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땅 이야기- 한국인의 뒷모습, 붉은 산, 애국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기뻐서 죽사오매…

 

 


⊙ 일본 지식인 기무라 에이분과의 만남… ‘한국인은 위대한 사람’
⊙ “기차는 떠나간다 보슬비를 헤치며…”(情恨의 밤車 中)
⊙ “그때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나는 거의 잊어버렸어. 성경에도 있어요. 용서하라고”(제암리 학살 사건 생존 할머니)
⊙ 6·25 때 줄지어 질서 정연하게 피란하는 모습에 세계가 감탄
⊙ 김동인의 소설 〈붉은 산〉… ‘나’와 ‘삵’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도 그 노래 ‘애국가’
⊙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심훈의 ‘그날이 오면’ 中)




[ 월간조선, 김태완 기자, 2022년 11월호 ]


이어령 선생이 타계한 지 9개월이 되어간다. 선생은 생전(生前) 시리즈 ‘한국인 이야기’의 문패에다 ‘끝나지 않은’이란 수식어를 직접 붙였다. 생전 선생은 당신이 남긴 굵직한 저작물과 수많은 강연에서 언급한 ‘한국인 이야기’를 비록 당신이 떠나도 계속 이어가기를 희망하였고 관련 원고와 저서의 일부를 《월간조선》에 전하였다. 또 선생이 남긴 바탕 위에 편집자의 생각을 보태도 된다고 허락하였다. 아주 조심스럽게 선생이 남긴 큰 발자국을 따라 연재를 이어가고자 한다. 선생에게 누(累)가 되지 않기를 소망할 뿐이다.

 




  # 한국인의 진짜 뒷모습은…
 


  어렸을 때는 한국 사람의 진짜 뒷모습을 몰랐어요. ‘아! 그게 아니다, 내가 잘못 알았구나’라고 생각한 것은 내가 이화여대 교수가 된 뒤니까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2년)를 쓴 후예요.
 
  1960년대 남진의 ‘가슴 아프게’라는 노래가 나오고, 이미자 노래가 일본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일본에 한류 붐이 막 일려고 할 때였어요. 그때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일본에 기무라 에이분(木村榮文·1935~2011년)이라는 아주 양심적인 지식인이 있었어요. 상도 많이 타고 다큐멘터리도 아주 잘 찍는 사람이었지요.
 
  그분이 1970년대 초반에 일본 RTV에서 〈봉선화 필 때〉라는 특집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이 기무라 에이분은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고 있을 때 알던 한국인 친구들이 더러 있었어요. 그래서 그 한국인 친구들이 그 시절, 얼마나 가슴 아프게 지냈는가를 현장 취재하러 오면서 나를 만난 거예요. 그때 취재 대상이 가수 이미자, 나, 그리고 1919년 4월의 비극적인 수원 제암리 사건 때 살아남은 생존자 할머니였어요.
 
  내 책 《흙 속에 저 바람 속에》가 전 세계에서 번역될 때였는데 이웃 일본에서는 《恨の文化論(한의 문화론)》으로 소개되었지요. 당시로선 우리나라를 최초로 다룬 ‘한국문화론’이었어요. 그 무렵, 우리는 일본이 그렇게 다들 잘났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인데, 그는 한국에 와서 뜻밖에도 ‘한국인이 위대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나를 찾아온 겁니다.
 
  나 역시 ‘한국인의 뒷모습’(《월간조선》 9월호, 10월호 〈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⑨ ⑩편 참조)을 떠올리며 다시 말해, 지프의 경적 소리에 놀란 노부부가 서로 손을 꼭 쥐고 뒤뚱거리며 곧장 앞으로만 뛰어 달아나는 모습만 생각한 거예요. 그 모습이 떠올라 한국인은 그냥 그렇게 쫓겨 다니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참 불쌍한 한국인, 지지리도 못났다고 생각했죠.
 
 
  우리 민족이 중국을 지배하지 않은 이유
 

  고백하자면, 남들은 다른 나라 쳐들어가서 온갖 것을 다 빼앗아 오는데, 물론 그게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정복하는 사람이 되지 왜 맨날 정복당하고 빼앗기는가, 하고 답답해했었어요.
 
  중국을 보세요. 원(元)나라를 세운 몽고족, 금(金)나라를 세운 여진족, 청(淸)나라를 세운 만주족 모두 중국 한족(漢族)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와 같은 변방 오랑캐거든요. 그 사람들 중에 중국 전역을 한 번쯤 지배해보지 않은 민족이 없어요. 오직 우리 한(韓)민족만이 중국을 지배해보지 못했죠.
 
  그런데 요즘 보세요. 중국을 지배했던 변방 민족 중 자민족의 국가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어요. 다른 민족은 중국 본토에 세웠던 나라가 망하는 것과 동시에 사라졌거든요. 우리가 중국을 지배하지 않았던 것도 다 생각이 있었던 거죠.
 
  기무라 에이분의 다큐멘터리는 한국의 여학교 학생들이 ‘울 밑에 선 봉선화’를 노래하는 것으로 시작해요. 왜 이 노래였을까요? 1920년 만든 홍난파 작곡, 김형준 작사의 이 노래에는 한국 가곡의 효시, 조선 독립을 애타게 기다리던 백성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습니다.
 
  다큐에는 또 나의 인터뷰와 함께 기차역 장면이 삽입되었죠. 그 인터뷰를 하면서 노래도 불렀어요. ‘정한(情恨)의 밤차(車)’라는 곡인데, 1935년에 발표된 노래예요. 나는 노래를 못하는 사람인데, 이 노래는 잘 불러요. 노래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1. 기차는 떠나간다 보슬비를 헤치며
  정든 땅 뒤에 두고 떠나는 님이여.
 
  2. 간다고 아주 가며 아주 간들 잊으랴.
  밤마다 꿈길 속에 울면서 살아요.
 
  3. 님이여 술을 들어 아픈 맘을 달래자.
  공수래공수거가 인생이 아니냐.〉
 

 

https://youtu.be/0q1hkzw3Hu0

 

 


  어릴 때의 기차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기차와 달랐어요. 나는 시골에서 자랐는데, 기차를 타고 우리 고향에 도착했던 사람들은 모두 늑대와 같았어요. 우리 형을 빼앗아가고 우리 어머니나 누이를 능욕한 짐승 같은 사람들이었죠. 기차를 타고 도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 사람들이었어요. 그러니 기차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가 없지요. 또 기차를 타고 가는 조선인들은 죄다 고향을 등지거나 고향을 떠나는, 아니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었어요.
 
  소작 짓던 땅을 빼앗기고, 도저히 조선 땅에서는 먹고살 길이 없어서 저 용정이니 만주, 간도 땅으로 떠나는 사람들…. 그리고 동남아로 징용, 학도병으로 끌려간 사람들….
 
  그래서 한국인의 노래 속에는 기차 타고 떠나는 사람들의 한(恨)이 있어요. 일본에서는 원(怨)이나 한(恨)을 구별해서 쓰지 않지만, 일본 사람들은 원수를 갚는 원이고, 우리는 한을 푸는 한을 써요. 다르죠.
 
 
  # ‘기차는 떠나간다’ 노래에 얽힌 기억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에 담긴 ‘노부부’는 지프에 치일 뻔한 거잖아요. 그러나 그 이전에는 무시무시한 기차가 있었던 거지요. 근대의 상징이 기차라고 해도 한국인에게 기차는 반갑고 고마운 존재가 아닙니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 누이, 우리 형, 우리 아버지가 정신대, 강제징병, 징용으로 끌려갈 때 쓰인, 무시무시한 굉음을 내는 검은색 쇳덩어리였어요. 그래서 제가 ‘정한의 밤차’라는 노래만 유독 잘 부르게 되었어요. 다른 노래는 하나도 못 해요.
 
  옛날에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에 모이는 일이 많았어요. 그렇게 바깥에서 손님이 온다든지, 귀한 손님이 오면 어머니나 아버지가 아이들을 불렀어요.
 
  “얘, 아무개 오라고 그래라.”
 
  그러면 제가 가는 거예요. 사랑방에 모인 손님들 앞에. 형은 숫기가 없고, 나는 아직 어려서 뭘 모를 때니까 어른들이 뭘 시키면 부끄럼 타지 않고 그냥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형님은 연출을 맡고 연기는 내가 한 거죠. 형이 “여기서는 좀 구슬프게 불러라” “여기서는 더 애절하게 해줘야지” “그냥 하면 안 된다”, 이렇게 지도하는 걸 받고 어른들 앞에 나가서 노래를 불렀어요.
 
  지금 생각하니까 그분들은 내 노래를 듣고 싶었던 게 아니에요. 그때 그 사랑방에 모였던 사람들은 다들 맘이 안 좋고 슬프니까 김동인(金東仁·1900~1951년)의 소설 〈붉은 산〉에서 ‘삵’이 죽어가면서 애국가를 불러달라고 한 것처럼 어린애가 부르는 ‘정한의 밤차’(박영호 작사 이기영 작곡)를 듣고 싶었던 거죠.
 
  그 어린애가 부르는 “기차는 떠나간다 보슬비를 헤치고” 하는, 우리의 그 슬프고 한 많은 노래를 듣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거예요. 어린 내가 그 노래를 하면 듣던 사람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고, 한숨 쉬는 사람도 있고, 아까까지는 침통해하던 사람이 또 막 박수치면서 “야! 너 잘 부른다” 하니까 우쭐했어요.
 
  게다가 용돈도 줍니다. 돈 몇 푼씩을 쥐여줘요. 어렸을 때는 그 재미에 어른들 앞에서 그 노래를 제법 자주 불렀지요.
 
 
  # 기찻길의 주먹감자


 
  그 노랫말을 보면 부슬비를 헤치고 기차가 떠나가는데, 기차가 떠날 때는 왜 밤낮 비가 오는 걸까요? 정한의 기차, 아니 ‘정한의 밤차’에서만 그런 게 아니에요. 1980년대에 가수 김수희가 불러서 지금까지도 전 국민 애창곡인 ‘남행열차’도 ‘비 내리는 호남선~’이라고 시작하지요. 왜 우리나라는 기차가 떠날 때마다 비가 올까요? 비가 와야만 기차가 달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렸을 때는 그 노래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어른들이 좋아하니까 그냥 불렀고, 사실 초등학생이 되어서도 그 뜻이 뭔지는 몰랐어요. 그런데 뭔지도 모르면서 우리가 하교할 때마다 무슨 의식처럼 하던 일이 또 있어요.
 
  하교하는 길에는 철길이 있었어요. 우리 동네에 사는 아이들은 전부 그 철길을 따라 등하교를 했어요. 다른 길에서는 안 그러는데, 그 철길을 걸을 때는 다들 장난도 안 치고 말도 안 하고 심각하게 걸어요. 기차를 기다리느라. 기차는 거의 정시에 오니까, 아이들이 시계는 없지만 느낌으로 그즈음이 되면 다들 기찻길 옆에 일렬로 늘어섰어요. 기차 지나가는 걸 보려고요. 그러면 저쪽에서부터 기차가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거죠.
 
  보통 아이들의 놀이에는 리더가 있어요. 그땐 남자아이들이 주로 전쟁놀이를 할 때니까요. 그런데 기차를 기다릴 때는 리더도 없어요. 그냥 다들 서서 심각한 표정으로 기차만 보고 있다가 기차가 자기 앞으로 오면 욕을 해요. 주먹감자를 먹이는 거죠. 그건 일종의 의식이었어요. 기차에다 대고 하는 의식…. 아이들끼리 서로 어쩌는지 쳐다보지도 않아요, 기차를 보느라.
 
  내 누이를 뺏어간 기차, 면소(面所)까지 와서 누구를 잡아간 기차. 아이들이 그 기차에 대고 주먹감자를 먹이면서 “야! 이 새끼들아” 하고 욕을 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상스럽게 그런 욕을 했다고요. 그 기차가 얼마나 많은 분노를 내려다 놓고 얼마나 많은 슬픔을 싣고 갔으면 그랬을까요. 어린 아이들이 가본 적 없는, 말로만 들은 저 만주 벌판으로 쪽박 찬 우리 아버지·어머니, 아저씨·아주머니를 실어 나르던 기차를 향해 오죽했으면 그랬겠어요? 기차의 의미도 알지 못하면서 철길에 서서 매일같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어때요. 요즘 아이들은 기차가 지나가든 말든 관심도 없죠? 아주 어린 아이들은 좋아서 박수치고. 이게 우리 역사의 변화입니다. 참 웃음과 눈물이 뒤범벅되던 시절의 사연인데 지금 아이들은 아무것도 몰라요.
 
 
  # 기차와 恨의 정서
 

  그런데 요즘 기차, KTX나 SRT, ITX-새마을호는 너무 쏜살같이 달려요. 완행열차도 있어야 합니다. 비 내리는 기찻길을 느리게 달리는 완행열차…. 요즘은 그 기차의 정서가 다 사라지고 빠른 이동 수단으로만 남았어요. 유행가 가락처럼 ‘비 내리는 호남선 완행열차에~’ 하는 슬픔, 한과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 한을 잊고 있어요. 한국인은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한을 푸는 민족입니다.
 
  예를 들어 너무 가난해서 대학에 못 갔어요. 가난의 이유는 누구누구 때문에 우리 땅을 빼앗기고, 그래서 가난해진 거라고 칩시다. 커서 복수를 위해 그 사람을 죽이거나 막 겁박을 해요. 그럼 원수를 갚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내가 대학에 가집니까? 아니잖아요. 나를 대학에 못 가게 만들었다고 그 사람을 나쁘게 대하는 건 그저 단순한 화풀이밖에 안 됩니다. 한 맺힌 근본은 내 안에 덩그러니남아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열심히 해서 대학에 가요. 그러면 원수는 못 갚았지만 한은 풀잖아요.
 
  우리 민족의 한, 분단의 한, 역사의 한을 푼다는 것은 어느 사람을 죽이고, 중국과 싸워 이기고 일본과 싸워 이기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복수를 했다고 한들 우리의 한은 그대로 남아요.
 
  기무라 에이분이 나를 만나고, 그다음으로 초기 한류(韓流) 붐을 일으킨 이미자를 만나고,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제암리 사건 때 살아남은 할머니였어요.
 
  그때의 사건에 대해 묻자,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해요.
 
  “그때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나는 거의 잊어버렸어. 이제 생각도 안 나. 한밤중에 가끔 생각이 나긴 해요. 그러나 다 지난 일 아닙니까. 성경에도 있어요. 용서하라고.”
 
  그리고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장면은 그 할머니의 뒷모습이에요. 뒷짐 지고, 시골의 호젓한 오솔길을 걸어가는 뒷모습은 당당했어요.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 않아도 그 뒷모습이 이렇게 말하는 거죠.
 
  ‘모든 것을 잃고 아들도 죽었지만 일곱 손자를 거느리고 사는 지금, 나는 괜찮아. 원수를 사랑하라고 성경에도 그랬어. 가끔 생각은 나지만 용서할 거야.’
 
  그 뒷모습이 어떻게 가축처럼 도망가는 모습이겠어요? 그 뒷모습에서 쫓겨 가던 슬픔이 아니라 그 쫓김 속에서도 인간으로서 어떤 침략자보다 강한 한국인의 생명력을 본 겁니다.
 
 
  # 임진왜란 때의 조선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수록된 〈김씨열체〉라는 그림에서는 박신간의 부인인 김씨가 임란 당시 노모를 업고 뛰어가고 있다.


  광해군 5년(1613년)에 편찬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수록된 〈김씨열체(金氏裂體)〉라는 그림을 본 적이 있나요? 곡산군 사람이자 박신간(朴信幹)의 부인인 김씨는 스무 살 때 임진왜란을 만나 그 어머니를 업고 피란을 가다 왜적을 만나 목숨을 잃었습니다.
 
  왜구에게 쫓겨 도망가면서도 노부모를 업고 뛰었다고 해요. 지금 왜구가 쳐들어오고 내 목숨이 다급한 상황인데도, 걷지도 못하고 살날이 얼마 남지도 않은 부모를 버리지 않은 거예요. 그걸 보고 일본인들이 ‘우리는 전쟁이 났을 때 노부모를 업고 뛸 사람이 있을까’ 하고 감탄한 거죠. 그래서 임진왜란 때 쳐들어왔던 장수들 중에 “야만인이 문화의 국가를 쳤구나, 나는 모든 걸 버리겠다” 하고 부하를 데리고 귀순해서 한국의 장군으로서 일본과 맞선 사람도 있어요.
 
  수원 제암리 사건 때 스물여덟 명이 죽었어요. 그 교회에 없던 사람들도 찾아가서 죽여 30명이 죽어요.
 
  그때 할머니가 정말 기가 막힌 말을 해요.
 
  “사람은 죽여도 집은 태우지 마라.”
 
  놀라운 이야기지 않아요? 그런데 그 일본군은 사람도 죽이고 민가도 다 태웠어요. 그럼에도 그 할머니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죠.
 
  “나한테 묻지 마, 나는 다 잊어버렸어.”
 
  제암리는 기독교 교세가 아주 강한 곳이니까 이 할머니도 기독교인이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분의 속마음까지 보태어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어. 그러니 나는 너희를 용서할 거야. 슬프지도 않아. 나한테는 손자가 있어. 씨가 있어. 너희가 씨를 말려? 어림도 없는 소리 하지 마. 내 아들은 죽었지만 나는 손자들 보는 재미로 살아. 가끔 생각나지만 나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
 
  그러곤 의연하게 뒷짐 지고 싹 사라지던, 기무라 에이분의 다큐 속 당당한 뒷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아요. 그 할머니, 한국의 여성들은 가축처럼 쫓겨 가지 않았어요. 인간의 모습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답고 강한 사람으로 쫓겨 갔기에 그 씨, 그 손자들이 이젠 더는 쫓기지 않고 살 수 있게 된 것이죠.
 
 
  # 질서 정연하게 피란 가는 사람들
 

  미 국무성에 보관되어 있는 한 장의 사진이 있어요.
 
  세상 어느 나라, 어느 전쟁에서 피란민이 이렇게 질서 정연하게 가는 거 본 적 있어요? 옆의 군대는 전장을 찾아 북상하는 유엔 군대고, 그 옆은 길을 막지 않으려고 리더도 없는 피란민이,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일렬로 질서 정연하게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는 거예요. 이건 쫓기는 모습이 아니에요.
 
  세상에 이런 모습이 어디 있어요? 다른 곳은 서로 도망가느라 길을 막아서 군대가 전장에 투입되지 못해요. 다들 탱크가 가는 길 앞을 막아서 아수라장이 되는 거죠.
 
  6·25 때 이 기적 같은 사진 한 장에 전 세계 사람들이 놀랍니다. ‘한국인이 대단한 민족이구나!’ 감탄했죠. 저 피란민 무리에 무슨 리더가 있었겠어요. 남편 잃고 자식 잃은 여자들이 대부분인데, 모두 경황이 없을 텐데, 젖먹이 아이를 등에 업고, 짐 보퉁이는 머리에 이고, 정처도 없어요. 그저 살려고 남쪽으로 갈 뿐, 기다리는 사람도 반기는 사람도 없는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질서 정연하고 의연한 거예요.
 
  당시를 떠올려봐요. 한강 다리는 이미 폭파되어 건널 수 없잖아요. 나룻배 하나를 얻어 타고 겨우 한강을 건너 걷기 시작한 겁니다. 서로가 이 살육의 전쟁을 겪으며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했겠지만 그렇게 걸어갔던 겁니다. 긴긴 여름 해를 따라 저녁에는 모닥불 옆에 누워 자기도 하며 걸어갔던 거예요.
 
  이 사진 한 장이 한국은 야만의 국가, 쫓겨 다니는 야만의 국가가 아니라고 알려준 거죠. 서구 사람들, 아프리카인을 동물 취급하지 사람 취급을 했어요? 노예로 만들어 동물처럼 부리고. 그러나 여긴 아니라는 거죠.
 
  ‘아프리카 사람들과 똑같이 가난해도 여긴 아니다!  봐라, 짐승이 언제 산불 날 때 이렇게 일렬로 가는 걸 봤냐?’
 
  이게 바로 한국인의 뒷모습인 겁니다.
 
  한국 근대문학 개척자 김동인의 아들 김광명(金光明·한양대 의대 명예교수)씨의 육성을 들은 적이 있어요.
 
  김광명이 신경외과 의사라는 직업을 택한 이유는 말년의 아버지가 앓던 중풍과 관련이 있다고 하지요. 6·25가 터지자 가족이 아버지 김동인을 업고 피란을 갔어요. 왕십리에서 응봉동 고개를 넘어 한강까지 가서 밤을 꼬박 새워 줄을 섰습니다. 이튿날 아침 나룻배를 타려고요. 놀랍지 않아요? 인민군이 탱크를 앞세워 밀려드는데 나룻배를 타려고 밤새 줄을 섰다고 하니까요. 다행히 나룻배에 가족 모두가 올랐는데 아버지 김동인은 몸을 가눌 수가 없었대요. 할 수 없이 가족 모두가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듬해 다시 1·4후퇴 때 피란을 갔어요. 김광명의 증언은 이랬어요.
 
  “신당동, 약수동을 거쳐 한남동 쪽을 향하다 보니 피란민 수가 상당히 많았어요. 길 양쪽으로 국군이 새끼줄을 쳐놓아 새끼줄을 넘어 흑석동(김동인의 딸이 출가한 집)으로 갈 수도 없었고 밀려드는 인파 탓에 뒤돌아 서울로 되돌아갈 수 있는 상황도 안 됐어요. 그렇게 새끼줄 안쪽에서 걸어 첫날 도착한 곳이 경기도 수원이었습니다.
 
  새끼줄이 있어 하루 만에 경기도 수원까지 피란 갈 수 있었던 겁니다.
 
 
  # 김동인의 〈붉은 산〉, 흙, 황토의 의미
 

  한국인의 이런 의연한 모습은 사진으로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으로도 형상화되어 있어요.
 
  소설 〈붉은 산〉은 1932년 김동인이 발표한 단편인데, 일제 강점하니까 차마 일본이 지배하고 있는 한반도를 배경으로는 말을 못 하고 만주로 무대를 옮겨서 쓴 소설이에요. 대개 만주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사는데, 만주로 이주한 한국인들은 한국인들끼리 모인 마을을 만들어서 살았어요.
 
  그 조선인 마을에 의사인 ‘나[余]’가 들어가게 됩니다. 이 소설에서 ‘나’는 화자(話者)이면서 관찰자예요. 진짜 주인공은 이 마을에서 나가 만나게 되는 ‘삵’이라는 별명의 정익호입니다. 멀쩡한 이름을 두고, ‘삵’, 그러니까 거친 육식동물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주인공의 성격은 별명 그대로입니다. 생긴 것도 표독스러운 데다가 투전에 싸움으로도 모자라 부녀자 희롱까지 더해지니 이 조선인 마을에서는 골머리가 아픈 거죠. 그렇다고 한 동포를 차마 내치지도 못하고요. 이 ‘삵’에 대한 이야기가 쭉 이어집니다.
 
  만주의 한국인 마을에 모여 살던 사람들은 모두 한국에서 살지 못하고 쫓겨 온 사람들이죠. 조선의 내 땅을 빼앗기고 소작권도 잃어 먹고살 길이 막막하니까 만주까지 들어가 남의 땅 부쳐 먹고 사는 거예요. 얼마나 비참한 삶이겠습니까. 지주는 밤낮 왜 소출이 이거밖에 안 되냐, 너 어디에 감춰놓은 거 아니냐 윽박지르며 때리고 소작인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그 소출을 지키는 그런 관계였어요. 그 불쌍한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곳에서 남 해코지나 하고 사는 ‘삵’은 또 모두에게 얼마나 미움의 대상이겠어요. 불쌍한 한국인끼리 왜 저리 괴롭히나 하겠지요.
 
  풍토병 연구를 위해 그곳까지 간 의사인 ‘나’는 사람들에게 들어 이런 것을 알게 되는 거죠. 그러던 어느 날 누가 ‘나’를 불러서 급히 가보니, 송노인이라는 한국인 소작농이 소출이 적다는 이유로 만주인 지주에게 맞아 다 죽게 되어 나귀에 실려 온 거예요.
 
  실제로 나귀에서 내리는 순간 절명하고 말죠. 그런데도 누구 하나 그 억울한 죽음에 대해 지주에게 항의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힘이 없으니까. 저쪽은 지주들이고, 주변에 사람도 많은 데다 제 나라 제 땅이고 이쪽은 땅도 없고, 자기 몸 하나 지켜줄 나라도 없는 쫓겨 온 소작농이잖아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화자인 ‘나’, 의사도 너무너무 화가 나고 분하고 서러워도 어디에 가서 호소할 데도 보호해줄 데도 없으니 참을 수밖에요. 그런데 그 말썽꾼인 ‘삵’이, 아무도 나서지 않는데 말 한 마디 없이 어디로 사라져 버려요. 혼자서 만주인 지주네 집에 쳐들어간 거예요. ‘삵’이 아무리 깡패고, 한국인 마을에서는 싸움꾼이라고 한들, 싸움이 됐겠어요? 중과부적(衆寡不敵)이죠. 결국 마지막엔 죽도록 맞아서 한국인 마을로 돌아오는데 집까지 가지도 못하고 마을 입구에서 그냥 쓰러져 버려요.
 
  그래서 사람들은 또 ‘나’를 불러요. 소설 〈붉은 산〉의 마지막 장면은 이 삵의 임종 장면입니다.
 
  〈“선생님 노래를 불러주세요. 마지막 소원… 노래를 해주세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여는 머리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여의 입에서는 창가가 흘러나왔다. 여는 고즈넉이 불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고즈넉이 부르는 여의 창가 소리에 뒤에 둘러섰던 다른 사람의 입에서도 숭엄한 코러스가 울리어 나왔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광막한 겨울의 만주벌 한편 구석에서는 밥버러지 익호의 죽음을 조상하는 숭엄한 노래가 차차 크게 엄숙하게 울리었다. 그 가운데 익호의 몸은 점점 식어갔다.〉
 
  ‘삵’이 그렇게 사람들에게 푸대접을 받고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지만, 사실은 의협심이 강했던 사람인 거예요. 늘 망나니처럼 자기 동포들을 괴롭혔지만, 또 막상 자기 동포가 외부의 사람에게 핍박을 당했을 땐 죽은 사람 복수를 하기 위해 나서는 그런 사람인 거죠.
 
  그 ‘삵’이 임종하며 보는 것이 붉은 산과 흰 옷의 환상이에요. 그리고 마지막 소원은 노래를 불러달라는 거였죠. ‘애국가’를. 안익태(安益泰·1906~1965년) 선생이 ‘한국환상곡’을 작곡한 것이 1936년 독일 베를린에서였으니까, 이 소설 발표 당시에 사람들이 불렀던 애국가는 스코틀랜드의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곡조에 맞춘 창가였을 거예요.
 
  죽어가는 ‘삵’을 앞에 두고, 또는 삵의 머리를 끌어안고, ‘나’는 노래를 하는 거죠. “동해물과 백두산이…” 그러자 ‘나’와 ‘삵’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도 그 노래가 나와요. 참으로 장엄한 코러스 아니었겠습니까?
 
 
  디아스포라, 望鄕歌…
 


  요즘 한국에서 행사할 때 ‘애국가’를 잘 안 불러요. 대개 애국가 제창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죠. 그런데 가끔 올림픽 같은 국제경기에서 1등 해서 시상식 때 태극기가 게양되면서 “동해물과 백두산이…”, 이 곡조가 나오면 눈물이 핑 돌아요. 왠지 마음이 찡해지죠.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 메달을 따기까지 자기의 고생을 생각하며 우는 경우가 많겠지만 우리는 그냥 태극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동해물과 백두산이…” 하는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서럽고 가슴이 북받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삵’이, 그 장엄한 코러스를 들으면서 죽어갈 때, 마지막으로 본 것이 무엇이었어요? 붉은 산이죠. 푸른 산도 아니에요. 붉은 황토 흙 산. 그리고 흰 옷 입은 사람들. 그러니까 만주 땅까지 쫓겨 와가지고 겉으로는 그 개망나니 짓을 했지만 가슴속에는 늘 떠나온 고향이 있었던 거죠.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가 이 “동해물과 백두산이…”예요. 고향에서 쫓겨나 만주까지 온 농민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떠나온 독립군도, 심지어 일제에 의해 전 세계로 노예처럼 팔려간 사람들도 이 노래를 불렀어요.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노래는 ‘애국가’라기보다 나라를 잃은 사람들의 ‘디아스포라(diaspora)’, 고향을 잃은 사람들의 망향가(望鄕歌)인 거죠. 땅을 그리워하며 불렀던 노래예요.
 
 
  사람들이 황토방에 가는 이유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할 때의 그 흙인데 그것도 그냥 흙이 아니고 황토 흙이에요, 황토 흙! 이 황토 흙이라는 게 참 묘해요.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불모의 땅이 황토 흙인데 ‘황톳길’ 그러면 마음이 찡해지거든요. 황토라는 말만으로도 말이죠. 뒤에서 말하겠지만, 그래서 지금 사람들이 황토방을 가는 거예요. DNA가 남아 있어서 그래요. 황토방이 바로 그 붉은 산이에요.
 
  ‘삵’이 죽어가는 순간에 그리워하며 환상으로 본 것은 화려한 도시, 풍요한 감나무·대추나무, 기름진 황금들판이 아니라 그 메마르고 황폐한 붉은 산이었어요. 이중섭(李仲燮·1916~1956년)이 그린 듯한 그런 붉은 산. 거기에 흰 옷 입은 고향 이웃들이 보입니다. 만주벌판 그 황량한 땅에서 환상으로 보는 고향의 붉은 산과 흰 옷 입은 사람들….
 
  ‘삵’의 마지막 소원에 따라 사람들은 노래를 불러요. 힘없어서 몸을 사리기만 했던 사람들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고 말이죠. 그야말로 장엄한 코러스입니다. 모두의 마음을 움직이고, 두려움을 잊게 만든 노래잖아요.
 
  지금 우리는 이 노래가 아무렇지도 않고, 큰 감동도 없지만 어디에서 어느 때에 부르는 것인가에 따라 똑같은 노래인데 그렇게 다르죠. 이게 결국 디아스포라, 약소민족으로 고향을 상실하고 쫓겨 온 사람끼리 남에게 받은 핍박과 설움을 서로 위로할 수밖에 없을 때, 그 순간에 마지막으로 부르는 노래가 ‘애국가’예요. 이런 것을 생각하면 감히 ‘애국가’를 생략하자는 말이 안 나와요. 생각해보세요.
 
  한때 ‘애국가’는 잘못 부르면 잡혀가는 노래였어요. 누구도 감히 드러내 놓고 가르쳐준다거나 하지 못해서 겨우, 겨우 아버지가 아들에게 집 안에서만 몰래 가르쳐주고, 그 아들이 또 친구에게 몰래 가르쳐주고 하면서 번져갔을 거예요. 가사를 종이에 인쇄하거나 써서 보여준다거나 하는 건 상상도 못 하는 상황에서 뜬소문처럼 번져갔을 노래인데, 1930년대의 〈붉은 산〉에 정확하게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가사가 나옵니다. 기가 막히지 않아요?
 
 
  # ‘애국가’ 이야기- 고통스러운 영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우리가 무심코 부르지만 가사를 한번 보세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니요? 동해물이 다 말라 없어지고 백두산이 다 닳아 없어지는 건 과학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이건 영원(永遠)을 말하는 거죠.
 
  그런데 그 영원이 행복한 영원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영원이에요. 뭔가가 생성하고 커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마르고 마멸되는 부정적인 영원이죠. 본디 영원이라는 것은 꿈과 희망을 말할 때 쓰는 말이지만 실제로 행복할 때는 꿈과 희망을 말하지 않아요.
 
  한국 불교에서는 ‘옥으로 새긴 연꽃 봉오리가 진짜 꽃이 되어 피어나듯이’라는 비유를 많이 씁니다. 돌이 어떻게 꽃이 되겠어요?
 
  한국 사람은 참 현실적인 사람들이에요. 어느 나라든 관용구를 보면 사는 게 먼저고 죽는 것이 뒤에 오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입니다. 죽는 게 앞서고 사는 게 뒤에 오죠. ‘죽기 아니면 살기’라고 하지 ‘살기 아니면 죽기’라고 하지 않잖아요. 무슨 일을 할 때도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하라’고 하지 ‘살기 죽기로 열심히 하라’고 해요? ‘죽으나 사나’라고 하지 ‘사나 죽으나’ 안 그러잖아요. 그런데 셰익스피어는 《햄릿》에서 이렇게 썼잖아요.
 
  “To be or not to be.”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만약 연극할 때 대사를 이렇게 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한국말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한국어로 번역할 때는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해야 맞죠.
 

  한국 사람들의 이런 관용구를 가만히 보세요. 앞에 좋은 게 오고 뒤에 나쁜 게 오면 결론은 뭐가 되겠어요? 나쁜 거죠. 그런데 앞에 나쁜 게 오고 뒤에 좋은 게 오면 죽음에서 삶으로 오는 게 되잖아요. 삶이 오고 죽음이 오는 것보다는 죽음 뒤에 삶이 오는 것이 좋지요.
 
  그래서 서양 사람들의 ‘trial and error’, 즉 시행착오(試行錯誤)라고 하는데, 심리학자들이 이걸 ‘착오시행’으로 바꾸자고 해요. 시행(試行)하고 착오(錯誤)했다면 그것은 네거티브예요. 착오로 끝났을 뿐 아무것도 얻지 못했으니까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도 사실 아무 생각 없이 보면 지지리도 못난 말이잖아요. 영원에 빗댈 말이 얼마나 많아요. 그것들을 다 버려두고 동해물이 마르고 백두산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영원하려면 그 영원이 얼마나 힘들고 고되겠어요. 그런데 그게 현실이에요.
 
  영원이라는 건 없어요. 또 동해물이 마르고 백두산이 닳아 없어지는 건 몇억 겁[億千萬劫]이 지나도 불가능해요. 냇물이 마르고 뒷동산이 없어지는 건 가능해요. 그러나 동해물과 백두산은 안 되죠. 불가능한 영원을 현실적인 불가능으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 그날이 오면, 인경을 들이받아
 


  그래서 나는 심훈(沈熏·1901~ 1936년) 선생의 ‘그날이 오면’을 보면 참 가슴이 아파요. 해방의 그날이 얼마나 기쁜 날입니까. 떡도 해 먹고 막 춤도 추고 그래야 하는데 글쎄 머리로 인경(人定)을 들이받아 피가 흐르고 몸의 가죽을 벗겨서 북을 만들어 치고 싶다니요. 인경은 조선 시대에 통행금지를 알리거나 해제하기 위하여 치던 종을 뜻합니다. 세상에 왜 그 기쁜 날에 머리를 들이받고 자기 가죽을 벗긴답니까?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치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올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걸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그 기쁜 날은 기쁨으로써 더 많은 것을 원하지도 않게 되는 그런 날인 거예요. 그 지독한 고통 속에서 설마 그날이 오랴. 그날이 오면 나 죽어도 좋다는 말인 거죠. 한국 사람이 죽음을 함부로 생각해서 죽음을 쓰는 것이 아니라 “죽어도 좋아, 이 세상에는 죽음보다도 강한 게 있어”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내가 살을 찢어서 북을 만들어도 신나는 게 있어, 그게 그날이야.”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지요. “세상에 그날이 왔으면 살아야지 왜 굳이 사람 가죽을 벗겨가지고 북을 만들어 친다니. 아이고 끔찍해라. 이런 메조키스트가 어딨냐”고 말하는 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거예요.
 
  여자들이 가장 사랑할 때 역설적으로 “죽고 싶어”라고 말해요. “오빠, 나 죽고 싶어” 그러는 건 그 오빨 그만큼 크게 사랑한다는 얘기예요. 내 마음을 강조하기 위한 최상의 말이 죽음이에요. 우리가 또 뭔가를 절대로 반대할 때 흔히 쓰는 관용구로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라는 말도 쓰이잖아요. 눈에 흙이 들어간다는 게 바로 죽음을 뜻합니다.
 
 
  # 흙의 중요성
 

3년 전 대형 산불이 발생했던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성천리 일대 야산. 1960~70년대 산림 녹화 이전 우리나라 산은 대개 붉은 산이자 민둥산이었다.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으세요? 흙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붉은 산. 그 흙을 빼앗긴 거예요. 내 땅을 빼앗긴 거죠. 그 흙을, 고향의 흙을 잃으면 ‘삵’처럼 환상에서밖에 보지 못해요. 그것도 초록이 무성한 풍요한 산이 아니고 붉은 황톳길처럼 붉은 산. 그것을 토포필리아(Topophilia), 혹은 장소애(場所愛)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땅의 8할이 산이에요. 과거엔 헐벗은 붉은 산, 민둥산이 대부분이었죠. 그런데도 우리는 ‘금수강산 삼천리’라고 했어요. 그걸 ‘진짜 금수강산(錦繡江山) 보지도 못했나 보다’고 어처구니없어 할 게 아니에요. 메마를수록, 붉은 산일수록 애정이 가는 겁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부모의 살림이 넉넉하고 건강하면 자식들이 부모 걱정을 안 해요. 사랑도 없죠, 나 살기 바쁜데.
 
  그런데 그 부모가 가난하게 살면 그 어린애가 효도를 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조국도 그래요. 우리 조국이 나한테 뭘 해줄 만큼 넉넉하고 잘살면 나는 내가 더 잘살 수 있는 곳으로 이민 가서 조국 잊고 편안하게 잘살 수 있어요. 남편도 잘나야 이혼하는 거죠. 지지리 못난 남편은 버리지도 못해요. 사람이 그래요.
 
  내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 조국이 너무 딱하니 버리지를 못해요. 그러니까 붉은 산, 이게 더 가슴이 아파요. 남들이 보면 이렇게 비웃을지 모르겠어요.
 
  ‘아이고, 그것도 산이라고…. 그 황토산, 나무 하나 없고 사슴은커녕 토끼 한 마리 없는 그런 산이 뭐가 좋다고….’
 
 
  “붉은 산, 이게 더 가슴 아파요”


 
  하지만 나에게는 가슴 에이게 절절히 그리운 곳이 되죠. 흰 옷도 보세요. 그게 뭐 금의환향(錦衣還鄕)의 비단옷도 아닌 헤질 대로 헤진 무명옷을 입은 그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이 보고 싶어집니다.
 
  그러니 이 흙이 뭘까요? 이 흙에 대한 사랑이 뭔가 생각해보면 그게 토포필리아, 장소애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 밖에서 놀다 집에 돌아오면 항상 어머니가 옷에 묻은 흙을 털어주셨어요. ‘아이고 이 녀석 흙 묻혀왔어?’ 그러고 그 옷을 빨아주셨죠. 내 옷에 흙이 묻었다는 이야기는 내가 흙과 놀고 왔다는 이야기예요. 친구와 함께 놀았든 혼자 놀았든 어린 저는 흙과 놀았어요. 그런데 요즘 아이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길을 걸으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엄지족이 된 아이들은 흙과 너무 멀어요. 흙하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요. 예전에 도시 아이들이 흙을 너무 모르니까 쌀이 벼에서 자라는 게 아니라 쌀나무에서 난다고 아는 아이도 있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요.
 
  우리가 해방 이후 70여 년을 살아오면서 제일 많이 잃어버린 게 뭘까요? 그 지겨운 농촌 떠나 서울 와서 다들 출세하고 우리 참 행복해졌죠. 그 과정에서 우리는 흙을 잃어버렸어요. 저 황토 흙의 우리 산, 그 흙이 우리가 먹을 풀, 우리 나물들, 곡식들, 우리의 생명을 이어가게 해줄 것들을 키워냈어요. 식물, 동물, 벌레, 인간 모두 흙이 없으면 죽어요.
 
  그런데 그 흙을 언제 밟아봤나 싶어요. 어딜 가나 다 아스팔트가 깔려 있고….
 
  대체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된 걸까요? (계속)⊙

 

 

 

 

 

12. 땅 이야기- 디아스포라와 어머니, 황토방


“앉을방아에서 찧어 먹던 호밀, 보리 다 어디로 갔습니까?”


 
⊙ 日 ‘기미가요’에 드러난 침략의 노래… 돌멩이·모래가 바위·이끼 꿈꿔
⊙ 韓 ‘정석가’ ‘서경별곡’… 부정·죽음 앞세운 희망·생명 꿈꿔
⊙ “우리처럼 당하고 찢기고 힘든 고개를 넘어가면서 선진국 된 나라, 없어요”
⊙ “고향서 내쫓긴 우리가 남의 가슴 못 안 박고 살아 이렇게 사는 겁니다”
⊙ “끝없는 생명 만드는 게 흙, 죽은 생명이 흙을 통해 再生”

[ 월간조선, 김태완 기자, 2022년 12월호 ]

 


  # ‘기미가요’, 비과학적인 상상에 의한 침략의 노래
 

 


  남의 나라, 특히 우리와 가까운 일본의 국가(國歌)와 우리 국가를 한 번 비교해 봅시다.
 
  일본에서도 ‘기미가요’(일본어: 君が代 きみがよ·군주의 치세)를 막 부르지 못합니다.
 
  “19세기에 ‘기미가요’를 불러가면서 아시아를 침략했으니 부르지 말자, 일장기를 걸지 말자!”
 
  우리를 비롯한 아시아에서 그렇게 요구하는 게 아니라 일본 내부에서 나오는 목소리예요. 사실 ‘기미가요’라는 건 일본의 고전 단가 모음집인 《만엽집》에 나오는 그냥 사랑 노래인데 그걸 천황을 받드는 노래로 만든 거예요. ‘기미(君/きみ)’라는 건 그냥 사랑하는 그대를 얘기하는 건데 거기에 천황을 빗댄 거죠.
 
  君が代は                님의 치세는
  千代に八千代に     1000대에 8000대에
  細石の                   작은 조약돌이
  巖となりて            큰 바위가 되어
  苔の生すまで        이끼가 낄 때까지
 
 
  사랑의 노래가 침략의 노래로
 


  님이 다스리는 이 치세가, 또는 님이 살고 있는 이 시대가 한 대(代)만 돼서는 안 된다, 1000대 아니 8000대까지 가라(千代に 八千代に)는 영원히 이어지라는 말이죠. 우리가 이야기하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과 같아요.
 
  1000년, 8000년이 길고 지겹다고요? 그런데 그다음 가사는 더 기가 막힙니다. ‘흙도 아니고 돌멩이가 바위가 될 때까지’ ‘다시 그 바위에 이끼가 끼도록 영원하옵소서’라고 노래합니다.
 
  이게 과학적으로 맞는 얘기예요? 돌이 바위가 될 수 있나요? 모래가 어떻게 바위가 되며, 설사 된다 한 들 모래가 바위가 된 것만도 끔찍한데 그 바위에 이끼가 끼는 것까지 상상을 합니까. 비과학적이죠. 우리하고는 달라요. 우리는 산이 닳아 모래가 되어 없어지는데, 일본은 돌멩이를 바위로 만들어서 그때까지 영원하자고 하니까 똑같은 영원이지만 우리처럼 부정적인 것을 전제로 한 영원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을 영원으로 했어요. 바로 침략(侵略)의 노래인 것이죠. 작디작은 모래가 바위가 된다고 생각했으니 한국을 먹고 중국을 쳐들어가고, 작은 일본이 점점 크게 확장되는 거예요.
 

  얼마 전만 해도 우리가 일본과 얼마나 가깝게 지냈어요. 그런데 자꾸 헌법을 뜯어고치겠다,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 참배를 간다고 하니까, 우리가 이렇게 말하며 일본을 경계하는 겁니다.
 
  “아이고, 얘들 또 돌멩이, 모래가 바위 되려고 하는구나. 그렇게 되면 우리가 억울하게 되겠구나.”
 
  지금 우리 살기도 바쁜데 왜 반일(反日)의 기치를 들겠어요? 2011년 쓰나미 왔을 때도 우리가 일본을 도와줬잖아요. “힘내라” 하면서 아이들이 저금통 깨서 성금 모아 보내고 했잖아요. 글쎄 이런 좋은 이웃으로, 그냥 모래로 살지 그걸 바위로 만들겠다고 야단들이에요, 지금.
 
 
  # 부정 앞세운 희망·생명 노래한 한국인
 

《악장가사》 등에 실린 고려가요 ‘정석가(鄭石歌)’.


  우리 ‘애국가’ 가사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는 부정적 영원의 이미지가 어느 날 갑자기 그냥 생긴 것이 아니라 고려 때부터 똑같은 발상의 노래가 있어요.
 
  조선 초기에 구전(口傳)되던 고려가요들을 모아 한글로 기록한 책 《악장가사(樂章歌詞)》 《악학궤범(樂學軌範)》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 등에 실린 고려가요 ‘정석가(鄭石歌)’ 가사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삭삭기 셰몰애 별헤
  구은 밤 닷 되를 심고이다.
  그 바미 우미 도다 삭나거시아
  유덕(有德)신 님을 여와지이다.’
 
  (사각사각 가는 모래 벼랑에/ 구운 밤 닷 되를 심습니다// 그 밤이 움이 돋아 싹이 돋아나야만/ 유덕하신 임을 이별하고 싶습니다.)
 
  아주 가느다란 모래가 있는 벼랑에, 그냥 밤도 아니고 구운 밤 다섯 되를 심어 놓고, 그 밤이 움이 돋아 싹이 나면 님과 이별하겠다는 말이니까, 절대 헤어지지 않겠단 이야기지요. 흙이 아닌 모래, 그것도 벼랑에 있는 모래니까 습기가 하나도 없어요. 제대로 된 씨를 심어도 싹이 트지 못할 그곳에 구운 밤을 갖다 심는다는 건 부정적인 가정(假定)이죠. 같은 영원을 가정하는 말이라도 같은 노래에 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므쇠로 한쇼를 디여다가
  슈산(鐵樹山)에 노호이다.
  그쇠 초(鐵草)를 머거아
  유덕(有德)신 님을 여ㅣ와지이다.’
 
  (무쇠로 큰 소를 만들어다가/ 쇠로 된 나무가 있는 산에 놓습니다// 그 소가 쇠로 된 풀을 먹어야/ 유덕하신 임을 이별하고 싶습니다.)
 
  철로 된 나무가 있는 산에 무쇠로 만든 큰 소를 놓아서, 그 소가 철로 된 풀을 먹을 때까지 영원하자는 겁니다. 옛날부터 그랬어요. 이 ‘정석가’와 ‘서경별곡’에 공통으로 들어가 있는 후렴구가 ‘구스리 바회예 디신 긴힌 그츠리잇가’인데, 풀이하자면 이렇습니다.
 
  ‘구슬이 바위에 떨어져서 깨어질 수는 있어도, 그 구슬을 엮어 놓은 끈이야 끊어질 리가 있겠습니까.’
 
  이게 우리나라의 부정을 앞세운, 죽음을 앞세운 희망과 생명이에요.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은 끝없이 살아가는 이 세상 속에서 그다지 욕심을 부리지 않았어요. 현실은 항상 죽음을 전제로 한 행복이고 죽음에서 벗어나는 것뿐 그렇게 욕심이 큰 민족이 아니었던 거죠.
 
 
  # 남에게 폐 안 끼치고 이만큼 사는 나라는 우리가 유일
 


  그래서 지금도 난 늘 이야기를 해요. 한국 사람이 자랑할 것이 별로 없다고요. 세계적으로 지금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들이 얼마나 많아요. 국민소득으로 따져도 잘 해봐야 우리는 세계 10위에서 13위를 왔다 갔다 하니까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들이 10개 나라도 넘는 거예요. 그 나라들보다 우리가 못살고, 노벨평화상 하나를 빼고는 학술 분야에서 노벨상을 탄 사람도 없잖아요. 그러나 우리는 남의 민족 눈에서 피눈물 나게 하고 그 가슴에 못질한 적도 없어요. 남을 침해하지 않은 민족 가운데 우리만큼 사는 민족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라! 정말이에요.
 
  프랑스 개선문(凱旋門), 그거 아프리카에서 콩고니 뭐니 다 식민지로 만들고서는 자랑스럽다고 만든 문이잖아요. 일본은 제국주의 시절에 이웃 국가들을 모두 침탈하고 심지어 대만까지 먹었어요. 그 이웃들이 흘린 눈물이 얼마겠어요. 그러니까 지금 G7, G10 국가에 들어 있는 나라들은 전부 남의 가슴에 못질하고, 거기서 빼앗은 재산으로 지금 선진국 소리를 듣지, 우리처럼 당하고 찢기고 힘든 고개를 넘어가면서 어렵게, 어렵게 살면서 선진국이 된 나라는 없어요.
 
  우리 지금 어때요? 한국에 스마트폰 안 든 사람이 있어요? 심지어 초등학교 아이들도 그걸 들고 다니니까 으레 그런가 보다 하지만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외국에서는 아직도 와이파이를 아이들이 쓰는 경우가 없어요. 이웃 일본만 해도 광케이블이 아니라 ISDN이 일반적이에요. 우리는 집집마다 광케이블이 안 들어가는 곳이 없는데….
 
 
  지금이 좋은 세상 맞아요?
 


  내가 지금 우리나라를 칭찬하고 자랑하자고 꺼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앞으로 가기 위해 뒤를 돌아볼 때 정말 광복 후 70여 년 동안 여기까지 우리가 제대로 왔느냐를 묻는 거지요. “우리가 하는 자랑이 진짜 자랑일까?” 이걸 묻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이만큼 살게 되었어요. 나이 많은 분들은 흔히 그러시죠. “아이고 좋은 세상 됐다, 우리 옛날 연탄불 피울 때는 말이지 가스 때문에 사람도 죽고 그랬어.” 그러곤 자식들 향해 “얘야, 좋은 세상 왔다”고요. 그러는데 정말 좋은 세상이 왔어요? 지금이 좋은 세상 맞아요?
 
  지난 70여 년 동안 우리가 어떻게 지냈느냐 하는 건 자랑스러운 것이죠. 하지만 앞으로 70년을 다시 또 나아가려면 이대로는 안 돼요.
 
  고향서 내쫓긴 사람들이 그래도 남의 눈에 피눈물 안 나게, 남의 가슴에 못 안 박고 올바르게 살았기에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우리만큼, 아니 우리보다 더 잘사는 다른 사람들, 다른 민족들은 다 전과자들이에요. 어디 가서 이야기하면 바로 “너희 몇 년에, 몇 세기 때 우리에게 와서 착취했던 나쁜 사람들이야”라고 지탄받지만 우리는 그런 게 없잖아요.
 
  1960년대 월남전 당시 파병 가서 좀 나쁜 짓을 하긴 했어요. 하지만 그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가 한 게 아니죠. 우린 그때 워낙 못사니까, 돈을 받고 파병을 간 거예요. 사실은 눈물겨운 거지, 우리가 남을 침략한 게 아닙니다. 그래도 어쨌든 남의 나라에 쳐들어가서 남이 눈물 흘릴 일을 만든 건 월남전 정도고 그걸 제외하면 우리는 남에게 못할 짓 하지 않았어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역사가 없습니다. 이런 민족이 드물어요.
 
  남의 나라 침공해서 지배했던 사람들은 지금 다들 민족이 해체되고 없어졌어요. 중국의 55개 소수 민족 중 자기 조국을 가지고 있는, 자기 민족만의 독립된 국가를 가지고 있는 민족은 몽골족과 조선족밖에 없어요. 이건 대단한 거죠.
 
 
  #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것도 좋은 것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은 193개국 732만5143명(2021년 기준)에 이른다. 지금은 한국이 살 만해서 이민이 줄고 있다.


  디아스포라(diaspora)는 희랍어입니다. ‘디아(dia)’는 방향을 뜻하는 겁니다. 사방(四方)을 말하죠. 그리고 ‘스포라(spora)’는 씨앗, 즉 씨앗을 뿌리는 것을 말해요. 우리가 씨를 뿌릴 때 한군데에 모아 뿌리는 것이 아니라 사방에 넓게 뿌리지요.
 
  우리 민족도 그래요. 사방으로 도망갔지요. 지금 저 러시아부터 시작해 미국, 유럽 온갖 곳에 한국 사람 안 간 곳이 없어요. 아프리카 오지에 가도 뻥튀기와 번데기를 파는 한국 사람이 있다잖아요. 독일에 광부, 간호사로 가서 정착한 한국 사람도 있고, 열을 가하지 않아도 달걀이 그냥 익어버린다는 그 열사(熱沙)의 땅 중동 지역에도 한국인들이 진출해 있죠. 우스개로, 냉탕 온탕에 다 있는 거예요. 저 시베리아의 냉탕부터 중동의 온탕까지 그곳들을 왔다 갔다 하면서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되었어요. 한국인의 디아스포라지요. 전 세계에 한국인의 씨앗을 뿌린 겁니다.
 
  지금 한국 인구가 5000만이 넘는데,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은 193개국 732만5143명(2021년 기준)이에요. 이 통계를 보면 동북아시아부터 아프리카까지 모든 곳에 다 가 있죠. 지금은 한국도 살 만하게 되었으니까 이민을 별로 안 나가지만요. 내가 가끔 농담 겸 하는 이야기로, 정치를 못해도 그것이 한국 사람에게 득이 될 때가 있다고 해요. 정치를 잘 해서 살기 좋으면 이민 갔겠어요?
 
  어렸을 때 민들레 홀씨가 하얗게 피어나면, 그 하얀 솜털 봉오리를 꺾어 들고 입김을 세게 불어 하늘로 날려 보낸 기억이 있을 겁니다. 누구라도 그 하얀 솜털 봉오리를 보면 불어 날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돼요. 어린아이의 장난이라고 해도 그건 생태계에 도움을 준 거예요. 하나의 식물이 가까이에 뭉쳐 있으면 해로워요. 어떤 이유로 그 지역의 생태계가 위협받으면 전체가 몰살되는 위험이 있잖아요. 그 식물에 위험한 돌림병이 돌면 그 돌림병이 퍼져 한 종(種)이 사라질 수 있어요. 그래서 멀리 퍼져나가기 위해 민들레는 하얀 깃털을 달았고, 단풍나무 씨앗이나 소나무 씨앗은 프로펠러를 닮은 외날개를 달고 있어요. 모체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질 수 있도록 말이죠.
 


韓民族 디아스포라는…
 


  한민족 분산의 역사는 크게 네 시기로 구분된다. 첫 번째 시기는 1860년대부터 1910년까지로 이 시기에는 구한말의 농민, 노동자들이 기근, 빈곤, 압정을 피해 국경을 넘어 중국, 러시아, 하와이로 이주했다.
 
  두 번째 시기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다.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궁핍에 내몰린 우리 민족은 1920년대에 접어들어 자신이 경작하던 땅을 빼앗기자 어쩔 수 없이 이농민이 되어 만주를 비롯한 해외로 이주했다. 1910~1918년에 걸쳐 진행된 식민지 정부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조선 농민의 소작화가 이루어지고 일본인 지주와 동양척식회사 등이 조선 농민을 체계적으로 착취하자 궁핍해진 농민들은 만주로 이주했던 것이다.
 
  게다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왕도락토(王道樂土)’ ‘오족협화(協和)’ ‘일본의 생명선’이라는 선전 문구 아래 식민지 건설의 환상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중국 동북 지역을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와 식량기지로 활용하고자 했던 일본은 1년에 1만 호씩 만주로 이주시킨다는 계획 아래 조선인들을 집단으로 이주시켜 집단농장을 형성하게 하여 식량 증산을 꾀했다.
 
  일본은 만선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해 한인이민 사업을 담당하게 하고 1939년부터 해마다 조선에서 1만 호를 이주시키기로 계획했다. 그리하여 만선척식주식회사에 의해 이주한 한인 농가는 1939년 말 당시 1만3977호, 인구수는 6만5065명이었다. 이후 중일전쟁(1937)과 태평양전쟁(1941)으로 이주 추이는 줄었으나, 약 26만 명의 한인이 이 시기 조선총독부와 관동군이 협력해 강행한 국책이민 형태로 만주에 이주했던 것으로 추산된다. 요컨대 오늘날 대부분의 조선족 인구가 일제 식민지 통치기간에 이주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세 번째 시기는 1945년부터 1962년까지로 이 시기에는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발생한 전쟁고아, 미군과 결혼한 여성, 혼혈아, 학생 등이 입양, 가족 개혁, 유학 등의 목적으로 미국 또는 캐나다로 이주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시기는 1962년부터 현재까지로 이때부터는 정착을 목적으로 한 이민이 이루어졌다.
 
  (장유정의 〈20세기 전반기 한국 대중가요와 디아스포라〉, 윤인진의 《코리안 디아스포라》 중에서 인용)
 


  워털루 전쟁과 로스차일드 가문 이야기
 

유대인은 나라 없이 떠돌았던 오랜 디아스포라를 겪으며 가난한 동족의 생존을 보살피기 위해 유대 회당에 모금함을 두고 모으는 구호 기금 ‘쿠파’와 이방인을 돕기 위한 ‘탐후이’ 등 다양한 자선의 방식을 만들어냈다. 오늘날에도 미국 인구의 2%인 유대인은 매년 발표되는 50대 기부자 명단의 평균 30% 이상을 차지한다.  


  전 세계로 가장 많이 흩어져 있으면서도 불행하지 않고, 노벨상을 가장 많이 탄 민족이 유대민족입니다. 디아스포라가 이 유대인에게서 나온 말이에요.
 
  진위(眞僞)가 의심스럽긴 하지만,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 워털루 전쟁과 로스차일드 가문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 유럽에도 국채(國債)와 주식을 거래하는 시장이 있었는데, 전쟁의 승패에 따라 각 나라의 국채 가격은 오르락내리락했겠죠.
 
  전쟁의 승패에 대한 정보를 남들보다 하루만 빨리 알아도 엄청난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어요. 그것을 가장 많이 알고 있던 이가 각국 정부나 군대가 아닌 딱 로스차일드 가문(Rothschild Family)의 네이선 로스차일드(Nathan Mayer  Rothschild·1777~1836)였다고 해요. 당시엔 전화나 전보가 지금처럼 활성화되어 있지 않으니 전서구(傳書鳩)를 띄워서 정보를 주고 받았는데, 로스차일드 가문은 널리 퍼져 있어서 가문끼리 오가는 비둘기가 있었던 거죠. 패밀리 네트워크예요.
 
  워털루 전투의 승패가 결정되던 날은 폭우가 내렸는데 그 비를 뚫고 로스차일드 가문의 전서구가 도착했고, 영국의 승리를 알게 된 로스차일드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영국의 국채를 팔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동요하는 거예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가문 사람들끼리의 패밀리 네트워크 덕분에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로스차일드가 영국 국채를 팔기 시작했다? 게다가 로스차일드가 누구예요. 금융업계의 왕과 같은 사람이잖아요. 사람들이 다들 “아이고, 영국이 졌구나!” 생각하면서 가지고 있던 영국 국채를 죄다 내다 팔았어요.
 
  그러자 로스차일드는 사람들이 투매(投賣)해서 가격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국채를 남몰래 싹 사들여 엄청난 이익을 취했어요. 이때 로스차일드가 번 돈이 현재 가치로 6억 파운드가 넘는 돈이었다고 합니다. 이 로스차일드가 유대인이에요.
 
 
흩어져 이 녀석들아. 하나씩 흩어져
 

  다섯의 아들을 둔 어떤 사람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개의 화살을 끈으로 묶어놓고 아들들을 불러 모았어요. 그런 후 화살을 각자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며 “화살을 부러뜨려 봐”라고 하니 아들들은 손쉽게 화살을 부러뜨렸겠죠? “두 개 부러뜨려 봐” “세 개 부러뜨려 봐” 하니 아들들은 벌써 알고 있었어요. 그런 옛날이야기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속으로 ‘아이고 아버지, 그거 다 아는 얘기예요’라고 생각하며 세 개, 네 개까지 하는데, 다섯 개까지는 못 부러뜨리는 거예요. 그래서 아들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알았어요, 아버지! 오 형제 단합하고 뭉쳐서 잘 살겠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대뜸 “야 이 바보들아, 바보들아!” 합니다. 아버지가 말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던 거죠.
 
  “너희 힘이니까 못 꺾지. 더 힘센 사람이 오면 다섯 개도 쉽게 꺾어. 뭉치면 죽는 거야. 흩어져! 이 녀석들아. 하나씩 흩어져! 하나는 독일에 가고 하나는 프랑스에 가면 독일과 프랑스가 싸워 어느 한쪽이 그 나라의 패망과 함께 사라져도 하나는 살아남잖아. 두 개 다 부러뜨릴 수는 없어. 전 세계로 흩어져. 그래서 그중의 어느 하나만이라도 살아남으면 우리가 다 사는 거야.”
 
  여태까지 우리는 뭉쳐야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했지만, 흩어지면 살고 뭉치면 죽는 게 맞는 말이에요. 디아스포라가 얼핏 보기에 불행해 보이더라도 유대인들이 세계 각국에 퍼졌기 때문에 노벨상도 각 나라의 여러 환경 속에서 탈 수 있게 됐던 거예요. 이스라엘 본국에 사는 유대인 중에서는 노벨상을 탄 사람이 별로 없어요. 남의 나라로 디아스포라 되어서 그 결과로 《안네의 일기》 같은 슬픈 글을 쓰게 되기도 했지만, 하느님이 전 세계로 파종을 하신 겁니다.
 
 
  디아스포라, 한국의 얼과 마음을 전 세계에 뿌려
 

독일 파독광부와 간호사야말로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대표적인 사례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1964년 12월 10일 서독을 방문해 파독광부와 간호사를 만나기 위해 본에서 1시간 거리의 함보른 광산에 입장하고 있다. 


  한국 사람이 지금까지 고통스럽게 살면서,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프리카 오지에 간 게 한국인을 파종한 거예요.
 
  “너희는 견딜 수 있어. 아프리카는 물론 그 어떤 곳에 가서도 견딜 수 있어. 그러니 한국의 얼과 마음을 전 세계에 뿌려!”
 
  이렇게 하느님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지만 디아스포라는 가슴 아픈 거예요. 그러나 나쁜 면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더구나 요즘과 같은 글로벌한 세계에서 메르스, 코로나19 같은 무서운 병이 한국에 들어와 한반도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 모두 죽는다고 해도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우리 동포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곳은 바이러스의 영향을 받지 않을 테니 살아남아요. 자식을 낳아서 한집에 오글오글 모여 사는 사람들은 ‘모’ 아니면 ‘도’예요. 그러나 흩어져 있으면 절대로 안 죽습니다. 이게 국제고 글로벌 사회예요. 그러니까 내 민족, 내 나라를 사랑하는 애족, 애국심을 가진 채로 전 세계로 흩어져 사는 것이 사실은 좋은 거예요. 우리나라에도 좋은 거고.
 
  IMF 때 해외에 있는 동포들이 우리나라로 금을 보내줬던 것도, 해외에 나갔기 때문에 금융위기에 타격을 입지 않은 사람들이 국내의 동포를 도와준 거잖아요.
 
  롯데그룹을 보세요. 일본에서 시작된 회사가 한국으로 들어와서 아주 큰 기업이 되었지요. 일본에서 롯데를 처음 시작한 창업주도 한국에서 살지 못할 이유가 있어 일본으로 간 거지 처음부터 웅대한 포부와 모험심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갔겠어요? 지금 해외에서 살고 있는 우리 이민 1세대들은 다들 한국에서 탄압받고 땅을 빼앗기고 어떤 이유에서든 내 나라 내 땅에서 살지 못하고 쫓겨간 분들이지요.
 
  하지만 어때요? 그렇게 해외로 간 분들, 다들 그 나라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계세요. 그러니까 내가 이야기한 장소애(愛), 즉 ‘토포필리아(topophilia·장소를 뜻하는 topos와 사랑을 의미하는 philia의 합성어)’대로 여러분이 이 한국 땅, ‘붉은 산’을 벗어나면 죽는 줄 알면 이 이야기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어요.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온 우리가 그 붉은 산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지금은 황토방으로 갑니다. 흙은 변하지 않지만 바람은 움직여요. 이 땅은 그대로인데 한국 사람들, 특히 여성들은 많이 바뀌었어요.
 
 
  # 《80초 메시지 생각 나누기》- 어머니의 발
 

  내가 《이어령 80초 생각 나누기》(2014)라는 책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얼굴은 좀 험악하게 생겼지만 공부는 잘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취직시험을 보면 지필시험이나 서류 심사에는 늘 통과를 하는데 면접만 보면 떨어지는 거예요. 떨어지고 떨어지고, 마지막이다 생각했던 회사에서 또 떨어졌어요. 그러자 이 사람이 그 회사의 사장을 붙잡고, 이렇게 말합니다.
 
  “사장님, 회장님. 제게 홀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십니다. 제가 시험에 또 떨어지면 저희 어머니가 죽습니다. 제발 좀 제 사정을 봐서 따로 면접을 봐주세요.”
 
  애원을 하자 그 사장이 그 구직자의 얼굴을 가만히 보더니 말합니다.
 
  “혼자 사는 노모가 계셔?”
 
  “네, 예전에 청상과부가 되셔서 저 하나를 보고 여태 키우셨는데, 제가 이제 어머니를 봉양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 그러면 오늘 가서 어머니의 발을 씻겨드리고 오게. 그러면 내일 자네에게 다시 면접 기회를 주겠네.”
 
  이 젊은 구직자가 그 말을 듣고 집에 돌아가니 어머님이 이렇게 말해요.
 
  “너, 취직은 됐냐.”
 
  “아니요, 그런데 희망이 하나 생겼어요.”
 
  “뭔데?”
 
  “어머니 발을 씻겨 오면, 내일 재면접을 보게 해 주겠대요. 사장님하고 단둘이서 따로 또 한 번 면접을 보게 해 주겠대요.”
 
  이게 어머니의 사랑이었구나
 
  그러자 어머니는 반색하며 말합니다.
 
  “얘, 그거 어렵지 않다. 대야 갖다 놓고 얼른 씻겨라. 취직만 된다면 씻겨라.”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요즘 아이들 말로 변태라고 해도 할 말이 없지요. 무슨 발을 씻기라고 합니까? 그래도 그 모자는 절박하니까 사장이 시킨 대로 해요. 한데 어머니가 씻겨달라고 양말 벗고 내놓은 발을 보는데 아들은 기가 막히는 거예요. 그 발이 사람 발이 아니에요. 청상과부가 되어 어린 아들을 키우느라고 어머니가 그 발로 평생 얼마나 걸어 다녔겠어요. 땅을 얼마나 디디고 다녔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새끼발톱은 무지러져 까맣게 죽었고, 발등은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 있었어요. 아들도 어머니가 고생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 발을 자기 손으로 잡아보니 눈물이 그냥 쏟아져요.
 
  ‘이게 사람의 발이냐.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몇천 리를 걸으셨냐. 이게 어머니의 사랑이구나.’
 
  어머니의 발을 씻겨준 아들은 그다음 날 그 회사로 다시 찾아갑니다. 구직자를 기다리고 있던 사장이 물어요.
 
  “어머니의 발을 씻겨드렸나?”
 
  그러자 아들이 대답을 합니다.
 
  “네. 사장님께서 제게 어머니를 찾아주셨습니다. 저는 말로만 어머니를 사랑했지, 어머니의 발을 씻겨드리면서 비로소 어머니가 나에게 어떤 어머니인가를 알았습니다. 정말 좋은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저 취직 안 해도 됩니다. 감사 인사를 드리러 왔으니 이만 가겠습니다.”
 
  사장이 등을 돌린 그 구직자를 붙잡습니다.
 
  “여보게 이리 와, 자네 지금 면접 합격했네. 내일부터 와서 일하게.”
 
  이 이야기를 《80초 메시지 생각 나누기》에 썼더니 어떤 사람이 와서 저한테 그래요.
 
  “이 선생, 역시 당신 옛날 사람이오. 요즘 그런 발을 가진 어머니 없어. 그러니 그런 걸로는 면접 통과 못 하고 취직 못 해.”
 
 
  # 흙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찾아가는 곳-황토방
 

  도시를 보세요. 황폐한 붉은 산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흙과 함께 지내면서 흙에서 기운을 받아 살아왔는데, 지금 도시를 보면 그 흙 위로 모두 아스팔트가 깔려 있어요.
 
  아스팔트 아니면 돌이거나 돌 아니면 시멘트! 도심의 사무실만이 아니라 개인이 사는 집에도 여기저기 놓인 화분의 흙을 제외하면 흙이 없어요. 요즘은 다들 아파트에 사니까. 그러니 우리 자신들은 모르고 가는 것이기는 해도, 사람들이 흙을 찾아 황토방으로 가는 거예요.
 
  황토방에서 입는 옷은 황토색 옷이에요. 그 황토방에서 일괄 대여해주죠. 왜 하필 황토색 옷을 대여해줄까? 붉은 황토 산을 떠올리게 하는 색이니까 황토색 옷을 찜질복으로 대여해주죠. 거기에 가면 흙을 볼 수 있어요. 속까지 시커먼 흙구덩이….
 
  황토방에 가면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이 남녀노소 사이에 구별이 사라진다는 점이에요. 흙은 모든 것을 공평하게 끌어안죠. 그래서 흙 앞에 가면 다들 편안해집니다. 우리나라가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고 해서 그렇게 남녀를 구분하고 내외하는데도 시골에 가서 멍석만 펴 놓으면 그 자리의 주인이고 지나가던 나그네고 뭐고 그냥 전부 와서 앉고 드러누워 낮잠 자고 하늘 보고 그랬거든요. 옆에 누가 있든 말든.
 
   
흙바닥에 멍석 깔아놓으면…
 

  전설처럼 전해져 오는 얘기가 있어요. 6·25사변이 났을 때, 피란민 중 한 사람이 어느 집 마당에 멍석을 깔고 누워 잠을 청하는데 웬 청년 하나가 옆에 와서 자더래요. 그런가 보다 하고 밤새 잘 자고 일어나 아침에 보니 같이 잠을 잔 청년이 북에서 내려온 인민군이었답니다. 무서운 적군(敵軍)이었던 거죠. 피란민들은 그 인민군을 피해 도망가던 중이었잖아요. 적으로 대치해 서로 죽고 죽이던 사이도 시골 흙바닥에 멍석을 깔아놓으면 옆에 와서 자고 가요. 그것에 관해 누구도 말하지 않아요. 이게 우리의 흙이에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의 그 흙! 바람은 그 흙을 어떻게 했어요?
 
  끝없는 생명을 만드는 게 흙이에요. 흙에서 생명이 자라기도 하지만 죽은 생명이 흙을 통해 또 다른 생명으로 재생되기도 하죠. 자연계 순환의 고리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흙입니다. 흙에서 자란 식물을 먹고 생활하던 동물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서 다시 다른 생명을 위한 거름이 됩니다.
 
  흙이 없으면 그 재생의 고리도 끊어져요. 그 중요한 흙을 오늘날 우리는 아스팔트로 시멘트로 덮어버립니다. 아스팔트와 시멘트 아래의 흙은 생산을 하지 못하니 죽은 흙과 마찬가지입니다. 고속도로가 생기면 그 고속도로의 길이와 너비만큼 흙이 생산할 수 있는 풀, 나무, 잡초, 곡식… 이런 생명이 줄어드는 겁니다.
 
 
  흙이 죽어가고 있다
 

  지금 그 흙이 죽어가고 있어요. 도시란 흙을 죽이는 문명입니다. 농촌을 죽여서 도시가 만들어지면 그 농촌에서 살던 사람들이 도시로 서울로 이농(離農)해 출세하고, 그 출세를 부러워하는 이 문화가 우리의 번영을 가져온 도시 문화예요. 스스로 흙을 파서 우리가 먹을 양식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공산품을 만들어 수출해 돈을 벌어 외국의 밀가루를 사 와서 연명하고 있지요, 지금 우리가…. 대량 생산에 적합하게 유전자 변형을 한 그 밀가루를요.
 
  우리가 옛날에 앉을방아에 찧어 먹던 호밀, 보리 다 어디로 갔습니까?
 
  그러니까 무역을 해서 이만큼 잘살게 되었다는 말은 그만큼 흙과 멀어졌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흙과 떨어졌어요. 분리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그 ‘흙’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그 흙의 의미를 알자는 말이 옛날 브나로드 운동처럼 농촌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곡식 지어 빻아 먹자는 말이 아닙니다. 같은 도시 생활을 해도 흙이 뭔지를 알면 생명이 뭔지를 알게 됩니다. 여태껏 무심하게, 별생각 없이 그냥 가고 싶어지니까 갔던 황토방. 지금부터라도 그 황토방에 가면 왜 마음이 편안해지고, 우리가 굳게 지키던 규범마저 한 꺼풀 느슨해져 남녀구별도 없어지나를 생각해보세요.
 
 
  # 한국의 방 문화
 

  한국엔 외국엔 없는 묘한 문화가 하나 있어요. 사적인 공간은 ‘집’이에요. 공적인 것은 퍼블릭(public) 공공(公共)의 공간이죠. 그런데 그 중간에 ‘방’이라는 게 있어요. 빨래를 보세요. 사적 공간인 집에서 혼자 빠는 빨래가 있고, 동네의 세탁소라는 공적 공간에 맡기는 빨래가 있어요. 그런데 빨래방은 여럿이 가서 각자의 빨래를 해요.
 
  컴퓨터도 그래요. 집에서 혼자 컴퓨터를 써서 글도 쓰고 웹 서핑도 하고 게임도 해요. 회사에 나가서 컴퓨터로 공적 업무를 봐요. 그런데 PC방이 또 있어요. 노래를 부르려면 집에서 혼자 부르거나 극장의 무대에서 부르는데 한국 사람들은 집도 아니고 극장도 아닌 노래방에서 노래를 제일 많이 불러요. 이런 거 보면 한국 사람들 참 묘한 사람들이에요.
 
  이 방 문화가 하나 더 만들어낸 게 ‘황토방’이에요. 자연도 아니고 도시도 아닌 중간 지점이죠. 도시 한가운데에 만들어진 인공의 자연이 황토방. 사람들이 거기 모여들어서 쉬는 거예요. 이 ‘황토방’은 현재 우리나라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중국 사람들이 보면 “야, 희한하다”, 일본 사람들이 와서도 “와, 희한하다”, 이렇게 감탄하고 좋아하니까 이게 외국까지 진출했어요. 황토방은 아니지만 찜질방이.
 
  미국에 있는 한국식 찜질방 역시, 아마 한국 교민이 만들었겠죠? 여기에 미국 사람도 와서 한국 사람들이 찜질방 즐기듯 즐기는 거예요. 사람들이 행복해 보여요. 이런 방에서는 반드시 먹는 게 있어요. 그러니까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이 다들 똑같은 헐렁하고 성별 차이 없는 옷을 느슨하게 입고 한방에 앉아 같은 음식을 먹는 거예요. 그것도 자발적으로. 이렇게 글로 써놓고 보면 참 희한한 일이지 않아요? 옷이야 주니까, 꼭 그 옷을 입어야 하지만 그렇다 쳐도 말이에요. 사람들이 찜질방 가면 꼭 하는 게 하나 더 있어요. 수건의 양 끝을 돌돌 말아가지고 ‘양머리’라 이름 붙인 수건 모자를 꼭 써요. 이건 규칙도 아니고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거든요. 그런데 다들 그러고 앉아서 삶은 계란을 까먹고 식혜 마시면서 놀아요. 참 묘한 문화죠. 방 문화라는 게.  (계속)⊙

 

 

 

 

 

 

 

 

 

 

 

 

 

 

 

 

 

 

 

 

 

 

 

 

 

 

 

 

 

 

 

 

 

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⑬ 지렁이 울음소리
밟히고 또 밟히면서 흙·생명 만드는 지렁이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트위터페이스북기사목록프린트스크랩글자 크게글자 작게
⊙ 왜 우리 농촌에서는 지렁이 울음소리를 들었을까?
⊙ 날 키운 흙 떠나는 건 슬픈 게 아냐… 우리 씨가 퍼져야
⊙ 흙은 국토의 개념이고 내 생명의 개념, 민족의 개념
⊙ 흙에 누워서 별을 봤을 때 듣던 소리… 지렁이가 우는 소리
⊙ 역사는 ‘밟은 자’의 역사가 아니라 ‘밟힌 자’의 역사

[ 월간조선, 김태완 기자, 2023년 1월호 ]

[편집자 註]
이어령 선생이 타계한 지 1년이 되어간다. 선생은 생전(生前) 시리즈 ‘한국인 이야기’의 문패에다 ‘끝나지 않은’이란 수식어를 직접 붙였다.
생전 선생은 당신이 남긴 굵직한 저작물과 수많은 강연에서 언급한 ‘한국인 이야기’를 비록 당신이 떠나도 계속 이어가기를 희망하였고 관련 원고와 저서의 일부를 《월간조선》에 전하였다. 또 선생이 남긴 바탕 위에 편집자의 생각을 보태도 된다고 허락하였다. 아주 조심스럽게 선생이 남긴 큰 발자국을 따라 연재를 이어가고자 한다. 선생에게 누(累)가 되지 않기를 소망할 뿐이다.

이어령 선생의 저술활동 50년을 기념하는 ‘만남 50년’ 행사가 2009년 11월 27일 오후 5시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열렸다. 펜을 쥔 자신의 손 모양을 담은 기념조각을 증정받은 이어령 선생이 활짝 웃고 있다. 사진=조선DB
  # 지렁이 울음소리
 
  여러분은 지렁이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나요? 2015년 무렵 강연을 할 때, 지렁이 울음소리를 녹음해서 거리로 나가 사람들에게 무작위로 들려주고 무슨 소리 같으냐고 물은 적이 있어요.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지요. 풀벌레 울음소리 같다는 사람, 바람소리 같다고 하는 사람, 귀뚜라미 소리라고 하는 사람, 또는 전자기기의 전파음 같다고 하는 사람 등등 다양한 답이 있었지만 지렁이 울음소리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뭐라고 딱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는, 윙윙~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잉~잉~ 하는 것 같기도 한 소리거든요. 나이가 아주 많은 시골 어르신에게 들려주었으면 “지렁이 울음소리야”라고 답을 했을지도 모르죠.
 
  옛날 사람들은 한밤중에 들려오는 그 소리를 지렁이 울음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땅강아지가 우는 소리예요. 과학적으로 발성기관도 조음기관도 없는 지렁이는 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지렁이 생김새를 보세요. 어느 한구석이라도 소리 낼 수 있게 생겼나? 그런데도 옛날 사람들은 깊은 땅속에서 지렁이가 운다고 생각했어요. 지렁이는 울지도 않고 소리 낼 방법도 없는데 왜 우리 농촌에서는 지렁이 울음소리를 들었을까요?
 

“저 알 수 없는 지렁이 울음소리를 듣고 싶은 간절함… 깊은 땅속 흙의 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사진=게티이미지
  저 알 수 없는 지렁이 울음소리를 듣고 싶은 간절함… 깊은 땅속 흙의 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우리 농촌의 저 땅, 혹은 흙 아래에서 울려오는 소리. 숲에서 울려오는 것도, 하늘에서 울려오는 것도 아닌, 땅속에서 나오는 저 소리, 그게 지렁이 울음소리예요.
 
  그런데 땅속에서 소리가 울려 나오려면 사실은 지진밖에 없어요. 땅강아지도 땅 위에서 울었지 땅속에서 울지는 않았을 거거든요. 그런데도 옛날 사람들은 그 땅강아지 소리를 굳이 지렁이의 울음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흙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 말이죠. 지렁이가 있는 땅은 살아 있는 땅이죠. 그러니까 지렁이가 우는 소리는 흙을 만드는 소리예요.
 
  우리 속담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라는 게 있어요. 그 많은 벌레 중에 왜 하필 지렁이였을까요? 우리 옛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지네도 있고, 흔히 보는 메뚜기, 여치, 방아깨비, 귀뚜라미… 농촌에 가면 벌레가 얼마나 많아요. 그런데 그 속담에 등장하는 것은 다름 아닌 지렁이예요. 이유가 뭘까요?
 
  먹이사슬의 제일 밑바닥이 지렁이예요. 지렁이는 눈도 없어요. 그래도 몸으로, 피부로 빛을 느껴서 그 감각으로 빛을 피해 땅속으로 들어가죠. 지렁이는 암컷, 수컷도 없어요. 한 몸에 암수가 다 있어요. 그리고 지렁이는 모든 동물의 밥이에요. 하늘을 나는 새부터 물속 물고기까지. 우리가 낚시할 때 낚싯밥으로 지렁이를 쓰잖아요. 그러니까 먹이사슬의 제일 하층에 있죠.
 
 
  아낌없이 주는 지렁이
 

“옛날에 멍석 펴놓고 말이야, 흙에 누워서 별을 볼 때 듣던 소리야. 지렁이가 우는 소리야. 저것은 땅강아지 소리 아니야. 내가 들었어. 저 지층(地層) 깊숙한 곳에서 지렁이가 울었다고.” 사진=게티이미지
  두더지는 땅속에 살아요. 두더지가 왜 굳이 땅속에서 살게 되었을까요? 눈이 보이지 않아서 땅속으로 들어간 건지, 땅속에 들어갔기 때문에 눈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제 두더지는 영영 땅 위로 못 올라와요.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약하니까.
 
  땅 위에서 살지 못하는 약한 것들이 새가 되어 하늘 위로 도망쳤어요. 하늘로 도망치지도 못하고 땅 위에서 살 만큼 강하지도 못한 것들은 땅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러니까 땅속 동물은 가장 약한 생명체예요. 그런데 실은 이게 역설적으로 생명력이 가장 센 생명체이기도 해요. 가장 약한 존재지만 가장 생명력이 강한 존재인 거죠.
 
  땅속에 사는 두더지는 지렁이가 없으면 죽습니다. 그 깜깜한 땅속에서 지렁이밖에 먹을 게 없잖아요. 눈이 안 보여서 땅 위로 나갈 수도 없는 두더지가 땅을 파봐야 지렁이 말고 나올 게 뭐가 있어요. 그 두더지가 땅을 파서 지렁이가 나오면 그걸 먹는데 한번에 다 먹지 않아요. 두더지가 지렁이 목장을 운영하는 거죠. 반쯤 먹고 그 목장에 던져두는 거예요. 그러면 지렁이는 알아서 먹힌 부분을 재생해내며 살아나거든요. 세상에 이런 생명력 강한 동물이 또 있을까요? 놀라운 거죠.
 
  지렁이가 동물 먹이로서만 이렇게 이로운가요? 아니에요. 식물들도 지렁이가 없이는 못 삽니다. 가랑잎이 땅으로 떨어졌는데 지렁이가 없으면 그건 그냥 마른 가랑잎으로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지렁이들은 구멍을 파서 땅 위로 나와 떨어진 가랑잎을 먹어요. 그리고 소화해서 하루에 자기 몸만큼의 배설물을 내놔요. 그게 흙을 만드는 겁니다. 가랑잎을 먹어서 흙을 만들고, 그 흙에서 식물이 자라요.
 
 
  # 박완서 소설 〈지렁이 울음소리〉
 

등단 40주년이 되던 2010년 1월 박완서 소설가. 사진=조선DB
  소설가 박완서 선생이 1973년 《신동아》에 발표한 단편 〈지렁이 울음소리〉라는 작품이 있어요. 이 작품은 그 얼마 후 잡지 《문학과 지성》에 재수록됐어요. 비로소 ‘작가’로서 대접받기 시작한 소설인 셈이지요.
 
  소설 속 화자인 ‘나’는 ‘욕쟁이’라는 별명을 가진 스승과의 추억이 있습니다. 광복 후 미군정 시절, 국어를 가르친 이태우 선생은 ‘내’가 다니던 여학교 선생이었는데 아니꼬운 것도 부정도 못 보던 성격의 소유자였어요. 수시로 분통(憤痛)을 터트리며 욕을 했어요. 그 시절, 욕할 일이 좀 많았겠어요?
 
  항상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세상사에 참견을 하고 비분강개를 터트리는 사람’이었죠. 그때는 일제가 끝난 직후였으니, 학생들이 학교에서 일본말을 쓰는 경우가 많았을 거 아니에요. 강점기 때는 조선어 사용을 완전히 금지했으니 일본어가 입에 배었을 테죠. 무의식 중에 일본말을 쓰면 국어선생다운 결벽성으로 절대로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었어요.
 
  “이 자식들아, 그래 너희는 밸도 없나. 그 지긋지긋한 왜놈의 말을 또 입에 담아봐. 노예근성이 뼛속까지 박힌 놈으로 알고 회초리로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려 줄 테니까.”
 
  이렇게 쌍욕을 했죠.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윤동주의 시를 젖은 목소리로 정성스레 낭송해 들려줄 줄도 아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여학생들이 너무너무 존경하는 선생님이었죠. ‘아, 저 사람은 분노가 있구나’ ‘불의(不義) 앞에 막 소리를 치는 용기가 있구나’ 하면서요.
 
 
  남편이 하는 딱 두 가지
 
  ‘나’와 결혼한 남편은 좋은 대학 상대(商大)를 나와 은행 중역을 거쳐 지금은 지점장입니다. 제 시각에 퇴근할 뿐 아니라 술·담배도 못 해요. 대신 단팥이 잔뜩 든 생과자나 찹쌀떡, 시골에서 고아온 눅진한 조청 따위를 즐깁니다. TV 연속극과 쇼를 재미나 합니다. 삶의 모험이나 불굴의 투쟁정신이니 하는 남성성은 먼 나라 이야기죠.
 
  게다가 유산으로 물려받은 작은 상가건물에서 적지 않은 월세까지 받으니 경제적으로 얼마나 윤택하겠어요. 알토란 같은 삼 남매와 아름답고 순종적인 부인까지 두고 있으니 남부러울 게 없죠.
 

  남편은 안정된 생활을 누리면서 딱 두 가지, 텔레비전 보는 것과 정력제 사는 것만 해요. 이 남편은 텔레비전 볼 때 TV 채널을 돌리는 독특한 기술을 가지고 있대요. 이 소설을 쓴 시절에는 지금과 달리 리모컨이 없어서 채널을 바꿀 때는 TV 본체 옆에 붙은 다이얼을 돌려 채널을 바꿔야 했거든요. 작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7에서 9로, 9에서 11로, 이 매혹적인 홀수에서 홀수로 옮아가는 길에 아무리 바빠도 거쳐야 하는 8이나 10이란 공허한 짝수를 용케도 냉큼냉큼 건너뛰어 곧장 7에서 9로, 9에서 11로, 또 11에서 9로, 9에서 7로 전광석화처럼 채널을 돌리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게 남편의 기술에 대한 칭찬 같지는 않죠? 심지어 남편은 TV를 보면서 군것질을 즐기죠. 소설에선 이렇게 묘사합니다.
 
  〈맛있게 맛있게 먹으며 입술 언저리를 야금야금 핥으며,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줄기차게 연속극과 쇼에 재미나 했다. 아니 연속극도 맛있어하더라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나에겐 그가 흡사 연속극도 단팥과 함께 먹고 있는 것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실상 두뇌나 심장이 전연 가담하지 않은 즐거움의 표정이란 음식을 맛있어하는 표정과 얼마나 닮은 것일까.〉
 
 
  ‘그럴 수는 없어. 그것만은 참을 수 없어’
 
  ‘나’는 남편과 함께 다디단 간식, TV 연속극을 즐기는 사람이면 좋을 텐데, 불행하게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TV 연속극도 단것도 안 좋아했다. 나는 단것이 위장에 해롭다고 믿고 있었고, TV는 바보상자라는 말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고, 연속극이 퇴폐적 단세포적 어쩌고 저쩌고 하며, 자못 고상하고도 혹독하게 매도되는 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즐겼다.〉
 
  그러니, 남편을 어떻게 바라보았을지는 짐작할 수 있겠죠? ‘나’를 더욱 외롭고 슬프게 만드는 건 이 현대에 욕을 할 줄 모르는, 아니 욕할 생각이 없는 남편이었죠. 타성에 젖어 자신의 행과 불행을 굳이 따져볼 일이 없었던 화자를 깨운 사람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 맏아들이에요. 느닷없이 이 아들이 미술대학에 가고 싶다고 하자 남편은 어처구니없어합니다. 아들에게 안정된 생활의 행복을 찬양하고 또 찬양하며 아들을 타이릅니다.
 
  〈“서울상대를 가야 해. 뭐니뭐니 해도 생활 안정이 제일이니라. 봐라 지금의 네 애비를. 뭬 그릴 게 있나. 뭬 걱정인가.”〉
 
  이 말을 할 때 남편 입가에 떠오르는 득의와 회심의 미소가 싫고 징그러워 아들이 남편의 그 말에 반기를 들어주기를 ‘나’는 바랍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뜻밖에도 다소곳이 아버지의 말을 듣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화자의 내부에서 별안간 힘찬 반란이 일어요. ‘아니지, 당신은 그렇게 살아도 좋지만 내 아들은 당신처럼 살아서는 안 돼, 그건 안 돼!’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거죠. ‘그럴 수는 없어. 그것만은 참을 수 없어’ 하는 격렬한 외침이, 심한 딸꾹질처럼 오장육부에 경련을 일으키며 치솟아요. 부유하고 평화로운 현재의 생활에 감사하고 속물처럼 살아가지만 화자가 여학생 시절에 생각했던 생이라는 건 이런 게 아니었으니까요.
 
 
 
여학생 시절의 우상, ‘욕쟁이’ 이 선생
 

“국어를 가르친 이태우 선생은 여학교 선생이었는데 아니꼬운 것도 부정도 못 보던 성격의 소유자였어요.” 50여 년 전 교복 차림에 단정한 머리를 한 여중생들 모습이다. 사진=조선DB
  겉으로만 볼 때 ‘나’는 특별한 고민도 없고, 특별히 해야 할 일도 없고 하니 취미로 조화(造花) 만들기를 익혀요. 이 조화를 만들어 남편에게 자랑하니 남편이 “와! 당신 이런 재주가 있었어? 이제 꽃 안 사 와도 되겠네. 비싼 생화를 왜 사 오냐? 시드는 거. 이거 갖다 놓으면 좋은데”라고 말해요. 남편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나’는 남대문 꽃시장에 가고 싶은 충동을 느껴요. 시드는 꽃, 살아 있는 꽃, 흙에서 생성되어 생명을 가지고 있는 꽃을 가지고 싶은 거죠.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행복이라는 것은 화자가 만든 것과 같은 조화예요. 아무런 변화도 없이 항상 행복하지만, 화자는 시들어버릴지언정 살아 있는 생명의 흙에서 나온 꽃과 같은 행복을 가지고 싶은 거죠.
 
  이런 와중에 화자는 우연히 여학생 시절의 ‘욕쟁이’ 이 선생을 다방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는 ‘몰라보게 늙었을 뿐 아니라 몰라보게 점잖아지기까지’ 했어요. 심지어 ‘탁하고 처진 소리로 길길길길길 오래 웃기’까지 하지만 ‘나’는 그래도 그가 가슴속에 여전히 분통(憤痛)을, 욕을 간직하고 있을 터라고 기대해요.
 
  이 조화와 같은 현대의 행복에 대해 그가 퍼부어주는 욕을 들으면 얼마나 시원할까 생각하죠. 그래서 화자는 그가 욕쟁이의 본색을 감추고 있을 뿐, 자극하면 다시 그 본색을 드러낼 거라고 생각하지만 ‘쉬 개발될 것 같지 않은 변두리의 복덕방 영감 같아’ 보이는 그는 쉬이 욕쟁이의 본색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렇게도 혐오했던 일본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에 섞어 쓰는 모습까지도 보여요. 때문에 ‘나’는 구정물을 뒤집어쓴 듯이 불쾌해집니다. 비단 ‘길길길’ 하는 웃음소리만이 아니라 ‘오야지’니 ‘요오시’니 ‘기마에’니 ‘앗싸리’니 ‘쇼부’니 하는 소리를 이 선생의 입에서 듣다니 기가 막히는 거죠.
 
 
  비명이라도, 신음이라도…
 
  그래서 ‘나’는 ‘그를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지’ 하며 진저리를 치면서도 며칠 뒤 다시 그를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찾아갑니다. ‘어떻게든 그를 다시 욕쟁이로 만들고 말 테다’ 하는 결심으로요. 만남이 거듭되면서 그와 ‘나’는 서로에 대해 알아갑니다. 욕쟁이였던 이 선생은 이제 현대사회의 평범하면서도 비열한 소시민이 되었어요. 이전에 그가 그렇게도 욕했던 그런 사람이 된 거죠. ‘나’는 차츰 그에게서 욕을 짜내기는 건포도에서 포도즙을 짜내기보다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를 못하는 거예요. 이 선생으로부터 욕은 단념했지만 비명이라도, 신음이라도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죠. 그렇게 ‘기름 안 친 기계의 운동처럼 고단하고 힘들고 쇳소리가 나게 지긋지긋한’ 사귐이 이어지던 어느 날, 이 선생이 기다리고 있어야 할 다방에는 이 선생 대신 편지 한 장이 남겨져 있습니다.
 
  편지에는 뜻밖에도 이런 내용이 담겨 있어요. ‘제자였던 숙이를 만난 이후, 사기성을 띤 일을 해야만 하는데 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한탄한다’고요.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이 선생은 아마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제자의 도장을 이용해 사기를 쳤을 텐데, ‘옛 스승의 기개(氣槪)를 기대하는 제자의 눈빛 때문에 더는 그 일이 하기 싫어졌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예전의 그 욕쟁이로 돌아가지도 못합니다. 요새는 그와 같은 고전적 욕쟁이의 시대가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는 것이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 선생은 숙이에 대해 은근한 복수심마저 내비쳐요. ‘유부녀가 아무리 선생이라도 찾아다니는 건 아니야. 나는 너와 고궁 앞에서 찍은 사진이 있어. 그 사진을 가지고 나는 여관방에서 연탄불을 피우든지 청산가리를 먹고 죽어버릴 거야. 그러면 숙이는 난처해지겠지, 내가 난처했던 것처럼. 내 죽음이 신문에 나면 너의 남편과 함께하는 편안한 생활도 끝장이 날 거야.’ 그 편지는 이렇게 끝납니다. ‘그러니 나를 내버려 둬. 나를 숙이의 기대로부터 풀어줘. 나에게 욕을 조르지 말아줘. 날 그만 쥐어짜. 제발 날 살려줘.’
 
 
 
“날 놔줘” “제발 날 살려줘”
 
  편지를 받은 ‘나’는 실제로 그가 죽었든 아니든 어차피 ‘나’에게 있어 그는 죽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허탈해지는 거예요.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도시의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그 욕쟁이는 변함없이 생존해서 시원하게 세상을 향해 욕을 내뱉는 것을 한번 보고 싶었는데 도시의 그 많은 사람과 똑같아지려다가 ‘나’를 보고 갈등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떼어놓는 편지만을 남기고 도망쳐 버린 겁니다.
 
  일요일 아침, 화자는 남편이 신문을 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어쩌면 이 선생의 협박대로 된 것인지도 모르지요. 남편을 그렇게도 지겨워했던 ‘나’는 자유로워질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가장 먼저 두려움을 느낍니다. 자유를 감당할 자신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뜻밖에 남편은 분노에 부들부들 떨었던 것이 아니라 웃느라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어요. 메릴린 먼로가 시도 썼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그렇게도 웃긴 일이었던 거죠.
 
  “그렇지만 먼로가 시를 썼다니 사람 웃기는군. 그렇게나 몸뚱이가 기막히게 좋은 여자가 뭬 답답해 시를 썼겠어. 책이나 팔아먹으려는 협잡이 뻔하지.”
 
  남편은 그렇게 말하면서 아내를 봅니다. ‘마치 그 여자의 몸뚱이를 구석구석 싫도록 주물러댄 경험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 방면에 도통한 듯한 음탕하고 권태롭고 느글느글한 웃음을 흘리면서’요. 그런 남편에 대해 ‘나’는 이 선생의 비명을 생각합니다. 소설 속 한 구절입니다.
 
  〈“날 놔줘” “제발 날 살려줘” 그건 어떤 소리 빛깔을 하고 있었을까. 지렁이 울음소리 같았을까 몰라. 그 신음을 육성으로 들어두지 못한 건 참 분하다.〉
 
  여기에서 지렁이 울음소리라는 게 뭐였을까요. 생태계 피라미드의 제일 하위에 있지만 거기에서 생명이 나오는 거잖아요. 먹이사슬의 제일 밑바닥에 있는 지렁이. 그 지렁이의 울음소리를 ‘해석’해낼 수 있다면 그건 이 선생의 “살려줘”라는 그런 소리가 아니었을까요?
 
 
  흙이 운다, 죽어가는 흙이 운다…
 
  ‘나’는 그 소리, 지렁이 울음소리를 못 들은 것이 한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보통의 사람들이,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면서 ‘내가 행복하다, 이 문명이라는 것은 참 편한 것이구나, 이것이 내가 추구하던 삶’이라며 맹목적으로 살아가다가 어느 날 밤 그 지렁이 울음소리를 듣는 겁니다. 땅속 깊은 곳에서 이놈한테 뜯기고 저놈한테 뜯기면서도 열심히 생명의 흙을 빚는 어둠의 영웅들의 소리를요.
 
  마치 고장 난 전자제품에서 들리는 지잉~, 윙윙~ 하는 것 같은 그 소리, 실상은 땅강아지의 울음소리일 뿐인데 사람들은 지렁이 울음소리라고 인지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흙이 운다, 죽어가는 흙이 운다, 살아 있는 흙의 생명이 운다… 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요?
 
  참 한국 사람들 대단하지요. 지렁이는 한자어 지룡(地龍)에서 파생된 말이에요. 그 하찮아 보이는 지렁이를, 햇빛 나면 그냥 말라비틀어질 뿐인 그 약한 지렁이를 저것은 지룡이다, 땅속의 용(龍)이다 생각했어요. 용이라는 게 뭐예요. 중국에서는 황제를 상징할 만큼 신령스러운 동물, 하늘을 날아다니고 자연현상을 관장하는 존재 아닙니까. 자연현상은 인간의 생존에 가장 중요한 요소예요. 그러니까 용은 인간에게 가장 두렵고도 소중한 존재지요. 결국 지렁이를 알아주는 사람은 한국인, 그중에서도 지렁이의 울음소리를 들은 사람들이에요.
 
 
  # 지구의 사과껍질에 사는 우리와 지렁이
 
  처음에 지질학적으로 지구의 단층을 보면 그 가장 표면에 흙이 있어요. 사과를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그 사과껍질 위에서 사는 거예요. 전체 지구에서 흙은 그 사과의 껍질만 한 두께와 무게밖에 차지하지 않습니다. 이 껍질, 바이오 스피어(Biosphere·생태계로서의 지구)라고 해서 모든 생물이 다 살고 있는데 그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아세요?
 
  지구 전체 무게의 10억 분의 1도 되지 않습니다. 지구 무게 중에 생물의 무게는 흙먼지만큼도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현재 밝혀진 바로는 이 넓은 우주에, 생명체가 있는 행성은 지구밖에 없고, 그 지구 전체의 10억 분의 1도 안 되는 게 생명체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하나하나는 얼마나 놀라운 존재입니까. 각기 다 다르고 가치 있는 생명이에요. 우스운 것 같지만 우주에서 하나하나 들어가 보세요. 우주의 지구, 지구의 10억 분의 1, 그 어마어마한 확률 안에 내가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어마어마한 확률의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누가 만들어요? 바로 지렁이입니다. 지렁이가 흙을 만들어주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갈 수 있어요. 모든 생명체는 먹이사슬에 묶여 나고 또 죽어요. 흙에서 생물이 나와 살아가다 다시 죽으면 지렁이가 나서서 우리를 분해시켜 다시 흙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지요. 흙으로 분해시켜야 거기서 또 생명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한국인에게 흙이란 무엇인가. 바이오 스피어가 무엇인가. ‘신토불이(身土不二)’예요. 몸이 바로 흙입니다. 흙은 나와 같아요. 내가 농협에 만들어준 말이 하나 있어요. ‘농도불이(農都不二)’. 신토불이만 하면 도시 사람들은 전부 흙이 뭔지도 모르는데 공허한 말이잖아요. 그러니까 농도가 불이. ‘농촌과 도시가 하나’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말을 해줘야죠. 이 아스팔트와 돌멩이로 흙을 끝없이 질식시키고 죽이는 도시 사람도 구해달라는 거죠. 신토불이는 본래 불교용어고요.
 
 
  세계에서 채소를 가장 많이 먹는 한국인
 
  이유가 있어요. 전 세계에서 한국 사람들이 채소를 가장 많이 먹습니다. 참 놀라운 거예요. 김치니 뭐니 우리 밑반찬이 전부 채소거든요. 최근 신문을 보니 미국 뉴욕의 동네마트 신선식품 진열대에 ‘KIMCHI’라고 쓰인 제품들이 진열돼 있더군요. 코로나19가 몰고 온 발효식품 재평가로 ‘진짜 한국식 김치’를 맛보고 싶어 하는 현지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고 해요.
 
  연간 대미(對美) 김치 수출액이 지난 2011년 280만 달러에서 2018년 900만 달러, 2020년 2300만 달러, 2021년 2820만 달러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어요. 김치 수출 대상 국가도 10년 전인 2012년 기준 62개국에서 2022년 89개국으로 확대됐다고 하지요.
 
  미국 캘리포니아, 버지니아, 뉴욕, 워싱턴DC 등은 11월 22일을 ‘김치의 날(kimchi day)’로 제정했어요. 그날은 모든 주민이 김치를 의무적으로 먹는 날일까요? 그렇지 않을 테지만 신기해요. 또 미시간, 메릴랜드 등 5개 주에서도 ‘김치의 날’을 선포했다고 합니다. 김치가 한류(韓流) 덕을 보는지, 한류가 김치 덕을 보는지 모르겠지만, 김치는 더는 한국만의 전통음식이 아닙니다. 세계인의 음식이 되었어요.
 
 
  # 디아스포라, 전 세계로 우리 씨를 파종하는 것
 

진주 남강과 촉석루. 1984년에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조선DB
  여러분이 도시에 살든 어촌에 살든, 사는 곳이 어디라 해도 흙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흙의 생명을 키워야 해요. 외세의 침략에 쫓기면서도 의연하게 길을 걸어갔던 할머니의 뒷모습, 그걸 내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2)를 쓰고도 한 10년 뒤에 알게 되었어요. 그 앎이 《생명 자본주의》(2014)를 쓰게 만들었죠.
 
  한국인, 참 지지리도 못났어요. 오죽했으면 중국 한번 쳐들어가지 못하고 원(元)나라에, 청(淸)나라에 그렇게 시달렸을까요? 허구한 날, 왜구에게 시달려 어쩜 이리 지지리도 못났나 했는데, 광복 후 70여 년 동안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서구의 자유시장·민주주의 모델을 가지고 이룩한 부(富)에 흙의 마음, 그 흙의 의미를 깨달으면 서양 사람이 못해낸 것, 우리 조상이 이룩하지 못한 것까지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내 민족만 앞세우고, “난 흙을 떠나선 살 수 없으니 우리나라에 붙박이로 남아야 해”라고 말해선 곤란해요. 흙의 마음이 글로벌해져야죠.
 
  “내 고향 난 못 떠나!” “천리길을 내 어이 왔던고~” 하면 안 됩니다. 세상에 천리길이 뭐 그렇게 멀다고요. 고작 서울에서 진주까지의 거리예요. 그 정도 가지고 “내 어이 왔던고~”가 뭡니까.
 
  남들은 조랑말 타고 전 세계를 누볐어요. 칭기즈칸 보세요. 몽골 초원에서 시작해 대륙을 건너 유럽까지 쳐들어가는데 우리는 겨우 진주 정도 가서 고향 떠났다고 “내 어이 왔던고~” 하고 노래하는 식이죠. 칭기즈칸처럼 정복을 하라는 게 아닙니다. 그 땅을 정복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그 땅에 뿌리내릴 수 있어요.
 
  나를 키운 고향 흙을 떠나야 하는 디아스포라가 슬픈 게 아닙니다. 우리 씨가 퍼져야 해요. 전 세계로 파종을 하는 것이 디아스포라입니다. 생명을 뿌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 씨는 흙이 있어야 싹이 납니다. 콘크리트에선 씨가 나지 않아요. ‘붉은 산’을 간직해야 합니다.
 
대중가요 ‘진주라 천리길’
 
  경남 진주를 소재로 한 대중가요 ‘진주라 천리길’은 1941년에 발표되었다. 조명암(趙鳴岩) 작사, 이면상(李冕相) 작곡, 이규남(李圭南)이 노래했다.
 
  대중음악 평론가 이동순에 따르면, 충남 연기 출신의 이규남은 식민지 시절 일본 유학비를 벌기 위해 진주의 재래시장에서 유성기 음반과 바늘을 팔았다고 한다. 작곡가 이면상이 진주에 갔다가 이 광경을 보았고, 서울에 돌아가서 그 이야기를 작사가 조명암에게 들려주었다. 깊은 감동을 느낀 조명암은 즉시 노랫말을 지었고, 이면상이 곡을 붙였다. 이 곡을 들어보면 나라의 주권을 잃고 군국주의 체제의 시달림 속에서 허덕이는 식민지 백성의 설움과 눈물을 느낄 수 있다.
 
  이면상은 ‘사랑도 팔자’ ‘네가 좋더라’와 같은 대중가요도 여러 곡 남겼다. 1946년 초 월북해 북한 음악가동맹위원장을 맡는 등 북한 최고의 작곡가가 되었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당 중앙위원 등을 역임했다.
 
  조명암 역시 대중가요 ‘신라의 달밤’ ‘서귀포 칠십리’ ‘낙화유수’ 등을 작사했는데 그 역시 월북해 북한 교육문화성 부상(副相), 문예총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가수 이규남(본명 임헌익)은 성악에서 대중음악으로 진로를 바꾼 인물이다. 처음엔 그 역시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유족들의 증언과 당시 정황에 의해 납북으로 밝혀졌다. 이 곡은 분단 이후 줄곧 금지곡 목록에 들었다가 훗날 해금되었다. ‘진주라 천리길’의 노랫말은 이렇다.
 
  ‘진주라 천리길을 내 어이 왔던고/ 서장대에 찬바람만 나무기둥을/ 얼싸안고 아~ 타향살이 내 심사를/ 위로할 줄 모르느냐.
  진주라 천리길을 내 어이 왔던고/ 달도 밝은 남강가에/ 모래사장을 거닐면서/ 아~ 불러보던 옛 노래는/ 지금 어데 사라졌나.’
 
  공적이면서도 사적인 장소, 찜질방
 
  요즘은 시들시들해졌지만 몇 해 전만 해도 다들 황토방이나 찜질방을 찾아갔어요. 중년 주부들이 우스갯소리로 “남편 없이는 사는데 찜질방 없으면 못 산다”고 했을 정도예요.
 
  왜 우리가 전 세계에 없는 찜질방, 황토방을 만들었을까요?
 
  왜 ‘방 문화’를 만들었어요? 공(公)도 아니고 사(私)도 아니고 참 특이한 공간이거든요. 다방, 요즘엔 커피숍, 모두 길거리와 마찬가지인 공적 장소예요. 호텔 이런 곳은 남들 눈에 띄지 않는 사적 공간이죠. 그런데 그 중간 지점이 찜질방입니다. 공적이면서도 사적인 장소예요.
 
  찜질방에선 연인이 이마를 맞대고 잠을 자도 아무렇지 않아요. 손을 잡고 있어도 불편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이가 없지요. 엄마가 딸이 밤늦도록 집에 오지 않자 전화를 겁니다.
 
  “너 어디야!”
 
  소리치다가도 “나, 찜질방인데…” 하면 “응, 알았어” 하고 전화를 끊어요. 그 황토방, 찜질방이 참 묘한 문화예요. 공도 아니고 사도 아닌 중간 문화인데, 뭔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어느 정도의 선을 지킬 수 있는 곳이죠. 중간 영역이에요.
 
  그러니까 뭔가 고민이 있고 맘속에 맺힌 게 있어 풀고 싶을 때 황토방을 갑니다. 아스팔트에 갇혀 고향을 잃어버렸을 때 흙의 생명력, 자연의 치유력을 얻는 곳이 황토방입니다. 이런 공간을 가진 나라는 우리밖에 없어요. 지금은 디아스포라로 흩어진 한국인이 해외에서 찜질방을 많이 만들었지만 말이에요.
 
 
  # 에티오피아 왕 이야기
 

1968년 5월 18일 오전 11시 에티오피아의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 1세가 박정희 대통령의 초청으로 내한했다. 사진은 김포공항 터미널 2층 로비에 마련된 환영식장에서 에티오피아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경례를 하고 있는 셀라시에 황제. 사진=조선DB
  한 발 한 발 흙을 디디며 살아가는 삶에, 우리 국토, 우리 땅만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대륙의 모든 나라가 유럽의 식민지가 될 때 유일하게 자주성을 지킨 나라입니다. 유럽의 여러 국가가 아프리카 대륙을 침략해 종단하고 횡단하며 유린할 때, 그들 중 누군가는 에티오피아에도 갔어요. 그 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땅을 재고 항구를 측량할 때 에티오피아의 국민과 왕은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둡니다. 아니, 내버려 둔 정도가 아니라 환대를 해요. 먹을 것도 주고, 측량도 도와주고. 심지어 그들이 측량을 마치고 떠날 때엔 잔치를 열어주고 국왕의 근위병을 호위로 붙여 항구까지 데려다줍니다. 그런데 그 유럽 사람들이 막 배에 타려고 하는데 뒤따라온 근위병들이 신고 있던 구두를 벗겨 구두에 묻은 흙을 조심스럽게 털고 깨끗이 닦아낸 후 다시 건네주었습니다. 영문을 몰라하는 서양의 탐험가들에게 근위병들은 황제의 말이라며 이렇게 전했습니다.
 
  “그대들은 멀리 떨어진 강한 나라에서 왔다. 그대들은 에티오피아가 모든 나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을 그대들의 눈으로 보았을 것이다. 이 땅의 흙은 우리에게 소중하다. 우리는 그 흙에 씨앗을 심고 우리의 죽은 자들을 묻는다. 우리는 피곤할 때 그 위에 누워 쉬고 들판에서 우리의 소 떼에게 풀을 먹인다. 그대들이 계곡에서 산으로, 평야에서 숲으로 걸어 다녔던 바로 그 오솔길들은 우리 조상의 발과 우리 어린이들의 발로 만들어진 것이다. 에티오피아의 흙은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어머니, 우리의 형제다. 우리는 그대들을 환대했으며 귀한 선물을 주었다. 그러나 흙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값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흙을 단 한 알갱이도 줄 수 없다.”
 
  이것이 에티오피아의 정신입니다. 이 정신이 있었기에 유럽 국가들의 제국주의에 의해 아프리카 대륙이 유린될 때 유일하게 나라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흙은 국토의 개념이고 내 생명의 개념이고 민족의 개념입니다. 여러분은 이 흙의 의미를, 앞으로 우주만큼 넓어지는 보편적 인류의 꿈과 접목시켜야 합니다.
 
 
  # 역사는 밟힌 자의 역사
 
  누군가 여러분에게 “너는 앞으로 어떻게 살래?”라고 묻는다면 “나는 지렁이처럼 한 번 살아볼래”라고 말해보세요. 사실, 지렁이처럼 살면 밟힙니다.
 
  우리 역사는 ‘밟은 자’의 역사가 아니라 ‘밟힌 자’의 역사예요. 미사여구가 아닙니다. ‘밟힌 지렁이’가 없었다면 어떻게 초목이 나오고 어떻게 나뭇잎이 다시 되살아나는 봄이 옵니까? 우리의 모든 역사는 ‘밟힌 자들의 역사’이기에 영웅이 생겨나고 지도자가 있어온 것이 아니겠어요? 그게 없었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 많은 사람을 바라볼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앞에서 이야기한 암흑의 영웅, 무명의 영웅, 밟히면 꿈틀 한다는 먹이사슬 최하위에 있는 지렁이의 울음을 들어야 합니다. 저 땅속에서 들리는, 사실은 울지도 못하는 지렁이의 울음을 들었다고 고집해야 해요. 실제로는 땅강아지의 울음이라고 해도 그걸 지렁이 울음이라고 해야 합니다.
 

  도시 사람들은 그걸 들을 기회가 없으니 녹음해서 가끔 들으세요. 저는 가끔 그런 상상을 해요. 찜질방에 지렁이 울음소리를 기증해 사람들이 거기 멍석에 누워 쉬고 있을 때 들려주는 거죠. 그러면 젊은 사람들은 “아, 이게 무슨 소리지?” 하지 않겠어요? 그럼 나이 든 분들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옛날에 멍석 펴놓고 말이야, 흙에 누워서 별을 볼 때 듣던 소리야. 지렁이가 우는 소리야. 저것은 땅강아지 소리 아니야. 내가 들었어. 저 지층(地層) 깊숙한 곳에서 지렁이가 울었다고. 과학자들은 지렁이가 무슨 소리를 내느냐고 역정을 내겠지만 지렁이는 분명히 울어. 내가 들었어.”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이 이렇게만 말할 수 있어도 이 ‘한국인 이야기’가 헛된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우리나라는 걱정을 안 해도 돼요. 지렁이는 ‘밟히더라도’ 무기물을 유기물로 만드는 생명의 통로입니다. 그런 사람이 된다면, 그러니까 흙을 기억하고 역사를 기억하면서 미래를 만드는 세대가 될 수 있어요.
 
 
  恨을 푸는 지렁이 울음소리
 
  생명, 생명력이 어디로부터 옵니까. 물론 부모로부터 오지요. 그런데 그 부모의 생명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흙에서 왔지요. 지렁이가 애쓴 결과로, 우리는 죽더라도 우리의 몸이 썩어 흙으로 돌아가 다시 꽃이 되고 작은 이파리가 되어 자자손손 순환하는 것을 생각하면 죽음도 별로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한국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고, 그래서 도망치고 싶을 때, 그것 때문에 우리가 사방에 퍼진 겁니다. 그건 쫓겨난 것이 아니에요. 파종한 겁니다. 그러니까 ‘나쁜 정치를 하는 사람도 애국하는 거야’라고 생각하면 속도 편하고 여러분도 희망이 생기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껏 추구해왔고 또 끝없이 추구해가야 할 것은 지렁이 울음 같은 삶이에요. 밟히고 또 밟히면서 흙을 만들고 생명을 만드는, 그래서 먹이사슬의 최하위가 최상의 것으로 올라가 한을 푸는 지렁이 울음 말입니다.
 
  어떤 색깔인지 몰라도 소설 속 ‘이태우 선생’처럼, 그땐 욕하던 이유를 몰랐지만, 욕쟁이가 한을 풀어서는 안 되던 그때가 어쩌면 우리가 행복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요? 욕쟁이의 한이야말로 땅속 깊은 곳에서 솟아 나오는 지렁이 울음소리입니다.
 
  자, 여러분에게 다시 말합니다. 한밤에 눈 뜨거든 귀를 기울여보세요. 지렁이 울음소리가 들릴 겁니다. 그건 분명 아파트 층간 소음이 아닐 겁니다.
 
  “눈도 다리도 없고 소리 낼 목청도 없다는데 어떻게 지렁이가 울음소리를 낸다고 합니까?”라고 따지지 마세요. 그 소리는 우리 할머니가 밭에서 묻혀온 흙냄새, 혹은 어머니의 친정집 시골 뒷마당에 묻어둔 어린 시절 우리의 생명 소리입니다.⊙

7. 천지인(天地人)과 윤동주의 ‘서시’


“높은 곳에 ‘별’, 가장 아래에 ‘잎새’, 그사이에 ‘내’가 있다”



⊙ 라파엘로 그림에 플라톤의 손끝이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손바닥이 땅을 가리키고 있는 까닭은…
⊙ 김소월 ‘진달래꽃’ 속 두 사람은 서로를 역겨워도 않고, 가지도 않았으며,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중
⊙ 윤동주 ‘서시’는 부끄럽지 않게 살았고, 살고 있고, 살 것이라는 맹세
⊙ 인간은 비록 불완전하고 땅에서 죄를 짓고 살지만 하늘을 볼 수 있기에 부끄러움을 알아


  내가 서양 사람들 앞에서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 사상을 이야기하면 서양인들이 다들 와 놀랍다고 이야기하는 까닭이 있어요.
 
  서양의 최고 철학자는 플라톤입니다.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1861~1947년)는 “오늘날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본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했어요. 여기에 하나 더 붙이자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지요.
 
  이탈리아 르네상스 전성기의 화가 중에 라파엘로(Raffaello Sanzio·1483~ 1520년)가 있습니다. 이탈리아 로마는 기본적으로 기독교 내지 그리스도교 국가이지만 르네상스 시기에 그리스·로마 문화가 들어와요. 중세 때는 그리스도교와 이방의 종교 문화는 대립하고 싸웠지만 르네상스에 들어서 기독교가 그리스·로마의 문화까지도 다 품어버립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티칸 교황청의 프레스코화입니다.
 

  대표적인 그림은 라파엘로가 1510~1512년 사이에 그린 〈아테네 학당(Scuola di Atene)〉이라는 작품입니다. 그리스는 희랍의 신(神)을 믿는 다신교니까 로마 가톨릭의 입장에서 보면 이교도지요. 그런데 왜 바티칸에 이 그림을 그리게 했을까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까지도 예수님 밑에 오면 다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아테네 학당〉을 보면 알겠지만, 가로세로의 비율이 똑같아요. 이처럼 비율이 똑같은 게 기독교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니까 희랍의 철학자들을 데리고 기독교를 만든 거죠.
 
 
  서양 철학의 기본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탈리아 르네상스 전성기 화가 중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오른쪽은 그림 속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진=조선일보DB


  이 그림의 중앙을 보세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세워놓았지요? 그리고 나머지 희랍 철학자들을 다 집어넣었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여기 벌거벗고 드러누워 있는 사람이 디오게네스라는 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죠. 통나무집에서 산 디오게네스 말고 또 누가 이렇게 바닥에 드러누워 있겠어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크게 확대해 보면, 플라톤의 손끝이 하늘을 가리키고 있어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손바닥을 아래로 해서 땅을 가리키고 있죠.
 
  이러니 서양 사람들이 내가 ‘천지인 삼재’를 이야기하면 놀라지 않을 수 있겠어요?
 
  플라톤은 “모든 인간의 본질은 하늘에 있다”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러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선생님, 하늘이 아니라 땅이지요, 땅”이라고 말합니다.
 
  이게 이원론(二元論)입니다. 서양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 이원론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1770~1831년)이 정(正·테제·Thesis), 반(反·안티테제·Antithesis), 합(合·신테제·Synthesis)이라고 해도, 프로이트(Sigmund Freud·1856~1939년)가 무의식을 파헤치고 별의별 것을 다 했지만 결과적으로 서양에서 ‘하늘’과 ‘땅’은 멀어요. 하늘은 이데아, 관념의 세계이고 땅은 육체의 세계입니다. 하늘은 무한·영원의 세계이고 땅은 순간·공간의 세계입니다. 무한·유한, 선·악, 두 세계로 나뉩니다.
 
  서양에서는 하늘나라에서 잘못한 사람들이 모두 땅으로 떨어져요. 떨어지는 것은 무게를 지니고 있어요. 중력에 의해 떨어지는 것은 다 나쁜 것이 되고, 죄는 항상 무거운 것이에요. 무거운 죄를 지은 죄인들의 발목에 큰 족쇄를 채우죠.
 
  반대로 중력을 이기고 날아가는 것들은 선(善)한 것들, 좋은 것들이죠. 그래서 단테의 《신곡》에 보면 죄의 무게만큼 높은 산을 올라가는 형벌을 내립니다. 올라간 만큼 죄가 가벼워져요.
 


 
  # 잘못된 지식의 위험성 - ‘진달래꽃’의 새로운 해석
 

1988년 12월 촬영한 이어령 선생과 ‘호돌이 어린이’ 윤태웅 군. 한국을 세계에 알린 88서울올림픽의 이미지 메이커 이어령 선생이 개회식 〈정적〉에서 굴렁쇠를 굴린 ‘호돌이 어린이’ 윤태웅 군을 안아 올려 원의 의미를 말해주는 모습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국민시 두 편이 있어요. 그중 하나가 김소월(金素月·1902~1934년)의 ‘진달래꽃’입니다. 교과서에 실린 이 시를 대개 학창 시절 외웠거나 지금도 외우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시는 윤동주(尹東柱·1917~1945년)의 ‘서시’입니다.
 
  두 시 모두 각종 시험에 단골 출제되는 시지요. 심지어 외울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렇게 외우는 사람 중 거의 단 한 사람도 ‘진달래꽃’과 ‘서시’를 제대로 모른다고 말한다면 믿으시겠어요?
 
  자, ‘진달래꽃’을 우리는 이별의 시로 배웠어요. 과연 진짜 그럴까요? 이 시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이라고 시작해요. ‘가실 때’니까 아직 내가 사랑하는 님은 안 갔어요. 이런데 어떻게 이별의 시가 됩니까?
 
  ‘만약 당신이 가신다면 이러이러하겠다’는 이야기니까 현재 이 두 사람은 서로를 역겨워도 않고, 가지도 않았으며,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중이에요. 가령 내가 ‘만약에 백만원이 생긴다면…’이라고 썼는데 시제를 잘못 봐서 ‘아, 이(李)아무개 백만원 생겼대’라고 오해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영어로 하면 if 가정법이잖아요. 그런데 학교에서 다들 그렇게 가르쳐요. 사랑가가 아닌 이별가로 말이죠.
 
 


  ‘진달래꽃’은 이별가가 아닌 사랑가
 

2016년 6월 서울 종로구 화봉문고에서 전시된 《진달래꽃》 초판본의 모습. 시인 김소월이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 초판본은 2015년 경매에서 1억 3500만원에 낙찰되었다.


  “사랑한다면 당신하고 어디 가서 서로 진달래꽃 꺾어서 뿌리지 않고 화전이라도 부쳐 먹으면서 오순도순 했어야지. 이건 분명히 이별하는 이야기야”라고 단정하는 식이에요.
 
  그러나 동사의 시제를 잘 보세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에서 보듯 ‘드렸다’가 아니라 ‘드리오리다’잖아요. 그런데 다들 ‘드렸다’로 읽어요. 그러니까 이별의 시가 된 거죠. ‘뿌리오리다’지, 뿌리지 않았어요. 이 시의 동사는 전부가 미래 추정형입니다. 마지막 구절도 보세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지금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이 시가 정말로 이별가가 되려면 이렇게 되어야죠.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 말없이 보내 드렸었지.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지르밟고 가셨지. 죽어도 눈물 안 흘리려고 했는데 눈물 펑펑 흘렸습니다.’
 
  이게 원래의 시와 닮기나 했어요?
 
  이 시의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건 이 말이에요.
 
  “내가 당신을 지금 열렬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버려도 꽃을 뿌려줄 겁니다. 나는 눈물도 안 흘릴 겁니다, 이렇게 사랑하는데….”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시는 이별을 가장하여 사랑을 노래한 시예요. 이별을 상상하면서 이별을 통해 오늘의 반대되는 상황으로 오늘의 내가 누리고 있는 사랑의 기쁨을 노래한 시예요. 이별의 슬픔을 통해 사랑의 기쁨을 노래한 것이죠. 이것을 전문적인 용어로는 패러독스 아이러니(Paradox Irony) 수법이라고 합니다.
 
 


  # 선입견으로 읽는 윤동주의 ‘서시’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책에 줄 긋고 칠하면서 배운 시가 윤동주의 ‘서시’입니다.
 
  윤동주…저항시인…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하며 줄줄줄 외웠죠. 이게 상표(商標)입니다. 영화사의 로고예요. 알맹이가 아닌 껍데기죠. 외우면 윤동주의 시를 알게 됩니까?
 
  윤동주 저항시? 윤동주가 저항하는 거 봤어요? 다 선생님에게 들은 얘기지요. 이 시를 읽기도 전에 선생님이 알려줘요.
 
  “윤동주는 저항시인이다. 이 시는 일제에 저항한 시다”라고 말한 뒤 시 읽기를 시작하지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아! 죽는 날까지 일제에 저항하겠다는 다짐이구나’ 하고 해석해가면서 읽는 거죠. 그렇게 하고 읽으면 이 시의 여러 군데가 걸려요.
 
  윤동주 선생이 저항시인이 아니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저항시인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이 시를 보면 이 시의 진짜 값어치를 모르게 돼요. 다 일제에 저항하는 시로만 읽으니까, 이 시의 장치나 비유도 딱 그렇게 한정 짓게 되니까요.
 
  만약 여러분이 이 시를 쓴 시인이 누구인지 모르고 선생에게 가르침도 받지 않고 그냥 날것인 채로 읽었을 때도 저항시라고 느껴질까요? 한번 해보세요.
 
 
  ‘서시’를 날것 그대로 다시 읽기
 
  저항시라는 말도 모르고 윤동주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길을 걷는데 그냥 ‘서시’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기에 주워 읽었다 칩시다. 그런 마음으로 솔직하게 그냥 읽어보세요.
 
  이 시만 읽어서 ‘아, 이분이 후쿠오카 감옥에서 생체실험 희생자로 돌아가시고, 그 집안도 다 기독교인인 데다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이지’ 하고 느껴질까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의 ‘서시’ 전문
 
  아무런 선입견 없이 이 시만 읽었을 때, 조선 독립을 위해서 싸우겠다는 마음이 느껴져요? 이 시를 저항시로 읽으려면 해석을 이렇게 해야 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부끄럽지 않게 나는 친일파가 되지 않겠다. 일본놈 앞잡이를 절대 안 하겠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잎새라는 게 민초들이지. 바로 한국인이야. 이 시를 쓰고 있는 윤동주가 살고 있는 북간도로 쫓겨온 가난한 사람들이지. 이 사람들을 보니 일본 식민치하에서 사는 사람들이 너무너무 안되어 보여서 윤동주가 괴로워하고 있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조국 해방의 별, 우리의 별 그걸 위하여 나는 끝까지 일본 사람들에 의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사랑해야지. 우리 동포를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일제에 저항하고 조선[한국]을 독립시켜서 이 가난하고 학대받고 어렵고 고난에 찬 민족을 구해야 되겠다. 그 길이 나에게 주어진 길이니 나는 오늘도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끝!
 
  자, 여러분은 저항시인 윤동주 시인의 저항시 한 편을 감상했어요.
 
 
  # 새롭게 읽는 윤동주의 ‘서시’ - 삭제된 서술부의 시제
 
  그런데 저항시인이라는 프레임을 제거하고, 시대상황도 배제하고 이 시를 읽으면 ‘모든 죽어가는 것들’에 예외가 있습니까? 일본 사람, 한국 사람의 구별이 있어요? 공자님이 말씀하신 대로 ‘나라’를 빼고, 이 시에서는 ‘노자’까지 나갔어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이니까 ‘사람’까지 뺐잖아요.
 
  ‘바람에’+‘도’가 붙으니, ‘바람’은 물론이고 ‘사람’은 말할 것도 없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그러니 그게 일본인이든 중국인이든 한국인이든, 내 이웃을, 죽음의 운명을 타고난 인간을 윤동주는 사랑했어요. 태어나면서 사형선고를 받는 것이 사람이죠. 언제가 되었든 필연적으로 죽는 것이 인간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죽을 줄 알면서도 버티고 싸우지요. 윤동주는 그 안에서 버티는 것이 아니라 하늘까지 올라갔어요.
 
  하늘에 올라가면 별이 있습니다. 땅을 노래하는 마음이 아니라 별을 노래하는 거니까 벌써 그 안에 역사를 내재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역사를 포함하고 점점 위로 올라가면 땅이 보이고 지구가 보이고, 거기서 쭈욱 올라가서 별을 노래하는 겁니다. 하늘을 우러러보는 거죠.
 
  그러니까 하늘까지 못 올라간 사람, 별을 모르는 사람은 풀잎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리가 없어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이라는 말은 현재 자신은 부끄러울 것이 전혀 없다, 나는 결백하다, 나는 그런 뜻을 가지고 있다며 스스로에게 맹세하는 말이에요. 그렇게 살고 싶다고 소원하는 거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이렇게 맹세하고, 다짐하고, 소원한다는 건 돌이켜 말하면 죽는 날까지 부끄럼 없이 살고 싶은데 그게 자신이 없다는 말이기도 해요. 자신이 없으니 또 한 번 맹세하고 다짐하는 거죠.
 
  앞에서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이야기하면서 시제를 잘못 읽으면 시의 본래 뜻을 모르고 착각하게 된다고 했지요? 그런데 ‘서시’의 이 부분은 한국어의 특성상 서술어를 생략하면서 시제가 동시에 생략되어 있어요. 보세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하고 서술어 대신 말줄임표(…)를 썼어요. 이건 읽는 사람이 서술부의 시제를 무엇으로 넣어 읽느냐에 따라 이 문장을 과거로도 현재로도 미래로도 읽을 수 있다는 거지요. 한 번 해볼까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맹세했다’라고 읽으면 과거에 맹세한 것이지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맹세한다’라고 읽으면 지금 현재에 내가 맹세하고 있는 것이에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맹세할 것이다’라고 읽으면 미래에 그리 맹세할 것이라는 다짐이 됩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다는 이야기예요. 부끄럽지 않게 살았고, 살고 있고, 살 것이라는 말이지요.
 
 
  # ‘부끄러움’도 문화의 산물. 3가지 부끄러움
 

 


  1967년 가수 윤복희씨가 우리나라 최초로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타났을 때 신문과 방송에서는 망신스럽다고 야단이 났어요. 결국 윤복희씨는 미니스커트 때문에 울고 갔잖아요. 요즘은 그가 입었던 미니스커트는 오히려 얌전해 보일 정도인데 옛날엔 그 정도의 길이도 창피해했어요.
 
  그러니까 부끄러움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문화입니다. 어느 문화에서는 부끄럽지 않은 것이 어느 문화에서는 부끄러운 것이 되지요. 또 남에 대해서는 부끄러운 것이 자기에 대해서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경우도 있어요. 자기가 혼자 있을 때는 아무렇게나 해도 부끄럽지 않잖아요. 주말 오전에 늦잠 자고 일어나 한껏 흐트러진 모습도 혼자 있을 때는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지요. 그 모습을 누가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그때부터는 부끄러워지지만. 또 남들은 모르는 나 혼자만의 부끄러움이 있어요. 자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이건 하늘에 대한 부끄러움이죠. 남들은 다 몰라도 하늘과 나만은 아는 그런 일들이 있으니까요. 이 부끄러움이 땅으로 내려오면 다시 남에 대한 부끄러움, 흔히 말하는 ‘쪽팔리는’ 부끄러움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세 가지 부끄러움을 배웠어요.
 
  하늘이 나를 봤을 때의 부끄러움, 땅의 사람(법, 제도 등)이 나를 보았을 때의 부끄러움, 그리고 꽃과 같은 자연이 나를 보았을 때의 부끄러움이 있어요. 남이 보는 앞에서는 부끄러워서 옷을 못 벗는데, 집에서 키우는 반려동물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벗어요. 개에게, 탁자에 놓인 꽃한테 “저리 가, 고개 돌려”라는 말을 하지는 않잖아요.
 
  부끄러움조차 ‘천지인’과 연관해 설명할 수 있는 거예요. 이러니 ‘천지인’이 기가 막힌 거죠.
 
 
  ‘나와 하늘’이 직접 연결된 ‘부끄러움’
 

 


  좀 더 ‘부끄러움’에 대해 이야기해볼게요.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선악과(善惡果)’와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어요.
 
  하느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을 때 창세기 2장 25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뒤 어떻게 됐을까요? 창세기 3장 7절입니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
 
  ‘무화과나무 잎을 엮었다’는 것은 알몸을 부끄러워했다는 말과 같아요. 이처럼 부끄러움은 인간의 원죄(原罪)에서 나왔다는 시각입니다. 이 부끄러움은 하늘(신) 앞에 감히 고개를 들 수 없는 인간의 타고난 죄인 것이죠. 부끄러움의 세 층위(層位) 중 첫 번째 ‘하늘이 나를 봤을 때의 부끄러움’입니다.
 
  신기독(愼其獨), 혹은 신독(愼獨)이란 말이 있습니다.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에 나오는 말인데, ‘홀로 있을 때 삼가라’는 뜻입니다. 백범(白凡) 김구(金九·1876~1949년) 선생이 남긴 여러 유묵 가운데 ‘신기독’이란 글씨가 등록문화재(제442-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김구가 집무실 벽에 ‘신기독’을 걸어놓았다고 합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년) 선생 역시 ‘신독’이란 말을 따랐다고 합니다. 어느 더운 여름날, 퇴계가 의관을 정제하고 서책을 읽자 가족들이 편하게 옷을 갈아입으라고 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퇴계는 “혼자 있어도 천 명 사이에 있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며 ‘신독’이라는 글귀를 남겼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퇴계와 김구의 경구, 愼獨
 
  《송사·채원정전(宋史·蔡元定傳)》에서는 ‘신독’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밤길 홀로 걸을 때에도 그림자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고, 홀로 잠잘 때에도 이불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獨行不愧影 獨寢不愧衾).’ 남이 보든 안 보든 스스로 삼간다는 이 신독·신기독은, ‘나와 하늘’이 서로 연결돼 있음을 뜻합니다.
 
  ‘나(개인)와 사회’, 다시 말해 ‘사회 법률·제도’가 나와 연결된 것이 아니라 ‘나와 하늘’이 직접 연결돼 있습니다. ‘나와 하늘’이 주고받는 것이지 중간에 ‘사회와 법률’이 개입할 순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아도, 법을 어겨 혹독한 처벌을 받아도 ‘나와 하늘’ 앞에 떳떳한 겁니다.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해 시성식(諡聖式)을 직접 주재하며 김대건(金大建·1822~1846년) 신부를 비롯해 가톨릭 복자 103위를 성인(聖人)으로 품위를 올렸습니다. 또 지난 2014년 2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에게 시복(諡福) 결정을 내렸습니다.
 
  한국의 신앙 선조들은 선교사나 사제, 수도자의 가르침을 통해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나와 하늘’이 바로 연결된 경우가 아닐까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죽음까지 불사해가며 믿음을 지키게 했을까요?
 
  조선 왕조가 자행한 전 근대적 사상 통제와 신분제적 사회 질서에 대한 저항이었을지 몰라도 보다 높은 차원의 선택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망해가는 조선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을 근거가 부족합니다. 어쩌면 그들의 죽음은 인간의 양심과 인격에 대한 깨달음의 표현이 아니었을까요? ‘순교자의 죽음은 역사 발전 과정에서 출현한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대한 갈망의 결과’(한국천주교주교회의·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이때 양심은 ‘나와 하늘’이 바로 만나는 지점입니다.
 
 
  양심과 ‘부끄러움’
 

 


  독자 여러분이 종교를 믿지 않는다면, 부끄러움은 개인의 양심(良心) 문제일 수도 있어요. 두 번째 ‘땅의 사람(법, 제도 등)이 나를 보았을 때의 부끄러움’ 말입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양심’을 찾아보면 이렇게 정의되어 있어요.
 
  ‘도덕적인 가치를 판단하여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깨달아 바르게 행하려는 의식.’
 
  《철학사전》(중원문화 刊)에서 ‘양심’을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인간이 사회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도덕적인 책임을 생각하는 감정상의 느낌을 말한다.’
 
  어떤 선택을 하고 결정에 책임을 지는 과정에서 ‘양심에 어긋나면’ 혹은 ‘도덕적인 책임감을 느끼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이는 아무리 인적이 드문 거리라도 함부로 무단횡단하지 않습니다. 지나는 차도 없고 횡단보도가 멀어도 그는 도로교통법을 철저히 지킵니다.
 
  그런데 이 양심이 형성된 과정을 추적하면 조금 복잡해집니다. 저 유명한 에리히 프롬(Erich Pinchas Fromm·1900~1980년)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떠올려보세요. 어떤 이는 자신의 양심에 따른 결정에 불안감과 공포를 느낍니다. 스스로 선택한 삶의 원칙(양심)을 따르지 못하고 외부의 ‘신화’와 ‘우상’을 섬깁니다.(신화와 우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독립적인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심리 상태를 ‘자유로부터의 도피’라고 하지요.)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양심의 실체는, 내면의 성찰과 비판을 거쳐 스스로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어야 합니다. 남이 만든 도덕률 혹은 윤리적 외부 준거(準據)나 틀에 맞추고, 맞춰가는 행위를 ‘양심에 따른다’고 착각합니다. 사회적인 법과 제도, 도덕률이 절대적인 양심이 될 순 없습니다.
 
 
  양심과 ‘자유로부터의 도피’
 
  아무리 사회 제도가 허용한다고 해도, 내 양심에 비춰 아니라고 느끼면 그것은 아닌 것입니다. 미국 사상가 헨리 소로(Henry D. Thoreau·1817~1862년)가 말하는 시민 불복종 운동(Civil Disobedience Movement) 같은 것이죠.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들이 조선총독부의 혹독한 법과 제도를 알면서도 목숨을 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양심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모진 고문을 겪고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그토록 믿어왔던 도덕률이 악법으로 바뀔 경우 양심은 큰 혼란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그렇기에 양심은 세상에서 평가하는, 옳고 그른 것을 초월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바람이 불어도, 권력이 바뀌어도 자신을 지켜나갈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사람마다 양심, 풀이하자면 자긍심, 수치심, 그리고 죄책감 같은 정서들은 천차만별입니다. 부모의 양육태도가 ‘부끄러움’과 ‘뻔뻔함’을 결정한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브로디와 셰퍼의 연구(1982)에 따르면 위협적이고 처벌적인 부모들이 도덕적으로 성숙한 자녀들을 양육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와 정반대로 가혹한 형태의 훈육에 의존하는 부모들은 종종 부적절한 행동을 하고 죄책감, 양심의 가책, 수치심, 혹은 자기비판을 거의 나타내지 않는 자녀들을 갖게 되는 경향이 있다고 해요. 아이들을 부모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교육만능론’은 전혀 신뢰할 것이 못 됩니다.
 
  어쨌든, 각 개인이 태어나고 자라난 환경, 양육태도가 다르듯 저마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정서상의 반응, 즉 양심도 다릅니다.
 
 
  복수와 관련한 두 이야기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는 사냥꾼 휴 글래스(리어나도 디캐프리오 扮)의 복수극입니다. 휴 글래스는 거대한 야생 곰에게 일격을 당해 큰 부상을 입게 되는데 비정한 동료 피츠 제럴드(톰 하디)는 인디언의 추격과 돈에 눈이 멀어 휴의 아들을 죽이고 그 또한 땅속에 묻고 떠납니다. 휴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처절한 복수를 완성하는데 이 경우 어떤 사람은 ‘복수하라’고 양심에 명령을 내리지만, 어떤 이는 ‘어떤 일이 있어도 살인만은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도 양심의 문제를 다루고 있어요. 덴마크의 왕이 갑자기 서거하자, 동생 ‘클로디어스’가 왕위에 오릅니다. 심지어 선왕(先王)의 아내와 재혼까지 합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괴로운 시간을 보내던 ‘햄릿’ 왕자. 그는 어느 날 아버지의 망령(亡靈)에게서 자신이 동생 클로디어스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햄릿은 숙부 클로디어스를 죽이지 못해 양심상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극(劇)과 똑같은 상황에 직면한 다른 사람은 숙부를 죽여서 살인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할지 모릅니다. 참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에서 ‘부끄러움’은, 본능적인 욕구들의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원초아(Id), 이러한 욕구들에 대해 현실적인 계획들을 세워 대응하는 합리적인 자아(Ego)보다는 도덕적인 초자아(Superego)와 가깝습니다.
 
  초자아는 양심과 비슷합니다. 초자아가 생겨나면 아동은 자신의 행위에 자긍심을 느끼고, 반면 도덕적으로 위반한 행동에 대해서는 죄책감 혹은 수치심을 느끼도록 만드는 ‘내부의 감시자(internal sensor)’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초자아 이론은 현대 심리학에서 많은 공격을 받습니다. 초자아가 아동들이 이성의 부모에 대한 근친상간의 욕망 같은 정서적인 갈등을 경험하는 남근기(3~6세)에 주로 발달한다는 주장도 요즘 거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어요.
 
 
  # ‘서시’를 읽는 세 가지 방법 - 종교시·저항시·휴머니즘시
 

 


  다시 윤동주의 ‘서시’로 돌아가 세 가지 층위의 부끄러움에 관해 분석해보겠습니다. 앞서 ‘하늘이 나를 봤을 때’ ‘땅의 사람이 나를 보았을 때’ ‘자연이 나를 보았을 때’의 부끄러움을 말했어요.
 
  ‘서시’를 일제에 대한 저항시라고 했을 때는 이 시를 정치적 레벨에서 읽은 것입니다. 국가 간의 정치 속에서 이 시를 읽을 수 있어요.
 
  국가의 개념을 털어내고 인간 레벨의 문제로만 읽었을 때는 휴머니즘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다음으로는 종교적, 초월적 하늘의 레벨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해서 ‘서시’는 저항시(정치), 인간주의시(휴머니즘), 종교시 이렇게 3개 층위로 읽을 수 있지만 전체적인 뜻은 천지인입니다.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애(民族愛), 인간애(人間愛), 우주애(宇宙愛) 말이죠. 이처럼 하늘, 땅, 사람으로 나눠놓으면 놀랍게도 이 시가 금세 보입니다.
 
  하늘에는 별이 있어요. 땅에는 잎새가 있지요. 먼저 하늘의 별은 바람이 불어도 끄떡없어요. 그러나 땅의 풀잎과 같은 잎새는 바람이 불면 흔들려요. 잎은 떨어지면 쉽게 죽습니다. 그러니 잎새는 모든 죽어가는 것의 상징이지요. 별은 죽음을 초월한 것이에요. 죽지 않습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나오는 말이에요. “오, 폭풍이 불어도 끄떡없는 별아.” 태풍 속에서 배를 타고 노 젓는 사람들은 별을 보고 항해를 합니다. 그 별이 우리나라로 오면 북극성, 북두칠성이 됩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이 북두칠성에서 온 것이에요. 저 삼라에서 온 것입니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그러니 우리가 누워서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하는 것은, ‘죽는 나와 영원히 죽지 않는 저 하늘나라에서 온 내가 있다’는 말입니다. 나는 땅에서는 죽어야 하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슬프지만 별과 나를 동일시(Identify)해서 별의 생명이 되었을 때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이지요. 사실은 슬픈 얘기예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는 마음의 기저에는 ‘나-하늘’이 직접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연결된 지상의 인간들은 사랑을 해도 뭘 해도 다 죽지만 별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했을 때, 내 마음속 심리적인 부끄러움이나 괴로움을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극복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시인의 마음이죠. 정치인이나 종교인의 마음이 아니라 시인이니까 윤동주는 하늘의 별을 노래하지 스스로 하늘의 별이 되지는 않았어요. 그러니까 다시 천지인으로 돌아옵니다.
 
  제일 높은 곳에 ‘별’이 있고, 가장 아래에 ‘잎새’가 있고 그사이에 ‘내(사람)’가 있습니다. 위를 보고, 아래를 보고, 다시 시인으로 돌아오는 것이지요.
 
 
  # 인간의 아름다운 눈, ‘나와 하늘’이 연결되다
 
  사형수들은 형장에서 죽기 전에 예외 없이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땅 한 번 쳐다보고 죽는다고 합니다. 마지막까지도 하늘과 땅을 보고 죽어요. 그러니까 하늘과 땅 사이에 인간의 눈이 그렇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형수의 눈이라도 아름다워요. 하늘을 보고 땅을 보니까 말이죠. 짐승들은 땅밖에 보지 못합니다. 짐승들은 부끄러움을 몰라요.
 
  하지만 인간은 비록 불완전하고 땅에서 죄를 짓고 살지만 하늘을 볼 수 있기에 부끄러움을 압니다. 죄를 짓고 경찰서에 끌려온 사람들,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에 하나같이 모자를 눌러쓰거나 옷을 뒤집어쓰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립니다. 그 모습을 보면 마음이 놓입니다. 죄를 짓고 끌려왔지만 너도 인간이구나, 하는 안도감이지요.
 
  함께 죄를 지은 무리가 저희끼리는 막 부끄럽게 다녀도 끄떡없었어요. 그런데 잡혀온 순간 하늘을 보는 겁니다. 하늘을 보니 스스로 부끄러운 거예요. 사형수들이 죽기 전에 하늘을 한 번 쳐다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땅의 마음만이 아니라 하늘의 마음이 있고 인간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 말을 하죠.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냐. 너도 사람이냐?”고 할 때는 ‘그 말을 듣는 너라는 상대가 짐승보다 못하다’는 비난입니다. 그런데 “나도 사람이야” 할 때는 실수할 수 있고 완벽할 수 없는, 신이 아닌 인간이라는 뜻이에요. 신처럼 완벽할 수는 없지만 짐승은 아니지요. 지금 ‘사람’은 신과 짐승의 사이에 있습니다.
 
 
  윤동주 눈이 아름다운 이유는…
 

 


  인간은 천(天)과 지(地)의 사이에 있기 때문에 하늘을 볼 때는 신을 향하고 땅을 볼 때는 짐승을 향합니다. 그래서 그사이에 있는 인간의 눈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윤동주의 눈이 그래서 아름다워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기를 맹세하는 사람이니까 사랑해야지, 영원히 미래를 향해서 사랑해야지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가 이렇게 아름다운 겁니다.
 
  제일 마지막 줄을 볼까요?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시에서 바람이 두 번 나옵니다. 처음에는 ‘잎새에 이는 바람’인데, 그 바람이 지금은 ‘하늘의 별에 스치고’ 있어요. 모든 것을 시들게 하고 죽게 하는 바람은 시간이죠. 그 시간이 별에 스치면 영원까지 갑니다. 그러니 윤동주가 ‘나는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라고 말할 때의 그 길은 풀잎에서부터 별까지 가는 것이지요. 바람을 따라서, 잎새에 이는 땅의 바람에, 저 허공에 부는 바람까지 뻗쳐서 별까지 가는 그 과정의 길입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길이지요. (계속)⊙

 

 

 

 

8. 천지인(天地人)과 별[星]의 노래

 


우리는 고난을 통해 별로 간다(ad astra per aspera)

 


⊙ 윤동주의 두 가지 마음, ‘별을 노래하는 마음’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
⊙ 시인의 마음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흔들리고 설레는 마음… 윤동주는 역사 속 ‘영웅’이 아니라 ‘햄릿’과 같아
⊙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아래로는 사람을 대함에 있어 부끄럽지 않을 때(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
⊙ 추운 겨울날, 언 손을 비비며 연을 날려본 기억이 있는 이가 윤동주의 마음을 아는 사람
⊙ Veni, vidi, vici(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의 ‘V’, 윤동주의 ‘밤, 별, 바람’의 ‘ㅂ’

 

 


  하늘과 땅 사이에 길이 있습니다. 무슨 그런 길이 다 있냐고요?
 
  당연히 있지요. 눈에 안 보일 뿐 마음의 눈으로 보면 누구나 길을 그릴 수 있지요. 과학적으로도 설명할 수 있어요.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은 포물선을 그리며 낙하한다고 해요. 밤하늘에 별똥별이 휙 나타났다가 떨어지는 찰나에 진심을 다해 소원을 빌었던 기억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겁니다. 그러고 보면 혜성도 태양을 중심으로 포물선의 궤도로 움직이고 있어요.
 
  하늘과 땅 사이에 다양한 형태의 길을 꿈꿀 수 있겠지만 하늘의 길은 어쩌면 포물선 형태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땅에서 하늘로 향하든, 하늘에서 땅으로 향하든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 연과 포물선
 


  땅에서 얼레를 들고 있는 아이와 하늘에 떠 있는 연 사이에 있는 실이 그려내는 선이 포물선입니다. 이 포물선을 이야기하기 전에, 아이들은 그 추운 날 왜 그렇게 덜덜 떨면서도 밖에 나가 연을 날렸을까요? 지금 어른들이 로켓과 비행기 같은 것을 만들어서 하늘로 가고 싶어 하는 그 마음과 하늘로 연과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아이들의 마음은 같습니다. 이 연은 비행기의 모델이에요.
 
  연을 날려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연이라는 게 떨어지기 쉬워요. 전선줄에 걸리고 나뭇가지에 걸려 추락할 때의 좌절감은 참 크죠. 내 연이 높이 높이 날았으면 좋겠는데 반드시 떨어져요.
 
  연을 바람에 실어 날려 보낼 때, 연은 하늘로 날아오르려고 하지만 동시에 끝없이 떨어지려고도 하지요. 하늘로 날아가고 싶은 마음과 땅으로 끌어당기는 중력, 그 두 개의 마음이 윤동주(1917~1945년) 시인에게도 있잖아요. ‘별을 노래하는 마음’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처럼요.
 
  ‘모든 죽어가는 것’은 현실에서의 괴로움이고, ‘별을 노래하는 것’은 이상과 꿈입니다. 그러니 끝없이 가벼워져서 별까지 올라가는 마음과 땅의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 미움, 현실에서의 어려움이 하늘로 날아가는 연과 얼레를 잡고 있는 아이 사이의 긴장감 있는 포물선으로 자리 잡는 것입니다.
 
 
  포물선과 逆說, 그 아름다움
 
  아이가 연을 날린다고 했을 때, 하늘을 나는 연과 얼레를 잡고 있는 아이 사이에는 반드시 올라가려는 것과 내려오려는 것 사이의 포물선이 그려집니다. 이것이 포물선의 아름다움이에요. 우리나라의 기본은 이러한 포물선으로 이루어집니다. 말하자면 역설(逆說)이지요. 하늘로 올라가려 하는 가벼움과 끝없이 지구가 끌어당기는 중력이 팽팽하게 긴장을 이루는 가운데 포물선은 직선이 아닌 곡선이에요. 그러니 이 포물선은 아름답지요.
 
  운명으로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데 그 운명의 끝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이 길은 나에게 주어진 것이니까 자기가 선택할 수는 없어요. 그렇지만 그냥 끌려가는 것만도 아닙니다.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속에서 끝없이 별을 노래하고 하늘을 우러러볼 줄 알기 때문에, 짐승처럼 그냥 죽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그 추위 속에서도 연을 날리는 것은 중력과 그 중력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것의 대립이지요. 이것이 시몬 베유(1909~1943년)가 말하는 ‘중력과 은총’입니다.
 

  중력이라고 하는 것은 뉴턴(1643~ 1727년)의 사과처럼 밑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땅에 있는 식물들은 그 중력을 거스르고 하늘로 올라가요. 힘없는 넝쿨이라도 하늘을 향해 끝없이 손을 뻗어요. 죽음은 정해진 운명이지만 죽는 그 순간까지 지향점은 영원의 하늘이지요.
 
  윤동주 시인이 그랬습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과 같이 죽음, 중력에 지배되는 땅을 향한 마음과 별을 우러르는 하늘을 향한 마음, 그 중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포물선과 같은 곡선이 생깁니다.
 
 
  # 맹자의 〈진심편〉과 서시
 
  그런데 윤동주가 시인이 아니라 군자(君子)라면 어떻게 될까요.
 
  군자는 이미 초월한 사람입니다. 땅에 사는 보통의 사람이 아니에요. 맹자(BC 372~289년)는 〈진심편(盡心篇)〉에서 군자에게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부모님과 형제가 모두 무사하면 첫 번째 즐거움(父母具存 兄弟無故 一樂也)이고, 둘째 위로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아래로는 사람을 대함에 있어 부끄럽지 않을 때가 두 번째 즐거움(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이며, 셋째는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을 함이 세 번째 즐거움(得天下英才 而敎育之 三樂也)이라 하였습니다. 윤동주의 시는 이 두 번째 즐거움에서 나옵니다.
 
  ‘앙불괴(仰不愧)’—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부부작어인(俯不怍於人)’—땅을 내려다봐서 사람을 향해서도 당당하게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가 군자의 즐거움이지요.
 
  괴(愧)도 부끄러움을 뜻하는 한자어고 작(怍)도 부끄러움을 뜻하는 자입니다. 요즘은 여간해서는 잘 쓰지 않는 글자지요.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낄 때는 ‘자괴(自愧)’라고 합니다. ‘자작(自怍)’이라고 하면 남 앞에 부끄러운 것입니다. 자괴는 하늘 앞에 부끄러운 것이고 자작은 남 앞에 부끄러운 것이니까 요즘 말로 바꾸면 “쪽팔리는 것”이지요. 그러니 군자삼락의 두 번째 구절을 거칠게 해석하면 ‘사람을 봐서 쪽팔리는 일이 없고, 하늘을 봐서 부끄러움이 없으면 문제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이 문구의 시제는 과거, 현재, 미래 중 어디에 해당할까요?
 
 
  현재에도 과거에도 부끄러움이 없는…
 

  미래에 그럴 것이라고 하면 그것은 군자가 아닙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렇다 해야 그것이 군자이지요. 그러니 전부 과거형이어야 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현재에도 과거에도 ‘없었고’ 사람을 봐서도 부끄러움이 ‘없다’, 이것이 군자입니다.
 
  윤동주의 ‘서시’를 전부 과거형으로 고치면 윤동주는 시인이 아니라 군자가 됩니다.
 
  ‘하늘을 우러러서 나는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습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사랑했습니다. 주어진 길을 내가 오늘 갑니다.’ 이건 시가 아니라 자랑이죠. 남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 자랑을 들은 사람은 “와~ 저 사람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했네. 예수님이네” 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과거형으로 바꾸어버린 시에는 망설임과 노력하려는 마음과 현실에서의 부딪침이 전혀 나타나지 않아요. 그런 것들이 시인의 마음인데요, 남에게 말하는 것은 시가 아니라 자랑이에요. 과거형으로 바꾼 ‘서시’에서 윤동주는 시인이 아니라 군자가 되었습니다.
 
  다시 윤동주가 쓴 ‘서시’의 본래 문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원문을 보면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어요. 이루어진 것은 보통 과거형, 완료된 문장으로 서술되는데 이 시에서 과거형으로 쓴 것은 ‘괴로워했다’ 단 하나예요. 그러니까 괴로워한 것만은 사실이고 현실이지요. 나머지 서술부의 시제를 보면 ‘사랑해야지’ ‘걸어가야겠다’ 하는 미래의 다짐, 미래의 원망(遠望)과 의지만이 나타납니다. 일종의 자기 자신에 대한 맹세지요.
 
  그리고 현재시제 역시 단 하나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 시에 나타난 동사에는 ‘보다, 노래하다, 부끄럽다, 괴롭다, 사랑하다, 걷다’가 있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시제가 붙어 있습니다.
 
  시제를 보면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 볼 수 있지요.
 
  첫 구절은 시제를 붙일 서술어를 생략해버리는 것으로 시제를 넘어섰어요. 과거, 현재, 미래를 통튼 자신의 결심이니까 과거에 했든, 현재에 하든, 미래에 할 것이든 상관이 없어요. 어쨌든 된 것이고 될 것이니까요.
 
 
  # 상승직선, 수평선, 포물선
 

  현재형과 미래형으로 쓴 윤동주의 시들이 모두 이루어졌을 때, 그것을 ‘길’로 그려보는 상황을 가정해봅시다. 가장 낮은 잎새에서 바람은 별까지 올라갔습니다. 이 위로 올라가는 길을 똑바로 직선으로 그으면 그것은 군자의 경지예요.
 
  위로 올라가지 않고 아래에서 쭉 뻗어나가면 그것은 현실 정치인, 현실인의 경지지요.
 
  그런데 인간은 신과 짐승의 중간에 있고 하늘과 땅을 모두 볼 수 있는 인간의 눈은 아름다운 것, 그것이 바로 시인의 마음이지요. 하늘과 땅 사이에서 흔들리고 설레지요. 군자는 이런 설렘이 없어요. 모든 것을 완전히 졸업하고 초월한 존재입니다. 또 악인이면 괴로워하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아요. 현실에 그저 적응하고 살면 되지요.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것이 시인의 마음입니다. 저항시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윤동주는 독립운동하는 사람의 결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서 끝없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인간적인 것에서 우주적인 것으로 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윤동주는 역사 속 ‘영웅’이 아니라 ‘햄릿’과 같아요. 시 속에서 끝없이 흔들리면서 죽음 앞에서 영원으로 가고, 현실 앞에서 이상으로 가고, 괴로움 앞에서 노래하고 사랑을 하는 존재이지요.
 
  땅에 얽매여 있으면서도 그것으로부터 초월하고자 하고 가장 낮은, 모든 죽어가는 것의 현실에서 영원히 불멸하는 별을 향해서 가는 마음을 노래하고 그 길을 걷는 것을 실천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시인의 마음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어린 아이가 그 추운 날 날린 연에 묶여 있는 실처럼 포물선이 그려져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드리운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에서 날아가려는 연과 중력으로 떨어지려는 연 사이에 팽팽한 연실의 그 중력! 그 추운 겨울날에 언 손을 비비며 연을 날려본 기억이 있는 사람은 윤동주의 시를 알고, 윤동주의 마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 연에는 날개가 없어요. 그리고 그 연과 사람 사이에는 묶인 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실이고, 그것이 길입니다.
 
 
  #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에서 나왔다
 


  시를 볼 때 어떤 것이든 여러 가지 의미 층위가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명사 하면 ‘하늘, 별, 땅’ 그다음이 풀잎이에요. 이 풀잎을 정치적으로는 민초(民草)라고 합니다. 글래스 루츠(Grass Roots). 민주주의(Democracy)와 비유할 때는 민초라는 뜻을 가지지요. 월트 휘트먼(1819~1892년)의 시 ‘풀잎’처럼 우리가 땅에서 하는 것이에요. 또 김수영(1921~1968년)의 유명한 시 ‘풀’에서 바람이 불면 풀들은 다 눕습니다. 울다가 눕고,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더 빨리 울었다가, 바람보다 먼저 일어납니다.
 

김수영 시인은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고 ‘풀’을 노래했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의 ‘풀’ 일부
 
  이렇게 하찮은 것, 바람이 불면 운명에 거스르지 못하고 복종하는 것! 이런 존재에서 시작해 전혀 다른 차원의 하늘까지 가는 하늘의 별이니까 하늘, 땅, 사람을 그리면 공간이 생겨납니다. 이번엔 시간을 볼까요? ‘잎새에 일던 바람’은 춘하추동, 밤낮과 같은 시간의 변화 속에서 점점 하늘로 올라갑니다. 계속 가다 보면 변하지 않는, 바람이 꽉 차 있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사실 바람이라고 하는 것은 끝없이 변하는 시간을 뜻하니까 시간의 축이 돼요. 시간은 곧 탄생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처럼 말이죠.
 
  그러니까 이 시 전체에서 ‘별’과 가장 가까운 동사를 찾아낸다면 ‘사랑해야지’입니다.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에서 나왔습니다. 현실이 아니라 모든 것이 멸망하는 밤이 되어도 빛이 사라지지 않고, 바람이 불어도 끄떡하지 않는, 그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힘이 됩니다.
 
 
  # 서양과 동양의 서로 다른 별 모양
 

라틴어 ‘ad astra per aspera’는 ‘고난을 통해 별로 간다’는 뜻이다.


  미국 국기에는 별[星]이 많습니다. 미국 주(州)의 수만큼 왼쪽 상단 네모난 칸에 별을 그려 넣었는데, 지금은 별이 50개입니다. 이 성조기의 별의 모양을 보세요. 익숙하지요. 우리에게 지금 별을 그려보라 하면 다들 이런 모양으로 그립니다. 미국 국기에 그려진 별의 모양과 동일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백 년 전만 해도, 한국 사람에게 별을 그리라고 하면 단추처럼 동그란 모양으로 그렸습니다.
 
  여러분이 별을 그릴 때 단추처럼 동그란 모양이 아니라 다섯 모서리가 있는 별을 그리는 것은 유럽 서양문명이 자기의 ‘밈(Meme)’, 문화적 유전자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처음 한국 사람, 중국 사람이 미국에 가서 우리에게 익숙한 저 별이 그려져 있는 미국의 국기를 보고는, “아, 웬 놈의 깃발에 저렇게 꽃이 많냐” 해서 화기(花旗)라고 했어요. 꽃이 있는 깃발이라는 뜻이지요. 우리도 처음에는 미국을 ‘화기국’이라고 했어요. 이런 것들을 볼 때 서양 사람들이 생각하는 별은 한국 사람이 생각하는 별과 다릅니다.
 
  오각형의 별 모양은 사람을 나타냅니다. 머리, 양손, 양발. 그래서 별을 거꾸로 놓으면 큰일 나는 거예요.
 
  육각형 별, 우리가 흔히 다윗의 별(Star of David)이라고 하는 삼각형 두 개를 엇갈려 겹쳐놓은 별은 유대교의 상징이지요. 두 개의 삼각형 중 하나는 올라가는 것 불, 하나는 내려가는 것 물을 나타내요. 이런 것을 상징코드라고 하는데, 이런 상징코드를 알고 보면 별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별에게 가는 길
 
  별이란 무엇입니까. 바람이란, 길이란 무엇입니까. 길은 선(線)이고 시간이잖아요. 공간이면서도 시간입니다. 그래서 길 위에 서 있으면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특히 밤에 그런 짓 하면 큰일 나요. 밤에 길거리에 서 있으면 이건 법률적으로 안 되는 겁니다.
 
  그와 관련된 법률이 있는 네덜란드 같은 나라에서는 개를 산책시킬 때도 사람이 한곳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맴돌아야 해요. 주변을 맴도는 것은 괜찮지만 가만히 서 있으면 강도나 도둑, 아니면 이상한 여자로 오해를 받습니다. 길은 걸어가도록 만들어져 있기에 길에 멈춰 서면 멋쩍고 이상한 것이지요.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말은 프로세스(Process)를 의미합니다. 과정이지요. 죽는 날까지의 과정을 길로 나타냈어요. 길의 끝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직선으로, 평지를 향하여 쭉 뻗은 길을 그냥 가면 길 끝에서 죽음과 만나게 됩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 죽어가는 것’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시인이니까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가면 이 길은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성인군자는 아니니까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듯’ 땅에게 끌어당겨지지요. 하늘로 올라가는 연과 중력의 사이에서 그려지는 연실과 같은 아름다운 포물선이 그려지지요.
 
 


  # 시와 현실의 이야기 - 시인으로 살아가기 힘든 현실
 


  별을 노래했던 윤동주는 별에 닿았을까요? 시인은 영원히 별에 닿지 못합니다. 영원히 세속을 초월한 군자가 못 되는 존재예요. 그렇다고 세속적 인간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시인에게는 상상력의 날개가 있어요.
 
  시인들이 현실에서는 성인군자로 존경받기보다는 뭔가 우리와는 다른 이상한 사람, 변태적인 사람, 생활력이 없는 사람으로 느껴지지요. 보들레르(1821~1867년)의 말처럼 귀양 온 신선이거나, 귀양 온 천사가 아니면 앨버트로스가 시인입니다. 앨버트로스(Albatross·한자문화권에서는 신천옹[信天翁]으로 불렸다-편집자)는 단숨에 바다를 건널 수 있다는 새인데 이 새가 사람들에게 붙잡혀 배의 갑판에 앉으면 우스꽝스러운 새가 됩니다. 단번에 바다를 건널 수 있는 거대한 날개가 오히려 걷는 데 방해가 되어 뒤뚱거리게 만드니까요. 그래서 선원들은 그 새의 큰 부리에다 담뱃재를 터는 학대도 했다고 해요.
 
  그것이 오늘날의 시요, 시인의 상상력입니다. 하늘 위 시의 세계를 날아다닐 때는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하는 기가 막힌 날개가 땅 위의 현실세계에서는 보행을 방해하지요. 시인들이 참 살아가기 힘든 세상입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시인(詩人)은 실제로 시집을 출간하고 등록되어 있는 시를 쓰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을 뜻하는 것입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을 가지고, 풀잎의 괴로움을 가지고, 죽는 날까지 부끄러움이 없이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그래서 서로 눈과 눈을 마주치면서 별을 보고 하늘을 보는 여러분이 시인입니다.
 
  시(Poem)와 시인(Poet)의 어원인 고대 그리스어 명사 Poietes는 ‘만들다(Make)’는 뜻입니다. 만든다는 것은 없던 것을 새로 있게 하는 것이지요. 물건을 만드는 사람은 기술자고 마음이나 꿈을 만드는 사람은 시인이에요.
 
  언어와 상상력을 가지고 시를 만들었는데 그 시가 현실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 ad astra per aspera 고난을 통해 별들로
 

“아이 라이크 아이크(I Like Ike)”는 미국 34대 대통령 아이젠하워의 선거 구호였다.


  라틴어 ‘ad astra per aspera’는 ‘아드, 아스트라, 페르, 아스페라’로 읽습니다. 나는 프랑스어는 했지만 라틴어는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이 문장의 정확한 발음은 몰라도 의미는 알죠.
 
  ‘고난을 통해서 별로 간다.’
 
  세네카(B.C. ?~65년·고대 로마 제국 시대의 정치인, 사상가, 문학자. 로마 제국의 황제인 네로의 스승으로도 유명하다-편집자)의 구절인데, 뜻이 중요한 것만이 아니라, ‘A.A.A’의 두음을 보세요. ‘아드, 아스트라, 아스페라.’ 이것이 바로 시입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B.C.100~B.C.44년)가 로마 시민과 원로원에 보낸 승전보에 쓴 유명한 문구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도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라틴어 경구 “Veni, vidi, vici”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어로 번역된 문구가 다시 한국어로 번역되어 왔기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문구도 보세요. ‘비니, 비디, 비치’, ‘V.V.V’의 두음이에요. 이런 것이 시입니다. 영어로 번역해서는 시가 안 돼요.
 
  미국의 34대 대통령 아이젠하워(1890~1969년·재직 1953~1961년)가 대통령 선거 당시 내건 구호는 “I Like Ike”였어요. Ike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이젠하워의 별명이었습니다. ‘아이, 아이, 크크.’ 두음·흉음·말음의 운율이 정확히 일치하죠. 이 말은 그대로 시가 됩니다. ‘나는 아이젠하워를 좋아합니다(I Like Eisenhower)’라고 하면 ‘I Like Ike’와 같은 뜻이지만 시가 아니지요.
 
  그러니까 시는 의미 이상의 것입니다. 의미에 날개를 단 것이에요.
 
 
 
‘아드, 아스트라, 아스페라’ ‘비니, 비디, 비치’
 


  다시 고난을 통해서 별들로, 즉 ‘ad astra per aspera’를 봅시다. 우연히도 ‘별’이라는 아스트라(astra)와 ‘고통’이라는 아스페라(aspera)가 발음이 비슷해요. 우연이겠지만 기적 같지 않아요? 밤이라는 고난이 있을 때 별은 빛납니다. 낮에는 별을 보지 못해요. 깜깜한 밤, 폭풍이 부는 때에 별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렇게 별과 고난은 연결이 되는 것인데 언어까지도 유사한 거예요.
 
  그런 말들은 많아요. 어머니의 자궁은 움(womb)인데 무덤은 툼(tomb)입니다. ‘W’와 ‘T’ 글자 하나 차이지요. 무덤은 우리가 죽어서 가는 곳이고 자궁은 우리가 태어나는 곳인데 어쩌면 태어나는 곳과 죽어서 가는 무덤이 하나는 ‘움’이고 하나는 ‘툼’일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극과 극인데 차이는 고작 ‘W’와 ‘T’의 차이로 나타내는 그것이 시입니다. 언어에 대한 아름다움, 언어의 운율을 알기 시작할 때 시를 아는 것이지, 단순한 의미만을 알아서는 시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한국 프로야구 레전드 이만수 전 SK와이번스 감독이 좋아하는 문장이 ‘Scars Into Stars’입니다. 번역하면 ‘상처는 별이 된다’입니다. 생략된 영어 문장을 살리면 ‘Turn your scars into stars(당신의 상처를 별로 바꾼다)’입니다. ‘상처’와 ‘별’의 단어가 한 자(c, t)만 다르고 같습니다.
 
  ‘h’가 반복되는, ‘상처’를 뜻하는 hurt와 ‘별’과 비슷한 뜻의 halo(성상의 머리나 몸 주위에 둥글게 그려지는 광륜 혹은 후광이라는 뜻-편집자)를 써서 ‘Turning hurts into halos(상처를 빛으로 바꾼다)’라는 문장도 자주 사람들에게 회자됩니다.
 
 
  # ‘서시’의 별, 바람, 밤 - 반복되는 ‘ㅂ’
 

 


  윤동주는 ‘서시’에서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고 했어요. ‘도’라는 것은 반복의 의미지요. 어젯밤에도 내일밤에도 무한히 계속될 거예요. 잎새에서 별까지 바람이 이는 그 길을 향해서 나는 걸어갑니다.
 
  그런데, ‘밤, 별, 바람’ 이상하지 않아요? ‘ㅂ’이 공통적으로 겹쳐요. 세 개의 ‘B, ㅂ’ 두운입니다.
 
  시를 가르칠 때 저항시인이다 하는 정치적인 의미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으로 한국말의 두운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찾을 수 있게 가르쳐줘야 합니다. 이런 ‘ㅂ’ 두운을 가진 시가 또 있어요. 정지용의 ‘향수’라는 시에 보면 ‘빈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다시 이야기를 처음으로 되돌려 생각해봐요. 하늘과 땅 사이에 다양한 길 말입니다. 지금부터 한국이 할 일은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일, 하늘에서 한국을 내려다보는 별이 되는 일입니다. 그걸 꿈꾸어봐요. 그것은 어쩌면 우리 역사 속에서 ‘천지인’의 천(天)을 가지는 일과 같을지 모릅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그 길이 아름다운 포물선임을 가르쳐준 이가 윤동주입니다.
 
  우리는 윤동주를 역사 속에서 그 시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시를 쓴 저항시인으로 알고 있지만, 만약 윤동주가 역사적 차원에서 저항시로만 ‘서시’를 썼다면 독립한 후에도 우리의 가슴을 울리지는 않았겠지요. 윤동주의 시는 우리 생각의 틀을 한 번 더 깨주고 더 큰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만들어주었던 것입니다.

 

 

 

 

 

 

9.  땅 이야기 -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선생님 이름이 이어영입니까, 이어녕입니까, 이어령입니까?”

 



⊙ 집안에선 “의영아, 의영아!”로 불러… 해방되고는 ‘이어녕’
⊙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2년)가 처음 나왔을 때 ‘이어영’
⊙ 이화여대에 가면 ‘이어녕’ 선생, 교육부에선 ‘이어령’
⊙ 최초의 신소설 《血의 淚》, 최초의 신체시 ‘海에게서 少年에게’의 비극, 한자 세대의 비극
⊙ 한국인에게 묻고, 세계인에게 묻는 말 “너, 어디까지 왔니?”

 

故 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2001년 9월 7일 정년퇴임을 앞두고 고별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건강이 썩 좋지 않아 외부 강연을 하지 못하는 날이 많아 서울 평창동 서재에서 강연을 하고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나를 배려하여 집으로 와준 것이었지요.
 
  그러나 본래 서재는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곳입니다.
 
  생각해보세요. 한 왕궁의 주인인 임금님이라 할지라도 그 왕궁의 주방에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임금이 주방에 들어가면 몇 사람이 죽어나가게 돼요. 일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깨끗하게 유지하려 노력해도 임금님이 보면 “야! 니들이 이걸 나한테 먹였구나, 어! 저기 바퀴벌레도 있구나” 하거든요. 그러니까 주방은 그 성의 주인인 임금은 물론 외부인에게도 절대로 보여주면 안 됩니다. 그 성에서 열리는 파티가 아무리 화려하고 성대해도 그 파티가 열리는 동안 주방에 한번 들어가 보세요. 음식을 막 엎지르고, 쓰레기가 지천으로 널려 있지 않겠어요?
 
  글 쓰는 사람에게는 그런 주방이 바로 서재인 셈입니다. 읽다가 엎어둔 책들, 글 쓰면서 마신 차 찌꺼기가 엉겨 붙은 찻잔, 구겨진 원고지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피곤할 때 잠시 눈을 붙였던 자리의 흔적들. 게다가 남들은 ‘야, 이 양반 참, 뭐 이런 걸 갖다 놨어. 초등학교 애들 방도 아니고’라고 생각할 만한 나에게만 소중하고 영감을 주는 물건들도 여기저기 있어요.
 
  남한테 보이려고 꾸민 공간이 아니니까 그냥 별의별 게 다 정돈되지 않은 채로 있어요. 그래서 여간해서는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장소이지요. 그럼에도 서재까지 여러분에게 열어놓은 것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 60년 넘게 글쓰기를 멈추지 않은 이야기
 

이어령 선생의 서울 평창동 서재에 자리한 《플라톤 전집》. 선생은 생전에 “《플라톤 전집》을 읽고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나는 일제 시대에 초등학교를 다녔고, 초등학교 6학년 때 해방을 맞았습니다. 일제 시대를 제법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지요. 또 23~24세, 대학 4학년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평생을 글을 썼어요. 이렇게 오랫동안 글을 써온 사람이 없을지 몰라요, 주변에. 실력이 나보다 나은 사람이 있지만 이렇게 재수 좋은 사람이 많지가 않거든요. 이렇게 꾸준히 오랫동안 글을 써온 사람을 어디서 구해 오겠어요. 전 세계에 없어요. 서양에서는 괴테 하나가 23세에 글을 쓰기 시작해서 83세까지도 현역으로 글을 썼죠.
 
  그러니까 내가 잘나거나 지식이 특별히 많아 강연하고 글 쓴 게 아니라, 단지 해방 이후 70여 년간 다양한 시대상을 직접 경험하면서 그 경험을 글로 꾸준히 옮긴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거지요.
 
  제가 어렸을 때 누님과 나물 캐러 다닌 게 ‘채집 시대’를 경험한 것 아니겠어요? 오래전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면서 산업 사회에서 ‘정보화와 디지로그’에 관한 글을 쓰고, 후기 정보 사회인 요즘에는 ‘빅데이터’에 관한 글을 썼지요.
 
  그러니까 인간의 한 생애 속에서 누님 쫓아 나물 캐던 채집 시대를 거친 소년이 후기 정보 사회의 빅데이터 강연을 하는 사람은 전 지구상에 나 하나뿐인 거예요.
 

 
  # 채집 시대 때 사랑받는 이는 누구?
  

  우리가 어렸을 때는 정말로 나물 캐러 다녔어요. 쑥과 같은 나물은 하느님이 거저 주신 것이지 인간이 재배한 것이 아니죠. 그러니까 나물 캐기는 채집이에요.
 
  사실 한국 사람들이 내 곁에 있는데, 그게 뭔지를 몰라서 못 찾아 먹는 것일 뿐, 우리는 나물 문화를 가지고 있어요. 콩나물 같은 것은 인간이 재배하기도 하지만 나물의 기본은 산채(山菜), 즉 인간이 가꾼 것이 아니라 산에서 그저 자라는 거예요. 한국 사람들이 이걸 아직도 몰라요.
 
  서양 사람들이 김 먹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서양 사람들은 김을 먹지 않아요. 요즘은 김도 양식 재배를 하지만 본래 김은 인간이 씨를 뿌려 재배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 자연에서 그저 발생한 것을 우리가 뜯어 먹는 것이었거든요. 동양인만 김을 먹어요. 채집 문화, 나물 문화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거죠. 샐러드로 대표되는 서양의 야채 요리는 모두 재배된 식물로 만들어져요. 허브와 같은 향신료조차 그들은 정원의 한쪽에서 따로 재배하죠. 그러나 한국을 보세요. 쑥도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해서 판다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봄날의 시골 장터에 나가 보면 밭둑이나 산에서 직접 채취해온 나물을 파는 할머니들이 시장에 좌판을 펴고 앉아 있고, 우리는 그 나물을 사다가 집에서 반찬을 만들어 먹어요. 서양의 샐러드와는 전혀 다르죠. 우리의 생활 속에 채집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는 거예요.
 
  그런데 채집 시대에, 부지런한 사람과 게으른 사람 중 어느 쪽이 칭찬을 받았을 것 같아요? 지금의 상식으로는 부지런한 사람이 칭찬을 받았을 것 같지만 아니에요. 농경 시대에 부지런한 사람이 자기 논과 밭을 열심히 경작해서 많은 수확을 얻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었지만 채집 시대를 생각해보세요. 농경은 작물을 기르는 일이 주가 되지만, 채집 시대에 인간은 작물을 수확만 할 뿐 기르는 행위는 전혀 하지 않았어요. 기르는 것은 오직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죠. 그러니까 뒷동산에 주어진 사슴은 몇 마리밖에 없어요. 인간의 노력과 관계없이 이미 주어진 것이죠. 그런데 부지런한 사람이 있어 남들이 놀 때 그 사슴을 전부 잡아먹었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다른 사람은 굶을 수밖에요.
 
 
  채집 시대의 勝者 꼬부랑 할머니
 
  부지런한 것은 우리가 직접 생산에 참여할 때나 그러라는 이야기예요. 고사리든 뭐든, 하느님이 주신 것은 똑같으니 그것을 다 함께 나누어 따 먹어야 하는데 부지런한 사람이 있어서 새벽까지 막 따서 자기가 먹고 남은 것을 저축하면, 저축하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죠. 그러니까 옛날 채집 시절에는 게으르고 저축하지 않는 사람이 그 공동체에게 굉장히 사랑받는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예요. “너 착한 애야”라는 칭찬도 받고요. 그래서 요즘은 노름해서 지면 그 사람에게 돈을 빼앗지만, 옛날에는 일을 아예 못 하도록 도구를 빼앗았어요. 그 사람이 일을 못 해야 그만큼의 배분이 나에게 돌아오니까요. 우리 생각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집는 이것은 마셜 살린스(Mashall Sahlins·1930~2021년)의 《석기시대 경제학》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옛날 사람이 혼자 벌어서 몇 사람이나 먹여 살렸을 것 같아요? 대개 두 사람, 세 사람 정도고 나머지 사람들은 자기가 먹을 것을 직접 다 채집해 왔어요.
 
  그러면 제가 질문 하나 할까요? 채집 시대 때 가장 경쟁력 있는 자가 누구였을까요?
 
  아프리카의 수렵 채집민 하드자족 예를 든다면 가장 많은 식량을 구한 이는 놀랍게도 노파들이었다고 하죠. 그것도 뼈와 가죽만 남은 노파들…. 미국의 저명한 인류학자이자 영장류학자인 세라 블래퍼 허디(Sarah Blaffer Hrdy·1946~)의 《어머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따르면, 어디서 음식을 구해서 먹이는 할머니와 이모할머니가 있으면 아이들은 풍족한 영양을 공급받아 잘 자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할머니가 바로 내가 비유로 늘상 이야기하던 ‘꼬부랑 할머니’입니다. 이 이야기는 뒤에 다시 할게요.
 
  할머니의 무조건적 사랑 내지 희생, 무엇보다 손주에 대한 아낌없는 사랑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채집 시대 때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따져보면 남성은 식량을 구하러 장거리 여행을 떠나거나 사냥 혹은 싸움으로 다치거나 죽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어요. 여성 입장에선 먹고사는 문제를 남성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 없는 이유였죠.
 
  그러니 때로 스스로 살아갈 궁리를 해야 했고 예고 없이 찾아온 기근이나 추위, 풍수해 같은 자연재해는 물론 보릿고개 같은 불가피한 식량난까지 대비해야 했어요. 이럴 때 가족 내지 집단 내에 모계 친척 여성, 즉 어머니, 외할머니, 이모할머니의 존재는 아이들의 성장과 생존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음을 예상할 수 있어요.
 
  한편, 채집민들은 사냥감을 집단 전체와 나눠 가졌다고 해요. 그러나 남성의 채집(사냥)만으론 집단이 필요로 하는 칼로리의 절반도 채울 수 없었다고 하지요. 그럼 나머지는 어떻게 메웠을까요? 여성, 무엇보다 할머니의 비중이 커질 수밖에요. 또 일부 남성은 일부일처(一夫一妻)에 만족하지 않았을 겁니다. 뒤집어 말하면 여성 역시 부성(父性)의 지원이 불확실한 남성과도 짝을 맺었던 거지요. 결국 여성 스스로 남성의 빈 자리를 어떤 식으로든 메워야 했는데 ‘대행 부모’ 내지 ‘돌봄 공유’의 형태에 가장 적합한 존재가 할머니이고 장수하는 할머니는 ‘인류의 에이스 카드’였지요.
 
  세라 허디의 이런 시각은 내가 이야기하는 ‘꼬부랑 할머니’와 일맥상통합니다. 남자들이 채집이나 사냥을 해오면 누가 요리해요? 여자는 애 낳고 키우면서 자연히 집에 있게 되잖아요. 불을 다루는, 부지깽이를 든 여자가 바로 인류 최초의 요리사, 즉 꼬부랑 할머니죠.
 
  헤겔은 ‘최초의 전사(戰士)’, 즉 남성이 역사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내가 볼 때 아닙니다. 최초의 역사를 만든 이는 전사 혹은 싸움꾼이 아니고 부지깽이를 든 여성, 꼬부랑 할머니입니다.
 
  다른 영장류와는 구별되는 이런 인간의 ‘협동 육아’가 진화사에 큰 변곡점을 만들었고, 세라 허디의 표현을 빌리자면 타인의 마음을 읽는 행위, 공감하고 협력하는 태도, 나눔과 같은 ‘상호 이해(Mutual Understanding)’를 하게 되었지요.
 
  이런 관계 속에서 점점 현실의 어려움이나 닥쳐올 고난을 ‘준비’하고 ‘대비’할 수 있었어요. 그러면서 인류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되고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으며, 나는 그리고 우리는 누구일까’를 질문할 수 있게 되었지요.
 
 
  # ‘어디까지 왔어?’라는 말의 뜻
 


  자, 우리가 그 수렵채집의 시대로부터 지금 어디까지 왔나를 생각해보세요.
 
  전화가 와도 옛날 같으면 “누구십니까” 했을 것을 요즘은 전화에 발신인이 누구인지 다 뜨니 그런 것을 묻지 않죠. 그 대신 기다리는 남자친구 또는 여자친구가 약속시각이 지났는데도 사람은 오지 않고 전화만 올 때, 첫마디가 이래요.
 
  “너, 어디야 거기?”
 
  그다음으로 하는 말은 “어디까지 왔어?”죠. 요즘은 모바일 시대라 다들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잖아요.
 
  초등학생쯤 되는 아이가 길바닥에서 막 울먹울먹하면서 휴대전화를 걸 때 옆에서 가만히 들어보면 아마 이렇게 말을 할 거예요.
 
  “엄마 어디야? 어디까지 왔어?”
 
  다른 애들은 하교 시간에 다들 엄마가 와서 데리고 가는데 내 보호자만이 오지 않을 때 하는 말이죠. 또 있어요. 어머니들이 늦도록 들어오지 않는 딸에게 전화를 걸어서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너 지금이 몇 시야? 어디까지 왔어?”
 
  어머니는 딸이 오는 시각에 맞추어 골목길로 마중을 나가줘야 하니까요. 아버지들이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도 그래요. 요즘 아들들이 아버지 말을 그렇게 잘 듣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전화를 걸어서 “야, 너 어디까지 왔어?” 한 뒤에 바로, “뭐? 떠나지도 않았어?”라고 말을 합니다. 아들은 아예 떠나지도 않은 것이죠.
 
  이런 건 또 할아버지들이 하는 것도 있어요. 명절이나 제삿날인데 서울에 있는 자식만 안 왔어요. 세상 풍파를 다 겪어본 할아버지는 딱 점잖게 어린애처럼 보채는 일도 없이 신경질도 안 내고 느긋하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씀하시죠.
 
  “누구야, 다들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어디야? 어디까지 왔어?”
 
  할아버지들의 맥없는 그 말은 참 가슴 아픈 이야기이기도 해요. 다른 자식들은 다 왔는데 서울 애만 안 오는 거예요. 지금 제사도 다 지내고 명절이면 차례도 다 지냈는데 그 애만 늦는 거죠.
 
  서울 사람들은 대부분 늦어요. 우리가 약속시각보다 늦게 왔을 때 제일 많이 하는 거짓말이 “길이 막혔다”는 말이에요. 도로가 막히지 않아도 “거의 다 왔는데 길이 막혀요”라고 말하잖아요.
 
  그러니까 전화할 때 거짓말을 제일 많이 해요. 거북한 전화가 왔을 때는 잘 들리면서도 이렇게 말하잖아요.
 
  “전화 상태가 나빠서 잘 안 들려. 내가 나중에 걸게.”
 
 
  #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한국과 세계는 어디에 있는지
 


  내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어디까지 왔고 어디에 있는지, 이것을 내가 때로는 유치원, 초등학교 아이 입장에서, 때로는 딸을 기다리는 어머니 입장에서, 또 아버지와 할아버지 입장에서 한국인에게 묻는 거예요.
 
  “어디까지 왔니? 거기 어디야?”
 
  또 아시아인에게 같은 질문을 해요.
 
  사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어요. 과거엔 우리가 유럽을 위시한 서양 사람을 죽어라 쫓아갔지만, 이제는 거꾸로 서양 사람이 동양을 보고 있어요. 그런데 이 아시아 사람들은 지금 갈등만 하고 있어요. 그래서 ‘아시아 사람은 어디까지 왔냐?’를 묻는 거죠. 유럽은 EU(유럽연합)를 만들고, 미국은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가 있는데 아시아인은 뭘 하고 있어요? 어디까지 왔어요?
 
  앞으로 세계 경제에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의 역할과 비중이 더 커지리라 기대해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는 11월 18~19일 태국 방콕에서 APEC 정상회의가 열리고, 이보다 앞선 15~16일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G20 정상회의가 개최된다고 하네요.
 
  마지막으로 하나 더 물을 것이 있어요. 코로나19 이전의 메르스 사태 때 뭘 느꼈어요? 우리와 아무 관계도 없을 줄 알았던 그 중동의 낙타, 내가 한 번 보지도 못했던 그 낙타 때문에 우리가 온통 난리를 겪었잖아요.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지금도 그 난리를 치고 있어요. 원인은 박쥐의 코로나 바이러스와 기원이 알려지지 않은 코로나 바이러스 사이의 재조합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요. 세상에 박쥐가 다 뭐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무관한 사람은 없어요. 글로벌이니 로컬이니 이런 이념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이에요. 우리 밥상을 보세요. 우리 시골에서 키운 게 별로 없어요. 표고버섯과 밤은 일본산, 손질한 고등어는 네덜란드산, 소고기는 호주산, 돼지고기는 멕시코산, 닭고기는 캐나다산, 전지분유는 뉴질랜드산을 자주 먹으니 우리 밥상만 하더라도 이미 글로벌한 것이죠.
 
  그러니 마지막에는 세계인들에게 물어야 해요. 우리만 행복해도 안 돼요. 아프리카에서 병이 나고, 또 지구 어딘가에서 지진이 나는 속에 우리 혼자 행복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또 전 세계 사람에게 묻습니다. “너, 어디까지 왔니?”라고.
 
  한국인에게 묻고, 아시아인에게 묻고, 세계 사람에게 묻는데 그중 제일 급한 것은 한국인에게 묻는 것이고, 그보다 더 급한 것은 나에게 묻는 것입니다.
 
  내가 늘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어디서 불났다”고 할 때 놀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자기 동네에서 불났다”고 그러면 다들 문을 열어보고, “이웃집에서 불이 났다”고 하면 바로 집으로 달려가거나 도망을 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민족, 애국 이런 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어디 왔느냐를 알면 한국이 어디에 왔는지를 알고 아시아가, 세계가 어디에 있는지를 압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지금 나의 책을 읽는 목적이고, 또 내가 여러분에게 말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디까지 왔나’를 생각하는 목적입니다.
 
  이야기의 전체 주제를 알아야 해요. 초상집에 갈 때 누구 초상인지는 알고 가야지, 실컷 울고 나서 “그런데 누가 돌아가셨대? 이럴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이야기의 시작이 어딘지를 알아야 합니다.
 
 
  # 환경·시대에 따라 ‘이어영’ ‘이어녕’ ‘이어령’으로 불린 이야기
 

이어령 선생이 1962년 펴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현암사). 오른쪽은 문학사상사가 발행한 같은 책이다. 이 책은 단행본으로 국내에서만 수백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고 미국, 일본, 중국 등지에 번역 출판되었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가 1962년에 처음 나왔어요. 그때는 저자의 사진을 책에 넣어주는 경우가 있었거든요. 그 책의 저자 보관본 사진 속지에 내가 내 이름을 써넣었는데 ‘이어영’이라고 썼어요. 그런데 시간이 흘러 언젠가부터 ‘이어령’이라고 사인을 했어요. 세월이 흐르면서 얼굴색이 변한 것처럼 이름도 바뀐 겁니다.
 
  어렸을 때 집에서 나는 ‘의영’이라고 불렸어요. 서울 경기도에서는 ‘어’자의 발음을 ‘의’라고 했거든요. ‘암행어사’라고 하지 않고 ‘암행의사’라고 하는 식이죠. 그러니까 원래 ‘령(寧)’자는 단어의 제일 앞에 나오면 ‘영’으로 발음하고 중간에 나오면 ‘령’으로 읽어야 하는데, ‘어(御)’자를 ‘의’라고 발음해버리니까 히아투스(Hiatus·모음충돌) 현상이 일어나지 않아서 ‘령’자가 처음에 나온 것과 마찬가지가 되어 ‘영’으로 발음하게 된 거죠. 그래서 집안에서는 다들 “의영아, 의영아!” 그렇게 불렀어요.
 
  학교에 들어가서는 다들 표준말을 쓰니까 지금이라면 의당 내 이름을 찾을 수 있었겠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때는 일제 시대라 창씨개명 때문에 아무도 내 진짜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어요. 6학년 때 해방이 되면서 비로소 이름을 찾았는데 그때는 ‘어녕’이라고 했어요. 그러다 또 중학교에 갔더니 그때는 한글맞춤법도 없었을 땐데, 국어 선생님이 “‘어녕’이가 뭐냐, ‘어영’이다, 너는” 하셨어요. 그래서 내 이름의 영문 표기는 ‘O Young’이에요. 인터넷에서 나를 영어로 검색할 때도 그렇고, 내 책 영문 번역본의 저자 이름도 모두 ‘by Lee O Young’로 되어 있어요.
 
  오래전 영국문화원(British Council)에서 우리 외교 문화인사를 초청하는 행사가 있었어요. 내가 거의 최초의 한국문화론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의 저자이고 대학교수니까 나를 초청했었죠. 대학 졸업 직후에 교수를 했으니 교수치고는 무척 젊었던 나를 보고 영국 문정관이 자기도 모르게 “Oh, Young!”, 그러니까 ‘너 참 젊다!’며 감탄을 해요. 그러더니 자기가 나를 초청하려면 내 이름의 로머나이즈(romanize)를 써야 한다며 묻기에, “너 지금 나에게 ‘Oh, Young’ 그랬잖아, 그렇게 쓰면 돼. ‘Young’이라고”라고 대답한 일이 있어요. 그러니까 내 영문명은 ‘오영, 어영’이죠.
 
  그 뒤 내 글이 국정교과서에 실리게 되어 편수관들이 모였어요. 그때는 남의 이름이라도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국가에서 지정한 표기법으로 통일하게 되어 있었어요. 당시 국가 지정 표기법으로는 지명은 속음으로 읽게 되어 있었어요. 그러니까 충남 보령(保寧)이라고 하지 ‘보영’ 또는 ‘보녕’이라고 읽거나 표기하지 않잖아요. ‘보령, 회령, 비령’ 하는 식으로 지리책에서 ‘寧’자가 들어간 지명은 모두 ‘령’으로 표기하니까 사람 이름에도 ‘寧’자가 있으면 ‘령’으로 표기하는 것이 원칙이 되는 거죠. 그래서 교과서에는 내 이름이 ‘이어령’으로 표기되었어요.
 
 
  “아무렇게나 불러도 됩니다”
 

현암사가 펴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에 실린 이어령의 사진과 사인. 사인이 ‘이어영’으로 적혀 있다.
  당시 내가 교수로 있던 이화여대에 가면 ‘이어녕’ 선생이고, 월급봉투나 기타 문서에도 ‘이어녕’인데 교육부에 가면 ‘이어령’이 되어 교과서에는 전부 ‘이어령’으로 실렸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술 먹다 말고 한밤중에 나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묻는 겁니다.
 
  “선생님! 지금 싸움이 붙었는데, 선생님 이름이 이어영입니까, 이어녕입니까, 이어령입니까?”
 
  그때마다 나는 “아무렇게나 불러도 됩니다”라고 대답했어요. 사람들은 “아니, 내기가 걸렸는데 아무렇게나 하면 돼요?”라고 불평했지만, 나로서는 그렇게 대답해서 서로 다 이긴 걸로 해주는 수밖에 없었어요. 내가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면 누군가는 잃을 수가 있는데 그건 내 책임이잖아요. 한때는 책에 저자 사인을 ‘이어영’이라고 했는데, 왜 그때 ‘이어영’이라고 사인해놓고는 지금은 ‘이어령’이라고 하느냐고 따지면 나는 할 말이 없거든요.
 
  교육부가 나에게 붙여준 이름 ‘이어령’, 집안에서 불러준 ‘이의영’, 중학교 때 ‘이어영’, 그리고 대학에서는 ‘이어녕’! 이렇게 내가 내 이름을 어려서부터 쓰고, 20대부터 글을 쓰고 책을 내기 시작해서 거의 60~70년을 이 성(姓)과 이름을 가지고 책을 내고 저자 사인을 해주었는데도 내가 내 이름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거예요.
 
  게다가 남들은 나한테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니,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자기의 이름을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어디까지 왔니’처럼 광복 후 70여 년이라는 긴 세월 속에 일제 시대 강제로 창씨개명한 것을 제외하고라도 ‘李御寧’이라는 이름이 이처럼 다양하게 변한 거예요. 남들이 그렇게 불러준 것만이 아니라 나 스스로도 그렇게 다양하게 변환하며 써왔어요. 1962년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초판 저자 보관본에는 이렇게도 선명하게 나의 글씨로 써놓은 나의 이름 ‘이어영’이 있으니까요.
 
 
  #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에 담긴 뜻은…
 
  내 이름에도 이러한 비화가 있지만, 나의 첫 번째 책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역시 이름에 얽힌 이야기가 있어요. 사람들은 이 책의 제목을 두고 시적(詩的)이라는 말을 많이 해요. 사실 이 책이 첫 출간될 당시에는 한자어로 된 제목이 일반적이었거든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당시 일반적으로 쓰이던 한자어 제목으로 바꾸면 ‘풍토(風土)’가 돼요. 정신풍토, 지리풍토 이런 말로도 많이 쓰이고, 영어로 하면 Climate. 기후, 풍토. 희랍어로는 ‘기울다’는 뜻이죠. ‘경사져 있다’는 말이에요. 흔하게 쓰고 듣던 말이지만 ‘풍토’라는 말을 하면 가슴에 찡하게 오는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한자를 말했기 때문이지요. 풍토의 풍(風)은 바람 풍자예요. 토(土)는 흙이라는 뜻이죠. 저는 이 풍토라는 말을 세 살 때 어머니에게 배운 말로 바꾸면서 바람이 뒤에 오고 흙이 먼저 오도록 순서만 뒤집었어요. 그리고 흙, 바람이라는 말에 ‘속에’라는 말을 붙였어요. 또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건데 ‘저’라는 말을 슬쩍 끼워 넣어 ‘저 바람 속에’라고 손가락질하듯이 하니까 바람이 보여요.
 
  그러니까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라는 건 ‘풍토’라는 말인데, 한자로 風土라고 할 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추상어였다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라는 세 살 때 배운 순수한 우리말로 바꾸는 순간 ‘아! 풍토라는 말이 바람과 흙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거죠. 흙과 바람. 우리 몸, 육체는 흙이에요. 마음, 또는 정신(Spirit)이라는 것은 바람이에요. 흙은 변하지 않지만 바람은 수시로 변해요. 그러니 우리에게는 변하는 ‘나(마음)’와 변하지 않는 ‘나(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죠. 나만이 아니라 한국에도 그런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기에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인 거예요. 《풍토》가 아니라. 사실 이 제목 덕분에 그 당시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 한국 근대에 담긴 비극적 현실
 

1906년에 간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인 이인직의 《혈(血)의 누(淚)》. 사진은 2016년 한 출판사가 펴낸 《혈의 누》.
  한국 근대문학이 막 부화하던 시절 책 제목을 어떻게 붙였는지 볼까요?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로 알려진 이인직(李人稙·1862~1916년)의 《혈(血)의 누(淚)》를 들어보셨지요? ‘피의 눈물’이라고 하면 간단할 것을 신소설이라고 내세우면서도 제목은 굳이 한자를 써서 ‘혈의 누’라고 붙였어요. 소설가들이 모두 한자에 절어 ‘피의 눈물’이라는 말을 못 하는 거예요. 소설가는 제 나라말, 그것도 세 살 때 배운 말로 소설을 써야 하는데, 엄청난 한자문화 때문에 한자 세대는 한자가 우리나라 말보다도 더 익숙했어요. 그러니까 《혈의 누》 같은 제목을 쓰게 되는 거죠. 한글 세대인 요즘 사람들은 《혈의 누》라는 제목을 보면 ‘남원 광한루’ 같은 것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지요.
 
  “내 눈에서 피눈물이 나” 그러지 “내 눈에서 혈의 누가 난다”라고 하면 무슨 실감이 나나요? 아버지가 막 화를 내면서 “너 그 짓하면서 내 눈에서 피눈물 나는 걸 봐야 되겠냐!” 이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 찡한데, “내 ‘혈의 누’ 나는 걸 봐야 되겠냐!” 하면 아무 감동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풍토》, 그러면 독자들이 감동하지 않는데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하면 감동하는 거예요. 게다가 그냥 바람도 아니고 ‘저 바람’이라 하고 거기다 ‘속’이라는 글자가 두 개 나오니 운율이 붙는 거예요. 또 이게 완결된 문장이 아니에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그러니까 종이 울리다 만 것처럼 여운이 있잖아요. 흙 속에 뭐가 있는지, 바람 속에 뭐가 있는지 아무 이야기도 안 했는데 사람들은 제목 하나만으로 상상하는 거예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있는 무언가에 대해.
 

대한민국 제1호 잡지 《소년》 창간호. 독자 6명으로 시작한 14전짜리 《소년》은 1908년 11월 최남선이 발행했다. 최초의 신체시 ‘海에게서 소년에게’는 《소년》 창간호의 권두시로 발표되었다.
  특히 이상한 것은 ‘신체시(新體詩)의 효시’라고 하는 최남선(崔南善·1890~1957년) 선생이에요.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시를 최남선 선생이 썼는데 그 작품의 제목이 ‘海에게서 少年에게’예요. 바다 해(海)자를 썼어요.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국제펜클럽대회를 한국에서 열었을 때 내가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시 ‘海에게서 少年에게’를 소개한 일이 있어요.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왔지요. 스크린 전면에 이 시의 영문 제목이 떴는데 눈이 아득해지더라고요. ‘From the sun, To the boys’라고요. 화들짝 놀랄 수밖에요. 번역자가 한글로 ‘해에게서 소년에게’라고 적어놓은 걸 보고 바다 해(海)를 하늘에 떠 있는 해(日)로 생각을 하고 영문으로 옮긴 거죠. 이것이 우리나라 신체시의 비극이에요. 신체시라고 했으니 ‘바다에서 소년에게’라고 하는 것이 마땅한데 왜 ‘海에게서 소년에게’라고 했을까요? 당시에는 바다를 해(海)라고 하고, 사람을 인(人)이라고 하는 게 더 알기 쉬웠던 거죠. 한자 세대니까.
 
  병원 중에 이비인후과라는 게 있잖아요. 이비인후과의 ‘이(耳)’는 귀를 뜻하는 한자예요. 그러나 우리말의 ‘이’는 치아를 의미하죠. 그래서 누가 “너 이가 이상하다”라고 말하면 되묻게 되는 거죠. 두 손으로 각각 귀와 치아를 가리키며 “귀요? 치아요?”라고.
 
  그러니까 신소설, 신체시를 쓰던 이인직·최남선 선생이 굉장히 위대한 분이지만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은 한자 세대가 아닌 한글 세대라서 그분들의 위대성을 실감하기 어려운 것이죠.
 
 
  # 나는 무슨 세대에 속할까
 

국립국어원은 이어령 문화부 장관 시절인 1991년 1월 23일 개청했다. 이어령 장관, 안병희 초대 국어연구원장 등이 서울 종로구 운니동 덕성여대 별관에 마련한 새 청사에서 현판식을 갖었다.


  한글 세대, 즉 우리말 세대는 광복 이후 고작 70여 년밖에 되지 않아요. 한글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여러분은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겠지만, 한국 사람이 세 살 때 배운 어머니 말로 통하는 세상이 왔으니 우리는 옛날 사람보다 행복한 시대에 사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나라 말 쓴다고, 이비인후과의 이(耳)라고 하지 않고 귀라고 한다고 행복해하는 사람이 있어요? 행복이 먼 데 있는 게 아니에요. 비교해보면 이인직·최남선 선생이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바다’를 ‘바다’라고 부르지 못하고 ‘해(海)’라고 쓰면 ‘해(日)’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데도 그렇게 썼다고 하니, 또 그걸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시인 신체시라고 부르니, 우리 근대라는 것이 오죽했겠어요.
 
  한글 세대 이전에 한자 세대가 있었어요. 나는 서당 가서 천자문을 배웠으니 한자 세대에 약간은 걸쳐 있는 사람이에요. 일제 시대에 태어나 자랐고 그때 초등학교에 다녔으니 일어 세대는 말할 것도 없죠. 이름까지도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했었으니까요. 그러면서도 나는 ‘혈의 누’와 같은 형식의 제목인 ‘풍토’라고 하지 않고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라고 했어요. 풍토라는 한자어를 순수한 어머니의 말로 한 거죠. 이 책이 외국에서도 《Climate》가 아니라  《In This Earth, In That Wind》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어요. 풍토라는 말이 한자에서 온 것이 아니라 우리의 흙과 바람이라는 의식이죠. 이것을 영어로 번역했을 때 내 사상은 중국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한국의 사상이 배어 있는 것이 세계로 알려졌어요.
 
  이렇게 되니 결국 나는 무슨 세대에 속할까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천자문을 읽었고 그다음에 일본어를 썼어요. 학교에 가서 한글을 체계적으로 배우기 이전에 일본어를 철저히 배워야 했죠. 그곳은 한국어를 쓰면 벌을 서던 세계였어요. 6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국어를 자유롭게 읽고 쓰게 된 사람이 지금은 언어를 다루는 문필가가 되었어요. 한글 세대가 된 거죠.
 
  한때는 사람들이 내가 우리말로 감동을 준다고 해서 ‘언어의 마술사’라고 불렀는데 내가 붙인 말이 아니에요. 실은 별명이 몇 개 있는데 ‘창조의 아이콘’ ‘창조적 지성’, 그리고 뭐… ‘한국대표 지성’.
 
 
  내가 제일 바라는 말은
 
  솔직히 하나도 안 맞는 이야기지만 남들이 붙여준 겁니다. 그러니 별명이지요. 난 그런 별명이 싫어요. 대신 “부르려면 크리에이터(Creator)로 불러다오” 하지요. 창조인, 생각하는 사람(Thinking Man)이라고 부르는 게 내가 제일 바라는 것입니다.
 
  광복 이후 다른 나라들이 200년 걸려도 하지 못한 산업문명의 모든 것을 우리는, 한국은 불과 몇십 년 안에 다 치러야 했습니다. 범람하는 산업화의 물결, 급변하는 문명의 충돌 그 사이사이, 고비고비마다 굵직한 모토를 던져왔지요. 20대에는 ‘우상의 파괴와 저항의 문학’, 30대에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로 대표되는 한국문화론, 40대에는 일본문화론인 ‘축소 지향의 일본인’, 50대에는 88서울올림픽 슬로건 ‘벽을 넘어서’, 60대에는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 70대에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접목을 말하는 ‘디지로그’, 80대에는 ‘생명이 자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물 한 방울’이라는 키워드를 던졌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세계의 어떤 문필가와 교수가 만년 동안 살아야 체험할 수 있는 인류 문명의 전 과정을 80여 년 한평생 동안 모두 체험하고 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의 서문
 
[편집자 註]


  1962년 현암사에서 이 책이 처음 출간되었다. 이후 동화출판공사, 범서출판사, 갑인출판사, 삼성출판사, 문학사상사에서 이 책을 찍었다.   단행본으로 국내에서만 수백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고 미국, 일본, 중국 등지에 번역 출판되었다. 컬럼비아대에서 동양학 연구자료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어령 하면 수많은 저작물 중에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기억하는 이가 많다. 이 책의 서문은 너무나 아름답고 슬프다. 아무리 읽어도 감동이 식지 않는다.

 


  그것은 지도에도 없는 시골길이었다. 국도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한국의 어느 시골길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길이었다. 황토 흙과 자갈과 그리고 이따금 하얀 질경이 꽃들이 피어 있었다. 붉은 산모롱이를 끼고 굽어 돌아가는 그 길목은 인적도 없이 그렇게 슬픈 곡선을 그리며 뻗어 있었다. 시골 사람들은 보통 그러한 길을 ‘마차길’이라고 부른다.
 
  그때 나는 그 길을 지프차로 달리고 있었다. 두 뼘 남짓한 운전대의 유리창 너머로 내다본 나의 조국은, 그리고 그 고향은 한결같이 평범하고 좁고 쓸쓸하고 가난한 것이었다.
 
  많은 해를 망각의 여백 속에서 그냥 묻어두었던 풍경들이다.
 
  이지러진 초가집의 지붕, 돌담과 깨어진 비석, 미루나무가 서 있는 냇가, 서낭당, 버려진 무덤들 그리고 잔디, 아카시아, 말풀, 보리밭… 정적하고 단조한 풍경이다.
 
  거기에는 백로의 날갯짓과도 같고, 웅덩이의 잔물결과도 같고, 시든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 같고, 그늘진 골짜기와도 같은 그런 고요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폐허의 고요에 가까운 것이다. 향수만으로는 깊이 이해할 수도 또 설명될 수도 없는 정적함이다.
 
  아름답기보다는 어떤 고통이, 나태한 슬픔이, 졸린 정체(停滯)가 크나큰 상처처럼 열려져 있다. 그 상처와 공도를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거기 그렇게 펼쳐져 있는 여린 색채의 풍경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위확장(胃擴張)에 걸린 아이들의 불룩한 그 배를 보지 않고서는, 광대뼈가 나온 시골 여인네들의 땀내를 맡아보지 않고서는, 그리고 그들이 부르는 노래와 무심히 지껄이는 말솜씨를 듣지 않고서는 그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지프차가 사태진 언덕길을 꺾어 내리막길로 접어들었을 때, 나는 모든 것을 보았던 것이다. 사건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사소한 일, 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가장 강렬한 인상을 가지고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앞에서 걸어가고 있던 사람들은 늙은 부부였다. 클랙슨 소리에 놀란 그들은 곧 몸을 피하려고는 했지만 너무나도 놀라 경황이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은 갑자기 서로 손을 부둥켜 쥐고 뒤뚱거리며 곧장 앞으로만 뛰어 달아나는 것이다.
 
  고무신이 벗겨지자 그것을 다시 집으려고 뒷걸음친다. 하마터면 그때 차는 그들을 칠 뻔했던 것이다. 이것이 그때 일어났던 이야기의 전부다.
 
  불과 수십 초 동안의 광경이었고 차는 다시 아무 일도 없이 그들을 뒤에 두고 달리고 있었다. 운전사는 그들의 거동에 처음엔 웃었고 다음에는 화를 냈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이었다. 이제는 아무 표정도 없이 차를 몰고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을 역력히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잔영이 좀처럼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누렇게 들뜬 검버섯의 그 얼굴, 공포와 당혹스런 표정, 마치 가축처럼 둔한 몸짓으로
 
  뒤뚱거리며 쫓겨 갔던 그 뒷모습, 그리고… 그리고 그 위급한 경황 속에서도 서로 놓지 않으려고 꼭 부여잡은 앙상한 두 손… 북어 대가리가 꿰져 나온 남루한 봇짐을 틀어잡은 또 하나의 손… 벗겨진 고무신짝을 집으려던 그 또 하나의 손… 떨리던 손….
 
  나는 한국인을 보았다. 천 년을 그렇게 살아온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뒷모습을 본 것이다. 쫓기는 자의 뒷모습을.
 
  그렇다. 그들은 분명 여유 있게 차를 비키는 아스팔트 위의 이방인 같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운전사가 어이없이 웃었던 것처럼 그들의 도망치는 모습은 꼭 길가에서 놀던 닭이나 오리 떼들이 차가 달려왔을 때 날개를 퍼덕거리며 앞으로 달려가는 그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
 
  악운과 가난과 횡포와 그 많은 불의의 재난들이 소리 없이 엄습해왔을 때에 그들은 언제나 가축과 같은 몸짓으로 쫓겨 가야만 했던 것일까!
 
  그러한 표정으로, 그러한 손길로 몸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우리의 피부빛과 똑같은 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우리의 비밀, 우리의 마음이 있다.

 

 

 

 

10.  땅 이야기 - 부지깽이, 두레박, 이끼
           ‘부뚜막 위 부지깽이가 되자’

 


 
⊙ 남을 불태워주는 추임새를 넣는 사람이 되어라
⊙ ‘우물가 옆 두레박이 되자’… 자기 두레박 없어도 함께 두레박 쓸 수 있는
⊙ ‘바위 위 이끼가 되자’… 딱딱한 바위를 초록으로 덮어 생명이 싹트게
⊙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일이 인간의 영원성을 찾는 일과 같아

 

  한국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절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아요. 닭살 돋고 낯간지러워 절대 하지 못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진짜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그런 말을 안 쓰는 거예요.
 
  서양 사람은 내(I)가 너(you)를 사랑(love)한다고 말하는데, 그 말을 하는 순간 사실은 벌써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랑하면 너와 내가 하나, 한 몸이 되는 건데 나와 너를 따지는 순간 사랑하는 것이 아니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사랑해” 이러지 “내가 너를 사랑해” 이렇게 말하지 않아요.
 
  사랑 고백할 때 남편은 아내에게 “사랑해”라고 해요. ‘나, 너’를 빼고 그냥 “사랑해”. 사실 그것도 상당히 발전한 거예요. 원래 한국 사람들은 진짜 사랑해서 구혼할 때 “사랑해”라는 말 대신 “니캉 내캉 함께 살자”라고 말했어요. 참 좋은 말이죠. 너와 내가 함께 살자! 살자는 건 생명을 말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평생 동안 글을 쓴다는 건 말을 찾는 거였어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
 
  그러고 보면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팔도마다 다 틀려요. 그러니 찾는 과정이 어렵지요. 어렵지만 즐겁기도 하고요.
 
  경상도 사투리로 ‘너를 사랑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디져도 그런 말 몬 한다.”
 
  전라도 사투리로 ‘너를 사랑해’는 “거시기 혀!”, ‘널 죽도록 사랑해’는 “오메 거시기 혀!”. 또 다른 버전으로 “니가 오살나게 좋아브러”.
 
  충청도 사투리로 ‘너를 사랑해’는 “임자밖에 서” 혹은 “꼭 말루 허야 하남”이죠. 충청도 사람이 기분이 좋을 때 “뭐여…”라고 말하고, 기분 나쁠 때는 “뭐여!”, 짜증 날 때도 “뭐여!!”라고 하지요. 이처럼 같은 의미라도 쓰이는 방식, 표현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사람마다 지역마다 사회마다 다 다릅니다. 그러니 일일이 ‘찾아가는’ 것이지요.
 
 
  # 문화부 장관 시절, ‘갓길’ 이야기
 

1990년 10월 12일 자 《조선일보》에 어느 독자가 〈노견 어원이 뭐냐. 갓길이면 어떨까〉라는 글을 투고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갓길 표시’ 또는 ‘갓길 없음’ 표시가 나오는 걸 보게 될 거예요. 그것이 내가 만든 말이에요. ‘갓길’. 그래서 내 별명이 ‘갓길 장관’이 되었어요. 문화부 장관 하면서 뭘 했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별로 한 일이 없는 것 같은데 고속도로 타고 가다 보면 ‘아, 내가 그래도 이름 하나는 바꿨구나’ 싶어요.
 
  갓길은 무엇보다 어색하지 않다는 장점이 있었어요. 한자어를 순우리말로 순화한다면서 공처가를 ‘아내 무섬쟁이’니, 이화여대를 ‘배꽃 계집 큰 배움터’ 막 이런 어색한 말로 바꾸니까 사람들이 저항감을 느껴 결국 바꾸지 못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갓길은 입에 착 붙어요. 내가 그 이름을 짓기 전에는 노견(路肩), 혹은 길어깨라고 했어요. 노견이라고 하니까 무슨 길거리 개(路犬)을 말하는 거냐고 사람들이 막 욕하니까 그다음으로 제안된 이름이 길어깨였어요. 노(路)가 길이고 견(肩)이 어깨니까 길어깨. 노견과 함께 길어깨라는 이상한 이름이 불리기도 했어요. 그래서 내가 국무회의에서 “그 길을 ‘노견’이나 ‘길어깨’라고 하면 절대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어요.
 
  당시 행정용어 표기 문제는 내무부 소관이었는데 내무부에서 갓길 통행 과태료 법을 통과시키려고 할 때였어요. 사실 갓길은 길이 아니라, 고속도로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차가 그 길을 달리면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길도 아닌 거죠. 그러니까 다른 장관들이 “그건 당신 소관도 아닌데, 문화부 장관이 왜 나서냐, 그리고 길도 아닌데 갓길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사람들이 그걸 오히려 더 길로 착각하고 달릴 것 아니냐”며 반대했어요. 그때 내가 이렇게 말했죠.
 
 
  갓길의 기적, 《행정용어순화편람》(1992)
 

1992년 12월 《행정용어순화편람》이라는 책이 이문석 총무처 장관 명의로 나왔다. 1991년 말에 〈행정용어바르게쓰기에 관한 규정〉이 제정되면서 총무처와 법제처, 문화부 등이 중심이 되어 대대적인 행정용어 순화 작업을 벌였다고 한다.


  “‘길갓집’을 생각해봐라. 길갓집은 길의 가에 붙어 있는 집이지, 길 위에 있는 집이 아니다. 그러니까 갓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그게 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국무회의는 장관회의가 아니라 나라 살림에 관한 회의다. 그 길의 이름은 대한민국 온 사방에 다 붙을 건데, 그 글자는 문화에 관한 것 아니냐.”
 
  이렇게 막 밀어붙여서 결국 내무부에서도 ‘갓길’로 이름 붙이게 된 거예요. 갓길. 가에 있는 길, 갓길. 어린아이도 이해하기 쉬운 말이잖아요.
 
  게다가 누가 만든 말이 아니라 옛날부터 써온 말 같지 않아요? 일제 시대 때 발행된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를 찾아봐도 갓길이란 표현은 나오지 않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쓰였지만 순우리말이어서 쓰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사실 노견은 일본식 표현입니다. 과거엔 고속도로 표지판에 〈노견주행 엄금〉이라는 표현이 많았습니다. 미국 등 서양에서 ‘Road Shoulder’라는 표현을 쓰는데 일본 사람들이 그걸 보고 한자로 옮겨 만든 용어죠. 1960년대 정부 행정용어로 노견이란 한자어 대신 같은 의미의 길어깨라고 쓰기도 했어요. 1982년 《이희승 국어대사전》에도 길어깨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공식적으론 길어깨로 쓰면서 표기는 노견이라 적고, 뒤죽박죽 써온 것이지요.
 
  그러나 갓길은 세 살 때 어머니에게 배워서 써온 말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정착되었어요. 노견이 갓길로 바뀐 후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전부터 일제식 행정용어를 우리말로 바꾸자는 움직임이 있어왔는데 갓길이 마중물이 된 셈이지요.
 
  1992년 12월 《행정용어순화편람》이라는 책이 이문석 총무처 장관 명의로 나왔습니다. 앞서 1991년 말에 〈행정용어바르게쓰기에관한 규정〉이 제정되면서 총무처와 법제처, 문화부 등이 중심이 되어 대대적인 행정용어 순화 작업을 벌였죠.
 
  어문 관련 단체 등 71개 기관에서 순화 대상 용어를 수집하였어요. 이렇게 모은 8673개 용어를 국어심의회 등 전문기관의 심의를 거쳐 1차로 최종 확정해 《행정용어순화편람》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당시 편람에 들어간 사례는 이렇습니다. 그땐 왜 이리 어려운 말을 썼을까 싶어요.
 
  고오바이 → 오르막·물매·비탈길
  가께소바 → 메밀국수
  가꾸목(角木) → 각목·각재
  가도(假道) → 임시도로·임시통로
  가리방 → 줄판
  도선장(渡船場) → 나룻터
  브로슈어(brochure) → 안내서
  쇄정(鎖錠)하다 → 잠그다
  시건(施鍵)장치 → 잠금장치
  오시핀 → 납작못
  영세민 → 저소득층
  잠업(蠶業) → 누에치기
  재식(裁植)하다 → 심다
  절석(切石) → 마름돌
  품신(稟申)하다 → 건의하다
  핫 라인 → 직통전화
 
 
  마을 입구 정자목, 쌈지공원, Vest Pocket Park
 
  내가 만든 말은 그것만이 아니에요.
 
  주택가 곳곳에 조그마한 공원을 만들어 ‘쌈지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그걸 문화부 장관 재임 시절 3개를 만들었는데 지금은 전국에 쌈지공원이 수천 개 있어요. 과거 농촌 등 집단 거주지의 중심지나 마을 입구의 정자목을 중심으로 형성된 자생적인 소공원 형태의 ‘농촌 공동쉼터’를 도시에 정책적으로 적용시킨 것이죠.
 
  ‘쌈지’라는 건 작은 주머니를 말하는 우리말이에요. 작은 공원을 그냥 흔하고 평범하게 ‘작은공원’이라고 하지 않고 쌈지공원이라는 예쁜 이름을 붙여준 거죠.
 
  서구에서도 비슷한 개념의 공원이 많아요. 뉴욕 허드슨 강이 내려다보이는 허드슨 하이트(Hudson Height)라는 곳이 있어요. 맨해튼 끝자락에 위치한 언덕이죠. 이 지역에 3개의 도로가 만나는 교차로가 있는데 차가 빨리 지나가 보행자들이 늘 사고 위험에 노출됐었죠. 거기에 소규모 공원을 만들었는데 그걸 포켓공원이라 부릅니다. 이 포켓공원이 생기면서 자동차들은 알아서 속도를 줄이게 됐죠. 또 포켓공원과 연계해 횡단보도도 훨씬 넓어져 보행자들의 안전도 보장받게 됐어요.
 
  도시 소공원(Vest Pocket Park)은 조끼주머니(Vest Pocket)가 의미하는 것처럼 작지만 요긴하고 편리함을 추구하는 공간인데 우리로 치면 바로 쌈지공원을 말합니다. 쌈지공원은 ‘the Vest-Pocket Park’의 순수한 한국적 표현으로 도심지의 자투리땅을 활용해 저소득층 고밀주거지역 거주자들을 위한 문화·복지적 차원에서 조성되었습니다.(이은기의 〈도심지 쌈지공원의 이용 후 평가 및 개선방안〉 참조)
 
  또 서울시에 ‘자락공원’이 있어요. 서울에는 크고 이름난 산이 많잖아요. 그 산과 평지의 접경지역에 공원을 만들고 자락공원이라고 이름 붙였어요. 치맛자락을 생각해보세요. 치맛자락은 땅에 끌리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남산이 치마를 입었다고 상상을 해보세요.
 
  또 ‘자락’은 치맛자락의 자락이기도 하지만 끝자락의 자락이기도 해요. 산의 끝자락, 주거지의 끝자락. 그 양쪽의 끝자락이 겹친 곳에 자락공원을 만드는 거죠. 산과 사람들의 주거지가 이어지지 않으면 산은 섬처럼 고립돼요. 도시인의 생활반경에 산을 끌어들이는 거죠.
 


이어령, 쌈지공원에서 울다
 
  다음은 2016년 8월 26일 자 《주간조선》에 보도된 쌈지마당 이야기다.
 
  1991년 6월 첫 번째 쌈지마당인 ‘중계쌈지마당’이 완공됐다. 연탄 실어 나르는 리어카 한 대도 다닐 수 없는 작고 꼬불꼬불한 골목길 마을에 들어선 쌈지마당은 의외의 곳에 ‘짠’ 하고 나타나는 ‘마법의 예술공원’ 같았다. 중계쌈지마당 준공식 행사 당일, 이어령은 울었다.
 
  “고건 시장한테 준공식에 나와달라고 했더니 이분이 농을 해. ‘선배님, 서울시장을 너무 우습게 보시네요. 10억 건설 현장에도 테이프 끊으러 안 가는데 8000만원짜리 공사에 나가겠습니까. 껄껄껄. 가야지요. 100억짜리는 안 나가도 거기엔 나가겠습니다.’ 이런 말을 하더니 기쁘게 행사장에 왔지. 행사가 끝나도 갈 생각을 안 해. ‘장관님 먼저 가세요. 저는 민원이 많아서 빠져나가기 힘들 겁니다’ 하며 손사래를 치더라고. 거기가 무허가 건물이 많잖아. 시민들이 서울시장한테 하고 싶은 건의가 좀 많겄어. 시민들 틈에 뺑 둘러싸여 나더러 손사래를 치는데, 고건씨가 키가 크잖아. 혼자 삐죽이 서 있는 걸 보니 울컥하더라고. 그런 마음으로 공원 입구를 나오는데 아이들이 만든 플래카드가 보여. ‘이.어.령.문.하.부.장.과.님.감.사.합.니.다.’ 노트를 한 장씩 찢어서 크레파스로 삐뚤빼뚤하게 써서 매달아 놓은 거야. 서툰 글씨로 철자법도 다 틀리고. 그 근처에 수녀님들이 돌봐주시는 보육원 시설이 있는데, 그 아이들이 만든 거였지. 아이들 마음이 어떻겠어요? 그걸 본 순간 눈물이 확 나더라고.”
 


  안상수체로 바뀌면서 일어난 변화
 

기하학적인 안상수체는 받침이 세로획의 정중앙에 오면서 정사각형 틀을 벗어난 글꼴이다.  


  내가 장관이 되었을 때는 군사정권이 막 민간으로 넘어올 때니까 중앙정부는 아직도 권위주의에 가득 차 있었어요. 서류나 문서는 모두 교과서의 글씨체처럼 딱딱한 명조체로 쓰고 그럴 때 나는 문화부의 모든 글씨체를 안상수체로 바꾸어버렸어요.
 
  글자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디자인 아닌가요? 이후 서체 디자인이 뭔지 사람들이 그제야 깨닫게 됩니다. 기존의 틀에 익숙한 사람들은 거부감이 있었겠지만 컴퓨터가 보급되고 워드 프로세서 소프트웨어가 널리 쓰이면서 날개를 달았죠. 통치계급, 즉 정치인이나 관료들이 쓰는 서체의 권위가 무너졌어요.
 
  서체의 변화가 문장의 변화, 사고의 변화, 사회의 변화를 동시에 이루지 않았을까요? 또 다양한 서체가 등장하면서 높다란 정부의 문턱도 낮아지지 않았을까요?
 
  나는 권위주의를 깨고 좀 부드럽게 하고 싶어서 문화부 앞에 바람개비를 붙여놓기도 했지요. 우리가 바람개비 가지고 놀 때, 바람이 불기를 기다리기만 하며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들고 뛰면 바람이 없어도 바람개비가 돌아가잖아요. 바람이 없다고 탓하지 말고 스스로 뛰면 바람개비는 돌아간다는 뜻으로. 그러자 어떤 장관이 나에게 오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중앙청이 권위가 있어야지. 문화부가 바(bar) 같아요. 뭐 거기다가 바람개비를 달아놓고 그럽니까?”
 
  지금은 뭐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 말을 들을 당시에는 참 기분이 나빴어요. 중앙청의 청(廳)은 관청을 뜻하는 말이고, 거기에 출근하는 사람들을 등청(登廳)한다고 했어요. 보통 사람들은 출근을 하는데 중앙청으로 오는 사람들은 등청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어마어마한 말을 쓰는 곳에 막 바람개비를 붙여서 돌리니까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았죠. 그래서 관리들이 그렇게 불평을 하는데 나는 이런 농담을 했어요.
 
  “성공했네! 사람들이 bar로 알았으면 성공했네. 그러면 사람들이 막 들어올 거야. 우리한테는 그 문턱이 높았지만, 이젠 그냥 별 사람 다 들어올 거 아니야. 밤에도 들어올 거 아니야.”
 
 
  # 문화부 슬로건1 부뚜막 위 부지깽이
 

1991년 6월 29일 《조선일보》 19면에 실린 〈휴식공간 중계 쌈지마당 준공〉 기사. 이어령 장관과 백상승 서울 부시장, 주민 등 150명이 참석해 준공식을 가졌다. 기사에는 중계 쌈지마당에 이어 금호 쌈지마당(성동구 금호2가), 창신 쌈지마당(종로구 창신동)도 다음 달 준공한다고 적혀 있다.


  그때는 관청에서 내거는 슬로건이 보통 ‘협조와 평화와 뭐…’ 이런 식이었어요. 관념적이고 한자 투의 말이었죠. 사실 슬로건은 지금도 그렇긴 하죠. ‘진보와 평화’ 하는 식으로. 내가 문화부 장관이었을 때 문화부의 슬로건이 뭐였는지 알아요?
 
  첫 번째, 부뚜막 위 부지깽이가 돼라.
 
  부뚜막 위 부지깽이. ‘부’자 두음이 반복되니까 음운율이 생기죠.
 
  부엌에 가면 놋그릇, 은그릇 같은 귀중품도 있고 식칼, 도마 같은 필수품도 있고 그중 제일 천한 것이 부지깽이예요. 부지깽이는 밤낮 불에 타요. 끄트머리를 불태워가며 아궁이의 불을 지피고 나면 다시 끄고, 다시 또 타고. 여러분이 특수한 사람은 못 되어도 부지깽이 같은 사람은 될 수 있어요. 남을 위해서 몸을 태우고 불은 못 되더라도 불을 붙여주는 것이 부지깽이잖아요.
 
  그러니까 부엌에서 가장 천한 것이지만 또 가장 요긴한 것이 부지깽이예요. 불을 붙여주는 부지깽이가 없으면 안 돼요. 그리고 이 부지깽이는 누구나 될 수 있어요. 아무 나뭇가지나 하나 꺾으면 다 부지깽이로 쓸 수 있어요.
 
  여러분이 기가 막힌 발명이나 연구로 노벨상을 타는 사람이 못 될지는 몰라도, 다들 부지깽이는 될 수 있어요. 사람들은 부지깽이를 우습게 알지만, 부지깽이가 있기 때문에 장작불을 지필 수 있고 밥을 지을 수 있어요. 부엌에 식칼부터 은그릇까지 온갖 것이 다 있지만 제일 하찮아 보이는 부지깽이, 심지어 무엇이나 될 수 있고 가장 긴요하게 쓰이는 것이 부지깽이예요.
 
  그러니까 긴요하게 쓰이는 사람이 되라는 거죠. 자기가 불타는 것이 아니라 남을 불태워주는 추임새를 넣는 사람이 돼라, 공무원이 뭐냐, 너희 스스로 불이 되려 하지 마라, 너희가 밥이 되려 하지 마라, 밥 짓고 요리할 때 밑에서 자기를 그슬려가며 부지깽이처럼 봉사해라.
 
 
전 국민을 향해 “불이야!”라고 소리 지르는 사람


  인류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불의 발견이라고 하지만 불을 이용하게 된 것도 부지깽이 덕분입니다. 사냥한 음식을 익혀 먹을 때 불을 어떻게 다뤘을까요? 손으로 했겠냐고요. 부지깽이로 했겠지요.
 
  불쏘시개 작대기야말로 가장 소중한, 꼭 필요한 물건이죠. 부지깽이로 이글거리는 불을 만지며 생각에 빠졌을 겁니다. 따스함을 느꼈을 겁니다. 불 앞에 모여 음식을 익혀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밤하늘에 수놓은 별들을 올려다보았겠지요.
 
  그 별을 보며 처음으로 신화(神話)라는 꿈을, 가공의 이야기를 만들었을 테지요. 종교가 생겨났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가 시인이나 소설가로 부르는 사람 역시 과거로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면 별을 올려다본 최초의 사람이 나오고, 그리고 불쏘시개, 부지깽이를 든 사람이 나오지 않겠어요?
 
  태초에 부지깽이를 든 사람들은 하늘에 흩어져 있는 별들을 그냥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북두칠성처럼 별과 별 사이를 이어서 하나의 별자리를 만들어냈어요. 그리고 그 모습 속에 견우직녀 설화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적어 넣었던 겁니다.
 
  그러니 ‘부뚜막 위 부지깽이가 돼라’라는 말이 얼마나 소중한 말이냐고요. 그런 농담 있잖아요. ‘홍도야 울지 마라’를 한마디로 줄이면 ‘뚝!’이 된다는. 그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런 다양한 분야의 봉사를 표현하는 게 ‘부뚜막 위 부지깽이가 돼라’예요. 봉사자 중에서도 문화 봉사자니까 그냥 봉사를 하는 게 아니라 문화계에 불을 붙이는 봉사자가 되어, 시인에게 불을 붙이고, 연극계에 불을 붙이는 거죠. 그래서 문화부가 잘 되면 환하게 불이 탈 거 아니겠어요? 나는 문화부 장관이 전 국민을 향해 “불이야!”라고 소리 지르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문화부라 하면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불이야’라고 하면 돌아볼 거 아니겠어요. 불이 났으니까.
 
 
  # 문화부 슬로건2 우물가 옆 두레박 

  두 번째 슬로건은 우물가 옆 두레박이에요.
 
  두레박을 모르는 사람은 없죠? 두레박은 우물가에 하나를 공용으로 놔주기만 하면 그다음에 오는 사람이 손쉽게 물을 떠먹을 수 있어요.
 
  아무리 목이 말라도 두레박이 있어야 해요. 두레박 없이는 우물물을 길을 수 없어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전승돼온 것이 두레박일지 몰라요. 두레박이 없었다면 우물을 파지도 못했을 것이고 강가나 개울 곁에서만 살았을 겁니다. 두레박이 있었기에 깊은 산속에서도 살 수 있었고 공동으로 우물을 쓰며 집단을 이루고 마을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을 거예요.
 
  한국인에게 돗자리가 ‘하늘을 나는 융단’이라면, 두레박은 ‘하늘이 내린 그릇’ 아니겠어요? 우물이 ‘집안의 작은 바다’라면 두레박은 ‘바다와 땅을 잇는 엘리베이터’인 셈이지요.
 
  그런데 만약 그 두레박을 자기 것 들고 가서 쓰고는 내 것이라고 싹 챙겨 와 버리면 모든 사람이 다 우물터에 갈 때마다 자기 것을 가지고 다녀야 해요. 이렇게 못난 짓 하는 사람은 되지 말자는 거죠.
 
  내 가진 것을 나눠주고 어쩌고 하는 이런 위선적인 말 대신, 모두가 쓰는 우물터에 내가 물 떠먹은 두레박을 안 가져가고 놔두는 그런 작은 선행보다 더 크고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아요. 그거면 모든 동네 사람이 자기 두레박이 없어도 하나의 공동 두레박으로 편하게 쓸 수 있잖아요.
 
  그 두레박과 같은 것이 문화시설이에요. 극장 하나 지어 놓으면 거기 와서 누구나 연극을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 문화시설, 소위 문화 인프라를 우리가 만들자는 거죠. 부지깽이가 되어 문화에 불을 붙이고, 그 불 붙은 문화가 활활 타오를 수 있는 터전을 만드는 것, 그것이 문화부가 할 일이에요. 문화를 융성시키고 불 붙이는 일!
 
  그런데 아무래도 후퇴한 것 같아요. ‘문화융성위원회’(박근혜 정부 시기인 2013년 7월 공식 출범한 문화 융성을 담당하는 대통령 직속 정책 자문기구.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라졌다)와 같은 어려운 말을 쓰잖아요. 내가 이미 몇십 년 전에 ‘부지깽이가 되자’라고 했는데 그게 융성(隆盛)이에요. 불 붙이라는 이야기잖아요? 그걸 그냥 ‘문화에 불 붙이자’ 하면 진짜 불이 붙을 텐데, ‘융성’이라고 하니까 이게 어디 남의 나라 이야기 같아요. 그래도 한편으로는 이름 잘 붙인 거예요. 그래야 뭐가 있는 것 같잖아요. 뭐 부지깽이, 두레박 이러면 또 너무 가벼운 것 같아서 사람들이 미심쩍어해요. 사람들은 묵직해야 쫓아오지 가벼우면 안 쫓아와요. 이해하긴 참 쉬운데도.
 
 
  # 문화부 슬로건3 바위 위 이끼가 되자
 

  세 번째, 바위 위 이끼가 되자.
 
  우리가 바위를 깰 수 있어요? 우리 속담에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있죠. 문화는 도저히 정치·경제를 못 깨요. 계란으로 바위를 깨지 못하듯. 비유를 하나 해볼까요? 지금 맹장염에 걸린 사람이 있어요. 당장 수술 안 하면 큰일 나죠. 그런데 또 이 사람이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해요. 그런데 노래를 못 부르게 한다고 해서 어디가 터져서 죽어요?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문화는 밤낮 우선순위가 뒤로 밀리는 거예요.
 
  그리고 부모님들이 뭐라고 해요? 늘 “그거 다음에 하자”라고 말씀하시죠. 먹고사는 것, 그러니까 정치·경제·사회가 우선이지 문화는 밤낮 뒷전인데, 그 뒷전인 문화부의 장관이 뭘 할 게 있었겠어요.
 
  우스운 이야기인데, 지금처럼 한강유역 정비가 잘 되기 전의 이야기예요. 여름만 되면 한강 부근에서 홍수가 나서 마포 일대에서 이재민이 발생하는 거예요. 내가 장관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또 한강 다리가 물에 잠길 정도로 큰 홍수가 나서 이재민이 발생했죠. 그러자 대통령 주재하에 장관들이 모인 국무회의를 열었어요. 내무부는 치안을 담당하고 보사부는 의약품을 지원하는 식으로 각 부처마다 그런 재난 상황에 해야 될 역할이 있는 거예요. 심지어 국방부는 국군장병들을 동원해 긴급 재난 구호 봉사를 하고요. 그런데 문화부는 뭘 하라고 시키는지 들으려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나오는 거예요. 그 국무회의 끝까지 계속.
 
  홍수 같은 재난 상황이 나서 이재민이 나왔을 때 문화부가 뭘 하겠어요. 잘 해봐야 합창단 데리고 가서 힘내라고 공연하는 건데 잘못하면 뺨 맞아요. 남은 지금 다 죽게 생겼는데, 너희는 지금 신난다고 노래하고 춤추냐? 안 그러겠어요?
 
 
  “이끼만 있다면 사막에서도 살 수 있어. 그게 문화”
 
  그러니까 문화라고 하는 건 정치·경제·사회 같은 바위와 싸워서 이길 수는 없어요. 그러나 그 딱딱한 바위를 덮는 이끼는 될 수 있죠. 이 메마른 정치·경제·사회를 깰 수는 없지만 아름다운 노래, 시로 감동시켜 생명의 이끼로 덮어버리는 거죠. 그 딱딱한 바위에 초록색 이끼가 돋아나는 거 보세요. 기가 막히잖아요?
 
  이런 게 기적이죠. 흙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그 딱딱한 바위를 초록색 부드러운 이끼로 다 덮어서 생명이 거기서 싹트게 하니 기적이지요.
 
  이끼는 원래 ‘물기가 많은 곳에 나는 푸른 때’를 가리키는 말이에요. 이끼는 3억5000만 년 전 최초로 육상 생활에 적응한 식물군이죠. 종류도 다양해서 우리나라에서만 700여 종이나 된다고 해요. 집 주변의 돌담이나 그늘지고 축축한 마당, 습기가 많은 숲 속 등에는 다양한 종류의 이끼가 살고 있습니다. 비록 습한 곳에서 자라지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요.
 
  흙이 무너지거나 공사 등으로 맨땅이 드러나 식물이 전혀 없는 곳에 맨 먼저 나타나 정착하면서 다른 생물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주죠. 과거 유럽에서는 침대의 속재료와 건축 재료로 사용했고, 인디언과 에스키모인들은 아기 기저귀를 만드는 데 이용하는 등 세상에 이롭게 사용됐어요. 지금도 이롭게 쓰입니다.
 
  1995년에 서울에서 이끼가 사라지자 산림청에서 환경오염 실태조사를 벌인 적이 있어요. 산성비 때문이지요. 이끼는 대기 및 토양 오염물질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합니다.
 
  서울주택도시공사(SH)는 도시 내 미세먼지 저감 솔루션인 ‘SH 스마트 이끼타워’를 개발해 특허 출원했다고 합니다. 이끼와 바람을 이용해 주변 약 50m 내의 미세먼지 흡착률을 높여 공기정화 효율을 증진시키도록 고안됐다지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이처럼 이끼만큼 이로운 게 없어요. 저 거대하고, 숨도 쉬지 못하는 바위를 덮을 만한 이끼만 있다면 우리가 어떤 사막에 가서도 살 수가 있어요. 그게 문화예요. 그래서 바위 위 이끼가 되자, 이게 내가 장관 재직 시절 내건 문화부의 세 번째 슬로건이었어요.
 
 
  # 우리말을 낡고 옛날 것 취급해선 안 되는 이유
 
  내가 그렇게 세 가지를 문화부 슬로건으로 내걸었더니 신문에서 문화부를 공격하기를, ‘요즘 이 아무개가 문화부 장관이 되더니 중앙청과 문화부 내에 고어(古語)가 난무한다’라는 거예요. 옛날 말이지만 이게 우리말인데, 사람들은 고어, 그러니까 고려 시대 때 말인 줄 알아요.
 
  그 당시로 치면 21세기가 이제 곧인데 이 사람이 어디서 와서 지금 부지깽이니 두레박이냐는 거죠. 그 사람들은 부지깽이가 뭔지 몰랐나 봐요. 그러니까 고어라고, 나더러 옛날 고리타분한 조선 시대 놀음을 한다고 공격했겠지요.
 
  그러나 우리 것은 맨날 낡고 옛날 거예요? 우리 것이 미래가 되면 안 됩니까?
 
  밥 먹을 때 쓰는 젓가락, 옷 입을 때 매는 옷고름 자락, 그리고 누워서 바라보는 대청마루의 서까래, 손가락의 투구인 골무, 악기가 된 평화로운 곤봉인 다듬이, 머리의 언어인 갓, 누워 있는 악기인 거문고, 현재 세계인의 고랑을 파는 호미, 한국인 손으로 빚어진 진주이자 다이아몬드인 나전칠기… 한국인이 사용해온 물건들 하나하나에는 한국인의 마음이 그려낸 별자리가 있어요. 그건 낮엔 안 보일지 몰라도 밤이 되면 밝게 빛납니다. 낮에는 태양 때문에 안 보일 뿐 없어서 안 보이는 게 아닙니다. 한국인의 마음이란 게 그렇습니다.
 
  부지깽이와 두레박은 버리거나 잊힌 것들이 아니라 한국인의 마음을 그려낸 별자리입니다. 하늘의 별들은 다 똑같지만 별자리와 그 전설의 이야기들은 민족과 나라에 따라 다 달라지는 법입니다. 그러니 함부로 천시하거나 잊어선 안 되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가 어디까지 왔니?
 

  요즘 사람들이 쓰는 말을 보면, 이것저것 붙여놓고 다시 말을 줄여놔서 뭘 이야기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술을 마실 때 건배사로 “나가자!” 그러기에, 나는 어디로 나가자는 말인 줄 알았더니 ‘나라와 가정을 사랑하자!’라는 말을 줄인 거라더군요.
 
  지금 한글 세대들이 쓰는 한글에는 새로운 조어가 얼마나 많이 생겼는지 몰라요. 이게 《혈(血)의 누(淚)》(‘피눈물이 난다’는 의미)라던 사람들이 한글 전용을 시작한 지 70년 만에 일어난 변화예요.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문화부 장관 하던 시절만 하더라도 ‘부뚜막 위 부지깽이가 되자’ ‘우물가 옆 두레박이 되자’ ‘바위 위 이끼가 되자’ 이것들을 고려 때 이야기인 줄 알고 고어를 쓰는 사람이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러니 내가 묻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어디까지 왔니? 문자로 봤을 때 한자 세대로 시작해 일어 세대를 거쳐 한글 세대로 왔는데, 이 한글을 제대로 찾지도 못하고 다시 영어 세대로, 또 한자 세대로 가고 있어요.
 
  외국어를 쓰지 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일이 바로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고 한자를 배우는 것이죠.
 
  서정주의 시집 《화사집》 속에는 서구적인 사상이 있지만 그 속에 동양적인 전통이 담겨 있고,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 속에는 거꾸로 동양적인 특성이 있지만 그 속에 또한 서구적인 사상까지 내포되어 있죠. 그래서 이들은 다 같이 전통적이며 인류적 보편성을 획득한 한국 문학이라 말합니다.
 
  우리가 어느 특정한 시대나 고정된 지역적 편견의 색안경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때 그 시대 문화의 생명은 극히 짧은 것이 되고 맙니다. 한 시대(시간), 한 지역(공간)이 되는 배경을 이해해야만 안목이 생기고 비전이 생깁니다. 문학에서 고전적 작품이라는 것은 무수한 공간을 꿰뚫고 확충하면서 오늘날까지 그 가치를 존속시켜온 작품을 뜻합니다. 호메로스나 셰익스피어의 위대성은 타임리스(timeless)에 있습니다. 《햄릿》이 덴마크인이라서, 왕자라서, 고대인이라서 유명한 게 아니라 인물 속에 인간 총체의 한 비극성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덴마크 왕실의 인간들만 흥미를 갖는 인물로만 그려졌을 거예요.
 
  당대에만 유행하는 사조, 뿌리가 없는 전통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곧 잊히고 맙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일은 인간의 영원성을 찾는 일과 같아요. 가치에 공감하는 많은 이의 지적(知的) 연맹을 실현시킬 수 있으니까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2)에서 요즘 사람들은 거꾸로 풍토(風土)라는 한자를 쉽게 배워요. 우리말을 찾는 것이 곧 한자를 배우는 일이 된 거죠.
 
 
  #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한국인의 뒷모습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의 서문(《월간조선》 2022년 9월호 참조)에 나오는 노부부 이야기는 저의 실화입니다.
 
  당시 군대에서는 더 이상 군용으로 쓸 수 없는 차를 민간에 불하해줬어요. 그럼 언론사들이 그 차를 불하받아 차체의 카키색을 다른 색으로 칠하는 정도의 개조만을 거쳐 썼거든요. 책에서 내가 타고 있던 차도 그런 차였어요. 그 차를 타고 고향을 갔다가 오는 길에 본 장면인 거죠. 그 장면을 한 번 상상해보세요.
 
  그런데 고개라는 게 뭘까요? 우리 민요 아리랑을 보세요. 그게 고개 노래잖아요. 각지의 아리랑마다 가사는 다 달라도 후렴은 똑같거든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고개를 넘게 해주시오, 고개를 넘어가세요, 넘지 마세요.’ 이러잖아요. 판소리에서 나온 우리 고전소설 《춘향전》에 춘향이 ‘(이도령이) 달만큼 별만큼, 나비만큼 불티만큼 망종고개 넘어 아주 깜박 넘어가니’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한국인에게 있어 고개라는 건 이별의 마지막 경계선이에요.
 
  어려서 외갓집에 놀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는 항상 외할머니가 쫓아 나오세요. 분명히 안방에서 하직 인사 하고 나왔는데도 마루 끝까지 따라 나와 “잘 가라” 하세요. 그래서 마당 아래에서 인사를 꾸벅 하는 거예요. “할머니 추워요, 얼른 방에 들어가세요.” 그렇게 이미 두 번이나 인사를 주고받았는데도 할머니는 또 대문간까지 나오시죠.
 
  그럼 “이만 가볼게요, 얼른 들어가세요” 하고 인사를 하고 대문을 나서는데도 여전히 따라 나오세요. 돌담을 따라 돌아가는 골목길까지. 그럼 “아유, 얼른 들어가세요”라고 만류해보지만 할머니는 그러세요. “응응, 들어갈게, 들어갈게” 하시면서 막상 들어가지는 않으시고.
 
  한국 사람들이 이별하는 게 이렇게 힘이 들어요. “들어가셔요” 그러면 또 쫓아 나오시고. 이 애틋한 동행은 보통 마을 입구까지지만 눈으로 하는 배웅은 계속 이어져요. 당신의 딸, 손자가 마을 고갯길을 넘어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그 자리에 서서, 딸이나 손자가 돌아보면 손을 흔들어주기도 하면서 서 있는 거죠. 참 눈물겹죠. 그 마지막 고개를 넘어가면 자기 딸이나 손자를 영원히 못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도 한국의 어느 고개를 가든지 거기에는 이별하는 사람들이 마지막 봤던 얼굴이 있는 거죠.
 
 
  자동차에 놀란 村老의 뒷모습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서문은 바로 그런 고개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지프를 타고 속력을 내며 고갯길을 돌아 내려오는데, 마침 그 앞에 나이가 든 시골 할아버지·할머니가 있는 거예요. 농부 특유의 옷차림에 장을 보고 오는지 할아버지는 작은 짐을 들고 느긋하게 길을 걷고 있다가 자동차 경적 소리에 뒤를 돌아본 거지요.
 
  마차 정도나 다니지 지프가 다니지도 않는 시골이에요. 시골에 있어도 비행기는 하늘을 날아다니니까 봤어도 자동차는 여간해서는 볼 일이 없어요. 그런데 갑자기 등 뒤에서 차가 나타나니까 평생 차를 피해보지 못한 이분들이 깜짝 놀라서 뛰어요. 그냥 뛰었으면 내가 그렇게 가슴이 아팠을까.
 
  그 경황없는 가운데 두 노인이 손을 부여잡고, 또 그 보따리에 뭐 그리 귀중한 게 들었겠어요? 시골 장터에서 구입한 거라고 해봐야 양잿물, 북어대가리 그런 것일 텐데 그걸 다른 손에 또 꽉 부여 쥐고 놓질 않아요.
 
  닭, 오리, 칠면조 이런 가금(家禽)으로 키우는 새들은 개나 여우 같은 육식 동물이 덤벼들 때 날 수가 없으니까 뛰어서 피해요. 그것도 길옆으로 숨어버리면 될 텐데 그냥 무작정 앞만 보고 푸덕푸덕 달려가는 거죠. 바로 이 두 노인분이 그랬어요. 뒤에서 빵빵하고 경적을 울렸으니 길옆으로 피하면 간단한 걸, 기를 쓰고 앞으로만 계속 뛰는 거예요. 놓치지 않으려고 손을 꼭 붙잡고 서로 다칠까 봐 걱정하면서.
 
  도시 사람들은 뒤에서 경적을 울려도 쓰윽 보고는 느긋하게 길옆으로 슬쩍 피해주는데 자동차에 놀라 뛰어가는 촌로의 뒷모습에서 내가 뭘 봤겠어요.
 
  그 장면을 보던 때 나는 25세나 26세쯤 되었어요. 확실하진 않지만 어쨌든 서른이 되기 전에 쓴 글이거든요. 그때 그분들은 내게 역사 속에서 끝없이 쫓겨 다니던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할아버지를 생각하게 했어요.
 
  ‘우리 조상들이 저런 모습으로 도망갔구나, 가축의 모습으로 쫓겨 다녔구나’ ‘천년을 그렇게 살아온 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뒷모습을 만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쫓겨 가던 뒷모습, 우리 역사 속에서 허둥지둥 가축처럼 쫓겨간 한민족.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하자고 생각했어요. 그것이 그때 내가 쓴 책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였던 거죠.
 
 
  # 후에 찾아간 성황당 길 - 모든 것이 변하다
 

이어령 선생이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서문에 나오는 ‘무척 깊은 산골의 높은 고개’인 청다니 고개를 다시 찾았다. 차가 다니기 좋게 다 깎아 완만한 언덕이 되어 있었다.


  그때가 《경향신문》 논설위원을 할 때고, 그 차도 신문사의 차라는 말은 앞에서 했고요. 그리고 한참 뒤에, 그 쫓기던 노부부가 있던 길에 다시 한 번 가봤어요. 그 불하받은 미제 군용 지프가 아니라 제대로 된 우리 국산차 에쿠스를 타고 갔죠. 에쿠스는 희랍어로 말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네 바퀴 달린 말을 타고 그곳에 다시 간 거예요.
 
  내가 어렸을 때는 그곳이 무척 깊은 산골의 높은 고개였어요. 물론 어린아이의 왜곡된 기억일 수 있지만. 그때는 청다니 고개라는 이름이었는데, 밤에 고개를 넘으면 호랑이가 모래를 끼얹는다는 전설이 있었지요. 동네의 어떤 사람이 장 보고 오다가 호랑이 때문에 놀라 허리를 다쳤다는 말도 있고. 그런데 지금 가보니 거기는 호랑이가 나올 만한 깊은 산골도, 높은 고개도 아니었어요. 내가 지프를 타고 갔을 때만 해도 조그마한 길이었는데 지금은 차가 다니기 좋게 다 깎아 완만한 언덕에 버스가 다니는 4차선 도로예요. 심지어 그 길의 아래에 광케이블이 깔려 있으니 조심하라는 팻말도 달려 있었어요. 다만 성황당 나무는 그대로더군요. 어지간히는 늙은 그 나무가 그 자리에 옛날처럼 서 있었어요.
 
  20대 후반의 나는 거기서 할아버지·할머니의 뒷모습을 보고 가축처럼 쫓겨 간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 우리 조상들은 참 못났다, 왜 쫓겨 다니느냐고 가슴을 치고 화를 냈는데 후에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어렸을 때는 한국 사람의 진짜 뒷모습을 몰랐어요. 아, 그게 아니다 내가 잘못 알았다는 사실을 내가 이대 교수가 된 뒤니까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쓴 후예요. (계속)

[인터뷰] 고 이어령 전 장관 부인 강인숙 영인문학관장 "맑은 날, 조용하고 평화롭게 가셨어요"

 

<여성조선 임언영 기자  2022.05.06>  

 


봄이 내려앉은 평창동. 겨우내 잠들었던 고목이 초록을 지나 노란 산수유, 분홍 앵두꽃, 새하얀 목련과 이팝 등이 순서도 없이 활짝 피어 있다. 남편 이어령 전 장관을 보내고 맞은 첫 봄, 강인숙 영인문학관장은 “사람이 타서 재가 되어버리는 엄청난 일에 압도당해 넋이 나가 있는 동안 밖에는 어느새 봄이 왔다”고 말했다.

 


시대의 지성, 이어령 전 장관이 세상을 떠난 지 한 달이 넘었다. 49재를 꼭 하루 앞둔 4월 15일,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 강인숙 관장을 만났다. 이날은 이 전 장관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전시인 <이어령 장예전(長藝展)>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했다. ‘크리에이터들의 크리에이터’로 불리던 고 이 전 장관을 기리기 위해 기획된 전시는 후배 예술가들이 공간을 구성하고 사진, 설치, 영상 등 작품을 완성했다. 이 전 장관 생전 각별한 사이였던 디자인하우스 이영혜 대표가 전시 총감독을 맡았다.

파워풀한 느낌의 닭이 햇살을 품은 영인문학관 곳곳에 세워져 관람객을 맞는다. 김병종 화가의 작품이다. 닭의 해에 태어난 고 이 전 장관은 ‘새벽에 외롭게 외치는 소리’라는 의미로 닭의 상징성을 자주 이야기했다. 

지하 2층에서 시작해 지하 1층으로 올라오는 동선으로 구성된 전시는 단정하고 조화롭다. 백남준, 이우환, 김병종 등 최고의 아티스트와 교류를 이어간 이 전 장관의 소장품부터 생전 사용하고 아끼던 일상용품과 사진, 대표 저서 등 수많은 자료들이 시선을 잡아끈다. 고인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수많은 마음이 느껴진다. 한 사람이 남기고 간 길고 깊은 여운만큼이나 따뜻하고 아름다운 남은 자들의 마음을 잔잔하게 공유한다. 지하 1층 전시 공간의 한복판에서 강 관장과 마주 앉았다.  
 
아름다운 전시입니다. 이 그림(윤후명의 작품)이 내 방에 있던 건데 여기 놓으니까 얼마나 아름다워요. 김덕수 선생이 쓰던 꽹과리, 안숙선 씨가 무대에서 쓰던 부채 등 하나하나 의미가 깃든 작품들인데 이렇게 밖으로 나오니 너무 멋있어요. 나는 죽었다 살아난대도 못할 일(전시)이에요. 많은 분들에게 아주 감사합니다. 

“봄이 무서워서, 방에서 숨어 지내다시피 했다”는 오프닝 말씀에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아직 마음이 힘드시지요. 벚꽃 피는 무렵이 싫더라고요. 그래서 (집에) 들어앉아 있었어요. 그러다가 이 전시 때문에 바빴어요. ‘이렇게 해서 또 힘든 시간이 지나가는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선생(강 관장은 고 이어령 장관을 ‘이 선생’이라고 불렀다)이나 나나 90이잖아요. 병이 아니라도 죽음을 생각할 나이고, 또 저희는 10년 전에 아이(이민아 목사)를 잃은 경험도 있어요. 그래서 비교적 죽음을 받아들이기 쉬웠다고나 할까요. 면역이 조금 되어 있는 거죠. ‘아이보다 10년이나 더 살았는데 뭐’라는 마음으로 이 시간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49재 맞춰 준비한 ‘장예전’ 
이어령이 남긴 ‘긴’ 예술 

 


고 이어령 전 장관을 추모하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김아타 작가가 찍은 사진과 황수로 작가의 홍매가 ‘생명과 죽음은 서로 등을 대고 있다’는 고 이 장관의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만장처럼 휘날리는 조문객의 애틋한 헌사에서는 그를 기리는 마음들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사유하다 눈을 감은 바로 그 장소에서,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추모의 현장이다.

이번 전시는 선생님 생전에 직접 기획하셨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이영혜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오셨을 때, 이 선생이 “내 장례식 디자인하는 거 해준다고 했잖아. 해볼래?”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 전시를 진행하게 됐어요. 

49재에 맞춘 전시라 더 의미가 생겼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사후 50일, 불교에서는 49일이 의미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우리끼리 “이왕이면 그 안에 하자. 혹시 아느냐 보러 오실지?” 농담을 하면서 시작했어요. 시간이 부족해서 많은 분들이 고생하셨는데, 덕분에 아주 정성들여 준비한 추모 전시가 됐습니다.   


당연히 선생님께서도 전시를 보셨을 것 같은데요. 보시고 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우리 선생님 보셨다면? (잠시 생각 후) 우리 선생님은 칭찬을 잘 안 하세요.(웃음) 그 양반은 완벽주의자라 100점이라야 되거든요. “아, 요거 요거는 고칠 걸 그랬다” 이런 말씀도 하셨을 것 같고, 이영혜 선생님이랑 호흡이 잘 맞는 파트너니까 “아, 당신 이건 참 잘했다” 하신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많이 좋아하시고 기뻐하셨을 것 같아요.  

스스로 아카이빙을 철저하게 해놓고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선생님의 철저함을 더 실감하셨을 것 같은데, 어떠셨나요. 맞아요, 뭐든지 꼼꼼하게 하시는 분이에요. 서재 정리가 마지막 작업이었는데, 5%만 남겨놓고 다 정리하고 가셨어요. 휠체어에 앉아서 사람을 시켜서 하는 정리지만 그 시간은 아픈 걸 잊어버리시더라고요. 이번에 준비하면서 다시 한 번 또 느꼈죠. 

 


가족이 지킨 ‘이어령의 마지막 2주’ 
맑은 날, 조용하고 평화롭게

 


고 이 전 장관은 2015년 암이 발견돼 두 차례 큰 수술을 받았지만 항암치료를 거부했다. 그 시간 동안 저서 집필에 몰두하며 치열한 시간을 보냈다. 그의 마지막 시간은 우리 사회에 죽음이라는 화두를 던짐과 동시에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돌아보게 했다. 이 전 장관의 마지막 시간을 담담하게 전하는 강 관장을 통해서도 다시 한 번 그 의미를 짚어볼 수 있었다. 

짧지 않은 투병 기간이었지만 그래도 갑작스러운 소식이었습니다. 사실 못 움직이고 완전히 누워 있었던 기간은 2주밖에 안 돼요. 그 기간에도 책 정리는 하셨고요. 좋게 가신 셈이에요. 암 환자들이 맞는 모르핀도 딱 한 번만 쓰셨으니 운이 좋은 거죠. 누군가 도왔나 보다 생각이 들어요. 식구들이 야단을 쳐서 2주 동안 영양제 주사를 맞으셨는데 “고통 속에서 10시간 주사를 맞으면 이틀을 더 산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 안 맞겠다” 하시고 사흘 만에 돌아가셨어요. 우리 선생님은 안 한다고 하면 그만이신 분이니까요. 

모든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토요일에 돌아가셔서 간병인이 한 명도 없었어요. 완전히 가족끼리  있을 때, 그 안에서 돌아가셨어요. 헐떡거리거나 고통스러워하지 않으시고, 진통제 효과가 있을 때 돌아가셔서 통증을 못 느끼셨거든요. ‘아이들이 평화로운 죽음을 봐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용하고 평화롭게 가셨어요. ‘맑은 날, 가족만 있는 데서 저렇게 돌아가시는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럼에도 임종을 지켜보는 심정은 그 어떤 언어로도 표현이 안 되는 고통입니다. 굉장히 충격이었어요. 저는 자연사를 처음 봤거든요. 딸은 심장마비로 갔기 때문에 그 과정이 생략됐어요. 그런데 우리 선생님은 6개월 정도 몸이 반으로 줄었으니까 아픈 데가 많았어요. ‘아, 저렇게 아파야 가는구나. 저렇게 고통을 당한다면 이승에서 지은 죄는 다 갚고 가는 거 아닐까?’ 여러 생각이 들더라고요. 게다가 저는 나이가 같으니까 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힘든 시간도 가족이 함께이기 때문에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큰아들(이승무 한예종 교수)은 매일 새벽에 들러 3시간 정도 머물고 출근을 했어요. 천안에 거주하는 아들(이강무 백석대 교수)은 주말마다 네 식구가 다 올라와서 2박 3일씩 시간을 보내고 갔어요. 너무 미안하더라고요. 선생님도 마지막까지 의식이 있으셔서, 아이들을 만나면 미안해하고 빨리 가라는 말을 끝까지 하셨어요.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웠습니다.    


아픈 아내 위해 사진 찍어주던 남편… 
1주기쯤에 서재 공개 할 예정 

 


강 관장과 이 전 장관은 1952년 서울대 국문학과 입학 동기다. 대학 3학년 때부터 만나 1958년 결혼해 꼬박 64년을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글을 쓴다는 직업이 같은 두 사람은 같고 힘든 일이어서 또 다른 서로를 존중하고 지켜보면서 평생을 함께했다. 강 관장은 힘든 일이어서 본인이 남아서 다행이라면서, 서재 공개 등 이 전 장관의 뒤처리 작업을 해나갈 것이라고 향후 계획을 전했다.  

마지막 두 분의 시간은 어떠셨나요. 우리는 직업이 같으니까, 저는 저대로 글을 쓰고 자기는 자기대로 글을 썼어요. 사실 동갑이면 간호가 안 돼요. 저도 간병인이 필요한 나이니까요.(웃음) 서재 정리가 마지막 작업이었어요. 한 5% 정도만 남겨놓고 다 정리하고 가셨어요. 그 시간은 아픈 것도 잊어버리시더라고요. 그걸 지켜보면서 그렇게 살았죠. 

곳곳이 흔적입니다. 남은 공간을 혼자 지켜보는 것이 힘들진 않으신가요. 한 달은 좋았던 생각밖에 안 나더라고요. 임종할 때는 너무 약해져 있으니 연민이 먼저 나와요. 그렇게 아프고 갔으니까, 아프던 생각이 나고 또 아니기도 하고 그래요. 우리 집이 좁아요. 그래서 선생님은 마지막 1년을 2층 서재에 계셨어요. 제 방에 있을 때는 그런 감정이 별로 안 느껴지는데, 아직 2층에는 못 올라가겠어요. 이제 익숙해져야죠. 조금 회복이 되면 정리도 해드려야 되고…. 잘 견딜 거예요. 제가 잘 참거든요. 

긴 시간 부부라는 이름으로 사셨습니다. 좋은 추억도 많으실 텐데, 몇 가지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60년이면 너무 많아서 고르기 힘들어 안 돼요.(웃음) 30년 전에 제가 일본에 교환교수로 가게 됐어요. 그런데 떠나는 날 뇌하수체 한복판에 혹이 났다는 걸 알아서, 100일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 11시간 동안 큰 수술을 받았어요. 그때 잠깐 일본에 머물 때, 이 선생님이 저를 데리고 다니면서 자꾸 사진을 찍어요. 저는 다 죽어가는 엉망인 얼굴인데 말이에요. 사진 찍히는 게 너무 싫어서 안 죽을게 고만 찍으라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내가 언제 죽는다고 했어?” 하면서 길길이 뛰더라고요.(웃음) 그다음에 식사를 하러 갔어요. 제가 샤브샤브가 먹고 싶다고 해서 둘이 갔는데, 그 집이 비싸더라고요. 내가 안 먹는다고 할까봐 가격표를 슬쩍 감춰놓고 메뉴를 보여주시더라고요. 그런 거죠 뭐.(웃음)    

일상은 어느 정도 회복을 하셨나요. 제가 혼자 살아보는 게 처음이에요. 대가족 속에서 항상 식구가 너무 많았는데, 도와주시는 아주머니를 내보내고 혼자 있어요. 제가 빨리 회복이 안 되면 애들이 독립을 못하게 하니까 열심히 챙겨 먹으며 혼자 사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어요. 일요일에는 큰 아들네가 와서 만나는데, 어느 토요일에 하루 종일 그 누구와 말을 안 하고 보낸 적도 있어요. ‘아, 이건 대단한 일이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남들 다 사는데… 살아야죠. 

고 이 전 장관의 아카이빙 작업은 계속 진행이 되나요? 지금 계획이, 전에 문학관을 운영하던 100평짜리 공간이 있어요. 거기 선생님 자료를 넣고 물건도 갖다놓고 내년에 공개할 예정이에요. 1주기쯤 공개할 생각입니다. 다음에는 서재를 공개하려고 해요. 우리 선생님 서재가 참 아름답거든요. 서재에 있는 책을 등록을 다 해야 하고, 서가에 장식품이 많아서 그것도 준비를 해야 하는데요. 그것도 내년 봄쯤이면 될 거예요. 

[김지수의 서정시대] 57년 전 이어령이 쓴 전혜린 추도사


서른둘에 죽은 전혜린 사후 나온 책에 동갑 이어령이 추모사 써
“가짜가 아닌 생이었다”는 글, 먼저 쓴 자신의 부고는 아니었을까

<김지수 조선비즈 문화전문기자 2022.04.07>



“스물아홉까지만 살고 싶어.”

젊은 시절,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혼자 중얼거리곤 했다. 어린 눈으로 훔쳐봤던 어른의 세계, 마음으로 흉봤던 뻔한 질서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불꽃처럼 살다 간 천재’ 로 명명받은 전혜린의 에세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내 낭만적 포즈에 불을 붙였다. 1960년대 서울대 법대 출신, 독일 유학 시절 슈바빙에서 보낸 이국적 나날, 죽기 전날 들렀다는 대학로 학림다방…. 서른두 해의 서사는 짧지만 매혹적이었다. ‘매 순간 온전한 자기를 갈망했던 전혜린’을 앓으면서 청춘의 봄이 지나갔고, 여름처럼 서른이 왔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들었고,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삼십세’를 읽었고, 양희은의 ‘내 나이 마흔 살에는’을 부르며 가을볕에 이르는 정상적 생장 과정이었다. 전혜린은 까맣게 잊었다. 그렇게 건강하고 무탈하게 오래 살고 싶었던 마흔아홉 살 가을에, 평창동 언덕에서 암으로 ‘죽어가는’ 이어령 선생을 만났다. 시대의 스승과 벼락같이 조우하며 한 세계가 찢겨 나가는 경험을 했다. 그는 적당히 덮어두었던 생을 들춰내 진선미의 세계로 쪼갰고, ‘너 존재했냐?’고 물었고, ‘자기만의 무늬를 살았느냐?’고 다그쳤다. 결정적으로 그는 우리가 두려워 회피하던 종말론적인 ‘죽음의 세계관’을 전복했다.

마지막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그가 찾아낸 죽음의 좌표는, 밤의 벼랑 끝이 아니라 ‘빛 한가운데 화사한 어머니의 품’이었다. 영화 ‘소울’에서 태어나기 전 세상을 보았을 때처럼 오감이 분명하게 살아났다. 몇 번의 인터뷰를 통해 그는 ‘탄생의 그 자리로 돌아간다’고 목적지를 분명히 했고 ‘죽어도 살아 있겠다’고 웃으며 작별했다. 실제로 사후에 수많은 책과 이야기를 예비해 ‘죽음은 끝이 아니라 이어짐’이라는 서사를 완성했다. 그것은 헛된 야망이 아니라 지극한 사랑이었다. ‘언제나 네 옆에서 글 쓰고 말할 거’라던.

신문에 부고조차 내지 말라던 선생의 바람과는 달리, 국가의 ‘부름’으로 널리 알려진 그의 문화부 장례식은 지극히 성대했고 그만큼 평범했다. 훌륭한 추도문이 있었으나, 최고의 추도문을 본 것은 한참 시간이 흐른 뒤였다.

어느 날 문득 인문 저술가 손관승의 SNS에서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말미에 붙은 추모 글을 보았다. 그걸 쓴 사람이 이어령이었다. 놀랍게도 전혜린과 이어령은 동년배로 둘 다 1934년 1월생이었다. 두 사람은 젊은 날 동시대를 함께 살았다.

“(중략) 그는 활화산이었다. 이 지상에 살고 간 서른두 해, 자기의 생을 완전하게 살고 간 여자였다. 가짜가 아닌 생이었다. 생을 열심히 진지하게 살았다. 정말로 유일한 여자였다. 그는 오늘의 침묵에 이르기 위하여 언제나 말을 했고 언제나 노상에 있었다. 당신은 이제 알 것이다. 그가 도달한 침묵의 값을. 그리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이 죽기 57년 전, 전혜린의 죽음을 위해 쓴 글은 ‘명백히’ 과거에 쓴 자신의 부고였다. 시대를 초월한 그들의 공명에, 아니 ‘너는 나’라는 투명한 자기 예시에 전율이 일었다. 이토록 드넓은 시공간과 독창적 타인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의 에고이스트를 본 적이 있던가. 그 뒤 ‘당대의 이념’에 제한되지 않고 ‘초월적 관념’을 말하는 자로, 오류 없이 오래 살아있겠다는 이어령의 집념은 새록새록 발견되었다. 진부한 미담이 아닌 전압이 높은 미문으로.

최근에 개정판 ‘우리 문화 박물지’를 보며 나는 뒤늦게 탄복했다. 예컨대 그는 거문고를 누워서 소리 내는 악기라고 하면서 ‘영혼의 무게를 느낄 때 인간은 눕는다. 눕는다는 것, 그것은 침묵이다’라고 쓴다. 그리고 그 자신, 지금 누워서 소리 내는 악기가 되었다.

다 지난 일이지만 ‘죽음의 스승’의 장례식에, 화환 대신 마당에 굴렁쇠 몇 개 세워 놓았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임종 감독 송길원 목사의 말은 의미 심장하다. 굴렁쇠는 그에게 정적의 소리였으니까.

완전히 다른 생이었으나, ‘완전하게 자기 생을 살다 간’ 전혜린과 이어령. 그 우연한 ‘데칼코마니’를 목격하면서 나는 요즘 신비로운 자아의 균형을 느낀다. 그리고 조금씩 즐겁게 나의 장례식 풍경을 그려볼 수 있었다. 죽음의 좌표가 삶의 한가운데 있다면, 데드라인에 이르기 전에 나의 부고는 내가 직접 쓰리라. 친구들에겐 미리 나의 연약함이 포함된 추모사를 부탁하리라. 장례식장엔 쇼스타코비치의 왈츠를 틀어놓고, 그들처럼 찬란하게 열매 맺는 우정의 만개를 지켜보리라.

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김태완 기자, 월간조선 2021년 10월호 - 2022년 3월호)

 


1. 꼬부랑 할머니는 한국인과 인류 이야기의 原型… 창조의 힘이자 생명자본


⊙ 이어령은 한국인 속에서 인류의 씨앗을 찾고 한국인의 原型 길어 올려
⊙ ‘한국인 이야기’를 피시스(자연계)와 노모스(법·제도), 세미오시스(상징계)라는 ‘三太極’의 방법론으로 풀어
⊙ 낳고 産育하는 ‘꼬부랑 할머니’는 谷神不死이자 玄牝… “생명의 원천, 인류 역사의 근원”
⊙ 한국인 문화 유전자 탐사한 《한국인 이야기》 12권 완간 계획… 지금까지 1권 출간
⊙ “BTS(방탄소년단)의 몸짓도 정형화되지 않은 막춤의 전통과 관련 있지 않을까”
⊙ “내 머리와 마음속 ‘전복’이 있는지 몰라도 이미 그려놓은 글의 ‘보물지도’ 따라 모험 길에 오르세요”

李御寧
1933년생. 서울대 국문학과·同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 경기고 교사, 이화여대 교수, 《조선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논설위원,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장,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장, 초대 문화부 장관 역임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
 
  《초사(楚辭)》 굴원편에 나오는 〈어부사〉의 노랫말이다. 이어령(李御寧) 선생(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은 ‘창랑의 물’로 비유되는 풍파의 세월을 돌아보며 요즘 부쩍 ‘물이 맑았던 시절이 언제였나?’ 더듬어 본다.
 
  늘 그렇듯 세상은 제 살 궁리에 제 원한에 충실했지만, 선생은 상앗대를 쥐고 갓끈을 죄며 정신적 지층(地層) 탐사를 떠났었다. 세월이 흘러 갓이 다 해어졌다. 때로 물이 탁해도 갓끈을 씻었고 물이 맑아도 발을 씻었다.
 
  생의 어두워져 가는 저녁, 선생은 상앗대를 다잡고 마음에 두었던 ‘보물지도’ 하나를 만들고 싶다고 다짐한다.
 
  불과 한 달 전이었다. 선생에게 전화가 왔다. 취재차 지인을 만나러 가던 길이었다.
 
 
  ‘혹시나 외로웠거나 말 상대가 없어서일까’
 


  “김 기자,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데 좀 만나줄 수 없어?”
 
  서울 주변 도심인데도 흙 실은 트럭이 쉴 새 없이 달리는 도로 옆길에서 전화를 받았다. 먼지 사이로 발걸음을 멈췄다. 선생은 늘 그랬다. 불쑥 전화를 걸어와 말했다. “중요한 이야기여서 전화로 말하기 그러니까 바빠도 날 좀 봐” 하고.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영인문학관이 있는 서울 평창동으로 가려면 높은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 차나 택시를 타기도 했고 걸어가기도 했다.
 
  왜 만나자는지 알 수 없으나 혹시나 외로웠거나 말 상대가 없어서일까? 그렇지 않으면 세상 돌아가는 꼴에 체증이 나 속말을 하고 싶어서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데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싸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박수 소리 같기도 했다. 주위를 둘러봐도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올려다본 낮은 건물 창문으로 얼핏 하늘이 보였다. 구름이 변덕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 주는 비 예보가 많았는데 날이 개었다. 말을 걸어오지 않았는데도 건물 앞 녹슨 청동 조형물 곁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소리를 질러야 해서 늘 목이 쉬어”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 한쪽에 새겨진 이어령 선생의 시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들었다/ 대지를 향해서 나뭇잎은 떨어진다/ 어둡고 거친 흙 속으로 향하는 나뭇잎들을 본다// 거부하지 말라/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대지는 더 무거워진다/ 피가 뜨거워질 때 잘 있거라 잘가라/ 인사말을 잘하고 떠나야 한다’.


  문득 선생과의 인연이 떠올랐다. 생과 사, 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면 선생은 기자가 듣지 못했던 전혀 다른 모국어(母國語)로 이야기하는 듯했다. 그는 세상에 드문 기호학자였다. 언어라는 상징체계 속에 내재된 문화적 기호를 찾아 그만의 독특한 해석으로 한국인의 문화 유전자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한국인 속에서 인류의 씨앗을 찾고, 그 씨앗 속에서 한국인의 원형(原型)을 길어 올렸다. 그럴 때면 신이 난 듯 목소리가 고음이었다.
 
  그러나 언젠가 선생의 고백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목에서 소리가 안 나와 소리를 질러. 그러면 남들은 열정이 있다고 하는데, 아냐. 보통사람처럼 얘기하고 싶지만, 소리가 안 나와. 소리를 질러야 해서 늘 목이 쉬어.”
 
  그럴 때면 선생은 “유리벽 사이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듯한, 절대로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이 느껴져 답답하다”고 고백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론 선생의 목소리가 커지면 기자는 불안함을 느꼈다.
 
  지난 8월 25일 서울 평창동으로 찾아갔다. 누웠다가 일어난 듯 머리가 흩어져 있었다. 선생은 웃으면 그렇게나 인자해 보이지만 웃지 않으면 날카로워 보였다.
 
  “어디서도 하기 싫은 말인데, 돈 많은 사람 있잖아…. 돈 아까워 어떻게 죽나, 하는 사람들도 죽고 나면 그 돈 누군가가 써. 조바심 안 내도 안 없어져.
 
  권력이 있는 사람, 죽으면 어떻게 돼? 황제가 죽으면 다른 황제가 그 자리를 메워. 그 권력, 안 없어져.
 
  마찬가지로 은행에 넣어둔 돈도 안 없어져. 자기가 안 쓰면 누군가가 대신 써.”
 
  여기서 잠깐 뜸을 들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예외가 있어. 머릿속에 있고 마음에 있는 건 다 사라져. 누구도 소유할 수 없다고.
 


  내가 가끔 ‘전복’ 이야기를 하잖아? 해녀들이 전복을 숨겨놓고 ‘내일 좋은 사람이 오면 따다 줘야지’ 해. 전복은 점점 크는데, 이제는 전복에게 갈 수 있는 힘이 없어. 늙어서. 마지막에는 보물지도밖에 못 그려주지. 내가 요즘 하는 이야기들이 바로 보물지도를 그리는 작업이여.
 
  김 기자, 나한테 시간이 없어요. 집에 내 컴퓨터가 일곱 대라고 하지 않았어? 근데 이제 아무 소용이 없어. 마지막 남은 게 이거야.”
 
  하더니 몽당연필을 꺼내 들었다.
 
 
  피시스·노모스·세미오시스, 세 가지 틀
 

  몽당연필로 종이 위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소리를 안 지르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다.
 
  “(일곱 대의 컴퓨터는) 이제 나한테 아무 소용이 없어. 마지막 남는 게 봐, 이거야. 몽당연필이거든. 이 연필로 어렸을 때부터 글을 썼잖아. 연필은 말이야 언제든 깎으면 되잖아.”
 
  그러더니 쓱쓱 종이 위에 삼각형과 원을 그렸다. 사각사각 연필심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어. 피시스(Physis)와 노모스(Nomos), 세미오시스(Semiosis)인데 ‘한국인 이야기’를 이 도구로 정리하고 싶은 거야.”
 
  선생이 몽당연필을 쥐고 웅크린 모습을 보니 마치 카드에 열중한 사람 같아 보였다. 끝까지 움켜쥔 패(牌)가 선생의 기호학이란 생각이 들었다.
 
  연필로 삼각형의 한쪽 끝을 세미오시스라고 적더니 “이건 상징·기호계고…”, 두 번째 꼭짓점에 피시스라고 적고 동그라미를 치더니 “이건 자연계”, 다시 세 번째 꼭짓점을 노모스라고 적고 “법과 제도”라고 했다.
 
  “삼각형으로 표현하지만, 우선순위가 없어. 순수한 상징계도, 순수한 생물계도 없으니 원으로 동그랗게 그려도 돼.
 
  한국인 이야기… 한국인이 뭐야? 내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난 조선인이었어. 좀 더 옛날에 태어났다면 신라인, 고구려인이었을 테지. 조선, 고려, 백제는 바로 노모스야. 제도와 법의 영역이지.
 
  그런데 피시스로 가봐. 거기 한국인이 어딨어? 과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36억 년 전 수프 같은 열탕(熱湯)의 바다가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 최초의 단세포 생명체가 하나 생겼대. 그게 생겨나지 않았더라면 난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겠지. 이것이 나의 생물학적(피시스) 아이덴티티야.”
 
 
  “한국 신화로 보면 단군의 자손, 곰의 후손이거든”
 

태극이 국가를 상징할 때 ‘노모스(법·제도)’로서 태극기가 된다.  


  기침을 한 뒤 목을 가다듬고서 다시 말을 이었다.
 
  “과학이 사실이라면 피시스의 나는 한국인이 아니라 그 세포야. 생물학적인 나, 생명이 이 지구에서 최초로 탄생한 그 순간이 바로 나야. 나의 조상이지.
 
  그런데 세미오시스로 가봐. 거기는 신화의 세계야. 기독교 상징으로 보면 아담이지. 중국 신화에서 말하자면 두 마리 뱀이 한 몸으로 꼬여 있는 여와씨(女媧氏)의 후손들이지. 물론 한국 신화로 보면 단군(檀君)의 자손, 곰의 후손이거든.
 
  몽당연필을 쥐고 무언가를 열심히 쓰는 모습이 마치 ‘생각하는 사람(The Thinker)’처럼 보였다.
 
  “태극(太極)에 비유해볼까? 자연계에는 음지와 양지, 다시 말해 빛과 어둠이 있어. 그것을 음양(陰陽)이라 하잖아. 그게 상징계로 오면 태극 무늬가 되지. 음양이 태극 무늬의 아이콘이 되는 거여. 그런데 그것을 구한말(舊韓末) 우리가 국기의 법과 제도로 태극 문양을 사용하는 순간, 노모스의 태극기가 되는 거지.
 
  만약 한국이라는 나라가 없어지고 새 나라가 건국되면 태극기 대신 다른 아이콘이 국기로 제정되겠지.
 
  그러나 기호(상징계)로서의 태극 문양은 없어지지 않아. 중국, 일본 그리고 몽골 깃발에도 태극 마크의 상징적 도형이 남아 있으니까.
 
  이렇게 노모스는 변해도 기호계(말·문자)는 쉽게 변하지 않아. 그런데 태극 도형을 모르는 외국인들에게도 음지와 양지라는 빛과 어둠은 똑같이 작용해. 피시스는 인간이 사라져도, 제도가 없어져도 그대로 남아 있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이렇게 자연계-상징계-법(제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 어느 한쪽만 인식하며 그것이 우리 현실이라 생각한단 말이지.
 
 
  닐스 보어와 太極 문양
 

서울 종묘 정전 남문 문설주 아래에 새겨져 있는 삼태극 문양.


  선생의 이야기가 태극→태극기→태극 문양으로 사유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덩달아 말도 빨라졌다. 중간에 끼어들 말을 못 찾아 옴짝달싹 못 했다.
 
  “태극 문양에서 양자물리학의 출구를 발견한 사람이 1922년 노벨상을 탄 닐스 보어(Niels Bohr·1885~1962)야. 그는 양자론의 해석을 거의 완성하고도 입증할 방법이 없었어. 1937년 방문한 중국에서 태극 도형을 보고서 ‘바로 저거다!’ 한 거지. 아르키메데스가 외쳤다는 ‘유레카!’처럼.
 
  동그란 원을 직선으로 잘라봐. 원이 반으로 분리되지만 태극은 반원 두 개가 얽혀 있잖아. 그걸 보고서 입자이며 동시에 파장인 세계, 양자의 그 미스터리한 세계를 태극 무늬에서 확인한 거지.”
 
  보어는 과학 분야의 공적이 인정되어 덴마크 귀족원에 입회하게 되었다. 예복에 문장을 달아야 하는데 평민이었던 그에게 가문의 문장이 있을 리 만무했다. 계속된 선생의 말이다.
 
  “궁리 끝에 우리 태극 전사들이 국제경기 나갈 때 달고 다니는 바로 그런 마크를 만들어 붙여. 그러고 근엄하게 라틴어로 ‘콘트라리아 순트 콤프리멘타(Contraria Sunt Complementa)’, 즉 ‘대립은 보완이다’는 문장을 삽입했지.
 
  아인슈타인도 미처 몰랐던 양자의 새로운 이론을 바로 그 태극 문양을 보고 완성했으니 놀랍지 않아?”
 
  기자는 선생의 이야기에 점점 빠져, 인류문명사라는 서사적(敍事的) 분위기에 젖어 들었다.
 
  “이 세 가지 틀로 생물학적 자연인으로서 한국인(피시스), 그리고 상징계의 기호적 존재로서 한국인(세미오시스), 그리고 헌법과 법・제도로서 한국인(노모스) 등 세 차원에서 작년에 펴낸 책이 《한국인 이야기: 너 어디에서 왔니》야.
 
  저마다 학자들이 ‘한국인론(論)’을 써왔지만 적어도 이 세 영역을 아우르는 복합적 시각에서 쓴 한국인 이야기는 처음이라 자부해요. 우리는 물고기이기도 하고, 최초로 등뼈를 세우고 일어선 척추동물(피시스)이기도 하지. 단군의 후손(세미오시스)이며 대한민국 국민(노모스)이야.
 
  그런데 누구도, 언론 서평조차 이 방법론을 분석하거나 평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어요. 난파선에서 S.O.S를 김 기자에게 친 거야.”
 
 
《국화와 칼》과 《한국인 이야기》
 

이어령 선생이 지난해 2월 펴낸 《한국인 이야기: 너 어디에서 왔니》(탄생 편).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 비견되는 책이다.


  선생은 작년 2월 《한국인 이야기: 너 어디에서 왔니》(탄생 편)를 펴냈다. 평생을 두고 연구한 ‘한국인 문화 유전자’를 해독한 책이다. 기자는 그 책을 읽고 입이 쩍 벌어졌다. ‘일본인론’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만 해도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만 바라본 책이다. 자연계·상징계 그리고 법·제도의 삼(三)태극적 방법론으로 쓴 글이 아니다.
 
  몇 해 전 선생은 KBS1 TV 〈이어령의 백년서재〉 프로그램 등을 통해 시작한 ‘한국인 이야기’에 혼을 불어넣어 향후 12권의 책을 완성할 계획이었다. 착수하고 얼마 뒤 암 선고를 받고 말았다. 지금까지 겨우 1권을 출간하고 4권은 90%만 마무리한 상태다. 나머지는 손을 놓고 말았다.
 
  “내가 완성하지 못한 걸 내 방법론을 최대한 이용해, 용인지 미꾸라지인지는 몰라도 그 점정(點睛) 역할을 맡아주시오.”
 
  이 말을 하는 선생의 표정에 유배지에서 고단하고 외로운 날을 보냈던 추사(秋史 金正喜·1786~1856)의 얼굴이 오버랩됐다. 〈세한도〉 송백의 결기처럼….
 
 
  꼬부랑 할머니와 생명자본, 바이오 필리아, 코라
 


  선생은 자문자답하듯 “우리 이야기, ‘한국인 이야기’의 원형이 꼬부랑 할머니”라며 이렇게 말했다.
 
  “영화 〈미나리〉를 봐봐. 할머니가 이민 간 이(異)문화 속에서 어린 손주를 살려내잖아. 할머니의 ‘파워’지. 〈미나리〉 할머니가 바로 우리 꼬부랑 할머니야.
 
  어릴 때 할머니한테 들었던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 기억나?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지팡이를 짚고 꼬부랑 고개를 넘다가 꼬부랑 강아지를 만나…. 끝도 없는 이야기 말이야.
 
  그런데 김 기자, 이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가 실은 요즘 문화인류학자 사이에서 새로운 학설로 등장한 ‘그랜마더 하이포테시스(Grandmother hypothesis·할머니의 힘 가설)’와 통하는 것이었어. 꼬부랑 할머니는 한국인만이 아니라 인류 이야기의 원형이기도 한 거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선생은 이 대목부터 한결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류만이 할머니가 있어요. 침팬지에게 할머니라는 존재가 있나요? 인간만이 폐경기가 되어도 존재하는 게 할머니지.
 
  그래서 코끼리를 제외하면 인간만이 유일하게 할머니가 아이 낳고 손주 기르는 걸 도와주는 역할을 해. 엄마는 일상으로 빨리 돌아갈 수 있게 되어 연년생을 둘 수 있게 되었고 인구가 급속히 불어날 수 있었어. 모두 우리 할머니 덕이지. 침팬지는 애미(어미)가 4년간 애를 껴안고 살아야 하니까 생식 주기도 오래 걸려.
 
  그게 바로 늘 내가 이야기하는 ‘생명자본’이고 바이오 필리아야. 젊어서 출산하고 늙으면 애를 받아 산육(産育)을 돕는 할머니의 자랑스러운 생명 파워! 이것이 인간을 오늘의 존재로 진화(進化)시킨 힘이라는 것이지.”
 
  바이오 필리아(Biophilia)는 자연과 생명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말이다.
 
  “늙고 병들고 생산도 못 하고 지팡이를 짚어야 겨우 다니는 그 꼬부랑 할머니도 우주의 창조를 낳는 공간, 그 거대한 상징을 가졌던 거야. 그걸 플라톤은 신비한 ‘코라(Chroa·우주의 자궁)’라 불렀어요.
 
  코라는 여자의 자궁인데 텅 비어 있어. 아무 힘도 없어. 그런데 여기에 창조자(남성)의 힘이 접합하는 순간, 엄청난 창조의 힘을 발휘하는 거야.”
 
 
꼬부랑 할머니가 헤라클래스를 이기는 이유
 

찰스 재롯이 감독한 〈천일의 앤〉(1969) 포스터. 앤 왕비는 재위 기간이 1000일에 불과하지만, 영국 튜더 왕조의 명맥을 이었다.


  선생은 등에 이고 있던 보따리를 차근차근 풀듯 말을 이었다. 그러나 목이 쉬어가고 있었다.
 
  “헤라클래스의 몽둥이는 부수고 달리고 죽이는 것은 돼. 그런데 새끼를 못 놔, 이놈은.
   죽으면 그만이여. 아무리 영웅적 힘을 가지고 있어도 꼬부랑 할머니가 넘는 고개를 넘을 수가 없거든.”
 
  왜 헤라클래스는 할머니가 넘는 그 고개를 못 넘는 걸까.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자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선생이 말했다.
 
  “왜냐고? 열두 고개는 생명의 고개잖아. 헤라클래스가 아기를 낳을 수 있어요? 죽일 수는 있어도 생명을 낳고 기를 수는 없어. 늙고 꼬부라진 할머니는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손자를 낳고, 손자가 또 손자를 낳는 생명의 열두 고개를 넘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단 말이야. ‘열두 고개’라는 것은 열두 세대, 그러니까 무한 세대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찰스 재롯이 감독한 〈천일의 앤(Anne of the Thousand Days)〉(1969)이란 영화가 있잖아. 봤어요? 16세기 영국 튜더 왕조의 국왕인 헨리 8세는 자신의 왕후인 앤 볼린과 결혼하지만 앤은 딸 하나만 낳고 쫓겨나게 됩니다.
 
  불과 1000일밖에 왕비 노릇을 못 했지만 그래도 딸을 낳았어. 그게 엘리자베스 1세지. 권세는 ‘1000일의 앤’이었지만 생식력의 앤은 튜더 왕조의 명맥을 이어간 100년의 앤, 200년의 앤이 된 것이잖어?
 
  그게 노자가 말한 곡신불사(谷神不死·세상이 모두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는 곳)이고 현빈(玄牝)이야. 여자의 암컷 자궁이라는 것이거든.”
 
  이상하게도 이 대목에서 기자는 박하사탕을 먹은 듯한 통쾌함이 느껴졌다.
 
  “김 기자, 시골 사는 꼬부랑 할머니 입안을 들여다봐요. 이는 다 빠졌는데 혀는 그대로야.
 
  이가 혀를 무는 일은 있어도 혀가 이를 물었다는 얘기 들어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부드러운 혀가 강한 이를 이겨요. 노자가 말하는 ‘이유극강(以柔克剛)’과 닿아 있어요.”
 
 
  꼬부랑 똥과 막문화, 막사발, 막말…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를 담은 동화집들. 한국인만이 아니라 인류 이야기의 원형이다.
  선생이 말하는 인류 역사의 원형이, 그 시작이 꼬부랑 할머니에서 비롯된다는 이야기가 즐겁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옛날 옛적 고리짝 옛말에’와 같은 인류 최초의 할머니인 꼬부랑 할머니는 21세기 이야기 속에서, 그것도 한국에서,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선생의 계속된 말이다.
 
  “꼬부랑 할머니라는 것은 아담과 이브의 미토콘드리아 같은 최초의 할머니야. 그 시원(始原)의 형상이 남아 있는 게 우리의 상징계 속에서는, 딴 동요 다 잊어버려도, 지금도 아이들이 부르는 ‘꼬부랑길 이야기’란 거지.
 
  그런데 그 할머니가 뭘 해? 꼬부랑 똥을 눠. 배설한다고…. 인공지능 로봇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그러니까 인조인간을 만든 시조(始祖) 보캉송(Jacques de Vaucanson·1709~1782)이 아무리 사람처럼, 근육이나 호흡까지 닮은 ‘피리 부는 사람’을 만들어도 마지막 배설하는 오리를 만들다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지. 똥 누는 ‘로봇 오리’는 못 만들어. 생명이 뭐야? 먹고 싸는 거야. AI나 기계는 생명이 없어.
 
  하지만 아이가 자라나 어른이 되고 점점 자연에서 멀어지면서 똥이니 욕이니 나쁜 것처럼 여기잖아. 그래도 그 욕이 꼬부랑 할머니의 세계로 들어서면 욕쟁이 할머니가 되고, 금기(禁忌)가 현실공간에서 시민권 대접을 받잖아.
 
  또 막문화로 막사발, 막걸리, 막말…. 정사(正射)에서 벗어난 ‘막이야기’가 우리 토박이 문화에서는 생명력과 독창성을 지니고 있어요. 어쩌면 세계가 열광하는 BTS(방탄소년단)의 몸짓도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난 막춤의 전통과 관련 있지 않을까.”
 
 
  “꼬부랑 고개를 꼬부랑꼬부랑 넘는데…”
 


  선생은 꼬부랑 할머니의 찬가인 ‘꼬부랑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노래는 끝이 없는 ‘네버 엔딩 스토리’였다.
 
  “많은 버전이 있지만 우리의 상징계의 원형을 이루는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
 
  꼬부랑 할머니와 꼬부랑 지팡이랑,
  꼬부랑 강아지랑, 꼬부랑 토끼랑,
  꼬부랑 다람쥐랑, 꼬부랑 황새랑,
  꼬부랑 나무랑, 꼬부랑 여우랑,
  꼬부랑 칡덩굴이랑 모두 모여
  꼬부랑 노래를 꼬부랑꼬부랑 부르며,
  꼬부랑 춤을 꼬부랑꼬부랑 추고,
  꼬부랑 떡을 꼬부랑꼬부랑
  아!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노래하고 춤추고 먹고…, 바로 이것이 자연계와 상징계와 법·제도의 사회가 오늘까지 이르게 한 핵심적인 키워드가 되는 것이지.”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고 숨을 돌린 뒤 웃으며 말했다.
 
  “아리고 쓰린 고개도 ‘랑’자로 결합하면 ‘아리랑’ ‘쓰리랑’이 되잖아.
 
  꼬부랑 할머니 노래는 뭐든지 갖다 붙이면 되는 거야. ‘꼬부랑 참나무를 만나서, 꼬부랑 다람쥐를 만나서, 꼬부랑 돌멩이를 던졌더니 꼬부랑깽 꼬부랑깽….’ 얼마든지 만들고 쓸 수 있는 ‘코라’의 공간인 거지. 받아들여서 생성할 수 있는 생성론이야. 존재론이 아니고.”
 
  그런데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는 왜 모든 것이 꼬부라져 있을까? 길도 고개도 나무도 심지어 똥도 꼬부라져 있다.
 
  “‘이 세상 살아 있는 모든 게 곡선으로 돼 있다’고 임어당(林語堂·1895~1976)이 말했잖아?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1852~1926)는 ‘직선은 인간에, 곡선은 신(神)에 속해 있다’고 하지 않았겠어? 신이라는 말을 생명의 원천인 자연으로 바꿔놓으면 되는 거여.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보면 인공물은 모두 직선이지만 자연물은 모두가 꼬부라져 있지. 그리고 꼬부랑 고갯길은 인간이 만든 게 아니야. ‘자연=신’이 만든 길이지.
 
  선생은 20대에서 80대에 이르는 60년 동안 10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 어마어마한 저작이다. 그러나 앞으로 간행될 《한국인 이야기》는 선생의 생애 중요한 마침표이자, 후학들에게 새로운 출발점이 되리라.
 
  이제야 그날 오후 선생의 전화가 기자에게 하나의 소명이었음을 알았다. 심호흡을 해보았다. 평창동 선생의 집을 나설 때 마지막 당부의 음성이 귓가에 들려왔다.
 
  “아시겠어요? 자연·생물계(Physis)-상징·기호계(Semiosis)-법·제도계(Nomos)가 둥그런 원을 그리고 있는 나의 숨겨둔 비밀 병기 P·S·N을 가지고, 내가 쓰다 만 《한국인 이야기》를 완성하세요.
 
 
  얼어 죽은 ‘성냥팔이 소녀’의 미소
 

안데르센 동화 〈성냥팔이 소녀〉에 나오는 그림이다. 소녀는 북구의 추위와 냉혹한 도시에서 죽었지만 할머니의 환영을 보고 미소지을 수 있었다.


  선생은 안데르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 속에서 꼬부랑 할머니를 찾았다.
 
  “그 《한국인 이야기》 속에는 추운 겨울, 길바닥에서 얼어 죽은 ‘성냥팔이 소녀’가 따뜻하고 평화로운 가족의 환상으로 보았던 서양의 꼬부랑 할머니도 존재하지요.
 
  오래전에 읽었던 〈성냥팔이 소녀〉 기억나나요? 팔리지 않는 성냥을 벽에 긋고 그 빛으로 환상과 따뜻한 사랑을 느꼈던 소녀는 이튿날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어요. 그런데 얼어 죽은 소녀 입술에 미소가 떠올라 있었어요.
 
  자연계(피시스) 속에서는 얼어 죽은 성냥팔이 소녀였지만, (성냥은 당시 산업주의의 첨단기술의 상징이었지요.) 몸이 식어가던 소녀가 마지막에 본 것은 뭣이었나요?
 
  어머니도, 더더구나 폭력적인 아버지도 아니었지. 할머니의 얼굴과 그 품이었어요. 자연계 속에서 소녀는 분명 동사했지만, 할머니의 환상·상징계 이야기 속에서는 행복한 미소가 되었어요. 꼬부랑 할머니는 동서 가릴 것 없이 현대에 살아 있어요. 가혹한 북구라파의 겨울바람(피시스)과 냉혹한 도시(노모스) 속에서도 말입니다.
 
  이 ‘미소’를 남기고 싶어요. 절망하다가도 《한국인 이야기》를 이대로 끝낼 수 없다는 생각도 그 때문이지요. 그리고 정말 ‘전복’이 있는지 몰라도 내가 이미 그려놓은 글의 ‘보물지도’를 따라 모험 길에 오르세요. 그리고 그 ‘전복’과 ‘보물’이 없더라도 밑질 게 없어요. 이미 대중가요가 된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되니까.”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동력과 상징의 힘
 


  “꼬부랑 할머니 속에서 창출되는 우리 이야기는 법·제도가 만들어낸 역사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낼 힘이 될 수 있어요. 나는 확신합니다. 단순한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소녀의 운명을 바꿔놓을 생명의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단단한 자연계와 제도화한 사회의 시스템 속에서 순환관계를 지니고 있는 상징의 힘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의 단순한 동화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는 무한 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섭씨 1도가 모자라 끓지 못하고 있는 내 라면 그릇…, 힘이 없어 끝내지 못한 《한국인 이야기》에 성냥불 한 개비의 에너지를 보태주면 되는 거지요.”
 
  기자는 자신도 모르게 “해보겠다”고 답했다.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기꺼이 동행자가 되어줄 젊은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2. 젓가락의 始原

 

인류 최초의 요리사와 戰士의 도구, ‘부지깽이’와 ‘작대기’
 
⊙ 젓가락 안에 한국인의 문화적 밈(Meme), 민족의 아이덴티티(정체성) 담겨
⊙ 무리서 쫓겨난 나무를 못 타는 원숭이… 맹수에 맞서 작대기 든 인류 최초의 戰士
⊙ 부지깽이 들고 불을 다루는 여자가 인류 최초의 요리사… 火食으로 뇌가 발달
⊙ 불 앞에 모여 허구, 상상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사람, ‘호모 나란스(Homo Narrans)’
⊙ ‘세미오시스(기호상징계)’ 관점에서 부지깽이와 작대기는 꼬부랑 할머니의 지팡이

 
  이어령(李御寧) 선생(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의 두 번째 한국인 이야기는 젓가락이다. ‘하찮게’ 여기는 젓가락이지만, 젓가락 안에 “한국인의 문화적 밈(Meme), 우리 민족의 아이덴티티(정체성), 신분증이 들어 있다”는 게 선생의 생각이다.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동양 문화권에서 수천 년을 이어온 젓가락은 지렛대 원리를 이용해 사람의 손가락을 완벽하게 대신하는 도구다. 그런데 한 짝으론 아무 구실을 못 한다. 오로지 두 짝이어야 한다.
 
  이유식을 뗀 아이가 밥을 먹으면서 배우는 것이 젓가락질이다. 숟가락과 달리 젓가락은 평균 이상의 악력이 필요하다. 아이는 점차 성장하면서 젓가락으로 콩자반을 집거나 깻잎장아찌를 떼는 과업을 차근차근 달성하며 밥상 대열에 안착한다.
 
  때로 메추리알, 방울토마토, 매실절임 같은 난도(難度)가 높은 음식과 성실히 맞서는데, 면(麵)을 돌돌 말거나 쌀밥을 한 톨씩 집는 극강(極强)의 젓가락질은 마치 성장통처럼 청소년기를 거치며 습득할 수 있었다.
 
  그 시절, 젓가락질이 서툴면 혀 차는 소리를 듣거나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때로 굶을 각오까지 해야 하는 비정한 밥상머리 교육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때와 많이 달라졌다. 선생의 말이다.
 
  “요즘 초등학생 가운데 젓가락질을 할 줄 아는 아이가 열 명 가운데 한두 명밖에 안 된대요. 하지만 정말 하찮은 것이라면 백제 무령왕(통치 기간 501~523) 능에서 금관 장식과 함께 청동 수저가 발굴되었겠습니까. 백제인의 피와 몸은 사라졌어도 그 하찮은 젓가락은 그 짝을 잃지 않고 나란히 우리 눈앞에 있습니다.
 
  1500년 전 모든 것은 모두 다 변하고 사라졌는데도 어떻게 그 젓가락만은 지금까지 전해져 끼니마다 변함없이 사용되니 신기하지 않습니까.”
 
  ― 젓가락도 우리 문화의 일부군요.
 
  “그럼요. 젓가락을 떠올려봐요. 자연의 나뭇가지를 손으로 집는 순간, 문화가 생겨나게 되는 겁니다. 그냥 나뭇가지가 아니라 자신의 손가락을 닮은 가지를 꺾고 다듬는 단순하지만 최초의 공정, 도구를 만드는 과정이 문화예요.
 
  손으로 잡기 쉽게, 처음에는 꼬챙이처럼 한 가닥이 있던 것이 두 개로 짝을 만들어 음식을 집는 순간 자연과는 다른 문화의 세계, 그 문이 열리는 것이지요.”
 
 
  中日과 다른 한국의 젓가락 문화 ‘수저’
 

  선생은 또 “동북아 한중일(韓中日)이 같이 공유하면서도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문화 유전자를 젓가락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도 했다.
 
  “우리는 젓가락만이 아닌 ‘수저’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중국·일본과 달라요.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숟가락과 젓가락을 합친 수저를 한 쌍으로 사용해요. 중국, 일본에는 그런 개념이 없어요. 연암 박지원이 《혹정필담(鵠汀筆談)》에서 이야기했듯 중국과 우리나라의 젓가락 문화는 수저에서 확연하게 달라요.”
 
  선생에 따르면, 숟가락은 주로 국물을 떠먹는 것으로 음(陰)에 속한다. 양(陽)에 속하는 젓가락은 고체 형태의 음식을 집는 데 용이하다. “젓가락은 양, 숟가락은 음, 건더기는 양, 국물은 음이다. 양으로 양을 집고, 음으로 음을 뜨면서 음양이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같은 젓가락 문화권인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한국 문화는 수저를 같이 쓴다는 점에서 일체형의 음양 조화 문화를 가장 철저하게 생활화한다고 할 수 있어요.”
 
  듣고 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런데 보세요. 한중일 3국 중에 유일하게 쇠젓가락을 가진 민족이 우리입니다. 쇠젓가락은 밥상을 두드려도 소리가 나고, 소주병을 잡고 즉석 연주도 가능하죠. 나무젓가락은 밋밋하고 소리가 안 나.”
 
  “쇠젓가락은 가락을 좋아하던 우리 민족에게 훌륭한 악기였다. 젓가락 장단으로 ‘니나노~’ 하잖아”라는 말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선생은 다시 ‘진지’ 모드로 돌아갔다.
 
  “한국인의 정체성이 담긴 젓가락이 어디까지 올라가느냐 하면 인류 최초의 전사(戰士), 최초의 요리사까지 올라갈 수 있어요. 다시 말해 ‘작대기’와 ‘부지깽이’로 연결됩니다.
 
  기자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짓자 선생은 혀를 차듯이 덧붙였다.
 
  “김 기자! 시작부터 황당하다는 눈빛인데, 들어봐요.
 
  헤라클레스가 사자를 때려죽일 때 쓴 도구가 뭐예요? 곤봉이거든요. 다시 말해 작대기입니다.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자기 마음대로 늘였다 줄였다 하던 작대기가 여의봉이잖아요. 유럽의 군주들에게 권력을 상징하던 지휘봉이 왕홀(王笏)입니다. SF의 명작으로 꼽히는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2001: A Space Odyssey)를 떠올려 보자고요.”
 
 
  火의 발견과 부지깽이
 

SF의 명작으로 꼽히는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한 장면. 원숭이가 뼈다귀를 높이 들어 내려치려 하고 있다.


  젓가락에서 ‘작대기’ ‘부지깽이’로 이야기가 옮겨가던 선생의 사유(思惟)가 갑자기 SF영화로 종횡무진 시공간을 넘나들었다. 기자의 뇌 이쪽저쪽이 동시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영화 속 인류의 진화를 가장 극적으로 드러낸 장면이 뭐예요? 그렇지. 원숭이 한 마리가 자신이 쥐고 있던 뼈다귀를 하늘 높이 드는 거라고. 이 뼈다귀가 바로 ‘작대기’의 원형이고 꼬부랑 할머니의 ‘지팡이’야. 권력과 파워(힘)의 상징인 거죠.”
 
  영화 속 묵직한 정강이뼈로 다른 무리를 제압하는 원숭이의 모습이 얼핏 떠올랐다.
 
  “원숭이가 하늘 높이 던진 뼈다귀가 천천히 내려오면서 화면이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잖아요. 넓디넓은 은하계, 우주 비행선이 날아가고 푸른 지구가 나오는 장면입니다. 우리 인류의 과거와 미래를 상징하는 거잖아요.
 
  이 뼈다귀를 쥔, 저 작대기, 곤봉을 쥔 이가 바로 인류 최초의 전사인 거지.”
 
  선생은 영화 속 유인원에 집중했다.
 
  “원래 원숭이는 네 발을 사용해 자유자재로 나무를 타잖아요. 나무를 못 타는 원숭이는 무리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진화론 관점에서 그 쫓겨난 원숭이가 인간으로 발달하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결핍의 존재일 수밖에 없어.
 
  기후의 변화로 열대 우림이 점점 줄어들고 사바나 지형이 형성되었다. 나무를 잘 타지 못하는 원숭이는 나무 열매에만 의존할 수 없어 평지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수렵 채집의 시작, 채집문명의 도래다.
 
  “원숭이는 살아남기 위해 고개를 높이 치켜들고 두 발로 서게 됩니다. 두 손은 자연히 자유로워지게 된 거지. 그때 저쪽에서 하이에나가 막 몰려옵니다.
 
  어떻게 하겠어요. 막 도망치다가 발에 차이는 돌을 집어 던지고(호모 훈디토르·Homo Funditor·投石人), 나무 작대기를 찾지 않겠어요?
 
  젓가락의 시원(始原)을 파고들던 선생은 작대기에서 ‘불의 발견’으로 이야기 방향을 조금 틀었다.
 
  “인류학자인 하버드대 리처드 랭엄 교수가 이런 말을 했어요. ‘날달걀을 먹으면 영양이 근육으로 가고, 삶은 달걀을 먹으면 뇌로 간다’고 말이죠.
 
  화식(火食)으로 인간의 뇌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했어요. 뒤집어 생각하면, 최초의 인간은 작대기를 든 사람이 아니라 불을 이용하는, ‘부지깽이를 든’ 사람이라 말하는 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古代 문헌에 부지깽이가 없는 이유
 

  리처드 랭엄 교수는 인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바로 ‘불의 발견’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이 이룩해낸 가장 중요한 것이 불로 음식을 요리하는 ‘화식’의 발견이며, 이 화식이 인간의 모든 것을 바꿨다는 ‘요리 본능 학설’을 주장한다.
 
  “그런데 잘 보라고. 사냥한 짐승을 익혀 먹을 때 불을 어떻게 다뤘을까요. 손으로 했겠냐고. 부지깽이로 했겠지요.
 
  우리가 캠핑을 가봐도 알 수 있어요. 나뭇가지를 모아 불 피우려면 불쏘시개가 필요하고 부지깽이가 있어야 해요.”
 
  ― 시골에서 자라 부지깽이가 뭔지는 알지만, 고대(古代) 유적에서 부지깽이가 발굴됐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학자는 부지깽이 흔적이 인류사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사피엔스》를 쓴 유발 하라리 같은 학자도 부지깽이의 존재를 모릅니다. 생각해보세요. 왕의 무덤 속에 상아(象牙)나 금, 청동, 옥으로 만든 젓가락은 넣어도 부지깽이를 넣겠어요?
 
  시골 부뚜막에서 불을 피워본 사람은 공감하겠지만 부지깽이 역할을 한 ‘불쏘시개 작대기’는 마지막에 다 태워버리잖아요. 그러니 화석(化石)으로 안 남죠.”
 
  고대 문헌에 부지깽이 사용법이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부지깽이는 일상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접목되었기 때문이다. 불을 이용하는 데 없어선 안 되는, 그러니까 요리를 하는 여자에게 단순한 도구를 뛰어넘는 생활의 편리함을 가져다주었다. 역사적 기술(記述)이 대개 남성의 시각에서 정리됐다는 점도 배제할 수 없다.
 
  “문화인류학자들은 화석으로 남지 않으면 역사적 실체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요. 문자로 인간 생활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시대를 ‘역사 시대’라고 부르고, 문자 이전을 ‘선사(先史) 시대’로 명명하잖아요.”
 
  선생이 목소리를 높이며 성토하기 시작했다.
 
  “김 기자! 생각해보세요. 인간 역사가 문자로 시작한다? 웃기는 놈들이야. 말이 없이 글(문자)이 어떻게 나와? 글보다 말이 먼저잖아. 인간의 ‘인지(認知) 혁명’은 글보다 말에서 먼저 시작되는 거야. 그렇지 않아? 문자 발명은 아무것도 아니야. 말의 발명이 더 위대해.
 
  말이 애비(아비)고 글은 자식인데, 자식에게 역사가 생기고 애비는 역사에서 제외한다? 이게 가능하냐고. 문자를 쓴 1만 년의 세월로 문자 이전의 350만 년을 다 지워버렸어, 이놈들이.
 
  선생은 두 손을 불끈 쥐더니 이내 눈을 감았다.
 
  “언제 예수님이 글을 쓰셨어? 제자들이 써 신약(新約)이 됐는데, 성경 이전에 기독교가 없었겠네. 정말이지 웃기는 거여.”
 
 
  부지깽이를 든 여자, 인류 최초의 요리사
 


  세계적 고고학 저널리스트인 후베르트 필저가 쓴 《최초의 것(Das Erste Mal)》(지식트리 刊, 2012)을 보니, 인간 손으로 불을 붙인 최초의 실제 증거들이 이스라엘 북부 요르단 계곡의 고갈된 호수 주변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79만 년 전에 모닥불이 타올랐다는 증거가 나왔다. 까맣게 탄 낟알, 나무껍질, 나뭇조각, 부싯돌, 그리고 사용되지 않은 목재들이 발견된 것이다.
 
  불을 땔 때 불을 헤치거나 끌어낼 때 쓰는 도구가 부지깽이다. 인류학자들은 불을 길들이던 시점을 약 80만 년 전쯤으로 본다. 선생의 설명이다.
 
  “불을 일상적으로 이용하게 된 인간은 극심한 추위를 이겨냈고 수렵 채집의 한계를 극복했으며 으르렁대는 호랑이, 사자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을 겁니다.
 
  자연의 열매로는 소화가 어려운 밀, 쌀, 감자가 인간의 주식(主食)으로 등장하게 된 것도 불 덕분이었어요.”
 
  “불에 익히면 음식을 오염시키는 세균과 기생충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심지어 죽은 동물도 구워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흔히 ‘잠자는 사자’라고 하잖아요. 사자는 먹으면 온종일 자. 왜? 소화시키느라 자는 겁니다. 다 소화시킨 뒤 배가 고파야 다시 어슬렁거립니다. 그런데 불로 익혀 먹으면 소화하는 시간이 날것으로 먹는 것에 비해 1/10이면 돼요. 그러니 인간은 짐승보다 활동하는 시간이 더 많게 되고, 화식으로 뇌가 발달한 덕에 정교한 사냥이 가능해진 거야.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짐승은 참을성이 없거든. 그 자리에서 다 먹어. 인간은 불로 익히고 요리를 해서 먹으려면 참아야 해요. 요리는 기다림이잖아. 또 여럿이서 공식(共食)을 합니다. 그것을 콘비비알러티(conviviality·향연 혹은 연회)라고 합니다. 기독교 성찬식에서 예수님의 성체인 빵과 포도주를 나눠 먹는 것과 다 연결이 됩니다.
 
  인간만이 참고 기다리며 공식합니다. 음식을 나눠 먹는 결속이 마을을 이루고 국가를 형성시킬 수 있었던 거지. 저 거대한 매머드를 혼자서는 잡을 수 없어요. 그러나 집단을 이루면 인간보다 몇 배나 큰 동물도 사냥할 수 있어요.
 
  집단주의는 개인을 죽이는 게 아니야. 개인의 힘을 확장시키는 것이야. 개인(의 능력)이 개인 이상을 발휘하기 위해 집단을 형성하는 거라고. 그러나 오늘날의 집단주의는 개인을, 개인의 개성을 죽이잖아.”
 
 
  인류 최초의 요리사, 꼬부랑 할머니, 미토콘드리아 이브
 


  선생의 말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인류 최초의 요리사’, 꼬부랑 할머니로 이어졌다.
 
  “불을 다루는, 부지깽이를 든 여자가 바로 인류 최초의 요리사입니다. 남자들은 보통 사냥을 나가잖아요. 사냥해온 짐승을 누가 요리해요? 여자는 애 낳고 키우면서 자연히 집에 있게 되잖아요.
 
  헤겔은 ‘최초의 전사(남성)’가 역사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내가 볼 때 아니야. 최초의 역사를 만든 이는 싸움꾼이 아니라 ‘이야기꾼’입니다. 그 이야기 속 가장 큰 상징이 부지깽이를 든 여성입니다. 그게 우리나라에 오면 꼬부랑 할머니죠.
 
  견강부회(牽强附會)라고? 아닙니다. 영화 〈쥬라기 공원〉처럼 DNA를 복제해 공룡을 만들듯 ‘인류 유전학’에서 미토콘드리아 DNA 변이를 거슬러 올라갈 때 상정할 수 있는 인류 최초의 모계 공통 조상을 ‘미토콘드리아 이브(Mitochondrial Eve)’라고 부르잖아요.
 
  그게 바로 다름 아닌 꼬부랑 할머니여.”
 
  ― ‘최초의 역사를 만든 이는 싸움꾼이 아니라 이야기꾼’이라고 했는데 풀어서 설명해주세요.
 
  “개인이든 집단이든 파이어 플레이스(fire place) 곁에 옹기종기 모여 음식을 익혀 먹게 됩니다. 먹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상상력의 꽃을 피우는 거야. 바로 그 자리에서 ‘스토리텔러’로서의 인류가 시작하는 겁니다. 그게 호모 나란스(Homo Narrans), 이야기꾼이야.”
 
  라틴어 ‘나란스’는 영어로 내러티브(narrative), 즉 허구 또는 실제 사건들의 연속된 이야기를 말한다.
 
  “지식과 지혜가 있다고 ‘호모 사피엔스’라고 부르고, 도구를 만들어 쓸 줄 안다고 해서 ‘호모 파베르’라고 불러요. 호모 루덴스(유희적 인간), 호모 아카데미쿠스(공부하는 인간), 호모 쿨투라(문화적 인간), 호모 폴리티쿠스(정치적 인간) 등 인간의 학명(學名)이 수백 가지나 됩니다. 다 하위 개념이야. 상위 개념은 딱 하나입니다. 바로 호모 나란스!”
 
  ― 왜 그런가요.
 
  “‘인지 혁명’으로 인간만이 ‘창조적 상상’을 할 수 있으니까요. 인간만이 불 앞에 옹기종기 모여 밤하늘을 바라보며 무수한 별 이야기를 만들 수 있으니까요. 거짓말과 허구, 상상의 세계를 원숭이나 침팬지가 꾸며낼 순 없었어요. 호모 나란스는 ‘호모 작대기’ ‘호모 부지깽이’ ‘호모 젓가락’으로 연결됩니다.”
   
 
일꾼보다 이야기꾼!
 


  선생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네발짐승이 두 발로 일어섰을 때를 상상해보세요. 저 멀리 땅끝 지평선이 보였을 것이고 하늘이 보였을 겁니다. 밤하늘, 수많은 별이 눈동자에 추락하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거야.
 
  직립보행 하는 인간의 눈에 그제야 대자연의 넓고 큰 땅[大地]이 들어오고 잠재된 상상력이, 신화(神話)의 세계가 분출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 대목에서 선생은 초대 문화부 장관(재임 1989년 12월~91년 12월) 시절을 떠올렸다.
 
  “클래식 발레의 ‘육법전서’라는 소련 볼쇼이 발레단이 방한했어요. 그들 앞에서 이런 환영사를 했습니다.
 
  ‘인간 역사 가운데 가장 가슴 설레고 가장 놀라운 이벤트 두 가지가 무엇이겠느냐. 바로 두 발로 딛고서 땅끝을 처음 보았을 때가 아니었을까. 그제야 하늘의 별이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두 발로 선 인간이 높이 솟구쳐 오르려 할 때가 아니었을까. 시몬 베유(Simone Weil)가 말하는, 아래로 떨어지는 중력의 비극(悲劇)에 맞서 끝없이 위로 올라가려 하는 인간의 상승 욕구와 같다. 하늘로 솟구치려는 고양(高揚)! 고양! 날개 없이 횃불처럼 솟구치려는, 높이 뛰는 자가 바로 당신들’이라고 하니 발레단 단장이 흥분해서 나를 5분 동안이나 껴안았어. 하하하.”
 
  선생의 회고를 듣자니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일꾼’을 대단히 여기지만 일꾼보다 이야기꾼이야.”
 
  ― 왜 그런가요.
 
  “사냥꾼보다 사냥한 경험담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더 대단해. 왜? 수렵은 짐승도 하니까. 하지만 이야기꾼은 짐승을 잡고서 ‘야, 이놈 뛰어가는데 잡으려다 죽을 뻔했어’라고 허풍을 보태면서 경험담을 늘어놓을 수 있잖아. 그러니 일꾼보다 이야기꾼이 먼저가 아니겠어? 그게 바로 문화고 ‘세미오시스(Semiosis)’라고 부르는 상징이지.”
 
 
  꼬부랑 할머니의 지팡이와 세미오시스
 


  기호학자인 선생은 세미오시스라고 부르는 언어와 기호의 상징체계를 오랫동안 연구해왔다. 기존의 피시스(Physis·자연계)와 노모스(Nomos·법과 제도)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상징계를 통해 풀이해온 것이다.
 
  “내가 안데르센 동화 〈성냥팔이 소녀〉 이야기를 자주 하잖아요. 차가운 길바닥에서 얼어 죽은 소녀의 얼굴에 왜 ‘미소’가 가득했을까요? 사람들은 이유를 알 수 없었어요.
 
  추운 겨울(피시스), 비정한 도시 문명(노모스)의 시각에선 그 ‘미소’를 해석할 수 없어요. 오직 상징(세미오시스)으로만 이해할 수 있어요.
 
  그 상징이 일종의 픽션(fiction)의 세계입니다. 어원인 라틴어 ‘픽티오(fictio)’는 꾸며내거나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현실이라는 뜻인데 바로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입니다.”
 
  은유와 상징으로서의 작대기, 부지깽이 이야기가 절묘하게도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로 연결되었다. 선생의 시각에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다.
 
  “바로 부지깽이와 작대기가 꼬부랑 할머니 지팡이의 상징인 겁니다.
 
  서양에서는 인류 역사를 대개 이항(二項) 대립으로 보잖아요. 남자 대(對) 여자, 지배 대 피지배자, 주인과 노예라는 식으로 말이죠. 대개 ‘노모스’와 ‘피시스’의 관점에서 대립과 전쟁을 변증법으로 정리한 거야.
 
  그러나 세미오시스의 눈으로 전쟁과 요리의 기원을 더듬다 보면 부지깽이와 작대기로 연결됩니다. 어때요, 기가 막힌 상징 아니에요? 하하하.”
 
  ― 아무도 선생님처럼 생각하는 이는 없을 겁니다.
 
  “작대기는 곤봉을 든 전사들이고 남성 원리가 지배하지. 결과적으로 전쟁과 폭력을 의미합니다.
 
  반면 부지깽이는 요리사들이고 여성 원리를 담지. 전쟁과 평화의 상징입니다. 남자는 생명을 죽이고 여자는 생명을 낳아요. 생명을 기르는 어머니의 젖이 요리입니다. 하늘이 주신 요리여. 아이가 젖을 떼면 그때부터 엄마의 요리를 먹어요.
 
 
부젓가락, 젓가락의 등장
 

2015년 ‘청주 젓가락 페스티벌’ 당시 이승훈 청주시장과 이어령 선생. 선생은 당시 ‘한·중·일 동아시아문화도시’ 국가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명예위원장을 맡았었다. 


  잠시 숨을 돌린 선생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최초의 요리사, 최초의 전사가 우리의 여자고 남자가 되는 겁니다. 바로 인류의 조상인 꼬부랑 할머니인 셈이죠. 부지깽이와 작대기는 자연 그대로 꼬부랑 할머니의 지팡이지요.”
 
  ― 불의 이용과 화식, 뇌의 질적 변화, 부지깽이가 다 연결이 돼 있네요.
 
  “불을 이용해 요리하려면 부지깽이가 반드시 필요하죠. 그런데 두 개가 있어야 효율성을 높일 수 있어요. 이렇게 등장한 것이 부젓가락이고 젓가락이 된 것입니다. 젓가락은 하드웨어 개념이 아니라 소프트웨어 개념이죠.
 
  젓가락 기원을 따라가면 처음부터 음식을 먹는 도구로만 이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의 분석처럼 젓가락은 불씨를 옮기는 부젓가락의 운명을 타고났다가 점점 요리할 때, 또는 식사할 때, 아니면 두 경우 모두에 쓰였을 것이 분명하다. 지금도 가정에는 요리용 (긴) 젓가락이 있다. 뜨거운 음식을 옮기고 뒤집거나, 혹은 달걀 같은 액체를 저을 때 젓가락이 쓰인다.
 
  선생은 불을 이용하기 위해 부지깽이와 부젓가락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브레이크가 없으면 자동차가 존재할 수 있나요? 멈출 수 있어야 출발할 수 있지. 같은 이유로 불을 끌 수 있어야 불을 이용할 수 있어요. 끌 수 있는 도구가 부지깽이고 부젓가락입니다.
 
  인류의 발명품은 대개 네거티브를 통해 증명할 수 있어야 해요. 불을 켜는 만큼 끄는 역할이 중요하죠. 발화(發火)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인간 욕망을 이해하려면 섹스를 참을 줄 알아야 하죠. 욕망만으로 섹스가 존재할 수 있겠어요? 성적 억압과 금기의 역사도 존재하잖아.
 
  너무 한 방향으로 죄다 보면 독재가 되고, 금욕이 되고, 움직이지 않는 자동차가 되는 겁니다. 자동차를 발명한 이유는 움직이기 위해 만든 것이지 정지하려고 만든 것은 아니니까요.
 
  문명의 시작은 항상 리스크(위험)를 각오하고 앞으로 나가는 거잖아요. (자동차의) 브레이크 장치가 약간 서툴지만 한번 가보는 거야. 이런 불안과 긴장이 사회를 만드는 겁니다.”
 
 
  꼬부랑 할머니가 한국에 온다면…
 


  ― 역설이네요.
 
  “역설이죠. 움직이게 하려면 그 반동력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기술이 필요해. 이것이 바로 문명을 만드는 슬기고 지혜인 것입니다.
 
  인공지능이 왜 두려우냐. 제어가 안 되기 때문이지. 불이 귀하지만 끌 줄 몰라봐요. (불을) 옮길 줄 모르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래서 부지깽이가 필요하다고요. 끄고 불붙이고 옮기고… 컨트롤(관리)할 수 있는 도구가 부지깽이인 거지.”
 
  심각했던 얼굴을 푼 선생은 열두 고개를 넘듯 기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인류 모계 공통 조상인 미토콘드리아 이브가 살아 돌아왔다고 칩시다. 아니면, 진화론적 관점에서 나무 못 타는 원숭이, 사바나 초원의 벌거숭이(원숭이), 그러니까 최초로 불을 쓰기 시작한 인류의 조상이 지금 한국에 왔다고 칩시다.”
 
  그 미토콘드리아 이브가 바로 ‘꼬부랑 할머니’란 사실을 《월간조선》 독자들이라면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 조상이 한국의 어디를 가겠어요? 서울의 고층 건물과 수많은 자동차 사이에서 길을 잃을 겁니다. 사람들마다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을 보고 그 쓰임새를 눈치챌 수 있을까요? 짐작조차 못 할 겁니다.
 
  옷 입고 돌아다니는 강아지를 보고서 무슨 이런 세상이 있나 할 테고 물이 채워진 변기를 보고는 신식 대야라 생각하고 세수를 할 수도 있어요. 비데 물줄기라도 경험하게 되면 혼비백산 소스라치지 않을까요.”
 
  선생은 말을 긴장감 있게 몰고 가면서도 기발한 비유로 미소를 끌어낼 줄 안다.
 
  “거의 유일하게 한눈에 용도를 알아보고 당장이라도 익숙하게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바로 부지깽이입니다.
 
  우리의 꼬부랑 할머니는 서울을 벗어나 시골 초가집 부뚜막에 가지 않겠어요? 그 부뚜막 앞에 쭈그리고 앉아 불을 피우곤 부지깽이를 손에 쥐지 않겠어요? 이글이글 타는 불길을 바라보며 350만 년 전처럼 환하게 웃지 않겠어요? 김 기자! 경이롭지 않아요?”
 
 
  생명의 작대기에서 젓가락이 나와
 

지난 1996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전라북도 참가팀이 ‘익산 지게목발놀이’를 공연하고 있다.


  인간이 도구(무기)를 이용해 집단 내 경쟁자나 맹수를 제거한다는 가정은 뇌의 발달을 전제한다. 화식으로 말미암아 뇌가 커지면서 의식적으로 ‘살인 무기’를 사용하려는 저열한 동기(動機)들이 생겨났을 것으로 짐작한다.
 
  “인간이 작대기를 가지면 대개 폭력적인 상황과 관련이 있어요. 사람(짐승)을 때리거나 싸워서 심지어 죽일 수 있는 무기인 셈이죠. 인류의 조상 때부터 작대기(곤봉, 방망이, 몽둥이)는 동물을 위협하거나 쫓아내기 위해 사용되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작대기를 평화롭게 쓴 것이 한국인과 아시아 문화권입니다.”
 
  ― 어떤 면에서 그런가요.
 
  “빨랫방망이를 생각해보세요. 원 없이 두들겨도 그게 누굴 해치거나 무언가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빨래를 더 깨끗하게 만들잖아요. 다듬이는 어떤가요. 구겨진 옷을 말끔히 펴는 데에 쓰이잖아요. 이 작대기로 죽은(더러운) 옷을 다시 살립니다.”
 
  선생은 “작대기는 파괴하고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살리고 돌려놓는 ‘생명’의 도구”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똑같은 작대기로 남들은 죽이고 폭력을 휘두르는데 그것으로 빨래를 빨고 다듬고 작은 것으로 만들어 식사를 해온 겁니다. 젓가락의 발명은 대단한 것이고 그냥 넘길 수 없는 이유죠.
 
  그렇지만 한국인은 이상적 평화주의자는 아니야. 전쟁 위협을 느끼면 남자는 작대기를 들고 용감한 전사로 돌변하지. 부엌에서 음식 하던 여자는 부지깽이를 들고 뛰어나오는 겁니다.”
 
  선생은 작대기의 다른 예로 전라북도 익산 지역에서 전해져 오는 ‘익산(益山) 목발노래’를 이야기했다. 목발노래란 지게 작대기로 목발을 두드리며 부르는 노동요(勞動謠). 나무로 된 두 개의 지게 다리를 일컬어 목발이라 부른다.
 
  “‘익산 목발노래’는 일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올 때, 혹은 나뭇짐 지고 신바람이 날 때 지게 목발을 작대기로 두드리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등짐이 무거울 때, 가벼울 때, 빈 지게로 나갈 때 등 상황에 따라 곡조의 장단이 다 달라요.
 
  인생사의 회포를 풀 때는 긴육자배기 가락으로, 신명 나게 부를 때는 엇모리장단, 흥을 돋울 때는 시나위 조의 굿거리장단으로 부릅니다. 심지어 패랭이에다 계화를 꽂고서 매호래기춤을 추며 고된 노동을 잊었어.
 
  작대기로 노래 장단을 맞추는 것이 처음엔 우연히 시작됐을지라도 노동에 생기를 불어넣은 ‘생명’의 악기가 된 겁니다.
 
  시골 부뚜막의 부지깽이에 인류의 원형이 남아 있다면 우리 농촌의 지게 작대기가 그 원형인 것이죠. 이것이 바로 문화고, 한국의 지게 문화인 거지. 무궁무진한 거여.”⊙
 


<韓中日 젓가락 비교論>
 
  술 먹고 신나면 젓가락 두드리는 나라, 한국
 
  다음은 이어령 선생의 한중일 3국의 젓가락 비교론이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중일 3국의 젓가락 중 제일 짧은 것이 일본 젓가락이고 제일 긴 것은 중국 젓가락이다. 한국 젓가락은 두 나라의 중간 길이다. 젓가락 끝부분의 굵기도 세 나라의 것이 다 다르다. 일본의 것이 제일 뾰족하고, 중국의 것이 가장 뭉툭하다. 이번에도 한국의 젓가락은 일본과 중국 젓가락의 중간 정도 굵기다. 참 절묘하지 않나? 대륙인 중국과 열도인 일본 사이에 한국 반도가 자리하고 있는 것처럼, 젓가락 또한 길이와 굵기 모두 중국과 일본의 중간이다.
 
  우리의 젓가락은 적당히 길고 적당히 뾰족하다. 우리는 젓가락만 단독으로 얘기할 수 없다. 젓가락과 숟가락을 합쳐 ‘수저’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항상 같이 다닌다. 젓가락과 숟가락은 완전한 한 쌍으로, 밥은 숟가락, 반찬은 젓가락을 이용해서 먹는다. 신라 시대 때 청동의 젓가락과 숟가락을 처음 쓰기 시작한 이후 은, 백동, 놋쇠로 만든 젓가락을 사용하는데 현재는 은이나 스테인리스제가 많다.
 
  여성들은 시집을 갈 때 부부용 ‘은수저’ 2벌을 가지고 간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면 친가에서 손자의 이름을 새긴 작은 은수저를 보내준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 술 먹고 신가락 나면 젓가락 두드린다. 세계 많은 곳을 돌아다녀 봐도 내 경험상 젓가락 두드리며 장단 맞추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그게 신가락에서 나온 거다. 노랫가락이라고도 한다. 눈으로 보는 ‘젓+가락’을 두드리니 귀로 듣는 ‘노래+가락’이 된다. 그리고 귀로 듣는 가락은 다시 마음을 움직이는 ‘신가락’이 된다.
 
  일본의 젓가락은 전나무를 많이 사용한다. 딱딱한 나무는 치아에 좋지 않다고 생각하여 부드러운 목재를 사용한 게다. 또한 젓가락의 시초는 대나무 가지를, 이쑤시개로는 버드나무 가지를 사용했다는 것이 통설처럼 전해져 오고 있다.
 
  중국 젓가락은 뭉툭하고 길다. 중국 젓가락은 크게 분류하자면 화저(火箸), 채저(菜箸), 식저(食箸) 등 3가지 종류가 있다. 화저는 불을 집는 젓가락이고 요리하는 요리 젓가락은 채저, 먹을 때는 식저를 사용한다.”

 

 

 

3. 식민지人


기구한 운명처럼 國土와 國語 잃은 식민지人으로 태어나다

⊙ “왜 하늘이 검나요? 내가 보기엔 파란데요?”
⊙ 2字, 4字식 한자의 병렬구조가 한국인의 사고에 덫을 놓아
⊙ 한자 말놀이 유행… 票퓰리즘, 多주세요, 대략난감, 내찍먹부먹
⊙ 식민지 아이들의 근대 체험… 유리창, 고무지우개, 필통의 세계
⊙ 다시 식민지 시절로 돌아간다면 안네 프랑크처럼 일기 쓰고 싶어
⊙ 한국인의 빗장을 푼 것은 일본식 난방장치 아닌 서양식 ‘스토브’


  기자는 매주 한두 차례 이어령(李御寧)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를 찾고 있다.
 
  뵐 때마다 지적인 미지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과정이 즐거우면서 때로 밀교(密敎)와 같다. 한 해의 끝자락에 서서 한국인의 뿌리를 찾아 먼 길을 따라나선 보람이 《월간조선》 독자들에게 있기를 소망한다.
 
  “우리가 어머니의 태(胎)내에서 단 10개월 만에 35억 년 전부터의 기나긴 생물 계통의 진화 과정을 거친다는 이야기를 《한국인 이야기:탄생-너 어디에서 왔니》(2020)에서 이야기했지요?
 
  한번 되짚어봐요. 뜨거운 바다, 어머니의 양수에서 떠돌던 진핵 세포가 아가미와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 모양으로 변하더니 그 지느러미에서 손과 발이 나오고 등뼈의 가시에서 척추가 나오는 긴 출생의 비밀 말이죠. 그런 변화를 생각하면 우리의 겨드랑이가 근질근질하지 않나요?”
 
이어령 선생이 펜으로 글씨를 쓰고 있다. 세미오시스(상징계)와 노모스(법·제도), 피시스(자연계)라는 세 관점으로 한국인 이야기를 다시 정리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선생이 강조하는 피시스(Physis·자연계)와 노모스(Nomos·법과 제도), 세미오시스(Semiosis·상징·기호계)라는 도구를 떠올려본다. 이 자(尺)를 통해 우리는 ‘한국인 이야기’를 새로운 시각에서 경험한다.
 
  “생물학적 진화론(피시스) 대신 세미오시스라는 신화(神話)적 관점에서 보면 한국인은 단군의 자손, 곰의 후손입니다. 반면 법과 제도(노모스)로서 한국인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는 존재할 수 없어요. 이전에는 조선인, 고려인, 신라인으로 불렸던 거지요.”
 
 
  《천자문》 다시 보기
 

  선생의 음성이 오늘은 유난히 떨리고 나지막하다.
 
  “나는 기구한 운명처럼 나라 잃은 식민지에서 태어났어요. 국토(國土)를 잃었고 내 나라의 말, 국어(國語)를 쓸 수 없는 기막힌 상황이었습니다.
 
  상징·기호계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들투성이였어요. 왜 한자(漢字)로 된 성씨는 김·이·박처럼 거의 한 글자이고, 이름은 두 글자인지 말이죠.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어요.
 
  지명(地名)도 구룡포·노량진·삼랑진·조치원·의정부 같은 일부를 빼고 다 두 자입니다. 중국과 일본 역시 예외 없이 두 자입니다. 들쑥날쑥하지 않게 아예 법으로 막아버렸어요.
 

  우리말로 된 아름다운 지명을 호명해봅니다. 골짜기를 뜻하는 강원도 사투리인 ‘고라데이’, 마을이 호리병을 닮아 붙여진 ‘호려울’, 둔전으로 부치던 밭이 있다는 ‘둔지미’, 가락처럼 좁은 골짜기에 있다고 해서 ‘가락골’, 마을이 누운 범과 닮아 ‘범지기’, 황소의 뚜레처럼 생겼다고 ‘도램말’ 같은 마을 이름이 두 자 한자로 잊히고 말았어요.”
 
  학교에 입학하기 전 어린 이어령은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우면서 우물의 도르래 장치가 끊어진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고 한다.
 
  “《천자문》은 4자씩 사언고시(四言古詩)로 되어 있어요. 왜 2자와 4자의 틀로 세상을 봐야 하는지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소학교에 입학하기 전 형을 따라 서당에 갔어요. 그때만 해도 시골에 서당이 있었습니다. 만발한 살구나무 옆 허물어진 초가…. 도무지 사람 사는 집 같지 않았어요.”
 
 
  서당과 훈장 선생님
 


  형의 손에 이끌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망태는 찌그러지고 귀밑머리가 하얀 중늙은이가 좌정해 있었다.
 
  “순간, 오금이 저려 옴짝달싹할 수 없었죠. 컴컴한 방 안, 믿기지 않을 정적 속에 위엄을 가진 선비가 앉아 있었어요. 그가 바로 훈장 선생이었어요.
 
  꼭 훈장이 아니더라도 시골에는 그런 낙탁(落魄)한 선비가 있었습니다. 조로서도(鳥路鼠道) 같은 채소밭 한 이랑 없는, 쓰디쓴 씀바귀나물을 엿처럼 달다고 여기는 정신의 승리자들이죠.
 
  마을 사람들은 자기 자식을 굳이 맡기고 싶어서가 아니라 선비를 존경하는 뜻에서 콩도 갖다주고 고추도 따다 주면서 ‘우리 아이에게 글 좀 가르쳐주세요’ 해서 생겨난 게 서당입니다. 그게 선비의 나라이고 한국인 이야기입니다.”
 
  굶을지언정 나라 걱정이 태산인 사람들, 버드나무 가지처럼 흔들리며 살 것 같지만 빳빳한 옥양목처럼 투명한 이가 조선의 선비들이자 마을의 훈장이었다.
 
  어린 이어령은 《천자문》 첫 수업부터 눈앞이 캄캄했다. ‘하늘 천(天), 땅 지(地), 검을 현(玄), 누를 황(黃)’, 즉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는 문장을 보며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왜 하늘이 검나요? 내가 보기엔 파란데요?”라고 물으면 훈장 선생은 화부터 냈다.
 
 
  거대한 의식의 덫, 4字의 竝列 문장
 


  “이놈아 밤에 보면 하늘이 검잖아.”
 
  “그러면 땅도 검어야지 왜 누렇다고 해요? 밤에 보면 다 까만데요?”
 
  훈장은 “이 쥐방울만 한 녀석이 어딜 와서 따져? 옛 선현들이 다 그렇게 말씀하신 걸 가지고”라고 나무랐다. 하지만 다그친다고 의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늘이 까맣고 땅은 누렇다’는 4자가 왜 우리말 어순처럼 ‘천현지황’이 아니고 ‘천지현황’인지 궁금했어요.
 
  그게 바로 중국 시(詩)문학, 동양문학의 특징인 병렬(竝列)구조라는 것을 훗날 알게 됐습니다.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R. Jakobson)이 동양철학과 동양시학의 기본을 ‘패럴리즘(parallelism·對句法)’으로 설명한다는 것도 나중 이해하게 됐어요.
 
  하지만 당시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죠. 이 병렬구조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하게 됐습니다. 좋든 나쁘든 간에 말이죠.”
 
  선생은 《용비어천가》를 예로 들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뮐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칠새’라는 구절이 대구로 이어집니다. ‘나무가 바람에 안 흔들린다’고 써놓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샘이 가뭄에 안 그친다’고 씁니다. 서양의 문장처럼 전진(forwarding)하는 직렬구조라면 알아듣기 쉬운데 문장 흐름이 갔다 왔다 하니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쉽지 않아요.”
 
  다시 선생은 〈춘향가〉의 비유를 들었다.
 
  “〈춘향가〉를 보세요. 이별 대목에 ‘(님이) 달만큼 별만큼, 나비만큼 불티만큼 망종고개 넘어 아주 깜박 넘어가니’라는 구절이 있어요. 사랑하는 님의 얼굴이 달처럼 보이다가 별처럼 사라진다 했다가, 님 몸짓이 나비처럼 움직이다 불티처럼 가물가물해진다고 다시 반복합니다.”
 
  선생은 “병렬식 한자구조가 한국인의 사고(思考)에 덫을 놓았다”고 말했다.
 
  “2자와 4자의 답답한 획일주의 문화를 통해 모든 사람이 똑같은 책을 읽고, 똑같은 생각을 하며, 똑같은 (형식의) 문장으로 표현했어요. 양반 관료 사회에 획일주의보다 편한 건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저처럼 《천자문》을 읽고 ‘왜 하늘이 까매요?’라고 묻는 이가 없었을까요? 그럼 제가 천재인가요? 아니죠. 저처럼 묻는 게 너무 당연합니다. 《천자문》을 살펴보세요. 생활에서 자주 쓰이는 봄 춘(春)자가 빠져 있고 ‘일(一)’부터 ‘십(十)’까지 숫자도 다 갖추지 않았어요. 심지어 동서남북의 ‘북(北)’도 없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실용적인 학습서가 아니었어요. 《천자문》 뗐다고 만세를 부르고 시루떡을 돌렸지만 그 아이는 사계(四季)의 봄도, 방향의 북쪽도 모르는 아이입니다.”
 
  ― 《천자문》은 누가 어떻게 만든 겁니까.
 
  “중국 남북조 시대 양무제 때의 학자인 주흥사(周興嗣·470~521년)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1000자 중 한 글자도 같은 글자를 안 쓰려고 신경을 쓰다 보니 하룻밤 새에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지만 자기만족을 위한 4자 창작이지 아이들을 위한 교육용이 아닙니다.”
 
 
한자에서 도망치기
 

  한자가 까다롭고 배우기 어렵다지만 요즘 젊은이들의 일상에는 한자가 녹아 있다. ‘한자 말놀이’가 그것이다. 인터넷 댓글이나 휴대전화 문자, 채팅에서 등장하더니 광고나 TV 드라마 등 제도권 안으로 흡수되고 있다.
 
  “대중영합주의라는 뜻의 외래어 ‘포퓰리즘’에 한자를 넣어 ‘票퓰리즘’이라 써보세요. 한층 의미가 명확합니다. ‘다 주세요’라는 말도 ‘多주세요’ ‘이 사람’을 ‘李사람’이라 써보세요. ‘많이 달라’는 의미와 연결되고, ‘이 사람’이 자연스레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을 지칭합니다.”
 
  사자성어(四字成語)도 시대에 맞게 변신하고 있다.
 
  “‘대략난감’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지요? 이 말을 듣고 한자 사전을 뒤진다면 구세대나 쉰세대 소리를 들을지 모릅니다. ‘내로남불, 대략낭패, 완전열공, 찍먹부먹, 낄끼빠빠, 할많하않…’ 등 수없이 많지요. 좀 더 예를 들어볼까요?”
 
  선생은 자료 조사한 것을 보여주었다.
 
  “호구지책(호구는 지 스스로 책망한다), 고진감래(고생을 진탕 하고 나면 감기몸살 온다), 삼고초려(쓰리고 할 때는 초단 조심) 등 ‘짝퉁 사자성어’는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단순한 말장난을 넘어 한글과 한자의 어울림이 재미와 함께 기성세대와 신세대 간 소통의 도구로 보입니다.”
 
 
  학교의 근대문명에서 만난 물건들
 

  《천자문》을 깨친 소년 이어령은 근대문명의 공간인 학교에 입학했다. 학교는 그에게 어떤 공간이었을까?
 
  “학교와 병원, 극장, 열차 같은 근대의 공간은 새로운 문물을 넘어 이전에 보지 못한 세상을 경험하게 만들었습니다. 시골 아이들은 격자 창문에서 보던 문살과 창호지 대신 반짝반짝 빛나는 학교 유리창과 만나게 됩니다.
 
  투명한 창을 통해 바다 건너 문명을 체험하게 되었죠. 물론 개화기 이전에도 유리는 있었지요. 그 유리는 근대 이전의 비단길이라고 불리던 실크로드를 따라 대륙을 건너온 것이라면, 근대 이후의 유리는 양선(洋船)을 타고 바다 건너에서 왔습니다. 유리 대신 ‘글라스’로 불렀고 컵도 ‘글라스’라고 하였지요. 일본어 발음은 ‘가라스’입니다.
 
  학교에 간다는 것은 문자를 배우고 교육을 받는 것을 넘어 교실을 투명하게 둘러싼 유리와 만난다는 것이었어요. 유리는 경이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자 열쇠였습니다.
 
  제가 온양명륜심상소학교(溫陽明倫尋常小學校)에 입학하자 아버지는 서울의 백화점에서 플라스틱 필통을 사다 주셨습니다. 그때는 플라스틱이라는 단어 대신 셀룰로이드로 불렀죠. 나무빛깔이나 누런 종이 같은 바랜 색이 아니라 보석처럼 빛나는 무지개색이었습니다. 필통을 열면 색색의 연필이 가지런히 누워 있었고 고무지우개가 들어 있었죠.”
 
 
고무지우개와 란도셀
 

  잠시 침묵하고서 다시 말을 이었다.
 
  “앞선 세대들은 남포등 아래 석유 냄새까지는 맡았지만, 고무 냄새는 맡지 못했습니다. 향이 풍기는 지우개는 먹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켰어요. 손에 쥐면 그 말랑말랑한 촉감은 또 어떻고요. 그런 소재를 평생 본 적도 만져본 적도 없었어요. 필통을 열면 감각이 확장되고 낯선 공간으로 여행을 떠나온 느낌이었죠. 1930년대 어린아이의 학교 체험이 바로 거대한 문명 체험이었던 것입니다.
 
  어린 시절 최고의 과일은 바나나였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뒷동산에서 열리는 과일이 아니었으니까요. 바나나는 야자수가 연상되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스콜을 떠올리게 합니다. 컴컴한 밤의 북두칠성이 아니라 남극성, 남태평양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열대 과일이었죠.
 
  그렇게 우리는 문풍지, 남포등, 메주 냄새에서 벗어나 학교에서 유리와 고무지우개, 셀룰로이드와 만날 수 있었습니다.”
 
  소년 이어령에게 근대는 등에 멘 ‘란도셀’과 같았다. 란도셀은 유럽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군용 가죽가방이었지만 학생들의 통학용 가방으로 이용되었다.
 
  분명, ‘보자기(혹은 책보)’를 옆구리에 끼고 통학하는 아이들은 시골뜨기였고, 란도셀을 멘 아이들은 서울내기였다.
 
  “서울에 다녀오신 아버지가 란도셀을 사다 주셨습니다. 무명천으로 만든 친구들의 책보는 김칫국물이 줄줄 새는 것이었지만 저는 보자기가 아닌 란도셀을 메고 다녔던 것입니다. 란도셀의 빛깔은 대개 검정, 빨강이었고 가죽 냄새가 물씬 풍겼습니다. 교실에서의 근대화, 서구화란 가죽 냄새 풍기는 란도셀에서 발견할 수 있었죠.”
 
 
  근대문명의 그늘
 


  “란도셀을 메고 학교에 가는 상상만 해도 즐거웠는데, 마치 하루하루가 잔칫날처럼 느껴졌습니다. 친구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란도셀은 그야말로 꿈을 담은 가방이었습니다.
 
  그러나 란도셀은 자랑스럽고 편리한 것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많은 물건을 빼앗고 구속하고 말았어요. 친구들은 부러워했지만 저에겐 큰 짐과 같았어요.

  책보는 교실에 들어가 교과서와 필통을 꺼내고 나면 한 장의 넓적한 평면으로 변합니다. 접으면 흔적을 찾을 수 없죠. 그러나 란도셀은 교실 밖이든 안이든, 내용물을 넣건 꺼내건 그 형태와 크기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의자 한쪽에 걸어두면 친구들이 뛰어다니다 제 란도셀을 건드는 겁니다. 행여 다칠까 봐 가슴에 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란도셀이 책과 학용품을 넣어 옮기는 목적 이외 아무것도 포용할 수 없는 물건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죠.
 
  하굣길, 친구 아버지가 ‘아무개야. 참외 가져가라’고 하면 책보 멘 친구들은 보자기에다 참외를 쌀 수 있었지만, 란도셀은 그런 공간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친구 책보는 덩치 큰 수박까지 쌀 수 있어 마법의 양탄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란도셀에는 예쁜 꽃 한 송이, 못생긴 개구리참외조차 넣을 수 없었어요.”
 
 
  학교교육과 서당교육의 차이
 


  선생은 “그때부터 학교 시스템이, 그러니까 근대교육의 시스템 속에 어둠이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신시대 여명을 경험하자마자 문명의 석양, 그 폐부가 불길하게 어른거렸던” 것이다.
 
  “빛나던 학교 유리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장난을 치다 행여 유리창을 깨면 그 아이는 죄책감이 들었어요. 금지된 장난이자 문명의 반역, 최초의 범죄로 비칠 수 있었죠. 지우개도 그랬어요. 지우개를 반쯤 쓰면 색이 시커멓게 변하고 모양도 이지러졌습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제일 먼저 지우개가 사라졌습니다. 남양(南洋)에서 만든 고무가 한반도까지 오지 않았던 겁니다. 죄다 장병들의 군화로, 전쟁물자로 쓰이면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근대 초기에는 서양의 기술문명을 받아들여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는 것이 근대화라 여겼다. 개화파들은 국가 존망이 자강(自强)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교육과 산업발전을 통한 실력양성을 자강으로 여겼다.
 
  일찍이 중국과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배우기 위해 시찰단(영선사, 신사유람단)을 파견했다. 외국어에 능한 사람을 양성하기 위해 동문학(同文學·1883년), 육영공원(育英公院·1886년) 같은 학교를 설립했는데 이처럼 근대교육이 제도적으로 정비된 것은 갑오개혁(1894년) 때였다. ‘교육조서’가 반포되고 6년 연한의 관공립소학교가 건립되었으며 각종 교과서 편찬이 그즈음에 이뤄졌다.
 
  “돌이켜보면 개화기 중심의 문명은 공급자 중심이었습니다. 학생이 가르칠 교(敎)가 들어가는 ‘교실’에 가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왜 배울 학(學)을 붙여서 ‘학실’이라 이름 짓지 않았을까요? 학생이 배우는 책도 ‘교과서’라고 불렀습니다. 학습자 위주의 ‘학습서’ ‘학과서’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 위주로,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 중심으로 학교제도가 만들어졌습니다.”
 
 
  南冥 선생과 공자의 가르침
 

  어쩌면 일제의 식민지 교육 때문일지 모른다.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기조 위에 교육목표를 조선인의 황민화에 두었다. ‘충량(忠良)한 국민양성’이란 목표는 일본 군국주의 교육정신을 바탕으로 한다.
 
  “교실 풍경은 어떤가요? 교탁이 교실 가운데 우뚝 서 있고 교단은 학생들을 내려다볼 수 있게 높습니다. 과거 서당은 달랐습니다. 훈장 선생은 보료에 앉을 뿐입니다. 동양에서 학문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이 주체였어요. 《논어》의 첫 구절은 ‘학이시습 불역열호(學而時習 不亦說乎)’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근대 이전에 많이 쓰이던 ‘학당’ ‘학원’이란 이름은 모두 배우는 사람을 주체로 한 말입니다.
 
  교육 주체가 배우는 쪽에서 가르치는 쪽으로 바뀐 것은 근대 이후입니다. ‘수우미양가’ ‘갑을병정’으로 매기는 평가와 서열도 그때 생겨난 것입니다.”
 
  ― 옛날 서당의 평가방식이 궁금합니다.
 
  “서당에서는 평가를 ‘문자’로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재주가 뛰어나 과민한 자에게는 ‘우(愚)’라는 문자를 나눠주었죠. 반면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독선가에게는 ‘인(仁)’, 효행심이 부족한 자에게는 어미 새에게 은혜를 갚은 반포지효(反哺之孝)의 ‘오(烏)’, 그리고 성급한 자에게는 느리게 걷는 ‘우(牛)’를 써주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선 선조 때 명상(名相) 정탁(鄭琢·1526~1605년)이 출사(出仕)하게 되어 하직 인사차 스승인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년)을 찾아갔습니다. 스승이 ‘뒤뜰에 매어 둔 소 한 마리를 몰고 가게나’라고 하였습니다. 정탁이 매어 놓은 소가 없어 어리둥절해 하자 남명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언어와 의기가 너무 민첩하고 날카로우니 날랜 말[馬]과 같다. 말은 넘어지기 쉬운지라 더디고 순한 것을 터득해야만이 능히 멀리 갈 수 있으므로 소를 준다고 하였네.’ 마음의 소를 주겠다는 말이었어요. 이후 정탁은 항상 마음의 소와 더불어 우보(牛步) 처세를 게을리하지 않아 정승에 올랐습니다.
 
  공자(孔子)는 똑같은 질문을 던진 두 제자에게 정반대의 대답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좋은 이야기를 들으면 언제 실천해야 합니까’ 하고 제자 자로가 묻자, 공자는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은 후에 행해야 한다’고 했고, 이튿날 제자 염유가 같은 질문을 하자 ‘망설일 것 없다. 바로 행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가 ‘왜 어제와 오늘의 대답이 다릅니까’ 하고 물었는데 공자의 답은 이러했습니다.
 
  ‘자로는 조금 성급한 면이 있으므로 신중함을, 염유는 우유부단하므로 행동력을 강조한 것’이라는 답이었습니다.
 
  이처럼 근대 이전 교육은 획일적인 기준 대신 한 사람씩 맞춤교육을 하였습니다. 서당이란 작은 공간에서 여섯 살과 스무 살이 함께 배울 수 있었죠. 때로 낡은 것이 새롭고 새로운 것이 낡을 수 있습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와 줄탁동시
 
  이 대목에서 선생은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1989)를 떠올렸다.
 
  “키팅 선생님은 자신을 부를 때 ‘오, 선장님! 나의 선장님!’이라고 부르도록 하고, 시론(詩論)을 강의하며 교과서의 ‘시의 개론’ 부분을 찢어버리라고 지시합니다. 키팅이 학부모의 압력으로 학교를 떠나는 마지막 장면도 인상적입니다. 학생들이 차례차례 책상 위에 올라서는데 ‘의자에 앉았을 때와 책상 위에 올라섰을 때 세상은 달라 보인다’는 그의 가르침을 잊지 않겠다는 시위였어요. 눈물 나는 장면입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전근대에서 근대로 바뀌는 체험은 얼마나 놀랍고 설레는 일입니까? 그러나 그때의 가르침은 줄탁동시(啐啄同時·병아리가 알을 깨기 위해서는 어미와 새끼가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의 교육이 아니라 식민지배와 전쟁으로 내몰기 위한 교육이었습니다. 《천자문》을 뗀 아이가 입학해 일본 교과서의 ‘붉은 일장기’를 배우면 어떤 느낌이 들까요?
 
  보급대로 정신대로 징병으로 끌려가던 형과 누나를 바라보면서 얼마나 슬프고 혼란스러웠을까요? 식민지 아이들은 묵비사염(墨悲絲染)의 모습이었습니다. 붉은색을 칠하면 붉은 실이 되고 노란색을 칠하면 노란 실이 되듯이 말이죠.
 
  안타깝게도 어느 교육학자들도 당시 아이들의 심리를 연구하지 않았어요. 만약 식민지 시절로 돌아간다면 나치 점령하의 안네 프랑크처럼 그 순간순간을 일기로 기록하고 싶습니다.
 
  지금의 우리 교육도 되짚어봐야 합니다. 미리 결론 내리고 정해진 해답을 만들어 틀을 씌우는… 누구도 만행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해방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일제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소학교에 입학하자 느닷없이 교명이 바뀌었다. ‘온양국민학교’가 된 것이다. ‘국민학교’라는 명칭은 일제가 태평양전쟁 등 침략전쟁을 본격화한 1941년 2월 28일 일왕 히로히토의 칙령 제148호에서 처음 발견된다. 창씨개명을 강요하기 시작한 지 1년 만의 일이었다.
 
  “국민을 위해, 나라를 위해 가르치는 것이 교육입니까? 아닙니다. 한 사람의 인격체로 성장해 꿈꿀 수 있는 주인공이 되고, 가장이 되며, 국민이 될 토대를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교육입니다. 붕어빵처럼 국가가 요구하는 인간을 만드는 의무교육이어선 안 됩니다.
 
  학교에서 신체검사를 하고 머릿니를 잡으려 DDT를 뿌리며 회충약을 주었어요. 내 몸이 국가의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체력은 국력이라며 체육을 가르쳤어요. 체육은 체조교육의 줄임말입니다. 덴마크에서 가져온 체조를 통해 식민지인을 근대인으로 개조하려 한 것입니다.
 
  남만주철도 초대 총재와 내무·외무 대신을 지낸 고토 신페이(後藤新平)는 ‘폭력이 아닌 의술과 인프라로 식민지를 다스려 자청해서 따라오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죠. 소위 위생(衛生)을 가르쳤던 겁니다. 이게 바로 푸코(Michel Paul Foucault)가 말하는 생정치(Biopolitics)입니다. 무서운 헌병의 채찍이 아니라 구충제 주고 때를 씻겨 ‘이게 너의 행복이고, 이 행복을 국가가 준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일본이 가져온 근대화 세례들은 자기네 것이 아니라 서양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일제를 통해 근대화를 이뤘어도 동화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국인의 빗장을 풀고 무장을 해제시킨 것은 일본식 난방장치 ‘고타쓰’가 아니라 서양식 ‘스토브’였던 겁니다.”
 
 
  《세계문학전집》과 東道西器
 


  선생은 “추운 겨울, 강이 얼어도 그 얼음장 밑으로는 따뜻한 물이 흐르는 법”이라고 했다.
 
  “어린 시절 저는 36권짜리 《세계문학전집》을 읽었습니다. 일본문학을 읽은 것이 아니라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발자크, 호메로스를 읽었습니다. 저는 일본 군국주의의 희생자가 아니었어요. 일제 구군신(九軍神)에게 세뇌당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웃기는 놈들이라고 생각했죠. 도스토옙스키가 구군신,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처럼 자폭하는 것을 찬성하겠습니까?
 
  파 뿌리 하나로 천국에 갈 수 있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머릿속에 집어넣었고, 그리스·로마 신화를 달달 외웠습니다. 문학을 통해 서구 교양을 익혔고 전체주의적 군국주의 사상에 전염되지 않았습니다. 그 교양이 마음속 자유공화국을 세울 수 있었고, 그 ‘영토’를 지금껏 유지하고 있죠.”
 
  ― 한·중·일(韓中日) 세 나라의 근대화 과정이 어떻게 다른가요.
 
  “중국은 중체서용(中體西用)의 관점에서 서구문물을 받았습니다. 중국 본래의 유학(儒學)을 중심으로 하되 부국강병(富國强兵)하기 위해 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었죠.
 
  근대화 시기의 일본 구호는 화혼양재(和魂洋才)입니다. 일본이 지닌 전통을 중시하면서(和魂), 서양서 배운 학문·지식·기술을 발전시키자(洋才)는 뜻입니다.
 
  한국의 동도서기(東道西器)론은 동양의 도덕·윤리를 유지한 채 서양의 기술·문명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룩한다는 사상입니다. 중체서용에선 한국·일본이, 화혼양재에선 한국·중국이 빠져 있지만 동도서기에는 한·중·일이 모두 포함돼 있어요. 다시 말해 중국과 일본은 자국 중심으로 서양을 받아들였지만 우리는 동양인으로서 문물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클래스가 다르고 논리가 다르지요.”
 
 
  〈오징어 게임〉에 숨어 있는 인류의 미래
 

  넷플릭스의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 40대 이상의 중장년층에게 오징어 게임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서려 있다. 이 게임은 지역마다 오징어가이상, 오징어다방구, 오징어가생이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일본 기원설이 회자된다.
 
  오징어포에서 기인한 가이산(海産·かいさん), 바깥 선을 뜻하는 가이센(外線·がいせん), 양쪽이 어울려 싸운다는 가이센(會戰·かいせん)에서 나왔다는 주장이 있다.
 
  선을 긋고 몸싸움을 벌이는 형태의 놀이는 세계 곳곳에 존재한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과 정확하게 대응된다고 할 만한 놀이는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 이번에는 유년 시절 놀이 문화에 대해 들려주십시오.
 
  “집단 놀이는 근대 문화의 산물입니다. 일본의 놀이 문화가 한반도로 유입됐다는 설이 있는데 기원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일본 봉건시대인 에도(1603~1867) 때에도 놀이 문화라는 게 없었습니다.
 
  오징어 게임이 일본에서 왔다는 주장이 있던데 그게 왜 문제가 됩니까? 〈오징어 게임〉 같은 TV 시리즈를 일본이 못 만든 게 문제지요. 일본에서 화려하게 꽃피운 문물 모두 서구에서 가져오지 않았습니까? 일본이 자랑하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도 모두 서구에서 들여온 장르입니다.”
 
  ― 어린 시절,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오징어 게임 같은 놀이를 직접 하였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는 그런 놀이가 없었어요. 해방 이후 생겨나지 않았나 유추해봅니다.
 
  어른이 되면 알게 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즐거운 것은 어린 시절 놀이 경험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죠. 그때는 어머니가 ‘밥 먹으러 오라’는 소리가 싫고 원망스러웠습니다. 이겨도 즐겁고 져도 즐거웠습니다.
 
  비록 몸은 이미 어른이지만 기억을 되돌려 어린 시절로 돌아가 놀고 싶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지요. 살아남기 위해 기꺼이 남을 해치고 죽여야 합니다. 그런 비정한 현실을 〈오징어 게임〉이 보여주고 있어요.”
 
 
  엄마의 ‘밥 먹으러 오라’는 소리가 싫었던 기억
 


  선생은 잠시 숨을 돌린 뒤 말을 이어갔다.
 
  “조폭이 나오고 빚쟁이, 목사, 은행 지점장, 장기밀매 의사, 외국인 노동자, 유리 기능공 등 다양한 인간 군상(群像)이 캐릭터로 나옵니다. 완력으로 누르고 배신하며 별의별 꾀를 써서 속아 넘겨도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이는 ‘착한 사람’입니다. 지성을 상징하는 조상우(박해수 분)가 휴머니티를 상징하는 성기훈(이정재 분)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기훈은 상우를 죽여야만 게임에서 이길 수 있었죠. 하지만 막상 죽음과 맞닥뜨리니 죽일 수 없었습니다. 상우는 그런 기훈에게 자기 어머니를 부탁하며 자결하면서 게임은 끝이 납니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남을 죽여도 된다고 여기지만, 그게 인간 본성이라 여기지만, 아닙니다. 본성에는 착함이 있어요. 인간은 인간을 믿을 수밖에 없어요. 그렇기에 인류가 여기까지 온 겁니다.
 
  구슬치기에서 극중 지영(이유미 분)이 강새벽(정호연 분)을 위해 일부러 져줍니다. 남을 위한 희생은 약육강식이 난무하고 살기 위해 배신하는 리얼리즘 세계를 간단히 뛰어넘습니다. 인간은 여전히 믿을 만하고 아직 사랑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난폭한 현실의 오징어 게임에서 승리하는 유일한 방식은 사랑과 희생에 있다고 말이죠. 저는 극중 성기훈의 ‘성’이 세인트(聖)를 뜻한다고 봅니다.”
 
 
  팽이치기 추억과 겨울털모자
 

  ― 어린 시절 놀이를 떠올려주세요.
 
  “추운 겨울이면 팽이치기를 하였죠. 겨울 풍경을 떠올려봅니다. 긴 정적처럼 산도 들도 강도 꽁꽁 어는데 딱 하나, 팽이만 팽팽 돌아갑니다. 팽이만이 날개 달린 곤충처럼 얼음판 위를 미끄러집니다.
 
  팽이는 장난감 가게에서 사지 않고 나무를 깎아 만들었습니다. 팔뚝만 한 박달나무 가지를 잘라서 배추 밑동 깎듯이 낫으로 깎아 원추형으로 만듭니다. 뾰족한 팽이의 끝은 자전거에서 빼낸 쇠구슬을 박았죠. 그것을 구할 수 없으면 못을 박기도 하였어요.
 
  이렇게 해서 만든 팽이가 아이들의 손때가 묻으며 점점 길이 들면 무슨 신경을 가진 곤충처럼 부드러운 날개 소리를 내며 돌아갑니다. 가장 오래 돌고 가장 힘이 세며 또 가장 윤이 잘 나는 팽이를 가진 아이는 마을 아이들의 영웅이 됩니다.”
 
  선생의 회고다.
 
  “친척에게 양자로 간 형이 있어요. 형은 아버지에게 값비싼 털모자를 선물 받았습니다. 그 모자가 에스키모인들이 쓰는 것 같은 수달피 가죽의 털모자였는지, 하얀 방울술이 달린 스키 모자였는지, 또 그렇지 않으면 셀룰로이드의 안경이 달린 파일럿 모자였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서울의 백화점에서 산 겨울털모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가 어느 겨울, 이 모자를 자랑하려고 바깥에 나갔다가 일생을 지배하는 그 사건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털모자를 쓴 형은 그 마을에서 제일 잘 도는 팽이를 갖고 싶었습니다. 형은 그 귀한 털모자와 팽이를 맞바꾸고 말았습니다. 형이 생각하기에 털모자가 아무리 값비싸도 팽이만큼 겨울의 추위를 잊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 모자 값으로 팽이 수백 개를 사고도 남았지만 겨울 햇살에 번쩍거리는 빙판 위를 돌아가는 팽이만이 즐겁고 소중하고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입니다.”
 
 
  자치기와 구슬치기, 딱지치기, 단추놀이
 

  자치기는 길고 짧은 두 개의 막대로 치며 노는 아이들 놀이를 말한다. 구슬치기는 구슬을 땅에 놓고 떨어진 곳에서 다른 구슬을 맞혀서 구슬을 빼앗는 놀이다.
 
  “20~30cm 되는 긴 막대로 10cm 안 되는 작은 막대를 쳐서 공중에 튀어 오른 것을 다시 쳐서 멀리 보내는 놀이입니다. 요즘의 야구 식으로 멀리 날아가게 만듭니다. 긴 막대는 작대기이자 부지깽이, 부젓가락 같은 것이죠. 어린 시절 제 양 호주머니에 나무토막이 가득했습니다.
 
  그땐 유리구슬을 소구(小球)라고 불렀는데 동그랗고 매끄러웠어요. 수정처럼 투명하게 속까지 다 비치는 장난감은 유리구슬밖에 없습니다. 작은 우주와 같았죠. 마법처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행복했어요.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한 아이가 장난치다가 문지방과 미닫이 문틈으로 소구를 빠뜨리고 말았어요. 늘 잃어버린 구슬이 마음에 걸렸지만 찾을 수 없었죠.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 아이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도시를 떠돌다 낙향하면서 그 소구를 찾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문을 뜯어 결국 찾습니다. 그러나 큰 충격을 받아요. 보잘것없는 싸구려 구슬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기억 속에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영롱한 수정처럼 반짝이고 있습니다.
 
  딱지 한 장을 땅바닥에 놓고 다른 딱지로 쳐서 뒤집는 딱지치기도 신나는 놀이였지요. 보통 문방구에서 파는 딱지는 일제 군국주의의 산물인 군대 계급장이 인쇄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책이나 공책의 두꺼운 겉표지, 혹은 신문을 접어 딱지로 만들었어요.”
 
 
  어린 시절 놀이가 재미있는 이유
 

  ― 우리는 저마다 유년의 놀이 체험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왜 놀이가 재미있을까요? 놀이는 절대 실력만으로 안 됩니다. 운이 있어야 합니다. 가위바위보처럼 백번 지다가도 한번은 반드시 이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덩치 큰 놈과 싸우면 절대 이길 수 없지만 아무리 약골이라도 가위바위보로는 이길 수 있습니다.
 
  게임에서 운은 승자의 기쁨을 주기보다 패자의 구실을 만들어준다는 것에서 우리 인생과 같습니다. 아무리 약한 놈도, 강한 놈도 운에 따라 이기고 질 수 있습니다.
 
  그 시절, 시골 아이들은 한복에 옷고름을 맸지만, 학교에 다니면서 교복이라는 것을 입어야 했다. 형편이 어려우면 무명을 검게 물들여 제복(교복)으로 입었다. 교복에는 5개 단추를 달아야 했다.
 
  “단추가 대개 볼록 나와 있었어요. 단추놀이라는 게 있었는데 교복 단추를 눌러서 찌그러지면 지는 겁니다. 안 찌그러진 단추는 자랑스런 훈장과 같았죠.
 
  남자의 훈장, 남자의 액세서리가 바로 단추입니다. 적장(敵將)을 모욕할 때 단추부터 떼잖아요. 왜 제복(교복)의 단추가 5개냐? 오행 사상을 담고 있어요. 아무리 제복, 교복이 서구의 산물이라지만 동양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겁니다. 5음절로 된 궁상각치우, 인의예지신, 도개걸윷모처럼 말이죠.”
 
 
  아름다운 도시락 도둑 이야기
 
 
  40대 이상 기성세대들에게 도시락 하면 조개탄을 넣은 겨울 난로가 먼저 떠오른다. 난로에 간단한 구조물을 만들어 그 위에 도시락을 올려놓아 데워 먹었다. 선생의 도시락 추억이다.
 
  “등교하면 난로에 층층이 도시락을 쌓습니다. 난로 가까이 먼저 데워진 도시락은 시간이 지날수록 뒤로 옮겨집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맨 위에 있던 차갑던 도시락이 난로와 가장 가까이 있게 되죠. 이렇게 해서 모든 도시락이 다 훈훈하게 데워집니다. 문제는 밥과 함께 반찬을 난로 위에 올려놓아 가끔 김치 끓는 냄새가 나기도 합니다. 온 교실이 김치 냄새로 가득했지요.”
 
  선생은 천부적인 이야기꾼답게 도시락에 얽힌 감동 사연을 풀어냈다.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어느 부잣집 엄마가 아이의 학교로 찾아갔어요. 아이 도시락이 매번 바뀌어서 온다며 담임 선생님께 항의를 했죠. 아이의 선생님은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엄마는 ‘맛있는 반찬을 담아 도시락을 싸주었는데 하교한 아이가 건넨 도시락에는 먹다 만 무짠지가 가득하더라’는 겁니다. 누군가 자기 아이의 도시락을 빼앗아 먹었다고 확신한 것이었죠.
 
  담임 선생님은 교실로 돌아가 탐문을 했고 결국 도시락 도둑을 찾아냈습니다. 사연은 이랬습니다. 부잣집 아이는 난로 위에 층층이 쌓은 도시락 중에서 가난한 친구의 도시락을 가져갔던 것입니다. 가난한 친구는 마지막에 하나 남은 도시락을 택할 수밖에 없었죠. 그 도시락에는 맛있는 반찬이 가득했습니다. ‘아름다운 도둑은 바로 당신 아이’라는 선생님 말씀에 부잣집 엄마는 큰 감동을 받았지요.”⊙

 

 

4. 맛과 멋, K-푸드


“한식의 특성은 생성의 美學, 융합의 味學”
 


⊙ ‘진지 드셨나요?’ 인사하는 민족… 동남아 국가도 ‘식사 인사’
⊙ ‘먹는다’는 시대의 문화와 사랑 담아… ‘한 골 먹었다’ ‘살맛 난다’ ‘죽을 맛’ ‘싱거운 놈’
⊙ 동물과 구별된 인간의 속성… ‘함께 사는 것’ ‘함께 밥을 나눠 먹는 것’(conviviality)
⊙ “화합과 함께 살아가는 우주적 메시지를 담은 음식이 탕평채(蕩平菜)”
⊙ “한국 음식은 대개 삭히고 끓이고 무치고 섞는 방법으로 요리”

 
  연초 이어령(李御寧)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를 만나 ‘끝나지 않은 한국인 이야기’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영감이 가득한 짐보따리 하나씩을 풀어냈다. 잊었던 옛 시문(詩文)에서 만나듯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우리는 지난 1월 7일과 10일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 만났다. 선생은 육체적 난항(難航)을 헤쳐나가며 혼신을 다해 영적(靈的) 음성으로 말했다. 그의 말 마디마디는 기울기의 변곡점처럼 살아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식구(食口)라는 말은 가족을 뜻합니다. 직역하면 먹는 입이죠. 가족이 많다란 말은 곧 먹는 입이 많다는 의미가 돼요.
 
  ‘너희 집 식구가 몇이냐’고 물으면 우리 집 식구 수를 손꼽아 대답하는데 전혀 이상하지 않죠. 도시 내 사는 사람, 나라 전체의 국민들도 사람의 입, 인구(人口)라고 하고, 호구(戶口) 조사라고 합니다.
 
  사람을 셀 때 뇌가 있는 머릿수(頭)로 계산하여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라고 하면 이상합니다. 그러나 한 입, 두 입이라고 하면 어색은 해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지요.
 
  한자문화권에서는 포로나 노비 그리고 소와 같은 가축도 식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입으로 수를 따져 생구(生口)라고 불렀어요. 광개토대왕비에는 396년 백제가 고구려에 대패해 생구를 헌상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그런데 가축 가운데 소만 생구라고 불렀지, 먹고 자기만 하는 돼지나 개는 생구라고 하지 않았어요. 땀으로 함께 일하고 한솥밥 먹는 대상에게만 ‘입 구(口)’를 썼던 겁니다.
 
  중국 《한서(漢書)》에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民以食爲天)’는 맹자의 말이 나옵니다. 먹는 것으로 지고한 하늘의 뜻을 배우고 섬긴다는 말이지요. 먹는 것은 물질이 아니고, 경제도 생리도 아닌 것으로 여겼습니다.”
 
 
  ‘진지 잡수셨습니까’ 하고 인사하는 민족
 

  이 대목에서 잠시 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먹는 입을 ‘생명의 문’으로 여겨서인지 먼 옛날 우리나라엔 밥집이 없었습니다. 밥이나 물, 공기 같은 생명을 사고파는 장사를 하면 안 되는 것으로 여겼어요. 대신 술집[酒幕]이라고 해놓고 밥을 팔았던 겁니다. 밥은 남에게 팔 수가 없어요. 거저주는 것이니까요.
 
  곧이어 인사말에 담긴 ‘먹는 것’의 의미를 분석했다.
 
  “우리는 ‘진지 잡수셨습니까’ ‘밥 먹었니?’ 하고 인사하는 민족입니다. 얼마나 가난하고 배가 고팠으면 남들이 ‘굿모닝’ ‘좋은 아침’이라 인사할 때 그렇게 인사했을까요?
 
  고학하던 대학 시절, 뭘 제대로 먹었겠어요. 아침밥 안 먹고 학교 가는 일이 많은데 친구가 ‘야, 밥 먹었냐’ 그러면 기분이 나빴어요. 어떻게 나 밥 굶은 거 알고…. ‘먹었다 왜?’ 하고 싸움이 나는 겁니다. (웃음)
 
  그런데 ‘진지 드셨냐’는 인사말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미얀마, 필리핀, 캄보디아 같은 동남아에서도 이런 인사를 한다고 해요.
 
  우리 민요에 이런 노래가 있었어요. ‘황새야 황새야 뭘 먹고 사니/ 이웃집에서 쌀 한 됫박 꿔다 먹고 산다/ 언제 언제 갚니/ 내일 모레 장 보아 갚지.’”
 
 
  지도에 없는 ‘고개’와 ‘섬’ 하나
 


  이야기꾼인 선생은 유머를 잃지 않았다.
 
  “지금은 잊혔지만 지지리 가난하던 시절, 자신의 처지를 황새에게 비유했지만 요즘 생각해보면 굶주림에 굴복하지 않고 먹는 것을 미학적, 철학적 단계로까지 끌어올린 민족이 우리 말고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웃음)
 
  우리나라에 지도에 없는 ‘고개’와 ‘섬’ 하나가 있었다고 하지요. 하나는 ‘보릿고개’, 다른 하나는 ‘그래도’라는 섬. 한국인은 춘궁기 보릿고개를 넘기 어려웠지만 굶주림에 손들고 항복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정신으로, 쓰러지다가도 다시 일어나 앞을 향해 걸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섬 3348개에 없는 ‘그래도’라는 섬 덕택에 시련을 이겨온 한국인이지요.”
 
  선생의 유머에는 통찰이 담겨 있었다. 계속된 그의 말이다.
 
  “우리나라만큼 ‘먹는 맛’의 표현이 많은 나라도 없어요. 한국인에게 ‘먹는다’는 단순히 먹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시대 문화와 사랑을 담았습니다. 또 한국 미학의 근본으로 꼽고 있는 ‘멋’이란 말이 먹는 ‘맛’에서 나온 말이라고 학자들이 말해요. 그러고 보면 미각언어가 발달한 것도 다 그런 데에 있어요. 아무리 언어가 풍부한 나라도 ‘쓰고’ ‘씁쓸하고’ ‘쓰디쓰고’ 또 ‘달고’ ‘달콤하고’ ‘달짝지근하고’를 구별하긴 어려울 거예요.
 
  세상을 살아가는 생사고락을 ‘쓴맛, 단맛 다 봤다’고 하잖아요. 슬픔도 기쁨도 어금니로 씹어 먹고 미각으로 맛보는 한국인에게 ‘먹는다’는 것은 짐승처럼 단순히 먹는 것을 넘어 깊은 뜻을 담았던 겁니다. 신바람이 나면 ‘살맛 난다’, 고통스러우면 ‘죽을 맛이다’고 하지요. 살고 죽는 철학적, 종교적 의미를 우리는 먹는 맛으로 표현했어요.”
 
 
  3대 불가사의 ‘먹는다’
 

  음성은 낮았으나 말은 다시 빨라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사람의 성격을 맛으로 표현하는데 ‘싱거운 놈’ ‘짠 놈’ ‘매운 놈’이라고 하잖아요
 
  어디 그뿐인가요? 2002년 한일월드컵 때 세계를 놀라게 한 3대 불가사의가 있었다고 하지요. ‘대~한민국’ 하고 손뼉치는 것, 새벽부터 전광판 앞에 앉아 있는 길거리 응원,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뭔지 알아요? ‘한 골 먹었다’는 표현이래요. 영어로는 ‘로스(loss)’인데 우리는 굳이 ‘먹었다’고 합니다.
 
  한국인처럼 ‘먹는다’는 말을 이렇게 다양하게 쓰고 있는 나라는 없을 것 같아요. 홍수환 선수의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란 말도 유명하지 않나요.”
 
  ‘먹다’라는 표현은 그야말로 부지기수다.
 
  ‘밥을 먹었다’는 기본이고, 남의 재물을 부당하게 빼앗을 때 ‘곗돈을 먹고 달아났다’, 뇌물을 받았을 때 ‘뇌물을 먹다’, 수익이나 이문을 가지라는 뜻으로 ‘나머지 이익은 네가 다 먹어라’, 꾸지람을 듣고 ‘호되게 욕을 먹다’, 어떤 마음이나 감정을 품을 때 ‘마음을 굳게 먹다’, 공포나 위협을 느끼면 ‘겁을 먹다’, 해가 바뀌어 나이 한 살을 더할 때 ‘나이 먹다’, 일사병에 걸릴 때 ‘더위 먹다’, 봉록 따위를 받을 때 ‘녹(祿)을 먹다’ 등등이 있다.
 
  선생은 먹는 행위에 사회적, 철학적 의미를 투여했다.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초등학교 1학년 산수 시간에 선생님이 한 학생에게 문제를 냈어요. ‘사과 열 개 가운데 3개를 먹었다. 몇 개가 남았느냐’고. 한 학생이 계속 ‘세 개가 남았다’고 하자 선생님이 ‘세 개를 먹었다는데 왜 세 개가 남느냐’고 화를 내자 학생이 그러는 거예요.
 
  ‘우리 엄마가 그러시는데 먹는 게 남는 거래요.’
 
  ‘먹는 게 남는 것’은 배고파서 먹는 게 아니에요. ‘먹는다’는 것은 내 안에 들어와 없어진다,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오감(五感)을 거리로 따지면, 시각이 제일 멀리 있고 그다음으로 청각, 후각, 촉각인데 미각은 (내 안으로 들어온) 상대가 없어지는 겁니다.
 
  지금도 시골 잔치를 하면 온 동네 사람이 다 옵니다. 지나가던 거지도 한술 뜨고 가게 해요. 먹는 것에 우열이 있을 수 없고 다 평등하니까요.”
 
  선생은 미국의 심리학자 케네스 케이(Kenneth Kaye·1946~2021)의 이론을 소개하며 “먹는 것 이상의 사랑을 구하는 지구상 유일한 포유류가 인간”이라고 말했다.
 
  “‘먹는다’는 표현은 단순히 신진대사를 위한 생물학적 욕망을 의미하지 않아요. 미국의 심리학자 케네스 케이에 따르면 젖을 빠는 포유동물 가운데 젖꼭지를 문 채 잠시 멈췄다가 다시 빠는 것은 사람밖에 없다고 합니다. 왜 젖을 먹다 말고 멈추는 걸까요? 엄마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고 해요. 가볍게 흔들어 달라는 신호라는 것이지요. 그것도 태어난 지 이틀도 안 된 아기가 말이지요.”
 
 
共食
 


  ― 놀랍네요.
 
  “그러면 산모도 무의식적으로 아기를 가볍게 흔드는데 그러면 아기가 다시 젖을 빨아요. 이렇게 주기적으로 젖을 빨다 말고 멈추면, 엄마가 흔들고, 다시 빠는 독자적인 리듬을 만들면서 대화를 하는 것이지요.
 
  전문가들은 이것을 ‘엄마와 아기의 발레’라고 아주 멋지게 표현하는데 아기를 가볍게 흔들어주는 동작은 엄마와 아기만의 독자적인 리듬이 있는 발레 동작인 셈이죠. 먹는 것, 젖을 빠는 것을 통해 상대와 일체화하는 유대를 형성하는 겁니다. 먹는 것을 통해, 먹는 것 이상의 사랑을 구하는 지구상 유일한 포유류가 인간이지요.
 
  인간은 여타 동물과 달리 수렵과 채집을 통해 획득한 음식을 혼자 독식(獨食)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대개 가족과 함께 먹습니다.
 
  말하자면 ‘공식(共食·common meal)’이었던 셈입니다. 공식은 ‘가족·친족, 지역공동체의 성원이 모여 같은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 일’을 의미하는데, 이때 음식은 사회적 단결과 친목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어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제례나 축제 등 공동사회의 다양한 행사에 음식과 술이 빠지지 않았던 이유지요.”
 
 
  콘비비알리티와 聖餐式
 

  선생에 따르면 미국 예일대 교수를 지낸 이반 일리치(Ivan Illich·1926~2002)는 콘비비알리티(conviviality·향연 혹은 연회)라는 키워드로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속성을 연구했다고 한다. ‘함께 사는 것’ ‘함께 밥을 나눠 먹는 것’이 콘비비알리티다.
 
  “상생하는 것, 같이 먹는 것, 그게 인간의 목적이고 사회의 궁극적인 목표죠. ‘먹는다’는 인간의 가치문제고 소통의 문제고,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거예요.
 
  그런데 함께 모여 같이 먹는 동물은 고릴라밖에 없어요. 짐승들은 같이 사냥은 해도 먹을 때는 서로 먹겠다고 싸웁니다. 인간이 왜 평화로운 짐승이냐? 함께 나눠 먹는 존재니까요. 나눠 먹고 함께 먹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해요.
 
  라틴어 코뮤니스(communis)에서 유래한 말로 코뮤니타스(communitas)라는 말이 있는데, 무상의 나눔을 서로 가질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가진 생활 공동체를 뜻합니다.
 
  또 커뮤니온(communion)은 어떤 일을 함께하는 친교 활동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성체인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는 가톨릭의 성찬식(聖餐式)을 ‘The Holy Communion’이라고 하죠.
 
  가톨릭 미사에서 예수님의 성체를 신자들에게 나눠주고 먹게 합니다. 신자들은 그 성병(聖餠), 혹은 성체성사 때 쓰는 누룩 없이 만든, 얇고 동그란 제병(祭餠)을 입에 넣고 녹여 먹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초대(初代) 교회 때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성체는 효모를 쓰지 않은 딱딱한 보리빵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빈자와 약자 편인 예수님이 효모를 넣은 하얀 밀가루(小麥)빵을 먹었을 리 없었다는 것이다. 과거 이스라엘은 모든 제사에 효모를 쓰지 않는 딱딱한 빵을 썼다. 그러니 초기 교회 신자들은 미사 때 딱딱한 빵(성병)을 씹어 먹었지, 요즘처럼 녹여 먹지 않았을 것이다. (조종건 목사의 ‘성체(聖體)로서의 빵’ 참조)
 
  “어찌 보면 딱딱한 빵을 입안에 넣어 녹여 먹기 쉽게 만들면서 교회가, 우리 신앙이 말랑말랑하게 된 것은 아닐까요? 요즘 먹거리 대부분이 먹기 쉬운 유동식(流動食)입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오늘날 문명사회가 과거의 거친 빵처럼 딱딱한 것, 어려운 것, 힘든 것에 어금니를 깨물고 도전하는 정신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지 고잉(easy going)’ 하고, 쉽게 살려는 유동식 문화에 젖은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합니다.
 
  다시 예수님의 성찬식 이야기로 돌아가 볼게요. 제가 기독교를 믿게 된 동기 중의 하나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마지막에 한 게 제자들과 나눈 ‘최후의 만찬’이었죠. 바로 먹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며 ‘받아라. 이는 내 몸’이라고 하셨죠.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주시니 모두 그것을 마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몸이 빵이고, 포도주가 피인 셈이지요. 예수님의 마지막이 먹는 것이라면, 인류의 시작도 먹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에덴동산에 있던 선악과를 따 먹으면서 말이죠. 성경이 선악과로 시작해 성찬식으로 끝난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음악학교〉와 새까만 음표
 

  선생은 이 대목에서 두 편의 단편소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매우 흥미로웠다.
 
  “미국 소설가 존 업다이크가 쓴 〈음악학교(The Music School)〉라는 소설이 있어요. 이 소설은 부드러운 것을 녹여 먹는 성병(성체), 지금은 잊어버린 초대 교회를 떠올리게 합니다. 교회가 씹어 먹지 않고, 입에 넣어 녹여 먹으면서 삶의 고난을 망각하고, 예수님의 수난을 잊어버리게 됐다는 의미지요.
 
  소설 속 주인공 알프레드 슈바이겐(Alfred Schweigen)은 음악학교에서 피아노 레슨을 시작한 8세짜리 딸을 기다리며 생각에 잠깁니다. 어젯밤 성찬식에 관한 가톨릭 교회의 태도 변화가 떠올랐던 겁니다. 미사 때 먹는 하얀 성체를 입에 넣어 녹을 때까지 물고 있으면 안 되고, 한 번에 씹고 삼켜야 한다는 의미를 되새긴 것이죠.
 
  어느 날 슈바이겐이 피아노를 치고 있는 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서 상기된 얼굴을 한 딸이 음표로 새까만 악보, 도저히 눈으로 읽을 수 없는 어려운 악보를 치며 황홀경에 빠졌던 겁니다. 새까만 악보가 딱딱한 빵, 씹어 먹는 성체를 연상시키죠.
 
  사실, 먹는다는 것은 지상의 것, 세속적인 것일지 몰라요.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리스도교에서는 단식 주간이 있고 때로 금식을 합니다. 먹는 것은 육체의 것이니까 단식은 영적인 것에 가까운 행위지요.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며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고 부처님도 깨달음을 위해 단식하셨어요.”
 
 
  〈단식 광대〉와 표범
 


  선생의 계속된 이야기다.
 
  “왜 단식을 하셨을까요? 육체는 소멸되니까…. 오감 중에 후각이나 시각, 청각을 고등 감각이라 여기고, 촉각이나 미각은 하등 감각이라 여겼어요.
 
  카프카의 단편소설 〈단식 광대〉를 보면 배우 한 사람이 우리에 들어가 아무것도 먹지 않습니다. 앙상한 갈비뼈, 두 눈을 내리깐 단식 광대에게 사람들은 하루에 한 번씩 구경하러 올 정도로 열광합니다. 광대는 때로 짐승처럼 우리의 창살을 마구 흔들어대기도 했어요. 단식 광대가 40일 동안 단식쇼를 마치면 매니저는 단식의 성공을 자축하는 행사를 열고 음식을 먹입니다. 그리고 며칠 휴식 기간을 가진 뒤 다시 40일간의 단식 공연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전처럼 단식에 열광하지 않습니다. 자극적인 볼거리 앞으로 사람들이 점점 떠나갑니다. 그래도 광대는 예전대로 단식을 계속했고, 별 어려움 없이 단식에 성공했지만, 누구도 단식 일수를 함께 세지 않았어요. 결국 단식 광대는 굶어 죽고 맙니다.
 
  그러자 서커스 단장은 광대가 지내던 우리에 젊은 표범 한 마리를 집어넣어요. 오랫동안 적막했던 우리에서 맹수가 날뛰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환호하지요.”
 
 
  ‘먹는다’와 밥의 의미
 

  왜 사람들은 단식 광대를 떠나갔을까? 세속적이고 자극적인 것에 빠져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선생의 답이다.
 
  “사람들은 광대가 단식하는 이유에 점점 흥미를 잃었고 단식 자체를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 외면 속에서 단식 광대는 고립돼 스스로 굶어 죽었죠. 어쩌면 소설 〈단식 광대〉는 오늘날의 영적인 패배, 금욕적 이상의 소멸을 상징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선생은 ‘먹는다’의 깊은 행간, 콘비비알리티, 성찬식을 지나 ‘밥’ 이야기로 나아갔다.
 
  “원래 빵은 덩어리라 사람의 마음을 담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밥은 퍼주는 거잖아요. 밥을 퍼주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어요. 따뜻한 밥, 고봉으로 퍼주는 밥을 떠올려봐요. ‘찬밥 신세’라는 말도 있잖아요. 밥의 온도와 퍼주는 그 모양에서 음식을 주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요.
 
  밥은 그때그때 먹을 사람을 위해 지어야 합니다. 먹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밥을 안칠 수 있나요? 어머니의 온기이며 기다림이 밥입니다.
 
  뜸을 들여야 비로소 먹을 수 있는 밥은 아무 때나 잘라 먹을 수 있는 싸늘한 빵이 아닙니다. 요즘에는 ‘햇반’이란 상품도 나왔지만, 밥은 본질적으로 반(反)인스턴트 식품이지요.”
 
 
  고봉문화, 우주적 메시지
 


  선생은 “우리 조상들이 고봉문화, 나눔의 문화, 융합의 문화를 음식 속에 담아 우리에게 물려주었다”고 말했다.
 
  “밥 한 그릇에 담긴 한국인의 마음이 21세기의 식문화를 만드는 자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왠지 아세요? 우리는 음식에 화합과 함께 살아가는 우주적 메시지를 담았죠. 이게 탕평채(蕩平菜)라는 거예요. 조선 정조 때 사색(四色) 당쟁을 없애고 고루고루 인재를 등원했던 탕평책에서 따온 말인데 검은색(북인-석이나 김 가루), 푸른색(동인-미나리), 붉은색(남인-고기), 흰색(서인-청포)의 사색이 다 있어요. 먹으면서 당쟁을 넘어서는 조화로움을 꿈꾸었어요.
 
  사실은 이미 정조 때만이 아니라 한국 음식 자체가 오방색, 우주의 색을 담고 있어요. 김치를 보세요. 김치에도 오색(청·황·적·백·흑), 오미(신맛·쓴맛·짠맛·매운맛·단맛)가 들어 있어요. 신선로, 비빔밥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생의 이야기는 한층 무르익었다.
 
  “이제 본격적인 한국 음식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사람들은 음식을 요리의 결과인 명사로만 생각하지만 저는 요리하는 과정인 동사를 유심히 살폈어요. 예컨대 우리 민족은 나물을 많이 먹는 민족이기에 ‘무치다’ ‘데치다’ ‘비비다’ ‘캐다’ ‘뜯다’ 등과 같은 낱말이 많아요. 외국에선 그런 말이 없잖아요.”
 
  선생은 “음식이라는 결과에는 요리라는 과정이 따른다”며 “과정 없는 결과가 없듯 각 나라의 고유한 음식은 고유한 요리 방법에 의해 탄생한다”고 했다. “서양 음식이 굽고 볶고 튀기는 게 기본이라면, 한국 음식은 대개 삭히고 끓이고 무치고 섞는 방법으로 요리한다”고 강조하며 “한국적 맛의 비밀 또한 한국인의 이 고유한 요리 방식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선생은 기자에게 최근 간행된 《K FOOD: 한식의 비밀》(디자인하우스 刊)을 건넸다. 이 책에 실린 선생의 말을 일부 요약해 소개한다. -선생의 당부이기도 하다- 한국인의 맛에 대한 깊은 통찰을 느낄 수 있었다.
 
 
  밍밍하고 슴슴한 無味의 맛
 


  ①한식의 첫 번째 비밀 : 밍밍하다 무미(無味)가 만드는 순환과 역설의 문화=한식의 맛은 짜고 달고 시고 맵고 쓴 오미가 끝이 아니다. 밍밍하고 슴슴한 무미의 맛이 존재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밥맛이다. 밥은 맛이 아주 싱거워서 무(無)이며, 텅 빈 공허다. 그래서 빵처럼 밥 하나만 먹을 수가 없다. 그러나 짜고 매운 여러 반찬과 어울리면 밥은 새로운 맛을 띠게 된다.
 
  밥은 국물 음식, 마른 음식, 매운 것과 짠 것, 딱딱한 것과 약한 것 등 온갖 반찬의 맛을 차별화하면서 동시에 융합한다. 말하자면 밥을 먹는 것은 입을 씻어 맛을 지우는 지우개 같은 역할을 한다.
 
  매운 음식을 먹었어도 일단 밥이 들어가면 입안에는 언제든지 새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백지(白紙)가 마련되고, 그 백지 속에서 모든 음식이 제맛과 제 표정을 갖게 된다. 그리고 밥은 동시에 그 맛을 합산한다. 반찬은 밥의 텅 빈 맛 덕분에, 그리고 밥은 반찬의 맵고 짠 맛 덕분에 싱싱하게 살아난다. 한국의 음식은 이 관계의 틈새에서 존재한다.
 
 
  포용하고 통합하는 맛의 문화
 


  ②두 번째 비밀 : 싸다 비비다 - 입안에서 완성되는 융합 문화=서양의 음식문화는 분리가 핵심이다. 그들은 고기에는 고기만, 채소에는 채소만 먹는다. 절대 섞어 먹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 음식은 먹는 사람의 입안에서 하나의 음식으로 완성된다. 매끼 밥과 국, 채소, 고기, 생선, 심지어 후식으로 먹는 떡과 식혜까지 동시에 한상 위에 차린다. 이들은 홀로 있는 음식도, 독자적인 맛을 지닌 음식도 아니다. 김치든 국물이든 나물이든 반드시 밥과 함께 먹기 때문이다. 다른 음식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맛으로서 존재 이유를 갖는다. 그 병렬적 동시 구조의 상차림 앞에서 한국인은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능동적으로 입안에 넣는다. 밥 한 숟갈에 김치 한 조각을 얹어 먹었다가, 갈비 국물에 밥을 비벼 먹는가 하면, 남은 밥을 국에 말아먹기도 한다. 먹는 사람이 음식 맛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음식 문화는 ‘되다’ ‘becoming’의 상태이며, 생성론의 개념이다. 모든 것을 포용하고 통합하는, 즉 ‘포함적(inclusive)’ 문화다.
 
 
  삭힌 맛, 기다리고 용해하고 변화하는 시간의 지속
 


  ③세 번째 비밀 : 담그다 삭히다 - 뭐든 삭혀야 제맛인 발효 문화=어떤 형태의 요리든 맛의 근원적 의미는 날것과 익힌 것, 즉 생식(生食)과 화식(火食)의 대립 항에 의해 구분된다.
 
  그러나 한국의 요리 코드는 화식과 생식의 대립 코드에서 일탈해 그것을 융합하거나 매개하는 제3항의 체계를 만들어낸다. 날것도 익힌 것도 아닌 삭힌 것의 맛, 바로 발효식이다.
 
  김치, 된장·간장·고추장, 젓갈 등 발효 음식은 한국 음식의 기저(基底)에 해당한다.
 
  배추를 날것으로 요리하면 샐러드가 되고, 불에 익히면 수프가 된다. 그러나 그것을 삭히면 김치가 된다. 그 ‘삭힌 맛’은 샐러드 같은 자연의 맛이나 채소 수프 같은 문명의 맛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제3의 새로운 미각이다. 자연과 문명의 대립을 뛰어넘는 ‘통합(integral)’의 맛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대표적 발효 음식인 장(醬. 된장·간장·고추장)은 기다리고 용해하고 변화하는 시간의 지속 속에서 이루어진다. 콩을 삶아 메주를 만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말려 간장과 된장을 담그기까지, 그리고 독에 담아둔 간장과 된장이 발효돼 제맛이 들기까지, 대개 수개월 혹은 수년의 시간이 걸린다.
 
  한국 대표 음식 중 하나인 김치야말로 삭힌 맛의 전형이다. 특히 김장 김치는 겨우내 쉽게 무르거나 상하는 일 없이 시원한 맛과 아삭한 식감을 유지할 수 있도록 땅을 깊이 파고 그 안에 독을 묻어 보관한다. 그런 의미에서 장과 김치로 대변되는 한국 음식 문화의 가장 중요한 재료는 콩이나 배추, 무가 아니라 시간일지도 모른다.
 
 
  채집 시대의 전설이 숨 쉬다
 


삼색 나물. 무치는 나물 요리 외에 나물죽, 나물국, 나물찜, 숙채, 생채, 강회, 나물장아찌까지 조리법이 다양하다. 


  ④네 번째 비밀 : 캐다 따다 뜯다 - 나물 민족의 식생활, 채집 문화=옛날 한국의 여인네들이 집 밖을 나설 때 바구니를 낀 채 봄에는 나물을 캐고, 여름에는 뽕잎을 따고, 가을에는 빈 밭에서 이삭을 주워 담았다. 캐고, 따고, 줍고…. 그 기능의 메타언어는 ‘채집’이다. 바구니 속에는 인간이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조차 모르던 채집 시대, 혈거민의 전설이 숨 쉬고 있다.
 
  한국어 사전에서 ‘나물’이 들어 있는 한국말을 검색하면 ‘가는갈퀴나물’부터 ‘흰바디나물’에 이르기까지 무려 250가지나 나온다. 달래·냉이·도라지처럼 뿌리를 캐 먹는 나물, 시금치나 취나물처럼 잎을 먹는 나물, 콩나물이나 숙주나물처럼 열매의 싹을 틔워 먹는 나물까지 식물의 잎·열매·줄기·뿌리·껍질·새순 등 거의 모든 부분을 음식으로 만들어 먹는다.
 
  무엇보다 한국인은 이 나물들을 생으로 먹기도 하지만, 살짝 데쳐서 참기름·깨소금 등 갖은양념을 넣어 무쳐 먹기도 한다. 나물은 덩이와 입자형의 음식물과는 달라 금세 다른 것과 뒤엉겨 결합될 수 있다. 그래서 나물의 요리법은 무치는 것이고, 나물의 맛은 맵고 달고 시고 짜고 쓴 오미가 된다. 무치는 것 외에도 나물죽, 나물국, 나물찜, 숙채, 생채, 강회, 나물장아찌까지 한국인의 나물 조리법은 매우 다양하다.
 
 
  찌고 고고 끓이는 게 한국의 물맛
 


한식에서 국물은 수단이자 목적이다.  


  ⑤ 다섯 번째 비밀 : 끓이다 삶다 찌다 - 국물 맛이 일품, 습식 문화=국물은 한국의 맛을 해독하는 중요한 코드 중 하나다. 서양의 요리 코드가 ‘고체-액체’ ‘건식-습식’의 대립 항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한국의 요리 코드는 이 대립의 경계를 없애고 음식의 건더기(고체)와 국물(액체)을 함께 먹는 혼합 체계로 이뤄져 있다.
 
  서양 요리에선 (수프처럼 정식으로 국물 요리를 만들 때를 제외하면) 조리 시 생기는 국물은 음식을 익히는 수단으로, 일종의 노이즈(noise)로 생각해 없애버린다. 반면 한식에서 국물은 수단이자 목적이다. 면을 끓이기 위해 부은 물도 버리지 않고 국수와 함께 요리 속으로 끌어들인다. 칼국수나 라면 그리고 한식화한 국물 스파게티 등이 좋은 예다. 김치는 어떠한가. 김치의 발효 과정에서 생기는 국물을 버리는 법 없이 함께 먹는다.
 
  한국의 음식 문화는 ‘물’이 핵심이다. 이에 비해 서양은 ‘불’이 더 중요하다. 한국에선 물을 이용해 시루에 떡을 찌지만, 서양에선 물 없이 오븐에서 빵을 굽는다. 물맛과 불맛, ‘시루’와 ‘오븐’, ‘떡’과 ‘빵’, ‘찌다’와 ‘굽다’가 대립 항을 이루는 것이다. 찌고 고고 끓이는 게 한국의 물맛이라면, 굽고 볶고 기름에 튀기는 것이 서양의 불맛이다.〉
 
 
  “진화하고 발전하는 현재진행형의 맛”
 


  선생은 《K FOOD: 한식의 비밀》에 나오는 한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한국의 식문화가 기다림을 통해 완성됩니다. 그렇게 삭히고 끓이고 무치고 섞어서 완성한 한식은 발효 문화와 국물 문화, 나물 문화와 융합 문화를 대변하죠. 그리고 이 모두는 순환과 역설의 원리를 품은 채 조화롭게 어우러집니다. ‘배제’하지 않고 ‘포함’하며, 서로가 서로를 포용하고 화합합니다.
 
  한식은 결코 과거의 기억이나 전통의 맛만을 고수하지 않는다. 현재의 맛과 이국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진화하고 발전한다.
 
  “이탈리아의 대표 음식인 파스타에 국물을 더해 국물 파스타를 만들고, 패스트푸드의 대명사인 햄버거에 밥과 불고기 등 한국의 대표 음식을 결합해 새로운 맛을 창조해냅니다. 또한 서양의 맥주와 한국의 치킨을 결합한 ‘치맥’ 문화로 많은 해외의 젊은이를 한국으로 불러들이죠.
 
  이처럼 한식의 경쟁력은 이미 완성돼 끝난 맛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화하고 발전하는 현재진행형의 맛 속에 숨어 있습니다. Being(존재)이 아니라 Becoming(생성)의 미학(美學), 융합의 미학(味學)이야말로 K-푸드로 세계에서 각광받고 있는 한식의 특성이라 할 수 있어요.”⊙

 

 

5. 眞善美와 가위바위보

 

“眞善美를 합치고, 뛰어넘어 포용의 시대로…”

⊙ “속담 ‘참꽃에 볼때기 덴 년’… 김소월 시인, 저리 가”
⊙ 어질 인(仁)은 ‘두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둘 사이’라는 뜻
⊙ 동양이 가위바위보를 할 때 서양은 ‘앞면이냐 뒷면이냐’의 동전 던지기 승부
⊙ 서구식 二項대립의 사고에서 가위바위보의 三項순환으로
⊙ 眞善美… 인지론·행위론·판단론 vs 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판단이성비판
⊙ “AI윤리학을 하는 사람, 진선미 제대로 아는 사람 필요한 시대”


  “김 기자! 참기름을 영어로 뭐라는 줄 알아? 내추럴 오일(Natural Oil)이라고 불러요. 우리에게 ‘참’은 진(眞)인데, 번역하면 내추럴이야.”
 
  새해를 맞아 지난 1월 7・18일, 2월 4일 이어령(李御寧)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를 찾았다.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 주변의 하늘빛이 ‘자선 주일’의 어느 하루처럼 포근하였다. 선생은 진선미(眞善美) 이야기를 꺼내면서 참기름을 화두로 던졌다.
 
  “참기름은 참깨를 짠 기름이고 진유(眞油)라고 하지. ‘참’은 ‘진짜’나 ‘진실하고 올바른’의 뜻이 있고, 동식물 이름 앞에 붙어 기본적인 품종을 나타내는 말로 쓰여요. 참가자미, 참깨가 그렇지.
 
  또 참꽃은 진달래라고 합니다. ‘들에 피는 달래보다 더 좋은 꽃’이 ‘진달래’입니다. 진에 대립하는 말이 ‘개’인데 ‘개꽃’이라고 하잖아. 접두사 ‘개’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참된 것이나 좋은 것이 아닌’ 혹은 ‘함부로 된 것’이라는 뜻이야. 개꽃은 먹지 못하는 철쭉을 뜻해요. 반면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진달래는 참꽃이지.
 
  봄바람이 들어 들뜬 아가씨를 뭐라고 하는 줄 알아?
 
  ‘참꽃에 볼때기 덴 년’이라는 속담이 있어요. 진달래가 뻘겋잖아? 만산홍(滿山紅)의 진달래로 두 볼에 화상을 입었다고 하니 얼마나 감각적이야? ‘볼 덴 년’이라니. 김소월 시인, 저리 가라야. 대단한 거야.”
 
  그러더니 이내 이야기 흐름이 선(善)으로 이어졌다.
 
  “선은 착하다, 어질다는 뜻인데 어질다를 쓰는 나라가 세계 어디에 있어? 있으면 가져와 봐. 나한테 가지고 와 보라고. 중국에서도 어질 인(仁)은 사람 인(人)과 같은 뜻이야. 일본에서도 어질 인은 번역이 불가능해. 우리만 해석할 수 있다고.”
 
 
  善과 仁에 대하여
 

이어령 선생은 인문학에서 3가지 사이(間)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인간(人間), 시간(時間) 공간(空間)을 뜻한다.

 

  선생은 선과 어질 인을 동일선상에 놓고 이야기를 풀어갔다.
 
  “어린 시절 자주 들었던 ‘사이좋게 놀아라’의 ‘사이’가 바로 어질 인입니다. 그런데 어질 인이 뭔지 우린 잘 몰라요. 사전 찾아보면 우습게 써놨어요. 슬기롭고, 너그럽고, 덕행이 높고…. 어질 인 찾아보면 전부 ‘어질다’ 나오고, ‘어질다’ 찾아보면 전부 인(仁)이에요.
 
  공자님도 그랬어요. 다른 건 다 정의 내렸으면서 어질 인자만은 이게 무엇이라고 딱 말씀하지 않으신 거죠. 백 가지, 천 가지 해석이 다 나오는 겁니다. 그럼, 공자님은 왜 어질 인자를 풀이하지 않았을까요?
 
  정의했다간 큰일 납니다. 왜? 인은 곧 ‘사이’인데, 사이의 경우가 얼마나 많겠어요? 수천, 수만 가지가 넘어요.
 
  그런데 이 ‘사이’가 중요해요. 사이에 낀 것이 잘못되면 큰일 나요. 인간(人間), 시간(時間), 공간(空間), 다 사이 간(間)자가 들어가 있죠? 즉 사이가 문제라는 겁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없으면 관계는 끝나는 거고, 자연과 인간 사이가 없으면 공해를 비롯해 각종 기상이변이 생기는 거예요.”
 
  어질 인에서 사이 간으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사랑 애(愛)를 자세히 봐요. 사람 뒤통수를 형상화한 거야. 애매하다는 뜻의 희미할 ‘애(曖)’도 거기서 나왔어요. 상대방이 사라질 때 느끼는 것이 사랑이라는 거야. 떠난 다음에야 비로소 ‘아, 내가 그 사람을 정말 사랑했구나’ 하는 거야. 사랑은 주는 것도 아니고 받는 것도 아니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터페이스(Interface·서로 다른 두 시스템이나 소프트웨어를 이어주는 접속장치)가 막 생기거나 없어질 때 아니면 못 느끼는 거야.”
 
 
  사이와 인터페이스
 
 
  ━ 떠난 다음에 느끼는 게 사랑이라고요?
 
  “그렇지. 사랑이 도대체 어디 있어요? 나한테 있는 건가, 너한테 있는 건가? 사랑이 주는 거냐, 받는 거냐 하면서 인류의 고민이 시작됐어요.
 
  사랑이 마치 물건과 같은 것이어서 교환과 증여가 가능하다고 생각했을지 몰라.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물건 같은 것이면 짝사랑을 해도 즐거워야 해요. 나한테 사랑이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실제로 그런가요? 아니잖아. 사랑은 둘 ‘사이’에 있는 거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터페이스’에 있다는 이야기야.”
 
  선생의 인터페이스론(論)에선, 오랜 사색이 만든 아날로그적 힘이 느껴졌다.
 
  “어질 인(仁)은, 사람 인(人)에다가 두 이(二)자를 씁니다. 두 이(二)라는 건 ‘두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둘 사이’라는 뜻이지요. 사람 사이를 말하는 겁니다.
 
  제일 중요한 게 인터페이스입니다. 아날로그의 입자와 디지털의 파동을 연결해주는 인터페이스! 앞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사람은 그 ‘사이’를 고민하는 자여야 해요. 머리(디지털)와 가슴(아날로그)을 연결하는 목. 우리는 생명을 ‘목숨’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목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길목, 손목, 나들목…. 어른들이 ‘사이좋게 놀아라’ 하듯이 현실과 가상, 로봇과 인간의 인터페이스를 ‘사이좋게’ 만드는 게 관건이죠.”
 
  또 이런 말도 했다.
 
  “산업사회는 독립된 ‘원자’를 끝까지 추적하는 것이었다면, 정보사회는 항상 ‘나’와 ‘너’ 사이의 관계를 전제로 해요.
 
  사실, 서양은 ‘개인’으로 살아왔지만 우리는 ‘사이’로 살아왔습니다. 서양의 비극은 어디에서 왔느냐? 서양은 밤낮 이항대립을 한 겁니다. ‘나에게 아내 혹은 남편이 있어도 둘이서 사는 건 아니다. 나는 반드시 개인으로, 아톰[原子]으로 있어야겠어!’라고 생각한 겁니다. 즉 인디바이드(Individ),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개체, 개인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아니에요. 혼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뭐도 짝이 있어야 한다’고 해요? 짚신짝도 짝이 있다고 하잖아요. 처음부터 짚신은 하나만 있을 수 없어요. 2개여야지만 돼. 눈이 두 개인 것처럼 말이죠.”
 
  선생은 이번 대화의 작은 결론이라도 지으려는 듯 이런 말을 빠르게 쏟아냈다.
 
  “무엇보다 진과 선, 미를 모두 합치고, 뛰어넘으며, 디지로그(디지털+아날로그)처럼 입자와 파동까지 포용하는 소위 전자의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전자는 입자하고 파장하고 떨어져 있지 않고 포개어져 있거든.”
 
 
  서구식 二項대립의 사고
 

  선생의 의식 흐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는 배제식 이항대립의 서양식 사고가 아니라 삼항순환의 ‘이것도 저것도’의 포함적 사고로 가야 한다”며 ‘가위바위보’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생의 말을 종합하면, 한국 아이들은 가위바위보, 중국 아이들은 차이차이차이(猜猜猜), 일본 아이들은 장켄폰이라고 외친다. 그러나 동북아의 가위바위보 사전에 문명의 충돌이란 말은 없다. 가위바위보를 부르는 방법에 있어 일본·중국은 바위-가위-보의 순서인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가위-바위-보라고 한다. 중국·일본이 순서대로 바위-가위-보를 내고, 한국이 가위-바위-보를 내면 승부가 나지 않고 계속 회전, 순환한다. “어느 한쪽이 이겼다고 우월감을 갖거나 졌다고 열등감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위바위보는 확률적으로도 우연성을 바탕으로 한 겨루기여서 절대 승자는 없다. 승부가 거의 균등하다.
 
  “누구도 피라미드의 정점에 오르지 못하고, 동시에 누구도 맨 밑에 깔리지 않습니다. 경쟁은 있으나 절대 승자도 절대 패자도 없죠. 상대적인 대전(對戰)에 따라 A는 B를 이기고, B는 C를 이기고, C는 A를 이기는 끝없는 승패의 순환입니다.
 
  가위바위보는 ‘패권’이 아닙니다. ‘바위’와 ‘보’만 있다면 승자와 패자밖에 없습니다. ‘바위’는 ‘보’에 먹혀 끝나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그 중간에 절반은 열리고 절반은 닫혀 있는 ‘가위’가 출현하면 바위에게도 보에게도 ‘패권’은 생기지 않습니다. 금, 은, 동의 올림픽 형태가 아니라 삼자견제의 역학으로 둥글게 회전합니다.
 
  그러나 동양이 가위바위보를 할 때 서양은 동전 던지기로 운명을 가릅니다. ‘앞면이냐 뒷면이냐’의 승부죠. 한 방향으로 이어진 서양식 일직선의 사고입니다.
 
  가위바위보의 동양은 니체의 ‘영원회귀’와 인도의 ‘윤회(輪廻)’처럼 순환한다는 말이었다.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가위바위보와 三項순환
 

  다시 선생의 말이다.
 
  “삼항순환을 이야기하자면 피시스(Physis), 노모스(Nomos), 세미오시스(Semiosis)를 이야기 안 할 수 없네요. 각각을 자연계, 법칙계, 기호계라고 설명할 수 있는데 세계 어디든 물은 0도에서 얼고 100도에서 끓는다는 것이 피시스입니다.
 
  그러나 법률이나 제도의 노모스는 국가와 시대에 따라 다르고 바뀝니다. 중간에 있는 세미오시스는 언어와 같이 하룻밤 사이에 바뀌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영구불변의 자연법칙도 아닙니다. 세미오시스는 상상력의 세계, 예술의 세계를 뜻해요.
 
  피시스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은 대륙, 일본은 섬, 한국은 반도의 나라입니다. 대륙(중국)은 개체를 초월하는 생명력을 갖고 세계를 감싸 안는다는 점에서 가위바위보의 ‘보’에 가깝죠.
 
  일본은 무사가 지배하는 나라여서 주먹은 힘을 상징합니다. ‘바위’와 비교할 수 있어요. 대륙과 비교해 여유보다는 긴장, 확대보다는 축소 지향인 것이죠.
 
  한반도의 ‘가위’가 있어야 비로소 다이내믹한 순환운동이 일어납니다. 바위도 섬도 아닌, 또는 대륙이기도 하고 바다의 섬이기도 한 독특한 다양성과 통합성이 반도 문화를 이루었다고 봐요.
 
  선생의 한반도 가위론(論)을 정리하면 이렇다.
 
  가위가 정상적으로 움직이면 동아시아는 선형적인 이항대립의 시스템에서 벗어나 원형적인 순환과 생성의 시스템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비유로 이야기하자면, 대립하는 물과 불 사이에 가마솥이 있으면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다. 한국이 가마솥 역할을 수행하던 시기에는 동아시아에 평화가 찾아오고 아름다운 문화의 꽃이 피어났다. 가위가 제 역할을 못 하면 동북아는 불행했다.
 
  분단된 한국은 어떤 모습일까? 선생에 따르면 북한은 중국의 대륙문화의 연장선상에 있어 대륙의 나라로 변했고, 남한은 인공적인 섬나라가 되어 해양문화의 영역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분단은 한민족만의 비극이 아니라 동북아시아 전체의 비극이기도 합니다.”
 
  문득 선생이 예전에 쓴 시가 생각나 옮겨 적어 본다.
 
  우리는 모두가
  사이에서 태어나
  사이에서 살다가
  사이에서 죽는다
 
  하늘과 땅 사이
  육지와 바다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얘들아 사이좋게 놀아라.
  어머니가 늘 하시던 말씀
  그런데도
  문자 메시지의 그 많은 이모티콘
  가운데 어질 인(仁)자가 없었다.
 
  언젠가 남과 북 사이도
  거짓말처럼 좋아지는 때가 오겠지
  오늘 내가 너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 사랑하는 사이가 되듯이
 
  -이어령의 ‘사이’
 
 
  진선미와 칸트의 3가지 비판
 

 

  다시 이야기는 처음으로, 진선미로 귀환했다.
 
  “진선미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고요. 진(眞)의 세계에 들어가면 인간은 착한가, 착하지 않은가 하는 선악(善惡)과 다른 차원으로 진짜, 가짜로 갈라집니다. 참이냐 거짓이냐의 물음은 인지론이고, 선악의 물음은 행위론이죠. 선악은 행위를 통해서만 드러나거든.
 
  그런데 미(美)의 영역은 또 달라요. 아름다움은 윤리와 관계없고 진리 추구와도 상관없어요. 미추 개념은 참을 다루는 진도, 행위를 다루는 선도 아니고 오감에 따라 각자가 판단하는 표현의 영역입니다.”
 
  선생은 “생각을 다루는 인지론, 실천을 다루는 행위론, 표현을 다루는 판단론을 구분할 줄 알아야 인간으로서 풍부하게 누리고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칸트 이야기를 꺼냈다.
 
  “진선미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이성비판과도 다 연결된다고….
 
  예컨대 순수이성으로 보면 자연계에 신은 존재하지 않아요. 일상에서 신의 존재 유무를 어떻게 확인하나요? 존재의 유무를 따지는 인지론으로 보면 (신은) 없는 거지요. 순수이성이지.
 
  그런데 살다 보면 신이 필요해요. 있어야 해요. 그래야 질서가 잡히고 선악의 기준도 생기잖아요. 그러면 행위론이 되는 거야. 실천이성이지.
 
  칸트가 어느 날 산책을 하는데 뒤에서 쫓아오던 종이 울면서 말해요. ‘주인님, 하나님을 여태 믿고 살았는데, 없다시니 너무 슬퍼요’ ‘그래? 그럼 있다고 해줄게’ 하고 쓴 게 《실천이성비판》이에요. 존재하지 않지만, 인간이 사랑한다면 신이 필요하다는 거지요.”
 
  선생은 판단이성을 설명하기 위해 시인의 존재를 끌어냈다.
 
  “산업 중심의 물질사회에서 시인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을지 몰라. 직접 빵을 만드는 존재가 아니거든. 그러나 이 세상은 시인의 따스한 손길이 필요해요. 명징하고 때로 오금이 저려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문장이, 시어가 필요하다고. 그게 표현론, 판단이성이지요. 판단이성은 ‘제 눈에 안경’으로 누군가를 보고 반하는 것, 저마다의 미적 판단이거든….”
 
  ━ 진선미에 대한 동서양의 기준이 다를까요?
 
  “서양은 진선미, 의식주를 서로 다른 기준으로 말하지만 동양은 진이 선이고, 선이 미이고, 미가 선인 듯 두루뭉술해요. 심지어 (미스코리아 선발하듯) 진선미로 등수를 가려요.”
 
  선생은 “세상이 의식주의 시대에서 진선미의 시대로, 의식주를 추구하는 삶에서 진선미를 추구하는 삶으로 바뀌고 있다”며 이렇게 강조했다.
 
  “과거 산업주의는 의식주 해결을 위한 것이었어요. 먹고살기 위해 일하고, 의식주를 위해 허리띠를 졸라맸던 겁니다. 반면 진선미의 추구는 전혀 다른 가치관과 인생관이 필요해요. 진짜 인간이 되는 것이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삶인지 따지는 ‘진’의 직업, 어떤 행동이 착한 것인지 규명하는 ‘선’의 직업과 생각, 무엇이 아름다움인지 생각하는 ‘미’의 직업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선생은 ‘노동’하고 ‘작업’하는 삶에서 ‘활동(봉사)’하는 삶으로의 전환을 이야기했다.
 
  “딥러닝하는 AI가 시험을 대신 치고, AI가 시도 쓰고 소설도 쓰는 시대에 옛날 방식의 암기식 노작(勞作)교육이 무슨 소용이 될까요?”
 
 
  AI시대의 眞善美
 

  초대 문화부 장관(1989년 12월~91년 12월 재임) 시절, ‘진선미를 추구하는 인간’을 양성하기 위해 대통령과 관료들을 설득해 한국예술종합학교를 만든 것도 선생이다.
 
  “제가 늘 하는 말인데, ‘먹고 노는 사회가 아니라, 놀고먹는 사회’를 만들어야 해요. 희랍시대 시민들이 진선미를 논할 수 있었던 것은 의식주를 대신 해결해주던 노예와 아내와 자식이 있어서 가능했어요. 이들 덕에 지식인 시민들은 의식주의 ‘노동’에서 벗어나 진선미를 탐구할 수 있었지. 그래서 철학은 희랍시대 딱 한 번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AI가 나왔어. 우리가 먹고살기 위한 일을 AI가 해주면 모든 사람이 진선미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선생은 AI시대에 새로운 윤리학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자율주행차의 AI라면 출발 전 스캔을 해서 차량에 인화물질이나 폭탄이 있는지 확인부터 하지 않겠어요? 만약 지나가는 어린아이를 피하기 위해 차량이 굴러서 폭발할 수도 있지만 아이를 치는 선에서 사고를 막을 수도 있어요.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하는 정의, 윤리 개념이 다 뒤죽박죽 되는 골치 아픈 상황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어요.
 
  머잖아 AI시대에 맞는 윤리가 필요하고 AI를 만들고 운영하는 기업윤리도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 미국 기업들도 윤리학 전공자를 뽑고 있다고 해요. 이제 AI 윤리학을 하는 사람, 진선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필요한 시대가 도래합니다.”
 
 
“미국 기업들도 윤리학 전공자 뽑아”
 


  끝으로 선생은 “AI가 직면할, 아시모프의 3원칙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을 고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이작 아시모프(Issac Asimov)가 자신의 소설 《런어라운드(Runaround)》에서 언급한 로봇공학(Robotics) 3원칙은 이렇다.
 
  ▲1원칙: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인간을 모른 척해서도 안 된다. ▲2원칙: 1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 명령을 따라야 한다. ▲3원칙: 1과 2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자신을 지켜야 한다.⊙

 

 

 

6.  천지인(天地人)과 하늘

 


한국은 하늘과 땅, 인간의 힘이 어우러지는 三太極의 나라
 
⊙ “한국인은 사물 속에 숨겨져 있는 본성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 본성은 하늘이 주는 것이라 여겨”
⊙ “하늘과 땅, 사람의 힘과 노력 모두가 어울렸을 때만 곡식 한 톨을 먹을 수 있어”
⊙ “ 우리가 배운 것은 국가주의, 민족주의밖에 없어. 그걸로 이 글로벌한 세상에 어떻게 살겠어?”
⊙ “凡人의 가족주의에서 荊人의 국가주의, 공자의 인간주의, 노자의 무위자연 중 우리는 어디까지 와 있을까”

 
이어령 선생이 타계한 지 2개월이 되어간다. 선생은 생전(生前) 시리즈 ‘한국인 이야기’의 문패에다 ‘끝나지 않은’이란 수식어를 직접 붙였다.


생전 선생은 당신이 남긴 굵직한 저작물과 수많은 강연에서 언급한 ‘한국인 이야기’를 비록 당신이 떠나도 계속 이어가기를 희망하였고 관련 원고와 저서의 일부를 《월간조선》에 전하였다.


또 선생이 남긴 바탕 위에 편집자의 생각을 보태도 된다고 허락하였다.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감히 편집자의 생각을 덧붙일 수는 없었고, 아주 조심스럽게 선생이 남긴 큰 발자국을 따라 연재를 이어가고자 한다. 선생에게 누(累)가 되지 않기를 소망할 뿐이다. 첫걸음을 배우는 아이의 흥분과 떨림으로 연재를 재개한다.

지난 3월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외벽 전광판에 소개된 고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의 글귀. ‘여러분과 함께 별을 보면 즐거웠어요. 하늘의 별의 위치가 불가사의하게 질서정연하듯, 여러분의 마음의 별인 도덕률도 몸 안에서 그렇다는 걸 잊지 마세요.’


  한국인 이야기의 바탕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물음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은 신성하지도 영원히 살 수도 없습니다. 나약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스스로의 결단과 선택만이 우리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습니다.
 
  한국인을 둘러싼 세상을 똑바로 봐야 합니다. 그래서 천지인(天地人), 그중에서도 우리를 둘러싼 하늘 이야기부터 시작해볼까 합니다. 땅과 사람 이야기도 차례차례 들려드리겠습니다.
 
  옛날의 한국인들은 오늘의 우리보다 훨씬 더 사물로부터 많은 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사물 속에 숨겨져 있는 본성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 본성은 하늘이 주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인간은 그 무수한 사물의 본성을 통해 물질이 아니라 정신의 행복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본성이란 쉽게 말해 적자(赤子)의 마음, 즉 아이의 마음입니다. 그 아이의 마음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을 맹자는 ‘대인(大人)’이라 불렀는데, 대인은 몸뚱이가 크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신적 행복을 느끼고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눈을 들어 밤하늘을 보면 수많은 별이 있습니다. 한국인은 ‘별’ 하면 바로 윤동주(尹東柱·1917~1945년) 시인을 떠올리게 되지요. 지상에서 마주한 얼굴이 하늘로 올라가 하늘의 얼굴, 하늘의 눈동자가 되면 윤동주의 시에 가장 가까운 이야기가 됩니다. ‘서시’를 한번 외워볼까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서시’ 전문
 
  나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여러분이 천지인을 가지고 보면 이 시가 새롭게 느껴질 것입니다.
 
  지금 손을 들어 허공에 선을 하나 그어보세요. 그것이 천(天)입니다. 그 아래에 다시 선을 하나 그으면 지(地)가 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다시 선을 하나 그으면 인(人)이 됩니다. 한자로는 석 삼(三) 자와 같은 형태지요.
 
 
  # 천지인이 뭔가요?
 

  농사를 짓는다고 가정해봅시다. 하늘에서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요. 비는 하늘에서 땅으로 오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무리 비가 충분히 와도 씨앗이 땅에 떨어지지 않으면 식물은 자라지 않아요. 하늘의 힘과 땅의 힘 속에서 식물이 자랍니다. 그런데 이 안에 사람의 힘이 없으면 곡식이 아니라 잡초가 자랍니다.
 
  하늘과 땅, 사람의 힘과 노력 모두가 어울렸을 때만 우리가 곡식 한 톨을 먹을 수 있어요. 아무리 인간이 노력해도 도울 땅이 없으면 곡식이 나지 않고, 인간이 노력하고 땅이 준비되어 있어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자라지 않아요. 그러니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말은 단순히 농업이 중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안 된다’ ‘땅의 힘만으로도 안 된다’ ‘하늘의 힘만으로도 안 된다’, 즉 모든 것, 다시 말해 농업은 물론이고 산업, 금융업 등 무엇을 하든 하늘과 땅, 사람이 합쳐졌을 때만 인간이 살아갈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나는 88서울올림픽과 같은 큰 행사를 기획할 때마다 이 천지인 삼재(三才)사상을 기본으로 했어요.
 
 
  하늘과 땅, 사람의 조화
 
  하늘과 땅, 사람이 합쳐져야 한다는 것을 삼재사상이라 합니다. 앞에서 우리 허공에 하늘과 땅, 그 사이의 사람을 그려 한자 석 삼(三) 자를 만들었지요? 요즘 은행에 가면 억(億)을 넘어 몇조(兆) 이런 단위의 금액이 흔하고, 반대로 내 통장을 보면서 ‘아휴, 요것밖에 없어’라고 한숨이 나오곤 하지만 사실 세상은 석 삼(三) 자만 있으면 됩니다. 삼(三) 자만 있으면 세상을 얻을 수 있어요.
 
  이것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1788~1856년)이 한 말입니다. 그는 “농업을 하기 위해서는 천지인 세 가지의 힘이 있어야 한다”고 했지요. 사실 농경문화란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의 협력에 의해서만 그 결과가 나타나는 법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홍수가 나거나 가뭄이 생기면 게으른 자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지요.
 
  마찬가지로 땅이 척박하면 아무리 부지런히 일을 해도 기름진 땅에서 낮잠을 자는 게으른 농부를 이기기 어렵지요. 천지인 삼재가 합쳐져 이루어지는 농사꾼의 경쟁에는 이렇게 3분의 2가 천과 지의 변수가 작용해요. 그러니 요즘 어느 정도 과학적 영농이 가능하다고 해도 여전히 하늘과 땅의 변수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인간이죠.
 
  천지가 이럴진대 사람 역시 믿을 게 못 됩니다. 예컨대 선비들이 문장을 겨루고 이념을 논하는 것도 마찬가지죠. 글이나 예술은 사람의 주관이나 지식의 차이에 따라 각기 달라지잖아요. 내가 보기에 형편없는 글을 평론가들이 극찬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가 잘 쓴 문장을 어떤 이는 신통찮다고 여기기도 하죠.
 
 
  천지인 속 나의 위치는?
 
 
  판단이라는 글자 자체에도 나타나 있듯이 판(判)이란 칼로 반을 자른다는 뜻입니다. 칼은 붓보다 언제나 분명하죠. 붓으로 싸우는 선비들의 승부는 칼로 싸우는 무사(武士)들보다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천지인 속에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국제 학술대회 같은 곳에서 이런저런 학술적인 발표를 할 때 서양 학문을 아무리 가르쳐봐야 그 사람들이 놀라겠어요? 그런데 삼재사상, 천지인의 조화를 이야기하면 놀라요. 서양은 천지인이 합치는 것이 아니라 싸우는 역사거든요.
 
  하늘이 땅하고 싸우고, 땅이 사람과 서로 치고받고 싸워요. 심지어 희랍 신화의 우라노스 이야기를 보세요. 아버지가 자식을 잡아먹잖아요.
 
  우리에게는 천지인이 합쳐져야 한다는 게 너무 당연한 이야기라 우습게 들려도, 서양 사람들에게는 “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해요. 그들은 지금의 역사가 끊임없이 하늘과 땅이 서로 싸우고, 인간과 자연이 서로 싸워서 이루어낸 결과라고 믿거든요. 지금도 코로나19와 싸우고 있고, 코로나19를 통해 드러난 자연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고 여기고 있어요.
 
  문제는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자연을 정복할 수 없다는 데 있어요. 정복할 수 있다는 착각이 불행을 가져오고 있지요.
 
 
  동양과 서양 세계관의 차이
 
  동양의 사고는 서양과 달랐어요.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것을 올바른 삶이라고 여겼어요. 임금 왕(王) 자를 보세요. 천지인의 석 삼(三) 자를 수직으로 이으니까 왕(王)이 되었어요. 이것이 동양의 리더, 왕의 본래 의미예요. 아무나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천(天), 하늘의 힘과 지(地), 땅의 힘 거기에 인(人), 인간의 힘까지 아우를 수 있는 사람만이 왕이 되고 리더가 될 수 있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오늘날은 어때요? 땅만 지배해도 되는 줄 알고 땅과 그 땅에 사는 사람들만 지배하고 있거나 또는 인간만 지배해서 표를 많이 얻으면 리더가 되잖아요. 하늘이 돕지 않아도 대부분의 정치인은 인심, 즉 투표자의 마음만 잡으면 대권을 쥘 수 있어요.
 
  임금 왕(王) 자에서 하늘을 의미하는 걸 걷어내면 흙 토(土)만 남아요. 그러니까 흙, 땅과 사람만을 지배해서 리더가 된 자는 진정한 왕이 아니라는 이야기죠. 이제 하늘의 의미까지 알게 되면 여러분은 각자가 왕이 될 수 있습니다.
 
 
  # 세상이, 세계가 뭔가요?
 


  세상의 힘이라는 건 사실 무척 간단합니다. 하늘의 힘, 땅의 힘, 인간의 힘이 어우러지는 삼재사상, 그게 삼태극(三太極) 사상이에요. 하늘과 땅만 있는 것은 태극(太極)이에요. 하늘의 양과 땅의 음이 합쳐진 것이지요. 삼태극은 천지인, 하늘과 땅에 사람이 들어간 거예요. 보세요. 태극기의 태극과 삼태극은 다르지요? 우리는 이 삼태극 사상을 기반에 두고 88서울올림픽의 엠블럼도 만들었어요.
 
  여러분이 서양 학문을 무시하고 배우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서양 학문에 우리 천지인 사상을 결합해 이야기할 수 있을 때, 21세기에 우리가 동과 서를 합쳐서, 서양에서도 리더가 될 수 있고 한국에서도 리더가 될 수 있는 글로벌 리더가 되는 것입니다.
 
  글로벌이라는 걸 우리나라 말로 하면, 세계? 지구촌? 아니요. 천하(天下)입니다. 천하통일 할 때의 그 천하. 옛날에 중국은 중국이 세계의 전부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중국을 통일해놓고 천하통일 했다고 그랬어요. 요즘 보면 미국과 중국이 참 비슷한데, 미국 프로야구에 월드 시리즈(the World Series)가 있는데 이게 또 세계인이 모인 경기가 아니에요. 미국 동부 해안가의 사람들과 서부 해안가의 사람들이 경기하는 걸 놓고 월드 시리즈라고 하는 거죠.
 

  중국 유교 경전 중에 《대학(大學)》이 있어요. 거기에 보면 중국이 천하통일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수신(修身)–몸을 닦고, 제가(齊家)–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치국(治國)–나라를 다스린다니까, 자 여기서 나라까지 왔지요? 그다음이 평천하(平天下), 천하를 평정하는 거죠. 중국 전역을 통일하면 그게 평천하, 중국인들은 중국 대륙이 지구 전체인 줄 알았던 거예요. 미국 사람들도 마찬가지죠. 신천지를 만들어서 그게 월드(세계)인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뉴 월드’, 신세계 교향곡이 있잖아요.
 
  한국 사람들만은 오래 외침을 당했기에 한국이 천하가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그러니까 진짜 천하의 존재를 한국인만이 안 거예요. 중국 사람들은 천하를 몰라요. 중국 대륙을 다 제패하고 나서 이게 천하인 줄 알았는데 글로벌리즘이 생기니 중국도 아주 작은 한 나라에 불과한 겁니다. 특히 인공위성을 띄워놓고 하늘에서 보면 말이죠.
 
 
  # 눈을 감고 생각해봐요.
 
  그러니 제가 여러분을 데리고 하늘로 가려고 하는 게 대단한 이야기이지요. 중국이 대국(大國)이라고, 미국에서 월드 시리즈 한다고 주눅 들지 마세요.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나라 간의 경계선도 없고 높고 낮은 것도 없어요. 아무리 큰 빌딩도, 아무리 큰 나라도 위에서 보면 ‘반짝반짝 작은 별’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집의 울타리, 마을의 경계와 행정구역, 나라의 국경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다보세요. 그러면 지구가 보일 겁니다. 더 내려오면 동양과 서양을 구별 짓는 반구(半球)가 보일 거예요. 또 내려오면 아시아가 보이고 거기서 더 내려오면 중국, 한국, 일본이 보입니다. 우리가 매일 보는 기상도를 떠올려보세요. 거기서 더 내려오면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 나는 서울이 보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발 딛고 선 곳이 보일 테지요?
 
  더 내려오면 무슨 구(區), 무슨 동(洞). 자기가 사는 동네가 보여요. 그리고 거기서 더 내려오면 내가 사는 집, 우리 식구, 그중 누군가의 얼굴이 보여요. 거기서 더 가면 그 누군가의 눈동자가 있어요. 저 우주로부터 계속 내려가서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곳은 우리의 눈동자입니다. 거꾸로 눈동자로부터 번져 가면 저 하늘 은하수까지 가요.
 
  참 기분 좋은 상상 아닙니까? 실제로 여러분이 우주로 가려면 로켓을 타야 하는 데 못 가죠. 그런데 상상력으로는 얼마든지 갈 수 있어요. 지금 여러분은 저와 함께 은하수에 떠 있는 겁니다. 하늘의 은하수에서 지구를 내려다본다… 이것이 시고, 문학이고, 상상력이에요.
 
  시인들이 매일 가난해도 불행하지 않은 것은 없어도 상상력 속에서 별 게 다 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에요. 날개 달고 하늘을 나는 것도 가능하죠. 우리가 시를 배우는 것은 바로 이 상상력을 배우는 것입니다.
 
 
  # 荊人遺弓에 담긴 깊은 뜻을 보세요
 

기원전 239년 중국 진나라의 재상인 여불위가 주도하여 편집한 백과사전인 《여씨춘추(呂氏春秋)》.
  ‘형인(荊人)이 활을 잃고도 활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형나라 사람이 잃은 것을 형나라 사람이 주울 것이니 찾아서 뭣하겠는가. 공자가 그 말을 듣고 형(荊)을 빼는 것이 옳다고 하자 노자가 그 말을 듣고 사람 인(人) 자도 빼는 것이 옳다라고 했다.’
 
  (荊人有遺弓者而不肯索曰荊人遺之荊人得之又何索焉孔子聞之曰去其荊而可矣老聃聞之曰去其人而可矣故老聃則至公矣天地大矣生而弗子成而弗有萬物皆被其澤得其利而莫知其所由始)
 
  -荊人遺弓, 《呂氏春秋》 중에서
 
  이 이야기는 《여씨춘추(呂氏春秋)》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형나라 사람 하나가, 참 인격자인데 이 사람이 사냥을 갔다가 활을 잃어버린 거예요. 그런데 잃어버린 활을 찾지 않고 산에서 그냥 내려오니 사람들이 이렇게 말해요.
 
  “아니, 여보시오. 그 비싼 활을 잃어버렸는데, 왜 그걸 찾아보지도 않고 그냥 내려옵니까.”
 
  그러자 이 사람이 하는 말이 이랬어요.
 
  “형나라 사람이 잃어버린 활을 형나라 사람이 주울 텐데, 그거 내가 안 찾아도 그만입니다.”
 
  보통 사람이 아니죠. 자기가 형나라 사람 전체만큼 커졌어요. 이런 사람은 왕을 시키면 좋아요. 이 사람이 바로 나라를 다 가진 사람입니다. 자신이 그 나라가 된 거예요. 우리는 아주 조그만 습득물을 주워도 신고하는데 이 사람은 “아니야, 그거 너 가져. 잃어버렸고 한국 사람이 주웠는데 내가 잃은 게 뭐가 있어, 내가 한국 사람 되면 되지”라고 말하는 경지잖아요.
 
  그 이야기를 들은 공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이고, 그 사람 소인(小人)이다. 이왕이면 형(荊) 자를 떼고 말하지 그랬냐.”
 
  형인에서 형 자를 떼면 인(人)만 남지요. 사람이 잃은 거, 사람이 얻을 텐데 굳이 내가 찾을 게 뭐가 있냐의 경지로 커집니다. 국가의 경계가 없어지고 사람만 남아요.
 
 
 
“대~ 한민국!”에서 ‘한국’을 뺀다면?
 
 
  우리가 축구 경기만 하더라도 막 “대~ 한민국!”을 외쳐요. 나라 이름을 외치고 나라를 기반으로 한 응원을 하죠. 사실 축구 경기에서 선수가 한 골 넣어봐야 내가 행복해지는 것도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기뻐 날뛰다가 한 골 먹었다고 그냥 땅을 치고 분해하잖아요. 그런데 공자님은 말합니다. 이렇게.
 
  “아이고, ‘한국’을 빼봐라. 사람이 넣고 사람이 잃은 거 박수 칠 일도 분할 일도 없다.”
 
  더 큰 것을 가진 군자는 그런 거 가지고 다투지 않는다는 거죠. 보통의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이지만.
 
  이런 게 휴머니즘입니다. 영화에 보면 많이 나오는 이야기예요. 어떤 간호사가 있습니다. 자기 어머니는 유대인이라 나치에 의해 죽었어요. 그런데 나치 장교 하나가 피를 흘리며 병원에 와요. 이걸 살려야 합니까 죽여야 합니까?
 
  살리려면 ‘나라’라는 개념을 빼야 합니다. 만약 이 간호사가 나치 장교를 살렸다면 이미 이 여자는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올라가 있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 자기 식구, 내 자식이 보여요. 내 자식에서 다시 나의 나라가 보입니다. 그다음에 다시 잘 올라가 봐야 글로벌인데, 다들 글로벌에서 더 큰 곳으로 나가는 것에 실패합니다. 그동안 모든 사람이 글로벌, 세계화, 국제화하면서 TV에서 유행처럼 지구촌을 이야기했지만 도대체 뭐가 글로벌이고 지구는 하나라는 말입니까? 도처에서 국가 간 분쟁이 일어나고 인종 저항을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만 해도 벌써 다문화 가정이 얼마나 많아요. 이주 노동자는 몇만이고요. 한국 땅에서 한민족만 가지고는 못 삽니다. 그런데 아무 준비가 안 되어 있어요. 지구촌이라고 말했지만 가짜라는 거죠. 이렇게 보면 여러분의 가치관이 막 흔들리는 겁니다.
 
 
  글로벌, 세계화, 국제화를 하려면…
 
  보통 나치 장교가 피를 흘리고 죽어가고 있다고 칩시다. 내가 사람을 살려야 하는 의사인데 내 앞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어요. 그런데 그 내가 독일, 프랑스, 영국인이라는 의식이 있으면 그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거꾸로 죽여요. 내 나라의 원수라고 해서 죽이지 않겠어요? 사람이니까.
 
  그러나 공자님의 도덕은 국가주의가 아니라 인간주의입니다. 휴머니즘이에요.
 
  그러니 보세요. 자신과 형인을 동일시한 국가주의라고 하는 것만도 대단한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지요. 일본이 우리를 삼키고 일본인이 한국에 와서 나쁜 짓을 한 것은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한 것입니다. 사람 대 사람이라면, 어떻게 사람이 사람한테 그런 짓을 하겠어요. 국가주의이기 때문에, 내가 국가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한국인을 일본인이, 식민지니까 죽여도 된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지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죽여요.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것은 국가주의, 민족주의밖에 없어요. 그걸로 이 글로벌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겠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의 가치관이 막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라!”고 배웠는데 그걸 공자님이 “떼라, 국가를 없애봐”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거예요. 이건 정말 차원이 다른 이야기죠.
 
  그런데 노자는 그 공자님을 두고도 소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에고 인(人) 자도 지워버리지….”
 
  그러면 뭐가 됩니까? 짐승, 자연, 바람. 천하의 글로벌이 되는 거죠.
 
  지금 우리는 지구에 인간만이 산다고 생각하며 살기 때문에 기후 온난화가 일어나고, 환경 파괴시키는 석유를 캐내며 살고 있는데 거기서 인(人)을 빼면 대자연만이 남아요. 그게 노자의 사상입니다.
 
 
  # 우리는 어디까지 왔나요?
 
  우리나라 사상을 보면 제일 밑에 가족주의가 있어요. 자기 선조를 조상신으로 믿고 제사를 지내면서 우리 선조와 족보를 들먹이며 으스대죠.
 
  그다음에 나라를 믿는 국가주의가 있어요. 그다음이 인간주의. 거기서 더 나아가면 지렁이 울음소리를 듣고 하찮은 돌멩이도 끌어안는 높은 차원에서 사람도 안 보이고, 동네도, 나라도 안 보이는 별 하나가 보입니다. 그 별과 별이 만나는 그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요? 사람인데.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내 새끼를 끌어안는 것이 인간인데, 가족을 희생시켜가며 나라에 내 자식을 바칠 수 있을까요? 드물긴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여태까지 자기 자식을 나라에 바치고서 “나는 인간으로서 가족을 벗어날 수 있는 가치를 가졌다, 국가를 위해 희생했다”라는 자부심을 가지는 겁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공자님이 나타나서 “나라는 좀 빼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또 나라를 빼고 인간으로서 적십자나 ‘국경 없는 의사회’ 같은 조직에 소속되어 내 국가와는 전혀 상관없는 아프리카 오지 같은 곳에 가서 인간을 위해 봉사를 합니다.
 

  이번엔 노자가 와서 “야, 그 사람도 빼라”고 해요. 그게 쉬운 일이 아니죠.
 
  그래서 이제 물어보는 겁니다. 우리는 어디까지 왔을까요? 범인(凡人)의 가족주의에서 형인(荊人)의 국가주의, 공자의 인간주의, 노자의 무위자연 중에서 우리는 어디까지 와 있습니까?
 
  아직까지는 자기 집 문밖 앞까지도 못 나온 것 같아요. 내가 생각하는 것과 여러분이 생각하는 정도가 다를 수 있겠지요? 그래도 아직 갈 길이 멀지요?
 
 
  # 天人相關 사상은 위험해요
 
  여기서 잠깐! 한국인의 강한 천인상관(天人相關) 사상을 한번 살펴볼까 합니다. 천지인이 조화를 이루는 삶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천지에 종속되는 삶을 선택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천인상관 사상은 하늘이 인간을 속속들이 다 들여다보고 잘못이나 나쁜 짓을 하면 가뭄이나 폭풍이나 홍수로 징벌도 한다는 생각을 내포하고 있어요. 반대로 잘못을 속죄하고 빌면 용서도 하는, 하늘이 인간의 양심(良心)과 직결된 존재라고 여기는 식이죠.
 
  조선 전기의 문신 추강 남효온(南孝溫·1454~1492년)의 수필집 《추강냉화(秋江冷話)》에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경기도 이천에서 한 강도가 처형을 당했는데 처형 직전 이 강도는 “나는 어릴 때 절도질을 한 일은 있으나 강도질은 한 일이 없다. 내 말의 허실은 하늘이 반드시 알고 있을 것”이라고 하였지요. 그런데 처형당하자마자 먹구름이 몰려들어 폭우가 쏟아졌고, 이천골 거의가 침수되고 대홍수를 몰고 왔어요.
 
  물론 우연의 일치일 테지만 우리 옛 선비들의 강한 천인상관 사상은 결코 이를 우연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수령은 사직서를 써 역마 편으로 올려보내고 자신은 거센 탁류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고 해요.
 
  우리 옛 선비들은 이처럼 하늘과 나의 양심 사이에 직결된 어떤 매체(媒體)가 있다고 여겼던 겁니다. 이것은 막스 베버가 거론한 기독교 문화권의 초자아(超自我·Super Ego)와 흡사한 가치관이랄 수 있습니다. 곧 이기적(利己的)이고 속물적인 나를 초월한, 즉 하늘이 지켜보는 양심적 자아가 우리 옛 선비들에게는 체질화돼 있었던 셈이지요.
 
  그러나 천인상관 사상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일 수 있어요. 착한 일을 하면 하늘이 복을 내리지만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는 인과응보의 법칙은 늘 성공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 세상에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너무 많아 착하게 살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 않고 착해서 반드시 보상을 받는 것도 아니란 걸 알 수 있지요.
 
 
 
기게스의 반지 이야기
 

  플라톤의 《국가(Republic)》에 유명한 ‘기게스의 반지(The Ring of Gyges)’ 우화가 실려 있습니다.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사는 것이 행복의 필요조건이라는 견해를 물리치는 반론(反論)으로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한때 기게스는 목동이었습니다. 기게스가 양을 치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커다란 지진이 일어났어요. 지진이 일어난 자리에 땅이 갈라져 동굴이 생겼는데 기게스는 동굴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 안에서 금반지를 낀 거인의 시체를 발견합니다. 기게스는 거인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들고 밖으로 나왔어요. 어느 날 우연히 반지의 흠집 난 곳을 안으로 돌리면 투명인간이 되고 밖으로 돌리면 자신의 모습이 다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이제 ‘보이지 않는 힘’을 가진 기게스는 나쁜 마음을 먹게 됩니다. 가축의 상태를 왕에게 보고하는 전령으로서 궁전에 들어간 기게스는 마법의 반지를 이용해 왕비와 간통하고, 왕을 암살합니다. 심지어 왕위를 찬탈하고 왕으로 등극하죠.
 
  기게스는 마법의 반지를 이용해 왕비를 유혹했고 왕을 죽였으니 부도덕하기 이를 데 없어요. 그렇지만 그는 왕위에 오르는 행복을 누립니다. 사람이 나쁜 짓을 하면 벌 받고 불행해야 하는데 기게스의 우화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죠.
 
 
  # 어떤 운명에도 의연한 사람이 되세요
 

  사실 악한 사람이 행복해지는 사례는 현실 속에서 혹은 가공의 소설 속에서 흔하고도 흔합니다. 착하고 겸손하며 도덕률을 철저히 지키는 삶이 행복의 필요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당장 오늘자 신문을 펼쳐보면 알 수 있어요. 세상에는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잘살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으니까요. 나만 왜 이리 사는지, 하늘이 원망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인간이 서로 부도덕함만을 추구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법과 제도가 필요 없고 연민이나 동정, 양심도 필요 없어요. 모든 것이 힘에 의해 좌우되고 인간의 운명은 그날그날의 운수에 결정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 힘도 오래 지속될 수 없어요.
 
  되짚어 생각하면, 바르게 산다는 것이 재물을 충족시키고 권력이나 사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일까요? 높은 자리나 힘센 권력 속에 어떤 자연적 선(善)이나 본성 같은 하늘의 의지가 내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기원후 5세기 로마제국의 정치가이자 희랍과 로마 철학의 최후를 장식한 사상가 보이티우스(Anicius Manlius Severinus Boetius·477~524년)가 사형 선고를 받고 유배지에서 처형될 날을 기다리며 저술한 책이 《철학의 위안(De Consolatione Philosophiae)》(정의채 몬시뇰 譯)입니다. 이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우리는 상습적으로 행인을 살해하던 부시리디스(Busiridis)가 나그네인 헤르쿨레스(Hercules)에게 살해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레굴루스(Regulus)는 포로로 잡은 많은 카르타고 사람들을 쇠사슬로 붙들어 매었지만 얼마 안 가 그 자신이 전쟁에 패하여 자신의 손을 그들의 쇠사슬에 내맡겨야 했다. 그러니 사람이 자기가 행한 것을, 남이 자기에게 응보 하지 못하도록 방지할 수 없다면 그런 권력이 대관절 무엇이 장하단 말인가.
 
  … 수많은 악한이 고관대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현실인즉 그 고관직 자체가 본질적으로 선일 수 없음은 확연하다. 그리고 여러 다른 행복도 이와 마찬가지니 대체로 행복이란 아주 악덕한 사람들에게 더 풍성하게 베풀어지는 법이다.〉(p74~75)
 
 
  세속적 행복에 씐 가짜 이름
 
  보이티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재물과 권력, 높은 지위는 하느님이 창조한 사물의 본성과는 거리가 멀고, 사람들이 그 사물의 본성과는 얼토당토않은 가짜 이름을 붙여 부르곤 하기 때문에 혼란이 생겼다”는 겁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세속적 행복(권력, 재물 등)은 다 진정한 행복이라고 불릴 수 없어요. 그러므로 행복이란 그 자체 안에 바랄 만한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런 선도 없음을 알 수 있어요.
 
  흔히 한국인은 철학과 사상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천인상관 사상이 강하면 강할수록 인간은, 인간의 철학은 숨 쉴 수 없어요. 철학은 현실의 공포나 희망에서 자유로워진 인간을 다루는 분야입니다. 철학적 인간은 어떠한 천재지변이나 폭군의 횡포에도 놀라거나 쉽게 동요하지 않습니다. 주변의 변화에 휘둘리며 그때그때 희망이나 공포를 갖는 사람은 평생 자유롭지 못하고 스스로 압제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보이티우스의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어떠한 운명에도 의연한 사람은
  거만한 운명을 발 밑에 깔고
  행운과 불운을 올바르게 쳐다보며
  그 얼굴 태연하게 보존할 수 있네.
  태풍 휘몰아치는 바다의 광포도
  큰 입으로 화염을 뿜어서
  흑연(黑煙)에 뒤덮인 활화(活火)의 베수비오산도
  드높이 솟은 저 탑 때려치는
  천둥 번개와 벼락도
  그 마음 혼란시킬 수는 없네.
  가련한 사람들아! 어찌하여 너희는
  하잘것없는 횡포스럽기만 한 폭군들을
  무서워해 떤단 말이냐.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 않는다면
  너, 폭군의 진노를 무력게 하리로다.
  그렇지만 무서워해 떨거나
  합당치도 못한 것만을 탐하는 자는
  방패를 버리고 제자리를 떠남과 같으니
  자기를 묶을 쇠사슬을
  마련하는 것이니라.
 
  -보이티우스의 《철학의 위안》 중 ‘제1서’에서
 
 
  # 안중근 의사가 진짜 영웅인 까닭은 무얼까요?
 


  사람의 선택은 늘 위태롭습니다. 시각과 관점에 따라 정반대의 해석을 낳기도 합니다. 정말이지 사람의 신념이란 것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인간이 지닌 각자의 신념이, 신념의 칼끝이 언제 자신을 향할지 모릅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 1909년)를 일본에서는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애국자라고 합니다. 그를 하얼빈에서 총을 쏘아 죽인 안중근(安重根·1879~1910년) 의사는 우리의 영웅이지요. 이렇게 나라 대 나라로 보면 우리의 원수는 저들의 애국 영웅이 되고 반대로 우리의 영웅은 저들에게는 테러 범죄자가 됩니다. 나라 대 나라의 대립구도로만 본다면 이 문제는 영원한 돌림노래, 쳇바퀴 돌리기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토를 죽인 안중근 의사가 위대해질까요? 국가주의를 넘어 그보다 더 높은 곳에서 말을 해야 합니다. 일본 사람이 하는 것보다 더 높은 차원의 인도주의에서 한 것이었다고 해야지요. 그렇게 되면 안중근 의사는 우리의 영웅이 아니라 세계 인류에 대한 폭력을 막은 사람, 비인간적인 짓을 저지르는 일본인과 맞서 싸운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일본이라는 국가와 싸운 사람이 아니라, 그 비인간적인 세력과 싸워서 이긴 사람이에요. 그러면 안중근 의사는 한국의 영웅이 아니라 인류의 영웅이 될 수 있어요.
 
 
  신념이란 이름의 욕망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봅시다. 그린피스 같은 범지구적 환경운동을 해서 자연파괴를 막는다면 그 사람은 누구의 영웅이 될까요? 그 자연에서 살아가는 다람쥐, 토끼, 그리고 자연 그 자체겠지요. 정말 위대한 영웅인 것이죠. 그보다 더 큰 영웅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자연이라는 게 아름다운 자연만 있으면 누군들 못 하겠어요. 자연에는 코로나19, 오미크론, 메르스, 페스트와 같은 고약한 바이러스도 있어요. 그것도 생명체죠. 그러니 그게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함부로 ‘나는 누구야’라는 신념을 가지면 안 돼요.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매일매일 같이 싸워서 자기만의 결론을 얻지 못한다면 지식인이라고 할 수 없어요.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이어령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하나의 공간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조그만 이파리 위에 우주의 숨결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왜 내가 혼자인가를 알았다
푸른 나무와 무성한 저 숲이 실은 하나의 이파리라는 것을....
제각기 돋았다 홀로 져야하는 하나의 나뭇잎,
한잎 한잎이 동떨어져 살고 있는 고독의 자리임을 나는 알았다.
그리고 그 잎과 잎 사이를 영원한 세월과 무한한 공간이 가로막고 있음을.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왜 살고 있는가를 알고 싶었다.
왜 이처럼 살고 싶은가를,
왜 사랑해야 하며 왜 싸워야 하는가를 나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생존의 의미를 향해 흔드는 푸른 행커치프....
태양과 구름과 소나기와 바람의 증인....
잎이 흔들릴 때,
이 세상은 좀더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의 욕망에 눈을 떴다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들었다.

다시 대지를 향해서 나뭇잎은 떨어져야 한다.
어둡고 거칠고 색채가 죽어버린 흙 속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을 본다.
피가 뜨거워도 죽는 이유를 나뭇잎들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생명의 아픔과 생명의 흔들림이, 망각의 땅을 향해 묻히는 그 이유를....
그것들은 말한다. 거부하지 말라,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대지는 더 무거워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끈끈한 인력이 나뭇잎을 유혹한다.
언어가 아니라 나뭇잎은 이 땅의 리듬에서 눈을 뜨고 눈을 감는다.
별들의 운행과 파동은 같은 질서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우리들의 마음도 흔들린다.
온 우주의 공간이 흔들린다.

 

이어령의 마지막 나날들
“걱정 마! 너 두고 나 절대로 안 죽어”

 

 

<월간조선 4월호 김태완 기자>

 


⊙ 무엇을 보았는가. 메멘토 모리. 훗날에야 알았네. 메멘토 모리
⊙ “쓰이지 않은 역사를 푸는 방법을 가져야 해. 그게 피시스와 노모스, 세미오시스지”
⊙ “난 그걸 쓰고 죽고 싶은데… (병이 들어) 그걸 못 한다는 거예요”
⊙ “어차피 죽을 것, 갈가리 찢어놔서 너희 기쁨이 뭐냐는 거야”
⊙ “애통해하는 사람, 슬퍼하는 사람만이 천국을 보는 거야”

 
  지난 2월 26일 이어령(李御寧· 1933~2022년)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그 흔한 방사선 치료조차 마다하고 사실상 곡기를 끊고 오랜 시간을 버텼다. 기자는 선생이 세상과 이별한 그날,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잠시 잠이 들었는데 회사 선배가 전화를 걸어 선생의 죽음을 알려왔다. 곧이어 소설가 이인화(류철균, 전 이화여대 교수)씨에게 전화가 왔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떨리는 음성이었다.
 
  가끔 우리는 이어령 선생을 만났다. 마지막 만남은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보름 전쯤이었다. 선생이 이인화 교수에게 몇 가지 당부의 말을 전하는 것을 곁에서 들었다. 그 역시 마지막 당부가 될 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날 몰라보게 야윈 선생을 보고 이 교수는 눈물을 흘렸다. 선생의 볼이 눈에 띄게 움푹 파였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생전 마지막으로 본 선생의 모습을 시(詩)처럼 표현했다.
 
  “체중이 절반으로 줄어든, 불행과 지혜가 아로새겨진 야윈 얼굴에 아름다움이 있었다. 미소 짓는 우수였고 기도하는 달관이었다.”
 
 
  용수철 같은 열정, 섬세하고 다양한 관심
 

  퇴원한 후 빈소를 찾았다. 2월 28일이었다. 고급 외투와 짙은 정장을 차려입은 구두들로 붐볐다. 눈부신 난(蘭)과 흰 국화, 검은 장례 리본이 빈소를 가득, 가득 메웠다. 하염없이 울거나 목멘 소리로 통곡하는 이는 다행히 없었다.
 
  대개는 모르는 분들이었지만 기자와 안면이 있는 분이 있어서 반가웠다고 해야 할까. 조성관 《주간조선》 전 편집장,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휠체어를 탄 김남조 시인 등이 눈에 띄었다.
 
  기자가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2019년 무렵이었다. 취재로 만났지만, 감히 선생과 동시대를 살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의 이름을, 그의 말을 겨우 식별할 수 있다는 정도였다.
 
  선생의 얘기를 들으며 기자는 늘 말문이 막히곤 했다. 무미건조하고 사무적인 음성이 아니라 용수철 같은 열정, 섬세하고 다양한 관심, 경계를 뛰어넘는 비유로 달려갔는데 논점을 엉뚱하게 비약하거나 고약하게 비꼬는 식의 잘록한 편견은 없었다. 갈피를 못 잡고 화제의 수미(首尾)가 충돌하는 일도 없었다. 대개는 당장의 일상과 거리가 먼 관념적인 이야기일 수 있지만,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불모의 관념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살아 있었거나 잊힌 관념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우는 것들이었다.
 
  깊이 있는 문장 역시 문학적 모조품이나 부자연스러운 진부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누가 뭐래도 천하의 이야기꾼이자 시인이었다.
 
 
  ‘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로 만나
 
  ‘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를 시작한 뒤로는 매달 3~4번씩은 만났다. 선생이 떠나기 두 달여 전인 작년 12월 13일을 기점으로 12월 20일(전화통화), 그리고 지난 1월 7일과 11·18일, 2월 4·10·17·23일 만났다.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고 있을 때여서 기껏 20~30분 정도 만나는 것이 전부였다. 하루가 다르게 살이 빠져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슬픔이 북받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사적이거나 느긋한 잡담을 나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선생은 고장이 나버린 생(生)의 시계를 곁눈질하며 초조했을지 모른다.
 
  지난 2008년 선생이 펴낸 시집 《무신론자의 기도》에 ‘메멘토 모리’라는 시가 실려 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M자 3개가 겹쳐져 있는 아름다운 라틴어다.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나는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라’는 뜻으로 ‘먹고 마셔라, 내일은 죽으니까’라는 향락적 찰나주의의 경구이기도 하고, 반대로 그러니 오만하지 말고 성실하고 경건하게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목숨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기저귀를 차고 나온다.
  아무리 부드러운 포대기로 감싸도
  수의(壽衣)의 까칠한 촉감은 감출 수가 없어.
  잠투정을 하는 아이의 이유를 아는가.
 
  한밤에 눈을 뜨면
  어머니 숨소리를 엿듣던
  긴 겨울밤
  어머니 손 움켜잡던
  내 작은 다섯 손가락.
 
  애들은 미꾸라지 잡으러 냇가로 가고
  애들은 새둥지 따러 산으로 가고
  나 혼자 굴렁쇠를 굴리던 보리밭 길
  여섯 살배기 아이의 뺨에 무슨 연유로
  눈물이 흘렀는가.
  너무 대낮이 눈부셨는가.
  너무 조용해 귀가 멍멍했는가.
 
  굴렁쇠를 굴리다 흐르던 눈물
  무엇을 보았는가.
  메멘토 모리
  훗날에야 알았네.
  메멘토 모리
 
  -이어령의 ‘메멘토 모리’ 전문
 
  이어령 선생은 말하곤 했다. “메멘토 모리는 일생의 좌우명”이라고. 기껏 여섯 살 코흘리개가 죽음이라는 말을 몸 전체로 느꼈다고 고백했다. 아이가 느꼈던 수의의 까칠한 촉감, 혹은 혼자 굴렁쇠를 굴리다 흘렸던 눈물의 기억이 바로 메멘토 모리이고, 그 기억을 평생 간직해왔다는 점이 놀라웠다. 이어령의 생전 마지막 저서가 또한 《메멘토 모리》였다.
 
 
  “메멘토 모리는 일생의 좌우명”
 
  기자는 선생이 생과 사투하던 마지막 나날들을 문장으로 옮기려 한다.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생전의 당부를 미화하거나 억지로 비단을 덧댈 생각은 없다. 연재를 기다리는 《월간조선》 독자들에게 선생의 음성을 글로 보여주는 것이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정리는 세월이 흘러야 가능할 것 같다. 사실, 선생의 음성이 낮아서 들리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선생은 말을 하다 보면 어느새 목소리 톤이 올라와 있기도 했다. 한번은 이런 말을 했다.
 
  “목에서 소리가 안 나와 소리를 질러. 그러면 남들은 열정이 있다고 하는데, 아니야. 보통 사람처럼 얘기하고 싶지만, 소리가 안 나와. 소리를 질러야 해서 늘 목이 쉬어.”
 
  그 말 속에 선생의 눈물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처럼 연달아 무언가를 쏟아낼 기력이 없었다. 하지만 와중에도 그동안 들어 올릴 수 없었던 버캐 같은 굵은 소금언어들이 들렸다.
 
 
  2021년 12월 13일
 

  서울 평창동 이어령 선생의 서재를 찾았다. 평소에는 회의 탁자에 앉았지만 이날은 소파에 앉았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앉기보다 누워 있었다고 해야겠다.
 
  “12월 27일이 89세 되는 생일이야. 그때 침대[의료 침대]가 들어오면 침대 생활을 하게 돼. 병원에서처럼 누워 지내게 된다고. 그러나 뭐가 가능하냐 그러면, 지금도 하고 있지만 녹음기를 매달아 놓고, 의식이 있는 동안 내 음성을 녹음하려고 해.”
 
  그러더니 시간이 없다고 느꼈던지, 말의 방향을 틀어 이달에 기자가 썼던 기사[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③ 식민지인(人)]의 아쉬운 점을 이야기했다.
 
  “‘패럴리즘(Parallelism)’을 대구법(對句法)이라고 하지만 병렬법이라고 반드시 해줘야 해.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뮐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칠새’라는 구절에서 보듯 (문장의 흐름이 갔다 왔다 하는) 대단히 어려운 이론이야. 자칫 (해석에) 오류가 생기기 마련이지.
 

 
四角의 저주
 
  선생은 동양의 사고를 지배한 중국의 한문 문장 구조, 의식을 지배한 한자(漢字) 언어의 틀을 지적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중국 나라들은 반드시 외 글자야. 진나라, 한나라 식으로. 그런데 변방의 나라는 반드시 두 자잖아. 한 자를 못 써. 신라, 고구려, 백제. 지명(地名)은 다 두 자야. 조치원, 삼랑진은 예외라고 얘기하면 안 되는 거지. 사각(四角)의 저주… 중국은 그렇다 치더라도 한국과 일본 사람들은 말이 안 되는 거야.”
 
  사각의 저주는 사각형 글꼴의 한자 형태가 한중일(韓中日)의 사고를 지배했다는 의미였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를 두고 ‘나라가 망하니 산하가 있다’로밖에 안 읽혀. 나라가 망해도 산하는 있는 것인지, 나라가 망하니 남은 건 산하뿐인지…. 하나는 포지티브, 하나는 네거티브야. 하나님이 와도 못 풀어. 전체 문맥을 봐야 하는 거야.
 
  도연명(陶淵明·365~427년)의 ‘귀거래사(歸去來辭)’도 보라고. 관직을 그만둔 거지 세상을 은퇴한 거 아니거든. ‘귀거래사’를 전부 은퇴하는 걸로 알아. 관직만 그만둔 거지 북쪽의 여산(廬山) 속으로 안 들어간 거예요. 여산 속으로 들어가야 은둔이지 끝내 안 들어가.
 
  그리고 ‘귀거래사’는 죽어서 여산에 들어가는 것, 살아서 가는 것, 벼슬을 그만두고 여산 근처에서 사는 것 등 3가지 패러다임이 있어. 또 ‘귀거래사’에 등장하는 배[舟]도 실제로 배를 타고 간다, 꿈결에서 배를 탄다, 혹은 죽어서 배를 타고 간다는 해석이 다 가능한 거예요. 이런 해석은 바둑으로 치면 단수 중에서도 알파고 수준의 바둑을 두듯이 풀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해석을) 반절도 못 하는 거지. 쓰지 못하는 거예요.”
 
 
  “한자는 이 땅에서 없어진 거야”
 

  “옛날에는 전부 문맥으로 해석했지만, 오늘날처럼 (문장 속) 단어가 제 몫을 하기 시작한 건 근대 개인주의가 시작되면서야. 이 문제로 들어가면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1857~1913년)로 들어가야 하는데 여기까지 누구도 못 올라가는 거야.
 
  그리고 한자는 이미 표의문자가 아니고… 세상에 간자체가 무슨 한자야. 상형도 아니고 의미도 아니고 발음부호가 돼버린 거야. 한자는 이 땅에서 없어진 거야.”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까지 이걸 안 하면 의미가 없는 거야. 그냥 보통 에세이를 쓸 바에야 그걸 뭐하러 죽으면서까지 해.”
 
  선생은 지금까지 탐사해온 ‘한국인 이야기’의 마지막 퍼즐을 완성하고 싶어 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프리히스토리(prehistory·선사시대), 히스토리 이야기야. 한국인의 정체성이 담긴 ‘젓가락’이 어디까지 올라가느냐 하면 인류 최초의 전사(戰士), 최초의 요리사까지 올라간다는 것을 밝히려고 해. 사람들이 기록된 역사, 문자로 기록된 역사만을 인정하지만 쓰이지 않은 역사를 푸는 방법을 가져야 해. 그게 내가 얘기하는 피시스(Physis·자연계)와 노모스(Nomos·법과 제도), 세미오시스(Semiosis·기호상징계), 추리력, 유추, 메타포지.”


 피시스, 노모스, 세미오시스
 
  “그 프리히스토리 이야기만 써도 엄청난 거라고. (기록된 역사만 인정하는 이들은) 패륜아들이야. 350만 년 전 인간의 인지능력 혁명을 전혀 인정 안 하는 것들이야, 이것들은….
 
  (선사시대 인간을) 뼈다귀나 던지는 줄 알고, 곤봉이나 휘두르는 침팬지인 줄 알았던 역사관을 여지없이 죽여버리려 하거든. (젓가락을 통한) 식사 공동체를 통해 말이지. 고릴라하고 인간만이 함께 나눠 먹어. 딴 짐승들은 음식을 두고 싸워. 다른 짐승하고 싸우고, 지들끼리 싸우고 그랬어. 그게 생존경쟁이야. 암컷 놓고 죽어라 싸우고.
 
  우리 인간은 안 그래. 결혼제도라는 게 있어서 싸움을 안 하는 거야, 대놓고. 그리스 신화에, 그리고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드》에 신들의 대리전인 트로이 전쟁 이야기가 나오잖아. (제우스의 딸인) 헬렌을 두고 (트로이 왕자 파리스와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가) 싸우는데 손님으로의 모럴을 (파리스가) 어겼던 거지.
 
  그리스는 해양국가이자 도시국가이기 때문에 도시에서 도시로 가려면 참 힘이 들어. 그러니까 낯선 나그네들은 먹여줘야 해. 발을 닦아주고. ‘친절’이란 뜻의 독특한 단어가 있는데….
 
  나그네한테 잘해줘야 자기도 길을 떠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어. 지금도 몽골에서는 (어딘가로 떠날 때) 텐트에다 밥을 차려놓고 간다고 하잖아. 왜? 길 잃은 사람이 왔다가 먹으라고.”
 
 
  “마지막 죽을 놈이 그걸 ‘라스트 강연’이라 하고 앉았어?”
 

  선생의 말 속에 날이 서 있었다.
 
  “(나그네에게) 선심 쓰는 게 아니야. 그래야 자기도 살아. 그걸 어기면 질서가 무너지는 거야. 그런데 나그네로 환대받던 파리스가 (아프로디테의 도움으로) 헬렌을 빼앗아간 것이지.
 
  포세이돈은 트로이를 지켜주는 신(神)이야. 말[馬]이 상징이지. 병사들이 숨어 있는 거대한 바퀴 달린 목마가 트로이 성 안으로 들어가잖아. 트로이 입장에선 자기들의 상징인 말인데 아무렇게나 두면 되겠어? 자기들의 신인데. ‘너희 신이다. 전쟁 안 하겠다’는 뜻인 줄 알고 (성 안으로) 목마를 끌고 들어간 것이지.
 
  그런 이면을 모르고 목마를 가져갔겠어? 바보야? 그런데도 지금까지의 해석이라는 게, 우선 자료가 없어. 수박 겉핥기로 아는 것들을 학교에서 가르치고 문학 시간에 배우고 있는 거예요. 나처럼 트로이 전쟁에 대한 얘기를 해봐. 납득이 갈 거야.
 
  옆구리가 저려 말을 못 하겠는데, 그러니까 난 그런 걸 쓰고 죽고 싶은데… (병이 들어) 그걸 못 한다는 거예요.
 
  그런 얘기를, 아무리 잘 전하려고 해도 엉뚱한 얘기로 돼서 나오면 안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 안 하는 게 낫다는 거지. 이미 한 말을 다시 쓸 바에야, 하나도 새로운 말이 없을 바에야…. 마지막 죽을 놈이 그걸 ‘라스트 강연’이라 하고 앉았어?”
 
 
  철봉대 앞 모래사장이 반짝이고, 눈부시던 교정…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어. ‘니들(너희)은 아무리 쉽게 말해도 하나님 말씀을 들을 줄 모르니 비유로밖에는 말할 수 없다’고. 플라톤도 그랬거든. ‘이데아가 뭡니까’ 하고 제자들이 물으니 ‘내가 말 못 한다. 그걸 말로 옮길 수가 없다’고 했어. 자꾸 조르니까 ‘굳이 비유로 말하자면 태양 같은 것’이라고 했지.”
 
  선생은 전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건강이 허락되지 않는 현실, 구어체가 문어체로 바뀌는 과정에서 잘못 전달되는 행간의 오류와 해석의 차이를 안타까워했다.
 
  “어린 시절, 내 필통 속에 서양이 있었어. 셀룰로이드(합성수지)로 된 작은 필통 속에 서양의 문명이 들어 있던 것이지. 지우개가 풍기는 향내. 제삿날 향불에 익숙하던 내 후각에겐 경이로운 것이었어.
 
  연필은 또 어떻고. 나무 속에 물질이 들어 있잖아. 광맥이 들어 있는 거야. 나이가 들어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의 상상력을 보면서 느꼈던 것과 같아.
 
  텅 비어 있는 운동장이 마음을 끌었어. 햇빛으로 꽉 차 있는, 아무도 없는 텅 빈 운동장. 학생들은 모두 교실로 가버리고 아무도 없는…, 비어 있는 운동장이 내게 강력한 학교의 이미지였어.
 
  아이들이 없는, 그래서 쓸모없을 것 같은 텅 빈 운동장, 철봉대 앞 모래사장이 반짝이고, 꽃과 화단이 눈부시던 교정…. 기껏 집 툇마루 아래 작은 마당밖에 모르던 아이에겐 큰 충격이었어.
 
  교실 안은 어둡지만, 바깥 운동장은 환한 햇살이 쏟아졌어. 센티멘털한 감상주의가 아니고 인간 존재의 생명에서 오는 것 같은….”
 
 
  “김 기자가 못 하는 게 아니라 어떤 사람도 못 하는 거예요”
 
  “(김 기자가) 말랑말랑한 지우개를 미각적이고 촉각적인 부분까지 아주 섬세한 부분을 놓치지 않고 써주길 원하는데, 그거는 김 기자가 못 하는 게 아니라 어떤 사람도 못 하는 거예요. 그거 하면 내 마음속에 들어가서 이어령처럼 해야지. 그러나 내가 한 말인데 왜곡되거나 잘못 전달된 말들 되어버리면 끝내 (사람들이) 이해를 못 하는 게 되거든.
 
  내 얘기들이 (바르게) 전해졌을 때 독자들이 ‘야, 읽을 만하다. 신문마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이 어떻고 하는 데에 빠져 있지만 그래도 인간의 깊은 동굴의 울음소리가 있구나. 그래도 우리나라에 형이상학이 있구나. 이념적 사고가 아니라 관념적 사고가 있구나. 추상의 세계에 사는 사람이 있구나, 하지 않겠어?”
 
  선생은 소변이 안 나온다고 했다. “대변이 나오면 소변이 안 나오고, 소변이 나오면 대변이 안 나온다”는 것이었다.
 
  “빈혈에서 오는 거야. 거의 보름 가까이가 됐어. 암 환자들은 이런 증상들이 있거든.
 
  내가 소변 안 나온다든지 해서 병원에 입원했으면 온갖 검사를 다 하고 죽을 사람의 몸을 째고 했을 거야. 그걸 안 하려고 재택의료로 바꾼 거지.
 
  나, 안 하겠다는 거야. 그거 안 하겠다는 거야. 얼마 전 수혈받으러 병원에 가서 일곱 시간 있었는데 죽을 것 같더라고. 나 수혈 안 받겠다고 했어.
 
  해서는 안 될 소리지만, 헤밍웨이(Ernest Hemingway·1899~1961년)도 그렇고, 가와바타(川端康成· 1899~1972년·소설 《설국》 작가)도 그랬고, 대개 지성인들이 죽을 때 보면 자살하거든.”
 
 
  “어떻게 하면 고통 없이 죽을까…”
 

인터뷰 도중 이어령 선생이 글을 쓰고 있다. 마지막까지 ‘한국인 이야기’의 지적 여정을 멈추지 않았다. 사진=김용호 작가
  선생의 이 말에 기자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나도 어떻게 하면 고통 없이 죽을까 방법을 강구 중인데, 시각 잃고 청각 잃고 막 이런 데 붓고… 도저히 못 견뎌, 진짜…. 창피한 얘기지만, 자의식이 강해서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지만 밤중에 막 아프면, 아픈 거는 말하지 않고 욕을 한다고.
 
  (의사들이) 병을 뭘 알아? 한 인간을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난도질을 하느냐 이거야. 그렇게 해서 너희에게 무슨 이익이 있느냐 이거야. 한 인간이 어차피 죽을 것, 갈가리 찢어놔서 너희 기쁨이 뭐냐는 거야.
 
  설령 내 죗값이라고 치자. 나, 죄가 많다. 그러나 (아픈 병이) 죄보다는 무거운 형벌일지도 모르지.
 
  그래, 나 이렇게 살아왔다, 지금까지…. 위선자고 표리부동하고 그렇게 살아왔어. 그런데 (사람이) 다 그래. 그렇게 잘난 사람 없어. 인간이 완벽하다면 뭣 하러 예수님이 오셨겠어?
 
  또 예수님도 그러셨어.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하신 분 아니야?”
 
  선생은 그러나 당신 생명의 소중함도 이야기했다.
 
  “기독교에서는 자살을 죄로 생각하지만, 불교는 그렇지 않아. 다비(茶毘)한다고 불 속에 들어가는 거? 태워가지고 뭐 사리(舍利) 나오는 거? 기독교에서는 용납 못 하는 거야. 생명인데 지(자기) 생명인데 그걸 어떻게 불에다가 태워?”
 
 
  “애통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천국을 알아?”
 
  “기독교는 생명주의 종교거든. 다른 종교하고는 달라. 그리고 ‘고통…,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천국이 너희 것이니라’. 기독교를 안 믿어도 애통하는 자는 천국이 너희 것이야. 삼성 이병철 회장이 물었어. ‘기독교를 안 믿으면 천국에 못 갑니까?’ 하고.
 
  애통하는 사람, 슬퍼하는 사람만이 천국을 보는 거야. 애통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천국을 알아?
 
  사람들은 천국을 어떻게 해석할까? 금은보화가 주렁주렁 달리고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들이 얘기하는 그런 천국은 지루해서 못 살아. 전직 대통령 중 한 분이 말했다지. ‘청와대에 갇혀 바깥에도 못 나가고 감옥살이가 지겨웠다’고. 그랬는데 또 감옥에…. 결국 자기를 잃잖아.”
 
  선생은 작년 10월 26일 노태우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빈소를 찾았다. 그는 6공화국 초대 문화부 장관(재임 1989년 12월~1991년 12월)이었다.
 
  “그 몸으로 어디 가느냐”며 주변이 다 만류했지만,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가서 유족들을 위로하며 양복 안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은 종이 한 장을 꺼내 건넸다. 노 대통령에게 바치는 헌시 ‘영전에 바치는 질경이 꽃 하나의 의미’였다.
 
  선생은 “몸이 성치 않아 옛날같이 글을 쓰지 못하고 컴퓨터 입력도 어려워 음성 입력으로 쓰다 보니 부끄러운 글을 되풀이할 뿐”이라며 겸손하게 말했다.
 
 
  용서하세요. 질경이 꽃 하나 캐다 올리겠나이다
 
  이 헌시는 대통령 유족들이 언론에 공개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남들이 고인의 영전에
  국화 한 송이 바칠 때에
  용서하세요. 질경이 꽃 하나
  캐다 올리겠나이다.
  (…)
  어느 맑게 개인 날 망각에서
  깨어난 질경이 꽃 하나
  남들이 모르는 참용기의 뜻,
  참아라 용서하라 기다려라
  낮은 음자리표 바람소리로
  전하고 갈 것입니다.
 
  -이어령의 ‘질경이 꽃’ 일부
 
  시 끝자락에 ‘참용기’, 풀이하자면 ‘참아라 용서하라 기다려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말은 생전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장관 시절 선생에게 한 말이자 평소 대통령의 좌우명이었다.
 
  선생은 이 시가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언론의 관심에 흡족해했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소리꾼 장사익이 붓글씨로 써서 액자에 담아왔다”며 거실 한쪽 눈에 띄는 자리에 세워놓았다. “시가 너무 좋아 직접 써서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편에 보내왔다”는 것이었다.
 
  “조갑제 대표도 유튜브를 통해 이 시를 두 번이나 읽고 소개해줬어요. 고맙다는 말씀을 전해주세요.”
 
  그러더니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나는 죽어 누가 날 위해 시를 써줄까?”
 
 
  2022년 1월 7일
 
  이후 기자에게는 가족 상(喪)이 있었다. 한동안 선생을 만날 수 없었다. 전화통화는 그사이 한 번 했다.
 
  선생은 목이 잠긴 채 쉬어 있었다. 누워서 일어서지 못했다. 의료 침대는 서재 안쪽 방에 놓여 있었다. 기자는 침대 곁으로 가 선생과 마주 앉았다.
 
  선생은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미국 소설가 존 업다이크(John Updike·1932~2009년)가 쓴 소설 《음악학교(The Music School)》에 관해 쓴 글을 찾아준다며 일어섰는데 걷는 것이 거의 불편했다. 보행기로 겨우 이동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컴퓨터를 켜고 한참을 뒤져도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음성 역시 낮고 가늘어서 잘 들리지 않았다.
 
  선생의 마지막 저서인 《메멘토 모리》의 출판을 앞둔 때였다.
 
  “이병철 회장이 가톨릭 사제에게 질문한 24가지 질문에 대한 책은 인문학자의 글이지 종교인의 글이 아니야.
 
  (책에 담긴) 기독교적 관점, 가톨릭적 관점의 차이는 인간들이 만든 인스티튜션(Institution·제도 관습)이야. 대학교 같은 거야. 서울대, 연세대 같은….
 
  교육이 대학이야? 웃기는 사람들이야. 무교(無敎), 그러니까 교회[교단]가 없어도 기독교가 되는 것이고,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지.
 
  아니, 예수님이 계실 때 언제 무슨 가톨릭이고, 기독교가 어디 있었어?”
 
  평소 선생의 생각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주기도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주기도문이 뭐야. 웃기는 거야. 왜들 그러지? 네임 오브 갓? 하나님이 이름을 안 가르쳐주니까 모세가 ‘당신은 누구시냐’고 묻자 ‘나는 있는 나다(라틴말로 Ego sum qui sum)’라고 하신 것이지.”
 
 
  “교회[교단]가 없어도 기독교가 되는 것이고”
 
  이어지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말끝마다 네임 오브 갓, 하나님의 이름으로라고 말해.
 
  하나님으로 하는 것[기도]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어떻게 달라? 대단한 신학자들이 많이 있지만, 킹덤, 왕이 다스리는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당신에게 있다?
 
  악마가 (광야에서 예수님에게) ‘당신을 지상의 왕이 되게 하겠다’고 유혹했지만, 예수님은 노(No)! 하셨어.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지상의 왕으로 모시겠다고? 지상의 권력과 권세를 드린다고? 그건 지상의 왕에게나 하는 말이야. 내 말 반박해보라고. 반박해봐.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이번에는 예수님이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수천 명을 먹였다는 신약(新約)의 오병이어(五餠二魚)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 오병이어, 그거 기적이 아니야. 모세와 나그네 살이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먹었다는 ‘만나(manna)’는 기적이 아니야. 먹으면 죽는 거요.
 
  그거 먹은 사람들 다 죽었어. 오병이어 먹은 사람들 다 죽었어. 만나를 먹은 놈들, 다 죽었어.
 
  (예수님은) 죽지 않는 빵을 주려고 왔는데 너희는 먹으면 죽는 빵을 가지고 기적이라고 그래? 오병이어라는 이름을 단 교회까지 있어. 성경을 어떻게 읽은 거야?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고 있는데 악마가 나타나 유혹하잖아.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을 빵으로 바꿔보시오’라고.”
 
 
  “五餠二魚 먹은 사람들 다 죽었어”
 
  기자는 숨죽인 채 선생의 말을 경청했다.
 
  “예수님이 돌을 빵으로 바꾸셨겠어? 생각해보라고. 세상의 모든 돌을 빵으로 바꾸면, 당장은 그 빵을 먹어 배가 부를지 몰라도 돌이 모두 사라지지 않겠어? 이후에는 배가 고파 죽지 않겠어? 그게 올바른 것이야?
 
  예수님이 ‘성서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하신 말씀은 하나도 틀린 말씀이 아니지.
 
  그까짓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생명이라는 것은 (언젠가는) 죽어. 죽는 생명이 뭐 그리 대단해. 가장 어려운 것은 영생이야.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지. 그러니까 기독교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생명을 통해 영생을 얻는 것이지.”
 
  처음에는 자그마하게 들리던 목소리가 어느새 원래 목소리처럼 커졌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힘이 납니다. 조금 전까지 녹다운되어 쓰러져 있었잖아. 이게 영(靈)이야. 육체보다 강한 영이야.”
 
  그러더니 죽음을 앞둔 자신을 달래듯 덧붙였다.
 
  “(하늘에서) 내가 이 책(《메멘토 모리》)을 통해 ‘올바른 소리를 했구나’ ‘착한 일을 했구나’ 해서 데려가려 하시는 건지, ‘너 어디서 망측한 소리, 니 멋대로 떠들어서’ (웃음) 데려가려고 하시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어. 그러나 난 내 나름대로 인간 예수의 입장에서 ‘네가 나를 이해했다’… (고 하시지 않을까.)”
 
 
  1월 11일
 
  선생의 침대 앞에 마주 앉아 20여 분간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는 《월간조선》 2월호에 실린 ‘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④ 맛과 멋, K-푸드’에 모두 녹였다.
 
  선생이 설명하는 존 업다이크가 쓴 소설 《음악학교》와 카프카의 소설 《단식 광대》 이야기에 큰 감명을 받았다.
 
  기자는 선생과 헤어진 뒤 도서관을 찾았다. 《단식 광대》는 빌려서 읽었지만 《음악학교》는 국내 소개되지 않은 듯 보였다. 인터넷 검색에도 나오지 않았다.
 
  《월간조선》에 싣지 않은 존 업다이크의 《음악학교》에 관한 선생의 육성을 요약해 전한다.
 
  “존 업다이크라는 소설가가 있는데 그 사람이 이런 말을 해. ‘오늘날 종교가 타락하는 이유가 있다’고.
 
  진리라는 것은 딱딱하고 어려운 것이지. 딱딱한 음식을 어금니로 깨물어 먹듯 진리도 깨물어 먹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가톨릭의 성체성사를 보면 엄지손톱만 한 작고 얇은 밀떡을 신자들에게 나눠주거든. 초대교회 때는 아마 무척 딱딱한 빵이었을 거야.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유동식을 먹고 전부 소프트드링크, 전부 소프트푸드야. 딱딱한 걸 씹질 않아. 그래서인지 어려운 걸 이겨내고 노력하고 추구하고 진리에 부딪힐 마음을 잊어버렸어.”
 
 
  아랫입술 꽉 깨물고…
 
  “소설에는 한 소녀가 음표로 새까만 악보를 치는데 아름다운 음악이 나오지. 요즘은 음악을 들을 때도 편안하고 소프트한 음악만 선호하잖아. 그러나 소설 속 소녀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어려운 악보를 치면서 연주에 몰입하지. 음악은 단순히 귀로 감상하는 게 아니야.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들어야 해).
 
  요즘 애들은 말이지, 씹질 않아가지고 옛날 석기시대보다 거의 4분의 1도 안 씹는다고 하잖아. 씹을 때마다 뇌에 산소가 공급되는데 말이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빵은 딱딱한 빵, 얇은 빵, 녹여 먹는 빵 별것이 다 있는데 그게 정신하고 밀접한 관계가 있어. 유동식 대신 인생을 씹듯이, 도전하면서 싸우듯이 딱딱한 것을 먹어야 해. 물론 상징적으로 하는 말이지. 인생을 안이하게 살지 말고 씹어서, 씹어 삼키듯이 살라는 것이야.”
 
 
  1월 18일
 

  이날 자리에는 출판사 관계자도 함께했다. 출판 계약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나누었다. 선생이 별안간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슬픈 가정하에 앞으로 나올 《한국인 이야기》 후속편에 관한 당부가 이어졌다.
 
  선생의 길고 길었던 지적 여정의 대미를 장식할 《한국인 이야기》는 현재 제1권 〈탄생 - 너 어디에서 왔니〉 편이 발간(2020년 2월)된 상태다. 앞으로 총 10권 발간이 목표다.
 
  우선 《젓가락의 문화 유전자》(가제), 인공지능을 다룬 《알파고의 추억》(가제), 일제 강점기를 유년의 눈으로 들여다본 《회색 교실》(가제) 등을 차례로 출간할 계획이다.
 
  기자는 선생이 쓴 글과 전집 라이브러리, 각종 자료들, 신문 스크랩, 간단한 메모, 육성 녹음파일, PPT 파일, 동영상 파일 등을 모두 넘겨받았다. 방대한 자료였다. 읽고 이해하고 선생의 숨결로 재생산하기 위해선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다행히 일부 원고는 선생의 생전에 여러 차례 수정과 첨삭의 지난한 퇴고의 과정을 거쳐 90% 이상 완성된 상태다.
 
  다만, 선생이 기자에게 꼭 써달라고 당부한 ‘의·식·주(衣·食·住)’ ‘천·지·인(天·地·人)’ ‘진·선·미(眞·善·美)’와 관련된 주제의 ‘한국인 이야기’는 아직 날것 그대로다. 전혀 코딩이 안 된 빈 공책 같다.
 
  기자 업무 외에 퇴근 후 별도 작업을 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어설프게 글을 만지다 보면 선생이 바랐던 의도와 달라질 수도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선생이 구사하는 말의 밀도는 늘 상상을 초월했었다. 걱정이 태산이다. 선생은 “김 기자의 생각을 자유롭게 보태도 된다”고 허락은 했다.
 
  앞으로 긴 호흡을 갖고 선생의 자료들을 다독(多讀)·다상량(多商量)할 생각이다. 가능하다면, 《월간조선》에 연재 형식으로 소개하는 방안도 고민해야겠다. 그렇게 되면 ‘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는 선생의 사후라도 계속 이어지지 않을까.
 
 
  2월 4일
 

이어령 선생은 췌장암의 고통을 겪으며 그 흔한 방사선 치료조차 거부했다. 사진=김용호 작가
  이날 오후 선생을 찾았다. 거의 보름 만이었다. 선생은 거동을 못 하는 상태였다. 거실 창을 바라보고 소파에 누워 있었다. 식사를 못 하고 물만 마신다고 측근이 전했다. 혹시나 선생은 일부러 곡기를 끊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선생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맑아 보였다. 눈의 초점도 또렷해 보였다. 수수께끼 같은 비밀스러운 힘이 그를 감싸고 있는 것만 같았다.
 
  ― 대소변은 잘 나오는 거죠?
 
  “안 돼.”
 
  말문이 막혔다. 손과 발이 퉁퉁 부어 있었다.
 
  “여기부터가 취재가 되는 건데, ‘데자뷔’ 현상이 있어.”
 
  ― 예?
 
  “내가 처음 겪는 건데, 두 번째인 것처럼…, 그러니까 데자뷔처럼 계속 (사고가 반복적으로) 돌아가니까, 한 번 빠지면 수렁에 빠진 것처럼…. 사람이 수렁이나 사막에 떨어진 것처럼 계속 같은 일[생각]을 반복한다고. 내가 지금 그렇게 돼버렸어. 데자뷔 병에 걸렸어. 그러니까 김 기자하고 이렇게 ‘액션’이 될 때는 그 현상이 멈춰. 그게 끝나면 전부 데자뷔처럼 돌아간다는 거지.
 
  그런 이상한 병에 내가 걸려 있는 거야. 그래도 김 기자와 만나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어. 김 기자와 만나는 동안만은 데자뷔 현상이 (일어나지 않고) 정상으로 돌아오니까 좋고, 둘째는 어차피 해야 할 일(인터뷰)을 하게 되니까 좋고….”
 
  ― 저도 좋습니다. 다음 주에도 찾아뵐까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데자뷔 병에 걸렸어”
 
  심리학에서 말하는 데자뷔 현상은 최초의 경험임에도 이미 본 적이 있거나 경험한 적이 있다고 느끼는 이상한 기분이나 환상을 말한다. 선생이 말하는 동일한 패턴의 반복적 사고가 데자뷔 현상과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자신의 의지로 통제되지 않는 사실과는 다른 생각,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상(異常)심리 현상을 겪고 있었다. 임계점에 이른 육체적 고통이 정신까지 위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때마침 선생의 전화로 여러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개중에는 “3·9 대선 이후 향후 우리나라의 과제와 미래에 대해 생각을 듣고 싶다”는 방송사 기자의 전화도 있었다. 선생의 비서가 대신 전화를 받아 와병의 이유로 정중히 거절했다. 속으로 기자는 ‘선생이 건강하다면 얼마나 멋진 답을 할까’ 생각했다.
 
  며칠 전 출간된 선생의 저서 《메멘토 모리》를 두고 대화를 이어갔다. 책 뒷면 표사(表辭)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어릴 적 신나게 놀다가도
 
  불안한 아이는 어머니에게 달려가 물었다.
 
  “엄마, 죽지 마.”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걱정 마! 너 두고 나 절대로 안 죽어.”〉
 
  그의 어머니는 선생이 겨우 열한 살 때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선생의 감성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선생의 저서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2010)에는 불안과 경계심이 가득한 열한 살 소년의 고백이 담겨 있다. 1943년, 어머니는 수술을 받기 위해 서울로 떠났다. 태평양전쟁이 한창 고비였던 시절, 어머니는 변변한 마취제도 없이 수술을 받았다. 그런 경황에도 예쁜 필통과 귤을 보내왔다. 병문안 손님들이 가지고 온 귤을 먹지 않고 머리맡에 놓고 보다가 아들에게 보낸 것이다.
 
 
  어머니와 귤, 하얀 상자 속 유골
 

이어령 선생의 마지막 저서 《메멘토 모리》. 지난 1월 발간됐다.
  그러고 얼마 후 어머니는 하얀 상자 속의 유골로 돌아왔다. 물론 그 귤은 어머니도 소년 이어령도 먹을 수 없는 열매였고 어머니와 함께 땅에 묻혔다. 선생은 《어머니를 위한…》에서 이렇게 썼다.
 
  〈서울로 떠나시는 마지막 날 어머니는 나보고 다리를 주물러달라고 하셨다. 열한 살이었으니까 이젠 어머니의 다리를 주무를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성장한 것이다. 정말 다리가 아프셔서 그러셨는지 혹은 어린 것이라 늘 걸려 하셨는데 그만큼 자란 것을 확인하고 싶으셔서 그러셨는지 혹은 내 손을 가까이 느끼시며 마지막 작별을 하려고 하신 것인지 확실치 않지만 다리를 주물러달라고 하셨을 때의 어머니는 외로워 보이셨다.
 
  왜 그랬던가, 어머니에게 나는 숙제를 해야 한다고 핑계를 대고는 제대로 다리를 주물러드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셨다. 나는 어머니의 신병이 무엇인지 잘 몰랐던 것이다. 그것이 정말 마지막인지 몰랐던 것이다.〉(24~25쪽)
 
  어쩌면 “걱정 마! 너 두고 나 절대로 안 죽어”라는 선생의 말은 이별의 말조차 없이 떠난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이 담겨 있는 표현이 아닐까.
 
  그래서일까. 선생은 책 제목 《메멘토 모리》를 마뜩잖게 여기는 듯했다. ‘너 두고 절대 나 안 죽어’가 제목이라 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하는 선생의 음성이 점점 거칠어졌다.
 
  “책 제목이 ‘메멘토 모리’가 아니라고 몇 번이고 말했잖아. ‘너 두고 절대 나 안 죽어’라는 말은 예수님이 한 말이야. 그래서 부활한 것이야.
 
  그리고 책 뒤표지에다 분명하게 썼잖아. 아이들이 신나게 놀다가도 불안해지면 어머니에게 가서 ‘엄마 죽지 마’, 그러면 엄마는 ‘너 두고 절대로 안 죽어’라고 말하잖아. 이게 책 제목이야.
 
  그래야 ‘메멘토 모리’를 넘어서는 것이고,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야. 참 큰일이네.
 
  그러니까, 내 얘기는… 메멘토 모리가 책 제목이 아니라니까….”
 
 
  2월 10일
 
  오늘은 이인화 교수와 함께 선생을 찾았다. 이 교수는 선생의 부탁으로 이어령 평전과 ‘디지로그’와 관련한 책 집필을 준비 중이었다. 이날 이 교수와 기자의 머리에 심어준 선생의 유언 같은 당부는 지면에 다 옮길 수 없다.
 
  우리는 선생의 건강을 걱정했다. 2~3일 전쯤 한 차례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고 측근이 전했다. 이후로 완전히 다리에 힘이 빠져서 지금은 스스로 일어서거나 몸을 움직일 수 없다고 했다. 측근은 “선생이 탈수 증상을 보이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거의 못 드세요. 알갱이 있는 것을 못 넘기시고 못 드시니까. 링거 일주일에 한 번 1000ml를 맞으시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물만 드신다고 보면 돼요. 못 드시니 배에서 항상 꼬르륵꼬르륵 소리가 나시는 겁니다. 배고플 때 나는 그 소리….”
 
  다소 그렁그렁해진 이인화 교수가 선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일곱 살 때 선생님을 처음 뵀으니 올해로 반세기가 됐어요. 대구 대명동 영남대에서, 지금은 영남공업전문대 건물에서 아버지 손을 잡고 뵈었습니다. 그때 《문학사상》을 창간하시고 1년 후인데 전국을 다니시면서 정기구독을 권하셨어요. 검은 뿔테 안경 때문에 얼굴에 하얀 철 가면을 쓴 것 같은 젊은 신사의 모습이… 그때 얼마나 젊으셨는지….”
 
  이 교수는 여러 차례 선생과의 면담과 취재를 거쳐 200자 원고지 700장 분량의 평전을 최근 완성했다고 한다.
 
 
  2월 17일
 
  이날 오후 20여 분 정도 선생과 만났다. 여전히 소파에 누워 있었다. 일주일 전 이인화 교수와 왔을 때보다 몸이 더 나빠 보였다.
 
  잠시 대화를 나누는데 목이 타는지 물을 찾았고 입술만 조금 축이는 정도로 마셨다. 젖은 거즈를 입에 대었다. 목이 쉬었으며 기력을 다해 말하는 듯했다.
 
  답답한지 거실 창문을 열라고 했다. 햇살이 제법 따가웠지만 바람은 차가웠다. 멀리 북악산 능선이 긴 허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북악산 팔각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자주 평창동 언덕을 오르내렸지만 맞은편 산을 응시한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우리는 숲의 숙영지라도 찾으려는 듯 북악산을 응시했다. 어느새 눈을 감은 선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지난 세기 전쟁의 유혈과 통곡, 이념의 광기와 무지가 몰아치던 시대에 진지한 통찰의 목소리를 내며 살았다. 권위를 내세운 세력의 이끌림이나 억지로 강요된, 어리석고 거창한 호언(豪言) 대신 양심과 지성의 목소리에 반응하며 생명과 평화를 존중하던 지성인이었다.
 
  알맹이 없고 상투적인 글과 말을 죽기보다 싫어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돌이킬 수 없는 운명적인 실수를 범하기 마련이지만 그는 그런 경우가 없었고, 구설에 오른 적도 없었다. 대신 좌와 우, 어느 편에 몸을 담지 않아 양쪽 모두에게 배척을 당했다. 외로웠다.
 
 
  ‘아, 나만 섬처럼 남았구나.’
 
  이런 일도 있었다. 지인이 10대 손자를 데리고 찾아왔다. 선생이 자신의 저서에다 사인을 해 줬는데 몇 장 들춰보다 말고 “할아버지, 글 잘 쓰시네요” 하더란다.
 
  책도 방송도 안 보는 아이여서 선생이 누군지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때 선생은 혼잣말처럼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아, 나만 섬처럼 남았구나.’
 
  그랬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그만 남기고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학계에서 이어령 사단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잠시 선생의 연대기적 흔적을 그려보았다.
 
  1956년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를 발표하며 논객으로 등장해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지향의 일본인》으로 한국 지성사에 일찌감치 금자탑을 세웠다.
 
  1967년 이화여대 강단에 선 후 학생들을 가르치며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벽을 넘어서’를 기치로 88서울올림픽의 개폐회식을 기획했고 초대 문화부 장관,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슬로건으로 IT 강국의 정신적 기반을 제시했으며 ‘디지로그 선언’으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문명 융합을 이끌었다. 80대에 들어선 ‘한국인 이야기’로 한국인의 문화 유전자를 분석했다.
 
  그런 거인이 뉘엿뉘엿 해가 지는 서편을 향해 이제는 졸리는 듯 눈을 감고 있었다.
 
 
  2월 23일
 
  오후 2시쯤 선생의 자택을 찾았다. 측근에 따르면 전날 호흡이 잠시 정지되었다고 했다. 한바탕 소동을 벌인 뒤 기적적으로 다시 소생했다는 것이다. 기자는 선생에게 “고비를 잘 넘기셨다. 생명의 봄이 오면 몸이 반응하여 좋아지실 것”이라고 말했다. 선생은 엷은 미소를 띠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다음 달에 대통령 선거가 있는데 혹시 당선자에게 당부의 말씀이 있으신지 조금 궁금합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정치와 관련해 묻거나 화제로 꺼낸 적이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선생이 조금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다고 느껴졌다. 질문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일까?
 
  “… 미국 대통령의 경우는 대개 변호사 출신들이야.”
 
  ― 맞습니다.
 
  “변호사는 위임자가….”
 
  ― 위임된 총잡이라고 하지요.
 
  “투표권자는 위임자야.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들의 옹호자야. 여(與)나 야(野)나.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리더를 선지자들이라 부르지.
 
  그 차이가 뭔지 알아야 합니다. 선지자와 위임받은 리더는 달라요. 예를 들면 지금 총을 가졌어. 강도가. 아주 흉악범이야. 이 사람을 죽이면 많은 이가 살 수 있어. 그런데 총에 맞아 병원에 왔어. 의사는 어떻게 해야 돼?”
 
  ― 그래도 의사라는 직분에 충실해야….
 
  “의사는 의사야. 수술을 해야 해. 환자는 고통받는 자야. 도와줘야 되느냐 안 도와줘야 되느냐? 도와주는 거야.”
 
 
  파뿌리 하나의 의미
 

  ― 그렇습니다.
 
  “아무리 잘못했어도 죽어가는 생명 앞에서는 살려야 해. 그게 크리스천의 정신이자 휴머니즘이고 다른 직업과 다른 거야. 내가 늘 얘기하는 파뿌리.… 파뿌리 하나야.”
 
  선생의 ‘파뿌리’ 비유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에피소드 중 하나다. 소설 속 완벽한 성인이라 칭송받던 조시마 장로가 죽는다. 성자는 죽어도 썩지 않는다고 믿었는데 그의 시체가 썩어 들었다. 그를 따르던 수도사 알료샤는 큰 절망에 빠진다. 그때 그루센카가 ‘하나님은 성자뿐 아니라 악한 자도 버리시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음은 《메멘토 모리》에 실린 선생의 육성이다.
 
  〈“나쁜 짓만 하던 사람이 길 가다 목마른 사람에게 파뿌리 하나를 뽑아줍니다. 그리고 지옥에 가니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 파뿌리 하나를 내려 지옥에서 구제해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자고 악인이고 다 포용하려고 해요. 인간이 끝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죠. 그런 깨달음을 얻고 알료샤가 다시 장로의 빈소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잠깐 졸게 되지요. 그때 꿈속에서 가나의 결혼식처럼 천국에 큰 잔치가 열린 겁니다. 보니까 조시마 장로도 있어서 “성자님, 그러면 그렇지 천국에 가셨네요!” 하고 기뻐하는데 장로가 “너도 빨리 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알료샤가 “저는 착한 일은 아무것도 한 일 없어 못 가요” 하고 말해요. 그걸 들은 장로가 뭐라고 했을까요? “여기 있는 사람들 다 파뿌리 하나야, 어서 와.”〉(30쪽)
 
  선생이 말한 ‘파뿌리 하나’의 당부는 자기편 지지자들만의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로 들렸다. 위임된 변호사형 리더가 아닌 그리스도교의 선지자가 되어, 누구에게나 ‘파뿌리 하나’를 건넬 수 있는, 건넬 줄 아는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부탁이었다.
 
 
  “잘 부탁할게. 기도 많이 부탁해”
 
  ― 앞으로 국가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이념의 갈등이 사라질까요?
 
  “(한반도가) 씨 파워[해양세력]와 랜드 파워[대륙세력]의 지정학적 ○○(목소리가 낮아 들리지 않았다.)인데 이게 코로나 때문에 더 심해졌어. 소셜라이즈화[사람들을 더 통제하게]됐다는 거지. 정부가 다 알아서 해야 한다든지 하는….”
 
  이 대목에 이르러 선생은 지치는 듯했다. 낮은 목소리가 어느덧 날카로워졌다. 거의 들리지 않아 문장으로 옮기는 데 의역이 필요했다.
 
  “이따만한 큰 나무 아래 사는 것은 좋은 게 아니야. 바람을 많이 타고…. 대나무가 웃어, 대나무가. ‘이 병신들아. 바람이 불면 난 휘어’. 이따만한 나무는 태풍에 쓰러져 버려. (덩치 큰) 주먹(나무)들을 보고 풀이 웃어. ‘덩치가 크면 뭘 해?’라고.
 
  1년생 초목들을 보라. 장엄한 새 생명일세.”
 
  선생이 말한 ‘큰 나무’가 정부의 방역독재를 비판하려는 의도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고쳐 물어볼 수 없었다. 이미 기력이 고갈한 상태였다. 기자가 듣기로는 ‘어린 초목’으로 상징되는 혹은 ‘파뿌리 하나’와 같은 생명, 다수 국민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말이 아닐까.
 
  기자는 선생에게 인사하고 다시 찾아뵙겠다며 일어섰다. 선생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 부탁할게. 기도 많이 부탁해.”
 
  그 말이 기자가 들은 선생의 마지막 말이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쓴 이어령의 추모시 ‘질경이 꽃’ 잔잔한 감동
‘독재와 독선, 역사의 두 수레바퀴에서 피어난 질경이 꽃’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2021.10.30>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가 쓴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조시(弔詩)가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이 교수는 노태우 정부 당시 신설된 문화부의 초대 장관(재임 1989년 12월~1991년 12월)을 지냈다.

자신도 병상에 있으나 직접 빈소를 찾은 이 교수는 유족들을 위로한 뒤 추모시 ‘영전에 바치는 질경이 꽃 하나의 의미’를 전했다고 한다.

이 교수는 “몸이 성치 않아서 옛날같이 글을 쓰지 못하고 컴퓨터 입력도 어려워 음성입력으로 쓰다 보니 부끄러운 글을 되풀이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 추모시는 대통령 유족들이 언론에 공개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영전에 바치는 질경이 꽃 하나의 의미

                               이어령


남들이 고인의 영전에
국화 한송이 바칠 때에
용서하세요. 질경이 꽃 하나
캐다 올리겠나이다.
하필 마찻길 바퀴자국난
굳은 땅 골라서 뿌리내리고
꽃 피운다하여 차화(車花)라고도
부르는 잡초입니다.
독재와 독선, 역사의
두 수레바퀴가 지나간 자국 밑에서
어렵게 피어난 질긴
질경이 꽃 모습을 그려봅니다.
남들이 서쪽으로 난
편하고 따듯한 길 찾아 다닐 때
북녘 차거운 바람 미끄러운
얼음 위에 오솔길 내시고
남들이 색깔이 다른 차일을
치고 잔칫상을 벌일 때
보통 사람과 함께
손 잡고 가자고 사립문 여시고
남들이 부국강병에 골몰하여
버려 둔 황야에
세든 문화의 집 따로
한 채 만들어 세우시고
이제 정상의 영욕을
역사의 길목에 묻고 가셨습니다.
어느 맑게 개인날 망각에서
깨어난 질경이 꽃 하나
남들이 모르는 참용기의 뜻,
참아라 용서하라 기다려라
낮은 음자리표 바람소리로
전하고 갈 것입니다.
  
이 교수는 고인을 ‘질경이 꽃’에 비유하며 ‘독재와 독선, 역사의/ 두 수레바퀴가 지나간 자국 밑에서/ 어렵게 피어난 질긴/ 질경이 꽃 모습’이라고 했다.

조시 끝자락에 ‘참용기’, 풀이하자면 ‘참아라 용서하라 기다려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말은 생전 노태우 대통령이 장관시절 이 교수에게 한 말이자, 평소 대통령의 좌우명이었다. 시중에서 노태우를 ‘물태우’라고 비난했지만 노 대통령은 자신의 신조가 ‘참용기’라면서 “참고, 용서하고,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이런 일이 있었다. 문화부 초대 장관 시절, 이어령 장관이 대통령 집무실을 찾아간 일이 있다. 1991년,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9월 17일, 한국시각 18일)을 앞둔 무렵의 일이다. 당시 우리 정부는 유엔의 관례에 따라 가입 축하 기념물을 선정해야 했다. 유엔에 전시·기증할 목적인데, 기념물을 준비하던 주무 부서는 외무부였다. 외무부는 기념물을 화려한 신라 금관의 레플리카로 정한 뒤 이미 대통령 재가까지 받았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이 장관이 문화부 차원에서 공식의견을 냈다. 조선 세종(1449) 때 지어진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의 원본을 확대한 복사본과 이를 인쇄한 당시의 활자를 재주조한 특수 전시물 제작을 제안한 것이다.

자칫 부서간 힘 겨루기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 장관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금속활자를 처음 만들어 쓴 나라요, 막강한 한자문화권에서도 독창적인 한글을 창제한 우리나라를 전 세계에 알려 대한민국 문화의 위상을 보여줄 수가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대통령 재가를 받은 사항을 번복할 수 없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답변이었기에 이 장관은 직접 대통령께 말씀드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독대 끝에 승낙을 받아냈다.

그때 노 대통령이 이 장관에게 말했다.
“참용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대답을 찾으려고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대통령은 “‘참아라’의 참, ‘용서하라’의 용, 그리고 ‘기다려라’의 기, 이것이 참용기이지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장관은 “죄짓다 들킨 사람처럼 가슴이 뜨끔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문화에 관한 대통령의 확고한 의지와 그에 대한 신뢰를 알고 있었기에 이미 재가까지 났던 결정을 뒤집을 수 있었다.

“나는 노태우 대통령과 지연이나 학연은 물론이요, 어떤 인맥도 닿는 데가 없다. 대선 때에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던 생면부지의 사람, 현실정치와는 담을 쌓고 지내온 사람, 대학 학과장조차 맡기 싫어하는 사람, 어쩌자고 그런 사람을 신설 문화부의 초대 장관 자리를 맡기실 생각을 하셨는가. 국무회의의 석상에서도 ‘이제 모든 장관은 물리적 힘이 아니라 문화적 접근을 통해 국민을 감동시키는 행정을 펴도록 하세요’라는 말로써 힘없고 가난한 신설 문화부에 추임새를 보낸 대통령이셨다.”

이 교수는 “이미 대통령께서는 먼저 내 수를 빤히 읽고 계셨고 나는 그 포석을 통해서 그분이 왜 문화부를 신설하려고 하셨는지 왜 1차 개각 때 장관 자리를 고사한 사람에게 다시 장관직을 맡기는 도량을 베푸셨는지 모든 의문이 풀렸다”고 했다.

이어령 교수는 1991년 12월 초대 문화부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대통령께서는 함께 임기를 마치자고 했지만, 당시의 정원식 총리에게 사의를 전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의 법령 통과를 끝으로 떠났다”고 한다.


다음은 1991년 9월 25일자 《조선일보》 1면에 실린 기사의 일부다.

<노태우 대통령은 24일 오전 11시 7분(한국시각 25일 0시 7분) 유엔 총회에 참석, 역사적인 기조연설을 통해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고 남북한 간에 신뢰구축 노력이 진전될 경우 재래식 무력의 감축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핵 문제에 대해서도 남북한 간의 협의를 추진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중략)
노 대통령은 기조 연설이 끝난 뒤 유엔본부 사무총장실로 케야르 사무총장을 면담하고 우리의 유엔가입 기념으로 <월인천강지곡>이 담긴 한국 초기 금속활자 모사품 등을 기증품으로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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