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시 : 2023. 7. 16 (일) 08:10 - 10:50 / 11:00 - 12:20 (4시간)
2. 오늘 걷기 거리 : 파란색 줄친 구간 16.0 km
【 1구간 】 강화나들길 14코스 강화도령 첫사랑길 10.0 km
【 2구간 】 강화나들길 15코스 고려궁성곽길 잔여 구간 (서문~남문) 6.0 km

3. 일기
- 날씨 : 흐림 (기온 최저 22도, 최고 26도)
- 천문 : 일출 05:24, 일몰 19:56
4. 강화나들길 걷기
- 강화나들길 14코스는 조선후기 철종이 왕으로 즉위하기 전 강화에서 살았던 젊은 시기에 강화읍 잠저(용흥궁)와 외갓집을 오가던 이야기가 있는 길이다. 강화군청 앞길에서 길을 시작하여 강화산성을 지나 선원면 철종 외가에서 길을 끝내고, 다시 길을 나서 15코스 고려궁성곽길 중 아직 걷지 못한 나머지 구간인 강화 서문에서 남문까지 길을 걸었다. 드디어 금년 5월 13일 강화나들길을 걷기 시작한지 11주차인 오늘 강화나들길 20개 전체 코스 길(공식 거리 310km)의 걷기를 완료하였다. (서해랑길 103코스, 마니산, 성주산, 고려산 등산 추가)
- 강화에 특별한 연고가 없어 아주 가끔 관광 목적으로 차 타고 다녀가던 길을 이렇게 오래동안 걸어서 강화를 샅샅이 살펴보는 인연은 참으로 소중하기 그지 없었다. 길을 걷는 동안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부터 고려시대 항쟁의 현장을 지나 조선 말 외세 침입의 현장을 모두 다 체험할 수 있었다. 역사의 현장에 못지 않게, 그 길에는 바다가 있었고 세계 5대 갯벌의 현장과 저어새를 비롯한 새와 각종 동식물들과 마주하였다. 마니산과 상주산을 등산하였고 마지막에는 고려산 능선에서 고인돌 무덤군을 보았다. 서울에서 강화까지 편도 3시간 정도 소요되는 관계로 일출과 일몰의 현장을 강화에서 제대로 보기 어려워 아쉬웠던 점도 있었다.
- 둘레길 걷기는 끝없는 걸음의 연속이고 길이란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내가 길을 걷고 있는 한, 이 길의 끝은 있을 수 없다. 사람 사는 것 역시 끝없이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을 견뎌내는 일이다. 그길에는 오늘처럼 내내 구름이 끼고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무더운 날씨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한계 또는 인생의 소위 불운(불운이란 인생에서 공짜 행운이 없다는 말인데, 이는 당연한 말이므로 적절한 용어가 아니다)을 대면했을 때 이를 극복해내는 것이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살았다는 흔적을 조금이라도 남기는 것이지 않을까? 비록 강화 고인돌 조각도 못 되고 우주에 남은 한 조각 에너지로 사라져 가더라도 한 순간의 흔적이라도 남긴다면 조금은 멋진 인생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삶의 균형을 추구하고 안분지족하는 구복 종교로는 이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꿈같은 이야기
김시종
내가 뭔가 말하면
모두가 바로 웃으며 달려들어
“꿈같은 이야기는 하지 마” 해서
나조차도
그런가 싶어진다.
그래도 나는
포기할 수 없어서
그 꿈같은 이야기를
진심으로 꿈꾸려 한다.
그런 터라
이제 친구들은 놀리지도 않는다
“또 그 이야기야!” 하는 투다
그런데도 꿈을 버리지 못해서
나 홀로 쩔쩔매고 있다.
5. 구간별 풍경
【 1구간 】 강화나들길 14코스 강화도령 첫사랑길 11.7 km
조선시대 철종(1831-1863)을 흔히 ‘강화도령’이라 부른다.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강화도에서 유배 생활을 했기 때문에 불리는 별명이다. 현재 강화도에는 철종이 5년 동안 머물렀던 집인 ‘용흥궁(龍興宮)’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용흥궁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강화도에서 살았던 집을 철종이 왕의 자리에 오르고 난 이후, 보수하고 단장해서 용흥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시대 때 정상적인 과정이 아닌 특별한 사정으로 임금에 추대되었을 경우,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을 ‘잠저(潛邸)’라고 한다. 용흥궁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잠저 가운데 한 곳이다. 1849년 헌종이 후사가 없이 붕어(崩御)하자, 철종이 19세에 왕의 자리를 계승한다. 당시 철종은 정치나 학문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1844년 14세에 강화도로 유배되어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왕이 된 철종은 왕의 자리에 오르기는 하였지만, 왕으로서 누려야 할 지위와 권한을 누리지 못했기에 흔히 ‘강화도령’이라는 말이 생기게 된 것이다.
- 오늘 길은 강화읍 (관청리 - 신문리 - 남산리)에서 선원면 (선행리 - 냉정리) 로 가는 비교적 짧은 길이다.

- 버스에서 강화읍에 내리니 새벽까지 장마비 온 뒤라서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날씨는 후덥지근하여 솜에 물이 가득찬 느낌이다. 걷는게 힘든 게 아니라, 후덥지근한 날씨가 오늘 걷기에서 상대해야 할 어려움일 것 같다.

- 용흥궁에는 이미 갔다와서 들리지 않고 강화중앙시장에서 남산 방향으로 좌회전한다.

- 솔터우물은 현재는 우물터 모형만 있어 사용하지 않는 우물이다. 솔터물, 장터우물이라고 부르는 아래시장 동쪽에 있는 우물로 활터가 있었다고 한다. 예전에 *진전(眞殿) 제사 때 이물을 썼다. *(진전 : 왕의 초상화인 어전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던 곳, 고려궁지에 있었던 만녕전을 말하며 그곳에 숙종과 영조의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었다) 솔터우물은 강화중앙시장 인근에 위치해 있어 이곳에서 가끔 음악회도 개최하는 곳이다.

- 마을 골목으로 길이 이어진다.

- 단아한 모습의 미술도서관이 있다.

- 길은 갑자기 아주 작은 골목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 남산으로 오르는 길이 시작되었다.

- 남산이 공원으로 조성되어 관리 상태가 양호하다.

- 숲 속으로 들어서도 후덥지근하다.

청하동 약수터
철종과 강화도 처녀 봉이는 강화도 남산에 있는 이곳 청하동약수터에서 만나 찬우물약수터까지 거닐었다고 하는 첫사랑의 서사가 있는 곳이다.


- 걷다 보니 남산 정상부근에 있는 강화산성 남문 암문에 도달한다.

- 산성이 앞으로 뻗어 있는데 길은 오른쪽으로 간다.

- 피톤치드 가득한 잣나무 숲이 나타났다.

- 물안개 가득한 잣나무 숲이 근사하다.

- 강화나들길 15코스와 겹치는 구간이다. 14코스는 국화리 공동묘지 길로 가서 하산하게 된다.

- 하산길로 접어든다.

- 오솔길이 빗물 흐르는 길로 바뀌어 있다.

- 산을 내려 오면 에버리치라는 호텔이 나온다. 영업을 하고 있다.

- 강화읍이 내려다보이는 깔끔한 70객실 규모의 호텔이다.

-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 간다.

- 지나온 길을 올려다 본 모습이다.

- 주택과 밭이 혼재되어 있는 길을 간다.

- 버스 다니는 길을 건너서 계속 간다.

- 강화읍 남산리 길이 거의 끝나간다.

- 선행천 건너편이 선원면 선행리이다. 끝부분에 다리가 있어 건너 간다.

선원면
고려 제 23대 고종 때 강화천도시 권신 최우가 경내에 제일 큰 고장을 세우고 五百佛像을 모신 후 사찰명을 선원사라 하였고, 병자호란 당시 공신인 선원 김상용의 위패가 있는 충렬사가 선행리에 위치하고 있어 그의 호를 따서 구한말 고종 7년(1870년) 면 이름을 선원면으로 호칭하였다. (김상용이 충신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선원면에는 금월리, 연리, 지산리, 신정리, 창리, 선행리, 냉정리 등 7개의 리가 있다.

냉정리
이곳에 ‘찬우물’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물이 차고 맛이 있어 명정(名井)으로 일컬어 왔다. 또한 이 마을에 수질이 비슷한 옥곡물이라는 이름난 우물이 또 있어, 찬물이 나는 마을로 상징화되어 마을 이름은 냉정리라 부르게 되었다.
찬우물약수터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에 ‘찬우물’ 또는 ‘냉정약천’, ‘냉정약수’ 등으로 불리는 약수터가 소재한다. 찬우물약수터는 강화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약수터 가운데 한 곳이다. 강화군 선원면은 고려시대 고종 때 전국 2대 사찰 가운데 한 곳이었던 ‘선원사(禪源寺)’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 선원면에 ‘냉정(冷井)’이라 부르는 마을이 있는데, 찬우물약수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차고 맛있었기 때문에 마을 지명까지도 생기게 되었다. 또한 선원면에는 ‘옥곡물’이라는 우물이 한 개 더 있어서 강화도에서는 찬물이 나는 마을로 유명하다. 현재 찬우물 약수터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선원면 창리에 포함되어 있다.
철종이 어린 시절 강화도 용흥궁에서 지낼 때 냉정리에 있던 외갓집을 오가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잠시 쉬어서 물을 마셨던 곳이 바로 찬우물약수터이다. 또한 철종과 같은 마을에 살던 강화도 처녀인 봉이(鳳伊, 일명 양순이)를 처음 만난 곳도 찬우물약수터라고 전한다. 철종과 강화도 처녀 봉이는 강화도 남산에 있는 청하동약수터에서 만나 찬우물약수터까지 거닐었다. 시간이 지나 임금이 된 철종이 한양 궁궐에서 생활할 때도 강화도에서 만났던 봉이를 잊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을 시켜 찬우물약수터에서 떠가지고 온 물로 막걸리를 담그게 했다고도 한다. 찬우물약수터는 강화도 사람들에게 소문난 약수터 가운데 한 곳이다. 언제나 시원한 물맛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강화도 사람들은 물론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다. 찬우물약수터 앞에는 인근에 사시는 분들이 밭에서 기른 호박, 옥수수, 양파, 땅콩 등 제철 농산물들을 판매하기 위해 좌판을 벌여 놓는다.



- 찬우물 약수터를 지난면 버스다니는 도로길이 나오고, 여기를 건너서 왼쭉으로 가다가 산길로 들어서게 된다.

- 다시 산길이다.

- 바닥에 장마비 흔적이 여전하다.

- 양봉하던 자리이다. 벌은 없는 듯하다.

- 능소화 떨어지는 여름날이다.

- 호박꽃이 밭의 가장자리 담에 피어 있다.

- 선원초등학교가 나오면서 다시 차도를 건너 간다.



- 멀리 보이는 산이 혈구산이다. 그 너머에 고려산이 있다.

- 비가 오고 나면 벼멸구가 극성이던 때가 있었는데 요새는 벼농사 방제를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다.

철종 외가 (哲宗外家)
1853년(철종 4)에 조선 제25대 철종이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에게 명하여 지은 기와집으로, 철종의 외척인 염보길(廉輔吉)이 살았다. 원래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로 둔 H자형 구조의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행랑채 일부가 헐려 몸체만 남아 있다. 집 뒤에는 염씨 집안의 묘가 있다. 일반 사대부 집의 웅장한 규모와는 다르게 법도에 맞도록 고졸(古拙)하게 지은 건물이이어서 양반가옥에서 볼 수 있는 기품과 화려함은 없으나 단아하고 고풍스럽다. 평면 구성은 경기 지역의 사대부 가옥 형태를 따랐으나 안채와 사랑채를 一자로 연결시켜 안채와 사랑채의 공간을 작은 화장담으로 간단하게 나눈 점이 특이하다.





물우리(勿憂里)
물우리는 한자대로라면 근심걱정 없는 마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물우리의 원어는 ‘물오리’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마을 어디엔가 물오리 떼가 철따라 찾아오는 곳이 있거나, 아니면 마을 앞 연못에 물오리 몇 마리가 한가로이 헤엄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을이름을 ‘물오리’라 하고 싶었을 것인데, 적절한 한자어가 생각나지 않으므로 물오리[수부(水鳧)]를 ‘물우(勿憂)리’로 작명했을 것이다. 물오리마을이란 뜻의 한자어 ‘수부촌(水鳧村)’이 물우리란 지명과 같이 쓰이고 있거나, 먼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볼 때 물우리는 물오리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하다, 할 것이다.
- 이전의 냉정리 공소가 신원성당으로 격상되어 미사가 거행되고 있다.

- 냉정2리 마을회관

- 마을 입구 이정표 - 대장간이 있었다는 마을유래.

- 버스타고 강화읍내로 간다.
【 2구간 】 강화나들길 15코스 고려궁성곽길 잔여 구간 (서문 ~ 남문) 6.0 km

- 이제 강화길이 아주 익숙하다. 버스 종점인 터미널에서 하차하지 않고 중간에 수협 앞에서 내려 서문 방향으로 <강화나들길 15코스 고려궁 성곽길>을 걷기 시작한다. 동문에서 강화향교까지는 강화나들길 걷기 시작한 첫날에 이미 다녀온 바 있어 생략하기로 한다.
강화산성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1232년(고종 19) 강화로 수도를 옮겼을 때 처음 성을 쌓았는데, 그 때는 지금보다 규모가 작았다. 조선 전기에 개축하였는데,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숙종 때 전면적으로 성을 보수하면서 동락천 건너 남산까지 포함시켜 크게 확대하였다. 북산, 남산, 견자산으로 이어진 포곡식 산성으로 둘레가 7,122m이다. 4개의 대문, 4개의 암문(暗門), 2개의 수문(水門)이 있고, 북산과 남산 정상에 관측소이자 지휘소인 북장대, 남장대가 있었다. 장인대(丈人臺)라고도 불린 남장대는 1745년(영조 21) 강화유수 황경원이 세웠는데, 2010년에 복원되었다. 4대문 가운데 북문에는 원래 누각이 없었는데 1783년(정조 7) 강화유수 김노진이 누각을 올려 온전한 형태를 갖췄다고 한다. 남문은 1955년에 문루가 무너졌는데 1975년에 복원했고,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이 ‘江都南門’ 편액을 썼다. 2003년 동문이 새로 세워지면서 모든 성문이 복원됐다. 동문은 망한루(望漢樓), 서문은 첨화루(瞻華樓), 남문은 안파루(晏波樓), 북문은 진송루(鎭松樓)이다. 성의 동쪽 부분은 많이 없어졌으나, 남쪽, 북쪽과 서쪽의 산자락 부분은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이 들어왔고, 강화도 조약을 맺을 때 일본군이 들어오는 등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었다.
- 서문 가기 직전에 서문안 마을 입구이다.

- 산성이 갈라진 틈으로 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왼쪽이 강화공설운동장이고, 오른쪽이 강화 서문이다.

- 강화 서문

- 국화리 쪽으로 15코스 길을 따라 걷는다.

- 5코스 지나갈 때 지나갔던 국화저수지이다.

- 저수지 건너편 길으로 들어선다.

- 남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 여름 풀이 그득한 오래된 공동묘지 길을 걸어간다.

- 사실 작은 묘비가 없으면 묘지인 줄 알기 어렵겠다.

- 공동묘지 길이 끝나고 강화산성 남장대가 나온다.

- 남장대 지나 서있는 느티나무가 부럽다. 사방을 내려다 보며 조용히 서있는 나무가 부럽지 아니한가.

- 강화읍 전경 - 김포 문수산 방향인데 흐릿하다.

- 강화읍내에 초첨을 맞춰 다시 한번 사진을 담아 본다.

- 산성 자리에 흙으로 둔덕을 만들어 길이 이어진다.

- 산성을 내려와 아래로 내려간다.

- 남문에 도착하였다.

- 오늘 걷기를 모두 마친 강화나들길 지도(20개 코스, 310km)이다. 둘레길처럼 계속 이어진 길은 아니나, 이 길을 걸으면 강화의 역사와 자연 모두를 속속들이 잘 알게 될 것이다. 사랑스러운 길이고 오래도록 생각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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