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언제 행복했을까…묻지 않는 신앙은 위험합니다"

 

 

 

< 중앙일보, 백성호 기자, 2023.01.12  >

 



9일 서울 강남의 한 커피숍에서 최원영(68) 작가를 만났다. 그는 2년 전 『예수의 할아버지』라는 장편 소설을 내놓으며 화제가 됐다. 신학계에서 치열하게 오갔던 논쟁을 소설을 통해 대중에게 과감하게 제시했다. 당시 소설가 김훈은 추천사에서 “하느님과 교회를 교리로부터 해방시켜서 현세의 생활 속에서 살아 있게 한다”고 평할 정도였다.

최근 최 작가가 두 번째 소설 『예수님의 폭소』(좋은땅)를 내놓았다. ‘예수’와 ‘폭소’를 합한 제목. ‘예수의 할아버지’만큼이나 눈길을 끄는 제목이다. 이유부터 물었다.


뜻밖의 제목이다. 왜 ‘예수님의 폭소’인가.  
“늘 궁금했다. 성경에는 왜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대목은 하나도 없을까. 우셨다는 대목은 세 번 나온다. 베다니의 나사로 무덤 앞,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면서,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였다. 그런데 왜 웃으시는 장면은 없을까. 오래전에 목사님에게 그걸 물어본 적이 있다.”

 


목사님의 대답은 어땠나.
“예수님이 한 번도 안 웃으신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렇게 거룩하신 분이고, 엄숙하신 분이라고 했다. 목사님은 그렇게 쉽게 대답을 했다. 그 말을 듣고도 나는 흔쾌하지 않았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항상 어린아이들을 좋아하고,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하셨으니까. 그때마다 예수님은 웃지 않았을까. 그래서 제목을 ‘예수님의 폭소’로 정했다. 예수님은 언제 가장 크게 웃었을까. 그런 오래된 생각의 씨앗이 소설의 시작이 됐다.”


예수님의 폭소. 예수님이 가장 좋아한 순간은 언제였을까.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였을까. 다섯 편의 단편소설 모음집이지만 책은 쉼 없이 그걸 찾아간다. 예수께서 가장 크게 웃는 순간, 그건 예수님이 이 땅에 온 이유와 닿아 있을 테니 말이다.

『예수의 할아버지』는 기독교 근본주의를 비판하며 개혁을 꿈꾸는 젊은 목사의 외침을 다룬 장편소설이었다. 반면 『예수님의 폭소』는 다섯 편의 단편 모음집이다. 상당히 유머러스하고 우화적인 느낌을 준다. 이유가 있나.


“기독교를 향해 질문과 대답을 자유롭게 던지기 위해서다. 그래서 시간 제약 없이 베드로와 도마도 등장해 문답을 주고받는다. 종교 이야기다. 너무 심각하고 엄숙한 쪽보다 자연스럽고 유머가 있는 쪽을 택했다. 그걸 통해 사람들이 마음을 좀 더 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최 작가는 원래 모태신앙이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 손을 잡고 교회를 다녔다. 중학생 때는 주일학교 학생회장을 하며, 등사기로 교회 주보도 만들었다. 그러다가 고등학생 때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당시 제가 알던 신앙은 이랬다. ‘하늘 높은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 이분은 자신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보낸다. 그 사람이 아무리 착해도 안 믿는 사람은 지옥에 간다.’ 저는 어쩐지 하나님이 하나님답지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이라면 좀 더 통이 크고, 공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외국에서 큰 지진과 해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어떤 목사님은 ‘그 나라는 예수를 안 믿어서 그렇다’고 했다. 그때부터 다른 교회를 다녀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방황하다가 서울 장충동 경동교회에서 강원용 목사의 설교를 듣게 됐다. “놀라웠다. 제게는 충격이었다. 강 목사님은 ‘예수 믿어서 천당 가는 것’보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예수님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보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방점을  찍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분이 미국 유니언 신학대에서 세계적 신학자 폴 틸리히에게 배우셨더라.”

 


책에서는 한국 교회의 ‘묻지마 신앙’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교회에서는 대개 ‘묻지마 신앙’이 훌륭한 신앙으로 생각된다. 저는 그게 답답했다. 한번 뿐인 우리의 삶에는 진정성이라는 게 있다. 종교의 ‘종(宗)’자는 근원, 즉 뿌리를 뜻한다. 종교는 자기 삶의 뿌리와 연결돼 있다. 여기에 대해 묻지 말라고 하면 결국 해결이 되겠나. 그게 중세 때 종교와 무엇이 다르겠나. 종교에도 시대마다 시대정신이 있다.

 



지금의 시대정신은 뭔가.
“기독교의 모태에 해당하는 유대교에는 원죄(原罪) 개념이 없다. 구약성경에도 원죄라는 용어는 없다. 원죄가 유전된다는 말도 없다. 기독교의 원죄 개념은 4세기에 성 오거스틴(354~430)이 만들었다. 인류의 죄를 대신해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당했다는 대속(代贖)의 개념도 1세기에 사도 바울이 만들었다고 봐야 하지 않겠나. 당시 시대적 필요성이 있었으리라 본다. 진리는 변함이 없지만, 지금의 시대정신은 또 다르다. 2021년 작고한 존 쉘비스퐁 주교(미국 성공회)는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했다.”

 


기독교, 어떻게 변해야 하나.
“기독교가 처음 등장한 1~3세기는 ‘신앙의 시대’였다. 초기 기독교인은 예수를 믿느냐보다 예수의 가르침을 행하느냐를 중시했다. 4세기에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됐다. 예수의 신성, 원죄, 삼위일체 등의 교리가 생겨났고, 정통과 이단을 구분하는 ‘믿음의 시대’가 열렸다. 4~20세기는 그런 믿음의 시대가 공고히 진행됐다. 지금은 21세기다. 이제는 새로운 ‘깨달음의 시대’가 열려야 한다. 소설에서도 그 이야기를 다루었다.”

 


깨달음의 시대가 왜 필요한가.
깨달음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기 때문이다. 이미 정해진 답과 스스로 당연하게 여기는 믿음의 틀. 거기에는 깨달음이 없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 말씀도 그렇다. 거기에 담긴 뜻을 깨칠 때, 비로소 우리의 신앙도 철이 든다. 깨달음을 통할 때 성숙한 기독교인이 된다.”

 


『예수님의 폭소』에 담겨 있는 마지막 단편의 제목이 도전적이다. ‘끝장토론 : 하나님은 있는가?’. 과학자와 신학자가 TV에 나와서 김동근 아나운서의 사회로 진행하는 뜨거운 논쟁이다. 그렇다고 유신론이냐, 무신론이냐의 기계적이고 이분법적인 논쟁이 아니다.

소설 속 신학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저는 하나님을 어떤 특정한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실재적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하나님을 독특한 방식으로 인류에 나타내셨지요. 동시에 저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는 성경 말씀을 진리로 믿습니다. ”

과학자는 이렇게 지적한다. “보험을 들듯이 하나님 믿고 교회 나가는 사람들도 많다. 삶의 목표는 오직 세상에서 잘 되고, 죽어서는 천당 가는 것이다. 이 땅에 널려 있는 ‘밑져야 본전 교회’와 ‘순보험 교회’를 다니면서 귀중한 삶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종교는 진지하고 심각하게 인생을 걸어야 하는 결단이다. 자기 삶의 진정성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끝장토론’에서는 시종일관 종교에 대한 성숙함을 강조한다. 이유가 뭔가.  

 

“‘묻지마 신앙’과 문자주의에 갇혀 신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진다면 대화와 상생이 어렵다. 반면 종교를 바라보는 성숙함이 있으면 달라진다. 성숙한 유신론자와 성숙한 무신론자는 서로 대화와 소통, 그리고 상생이 가능하다. 한국 사회에서 정말 필요한 것은 종교에 대한 성숙한 태도라고 본다. 소설을 통해 그런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다.

 

 

 

◇최원영=고려대에서 경영학,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서울대 음악대학원 기악학 석사, 직접 창작한 가곡도 여러 편이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원 국제외교학 석사, 뉴카슬 대학원 정치학 박사. 동아그룹 사장과 예음그룹 회장을 역임했다. 고전음악 감상실 ‘필하모니’를 만들고, 음악공연예술지 ‘객석’과 시사주간지 ‘시사저널’을 창간했다.

1. 

 

최고 종교학자 길희성이 꼽은 영적휴머니스트는

 

 

 

< 한겨레, 조현 기자, 2021-08-10 >

 

 

 

 


종교는 모든 가르침의 근원이다. 또한 종교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살육하고, 전쟁을 일삼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도 차별금지법을 반대하고, 사회와 남북의 갈등과 상처를 치유하기는커녕 갈등과 적개심을 가장 부추기는 것도 종교라는 이름을 내세운 이들이다. 따라서 종교는 가장 고귀한 인간을 지향하지만, 평균적인 인간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데 중세적 억압을 넘어 인류 진보가 얻어낸 ‘휴머니즘’과 이상적 종교성인 ‘영성’이 만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게 가능할까.

 


길희성(78) 서강대 명예교수가 <영적 휴머니즘>(아카넷 펴냄)이란 책에서 제시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길 교수는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에서 신학으로 석사학위를, 하버드대에서 비교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철학과 교수와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를 거쳐 학술원 회원이기도 한 그는 2011년부터 강화도 고려산 자락에 ‘심도학사―공부와 명상의 집’을 지어 영성적 고전공부를 이끌어왔다. 지난 6일 심도학사에서 만난 길 교수는 평생을 씨름해온 종교적 여정을 마치고 정자에 쉬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무려 900여쪽의 이 책이 “인생의 마지막 작품이 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길 교수는 크리스천이다. 외조부를 비롯해 집안에 목사와 장로들이 많다. 한완상 교수 등과 힘을 모아 새길교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보조지눌의 선사상을 연구해 불교를 가르쳤고, <보살예수>나 <길은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른다> 같은 다원주의적 저작과 <아직도 교회 다니십니까>라는 책을 썼다. 부드러운 성품과 달리 독선적인 기독교에 대해서는 예언자처럼 매섭게 비판해와 보수개신교계에선 그를 반기독교인쯤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런데 그가 종교적인 책을 ‘최후의 작품’으로 내놓은 것이다.

 


―기독교와 종교적 문제점을 날카롭게 비판해오다 왜 말년에 ‘영적 휴머니즘’을 들고 나왔나?
“목욕물이 더럽다고 목욕물과 함께 아기까지 버릴 수는 없다. 폭력적이고 비합리적인 종교는 외피고 본질은 영적 휴머니즘이다. 이제 종교적 인간보다는 영적 인간을 말할 때가 되었다. 코로나19 사태로 촉발된 전지구적인 문명 위기의 탈출구는 무종교도 아니고 세속주의도 아닌 제3의 길, 영적 휴머니즘에 있다는 것이 종교를 두고 평생을 씨름해온 내가 도착한 정착역이다.”

 


―‘영적 휴머니즘’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본래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존재로서, 모두 하느님의 고귀한 자녀라는 예수 자신의 가르침에 근거한 휴머니즘이다. 이런 영적 인간관은 불교, 힌두교, 그리스도교, 유교 등 세계 모든 주요 종교 전통의 공통적인 핵심이다.”

 


―‘세속적 휴머니즘’으로는 부족하다고 보는 이유는?
“중세적 신본주의를 깨고 르네상스와 계몽주의를 거쳐 자유와 인권을 중시한 게 ‘세속적 휴머니즘’이다. 그러나 예수를 근대적 의미의 휴머니스트로 보는 것은 착각이다. 세속적 휴머니즘이 지향하는 자유가 절대적 가치가 될 수는 없다. 맹목적인 자유를 위한 자유가 되는 순간 에리히 프롬의 예견대로 독재나 전체주의로 도피하고픈 유혹을 느끼게 된다. 만인의 자유와 평등을 힘차게 외치고 출발한 프랑스 혁명 뒤에 공포정치가 도래한 것을 보라. 도덕과 공정한 정의, 영성을 상실한 근현대 서구문명의 한계를 세속적 휴머니즘이 보여주고 있다.”

 


―‘세속적 휴머니즘’에서 ‘영적 휴머니즘’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는?
“전통사회의 부조리한 사회제도와 관습에서 수많은 사람을 해방시켜준 계몽주의 이전이나 종교가 정치권력과 결탁해 질서를 유지하던 때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세속적 휴머니즘의 토대가 되는 이성과 상식에 반해선 안 된다. 하나의 종교 전통에 고착되거나 매달리지 않고, 배타적이지 않고 포용적이며, 자연계를 감싸면서도 초월하는 따뜻한 인간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개신교 신앙인으로서, 철학자로서 가장 큰 고뇌는 무엇이었나?
“그리스도교의 초자연주의적인 신앙과 정통 교리가 인간의 상식과 지성에 반하는 면이 너무 많고 크다는 사실이었다. ‘인간의 지성에 부담을 주거나 상식에 폭력을 가하지 않고, 종교가 좀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면 안 되나’ 하는 의문이 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철학자든 신학자든 무신론자든 유신론자든, 내가 아는 서구 사상사를 장식한 위대한 사상가 치고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영적 휴머니즘’이 그 고뇌에 대한 답인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는 신앙을 유치하게 만드는, 신과 인간을 유사하게 생각하는 신인동형적 사고, 그리고 성경을 문자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근본주의다. 많은 신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 못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묻지마 신앙’에 빠지거나, 아예 종교에 담을 쌓고 세속적 삶에 자신을 맡긴다. 이 불행한 양극단의 선택을 피하도록 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고뇌는 젊은 날 교회에서 시작됐나?
“그렇다. 영락교회 신자로서 한경직 목사의 설교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그러나 전혀 감동이 없었다. 한국 개신교 주류를 복음주의라고 하는데, 말로는 죄인 죄인 하지만, 실제로는 죄의식이라는 게 없다. 차라리 죄의식으로 괴로워하면 낫겠는데 다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고, 승리주의에 젖어 타종교를 무시하고, 미국을 할아버지쯤으로 여겨 역사의식이라는 게 없다. 기본적 이성과 상식을 무시해 세속적 휴머니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한국 개신교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신학적 상식조차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상징이고 ‘아날로지’(유비)다. 그게 신학의 가장 기본이다. ‘저 친구는 곰이다’는 말은 ‘인간이 아니고 진짜 곰’이라는 게 아니지 않나. 그런데 문자주의, 근본주의에 빠진 한국 개신교 목사와 신자들은 ‘진짜 곰’이라고 한다. 성서에 그렇게 쓰여있다는 것이다.”

 

 

―이성 없는 신앙은 무엇이 문제인가?
한국 교회와 신학계는 이성을 너무 가볍게 여기지만, 이성 없는 신앙은 아전인수격으로 자기 욕망과 생각을 하느님의 뜻으로 둔갑시키기가 너무 쉽다. 중세를 대표하는 토머스 아퀴나스는 고대 그리스 철학을 이어 신앙과 이성을 종합하는 금자탑을 세웠다. 그러나 지금은 철학적 이성보다 과학적 사고가 지배하는 기술혁명시대다. 또 고대 그리스 철학보다 더 서양 철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을 매료시키는 불교나 노장사상 등이 널리 알려졌다. 따라서 어떤 철학이나 종교도 상대성을 초월하지 못하는 다원적 세계에 살고 있다는 점에서 토머스 아퀴나스의 사상적 한계도 분명하다.”

 


대표적인 영적 휴머니스트로 예수와 중국 선불교의 임제 선사, 독일 수도사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을 제시한 이유는?

 

예수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곧 인간에 대한 사랑임을 보여준 참된 인간이었다. 

 

에크하르트는 내가 아는 한, 그리스도교 2000년 역사에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와 우리 인간들 사이에 조금의 차이도 없다는 것을 대담하게 가르친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임제는 불교 냄새도 풍기지 않고, 어떤 특정한 이념과 관념조차 과감하게 벗어버리고, 아무런 사회적 지위도 없이 당당하게 사는 벌거벗은 참사람이었다. 

 

최시형은 경천, 경인에서 나아가 경물까지 가르쳤다. 슈바이처보다 훨씬 먼저 인간중심주의까지 넘어선 것이다. 

 

 

길을 잃은 문명의 앞길을 비춰주는 이들이 바로 이런 영적 선각자들이다.”

 

 

 

 

 

 

2. 

 

종교학 석학 길희성 교수 "영적 휴머니스트, 예수외 3명 있다"

 

 

< 중앙일보 백성호 기자, 2021.07.29 >

 
서강대 종교학과 길희성(78) 명예교수가 최근 책을 냈다. 서문에서 그는 “나의 학문 인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저서가 될지도 모른다는 다소 ‘비장’하고 무거운 심정으로 썼다”고 밝혔다. 922쪽, 두툼한 책의 제목은 『영적 휴머니즘』이다.

실제 그랬다. 어찌 보면 ‘마지막 고백’ 같았다. 서울대 철학과 교수 자리를 내놓고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로 갔을 만큼, 그는 좋아하는 종교학을 한평생 파고들며 살았다. 그 길의 후반부에서 길 교수가 내리는 마지막 고백과 결론은 어떤 걸까. 23일 강화도의 심도학사(尋道學舍)에서 그를 교수를 만났다. 길희성 교수에게 ‘나의 삶과 종교’를 물었다.

 


젊었을 때 신앙은?
“집안이 개신교였다. 외조부는 목사님이었다. 황해도였던 외가에 교회 장로도 여럿 있었다. 나는 고등학생 때 영락교회에서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자랐다. 그런데 나의 마음이 생동감 있게 움직이지 않더라.”

 

 

왜 생동감이 없었나.
“무언가 답답했다. 전통적 신학의 틀이 왠지 갑갑했다. 그때 부목사로 오신 홍동근 목사님이 물꼬를 터줬다. 그분은 카를 마르크스 이야기도 하고, 사회정의도 이야기했다. 성경 해석도 자유롭고 진보적이었다. 나는 거기서 어떤 해방감을 느꼈다.”
길희성 교수는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신학을 하기 위해서 철학과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당시 홍 목사님과 주위 여러분의 조언이 그랬다. 신학을 하려면 철학을 먼저 하라고 했다. 그건 신학의 경직된 울타리 안에 갇히지 말라는 충고였다.”

그 조언, 지금 돌아보면 어땠나.
“결국 나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내가 입학하던 시절, 철학과에는 논리실증주의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또 언어 분석적인 메타 윤리학도 유행하기 시작했다. 나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거기에는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등 삶에 대한 큰 물음이 빠져있었다. 대신 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심취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무엇을 찾았나.
“플라톤은 본질주의자다. 사물에는 본질이 있다. 책이라면 책의 본질이 있고, 대학에는 대학의 이념이 있다. 그게 본질이다. 나는 플라톤의 개념 철학, 본질 철학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또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세계관은 나의 기독교 신앙 이해에 큰 도움이 됐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지향점이 있고, 가치가 있다는 거다. 이건 지금까지도 내가 포기하지 않는 진리다.”

 


길 교수는 학부를 졸업하고 군 복무를 마친 뒤 미국 예일대 대학원 신학부로 유학을 떠났다. 거기서 3년간 신학 공부를 했다. 석사 과정이었다. 당연히 박사 학위도 신학으로 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심적인 변화가 생겼다. 뜻밖에도 그는 하버드대 비교종교학과에서 불교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크게 방향을 바꾸었다. 심적인 변화는 무엇이었나.
“예일대에서 공부하며 깨달았다. 서양 사람들은 데카르트나 칸트를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그들의 사고가 철학적이구나. 동양 사람들은 공자와 노자를 공부하지 않아도 사고의 밑바탕에는 동양철학이 흐르는구나. 특히 와인슈타인 교수의 학부 불교사 강의를 수강하면서 불교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이해를 하게 됐다. 나는 기독교가 세계 종교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당시 하버드 대학에는 켄트웰 스미스 교수라는 세계 종교학의 거장이 있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이슬람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이슬람학에 정통했다. “그분의 세계 종교사를 보는 눈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스미스 교수의 학부 강의 조교도 했다. “그때 나는 이슬람과 유일신 신앙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됐다. 기독교 신학을 넘어서서 세계 종교를 이해하는 데 큰 힘이 됐다.”

 


켄트웰 교수의 안목 중 가장 놀라웠던 대목은 뭔가.
그분은 세계 5대 종교를 이렇게 꼽았다.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마르크시즘, 세속적 휴머니즘(Secular humanism). 그는 마르크시즘과 세속적 휴머니즘도 하나의 종교로 봤다. 이런 견해에 나는 깜짝 놀랐다. 종교를 바라보는 나의 눈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건 궁극적 삶의 의미와 토대에 관한 인간의 모든 게 종교적이라는 깊은 통찰이었다.”

 

 

세속적 휴머니즘이 뭔가.
인간은 인간이란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어떤 종류의 차별도 없이 존중받아야 하는 가치 있는 존재다. 종교적 차별마저 넘어서는 휴머니즘이다. 서구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비판을 받았고, 그 결과 인간의 이성과 윤리에 중심을 두는 탈 종교화한 휴머니즘이 생겨났다. 그게 세속적 휴머니즘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결정적 문제가 있다.”


어떤 문제인가.
세속적 휴머니즘에만 머물면 삶의 의미, 삶의 토대가 공허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세속적 휴머니즘이 아니라 영적 휴머니즘으로 가야 한다고 본다.”

 


영적 휴머니즘, 그 핵심은 뭔가.
“데카르트는 인간은 몸과 마음으로 되어 있고, 세계는 물질과 정신으로 돼 있다고 보았다. 그렇게 세계를 이분법으로 쪼개고 대립적으로 봤다. 기독교를 위시한 유일신 신앙의 종교들 역시 이분법적 사고의 영향을 극복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고 본다.  

 


유일신 신앙의 이분법은 어떤 건가.
“신을 초자연적 존재로만 본다. 그래서 초자연과 자연이 대립한다. 신과 인간, 성(聖)과 속(俗)이 이원적으로 대립한다. 게다가 자신들처럼 그걸 명확하게 나누지 않는 다른 종교를 범신론이라고 비판한다. 여기에서 유일신 신앙의 배타성이 나온다.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나는 이걸 바꾸어야 한다고 본다.”

 


어떻게 바꾸어야 하나.
둘로 쪼개져 있던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야 한다. 그래야 유일신 신앙이 살 수 있다. 그걸 나는 ‘포월적 신관(包越的 神觀)’이라 부른다. ‘포월’은 감싸면서 초월한다는 뜻이다. 만물에 내재하면서, 동시에 초월한다. 자연적 초자연주의라고도 할 수 있다. 인류의 종교 전통들에는 이런 안목을 갖고 살았던 영적 휴머니스트들이 실제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길 교수는 네 명의 영적 휴머니스트를 꼽았다. 예수와 중세의 수도자이자 신학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7), 중국 선불교의 임제 선사(?~867)와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1827~98)이다. 그는 먼저 예수를 꼽았다.

예수는 말과 행동으로 진정한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래서 하느님의 대변인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하늘 아버지의 모습을 너무나 닮았다고 하여, 그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 점에서 예수는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이자 진정한 사람의 아들이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어땠나.
“그런 예수를 알아보고 가감 없이 말했던 신학자다. 전통적인 기독교는 예수는 하느님의 외아들이고,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입양된 양자라고 말한다. 독생자는 예수님뿐이라는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이런 장애를 완전히 넘어서신 분이었다.”

 

 

에크하르트는 뭐라고 했나.
예수와 우리가 모두 똑같은 하느님의 아들과 딸이라고 했다. 에크하르트는 그사이에 한 치의 차이도 인정하지 않은, 내가 아는 한 거의 유일한 신학자였다. 그는 기독교의 공고한 신학적 장벽과 교리의 장벽을 속 시원하게 돌파해 허물어 버린 수도자이자 신비주의자다.” 

 


임제 선사와 해월 최시형은 왜 영적 휴머니스트인가.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ㆍ다다른 곳마다 주인이 돼라, 서있는 곳마다 모두 참되다)’을 강조한 임제 선사는 참다운 인간의 주체성을 거침없이 설했다. 또 사인여천(事人如天ㆍ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다)을 주창한 해월 최시형은 ‘도인의 집에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고 하지 말고 하느님이 강림했다고 말하라’고 할만큼 영적 휴머니스트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심도학사 진입로까지 배웅을 나온 길 교수가 맑은 눈으로 말했다.

영성은 인간의 본성이다.

 

 

Golden Rule Poster presented to the United Nations
 

United Nations gets the Golden Rule Poster

 


The Scarboro Missions Golden Rule poster is now on permanent display at the United Nations headquarters in New York City. On January 4, 2004, Mrs. Gillian Sorensen, Assistant Secretary-General of the UN, accepted the poster as a gift from the North American Interfaith Network.

 


The presentation was part of an interfaith ceremony in which it was pointed out that the Golden Rule is not just a moral ideal for relationships between people, but also for relationships among nations, cultures and religions.

In presenting the poster to the Assistant Secretary- General, the following a statement was read by a representative of the North American Interfaith Network (NAIN).

 


Statement read at the Presentation of the Golden Rule Poster to the UN

The framed Golden Rules poster was presented to Mrs. Gillian Sorensen, Assistant Secretary- General of the United Nations on January 4, 2002. It was presented by the Board of the North American Interfaith Network (which has sixty-five member organizations) and Scarboro Missions, on behalf of the people in the many religious, spiritual and humanistic communities who honour these Golden Rules. In presenting the poster, the following statement was read:

 


The Statement — Golden Rule for a Culture of Peace

Because the United Nations is a home for our highest human ideals, and because the world’s religions have a duty to articulate and promote those ideals, we are honoured to present you with “The Golden Rule.” In this poster, thirteen religious and spiritual traditions state a universal principle in elegant and distinctive forms.

These Golden Rules are evidence of a Global Ethic that transcends nations, civilizations, and religions. Yet no other statements so clearly summarize the simple practices of kindness and sustainable human conduct. In recent years, gatherings of religious and spiritual leaders have confirmed that “this ancient precept is found and has persisted in many religious and ethical traditions of humankind for thousands of years. . . [and] should be the irrevocable, unconditional norm for all areas of life, for families and communities, for races, nations, and religions” (Toward a Global Ethic).

The United Nations provides a unique forum where the subtleties of this universal principle can be translated into the realm of international affairs. We are inspired by key United Nations documents such as the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and its premise that those rights we wish for ourselves shall be granted to others as well. Equally challenging is the principle that no nation will find peace until it wants for others the same peace and security it seeks for itself.

We believe that these Golden Rules, also known as the “law of reciprocity,” must be obeyed by all nations, and that, in the interests of global security, no nations or leaders may exempt themselves. Whatever is hateful or injurious to ourselves, we must not do to others.

Failure to adhere to these moral principles brings great hazards to all, ranging from unsustainable development practices to environmental crises and nuclear threats with their inherent potential for catastrophe. Nations must treat other nations as they wish to be treated.

Together, these precepts remind us that our diversity can flourish within a greater and simpler unity – the human family, with its common origins, needs, and aspirations. The Golden Rules teach that no one – no nation, culture, or religion – is an island unto itself. Drawing on time- tested wisdom and experience, they presume our interdependence and declare our personal responsibility for the common good.

Presenting a framed Golden Rule Poster to the Secretariat of the United Nations on January 4, 2002 were leaders from the North American Interfaith Network (NAIN) and some of its member organizations and friends: Rev. Deborah Moldow from United Religions Initiative at the UN and World Peace Prayer Society; Sister Joan Kirby, Representative to the UN from Temple of Understanding; Father Terrence Gallagher, from Scarboro Missions in Toronto; Joel Beversluis, Editor of the NAIN newsletter and CoNexus Multifaith Media; Mrs. Gillian Sorensen, Assistant Secretary- General of the United Nations for External Affairs; Jonathan Granoff, from Temple of Understanding, Bawa Muhaiyadeen Fellowship, and Global Security Institute; Ralph Singh, Secretary of the NAIN Board, from Gobind Sadan-USA; and Dr. Elias Mallon, a founder of NAIN and Dean of Auburn Seminary.

 

 

 

The Golden Rule mosaic is based on a painting by well-known American artist Norman Rockwell (1894 – 1978). The painting served as the illustration for the cover of the April 1961 issue of the Saturday Evening Post, a popular magazine. Rockwell’s most well- known work is the series of oil paintings called Four Freedoms, which was inspired by a 1941 speech by USA President 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 – 1945). The speech centered on the idea of a postwar world based on four basic freedoms; freedom of speech, freedom of religion, freedom from want, and freedom from fear. Another recurring theme in Rockwell’s work is tolerance.  
 
The mosaic depicts people of every race, creed, and color, with dignity and respect and touches on the theme of human rights. Inscribed on the surface of the mosaic is the Golden Rule: Do Unto Others as You Would Have Them Do Unto You. It depicts a common experience and a shared aspiration to unify the world’s religions and philosophies. In the mosaic, people of all traditions and cultures of the world are in united harmony. The artist said, “When I decided to attempt a picture illustrating the Golden Rule and, remembering this charcoal, hauled it out of the cellar and looked at it, I immediately felt that in the grouping of the peoples of the world behind the delegates was the basis for my picture illustrating the Golden Rule.” 

The government and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presented this gift to the United Nations and Secretary-General Javier Perez de Cuellar received it. It was presented by the USA’s First Lady, Nancy Reagan (1921 – 2016),  on 21 October 1985, in celebration of the 40th anniversary of the United Nations. The Thanks-Giving Square Foundation arranged for the creation and finance of the mosaic.

Donor Region:  Western European and Other Groups
Donor:  USA
Classification:  Architecture & Mosaics
Materials:  Glass
Medium:  Murano glass tile mosaic
Location (Building):  Conference Building (CB)
Location floor:  3rd Floor
Donation Date:  October 21, 1985
Artist or Maker:  After Norman Rockwell by Coop Mosaic Artistico Veneziano
Dimensions:  H: 125 ½ x W: 108 ½ x D: 13 ½ in.

"이럴 때 하느님이 기도 들어주십니다" 故정진석 추기경의 답 

[백성호의 한줄명상]

 

 

 

< 백성호 기자 ,  중앙일보 2022.07.27  >

 


“어떤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나요?”

 


#풍경1

고(故) 정진석(1931~2021) 추기경은 원래 공학도였습니다.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다니다가 한국전쟁이 터졌습니다.
그는 국민방위군에 소집됐고, 통신장교로 한국전쟁에서 복무했습니다. 그는 과학자를 꿈꾸는 젊은이였습니다.  서울대 공대에 입학했으니, 그는 한 발짝 성큼, 꿈에 다가가 있었습니다. 느닷없이 터진 한국전쟁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무엇보다 전장에서 직접 체험한 전장의 참상은 그에게 큰 물음을 던졌습니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대화를 나누고, 함께 잠을 자고, 함께 행군하던 전우가 눈앞에서 죽는 걸 본다면 과연 어떨까요.
그는 한국전쟁에서 몇 번이나 그런 참상을 경험했습니다. 부대가 얼어붙은 남한강을 건널 때, 발밑의 얼음이 깨졌습니다. 줄지어 강을 건너던 행렬의 중간이 끊어졌습니다. 그게 정 추기경의 바로 뒤였습니다. 그의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부대원들이 물에 빠졌습니다. 겨울 강, 얼음물에 빠져 아우성치며 죽어가는 모습을 그는 하나도 빠짐없이 목격했습니다.

 #풍경2

서울 명동성당의 집무실에서 마주 앉은 정 추기경은 당시를 회상하며 잠시 눈을 감았습니다.
  “바로 코앞에서 그걸 봤어요.    그게 저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산을 넘어 행군하다가 전우가 지뢰를 밟았습니다. 지뢰는 터졌고, 전우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역시 젊은 정 추기경의 바로 옆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 또한 자신일 수 있었습니다. 지뢰를 밟는 사람이 자신일 수 있었고, 목숨을 잃는 사람도 자신일 수 있었습니다. 그건 정말 간발(間髮)의 차이에 불과했으니까요. 그때 그곳에서 죽은 사람은 나가 아니라 그였다는 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저일 수 있었습니다.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저에게는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그때 절감했습니다. 내 생명이 나의 것이 아니구나.”

 


#풍경3

정 추기경께서 나의 생명이 내 것이 아니더란 대목을 말할 때, 저는 보았습니다. 그의 등 뒤에 서 있는 큼직한 자기 십자가를 말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합니다. 백 년을 살기도 힘든 우리는 천 년을 살 것처럼 살아갑니다. 삶은 영원하고,
죽음은 남의 일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쉽지 않습니다. 삶이 유한하구나,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구나, 주어진 시간이 다 가기 전에 삶의 의미를 찾아야겠구나! 이걸 깨닫는 게 쉽지 않습니다.

사도 바오로(바울)는 말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는다.” 전장에 서 있던 정 추기경도 그랬습니다. 그 역시 날마다 죽는 연습을 수도 없이 했습니다. 그런 죽음 끝에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정 추기경의 고백도 바오로의 고백과 무척 닮았습니다.   “나의 것인 줄만 알았던  내 생명이 나의 것이 아니구나.”

 


#풍경4

한국전쟁은 끝이 났고, 통신장교 정진석도 제대를 했습니다. 주위에서는 그가 다시 서울대로 복학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는 삶의 방향을 틀었습니다. 서울대 복학 대신 가톨릭 신학대에 들어갔습니다. 과학자의 삶이 아니라, 수도자의 삶을  택한 겁니다.  그 이유를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전쟁 기간에 항상 기도했습니다.    내 삶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게 해달라고,  날마다 기도했습니다.
   그게 저에게는 가장 절실한 기도였습니다.”

그가 사제의 길, 수도자의 길을 택한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내 삶의 뜻을, 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세상에 태어나,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인간에게 그보다 큰 물음이 과연 있을까요.  그는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 방향을 틀었습니다.

 


#풍경5

생전에도 사람들은 정 추기경을 향해 이런저런 수식어를 붙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보수적이다”라고 비판했습니다. 특히 가톨릭 내부의 진보 진영에서 정치적 공세를 쏟아내기도 했습니다. 시간적 간격을 두고 여러 차례 인터뷰하며 가까이서 마주했던 정 추기경은 사실 달랐습니다.

보수주의자나 진보주의자는 정치적 잣대에 불과합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날마다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매년 한 권씩 책을 쓰는 그는 오히려 ‘수도자(修道者)’에 훨씬 더 가까운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정 추기경과의 인터뷰는 매번 각별했습니다. 제가 물음을 던질 때마다 추기경은 자신의 내면, 그 깊은 우물에서 길 어 올린 수도자의 눈으로 답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울림이 있었습니다. 그의 답은 늘 울림이 있었고,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는 저의 귀에는 메아리로 맴돌곤 했습니다.

한번은 제가 물었습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추기경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무슨 대화입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간절히 구하는 대화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간절히 구하는 대화입니다.
   지금 하느님께서 뭘 원하시나,  그걸 묻고 찾는 게 기도입니다. 그럴 때 하느님도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기도할 때 왜 내가 원하는 걸 구하지 않고, 하느님이 원하는 걸 구해야 하느냐고 따집니다.
나를 위한 기도이지, 하느님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고 반박합니다.

그런데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걸 구하면 나의 에고만 강해지기 십상입니다. 반면 하느님이 원하는 걸 구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조금씩, 또 조금씩 하느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걸 구하면 나의 마음을 따라가는 거고, 하느님이 원하는 걸 구하면 하느님의 마음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마음을 따라가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 다시 말해 신의 속성을 닮아가게 되겠지요. 그만큼 진리에 가까워지겠지요.

하느님이 지은 최초의 인류는 인간의 속성과 신의 속성이 서로 통했으니까요.

그걸 다시 회복하고자, 우리는 기도할 때 묻는 겁니다. 나의 마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을 말입니다.
내가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구하시는 것을 말입니다.

1.  “봄 같은 선심 품으라, 꽃이 절로 필 것”

 

<중앙일보 백성호 기자  2022.03.25>

 


24일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 만난 조계종 차기 종정 성파 스님은 “코로나보다 더 악랄한 게 뭔지 아나. 사람이 먹는 악심이다. 나만 옳고 상대는 틀렸다는 생각이다”고 말했다.  

24일 경남 양산의 통도사에는 봄이 성큼 와 있었다. 영축산 기슭은 파릇하고, 경내에는 홍매(紅梅)가 활짝 피어 있었다. 통도사 안의 전각인 해장보각(海藏寶閣)에서 성파(性坡·83, 통도사 방장) 스님을 만났다. 오는 30일 대한불교 조계종 제15대 종정(宗正, 종단의 최고지도자) 취임을 앞두고 갖는 첫 기자간담회였다. 종정 임기는 5년이며, 한 차례 연임이 가능하다.

은사인 월하 스님에게 받은 교훈이 있나.


“우리 스님은 항상 ‘평상심이 도(道)다’라고 하셨다. 다시 말해 상식이 법이라는 말이다. 나는 평생 그 교훈을 지키며 살고 있다.”


평상심이 도인데, 사람들은 왜 그걸 모르고 사나.


“중생과 부처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부처에서 부처가 나오는 게 아니다. 중생심에서 부처의 마음이 나오는 거다. 그러니 범부와 부처가 따로 없다. 그걸 깨치면 평상심이 도가 된다. 이렇게까지 말해도 모른다면, 그건 또 어쩌겠나.”


성파 스님은 “중국 부처와 한국 부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부처는 똑같은 부처다. 중국 선사만 대단한 게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대단한 선사들이 많다”고 말했다.

중국의 달마, 마조, 임제, 혜능 대사만 대단한 고승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원효, 의상, 지눌, 나옹, 무학, 서산 대사도 그에 못지않은 깨달음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도를 깨쳤다고 하지 않나. 그건 누구든지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부처가 어디에 있나. 자기 마음에 있다. 세상에 마음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나. 마음이란 게 따로 있어서 머리에 이고 다니거나, 짊어지고 다니는 게 아니지 않나. 그러니 부처도 치우고, 조사도 치우면 누구라도 부처가 될 수 있다.”


대통령 선거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가 갈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내 처신도 제대로 못 하는데, 사회에 대한 가르침을 내가 줄 수 있겠나. 다만 코로나보다 더 악랄한 게 뭔지 아나. 사람이 먹는 악한 마음이다.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개개인이 악심(惡心)을 품지 말고 선심(善心)을 품어보라. 봄바람 같은 선심을 품으면 절로 꽃이 피지 않겠나.


이말 끝에 성파 스님은 “살림살이” 이야기를 꺼냈다.

“개인도 살림살이가 있고, 절에도 살림살이가 있고, 나라에도 살림살이가 있다. 살림살이에서 가장 큰 장애물이 뭔지 아나. 나만 다 옳고, 나만 잘났다. 남은 다 못났다는 생각이다. 그게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이다. 이 인아상(人我相)을 무너뜨리고 공덕의 숲을 길러야 한다. 그 숲이 우거지면 짐승도 살 수 있고, 곤충도 살 수가 있다. 그럼 살림살이가 잘 돌아간다. 그렇지 않고 상대를 입도끼로 찍어대고, 소리 안 나는 총으로 쏘아 대고. 그럼 살림살이를 잘할 수가 없다.”

대한불교 조계종의 조직 체계상 ‘종정 예경실’이 있다. 정부로 치면 ‘청와대 부속실’쯤에 해당한다. 성파 스님은 “예경 실장도, 그 밑의 사서도 따로 두지 않을 참이다. 나는 본사(통도사)가 있으니, 본사 주지가 예경 실장하고, 직원들이 사서 하면 되지 않나. 따로 둘 필요가 없다”고 했다.

간담회를 마치고 통도사 경내로 나섰다. 성파 스님은 “사람들이 자기 잘못은 생각 안 하고, 남의 탓만 하지 않나. (새 종정으로서) 나는 내가 잘해야지 생각한다. 우리 불교도 새 정신으로 자정(自淨)하고, 새로운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2. "사회에 어떤 가르침?…나부터 잘하겠습니다"

 

< 매일경제 허연 기자, 2022.03.24 >

 

 
대한불교조계종 신임 종정인 성파 대종사가 24일 오후 경남 양산 통도사 해장보각(海藏寶閣)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스님은 "지금 봄바람이 불 듯이 선심(善心)이 널리 퍼지면 좋은 세상이 된다"고 설법했다.  

 


일주문에 들어서니 홍매화가 지천이다. 사찰을 창건한 자장율사의 정신을 기려 자장매(慈藏梅)라 부르는 매화나무를 선두로 봄이 왔음을 일깨운다.

경남 양산 통도사. 한국불교의 맥을 잇는 영축총림 삼보종찰이다.

"아이고, 먼 길 오느라 수고들 했어요." 대한불교조계종 제15대 종정 취임을 앞둔 통도사 방장 중봉 성파 대종사(82)가 밝은 얼굴로 기자들을 맞았다.

"기자간담회라니 달갑지 않습니다. 무슨 민족의 지도자나 국가 통치자도 아닌 일개 산승일 뿐인데 귀한 분들이 너무 많이 오셨네요. 제 수준에 안 맞는 것 같아서 송구할 뿐입니다. 이렇게 오셨으니 차나 한잔하고 가시면 좋겠습니다."

성파 대종사는 스승 월하 스님의 이야기를 꺼냈다.

"월하 스님께서는 평상심이 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평생 동안 그 교훈을 지키고 있습니다. 앞으로 종정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중노릇이나 제대로 하고자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주지니 방장이니 종정이니 하는 자리는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일상(日常)에 도(道)가 있고, 천지사방이 학교'라는 것이 제 깨달음입니다."

오는 30일 종정 추대식을 앞둔 큰스님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내 처신도 제대로 못하는데 무슨 사회에 가르침을 주겠습니까. 나부터 잘하겠습니다.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을 염두에 두고 말과 행을 같이하는 수행으로 임하겠습니다. 단지 바라는 게 있다면 봄바람이 불어오듯 선심(善心)이 사회에 널리 펴졌으면 좋겠습니다."

종정으로서 종단에 어떤 가르침을 줄 것이냐는 질문에 스님은 짤막하게 답했다. "태풍이 불면 태풍을 막고, 가뭄이 심하면 가뭄을 막아야 하듯이 그냥 벌어지는 일을 하나하나 챙길 생각입니다."

성파 대종사는 이제까지 종정을 지낸 큰스님들과는 좀 결이 다르다. 일상을 멀리하지 않고 중생 속에서 도를 찾은 스님이다.

"내게는 선방(禪房) 아닌 '중생의 일상'이 깨우치는 자리였습니다. 그냥 그렇게 지내왔는데 원로들과 신도분들이 높은 자리에 저를 앉히는 걸 보면서 부처님의 가피(加被)를 느낍니다."

스님은 대중 눈높이에 맞춰 잔잔하고 평이한 법문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정치에 관한 질문을 하자 쓴소리를 던졌다.

"악을 짓지 말고 착한 것을 지으면 되는 겁니다. 말하기 쉽지만 행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 정치하는 사람들 말 얼마나 잘합니까. 말만큼만 하면 됩니다. 그게 나라살림 잘하는 겁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먼저 인사를 했다는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서로 내가 먼저 하겠다고 하고, 내가 잘났다고 하면 뭐가 되겠습니까."

스님은 또 '오늘'을 중시한다. 올해 동안거 해제 법어의 핵심도 '오늘'이었다. "목숨을 아끼지 말고 조사의 공안을 참구하되 내일을 기다리지 말아야 해요. 수행자에게는 오늘이 있을 뿐 내일은 없어요. 내일을 기다리는 자는 설사 미륵이 열반하더라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사람 몸 받았을 때 일대사를 마쳐야 합니다."

성파 대종사는 그림과 글씨, 도예 등 예술적 재능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동안 옻 염색전과 옻칠 불화전, 민화전 등을 열며 꾸준히 작품활동을 이어왔다. 스님에게는 예술도 수행이다.

"예술을 했다기보다 일상을 그냥 살아온 거죠. 산에 올라가 보지 않고는 다리 힘을 알 수 없고, 물에 들어가 보지 않고는 물의 깊이를 알 수 없습니다. 내 발길 닿는 곳이 곳 수행처이고 손에 잡은 일이 곧 수행입니다. 뭔가 직접 창조하고 생산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발자취를 남기려고 하는 일이 아니에요."

스님은 특히 우리 전통문화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저는 우리 불교를 자부심을 갖고 봅니다. 우리 문화를 바탕으로 우리 역대 조사 스님들의 공부를 따르는 것이 도를 아는 길입니다. 우리 민족문화에 대한 자존심도 대단합니다. 이미 1700년 전에 선덕여왕이 있었어요. 서양에 여왕이 생기기 천년 전에 우리에게는 이미 여왕이 있었던 거죠. 정신문화는 우리가 앞서 있어요."

성파 대종사는 월하 스님을 은사로 1960년 사미계를, 1970년 구족계를 받았다. 중앙종회 의원, 통도사 주지, 영축학원 이사장을 역임했고 2013년부터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있으며 2014년 종단 최고 법계인 대종사에 올랐다. 2018년부터는 영축총림 통도사 방장을 맡아왔다.

"제게 인생은 시작부터 지금까지 나날이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새가 숲속에 있을 때는 거기가 불국토인 줄 모릅니다. 새장에 갇히면 비로소 알게 되죠. 우리가 사는 세상도 똑같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부처가 있습니다."

영성 강좌

      - 길희성 (심도학사 원장, 서강대학교 비교종교학 명예교수) 

 


I. 종교, 영성, 현대

최근 우리 사회에 영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종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 반대로 종교에 대한 관심과 영성에 대한 관심은 반비례 할지도 모른다. 이는 현대 한국 종교계를 보면 곧 드러나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 종교가 번성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인구조사를 해 봐도 스스로를 이런 저런 종교 교단이나 단체에 속한 신자로 간주하는 사람이 족히 전 인구의 반에 육박하고 있으며, 그 중에 상당수가 활발한 신앙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적극적인 신자들이다. 이는 ‘탈종교’ 시대를 살고 있는 서구 국가들과는 사뭇 대조적이며, 아마도 이슬람 국가들을 제외하고는 한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종교가 융성하고 있는 나라일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사실이 한국인들이 그만큼 종교적 영성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무교나 각종 민속신앙은 물론이고 가장 많은 신자들을 보유하고 있는 불교나 그리스도교의 경우, 신자들 대다수가 기복신앙에 기울어져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세속적 복락을 추구하는 기복신앙은 종교의 범주에는 속할지언정 결코 영성(spirituality)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하느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통해 인간의 각종 세속적 욕망을 채우려는 기복신앙을 우리는 영성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종교와 영성의 괴리는 한국과는 사뭇 다른 이유로 서구 종교계 내지 현대 사회 일반의 특징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서구 사회는 이른바 철저한 세속화(secularization) 과정을 통해 탈그리스도교, 탈종교 시대를 살고 있다. 하나의 문화적 전통 내지 관습, 혹은 집단적 정체성의 힘으로서는 종교가 여전히 건재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을 규제하는 힘을 상실한 지 오래고 종교의 제도적 권위 또한 철저히 무시되고 있다. 서구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낮은 교회 출석률은 이를 입증하는 가장 두드러진 현상이지만, 그밖에도 피임, 유산, 동성애 등 가족윤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 가톨릭 전통이 매우 강한 사회들에서조차 외면당하고 있다.

그러나 제도화된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의 퇴조가 반드시 현대 서구인들의 영적 관심의 부재나 퇴조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종교의 핵이자 존재 이유라고도 할 수 있는 영성이 더 이상 그리스도교라는 제도와 전통의 울타리 내에서 추구되고 있지 않음을 말해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는 서구 사회에서 불교를 위시한 동양 종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으며 이른바 뉴 에이지 운동 등 다양한 형태의 명상 운동들이 번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다. 세속화가 반드시 세속주의(secularism)를 뜻하는 것은 아니며, 초월적 자유를 향한 인간의 영적 갈망은 형태와 채널을 달리 하여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종교와 영성은 반드시 같이 가는 것은 아니다. 모든 종교 신자들이 영성에 관심을 갖는 것도 아니고 영성에 관심이 있다 해서 반드시 어느 특정 종교에 소속된 신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사실이 영성이라는 현상이 지닌 한 매혹적 측면이며, 어쩌면 이것이 영성의 본질을 드러내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성은 제도권 종교 내에 머물기도 하고 초월하기도 하며 종교와 비 종교의 경계선을 허무는가 하면 종교 간의 장벽도 뛰어넘을 수 있는 매우 유연하고 무정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영성은 초월적 실재와의 만남의 의식 내지 경험이다. 초월적 실재와의 만남인 한 영성 자체도 초월적 성격을 띠며, 초월적 실재가 보편적 실재이며 그것과의 만남이 인간의 보편적 현상인 한 영성도 인류의 보편적 현상이다. 이것은 물론 영성이 특정한 역사적, 사회문화적 맥락 없이 하늘로부터 뚝 떨어진 순수 초월적 현상이라는 말은 아니다. 영성의 본질이 어떠하든, 영성의 촉발이나 발현은 언제나 일정한 문화적, 종교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다. 영성의 실현은 맥락 의존적이고 문화 상대적이며 항시 특수한 역사적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 특히 종교 전통들 ― 신화, 교리, 신학, 신앙 등 ― 은 영성을 배양하는 토양과도 같다. 사실 인류 역사를 통해 영성은 주로 특정 종교 전통 내에서 함양되고 고취되어 왔다. 비록 영성이 초월적, 보편적 실재와의 만남이기에 궁극적으로 특정 종교의 울타리를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해도, 일반적으로는 종교 의존적이어 왔다. 특히 영성은 항시 일정한 신관 혹은 신학, 형이상학 내지 존재론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영성이 신학 내지 형이상학을 전제로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신학이 곧 영성은 아니며, 신학자가 반드시 영성가인 것도 아니다. 영성은 영적 실재, 초월적 실재, 혹은 신의 현존에 대한 의식이고 경험이다. 영성은 또한 신앙(faith)과도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신앙과 영성은 초월 지향적이라는 면에서는 일치하지만, 영성에는 신앙적 영성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신앙은 인간과 초월적 실재와의 일정한 거리를 전제로 한다. 신앙은 믿는 자와 믿는 대상, 신앙의 주체와 대상 사이의 관계를 전제로 하지만, 영성의 여러 형태들 가운데는 이러한 관계적 영성을 넘어서서 초월적 실재나 절대적 실재와 완전히 하나 됨을 추구하는 영성도 있다. 신앙의 영성도 있지만 깨침의 영성도 있고 지혜와 관조의 영성도 있다. 대체로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과 같은 유일신 종교는 전자, 즉 신앙적 영성을 주로 하는 반면, 동양 종교들의 영성은 주로 깨침과 관조의 영성이 주종을 이룬다. 

과거에는 영성이 주로 특정 종교 전통 내에서 함양되어 왔지만, 현대 영성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탈종교적, 초종교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데에 있다. 현대 세계에서는 종교 전통들이 신앙과 영성, 즉 초월적 실재와의 만남을 촉발하고 배양하기보다는 오히려 장애가 되는 역리 현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의 목적이 영성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종교 전통과 제도들이 현대인의 영적 관심에도 불구하고 영성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난해한 교리나 개념들, 낡은 신관이나 신학 등은 곧 거기에 근거했던 영성의 위기로 이어진다. 현대 영성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많은 영성 운동들이 특정 종교의 제약을 받지 않고 혼합적 성격 내지 무정형적 성격을 띤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의 눈에는 분명히 어떤 특정 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그것과 무관하다고 자처하거나 심지어는 스스로를 ‘종교’가 아니라고까지 주장하는 영성 운동들도 나타나고 있다. 가령 인도의 힌두교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 각종 명상 운동들이나 우리나라에서 크게 번성한 단학이나 한마음수련 운동 같은 것이다. 이런 현상은 단적으로 말해 전통적인 제도 종교가 현대인에게 관심을 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감마저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영성이 문화제약적이고 종교 의존적임에도 불구하고 특정 종교는 물론이요 종교와 비종교, 혹은 종교 간의 차이마저 초월하는 보편성을 띨 수 있는 이유는 영성이 지향하고 있는 실재 자체가 초월적이기 때문일 뿐 아니라, 인간에 내재하고 있는 인간 존재 자체의 어떤 보편적 특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 인간은 영적 존재(spiritual being)라는 말이다. 인간은 단순히 생존의 토대가 되는 물적 조건을 확보하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일하고 사랑하며 지성을 사용하여 자연의 상태를 벗어나 문명을 구축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이 모든 활동 이상의 초월적 관심을 가진 존재라는 말이다. 인간은 자신을 제약하고 있는 물적 조건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초월을 향한 갈망을 지닌 존재로서, 가시적 세계를 넘어서거나 그 근저에 있는 초월적 실재와 하나가 되려는 영적 욕구를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영성가들은 하나 같이 인간 존재 안에는 바로 이런 영적 욕구를 산출하고 있는 어떤 본성적 근거가 존재한다고 증언한다. 인간은 세상과 세간에 속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거기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초세간적 관심을 지닌 존재이며, 유한한 사물들을 넘어서거나 포괄하는 무한한 실재, 변하는 사물들의 배후에 있는 불변의 실재를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갈망을 지닌 존재로서, 초월적 실재를 향해 열린 존재라는 것이다.

이 초월적 실재의 성격은 종교 전통들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지만, 반드시 비물질적인 혹은 초자연적인(supernatural) 실재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전통적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이해하듯이 초자연적 신일 수도 있고 자연의 이법 혹은 자연 안에 내재하는 어떤 신비한 힘일 수도 있다. 영성이 추구하는 초월적 실재는 또한 물질이나 육체를 무시한, 혹은 사회와 역사를 외면하는 이른바 순수 ‘영적’ 혹은 ‘정신적’ 세계일 필요도 없다. 다만 초월적 실재를 갈망하는 인간의 욕구가 물질적 혹은 생물학적 욕구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것을 영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물론 회의적 시각은 이러한 영적 욕구마저도 또 하나의 변형된 생존의 욕구, 불로장생이나 영생불멸을 원하는 인간의 자연적 욕구의 연장일 뿐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순수한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자기 이해에 명백히 반하는 일이며, 영성의 세계를 접해 보지 못한 세속적 지성의 시각일 뿐이다. 영성은 곧 초월적 실재와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 존재의 초월성과 직결되는 현상이다. 영성은 오히려 때로는 보이는 현상 세계를 허망하다 하고 초월적 실재를 참다운 실재로 간주하기도 하며, 세속적 자아를 거짓 자아로 간주하고 영적 자아 혹은 형이상학적 자아를 참 자아(眞我)라 부르기도 한다. 

인간이 초월적 존재이며 영적 존재라는 사실은 물질적 욕구가 어느 정도 해소된 사람들, 특히 물질의 풍요를 누리고 있는 현대인들에게서도 그러한 욕구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말해 주고 있다. 탈종교, 탈형이상학 시대를 살며 고도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도 그것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영적 욕구가 엄연히 존재한다. 현대인은 한 편으로는 물질적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노심초사 밤낮으로 몸과 마음을 괴롭히며 살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리 해도 충족시킬 수 없는 욕망의 늪에서 완전히 벗어나고자 하는 또 다른 욕망이 존재한다. 욕망을 없이 하고 욕망의 늪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역설적 욕망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출세간적 욕구이며 불도를 구하는 불심 혹은 불성의 발로이다. 에릭 프롬은 그것을 <소유>보다는 <존재> 지향적 욕구라고 불렀다.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와 쾌락과 사치를 누리고 있는 현대인은 어쩌면 최고의 쾌락은 아무런 쾌락이 필요 없는 상태, 혹은 모든 쾌락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쾌락주의의 역설을 피부로 느끼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철학자 베르그송은 『도덕과 종교의 두 가지 기원』이라는 그의 말년의 저서에서, 현대 산업문명이 신비주의적 영성과 금욕적 영성에 바탕을 둔 소박성(simplicity)으로 회귀할 가능성을 예견하고 있다. 대중적 향락주의가 아니라 역설적 향락주의, 사물의 정복이 아니라 욕망의 정복을 힘으로 여기는 중세적인 금욕적 영성이 새롭게 부상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영성은 대체로 세속적 욕구의 성취보다는 포기, 소유보다는 존재, 일보다는 유희, 차이보다는 통합, 대립과 갈등보다는 화해와 일치, 투쟁보다는 평화, 역사보다는 자연에 더 친화적이며, 이러한 특성은 현대인들이 지나치게 발달된 자아의식 내지 개체 의식과 소외감을 넘어서 자신보다 더 크고 깊은 어떤 무한한 실재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욕구를 자극한다. 영성은 탈종교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제 3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종교에 흥미를 잃었으나 그렇다고 세속에 함몰된 삶에 만족하지도 못하고 방황하는 현대인들에게 영성은 하나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모든 과감한 정치적 실험과 사회변혁이 한계점에 이른 듯 ‘역사의 종언‘과 탈 이데올로기 시대를 맞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답답한 현실을 탈피하고자 하는 초월의 갈망은 거부할 수 없는 내면의 소리로 다가오고 있다. 물질이 풍부하면 할수록 물질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욕구, 감각적 쾌락이 짙으면 짙을수록 감각적 쾌락 너머의 행복을 갈망하는 영성의 요구 또한 더욱 절실해진다.

그렇다고 영성의 추구가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되는 현실 세계와 역사를 외면하는 도피주의로 빠지는 것은 아니다. 초역사적인 형이상학적 영성의 추구가 단순한 현실 도피로 이어질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영성은 동시에 존재의 차원에서 현실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고 긍정하는 영적 토대를 마련해 준다. 영성적 세계 긍정은 세계에 대한 단순한 즉자적 긍정이 아니라 강한 부정을 수반한 긍정이며, 영성이 추구하는 삶은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는 사즉생(死卽生)의 영성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영성가들은 현실을 부정하는 초월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의 초월, 혹은 현실 속으로의 초월을 추구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위와 같은 현대의 정신적 상황에 대한 진단은 크게 보아 현대 한국 사회에도 타당하다고 본다. 한국 사회는 이제 5,60년대의 처절했던 가난과 7,80 년대의 치열했던 민주화 투쟁의 시기를 거쳐 이제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둘 다 이룩한 세계 몇 안 되는 나라들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아직도 사회 각 방면에 걸쳐 거칠고 미숙한 면이 많고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으며, 무엇보다도 남북한의 화해와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업을 안고 있지만, 현대 한국인들의 정신적 주소도 이제 서구 선진 사회와 큰 차이가 없다고 본다. 차이가 있다면, 서구와는 달리 끈끈한 가족의 유대와 유교적 인간관계가 여전히 공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며, 특히 제도화된 종교가 우리 사회에서 아직 상당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경제발전과 더불어 서구사회와 마찬가지로 한국인의 인간관계도 점점 더 원자화될 것이며 제도화된 종교들도 사양길에 접어들 것이라고 나는 본다. 특히 생활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기복신앙의 한계는 더욱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경제발전과 더불어 조잡한 물질주의와 배금주의, 향락주의가 기승을 부리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진정한 영성에 대한 갈망도 더욱 확산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렇다면 현대 한국 사회의 영성은 어떤 양태를 띠게 될 것이며 그 영성의 자양분은 어디서부터 올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한국보다 한 발 앞서 역사의 발전을 경험한 서양의 영성적 상황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고 이에 준하여 한국 사회의 영성적 미래를 전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한국은 아시아 여러 나라들과는 달리 그리스도교 신자가 인구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그리스도교가 번성하고 있는 사회라는 점에서, 서구 그리스도교 신학과 영성의 전통과 그 성격에 대한 고찰은 우리에게도 직접적인 의미를 지닌다. 

나는 이 글에서 서구적 영성의 뿌리와 성격, 그리고 그것이 현대세계에서 처한 문제점들을 고찰할 후, 동양적 영성이 과연 현대인들에게 대안이 될 수 있을는지,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오늘의 한국 종교계에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어느 것 하나 간단한 문제가 아니고 방대한 논의를 요하지만, 거시적 안목에서 나의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서구 영성의 핵심은 성서적 신앙에 뿌리를 둔 영성이다. 이 성서적 영성은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형이상학적 영성과 만나면서 적어도 중세 시대까지 서구의 영성 전통을 지배해 왔으며, 종교개혁이나 근ㆍ현대 신학의 다양한 새로운 흐름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근본 패러다임은 지속되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서구 그리스도교 신학은 그리스 철학의 지배적 영향 하에 형성되었으며 그리스도교 영성 또한 그리스 철학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특히 교부시대의 그리스도교 신학과 영성에 끼친 플라톤 철학 내지 신플라톤주의의 영향, 그리고 중세 스콜라 철학의 전성기에 그리스도교 신학에 끼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은 지대했다. 그 후 근대 과학의 지배적 영향 아래 전개된 근대 서구 철학은 그리스도교 영성을 뒷받침해 줄 만한 사상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리스도교 영성은 고전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신교의 성서 중심 신학, 인간의 종교적 경험이나 윤리적 관심에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을 정초하려는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 인간 실존의 자각과 분석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해석하려는 실존주의 신학, 하느님의 계시에 신학을 정초하는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 마르크스적 시각에서 전통적 신학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는 해방신학,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 기초한 과정신학 등이 그리스도교 신학을 다양하고 풍부하게 만들었으나, 결코 그리스 철학의 지배적 영향 하에 형성된 전통적인 신학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비록 서구의 지배적인 영성 전통이 성서적 영성과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적인 그리스 철학의 영성, 특히 신플라톤주의 영성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형성되었다고는 하나, 만물을 일자로부터 유출된 것으로 간주하는 신플라톤주의의 일원론적(monistic) 실재관 내지 세계관이나 신을 부동의 제일 원인으로(causa prima, unmoved mover) 간주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신관은 신을 무에서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의 역사를 주도하며 특별한 방식으로 인간사에 개입하는 인격적 실재로 보는 성서적 신관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지는 못했다. 따라서 서구 신학과 영성을 지배해 온 주도적 패러다임은 성서적 신앙에 기초해서 신과 세계, 성과 속, 초자연과 자연, 계시와 이성, 은총과 자연, 종교와 문화, 그리고 교회와 국가라는 이분법적 구별 위에서 그 관계를 논하는 사고의 구도였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전통적인 구도가 현대 세계에 이르러 심각한 도전을 받아 흔들리거나 와해되게 되었다. 현대 서구 사상사는 간단히 말해, 성서적 계시와 초자연적 신관에 대한 믿음이 붕괴되고 세속화된 이성이 홀로 독자적 길을 걸어온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 이성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최근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은 이성 또한 보편성의 권위를 상실하게 된 현대적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 서구 그리스도교의 위기, 서구적 영성의 위기는 일차적으로 성서적 신관과 이에 기초한 영성의 위기로 규정될 수 있다.

성서적 영성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 기초하고 있다. 성서의 하느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는 창조주로서 인간의 생사화복과 역사를 주관하며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고 인류를 구원하며 역사의 종말에 심판과 구원을 베푸는 인격적 신으로 이해된다. 성서적-그리스도교의 신앙적 영성은 간단히 말해서 창조(creation)와 구속(救贖 redemption)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하는 영성이다. 창조와 구속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양대 주제로서, 그리스도교 영성은 이러한 신학적 테두리 내에서 형성되어 왔다.

창조의 영성은 우선 창조주와 피조물의 엄격한 질적 차이와 존재론적 간격에 의거하여 우상숭배, 즉 피조물의 절대화를 거부하는 영성이다. 자연이나 인간, 그리고 인간이 만든 그 어떤 제도나 권위도 초월적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대신할 수 없다. 창조 신앙의 영성은 이성에 대한 신뢰와 더불어 서구적 비판의식의 초석을 이루어 왔다. 초월적 하느님 앞에서 어떤 피조물도 신적 권위를 주장할 수 없으며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인간이 만든 모든 제도나 체제는 어떤 것도 절대화될 수 없으며 항시 신의 초월적인 도덕적 의지와 권위 앞에서 심판의 대상이 된다. 

창조의 영성은 동시에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어 존재를 부여받은 것임으로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긍정의 영성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하다. 물질과 정신, 몸과 마음, 이성과 감성, 남성과 여성 등의 이원적 대립을 넘어서 하느님이 존재를 허락한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좋은 것이다. 특히 하느님의 창조 행위로 이루어진 자연 세계에는 하느님의 선함과 지혜가 깃들어져 있으며, 세계의 존재와 질서는 이미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보편적 은총의 질서로 이해된다.

성서적 창조 영성은 피조 세계 가운데서 인간 존재의 특수한 위치를 인정한다. 인간은 여타 피조물과는 달리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으로 창조된 존재로서, 하느님의 초월성과 인격성, 자유와 주권에 동참하는 존재이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자신의 본래 모습을 실현하고자 하는 영적 존재로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원형이자 존재의 근원인 하느님을 닮고자 갈망한다.

“윤리적 유일신론”(ethical monotheism)으로 규정되는 성서의 신관은 인간에게 도덕적 헌신을 요구한다. 창조의 영성은 도덕적 영성이다. 창조주 하느님은 도덕적 의지를 지닌 인격신으로서, 인간은 그의 도덕적 명령 앞에 서 있는 존재이다. 신에 대한 믿음은 곧 세계와 인생의 도덕적 의미에 대한 긍정을 뜻하며, 그 실현을 위한 실천적 헌신을 요구한다. 창조의 영성에서는 따라서 하느님과 도덕성, 영성과 도덕적 실천은 불가분적이다.

성서적 영성은 또 창조 영성과 더불어서 구속의 영성이다. 창조의 세계는 그 근본적 선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파괴되고 왜곡되어 있음을 성서적 신앙은 말한다. 성서적 영성은 따라서 인간의 죄악성을 성찰하고 고백하며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받아들이는 영성이다. 특히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본래적 모습을 가장 완벽하게 실현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나타난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과 화해하고 일치를 이루는 영성이다. 성서적 구속의 영성은 이와 동시에 타락한 세상의 질서를 거부하며 죄악에 물든 자신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삶을 살려는 실천적 영성이다. 

주목할 점은, 하느님이 지은 세계의 선함을 긍정하는 창조의 영성과 타락한 세계와 인간의 현실을 직시하는 구속의 영성 사이에는 일정한 긴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이원적 대립이 아니며, 창조 영성나 구속의 영송 모두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에 근거한 영성이다.

이상과 같은 성서적-그리스도교적 영성은 현대에 와서 여러 면에서 커다란 시련에 봉착해 있다. 우선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은 인격적 의지로 세계를 창조하고 세계 밖에서 세계를 다스리고 때때로 기적적인 방법으로 인류 역사에 개입하여 인간을 구원하는 초자연적 존재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어렵게 만들었다. 뉴턴 유의 기계론적 세계관과 다윈 유의 진화론적 시각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계 밖에서부터 자연과 역사의 과정에 특별한 방식으로 개입하는 초자연적 신에 대한 믿음을 어렵게 만들었고, 세계의 배후에 어떤 인격적인 의도나 도덕적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수용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동양의 자연주의적 세계관과 영성에 대한 서구인들의 관심의 배후에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성서적 신관, 초자연적 신관에 대한 회의와 불신이 자리하고 있음을 간과하기 어렵다. 

하느님의 창조 행위는 전통적으로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로 이해되어 왔다. 신이 자유로운 의지적 결단의 행위를 통해 피조물들을 무로부터 유로 불러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생각의 배후에는 우선 창조신의 존재론적 배타성과 우선성을 보장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신만이 스스로 존재하며, 세계의 존재나 여타 사물들은 전적으로 신에 의지하여 존재를 확보하기 때문에 그 자체 내에 허무의 그림자를 안고 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어떻게 무로부터 유가 생길 수 있는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순수 무란 것이 어떻게 사고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등의 근본적인 물음들은 차치하고라도,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세계는 전적으로 신의 자의적 결단에 의해 창조된 그야말로 우연적 존재로 보이며, 신이 세계와 인간을 창조할 이유나 필연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성서의 창조설화는 세계 창조의 목적이나 동기 같은 것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신과 세계가 별개의 실재로 간주됨에 따라 세계 없는 신의 존재 가능성은 물론이고, 나아가서 신 없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무신론의 단초를 이미 배태하고 있는 것이다.

설령 신이 세계를 창조한 이유와 목적, 섭리 같은 것을 인정한다 해도 인격적 의지에 의한 세계 창조는 예로부터 악의 존재를 설명해야 하는 변신론 혹은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의 부담을 지게 되어 큰 어려움을 겪어 왔다. 자연계까지 포함하여 세상만사를 주관하며 인류 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관여하는 하느님과, 우리가 목도하는 세계와 역사의 엄청난 비극과 부조리 사이에는 어떠한 이론으로도 정당화하기 어려운 모순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밖으로부터 자연계와 인간계에 개입하고 다스린다고 믿는 성서의 초자연적 신관은 현대 세계에서 또 다른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신과 세계, 인간과 자연을 분리해서 보는 성서의 신관과 인간관은 자연세계의 탈성화(脫聖化 desacralization)를 초래함으로써 오늘날의 생태계의 파괴와 환경위기를 초래한 이념적 근거가 되었다는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자연 없는 신 혹은 신 없는 자연을 생각할 수 있도록 단초를 제공한 성서의 신관은 자연으로부터 신성을 박탈했을 뿐만 아니라, 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또한 자연과는 별도의 존재론적 위상을 지닌 초월적 존재로서 자연에 ‘속한’ 존재라기보다는 자연을 초월하고 다스리는 존재로 인식됨으로써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군림을 정당화했다는 비판이다.

동양사상적 관점에서 보면 무엇보다도 신을 인격적 존재로 보는 그리스도교(유대교, 이슬람도 마찬가지)의 인격신관 자체가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신의 인격성이 인간의 초월성과 존엄성을 담보해주는 측면이 있지만, 힌두교, 불교, 유교, 도교 등 동양철학적 관점에서는 신의 인격성은 궁극적으로는 무한한 실재를 유한한 인간에 빗대어 유비적으로 파악한 무지의 소산이며 신격의 비하를 뜻한다. 동양 종교에서도 만물의 궁극적 실재를 인격화해서 섬기는 현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령 도교에서는 도, 유교에서는 천을 인격화하며, 불교에서는 상을 초월하는 부처를 형상화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대중의 종교적 요구에 응하는 저급한 형태의 신관으로 간주된다. 예를 들어, 힌두교의 가장 정통적 사상을 대표하는 불이론적(不二論的) 베단타(Advaita Vedānta) 철학에서는 풍부한 인격적 속성을 지닌 브라흐만(saguna-brahman)과 일체의 속성을 여읜 브라흐만(nirguna-brahman)을 구별한다. 전자는 인간의 각종 필요와 욕구에 따라 다양한 형상과 이름으로 나타나는 신, 풍부한 신화를 통해 전수되며 신상을 통해 형상화되어 신전에 모셔지는 신들을 가리키는 반면, 후자는 일체의 속성이나 형상, 이름이나 이야기를 초월한 신, 오직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파악되는 순수 정신(cit,), 순수 존재(sat), 순수 희열(ānanda)로서의 신, 말하자면 신 아닌 신 혹은 신위의 신(God above God)을 가리킨다. 힌두교가 이렇게 현상적 신과 본체적 신, 혹은 드러난 신과 감추어진 신성을 구별하는 이유는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을 파악하고 인식할 수 있는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일찍부터 자각했고 잡다한 신의 모습들이란 불가피하게 인간의 자기 모습이나 욕구의 투영일 수밖에 없음을 깊이 인식했기 때문이다. 

신의 인격성은 동시에 신과 인간의 거리를 함축한다. 인격성은 필연적으로 타자성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격적 신관에서는 신이 인간에게 상벌을 내리고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타자적 성격을 끝까지 보유한다. 신의 사랑과 은총을 말한다 해도 신과 인간 영혼의 연합(communion, union)을 말할지언정 완벽한 일치(unity)나 하나 됨, 혹은 신과 인간의 구별을 넘어서는 그 근저에서의 동일성(identity)을 말하지는 않는다. 가령 “내가 곧 브라흐만”이라는 힌두교의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영성이나 “나의 마음이 곧 부처다”라는 선불교의 심즉불(心卽佛)과 같은 영성은 유일신 종교에서는 불가능하다. 인간이 신과 제아무리 가깝다 해도 인간은 결코 신이 아니며, 신과 인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존재론적 차이와 도덕적 긴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양자의 완벽한 일치를 말하는 동양적 영성의 관점에서 볼 때 인격적 신에 대한 신앙에 바탕을 둔 영성이 불완전하고 불안하게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하튼 세계의 궁극적 실재인 신의 인격성 문제는 동서양의 신학과 영성을 가르는 가장 핵심적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이상과 같은 문제들 외에도 보다 대중적 차원에서 인격신관이 지닌 문제점들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캐렌 암스트롱은 인격신관의 폐단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인격적 신 이해에는 한 가지 커다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인격적 신이 인간의 필요조건, 두려움과 소망 같은 감정을 반영하는 인간의 생각의 투영에 불과한 하나의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때때로 인간은 자기가 느끼고 행하는 것처럼 신도 느끼고 행하며 신이 인간의 편견과 아집을 부정하기보다는 용인하는 것으로 추정하곤 한다. 그리고 신이 재앙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조장하는 것처럼 보일 때 인간은 신을 냉혹하고 잔인한 존재로 이해하며, 심지어는 재앙이 신의 뜻이라고까지 믿음으로써 근본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마저 인정하기도 했다. 인격적 신 개념은 또한 신을 남성적 측면에서만 이해함으로써 여성을 억압하는 부적절한 성 관습을 정당화했다. 이처럼 인격적 신은 인간이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허하게 초월적 세계를 지향하도록 하기보다는 냉혹하고 잔인하며 편협한 인간적 과오를 정당화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내세우는 사랑의 가르침과는 정 반대로 인격적 신은 인간이 타자를 판단하고 정죄하며 소외시키는 구실이 되기도 한다. 그럼으로 인격적 신 개념은 종교의 본질을 표현하지 못하며 단지 종교 발전의 한 단계를 나타낼 뿐이다. 세계의 모든 종교는 이러한 인격적 신 개념이 가지고 있는 위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의 사고 범주를 넘어선 초월적 신 개념을 추구해 온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인간이 신을 닮은 것이 아니라 신이 너무나도 인간을 닮는 유치하고 저급한 신관을 조장하는 위험성을 인격신관이 지니고 있다는 비판이다.

이상과 같은 성서적 인격신관과 영성이 안고 있는 문제점은 서구 사상사에서 신플라톤주의의 일원론적 형이상학과 영성에 의해 어느 정도 수정되고 보완되어 왔다. 신플라톤주의는 세계와 신을 엄격하게 구별하여 별개의 실재로 간주하는 초자연적 신관에 근거한 영성보다는 세계의 원천이자 세계의 깊이에서 발견되는 신, 나 자신의 존재의 밑바탕에서 만나는 신, 다시 말해 밖으로의 초월이 아니라 안으로의 초월 내지 내재적 초월을 추구하는 영성을 제공함으로써 초자연적 인격신관에 바탕을 둔 성서적 영성에 대안을 제공해왔다. 베단타 사상 연구가 토르베스텐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서구 그리스도교 신학이 베단타와 같은 동양의 종교체계들과 논란을 벌일 때 오늘날 제기하는 비판의 대종은 서구에서 플로티누스(Plotinus), 존 스코투스 에리게나(John Scotus Erigena), 엑카르트(Eckhart), 혹은 심지어 스피노자에 대한 논란에서 사용되었던 많은 점들을 항시 되풀이하곤 한다. 인격적 신 (이미 절대적 존재인)의 옹호, 인간 개개인(신이 창조한)의 독특성, 원죄의 심감성과 “위로부터 오는” 구원의 필요성이 항시 거론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베단타 측은 종종 플로티누스나 스피노자를 인용하여 반론을 제시할 수 있다. 즉, 교회의 공식적 교리와 더불어 서구에서조차 끈질기게 생존해왔으며 시간과 공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영원한 철학’(philosophia perennis)의 언어에 의거한 반론이다. 거의 정의 불가능한 플로티누스의 일자(One), 베단타의 무속성적 브라흐만(Nirguna Brahman), 대승불교의 공(空), 초인격적인 도(道), 엑카르트의 “신성의 근원”과 같은 개념들로서, 마치 성서의 창조주 하느님이 부정적 언사들, 아무런 의지(will)도 지니지 않고 단지 “존재”하기만 하는, 더 정확히 말해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그것”(It)의 연합전선에 의해 포위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들 사상이 “창조” 개념을 수용한다면 창조는 단지 일자로부터의 유출이며, 절대로부터의 분리처럼 보이지만 결코 독특한 의지적 행위는 아니다.... 베단타에 의하면,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은 신이 그것을 무로부터 창조했기 때문이 아니라 (창조하지 않아도 그만일 수 있음에도) 무한자가 그 자체의 환술(maya)에 의해 유한하게 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초월성은 상실되지 않고 말이다. 동서양 사상의 대화에서 이와 같은 중대한 차이를 간과하는 사람은 곧 서로를 지나쳐 버리게 된다. 왜냐하면 존재를 설명하는 두 가지 근본적인 방식이 여기서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방식은 또 다시 다른 모든 신학적 철학적 관념들, 특히 구원과 해탈에 관한 관념들에 영향을 준다. 

서양 그리스도교에서 신플라톤주의적 영성의 대표적 사상가는 중세 도미니꼬 수도회의 신학자이자 영성가인 마이스터 엑카르트(Meister Eckhart. 1328 사망)였다. 그는 신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토마스 사상의 영향 아래,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신관으로 대표되는 인격신(Gott)과 삼위의 속성과 관계성을 초월하는 신성(Gottheit) 그 자체를 구별했다. 신성은 힌두교의 브라흐만이나 도가의 도(道)와 마찬가지로 거기로부터 만물이 흘러나오고(exitus) 거기로 되돌아가는(reditus) 세계의 궁극적 원천이고 귀착지다. 엑카르트 영성의 특징은 전통적인 삼위일체의 영성을 넘어서 사물의 잡다한 관념과 상(像)뿐 아니라 신에 관한 일체의 상과 개념을 거부하는 철저한 초탈(Abgeschiedenheit)의 수행에 있다. 그리고 이 초탈의 영성은 “신성의 감추어진 어두움” 속으로 찾아들어가는 돌파(Durchbruch)의 영성으로까지 극단화된다. 이 돌파를 통해서 우리는 일체의 상을 여읜 "비고 자유로운" 영혼의 근저(Grund)에서 신성과 완전히 하나가 된다. 

엑카르트의 신비주의 영성은 인격신관의 한계를 자각하고 극복한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신과 인간의 완전한 일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신인합일 내지 천인합일을 말하는 동양의 일원론적 영성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오늘날 서구에서 엑카르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그에게서 전통적인 성서적-신학적 신관과 영성의 극복은 물론이고 동양 사상과의 만남과 그리스도교 영성의 탈출구를 모색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대체로 보아 현재도 서구 영성 운동을 대표하고 있는 것은 복음주의나 근본주의 신앙, 혹은 각종 해방적 실천(민중, 유색인종, 여성, 자연 등) 내지 도덕적 헌신(개인적 혹은 사회적)을 통해 인격신과 만나는 성서적 신앙이 아니라 묵상과 관조를 통해 자기 영혼의 깊이에서 신성을 발견하는 신비주의적, 관조적 영성 운동들이며, 이는 크게 보아 동양적 영성과 궤를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II. 동서양 영성의 전통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신플라톤주의 영성이 일원론적 존재론을 바탕으로 해서 초자연과 자연, 창조주와 피조세계의 거리에 바탕을 둔 성서적 영성의 문제점들을 극복하고 그것을 한 차원 고양시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서양의 형이상학적 영성 일반이 지니는 문제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리스도교 신학에 수용된 그리스 형이상학적 영성은 신플라톤주의까지 포함하여 과감하게 일원론적 관점에서 수용되지 못하고 여전히 하느님과 세계를 이원적 대립으로 보는 성서적 신앙의 틀 내에서 수용됐다.

성서적 창조 영성이 신과 세계, 초자연과 자연의 대립적 구도에 서 있다면, 전통적인 서구 형이상학적 영성은 주로 일(一)과 다(多), 영원과 시간, 불변하는 실체와 변화하는 사물, 본체와 현상, 정신과 물질 혹은 영혼과 육체, 이성과 감성,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이원적 대립에 서 있다. 이로 인해 형이상학적 영성은 물질세계와 인간의 몸을 폄하하고 세상을 도피하는 영성이라는 비판, 나아가서 자연과 성(sexuality)과 여성에 대하여 적대적인 영성을 조장해 왔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러한 비판은 특히 현대 생태여성주의(ecofeminism)에서 날카롭게 제기되고 있다. 이 점에서 보면, 인간의 몸을 포함하여 물질세계 전체를 하느님의 선한 창조로 긍정하는 성서적 영성이 오히려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 현대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창조 영성, 몸의 영성이 새롭게 관심의 대상으로 부각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하튼 현대가 요구하는 초월의 영성은 자연이나 일상의 세계를 부정하고 떠나려는 영성보다는 바로 그 속에서 신성을 경험하는 내재적 초월의 영성이다. 현대적 영성은 변화하는 세계 밖에서 세계를 움직이고 조정하는 초자연적 신보다는 세계 안에 내재하며 세계와 함께 움직이는 역동적인 신, 변화 저편에 있는 부동의 실재보다는 사물과 함께 움직이면서 사물의 변화에 방향과 의미를 부여하는 신을 지향한다. 유한에 대립하는 무한이 아니라 유한한 사물들을 감싸고 품는 무한, 상대와 상대적인 절대가 아니라 상대와 절대의 구별마저 초월하는 절대 아닌 절대, 인간 위에 군림하는 절대 군주나 인간을 종으로 비하하는 주인과 같은 신이 아니라 인간의 참 자아로 내재하는 신을 갈망한다. 현대세계가 요구하는 영성은 영원과 시간, 초월과 내재, 초자연과 자연의 대립적 구도를 넘어서는 내재적 초월의 영성이다. 인간과 자연, 주관과 객관, 정신과 물질, 영혼과 육체, 이성과 감성, 남성과 여성을 위계적으로 대립시키기지 않고 상보적 관계로 조화시키는 통전적인 영성이다.

21세기 인류의 최대 화두는 환경/생태계 위기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이제 별로 없다. 137억년에 걸친 우주의 생성 과정에서 기적과도 같이 태어나 생명을 품을 수 있는 푸른 별 지구가 인간의 끝없는 탐욕으로 인해 죽음의 땅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인간과 뭇 생명체들이 생존을 위해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생명의 원천(source)으로서 자연을 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목적을 위한 자원(resource)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원시 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모든 생존의 절대 조건인 자연을 성스러운 힘이나 질서로 간주해왔다. 인간은 동시에 의식을 지닌 존재로서, 자신을 자연과 분리된 주체로 의식하면서 자신과 맞서 있는 대상(Gegenstand)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근대의 과학기술과 산업 문명의 발달하기 전까지는 이 두 가지 태도가 대체로 균형을 유지하면서 인간의 삶이 이루어졌다. 자연을 이용하고 다스리는 것도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가운데 일정한 한계와 절제 속에서 이루어졌다. 인간이 자연과 투쟁을 한다거나 그 위에 군림한다는 오만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근대 과학기술과 산업문명은 이러한 균형을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하기 시작했다. 근대인은 이제 더 이상 자연에 ‘속한’ 존재가 아니다. 마르틴 부버의 표현으로, 이제 인간은 자연을 ‘그대’(Thou)가 아니라 ‘그것’(It)으로 대하게 된 것이다.
자연을 대상화함으로써 자연에서 소외된 인간은 이제 자연을 순전히 기계적 인과율이 지배하는 물질세계로 인식한다. 심지어 사물의 색깔이나 맛이나 냄새 같은 자연계의 다채로운 속성들을 ‘이차적 성질들’(secondary qualities)이라 부르면서 실재하지도 않는 것으로 간주하고 자연을 순전히 질량 덩어리들의 체계로 파악한다. 이렇게 추상화되고 질량화된 자연이 인간적 가치나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물체로 전락하면서 인간의 과학적 탐구와 정복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탈 인간화된 자연은 오직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착취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근대 세계는 철저히 인간중심적 세계다. 자연은 인간에게 아무런 영적 의미나 도덕적 메시지를 전하지 못하는 죽은 침묵의 물체로 변해버린 것이다.

근대를 넘어 탈근대 시대로 접어든 오늘의 문명은 이제 이러한 자연관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성스러움이 사라지고 영적 의미가 박탈된 자연에서 다시금 성스러움을 느끼고 영적 의미를 복원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에 이른 것이다. 현대 영성은 따라서 무엇보다도 자연친화적, 자연정향적 영성이어야 한다. 신과 자연을 별개로 볼 것이 아니라 만물 속에서 신을 발견하고 신 안에서 만물을 보는 영성이어야 하며, 자연과 더불어 영적 교감을 나누는 영성이어야 한다.

현대의 자연친화적 영성은 ‘인간적 자연’(인간적 의미를 지닌 자연)과 ‘자연적 인간’(자연에 속한 인간)을 요구한다. 신과 함께 인간 역시 자연에 내재적인 존재임을 겸허하게 수용해야만 한다. 인간만 하느님의 모상이 아니라 자연도 하느님의 모상임을 깨닫는 영성, 인간에서만 하느님의 얼굴을 보는 영성이 아니라 자연계의 하찮은 미물에서도 존재의 신비와 하느님의 얼굴을 보는 영성을 현대 세계는 요구하고 있다. 신성한 인간의 인권뿐 아니라 신성한 자연의 권리도 존중하고 경외하는 영성이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을 의식의 주체로 파악하면서 인간의 초월성을 터무니없이 과장해 온 근대 서구의 인간관은 근본적으로 수정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의식(Bewusstsein)이기 전에 존재(Sein)이며, 정신이기 전에 물질, 영혼이기 전에 몸이다. 이 둘은 구별은 되지만 결코 대립적일 수 없다는 통전적이고 전일적인 인간관이 필요하다. 만물을 벗으로 혹은 형제로 여기면서 자연의 창조적 순환과정 속에서 만물과 함께 나고 살고 죽는 인간의 유한성을 겸허하게 수용하는 영성, 인간뿐 아니라 뭇 생명들에게까지 도덕적 책임을 느끼는 성숙한 영성이 현대인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자세한 논의는 피하겠지만, 나는 위와 같은 현대적 영성이 동양적 사유 가운데서도 서구 형이상학적 전통 이상으로 물질세계와 육체를 폄하하는 경향이 강한 인도 사상과 영성보다는, 중국적/동아시아적 자연주의(도가나 유가 사상)나 생사와 열반을 하나로 보는 대승불교 사상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성은 초월적 실재를 인정하는 형이상학이나 현상계의 깊은 차원을 논하는 존재론의 배경 없이는 공허한 것이 된다. 문제는 현대 문명이 일반적으로 이러한 초월적 사고나 심층적 사고 자체를 거부하거나 회피한다는 데 있다. 현대 영성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이에 기인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단지 물질로 설명하는 물리적 환원주의, 입증이 가능하지 않는 한 사물에 대한 어떠한 심오한 통찰이라도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는 실증주의적 사고가 성서적 신관은 물론이고 존재의 깊은 차원에 대한 그 어떤 탐구나 믿음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특별한 관심을 끄는 것은 불교 사상과 영성이다. 불교는 세계 종교들 가운데서 거의 유일하게 형이상학적 실재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다. 불교는 창조주 하느님은 물론이고, 만물을 통일하는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실재를 말하는 모든 종류의 일원론적 형이상학을 거부한다. 불교는 또 물질과 정신,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도 배척한다. 불교적 영성은 만물을 연기적 관점, 상호의존적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존재론에 기초하고 있다. 불교의 존재론이 과연 세계와 사물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는지, 혹은 존재의 근원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깊은 형이상학적 갈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로 하고, 위와 같은 사실이 탈 형이상학 시대를 살면서도 물질주의나 세속주의에 만족하지 못하는 현대 서구인들 사이에 불교가 특별한 관심을 끄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불교는 물론 유물론도 아니고 실증과학도 아니다. 고정 불변하는 형이상학적 실체를 부정하지만 불교는 사물들의 관계나 법칙, 그리고 사물의 일반적 성격에 대한 깊은 존재론적 통찰을 갖고 있으며(緣起, 空, 唯識), 이에 기초한 철학적 영성을 지니고 있다. 불교가 상식이나 과학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실재의 깊은 차원과 성격에 대한 독특한 인식에 기반하고 있는 한, 존재하는 모든 것을 물질로 파악하려는 물리적 환원주의나 실증주의적 사고와는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 한다. 열반이라는 절대적 실재를 추구하는 상좌(소승)불교는 물론이고,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마음에 돌리는 대승불교의 유심론이나 여래장/불성 사상 또한 형이상학적 절대에 대한 관심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기 어렵다. 여하튼, 우리 마음 안에서 부처를 구하고 마음이 곧 부처임을 말하는 선불교의 영성은 유한과 무한, 상대와 절대의 일치를 추구하는 동서양의 일원론적인 형이상학적 영성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이상에서 나는 서구 영성 전통의 특징과 아울러 그 한계와 문제점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또 성서적 영성이든 형이상학적 영성이든 서구의 전통적 영성이 어떠한 방향으로 수정되어야 할지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언급했다. 그리고 현대의 새로운 영성의 모색을 위해서 동양 사상, 특히 중국적 자연주의와 대승불교 사상이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가 동양적 영성의 무비판적 수용을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신과 세계, 창조주와 피조물, 초자연과 자연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양자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를 인정하는 ‘이원론적’(동양적 시각에서 볼 때) 사고는 문제점 못지않게 장점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장점이 동양 사상과 일원론적 영성 일반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절대와 상대의 존재론적 차이는 우선 상대 세계의 손쉬운 절대화를 방지한다. 세계 안의 그 어떤 사물이나 제도, 어떤 권위나 권력도 절대자 앞에서는 성스러움을 상실하고 상대화되고 세속화되기 때문이다.

성서의 유일신 신앙이 지닌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유한한 것을 절대화하고 숭배하는 우상숭배에 대한 강한 예언자적 비판정신이다. 유일신 신앙을 바탕으로 한 예언자적 종교에서는 절대와 상대 사이의 거리와 긴장이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인간은 결코 충족시킬 수 없는 절대자의 초월적 의지 앞에서 끊임없이 자기 성찰과 비판을 해야 하며 그래야만 절대자와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우리는 동양의 일원론적 형이상학과 영성이 절대와 상대 사이의 존재론적 연속성과 불가분성을 강조한 나머지 자칫 상대적인 것의 절대화로 넘어갈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동양 종교에서 흔히 보이는 구루 숭배나 스승의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 혹은 정치권력이나 사회제도에 대한 무비판적인 순응 같은 것이 흔히 서구인들이 동양 종교들에 대해 품고 있는 문제의식이다. ‘윤리적 유일신 신앙’(ethical monotheism)에 기초한 성서의 예언자적 정신과 비판적 역사의식은 현대 세계에서도 결코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인류의 소중한 유산이며, 동양 사상과 영성도 진지하게 대하여야 할 정신이다. 

동양 사상과 영성의 취약점으로 지적되는 또 하나의 문제도 이에 직결된다. 이른바 윤리적 비판의식의 결핍이다. 절대자를 윤리적 의지를 지닌 인격적 주체로 파악하는 유일신 신앙과 달리, 동양의 탈 인격적 실재관은 궁극적 실재 자체에 도덕성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도덕의 궁극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도가의 도나 불교의 열반 혹은 불성은 선악의 구별과 대립을 초월하는 탈 도덕적 혹은 초 도덕적 실재다. 물론 우리가 이 탈 도덕적 실재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이기적 욕망을 제어하거나 포기하는 고도의 도덕적 훈련이 필요하다. 선악의 구별을 무시하지 않는 도덕성과 자기를 비우는 무위와 무욕의 삶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도나 열반 자체가 인격신처럼 도덕성을 띤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동양종교에는 윤리적 노력이나 긴장 없이 절대와 하나가 되려는 위험이 항시 도사리고 있다. 영성의 도덕적 차원이 때로는 도덕이 지닌 허구성과 억압성을 깨닫게 하고 도덕을 가장한 아집과 독선에서 오는 대립과 갈등을 초월하는 장점이 있다 해도, 영성과 도덕성을 분리할 수 없는 유일신 신앙의 입장 또한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유교의 도덕적 형이상학은 우리의 특별한 관심을 끈다. 유교의 천(天)은 분명히 도덕적 성격과 의미를 지닌다. 전통적으로 동양 사회와 도덕은 천에 기초한 성스러운 질서로 간주되어 왔다. 천도(天道, 天理)가 인도이며 인심이 천심이고 인륜이 천륜이다. 유교 윤리가 천도와 사회질서를 너무 직접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불합리한 사회질서나 구시대의 윤리를 절대화할 우려가 없지 않지만, 유교적 천인합일의 영성은 도덕적 수양과 실천을 떠나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超 도덕적 영성이 도덕적 무감각과 무책임성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면, 영성의 탈 이데올로기 주장 또한 경계해야 할 문제다. 영성은 흔히 정치나 사회 문제에 초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월적 실재와의 직접적 만남과 일치를 추구하는 영성 자체는 물론 특정 정치이념이나 사회사상과 유기적 관계를 갖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영성의 탈 역사성과 탈 이념성을 자동적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현대 역사의식은 인간의 어떠한 활동도 역사적 제약성을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해준다. 영성 운동도 언제나 특정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념적 함축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종교와 교리, 신학과 형이상학, 세계관과 인생관 등이 영성에 영향을 주는 문화적 맥락이듯이, 정치 이념이나 체제, 사회 계급이나 신분, 그리고 성별도 영성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현대 영성운동은 이런 면에서 영성의 이데올로기성 문제에 민감해야만 한다. 어떤 영성 운동도 이데올로기적 비판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성의 무비판적인 탈 이데올로기적 주장은 영성 운동으로 하여금 기존의 사회 이념이나 특정 정치 체제에 쉽게 영합하도록 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영성 운동이 이념적 자기 성찰과 반성을 게을리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성 운동도 특정한 사회와 역사적 상황을 떠날 수 없는 한, 자기도 모르게 인간을 억압하는 기재로 작용할 수 있다. 물질과 정신, 육체와 영혼, 자연과 초자연 등의 이원적 혹은 위계적 대립에 바탕을 둔 서양의 형이상학적 영성이 여성과 자연에 대한 억압적 기재로 작용해 왔다는 생태여성학적 비판은 그 좋은 예다. 어쨌든 영성 운동은 초월성과 순수성을 위해서라도 철저한 이념적 자기 성찰을 게을리 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일원론적 형이상학에 근거한 동양적 영성의 내재적 초월 정신과 그리스도교의 성서적 영성이 지니고 있는 예언자적 정신의 창조적 만남, 그리고 영성 운동의 철저한 도덕적, 이데올로기적 자기 성찰은 현대 세계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영성의 방향이자 시금석이다. 





III. 한국 종교계의 영성적 과제

이상과 같은 동서양 영성에 대한 이해와 평가가 타당하다면, 과연 이것이 현대 한국 종교계에 던지는 문제와 과제는 무엇일까? 한국종교들은 현대인이 추구할만한 영성을 위해 과연 무슨 공헌을 할 수 있을지 우선 묻게 된다. 영성이 종교의 진수이며 존재이유인 한 이 물음은 모든 종교가 항시 물어야 하지만, 세계 종교의 집산지와도 같이 다양한 종교전통이 공존하는 현대 한국사회의 현실, 전통 사상과 서구의 각종 근현대적 사조들이 혼재하면서 사상의 다양성과 더불어 혼란과 갈등을 빚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볼 때 매우 절실한 물음이다.

한국은 종교적으로 불교와 그리스도교라는 양대 종교가 막상막하의 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는 사회이며, 비록 제도화된 조직의 힘은 없지만 유교적 윤리와 덕목, 관습과 심성이 종교들의 차이를 넘어 모든 한국인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사회다. 또 그 기층에는 무속적 종교성이 짙게 깔려 있기도 하다. 이들 종교전통들이 오늘 우리 사회에서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그리고 각 종교들이 한국인의 영성생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는 상세한 논의를 요하지만, 나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오늘의 한국 종교계가 단적으로 “종교냐 영성이냐?”의 양자택일을 요구 받고 있는 매우 중대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종교계가 현대 세계가 요구하는 영성은커녕 동서양의 중세적 영성조차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성은 종교의 토양에서 자양분을 섭취하며 자라는 종교의 존재이유이자 목적이다. 그럼에도 오늘의 우리나라 종교계를 볼 때, 본말이 전도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영성을 고취하기는커녕 한국 종교계는 종교나 종파를 막론하고 초자연적 힘을 이용해서 인간의 세속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기복신앙을 부추기면서 번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성보다는 기복신앙에 호소하여 세속적 영달과 세력 확장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한국 종교계 전체에 해당하는 말은 아니지만, 온갖 종류의 기복신앙이 한국 종교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기복신앙과 영성은 양립할 수 없다는 점에서 나는 한국종교계가 일반적으로 반 영성적이라고 단언한다. 

혹자는 기복신앙의 불가피성을 논하면서 그 정당성을 옹호하거나 묵인하려 하지만, 나는 한국 종교의 최대 과제가 기복신앙의 극복에 있다고 믿으며 한국 종교계는 이제 기복신앙과 영성 사이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할 시점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다시 말하면, 기복신앙을 넘어서는 영성을 키우지 못하는 종교는 더 이상 존재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을 구하는 마음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종교가 추구하는 복이 어떤 종류의 복이냐는 것이다. 기복신앙이 구하는 복은 전적으로 물질적이다. 그러나 종교가 본래적으로 추구해야할 복은 어디까지나 영적인 축복이다. 내가 아는 한, 세계 종교들은 현세든 내세든 영적 축복을 약속하지 물질적 축복을 약속하지 않는다. 이것은 결코 몸과 마음, 물질과 정신의 이원적 대립을 전제로 하는 말이 아니며, 더욱이 물질이 정신보다, 영혼이 육체보다 더 귀하고 고차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말도 아니다. 사실 ‘영적’(spiritual)이라는 말은 단순히 ‘정신적’이라는 개념을 넘어선다. 영성의 ‘영’(spirit)은 몸과 마음, 육체와 정신의 대립을 초월하는 보다 근원적인 실재를 가리킨다. 인간의 영은 근본적으로 초월적 실재 자체, 우주만물의 궁극적 실재 자체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 둘은 완벽히 일치한다고 가르치는 종교도 있다 - 초월성을 지닌다. 인간이 영적 존재라는 말은 인간 안에 초월적 실재를 지향하며 그것을 향해 열려 있는 힘이 내재한다는 말이다. 이 힘은 영혼과 육체, 물질과 정신 모두를 변화시키는 힘이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생명의 원천에 뿌리를 둔 것이기 때문에 인간 존재 전체를 변화하는 힘이며, 나아가서 사회와 역사까지도 변혁할 수 있는 힘이다. 하느님, 브라흐만(Brahman), 천, 도, 불성, 태극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우주 만물의 궁극적 실재에 근거를 가지고 있는 인간의 영은 물질과 정신, 몸과 마음의 구별을 넘는 포괄적 실재로서, 진정한 영성은 바로 이러한 실재를 자각하고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 축복은 결코 물질적 축복을 배제하거나 거기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영적 축복은 물질적 축복을 수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진정한 영성은 물질에 대한 자유를 낳는다는 사실이다. 영성은 물질을 누리기도 하고 부리기도 하며, 이웃과 더불어 나누기도 하며 아낌없이 버리기도 한다. 영성은 때로는 물질적 욕망과 치열하게 투쟁하는가 하면 물질에 초연하기도 하며 자발적으로 포기하기도 한다. 기복신앙의 문제는 물질을 중시한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며 거기에 종속된다는 데 있다. 초월의 자유를 외면하고 물질에 속박되어 영적 자유와 축복을 단지 물질적인 것으로 왜곡하고 비하하는 데 있다. 한국 종교계는 이제 이러한 저급한 기복신앙을 극복하고 질적 도약을 이루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높아진 한국인의 의식 수준에 의해 머지않아 외면당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종교 본연의 사명을 되찾는 것 이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

종교가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확대재생산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때, 종교는 이미 그 존재 이유를 상실 한 것이나 다름없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하느님을 세속적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는 신앙행태를 가리켜 신을 소나 양초처럼 여기는 행위라고 꼬집었다. 일단 우유를 얻고 나면 더 이상 소에 관심이 없고, 물건을 찾고 나면 더 이상 양초가 필요 없듯이, 신을 통해 신 이외의 어떤 것을 얻고 나면 신은 곧 잊어버리는 신앙 아닌 신앙을 풍자하는 말이다. 진정한 영성은 하느님 자신을 원하지 하느님 대신, 혹은 하느님과 더불어, 다른 어떤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축복이 아니라면 신은 도대체 무엇 하러 믿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아무 ‘소용’없는 신이야 말로 참 신이고 참다운 영성이 구하는 바라고 그는 대답한다. 세속의 가치 기준에서 보면 신은 실로 아무런 쓸모없는 존재가 아닌가?

진정한 영성은 결코 몸과 물질의 세계나 사회와 역사를 무시하지 않고 현실로부터 도피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 모든 것을 초월적 시각에서 봄으로써 현실을 더 깊고 넓게 이해하는 지혜를 준다. 영성은 세상을 긍정하되 철저한 자기부정과 세계부정의 토대 위에서 긍정한다.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색즉시공(色卽是空)을 수반한 공즉시색(空卽是色)의 긍정, 즉 공으로서의 색의 긍정이다. 그리스도교적으로 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정신과 물질, 몸과 마음의 이원적 구별을 넘어서는 전인적 구원의 세계지만, 이 세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세속적/세간적 가치의 과감한 부정 없이는, 그리고 거기에 매몰된 나 자신의 삶의 과감한 청산(회개, metanoia) 없이는 실현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만나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지 않고는 접할 수 없는 세계다. 불교든 그리스도교든 참다운 생명은 사즉생(死卽生)의 생명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종교계에는 이러한 부정의 정신이 너무나 결여되어 있다. 일차원적인 세계 긍정만이 지배하며 조잡하고 저급한 신앙이 판을 치고 있다. 세속적 욕망을 부추기고 확대재생산 하는 기복신앙에 압도당해서 순수한 영성은 발을 붙일 곳이 없다. 그야말로 장사가 안 된다. 종교가 세상 혹은 세속과 아무런 긴장이나 갈등도 느끼지 않는다면, 그런 종교는 종교가 아니며 더 이상 존재할 이유도 없다. 개인이든 사회든 그런 종교가 지배한다면, 삶에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 종교계의 현실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종교는 현실을 외면하고 세계 도피라는 비판을 받을지언정 먼저 세속/세상과의 철저한 단절이 필수적이다. 섣불리 진속불이(眞俗不二)를 들먹이거나 현실참여의 명분을 내세우기에 앞서 세상/세속에 대한 철저한 부정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 종교계에는 근대적 세계긍정 이전에 중세적 세계부정의 영성이 먼저 더 절실하게 요구된다. 강한 자기부정과 세간/세속에 대한 비판의식과 초월의식의 결핍이 한국 종교계의 영적 주소를 현대적 영성은 고사하고 중세 이전으로 퇴행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세속/세간 자체, 물질 자체를 형이상학적으로 부정하거나 폄하하는 중세적 초월의 영성에도 한참 못 미치고 현세의 가치에 아무 고민 없이 함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대다수 신앙인들은 이것을 신앙이라고 굳게 믿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현대인은 더 이상 종교에서 물질적 축복을 구하지 않는다. 임신을 못하거나 몸이 아프면 병원을 찾지 절을 찾을 필요가 없으며, 좋은 대학에 가고 싶으면 입시학원을 찾지 교회를 찾을 필요가 없다.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는 현대인은 오히려 종교에서 순수한 종교 본연의 사명을 찾고 있다. 인류 역사를 통해 극소수의 종교 엘리트층만 누렸던 영적 특권이 현대 세계에서는 대중의 영성으로 보편화되고 있다. 과거에는 수도승이나 출가자들의 전유물이었던 각종 명상이 오늘날 대중화되고 있는 것은 그 뚜렷한 징표 가운데 하나다.

현대 세계는 종교와 세속주의를 넘어서는 제3의 길, 나아가서 종교 간의 장벽마저 초월하는 초종교적 영성의 시대를 맞고 있다. 성서적 영성과 동서양의 형이상학적 영성을 계승하되 그 한계와 문제점을 극복한 보다 넓고 깊은 통합적 영성을 현대 세계는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 앞에서 다른 어느 나라 못지않게 풍부한 종교적 전통과 영적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우리 종교계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성찰할 때가 되었다.

7,80년대를 통해 한국 종교계는 경제계와 마찬가지로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양적 성장을 이룩했다. 급속한 경제성장과 더불어 종교도 ‘호황’을 구가했다. 숙명과도 같았던 가난의 멍에를 벗고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라는 두 마리 토끼를 성공적으로 잡아 선진국 반열에 오르게 된 오늘, 한국 종교계는 종교 본연의 모습을 찾아 질적 도약을 이루던지 아니면 사회의 조롱거리가 되어 퇴출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고 있다.

종교에서 질적 도약이란 곧 영성의 회복과 심화를 뜻한다. 어려웠던 시절에 비해 물적 조건과 제약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게 된 오늘의 한국 종교계는 물질과 물량의 예속을 벗어나서 종교 본연의 메시지를 전하고, 옛날에는 소수에만 국한 되었던 영적 혁명을 대중의 몫으로 만들 수 있는 공전의 기회를 맞고 있다. 조잡한 기복신앙을 과감히 청산하고 대중을 한 차원 고양된 영성의 세계로 인도할 사명을 한국 종교계는 안고 있다. 이를 위해서 한국 종교계는 중세적 세계부정의 영성 - 세계 부정과 금욕의 영성 - 과 현대적 세계긍정의 영성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부정 없는 긍정은 천박한 긍정이 되고 긍정 없는 부정은 또 다른 억압을 낳기 때문이다. 중세적 영성의 가치를 현대적 안목에서 살리되 그 억압성을 극복하고 인간의 육체적 욕망과 미적 감각, 그리고 이성과 감성을 조화시키고 승화시키고 심화하는 새로운 통합적 영성이 요구된다. 세간과 출세간이 모순이 되지 않고 수도원과 시장이 서로 장애가 되지 않는 영성, 인간의 자유와 창조성을 억압하지 않고 한껏 풀어주고 고양하는 현대적 영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참다운 영성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절대와 무한과의 만남은 인간을 한 없이 고양시키며 엄청남 해방감을 안겨준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 자체를 탐닉하거나 거기에 얽매이는 영성은 참다운 영성이 아니다. 영성의 목적은 인간이 무한과의 만남을 통해 좁은 자기중심적 삶과 세상적 가치로부터 해방되어 이웃과 세상을 향해 열린 존재로 살도록 하는 데 있다. 종교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듯, 영성 또한 아무리 순수하고 숭고하다 해도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영성의 마지막 유혹은 그 자체의 탐닉이다. 영성이 주는 자유는 세상과 이웃을 향한 새로운 헌신을 위한 것이지 자유를 위한 자유가 아니다. 출세간은 세간으로의 회귀를 위함이고 자유는 진정한 사랑을 위함이다. 성속일체(聖俗一體), 진속불이(眞俗不二)의 진리 위에서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중생의 고통 속에서 부처의 자비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한국 종교계의 갈 길이 멀고도 멀다.

탕자의 귀환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헨리 나우웬 (2009, 포이에마)

 

 

 

<루가복음 제15장>

 

잃었던 양 한 마리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 하며 못마땅해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한 마리를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아흔아홉 마리는 들판에 그대로 둔  잃은 양을 찾아 헤매지 않겠느냐?

 그러다가 찾게 되면 기뻐서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양을 찾았습니다.' 하며 좋아할 것이다.

 잘 들어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잃었던 은전

 

"또 어떤 여자에게 은전 열 닢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닢을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 여자는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온통 쓸며 그 돈을 찾기까지 샅샅이 다 뒤져볼 것이다.

그러다가 돈을 찾게 되면 자기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잘 들어두어라.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잃었던 아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제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재산을 갈라 두 아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자기 재산을 다 거두어가지고 먼 고장으로 떠나갔다. 거기서 재산을 마구 뿌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돈이 떨어졌는데 마침 그 고장에 심한 흉년까지 들어서 그는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그는 그 고장에 사는 어떤 사람의 집에 가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주인은 그를 농장으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하도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워보려고 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아서 그 많은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

 어서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으로라도 써주십시오 하고 사정해 보리라.'

 마침내 그는 거기를 떠나 자기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하인들을 불러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 하고 말했다. 그래서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밭에 나가 있던 큰아들이 돌아오다가 집 가까이에서 음악 소리와 춤추며 떠드는 소리를 듣고

하인 하나를 불러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하인이 '아우님이 돌아왔습니다. 그분이 무사히 돌아오셨다고 주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게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서 달랬으나

 그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는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종이나 다름없이 일을 하며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지 않으시더니

 창녀들한테 빠져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린 동생이 돌아오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주시다니요!' 하고 투덜거렸다.

 이 말을 듣고 아버지는 '애,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 하고 말하였다."

 

 

 

작은 아들

 

 

1. 그림

 

작은아들의 황갈색 홑옷은 아버지의 붉은 외투와 어우러져 제법 근사해보이지만 사실 젊은이는 비참했던 지난 삶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누더기를 걸치고 있습니다아버지는 물론이고 지켜보는 키 큰 남성도 신분과 위엄을 드러내는 붉은 외투를 입고 있습니다오로지 지치고 피곤해서 탈진 상태에 이른 육신을 너덜너덜한 황갈색 속옷으로 가렸을 따름입니다.

 

박박 밀어버린 머리를 보면 지난날 흥청거리고 오만하고 반항적인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졌습니다.

 

샌들 바닥만 봐도 탕자의 여정이 얼마나 길고 수치스러웠는지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닳아빠진 신발마저도 벗겨진 왼발에는 상처가 있습니다구멍 뚫린 샌들을 반만 꿰고 있는 오른발 역시 고통스럽고 비참한 현실을 웅변합니다.

 

칼 한 자루 말고는 모든 걸 탕진한 젊은이의 초상입니다남아 있는 품위의 상징이라고는 달랑 엉덩이에 매달린 단검이 전부입니다신분을 나타내는 일종의 배치인 셈입니다작은아들의 단검은 비록 거지꼴을 하고 부랑자 신세가 되어 돌아왔을망정 여전히 아버지 아들이라는걸 잊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2. 묵상

 

(1) 작은아들집을 나서다

 

- ‘돌아옴은 떠남을 전제로 합니다잃었던 되찾은 벅찬 기쁨의 이면에는 그 아이를 잃어버렸던 지난날의 슬픔이 깊게 배어 있습니다.

 

아들의 가출은 생각보다 훨씬 무례한 짓이었습니다태어나고 성장한 가정을 냉정하게 내동댕이치는 처사인 동시에 자신이 속한 광범위한 공동체에서 정성껏 지키는 전통을 무시하고 뿌리친 행동입니다.

 

작은아들이 떠나온 세상에서의 사랑은 항상 조건적이며 앞으로도 절대 달라지지 않는 곳입니다세상에서 추구하는 것은 중독인데 이것으로는 마음속 깊이 간직한 소망을 채울 수 없습니다.

 

세상의 속임수를 간파하지 못하면 먼 지방에서 머물며 허망한 일을 쫓는 중독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자존감은 충족되지 않고 끝없이 이어지는 환멸에 부닥칩니다.

 

탕자의 거부는 아담이 저지른 반역의 복사판입니다그러나 아담과 그 후손이 저지른 반역은 용서를 받았습니다하느님은 아버지처럼 두 손을 내밀고 언제나 반갑게 맞아 주십니다.

 

 

(2) 작은아들다시 집으로

 

먼 지방에서 작은아들은 결국 주위사람들에게 더 이상 사람 취급을 받지못하고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외로움을 느꼈습니다더 잃을 것 없을 만큼 빈털털이가 되었습니다이 총체적인 탈선 때문에 탕자는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정신 차린 순간 탕자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우너래의 자신을 되찾는 것만이 유일합니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내가 일어나서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으로 삼아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먼 지방을 떠나 집으로 향했습니다.

 

탕자는 전 재산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의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가장 밑바닥에 떨어져서 비로소 말리서 자신을 부르는 아버지의 음성을 희미하게나마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탕자의 길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용서를 받으려면 하느님이 명실상부하게 나의 주님이 되셔서 치유하고 회복시키며 새롭게 하시는 역사를 일으켜주시도록 기꺼이 전폭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야 합니다마음을 돌이키는 순간부터 집에 도착할 때까지 지혜롭게 스스로를 훈련시키면서 여행해야 합니다.

 

 

큰아들

 

 

1. 그림

 

작은아들을 끌어안은 노인을 바라보는 핵심 입회인인 큰 아들은 한 발 뒤로 물러서 있습니다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지만 기뻐하는 기색이 없습니다손을 내밀지도 웃음 짓지도 반갑다는 표현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무대 한 구석에 그냥 서 있을 뿐 전면에 나설 의사가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귀향이 중심 화제인 것은 분명합니다그러나 물리적으로 캔버스 중앙에서는 그 장면을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사건은 왼쪽으로 치우친 자리에서 벌어집니다오른쪽 구석은 기골이 장대하고 완고해 보이는 큰아들이 지배하고 있습니다남은 여백은 아버지와 맏아들을 갈라놓고 있습니다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내며 해결을 재촉하는 공간입니다.

 

그림에 큰아들이 버티고 있는 한탕자가 돌아온 사건을 감상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비중이 가장 높은 입회인은 아버지가 보여주는 따뜻한 환영에 동참할 생각이 없다는 듯한사코 거리를 두려 합니다큰아들 마음 속에는 무슨 생각이 오가고 있을까요?

 

렘브란트는 아버지와 큰아들을 대단히 흡사하게 그렸습니다둘 다 수염을 그리고 있으며 붉은 망토를 어깨에 넉넉하게 두르고 있습니다이런 외적 요소들은 큰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공통점이 많다는 사실을 넌지시 암시합니다화가는 큰아들의 얼굴에 빛을 떨어 뜨려서 역시 밝은 조명을 받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과 직접 연결시키는 방식으로 방점을 찍습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가슴 아픈 차이가 있습니다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온 아들을 향해 몸을 굽히고 있습니다큰 아들은 뻣뻣하게 서있을 뿐입니다손에서 바닥까지 곧게 이어진 지팡이는 그의 완고한 마음가짐을 보여줍니다.

 

아버지의 망토는 자식을 환영하는 듯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큰아들의 옷은 몸에 착 달라붙었습니다아버지는 손을 펴서 탕자를 어루만지고 있습니다축복의 몸짓입니다큰아들은 양손을 단단히 모아 쥔 채 가슴에 대고 있습니다두 인물의 낯에는 모두 빛이 드리웠습니다그러나 아버지의 얼굴에서 나오는 광선은 오몸특히 두 손으로 흘러나가 따뜻하고 풍성한 빛으로 온전히 감싸는 반면큰아들 얼굴 위에 떨어진 빛은 차갑고 제한적입니다몸뚱이는 여전히 어둠에 묻혔고 그러쥔 손은 그늘졌습니다.

 

 

2. 묵상

 

 

(1) 큰아들집을 나가다

 

어쩌면 렘브란트가 그림으로 옮긴 이야기는 탕자의 비유가 아니라 탕자들의 비유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할 지 모릅니다자유와 행복을 찾아 집을 떠났다가 먼 지방에서 길을 잃은 작은 아들뿐만 아니라 고향에 머물던 큰아들 역시 방황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겉으로는 어른이 시키는 일들을 성실하게 잘해낸 착한 아들처럼 보이지만속내를 들여다보면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 엉뚱한 곳을 헤메고 있었습니다부친을 잘 섬기고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며 주어진 책임을 다했지만 큰아들은 날이 갈수록 불행하고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보통 맏아들은 부모의 기대에 맞추어 살며 그 뜻을 잘 따르고 효도하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특유의 욕구가 있는지도 모릅니다때로는 그러한 욕구는 무거운 짐이 되어 계속 짓누를 수도 있습니다.

 

큰아들이 화를 냈다는 것은 탈선이고집을 떠나 방황하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버지의 집에서 자유롭게 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분노하고 시기하는 모습 자체가 여전히 무언가에 속박된 종의 신세라는 증거입니다.

 

큰아들의 탈선은 분별하기 어렵지만집에 돌아온 작은아들을 보고 뛸 듯이 기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자 암흑의 기운이 마음속에서 표면으로 솟구쳐 떠올랐습니다분노오만몰인정이기적 자아가 점점 강해져 마침내 사나운 본색을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 ‘나는 열심히 노력했어오랫동안 최선을 다했고 일도 많이 했어하지만 아무 대가도 받지 못했어남들은 다 쉽게 얻는데도 말이야어째서 아무도 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지초대하거나 함께 어울리려고 하지 않고 왜 제대로 대우를 해주지 않느냐고대충대충 가볍게 사는 이들한테는 그렇게 신경을 쓰면서 말이야.’

 

큰아들이 최종적으로 어떤 결정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그러나 여기서 분명한 것은 한없이 큰 사랑을 베푸는 아버지의 넓은 마음입니다.

 

 

(2) 큰아들집으로 돌아오다

 

아버지는 작은아들뿐만 아니라 맏아들도 애타게 기다렸습니다그 역시 잘못을 깨닫고 기쁨에 집으로 되돌아 올 필요가 있었습니다큰아들은 간곡히 타이르는 아버지에 가르침에 반응을 보일까요아니면 자기 뜻을 굽히지 않을까요렘브란트 또한 그 질문에 확실한 답을 하지 않습니다큰아들의 반응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관람자의 몫이 되었습니다.

 

큰아들 이야기는 모든 고민스러운 이야기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합니다하느님이 탕자를 맏아들보다 더 사랑하셨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명쾌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애야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았더냐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 아니냐?’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여실한 한 마디는 모든 의구심을 단숨에 날려 버립니다아버지는 무제한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두 아들에게 온전히그리고 공평하게 쏟아 부었습니다.

 

작은아들이 극적으로 돌아온 것을 아버지가 한없이 기뻐했지만 그것이 어떤 면으로든 큰아들을 덜 사랑한다는 말은 아닙니다아버지는 두 아들을 비교하지 않습니다각각 걸어온 삶의 여정에 맞게 온전한 사랑을 쏟습니다.

 

에수님은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거룩한 자녀들은 하느님 나라에 저마다 고유한 자리를 가지고 있고 그곳이 바로 주님의 거처인 것입니다그러므로 마음에서 비교와 경쟁의식다툼을 모두 비워낸 자리에 하느님의 사랑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탕자의 비유는 나를 만날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찾아다니는 하느님의 이야기입니다하는님은 권면하고 간청하십니다죽음의 권세에 의존하지 않고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는 거룩한 팔에 몸을 맡기라고 사정하십니다비록 내 힘으로는 차가운 분노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할지라도날마다 구체적으로 신뢰하고 감사하는 훈련을 통하여 주님 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거룩한 사랑에 힘입어 건강을 찾을 수 있도록 스스로 분발해야 합니다.

 

 

 

아버지

 

 

1, 그림

 

렘브란트가 그린 아버지의 초상에서 그처럼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느껴지는 것은 견줄 수 없을 만큼 거룩한 요소를 가장 인간적인 틀 안에 포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거의 시력을 잃은 노인을 보십시오구레나룻을 길렀고 턱수염은 두 갈래로 나뉘었습니다금실로 수놓은 웃옷에 심홍색 외투를 두르고 있습니다큼지막하고 뻣뻣한 두 손은 돌아온 둘째아들의 어깨에 올려져 있습니다묘사가 대단히 구체적이고 분명해서 직접 현장에 같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아버지에 두 손은 정말 다릅니다아들의 어께에 닿은 아버지의 왼손은 강하고 억세 보입니다손가락을 펼쳐 탕자의 어깨와 등의 상당부분을 가리고 있습니다마디 마디에 적잖이 힘이 들어가 있는 게 눈에 뜨입니다특히 엄지손가락이 그렇습니다그저 만지는데 그치지 않고 힘을 주어 단단히 부여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물론 왼손으로 아들을 다독이는 모습에서는 부드러움이 넘치지만 그러쥔 느낌은 여전합니다하지만 오른손은 전혀 딴판입니다부여잡거나 움켜쥐지 않습니다세련되고 부드럽고 대단히 다정합니다손가락들이 가지런히 모으고 있어 우아한 분위기가 납니다아들의 어께에 사뿐히 올려놨다고 해야 할까요어루만지고 토닥이며 위로와 위안을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그건 어머니의 손입니다아버지의 손은 부여잡고 어머니의 손은 쓰다듬습니다아버지는 확신을어머니는 위안을 줍니다.

 

 

2. 묵상

 

- <탕자의 귀환>은 인류를 불쌍히 여기는 하느님의 따뜻한 마음을 인간에 대입해 표현한 그림입니다어쩌면 <탕자의 귀환대신 인정 많은 아버지의 환영이라는 제목이 더 적합할 수도 있겠다 하는 것은 아들보다는 아버지를 더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렘브란트는 아버지라는 인물의 묘사 하나하나가 인류를 향해 하느님이 쏟아부으시는 사랑태초에 존재했으며 앞으로도 변치않을 하느님의 사랑을 웅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집으로 돌아온 아들의 등을 어루만지는 두 손은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아버지에 도구처럼 보입니다. 육신의 눈이 거의 감기 다시 피한 아버지는 오히려 더 멀리 그리고 널리 봅니다그것은 인류 전체를 아우르는 영원한 시선입니다시간과 장소 성별을 초월해서 모든 이들의 상실과 방향을 살핍니다집을 떠나는 쪽을 선택한 자녀들이 겪는 아픔을 알고 말할 수 없는 만큼 가슴아파하는 눈길입니다정신적인 고통과 고뇌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을 보고 바다를 이루도록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아버지에 마음은 길은 자신의 집으로 데려 오려는 열망으로 뜨겁게 타오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한없이 사랑하므로 강요할 수도 속박할 수도 밀어부칠 수도 끌어당길 수도 없었습니다도리어 그 사랑을 거부하든지 아니면 집으로 돌아오든지 선택할 자유를 주셨습니다하느님을 그토록 고통스럽게 하는 근원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는 우선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되기로 작정하셨습니다아버지 하느님은 자녀들이 자유로워지기를 자유로이 사랑하기를 바랍니다거기에는 자식이 집을 떠나 먼 지방으로 가서 모든 재산을 탕진할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아버지는 내심 그런 선택이 불러올 심한 고통을 알고 있지만 사랑의 가로막혀 하릴없이 바라만 봅니다.

 

하나님은 목소리보다 어루만짐을 통해 자녀들에게 좋은 말씀을 들려주고 싶어 하십니다벌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안팎으로 방황하면서 이미 넘치도록 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아버지는 다만 자녀들이 그토록 비뚤어진 방식으로 찾아 헤매 왔던 사랑이 늘 가까이에서 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며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알려주길 바랄 뿐입니다.

 

렘브란트의 작품 <탕자의 귀환>의 참된 중심은 아버지 손에 있습니다가장 밝은 빛이 그 위를 비추고 있습니다구경꾼들의 시선도 거기 손에 있습니다그 손 안에 자비로운 사랑이 구현되었습니다. 거기서 용서와 화해치유가 일어납니다아버지는 결국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고내 여정의 종착점이며 마지막 안식처입니다.

 

우리는 비록 지금 작은아들인 동시에 큰아들의 처지이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궁극적으로는 아버지처럼 되어야 합니다.

길은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른다

닫힌 종교에서 열린 종교로 종교다원주의의 도전

 

(길희성, 출판사 휴,  2013)

 

 

 

 

  

서론〕 글을 쓴 목적

 

⑴ 종교의 본질적 역할에 대한 의문 종교의 참다운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종교를 종교답게 만드는 본질적인 힘은 어디에 있으며종교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

 

⑵ 종교 간의 대화와 일치 세계의 주요 종교들이 제도나 교리나 신앙 경험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궁극적인 실재와 목표를 지향하고 있는 바길은 달라도 종교들은 결국 같은 산을 오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자 소개
 
저자 길희성 교수는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이후 예일대학교 신학부에서 석사학위를하버드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비교종교학)를 받았다미국 세인트올라프대학 종교학과 교수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서강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현재 서강대 명예교수이자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다동서양 종교와 철학신학을 넘나드는 폭넓은 시야와 깊은 연구로 지식인들 사이에서 존경받는 원로 학자이다. 2011년에 사재를 털어 강화도에 고전을 읽고 명상을 할 수 있는 도를 찾는 공부방이란 뜻의 심도학사를 열었다저서로는 인도 철학사지눌의 선사상일본의 정토사상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영성사상보살 예수하나님을 놓아 주자가 있다.

 

 

 

 

1〕 영성으로의 초대

 

 

(1)왜 사냐고 묻는다면

 

□ 인간은 의미를 추구한다

 

인간은 의미를 먹고 사는 존재이다그래서 누구나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한다고통스러운 삶을 참을 수는 있지만 무의미한 삶은 못 참는 존재가 인간이다.

 

인간은 자기 존재를 의식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와 의식이 괴리될 수 있는 이중적·자기분열적 존재다.

 

인간의 존엄성은 인간이 자기존재를 의식함으로써 어느 정도 자신을 벗어나고 초월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주체적인 존재라는 데 기초하고 있다.

 

인간 존재의 구조적 취약성을 강조하는 에리히 프롬은 이중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인간 존재의 특성에서 종교의 유래를 찾는다종교는 자기분열을 안고 사는 불안정한 존재인 인간에게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방식을 제공하고 우리가 온 몸과 마음을 바쳐 사랑하고 추구할 궁극적인 헌신의 대상을 제시함으로써 이 분열된 자아가 재통합하게 되는 기능을 수행한다.

 

 

□ 우리 모두가 생각하는 주체로 살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권위주의전체주의순응주의가 판치게 된다

 

폴 발레리 : “그대가 용기 내어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않아 그대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지배받지 않고 살려면 자기가 몸담고 있는 사회와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깨어 있는 의식깨어 있는 양심이 지키는 사회가 투명한 사회이며그래야 개인도 나라도 잘 돌아간다.

 

 

□ 의미의 위기가 고개를 들 때인간은 스스로 삶의 궁극적인 목적과 의미를 진지하게 묻기 시작한다

 

- “나는 정말 행복한가행복하지 않아도 가족을 위해서는 참아야 하는가인생의 행복은 과연 어디에 있으며 어떤 삶이 정말로 좋은 삶인가?”

 

경봉 스님 : “사내대장부로 세상에 태어났으니 연극 한번 멋지게 하다가 가라” 

 

니코스 카잔차키스 :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나는 자유다.”

 

 

□ 진정한 자기를 찾으려는 욕구그리고 두려움

 

- ‘참나를 대면하는 일은 언제나 두려운 일이다하지만인간이 인간인 이상 언제까지나 미루고 피하며 살 수는 없다.

 

진정한 자유는 자신의 전 존재를 두고 헌신할 새로운 가치새로운 목적새로운 의미를 발견해야 하고새로운 사회적 관계로 나아 갈 때 비로소 완성된다.

 

 

□ 죽음모든 삶의 의미를 앗아가다

 

죽음은 누구나 봉착하게 되는 인생 최대의 위기이다모든 가치와 목적을 집어삼키고 의미를 무효화시키기 때문이다.

 

이 죽음의 위기를 돌파할만한 더 높고 깊은 가치와 의미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 성공전도사가 전하는 환상

 

동서고금의 영성의 대가들은 한결같이 인생의 최고 목표와 의미는 참다운 자기인식에 있다고 증언한다.

 

- ‘성공전도사의 자기계발 환상에 강박되어 있는 현대인들은 진짜 자기를 발견해서 자기다운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그것은 환상이다.

 

자기만의 특별한 것 없이 평범하게 살아도 인간답게 진정한 삶을 사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영성의 세계에서 말하는 참나란 인간이면 누구나 타고난 인간의 본연의 인간성 자체이다참된 인간성의 자각과 실현이야말로 인생의 궁극적인 선이며 행복이다.

 

 

 

(2) 기복신앙을 넘어선 종교

 

□ 인생에 있어 행복이 무엇인가?

 

현세구복적 기복신앙이 내세우는 종교는 존재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존재해서도 안 된다차라리 신앙 없이 드러내 놓고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보다 못하다비신앙인들은 적어도 초자연의 무기까지 동원해서 자기 욕망을 채우려 하지는 않는다.

 

종교에서 제시하는 지고지선의 공통된 목표는 보이지 않는 초월적 실재와의 관계특히 연합 내지 완전한 합일을 최고의 선이자 행복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그것을 해탈구원깨달음은총어떻게 부르던 인간의 최고 행복과 궁극적 완성은 거기에 있는 것이지 결코 물질적 욕망을 충족하거나 유한한 피조물에서 오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친다물질의 소유나 신체적 조건에 따라 변화하는 행복보다 정신적 행복영적 평화덕이 있는 삶에서 오는 마음의 행복이 더 항구적이고 큰 기쁨을 주는 행복이라는 평범한 사실 때문이다.

 

 

□ 행복의 원천이신 하느님

 

기복신앙은 종교가 제시하는 본래적 가치를 무시하고 목적적 가치와 수단적 가치를 혼동하는 신앙이며 가치의 질서를 거스르는 신앙이다하느님만이 모든 선의 원천이고 선 그 자체이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욕망과 사랑의 최고 대상이다그러나 흔히 사람들은 피조물을 하느님으로 착각하고 하느님보다 더 사랑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기복 신앙의 문제는 물질에 대한 욕망 자체가 아니라 지고선인 하느님을 물질에 대한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데 있다목적인 신은 안중에 없고 피조물에 대한 욕망만이 영혼을 지배한다.

 

이슬람 수피 영성가 : “내가 만일 천국의 복락을 위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나를 지옥에 던지소서.”

 

 

□ 기적을 바라는 신앙

 

자신의 노력으로 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힘을 빌려 복을 얻으려는 것이 기적을 바라는 기복신앙이다. 피조물 모두의 선을 위하여 하느님이 정해 놓은 자연의 질서를 자신의 선을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뜻을 앞세워 하느님 스스로 벗겨 주거나 수정해주기를 기도한다.

 

자식의 입시를 앞두거나 생사의 기로에 선 자식을 보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을까하지만 똑같이 기도했는데 왜 하느님은 한 어머니의 기도는 들어주고 다른 어머니의 기도는 외면하실까자식이 암에 걸린 것만도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인데 어머니의 기도가 부족해 죽었다면 이보다 더 원통할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그렇다고 하느님이 모든 기도를 들어주신다면 기적은 더 이상 기적이 아닐 것이다기적은 본질상 특별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극적인 치유의 경험을 듣는 것보다 차라리 지나간 고통의 세월을 담담하게 털어놓는 이야기가 오히려 더 공감이 가고 은혜가 되는 것은 나만의 경험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세세히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섭리 앞에서 함부로 특정 사건을 하느님의 뜻과 연관시키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참다운 신앙적 태도가 아닐까

 

사도 바오로 : “살던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내가 약할 때 오히려 나는 강하다”, “나에게는 죽는 것도 유익하다

 

 

□ 징표 없이 믿는 신앙

 

종교에서 기적과 같은 징표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다.

 

이 세상이 선과 행복이 정비례하는 세계이라면 강요된 선만 있고 순수한 자발적인 선은 존재하기 어려울 것이다보상을 바라지 않고 순수한 도덕적 행위실로 도덕의 이름에 걸맞은 순수한 도덕적 삶은 그 결과의 불확실성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역설이 성립한다진정한 신앙도 순수한 도덕도 불확실성 속에서 감행하는 일종의 모험인 것이다.

 

한편세상에 원인 없는 현상은 없다는 대전제를 수용한다면, ‘기적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아마도 당분간 우리의 지식이 모자라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붙이는 일시적 이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신앙심 깊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 세상에 기적 아닌 것은 없다고 증언한다. 예수님은 들에 핀 백합화공중을 나는 새 한 마리에서도 하느님의 손길을 느꼈고선한 사람 악한 사람 가리지 않고 내리는 비와 햇빛에서도 하늘 아버지의 무차별적인 사랑을 보았다.

 

 

 

□ 무상한 것들의 신비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무상한 것들은 우리에게 존재의 신비를 느끼게 한다우리 인간 자체가 기적 중의 기적이다온 우주보다 귀하고 위대한 것이 인간의 생명이다.

 

인간은 슬픔이 있어야 기쁨이 있다고통이 없으면 즐거움도 느끼지 못한다하나만 있고 다른 하나는 없는 것이 불가능한데한만 취하고 다른 하나를 거부하는 것은 모순이다우리가 슬픔과 기쁨고와 낙을 느낄 수 없는 존재라면 몰라도생명체가 존재하고 고통과 슬픔을 더 깊이 경험할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고와 낙은 항상 붙어 다닌다우주의 한 점에 불과한 이 지구라는 우주의 오아시스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날마다 기적 중의 기적을 경험하고 사는 존재들이다.

 

참된 신앙과 영성은 고통을 없애 주기 보다는 좀더 넓고 깊은 시각에서 사물을 보고 인생을 달리 경험하도록 하는 능력을 준다고통이 초월의 세계를 열어 주는 은총의 매개체로 변한다고통과 고난을 경험하지 않고 위대한 신앙을 가진 사람을 보았는가순수한 신앙은 오히려 고난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손길을 더 가까이 느끼고 사랑하게 만든다.

 

 

□ 참된 신앙이란?

 

한국 종교계는 이제 일차원적이고 단선적인 기적신앙과 기복 신앙을 과감히 청산할 때가 되었다종교란 무엇인가자기를 변화시키고 사회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 아닌가이기적이고 아전인수 격인 기복 신앙은 결코 자기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물론 사회도 변화시키지 못한다오히려 그 반대이다.

 

고통을 없애 주기보다는 고통을 안고 사는 지혜와 용기여태껏 들리지 않았고 들어도 외면했던 이웃의 고통과 뭇 생명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 주는 것이 신앙이다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는 것이 신앙의 힘이다.

 

참된 신앙은 하느님과 전부 아니면 전무의 도박을 한다자신의 전 존재전 삶을 걸고 하느님과 빅 딜'을 하는 것이 신앙이다.

 

 

 

 





축복의 기도


큰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주십사 기도 했더니 
겸손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다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강을 구했는데 
보다 가치 있는 일 하라고 병을 주셨다
행복해지고 싶어 기도했는데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다
삶을 누릴 수 있게 모든 걸 갖게 해 달라고 기도했더니 
모든 걸 누릴 수 있는 삶 그 자체를 주셨다
구한 것 하나도 주시지 않았지만 
내 소원 모두 들어주셨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삶이었지만 
내 맘 속에 진작 표현하지 못한 기도는 
모두 들어주셨다
나는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3) 신의 암호 해독하기

 

신에 대해 사용되는 말은 모두 암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그래서 침묵이 최고의 언어이다아니침묵이야말로 최고의 암호일지도 모른다

 

성서의 언어를 비롯하여 신에 관한 언어를 모두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근본주의 신학자들을 제외하고 그렇게 보는 신학자들은 거의 없다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두말할 필요 없이 이 세상 사물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언어의 세계를 초월하는 실재인 하느님에게 문자를 적용하는 것은 하느님을 유한한 사물로절대적 실재를 상대적 존재로 격하시키는 비신앙적인 처사이다하느님의 계시 말씀으로 간주되는 성서의 언어도 예외가 될 수 없다성서가아무리 성령의 영감으로 씌어진 하느님의 말씀이라 해도그것이 인간이 사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주어진 한결코 문자 그대로 하느님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신의 존재 여부를 묻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까신은 눈에보이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신앙인들에게 피조물들의 허무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그리스도교 신학 전통에 의하면하느님은 피조물을 로부터 창조하셨다피조물은 허무로부터 왔기 때문에 항상 허무의 그림자를 안고 존재한다인생무상과 죽음을 통한 무와의 대면은 우리를 허무주의로 몰아 갈 수도 있겠지만오히려 우리 자신이나 주위 사물들이 덧없음에도 불구하고 존재한다는 사실의 신비와 은총에 눈을 뜨게 해준다

 

신의 암호 혹은 신이라는 암호를 해독한다고 해서 신에 대해 어떤 확실한 지식을 얻으려는 생각은 금물이다지식은 신을 여느 사물처럼 물상화하고 대상화하기 때문에 신에 관한 지식이란 있을 수 없다신은 인간을 매개로 해서 자신을 알리며세계는 인간을 매개로 해서 신을 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깊은 영성의 소유자에게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신의 암호이다그래서 그들은 어디서나 신을 만난다개념과 언어는 암호나 상징이기보다는 문자적으로 이해되기 쉬운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문자의 사용이 소수의 전유물이었던 시대에는 신을 만나는 암호와 상징이 현대 세계에서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풍부했다는 사실경전의 문자적 의미를 고집하는 근본주의는 놀랍게도 현대적 산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4)마음에는 평화,세상에는 정의

 

 

□ 인식의 변화를 넘어 참으로 자기를 변화시키고 세상도 변화시키는 힘은 사랑과 자비 외에 아무 것도 없다.

 

 

□ 어떻게 평화를 이룰 것인가?

 

세계는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이 땅 하나 밖에 없는데종교는 하늘을 가리키고 있으며인생은 단 한번만 사는 것인데 또 다른 삶이 있다고 말하며물질과 육체는 누가 보아도 중요한 것인데 보이지 않는 영적 실재나 영혼같은 것이 더 중요하다 하니종교는 현실 도피인간 소외심지어 성직자들의 사기극이라고 할 만도 하다하지만 종교는 본래 현실을 도피하려고 생겨난 것이 아니라 현실의 괴로움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현실을 알되 현실만으로 문제가 잘 안 풀리기에 초월적 세계에 눈을 떠 그 시각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종교는 아편일 수도 있고 영성도 현실 도피적일 수 있다역설적이게도 현실을 폄하하고 초월만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종교일수록 실제로는 물질을 더 탐하고 세상 권력과 쉽게 타협하기도 한다그런가 하면 현대 종교는 지나치게 현실 문제에 집착하면서 시민운동 단체나 여느 사회단체처럼 사회문제에 전적으로 몰두하는 모습도 보이기도 한다현실과 초월 중 어느 하나에 편중되거나 무시하지 않고양자 간에 긴장을 유지하면서 매개하는 자세가 종교와 영성에 요구된다.

 

평화는 먼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야 하지만 의식의 변화만으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으므로 의당 사회적 실천이 따라야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는 말로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덕이란 것이 객관적 토대를 상실하고 순전히 우리 인간의 주관적 감정이나 자의적 호불호의 문제로 전락하기 쉽다는 것따라서 도덕적 상대주의 내지 허무주의로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경고하고 있다.

 

평화롭기와 평화 만들기는 둘 다 필요하지만 동시에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낄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그래서 우리는 종종 그 중 하나만 선택하려는 유혹에 빠진다하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둘은 반드시 같이 가야 한다.

 

결론적으로 마음의 치유와 사회적 치유가 함께 가는 길도피적 영성도 아니고 폭력적 행동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을 찾아야 한다

 

 

 

 

 

 

  

2〕 길은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른다

 

 

(5) 종교는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

 

 

□ 제도로서의 종교정신으로서의 종교

 

종교를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로 보는 과감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종교를 그리스도교 또는 불교라는 일정한 경계를 지닌 제도 내지 집단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그리스도교적’, ‘불교적이라는 형용사로 이해해야 한다.

 

명사화된 종교가 제도화되고 물상화된 종교명확한 배타적 경계선과 울타리를 지닌 조직체로서의 종교를 가리킨다면형용사 종교는 신자들 내면에 살아있는 정신으로서의 종교마음의 성품과 삶의 태도로서의 종교이다.

 

 

□ 그리스도 정신에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

 

현대 그리스도교 선교는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선교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전파하고 다니신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며 예수님 자신이 하신 것처럼 하느님나라의 구체적 모습을 행동으로 보여 주는 선교이어야 한다.

 

예수님은 하느님나라 운동을 하다 처형당했지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다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하느님나라는 결코 그리스도교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교회는 하느님나라의 징표일 뿐이지 하느님나라 그 자체는 아니며종교를 불문하고 정의와 평화를 위해 사는 사람들하늘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느님 자녀들이며 예수님의 형제자매들이라고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셨다.

 

 

□ 그리스도 향기부처님의 자비

 

종교를 형용사적으로 이해하면 종교 간의 경계가 그다지 배타적이거나 경직되지 않을 것이다종교의 궁극적 목표는 사람다운 사람을 만드는 데 있을뿐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성인은 별다른 존재가 아니라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다인간의 인간성을 제대로 자각하고 실천한 존재다.

 

형용사적 종교는 종교 간의 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성과 속의 벽도 넘나들 수 있다모두가 참사람이 되기 위해 한 길을 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6)상생을 위한 종교 간 대화

 

 

□ 종교의 메시지는 인간의 욕망을 경계하지만제도화된 종교는 항상 집단 이기주의와 독점욕의 유혹을 받는다.

 

 

□ 과학적 세계관과 역사적 상대주의의 도전

 

현대 종교가 직면하고 있는 세속적 탈종교화된 도전은 과학적 세계관 내지 실증주의적 사고방식의 도전과 역사적 사고방식의 도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과학적 세계관과 실증주의적 사고방식이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 실재나 사후세계에 대해 말하는 종교와 갈등을 빚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또한 역사적 사고에 의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예외 없이 어느 시기어느 지역에 역사적 기원을 갖고 있으며 여러 변천 과정을 거쳐 왔다.  이 모든 것은 변하고 변할 수 있으며 변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현대인의 상식이 되었다종교도 예외가 아니다종교가 아무리 초월적 절대적 진리를 주장한다 해도 현대의 역사적 사고는 종교가 언제어떠한 역사적 상황에서 발생했고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속속 밝히고 있다이에 따라 역사적 연구는 종래 신성한 권위를 지닌 것으로 간주되었던 경전이나 교리나 제도들이 언제어떻게 형성되었고어떤 과정을 통해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는지 낱낱이 밝혀 주고 있다역사적 연구가 종교의 초시간적 신화적 권위를 무너뜨리게 된 것이다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절대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과학적 세계관과 역사적 상대주의의 도전으로 권위를 상실하기 시작한 종교의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개방되고 가치다원화 된 현대 사회이다민주사회의 혜택이자 정신적 혼란의 원인이기도 한 가치 다원화와 종교 다원화라는 현상은 그 자체로 종교들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상대화를 수반하고 있다가치관과 종교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대상이 되는 사회에서는 어느 종교도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기 어렵고 사회의 통일적 가치관을 제공하기 어렵다종교의 가르침이 개인적 선택의 대상이 되어 버림으로써 사회적 보편성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 종교다원화는 순수성 회복의 기회

 

종교다원 사회가 종교에게 주는 새로운 기회는 첫째종교의 홀로서기와 이로 인한 종교의 순수성과 진정성의 회복이며둘째종교 간의 대화와 이를 통한 종교의 창조적 발전이다.

 

현대 다종교탈종교 시대의 종교는 이제 외부 도움 없이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순전히 메시지 자체의 힘과 영성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현대 종교는 순전히 개인의 영혼과 영성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역설적인 것은 홀로 서기할 수 있는 종교는 이전보다도 더 순수한 종교더 진정성 있는 신자들을 확보하는 종교가 된다는 사실이다어떤 종교든 사회에서 다수의 종교가 되는 순간 그 사회와 한통속이 되고 사회를 변혁할 정신적 힘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에 이러한 오늘의 종교적 역설 상황은 사실 감추어진 축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권력과 진리의 독점권 상실

 

대등한 세력을 가진 종교가 공존하는 종교 다원 사회에서는 종교가 독점권만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독점권도 상실하게 된다모든 종교가 가진 사상의 진위나 우열을 가릴 만한 객관적 잣대를 찾기란 현실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진리는 절대적이지만 인간의 인식은 유한하다

 

각 종교가 상이한 진리 주장을 대하는 태도에는 첫째자기 종교만 진리를 안다는 독점적 배타주의둘째종교란 모두 다 근거 없고 믿을 수 없다는 세속주의 입장셋째모든 종교가 자기 나름대로 절대적 진리 혹은 궁극적인 실재를 경험하고 알지만 이 진리는 역사적으로 제약되고 문화적으로 굴절된 형태로밖에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다원주의 입장이 있다.

 

다원주의에서는 어느 종교도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주장을 펼 수 없고 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진리 혹은 실재 자체는 절대적이고 영원하지만이 진리를 접하고 아는 인간의 시각과 지식은 유한하고 상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한 종교의 절대적인 진리 주장은 이 계시가 특정한 역사적 상황과 문화적 조건 하에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주어지는 한 오히려 그 종교가 지향하고 있는 초월적 실재 자체에 대한 반역이고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진리 자체 하느님은 절대적이지만 인간이 진리를 파악하고 하느님을 이해하는 것은 유한하고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 민주 사회의 가치와 대화하는 종교

 

현대 다종교 사회의 종교 간 대화는 비단 종교들 사이의 대화일 뿐 아니라 민주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근본정신과 가치와 대화해야 한다.

 

현대 사회의 종교 간 대화는 단지 종교 간 대화할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성스런 이념과 가치와도 진지한 대화를 해야만 한다각 종교는 타 종교와의 대화 못지않게 민주적 질서가 요구하는 가치와 덕목에 대해서 입장을 확실하게 정립하고 가르칠 필요가 있다.

 

한국 종교가 진정한 상생과 호혜의 종교 간 대화를 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반드시 필요하다하나는 민주 사회의기본 질서가 요구하는 성스러운 가치와 덕목을 존중하는 사회이고다른 하나는 종교가 추구하는 궁극적 진리 자체는 영원하고 절대적일지 모르나 그것을 추구하고 인식하는 현실 종교는 결코 절대적인 진리 인식을 주장할 수 없다는 역사 의식과 절대적 진리 앞에서의 겸손한 자기 성찰이다.

 

 

 

(7) 길은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른다

 

 

□ 비록 산을 오르는 길이 다르고 산행 중에 가끔 다른 위치에서 산정의 모습을 힐끗 보기도 하지만결국은 같은 정상에서 만날 것이다.

 

 

□ 문자적 언어의 한계

 

신의 계시든 깊은 명상이든혹은 그 밖의 탈아적 경험이나 신비체험을 한 사람이라도 그 경험이 자신의 심적 상태를 넘어서 어떤 외적 세계객관적 사실 내지 실재에 관계되는 것이라 믿지 단지 일시적인 감정이나 마음의 상태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오히려 반대로 강한 종교적 경험을 한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것이 현실 세계보다도 더 현실 같고 참되다고 확신한다비록 객관화된 언어로 쓰인 교리나 경전의 말씀이 상징적인 언어라 해도 이 상징이 가리키고 있는 언어 너머의 실재가 엄연히 있다고 생각한다.

 

 

□ 존 힉의 종교다원론

 

존 힉에 의하면유구한 전통을 지닌 세계 굴지의 종교들은 인간의 유한성에서 오는 불가피한 진리 인식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각자 자기 방식으로 신 혹은 실재를 인식하고 구원을 경험한다.

 

인간은 종교적 경험을 통해 실재에 접할 수 있다다만 종교적 경험도 실재 그 자체를 있는 대로 접하지는 못하고 각 종교가 처해 있는 문화가 제공하는 인식의 틀 내지 범주를 통해 굴절된 형태로 경험할 수밖에 없다종교적 경험이 종교와 문화에 따라 다르고 그 표현이 다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계종교사에 나타난 궁극적 실재를 접하는 종교 경험은 두 가지 유형에 주목한다하나는 궁극적인 실재를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 같은 유일신 신앙의 종교에서처럼 인격적 실재로 경험하는 유형이고다른 하나는 불교유가도가 사상 그리고 일부 힌두교 사상에서처럼 탈인격적 실재로 경험하는 유형이다이러한 두 가지 유형의 차이는 결국 실재를 접하고 경험하는 사람들이 속한 문화적 전통과 환경의 차이에 기인된다고 할 수 있다.

 

실재 자체는 이 두 범주를 초월하기 때문에 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다어떤 종교도 실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알 수 없으며 주어진 문화 전통과 환경의 영향 아래 불완전한 방식으로 접할 뿐이다종교는 나름대로 진리의 빛을 발하고 있지만 역사적 문화적 조건의 제약을 받고 굴절된 형태로 반사할 뿐이다따라서모든 종교는 진리실재의 인식의 한계를 인정해야 하며 자기 종교의 진리를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오히려 겸손하게 타종교와 대화하고상호 이해를 통해 시야를 넓히고 심화해 갈 필요가 있다.

 

 

□ 언어를 초월하는 신비 체험은 모두 같은 것일까?

 

신비주의자들이나 영성의 대가들이 경험한 신비적 합일의 경험이 아무리 순수하고 초월적이라 해도그들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고 땅을 딛고 사는 인간들인 한각자 자기가 속한 종교 전통과 문화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아무리 신비한 영적 체험이라 해도 모두 특정 종교 전통의 틀 내에서 발생한다또 종교에 따라 그들이 익힌 수행법도 다르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신비 경험 역시 똑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리나 사상은 물론이고 신비적 경험에서도 우리는 종교의 궁극적 일치를 찾기 어렵다는 결론이 나온다

 

 

□ 모든 종교가 동일한 실재를 지향한다는 가설

 

인간의 영혼 깊이 숨어 있는 신성과 영성의 순수성을 믿더라도그것을 자각하고 실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특정한 역사적 제약 하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따라서 종교 간의 궁극적인 일치는 신비한 경험에서보다는 그런 경험을 가능케 하는 어떤 불가언적 실재’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

 

종교가 갈망하고 접하고자 하는 경험의 대상인 ’ 혹은 실재’ 그 자체에서 종교의 궁극적인 일치점을 찾는다는 말이다.

 

이는 입증될 수 있는 이론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추측이며 가설이다즉 모든 종교가 동일한 궁극적 실재로부터 비롯되었으며 동일한 실재를 지향한다는 가설이다다양한 종교적 상징이나 경험이 모두 같은 실재에 대한 다른 반응이자 표현일 것이라는 추측이다결코 입증될 수 있는 가설은 아니지만우리는 인류 종교사를 통해 이를 뒷받침해 줄 만한 상황과 개연성을 높여줄 만한 현상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 길은 달라도 같은 정상에서 만나리라는 희망

 

첫째각각의 인종이나 민족이 처한 지리적 환경과 삶의 조건이 달라서 문화가 다르고 종교도 다르지만인간의 도덕적 영적 수준은 거의 동일하다둘째고대 세계의 혼령숭배나 단신숭배가 유일신 신앙과 형이상학적 일원론으로 극복된 후대다수 고등 종교들은 기본적으로 단 하나의 궁극적인 실재로 우주만물의 조화와 통일성을 이해하는 공통성을 보이고 있다

 

종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을 좁은 자기중심적’ 존재에서 실재중심심적’ 존재로 변화시키는데 있다세계 종교가 우주만물의 궁극적 실재를 다양하게 경험하고 여러 이름으로 부르고 있음에도 결국은 동일한 진리동일한 실재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동일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잠정적 결론을 내려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지상의 삶을 마감하고 우리를 제약했던 각종 역사적 한계와 문화적 제약을 벗어나는 날우리가 모든 궁극적 실재를 더 완전하게 볼 수 있을 것이며동일한 구원과 해방의 경지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비록 산을 오르는 길이 다르고 산행 중에 가끔은 다른 위치에서 산정의 모습을 힐끗 보기도 하지만 결국은 모두가 같은 정상에서 만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오른다아직은 아무도 정상의 모습을 완전하게 본 사람은 없지만언젠가는 모두가 그 환희를 누리게 될 것이다어떤 사람은 가까운 길로어떤 사람은 험준한 길로어떤 사람은 평탄하고 쉬운 길로 오르고 있지만 우리는 모두 같은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는 도반들로서 영적 산행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가끔 등산로가 교차할 때마다 우리는 만나서 산행의 경험을 나누고 배우며 격려도 한다그러다가 다시 자신의 길을 가지만 결국 같은 정상에서 만나는 기쁨을 나눌 것이라는 희망으로 산은 오르고 있다.

 

 

□ 종교는 길이자 방편수단이자 상징

 

종교다원주의가 각 종교의 특수성과 차이를 해소해 버림으로써 역설적으로 다원주의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비판도 있다따라서 진정한 다원주의는 종교 간의 차이를 끝까지 인정하고 유지해야 한다고 말한다그러나 이러한 다원적 다원주의는 종교가 궁극적으로 같은 정상에서 만날 것이라는 일원적 다원주의와 달리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에 문제를 원점으로 돌려놓게 된다선택은 궁극적인 일치 아니면 궁극적인 차이 둘 뿐이다다원주의는 현존하는 여러 종교에서 비본질적이고 우연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고 남는 여러 추상적인 종교의 본질이나 보편종교 같은 것이 가능하다거나 그런 새로운 종교를 만들자는 주장이 아니다

 

다원주의자들은 인간이 지상에 발을 붙이고 신앙생활을 하는 한누구도 자기가 속한 역사적 실체로서의 종교를 떠날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산정에 오르려면 누구든 자기 종교가 제시하는 길을 따라야지 존재하지도 않는 보편 종교 같은 추상체를 통해 오르는 것이 아니다.

 

또 여러 등산로를 동시에 오를 수도 없다다원주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다른 길을 걷는다고 다툴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서로 배우고 격려하면 더 즐겁고 유익한 산행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결국은 우리 모두가 더 즐겁고 같은 정상에서 만나 구원과 해방의 기쁨을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그때는 물론 종교 간의 차이는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이런 의미에서 종교 간의 차이는 궁극적인 것이 아니다종교는 길이자 방편이며수단이자 상징일 뿐이다.

 

 

□ 실천적 종교다원주의

 

- Paul Knitter에 의하면 모든 종교는 내재적이고 초월적 신비의 경험을 통해서 인간과 자여의 복리를 구원으로 추구한다이 구원은 모든 종교의 공통된 관심사이고 궁극 목표이며 종교의 가치와 진리를 판단하는 척도가 된다구원을 추구하고 경험하는 방식은 종교마다 다르지만 어느 종교든 가난한 자들을 위한 해방 그리고 지구 환경의 보존이라는 실천적 과제를 무시하면 참다운 종교라 할 수 없다하지만 어느 종교도 이러한 구원을 독점하거나 완전히 구현하지 못한다따라서 모든 종교는 실천적 과제와 이상을 놓고 각각의 한계를 의식하고 타종교와 협력해야 한다.

 

종교다원주의는 어떻게 하면 종교와 신앙의 이름으로 자행된 무수한 폭력과 증오의 문제를 신앙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나온 해결책이다.

 

 

□ 종교는 신이 아니다

 

종교 비판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하나는 종교 외적 비판으로 니체마르크스프로이드 같은 서구 근현대 세속주의 사상가들의 종교 비판이다이들 화살은 주로 그리스도교를 향한 것이었다다른 하나는 종교 내적 비판으로 한 종교 내의 양심적인 신앙인이나 사상가나 영성가들 그리고 신비주의자들이 제기해 온 자기 종교 비판이다

 

사랑정의평화그리고 겸손과 관용은 모든 종교의 공통된 가르침이며 종교내의 양심적인 신앙인들은 항시 자기가 속한 종교를 엄중한 잣대로 비판해왔다종교다원주의가 추구하는 일련의 실천적 가치들은 사실상 개별 종교의 교리나 사상보다도 우선적일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종교는 결코 신이 아니다종교는 어디까지나 신 또는 실재를 지향하고 가리키는 상징이다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달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신앙인들은 잘 알고 있다종교다원주의는 이러한 현상에 주목하면서 종교의 교리나 사상이 어디까지나 실재를 가리키는 상징이고 방편이지 진리나 실재 그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에 입각한 이론이다.

 

 

 

□ 겸손한 신앙인의 자세

 

종교의 전통적인 절대적 진리 주장을 돌이킬 수 없게 무력화시킨 역사학문화인류학비교종교학과 같은 현대 학문들이 오히려 순수한 종교 내지 종교 비판의 소리를 명료하게 해준다는 사실이 아이러니이다.  종교다원주의는 결코 또 하나의 종교가 아니며오히려 자신의 종교에 충실하면서도 초월적 실재 앞에서 그 한계를 의식하는 겸손한 신앙인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이론이다

 

종교는 길이다길은 달라도 우리는 모두 같은 산을 오르고 있다영성은 산을 오르다가 가끔 볼 수 있는 산정의 황홀한 모습이다. 제대로 된 길이라면 그렇다물론 잘못된 길도 있다산정을 향하지 않고 가끔씩이라도 산정을 보게 하기는커녕 엉뚱한 곳으로 인도하는 종교다그런 것을 사람들은 사교라 한다그러나 제대로 된 길이라도 여러 개가 있으며도중에 보이는 산정의 부분적 모습도 다를 수 있다하지만 우리는 같은 산정을 향해 오르고 있다는 믿음과 희망으로 지상의 삶이 다할 때까지 구도의 길을 멈추지 않고 걸어가야 한다.

 

 

 

 

 

  

3〕 종교의 존재 이유

 

 

(8) 종교에서 영성으로

 

□ 영혼의 부름

 

외면할 수 없는 양심의 소리영성을 일깨우는 영혼의 음성 또는 신의 부름은 언젠가 반드시 우리를 찾아오고야 만다.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증언하는 것은 인간은 영성을 지닌 존재로서 어떤 보이지 않는 초월적 실재를 지향하는 영적 존재라는 것이다이 영성을 자각하고 실현하는 일이야말로 종교의 근본 목적이다그러나 오늘의 문제는 종교와 영성이 유리되어 따로 논다는 데 있다.

 

초월적인 실재 혹은 세계와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시각새로운 차원에서 삶을 살고자 하는 인간의 영적 본성 내지 성향을 가리키는 말이 영성(spirituality)이다.

 

 

□ 종교와 영성은 동반자

 

종교와 영성은 같이 간다인류 역사를 통해 영성은 언제나 특정 종교의 전통 속에서 함양되어 왔다종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한’ 영성이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 우리에게 찾아온 절호의 기회

 

개인의 발견과 더불어 주체적 인간이 출현하는 근대 세계에 들어오면서 종교는 인간의 주체성과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라는 의식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그에 따라 현대인들은 종교를 외면하기 시작했다그러나 종교는 외면당할지언정 인간의 영성이 사라지거나 무시되는 일은 없다.

 

감성이나 이성과 마찬가지로 영성이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인 한현대인이라고 영성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현대인들은 오히려 종교의 전통과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짐에 따라 다종교적 영성초종교적 영성 또는 비종교적 영성을 키울 수 있는 공전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종교 간의 벽을 넘고 종교와 비종교의 구별마저 초월하는 인간 본연의 순수한 영성을 회복하고 실현할 수 있는 초유의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9) 영성의 대가를 만나다

 

 

□ 영성의 대가들이 증언하는 바는 영성은 인간의 참나참자아이며인간 내면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심층적 실재이다.

 

영성은 인간의 진정한 인간성 자체로서 이 본성을 깊이 자각하고 완전히 실현하는 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지고의 행복이다.

 

- Ken Wilber는 인간의 의식 발달 단계를 1) 인격 형성 이전의 단계, 2) 인경의 단계, 3) 초인격적 단계로 구분하고초인격적 초이성적 단계야말로 인간의 정신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이며 모든 종교 특히 신비주의 영성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구원의 세계라고 말한다.

 

근대 생물학적 인간관들의 주창자들이 인간의 허위의식을 폭로하고 위선의 가면을 벗기는 데 공헌한 것은 사실이지만그것을 인간 해방의 복음으로 내세운다면 곤란하다그들에게 도덕과 영성은 결국 동물적 본능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성에 대한 폭력적이고 압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신비주의 영성의 세계

 

우리나라 선불교 사상에 확고한 기초를 다져 놓은 보조국사 지눌의 선 사상중세 가톨릭 신학자이자 영성가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 사상그리고 정통 힌두교의 불이론적 베단타 사상을 고스란히 계승하고 재현하여 현대 인도에서 가장 위대한 성자 가운데 하나로 추앙받는 라마나 마하리쉬의 영성 사상이 동서양의 영성을 대표하는 사상이다.

 

이들은 각기 자기가 속한 종교 전통의 언어를 사용해서 영성이 지향하는 실재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지눌은 이 궁극적 실재를 진심’ 혹은 공적영지심이라고 부르며에크하르트는 지성’, 라마나 마하리쉬는 진아’ 혹은 나의 나라고 부른다이 세영성의 대가 모두는 인간에게 감정이나 욕망이성적 사고나 분별지를 넘어서 인간 모두에게 공통된 영적 본성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이 영적 본성영적 인간성의 깊은 자각과 완전한 실현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인생의 궁극 목표이자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한다.

 

신비주의적 영성의 핵심은 절대적 실재즉 신브라만법신혹은 진여와 인간의 본래 마음 곧 진아가 모두 하나라는 통찰에 있다.

 

 

(10) 어디서나 하느님을 만나다

 

 

□  모든 종교의 신앙생활과 영성의 핵심

 

이슬람의 한 수피 영성가는 처음 카바를 방문했을 때 카바만 보고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고그 다음에 갔을 때 카바와 함께 하느님을 보았으며,  마지막 세 번째 방문에서는 카바는 사라지고 하느님만 보았다고 말했다.

 

 

□ 상징에 매달려 초월적 존재를 놓치다

 

어떤 종교든 상징을 가지고 있다보이지 않는 실재를 매개해 주는 보이는 것들을 상징으로 가지고 있다유감스럽게도 신앙인들은 종종 이러한 사실을 망각한 채 상징이 실재 자체인 줄 착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한다상징이 상징임을 모르고 절대적 실재로 간주하면서 절대화하는 것이다

 

상징의 존재 이유는 어디까지나 초월적 실재와의 만남을 매개해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상징을 절대화하고 숭배하며 거기에 집착하면서 이것을 신앙이라고 착각한다종교에 의한 인간소외가 시작되는 것이다종교적 우상숭배는 세속적 가치를 숭배하는 우상숭배 못지않게 위험하다.

 

상징을 절대화하는 이유는 첫째는 문자주의둘째는 종교의 교리가 상징의 상징성을 거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 하느님을 만나는 법

 

어떤 종교든 전통의 권위가 신의 권위와 혼동되고 상징과 실재가 동일시되는 매우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전통을 절대화하고 고수하려는 보수주의근본주의광신주의는 위기를 더욱 가속화시킨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는 길은 상징을 상징으로 알아 상징의 고착화를 피하고 낡은 상징적 언어는 현대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과감히 재해석하거나 바꾸는 제3의 길에 있다이것이 각 종교들의 현대주의자들이 하는 일이다

 

그리스도교의 경우 F. Schuleiermacher라는 걸출한 신학자 이후 현대 개신교 신학이 줄곧 추구해온 길이며이를 통해 수많은 현대 지성인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다가톨릭의 경우도 1960년초 제2차 바티간 공의회를 통하여 신학의 문을 과감히 열어서 현대의 시대정신과 대화하는 길을 택했다현대 이슬람이 처한 근본적인 위기의 본질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러한 이슬람 현대주의’ 내지 현대주의적 이슬람의 세력이 매우 약하다는 데 있다.

 

 

□ 상징에서 해방될 때 영성의 세계가 열린다

 

탈종교 시대의 영성은 이러한 현대주의자들의 선택 이상을 요구하고 있다현대주의자들은 아직도 한 종교에만 머무르는 신앙에 만족하기 때문이다탈종교 시대의 영성은 현대화 작업보다도 더 과격한 선택을 요구한다.

 

수피 영성가가 발견한 카바는 사라지고 하느님만 남는 영성의 단계이다상징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고 하느님만 남게 되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영성의 세계가 열리게 된다.

 

새로운 영성에서는 상징이 상징임을 아는 사람에게는 자기 종교의 상징뿐 아니라 다른 종교의 상징에도 마음의 문을 열 수 있게 된다자기 종교의 언어와 전통을 주로 배우고 사용하되타종교의 상징도 자유롭게 섭렵하면서 영적 자양분을 흡수하는 영성의 세계가 열린다.

 

그 뿐 아니라 종교적 상징에서 해방된 사람은 종교 다원적 영성마저 초월하여 모든 사물모든 경험이 종교적 경험이 되는 영성으로 들어가게 된다종교와 비종교성과 속진과 속세간과 출세간하느님과 세상자연과 초자연의 이원적 대립을 초월하는 문자 그대로 초종교적 영성의 세계가 열린다종교의 상징만 초월을 매개해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사물과 다양한 경험들도 깨달음과 지혜를 얻는 계기가 되며 하느님과 만나는 상징과 매개체가 된다.

 

종교와 비종교의 경계가 무너지면 언제 어디서든 하느님을 만나고 부처를 본다존재하는 모든 것이 초월의 상징이 되고 세상의 시끄러운 언어가 모두 초월의 통로가 될 수 있다하느님 혹은 절대적 실재 자체에 종교와 비종교성과 속진과 속의 이원적 구별이 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종교가 필요 없다하느님은 그리스도교 신자도 아니고 불교 신자도 아니다.

 

종교 아닌 종교의 세계세속을 떠나서 하느님을 만날 뿐 아니라 세속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진속불이의 경지하느님마저 떠난 하느님 너머의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바로 초종교적인 영성의 세계인 것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자유롭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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