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난 부끄럽다"…아프리카 먹여살려 칭송 받은 그의 후회

 

< 중앙일보, 안혜리 기자,  2024.03.27 >

 


우리는 아프리카를 모른다. 구호단체 모금 영상 속 기아·질병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어린이의 이미지가 아프리카의 전부라고 착각하며 겁을 먹는다. 전 세계 정보가 실시간으로 쏟아지고 해외여행이 일상화한 지금도 그러한데 하물며 1970년대엔 어땠을까. 가난과 재해, 전염병, 여기에 내전까지 덮친 저 먼 땅을 자기 삶의 터전으로 삼겠다는 생각을 하기란 그 누구라도 쉽지 않다. 그런데 그 시절 서울대 교수라는 안정된 삶, 그리고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원이라는 빛나는 커리어 대신 아무런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아프리카를 선택한 남자가 있었다. 나이지리아를 세계 8대 작물 카사바(타피오카 원재료) 세계 1위 생산국에 올려놓은 '나이지리아의 우장춘' 한상기 박사(91)다. 

 

그는 왜 '한국의 우장춘'이 아니라 '아프리카의 우장춘'이 된 걸까. 1994년 은퇴 후 미국생활을 거쳐 2013년 귀국해 수원 광교에 자리 잡은 한 박사를 지난 4일 만나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마침 그날은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 2024년 대한민국과학기술유공자로 한 박사를 지정하고, 그의 집에 명패를 부착한 날이었다.

 


'슈퍼 카사바'로 기아 해결 기여
세계은행서도 공로 인정받아
현지 연구 자립 위해 700명 배출
핵심 후학, 내전 속 살해돼 먹먹

 

 


#명예 대신 도전, 운명이 된 선택


어떤 선택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서울대 농과대학 교수 시절인 30대 후반 영국과 나이지리아에서 각각 날아온 두 개의 초청장이 딱 그랬다. 하나는 케임브리지대 식물육종연구소(Plant Breeding Institute)라는 명예의 길, 다른 하나는 건물도 없이 이름뿐이던 나이지리아 국제열대농학연구소(IITA)라는 도전의 길이었다. 명예보다 도전을 택했다. 위험하다며 어릴 적 수영도 못 하게 했던 아버지, 가지 말라고 눈물로 호소하던 어머니. 두 분이 연이어 갑작스럽게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편안한 삶에 안주했을지도 모른다. 효도 한 번 못했다는 죄책감은 뒤로 한 채 중학생 큰딸은 제자에 맡기고 아내와 어린 삼 남매만 데리고 험난한 아프리카행에 나섰다. 어떻게 그런 담대한 결정을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그 선택이 운명이 됐다는 것이다.


#첫 번째 도전, 미네소타 프로젝트


고향 충남 청양은 칠갑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샛강과 백마강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장마철이면 강물이 범람했고, 가난한 농부들은 농사를 망치고 보릿고개를 겨우 넘기며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대전중학교 국어 시간에 우장춘(1898~1959) 박사 얘기를 듣고 인생 경로를 정했다. 우 박사 같은 사람이 되어 우리나라의 배고픔을 해결하고 싶었다. 그런 열정으로 서울 농대에 갔고, 졸업 수학여행 때 만난 우 박사는 그런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줬다.
대학원 졸업 후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미 국제협력처가 1000만 달러를 지원한 '미네소타 프로젝트' 교환교수 기회를 얻은 거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제3 세계 43개국에서 진행한 국가 재건 프로젝트 중 하나였던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형편없던 한국 의학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실은 의학뿐 아니라 한국의 공학·농학 발전도 여기서 기인한 바가 크다. 1955~62년 서울대 교수진 226명이 미네소타 대학에 장단기 연수·유학을 갔는데, 여기에 선발됐다. 1960년부터 1년 동안 학비는 물론 숙식 등 모든 비용 걱정 없이 식물육종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서울대가 한국에선 최고의 대학이지만 그 시절 기초학문을 연구하기엔 초라했다. 선진 학문을 접해보니 배움의 욕구가 더 커졌다. 교수로 막 임용된 1965년 이 분야 거목 존 그래피우스 교수에게 청해 미시간주립대에서 박사를 했다. 가족은 시골 부모님 댁에 두고 홀로 유학을 갔다. 한국에 남은 가족은 비록 쥐꼬리만 해도 서울대에서 나오는 월급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는데, 무슨 영문인지 갑자기 외국 체류자에게 주던 봉급이 끊겼다. 그래피우스 박사는 이 소식을 듣고선 "가족에게 송금하라"며 매달 내 책상 위에 50달러 수표를 놓고 갔다. 다시 봉급이 나와 돈을 갚겠다고 하자 "100년 후에 갚으라"고 했고, 귀국 땐 비행기 표 살 돈까지 마련해줬다. 미국은, 그리고 그 나라 최고 석학은 이렇게 가난한 나라의 미래를 위해 유학생 하나를 정성껏 키워냈다.


박사를 마치고 돌아온 1967년 서울대 교수 월급으로 살 수 있는 곳은 방 한 칸짜리 사글세뿐이었다. 얼마 후 수원에 온 가족과 함께 들어간 수원 서울농대 교수 관사도 비만 오면 지붕에서 물이 새고 부엌에 물이 차는 열악한 곳이었다. 그렇다고 공부 열정이 꺾이진 않았다.

 


# 두 번째 도전, 나이지리아의 식량난


유학 시절 논문 세 편이 영국 유명 학회지 '헤레더티(Heredity)'에 등재돼 영국과 나이지리아에서 일할 기회가 생겼다. 잠깐의 면접을 위해 김포공항을 떠나 홍콩, 태국 방콕, 인도 뭄바이, 예멘,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케냐 나이로비, 우간다 엔테베를 거쳐 4일 만에 나이지리아 라고스 공항에 도착했다. 당시 가장 빠른 항로였다. 육로로 100㎞를 더 달려 국제열대농학연구소(IITA)가 있는 항구도시 이바단에 도착했다. 10만 전사자와 100만 아사자를 낸 참혹한 비아프라 내전(1967~70) 직후라 엉망인 길 위로 파괴된 탱크와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희망조차 말라 죽은 대륙이었다. 이상하게 두려움 대신 아프리카 식량난을 해결하고픈 도전 욕구가 솟구쳤다. 당초 귀국편에 다른 면접장소 런던이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나이지리아였다.


당시 미국은 '굶주리면 공산화된다'는 우려에, 포드 재단과 록펠러 재단을 통해 식량난 해소를 목표로 전 세계 곳곳에 농업연구소를 세우던 중이었다. IITA는 통일벼로 유명한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IRRI)와 멕시코 국제밀옥수수연구소(CIMMYT)에 이은 세 번째 연구소였다. CIMMYT에서 일하던 노먼 볼로그(1914~2009) 박사가 내병다수성(耐病多收性·병충해에 강한 다수확) 밀을 만들어 멕시코·인도에 보급한 녹색혁명 공로로 1970년 노벨평화상을 받을 정도로 성과가 뛰어났다.

노벨상 같은 보상을 기대하고 이바단에 간 게 아니다. 북한 수교국 나이지리아는 당시 우리와 국교가 없어 위험했고, 연구해야 할 카사바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작물이었다. 참고할 자료도 없었다. 앞서 아프리카에 온 서구 연구진이 있었지만 이들은 고무 같은 돈 되는 작물에만 관심 있고 아프리카 기아를 해결할 카사바 같은 식량 작물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내가 내병다수성 슈퍼 카사바 개발에 성공(1976)한 지 10년쯤 뒤 일본 재벌 사사카와 료이치 일본선박진흥회 회장 부탁을 받고 가나에 온 노먼 볼로그조차 3~4년 만에 큰 성과 없이 아프리카를 떠났다. 명분은 기아 해결이라면서도, 서양 연구자들은 돈벌이에 급급하거나 아프리카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배곯아본 난 달랐다. 그들의 아픔을 이해했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었다. 수확량이 기존 카사바의 두 배가 넘는 신품종 카사바의 성공은, 그래서 내겐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연구소 반대를 무릅쓰고 카사바 줄기를 차에 싣고 시장에 가 나눠준 이유다.

 


#세 번째 도전, 한상기 프로젝트


'한상기 박사 연구로 카사바 병 문제가 해결되다.' 나이지리아 식량 혁명의 시작을 알린 나이지리아 데일리 타임스 1면 기사(1976)다. 치명적 바이러스와 박테리아로 생산량이 절반으로 줄었던 카사바를 개량해 나이지리아를 비롯해 아프리카 41개국 식량난 해소에 지금까지 도움을 주고 있다. 그 덕에 영국 기네스 과학공로상(1982), 영국생물학술원(Institute of Biology·영국 생물학회의 전신) 펠로 상(1984), 브라질리아 대학 주최 카사바 학회 공로상(2006) 등을 받았다. 케네디 정부 국방장관을 지낸 로버트 맥나마라 세계은행 총재(1968~81 재임)는 "한 박사의 슈퍼 카사바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땅에 빚을 덜 지게 해주는 신기술"이라 칭송했다.

영예로운 상들보다 더 기뻤던 건 1983년 연구소에서 50㎞ 떨어진 이키레 읍에서 '농민의 왕'(세레키아그베)이라는 칭호를 받고 요루바족 추장으로 추대된 일이다. 내 연구가 연구소 안에 머물지 않고 그들의 삶을 도왔다는 인정을 받아서다.

추앙받는다고 언제까지나 아프리카 왕으로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미국이 나를 키운 것처럼, 나도 아프리카 사람을 키우고 싶었다. 1994년 IITA를 떠나 아이들이 있는 미국에 갈 때까지 23년 동안 위험한 출장을 마다치 않은 건 이런 이유도 있다. 아프리카 비행기는 퇴물이라 언제 추락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기상 정보 입수조차 안 되는 아프리카 공항은 토네이도가 몰려와도 알 길이 없었고, 활주로는 엉망이었다. IITA 직원 3명이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할 정도였다. 그래도 끊임없이 가서 지도했고, 연구소에 데려와 훈련시켰다. 그렇게 키운 게 700여명에 달한다.

그중 잊히지 않는 인물이 자비 들여 만든 ‘한상기상’ 1, 2회 수상자인 르완다의 조지 은다마제 중앙농업시험장장과 조셉 물링다가보 지방농업시험장장, 그리고 시에라리온의 은잘라 농과대학 다니야 학장이다. 은다마제와 물링다가보는 1994년 6월 르완다 내전 당시 온 가족이 폭도들에게 몰살당했다. 시에라리온 내전(1991~2002) 때 값비싼 가재도구는 다 버려두고 슈퍼 카사바만 자동차에 싣고 피난 갈 정도로 그 나라 농업의 미래를 고민했던 다니야 역시 강도에 살해당했다. 르완다와 시에라리온은 이렇게 허무하게 아까운 인재를 잃었다.


하지만 가장 안타까운 건 한국 농업발전에는 아무런 기여를 못 했다는 점이다. 나이지리아 정착 초기부터 가족 전부 흡혈 파리(sand fly)에 물리고 말라리아에 걸리는 등 희생했고 이를 밑거름 삼아 나는 명예를 얻었다. 하지만 20년 넘도록 1년에 얼굴 한 번 본 게 고작인 큰딸의 결혼식엔 아예 못 갔고, 치안이 불안한 타지에서 남편 양말 기워가며 외롭게 가족 뒷바라지한 아내는 2009년 미국에서 치매 증상을 보인 끝에 2013년 귀국 후 2020년 세상을 떠났다. 땅이 꺼지고 세상이 무너지는 거 같았다. 미안한 마음뿐이다. 하지만 더한 후회는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거보다 한국을 돕지 못했다는 점이다. 비록 그땐 아프리카 식량난이 내 조국보다 더 극심해 여기에 인생을 걸었지만 부끄럽고 죄송하다. 내 조국 한국에, 그리고 사랑하는 내 가족에게.

시각장애 의원의 분투 “정치 들러리로 남지 않으려는 4년이었다”
여야 모두 극찬한 ‘여의도 활동記’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 에세이 출간

< 조선일보, 양지혜 기자, 2024.01.15. >

 


“지난 4년간 ‘여의도 들러리’로 남지 않으려고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많은 분이 저를 ‘어항’ 속에 가두려할 때, 어떻게 그걸 깨고 헤쳐 나왔는지 진솔하게 썼습니다.”

피아니스트 출신으로 첫 여성 시각장애인 의원인 김예지(44) 국민의힘 의원이 여의도 활동기를 다룬 책 ‘(어항)을 깨고, 바다로 간다’를 최근 출간했다. 오는 4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인들의 출간 소식이 여의도에 홍수처럼 쏟아지는데 그의 책은 여야 진영을 막론하고 호평을 받는다. 신당 ‘새로운선택’의 곽대중 대변인은 페이스북에 “책장마다 감동하고 감탄했다. 예의상 건네는 말이 아니라 정치인 에세이 중에 최고”라며 “각자의 앞을 가로막은 차별·혐오·가난 등의 장벽을 넘어 우리는 바다로 나아갈 것”이라고 했다.

21대 총선에서 미래한국당 1호 인재로 영입돼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김 의원은 당 최고위원을 거쳐 최근 출범한 ‘한동훈 비대위’ 위원까지 맡고 있다. 장애인 의원으로서는 이례적인 활약이다. 그는 “처음 비례대표 제의를 받았을 때, 당 관계자들은 ‘당신이 안내견과 국회를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큰일을 하는 것’이라며 생색내기용 4년짜리 들러리로 저를 영입하려는 뜻을 숨기지 않았다”면서 “장애인에게 별 기대가 없는 그 무관심의 어항부터 깨부수고 싶었다”고 했다.

김 의원은 책에서 ‘내게는 불빛이 필요 없지만, 어두운 밤이면 여러분을 위해 불을 켜드릴 것이다. 여러분은 저 뒤편 어항 구석에 남아서 웅크리고 있는 ‘코이’가 있는지 확인해 주시길 부탁드린다’고 했다. 그는 작년 6월 국회 대정부질문 때 ‘코이의 법칙’을 언급해 화제가 됐다. 작은 어항 속에서는 10cm 미만으로 자라지만, 강물에서는 1m 넘게 자라나는 물고기 ‘코이’를 예로 들면서 “사회적 약자들이 어항을 깨고 기회의 균등 속에서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정부가 강물이 되어주시기를 기대한다”고 해 여야 의원들의 기립 박수를 받았다. 그의 ‘어항’ 경험담을 집대성한 게 이번 책이다.

김 의원은 장애인 의원들이 으레 선택하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가 아닌 문화체육관광위에서 활동했다. 대표 발의 법안 169건, 공동 발의 법안 1381건으로 총 1550건의 법안을 제출(작년 12월 가준)해 21대 국회의원 300명 중 일곱째로 많은 법안을 발의했다. 그는 “유엔 장애인권리협약 선택의정서를 비준시켜 국내에서 장애인 권리 구제가 안 될 경우 유엔에 직권조사를 신청할 수 있게 된 것과, 의약품·식품 등에도 점자 표기를 하도록 개정안을 통과시킨 일 등이 가장 보람찬 활동”이라며 “여성 장애 예술인 국회의원으로서 여의도는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어항들이 모여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라고 느꼈다”고 했다. 이어 “앞을 볼 수 없기에 정확한 언어로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훈련을 평생 해왔는데, 정치야말로 ‘언어의 예술’이 될 수 있는 영역”이라고 했다.

김 의원은 숙명여대 피아노과 일반 전형 수석 입학에 미국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피아니스트다. 또 전국 장애인 동계 체육 대회 메달리스트(크로스컨트리·바이애슬론)이며, 시각장애인을 위한 형태 입체 악보로 특허를 딴 개발자이고, 조향(調香) 관련 창업에 뛰어드는 등 다양한 ‘어항 깨기’ 이력을 자랑한다. “봉사(시각장애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가 하는 봉사가 참봉사”라고 스스럼없이 농담하는 유머 감각까지 갖췄다.

요즘 그가 천착하는 과제는 ‘격차 해소’다. 단순히 장애·비장애의 격차 해소뿐만아니라 소득 격차, 지역 격차 등 우리 사회의 많은 격차를 해소할 방안을 모색한다. 김 의원이 이번 비대위에 참여한 이유도 한동훈 위원장이 “격차 해소에 힘을 보태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그는 “갈수록 양극화되는 여야 정치 지형 속에서 ‘약자와의 동행’이라는 중심을 놓지 않으려 노력했고, 그 일환으로 이태원 참사 1주기 추모식 참석 및 사과 등을 했다”고 설명했다.

“작곡가 슈만에게 아내 클라라가 전부였던 것처럼, 의원에겐 국민이 전부여야 합니다. 우리 당의 클라라이자 함께 어항을 깨고 바다로 나갈 ‘동료 코이들’인 국민 여러분을 위해, 임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소속 : 국민의힘(비례대표)
학력 : 위스콘신대학교 메디슨캠퍼스 대학원 피아노 연주 교수법 박사
수상 : 2020년 국민의힘 국정감사 우수의원상
경력 :
2023.10~ 국민의힘 최고위원
2020.09~ 제21대 국회의원 (비례대표/국민의힘)
2020.07~ 제21대 국회 전반기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

반세기 걸쳐 ‘주역’ 풀어냈다, 3300쪽 해설서 낸 90세 학자
‘주역’과 ‘십익’ 해설서 펴낸 윤재근 한양대 명예교수

<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2023.11.27.  >

 


서른 살이 될 무렵 부친이 그에게 말했다. “너도 이제 ‘주역(周易)’과 가까이하거라. 어디서 살든 날마다 주역을 보면 인생의 왕래(往來)에서 순조로운 길이 넓혀짐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60년의 세월이 흘렀다. 구순(九旬) 나이에 접어든 윤재근 한양대 국문과 명예교수가 새 책 세 권을 냈다. ‘주역’ 상·하경과 공자가 지었다는 주역 해설서인 ‘십익(十翼)’(이상 동학사)이다. 모두 3300여 쪽, 원고지 2만2000장 분량이다. 주역과 십익을 해부하듯, 따로 자전을 찾아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한 글자 한 글자를 꼼꼼이 풀어내고 문장을 자세히 해석했다. 서울 광진구 윤 교수 자택에 있는 12권짜리 ‘중문대사전’엔 포스트잇 수백 장이 빼곡했다. 키보드를 치느라 손톱이 닳을 지경이라고 했다.

윤 교수는 1991년 ‘장자(莊子)’를 쉽게 풀어쓴 책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 등이 밀리언셀러가 됐던 왕년의 인기 작가다. “사람들이 5공화국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던 때였어요. 길면 길다고 자르고 짧으면 짧다고 늘리려 했던 시대적 분위기에 대한 반감 때문에 책을 많이 봤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집필에 꼬박 반세기가 걸렸다는 이번 책은 어디에도 대중서의 자취가 느껴지지 않는다.

어린 시절 윤 교수는 산골 소년이었다. 경남 함양 백운산 자락에서 약초를 캐는 채약인(採藥人)의 아들로 자랐다. 6·25전쟁이 나자 가족은 빨치산이 창궐하는 산에서 내려와야 했고, 부친은 농사를 지을 줄 몰랐다. 뭘 하며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던 청년 윤재근은 출가하려고 절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만난 고암(1899~1988) 스님이 그에게 넌지시 말했다. “너는 중이 되지 말고 대학에 가서 학자가 되거라. 네가 쓴 책 수만 권을 세상 사람들이 읽게 될 것이다.” 늦은 공부를 시작해 서울대 영문과에 들어갔을 때 서른 살이었다. 만해 한용운을 연구하는 한편 부친의 뜻을 받들어 주역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왜 주역인가? “많은 사람들이 주역을 점술서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윤 교수는 “주역이 이끌어주는 점은 복채를 들고 점쟁이를 만나는 점치기가 아니라, 내 삶의 왕래를 나 스스로 날마다 점쳐보라고 간절히 부탁하는 책입니다.” 주역의 점치기를 역수(易數)라고 하는데 이것은 역수(逆數)와 통하는 말이다. 미리 거슬러[逆] 헤아려보라[數]는 것이다.

그렇게 내다봐야 할 앞날이란 결코 먼 미래가 아니라고 윤 교수는 말했다. “예전에는 ‘인생 닷새’란 말이 있었습니다. 그제·어제와 오늘, 내일·모레의 5일에 정성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죠.” 주역은 오늘로써 그제·어제를 반추하고 곧 다가올 내일·모레의 삶을 건강하게 성취할 수 있는 길잡이라는 얘기다. 이것이 바로 일신성덕(日新盛德·훌륭한 덕을 날마다 새롭게 함)인데 허황된 미래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욕심부리지 않고 날마다 새로운 삶을 개척하라는 뜻이다. 경쟁하는 삶이 사납고 치열해질수록 길잡이가 되는 책이 주역이라는 말이다.

“주역은 6·25 전까지만 해도 식자층의 필독서였어요. 주어가 신(神)인 성경, 여래(如來)인 불경과 달리 주역은 주어가 ‘나’로 돼 있는 책입니다.” 하지만 점차 서양 문물이 들어오며 주역은 잊히고 오해받게 됐다는 것이다. ‘논어’ ‘맹자’와 ‘노자’ ‘장자’의 번역서도 낸 윤 교수는 “그 책들도 따지고 보면 결국 주역 풀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주역 64괘(卦)를 꼭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무심코 주역을 열어 드러나는 괘가 바로 그날 심독(心讀)할 인연이라는 것이다. “경문 자체가 삶의 길잡이인지라 굳이 외우려 하지 않아도 문득문득 마음에 떠오르게 됩니다.” 예를 들어 25괘를 펴들면 ‘밭 갈면서 수확을 생각하지 않고 첫째 밭을 일구면서 삼 년 뒤에 좋은 밭이 되리라 여기지 않으니, 곧 갈 바가 있어 이롭다’는 문장이 나온다. 일을 하면서 탐욕을 부리지 않고 순리대로 성과를 얻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윤 교수는 자택 연구실에서 또 다른 집필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과거 그를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게 했던 ‘장자’의 결정판이라고 한다. “중요한 부분을 정선해서 책만 보고 독학이 가능하도록 쓰고 있어요. ‘장자’ 훈장 노릇 제대로 해볼 생각입니다.”

‘기업은 나라 것’이라던 할아버지가 준 최고의 선물? 내가 나로 살게 한 자유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박사의 손녀 유일링


< 조선일보, 김윤덕 선임기자,  2023.>



독립운동가이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었던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박사의 손녀 유일링(柳恩令) 씨가 2023년 10월 24일 서울 용산 보건장학회에서 조선일보와 인터뷰 하고 있다. 할아버지처럼 아웃사이더 기질이 있다는 유일링씨는 "모두가 가는 길을 따라가지 않고 소신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유한양행 창업주인 유일한(柳一韓·1895~1971)이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된 건 그가 남긴 유언장에서 비롯됐다. 손녀의 대학 학자금 1만달러를 제외한 전 재산을 사회에 내놓는다는 내용의 유언장이 공개되자 한국 사회가 신선한 충격에 휩싸였다. 정치 비자금, 탈세, 세습 경영을 당연시하던 1970년대였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1만달러 ‘상속’의 주인공 유일링(62)씨는 “우리 가족은 오히려 ‘그렇게나 많이?’ 하고 놀라워했다”며 웃었다. “기업은 국가와 사회의 것이니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는 할아버지 말씀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고 자라 전혀 놀랍지 않았다”고 했다.

유일한 박사의 하나밖에 없는 직계 후손이지만 경영에 가족이 관여하지 않는다는 철칙에 따라 그는 유한학원 재단과 보건장학회 이사로만 이름을 올린 채 미국 애리조나에서 권총 사격 코치로 일하며 산다.


◇대학에 보냈으니 자립하라


-국내 1위 제약 회사를 일군 할아버지가 유산을 1만달러만 남겨 섭섭하지 않았나?

“전혀! 스스로 능력이 있어야지, 누가 죽기만을 기다렸다가 유산을 받는다는 건 우리 가족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웃음). 1만달러나 주셔서 오히려 놀랐다. 특히 저의 대학 등록금으로 남겨준 선물이라 더욱 의미 있고 감사했다.”

-외아들 유일선에게도 ‘대학까지 보냈으니 자립하라’고 했더라.

“임원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미국 변호사였던 아버지(유일선)가 60년대에 잠시 한국에 들어와 경영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러나 얼마 안 돼 할아버지가 해고하셨다(웃음).”

-경영이 적성에 맞지 않았던 걸까?

“아버지는 국내 기업 최초로 IBM 컴퓨터를 도입하고 킴벌리 클라크와 합작회사도 설립했다. 할아버지처럼 창의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분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성장해 한국 문화에 적응하길 어려워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서로가 더 좋은 선택을 하길 원했다. 아버지는 자유를 얻는 대신 스스로 개척하는 인생을 택했다.”

-맏딸인 유재라에겐 땅 5000평을 남겼던데.

“할아버지가 부천에 세운 유한공업고등학교에 포함된 부지다. 할아버지 묘소와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유한의 문지기로서 기업과 학교에 친인척들이 얼씬 못 하게 하고, 할아버지 경영 철학에 맞게 회사가 굴러가는지 지켜보는 사명을 맏딸인 고모에게 남긴 것이다. 고모 또한 1991년 세상을 떠나면서 전 재산을 유한재단에 기부했다.”

-유일한 박사는 아들보다 딸을 더 신뢰했을까?

“우리 집에선 성별이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할아버지와 우리 가족을 사랑하는 이유다. 할아버지는 아내와 딸에게도 총 쏘는 법을 가르쳤다. 자기 몸은 자기가 지켜야 한다며. 딸에게 문지기 사명을 맡긴 것도 그 때문이다. 친척들이 일자리를 부탁할 때 ‘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고모였다.”


◇정치자금? 정직한 납세가 애국


-유일한 박사는 왜 그토록 전문 경영인 체제를 고집했을까.

“할아버지는 모든 직원이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가족이나 친인척이 회사에 버티고 있으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저 자리까지는 못 올라가겠구나 하는 생각에 좌절하고 날개를 펼칠 수 없다고 하셨다. 물론 가족의 경영 참여가 나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유일한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 유한양행을 주식회사로 전환하고 종업원 지주제를 실시했다. 그 시대에 그런 발상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할아버지는 아홉 살에 선교사를 따라 미국으로 갔다. 네브래스카의 청교도 가정에 입양돼 일하고 공부하며 대학까지 다녔고, 졸업 후 숙주 통조림을 파는 회사 ‘라초이’를 창업해 성공시킨 사업가였다.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미국의 경영 철학과 시스템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미국 기업이 다 그렇진 않다.

“물론이다. 그런 점에서 나도 할아버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성공한 사업가가 돼 고국의 부모님을 만나러 왔을 때 할아버지는 질병과 가난에 고통 당하는 국민을 보고 충격을 받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에 남아 뭘 할 수 있는지 고민하다 의사인 아내와 종로에 제약 회사를 세웠다. 할아버지에겐 처음부터 기업을 하는 목적이 이윤 극대화에 있지 않았다.”

-정치자금을 헌납하라는 정권의 요구를 거절해 세무조사를 받았는데 아무리 털어도 먼지 한 톨 안 나와 세무당국이 당황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기업이 비자금을 내고 국가의 특혜를 받는 걸 당연히 여기던 때라 회사에도 할아버지를 이해 못 하는 임원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사업과 정치가 같이 가면 안 된다는 것이 할아버지 신념이었다. 정치자금 대신 정직한 납세가 애국이라고 믿었다.”

-교육에 대한 관심도 지대했던 유일한은 1964년 전교생에게 전액 장학금을 주고 기술을 가르치는 유한공고를 세웠다.

“할아버지는 국가와 국민을 더 강하게 하는 기반이 교육이라고 믿었다. 전쟁으로 폐허 된 나라를 다시 세우는 데 공업 기술과 엔지니어가 절실하다고 믿고 설립한 학교가 유한공고다. 지금도 할아버지 말씀이 생각난다. ‘네가 얼마나 아느냐, 지식이 많으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그 지식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내년이 개교 60주년이다.”


◇유일한과 펄 벅의 우정


-유일한은 이승만, 서재필과 함께 1919년 4월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를 이끈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지만, 태평양전쟁 때 미 전략사무국(OSS) 특수 요원이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반도에 침투해 일제를 타격하는 일명 ‘냅코 프로젝트’ 요원이었다. 가족에겐 한마디도 하지 않고 LA 산타칼리나섬에 들어가 군사훈련을 받으셨다. 그때 나이 50세였다. 작전 수행 중 죽을 수도 있으니, 아들은 네브래스카의 친구에게, 딸은 매사추세츠에 사는 친구에게 맡기고 섬으로 들어가셨다고 한다. 그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땐 무척 놀랐지만, 할아버지라면 일본을 상대로 한 싸움에 당연히 뛰어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OSS에서 유일한은 펄 벅을 만난다. 훗날 노벨 문학상을 받는 펄 벅과 우정이 각별하더라. 그의 소설 ‘살아 있는 갈대’는 유일한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었다.

“할아버지와 펄 벅을 서로 가깝게 만든 요소는, 펄 벅이 하이브리드(hybrid)라고 표현한 혼혈 아이들에 대한 감정이었다고 생각한다. 펄 벅이 부천에 ‘소사 희망원’을 세워 혼혈 고아들을 돌볼 수 있게 해준 분이 할아버지다. 두 사람은 자신들 또한 ‘혼혈’이라고 느낀 것 같다. 펄 벅은 미국인이자 중국인으로, 할아버지는 미국인이면서 애국심 강한 한국인으로 살았다. 그들은 둘 이상의 국가에 애국심을 갖는 것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줬다. 아이가 엄마 아빠를 다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듯. 놀랍도록 진보적인 아이디어와 이를 실행에 옮기는 능력도 둘의 공통점이었다.”

-중국계였던 할머니 호미리 여사는 미국에서 소아과 의사 면허를 처음으로 딴 동양 여성이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아내로서 삶의 우선순위가 국가-교육-기업-가족이었던 남편이 못마땅하지 않았을까.

“할머니는 자신의 삶을 남편에게 의지하지 않는 자립심 강한 여성이었다. 의사인 할머니가 없었다면 할아버지는 유한양행을 만들 수 없었다. 하지만 내겐 더없이 자애로운 할머니였다. 딱 하나, ‘끔찍한’ 추억은 있다. 할머니 댁 냉장고 문을 열면 주삿바늘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내가 맞아야 할 예방주사였다(웃음).”

-유한양행이 개발한 ‘국민 연고’ 안티푸라민에 대한 추억도 있을 것 같다.

“물론이다. 내가 먹는 걸 좋아해 과식으로 배가 자주 아팠는데, 그때마다 엄마가 배꼽 주변에 안티푸라민을 발라주셨다.(웃음)”


◇외할아버지도 건국훈장 받아


-유일한 박사가 돌아가신 날을 기억하는지.

“내가 열 살 때였다. 최고의 할아버지를 잃어버렸다며 울자 엄마가 ‘너에겐 할아버지 한 분이 더 계시지 않냐’며 위로해주시더라(웃음).”

-외할아버지는 중국 군인이었다던데.

“중국 국민당 쉐웨 장군으로, 할아버지(유일한 박사)처럼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으셨다.”

-중국 군인이 대한민국 훈장을 받았다는 건가?

“중일전쟁 때 잡은 포로들 중에 일본에 강제 징집된 한국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들을 분리해 조국으로 보내준 공로를 인정받으셨다고 들었다.”

-권총 사격 코치라는 직업은 두 할아버지와도 관련이 있을까.

“사격은 온 가족이 즐긴 취미였다. 어릴 때 나도 아빠한테 공기총 쏘는 법을 배웠다. 나는 예일대 사격팀의 주장이기도 했다(웃음). 예일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뒤 MBA를 하고 마케팅 디렉터로 일하다 나이 마흔에 사격 코치로 직업을 바꿨다. 엄마와 고모가 6개월 간격으로 돌아가신 뒤 커다란 상실감에 빠져 마음을 집중할 수 있는 직업이 필요했다. 내가 잘하는 게 총쏘기와 가르치기여서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애리조나의 사격 학교 코치로 취직할 수 있었다. 첫 15년은 군인, 경찰 등 학생이 다 남자였다(웃음).”

-90년대에 한국에서 잠시 일했다고 들었다.

“고모는 재단 문지기 역할을 하면서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일했는데, 나를 볼 때마다 한국에 가서 유한양행과 할아버지의 정신에 대해 더 배워야 한다고 권하셨다. 경영에 참여할 수 없으니 유한의 신입사원들에게 무급으로 영어 가르치는 일을 했다. 영업사원들과 함께 공장을 견학했던 기억도 난다. 30년 전 인연을 맺은 그들과 지금도 연락하며 친구로 지낸다. 서로 늙었다고 골린다(웃음).”

-자신이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느낄 때가 있는지.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라고 느끼는 것, 소신이 강해 홀로 외로운 길을 간다는 것. 그러나 할아버지는 너무 큰 분이라 내가 닮기는 힘들 것 같다.”

-’큰 그늘 아래선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는 속담처럼?

“그래서 우리는 큰 그늘을 벗어나 스스로 갈 길을 찾았다(웃음).”

-2026년 100주년을 맞는 유한양행은 창업주의 정신을 잘 계승해 가고 있나.

“할아버지의 열정과 철학에 동의하고 실천하는 분들이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유한은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지,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는지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 정신에 충실했던 전문 경영인들이 일군 시스템과 거버넌스가 계속해서 유지, 발전되고 있는지 지켜보고 있다.”

-대한민국에 유한양행 같은 기업만 있으면 K드라마를 못 만들 텐데.

“오, 노노(no)! 그건 안 된다. 한국 드라마는 정말 재미있다(웃음).”

-할아버지 유일한이 준 가장 큰 선물은 뭘까.

“등록금 1만달러와 내가 나로 살 수 있게 해준 자유, 그리고 책임감이다. 이 세 가지만 있으면 최고의 인생을 개척해서 살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엄청난 부자다!”


☞유일링

196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변호사 유일선과 중국인 아내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도쿄에서 유년기를 보낸 뒤 샌타바버라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왔다. 예일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뒤 마케팅 디렉터로 일하다 40세부터 애리조나의 사격 학교에서 코치로 일하고 있다. 한자 이름은 유은영(柳恩令). 유한학원과 보건장학회 이사다.

‘멍’ ‘그녀와의 이별’ 부른 롱다리 디바 김현정

<조선일보, 길해연 배우, 2023.10.14.>

 

 


“가수 김현정이 누나 좀 만나고 싶다는데?” 후배의 전화를 받은 나는 몇 번이고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롱다리 미녀 가수 김현정? 다 돌려놔! 그 김현정?” 그 유명한 가수가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는 사람을 왜 만나고 싶다는 건지 이유를 묻기도 전에 내 입에선 “그래, 그러자”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하자마자 “앗싸!” 신이 난 내 입에선 “다 돌려놔/ 너를 만나기 전에 내 모습으로/ 추억으로 돌리기엔 내 상처가 너무 커~”가 절로 흘러나왔다. 두 팔은 허공을 휘젓고 있었다. 그 시절 목이 터져라 “다 돌려놔!”를 외쳐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 노래 제목이 ‘멍’이 아니라 ‘다 돌려놔’인 줄 알고 있던 나 같은 사람도 꽤 많았으리라.

2007년 겨울, 그렇게 우리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하던 일도, 살아온 것도 달랐던 띠동갑 두 여자는 만난 지 30분도 지나지 않아 서로의 손을 부여잡고 울고 있었다. “...어린 시절 저는 먼지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어요. 말도 없고 존재감도 없는 소심 덩어리 꺽다리. 그게 저였어요.” 깊은 곳에 열망을 감춰둔 소심한 소녀 김현정은 뜨거운 가슴을 자전거와 헤비메탈로 식히며, 힘들 때는 자신만의 동굴에 숨어 침묵하고 좌절하고 번뇌했다고 했다. “그러다 1995년 2년간의 연습생 시절을 거쳐 ‘그녀와의 이별’을 발표했는데 그 음반은 빛을 보기는커녕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어요.”

그래도 가수의 꿈을 버릴 수는 없었다. 판소리를 배우고 코러스로 일하며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어요. 90년대 길거리 테이프 노점상들 기억하시죠? 거기서 ‘그녀와의 이별’을 틀기 시작하고 나이트클럽들이 따라오면서 역주행을 시작한 거예요. 그 덕에 큰 기획사 들어가고 음악 프로 1위도 하고 정말 바쁘게 움직였어요. 차 안에서 양치를 하고 헬기를 타고 다음 공연장으로, 촬영장으로. 편하게 누워 잠든 날이 거의 없을 정도였어요.”

자신을 보살필 시간도 없는 일정들을 소화하며 ‘혼자 한 사랑’ ‘되돌아온 이별’에다 국민 떼창곡 ‘멍’까지 대단한 인기를 누렸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사람들의 갈채 속에 서서히 병들어 가고 있었다. 나를 찾아온 시기에 그녀는 성대결절 상태였다. 수술해도 계속 재수술이 필요할 거라고 해서 수술은 포기하고 좋다는 치료법을 다 찾아서 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사람 만나는 일을 줄이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인간관계가 정리되었다. 그런 모든 상황이 당찬 가수 김현정을 다시 소심한 소녀 김현정으로 되돌려 놓고 있었다.

최고의 고음 가수, 라이브의 여왕이라는 찬사를 듣던 그녀에게 성대결절이라니.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그녀 앞에서 적절한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해 한참을 주저하다가 말없이 손을 잡아 주었다. 그러자 잠금장치가 해제된 눈물 탱크처럼 그녀는 눈물을 터뜨렸다. 건강을 돌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노래를 못 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통곡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손을 잡고 함께 우는 것뿐이었다. 나중에 그녀가 이런 말을 했다.

“사실 그때 언니를 찾아간 이유가 있었는데 언니 얼굴을 보자마자 잊어버렸어요. 그냥 제 얘길 털어놓고 싶어진 거예요. 근데 갑자기 눈물이 나고…. 감정을 추스르려고 했는데 언니가 같이 울고 있지 뭐예요. 하하. 그래서 핑계 김에 엉엉 목 놓아 울어버렸어요. 지금도 궁금해요. 내가 왜 언니를 찾아갔는지.”

그렇게 만난 그날 이후 그녀는 눈이 오면 보고 싶다고, 비가 오면 울적하다고, 날이 좋으면 화창하다고 전화를 했다. 어디에 있건 단숨에 달려오곤 했다. 내가 있는 곳은 꿉꿉한 곰팡내가 진동하는 지하 연습실이거나 어두컴컴한 극장이었는데 그녀는 떠나질 않고 자리를 지켰다. 한동안은 나보다 대학로 공연을 많이 보고 뒤풀이 장소까지 따라다니며 연극하는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곤 했다. “연극은 라이브잖아요. 현재 진행형…. 이게 살아 있는 거구나, 하는 느낌. 제가 무대에 섰을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한 것 같아요.”

그녀는 그렇게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고 2014년 드디어 제2의 전성기가 펼쳐졌다. 각종 음악 프로에서 90년대와 2000년대 초 노래들이 다시 불리기 시작했고 그녀의 노래들이 역주행한 것이다.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걱정이 앞섰다.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습관 때문일까? 그녀는 지나치리만큼 부지런했고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익히는 데 온 시간을 쏟아붓고 있었다. 통화할 때도 그녀는 편안하게 널브러져 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도대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있긴 한 것인지, 너무 혹독하게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은 아닌지 마음이 아팠다.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늘 목이 말라요. 벌써 26년 차인데 아직도 무대에 오를 때 떨려요. 이게 마지막이 되진 않을까 두렵기도 하고. 그래서 이렇게 미친 듯이 노력하고 고민하는데…. 이 목마름은 언제나 끝이 날까요?”

답이 없는 질문을 던지는 그녀에게 “널 만나게 되어 참 고맙다” “네가 있어 참 든든하다”고 위로를 건네며 등을 토닥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언젠가 자신의 라이브 공연 영상을 찍어 보내곤 괜찮은지 묻는 그녀에게 이제야 나는 대학로에서 만난 후배의 말을 빌려 답을 보낸다.

선배님, 가수 김현정씨랑 친하시죠? 만나시면 제가 광팬이라고, 그리고 정말 고마워하고 있다고 전해주세요. 군대 있을 때 여자 친구에게 이별 통보를 받았어요. 가슴이 터져 죽을 것 같았는데 김현정의 ‘멍’을 따라 부르며, 다 돌려놓으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정말 큰 위로를 받았거든요. 그래, 이별도 슬픔도 당당하게 풀어 버리자. 징징거리지 말고. 그 노래가 절 구해줬어요.

이 친구의 말처럼 너는 이미 우리에게 추억이라는 큰 선물을 줬어. 또 어떤 노래로 우리를 위로해 줄지 기대하고 있을게. 초조해하지 말고 천천히…. 나이 들어가는 가수 김현정의 선물은 어떤 것일지, 그날의 기쁨을 아끼면서 기다리고 있을게!

21세 안세영이 준 두 가지 커다란 교훈

 

 

< 머니투데이, 김고금평 에디터, 2023.10.8 >

 

 

 


세계 랭킹 1위의 한국 여자 배드민턴 안세영(21)이 항저우 아시안게임 2관왕에 오른 것은 당연한 듯 보이면서도 '충격의 연속'이었다. 그 충격은 '압도적 기량'과 '(듣는 이를) 짓누르는 언어'에서 나왔다.

단식 경기에서 안세영은 약간의 차이나 아슬아슬한 경기력으로 상대를 제압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믿기 어려운' 실력으로 상대의 공격 의지마저 꺾을 정도였다. 8강전에 나선 태국 부사난 옹밤룽판(27) 선수는 (자신이) 아무리 강한 스매싱을 내리쳐도 모두 받아내는 안세영의 수비에 혀를 내두르며 허탈한 웃음을 내비치는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심지어 경기를 마친 뒤엔 한국어로 "안세영, 대박"이라고 외치며 그의 압도적 기량을 치켜세웠다.

결승전도 예외는 아니었다. 세계 3위 천위페이(중국)를 2대 1로 제압할 때도 그 기량은 촘촘히 빛났다. 안세영은 첫 번째 게임 마무리에서 극적으로 수비하다 무릎을 다쳤다. 가까스로 이 게임을 가져갔지만, 두 번째 게임은 상대에게 내줘야 했다. 이 흐름을 보고선 마지막 게임은 부상의 위험과 다음 올림픽 경기를 위해서라도 질 수밖에 없거나 포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하지만 안세영은 마지막 게임을 21대 8로 간단히(?) 제압했다. 경기를 마친 뒤 안세영은 "무릎 쪽이 많이 아팠다"면서 "걸을 정도는 돼 정신력으로 뛰었다"고 했다.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히던 중국 여자 역도 선수 리아오 구이팡이 용상 2차 시기에서 팔꿈치에 이상이 생겨 3차 시기를 포기해 실격 처리된 사례 등과 비교하면 불굴(不屈)도 이런 불굴이 없을 정도다.

안세영의 압도적 기량은 상대 선수의 어떤 공격도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받아내며 흔들리지 않는 경기력을 선보인다는 점에 있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안세영의 전 경기를 종합하면, 그의 기량은 '압도적'이라는 말 외에 따로 쓸 수식어를 찾기 어렵다. 안세영은 우선 코트 바로 앞에서 콕 찍어 넘기는 헤어핀이나 코트 멀리 보내는 하이클리어 같은 비교적 '약해 보이는' 기술을 아주 영리하고 감각적으로 사용한다. 상대가 이런 기술을 약점 잡아 스매싱 기회로 이용하는 것 자체를 차단하려는 것처럼 '기술적'으로 방어하는 셈이다.

무엇보다 상대의 빈자리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라인을 정확하게 계산해서 보내는 '신기의 기술'은 어떤 선수에게서도 보기 힘든 최고의 공격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해설자들이 저마다 'AI 안세영'이라는 별칭을 붙였을까.

안세영은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딴 뒤 "내 연습량을 믿었다"는 말을 했다. 운동선수라면 누구나 '연습량'을 운운하지만, 이날 그의 이 멘트는 특별했다. 하루 10시간씩 독서실에 있다고 반드시 학습 능률이 올라가지 않듯, 그의 연습도 양 뒤에 숨겨진 어떤 특별한 '무엇'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을 엿보게 했다.

그만큼 그의 경기는 어떤 특별한 연습이 아니고선 증명될 수 없는 결과를 선보였다. 예를 들면, 어떤 공격도 다 받아내기 위해 여러 각도에서 받아내는 연습만 수없이 했다거나, 자신이 보낼 셔틀콕의 낙하지점을 정확히 계산하기 위해 강약 조절을 끊임없이 연습해 본능적으로 다룰 수 있도록 하는 방식들이 그것이다.

잘하는 것과 매일 하던 패턴을 계속 연습하는 방식이 아니라, 못하는 것과 힘든 걸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며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는 연습으로 양을 채우는 방식이 그가 말하는 진정한 연습량의 의미인 셈이다.

이용대 SBS 해설위원은 "안세영 선수를 몇 년 전 만났을 때, (네가 승리하려면) 강한 공격을 연습해야 한다는 말을 했는데, 지금 그 말을 취소해야겠다"며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기도 했다. 승리가 정해진 툴이나 방향이 아닌, 각자의 연습과 해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도 안세영은 기꺼이 증명했다.

안세영의 기막힌 충격과 감동의 언어는 단식 결승전 이후에도 계속됐다. 

 

그는 "무릎이 '딱' 소리가 나면서 어긋난 느낌이 들어 고통스러웠다"면서 

"지금 같은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고통을 이겨내고 뛰었다"고 했다.

안세영은 모든 경기가 끝난 뒤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자신이 해온 연습량을 믿고 다시 오지 않을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한 21세 국가대표의 땀의 결실이었다. 

21세의 어린 국가대표 선수가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을 이야기할 때 머리에 크게 한 방 맞은 듯한 느낌을 피하기 어려웠다. 반백 년을 살아도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이라고 절실히 느끼며 사는 인생이 많지 않은데, 이렇게 삶을 절실하고 소중하게 꾸리는 인생을 직접 마주할 수 있다니. 안세영은 자신이 충실하게 살아온 삶의 느낌을 그대로 표현했지만, 그 사실이 주는 충격과 감동은 결코 작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하루를 특별한 연습으로 시작하고 마무리했을까. 그리고 그런 날은 또 얼마나 될까. 우리는 다시 오지 않을 이 순간에 얼마나 최선을 다했을까. 아니, 지금 다시 달아나는 이 순간을 잡을 생각조차 해본 적이 있을까.

안세영이 모든 경기가 끝나고 한꺼번에 터뜨린 눈물과 포효의 의미가 이제야 비로소 각인되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차근차근 쌓아 올린 작지 않은 삶의 교훈들에도 뒤늦은 감사 인사를 전한다. 탱큐, 안세영!!!

‘2류 시민’ 취급 받던 계약직의 인생 역전…엄마는 노벨상, 딸은 올림픽 金
[테크노 사이언스의 별들]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백신의 어머니’ 커털린 커리코

< 조선일보, 박건형 기자,  2023.10.10.  >

 


1928년 여름휴가를 마치고 연구실을 찾은 스코틀랜드 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은 특이한 푸른 곰팡이를 발견했다. 실수로 열어놓은 배양 접시 안에서 자란 이 곰팡이는 플레밍이 연구하던 포도상 구균을 파괴하고 있었다. 인류가 첫 항생제이자 ‘20세기 최고 발명품’이라는 페니실린을 얻게 된 순간이었다. 플레밍 사례처럼 세상을 바꾸는 혁신은 뜻밖의 행운으로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1997년 펜실베이니아 의대 전염병 학과장으로 갓 부임한 드루 와이스먼과 계약직 여교수 커털린 커리코(Katalin Kariko·1955~)의 만남도 우연이었다. 전혀 다른 부서의 두 사람은 학교 복도의 제록스 복사기 앞에서 자주 마주쳤다. 도서관에서 논문을 구해 일일이 복사하던 시절이었고, 두 사람은 비슷한 시간에 먼저 복사기를 차지하려는 경쟁을 벌이다 친해졌다. 와이스먼은 에이즈를 비롯한 바이러스 연구에 단백질을 활용하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지만 방법을 찾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었다. 와이스먼에게 커리코가 말했다. “당신이 하려는 일이 바로 내가 하는 일이에요.” 이 대화가 생명공학과 의학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둘은 상상조차 못 했을 것이다.

 


타임 '100인의 인물'에 선정된 커리코 -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기여한 공로로 지난해 타임 '100인의 인물'에 선정된 커털린 커리코(오른쪽)와 딸 수전 프랜시아. 어머니가 연구원으로 일했던 펜실베이니아대를 졸업한 프랜시아는 2008년 베이징, 2012년 런던 올림픽 조정 금메달리스트이다.  

 

 

 


◇미국행 편도 티켓과 전 재산 147만원

커리코는 헝가리 커르처그의 가난한 정육점 딸로 태어났다. 갈대로 지붕을 얹은 흙벽돌 빈민가 집은 냉장고와 텔레비전이 없음은 물론 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커리코가 기댈 곳은 공부뿐이었다. 8학년 때는 헝가리 생물 올림피아드에서 3위를 차지했다. 1978년 세게드대에서 생물학 학사를 받았고, 1982년에는 유전 물질 리보핵산(RNA)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헝가리 생물학 연구센터(BRC)에서 일할 때 커리코는 헝가리 비밀경찰 정보원이었다. 그는 “회사에서 해고하겠다거나 가족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을 받았다”면서 “실제로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의 연구실은 1985년 연구비 지원 중단으로 문을 닫았다. 유럽 대학 문을 두드렸지만 누구도 답을 주지 않자 미국행을 결심했다. 커리코와 남편은 차를 팔아 편도 비행기 표를 사고 나머지 돈은 두 살짜리 딸의 곰 인형 배에 넣어 밀반출했다. 당시 공산 국가인 헝가리에서 100달러 이상 해외 반출은 금지돼 있는 시절이었다. 900파운드(약 147만원)가 당시 이 가족의 전 재산이었다. 커리코는 손수 꿰맨 이 곰 인형을 아직도 딸의 방에 보관하고 있다.(훗날 펜실베이니아대를 졸업한 딸 수전 프랜시아는 2008년 베이징, 2012년 런던 올림픽 조정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커리코는 템플대에서 3년간 일하며 전공인 RNA를 활용해 에이즈, 혈액 질환 등을 치료하는 임상 시험에 참여했다. 도서관이 오후 11시에 문을 닫을 때까지 논문을 읽다가, 친구 집에서 자거나 사무실 바닥에 침낭을 깔고 잠들었다. 아침 6시부터 실험을 시작했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고 결국 계약이 해지됐다.


◇아메리칸 드림 꿨지만

메릴랜드의 미국 국립군의관의대를 거쳐 1989년 펜실베이니아 의대로 자리를 옮겼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부교수 직함을 달았지만 정규직 교수에게 고용된 계약직이었다. 의사가 주류인 의대에서 이학 박사 커리코는 ‘2류 시민’ 취급을 받았다. 동료였던 데이비드 랭어는 “사투리를 사용하는 이민자이자 여성 과학자라는 점이 모두가 커리코를 간과하게 만들었다”면서 “그는 학내 정치나 연구비보다는 과학에만 관심이 있었다”고 했다.

커리코는 실험광이었다. 동료들에게 “실험은 결코 실수하지 않는다. 당신의 기대가 실수할 뿐”이라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말을 자주 들려줬다. 1995년 학교의 인내심은 바닥이 났다. 학교는 커리코에게 정교수직을 제안하면서 메신저 리보핵산(mRNA) 연구를 포기하라고 요구했다. mRNA를 고집하면 연구원으로 강등하고 연봉은 절반 줄이겠다고 했다. 당시 과학계에서 mRNA는 계륵(鷄肋) 같은 존재였다. 1961년 프랑스 과학자들이 생체 내에서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mRNA의 존재를 처음으로 밝혔다. 질병과 싸우거나 예방하는 단백질을 만드는 가능성에 수많은 과학자가 뛰어들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사람 몸이 외부에서 들어온 mRNA를 바이러스의 침입으로 여기고 염증을 비롯해 강력한 면역반응을 일으켰다. 커리코를 비롯한 극소수만 mRNA의 가능성을 믿었지만 1990년대에는 아예 연구비 지원조차 끊겼다. 커리코는 승진 대신 강등과 연봉 삭감을 택했다. 모두 ‘멍청한 선택’이라며 비웃었다. 영주권도 없었고, 대학생 딸의 학비도 마련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뉴욕타임스는 “커리코는 실험실을 옮겨다니며 계약했지만, 연봉은 6만달러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와이스먼과 공동 연구로 돌파구 찾아

1995년은 커리코의 굴곡진 인생에서도 유독 잔인한 해였다. 아파트 관리인이던 남편이 미 영주권을 받으러 헝가리에 갔다가 문제가 생겨 돌아오지 못하는 사이 커리코는 암 진단을 받고 두 차례 수술을 견뎌야 했다. 끝없는 고난 속에서 1997년 우연히 와이스먼을 만나 공동 연구를 시작했다. 실험실에서는 얼마든지 원하는 단백질을 유도하는 mRNA를 만들 수 있었지만, 동물실험은 번번이 실패했다. 해결책을 찾는 데 8년이 걸렸다. 2005년 RNA의 한 종류인 전달RNA(tRNA)를 이용해 면역반응을 회피하는 mRNA 합성법을 찾아낸 두 사람은 특허를 등록하고 논문을 썼다. 사이언스, 네이처 등 저명 학술지들은 연구 성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게재를 거부했다. 결국 ‘이뮤니티(면역)’에 발표한 논문조차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몇 년 뒤 스탠퍼드대 박사 후 연구원 데릭 로시가 이 논문을 읽고 사업을 구상했다. 로시는 하버드와 MIT의 교수들, 벤처 투자자를 찾아다니며 mRNA로 백신과 치료법을 만드는 거대한 사업 구상을 설명했다. 생명공학계 창업의 아이콘 로버트 랭어 MIT 교수가 앞장섰고, 불과 1년 만에 3억5000만달러가 넘는 투자금이 모인 이 회사 이름은 모더나였다. 

 

모더나 탄생을 본 커리코와 와이스먼은 mRNA를 상용화하겠다는 독일 스타트업 바이오엔테크에도 특허 라이선스를 줬다. 충분한 성과를 냈다고 생각한 커리코는 2013년 학교에 교수 신분 복원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사실상의 해고 통보였다. 커리코는 바이오엔테크 부사장으로 이직을 결심하고, 학교에 “떠나겠다”고 통보했다. 학교 관계자들은 “그 회사는 홈페이지도 없어요”라며 조롱했다.

 


◇”그의 집착이 인류를 구했다”

모더나와 바이오엔테크의 목표는 mRNA로 암 면역 치료, 심혈관 및 대사 질환 치료제 같은 의약품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단숨에 세계 바이오 시장 판도를 바꿀 수 있는 도전이었다. 하지만 성과가 없자 바이오엔테크는 차선책으로 화이자와 인플루엔자 mRNA 백신 개발 파트너십을 맺었다. 가능성을 낮게 본 화이자는 연구비조차 제대로 지원하지 않았다. 몇 년 뒤 코로나19가 모든 것을 바꿨다. 펜데믹에서 mRNA 백신이 구세주로 떠올랐다. 모더나는 임상에 필요한 백신을 25일 만에 만들었다. ‘빛처럼 빠른 개발’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최소 4년이 걸리는 종전 방식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앤서니 파우치 미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장은 “수십 년에 걸친 커리코의 집착이 백신을 만들었다”고 했다. 코로나 백신 개발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이 억만장자가 됐지만 ‘백신의 어머니’ 소리를 듣게 된 커리코의 선택은 달랐다. 커리코는 지난해 바이오엔테크를 떠나 세게드대에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mRNA로 모든 질병을 극복하는 것이 꿈이라는 이유였다. 커리코와 와이스먼의 mRNA 기술을 현재 의학·바이오 업계에서는 ‘게임 체인저’라 부른다. 내년에 mRNA 독감 백신이 등장하고, 암과 에이즈 백신도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지난 2일 스웨덴 카롤린스카 의대 노벨위원회는 커리코와 와이스먼을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뉴욕타임스는 “두 사람은 세계적으로 수십억 회 투여한 코로나 백신의 전례 없는 개발 속도를 이끌었고, 암과 같은 수많은 치명적 질병에 걸린 인류를 구하는 백신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했다. 커리코는 “2년 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는 가을마다 ‘네가 노벨상을 받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면서 “그때마다 ‘난 연구비도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고 말했다. 아메리칸 드림을 좇던 이민자이자 여성인 무명 과학자가 30년간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그만둬라’ ‘포기해라’였다. 커리코는 “’난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고 했다. 미련할 정도로 고집한 그의 신념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구했고, 앞으로 구하게 될까.

☞mRNA(메신저 리보핵산)

DNA(유전자) 유전 정보를 복사해 세포 안에서 단백질을 만드는 공장인 리보솜에 전달하는 물질. 신체를 구성하는 단백질의 설계도 역할을 한다. mRNA의 정보 전달 원리를 응용하면 바이러스 항체 등 원하는 단백질을 우리 몸에서 만들 수 있다. 커털린 커리코는 외부에서 주입한 mRNA를 사람의 몸이 이물질로 여기지 않게 하는 방법을 개발해 노벨상을 받았다.

 

 

 

 

1. 김관우 소개 (자료 : 나무위키)

 

(1) 개요
- 대한민국의 대전 격투 게임 프로게이머.
- 무려 KOF 96부터 활동을 시작한 1세대 원로 격투 게이머로 KOF 외에 소울 칼리버,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도 플레이를 하며 어느덧 40대를 넘겼지만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레전드 프로게이머로 대전액션 뿐 아니라 슈팅, 횡스크롤 액션, 리듬게임 등 오락실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게임을 다 잘하고 좋아한다. 역시 관운장의 클라스는 어디 안간다

- 플레이 스타일: 기본적으로 돌격형이다. 상대의 움직임을 봉쇄하며 마구 쳐들어가 두들겨패는 타입. 성격상 니가와를 못 한다.
- 캐릭터: 종목과 시리즈를 불문하고 개캐를 절대,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다.  성능과는 관계 없이 자신의 마음에 드는 캐릭터를 고르는데 다음 시리즈에서 그 캐릭터가 개캐가 되면 하지 않는다. 킹오파 시리즈의 경우 96에서 자신을 유명하게 만들어준 베니마루를 97 들어가면서 버렸고 97에서 재미 본 크리스는 98에서 놓았다. 반대로 늘 개캐라 못했던 이오리를 마침내 99에서 잡았다.
- 연습벌레: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스틱을 잡으며 자리만 깔리면 밤샘도 마다하지 않는다. 멀쩡히 직장생활 하면서 대회 입상할 정도로 엄청나게 수명 깎아먹으며 게임을 한다.


(2) 수상 이력 
 - 더 킹 오브 파이터즈 시리즈  :  96시절 H. I.라는 팀의 팀장으로 데뷔, 곧 최강라인에 올랐다. 당시 베니마루, 로버트 최강자. 시리즈 끝물이었기에 대회입상경력은 없지만 팀배틀과 개인배틀 모두 국내에서 손꼽는 실력이었다. 또한 개캐 없이 중상캐로 다른 팀을 털어먹은 H. I. 특유의 심리전 플레이는 잡기캐릭터+이오리에 집중돼있던 96배틀계전반의 플레이스타일을 바꾸는 데에 일조했다.   97발매와 함께 SNK가 주최한 Asia Tour대회에서 김관우가 8강, 부팀장인 최형일이 우승을 차지했으며, H. I.는 이후 98발매전까지 시즌통합챔피언이라해도 무리가 없는 성적을 냈다. 현역시절 그들의 활약상은 배틀페이지의 회상글에서 엿볼 수 있다. KOF96시절, KOF97 시절. 97시절 김관우의 대표 엔트리는 클래식쿄, 테리, 마리, 랄프, 야시로, 크리스를 꼽을 수 있으며 크리스는 당시 배틀계 유일의 초고수였다.  팀원과 팀명의 변경이 이루어진 98, 99에서도 여전히 최강라인이었으나 그는 99에서 도입된 스트라이커 시스템을 매우 싫어했고 결정적으로 00발매 직전 군대에 가면서 KOF배틀계에서 모습을 감췄다. 

- 소울 칼리버 시리즈 :  킹오파 팀배틀을 접은 뒤, 개인플레이어로서 소울칼리버를 시작했다. 1부터 5까지 꾸준히 플레이 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KOF시절과 마찬가지로 국내에서 손꼽는 고수였으며 2012년 초청받은 샤돌루쇼다운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  :  스트리트 파이터 4부터 시작하여 당시 크림슨 바이퍼 고수로 이름을 알렸다. 투혼 2009대회 16강에서 인생은 잠입을 탈락 시키며 최종 3위에 입상했다.  스트리트 파이터 5에서는 중캐 정도밖에 안 되는 발로그(Claw)를 사용하면서도 국내 정상급의 실력을 발휘, 일찌감치 마스터를 달성하는 관록을 보여주었다. Online Warrior 대회에 꾸준히 참가해 좋은 활약을 보여주던 끝에 9회차에서 홍콩 유저이자 Talon 소속의 프로게이머인 Hotdog29를 꺾고 마침내 첫 우승을 차지했다. 직장인 신분이면서도 프로 실력자들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실력을 보여주어 격투게임커뮤니티 내에서 많은 리스펙을 받고 있다. 그의 높은 온라인 랭크 덕에 해외에서 컴필레이션 영상이 제작되는 등 높은 인지도를 갖고 있다.  온라인 프리미어는 아쉽게 우승에 실패했지만 월드 워리어 한국 대회를 우승하면서 커리어 처음으로 캡콤컵에 진출하였다.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같은 조에 배정받은 멤버 중 영국의 엔딩워커라는 유저가 있는데 2006년생밖에 되지 않아서 본인에게는 아들뻘 나이다.

 

(3)  국가대표 경력 -  2023 항저우 아시안 게임 
- 스트리트 파이터 5 종목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발전 2차대회에서 우승하여 1차대회 우승자인 연제길과 함께 태극마크를 달게 되었다.
- 9월 26일, 일본의 강자 카와노와 대만의 시앙유린(게이머비)를 차례로 꺾으며 승자조 결승전에 진출해 최소 동메달을 확보했다.
- 9월 27일 대만의 오일 킹을 잡고 결승에 진출했다. 이후 패자조 결승에서 시앙유린이 오일 킹을 누르고 최종결승에 올라갔다.
- 9월 28일, 대만의 시앙유린을 상대로 7라운드 까지 가는 접전 끝에 4:3으로 승리, 전승우승으로 대한민국 e스포츠 종목 첫 금메달을 획득함과 동시에 대회 최고령 금메달리스트에 등극했다.
- 김관우 선수를 응원하는 한국 격투 게임 커뮤니티조차, 김관우 선수의 금메달을 쉽게 예상하지 못했다.  당장 격투 게임 최고 권위 대회인 EVO 2022 우승자인 일본 대표 카와노와 스파5로 치러진 마지막 메이저 대회 EVO JAPAN 2023 우승자인 대만 대표 오일킹이 참전했기 때문. 거기에 다른 국가의 대표 선수들조차 큰 대회에서 우승 경험이 있는 선수들이었다.  
반면 김관우 선수는 한 캐릭 장인으론 유명했지만, 경력은 확실히 밀리는 상황. 컨디션과 운이 좋다면 동메달 정도는 노려볼 수 있을까 하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정작 대회가 시작되니 상황은 반전.  대진표 덕이 아니라 EVO 2022 우승자 카와노, EVO JAPAN 2023 우승자 오일킹을 연달아 격파하며, 금메달을 획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2. [항저우AG] "매일 게임했더니~!" 마흔넷 스트리트파이터 국대된 사연

 

<엠빅뉴스, 2023.9.22>

 

- 항저우 입국 소감 :  와보시니까 좀 어떠세요?


저는 기다리던 순간이었고요. 긴장보다는 좀 더 기대되는 마음이 큽니다.

 

- 적지 않은 나이에 이제 시작하게 됐잖아요.  여기까지 와보셨는데 그래도 성취감이 남다르신 것 같아요.  좀 어떠세요?


정말 제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궁금했는데 이 자리까지 오게 됐고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더 잘해 나가겠습니다.

 

- 이번 대회 목표는

 

이번 대회 목표 메달 딸 수 있을 거라고 일단 자신감을 가지고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요.  그리고 그만큼 열심히 연습했고 제가 연습한 만큼 최선을 다해서 좋은 성적 내고 돌아오겠습니다. 


- e스포츠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소감은

 
정말 제가 처음 게임을 시작할 때는 이런 자리가 생길 줄은 꿈도 못 꿨습니다.  근데 정말 오래 살고 볼일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라는 생각도 들고요.  정말 기쁘고 앞으로도 큰 발전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 마지막으로 보고 있을 가족들에게 한마디


꼭 금메달 따서 자랑하겠습니다. 그래도 제가 맨날 게임하는데 뭐라고 안 하시고 이 나이에도 지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3. 44세 격투게임 金 김관우 "오락실에서 맞아도 의지와 승부욕으로"

 

<뉴시스, 박지혁 이명동 기자, 2023.09.29  >

 


항저우 아시안게임 e스포츠 스트리트파이터5 우승
e스포츠 첫 정식종목…한국 최초 금메달리스트



[항저우=뉴시스] 박지혁 이명동 기자 = "오락실에서 옆구리를 맞아도 기술 콤보를 넣는데 손을 놓지 않았던 의지와 승부욕으로 지금까지 왔다."  한국 e스포츠 최고령 국가대표 김관우(44)가 아시아 정상에 우뚝 섰다.

김관우는 28일 중국 항저우 e스포츠센터 주경기장에서 열린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e스포츠 스트리트파이터5 결승전(7전4승제)에서 대만의 샹위린(44)에게 극적인 4-3(2-1 0-2 1-2 2-0 2-1 0-2 2-0) 승리를 거두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번 대회에서 처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e스포츠에서 나온 한국 선수단의 첫 금메달이다.  1979년생이다. 20대가 주축인 e스포츠 국가대표 내에서 적잖은 나이다.  

게임 비용이 50원일 때부터 제 집 드나들 듯 오락실을 즐겼다. 당시 오락실은 유해 장소로 여겨지는 사회적 분위기였다. 오락실에 갔다가 들통 나면 학교 선생님이나 부모님에게 혼이 나는 게 다반사였다고 한다.  하지만 스틱을 놓지 않았고, 그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게임의 위상 속에서 당당히 태극마크를 달고,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김관우는 29일 오전 항저우 시내 한 호텔에 마련된 대한체육회 스포츠외교라운지에서 열린 메달리스트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스트리트파이터5가) 처음 아시안게임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다고 했을 때, 도전적으로 참가했다. 최선을 다해 선발전에서 우승해 국가대표가 됐을 때도 체감이 안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오기 전에 함께 힘들게 훈련했다. 정말 오래 했던 게임임에도 더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아시안게임에서 더 강력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며 "금메달을 따서 기쁘다. 응원해주신 분들에게 모두 감사하다"고 했다.

PC를 기반으로 한 e스포츠가 주를 이룬 요즘 1987년 출시된 '스트리트파이터'는 격투 게임의 고전 격이다. 1990년대 오락실에서 이 게임을 경험하지 않은 40~50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선풍적인 인기였다.  당시에는 격투 게임의 폭력성, 선정성을 지적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는 게 어렵지 않았다. 김관우도 부모님에게 혼이 나면서도 게임에 열중한 경우다.  당시 김관우를 나무랐던 이들은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김관우는 "그때 혼내셨던 분 중 지금은 어머니 밖에는 없다. 어머니는 이런 걸 아직 잘 모르신다. 찾아보기 힘드신 연세다. 다른 분이 연락을 주셨다. 어머니 아시는 분이 '거기 아들 금메달 땄다'고 연락을 주신 것 같다. 어머니께서 치기 어려운데 카카오톡을 쳐서 문자를 보내주셨다"며 울먹였다.

그러면서 "요즘 e스포츠하면 보통 떠올리는 게 PC게임일 것이다. 스트리트파이터는 오락실에서 하던 게임이다. 가면 항상 혼나던 게임"이라고 회상했다.

격투 게임의 경우, 동전을 순서대로 두고, 이기는 사람이 계속 상대를 바꿔가며 하는 방식이 당시 '오락실 룰'이었다. 이기는 사람은 계속 게임을 즐길 수 있지만 지면 자리에서 밀려나거나 추가로 동전을 넣어야 했다.

김관우는 "어렸을 때부터 잘하는 편이었다. 오락실에서 격투 게임을 잘하면 항상 근처 형들에게 끌려가서 혼났다. 게임을 잘했던 분들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며 "동네에서 맞아보지 않았다면 실력을 의심할 수 있다. 옆구리를 맞아도 기술 콤보를 넣는 데 손을 놓지 않았던 의지와 승부욕으로 지금까지 왔다. 그래서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이라는 결실을 맺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했다.

기자회견에서 옆자리에 동석한 펜싱의 구본길은 "솔직히 저도 격투게임을 잘한다. 철권을 잘한다. 철권을 했었다면 제가 이 자리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지금도 게임을 한다. 대단한 건 집중력이 중요하다. e스포츠든 스포츠든 다 같은 것 같다"며 김관우에게 "정말 축하드립니다"라고 했다.

김관우는 "감사합니다"라며 활짝 웃었다.

 

 

 

4. 우승 인터뷰 내용

 

- 항저우에 을 때만 해도 저는 아직 제가 국가대표라는 게 어떤 건지 아직 체감이 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아시안게임에 오기 전에 이제 같이 정말 힘들게 훈련을 하면서 그리고 정말 오래 해왔던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더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아시안게임에서 더 강력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고 그리고 금메달을 따는 결과를 얻어서 정말 기쁩니다.  응원해 주시는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 옛날에 혼내셨던 분은 지금 아직은 이제 저희 엄마밖에는 없고요.  저희 어머니도 저희 어머니도 이제 이런 걸 아직은 잘 모르십니다.  잘 찾아보기 힘드신 연세이기도 하시고요.  그래서 다른 분이 연락을 해주셨대요.  어머니 아시는 분이 거기 아들 금메달 땄는가 그런 식으로 아마 연락을 해주셨나 봅니다.  그래서 그쪽을 통해서 이제 약간은 어설픈 카톡 친 것처럼 어설픈 문자로 아들 나 너무 좋다. 그렇게 이제 그런 식으로 문자가 와서 이렇게 보고 기뻤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연락을 못했던 친척 형한테도 축하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 오늘 경기에 임하는 각오는 경기력을 최대한 잘 내기 위한 생각이었습니다.   내가 꼭 금메달을 따겠다. 그런 여러 가지 생각보다는 지금 내 앞에 있는 경기를 최대한 잘해서 이기겠다.   오직 그 생각뿐이었습니다. 다른 생각은 없었습니다. 
금메달 이거 정말 텔레비로만 보던 거를 제가 한번 이렇게 실제로 직접 해보니까 아직 뭔가 큰 거를 했다라는 느낌은 나는데 대체 내가 뭘 한 거지라는 약간 멍합니다.  좋습니다. 일단은 좋습니다. 많은 분들이 축하해 주셔서 너무 저도 기쁘고요. 
제가 금메달 딸 때 같이 기뻐했을 거를 생각하니까 저도 처음 금메달 딴 보람이 거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여기  항조우 아시안게임에서 애국가 하나가 저로 인해서 울리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벅찬 느낌, 진짜 그 자체였습니다. 
감동적이고, 이런 순간을 내가 또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 정말 모든 지원 아끼지 않고 해주신 한국e스포츠협회에 정말 감사드리고요.  제가 금메달 딴 걸로 그동안의 고생 앞으로도 고생 아직 더 하시겠지만 고생하신 거 조금이라도 보람을 느끼셨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입니다.  신나게 멀리서 응원해 주신 팬분들 그리고 친구분들 고맙고 마지막에 저로 인해서 이제 급하게 중개가 하나 잡힌 것 같지만 같이 결승전 보면서 재밌게 봤을 친구들 그리고 또 금메달 땄을 때 기뻐했을 응원해 주신 분들한테도 좀 고맙고 그리고 많이 기뻐했으면 좋겠습니다.  

 

- 가족들은 이제 잘 모르실 거예요.  제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르실 텐데 가서 약간 서프라이즈로 금메달 딱 바로 보여드리면서 내가 금메달을 땄다, 그리고 금메달 애국가 올라가는 장면 다시 볼 수 있으면 그거 같이 한번 보면서 제가 한번 직접 보여드리면서 좋아하시는 모습 보고 싶어서 아직 정확히 안 알려드리고 있는데요.  가서 제대로 서프라이즈 하겠습니다.

 

- 40대에 보내는 메시지  :  

  뭔가가 잘 안 되면 항상 떠오르는 게 이게 나이 때문인가? 역시 그런 생각이 들 나이긴 한데 그런 생각하지 말고 좀 더 연습하면 되겠지.   그리고 옛날에 우리가 잘했던 거 생각하면서 연습하면 게임뿐만이 아니라 사실 뭐든지 아직 많이 더 역시 옛날에 우리가 잘했던 전성기 시절처럼 잘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40대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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