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과잉의 시대, 문학과 책의 쓸모

 

 

< 아시아경제, 정지우 문화평론가, 2023.03.16  >

 

 


우리 시대는 ‘눈앞의 것’만 보게 하고, 장기적인 삶에 관해서는 실명하게 만든다. 각종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유튜브 등 미디어에는 매일 쫓아가야 할 것들이 넘쳐난다. 남들은 다 가는데 나만 못 간 것 같은 각종 ‘핫플’들, 남들은 다 가졌는데 나만 없는 온갖 아이템이나 굿즈·명품, 남들은 다 봤는데 나만 못 본 것 같은 드라마나 영화, 남들은 다 아는데 나만 모르는 이슈들이 매일의 삶을 채우고 있다.


그 눈앞의 것들은 대부분 소비사회의 현상이고, 누군가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삶의 장기적인 전망이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대신, 그런 것들을 실시간으로, 초 단위로 쫓으면 쫓을수록, 그 모든 관심은 누군가의 ‘돈’이 된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삶의 장기적인 전망, 삶의 의미, 나만의 가치라는 것을 지니고 그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독서’가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는 보이는 것의 과잉에 빠져 있다. 하루종일 스마트폰을 통해 보는 이미지들의 컷 수나 장 수는 셀 수 없을 지경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하루종일 무언가를 쳐다보느라 눈의 아픔을 호소할 정도다. 그런데 삶의 미래와 의미를 응시하려면 눈을 감아야 한다.

 


특히, 문학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본다는 점에서 그런 보이지 않는 삶을 내 안에 키워내는 능력을 준다. 마음으로 삶을 보는 법을 배우고, 삶을 총체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된다. 타인을 볼 때도 그 사람의 외면만 보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심리나 내면, 마음을 보는 법을 배우게 한다. 문학은 우리가 장면 하나에서부터 그 인물, 그 인생까지 마음으로 상상해서만 볼 수 있기 때문에, 바로 그 보이지 않는 것과 계속 접촉하게 하기 때문에, 모든 ‘보이는 것’과 싸울 힘을 길러준다.


이미지 과잉의 시대를 건너는 방법은, 그 과잉된 이미지 반대편의 무언가를 키우는 것이다. 물을 막으려면 흙으로 둑을 쌓아 올려야 하듯, 그 무언가와 싸우려면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구축해야 한다. 외적인 이미지들과 싸우려면 내적인 이미지들을 쌓아야 한다. 내적인 이미지에 대한 시력을 회복하여, 자기 삶의 중심을 지키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생을 장기적으로 보는 안목은 너무 중요하다. 사실상 삶의 거의 모든 것은 장기적으로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사랑은 눈앞의 사람에 유혹당하는 것부터 시작하지만, 깊은 애정은 결국 오랜 시간, 추억, 대화,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삶의 방향 같은 것들이 어우러지며 만들어진다. 거의 모든 성취, 예술에서나 사회에서의 성취는 긴 시간에 대한 신뢰, 노력, 꾸준함으로 달성된다.



내가 매일 책을 읽는 건 그냥 책이 좋아서도 있지만, 책을 읽을 때마다 내가 이 눈앞의 현란한 세계에서 벗어나, 더 깊고 넓은 삶에 들어간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 내적인 세계에서, 나는 눈앞의 것들로부터 살짝 벗어나 더 기나긴 삶에 대한 관점을 가진다고 느낀다. 그것이 내 삶을 지키게 하고, 내 중심을 갖게 해준다고 느낀다. 그렇게 내 안의, 내 삶을 위한 힘을 길러주는 것이 곧 문학의 쓸모이자 책의 쓸모이고, 우리 시대를 건너는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혼자 지낼 수 있는 능력,  ‘자기 길을 가는 침묵’에 눈 떠야 
 

진정한 자신을 돌아보고 선택과 집중도 가능… 자신에 대한 이해→자기 생각·의견 축적

 

 

 

< 월간중앙 이코노미스트, 서광원, 1475호 (2019.03.18) >

 

 


혼자 사는 사람들이 밤 늦게 집에 들어오면 곧바로 하는 일이 있다. TV나 음악을 튼다. 불 꺼져 있는 게 싫다며 아예 불을 켜 두고 나가기도 한다. 다들 그럴 만한 이유를 대지만 바탕에 있는 이유는 하나다. 적막한 분위기, 혼자 있는 느낌이 싫어서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순수하게 좋아하는 이들도 있지만 ‘같이 사는 삶’을 원해서 그러는 이들도 많다. 혼자 살고 싶어서 독립한 이들도 그렇다.

밤마다 술집이나 클럽을 순회하듯 하는 이들이 왜 그러는지 관찰한 연구가 있다. 당사자들은 하나같이 “술을 좋아한다”거나 “춤추는 게 즐겁다”고 했지만 마음 저변에는 누군가와 같이 있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었다.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자신이 외롭다고 느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두 배나 많은 초콜릿 쿠키를 먹었다. 알다시피 초콜릿 쿠키는 비만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이들의 뇌를 살펴 보니 외로움이 쿠키의 맛을 더 좋게 느끼도록 하고 있었다. 심지어 맛있다고 느끼지 못했을 때에도 외롭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보다 더 먹었다. 외로움이라는 고통을 고지방 음식을 먹는 즐거움으로 달래고 있었다.

 

 

협력이 절실했던 원시 인류


우리에게는 이렇듯 혼자 있지 않으려는 강한 성향이 있다. 이런 성향이 얼마나 강한지, 혼자 있음을 처벌 수단으로 사용할 정도다. 이른바 ‘왕따’나 교도소에서의 독방 처분이 대표적이다. 우리는 왜 혼자 있지 않으려 할까?

진화 이론을 따라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 성향은 우리가 인류로서의 발걸음을 시작할 때부터 우리 마음 깊숙이 뿌리내린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600여 만 년 전 우리 인류가 숲에서 초원으로 생존공간을 옮겼을 때, 초기 인류는 정말 별 볼 일 없는 존재였다. 지금보다 키도 훨씬 작았을(약 150cm) 뿐만 아니라 별다른 생존무기도 없었다. 당연히 기회의 땅인 초원에 쉽게 진입할 수 없어 400만년 가까이 변두리 신세에 머물러야 했다. 사자와 하이에나 같은 맹수들이 터줏대감처럼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덩치가 컸을 뿐만 아니라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있었고 속도 또한 월등하게 빨랐다. 어찌 해볼 수 있는 경쟁상대가 아니었다.

인류가 이런 상황을 역전시킨 건 새로운 생존전략을 개발한 덕분이었다. 어느 생명체보다 긴밀한 협력이 그것이다. 혹시 크고 무거운 물건을 여럿이 들고 가는 침팬지나 고릴라를 본 적이 있는가? 눈을 씻고 찾아 봐도 없을 것이다. 그들도 집단생활을 하고 어느 정도 협력을 하지만 인간만큼 정교한 협력을 하지는 못한다(개미는 한다! 그러니 지금도 번성하고 있을 것이다).

협력이란 다 같이 살면서 힘을 합치는 것이다. 인류 개개인은 약하디 약한 존재이지만 긴밀한 협력을 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집단은 어느 맹수보다 덩치가 크고 빠르고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혼자 있는 건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이었을 것이니 죽으나 사나 항상 같이 있어야 했을 것이다.

외로움의 기원은 여기에 있다. 다 같이 있어야 잘 살아갈 수 있고 안전한데 ‘지금 무리에서 떨어져 있어 위험한 상태’라는, 우리의 오랜 생존 무의식이 보내는 경고 신호다. ‘빨리 무리로 돌아가라’는 몸이 보내는 메시지다. 워낙 중요하게 깊이 뿌리내린 본성이라 우리가 의식적으로 뿌리치기 힘들 수밖에 없다.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톤즈의 성자’로 불릴 정도로 헌신하다 사망한 이태석 신부는 성자 같은 분이다. 생전에 그를 찾아갔던 홍창진 신부가 쓴 [유쾌한 인생 탐구]라는 책을 보면 그가 했다는 말이 나온다. “너무 힘들어요. 봉사는 견디면 되는데, 이 적막함과 문명과의 이별, 뇌가 정지된 기분…, 힘들고 지칠 땐 가끔 들에 나가서 울고 옵니다.”

분명 현지인들과 같이 살고 있었는데 왜 그렇게 외로웠을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외로움은 단순히 여느 사람들과 같이 있다고 해서 해소되는 게 아니다. 마음을 나눌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이런 사람이 없으면 사람들 속에서도 외로움을 느낀다(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이가 아니면 협력이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외로움은 각종 질환의 원인 중 하나


홍 신부는 “한없이 위대하게만 느껴져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존재로만 생각했던 그가 실은 나와 똑같은 두려움을 안고 사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나도 어쩌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적고 있지만, 성자 같은 분이 이렇게 힘들어 할 정도로 우리 안의 외로움은 힘이 세다. 마치 중력이 그렇듯이 보이지 않게 우리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30년 정도 직장생활을 하다 은퇴한 이들이 겪는 허전함, 갑작스러운 노화는 당연한 것이다. 외로움이 각종 질환을 일으킨다는 연구도 많다.

그러면 같이 있는 건 언제나 좋을까?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화재 경보 소리가 들린다. 가능한 빨리 밖으로 대피하는 게 좋겠지만, 작은 화재라 금방 끌 수 있는 것이라면 괜히 대피하느라 소란 떠는 것보다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게 나을 것이다. 이럴 때 다른 많은 사람과 함께 있는 게 좋을까, 아니면 혼자 있는 게 좋을까?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과 같이 있을수록 결과가 좋지 않았다. 혼자 있을 때는 자신이 스스로 판단해서 대피했지만, 같이 있을 때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는가를 보고 판단하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칠 때가 많았다. ‘다른 사람이 피하지 않는 걸 보니 그리 위험하지 않는가 보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은 서로를 따라 했던 것뿐인데 말이다.

이유는 하나, 다른 많은 사람이 하는 대로 따라 하는 게 좋다는 성향 때문이다. 실제로 며칠 전 한 카페에 갔는데 화재 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사람들은 얼른 대피하거나 상황을 알아보기 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살폈다. 사람들이 그대로 있으니 다들 그대로 있었다. 다행히 오작동이었기에 망정이지 실제로 화재가 났다면 죽음으로 가는 길을 따라가는 것일 수도 있었다.

협력은 좋은 것이지만 같이 있다고 항상 좋은 건 아니다. 무엇보다 마음이 맞지 않으면 같이 있는 게 지옥이 된다. 거대한 바위처럼 짓눌러 숨을 막히게 하는 상사들이 그렇고 고슴도치처럼 뾰족한 가시를 가지고 있어 다가올수록 견디기 힘든 사람들이 그렇다. 나쁜 관계보다 차라리 모르는 사이가 낫다는 말 그대로다. 내향적인 성격이라면 스트레스는 날로 쌓인다.

자, 어느 날 어렵고 골치 아픈 업무가 떨어졌다. 25개 도시를 연결하는 최적의 루트를 짜라는 일이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아마 크게 두 유형으로 나뉠 것이다. 필요한 자료를 챙겨 커피숍이나 빈 회의실로 가서 혼자 끙끙거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전화나 e메일, 또는 소셜미디어로 좋은 방법을 수소문하는 유형이 있을 것이다. 누가 더 빨리, 그리고 효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할까?

미국 하버드대와 보스턴대 연구팀이 참가자들을 세 그룹으로 나눠 성과를 실험했다. 1그룹에게는 혼자서 문제를 풀게 했고, 2그룹에게는 여기저기 연락하면서 문제를 풀게 했다. 3그룹은 1+2의 유형, 그러니까 혼자 문제를 풀면서 여기저기 연락할 수 있게 했다. 결과는 명확했다. 혼자서만 문제에 매달린 참가자들은 몇몇 좋은 아이디어를 내긴 했지만 대체로 성과가 별로였다. 여기저기 연락한 2그룹은 1그룹보다 조금 낫긴 했지만 역시 별 차이 없었다. 그러나 1과 2를 합한 3그룹은 뛰어난 답을 찾은 이들이 많았다. 평균 또한 당연히 높았다.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자신만의 차별화된 해결법을 생각해 냈기에 다양성이 높았고, 주변과 소통을 하다 보니 흡수력 또한 좋았다.

다른 연구에 따르면 브레인스토밍을 할 때도 이런 방식이 효과적이었다. 일단 모여서 자유 토의를 하는 것보다 먼저 개별적으로 생각하게 한 다음 모여서 토의를 하는 게 더 좋은 성과를 냈다. 또 다른 연구에서 보면 한 공간을 다 같이 쓰는 개방형 사무실 같은 시끄러운 장소에서는 집중력이 저하돼 어떤 일을 헤아리는 능력이 상당히 떨어졌다. 반면 혼자 있는 공간에서는 집중력이 올라갔다. 같이 있는 것도 필요하지만 혼자 있는 것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미다(조직 차원에서도 혼자 있음을 적극 장려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창의적인 걸 원한다면 말이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사피엔스]를 쓴 유발 하라리는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다. 시간을 잡아 먹는 괴물이라는 생각에서다. 대신 하루에 두 시간씩 명상을 하고 1년에 한두 달은 아예 조용한 곳으로 가서 자기 안으로 들어간다. e메일도 전화도 받지 않는다. 그렇게 완벽한 혼자 있음을 만들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한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자신의 생각을 가리고 있고, 하고자 하는 것을 못하게 하는 게 무엇인지 헤아린다. 마음 속의 어떤 감정이 자신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고 있는지 관찰한다. “예전에는 정보 결핍이 문제였다면 이제는 수도 없이 이거 하라, 저거 하라고 하는 정보 홍수가 문제다.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강한 중심이 필요하다. 나 자신을 잃지 않는 중심이 필요하다.”

유발 하라리만이 아니다. 남다른 성과를 이뤄낸 이들의 삶을 찬찬히 살펴 보면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혼자 있는 시간이 있다. 물론 혼자 있음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혼자다. 세계 최고의 부자로 꼽히는 워런 버핏은 아예 ‘한적한 시골’에 산다. 최고의 투자가인데도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뉴욕 월스트리트에 살지 않고 미국 중부의 작은 도시 네브래스카 오마하에 산다. ‘오마하의 현인’이라는 별명답게 그곳에서 조용히 세상을 관찰한다. 소설가이자 탁월한 번역가였던 이윤기 씨의 표현대로 하자면 ‘자기 길을 가는 침묵’이라고나 할까.

왜 이들은 혼자 있음을 지향할까? ‘같이 있는 상태’에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느 조용한 곳에서 혼자 커피나 차 한 잔을 음미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평소 경험하지 못했던 지나온 시간으로 여행을 할 때가 있다. ‘아, 그때 내가 너무 서둘렀구나’ ‘이런 말은 나중에 했어야 했는데 마음이 앞섰구나’ 하는 것 같은,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 깨닫지 못했던 것을 느낄 수 있다. 부대끼며 사느라 나도 모르게 내 눈 앞의 것만 보게 되는, 시각이나 시력에 치우쳤던 눈을 시야를 보는 눈으로 전환할 수 있다.

 


혼자 잘 지낼수록 공감능력 더 높아져


혼자 있는 시간은 이렇듯 평소 만날 수 없었던 우리 자신을 만날 수 있게 해준다. 내가 어떻게 생겼고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게 해준다. 세모처럼 생겼는지, 아니면 네모처럼 생겼는지, 그것도 아니면 동그라미처럼 생겼는지 알게 해준다. 내가 누구인지 알면 좀 더 효과적으로 살 수 있다. 내가 세모인 걸 알게 되면 ‘왜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잘 굴러가지 못할까?’ 같은 소모적인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다. 더하여 내게 필요한 사람이 어떤 유형인지 알 수 있다. 내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사람보다 그가 가진 마음 유형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된다.

교육방송에서 재미 있는 연구를 했다. 공부 잘하는 학생은 기억력이 좋을까, 아니면 인지능력이 좋을까? 상위 0.1%의 학생들은 기억력보다 인지능력이 좋았다. 무엇보다 자신을 인지하는 능력, 그러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력이 높았다.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의미다. 이런 건 누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게 아니니 혼자 스스로 생각하고 관찰했을 것이다. 무엇이 부족하고, 어떤 걸 어느 정도로 더 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생각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은 그들대로 비슷한 게 많다. 대체로 학원에 가는 이유가 같다. 다른 학생들이 학원에 가니 나도 간다. 남들 다 다니는데 나만 안 다니면 이상하기 때문이다. 남들 따라 간 곳이다 보니 스스로 알아서 하기보다는 하라는 것만 하고 풀라는 문제만 푼다. 학원 입장에서는 더 나은 성적을 내야 하니 문제 풀이를 많이 시킬 수밖에 없고 그럴수록 학생들은 지겨워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학원을 나가면 생각하기도 싫어진다. 이들의 생활을 보면 혼자서 자신을 탐색하는 시간이 없다. 반면 공부 잘 하는 학생들은 자신에 대한 탐색에서 발견한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해 학원을 간다. 목적이 명확하다. 목적이 명확하니 성적이 오를 수밖에 없다.

학생들만 그럴까? 미국 코넬대 연구팀이 포춘 500대 기업에서 CEO가 될 가능성이 있는 임원들을 대상으로 ‘CEO에게 가장 중요한 자격 요건’을 물었다. 가장 많은 대답은 자기 이해 능력이었다. 사실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거대한 기업을 알고 세상을 알겠는가? 자신에 대한 성찰이 없는데 어떻게 세상을 통찰할 수 있겠는가?

밀리고 당해서 혼자가 되는 게 아니라 스스로 혼자를 선택하는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은 갈수록 중요해질 것이다. 혼자 있음을 통해 자신을 알게 될수록 뭘 잘 하고 뭘 못 하는지 알게 되니 효과적인 집중과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에 대한 스트레스를 덜 받을 수 있으니 이런저런 일을 마음 먹은 대로 해낼 수 있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내 안에 자신감이 조용히, 조금씩 들어서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자신감(自信感)이란 게 뭔가? 나를 믿는 것이다.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와 같은 자기 의심을 하지 않는 것이다.

 


나를 믿지 못하는데 무엇을 할 수 있나


자신에 대한 이해는 선순환 연쇄효과를 부른다. 무엇보다 갈수록 중요해지는 자기 생각, 자기 의견을 자연스럽게 축적할 수 있다. 이게 축적되면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중심을 잡을 수 있어 쉽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얇은 귀가 아닌 깊은 귀를 갖게 되니 휩쓸리지 않고 자기 길을 갈 수 있다. 남들이 가는 길이 아닌 자기 길을 간다는 건 혼자 가는 길일 수밖에 없는데, 덕분에 그 길을 의연하게 갈 수 있다. 여기저기 떠벌리지 않고 자기 길을 가는 침묵을 할 수 있다.

때로는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 경향신문, 양창순 정신과전문의, 2019.05.14 >

 


동물들은 새끼가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는 지극정성으로 돌보지만 일단 자립할 능력을 갖추면 헤어져서 각자의 길을 간다. 언젠가는 북극곰을 다룬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는데 그들 또한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북극곰 역시 새끼가 세 살이 될 때까지는 정말 지극한 모성으로 보살핀다. 때로는 자기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새끼를 지켜내려고 하는 모습이 눈물겨울 정도다. 하지만 새끼가 세 살이 되어 자립을 하면 어미는 죽는 날까지 새끼를 보지 않는다. 요즘 하는 말로 각자도생의 길을 완벽하게(?) 가는 셈이다.

그걸 보면서 만약 사람들도 그렇게 지낸다면 부모 자녀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나아가 인간관계 전반에 갈등이 덜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인간은 독립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그것이 경제적 독립이 됐든, 정신적 독립이 됐든 거의 이십 년의 세월이 필요하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독립과 의존 사이에서 경계를 지키기가 어렵다는 문제가 생겨난다. 하지만 우리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각자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이끌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즘 혼자 살아가는 인구가 많다 보니 ‘홀로족’이나 ‘혼자 안녕하기’ 등의 신조어들이 생겨나는 것을 본다. 대개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것에 큰 의미를 두는 말들이다. 다만 그들이 불안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가 외로움이라고 한다. 물론 SNS의 시대이다 보니 늘 그런 쪽으로는 관계가 활짝 열려 있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은 사실 나의 외로움과는 무관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잠시 외로움을 잊은 것 같은 착각만 들 뿐 돌아서면 더욱더 외로움이 커질 뿐이다. 결과적으로 고독을 이겨내고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하나의 명제로 떠오르고 있는 셈이다.

인간관계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성장과 성숙을 돕는 가장 좋은 밑거름이 되어준다. 하지만 그와 같은 경험들은 때로 복잡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홀로 지낼 수 있을 때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마련이다. 고독을 통해 자기 성찰의 시간이 주어질 때 비로소 인간관계의 소중함도 더 커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시간들은 인간관계에만 해당하지는 않는다. 인생의 모든 면에서 고독은 때때로 우리에게 ‘홀로 있음의 자유’와 그 자유를 통한 새로운 사색과 변화의 시간들을 허락하곤 한다. 고독이란 자신의 에너지를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도록 허락하는 것이라는 의미의 글을 읽고 공감한 적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의 고독은 누군가의 말처럼 일종의 ‘나를 담는 그릇’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마도 이는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고독은 곧 내 창작의 원천’이라고 이야기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나는 그것이 꼭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독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그런데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고독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을 본다. 임상에서도 인간관계에 서툴고 상처 입는 것도 힘들지만 그런 관계에서 벗어나는 순간 직면해야 할 외로움이 더욱 두렵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때마다 나는 고독이 우리에게 주는 일종의 힘에 대해(때때로 우리에게 ‘홀로 있음의 자유’와 그 자유를 통한 새로운 사색과 변화의 시간들을 허락한다는 의미에서) 이야기하곤 한다. 더불어 우리에게는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도 함께. 그러니 혼자 있는 순간의 외로움에 대해 걱정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순간이 내게 찾아오는 것을 반가워해야 한다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에서 위로를 얻는다고 내게 말하곤 한다.

나는 고독에 관한 한, 일본 작가 마루야마 겐지의 다음과 같은 표현을 좋아한다.

무슨 일을 시작하든 우선 고독이란 강을 건너지 않으면 안된다. 그 강을 건너지 않고는 제아무리 거창한 말을 입에 담는다 해도 다 어린애 장난이다.”

물론 창작을 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하겠지만, 그의 결연함이 묘하게 위로가 되어주는 것이다. 적어도 고독에 관해서는.

노후 준비는 혼자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다.

 

 

< 문제에서 답을 찾는 황선만TV,   2022. 11. 26.  >

 


노후 준비는 혼자 살 수 있는 능력이다. 

노후준비는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혼자 살 수 있는 능력만 갖춘다면 노후 준비의 절반은 된다고 생각합니다.

혼자 산다는 것은 삶에 엄청난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두렵게 여기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 사는 준비를 조금씩 해나가다 보면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관계에 대한 책임을 전부 우리가 져야 했습니다.

자식문제, 가족문제, 사회에서의 직장문제, 사업문제 등 이런 것들로 책임감과 싸우느라 우리만을 위해 산 기억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제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자! 

 

 

 

https://youtu.be/ZLqJXunYYg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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