돈은 얼마나 중요할까

 

 

< 경향신문, 황세원 일in연구소 대표, 2023.01.31  >

 


 
돈은 얼마나 중요한가? 직업 또는 직장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월급이 얼마나 중요하냐는 질문이다. 당연히, 단연코, 최고로 중요하지 뭘 묻느냐고 대부분은 답할 것이다. 여기에 반대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내 질문은 그래서 ‘얼마나’ 중요하냐는 것이다.


안정성과 안전, 존중, 재미와 보람, 성장, 워라밸을 기대할 수 없는 일이어도 월급만 확실히 높으면 상관없을까? 여전히 ‘그렇다’고 할 사람들이 있겠지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얼마 전 지방 공공의료원에서 연봉 3억6000만원을 제시하고도 의사 채용을 못한 일이 알려지자 “의사들이 돈만 밝힌다”는 비난이 빗발쳤다. 얼마 후 MBC가 후속 보도를 했다. 면접을 봤던 의사가 “도저히 일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고 제보한 것이다. 비상식적으로 과도한 일을 맡길뿐더러 사고가 나면 개인이 책임지도록 하는 조건이었단다. ‘돈만 밝혀서’가 아니라 ‘돈만 밝힐 수 없어서’ 기피된 일자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업 등 제조업 현장에서도 사람을 못 구한다고 난리다. “취업 즉시 1000만원”을 내걸어도 채용이 안 된다는 보도도 있었다. 이런 기사들 대부분은 전문가의 입을 빌려 “주 52시간제 완화”를 주장한다. 장시간 근로를 통해서 돈을 더 벌게 해줘야 구인난이 해소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돈이 그렇게 중요한가? 돈 말고 다른 조건이 문제라는 생각은 도저히 할 수 없는가?

 


2년 전, 20대 구직자들을 대상으로 복합적인 방식의 조사인 ‘랩 실험’을 했다. 먼저 가상의 구인광고 속 다양한 근로조건들을 읽어본 뒤에 가장 마음에 드는 조건을 고르도록 했다. 이렇게 고른 조건을 ‘높은 연봉’이라는 조건과 비교한 뒤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기회를 줬더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연봉이 아닌 쪽을 택했다. 가장 많이 선택된 조건은 자신의 일하는 방식과 시간, 장소를 스스로 정할 권한, 즉 ‘통제권’이었다. 발전 가능성, 윤리적인 문화, 직장의 위치 등을 중요하게 선택한 사람들도 있었다.

 


연봉을 택한 사람들도 돈 자체를 중시하는 게 아니었다. 한국사회에서 임금 높은 일자리는 다른 모든 조건에서도 뛰어난 경우가 많다. 사회적 인정 수준도 높다. 이 때문에 일단은 “거기서 일할 만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획득하고 나서”, 또는 “몇 년 바짝 돈을 벌어 놓고 나서” 진짜 원하는 일자리로 이직하겠다고 답한 사람이 많았다.

 


예외적인 상황은 있다. 몇몇 응답자들은 “부양 가족이 있다면 다를 수 있다”고 했다. 지금 구인난을 겪는 일자리들을 지금껏 지탱해 온 사람들이 바로 이런 경우일 것이다. 근면성실한 가장들의 희생과 노고는 높이 평가되어야 하나, 이를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 이들도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할 권리가 있었다. 일하다 다치거나 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보호해주는 조직과 제도하에서 안심하고 일할 권리도 있었다.

 


기성세대가 일해온 것을 지켜보면서 다르게 살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증거가 바로 저 ‘구인난’ 현상이다. 기록적으로 낮은 출생률의 일정 부분도 이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그래서 다시 묻고 싶은 것이다. ‘52시간 노동제’가 문제라는 이들에게 말이다. 돈이 그렇게 중요한가? 아니, 돈만 그렇게 중요한가?

‘젠더 갈등’이 아니라 성차별이다

 

 

 

< 경향신문,  정희진 여성학자,  2021.11.24 >

 

 



코로나 이후. 기후위기를 낙관하는 이들은 없다. 팬데믹은 지속될 것이다. 2년간 일상의 불편은 말할 것도 없고 생계와 생명을 잃은 이들을 생각해 보라. 나는 당연히 이번 대선의 주요 의제가 환경, 노동 문제가 될 줄 알았다. 그러나 거대 양당은 일부 남성의 성차별 의식을 이용, 이를 표로 연결시키는 데 골몰하고 있다. 며칠 전 경향신문 보도대로, “젠더 지우기로 젠더 공략하는 ‘젠더 대선’”이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세대 차이(generation gap)만큼 골치 아픈 언설도 없을 것이다. 이는 노소(老少)에 따른 연령주의(ageism)와 다르다. 그러나 세대 개념은 계급, 나이, 성차별, 취향, 소통 등 많은 문제와 혼용, 대체되어 사용되고 있다.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어” “저렇게 나이들지 말아야지”처럼 세대 차이는 생로병사의 원리와 함께 시대(일제강점, 한국전쟁, 군부독재 시절…) 경험에 따라 어느 시절에나 존재했다.

 


이에 반해 연령주의는 사회 구조적 모순이다. 적든 많든 나이로 인한 차별을 말한다. 그만큼 논쟁도 많고 판단도 어렵다. 연령주의는 성별, 계급 차별과 함께 작동한다. 평범한 노인은 노인이지만, 정치인이나 재벌은 노인으로 불리지 않는다. ‘아줌마’와 ‘아가씨’의 차이는 여성의 존재를 사회적 지위나 자원이 아니라 나이와 외모로 평가하는 성차별과 연령주의가 결합된 결과다.

 



‘예전보다 나아졌다’는 주장
누구의 기준에서인지 의문
지금 우리 사회는 고통 경쟁 속
‘당신들, 나아졌잖아’라며
약자에게 분노하고 있다
탈정치적이고 비윤리적이다



‘미모의 어린 여성’은 성적으로 소비되고 남성 사회가 욕망한다는 측면에서 같은 또래의 남성보다 ‘지위가 높지만’, 이는 실제 지위가 아니라 가부장제 사회의 특징이다.  아줌마는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적 여성에 포함되지 않는다. 어리게 보이려면 비용과 관리, 시간 투자가 필요하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여성을 만날 때 상대방의 손톱을 보는 습관이 있는데, 계급과 그의 일상을 짐작할 수 있다. 사무직이든 블루칼라 노동자든, 일을 할 수 있는 손톱이 있고 그렇지 않은 손톱이 있다. 글쓰기 노동도 손톱이 길면 타자를 칠 수 없다.



한때 이런 농담이 있었다. “남성은 제1의 성, 여성은 제2의 성, 아줌마는 제3의 성.” 이 말의 전제는 인간의 기준은 남성이므로 그들은 1등 시민, 여성은 2등 시민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여성이나 남성이나 각기 내부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아줌마’처럼 2등 시민에도 포함되지 못하는 여성이 실상은 대다수다. 여성(성)이나 남성(성)은 실체가 아니라 사회적 규범이기 때문이다. 젊은 중산층 고학력 비장애인 백인 이성애자이면서 자원 있는 아버지를 둔 도시에 사는 ‘예쁜’ 여성은 드물다.

 


지금 20~30대를 중심으로 한 ‘젠더 갈등’은 왜 중장년층에서는 그만큼 격렬하지 않을까. 갈등은 상호 대칭적인 지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왜 성차별이 갈등으로 재현되는가. 양당 후보들은 마치 여성 유권자는 없는 것처럼, 일부 남성의 눈치를 보면서 정책도 없이 그들에게 아부하는 데 정신이 없다. 이런 상황 자체가 남성 중심의 성차별 사회라는 증거다. 선거든 일상에서든 힘 있는 집단에는 누구도 함부로 하지 않는다. 특히 정치인은.



여성은 무시해도 대세에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양당은 장혜영 정의당 의원 말대로 “성소수자 인권, 여성 인권을 누가 멀리 내팽개치나 경쟁하고 있다”. 20~30대 청년의 구조적 어려움에 대응하기보다는 목소리 큰 편에서 갈등을 부추기고 선거에 이용하는 것이, ‘용감하고 책임감 있는 남성 어른’의 태도인가? 성차별을 젠더 갈등으로 둔갑시키는 이들의 ‘능력’이 선거 전략인지 무지(ignore·정말 모름)인지 모르겠지만, 선거관리위원회라도 나서서 “여성도 유권자”라고 그들에게 고지해야 할 지경이다.



말할 것도 없이 자본주의 역사상 청년층은 가장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다. 장년층의 상황이 청년과 다른 양상을 띠는 것은 실업이 일상화된 시대인 데다 청년층이 취업, 병역, 결혼 등 진로를 놓고 삶의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여성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젊은 여성은 청년이 아니라 여성으로 분류되어 청년 문제=남성 문제가 되었다.

 


남성 문화는 남성이 ‘차별당하는 이유’로 징병제, 여성 할당제, “여성의 지위가 예전보다 나아졌다”는 점을 든다. 그러나 이 모두 사실이라 해도 나이든 남성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즉 젠더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다.

 


모든 남성이 복무 여부, 보직, 근무 방식 등에서 징병제를 동일하게 경험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징병제는 여성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아무리 해봤자 소용이 없다. 남성 사이의 계급투쟁을 젠더 갈등으로 포장, 스스로 현실에서 도피한 이상 해결은 없다. “군 가산제 부활” “여성도 군대 가라”는 외침은 일단 남성들끼리 합의를 본 후 발언할 문제다. 70년이 넘은 내무반 개조부터 한·미 동맹에 이르는 복잡한 문제다. 가장 빠른 방법은 미국의 랜드연구소에 물어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많은 남성들이 실제로는 남녀 동반 입대를 바라지 않는다. 1974년 미국 경찰은 최초로 여성 근무가 이루어졌지만, 당시 남자 경찰은 스트라이크와 사보타주로 일관했다. “우리가 겨우 여자랑 일하려고 경찰이 된 것이 아니다”라며 여성과 동료가 되기를 거부했다. 이러한 정서는 군인이나 경찰 등 전통적인 남성 직종에서 특히 강하다.

 


여성 할당제? 현재 국공립대 여교수 비율은 17.9%로, 교육부는 2030년까지 25%로 올릴 계획이다. 실현될지도 의문이지만 남성의 반발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한편 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교대는 30% 남성 할당제가 적용된 지 오래다. 왜 교대의 남성 할당제는 사회적 반발이 적을까부터 분석해야 하지 않을까. 예술대의 블라인드 테스트 와중에서도 최종 결정에서 암암리에 남학생 할당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여성 졸업자가 많으면 전공 영역이나 교세(敎勢)가 약화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남성의 숙직 vs 여성의 가사노동’식의 논의도 큰 문제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공사 영역에 걸친 이중 노동이라는 현실 때문에 여성들은 과로와 경력단절을 피해, 비혼을 선택하고 이는 저출산과 동물과의 반려 인생으로 이어졌다.

 


흑인이 본인의 계급, 능력과 무관하게 평생 인종차별에서 자유롭지 않듯 여성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언제까지 ‘성차별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가. 여전히 여성은 남성 평균 임금의 60%를 받고 있으며, 여성에 대한 폭력(gender based violence)은 디지털 성폭력의 등장으로 더 복잡하고 교묘해졌다.

 


남성의 눈치를 보는 상황은 이재명 후보도 마찬가지만, 조직과 인력 운용 경험이 있는 그는 적어도 정확한 현실을 알고 있다. 지난 13일, 그는 “실제로 여성을 위한 할당제는 거의 없다… 20대 남성이 ‘여성 할당제 때문에 피해를 봤다, 폐지하자’고 하는데 여성 할당제는 거의 없고 대부분 성 할당제”라고 말했다. 즉 “특정 성이 30% 이하로 내려가지 않도록, 실제로 공무원 시험에선 남성이 혜택을 보는 경우가 많다”. 합격선을 넘는 여성 수가 남성보다 많지만, 성비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성적이 낮은 남성을 발탁한다.

 


이러한 현실은 상식이다. 기업의 인사 담당자들은 실력으로 뽑으면 여성이 100%라 어쩔 수 없이 남성을 뽑는다는 고충을 호소한다. 여성이 원래 우월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여성, 장애인, ‘지방대생’은 차별받는 집단이므로, 공정한 시험으로 자기 능력을 증명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이런 이야기도 중간층 이상의 사례이다. 우리는 2인 1조의 사업장에 배치된 19세 청년들이 혼자 일하다 사망하는 현실을 매일 목도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사라지고 부동산과 젊은 남성이 선거의 키워드가 되었다.

 


무엇보다 탈정치적이고 비윤리적인 인식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다음과 같은 발언이다. “그래도 예전(조선시대? 1980년대?)보다는 나아졌다.

 

 우리는 과거를 살아본 적이 없다. 과거를 어떻게 아는가? 사회적 약자는 언제나 과거에 살아야 하는 이들인가? 심지어 “나아졌다”는 주장은 누구의 기준에서인가. 장애인의 지위는 당대 비장애인의 지위와 비교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서로 고통을 경쟁하면서 약자에게 “당신들, 예전보다 나아졌잖아!”라고 분노하고 있다.

일상을 가능케 하는 권력을 생각함

 

 

< 경향신문, 정희진 여성학자, 2022.11.02 >

 



윤석열 정부를 상징하는 구호 중 하나는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이다. 이 말은 용감했지만, 저잣거리에 넘쳐나는 남성문화의 일부이자 30년이 넘은 신자유주의 통치 패러다임일 뿐이다. 물론 ‘구조도 구조적 문제도 없다’는 비현실이다. 우주에서 혼자 사는 것도 증류수 같은 현실도 불가능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사고방식 자체가 사회 구조적 문제다.


구조와 구조주의는 다르다. 구조는 사회의 물리적, 정치경제적, 심리적 관계들을 의미하고 이런 상황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개인은 없다. 혼자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는 개인은 사후에도 성립되지 않는다. 기억되기 때문이다.

 


반면, 문제의 원인을 개인 몸 외부에서 찾는 사고가 구조주의이다. 성별이든 계급이든 구조적이지 않은 문제는 없지만 구조에 대한 개인의 인식, 반응(reaction), 대처, 행위는 다르다. 그래서 포스트(후기) 구조주의가 등장했다. 포스트 구조주의는 개인과 구조 사이의 저항, 충돌, 협상 등을 중요시하고 이 과정에서 구조와 개인 모두가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포스트 구조주의는 자유주의가 상정하는 개인의 관념성과 구조주의에 내재한 환원주의가 모두 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본다.

 


“구조적 차별이 없다”에 “있다”고 외쳐 봤자, 모든 갑들은 귀찮거나 무슨 말인지 모른다. 국가 권력이든 개인 사이의 권력이든 일상에서 체감하는 영향력 혹은 책임감으로서 힘의 관계는 인간의 조건이고, 구조는 사회라는 ‘집 전체’를 이룬다. 구조를 부정하는 것은 사회를 부정하는 것이다. 남성문화는 근대 국가가 역사상 최고 수준의 사회 조직이라고 믿으며 정상(正常) 국가, ‘이왕이면’ 정상(頂上) 국가를 꿈꾸어왔다. 그런 의미에서 윤석열 정부의 ‘구조론’은 이 정권의 독특한 성격을 드러낸다. ‘나쁜 정부’가 아니라 (행)정부가 없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구조적 문제지만 가장 개인적 문제로 간주되는 사안이 성매매이다. ‘페미니스트’들도 성매매의 성별에 대해서 무지한 경우가 많다. 그만큼 뿌리 깊고 복잡한 남성 문제다. 여성주의 연구나 정치경제학 연구 중에서도 ‘동의-강제’의 이분법(자유주의)을 벗어나기 어렵고, 연구자도 사회적 관심도 적다. 범죄학에서 ‘피해자 없는 범죄’(victimless crimes)는  불가능한 개념이지만, 도박과 매춘은 전통적으로 피해자 없는 범죄로 인식되어 왔다. 범죄이되, 피해자는 없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범죄를 선택했다는 논리다.

 

 


피해자가 범죄를 선택했다?

 


성 산업에는 피해자가 없는가. 알선업, 대부업, 임대업, 성형업, 요식업, 숙박업 관련 종사자, 남성 구매자, 여성 판매자(정확히는 상품으로 간주되는 특정한 몸)는 모두 피해와 가해와 무관한가? 

 

최근 출간된,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이 기획하고, 연구자 12명이 참여한 <불처벌>은 성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을 처벌하는 한국 사회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제기다. 성매매 연구서지만 여성학 입문서이자 전문서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구조적인 문제로서 젠더, 돈과 성별을 매개로 인간 행동의 다양성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젠더는 여성은 잠재적 피해자,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라는 주장이 아니다. 나는 한 번도 그런 여성주의 책을 읽은 바 없다. 그런 논리가 있다고 해도 가능하지 않다. 여성들 내부에는 나이, 계급, 인종 등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젠더는 여성(female)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라 인식론이다. 구조적 문제로서 젠더는 성차별뿐 아니라 여성이 여성을 착취하는 현실도 포함한다. 남성들 간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다. 성매매는 남성 사이의 차별과 적대를 봉합해온 제도화된 남성 연대이다.

 


<불처벌>에 나온 다음과 같은 사실이 한국 사회에서 상식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 글에 인용된 부분은 나의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책 전체를 읽기 바란다. 책을 사지 않아도 좋다. 공동체를 위해 지역의 공공도서관에 희망 도서로 신청하자.

 


황유나의 서문은 이 책을 요약한다. “성 판매자의 성별은 압도적으로 여성이다.”(7쪽) 성매매는 개인 사이의 성적 거래를 넘어 여성의 몸과 성을 상품화, 확대 재생산하는 산업과 자본의 문제다. 성을 매매하는 경로가 성별에 따라 정반대임에도 구매자와 ‘판매자’는 현행 성매매처벌법에 따라 동일하게 처벌받는다. 성매매로 처벌받는 남성은 ‘억울하고’ 여성은 ‘수치스러운’ 두 갈래의 사회적 감정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29쪽)

 

 


실제 일상에는 이분법이 없다



남성들의 성 구매 동기는 그 자체로 성별 권력관계를 증명한다.(76쪽, 이 글을 읽는 여성 독자 중 성 구매 동기가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현재 성매매처벌법은 ‘동의’를 통해 성매매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 여성이 놓인 곤궁과 취약성, 성매매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속적인 착취와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을 무시하고 있다.(113쪽) 강간 사건 피해자 A씨는 가해자를 경찰에 신고했다. 출동한 경찰은 “성매매하려고 만났다”는 범인의 말을 듣고 성폭력 피해 여성을 성매매처벌법 위반 혐의 피의자로 조사했다.(121쪽)

 


성매매 집결지가 사라졌다고 해서 성매매가 없어지거나 축소되지 않았음은 명확하다.(142쪽) 사회와 구조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한 까닭은 살면서 자기가 겪은 모든 부당함을 팔자로 체념하는 것을 막고 짐을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187쪽) 나는 학술대회에서 윤락(淪落)의 의미를 설명할 기회가 있었는데, 몇몇 남성 연구자들이 윤락의 ‘락’이 ‘즐거울 樂’인 줄 알았다고 고백해서 큰 충격을 받았다.(197쪽)

 


성매매 수요와 공급을 각각 성 구매 남성과 성 판매 여성에 대응하여 각 개인에 대한 규제를 통해 성매매를 근절하겠다는 생각은 현실화되기 어렵다. 필요한 것은 성 판매 여성만을 겨냥한 ‘공급 차단’이 아니라 공급 주체인 성 산업(남성 문화) 자체를 명확히 가시화하는 것이다.(233쪽) 각자도생이 깊숙이 스며든 한국사회지만 유독 여성의 성적인 동시에 경제적인 행위성은 공공의 적으로 비난받는다.(246쪽) 한편, 남성 구매자 처벌로만 성 산업을 축소할 수 있을까? 성 산업으로 돈을 버는 브로커들이 조장하는 수요와 공급이 가장 문제다.(312쪽)

 


특히 민가영은 동의와 강제의 이분법을 벗어나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분석한다. 가출 청소년 패밀리의 일상 연구를 통해 새로운 개념을 도출했는데, ‘피해자의 협력에 의존하는 비강압적 착취’가 그것이다. 착취와 협력은 서로 대립하는가? 협력이 있었다면 착취는 없는 것인가?(285쪽) 지금 구조를 바꾸기 위해 국가 권력을 탈취하거나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는 이들은 드물다. 우리는 단지, 안전한 하루를 바란다. 이 논의가 중요한 이유는, 10대 여성의 성 판매가 가출 패밀리에서의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생존방식이라는 점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인생은 대단하지 않다. 일상의 연속일 뿐이다. 안 아프고, 안전하고, 소소한 즐거움이 있었으면 더 좋겠지만, 굶주림과 주거가 안정치 않은 이들을 생각하면 그것도 욕심이다. 큰일 없이 ‘오늘도 무사히’ 하루가 지나가기를 소망한다. 일상은 구조와 개인, 동의와 강제, 폭력과 비폭력의 재정의를 요구한다. 일상에서 택일은 가능하지 않다. 가정 내 폭력이나 빈곤으로부터 탈출한 10대 여성들이 새로운 가족에서 가해자에게 ‘협력’하는 이유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태원 참사로 문자와 메일이 쇄도한다. 긴 하루였다. “제2의 세월호, 여성들은 CPR을 할 줄 모른다, 정쟁에 이용하지 말라. 미국인이 많이 안 죽어서 다행, 원인을 찾기 어려울 것….” 여론이 폭발한다. 행정과 안전을 담당하는 이상민 장관의 말대로, 이태원 골목에 몰린 10만 인파 자체가 원인일까. 미리 예약하고 가게 안에서 안전한 파티를 즐기고 있던 이들 중, 피해자는 없다. 피해자 대부분은 이태원 거리 구조에 익숙하지 않은 가게 밖의 사람들, 이 중에는 행사를 구경하기 위해 상경한 이들도 있다. 이 사건의 원인 중 하나는‘가게 안과 밖의 차이’ 아닐까.

 


일상이 과로와 폭력을 무릅쓰고 버텨야 하는 시간인지, 최소한의 안전과 삶의 의미를 추구할 수 있는지 여부는 구조에 달려 있다. 가출 패밀리에서 10대 여성을 괴롭히는 ‘아저씨’와 통치자들, 그들이 바로 구조다.

사진과 총, 캄보디아에서의 대통령 부인

 

 

< 경향신문,  정희진 여성학자,  2022.11.30 >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고전으로 간주되는 <현대국제정치론>(1987·법문사판)의 저자 한스 모겐소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나폴레옹의 모자 에피소드를 예로 든다. 러시아 원정에 실패한 나폴레옹은 1813년, 오스트리아의 외상 메테르니히와 9시간 동안 만났다. 전쟁의 양상이 프랑스 대(對) 러시아·프로이센·영국·스웨덴 동맹군으로 변화하자,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에 반(反)프랑스 동맹에 참가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을 무시했고, 여전히 유럽의 지배자처럼 행동했던 나폴레옹은 상대방을 떠본다. 그는 일부러 모자를 떨어뜨려 메테르니히가 집어주길 바랐지만, 메테르니히는 못 본 척했다 .


모겐소는 의전이 곧 국력임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며 ‘흥분했지만’, 200여년이 지난 지금 생각하면 두 인물 모두 유치해 보인다. 당대 상황은 ‘모자를 떨어뜨리고, 안 주워주고’ 이런 수준이 아니다. 푸틴은 아베 전 일본 총리와의 회의 일정에 3시간씩 늦었다. 2007년에는 개를 무서워하는 것으로 알려진 메르켈 독일 총리와 회담할 때 송아지만 한 개를 앞세웠다.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은 문재인 전 대통령과 만나 악수를 나눈 후 급히 자신의 손을 바지에 닦았다. 코로나19라는 맥락이 있었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개인 간 행동에도 이런 일이 있으면 굉장한 무례인데, 전 세계로 중계되는 국가 정상 간 만남에서 이런 일이? 동영상을 보면 가해자인 해리스도 놀란 듯했다.

 


푸틴의 행동이 의도적이라면, 해리스의 경우는 근대적 위생 관념이 작동한 것일까. ‘유색 인종 문재인’에 대한? 그러나 그녀야말로 미국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흑인·여성’ 부통령 아닌가. 의식적 망동이든, 무의식적 실례든 푸틴과 해리스의 공통점은 상대방에 대한 무시이다. 차이는 개인의 배경이다. 푸틴은 백인 남자고, 해리스는 둘 다 아니다. 문 대통령은 잘 모르겠고, 아베나 메르켈은 매우 불쾌해했다. 메르켈은 그 자리에서 항의했다. 독일이고 메르켈이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외교에서 모든 나라를 똑같이 대우할 수는 없다. 과잉, 과소 의전 모두 외교력 낭비다. 하지만 거창한 의전은 아니더라도 국가를 대표해서 타국을 방문한 약소국 외교관 개인에 대한 존중은 그들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존중해서 나쁠 일은 없다.

 


조상의 지혜를 본받자. 조선이 천명한 공식 외교 사상인 사대교린(事大交隣)은, 글자 그대로만 보면 합리적 전략이었다. 사대는 논쟁이 많으니 차치하고, 교린은 이웃을 무시하지 말고 잘 지내라는 뜻이니 나쁘지 않다. 이웃과 잘 지내면 되지, 굳이 “왜(倭)니, 오랑캐니” 하며 얕잡아 볼 필요가 있을까. ‘상대 무시 = 나 훌륭’이라는 방식, 즉 열등감에 기초한 방어기제의 갑옷을 입은 인생들은 어디에나 있다.

 



재현의 윤리



하긴 이런 이야기가 무슨 소용이랴. 아예 맥락에 벗어난 기이한 일도 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 부부의 캄보디아 방문이 그것이다. 나랏일에 주제넘은 걱정이지만, 그것은 내가 한국인일 때이다. ‘캄보디아(의 이미지)’에 동일시하는 지구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실제 캄보디아 사회가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분노한다. 동시에 이는 평범한 시민의 고달픈 일상이기도 하다. 타인이나 집단이 나를 마음대로 재현(묘사, 평가, 규정)할 때 어떻게 대응하며 살아야 할까.

 


김건희 여사는 ‘국경 없는 의사회’ 활동가가 아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국제적인 공식 회의가 있어서 방문했는데, 빈곤 지역의 심장병을 앓는 아동을 찾아가고 (조명 설치 여부는 모르겠지만) 사진을 찍고 배포하는 행위는 적절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폭력이다.



전쟁만이 폭력은 아니다. 문화연구, 탈식민주의, 여성주의, 인류학 등 현대 인문학은 재현의 윤리에 대해 수없이 고민해왔다. 이들 학문의 목적 자체가 이 윤리와 정치경제학에 대한 탐구이다.



젠더 폭력 피해를 연구할 때 피해 여성을 피해자화하지 않고 어떻게 피해 구조를 드러낼 것인가. 음핵 절개가 널리 행해지는 지역에서 서구 페미니스트는 그 현장을 찍을 것인가, 당장 피해자를 구조할 것인가. 다른 차원의 논쟁도 있다. 서구 여성도 야만적인 성차별을 당하는데, 그들은 왜 자국 문제보다 ‘제3세계’ 여성을 그토록 걱정하는가.

 


수단의 기아 소녀가 죽기를 기다리는 독수리를 촬영하여, 1994년 퓰리처상을 받은 사진작가 케빈 카터는 수상한 후 2개월 만인 33세에 자살했다. 사진을 찍기 전에 소녀를 먼저 구하지 않았다는 대중의 비난은 격렬했고 그 역시 자책감을 견디지 못했다. 그는 독수리가 다가오기를 20분간 기다린 후 사진을 찍고, 소녀를 긴급 식량센터에 옮겨주고 내내 울었지만 죄의식을 감당하지 못했다.



캄보디아에서 대통령 부인의 성녀(聖女) 코스프레는 이번 정권의 성격을 압축한다. 더 놀랄 일이 무엇이겠냐마는, 그래도 놀랐다. 나는 윤 대통령 부부가 ‘나쁜 사람’이거나 ‘극우 보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이상한 경우라고 본다. ‘이승만부터 문재인까지’ 이런 커플은 없었다. 만일 질 바이든 여사가 한국을 방문, 보육원 아동을 만나고 사진을 찍어 널리 알린다면? 푸틴과의 사이에 자녀 4명을 둔 31세 연하 연인(실질적 배우자)인 알리나 카바예바가 빈곤국을 방문해서 사진을 찍어댄다면? 이는 의전이고 국격이고 운운할 것도 없는, 정신 나간 권력자의 기이한 행동이다.

 


김 여사의 시선은 ‘저 높은 곳을 향해’ 응시하고 있고, 그가 안은 어린이는 카메라를 보고 있다. 상식대로라면 두 사람이 마주 보아야 한다. 이번 사건에 대한 반응은 한국 사회의 총체적 수준을 보여준다. “이렇게 미모가 아름다운 분이 있었느냐”는 국회의원(국민의힘 윤상현), 김 여사 비판은 무조건 미소지니(여성혐오)이니 자제해야 한다는 사람들, “김혜자, 정우성 배우도 마찬가지 아닌가”식의 빈곤 포르노에 대한 옹호….

 

 


돋보이고 싶음의 폭력



윤 의원의 발언은 논외고, 배우와 액티비스트의 활동은 대립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김건희’는 ‘엘리너 루스벨트’가 아니다. 미소지니는 여성 개인을 혐오하는 행위가 아니다. 여성은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이다. 당연히 여성이라고 해서 모두 착하지 않다. 미소지니는 한 인간을 동일한 성격을 지닌 집단성으로 조작하는 행위를 뜻한다. 여자는 모두, 그저 여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여성을 어머니와 창녀로 이분화하고 그 스펙트럼 안에서 평가하는 방식이다.

 


내가 미소지니(Misogyny)를 번역하지 않고 사용하는 이유는 혐오라는 단어가 주는 피로감, 남성 혐오라는 황당한 대칭어의 생산, 그리고 이 문제가 여성에 국한되지 않는 사회적 약자 전반에 대한 지배 전략이기 때문이다.

 


미소지니(Misogyny)는 상대를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맘대로 규정하는 사고방식이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사고인 가부장제와 동양에 대한 서구의 상상(망상)인 오리엔탈리즘, 이 두 가지가 문명의 두 축이다.

 


대상과 대상화는 다르다. 누구나 대상일 수 있다. 대상화는 ‘나’를 설명하기 위해 타인을 동원한다. 이성애의 정상성은 동성애에 대한 낙인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고, 결혼제도의 정상성은 이혼과 저출산이 문제라는 사고방식이 없다면 작동할 수 없다. 흰 피부의 우월성은 흑인의 존재를 전제한다. 이것이 사고방식으로서 ‘미소지니(Misogyny)’다.



주지하다시피 카메라와 권총은 동반 발전했다. 사진을 찍다와 총을 쏘다가 모두 ‘shoot’로 같은 이유다. 김 여사의 성모 마리아, 오드리 헵번 흉내내기는 ‘캄보디아’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제국주의는 물자와 노동력을 착취하는 시스템만이 아니다. 그것을 당연하다고 믿게 만드는 장치까지 포함한다.



제국주의는 불쌍한 어린이를 이용, 관용을 선전한다. 제국주의 용어가 불편하다면, 순한 말로 바꿀 수 있다. 주인공병, ‘관종’, 돋보이고 싶은 욕망. “돋보이고 싶다”도 그 행동에 비한다면 너무 좋은 표현이다.  타인의 생명과 고통을 볼모로 셀럽이 되고 돈을 버는 이유가 겨우 돋보임 욕망 때문일까.

 


김 여사는 대선 중 허위 경력과 범죄 연루 의혹 문제로 6분13초짜리 기자회견을 했다. “돋보이고 싶은 욕심 때문에 사랑하는 남편에게 폐가 되었다”는 요지였다. 누구나 돋보이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생계만 해결된다면, 조용히 살고 싶은 사람도 많다. 

 

돋보이고 싶은 사람들은 국력을 사용(私用)하지 말고, 거울 앞에서 혼자 하기를 권한다. 어차피 관중도 그의 머릿속에 있을 뿐이다.

‘헤어질 결심’, 군 위안부, 김건희님의 다운로드

 

< 경향신문, 정희진 여성학자, 2022.08.10  >



 


나는 박찬욱 감독의 작품 중 해외 연출작 외에는 모두 보았다. <복수는 나의 것>(2002)과 <헤어질 결심>을 가장 좋아한다. <복수는 나의 것>은 보기 힘들어서 두 번 보지 못했지만 꿈에 나타났으므로 ‘여러 번 봤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헤어질 결심>은 세 번 보았다. 주·조연은 말할 것도 없고 독립영화 <들꽃> 시리즈의 스타 정하담  배우까지 멋진 배우들의 기막힌 연기, 언어의 차이가 작품의 깊이로 전환되는 각본과 연출, 이야기 구조…. 이 영화의 매력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영화를 좋아하는 나는 작품 자체를 즐길 수 있는 날을 꿈꾸지만, 불가능한 일임을 안다. 정치적이지 않은 텍스트는 없다. 이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탕웨이)은 젠더 폭력 피해자다. 그녀가 남편을 죽였다면, 당연히 정당방위다. 남편은 지갑, 가방… 모든 물건에 자기 이름을 새기는 인간이다. 중국 출신 이주여성인 그녀는 8년 동안 의료진도 놀랄 만큼 표시 안 나게, 매일 맞고 살았다. 몸에는 남편의 여느 소지품처럼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정당방위이므로 영화의 전제인 남편의 사인이 자살이냐 타살이냐는 줄거리는 ‘붕괴’된다.

 


가정폭력 피해 여성의 문신은 흔하다. 폭력 남편들은 주로 몸의 민감한 부분에 자기 이름이나 욕설을 새긴다. 소유물, 낙인, 노예라는 뜻이다. 정육(精肉) 과정에서 상품에 도장을 찍는 행위와 같지만 문신과 도장은 다르다. 문신은 조각(彫刻)이다. ‘각’에는 칼(刀)이 필요하다. 육체가 조각의 재료가 되는 것이다. 전문가의 시술도 아닌 피와 살이 튀는 인체 실험, 폭력이다.

 


이처럼 박학(薄學)한 지식조차 괴로울 때가 있다. 젠더 폭력으로서 문신. 이 멋진 영화를 나는 온전히 감상할 수 없었다. 관련 기억이 줄줄이 소환된다.

 


<나는 부정한다>는 홀로코스트 소재 영화로서 최근 출몰하는 역사부정론자들의 실화다. 이들은 “홀로코스트는 없었다”며, “있었다”는 증거를 요구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홀로코스트 피해자인 나이 든 여성이 나치가 새긴 문신을 보이자 역사부정론자는 조롱한다.

 

 


젠더 폭력의 증언, 문신

 


박수남 감독의 <침묵>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운동가로 성장하는 다큐멘터리로 유수의 영화제에서 많은 상을 수상했다. 관련 영화 중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꼽힌다. <침묵>은 운동 조직 없이 활동하는 피해자들의 자조 모임, 당사자 운동을 다룬다. 이들의 언어는 피해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거부, 극복한다. 듣는 이가 같은 처지의 동료일 때, 팩트가 드러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침묵한 이들은 피해자가 아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사회다. 피해자가 아무리 말해도 한·일 양국은 침묵하거나, 그들의 말을 취사선택하여 피해자를 위계화시켰다<침묵>에도 문신이 나온다. 당시 일본군이 군 위안부의 팔에 이름을 새긴 것이다. 피해자는 고향에 돌아와서 지우려 했으나 아무도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자, 이 문신을 역사적 증거로 삼기로 하고 남겨둔다. 매일 아침 세수할 때마다 ‘그 나날’들을 상기하며 몸으로 증언하는 삶을 살아간다.

 


<헤어질 결심>과 <침묵>의 역사적 맥락과 장르는 완전히 다르지만, 문신이라는 젠더 폭력으로 만난다. <헤어질 결심>에서 형사가 남편의 폭력을 왜 경찰에 알리지 않았느냐고 묻는 장면은 <침묵>에서 군 위안부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사회와 겹친다. 가정폭력을 신고하면 경찰이 도와주는가? 사회는 군 위안부 목소리를 제대로 듣고 믿어주었는가?

 


박수남 감독은 재일교포로 일제강점기에 부모를 따라 일본에서 성장한 영화감독이자 사회운동가이다. ‘서울의 정대협’만 운동을 한 것이 아니다. 대구, 수원, 광주, 해외에서도 왕성했다. 일본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자이니치 여성들의 군 위안부 운동은 일본사, 한국사의 한 부분이 될 만큼 치열하고 광범위했다. 그들은 일본 우익의 살해 협박을 받아가며,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귀국하지 못하고 ‘버려진’ 군 위안부를 찾아다니며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기록했다.

 


그런 박수남 감독이 1998년, 한국 정부에 의해 입국을 금지당했다. 당시 박수남 감독은 자신의 입국 금지 사실을 한국의 신문 기사를 보고 알았다. 1970년대 재일교포를 간첩으로 조작하던 시절도 아니고, 2000년대를 앞두고 입국 금지라니. 입국 금지령을 ‘내린’ 집단은 한국의 군 위안부 단체였다. 학계에서 매장을 무릅쓴 어느 연구자가 당시 외교부 직원을 끈질기게 추적, 오랜 설득과 인터뷰 끝에 관련 문서를 확보했다. 그럼에도 모두가 침묵한 사건이다.

 


박수남 감독과 정대협의 군 위안부에 대한 입장은 같다. “군 위안부는 국가가 조직한 명백한 전시 성폭력이고, 일본 정부는 가해자로서 책임과 관련된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그런데 왜 같은 운동을 해 온 동지인 박수남 감독의 입국을 막았을까.



주지하다시피 DJ의 당선은 천운이었다. 이인제씨의 500만표 분산, DJP연합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DJP연합의 대표가 왜 김종필이 아니라 김대중이냐고 항의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정권 교체는 되었지만 DJ 정부는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김대중 정권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바라던 건국 이래 최초의 정권 교체, 김대중 정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싶지만, 사실은 김대중 정부였기에 가능한 사건이었다. ‘친정부 단체’가 된 일부 사회운동은 오만, 독선, 독점욕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은 이후 나눔의집의 부정부패와 윤미향 의원의 각종 혐의, 위안부 쉼터 담당자의 자살, 이용수님의 폭로로 이어졌다.

 

 


대통령 배우자·여성운동가의 표절



모처럼 ‘박찬욱 월드’에서 행복했던 나는 문신 장면 때문에 마침내 붕괴되었다. 지난 정권은 무엇을 잘못했고, 현 정권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영화를 네 번째 보지 못한 이유는 여기서 넘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이 지면에서 대통령 배우자의 논문 다운로드에 대해 쓰려 했다. 하지만 한국 학계에서 표절이나 다운로드는 대통령 배우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일부 군 위안부 운동가, 연구자들의 표절, 횡령, 성폭력, 인적 네트워크를 기준으로 다른 운동가와 연구자를 배제하고 모욕한 행위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윤석열 정권의 탄생은 민주당이 싫어서였지 국민의힘을 지지한 결과가 아니다(누구보다도 현 정권이 가장 잘 알 것이다). 1998년, 24년 전에도 군 위안부 단체가 외교부를 흔들 정도였으니 문재인 정권에서는 어떻겠는가. 군 위안부 이슈는 한국의 경제 성장과 민주화운동 수출이라는 담론 속에서 일부 ‘똑똑한’ 지식인들에게 블루오션이 되었다.

 


일본 우익의 폭력과는 별개로 세계 곳곳의 소녀상이 대변하듯 운동은 대중화와 동시에 성역화되었다. 실리는 말할 것도 없다. 군 위안부 관련 각종 기금은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지급되지 못하고, 주인을 잃은 채 처리 곤란 상태에 있다. 그래서 앞서 말한 자신의 비리를 덮고 각종 자원 확보를 위해, 위안부 사안에 뛰어든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들의 부패는 현 정권 탄생에 일조했다.



나는 원래 대통령 배우자의 논문 다운로드에 대해 쓰려고 했다. 그러나 ‘같은 여성주의자’로서, 김건희 여사보다 더한 사례가 있으니 난감했다.   정의기억연대(이사장 이나영) 일부 관계자의 논문도 지난 15년간 계속 문제가 되어왔기 때문이다. 여성계와 학계는 쉬쉬했다. 입국 금지 같은 보복이 실제로 빈발했다.

 


특히 정의연의 핵심 모 교수는 최초 학위 논문부터 재판에 버금가는 조사를 받았고 이후에도 모든 논문이 절도 의혹을 받았지만 쉽게 무마되었다. 문제를 바로잡고자 하는 이들은 해임, 매장 위협, 학술지 심사위원과 연구비 배제 등 공포에 떨었다.

 


사회운동이 피해자의 인권 중심이 아니라 조직 자체의 존속과 대의가 강조될 때, 이런 일은 필연적이다. 

 

더불어민주당을 포함해 최소한 현 정권에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이라면, 군 위안부 운동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내로남불의 반복이다. 위안부 운동의 변화가 검찰에서 시작되지 않기를 절실히 바란다. 그러면 일부 진보 세력은 또다시 피해를 주장할 것이다. 피해자 코스프레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나는 정훈희·송창식씨의 ‘안개’에 의지하며 이 끔찍한 현실에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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