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부터 진행한 삶 인터뷰 내용 가운데 사회생활에 도움이 될만한 삶의 원칙 등을 묶은 것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 기자= 한 동창 모임이 있었다. 한 친구가 모임 시작 전에,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했다. 논쟁을 해봐도 결론이 나올 리 없고, 기분만 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큰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다고 했다.

연합뉴스가 지난 22년 9월 [삶] 인터뷰를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50명에 달하는 인사들이 인터뷰에 참여했다. 그들은 자기 삶의 원칙을 말했는데, 독자들이 생각해볼 만한 내용들이 적지 않다.  아래 내용은 그동안 진행된 [삶] 인터뷰 내용 가운데 독자들의 생활에 도움이나 지혜가 될만한 내용만을 묶은 것이다.

※ 표시의 내용은 인터뷰를 진행한 윤근영 기자가 인터뷰 당시에 느낀 점 등을 적은 것이다,

 



◇ 태초먹거리학교 교장 이계호 교수

-- 스트레스가 발암 요인인가.

▲ 암 발병의 직접적 원인은 아니지만 암을 촉진한다고 본다. 암은 10년, 15년, 20년의 장기간에 천천히 자라는데, 스트레스는 암세포의 증식 속도를 빠르게 한다. 활성산소를 많이 만들고, 코르티솔을 비롯한 나쁜 호르몬이 나오도록 하기 때문이다.

-- 한국에 사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 나는 우리나라를 정말로 사랑한다. 이렇게 좋은 나라는 세계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 산과 강, 호수가 있고 사계절이 뚜렷하다. 사람들은 인물이 좋고 다정다감하다. 문제는 한국 사회 분위기가 너무 심각하다는 점이다. 내가 운영하는 태초먹거리학교에서는 정치 이야기를 안 하는 것이 원칙이다. 정치 문제는 이야기하고 토론해도 답이 없고, 결국에는 싸움으로 번지기 때문이다.

-- 한국의 정치는 왜 이렇게 됐을까.

▲ 보수든, 진보든 잘 된 것은 잘 된 것이고, 나쁜 것은 나쁜 것이어야 한다. 한국에서는 이 기준이 무너졌다. 진영논리에 의해 나쁜 것이 좋은 것으로 되고, 좋은 것이 나쁜 것으로 바뀐다.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자기 편이면 좋은 사람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합리적, 객관적, 공정이라는 단어가 사라졌다. 


※ 새로 당선된 22대 국회의원 중에 특권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사람은 없다. 유세 기간에는 아주 드물게라도 있었다. 당선되니 또 마음이 바뀐 듯하다. 새 국회의원들은 일제히 민생에 집중하고, 국민을 위하는 정치를 하겠다고 한다. 그들은 180여가지에 이르는 기괴한 특권을 버릴 수 없다고 하면서도 공정과 정의, 역사, 헌법 정신의 수호자인 것처럼 열을 올린다. 이런 정치인들을 위해,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서로 싸운다면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가지의 특권도 없는 사람들이 왜 180여가지의 특권을 가진 사람들의 한쪽 편에 서서 맹렬히 싸우는지, 정치학자나 심리학자의 해석이 필요한 듯하다.



◇ '영원한 재야' 장기표

-- 좌우명은.

▲ 전화위복을 중시한다. 그것은 위로의 말이 아니라 세상의 법칙이라고 믿는다. 살아오면서 실패도 많이 했지만 낙담하지 않았다. 사람은 어떤 화(禍)를 입었을 때 좌절에 빠질 수 있는데, 나는 그렇게 되지 않는 사람이다. 어려움은 오히려 나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

-- 생활의 원칙이 있다면.

▲ 과거부터 '골프 안 하기'와 '외제 차 안 타기'를 실천하고 있다. 재야 출신들이 해방됐다고(민주화됐다고) 해서, 또는 돈이 좀 생겼다고 해서 골프하러 다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돌아가신 정치인 김상현 씨가 나를 좋게 봤는데, 그분이 골프하라고 여러 차례 권했다. 정치를 하려면 골프를 알아야 한다면서 골프에 입문하면 도구 일체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당시에는 정치인들이 앉으면 골프 이야기를 하던 시절이었다. 남들이 하니까 따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 정치인들이 국민을 위한다면서 골프하러 몰려다니는 경우가 있다. 장기표는 자기에게 그걸 금지했다. 장기표는 월수입 250만원으로 살아간다고 했다. 서울 봉천동 25평짜리 집 역모기지론으로 매달 95만 원이 나오고, 월남전 참전으로 정부와 서울시로부터 매달 나오는 돈, 기초연금 등을 합하면 그렇게 된다고 한다.

 



◇ 노동운동가 하종강

-- 삶의 원칙이 있다면 무엇인가.

▲ 자녀들에게 자기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사는 삶은 천박하다고 말한다. 집에서 아이들이 햄스터를 키운 적이 있었는데, 어미가 새끼를 눈물겹게 사랑하는 것을 봤다. 아이들에게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이렇게 작은 짐승도 할 수 있다. 인간이 이런 짐승과 구별되는 것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 뭔가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 우리가 햄스터보다 나은 사람이 되려면 자신과 가족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하종강의 말은 요즘에 더욱 크게 들린다. 자기와 가족만의 이익을 위해 물불 안 가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 스타강사 김미경

-- 강사가 되기 전에는 무엇을 했나.

▲ 피아노학원을 운영했다. 원생이 200명이나 됐다.

-- 학원장으로서 성공한 것인데, 비결은 무엇인가.

▲ 나는 뭐든지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다. 당시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서 학원으로 출근한 다음에 원생 부모들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아이가 피아노학원에서 무엇을 했고, 어떻게 하고 있는지 등을 담았다. 이 편지를 레슨비 청구 봉투에 함께 넣어 보냈다. 그러면 원생 부모님은 그 정성을 높이 평가하고 그 편지를 냉장고 앞면에 붙여놓는 경우가 많다. 이를 옆집 아주머니가 보고는 자기 아이를 나의 피아노학원에 보내게 된다. 나는 학원생들을 정성스럽게 챙겼다. 피아노학원인데도 1년에 한 번씩 큰 합창대회를 개최했고 가족들이 참여하는 행사도 열었다.

-- 왜 직업을 강사로 바꿨나.

▲ 내가 업계에서 (피아노학원 운영을) 잘한다고 소문이 났다. 그 결과, 속리산에서 열린 피아노학원장 워크숍에서 내가 강연을 하게 됐다. 그 이후에 조금씩 강연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강연을 해보니 사람 사는 것 같았다. 인정받는 느낌이 좋았고 그 효능감이 하늘을 찔렀다. 강연이 내 천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서서히 강연의 길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 강연을 잘하는 비결은 무엇인가.

▲ 청중에게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강연은 망친다. 나는 강연장에 가기 전에 참석자들의 대표되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어떤 고민이 있는지 미리 파악한다.

 


※ 역지사지(易地思之)는 한국인들이 어린 시절부터 자주 들어온 말이지만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습관을 가졌다면 그는 어떤 분야에 있든 이미 전략가다. 



◇ 김미형 1형당뇨 환우회 대표

-- 좌우명이나 삶의 원칙은 무엇인가.

 불평만 하지 말고 행동하자는 것이다. 우리 아이가 1형당뇨를 처음 진단받았을 때 같은 병 환우의 부모들이 정부에 불만이 많았다. 답답한 것은 한 번도 문제점을 정부에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불만만 이야기하지 말고 실천할 것은 한번 행동으로 옮겨보자고 말한다.

-- 원래 본인 삶의 목적은 무엇이었나.

▲ 평온한 삶이었다. 결혼하고도 평범한 삶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책이나 옷 등을 하나 구입하더라도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중산층의 안정적 삶을 원했다. 


※ 김미영 대표의 친구들은 언론에 김 대표가 나올 때마다 놀란다고 한다. 학창시절 아주 내성적이었던 사람이 어떻게 '투사'가 됐느냐는 것이다. 그가 '투사'가 된 것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행동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서 실천력은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다. 



◇ 김재련 변호사(박원순 성폭력사건 피해자 법률 대리인)

- 1천여 건의 성폭력 사건을 대리하면서 얻은 인간에 대한 통찰이 있다면.

▲ 완벽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변호사도, 판사도, 검사도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영웅을 쉽게 만드는 것 같다. 자신들이 믿는 영웅은 옳은 행동만 할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건 착각이다. 사람의 특정 행위를 훌륭하게 평가할 수는 있지만 그 또한 인간일 뿐이다. 영웅도 인간이기에 잘못할 수 있고, 실수하기도 한다. 잘못된 행위에 대해서는 비판받고 책임져야 한다.

 


※ 아무리 완벽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결점은 있다. 누군가를 맹종하면 이성적 판단이 어려워진다. 집단적 맹종은 광기의 전체주의를 만들어내기도 하는데, 이는 민주주의의 파괴로 이어진다, 



◇ 직장갑질119 대표 윤지영 변호사

-- 존경하는 사람은.

▲ '어른 김장하'라는 다큐 영화를 감동적으로 봤다. 나도 그분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른 김장하는 좋은 일을 하면서도 자기의 선행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자기 활동을 하시는 분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많이 반성한다.

-- 본인 삶의 원칙이나 좌우명은.

▲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이고, 진리는 변하지 않기 마련이고, 진심은 통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친구가 나에게 해준 말이다. 진실은 결국 밝혀지는 것이기 때문에 꾸준히 기다려야 하는 것이고,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이니 내가 믿는 신념은 밀고 나가자는 것이고, 내가 지금 표현하지 않아도 진심은 언젠가는 통할 것이라고 믿는다. 


※ 윤지영 변호사가 직장갑질119 대표로서 받는 월급은 100만원이다. 사회적 약자들 돕겠다는 사명감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진실, 진리, 진심의 가치를 믿는 사람은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지만 역사는 이런 가치를 실행하는 사람들이 움직인다. 기본에 충실하지 않고, 기교를 부리거나 편법을 쓰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패배자다. 



◇ 범죄심리전문가 이수정 교수

-- 직업이 본인의 생활에도 영향을 줬나.

▲ 나는 가능하면 가로등이 있는 큰길로 다닌다. 지름길인 골목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위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골목길로 가더라도 주의력을 분산시킬 수 있는 이어폰을 끼지 않는다. 주차도 CCTV가 있는 곳에 한다.

※ 이수정은 많은 범죄를 마주하면서 누구나 느닷없이 범죄의 희생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매사에 조심하는 것이 습관이 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생존 가능성이 높다.



◇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 김영삼 대통령의 공보수석 시절은 어떠했나.

▲ 김 대통령은 대변인(공보수석)이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면서 북한 정세 등 여러 정보를 말해줬다. 그는 내 업무가 아닌 사안에 대해서도 의견을 물었다. 인사에 대해서도 의견을 말하라고 했다. 후보들 이름을 거론하면서 누가 장관으로 적합한지 토론하기도 했다.

-- 김영삼 대통령의 공보 수석을 지냈는데, 그한테 신임받았나.

▲ 대통령과 나눈 이야기는 철저하게 비밀로 한다는 것이 나의 원칙이었다. 국가의 중요 기밀은 60%가 부인으로부터, 40%가 승용차 운전사로부터 유출된다. 내가 대통령과 나눈 이야기를 외부에 함부로 흘리지 않는 것을 대통령이 알고 여러 사안에 대해 상의한 것으로 본다. 


※ 윗사람의 신임을 받는 방법의 하나는 비밀을 지키는 것이다. 윤여준은 자기의 부인한테도 업무상 비밀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윗사람한테 건의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두 번 정도 건의를 했는데도 수용되지 않으면 더 이상 건의하지 말라고 한다. 윗사람이 화를 낼 가능성이 커지는 데다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공자도 비슷한 말을 했다. 간절히 원하지 않는 사람한테 자꾸 조언하지 말라고 했다.



◇ 박찬종 변호사

-- 김영삼에게 인간적 매력이 있었나.

▲ 사람을 아들이나 조카 대하듯이 하니 사람을 끌었다. 밥을 먹으면서 상대방의 심기를 살필 줄 알았다.

-- 알려진 대로 김대중은 지적인 사람인가.

▲ 몇 차례 김대중과 단둘이 심층적인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아는 것이 많고, 자기가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스타일이다.

-- 김종필은 어떤 사람이었나.

▲ 그는 독한 데가 없는 사람으로 유연성을 갖췄다. 그가 나의 큰 형님이나 작은아버지였다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박찬종은 인터뷰에서 김영삼이 아랫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었으나 지식이 부족했고, 김대중은 지식이 많았으나 인간관계에서 무미건조한 측면이 있었다고 했다. 직장에서 상사가 부하직원을 자식처럼 대한다면 리더십의 기초는 된 것이지만, 그 위에 독서와 공부를 통해 지식을 쌓아 올려야 올바른 방향으로 리드할 수 있다. 지식과 사랑만으로도 부족한 경우도 꽤 있다. 엄격함이 없으면 큰 조직을 이끌 수 없기 때문이다. 



◇ 국제구호 전문가 한비야

-- 일기는 매일 쓰나.

▲ 초등학교 때부터 일기 쓰기를 멈춘 적이 없다.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일기를 깊게 쓰게 됐다. 누구한테 말을 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으니 일기를 썼던 것 같다. 이제는 그 일기장들이 나의 재산 중 최고가 됐다.

-- 글을 잘 쓰는 방법은 무엇인가.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는 것이 기본이다. 여기에 많이 경험하는 것을 추가하고 싶다. 내가 직접 보고 느낀 것을 체계화해야 비로소 내 것이 된다.

 


※ 한비야는 뭐든지 기록하는 습관을 지녔다. 당시의 느낌 등을 작은 종이 쪼가리에라도 적어 놓으면 나중에 자산이 된다고 했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냈다. 직장 생활에서도 메모는 중요하다.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아이디어를 붙잡아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탁월한 기획력은 그냥 생기지 않는다.

원불교 나상호 교정원장 "신앙 생활의 본질은 감사하는 마음"

 

 

< 중앙일보, 백성호 기자,  2024.04.18 >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물음을 가진 한 청년이 있었다. 20년 넘게 수도한 끝에 마침내 답을 찾았다. 1916년 4월 28일, 그는 진리의 자리를 뚫고서 이렇게 외쳤다.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道)와 인과 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

청년의 이름은 박중빈(1891~1943). 원불교를 창교한 소태산(少太山) 대종사다. 소태산은 전남 영광에서 출발해 변산을 거쳐 전북 익산에 원불교의 터전을 잡았다. 올해가 익산에 원불교 총부가 들어선 지 꼬박 100주년이다. 대각개교절(大覺開敎節,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고 원불교를 연 날)을 앞두고 15일 익산 원불교 중앙총부에서 행정수반인 나상호(63) 교정원장을 만났다.

대각개교절은 원불교 최대 절기다. 무엇을 크게 깨친(大覺) 건가.  


“진리를 깨달았다. 그런데 그 진리가 당신만의 소유라고 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다 깨달아서 소유할 수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해 깨달음의 중심에 당신만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 중심에 설 수 있다고 했다.”
나 교정원장은 그걸 “깨달음의 개벽(開闢)”이라고 표현했다.

그게 왜 ‘깨달음의 개벽’인가.


“나는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에 대한 개벽적 시각을 열어주었다고 본다. 당시 누군가 물었다. ‘당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도 됩니까?’ 소태산의 답은 단호했다. ‘나를 절대로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마라.’ 그 말에는 진정한 신앙의 대상이 무엇인가에 대한 가르침이 담겨 있다.”


진정한 신앙의 대상, 그게 무엇인가.


“진리 그 자체다. 원불교는 그걸 ‘법신불(法身佛)’이라 부른다. 이 우주의 근원이다. 또한 우리 각자 안에도 내재해 있다. 소태산 대종사를 찾아온 한 사람이 물었다. 왜 불상(佛像)이 보이지 않느냐고 했다. 소태산은 기다려보라고 했다. 점심때가 되자 논밭에서 일하던 제자들이 돌아왔다. 소태산은 그들을 가리키며 ‘저들이 우리 집 부처님이다’고 대답했다.”

나 교정원장은 여기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마음이 있다. 또 하나는 이 세상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부처의 모습을 찾아라. 그래서 대종사께서는 내 주변의 사람들, 즉 살아 있는 부처에게 불공(佛供)을 드리라고 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깨달음을 얻고서 세상을 향해 표어를 하나 내놓았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갈수록 물질만능의 세상이다. AI(인공지능) 혁명까지 가세해 물질개벽이 더욱 실감난다. 우리에게 왜 정신개벽이 필요한가.


“사람이 물욕에 빠지면 물질의 지배를 받게 된다. 명예욕이나 권력욕도 물질의 연장선이다. 우리의 삶이 물질의 노예가 되어선 곤란하다. 그래서 소태산 대종사는 그걸 넘어서는 힘을 기르라고 했다. 그게 정신개벽이다. 그러니 개벽은 하늘이 중심이 아니고 사람이 중심이다.”


정신개벽,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되나.


“하나는 수행이다. 요즘 말로 하면 마음공부다. 또 하나는 신앙이다. 쉽게 말하면 감사하는 생활이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서 은혜를 발견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일. 그게 원불교가 말하는 신앙생활이다. 창밖을 보라. 4월의 신록이 푸르지 않나. 저런 나무가 없으면 지구가 살 수 있나. 인간이 살 수 있나. 그런 식으로 주위를 돌아보면 감사함 투성이다.”


그렇게 감사하면 무엇이 달라지나.


“고마움을 알면 상대를 존중하게 된다. 그럼 상대도 나를 존중한다. 내 주위에 상생(相生)의 관계가 이루어진다. 그럼 사람 관계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결국 우리의 삶이 달라지지 않겠나.”

출가 후 지금까지 가슴에 꽂고 사는 한 마디가 있나.


“있다. ‘마음을 알아서 마음의 자유를 얻고, 생사의 원리를 알아서 생사를 초월하고, 죄복(罪福)의 이치를 알아서 나의 죄복을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을 얻도록 적공(積功)하자.’ 소태산 대종사의 법문에 있는 말이다. 매일 아침 5시, 기도와 명상을 할 때 이 구절을 새긴다.”


죄와 복은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이걸 어떻게 내 힘으로 다루나.


“내가 앙갚음할 차례다. 갚으면 어찌 되나. 상대방이 또 앙갚음하게 된다. 윤회의 수레바퀴가 쉬지 않는다. 만약 내가 갚을 차례에 참으면 어찌 되나. 그 업이 쉬게 된다. 윤회의 바퀴가 멈춘다. 그럼 죄가 쉬고 복이 온다. 그러니 내 힘으로 할 수 있다.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릴 수 있다.”

‘삼체’ 작가 “미중관계 은유? SF일뿐… 文革 장면, 책보다 수위 낮더라”
 
넷플릭스 드라마 세계 1위 ‘삼체’ 작가 中류츠신

 

< 조선일보, 베이징=이벌찬 특파원,  2024.04.18.  >

 


“인공지능의 눈부신 발전과 일론 머스크(‘스페이스X’ 창업자)의 우주선이 열어젖힌 새로운 우주 시대를 보라. 인간은 역사 속 재난을 반복해서 만들지만 그 가운데 강대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것이 인류다.”

중국 SF(공상과학) 소설가 류츠신(劉慈欣·61)을 16일 두 시간에 걸쳐 전화 인터뷰했다. 그는 현시점에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중국인 소설가 중 하나다. 그의 대표작 ‘삼체(三體·2006~2010년)’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미국 드라마는 지난달 21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이후 세계 시청 순위 1위(TV 부문)에 올랐다. 앞서 중국 CCTV는 지난해 1월 중국판 ‘삼체(중국어 발음 ‘싼티’)’ 드라마를 방영했는데 이 역시 크게 흥행했다. 류츠신의 소설엔 중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이 언급되는데 삼체에는 문화혁명(문혁·1966~1976년 중국 극좌사회운동)이 나온다. 문혁을 겪으며 인간의 자정(自淨) 능력에 실망한 중국 과학자가 외계로 메시지를 보낸 이후 벌어지는 지구와 외계 문명의 대결을 그렸다. 책은 2014년 미국에서 번역 출간돼 ‘버락 오바마(전 대통령)가 휴가 때 읽는 소설’로 유명해졌고, 전 세계 판매량은 영어권 300만권을 포함해 3000만 권이 넘는다. 지금까지 번역 출간된 중국의 문학 작품 총 판매량을 뛰어넘는(가디언) 기록이다.


◇ “히트 칠 줄 몰랐고 지금도 이유 모른다”

-‘삼체’가 이 정도로 성공할 줄 알았나.

“의외다. 출판사가 나보다 더 놀랐다. 이 책은 순수 SF 소설로 출간됐고, 겨냥한 독자층도 중국의 SF 애호가들 정도였다. 지금도 성공 원인은 못 찾았다.”

-당신의 소설이 현실을 빗댄 우화, 혹은 예언이라 하는 이들도 있다. (예를 들어 ‘삼체’ 2부 ‘흑암의 숲’에 대해선 미·중 갈등을 그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아니다. ‘흑암의 숲’의 경우 인간과 외계인의 대결을 그렸을 뿐이다. 대항만 있고 협력은 없다. 그러나 실제 인간 사회와 미·중 사이엔 경쟁과 대항 외에도 협력이 있다. 독자 해석은 자유지만, 나는 SF 소설을 통해 은유하지 않는다. 내 작품은 (정치 메시지를 담은 SF 소설) ‘1984′(조지 오웰)가 아니다.”

-‘삼체’의 애독자 오바마가 2017년 베이징에 왔을 때 만났던데.

“오바마와 얼굴을 한 번 봤을 뿐이고,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 새 책이 나오면 보내달라 했지만, 연락처를 주지 않았으니 보낼 수도 없지 않나.”

 

◇ “중국 역사보다 서방 역사를 더 잘 안다”

-‘삼체’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었나.

“물리학이 말하는 삼체 문제를 설명한 글을 읽고 이에 관한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 삼체 문제는 질량을 가진 세 개의 점만으로 이뤄진 우주가 있다고 가정한다. 단순한 우주인데 이 점들이 각자의 인력(引力)으로 당기며 움직일 경우 현재의 물리학이나 수학으론 그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이 세 점이 항성이고 문명이라면’이란 질문을 스스로 던지며 소설을 썼다.”

-작품엔 물리학적 요소가 많은데, 물리학은 어떻게 통달했나.

“솔직히 물리학을 진정으로 이해하진 못한다. 좋아할 뿐이다. 전문가들이 봤을 때 높은 수준이 아니다.” (류츠신은 1985년에 화베이 수리수전대학을 졸업하고 컴퓨터 엔지니어로 일했다. 그는 중국이 첫 인공위성을 쏘아 올린 1970년부터 천문학에 매료됐고, 대학에선 수력 발전을 전공하며 물리학 지식을 쌓아갔다고 알려졌다.)

-문학적 재능은 타고났다고 생각하나.

“보통이다. 문학을 사랑해서 소설을 쓴 것이 아니고, 과학·기술을 사랑하기에 SF 소설을 쓴다. 체계적인 문학 훈련을 받거나 문학 작품을 다독하지도 않았다.”

-영향받은 책이 있다면.

“SF 소설로는 아서 C 클라크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꼽을 수 있다. 문학 전체 중엔 레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다. 광활한 시각으로 역사의 장관을 묘사했다. 대지(大地)의 무게감이 내 창작에 영향을 크게 미쳤다. 하나의 시대를 묘사하는 넓은 시야가 있는 소설이다. 오늘날 많은 작가는 자신이 속한 작은 집단에 몰두하고, 심지어 개인의 희로애락(喜怒哀樂)만 다룬다. 거대 서사를 펼칠 능력이 없는, 시야가 좁은데 근시다.”

-시야를 넓히기 위해 무엇을 하나.

“깊이 있는 역사·과학서를 읽는다. 그리고 과학과 관계가 밀접한 서방 역사를 중국 역사에 비해 많이 읽고, 그래서 더 잘 안다.”



◇ “지난 30년 간 지구의 평화는 비정상”

-인류가 ‘삼체’와 같은, 생존의 위협과 맞닥뜨리는 날이 올까.

“나는 과거에 비해 생존 위기가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돌아보면 흑사병이 유럽 인구 3분의 1을 앗아갔고, 세계 대전이 두 번이나 일어났고, 핵위협이 (지금보다) 실질적인 때도 있었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인류는 더 강대해지고 있고 위험은 작아지는 추세다. 코로나 사태나 (러시아·우크라이나 등의) 전쟁 등을 고려해도 지금은 인류 역사 전체로 봤을 때는 ‘새로운 혼란 발생기’가 아니라 ‘정상[常態] 회복기’에 가깝다.”

-지구와 우주를 변화시키는 궁극적인 힘은 무엇일까.

“오직 한 가지 힘이다. 과학기술. 나는 인공지능(AI)이 세계를 바꿀 핵심 기술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다만 현재의 AI는 데이터에 기반해 확률에 의존할 뿐이고, 논리적 추론에 기대 판단하는 수준엔 이르지 못했다. 지금의 수준으론 SF 소설에 나오는 인간 통치 능력을 갖출 수 없다. 나는 AI가 영원히 그런 능력을 갖추지 못할 수 있다고도 본다.”

-AI가 미래에 미칠 영향을 상상한다면.

“당장 직면한 영향은 사람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에 대비해) 전통적인 분배 방식에 중대한 변화가 필요하다. 과거 증기기관과 자동화 기계가 나타났을 때는 인간을 다른 일자리로 밀어내는 정도라면, 지금은 일할 기회 자체를 박탈한다. 분배 개혁을 하지 않으면 ‘러다이트 운동’(기계 반대 운동)의 1만배 수준의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

-‘공동부유(다 함께 잘 살자)’ 등 중국의 최근 정책이 이런 변화에 대한 대비책이라고 보나.

“그건 아니다. 중국 정부는 빈곤한 지역과 발전된 지역의 균형을 맞추려는 것뿐이다.”

 


◇ “문화혁명은 참회가 없었다”

‘삼체’에선 문혁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첫 장면이 문혁 당시 제자와 아내에게 버림받고 살해당하는 천체물리학자의 모습을 조명한 것이다. 이를 두고 일부 중국인들이 “중국에 망신을 주고 있다”고 분노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문혁을 중요하게 다룬 이유는.

“이야기 전개에 필요했기 때문이다. 줄거리의 진행상 현대의 중국인이 인간성에 대해 철저하게 실망하는 내용이 필요한데, 중국 현대사에서 그럴 만한 사건이 문혁 외에 떠오르지 않았다. 문혁은 참여한 이들이 대부분 참회하지 않았다.(그 부분이 특히 실망스럽다는 뜻.)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른다.”

-넷플릭스 ‘삼체’에 만족·불만족한 부분은.

“등장인물을 대거 추가하고 관계를 풍부하게 만든 것은 좋다. 그런데 그 등장인물들이 왜 서로 다 아는 사이인가. 그건 이상하더라. 외계인에 대한 저항은 전 인류의 공동 대업인데, 마치 한 학급의 친구들이 차출돼 외계인과 싸우는 것처럼 연출됐다.”

-넷플릭스 드라마 제작에 얼마나 참여했나.

“고문 수준으로 참여했고 의견도 냈다. 다만 미국 드라마 특징과 상업성을 살려야 하니 내 의견이 다 수용될 수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문혁 박해 장면이 중국 소셜미디어 등에서 비판받았는데.

“원작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정상적이다. 오히려 소설보다 적게 묘사되지 않았는가?(영어 등 번역판 소설에선 문혁 장면이 앞쪽에 상세히 묘사되는 반면, 중국어판에선 다소 뒤쪽으로 이동해 있고 분량도 적은 편이다.) 중국사회에서 문혁은 여전히 어느 정도의 민감성이 있다. 그러나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두 편이 문혁을 배경으로 삼았을 정도로 소재로 삼은 사례가 전혀 없지는 않다.”

-현재의 중국을 후일 당신의 책에선 어떻게 묘사할까.

“비행을 시작하는, 굴기의 시기. 지난 세기 초 미국의 모습과 비슷하다. 중국은 강력한 ‘미래감(未來感·미래 지향적인 감각)’이 있는 나라다.”

-중국과 세계는 지금 어떤 변화를 겪고 있나.

“AI 발전을 통해 인류는 고유의 것이라고 믿은 지능, 지식에 대한 이해가 더는 인간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중국의 변화라면, 중국이 자신을 전(全) 인류의 일원으로 보기 시작했다. 시야가 인류 전체를 향하기 시작하며 넓어졌다. 앞으로 중국은 더 개방되고 연결되어 결국 세계와 융합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 “우주 속에서 아주 작은 인간, 그걸 보여주고 싶다”

류츠신은 1980년대부터 산시성 화력발전소에서 30년간 일하며 소설을 썼다. 1994년 같은 발전소의 여직원과 결혼하기 전까지 기숙사 2인실에서 생활했다. 그는 “발전소 4층에서 컴퓨터 공학자로서 홀로 일했다. 퇴근하면 오전 1시까지 글을 썼는데, 컴퓨터가 있는 사무실에서 작업하니 동료들이 내가 게임 중독인 줄 알더라”고 했다.

-유명해진 후에도 발전소에서 일한 이유는.

“중국 SF 출판 시장은 작다. (삼체 3부가 출판된) 2010년까지는 큰돈을 만져보지 못했다. 잡지사에 소설을 투고하면 고료가 1000자 기준 150위안(약 2만8500원)밖에 안 됐다. 장편 소설은 한 권 팔릴 때마다 떨어지는 돈이 2위안(약 380원) 정도였다.”

-공장 다니며 부업으로 글 쓰는 것이 맘은 편하지 않았나.

“얼마나 힘들었는데… 공장 다니면서 장편 쓸 시간이 없었다. 나이가 들수록 체력도 고갈된다. 아무도 내가 소설을 쓴다는 사실을 모르게 하려고 노력했다. 편의를 봐준다는 뒷말이 나오고 ‘투잡’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어서다.”

-왜 베이징이나 상하이 같은 대도시에 살지 않나. SF 소설가는 기술의 발전상을 눈으로 봐야 하지 않나.(그는 현재 산시성의 외진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SF 소설 거장으로 꼽히는 아서 클라크도 평생을 스리랑카 어촌에 살았다. 작은 도시에 살면 사회관계가 단순해져 장점이 많다. 한 달에 한 번도 친구를 안 만나곤 한다. 아내도 대도시 삶을 동경하지 않는다.”

-딸이 아빠를 자랑하지 않느냐.

“딸은 대학원 1학년생으로, 환경 공학을 배운다. 이공계 학생이긴 하지만 SF 소설에 관심이 없다. 학교에서는 내가 아빠인 걸 숨긴다. 다른 아이나 학교 측에서 알면 내가 학교에 불려가 특강해야 할까봐 그런다고 한다.”

-소설 쓰는 데 얼마나 걸리나.

“나는 오래 걸린다고 생각하는데, 장편 소설은 한 권에 1년 정도 걸렸다. 삼체 3부가 각 1년씩이었다. 2006년 잡지에 삼체 소설을 연재할 때 1권은 완고한 상태였다. 단편 소설은 2주 정도면 완성하는데, 생각하는 시간이 쓰는 시간보다 길다.”

-지금은 뭘 쓰고 있나.

“‘삼체’ 이후 더 나은 글을 쓰기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정점을 찍은 작가들이 다들 겪는 일이다. 지금까지 쓴 글 중에 폐기한 적은 없고, 썼다면 다 출판했다. 스스로 합격점을 줄 수 있는 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공산당원인가.

“당원 아니다. 다른 당·정 직책도 없다.”

-SF의 힘은 무엇이고, 문학을 통해 무엇을 하고 싶은가.

“SF는 독자의 상상력을 일으켜 미지의 세상에 대한 열망을 갖게 하는 힘이 있다. 중국은 창신(創新·창조와 혁신)형 국가를 만들려고 하기에 앞으로 SF 소설 시장이 커질 것이다. 작가이자 SF 마니아로서 나는 미래 우주에 대한 상상을 통해 독자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고 싶다. 우주 속에서 인간은 아주 작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러나 과학과 지식의 힘은 1억~2억년 후 인류를 우주만큼 거대하게 만들 것이다.”

-한국 SF 작품도 평가해달라. 무엇을 보았고 어떤 영향을 받았나.

“최근 한국 SF 영화 ‘괴물’ ‘설국열차’ ‘승리호’ 등을 인상 깊게 봤다. 한국은 할리우드를 제외하면 가장 높은 수준의 SF 영화를 만드는 나라가 된 것 같다. 특히 작품이 축소 지향적이지 않고 중국과 일본 작품처럼 대규모 서사를 풀어낸다. 김초엽 소설가 작품을 비롯해 한국 SF 소설도 종종 읽는다.”

-한국 방문 계획은.

“아직은 없다. 올해 6월 한국에서 열리는 도서전을 참가하려고 했는데, 중국에서 비슷한 일정이 겹쳐서 못 가게 됐다.”

 

 


☞류츠신은 누구

영미권에서만 300만 권이 팔린 소설 ‘삼체(三體)’를 쓴 중국 최고의 SF(공상과학) 소설가. 2015년 SF 소설계의 노벨문학상으로 불리는 휴고상을 아시아 작가 최초로 받았다. 1963년 베이징에서 태어났고, 아버지가 중국 문화혁명 기간에 직장을 잃고 보내진 산시성의 작은 도시 양취안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때 화약 만드는 법을 독학했고, 십대에 천문학에 매료됐고, 1981년에 화베이수리수전대학에 들어가 수력발전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 화력발전소에서 컴퓨터 엔지니어로 일하며 SF 소설을 썼다. 1999년 등단해 승승장구했지만, 삼체 3부작 출간 직후인 2010년에서야 발전소 도산에 따라 전업 작가가 됐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는 ‘류 전기공’이란 별명으로 더 많이 불린다. 반체제 인사는 아니지만, 문화혁명·천안문사태 등 민감한 현대사를 소설에서 다루거나 모티브로 삼아 주목받았다. “훌륭한 SF 소설이란 정신 나간 상상을 뉴스 보도처럼 진실 되게 쓰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2019년 그의 중편 소설 ‘유랑지구’를 원작으로 한 영화가 그해 중국 관람객 수 2위에 올랐고, 지난해와 올해 삼체가 중국과 미국에서 잇따라 드라마로 제작돼 흥행했다.

인간극장' 제작진이 24년 동안 지켜온 방송 철칙 '한 가지'
[장수프로] KBS 1TV <인간극장>

< 오마이뉴스, 오수미(breathee),  2024.04.14 >

 


2000년 5월 1일 첫 방송된 KBS <인간극장>은 그 이후 24년째 꾸준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KBS의 대표 휴먼 다큐멘터리다. 무기수로 복역하다가 6박 7일간 휴가를 나온 모범수들의 이야기를 담은 '어느 특별한 휴가, 귀휴' 편을 시작으로, 제주 바다와 65년 동안 함께한 '해녀 김옥자' 편, 영화 <맨발의 기봉이>의 원전이 된 '맨발의 기봉씨' 편, 어려운 환경에도 따뜻한 가족애를 보여준 '흥부네 11남매' 편 등 <인간극장>은 수많은 우리 이웃들의 거칠고 치열한 삶을 밀착 취재하며 안방극장에 감동과 공감을 전했다.

특히 방송 시작을 알리는 오프닝 음악과 정감 넘치는 내레이션은 누구나 <인간극장>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익숙한 것이기도 하다. 24년 동안 매일 아침 7시 50분에 한결같이 시청자들과 함께한 <인간극장>만의 힘이다. 지난 5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 본관에서 KBS 김영선 프로듀서와 타임프로덕션 한성순 팀장, 제3비전의 조창근 팀장을 만났다.

<인간극장>은 격주로 타임프로덕션과 제3비전이 외주 제작을 맡고 있고, 김영선 프로듀서가 이를 조율하는 전체 프로듀싱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한성순, 조창근 팀장은 <인간극장> 제작 초창기부터 함께한 사이로, <인간극장>의 역사에 대해서는 물론 시시콜콜하고 정감 넘치는 에피소드들까지 꿰고 있는 인물들이다. 

2000년 프로그램에 합류했다는 한성순 팀장은 <인간극장>에 대해 "내 삶과 분리해서 말할 수 없는 프로그램"이라고 말했다. 그는 "프로그램이 흘러가듯 저 역시 성장해 왔다. 서른 살에 연출을 시작해서 서른둘에 결혼하고, 서른셋에 아이 낳고, 서른다섯에 아이 낳고 아직도 이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며 웃었다. 2002년부터 조연출을 맡았다는 조창근 팀장 역시 "저도 총각일 때 시작했는데 결혼하고 아이를 갖고 나니 그때와 출연자들, 프로그램을 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졌다고 느낀다. 인간에 대해 더 많이 공감하게 되고 출연자들에게 많이 배우고 있다"고 전했다.

24년 동안 변함없이 우리 곁을 지켜온 <인간극장>이지만, 길었던 세월 만큼이나 제작 현장의 풍경은 많이도 달라졌다. 최근까지도 현장에서 연출을 담당한 조 팀장은 당시를 추억하며 "6mm 카메라로 촬영했던 옛날 시스템이 더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언젠가 촬영을 했는데 파일이 통째로 날아간 적이 있다. 6mm 시절엔 테이프가 손상되면, 앞뒤를 조금 잘라내고 붙여서 새로 만들 수 있었거든. 그렇지만 HD 카메라로 바뀐 지금은 그게 안 되지. 며칠 동안 찍은 게 날아가버리기도 한다. 그러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한성순 팀장 역시 "그때는 테이프를 데크에 넣고 재생하면서 작가들이 수기로 프리뷰어(영상을 텍스트로 옮기는 일)를 했다. 지금은 프리뷰어의 영역이 따로 있지만, 그땐 막내 작가에 메인 작가까지 다같이 손으로 적었다. 원고도 이메일로 주고받는 게 아니라 손으로 써서 타이핑을 하고 그걸 직접 들고 더빙실까지 뛰어 올라가야 했다"고 말했다. 이어 한 팀장은 당시엔 출연자 섭외를 위해 어디로든 무작정 떠났다고 회상했다.

"꼭 해보고 싶은 아이템이 노부부였다. 2004년이었는데 노부부를 찾기 위해 저, 조연출, 막내작가, 카메라 감독까지 넷이서 강원도를 2박3일 동안 훑었다. 여기 가면 이런 분이 있다더라, 어느 동네 맨 끝집에 가면 어떤 분이 산다더라. 도서관에서 찾은 이 정도 정보만 가지고 가서 온 동네를 다 돌아다녀 보는 것이다. 그러다 120년 된 귀틀집에 사는 80대 노부부를 만났다. 그게 참 기억에 많이 남는다. 그땐 무작정 떠나는 게 당연했다. 신안에 1000여 개 섬이 있으면 우리가 이번에 일정상 갈 수 있는 섬이 어디까지인지 계산해서 무작정 갔다. 그때는 이런 휴먼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뭐든 아이템이 됐다. 요즘은 이미 다른 방송에서 다룬 게 너무 많지 않나. 그런 부분에선 옛날이 좋았지."(한성순 팀장)

<인간극장>은 PD 10명, 메인 작가 7명, 조연출 7명, 취재 작가 7명, 카메라 감독 등을 모두 포함해 약 50여 명의 제작진이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이들이 모두 매주 방송되는 분량을 제작하는 것은 아니다. 조창근 팀장은 "주 5일 방송되는데, PD, 작가 1명씩, 조연출, 취재작가, 카메라 1명, 제작팀장까지 모두 포함해서 6명이 한 주간의 방송을 제작한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짜인 팀이 하나의 에피소드를 완성하기까지 총 10주 정도의 시간이 걸린단다. 한성순 팀장은 "출연자를 물색하고 섭외를 결정하기까지 3주, 촬영 3주, 후반 작업 2.5주, 그리고 마지막 1.5주는 출연자 A/S 기간이라고 부른다. 출연자와 제작진이 그동안 밀착해 있었으니, 방송 끝나고 회포를 푸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면 10주가 된다. 그리고 또다시 (다음 편을) 시작한다"고 덧붙였다.

제작진은 21일 정도 출연자와 함께 먹고, 자고, 동고동락하며 촬영하는데 하루이틀 차에 찍은 영상은 거의 방송에 쓰지 않는다고. 조 팀장은 "첫날에는 촬영조차 하지 않을 때도 많다. 계속 촬영만 하는 게 아니라 출연자와 대화를 많이 나누는 편이다. 첫째 주는 (아직 서로 낯설어서) 서먹서먹 하다. 2주 차쯤 점점 가까워지는데 이때 출연자와 제작진간 힘 겨루기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다 3주 차에는 엄청 가까운 사이가 된다. 그때쯤이면 한 배를 탄 것이나 다름없다"고 귀띔했다. 촬영 기간 동안에도 오늘 무엇을 찍을지 거의 정해놓지 않고 그저 출연자의 일상을 함께하면서 지낼 때가 더 많단다.

"아침에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오늘 뭐할 거예요?' 슥 물어본다. '오늘 애 데리고 어디 가봐야 하는데 그런 것도 따라갈 거예요?'라고 하시면, '일단 가보죠 뭐. 같이 가요' 하고 슬렁슬렁 따라가는 것이다. 그렇게 찍다 보면 뭐가 나오고. 식사도 같이 하고 잠도 같이 자니까. 카메라 내려놓고 같이 밥 먹다가도 아까 촬영할 때랑 다른 새로운 얘기가 나오면 숟가락 놓고 또 카메라를 든다. 그게 <인간극장>의 문법이 됐다." (한성순 팀장)

매일 붙어있었다 보니, 촬영이 끝나고 나면 허전함을 느끼는 출연자들도 적지 않다. 조창근 팀장은 어느 출연자로부터 갑자기 걸려왔던 전화가 기억에 남는다고 고백했다. 

"촬영이 모두 끝나고 방송은 나가기 전이었다. 갑자기 전화가 와서, 아내분이 '우리 신랑 울고 난리였다'고 하시더라. 염전을 운영하는 출연자였는데, 염전은 주변이 뻥 트여있지 않나. 염전을 밀려고 길목을 걸어가다가, '이 사람들이 나한테 인터뷰를 할 때가 됐는데 왜 아무 말도 안 시키지?' 생각을 한 거다. '조 PD 뭐하고 있지?' 하고 뒤를 돌아봤는데 아무도 없었지. 촬영에 너무 익숙해져서 순간적으로 착각한 것이다. 텅 빈 염전을 보니 너무 외로워서 눈물이 주룩주룩 났다고 하더라. 아내분은 점심을 챙겨서 함께 밥을 먹으러 갔는데, 갑자기 신랑이 우니까 깜짝 놀라셔서 전화를 하셨다. 그 얘기를 전화로 듣는 데 뭉클하더라. 단순히 출연자와 제작진 관계가 아니라 촬영이 끝나도 형님, 누님이라고 부르며 지낼 정도로 가까워진다." (조창근 팀장)

유일무이한 연작 다큐멘터리
  
<인간극장>이 돌풍을 일으킨 이후, SBS <휴먼스토리 여자> 등 비슷한 다큐멘터리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20년 전과 달리 '휴머니즘'이라는 말이 어색해진 시대지만 <인간극장>은 유일무이한 연작 다큐멘터리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시청률 역시 7%를 웃도는 수준으로(닐슨코리아 전국 기준) OTT, 유튜브가 대세인 시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훌륭한 성적이다.

<인간극장>이 아직까지 시청자들의 사랑받을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김영선 프로듀서는 공식 홈페이지에 쓰인 기획 의도 '평범한 사람들의 특별한 이야기, 특별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를 언급하며, 이 말 만큼 <인간극장>을 잘 표현해주는 말은 없다고 강조했다.

"모든 사람의 삶에는 드라마가 있다.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 삶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각자의 사연, 아픔, 희로애락이 있다. 최근 '별난 여자 김선씨' 편을 보면서 그걸 느꼈는데 SNS에서는 독특한 모습만 보여주는 분이었다. 그런데 우리 카메라가 한꺼풀 벗기고 들어가니, 그 사람의 깊은 이야기를 끌어냈다. 아주 가끔 연예인이 나오기도 하지만, 화려하게 사는 사람들도 우리처럼 희로애락을 겪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나. 그래서 사람들이 <인간극장>을 좋아하는 것 같다. 저 사람들도 우리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구나. 공감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게 우리 프로그램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김영선 프로듀서)

그럼에도 TV를 보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인간극장> 제작진 역시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다. 주 시청자층이 장년층, 노년층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서도 김영선 프로듀서는 "휴먼 다큐멘터리는 세대를 떠나서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코드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요즘 젊은 친구들도 유튜브 등을 통해 <인간극장>에 대해 알고 있더라. 최근 화제가 됐던 '나는 선생님과 결혼했다' 편은 젊은 층도 많이 봤다. 저희도 소재도 다양하게 하려고 하고 젊은 세대 출연자들을 찾는 등 노력하고 있다. 길이도 30분 정도라, 젊은층이 보기도 편한 콘텐츠이지 않나. 꼭 실시간으로 보지 않더라도, 두고두고 볼 수 있는 콘텐츠이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동안 <인간극장>에 출연한 사람들만 해도 1000명이 훌쩍 넘는다. 더이상 새로울 게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극장>이 앞으로도 계속 방송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김영선 프로듀서는 "저도 처음에는 놀랐다. 어떻게 24년 동안 끊임없이 새로운 사람을 찾을 수 있었을까. 누가 '사람은 계속 태어나고 또 늙는다'고 하더라. 평범한 사람들의 특별한 이야기를 담는다는, 다큐멘터리의 본령을 지킨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국민소득 3만 불을 넘어서면 더이상 <인간극장>은 방송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한 적도 있다. 우리가 영미, 서구권처럼 잘 살게 되면 남의 문지방을 아무렇지 않게 넘어서 촬영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3만 불을 넘어섰지만 여전히 방송하고 있지 않나. 한국만의 특수성이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인간극장>에 출연해주시는 모든 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저는 제 삶을 누가 와서 보겠다고 하면, 감추고 싶은 부분도 많다. 하지만 그 분들은 '나는 떳떳하게 살았는데 왜. 내가 도둑질을 했어, 뭘 했어'라며 자신을 탁 펼쳐 보이는데, 그 순간이 굉장히 멋있다. 그런 분들이 계속 있는 한 <인간극장>은 계속될 수 있지 않을까." (한성순 팀장)

“북한산 정상엔 태극기가 꼭 있어야죠” 24년간 태극기 값만 430만 원

 

< 조선일보 산, 서현우,  2024.03.29 >

 


북한산 백운대 태극기 24년간 교체한 정왕원씨

극한 산행은 단순히 체력만 좋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 산을 대하는 올곧은 태도와 이념, 탄탄한 지식과 경험을 두루 갖춰야만 안전히 산행을 마칠 수 있다. 넷플릭스 인기 예능 <피지컬100>에서 피지컬이 뛰어난 이를 탐구했듯, 월간<山>은 ‘산지컬’이 뛰어난 이들을 만나본다. _ 편집자 주

 


“백운대에는 태극기가 있어야 합니다.”


문득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이 생각났다. 저주에 걸린 선원들이 “플라잉 더치맨에는 선장이 필요하다”는 말을 홀린 듯 되풀이하는 장면이다. 정왕원(74)씨도 영화 속 캐릭터처럼 홀린 듯이 반복적으로 얘기했다. 북한산 백운대에는 그 어떤 다른 것도 아닌 태극기가 있어야 한다고.

왜 북한산 백운대에 태극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일까. 사실 태극기가 게양된 봉우리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국립공원의 경우에는 조금 얘기가 다르다. 과거 20세기에는 설악산 대청봉 같은 곳에 태극기가 걸려 있곤 했지만 지금은 싹 밀어냈다. 지난 2015년에는 정상부 관리 가이드라인도 만들었다. 정상석은 자연석을 활용할 것, 주변부 경관이 난잡하면 자연경관에 어울리게 정비할 것 등이다.

그런 의미에서 백운대에 들어선 태극기는 이질적이다. 국립공원의 경우, 그것도 가장 상징적인 공간인 정상에 정상석을 제외한 인공시설물이 존재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리고 이 태극기가 들어선 사연을 알고 나면 더 놀랍다. 이 태극기는 국립공원공단이 설치, 관리하는 것이 아니다. 단 한 명의 일반인이 한다.

그게 바로 정왕원씨다.

정씨는 지난 2000년부터 백운대 태극기를 교체하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현재는 개인택시 일을 하고 있는데 이틀 일하고, 하루 쉬는 날이면 늘 백운대에 올라서 태극기 상태를 점검한다. 색이 바래거나 해진 부분이 있으면 즉각 새 걸로 교체한다. 교체주기는 날씨에 따라서 상이한데 보통 한 달에 3번 정도 바꾼다.

“작년 말 기준으로 백운대를 2,200번 올랐어요. 태극기 교체 횟수는 딱히 세지 않아서 잘 모르겠네요. 한 달 평균 3장이니 1년이면 36장이군요. 24년 했으니 계산하면 한 850장 정도 구매했던 거네요. 태극기 한 장 소매가격이 1만2,000원이지만 저는 도매가격으로 5,000원 정도에 사고 있거든요? 태극기에만 430만 원이나 썼네요. 허 참 그렇게 많은 돈을 들였을 줄이야.”

인터뷰 당일 북한산 진달래 능선에서 만난 정왕원씨는 스스로 계산을 해보곤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새벽 일찍부터 도선사에서 출발해 백운대에 오른 뒤 진달래 능선 쪽으로 걸어온 상태였다. 분명 본인이 늦을 테니 천천히 오라고 했지만 부리나케 백련사 기점에서 올라가 만난 그는 한참을 기다린 눈치였다.

“혹시 먼저 태극기를 좀 같이 들고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요?”

사진기자의 말에 그는 배낭에서 태극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인상적이게도 그는 고이 접은 태극기를 고급 손수건으로 폭 싸서 갖고 다녔다. 배낭 안에도 독립된 주머니에 홀로 넣어놔서 다른 물건에 짓눌리지 않게 해놓았다.

“태극기를 늘 이렇게 싸서 갖고 다니시는 거예요?”

“당연하죠. 어떻게 태극기를 함부로 대할 수 있겠어요.”


고단한 삶을 비춘 빛, 백운대

정왕원씨가 백운대 태극기를 관리하게 된 건 그의 인생 궤적과 맞닿아 있다. 그의 인생사는 지난 2016년 본지 기사에 자세하게 소개된 바 있다. 그에게 “해당 기사에 나온 내용 중에서 정정할 부분이나 추가할 부분이 있냐”고 묻자 그는 “창피하고 부끄러운 이야기라 다시 얘기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

“제 인생은 바닥을 기었고 비참했습니다. 돈이 없어서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고, 벌였던 사업들도 제대로 굴리지 못했어요. 여러 직업과 지역을 전전했지만 정착하지 못했죠. 2000년에 개인택시 일을 시작하면서 현상유지가 되는 삶을 살게 됐고요.

물론 사람들이 옛날 그 기사를 보곤 ‘그렇게 힘들게 살았으면서도 백운대 태극기 교체라는 좋은 일을 해서 존경스럽다’고 박수 쳐주곤 합니다.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고맙지만 저는 그냥 바닥에서부터 치열하게 기어올라 살아났을 뿐이거든요. 그런 얘길 들을 때면 쥐구멍을 찾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네요.”

등산을 시작하게 된 것도 우연한 계기였다. 1994년, 일정한 직업이 없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대동문을 통해 백운대에 올라갔다. 애초에 백운대를 오르겠단 생각도 딱히 없었다. 그냥 산의 흐름을 따르다보니 가게 됐다. 헐렁한 작업복 차림으로 정상에 서니 그는 “경치가 완전히 딴 세상이라 충격이었다”고 했다. 그리곤 이내 시선은 정상에 있는 사람들에 머물렀다.

“정상에서 놀고, 쉬고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어요. 나는 잘 놀지도 못하고 힘들게 사는데 이렇게 좋은 경치를 보면서 재미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구나 싶었죠.”

그 기억을 잊지 못해 고단한 삶 속에서도 짬을 내 백운대를 찾았다. 일요일 아침 8시쯤 백운대에 도착하면 늘 보던 얼굴들이 있었다. 서로 가져온 음식과 다양한 술을 나눠 먹으며 즐기다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딱히 정확히 몇 시에 모이자고 말을 한 것도 아닌데 그게 2년이나 지속됐다. 그러면서 백운대 아래에서 기념품을 팔고 사진을 찍어 주던 박현우씨와도 자연스럽게 연을 맺게 됐다.

“그분 얘기론 자신이 1985년부터 직접 정상에 대나무로 깃대를 세우고 태극기를 게양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장사도 점점 안 되고 무릎도 아프니 백운대에 매일 올라오기 어렵게 됐죠. 그게 2000년입니다. 그때 제가 마침 개인택시를 시작하면서 이틀 일하고 하루 쉬는 스케줄이 됐어요. 그래서 제가 태극기 일을 자연스럽게 인계받았죠. 박씨와는 지금도 연락해요. 늘 ‘태극기 잘 있냐’고 물어봐요.”

 


24년간 3일에 한 번 등산…

그래서 3일에 한 번꼴로, 1년에 약 100회씩 그렇게 백운대를 집요하게 올랐다. ‘사람이 어떻게 밥만 먹고 사냐’는 말이 있듯 “어떻게 같은 산만 오르고 사냐?”는 말이 절로 나오지만 그의 백운대 사랑은 끔찍하다. 설악산 대청봉도 가봤고, 지리산 천왕봉도 올랐지만 그저 땀이 좀더 날 뿐이었단다. 그 어느 곳도 백운대만큼 좋지 않았다. 그는 “백운대 정상 암릉 구간이 엄청 짜릿하고 스릴 넘치는데 다른 산에서는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고 돌아봤다. 

“물론 설악산도 지리산도 좋죠. 하지만 저는 돈과 시간을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그걸 감안하면 서울 바로 옆에 딱 붙어 있는 백운대가 얼마나 좋아요. 게다가 정상에 오를 수 있도록 계단과 난간도 잘 만들어놨죠. 사실 북한산 백운대 정상부만 놓고 보면 무척 어렵고 무서운 산입니다. 얼씬도 못 하겠죠. 돈과 시간을 적게 들여, 안전하게, 스릴을 즐기며, 오를 수 있는 어려운 산이라니. 이런 산이 옆에 있다는 것이 정말 행운이죠.”

정씨가 백운대를 올랐던 나날을 말로 되짚어 오른다. 왜인지 모르게 그 모습에서 그의 인생사가 겹쳐 보였다. 그는 순조롭게 자리를 잡을 만하면, 일이 풀릴 만하면 우여곡절 끝에 다시 바닥으로 내팽개쳐지곤 했다. 마치 9부 능선인 백운봉 암문까지는 순조롭게 오르지만 생각보다 무서운 백운대 정상부를 극복하지 못하는 산행 초보처럼. 

하지만 정씨는 백운대 정상을 올랐고, 악착같이 버티는 데 급급했던 인생에도 안정이 찾아왔다. 그러니 그에게 백운대는 더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2000년대 초 기존에 있던 깃대가 삭아서 부러진 적이 있었다. 4m 높이에서 위풍당당하게 휘날리던 태극기가 반절쯤 내려오니 영 볼품이 없었다. 4~5m 쇠파이프를 지고 백운대를 오를 엄두가 나지 않아 기회를 엿보는 사이 국립공원공단에서 깃대를 새 걸로 바꿔줬다. 정씨는 “아 이제 공단이 관리하려나보다 했는데 깃대만 바꾸고 태극기는 건들지도 않았다”며 “그래서 그때부터 쭉 내가 태극기 교체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최근에는 그래도 10번 중 1번꼴로 공단 직원이 가서 태극기를 교체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용케 공단이 깃대를 바꿔줬네요? 보통 자연물만 남기려고 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지금도 태극기 교체하는 일에 뿌듯함을 느껴요. 예를 하나 들게요. 백운대 정상에는 한국산악회가 1975년에 세운 통일서원비가 있어요. 옛날엔 그게 정상석 노릇을 했죠. 그런데 한 산꾼이 보니 거기에 백운대 이름도, 높이 표시도 안 돼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이 안타까우니까 자기가 그 비석 사이즈에 딱 맞는 종이에 백운대 이름과 높이 836m를 인쇄해서 뒷면에 붙여놨어요. 공단 직원이 바로 ‘이거 왜 네 맘대로 붙여’ 하면서 뗐죠. 이 사람이 화가 나서 1년 넘게 계속 붙였고, 공단은 계속 떼는 싸움을 했어요. 아무리 그분이 ‘정상석엔 산의 이름과 높이가 적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도 씨도 안 먹혔죠. 그렇게 한참 지나고 나서야 공단이 사람을 시켜서 지금 정상석에 석각을 새기더라고요. 2000년대 후반이었어요.”

“근데 그 사건과 태극기가 무슨 상관이죠?”

“그러니까 박현우씨와 제가 계속 태극기를 게양하는 작업을 이어오지 않았다면, 나중에 태극기를 매달았다면, 지금처럼 태극기가 백운대의 상징이 되지 못했을 거란 말입니다. 박현우씨가 일찌감치 잘한 셈이죠.”


어려운 살림에도 태극기 교체 도맡아

처음에는 태극기 값이 좀 부담됐다. 당시 기준으로 1만2,000원. 택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라 여윳돈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지자체를 찾아서 협찬을 좀 해달라고 했다. 그는 “첫 해에 10장 주고, 그 다음해에 한 장을 주겠다기에 그럴 바엔 그냥 안 받겠다고 하고 나왔었다”며 “사실 나도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게 백운대 정상은 행정주소가 고양시인데 강북구청을 찾아가서 달라고 했다”며 웃었다. 어쨌든 처음에는 그 정도로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지금은 어때요? 국립공원공단이나 지자체에서 지원해 주겠다는 얘기가 없나요?”

“그런 얘기도 없고, 제가 받을 생각도 절대, 전혀 없어요. 제가 이 일을 더 못 하는 날까지는 무조건 제 돈으로 할 겁니다. 백운대를 위해서 돈을 쓰는 건데 전혀 아깝지 않고 오히려 더 선뜻 쓰고 싶어요.”

돈은 돈대로, 시간은 시간대로 쓰는 힘들고 까다로운 일. 그래도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에 대해 묻자 그는 단순히 “좋아서”라고 했다. 누가 등을 떠밀지도 않았고, 노고를 칭찬받고자 하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고 했다. 그래도 단순히 좋아서란 말로는 부족해 보여 조금 더 캐물어봤다. 미간에 주름을 잡고 고민하던 그가 입을 연다.

“백운대 정상에는 온갖 사람들이 다 옵니다. 열이면 열, 태극기를 옆에 두고 사진을 찍어요. 그런걸 보면 우리는 다 똑같다, 모든 한국 사람들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참 똑같다고 느껴요. 그러니 그렇게 태극기를 좋아해 주는 것 아니겠어요? 저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일원들이 수도 서울 최고봉에 모였을 때 서로 같은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상징물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 어찌 안 ‘좋을’ 수 있겠어요?”

백운대 태극기 앞에서는 좌파도 우파도, 여자와 남자도, 젊은 세대와 나이든 세대도 다 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고, 같은 눈으로 올려다본다. 정씨는 그런 모습을 ‘좋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아내도 그랬다. 24년 동안 백운대를 올라 태극기를 교체하는 일에 대해 좋다 싫다 일언반구도 없다가 딱 한 마디만 남겼단다. “여보, 의미 있는 일 한다”고.

 


백운대 오르려고 새벽 2시에 일어나

백운대를 위해서 삶의 패턴도 바꿨다. 오후 6시 30분에 잠들어서 새벽 2~3시 사이에 깬다. 산에 가는 날만 그러는 게 아니다. 매일이다. 과거에는 친구들을 만나 술도 많이 마셨고 밤늦게 놀기도 했다. 하지만 오로지 백운대에 올라 태극기를 교체하는 일을 원활히 진행하기 위해 그런 즐거움을 포기했다.

“일을 하는 날에는 새벽 3시쯤 일어나서 한 시간 정도 운동을 하고 출근합니다. 집 안에 철봉도 들여놨고 35kg 쇳덩어리도 있어요. 헬스를 하죠. 그리고 저녁 6시에 퇴근하면 곧장 잠들어요. 산에 가는 날이면 조금 더 일찍 일어나서 새벽 3시 내외에 도선사 들머리에 도착하고요.”

“왜 그렇게 일찍 오르시는 겁니까?”

“거창한 이유는 아니에요. 예전엔 괜찮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도선사 주차장에 주차난이 생겼어요. 주말이면 새벽에도 자리가 한두 개밖에 없을 때가 많아졌죠. 그래서 그냥 삶을 산에 맞췄어요. 주차도 편리하고, 올랐을 때 정상부에 사람이 없어서 교체 작업하기도 편하고, 또 아침 일찍 오신 분들도 헌 태극기가 아니라 새 태극기를 볼 수 있고 여러모로 좋더라고요.”

“하지만 친구 만날 시간이 없는데요?”

“나이 70이 넘어가니까 누굴 만나서 술 마시고 그래봤자 맨날 쓸데없는 얘기만 하지 영양가가 없더라고요. 차라리 산에 가서 땀이라도 흘리면 다리 힘이라도 생기죠.” 

그러니 밤이 없는 삶을 선택한 건 그에게 대승적인 결정이나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었다. 그냥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사건사고도 많았다. 죽을 뻔한 적도 있다. 어느 겨울 가파른 나무계단 초입에서 살얼음을 못 보고 밟았다가 머리부터 떨어졌다. 불행 중 다행인지 다행 중 불행인지 쇠기둥에 머리를 박으면서 추락이 멈췄다. 모자를 벗으니 피가 쏟아졌다. 묘하게 피를 한 번 흘리고 나니 정신은 말짱하고 그리 아프지도 않았다. 눈으로 피를 덮고 오기가 생겨 정상에 무사히 갔다가 내려 왔다. 피가 더 안 나기에 멀쩡한 느낌이었는데 병원에 가니 상처를 봉합해야 한다고 해서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뇌진탕 증세까지는 없어서 더 위독해지진 않았다.


태극기 교체, 앞으로 3년 남았다

진달래 능선을 오르내리는 그의 숨이 사뭇 거칠다. 사실 이제 그의 백운대 사랑도, 태극기 작업도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정씨는 “앞으로 3년, 길어야 5년 정도 더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체력적으로 버겁다. 사실 가려면 갈 순 있는데 컨디션이 안 좋으면 선뜻 올라갈 결심이 잘 서지 않는단다. 그래서 도선사 주차장까지 왔다가 되돌아가기도 한다.

“이어 받을 사람은 있나요?”

“없습니다. 백운대를 정말 사랑하고, 저처럼 백운대를 3일에 한 번꼴로 올 수 있는 여건을 갖춘 사람이어야 할 텐데, 그런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국립공원공단에 말해 보려고 합니다.”

“국립공원공단이 할까요?”

“싫어도 할 수밖에 없죠. 깃대가 세워져 있는 걸요. 지금도 태극기가 해져 있으면 바로 공단 사무소에 민원이 접수됩니다. 그 등쌀에 할 수밖에 없겠죠. 그렇게 믿고 있어요.”

“태극기 교체 일을 그만둔 뒤에는 어떤 일을 하실 생각인가요?”

“사실 꿈이 있어요. 블라디보스토크부터 대서양까지 유라시아 횡단을 해보려고 합니다. 캠핑카로요. 그간 못 둘러본 세상을 실컷 보고 싶습니다.”

그는 백운대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꿈은 일절 가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백운대를 오르기 전 그의 세상이 주먹 안에 쥘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면 지금은 팔을 활짝 벌려도 모자랄 정도로 세상이 넓어졌다고 했다.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도, 세상이 이토록 넓고 아름답다는 것도 모두 백운대에서 배웠다. 그래서 그는 “백운대는 내 인생의 스승”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든지 그런 게 있을까요?”

그는 망설였다. 그리곤 “뭘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런 말을 하겠냐”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질문을 살짝 바꿔봤다.

“백운대에 처음 올라온 아이가 ‘여기 이 태극기는 뭔가요?’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해 주실 것 같으세요?”

그는 이번엔 망설이지 않았다.

“여기에 꼭 있어야 되는 것이라고 답할 겁니다. 백운대에는 태극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는 백운대 위에 다른 그 무엇도 아닌 태극기가 있어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그것이 곧 대한민국과 서울, 그리고 한국인을 드러내는 상징이자 의미라면서. 

"그러나 난 부끄럽다"…아프리카 먹여살려 칭송 받은 그의 후회

 

< 중앙일보, 안혜리 기자,  2024.03.27 >

 


우리는 아프리카를 모른다. 구호단체 모금 영상 속 기아·질병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어린이의 이미지가 아프리카의 전부라고 착각하며 겁을 먹는다. 전 세계 정보가 실시간으로 쏟아지고 해외여행이 일상화한 지금도 그러한데 하물며 1970년대엔 어땠을까. 가난과 재해, 전염병, 여기에 내전까지 덮친 저 먼 땅을 자기 삶의 터전으로 삼겠다는 생각을 하기란 그 누구라도 쉽지 않다. 그런데 그 시절 서울대 교수라는 안정된 삶, 그리고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원이라는 빛나는 커리어 대신 아무런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아프리카를 선택한 남자가 있었다. 나이지리아를 세계 8대 작물 카사바(타피오카 원재료) 세계 1위 생산국에 올려놓은 '나이지리아의 우장춘' 한상기 박사(91)다. 

 

그는 왜 '한국의 우장춘'이 아니라 '아프리카의 우장춘'이 된 걸까. 1994년 은퇴 후 미국생활을 거쳐 2013년 귀국해 수원 광교에 자리 잡은 한 박사를 지난 4일 만나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마침 그날은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 2024년 대한민국과학기술유공자로 한 박사를 지정하고, 그의 집에 명패를 부착한 날이었다.

 


'슈퍼 카사바'로 기아 해결 기여
세계은행서도 공로 인정받아
현지 연구 자립 위해 700명 배출
핵심 후학, 내전 속 살해돼 먹먹

 

 


#명예 대신 도전, 운명이 된 선택


어떤 선택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서울대 농과대학 교수 시절인 30대 후반 영국과 나이지리아에서 각각 날아온 두 개의 초청장이 딱 그랬다. 하나는 케임브리지대 식물육종연구소(Plant Breeding Institute)라는 명예의 길, 다른 하나는 건물도 없이 이름뿐이던 나이지리아 국제열대농학연구소(IITA)라는 도전의 길이었다. 명예보다 도전을 택했다. 위험하다며 어릴 적 수영도 못 하게 했던 아버지, 가지 말라고 눈물로 호소하던 어머니. 두 분이 연이어 갑작스럽게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편안한 삶에 안주했을지도 모른다. 효도 한 번 못했다는 죄책감은 뒤로 한 채 중학생 큰딸은 제자에 맡기고 아내와 어린 삼 남매만 데리고 험난한 아프리카행에 나섰다. 어떻게 그런 담대한 결정을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그 선택이 운명이 됐다는 것이다.


#첫 번째 도전, 미네소타 프로젝트


고향 충남 청양은 칠갑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샛강과 백마강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장마철이면 강물이 범람했고, 가난한 농부들은 농사를 망치고 보릿고개를 겨우 넘기며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대전중학교 국어 시간에 우장춘(1898~1959) 박사 얘기를 듣고 인생 경로를 정했다. 우 박사 같은 사람이 되어 우리나라의 배고픔을 해결하고 싶었다. 그런 열정으로 서울 농대에 갔고, 졸업 수학여행 때 만난 우 박사는 그런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줬다.
대학원 졸업 후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미 국제협력처가 1000만 달러를 지원한 '미네소타 프로젝트' 교환교수 기회를 얻은 거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제3 세계 43개국에서 진행한 국가 재건 프로젝트 중 하나였던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형편없던 한국 의학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실은 의학뿐 아니라 한국의 공학·농학 발전도 여기서 기인한 바가 크다. 1955~62년 서울대 교수진 226명이 미네소타 대학에 장단기 연수·유학을 갔는데, 여기에 선발됐다. 1960년부터 1년 동안 학비는 물론 숙식 등 모든 비용 걱정 없이 식물육종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서울대가 한국에선 최고의 대학이지만 그 시절 기초학문을 연구하기엔 초라했다. 선진 학문을 접해보니 배움의 욕구가 더 커졌다. 교수로 막 임용된 1965년 이 분야 거목 존 그래피우스 교수에게 청해 미시간주립대에서 박사를 했다. 가족은 시골 부모님 댁에 두고 홀로 유학을 갔다. 한국에 남은 가족은 비록 쥐꼬리만 해도 서울대에서 나오는 월급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는데, 무슨 영문인지 갑자기 외국 체류자에게 주던 봉급이 끊겼다. 그래피우스 박사는 이 소식을 듣고선 "가족에게 송금하라"며 매달 내 책상 위에 50달러 수표를 놓고 갔다. 다시 봉급이 나와 돈을 갚겠다고 하자 "100년 후에 갚으라"고 했고, 귀국 땐 비행기 표 살 돈까지 마련해줬다. 미국은, 그리고 그 나라 최고 석학은 이렇게 가난한 나라의 미래를 위해 유학생 하나를 정성껏 키워냈다.


박사를 마치고 돌아온 1967년 서울대 교수 월급으로 살 수 있는 곳은 방 한 칸짜리 사글세뿐이었다. 얼마 후 수원에 온 가족과 함께 들어간 수원 서울농대 교수 관사도 비만 오면 지붕에서 물이 새고 부엌에 물이 차는 열악한 곳이었다. 그렇다고 공부 열정이 꺾이진 않았다.

 


# 두 번째 도전, 나이지리아의 식량난


유학 시절 논문 세 편이 영국 유명 학회지 '헤레더티(Heredity)'에 등재돼 영국과 나이지리아에서 일할 기회가 생겼다. 잠깐의 면접을 위해 김포공항을 떠나 홍콩, 태국 방콕, 인도 뭄바이, 예멘,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케냐 나이로비, 우간다 엔테베를 거쳐 4일 만에 나이지리아 라고스 공항에 도착했다. 당시 가장 빠른 항로였다. 육로로 100㎞를 더 달려 국제열대농학연구소(IITA)가 있는 항구도시 이바단에 도착했다. 10만 전사자와 100만 아사자를 낸 참혹한 비아프라 내전(1967~70) 직후라 엉망인 길 위로 파괴된 탱크와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희망조차 말라 죽은 대륙이었다. 이상하게 두려움 대신 아프리카 식량난을 해결하고픈 도전 욕구가 솟구쳤다. 당초 귀국편에 다른 면접장소 런던이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나이지리아였다.


당시 미국은 '굶주리면 공산화된다'는 우려에, 포드 재단과 록펠러 재단을 통해 식량난 해소를 목표로 전 세계 곳곳에 농업연구소를 세우던 중이었다. IITA는 통일벼로 유명한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IRRI)와 멕시코 국제밀옥수수연구소(CIMMYT)에 이은 세 번째 연구소였다. CIMMYT에서 일하던 노먼 볼로그(1914~2009) 박사가 내병다수성(耐病多收性·병충해에 강한 다수확) 밀을 만들어 멕시코·인도에 보급한 녹색혁명 공로로 1970년 노벨평화상을 받을 정도로 성과가 뛰어났다.

노벨상 같은 보상을 기대하고 이바단에 간 게 아니다. 북한 수교국 나이지리아는 당시 우리와 국교가 없어 위험했고, 연구해야 할 카사바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작물이었다. 참고할 자료도 없었다. 앞서 아프리카에 온 서구 연구진이 있었지만 이들은 고무 같은 돈 되는 작물에만 관심 있고 아프리카 기아를 해결할 카사바 같은 식량 작물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내가 내병다수성 슈퍼 카사바 개발에 성공(1976)한 지 10년쯤 뒤 일본 재벌 사사카와 료이치 일본선박진흥회 회장 부탁을 받고 가나에 온 노먼 볼로그조차 3~4년 만에 큰 성과 없이 아프리카를 떠났다. 명분은 기아 해결이라면서도, 서양 연구자들은 돈벌이에 급급하거나 아프리카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배곯아본 난 달랐다. 그들의 아픔을 이해했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었다. 수확량이 기존 카사바의 두 배가 넘는 신품종 카사바의 성공은, 그래서 내겐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연구소 반대를 무릅쓰고 카사바 줄기를 차에 싣고 시장에 가 나눠준 이유다.

 


#세 번째 도전, 한상기 프로젝트


'한상기 박사 연구로 카사바 병 문제가 해결되다.' 나이지리아 식량 혁명의 시작을 알린 나이지리아 데일리 타임스 1면 기사(1976)다. 치명적 바이러스와 박테리아로 생산량이 절반으로 줄었던 카사바를 개량해 나이지리아를 비롯해 아프리카 41개국 식량난 해소에 지금까지 도움을 주고 있다. 그 덕에 영국 기네스 과학공로상(1982), 영국생물학술원(Institute of Biology·영국 생물학회의 전신) 펠로 상(1984), 브라질리아 대학 주최 카사바 학회 공로상(2006) 등을 받았다. 케네디 정부 국방장관을 지낸 로버트 맥나마라 세계은행 총재(1968~81 재임)는 "한 박사의 슈퍼 카사바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땅에 빚을 덜 지게 해주는 신기술"이라 칭송했다.

영예로운 상들보다 더 기뻤던 건 1983년 연구소에서 50㎞ 떨어진 이키레 읍에서 '농민의 왕'(세레키아그베)이라는 칭호를 받고 요루바족 추장으로 추대된 일이다. 내 연구가 연구소 안에 머물지 않고 그들의 삶을 도왔다는 인정을 받아서다.

추앙받는다고 언제까지나 아프리카 왕으로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미국이 나를 키운 것처럼, 나도 아프리카 사람을 키우고 싶었다. 1994년 IITA를 떠나 아이들이 있는 미국에 갈 때까지 23년 동안 위험한 출장을 마다치 않은 건 이런 이유도 있다. 아프리카 비행기는 퇴물이라 언제 추락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기상 정보 입수조차 안 되는 아프리카 공항은 토네이도가 몰려와도 알 길이 없었고, 활주로는 엉망이었다. IITA 직원 3명이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할 정도였다. 그래도 끊임없이 가서 지도했고, 연구소에 데려와 훈련시켰다. 그렇게 키운 게 700여명에 달한다.

그중 잊히지 않는 인물이 자비 들여 만든 ‘한상기상’ 1, 2회 수상자인 르완다의 조지 은다마제 중앙농업시험장장과 조셉 물링다가보 지방농업시험장장, 그리고 시에라리온의 은잘라 농과대학 다니야 학장이다. 은다마제와 물링다가보는 1994년 6월 르완다 내전 당시 온 가족이 폭도들에게 몰살당했다. 시에라리온 내전(1991~2002) 때 값비싼 가재도구는 다 버려두고 슈퍼 카사바만 자동차에 싣고 피난 갈 정도로 그 나라 농업의 미래를 고민했던 다니야 역시 강도에 살해당했다. 르완다와 시에라리온은 이렇게 허무하게 아까운 인재를 잃었다.


하지만 가장 안타까운 건 한국 농업발전에는 아무런 기여를 못 했다는 점이다. 나이지리아 정착 초기부터 가족 전부 흡혈 파리(sand fly)에 물리고 말라리아에 걸리는 등 희생했고 이를 밑거름 삼아 나는 명예를 얻었다. 하지만 20년 넘도록 1년에 얼굴 한 번 본 게 고작인 큰딸의 결혼식엔 아예 못 갔고, 치안이 불안한 타지에서 남편 양말 기워가며 외롭게 가족 뒷바라지한 아내는 2009년 미국에서 치매 증상을 보인 끝에 2013년 귀국 후 2020년 세상을 떠났다. 땅이 꺼지고 세상이 무너지는 거 같았다. 미안한 마음뿐이다. 하지만 더한 후회는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거보다 한국을 돕지 못했다는 점이다. 비록 그땐 아프리카 식량난이 내 조국보다 더 극심해 여기에 인생을 걸었지만 부끄럽고 죄송하다. 내 조국 한국에, 그리고 사랑하는 내 가족에게.

누구를 위한 법치주의인가


                      다산포럼 1199호,   김진균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부위원장)

 


  법으로 다스리자는 법치주의는 근대 입헌 국가의 정치 원리이다. 이상적인 법에 의한 통제는 사회 내의 갈등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비화하지 않도록 막는 안전장치로 작동할 수 있다.

  전근대 조선왕조에서도 법에 의한 통치를 표방하였는데,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조종성헌(祖宗成憲)으로 불리며 왕조차도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규율로 작용하였다. 그렇게 보면 전근대 조선왕조를 국왕 한 사람의 독단으로 움직이는 전제 왕조라고만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왕조에서는 15세기에 완성된 경국대전 체제를 19세기까지도 운용하였으니 법률이 오히려 갈등을 양산하는 장본이 되기도 하였다. 현실의 모든 갈등을 법률로 대비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어떠한 법률도 어느 순간에도 완전할 수가 없는데, 오래될수록 불완전성의 밀도는 더욱 짙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법은 과연 완벽한가

  다산 정약용은 조선왕조의 낡은 법률 질서인 경국대전 체제를 극복해 보고자 『경세유표(經世遺表)』를 저술하였다. 정약용 스스로 “신아구방(新我舊邦)”이라는 개념으로 이 작업의 의미를 설명하였는데, 낡은 우리의 나라를 새롭게 하자는 뜻이다. 그러나 정약용은 개헌과도 같은 새로운 법률 질서 수립의 가능성을 크게 기대하기 어려운 당시의 현실도 곱씹고 있었다. 자신이 죽은 뒤에나 임금께서 살펴보시라는 뜻의 ‘유표(遺表)’가 제목에 들어간 것도 그런 판단의 귀결일 것이다. 정약용은 다시 『목민심서(牧民心書)』를 통해 경국대전 체제 하에서라도 최대한 백성을 보호할 장치를 마련해 보려고 하였다. 『목민심서』의 작업은 현행 법률을 인정한 상태에서 민생을 위한 해석 투쟁이라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경국대전 체제를 인정하는 전제에서 저술했다는 『목민심서』의 곳곳에서 당시의 모순된 현실 체제에 대한 부정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밝히는 수법(守法) 대목에서도 백성을 편하게 할 수만 있다면 다소 법을 넘나들 수도 있다는 과감한 주장을 펼치기도 하고, 갓난아이에게 병역의무를 부과하여 군포를 징수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 대목에서는 이 법이 고쳐지지 않으면 백성이 모두 죽고 말 것이라고 절규하기도 했다. 모순에 대한 분노가, 이따금 해석 투쟁의 경계를 넘어 신아구방의 체제개혁 투쟁으로 비약하는 것이다.

  정약용이 곡산부사로 부임하러 가는 길에 나타난 이계심(李啓心)이란 백성의 경우는 1천여 명의 백성들을 조직하여 전직 사또에게 항의한 전력이 있었다. 일종의 불법시위 주동자로 체포 즉시 처벌될 예정이었는데, 1년 동안의 도피 끝에 신임 사또 정약용 앞에 자수한 것이다. 처벌하자는 아전들의 요구를 물리치고, 정약용은 오히려 시위의 원인이 되었던 폐단을 바로잡을 기회로 삼으며 이계심을 칭찬하였다. 정약용은 법의 원칙을 어긴 것일까?


  법보다 앞서야 하는 것

  법에 의한 통제가 진정한 안전장치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법률이 합리적으로 제정되어 평등하게 적용된다는 신뢰가 축적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제정 과정의 합리성이나 적용 과정의 평등성을 기대할 수 없는 사회라면, 법치주의는 사회적 약자를 괴롭히고 개혁 의지를 꺾는 폭정의 논리가 될 뿐이다. 정약용은 그 폭정의 길을 차마 갈 수 없었던 것이다. 가령 곡산의 아전들처럼 법을 적용하면 이계심은 처벌되고 곡산의 폐단은 바로잡힐 기회를 잃을 것이다. 그랬다, 법의 이름으로 백성들만 처벌되고 세도정권과 탐관오리는 법 위에 군림하며 나라 바로잡을 기회를 놓친 것이 19세기 조선왕조였던 것이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훌륭한 문장을 담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 11조는 평등권에 대한 규정으로서, 특수계급을 설정할 수 없음과 특권을 인정할 수 없음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헌법 11조를 두고 고 노회찬 의원은 “법은 만 명에게만 평등하다.”고 일갈한 바 있다. 입법과 행정과 사법의 3권이 힘을 합쳐, 상속세 회피한 재벌이나 뇌물 받은 검사에게는 따뜻한 햇살을 비추다가, 800원 잔돈 자판기에 넣은 버스기사나 뇌물 검사 명단 폭로한 의원만 골라 불을 뿜는 법치주의라면, 차라리 법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유발하는 부비트랩이다. 한반도 북쪽의 핵무기만 자기파괴적 무기인 것은 아니다.

‘노벨상 산실’ 뚫은 토종 과학자… “망한다는 연구도 밀어붙인 맷집 통했죠” [김윤덕이 만난 사람]
막스플랑크 연구소 첫 한국 단장


차미영 카이스트 전산학부 교수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 첫 한국인 단장으로 선임된 차미영 카이스트 전산학부 교수는 가짜 뉴스를 비롯해 빈곤, 기후변화, 식량 문제 등 인류 공통의 사회 안전망에 관한 연구를 할 것이며, "연구가 너무 재미있어서 월요일 되기만을 기다렸다”라고 밝혔다. 

 


< 조선일보, 김윤덕 기자,  2024.02.26.>

 


대통령의 독일·덴마크 순방이 취소된 덕에 차미영 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대통령이 참석할 예정이던 독일 레오폴디나 한림원 행사에 동행하기로 돼 있었다. 빅데이터와 AI를 기반으로 가짜 뉴스, 기후변화, 식량 문제 등 지구촌 공동의 이슈를 분석해온 차 교수는, 최근 세계적 권위의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 첫 한국인 단장에 선임돼 화제가 됐다. 빽빽한 일정에 3월 이후에나 볼 수 있겠다던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아인슈타인 배출한 노벨 사관학교


-막스플랑크 연구소는 어떤 곳인가?

“한마디로 ‘공룡’이다. 독일 전역에 86개 연구소, 2만4000명의 연구원과 직원을 둔 세계 최고의 기초과학 연구 빅텐트다. 총재 밑에 300명의 연구단장이 있고 그중 한 명이 됐다.”

-노벨상 사관학교라던데.

“아인슈타인, 막스 플랑크를 비롯해 노벨상 수상자가 30명이 넘는다. 노벨상 말고도 각 분야 최고 연구자들이 모인 곳이라 단장 회의에 참석하면 굉장할 것 같다(웃음).”

-’보안 및 정보보호연구소’의 단장이라고 들었다.

“그중에서도 ‘인류를 위한 데이터과학 연구그룹’을 이끈다. 가짜 뉴스를 비롯해 빈곤, 기후변화, 식량 문제 등 인류 공통의 사회 안전망에 관한 연구를 할 것이다.”

-단장직에 ‘지원’한 게 아니고 ‘초대’받았다고 하더라.

“작년 겨울 막스플랑크 연구소에서 심포지엄이 있었다. 내가 카이스트와 기초과학연구원(IBS)에서 진행해온 연구에 대해 주제 발표를 했는데, 타 분야 연구단장들까지 다 와서 듣더라. 나중에 알고 보니 일종의 면접이었다.”

-후보군에 하버드대, 옥스퍼드대 학자들도 있었다던데.

“다양성(diversity)을 위해 아시아 학자인 내가 우선순위가 된 게 아닐까(웃음). 나의 도전적이고 초긍정적인 리더십이 좋은 인상을 줬다고 하더라. 우리 팀은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연구도 과감히 추진해왔다.”

-오는 6월 임기가 시작되면 카이스트 교수직은 그만두나.

“카이스트에서 겸직할 수 있는 파격 대우를 해주셨다. 학생으로 입학해 교수 생활까지 24년을 몸담은 카이스트를 떠나야 했다면 몹시 슬펐을 것이다.”

-연봉도 파격적인가?

“돈 때문이라면 한국에 남거나 실리콘밸리로 가야지(웃음). 100년 전통의 막스플랑크엔 연구의 독립성을 지켜주는 ‘하르나크 원칙’이 있다. 단장에게 연구 예산과 인사권을 일임한다. 당장 성과가 나오지 않아도 믿고 기다려준다. 전통, 관습의 폐해가 있을 거라는 상식을 깨뜨리는 곳이다.”

 


◇백만 팔로어의 오류


-차미영 연구팀은 ‘액셔너블한 기초과학’을 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우리 연구의 주제는 사회 현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논문이나 이론으로만 남아 있지 않고 사회에 직접 파급력을 갖는 연구를 하려고 한다. 사회과학자들, 그리고 유엔 등 세계 기구들과 협업하는 이유다.”

-2008년 소셜미디어에 관한 연구를 일찌감치 시작했더라.

“그때만 해도 얼리 어답터들만 이용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용자가 가파르게 증가했다. 스스로 수집한 정보를 자발적으로 공유하고 전파하는 혁신적인 미디어였다. 대세가 될 거란 확신이 왔다.”

-17억개 트위터를 분석한 논문 ‘백만 팔로어의 오류’는 4000회 가까이 인용될 만큼 반향이 컸다.

“2008년 막스플랑크 연구소 박사후 연구원(포닥)으로 있을 때 서버 50대로 수집한 네트워크를 분석한 연구다. 단순히 팔로어(follower)가 많다고 해서 메시지 전파력이나 사회적 영향력이 큰 건 아니라는 결과를 데이터로 증명했다.”

-소셜미디어를 연구하다 가짜 뉴스로 관심이 옮겨간 건가.

“트위터가 나온 첫 3년 동안의 데이터를 들여다보니 가짜 뉴스가 굉장히 많이 보였다. 양질의 정보가 많은데 왜 사람들은 가짜 뉴스를 퍼뜨리지?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사람을 왜 계속 팔로(follow)하지? 그런 궁금증에 연구를 시작했다.”

-가짜 뉴스의 특징을 밝히기도 했다.

“일반 정보는 초반에 확 읽히고 사라지는데 가짜 뉴스는 파도처럼 정점을 오르내리길 반복한다. ‘어디서 들은 건데’처럼 확실하지 않은 표현이 많고, 낚시성 제목과 본문이 불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건 초창기 가짜 뉴스에 해당하는 특징이다. 요즘은 딥페이크 등 개인이 판별하기 어려운 가짜 뉴스가 쏟아져온다. 사용자가 챗GPT와 직접 대화하면서 정보를 얻는 등 유통 경로도 바뀌고 있다. 오픈AI가 최근 발표한 영상 생성 AI 소라(Sora)는 내게도 충격적이었다. 텍스트를 주면 짧은 영상을 뚝딱 만들어낸다. 가짜 뉴스는 이제 새로운 게임이 됐다.”

-대책이 별로 없다는 뜻인가?

“AI 기술이 너무 빨리 발전하고 정보가 산발적으로 퍼지기 때문에 중앙의 컨트롤은 거의 불가능하다. 뒤따라가면서 규제하고 안전장치를 만드는 수밖에 없다. 진짜 문제는 우리나라의 가짜 뉴스 처벌이 너무 약하다는 것이다. 가짜 뉴스 자체에 대한 처벌은 없고 명예훼손죄로 몇백만원 벌금 내는 정도다.”

-올해 선거를 치르는 나라가 많다.

“어떤 형태로든 대형 사고가 날 텐데 우리나라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실패, 두렵지 않다


-가짜 뉴스 범람에 네이버, 유튜브, 페이스북 같은 플랫폼의 책임이 적지 않다.

“미 대선 기간이던 2016년, 페이스북으로 연구년을 다녀왔다. 플랫폼이 왜 가짜 뉴스를 안 막는지 비난받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플랫폼이 어떤 정보가 가짜 같아서 가리거나 삭제하면 사용자로부터 고소가 들어온다. 일일이 검증하기도 힘들다. 플랫폼이 할 수 있는 일은, 양질의 콘텐츠를 위로 올려 가짜 뉴스를 후순위로 밀리게 하는 것뿐이다.”

-소셜 네트워크의 폐해가 많지만 행복을 도모하는 데 도움이 될 가능성도 있다고 했더라.

“지금의 알고리즘들은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고 사용자를 더 오래 잡아두느냐에 사용되고 있다. 이와 반대로 나를 더 많이 웃게 해주고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쪽으로 알고리즘을 개발할 수도 있다. 가까운 친구보다도 플랫폼이 노출하는 콘텐츠의 영향이 더 큰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플랫폼들은 사용자의 삶을 보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유엔 등 세계기구와의 협업도 많았다던데.

“세계관세기구에 탈세범 잡는 알고리즘을 제공해 개발도상국들이 탈세를 막고 제대로 세수를 거둘 수 있게 도와줬다. 유엔개발계획(UNDP)과 함께 인도네시아의 물가지수를 샘플링해 가짜 물가를 잡는 작업도 했다.”

-데이터 과학이 개도국이나 후진국들에 더 필요하다고 했더라.

“빈곤, 환경오염, 식량 문제의 해법을 모색하는 데 데이터 과학이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위성 영상을 보면 어느 지역이 빈곤한지, 어느 지역에 쓰레기가 쌓이고, 인구가 밀집해 있는지 다 보인다. 문제는 디지털화가 안 된 개도국에는 이런 기술과 알고리즘을 제공해도 사용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괴리를 줄여나가는 것이 과제다.”

 


◇몰입과 공상 좋아하던 아이


-과학자가 된 건 물리학자였던 아버지 영향일까.

“난 좀 별스러웠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음악을 들으면 눈앞에 꽃잎이 막 떨어지고, 눈을 감으면 별이 가득한 우주가 펼쳐졌다(웃음). 몰입과 공상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춘천에서의 성장기는 어땠나.

“호수와 안개 속에서 자랐다. 소설가 오정희 선생님과 같은 아파트인 데다 딸이 나와 동갑이라 맨날 놀러 갔다. 그 집에는 언제나 클래식 음악이 흘렀다.”

-천문학을 하려다 카이스트엔 없어 전산학을 공부했다던데.

“전산도 재미있었다. 요즘엔 데이터가 전산에만 있는 게 아니어서 어느 분야에 갔어도 재미있는 걸 찾아 연구했을 거다.”

-’로봇의 인권’도 연구 주제더라.

“나와 함께 막스플랑크 연구소로 가는 우리 팀은 다국적 연구원들로 구성돼 있다. 지난 5년간 20국에서 130명의 인턴을 채용했다. 다양한 경험을 가진 인재들에게서 다양한 아이디어와 창의가 나온다. 미래의 이슈로 떠오를 ‘로봇의 인권’을 연구해보자는 아이디어도 그렇게 나왔다. 트럼프가 집권해서 좋을 딱 한 가지는 미국으로 흡수될 우수한 과학 인재들이 카이스트로 올 수 있다는 점이다(웃음).”

-여성이라 차별받은 적은 없나.

“당시엔 남고, 남자 대학이나 다름없는 과학고와 카이스트에서 ‘빡세게’ 공부만 하고 살아선지 차별 같은 건 인지할 틈이 없었다(웃음). 지금은 여학생 수가 많아져서 정말 좋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남편, 양가 부모님, 베이비 시터 등 모든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았다. 연구가 너무 재미있어서 월요일 되기만을 기다렸다(웃음).”

-후배들에게 회의할 때 뒷자리에 앉지 말라고 했더라.

“초대받은 회의라면 나만의 목소리를 내고 와야 한다. 어디서든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돼야 한다. 하다못해 행사가 있으면 총장님 옆에 서는 게 좋다(웃음).”

-직업병은 없나?

“병이 아니라 혜택! 소셜미디어에 중독되지 않는 나만의 방법을 터득했다. 페이스북이든 유튜브든 네이버든 필요할 때 사용하고 바로 앱을 지워버린다. 다시 깔기 귀찮아서라도 안 본다(웃음).”

-외모며 말투가 과학자 같지 않다는 말도 들을 것 같다.

“결핍 때문일 거다. 공부만 하는 바람에 10대, 20대에 누려야 할 낭만이 없었다. 그래서 석·박사 과정 때 꽃무늬 원피스만 입고 다니고, 여성 잡지를 한 달에 다섯 권씩 구독했다(웃음).”

-여성은 수학, 과학에 약하다는 편견에 대해.

“남녀는 선천적으로 다른 생물이 아니다. 다만 지금은 여러 가지 융합 능력이 필요한 시대고 100세까지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인문적 소양과 예술적 감성도 함께 키워야 한다. 아, 경제도 좀 일찍 가르쳐달라. 내가 펀드와 재테크는 완전 무지하다, 하하!”

 


☞차미영

1979년 대전에서 태어나 춘천에서 자랐다. 강원과학고를 졸업한 뒤 카이스트 전산학부에 입학, 카이스트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부터 2년간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근무했고, 2010년 카이스트 교수로 임용됐다. 5년간 기초과학연구원(IBS) 데이터 사이언스그룹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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