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음악이 만든 불후의 영화들
<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2022-11-17 12:00 >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보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음악이 흐르지 않으면 영화가 정녕 영화가 될 수 있을까.
이 세상 모든 영화감독의 목표는 하나다. 작품성과 대중성,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영화를 찍고 싶다. 어떤 영화가 예술성과 흥행성에서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으려면 어떤 필요충분조건이 필요할까.
무엇보다 먼저 시나리오가 탄탄해야 한다. 영화는 텍스트의 기초 위에 세워지는 이미지의 구조물이다. 감독이 시나리오를 직접 쓰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시나리오 작가가 따로 있다. 감독은 시나리오를 읽고 영화로 찍을지 말지를 판단한다.
그다음이 감독의 연출력이다. 아무리 시나리오가 좋아도 감독의 연출이 뒷받침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여기서 캐스팅이 중요해진다. 어떤 배우가 캐릭터를 잘 소화할 것인가. 감독의 연출력과 배우의 연기력이 조화를 이뤄야만 공감을 끌어낼 수 있다.
이걸로 끝인가. 아니다. 음악이 받쳐주어야 한다. '시작 5분'이나 영화의 결정적인 장면에서 어떤 음악을 어떤 길이로 배치하느냐. 음악감독이 필요한 이유다. 인간의 뇌(腦)는 오감각 중 청각에 가장 즉각적이고 예민하게 반응한다. 말보다 음악이 먼저다.
대사가 없는 무성영화 시대에도 영화음악이 있었다.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를 떠올려 보라. 음악 없는 장면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이 흐른다. 찰리 채플린은 대부분 직접 작곡한 음악을 영화에 사용했다. 사실, 무성(無聲)영화라는 말은 틀린 용어다. 무언(無言)영화라고 해야 맞다.
영화음악에는 두 종류가 있다. 기존의 음악을 적재적소에 삽입하는 경우와 처음부터 영화의 주제에 맞는 음악을 별도로 작곡해 영화에 붙이는 경우다. 후자를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OST)이라고 한다.
어떤 영화는 제목만 대면 영화음악이 자동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다. 내 경우는 '남과 여' '시네마 천국' '죠스'.
클로드 를로슈 감독의 '남과 여'(Un Homme et une Femme). '다다다 다다다다다 다다다다다~'로 시작하는 흑백영화. 프란시스 레이의 OST다. 프랑스 누벨 바그의 기수 클로드 를로슈. 1966년에 나온 '남과 여'의 여운을 잊지 못하는 중장년이 많다.
프란시스 레이와 동시대에 활동한 음악가 엔니오 모리코네. 그가 사망했을 때 한 신문은 발자취 기사 제목을 이렇게 뽑았다. '엔니오 모리코네 타계…시네마 천국으로'
'시네마 천국'의 감독 이름은 몰라도 OST를 작곡한 엔니오 모리코네는 기억한다. '가브리엘 오보에' '황야의 무법자'도 대단하지만 '시네마 천국'의 감동과 여운을 따라가지 못한다.
극장 영사실의 천진난만한 꼬마 토토와 첫사랑의 애틋함을 뒤로한 채 고향을 떠나야 했던 청년 토토의 심리가 OST '시네마 천국'에 녹아 있다. 모리코네가 타계하자 어떤 신문은 '내 인생의 시네마천국'이라는 제목으로 각계 인사 10인의 글을 실었다. 이 영화가 대중에게 얼마나 넓고 깊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미뤄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미국의 영화음악가 존 윌리엄스도 빼놓을 수 없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죠스'. 식인상어의 출현으로 공포의 해변이 되어버린 뉴잉글랜드 애미티 해수욕장. 식인상어가 등장할 때마다 모골이 송연한 것은 윌리엄스의 음악 때문이다.
극장의 대형 스피커에서 그 음악이 나올 때마다 관객의 심장은 쪼그라들었다. 알려진 대로 존 윌리엄스는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교향곡' 4악장의 첫 소절에서 따왔다. 드보르자크는 신대륙 미국의 역동성으로 표현했지만 윌리엄스는 공포의 크레센도를 창조해냈다. 여기까지는 생각나는 대로 열거해본 유명 OST다.
1967년 영화 '엘비라 마디간'이 성공한 이유
서커스단의 곡예사와 탈영한 기병 장교의 비극적 사랑을 다룬 영화 '엘비라 마디간'. 1889년 덴마크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 러브스토리는 문학, 음악 등 문화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영화로도 1943년, 1967년, 1990년 세 번이나 만들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1967년 영화만을 기억할 뿐이다.
무엇이 영화의 운명을 바꿔놓았을까.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음악 선곡이었다. 헌병들의 추격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가운데 식스틴 스패리와 엘비라 마디간이 봄꽃이 만발한 들판으로 생의 마지막 소풍을 나간다. 마디간이 들꽃을 꺾고 나비를 쫓으며 해맑게 웃는다. 이 세상에 사랑하는 남녀의 웃음만큼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 그때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 21번이 잔잔하게 흐른다. 사무치도록 아름답다.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이 부부일 때 찍은 영화가 '아이즈 와이드 셧'(Eyes Wide Shut). 이 영화의 첫 장면은 파티에 가는 여주인공이 드레스룸에서 옷을 갈아입는 모습이다. 이때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2번'이 나온다. 바비 인형 같은 니콜 키드먼의 비현실적인 나신(裸身)이 드러난다.
'왈츠 2번'은 중간에 한 번, 마지막 부분에 한 번 해서 모두 세 번 나온다. 클래식 마니아가 아닌 일반 대중에게 쇼스타코비치를 알린 영화다. 이병헌·이은주가 주연한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의 첫 장면에서도 '왈츠 2번'이 등장한다. '왈츠 2번'을 스마트폰 수신 링톤으로 하는 사람도 꽤 있을 정도다.
https://youtu.be/Ty_Ez5Berik
밀로쉬 포르만 감독의 영화 '아마데우스'. 자칫 진부하기 쉬운 모차르트 이야기를 경쟁자였던 살리에리의 관점으로 접근한 영화다. 이 영화가 시작부터 끝까지 극적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첫 장면에서 교향곡 25번을 선택한 덕분이다. 교향곡 25번은 초두효과(初頭效果)처럼 관객을 끝까지 사로잡는다. 모차르트 음악을 잘 몰랐던 사람들도 교향곡 25번에 이끌려 클래식 음악에 입문하게 된 경우도 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아마데우스'처럼 영화의 도입부에 클래식 음악을 사용해 영화의 주제를 전체적으로 암시한 영화로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지옥의 묵시록'이 대표적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는 클래식 음악이 두 곡 흐른다. 영화 초반부 유인원들이 죽음 짐승의 뼈를 가지고 놀다가 뼈가 무기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 장면이 나온다. 유레카(eureka)다.
수렵 인간의 탄생! 그 순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마치 천지창조의 순간처럼 터져 나온다. 극과 음악의 완벽한 합일(合一).
우주선 디스커버리호와 푸른 지구를 배경으로 비행할 때 요한 슈트라우스의 '푸른 도나우'가 나온다. 이 장면처럼 '푸른 도나우'가 서정적이면서 장엄하게 다가온 적이 또 있던가. 우리는 우주를 강물에 비유해 은하수(銀河水)라고 말한다. '푸른 도나우'로 인해 디스커버리호의 탐사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항해가 되었다.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 조셉 콘라드의 소설 '하트 오브 다크니스(Heart of Darkness)'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처음과 끝을 통하게 하는 수미상응(首尾相應). 영화든 소설이든 수미상응만 되면 작품의 완성도는 높아진다. '지옥의 묵시록'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헬기 편대가 베트콩 마을을 공습하는 장면이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제2곡 '발키리의 비행'이 터져 나온다. '발키리의 비행'은 바그너의 작품 중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함께 영화에 자주 차용된다.
우리가 장 르노·나탈리 포트먼이 주연한 영화 '레옹'을 보고 또 보고 싶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영화에 사용된 '셰이프 오브 하트'(Shape of My Heart)가 8할은 차지한다. 영국 가수 스팅이 발표한 1993년 노래. 고독한 킬러의 사랑과 스팅의 음색(音色)이 빚어낸 천상의 앙상블이다.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도 자주 영화음악에 애용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에 보면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가 여러 번 등장한다. 그것도 딱 한 소절씩만. 고도의 절제로 긴 여운을 남기며 영화에 대한 긴장을 유지시킨다.
실제 연주 활동을 하는 뮤지션들은 어떤 영화음악을 최고로 평가할까. 플루티스트이자 공연기획자인 박태환 음악감독은 "작곡가로는 '스타워즈' OST를 작곡한 존 윌리엄스를 꼽는다"면서 "영화 '타이타닉'에서 배가 침몰하는 가운데 바이올린 밴드가 연주한 음악을 최고의 영화음악이라고 본다"고 말한다. 피아니스트 이혜은씨는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 쓰인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과 '시네마 천국'의 주제가가 가장 강렬하게 각인된 영화음악"이라고 평가했다.
1970년대 후반의 서울을 배경으로 영화를 제작한다고 하자. 그 시대의 분위기를 소환해 관객에게 1970년대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하는 방법은 어떤 게 있을까.
안방 문갑 위에 골드스타(Gold Star) TV를 놓고, 거실에 괘종시계를 세워놓고, 자녀 방에 '별들의 고향' 영화 포스터를 붙여 놓으면 그만일까.
그런 것들은 소품에 지나지 않는다. 관객을 단숨에 그 시대로 돌아가게 하는 장치는 딱 하나, 음악이다. 영화의 주인공이 청춘들이라면 그들의 가슴에 아로새겨진 음악을 선곡하면 된다.
주인공이 깊은 밤, 라디오로 '황인용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듣고 있다. 그때 황인용 DJ가 산울림의 '나 어떡해'를 틀어준다. 주인공이 '나 어떡해, 너 갑자기 가버리면~'이라고 흥얼거린다. 이렇게 되면 1970년대로의 회귀(回歸)가 완성된다. 실제로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여러 영화가 '나 어떡해'를 사용했다. 이게 음악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