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법인
(1) 삽법인이란?
삼법인(三法印,tilakkhaṇa)은 불교의 교의를 요약하여 제시한 기치 또는 슬로건으로, 불교의 기본적 입장을 특징적으로 보여 주는 근본불교 시대에 발생한 교의이다. 법인(法印)이란, 법의 도장이라는 뜻으로, "이것이 찍혀있으면 진짜이고, 이것이 찍혀있지 않으면 가짜이다."라고 말해질 정도로 불교의 진.위를 판별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삼법인은 제행무상(諸行無常 · Anicca) · 일체개고(一切皆苦 · Dukkha) · 제법무아(諸法無我 · Anatta)의 세 가지를 가리켰다. 이 최초의 삼법인의 각각은 간단히 무상(無常) · 고(苦) · 무아(無我)라고도 한다.
고타마 붓다는 이 현실세계는 모두 고(苦)라고 하는 일체개고(一切皆苦)의 현실인식에서 출발하여, 고(苦)의 원인이 인간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자기모순에 있다고 하였다. 일체개고의 현실인식은 현실 또는 존재(existence) 그 자체에 고(苦)라고 하는 고정된 성질 또는 실체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며 또한 고(苦)의 원인이 현실 또는 존재 그 자체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즉,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시시각각 흘러가고 변화하고 있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없는데(제행무상) 인간은 항상 불변을 바라고, 또 모든 것은 무엇 하나 고정적 실체인 것은 없는데도(제법무아) 그것을 실체라고 고집하려 하는 데에 고(苦)의 원인이 있다고 고타마 붓다는 말하였다. 따라서 올바른 지혜(반야 · 보리)를 통해서, 이러한 자기모순에 빠진 자기 자신을 반성하며 욕망을 버리고 집착에서 벗어날 때야말로 아무것에도 어지럽혀지지 않은 이상적인 열반적정의 경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삼법인 또는 사법인이라는 교의 속에서 나타나는 불교의 기본적 입장이다.
(2) 사고 [四苦]
인생에서 겪게 되는 네 가지 고통. 생고(生苦)ㆍ노고(老苦)ㆍ병고(病苦)ㆍ사고(死苦)의 총칭.
생고는 입태(入胎)에서부터 태어날 때까지의 고통, 노고는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겪는 노쇠의 고통, 병고는 병들었을 때 몸과 마음이 받는 고통, 사고(死苦)는 죽을 때의 고통이나 죽음에 관련하여 느끼는 고통이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인생은 자연적으로 경험하는 생로병사의 사고(四苦)의 연속이다.
(3) 팔고 [八苦]
중생세계에서 겪게 되는 여덟 가지의 괴로움.
보통 말하는 생로병사의 사고(四苦)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愛別離苦),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고통(怨憎會苦),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求不得苦), 오온이 너무 치성한 고통(五陰盛苦)을 합쳐서 팔고라 한다.
(4) 오온 [五蘊]
불교에서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적 요소인 색온(色蘊)과 정신요소인 4온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온이란 곧 집합 ·구성 요소를 의미하는데, 오온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다섯 가지이다. 처음에는 오온이 인간의 구성요소로 설명되었으나 더욱 발전하여 현상세계 전체를 의미하는 말로 통용되었다.
오온이 인간의 구성요소를 의미하는 경우에는 ‘색’은 물질요소로서의 육체를 가리키며, ‘수’는 감정·감각과 같은 고통·쾌락의 감수(感受) 작용, ‘상’은 심상(心像)을 취하는 취상 작용으로서 표상 ·개념 등의 작용을 의미한다. ‘행’은 수·상·식 이외의 모든 마음의 작용을 총칭하는 것으로, 그 중에서도 특히 의지작용·잠재적 형성력을 의미한다. ‘식’은 인식판단의 작용, 또는 인식주관으로서의 주체적인 마음을 가리킨다.
약해서 명색(名色:名은 4온에 해당)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오온은 현상적 존재로서 끊임없이 생멸(生滅)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주(常住)불변하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불교의 근본적인 주장으로서의 무상(無常)·고(苦)·공(空)·무아(無我)를 설하는 기초로서 설명되었다.
‘색’의 개념도 원시불교에서의 상식적·구체적 존재에서 물질의 형식·성질, 물질 일반으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오온설의 철학적 의미는 모든 인간계가 실체가 없는 가화합(假和合)·개공(皆空)으로 이루어진 현상적 존재이기 때문에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을 설명하고 있다. 즉 오온가화합(五蘊假和合), 오온개공(五蘊皆空) 등의 말뜻이 그것이다.
2. 사성제 [四聖諦]
(1) 사성제란?
불교 중심교리의 하나로 네 가지 가장 훌륭한 진리라는 뜻으로, 줄여서 ‘사제’라고도 한다. 인생의 모든 문제와 그 해결 방법에 대한 네 가지의 근본 진리를 의미한다. 제(諦)는 진리, 진실이란 뜻이며, 그러한 진리가 신성한 것이라 하여 사성제 또는 사진제(四眞諦)라 한다. 불교의 실천적 원리를 나타내는 불타 교설의 대강(大綱)으로 고제(苦諦)ㆍ집제(集諦)ㆍ멸제(滅諦)ㆍ도제(道諦)의 네 가지 진리를 말한다.
① 고제: 현실세계의 참 모습을 설명하는 것으로 범부 중생의 현실세계는 모두가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생ㆍ로ㆍ병ㆍ사의 사고(四苦)를 기본적으로 갖고 있고, 여기에다가 다시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해야 하는 괴로움(愛別離苦),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게 되는 괴로움(怨憎會苦), 원하고 구하는 것을 이루지도 못하고 얻지도 못하는 괴로움(求不得苦) 그리고 이러한 괴로움의 근본이 되는 색ㆍ수ㆍ상ㆍ행ㆍ식(色受想行識)의 오온(五蘊)에 집착하는 괴로움(五陰盛苦) 등 팔고(八苦) 속에서 윤회 애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② 집제: 현실세계의 모든 괴로움의 원인을 설명하는 것으로, 갈애(渴愛)ㆍ무명ㆍ번뇌의 애욕 집착 때문에 십이인연으로 한없이 윤회 전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괴로움의 원인을 바깥에 있다고 보지 않고 내 마음 안에 있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특색이다.
③ 멸제: 온갖 괴로움을 멸하고 무명ㆍ번뇌를 멸하는 것으로 이가 곧 열반이요, 해탈이다. 열반과 해탈의 세계가 곧 불교가 추구하는 이상(理想)세계이다.
④ 도제: 괴로움과 무명ㆍ번뇌를 멸하고, 열반ㆍ해탈을 얻어 십이인연을 자유자재하는 방법을 말한다.
도제의 방법을 팔정도(八正道) 또는 팔성도(八聖道)라 하는데, 곧 정견(正見)ㆍ정사유(正思惟)ㆍ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ㆍ정정진(正精進)ㆍ정념(正念)ㆍ정정(正定)의 실천 수행을 말한다.
정견은 올바른 견해로서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정사유는 올바른 생각, 정어는 올바른 말, 정업은 올바른 행동, 정명은 올바른 생활, 정정진은 올바른 수행 정진, 정념은 마음을 바르게 통일하는 것, 정정은 올바른 선정(禪定)이다.
이 사제 중에서 고제와 집제는 유전(流轉)하는 인과세계이고, 멸제는 깨달을 목표 곧 이상을 말하며, 도제는 열반에 이르는 방법 곧 실천의 수단이라 한다. 이 사제는 석가모니불이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설한 최초의 설법 내용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2) 사성제의 내용
불교에서 십이연기설은 인간에게 왜 생사의 괴로움(苦蘊)이 발생(集)하며, 또 멸할 수 있는가를 밝혀주는 가장 체계적이고 완비된 이론이다.
① 고성제에 대해서 경전은 여덟 가지 괴로움(八苦)을 드는 것이 보통이다. “생하고 늙고 병들고 죽고, 미운 것과 만나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고,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은 괴로움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오취온(五取蘊)은 괴로움이다”(《중아함》 권7, 《분별성제경(分別聖諦經)》). 십이연기설에서도 인간의 현실적 존재는 괴로움으로 제시하고 있다. 무명에서 시작한 연기는 생ㆍ로ㆍ사에 귀결되고 있으며, 그것을 ‘커다란 하나의 고온(純大苦蘊)’이라고 다시 요약하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괴로움의 성제는 바로 이 명백한 사실을 바로 가리키고 있다.
② 집성제는 위에서 말한 괴로움이 어떻게 해서 발생하게 되었는가의 이유를 밝혀주고 있다. 경전에는 여러 가지 설명이 베풀어져 있는데 주로 오온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곧 오온에 대한 ‘애탐(愛貪, chanda-āga)’(《잡아함》 권2)이라든가 또는 ‘재생(再生)을 초래하고(punar-bhāvika) 희탐(喜貪, nandiāga)을 수반하고 이곳저곳에 낙착(樂着, abhinandin)하는 애(愛, tṛṣṇā)’(《잡아함》 권3)라고 설명되어 있기도 하다. 어떤 경우에는 오온 중의 색은 애희(愛喜)가 그 집이고, 수ㆍ상ㆍ행은 촉이, 식은 명색이 그 집이라고 따로따로 설해져 있는 경우도 있다(《잡아함》 권2).
괴로움의 집에 대해 이렇게 오온을 대상으로 설명하고 있음은 앞서 고성제에서 여덟 가지 괴로움을 오취온으로 요약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집이라는 개념의 최승(最勝)한 뜻은 역시 십이연기설에서 찾아야 한다. 집(集, samudaya)이라는 술어는 원래는 ‘결합하여(sam-) 상승하다(udaya)’는 뜻으로서 ‘모으다(collect)’는 뜻이 아니다. ‘집기(集起)’라고 번역함이 좋은 말이다. 따라서 연기라는 말과 매우 가까운 개념이다. 그러기에 십이연기설에서도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일어난 것임을 설한 다음 ‘그렇게 해서 오온의 집이 있다’고 맺고 있는 것이다. 또, 그것은 고성제와 함께 십이연기설의 유전문(流轉門)에 입각한 사실을 지적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③ 멸성제는 집제와 정확하게 반대되는 입장이다. 경전에도 그런 각도에서 설명되고 있다. 오온의 집이 애탐(愛貪) 등으로 설명되면, 멸제는 그것을 멸한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이다. 십이연기설에서도 생사의 멸은 무명의 멸과 함께 사라진다고 설한 다음 ‘그렇게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멸(滅)이 있다’고 맺어져 있다. ‘멸(滅, nirodha)’의 원어 또한 ‘멸하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 분명하다면, 무명의 멸진(滅盡)을 통해 우리는 그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제는 우리에게 이 명백한 사실을 깨우쳐 주고, 동시에 괴로움이 사라진 그러한 종교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④ 도성제는 경전에 팔정도라고 설명되어 있다. 정견ㆍ정사유ㆍ정어ㆍ정업ㆍ정명ㆍ정정진ㆍ정념ㆍ정정의 여덟가지 실천 사항을 가리킨다. 정견(正見, samyag-ḍṛṣṭi)은 바르게 본다는 뜻으로서, 경전에는 사제를 닦을 때 ‘법을 잘 결택(決擇)하여 관찰하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중아함》 권7, 《분별성제경》). 정사유(samyag-saṃkalpa)는 바르게 사유한다 또는 바르게 마음먹는다는 뜻으로서, ‘생각할 바(可念)와 생각 안할 바(不可念)를 마음에 잘 분간하는 것’이라고 한다. 정어(samyag-vāc)와 정업(samyag-karmānta)은 각각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일하는 것인데, 전자는 ‘네 가지 선한 구업(口業)’이요, 후자는 ‘세 가지 선한 신업(身業)’이라고 설명되어 있다(《중아함》 권7, 《분별성제경》).
정어와 정업이 이렇게 각각 구업과 신업에 해당된다면 위의 정사유는 의업(意業)에 통한다고 말할 수가 있다. 정명(samyag-ājīva)은 바르게 생활하는 것으로서, 정당한 방법으로 적당한 의식주를 구할 것이 권해지고 있다. 정정진(samyag-vyāyāma)은 바르게 노력하는 것으로서, ‘끊임없이 노력하여 물러섬이 없이 마음을 닦는 것’이라고 한다. 정념(samyag-smṛti)은 바르게 기억하는 것인데, ‘생각할 바에 따라 잊지 않는 것’이다. 정정(samyag-samādhi)은 바르게 집중한다는 말로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인데, 삼매(三昧)라는 음역어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행법이다.이상이 대개 경전에서 볼 수 있는 팔정도의 설명인데, 괴로움의 멸에 이르려면 이러한 팔정도가 행해져야만 할 이유는 괴로움은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사의 괴로움도 실체가 없을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무명 망념에서 일어난 괴로움은 현실적으로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集諦). 괴로움이 이렇게 현실적으로 있으므로 그것을 멸하지 않으면 안 된다(滅諦).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진리를 똑바로 응시하고(정견) 그에 입각해서 새로운 종교적 생활을 영위하면서(정사유-정념) 마음을 진리에 계합(契合)하도록 집중(정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경전에도 이런 뜻을 나타내고 있다. “해 뜨기 전에 밝음이 비치듯이 괴로움의 사라짐에는 먼저 정견이 나고, 이 정견이 정사유 내지 정정을 일으키며, 정정이 일어남으로써 마음의 해탈이 있게 된다”(《잡아함》 권28).
따라서 팔정도에서 수행상으로 가장 중요한 비중을 갖고 있는 것은 정견과 정정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불교 수행법의 주축이 되는 지(止, śamatha)와 관(觀, vipaśyana)의 병수(竝修)라든지 정(定, samādhi)과 혜(慧, prajñā)의 쌍수(雙修)와 같은 것도 이 정견, 정정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불교의 업설은 선악을 결택하여 현실의 괴로움을 타개하려는 강력한 실천윤리임을 알 수 있다. 이 업설은 아직도 생사윤회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라도 즐거운 과보를 초래코자 하는 것으로서, 사후 하늘(天)에 생(生)하는 것이 목적이 되고 있다.
이에 반해 사제 팔정도는 선악의 근저에 있는 ‘정사(正邪)’를 문제로 대두시켜, 정사의 결택을 통해 생사의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하려는 해탈에의 길이다. 따라서 범속한 세간(世間, 生死)을 벗어나는 ‘신성한’ 진리라고 해서 사제를 ‘사성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성제가 설해짐으로써 석가모니의 교설은 이론과 실천의 완비를 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종교는 ‘신성한 것과의 만남’이라고 말해질 정도로 성스러운 것을 특질의 하나로 삼고 있는데, 석가모니의 교설은 이러한 신성성(神聖性)을 띠게 되었다. 석가불이 녹야원에서 사성제를 설한 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함은 사성제가 이렇게 교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3) 탐진치 [貪瞋癡]
욕심ㆍ성냄ㆍ어리석음. 오욕 경계에서 지나치게 욕심을 내고, 마음에 맞지 않는 경계에 부딪쳐 미워하고 화내며, 사리(事理)를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탐욕심(貪欲心)ㆍ진에심(瞋恚心)ㆍ우치심(愚癡心)을 말한다. 이러한 마음은 지혜를 어둡게 하고 악의 근원이 됨으로 삼독심이라고도 한다.
연기 [緣起]
3. 연기
(1) 연기 : 좋고 싫음의 관계
연기(緣起)는 인연생기(因緣生起) 즉 인(因: 직접적 원인)과 연(緣: 간접적 원인)에 의지하여 생겨남 또는 인연(因緣: 통칭하여, 원인)따라 생겨남의 준말로, '연(緣: 인과 연의 통칭으로서의 원인)해서 생겨나 있다' 혹은 '타와의 관계에서 생겨나 있다'는 현상계(現象界)의 존재 형태와 그 법칙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세상에 있어서의 존재는 반드시 그것이 생겨날 원인[因]과 조건[緣]하에서 연기의 법칙에 따라서 생겨난다는 것을 말한다. 연기의 법칙, 즉 연기법(緣起法)을 원인과 결과의 법칙 또는 줄여서 인과법칙(因果法則) 혹은 인과법(因果法) 또는 인연법(因緣法)이라고도 한다.
(2) 불교의 중도(中道) 사상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말라는 중도(中道)의 가르침은 쉽게 말해 차별을 두지 않는 개념이다. 차별이 없고 극단믈 피해 흑백논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도다. 이성적으로 따져서 아는 것들, 분별하고 이를 지어 만들어낸 것들이 모두가 허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중도다. 불교의 중도사상(中道)은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은 바른 길이라는 의미로서 초기불교부터 근본진리의 중요한 특징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이어 대승ㆍ소승 각 교파에서도 중도야말로 불교적 진리관의 요체라는 의미에서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초기불교의 중도는 보통 실천 중도와 이론 중도(理論中道)로 나누어 설명된다. 실천 중도는 녹야원의 처음 설교에서 교진여 등 다섯 사람에게 설해진 내용이며, 구체적으로는 정견(正見)ㆍ정사유(正思惟)ㆍ정정진(正精進)ㆍ정업(正業)ㆍ정어(正語)ㆍ정정(正定)ㆍ정념(正念) 등의 팔정도(正道)로서 설명되었다.
석가모니가 치우친 수행법으로 반대한 것은 고행주의와 쾌락주의의 두 가지였다. 팔정도는 고행이나 낙행(樂行: 쾌락행) 등의 치우침에 떨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지혜와 정력(定力)과 자재(自在)와 깨달음(覺)과 열반을 얻는 가장 정당한 방법으로 생각되었다. 과도한 정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심해탈(心解脫)을 얻지 못한 자기의 마음을 비관한 한 비구가 귀가하여 오욕락(五欲樂)을 수용하고 보시(布施)로 복업(福業)을 닦으려 할 때 세존이 이를 가야금의 비유를 들어 훈계했다. 그리고 능히 시(時)를 분별하고 상(相)을 관찰하여 중(中)을 잡으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 형편을 따라 대의를 세우라는 말이다.
팔정도마다 머리에 정(正)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중정(中正)의 뜻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 중도 외에 석가모니는 이법중도(理法中道)를 설하여 다시 이론적이고 사상적인 중도관을 제시했다. 석가모니는 유아(有我)와 무아(無我), 죽은 후 생명이 영속되는가 아니면 단멸되는가 등 여러 가지 치우친 견해를 극복하고자 했다. 이밖에도 육체와 마음은 하나인가 둘인가, 또는 일체존재의 본성이 하나인가 여럿인가의 문제도 중요했다. 후자의 경우 모든 존재가 하나인 근본에서 나왔다고 보는 견해는 전변설(轉變說), 많은 다양한 성질을 지닌 존재의 결합이라는 관점은 적취설(積聚說)이라고 불리어졌다.
적취설에서도 중요한 원소를 몇 가지로 보는가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분립되었다. 이런 관점은 당시에 제기되었던 여러 가지 형이상학적 문제들로서 석가모니는 이를 십이연기(十二緣起)에 의한 중도사상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모든 존재는 독립된 개체의 실체가 없고 다만 인연에 의하여 서로 의지하고 서로 바탕이 되는(相依相資)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원리의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게 된다”(此有故彼有)는 원리는 서로의 공간적인 인연을 말한다 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발생하기 때문에 저것이 발생한다”(此起故彼起)는 원리는 서로의 시간적인 인연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시간적인 면에서 무상(無常)인 것이며 공간적인 면에서 무아(無我)인 것이다.
이 연기의 원리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십이인연설이다. 이 십이인연(十二因緣)은 무명(無明)의 인(因)으로 부터, 즉 무명에 의해서 행(行)이 있고 행에 의하여 식(識)이 있고 식에 의해서 명색(名色)이 있고 이 명색에서 육입(六入)ㆍ촉(觸)ㆍ수(受)ㆍ애(愛)ㆍ취(取)ㆍ유(有)ㆍ생(生)을 거쳐 노사우비고뇌(老死憂悲苦惱) 등의 십이인연으로, 모든 존재가 서로 인(因)과 연(緣)이 되어 생성변화하고 윤회한다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예를 들어 일체 존재가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에 관하여 무명이 있는 한 유라고 볼 수 있으나 무명을 멸하면 모든 것이 공하므로 무로 볼 수도 있다는 관점을 제기한다.
실천수행의 입장에서의 중도를 제외한 모든 형이상학적 문제는 십이연기에 의해 응답하며 설명하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집착된 관점을 벗어난 중도적 지혜를 통해 열반의 경지를 증득하여 실천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석가모니의 열반 후 약 500년경에 대승불교를 흥기시킨 용수(龍樹, Nagarjuna)는 석가모니의 모든 사상을 중도에 의하여 설명코자 하여 《중론》을 저술했다. 중론에서는 생(生)ㆍ멸(滅)ㆍ단(斷)ㆍ상(常)ㆍ일(一)ㆍ이(異)ㆍ내(來)ㆍ출(出)의 8종의 편견을 벗어난 공(空)의 세계를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고 본다.
만유는 모두 연기의 소산이므로 실체가 없어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이를 팔불중도(八不中道)라고 말한다. 요컨대 중도는 모든 집착이나 분별을 벗어난 무소득(無所得)의 경지를 의미했다. 중도사상은 그 후 천태종ㆍ화엄종에서 이론적으로 더욱 정치해지고 선불교에서 실천적으로 계승되었다.
[비교 : 유교의 중용사상]
중국 고전인 《서경》에서는 중(中)에 대하여 언급한 내용이 보인다. 요(堯)가 순(舜)에게 위를 전할 때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允執厥中)라고 부촉했다. 순이 우(禹)에게 위를 물려줄 때 “인심은 오직 위태롭고 도심은 오직 미묘하니 오직 정성되고 한결같이 하여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人心惟危 道心惟徵 惟精惟一 允執厥中)고 한데서 중의 실천 방법을 찾아볼 수 있다. 이어 《서경》 ‘홍범’에서 말한 황극(皇極)도 중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논어》에서는 중용(中庸)의 덕(德)이 지극함을 말했다.(《논어》 옹야편) 이렇게 단편적으로 논의되던 중사상은 자사(子思)의 저서로 알려진 《중용》에서 체계적으로 종합되었다.
중용이란 개념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석이 나와 있으나 성리학자 주자(朱子)의 주석이 가장 저명하다. 그는 ‘중’이란 기울어지거나 의지하지 않고 지나치거나 모자라지도 않는 것이라 했고 ‘용’은 평상(平常)함을 뜻하니 본분을 지켜 괴이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라 정의했다.(《중용장구》 서) 《중용》에서는 중을 중과 화의 두 가지로 설명한다. 중은 희로애락의 감정이 아직 발동되지 않을 때를 말하고 발하되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 여기서 사려와 감정이 발동되지 않을 때는 근본적 중이라면 발동될 때는 상황에 따른 조화로운 발현이 중시된다.
상황에 따른 화는 특히 시중(時中)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형식에 고정되어 있는 정제된 중이 아님을 표현했다. 실제로는 순도 대의를 살리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격식을 폐한 일이 있으며 공자에게도 이러한 사례가 많이 있었다. 《맹자》 ‘진심편’에 ‘터럭 하나를 뽑아 천하가 이롭다 해도 하지 않는다’는 양자(揚子)와 ‘머리에서 발끝까지 갈아 없어지더라도 남을 위해서는 하겠다’는 묵자(墨子)와 이도 저도 아닌 중간의 자막(子莫)을 들고, ‘자막의 입장이 중에 가까운 듯하나 중만 잡았지 수기응변의 대의가 없으므로(執中無權) 옳지 못하고 피해가 많다’ 했다.
또 순우곤이 맹자에게 남녀의 예(禮)를 물은 뒤 ‘형수가 물에 빠졌을 경우에는 손을 잡아 건져야 될 것인가, 예(禮)에 충실해야 할 것인가’를 물었다. 이 때 맹자는 ‘때에 따라 대의를 세우는 권도(權道)를 중시할 것이니 그런 경우에 방관하고 있는 사람은 이리나 승냥이와 같다’고 답변했다(《맹자》 이루편상17). 이와 같이 동(動)할 때의 도가 때와 곳과 대의 또는 이치에 맞으면 과도한 것과 모자람이 없는 중도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이러한 용(用)으로서의 중도 이전에 체(體)로서의 중도에 표준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중용》에서는 이를 희로애락이 발하기 전의 중도(未發之中)로 표현한다. 유가적 중도주의는 《중용》의 ‘극고명이도중용(極高明而道中庸)’이라는 언급에서 가장 잘 드러나 있다. 고명한 깊은 이치를 추구하되 일상생활을 벗어나지 않고 실현한다는 이념이다. 일상에 떨어져 도의 실현을 소홀히 하거나 일상을 포기하고 고원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경계한다. 수신(修身)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의 무대에서 이상을 실현하자는 것이 중도주의의 기본내용이다. 유교에서의 중도정신은 개인의 조화로운 마음의 보존과 실현에서만 논의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유가의 덕치주의는 법가(法家)와 도가(道家)의 양극단을 떠난 중도적 입장으로 볼 수 있다. 법가적 법치주의(法治主義)는 개관적 규범인 법과 힘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는 반면 도가는 인위적 제약을 벗어나 자연과 하나가 되는 도치주의(道治主義)를 강조한다. 법가는 부국강병책에 의한 중앙집권적 대통일제국을 지향하는 반면 도가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을 지향한다. 이에 비해 유가는 통치자의 덕에 바탕하고 예(禮)와 악(樂)의 상보적 역할이 이루어지는 대동세계(大同世界)를 지향한다.
< 성철 스님의 중도법문 >
현실세계란 전체가 상대모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물과 불, 선과 악, 옳음과 그름, 있음과 없음, 괴로움과 즐거움, 너와 나 등입니다.
이들은 서로 상극이며, 모순과 대립은 투쟁의 세계입니다. 투쟁의 세계는 우리가 목표하는 세계는 아닙니다.
우리는 평화의 세계를 목표로 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극 투쟁하는 양변의 세계에서 평화라는 것은 참으로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평화의 세계를 이루려면,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면 양변을 버려야 합니다.
모순상극의 차별 세계를 버려야 합니다.
양변을 버리면 두 세계를 다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다 비친다는 것은 통한다는 뜻이니
선과 악이 통하고 옳고 그름이 통하고
모든 상극적인 것이 서로 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둘 아닌 법문이라고 합니다. 선과 악이 둘이 아니고, 옳음과 그릇됨이 둘이 아니고, 괴로움과 즐거움이 둘이 아닙니다.
둘이 아니면 서로 통하게 되는 것이니,
서로 통하려면 반드시 양변을 버려야 합니다.
-성철스님 『백일법문』중에서
4. 육바라밀 [六波羅蜜]
(1) 육바라밀
바라밀은 바라밀다(波羅蜜多)의 준말로, 생사의 고해를 건너 열반의 피안에 이르기 위해 닦아야 할 여섯 가지 실천덕목이다. 대승불교의 보살은 이 육바라밀의 실천을 통해 자신의 완성을 이룩해 가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완성시켜 정토(淨土)를 건설해 간다.
육바라밀은 구체적으로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의 여섯 가지를 말한다.
보시는 조건 없이 기꺼이 주는 생활이다. 이 보시에도 그 주는 내용에 따라 물질적인 재보시(財布施), 교육적인 법보시(法布施), 종교적인 무외시 (無畏施)의 세 가지가 있다.
지계는 계율을 잘 지켜 악을 막고 선을 행하는 생활이다.
인욕은 박해나 곤욕을 참고 용서하는 생활이다. 인목바라밀은 억지로 참는 삶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상대를 연민하고 포용하는 삶을 말한다. 멀게는 참는다는 생각조차 내지 않고 참아내는 것이다. 분노도 원망도, 교만도 없이, 그 어떤 것도 참는다는 생각 없이 마음을 비우고 행하는 것. 그러니 인욕바라밀은 일상의 인내심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정진은 꾸준하고 용기 있게 노력하는 생활이다. 정진바라밀을 실천한다는 것은 선업을 꾸준히 쌓아가는 것이다. 수행에 있어 힘들고 괴로운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맑고 깨끗한 정신으로 게으름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지속해가는 노력이며, 게으름과 방일에 물들지 않는 생활이다. 포기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으며, 잠시 쉬었다가도 다시 일어나는 수행이 정진이다.
선정은 마음을 바로 잡아 통일되고 고요한 정신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하는 것이 정진이요, 부단한 정진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선정바라밀이다. 헛된 생각을 모두 버리고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여 번뇌 망상을 잠재우는 노력이 정진이라면, 원숭이처럼 날뛰는 마음을 진정시켜 정신 집중을 이룬 상태가 선정이다. 그렇게 자기 마음에 흔들림이 없어지면 서서히 선정의 힘이 생긴다.
지혜는 진상(眞相)을 바르게 보는 정신적 밝음이다. 반야바라밀은 지혜를 찾는 수행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 수행을 통해 형성된 지혜로도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둘 다 중생과 함께 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중생들에게 필요한 지식과 지혜, 중생을 도울 방법을 아는 지혜가 반야바라밀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이 가운데 보시·지계· 인욕은 타인을 위한 이타(利他)의 생활인 자비의 실천으로, 보통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생활이라 한다. 정진·선정·지혜는 자신을 위한 자리(自利)의 생활로서, 지혜를 추구하는 상구 보리(上求菩提)의 생활이다. 이렇게 볼 때 대승불교의 교육정신은 이 육바라밀에 압축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2) 사무량심 [四無量心]
자, 비, 희(흥), 사 등의 네 가지 마음을 사무량심이라고 한다. 사무량심은 중생을 해탈로 이끌기 위해 보살이 가져야 할 네 가지 크고 넓은 마음이다.
첫째,자무량심(慈無量心)은 악의나 증오 없이 무한한 자애와 사랑으로 세상을 가득 채우고, 많은 사람들과 자애로운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남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자애심이 많은 사람은 이타심이 많고, 자무량심을 키우면 성내는 마음이 사라진다.
둘째, 비무량심(悲無量心)은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무한한 자비심으로 중생들을 고통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는 마음이다. 연민심이 많은 사람은 공감 능력이 뛰어나고, 비무량심을 키우면 남을 해치려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희무량심(喜無量心)은 다른 중생의 기쁨을 함께 기뻐해주며, 세상을 기쁨으로 가득 채우려는 마음이다. 남 잘 되는 것을 기뻐하기가 쉽지 않다. 모르는 사람이 잘 되면 그래도 괜찮은데, 가까운 사람이 잘 되면 배 아파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함께 기뻐 할 줄 알고, 희무량심을 키워 박수쳐줄 줄 아는 사람은 시기하는 마음을 잘 알아 내려놓을 줄 안다.
사무량심(捨無量心)은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대하고, 무한한 평정심으로 세상을 가득 채우는 것을 말한다. 모든 감정에서 벗어나 중립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다. 차별하는 마음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평온하며, 사무량심을 키우면 교만한 마음이 사라진다.
"너희들은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의지하여라.
그밖에 다른 것을 의지해서는 안된다. 너희들은 내 가르침을 중심으로 서로 화합하고 공경하며 다투지 마라. 물과 우유처럼 화합할 것이요, 물 위의 기름처럼 겉돌지 마라.
나는 몸소 진리를 매달아 너희를 위해 설하였다.
너희는 이 진리를 지켜 무엇이든 진리대로 행하여라. 이 가르침대로 행한다면 설령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는 항상 내 곁에 있는 것과 다름없다.
죽음이란 육신의 죽음임들 잊지 마라.
육신은 죽더라도 매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진리와 매달음의 길에 살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덧없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열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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