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필 “철창 속 아들이 날 변화시켜… 정치할 때보다 행복하다”
마약 퇴치 운동 나선 남경필


 

< 조선일보, 김윤덕 기자,  2024.01.15.  >

 


아들이 2년 6개월 형을 확정받았지만 남경필의 얼굴은 밝았다. "비록 감옥에서지만 치료를 제대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청년들과 함께하는 스타트업 수익의 일부도 마약 퇴치 운동에 쓰겠다고 했다. 


남경필 전 경기지사를 만난 건 지난달 20일, 장남 주성씨가 마약 투약으로 징역 2년 6개월 형을 확정받은 날이다. 결코 짧은 형기가 아닌데도 아버지 남경필은 “감사하다”고 했다. “이제 사회에서 격리돼 제대로 치료받게 됐으니까요. 아들과 저희 가족이 너무도 원했던 일입니다.” 인터뷰 중 몇 차례 전화가 걸려 왔지만 받지 않았다. “정치권에서 오는 전화는 안 받는다”고 했다. 그는 “정치할 때보다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고 했다.

 


◇아들을 112에 신고한 이유


-항소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는데 기뻐하더라.

“마약은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힘들다. 자신의 의지로는 끊을 수가 없다. 제 아들도 끊었다 다시 손대기를 반복했다. 이걸 끊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 공권력이다. 일단 사회에서 격리돼야만 치료받을 길도 열린다.”

-아들을 제발 구속시켜 달라고 탄원했던데.

“마약을 공급하고 운반하는 중대 범죄와 달리 단순 마약 투약범은 구속영장이 거의 기각된다. 재판을 받아도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경우가 많다. 자기 몸을 해쳤을 뿐 타인에겐 해를 끼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집으로 돌아와 마약에 다시 손을 댄다. 우리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감옥에서 치료도 받을 수 있게 된 건가.

“현재 안양교도소에 수감돼 있는데 곧 치료감호소가 있는 공주교도소로 옮겨간다. 검사가 치료감호를 청구해줬고 판사가 이를 받아들였다. 정말 감사하다.”

-오늘 재판장에서 아들을 만났겠다.

“피고석의 아들과 눈이 마주쳐서 웃어줬다. 얼굴이 맑았다. 구속된 뒤로 마약을 안 했으니 당연히(웃음). 하루빨리 공주로 호송돼 치료가 시작됐으면 좋겠다.”

-면회 가도 아들을 안아줄 수 없어 안타깝다고 했더라.

“매주 보지만 면회실이 철창으로 막혀 있어 안아줄 순 없다. 대신 사랑한다고, 보고 싶었다고, 넌 잘해낼 거라고 말해준다. 아들이 속으로 ‘야단만 치고 화만 내던 우리 꼰대가 달라졌네?’ 했을 것이다(웃음).”

 


◇변호사도 선임하지 않았다


-경기지사였던 2017년에 처음 장남의 마약 투약 사건이 터졌다.

“독일 출장 중 듣고 급히 귀국했다. 너무 충격적이라 비행기에선 화가 났는데 막상 유치장에 있는 아들을 보자 불쌍하더라. 정치 한다는 핑계로 아이와 제대로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다.”

-당시 집행유예로 풀려났는데 또다시 마약을 투약했다.

“그때의 충격이 더 컸다. 끊은 줄 알았는데 숨어서 몰래 했던 거다. 다시는 안 하겠다고 약속한 아들이었다. 신뢰가 깨지고 지옥의 시간이 시작됐다. 아이를 의심하고, 야단치고, 핍박하고. 분노가 폭언이 되어 나왔다.”

-그래서 또다시 마약을 했을 때 자수하게 한 건가.

“마약을 끊으려면 사회에서 격리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아들과 함께 증거물을 가지고 경찰서로 갔다. 모발·소변도 채취해서 제출했다. 그런데 일단 집에 가 있으라고 하더라. 그 사이 아들이 또 손을 댔다. 이번에도 증거물을 가지고 가서 자수하게 했다. 또 집으로 돌려보내더라. 안 되겠다 싶어 아들을 보호자가 동의해야 나올 수 있는 폐쇄 병동에 입원시켰다. “

-그런데 어떻게 다시 마약을 투약한 건가.

“아들을 병원에 입원시키고 나는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떠났다. 지난해 3월이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전화를 했다. 형이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왔다고. 병원에 수두가 돌았는데 형이 감염돼 퇴원 조치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다음은 예상한 대로다. 또다시 마약에 손을 댔다.”

-이번엔 구속이 됐다.

“자수는 소용이 없어 아들을 신고했다. 당시 기사엔 ‘검거됐다’고 나오는데 내가 112를 눌러 신고하고 증거물을 가지고 함께 경찰서로 갔다. 신고인도 경찰 조사를 받는데, 저희가 바라는 건 오직 사회에서의 격리라고 간청했다. 변호사도 선임하지 않았다. 그러자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마약청은 왜 필요한가


-아들은 왜 마약에 손을 댔을까.

“결핍 아니었을까. 영적(靈的), 정신적 결핍.”

-어느 인터뷰에 보니 ‘내가 과거에 지은 죄 때문 아닌가’ 자책 했더라.

“정치하는 아버지를 둬서 그런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른 나이에 유학을 보낸 것도 후회했다. 정치인 아버지의 지역구에 있는 초등학교·중학교에 다니니 두 아들이 무척 힘들어했다. ‘너네 아빠 나쁜 사람이래’ 하는 말에 친구들과 싸우고 돌아오기도 하고. 그래서 유학을 보냈는데….”

-부모의 이혼도 영향을 미쳤을까.

“얘기는 안 하지만, 상처도 받았겠지. 그런데 전처의 이혼 사유가 정치인의 아내로는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것이어서 아이들도 엄마를 자유롭게 살게 해주자는 데 동의했다. ‘그동안 살아줘서 고마웠다’고 서로 맞절하며 헤어졌다.”

-마약이 우리 일상에 아주 가까이 와 있다고 했더라. 친인척 중 한 사람은 마약을 할 거라고도 했다.

“텔레그램 문자 한 통으로 손쉽게 마약을 구할 수 있는 시대다. 척추로 올라가는 신경을 마비시키는 펜타닐처럼 온갖 화학물질을 섞어 더 강력하고, 더 값싼 마약들이 나오고 있다. 가족이 알게 되는 시점은 사회생활이 안 될 만큼 이미 중독된 상태다. 카드빚 독촉장이 날아올 때쯤 알게 되면 상당히 늦은 상황이다.”

-중독성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 걸까.

“마약은 뇌를 자극하고 변형시킨다고 한다. 일단 끊어도 뇌가 기억하고 있어 유혹에 쉽게 굴복당한다. 손가락질이 두려워 가족도 쉬쉬하고, 치료받을 병원도 전국에 한두곳밖에 없다. 마약 상담 기관이 있지만 재정적으로 열악하고 법적 지위도 없다.”

-국가와 교회, 사회 공동체가 나서야 한다고 했다.

“우리도 별짓 다 해봤다. 의사도 만나고, 치료 기관에도 들어가보고, 아이 데리고 산속 기도원에도 가봤다. 그때뿐이다. 잠시 한눈파는 사이 다시 손을 댄다. 마약에 취한 아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내 아들이 아니다. 내가 알던 착하고 똑똑한 아이가 아니었다. 혼자 힘으로는 그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대통령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마약청 설립 얘기도 나온다.

“마약 퇴치는 국가적 어젠다다. 바이든·시진핑 회담의 세 번째 어젠다도 마약이었다. 바이든이 시진핑에게 펜타닐 원료 수출을 단속해 달라 요구했다. 미국의 20~40대 사망 원인 1위가 펜타닐이다. 이 펜타닐이 우리 사회에도 퍼지면 걷잡을 수 없다. 아직 티핑 포인트는 아니라 지금이라도 컨트롤타워를 세워 이를 잡아야 한다. 마약청이 절실한 이유다. 현재 복지부, 식약처 주무관급 업무인 마약을 가져와 검찰·경찰·외교부가 협업하게 해야 한다. 이건 정쟁거리가 될 수 없다.”

 


◇사랑이 변화시킨다


-2018년 경기 지사에 낙선한 이듬해 정계를 은퇴했다. 아들 영향도 있을까.

“낙선하니 아들이 ‘저 때문에 떨어진 거 아니냐’며 미안해하더라. 가슴이 아팠다. 하필 ‘남경필 아들’이라 지은 죄보다 욕은 천배만배로 들은 아이다. 그렇다고 아들 때문에 정치를 그만둔 건 아니다.”

-정치를 그만두기엔 이른 나이였다.

“도지사 시절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연정을 배우겠다고 경기도에 왔다. 내가 야당인 강득구 의원을 부지사로 앉히고 예산권과 인사권을 나눠주며 연정을 실행한 것에 감동하더라. 그런데 이분이 대통령 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적폐 청산이었다. 청산과 보복의 악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증오와 팬덤의 정치로 치닫는 정치판에서 내 역할은 없다고 생각했다. 국회의원을 다섯 번 했는데 의원 배지를 한 번 더 다는 게 무슨 소용 있나. 내 꿈은 대한민국의 마지막 대통령으로 개헌을 단행한 뒤 내각제로 가는 징검다리가 되겠다는 거였는데, 그런 날은 오지 않겠다 싶어 미련없이 떠났다.”

-청년들과 스타트업을 하더라.

“경기지사 때 스스로를 ‘일자리 도지사’로 명명했다. 판교에 가면 지금도 내가 만든 스타트업 캠퍼스가 남아 있다. 열정과 비즈니스 모델은 있지만 돈과 네트워크가 없는 청년 창업가들을 돕기 위해 만들었는데, 그 일을 이제 개인적으로 하게 된 것이다.”

-스타트업 수익의 일부를 마약 퇴치 운동에 쓴다고 들었다.

“지난 3월 성지순례 때 아들의 마약 소식을 듣고 내가 믿는 하나님을 원망했다. 대체 나더러 어떡하라는 거냐, 몸부림치며 소리소리 질렀다. 그때 하나님 음성을 들었다. ‘아들은 내게 맡기고 너는 다른 아이들, 마약으로 영혼이 말라가는 아이들을 살려라.’ 마약 퇴치 운동에 뛰어든 이유다.”

-함께하는 분이 많다고.

“배우 차인표씨가 제일 먼저 연락해왔다. 연예계도 마약 문제가 심각한데 같이 힘을 합해 이들을 구원해보자고. KG그룹 곽재선 회장도 전화하셨다. 우리 아들은 마약을 하지 않지만 나중에 손주들이 여럿 생기면 그중 누군가가 안 하리란 보장이 없을 테니 뭐든 돕겠다고. 오륜교회 김은호 목사님은 마약중독자를 구제해온 다르크 공동체가 재정난으로 폐쇄 위기에 처하자 이를 돕겠다고 손을 내미셨다. 마약 치료 전문가인 조성남 국립법무병원 원장님도 함께하신다. 신애라씨가 시작한 ‘야나’ 재단을 벤치마킹해 운동본부를 꾸릴 것이다.”

-아들 주성씨가 법정에서 ‘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가족에게 감사한다’고, ‘출소하면 아빠를 도와 마약 치유 운동가로 살겠다’고 했더라.

“나도 놀랐다. 내게 그런 얘길 한 적이 없어서. 실은 아이를 통해 내가 가장 많이 변했다. 잔소리하고 야단만 치던 아빠에서 다정하고 친구 같은 아빠로. 이번 일로 확실하게 깨달은 건, 변화는 사랑이 시킨다는 것이다. 야단은 나의 분함을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정치할 때보다 행복한가?

“행복하다. 요즘은 붕붕 날아다닌다, 하하!”


 


☞남경필

1965년 경기 용인 출생. 경복고, 연세대 사회사업학과를 졸업한 뒤 예일대에서 MBA를, 뉴욕대 대학원에서 행정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부친인 남평우 의원 사망으로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33세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5선을 했다. 2014년 경기도 지사에 당선됐지만 2018년 연임에 실패한 뒤 이듬해 정계를 은퇴했다. J&KP 홀딩스 대표로 청년들과 스타트업을 하고 있다.

시각장애 의원의 분투 “정치 들러리로 남지 않으려는 4년이었다”
여야 모두 극찬한 ‘여의도 활동記’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 에세이 출간

< 조선일보, 양지혜 기자, 2024.01.15. >

 


“지난 4년간 ‘여의도 들러리’로 남지 않으려고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많은 분이 저를 ‘어항’ 속에 가두려할 때, 어떻게 그걸 깨고 헤쳐 나왔는지 진솔하게 썼습니다.”

피아니스트 출신으로 첫 여성 시각장애인 의원인 김예지(44) 국민의힘 의원이 여의도 활동기를 다룬 책 ‘(어항)을 깨고, 바다로 간다’를 최근 출간했다. 오는 4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인들의 출간 소식이 여의도에 홍수처럼 쏟아지는데 그의 책은 여야 진영을 막론하고 호평을 받는다. 신당 ‘새로운선택’의 곽대중 대변인은 페이스북에 “책장마다 감동하고 감탄했다. 예의상 건네는 말이 아니라 정치인 에세이 중에 최고”라며 “각자의 앞을 가로막은 차별·혐오·가난 등의 장벽을 넘어 우리는 바다로 나아갈 것”이라고 했다.

21대 총선에서 미래한국당 1호 인재로 영입돼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김 의원은 당 최고위원을 거쳐 최근 출범한 ‘한동훈 비대위’ 위원까지 맡고 있다. 장애인 의원으로서는 이례적인 활약이다. 그는 “처음 비례대표 제의를 받았을 때, 당 관계자들은 ‘당신이 안내견과 국회를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큰일을 하는 것’이라며 생색내기용 4년짜리 들러리로 저를 영입하려는 뜻을 숨기지 않았다”면서 “장애인에게 별 기대가 없는 그 무관심의 어항부터 깨부수고 싶었다”고 했다.

김 의원은 책에서 ‘내게는 불빛이 필요 없지만, 어두운 밤이면 여러분을 위해 불을 켜드릴 것이다. 여러분은 저 뒤편 어항 구석에 남아서 웅크리고 있는 ‘코이’가 있는지 확인해 주시길 부탁드린다’고 했다. 그는 작년 6월 국회 대정부질문 때 ‘코이의 법칙’을 언급해 화제가 됐다. 작은 어항 속에서는 10cm 미만으로 자라지만, 강물에서는 1m 넘게 자라나는 물고기 ‘코이’를 예로 들면서 “사회적 약자들이 어항을 깨고 기회의 균등 속에서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정부가 강물이 되어주시기를 기대한다”고 해 여야 의원들의 기립 박수를 받았다. 그의 ‘어항’ 경험담을 집대성한 게 이번 책이다.

김 의원은 장애인 의원들이 으레 선택하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가 아닌 문화체육관광위에서 활동했다. 대표 발의 법안 169건, 공동 발의 법안 1381건으로 총 1550건의 법안을 제출(작년 12월 가준)해 21대 국회의원 300명 중 일곱째로 많은 법안을 발의했다. 그는 “유엔 장애인권리협약 선택의정서를 비준시켜 국내에서 장애인 권리 구제가 안 될 경우 유엔에 직권조사를 신청할 수 있게 된 것과, 의약품·식품 등에도 점자 표기를 하도록 개정안을 통과시킨 일 등이 가장 보람찬 활동”이라며 “여성 장애 예술인 국회의원으로서 여의도는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어항들이 모여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라고 느꼈다”고 했다. 이어 “앞을 볼 수 없기에 정확한 언어로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훈련을 평생 해왔는데, 정치야말로 ‘언어의 예술’이 될 수 있는 영역”이라고 했다.

김 의원은 숙명여대 피아노과 일반 전형 수석 입학에 미국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피아니스트다. 또 전국 장애인 동계 체육 대회 메달리스트(크로스컨트리·바이애슬론)이며, 시각장애인을 위한 형태 입체 악보로 특허를 딴 개발자이고, 조향(調香) 관련 창업에 뛰어드는 등 다양한 ‘어항 깨기’ 이력을 자랑한다. “봉사(시각장애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가 하는 봉사가 참봉사”라고 스스럼없이 농담하는 유머 감각까지 갖췄다.

요즘 그가 천착하는 과제는 ‘격차 해소’다. 단순히 장애·비장애의 격차 해소뿐만아니라 소득 격차, 지역 격차 등 우리 사회의 많은 격차를 해소할 방안을 모색한다. 김 의원이 이번 비대위에 참여한 이유도 한동훈 위원장이 “격차 해소에 힘을 보태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그는 “갈수록 양극화되는 여야 정치 지형 속에서 ‘약자와의 동행’이라는 중심을 놓지 않으려 노력했고, 그 일환으로 이태원 참사 1주기 추모식 참석 및 사과 등을 했다”고 설명했다.

“작곡가 슈만에게 아내 클라라가 전부였던 것처럼, 의원에겐 국민이 전부여야 합니다. 우리 당의 클라라이자 함께 어항을 깨고 바다로 나갈 ‘동료 코이들’인 국민 여러분을 위해, 임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소속 : 국민의힘(비례대표)
학력 : 위스콘신대학교 메디슨캠퍼스 대학원 피아노 연주 교수법 박사
수상 : 2020년 국민의힘 국정감사 우수의원상
경력 :
2023.10~ 국민의힘 최고위원
2020.09~ 제21대 국회의원 (비례대표/국민의힘)
2020.07~ 제21대 국회 전반기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

“文은 날 만나지 않았고, 尹은 내게 ‘선생이 돼 달라’ 했다”
 
2015년에 과거사 사죄했던 하토야마 유키오 前 일본 총리

 

< 조선일보, 김아진 기자,  2024.01.13. >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의 별명은 ‘우주인’ ‘외계인’이다. 현실보다는 이상을 따르는 정치를 한다고 해서 붙었다. 일본의 과거사에 대해 “피해자가 그만하면 됐다고 할 때까지 사과해야 한다”고 한 그는 “2015년 서대문형무소에서 무릎 꿇은 것도 솔직한 마음의 표현이라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진심이었다. 일본 정치인 여럿이 과거에 대해 사과했지만 그가 꿇은 무릎은 또 다른 울림을 줬다. “일본의 전 총리로서, 한 일본인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2015년 8월 12일 서울 서대문형무소를 찾은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77) 전 총리는 한 시간 가까이 머물며 신발을 벗고 큰절을 올렸다. 11차례 고개를 숙였다. 그는 지금도 “피해자가 그만하면 됐다고 할 때까지 더 사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 극단의 세력은 “일본은 사과하지 않았다”며 언제든 반일 감정을 부추길 준비를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최근 비공개 일정으로 우리나라를 찾은 하토야마 전 총리를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8년 전으로 돌아가도 똑같이 무릎을 꿇었을 겁니다. 일본에서 비판을 많이 받았지만 그게 제 솔직한 마음이었으니까요. 후회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우리나라를 향한 하토야마의 진심은 그의 배경이나 정치 이력을 보면 더 와 닿는다. 유약하다는 평가와 달리 생각한 대로 행동하고 마음먹으면 결단해 왔다. 일본의 케네디가, 최고 명문가로 꼽히는 ‘하토야마 가문’의 장손인 그는 1986년 집안의 정치 성향에 따라 자민당 간판으로 국회에 진출했다. 고조부, 증조부, 조부, 부친까지 보수 지형에서 화려한 정치력을 가졌기에 당연한 길로 여겨졌다. 어머니는 일본 재벌 ‘브리지스톤 타이어’ 창업자의 장녀다. 정계 입문 시기 “피는 못 속인다”는 혹독한 평가가 있었던 이유다.

하토야마는 무난한 길을 포기했다. 뿌리 깊은 기득권에 맞선 정치 개혁을 이루겠다는 꿈을 밝히며 93년 자민당을 탈당한 것. 96년 민주당을 창당한 후엔 엄청난 비난을 듣고 정치적 고난을 겪었다. 하지만 흩어져 있던 야당과 합당하려고 생각이 다른 세력도 껴안는 결단도 보였다. 2009년, 54년 만에 정권 교체를 이뤄냈다. 정책 혼선 등의 책임을 지고 8개월 만에 사퇴해 단명한 정권이라는 오명을 남겼지만. “정치를 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한일 관계 개선, 나아가 세계 평화를 위한 작은 노력 역시 정치를 하지 않았다면 못 했죠.”

 


◇국가를 대신한 사과였다


하토야마는 일본 내 몇 안 되는 지한파 정치인이다. 작년에만 비공개로 우리나라를 세 차례 방문했다. 오래 가깝게 지내온 민주당 이낙연 전 대표, 정대철 상임고문 등과 만나 정세를 논의하기도 했고, 이번 방문 때는 이명박 전 대통령을 만나 “우리가 각각 총리와 대통령이던 시절 한일 관계가 최고였다”고 술회했다. 그는 이날도 일본의 사죄와 반성을 요구했다. 유관순 이름을 한국어로 또박또박 말했다. 서대문형무소를 찾은 직후 “나를 맞이하는 데 쓴 화환 비용은 내가 내겠다”며 3만엔(약 30만원)을 건넨 데서도 진정성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럴까. 최근 일본 한 연구소의 2001년 이후 취임한 일본 총리 9명 호감도 조사에서 그는 꼴찌를 기록했다. 애국심 때문에 정치를 시작했다는 그는 꿋꿋하게 갈 길을 가겠다고 했다.

-이번엔 어떤 일로 방한했나요.

“저에 대한 이야기를 엮어 출간하고 싶다는 작가가 있어서 그 취재에 응하려고 왔어요. 감사한 일이죠. 지난 9월에 명예 박사를 준 전주대 쪽에도 협업 제안을 하려고 왔습니다.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일이에요.”

-서대문형무소를 찾은 지 벌써 8년이 지났습니다.

“시간이 참 빠릅니다.”

-그때 어떤 감정이었나요.

“한국 국민에게 식민 지배로 너무 큰 고통을 드린 것, 힘든 경험을 남긴 것을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식민지 해방이라는 일념 하나로 노력한 열사들을 고문하고 목숨까지 앗아가는 일이 있었잖아요. 일본인으로서 사과하고 싶었습니다.”

-무릎까지 꿇었는데요.

“죄송하다는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싶었어요. 저도 충분히 배우지 못한 사람입니다. 살면서 혹시나 무의식 중으로 해왔을 잘못, 그에 대해서도 사과하자는 마음이었죠.”

-그 직후 일본에서 비판이 거셌죠. 후회는 없었나요?

“솔직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었기 때문에 후회도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일본에 돌아가니 여러 가지 비판이 휘몰아치기는 했습니다만 누가 맞냐, 틀리냐고 했을 때 저는 자신이 있었어요. 저의 행동을 이해해주는 분도 있었고요.”

-쉽지 않은 결정이었죠?

“(침묵) 저뿐 아니라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가 1995년에 사죄를 표명하는 등 여럿 있었죠. 또 고노 담화로 알려져 있는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중의원 의장도 했고요.”

-사과 후 왜 욕을 먹었다고 생각하나요?

“많은 일본 정치인, 특히 보수 계열에선 이미 1965년에 한일 관계는 과거사에 대해 종지부를 찍었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니 과거를 묻지 마라, 이런 입장이죠. 지금 일본 정부 생각도 비슷하고요. 그때 사과를 표명했으니 더 이상은 필요 없다는 거죠. 그건 잘못됐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요?

“기본 조약으로 해결됐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개인 청구권은 현 국제법상 당연히 인정돼야 하는 흐름으로 인식되고 있어요.”

-그래서 계속 사과하는 건가요?

“국가 차원에서 한국이나 중국에 사죄하는 것을 좀 꺼린다면 저라도 해야죠.”

 


◇尹의 한일 관계 개선 노력에 감사


하토야마는 정치 성향과 지향점에서 우리나라 민주당 인사들과 같은 길을 걷고 있지만, 오히려 윤석열 대통령을 더 격의 없고 가깝게 느껴지는 대통령으로 평가했다. 한일 관계 개선에 강한 의지를 보인 윤 대통령은 2022년 취임식에 하토야마를 초청해 “선생님이 돼 달라”고 했다. 하토야마는 한일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던 문재인 정부 시절, 문 전 대통령과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아마도 바쁘셨던 것 같다”는 말로 서운함을 대신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선생님이 돼 달라’고 했는데요.

“2022년 대통령 취임식 전날 만난 자리에서요.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무슨 대통령의 스승이 될 수 있겠느냐고 했습니다(웃음).”

-뭐라고 답했나요?

“한일 간의 역사, 그 자체가 스승이 되어 줄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 역사를 양국 간에 배우고, 그 과정에서 깨닫는 게 있다면 그게 바로 큰 스승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요.”

-윤 대통령과 만난 일은 어땠나요.

“격의 없이 허물없이 만난 첫 대통령이었습니다. 한일 관계 개선에 대한 강한 의욕, 의지 이런 것이 느껴졌죠.”

-언제 술 한잔 하자고 안 하던가요?

“하하. 그런 제안은 받은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이미 한잔 했습니다. 취임식 이후 축하 파티가 있었는데요. 대통령도 얼굴이 붉어지시더라고요. 그때 어깨동무도 하고 사진도 찍었습니다. 굉장히 가까워졌다는 감정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윤 대통령은 가까워지기 쉬운 자민당 체질 정치인 같습니다.(웃음)”

-과거엔 어땠나요?

“이번에 한국에 와서 이명박 전 대통령과도 만났는데요. 그때가 한일 관계가 가장 좋았던 시절 같아요. 이 전 대통령과도 그런 대화를 나눴어요. 오랜만에 옛날 일을 회상했네요.”

-이념·정책 면에선 민주당과 더 가깝지 않은가요?

“정책적으로 뭐 가깝다 멀다 이런 것을 차치하더라도 일단 문 대통령은 사실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먼저 만나자는 제안이 있었다면 한일 관계에 대한 제 의견을 꼭 전하고 싶었고요.”

-왜 그랬을까요.

“글쎄요. 생각하는 게 비슷했을 텐데 그런 기회가 없었다는 게 좀 아쉬웠죠. 여러 사안으로 많이 바빴던 것 같아요. 정말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윤 대통령과는 대통령 취임 전날 만났다는 게 의미 있고 그래서 좀 더 가깝게 느껴지고요.”

 
◇한일, 근본 문제 해결이 절실해


하토야마는 악화일로를 걷던 한일 관계가 윤석열 정부 들어 개선된 데 “감사한 마음”이라고 했다. “한일 관계가 좋아지더라도 그것이 미국과 합심해 중국을 적으로 돌리는 관계가 되면 안 돼요. 한일 관계 개선이 미·중 긴장 관계를 해소하는 계기가 되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 방향으로 협력할 수 있다면 세계가 평화로 크게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이전 정부에서 한 번도 못 한 한일 정상회담도 개최했어요.

“그렇죠. 윤 대통령은 어떻게든 양국 관계를 좋게 하려고 노력하거든요. 여러 타협안도 내놓고 그 덕분에 좋아진 겁니다. 윤 대통령이 통 큰 결단을 하는 것에 대해 일본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어요.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도 양보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습니다.”

-아직 멀었다고 보는군요?

“네. 저는 이 상태로 안 된다고 봅니다. 이런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한가? 저는 쉽지 않다고 봐요.”

-대화와 타협조차 없는 것보단 낫지 않습니까?

“한국 문제가 아니죠. 사실 일본이 답해야 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침묵했잖아요. 일본의 책임인 거죠. 대부분 그렇죠. 문 전 대통령도 관계를 개선하고 싶어도 그 부분이 풀리지 않으니 못 했을 테고요.”

-왜죠?

“일본은 바뀌지 않고 있는 것이거든요.”

-가장 큰 걱정이라면.

“만약 정권이 바뀌기라도 한다면 한일 갈등이 재현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어요. 지금 한일 관계가 좋아진 지금이야말로 많은 한국 국민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일본과 합의를 이끌어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윤 대통령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요.”

-일본이 또 사과해야 한다는 거죠?

“반복해서 말하지만 일본은 무한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죄를 지은 쪽은 피해자 또는 그 국가가 ‘더 이상 사죄할 필요가 없다’고 할 때까지 사죄하는 게 당연해요. 이게 중요한데 일본 정부는 충분한 이해가 없죠.”

-어려운 문제네요.

“일본인은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위에서 내려다보듯이 우열 의식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미국에는 종속돼 있고 반대로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서는 그렇다는 착각을 하고 있는 거죠. "

-이전 정부 때 특히 MZ세대에서 반일 감정이 컸어요.

“그 시대를 겪은 분들의 분노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젊은 층에서 정치에 의해 그들의 행동, 언동이 크게 좌우되는 건 생각해 봐야 해요. 맹목적 일본 혐오로 가는 것에 대해서.”

-문제가 있다고 보는 건가요?

“일·중 관계에서도 그런 게 생겨요. 일본 내 부모들도 중국으로 관광을 가지 말라고 하는 경향이 있고요.”

-우리나라에선 반중 감정이 커지고 있어요.

“이렇게 정권에 크게 좌우되는 걸 보면 정치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 새삼 실감할 수 있습니다.”

-해결책이 있나요?

“새로운 국가 간 관계 정립이 필요해요. 상호 이해를 하려다 보면 서로 다른 점이나 간극이 보이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 노력을 하다 보면 서로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즐길 수 있지 않을까요?”

-역시나 어렵네요.

“차이, 다름, 간극이 있다면 서로 그것을 메우는 작업을 하겠죠. 나아가 국가가 그걸 도와서 진행해야 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젊은 사람들의 교류가 한층 더 강화되고 확대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정치인의 삶, 후회 없다면 거짓말


하토야마는 2009년 8월 중의원 선거(총선)에서 공고하던 자민당 체제를 무너뜨리고 민주당 승리를 이끌어 정권 교체를 이룬 엄청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반세기 넘게 집권해온 일당 독주 체제를 깬 것. 현재 우리나라도 민주당이 20, 21대 총선에서 연달아 승리하며 국회 장악을 이어가고 있다. “모든 건 국민이 판단할 겁니다. 문제가 있다면 바로잡겠죠.” 야당의 연합을 강조해온 그였지만 자신과 가까운 이낙연 민주당 전 대표의 탈당에 대해선 침묵했다.

-후회되는 때도 있나요?

“총리로서 사임할 수밖에 없던 상황에 대한 후회가 없다면 거짓말이죠. 저는 원래 정치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정치인이 된 것은 후회하지 않아요.”

-한국에서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을 곧 치릅니다.

“압승 비결이라는 건 없어요. 결국 국민이 판단하는 거예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당시는 자민당이 장기 집권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불패 정치에 의해 국민의 생활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는 걸 국민 스스로 인식한 것 같아요. 그래서 혼쭐을 내자는 분위기가 형성된 겁니다.”

-국민의 판단이 늘 옳다고 보나요?

“국민이 늘 합리적인 판단만 하는 건 아닙니다. 하하. 지금 일본은 자민당이 장기 집권을 하잖아요. 그 또한 합리적인 판단은 아니죠.”

-그래도 결국 투표가 답인데요.

“국민들이 심판하겠다고 마음먹고 목소리를 내면 정치는 바뀝니다. 투표하러 가지 않으면 견고한 기득권을 이길 수 없죠.”

-일본의 야당 상황은?

“야당이 너무 분산돼 있어요. 그래서 야당에 대한 기대가 자민당에 대한 기대를 뛰어넘기 어려운 겁니다.”

 


◇아내 손 꼭 잡은 로맨티스트


1박 2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은 하토야마 전 총리는 서둘러 인터뷰를 끝내고 문 밖에서 기다리는 아내를 만났다. 환한 미소를 띤 얼굴로 아내 손을 자연스럽게 잡았다. 그의 연애사는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하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유학 중 네 살 연상 유부녀였던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2년 뒤 이혼한 그녀와 결혼했다. 집안의 반대와 세간의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손에 낀 반지는 뭔가요?

“결혼반지입니다. 그렇게 안 보이죠?”

-로맨티시스트란 별명도 갖고 있죠?

“이상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세계를 평화롭게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는 한일 관계뿐 아니라 전 세계가 우애의 길을 걸어가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애정을 가지고 돕는 것이 중요하죠. 그런 의미에서는 로맨티시스트죠. 좀처럼 실현이 어렵다는 생각을 하지만요.”

-아뇨. 제가 말한 로맨티시스트는 아내를 향한 마음인데요.

“로맨티시스트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하하.”

-너무 젊어 보입니다.

“비결요? 아내와 매일 산책하는 게 제가 건강을 위해 하고 있는 딱 한 가지입니다.”

-진짜 그것뿐인가요?

“아아, 오늘도 만난 한국 분들이 건강을 위한 영양제 등을 챙겨주셔서 더 젊어질 것 같다고 기대 중이긴 합니다.(웃음)”

하토야마는 앞으로도 세계 평화를 위해 남은 생을 살겠노라고 했다. 

 

“큰 세계 평화라고 할까, 주변국과 평화를 이루는 데 더 공헌하고 싶어요. 그것은 총리가 아니라도 할 수 있잖아요. 그 생각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유발 하라리 "AI는 인공 아닌 외계지능이다"  

 

 

< 한국경제, 구은서 기자,  2024.01.01  >

 



 


“나는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 상상 속의 질서와 지배적 구조를 창조해내는 인류의 독특한 능력을 재검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발 하라리 히브리대 역사학과 교수가 2022년 말 발표한 <사피엔스> 출간 10주년 특별판 서문 중 일부다. 인공지능(AI)의 비약적 발전을 지켜보는 역사학자 하라리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문장이다. 하지만 이 글을 쓴 건 그가 아니라 생성형 AI 챗GPT-3다. AI에게 ‘하라리 스타일로 <사피엔스> 10주년을 기념하는 서문을 쓰라’고 주문했던 그는 그럴 듯하게 완성된 글을 보고 “충격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그로부터 1년여. 하라리 교수는 한국경제신문과의 화상 인터뷰에서 “<사피엔스>(히브리어판 2011년 출간) <호모 데우스>(2015년) 이후 많은 것들이 변했다”며 “세상이 변하는 속도가 그 어느 때보다 빠르다”고 말했다.

그는 세계적 베스트셀러 <호모 데우스>에서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향후 AI 같은 과학기술을 등에 업고 신적인 존재 ‘호모 데우스’로 나아갈 것이라 내다봤다. 불멸에 도전하고, 인간과 비슷한 존재를 창조해내는 인류는 인공일반지능(AGI)을 넘어 초지능(super intelligence)을 꿈꾸는 현재의 모습과 겹친다.

하라리 교수에게는 매주 수십 통의 인터뷰 요청 메일이 쏟아진다. 이를 관리할 별도 팀까지 둔 그는 ‘AI 시대, 미래세대를 위한 조언’이 주제라는 이야기에 이 인터뷰를 수락했다. 하라리 교수는 최근 청소년을 위해 인류의 역사를 쉽게 풀어쓴 <멈출 수 없는 우리 2>를 출간할 정도로 미래세대에 깊은 애정을 보인다.

그는 이번 인터뷰를 통해 AI 사회에서 인류가 경계해야 할 부분, 미래세대를 위한 새로운 교육 등에 대한 생각을 풀어냈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 중복되는 문장과 일부 질문 순서 등은 편집했다.

▶강력한 인공지능(AI)의 출연은 당신의 책 <호모 데우스>에서 언급한 새로운 인류의 탄생을 떠올리게 한다.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가 출간된 이후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예측했던 미래상에 어떤 변화가 있나.

=그렇다. 책이 출간된 이후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책에서 했던 예측들 중 정확했던 것도 있고 완전히 빗나간 것도 있다.

나는 내가 미래를 예언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역사학자로서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지식을 이용해 미래에 대한 개연성 있는 시나리오들을 창출해 내는 것이다.

미래에 대해 중요한 것은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위험한 시나리오들에 대해 사람들에게 경고를 해서 우리가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게 하는 것, 지금 현명한 결정을 해서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는 것을 피하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호모 데우스>에서 경고한 것 중에 하나가 '불평등'이다. AI가 세계적으로 엄청난 불평등을 야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단일한 사회 내부에서도, 전체 인구 중 아주 극소수만이 AI의 힘을 틍해 경제적, 정치적 이익을 누리고 나머지 대다수는 뒤쳐지게 될 수 있다고 했다.

국제적인 차원에서도 몇몇 국가들이 AI 혁명을 이끌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현재 AI 양대 강국이고 아마 5개~10개국 정도가 AI 경쟁에서 선두 그룹에 속해 있다. 전 세계적으로 200여개국이 있는데, 그 중 10개국 정도만이 혁명을 선도하는 위치에 있고 나머지 190여개 국가들, 즉 대부분의 국가들은 뒤쳐져 있는 것이다.

우리가 조심하지 않는다면 19세기 산업 혁명 당시에 있었던 일들이 되풀이 될 수 있다. 당시 영국, 프랑스, 일본 같은 몇몇 국가들이 산업화를 먼저 이루고 나머지 국가들은 뒤처져서 몇몇 산업 강국들에게 정복당하고, 식민지화되고, 착취당했다. 그리고 이렇게 식민지화된 민족들을 해방시키고 19세기에 벌어진 격차를 줄이는 데 한 세기에 걸쳐 끔찍한 고난을 거쳐야 했다.

이런 일이 또 일어날 수 있다. 어떤 국가가 강대국이 될지, 어떤 형태로 일어날지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AI의 힘을 연료로 삼아 새로운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파도가 일어나는 일이 이미 관찰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위험은 당시보다 훨씬 커졌다. 과거에는 먼 미래에 대한 막연한 예상이었던 것이 이미 현재 여러 나라들이 본격적으로 AI 무장 경쟁을 하고 있다.

 


▶AI가 남북관계에도 리스크가 될 거라 보나.

(그는 <호모 데우스>에서 “만일 북한이 남한의 온라인 금융 서비스를 붕괴시킨다면, 남한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물으며 “AI의 부상으로 남북한 사이의 문화적 격차가 벌어지면 통일이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AI가 (남북관계의) 유일한 위험 요인이라고 보지는 않지만, 우리는 최근 세계 전역에서 국제적 긴장이 높아지고 있는 걸 목격할 수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전쟁도 그렇고, 베네수엘라가 가이아나를 위협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보편적 규범과 가치에 기반을 둔 글로벌 질서가 작동하고 있었다. 물론 불완전한 질서지만 역사상 인류가 이전에 가졌던 어떤 질서보다도 나았다. 자유주의 질서는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일정한 경험, 보편적 이로움들이 있다는 가정하에 세계 평화와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덕분에 21세기 초는 인류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평화로운 시기였다.

지난 10년 동안 이 질서가 공격받고 있다. 북한 같은 외부의 적뿐 아니라 자유주의 사회 내부에서도 공격받고 있다. 미국의 트럼프 같은 정치인들이 글로벌 질서, 즉 보편적인 공동선과 규범에 적대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국가 간의 관계는 어떤 규칙을 따라야 할까? 이들은 여기에 대한 대안을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질서가 붕괴되면 뒤따르는 건 무질서다. 우리는 무질서의 시대에 돌입하고 있고 만약 강력한 글로벌 질서를 구축하지 못한다면 우크라이나와 같은 사태,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점점 더 전세계 여러 곳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점점 더 많은 전쟁들이 터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가 현명한 결정을 내리고 글로벌 질서를 재정립하기를 바란다.

 


▶AI의 측면에는 국제 규제기관 같은 게 필요하다고 보는 건가?

=그렇다. 글로벌 차원에서 AI에 대한 규제가 없다면 무분별한 AI 무장 경쟁에 매몰될 것이다. 군비 경쟁 때와 마찬가지로 누군가는 선제 공격을 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것이다.

 


▶AI시대에는 데이터가 미래 사회의 권력이 될 텐데, 인류는 AI 시대를 위해 무엇부터 준비해야 할까.

=중요한 것은 데이터의 독점을 막는 것이다. 데이터는 새로운 AI 도구들을 만들어내기 위해는 필수적인 연료다. 예를 들어 자율 주행을 하는 자동차, 사람 얼굴을 인식하는 AI 도구들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양의 데이터가 필요하다.

그리고 일단 AI를 가지게 되면 계속 통제권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는 데이터의 흐름이 반드시 유지돼야만 한다. 정치적으로뿐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그렇다.

굉장히 전통적인 산업이지만, 오늘날 섬유산업조차도 데이터가 지배한다. 누가 목화를 생산하는가, 어떤 섬유 공장에서 직조가 이루어지는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섬유 산업을 장악하고 샆다면 소비자가 무엇을 구매하고 싶어하는지, 최신 유행은 무엇인지에 대한 데이터가 필요하다. 그래서 아마존 같은 거대 데이터 기업들이 섬유산업도 지배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전 세계 수십억 명의 사람들의 선호, 기호에 대해 끊임없이 데이터를 수집해야 한다. 따라서 데이터의 흐름을 장악하는가의 여부가 경제적, 정치적 힘의 핵심이다.

만약 몇몇 기업, 몇몇 정부와 국가들이 모두를 지배하는 극도로 불공정, 불공평한 세상이 오는 것을 막으려면 몇몇 기업, 몇몇 정부가 모든 정보를 모아들이고 독점해 버리는 상황을 막아야 한다.

 


▶경제적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어떤가.

=경제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데이터와 관련 특이한 점 중에 하나는 데이터에 세금이 부과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 세계 모든 세무 당국은 돈의 흐름에 대해 과세를 한다. 상품이 움직일 때도 세금을 부과한다. 내가 베트남에서 만든 셔츠 하나를 사면 세무 당국은 이 셔츠에서 얼마만큼의 세금을 떼야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하지만 데이터에 세금을 얼마나 매겨야 하는지는 모른다.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몇 군데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데, 데이터의 가치는 수십억 (달러), 아니 수조 (달러)에 이른다.

테슬라 같은 회사를 한번 봐라. 사람들은 테슬라가 자동차 회사라고 생각을 하지만 심지어 테슬라 오너 일론 머스크조차 테슬라는 자동차 회사가 아니라는 말을 자주 한다. 테슬라는 AI 회사다. 테슬라의 자동차들은 인간들이 자동차를 어떻게 운전하느냐부터 시작해 끊임없이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수집한다. 이런 데이터들은 차가 스스로 운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새로운 AI 도구를 만드는 데 사용된다.

테슬라는 나의 데이터를 공짜로 가져가서 AI 도구를 만드는 데 사용하고, 그렇게 개발된 AI 도구를 다시 나한테 되팔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핵심인 데이터의 양도에 대해 세무 당국은 어쩔 줄 몰라하고 있다. 데이터에 어떻게 세금을 부과할 수 있을까?

 

 


▶물론 AI에 여러 리스크가 있지만 잠재력이 큰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세계 최악의 출생률을 기록 중인 한국은 AI를 통해 산업 현장을 효율화하면 인구 문제에 대응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나는 'AI가 완전히 나쁘다, 끔찍하다, 금지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당연히 금지할 수도 없고, 그리고 금지해서도 안된다. 엄청난 긍정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AI는 더 나은 의료 서비스를 우리에게 줄 수 있다. 앞서 자율주행 얘기가 나왔는데, 나 역시 자율주행 자동차, 즉 '내가 전혀 신경쓰지 않고 완전히 운전대를 놓아버려도 되는 차가 나왔으면…' 고대하는 사람 중에 하나다. 그러면 내 인생이 훨씬 편리해지고 더 안전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AI가 운전을 하게 되면 아마 매년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매년 120만~130만명의 사람들이 자동차 사고로 죽는다. 자동차 사고 중 90%는 음주 운전 같은 인간의 과실 때문에 발생한다. AI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는다. AI는 환경 보호에도 엄청난 역할을 할 수 있다.

나는 AI의 개발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AI의 위험한 부분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고 안전에도 투자를 하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다른 모든 산업에서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자동차의 예를 들어보면 신차를 개발할 때 신차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면 차가 도로를 달리도록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자동차 회사라면 예외 없이 신차 출시 전에 안전에 상당한 투자를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신약을 개발하는 제약 회사도 마찬가지다.

나는 역사학자로서, 철학자로서 긍정적 잠재력에 대해서만 얘기하지 않는다. AI의 긍정적 잠재력에 대해서는 이미 일론 머스크나 샘 알트만 같은 기업가들이 충분히 얘기하고 있다.

 


▶왜 특히 AI에 있어서 그런 투자가 중요한가.

=AI는 지금까지 인간이 개발한 다른 어떤 기술과도 다르다. AI는 스스로 결정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해 낼 수 있다는 점이 그렇다.

심지어 라디오, 텔레비전 같은 정보 기술 제품들도 그렇게는 못 한다. 라디오가 스스로 무엇을 방송할지 결정하지 못 하고, 라디오가 새로운 교향곡을 작곡하거나 새로운 연설문을 쓰지도 못 한다. 무엇을 방송하는가는 오로지 인간이 결정해왔다. 라디오는 그저 도구일 따름이었다. 그래서 라디오의 문제를 예상하고 안전한 라디오를 생산해내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웠다.

하지만 AI는 다르다. AI는 인류 역사상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해낼 수 있는 최초의 도구다. AI는 새로운 음악도 작곡할 수 있고, 정치가의 연설문도 작성할 수 있다. AI는 스스로 결정도 할 수 있다. 아니, 이미 AI 알고리즘이 SNS에서 무엇을 선순위로 올려야 하는지를 결정하고 있다.

AI는 어떤 의미에서는 독립적 행위 주체자이고 그래서 AI가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어떤 새로운 결정을 내릴지 예상하기가 아주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AI의 안전성을 확보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훨씬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AI의 위험성에 대해 어떤 시나리오를 마음속에서 떠올리건 AI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다.

AI는 우리에게는 완전히 낯선 형태의 지능, '에일리언 인텔리젼스(Alien Intelligence)'라고 할 수 있다. AI는 인공(artificial) 지능의 줄임말이지만, 나는 AI를 외계(alien) 지능의 줄임말이라고 보는 게 더 말이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AI는 마치 외계 생명체의 지능인 것마냥 의사 결정 방식이 인간과는 급진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인공적으로 구현된, 인간과 유사한 방식으로 사고하는 지능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AI가 어떤 결정을 할지, 어떤 아이디어들을 낼 지를 예상하는 것이 아주 어려운 것이다.

 


▶미디어 얘기가 나왔는데, AI의 또 다른 위험성 중 하나는 가짜뉴스다.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우리는 많은 가짜뉴스를 이미 목격하고 있다. AI는 전통적 언론을 몰아낼까?

=물론 사라지는 구시대 미디어도 있겠지만, 특정 기술이 언론을 완전히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언론의 주요 기능은 컨텐츠의 생산이 아니라 컨텐츠의 큐레이션이기 때문이다.

언론 역시 (AI에) 적응을 해야 살아남는다.

뭐든지 원하는 내용으로 동영상을 만드는 것은 아주 쉽다. 하지만 사람들의 주의력, 관심은 한정적이다. 핵심은 '어떤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느냐' '어떤 콘텐츠를 우선 순위로 소개하느냐'이지, '어떤 동영상, 어떤 음악을 제작하느냐' '어떤 글을 쓰느냐'가 아니다. 핵심은 큐레이션이다. 언론기관들의 최우선 기능은 언제나 큐레이션이었다.

에디터의 일을 예로 들어보자. 예전에도 그랬지만, 주요 TV 뉴스 채널의 에디터라면 한국, 혹은 전 세계에서 오늘 일어난 중요한 일들을 뉴스로 10분 안에 다루어야 한다. 오늘 일어난 사건이 백만개는 될 거다. 가짜뉴스가 아닌 진짜로 일어난 사건들 말이다. 우리에겐 10분밖에 없다. 이중 가장 중요한 아이템 5개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계속해서 큐레이션을 필요로 할 것이다. 가짜뉴스 때문에 더욱 그렇다. 요즘 사람들은 동영상을 봤을 때 그 동영상이 AI가 만들어낸 가짜일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염두에 두고 있다.

활자도 마찬가지다. 수세기 전에도 이미 글을 쓰고 거기에 따옴표를 쳤다. 예를 들어 "황제가 '전쟁을 하자'고 말했다"고 쓰고 '전쟁을 하자'에 따옴표를 쳤다고 해보자. 모든 사람이 이것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누구나 종이에 "황제는 '~~'라고 말했다" 심지어 "신이 '~~"라고 말했다"고 쓸 수 있다. 어려운 것은 '누구를 신뢰하느냐?'라는 질문이다.

 


▶미래세대를 위한 교육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AI 이전까지 인류는 창의성은 인류만의 힘이라고 믿어왔고 창의력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제는 AI 예술가들이 활약하고 있다.

=교육은 전례가 없는 도전에 직면에 있다. 교육이란 언제나 미래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10년 후, 20년 후에 중요하고 가치가 있을 것들이다. 다른 분야에서는 지금 현재 일어나는 일에 집중한다. 교육은 미래의 최전선(frontier)에 자리하고 있다.

문제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인류 사회가 앞으로 20년 후에 어떤 모습일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20년 후 인류 사회에서 어떤 기술이 필요하게 될지도 전혀 알 수가 없다.

한반도에서 천년 전에 태어났다고 가정해보자. 당시에도 20년 후의 정치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누구라도 20년 후에 어떤 기술이 필요할지는 다 알았다. 20년 후에 일본이 침략한다고 해도, 역병이 돈다고 해도 쌀농사를 짓는 기술, 집을 짓는 기술, 글을 쓰는 기술 등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필요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20년 후의 미래에 어떤 기술이 필요할지 아무도 모른다. 'AI 시대니까 누군가는 코딩을 해야 할 거야' '그러니까 아이들에게 코딩을 가르치자'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왜냐하면 이미 AI는 혼자 코딩을 하기 때문이다. 20년 후에는 코딩 기술이 전혀 필요 없거나 아주 최소한으로만 필요하게 될 수도 있다.

좁은 범위의 기술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아주 위험한 전략이다. 교육의 초점은 배우는 법을 배우는 것(learn how to learn), 즉 새로운 것을 어떻게 배우는지 그 방법을 배우고 변화하는 법을 배우는 데 맞춰져야 한다. 어떻게 하면 유연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지를 중시해야 한다.

20년 후에 세상의 모습에 대해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세상은 아마 아주 빠른 속도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20년 후의 노동 시장을 보면 아마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일을 평생 하고 또 해야 할 것이다. 젊었을 때 배운 것을 평생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학습의 기술, 변화의 기술에 초점을 맞추는 게 가장 중요하다. 이는 상당 부분 교육이 감정 지능을 키우는데 집중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하면 유연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끊임없는 변화, 불확실성, 실패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봐야 한다.

사람들은 변화에 적응하기를 어려워한다. 나이가 들수록 더 그렇다. 이미 세상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이 있고, 습득한 기술이 있기 때문이다. 큰 변화가 일어나면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아야만 한다. 내가 알던 것들, 할 줄 아는 것들이 점점 무의미해지면서 새로운 기술을 익혀야만 한다. 이런 과정은 나이가 들수록 심리적으로 아주 힘이 든다.

 


▶미래세대에게 역사를 가르칠 때, 가장 의미 있는 역사적 순간은 뭐라고 보나.

=아이들에게 과거 왕의 이름이나 사건연도를 외우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게 궁금하면 구글에서 1초만에 검색할 수 있다.

역사학은 과거를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변화를 연구하는 학문, 세상이 어떤 과정을 거쳐 변화했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졌다. 변화의 속도가 어느때보다도 빨라졌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이들을 위한 역사책을 썼는데, 이 책의 주제이기도 하지만, 역사를 배울 때 가장 중요한 점은 변화의 역동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특히 21세기에는 모든 역사 수업이 여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변화의 속도가 계속 가속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농업혁명은 숲에서 수렵 채집을 하던 인간이 어떻게 쌀을 경작하고 닭이나 소를 키우고 살게 됐는가 하는 변화의 과정인데, 이게 5000년이 걸렸다. 그 어느 누구도 살면서 “나는 이번 생에 농업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내 눈으로 목격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반면 AI 혁명은 5년 만에, 아무리 길게 잡아도 50년 만에 일어난다. 오늘날 어린이들, 지금 8살 정도의 아이들이 80세가 됐을 때 지금 세상과 완전히, 전혀 다를 것이라는 점을 빼면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최근 어린이·청소년을 위해 쓴 <멈출 수 없는 우리> 2권이 한국에 출간됐다. 책의 주요 주제는 '불평등'이다. 왜 이 주제가 미래세대에게 중요하다고 봤나.

=인류 역사에 걸쳐 사람들은 늘 이 문제로 괴로워했고, 특히 어린이들은 세계 어디에서 살던 이 문제로 괴로워한다. 한국 아이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스라엘에서는 아이들이 “이건 불공평해요!” 얘기하는 걸 매일 듣는다. 왜냐하면 아직 사회의 규범, 법규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들은 불편할 수도 있지만, 좋은 일이기도 하다. 어떤 사회나 불공평을 야기하는 규칙들이 있고 이런 질문들을 통해 문제적인 규칙들이 드러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실상 전세계에 걸쳐 여자아이들에게는 학교에 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정치인, 판사, 기자, 종교 지도자가 될 수 없었다. 몇 십 세기 동안 계속된 불공평한 상황이지만, 사람들은 '그저 세상 돌아가는 이치는 원래 그런 것이다' 하고 살았다.

우리가 지배적인 서사에 대해 질문을 하지 않는다면 이런 문제들을 고치는 것이 절대 불가능할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유발 하라리 히브리대 역사학 교수는 인류의 기원과 미래를 탐구하는 세계적 지성이다. 그의 ‘인류 3부작’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은 세계적 베스트셀러로, 인류의 약진과 문명 발달사에 대한 대담한 가설과 흥미로운 서술로 학계와 독자들을 열광시켰다. 1300만권을 갖춘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최근 10년간 가장 많이 대출된 책이 <사피엔스>였을 정도다. 최근에는 인공지능(AI)이 가져올 충격에 대비해 국제적으로 연대해야 한다는 공개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극우파의 ‘슬픈 정념’이 몰려온다

 

 

< 경향신문, 홍기빈 (재)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2023.12.11 >



지금 전 지구를 휩쓸고 있는 극우파 정치의 바람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새로운 삶의 질서가 태어나지 않는 가운데, 세상 에너지가 ‘슬픈 정념’으로 변질되고 썩고 있는 현상일 뿐이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대로, ‘낡은 것은 죽었는데 새로운 것은 태어나지 않고 있는 순간, 그때가 위기’인 셈이다

 


전 세계, 특히 유럽과 남미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파 정당의 약진에 관해 함께 생각해보도록 한다. 이런 일들이 왜 벌어지는지, 앞으로 어떤 세상이 펼쳐지게 될지에 대해 좀 더 긴 역사적 시각에서 그리고 철학적인 관점에서 부족한 생각을 나누어보고자 한다.

지난 11월19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선거에서 극우파 하비에르 밀레이가 당선되었다. 아르헨티나 하면 떠오르는 두 단어, 즉 페론주의 이후의 좌파 포퓰리즘 정치 그리고 끝도 없이 계속되는 경제위기를 밀레이는 연결시켰다. 현재 경제위기의 모든 책임을 좌파 정권으로 돌리면서, 중앙은행을 폐쇄해버리고 자국 통화인 페소도 폐지하고 대신 미국 달러를 통화로 쓰겠다는 파격적인 정책을 내걸었다. 지난 11월22일 네덜란드의 하원 선거에서 헤이르트 빌더르스가 이끄는 극우정당 자유당이 제1당으로 올라섰다. 빌더르스는 이민을 완전히 봉쇄하고,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를 폐쇄하고, 이슬람 경전인 쿠란을 금지 서적으로 만들겠다는 입장을 가진 인물이다.

이 두 나라만이 아니다. 지금 유럽은 극우파의 물결이 높게 출렁이고 있고, 조만간 서유럽 대부분 나라의 정치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는 이미 극우파 정권이 들어선 상태이며, 프랑스에서는 극우파 마린 르펜 후보가 지난해 대통령 선거 결선에서 무려 득표율 41.4%를 기록한 바 있다. 심지어 북유럽의 스웨덴과 핀란드에서도 극우정당이 제2당을 차지하고 있으며, 독일에서도 극우파 독일대안당이 집권여당 사민당 지지율을 제치고 제2당 자리에 올라섰다. 스페인 역시 극우정당이 집권여당의 위치를 넘보고 있는 상황이다.

좀 엉뚱하다 싶지만, 지금의 극우파 창궐 사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자 스피노자가 말한 ‘슬픈 정념’이라는 개념에서 시작해보는 게 좋을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코나투스’, 즉 버티는 힘이라는 게 있다. 그런데 이 힘이 발현되는 방식을 놓고서 스피노자는 사람의 정념을 ‘기쁜 정념’과 ‘슬픈 정념’ 두 가지로 나눠놓았다.

먼저 ‘기쁜 정념’이란 그 사람이 힘을 더 바깥으로 크게 뻗치게 만드는 감정이다. 예를 들어서 사랑, 희망, 자신감, 헌신, 감사 같은 감정들로서 이런 감정에 빠진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넘어서서 삶을 더 크게 만드는 쪽으로 본인의 힘을 쓰게 된다. 기쁘고 좋으니까. 그런데 반대로 ‘슬픈 정념’은 사람을 아프게 만드는 감정들이다. 공포, 질투심, 증오, 죄의식, 수치심 같은 것들이다. 이 경우에는 사람이 갖고 있는 힘이 몽땅 그 고통과 괴로움을 견디는 쪽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이런 감정과 싸우다 보면 자기 존재가 커지기는커녕 갈수록 쪼그라들고 삶은 피폐해져가다, 결국 죽어 없어지기까지 한다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2010년대 좌파는 정치경제학 부재

나는 정치 운동도 ‘기쁜 정념’으로 움직이는 경우와 ‘슬픈 정념’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자는 제도도 바꾸고 정책도 바꾸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창조해나간다는 힘으로 움직이는 운동이지만, 후자는 무엇에 대한 증오와 분노와 공포 혹은 죄의식 같은 것으로 움직이는 운동이다. 전자는 갈수록 사람들도 많이 모이고 세상도 실제로 바뀌면서 개인과 공동체가 다 풍요해지는 쪽으로 이바지하지만, 후자는 갈수록 사람들 사이에 싸움과 반목을 만들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쪽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정치 운동이 ‘기쁜 정념’의 운동이냐 ‘슬픈 정념’의 운동이냐를 가르는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일까? 나는 사회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 기반하여 새로운 대안적인 실천 계획이 있느냐 없느냐라고 믿는다. 이게 있다면 그걸 하나하나 실현해나가면서 더 많은 사람과 만나고 하나가 되는 일이 가능하지만, 그게 없으면 모여서 다른 무언가를 욕하고 저주하는 쪽으로 힘을 쓰게 되니까. 지금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극우파 정치는 후자로 ‘슬픈 정념’의 운동에서도 가장 나쁜, 하지만 전형적인 예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흔히 간과하고 있다. 극우파 정치는 진보 좌파 정치의 실패로 나타난 결과이며, 그 연속선에 있다는 점이다. 특히 ‘슬픈 정념’의 운동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잠깐 시간을 돌이켜서 2010년대 초로 가본다. 2008년 세계 경제위기가 터진 뒤 좌파에 기회가 오는 듯싶었다. 2011년에는 미국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도 있었고, 스페인에서는 ‘분노한 자들’ 운동도 있었다. 또한 세계 경제위기와 함께 대규모 정치 운동이 각국에서 터져나왔고, 그리스와 스페인 등지에서는 시리자나 포데모스와 같은 새로운 유형의 좌파정당들도 나타났으며, 사회민주당이나 노동당과 같은 기존 좌파정당 내에서 정당 혁신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기도 했다. 그래서 201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정치·경제 주도권과 기회는 진보와 좌파 쪽에 있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었다. 진보 좌파가 이렇다 할 만한 행동 플랜을 내놓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불평등을 감소시키기 위한 기본소득이라든가 생태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녹색뉴딜 같은 이야기들이 나왔지만, 뾰족한 실천 운동 방침이 제시된 것도 아니었고, 당장 사람들 삶의 고통을 해결해줄 수 있는 유능한 정책이나 제도가 마련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말만 많고 요란했을 뿐이고, 좀 냉소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그런 이야기로 마이크를 잡은 개인들이 정치가·지식인 등 셀럽이 되고 출세하는 일만 벌어졌을 뿐이다.

 


‘화풀이’로 극우 정치인에 표 던져

진보 좌파는 왜 2010년대에 자신들에게 온 천재일우의 기회를 이렇게 날려버린 것일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경제 시스템에 대한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분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정치경제학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이나 그린뉴딜 같은 막연한 구호만으로 정책과 제도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많은 연구와 계획이 필요하고, 이를 사람들에게 자세히 알기 쉽게 설명해서 힘을 모으는 작업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사실상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리하여 스피노자가 말한 ‘기쁜 정념’이 사그라들게 되자 모여 있던 힘은 ‘슬픈 정념’으로 변하게 된다. 2010년대 후반이 되면 진보 좌파 운동은 사회경제적 모순이나 생태위기 문제를 가지고 싸우는 게 아니라 엉뚱하게 백인, 남성, 이성애자 등등에게 싸움을 거는 극단적인 PC주의, 즉 ‘워키즘’으로 변질된다. 그래서 이른바 문화 전쟁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러한 ‘슬픈 정념’의 운동만을 가지고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오히려 사회 전체에 깊은 상처만 남기기 십상이다.

2023년 지금 극우파 발호의 기초가 되는 중대한 쟁점으로 네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는 이민자 문제, 둘째는 물가 인상과 생활고 문제, 셋째는 기후위기 대응 정책에 대한 반발과 저항, 넷째는 전쟁 등으로 인한 안보 불안이다. 이는 현실을 살아가는 서민 대중에게는 정말로 크고 심각한 문제이지만, 기존 정치권이나 제도에서 풀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무책임하게 극단적인 주장과 요구를 질러대는 극우 정치인이 사람들을 끌어간다는 이야기이다.

문제는 이게 ‘슬픈 정념’이라는 데 있다. 극우 정치인에게 표를 준 사람들도 마음속으로는 잘 알 것이다. 저 사람들도 기존의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인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종자들은 아니라고. 그래서 저기에 표 던져봐야 뾰족하게 뭔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것도. 그냥 기존 정치, 질서에 대한 부정과 ‘화풀이’로 표를 던지는 것에 가깝다.

신자유주의 질서가 빈사 지경에 처하여 새로운 정치경제 질서를 만들어가는 일에 착수해야 했던 2010년대를 그냥 말잔치로 날리고, 되레 극단적 PC주의 같은 ‘슬픈 정념’만 키운 결과가 이러하다. 

 

그래서 지금 전 지구를 휩쓸고 있는 극우파 정치 바람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새로운 삶의 질서가 태어나줘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있는 가운데, 세상의 에너지가 또 인류의 에너지가 ‘슬픈 정념’으로 변질되고 푹푹 썩고 있는 현상일 뿐이다. 잘 알려진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대로 “낡은 것은 죽었는데 새로운 것은 태어나지 않고 있는 순간, 그때가 위기”인 셈이다.

“의사는 먹고사는 일… 내가 꿈꾸는 세계는 링 위에 있다”
 
여자 복싱 세계챔피언 도전하는
순천향대 천안병원 의사 서려경

< 조선일보, 김아진 기자,  2023.12.30. >

 

https://youtu.be/2KSQgUPCeEE

 

 
펀치를 날리는 ‘의사 복서’ 서려경은 군살 하나 없는 근육질이다. 링에 오르면 눈빛부터 바뀌는 그녀는 내년 세계 타이틀 매치를 앞두고 “이겨야만 한다. 물러설 곳이 없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링 위의 그녀는 시선부터 매섭다. 8전 7승(5KO) 1무. 복싱을 시작한 지 불과 5년 만에 만들어낸 화려한 전적. 흥미로 시작한 복싱이 이제 삶을 지탱하고 있다. “제 주먹을 맞을 일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제 주먹을 맞았다면 복싱은 못 했을 것 같아요. 펀치력이 그 정도로 세거든요.”

최근 한국복싱커미션(KBM) 여자 라이트 플라이급(48.98kg 이하) 챔피언에 오른 서려경(32·천안비트손정오복싱)을 지난 13일 천안 복싱장에서 만났다. 그녀가 한물간 복싱판에서 이토록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이유는 따로 있다. 어릴 때부터 권투를 해온 선수가 아니라 의사여서다. 링을 벗어나 하얀 가운을 입고 환하게 웃으면 영락없는 소아과 의사다. 그는 현재 순천향대학 천안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로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일하고 있다.

“인생은 닥치는 대로 해나가는 거 아닌가요? 저는 제가 선택한 것에 대해 최선을 다하고 그에 맞는 책임을 다할 뿐이에요. 의사로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복서로서 내년에 세계 챔피언이 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후회 없이요.”

서려경은 최근 세계 챔피언 타이틀 매치 전초전(계약 체중 47kg급)을 승리했고 내년 2~3월 여자국제복싱협회(WIBA) 미니멈급(47.62kg 이하) 세계 타이틀전을 앞두고 있다. 이후 가능하다면 세계 복싱 4대 기구인 세계복싱협회(WBA), 세계복싱평의회(WBC), 국제복싱연맹(IBF), 세계복싱기구(WBO) 챔피언 타이틀도 도전할 계획이다. “왜 복싱을 하냐고요? 세계 챔피언도 가능할 것 같거든요. 하면 될 것 같은데 그만둘 수가 없죠. 하지만 목표에 도달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안녕할 것 같아요.”

 


◇복싱하는 내 모습이 너무 좋다


복싱은 2018년 친하게 지내던 선배 마취과 의사의 권유로 시작했다. “그 선생님이 술 친구였거든요. 제가 운동을 좋아하니까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해서 체육관에 가게 됐어요. 그때는 프로 선수가 될지 꿈에도 몰랐고요.” 호기심에 시작했지만 처음부터 딱 맞는 운동이라는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다고. 그리고 1년 뒤 프로 테스트를 거쳐 데뷔전까지 치렀다. “관장님이 선수 한번 해볼 거냐고 해서 하겠다고 했죠. 역시나 그때도 안 된다는 생각은 조금도 안 했어요. 붙으면 이긴다고 생각했죠.”

-원래부터 운동을 좋아했나요?

“어릴 때는 저보다 달리기가 빠른 여자를 본 적이 없었어요. 운동 신경이 있는 편이었죠. 힘도 셌어요. 유치원 땐 대장이었고요. 2차 성징 전까지 남자아이들도 저보다 강하지 못 했어요. 팔씨름도 다 이겼고요. 그래서 제가 강하다는 걸 어렴풋이 알았던 것 같아요.”

-왜 복싱이었나요?

“저는 용감한 여성인데도 복싱 체육관 가는 건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험하게 생겼잖아요. 그런데 친한 의사 선생님이 ‘나 있으니까 와보라’고 하더라고요.”

-처음부터 소질이 있었나요?

“남달랐죠. 관장님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고요. ‘잘한다’ ‘잘한다’는 당근을 먹고 무럭무럭 자랐죠. 하하.”

-선수 제안은 언제 받았나요?

“운동하고 1년 됐을 때 프로 테스트를 받아보자 하더라고요. 아마추어급인 생활체육 대회가 아니라 곧바로 프로 대회로 갔어요. 당연히 쉽게 이겼고요. 몇 달 있다가 바로 데뷔전을 치렀죠.”

-데뷔전은 어땠나요?

“지금까지 경기 중에 가장 힘든 날이었어요. 너무 긴장을 해서요. 판정승으로 이겼어요. 2라운드 끝났는데 다리가 후들거려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였어요. 복싱은 호흡이 중요해서 강약강약으로 공격을 해야 하는데, 그날은 강강강강으로 몰아붙여서(웃음).”

-무슨 생각을 했나요?

“포기할 수는 없으니 일단 이기자. 경기 중에는 다시는 경기를 안 뛰어야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벌써 8경기를 뛰었네요.

“이기면 못 그만둬요. 중독이죠. 승리의 쾌감도 있고요. 왜 복싱을 하냐, 무엇 때문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답을 할 수가 없었어요. 저 스스로도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최근에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왜죠?

“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인 것 같아요. 세계 챔피언도 굉장히 높은 확률로 저는 이룰 거 같거든요. 그래서 못 그만둬요.”

-솔직히 이해는 잘 안 돼요.

“어떤 기자는 ‘고통을 즐기시나요?’라고 물어요. 아니, 그런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너무 괴롭고 하루하루 죽을 것 같은데요. 지금은 아무도 이루지 못한 걸 내가 해봐야겠다는, 그 생각뿐입니다.”

-이겼을 때 쾌감을 설명한다면.

“이기고 나면 제 경기 영상을 백 번, 이백 번 돌려봐요. 너무 좋아요. 이겨본 사람만 알 수 있어요. 운이 좋아서 이긴 게 아니에요. 죽을 것 같지만 그걸 이겨내서 운동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기쁨이죠.”

서려경은 복싱을 가르쳐준 한국 챔피언 출신 손정수(오른쪽) 관장을 최고 은인으로 꼽았다. “관장님이 없었다면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손 관장도 “저에게는 넘버원, 베스트 선수가 서려경”이라며 “복싱계의 김연아”라고 했다.  

 


◇진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서려경은 2018년 프로 데뷔 후, 2021년까지 다섯 경기를 뛰었다. 2022년 서울 삼성병원에서 펠로우 2년 차에는 경기를 뛰지 못했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의사로서의 삶도 살아내야 했다. “그래도 목표가 있었으니까 운동은 쉬지 못했어요. 하루종일 논문 쓰고 환자 보고 나서 퇴근하면 또 운동을 했죠. 평생 흘릴 눈물을 그 1년에 다 흘린 것 같아요. 그 정도로 힘들었어요.”

지옥 같은 해를 보낸 뒤 올해 세 경기를 뛰었다. 1년을 쉬었지만 경기력은 더 향상돼 있었다. 모두 KO로 이겼다. 그녀의 주먹을 맞고 링을 멀쩡하게 걸어나간 상대는 없었다. 지난 7월 한국 챔피언 타이틀전에선 임찬미 선수를 가볍게 꺾었다. “귀를 세게 맞아서 피멍이 들었는데요. 찬미 언니도 링을 내려갈 때 살짝 보니까 온몸에 멍이 들었더라고요. 이길 거라고 생각은 했어요. 왜냐면 그만큼 열심히 했거든요.

-작년엔 경기를 하지 않았어요.

“의사로서도 할 일은 해야 했으니까요. 큰 규모의 병원에서는 중환자도 많고요. 그래도 기량이 떨어지지 않아야 선수를 계속할 수 있기 때문에 울면서 운동을 했죠.”

-그리고 나서 1년 만에 올해 초 중국 선수와 붙었어요.

“체중이 55kg였는데 7kg을 빼야 했어요.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운동을 했어요. 못 먹으면서요. 생리까지 끊기더라고요.”

-그 정도로 힘든데 또 해냈어요.

“병이에요. 하하. 완벽주의. 생각대로 안 되면 스트레스를 엄청 받는 스타일이거든요. 이미 최소 한국 챔피언은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때였기 때문에 그만둘 수 없었죠.”

-경기 전에 질 수도 있겠구나 했나요?

“전혀요. 운동을 많이 하면 질 것 같지 않아요. 질 생각도 없었고 KO로 끝냈죠. 제 주먹이 스치면 다 가는 거죠. 하하.”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안 되네요.

“저와 스파링을 했던 어떤 선수 분이 맞아 본 여자 선수 중에 제일 세다고 할 정도예요.”

-2020년에는 유일하게 무승부 판정이 난 경기도 있긴 했어요.

“저는 이긴 경기로 생각했는데요. 더 확실하게 이겼어야 했죠.”

-너무 세게 맞아서 아팠을 때도 있나요?

“보디(배와 가슴)를 제대로 맞으면 진짜 아프거든요? 저는 그렇게까지 아프게 맞은 적이 없어요. 데뷔전 때 눈이 파랗게 멍든 거 빼고는 피 한번 안 흘려봤어요. 눈을 맞아서 잠깐 두 개로 보인 적은 있지만. 그런데 관장님이 그럴 수 있다고 여러 번 워닝(경고)을 줘서 안 그런 척했죠.”

-안 아픈 척이 되나요?

“빨리 정신 차리고 제가 더 세게 때려야죠. 아프다고 그러고 있으면 안 돼요.”

-가장 기뻤을 때는 언제죠?

“한국 챔피언이 됐을 때요. 타이틀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완전 다릅니다.”

-그 타이틀전에서 질 거란 예측도 많았어요.

“댓글도 봤어요. 그런데 저는 한 번도 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어떻게 지지?’ 생각했죠.”

-슬럼프도 있었나요?

“심적으로 힘들긴 했지만 체력적인 슬럼프는 없었어요.”

-은인을 꼽자면.

“당연히 손정수 관장님이죠. 관장님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못 왔을 겁니다. 복싱을 가르치는 스킬은 따라갈 자가 없을 거 같아요. 국내 톱이죠.”

-서로 존대를 하더라고요.

“이 바닥에선 욕은 기본이고 ‘이 새끼야’라고 불러요. 그런데 관장님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내가 선생님을 존중해야 다른 사람들도 막 하지 않는다’면서요. 안 그랬다면 제가 애정을 못 붙였을 것 같아요. 너무 감사하죠.”

 


◇“그만하라”는 걱정은 이제 실례


서려경은 지난 5년 동안 별의별 소리를 다 들었다. “신나게 두들겨 맞아봐야 정신 차리지.” “잘못 맞으면 진짜 죽어.” 이기고 올 때마다 병원 사람들도 한숨을 쉬었다. “또 이겼다고? 하....” 엄마도 오빠도 예외는 아니었다.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 끙끙 앓았다. “이해는 해요. 그래도 저는 복싱하는 제 모습이 너무 좋아요. 힘들어도 너무 좋아요. 복싱이 제 삶을 지탱해줘요.”

-처음에 복싱한다고 했을 때 가족 반응은 어땠나요?

“좋아했죠. 운동한다고 하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할 줄은 몰랐겠죠.”

-가족들이 경기장에도 왔나요?

“엄마는 새가슴이라 덜덜 떨어요. 오지도 못하고 생중계도 못 봐요. 한 살 위 오빠는 저를 끔찍하게 생각하는데 한번 왔다가 충격받은 모양이에요. 관장님이 경기 도중에 보니까 오빠가 울더래요.”

-왜 울었대요?

“제 경기 전에 남자 경기가 있었는데 ‘어떻게 저런 걸 우리 려경이가 하지? 쟤가 의사까지 돼서 저런 흉악한 걸 왜 하고 있지?’ 하면서 멘붕이 왔다더라고요.”

-지금은 어떤가요?

“매번 ‘이것까지만 하고 그만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한국 챔피언이 되니까 ‘이제는 그런 말 자체가 실례다’ 하더라고요. 자주 안 보는 친척들이나 초면인 사람들이 너무 쉽게 걱정한답시고 그만하라고 하잖아요. 제 노력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쉽게 얘기하면 안 되죠.”

-병원에선 어떤가요?

“대놓고 싫어하는 분도 있고, 애정을 가지고 진심으로 걱정해주시는 분도 있어요. 한번 져야 정신차릴 텐데 왜 또 이겼냐고도 하고요. 그래도 센터장님은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라고 늘 이해해주셨어요.”

-이제 좀 달라졌나요?

“확실히 한국 챔피언 되고는 많이 바뀌었어요. 병원장님도 불러서 ‘대단하다’ ‘응원한다’ 해주셨고요.”

-그래도 복싱이 험한 운동은 맞잖아요.

“선입견이에요. 체육관에는 정신이 건강한 사람들만 모여요. 순수하고 맑죠. 운동 좋아하면 안 건강할 수가 없잖아요.”

-어쨌든 유명해졌어요.

“알아보시는 분들이 있긴 하지만 저는 주목받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도 신기하긴 하죠.”

 


◇소아과 의사의 삶도 쉽지 않아


서려경은 솔직했다. 재는 게 없다. 앞뒤 가리지 않고 숨기지도 않았다. “의사요? 공부도 잘했고요. 돈도 많이 벌고 멋있어 보이니까 했죠. 하하.” 이럴 땐 딱 MZ였다. 소아과 의사의 현실에 대해선 뼈 때리는 말도 꺼내놓았다. “의사로도 만족합니다. 힘든 시간이 있었지만 그것도 다 이겨냈고요. 다만 소아과 의사로서는 부담이 있어요. 타과 의사와 비교하면 스트레스는 크고 보상은 적죠. 동료들도 비슷한 고민을 해요.” 돈만 많이 준다면 직업 복서의 삶도 괜찮을 것 같다고 농담 같은 진심도 털어놨다.

-공부로도 1등만 했나요?

“내신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모의고사는 그랬던 것 같아요.”

-의사는 왜 됐나요?

“공부 잘하면 의사해야 한다는 말에 세뇌된 것 같기도 하고. 멋있긴 하잖아요. 경찰, 의사 둘 중 하나가 돼야겠다고 생각은 했어요. 형사가 됐어도 잘했을 것 같아요. 경찰이 돈을 더 잘 벌었다면 경찰이 되지 않았을까요?”

-소아과를 택한 이유라면.

“성형외과 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경쟁이 너무 셌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남녀 차별도 있었고요. 일반외과를 가려고 했는데 지원자가 거의 없더라고요. 그래서 어쩌다가 소아과에 왔네요. 하하.”

-통상 이런 질문을 하면 ‘아이가 좋아요’라고 하는데.

“동기들이 ‘서려경이 소아과를 간다고? 진짜 안 어울린다’고 했어요. 제가 아이들에게 ‘오구, 오구’ 하는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신생아 중환자실은 잘 맞아요. 특수성이 있으니까요.”

-요즘 소아과 지원율이 낮아요.

“바보가 아닌 이상 스트레스 많고 보상 적은 곳을 왜 가려고 하겠어요. 소아과 전문의 따고도 성형외과, 피부과에서 페이닥터하는 친구들도 있어요.”

-심각하네요.

“피부과에서 100만원 내는 건 안 아까우면서 소아과에선 1만~2만원 나오면 난리가 나요. 진료를 할 수 없게끔 전화해서 따지죠. 착한 친구들이 현장에서 인격이 다 변해요. 수명이 단축되는 느낌을 받아요. 시스템이 변해야 합니다.”

-나중에 개업할 생각도 있나요?

“저는 대학병원에 있을 생각이에요. 여기를 나간다면 저도 소아과를 계속할지, 다른 선택을 할지 모르겠어요.”

-의사로서 가장 보람된 일이라면.

“제가 있는 신생아중환자실은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 아기들이 많아요. 제가 맡은 아기가 극적으로 좋아지고 퇴원하고 나중에 걸어서 진료받으러 오면 그 기분은 말로 할 수 없죠.”

-의사 서려경과 복서 서려경, 하나만 택한다면요?

“더 애정이 가는 건 복서예요. 하지만 먹고사는 일이 중요하잖아요. 지금까지 의사를 하려고 들인 노력이 너무 커요. 이제 의사는 할 만한데 복서는 계속 힘들 테니까 지금은 의사가 낫죠.”

-직업 복서는 돈 벌기 쉽지 않죠?

“진짜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가 돼야만 벌 수 있는 구조예요. 파이트 머니 개념인데, 이번에(태국 선수와 맞붙은 세계 타이틀 매치 전초전) 200만원 받았어요. 그나마 좀 유명해서요. 그 전엔 20만원, 40만원 이렇게 받았던 것 같아요. 몇 달 준비해서 고작 이 정도죠.”

"복싱의 기본은 잽이에요. 끝까지 뻗어야 돼요. 맞으면 저도 아픈데 계속 맞다 보면 맷집이 늘어요."  

 


◇이제는 세계 챔피언이 꿈


그녀의 눈은 링 위에서 더 빛이 난다. 노려보면 쳐다보기조차 무섭다. “제가요? 저는 제가 그런지도 몰랐네요. 사실 아무 생각이 없어요. 맞기 싫으니까 빠르게 집중하느라 그런 것 같아요.” 그녀는 선천적으로 한쪽 발가락이 네 개뿐이다. 발 사이즈도 양쪽이 1cm 차이가 난다. “친한 친구들도 몰라요. 숨겼죠. 그런데 다 극복했어요. 이제 어렵지 않게 다 얘기해요. 다들 이런 상처쯤은 갖고 있잖아요.” 유명해지니까 정계 입문을 권유받기도 했다. “운동하기도 힘든데 정치요? 저는 복잡한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단칼에 거절했죠.”

-정계에서 혹시 영입 제안이 왔나요?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요. 얼마 전에 전화를 받았어요. 누가 연락이 와서 정계 입문? 이런 처음 듣는 말을 했어요. 저는 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

-사람 일은 모르잖아요.

“저는 운동하는 사람이에요. 그래도 나중 일은 모르긴 하죠. 지금으로선 정치는 절대 안 할 것 같긴 합니다.”

-아직 미혼인데요.

“결혼은 해야죠. 그렇다고 막 아무하고 하고 싶진 않아요. 그런데 남자를 만날 일이 없네요. 도대체 어디서 만나죠? 하하. 저더러 눈이 높다고 하는데 그건 아니거든요. 듬직하고 아빠 같은 쿨 가이를 좋아합니다.”

-롤모델은 있나요?

“세계적으로도 여자 선수는 별로 없어요. 일본의 이노우에 나오야를 가장 좋아해요. 움직임, 타이밍 모든 게 완벽한 선수죠. 최대한 배우고 싶어요.”

-언제까지 복싱을 할 건가요?

“세계 4대 복싱 기구 중 하나만 따도 찐이거든요. 그런데 관장님은 통합도 가능하다고 해요. 마음이 정해지고 그 목표를 이루면 저는 딱 뒤돌아서 나올 것 같아요.”

-MZ 친구들과는 다른 삶인데요.

“그러니까요. 오래 남지 않았어요. 1~2년 안에 결정짓고 빠져나와야죠. 원래 알코올중독이란 소릴 들을 정도로 매일 술을 먹었거든요. 주량은 소주 세 병. 지금은 경기 잡히면 몇 달이고 술은 입에 안 대요.”

-특별히 몸보신하는 음식이라면.

“다 잘 먹어요. 전주 사람이다 보니 엄마가 음식에 대한 긍지가 있어요. 엄마가 와서 밥해주면 다 잘 먹습니다.”

-의사인데 따로 먹는 약은?

“저는 영양소를 약으로 채우지 않아요. 고기 등 음식 위주로 먹지, 강박적으로 하진 않아요. 감기 걸려도 병원 안 가고, 운동하다가 다쳐도 파스 한번 붙여본 적 없어요.”

-왜죠?

“크게 의미 없다고 생각해요. 시간이 지나면 다 이겨내게 돼 있거든요.”

 

 


서려경의 목표는 지금 하나다. 세계 챔피언. “이겨야만 하죠. 이제 물러설 곳이 없어요.” 복서로서 이루고자 하는 걸 이루고 난 뒤에는 또 무얼 할지 벌써 행복한 고민도 한다. “다이빙을 좋아해요. 한번은 제주도에 가서 다이빙을 하다가 정착할까 심각하게 생각했어요. 그사이에 복싱에 빠져서 이렇게 됐지만요. 복서 은퇴하고 나면 일본, 필리핀 같은 데 가서 열대 과일 먹으면서 원 없이 바다에 뛰어들어 쉬고 싶어요.”

프레임의 충돌

 


< 중앙일보, 진중권 광운대 교수, 2023.12.28 >

 



“완벽한 검찰공화국의 수립을 위한 포석이 놓였다. 이제 ‘당, 정, 청(=용)’이 모두 검찰 출신에 의하여 장악되었다. 2019년 검찰 쿠데타가 시작되었다고 문제 제기했을 때 과한 규정이라고 동의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이제 앞다투어 ‘검찰 쿠데타’란 말을 쓰고 있다.” 조국 전 장관이 제 SNS에 올린 글이다.

총선을 앞두고 프레임의 전쟁이 시작됐나 보다. 민주당이 무기로 선택한 것은 ‘검찰 쿠데타’라는 프레임. 실제로 대통령도 검사 출신인데 당 대표(비대위원장)마저 검찰 출신으로 바뀌었다. 거기에 당·정·용의 여기저기에 검찰 출신이 즐비하니, 야당으로부터 ‘검찰 쿠데타’나 ‘검찰독재’라는 비아냥을 들을 만도 하다.

이 프레임은 문학적 성격을 띤다. 민주적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은 ‘쿠데타’가 아니다. 검사 출신의 과다기용은 ‘편중 인사’일지는 몰라도 그걸 ‘독재’라 부를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검찰 쿠데타’는 프레임이라기보다는 수사학에 가깝다. ‘개새끼’라는 말을 생물학적 분류에 사용하지는 않지 않은가.

게다가 ‘검찰 쿠데타’의 주역이 누구던가? 검찰총장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것은 민주당 정권이었고, 일개 검사장을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 역시 법사위 소속 민주당의 의원들이었다, 사실 민주당의 ‘처럼회’야말로 제2의 검찰 쿠데타를 획책하는 21세기 ‘하나회’라 불러 마땅하다.

검찰의 정치화를 막겠다며 시작한 검찰개혁. 그 명분을 자기들 비리와 범죄를 덮는 데에 악용하다 아예 검찰에 나라를 갖다 바쳤으면 자성이나 할 일. 그런데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생쥐도 시행착오를 통해 배운다는데 영장류씩이나 돼서 오류로부터 배우지를 못하니, 종(種)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민주당의 ‘검찰 쿠데타’ 프레임에 국민의힘은 ‘포스트 운동권’으로 맞선다. 조국 사태, 오거돈·박원순·안희정의 성추행, 은수미의 직권남용, 윤미향의 공금 횡령, 노웅래의 뇌물수수, 송영길·윤관석의 돈 봉투 살포, 이재명·김용·정진상·이화영의 대형 토착 비리. 그 잘난 민주투사들의 민낯을 보라.

그러니 이런 말을 듣는 것이다. “중대범죄가 법에 따라 처벌받는 걸 막는 게 지상 목표인 다수당이 폭주하면서 이 나라의 현재와 미래를 망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그런 당을 숙주 삼아 수십 년간 386이 486, 586, 686이 되도록 썼던 영수증 또 내밀며 국민 위에 군림하고 가르치려 드는 운동권 특권정치를 청산해야 합니다.”

한동훈이 등판하자 민주당에선 ‘한나땡’이라며 짐짓 여유를 부린다. 그런데 적어도 말의 전쟁에서 민주당 정치인들은 승산이 없어 보인다. ‘암컷’, ‘놈’ 등 막말에 ‘대통령 탄핵’, ‘계엄선포’ 등 극언을 남발하는 처참한 언어능력으로 루쉰과 처칠을 인용하는 수준의 언어 감각을 상대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 프레임의 대결을 말싸움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거짓말쟁이가 거짓말쟁이를 거짓말쟁이라 부르는 시대에는 참말쟁이든 거짓말쟁이든 모든 말쟁이에게 짜증이 나기 마련. ‘운동권 청산’이라는 말의 낙인효과보다 중요한 것은 그 프레임이 한갓 수사학이 아니라 현실의 기술임을 입증하는 실천이다.

민주당 사람들이 영화 한 편(‘서울의 봄’)에 잔뜩 고무된 것은, 이제 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아득한 과거에서, 영화라는 허구에서 찾는 신세가 됐음을 의미한다. ‘검찰 쿠데타’라는 생뚱맞은 표현도 현실에 영화를 투사함으로써 얻어진 것. 산업화의 뒤를 이어 민주화의 시대도 막을 내린 것이다.

문제는 다음이다. 민주당에서는 세대교체에 실패했다. 국민의힘은 이준석 대표를 내침으로써 회춘의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렸다. 다시 70대 80대, TK 정서에 갇힌 당은 위기에 빠졌고, 결국 적금 깨서 생활비 대듯이 대선 카드를 당겨쓰는 처지가 됐다. 경위야 어쨌든 국민의힘은 또 한 번 기회를 맞았다.

‘포스트 운동권’의 프레임은 상대를 멋지게 날려버리는 말솜씨가 아니라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보수를 기획하여 그로써 민주당을 정말 낡아 보이게 하는 실천을 통해 그 올바름이 입증된다. 하지만 어떻게? 힌트는 그가 장관 시절 가끔 보여주던 탈진영, 탈권위의 언행에서 찾을 수 있다.

쉬운 일은 아니다. 당도 그렇고, 대통령도 그렇고, 사실 바뀐 것은 하나도 없잖은가. 그저 당의 얼굴 하나만 바뀌었을 뿐. 지난 1년 반 동안 경험한 나라 꼴은 한국 보수의 한계를 보여준다. 새 비대위원장에 대한 지지자들의 희망은 그 한계를 돌파할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에 대한 기대이리라.

길이 아닌 것은 ‘함께’ 가야 길이 된다. 과연 그렇게 만들 수 있을까? 아무쪼록 가지 않은 길을 가기로 한 그가 현실의 저항에 좌절하지 않기를, 한갓 분식(粉飾) 위원장, 즉 보수의 흉한 얼굴을 가리는 일회용 마스크로 소모되지 않기를 바란다.

전영애 교수의 '여백서원' 이야기

 

< 조선일보, 전병근 기자, 2015.09.26 >

 



“무어 거창하게 ‘공동체의 이상’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고, 세상이 너무도 각박해서, 아끼는 귀한 젊은이들마저 부대껴 마모되지 않기를 소망했다. 그런 이들이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곳, 잠시라도 숨 돌리고, 자기도 돌아보고 세상도 돌아보는 그런 자리를 하나 만들고 싶었다.

저 맑고 귀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굳게 서주기를, 저 혼자만 살겠다고 남들을 밀쳐내는 것이 아니라 저도 살고 남도 살리는 지혜를 깨쳐주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것이 서원을 짓는 이유이기도 하다.

콘도며 펜션, 리조트, 온갖 연구소도 널려 있는 세상에서 굳이 서원이라는 형식을 택한 것은, 지켜가야 할 것이 많은 것 같아서였다. 우리는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다. 남들과 비교하고 남들을 탓하고 공격하는 데는 능란하지만, 사람 도리 하고 살려는 자세라든지, 옷깃 여미며 자신부터 돌아보는 자세라든지, 선공후사(先公後私)의 당연한 도리라든지…”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걸은리의 여백서원(如白書院)은 그런 마음에서 생겨났다. 전영애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의 맑은 뜻 위에 자비(自費)와 주변의 도움까지 더해 작년 10월 문을 열었다. 천정을 가로지른 대들보에는 ‘맑은 사람을 위하여, 후학을 위하여, 시를 위하여’라고 적어놨다. 서원의 모토다. 말 그대로다.

전 교수는 여기서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찾아오는 손님도 맞는다. ‘오마토’와 ‘시마토’라고 해서 5월과 10월 마지막 토요일에는 학교 수업으로 인연 맺은 제자들과 정례 모임도 한다. 책을 읽고, 밥도 해 먹고, 각자 세상 사는 이야기도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날이 새기 일쑤다.

직접 찾아가보고 싶은 생각이 든 것은 작년말에 출간된 그의 책 ‘인생을 배우다’를 읽고 나서였다. 지금까지 수십 권의 저서와 번역서를 써낸 전 교수지만 에세이집으로는 첫 책이다. 지금껏 수많은 학생과 후학들에게 가르침을 전해온 그가 ‘살아오면서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로부터 배운 것들’을 일기처럼 적어놨다. 한 부분을 옮겨보면 이렇다.


괴테 탄생 250주년이던 해 여름,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기념 학회에서였다. 바이마르 괴테학회 재정 감사였던 홀레 씨는 사람들을 아끼고 인연을 중히 여기는 분이었다.

몇 해 전 성탄절 무렵, 나는 그 댁을 찾아 격식을 갖춘 식탁에서 홀레 씨 내외와 함께 식사를 했다. 편찮으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홀레 씨는 그날 평소와 다름없이, 아니 더욱 단정하게 정장을 하고 식탁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마치셨다. 후식을 들 차례가 되었는데 정중하게 아주 미안해하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나중에 들으니 당시 홀레 씨는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어 심폐기를 달아야 하는 상태였다고 한다. 며칠 뒤 세상을 떠나셨다… 그런 위중한 상태로 아무 일 없다는 듯 손님과 정중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의 메인 코스를 마치신 것이다.

서울의 학교로 돌아오니, 책 200여 권이 담긴 상자들이 항공우편으로 도착해 연구실에 높이 쌓여 있었다. 나는 말을 잃었다. 홀레 씨가 임종을 앞두고 정리를 해서 보내신 것이다. 내가 괴테 공부를 한다고 괴테의 ‘서·동 시집’ 초판본(1819년), ‘파우스트’ 희귀본을 전해 주셨는데, 이제 그와 같은, 그 가치를 평가조차 할 수 없는 귀중본들이 담긴 상자들이 또 온 것이었다. 다들 훌륭한 사회인들인 당신 자녀들도 있는데 홀레 씨는 가장 귀중한 책들을 내게로 보내셨다. 그 책들을 누구에게 보내야 가장 귀하게 읽히고 잘 보관될 것인가를 많이 생각하신 것 같았다… 그 집에 쌓인 수많은 편지를 보고 여러 일화를 들으면서 그의 생애가 얼마나 아름다워 보였던지.

나는 홀레 씨 말고도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보여준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 삶 자체로 기쁨이고 선물인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얼마나 든든한지. 그들의 아름다운 삶을 전하고 싶은 욕심, 어쩌면 그것이 이 책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30년 가까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젊은 시절 나는 내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리라고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저 무얼 좀 배우고 싶었고, 그냥 무슨 수 쓰지 않고 내가 바르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보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세상이 무법천지 같아 살아가기가 막막하고, 무슨 수든 쓰지 않고는 못 살 듯하지만, 살아보니 바르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도 살아진다. 남을 배려하고 격려하며 살면, 조금 더 잘 살아진다. 쓸데없는 계산하느라, 남들과 비교하느라 힘과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면 제법 많은 것을 이룰 수 있기도 하다. 내가 거쳐 온 시간이, 내가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게 했다.

 


찾아가서 그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기로 했다.

서원은 서울에서 차로 1시간 반쯤 걸리는 곳에 있었다. 마을 주민회관 앞에 이르러 전화를 하니 먼 발치에서 전 교수가 마중을 나왔다. 목과 팔 쪽이 늘어진 줄무늬 스웨터에 무릎이 튀어나온 작업용 바지 차림. 교수님의 아우라는 어디로 가고, 밭 매다 온 시골 아낙 같은 분이 먼 데서 온 손님을 반겼다.

“여기가 우전(友田)입니다. 손님들이 오면 여기서 찻잎을 따서 갖고 들어갑니다. 그걸 뜨거운 물에 우려내 대접하지요.” 서원 입구 자그마한 주차장 옆에 그보다 작은 텃밭이 있었다. 전 교수는 우뚝하게 자란 식물의 잎을 한움큼씩 따서 챙기고는 서원으로 앞장섰다.

입구에 우람한 비석이 가로놓여 있었다. ‘如白서원’이라는 글자를 새긴 뒷면에는 이름들이 빽빽하게 적혀있다. 공사에 참여한 인부들이다. 와공, 구들공까지 적어 넣었다.

“여기 있는 것들은 사연이 없는 게 없어요. 이 비석은 이웃에 조각가 한 분이 있는데, 사모님이 작품에 쓰라고 준 돌을 이곳 서원 비석을 장만하는 데 내놓으셨어요.” 함께 걷는 내내 전 교수의 ‘사연’이 이어졌다.

“여기는 나무 고아원이에요. 그냥 보면 번듯한 것들을 사서 심은 것 같지만, 계단 틈 같은 곳에 나서 제대로 자라지도 못하는 것들을 구출해서 옮겨 심고 한 것들이 많아요. 한 10년 되니까 이렇게 많이 컸어요.”

나무들도 이름이 있다. 아버지를 기린 여백송, 잔가지가 많은 후학송, 어머니를 생각하고 심은 모송, 가운데가 구불구불한 시송, 괴테송… 그야말로 작은 식물원이다. 뒷마당은 제법 널찍해서 공연을 하거나 캠프파이어도 할 수 있게 돼있다.

-여백(如白)이 무슨 뜻인가요?

본래 아버지 호입니다. 성품이 맑다고 친구분들이 지어준 거지요. 저는 이 서원이 말 그대로 ‘여백 같은 공간’인 동시에 ‘맑은 사람들을 위한 집’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서 이름을 따서 붙였습니다.

아버지가 2010년 12월 돌아가실 때 91세였어요. 킬리만자로는 세계 두 번째 고령 등정 기록을 세웠고, 돌아가시기 전 해까지 매년 에베레스트에 오른 분이셨지요. 일찍 부친을 여읜 아버지께서 증조부(부친의 할아버지)를 많이 따랐는데 증조부께서는 향리에 아름다운 정자를 지었어요. 증조부는 아주 잠깐씩 도산서원과 소수서원 원장도 지낸 선비였어요.

구석구석에 싯구를 적어 놓은 돌판들이 보인다. 독일 현대 시인 라이너 쿤체의 시들이라고 했다. 뒤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전 교수의 독일시 스승이기도 하다.

5분여를 올라가니 자그마한 정자가 보인다. ‘詩亭(시정)’이라고 적혀있다. 현판 글씨는 부친의 것이다. “아버지가 시(詩)라는 한자어를 좋아했어요. 문자를 쪼개 보면 말씀(言)인데, 흙(土)에서 나와 마디(寸)만 한 것이라는 뜻이 되잖아요. 시라는 말이 함축한 것을 잘 나타낸 것 같아요.”

“여기서 10년 동안 글을 썼어요. 처음에는 허허벌판에 이것 하나만 지어서 건너편 마을의 집과 여기를 왔다갔다했지요. 저기 있는 제 책들이 다 여기서 쓴 것들이지요. 전기도 수도도 없이 깜깜한 곳을 왔다갔다 했어요. 밤이면 무섭기도 했어요. 고라니도 자주 왔어요. 그래도 저한테는 글 쓸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어요.”

이 ‘시정’은 독일에도 하나가 더 있다. 남동부 도나우 강가 파사우라는 작은 마을이다. 앞에서 말한 전 교수의 시 스승 라이너 쿤체의 집이 있는 곳이다. 쿤체 시인이 사후에 시인 박물관으로 개조하려고 생각했던 자택 뜰에 귀한 자리를 얻어 한옥 정자를 지었다.

한국에서 장인들이 설계해서 지은 것을 다시 분해해서 배로 실어 날라 현지에서 짜맞추는 ‘대역사’를 거쳤다. 그곳 정자에도 똑같은 ‘시정’ 현판을 걸었다고 했다. 전 교수는 그 과정에 오간 편지와 기록들을 한 권의 책으로도 엮었다.

이윽고 언덕 위 전망대에 이르렀다. 공사용 가건물처럼 철골로 얽어올렸다. 외관은 그리 볼품이 없지만 올라와 보니 그럴듯하다. “여기 찾아오신 분들이 더울 때는 이곳에 올라와서 시원하게 전망도 즐기라고 지어 올린 거예요. 아끼는 제자들 가끔 와서 숨도 고르기도 하고. 일출 때는 여기 풍경이 기가 막혀요.”

땀도 식힐 겸, 이곳에 주저앉아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인생을 배우다’가 첫 에세이집이라구요. 제목처럼 인생에서 배운 지혜랄까 철학 같은 것이 잘 나와 있더군요.

이곳 서원 개관을 기념해서 냈어요. 저는 요즘 제 약력을 써놓고 보면 너무 번듯해서 겁이 나는데, 사실 저는 굉장히 어렵게 공부했어요. 어릴 때 경북 영주에서 35리나 떨어진 산골에서 살았는데, 국민학교 때 다니던 등하교길을 30년이 지나서 차로 한번 가보니 왕복 11.6킬로미터가 되더군요. 비가 와서 외나무 다리가 떠내려 가면 그날 학교도 못 가곤 했어요.

부모님의 삶도 참 파란만장했지요. 아버지는 장손이어서 한학을 증조부한테 배우다가 12세에 학교에 들어가서 2학년 때 결혼을 하고는 두루마기를 입고 학교에 다녔다고 해요. 집안에서 그래도 너는 장손이니 신학문을 해야 한다고 해서 뒤늦게 서울 휘문중고등학교를 갔어요. 졸업 후엔 일본 와세다 대학에 들어갔는데 2차대전이 났고, 해방 후에는 서울대 정치학과에 갔는데 또 6.25가 터졌지요.

아버지가 그때 정치사회 상황에 환멸을 느끼고 고향에 내려와서 교사로 일하던 중에 5.16 쿠데타가 났어요. ‘군사혁명’ 초반에는 기대가 컸기 때문에 정치를 해보려고 하시다가 다시 관뒀어요.

그 사이 어머니도 말도 못하게 고생을 많이 하셨지요. 16세에 결혼하고는 곧장 큰 집안 살림을 꾸려가야 했으니까요. 결혼 18년 만에야 저를 낳았고, 나중에 8년 차 나는 동생이 생겼어요. 저는 국민학교 5학년을 마치고는 서울에서 혼자 살았어요.

-어떻게 그 나이에 혼자 살게 됐지요?

어느날 아버지가 부르더니 “너 서울 가서 공부 안 할래?” 하셔요. 속으로 너무나 놀랐는데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네” 했어요. 그 다음 날로 아버지가 서울에 데리고 가셨어요. 그때 서울은 제게 지금 미국, 독일보다 훨씬 멀게 느껴졌어요. 6시간 동안 통통거리는 기차를 타고 가서 서울에서 6학년부터 혼자 살았지요. 아버지는 고향집으로 내려가서는 제게 생활비를 부쳐주셨어요.

-어린 나이인데 겁이 안 나던가요?

그냥 살았어요. 겁도 모르고.

-원래 어릴 적부터 당찼나 보지요?

아뇨, 순 바보예요.(웃음) 그 뒤에 제가 중 3때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셔서 서울로 왔어요. 병원 있는 데로. 그때 어머니도 수발하느라 고등학교 때 좀 힘들었지요. 그래도 대학은 잘 들어갔어요.

-혼자서도 공부를 잘하셨나 보네요.

아니에요. 그때 일 중에 지금도 안 잊히는 게 있어요. 경기여중 시험을 보고 왔더니 국민학교 담임선생님이 남대문 시장에 데려가서 편한 바지를 사주셨어요. 그때는 체력장을 봐야 했는데, 다음날 달리기 잘하라고 격려해주신 거지요. 그거 입고 열심히 뛴 기억이 나네요.(웃음)

-대학 때 독문학과에 들어간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18,19세 때 뭘 알았겠어요? 그때 집에서 돈을 부쳐주시는데 다른 데는 쓸 줄을 몰라서 당시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을 족족 샀어요. 혼자 있으니까 책을 참 많이 봤어요. 이것저것 많이 읽었어요.

문학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선명했는데, 국문학은 좀 아는 것인 것 같고, 영문학은 많이들 하는 것 같고, 경기여중고 다닐 때 제2 외국어가 독일어였어요. 또 릴케니 괴테니 이런 독일 작가들에게 매료가 됐지요.

-그때는 서울대에 지방 출신이 많았지요?

그럼요. 가난한 지방 유학생이 많았아요. 캠퍼스가 동숭동 대학로에 있을 때인데, 도서관 계단 밑에 매점이 있었어요. 학생들이 멀건 콩나물국물만 사서 밥만 싸온 도시락이랑 같이 먹곤 했지요.

계단 위에 올라가면 바로 철학과가 있었는데 누가 목청 높여서 플라톤이 어쩌고 하던 시절이었지요. 그 기억 때문에, 처음 제가 독일에 공부하러 갔을 때 딴 사람들은 대학식당 밥이 맛없다고들 했는데 저는 그 친구들 생각이 나서 목이 메었어요.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요?

대학원까지 줄창 6년은 공부를 잘 했는데 그 다음 길이 없어진 거예요. 왜냐하면 유학을 가야 하는데 그때는 박사과정 원서도 함부로 못 냈어요. 서열이 있어서. 유학을 가려면 독일학술교류처 장학생에 선발이 돼야 했어요. 정원이 전국에서 한 명이었어요. 보통은 학과 조교를 하고 나면 시험을 봐서 가곤 했어요.

저희 학년 전체가 20명에 여학생은 저 혼자였는데, 졸업 때 성적이 좋아서 무급 조교 1년을 했어요. 그 다음에 유급 조교가 될 차례였는데, 어떤 남학생이 제대하고 복학을 하면서 그 자리를 차지한 거예요. 갑자기 저는 길이 끊기면서 희망이 사라진 거예요. 그때는 여자들은 ‘논외’였던 시절이었어요.

그 뒤로 한 5년을 그냥 있다가, 이대로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학교에 가봤더니, (그때 서울대는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상태여서) 온통 낯선데 독일 유학생 선발 공고가 떡 붙어 있는 거예요. 마감 며칠 전이었는데 지원을 해버렸어요.

다급한 마음에 조교 우선 지원 관례 같은 것도 안중에 없었지요. 시험 결과가 나왔는데, 제가 되고 학과 조교는 떨어져버린 거예요. 붙었으니 안 갈 수도 없고, 학교에는 (관례를 어긴 셈이니) 얼굴을 내밀 수 없는 상황이 됐지요.

그때는 캠퍼스에 최루탄이 터지고, 학생들은 시국사범으로 잡혀 가고 하던 시절이었어요. 저는 도서관에 앉아 있는데도 참 불편하고 염치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 또 마침 (대학 졸업하고 결혼 후에도 한동안 없던) 애가 생겼어요.

그래서 처음 독일에 가서는 세 학기만 하고 왔어요. 2개월짜리 아이를 두고 가서 오래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때 ‘불경죄’에다 이런저런 사연이 얽혀서 도무지 희망을 갖기 어려웠어요.

석사 끝내고 10년을 낭패 속에서 지내는 동안, 혼자서 있는 책은 다 읽고 번역했어요. 번역서를 출판한다는 개념도 없었어요. 그때는 컴퓨터가 나오기 전이어서 한 번 번역하려면 원고를 타자기로 한 다섯 번은 쳐야 했어요. 손쉽게 교정이 안되니까. 하도 타이핑을 많이 해서 저녁에 젓가락질이 안 될 정도였어요. 아이도 어렸을 때라 참 힘들었어요.

그래도 지나고 보니 그때 열심히 읽은 게 결국 힘이 되더군요. 인문학이라는 게 결국은 읽는 힘 같아요. 나중에 독일에 가서 보니, 거기서도 선생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독일 교수처럼 많이 읽지는 못하지만 더 정밀하게 읽을 수 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거나 놓치는 것도 꼼꼼하게 볼 수 있으니까요.

그때 번역해놓고도 아직 출판 안 된 게 많아요. 한 60-70권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때는 공부할 기회만 있으면 어디든 가서 배우려고 했어요.

그러다가 전두환 정부 때 대학을 많이 늘리면서 서울대 대학원에 응시하라는 연락이 왔어요.(전 교수는 서울대에서 독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에 대학이 난립하면서 작은 사립대에 가서 11년간 있다가 1996년 서울대에서 오라고 해서 가게 됐어요.

-2011년에 ‘괴테금메달’을 받아서 화제가 됐지요?

너무나 뜻밖이었어요. 독일 바이마르 괴테학회라고 있어요. 금년에 130주년 되는 유서 깊은 학회입니다. 거기서 괴테 연구자들 대상으로 격년제로 주는 상이에요. 100년쯤 됐는데 그때까지 외국인이 받은 일은 거의 없었어요. 나중에 찾아봤더니 동양인으로는 제 앞에 일본인이 한 명 있었고, 제 뒤에 중국인이 한 명 받았어요.

그동안 제가 발표한 논문과 괴테 시를 전부 번역한 것, 관련 저술 낸 것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결과였어요. 그때 놀라서 수상 연설에서 “이제 비로소 이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춰야겠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2011년 6월 시상식 때 테렌스 제임스 리드 옥스퍼드대 교수는 축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 교수가 번역한 작품들의 풍부한 양과 폭을 생각하면 그것은 가히 하나의 범례적인 도서관입니다. 놀라서 자문하게 돼요, 한국에서는 하루가 몇 시간인가 하고요.”)

-연구 업적으로 큰 상을 받은 그 해에 ‘서울대 교육자상’도 받으셨지요? 지금도 학생들 사이에서 강의가 인기 높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제가 좋아서 하는 수업이에요. 서울대에 부임한 것이 1996년이었어요. 가자마자 그 다음 학기부터 시작한 ‘독일 명작의 이해’를 지금까지 하고 있어요. 연구 학기 말고는 빠지지 않고 매년 했어요.

보통 강의는 똑같은 것을 두 번 하기도 어렵거든요. 하지만 그 수업은 달라요. 제가 사회만 보고 수업은 학생들이 알아서 하니까. 한 학기를 마치고 나면 마치 제가 큰 부자가 된 기분이 들어요. 여기 서원도 그 수업을 들은 제자들을 위해 만든 거예요.

(2011년 서울대 교육자상 수상 감사 연설에서 전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학생들에게 받은 것은 정말 얼마나 많은지요. 한 학기가 지나면 처음에는 그저 ‘학생’이던 한 사람 한 사람이 그야말로 조각처럼 뚜렷해져 있는 것을, 앞으로 우리 사회 이곳저곳에서 한 역할을 다부지게 해갈 든든한 사람들의 모습이 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젊은이들의 그런 놀라운 성장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축복인 것 같습니다… 제가 얼마나 부자인가요.”)

오월 마지막 토요일, 시월 마지막 토요일을 ‘오마토’ ‘시마토’라고 해서 모입니다. 저는 오는 사람들을 다 알지만, 온 사람들끼리는 서로 다 몰라요. 그래도 같이 있다가 밤늦게 제가 잠이 들면 그 사람들끼리 밤새 얘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 수업을 통해 너무나 좋은 사람들을 많이 알수 있어서 감사하고 황공할 따름이지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누군가 걸출한 인물이 나와서 크게 바꿀 수 있으면 좋겠지만, 사실 어려운 일이고 위험한 일이기도 하잖아요. 저는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너무 마모되지 않은 채 세상에 온전히 좀 남아 있으면 그게 바로 세상이 나아지는 길이 아닐까 싶어요. 서원 일도 그래서 시작한 일이에요.

-책에서도 수업을 들은 다른 학과 학생들과의 인연을 많이 언급하셨더군요.

수업에서 사실 저는 별로 하는 게 없어요. 학생들이 읽어온 책을 가지고 진행해요. 그 책이 아주 중요한 것이면, 제가 몇 마디 하고. 아니면 내가 잘 모르는 경우엔 그냥 넘어가기도 하고. 별도의 커리큘럼도 없어요.

학생들에게 “에베레스트 올라갔다 온 사람이 관악산을 못 가겠느냐” 하면서 파우스트를 읽힙니다. 혼자서는 읽기 어려운 작품이어서 조별로 역할을 배정해 한 달 간 읽게 합니다. 다들 즐겁게 읽고 조별로 회의록을 씁니다. 저는 회의록을 보고 거기 나온 질문이나 읽기에 도움 될 말만 조금 거듭니다.

학생들은 독회가 끝나면 거기에 대해 글도 씁니다. 마지막에는 이 서원으로 와서 다같이 몇 십 명 둘러 앉아서 다 읽습니다. 그러고는 조별로 밥 해 먹고 파우스트의 한 장면을 공연합니다. 저기 무대는 그래서 만들어 놓은 거예요. 여기 시정에 와서 시도 한 편 읽고.

그 다음 중요한 독일 작가들을 정해주면 학생들이 내키는 대로 작품을 골라 읽습니다. 책 읽는 즐거움을 일깨워주는 거지요. 무엇보다 읽고 난 후에는 반 쪽이라도 글을 쓰게 합니다. 학생들끼리도 굉장히 가까워집니다. 학기말에는 각자 책을 만듭니다. 얼마나 정성껏 만드는지 몰라요.

전망대에서 내려 오는 길에 ‘괴테 오솔길’이 보였다. 그 길을 따라 시비가 놓여 있다. 노년기 시들이다.

-괴테는 만년 청년이었던 것 같아요.

파우스트에 얽힌 유명한 일화가 있지요. 60년 동안이나 쓰고, 죽기 바로 전 해 여름에 “이제는 다 끝났다”면서 밀랍으로 봉인을 해서 넣었다가, 죽기 바로 전(3월 20일)에 다시 꺼내서 또 고쳤다고 해요.

이제는 여백서원 지붕 안으로 들어와 큰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아까 대문 앞 텃밭에서 따온 찻잎으로 우려 낸 차를 앞에 두고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전 교수는 깜박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난 듯 가서 보따리를 들고 왔다.

서원에는 귀중한 글들이 있다. 내 어머니가 읽으신 책. 반가에서 태어나 학교 문턱에도 못 가셨고,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생애를 사시면서도, 책만 보면 일일이 한지에다 필사를 해서 그것이 낱장이 되어 흩어지도록 읽어 다 외우셨던 어머니의 그 간절한 필사본들을 젊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책이 그토록 귀하게 읽혔던 전통을 알려주고 싶다.

또 시 선생님이신 라이너 쿤체 시인의 책들. 내 작은집 팩스로 부쳐주신 수백 통의 가르침이 담긴 편지들, 내 수업 듣는 학생들이 한 학기가 끝날 때면 어김없이 정성껏 만들어내는 책들, 그들이 세상에 나가서 만들어 오는 책들.. (‘인생을 배우다’ 중에서)

여기 온 분은 이걸 꼭 보여드립니다. 어머니가 어릴 때 필사한 책이예요.

-선생님 학구열이 어머니를 빼닮은 건가 보네요.

어휴, 저는 발치도 못 따라갑니다. 어머니는 말도 못하게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나이 열여섯에 결혼하시고 큰 살림을 꾸려가야 했지요. 요즘은 책이 흔하디 흔해졌지만, 저희 어머니는 학교 문턱에도 못 갔어요. 그 와중에도 책만 보면 이렇게 죄다 베껴 썼어요. 보세요. 너덜너덜하잖아요. 이렇게 되도록 읽고, 읽은 책은 다 외웠어요. 열두서너 살 때였다고 해요. 배움에 대한 간절함이 얼마나 컸나 몰라요.

두루마리 가사집은 참 많은데 책으로 남은 것은 ‘강릉추월전’ 이것뿐입니다. 고생하면서 사시는 동안 이걸 읽고 외우고 하면서 견뎠던 거지요.

제가 어릴 때 육전(六錢)소설(옛 문고본)도 어머니랑 같이 다 읽곤 했어요. 저는 이런 걸 요즘 젊은 사람들한테 보여주고 싶어요. 요즘은 귀한 것을 잘 알아보지 못하고, 그것에 대한 간절함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걸 꼭 보여줍니다.

이건 제 책 서문에도 썼지만, 홀레씨가 제가 남겨 주신 장서 200여 권 중 하나입니다. 1823년본으로 굉장히 귀중한 책입니다. 여기 1819년에 출간된 괴테의 서·동시집도 있어요.

당신 자녀분들도 다 훌륭한데, 이 귀중본을 굳이 제게 남겨준 것은 이 책이 어디로 가야 가장 귀하게 보관되고 읽힐까 생각한 거지요. 여기 ‘세기의 판본’이라 불리는 1854년 파우스트본도 있어요. 사실 이런 게 도서관에 하나 있기만 해도 굉장한 자랑거리로 삼을 만한 희귀본이지요.

이 사진이 홀레씨입니다. 그분을 처음 뵙게 된 게 기차 안이었어요. 6명이 타는 칸이었는데 저와 대각선으로 맞은 편에 앉아계셨지요. 그때 바로 제 옆에 앉은 젊은 사람이 다음 교통 편인 비행기를 놓칠까 봐 굉장히 불안해 해요. 모르는 사람이지만 제가 그곳 상황을 좀 알고 있어서 위로를 했어요.

그 사람이 공항에서 내리고 난 후에 기차가 프랑크푸르트까지 10-15분을 더 가는데 갑자기 이 분이 제게 말을 걸더군요. 프랑크푸르트에 가면 히시그라벤에 한번 가보라고 해요. 그 순간 깜짝 놀랐아요. 거기가 괴테하우스의 주소였거든요. 그렇게 처음 만났어요.

그 다음 괴테 250주년 때 뒤셀도르프에서 다시 뵀는데 사모님이 같이 왔어요. 제가 그때 괴테의 서·동시집에 대해 강연했는데, 끝난 후에 당신 댁에 하룻밤 자고 가라고 해요. 고사를 하고 호텔에 갔더니 과일 바구니를 보내셨더군요. 와서 하룻밤 자고 가라는 쪽지와 함께.

할 수 없이 갔는데, 그때 제가 관심 있을 만한 책과 기사 들을 꺼내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걸 다 읽고 오느라 열하루가 걸렸어요.

-독일에 한국식 정자를 지은 일도 난관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조그만 정자인데도 사연이 얼마나 긴지 몰라요. 천안에서 지어서, 일산에 가서 소독 포장해서 부산에 가서 다시 선적했어요. 레고처럼. 문이 22짝 들어갔는데 보석상자처럼 지었지요.

(전 교수는 독일에 한옥 정자를 짓기로 결심하고 장소를 고민하던 중에 쿤체 시인의 승낙을 얻어 그의 집 뜰에 정자를 짓게 됐다. 전 교수는 이 과정에 오간 편지글과 메모, 기록, 관련 자료와 사진들을 비매품 도서로 제본했다.)

-쿤체 시인은 어떻게 시의 스승으로 삼으시게 됐습니까?

쿤체 시인은 옛 동독 출신입니다. 1960-70년대 국내에서는 금서였던 그의 첫 시집 ‘민감한 길’(1969)과 산문집 ‘참 아름다운 날들’(1976)을 제가 번역했다가 해금 뒤인 1989년에 출간한 것이 인연이었어요. 1994년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세계 독문학회에서 첫 대면한 후로 독일시의 스승으로 삼게 됐습니다.

학회 때 그분 시에 대해 발표를 했다가 우연히 그분도 그곳에 와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 “허락도 없이 시를 번역해서 책을 내서 죄송하다”고 했더니 오히려 감사하다고 하시더군요. 그 뒤로 팩스로 시를 주고받으며 제 시의 스승이 되셨습니다.

2005년에 한국에 오신 적이 있어요. 그때도 한 단체의 작가포럼 초청은 두 번이나 고사하다가, 제가 “학생들이 선생님 시를 듣고 싶어해요”라고 했더니 자비로 날아와서 낭독회를 하셨어요. 일주일 머물면서 한국에 관한 시도 열두 편 짓고 시집으로도 냈지요.

마침 지난 주에 그분 댁에 갔더니 그 사이에 귀빈이 다녀갔다고 해요. 메르켈 총리가 다녀간 거예요. 여름 휴가차 오전 10시에 와서 오후 4시에 갔다고 하더군요. 6시에 베를린에서 푸틴(러시아 대통령)과 만날 약속이 있다면서 일어났다고 해요. 총리가 휴가 때 조용히 시인의 집에 찾아오다니 놀랍지 않아요?

-이건 뭐지요?

아버지가 직접 옮겨 쓰신 증조부 문집입니다. 제 아버지는 90세까지 에베레스트에 오른 분이세요. 그 해에는 갔다오시더니 “이번엔 덜 올라갔다”고 하시더군요. 그러면서 “무슨 일이 있으면 너네는 어쩌니, 거기까지 올라오지도 못할 텐데” 하시더군요. 그때 벌써 담도암 2기말이었어요. 91세 되던 해 1월 5일 6시간 반 수술을 받았는데 결국 돌아가셨어요.

그래도 하시던 일을 다 마무리하고 가셨어요. 이게 그때 남긴 증조부 문집인데, 한학자도 아닌 분이 공부를 해가면서 다 번역을 하셨어요. 옥편 여덟 질(한 질이 스무권)을 옆에 놓고 옮겨 내려가신 거예요. 여기에 ‘울면서 피로 번역했다’고 쓰셨어요.

-왜 그러셨지요?

후손들이 읽게 하기 위한 거였지요. 가령 저만 해도 오래 전 먼 이방의 괴테 책은 줄줄 읽으면서 정작 증조부 글은 못 읽잖아요. 뭔가 이어주시고 싶은 게 있으셨던 거지요.

이것들은 제 수업을 들은 학생들이 만든 ‘나의 책’이에요. 한 학기 끝나면 한 권씩들 만들어 제출했어요. 아이디어들이 기발해요. 저는 학생들 쓴 글에다 감평을 짧게 써서 나눠줍니다.

-오마토, 시마토 모임은 사전 공지를 하나요?

전혀 없어요. 올 사람은 알아서들 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한번은 대구에서 밤 11시에 온 사람도 있어요.

-여기서 숙식도 하나 보지요?

침낭이 많이 있어요. 각자 알아서들 합니다. 여긴 자력갱생이 모토예요. 다들 빈손으로는 오지 않아요. 뭐라도 하나 들고 와서 자기들끼리 여기서 먹고, 이야기하다 자다가 합니다. 제가 하는 일은 아침에 국 끓여주는 게 유일합니다.

이곳이 정말 여백 같은 곳이 됐으면 해요. 호흡도 좀 가누고, 둘러앉아서 이야기하려면 하고, 글도 써오면 읽기도 하고, 악기가 있으면 연주도 하고. 각자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거지요. 딱딱하게 프로그램을 짜서 돌리지도 않아요.

이곳에서 생산적인 뭔가를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꼭 그게 아니더라도 와서 쉬고 책도 보고 하는 공간이 되면 좋겠어요. 그런 게 결국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이 될 테니까요. 그걸 간절히 바랬는데, 다행히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어제도 어떤 분이 오셔서 그냥 계속 책만 읽다가 가셨어요.

-독일 문학을 전공하시면서 번역서를 누구보다 많이 내셨습니다. 누구를 가장 좋아하세요?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네요. 살아있는 분으로는 쿤체 시인입니다. 평생 독학을 하다보니 선생에 목말랐는데 저는 뒤늦게 다 만났어요. 학문의 선생님은 49세에 만났고 시의 선생은 55세에 만났어요.

-학문의 스승이라면 누구 말씀인가요?

헨드릭 비루스라고, ‘괴테 서·동시집 연구’를 내신 분입니다. 독보적인 괴테 연구자이지요. 제가 그분 책도 번역했고, 에세이집에서도 따로 소개도 했지요.

(한번은 독일의 아주 조그만 시골에서 열린 주말 세미나 모임에 찾아갔다. 내가 관심 있게 읽고 있던 분야에서 독보적인 전문가인 석학이 이끄는 블록 세미나였다. 내가 -나중에 그분의 표현으로- 얼마나 눈을 반짝이며 들었는지, 휴식시간에 그분이 내 곁으로 다가와 이것저것 물으셨다. 마침 세미나 주제로 쓴 글이 있어 그 이야기도 했더니 내일 저녁에 그것 좀 발표해 보라는 것이었다…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지만 밤새 원고를 손질해서 다음 날 저녁 정성껏 발표를 했다. 이번에는 그분이 그야말로 눈을 반짝이며 경청해 주셨다. 끝나고는 아주 내 옆자리로 와 앉으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들판으로 함께 걸어나가게 되었는데, 낮이 긴 여름이라 이제 막 어스름이 내리고 첫 별이 뜨고 있었다… 처음 간 바이마르가 그때 얼마나 인상적이었던지, 나중에 내가 쓴 편지를 받은 사람들이 ‘바이마르에서 온 편지’라는 책으로 묶어낼 정도로 나는 기나긴 편지들을 썼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지나가는 소리로 그런데 그 책은 제 스물일곱 번째 책이에요, 했다. 그랬더니 그분이 느닷없이 자기가 키스를 좀 하면 안 되겠느냐고 하셨다… 장한 아이에게 아버지가 하듯이 그렇게, 내 키의 두 배는 될 법하신 분이 내 머리를 두 손으로 붙잡고 이마 위에다 가볍게 키스를 해주셨다… 사랑과 존경이 담긴 인정이었다… 나는 당시 마흔아홉이었는데, 지구가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도는 것 같았다. 그리 오래 찾던 선생님을, 학문의 스승을 이제야 만난 것이었다. 그동안은 노상 혼자 공부하다시피 지내다 보니 평생 스승을 찾아 헤매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세상의 정말 중요한 일들은 바로 외로움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런 이치를 젊었을 때는 몰랐다. 그분, 평생 찾아온 스승인 헨드릭 비루스 교수를 만난 후로 나는 정말이지 열심히 공부했다.)

-독일 문학과 문인들을 오래 공부하고 접하셨는데 어떤 특징이 있나요?

좋은 의미일 수도 나쁜 의미일 수도 있는데 생각이 많이 들어가 있어요. 물론 저는 좋은 의미로 말을 하는 겁니다. 흔히 사변적이라고들 하지요. 독일을 보면 제일 부러운 게 있어요. 어느 나라나 다 고급 문화, 저급 문화가 있잖아요.

독일도 둘 사이 간극이 크긴 한데, 고급 문화를 돌보는 사람들이 뚜렷하게 있는 것 같아요. 이른바 ‘교양시민층’입니다. 독일인 자신들도 요즘은 그 시민층이 사라진다고 개탄들을 합니다만, 그래도 우리가 보면 여전히 부럽지요.

가령 홀레 씨 같은 경우만 해도 그저 작은 개인 사업을 하는 분인데, 그렇게나 성심껏 문학을 하는 사람을 돕습니다. 저 같은 외국 학자도 그렇게 자상하게 보살피니 다른 사람은 어떻겠어요.

그분이 괴테학회 재정감사도 맡아서 했는데, 저는 그저 가끔씩 돈을 기부하는 역할인가 싶었어요. 알고 보니 그 정도가 아니라, 우선 문인들이 계산에 능하지 않은데 그런 재정회계 일을 다 해주고, 사업가들과 연결해서 후원금도 받아주는 일을 해요. 끊임없이 책도 읽고. 그렇게 문화를 지켜가는 층이 상당히 두꺼운 것 같아요. 그런 사람들이 사회의 중심이 되는데 그게 부러운 거지요.

또 늘 제가 하는 얘긴데, 독일은 위아래가 안 보여요. 독일에 있다가 미국 가면 계급사회라는 첫인상을 받는데 독일은 안 그래요. 돈 많은 부자도 분명히 있을 텐데 겉으로 별로 안 보여요.

쿤체 선생의 일화 중에 기가 막힌 게 있어요. 그 집에는 매년 좋은 와인이 와요. 한번은 낭독회를 마치고 옆 사람이랑 한창 얘기하는데, 무슨 일 하느냐고 물었더니 농사를 한다고 하더래요. “내가 망치는 있는데 모루가 없다. 그걸 구할 길 없느냐”고 했더니 알았다고 하더니, 그때가 여름인데도 큼지막한 모루를 짊어지고 쿤체 집에 찾아왔더래요. 알고 봤더니 그분이 ‘왕’(제후)이었어요.

독일에는 아직도 지방에 그런 왕들이 있어요. 왕이란 사람이 그 무거운 걸 지고 시인의 집에 온 거예요. 그러고 나서는 자신의 넓은 영지에서 나는 포도로 만든 포도주를 매년 보내준다고 해요. 아까 메르켈 총리도 그렇잖아요. 지도자가 그 귀한 휴가를 이용해 시인 집에 찾아올 생각을 한다는 게 상상이 가요?

메르켈 총리의 남편이 화학 교수인데, 좋은 시를 발견하고는 작가가 누군지 구글로 찾아보다가 쿤체 시인인 걸 알고 둘이서 휴가에 그 집에 왔다고 해요. 그것도 떠들썩하지 않게 조용히. 다녀가는 동안에도 동네 사람들은 총리가 다녀갔는지 몰랐다고 해요. 그처럼 소리 없이 문화를 지켜가고 남을 배려하는 것도 참 부러워요.

-독일에 있다 온 분들은 그곳 독서 문화를 많이 얘기하더요.

많은 사람들이 차만 타면 책을 열어요. 예전에 동독은 더 심해서 ‘독서국’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지요. 별다른 오락거리도 없고 하니 더 그랬던 거지요. 독일은 TV가 참 재미가 없어요.

-우리와는 대조적이군요.

우리는 TV가 너무 재미있어서 국민이 그것만 들여다봐서 걱정이지요. 소비도 너무 조장하는 것 같고. 사람들이 이제는TV 좀 덜 보고, 책도 좀 보고 했으면 좋겠어요. 똑같은 TV 프로그램을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보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조종되기가 쉬운 건가요. 이거 좋다고 사라고 하면 다들 사고 그러지 않나요. 뭘 하든 한쪽으로 쏠리기 쉽잖아요. 결코 건강한 게 아니지요.

-선생님께서 이런 서원을 짓고, 학생들 문집도 내게 하는 것도 다 ‘교양시민 문화’를 위한 밑거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게 독일에서는 그전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누적된 거지요. 우리는 상대적으로 희박하지만 이제라도 해야지요.

저는 젊은 아이들이 춤추고 노래만 하고 영어만 하지 말고, 일도 좀 하고 풀도 좀 뽑고 땀을 흘렸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여기 오면 다들 일을 합니다. 얼마간 노동의 기쁨도 알고 땀의 맛도 알고 그래야 개인이 잘 서고 그래야 사회가 잘 될 것 같아요.

각자 맡은 일이 힘들지만 그래도 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작은 일에도 보람을 느끼고, 또 남의 일도 도와주면 좋겠어요. 자꾸 남들 따라가려고 하고, 남을 누르려고 들면 어떻게 되겠어요. 남들은 불특정 다수이고 나는 혼자인데 어떻게 감당이 되겠어요. 따라가려면 무리가 생길 수밖에 없고, 점점 스스로 불행해질 수밖에 없지요.

나 나름의 삶 안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것, 그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는 시간이 있어야지요. 지금도 저 어린 친구들이 와서 열심히 꽃도 심고 해요. 나중에 와서 내가 심고 키운 것이 자란 걸 보고 하면 기분 좋거든요.

-“20대에 일찍부터 내가 하는 대로 살아보겠다, 그래도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책에 쓰셨더군요.

남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그냥 별 잔 재주, 잔 계산 없이 살아도 잘 살아진다는 것을 내가 해 보이고 싶었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고집이었을 거예요.

힘든 시절에도 그랬어요. ‘이 어둠이 뭔지’ 알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냥 막 읽었어요. 다른 건 모르고 내가 할 줄 아는 것은 책을 읽는 것이니까. 거기서 뭔가를 찾아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사실은 그 책을 쓴 사람들도 알고 보니 다들 숱한 고생 끝에 그 높이에 이르렀더군요. 그래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거지요. 정말 다들 힘든 인생을 그렇게 감내하고 살았구나, 그런 생각을 볼 수 있었어요.

책을 읽을 때마다 내가 정말 얼마나 부자인가 싶었어요. 책을 쓴 사람과 그것을 읽는 수많은 사람들과 엄청난 유대감이 느껴지거든요. 그러니 힘든 것도 좀 의연하게 감당하게 되고.

글을 읽을 줄 알아서, 그 많은 것들을 읽을 수 있었고, 그럼으로써 그 많은 좋은 사람들을 직간접으로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했어요. 그래서 나중에는 내가 젊은날에 가졌던 약간의 불만 따위는 허황하다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저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우뚝우뚝 서서 같이 가야 잘 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자기가 삶에 자부심이 있어야 남도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자기 본업이 잘 안 되는데 딴 걸로 메우려고 할 때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흔히 남을 도와준다면 자선사업이나 고아원 같은 거창한 일을 생각하는데 그런 것도 있겠지만, 나중에 떼돈 모아 희사할 생각하지 말고, 지금 일상 생활 중에서 한 사람한테 말 한 마디라도 나쁘지 않게 하고 잘 대하는 것만 해도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범위 아닐까 싶어요.

-시도 쓰셨지요? 독일어로 시가 터져나온 게 40세 전후라고 쓰셨던데.

나오는 대로 쓸 뿐이지요. 예전에 문단에도 잠깐 나가본 적이 있는데 저는 안 되겠더군요. 굉장히 독보적인 재능이 있으면 모르겠지만. 문단 취향은 아닌 것 같고. 그래도 시를 쓰면서 살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명시를 써서 이름을 내는 것도 좋겠지만, 그보다 저는 글 쓰는 시간은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이란 장사하기 위해 눈물, 콧물 묻히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어서, 그냥 수양하는 정도로 생각하고 글을 씁니다. 시집은 독일에서 나온 것도 있고 한국 것도 있고 한데, 처음에 모르는 출판사에서 조금 내다가 그 다음부터는 내지 않고 있어요. 관심 있는 제자들 주려고 묶어놓은 것들은 있어요.

사실 책을 낼 때 출판사를 오가는 과정에서 잘 다듬어지는 부분도 있지만 창작 부분은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부분도 있거든요. 인쇄소에 부탁해서 책을 내면서 일반용으로 출판하지 않은 예쁜 책들이 많아요.

-시는 무엇이고, 시인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결국 궁극적인 것은 학문이든 시든 예술가든 마찬가지일 텐데, 시인도 바른 삶의 장과 직결되는 것 같아요. 물론 시인은 섬세한 사람이고 여러가지 파행적인 실험을 시도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또한 주변부의 상황 요인도 있겠지만 근본에서는 바른 삶에 대한 생각과 닿아있는 것 같아요.

그런 심지가 없으면 어떻게 세상 만물에 애정이 생길 수 있겠어요. 바른 삶에 대한 뿌리가 없으면 그건 질투로 갈 수도 있고 질환으로 갈 수도 있지요.

바른 삶에 대한 지향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이 그만큼 유난스러워서, 그 사랑을 어떻게든 좀 표현을 해보려는 사람이 시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그만큼의 자격은 안 되는 것 같고, 그냥 조금이라도 시를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정도입니다.

학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높은 산’ 비유를 자주 하는데, 올라갈 때 어느 길로 가느냐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산의 발치에서는 사람들도 바글바글하고 외롭지도 않고 좋지요. 중턱쯤 올라가면 고요하기도 하지만, 이따금씩 오가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지. 정상쯤 올라가면 모든 사람이 다 반갑습니다. 다들 나름의 고생을 하고 올라왔을 테니까 그런 거지요.

학문이든 예술이든 사실 인류가 사랑 이상의 복음을 찾은 것은 없지 않나 싶어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생명에 대한 사랑이 기반이 되지 않았을 때는 그것이 갈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요즘 인문학에 대한 관심들이 많은데, 대중 강연도 하시나요?

저도 가끔씩 강연 같은 데 불려갑니다만 감사한 마음으로 성심껏 얘기합니다. 똑같은 시간에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보인다면 감사할 일이지요. 그분들이 사실 술 마시고 다른 것 할 시간일 수도 있잖아요. 어찌됐건 목적이 무엇이건 누군가가 그걸 듣겠다는 것은 너무 소중해서 성심껏 가서 얘기합니다. 요번에 귀국한 날 그냥 2시쯤 도착해서 6시반부터 10시까지 했어요.

-어떤 자리였지요?

경영인 역사포럼이라는 덴데 오래전 약속이라 도착하자마자 아예 강연 열리는 호텔에 방 빌려 2시간 누웠다가 강연하고 거기서 자고 내려왔어요.

-강연 주제는?

거기서 정해줬어요. 파우스트 읽는 법이라고.

-간략히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하하, 2시간짜리 강연인데... 간단히 말하자면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는 말이 어떤 뜻인가를 상세히 설명했어요. 원래 파우스트 이야기가 오래 전 기독교권의 권선징악을 담은 나쁜 설화에서 나온 거거든요. 욕심이 많아 영혼까지 판 나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가지고, 괴테가 “멈춰라 순간이여, 너 참 아름답구나”라고 할 때까지 가는 파우스트 박사와 악마 사이의 계약으로 바꿨어요. 그럼으로써 얼마나 큰 이야기의 폭이 생겨날 수 있었나 하는 것을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육십 년 동안 걸려 쓴 거지요.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는 구절이에요. 그것 한 줄만 알아도 사실 파우스트 다 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걸 극단적으로 달리 번역하면 ‘인간은 목표가 있는 한 길을 잃는다’ 이렇게도 번역할 수가 있지요. 그 말은 결국 어딘가 갈 곳이 있는데, 즉 마음 속에 어떤 솟구침이 있는데, 그래서 바로 그 솟구침 때문에 길을 잃는다는 뜻이지요. 지향점이 있기 때문에 헤맨다는 거지요.

그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인가요. 지금 내가 방황하는 이 모든 것이 결국 내가 갈 곳이 있기 때문이라는 거잖아요. 이 한 줄로 요약이 되는 걸 가지고 1만2111행이라는 정교함의 극치에 달하는 시를 만들었거든요.

복숭아로 비유를 들자면 가운데 박힌 씨앗만 먹어도 되겠지만 굳이 그 숱한 이야기를 통해 시고 단 과육을 먹는 것이 바로 문학 작품이거든요. 그러고 나서 스물한 시간짜리 파우스트 공연 장면을 보여드립니다.

그 장시간 공연이 실제로 역사적으로 딱 한 번 있었어요. 1년 하고 2개월 쉬고 4개월 또 했는데. 대단하죠. 그런 장면들을 보여드린 후에 이 단순한 권선징악의 설화를 어떻게 근대인의 드라마로 만들었는가를 설명하지요. 말이 그렇지, 공연을 하는 사람도 그렇고 보는 관람객도 대단하지 않아요?

그리고 어떻게 그 압축적인 모순 어법, 즉 ‘목표가 있는 한 길을 잃는다’는 말이 얼마나 큰 뜻인가, 계속 실수하고 실패하는 그런 얘기들인데도 거의 3000년을 넘나드는 스토리를 만들었다, 그것도 작가가 60여 년에 걸쳐 썼다(물론 매일은 아니고 집중적으로 네 시기에 걸쳐 썼지만), 요즘 온갖 명품들 사려고 목을 매는데 기왕이면 정신적인 것도 명품을 읽으면 어떻겠는가, 이런 이야기를 전합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바쁜 생활 중에 마음의 허전함을 채울 것을 찾는 것 같아요.

저는 그런 분을 볼 때마다 일(노동)을 해보라고 해요. 요즘 사람들이 운동(헬스)의 중요성은 다들 인식해서 신경을 씁니다.하지만 돈을 주고 운동을 해야 하는 줄 압니다. 그게 아니고 어디서든 그냥 일을 하면 되는 거예요.

현대의 많은 문제가 노동과 유리되면서 발생하는 것 같아요.예전에는 농사를 지으면 씨를 뿌려서 그것이 나서 그 전모를 다 보고 내가 수확을 해서 기쁘기도 하고 그랬는데, 요즘은 세계를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시력이 사라져 버린 것 같아요.

우선 일이라는 것이 세상과 나를 연결시켜줍니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친구들이 계속 이곳을 돌보고 토마토 지주도 세워주고 풀도 뽑고는 너무들 좋아해요. 저 꼬마 친구도 여기 오면 이전에 자기가 심은 국화가 잘 자랐나 보곤 합니다.

애들도 그냥 공부만 하라고 하지 말고, 어떤 일을 맡겨 보세요. 그 일 하나는 그 아이가 없으면 구멍이 나는 그런 일을 맡겨보세요. 그런 게 하나 있으면 얼마나 자부심이 생기는지 몰라요. ’나 없으면 우리 집이 안 되지’ 이런 책임감을 가지게 됩니다.

직장에서도 자기가 존재할 자리가 있고 그 가치가 인정 받으면 얼마나 아름답겠어요. 노동이라는 게 꼭 곡괭이 들고 그러는 게 아니거든요. 일이야말로 세상과 나를 붙여주는 것 같아요.

“아, 똘똘이가 있으니까 쿠션도 의자도 다 똑바로 놓여 있구나” 하면서 서로 즐거워 하는 거지요. 다른 사람들도 기분이 좋아지고 나도 그 사회 속에서 뿌리를 내리는 거지요. 꼭 어디 가서 거창한 노력 봉사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예요. 물론 그런 것도 가면 좋지만, 그냥 내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뭔가를 맡아서 하면 되는 거예요.

-세상이 점점 자동화하고 인공지능 같은 것도 발달하면서 새로운 차원의 인간 소외를 걱정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점점 불필요해질 텐데 어떻게든 자기 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다들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에만 혈안인데 그런 뜻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해야겠지만, 어딘가에 자기 자리를 만든다는 것은 삶에 사람을 밀착시키는 것이거든요.

릴케가 말하는 것 중에 ‘예술 사물(Kunst-Dingen)’이라는 개념이 있어요. 우리가 사물들을 너무 아무렇게나 휙휙 내버리고 살지는 않나 하는 거지요. 그럴 경우에는 결국 우리 존재도 다 그렇게 쓰레기처럼 되고 만다는 얘기입니다.

많은 물건이 아니어도 볼펜 하나를 볼 때에도 ‘아, 이건 내가 예전에 이걸로 뭔가를 썼었지’ 혹은 ‘어떤 친구가 준 거지’ 혹은 창문 하나를 볼 때라도 ‘아 내가 저 창가에서 언젠가 어떤 좋은 생각을 했지’ 이렇게 추억을 묻히고 가치를 부여할 때 그 사물이 다시금 우리 자신을 구원한다는 거예요. 그게 예술 사물 개념입니다.

꼭 무슨 값비싼 예술품이 아니어도, 우리가 물건 하나하나, 다른 무엇 하나라도 귀하게 바라보고 귀하게 생각할 때 그것은 얼마든지 훌륭한 예술 사물이 될 수 있습니다.

꼭 해야 되는 일이다 싶으면 힘에 넘치는 일이어도 하곤 한다. 늘 두렵다. 이것저것 하며 사는 걸 보고 힘들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당연히 힘들다. 힘든 정도가 아니고 가끔씩은 정말로 죽을 것 같다. 그러나 힘들어도 하면 한 가지 일은 되는 것이고 못 하면 그 하나도 안 된다. 다음 일은 더더욱 안 되고. 몸이건 머리건 움질일 수 있는 한 움직인다 생각하며 살고 있다. 마음이야 더더욱 그러해야 하리라. 이제는 조금씩 손 비우는 연습을 해야 하는 시간, 좀 더 전하고, 좀 더 나누며 살고 싶다.” (전영애, 2015년 5월 3일 메모 중에서)

 


◆  전영애

서울대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튀빙엔대학과 칼대학에서 수학했다. 1996년부터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있다. 2008~2013년 독일 프라이부르크 고등연구원 수석연구원을 겸임했다. 2011년 독일 바이마르 괴테학회가 주는 ‘괴테 금메달’을 수상했다. 같은 해 서울대 교육자상을 받았다. 서울대에서 20여 년 동안 교양 과목으로 ‘독일 명작의 이해’를 강의했다. 수업을 통해 연을 맺은 제자들은 졸업 후에도 오마토(5월 마지막주 토요일)와 시마토(10월)란 모임으로 만난다.

‘어두운 시대와 고통의 언어: 파울 첼란의 시’ ‘괴테와 발라데 ‘서·동 시집 연구’(공저) ‘독일의 현대문학: 분단과 통일의 성찰’ 등 많은 연구서를 국내와 독일에서 펴냈다. 시집으로 ‘카프카, 나의 카프카’와 독일어로 쓴 ‘Regenbogen für Franz Kafka (프란츠 카프카를 위한 무지개)’가 있다. 번역서로 ‘괴테 시 전집’ ‘서-동 시집’ ‘데미안’ ‘나누어진 하늘’ ‘보리수의 밤’ 등 6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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