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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차 발레리나 강미선 ‘무용계 오스카’ 품었다
한국 창작 작품 ‘미리내길’로 수상

'무용의 오스카'로 불리는 세계 무용계 최고의 상 '브누아 드 라 당스' 올해 최고 여자 무용수상을 받은 발레리나 강미선

 

 

< 조선일보, 이태훈 기자,  2023.06.22. >

 


21년간 국내 발레단에서만 활동하며 최고 무용수로 발돋움했다. 마흔 살에 마침내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가장 한국적인 작품으로 가장 밝게 빛난 별이 되었다.

강미선이 ‘브누아 드 라 당스’ 경연에서 선보인 창작 발레 ‘미리내길’ 공연 모습. 유병헌 유니버설발레단 예술감독이 안무한 작품으로, 한국 고유의 ‘정한(情恨)’을 한국 무용 색채로 녹여냈다.  

 


“그냥 머릿속이 새하얘졌어요. 아무 생각도 안 났어요. 수상할 거란 기대는 정말 하나도 안 했거든요.”

‘무용의 오스카’로 불리는 세계 무용계 최고의 상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se)’. 20일(현지 시각) 러시아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최고 여성 무용수상 수상자로 발표되던 그 순간에 누가 가장 먼저 생각났느냐고 물었더니, 발레리나 강미선(40)은 수화기 너머에서 이렇게 답했다. “남편도 공연 예쁘게 잘하고 오라고만 했어요. 최고의 무대에서 한국 발레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이제야 오래 꾸준히, 열심히 해왔다고 선물을 주시는 건가 싶기도 하네요.” 그의 남편은 2013년 결혼한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 동료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2021년 태어난 아들 한 명을 둔 ‘워킹 맘’ 발레리나다.

‘브누아 드 라 당스’는 1991년 국제무용협회가 현대 발레에 큰 영향을 끼친 러시아의 예술가이자 비평가 알렉상드르 브누아(1870~1960)의 이름을 따 제정한 상이다. 강미선은 중국국립발레단의 추윤팅과 함께 올해 수상자로 공동 선정됐다.

무용수 부문의 경우 직전 해 처음 공연한 작품에 출연한 무용수들을 심사한 뒤, 현장 경연을 거쳐 선정한다. 올해 발레리나 경연에는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 ‘에투알’인 도로시 질베르, 볼쇼이 발레단 수석무용수 엘리자베타 코코레바, 마린스키 발레단 제1 솔리스트 메이 나가히사 등 세계 최고 발레단의 최고 무용수 6명이 경쟁했다. 강미선은 유니버설발레단 동료 이동탁과 함께 선보인 작품 ‘미리내길’에서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여인의 슬픔을 연기했다. 애절한 한(恨)의 정서로 가득한 무척 한국적인 창작 발레다.

강미선은 “외국 심사위원 분들이 우리 정서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했는데, 올해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유지연 선생(유니버설발레단 지도위원)이 한국 고유의 정서를 잘 설명해주신 것 같다”고 전했다. “공연이 끝난 뒤 볼쇼이 극장장님과 현지 관계자들이 ‘안무도 음악도 춤도 정말 아름다웠다’고 칭찬해주셨어요. 그제서야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올해 심사위원장은 볼쇼이 발레단의 수퍼스타 발레리나 출신 스베틀라나 자하로바였다.

강미선은 역대 다섯 번째 한국인 수상자다. 그동안 발레리나 강수진(1999년), 김주원(2006년)과 발레리노 김기민(2016년), 발레리나 박세은(2018년)이 이 상을 받았다.

선화예중·고를 나온 강미선은 미국 워싱턴 키로프 아카데미를 거쳐 2002년 연수 단원으로 입단한 유니버설발레단에서만 줄곧 활동했다. 군무 무용수로 시작해 솔리스트를 거쳐 2012년 수석 무용수로 승급했다. 작년엔 20년 근속상도 받았다. 발레리나로선 무척 드문 일이다.

강미선은 “제가 유니버설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미리내길’을 할 수 있었고, 이 한국적 작품에서 춤췄기 때문에 브누아 드 라 당스의 후보가 될 수 있었다”며 “제게 주시는 상이라기보다 저희 발레단 모두에게 주시는 상이라고 생각한다”고도 했다.

유니버설발레단 문훈숙 단장은 “강미선씨는 21년간 아마 유니버설에서 안 해 본 역할이 없을 것”이라며 웃었다. “테크닉뿐 아니라 역할 해석과 예술적, 디자인적, 연기적 측면 모두 감각적으로 소화하고 만들어내요. 어떤 역할도 믿고 맡길 수 있는 무용수입니다. 빛나지 않는 자리에서 빛나는 자리로, 또 후배를 이끌어 주는 선배로 성장하면서, 이제는 엄마이자 아내로 인생의 성숙함까지 춤에 묻어나게 됐죠.” 강미선은 이번 시상식 갈라 공연에서는 유니버설발레단의 대표 레퍼토리인 ‘춘향’을 선보인다.

그는 “기회가 닿는다면 한국 발레를 세계에 알리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동안 이 상을 받은 분들은 해외에서 활동 중이거나 클래식 발레 작품으로 인정받으셨죠. 한국 창작 발레로 수상한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발레의 아름다움을 더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합니다.”

한국에 돌아오면 가장 먼저 뭘 하고 싶을까. 그는 “사우나에 가고 싶어요”라며 웃었다. “지쳤을 때 힘내는 데는 최고거든요. 러시아 사우나도 참 좋은데 여기선 계속 극장에만 있어서 기회가 없을 것 같아요. 귀국하면 제일 먼저 사우나부터 가려고요, 하하.”

 

 

 

2. 

마흔 살 발레리나 강미선

 

 

< 조선일보, 김태훈 논설위원,  2023.06.22.  >

 

 


몸을 쓰는 직업에는 전성기가 있다. 스포츠와 공연예술이 그렇다. 극한의 체력에다 가혹한 다이어트까지 요구하는 발레는 그중에서도 제약을 심하게 받는 분야다. 발레 영화 ‘블랙 스완’에 출연했던 배우 내털리 포트먼은 발레리나 몸매를 만들기 위해 그렇지 않아도 마른 몸에서 9㎏을 더 덜어냈다. 잠시 맛본 발레리나의 삶이 얼마나 혹독했던지 영화 개봉 후 “일주일만 더 이렇게 살았으면 미쳐버렸을 것”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많은 무용수가 “무대에 서고 싶어도 더는 안 된다”며 발레를 그만두는 나이가 대략 마흔 전후다. 세계 5대 발레단 중 하나인 파리오페라발레단(POB)이 정년을 42세로 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영국 로열발레단과 러시아의 마린스키, 볼쇼이 단원도 40~42세 사이에 무대를 떠난다. 세르비아 국립발레단이 정년을 50세로 연장하자 발레단원들이 힘들어 못 한다며 들고일어난 적도 있다.

▶유니버설 발레단(UBC) 소속 수석 무용수 강미선은 1983년 3월생으로 올해 마흔이다. 그가 발레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의 최우수 여성 무용수상을 수상했다. 한국인으로 다섯 번째 수상이지만, 마흔을 넘겨 이 상을 받은 이는 강미선이 처음이다. 앞서 수상한 강수진은 32세, 김주원은 28세, 박세은은 29세였고 김기민은 24세였다. 게다가 워킹맘이 수상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라고 한다.

▶마흔의 벽을 넘겨 무대에 서는 발레리나가 없지는 않다. 올해 환갑인 이탈리아 발레리나 알레산드라 페리는 여전히 현역이다. 53세에 내한해 14세 줄리엣 역할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러시아에선 발레리나 마야 플리세츠카야가 1995년 만 70세로 볼쇼이 극장 무대에 서는 기록을 세웠다. 한국인 중엔 강수진 국립발레단장이 49세이던 2016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오페라극장에서 고별 무대를 가졌다.

▶강미선이 어느 인터뷰에서 마흔 워킹맘으로 무대에 서는 각오를 이렇게 밝혔다. “나이 먹으니 골반이 굳고 허리도 전처럼 꺾이지 않았어요. 꺾이지 않으면 별수 없죠. 연습으로 꺾어야죠.” 발레 무용수에게는 ‘클래스’라는 명칭의 워밍업이 필수다. 고난도 동작이 포함돼 있어 임신한 무용수에겐 권하지 않는다. 강미선은 출산 2개월 전까지도 클래스에 참여했고 엄마가 되고 석 달 만에 몸 만들기에 나섰다. 그걸 본 문훈숙 UBC 단장이 여성 주역 무용수의 체력 소모가 가장 큰 것으로 악명 높은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맡겼다. 마흔 살 발레리나 강미선이 땀의 소중한 가치를 곱씹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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