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법인

 

(1) 삽법인이란?
 
삼법인(三法印,tilakkhaṇa)은 불교의 교의를 요약하여 제시한 기치 또는 슬로건으로, 불교의 기본적 입장을 특징적으로 보여 주는 근본불교 시대에 발생한 교의이다. 법인(法印)이란, 법의 도장이라는 뜻으로, "이것이 찍혀있으면 진짜이고, 이것이 찍혀있지 않으면 가짜이다."라고 말해질 정도로 불교의 진.위를 판별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삼법인은 제행무상(諸行無常 · Anicca) · 일체개고(一切皆苦 · Dukkha) · 제법무아(諸法無我 · Anatta)의 세 가지를 가리켰다. 이 최초의 삼법인의 각각은 간단히 무상(無常) · 고(苦) · 무아(無我)라고도 한다. 

고타마 붓다는 이 현실세계는 모두 고(苦)라고 하는 일체개고(一切皆苦)의 현실인식에서 출발하여, 고(苦)의 원인이 인간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자기모순에 있다고 하였다. 일체개고의 현실인식은 현실 또는 존재(existence) 그 자체에 고(苦)라고 하는 고정된 성질 또는 실체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며 또한 고(苦)의 원인이 현실 또는 존재 그 자체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즉,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시시각각 흘러가고 변화하고 있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없는데(제행무상) 인간은 항상 불변을 바라고, 또 모든 것은 무엇 하나 고정적 실체인 것은 없는데도(제법무아) 그것을 실체라고 고집하려 하는 데에 고(苦)의 원인이 있다고 고타마 붓다는 말하였다. 따라서 올바른 지혜(반야 · 보리)를 통해서, 이러한 자기모순에 빠진 자기 자신을 반성하며 욕망을 버리고 집착에서 벗어날 때야말로 아무것에도 어지럽혀지지 않은 이상적인 열반적정의 경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삼법인 또는 사법인이라는 교의 속에서 나타나는 불교의 기본적 입장이다.

 


(2) 사고 [四苦]

인생에서 겪게 되는 네 가지 고통. 생고(生苦)ㆍ노고(老苦)ㆍ병고(病苦)ㆍ사고(死苦)의 총칭. 

 

생고는 입태(入胎)에서부터 태어날 때까지의 고통, 노고는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겪는 노쇠의 고통, 병고는 병들었을 때 몸과 마음이 받는 고통, 사고(死苦)는 죽을 때의 고통이나 죽음에 관련하여 느끼는 고통이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인생은 자연적으로 경험하는 생로병사의 사고(四苦)의 연속이다.


(3) 팔고 [八苦]

중생세계에서 겪게 되는 여덟 가지의 괴로움. 

 

보통 말하는 생로병사의 사고(四苦)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愛別離苦),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고통(怨憎會苦),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求不得苦), 오온이 너무 치성한 고통(五陰盛苦)을 합쳐서 팔고라 한다. 


(4) 오온 [五蘊]

불교에서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적 요소인 색온(色蘊)과 정신요소인 4온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온이란 곧 집합 ·구성 요소를 의미하는데, 오온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다섯 가지이다. 처음에는 오온이 인간의 구성요소로 설명되었으나 더욱 발전하여 현상세계 전체를 의미하는 말로 통용되었다.

오온이 인간의 구성요소를 의미하는 경우에는 ‘색’은 물질요소로서의 육체를 가리키며, ‘수’는 감정·감각과 같은 고통·쾌락의 감수(感受) 작용, ‘상’은 심상(心像)을 취하는 취상 작용으로서 표상 ·개념 등의 작용을 의미한다. ‘행’은 수·상·식 이외의 모든 마음의 작용을 총칭하는 것으로, 그 중에서도 특히 의지작용·잠재적 형성력을 의미한다. ‘식’은 인식판단의 작용, 또는 인식주관으로서의 주체적인 마음을 가리킨다.

약해서 명색(名色:名은 4온에 해당)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오온은 현상적 존재로서 끊임없이 생멸(生滅)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주(常住)불변하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불교의 근본적인 주장으로서의 무상(無常)·고(苦)·공(空)·무아(無我)를 설하는 기초로서 설명되었다.  

‘색’의 개념도 원시불교에서의 상식적·구체적 존재에서 물질의 형식·성질, 물질 일반으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오온설의 철학적 의미는 모든 인간계가 실체가 없는 가화합(假和合)·개공(皆空)으로 이루어진 현상적 존재이기 때문에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을 설명하고 있다. 즉 오온가화합(五蘊假和合), 오온개공(五蘊皆空) 등의 말뜻이 그것이다. 


2. 사성제 [四聖諦]

(1) 사성제란?


불교 중심교리의 하나로 네 가지 가장 훌륭한 진리라는 뜻으로, 줄여서 ‘사제’라고도 한다. 인생의 모든 문제와 그 해결 방법에 대한 네 가지의 근본 진리를 의미한다. 제(諦)는 진리, 진실이란 뜻이며, 그러한 진리가 신성한 것이라 하여 사성제 또는 사진제(四眞諦)라 한다. 불교의 실천적 원리를 나타내는 불타 교설의 대강(大綱)으로 고제(苦諦)ㆍ집제(集諦)ㆍ멸제(滅諦)ㆍ도제(道諦)의 네 가지 진리를 말한다.

① 고제: 현실세계의 참 모습을 설명하는 것으로 범부 중생의 현실세계는 모두가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생ㆍ로ㆍ병ㆍ사의 사고(四苦)를 기본적으로 갖고 있고, 여기에다가 다시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해야 하는 괴로움(愛別離苦),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게 되는 괴로움(怨憎會苦), 원하고 구하는 것을 이루지도 못하고 얻지도 못하는 괴로움(求不得苦) 그리고 이러한 괴로움의 근본이 되는 색ㆍ수ㆍ상ㆍ행ㆍ식(色受想行識)의 오온(五蘊)에 집착하는 괴로움(五陰盛苦) 등 팔고(八苦) 속에서 윤회 애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② 집제: 현실세계의 모든 괴로움의 원인을 설명하는 것으로, 갈애(渴愛)ㆍ무명ㆍ번뇌의 애욕 집착 때문에 십이인연으로 한없이 윤회 전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괴로움의 원인을 바깥에 있다고 보지 않고 내 마음 안에 있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특색이다.

③ 멸제: 온갖 괴로움을 멸하고 무명ㆍ번뇌를 멸하는 것으로 이가 곧 열반이요, 해탈이다. 열반과 해탈의 세계가 곧 불교가 추구하는 이상(理想)세계이다.

④ 도제: 괴로움과 무명ㆍ번뇌를 멸하고, 열반ㆍ해탈을 얻어 십이인연을 자유자재하는 방법을 말한다.

도제의 방법을 팔정도(八正道) 또는 팔성도(八聖道)라 하는데, 곧 정견(正見)ㆍ정사유(正思惟)ㆍ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ㆍ정정진(正精進)ㆍ정념(正念)ㆍ정정(正定)의 실천 수행을 말한다. 

 

정견은 올바른 견해로서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정사유는 올바른 생각, 정어는 올바른 말, 정업은 올바른 행동, 정명은 올바른 생활, 정정진은 올바른 수행 정진, 정념은 마음을 바르게 통일하는 것, 정정은 올바른 선정(禪定)이다. 

 

이 사제 중에서 고제와 집제는 유전(流轉)하는 인과세계이고, 멸제는 깨달을 목표 곧 이상을 말하며, 도제는 열반에 이르는 방법 곧 실천의 수단이라 한다. 이 사제는 석가모니불이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설한 최초의 설법 내용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2) 사성제의 내용

불교에서 십이연기설은 인간에게 왜 생사의 괴로움(苦蘊)이 발생(集)하며, 또 멸할 수 있는가를 밝혀주는 가장 체계적이고 완비된 이론이다. 

① 고성제에 대해서 경전은 여덟 가지 괴로움(八苦)을 드는 것이 보통이다. “생하고 늙고 병들고 죽고, 미운 것과 만나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고,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은 괴로움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오취온(五取蘊)은 괴로움이다”(《중아함》 권7, 《분별성제경(分別聖諦經)》). 십이연기설에서도 인간의 현실적 존재는 괴로움으로 제시하고 있다. 무명에서 시작한 연기는 생ㆍ로ㆍ사에 귀결되고 있으며, 그것을 ‘커다란 하나의 고온(純大苦蘊)’이라고 다시 요약하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괴로움의 성제는 바로 이 명백한 사실을 바로 가리키고 있다.

② 집성제는 위에서 말한 괴로움이 어떻게 해서 발생하게 되었는가의 이유를 밝혀주고 있다. 경전에는 여러 가지 설명이 베풀어져 있는데 주로 오온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곧 오온에 대한 ‘애탐(愛貪, chanda-āga)’(《잡아함》 권2)이라든가 또는 ‘재생(再生)을 초래하고(punar-bhāvika) 희탐(喜貪, nandiāga)을 수반하고 이곳저곳에 낙착(樂着, abhinandin)하는 애(愛, tṛṣṇā)’(《잡아함》 권3)라고 설명되어 있기도 하다. 어떤 경우에는 오온 중의 색은 애희(愛喜)가 그 집이고, 수ㆍ상ㆍ행은 촉이, 식은 명색이 그 집이라고 따로따로 설해져 있는 경우도 있다(《잡아함》 권2).

괴로움의 집에 대해 이렇게 오온을 대상으로 설명하고 있음은 앞서 고성제에서 여덟 가지 괴로움을 오취온으로 요약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집이라는 개념의 최승(最勝)한 뜻은 역시 십이연기설에서 찾아야 한다. 집(集, samudaya)이라는 술어는 원래는 ‘결합하여(sam-) 상승하다(udaya)’는 뜻으로서 ‘모으다(collect)’는 뜻이 아니다. ‘집기(集起)’라고 번역함이 좋은 말이다. 따라서 연기라는 말과 매우 가까운 개념이다. 그러기에 십이연기설에서도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일어난 것임을 설한 다음 ‘그렇게 해서 오온의 집이 있다’고 맺고 있는 것이다. 또, 그것은 고성제와 함께 십이연기설의 유전문(流轉門)에 입각한 사실을 지적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③ 멸성제는 집제와 정확하게 반대되는 입장이다. 경전에도 그런 각도에서 설명되고 있다. 오온의 집이 애탐(愛貪) 등으로 설명되면, 멸제는 그것을 멸한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이다. 십이연기설에서도 생사의 멸은 무명의 멸과 함께 사라진다고 설한 다음 ‘그렇게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멸(滅)이 있다’고 맺어져 있다. ‘멸(滅, nirodha)’의 원어 또한 ‘멸하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 분명하다면, 무명의 멸진(滅盡)을 통해 우리는 그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제는 우리에게 이 명백한 사실을 깨우쳐 주고, 동시에 괴로움이 사라진 그러한 종교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④ 도성제는 경전에 팔정도라고 설명되어 있다. 정견ㆍ정사유ㆍ정어ㆍ정업ㆍ정명ㆍ정정진ㆍ정념ㆍ정정의 여덟가지 실천 사항을 가리킨다. 정견(正見, samyag-ḍṛṣṭi)은 바르게 본다는 뜻으로서, 경전에는 사제를 닦을 때 ‘법을 잘 결택(決擇)하여 관찰하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중아함》 권7, 《분별성제경》). 정사유(samyag-saṃkalpa)는 바르게 사유한다 또는 바르게 마음먹는다는 뜻으로서, ‘생각할 바(可念)와 생각 안할 바(不可念)를 마음에 잘 분간하는 것’이라고 한다. 정어(samyag-vāc)와 정업(samyag-karmānta)은 각각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일하는 것인데, 전자는 ‘네 가지 선한 구업(口業)’이요, 후자는 ‘세 가지 선한 신업(身業)’이라고 설명되어 있다(《중아함》 권7, 《분별성제경》).

정어와 정업이 이렇게 각각 구업과 신업에 해당된다면 위의 정사유는 의업(意業)에 통한다고 말할 수가 있다. 정명(samyag-ājīva)은 바르게 생활하는 것으로서, 정당한 방법으로 적당한 의식주를 구할 것이 권해지고 있다. 정정진(samyag-vyāyāma)은 바르게 노력하는 것으로서, ‘끊임없이 노력하여 물러섬이 없이 마음을 닦는 것’이라고 한다. 정념(samyag-smṛti)은 바르게 기억하는 것인데, ‘생각할 바에 따라 잊지 않는 것’이다. 정정(samyag-samādhi)은 바르게 집중한다는 말로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인데, 삼매(三昧)라는 음역어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행법이다.이상이 대개 경전에서 볼 수 있는 팔정도의 설명인데, 괴로움의 멸에 이르려면 이러한 팔정도가 행해져야만 할 이유는 괴로움은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사의 괴로움도 실체가 없을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무명 망념에서 일어난 괴로움은 현실적으로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集諦). 괴로움이 이렇게 현실적으로 있으므로 그것을 멸하지 않으면 안 된다(滅諦).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진리를 똑바로 응시하고(정견) 그에 입각해서 새로운 종교적 생활을 영위하면서(정사유-정념) 마음을 진리에 계합(契合)하도록 집중(정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경전에도 이런 뜻을 나타내고 있다. “해 뜨기 전에 밝음이 비치듯이 괴로움의 사라짐에는 먼저 정견이 나고, 이 정견이 정사유 내지 정정을 일으키며, 정정이 일어남으로써 마음의 해탈이 있게 된다”(《잡아함》 권28).

따라서 팔정도에서 수행상으로 가장 중요한 비중을 갖고 있는 것은 정견과 정정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불교 수행법의 주축이 되는 지(止, śamatha)와 관(觀, vipaśyana)의 병수(竝修)라든지 정(定, samādhi)과 혜(慧, prajñā)의 쌍수(雙修)와 같은 것도 이 정견, 정정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불교의 업설은 선악을 결택하여 현실의 괴로움을 타개하려는 강력한 실천윤리임을 알 수 있다. 이 업설은 아직도 생사윤회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라도 즐거운 과보를 초래코자 하는 것으로서, 사후 하늘(天)에 생(生)하는 것이 목적이 되고 있다.

이에 반해 사제 팔정도는 선악의 근저에 있는 ‘정사(正邪)’를 문제로 대두시켜, 정사의 결택을 통해 생사의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하려는 해탈에의 길이다. 따라서 범속한 세간(世間, 生死)을 벗어나는 ‘신성한’ 진리라고 해서 사제를 ‘사성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사성제가 설해짐으로써 석가모니의 교설은 이론과 실천의 완비를 보게 된다. 뿐만 아니라 종교는 ‘신성한 것과의 만남’이라고 말해질 정도로 성스러운 것을 특질의 하나로 삼고 있는데, 석가모니의 교설은 이러한 신성성(神聖性)을 띠게 되었다. 석가불이 녹야원에서 사성제를 설한 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함은 사성제가 이렇게 교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3) 탐진치 [貪瞋癡]

욕심ㆍ성냄ㆍ어리석음. 오욕 경계에서 지나치게 욕심을 내고, 마음에 맞지 않는 경계에 부딪쳐 미워하고 화내며, 사리(事理)를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탐욕심(貪欲心)ㆍ진에심(瞋恚心)ㆍ우치심(愚癡心)을 말한다. 이러한 마음은 지혜를 어둡게 하고 악의 근원이 됨으로 삼독심이라고도 한다. 
연기 [緣起]

 

 

3. 연기

 

(1) 연기 : 좋고 싫음의 관계


연기(緣起)는 인연생기(因緣生起) 즉 인(因: 직접적 원인)과 연(緣: 간접적 원인)에 의지하여 생겨남 또는 인연(因緣: 통칭하여, 원인)따라 생겨남의 준말로, '연(緣: 인과 연의 통칭으로서의 원인)해서 생겨나 있다' 혹은 '타와의 관계에서 생겨나 있다'는 현상계(現象界)의 존재 형태와 그 법칙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세상에 있어서의 존재는 반드시 그것이 생겨날 원인[因]과 조건[緣]하에서 연기의 법칙에 따라서 생겨난다는 것을 말한다. 연기의 법칙, 즉 연기법(緣起法)을 원인과 결과의 법칙 또는 줄여서 인과법칙(因果法則) 혹은 인과법(因果法) 또는 인연법(因緣法)이라고도 한다.


(2) 불교의 중도(中道) 사상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말라는 중도(中道)의 가르침은 쉽게 말해 차별을 두지 않는 개념이다. 차별이 없고 극단믈 피해 흑백논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도다. 이성적으로 따져서 아는 것들, 분별하고 이를 지어 만들어낸 것들이 모두가 허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중도다.  불교의 중도사상(中道)은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은 바른 길이라는 의미로서 초기불교부터 근본진리의 중요한 특징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이어 대승ㆍ소승 각 교파에서도 중도야말로 불교적 진리관의 요체라는 의미에서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초기불교의 중도는 보통 실천 중도와 이론 중도(理論中道)로 나누어 설명된다. 실천 중도는 녹야원의 처음 설교에서 교진여 등 다섯 사람에게 설해진 내용이며, 구체적으로는 정견(正見)ㆍ정사유(正思惟)ㆍ정정진(正精進)ㆍ정업(正業)ㆍ정어(正語)ㆍ정정(正定)ㆍ정념(正念) 등의 팔정도(正道)로서 설명되었다.

석가모니가 치우친 수행법으로 반대한 것은 고행주의와 쾌락주의의 두 가지였다. 팔정도는 고행이나 낙행(樂行: 쾌락행) 등의 치우침에 떨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지혜와 정력(定力)과 자재(自在)와 깨달음(覺)과 열반을 얻는 가장 정당한 방법으로 생각되었다. 과도한 정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심해탈(心解脫)을 얻지 못한 자기의 마음을 비관한 한 비구가 귀가하여 오욕락(五欲樂)을 수용하고 보시(布施)로 복업(福業)을 닦으려 할 때 세존이 이를 가야금의 비유를 들어 훈계했다. 그리고 능히 시(時)를 분별하고 상(相)을 관찰하여 중(中)을 잡으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 형편을 따라 대의를 세우라는 말이다.

팔정도마다 머리에 정(正)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중정(中正)의 뜻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 중도 외에 석가모니는 이법중도(理法中道)를 설하여 다시 이론적이고 사상적인 중도관을 제시했다. 석가모니는 유아(有我)와 무아(無我), 죽은 후 생명이 영속되는가 아니면 단멸되는가 등 여러 가지 치우친 견해를 극복하고자 했다. 이밖에도 육체와 마음은 하나인가 둘인가, 또는 일체존재의 본성이 하나인가 여럿인가의 문제도 중요했다. 후자의 경우 모든 존재가 하나인 근본에서 나왔다고 보는 견해는 전변설(轉變說), 많은 다양한 성질을 지닌 존재의 결합이라는 관점은 적취설(積聚說)이라고 불리어졌다.

적취설에서도 중요한 원소를 몇 가지로 보는가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분립되었다. 이런 관점은 당시에 제기되었던 여러 가지 형이상학적 문제들로서 석가모니는 이를 십이연기(十二緣起)에 의한 중도사상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모든 존재는 독립된 개체의 실체가 없고 다만 인연에 의하여 서로 의지하고 서로 바탕이 되는(相依相資)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원리의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게 된다”(此有故彼有)는 원리는 서로의 공간적인 인연을 말한다 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발생하기 때문에 저것이 발생한다”(此起故彼起)는 원리는 서로의 시간적인 인연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시간적인 면에서 무상(無常)인 것이며 공간적인 면에서 무아(無我)인 것이다.

이 연기의 원리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십이인연설이다. 이 십이인연(十二因緣)은 무명(無明)의 인(因)으로 부터, 즉 무명에 의해서 행(行)이 있고 행에 의하여 식(識)이 있고 식에 의해서 명색(名色)이 있고 이 명색에서 육입(六入)ㆍ촉(觸)ㆍ수(受)ㆍ애(愛)ㆍ취(取)ㆍ유(有)ㆍ생(生)을 거쳐 노사우비고뇌(老死憂悲苦惱) 등의 십이인연으로, 모든 존재가 서로 인(因)과 연(緣)이 되어 생성변화하고 윤회한다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예를 들어 일체 존재가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에 관하여 무명이 있는 한 유라고 볼 수 있으나 무명을 멸하면 모든 것이 공하므로 무로 볼 수도 있다는 관점을 제기한다.

실천수행의 입장에서의 중도를 제외한 모든 형이상학적 문제는 십이연기에 의해 응답하며 설명하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집착된 관점을 벗어난 중도적 지혜를 통해 열반의 경지를 증득하여 실천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석가모니의 열반 후 약 500년경에 대승불교를 흥기시킨 용수(龍樹, Nagarjuna)는 석가모니의 모든 사상을 중도에 의하여 설명코자 하여 《중론》을 저술했다. 중론에서는 생(生)ㆍ멸(滅)ㆍ단(斷)ㆍ상(常)ㆍ일(一)ㆍ이(異)ㆍ내(來)ㆍ출(出)의 8종의 편견을 벗어난 공(空)의 세계를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고 본다.

만유는 모두 연기의 소산이므로 실체가 없어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이를 팔불중도(八不中道)라고 말한다. 요컨대 중도는 모든 집착이나 분별을 벗어난 무소득(無所得)의 경지를 의미했다. 중도사상은 그 후 천태종ㆍ화엄종에서 이론적으로 더욱 정치해지고 선불교에서 실천적으로 계승되었다.

 


 [비교 : 유교의 중용사상]

중국 고전인 《서경》에서는 중(中)에 대하여 언급한 내용이 보인다. 요(堯)가 순(舜)에게 위를 전할 때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允執厥中)라고 부촉했다. 순이 우(禹)에게 위를 물려줄 때 “인심은 오직 위태롭고 도심은 오직 미묘하니 오직 정성되고 한결같이 하여 진실로 그 중을 잡으라”(人心惟危 道心惟徵 惟精惟一 允執厥中)고 한데서 중의 실천 방법을 찾아볼 수 있다. 이어 《서경》 ‘홍범’에서 말한 황극(皇極)도 중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논어》에서는 중용(中庸)의 덕(德)이 지극함을 말했다.(《논어》 옹야편) 이렇게 단편적으로 논의되던 중사상은 자사(子思)의 저서로 알려진 《중용》에서 체계적으로 종합되었다.

중용이란 개념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석이 나와 있으나 성리학자 주자(朱子)의 주석이 가장 저명하다. 그는 ‘중’이란 기울어지거나 의지하지 않고 지나치거나 모자라지도 않는 것이라 했고 ‘용’은 평상(平常)함을 뜻하니 본분을 지켜 괴이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라 정의했다.(《중용장구》 서) 《중용》에서는 중을 중과 화의 두 가지로 설명한다. 중은 희로애락의 감정이 아직 발동되지 않을 때를 말하고 발하되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 여기서 사려와 감정이 발동되지 않을 때는 근본적 중이라면 발동될 때는 상황에 따른 조화로운 발현이 중시된다.

상황에 따른 화는 특히 시중(時中)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형식에 고정되어 있는 정제된 중이 아님을 표현했다. 실제로는 순도 대의를 살리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격식을 폐한 일이 있으며 공자에게도 이러한 사례가 많이 있었다. 《맹자》 ‘진심편’에 ‘터럭 하나를 뽑아 천하가 이롭다 해도 하지 않는다’는 양자(揚子)와 ‘머리에서 발끝까지 갈아 없어지더라도 남을 위해서는 하겠다’는 묵자(墨子)와 이도 저도 아닌 중간의 자막(子莫)을 들고, ‘자막의 입장이 중에 가까운 듯하나 중만 잡았지 수기응변의 대의가 없으므로(執中無權) 옳지 못하고 피해가 많다’ 했다.

또 순우곤이 맹자에게 남녀의 예(禮)를 물은 뒤 ‘형수가 물에 빠졌을 경우에는 손을 잡아 건져야 될 것인가, 예(禮)에 충실해야 할 것인가’를 물었다. 이 때 맹자는 ‘때에 따라 대의를 세우는 권도(權道)를 중시할 것이니 그런 경우에 방관하고 있는 사람은 이리나 승냥이와 같다’고 답변했다(《맹자》 이루편상17). 이와 같이 동(動)할 때의 도가 때와 곳과 대의 또는 이치에 맞으면 과도한 것과 모자람이 없는 중도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이러한 용(用)으로서의 중도 이전에 체(體)로서의 중도에 표준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중용》에서는 이를 희로애락이 발하기 전의 중도(未發之中)로 표현한다. 유가적 중도주의는 《중용》의 ‘극고명이도중용(極高明而道中庸)’이라는 언급에서 가장 잘 드러나 있다. 고명한 깊은 이치를 추구하되 일상생활을 벗어나지 않고 실현한다는 이념이다. 일상에 떨어져 도의 실현을 소홀히 하거나 일상을 포기하고 고원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경계한다. 수신(修身)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의 무대에서 이상을 실현하자는 것이 중도주의의 기본내용이다. 유교에서의 중도정신은 개인의 조화로운 마음의 보존과 실현에서만 논의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유가의 덕치주의는 법가(法家)와 도가(道家)의 양극단을 떠난 중도적 입장으로 볼 수 있다. 법가적 법치주의(法治主義)는 개관적 규범인 법과 힘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는 반면 도가는 인위적 제약을 벗어나 자연과 하나가 되는 도치주의(道治主義)를 강조한다. 법가는 부국강병책에 의한 중앙집권적 대통일제국을 지향하는 반면 도가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을 지향한다. 이에 비해 유가는 통치자의 덕에 바탕하고 예(禮)와 악(樂)의 상보적 역할이 이루어지는 대동세계(大同世界)를 지향한다.


< 성철 스님의 중도법문  >
 
현실세계란 전체가 상대모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물과 불, 선과 악, 옳음과 그름, 있음과 없음, 괴로움과 즐거움, 너와 나 등입니다.
이들은 서로 상극이며, 모순과 대립은 투쟁의 세계입니다. 투쟁의 세계는 우리가 목표하는 세계는 아닙니다.
우리는 평화의 세계를 목표로 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극 투쟁하는 양변의 세계에서 평화라는 것은 참으로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평화의 세계를 이루려면,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면 양변을 버려야 합니다.
모순상극의 차별 세계를 버려야 합니다.
양변을 버리면 두 세계를 다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다 비친다는 것은 통한다는 뜻이니
선과 악이 통하고 옳고 그름이 통하고
모든 상극적인 것이 서로 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둘 아닌 법문이라고 합니다. 선과 악이 둘이 아니고, 옳음과 그릇됨이 둘이 아니고, 괴로움과 즐거움이 둘이 아닙니다.
둘이 아니면 서로 통하게 되는 것이니,
서로 통하려면 반드시 양변을 버려야 합니다.

-성철스님 『백일법문』중에서

 

4. 육바라밀 [六波羅蜜]

 

(1) 육바라밀


바라밀은 바라밀다(波羅蜜多)의 준말로, 생사의 고해를 건너 열반의 피안에 이르기 위해 닦아야 할 여섯 가지 실천덕목이다. 대승불교의 보살은 이 육바라밀의 실천을 통해 자신의 완성을 이룩해 가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완성시켜 정토(淨土)를 건설해 간다.

육바라밀은 구체적으로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의 여섯 가지를 말한다.

보시는 조건 없이 기꺼이 주는 생활이다. 이 보시에도 그 주는 내용에 따라 물질적인 재보시(財布施), 교육적인 법보시(法布施), 종교적인 무외시 (無畏施)의 세 가지가 있다.

지계는 계율을 잘 지켜 악을 막고 선을 행하는 생활이다.

인욕은 박해나 곤욕을 참고 용서하는 생활이다. 인목바라밀은 억지로 참는 삶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상대를 연민하고 포용하는 삶을 말한다.  멀게는 참는다는 생각조차 내지 않고 참아내는 것이다. 분노도 원망도, 교만도 없이, 그 어떤 것도 참는다는 생각 없이 마음을 비우고 행하는 것. 그러니 인욕바라밀은 일상의 인내심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정진은 꾸준하고 용기 있게 노력하는 생활이다. 정진바라밀을 실천한다는 것은 선업을 꾸준히 쌓아가는 것이다. 수행에 있어 힘들고 괴로운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맑고 깨끗한 정신으로 게으름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지속해가는 노력이며, 게으름과 방일에 물들지 않는 생활이다. 포기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으며, 잠시 쉬었다가도 다시 일어나는 수행이 정진이다. 

선정은 마음을 바로 잡아 통일되고 고요한 정신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하는 것이 정진이요, 부단한 정진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선정바라밀이다. 헛된 생각을 모두 버리고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여 번뇌 망상을 잠재우는 노력이 정진이라면, 원숭이처럼 날뛰는 마음을 진정시켜 정신 집중을 이룬 상태가 선정이다. 그렇게 자기 마음에 흔들림이 없어지면 서서히 선정의 힘이 생긴다.

지혜는 진상(眞相)을 바르게 보는 정신적 밝음이다. 반야바라밀은 지혜를 찾는 수행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 수행을 통해 형성된 지혜로도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둘 다 중생과 함께 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중생들에게 필요한 지식과 지혜, 중생을 도울 방법을 아는 지혜가 반야바라밀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이 가운데 보시·지계· 인욕은 타인을 위한 이타(利他)의 생활인 자비의 실천으로, 보통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생활이라 한다. 정진·선정·지혜는 자신을 위한 자리(自利)의 생활로서, 지혜를 추구하는 상구 보리(上求菩提)의 생활이다. 이렇게 볼 때 대승불교의 교육정신은 이 육바라밀에 압축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2) 사무량심 [四無量心] 


자, 비, 희(흥), 사 등의 네 가지 마음을 사무량심이라고 한다. 사무량심은 중생을 해탈로 이끌기 위해 보살이 가져야 할 네 가지 크고 넓은 마음이다.

첫째,자무량심(慈無量心)은 악의나 증오 없이 무한한 자애와 사랑으로 세상을 가득 채우고, 많은 사람들과 자애로운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남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자애심이 많은 사람은 이타심이 많고, 자무량심을 키우면 성내는 마음이 사라진다.

둘째, 비무량심(悲無量心)은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무한한 자비심으로 중생들을 고통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는 마음이다. 연민심이 많은 사람은 공감 능력이 뛰어나고, 비무량심을 키우면 남을 해치려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희무량심(喜無量心)은 다른 중생의 기쁨을 함께 기뻐해주며, 세상을 기쁨으로 가득 채우려는 마음이다. 남 잘 되는 것을 기뻐하기가 쉽지 않다. 모르는 사람이 잘 되면 그래도 괜찮은데, 가까운 사람이 잘 되면 배 아파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함께 기뻐 할 줄 알고, 희무량심을 키워 박수쳐줄 줄 아는 사람은 시기하는 마음을 잘 알아 내려놓을 줄 안다.

사무량심(捨無量心)은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대하고, 무한한 평정심으로 세상을 가득 채우는 것을 말한다. 모든 감정에서 벗어나 중립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다. 차별하는 마음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평온하며, 사무량심을 키우면 교만한 마음이 사라진다. 

 

 


"너희들은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의지하여라.
그밖에 다른 것을 의지해서는 안된다. 너희들은 내 가르침을 중심으로 서로 화합하고 공경하며 다투지 마라. 물과 우유처럼 화합할 것이요, 물 위의 기름처럼 겉돌지 마라.

나는 몸소 진리를 매달아 너희를 위해 설하였다.
너희는 이 진리를 지켜 무엇이든 진리대로 행하여라. 이 가르침대로 행한다면 설령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는 항상 내 곁에 있는 것과 다름없다.
죽음이란 육신의 죽음임들 잊지 마라.
육신은 죽더라도 매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진리와 매달음의 길에 살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덧없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열반경』

성경을 왜곡하는 사람들

 

< 중앙일보, 홍성남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장, 2023.12.21  >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을 기록한 거룩한 책이며, 전 세계 베스트셀러이다. 성경을 통해 심리적 안정과 치유를 얻고 역경을 이겨낸 수많은 사례가 있으니 성경에 대한 우호적인 평가는 지나치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일부 사이비 종교인이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사람들에게 강요하며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성경에 대한 잘못된 주장을 비판하고자 한다.

첫 번째, 성경은 많이 보아야 경지에 오르며 성경을 다른 학문적 관점에서 보면 안 된다는 주장이다. 성경을 많이 볼수록 내적인 경지가 높아진다면 사이비 교주인 정명석 같은 자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는 성경을 2000번을 보았다는데 내적 성장은커녕 신도들의 성과 재물을 착취하는 범죄자가 되었다. 또한 사이비 교주들이 성경 제일주의를 주장하면서 성경 구절을 자기합리화와 자기신격화에 악용하고 있다.

성경은 폭식이 아닌 음미 대상
계시 받았다는 이들 경계해야
이스라엘 선민사상 근거 적어
중동제국의 영향도 많이 받아

자칫하면 사이비로 빠질 위험성

성경은 많이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음식 맛을 음미하듯이 조금씩 천천히 묵상하는 것이 좋다. 무조건 많이 보는 것은 음식의 맛은 안 보고 폭식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부작용이 적지 않다. 이렇게 무작정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다가 깨우친 것을 하느님이 자기에게 직접 주신 계시라고 여기는 것도 자칫 사이비로 빠질 위험이 크다.

두 번째, 세상사의 모든 답은 성경 안에 있으니 그 외 다른 책은 보지 말라는 주장이다. 이들은 성경이 신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니 세속적인 다른 책들은 보지 말라고 하며 심지어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도 금기시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고정관념이 강하거나 정서적으로 폐쇄적인 사람들이다. 성경은 지층과도 같다. 신이 단 한 번에 써내려간 책이 아니다. 성경은 그 내용이 중첩적이고 언어적으로도 복잡한 책이다.

신학교 시절 성서학 교수의 말을 빌리면 구약성서를 제대로 보려면 50개의 언어를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소개된 성경은 대개 번역본이며 개신교의 경우 영어판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원본과는 전혀 다른 내용도 많다. 게다가 구약의 경우 역사적 사실이 아닌 신화적 요소가 상당히 가미되었고 이스라엘 전통문화가 아닌 중동 대제국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래서 가톨릭 신학교에서는 성서학을 구약은 히브리어 원본으로, 신약은 희랍어 원본으로 여러 각도에서 해석하도록 다년간 가르친다.

이처럼 복잡한 성경을 심리적으로 미성숙하거나 욕망에 사로잡힌 자들이 제멋대로 해석하고 가르쳐서 많은 사람을 현혹하고 있다. 사람이 대상을 보고 판단하고 해석할 때는 자신의 지적 수준, 심리적 콤플렉스 등 여러 개인적인 특질에 근거하므로 누구나 자기만의 색안경을 끼고 성경을 해석한다. 그래서 선택적 해석, 즉 자기 생각에 성경 구절을 꿰맞추는 억지를 부리기도 하는 것이다.

예컨대 돈에 대한 집착이 심한 종교인들은 성경 여기저기에서 헌금과 십일조에 대한 구절을 골라내어 헌금이나 십일조를 강조한다.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불어넣어 심리적 노예로 만들려는 자들은 성경에서 비참한 종말론만을 골라서 이야기한다. 성경 공부를 제대로 안 한 자들일수록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욕망의 충족수단으로 악용한다.

세 번째, 성경은 이스라엘을 선민이라고 증언하며 이스라엘은 종말에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선민의식이란 대개 민족적인 열등감에서 비롯된다. 중동의 대제국들 사이에서 경제적·문화적 열등감을 갖고 살던 이스라엘은 민족적 열등감의 해소와 생존을 위해 선민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전유물 아니다

이스라엘이 탁월한 민족이 아님은 구약 탈출기와 십계명이 증언하고 있다. 왜 모세가 하느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는 것이라고 강변을 하였을까. 십계명은 왜 만들어졌을까. 당대 이스라엘은 미개한 민족이었다. 물건을 훔치고 여인을 빼앗고 거짓말을 일삼고 심지어 살인까지 하는 민족이었다. 그래서 신의 이름으로 계명을 보여준 것이다. 이스라엘은 선민이 아니며, 더욱이 종말에 세상을 지배한다는 주장은 망상에 불과하다. 그저 구원사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발상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교의 전유물이 아니다. 성경은 인류가 어떻게 살아야 생존할 수 있는지 길을 알려주는 책이다. 우주로 쏘아 올린 보이저호에서 찍은 지구는 광대한 우주에 달랑 떠 있는 작은 빛이었다. 이 작은 곳에서 미생물처럼 사는 것이 인간이고, 이 인간들에게 서로 싸우지 말고 함께 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성경이다.

그래서 성경 구절을 악용하여 사람들을 학대하고 심지어 학살하는 행위를 반복음적 이단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런 자들을 적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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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치며 슬퍼하는 자, 왜 행복한가"…故차동엽 신부가 찾은 답

 

 

 

< 중앙일보, 백성호 기자,  2023.02.17  >

 



#궁궁통1

고(故) 차동엽(2019년 선종·노르베르토) 신부는 서울 관악산의 달동네인 난곡에서 자랐습니다. 좁은 골목에 가난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산동네였습니다. 차 신부는 난곡에서 연탄과 쌀 배달을 하며 유년을 보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차 신부는 힘겨운 삶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차 신부는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뒤 가톨릭 신학대에 들어갔습니다. 자신이 찾고자 했던 삶에 대한 물음을 다른 곳에서는 찾기가 힘들었기 때문이겠지요. 차 신부는 신학교를 졸업한 뒤 오스트리아 빈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성서신학으로 석사, 사목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가톨릭 안에서도 성경 말씀에 대한 남다른 안목을 내놓곤 했던 차 신부에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안목은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차 신부는 웃으면서 이렇게 답했습니다. “대학생 때 사색을 아주 많이 했습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는 상당수 그때 가졌던 생각입니다.”

 


#궁궁통2

예수께서 갈릴리 호숫가 언덕에서 설했다고 전해지는 ‘산상수훈’의 팔복에는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대목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팔복 중 두 번째 복입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지 않나요? 왜 슬퍼하는 사람이 행복한 것이며, 왜 슬퍼하는 사람이 위로를 받는 걸까요. 도대체 그 위로는 누가 주는 것이며,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우리에게도 삶의 고비마다 슬픔이 닥치지만 그때마다 위로가 밀려오는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고통의 파도가 밀려올 때가 더 많지 않나요? 이 대목에는 도대체 어떤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걸까요. 그걸 차 신부에게 물었습니다.

 


#궁궁통3

신약성경은 처음에 그리스어로 기록됐습니다. 예수님이 사용했던 아람어로 기록된 신약성경도 있었을 거라 보지만, 아직 발견된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리스어 신약성경이 예수님 원래의 어록에 가장 가까운 셈입니다.

차 신부는 그리스어로 ‘슬픔’을 먼저 설명했습니다. “마태오(마태) 복음에서는 ‘슬픔’을 그리스어로 ‘펜툰테스(Penthountes)’ 라고 썼다. 이건 상실의 슬픔을 뜻한다. 사별 등 소중한 걸 잃은 극심한 슬픔을 뜻한다.”

‘산상수훈’은 루카(누가) 복음에도 등장합니다. 루카 복음에서는 슬픔에 ‘클라이온테스(Klaiontes)’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클라이온테스’는 땅을 치면서 우는 걸 뜻한다.” 땅을 치면서 우는 일, 우리말로 하면 ‘통곡’쯤 되지 않을까요. 그럼 히브리어로는 뭐라고 불렀을까요. 그 정도로 복장이 터지는 슬픔은 “히브리어로 ‘사파드(Sapad)’다. 애통해 우는 걸 뜻한다. 예수님은 이 단어를 썼을 것이다. 슬픔은 감정이고, 우는 건 표출이다. ‘사파드’에는 이 두 가지 의미가 통합돼 있다.”

 


#궁궁통4

저는 슬픔에 대한 물음을 이어갔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나. 슬퍼하는 사람이 왜 행복한가?” 차 신부는 찻잔에 차를 따르며 빙긋이 웃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위로’에 있다. 이 ‘위로’가 어디에서 오는 위로인지 알아야 한다.”

차 신부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유대인은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않으려 했다. ‘하느님’이란 주어를 사용하지 않으려면 수동태 문장을 써야만 했다. 주어를 생략하기 위해서다. 그럼 이 구절의 주어는 무엇이겠나. 그렇다. 이 위로는 하느님이 주시는 위로가 된다.”

 


차 신부는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슬픔과 절망을 겪지 않은 사람의 삶은 싱겁다. 그래서 누리는 행복도 싱겁다. 

우리가 명심할 건 슬픔의 끝에 위로가 있다는 거다. 슬픔의 크기와 비례하는 위로 말이다. 

그걸 가슴 깊이 받아들이면 희망이 생겨난다. 고통이 와도, 슬픔이 와도 두렵지만은 않게 된다. 

그 고통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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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바라며

                         성철스님

                         (1989.3.1 종교인연합회 법어)

 


산 좋고 물 맑으며
무궁화 가득 핀 삼천리 강토에
둥근 해가 높이 떠서
육천만 머리 위에 두루두루 비치니
백두산에서 이는 바람
천왕봉에서 소리치고,
한강에서 노는 오리
대동강에서 헤엄치며,
명사십리 기러기떼
제주에서 춤을 추네.

만방의 자랑이며
구주(九州)의 영광인
배달의 성자신손(聖子神孫)이
천하에 둘도 없는 아름다운 낙토(樂土)에서
대대로 융성하여 천만 년을 살아오며
한핏줄의 따슨 정을 오순도순 나누었거늘.

오늘 나라가
남과 북으로 갈라섬을
조상들이 아실까봐 두렵고도 두렵구나.
눈앞에 일시적인 이해를 훨훨 털어보세

신의주에서 아침 먹고
서귀포서 낮잠 자며
경포대서 술 마시고
부벽루에서 놀이하세.

삼천리 곳곳마다 조상들 자취 분명하고
금수강산 우리 국토 조상 얼굴 뚜렷하구나.

공장마다 들려오는 우렁찬 기계 소리
세계의 자랑이요,
넓은 들의 황금물결 우리의 보고일세.

감로수로 빚은 술을
오색 잔에 가득 부어
서로서로 권할 적에
흥겨워 노래하며 저절로 춤을 추니
도원의 옛 동산도 무색하기 짝이 없네.
한라산에 솟은 달이 천지못에 비치우니

어허라! 좋을시고
삼천리 한 땅이요 칠천만이 한형제이니
한려수도 돌아보고 만물상을 구경가세.

 

 

 

내려올 때를 알았던 거인, 베네딕토 16세

 

 

< 조선일보,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2023.01.04  >

 




즉위 1년 후 작성한 ‘영적 유언장’엔 “감사할 이유 너무 많아”

“늘그막에 내가 살아온 수십 년을 돌아보면 감사해야 할 이유가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된다.”

 

 


지난 2022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이 선종(善終)했습니다. 이날 교황청은 그의 ‘영적 유언장(Spritual Testament)’을 발표했습니다. 이 유언장은 죽음에 임박해서 쓴 것이 아닙니다. 그가 교황에 즉위한 지 1년이 지난 2006년 8월에 작성돼 16년만에 공개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베네딕토 16세는 교황 즉위 직후부터 ‘메멘토 모리’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처럼 늘 마지막을 염두에 두고 교황직을 수행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베네딕토 16세 선종 후, 그가 2013년 2월 11일 ‘생전(生前) 사임’할 때 발표한 문서와 이번에 공개된 영적 유언장을 곰곰히 읽었습니다. 이 문서들에서는 ‘물러날 때를 안 리더’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생전 사임 발표문엔 사유와 후속 절차까지 철저히 밝혀

먼저 사임 발표문은 간결하지만 분명하고, 솔직했습니다. 그는 한글 200자 원고지 4.5매 분량의 문서를 통해 자신이 왜 생전에 사임하는지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는 “하느님 앞에서 거듭거듭 제 양심을 성찰하면서, 저는 고령으로 더 이상 베드로 직무(교황직)를 수행하기에 맞는 체력이 없다는 확신에 이르렀습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이어 “이 급변하는 세상에서, 신앙생활의 중대한 문제들이 흔들리는 세상에서, 베드로 성인의 배를 이끌고 복음을 선포하려면, 몸과 마음의 힘도 필요합니다. 지난 몇 달 사이에, 저에게 맡겨진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정도로 제 자신이 너무 약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행위의 중대성을 잘 의식하고 온전한 자유로 2005년 4월 19일에 추기경님들의 손으로 저에게 맡겨진 베드로 성인의 후계자인 교황의 직무를 사퇴”한다고 밝혔습니다.

학자 출신다운 문장입니다. 사임 이유는 건강 때문이며, 누구의 강요가 아니라 ‘잘 의식하고 온전한 자유’로 사퇴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2013년 2월 28일 오후 8시’에 자리를 떠날 것이라고 명시하면서 이 스케줄에 맞춰 후임 선출 절차까지 부탁했습니다.

사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전임 요한 바오로2세 교황이나 후임 프란치스코 교황에 비해 대중적 인기는 덜했습니다. 연극배우 출신인 요한 바오로2세는 스킨십이 뛰어났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빼어난 공감능력을 보여줬지요. 두 분에 비해 평생 신학자였던 베네딕토 16세는 ‘딱딱하고 엄숙한 이미지’였습니다.

 


‘스트라이커 요한 바오로2세, 수비수 베네딕토 16세’

베네딕토 16세가 대중적 인기가 없었던 것은 스스로 철저히 ‘주연’이 빛나도록 한 걸음 물러서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많이 타기도 했지요. 요한 바오로 2세 시절 라칭거 추기경(베네딕토 16세)은 사실상 2인자였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공산주의와 일전(一戰)을 벌이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결국 1980년대말 사회주의 붕괴를 이끌었지요. 요한 바오로2세가 골을 넣는 스트라이커였다면, 수비는 라칭거 추기경 몫이었습니다. 라칭거 추기경은 남미의 해방신학을 비롯한 가톨릭 내외부의 온갖 도전을 온몸으로 방어했습니다. 그의 역할은 동성애, 낙태, 여성 사제 허용 등의 문제에 대해 ‘No’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인기가 없을 수 밖에 없었지요.

 


보수적일 것 예상 넘어 ‘생전 사임’ 핵폭탄

요한 바오로 2세 선종 후 2005년 후임 교황으로 베네딕토 16세가 선출됐을 때 일반적으로는 가톨릭이 더욱 보수화될 것이라고 관측했습니다. 그러나 베네딕토 16세는 재위 8년만에 ‘핵폭탄’을 터뜨렸습니다. 건강을 이유로 ‘생전 사임’한 것이지요.

동서고금의 역사를 봐도 알 수 있지만 권력의 정점에서 스스로 내려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게다가 교황직이 종신(終身)이라는 것은 불문율로 굳어진 상태였습니다. 1415년 이후 단 한 명도 생전에 사임한 적이 없지요. 단명(短命)하든 장수하든, 투병을 하든 생명이 다할 때까지 교황직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1415년 그레고리우스 12세가 생전에 사임한 것도 당시의 복잡한 교회 정치 싸움과 관련 있습니다. 당시엔 3명의 교황이 난립한 상황이었고, 그 문제 해결의 방법으로 그레고리우스 12세 교황이 사임한 것입니다. 순수한 자의로 보기는 어렵지요. 이런 역사 때문에 각종 음모론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정통의 수호자였던 베네딕토 16세는 스스로 그 자리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해 ‘혁명가’라고 부르는 분도 있습니다. 웬만한 진보적 성직자도 생각지 못한 엄청난 일을 해낸 것이지요. 앞으로 교황직을 수행하기 힘든 건강상태인데도 자리를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실제로 후임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 즉위 직후 ‘건강상의 문제가 생기면’이란 전제로 미리 사직서를 써서 서명해뒀다고 합니다.

그의 ‘생전 사임 발표문’이 ‘혁명 포고문’이었다면, 선종 후 발표된 ‘영적 유언장’은 인간적이며 영적인 면모를 보여줍니다. 

 

그는 이 유언장에서 “먼저 내게 생명을 주시고 혼란의 여러 순간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나를 인도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며 “하느님은 내가 미끄러지기 시작할 때마다 항상 나를 일으켜주고 얼굴을 들어 다시 비춰주신다”고 말했습니다. “돌아보면 어둡고 지치는 이 길이 나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는 걸 보고 이해한다”고도 했지요. 그리고 주변의 모든 분께 감사 인사를 합니다. “어려운 시기에 생명을 주셨고, 큰 희생을 치르면서도 사랑으로 안식처를 주셨다”며 부모님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또한 자신을 위해 수십년간 희생한 누나와 형(게오르그 라칭거 신부)에 대해서도 “올바른 길을 걷도록 이끌고 함께해줬다”며 감사했습니다.

자신의 곁을 지켰던 친구와 선생님, 제자 그리고 형제자매(신자들)에 대해서도 감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고국 독일과 제2의 고향이 된 이탈리아와 로마에 대해서도 감사했지요.


영적 유언장에선 흔들리지 않는 신앙 당부

그러면서 “어떤 방식으로든 내가 잘못을 저지른 모든 이들에게 마음 깊이 용서를 빈다”면서 “믿음 안에서 굳건히 서라”고 당부했습니다. 전통의 수호자로서 면모도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연과학, 합리주의, 실존주의, 맑시즘 등 정통 신앙에 대한 도전들을 언급하며 “예수그리스도는 진정한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며, 교회는 모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그분의 몸”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이런 도전은 사임 발표문에서 밝힌 ‘신앙생활의 중대한 문제들이 흔들리는 세상’과 관련된 것이겠지요. 

 

그는 마지막으로 “나의 모든 죄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나를 영생의 거처로 받아주시도록 나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했습니다. 신학자다운 유언장입니다.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2000년을 이어온 가톨릭의 저력’을 보는 듯했습니다. 때로는 보수적으로, 때로는 진보적으로, 신앙의 본질은 유지하면서 세상의 변화도 받아들이면서 2000년 동안 이어온 가톨릭의 힘이지요.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 후 ‘수퍼스타 교황’이라고까지 불리게 된 것은 파격적 행보 덕분입니다. ‘파격’은 ‘격식을 깨뜨린다’는 뜻이죠.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격식을 엄격히 수호했기 때문에 후임 프란치스코 교황의 파격이 더 크게 보인 면도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르헨티나에서 신던 검정 구두를 그대로 신는 것까지 비교됐으니까요.(베네딕토 16세는 전통에 따라 빨간 구두를 신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핵심 교리에 관해서는 요한 바오로2세부터 베데딕토 16세 그리고 현 프란치스코 교황까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베네딕토 16세가 퇴임 후 현 프란치스코 교황과 견해 차를 보이기도 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큰 마찰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큰 갈등이 있었다면 그의 생전에 이야기가 나왔겠지요. 베네딕토 16세는 전례 없는 ‘Pope emeritus’(일부에서 ‘명예교황’으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전임 교황’으로 공식 번역합니다. ‘emeritus’는 영어로 ‘retired’ 정도의 뜻이라고 합니다.)로서 칩거하며 마지막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주연’을 빛내주는 ‘조연’으로서 말이지요.

뛰어난 신학자로서 논문과 저술 목록만 적어도 책 한 권 분량이 된다던 베네딕토 16세였습니다. 그는 그 학문적 업적뿐 아니라 물러날 때를 스스로 알고 실천한 ‘생전 사임’ 하나만으로도 가톨릭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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