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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묶여있던 ‘학문의 자유’ 풀려났다... 대법,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무죄

 

 

<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 이슬비 기자,  2023.10.26.  >

 


대법원은 26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됐던 ‘제국의 위안부’의 저자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에게 무죄 취지의 판결을 내리면서 ‘학문적 주장은 명예훼손 형사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법리를 확인했다.

대법원은 “박 교수의 표현은 조선인 위안부 전체에 대한 종합적 해석이나 평가로서 학문적 주장이나 의견의 표명”이라며 “학문적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은 필요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고 판시했다. 박 교수의 무죄는 향후 서울고법에서 진행될 파기 환송 재판에서 최종 확정될 전망이다.


◇대법 “명예훼손 처벌 대상 아니다”

박 교수는 2017년 1월 1심에서 무죄를, 같은 해 10월 2심에서는 유죄(벌금 1000만원)를 선고받았다. 2심은 ‘강제 연행이라는 국가 폭력이 조선인 위안부에 관해서 (공적으로) 행해진 적은 없다’ ‘위안부란 근본적으로 매춘의 틀 안에 있던 여성들’ 등 11개 표현이 허위 사실이며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이날 대법원은 2심 유죄로 본 표현들에 대한 판단을 내놨다. ‘공적 강제 연행’ 부분과 관련해 대법원은 “국가나 군 차원에서 어느 정도 개입이 존재해야 이를 ‘공적 강제 연행’으로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해 다양한 해석과 주장이 가능하다”면서 “박 교수 주장이 문언의 객관적 의미나 대중의 언어 관습에 비춰 용인될 수 없는 수준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대법원은 “저서의 전체적인 내용이나 맥락에 비춰 보면 박 교수가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강제 연행을 부인하거나 조선인 위안부가 자발적으로 매춘 행위를 했다거나 일본군에 적극 협력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해당 표현들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대법원은 “오히려 박 교수는 강제로 끌려가는 이들을 양산한 구조를 만든 것이 일본 제국이며 조선인 위안부는 일본 제국 구성원으로서 피해자인 동시에 식민지인으로서 일본 제국에 협력할 수밖에 없는 모순적 상황에 있었다는 점을 여러 차례에 걸쳐 밝혔다”고 했다.

대법원은 또 “박 교수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제국의 책임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다른 사회 구조적 문제가 기여한 측면이 분명히 있으니 전자에만 주목해 한일 갈등을 키우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기 어렵다는 주제 의식을 부각하기 위해 해당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고도 했다.

박 교수는 이날 판결에 대해 “대한민국에 국민의 사상을 보장하는 자유가 있는지에 관한 판결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위안부 강제 연행을 부정하거나 위안부 할머니를 기만한 적이 없다”며 “고발당한 이후 9년 4개월 동안 제 의도를 정확히 간파하고 응원해 주신 분들께 감사한다”고도 했다.

 


◇ 2014년 시작된 법정 공방

‘제국의 위안부’가 처음 출간된 것은 2013년 8월이었다. 이 책은 ▲위안부의 불행을 낳은 것은 식민 지배, 가난, 가부장제, 국가주의라는 복잡한 구조였다 ▲20만명이 강제로 위안부가 됐다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라는 등의 주장을 담았다. ‘위안부 문제를 보는 폭넓은 시각을 제시했다’는 호평과 ‘일본의 국가적 책임을 경시하는 잘못된 논점을 담았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았지만 학문적 논의의 틀을 벗어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2014년 6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9명이 자신들을 ‘자발적 매춘부’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 등으로 매도했다며 박 교수에 대한 민형사 고소에 나서면서 책을 둘러싼 법적 공방이 시작됐다. 법원은 이들이 낸 출판 금지 가처분 신청을 일부 인용해 “ ‘위안부’들을 ‘유괴’하고 ‘강제 연행’한 것은 최소한 조선 땅에서는, 그리고 공적으로는 일본군이 아니었다” “’위안’은 기본적으로는 수입이 예상되는 노동이었고, 그런 의미에서는 ‘강간적 매춘’이었다. 혹은 ‘매춘적 강간’이었다” 등 문장 34개를 삭제해서 출판하도록 했다.


◇국내 학계, 옹호와 비판으로 나뉘어

2015년 11월 검찰이 박 교수를 기소하자 ‘학문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고노 담화’의 주인공인 고노 요헤이 전 일본 관방장관,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일본 총리, 노벨 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 등 일본의 진보적 인사들은 “제국 일본의 근원적인 책임을 지적했을 뿐”이라며 박 교수를 옹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국내 학계는 옹호론과 비판론으로 나뉘었다. 2015년 12월 2일 김병익 전 문화예술위원장, 문정인·정과리 연세대 교수 등 190여 명은 “검찰 측의 기소 사유는 책의 실제 내용에 비춰볼 때 타당하지 않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반면 같은 날 정진성·양현아 서울대 교수, 임지현 서강대 교수 등 60명은 “충분한 학문적 뒷받침 없는 서술로 피해자들에게 아픔을 주는 책”이라며 ‘제국의 위안부’를 비판했다.

 

 

 

2.

무죄 난 박유하 교수 “좌도 우도 ‘제국의 위안부’를 誤讀했다”

 

90년대 도쿄 위안부 증언 집회,  눈물 흘리며 통역한 게 첫 인연
하지만 ‘제국의 위안부’ 펴낸 후 있는 그대로 읽은 독자는 소수
9년 4개월 만의 무죄 판결, 집필 동기 이해받았다는 심정
할머니들은 늘 소외돼 그분들의 명복과 평안을 빈다

< 조선일보,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  2023.10.30. >



위안부 할머니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형사고발당한 지 9년 4개월 만에 대법원의 무죄취지 파기환송 판결을 받았다. 판결문에선 나의 집필 동기와 글의 의도가 명확히 파악되고 있었고, 학문과 역사에 대한 깊은 고찰도 담겨 있어 반갑고 고마웠다.

30년 전의 일이 떠오른다. 90년대 초, 일본 유학 마지막 무렵 즈음에 위안부 문제가 처음 제기되었다. 도쿄에서 열린 위안부 증언 집회에서 나는 무료로 통역 봉사를 맡게 되었다. 눈물을 흘리며 통역하던 경험이 바로 이 문제와의 첫 만남이다. 귀국 후 나눔의 집을 방문해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증언집을 읽기도 하면서, 나는 세간에서 위안부 문제가 소비되는 방식에 조금씩 의문을 갖게 되었다. 2005년에 펴낸 책 ‘화해를 위해서’에서 나는 그런 의구심을 처음 세상에 제기했다. 언론에서도 호의적으로 다루어지고 ‘문광부 우수교양도서’로 선정되기도 했지만, 책은 많이 팔리지 않았고 널리 읽히지 않았다.

이후에도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 대립은 격화되어가기만 했다. 국내에 소녀상이 세워진 직후부터, 나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제대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목소리 큰 양극단의 싸움에 동원되어 똑같이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만 늘어가는 소모적 현실에 제동을 가하고 싶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나고 관계 서적 대부분을 읽어 온 내가 보기에, 할머니들의 삶을 온전히 보려고 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소중히 여겨지는 듯 하면서도 실상은 할머니들은 소외되고 있었고,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원인은 거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2013년에 ‘제국의 위안부’를 펴내고 나서 다시 할머니들을 만났다. 그들은 여전히 소외되고 있었다. “적은 100만, 나는 혼자” “정대협 빼고 보상을 직접 달라”고 말하는 할머니들의 토로를 들으며, 나는 그간의 의구심과 판단이 맞는다는 확신을 얻었다.

양극단을 비판한 나의 책을 두고, 그 양극단은 자신들의 기존 주장에 맞춰 오독했다. 우파 일부는 내가 자신들과 똑같이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동의했다며 환영했고, 좌파 일부 역시 위안부를 매춘부라 비난했다면서 나를 공격했다. 급기야 내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나는 것을 노골적으로 불편해하던 ‘나눔의 집’은, 내가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면서 형사·민사·가처분 소송을 제기했다. 책을 낸 지 10개월 후였다. 나와 가장 친했던 위안부 할머니가 작고한 지 일주일 만의 일이었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문은 “강제 연행 부인, 자발적 매춘, 적극 협력을 말하기 위해 해당 표현을 사용한 게 아니다”라고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이번 사건은 위안부 할머니들과 나의 싸움이 아니라, 그렇게 주변인들과 나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그 주변인들의 진짜 불만은 자신들과 ‘다른 해결 방법’이 모색되고 받아들여진 데에 있었다.

위안부 문제는 흔히 한일 문제로만 여겨지지만, 실은 냉전 체제와도 깊이 연계되어 있다. 위안부 문제가 시작된 1990년대 초는 북한이 일본과 국교 정상화 협상을 벌이던 시기였고, 북한은 위안부 문제를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불법 배상’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겼다. 1992년에 당시 정대협 간사였던 윤미향 전 대표가 북한이 조일 수교협상에서 ‘전쟁 범죄 배상’을 받아내려 한다면서 “남과 북 모두가” “배상을 받아내기에 충분한 주체 역량”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배경이기도 하다. 위안부 문제 운동에 깊이 관여한 법률가들 역시 북한의 대일 협상력을 의식했다. 위안부 문제에서 보상 아닌 ‘배상’을 받으려면 ‘불법’이어야 하고 바로 그 때문에 어디까지나 ‘국가에 의한 강제 연행’이어야만 하는 구조가 그렇게 시작됐고 정착됐다.

하지만 정작 북한은 2002년 평양 선언에서 그 주장을 접고, 경제적 보상을 받는 방식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이후에도 윤미향 대표 등 주변 관계자들은 ‘불법 배상, 강제 연행’ 주장을 이어갔다. 이들이 박근혜 정부 시절의 한일 합의를 결사 반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동아시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나는 북일 수교를 기대하는 쪽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국가의 자존심을 살리는 수단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은 전혀 원하지 않던 ‘성 노예 프레임’에 갇히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국가에 동원되어 오랜 세월 거리에 서야 했고, 이제는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다. 내가 ‘제국의 위안부’를 쓴 건, 그분들이 전쟁의 희생자가 아니라, 식민지 지배의 희생자들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돌아가신 할머니들의 명복을 빌고, 남은 할머니들의 평안을 기원한다.

 

 

 

3.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할머니들 편에서 쓴 책…그분들 소외당했다"

 

< 중앙일보, 문현경 기자,  2023.11.01  >

 


2013년 출간 때부터 여러 의미로 주목을 받았던「제국의 위안부」는 지금은 온전하게 읽을 수 없다. 나온 지 열 달 뒤부터 송사에 휘말린 책은, 법원의 가처분 결정으로 2015년부터는 34곳이 삭제된 채 출판됐다. 34곳은 고스란히 검찰의 공소장에도 들어갔다. 그것은 2017년 1월엔 ‘일부는 사실의 적시이나, 명예훼손은 아닌 것’이었다가(1심), 그 해 10월엔 ’일부는 사실의 적시이고 명예훼손죄에 해당하는 것’이었는데(2심), 결국엔 ‘모두 학문적 주장 내지 의견의 표명’인 것으로 정리됐다(3심). 지난달 26일, 대법원은 이 책을 “한일 갈등 문제 해결을 위한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학문적 표현물”로 읽었다. 6년만에 무죄를 받은 이튿날, 박유하 세종대학교 명예교수를 유선으로 만났다.

Q 사실의 적시냐, 의견 표명이냐를 두고 세 번의 재판에서 열 명의 판사들 간 의견이 갈렸다.


A 대법원에서처럼 전부 의견으로 본 것도 납득이 된다. 판결문 초반부에 역사학에 대한 얘기가 있었는데, 역사라는 게 진실에 가까운 기술이지만 과거에 남겨진 자료의 편린을 보고 학자들이 구성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의 기술도 소설의 플롯과 다르지 않다. 새로운 자료가 나오면 이전의 자료를 틀린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학문은 기본적으로 ‘의견’으로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Q 「제국의 위안부」는 어떻게 쓰게 됐나.  


A 책이 나온 2013년은 위안부 문제 운동이 시작된 지 20여 년 되던 때다. 지금도 그렇지만 위안부 문제를 두고 지원하자는 쪽과 비판하는 쪽의 목소리가 양 극단으로 치달았는데, 양 쪽 다 할머니들의 진짜 삶이나 생각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고 양 쪽 논리 모두 문제가 있었다. 이에 양 쪽을 다 비판한 책이「제국의 위안부」다. 국가의 체면 혹은 국가가 그동안 유지해 왔던 입장을 유지하기 위해 할머니들이 이용 또는 동원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초기 할머니들을 본 입장에서, 할머니 편에 서서 쓴 책이다.


Q 왜 소송까지 이어졌다고 생각하나.


A 책 나온 직후 반응은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고발 당한 건 10개월 후인데, 할머니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으려 했기 때문이다. 책이 나온 뒤 정작 할머니들의 생각을 물어보려 한 사람이 없어 그걸 들으려 갔다가, 나눔의 집 처우에 대한 불만과 정대협 대표 등에 대한 비판 이런 이야기까지 제가 듣고 말았다. “정대협 빼고 보상을 달라” “일본을 용서하고 싶은데 말하지 못한다” 얘기하는 분도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모아 ‘위안부 문제, 제3의 목소리’란 심포지엄(2014년 5월)을 열어 한·일 언론으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한 달 후에 고발을 당했다.

Q 위안부 문제 운동의 ‘감추어진 목적’이 있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고 SNS에 썼는데.


A 위안부 문제 운동도 30년이 넘어 거의 역사화됐다. 그 운동의 역사와 배경에 비춰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얘기다. 최근 몇 년 간 강제징용·위안부 관련 판결을 살펴 봤더니,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가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더라. 1965년 협정은 공식적으로 식민지 배상을 받은 게 아니다. 앞으로 만일 북한과 일본이 수교하게 되면 한국이 공식적으로 받지 못했던 배상을 북한이 받게 받도록 하자는 생각이 존재했다. 그러려면 식민지배가 ‘불법’이어야 하고 그 안에서 이뤄진 게 ‘강제’가 돼야만 한다. 물론 그것만 목적이라는 얘기는 아니고, 이런 식의 정치적 구조도 배경에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


Q 책 하나로 10년 가까이 송사로 고생했는데, 다시 돌아가도 그 책을 쓰겠는가.


A

 

(잠시 고민하다) 쓸 것이다. 저는 한국을 떠날 생각이 없는 사람으로서 사회가 좀 더 좋아지길 바라고 그런 의미에서 쓴 책이다. 

 

제 관심은 ‘한·일 관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갈등’ 전반이다. 

 

양 극단이 대립하며 발생하는 < 분열과 갈등, 목소리 큰 사람들의 문제를 계속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가 좀 더 안정적으로, 분열에 흔들리지 말고 접점을 찾아, 사람의 생각이 다 같을 순 없겠지만 접점을 찾으면서 좀 더 합리적이면서도 윤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4.

정의연도, 박유하도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았다


‘제국의 위안부’는 無罪였지만 박유하 주장이 옳다는 건 아냐
‘동지애’ ‘매춘적 강간’ 주장, 피해자에 대한 혐오 불러
정부는 ‘정의연 독주’ 방관만, 진정한 사과 이끌 외교 절실

< 조선일보, 김윤덕 선임기자,  2023.11.07. >


 
일본 저널리스트 도이 도시쿠니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강덕경의 일생을 추적한 책 ‘기억과 살다’에는 매우 논쟁적인 대목이 등장한다. 도야마의 군수 공장을 탈출한 자신을 붙잡아 강간한 뒤 군 위안소로 끌고 간 고바야시 헌병에 대한 강덕경의 증언이다. 고바야시는 15세 소녀를 지옥 구덩이로 던져 넣은 악마지만, “가끔 주먹밥과 건빵을 갖다주고 뱃놀이도 데려가 준 사람이었다”고 강덕경은 회고한다. “고바야시에게서만 그런 일을 당했다면 위안부로 신고하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했다.

가해자를 향한 증오와 애착의 공존에 저자는 범죄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한다. 매 맞는 아내가 남편에게서 도망치지 못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듯, 물리적·심리적 감금 상태에 있던 위안부들은 생사여탈권을 쥔 일본군이 사소한 자비를 베풀 때 과도한 애착과 감사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다.

‘제국의 위안부’를 쓴 박유하 교수의 해석은 달랐다. 그는 강덕경 같은 조선인 위안부들이 일본 군인에게 느낀 감정이 ‘사랑’ 또는 ‘동지애’일 수 있다고 해서 논란을 불렀다. 황국신민으로 애국자 역할도 담당해야 했던 조선인 위안부에겐 일본군과의 동지적 관계가 긍지가 되어 살아가는 힘이 되었고, 일본군을 간호하고 사랑하고 함께 웃던 기억을 은폐하는 건 그들을 또 한번 노예로 만드는 것이라고도 했다.

나는 박유하의 문제적 저서 ‘제국의 위안부’가 사법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책이 위안부 피해자들을 분노하게 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데 동의한다. 하루 수십 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여성들에게 ‘동지애’란 말은 얼마나 잔인한가. 이는 여성 폭력에 대한 무지이자, 피해자가 아닌 ‘제국의 시각’에서 위안부를 바라본 ‘인간에 대한 몰이해’다.

일본의 국가적 책임 유무를 결정하는 두 요소 ‘강제 연행’과 ‘위안소의 매춘적 성격’에 대해서도 박 교수는, 여성을 직접 끌고 간 주체는 포주나 업자이지 일본군이었던 경우는 적어 국가적 책임을 묻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매춘적 강간’이라는 모호한 용어를 통해 매춘을 목적으로 한 조선인 위안부도 적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군 위안부 제도는 그것이 강제 연행이든 사기든, 성폭력이든 성매매든, 일본군과 사랑을 했든 안 했든, 국가 조직인 군대가 여성에게 가한 명백한 폭력이다. 군 당국과 행정기관의 비호와 묵인 없이 위안부 동원이 불가능했다는 건 일본 학자들도 동의하는 바다. 박유하가 주요 근거로 삼은 센다 가코의 책 ‘종군 위안부’조차 ‘군의 명령에 의해 전장으로 끌려가 제1선 장병들의 성욕 처리 용구로 이용됐던 여성’으로 위안부를 정의한다. ‘제국의 위안부’와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윤명숙의 일본 박사 학위 저술 ‘조선인 군 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 제도’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와 증언이 빼곡하다.

물론 ‘제국의 위안부’는 과도한 민족주의를 등에 업고 위안부 담론을 독점한 채 일본 정부에 강경 일변도로 대응해 온 정대협(정의연)의 운동 방식을 정면으로 비판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일본 정부가 왜 그토록 법적 배상 책임을 거부하는지도 소상히 밝힌다.

문제는 박 교수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해 썼다”는 이 책이 아베 정권과 일본 극우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이다. 국내에서조차 “매춘이 자랑이냐” “가짜 위안부 색출하라”는 모욕과 멸시가 쏟아졌고, 좌파와 정의연은 이를 반일 선동에 이용했다. 박 교수는 “좌우 모두 내 책을 오독했다”고 했지만, 누구를 위한 화해인지 오독하게끔 글을 쓴 건 저자의 책임이다.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 이후 30년이 흘렀지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은 요원해 보인다. 일차적 책임은 정의연의 독주를 수수방관한 정부에 있다. 박근혜 정부가 아베 정권과 우여곡절 끝에 타결한 합의마저 문재인 정부가 휴지 조각으로 만든 뒤로는 단 한 걸음의 진전도 없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챙겼다”는 이용수의 분노처럼 한일 양국 간 협상에서도, 정의연과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도 할머니들은 언제고 소외됐다.

이제라도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일본 정부의 개입이 없었다는 주장에 분노해 위안부 피해 신고를 했던 강덕경은 “일본 정부가 진상을 밝혀준다면 배상을 받지 못해도 상관없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대구에서 만난 이용수 할머니는 “돈을 바라는 게 아니라 죽기 전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싶은 것”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결국 외교로 풀어야 한다. 일본 총리가 고개 숙여 할머니들 손을 잡아드리는 일이 그 첫걸음이다. 그건 대통령과 정부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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