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대한민국의 동화 작가이며, 평화주의자, 반전주의자이며, 생태주의자이고, 기독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로도 평가받는다.

 

 

애국자가 없는 세상


                     권정생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동족을 위해
총을 메고 전쟁터로 가지 않을 테고
대포도 안 만들 테고
탱크도 안 만들 테고
핵무기도 안 만들 테고
국방의 의무란 것도
군대훈련소 같은 데도 없을 테고
그래서
어머니들은 자식을 전쟁으로
잃지 않아도 될 테고
젊은이들은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고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

 

 

 

2. 일생  

 

- 일본 제국의 도쿄 빈민가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경상북도 청송군으로 귀국했다. 조선인연맹에 가입해있던 친인척 둘은 나중에 뒤따라 오기로 했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아 평생 생사를 모르고 살았다고 한다. 귀국 후에도 살림이 무척 어려워서 국민학교도 겨우 졸업했고, 또한 바로 나무 장수, 고구마 장수, 임노동자 등의 궂은 일을 하며 성장했다.

- 19세 때 그는 폐병에 걸려서 항생제를 보급받기 위해 읍내 보건소를 찾아갔으나 공급이 제대로 되질 않아 허탕치는 날이 많았으며, 같이 폐병을 앓던 고향친구들이 하나둘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의 병세는 점점 심해져서 폐결핵과 늑막염을 거쳐 신장결핵과 방광결핵으로 인하여 온 몸이 망가져버려서 사람 구실을 못 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평생 오줌통을 몸에 차고 살아야 했다.

- 이런 상황에 부모님마저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집도 없고 기댈 곳도 없어진 그는 1967년 경상북도 안동군(현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 일직교회 부속의 토담집에서 기거하며 종지기를 하게 되었다. 생활은 여전히 조악해서, 여름이면 소나기에 뚫린 창호지 문 구멍 사이로 개구리가 들어와 울고, 겨울이면 생쥐들이 들어와 발가락을 깨물거나 옷속을 비집고 겨드랑이까지 파고들 정도였다고 한다. 처음엔 깜짝 놀라고 귀찮았지만 시간이 점차 흐르고 나중에는 아랫목에 먹을 것을 두고 생쥐들을 기다릴만큼 정이 들었다고 한다.

- 1969년 단편동화 《강아지똥》을 발표하여 월간 《기독교교육》의 제1회 아동문학상을 받으며 동화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에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당선되었고, 1975년 제1회 한국아동문학상을 받았다. 1984년부터 교회 뒤편의 빌뱅이언덕 밑에 작은 흙집을 짓고 혼자 살며 꾸준히 창작을 했다.

- 1981년작 몽실 언니 등의 베스트셀러를 쓰면서 수억원에 이르는 인세를 매년 받았으나, 정작 산골의 흙집에서 평생을 검소하게 살았고, 옷도 단벌이어서, 이웃 사람들은 그가 굉장히 가난한 사람인 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그의 사망 후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과 그가 남긴 재산에 대해 알고서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사실 여기엔 어두운 뒷 이야기가 있다. 출판사에서 지급한 권정생의 인세가 작가에게 전달되지 않고 중간에 사라진 것. 출판사와 권정생 사이에 있던 아무개가 착복한 것이다. 이 일에 대해 아무개는 "권정생은 워낙 순수한 사람이라 돈이 있어도 쓸 줄 몰라 주지 않았다"라고 변명했다고 한다. 금전에 무지한 권정생이 훗날 유언장에 유산에 관한 부분을 남기게 된 사연이 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연 선생께서 정말로 모르셨을까?

 

- 유언장

내가 죽은 뒤에 다음 세 사람에게 부탁하노라.

1. 최완택 목사 민들레 교회
   이 사람은 술을 마시고 돼지 죽통에 오줌을 눈 적은 있지만 심성이 착한 사람이다.

2. 정호경 신부 봉화군 명호면 비나리
   이 사람은 잔소리가 심하지만 신부이고 정직하기 때문에 민을 만하다.

3. 박연철 변호사
   이 사람은 민주 변호사로 알려졌지만 어려운 사람과 함께 살려고 애쓰는 보통 사람     이다. 우리 집에 두 세 번쯤 다녀갔다. 나는 대접 한 번 못했다.

 

이 세사람은 내가 쓴 모든 저작물을 함께 잘 관리해 주기를 바란다.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는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를
어린이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만약에 관리하기 귀찮으면 한겨레 신문사에서 하고 있는 남북 어린이 어깨동무에 맡기면 된다.
맡겨 놓고 뒤에서 보살피면 될 것이다.
유언장이란 것은 아주 훌륭한 사람이 쓰는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유언을 한다는 게 쑥스럽다.
앞으로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좀 낭만적으로 죽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도 전에 우리 집 개가 죽었을 때처럼 헐떡헐떡거리다가 숨이 꼴깍 넘어가겠지.
눈은 감은 듯 뜬 듯하고 입은 멍청하게 반쯤 벌리고 바보같이 죽을 것이다.
요즘 와서 화를 잘 내는 걸 보니 천사처럼 죽는 것은 글렀다고 본다.
그러니 숨이 지는 대로 화장을 해서 여기 저기 뿌려 주기 바란다.
유언장 치고는 형식도 제대로 못 갖추고 횡설수설했지만 이건 나 권정생이 쓴 것이 분명하다.
죽으면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외로운 것도 끝이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그러니 용감하게 죽겠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 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 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환생했을 때도 세상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 봐서 그만 둘 수도 있다.

2005년 5월 1일

쓴 사람 권정생  주민등록번호 370818-0000000
주소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7 

 

 

그리고 타계 직전에 쓴 유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께 기도해 주세요.
제발 이 세상, 너무도 아름다운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게 해 달라고요.
제 예금통장 다 정리되면 나머지는 북측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보내주세요.
제발 그만 싸우고, 그만 미워하고 따뜻하게 남북통일이 되어 함께 살도록 해주십시오.
중동, 아프리카, 티벳 어린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지요?
기도 많이 해주세요.

 

마지막 유언은 "어머니… 어머니 아아, 어머니…"였다고 한다.(권정생 위인전 참고)

 

현재 그의 재산은 유언에 따라 권정생 어린이 문화재단에서 관리하며 남북한과 분쟁지역 어린이 등을 돕기에 사용되고 있다.

 

 

3. 주요작품 


똘배가 보고 온 달나라
훨훨 간다 (2003.4)
사과나무밭 달님
슬픈 나막신 - 1930~1940년대 재일 한국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새벗문고에서 '꽃님과 아기양들'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바 있다. 처음 쓸 때는 1천 페이지 정도의 분량이었으나 아이들에게 차마 읽힐 수 없는 부분들을 삭제하다 보니 지금의 분량이 나왔다고 한다.
하느님의 눈물
무명저고리와 엄마
몽실 언니
도토리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달맞이 산 너머로 날아간 고등어
오물덩이처럼 뒹굴면서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바닷가 아이들
길 아저씨 손 아저씨 (2006. 2)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
짱구네 고추밭 소동
내가 살던 고향은

우리들의 하느님 - 2008 국방부 불온서적 리스트에 있는 책이다. 좌우 이념을 선동하는 내용은 전혀 없고 자연과 벗하여 사는 가난한 삶에 관한 이 책이 불온서적으로 오르자, 독자 및 네티즌들은 '오히려 필독서를 권해줘서 고맙다', '국방부는 제대로 읽어보기나 한 거냐? 독후감 좀 써봐라'라며 실소를 금치 못했다.
엄마 까투리 - 그의 유작. 애니메이션화도 되었다.
랑랑별 때때롱 - 이 작품은 200 페이지가 넘는데 일본식 번역체인 "~의"를 단 3번만 사용한 일화로 유명하다. 자세한 것은 번역체 문장/일본어 참조. 그리고 개똥이네 놀이터에 연재되었다.
한티재 하늘 - 지병으로 인한 건강 문제로 완결을 내지 못하고 작고하였다. 출판은 2권까지 되어 있다.
점득이네
열여섯 살의 겨울(수필형식의 소설, 수필에 가까움)
강아지똥

 

 

 

 

4. 작가 권정생 “교회나 절이 없다고 세상이 더 나빠질까”

 

 

< 한겨레, 조연현 기자,  2006-10-31  >

 


〈강아지똥〉과 〈몽실 언니〉를 쓴 권정생(69) 선생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독자가 많은 동화작가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려고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의 오두막으로 그를 찾아오지만 그는 사람들을 만나주지 않는다. 기자는 말할 것도 없다. 인터뷰 같은 것을 한 적도 없다. 어려서부터 앓아온 전신결핵의 고통으로 신음하면서 홀로 살아가는 그는 “너무 아파서 인상을 찌푸리지 않고 사람을 맞을 자신이 없어서” 사람이 찾아와 불러도 아예 문조차 열어보지 않는다.


그런 그가 김장배추 속에 숨은 흰 속살 같은 얼굴을 내보였다. 지난 29일 그의 마을 정자 나무 아래서 한 ‘드림교회’ 예배에서였다. ‘드림교회’란 이현주(62) 목사가 지난 4월부터 주일이면 좋은 사람과 좋은 장소를 찾아 예배를 드리는 ‘건물’ 없는 교회다. 이 목사는 이 마을에 찻길조차 없던 1970년대 이오덕 선생으로부터 숨은 ‘인간 국보’의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다녔던 지기다. 그는 ‘드림교회’가 뭔지도 몰랐지만 그런 이 목사의 청으로 엉겁결에 마을 정자 나무 아래 앉았다. 그를 만나고파 이 전국에서 이날 예배에 온 20여명과 함께였다.


‘교회 종지기’의 나무아래 예배 - 권 선생은 사람들의 시선이 부끄러운 듯 모자를 눌러쓴 채 얘기를 했다. 그와 수십 년 지기인 이 목사도 “이렇게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것도, 이렇게 말씀을 오랫동안 하는 것도 처음 본다”고 했다. 권 선생이 생전 처음 베푼 말잔치는 소리 소문 없이 온 산하를 물들여버리는 가을 기운 같은 축복이었다.



작가 권정생이 말하는 하느님과 인간의 뜻


침묵 기도 뒤 사람들은 기도를 나누었다. 참석자들 대부분은 “하나님께 ‘저를 왜 이곳에 불렀느냐?’고 물었다”며 하나님께서 이러저러한 응답을 주었다고 말했다.
“차를 타고 이곳에 온 게 하나님 뜻인가요?”
이 목사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권 선생이 말문을 열었다. 무슨 일을 하든 관성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갖다 붙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습관적인 말’에 대한 일침이었다.
“이라크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사람들에게 그 많은 고통을 주는 것도 하나님의 뜻인가요? 인간이 한 것이지요.”
권 선생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낙엽만이 침묵의 공간 속을 뒹굴었다. 마침내 여든여덟살 난 마을 할머니 얘기를 꺼냈다.


인간이 저지르고 하느님뜻이라니… 천당가는 것보다 따뜻한 삶이 중요


할머니가 네살 때 부모가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 뒤 아직까지 소식을 모른다. 그는 지금도 ‘아버지 어머니가 나를 버렸을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못 오셨을까’만 생각한다. 결혼해 자식 손자까지 다 있는데도 할머니는 아직까지 네살짜리 아이로 살아가고 있다. 그것도 하느님 뜻인가. 하느님이 일제 36년과 6·25의 고통을 우리에게 주었는가?
권 선생은 “아니다”라고 자답했다. 그 고통 역시 “인간 때문”이라는 것이다. 얘기 중에도 허공을 응시하는 듯한 눈으로 산과 들과 마을을 바라보던 그가 다시 마을 얘기를 이어갔다.


“우리 마을엔 당집이 있다. 거기엔 할머니신을 포함해 세 분이 모셔져 있다. 한 분은 후삼국시대에 백제에서 온 장군인데, 죽을 줄 알던 마을 사람들을 모두 살려줬다. 또 한 분은 비구니 스님인데, 이 마을에 전염병이 돌 때 와서 사람들을 살려줬다. 당집에선 한해 동안 싸움 안하고 가장 깨끗하게 산 사람이 제주가 되어 정월 보름마다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면서, 또는 당집 앞을 지날 때마다 스스로 착하게 살려고 자신을 다잡는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은 평안하게 살아간다.”
그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착하게 살아가라’는 설교를 귀가 따갑게 들으면서도 한 가지도 행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기 일쑤인데 왜 그럴까. 세상에 교회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는 또 “교회나 절이 없었더라도 더 나빠지지 않았을 것 같다”고 자답했다. 그는 “세상에 교회와 절이 이렇게 많은데, 왜 전쟁을 막지 못하는가”라며 다시 낙엽을 바라보았다.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에서 600만명이나 죽는 고통을 당하고도 왜 그렇게 남을 죽이고 고통스럽게 하는가. 1940년대 유대인들이 처음 팔레스타인 땅에 돌아올 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키부츠 등에 땅도 내주고 함께 살자고 했는데, 이젠 ‘처음부터 막았어야 했는데’라며 후회한다고 들었다. 영화 〈쉘부르의 우산〉의 배경이 된 전쟁은 베트남전이다. 프랑스는 당시 베트남인들을 노예처럼 끌어다가 칠레 남부의 섬에 가둬 비행장 건설 노역을 시켰다. 그러다 전쟁이 끝나자 베트남인들은 그대로 남겨둔 채 자기들만 고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섬엔 아직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베트남 노인들이 살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악행만 얘기하지 자신들이 한 것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중국도 일본이 난징학살 때 30만명이나 살육한 것을 지금까지 그토록 분개하면서도 티베트인들을 그렇게 죽인 것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지금까지도 억압만 하고 있다. 미국은 자기는 핵무기를 만 개도 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나라들만 나쁘다고 한다.


권 선생은 “모두가 자기는 잘하고 옳은데, 상대방이 문제라고 한다”고 했다. 그것이 불화와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죽어서 가는 천당 생각 하고 싶지 않다. 사는 동안만이라도 서로 따뜻하게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사의 일들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짓’임을 분명히한 권 선생의 말에 자신의 행동도, 세상의 해악도 하느님에게만 돌리던 핑계의 마음은 쓸려가 버렸다. 그러나 권 선생은 “하느님은 언제나 ‘인간이 하는 것’을 보고 계신다”며 “그렇기에 홀로 있어도 나쁜 짓을 할 수 없고, 착한 일을 했어도 으스댈 수 없다”고 했다.

 

 

 

장애와 천대 보듬은 ‘몽실언니’처럼
자기를 녹여 꽃피운 ‘강아지똥’처럼
권정생의 문학과 삶 

 

마을 뒤편 작은 개울가에 있는 권 선생의 오두막은 멀찌감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뭔가 울컥 솟구치게 할 만큼 쓸쓸했다. 이끼로 덮인 바위를 지나 들어선 앞마당 잡풀 사이에 권 선생이 불을 때 밥을 한 것으로 보이는 솥이 걸려 있었다. 오두막은 5평 남짓. 그러나 그도 평생 읽어온 책들이 대부분 자리를 차지했다. 그가 사용하는 공간은 몸을 웅크려야 겨우 누울 수 있는 0.3평이나 될까.


장애와 천대를 안은 채 살아온 가련한 이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몽실 언니〉의 삶을 그는 우리나라 최고의 작가가 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일제 때 일본 도쿄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광복 후 외가가 있는 경북 청송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가족과 헤어져 나무장수, 고구마장수 등을 했고, 전신 결핵을 앓으면서 걸식을 하다 열여덟살에 이 마을로 들어왔다. 스물두살에 다시 객지로 나가 떠돌던 그는 5년 뒤 이 마을로 돌아왔고, 스물아홉살 때부터 16년 동안 마을 교회 문간방에서 살며 교회 종지기로 살았다. 〈하느님의 눈물〉,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우리들의 하느님〉 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승화한 작품들이었다.


고운사 경내에서 함께 걸으며 그에게 “시골 마을에서도 이제 모두 새집 지어 살아가는데,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그 집도 1983년에 120만원이나 들여서 지은 집”이라며 “그런데 면에서 나온 공시지가를 보니, 89만원밖에 안 한다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마을 할머니들이 죽기 전에 그 집이라도 팔아서 돈을 쓰라고 한다”고 했다. 종지기 때와 다름없이 살아가는 그의 모습을 본 할머니들이 너무도 안타까워 하는 소리일 터였다. 그는 무언가를 관찰해 쓰는 작가가 아니라 자신은 끝내 녹아 없어져 아름다운 민들레꽃으로 피어나는 〈강아지똥〉의 실제 주인공이었다.

“자기 팔에서 직접 피 뽑아 수혈”... ‘히말라야 슈바이처’ 강원희 선교사 별세

 

의료봉사 40년... 26일 숙환으로 별세
‘인생 가운데 토막 신께 드리자’ 아내 설득해 82년 네팔로
위험한 순간도 많았지만 신뢰로 견뎌내
서재필 의학상, 국민훈장 동백장 등 수상

 

 

< 조선일보, 김경은 기자,  2023.05.27.  >

 

 


‘히말라야의 슈바이처’ 강원희(姜元熙·87) 선교사가 26일 오후 숙환으로 별세했다고 세브란스병원이 27일 밝혔다.

1961년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고인은 1970년 강원도 무의촌에 병원을 열었다. 그는 생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부친이 황해도 피란민이었다. 꿈이 무의촌 봉사였다”고 했다. 병원도 잘 됐다.

하지만 그는 항상 은혜의 빚더미 위에 살고 있고, 조금이라도 갚으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1976년 한경직 목사가 속초를 방문해 찾아갔다. 선교사로 가고 싶다고 하니 네팔을 권했다.

간호사 출신인 아내 최화순 권사가 ‘우리도 그냥 보통 사람들처럼 살 수 없느냐’고 했다. 그는 ‘꼬리도 머리도 아닌 인생의 가운데 토막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다’고 아내를 설득했다.

우여곡절 끝에 1982년 네팔로 건너가 약 40년간 네팔·방글라데시·스리랑카 등에서 의료 봉사 활동을 펼쳤다. 49세 늦은 나이로 해외 선교에 나섰지만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봉사에 헌신했다.

네팔은 공산당이 득세했고, 서점에는 김일성 책 천지였다. 현지 청년들은 “남한에서 왔다”는 그에게 “죽여버리겠다”며 으르렁댔다. 그는 매 주말 산동네를 찾아다니며 병자들을 고쳤다. 아이 출산부터 중환자 수술까지 거의 모든 환자를 돌봤다. 먼 곳에 갈 땐 하루 열대여섯 시간 걸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이상하게 닥터 강이 치료하면 염증도 안 생기고 잘 낫는다”고들 했다. 그는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낮에는 환자들을 돌보고 밤에는 잘 시간을 쪼개가면서 현지 언어를 익혔다. 새로운 의술을 익히는 일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틈나는 대로 귀국해 대형 병원에서 새로운 의료 기술을 익혔다. 봉사의 마음가짐도 중요하지만 실력이 없으면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위험한 순간도 많았다. 1998년 힌두교 성지인 네팔 돌카의 산골짜기 병원에서 병원 사역자 중 한 사람이 간호사 방의 힌두신(神) 포스터를 찢어버렸다. 성난 군중이 병원으로 새까맣게 밀어닥쳤다. 먼저 기도를 하고, 죽을 각오로 그들을 맞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실수였다.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내가 책임지겠다’고 빌었다. 사람들은 몇 시간 만에 씩씩대며 돌아갔다. 그는 “그 일이 있기 전부터 친구처럼 신뢰를 쌓은 덕에 살아남은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의 피를 수혈해 중환자를 살려내고 환자가 퇴원하면 식료품을 사 들고 집에까지 찾아가는 열정으로 현지인들은 그를 ‘히말라야의 슈바이처’로 불렀다.

1985년 그가 쉰두 살이었을 때다. 네팔에서 3년째 봉사하던 때 응급실로 배 전체에 염증이 퍼진 환자가 실려왔다. 수술에 들어가자 헌혈하겠다던 아들들이 도망쳐 버렸다. 그냥 두면 죽는 상황이었다. 응급실장인 그가 팔을 걷고 피를 뽑으라고 했다. 그는 그때 200cc 혈액 팩 2개를 뽑았다. 병원장이 뛰어와 ‘죽고 싶으냐’고 말리는 바람에 그 정도에서 그쳤다. 환자는 한 달여 만에 퇴원했다.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안동성소병원장을 맡았지만 병원 경영이 안정되자 병원장 자리를 내놓고 곧장 에티오피아로 떠났다. 그곳에서 7년간 의료 봉사를 진행했다.

2010년 4월 히말라야 오지를 배경으로 당시 여든을 앞둔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히말라야 슈바이처’가 개봉했다. 나눔과 기도의 진짜 의미를 몸소 실천하는 그의 모습에 영화는 3만명 가까운 관객을 모으며 잔잔한 감동을 안겼다.

이러한 의료 선교 공로로 2020년 제17회 서재필 의학상, 2014년 국민훈장 동백장, 2012년 제24회 아산상 의료봉사상, 2000년 연세의학대상 봉사상, 1990년 보령의료봉사상 등을 수상했다.

빈소는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특2호실, 발인은 29일 오전 7시다. 장지는 강원도 양양군 선영.

1.

땅이 꺼져 세상 끝나길 바랐지만…더 좋은 세상 만들고 떠나다
삼풍 참사 유족 정광진 변호사 별세

 

 

< 조선일보, 박은주 부국장 겸 에디터 / 양승수 기자,  2023.05.22.  >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세 딸을 잃은 정광진 변호사와 아내 이정희씨가 1996년 11월 5일 국립 서울맹학교에서 열린 삼윤장학재단 설립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했다. 정 변호사 부부는 시각장애를 딛고 서울맹학교 교사로 일하던 윤민씨와 유정·윤경씨 등 세 딸의 뜻을 기려 삼윤장학재단을 설립했다.  

 


“그 일을 당한 뒤 우리 내외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 이 세상이 아주 끝나줬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정윤민 추모 문집에 쓴 아버지 정광진의 글)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로 시각장애인인 장녀 정윤민씨 등 세 딸을 잃은 후 장학재단을 설립, 장애인과 이웃을 도운 정광진(86∙삼윤장학재단 이사장) 변호사가 19일 오후 8시 51분 서울아산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그 여름 6월 29일, 정 변호사는 서울지법에서 재판을 끝내고 동기 모임 저녁 자리에서 붕괴 사고가 났다는 소리를 들었다. 집 근처에서 난 사고. 그는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수퍼에 가서 필요한 것도 사고 언니(윤민) 운동도 시키자”며 나간 세 자매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식이었다. 한걸음에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지만 딸들은 없었다. 밤새 서울 시내 병원을 뒤지다 다음 날 아침 10시쯤에야 둘째 딸의 주검을 마주했다. 남편, 한 살배기 아들과 유학을 떠나기로 했던 딸 유정(당시 28세)씨였다. 이어 찾은 윤민(당시 29세)씨, 윤경(당시 25세)씨도 같은 처지였다. 딸들이 다니던 영화교회 목사는 그들 장례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 현실을 믿음으로만 감내해야만 합니까.”


참척의 고통 속 그가 택한 것은 침묵이었다. 노환으로 입원한 지난 한 달 반 동안 숙부(叔父)인 정 변호사를 돌보고, 임종을 지킨 조카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은 말했다. “사고 이야기는 가족 간에도 금기였다. 아픈 이야기만 나오니까….”

말을 아꼈던 정 변호사의 속마음이 나타난 대목이 있다. 윤민씨가 유학 중 다녔던 교회의 목사 부인 노연희씨가 출간한 추모집 ‘나의 사랑, 나의 생명, 나의 예수님’에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딸 셋을 잃은 것이 아니라 인생을 송두리째 잃어버렸습니다.”

고 정경진(종로학원 창립자)씨의 7살 터울 막냇동생이었던 정 변호사는 용산고, 서울대 법대 졸업 후 1963년 제1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판사가 됐다. 전국 법조인 바둑 대회에서 여러 번 우승할 만큼 바둑을 즐겼다. 거의 유일한 도락이었다.

그의 마음은 가족, 특히 5세에 한쪽 눈 시력을, 12세에 남은 눈마저 잃은 시각장애인 딸 윤민씨에게 가 있었다. 1978년 변호사가 된 것도 수술비, 치료비 등이 이유였다고 한다. 정 변호사 표현대로 “앞을 보지 못하면서도 늘 밝은 마음으로 살았던” 큰딸은 국립서울맹학교, 단국대 졸업 후 1988년 미국 버클리대 특수교육과로 유학을 떠나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헬렌 켈러처럼 다른 시각장애인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며 모교인 서울맹학교를 첫 직장으로 택했다. 윤민씨는 정교사가 된 지 9개월 만에 사고를 당했다.

사건 이듬해인 1996년 11월 6일, 서울맹학교에서 윤민·유정·윤경씨를 기리는 ‘삼윤(三允)장학재단 설립 및 기념비 제막식’이 열렸다. 정 변호사는 자신이 수령한 미혼인 두 딸의 보상금 6억5000만원, 경기도 의왕시 토지(당시 시가 7억원)를 재단에 출연해 서울맹학교에 기증했다. 

 

행사에서 그가 짧게 말했다. “맹인 학생들 가운데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유난히 많은 것을 봐 왔다. 삼윤장학재단은 특히 이들에게 힘이 되고자 한다.” 부인 이정희씨는 “맹인들에게 빛이 되고자 했던 윤민이의 못다 이룬 꿈을 우리 부부가 대신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독실하고 검약하게 산 ‘정광진 장로’는 교회, 병원 등 여러 곳에 드러내지 않고 여러 번 큰 기부를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비통한 마음에 땅이 꺼지길 바란다고 했지만, 결국 그가 바란 건 더 좋은 세상이었다.

시각장애인인 조성재 대구대 교수도 유학 중 연간 400만원씩 ‘삼윤 장학금’을 받았다. 박사 학위를 받은 2005년 그가 말했다. “미국 유학 7년 동안 누군가 나를 믿고 도와준다는 생각에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장학금을 받은 장애인이 수천명이다.

정 변호사는 막내딸도 병으로 먼저 보냈다. 평소 연명 치료를 거부한다고 밝혔던 그는 마지막 즈음, 부인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자식 한(恨)이 많았지만 그래도 한평생 바르게 잘 살았다.” “내가 먼저 아이들을 만나러 간다.” “여자한테 잘하는 법을 몰라서 미안했다.” 큰 슬픔으로 다른 아픔을 위로한 삶이었다.

유족은 부인 이정희씨, 외손자 윤상원씨 등이다. 빈소는 분당서울대병원 장례식장 3호실, 발인은 22일 오전 7시 30분. 

 

 

 

2.

세 딸 잃은 아버지의 그 후 30년 

 

 

< 조선일보, 김태훈 논설위원,  2023.05.22. >



1988년 남편과 아들을 연이어 잃은 소설가 박완서는 작품집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아들 잃은 아픔이 더 컸다고 했다. ‘내가 이 나이까지 겪어본 울음에는, 그 울음이 설사 일생의 반려를 잃은 울음이라 할지라도, 지내놓고 보면 약간이나마 감미로움이 섞여 있기 마련이었다. (중략) 오직 참척(慘慽·자식 사망)의 고통에만 전혀 감미로움이 섞여 있지 않았다. 구원의 가망이 없는 극형이었다.’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슬퍼하는 조각상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뜻이다. 자식 잃은 아픔은 신도 위로할 수 없기에 그저 불쌍히 여길 뿐이다. 

 

하지만 세상엔 그런 아픔을 큰 사랑으로 승화한 부모들이 있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로 숨진 여대생 이승영씨의 부모는 승영장학회를 만들었다. 

 

천안함 용사 정범구 병장과 차균석 중사의 어머니들은 보상금을 아들의 모교에 장학금으로 기탁했다. 

 

서울 서대문의 이진아기념도서관은 평소 책 좋아했던 딸을 사고로 떠나보낸 부모가 세웠다. 성악 하던 아들을 학폭으로 잃은 이대봉 참빛그룹 회장도 장학회를 만들었다.

▶외국에도 비슷한 사례가 많다. 

 

영국에선 등교한 아들을 심정지로 떠나보낸 부모가 전국 학교에 심장제세동기 6000여 개를 보내는 운동을 펼쳤다. 지난 12년간 60여 명의 목숨을 구했다. 

 

미국에서 9·11 테러로 아들을 잃은 뒤 장학재단을 만들고 공원과 도서관, 테니스장을 조성해 아들 이름으로 시민들에게 기부한 이도 있다.

▶예술가들도 작품을 통해 비슷한 일을 한다. 가수 에릭 클랩턴은 아들을 추락사로 잃고 방황하다 ‘천국의 눈물(Tears in Heaven)’을 발표했다. 같은 아픔을 겪는 이들을 그 노래로 일으켜 세웠다. ‘나는 강해져야 해/ 그리고 살아가야 해/(중략)/ 나는 네가 있는 이곳, 하늘에 머물 수 없으니까.’

 

시인 김현승도 자식을 잃고 시 ‘눈물’을 썼다. 그 슬픔을 꼭 이겨내겠다는 다짐을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라는 시행에 담았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로 한꺼번에 세 딸을 잃은 정광진 변호사가 19일 별세했다. 정 변호사는 생전에 “우리 내외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 세상이 아주 끝나줬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고 했지만 세상을 오래 원망하지 않았다. 장학재단을 만들어 30년 가까이 시각장애 학생들을 지원했다. 눈물 속에 딸들을 보내지 않고 세상의 빛으로 되살려 냈다. 비극적인 사건이 끊이지 않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살아갈 희망을 얻는다. 정 변호사 같은 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 주식거래 혁명’ 이끈 시각장애인... 전재산 기부하고 떠나다
(1943~2023)프로그래머 버니 뉴컴 별세
1982년 이트레이드 창업
PC·스마트폰 주식 거래 혁명 이끌어

 

 

< 조선일보, 박건형 테크부장,  2023.04.24. >

 


누구나 주식을 하는 시대입니다. 심지어 지구 반대편의 거래소에 상장된 해외 주식을 24시간 사고 팔 수도 있습니다.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라는 책에 따르면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는 무려 1600년대 초반 네덜란드에서 시작됐습니다. 당시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던 암스테르담에서 동인도회사가 생기고, 이 회사에 투자자들이 몰립니다. 초대 주주는 1143명, 자본금은 오늘날의 가치로 1억유로 정도가 됐다고 합니다. 이 당시 동인도회사는 21년간의 장기 투자를 원칙으로 했는데 장기 투자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 지분을 팔 수 있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증권거래의 시초라는 겁니다. 이후 지분거래만으로 돈을 버는 트레이더들이 생겼고 세계 곳곳에 증권거래소가 설립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시스템이 구축됐습니다. 회사의 장부에만 기록되던 주식 거래는 전화와 전표, 증권회사 객장으로 점차 발전하면서 더 많은 사람을 주식의 세계로 끌어 들였습니다.


오늘날 주식거래를 하기 위해 거래소에 가거나 증권사를 찾아가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왜일까요? 바로 PC와 스마트폰을 통해 어디서나 원하는 시점에 주식을 사고 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식거래의 혁명을 이끈 온라인 주식거래의 발명자 버니 앨런 뉴컴(Bernie Newcomb)이 지난 1월29일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뒤늦게 알려졌습니다. 혁명적인 기술을 만들어낸 뉴컴의 인생은 테크 업계에서 꽤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앞을 거의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자 독학으로 소프트웨어를 공부해 프로그램을 만들어낸 입지전적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잡스와 워즈니악 같은 만남


1980년 전자회사를 운영하던 윌리엄 포터는 캘리포니아 팰로알토의 핼러윈 파티에서 프리랜서 프로그래머 뉴컴을 만났습니다. 당시 애플의 ‘애플II’ 컴퓨터를 막 구매한 포터는 이 개인용 컴퓨터로 집에서 주식을 사고 팔 수 있는 아이디어를 얘기합니다. 워싱턴포스트는 두 사람의 만남을 애플 공동창업자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의 만남에 비유했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잡스와 마찬가지로 포터는 선견지명이 있는 마케터이자 계산적인 사업가였고, 뉴컴은 워즈니악 같은 천재 프로그래머였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자본금 1만5000달러로 ‘트레이드 플러스’라는 회사를 세웠습니다. 처음 타깃은 이른바 ‘디스카운트 브로커(discount broker)’였습니다. 증권사보다 훨씬 싼 가격에 주식 거래를 대행하거나 자산을 운용해주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비용 절감을 위해 온라인으로 거래를 할 수 있도록 해 준 것이죠. 트레이드 플러스를 통해 처음 주식 거래를 한 사람은 미시간의 한 치과의사였다고 합니다. 당시 온라인 주식 거래는 엄청난 인내가 필요했다고 합니다. PC통신 시절을 떠올려보면 됩니다. 전화선을 이용한 모뎀의 속도와 전화가 왔을 때의 상황이 한시가 급한 주식 거래에서 나타난다면 환장할 노릇이겠죠.

하지만 거래소나 증권사를 찾아가지 않아도 되는 편의성 덕분에 중개인들은 자체적으로 온라인 거래 기술을 개발하기 시작합니다. 시장이 사라진 포터와 뉴컴은 1992년 회사 이름을 ‘이트레이드(E-Trade)’로 바꾸고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직접 주식 거래 서비스를 론칭합니다.

 


◇PC시장 성장 이끈 혁명적 기술


1992년 85만달러였던 이트레이드의 매출은 2년만에 1100만달러로 늘었고 비즈니스저널은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회사”라는 찬사를 보냈습니다. 이트레이드의 목표는 피델리티, 찰스 슈왑 같은 주식 중개 업계의 최정상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창업자들 이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을 얘기였지만, 결국 이 꿈은 이뤄졌습니다.

이트레이드는 주식 거래당 12달러를 고객에게 받았는데, 당시 일반적인 주식 거래 수수료의 절반 이하였다고 합니다. 공격적인 영업도 했습니다. 1996년 주요 일간지에 “여러분의 주식 중개인은 이제 구식입니다(Your broker is now obsolete)”라는 광고를 게재했습니다. 다음 광고의 카피는 “주식 중개인을 부팅하십시오(Boot your broker)”였습니다. 인터넷 속도와 PC 성능이 향상되면서 이트레이드는 급성장을 거듭했습니다.

1996년 이트레이드는 주당 10.5달러에 뉴욕 증시에 상장됐고, 1년 후에는 주가가 두 배가 됐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이트레이드는 PC 판매를 촉진하는 효과가 있었고, 아마추어 주식 투자자들을 전문 투자자로 바꿔놓았다”고 했습니다. 이트레이드의 최고기술경영자이자 연구개발 총괄을 맡았던 뉴컴은 주당 가격이 약 23달러였던 1997년 회사 주식 240만주를 가지고 은퇴했습니다. 본인의 역할이 다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물러날 때를 선택한 겁니다.

 


◇벌목공이 될 뻔한 시각장애 소년


뉴컴은 1943년 11월10일 포틀랜드 남쪽의 작은 마을 스키오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마을은 벌목을 주업으로 하는데 인구 1000명도 되지 않는 작은 동네였습니다. 아버지는 학교 청소 직원과 골프장 관리인으로 일했고, 어머니는 식료품점 점원이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가족들은 그를 빙(Bing)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는데, 고등학교 졸업 후 지역 제재소나 벌목장에서 일할 운명이었다”고 했습니다.

뉴컴은 선천성 백내장으로 법적으로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아예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책을 완전히 눈에 가까이 대야 간신히 글자가 보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대신 그는 뛰어난 기억력과 청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뉴컴의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었습니다. 2학년까지 시각장애인 기숙 학교에 다녔지만 공립학교로 옮겨 비장애인들과 어울렸습니다. 점자도 배우지 않았습니다. 오레거니언 뉴스페이퍼 인터뷰에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일찍 배웠다”면서 “미식축구팀 입단 테스트를 하려고 했지만 거절당하고 학생 매니저이나 워터보이를 했다”고 했습니다.

 


◇끝까지 극적이었던 인생


뉴컴은 가족 가운데 처음으로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오레건주립대 경영대 재학 시절 줄곧 장학생이었고, 3등으로 졸업했습니다. 졸업을 했지만 일자리를 구하는 첫 단계부터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당시만 해도 장애인을 고용하는 회사가 거의 없었던 것이죠. 은행과 회계법인 채용 시험마다 낙방했고, 대학 진로상담관이 한포드워크스 공장의 데이터 처리 부서에 간신히 일자리를 구해줬습니다.

뉴컴은 소프트웨어를 독학으로 배웠습니다. 대학에서 메인 프레임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청강했고, 공장을 퇴사한 뒤에는 소프트웨어 관련 컨설팅 서비스를 기업들에 제공했습니다. 그러다 포터를 만난 것이죠. 제약이 많은 시각장애인이었지만 도전을 즐기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수상스키와 스키를 즐겼고, 북극을 비롯한 전세계를 돌아다녔습니다. 여행 중에 뼈가 부러지거나 머리를 다치는 일도 있었지만 계속해서 새로운 일을 벌였습니다.

뉴컴의 인생은 끝까지 극적이었습니다. 그는 은퇴 직후 버니 뉴컴 재단을 세워 전 재산의 사회환원에 나섰습니다. 은퇴한 1997년 오레곤주립대에 610만달러를 기부했는데, 이는 지금까지 이 대학이 기부 받은 최고 금액입니다. 2000년에는 자신이 졸업한 고등학교에 축구장과 육상장을 지으라며 130만달러를 내놓았습니다. 또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대(UCSF) 안과의 올 메이시 재단의 연구를 지원했고, ‘버니 앤드 게리 뉴컴 안과 혁신 센터’ 건립자금도 냈습니다. 미국 시각장애인 재단은 그에게 ‘헬렌 켈러 공로상’을 줬죠. 자신이 처했던 현실에 뉴컴이 비관하고 멈췄다면 절대 이룰 수 없는 일들입니다. 온라인 주식거래도 한참 뒤에야 현실에 등장했겠죠.

동업자인 포터는 2015년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창업자들이 물러난 이트레이드는 어떻게 됐을까요. 2020년 투자은행 모건 스탠리가 130억달러에 인수했습니다. 당시 이트레이드의 고객은 520만명 수준이었습니다. 파티장의 우연한 만남이 만들어낸 거대한 성공인 셈이죠.

이 일본인을 추모하러… 봄비에 韓·日 인사 수십명이 모였다
일제시대 韓 산림·문화보존 힘쓴
아사카와 다쿠미 92주기 추모식
장사익 ‘아리랑’·'봄비’ 불러

 

 

< 조선일보, 김은중 기자,  2023.04.05.  >

 

 


“한일 간 어두운 과거사와 해묵은 감정들, 오늘 내리는 이 봄비에 다 털어냅시다.”

4일 오전 서울 중랑구 망우리 묘지 내 있는 203363호 무덤 앞에서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1892~1931)씨의 아흔두 번째 기일을 맞아 추모식이 열렸다. 고인은 일제 시대 때 조선총독부 산림과 직원으로 일하면서 한반도 조림(造林)에 앞장섰고, 형 노리다카와 조선백자 등 미술품 3000여 점을 수집해 경복궁에 세운 조선민족미술관에 기증했다. 그의 추모석에는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 적혀 있다.

이날 추모식에는 한국과 일본 인사 50여 명이 참석했다. 추모식을 주최한 ‘아사카와 노리다카·다쿠미 형제 현창회’가 알리지도 않았는데 중랑구에 거주하는 일본인들도 직접 현장을 찾았다. 형제인 노리다카도 조선 도자기와 공예품을 연구하고 알리는 데 공헌을 했다.

이번이 첫 추모식 참석이라는 소리꾼 장사익(74)씨가 가장 먼저 헌주(獻酒)를 했고 무반주로 ‘아리랑’과 ‘봄비’ 2곡을 불렀다. 장씨는 “나는 몰랐지만 한국의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해준 것이 고맙다”며 “한일 교류에 있어 문화의 힘과 중요성을 다시 실감한다”고 했다.

정부가 지난달 강제징용 배상 문제 해법으로 발표한 ‘제3자 변제’ 관련 실무를 총괄하고 있는 심규선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이사장도 참석해 추모사를 낭독했다. 심 이 사장은 “한국은 현재 일본 문제로 과거와 미래가 싸우고 있는데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갈등한 당신의 삶에서 작은 용기를 얻고자 한다”며 “당당하게 현재를 살다 간 당신을 등불 삼아 저도 험한 산길에 난 작은 오솔길을 걸어보겠다 다짐한다”고 했다.

이동식 현창회 회장은 “아사카와의 마음을 일본인도 많이 알게 돼 한국과 일본이 더 좋은 친구로 새로운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현창회 간사를 맡고 있는 함재경씨는 “한일이 정치 문제로 시끄러워도 민간 교류는 계속되어야 한다”며 “코로나가 끝난 만큼 내년에는 일본에서도 더 많은 인원이 추모식에 참석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다이내믹 싱어’ 현미...운명 전날에도 KTX 타고 대구 공연'

‘원조 디바’ 현미 85세로 별세

 

 

< 조선일보, 박은주 부국장 겸 에디터,  2023.04.05.  >

 


한국식 스탠더드 팝 시대의 시작점이자 최고 스타였던 가수 현미(본명 김명선). 짧은 파마 머리에 짙은 눈화장,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건강미를 자랑하던 그가 4일 오전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흐드러진 벚꽃이 간밤에 후드득 떨어졌듯이. “2027년, 데뷔 70주년 공연을 갖고 싶다”던 그는 전날인 3일에도 아침 KTX를 타고 대구에 가서 노래교실 공연을 마친 뒤 서울 용산구 이촌동 자택으로 귀가했다. 3일 오후 5시쯤 제부 한순철씨와의 마지막 통화에서 그가 이렇게 말했다. “오늘 좀 피곤하네.”

 


그의 마지막을 발견한 건 팬클럽 회장 김모(73)씨였다. 4일 오전 9시 37분 이촌동 자택을 방문했다가 쓰러져 있는 그를 발견해 경찰에 신고, 인근 병원으로 옮겼으나 사망 판정을 받았다. 그를 마지막 본 김씨는 “고인이 편안한 얼굴이었다”는 말을 전했다. 고 이봉조 작곡가와의 사이에 낳은 두 아들 이영곤(61), 영준(58)씨는 미국 LA에 거주 중이라 6일 서울에 도착해 장례 절차를 결정한다. 빈소는 서울중앙대학병원 장례식장 특실에 마련됐지만 아직 일반조문을 받지 않는다.

 


음악평론가 임진모씨는 “현미 선생은 1960년대 ‘가수의 시대’를 개막했고, 한국 가요의 품위를 끌어올렸다”고 ‘가수 현미’의 의미를 전했다.

 

 


미8군 칼춤 무용수, 60년대 ‘가수의 시대’를 열다

 


1938년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수산업을 크게 하는 집안의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현미는 1·4 후퇴 때 부모를 따라 월남했다. 이때 어린 여동생 둘을 외가에 두고 오는 바람에 이산가족이 됐다. 그 동생들 김길자, 명자와는 지난 1998년 중국에서 짧게 재회했다.

 


월남한 부친이 강원도 화천에서 식당업으로 돈을 벌어 집안 형편이 윤택했고, 현미는 덕성여대 가정과에 입학했다가 2학년 1학기 때 중퇴했다. 1957년 미8군 무대에 칼춤 무용수로 데뷔하며 연예 활동을 하느라 학업 병행이 어려웠던 것이다. 펑크 낸 다른 가수 대신 선 무대에서도 현미는 가수 재능을 발산했다. 곧바로 ‘현시스터즈’를 결성하게 된다.

 


당시 같은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작곡가가 이봉조(1932~1987). 이씨는 현미에게 팝송 번안곡 ‘아, 목동아’를 취입하게 한다. 현미는 “성량이 너무 커 다른 가수들과는 다르게 몇 발자국 떨어져서 곡을 녹음했다”고 당시를 회상한 적이 있다.



음악적 스승이자, 연인인 이봉조를 만난 현미는 솔로 가수로서 날개를 단다. 1962년 이봉조-현미의 메가 히트작이 나온다. ‘밤안개’는 미국 가수의 냇 킹 콜의 노래(It’s A Lonesome Old Town)를 현미가 한국어로 번안하고 이봉조가 편곡한 노래로 당시 대중에게는 충격적으로 세련된 노래였다.

 


2007년 11월 6일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 가수 현미의 데뷔 50주년 기념 콘서트 My Way 기자회견 및 53번째 앨범 제작발표회에서 가수 현미와 남편이었던 故 이봉조 작곡가와의 약혼사진이 취재진에 공개되었다.

 


한이나 흥을 애잔하게, 혹은 정겹게 부르는 당시 신민요나 트로트와는 달리 이봉조의 곡은 근대적 ‘개인’의 감성을 더 풍부한 음계로 표현했다. 현미의 음성은 전통적인 여가수 기준에서는 벗어나는 저음의 허스키한 스타일. 이봉조의 세련된 곡조와 현미의 새로운 질감의 목소리는 대중에게 도회적 감성이 무엇인지 느끼게 했다.

 


당시 언론은 현미를 두고 ‘다이내믹 싱어’ ‘폭탄적인 가수’라는 수식을 썼다. 한명숙, 최희준과 함께 미국식 ‘스탠더드 팝’을 한국땅에 심는 순간이었다. 미8군 라이브 무대 중심이던 팝 스타일 노래가 음반과 방송을 통해 한국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신성일-엄앵란 커플의 영화에 이봉조-현미 커플의 영화주제가로 참여한 1965년 영화 ‘떠날 때는 말없이(감독 김기덕)’는 영화와 주제곡이 모두 대히트를 쳤다.


소고기 한 근이 100원이었던 시절, 현미 노래가 담긴 300원짜리 12인치 음반은 잘도 팔려나갔다. 빠른 템포의 명랑한 가사 ‘몽땅 내 사랑’, 한국적 엔카 스타일로 평가받는 ‘무작정 좋았어요’까지 현미는 50여 장의 앨범을 통해 폭넓은 노래를 소화했다. 2017년 우리 나이 여든에 낸 신곡의 제목은 ‘내 걱정은 하지 마’였다.



현미의 최고 히트작 중 하나인 1968년 ‘보고 싶은 얼굴’은 이중간첩 혐의로 6·25 직전 처형된 ‘간첩 김수임 사건’을 다룬 이강천의 1964년 영화 ‘나는 속았다’의 주제곡이었다. 분단이라는 주제는 현미에게도 가슴 아픈 사연이었다. 역시 이봉조 작곡이었다.

 



“주말에는 평양 냉면 먹으러 가자”더니

 


현미와 50년 가까운 인연을 이어온 제부 한순철씨(연기자 한상진씨 부친)는 그를 두고 “남자로 태어났으면 장군감”이라고 했다. “외롭지 않으시냐 물으면, 잠 잘 자고 용변 잘 보면 잘 사는 인생이라고 늘 말씀하셨다”고 했다. 음악평론가 박성서는 “현미의 평생 신조는 ‘무던하게 살기’ ‘되도록 많이 이해하기’ ‘남 앞에서 울지 않기’였다”고 적었다.

 


실제로 현미는 다른 여가수와는 달리 맨얼굴로 대중 곁에 머물기를 즐겼다. 1974년 이봉조와 갈라선 후, 현미는 노래교실을 열었다. 스타 가수는 잘 하지 않는 일이었다. 방송에서는 ‘건강하게 나이 드는 스타’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줬다. 십년 전쯤 기자와 만났을 때에도 “아직도 열 살 어린 남성 팬들이 만나자고 줄을 선다”고 자랑했다. ‘할머니’에 대한 고정관념을 ‘신박하게’ 깨뜨려줬다.

 


2023년 3월 16일 가수 현미씨가 (사)한국나눔연맹과 광주 북구청이 계묘년을 맞아 토끼띠 저소득 독거 어른신들을 위해 연 합동생일 잔치에서 공연을 하였다.

 


‘에너지’는 그의 또 다른 재주였다. 가리는 것 없이 잘 먹고, 말했고, 사람들을 사귀었다. 뽀글 파마 머리를 옆으로 바짝 붙이고, 짙은 눈화장을 한 그녀를 여성, 남성 개그맨들 여럿이 흉내 냈다. 개그맨 김숙은 “현미 선생님이 내 개그를 봤다며 계속하라고 격려해 줬다. 다만, 나는 (너처럼) 초라한 드레스는 안 입는다. 내가 화려한 드레스 몇 개 주겠다고 하시더라”는 일화를 공개한 적이 있다. 현미의 조카인 가수 노사연씨는 “가수 목소리가 좋으려면 몸과 정신 둘 다 건강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이봉조씨의 중혼 사실이 알려지면서 현미가 대중에게 손가락질받은 적이 있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여자를 먼저 손가락질하던 시절이었다. 현미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남편 때문에 내가 노래를 부를 수 있었고 여전히 존경한다.” 제부 한씨도 “한번도 원망하는 걸 들은 적이 없다”고 했다.

 


대신 그는 호쾌한 목소리로 “목소리가 안 나오면 그때 은퇴하겠다” “노래할 수 있을 때까지 노래하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지난주 현미는 제부와 식사 약속을 했다. “거 내주 말에는 을밀대에 냉면 먹으러 가자.” 꽁하는 것 없이 앞으로 나가는 것, 대중이 가수 현미와 85세 인간 현미, 둘 다 사랑한 이유였을 것이다.

제주살이하며 죽음 이후 세계 연구하는 의사

 

 

 

< 조선일보, 함영준·마음건강 길(mindgil.com) 대표,  2023.04.04.  >

 


# 우리나라 소화기 내과의 권위자인 정현채(68)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는 평범한 교육자 집안에서 자랐다. 공부를 잘해 당시 명문 경기 중고를 거쳐 서울대 의대를 다녔다. 워낙 말이 적어 별명이 ‘벙어리’였지만, 사회성도 있어 반장도 하고 잘 컸다.

정현채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는 죽음은 삶의 종착역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문이라면서 죽음 이후의 삶을 인정했다. 


그런데 그는 늘 자신에 대한 자학이 심했다. 사춘기 시절 머리가 크면서 스스로를 ‘가치없는 인간’으로 여겨 투신자살하려고 한강에 간 적도 있었고, 20대 대학시절에는 손목을 칼로 긋거나 수면제를 모아 먹은 적도 있었다.

그는 70을 바라보는 지금도 왜 그런 자살충동이 생겼는지 이유를 잘 모르겠다고 했다. 타고난 성격이나 환경 때문이 아니라면 그의 업(業) 때문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전생의 빚을 해소하기 위해서인가.

장가 가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서울대병원에서 잘나가는 의사로 인정받고 사는 데도 마음 한구석에는 삶에 대한 허무, 자신에 대한 자책, 그리고 이생 너머 죽음에 대한 불안이 강력히 존재하고 있었다.

 


# 죽음에 대한 인식의 전환은 40대 후반인 2003년, 아내가 권해준 ‘사후생(死後生)’이란 책을 읽으면서 비롯됐다.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이자 죽음학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스위스 태생의 미국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1926~2004) 박사가 많은 환자들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목격한 죽음과 관련된 영적 현상을 기록한 책이다.

2만여건의 근사체험(육체이탈체험) 기록 등을 통해 그녀는 한마디로 “죽음 이후의 삶이 존재하며 그렇기에 우리는 바로 지금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환자가 죽음에 직면할 때 가장 사랑하는 존재가 그 죽음을 도우러 나타나며, 그 사랑 속에서 환자가 평화롭게 임종을 맞게 되는 등 사랑은 죽음 이후에도 지속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종교인이나 철학자의 관점이 아니라 과학자의 시각으로 죽음을 알고 싶었던 그는 그녀의 임상기록에 크게 공감하고 이후 저명한 의학 저널 ‘랜싯(Lancet)’이나 의과학 전문 학술지에 게재된 근사체험에 관한 논문 등을 찾아 본격적으로 죽음을 공부했다.

마침 고교동창인 이화여대 한국학과 최준식 교수가 창설한 ‘한국죽음학회’에 들어가 함께 공부하고 연구도 했다.

죽음은 사방이 꽉 막혀 있는 벽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문이라는 걸 확신하게 됐죠.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면 자살하는 이들이 크게 줄 것이며, 말기 암 환자 등 죽음을 앞둔 이들도 불안과 공포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의사로서 그의 임무가 사람 목숨을 살리는 일이었다면 이제는 죽음을 공부함으로써 이생에서 의미있게 살다가 아름답게 세상을 마무리하도록 도와주는 일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2007년부터 대중을 상대로 ‘죽음학’ 강의를 시작했다. 진료 활동중에도 연구를 거듭해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란 책 등도 간행했다.

 


# 명예퇴직을 몇 해 앞둔 2018년 그는 암에 걸렸다. 방광암 2기. 처음엔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러나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을 연구하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인간을 비롯 모든 동물체는 ‘접근・회피(approach vs avoid)’ 본능이 있다. 좋은 것은 다가가고 싫은 것은 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성장과 자유는 두려움과 싫은 것을 정면으로 마주보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데서 이뤄진다.

방광과 전립선을 다 들어내는 수술을 받았고, 소변은 인공방광으로 대신했다. 항암치료는 잠깐 받았다. 암으로 인해 그는 조기 정년퇴직을 하고 제주도에 내려와 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까지 암 세포는 더 이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의 ‘대담한’ 마음 자세가 암세포의 증식을 억제시킨 것인가. 그러나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고 한다. 6,7년이 지나도 재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매일 새벽마다 일어나 15분 정도 샤워를 하면서 하는 독특한 감사(感謝) 의식이 있다. 자신의 두눈, 두귀, 두다리 등 모든 신체기관이 멀쩡하고 지난밤 돌연사하지 않은 데 대한 감사다. 의사로서 그는 수많은 환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예후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감사 기도를 마친 후 그는 샤워의 물줄기를 밝은 빛의 폭포로 생각하는 심상화(imaging) 훈련을 한다. 폭포를 맞으면서 몸에 쌓여 있는 부정적 에너지가 씻겨 내려가고, 손상된 신체 기관이 치유된다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분자생물학적 관점에서 그는 암세포와 싸우는 세포들에 대해 감사하고 격려하는 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암환자들에게 권유되는 이 요법은 의학적으로는 아직 입증되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임상적으로는 꽤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샤워를 마친 다음에는 서재로 들어가 컴퓨터를 켜고 자신이 운영하는 네이버 <죽음학 카페>에 들어가 점검을 한다. 3000여명 회원이 죽음이나 인생 문제를 놓고 대화를 나누고 상담을 구한다. 정교수는 직접 글을 쓰고 댓글을 달아준다.

아침을 들고 나면 죽음에 대한 연구나 강연준비를 한다. 오후에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카메라를 들고 인근 숲으로 향해 산책하며 사진을 찍는다. 자연에 대한 사진 찍기는 그에게 탐구요, 몰두요 명상이다. 마음이 아주 편안해진다.

집에 돌아와서 다시 카페로 들어가보면 이런저런 상담 내용들이 올라와 있다. 답변도 보낸다. 자살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힘을 북돋워주고,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여윈 이에겐 죽음 이후에 사랑을 전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준다.

정교수는 은퇴 후 암과 싸우면서 오히려 더 마음이 맑아지고 편안해졌다. 죽음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고 공부하면서 이생에서의 삶에 대해 더욱 의욕과 희망을 느끼고 산다고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삶에도 큰 변화가 옵니다. 재물이나 출세, 자식의 성적에 연연하는 지상의 시선을 거두고 삶의 진정한 의미로 향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죠.”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과 풍광 속을 거닐며 그는 젊은 시절 느껴보지 못한 자유와 희망, 그리고 기쁨을 느낀다고 한다. 

‘살아서 장례식’ 치른 서길수 교수


1.  < 매일종교신문 문윤홍 대기자, 2020.02.24 >


 

‘죽음’ 준비하는 삶 살고자 ‘살아서 장례식’하는 서길수 전 서경대 교수 

 
죽음은 누구나 공평하게 가야하는 길이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이 죽음을 준비하는 경우는 적다.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고 이를 준비하고 ‘연습’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서길수(75) 전 서경대 교수. 그는 특히 ‘살아서 치르는 장례식‘을 통해 주변인들에게 장례(葬禮)문화를 새롭게 인식시키고 있다.

 
" '죽은 뒤 찾아오는 사람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가 살아서 조문 온 사람들을 직접 만나보고 가는 게 좋겠다.' 그러려면 장례식을 살아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서 교수는 고구려발해학회(전 고구려연구회) 회장을 지내며 중국의 동북 공정(東北工程: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 역사로 만들기 위해 2002년부터 중국이 추진한 동북쪽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연구 프로젝트)에 맞서 싸운 학자로 유명하다. 특히 그는 우리가 '고구리'를 '고구려'로 잘못 부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2009년 정년퇴직한 뒤에 "삶과 죽음에 대해 공부하겠다"며 갑자기 머리 깎고 3년을 강원도의 한 산사(山寺)에서 보냈다. 그는 "책을 펴낼 때마다 장례식 겸 출판기념회를 하기로 했다"며 "앞으로 내 장례식을 몇 번 더 치를지 나도 궁금하다"고 했다. "내 죽음을 내가 보며 가게 해달라고 유언했다. 연명치료도 하지 말고 가능하면 집에서 세상을 떠나야한다. 숨을 거두면 알리지 말고 빨리 화장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살아서 장례식’ 치른 서길수 교수의 장례철학

 
2019년 12월21일 오후 1시 서울 이화여대 근처의 한 강연장. 서길수 교수가 한복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문상객을 맞았다. "제 장례식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상중(喪中)인 큰며느리가 밝은 얼굴로 접수를 맡았다. 부의함은 없었다. 『고구려의 본디 이름 고구리』, 『장수왕이 바꾼 나라 이름 고리』 등 신간 저서 두 권을 필요한 사람만 샀다.

 
한 조문객이 "돌아가신 분에 대해 예를 표하러 왔는데 잘못 온 것 같습니다. 살아계시네요" 하는 바람에 웃음바다가 됐다. 이날 3시간 동안 누구도 울지 않았다.


‘살아서 하는 장례식’ 행사는 축사(고구려발해학회 회장 공석구), 축가(민족음악 가수 전경옥 ‘바람의 빛깔’, ‘함께 아리랑’ 2곡), 서길수 교수의 장례식 강의(책 2권에 담은 내용 함께 나누기), 참석자들과의 대화(서길수 교수와의 대화-삶과 죽음에 관하여)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이 행사에서 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 교수는 살아서 장례식을 치르는 것에 대해 “나는 늘 마음에 죽음을 새기며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다. 어느 날 자식들에게 할 유언을 준비하면서 살아서 하는 장례식을 생각했다. ‘죽은 뒤 찾아오는 사람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죽어서 누가 오는지도 모르는 장례식보다는 내가 살아서 조문을 온 사람들을 직접 만나보고 가는 장례식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장례식을 살아서 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대신 죽었을 때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부고 없이) 조용히 가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2009년 정년퇴직한 지 10년이 되었다. 2012년까지 산사에 들어가 3년간 ‘삶과 죽음’에 대한 공부를 하고 2012년 가을, 산에서 내려와 나머지 삶은 ‘함께 나누는 삶(回向)’을 살기로 했다. 나누는 삶이란 지금까지 내가 얻은 것을 정리하여 남겨주는 것을 뜻한다. 하산하고 동아일보 인터뷰(2012년 9월19일)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남은 생은 책 쓰며 나를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삶을 살 것이다’라고. 그러므로 내 장례식은 책이 한 권 나올 때마다 한 번씩 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살아서 장례식을 치른 서 교수는 “살아서 하는 장례식은 출판기념회로 대신했다. 몇 번을 해도 좋은 장례식을 하자는 것이다. 한 번을 하면, 책 1권을 나눈다. 100번을 하면 책 100권을 나눌 수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죽기 전까지 가능한 한 많은 장례식을 했다”면서 “저는 제 장례식에서 ‘내 죽음을 내가 보며 가게 해 달라.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연명치료를 하지 말고, 가능한 한 집에서 세상을 떠나게 한다’고 말했다. 또한 장례식에서는 ‘숨을 거두면, 장례식을 하지 말고, 화장터와 연락이 되는 대로 가능한 한 빨리 화장해야 한다. 될 수 있으면 24시간 안에 하되, 주검은 이른 아침이나 저녁에 조용히 떠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라고 했다.  

  

한 참석자가 ‘장례식에는 울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서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이 명상 주제는 1967년(24살)부터 주어졌다. 당시 대학 3학년,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장례식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엄격하게 진행 법식에 따라 곡(哭, 울음)을 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울지 않았다. 모두들 수근거렸지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장례식에는 왜 울어야 하는가? 1991년(48살) 12월2일,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나는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울지 않았다. 장례식에서는 울어야 하는가? 이 명상주제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주신 화두(話頭)였다. 울어야 하는가? 안 울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문제의 답은 ‘죽음(死)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의 답과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 죽음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1992년(49살) 2월22일 체선(體禪)을 시작해 내 생에서 처음으로 진지한 수행(修行)을 시작했다. 체선은 자신의 모든 움직임을 관(觀, 念)하는 수행법이다. 지도하는 선생님과 첫 대면에서 한 첫 질문이 죽음이었다.
 

‘선생님께서도 죽음에 대한 고통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걸 없애려고 노력하십니까?’, ‘하지 않습니다.’ ‘아예 두려워하시고 두려운 상태를 그대로 두십니까?’

죽음, 그것은 영원히 두렵다. 두려움은 두려움일 뿐이다. 두려움 자체가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하는데, 사람들은 선택을 하고 망설이기 때문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니까 고통이 온다. 두려움은 다 드러내면 고통은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체선의 원리”라고 답했다.

 

서길수 “죽음이란 익은 과일이 떨어지는 것”

 

서 교수는 ‘살아서 하는 장례식’에 대해 "삶에도 사계절이 있다고 생각한다. 정년퇴직할 때 는 가을이 끝나고 겨울로 들어선 셈이다. 누구는 '인생은 그때부터'라고 하지만 그러다 어느 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생사(生死) 문제를 확연히 알고 가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산사에 들어가 3년간 죽음 공부를 한 것에 대해서도 "1992년부터 '관법(觀法)수행'을 시작했다. 인터뷰하면서도 이야기하는 나를 내가 보는 식이다. 죽음은 전체 생애에서 마지막 부분이다. 입시 공부, 취직 공부는 열심히들 하면서도 정작 가장 중요한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안타까워한다.


그러면 서 교수는 깨달음을 얻었을까. 왜 3년 만에 하산한 걸까. 그는 "3년 만에 깨달을 수 있다면 이 세상은 깨달은 사람으로 가득 찰 것이다. 내 그릇으로는 이승에서 득도할 수 없다는 것은 깨달았다. 불교에 ‘회향(回向)’이라는 말이 있다. '함께 나누는 삶'이라는 뜻이다. 남은 생은 정리하고 책을 써 남겨주는 일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2014년 봄에 육종암 판정을 받았는데, 수술 받으면 '다리를 절게 될 것'이라고 의사가 말했다. 왼쪽 허벅지에서 암 덩어리를 도려내보니 18㎝ 크기였다. 암이라는 진단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나를 관찰했다. 수행을 검증할 기회였다. 현실을 인정하고 큰 업(業)을 하나 떼어낸다 생각하니 후련했다.


병원에서 사람들은 사실 암 때문에 죽는 게 아니었다. 암 자체보다는 암에 대한 걱정과 고통 때문에 죽어간다. 옛날에 읽은 아라비아 우화가 떠올랐다. 한 청년이 바그다드에 가는데 동행자가 생겼다. 다리가 아프다고 해서 업어줬더니 그 동행자가 '나는 사실 바그다드 사람들을 죽이려고 가는 페스트균인데 원래는 절반을 없앨 생각이었지만 네가 도와줬으니 3분의 1만 죽이겠다'고 했다. 약속을 어겼을 때 불러낼 수 있는 주문까지 가르쳐주면서 먼저 가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청년이 바그다드에 도착해보니 절반이 죽었다. 그 페스트균을 불러내 따지자 한다는 말이 '정확히 3분의 1만 죽였는데 나머지는 놀라서 죽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실제 고통보다 훨씬 더 키워서 고통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러면 서 교수의 육종암은 어떻게 됐을까. 그는 "수술 받고 두어 달 뒤에 문제가 생겼다. 퉁퉁 부어오른 거다. 의사도 당황했다. 암에 칼을 대면 더 번성할 수 있다는데 그거로구나 싶었다. MRI 찍고 결과를 기다리는 1주일이 죽음에 대해 가장 구체적으로 골몰한 시간이었다. 암 환자들이 모이는 사이트에 처음 들어가 봤다. '사람은 여러 가지 병으로 죽는데 암은 그 죽을병 중의 하나'라는 글을 읽으니 위안이 되었다"고 했다.


서 교수는 MRI 검사 결과를 보러 가기 전에 의사에게 할 요청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치료가 가능하다면 살고 싶다. 둘째, 불가능하다면 책을 두세 권 마무리할 때까지만 살려달라. 셋째, 그것도 안 되면 덜 고통스럽게 가고 싶다.


그랬더니 의사는 암이 재발한 게 아니고 림프액이 새어 나왔다고 했다. 1주일에 두 번씩 뽑아내면 된다고 했다. 그는 “5년이 지나 2019년 완치 판정을 받긴 했지만, 죽음에 대한 준비가 그때 확실히 시작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서 교수는 ‘살아서 하는 장례식’을 결심한 걸까. 그는 "답사로, 또 여행으로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녔다. 2018년 9월 중국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찍은 제 사진을 보더니 손녀(13)가 '이건 영정 사진이네'라고 했다. 그래서 손녀에게 물었다. '넌 장례식이 뭐라고 생각하니?' 그랬더니 대뜸 '육개장 먹고 울다 가는 것'라고 답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남의 장례식에는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난 10년 동안 제가 꼭 있어야 할 장례식만 두 번 갔다. 자식들 결혼할 때 청첩장도 보내지 않았다. 빚이 없다. 나중에 '세금' 걷으려고 장례식과 결혼식에 간다면 시간을 까먹는 일이다. 1967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눈물이 나오질 않았다. 왜 울어야 하나 궁금했다. 아버지의 죽음이 내게 준 화두"라고 강조했다. 


▲ 2009년 정년퇴직 후 강원도 산사에 들어가 3년간 죽음을 공부한 서길수 교수는 “죽음이란 익은 과일이 떨어지는 것”이라며 “몰라서 두렵지, 이치를 받아들이면 슬프기는커녕 기쁘다”고 했다.  
 

그러면 화두에 대한 답을 찾았을까. 그는 "산사에 있을 때 답을 읽었다. 진리는 이미 있는데 만나기가 힘들 뿐이다. 사람은 자연의 일부이고 반드시 죽는다. 과일이 익으면 떨어지듯이 말이다. 두렵지만 맞아들여야 한다. 죽음을 슬퍼한다고 해서 어떤 실익이 있나? 이치를 받아들이면 슬프지 않다. 몰라서 두려운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막상 닥치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게 죽음인데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서 교수는 "결국 삶은 늘 선택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프로그램대로 가고 싶었다. 지금의 장례식은 죽은 사람을 위한 게 아닌, 남은 사람을 위해 벌이는 쇼(show)다. 죽음이 뭔지 알았다면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수많은 목사님과 스님이 말씀하셨지만 나는 실천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 장례식에선 슬픈 척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슬프다면 그 근원을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는 게 목적이다. 내가 자식들에게 유언하면서 '다음 순서는 너희라고 생각하라'고 했다. 옛날에는 부모가 죽으면 자식들이 사흘을 지키고 염도 하고 다 봤다. 그 과정에서 생사에 관심을 가졌다. 이 장례식이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할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서 교수는 죽음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그는 "죽음은 마지막이자 시작이다. 그래서 천주교나 개신교에서는 영세나 세례를 준다. 살면서 지은 모든 업이 죽는 순간 한꺼번에 몰려온다. 힘들게 죽는 사람은 힘들게 살아온 것이다. 편안하게 살고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편안하게 간다. 하나님 곁으로 가든 윤회에 따라 다시 태어나든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산에서 3년 수행 끝내고 ‘환속’

 
서길수 교수는 정년퇴임 직후인 2009년 9월12일 머리를 깎고 부인과 강원도 영월군 깊은 산속의 적막한 암자로 들어간 지 3년 만에 2012년 9월 서울 집으로 내려왔다.  


퇴임 전까지 그는 중국을 답사하며 고구려 산성 130개를 발견했고 1994년 사단법인 고구려연구회(현 고구려발해학회)를 설립해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논리를 개발하는 데 앞장서왔다. 그러다 돌연 지인 700여명에게 “3년간 ‘수학여행’을 다녀오겠다”는 e메일만 남기고 전화, 인터넷, TV, 라디오, 신문 등을 일절 끊은 채 산속에서 두문불출하면서 수행과 공부에 전념했다. 

 
그가 산으로 들어간 것은 생사(生死)에 대한 오랜 관심 때문이었다. “인간의 생을 사계절로 보면 65세 퇴임 이후는 겨울에 접어드는 시기이다. 죽음을 준비할 때다. 부처님도 예수님도 피하지 못한 게 죽음인데, 그럼 죽고 사는 게 뭔지 확연히 알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단다.  


1992년부터 8년간 아침마다 2시간씩 선(禪)수행을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산에서 매일 6∼8시간 정토선(淨土禪·염불선)을 수행했다. 오전 2시 반에 기상해 오후 9시에 잠들기까지 수행과 경전 번역, 집필, 공부에 몰두했다. “내 생애 이렇게 열심히 공부해본 적이 없었다”는 그는 24시간 염불을 들었는데 산책 나갈 땐 MP3플레이어의 이어폰을 꽂고 들었다.  


결국 서 교수는 “3년간 수행해보니 내 근기(根氣)로는 이승에서 득도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라고 말한다. 그 대신 남은 세월은 ‘자리이타(自利利他)’, 즉 자신은 물론이고 남을 이롭게 하는 데 쓰기로 했다. 그것이 대승에서 말하는 보살행위라는 것. 그래서 그는 남의 똥 닦아주며 보살해도 되겠지만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즉 책을 써서 (지혜와 지식을) 나누는 데 여생을 바치기로 했다.


뱀에 물렸을 때, 벌에 쏘였을 때, 그리고 치질수술을 받으러 병원에 갔던 세 차례를 제외하고 온전히 산속에만 있었다는 그는 “치질수술을 안하면 좌선 수행을 못하겠더라”고 했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은 한 달에 한 번 공과금 내러 산 밑으로 내려가는 부인이 사다 준 신문을 읽거나 스님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어 알았다.


산에서 그는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으로 불리는 정토종의 경전 ‘무량수경(無量壽經)’ ‘관(觀)무량수경’ ‘아미타경(阿彌陀經)’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이를 위해 산스크리트어를 독학했다. 정토선 수행 중 극락에 다녀왔다고 해서 논란을 일으킨 중국의 관정 스님(1924∼2007)에 관한 책도 쓰고 있다. 

 

왜 ‘고구려’는 틀리고 ‘고구리’가 맞나

 
서길수 교수는 고구려 산성 130곳을 발견한 고구려 연구의 권위자다. 이날 조문객 100여 명 중에는 30년전 서 교수에게 ‘고구려’를 일깨워준 조선족 청년도 있었다. 그는 "중국에서 고구려 유적을 답사 중이었는데 이 분이 '환도산성을 안 가보고 어떻게 고구려를 봤다고 하느냐?'고 해서 깜짝 놀랐다. 올라가 보니 둘레가 7㎞였다. 압록강과 국내성이 내려다보이고 멀리 일본이 펼쳐지는데 내가 한복판에 서 있는 것이다. 그때 깨달았다. 고구려는 크다. 열등의식은 없애려 애쓴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라 우리가 크다는 걸 느꼈을 때 없어지는 것"라고 했다.


그가 주장하는 '고구려'는 틀리고 왜 '고구리'가 맞을까? 이에 대해 "한자로 된 고유명사를 다르게 부르는 경우가 꽤 있다. '악랑(樂浪)'을 '낙랑'으로, '계단(契丹)'을 '거란'으로. 다른 나라 이름을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 '고구려(高句麗)'와 '고려(高麗)'도 이웃 나라인 '고구리'와 '고리'를 한자로 옮긴 것으로, 당시 한나라에서는 외래어였다. 이 주장이 낯설지 모르지만 제가 10여 년 전에 논문을 발표해 많은 논의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대표적 증거로 그는 "훈민정음 창제 후 최초로 한글로 엮어낸 '용비어천가'(1447)에 '高麗=고리'로 읽어야 한다고 적혀 있다. 이미 그때 '고려'로 잘못 읽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동북공정’ 등 중국의 역사 왜곡을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서 교수는 "우리 역사를 학술적으로 방어해야 한다. 동북공정을 되돌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할 수 있는 몫만큼 최선을 다해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적어도 2~3년 안에 작은 대응 논리라도 내놓는 게 내 의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책을 낼 때마다 장례식을 열어 이 문제를 널리 알릴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중국, 일본의 영토 갈등이 또다시 불거진 데 대해서도 그는 “한·중·일이 영토를 ‘소유’ 개념으로 생각하면 분쟁은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서길수 교수는 “고구려 때는 만주가 우리 역사의 무대였지만 지금은 우리 땅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중국도 만주는 자기들 땅이지만 고구려 역사는 한국사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영토 분쟁은 감정싸움으로 치달으면 손해가 더 크다. 역사 이슈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고 한·중·일 학자들이 공동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수암(守岩) 문 윤 홍<大記者/칼럼니스트> 

 

 

 

2.  故人도 哭도 없는… "제 장례식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선일보 아무튼, 주말- 박돈규 기자의 2사만루,  2019.12.28 ]
 


살아서 하는 장례식을 연 서길수 전 서경대 교수가 지난 11일 서울 마포구 '고구려연구소' 앞 골목길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2009년 정년퇴직 후 강원도 산사에 들어가 3년간 죽음을 공부한 그는 "죽음이란 익은 과일이 떨어지는 것"이라며 "몰라서 두렵지, 이치를 받아들이면 슬프기는커녕 기쁘다"고 했다.
 
희한한 부고(訃告)를 받았다. 이메일 제목이 '살아서 하는 장례식과 출판기념회'였다. 멀쩡히 산 사람을 장사 지낸다고? 고인(故人)도 없고 통곡도 없는 초상집에 초대받은 셈이다. 모시는 글은 이랬다.

"나는 늘 마음에 죽음을 새기며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식들에게 할 유언을 준비하다 생각했습니다. '죽은 뒤 찾아오는 사람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가 살아서 조문 온 사람들을 직접 만나보고 가는 게 좋겠다.' 그러려면 장례식을 살아서 해야 했습니다."

서길수(75) 전 서경대 교수는 고구려발해학회(전 고구려연구회) 회장을 지내며 중국의 동북 공정에 맞서 싸운 학자였다. 2009년 정년퇴직하곤 "삶과 죽음에 대해 공부하겠다"며 머리 깎고 3년을 강원도 산사에서 보냈다. 그는 "책을 펴낼 때마다 장례식 겸 출판기념회를 하기로 했다"며 "앞으로 내 장례식을 몇 번 더 치를지 나도 궁금하다"고 했다. "내 죽음을 내가 보며 가게 해달라고 유언했어요. 연명 치료도 하지 말고 가능하면 집에서 세상을 떠나야지요. 숨을 거두면 알리지 말고 빨리 화장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지난 21일 오후 1시 서울 이화여대 근처 한 강연장. 서 교수가 한복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문상객을 맞았다. "제 장례식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상중(喪中)인 큰며느리가 밝은 얼굴로 접수를 맡았다. 부의함은 없었다. '고구려의 본디 이름 고구리' '장수왕이 바꾼 나라 이름 고리' 등 신간 두 권을 필요한 사람만 샀다. 한 조문객이 "돌아가신 분에 대해 예를 표하러 왔는데 잘못 온 것 같습니다. 살아계시네요" 하는 바람에 웃음바다가 됐다. 이날 3시간 동안 누구도 울지 않았다.


장례식이 있기 열흘 전 서울 마포구 '고구리연구소'로 서 교수를 찾아갔다. 그는 우리가 '고구리'를 '고구려'로 잘못 부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이야기는 뒤로 밀어놓고 본론으로 직행했다.

―살아서 하는 장례식이라니, 긴가민가했어요.

"삶에도 사계절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년퇴직할 때 가을이 끝나고 겨울로 들어선 셈이죠. 누구는 '인생은 그때부터'라고 하지만 그러다 어느 날 죽음을 맞이하게 돼요. 저는 생사(生死) 문제를 확연히 알고 가고 싶었습니다."

―부고를 접한 주변 반응은.

"130명쯤 들어 있는 단톡방에 '장례식'이라는 단어를 툭 던졌는데 조용~해요. 아무도 대꾸를 안 했습니다. 진짜 죽는 줄 알고. 하하하. 뭐라고 댓글을 달아야 할지 막막했겠지요. 파격이 일단 성공했구나 싶었어요. 궁금하면 조문하러 올 테니까요."

―'장례식 축하드립니다'라는 댓글은 안 붙었나요.

"1주일 지나서야 '명복을 빕니다'와 '극락왕생하십시오'를 받았지요(웃음). 저는 뼛속까지 교육자라 그런 반응을 흥미롭게 관찰합니다. 지금은 이걸 충격으로 받아들이지만 앞으로 여러 번 하면 멈칫거리지 않고 축하할 수 있을 거예요."

―산사에 틀어박혀 3년간 죽음을 공부했다면서요.

"더 올라가면 1992년부터 '관법(觀法) 수행'을 시작했어요. 지금 박 기자와 이야기하는 나를 내가 보는 식입니다. 죽음은 전체 생애에서 마지막 부분이잖아요. 입시 공부, 취직 공부는 얼마나 열심히들 합니까. 정작 가장 중요한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뭔가 깨달음을 얻고 하산했나요.

"3년 만에 깨달을 수 있다면 이 세상은 깨달은 사람으로 가득 찰 겁니다. 내 그릇으로는 이승에서 득도할 수 없다는 것은 깨달았지요(웃음). 불교에 회향(回向)이라는 말이 있어요. '함께 나누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남은 생은 정리하고 책을 써 남겨주는 일을 하기로 했지요. 그런데 2014년 봄에 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아이코.

"육종암인데 수술받으면 '다리를 절게 될 것'이라고 의사가 말했지요. 왼쪽 허벅지에서 암 덩어리를 도려내보니 18㎝ 크기였어요. 암이라는 진단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나를 관찰했습니다. 수행을 검증할 기회니까요. 현실을 인정하고 큰 업을 하나 떼어낸다 생각하니 후련했어요. 병원에서 사람들은 사실 암 때문에 죽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럼요?

"암 자체보다는 암에 대한 걱정과 고통 때문에 죽어갑니다. 옛날에 읽은 아라비아 우화가 떠올랐지요. 한 청년이 바그다드에 가는데 동행자가 생겼습니다. 다리가 아프다고 해서 업어줬더니 그 동행자가 '나는 사실 바그다드 사람들을 죽이러 가는 페스트균인데 원래는 절반을 없앨 생각이었지만 네가 도와줬으니 3분의 1만 죽이겠다'고 했지요. 약속을 어겼을 때 불러낼 수 있는 주문까지 가르쳐주곤 먼저 가더랍니다. 그런데 청년이 바그다드에 도착해보니 절반이 죽은 거예요. 그 페스트균을 불러내 따지자 한다는 말이 '정확히 3분의 1만 죽였는데 나머지는 놀라서 죽었다'는 거예요(웃음). 사람들은 실제 고통보다 훨씬 더 키워서 고통을 받는다는 얘기입니다."

―육종암은 어떻게 됐나요.

"수술 받고 두어 달 뒤에 문제가 생겼어요. 퉁퉁 부어오른 거예요. 의사도 당황했습니다. 암에 칼을 대면 더 번성할 수 있다는데 그거로구나 싶었지요. MRI를 찍고 결과를 기다리는 1주일이 죽음에 대해 가장 구체적으로 골몰한 시간입니다. 암 환자들이 모이는 사이트에 처음 들어가 봤어요. '사람은 여러 가지 병으로 죽는데 암은 그 죽을병의 하나'라는 글을 읽으니 위안이 되더군요."

죽음을 왜 알아야 할까. 서길수 교수는 "죽음을 아는 사람은 진지하게 살게 됩니다. 아무렇게나 살지 않아요"라고 했다. 그의 장례식에서 축사를 맡은 공석구 고구려발해학회 회장은 "연락을 받고 '축사가 가능할까? 조사(弔辭)를 해야 하나?' 고민했다"며 웃었다.
 


죽음이란 익은 과일이 떨어지는 것

서 교수는 MRI 검사 결과를 보러 가기 전에 의사에게 할 요청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치료가 가능하다면 살고 싶다. 둘째, 불가능하다면 책을 두세 권 마무리할 때까지만 살려달라. 셋째, 그것도 안 되면 덜 고통스럽게 가고 싶다.

―의사가 뭐라 하던가요.

"암이 재발한 게 아니고 림프액이 새어 나왔다고 했습니다. 1주일에 두 번씩 뽑아내면 된다고요(웃음). 5년이 지나 올해 완치 판정을 받긴 했지만, 죽음에 대한 준비가 그때 확실히 시작된 것 같아요."

―살아서 하는 장례식을 결심한 계기라면.

"답사로 또 여행으로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녔어요. 지난해 9월 중국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찍은 제 사진을 보더니 손녀(12)가 '이건 영정 사진이네' 그래요. 제가 물었죠. '넌 장례식이 뭐라고 생각하니?' 그랬더니 대뜸 '육개장 먹고 울다 가는 것'이래요. 하하하."

―즉물적으로 정확히 봤네요.

"이번 장례식에서는 '슬픔이 없는 가족'이 낮밥을 대접하는데 100% 채식입니다. 저는 2008년부터 고기를 먹지 않았어요. 미래의 생명인 계란도 빼달라고 했지요. 내 죽음 때문에 다른 동물이 애꿎게 죽는 건 옳지 않으니까."

―교수님 연배는 조문하고 육개장 드실 일이 많았을 텐데요.

"가지 않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제가 꼭 있어야 할 장례식만 두 번 갔어요. 자식들 결혼할 때 청첩장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빚이 없지요. 나중에 '세금' 걷으려고 장례식과 결혼식에 간다면 시간을 까먹는 일입니다. 1967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저는 눈물이 나오질 않았어요. 왜 울어야 하나 궁금했지요. 아버지의 죽음이 제게 준 화두입니다."

―답을 찾아냈나요.

"산사에 있을 때 답을 읽었습니다. 진리는 이미 있는데 만나기가 힘들 뿐이에요. 사람은 자연의 일부이고 반드시 죽습니다. 과일이 익으면 떨어지듯이요. 두렵지만 맞아들여야 합니다. 죽음을 슬퍼한다고 해서 어떤 실익이 있나요? 이치를 받아들이면 슬프지 않아요. 몰라서 두려운 겁니다."

―그래도 막상 닥치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게 죽음인데.

"결국 삶은 늘 선택입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프로그램대로 가고 싶었어요. 지금의 장례식은 죽은 사람을 위한 게 아니라 남은 사람을 위해 벌이는 쇼(show)예요. 죽음이 뭔지 알았다면 행동으로 옮겨야죠. 수많은 목사님과 스님이 말씀하셨지만 저는 실천을 하겠다는 겁니다."

―아무튼 이번 장례식은 호상(好喪)이군요.

"축가도 부릅니다. '내 장례식에서 축가를 불러달라'고 부탁하니 난감해하더군요. 이 장례식에선 슬픈 척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도 슬프다면 그 근원을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는 게 목적이에요. 제가 자식들에게 유언하면서 '다음 순서는 너희라고 생각하라'고 했어요. 옛날에는 부모가 죽으면 자식들이 사흘을 지키고 염도 하고 다 봤습니다. 그 과정에서 생사에 관심을 가졌지요. 이 장례식이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할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요.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아요. 죽음은 마지막이자 시작입니다. 그래서 천주교나 기독교에서는 영세나 세례를 주지요. 살면서 지은 모든 업이 죽는 순간에 한꺼번에 몰려와요. 힘들게 죽는 사람은 힘들게 살아온 사람입니다. 편안하게 살고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편안하게 가지요. 하나님 곁으로 가든 윤회에 따라 다시 태어나든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고구려 연구를 다시 붙잡은 이유

마침내 장례식 날. 조문객은 '늘 입던 옷으로 편하게'들 모였다. "산 자의 장례식은 국내에서 처음 같다"는 소개를 받고 서 교수가 마이크를 잡았다. "앞으로 (장례식을) 몇 번 더 할지 모르지만 부의금 안 받을 테니 여러분이 계속 와줘야 합니다."

그는 고구려 산성 130곳을 발견한 고구려 연구 권위자다. 이날 조문객 100여 명 중에는 30년 전 서 교수에게 고구려를 일깨워준 조선족 청년도 있었다. "중국에서 고구려 유적을 답사 중이었는데 이분이 '환도산성을 안 가보고 어떻게 고구려를 봤다고 하느냐'고 해 깜짝 놀랐어요. 올라가 보니 둘레가 7㎞예요. 압록강과 국내성이 내려다보이고 멀리 일본이 펼쳐지는데 내가 한복판에 서 있는 겁니다. 그때 깨달았어요. 고구려는 크다. 열등의식은 없애려 애쓴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라 우리가 크다는 걸 느꼈을 때 없어지는 것이구나."

―왜 '고구려'는 틀리고 '고구리'가 맞나요.

"한자로 된 고유명사를 다르게 부르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악랑(樂浪)'을 '낙랑'으로, '계단(契丹)'을 '거란'으로. 다른 나라 이름을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생긴 거예요. '고구려(高句麗)'와 '고려(高麗)'도 이웃 나라인 '고구리'와 '고리'를 한자로 옮긴 것으로, 당시 한나라에서는 외래어였습니다. 이 주장이 낯설지 모르지만 제가 10여 년 전에 논문을 발표해 많은 논의가 있었어요."

―대표적 증거를 꼽는다면.

"훈민정음 창제 후 최초로 한글로 엮어낸 '용비어천가'(1447)에 '高麗=고리'로 읽어야 한다고 적혀 있어요. 이미 그때 '고려'로 잘못 읽는 사람들이 있었던 겁니다."

―7년 전엔 '고구려 연구는 이제 후학의 몫으로 넘기겠다'고 했는데.

"2017년 중국 시진핑 주석이 미국 트럼프 대통령에게 '중국과 한국의 역사에는 수천 년 세월과 많은 전쟁이 얽혀 있다'며 '한국은 사실상 중국의 일부였다'고 했습니다. 북한도 아니고 한반도 전체가 중국의 일부라니, 깜짝 놀라 언론사들에 보도 자료를 보냈어요. 그런데 거의 다루지 않았습니다. 일본을 향해선 조그만 것 가지고도 난리를 치면서, 우리 역사가 중국으로 다 넘어갈 마당에 왜 이렇게 조용합니까?"

―고구려 연구로 돌아온 다른 이유도 있나요.

"통일 코리아의 이름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많아요. Korea가 고구리와도 관계가 깊으니까요."

―중국의 역사 왜곡,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우리 역사를 학술적으로 방어해야죠. 동북 공정을 되돌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할 수 있는 몫만큼 최선을 다해 문제를 제기할 겁니다. 적어도 2~3년 안에 작은 대응 논리라도 내놓는 게 제 의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책을 낼 때마다 장례식을 열어 이 문제를 널리 알릴 겁니다."

―학술서는 시장이 죽었는데.

"모두 10권을 낼 계획인데 제작비는 제가 대요. 마지막엔 재산이 제로(0)가 되는 게 목표입니다. 보통 장례식 끝나면 자식들끼리 부의금 때문에 싸운다잖아요. 티베트 사람들은 죽을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만 참된 재산이라고 생각해요."

조문하러 온 출판사 사장이 판소리 심청가 중 상엿소리를 뽑았다. 고정관념을 깬 이날 장례식은 마지막 인사도 특별했다. 달 항아리처럼 둥글게 웃으며 서 교수가 말했다. "오늘 못 한 이야기는 '다음 장례식'에서 찬찬히 나눕시다." 밖으로 나오니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길이 미끄러웠다. 자빠지면 머리 깨질라 조심조심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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