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몰          19:41

시민박명   20:09

항해박명   20:44

천문박명   21:22

 

 

 

< 19:36 >

 

 

 

< 19:39 >

 

1. 일시 : 2023. 7. 16 (일)   08:10 - 10:50 / 11:00 - 12:20   (4시간)
 
 

2.  오늘 걷기 거리 :  파란색 줄친 구간  16.0 km
 
 【 1구간 】  강화나들길 14코스 강화도령 첫사랑길  10.0 km  
 【 2구간 】  강화나들길 15코스 고려궁성곽길 잔여 구간 (서문~남문)  6.0 km   

 

 

 

3. 일기

 
- 날씨 : 흐림 (기온 최저 22도, 최고 26도)
- 천문 : 일출 05:24, 일몰 19:56
 
 
 
4.  강화나들길 걷기 
 

- 강화나들길 14코스는 조선후기 철종이 왕으로 즉위하기 전 강화에서 살았던 젊은 시기에 강화읍 잠저(용흥궁)와 외갓집을 오가던 이야기가 있는 길이다.  강화군청 앞길에서 길을 시작하여 강화산성을 지나 선원면 철종 외가에서 길을 끝내고, 다시 길을 나서 15코스 고려궁성곽길 중 아직 걷지 못한 나머지 구간인 강화 서문에서 남문까지 길을 걸었다. 드디어 금년 5월 13일 강화나들길을 걷기 시작한지 11주차인 오늘 강화나들길 20개 전체 코스 (공식 거리 310km)의 걷기를 완료하였다. (서해랑길 103코스, 마니산, 성주산, 고려산 등산 추가)  

 

- 강화에 특별한 연고가 없어 아주 가끔 관광 목적으로 차 타고 다녀가던 길을 이렇게 오래동안 걸어서  강화를 샅샅이 살펴보는 인연은 참으로 소중하기 그지 없었다. 길을 걷는 동안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부터 고려시대 항쟁의 현장을 지나 조선 말 외세 침입의 현장을 모두 다 체험할 수 있었다.  역사의 현장에 못지 않게, 그 길에는 바다가 있었고 세계 5대 갯벌의 현장과 저어새를 비롯한 새와 각종 동식물들과 마주하였다.  마니산과 상주산을 등산하였고 마지막에는 고려산 능선에서 고인돌 무덤군을 보았다.  서울에서 강화까지 편도 3시간 정도 소요되는 관계로 일출과 일몰의 현장을 강화에서 제대로 보기 어려워 아쉬웠던 점도 있었다.

 

- 둘레길 걷기는 끝없는 걸음의 연속이고 길이란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내가 길을 걷고 있는 한, 이 길의 끝은 있을 수 없다. 사람 사는 것 역시 끝없이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을 견뎌내는 일이다. 그길에는 오늘처럼 내내 구름이 끼고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무더운 날씨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한계 또는 인생의 소위 불운(불운이란 인생에서 공짜 행운이 없다는 말인데, 이는 당연한 말이므로 적절한 용어가 아니다)을 대면했을 때 이를 극복해내는 것이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살았다는 흔적을 조금이라도 남기는 것이지 않을까?  비록 강화 고인돌 조각도 못 되고 우주에 남은 한 조각 에너지로 사라져 가더라도 한 순간의 흔적이라도 남긴다면 조금은 멋진 인생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삶의 균형을 추구하고 안분지족하는 구복 종교로는 이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꿈같은 이야기

             김시종


내가 뭔가 말하면
모두가 바로 웃으며 달려들어
“꿈같은 이야기는 하지 마” 해서
나조차도
그런가 싶어진다.

그래도 나는
포기할 수 없어서
그 꿈같은 이야기를
진심으로 꿈꾸려 한다.

그런 터라
이제 친구들은 놀리지도 않는다
“또 그 이야기야!” 하는 투다
그런데도 꿈을 버리지 못해서
나 홀로 쩔쩔매고 있다.

 

 

 

 

5. 구간별 풍경

 

 【 1구간 】  강화나들길 14코스 강화도령 첫사랑길     11.7 km  

 

 

조선시대 철종(1831-1863)을 흔히 ‘강화도령’이라 부른다.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강화도에서 유배 생활을 했기 때문에 불리는 별명이다. 현재 강화도에는 철종이 5년 동안 머물렀던 집인 ‘용흥궁(龍興宮)’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용흥궁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강화도에서 살았던 집을 철종이 왕의 자리에 오르고 난 이후, 보수하고 단장해서 용흥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시대 때 정상적인 과정이 아닌 특별한 사정으로 임금에 추대되었을 경우,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을 ‘잠저(潛邸)’라고 한다. 용흥궁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잠저 가운데 한 곳이다. 1849년 헌종이 후사가 없이 붕어(崩御)하자, 철종이 19세에 왕의 자리를 계승한다. 당시 철종은 정치나 학문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1844년 14세에 강화도로 유배되어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왕이 된 철종은 왕의 자리에 오르기는 하였지만, 왕으로서 누려야 할 지위와 권한을 누리지 못했기에 흔히 ‘강화도령’이라는 말이 생기게 된 것이다.

 

 

- 오늘 길은 강화읍 (관청리 -  신문리 - 남산리)에서 선원면 (선행리 - 냉정리) 로 가는 비교적 짧은 길이다.

- 버스에서 강화읍에 내리니 새벽까지 장마비 온 뒤라서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날씨는 후덥지근하여 솜에 물이 가득찬 느낌이다. 걷는게 힘든 게 아니라, 후덥지근한 날씨가 오늘 걷기에서 상대해야 할 어려움일 것 같다.

- 용흥궁에는 이미 갔다와서 들리지 않고 강화중앙시장에서 남산 방향으로 좌회전한다.

- 솔터우물은 현재는 우물터 모형만 있어 사용하지 않는 우물이다. 솔터물, 장터우물이라고 부르는 아래시장 동쪽에 있는 우물로 활터가 있었다고 한다. 예전에 *진전(眞殿) 제사 때 이물을 썼다. *(진전 : 왕의 초상화인 어전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던 곳, 고려궁지에 있었던 만녕전을 말하며 그곳에 숙종과 영조의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었다)  솔터우물은 강화중앙시장 인근에 위치해 있어 이곳에서 가끔 음악회도 개최하는 곳이다.

- 마을 골목으로 길이 이어진다.

- 단아한 모습의 미술도서관이 있다.

- 길은 갑자기 아주 작은 골목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 남산으로 오르는 길이 시작되었다.

- 남산이 공원으로 조성되어 관리 상태가 양호하다.

- 숲 속으로 들어서도 후덥지근하다.

청하동 약수터

철종과 강화도 처녀 봉이는 강화도 남산에 있는 이곳 청하동약수터에서 만나 찬우물약수터까지 거닐었다고 하는 첫사랑의 서사가 있는 곳이다.

- 걷다 보니 남산 정상부근에 있는 강화산성 남문 암문에 도달한다.

- 산성이 앞으로 뻗어 있는데 길은 오른쪽으로 간다.

- 피톤치드 가득한 잣나무 숲이 나타났다.

- 물안개 가득한 잣나무 숲이 근사하다.

- 강화나들길 15코스와 겹치는 구간이다. 14코스는 국화리 공동묘지 길로 가서 하산하게 된다.

- 하산길로 접어든다.

- 오솔길이 빗물 흐르는 길로 바뀌어 있다.

- 산을 내려 오면 에버리치라는 호텔이 나온다. 영업을 하고 있다.

- 강화읍이 내려다보이는 깔끔한 70객실 규모의 호텔이다.

-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 간다.

- 지나온 길을 올려다 본 모습이다.

- 주택과 밭이 혼재되어 있는 길을 간다.

- 버스 다니는 길을 건너서 계속 간다.

- 강화읍 남산리 길이 거의 끝나간다.

- 선행천 건너편이 선원면 선행리이다.  끝부분에 다리가 있어 건너 간다.

선원면
고려 제 23대 고종 때 강화천도시 권신 최우가 경내에 제일 큰 고장을 세우고 五百佛像을 모신 후 사찰명을 선원사라 하였고, 병자호란 당시 공신인 선원 김상용의 위패가 있는 충렬사가 선행리에 위치하고 있어 그의 호를 따서 구한말 고종 7년(1870년) 면 이름을 선원면으로 호칭하였다. (김상용이 충신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선원면에는 금월리, 연리, 지산리, 신정리, 창리, 선행리, 냉정리 등 7개의 리가 있다.

냉정리
이곳에 ‘찬우물’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물이 차고 맛이 있어 명정(名井)으로 일컬어 왔다. 또한 이 마을에 수질이 비슷한 옥곡물이라는 이름난 우물이 또 있어, 찬물이 나는 마을로 상징화되어 마을 이름은 냉정리라 부르게 되었다.

 

찬우물약수터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에 ‘찬우물’ 또는 ‘냉정약천’, ‘냉정약수’ 등으로 불리는 약수터가 소재한다. 찬우물약수터는 강화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약수터 가운데 한 곳이다. 강화군 선원면은 고려시대 고종 때 전국 2대 사찰 가운데 한 곳이었던 ‘선원사(禪源寺)’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 선원면에 ‘냉정(冷井)’이라 부르는 마을이 있는데, 찬우물약수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차고 맛있었기 때문에 마을 지명까지도 생기게 되었다. 또한 선원면에는 ‘옥곡물’이라는 우물이 한 개 더 있어서 강화도에서는 찬물이 나는 마을로 유명하다. 현재 찬우물 약수터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선원면 창리에 포함되어 있다.


철종이 어린 시절 강화도 용흥궁에서 지낼 때 냉정리에 있던 외갓집을 오가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잠시 쉬어서 물을 마셨던 곳이 바로 찬우물약수터이다. 또한 철종과 같은 마을에 살던 강화도 처녀인 봉이(鳳伊, 일명 양순이)를 처음 만난 곳도 찬우물약수터라고 전한다. 철종과 강화도 처녀 봉이는 강화도 남산에 있는 청하동약수터에서 만나 찬우물약수터까지 거닐었다. 시간이 지나 임금이 된 철종이 한양 궁궐에서 생활할 때도 강화도에서 만났던 봉이를 잊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을 시켜 찬우물약수터에서 떠가지고 온 물로 막걸리를 담그게 했다고도 한다. 찬우물약수터는 강화도 사람들에게 소문난 약수터 가운데 한 곳이다. 언제나 시원한 물맛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강화도 사람들은 물론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다. 찬우물약수터 앞에는 인근에 사시는 분들이 밭에서 기른 호박, 옥수수, 양파, 땅콩 등 제철 농산물들을 판매하기 위해 좌판을 벌여 놓는다. 

- 찬우물 약수터를 지난면 버스다니는 도로길이 나오고, 여기를 건너서 왼쭉으로 가다가 산길로 들어서게 된다.

- 다시 산길이다.

- 바닥에 장마비 흔적이 여전하다.

- 양봉하던 자리이다. 벌은 없는 듯하다.

- 능소화 떨어지는 여름날이다.

- 호박꽃이 밭의 가장자리 담에 피어 있다.

- 선원초등학교가 나오면서 다시 차도를 건너 간다.

- 멀리 보이는 산이 혈구산이다. 그 너머에 고려산이 있다.

- 비가 오고 나면 벼멸구가 극성이던 때가 있었는데 요새는 벼농사 방제를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다.

철종 외가 (哲宗外家)
1853년(철종 4)에 조선 제25대 철종이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에게 명하여 지은 기와집으로, 철종의 외척인 염보길(廉輔吉)이 살았다. 원래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로 둔 H자형 구조의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행랑채 일부가 헐려 몸체만 남아 있다. 집 뒤에는 염씨 집안의 묘가 있다. 일반 사대부 집의 웅장한 규모와는 다르게 법도에 맞도록 고졸(古拙)하게 지은 건물이이어서 양반가옥에서 볼 수 있는 기품과 화려함은 없으나 단아하고 고풍스럽다. 평면 구성은 경기 지역의 사대부 가옥 형태를 따랐으나 안채와 사랑채를 一자로 연결시켜 안채와 사랑채의 공간을 작은 화장담으로 간단하게 나눈 점이 특이하다.  

물우리(勿憂里)
물우리는 한자대로라면 근심걱정 없는 마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물우리의 원어는 ‘물오리’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마을 어디엔가 물오리 떼가 철따라 찾아오는 곳이 있거나, 아니면 마을 앞 연못에 물오리 몇 마리가 한가로이 헤엄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을이름을 ‘물오리’라 하고 싶었을 것인데, 적절한 한자어가 생각나지 않으므로 물오리[수부(水鳧)]를 ‘물우(勿憂)리’로 작명했을 것이다. 물오리마을이란 뜻의 한자어 ‘수부촌(水鳧村)’이 물우리란 지명과 같이 쓰이고 있거나, 먼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볼 때 물우리는 물오리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하다, 할 것이다.  

 

- 이전의 냉정리 공소가 신원성당으로 격상되어 미사가 거행되고 있다.

- 냉정2리 마을회관

- 마을 입구 이정표 - 대장간이 있었다는 마을유래.

- 버스타고 강화읍내로 간다.

 

 

 【 2구간 】  강화나들길 15코스 고려궁성곽길 잔여 구간 (서문 ~ 남문)  6.0 km   

 

- 이제 강화길이 아주 익숙하다. 버스 종점인 터미널에서 하차하지 않고 중간에 수협 앞에서 내려 서문 방향으로 <강화나들길 15코스 고려궁 성곽길>을 걷기 시작한다. 동문에서 강화향교까지는 강화나들길 걷기 시작한 첫날에 이미 다녀온 바 있어 생략하기로 한다.


강화산성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1232년(고종 19) 강화로 수도를 옮겼을 때 처음 성을 쌓았는데, 그 때는 지금보다 규모가 작았다. 조선 전기에 개축하였는데,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숙종 때 전면적으로 성을 보수하면서 동락천 건너 남산까지 포함시켜 크게 확대하였다. 북산, 남산, 견자산으로 이어진 포곡식 산성으로 둘레가 7,122m이다. 4개의 대문, 4개의 암문(暗門), 2개의 수문(水門)이 있고, 북산과 남산 정상에 관측소이자 지휘소인 북장대, 남장대가 있었다. 장인대(丈人臺)라고도 불린 남장대는 1745년(영조 21) 강화유수 황경원이 세웠는데, 2010년에 복원되었다. 4대문 가운데 북문에는 원래 누각이 없었는데 1783년(정조 7) 강화유수 김노진이 누각을 올려 온전한 형태를 갖췄다고 한다. 남문은 1955년에 문루가 무너졌는데 1975년에 복원했고,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이 ‘江都南門’ 편액을 썼다. 2003년 동문이 새로 세워지면서 모든 성문이 복원됐다. 동문은 망한루(望漢樓), 서문은 첨화루(瞻華樓), 남문은 안파루(晏波樓), 북문은 진송루(鎭松樓)이다. 성의 동쪽 부분은 많이 없어졌으나, 남쪽, 북쪽과 서쪽의 산자락 부분은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이 들어왔고, 강화도 조약을 맺을 때 일본군이 들어오는 등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었다.

 

- 서문 가기 직전에 서문안 마을 입구이다.

- 산성이 갈라진 틈으로 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왼쪽이 강화공설운동장이고, 오른쪽이 강화 서문이다.

- 강화 서문

- 국화리 쪽으로 15코스 길을 따라 걷는다.

- 5코스 지나갈 때 지나갔던 국화저수지이다.

- 저수지 건너편 길으로 들어선다.

- 남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 여름 풀이 그득한 오래된 공동묘지 길을 걸어간다.

- 사실 작은 묘비가 없으면 묘지인 줄 알기 어렵겠다.

- 공동묘지 길이 끝나고 강화산성 남장대가 나온다.

- 남장대 지나 서있는 느티나무가 부럽다.  사방을 내려다 보며 조용히 서있는 나무가 부럽지 아니한가.

- 강화읍 전경 - 김포 문수산 방향인데 흐릿하다.

- 강화읍내에 초첨을 맞춰 다시 한번 사진을 담아 본다.

- 산성 자리에 흙으로 둔덕을 만들어 길이 이어진다.

- 산성을 내려와 아래로 내려간다.

- 남문에 도착하였다.

 

- 오늘 걷기를 모두 마친 강화나들길 지도(20개 코스, 310km)이다. 둘레길처럼 계속 이어진 길은 아니나, 이 길을 걸으면 강화의 역사와 자연 모두를 속속들이 잘 알게 될 것이다. 사랑스러운 길이고 오래도록 생각날 것 같다.

 

 

 

 

 

1. 일시 : 2023. 7. 8 (토)   07:40 - 11:50 / 13:30 - 17:10   (7시간50분)
 
 

2.  오늘 걷기 거리 : 파란색 줄친 구간  34.0 km
 
 【 1구간 】  강화나들길 5코스 고비고개길       20.0 km  
 【 2구간 】  강화나들길 17코스 고인돌탐방길  14.0 km   

 

 


3. 일기

 
- 날씨 : 흐림 (기온 최저 20도, 최고 29도)
- 천문 : 일출 05:19, 일몰 19:59
 
 
 
4.  강화나들길 걷기 
 

- 5월 13일 강화나들길을 걷기 시작한지 10주차이다.   솜을 물에 적신 것처럼 기력이 나지 않는 덥고 습한 날씨이지만 해가 안 떴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삼고, 강화나들길 5코스(고비고개길)와 17코스(고인돌길)을 시작하였다.  오늘 어제 걷기를 정리하는 중에 장마비가 세차게 오가는 걸 보니 덥고 땀났던 어제가 참 좋았구나 생각해본다.  사람의 생각은 이렇게 상대적이다.
 

- 고비고개길은 초반부는  나무꾼들이 다니던 길이라 하는데 경사는 완만하지만 여름숲이라 거칠고 학생야영장 부근은 리본 표식이 우회하도록 되어 있어 주의해야 한다.  내가면 덕산산림야영장을 넘어가면 사유지 개발이 한창이어 공사장 인부들이 길을 막기도 하고 길 자체가 산에서 도로길로 내려가도록 변경되었으므로 공사장이 나오면 차도로 내려가야 한다.  5코스 길을 마무리한 뒤 외포리에서 버스를 타고, 아까 지나갔던 고상리 고인돌 부근으로 이동하여 17코스를 다시 시작한다.  17코스 고인돌길은 산 능선을 가면서 고인돌을 수시로 보는 길이다. 청동기 시대 강화의 산 중턱(현재 300m 고지)에 무덤을 만든 고대인들의 생각과 노력을 느껴본다.

 

- 무더위와 흘러내리는 땀 속에서 길을 걸으면 내 생각도 없어진다. 그래도 그늘에서 세 번 휴식시간을 가졌다. 고비고개길 종료 후 버스정류장 옆 가게 의자, 그리고 17코스 시작하는 오상리 고인돌 앞 의자,  길을 거의 마치고 걸어가다 만난 부근리 느티나무 보호수 아래 정자에서 쉬면서 더운 날에 뭐하는 짓일까 하는 생각보다 오늘 지나면 마지막 한 번 남았다는 생각이 더 먼저 들었다. 남들과 다르게 내가 좋아 하는 일을 찾으려면 뭔가 대가를 치러야 한다.  내 수고에 대한 위로나 대가는 어떤 말보다도 최근 내가 걸었던 길로 남아 있다. 올해 여름 길을 더하니 걸었던 지난 길의 사계절 풍경들이 잠들기 전 항상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5. 구간별 풍경

 

 【 1구간 】  강화나들길 5코스 고비고개길       20.2 km  

 

- 강화를 동서로 연결하던 옛길로 고천리에서 나무꾼과 장사꾼들이 등짐을 지고 고비고개를 넘어 강화장터로 가던 길과 2개의 저수지를 도는 풍경과 운 좋으면 내가시장에서 소박한 시골장을 만날 수 있는 코스이다. 

- 강화터미널 바로 직전에 버스에서 내려 길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이제는 익숙해진 강화 시내 길들이다.

- 어느새 남문에 왔다.

- 주말이고 오전 8시 전이라 사람 거의 없다.

- 시내 역시 마찬가지로 조용하다.

- 조양방직 자리는 안 보이고 동광직물 생활문화센터가 문을 열고 있다. 강화군에서 운영한다고 한다.

- 강화나들길을 관리하는 사단법인 본부이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들려오는 듯하다.  재단 관계자분들의 모든 노고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 강화가 원조인 뉴욕꽈배기 본점이다.

- 강화청소년 문화의 집

- 무너진 성곽 바로 너머에 강화공설운동장이 자리잡고 있다.

- 운동장에 운동하는 사람이 없다.

- 국화저수지 : 1978년 수면적 23.48㏊, 제방 길이 245m, 저수지 용량 105만t 규모로 조성된 국화저수지는 현재 강화읍 갑곶리 일대의 농지 105㏊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현재 '동락천 생태문화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국화저수지 생태문화로는 총 3.6㎞에 달하며 산책로를 걷는 구간과 저수지옆 산을 걷는 등산로로 나뉘어 있다.  투명한 수면 위로는 갈대와 물억새가 솟아있고, 수생식물원·자연학습원 등이 만들어져 있어 아이들과 생태식물을 학습하기에도 좋다. 등산로 구간은 저수지를 한 눈에 내려다보며 울창한 숲 속을 걸을 수 있어 연인들 데이트 코스로 손색이 없다.  저수지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농촌 마을들도 구경할 만하다. '승거문마을'은 마을 어귀에 선기문(개성 동북쪽에 있던 성문의 하나)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지방돌마을'은 마을 앞에 문지방처럼 가로놓여 있는 바위에서 이름이 유래됐다. 이외에도 '국장안', '국정' 등 9개 마을 이름의 유래와 역사를 돌아보고 구석구석 마을을 살펴보면 고향집에 와 있는 듯한 향수를 느낄 수 있다. 

- 저수지 주변 길목에 서 있는 강화나들길 5코스 안내표지판

- 저수지 길이 끝나고 국화리 마을로 간다.

- 풀협죽도라고 검색된다. 일일초와 비슷하다.

- 접시꽃

- 포도

- 국화리 마을 입구

- 체험할 사람들은 모두 캠프장으로 가고 여기 오는 사람들은 없는 듯하다. 

- 주목 묘목을 잘 관리하고 있다.

- 노루오줌이라는 식물이다.

-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된다.

- 경사가 심하지는 않다.

- 학생야영장이 나오는데 수선 중이다. 

- 길 안내 리본이 학생야영장에서 다시 내려가라고 하나, 분위기 상 올라가야 할 것 같아 계속 올라가보니 결국 길이 나왔다. 아마 우회하는 길이었나 보다.

- 걸어가도록 길을 만들어 놓았다. 

- 강화나들길인데 자전거가 지나가지 못하도록 하였는지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다.

- 계곡 다리 길도 있다.

- 지금 가는 길은 왼쪽 혈구산과 오른쪽 고려산 가는 길의 중간 계곡길이다.

- 왼쪽 혈구산과 오른쪽 고려산 가는 길이고, 강화나들길은 가운데 직진 길이다.

- 약간 가파른 경사길이다.

- 길이 다시 편안해진다.

- 여름 산의 진수를 느끼게 거치른 풀숲과 거미줄이 기다리고 있다.

- 산길이 끝나고 드디어 고천리 마을이 나왔다. 전원 주택 보다도 오래된 주택의 비중이 더 많다.

- 벌통이 있다.

- 마당 밭에 포도가 영글어 가고 있다.

- 인삼도 재배하고 있다.

- 자귀나무를 다시 만났다.

- 무궁화가 조용히 피어나고 있다.

- 여기는 5코스와 17코스가 마주쳐서 지나가는 공통구간의 시작점인 어반티지 글램핑 카라반이라는 곳이다. 여기부터 오상리 고인돌까지 공통 구간이다.

- 마을길이 여느 산길처럼 호젓하다.

- 심도학사는 2012년 길희성 서강대 종교학과 명예교수가 사재를 털어 고전공부와 명상을 위해 마련한 공간이다.

   (길희성교수는 내가 사숙하는 종교학 대가이다. 모든 종교는 결국 한 곳에서 만나게 된다는 결론을 제시하였다 .  https://cyoon.tistory.com/103)

- 심도학사 전경

- 강화오상리 고인돌군이다.

- 고인돌을 지나. 내가저수지 도착 전까지 산길을 간다.

- 내가저수지(고려저수지) : 내가면 고천리에 있는 내가지(고려지)는 만수면적 28만평 규모의 큰 저수지로 고려산 및 혈구산으로 99계곡에서 흘러 내리는 물줄기를 담수로 한곳으로 주변 오염원이 없어 깨끗한 수질을 보존하고 있다. 1950년에 착공하여 1957년에 준공되었으며 강화도에서 두 번째로 큰 저수지이다

- 오늘 날씨가 흐려 저수지의 풍광이 좀 떨어지는 것 같다.

- 저수지 사면에 공식 명칭으로 고려저수지라고 표기되어 있다.

- 내가면 : 조선시대 이래로 내가면이라 하였는데 내가면이란 명칭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전에 있던 외가면(外家面)의 안쪽에 있다는 뜻으로 상대적 개념으로 붙여진 듯하다.  강화읍에서 18.6 km 떨어진 곳으로 동쪽은 고려산과 혈구산으로 둘러쌓인 산간 지역이며 서쪽은 평야지역으로 해안과 연접되어 있다.  

- 내가초등학교 

- 내가면사무소와 보건소

- 마을을 지나, 차가 별로 안 다니는 도로길의 보도로 간다.

- 덕산산림욕장 :  강화군 내가면 고천리 산 494번지외 2필지에 강화군에서 건립한 캠핑장 시설로 29,440㎡ 면적에  야영장 66사이트,  관리동,  화장실,  개수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 강화나들길은 덕산산림욕장을 가로 질러 지나간다. 

- 혼자 다니는 길에서 포토존의 모델은 포토존 자체이다.

- 신림욕장 오솔길이다.

- 끝나는 지점에 갑자기 건축공사가 벌어져 있다. 원래 산 속으로 가도록 길이 되어 있는 것 같았는데 주택단지 아래 큰길로 변경해서 내려간다. 공사하는 사람들이 사유지임을 들어 출입금지라고 훈계를 주었지만, 이게 뭔 소리, 내가 언제 또다시 오겠느냐 하여 그냥 알았다고 했다. 나중에 조사해보니 인천에서 꽤 큰 교육재단이 벌이는 사업의 일환으로 건축 중이었다.

- 웰컴 로이 빌리지 -  검색해보니 로이교육재단 홈페이지에 강화식문화예술단지를 만들어 아시아에서 최초로 시도되는 음식과 문화의 접목을 테마로 한 전문 테마파크로서 4만평 규모의 부지에 카페, 리조트, 스파 등 생활예술 시설을 갖추어 아시아를 대표하는 식문화관광단지로 거듭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고 알리고 있다.

- 먼저 운영 중인 커피숍이다.

- 차가 다니는 큰 길이다. 강화나들길 리본이 있어 5코스 경로로 확인하였다.

- 가다보면 외포리 마을이 눈에 들어 온다.

- 길은 마을로 바로 가지 않고 곶창굿당을 들러서 옛날 풍습에 대해 안내한다.

-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곶창굿당 : 외포리 고창굿당은 외포리 주민들이 해마다 성대하게 굿판을 벌여 마을의 풍어와 풍농을 기원하는 곳이다.

- 마을로 내려가는 길이다.

- 리 단위 마을에 공동주택이 이렇게 많이 지어진 것을 보면 지난 날 이곳이 석모도나 교동도로 출발하는 선박교통의 요충지로 번성했던 흔적을 볼 수 있다.

- 지난번 서해랑길 102코스와 강화나들길 16코스 시점에서 삼별초 유적과 망양돈대를 지나쳐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바닷가쪽으로 가보기로 한다. 예전에 강화에 왔을 때 우연히 들린 적이 있어 유적지 방문은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다. 

- 외포리항에 여객선은 이제 운항하지 않지만 고깃배들은 제법 많다.

- 삼별초 유적을 조성해 놓았다. 진도개 돌하르방 역시 삼별초가 옮겨간 곳을 기념하여 조성한 것이다.

 

***  1270년 삼별초는 어디에서 강화를 출발하였을까?

 

고려와 몽골의 30년간 전쟁은 1259년 고려의 태자 전(후의 원종)이 부왕을 대신해 몽고에 입조하면서 일단락된다. 여기다 1270년 임유무가 살해되면서 무인정권이 종식되자, 원종은 몽골의 지시에 따라 ‘출륙 환도’를 단행했다. 그러나 환도는 삼별초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삼별초는 환도를 거부하고 1270년 6월 승화후(承化候) 온(溫)을 고려의 새로운 왕으로 추대한다. 삼별초는 6월 3일 강화도를 출발해 8월 19일 진도에 도착한다.

이때 삼별초가 강화도 어느 곳에서 출항했는가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삼별초의 출항지를 찾는 일은 강도시대 강화의 군사적 상황, 연안 해로에 의한 지방 여러 군현과 강도의 연결고리로서 항구를 찾는 작업과도 관련이 있기에 꾸준한 관심 대상이었다.  강화군은 삼별초의 출항지를 외포항으로 보고 있다. 내가면 외포리 외포항 인근에는 ‘삼별초항쟁비’가 설치돼 있다. 몽골 침략에 대한 삼별초의 항쟁을 기려 강화군민들이 1993년에 세웠다. 항쟁비 앞에는 ‘삼별초군호국항몽유허비(三別抄軍護國抗蒙遺墟碑)’라 쓰여 있다.  삼별초항쟁비 앞에는 진도군의 상징인 진돗개의 상이 있다. 진돗개는 천연기념물 제53호로 지정돼있다. 진도군이 삼별초의 역사를 바탕으로 자매결연한 강화군에 2005년 기증했다. 안내판에는 “고려 삼별초의 호국정신 계승발전을 위해 1989년 5월 2일 자매결연한 지 16주년을 맞아 군민의 마음이 담긴 강화군ㆍ진도군ㆍ북제주군의 상징물을 삼별초의 원정길인 3개 군에 설치하고 뜻을 기리기로 함”이라고 적혀있다.

강화군이 삼별초를 전면에 내세운 관광지는 외포항뿐이다.  ‘고려사’ 배중손 열전에는 “선박과 군함을 모아 공사(公私)의 재물과 자녀들을 모두 싣고서 남쪽으로 내려가니, 구포(仇浦)에서 항파강까지 고물과 뱃머리가 이어졌으며 무려 1000여 척이었다. 전 중서사인 이숙진, 낭장 윤길보가 노예들을 모아 남은 적을 구포까지 추격해 5명을 죽이고 부락산에 이르러 바다에 임해 군사의 위세를 올리니 적이 바라보고 두려워해 오랑캐 군사가 이미 이르렀다 하여 드디어 도망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대로라면 삼별초는 구포에서 항파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삼별초 출항지에 대해 인천문화재단 인천문화유산센터 관계자는 “교동도도 당시에는 방어선 기능을 했다”며 “강화도뿐 아니라 인근 섬의 군사들과 주민들도 함께 내려갔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남하하면서 강화도 주변 섬에서 군사들과 배가 지속적으로 합류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 망양돈대 : 망양돈대는 1679년(숙종 5)에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로 건평돈대·삼암돈대·석각돈대와 함께 정포보에 속했다. 방형 구조로 둘레가 130m, 석벽의 높이는 300~340㎝이다. 동쪽으로 외포리 항이 있고 바로 아래 삼별초항몽유허비가 있다. 남쪽은 급경사로 거의 절벽에 가깝다. 

- 돈대에서 나오는 길이다. 연립주택 마당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 내려오는 길에 넘어지지 않도록 친절하게도 밧줄을 설치해 놓았다.

- 5코스를 마치고 외포리 정류장에서 강화 62번 버스를 타니 나 혼자이다.

 

 


 【 2구간 】  강화나들길 17코스 고인돌탐방길  14.0 km  (버스정류장 이동 거리, 고려산 왕복 추가)

- 오상리고인돌군 (鰲上里 고인돌群) :  오상리 고인돌은 1972년에 1기가 알려져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나 그 이후에 자세한 보고는 없다가 1990년대 초에 『강화도 고인돌무덤(지석묘)조사연구』를 통해 이 고인돌이 있는 오상리 산125번지 일대를 자세하게 조사하여 잡목과 잡초가 우거진 사이에서 10기에 가까운 고인돌을 더 찾아냈다. 이 지역의 고인돌은 덮개돌은 부분적으로 손질한 흔적이 있고, 평면 형태는 모두 판돌형(板石形)이다. 덮개돌의 크기는 기념물로 지정된 내가 고인돌이 길이 335㎝로 가장 크고 나머지는 길이가 130∼260㎝로 다양한 편이다. 돌방(石室)은 돌널형태의 모습이고, 고임돌이나 막음돌을 세울 때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주변에 쐐기돌을 사용하였다. 돌방의 바닥은 거의 대부분 맨바닥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1·4·9호 고인돌은 판돌이나 깬돌[할석]이 깔려 있었다.

- 세월이 흐르면 사자의 시신은 물론 윗돌 조차도 흔적없이 자연 속으로 이렇게 사라져 버린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우리 대에 이미 사망 후 매장지 대란이 일어나 있고 또 그곳을 추모 사람조차도 없을 것이 분명해 일본에서는 풍선에 화장 분골을 넣어 40~50㎞ 상공 성층권까지 올라가 터뜨리는 하늘장(葬)까지 등장하였다고 한다.  (https://cyoon.tistory.com/7296)

- 적석사 (積石寺) : 416년(장수왕 4) 인도승려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한다. 인도승은 진나라를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절터를 물색하다가 강화도 고려산에 이르러 다섯 빛깔의 연꽃이 만발한 연지(蓮池)를 발견하였다. 그는 다섯 가지 연꽃을 공중으로 날려 그 연꽃이 떨어지는 곳마다 사찰을 지었는데, 이 절터에는 적련(赤蓮)이 떨어졌으므로 적련사(赤蓮寺)라 하였다. 그 뒤 절 이름은 적석사로 바뀌었으며, 1544년(중종 39)과 1574년(선조 7)에 중수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이후 중건되었다. 2001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조용하다.

- 낙조대 오르는 계단길이다.

- 산 정상 부근에 넓은 마당을 구축하여 낙조대라 명명하고 부처를 모셨다.

- 낙조대에서 오늘 걸었던 5코스 고비고개 길을 조망해 본다. 고려저수지와 멀리 외포리 항구가 눈에 들어 온다.

- 신심은 좋으나 이곳에 촛불을 켜면 부처님이 반드시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는 마케팅 문구는 좀 심하다고 생각했다.  

- 낙조봉 능선의 모습은 대략 이렇다.  능선길에 나무도 없고 해서 사방이 탁 트여 있다.

- 북쪽 바다와 별립산을 바라본 정경이다.

- 방금 예초기로 길 위의 풀을 재단한 흔적이 있고 멀리서 기계 소리도 들려 온다.

- 강화나들길 여행객들도 거의 없는 더운 여름 주말에 산 능선길에서 예초기 작업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의 노고에 감사 인사를 드렸다. 멀리 지나온 길 끝에서 이쪽으로 예초 작업 중이다.

- 강화고천리 고인돌군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고려산의 서쪽 능선을 따라 해발 350∼250m 지점에 18기의 고인돌무덤이 흩어져 있다. 이 고인돌군은 우리나라 고인돌무덤이 분포하는 평균 고도보다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대부분의 고인돌무덤들은 무너져 원형이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그 중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탁자식 고인돌무덤은 덮개돌의 크기가 가로 3.35m, 세로 2.47m, 두께 0.65m이다. 고인돌군이 위치한 주변 지역에 고인돌무덤을 만들기 위하여 돌을 떼어 낸 흔적이 남아 있다.

- 300m나 되는 산의 능선에 묘를 설치한 고대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생각해본다.

- 한참을 가니 다시 고인돌이 또 나온다.

- 늠름한 소나무의 모습

- 소나무 사이로 건너편 혈구산을 바라본다.

- 고려산(高麗山) : 강화6대산의 하나로 마니산(472m),혈구산(466m),진강산(443m) 다음으로 높은 산( 높이 436m)이다. 1696년 편찬된 강도지에 홍릉과 국정,적석,백련등의 세 절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신증동국여지승람」에 강화부 서쪽 15리에 있으며 강화부의 진산이라고 되어 있다. 고려산은 고려의 정기를 품고 있는 산으로 신성한 연못의 물고기가 중국 천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쳤고, 연못의 연꽃이 떨어진 다섯 곳에 오련사를 지었으며 고구려 장수 연개소문이 태어난 전설이 있는 곳으로 곳곳에 적석사, 백련사, 청련사 등 사찰과 고인돌군락지, 고구려 토성, 오련지, 홍릉 등 문화재가 분포하여 아침에 역사탐방 위주의 산행이 좋다. 적석사에서 등산을 시작하여 낙조봉(343m) 능선에서 고려산 정상으로 가는 능선에는 억새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 고려산 정상에는 이동통신 기지국 등 별도 시설이 있어 출입차단되는 듯하여 사람들의 방문지로 지정한 중간 정상을 고려산으로 생각하고 다녀 왔다. 여기는 강화나들길 코스는 아니다. 약 1km정도 왕복거리일 듯하다.

- 길 가다가 만난 산 고양이가 몸을 내게 비비고 친한 척하여 배가 고픈 걸로 짐작하여, 가지고 다니는 점심 음식물을 나누어주니 감사히 절 먹고 있다.

- 강화 하점면 삼거리 고인돌군은 강화읍에서 48번 국도를 따라 인화리 방면으로 가다 송해면과 하점면 경계지점을 지나 부근리-망월간 도로의 중간지점인 진촌마을에 있다. 진촌마을은 고려산 북서쪽 능선 상에 위치한 마을로 이 지역 일대에 탁자식 고인돌 9기가 일렬로 분포되어 있다. 어떤 고인돌무덤은 덮개돌 위에 작은 구멍이 여러 개 패여 있는데 이러한 모양을 남한에서는 성혈이라고 하고 북한에서는 별자리와 연관 짓고 있다. 작은 구멍이 있는 고인돌무덤의 크기는 고임돌의 높이 2.80m, 너비 0.90m, 두께 0.38m이다. 고인돌무덤 가까이에는 돌을 떼어 낸 흔적이 남아 있는 채석장이 있다.

- 고인돌에는 번호가 붙어 있는데 아마도 발굴 순서인 듯하다. 마지막 내려온 고인돌에 붙어 있는 번호는 125번이다.

- 마을에 내려오니 올해 처음 보는 해바라기 꽃이 맞이해 준다. 

- 삼거1리 마을회관과 교회가 같이 있다.

- 한가한 시골버스 정류장의 모습

- 강화 부근리 점골 고인돌 (江華 富近里 점골 고인돌)은 강화읍에서 48번 국도를 따라 인화리 방면으로 가다 송해면과 하점면 경계지점을 지나 부근리-망월간 도로의 중간지점, 고려산 북쪽에서 흘러내린 주능선의 끝자락에 있는 해발 15m 정도의 낮은 지대의 밭에 위치해 있다. 고임돌이 기울어져 무너져 내린 것을 현재는 원형 그대로 복원하였다. 동서방향의 고인돌을 바로 세우고 그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올린 전형적인 탁자식 고인돌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북쪽 방향에는 마감돌이 유실되지 않고 보존되어 있어 점골 고인돌은 물론 강화지역에 분포한 고인돌의 구조와 형태를 파악하는 데에 귀중한 유적이다.

- 하점면 부근리 514-1번지에 있는 수령 260년의 느티나무 보호수이다. (높이 30m, 나무둘레 4.4m) 나무 그늘이 참 튼실하여 아래 정자에서 한참을 쉬었다. 감사한 마음이다.

- 길을 가다가 지나온 고려산 정상쪽을 쳐다 본다.

- 도로길을 계속 따라 간다.

- 드디어 오늘 길을 마무리할 종점이 보인다. 

- 도착했다.

- 버스정류장에서 30분 기다려 강화버스터미널로 귀환하였다.

- 이제 한 번 남았다.

 

1. 일시 : 2023. 7. 1 (토)   09:50 - 13:10 / 14:10 - 16:50   (6시간)
 
     < 상세 시간 기록 >
    - 07:32  강화터미널 도착
    - 07:45  강화47번 버스 출발
    - 08:26  선수항 도착
    - 08:50   삼보12호 출항
    - 09:50   볼음도 도착
    - 09:50~13:10 강화나들길 13코스 전 코스
    - 13:50   삼보12호 다시 탑승
    - 14:10   주문도 도착
    - 14:10~18:50  강화나들길 12코스 (느리항~살꾸지항~뒷장술해변입구~살꾸지항 회귀)
    - 17:25   삼보6호 주문도 살꾸지항 출발
    - 18:10   선수항 도착
    - 18:20   강화 47번 버스 탑승
    - 19:10   강화터미널 도착
 
 

2.  오늘 걷기 거리 : 파란색 줄친 구간  22.0 km
 
 【 1구간 】  강화나들길 13코스 볼음도길  15.0 km  
 【 2구간 】  강화나들길 12코스 주문도길  7.0 km  


 
3. 일기

 
- 날씨 : 맑음 (기온 최저 21도, 최고 26도)
- 천문 : 일출 05:16, 일몰 20:00
 
 
 
4.  강화나들길 걷기 
 

- 오늘 길은 강화도의 진짜 섬 구간으로 배를 타고 들어가서 걷게 되는 길이다.  화도면 선수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먼저 볼음도를 일주하고 다시 아침에 탔던 배를 타고 주문도로 향한다. 주문도 코스는 선착장과 배시간에 맞추다 보니 전부 돌지 못하고 중간에 살꾸지 선착장에서 다른 배를 타고 강화도로 귀환하였다.  바다를 곁에 두고 해변길을 걷는 길은 오늘로서  끝났고 이제 두 번의 강화나들길 걷기(강화나들길, 5코스와 17코스, 14코스와 15코스)가 남았다. 열심히 걸어 보리라 다짐해본다.
 
- 섬으로 가는 길은 길이는 길지 않는 대신 배 시간 압박이 심하다.  열심히 걷고나니 오히려 배를 탈 때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정자나 바닷가에 앉아 휴식을 취할 시간이 생겼다. 파도 소리 들리는 가운데, 지난 수요일 다녀온 루체른 심포니 연주회에서 임윤찬이 협연했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라단조를 조성진이 연주한 버전으로 두번이나 들었다. 파도 소리 들리는 해변에서 홀로 듣는 경쾌한 오케스트라 반주 속을 흐르는 애절한 피아노 소리는 파란 바다 풍경과 잘 어우러져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작은 행복을 주었다.   인간은 외부 자극에 대한 감각기관 소화 능력도 변변치 않을 뿐더러, 과거를 기억하는 정신적 능력 또한 형편없는 수준이라는 연구 결과를 생각하면, 우리 인간이 다른 누구의 허물을 탓한다는 것은 어쩌면 우스운 일이다. 허망한 데 남은 시간을 쓰기 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 내 삶에 빛과 꽃이 되는 일에  집중하며 살아 보겠다는 다짐해 보았다.
 
 

5. 구간별 풍경

 
 - 오늘 타고갈 볼음도행 배(삼보12호)가 기다리고 있는 선수선착장의 모습이다. 

- 본격적인 여름이라 걷기 모자를 사하라캡(일명 양봉모자)으로 재정비하였다.

- 선실 내부는 에어컨이 틀어져 있어 아주 시원하다.

- 배가 선수항을 출발한다.

- 선실 뒤에서 여행객들이 나누어 주는 새우깡의 유혹에 갈매기들이 바쁘다.

 

 
 【 1구간 】  강화나들길 13코스 볼음도길    15.0 km  
 
< 볼음도 >
 
강화군 서도면 볼음도는 보름달의 발음을 따서 불리는 곳이다. 176가구 271명('22년 12월 현재)의 주민이 살고 있는 볼음도는 강화도 서쪽으로 7㎞, 황해도 연백군과 5.5㎞ 떨어진 서해 최북단에 위치한다. 서도면에서 가장 큰 섬으로 면적은 6.57㎢이고, 해안선 길이는 16.0㎞이다. 강화 선수포구에서 여객선으로 1시간 이상 걸린다. 하늘·바다·땅 모두 청정 지역이며, 무공해 천혜의 고장이다. 조선 인조 때 명나라로 가던 임경업 장군이 풍랑을 만나 여기에 체류하던 중 보름달을 보았다고 해서 한참동안 만월도(滿月島)라고 했다고 한다. 섬 북쪽에 봉화산(83m), 서쪽에 요옥산(103m)이 자리를 잡고 있다.

대부분의 볼음도 주민은 농업에 종사하며, 쌀·보리·마늘·고추 등을 생산한다. 어획량은 미미하고, 백합 양식이 널리 이뤄진다. 섬의 크기는 작지만, 농경지가 많아 넓은 들판을 자랑한다. 이 섬은 '새들의 낙원'으로도 유명하다. 천연기념물인 저어새와 노랑부리백로 등 20여종의 철새들이 먹이를 찾아 갯벌로 모여든다. 볼음도엔 또 유명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수령 800년에 달한다.
 
원래 볼음도 앞바다는 새우잡이로 유명한 바다였다 한다.  “볼음도 및 아차도는 은염어장이 형성돼 새우젓으로 유명했으나 어로 저지선이 3차에 걸쳐 남쪽으로 내려와 고기잡이가 어려워지고 한강의 오염 증가로 고기가 고갈되는 등 위기를 맞게 된다. 볼음도 및 아차도 어민들은 전북과 군산으로 이전하거나, 전남까지 장기 출가 어업을 하기 시작한다. 어로 저지선으로 고기잡이를 못하게 되면서 주민 대부분은 농업이 주업이 됐다. 볼음도는 농지가 넓은데  논만 해도 55만평에 이른다. 


 
- 볼음도 대합실 좌측의 ‘강화나들길 13코스’ 안내판을 잠시 살펴본 후 본격적으로 좌측 시계 방향으로 볼음도길 걷기에 나선다.  스탬프 박스는 매표소 대합실 바로 옆에 있다.

- 시작하는 길은 아래 포장도로이다.

- 강화나들길 옆에 해변 백사장이 있다.

- 보다시피 사람들도 잘 안 다니고 해서 둘레길 정돈 상태가 양호하지는 않다.

- 큰 길 나오기 전까지 아무래도 바닷가 백사장을 걸어서 길을 가기로 하였다. 썰물 때라 걸어가는 데 큰 문제 없다.

- 걸어가는 길에는 모래 말고 돌이나 큰 바위도 있기 때문에 조심해서 걸어야 한다.

- 건너편 가까이 아차도와 주문도가 보인다.

- 너덜길이다.

- 모퉁이를 돌아서면 조개골해수욕장이 나오는데 아직 사람은 없다.

- 갯벌에 말뚝을 박아 그물을 설치하고 밀물에 따라 들어온 밴댕이를 썰물에 잡기도 한다고 한다. 전통 조업방식인 건강망 어업이다. 

- 제방길은 풀이 우성하다.

 -  영뜰해수욕장 :  최근 1년 사이에 영뜰해변 서쪽과 동쪽이 각각 200여m, 100여m 침식되어 우려를 사고 있다. 서쪽 해변은 돌로 제방을 쌓았지만 200여m가 무너져 내렸고 침식은 계속 진행 중이다. 제방 역시 아래쪽과 안쪽의 모래가 빠져나가면서 주저앉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제방이 무너지면서 제방 안쪽에 방풍림으로 심어놓은 나무들이 뿌리째 뽑히기도 했다. 동쪽 해변도 상황은 비슷한데, 해변을 조망하도록 정자와 망원경이 설치된 곳 바로 앞쪽까지 모래언덕이 무너져 내렸다. 이곳의 방풍림은 모래언덕이 무너지면서 뿌리를 훤히 드러내고 있다.

- 넓은 갯벌을 배경으로 사랑스러운 의자가 마련되어 있다.

- 바닷바람 맞은 소나무와 억새풀이 버티고 있다.

- 갯벌은 옛날부터 오늘까지 잘 살아가고 있다.

- 소나무 사이로 내다본 볼음도 갯벌 모습

- 볼음도의 생태가 건강한지 좁은 숲길에서 뱀을 만났다. 뱀도 놀랐는지 스르륵 길에서 벗어나 사라진다. 길 위에 개구리들이 많던데 먹이는 많을 듯하다.

- 해변 백사장보다 그늘이 좋다.

- 밭은 있으나 근처에 농가는 없다.

- 다시 숲 안으로 들어왔다.

- 숲 속에서 바깥 세상을 바라보는 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조망이다. 평화롭다.

- 길이 막히고 이상하면 바로 해변길로 내려와서 걸어간다.

- 갑자기 날씨가 어두워지면서 해무가 다가온다. 유영을 하는 새들이 저어새인지는 망원경이 없어 잘 확인이 안된다.

- 더 어두워지는 해변가.

- 다시 좀 밝아진다. 길이 좋지는 않지만 풀숲길보다는 더 낫다,

- 밀물이었으면 못 갔을 길을 썰물이라 가장자리 돌이라도 밟으면서 지나갈 수 있다.

- 드디어 해변길은 끝이다. 요옥산길로 올라간다.

- 그늘길이다.

- 요목산을 오르지 않고 고개 중턱을 지나 아래로 길이 지나간다.

- 내려와서 돌아보니 산자락에 나지막한 구름으로 가득하다.

- 논에 벼가 그새 튼실하게 자라고 있는 계절이다.

볼음도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볼음도 은행나무는 언덕 위에서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다. 높이 25m 정도의 노거수로 천연기념물 제304호로 지정됐다. 800년 전 황해남도 연안군에 있는 부부 나무 중 홍수로 떠내려온 수나무를 건져 이곳에 심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흥미로운 사실은 북한의 은행나무도 북한 천연기념물 165호로 지정됐다고 한다. 

- 이제 볼음도 저수지다. 큰 규모는 아니나 볼음도 용수로는 충분한 규모인 것 같다.  연꽃은 아니고 수련인데 꽃은 아직인 것같다.  수련 가득한 저수지가 단아한 정원처럼 생각된다.

-  물이 깨끗하다.

- 저수지에 새들이 모여서 물도 먹고 목욕을 하고 있다.

- 저수지 수문이다. 길은 오른쪽으로 가야한다.

- 저수지 반대편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 다시 전원주택을 지나 산길로 간다.

- 그늘이 있어 좋다.

- 논을 지나 멀리 산꼮대기에 군부대가 보인다.

- 갑자기 멋있는 자태의 나무가 나와 사진에 담아 본다.  외롭게 보이나 둘이 나란히 서 있어 보기 좋다.

- 궁금해서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고 그 넘어에 있는 광경도 사진에 담아 본다. 

- 길가에 피어있는 까치수염이라는 우리나라 식물이다.

- 작은 도로따라 계속 길을 가본다.

- 논에서 벼가 잘 자라고 있다.

-  볼음도 마을이다. 주민들이 한 곳에 다 모여 사는 듯하다.

- 창고로나 쓰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 교회와 보건소 모습이다.

- 마을회관

- 이곳을 지나면 선착장으로 가는 길이다.

- 올해 처음으로 길 가에서 코스모스 꽃을 만났다.

- 볼음도 강화나들길이 거의 끝나간다. 잠시 후 선착장에 도달한다.

- 빈 땅이 자연 그대로 정원이 되어 있다.

- 선착장 가는 길가에 페츄니아꽃이 갑자기 나타났다.

- 선착장 화장실 옆에 나무로 만든 쉼터에 앉아 점심도시락도 먹고 음악도 들어보았다. 한낮이라 사람들이 거의 없다.

- 아침에 탔던 배가 시간을 바꿔 다시 들어오고 있다. 선수항을 떠나 볼음도 - 아차도 - 주문도를 왕복하는 노선이다. 이 배를 타고 주문도로 간다.

- 아차도에 도착하는 순간이다.  선수만 바꾸면 지척이 주문도 느리항이다.

 
 
 
 
 

 【 2구간 】 강화나들길 12코스 주문도길    11.3 km  
 

< 주문도 >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낙도(落島) 지역인 서도면에 있는 섬으로, 면소재지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서도면 주문도리이다. 면적 4.626, 해안선 길이 12.6km, 최고점 147m이다. 주민은  42가구 103명('22년 12월 현재)으로 고령층이 대부분이다.  섬의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임경업(1594~1646)장군이 명나라에 원병수신사로 출병하였을때 항해가 여의치 못해 인조에게 상황을 주달했다 하여 주문도(奏文島)라고 불리우기 시작했다는 전설이 있으나, 이미 세종실록에서 주문도라는 이름이 사용되고 있었으므로 이는 충성심에서 나온 허구임을 알 수 있다.
 
보름도와 마찬가지로 주문도는 지금까지 민통선에 위치한 섬으로 북한과 맞닿아 있는 접경지역이다 보니 출입과 어업의 규제가 심하여 발이 묶여 있는 곳이다. 외부인 출입이 자유롭지 않고 교통이 불편하면, 어로저지선 때문에 황금어장을 앞에 두고 주민들은 아예 어업과는 담을 쌓고 농사에만 매달리고 있다. 백합과 조개, 굴을 조금씩 캐는 섬들이 서도면 섬들이다. 

- 주문도에 두 개의 항구가 있는데 이곳은 느리항이라고 한다. 느리항 대합실 오른쪽에 강화나들길 스탬프함이 있다.(사진 왼쪽 아래)

- 시계 방향코스로 길을 시작하면 서도파출소가 바로 나온다.

- 파출소 앞 삼거리에서 서도면사무소 - 봉구산(147m)가는 길이다. 그러나 이 길은 강화나들길 코스는 아니다.

- 다른 길로 진행하여 길의 오르막 정상에서  석모도쪽을 바라본 보습이다. 

- 조그만 섬이라도 마을버스도 있고 2차선 도로도 있다. 옆에 보이는 물은 주문지라는 저수지이다.

- 길가에 우체국이 있는데 문을 열고 있는 것 같다. 소포나 택배를 나르는 오토바이가 있다.

- 안쪽 마을 입구이다.

- 서도중앙교회
 
서도중앙교회는 1923년 교인들의 헌금으로 지어진 한옥 예배당(감리교)이다. 정면 4칸, 측면 7칸으로 구성된 팔작지붕의 건물인데, 종탑부로 사용되던 건물 전면의 구조물까지 합하면 측면이 8칸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층으로 구성된 종탑부의 상층지붕은 우진각지붕으로 꾸몄다. 건물 내부의 전면에는 강단 위에 설교대를 두었으며,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다. 이 건축물은 우리 전통 목조건물의 가구형식을 바탕으로 서양교회를 지었다는데 큰 의미를 지닌다. 주문도지역에 기독교가 처음 전파된 것은 1893년 무렵이었는데, 1902년 윤정일이 감리교 전도인이 되어 주문도에 들어가 전도활동을 한 후 본격적으로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도중앙교회가 1905년 문을 열었다. 1923년 교회 신도의 헌금에 의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개축되었으며, 1978년 주문교회에서 서도중앙교회로 명칭을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멀리서 바라본 모습,  서도교회 왼쪽에 주문도를 알아보게 하는 봉구산 정상 통신탑이 있다.

- 주문1리 마을회관이다.

- 마을에서 벗어나 농로를 지나 바닷가로 가야 한다.

- 바닷가에 다달으면 해당화 군락지가 나온다. 둑을 따라 인위적으로 조성된 곳이다. 

- 멋있는 쉼터가 나왔으나 구경만하고 지나가기로 한다.

- 사진찍는 곳임에 분명하다. 석모도를 주인공으로 찍어 본다.

- 나들길 코스를 가다보니 길을 막고 밭을 만들어 놓았다. 어쩔 수 없이 볼음도처럼 해변길로 가기로 하였다. 해변에서 파도에 씻겨 뿌리 채 뽑혀 가로 누운 아까시나무를 넘어 간다.

- 설꾸지선착장 부근에 도착했다. 고맙게도 모서리에 누가 밧줄을 놓아주어서 그 줄을 잡고 올라가니 위험하지 않다.

- 바로 올라 서니 환상적인 서해바다의 모습이 더위를 잊게 한다.

- 살꾸지선착장 앞에 있는 사진 포인트이다.

- 대합실은 배가 들어올 때만 문을 연다.

- 왼쪽이 배 타는 곳이다. 오른쪽으로 좀 더 가기로 하였는데, 아뿔사 강화나들길은 아니고 그냥 해변길이다. 한참을 가다 보니 밀물 때이고 길이 점점 더 거칠어져서 어쩔 수 없이 선착장 쪽으로 돌아왔다.

- 사진찍는 걸 잊어서 나중에 배타고 돌아갈 때 바다 쪽에서 찍어 본 해변 모습이다.

- 암튼 선착장으로 바로 돌아오지 않고,  돌아오는 길의 바닷물이 너무 맑아서 발을 물에 담그기도 하며 배가 들어올 때까지 쉬었다 가기로 한다.

- 드디어 때가 되어 오늘을 마감하는 배가 들어 온다. 감사하게도 일정에 어긋남 없이 육지로 돌아 갈 수 있게 되었다.

- 배가 지나간 곳에 펼쳐지는 윤슬의 모습이 멀리 지나온 섬들을 배경으로 빛나고 있다.

- 새우깡을 펼치자 금세 갈매기들이 날아든다.

- 먹이를 구하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 배는 석모도 앞을 지난다. 보문사 앞의 건물들을 기준으로 지리를 분간해본다.

- 이곳은 강화 본도의 남서단이다. 멀리 장화리 일몰 명소 해변이 보인다.

- 다시 윤슬을 보며 오늘 걸어온 길을 되새겨 본다.

- 지금 배가 일으키는 힘찬 물결도 잠시 후에 바다 속으로 사라지게 되는 것처럼, 오늘 나의 여행 기억도 언젠가 생각의 심연 속에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허망한 데 남은 시간을 쓰기 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 내 삶에 빛과 꽃이 되는 일에  집중하며 살아 보겠다는 다짐으로 살아있는 나의 생각을 계속 새롭게 가다듬어 보자.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신현림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나무를 보면 나무를 닮고
모두 자신이 바라보는 걸 닮아간다
멀어져서 아득하고 아름다운 너는
흰 셔츠처럼 펄럭이지
바람에 펄럭이는 것들을 보면
가슴이 아파서
내 눈 속의 새들이 아우성친다
너도 나를 그리워할까
분홍빛 부드러운 네 손이 다가와
돌려가는 추억의 영사기
이토록 함께 보낸 시간이 많았구나
사라진 시간 사라진 사람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해를 보면 해를 닮고
너를 보면 쓸쓸한 바다를 닮는다
 
 
 
 
 
 
 
 
 

1. 일시 : 2023. 6. 24 (토)   08:30 - 17:30   (9시간)

 

 

2.  오늘 걷기 거리 :    강화도 남쪽 지역의  파란색 줄친 구간  31.0 km

 

 【 1구간 】  강화나들길  8코스 철새보러 가는 길  (초지진    동검도 입구)   5.5 km  

 【 2구간 】  강화나들길  20코스 갯벌보러 가는 길   (동막해변  화도버스터미널)   20.5 km   

 【 3구간 】  강화나들길  7코스 갯벌보러 가는 길   (화도버스터미널  여차1리 마을회관)   5.0 km   

 

3. 일기

 

- 날씨 : 맑음 (기온 최저 20도, 최고 26도)

- 천문 : 일출 05:13, 일몰 20:00

 

 

 

4.  강화나들길 걷기  

 

- 오늘 둘레길은 철새와 갯벌, 낙조보러가는 길이다. 하루 종일 철새와 갯벌은 마음껏 보았으나,  1박을 감수해야 하는 낙조 구경은 귀가에 편도 3시간이 걸리는 강화의 나그네로서는 부담되어, 귀가하는 버스 창밖으로 낙조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 특히 이번 출행에서는 강화의 상징인 천연기념물 저어새 무리들이 강화 남부 광활한 갯벌지대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는 모습을 아주 가까이 관찰할 수 있었다.  https://cyoon.tistory.com/7272

 

- 날씨가 이제 완전히 한여름이다. 바람은 조금씩 불어와  땀을 식혀 주었지만 더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길의 마지막 부분에 산길이 나와서 그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 지난주 선두리 부근을 미리 걸었던 관계로, 버스편이 가능한 동검도 입구에서 동막 해변까지는 버스로 중간 이동하였다. 그리고 황산도와 여차리 부근에서는 펜션 신축관계로 강화나들길 노선에 변경을 줄 정도로 많은 신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좀 더 좋은 전망을 위해 가능한 바다 가까이 인공구조물을 신축하려는 인간의 욕심은 자연 그대로 보고자 하는 마음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5. 구간별 풍경

 

 

 

 【 1구간 】  강화나들길  8코스 철새보러 가는 길 (초지진    동검도 입구)  

 

- 집에서 5시 30분 나섰으나 오늘도 시작점에 오기까지 3시간이 걸렸다. 초지진에서 버스를 내리니 여름의 꽃 수국이 연분홍색으로 활짝 피어 있다.

- 강화나들길 8코스를 가기 위해 해변으로 가는 길에 해수탕과 각종 음식점들이 있으나 토요일 아침이라 문이 닫혀 있다.

- 해변이다. 멀리 황산도와 그리로 들어가는 다리가 보인다.

- 강화경찰수련원에 아침부터 족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 금방 건너온 초지대교 부근의 모습이다.

 

- 황산도

 

  황산도(黃山島)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에 속하는 섬으로, 강화해협의 남단에 있는 섬이다. 면적은 0.275 ㎢이다.  조선 시대에는 항산도(項山島)로 불리기도 하였다. 황산도 서쪽의 소황산도는 1962년 간척으로 강화도에 합쳐졌으며, 서남쪽과 서북쪽이 각각 강화도(옛 소황산도)와 방조제로 연결되어 사실상 강화도의 일부가 되어 있다. 섬의 동북쪽에 있는 황산도항은 어촌정주어항으로 지정되어 있고, 2008년에 재개장한 어판장이 있다. 

 

- 황산도 입구에 있는 데크 길이다. 황산도에는 순환하는 데크길이 있으나 언젠가 황산도 항구 넘어선 구간에 파손이 있었으나 복구가 안 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바닷가쪽으로 토목공사가 벌어지고 있어, 결국 강화나들길도 내부 도로길로 바꾸어졌다. 새로운 리본표시를 따라간다.

- 황산어판장에 사람들이 아침부터 영업 준비에 바쁜 듯하다.

- 황산포구의 아침 모습

- 변경된 코스 지도 (원래 코스는 분홍색이나, 현재 길은 파란색으로 간다.)

- 변경된 길로 간다.

- 원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야 하나, 아래쪽에서 와서 오른쪽으로 간다.

- 황산도와 강화를 잇는 두번째 제방을 건너 간다. 제방길 끝 부분에 사진 찍으러 준비하는 사람과 낚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 천연기념물 저어새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만큼 가까이 지나간다.

- 포장도로 갓길로 길이 이어진다.

- 황산도 앞의 아침 바다.  

- 조금 더 가니 새들로 북적이는 갯벌이 나타났다. 멀리 보이는 산은 높이 355m의 길상산이다.

- 혼자있는 새의 이름은 과문이라 알 수 없다.

- 계속 바다 구경하면서, 갓길을 간다.

- 강화웰빙CC라고 하는데, 9홀 골프장과 글램핑장, 펫, 루지등이 구비되어 있다고 하는데, 마을에서 환경파괴 그만하라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 옆에서 본 모습. 고구마밭 너머로 산을 깎아 만든 골프장에 카트가 오가고 있다.

 

- 동검도(東檢島) 

 

   동검도(東檢島)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동검리에 있는 섬으로, 강화도 남쪽에 위치한다. 1985년에 동검도 북쪽과 강화도를 잇는 연륙교를 지으면서 육지와 이어졌으나, 다리 아래로 바닷물이 통하지 못하여 갯벌이 변형되었다. 옛날 삼남지방에서 한양으로 향하는 선박은 물론 중국에서 우리나라 서울을 왕래하던 사신이나 상인들이 통과하는 동쪽의 검문소라는 의미에서 동검도라 하였다고 전한다. 강화군 삼산면의 서검도와 대비를 이루는 지명이다.  섬의 중앙부에 산지가 솟아 있으며, 서쪽과 동북쪽 해안은 비교적 완경사지이다. 섬 주변에는 간석지가 넓게 분포하며, 그 가운데 일부는 간척되었다. 

- 동검도 입구이다. 강화나들길은 왼쪽으로 가서 동검도 입구를 지나간다. 

- 동검도 들어가는 다리가 멀리 보인다.

- 동검도 지나면 선두리가 나오는데, 지난주 선두리 길을 걸었던 관계로 강화나들길8구간 걷기는 여기서 종료하고, 다음코스 시작점인 동막해변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이동하였다.

 

< 선두리 이후 구간 사진 - 지난 주 사진 >

 

 

 

 

 

 【 2구간 】  강화나들길  20코스 갯벌보러 가는 길 (동막해변   화도버스터미널)   

 

동막해수욕장 (東幕海水浴場)

폭 10m, 길이 200m의 해변이 펼쳐져 있다. 강화에서 가장 큰 모래톱을 자랑하는 동막해변은 세계 5대 갯벌 중 하나로 꼽힐 만큼 갯벌 체험을 하기에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백사장 뒤로 수백 년 묵은 노송들이 늘어서 있으며, 썰물 시에는 각종 조개를 비롯하여 칠게, 가무락, 갯지렁이 등 다양한 바다 생물을 볼 수 있다. 동막해수욕장 옆에는 분오리돈대가 있는데, 해질녘 이 돈대에서 바라보는 일몰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 얼마 전에 여기가 계단 등 공사 중이라 복잡하다고 하였는데, 이제 공사가 끝나 있다.  119수상구조대까지 대기하고 있어 본격적인 피서철을 앞두고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는 듯하다.  

- 이곳 저어새들은 사람들 가까이에서도 놀라 도망가지 않는다. 혹시 갈매기처럼 새우깡 같은 걸 주면 받아 먹을까, 생각만 해본다.

- 2000년 7월 6일 문화재청에서 강화군 일대 저어새 번식지로 추정되는 강화갯벌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여의도의 53배에 해당하는 약 435,016,325㎡(약 1억 4천만평)의 강화갯벌을 지정한 것이다.  현재의 강화갯벌은 저어새를 비롯한 수많은 물새들의 보금자리로 남았다. 강화갯벌은 저어새만의 자리가 아니고 동북아시아의 물새들의 주요한 먹이 터와 쉼터, 번식지가 되고 있다. 

- 동막해수욕장을 지나 강화나들길은 해변의 바위길을 그대로 걸어 지나간다. 

- 갯끈풀 제거 관련 안내판이다.  갯벌에도 문제되는 잡초가 있다.

- 새우양식장에서 산소 공급 모터가 씩씩하게 돌아가고 있다.

-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넓은 강화의 갯벌 !

- 돈대로 올라가는 계단길이다.

- 지도를 보니 송곶돈대인데, 안내 표지가 없다.

- 돈대 옆 제방길은 바닷가쪽으로 펜션들이 길을 막아 강화나들길을 주택가 골목길로 지나가야 한다.

- 펜션의 담 위로 처음 보는 자귀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다. 

 

자귀나무(영어: Persian silk tree 또는 pink silk tree) :  콩목 콩과의 식물로, 산과 들에서 자라며 관상수로 심기도 한다. 키는 5~15m에 이른다. 미모사가 잎을 건드리면 움츠러들듯이 자귀나무는 밤이 되면 양쪽으로 마주 난 잎을 서로 포갠다. 잎은 줄기에 하나씩 달리는 것이 아니라 아까시나무처럼 작은 잎들이 모여 하나의 가지를 만들고 이들이 다시 줄기에 달린다. 이것이 복엽이다. 대부분의 복엽은 작은 잎들이 둘씩 마주 나고 맨 끝에 잎이 하나 남는데, 자귀나무는 작은 잎이 짝수여서 밤이 되어 잎을 닫을 때 홀로 남는 잎이 없다. 그래서 부부 금슬을 상징하는 합환목(合歡木), 합혼수(合婚樹), 야합수(夜合樹)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가 자귀나무 잎을 무척 좋아해서 소쌀밥나무라고도 부른다. 6~7월이면 가지 끝에 15~20개의 작은 꽃이 우산 모양으로 달리며 기다란 분홍 수술이 술처럼 늘어져 매우 아름답다. 9~10월에 익는 열매는 콩과 식물답게 콩깍지 모양이다. 금세 떨어지지 않고 겨울 바람에 부딪혀 달가닥거린다. 이 소리가 시끄러워 여설목(女舌木)이라 부르기도 했다.

- 펜션 지대를 벗어나니 금방 다시 제방길로 복귀한다.

- 제방길에서도 자귀나무를 만났다.

흥왕저수지

   6만평의 면적에 수심 1.2m 정도로 일정한 편이다. 낚시터 전역에 갈대,부들 등이 자생하며 수질이 매우 깨끗하여 주 어종인 토종 붕어, 가물치의 찌 올림이 매우 좋다고 한다.

 

- 저수지 너머로 멀리 지난 주 다녀 온 마니산이 보인다.

- 저수지 끝 부분에서 돌아다 본 모습

- 참억새꽃 :  참억새는 한반도 전역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높이는 1-2m이다. 줄기는 원기둥 모양이고 약간 굵다. 잎은 길이 40~70cm의 줄 모양으로, 너비 1~2cm이며 끝은 차차로 뾰족해진다. 가운데 맥은 굵고 흰색이며 기부는 긴 잎집으로 되고 긴 털이 있다. 가을 무렵에 줄기 끝에서 산방꽃차례를 이루어 작은 이삭이 빽빽이 달린다. 

- 솔체꽃 :  솔체꽃(Scabiosa mansenensis)은 두해살이풀의 하나이다. 줄기는 1m 정도까지 자란다. 잎은 달걀 모양의 타원형으로 긴 잎자루를 가지고 있으며 마주난다. 꽃은 엷은 자색으로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가지 끝에 두상꽃차례를 이루면서 달린다. 바깥쪽의 꽃부리는 5갈래로 나누어진 입술 모양을 하고 있으며, 안쪽 것은 4갈래 또는 5갈래로 나누어진 관 모양을 하고 있다. 열매는 긴 타원형의 수과이다. 주로 산지에서 자라며 한국의 중부 이북에 분포하고 있다.

- 미루지항(港)이라는 항구인데 조용하다.

- 동막해변처럼 해변 바위길을 지나 간다.

- 쉴 수 있는 그늘이 처음으로 나와, 자리를 잡고 쉬기로 한다. 피서온 기분이 제법 났다.

- 다시 제방길로 복귀.

- 강화도 남서단에 도달하면서 해병 초소가 나타나고, 길은 이제 숲 속으로 전환된다.

- 오늘의 최고 조망 모습이다.

- 산딸기 : 장미과에 속하는 갈잎 떨기나무이다. 높이는 1~2미터, 전체에 가시가 나고 잎은 달걀 모양이며 흔히 3~5갈래로 갈라진다. 5월에 흰 꽃이 산방상으로 잎겨드랑이나 작은 가지 끝에 피고, 과실군은 거의 둥근 공 모양이며 7월에 붉은 흑색으로 익는다. 비교적 서늘한 지방에서 잘 자라는데, 원산지는 유럽과 아시아이다. 열매는 단 맛이 나며 잼, 주스로도 쓴다.

- 흐드러지게 핀 빛나는 개망초 :  개망초(영어: annual fleabane, daisy fleabane 또는 eastern daisy fleabane)는 전 세계 온대 지방에 주로 서식하는 국화과의 두해살이풀이다. 망국초, 왜풀, 개망풀이라고도 한다.  (개망초가 들어왔을 때가 일제 침략기였고, 밭농사를 방해하는 새로운 잡초여서 나라가 망했다는 경멸의 뜻으로 붙여 개망초라고 부르게 됐다는 설이 있으며, 질기고 억세서 농사지을 때 큰 장애가 되는 망초와는 달리, 개망초는 뽑기 쉬워서 지어졌다는 설도 있다.) 개망초는 북아메리카 원산의 귀화식물이다.  주로 밭이나 들, 길가에서 자란다. 높이는 30~100센티미터이고 전체에 짧은 털이 있으며 가지를 조금 친다. 뿌리에서 나는 잎은 꽃이 필 때 시들고 긴 잎자루가 있으며 난형이고 톱니가 있다. 줄기잎은 어긋나고 밑의 것은 난형 또는 난상 피침형으로 길이 4~15미터, 나비 1.5~3미터이다. 잎 양면에 털이 있고 드문드문 톱니가 있으며 잎자루에는 날개가 있다. 위에 붙은 잎은 좁은 난형 또는 피침형으로 톱니가 있고 가장자리와 뒷면 맥 위에도 털이 있다. 관상화는 황색이다. 5~7월, 9~10월에 백색 또는 연자줏빛 꽃이 두상꽃차례를 이루고 가지 끝과 줄기 끝에 산방상으로 붙는다. 총포에 짧은 털이 있고 혀 모양의 화관은 길이 7-8밀리미터, 나비 1밀리미터 정도이다.

- 북일곶돈대를 지나 나무계단을 따라 해변으로 내려간다.

- 숲을 지나면 바로 장화리 일몰 명소 해변길이 시작된다.

장화일몰명소

인천 강화군 화도면 장화리 낙조마을에 위치한 장화리 일몰조망지는 해넘이 명소인 안면도, 변산반도와 함께 서해안 3대 낙조 조망지로 손꼽히고있는 곳이다. 연말이 되면 새마음 새뜻으로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많이 찾는 서해안의 일몰명소이지만 다소 한산할 때 찾아서 보는 서해안의 일몰은 또다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강화 화도면 장화리는 마을이 해변으로 길게 형성되었고 서쪽으로 산이 길게 뻗어 곶을 이루고 있어 장곶동(長串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길다는 뜻의 장(長) 자와 곶(串)을 화(花)로 바꾸어 장화리로 개칭한 듯하다.  장화(長花)는 마을이 해변으로 길게 형성되었고 서쪽의 산이 곶으로 길게 뻗어 있어 장곶(長串)이라 칭하다가, 길다는 뜻으로 장(長) 자를 따고 아름다운 경치를 꽃에 비유하여 화(花) 자를 붙여 장화리라 하였다. 자연마을은 선수, 진말, 장화 마을이 있다. 선수 마을은 버드러지 북쪽에 있는 마을이며, 진말 마을은 긴곶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장화 마을은 긴 곶이 있어 긴곶이라 불리다가 장화로 개칭되었다. 

- 해변을 벗어나 화도면으로 가기 위해 도로를 건너는데, 길가에  400년 수령의 느티나무 보호수가 있다.

- 도로를 건넌다.

- 마을로 올라와서 멀리 바다를 조망을 해본다.

- 화남 선생이 지은 시이다.

- 고맙게도 고개 정상부에 쉬어갈 수 있게 긴 의자가 있다.

- 산을 내려 오니 마을은 장화리에서 내리로 바뀐다. 오래된 집들이 많은 걸 보니 이곳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것 같다.  마을길에 접시꽃이 한창이다.

 

- 접시꽃 : 접시꽃(Alcea rosea)은 아시아 중국·시리아가 원산지이며 4m까지 자란다. 심장 모양인 잎은 크고 솜털이 났으며, 가장자리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톱니가 있다. 줄기 밑부분에는 여러 장 겹쳐진 잎들이 땅 표면과 거의 닿게 방사상으로 나와 있다. 꽃은 여름에 핀다. 접시꽃은 주로 울타리나 담을 따라서 심는다. 꽃은 둥글고 넓은 접시 모양이다. 꽃 색깔은 다양해서 흰색, 노란색, 분홍빛이 섞인 붉은색, 자주색 따위를 띤다. 여러 접시꽃 변종은 대부분 여러해살이식물로 심은 지 2년째 되는 해에 꽃이 핀다. 관상용으로 많이 심으며, 꽃·뿌리는 약용으로 쓴다.

강화 화도면 이야기 : 옛날에는 고가도(古加島)라는 섬이었으며, 강화의 최남단에 위치하여 조선시대 이래로 하도면(下道面) 이라고 칭하다가 1937년 하도공립보통학교장으로 부임하여 왔던 일본인 산원(山元)의 제청으로 하도(下道)라는 명칭이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여 화도(華道)로 개칭하였다.

 

- 마을 안에 오래된 나무가 자리잡고 있다. 보호수는 아니다.

- 성공회 내리교회 : 강화에는 성공회 교당이 도처에 있다. 강화군은 종교적으로는 기독교 , 특히 개신교의 초강세 지역이다. 강화군에서 종교를 가진 인구 중 절반 이상은 교회에 다닌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인데,  교단 중에서는 성공회와 감리교회의 교세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력한 곳으로 꼽힌다. 어느 정도냐면 성공회의 이웃 종교인 한국 가톨릭 교회의 강화군 관내 성당 수가 6곳인데 반해 강화군 내 성공회 성당 수는 2배가 많은 12개라고 한다.

- 화도버스터미널 종점까지는 1km 이상 가로수 없는 도로 갓길을 걸어야 한다. 멀리 보이는 산은 강화나들길 3코스 가면서 지나갔던 진강산이다.

 

 

 

 

 

 【 3구간 】  강화나들길  7코스 낙조보러 가는 길  (화도버스터미널  여차1리 마을회관)  

 

- 강화나들길 7코스 낙조보러 가는 길은 상당 부분이  20코스와 중복된다. 그래서 중복되지 않은 부분만 걸어서 7코스 걷기를 완성시키고자 다시 화도버스터미널에서 온길을 돌아간다. 출발점인 화도초등학교 앞 벤치에서 초등학교 운동장을 본 모습이다.

- 초등학교 잎에 근처에 있던 조선후기 공적비들을 모아 놓은 곳이다.

- 더운 날에  '화도면 마니산 꽃동산'이라는 미니 공원 옆을 지나간다.

- 성공회 내리교회 앞길에 좌회전하여 길을 새로 시작하는데 차들의 왕래가 좀 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 도로는 화도면 면소재지인 내리에서 산을 넘어 야차리로 바로 가는 도로이었다. 가는 길에는 산속에 펜션들이 개발되어 있어 차들의 왕래가 많은 것이다. 도로는 연화사를 관통하여 지나간다.

- 고개를 넘어서면 강화 '하늘아래 호수마을'이 나오는데, 자연 마을은 아니고 펜션 전문으로 새로 개발된 곳이 분명하다. 준보전산지에 건폐율 20%이하, 용적율 80% 이하로 건축되었다고 하는데, 저수지 테마 하나로 산꼭대기 부근에 이런 곳을 개발한 사람들의 노력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장화 해변으로 흘러가는 장화리저수지의 유래에 대해서는 나와 있는 곳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강화 중형저수지 11개중 1곳으로 면적이 1만 3천평, 제방길이 210m, 제방의 높이 10~15m로 추정되고 낚시는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 여차1리 마을회관 앞에서 오늘 길을 마무리한다.(17:20)  마을회관 앞에서  50분을 더 기다려 강화 3번 버스타고 강화터미널로 와서 귀경하였다.

 

만고충신 김상용, 그는 과연 나라 위해 강화도에서 폭사했나

 

 

< 중앙일보,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2023.06.23  >



명가(名家)의 탄생, 빛과 그림자


조선 후기 세도정치를 주도한 장동 김씨는 안동 김씨의 한 분파로 서울을 근거지로 16세기에 발흥한 가문이다. 이후 300년간 이 가문은 문·무과 급제자가 300명이 넘고, 정승·판서 등 고관대작이 150여 명에 이르며 왕비 3명을 통해 왕실까지 장악한, 부귀와 문화의 최정상 명가로 군림했다. 장동 김씨가 충절(忠節)과 문한(文翰)을 자랑하는 명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병자호란 때 활약한 두 선조에서 유래하는데, 바로 김상용(1561~1637)과 김상헌(1570~1652)이다.

 


조선 후기 세도정치 주도한 가문

조선시대의 가문은 혈연을 기반으로 한 일종의 이익집단이다. 가문을 통해 개인의 존재 의미가 결정되던 사회이다 보니 그 위상을 높이기 위해 갖은 노력과 수단이 동원되었다. 이름난 가문일수록 빛의 크기만큼 그늘이 있기 마련이다. 그늘에는 사회적 이익을 독점하거나 국가적 명예를 훔쳐 가문의 번영을 도모하는 따위도 포함된다. 사대부의 자존심과 나라의 명예를 지킨 죽음으로 이름을 얻은 김상용은 바로 이 명가의 조건을 묻기에 적절한 사례가 될 것이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서 ‘사고사’

청나라 침공 전에 화약고 터뜨려

친족·측근 “의로운 자결” 잇단 상소

권신에 밀린 왕, 충절지사로 인정

“나라의 해와 별” 후손들 숭모작업
왜곡된 기억도 역사의 한 축 이뤄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을 맞아 쌓은 강화산성 중 남문 일대. 조선시대 병자호란 당시 우의정 김상용은 이곳 누각에서 화약이 터지며 숨졌다.

1637년 1월 22일 저물 무렵 청군(淸軍)이 강화도를 함락시켰다. 수 시간 전인 오시(午時)에는 전 우의정 김상용이 남문루에 장착해 놓은 화약고를 터트렸다. 세찬 불꽃이 하늘을 치솟으며 문루가 날아가고 본인은 물론 인근에 있던 많은 사람이 죽은, 시체를 찾지 못할 정도의 대폭발이었다. 두 달 전 군기시(軍器寺·병기관리 관청)의 화약 4000근을 강화도로 운반해 놓은 것이다.(인조실록, 1636년 11월 21일) 당시 김상용은 노약자를 우선 대피시키라는 왕의 분부로 강도(강화도의 옛 이름)로 들어가는데, 왕실과 대신(大臣) 가족에게만 주어진 특혜였다.

사건 당일 강도에서 올린 장계(狀啓)에는 “김모(金某)가 불이 나 죽었다”는 기사와 함께 여러 사망자와 나란히 언급되었다. 강화유수는 김상용의 죽음을 사고사로 보고한 것이다. 그 40일 후 왕은 “졸(卒)한 영돈녕부사 김상용의 상례(喪禮)”에 비용을 대주라고 한다.(승정원일기, 1637년 3월 3일) 이는 “대신과 중신의 상(喪)에 으레 장례 물품을 주는” 법전(法典)을 따른 것일 뿐 그의 죽음에 의미를 준 것은 아니다. 그런데 7개월 남짓 흐르자 김상용의 죽음을 포장하려는 기미가 이는데, 바로 “강도가 함몰될 때 의리를 지켜 죽은 신하가 있었으니 김상용 등입니다”(1637년 8월 16일)라는 것이다.

 


사건 초기 보고서와 다른 상소문

다시 두 달이 흘러 10월에는 예조가 김상용의 치제(致祭·나라에서 내리는 제사)를 청하기에 이른다. 제문을 본 왕은 “태산처럼 의리를 무겁게 했고 홍모(鴻毛)처럼 목숨을 가볍게 여겼다”고 한 서술이 사실과 맞지 않는 듯하다며 돌려보낸다. 게다가 김상용을 ‘살신(殺身)으로 인(仁)을 이룬 자’라고 하자, 왕은 불편한 속내를 드러낸다. “착한 것을 칭찬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 할지라도, 그 칭찬하는 말이 참되고서야 죽은 자가 영화롭고 산 자가 사모할 것이다.”(1637년 10월 28일) 왕은 사건 초기에 올라온 장계나 전언(傳言)으로 나름 판단하여, 담배꽁초를 화약고에 잘못 던져 일어난 폭발 사고로 본 것이다.

사절(死節)을 인정하는 첫 관문인 치제를 왕이 거부하자 측근인 신익성, 사돈 강석기, 두 아들 광환·광현이 연달아 상소를 낸다. 그들은 큰 변란을 겪은 국가가 급선무로 삼아야 하는 것은 충신을 포상하는 일인데, 대신의 죽음을 애매하다며 버려두는 것은 죽은 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한다. 측근들은 사고사가 아니라 노(老)대신의 뜻과 의지가 선택한 자결임을 논증하는 데 주력한다.

경기도 남양주시 석실서원에 있는 비석. 조선 후기 충신 김상용·김상헌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 

너나 할 것 없이 담뱃불과 폭발의 관련성에 집중하는데 남초를 피겠다는 핑계로 불을 청했고, 사실은 자폭을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또 고귀한 신분을 선호한 적의 눈을 피하고자 종과 옷을 바꿔 입어 살기를 도모한 사대부들의 당시 행태를 염두에 둔 듯, “신의 아비가 입었던 옷을 벗어 하인에게 준 것은 이미 자결할 뜻을 정하고 초혼(招魂)에 쓰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라고 한다. 왕이 “같이 타 죽은 자가 매우 많으므로, 감히 가벼이 허락하지 못한다”고 하자, “그들 역시 김상용과 뜻을 같이하겠다며 스스로 택한 죽음”이라고 한다.(승정원일기, 1637년 10월 29일)

 


권신의 승리, 왕권의 추락

김상용의 측근들은 절의를 지켜 죽은 사실이 온 나라 공론으로 이미 정해졌는데 무슨 조사가 또 필요하냐며 왕을 다그치고, ‘남의 아름다움을 시기한 무리들’이 왕의 판단을 흐리고 있다고 항변한다. 그런데도 왕은 단호하다. “절의를 지켜 죽은 일은 속이거나 숨길 일이 아니며 나라의 법이란 사사로운 정을 용납할 수 없으므로, 내가 거짓된 일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지 유독 김상용에게 박해서가 아니다.”(1637년 10월 30일)

사실 왕은 김상용에 대한 의심이 없지 않았다. 10년 전 정묘호란 때 김상용이 보인 행적이 『인조실록』과 『속잡록』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유도대장(留都大將·임금이 서울을 비웠을 때 도성을 지키던 대장)에 임명된 김상용은 적병이 임진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자 도성을 버리고 달아나 버린다. 그 바람에 도적이 횡행하며 여러 관청이 불탔고, 노량진 나루에 두었던 양곡 1000여 석도 잃어버렸다. 이에 강도에 피신해 있던 왕이 영을 내린다. “도성을 무너지게 한 김상용을 추고하라!”(1627년 2월 11일)

김상용의 사절(死節)을 인정하라는 권세가들의 요구는 왕의 권력 기반을 흔들 만큼 위협적이었다. ‘의로운 죽음’과 ‘단순 사고사’라는 엇갈린 주장은 척화파와 주화파라는 당파적 입장과 결부되면서 국정 혼란을 가중시켰다. 1년여 공방 끝에 김상용은 ‘절의를 지킨 죽음’으로 공인되었다. 무엇보다 이 사건은 권신에 굴복한 왕의 패배이자 왕권의 추락을 의미한다. 대사헌 서경우는 왕이 김상용에게 온당치 못한 거조(擧措·태도)를 보이며 공의(公議)를 어기니 인심(人心)이 복종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승정원일기, 1638년 5월 5일)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에게 인심이니 공의니 하는 개념보다 더 큰 협박은 없을 것이다.

 


강화도 충렬사 등에 배향 공간


가족들은 김상용 숭모에 박차를 가하는데, 동생 김상헌과 사위 장유가 주도하고 후손 김창협(1651~1708)이 이어간다. 여기서 김상용은 원래부터 나라를 걱정하는 절대 충신이었다. “아아! 공이 품고 있던 충성과 절개여, 만고토록 길이 해와 별이 되리라”(김상용신도비명, 『청음집』 26) 김상용의 종증손인 김창협은 『강도충렬록』을 지어 김상용의 죽음을 환원 불가능한 지식체계로 정립시킨다. “남문에 어린 충정 북두성에 뻗치니, 우리 가문 승상이 큰 이름 남기셨지. 산천을 철옹성 요새라고 하지 마소, 오직 이 누각 하나 천지를 받쳤다오.”(남문루감회, 南門樓感懷) 이후 김상용은 강화도 충렬사와 양주 석실서원 등 여러 곳에 배향되며 온 나라 사람들이 기려야 할 충절지사로 안착한다.

김상용의 화려한 등극으로 남문루의 희생자들은 ‘김상용과 마찬가지’라며 정려(旌閭·붉은 문을 세워 표창)를 요구한다.(1638년 5월 21일) 김상헌은 8~9명이라고 하고 인조는 많은 사람이라고 한 사망자들은 한결같이 “구차스럽게 살지 않겠다”며 “불 속으로 뛰어들어” “의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으로 변모된다. 김상용의 손자 13세의 김수전은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노나라의 동자 왕기(汪踦)에 비유되며 정려의 혜택을 받는다.(숙종실록, 1704년 3월 15일) 이렇게 내 가족의 이익과 내 가문의 영광을 위해 사건은 재구성되고 기억은 발명되었다. 권문세족이 한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한 선조의 ‘만들어진 희생’이 후손의 물질적 정신적 유산으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역사 속에 묻힌 국가적 재앙

무엇보다 남문루의 진실은 방위 수단인 화약고를 날려 국가적 재앙을 초래한 사건이다. 청군의 강화도 함락은 화약이 터지고 난 몇 시간 후에 일어난다. 한편 자결이라 하더라도 적과의 대적은커녕 일신의 명예를 의도한 것을 의롭다고 한다면 적과 맞서 싸우다 전사한 조선의 장병들은 어떤 죽음인가.

 


왜곡된 기억과 조작된 사건이 오랜 시간을 지나며 사실이 되고 역사가 되기도 한다. 반면에 거짓을 밝혀내고 진실을 되살리려는 힘 또한 역사를 구성하는 한 축이다. 

 

권세가들이 나서서 충절로 마무리한 김상용 사건의 이면을 오늘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그 증거다.

강화도의 저어새

 

이기섭 (한국물새네트 이사)

 

          출저 : 『강화도 지오그래피』, 함민복 외 16, 작가정신 (2018.4.10)

 

강화도의 상징인 저어새


강화도를 상징하는 새가 있다면 단연 저어새라고 할 수 있다. 저어새 는 인천 일대, 특히 강화도에 가야 쉽게 볼 수 있는 종이다. 일부는 남 서부 해안에서도 관찰되지만 수가 적거나 잠시 들르는 경우가 많다. 강화도의 괭이갈매기는 저어새보다 더 흔하지만 전국 해안 어디를 가도 볼 수 있어 상징이 되기는 힘들다.


강화도에 저어새가 많이 오는 이유는 어느 갯벌보다 풍부한 먹이 원이 있기 때문이다. 강화도 하면 떠오르는 것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게 드러나는 갯벌일 것이다. 특히 강화도 남단의 갯벌은 세계 어느 갯벌과도 뒤지지 않는 광활함과 풍부한 생물을 품고 있다. 저어새는 망둥어, 숭어 치어, 황강달이 등과 같은 소형 어류뿐만이 아니라 새우류, 칠게와 같은 갑각류와 갯지렁이 등도 잘 잡아먹는다. 강화도는 한강을 통해 육지에서 수많은 영양물이 유입되어 먹잇감이 풍부하고 잘 발달한 갯벌과 물골을 따라가며 저어새가 먹이를 잡기에 적당한 곳이기에 저어새가 많이 온다고 할 수 있다.


강화도에 저어새가 많은 두 번째 이유는 어느 갯벌보다 사람의 간섭을 덜 받는다는 것이다. 강화도는 접경 지역이어서 해안 출입이 제한되는 경우가 많고 야간에는 해싱으로의 출입과 선박의 이동도 엄격하게 제한되는 곳이다. 저어새들은 수심이 낮은 해안 가까운 곳에서 낮뿐만이 아니라 야간에도 활발하게 먹잇감을 찾기 때문에 사람들의 해안 출입이 제한되는 점은 저어새들이 편하게 먹이를 찾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세 번째 이유는 번식할 수 있는 섬들이 있기 때문이다. 강화도에는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기 힘든 곳에 저어새가 번식하기 적당한 여러 무인도들이 있다. 예를 들어 볼음도 서쪽 해상에 위치한 석도와 비도는 군사보호지역이며 북방한계선인 NLL에 위치하고 있어 어선의 접근도 허용되지 않고 있다. 교동도 북단에 위치한 요도라는 섬 또한 강 한가운데 있어 남북한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는 중립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저어새가 즐겨 찾는 장소


강화도에서도 저어새를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강화도 남단 갯벌이 강화도에서도 가장 흔하게 저어새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저어새들은 동검도에서 선두리, 여차리, 분오리를 잇는 긴 해안 갯벌을 따라 폭넓게 서식한다. 이곳에선 봄부터 가을까지 저어새들이 곳곳에 흩어져 긴 부리를 휘젓고 있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만조가 되어 물이 차면 각시암 선두리 해안 여차리 물광, 분오리저수지 등지에 수십 마리에서 백여 마리까지 저어새들이 모여서 휴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에 비해 강화도 동서 해안은 상대적으로 저어새가 드물게 보인다. 갯벌 폭이 좁고 수심이 깊은 데다 물살이 빨라 물고기를 잡아먹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강 하구와 연결되는 강화도 북쪽 해안 역시 저어새가 그리 많지 않다. 한강으로 드나드는 물살이 빠르고 갯벌보다 모래가 많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교동도 북쪽으로 더 내려 가면 북한의 예성강과 합류하는 곳에 갯벌이 발달하여 수많은 저어새 들이 서식한다. 바다 쪽으로 더 나아가 석모도와 볼음도,주문도, 서검도 일대에도 섬 주변으로 갯벌이 발달해 있다. 강화도 남단처럼 많은 수는 아니지만 곳곳의 갯벌과 갯골에서 부리를 휘젓고 있는 저어새를 한두 마리씩 만날 수 있다.


저어새를 쉽게 볼 수 있는 곳은 갯벌이다. 그러나 저어새는 갯벌에만 서식하지 않는다. 저어새는 종종 갯벌을 떠나 내륙 습지에 머물기를 좋아한다. 갯벌처럼 수심이 얕고 부드러운 펄이 넓게 펼쳐진 곳이면 저어새를 볼 수 있다. 그런 곳으로 강 하구, 수심이 얕은 저수지, 양어장,혹은 소하천 등이 있다. 특히 봄철에는 모내기 전후에 물을 댄 논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저어새를 위성 추적한 결과를 보면 석도와 비도에서 번식하는 개체들은 북한 황해남도 연안군을 주 먹이터로 이용하였는데 봄철에는 상당히 많은 시간을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한 논이나 하천,저수지까지 날아가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저어새의 특징


저어새는 부리에서 꼬리까지 몸길이가 75~80cm 내외이며,전반적으 로 흰색을 띠는 새이다. 종종 비슷한 크기의 흰색 새인 백로와 혼동 될 수 있으나 부리가 뾰족한 백로와 달리 저어새는 길고 넓적한 부리 를 하고 있어 구별된다. 저어새 부리 모양은 마치 주걱과 흡사한 독 특한 부리를 하고 있#. 부리의 생김새로 인해 저어새류를 영어로 ‘Spoonbill’이라고 하며 숟가락처럼 생긴 부리를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국명으로 저어새라는 이름은 먹이를 잡을 때 부리를 휘휘 젓는 특성에 따라 ‘젓는 새’라는 의미로 이름이 유래하였다.


저어새류는 전 세계적으로 여섯 종류가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 강화도에 오는 저어새는 얼굴이 검다고 해서 영어로는 'Black-faced Spoonbill’이라고 한다. 이들은 동아시아에만 분포하며 갯벌 습지에 대 한 의존성이 강한 새이다. 다른 다섯 종류와 달리 20세기 격동기에 급 격하게 감소하여 사라질 뻔한 종으로 한국에서는 유사종인 노랑부리 저어새(Eurasian Spoonbill)와 함께 천연기념물 제205호 및 멸종위기 1급종으로 지정하여 각별하게 보호하고 있다.


저어새는 다른 저어새류가 내륙 습지나 민물에서만 서식하는 것과 달리 바닷물에도 살도록 적응한 종이다. 짠물을 먹더라도 소금기가 강한 짠물을 혈관을 통해 코로 홀려보내 삼투압을 조절할 수 있다. 그러나 어린 새끼일 때는 염분을 여과하는 능력이 부족하여 민물고기를 먹어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약 1만 년까지 거대한 호수였던 황해가 침하하여 바다가 되면서 이에 적응하여 갯벌을 좋아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탁한 갯벌 물에서는 눈으로 보는 것보다 부리를 휘저으면서 촉감을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 것이 더 쉬웠을 것이다. 또한 얼굴이 검은 것은 강한 바닷가 햇살로부터 얼굴을 보호하는 데 유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저어새는 깃털 속의 피부도 검은색을 띠어 강한 자외선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있다.

 

저어새의 생김새

저어새는 암수와 나이에 따라 서로 생김새가 다르다. 저어새는 수컷이 암컷보다 크기가 큰 편이다. 번식기에 암수가 같이 있으면 크기 차이로 서로를 구별할 수 있다. 또한 수컷은 부리 길이가 암컷보다 길며 과시하듯이 몸을 세워 키가 큰 데 비해 암컷은 부리가 짧고 자세를 낮추는 경우가 많아 서로가 구별된다.


어린 새와도 구별이 가능한데 어미와 달리 1살 미만의 어린 개체 들은 부리에 주름이 없다. 저어새는 나이가 들면서 검은색 부리에 주름이 생기는데 개체마다 주름 모양이 다르고 한번 생기면 변하지 않아서 마치 사람의 지문처럼 구별할 수 있다. 어린 새들은 주름이 없고 부리 색도 옅은 황갈색을 띤다. 점차 나이가 들면서 윗부리부터 아래로 주름이 생겨나는데 보통 3살이 되어야 부리 주름이 모두 형성되며 주름의 길이도 늘어난다.


또한 어린 새는 날개 끝이 검고 날개를 따라 검은 선이 보인다. 1살이 넘어야 날개의 검은 선이 사라지며 나이가 들면서 날개 끝의 검은색도 점차 줄어들다. 보통 3~4세가 되면 날개깃은 모두 흰색으로 변하는데 이때부터 성적으로 성숙한 어미가 된다. 저어새는 독특하게 눈앞에 아이라인과 같은 노란 테가 있고, 개체마다 조금씩 범위가 다르거나 없는 경우도 있다. 눈 테두리의 생김새로 서로를 구별할 수 있다.

 


저어새의 혼인 깃


저어새는 성적으로 성숙하게 되는 3살부터 가슴과 머리에 노란색 혼인 깃을 지니게 된다. 어미 저어새들은 번식기가 도래하는 2~3월부터 머리 뒤로 댕기처럼 길게 늘어지는 깃이 생기며, 색깔이 흰색에서 점차 노란색으로 변한다. 또한 목 아래, 흑은 가슴 부위에도 노란색 테두리가 둘러진다. 성숙하지 않은 어린 개체들은 이런 노란색 댕기가 생기지 않거나 아주 짧다. 가슴의 노란색 띠도 어린 개체들은 없는 경우가 많다. 성조라하더라도 개체에 따라 노란색의 진한 정도가 다르기도 하 다.

노란색 댕기와 노란색 가슴 띠가 생기는 것은 꼬리깃 기부에 위치 한 1쌍의 기름샘에서 나오는 노란색의 기름을 부리에 묻혀서 바르기 때문이다. 개체마다 부리를 이용해 기름을 얼마나 열심히 가슴에 바르고 다시 머리를 대고 문지르느냐에 따라 노란색의 농도와 범위가 달라 진다. 색깔이 진할수록 많은 시간을 깃털 치장에 소비해야 하지만 짝을 짓는 데 유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어린 개체들은 짝을 지을 필요가 없기 때문인지 댕기가 길게 자라지도 않으며, 가슴에 노란색 혼인 깃이 생기지 않거나 연한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이 저어새들은 몸 크기와 눈 테두리, 부리 주름, 날개의 검은색 띠, 그리고 노란색 댕기 등의 다양한 특징으로 서로를 구별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성별과 연령까지도 구별할 수 있다. 저어새처럼 다양한 특징을 보이면서 서로를 구별할 수 있는 새는 그리 많지 않다.

 


저어새의 번식지


저어새의 번식지는 한반도이다. 저어새 번식지는 주로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분포하며, 경기만의 무인도에 번식지가 집중되어 있다. 극소수만이 북쪽의 중국 동북부 랴오닝성, 북한과 러시아 접경 지역 등에 번식할 뿐이다.


저어새는 작은 무인도에 번식하는 것을 선호한다. 번식할 섬이 너무 크거나 숲이 우겨져 있으면 좋아하지 않는다. 수풀이 무성하게 자라면 둥지 자리를 마련하거나 바닥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알이나 새끼를 해칠 수 있는 쥐나 수리부엉이와 같은 포식자가 살 수 있으며, 사람들도 종종 들어와 방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강화도는 저어새 번식지의 중심에 위치한다. 강화도에 알려진 저어새 번식지는 4곳이 있으며, 그중에서 서도면 서쪽에 위치한 우도의 부속 섬인 석도와 비도가 가장 중요한 번식지이다. 석도는 1999 년에 처음 알려진 번식지로, 대략 10여 쌍이 번식하고 있다. 비도는 120〜170쌍이 번식하는 강화도 최대의 번식지이다. 이곳은 1995년에 번식지가 최초 확인될 당시에는 1쌍에 불과하였으나 이후 번식 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교동도 남쪽에 상여바위라는 섬에도 20쌍 이상이 번식한다. 또 다른 곳으로 강화 남단 화도면에 위치한 각시암에도 약 20쌍 번식하고 있다. 이외에도 교동도 북쪽으로 3km 떨어진 요도(다른 말로 역섬이라고 함, 여뀌가 자라는 섬이라는 뜻)라는 섬에 약 100쌍 내외가 번식하고 있다. 또한 동검도 남서쪽으로 매도라는 섬에 약 70〜80쌍이 번식하고 있으 며, 영종도 북단으로 수하암이라는 바위섬에도 약 40쌍이 번식하고 있다. 매도와 수하암은 행정구역상 인천 서구와 중구에 속하지만 번식하는 저어새들의 일부가 강화도 갯벌을 먹이터로 이용하고 있다.


옹진군에 속하는 서만도라는 섬에도 약 50~80쌍의 저어새들이 번식한다. 이들은 번식을 마치면 모두 강화도로 날아와 서식한다. 서도면 볼음도 인근 수리봉이라는 섬에도 과거 2007년에 10여 쌍이 번식한 적이 있다. 따라서 강화도 내 4개 섬에 저어새들이 번식하고 있지만 강화도 갯벌을 먹이터로 이용하는 인근 번식 섬들을 포함하면 저어새 번식지는 9개에 이르며,번식 추정 수도 약 500쌍에 이른다.


2000년대 초반까지 전국 저어새 번식지로 확인된 곳은 석도와 비도 요도 수리봉 등 4곳뿐이었으며, 번식 수도 100쌍 내외에 불과하였다. 2006년 이후부터 번식지 수와 번식 쌍이 점차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번식지도 점차 확대되고 있다. 이와 같은 증가 추세는 저어새 서식지인 강화 갯벌 약 45000ha를 2000년에 천연기념물 제419호로 지정하고 저어새 번식지를 보호하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강화도의 번식지


1) 각시암


강화도에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저어새 번식지로 대표적인 곳은 각시암이다. 이곳은 나무가 자라지 않는 작은 암초 섬으로 강화 남단 해안에서 1km가량 떨어져 있으며, 섬이 작아서 포식 동물이 서식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곳이다. 사람들도 뻘이 드러나면 접근하기 어렵고 마땅히 머물 만한 곳도 없다. 각시암의 저어새들은 가파른 돌 틈에 둥지를 틀며 주변에 떠내려온 나뭇가지나 풀을 가져다 둥지를 만든다. 그러나 이곳은 크기가 너무 작아 번식할 만한 장소가 부족하고,그나마 사리 만조 시에 둥지가 물에 잠기는 경우가 많다. 또한 풀도 자라지 않는 섬이어서 둥지 재료를 구하기도 쉽지 않다. 이곳은 20쌍이 번식하기도 쉽지 않으며, 그마저도 번식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2) 비도


강화도에서 저어새가 가장 좋아하는 대표적인 섬으로 비도를 들 수 있 다. 비도는 2개의 봉우리가 연결되어 있는 섬으로 민간인 통제 지역에 위치하여 사람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다. 또한 군부대가 주둔한 우도로부터 500m 정도 떨어져 있고 빠른 조류가 흐르고 있어 쥐가 접근 하기도 쉽지 않다. 둥지 재료로 쓰기 적당한 명아주나 쑥 종류가 무성하게 자라며,절벽이 있어 중간 바닥에 둥지를 틀기 좋은 공간이 많은 곳이다. 과거에는 군부대에서 사격 연습을 하던 곳이었으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후에 사격을 하지 않게 되어 저어새들의 번식수가 2016 년에는 170쌍 내외로 크게 증가하였으며, 강화도 최대의 번식지가 되었다. 이곳은 매년 3천 쌍의 팽이갈매기와 1백여 쌍의 가마우지를 비롯하여 중대백로, 노랑부리백로, 쇠백로, 왜가리 등도 같이 번식하고 있다. 이들의 배설물로 인해 섬에 나무가 잘 자라지 않을까 하여 적절히 조절되고 있다.


3) 석도

인근에 위치한 또 다른 번식 섬인 석도의 경우에도 저어새가 번식을 하고 있다. 다만 섬의 크기가 비도보다 작고 돌이 많아 저어새가 번식할 만한 곳이 많지 않다. 29쌍까지 번식한 적도 있으나 최근에는 번식을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 매가 번식하면서 위협을 주고 한국재갈매기 또한 종종 알을 훔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번식하기가 쉽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도와 석도는 각시암에 비해 크기가 크고 번식하기에 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먹이를 구할 수 있는 갯벌이나 육지 습지로부터 30km가량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미들은 새끼를 키워내기 위해 먼 거리를 자주 이동해야 하고 체력 소모가 커서 두 마리 이상의 새끼들을 키워내기 힘든 상황이다.


4) 요도


교동도 북쪽에 있는 요도는 남북한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섬이다. 나무가 자라지 않아 저어새를 비롯한 갈매기류와 가마우지류에게는 이상적인 번식지이다. 상부는 풀밭이며 하부는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섬의 길이가 약 300m 정도로 작지 않은 크기이다. 다만 나뭇가지를 구하기 힘들고 풀들도 무성하게 자라지 못하여 번식하는 새들 간의 둥지 재료 경쟁이 심하고 재료가 부족한 편이다. 둥지 재료를 상대적으로 잘 물어 나를 수 있는 가마우지의 번식 수가 매년 늘어나고 있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요도의 저어새들은 주로 북한 쪽 갯벌과 농경지를 이용하며 간혹 교동도 농경지와 고구저수지에서도 볼 수 있다.


5) 상여바위


교동도 남쪽에 위치한 저어새 번식지인 상여바위는 절벽섬으로 사람들의 접근이 쉽지 않은 곳이다. 중간에 고압선과 철탑이 있고 섬의 크기가 작은 편이나 풀과 나무가 듬성하게 자라고 있어 수십 쌍이 번식하기에 좋은 곳이다. 최근에 한국재갈매기,괭이갈매기와 함께 저어새까지 세 종류가 번식하고 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번식기에 수리부엉이가 종종 날아와 포란 중인 새들과 새끼를 잡아먹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이로 인해 저어새들이 2015년에는 절반 가까이 번식을 포기하였고, 2016년에는 거의 모든 저어새들이 번식에 실패하였다. 수리부엉이는 저어새의 번식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새이다. 이곳의 저어새들은 강화도 서쪽부터 석모도, 서검도 등을 먹이터로 이용하고 있다. 

 

저어새의 번식 습성

 

1) 번식 시기


저어새는 대개 4월부터 번식을 시작한다. 일부 늦게 도착한 개체들은 5〜6월에 산란을 하기도 한다. 산란에서부터 새끼가 둥지를 떠날 때까 지 약 3개월이 소요되며 8월이면 대부분 번식이 끝난다. 경험이 많고 나이가 많은 저어새들일수록 빨리 번식하는 경향을 보인다. 번식지는 사람이나 동물이 접근하기 힘든 섬의 바위틈이나 절벽,경사면을 선택한다.


2) 짝짓기


짝짓기는 보통 1주일 정도 소요되며 암수가 함께 붙어서 서 있거나 같이 잠을 자며 종종 서로 깃을 다듬거나 같이 몸 터는 등의 행위를 한다. 교미를 하기 전에는 수컷이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며 접근하여 암컷의 등을 좌우로 여러 번 문지르는 행위를 한다. 그러면 암컷은 자세를 낮추고 짝짓기 쉽게 해준다. 수컷은 교미할 때 부리를 벌려 암컷의 부리를 빠르게 좌우로 흔든다. 지난해에 짝을 지었던 개체와 다시 하는 경우도 많으며, 이 경우는 짝짓는 데 걸리는 일수가 짧은 편이다.


3) 둥지 틀기


암수가 함께 둥지를 틀며 둥지 장소는 돌 틈이나 풀, 관목, 나무 밑 등을 이용한다. 나뭇가지나 마른 풀줄기 등으로 기초를 하고 잔가지와 풀잎 등을 모아 약 40cm 내외의 원형 둥지를 만든다. 산란을 하고 나서도 새끼가 자랄 때까지 계속 둥지를 보강하기 때문에 둥지가 점차 커진다. 

4) 산란과 포란


저어새는 알을 보통 세 개 낳으며 종종 네 개나 다섯 개를 산란하기도 한다. 1 ~2일에 한 개씩 산란하며 포란은 암수가 서로 교대를 한다. 포란 시간은 평균 7~8시간이며 대개 낮에는 수컷이 많이 포란하고 밤에는 암컷이 주로 포란한다. 그러나 아침 에는 1~2시간의 짧은 포란 교대를 자주하며, 교대 후에도 둥지 주변에 지키고 서 있거나 둥지 재료를 날라 오기도 한다. 저어새들은 서로 싸우지 않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둥지를 틀지만 장소가 좋은 곳에서는 둥지 간 거리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바싹 붙여서 여러 둥지가 몰려 있기도 한다. 포란 시기는 23~26일이 소요된다.


5) 새끼의 부화와 육추


새끼는 동시에 부화하지 않고 보통 2일 간격으로 알을 까고 나온다. 따라서 첫째와 셋째 새끼와는 5~6일의 부화 차이가 생긴다. 먹이가 부족하게 되면 먼저 태어난 새끼만 먹이를 받아먹고 동생들은 잘 먹지 못해 죽는 경우가 많다. 어미가 먹이를 잘 잡아 올 경우에는 세 마리 모두가 잘 성장하지만 대개는 먹이를 충분히 공급하지 못해 한두 마리 만 키우는 경우가 많다. 네 번째 알의 부화는 첫째와 10일 이상 차이 가 나기 때문에 거의 살아남기 힘들다. 이와 같이 동시에 새끼들이 부화하지 않고 시간차를 두는 것은 기후가 갑자기 나빠지거나 먹이가 부족해질 경우에 모두 죽지 않고 한 마리라도 키워내기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  어미가 새끼들에게 먹이를 먹일 때는 먹이를 토하지 않고 새끼들이 부리를 어미 부리 속으로 넣어야만 얻어먹을 수 있게 한다. 대개 부화 후 2주일까지는 어미가 새끼를 품어주거나 보살피며 이후부터 점차 새끼들을 놔두고 먹이를 찾아 떠난다. 2주일 정도 자란 새끼들은 둥지에 도착한 어미를 알아보고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며 끼르륵, 끼르륵 하는 소리를 내며 먹이를 달라고 보챈다. 걸어 다닐 수 있는 3주일 가량의 새끼들은 종종 둥지를 떠나 돌아다니거나 다른 둥지의 새끼들과 함께 있기도 한다. 어미는 둥지로 새끼가 알아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며 거의 찾아다니지 않는다.


6) 새끼의 이소


태어난 지 한 달 정도 되면 새끼는 비행할 수 있을 정도로 날개가 자란다. 몸무게도 어미와 비슷해진다. 이때부터는 둥지에 도착한 어미를 기다리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어미를 쫓아다니며 새끼들 간에 먹이를 달라고 경쟁적으로 보챈다. 어미는 금방 먹이를 주지 않고 둥지를 벗어나 자신을 쫓아오게 하거나 주변을 날게 한 후에 먹이를 주면서 새끼가 둥지를 떠나 날아갈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킨다. 50일이 지나면 새끼들은 어미를 따라 번식지를 떠나 첫 비행을 하며 어미의 먹이터인 갯벌로 쫓아가기 시작한다. 새끼들은 쉬기 편한 장소에서 모여 어미들이 먹이를 가져오길 기다리거나 그동안 스스로 먹이를 잡는 방법을 터득하면서 점차 독립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번식지를 떠난 후에도 몇 달간 계속 어미를 쫓아다니며 먹이를 보채는 경우가 많다.

 


강화의 논과 저어새


강화도에서 저어새를 자주 볼 수 있는 곳은 해안과 가까운 논이다. 특히 범람형 논 지역을 즐겨 찾는다. 강화도에서는 봄철 일찍부터 수로에 물을 가두었다가 넘치는 물을 논에 대는 범람 방식의 논농사 지역이 곳곳에 있다. 강화도 해안 일부 지역은 과거 갯벌을 매립하고 물골이었던 곳에 보를 막아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게 한 수로형 저수지가 많다. 수로의 물에는 과거 염분이 남아 있어 양수기로 곧바로 퍼 올려 물을 대면 벼가 잘 자라지 않는다. 따라서 수로의 윗물을 천천히 범람시켜 논에 물을 채우는 방식을 이용하여 왔다. 염분이 높은 물은 밀도가 높아 아래로 가라앉기 때문이다. 이런 논은 빠르면 2월부터 모내기 철인 5월까지 천천히 물을 공급한다. 논물을 오랫동안 가두기 때문에 매화마름과 같이 멸종위기에 처한 수서식물이 자랄 수 있는 기회를 주며, 미꾸라지나 붕어, 개구리,수서곤충 등의 먹잇감이 다수 논으로 유입된다. 강화도의 논에선 종종 수십 마리의 저어새들이 미꾸라지를 잡기 위해 함께 무리를 지어서 부리를 휘젓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백로와 왜가리들이 목을 길게 빼고 저어새를 쫓아다니며 도망가는 미꾸라지라도 잡기 위해 기회를 엿보는 재미있는 모습을 관찰할 수도 있다.


저어새들이 가장 많이 찾는 시기는 한창 모내기를 준비하는 4월부터 벼의 크기가 저어새 등 높이를 넘기 전인 6월까지이다. 북한의 경우에는 모내기가 한 달가량 늦어지는 경우가 많고 수작업으로 농사를 짓기 때문에 7월까지도 논을 이용할 수 있다. 저어새들이 거의 이용하지 않는 논들도 있는데, 이런 곳은 대개 큰 저수지에서 한꺼번에 관계 수로를 통해 물을 받아 논농사를 하는 곳이다. 물을 대는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아 먹잇감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저어새의 월동지


저어새는 번식을 마치면 주변의 갯벌이나 습지 등으로 이동해 체류하다가 기온이 떨어지는 10~11월에 남쪽으로 이주를 시작한다. 주 월동지는 한겨울에도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대만, 홍콩, 중국 남부 등이며, 일부 가까운 곳으로 제주도와 일본 남부에 머물기도 하고, 더 멀리 베트남, 태국, 필리핀까지도 내려간다. 저어새는 월동지까지 보통 2000km 내외 거리를 이동하며 대부분 황해를 건너 중국 쪽으로 날아 간다. 이주 중에 중간 기착지인 중국 중부의 엔청, 상하이, 항저우 등의 해안 갯벌이나 양어장, 습지 등에서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한달 이상 오래 머물기도 하며, 소수 개체들은 더 남하하지 않고 월동하기도 한다.


월동지에서 저어새는 갯벌을 별로 이용하지 않는다. 저어새 최대 월동지인 대만 남서 해안 지역에서는 강화도와 달리 갯벌을 이용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대만의 주 월동지인 타이난 치구 등의 지역은 오래 전에 갯벌이 매립되어 거의 사라지고 염전이나 어류 양식장 등으로 바뀌었다. 최근에는 염전의 이용가치가 떨어지면서 양식장으로 바뀌거 나 일부 저어새 보호지역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저어새들은 이곳 양식장이나 폐염전에 대한 의존성이 상당히 강하다. 이곳의 드넓은 양식 장은 가을부터 겨울철에 물고기를 출하하고 물을 빼는 경우가 많다. 이때 이용가치가 없는 작은 물고기나 새우류는 수확하지 않고 남겨두는 경우가 많은데, 저어새들과 여러 종류의 물새들에게는 겨울을 지내기에 너무도 좋은 상태가 된다. 저어새가 많을 때는 양어장 한 장소에만 수 백 마리가 모이기도 한다. 다른 월동지인 중국 남부, 흥콩 등지도 이런 이유에서 갯벌보다는 매립된 양어장이나 새우 양식장을 즐겨 찾는다.


그러나 일본 규슈 월동지의 경우에는 이용할 수 있는 양어장이 거의 없다. 따라서 소규모로 남아 있는 갯벌과 수심이 얕은 강 하구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으며, 곳곳에 적은 무리로 흩어진다. 중국에 월동 하는 일부 저어새는 내륙으로 수백 킬로미터 들어간 호수나 습지 등을 찾아 월동하는 경우가 종종 확인된다.


저어새의 생존 수


2017년 1월에 저어새 월동지에 대한 모니터링 결과,현재 전 세계에 저어새가 약 4000마리 내외 생존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들 중에 약 2000마리가 강화도에 번식하거나 강화도를 이용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20년 전에 저어새의 생존 수는 400여 마리에 불과하였다. 지난 20년간 10배로 늘어난 셈이다. 이들이 점차 증가할 수 있었던 것은 강화의 번식섬들이 보호될 수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볼음도와 강화도 남단을 포함한 45OOOha의 넓은 강화도 수역이 저어새 천연기념물 지역으로 지정된 2000년 이후부터 강화의 저어새들이 꾸준하게 증가하여 왔다. 만일 강화 갯벌의 천연기념물 지정 이 없었더라면 저어새의 현재와 같은 증가는 없었을 것이다.

 


저어새를 위협하는 요인


저어새는 다양한 종류의 위협에 처해 있다. 번식지에서는 집쥐나 수리 부엉이가 큰 위협이 되고 있다. 집쥐는 알이나 어린 새끼를 잡아먹고, 수리부엉이 역시 새끼를 잡아먹으며 어미에게도 위협이 되고 있다. 그 외 큰부리까마귀,재갈매기 등도 알을 훔쳐 갈 수 있으며,매도 어린 새끼에게 위협이 된다. 일부 번식지에서는 사람이 풀어놓은 염소가 번식에 방해를 주며, 풀을 먹어치워 번식을 힘들게 하기도 한다. 종종 사람들이 알을 주워 가기도 한다. 습지 먹이터에서는 고양이와 개 등이 위협이 되며 삵은 저어새를 종종 잡아먹기도 한다.  낚시 쓰레기 역시 문제가 된다. 부리가 넓적하기 때문에 물속의 끊어진 낚싯줄이나 바늘아 혹은 노끈이 부리에 걸리면 풀어내지 못한다. 종종 오염된 먹이를 먹고 죽기도 하고 전깃줄이나 건물에 충돌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저어새를 위협하는 것은 서식지인 습지와 갯벌이 사라지는 것이다.

 


사람과의 갈등


강화의 저어새들은 점차 이용할 수 있는 서식지가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강화 남단 동막리의 경우에 해안으로 숙박업소와 위락 시설 등이 점차 증가하면서 저어새들은 가까운 해안을 이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동막리 해수욕장에 관광객이 증가하면서 주변의 저어새들이 이곳 갯벌을 피하고 있다. 넓은 갯벌이 펼쳐진 초지리 갯벌 역시 점차 이용 하기 힘들어졌다. 초지대교 개통과 해안도로 신설,황산도 관광단지화 등으로 차량이 과거보다 증가하고 사람의 갯벌 접근이 많아져 이제는 저어새들이 잘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분오리와 선두리 사이에 위치한 매립지인 동주농장은 만조 시에 저어새의 휴식지로 중요한 곳이다. 그러나 동주농장의 농경지가 개발될 예정이어서 민물에서 목욕을 하거나 물을 마셔야 하는 저어새들이 점차 이곳을 이용하기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다른 곳들도 강화도 해안을 따라 차량의 이용이 크게 증가 하였고 강화나들길을 따라 관광객도 증가하고 있다. 논 지역에서는 낚시꾼들의 증가도 영향을 주고 있다. 또한 범람형 논이 점차 줄어들고 있으며 모내기 벼를 쓰러트린다는 이유로 저어새를 달갑지 않게 보는 농민들과의 갈등도 있다. 모내기한 벼 사이로 무리를 지어 부리로 휘젓고 다니는 모습이 농민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줄 만하다. 천연기념물 도래지로 지정한 이후 해안 개발이 제한되면서, 주민과의 갈등 과 개발 제한에 따른 민원 등의 여러 문제점들은 계속되고 있다.

 


저어새의 보호


강화 갯벌의 넓은 면적이 천연기념물 지역으로 보호되고 있지만 일부 저어새들이 이용하는 핵심 서식지는 보호지역에서 벗어나 있다. 일부 저어새가 번식하는 섬들은 보호지역으로 지정되지 못하였으며, 저어새들이 자주 찾는 해안 인근의 논이나 습지 역시 보호지역으로 지정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강화 남단의 여차리, 홍왕리, 분오리 등의 해안에 위치한 유수지와 저수지, 그리고 어유정도 폐염전과 강화도 일원의 폐양어장 등은 갯벌에 물이 차는 만조에 저어새들이 들어와 쉴 수 있는 좋은 장소이다. 이런 장소들 중에 일부가 향후 저어새의 보호를 위해 습지 공원이나 보전 지역으로 지정 •관리될 수 있다면 저어새 보호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1) 여차리 유수지의 사례


저어새들이 가장 즐겨 쉬는 장소로 여차리 유수지가 있다. 이곳은 수심이 얕고 만조 시에 안전하게 휴식을 취하거나 목욕을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곳은 사유지인 데다 함초를 재배하거나 물을 뺄 경우에는 이용할 수 없다. 또한 새우 양식장 때문에 새들이 잡아먹거나 조류에 의한 전염병 전파 우려가 있어 저어새의 접근이 달갑지 않은 상황이다. 동주농장의 경우에도 저어새들이 휴식지로 즐겨 찾거나 물을 먹는 곳어서 일부 해안 지역을 습지 공원으로 전환한다면 저어새와 물새 서식지로 유명해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 각시암의 사례


각시암은 저어새 번식지로도 이용되지만 만조에 가장 많은 저어새들이 휴식지로 이용하는 곳이다. 이곳에 매년 보호 단체가 둥지터를 만들고 둥지 재료를 넣어줌으로써 번식 수 증가에 좋은 효과를 보고 있다. 그러나 섬이 작기 때문에 주변에 이보다 더 큰 섬을 만들어준다면 저어새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 저어새는 DDT와 물의 오염으로 거의 멸종할 뻔했던 새이다. 그러나 자연환경 보호를 통해 점차 수가 증가하고 있으며 이제는 좀 더 가까이에서 많은 새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저어새는 갯벌의 건강함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도 계속 강화의 저어새가 사람들과 공존할 수 있도록 우리의 배려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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