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학이 바꾼 그녀의 운명...암 발생·진화 밝혀 유전학 새 장 열다  
(에블린 위트킨 1921~2023) DNA 복구 과정 규명…현대 유전 연구 여명 열어

 

< 조선일보, 박건형 기자,  2023.07.24. >



“얘들은 왜 살아남았을까?”

1944년 미국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 출근 첫날 실험을 진행하던 박사과정 학생 에블린 위트킨(Evelyn Witkin)은 당혹스러운 결과를 앞에 두고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장균 세포에 자외선을 조사한 뒤 돌연변이가 생기는지 관찰하는 실험이었는데, 자외선을 너무 강하게 쫴 대부분의 세포가 모두 사멸했습니다. 문제는 그 와중에 4개의 세포만 살아남았다는 겁니다. 위트킨은 “아마 자외선에 저항성을 가진 돌연변이가 생겼을 것으로 추정했다”고 당시를 회고했습니다.

초보 여성 과학자에게는 의문이 드는 신기한 현상일 뿐이었던 이 실험이 후일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자외선에서 살아남은 대장균들은 박테리아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살아있는 유기체를 구성하는 유전자(DAN) 손상과 복구의 원리를 파헤치고, 나아가 암과 노화라는 인류의 가장 큰 적과 대항할 무기를 만드는 결정적인 힌트가 됐습니다. 

 

지난 8일(현지 시각) 뉴저지주 플레인스보로 타운십에서 세상을 떠난 위트킨 박사에 대해 워싱턴포스트는 “위트킨은 DNA의 구조가 수수께끼로 남아 있던 1940년대부터 1991년 70세로 은퇴할 때까지 유전학의 획기적인 발전을 선도했다”고 했습니다.

 


◇진로 바꾼 정학 사건

 

위트킨은 1921년 3월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조셉은 약사였고, 위트킨이 3살 때 사망했습니다.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위트킨과 가족은 퀸즈로 이사를 갔습니다. 어린 시절 위트킨은 의학 연구에 열정을 바친 젊은 의사를 다룬 싱클레어 루이스의 퓰리처상 수상 소설 ‘애로스미스(Arrowsmith)’를 읽은 뒤 생물학에 흥미를 느낍니다. 훗날 위트킨은 “과학을 너무나 낭만적이고 보람되고, 훌륭하게 보이게 만든 책”이라고 했습니다.

뉴욕대에 16살에 입학해 생물학을 전공한 위트킨은 흑인 인권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뉴욕대 팀은 미주리대 미식축구 원정 경기 당시 흑인 선수인 레너드 베이츠를 남겨두고 떠났는데, 위트킨을 비롯한 학생 2000명이 이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습니다. 시위를 주도했던 위트킨을 비롯한 7명의 학생은 3개월간의 정학 처분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위트킨의 미래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초 뉴욕대에서 대학원에 진학하려던 위트킨은 정학 처분의 영향으로 대학원 진학과 조교를 할 수 없게 됐고, 대신 1941년 컬럼비아대 박사 학위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2016년 ‘국립 과학기술 메달 재단’ 수상 기념 인터뷰에서 “1941년 뉴욕대가 나를 나쁜 여성이라고 규정하지 않았다면 난 이 메달의 수상자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훌륭한 스승과 조력자들


컬럼비아대에서 위트킨은 진화유전학의 창시자이자 러시아 출신 연구원인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 밑에서 공부했습니다. 도브잔스키는 초파리를 이용한 유전학을 만들어내, 생물의 진화에 염색체 이상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밝혀낸 인물입니다. 도브잔스키를 두고 생물학자들은 ‘20세기 최고의 유전학자’라고 평가합니다. 도브잔스키는 위트킨의 뉴욕대 정학 처분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를 받아들였고, 거침없는 토론을 벌였습니다. 도브잔스키는 당시 논란이 있었던 주제인 ‘박테리아에 과연 DNA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다양한 논문을 근거로 위트킨에게 명백한 사실이라는 점을 가르칩니다.

박사과정 재학 시절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도 위트킨에게 큰 행운이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옥수수 유전 연구로 1983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바버라 매클린톡과 친구가 됐습니다. 콜드 스프링 하버는 제임스 왓슨이 DNA의 이중나선 구조에 대한 첫 번째 공개 발표를 할 정도로 당대 최고의 연구소로 주목받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위트킨은 “나는 과학 분야에서 여성을 괴롭혀온 성차별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운이 좋았다”면서 “남편(심리학자 허번 위트킨)은 내 경력이 자신의 경력만큼 중요하다고 믿었던 진정한 페미니스트였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연구소는 위트킨이 처음 임신했을 당시 급여 삭감 없이 출산 휴가와 6년 동안의 유연한 시간제 근무를 허용했습니다. 여성의 경력 단절이 당연시되던 때라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복구 메커니즘 ‘SOS 반응’ 규명

 


1955년 위트킨은 뉴욕주립대 다운스테이트 메디컬 센터로 자리를 옮겼고, 1971년에는 럿거스대 교수가 됐습니다. 하지만 그의 경력을 관통하는 연구는 모두 유전학에 집중돼 있었습니다.

대장균 돌연변이에서 시작된 위트킨의 연구는 1970년대 초 브뤼셀 자유대 박사 연구원이었던 미로슬라프 라드먼과의 공동연구를 통해 마침내 빛을 발합니다. 이들은 세포가 파괴될 위기에서 DNA 손상을 막고 번식하려는 작용, 이른바 복구 메커니즘인 ‘SOS 반응(SOS response)’을 규명했습니다. SOS 반응은 정상적인 조건에서는 비활성화돼 있지만, DNA에 손상이 생기는 특수한 조건에서만 유도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두 사람의 연구팀은 DNA가 손상됐을 때 어떤 물질이 활성화되는지, 세포가 어떻게 버티도록 돕는지를 알려주는 40개 이상의 효소 등의 요인을 찾아냅니다. 뉴욕타임스는 “이들의 연구는 태양 복사와 환경 화학물질이 인간의 유전적 구성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고 했습니다. 이 성과는 진화를 이해하고, 종양에 대한 돌연변이 유발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손상된 DNA를 복구하지 못하면 암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를 세포 스스로 막는 방법을 규명한 겁니다. DNA 손상은 암뿐만 아니라 노화, 신경질환, 면역 체계 등 다양한 질환의 원인이 됩니다. 이후 수많은 과학자가 도전하고 또 결실을 맺은 분야의 개척자인 셈입니다.

위트킨은 이 공로로 2015년 ‘예비 노벨상’, ‘미국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레스커상을 수상했습니다. 그의 나이 94세였습니다. 위트킨은 1991년 럿거스대의 규정 때문에 정년퇴직해야 했지만 본인이 연구 현장을 떠난다는 것을 아쉬워했습니다. 2012년 국제학술지 플로스 제네틱스 인터뷰에서 “연구실을 마련할 수 있는 200만 달러가 있었으면 나는 연구를 중단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100번째 생일이 있었던 2021년, 럿거스대는 최고의 연구 실험실에 위트킨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럿거스대는 “그는 대학 역사상 가장 뛰어난 학자이자 국보와 같은 존재였다”면서 “시대를 앞서간 수많은 과학자의 롤모델이었다”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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