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탈북 화가라 힘들지 않냐고요? 저는 너무 행복합니다”
맨몸으로 한국살이 11년, ‘숟가락 화가’ 오성철

< 조선일보, 배준용 기자,  2023.12.09.  >

 


“북한에는 화가라는 말이 없으니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거기선 그냥 다 그림쟁이, 화공이죠.”

어릴 때부터 북한이라는 세계에서 늘 숨이 막혔다는 소년. 막연히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그는 나라에서 내준 공책에 낙서했다가, 공책 검사 날에는 혼이 날까 무서워 그림을 그린 공책들을 북북 찢어 버려야 했다. 도배지가 없어 시멘트 포장지를 풀로 붙여둔 집 벽에 무심코 그림을 그렸다 아버지한테 두들겨 맞기 일쑤였다.

10년이 넘는 군 생활 동안 북한과 김정일 체제를 찬양하는 정치 선전물과 포스터를 그리던 서른한 살 청년은, 2009년 무역을 하러 중국에 갔다 덜컥 한국 영사관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3년간 보호시설에 머물다 2012년 한국에 들어왔다. 하나원(북한 이탈주민 교육시설)을 나오자마자 그는 미대에 입학했고, 11년째 ‘가난하지만 행복한’ 화가의 길을 묵묵히 걷고 있다. 탈북자 출신 화가 오성철(45)씨다.

작업실은 서울 은평구 평범한 주택가에 있는 중국집 아래 지하실. 좁고 캄캄한 계단을 내려가 지하실 문을 열자 은은한 유화 향이 코를 찔렀다. ‘숟가락 작가’라는 별명답게, 그의 작품과 작업 중인 캔버스에는 숟가락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그는 그림으로 대체 어떤 얘기를 하고 싶은 걸까.

◇왜정 땐 수박껍질이라도 삶아먹었다


-평양 밑 남포 출신이라고요.

“할아버지가 원래 부산 지주 집안 사람인데, 소작농 딸과 사랑에 빠져 내쫓기듯 정착하신 곳이 남포예요. 6·25전쟁이 일어나자 ‘아버지 뵙고 와야겠다’며 부산에 가셨다가 돌아오지 못하셨대요. 그렇게 ‘월남’ 정치범 집안이 됐습니다. 제 아버지가 삼형제 중 막내였는데 일하느라 매일 새벽 6시에 나가서 저녁 8시에 돌아오셨어요.”

-어린 시절부터 북한 체제에 불만이 많았겠군요.

“할머니는 집에 걸린 김일성 초상화 보면서 ‘저 개XX 때문에 못살겠다’며 욕하고, 저는 ‘할머니, 누가 들으면 큰일 나요’하고 말렸죠. ‘왜정(倭政) 때는 배가 고프면 수박껍데기라도 삶아 먹었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수박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며 한탄하셨어요.”

-할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겠네요.

“저도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꼈어요. 김일성, 김정일 생일에 음식을 주면 초상화에 인사하고 먹으라는데, 그게 그렇게 우습더라고요. 한번은 등교길에 신발이 찢어져서 아버지한테 ‘다음에 월급타면 구해달라’ 했더니, 아버지가 월급날인데 월급이 없고 오히려 마이너스라고 하시는 거에요. 명세서를 보니 아동보험부터 해서 각종 보험 명목으로 월급이 쭉 다 공제된 거에요. ‘아버지, 우리나라는 학교니 의료니 다 공짜 아니에요’ 했더니 아버지가 ‘공짜 아니다’라고 하셨죠. 새벽부터 밤늦게 죽어라 일만 하는데 마이너스라는 게 말이 되나요. 심지어 명절날에 돼지고기를 1kg씩 나눠주길래 그것도 거저 주는가 했더니, 다 월급에서 제하는 거였어요.”

-원래 화가가 꿈이었나요.

“북한에는 화가나 예술가라는 개념이 없어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리니까, 생활기록부 같은 데 남았는지 17세 때 군에 징집돼 정치 선전물을 그리는 ‘직관원’이 됐어요. 물감이나 종이는 줘야 일을 할 텐데 다 알아서 구해 오래요. 참 황당했죠.”

-1994년에 징집됐으면 ‘고난의 행군’ 시기였을 텐데요.

“94년에 군대에 갔는데 김일성이 죽은 해였죠. 그때까진 군인들이 백미를 먹었고 식용 기름도 넉넉했습니다. 그런데 95년이 되니 후임병이 뚝 끊어지고 기름도, 쌀도 떨어지고 소금도 없었어요. 맹물에다 국 끓여 먹고, 너무 배가 고프니 거의 6개월은 산을 돌아다니며 칡뿌리 캐서 먹고 개구리알 삶아 먹으며 버텼습니다.”

-당시에 한국이 쌀을 지원했는데 기억 나나요.

“남포항으로 쌀이 들어왔는데, 포대에 ‘대한민국’이라고 적혀 있더라고요. 그때 대한민국을 처음 접했습니다. 남조선으로만 알았으니까요. 상부 지시로 대한민국이라 적힌 포대를 다 찢어서 소각하고 중국산 포대에 쌀을 옮겨 담는 일을 제가 직접 했어요. 지금도 북한에는 대한민국 못 들어 본 사람이 많을 겁니다.”

-선전물로 그린 것 중에 기억에 남는 게 있나요?

“북한에 ‘김일성 구호나무’라고 해서 일제 때 김일성 휘하 항일 유격대원들이 김일성을 칭송하며 글귀를 적었다는 나무들이 있습니다. 다 가짜로 만든건데, 한 번은 산에 불이 나서 그 나무가 불탈 거 같으니 애들이 나무를 지키려고 감싸 안고 타 죽은 일이 있었어요. 그걸 찬양하는 그림을 그리라고 하는데, 저는 그런 걸로 목숨을 바치라고 하는 게 너무 싫었어요. 겨우 글귀 하나 지키겠다고...”

-체제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과 뜻을 모을 순 없었나요?

“보위부에서 구역마다 연락원을 둬요. 어떤 장소에서 누가 어떤 얘기를 했는지 일주일에 한 번씩 체크하죠. 둘째 큰아버지도 외제 에어컨을 보고 ‘우리는 왜 이렇게 좋은 걸 만들지 못하냐’고 무심코 말했다 잡혀갔어요. 그러니 불만이 있어도 입을 다물어야 해요. 한국에서 예전에 독재에 반대하는 혁명을 했다는데, 그것도 자유가 있으니까 가능한 겁니다. 제 입장에선 ‘진짜 독재자한테 제대로 밟혀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죠.”

-어떻게 버텼습니까.

“꿈이란 게 없었어요. 정치범 집안이라 공부를 해도 쓸모가 없었고요. 군 시절 탈영병을 잡으러 갔는데, 탈영병 아버지가 교수였어요. 책장에 ‘1920년대 시선’이라는 시집이 있었는데 딱 봐도 불온서적 같아 훔쳐왔습니다. 몰래 읽었는데, 김소월 시를 읽으면 그렇게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왜정 때 힘든 삶을 노래한 시라는데, 왜 이렇게 지금 내 처지와 같은지. 그러다 책 읽고 질질 짠다는 소문이 퍼져서 정치부에 걸리는 바람에 한 달 반 동안 매일 자아비판문을 썼습니다. 그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었죠.”

◇그림 그리며 3년 기다려 한국행


10년 군생활을 마친 오씨는 남포의 작은 대학으로 탈출하듯 진학했다. 대학에서도 매일 돈을 내라고 요구하는 통에 갖가지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대학을 나온 뒤 보위부 산하에서 무역을 하며 중국을 오갔고, 그러다 오씨는 탈북을 결심하게 됐다. “자유라든지 예술이라든지 그런 말은 몰랐어요. 그저 노예 같은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공개 처형을 실제로 본 적이 있나요.

“주민들한테 학교에 다 모이라고 해요. 가면 말뚝이 세워져 있고. ‘반당 반혁명 종파 분자 아무개를 향하여, 쏴!’ 하면, 다다다닥…. 그걸 어린애들도 다 봐요. 말뚝에 세워놓은 사람은 이미 너무 맞아서 죽은 상태긴 했어요. 군 시절엔 탈영병이 배가 고프다고 할머니 사는 집에 들어가 할머니를 죽이고 밥을 도둑질했다 붙잡혀 공개 처형 당하는 걸 봤죠. 그런 체제를 찬양하는 사람들은 제가 보기엔 미친 사람들이에요.”

-어쩌다 탈북을 결심했나요.

“2007년부터 보위부에서 주도하는 외화벌이를 했어요. 1년에 2만달러 내면 장사할 수 있는 허가증을 줍니다. 해산물 거래를 하려고 처음 중국에 갔다가 ‘탈출해서 할아버지 고향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중국에서 대방(무역업자)하는 친구가 늘 한국 드라마를 보고 한국산 제품을 좋아하더라고요. 중국에 있는 갤러리에서 미술 작품을 보고 큰 충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콘크리트벽에 거대한 설치 미술이었는데, 북한에선 볼 수 없던 거라 ‘이게 대체 뭔 지X인가’ 했어요(웃음). 그런데 뭔가 또 먹먹함을 느꼈죠. 그렇게 예술이 뭔지 조금씩 알게 됐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두 번째 중국에 갔을 때 탈북할 방법을 물어보려고 114 같은 걸 눌러서 한국 영사관에 연결해달라고 했습니다. 마침 영사가 받길래 ‘나 북한에서 나온 사람인데 한국에 가고 싶어요’ 하니 ‘영사관에 오세요’ 이러더라고요. 짐을 싸서 영사관에 가보니, 철조망이 네 겹 쳐 있고 중국 공안이 지키고 있는 거예요. 다시 영사한테 전화해 어떻게 들어가야 되는지 물으니 ‘외교적인 문제 때문에 데리고 들어올 순 없으니 알아서 들어오라’ 하더라고요. 너무 무책임하다 생각했지만 어떡해요? 일은 벌어졌고. 가방은 다 공안들 앞에 놔두고, 비자 발급 창구 쪽을 보니까 점심 시간에 지키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후다닥 뛰어들어갔죠.”

-2009년에 탈북했는데 한국에는 2012년에야 들어왔는데.

“영사관 내 탈북자 보호시설에 3년을 머물렀어요. 처음 갔을 땐 사람이 많았는데, 1년 반 정도 되니 다 나가고 저만 남았어요. 왜 3년이나 걸렸는지도 저도 모르죠. 지하라 볕도 들지 않아서 감옥 비슷했습니다.”

-정말 한국에 갈 수 있을지 의심하거나 후회하지는 않았나요.

“그때 무심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감정을 막 그렸다가, 이상한 괴물도 그리고. 그렇게 하다 보니 ‘아, 그림을 그리니까 내가 견딜 수 있었구나. 한국에 가면 화가가 되어야겠다. 이 세계를 씹어 먹자’는 생각이 불쑥 들었어요. 그때부터 영사관 직원들한테 한국에서 화가 되는 법, 미대 가는 법 같은 걸 막 물어봤죠. 진중권이 쓴 ‘서양미술사’ 책도 주고, 수채화 물감도 구해서 주더라고요. 그림이 저를 지탱해줬어요.”

-한국 소식도 접할 수 있었나요?

“KBS 하나 딱 틀어주더라고요. 거기서 뉴스도 보고 했는데 제일 신기했던 건 시위 뉴스였어요. 어떻게 정권을 향해서 저렇게 집단 행동을 할 수 있는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시위 때도 신기해서 가봤었습니다. 시위하는 풍경 보면서 ‘이야, 이거 북한이었으면 다 죽었을텐데’ 하면서 봤죠(웃음).”

-한국 생활은 어떻게 적응했나요?

“그럴 틈이 없었어요. 35세가 넘어 입학하면 대학 장학금이 안 나오더라고요. 9월 6일에 하나원에서 나왔는데, 서울에 있는 미대 수시는 다 끝났고 지방 미대 입시만 남아서 임시 신분증 만들고 곧장 한남대에 찾아가 미대 학장을 만났죠. ‘이번에 꼭 들어가야 한다’ 했더니 조교 한 분을 붙여 도와주셨어요. 정착금으로는 학비 감당이 안 되니까 학교가 오후 6시에 끝나면 곧바로 택배 상하차 알바, 웨딩 알바, 레스토랑 알바 뛰고 새벽에 들어와 자고 그렇게 다녔습니다.”

◇”가난한 화가? 나는 너무 행복하다”


졸업 후 서울에 온 뒤로도 오씨는 알바와 공사일을 병행하며 화가 활동을 이어왔다. 1년 반 전에는 공사장에서 일하다 사다리에 추락해 뼈가 6개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3년 전에 결혼해 지난 10월 득남했다. 1억5000만원 대출로 전셋집에 살며 여전히 학자금 대출을 갚고 있다. 오씨는 “삶이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래도 이곳에서 화가로, 예술가로 살 수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서울 강서구 통일부 남북통합문화센터에서는 오씨의 특별전 ‘표현의 조건형식’이 이달 31일까지 열린다.

-그림을 팔아 생계를 잇는 건 쉽지 않을 텐데요.

“처음엔 감동을 주는 게 예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공부해 보니 아니더라고요. 갤러리 대표가 주문하는 대로 그림을 그려서 팔아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2017년에 미국에 초대를 받아 아트 페어에 참가했어요. 개념 미술이 엄청나게 상업화돼 활발하게 거래되는 걸 보니 한국 미술 시장과 세계 미술 시장의 격차가 어마어마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충격을 받았죠. 시장과 대중이 알아주지 않아도 정말 큰 미술, 개념 미술에 매달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제적인 문제가 고통을 주지 않나요.

“11년 동안 맨몸으로 살았어요. 한국에선 다들 ‘먹고사는 게 제일 힘들다’고 그래요. 북한에서 온 저로선 이상하잖아요. 사람들이 왜 힘드냐 하면 다 욕망 때문이에요. 남과 비교하고, 그 차이에 좌절하고. 그런 게 힘든 거죠. 사실 인문학적 빈곤 때문이에요. 한국은 돈이 없어도 나가서 일하면 돈 주잖아요. 북한에선 100을 벌면 90을 뜯겨요. 사람들이 재벌을 비난하는데, 사실 재벌 때문에 먹고사는 게 맞잖아요. 그냥 그대로 인정하고 내 삶을 살면 되는데 다들 왜 이렇게 불행하다고 하는지….”

-10월에 득남을 하셨는데 어떤 생각이 드나요.

“원래는 결혼하지 않으려 했어요. 미술가로 살려면 가정을 돌 볼 힘이 없으니까요. 어쩌다보니 결혼하고 아들이 생기니 책임감이 더 생겨요. 불평·불만을 조장하는 세력이 진실을 혼돈에 빠트리고, 인간에 대한 고민보다 돈이 앞서는 시대니까요. 이런 세상에서 화가로서 인문학적 정신을 관철해 나가는 삶을 아들에게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탈북자라는 이유로 차별받은 경험이 있는지.

“여기서 그림 그리며 교류한 사람 중 적지 않은 사람이 586세대예요.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김일성 관련 책을 사적으로 출판해서 돌려보더라고요. 그 사람들이 얘기하길 ‘예전 독재 정권 때 빨갱이 프레임 가지고 억울한 사람 많이 때려잡았다’ 하는데, 가만히 보면 그 말 하는 사람이 빨갱이야(웃음). 이런 사람들은 탈북자를 싫어할 수밖에 없어요. 그 사람들은 대한민국이 제일 한심한 나라고, 역사 왜곡을 하고, 이승만의 정당성을 인정 안 해주고, 조선을 계승해야 하는 것처럼 프레임을 짜놨는데, 탈북자들이 북한에서 힘든 생활을 자꾸 얘기하니 자기네 이해관계와 충돌하는 거예요. 미술 시장에서도 이런 사람들 입김이 세 저 같은 사람은 진출할 수가 없어요. 제대로 평론받고 전시도 하고 싶은데, 많이 답답하죠.”

-캔버스 속 숟가락은 어떤 의미인가요?

“요즘 한국 사회를 보면 뻔한 거짓말이 난무해요. 내로남불부터 김정은을 칭찬하는 말까지 나와요. 저는 오로지 돈만이 찬양받고 진짜 지식, 교양은 탄압받는 시대라는 생각을 그림에 녹이려고 합니다. 숟가락은 먹는 걸 담잖아요. 그런데 이 숟가락이라는 게 인간이 생각하는 모양과 똑 닮았더라고요. 다들 욕망에 따라 움직이고, 이성은 그런 욕망과 행동을 합리화하는 데 쓰고 있어요. 숟가락은 ‘당신은 스스로를 선(善)이라고 말하지만, 결국 그저 숟가락일 따름’이라고 하는 거죠.”

인터뷰를 시작할 때만 해도 수줍게 웃던 오씨의 얼굴이, 끝날 무렵엔 저항감과 사명감 가득한 예술가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30여 년을 노예로 살았다는 그는 한국에 온 지 11년 만에 그 누구보다 자유롭고 깨어있는 시민이 돼 있었다. 

“안희정 조종하던 광신도들, 새 숙주로 갈아타…두고볼 건가”
진보 진영 위선 고발한 ‘안희정 미투’의 조력자 문상철

 

< 조선일보, 정시행 기자,  2023.12.09. >

 

 


5년 전 한국에선 전무후무한 방식의 미투(Me too·'나도 당했다’는 뜻의 성폭력 고발 운동)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유력 대선 주자 안희정 충청남도 도지사가 20세 어린 비서의 성폭행 폭로로 하룻밤 새 추락한 것. 피해자 김지은씨는 이례적으로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고 나왔다. 극단적 장면의 대비에 충격받은 사람들은 그 정도면 끝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추악한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지금껏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2018년부터 김씨의 미투 폭로와 법정 투쟁을 도운 ‘첫 조력자’의 말이다. 바로 문상철(40) 전 충남도지사 수행·의전비서. 그는 오직 피해자 편에 서기 위해, 8년을 몸담은 안희정 사단에서 이탈해 내부 고발자가 됐다. 문씨는 “가해자와 가해자를 도운 이들은 서로의 뒤를 봐주며 잘 살고 있다. 그러나 피해자와 피해자를 도운 사람들의 삶은 망가졌다”고 했다.

문씨는 지난달 안희정 미투의 전말을 다룬 책 ‘몰락의 시간’을 펴냈다. 그간 검찰 코드네임 ‘김상훈’ 혹은 ‘문 선배’란 익명 뒤에 숨어 살아오다 처음 자신을 드러냈다. 왜 지금이냐고 물었다. 그는 “안희정 사건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탓에 정치권에서 비슷한 문제가 반복되고 있어서”라며 “내 경험은 우리 사회가 같이 되짚어봐야 할 공공재”라고 말했다.

◇“도와줄게”… 세상이 뒤집혔다


-안희정 전 지사와 어떤 관계입니까.

“저는 2011년 충남도청에 메시지·여론조사 담당으로 들어갔어요.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팬이었습니다. 친노(親盧) 적자이자 민주 투사로 유명한 안 전 지사 밑에서 일해보고 싶었어요. 그의 수행·의전 비서, 대선 경선 수행팀장으로 뛰었습니다. 중앙정치 경험이 없는 그를 위해 각계 전문가를 모아 집권 플랜을 짜는 ‘안희정의 대통령 공부’를 4년간 기획했어요. 도지사 시절 저서를 제가 대필하다시피 해 인세를 나눠갖기도 했고요. 그는 저의 우상이었고, 안희정의 꿈이 곧 저의 꿈이었습니다.”

-김지은씨는요.

“제 후임이었습니다. 2017년 대선이 끝나고 저는 안 전 지사의 서울 복귀를 돕기 위해 여의도의 정세균 국회의장실에 배치됐습니다. 안 전 지사는 퇴임 후 미국 유학을 다녀와 민주당 대표 경선 혹은 총선 종로 출마 등을 저울질하며 2022년 대선 가도를 구상 중이었어요. 그때 지은씨가 도지사 수행비서가 됐어요. 도청 일이 끝물이다 보니 지은씨를 도와줄 사람이 없어 제가 원격으로 업무를 조언해야 했어요. 얼굴 맞대고 일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반년 만에 김씨가 울면서 연락했죠.

“2018년 2월 25일 안 전 지사 일정을 의논하려 통화하는데 지은씨 목소리가 너무 안 좋았어요. ‘무슨 일이야? 말해봐, 도와줄게’ 했더니 ‘선배, 저 지사님께 성폭행당했어요’라며 펑펑 울더군요. 머리가 멍했지만 ‘일단 수사 기관에 신고해. 도와줄게’라고 했습니다.”

문씨가 통화한 날은 안 전 지사가 김씨를 상대로 마지막 범행을 저지른 다음 날이다. 법정 증언에 따르면, 김씨는 2월 24일 가족과 저녁식사를 하다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고 뛰쳐나갔다. 안 전 지사의 건설 업자 친구가 소유한 마포의 오피스텔이었다. 안 전 지사는 “너도 나 미투할 거냐?”라고 물었다. 미국 할리우드 등 각국에서 미투 폭로가 몰아치던 때였다. 경력과 생계를 자신에게 의존하는 하위 공무원에게서 “제가 어떻게 미투를 하겠어요”란 무기력한 대답을 얻어낸 안 전 지사는 그 자리에서 또 김씨를 성폭행했다. 이튿날 새벽 2시에 “빨리 청소하고 나가라”고 짜증을 부렸다.

훗날 김씨는 저서 ‘김지은입니다’에 “안희정에게 당할 때마다 도청 내 친한 이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다 외면당했다. 생업을 버리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때 문 선배의 ‘도와줄게’ 한마디가 얼음 속에 박제된 나를 꺼내줬다”고 썼다. 문씨가 이 문제를 가해자와 먼저 상의하고 피해자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갔다면 미투도 좌절됐을 수 있다는 얘기다. 김씨는 3월 5일 한 방송에 출연해 안 전 지사의 범행을 세상에 알렸다.

◇팩트가 무너뜨린 미래 권력


-당신은 가해자와 훨씬 가까웠는데, 왜 피해자 말만 듣고 자신의 인생을 걸었습니까.

“전 안희정의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사적 친분을 떠나 저도 나라 녹을 먹는 사람으로서 공적 책임을 가져야 했습니다. 아무리 스타 정치인이라도 그런 범죄를 저질러왔다면 신기루에 불과한 거죠. 사람을 짓밟는 행위 위에 무슨 미래가 있겠어요? 더구나 지은씨는 얼굴 내놓고 미투해서 얻을 게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 사람 말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어요.”

-김지은씨를 어떻게 도왔습니까.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저는 총 네 차례 검찰 조사를 받고, 3심에 걸친 재판마다 증인대에 섰어요. 안 전 지사 참모진과 가족은 변호인단 코치를 받아 두 사람이 불륜 관계였던 것처럼 몰아갔습니다. 그들은 지은씨가 성폭력을 당하면서도 가해자의 기분을 맞추는 언행을 하거나, 범행 장소인 호텔비 결제를 하고 식당을 알아봤다는 점 등을 들어 ‘피해자답지 못한 행실’ ‘안희정의 광팬’이라며 꽃뱀 취급했어요.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는지... 저는 그것이 잘리지 않기 위해 할 수밖에 없는 수행비서의 업무였고 안 전 지사가 강요한 충성 문화라는 점을 일관되게 진술했어요.”

-안 전 지사는 중도진보 이미지로 상한가를 달렸죠. 2017년 대선 경선에선 2위를 했고, 문재인 대통령 당선 날 밤 무대에 올라 ‘뽀뽀’를 하며 차기 주자의 지위를 각인시켰고요. 그런 때 터진 미투라 국민들 충격이 컸어요.

“미투 직전까지 안 전 지사는 ‘미래 대통령’으로 통했습니다. 정계·재계·관계·법조계에서 미리 줄대려 안달했고 해외 유력인사들도 와달라고 했어요. 본인 자신감도 극에 달했고, 그와 가까울수록 권력의 크기는 컸습니다.”

-안희정 사단에서 김지은씨 편에 선 사람은 얼마나 됐습니까.

“10명 중 1명쯤. 최측근 중에선 저 정도였고, 캠프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젊은 봉사자가 대부분이었어요. 그들이 ‘김지은과 함께하는 사람들’이란 모임을 만들어 법정 증언을 하고 탄원서를 썼습니다. 안 전 지사 가족 중에선 유일하게 차남이 피해자 말을 들어보려 했고요.”

-안 전 지사 측이 ‘배신자’ 낙인을 찍고 위협했는데.

“첫 재판 때 안 전 지사가 돌 무렵이던 제 아이를 안고 찍은 사진을 법정 스크린에 대문짝만 하게 띄우더군요. 우리가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 등 돌린 대가는 제 가족이 감당하게 될 거란 협박이었습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연민과 동정은 그때 다 사라졌습니다. 약자를 위하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자고 모인 동지들이었는데… 배신은 제가 아니라 안 전 지사가 한 거예요.”

안 전 지사는 1심에선 무죄를 받았지만 2019년 2심과 최종심에선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으로 유죄가 확정됐다. 3년 6개월 만인 지난해 만기 출소했다. 향후 10년간 피선거권이 박탈돼 정치적 재기는 불가능한 상태다. 아내 민주원씨와도 옥중 이혼했다.

◇더 무너진 내부 고발자의 삶


-범죄 혐의를 남에게 떠넘기거나, 선거에 나와 ‘비(非)법률적 명예 회복’을 하겠다는 정치인도 있어요. 안 전 지사는 죗값을 치른 것 아닌가요?

“안 전 지사는 최소한의 사법적 처분만 받았을 뿐입니다. 아직 자기 계보를 유지하고 있어요. 여전히 찾아오는 정치인과 후원자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여자애 하나 때문에 아깝게 갔다’는 세간의 오해를 이용하고 있어요. 그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주고 지은씨에게 악랄한 2차 가해를 한 사람들은 안희정계 의원들이 밀고 끌어줘 국회와 정부, 지자체 요직으로 승진했어요. 반면 안 전 지사는 피해자에겐 단 한번 진심어린 사과도, 금전적 배상도 하지 않았어요. 맹목적 충성엔 후한 보상을, 진실의 편에서 반기를 들면 벌을 준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내부 고발자의 삶은 피폐해지기 십상이다. 법치·민주주의 수준이 낮은 나라일수록 그렇다. 김씨는 미투 직후 쏟아지는 인신 공격 속에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었고, 아직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취업은커녕 고립돼 살면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것으로 전해졌다. 김씨는 안 전 지사와 충남도청을 상대로 3억원 규모 손해배상 소송을 3년째 벌이고 있지만 결과는 불투명하다.

-당신의 삶은 어땠나요.

“재판 때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왼쪽 어금니가 깨졌어요. 정세균 국무총리실, 이낙연 민주당 대표실에 들어갈 기회가 생겼지만 민주당 사람들이 똘똘 뭉쳐 ‘원래 질이 안 좋은 애’ ‘이 판에 발 못 붙이게 하라’고 했어요. 평판 조회가 생명인 정치권에서 제 경력은 끝났습니다. 시민단체 ‘의인상’ 후보에 오르긴 했어요. 간신히 일반 기업에 취직했는데, 이번에 책을 냈더니 정치적 관심이 쏠려 불편했는지 일주일 만에 권고사직당했어요. 이제 아내가 생계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원망스럽겠군요.

“솔직히 이렇게까지 오래 문제가 해결 안 될 거라곤 예상 못했습니다. 제가 아는 안희정이란 사람은 잘못은 했더라도 참회하고 배상할 줄 알았어요. 다같이 반성하고 폐허 위에 일어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판이었죠.”

안희정 미투 이후 한국의 미투는 다시 지리멸렬해졌다. 2020년 오거돈 전 부산시장이 여직원 성추행으로 사퇴하고 복역 중이지만, 피해자에겐 단돈 5000만원을 배상했다. 같은 해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비서의 미투가 예고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공소권을 없애버렸다. 민주당은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이라 조롱하며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음해했다. 오거돈과 박원순의 피해자들은 김지은씨와 달리 익명으로 남기를 택했다. 문씨는 “가해자끼리만 뭉치면 죄가 지워진다는 학습 효과가 있는 한, 피해자 한 명을 마녀로 만들어 화형대에 올리는 행태는 반복될 것”이라고 말했다.


◇운동권의 性·계급 인식


-안 전 지사 여성 편력이 유명했다면서요?

“늘 여러 여자를 은밀히 만났고, 어느 자리에든 여자를 데려오게 했습니다. 정치인에 대한 기대를 이성(異性)으로서의 호감과 헷갈리는 것 같았어요. 참모들끼린 ‘봐도 못 본 거’라고 쉬쉬했어요. 제가 ‘이 사람한테 충성하는 게 맞나?’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어요. 지은씨 말고도 도청 내 성폭력 피해자가 많다는 걸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들은 침묵을 택했을 뿐이죠.”

-‘성폭력은 권력의 모든 문제가 결합된 악랄한 최종 결과물’이라고 책에 썼더군요.

“미투는 트리거(trigger·도화선)일 뿐, 정치인 개인을 신격화하는 퇴행적 정치 문화가 근본 문제라고 봅니다. 안 전 지사는 자신이 군부 독재에 맞섰고 앞으로 ‘큰일’ 할 사람이기 때문에 절대적 권력으로 보상받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욕구가 즉시 채워지지 않으면 신경질적으로 ‘…’이라는 문자를 보냈어요. 말 안 해도 알아서 모시는 ‘물 흐르는 의전’으로 떠받들라는 거죠. 슈트발 살린다고 펜·안경닦이조차 본인 주머니에 넣지 않고 비서가 챙겨야 했고, 따뜻한 농사꾼 이미지가 필요할 땐 공관에 텃밭 만들고 농학 박사들 시켜 농사짓게 했어요. 이런 식으로 권력을 확인하는 또 다른 방법이 성폭력이었습니다.”

-그게 86세대 운동권 문화입니까.

“안 전 지사의 오랜 측근들은 학생운동 때부터 봉건적 조직 문화를 이어왔어요. ‘우린 안희정 집안’이라며 형·동생 하고, ‘조배죽(조직을 배신하면 죽는다)’ 건배사하고, 취하면 김광석 노래 부르고, 회식 끝나면 도청 돌아가 초과수당 찍고... 저도 거기서 살아남아야 했기에 안 전 지사에게 노(No) 해본 적 없어요. 그래선 안 됐어요. 제가 배타적인 광신도 조직을 만드는 데 기여한 일종의 공범일지 모른다는 죄책감 때문에 지은씨를 도운 측면도 큽니다.”

-진보 진영은 ‘박근혜의 세월호 7시간’ ‘김건희 여사 전력’ 의혹 등 유독 여성의 정조·순결을 들춰 공격하곤 합니다. 최근엔 최강욱 전 민주당 의원이 ‘설치는 암컷’이란 표현을 썼고요.

“시대가 변한 걸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자기들끼리는 그런 가부장적 여성 혐오가 여전히 재미있고 상대의 아킬레스건이 된다고 여기는지 모르지만, 젊은 세대는 남녀를 떠나 그런 데 관심 없어요.”

문상철씨는 김지은씨를 도운 이유 중 하나가 “나 또한 권위적인 안희정 조직을 만든 공범일지 모른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고 했다. 문씨는 안 전 지사의 다양한 요구를 토대로 그를 왕처럼 떠받드는 방법을 망라해 ‘수행비서 업무 매뉴얼’을 만들었다.(위 사진) ‘해외 수행’ 항목의 경우 ‘호텔은 한국인 적은 곳에 잡을 것’ ‘기내에서 코냑 사서 지사님 숙소에 비치’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이 매뉴얼대로 일한 김씨는 주로 해외 출장 중 안 전 지사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  

 

 

◇통제 불능의 팬덤 정치


-왜 지방자치단체 기관장들의 일탈이 계속 나올까요.

“충남도청도 그랬지만 지자체마다 의전 조직이 너무 세요. 공무원들이 떠받들어주니 제왕적 권력에 취할 수밖에 없어요. 중앙정부에 비해 언론과 의회의 감시는 약하죠. 지자체장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러도 안전할 거란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지자체 감사 빈도부터 높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무소불위의 안 전 지사가 두려워한 게 있습니까.

“팬덤입니다. 2017년 대선 경선에서 문재인 후보에게 밀리기 시작할 때였어요. 안 전 지사가 팬들이 보내는 맹목적 지지 메시지와 상대 비방, 유사 언론인들의 유튜브 같은 걸 틈만 나면 강박적으로 찾아보더군요. 문 후보 팬들이 우릴 미친 듯 공격할수록, 안 전 지사도 분노와 고통을 잊는 마약을 찾듯 자기 팬들에게 빠져들었어요.”

-문 전 대통령은 그걸 ‘양념’이라고 했죠.

“맹목적이고 거대한 팬덤은 다양한 사람과의 토론을 회피하게 하는 도피처가 됩니다. 개인 인권쯤은 우습게 여기는 빌미도 되구요. 그런 극렬 팬들은 특정 정치인을 존경한다기보다, 자신들의 이권이나 욕망을 대리하는 수단으로 삼는 거예요. 안희정을 떠받들던 사람들은 새로운 숙주를 찾아 자리 잡았어요. 그 숙주들이 다음 대통령 후보들로 불리고 있구요. 선출되지 않은 소수 선동가들이 국민이 뽑은 정치인을 꼭두각시처럼 부리는 세상이 올지 모릅니다.”

-책 인세는 한국성폭력상담소에 모두 기부한다고요.

“제가 성폭력 문제를 잘 아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현장 활동가들이 이름 없는 피해자들 손을 잡아주며 헌신하는 걸 지켜보니, 말만 앞세우는 정치인들보다 세상을 훨씬 낫게 바꾸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작지만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2023 평범을 산 비범한 이야기] #1. 2군 선수로만 7년째, 프로축구 선수 임민혁

 

 

< 피렌체의 식탁, 천안 시티 FC 임민혁 선수,  2023.12.09  >

 


"1등은 아니지만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수히 많습니다"
"악착같이 하루를 살아내는 우리같은 사람들이 진짜 주인공"
"결과는 열심히 노력하는 과정의 보너스, 그 자체로 행복합니다"
삶은 상대적이지 않습니다. 삶은 그 자체로 주관입니다. 그러나 우린 늘 얼굴 모를 대상, 혹은 언론에 노출된 위대한 상대에 억눌려 쪼그라듭니다. 승리는 물론 고통마저도 누구보다 더 해야만 주목받는 세상. 그럴 필요 없어요. 한해를 돌아보게 되는 이때, 올해도 참 수고했어, 잘 살아냈어! 나에게 인사하는 시간을 가져봐요. 



저는 7년 동안의 프로 선수 생활 중 30경기 남짓밖에 출전하지 못한 만년 후보 프로축구선수입니다. 주전선수들이 1년에 평균적으로 40경기 가까이 소화하니 제가 얼마나 경기에 많이 나서지 못한 선수였는지 쉽게 비교할 수 있겠죠. 그러던 저에게 지난 2022년 여름,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주전선수의 부상으로 4년 만에 경기장에 모습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경기를 마친 후 기자회견장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아무리 긴 터널도 끝은 있다고 생각했다. ‘산을 만나면 넘고 강을 만나면 건너자’라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버텼다”라고 인터뷰했습니다. 봄눈처럼 잠깐이긴 했지만 프로 데뷔 이후 처음으로 이슈의 중심에 서기도 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오래 기다렸던 기회를 잡았기 때문에 저의 2023년은 더 많은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올해는 분명 지금까지와는 다를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죠. 하지만 프로의 무대는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주전선수가 되려면 거쳐야 하는 수많은 난관을 여전히 뚫지 못한 채 2023시즌 역시 후보선수로 1년을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올해도 목표했던 경기 수를 채우지 못했고 많은 팬들의 주목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던 올해가 그저 불행하고 아프지만은 않았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후보선수로 있으면서 ‘과정의 소중함’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를 비롯한 우리 사회의 절대 다수는 각기 다른 세계에서 각기 다른 뛰어난 ‘주전선수’들을 상대로 고전하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입니다. 죽을 만큼 애쓰지 않으면 살아남을 기회조차 받지 못하는 저와 같은 보통의 사람들에게 생존을 위한 투쟁은 그 과정만으로도 위대한 여정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결코 오늘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또 한 번의 실패가 힘들지만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각박한 세상에서 특출난 것 하나 없지만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적은 횟수지만 열정적인 팬들 앞에서 부상 없이 몇 차례 내가 가진 실력을 뽐낼 수 있었던 한 해를 보낸 사실만으로 나 자신을 충분히 칭찬하고 격려하고 싶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2군 선수일 가능성이 큽니다. 운동을 그만두는 날이 오더라도 사회에서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서 ‘1등은 아니지만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수히 많습니다. 그리고 악착같이 하루를 살아내는 우리 보통 사람들이 이 세상의 진짜 주인공입니다. 그러니 목표했던 일이 잘 안된 하루여도, 또 원하던 것을 다 이루지 못했던 한해여도 괜찮습니다. 결과는 열심히 노력하는 과정에서 따라오는 보너스 같은 것이기 때문에 하루를, 한 달을, 일 년을 열심히 땀 흘려 분투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렇게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을 꾸준히 소신껏 잘 해내다 보면 보너스는 언젠가 따라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와 우리의 내일은 여전히 희망찹니다. 메마르고 모진 이 세상을 그 누구보다 잘 버티고 있는 스스로를 자주 격려합시다. 잘하고 있다고, 수고했다고!



글쓴이 임민혁은 1994년 경북 영덕에서 태어났다. 2014년 고려대학교에 입학 후 그 활약을 바탕으로 2017년 K리그 전남드래곤즈에 입단했다. 당시 등번호는 에이스 골키퍼의 상징인 1번. 현재 천안시티FC, 등번호 36번을 달고 골키퍼로 활동중이다. 패널티킥에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방 출신이라 지방 소멸 위기에 관심이 많고 평소 말은 부질없다 생각해 글쓰기를 취미로 한다.  이제 서른을 맞는 임민혁 선수는 건강하고 맑다. 몸만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마음가짐과 눈이 그렇다. "악착같이 하루를 살아내는 우리 보통 사람들이 이 세상의 진짜 주인공이다. 목표했던 일이 잘 안된 하루여도, 또 원하던 것을 다 이루지 못했던 한해여도 괜찮다. 결과는 열심히 노력하는 과정에서 따라오는 보너스 같은 것이기 때문에 하루를, 한 달을, 일 년을 열심히 땀 흘려 분투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그렇게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을 꾸준히 소신껏 잘 해내다 보면 보너스는 언젠가 따라올 것이라 생각한다. " 진짜 이기는 삶을 사는 임민혁 선수는 응원받아 마땅한 청년이다.  

 

지식인의 비겁, 지식인의 죽음
유발 하라리 등 지식인 90명
하마스에 눈감은 좌파 비판
정의·평등 의미 오염시키는 건
전 세계 좌파의 공통점인가

< 조선일보, 어수웅 기자,  2023.12.02. >

 


역작 ‘사피엔스’로 뜨거운 학자가 된 유발 하라리의 이스라엘 자택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신간 ‘호모 데우스’가 막 나왔을 때다. 인터뷰 질문과 대답은 책의 주제였던 인류의 기원과 미래로 집중됐지만, 때로 그는 묻지 않은 얘기를 꺼냈다. 최장수 기록을 경신하던 네타냐후 총리에 대한 비판과 강경 보수화되고 있는 나라 걱정이었다. 자신의 국가에서 진행한 인터뷰이기 때문이었을까. 이스라엘 국내 문제였으므로 우리 지면에까지 실을 필요는 느끼지 못했지만, 영미권의 많은 지식인처럼 그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통치 방식에 비판적이었다.

아슬아슬한 휴전이 끝나고 공습이 재개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한복판에서, 그는 다른 의미의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하라리를 포함한 90명의 이스라엘 작가 예술가 학자들은 얼마 전 전 세계 좌파 지식인들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거칠게 압축하면 내로남불하지 말라는 것. 왜 당신들은 이스라엘은 비난하면서 하마스가 이스라엘의 어린이 노인 여성을 표적 학살한 행위에는 침묵하느냐는 반박이었다. 성명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평등, 자유, 정의, 복지를 옹호하는 좌파 인사들이 이토록 극단적인 도덕적 무감각과 정치적 무모함을 드러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하마스 공격 초기 하버드대 30여 학생단체의 “모든 폭력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이스라엘 정권에 있다” 운운, 또 미국 내 소위 민주사회주의자들의 “오늘의 사건은 이스라엘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직접적인 결과” 주장도 이 분노의 과녁이 됐다.

앞서 말했듯, 하라리 역시 이스라엘 정권에 비판적인 지식인이었다. 또 최근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내 팔레스타인 민간인 보복 공격도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모 앞에서 어린 자식을 살해하고 시신을 다시 훼손한 하마스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

지난 칼럼에서 한국 사회의 언어가 오염되고 있다고 쓴 적이 있다. 조국 윤미향 최강욱 등으로 대표되는 인물들의 맹활약 덕에, 평등과 정의와 공정이라는 아름다운 단어들이 조롱과 비아냥의 대상이 됐다는 한탄이었다. 위선과 내로남불은 전 세계 좌파로 번지는 팬데믹일까. 바다 건너 해외에서 발표된 이번 성명에도 그 언어의 오염은 예외 없는 조롱거리가 됐다. 평등과 자유와 정의와 복지를 그렇게 외치던 좌파들이 자신들이 ‘피의자’가 되자 꿀 먹은 듯 입을 닫는 몰염치.

21세기에 지식인은 죽었고 직업인만 남았다는 조롱이 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지식인이 필요하고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대중이 납작한 선악 이분법으로 세상을 볼 때, 지식인은 한 발자국 더 들어가야 할 의무가 있다. 지식인이 어느 한 편을 선택하는 건, 지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게으르다는 자백에 다름 아니다. 스탈린의 학살과 마오쩌둥의 숙청에 침묵하던 글로벌 좌파, 그리고 북한의 인권 탄압에 침묵하는 한국의 지식인도 마찬가지. 선택적 정의, 선택적 평등은 그 자체로 불의고 차별이다.

흔히 동화로 낮춰보지만,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현대문학의 걸작이다. 주인공 허클베리는 학교라고는 구경도 못 해본 무학(無學) 소년. 흑인 노예 짐을 ‘니거’라고 부르면서도 혐오 표현이라는 자의식조차 없다. 도망 노예를 돕는 것은 지옥에 가는 악한 행위라는 설교를 듣고 자랐지만, 지옥불을 무릅쓰고 친구가 된 짐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바친다. 그건 PC(정치적 올바름)도 아니고, 정의나 평등 의식 때문도 아니었다. 

 

사람이라면 그래야 할 것 같은, 말 그대로 인간 본성의 발로. 번지르르한 말보다, 인간의 행동을 믿어야 할 이유다.

중국의 ‘환대’에 빠져 한국을 배신한 정치인·교수·엘리트들 

주재우 경희대 교수 인터뷰 [차이나 프리즘]

 

 

 
 

 

#1. ‘주한미군 세균 실험실에서 이뤄지는 깜깜이 실험’ ‘코로나 19 공조 지원하는 중국 ‘미국은 절대 한국의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다.’ 중국 홍보업체가 만들어 국내 언론사로 위장 활동 중인 38개 웹사이트에 게재돼 있는 기사(記事) 제목들이다. 국가정보원이 지난달 13일 적발해 발표한 웹사이트들은 조선주간·동아뉴스넷·서울프레스·충청타임스·인천속보처럼 국내 언론사 명칭을 교묘하게 바꿔 한국 언론사 행세를 하며 반미(反美)·친중(親中) 성격의 콘텐츠를 국내에 다량 유포했다.

 

#2. 2006년 문을 연 광주광역시 소재 호남대 공자학원은 광주시교육청과 중국 후난성 교육청·시안시 교육청과의 자매결연, 광주경찰청과 후난성 공안청의 협조를 성사시킨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2010년 6월 호남대 경찰행정학과 학생들을 후난성 공안(公安)대학에 실습파견키로 한 합의도 마찬가지다. 2015년 4월 하순 후난성 공안청 대표단은 4박5일 일정으로 방한해 광주경찰청의 경찰특공대, IT기반 치안시스템, 112종합치안상황실 등을 시찰했다.

중국 하이마이사가 제작해 한국 언론사로 위장해 활동하고 있는 웹사이트들/국정원 캡처
중국 언론홍보업체 하이마이(Haimai)가 만든 위장 국내 언론사 웹사이트에 뜬 기사/국정원 캡처

 

주재우(朱宰佑·56) 경희대 중국학과 교수는 이런 모습에 대해 “중국몽(中國夢) 달성을 위해 중국공산당(약칭 중공)이 한국을 상대로도 ‘영향력 공작’을 치밀하게 펼치는 증거”라고 말했다. 그는 1990년 9월 중국 유학을 시작해 1997년 7월 베이징대 국제관계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중국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주 교수를 기자는 지난달 24일과 29일 서울 양재동과 광화문에서 각각 만나 인터뷰했다.

 

 

◇중공의 ‘은밀한’ 21세기 통일전선공작

 

- ‘영향력 공작’을 쉽게 설명한다면.

 

정면 대결해선 이기기 힘든 적(敵)을 상대로 선전선동, 여론조작, 매수, 협박, 약점 잡기 같은 비정상적인 방법을 동원해 자기 세력을 확대하고 적은 위축·약화시키는 중국 특유의 전략·전법이다. 1921년 창당 때 50여명 남짓했던 중공은 국민당이라는 강자(强者)에 맞서 1938년 50여만명, 1949년에 449만명으로 당세(黨勢)를 불렸다. 이때 구사한 통일전선 공작을 21세기에 맞게 세련되게 다듬은 것이다.”

1945년 중국 충칭에서 만난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왼쪽)와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 열세에 있던 마오쩌둥은 국민당 격파를 위해 통일전선 공작을 적극 구사했다. 통일전선 공작은 21세기 중국몽 달성의 핵심 수단이다. '영향력 공작', '샤프 파워(sharp power)' '초한전' 등으로도 불린다./wikipedia

 

주 교수의 이어지는 말이다.

 

“중공이 세계 각국을 상대로 벌이는 자국 이익 증진 행위가 모두 ‘영향력 공작(Influence Operation)’에 해당된다. 오랜 세월동안 중국의 가장 효과적인 세력확장 도구로 검증된 이 공작은 레이더망을 피해 조용히 침투하는 스텔스 폭격기처럼 아주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그래서 ‘비밀스러운 전쟁(stealth war)’ ‘조용한 침공(silent invasion)’으로 불린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매수·회유·여론전·심리전·해킹·댓글공작·사이버전을 펴는 게 특징이다. 중공 내부적으로는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뜻의 ‘초한전(超限戰·un-restricted warfare)’이라고 한다.”

 

그는 “중국의 공작 대상은 언론인, 지식인, 엔지니어, 시민단체(NGO) 관계자, 중앙 및 지방의 각급 공무원을 망라한다. 이 과정에서 성공 기미가 보이는 대상자들을 중공은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그들이 감동할 정도로 환대(歡待)한다”고 말했다.

클라이브 해밀턴 호주 찰스 스터트대 교수가 2018년 냈고 2021년 6월 한국어로 번역출간된 <중국의 조용한 침공>(왼쪽)은 중국 공산당이 호주의 정치, 기업, 언론, 대학 등을 상대로 영향력 공작을 펴는 실상을 파헤쳤다. 오른쪽의 로버트 스팔딩 전 미국 NSC 전략국장이 쓴 <중국은 괴물이다>(영문판 제목 Stealth War)는 세계를 상대로 한 중국의 패권 장악 노력과 실태를 해부한 책이다.
프랑스,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에서 중국공산당이 벌이는 '영향력 공작' 실태를 고발하고 파헤친 단행본들. 해당국 언론인과 학자들이 추적보도해 쓴 책들이다. 2021~2022년 한국어로 번역출간됐다./송의달 기자

 

◇서양 언론인들의 활발한 ‘추적 보도’...한국은 全無

 

- 미국, 캐나다, 호주, 프랑스 등 서양 선진국에서도 그러한가?

 

“당연하다. 서방 국가들에선 유력 싱크탱크와 대학, 전문가 집단에 중국 자금을 쏟아부어 호의적인 연구 결과와 보고서를 유도하거나 중국계 현지인과 로비스트 등을 동원해 선거와 입법 과정에 개입하는 방식이 많다. 이들 나라에선 10여년 전부터 언론인들의 적극적인 탐사·추적 보도 기사(記事)와 서적들을 통해 중국의 은밀한 활동이 파헤쳐 중국에 대한 경각심과 반중(反中) 정서가 높아졌다. 우리나라에선 그런 보도가 전무(全無)해 내가 올해 초부터 연구를 시작해 1~2개월 내 단행본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그는 이렇게 밝혔다.

 

“2022년 12월 말 터져나온 서울 잠실의 중식당 ‘동방명주(東方明珠)’라는 중국의 비밀 경찰서는 빙산(氷山)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학계만 해도 ‘누가 중국의 지원을 특히 많이 받는다더라’ ‘정부 관련 기관과 학계의 유력 연구자의 자녀가 중국대사관 장학금을 포함한 중국 국가장학금 등을 받고 있다’ ‘유명 중국 전공교수는 부모가 수 년전 중국 정부 초청 무료 관광을 다녀왔다’ 같은 소문이 파다하다. 이처럼 법망(法網)을 피하면서 한국의 중국 관련 실력자들의 머리와 손, 발을 꽁꽁 묶는 게 영향력 공작이다.”

중국의 비밀경찰서로 판명난 서울 잠실 한강변에 있는 선상(船上) 중식당 '동방명주' 모습(왼쪽)/조선일보DB, 2022년 12월 29일 ‘동방명주’ 식당 대표인 왕하이쥔(王海軍) 중국재한교민협회총회 회장이 식당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뉴시스

 

- 한국에 특화(特化)된 ‘맞춤형’ 공작을 펴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중공은 북미와 호주, 유럽 등에서는 성공한 현지 화교(華僑), 즉 중국계 자국민을 적극 활용해 주류 사회를 파고든다. 화교 인구가 2021년 2월 기준 2만명 미만인 한국에서, 그들은 친중(親中) 성향 한국인들을 적극 활용한다. 중국에 호감을 갖고 있는 친중 정치인들과 중국에 애틋함과 정(情)을 갖고 있는 중국 전문가들이 대표적이다.”

 

주 교수의 이어지는 말이다.

 

“이 가운데 핵심은 친중 성향이 매우 높은 한국의 친북(親北)·종북(從北) 세력이다. 이들에게 중국은 북한의 동맹이자, 북한의 가장 긴요한 생명줄이 되는 나라다. 이런 이유로 한국의 친북·종북·반미(反美)·반일(反日) 세력은 친중 세력과 정체성과 이해 관계를 공유한다. 중공에게 친중 세력은 천군만마(千軍萬馬) 같은 존재다. 한국에서 중국에 대한 포비아(phobia·공포증)가 줄지 않는 것은, 중국의 갖은 횡포를 비판은커녕 거꾸로 옹호하는 친중 세력 탓이 크다.”

2019년 12월 방중한 문재인 당시 대통령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만난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 문 대통령은 당시 방중 기간 중 10끼 가운데 8끼를 혼밥했다./뉴시스
양정철(왼쪽)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장이 2019년 7월 10일 중국 베이징에서 리지 중국공산당 중앙당교 부교장과 교류협력 추진 협약을 체결한 후 악수하고 있다./중공 중앙당교-뉴스1

 

◇정체성을 중공과 공유하는 종북 좌파 정치인들

 

- 중국공산당의 최근 한국 정치권과의 교류 활동을 보면 민주당에 편중돼 있다. 왜 그런가?

 

“2017년 12월 중국 방문시 ‘중국은 큰 산, 한국은 작은 봉우리’라며 ‘중국몽’ 동참을 밝힌 문재인 전 대통령처럼, 많은 민주당 정치인들의 정치 철학, 정체성, 이념 인식이 중공과 거의 같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시진핑의 중국이 추구하는 ‘인류운명공동체’에도 강한 긍정과 참여 의사를 갖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이 표방하는 가치와 이념은 중국과 완전히 다른데도, 이들은 중국과 운명을 함께 해야 한다고 외친다. 중공은 이를 통해 한국 정계(政界)를 갈라치기 해 이미 절반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

2017년 5월 시진핑 중공총서기가 문재인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베이징을 방문한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를 만나고 있다. 당시 시 총서기는 상석(上席)에 앉아 노골적으로 이 전 대표를 하대(下待)했다./연합뉴스
문희상 당시 국회의장(왼쪽)이 2019년 2월 12일(현지시간) 워싱턴DC 의사당에서 낸시 펠로시 연방하원의장을 만나 '만절필동'(萬折必東·황하가 만 번을 꺾여 흘러도 결국 동쪽으로 흘러간다)을 쓴 친필 휘호를 선물하고 있다. '중국에 충성'을 서약하는 내용의 휘호를 미국 의회 지도자에게 증정했다는 점에서 문 의장이 대한민국의 체통을 훼손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조선일보DB

 

그는 “2017년 12월 신임 주중한국대사는 신임장을 받는 자리에서 ‘천자를 향한 제후들의 충성’을 뜻하는 ‘만절필동(萬折必東)’ 문구를 방명록에 썼다. 2015년 8월 중국을 방문한 박원순 당시 서울시장은 낯 뜨거운 친중 발언을 쏟아냈다”며 이렇게 말했다.

 

친중 정치인들의 언행은 실언(失言)이 아니라 국민들의 자존심을 무시한 채 중국에 보내는 아첨(阿諂)이다. 이들은 2016년부터 사드 보복을 퍼부은 중국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못하면서 일본에 대해서는 항일 의병과 죽창가(竹槍歌)를 들고 싸우자고 외치는 위선적인 행태를 보였다.”

 

◇한국 영토 주권 ‘무력화’ 밀어붙이는 중국

 

- 중국의 영향력 공작에서 다른 특징이 또 있다면?

 

“대한민국의 영토 주권 무력화를 집요하게 밀어붙인다는 사실이다. 2010년 우리의 서해를 자신의 ‘내해(內海)’로 규정한 중국은 2020년 한 해에만 우리 해상 관할 구역에서 항공모함 훈련 약 20회, 대잠수함 훈련 약 10회에 매일 동경 123~124도 해역으로 해군 경비함을 출동시키고 있다.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중국 해군이 한중(韓中) 배타적경제수역(EEZ)의 잠정 등거리선을 넘어 온 것만 900회가 넘는다. 2023년 여름 중국 전투기가 독도 인접 하늘을 비행했는데, 우리 공군 전투기는 대응출동을 않고 일본은 출동시켰다. 중국의 ‘반복 노력’으로 한국의 안보 불감증(不感症)이 높아지는 양상이다.”

/그래픽=주재우 교수
우리나라와 중국은 자국의 배타적경제수역(EEZ) 경계를 동경 123도 가까운 곳과 124도로 각각 삼고 있다. 그러나 동경 124도를 경계로 확정할 경우, 서해의 70% 이상이 중국 관할로 흡수돼 한국 정부는 이를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편 중국은 한중 접경 바다에 10개 넘는 부표를 설치해 놓고 있다. 부표는 해당 해역이 자기 관할구역임을 알리기 위해 설치한 증표이다./주재우 교수 제공
 

주 교수는 “중국은 최근엔 러시아 공군과 합세해 우리나라 방공식별구역(KADIZ)을 무단 침범하고 있다. 2016년부터 2019년까지 중국이 방공식별구역을 무단 침범한 횟수가 450여 회에 달한다”고 말했다.

 

- 중국이 이렇게 우리의 영토주권을 위협하고 뒤흔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은 중국의 제1도련선(島鏈線·오키나와~타이완~필리핀~보르네오섬을 잇는 중국의 해상 방어선) 안에 포함돼 있는 유일한 나라이다. 중국이 태평양으로 진출하려면 제1도련선을 돌파해야 한다. 중국의 진출 길목으로 4개 해협이 있는데, 중국은 우리의 대한해협을 가장 애용한다. 중국은 이런 차원에서 한국의 영토 주권 수호 의지 무력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중국은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 사건후 올해까지 13년간 서해에서 한미(韓美)연합해상훈련을 중단시키는 성과를 냈다.”

 

◇“중국 영향력 공작 100년 넘게 지속될 것”

 

- 중국의 이런 ‘영향력 공작’은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

 

“중국의 영향력 공작, 달리 말하자면 통일전선 공작은 목표를 완수할 때까지 100년 넘게 지속되는, 상상을 초월하는 장기 전략이다. 중공은 한반도 정책의 최대 목표인 한미(韓美)동맹 폐기와 주한미군 철수가 실현될 때까지 대한민국의 영해·영공 침범도 계속할 것이다. 한국 언론과 지식인들이 이 문제를 지적하며 국민적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중국은 목표를 더 많이, 더 빨리 달성할 것이다.”

중국이 설정한 제1도련선(島鏈線·island chain, 선 두 개 중 왼쪽편) 안에 있는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중국에 군사적, 전략적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힌국 중국 일본 3개국의 해상 경계/그래픽=주재우 교수

 

- 국내 22개 대학교에서 활동하는 공자학원(孔子學院)도 중국의 ‘영향력 공작’ 창구 아닌가?

 

“분명 그렇다. 한국에서 중공은 ‘공자학원’을 지렛대 삼아 특정 지방 장악에 총력을 쏟고 있다. 이미 호남과 충청 등은 ‘친중(親中) 텃밭’이 되고 있다. 공자학원은 이를 위한 숙주(宿主)이자 본부 노릇을 하고 있다.”

 

- 구체적인 사례가 있나?

 

“공자학원들은 거의 예외없이 지역의 교육청, 경찰, 초중고 교장~교사, 심지어 초등학생에까지 손길을 뻗치며 관련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호남대 공자학원은 2014년 중국 인민해방군가 등을 작곡한 쩡뤼청(鄭律成·한국명 정율성) 동요경연대회를 광주MBC와 함께 열었다. 이런 모습은 농촌 장악후 도시를 공격해 중국 공산화에 성공한 중공의 과거를 연상시킨다. 중공은 한국의 지방을 먼저 ‘친중’으로 만든 뒤 수도권과 전국을 석권한다는 계획을 세운 것 같다.”

 

◇공자학원은 지방을 ‘친중 텃밭’ 만드는 본부

 

주 교수는 “우리나라 대학과 공자학원간 계약서를 살펴 보면 ‘폐기 조항’이 없다. 공자학원이 대한민국의 이념·가치에 반(反)하는 행동을 하거나 국내 실정법을 위반한 증거가 없으면 반(半)영구적으로 대학 안에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전미(全美)대학협회와 정부가 합동으로 외국의 대학 지원금 사용 내역을 공개토록 하고 이를 거부하거나 불법을 저지른 공자학원을 퇴출시키는 미국 사례를 우리도 참조할만한 하다”고 말했다.

2022년 10월 광주광역시 MBC 공개홀에서 열린 ‘2022 정율성(중국 명칭 쩡뤼청) 동요 경연 대회’에서 한 초등학교 참가 팀이 정율성의 ‘우리는 행복해요’를 부르고 있다. 중국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도 수록돼 있는 이 노래는 정율성이 중국 공산당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내용이다./광주MBC 유튜브
국립 안동대학교공자학원 부설 안동 청소년중국어교육센터가 2022년 3월 25일 제9기 입학식을 가진 뒤 찍은 사진. 안동대 공자학원은 최근 입학 대상자를 초등학교 2학년으로 대폭 낮춘 것으로 전해졌다./안동대 홈페이지

 

- 중국의 전방위 공작·침투에 한국 지식인·엘리트들은 아직도 무감각하고 침묵하고 있다.

 

“상당수 한국 엘리트들이 여전히 ‘중국은 한반도 통일과 북한 비핵화에 매우 중요하며, 중국 시장의 가치는 영구적’이라는 환상에 갇혀 있는 탓이 크다. 문재인 정권 5년의 친중 노선으로 말미암아 대한민국의 국익 보다 중국을 우선 고려하고, 중국의 심사(心思)를 거스르지 않으려 자기검열하는 중국 공포증도 심각하다.”

 

- 이런 현상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국민 모두가 중공의 본질과 속셈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중공은 북한의 핵 군사력 강화를 ‘정당하고 합리적’이라며 두둔하는 나라다. 중국 시장의 가치와 매력은 급감하고 있으며, 글로벌 협업 구조로 중국은 한국에 일방적인 경제 보복을 가할 수 없게 됐다. 동시에 정부는 대중(對中) 외교 원칙, 즉 중국이 넘어서는 안되는 마지노선(線)을 천명하고 그 실천을 요구해야 한다. 대중 외교 원칙은 한국의 주권과 영토·체제 존중, 내정 간섭 불용(不容) 등을 담아야 한다.”

박진(사진 왼쪽) 대한민국 외교부 장관이 2022년 8월 9일 중국 칭다오시 지모구 지모고성군란호텔에서 왕이 중국 외교부장과 회담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 출범후 첫 외교장관 회담에서 중국은 한국의 주권(主權)과 독립을 침해하는 5개항을 일방적으로 요구(堅持五个 应当)하며 무도하게 한국 정부를 협박했다./대한민국 외교부-조선일보DB

 

자녀가 ‘中국가장학금’ 받는 중국 전문가들

 

- 하지만 한국 엘리트들과 외교관들은 중국 앞에 서면 작아지는 것 같다. 왜 그런가?

 

“중국 관련 여론과 정부의 대응 방향을 결정하는 한국의 중국 전문가들이 사실상 중국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면서 심하게 말하면 그들을 위한 나팔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보·좌파는 물론 중도·우파 전문가들 중에서도 본인 외에 가족, 친척 등까지 중국의 지원과 환대를 받은 이들의 숫자가 제법 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른바 ‘홍색귀족(紅色貴族·일종의 대리 부패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공작 대상자를 부패 수준의 혜택·지원에 연루시킴)’ 전략에 포획된 것이다.”

 

그는 “예를 들어 자녀를 중국 명문대학에 유학을 시켜 주고 장학금과 생활비까지 제공하거나 조선족 사업가 등 우회 통로로 상당한 정치 자금을 전달하는 방식이다. 중국에서 사업하는 친·인척이 있으면 그를 중국 고위 관료나 영향력 있는 재계 인사와 연결해 주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중국에 비판적인 목소리나 보고서 작성이 원천 봉쇄된다”고 했다.

 

- 이는 작은 이익에 도취해 대한민국을 배신(背信)하는 행위 아닌가?

 

“그렇다. 적지 않은 학자와 전문가들이 중국으로부터 지원과 특혜를 받았거나 받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앞으로 법적 효력 있는 증거를 모아야 한다. 이들이 받는 지원금이나 혜택은 서방과 비교할 때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 정도 수준에서도 중국을 옹호·변호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서는 한국 전문가들의 모습이 안타깝다. 중국의 ‘저렴한 공작’에 한국 엘리트들이 놀아나고 있다.”

2022년 10월 26일 시민단체 '공자학원 실체알리기 운동본부'와 'CCP(중국 공산당) 아웃'이 서울 신촌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연세대 공자학원과 차하얼 연구소 폐쇄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차하얼 연구소는 중공이 공공외교와 학술토론회라는 미명 아래, 정·재계, 지식인·문화계 등 한국 유력 인사들을 포섭하고 친중 여론을 퍼뜨리는 본산으로 지목된다./공자학원 실체 알리기 운동본부
한국세계지역학회는 2023년 11월 24일 서울 양재동 국립외교원에서 국가안보전략연구원(INSS)과 공동 학술회의를 열어 중국 등 전체주의 국가의 한국을 겨냥한 영향력 공작 실태를 점검했다. 왼쪽부터 김현욱 국립외교원 교수, 이미숙 문화일보 논설위원, 남궁영 한국외대 명예교수, 주재우 경희대 교수, 유성옥 INSS 이사장/한국세계지역학회 제공
2020년 1월 대만에서 실시된 총통(한국의 대통령) 선거 당시 시민들이 "중국에 노(No)를 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반중(反中) 시위를 벌이고 있다./조선일보DB

 

◇‘저렴한 공작’에 포로된 한국 엘리트들

 

- 중국의 영향력 공작에 이런 무방비 상태가 5~10년 더 지속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영토 주권이 유명무실화될 뿐 아니라 나라 전체가 친중(親中) 국가가 될 것이다. 또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동맹 해체가 이뤄지거나 그 직전 단계에 이른다.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은 평시에는 중국에 예속돼 있고, 전쟁 같은 긴장 국면에는 중국의 지침에 순응하는 상하 복속(服屬) 관계에 처하게 될 것이다. 국가명만 있고 자주·독립·주권을 상실해 20세기 초에 국권(國權)을 뺏기고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 같은 비극을 겪을 것이다.”

 

- 세계적 금융인인 조지 소로스(George Soros)는 시진핑과 중공을 인류 최대의 적(敵)이자, 현대문명을 위협하는 제1 적대세력이라고 규정했는데.

 

“지금의 중국은 개혁·개방과 포용·실용 정신으로 충만했던 예전의 중국이 아니다. 폭압적인 외교와 외국에 대한 배타적·폐쇄적인 정책들은 중국을 최악의 기피(忌避) 국가로 만들고 있다. 미국이 세계 최강대국이 된 근원에는 인류가 동의(同意)할만한 민주·자유·인권 같은 보편적인 가치가 있으나, 시진핑 중국에는 공감을 주는 가치가 없다. 불법 수단·방법까지 동원해 무자비한 영향력 확대를 꾀하는 중국은 세계의 공적(公敵)이다.”

세계적인 억만 장자이자 유명 금융인인 조지 소로스는 "중국의 시진핑이야말로 오늘날 자유개방사회가 직면한 가장 큰 위협이자 가장 위험한 존재"라며 "시진핑은 하루빨리 축출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페이스북 캡처

 

◇“외국인 간첩법 제정하고, 중국인 불법 엄격 관리해야”

 

- 우리나라 엘리트들과 주류 세력은 중국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무엇보다 중국의 영향력 공작이 현실임을 인정하고 이성적(理性的)으로 냉정하게 직시해야 한다. 그 출발점은 중국 공포증과 중국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 저자세 외교를 끊는 것이다. 한국 엘리트들은 2차 세계대전 종결 후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모두 성취한 자유민주주의의 대표국이라는 자부심과 정체성으로 무장해 중공에 당당하게 임해야 한다. 한국은 민주주의의 전초(最前哨) 기지이자, 세계 자유주의동맹의 핵심 축이다.”

 

- 윤석열 정부에 바라는 바라면?

 

외국인 간첩 활동을 막는 법안 마련이 가장 시급하다. 기존 국가보안법은 북한의 간첩 활동이나 북한 찬양 같은 이적(利敵) 행위에 국한된다. 국가와 국적(國籍)에 상관없이 우리의 국익을 해치는 모든 이들의 모든 행위를 수사·처벌하는 법이 필수적이다. 법무 당국은 중국인의 국내 활동을 엄격하게 관리해야 한다. 발급받은 비자의 허용 범위를 넘어서서 활동하는 중국인들이 너무 많다. 이를 ‘예외’로 두는 한, 중국의 영향력 공작은 쉬지않고 활개칠 것이다.”

2023년 9월 4일 서울 중구 명동거리 상가에 중국인 관광객을 위해 쇼핑시 할인 혜택을 알리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뉴스1
대전경찰청은 중국에서 밀반입한 향정신성의약품을 국내에 유통하고 투약한 혐의(마약류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로 중국인(조선족)과 한국인 47명을 검찰에 불구속 송치했다고 2023년 7월 6일 밝혔다. 사진은 같은 해 5월 경찰 압수수색 당시 인천의 한 중국식품점에 보관돼 있던 마약류 박스/연합뉴스 

“가져갈 순 없잖아요? 하하” 수백억원 기부한 이 남자, 남은 재산도 다 내놓는다

 


떠날 때 성경책만 가져가겠다는
영화계 전설, 배우 신영균

< 조선일보, 김아진 기자,  2023.12.02.  >

 


96세 노신사는 그동안 수백억원을 기부했다. 알려진 것도 있지만 언제, 얼마를, 왜 했는지 기억을 다 못 할 정도로 자주, 남 모르게 했다. 이유를 물었다.

“돈을 많이 벌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제가 ‘짜다’고 소문이 났더라고요. 짜장면만 산다고. 하하. 제가 짜장면을 좋아해서 산 건데 그렇게들 말하더라고요. 오해예요. 오래전부터 돈은 죽기 전에 좋은 데다 다 쓰고 가자는 생각을 했어요. 제 기부는 이제 시작입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원로 배우 신영균은 지난 7월 이승만 기념관을 지을 부지를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20년 가까이 집을 짓고 살았던 서울 고덕동의 4000평이었다. 한강이 훤히 보이는 금싸라기 땅. “이승만 대통령이 고덕동 쪽 한강에서 낚시를 즐기곤 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즉흥적으로 ‘땅이 노니까 거기에다가 기념관을 지어도 되겠다’ 한 거죠. 건국 대통령 아니겠습니까? 예우를 해야죠.”

서울 명동의 한 호텔에서 만난 신영균은 “국민의 사랑을 많이 받은 배우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배우 말고도 치과 의사, 국회의원, 사업가 등 10개 가까운 직업을 가졌다. 1960~1970년대엔 서울에 극장과 제과점, 볼링장을 열어 큰돈을 벌었다. “손대는 것마다 잘되더라고요. 인생의 유일한 실패는 국회의원 선거에 떨어진 거였어요. 그때 쓴맛을 본 뒤 나무나 키워야겠다는 심정으로 고덕동에 땅을 사서 집을 짓고 산 거예요. 시간이 지나 그 땅을 기부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고요. 그러고 보면 세상에 이유 없는 일은 없어요.”

수백억원을 기부해온 배우 신영균은 “돌려주는 기쁨이 매우 크다. 죽는 날까지 계속 기부하겠다”고 했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흐트러짐이 없는 이 노신사는 한때 소유했다가 가족에게 물려준 서울 명동의 한 호텔 사무실로 매일 출근한다. 이곳에는 영사기, 포스터, 트로피 등 빛나던 배우 시절이 전시돼 있다. 


◇사랑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


본격적인 기부는 2006년 즈음 시작했다. 당시 50년 뒷바라지해준 아내를 위해 자녀들과 함께 금혼식을 성대하게 준비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호텔에서 하고 어쩌고 하면 억대가 들겠더라고요.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사람들과 나누자고 마음을 먹었죠. 가족들도 다 좋다고 해서 금혼식을 취소하고 불우이웃 돕기에 1억원을 기부했죠.”

이전에도 어려운 동료 배우를 위해 몰래 지갑을 자주 열었다. 하지만 ‘신영균은 구두쇠’란 소문이 충무로에 쫙 퍼졌다. 아들 신원식씨는 “검소하고 낭비하지 않는 성격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 뒤로 통 큰 기부가 이어졌다. 2010년 500억원 상당의 명보극장과 사재 100억원이 들어간 제주의 영화박물관을 기증했다. 모교인 서울대, 명예박사 학위를 준 서강대에도 수십억원을 기부했다. 각종 구호 성금, 탈북 학생 장학금 등에도 수십억원을 내놨다. 이번에 기부하겠다고 밝힌 이승만 기념관 부지는 여러 사정으로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이승만 기념관 부지를 기부하겠다고요?

“기념관 설립 추진위원회 회의에 참석했는데, 첫날 모임에서 한마디하라고 해요. 그래서 그 양반을 존경한다고 말했죠. 뭐 하나 해드리고 싶다고요. 고덕동 땅 살 때 이승만 대통령이 낚시도 했다고 하고, 인연이 있는 땅이구나 생각했죠. 그래서 거기에 짓겠다면 기증하겠다고 한 거예요.”

-평소 생각이었나요.

“그날 즉흥적으로 갑자기 떠오른 것이었어요.”

-배우 이영애는 기념관 설립에 5000만원 기부 의사를 밝히고 엄청난 비난을 받았는데.

“좌다 우다 해서 대한민국이 갈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 대통령이라는 사실은 틀린 얘기가 아니잖아요. 나라를 위해 애썼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모셔야죠. 정치적으로 싸우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요. 정치인도 국민도 대한민국을 위한 싸움만 했으면 해요.”

-2010년엔 500억원대 명보극장을 기증했어요.

“1977년에 인수한 극장이죠. 그 뒤로 충무로 극장이 다 사라졌어요. 장사가 안 되니까. 주변에서 자꾸 팔라는 거예요. 그런데 아들과 (문체부 장관) 유인촌이 ‘영화의 거리를 위해선 명보극장은 남겨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러라고 했죠.”

-보통 결심은 아닌데요.

“돈이 정말 많아도 기부는 잘 못 하죠. 저는 배우로 사랑받았으니까 그만큼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밥도 싼 것만 산다고 욕도 먹고 그랬는데요. 좋은 일 하니까 너무 좋았어요.”

-기부가 돈 버는 것보다 어렵다고도 해요.

“혼자서는 못 해요. 가족도 동의해야 할 수 있는 겁니다. 제가 기부한다고 하면 자식들이 찬성해주고, 또 아들이 기부하자고 먼저 말 꺼내면 제가 호응해주고 그래서 된 거죠.”

-2016년엔 탈북 학생 장학금으로 10억원을 쾌척했어요.

“제가 이북 출신이다 보니 탈북자 교육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통일과 나눔 재단에 10억원을 갖다줬죠. 그때 수표로 가져갔는데 깜짝 놀라더라고요. 현물로 이렇게 큰돈은 처음 만져본다고. 하하.”

-기부를 더 할 건가요?

“지금까지 얼마나 했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아직 멀었어요. 이제 시작이죠. 더 할 거예요. 나이가 있으니 자식들에게 나눠줄 건 다 줬고요. 제가 갖고 있는 남은 돈은 전부 기부하고 떠날 겁니다. 지금까지는 가족 동의를 받았지만 앞으로는 오케이하거나 말거나 할 겁니다. 제 뜻은 변하지 않아요.”

-이유가 있을까요.

“몰라요. 기부하면 그냥 좋아요. 누구는 아깝지 않냐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기부할수록 제가 더 부자가 되는 느낌입니다.”

신영균은 국회의원, 사업가 등 10개 가까운 직업을 가졌다. 하지만 그는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았던 배우로 남고 싶다”며 “다른 직업은 부업일 뿐이었다”고 했다. 1960년 영화 ‘과부’로 데뷔해 300편 가까운 영화를 찍으며 당뇨 등 병을 얻기도 했지만 “지금도 나는 배우라는 직업이 좋다”고 했다. 


◇국회의원 낙선이 유일한 쪽박


일평생 한 분야에서 성공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신영균은 손만 대면 대박을 쳤다. 그래서 기부를 할 수 있었다.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연 서울 회현동 동남치과는 늘 환자로 붐볐고, 영화배우가 된 뒤엔 흥행 보증수표로 통하며 300편에 출연했다. 사업도 흥했다. 극장도 인수하고 빵집도 열었다. 1970년대 초 명동에 문을 연 우리나라 1호 볼링장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맥도널드를 들여온 것도 그다. “해외에 영화를 찍으러 다니면서 본 게 많으니까 이것저것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적중했고요. 이렇게 잘될 수가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잘됐어요.”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으로 눈을 돌렸어요.

“영화는 시대 흐름을 많이 탔어요. 정권에 따라 규제가 달라지니까 키스도 못 하게 하고. 그러니까 관객도 안 들고요. 그래서 영화 관련 협회 등에서 회장도 하면서 사회봉사를 시작했죠. 그즈음 사업도 하고요.”

-손댄 사업마다 대박이 났어요.

“장사는 극장으로 시작했죠. 1963년 금호동에 2류 극장을 열었어요. 명절 때는 줄이 끝없이 이어졌어요. 영화배우 한 것만큼 돈을 벌었죠.”

-빵집도 했어요.

“그즈음 충무로 명보극장 옆 빵집을 인수했어요. 그 집 사장이 이민을 간대서요. 극장까지 인수하려고 한 큰 그림이었는데 그게 또 잘됐죠. 그리고 1977년에 명보극장을 샀죠.”

-우리나라 1호 볼링장도 열었다고요?

“영화배우 할 때 외국에 촬영을 다니는데 볼링장이 크게 유행했어요. 들여와야겠다 했는데 허가가 안 나서 감사원에서 감사까지 받고 시작했어요. 내 성을 따서 ‘신스 볼링장’이었죠. 손님이 정말 많이 왔어요.”

-뭐 하나 망한 게 없네요.

“글쎄 그랬어요. 그런데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서 떨어졌잖아요. 제 인생의 첫 실패였죠.”

-갑자기 왜 정치에 뛰어들었나요?

“선거 20일 앞두고 서울 성동구에 나가라는 거예요. 중앙정보부에서 반협박으로. 별로 내키지 않았어요. 그런데 나밖에 나갈 사람이 없다니까. 돈만 쓰고 600표 차이로 떨어졌죠. 상대 후보가 ‘신영균에게 세컨드(첩)가 있다’고 흑색선전을 했어요. 며느리였는데 말이에요.”

-정치를 안 하겠노라 했었죠?

“환갑이 갓 지났을 때였어요. 나무나 가꾸고 살아야겠다 해서 고덕동에 땅을 샀죠. 거기서 20년을 살았어요. 그리고 이번에 기부 얘기를 꺼낸 거예요.”

-그런데 15·16대 국회의원을 지냈어요.

“마지막으로 문화예술계를 위해 봉사하는 마음으로 했어요. 지역구 출마가 아니라 전국구 비례대표를 하라고 해서 했어요.”

-정치하면서 이룬 게 있나요?

“예술가들 의료보험제도가 없었는데, 그걸 제도화했죠. 제일 잘 한 일이에요.”

-예술계도 좌, 우로 나뉘어있어요.

“그러니까요. 재단이나 협회에서 상을 주면 좌, 우 양쪽에서 난리예요. 통합이 돼야 하는데요.”

-정치도 마찬가지죠.

“윤석열 대통령을 당선 전에 만났어요. 나를 후원회장으로 모시고 싶었다고 먼저 말을 해주더라고요. 영화를 엄청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고맙게 생각해요. 꼭 성공한 대통령이 돼야 합니다.”

-후배 정치인들에게도 한마디.

“헌법 개정이 필요해요. 대통령이 5년 가지고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윤 대통령도 그렇고요. 우리나라 대통령제는 수명을 다했어요. 진지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다시 태어나도 배우로 살겠다


유년 시절에 이유도 없이 배우가 되고 싶었다. 자신을 키운 홀어머니가 “내가 너 딴따라 하라고 이북에서 여기까지 데리고 온 줄 아느냐”고 심하게 반대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얻어맞고도 고등학교 졸업 후 가출해 2년간 전국을 돌며 연극 무대에 섰다. 그런데 배가 너무 고팠다. “직업은 있어야겠더라고요.” 공부해서 서울대 치과대학에 입학했다. 배우의 꿈은 버리지 않았다. 먹고살려고 치과를 개업했지만 2년을 버티지 못했다. 1960년 서른 살이 넘은 나이에 영화 ‘과부’(감독 조긍하)로 데뷔했다. 이후 1962년 ‘연산군(감독 신상옥)’, 1964년 ‘빨간 마후라’(감독 신상옥), 1968년 ‘미워도 다시 한번’(감독 정소영) 등 영화를 300편 찍으며 당대 최고 스타가 됐다.

-배우는 왜 하고 싶었나요?

“배우가 뭔지도 몰랐지. 왜 그렇게 하고 싶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까마득해요.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때 성극을 하는데 뽑혀서 한번 무대에 오르니까 너무 좋더라고. 박수를 받는다는 게. ‘연극이 참 좋구나, 직업으로 하고 싶다’ 했지.”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네요.

“그런데 배우가 되고자 한 때부터 집 뒤 동산에 올라가 소리 지르고 연극 대사도 따라 하고 그랬어요. 배우가 되겠다고 일편단심이었지.”

-어머니 반대가 심했죠?

“고등학교 졸업한 뒤 어머니한테 연극배우가 되겠다고 하고 욕을 많이 먹었어요. ‘야, 이 XX야’ 하면서요. 고무신짝으로 두들겨맞고 집을 나왔어요. 2년 동안 극단을 따라다녔죠. 그런데 너무 고생했어요. 트럭 하나에 다 타서 다니다 한번은 떨어져서 죽을 뻔도 했죠. 그때야 어머니 말이 맞는구나 했어요.”

-그래서 공부했군요.

“1년 더 공부해서 남보다 3년 늦게 대학을 갔어요. 배우가 먹고살 수가 없는 직업이라는 걸 알고 치과 의사를 택했죠.

-졸업하고 바로 개업했나요?

“먹고살려고요. 그래도 연극을 계속하고 싶었어요. 친구들이 와서 설득해 무대에 한번 섰는데 영화 제작자들이 보고는 병원에 찾아와서 또 배우를 하라고 해요. 그렇게 찍은 게 ‘과부’입니다.”

-반응이 어땠나요?

“그때는 영화 황금기였죠. 흥행했죠. 배우를 딴따라 취급할 때였는데 서울대 졸업한 치과 의사 출신이라 좋게 봐줬어요. 그 후 1년간 치과 의사를 병행하다가 관뒀죠.”

-의사 하다가 배우 한다고 하면 반대가 심했을 거 같아요.

“와이프가 반대했죠. 자기는 치과 의사랑 결혼했지, 배우와 한 게 아니라면서요. 스캔들이 워낙 많을 때니까 바람피울까 봐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약속했죠. 나는 당신만을 사랑하겠노라고.”

-그 약속 지켰나요?

“지켰으니까 오늘날 이러고 살고 있잖아요. 하하. 유혹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고요. 신앙으로 이겨냈고 가족 생각하면서 지켰죠. 그렇게 반대하던 어머니도 영화 개봉하니까 ‘우리 아들이 배우감이었구나’ 하더라고요.”

-배우의 삶은 어땠나요?

“너무 재밌었어요. 하고 싶은 일이었으니까요. 엄청 바빠서 힘든지도 몰랐어요. 1년에 20~30편씩 찍으니까 잠도 거의 못 자고 다녔죠. 연극과는 달랐어요. 후시녹음이라 대사도 안 외우고 다 즉흥적으로 했죠. 그래서 ‘연산군’ ‘상록수’ 등 동시녹음을 한 작품이 기억에 남아요. 욕심을 내서 한 것들이죠.”

-그러다 은퇴 아닌 은퇴를 했어요.

“돈은 많이 벌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 힘들더라고요. 피곤에서 달아나려고 초콜릿을 많이 먹어 당뇨까지 왔죠. 너무 열심히 달렸어요.”
 
-치과 의사 그만둔 건 후회 안 했나요?

“전혀. 후회 안 하죠. 100%. 하하. 다시 태어나도 영화배우를 할 거예요. 국민의 사랑을 받으니 얼마나 좋아요.”

 


◇지금 내 모습은 아내 덕


신영균은 천생 배우다. 아흔을 넘겼지만 스트라이프 남색 정장에 빨간색 넥타이를 매치하고 새하얀 행커치프를 꽂은 모습은 영락없는 배우다. 헤어는 무스로 고정했다. 걸음걸이에 흐트러짐도 없다. 나이가 무색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나 보다. “오늘 나 좀 괜찮아 보이냐”고 묻는 말투에서도 배우의 연륜이 느껴졌다. 그런 그의 스타일리스트는 딱 한 사람이었다. 아내 김선희씨. “평생 그림자처럼 뒷바라지했죠. 그 사람만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합니다.”

-여성 팬이 많았죠?

“그 시절엔 집 앞에 죽치고 있으면서 혈서 쓰고, 자기 엉덩이에 내 이름 썼다고 보여준다고 하고 그런 사람이 많았어요.”

-아내가 잔소리 안 했나요?

“하지 왜 안 해요. 한번은 팬레터를 주머니에 넣은 적이 있었는데 엄청 혼났어요. 별별 유혹이 많았는데 제가 다 물리쳤죠. 그래서 오늘날 신영균이가 있는 거야(웃음).”

-소원이 있다면요?

“우리 마누라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또 나랑 같이 갔으면 좋겠어요. 진짜. 나 없다고 자살하면 어떡하나,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거든요. 지금도 사랑해요. 그 양반도 그렇고. 나도 그 사람 하나만 알고 살았으니까요.”

-주례도 많이 했죠?

“수도 없이 했죠. 이병헌 부부도 했고. 그런데 다 잘살지는 않더라고요. 하하.”

 
◇가져갈 수도, 가져가고 싶은 것도 없어


새벽 6시에 일어나 저녁 10시가 되기 전에 잠자리에 든다. 매일 점심은 누군가와 식사를 한다. “한 달 전에 약속을 다 잡아놔요. 대화를 하는 게 낙이죠.” 루틴이 철저한 게 건강의 비결이다. 또 평생 남 험담을 해본 일이 없다고 한다.

-어떤 직업인으로 남고 싶나요?

“수도 없이 받은 질문이에요. 그럴 때마다 가만히 생각해봐요. 신영균 하면 영화배우지, 정치인 신영균이나 치과 의사 신영균이 아니잖아요. 내 직업은 배우고, 나머지는 다 부업이에요.”

-건강 유지 비법이라면.

“담배는 안 피웠어요. 어머니가 안 된다고 해서 따랐죠. 술은 젊을 때는 부득이하게 먹었지만 이후엔 입에 거의 안 댔고 지금은 아예 안 먹어요. 나쁜 일 있으면 금방 잊어버리고 좋은 일만 생각해요. 오래 꽁하질 않아요. 그게 건강 비결 아닐까요?”

-루틴이 철저하다고요?

“매일 사무실에 와서 앉아 있다가 점심 때는 중식당 가서 빠짐없이 사람을 만나요. 그리고 2시간 정도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고요. 걷고 가벼운 근육 운동이요. 귀가해서 저녁 먹고 자는 거죠.”

-소식하나요? 피부 관리는요?

“과식도 안 하지만 소식도 안 해요. 당뇨가 있으니까 단것은 안 먹고요. 피부 관리 같은 건 전혀 안 해요. 열심히 좋은 거 발라요(웃음).”

-인생에 가장 행복했던 장면이라면.

“글쎄요. (잠시 침묵) 항상 좋았어요. 이북에서 어머니 손 잡고 서울에 올 때도, 아버지가 없어서 어머니가 고생할 때도 힘들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그저 그대로 열심히 살았어요. 인생은 아름답죠. 죽고 싶다,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네요. 인생이 엄청 짧아요. 사는 날까지 건강하게, 실수하지 않고 마무리하고 싶어요.”

-나중에 관에 무엇을 넣고 싶은가요?

“성경책 하나면 돼요. 가져갈 수도 없고. 가져가고 싶은 것도 없어요.”

-영화 찍자는 제안은 이제 안 오나요?

“하하하하하. 하나 찍을까요?”

그는 2012년 서울대 동문 배우 이순재와 함께 연극 ‘하얀 중립국’으로 무대에 올랐다. 젊은 시절 열흘이면 외웠을 대사를 한 달이나 붙잡고 있었지만 행복했다. 그 무대가 마지막이 아닐 거라고 했다. “너무 좋았어요. 옛날 생각이 나면서. 무대에 다시 한번 올라갈까 생각은 하고 있는데요. 지금도 그냥 배우가 좋아요. 뭘 해서 돈을 벌면 그건 다 기부하고 싶고요.”

한비자의 충고

 

< 중앙일보,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2023.11.30 >

 



한국에서는 지금의 윤석열 대통령을 제20대 대통령이라 하는데, 역대 대통령이 모두 12명이었으니 제12대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르다. 대통령 대수는 인물로 치는 것이지 재임 횟수로 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지금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을 제46대 대통령이라고 하는데, 이는 인물로 친 것이다. 한국 방식대로 따지자면 바이든은 제61대 대통령이 된다.

대한민국의 지나간 대통령 11명 가운데, 내각제 시절 대통령인 윤보선과 과도정부 대통령 최규하를 제외한다면 나머지 아홉 명 가운데 명예롭게 퇴직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 망명자(1), 형사범(4), 비명횡사(2), 아니면 친인척 비리(2)로 역사에 얼룩을 남겼다. 

 

그런데 이미 2300년 전에 이런 일이 오리라고 예언한 정치가가 있었다. 한비자(韓非子·기원전 280?∼233·사진)가 바로 그다.

신불해(申不害)와 상앙(商鞅)의 법가(法家) 학맥을 잇는 한비자는 본디 수재로서 지모가 출중했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말더듬이여서 세객(說客)으로 출세하는 것을 포기하고 저술에 몰두했다. 진시황(秦始皇)이 그의 책을 읽고 초빙했으나 그의 재주를 시샘한 이사(李斯)의 모함에 빠져 투옥됐다가 옥중 자살했다.

한비자에 따르면 군주를 무너뜨리는 여덟 가지 유형의 측근이 있는데 이를 팔간(八奸)이라 한다. 

  동상(同床·한 이불 속의 사람), 

  재방(在旁·비서), 

  부형(父兄·부모와 형제), 

  양앙(養殃·가마꾼), 

  민맹(民萌·재물로 백성을 현혹하는 신하), 

  유행(流行·주군의 귀를 막는 신하), 

  위강(威强·백성을 겁주는 신하), 

  사방(四方·외세를 끌어들이는 신하)

등을 말한다.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면 아홉 명의 대통령은 모두 자기모순으로 제풀에 무너지고 감옥에 가거나 죽거나 역사의 죄인이 됐다. 

 

적은 늘 가까이 있었다. 충신 열 명이 간신 하나를 이기지 못하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다.

손웅정 "'제2의 손흥민'? 재능보다 인성! 기본이 있어야 한다"

 

< 한국일보, 강은영 기자 ,  2023.11.29 >

 



"바짝바짝 붙어! 그렇지!"

강원 춘천시 손흥민체육공원 내 축구장에서 한 남성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러 퍼졌다. 낯익은 얼굴과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손흥민(31·토트넘) 아버지 손웅정(61) 손축구아카데미 대표이자 감독. 그는 이곳에서 축구를 배우는 14세 안팎의 어린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렇게 할 거야? 똑바로 안 할래?", "OO아! 좋았어! 그렇게 하는 거야!" 채찍과 당근을 쏟아내는 그의 말에 축구장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스무 명 남짓의 아이들은 손 감독의 예리한 눈빛을 느끼며 진지하게 경기에 임했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손 감독은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느라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좇느라 바빴다. 내년 대회 준비를 위해 나름의 테스트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는 경기 시작 전에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을 지은 눈치였다. 아이들의 재능을 보지 않고도 말이다.

손 감독은 이른 아침부터 아이들을 기다렸다. 넓은 주차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축구장에 서서 부모와 함께 도착한 아이들을 지켜봤다. "저는 아이들이 차에서 내리는 것만 봐도 성향을 알 수 있어요. 딱 걷는 것만 봐도 말이죠." 손 감독은 차에서 내려 축구장으로 올라오는 아이와 부모의 모습을 꼼꼼히 살펴본다고 한다. 

 

그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과잉보호받는 아이들이다. 아무리 재능이 있고 뛰어나도 부모와 아이의 그릇된 성향이 보이면 뽑질 않는다. 주차장에서 여기 운동장까지 올라오는 것만 보고도 벌써 70, 80%는 결정이 난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인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다. 손 감독은 "인성, 도덕성이 바로 서지 않으면 기량이 좋은 선수는 될 수 있어도 훌륭한 선수는 될 수 없다. 대들보가 휘면 기둥이 휜다고 부모님의 성향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시 말해 축구에 임하는 태도와 자세, 재능을 뒷받침해 줄 성실함과 겸손함이 갖춰져야 큰 선수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손 감독은 지난 2019년 이곳의 7만1,000여㎡ 부지에 손흥민체육공원을 완공했다. 크고 작은 축구장 3곳과 실내구장 1곳 등이 들어섰다. 손 감독은 9~10세 아이들을 위주로 선발해 기본기부터 가르친다. 공과 친해질 수 있도록 패스와 드리블, 킥, 슈팅 등에 엄청난 시간을 투자한다. 공과 몸이 하나가 돼야 축구의 기본기가 잡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2의 손흥민'을 만들고 싶어 이곳을 찾은 일부 부모들은 고개를 갸웃한다는 것. 기본을 다져야 할 아이들에게 꽃과 열매부터 따주려 한다는 거다. 그는 그런 부모들에게 작심 발언을 했다. "'계이불사 금석가루(鍥而不舍 金石可鏤)'라고 새기기를 그만두지 않아야 쇠나 돌도 뚫을 수 있어요. 반복만 한 스승이 없거든요. (손)흥민이는 이런 기본기를 다지는 데 저하고 13년을 했어요."

손흥민은 초등학교 2학년부터 자그마치 13년 동안 아버지 손 감독과 훈련에 훈련을 거듭했다. 손흥민이 아버지와 함께 지옥 같은 훈련을 모두 견뎌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게 고난의 길을 견딘 그는 현재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에서 월드클래스 반열에 올라 전 세계 축구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래서 이젠 '손흥민 아버지' 대신 '인간 손웅정'의 삶에 주력하고 싶은 마음이다. 뒤늦게 찾은 작가로서의 생활도 즐겁다. 내년에는 자신의 독서노트를 토대로 한 신간이 나올 예정이다. 품 안의 자식이라고 손흥민에게 잔소리하는 시기는 지났다는 손 감독, 올 연말과 신년은 영국이 아닌 한국에서 맞을 계획이다.

그는 자신의 에세이(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2021)에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선수의 경기를 편히 볼 수 없는 게 운명"이라고 쓴 바 있다. 아들 손흥민의 경기가 있는 날은 소화가 안 돼 식사를 거르는 게 일쑤인 적이 많았다. 이달 초만 해도 무패행진(8승 2무)을 이어가던 토트넘은 최근 3연패 수렁에 빠져 5위까지 떨어졌다.

 

손 감독의 심정은 어떨까. "흉년이 들 수 있고, 풍년도 들 수 있어요. 흉년 들었다고 침체해 있을 거 아니고 풍년 들었다고 교만 떨 거 아니잖아요. 호황은 좋고 불황은 더 좋다고 했어요. 그게 인생사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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