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유행이 잦아든 이 선물의 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의 생존 회복력이 지속될 수 있도록 사회 전반의 근본적인 재구성이 필요하다. 그 원칙은 “모든 존재가 함께 건강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건강할 수 없다”가 되어야 한다.
“수십년 이래 유행병이 성행하여 여름, 가을 사이에는 한 사람이 병에 걸려도 백명, 천명의 사망이 계속된다. … 날이 서늘해지고 전염병이 없어지면 다시 즐거워하며 지난 일을 잊어버리니 가히 어리석고 불쌍하다.” 1882년 김옥균이 쓴 <치도약론>에 나오는 구절이다.
지난 5일(현지시각) 세계보건기구는 코로나19에 대한 국제 공중보건 비상사태를 해제했다. 현재 국내에서도 하루 평균 약 10명의 사망자가 보고되고 있기에 이것이 유행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약 694만명의 사망자와 7억7천만명의 확진자를 야기한 인류사의 큰 재난을 반성 없이 보낼 수 없다. 이 초유의 사건에 완벽히 대응할 순 없었어도 우리가 조금 더 탐욕을 줄여 현명하고 헌신적으로 노력했다면, 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살아남은 우리가 자축뿐 아니라 성찰의 형벌도 감수해야 할 이유다.
첫째, 현 코로나 소강 국면은 인간이 이루어낸 게 아니라 하늘의 축복, 코로나바이러스의 자비, 우연한 행운일 뿐이다. 보건의료 현장 종사자들의 헌신과 시민들의 협력이 기여한 바가 없지 않으나 현재 코로나 변종의 감염률과 치명률이 10배가 넘었다면, 지금 우리는 이미 죽었거나 지옥 속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둘째, 코로나 팬데믹은 천재지변이 아니었다. 동굴 속에서 잠자던 코로나바이러스를 깨운 것은 인간의 무분별한 생태 파괴였는데, 이 근본 원인은 여전히 완고하게 건재하다.
셋째, 코로나는 약자에게 더 혹독했다. 2020년 미국 성인 대상 연구에서 코로나로 인한 연령 보정 사망률은 백인 여성에 견줘 히스패닉 남성이 27.4배나 높았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코로나 확진자 9148명 중 가난한 의료급여 수급권자의 사망률이 보험료 상위 20%인 사람들에 비해 2.81배 높았다.
넷째, 우리의 인내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이기적이었으며, 타인의 죽음에 쉽게 둔감해졌다. 팬데믹 초기 많은 이들이 마스크, 백신, 구호물자도 없이 죽어갔다. 어쩔 수 없는 조처였다고 믿는 이들이 많지만, 마스크 좀 보내달라는 인도·콜롬비아 친구들의 부탁을 해외배송 금지 때문에 들어주지 못한 것이 나는 한없이 미안하다.
다섯째, 국제 협력의 규범이 작동하지 않았다. 70여년 전 유엔 설립 이후 생긴 각종 규범은 부자 나라들의 이기심과 다국적 제약회사의 영리 추구로 무용지물이 되었다. 빈곤국 국민 20%가 맞을 수 있는 백신을 무료 공급해주자는 코백스 프로젝트가 부국의 백신 독점과 소극적인 재정 지원으로 실패한 게 그 예다.
여섯째, 정치화가 피해를 키웠다. 우리 정부의 초기 대응은 비교적 성공적이었는데, 투명성이 정부 신뢰로 이어지며 효과적인 대응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행의 장기화로 인한 사안의 복잡화와 피곤 등에 더해 대통령선거라는 정치가 개입해 공론장은 합리성을 잃고 자극적인 정보가 넘쳐나고 헌신이 폄하되었다. 시민들은 각자도생을 택했고 정부는 사실상 손을 놓았다.
유행이 잦아든 이 선물의 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가? 자잘한 기술적·행정적 문제도 개선해야겠지만, 우리의 생존 회복력이 지속될 수 있도록 사회 전반의 근본적인 재구성이 필요하다. 그 재구성의 원칙은 “모든 존재가 함께 건강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건강할 수 없다”가 되어야 한다.
생태를 파괴하는 막개발, 공장식 축산을 중단하고, 백신 구입 시 10분의 1을 저소득 국가에 할당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등 근본적인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
대규모 유행의 장기화에 따르는 복합 사회문제에 대응할 수 있도록 여러 부처에 대한 통합 리더십과 시민 참여를 의무화하는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어려운 상황을 이용해 사적 권력, 이익을 추구하는 이들을 걸러낼 수 있는 민주적 장치들이 필요하다.
국가와 전 지구적 차원에서 공공 제약회사 등 공공 인프라의 양적·질적 확대를 진행하고 민간 부문의 공공성을 좀 더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사망자 694만명에 대해 진정으로 애도하는 것이다. 진정한 애도란 영원히 잊지 않는 것이다. 안치실조차 찾지 못해 즐비하게 널려 있던 주검들, 바나나 껍질로 만든 마스크를 써야 했던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마스크 한장을 양보하지 않은 부끄러움을 잊지 않는 것이다. 철학자 헤겔은 우리가 역사에서 배운 건,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불안하다. 이쯤에서 되뇌어 기억할 말이 있다.
영화 <터미네이터>(종결자)의 대사다.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I’ll be back)
‘65′라는 숫자는 잊어라… 국민연금만큼 노인 돌봄 문제가 급하다 [정희원의 늙기의 기술]
< 조선일보, 정희원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의사, 2023.05.24. >
우리 사회에서 고령화와 관련된 논의를 할 때 많은 경우 65세 이상의 인구가 늘고 있다는 통계 자료에 집중한다. 그런데 65세 이상이라는 인구 집단은 매우 큰 범주이며, 연령 등 인구학적 특성과 의학적, 기능적 특성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놓치고, 숫자 나이 65세 이상의 인구 집단이 균질하거나 변화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미래를 예측하거나 대비하지 못하게 된다.
지금부터는 65세 이상 인구집단이 비교적 균질하다고 생각하면 제대로 볼 수 없는, 방 안의 코끼리에 대한 이야기다. 경도 인지 장애와 골다공증, 고혈압, 만성 콩팥병 등을 앓던 87세 여성 A씨가 예정된 날짜보다 일찍 진료실을 찾았다. 작년부터 전반적 신체 기능이 떨어지며 조금씩 외출이 어려워졌는데, 6개월 전 경험한 척추 압박 골절로 잘 움직이지 못하는 시간이 늘면서 쇠약감은 더 심해졌다는 것이다. 남편과 사별 후 혼자 살던 그는 1년 전에는 기본적 집안일 정도는 스스로 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대부분을 근처에 사는 딸이 챙겨야 했고, 돌봄의 부담을 덜기 위해 노인장기요양보험을 신청했다. 신청 후 제출해야 하는 의사 소견서를 받으려고 예정일보다 일찍 내원한 것이다.
A씨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 질병과 노화의 결과로 전반적 삶의 기능이 떨어지면 돌봄이 필요한 정도에 따라 집, 주간보호센터, 요양원 등에서 여러 가지 서비스를 받기 위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노인장기요양보험이다. 노인장기요양보험 등급을 인정받은 사람을 모두 합치면 우리 사회의 전체적 노년기 돌봄 요구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현재 한국인 모두를 평균했을 때, 대략 몇 살이면 노인장기요양보험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을까? 걷는 속도가 느려지고 허리가 굽기 시작하는, 노년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72세, 노쇠가 조금 더 뚜렷해지는 시기는 77세다. 이 노쇠의 결과로 돌봄 요구가 생기는 시점이 문제다. 국민건강보험의 장기요양등급 판정 현황 통계와 지난 13년의 시군구별 주민등록 인구를 종합하면, 노인장기요양보험 인정자 수는 85세 이상 인구와 거의 비슷하게 따라가는 것을 알 수 있다.
2008년 노인장기요양보험이 탄생한 이래 이 제도의 지속 가능성을 고민한 많은 보고서가 나왔지만, 많은 연구는 노인장기요양보험의 수요 증가를 보수적으로(낮게) 예측했다. 안타깝게도, 이 보고서들은 초기의 노인장기요양보험 이용 연령 패턴이 유지된다고 잘못 가정하거나, 미래의 국가적 돌봄 수요가 65세 이상의 전체 인구 변화를 추종하는 것으로 가정하였다. 그런데, 65세 이상 인구는 상대적으로 완만하게 증가했어도 85세 이상 인구는 급증해왔으며, 이러한 거시적 변화는 국가적 돌봄 요구를 5~10년 전의 전문가들이 예측한 것보다 더 빠르게 증가시켰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지 못한 기존 보고서에 기대어 정책적 판단을 하는 경우, 예를 들어 요양병원 입원 환자 수가 65세 이상 인구 증가 속도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현상에 대해 인구 변화라는 거대한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하고, 없는 수요를 영리 목적으로 만들어냈다며 애꿎은 병원들을 비난하게 된다.
참고로 요양 병원의 입원 비용은 노인장기요양보험에서 지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요양 병원 입원이 필요한 사람은 대부분 장기요양보험 등급이 필요한 정도의 노쇠가 있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 20년간 급증할 초고령 인구 대책을 마련해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2018년 인지지원등급이 신설된 이후 최근까지 장기요양보험 인정자 수는 85세 인구의 110% 정도에 수렴하고 있다. 이러한 수렴 상태가 당분간은 유지된다는 전제 아래 미래의 돌봄 수요를 예측해 보면 노인장기요양보험 인정자 수는 2021년 95만명(85세 이상 인구 86만명)에서 2041년 297만명(85세 이상 인구 270만명)으로 늘 것으로 예상된다.
노인 95만명을 돌보는 데만 요양보호사는 50만7000명, 사회복지사는 3만4000명이 필요하다. 산술적으로 계산한다면, 2041년에 요양보호사가 적어도 150만명 필요하다. 하지만 이 계산에서 고려하지 않은 것이 있다. 20년 뒤에 돌봄이 필요한 사람은 자녀가 한두 명으로 구성된 베이비붐 세대다. 지금의 80대는 자녀 세대가 주도권을 갖고 돌봄을 수행하며, 장기요양보험 재가 돌봄 서비스는 보조적 역할을 수행한다. 20년 뒤의 베이비 부머에게는 그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자녀 세대가 부족하거나 없다. 따라서 일일 3~4시간의 재가 요양 개념 역시 20년 후에는 수정해야 할 가능성이 높고, 결과적으로 훨씬 더 많은 요양보호사가 필요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돌봄 폭증의 부담은 더 적은 수의 젊은 세대가 받는다. 비교적 느리게 증가하는 65세 이상 인구를 다루는 국민연금 문제에 비해 더욱 급격한 파급 효과가 예상된다. 생산연령인구(15~64세)가 2021년 3700만명에서 2041년 2700만명으로 줄어든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금까지 유지되던 장기요양 서비스 구조가 20년 뒤에도 유지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비슷한 가정을 활용한 순천향대학교 김용하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2020년 기준으로 0.68%인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의 필요 보험료율은 2065년에는 자그마치 9.4배 높아진 6.4%가 되어야 할 것으로 추정된다.
미래 노령 인구 구조의 변화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정해져 있는 미래다. 하지만 ‘65′라는 숫자에 파묻혀 우리 사회는 노쇠와 돌봄이라는 방 안의 코끼리를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일단 코끼리를 바라볼 수 있어야 노화를 지연시키고, 노쇠 진행을 더디게 하며, 돌봄 부족을 예방하기 위해 해야 할 노력을 논의할 수 있는데, 아직은 다들 편안히 눈가리개를 쓰고 있는 것 같다.
윤석열 대통령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한 간호법 제정안은 간호사의 지위에 관한 법이다. 의사로부터 간호사의 자율성을 확보하고, 간호조무사에게는 간호사의 통제력을 확보하려는 법이다. 간호사의 인권, 처우 그런 명분으로 접근하지 말자. 이건 지위에 관한 법이고 간호사와 의사-간호조무사 사이에 권력 투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과연 간호사의 지위 변동이 그렇게 시급한 일인가.
지금 의료시장은 급변하고 있다. 2020년 장기요양보험 급여자가 86만 명을 넘어섰고 건강보험 급여 지급액이 10조원에 육박했다. 매년 10% 이상 증가하고 있고 2030년이 되면 24조원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자가 부담 20%를 합산하면 요양 시장은 2030년 29조원 규모가 된다. 간병인 시장도 마찬가지다. 2021년 7조6000억원 정도로 추산되고 증가율도 연 8% 이상이다. 사실상 재외동포(F4 비자)에만 개방돼 있는데 인력 수급이 원활하지 않아 간병비 인플레가 발생하고 있다.
현재 하루 간병비는 12만~15만원이고 간병인 인력 송출 수수료는 10~25% 수준이다. 인력송출센터가 정착되고 25% 수수료가 고착되면 간병인 인력 송출의 매출만 2조원을 넘을 것으로 보인다.
2030년이 되면 요양병원과 간병인 시장 규모는 45조원에 육박한다. 사교육 시장의 1.5 배 규모로 커진다는 얘기다. 요양 및 간병 시장은 향후 30년간 성장이 약속된 시장이다. 국가 예산의 블랙홀이 될 것이고 우리의 등골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의료 시장은 치료와 케어의 양대 축으로 분화 중이다. 간호법 제정안이 시행됐다면 간호사는 케어의 영역에서 의사와 사실상 동등한 지위를 가지게 된다. 그게 이번 간호법 논란의 핵심이다.
문제는 인권이 아니다. 이권이요 권력이다. 의료 시스템의 붕괴를 걱정해야 하는 지금 이것이 문제 해결의 시발점이라도 되는가?
현재 대한민국 의료의 가격은 철저히 국가 통제다. 정확히 필수 의료의 영역에서 말이다. 필수 의료 영역에서 이윤 추구가 통제되자 그 바깥으로 의사 인력이 이동했다. 성형과 미용, 그리고 실손보험의 영역인 비급여 항목이 급성장했다. 담론의 장에서 의사는 이과생의 블랙홀이자 대한민국 최고 기득권 세력이다. 그러나 그건 판타지다. 의사도 돈은 더 벌고 싶지만, 위험과 소송은 회피하고 싶은 사람이다.
생명과 직결될수록 국가 통제력은 강했고 환자들의 ‘갑질’은 심했다. 의사들은 스스로 방어해야 했고 생명을 다루는 바이털과(科)를 기피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내·외·산·소(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가 붕괴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 인식 속에서 의사는 강자고 선망의 대상이다. 그들의 처우 개선을 주장하는 말은 득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피니언 리더도 약자 보호를 외치는 것이 처신에 유리하다. 오피니언 리더가 의사나 대기업 같은 강자를 옹호하면 어용 소리를 듣는다. 의사를 타자화한 정치 담론 속에 문제 해결을 위한 공론은 실종되고 계급 투쟁만 남았다.
당신이 외과 의사라 가정하자. 지금 수술하면 살릴 확률이 70%, 수술을 안 하면 사망 확률이 100%인 환자가 있다. 당신은 수술하겠는가? 당연히 수술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럼 질문을 바꿔보자. 수술하면 소송 확률이 30%, 수술 안 하면 소송 확률이 0%라면 당신은 수술하겠는가?
지금 대한민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이다. 의사들이 소극적 진료를 한다. 적극적 진료를 하다 실패하면 보호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사가 보호받지 못하면 환자들은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를 받을 기회를 박탈당한다. 침묵 속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문제도 없는 비극은 이렇게 탄생한다. 수술하다 사망한 환자의 통계는 있다. 그렇다면 수술을 포기해서 사망한 환자의 통계는 있는가? 없다. 우리 시스템이 돌아가는 방식이다.
힘차게 손가락질하고 문제 해결은 외면한다. 감정의 승리이자 이성의 패배다. 이게 포퓰리즘의 폐해다. 이쯤 되면 의사의 지위에 관한 공론화가 시작되어야 한다. 의사들의 면책과 의무와 경제적 보상 사이의 새로운 균형점을 논의하고 입법이 이루어져야 한다.
필요한 건 위험 분산과 보상이다. 자동차 보험이 운전자와 피해자를 둘 다 보호하듯, 의료 현장에서 의사와 환자를 둘 다 보호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의사들이 바이털, 내·외·산·소를 포기하는 상황에서 그들이 요구하는 안전과 보상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과로와 소송당할 위험, 상대적 박탈감을 참아내야 하는 일상 앞에 생명을 살리는 숭고함이 설 자리는 없다. 더는 의사 사회에서 생명을 살리는 명의가 에이스가 아니다. 돈 잘 버는 의사가 동기 중 에이스다. 하얀거탑의 긍지는 이렇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 바이털 의사를 한다는 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사명감 하나로 해야 하는 일이 됐다.
계속 실천할 수 없는 윤리 의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건 위선이다. 공공이라는 이름의 완장에 선동당해 의료 시스템을 망가뜨렸다. 의사의 전문성과 병원에서 그들의 주도권을 부정하고 병원에서 다수의 논리로 민주주의를 외치는 건 군대에서 계급장 떼자는 것과 같은 주장이다. 시민들이 냉정한 결정을 해야 할 때가 왔다. 실력 있는 바이털 의사가 제자를 길러낼 수 없는 시대가 오기 전에 말이다. 의사의 멱살을 쉽게 잡을 수 있는 시대가 민주화 시대라는 착각에서 이제 벗어나야 한다.
의사는 존중받아 마땅한 직업이다. 열심히 공부하고 수련 받은 사람들이며 1등의 자부심 하나로 사는 사람들이다. 평등이란 이름으로 그들을 평범하게 만들면 절체절명의 순간 어디선가 나타나 나의 생명을 구해줄 비범한 사람들이 사라진다.
버스 안에서 한 청년이 호흡곤란을 일으키며 쓰러진다. 얼떨결에 의사로 불려 나간 차정숙(JTBC 드라마 <닥터 차정숙>의 주인공)은 간단한 응급처치도 못 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좌절한다. 차정숙이 허둥지둥하는 동안, 대학병원 외과의사 로이 킴은 능숙한 손길로 환자를 구한다. 로이가 ”비의료인이 의료행위를 해선 안 된다”고 지적하자, 차정숙은 억울함을 토로한다. “의사가 맞긴 맞아요.”
그렇다. 차정숙은 의사다. 의과대학(예과 2년·본과 4년) 졸업자들은 의사 국가시험을 통과하면, 보건복지부 장관으로부터 의사 면허를 받는다. 하지만 차정숙은 응급환자도 살리지 못하는 ‘장롱 의사 면허’ 소지자다. 20년 전 인턴만 마치고 레지던트는 거치지 않은 ‘경단녀’다.
우리나라에서 인턴·레지던트 제도가 본격 시행된 것은 1958년이다. 1951년부터 전문의 제도가 도입됐는데, 이후 종합병원 수련 없이 전문의가 될 수 없도록 요건이 강화됐다. 이에 따라 의사면허를 취득한 일반의는 인턴(수련의·1년)→레지던트(전공의·3~4년)→전문의→전임의(펠로)의 수련 단계를 거친다.인턴은 모든 과를 돌지만, 레지던트가 되면 26개 전문과목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한다. 외과·내과·가정의학과·예방의학과 등은 3년을, 나머지 과들은 4년간 레지던트 수련을 받는다. 이후 자격시험을 거치면, 비로소 전문의가 된다. 대형병원에서 1~2년 더 머무르며 추가적인 공부를 하는 의사들도 있는데, 이들을 펠로라고 부른다.
‘2021 의료급여 통계’(건강보험심사평가원·국민건강보험)를 보면, 우리나라의 전체 의사 수는 10만9937명이다. 이 가운데 인턴이 2981명, 레지던트가 9853명이다. 수련 과정에 있는 의사들이 전체의 12% 정도다. 이들은 전국 240여곳 수련병원 및 기관에서 일하고 있다. 올해 차정숙과 같은 레지던트 1년차 동기는 3465명(모집 인원 기준)이 선발됐다.
첫 출근 날, 동료 전공의가 ‘주 80시간 근무를 해도 괜찮겠냐’고 묻자, 차정숙은 주 100시간 근무와 100일 당직 등 ‘라떼는~’을 시전한다. 실제로 전공의들의 살인적 노동시간은 의료계의 고질적 관행이었다.
전공의는 전문의가 되기 위해 배우는 신분인 동시에, 실제 진료를 하는 의사로서의 역할도 맡는다. 비용을 줄이려는 병원들이 인건비가 싼 전공의들에게 과다한 업무를 부여하는 관행이 굳어져온 것이다.
1998년 대한전공의협의회가 결성되고 2015년 전공의법(주 80시간 수련 초과 금지, 인턴·레지던트 적용)이 제정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대한의사협회가 파업을 벌일 때마다, 그 파급력은 전공의 움직임에 달렸다. 응급실·중환자실 등 필수의료의 핵심 인력은 전공의들이다. 대형 병원의 경우, 전공의만 500명 이상 일한다. 이들이 일손을 놓게 되면 의료 공백이 불가피해진다.
첫 단체행동은 1971년에 있었다. 그해 6월 국립의료원 인턴들이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며 집단 사표를 냈다. 이어 대학병원 인턴·레지던트들이 동참하면서 전국적으로 번졌다. 비교적 근래에는 2000년 의약분업, 2014년 원격의료, 2020년 의대 증원 반대 파업의 주력군이었다. 최근 의협은 간호법 제정 반대를 촉구하며, 17일 의료계 총파업을 예고했다. 명분 없는 파업에 국민 건강을 볼모로 삼지 말라는 목소리가 따른다.
류형돈(54) 뉴욕대 의과대학 세포생물학과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최근 ‘가장 큰 걱정 : 먹고 늙는 것의 과학’(이음)의 출간 계기로 방한했다. 그의 연구 주제는 초파리를 모델로 한 유전자 발현. 책엔 건강과 장수의 비결이 담겼다.
핵심은 소식이다. 노화와 관련된 현대인의 병 대부분이 과도한 영양에서 비롯되었기 때문. 특히 단백질을 적게 먹는 것이 중요하다. “동물 실험 결과 단백질을 적게 먹이면 어떤 생명체든 오래 삽니다. 장수마을을 분석해 보면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채식주의자예요.” 단백질을 섭취하면 세포의 성장을 조절하는 ‘토르(TOR)’라는 단백질이 활동하면서 노화를 촉진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초파리 연구가 일반화됐지만, 류 교수가 처음 유학 갔을 때는 인간 세포를 배양해 연구하는 것이 주류였다고 한다. 그가 초파리를 연구하게 된 건 “남들이 안 하는 방법을 써야 훌륭한 발견을 할 수 있다”는 한 선배 연구자의 조언 덕분이었다.
소식이 중요하지만 힘들다면 무리할 필요는 없다. “단것을 찾고 더 많이 먹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이에요. 모든 연구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다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잔소리해서 건강이 조금 나아질 수도 있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사람마다 다른 거죠.”
인류가 음식이 풍족한 시대를 맞이하게 된 역사, 과학적 원리 등 친절한 설명이 돋보이는 책. 류 교수는 “학생들이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을 때가 수업 중 가장 힘들다. 독자들이 공감하기 쉽게 익숙한 얘기를 많이 넣었다”고 했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칭찬이 드문 분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7년 전 처음 이 책을 냈을 때 칭찬해 주시더라고요. 당시 어머니 친구분들의 반응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나이 드신 분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고쳐 썼습니다.”
(서울=뉴스1) 음상준 기자 = 연세대 의료원(이하 연세의료원)은 올해 상반기 꿈의 암 치료로 평가받는 중입자치료를 시작한다고 21일 밝혔다. 암 환자가 중입자치료를 받기 위해 해외 원정을 떠날 경우 소요되는 비용은 1억~2억원에 수준이다. 국내에서는 수천만원이면 치료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중입자치료기는 중입자(탄소원자)를 빛의 70% 속도로 가속한 뒤 암환자 종양에 조사한다. 중입자가 암에 닿는 순간 강력한 방사선 에너지를 방출해 암세포 디엔에이(DNA)를 없애는 원리다. 이때 암세포 주변 정상세포는 거의 파괴되지 않는다. 중입자는 양성자보다 질량이 12배가량 무거워 암세포를 훨씬 많이 파괴한다.
X선이나 감마선을 이용하는 일반 방사선 의료기기와 달리, 탄소이온을 이용해 각종 난치암 환자의 생존율을 높일 수 있다. 회당 치료 시간은 1~2분가량이다. 통증도 없어 치료 후 바로 귀가할 수 있다. 연세의료원은 중입자치료기 의료장비와 전용 건물, 의료진 연수 등을 포함해 약 3000억원을 투입했다.
이 치료기는 입자를 가속하는 장비인 '싱크로트론'과 치료장비 '회전 갠트리'로 구성됐다. 싱크로트론은 가로 20m, 높이 1m 크기로 만들어진다. 회전 갠트리는 무게 200톤에 길이가 9m에 달한다. 두 장비는 두께가 2m인 차폐벽 안에 설치해야 가동할 수 있다.
중입자치료는 국내 병원이 현재 운용 중인 기존 방사선치료, 양성자치료보다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 중입자의 생물학적 효과는 X-선 및 양성자보다 2~3배 정도 우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입자치료가 가능한 암은 혈액암을 제외한 모든 고형암이다. 기존에 치료가 어려웠던 산소가 부족한 환경의 암세포에 강력한 효과를 보인다. 이런 저산소 암세포는 산소가 부족한 조건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생명력이 그만큼 강하다. 100배 이상 방사선 조사량에도 견디며, 항암약물 역시 침투가 어려워 치료가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윤홍인 연세암병원 방사선종양학과 교수는 "중입자치료는 췌장암과 폐암, 간암 등 여러 고형암에서 생존율을 높이는 데 기여할 것"이라며 "골·연부조직 육종, 척삭종, 악성 흑색종 등의 희귀암, 전립선암 치료에도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연세의료원이 선보이는 중입자치료기는 고정형 1대와 회전형 2대다. 회전형은 360도 회전하며 중입자를 조사하기 때문에 어느 방향에서든 환자 암세포에 집중 조사할 수 있다
치료 횟수는 평균 12회로 X-선, 양성자치료 절반 수준이다. 환자 1명당 치료 시간은 2분 정도다. 다만 준비 과정에 시간이 소요돼 치료기 3대에서 하루 동안 50여명의 환자를 치료할 것으로 예상된다. 치료 후에 환자가 느끼는 통증은 거의 없어 바로 귀가할 수 있다.
회전형 치료기를 2대를 선보이는 것은 연세의료원이 전 세계 최초다. 전 세계적으로 중입자치료가 가능한 병원은 10여곳에 불과하다. 회전형이 들어간 곳은 일본 2곳, 독일 1곳이다. 3곳도 회전형은 1대씩 보유 중이다. 회전형은 방사선을 암 부위에 정밀하게 타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노화의 속도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누군가는 한 번에 0.5초씩, 누군가는 2초씩 흐르죠. 이 속도를 늦춰야 합니다. 당신의 하루에 달렸어요. 오늘, 무엇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돌아보세요. 하루하루가 노화 속도를 결정합니다.
정희원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교수는 3040세대의 성과와 소비를 지향하는 삶이 계속되면 부모 세대보다 빠르게 늙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나이 들어도 아프지 않고, 활기차게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정희원(39) 서울 아산병원 노년내과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노년을 팔팔하게 보낼 수도, 병상 위에서 보낼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가 가능한 젊은 시기부터 ‘성공적인 나이 듦’을 과업으로 여겨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다. 『지속가능한 나이 듦』 『당신도 느리게 나이들 수 있습니다』를 쓰고, 노화 예방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것도 그래서다.
정희원 교수는 ‘노화’(Frailty)를 연구하는 노년내과 전문의다. 그가 몸담은 노인 의학에서는 나이를 숫자가 아닌 신체 기능으로 판단한다. 그래서 아직 숫자로는 청년이지만, 생물학적으로는 노년에 가까운 젊은 환자들도 만난다. 정 교수에 따르면 지난 몇 년 사이 젊은 성인의 건강 지표가 눈에 띄게 나빠졌다. 신체 질량지수 등의 통계가 이를 뒷받침한다.
정 교수는 “지금 우리의 삶은 가속 노화를 부추기는 환경에 둘러싸여 있다”며 “가속 노화를 방치하다가는 지금의 3040 세대는 죽을 때까지 오랜 시간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노년을 맞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가속 노화가 대체 뭔가요?
실제 나이보다 신체가 빠르게 늙는 겁니다. 노화 시계의 흐름이 시간의 흐름보다 빠르게 가는 건데요. 노화가 진행되면, 처음에는 만성 질환들이 생기면서 점차 기능이 떨어집니다. 기능이 떨어진다는 건 곧 보호자가 필요해진다는 의미입니다. 기능이 저하되는 속도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노화 속도가 빠르면 60대에 이미 90대의 기능을 갖게 될 수 있고, 속도가 느리면 90대에도 60대의 기능을 가질 수 있습니다.
3040에게 노화는 아직 먼 얘기로 들립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3040 세대의 가속 노화는 이미 곳곳에서 엿볼 수 있어요. 30~40대에 50~60대에서 나타나는 질병을 겪는 분이 통계적으로도 점점 늘고 있습니다. 치매에 걸린 듯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이유 없이 기력이 떨어져서, 이곳저곳 통증이 가라앉지 않는다며 노년내과를 찾습니다. 이 환자들은 나이에 비해 몸과 마음이 부쩍 나이 들어 있습니다. 저는 3040 세대의 가속 노화가 더 빨라질 것으로 보는데, 우리나라 국민의 비만 유병률 추이가 그 근거입니다.
비만율이요?
비만은 당뇨병, 고혈압, 혈관 질환 등 만성질환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입니다. 2020년 국민건강영양조사에 따르면 한국 남성의 비만 유병률이 48%에 이릅니다. 그중에서도 30대, 40대 남성이 각각 58.2%, 50.7%로 2000년대 초반(30%대)에 비해 눈에 띄게 높아졌습니다. 여성의 경우 ‘마른 비만’이 많습니다. 마른 비만은 겉으로 보기엔 말랐지만, 근육량이 부족합니다. 근육량이 부족하면 근골격계가 급속도로 나빠지죠. 허리와 목의 통증으로 이동성이 떨어지면서 당뇨·고지혈증 등 대사 질환이 연쇄적으로 찾아옵니다.
하지만 의료 기술이 발전하면서 기대수명은 오히려 늘었어요.
기대수명은 늘었지만, 건강 수명은 지금도 잘 늘지 않고 있습니다. 100세까지 살지만 건강하게 사는 기간은 오히려 줄었다는 겁니다. 미국의 연구를 보면 1990년대 노인보다 2020년 같은 연령대 노인의 건강 상태가 더 나쁩니다. 이 현상이 우리나라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봅니다. 실제 ‘국민건강영향조사’ 결과를 보면 노인의 건강 상태가 2014년 이후로 좋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에 지금의 30~40대는 가속 노화를 부추기는 환경에 노출돼 있습니다. 초가공식품(식품첨가물 함량이나 당도가 매우 높고 원재료를 알기 어려운 가공식품) 같이 비만을 유발하는 식품을 자주 먹고, 자동차와 스마트폰 등 활동량을 줄이는 기계를 끼고 살죠. 이대로 가다간 지금의 30~40대는 부모 세대보다 더 빨리 늙고, 기대수명도 짧아질 수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가속 노화가 개인이 아닌 사회문제로 커질 수 있다는 거예요. 저는 가속 노화가 한국 최고의 위기라고 봅니다.
개인의 가속 노화가 국가에 위기라고요? 상상이 안 가는데요.
지금의 30~40대가 빠르게 늙으면, 일찌감치 돌봄이 필요해집니다. 20년 뒤 80~90대를 돌봐야 할 50~60대도 함께 병상에 눕게 된다는 얘기죠. 극단적으로 들리겠지만, 국민의 절반이 온갖 병치레를 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심지어 한국은 아이도 낳지 않잖아요. 20년 뒤 노년 인구를 부양할 20~30대 수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가속 노화는 의료비와 돌봄 비용 증가를 높여 국가 전체를 위기에 빠뜨릴 가능성이 크다는 얘깁니다. 2020년대 30~40대는 의지할 곳 없이 병상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가속 노화에 불을 붙이다
정희원 교수에 따르면 노화는 시간과 유전자, 그리고 누적된 삶의 방식의 영향을 받는다. 시간과 유전자는 어쩔 수 없지만, 삶의 방식은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이미 가속 노화가 진행됐을지라도 관리하면 나아질 수 있다는 거다. 단, 운동과 식단만으로는 안 된다. 삶의 유지 기능을 떠받들고 있는 ‘네 가지 기둥(4M)’을 관리해야 한다는 게 정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흔히 건강하려면 운동과 식단만 떠올리는데, 이건 반쪽짜리 예방법”이라며 “네 가지 기둥을 입체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네 가지 기둥은 무엇인가요?
이동성(Mobility), 마음 건강(Mentation), 질병으로부터의 건강(Medical issues), 나에게 중요한 것(What Matters to me)을 말합니다. 이 네 가지를 체계적이고 전략적으로 설계해야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기능을 지키고, 노화 시계도 늦춥니다. 중요한 건 이 네 가지를 동시에 관리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 몸은 복잡적응계입니다. 신체와 정서, 사회적 요인 등 여러 요소가 서로 영향을 미쳐 선순환 또는 악순환을 만듭니다. 그래서 아픈 증상을 볼 때도 여러 가지를 함께 들여다봐야 해요. 근골격계의 가속노화라고 할 수 있는 목·허리·어깨 통증의 경우 아픈 부위만 볼 게 아니라 평소 앉는 자세, 관절의 가동 범위, 스트레스 지수 등도 함께 봐야 합니다. 나쁜 자세가 굳어진 이유도 찾아야 하고요. 저는 그 기저에 어떤 즐거움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쾌락 중독’도 있다고 봅니다.
쾌락 중독이요?
우리의 뇌가 쾌락에 중독된 상태를 말합니다. 뇌는 강한 자극이 들어오면 처음에는 큰 즐거움을 느끼지만, 점차 뇌가 느끼는 즐거움의 수준을 낮춥니다. 자극으로부터 뇌를 보호하기 위한 적응 현상으로 설명하기도 하는데요. 그래서 자극을 받으면 처음에는 즐겁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시시해집니다. 결국 쾌감을 느끼기 위해 더 강한 자극을, 더 자주 찾습니다. 예를 들어 같은 즐거움을 얻기 위해 마시는 술의 양이 늘고, 동영상도 점차 짧고, 강한 자극의 것을 자주 찾게 됩니다. 이런 과한 자극은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를 높여 몸과 마음을 고장내며, 가속 노화로 이어집니다.
SNS를 하면 스트레스가 풀리지 않나요?
SNS는 스트레스를 유발합니다. 연구에 따르면 SNS 사용에 따라 스트레스와 우울감이 악화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남과의 비교’가 원인 중 하나로 보이는데요. 다른 사람이 올린 비싼 옷, 멋진 차, 호화로운 여행을 보면 부러움과 질투심이 생깁니다. 한발 더 나가 자신이 초라해지죠. 이런 상태가 되면 집중력과 판단력이 떨어지고, 초라함을 잊게 해줄 더 큰 쾌락과 자극을 좇게 됩니다.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이 필요하고, 그걸 위해 일에 집착하고요. 술·담배 등 건강에 유해한 행동을 할 가능성도 커집니다. 스스로 에너지를 써가며 가속 노화의 악순환에 빠지는 겁니다.
여기서 빠져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의식적으로 욕심을 줄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일종의 ‘마음 챙김’된 상태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즐거움, 쾌락의 총량은 자극에 비례해 늘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게 중요한 것’(What matters to me)을 찾으세요. 그래야 외부 자극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어요. 운동과 식사, 수면 등 건강한 생활습관을 오래도록 유지할 힘도 생기고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사고의 방법을 바꿔야 합니다. 내 주변을 낯설게 보고, 새롭게 바라보세요. 예를 들어 어떤 물건을 사기 전에 정말 필요한지, 과시를 위해 사는 건 아닌지 돌아보세요. 내 생각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자신의 행동과 변화를 시각화하는 겁니다. 내가 먹은 음식, 걸친 옷, SNS 활동 등을 기록하고 그 뒤에 일어난 내 생각과 행동의 변화를 알아차리세요. 그래야 무엇이 욕심을 부추기는지 알아챌 수 있습니다. 찾아낸 자극원을 덜어내면 쾌락 중독에 억눌려 있던 건강한 활동들, 예를 들어 운동, 독서, 풍경 보기 등에 눈이 갈 겁니다. 그렇게 노화 지연 선순환을 시작하는 겁니다.
📢 젊을 때 불편해야 노년이 편하다
꾸준한 운동과 균형 잡힌 식단, 충분한 수면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챙겨야 한다. 알지만 실천이 쉽지 않다. 정희원 교수는 우리 사회의 편리함을 이유로 꼽았다. 몇 년 전만 해도 10분 거리는 걸어 다녔는데, 요즘은 전동 킥보드를 타고 다닐 수 있다. 노화를 늦추려면 편리함을 버리고 움직여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특히 그는 “운동과 이동을 분리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일부러 운동하려 애쓰지 말고, 걸어 다니라는 얘기다.
운동이 중요하다는 건 알지만, 시간 내는 게 어려워요.
헬스클럽에 가야만 운동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운동할 기회는 많습니다. 택시나 킥보드를 타는 대신 걸으면 되고,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면 됩니다. 많은 사람이 시간을 벌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이용한다고 하지만, 따져보면 오히려 더 시간을 쓸 때가 많습니다. 길은 늘 막히고, 엘리베이터를 부르면 늘 15층에서 내려오죠. 사람의 근골격계는 성능 좋은 ‘교통기관’으로 설계돼 있습니다. 애초에 설계된 보폭과 걷는 속도에 따르면 사람은 1㎞ 가는 데 빠른 걸음으로 10분 이내면 충분합니다. 하루 20㎞를 걷고 뛰어도 문제가 없죠. 그렇다고 걷기만 해선 안 됩니다. 전반적인 이동성을 높이려면 다양한 운동으로 여러 신체 기능을 골고루 강화해야 합니다.
정 교수에 따르면 사람의 몸은 생각보다 걷기에 최적화돼 있다. 운동과 이동성을 분리하지 않고, 평소 몸을 움직이는 활동을 늘려야 한다고 했다.
어떤 운동으로, 어떤 신체 기능을 강화해야 할까요?
고관절과 견관절, 대퇴부 등은 스트레칭으로 관절 가동 범위를 넓혀야 합니다. 스트레칭은 자기 전과 기상 직후에 챙겨주는 것이 좋습니다. 코어 근육이나 둔근을 강화하는 운동도 해야 합니다. 평소 생활에서 코어 근육을 강화하고, 스트레칭을 꾸준히 해서 긴장 없고 자연스러운 자세를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이 밖에 요가와 같은 균형 운동, 근력과 유산소 운동을 각각 해줘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한번에 할 수 있는 운동은 없습니다. 한 가지 운동만 하면 자세가 굳어질 수 있거든요. 각 기능을 높이는 운동을 번갈아가며 해야 합니다. 이와 함께 충분한 수면과 균형 잡힌 영양도 중요하고요.
현대인은 필요 이상으로 영양을 섭취한다는 주장도 있어요. 먹는 걸 줄여야 한다고요.
잘못된 접근 방식입니다. 문제는 단순 당과 정제 곡물입니다. 설탕, 과일 주스, 빵, 파스타 등이 이 두 가지를 이용해 만든 음식에 속해요. 단순 당과 정제 곡물은 혈당을 빠르게 올려요. 그럼 우리 몸은 혈당을 낮추기 위해 인슐린이란 호르몬을 분비하고요. 인슐린이 과도하게 분비되면 에너지가 근육이 아니라 지방과 간에 쌓입니다. 근육에 쌓인 에너지는 사용되지만, 지방과 간에 쌓인 에너지는 비만으로 이어지죠. 비만은 혈당과 혈압 조절에 문제를 일으키고, 노화 체형을 만들고요. 단순 당과 정제 곡물을 피하는 것이 건강한 식사의 기본입니다.
건강한 식사란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요?
혈당 변동성이 크지 않은 식사를 말해요. 흰 쌀밥 대신 잡곡밥을 먹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습니다. 하루 정도 당분이 없고 탄수화물 함량이 낮은 식사를 실험적으로 해봐도 좋습니다. 단, 이런 식사는 장기간해선 안되고 3일 정도 해보면 좋습니다. 그동안 느꼈던 ‘식욕’이 ‘식탐’이었다는 걸 깨닫게 될 겁니다. 이렇게 식욕 중추가 정상화되면 하루 동안 에너지를 섭취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총 에너지 섭취량이 자연스럽게 줄어듭니다. 또 한 가지, 식단과 함께 근육도 단련해야 합니다. 근육은 혈당의 흡수율을 높여줘 혈당 변동성을 완만하게 유지하게 합니다. 평소 활동량이 적고, 근육이 없으면 흡수되는 혈당이 적어 마른 비만이 될 수 있습니다.
건강한 식단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아요. 외식도 많이 하고, 술도 마시게 되고요.
건강한 식단만 고집하기란 쉽지 않아요. 그렇지 않은 식사, 해도 됩니다. 다만 다시 돌아와야 해요. 그러려면 건강한 식사가 습관이 돼야 합니다. 식단 매뉴얼을 만들어 보세요. 예를 들어 평소보다 더 많이 먹은 날은 운동 시간을 늘린다거나 과식한 다음 날은 절식하는 식의 규칙을 만드는 겁니다. 제 경우 햄버거를 좋아했는데, 이런 방식으로 한 달을 조절하니 패스트푸드의 자극에 무던해지더군요. 자극적인 음식을 먹어도 더 강한 자극을 찾지 않게 됐다는 겁니다.
정희원 교수는 자신도 한때 가속 노화의 악순환에 빠졌었다고 말했다. 취미로 호른 연주를 시작했는데, 잘하려고 하다 보니 매일 4시간씩 밤낮없이 연습하며 몸을 혹사하고 있더란다. 그때 떠오른 게 “나에게 중요한 것”이었다. 연주를 잘하기보다 연습하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후 연습 시간은 1시간으로 줄이고 네 가지 기둥(4M)을 챙겼다. 몰입된 상태로 연습할 수 있는 마음 챙김, 회복 수면, 근력 운동, 좋은 식사 말이다. 그랬더니 호른 연주 실력이 더 좋아졌단다. 정 교수는 “우리는 늘 더 좋은 대학, 더 많은 돈, 더 높은 지위 같은 걸 좇아왔는데, 정말 손에 얻었는지 돌아보자”고 말했다. “결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나에게 중요한 것을 찾고, 삶의 여러 요소를 두루 둘러봐야 한다”는 것이다.
자동차가 수렁에 빠졌을 때, 바퀴 하나만 꺼내면 되나요?
네 바퀴가 모두 나와야 하죠.
노화도 그렇습니다.
한두 가지 약을 먹는다고 늦출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삶의 방식 전반을 개선해야 합니다.
노화를 막는 데 요행은 없어요.
바로 지금 움직이세요.
바쁜 당신을 위한 세 줄 요약
① 3040 세대가 부모보다 빨리 늙고 있어요. 이들 세대의 가속 노화 현상를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비만율입니다. 20년 전보다 크게 늘었죠. 기억력저하·만성통증 등 노쇠 증상 환자도 증가했고요. 이대로면 30~40대는 부모 세대보다 더 빨리 요양병원에 가야 할 겁니다.
② 가속 노화는 불균형한 생활 습관에서 비롯됩니다. 쾌락 중독이 만든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악순환을 끊으려면 술이나 SNS 같이 쾌락을 유발하는 자극원을 제거하고, 내게 정말 중요한 것(What matters to me)을 찾아야 합니다.
③ 젊을 때 몸이 불편해야 노년이 편합니다. 운동하세요. 이동과 운동을 분리하지 말고, 걸어다니십시오. 여기에 더해 유산소·근육·코어·균형감 운동을 골고루 하고요. 식사는 단당류와 정제곡물만 피해도 효과가 큽니다.
“서울은 다르다는 ‘믿음’이 있는 것 같아요. 지역에서도 유방암 치료는 비슷하다고 하는데….”
경북 포항에 사는 유방암 환자 이숙경(가명·44)씨는 6일 <한겨레> 인터뷰에서 굳이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까지 와서 치료받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해마다 비서울권 암 환자 10명 중 3명이 ‘서울행’ 여정에 오른다(국민건강보험공단, 진료 인원 기준).
의료계에서는 소아암처럼 의료진이 부족해 서울에서 치료받을 수밖에 없는 암이 있는 반면, 위암·유방암 등 국내에서 빈발하고 치료법이 표준화돼 있는 암은 지역도 치료 수준이 높다고 말한다. 하지만 2021년 서울에서 진료받은 유방암 환자 다섯 중 넷이 비수도권 거주자일 정도로, 서울 쏠림이 심각하다.
비수도권 환자들은 왜 사는 지역에서 치료를 받지 않고 체력 저하와 경제적 부담을 감내하며 서울 병원을 찾을까.
<한겨레>는 그 원인과 대안을 찾기 위해 한국암환자권익협의회의 도움을 받아 지난해 12월15~18일 서울로 온 비수도권(서울·경기·인천 제외 거주자) 암 환자(보호자 대리 응답과 복수 응답 가능) 249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이 가운데 유효 응답자는 188명(이하 응답자)이었으며, 김영애 국립암센터 중앙암생존자통합지지센터 부센터장과 함께 이를 분석했다.
암 환자들이 거주 지역 내 의료기관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다양하지만, 의료진과 의료시설이 부족하고 신뢰도가 낮다는 말로 집약된다.
응답자 중 50%인 94명이 ‘암 관련 의료진이 부족하거나 부족한 것 같아서’, 13.8%인 26명은 ‘최신 의료장비를 이용할 수 없는 환경’ 때문에 지역 의료기관에서 치료받지 않는다고 답했다. 김 부센터장은 “비수도권 의료기관에서 인력 수급이 차질이 없도록 종합적인 대책이 필요한 대목”이라고 설명했다.
지역 필수의료 부족에 홍보 부족까지 더해지면서 암 환자들은 지역 의료진과 병원에 대한 신뢰도가 낮았다. 응답자 56.4%(106명)가 ‘의사의 전문성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서’ 거주 지역 내 의료기관에서 치료받지 않았다고 답했다. 작은 병원 규모(14.8%), 낮은 병원 인지도(14.3%) 역시 신뢰도와 관련된 답변이었다.
거주 지역 병원을 택하지 않은 전국의 암 환자들이 유독 서울로 모이는 가장 큰 이유도 결국 의료진과 병원의 전문성에 대한 신뢰였다. ‘현재 암 치료 받는 서울의 의료기관을 선택한 이유’를 물었더니, 응답자의 66%인 124명이 ‘유명 의사를 비롯한 의사의 전문성’을 꼽았다. ‘높은 병원 인지도’(37.2%), ‘암 전문기관이라서’(26.1%), ‘가족·지인의 추천’(26.1%), ‘최신 의료장비 이용이 가능해서’(17%), ‘큰 병원 규모’(11.7%)가 뒤를 이었다. 유명하고, 전문성 있고, 최신 의료장비로 치료받을 수 있는 큰 병원을 선택한 셈이다.
서울대병원 인근 고시텔에 머물며 치료를 받는 이숙경씨는 “암이라면 무조건 큰 병원 가고 싶은 게 사람들의 마음이고 저도 그렇다. 생명과 직결되니까, 비용이 부담되지만 ‘지방’ 병원보다는 아무래도 서울을 찾게 된다. 그중에서도 ‘빅5’를 찾는 것”이라고 했다. 이씨는 초등학생과 중학생 두 자녀, 직장에 다니는 배우자를 고향에 두고 홀로 서울로 왔다. 전북 익산에서 경기도 일산 국립암센터로 치료를 받으러 온 자궁암 환자 박은숙(63)씨는 “지역에서 치료받을 생각이 있었는데, 아들이 ‘명의’에게 받아야 한다고 했다”고 말했다.
‘크고 유명한 병원·의사’ 선호는 언론 홍보 마케팅의 영향으로도 풀이된다. 김 부센터장은 “수도권 병원이 마케팅 등 방법으로 매스컴에 상대적으로 많이 노출된다. 반면 지역 의료기관들은 서울 대형병원보다 전문성 홍보에 대한 마케팅이 적은 영향도 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지역 암 환자 3명 중 1명 이상은 서울 치료 시 요양병원이나 숙박시설을 이용한다고 답했다. 요양병원 및 협력병원 등 의료기관에 입원한다고 답한 경우는 40명(21.3%), 호텔·단기원룸·셰어하우스, 환자방 등 숙박시설을 이용하는 경우는 29명(15.4%)이었다. 합하면 서울로 오는 환자 중 36.7%가 주거비 추가 지출이 소요되는 병원과 숙박시설에서 지내는 것이다. 자녀·친척·지인의 집에서 지내는 환자가 36.2%였고, 자택 통원치료는 24.5%였다.
서울에 치료를 받으러 온 암 환자의 한달 평균 가구소득은 453만6100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3분기 기준 전국 1인 이상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486만9천원(통계청)인 것을 고려하면, 평균에 조금 못 미친다. 지역별로는 대전·세종·충청 43명(22.9%), 대구·경북 43명(22.9%), 부산·울산·경남 43명(22.9%), 광주·전라 34명(18.1%)이었다. 응답자 90.4%가 실손보험에 가입한 상태였고, 평균 나이는 52.7살이었다.
2. 대형병원 옆 환자방
의료진 없는 지역 암환자들 짧게는 하루, 길게는 수개월 대형병원 인근서 ‘쪽방살이’
‘큰 병 걸리면 서울로 가라.’ 해마다 비수도권에 사는, 국내 사망원인 1위 암 환자의 30%, 소아암 환자는 70%가량이 서울 등 수도권 대형병원으로 향한다.
체력이 약한 환자가 4~5시간씩 걸려 수백㎞를 통원하거나, 아예 병원 옆에 거처를 얻어 서울살이를 시작한다. 2000년대 중반부터 수도권 대형병원 인근에 하나둘씩 환자 숙소가 들어서더니 이제 고시원·고시텔·셰어하우스·요양병원이 밀집한 ‘환자촌’으로 자리잡았다.
<한겨레>는 지난해 11월부터 석달간 ‘빅5’로 불리는 서울 대형병원과 경기도 국립암센터 인근에서 지역 필수의료 공백을 틈타 성업 중인 환자방 실태를 취재했다. 또 지난해 11월부터 석달간 서울에서 치료받는 지역 암 환자와 보호자 46명을 인터뷰하고, 188명을 설문조사했다. 그 결과를 토대로 전문가 10명의 자문을 거쳐 한국의 지역 의료 불평등 실태와 필수의료·의료전달체계 대책을 4회에 걸쳐 짚어본다. 편집자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인근 고시텔, 침대 머리 방향의 책 두권 크기 창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자려고 누우니 옆방 재채기 소리가 들렸다.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 소리를 줄였다. 6㎡ 남짓 공간에 화장실까지 욱여넣은 방, 침대에 이불을 반듯하게 펼 수조차 없이 비좁았다. 주방과 세탁기도 10명 안팎이 나눠 쓰는 이 방의 하루 숙박비는 4만원. 서울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온 지역 암 환자와 보호자가 많이 묵는 이른바 ‘환자방’이다.
전남 완도 노화도 주민 고수동(76)씨는 지난해 5월 식도암 진단을 받은 뒤 삼성서울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려고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이때부터 보호자인 아들 고복주(49)씨와 함께 이 고시텔과 원룸 등 병원 인근 환자방 2~3곳을 옮겨다니며 지내고 있다. 최근 몇년 새 이 일대에도 전문 의료서비스와 병실, 항암식을 제공하는 암 요양병원이 진화된 환자방 형태로 급증하고 있지만, 고가의 민간 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거나 보호자를 동반한 수동씨 같은 환자에게는 진입장벽이 높다.
의료진이 없어서든 서울 유명 병원을 선호해서든 지역 환자가 서울에서 치료받으면서 발생하는 추가 비용은 오롯이 개인의 몫이다. 정부는 저소득층 등 일부 중증질환자에게 의료비를 지원하는 데 그칠 뿐, 취약한 지역 공공의료로 개인이 떠안게 되는 ‘불평등 비용’까지 돌보진 않는다.
지역의료 ‘불평등 비용’ 개인이 떠안아
서울과 경기도 대형병원 인근은 지역에서 치료를 받으러 올라온 환자들이 머무는 거대한 대기실이다. 주로 암 환자가 많은데, 이들은 치료 방법에 따라 짧게는 하루, 길게는 수개월씩 숙박할 곳을 구해야 한다. 대형병원이 통상 중환자, 수술환자, 응급환자에게만 병실을 내주는 탓이다.
자연스레 대형병원 주변에 숙소·원룸이 생겼다. 경기도 고양시 국립암센터 인근에서 환자방을 운영하는 권아무개(77)씨는 “암 환자들이 항암치료를 하려면 아침 8시까지 가서 피검사도 하고 치료도 받아야 하니까, 숙소들이 생겼다”며 “전국 각지에서 환자들이 온다”고 말했다. 대형병원 앞 숙소는 20여년 전부터 눈에 띄게 늘었다고 한다.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인근에서 2대째 가업으로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ㅇ부동산 대표는 “2000년대 중반부터 환자들이 서울에 몰리면서 숙소를 구하는 수요가 생겼다. 임대인들이 그런 트렌드를 파악하고 환자들에게 방을 빌려주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환자방’으로 통칭되는 환자·보호자 숙소들은 서울 ‘빅5’와 경기도 국립암센터를 중심으로 형성됐다. 특히 삼성서울병원과 서울아산병원 근방에는 ○○고시텔, ○○레지던스, ○○하우스 등 간판을 내걸고 환자방으로 운영되는 숙소들이 많다. <한겨레> 현장 취재 결과, 반경 1㎞ 기준으로 삼성서울병원은 최소 4곳, 서울아산병원은 최소 5곳이 있었다. 국립암센터 인근에서 영업하는 환자방의 경우, ‘환자방’이란 간판으로 최소 6곳이 영업 중이었다. 한 숙소당 적게는 3~4개에서 많게는 30개까지 방을 운영한다.
간판 없이 환자방으로 운영되는 곳도 많다. 지난 2일 기준 공유숙박 플랫폼을 보면 ‘병원과 가장 가까운 숙소’라며 환자들을 상대로 홍보한다. 이런 집은 2일 기준 서울아산병원 인근 10곳이 넘고, 삼성서울병원 주변에도 20곳 이상이다. 단기로 숙소를 구하는 이들은 서울 송파구 방이동(서울아산병원), 종로구 혜화동(서울대병원), 서초구 서초동과 양재동(삼성서울병원·서울성모병원), 서대문구 신촌동(신촌세브란스병원)의 호텔·모텔을 이용한다.
장기 치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와 보호자들은 병원 주변 원룸에도 머문다. ㅇ부동산 대표는 “삼성서울병원 인근에 원룸·투룸이 100개 정도 있는데, 이 중 80%가 환자”라고 전했다. 그는 “어르신 환자분이 오시면 ‘저렴한 방’을 주로 문의하고, 환자 자녀들은 ‘편한 방’을 찾는다”고 덧붙였다.
고시텔·원룸은 하루 3만원~월 130만원
대형병원 주변 숙소는 비용에 따른 위계가 명확하다. 하루 3만~5만원짜리 고시텔과 한달 500만원이 넘는 암 요양병원은 주거 공간의 넓이와 편의시설은 물론 의료서비스에 이르기까지 정확히 지불 가격만큼의 편차를 나타낸다.
<한겨레>가 국립암센터 인근 환자방 간판을 내건 5곳을 취재해보니, 평균 하루 3만원, 한달 기준 60만~70만원 선에서 5~10㎡ 방을 구할 수 있었다. 서울아산병원과 삼성서울병원 주변은 같은 1인실이더라도 하루 최소 4만원, 한달 60만~90만원 안팎이었다.
고시텔보다 한 단계 위인 원룸은 더 넓고 요리·세탁을 개별적으로 할 수 있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다. 삼성서울병원과 서울아산병원 인근 원룸은 한달 80만원에서 130만원 수준이다. 단기계약은 공실 분담금이 붙어 주변 시세보다 10~15% 더 비싸게 계약하기도 한다.
식도암 환자 고수동씨 가족은 애초 삼성서울병원 인근 하루 4만원꼴 고시텔에서 머물렀으나, 서울살이가 길어지면서 지난해 8월부터 석달간 원룸을 계약했다. 한달 110만원, 관리비 10만원씩을 방값으로 냈다. “서울 생활 4~5개월에 의료비 제외하고 총 2천만원 정도 든 것 같아요. 숙박비만 500만원이 넘게 들었고요. 환자와 보호자 식비만 해도 한달 100만원이 넘고, 생활비, 교통비도 들고요.”(고수동씨 아들 고복주씨)
월 수백만~1천만원 요양병원도
최근에는 수도권 대형병원에서 치료받는 암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암 요양병원이 늘고 있다. 의료진이 면역 치료 등 건강관리를 해주고, 심신 안정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도 마련돼 있다. 대형병원에 진료나 치료를 갈 때는 픽업 서비스까지 제공해, 보험 등 여력이 있는 암 환자에겐 최우선적인 고려 대상이다.
요양병원 성업은 통계로도 나타난다. ‘빅5’가 있는 서울 송파구(서울아산병원), 강남구(삼성서울병원), 서초구(서울성모병원), 서대문구(신촌세브란스병원), 종로구(서울대병원)에서 최근 10년(2013~2022년)간 요양병원 21곳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한방병원 22곳이 생겼다. 2003~2012년 사이 이 5개 구에 설립된 요양병원이 8곳, 한방병원은 2곳인 것을 고려하면 큰 변화다.
아픈 몸을 이끌고 지역에서 올라온 암 환자에게 요양병원은 최선의 쉼터처럼 보이지만, 문제는 비용인 경우가 많다. 보장성이 높은 암 보험에 가입한 환자들은 보험사에 요양병원 비용을 청구할 수 있지만, 보험 보장이 덜 되거나 아예 보험이 없는 이들에겐 어려운 선택지다. 경남 거창군에 거주하는 자궁경부암 환자 김귀선(67)씨는 서울 대형병원 인근 요양병원에서 4개월 반을 지내며 총 2400만원을 썼다. 입원료 보장 보험이 없어, 면역치료 등 비급여 치료를 포함해 요양병원비로만 월 300만~700만원이 들었다. 한 수도권 요양병원장은 “서울 강남권 요양병원은 임대료가 비싸 환자들에게 비급여 의료서비스를 권장하는 면이 있다”고 귀띔했다. 이들 중 일부는 호텔 수준의 병실과 맞춤 항암식을 내주는 초특급 요양병원으로, 1인실 기준 월 1천만원인 곳도 있다.
요양병원이 아닌 원룸과 고시텔이라도 묵을 곳을 찾았다면 그나마 다행인 걸까. 지난달 4일 자정 무렵, ‘빅5’ 중 한곳 병원 로비에서는 부산에서 온 소아 희귀질환 환자의 할머니인 곽아무개(74)씨가 대기실 의자 위에서 잘 채비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주변 숙소 멀지요? 나는 처음 와보고, 그런 거 찾지도 못해.” 딸이 손녀와 함께 입원했고, 본인은 이들을 돕다가 로비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는 그다. 패딩 점퍼를 이불 삼아 누운 곽씨는 그날 새벽 1시가 넘어서까지 몸을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3.
“포항엔 소아암 의사가 없어요”…희원이의 640㎞ 치료길
지난달 5일 아침 6시 반, 열두살 희원이가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낯선 천장, 낯선 냄새. 희원이는 “세정제와 소독약 냄새가 코로 들어오면 기분이 가라앉는다”고 했다. 경북 포항에 사는 희원이와 엄마 김소영(가명·43)씨가 잠을 깬 곳은 서울 강동구 천호동의 소아암 환자 셰어하우스다. 12㎡ 남짓 방 한칸이 모자의 서울 쉼터다. 방이 세개인 이곳에는 다른 두 환자 가족도 함께 묵는다. 혹여 옆방 투숙자가 깰세라 희원이와 엄마는 조용히 나설 채비를 한다. 마음은 급하다. 택시로 5㎞만 가면 서울아산병원인데, 교통체증으로 30분 넘게 걸린 적도 있다.
또래들이 이제 막 일어나 등교를 준비할 아침 7시 반. 희원이는 병원에 도착했다. 지난해 7월 진단받은 소아암, 급성림프모구백혈병 치료를 위해서다. 백혈병 세포가 혈액을 통해 몸에 퍼지고 있다. “작년 7월부터 다리에 멍이 들고 통증이 심했어요. 체중도 갑자기 6㎏ 줄었고요. 감기가 2주간 안 떨어지더라고요. 처음엔 성장통인 줄 알았는데, 검사해보니 백혈구 수치가 높더라고요.” 한때 야구선수를 꿈꿨던 희원이와 엄마의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던 순간이다.
지역 소아암 환자 70% 서울로
한해 신규 발생하는 소아암 환자는 약 1천여명, 그중 지역에 거주하는 소아암 환자의 70%(건강보험공단, 2017년)가 그렇듯 희원이도 진단 직후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2022년 대한소아혈액종양학회 통계를 보면, 포항에는 소아혈액종양 전문의가 없다. 비수도권 소아혈액 전문의는 대구(5명)·경남(6명)·부산(3명)·전남(3명)을 제외하곤 시·도별로 많아야 2명 수준이다. 서울(31명)과 경기도(10명)에 몰려 있다지만, 최근 수도권 종합병원 4곳도 소아청소년과 전문의가 부족해 응급 진료를 중단했다.
김혜리 서울아산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소아암은 항암 치료뿐 아니라 방사선, 수술도 굉장히 중요한데 관련 전문의들이 지방에는 거의 없다. 결국 서울이나 경기도로 온다”고 말했다. 김 교수가 만난 한 지역 소아암 환자의 어머니는 “지역에 의료진이 오게 해달라”고 늘 기도한다고 했다. 전문의가 부족한 지역에 사는 소아암 환자 대부분은 일단 서울로 향한다. 당장 문제는 주거다. 복지재단이나 기업이 수도권에 4~5곳 정도 운영하는 저렴한 셰어하우스에 묵게 되면 그나마 사정이 낫지만, 수용 인원이 적다. 아이와 부모는 대형병원 인근에서 환자를 대상으로 운영하는 고시텔, 레지던스, 원룸에 주로 머문다. ‘환자방’으로도 불리는 이들 숙소의 한달 숙박비는 최소 60만원에서 많게는 200만원에 이른다.
왕복 640㎞ 치료길에 ‘풀썩’
희원이도 1주일에 4일 집중 항암 치료를 받는 시기엔 셰어하우스에 묵는다. 희원이는 항암제 계열 약물을 투여하는데, 오전에 병원 혈액검사에서 ‘적합’ 판정을 받아야 치료를 시작할 수 있다. ‘부적합’ 판정을 받은 날엔 치료 일정이 밀린다. 혈액검사가 끝나면 각종 약물 투여, 진료 등으로 병원에서 하루 6~12시간을 보낸다. 이 때문에 많게는 한달에 16일, 적어도 4~5일은 서울에 머물러야 한다.
나머지 기간엔 포항-서울 통원치료를 받기도 한다. 걷기조차 힘든 희원이에게 한달에 다섯번 이상 왕복 640㎞ 여정이 이어진다. 지난해 12월9일 취재진은 희원이가 서울에 치료를 받으러 가는 길에 동행했다. 아침 6시 반에 집에서 출발해 포항역-수서역-병원까지 4시간, 왕복 8시간이 넘게 걸렸다. 김씨는 약과 생필품이 든 무거운 여행용 가방과 함께 희원이를 챙겼다. 이날 희원이는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에서 내리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부축을 받고 일어난 희원이가 불쑥 전날 밤 꿈 이야기를 꺼냈다. “운동하는 꿈을 꾸다가 깼어. 꿈에서라도 좋았어.”
지역 암 환자, 가족·친구 ‘이산’ 이중고
얇고 듬성듬성한 머리카락 위에 모자를 덮어쓴 희원이는 ‘포항 집’과 ‘가족’, ‘학교 친구들’ 이야기를 유독 자주 꺼냈다. “동생은 특히 엄마를 좋아할 나이잖아요.” 희원이는 포항에 남겨진 막냇동생을 걱정했다. 여섯살 막내는 소아 희귀질환을, 열네살 첫째는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다. 아빠와 외할머니가 돌봐주지만, 남은 아이들에게 엄마의 공백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제가 희원이와 처음 서울로 갔을 때, 막내가 2~3일은 울었다고 들었어요. 그 뒤에도 ‘엄마 가지 마’ 하고 울더라고요.”(김씨)
그럼에도 김씨는 차라리 서울에 있을 때 마음이 편하다. 백혈병은 감염에 취약해 가족들도 마냥 편하게 함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말에는 희원이 열이 섭씨 38도까지 솟아 밤에 포항에서 서울의 응급실로 내달렸다. 최근에는 코로나19에 감염됐다. 그때마다 김씨는 마음을 졸였다. “응급 상황이 언제 벌어질지 모르니까, 긴장돼서 제 몸이 힘들더라고요. 저는 포항에서 나고 자랐는데, 여기 사는 게 불편하고 아쉬운 건 하나도 없었어요. 그런데 아이가 아프니까, ‘지방’에 산다는 이유로 서울 사람들은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을 많이 겪었어요.” 앞서 김씨는 첫째와 막내를 데리고도 자주 서울 큰 병원을 찾아야 했다.
희원이네처럼 암 환자가 있는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지낼 각오를 해야 한다. 지난해 11월9일 서울아산병원에서 만난 형준(가명·4)이네도 그랬다. 충북 청주에 사는 형준이는 지난해 9월 소아암을 진단받은 뒤 엄마 홍이현(가명·37)씨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모자는 병원 인근에 원룸을 구해 머물고 있다. 청주에서 직장을 다니는 아빠는 주말마다 형준이를 보러 온다. 두살배기 둘째는 서울 인근에 사는 외할머니가 돌보고 있다. 홍씨는 “오롯이 형준이만 신경 쓰기에도 벅차다”며 “남은 가족 걱정은 접어둘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겨레>가 만난 대부분의 암 환자들이 가족·친구와 떨어져 타향살이를 하면서 우울감과 사회적 단절을 겪고 있었다. 울산에 살다 2021년 소아암을 진단받고 1년간 서울에서 치료를 받은 지혁(가명·14)이는 곧 복학을 앞뒀지만 기쁘지 않다. 초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은 이제 만나도 인사를 하지 않고 지나쳤다. 타지에서 보낸 1년은 사춘기 아이들이 서먹해질 법한 기간이다. 지혁이 엄마는 내성적인 아들이 위축될까봐 걱정스럽다. “위로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서울로 떠난 뒤 점점 잊혀지니까 연락이 끊겼던 거죠. 지혁이도 서운할 거예요.” 지혁이는 요즘 엄마에게 이야기한다. “친구들 다 필요 없어.”
중증 질환일수록 서울-지역 의료격차
의사와 병원을 찾아 서울로 떠밀려 올라오는 건 소아암 환자뿐만이 아니다. 암을 비롯해 중증 질환일수록 지역 의료자원이 부족하다. 정춘숙 의원실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지난해 기준 방사선종양학과 전문의는 서울 123명, 경기도 61명인 반면, 광주·울산·세종·충북·충남·전남·전북·경북·제주는 10명 이내였다.
중증 질환을 주로 치료하는 종합병원급 이상 의료기관에서 근무하는 심장혈관 흉부외과(폐·식도·심장 등 관련) 전문의의 경우, 전체 198명 중 서울 38명, 경기도 42명에 견줘 대구(9명)·대전(7명)·울산(4명)·세종(1명)·강원(7명)·충북(6명)·충남(5명)·전북(8명)·전남(8명)·제주(6명)는 10명 미만이었다. 지역 암 환자들이 서울 암 환자보다 더 무거운 투병 부담을 떠안아야 하는 ‘지역 의료격차’의 현주소다.
4.
수서행 SRT는 암환자를 싣고 달린다 서울로 가는 지역 암환자 ‘마지막 기회’도 서울에…
‘큰 병 걸리면 서울로 가라.’ 해마다 비수도권에 사는, 국내 사망원인 1위 암 환자의 30%, 소아암 환자는 70%가량이 서울 등 수도권 대형병원으로 향한다. 체력이 약한 환자가 4~5시간씩 걸려 수백㎞를 통원하거나, 아예 병원 옆에 거처를 얻어 서울살이를 시작한다. 2000년대 중반부터 수도권 대형병원 인근에 하나둘씩 환자 숙소가 들어서더니 이제 고시원·고시텔·셰어하우스·요양병원이 밀집한 ‘환자촌’으로 자리잡았다.
지난달 30일 오전 10시께, 영하의 날씨에도 삼성서울병원 셔틀버스 대기줄이 50m 이상 길게 늘어섰다. 배차간격은 8분. 셔틀버스는 시간당 300명의 환자와 보호자를 실어날랐다. 이렇게 취재진이 방문한 수서역 일대는 서울로 먼 거리를 통원하는 중증 환자와 보호자의 정거장이었다. 대다수가 지역에서 에스알티(SRT) 고속열차를 타고 온 중증 환자다.
빅5 병원과 가깝고 셔틀 운행
수서역이 암 환자 등 중증 환자들의 거점역이 된 것은 서울의 주요 대형 병원과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이다. ‘빅5’ 중 삼성서울병원(서울 강남구, 약 2㎞), 서울아산병원(서울 송파구, 8㎞), 서울성모병원(서울 서초구, 14㎞)이 멀지 않다. 강남세브란스병원(서울 강남구, 6㎞), 분당서울대병원(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20㎞)도 접근성이 좋다. 특히 삼성서울병원과 강남세브란스병원은 수서역에서 병원까지 이동하는 셔틀버스를 운행한다. 셔틀버스를 기다리던 심장질환 관련 환자 보호자 김아무개(52)씨는 “사는 지역인 충북 청주보다 서울에서 치료를 받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큰 병원에 가기로 했다”며 “어려운 치료인데, 지역은 시스템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체력소모·교통비 만만찮지만…“지역 의료시스템 부족”
서울로 통원치료를 다니는 환자와 보호자는 먼 여정 탓에 체력이 부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경북 의성에 사는 림프종 환자 김진희(가명·66)씨는 자택에서 국립암센터(경기도 고양시)까지 왕복 10시간을 오간다. 이 여정은 한달에 두번 이상 반복된다. 항암치료 후에는 다리 저림이 심해져 힘겹다. “지금 다리 밑으로는 완전히 내 살이 아닌 것처럼 저려요. 겨울에도 그렇고, 여름에 기차에서 에어컨을 틀 때요, 발이 저리고 시리니까 양말 안에다 손난로를 넣어서 오고 그랬어요.” 먼 거리를 와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돌아간 적도 있다. 치료 전에 하는 혈액검사에서 당일 항암치료가 부적합하다는 수치가 나와서다.
임신 7개월차인 염혜영(가명·35)씨는 소아암 환자인 딸 서지우(가명·3)를 데리고 광주광역시에서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까지 일주일에 2~3번, 한달 기준 8~10번을 왕복한다. 지역 병원에 의료진이 없었고, 서울에 머물기는 여의치 않았다. 지난해 11월 만난 혜영씨는 “출산이 가까워지면 제가 지우를 데리고 가지 못하니 막막하고 걱정이 된다”고 했다.
교통비 부담도 상당하다. 혜영씨가 서울로 지우를 데리고 갈 때마다 왕복 20만원이 넘게 든다. 기차비와 역에서 내려서 타는 택시비를 합친 금액이다. 한달 서울까지 왕복한 기차, 택시비를 합하면 100만원에 이른다. 자가용을 이용해 서울로 가더라도 기름값으로 한달에 수십만원이 든다.
그럼에도 환자들의 체력과 비용을 소진하는 ‘수도권 쏠림 현상’은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를 보면, 수도권(서울·경기·인천) 소재 종합병원 이상급 의료기관에서 진료받은 비수도권 암 환자들은 2012년 19만4563명에서 2021년 29만1053명으로 50% 늘었다.
●자문 주신 분들(가나다순)
강정훈 국립경상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 권정혜 세종충남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 김동은 계명대 동산병원 이비인후과 교수 김성주 한국암환자권익협의회 대표 김세현 분당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 김영애 국립암센터 중앙암생존자통합지지센터 부센터장 김윤 서울대 의료관리학 교수 김혜리 서울아산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윤영호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임정수 국립암센터 국가암사업관리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