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백자의 주인공들, 그들은 왜 이름도 없이 사라졌나

 

 

 

<  중앙일보, 문소영 중앙SUNDAY 문화전문기자, 2023.04.28  >

 



“현대미술가 작품 같네.”

요즘 화제인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기획전에서 ‘철화·동화백자’ 섹션을 둘러볼 때 들려온 소리다. 실제로 ‘백자철화 어문병’에 그려진 발 달린(!) 물고기는 독일 화가 파울 클레의 그림 같다. “고된 시기에도 예술적 끼와 유머가 있었구나”라는 감탄이 나온다. 17세기 철화·동화백자는 조선이 왜란과 호란을 연이어 겪은 후 청화 안료를 구하기 힘들어졌을 때 나타난 것이다.

 

현대미술 뺨치는 창의적 작품
빼어난 작가들 익명 속에 묻혀

상공업 경시한 주자학의 폐해
예술을 국부로 연결하지 못해

일본엔 이름 남긴 조선 도공들
일본 근대화의 밑거름 되기도

 

 


리움미술관 백자전 ‘군자지향’ 화제

전시를 기획한 리움미술관 이준광 책임연구원은 “군자는 곤궁 속에서도 굳세다”는 공자의 말을 인용했다. 조선백자는 힘든 시기의 지방 백자부터 풍요로운 시기의 왕실 백자까지 유교의 이상적 인간상인 군자의 모습을 투영했다는 견해다.


전시에선 백자의 다채로움이 빛난다. 전위미술을 연상시킬 만큼 창의적 작품도 많다. 조선백자의 전위성을 일찍이 발견한 사람은 현대미술의 거장 김환기였는데, 이번에 달항아리 못지않게 그에게 영감을 주었을 법한 청화철화백자도 한 점 나왔다. 김환기의 1950년대 말~60년대 초 그림에 등장하는, 추상화된 산(山) 모습을 꽤 닮은 문양이 있다.

그러나 전시에는 유교적 백자의 어두운 그림자도 있다. 이토록 매력적인 백자를 만든 도공들의 이름을 전시장에서 볼 수 없다. 이 연구원에게 물어보니 그가 연구했던 조선 자기 중에 제작자의 이름이 남아 있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고 대답했다.

한데 우리는 몇몇 조선 도공의 이름을 알고 있다. 이삼평과 박평의, 그리고 요즘 재조명되고 있는 여성 도공 백파선(본명은 아니며 ‘백 살 할머니 신선’이라는 뜻의 존경이 담긴 호칭이다) 등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모두 임진왜란 당시에 포로로 끌려가 일본의 도자기 산업을 일으킴으로써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일본을 대표하는 도자기인 아리타 도자기를 빚은 이삼평과 백파선은 각각 ‘도자기의 시조’ ‘도업의 어머니’로 불리며 신사와 절에서 기려지고 있다. 특히 백파선이 없었다면 조선에 여성 도공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리라.

임진왜란이 일어난 16세기 말까지만 해도, 도기(陶器)는 세계 여러 곳에서 만들었지만,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자기(瓷器), 더욱이 백자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중국과 조선뿐이었다. 중국은 백자를 아랍과 유럽에 명품으로 수출했다. 청화백자 자체가 푸른색을 좋아하는 아랍인의 취향에 맞춰 수출용으로 개발한 것이었다.

중국과의 조공무역에 의존하던 조선은 백자를 서역에 수출해 국부를 쌓을 여력도, 의지도 없었다. 주자학 근본주의를 따르면서, 상공업의 발달을 경계했다. 조선 도공들은 뛰어난 기술과 예술성을 지니고도 익명의 존재로 머물렀다. 게다가 임진왜란 당시 많은 도공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후 광해군 때 일본에 파견된 이경직은 포로로 잡혀간 조선 도공들을 데려오려 했으나 그중 상당수가 이미 일본이 자리를 잡았기에 귀환을 거부했다고 『부상록』에 썼다. 조선 도공들을 확보한 일본은 이들 덕분에 중국을 위협하는 자기 수출국으로 변모했고, 그 수출 대금으로 근대화의 밑거름을 마련했다.

그 여파는 오스트리아 여행작가 헤세-바르텍(1854~1918)의 기록에도 나타난다. 그가 구한말 한양을 방문했을 때 조선과 일본의 문화 격차가 심각했던 모양이다. 그는 『조선, 1894년 여름』에서 조선의 공예품 수준은 일본은 물론 동남아와 비교해도 조악한 것이 많다고 적었다. 또 조선인은 외국인에게 물건을 팔아 돈을 벌려는 의지도 없다고 꼬집었다.

하지만 그는 조선을 비하하지 않았다. 조선인은 한때 이웃 나라 국민보다 훨씬 앞섰다고 적시했다. “12세기에 벌써 서적 인쇄술을 알고 있었다. 이는 유럽의 인쇄술 발명보다 100년이나 앞선다!”라고 썼다. 그는 조선 도자기 역사도 제법 알고 있었다. “조선의 도자기와 채색 백자는 이미 15세기에 유명했고, 17세기 말까지도 일본인들이 대량으로 구입했다. 일본이 조선을 끔찍하게 파괴한 전쟁이 끝났을 때, 사쓰마의 강력한 다이묘였던 나베시마는 조선의 도공들을 자신의 고향인 규슈 섬으로 끌고 갔는데, 오늘날 사쓰마 도자기가 최고 명성을 누리게 된 것은 바로 이 도공들 덕분이다.”

이어지는 그의 일침은 뼈아프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새로 습득한 기반 위에서 무언가를 더 만들어 마침내 많은 영역에서 산업을 발전시킴으로써 오늘날 유명해진 반면, 조선인들은 수백 년 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외부 세계로부터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고, 관리들의 억압과 착취 그리고 무능력한 정부 탓에 그나마 존재하던 산업은 오히려 뒷걸음질을 쳤다.” 그래도 그는 조선인은 “훌륭한 본성” 때문에 “현명한 정부가 주도하는 변화된 상황에서라면, 이들은 아주 짧은 시간에 깜짝 놀랄 만한 것을 이루어낼 것이다”라고 예견했다.

 


백범 김구의 비판 들려오는 듯

백범 김구는 ‘나의 소원’(1947)에서 이렇게 말했다. “수백 년 동안 이조 조선에 행하여 온 계급 독재는 유교, 그 중에도 주자학파의 철학을 기초로 한 것이어서, (…)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하지 못하니 이 영향은 예술, 경제, 산업에까지 미치었다. 우리나라가 망하고 민력이 쇠잔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실로 여기 있었다.”

조선은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백자를 생산할 수 있었으면서도 수출할 생각을 하지 못했고 도공을 대우해 이름을 남겨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제 유교와 결부된 조선백자를 볼 때 그 예술성에 감탄하면서도 그 그림자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1. 개요

 

   오늘 리움미술관의 ‘조선의 백자, 군자(君子)지향’전에 다녀 왔다.  5월 28일까지 무료로 전시되는 이 전시회는 조선백자의 명품 185점이 전시된 사상 최대 규모의 특별전이다.  조선백자 중 국보·보물로 지정된 유물은 총 59점인데, 그중 절반이 넘는 31점이 전시되어 있다. 이를 위하여 리움미술관 자체 소장품뿐만 아니라 국립중앙박물관, 호림박물관, 이화여대박물관, 간송미술관, 서울역사박물관, 부산박물관, 아모레퍼시픽미술관, 국립경주박물관 등의 명품들이 총출동하였고, 일본의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도쿄국립박물관, 이데미츠미술관, 야마도문화관, 일본민예관, 고려미술관, 거기에다 개인소장의 비장품들까지 한자리에 모였다고 한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이번 전시회를 보고 세가지 놀랐다고 한다.  첫 번째는 박물관을 운영해 본 입장에서 이렇게 많은 유물을 대여하기 위해 지불한 보험료가 도대체 얼마일까 상상도 가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방대한 규모의 전시는 모르긴 해도 우리 생애엔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두 번째 놀라움은 감상자 입장에서, 모든 유물을 독립 진열장에 전시하여 사방에서 전모를 볼 수 있게 디스플레이했다. 도대체 이 전시회 디스플레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예산이 책정되었을까 하는 놀라움과 부러움이었다. 세 번째 놀라움은 이렇게 명품들을 한 자리에 놓고 보니 조선백자의 다양한 아름다움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다. 순백자, 코발트 무늬의 청화백자, 갈색 무늬의 철화백자, 화사한 붉은 빛 무늬의 동화(銅畫)백자, 거기에 지방 가마의 소탈한 도예품까지 한데 어우러져 차분한 가운데 은은히 풍겨오는 조선 선비문화의 ‘군자지향’을 절감케 한다.

조선백자 500년 역사는 시대마다 독특한 미적 특질을 보여준다. 도자기 아름다움의 세 가지 관점인 빛깔, 기형, 문양이 시대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조선 전기 백자는 새로운 이상 국가를 건설하는 왕실과 사대부의 기상이 들어 있다. ‘백자청화 매죽문 항아리’에서 보이듯 아이보리 백색에 기형이 당당하고 매화 문양에 기품이 있다. 한마디로 귀(貴)티가 역력하다.

조선 중기의 백자는 ‘백자청화 사군자문사각병’에서 보이듯 따뜻한 유백색에 기형은 단아하고 대나무·난초가 소담하게 그려져 있어 조선 선비의 취향을 여실히 느끼게 한다. 한마디로 문기(文氣)가 가득하다.

조선 후기의 백자는 ‘백자청화 모란문 병’에서 보이듯 푸르름을 머금은 백색에 기형은 푸짐하고 문양은 화려하다. 한마디로 부(富)티가 넘쳐흐른다. 그리고 이러한 조선백자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한 몸에 지닌 것이 저 유명한 ‘백자 달항아리’다.

 

   리움박물관이 밝힌 ‘조선의 백자, 군자(君子)지향’展의 기획의도는 다음과 같다.

 

 

 

2.  절제미의 승화, 순백의 조선백자 달항아리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근간으로 왕실의 품위와 선비의 격조가 미술품에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문기(文氣)가 흐르는 품위와 격조는 조선 백자의 미적 특성이기도 하다. 


   조선의 관요에서는 순백자, 청화백자, 철화백자, 동화백자 등 다양한 종류의 백자가 제작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백자 큰 항아리[백자대호(白磁大壺)]가 바로 ‘백자달항아리’이다. 17세기 후반에 나타나 18세기 중엽까지 유행한 이 백자는 보름달처럼 크고 둥글게 생겼다 해서, 1950년대에 백자달항아리라는 이름을 얻었다.


   달항아리를 조선 백자의 정수로 꼽는 이유는 절제와 담박함으로 빚어낸 순백의 빛깔과 둥근 조형미에 있다. 이는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조선 달항아리만의 특징이다. 조선은 ‘예(禮)’를 중시하는 유교 사회였다. ‘예’란 유교 문화 전통에서 인간 도덕성에 근거하는 사회질서의 규범과 행동이자 유교 의례의 구성과 절차였다.  예를 실천하기 위해 선비들이 사욕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것은 절제였습니다. 절제란 사람이 욕망이나 감정 표현 따위가 정도를 넘지 않도록 알맞게 조절하거나 제어하는 것이다. 선비들은 자신의 내적인 청결함을 중시하고 담박한 생활을 지향하였으며, 나아가 자연과 더불어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삶을 추구하였다. 담박함이란 사람의 성품에 사사로운 욕심이 없고 순박한 것을 뜻한다. 백자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추구하는 절제와 청결, 담박함, 그리고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https://youtu.be/F8a-0FVk-AA

 

 

 

3.  리움 전시에서 내가 본 조선백자 항아리 

 

(1) 백화청화 홍치명 송죽문 호 (1489년, 동국대 박물관, 국보)

(2) 백자청화 보상화당초문 호 (16세기, 개인 소장, 보물)

(3) 백자청화 운룡문 호 (18세기, 개인소장, 보물)

(4) 백화청화 매죽문 호 (15-16세기,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5) 백자청화철화 삼산뇌문 산뢰 ((15세기, 개인소장, 보물)

(6) 백자청화 신선문 호 (19세기 전반,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7) 백화철화 매죽문 호 (17세기, 개인소장, 보물)

(8)  백자 호 (15-16세기, 서울역사박물관, 보물)

(9) 백자 대호 (17세기말-18세기초, 부산박물관, 보물)

(10) 백자 달항아리 ( 18세기,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보물)

(11) 백자 달항아리 (18세기, 개인소장, 국보)

(12) 백자 달항아리 (18세기,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13) 백자청화철화 화조문 호 (18세기전반, 일본민예관 소장)

(14) 백자청화 운룡문 호 (18세기,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15) 백화청화 전서체자시명 호 (18세기 전반,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16) 백자청화 도석류매문 호 (18세기 전반,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17) 백자청화 모란당초문 (18세기, 개인 소장)

(18) 백자청화 송하호작문 호 (18세기말-19세기초, 국립경주박물관)

(19) 백자철화 진산다병명 병 (18세기 전반, 국립중앙박물관)

(20) 백자철화 매죽문 병 ( 17세기, 국립중앙박물관)

(21) 백자 반철채 호 (16세기, 개인소장)

(22) 백자철화 초화문 호 (17세기 후반,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23) 백자철화 매조문 호 (17세기 후반,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24) 백자철화 운룡문 호 (17세기, 개인 소장)

(25) 백자동화 호작문 호 (18세기, 일본문예관 소장)

(26) 백화철화 운룡문 호 (17세기, 개인소장)

(26) 백자청화 송하호작문 (18세기말-19세기초, 경주국립박물관)

(27) 백자 호 (15세기, 호림박물관)

 

 

4.  조선백자의 역사 

 

   한자로 흰 백(白)에 자기를 일컫는 자(磁)를 쓰는 백자(白磁)는 말 그대로 흰 도자기이다. 하얀 바탕흙으로 빚어 투명한 유약을 바른 뒤 약 1300℃에 달하는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백색의 자기이다. 우리나라에서 백자가 처음 제작된 것은 신라 말~고려시대로 알려졌다. 소량이긴 해도 꾸준히 제작된 백자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새 나라의 그릇으로 선택되었다.  조선 개국 초기에는 분청사기를 주로 사용했지만, 세종·세조 연간을 거치며 나라에서 주도적으로 백자를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 형태·품질 모두 체계적으로 관리·감독해 제작하기 위해 왕실용 도자기 전담 제작 공장이라 할 수 있는 관요를 설치하고 왕의 백자가 생산되자 지배층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도 백자를 선호하게 되었다.  


  백자는 청자보다 기술적으로 한층 진보된 자기이다. 백자를 만들 때 핵심 재료는 하얀 바탕흙, 즉 백토(白土)이다. 관요에서는 전국 산지에서 백토를 가져다 질 좋은 것을 선별해서 사용했다. 이와 더불어 중요한 건 의외로 땔나무이다. 백자를 구워내기 위해 가마 안을 1300℃라는 고온으로 만들려면 엄청난 양의 나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도로가 지금처럼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왕이 사용할 그릇을 안전하게 운반하기 위해서는 수로를 이용해야 하여 한양과 가깝고, 강을 끼고 있어 뱃길을 이용하기 쉬우며, 우수한 백토가 나고, 숲이 울창했던 경기도 광주가 선정된 것이다. 또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420년대 광주에 있던 도자소는 뛰어난 제작 능력과 기술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관요는 ‘사기소’ ‘사옹원 사기소’로 불리다 17세기부터 사옹원의 지점이란 의미로 ‘분원(分院)’이라고 불렸으며 이 명칭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옹원(司饔院)은 왕을 비롯한 궁중의 음식과 그에 필요한 그릇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주변 나무를 다 베어다 쓰면 다시 숲이 우거진 곳을 찾아 이동했던 분원은 18세기 중반 현재의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에 정착하고 땔나무를 운반해서 쓰게 되었다.
   1460년대 후반 국가 주도로 가마를 설치·운영하며 분원에서 본격적으로 왕실과 관청에서 쓰는 백자가 만들어지자, 시간을 두고 점차 각 지방에서도 분청사기 대신 백자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지방의 백자들은 중앙의 관요에서 사용하는 질 좋은 백토에 비하면 거친 바탕흙을 사용해 만들었다. 처음엔 광주 관요의 백자를 기본으로 삼아 만들어지다가 점차 변해 형식을 벗어나는데, 흙의 성분이나 만든 이의 솜씨에 따라 형태나 그림이 다양하게 나타났다.

   백자는 그 위에 어떤 안료로 그림을 그렸느냐에 따라 순백자·상감백자·청화백자·철화백자·동화백자 등으로 분류한다. 그림 없이 순수한 흰빛의 순백자, 상감청자처럼 상감기법을 활용한 상감백자, 푸른색 안료(코발트)로 그림을 그린 청화백자, 철(산화철) 안료를 사용해 다갈색·흑갈색으로 그린 철화백자, 진사 빛깔 산화동을 써서 붉게 그려진 동화백자 등이다. 또 유약의 성분이나 가마 안의 조건 등에 따라 색깔이 조금씩 달라지기에 자기가 띤 백색을 보고 순백자·청백자·유백자·회백자로도 나누기도 한다. 푸른 기를 머금은 하얀 빛인 청백자, 우윳빛깔 유백자, 회색을 띠는 회백자 등이 유명하다.


   안정적으로 발전하던 조선이 임진왜란(1592~1598)·정묘호란(1627)·병자호란(1636~1637) 등 연이은 전쟁으로 큰 어려움을 겪으며, 백자 역시 특징인 흰색을 잃기도 하고 값비싼 안료를 쓰는 청화백자를 생산할 수 없어져 철화백자가 유행하기도 했다. 17세기 말~18세기 초에는 다시 사회적으로 도약하며 백자도 특유의 흰색을 회복하고, 제작기술이 발달하여 동을 안료로 사용하는가 하면, 청나라 영향을 받은 화려하고 장식적인 자기도 나타나게 된다. 17세기 중후반~18세기에는 달항아리라고 불리는 큰 항아리, 백자 대호도 출현하게 되었다. 이후 19세기에는 청나라뿐 아니라 일본 자기들도 활발하게 유입되어,  특히 1876년 개항 이후에는 일본 등 외국 자기가 왕실용으로도 사용되는 등 조선백자가 설 자리가 점차 줄어게 되었다. 이후 왕실용 그릇을 만들던 분원 역시 민영화되고, 장인들은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우리 생애 다시 없을 백자의 대향연

 

 

< 중앙일보,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2023.04.13  >

 



리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조선의 백자, 군자(君子)지향’(5월 28일까지)은 조선백자의 명품 185점이 전시된 사상 최대 규모의 특별전이다. 

 

조선백자 중 국보·보물로 지정된 유물은 총 59점인데, 그중 절반이 넘는 31점이 전시되어 있다. 이를 위하여 리움미술관 자체 소장품뿐만 아니라 국립중앙박물관, 호림박물관, 이화여대박물관, 간송미술관, 서울역사박물관, 부산박물관, 아모레퍼시픽미술관, 국립경주박물관 등의 명품들이 총출동하였고, 일본의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도쿄국립박물관, 이데미츠미술관, 야마도문화관, 일본민예관, 고려미술관, 거기에다 개인소장의 비장품들까지 한자리에 모였다.

역대 최대 규모의 백자전
유명 컬렉션들의 총집결
초기·중기·후기 미감의 변화
K컬처의 원류로서 백자

이 전시회를 보면서 나는 세 번 놀랐다. 첫 번째는 박물관을 운영해 본 입장에서 이렇게 많은 유물을 대여하기 위해 지불한 보험료가 도대체 얼마일까 상상도 가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방대한 규모의 전시는 모르긴 해도 우리 생애엔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두 번째 놀라움은 감상자 입장에서다. 모든 유물을 독립 진열장에 전시하여 사방에서 전모를 볼 수 있게 디스플레이했다. ‘백자청화 조어문 떡매병’에서 낚시꾼을 그린 뒷면에는 한 쌍의 오리가 아름답게 그려진 것을 처음 보았다. 그러면서 또 생각게 되는 것은 도대체 이 전시회 디스플레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예산이 책정되었을까 하는 놀라움과 부러움이었다.

세 번째 놀라움은 이렇게 명품들을 한 자리에 놓고 보니 조선백자의 다양한 아름다움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다. 순백자, 코발트 무늬의 청화백자, 갈색 무늬의 철화백자, 화사한 붉은 빛 무늬의 동화(銅畫)백자, 거기에 지방 가마의 소탈한 도예품까지 한데 어우러져 차분한 가운데 은은히 풍겨오는 조선 선비문화의 ‘군자지향’을 절감케 한다.

조선백자 500년 역사는 시대마다 독특한 미적 특질을 보여준다. 도자기 아름다움의 세 가지 관점인 빛깔, 기형, 문양이 시대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조선 전기 백자는 새로운 이상 국가를 건설하는 왕실과 사대부의 기상이 들어 있다. ‘백자청화 매죽문 항아리’에서 보이듯 아이보리 백색에 기형이 당당하고 매화 문양에 기품이 있다. 한마디로 귀(貴)티가 역력하다.

조선 중기의 백자는 ‘백자청화 사군자문사각병’에서 보이듯 따뜻한 유백색에 기형은 단아하고 대나무·난초가 소담하게 그려져 있어 조선 선비의 취향을 여실히 느끼게 한다. 한마디로 문기(文氣)가 가득하다.

조선 후기의 백자는 ‘백자청화 모란문 병’에서 보이듯 푸르름을 머금은 백색에 기형은 푸짐하고 문양은 화려하다. 한마디로 부(富)티가 넘쳐흐른다. 그리고 이러한 조선백자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한 몸에 지닌 것이 저 유명한 ‘백자 달항아리’다.

개인적으로 임진왜란 이전 조선 전기의 청화백자들이 정녕 이렇게 아름다운 줄 미처 몰랐다. 한국 미술사에서 조선백자의 전성기는 대체로 18세기 영정조 시대 분원리 가마 때라고 생각되고 있지만, 조선 전기의 ‘백자청화 매죽문항아리’들이 오히려 절정이 아닐까 하는 인상을 준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가장 사랑스러운 작품을 꼽으라고 하면 버드나무에 매단 그네를 뛰는 처녀를 귀엽게 그려 넣은 ‘백자청화 인물문 병’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생활용기 중 백자를 능가하는 것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 처음 시작된 백자는 15세기 조선왕조가 이어받았고, 뒤이어 16세기엔 베트남의 안남백자, 17세기엔 일본의 아리타 야끼, 18세기엔 독일 드레스덴의 마이센 백자를 필두로 전 유럽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백자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며 모든 나라가 화려함을 지향하여 백자 위에 에나멜 안료로 채색을 가한 유상채(釉上彩)와 금속기까지 결합하여 기발함을 추구하고 있을 때, 조선은 변함없이 품위 있고, 단아하고, 넉넉한 여백의 미를 보여주는 고고한 백자의 세계로 나아갔다. 이것이 한국미의 특질이다.

한류가 세계로 퍼져나가는 K컬처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우리 것을 기반으로 하면서 세계 문화를 소화하여 다시 세계로 나아간 것임을 생각할 때,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은 어제의 미학이 아니라 오늘날에서 작용하는 우리의 미의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비근한 예로 지금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단색조 회화’의 뿌리가 조선백자에 있다고 하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군자지향’의 DNA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몸속에 흐르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이 사상 최대의 조선백자 대향연이 더욱 자랑스럽게 다가오기만 한다.
 

□ 전시 개요

 o 전시명 : 어느 수집가의 초대 –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

 o 관람일시 : 2022. 07. 06.(수) 16:30

 o 장소 :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o 초대의 말 :

"어느 수집가가 여러분을 집으로 초대합니다.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수많은 수집품이 수집가의 집에 가득 차 있습니다. 수집품에는 상상력을 펼치며 끊임없이 경계를 넘어온 인류의 궤적과 지혜가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 수집가는 자신의 수집품 속 인류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어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수집품에는 어떠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을까요?"

 

 

 

 

□ 전시 구성

 

 (1부) 저의 집을 소개합니다 - 수집품으로 누리는 즐거움

 

 - 맞이공간,  가족과 사랑, 수집가의 안목, 후원

 

* 국립중앙박물관 설명 캡처 사진과 전시장에서 찍은 사진을 같이 올립니다.

 

춤추는 가족 (이중섭, 1955년)
가족 (김동우, 1997년)

 

 

 

 

 

(2부) 저의 수집품을 소개합니다 - 수집품에서 배우는 지혜와 경험

 - 자연과 교감, 자연 활용, 생각 전달, 인간변화 탐색

 

 

 

화물선 (오지호, 1970년)
무제(유영국, 1993년)
난초, 대나무와 바위(김규진,1922년)
하늘과 땅(방혜자, 2010년)
나무 아래 한가로운 담소(이인상,조선18세기)

 

손 (권진규, 1963년)
나뭇잎(정광호,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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