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땅 이야기- 한국인의 뒷모습, 붉은 산, 애국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기뻐서 죽사오매…
⊙ 일본 지식인 기무라 에이분과의 만남… ‘한국인은 위대한 사람’
⊙ “기차는 떠나간다 보슬비를 헤치며…”(情恨의 밤車 中)
⊙ “그때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나는 거의 잊어버렸어. 성경에도 있어요. 용서하라고”(제암리 학살 사건 생존 할머니)
⊙ 6·25 때 줄지어 질서 정연하게 피란하는 모습에 세계가 감탄
⊙ 김동인의 소설 〈붉은 산〉… ‘나’와 ‘삵’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도 그 노래 ‘애국가’
⊙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심훈의 ‘그날이 오면’ 中)
[ 월간조선, 김태완 기자, 2022년 11월호 ]
이어령 선생이 타계한 지 9개월이 되어간다. 선생은 생전(生前) 시리즈 ‘한국인 이야기’의 문패에다 ‘끝나지 않은’이란 수식어를 직접 붙였다. 생전 선생은 당신이 남긴 굵직한 저작물과 수많은 강연에서 언급한 ‘한국인 이야기’를 비록 당신이 떠나도 계속 이어가기를 희망하였고 관련 원고와 저서의 일부를 《월간조선》에 전하였다. 또 선생이 남긴 바탕 위에 편집자의 생각을 보태도 된다고 허락하였다. 아주 조심스럽게 선생이 남긴 큰 발자국을 따라 연재를 이어가고자 한다. 선생에게 누(累)가 되지 않기를 소망할 뿐이다.
# 한국인의 진짜 뒷모습은…
어렸을 때는 한국 사람의 진짜 뒷모습을 몰랐어요. ‘아! 그게 아니다, 내가 잘못 알았구나’라고 생각한 것은 내가 이화여대 교수가 된 뒤니까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2년)를 쓴 후예요.
1960년대 남진의 ‘가슴 아프게’라는 노래가 나오고, 이미자 노래가 일본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일본에 한류 붐이 막 일려고 할 때였어요. 그때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일본에 기무라 에이분(木村榮文·1935~2011년)이라는 아주 양심적인 지식인이 있었어요. 상도 많이 타고 다큐멘터리도 아주 잘 찍는 사람이었지요.
그분이 1970년대 초반에 일본 RTV에서 〈봉선화 필 때〉라는 특집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이 기무라 에이분은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고 있을 때 알던 한국인 친구들이 더러 있었어요. 그래서 그 한국인 친구들이 그 시절, 얼마나 가슴 아프게 지냈는가를 현장 취재하러 오면서 나를 만난 거예요. 그때 취재 대상이 가수 이미자, 나, 그리고 1919년 4월의 비극적인 수원 제암리 사건 때 살아남은 생존자 할머니였어요.
내 책 《흙 속에 저 바람 속에》가 전 세계에서 번역될 때였는데 이웃 일본에서는 《恨の文化論(한의 문화론)》으로 소개되었지요. 당시로선 우리나라를 최초로 다룬 ‘한국문화론’이었어요. 그 무렵, 우리는 일본이 그렇게 다들 잘났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인데, 그는 한국에 와서 뜻밖에도 ‘한국인이 위대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나를 찾아온 겁니다.
나 역시 ‘한국인의 뒷모습’(《월간조선》 9월호, 10월호 〈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⑨ ⑩편 참조)을 떠올리며 다시 말해, 지프의 경적 소리에 놀란 노부부가 서로 손을 꼭 쥐고 뒤뚱거리며 곧장 앞으로만 뛰어 달아나는 모습만 생각한 거예요. 그 모습이 떠올라 한국인은 그냥 그렇게 쫓겨 다니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참 불쌍한 한국인, 지지리도 못났다고 생각했죠.
우리 민족이 중국을 지배하지 않은 이유
고백하자면, 남들은 다른 나라 쳐들어가서 온갖 것을 다 빼앗아 오는데, 물론 그게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정복하는 사람이 되지 왜 맨날 정복당하고 빼앗기는가, 하고 답답해했었어요.
중국을 보세요. 원(元)나라를 세운 몽고족, 금(金)나라를 세운 여진족, 청(淸)나라를 세운 만주족 모두 중국 한족(漢族)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와 같은 변방 오랑캐거든요. 그 사람들 중에 중국 전역을 한 번쯤 지배해보지 않은 민족이 없어요. 오직 우리 한(韓)민족만이 중국을 지배해보지 못했죠.
그런데 요즘 보세요. 중국을 지배했던 변방 민족 중 자민족의 국가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어요. 다른 민족은 중국 본토에 세웠던 나라가 망하는 것과 동시에 사라졌거든요. 우리가 중국을 지배하지 않았던 것도 다 생각이 있었던 거죠.
기무라 에이분의 다큐멘터리는 한국의 여학교 학생들이 ‘울 밑에 선 봉선화’를 노래하는 것으로 시작해요. 왜 이 노래였을까요? 1920년 만든 홍난파 작곡, 김형준 작사의 이 노래에는 한국 가곡의 효시, 조선 독립을 애타게 기다리던 백성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습니다.
다큐에는 또 나의 인터뷰와 함께 기차역 장면이 삽입되었죠. 그 인터뷰를 하면서 노래도 불렀어요. ‘정한(情恨)의 밤차(車)’라는 곡인데, 1935년에 발표된 노래예요. 나는 노래를 못하는 사람인데, 이 노래는 잘 불러요. 노래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1. 기차는 떠나간다 보슬비를 헤치며
정든 땅 뒤에 두고 떠나는 님이여.
2. 간다고 아주 가며 아주 간들 잊으랴.
밤마다 꿈길 속에 울면서 살아요.
3. 님이여 술을 들어 아픈 맘을 달래자.
공수래공수거가 인생이 아니냐.〉
어릴 때의 기차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기차와 달랐어요. 나는 시골에서 자랐는데, 기차를 타고 우리 고향에 도착했던 사람들은 모두 늑대와 같았어요. 우리 형을 빼앗아가고 우리 어머니나 누이를 능욕한 짐승 같은 사람들이었죠. 기차를 타고 도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 사람들이었어요. 그러니 기차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가 없지요. 또 기차를 타고 가는 조선인들은 죄다 고향을 등지거나 고향을 떠나는, 아니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었어요.
소작 짓던 땅을 빼앗기고, 도저히 조선 땅에서는 먹고살 길이 없어서 저 용정이니 만주, 간도 땅으로 떠나는 사람들…. 그리고 동남아로 징용, 학도병으로 끌려간 사람들….
그래서 한국인의 노래 속에는 기차 타고 떠나는 사람들의 한(恨)이 있어요. 일본에서는 원(怨)이나 한(恨)을 구별해서 쓰지 않지만, 일본 사람들은 원수를 갚는 원이고, 우리는 한을 푸는 한을 써요. 다르죠.
# ‘기차는 떠나간다’ 노래에 얽힌 기억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에 담긴 ‘노부부’는 지프에 치일 뻔한 거잖아요. 그러나 그 이전에는 무시무시한 기차가 있었던 거지요. 근대의 상징이 기차라고 해도 한국인에게 기차는 반갑고 고마운 존재가 아닙니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 누이, 우리 형, 우리 아버지가 정신대, 강제징병, 징용으로 끌려갈 때 쓰인, 무시무시한 굉음을 내는 검은색 쇳덩어리였어요. 그래서 제가 ‘정한의 밤차’라는 노래만 유독 잘 부르게 되었어요. 다른 노래는 하나도 못 해요.
옛날에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에 모이는 일이 많았어요. 그렇게 바깥에서 손님이 온다든지, 귀한 손님이 오면 어머니나 아버지가 아이들을 불렀어요.
“얘, 아무개 오라고 그래라.”
그러면 제가 가는 거예요. 사랑방에 모인 손님들 앞에. 형은 숫기가 없고, 나는 아직 어려서 뭘 모를 때니까 어른들이 뭘 시키면 부끄럼 타지 않고 그냥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형님은 연출을 맡고 연기는 내가 한 거죠. 형이 “여기서는 좀 구슬프게 불러라” “여기서는 더 애절하게 해줘야지” “그냥 하면 안 된다”, 이렇게 지도하는 걸 받고 어른들 앞에 나가서 노래를 불렀어요.
지금 생각하니까 그분들은 내 노래를 듣고 싶었던 게 아니에요. 그때 그 사랑방에 모였던 사람들은 다들 맘이 안 좋고 슬프니까 김동인(金東仁·1900~1951년)의 소설 〈붉은 산〉에서 ‘삵’이 죽어가면서 애국가를 불러달라고 한 것처럼 어린애가 부르는 ‘정한의 밤차’(박영호 작사 이기영 작곡)를 듣고 싶었던 거죠.
그 어린애가 부르는 “기차는 떠나간다 보슬비를 헤치고” 하는, 우리의 그 슬프고 한 많은 노래를 듣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거예요. 어린 내가 그 노래를 하면 듣던 사람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고, 한숨 쉬는 사람도 있고, 아까까지는 침통해하던 사람이 또 막 박수치면서 “야! 너 잘 부른다” 하니까 우쭐했어요.
게다가 용돈도 줍니다. 돈 몇 푼씩을 쥐여줘요. 어렸을 때는 그 재미에 어른들 앞에서 그 노래를 제법 자주 불렀지요.
# 기찻길의 주먹감자
그 노랫말을 보면 부슬비를 헤치고 기차가 떠나가는데, 기차가 떠날 때는 왜 밤낮 비가 오는 걸까요? 정한의 기차, 아니 ‘정한의 밤차’에서만 그런 게 아니에요. 1980년대에 가수 김수희가 불러서 지금까지도 전 국민 애창곡인 ‘남행열차’도 ‘비 내리는 호남선~’이라고 시작하지요. 왜 우리나라는 기차가 떠날 때마다 비가 올까요? 비가 와야만 기차가 달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렸을 때는 그 노래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어른들이 좋아하니까 그냥 불렀고, 사실 초등학생이 되어서도 그 뜻이 뭔지는 몰랐어요. 그런데 뭔지도 모르면서 우리가 하교할 때마다 무슨 의식처럼 하던 일이 또 있어요.
하교하는 길에는 철길이 있었어요. 우리 동네에 사는 아이들은 전부 그 철길을 따라 등하교를 했어요. 다른 길에서는 안 그러는데, 그 철길을 걸을 때는 다들 장난도 안 치고 말도 안 하고 심각하게 걸어요. 기차를 기다리느라. 기차는 거의 정시에 오니까, 아이들이 시계는 없지만 느낌으로 그즈음이 되면 다들 기찻길 옆에 일렬로 늘어섰어요. 기차 지나가는 걸 보려고요. 그러면 저쪽에서부터 기차가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거죠.
보통 아이들의 놀이에는 리더가 있어요. 그땐 남자아이들이 주로 전쟁놀이를 할 때니까요. 그런데 기차를 기다릴 때는 리더도 없어요. 그냥 다들 서서 심각한 표정으로 기차만 보고 있다가 기차가 자기 앞으로 오면 욕을 해요. 주먹감자를 먹이는 거죠. 그건 일종의 의식이었어요. 기차에다 대고 하는 의식…. 아이들끼리 서로 어쩌는지 쳐다보지도 않아요, 기차를 보느라.
내 누이를 뺏어간 기차, 면소(面所)까지 와서 누구를 잡아간 기차. 아이들이 그 기차에 대고 주먹감자를 먹이면서 “야! 이 새끼들아” 하고 욕을 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상스럽게 그런 욕을 했다고요. 그 기차가 얼마나 많은 분노를 내려다 놓고 얼마나 많은 슬픔을 싣고 갔으면 그랬을까요. 어린 아이들이 가본 적 없는, 말로만 들은 저 만주 벌판으로 쪽박 찬 우리 아버지·어머니, 아저씨·아주머니를 실어 나르던 기차를 향해 오죽했으면 그랬겠어요? 기차의 의미도 알지 못하면서 철길에 서서 매일같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어때요. 요즘 아이들은 기차가 지나가든 말든 관심도 없죠? 아주 어린 아이들은 좋아서 박수치고. 이게 우리 역사의 변화입니다. 참 웃음과 눈물이 뒤범벅되던 시절의 사연인데 지금 아이들은 아무것도 몰라요.
# 기차와 恨의 정서
그런데 요즘 기차, KTX나 SRT, ITX-새마을호는 너무 쏜살같이 달려요. 완행열차도 있어야 합니다. 비 내리는 기찻길을 느리게 달리는 완행열차…. 요즘은 그 기차의 정서가 다 사라지고 빠른 이동 수단으로만 남았어요. 유행가 가락처럼 ‘비 내리는 호남선 완행열차에~’ 하는 슬픔, 한과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 한을 잊고 있어요. 한국인은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한을 푸는 민족입니다.
예를 들어 너무 가난해서 대학에 못 갔어요. 가난의 이유는 누구누구 때문에 우리 땅을 빼앗기고, 그래서 가난해진 거라고 칩시다. 커서 복수를 위해 그 사람을 죽이거나 막 겁박을 해요. 그럼 원수를 갚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내가 대학에 가집니까? 아니잖아요. 나를 대학에 못 가게 만들었다고 그 사람을 나쁘게 대하는 건 그저 단순한 화풀이밖에 안 됩니다. 한 맺힌 근본은 내 안에 덩그러니남아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열심히 해서 대학에 가요. 그러면 원수는 못 갚았지만 한은 풀잖아요.
우리 민족의 한, 분단의 한, 역사의 한을 푼다는 것은 어느 사람을 죽이고, 중국과 싸워 이기고 일본과 싸워 이기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복수를 했다고 한들 우리의 한은 그대로 남아요.
기무라 에이분이 나를 만나고, 그다음으로 초기 한류(韓流) 붐을 일으킨 이미자를 만나고,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제암리 사건 때 살아남은 할머니였어요.
그때의 사건에 대해 묻자,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해요.
“그때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나는 거의 잊어버렸어. 이제 생각도 안 나. 한밤중에 가끔 생각이 나긴 해요. 그러나 다 지난 일 아닙니까. 성경에도 있어요. 용서하라고.”
그리고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장면은 그 할머니의 뒷모습이에요. 뒷짐 지고, 시골의 호젓한 오솔길을 걸어가는 뒷모습은 당당했어요.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 않아도 그 뒷모습이 이렇게 말하는 거죠.
‘모든 것을 잃고 아들도 죽었지만 일곱 손자를 거느리고 사는 지금, 나는 괜찮아. 원수를 사랑하라고 성경에도 그랬어. 가끔 생각은 나지만 용서할 거야.’
그 뒷모습이 어떻게 가축처럼 도망가는 모습이겠어요? 그 뒷모습에서 쫓겨 가던 슬픔이 아니라 그 쫓김 속에서도 인간으로서 어떤 침략자보다 강한 한국인의 생명력을 본 겁니다.
# 임진왜란 때의 조선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수록된 〈김씨열체〉라는 그림에서는 박신간의 부인인 김씨가 임란 당시 노모를 업고 뛰어가고 있다.
광해군 5년(1613년)에 편찬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수록된 〈김씨열체(金氏裂體)〉라는 그림을 본 적이 있나요? 곡산군 사람이자 박신간(朴信幹)의 부인인 김씨는 스무 살 때 임진왜란을 만나 그 어머니를 업고 피란을 가다 왜적을 만나 목숨을 잃었습니다.
왜구에게 쫓겨 도망가면서도 노부모를 업고 뛰었다고 해요. 지금 왜구가 쳐들어오고 내 목숨이 다급한 상황인데도, 걷지도 못하고 살날이 얼마 남지도 않은 부모를 버리지 않은 거예요. 그걸 보고 일본인들이 ‘우리는 전쟁이 났을 때 노부모를 업고 뛸 사람이 있을까’ 하고 감탄한 거죠. 그래서 임진왜란 때 쳐들어왔던 장수들 중에 “야만인이 문화의 국가를 쳤구나, 나는 모든 걸 버리겠다” 하고 부하를 데리고 귀순해서 한국의 장군으로서 일본과 맞선 사람도 있어요.
수원 제암리 사건 때 스물여덟 명이 죽었어요. 그 교회에 없던 사람들도 찾아가서 죽여 30명이 죽어요.
그때 할머니가 정말 기가 막힌 말을 해요.
“사람은 죽여도 집은 태우지 마라.”
놀라운 이야기지 않아요? 그런데 그 일본군은 사람도 죽이고 민가도 다 태웠어요. 그럼에도 그 할머니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죠.
“나한테 묻지 마, 나는 다 잊어버렸어.”
제암리는 기독교 교세가 아주 강한 곳이니까 이 할머니도 기독교인이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분의 속마음까지 보태어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어. 그러니 나는 너희를 용서할 거야. 슬프지도 않아. 나한테는 손자가 있어. 씨가 있어. 너희가 씨를 말려? 어림도 없는 소리 하지 마. 내 아들은 죽었지만 나는 손자들 보는 재미로 살아. 가끔 생각나지만 나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
그러곤 의연하게 뒷짐 지고 싹 사라지던, 기무라 에이분의 다큐 속 당당한 뒷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아요. 그 할머니, 한국의 여성들은 가축처럼 쫓겨 가지 않았어요. 인간의 모습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답고 강한 사람으로 쫓겨 갔기에 그 씨, 그 손자들이 이젠 더는 쫓기지 않고 살 수 있게 된 것이죠.
# 질서 정연하게 피란 가는 사람들
미 국무성에 보관되어 있는 한 장의 사진이 있어요.
세상 어느 나라, 어느 전쟁에서 피란민이 이렇게 질서 정연하게 가는 거 본 적 있어요? 옆의 군대는 전장을 찾아 북상하는 유엔 군대고, 그 옆은 길을 막지 않으려고 리더도 없는 피란민이,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일렬로 질서 정연하게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는 거예요. 이건 쫓기는 모습이 아니에요.
세상에 이런 모습이 어디 있어요? 다른 곳은 서로 도망가느라 길을 막아서 군대가 전장에 투입되지 못해요. 다들 탱크가 가는 길 앞을 막아서 아수라장이 되는 거죠.
6·25 때 이 기적 같은 사진 한 장에 전 세계 사람들이 놀랍니다. ‘한국인이 대단한 민족이구나!’ 감탄했죠. 저 피란민 무리에 무슨 리더가 있었겠어요. 남편 잃고 자식 잃은 여자들이 대부분인데, 모두 경황이 없을 텐데, 젖먹이 아이를 등에 업고, 짐 보퉁이는 머리에 이고, 정처도 없어요. 그저 살려고 남쪽으로 갈 뿐, 기다리는 사람도 반기는 사람도 없는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질서 정연하고 의연한 거예요.
당시를 떠올려봐요. 한강 다리는 이미 폭파되어 건널 수 없잖아요. 나룻배 하나를 얻어 타고 겨우 한강을 건너 걷기 시작한 겁니다. 서로가 이 살육의 전쟁을 겪으며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했겠지만 그렇게 걸어갔던 겁니다. 긴긴 여름 해를 따라 저녁에는 모닥불 옆에 누워 자기도 하며 걸어갔던 거예요.
이 사진 한 장이 한국은 야만의 국가, 쫓겨 다니는 야만의 국가가 아니라고 알려준 거죠. 서구 사람들, 아프리카인을 동물 취급하지 사람 취급을 했어요? 노예로 만들어 동물처럼 부리고. 그러나 여긴 아니라는 거죠.
‘아프리카 사람들과 똑같이 가난해도 여긴 아니다! 봐라, 짐승이 언제 산불 날 때 이렇게 일렬로 가는 걸 봤냐?’
이게 바로 한국인의 뒷모습인 겁니다.
한국 근대문학 개척자 김동인의 아들 김광명(金光明·한양대 의대 명예교수)씨의 육성을 들은 적이 있어요.
김광명이 신경외과 의사라는 직업을 택한 이유는 말년의 아버지가 앓던 중풍과 관련이 있다고 하지요. 6·25가 터지자 가족이 아버지 김동인을 업고 피란을 갔어요. 왕십리에서 응봉동 고개를 넘어 한강까지 가서 밤을 꼬박 새워 줄을 섰습니다. 이튿날 아침 나룻배를 타려고요. 놀랍지 않아요? 인민군이 탱크를 앞세워 밀려드는데 나룻배를 타려고 밤새 줄을 섰다고 하니까요. 다행히 나룻배에 가족 모두가 올랐는데 아버지 김동인은 몸을 가눌 수가 없었대요. 할 수 없이 가족 모두가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듬해 다시 1·4후퇴 때 피란을 갔어요. 김광명의 증언은 이랬어요.
“신당동, 약수동을 거쳐 한남동 쪽을 향하다 보니 피란민 수가 상당히 많았어요. 길 양쪽으로 국군이 새끼줄을 쳐놓아 새끼줄을 넘어 흑석동(김동인의 딸이 출가한 집)으로 갈 수도 없었고 밀려드는 인파 탓에 뒤돌아 서울로 되돌아갈 수 있는 상황도 안 됐어요. 그렇게 새끼줄 안쪽에서 걸어 첫날 도착한 곳이 경기도 수원이었습니다.”
새끼줄이 있어 하루 만에 경기도 수원까지 피란 갈 수 있었던 겁니다.
# 김동인의 〈붉은 산〉, 흙, 황토의 의미
한국인의 이런 의연한 모습은 사진으로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으로도 형상화되어 있어요.
소설 〈붉은 산〉은 1932년 김동인이 발표한 단편인데, 일제 강점하니까 차마 일본이 지배하고 있는 한반도를 배경으로는 말을 못 하고 만주로 무대를 옮겨서 쓴 소설이에요. 대개 만주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사는데, 만주로 이주한 한국인들은 한국인들끼리 모인 마을을 만들어서 살았어요.
그 조선인 마을에 의사인 ‘나[余]’가 들어가게 됩니다. 이 소설에서 ‘나’는 화자(話者)이면서 관찰자예요. 진짜 주인공은 이 마을에서 나가 만나게 되는 ‘삵’이라는 별명의 정익호입니다. 멀쩡한 이름을 두고, ‘삵’, 그러니까 거친 육식동물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주인공의 성격은 별명 그대로입니다. 생긴 것도 표독스러운 데다가 투전에 싸움으로도 모자라 부녀자 희롱까지 더해지니 이 조선인 마을에서는 골머리가 아픈 거죠. 그렇다고 한 동포를 차마 내치지도 못하고요. 이 ‘삵’에 대한 이야기가 쭉 이어집니다.
만주의 한국인 마을에 모여 살던 사람들은 모두 한국에서 살지 못하고 쫓겨 온 사람들이죠. 조선의 내 땅을 빼앗기고 소작권도 잃어 먹고살 길이 막막하니까 만주까지 들어가 남의 땅 부쳐 먹고 사는 거예요. 얼마나 비참한 삶이겠습니까. 지주는 밤낮 왜 소출이 이거밖에 안 되냐, 너 어디에 감춰놓은 거 아니냐 윽박지르며 때리고 소작인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그 소출을 지키는 그런 관계였어요. 그 불쌍한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곳에서 남 해코지나 하고 사는 ‘삵’은 또 모두에게 얼마나 미움의 대상이겠어요. 불쌍한 한국인끼리 왜 저리 괴롭히나 하겠지요.
풍토병 연구를 위해 그곳까지 간 의사인 ‘나’는 사람들에게 들어 이런 것을 알게 되는 거죠. 그러던 어느 날 누가 ‘나’를 불러서 급히 가보니, 송노인이라는 한국인 소작농이 소출이 적다는 이유로 만주인 지주에게 맞아 다 죽게 되어 나귀에 실려 온 거예요.
실제로 나귀에서 내리는 순간 절명하고 말죠. 그런데도 누구 하나 그 억울한 죽음에 대해 지주에게 항의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힘이 없으니까. 저쪽은 지주들이고, 주변에 사람도 많은 데다 제 나라 제 땅이고 이쪽은 땅도 없고, 자기 몸 하나 지켜줄 나라도 없는 쫓겨 온 소작농이잖아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화자인 ‘나’, 의사도 너무너무 화가 나고 분하고 서러워도 어디에 가서 호소할 데도 보호해줄 데도 없으니 참을 수밖에요. 그런데 그 말썽꾼인 ‘삵’이, 아무도 나서지 않는데 말 한 마디 없이 어디로 사라져 버려요. 혼자서 만주인 지주네 집에 쳐들어간 거예요. ‘삵’이 아무리 깡패고, 한국인 마을에서는 싸움꾼이라고 한들, 싸움이 됐겠어요? 중과부적(衆寡不敵)이죠. 결국 마지막엔 죽도록 맞아서 한국인 마을로 돌아오는데 집까지 가지도 못하고 마을 입구에서 그냥 쓰러져 버려요.
그래서 사람들은 또 ‘나’를 불러요. 소설 〈붉은 산〉의 마지막 장면은 이 삵의 임종 장면입니다.
〈“선생님 노래를 불러주세요. 마지막 소원… 노래를 해주세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여는 머리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여의 입에서는 창가가 흘러나왔다. 여는 고즈넉이 불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고즈넉이 부르는 여의 창가 소리에 뒤에 둘러섰던 다른 사람의 입에서도 숭엄한 코러스가 울리어 나왔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광막한 겨울의 만주벌 한편 구석에서는 밥버러지 익호의 죽음을 조상하는 숭엄한 노래가 차차 크게 엄숙하게 울리었다. 그 가운데 익호의 몸은 점점 식어갔다.〉
‘삵’이 그렇게 사람들에게 푸대접을 받고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지만, 사실은 의협심이 강했던 사람인 거예요. 늘 망나니처럼 자기 동포들을 괴롭혔지만, 또 막상 자기 동포가 외부의 사람에게 핍박을 당했을 땐 죽은 사람 복수를 하기 위해 나서는 그런 사람인 거죠.
그 ‘삵’이 임종하며 보는 것이 붉은 산과 흰 옷의 환상이에요. 그리고 마지막 소원은 노래를 불러달라는 거였죠. ‘애국가’를. 안익태(安益泰·1906~1965년) 선생이 ‘한국환상곡’을 작곡한 것이 1936년 독일 베를린에서였으니까, 이 소설 발표 당시에 사람들이 불렀던 애국가는 스코틀랜드의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곡조에 맞춘 창가였을 거예요.
죽어가는 ‘삵’을 앞에 두고, 또는 삵의 머리를 끌어안고, ‘나’는 노래를 하는 거죠. “동해물과 백두산이…” 그러자 ‘나’와 ‘삵’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도 그 노래가 나와요. 참으로 장엄한 코러스 아니었겠습니까?
디아스포라, 望鄕歌…
요즘 한국에서 행사할 때 ‘애국가’를 잘 안 불러요. 대개 애국가 제창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죠. 그런데 가끔 올림픽 같은 국제경기에서 1등 해서 시상식 때 태극기가 게양되면서 “동해물과 백두산이…”, 이 곡조가 나오면 눈물이 핑 돌아요. 왠지 마음이 찡해지죠.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 메달을 따기까지 자기의 고생을 생각하며 우는 경우가 많겠지만 우리는 그냥 태극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동해물과 백두산이…” 하는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서럽고 가슴이 북받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삵’이, 그 장엄한 코러스를 들으면서 죽어갈 때, 마지막으로 본 것이 무엇이었어요? 붉은 산이죠. 푸른 산도 아니에요. 붉은 황토 흙 산. 그리고 흰 옷 입은 사람들. 그러니까 만주 땅까지 쫓겨 와가지고 겉으로는 그 개망나니 짓을 했지만 가슴속에는 늘 떠나온 고향이 있었던 거죠.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가 이 “동해물과 백두산이…”예요. 고향에서 쫓겨나 만주까지 온 농민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떠나온 독립군도, 심지어 일제에 의해 전 세계로 노예처럼 팔려간 사람들도 이 노래를 불렀어요.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노래는 ‘애국가’라기보다 나라를 잃은 사람들의 ‘디아스포라(diaspora)’, 고향을 잃은 사람들의 망향가(望鄕歌)인 거죠. 땅을 그리워하며 불렀던 노래예요.
사람들이 황토방에 가는 이유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할 때의 그 흙인데 그것도 그냥 흙이 아니고 황토 흙이에요, 황토 흙! 이 황토 흙이라는 게 참 묘해요.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불모의 땅이 황토 흙인데 ‘황톳길’ 그러면 마음이 찡해지거든요. 황토라는 말만으로도 말이죠. 뒤에서 말하겠지만, 그래서 지금 사람들이 황토방을 가는 거예요. DNA가 남아 있어서 그래요. 황토방이 바로 그 붉은 산이에요.
‘삵’이 죽어가는 순간에 그리워하며 환상으로 본 것은 화려한 도시, 풍요한 감나무·대추나무, 기름진 황금들판이 아니라 그 메마르고 황폐한 붉은 산이었어요. 이중섭(李仲燮·1916~1956년)이 그린 듯한 그런 붉은 산. 거기에 흰 옷 입은 고향 이웃들이 보입니다. 만주벌판 그 황량한 땅에서 환상으로 보는 고향의 붉은 산과 흰 옷 입은 사람들….
‘삵’의 마지막 소원에 따라 사람들은 노래를 불러요. 힘없어서 몸을 사리기만 했던 사람들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고 말이죠. 그야말로 장엄한 코러스입니다. 모두의 마음을 움직이고, 두려움을 잊게 만든 노래잖아요.
지금 우리는 이 노래가 아무렇지도 않고, 큰 감동도 없지만 어디에서 어느 때에 부르는 것인가에 따라 똑같은 노래인데 그렇게 다르죠. 이게 결국 디아스포라, 약소민족으로 고향을 상실하고 쫓겨 온 사람끼리 남에게 받은 핍박과 설움을 서로 위로할 수밖에 없을 때, 그 순간에 마지막으로 부르는 노래가 ‘애국가’예요. 이런 것을 생각하면 감히 ‘애국가’를 생략하자는 말이 안 나와요. 생각해보세요.
한때 ‘애국가’는 잘못 부르면 잡혀가는 노래였어요. 누구도 감히 드러내 놓고 가르쳐준다거나 하지 못해서 겨우, 겨우 아버지가 아들에게 집 안에서만 몰래 가르쳐주고, 그 아들이 또 친구에게 몰래 가르쳐주고 하면서 번져갔을 거예요. 가사를 종이에 인쇄하거나 써서 보여준다거나 하는 건 상상도 못 하는 상황에서 뜬소문처럼 번져갔을 노래인데, 1930년대의 〈붉은 산〉에 정확하게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가사가 나옵니다. 기가 막히지 않아요?
# ‘애국가’ 이야기- 고통스러운 영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우리가 무심코 부르지만 가사를 한번 보세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니요? 동해물이 다 말라 없어지고 백두산이 다 닳아 없어지는 건 과학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이건 영원(永遠)을 말하는 거죠.
그런데 그 영원이 행복한 영원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영원이에요. 뭔가가 생성하고 커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마르고 마멸되는 부정적인 영원이죠. 본디 영원이라는 것은 꿈과 희망을 말할 때 쓰는 말이지만 실제로 행복할 때는 꿈과 희망을 말하지 않아요.
한국 불교에서는 ‘옥으로 새긴 연꽃 봉오리가 진짜 꽃이 되어 피어나듯이’라는 비유를 많이 씁니다. 돌이 어떻게 꽃이 되겠어요?
한국 사람은 참 현실적인 사람들이에요. 어느 나라든 관용구를 보면 사는 게 먼저고 죽는 것이 뒤에 오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입니다. 죽는 게 앞서고 사는 게 뒤에 오죠. ‘죽기 아니면 살기’라고 하지 ‘살기 아니면 죽기’라고 하지 않잖아요. 무슨 일을 할 때도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하라’고 하지 ‘살기 죽기로 열심히 하라’고 해요? ‘죽으나 사나’라고 하지 ‘사나 죽으나’ 안 그러잖아요. 그런데 셰익스피어는 《햄릿》에서 이렇게 썼잖아요.
“To be or not to be.”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만약 연극할 때 대사를 이렇게 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한국말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한국어로 번역할 때는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해야 맞죠.
한국 사람들의 이런 관용구를 가만히 보세요. 앞에 좋은 게 오고 뒤에 나쁜 게 오면 결론은 뭐가 되겠어요? 나쁜 거죠. 그런데 앞에 나쁜 게 오고 뒤에 좋은 게 오면 죽음에서 삶으로 오는 게 되잖아요. 삶이 오고 죽음이 오는 것보다는 죽음 뒤에 삶이 오는 것이 좋지요.
그래서 서양 사람들의 ‘trial and error’, 즉 시행착오(試行錯誤)라고 하는데, 심리학자들이 이걸 ‘착오시행’으로 바꾸자고 해요. 시행(試行)하고 착오(錯誤)했다면 그것은 네거티브예요. 착오로 끝났을 뿐 아무것도 얻지 못했으니까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도 사실 아무 생각 없이 보면 지지리도 못난 말이잖아요. 영원에 빗댈 말이 얼마나 많아요. 그것들을 다 버려두고 동해물이 마르고 백두산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영원하려면 그 영원이 얼마나 힘들고 고되겠어요. 그런데 그게 현실이에요.
영원이라는 건 없어요. 또 동해물이 마르고 백두산이 닳아 없어지는 건 몇억 겁[億千萬劫]이 지나도 불가능해요. 냇물이 마르고 뒷동산이 없어지는 건 가능해요. 그러나 동해물과 백두산은 안 되죠. 불가능한 영원을 현실적인 불가능으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 그날이 오면, 인경을 들이받아
그래서 나는 심훈(沈熏·1901~ 1936년) 선생의 ‘그날이 오면’을 보면 참 가슴이 아파요. 해방의 그날이 얼마나 기쁜 날입니까. 떡도 해 먹고 막 춤도 추고 그래야 하는데 글쎄 머리로 인경(人定)을 들이받아 피가 흐르고 몸의 가죽을 벗겨서 북을 만들어 치고 싶다니요. 인경은 조선 시대에 통행금지를 알리거나 해제하기 위하여 치던 종을 뜻합니다. 세상에 왜 그 기쁜 날에 머리를 들이받고 자기 가죽을 벗긴답니까?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치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올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걸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그 기쁜 날은 기쁨으로써 더 많은 것을 원하지도 않게 되는 그런 날인 거예요. 그 지독한 고통 속에서 설마 그날이 오랴. 그날이 오면 나 죽어도 좋다는 말인 거죠. 한국 사람이 죽음을 함부로 생각해서 죽음을 쓰는 것이 아니라 “죽어도 좋아, 이 세상에는 죽음보다도 강한 게 있어”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내가 살을 찢어서 북을 만들어도 신나는 게 있어, 그게 그날이야.”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지요. “세상에 그날이 왔으면 살아야지 왜 굳이 사람 가죽을 벗겨가지고 북을 만들어 친다니. 아이고 끔찍해라. 이런 메조키스트가 어딨냐”고 말하는 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거예요.
여자들이 가장 사랑할 때 역설적으로 “죽고 싶어”라고 말해요. “오빠, 나 죽고 싶어” 그러는 건 그 오빨 그만큼 크게 사랑한다는 얘기예요. 내 마음을 강조하기 위한 최상의 말이 죽음이에요. 우리가 또 뭔가를 절대로 반대할 때 흔히 쓰는 관용구로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라는 말도 쓰이잖아요. 눈에 흙이 들어간다는 게 바로 죽음을 뜻합니다.
# 흙의 중요성
3년 전 대형 산불이 발생했던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성천리 일대 야산. 1960~70년대 산림 녹화 이전 우리나라 산은 대개 붉은 산이자 민둥산이었다.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으세요? 흙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붉은 산. 그 흙을 빼앗긴 거예요. 내 땅을 빼앗긴 거죠. 그 흙을, 고향의 흙을 잃으면 ‘삵’처럼 환상에서밖에 보지 못해요. 그것도 초록이 무성한 풍요한 산이 아니고 붉은 황톳길처럼 붉은 산. 그것을 토포필리아(Topophilia), 혹은 장소애(場所愛)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땅의 8할이 산이에요. 과거엔 헐벗은 붉은 산, 민둥산이 대부분이었죠. 그런데도 우리는 ‘금수강산 삼천리’라고 했어요. 그걸 ‘진짜 금수강산(錦繡江山) 보지도 못했나 보다’고 어처구니없어 할 게 아니에요. 메마를수록, 붉은 산일수록 애정이 가는 겁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부모의 살림이 넉넉하고 건강하면 자식들이 부모 걱정을 안 해요. 사랑도 없죠, 나 살기 바쁜데.
그런데 그 부모가 가난하게 살면 그 어린애가 효도를 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조국도 그래요. 우리 조국이 나한테 뭘 해줄 만큼 넉넉하고 잘살면 나는 내가 더 잘살 수 있는 곳으로 이민 가서 조국 잊고 편안하게 잘살 수 있어요. 남편도 잘나야 이혼하는 거죠. 지지리 못난 남편은 버리지도 못해요. 사람이 그래요.
내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 조국이 너무 딱하니 버리지를 못해요. 그러니까 붉은 산, 이게 더 가슴이 아파요. 남들이 보면 이렇게 비웃을지 모르겠어요.
‘아이고, 그것도 산이라고…. 그 황토산, 나무 하나 없고 사슴은커녕 토끼 한 마리 없는 그런 산이 뭐가 좋다고….’
“붉은 산, 이게 더 가슴 아파요”
하지만 나에게는 가슴 에이게 절절히 그리운 곳이 되죠. 흰 옷도 보세요. 그게 뭐 금의환향(錦衣還鄕)의 비단옷도 아닌 헤질 대로 헤진 무명옷을 입은 그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이 보고 싶어집니다.
그러니 이 흙이 뭘까요? 이 흙에 대한 사랑이 뭔가 생각해보면 그게 토포필리아, 장소애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 밖에서 놀다 집에 돌아오면 항상 어머니가 옷에 묻은 흙을 털어주셨어요. ‘아이고 이 녀석 흙 묻혀왔어?’ 그러고 그 옷을 빨아주셨죠. 내 옷에 흙이 묻었다는 이야기는 내가 흙과 놀고 왔다는 이야기예요. 친구와 함께 놀았든 혼자 놀았든 어린 저는 흙과 놀았어요. 그런데 요즘 아이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길을 걸으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엄지족이 된 아이들은 흙과 너무 멀어요. 흙하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요. 예전에 도시 아이들이 흙을 너무 모르니까 쌀이 벼에서 자라는 게 아니라 쌀나무에서 난다고 아는 아이도 있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요.
우리가 해방 이후 70여 년을 살아오면서 제일 많이 잃어버린 게 뭘까요? 그 지겨운 농촌 떠나 서울 와서 다들 출세하고 우리 참 행복해졌죠. 그 과정에서 우리는 흙을 잃어버렸어요. 저 황토 흙의 우리 산, 그 흙이 우리가 먹을 풀, 우리 나물들, 곡식들, 우리의 생명을 이어가게 해줄 것들을 키워냈어요. 식물, 동물, 벌레, 인간 모두 흙이 없으면 죽어요.
그런데 그 흙을 언제 밟아봤나 싶어요. 어딜 가나 다 아스팔트가 깔려 있고….
대체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된 걸까요? (계속)⊙
12. 땅 이야기- 디아스포라와 어머니, 황토방
“앉을방아에서 찧어 먹던 호밀, 보리 다 어디로 갔습니까?”
⊙ 日 ‘기미가요’에 드러난 침략의 노래… 돌멩이·모래가 바위·이끼 꿈꿔
⊙ 韓 ‘정석가’ ‘서경별곡’… 부정·죽음 앞세운 희망·생명 꿈꿔
⊙ “우리처럼 당하고 찢기고 힘든 고개를 넘어가면서 선진국 된 나라, 없어요”
⊙ “고향서 내쫓긴 우리가 남의 가슴 못 안 박고 살아 이렇게 사는 겁니다”
⊙ “끝없는 생명 만드는 게 흙, 죽은 생명이 흙을 통해 再生”
[ 월간조선, 김태완 기자, 2022년 12월호 ]
# ‘기미가요’, 비과학적인 상상에 의한 침략의 노래
남의 나라, 특히 우리와 가까운 일본의 국가(國歌)와 우리 국가를 한 번 비교해 봅시다.
일본에서도 ‘기미가요’(일본어: 君が代 きみがよ·군주의 치세)를 막 부르지 못합니다.
“19세기에 ‘기미가요’를 불러가면서 아시아를 침략했으니 부르지 말자, 일장기를 걸지 말자!”
우리를 비롯한 아시아에서 그렇게 요구하는 게 아니라 일본 내부에서 나오는 목소리예요. 사실 ‘기미가요’라는 건 일본의 고전 단가 모음집인 《만엽집》에 나오는 그냥 사랑 노래인데 그걸 천황을 받드는 노래로 만든 거예요. ‘기미(君/きみ)’라는 건 그냥 사랑하는 그대를 얘기하는 건데 거기에 천황을 빗댄 거죠.
君が代は 님의 치세는
千代に八千代に 1000대에 8000대에
細石の 작은 조약돌이
巖となりて 큰 바위가 되어
苔の生すまで 이끼가 낄 때까지
사랑의 노래가 침략의 노래로
님이 다스리는 이 치세가, 또는 님이 살고 있는 이 시대가 한 대(代)만 돼서는 안 된다, 1000대 아니 8000대까지 가라(千代に 八千代に)는 영원히 이어지라는 말이죠. 우리가 이야기하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과 같아요.
1000년, 8000년이 길고 지겹다고요? 그런데 그다음 가사는 더 기가 막힙니다. ‘흙도 아니고 돌멩이가 바위가 될 때까지’ ‘다시 그 바위에 이끼가 끼도록 영원하옵소서’라고 노래합니다.
이게 과학적으로 맞는 얘기예요? 돌이 바위가 될 수 있나요? 모래가 어떻게 바위가 되며, 설사 된다 한 들 모래가 바위가 된 것만도 끔찍한데 그 바위에 이끼가 끼는 것까지 상상을 합니까. 비과학적이죠. 우리하고는 달라요. 우리는 산이 닳아 모래가 되어 없어지는데, 일본은 돌멩이를 바위로 만들어서 그때까지 영원하자고 하니까 똑같은 영원이지만 우리처럼 부정적인 것을 전제로 한 영원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을 영원으로 했어요. 바로 침략(侵略)의 노래인 것이죠. 작디작은 모래가 바위가 된다고 생각했으니 한국을 먹고 중국을 쳐들어가고, 작은 일본이 점점 크게 확장되는 거예요.
얼마 전만 해도 우리가 일본과 얼마나 가깝게 지냈어요. 그런데 자꾸 헌법을 뜯어고치겠다,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 참배를 간다고 하니까, 우리가 이렇게 말하며 일본을 경계하는 겁니다.
“아이고, 얘들 또 돌멩이, 모래가 바위 되려고 하는구나. 그렇게 되면 우리가 억울하게 되겠구나.”
지금 우리 살기도 바쁜데 왜 반일(反日)의 기치를 들겠어요? 2011년 쓰나미 왔을 때도 우리가 일본을 도와줬잖아요. “힘내라” 하면서 아이들이 저금통 깨서 성금 모아 보내고 했잖아요. 글쎄 이런 좋은 이웃으로, 그냥 모래로 살지 그걸 바위로 만들겠다고 야단들이에요, 지금.
# 부정 앞세운 희망·생명 노래한 한국인
《악장가사》 등에 실린 고려가요 ‘정석가(鄭石歌)’.
우리 ‘애국가’ 가사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는 부정적 영원의 이미지가 어느 날 갑자기 그냥 생긴 것이 아니라 고려 때부터 똑같은 발상의 노래가 있어요.
조선 초기에 구전(口傳)되던 고려가요들을 모아 한글로 기록한 책 《악장가사(樂章歌詞)》 《악학궤범(樂學軌範)》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 등에 실린 고려가요 ‘정석가(鄭石歌)’ 가사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삭삭기 셰몰애 별헤
구은 밤 닷 되를 심고이다.
그 바미 우미 도다 삭나거시아
유덕(有德)신 님을 여와지이다.’
(사각사각 가는 모래 벼랑에/ 구운 밤 닷 되를 심습니다// 그 밤이 움이 돋아 싹이 돋아나야만/ 유덕하신 임을 이별하고 싶습니다.)
아주 가느다란 모래가 있는 벼랑에, 그냥 밤도 아니고 구운 밤 다섯 되를 심어 놓고, 그 밤이 움이 돋아 싹이 나면 님과 이별하겠다는 말이니까, 절대 헤어지지 않겠단 이야기지요. 흙이 아닌 모래, 그것도 벼랑에 있는 모래니까 습기가 하나도 없어요. 제대로 된 씨를 심어도 싹이 트지 못할 그곳에 구운 밤을 갖다 심는다는 건 부정적인 가정(假定)이죠. 같은 영원을 가정하는 말이라도 같은 노래에 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므쇠로 한쇼를 디여다가
슈산(鐵樹山)에 노호이다.
그쇠 초(鐵草)를 머거아
유덕(有德)신 님을 여ㅣ와지이다.’
(무쇠로 큰 소를 만들어다가/ 쇠로 된 나무가 있는 산에 놓습니다// 그 소가 쇠로 된 풀을 먹어야/ 유덕하신 임을 이별하고 싶습니다.)
철로 된 나무가 있는 산에 무쇠로 만든 큰 소를 놓아서, 그 소가 철로 된 풀을 먹을 때까지 영원하자는 겁니다. 옛날부터 그랬어요. 이 ‘정석가’와 ‘서경별곡’에 공통으로 들어가 있는 후렴구가 ‘구스리 바회예 디신 긴힌 그츠리잇가’인데, 풀이하자면 이렇습니다.
‘구슬이 바위에 떨어져서 깨어질 수는 있어도, 그 구슬을 엮어 놓은 끈이야 끊어질 리가 있겠습니까.’
이게 우리나라의 부정을 앞세운, 죽음을 앞세운 희망과 생명이에요.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은 끝없이 살아가는 이 세상 속에서 그다지 욕심을 부리지 않았어요. 현실은 항상 죽음을 전제로 한 행복이고 죽음에서 벗어나는 것뿐 그렇게 욕심이 큰 민족이 아니었던 거죠.
# 남에게 폐 안 끼치고 이만큼 사는 나라는 우리가 유일
그래서 지금도 난 늘 이야기를 해요. 한국 사람이 자랑할 것이 별로 없다고요. 세계적으로 지금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들이 얼마나 많아요. 국민소득으로 따져도 잘 해봐야 우리는 세계 10위에서 13위를 왔다 갔다 하니까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들이 10개 나라도 넘는 거예요. 그 나라들보다 우리가 못살고, 노벨평화상 하나를 빼고는 학술 분야에서 노벨상을 탄 사람도 없잖아요. 그러나 우리는 남의 민족 눈에서 피눈물 나게 하고 그 가슴에 못질한 적도 없어요. 남을 침해하지 않은 민족 가운데 우리만큼 사는 민족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라! 정말이에요.
프랑스 개선문(凱旋門), 그거 아프리카에서 콩고니 뭐니 다 식민지로 만들고서는 자랑스럽다고 만든 문이잖아요. 일본은 제국주의 시절에 이웃 국가들을 모두 침탈하고 심지어 대만까지 먹었어요. 그 이웃들이 흘린 눈물이 얼마겠어요. 그러니까 지금 G7, G10 국가에 들어 있는 나라들은 전부 남의 가슴에 못질하고, 거기서 빼앗은 재산으로 지금 선진국 소리를 듣지, 우리처럼 당하고 찢기고 힘든 고개를 넘어가면서 어렵게, 어렵게 살면서 선진국이 된 나라는 없어요.
우리 지금 어때요? 한국에 스마트폰 안 든 사람이 있어요? 심지어 초등학교 아이들도 그걸 들고 다니니까 으레 그런가 보다 하지만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외국에서는 아직도 와이파이를 아이들이 쓰는 경우가 없어요. 이웃 일본만 해도 광케이블이 아니라 ISDN이 일반적이에요. 우리는 집집마다 광케이블이 안 들어가는 곳이 없는데….
지금이 좋은 세상 맞아요?
내가 지금 우리나라를 칭찬하고 자랑하자고 꺼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앞으로 가기 위해 뒤를 돌아볼 때 정말 광복 후 70여 년 동안 여기까지 우리가 제대로 왔느냐를 묻는 거지요. “우리가 하는 자랑이 진짜 자랑일까?” 이걸 묻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이만큼 살게 되었어요. 나이 많은 분들은 흔히 그러시죠. “아이고 좋은 세상 됐다, 우리 옛날 연탄불 피울 때는 말이지 가스 때문에 사람도 죽고 그랬어.” 그러곤 자식들 향해 “얘야, 좋은 세상 왔다”고요. 그러는데 정말 좋은 세상이 왔어요? 지금이 좋은 세상 맞아요?
지난 70여 년 동안 우리가 어떻게 지냈느냐 하는 건 자랑스러운 것이죠. 하지만 앞으로 70년을 다시 또 나아가려면 이대로는 안 돼요.
고향서 내쫓긴 사람들이 그래도 남의 눈에 피눈물 안 나게, 남의 가슴에 못 안 박고 올바르게 살았기에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우리만큼, 아니 우리보다 더 잘사는 다른 사람들, 다른 민족들은 다 전과자들이에요. 어디 가서 이야기하면 바로 “너희 몇 년에, 몇 세기 때 우리에게 와서 착취했던 나쁜 사람들이야”라고 지탄받지만 우리는 그런 게 없잖아요.
1960년대 월남전 당시 파병 가서 좀 나쁜 짓을 하긴 했어요. 하지만 그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가 한 게 아니죠. 우린 그때 워낙 못사니까, 돈을 받고 파병을 간 거예요. 사실은 눈물겨운 거지, 우리가 남을 침략한 게 아닙니다. 그래도 어쨌든 남의 나라에 쳐들어가서 남이 눈물 흘릴 일을 만든 건 월남전 정도고 그걸 제외하면 우리는 남에게 못할 짓 하지 않았어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역사가 없습니다. 이런 민족이 드물어요.
남의 나라 침공해서 지배했던 사람들은 지금 다들 민족이 해체되고 없어졌어요. 중국의 55개 소수 민족 중 자기 조국을 가지고 있는, 자기 민족만의 독립된 국가를 가지고 있는 민족은 몽골족과 조선족밖에 없어요. 이건 대단한 거죠.
#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것도 좋은 것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은 193개국 732만5143명(2021년 기준)에 이른다. 지금은 한국이 살 만해서 이민이 줄고 있다.
디아스포라(diaspora)는 희랍어입니다. ‘디아(dia)’는 방향을 뜻하는 겁니다. 사방(四方)을 말하죠. 그리고 ‘스포라(spora)’는 씨앗, 즉 씨앗을 뿌리는 것을 말해요. 우리가 씨를 뿌릴 때 한군데에 모아 뿌리는 것이 아니라 사방에 넓게 뿌리지요.
우리 민족도 그래요. 사방으로 도망갔지요. 지금 저 러시아부터 시작해 미국, 유럽 온갖 곳에 한국 사람 안 간 곳이 없어요. 아프리카 오지에 가도 뻥튀기와 번데기를 파는 한국 사람이 있다잖아요. 독일에 광부, 간호사로 가서 정착한 한국 사람도 있고, 열을 가하지 않아도 달걀이 그냥 익어버린다는 그 열사(熱沙)의 땅 중동 지역에도 한국인들이 진출해 있죠. 우스개로, 냉탕 온탕에 다 있는 거예요. 저 시베리아의 냉탕부터 중동의 온탕까지 그곳들을 왔다 갔다 하면서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되었어요. 한국인의 디아스포라지요. 전 세계에 한국인의 씨앗을 뿌린 겁니다.
지금 한국 인구가 5000만이 넘는데,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은 193개국 732만5143명(2021년 기준)이에요. 이 통계를 보면 동북아시아부터 아프리카까지 모든 곳에 다 가 있죠. 지금은 한국도 살 만하게 되었으니까 이민을 별로 안 나가지만요. 내가 가끔 농담 겸 하는 이야기로, 정치를 못해도 그것이 한국 사람에게 득이 될 때가 있다고 해요. 정치를 잘 해서 살기 좋으면 이민 갔겠어요?
어렸을 때 민들레 홀씨가 하얗게 피어나면, 그 하얀 솜털 봉오리를 꺾어 들고 입김을 세게 불어 하늘로 날려 보낸 기억이 있을 겁니다. 누구라도 그 하얀 솜털 봉오리를 보면 불어 날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돼요. 어린아이의 장난이라고 해도 그건 생태계에 도움을 준 거예요. 하나의 식물이 가까이에 뭉쳐 있으면 해로워요. 어떤 이유로 그 지역의 생태계가 위협받으면 전체가 몰살되는 위험이 있잖아요. 그 식물에 위험한 돌림병이 돌면 그 돌림병이 퍼져 한 종(種)이 사라질 수 있어요. 그래서 멀리 퍼져나가기 위해 민들레는 하얀 깃털을 달았고, 단풍나무 씨앗이나 소나무 씨앗은 프로펠러를 닮은 외날개를 달고 있어요. 모체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질 수 있도록 말이죠.
韓民族 디아스포라는…
한민족 분산의 역사는 크게 네 시기로 구분된다. 첫 번째 시기는 1860년대부터 1910년까지로 이 시기에는 구한말의 농민, 노동자들이 기근, 빈곤, 압정을 피해 국경을 넘어 중국, 러시아, 하와이로 이주했다.
두 번째 시기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다.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궁핍에 내몰린 우리 민족은 1920년대에 접어들어 자신이 경작하던 땅을 빼앗기자 어쩔 수 없이 이농민이 되어 만주를 비롯한 해외로 이주했다. 1910~1918년에 걸쳐 진행된 식민지 정부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조선 농민의 소작화가 이루어지고 일본인 지주와 동양척식회사 등이 조선 농민을 체계적으로 착취하자 궁핍해진 농민들은 만주로 이주했던 것이다.
게다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왕도락토(王道樂土)’ ‘오족협화(協和)’ ‘일본의 생명선’이라는 선전 문구 아래 식민지 건설의 환상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중국 동북 지역을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와 식량기지로 활용하고자 했던 일본은 1년에 1만 호씩 만주로 이주시킨다는 계획 아래 조선인들을 집단으로 이주시켜 집단농장을 형성하게 하여 식량 증산을 꾀했다.
일본은 만선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해 한인이민 사업을 담당하게 하고 1939년부터 해마다 조선에서 1만 호를 이주시키기로 계획했다. 그리하여 만선척식주식회사에 의해 이주한 한인 농가는 1939년 말 당시 1만3977호, 인구수는 6만5065명이었다. 이후 중일전쟁(1937)과 태평양전쟁(1941)으로 이주 추이는 줄었으나, 약 26만 명의 한인이 이 시기 조선총독부와 관동군이 협력해 강행한 국책이민 형태로 만주에 이주했던 것으로 추산된다. 요컨대 오늘날 대부분의 조선족 인구가 일제 식민지 통치기간에 이주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세 번째 시기는 1945년부터 1962년까지로 이 시기에는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발생한 전쟁고아, 미군과 결혼한 여성, 혼혈아, 학생 등이 입양, 가족 개혁, 유학 등의 목적으로 미국 또는 캐나다로 이주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시기는 1962년부터 현재까지로 이때부터는 정착을 목적으로 한 이민이 이루어졌다.
(장유정의 〈20세기 전반기 한국 대중가요와 디아스포라〉, 윤인진의 《코리안 디아스포라》 중에서 인용)
워털루 전쟁과 로스차일드 가문 이야기
유대인은 나라 없이 떠돌았던 오랜 디아스포라를 겪으며 가난한 동족의 생존을 보살피기 위해 유대 회당에 모금함을 두고 모으는 구호 기금 ‘쿠파’와 이방인을 돕기 위한 ‘탐후이’ 등 다양한 자선의 방식을 만들어냈다. 오늘날에도 미국 인구의 2%인 유대인은 매년 발표되는 50대 기부자 명단의 평균 30% 이상을 차지한다.
전 세계로 가장 많이 흩어져 있으면서도 불행하지 않고, 노벨상을 가장 많이 탄 민족이 유대민족입니다. 디아스포라가 이 유대인에게서 나온 말이에요.
진위(眞僞)가 의심스럽긴 하지만,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 워털루 전쟁과 로스차일드 가문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 유럽에도 국채(國債)와 주식을 거래하는 시장이 있었는데, 전쟁의 승패에 따라 각 나라의 국채 가격은 오르락내리락했겠죠.
전쟁의 승패에 대한 정보를 남들보다 하루만 빨리 알아도 엄청난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어요. 그것을 가장 많이 알고 있던 이가 각국 정부나 군대가 아닌 딱 로스차일드 가문(Rothschild Family)의 네이선 로스차일드(Nathan Mayer Rothschild·1777~1836)였다고 해요. 당시엔 전화나 전보가 지금처럼 활성화되어 있지 않으니 전서구(傳書鳩)를 띄워서 정보를 주고 받았는데, 로스차일드 가문은 널리 퍼져 있어서 가문끼리 오가는 비둘기가 있었던 거죠. 패밀리 네트워크예요.
워털루 전투의 승패가 결정되던 날은 폭우가 내렸는데 그 비를 뚫고 로스차일드 가문의 전서구가 도착했고, 영국의 승리를 알게 된 로스차일드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영국의 국채를 팔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동요하는 거예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가문 사람들끼리의 패밀리 네트워크 덕분에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로스차일드가 영국 국채를 팔기 시작했다? 게다가 로스차일드가 누구예요. 금융업계의 왕과 같은 사람이잖아요. 사람들이 다들 “아이고, 영국이 졌구나!” 생각하면서 가지고 있던 영국 국채를 죄다 내다 팔았어요.
그러자 로스차일드는 사람들이 투매(投賣)해서 가격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국채를 남몰래 싹 사들여 엄청난 이익을 취했어요. 이때 로스차일드가 번 돈이 현재 가치로 6억 파운드가 넘는 돈이었다고 합니다. 이 로스차일드가 유대인이에요.
흩어져 이 녀석들아. 하나씩 흩어져
다섯의 아들을 둔 어떤 사람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개의 화살을 끈으로 묶어놓고 아들들을 불러 모았어요. 그런 후 화살을 각자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며 “화살을 부러뜨려 봐”라고 하니 아들들은 손쉽게 화살을 부러뜨렸겠죠? “두 개 부러뜨려 봐” “세 개 부러뜨려 봐” 하니 아들들은 벌써 알고 있었어요. 그런 옛날이야기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속으로 ‘아이고 아버지, 그거 다 아는 얘기예요’라고 생각하며 세 개, 네 개까지 하는데, 다섯 개까지는 못 부러뜨리는 거예요. 그래서 아들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알았어요, 아버지! 오 형제 단합하고 뭉쳐서 잘 살겠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대뜸 “야 이 바보들아, 바보들아!” 합니다. 아버지가 말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던 거죠.
“너희 힘이니까 못 꺾지. 더 힘센 사람이 오면 다섯 개도 쉽게 꺾어. 뭉치면 죽는 거야. 흩어져! 이 녀석들아. 하나씩 흩어져! 하나는 독일에 가고 하나는 프랑스에 가면 독일과 프랑스가 싸워 어느 한쪽이 그 나라의 패망과 함께 사라져도 하나는 살아남잖아. 두 개 다 부러뜨릴 수는 없어. 전 세계로 흩어져. 그래서 그중의 어느 하나만이라도 살아남으면 우리가 다 사는 거야.”
여태까지 우리는 뭉쳐야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했지만, 흩어지면 살고 뭉치면 죽는 게 맞는 말이에요. 디아스포라가 얼핏 보기에 불행해 보이더라도 유대인들이 세계 각국에 퍼졌기 때문에 노벨상도 각 나라의 여러 환경 속에서 탈 수 있게 됐던 거예요. 이스라엘 본국에 사는 유대인 중에서는 노벨상을 탄 사람이 별로 없어요. 남의 나라로 디아스포라 되어서 그 결과로 《안네의 일기》 같은 슬픈 글을 쓰게 되기도 했지만, 하느님이 전 세계로 파종을 하신 겁니다.
디아스포라, 한국의 얼과 마음을 전 세계에 뿌려
독일 파독광부와 간호사야말로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대표적인 사례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1964년 12월 10일 서독을 방문해 파독광부와 간호사를 만나기 위해 본에서 1시간 거리의 함보른 광산에 입장하고 있다.
한국 사람이 지금까지 고통스럽게 살면서,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프리카 오지에 간 게 한국인을 파종한 거예요.
“너희는 견딜 수 있어. 아프리카는 물론 그 어떤 곳에 가서도 견딜 수 있어. 그러니 한국의 얼과 마음을 전 세계에 뿌려!”
이렇게 하느님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지만 디아스포라는 가슴 아픈 거예요. 그러나 나쁜 면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더구나 요즘과 같은 글로벌한 세계에서 메르스, 코로나19 같은 무서운 병이 한국에 들어와 한반도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 모두 죽는다고 해도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우리 동포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곳은 바이러스의 영향을 받지 않을 테니 살아남아요. 자식을 낳아서 한집에 오글오글 모여 사는 사람들은 ‘모’ 아니면 ‘도’예요. 그러나 흩어져 있으면 절대로 안 죽습니다. 이게 국제고 글로벌 사회예요. 그러니까 내 민족, 내 나라를 사랑하는 애족, 애국심을 가진 채로 전 세계로 흩어져 사는 것이 사실은 좋은 거예요. 우리나라에도 좋은 거고.
IMF 때 해외에 있는 동포들이 우리나라로 금을 보내줬던 것도, 해외에 나갔기 때문에 금융위기에 타격을 입지 않은 사람들이 국내의 동포를 도와준 거잖아요.
롯데그룹을 보세요. 일본에서 시작된 회사가 한국으로 들어와서 아주 큰 기업이 되었지요. 일본에서 롯데를 처음 시작한 창업주도 한국에서 살지 못할 이유가 있어 일본으로 간 거지 처음부터 웅대한 포부와 모험심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갔겠어요? 지금 해외에서 살고 있는 우리 이민 1세대들은 다들 한국에서 탄압받고 땅을 빼앗기고 어떤 이유에서든 내 나라 내 땅에서 살지 못하고 쫓겨간 분들이지요.
하지만 어때요? 그렇게 해외로 간 분들, 다들 그 나라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계세요. 그러니까 내가 이야기한 장소애(愛), 즉 ‘토포필리아(topophilia·장소를 뜻하는 topos와 사랑을 의미하는 philia의 합성어)’대로 여러분이 이 한국 땅, ‘붉은 산’을 벗어나면 죽는 줄 알면 이 이야기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어요.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온 우리가 그 붉은 산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지금은 황토방으로 갑니다. 흙은 변하지 않지만 바람은 움직여요. 이 땅은 그대로인데 한국 사람들, 특히 여성들은 많이 바뀌었어요.
# 《80초 메시지 생각 나누기》- 어머니의 발
내가 《이어령 80초 생각 나누기》(2014)라는 책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얼굴은 좀 험악하게 생겼지만 공부는 잘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취직시험을 보면 지필시험이나 서류 심사에는 늘 통과를 하는데 면접만 보면 떨어지는 거예요. 떨어지고 떨어지고, 마지막이다 생각했던 회사에서 또 떨어졌어요. 그러자 이 사람이 그 회사의 사장을 붙잡고, 이렇게 말합니다.
“사장님, 회장님. 제게 홀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십니다. 제가 시험에 또 떨어지면 저희 어머니가 죽습니다. 제발 좀 제 사정을 봐서 따로 면접을 봐주세요.”
애원을 하자 그 사장이 그 구직자의 얼굴을 가만히 보더니 말합니다.
“혼자 사는 노모가 계셔?”
“네, 예전에 청상과부가 되셔서 저 하나를 보고 여태 키우셨는데, 제가 이제 어머니를 봉양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 그러면 오늘 가서 어머니의 발을 씻겨드리고 오게. 그러면 내일 자네에게 다시 면접 기회를 주겠네.”
이 젊은 구직자가 그 말을 듣고 집에 돌아가니 어머님이 이렇게 말해요.
“너, 취직은 됐냐.”
“아니요, 그런데 희망이 하나 생겼어요.”
“뭔데?”
“어머니 발을 씻겨 오면, 내일 재면접을 보게 해 주겠대요. 사장님하고 단둘이서 따로 또 한 번 면접을 보게 해 주겠대요.”
이게 어머니의 사랑이었구나
그러자 어머니는 반색하며 말합니다.
“얘, 그거 어렵지 않다. 대야 갖다 놓고 얼른 씻겨라. 취직만 된다면 씻겨라.”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요즘 아이들 말로 변태라고 해도 할 말이 없지요. 무슨 발을 씻기라고 합니까? 그래도 그 모자는 절박하니까 사장이 시킨 대로 해요. 한데 어머니가 씻겨달라고 양말 벗고 내놓은 발을 보는데 아들은 기가 막히는 거예요. 그 발이 사람 발이 아니에요. 청상과부가 되어 어린 아들을 키우느라고 어머니가 그 발로 평생 얼마나 걸어 다녔겠어요. 땅을 얼마나 디디고 다녔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새끼발톱은 무지러져 까맣게 죽었고, 발등은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 있었어요. 아들도 어머니가 고생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 발을 자기 손으로 잡아보니 눈물이 그냥 쏟아져요.
‘이게 사람의 발이냐.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몇천 리를 걸으셨냐. 이게 어머니의 사랑이구나.’
어머니의 발을 씻겨준 아들은 그다음 날 그 회사로 다시 찾아갑니다. 구직자를 기다리고 있던 사장이 물어요.
“어머니의 발을 씻겨드렸나?”
그러자 아들이 대답을 합니다.
“네. 사장님께서 제게 어머니를 찾아주셨습니다. 저는 말로만 어머니를 사랑했지, 어머니의 발을 씻겨드리면서 비로소 어머니가 나에게 어떤 어머니인가를 알았습니다. 정말 좋은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저 취직 안 해도 됩니다. 감사 인사를 드리러 왔으니 이만 가겠습니다.”
사장이 등을 돌린 그 구직자를 붙잡습니다.
“여보게 이리 와, 자네 지금 면접 합격했네. 내일부터 와서 일하게.”
이 이야기를 《80초 메시지 생각 나누기》에 썼더니 어떤 사람이 와서 저한테 그래요.
“이 선생, 역시 당신 옛날 사람이오. 요즘 그런 발을 가진 어머니 없어. 그러니 그런 걸로는 면접 통과 못 하고 취직 못 해.”
# 흙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찾아가는 곳-황토방
도시를 보세요. 황폐한 붉은 산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흙과 함께 지내면서 흙에서 기운을 받아 살아왔는데, 지금 도시를 보면 그 흙 위로 모두 아스팔트가 깔려 있어요.
아스팔트 아니면 돌이거나 돌 아니면 시멘트! 도심의 사무실만이 아니라 개인이 사는 집에도 여기저기 놓인 화분의 흙을 제외하면 흙이 없어요. 요즘은 다들 아파트에 사니까. 그러니 우리 자신들은 모르고 가는 것이기는 해도, 사람들이 흙을 찾아 황토방으로 가는 거예요.
황토방에서 입는 옷은 황토색 옷이에요. 그 황토방에서 일괄 대여해주죠. 왜 하필 황토색 옷을 대여해줄까? 붉은 황토 산을 떠올리게 하는 색이니까 황토색 옷을 찜질복으로 대여해주죠. 거기에 가면 흙을 볼 수 있어요. 속까지 시커먼 흙구덩이….
황토방에 가면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이 남녀노소 사이에 구별이 사라진다는 점이에요. 흙은 모든 것을 공평하게 끌어안죠. 그래서 흙 앞에 가면 다들 편안해집니다. 우리나라가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고 해서 그렇게 남녀를 구분하고 내외하는데도 시골에 가서 멍석만 펴 놓으면 그 자리의 주인이고 지나가던 나그네고 뭐고 그냥 전부 와서 앉고 드러누워 낮잠 자고 하늘 보고 그랬거든요. 옆에 누가 있든 말든.
흙바닥에 멍석 깔아놓으면…
전설처럼 전해져 오는 얘기가 있어요. 6·25사변이 났을 때, 피란민 중 한 사람이 어느 집 마당에 멍석을 깔고 누워 잠을 청하는데 웬 청년 하나가 옆에 와서 자더래요. 그런가 보다 하고 밤새 잘 자고 일어나 아침에 보니 같이 잠을 잔 청년이 북에서 내려온 인민군이었답니다. 무서운 적군(敵軍)이었던 거죠. 피란민들은 그 인민군을 피해 도망가던 중이었잖아요. 적으로 대치해 서로 죽고 죽이던 사이도 시골 흙바닥에 멍석을 깔아놓으면 옆에 와서 자고 가요. 그것에 관해 누구도 말하지 않아요. 이게 우리의 흙이에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의 그 흙! 바람은 그 흙을 어떻게 했어요?
끝없는 생명을 만드는 게 흙이에요. 흙에서 생명이 자라기도 하지만 죽은 생명이 흙을 통해 또 다른 생명으로 재생되기도 하죠. 자연계 순환의 고리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흙입니다. 흙에서 자란 식물을 먹고 생활하던 동물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서 다시 다른 생명을 위한 거름이 됩니다.
흙이 없으면 그 재생의 고리도 끊어져요. 그 중요한 흙을 오늘날 우리는 아스팔트로 시멘트로 덮어버립니다. 아스팔트와 시멘트 아래의 흙은 생산을 하지 못하니 죽은 흙과 마찬가지입니다. 고속도로가 생기면 그 고속도로의 길이와 너비만큼 흙이 생산할 수 있는 풀, 나무, 잡초, 곡식… 이런 생명이 줄어드는 겁니다.
흙이 죽어가고 있다
지금 그 흙이 죽어가고 있어요. 도시란 흙을 죽이는 문명입니다. 농촌을 죽여서 도시가 만들어지면 그 농촌에서 살던 사람들이 도시로 서울로 이농(離農)해 출세하고, 그 출세를 부러워하는 이 문화가 우리의 번영을 가져온 도시 문화예요. 스스로 흙을 파서 우리가 먹을 양식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공산품을 만들어 수출해 돈을 벌어 외국의 밀가루를 사 와서 연명하고 있지요, 지금 우리가…. 대량 생산에 적합하게 유전자 변형을 한 그 밀가루를요.
우리가 옛날에 앉을방아에 찧어 먹던 호밀, 보리 다 어디로 갔습니까?
그러니까 무역을 해서 이만큼 잘살게 되었다는 말은 그만큼 흙과 멀어졌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흙과 떨어졌어요. 분리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그 ‘흙’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그 흙의 의미를 알자는 말이 옛날 브나로드 운동처럼 농촌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곡식 지어 빻아 먹자는 말이 아닙니다. 같은 도시 생활을 해도 흙이 뭔지를 알면 생명이 뭔지를 알게 됩니다. 여태껏 무심하게, 별생각 없이 그냥 가고 싶어지니까 갔던 황토방. 지금부터라도 그 황토방에 가면 왜 마음이 편안해지고, 우리가 굳게 지키던 규범마저 한 꺼풀 느슨해져 남녀구별도 없어지나를 생각해보세요.
# 한국의 방 문화
한국엔 외국엔 없는 묘한 문화가 하나 있어요. 사적인 공간은 ‘집’이에요. 공적인 것은 퍼블릭(public) 공공(公共)의 공간이죠. 그런데 그 중간에 ‘방’이라는 게 있어요. 빨래를 보세요. 사적 공간인 집에서 혼자 빠는 빨래가 있고, 동네의 세탁소라는 공적 공간에 맡기는 빨래가 있어요. 그런데 빨래방은 여럿이 가서 각자의 빨래를 해요.
컴퓨터도 그래요. 집에서 혼자 컴퓨터를 써서 글도 쓰고 웹 서핑도 하고 게임도 해요. 회사에 나가서 컴퓨터로 공적 업무를 봐요. 그런데 PC방이 또 있어요. 노래를 부르려면 집에서 혼자 부르거나 극장의 무대에서 부르는데 한국 사람들은 집도 아니고 극장도 아닌 노래방에서 노래를 제일 많이 불러요. 이런 거 보면 한국 사람들 참 묘한 사람들이에요.
이 방 문화가 하나 더 만들어낸 게 ‘황토방’이에요. 자연도 아니고 도시도 아닌 중간 지점이죠. 도시 한가운데에 만들어진 인공의 자연이 황토방. 사람들이 거기 모여들어서 쉬는 거예요. 이 ‘황토방’은 현재 우리나라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중국 사람들이 보면 “야, 희한하다”, 일본 사람들이 와서도 “와, 희한하다”, 이렇게 감탄하고 좋아하니까 이게 외국까지 진출했어요. 황토방은 아니지만 찜질방이.
미국에 있는 한국식 찜질방 역시, 아마 한국 교민이 만들었겠죠? 여기에 미국 사람도 와서 한국 사람들이 찜질방 즐기듯 즐기는 거예요. 사람들이 행복해 보여요. 이런 방에서는 반드시 먹는 게 있어요. 그러니까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이 다들 똑같은 헐렁하고 성별 차이 없는 옷을 느슨하게 입고 한방에 앉아 같은 음식을 먹는 거예요. 그것도 자발적으로. 이렇게 글로 써놓고 보면 참 희한한 일이지 않아요? 옷이야 주니까, 꼭 그 옷을 입어야 하지만 그렇다 쳐도 말이에요. 사람들이 찜질방 가면 꼭 하는 게 하나 더 있어요. 수건의 양 끝을 돌돌 말아가지고 ‘양머리’라 이름 붙인 수건 모자를 꼭 써요. 이건 규칙도 아니고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거든요. 그런데 다들 그러고 앉아서 삶은 계란을 까먹고 식혜 마시면서 놀아요. 참 묘한 문화죠. 방 문화라는 게. (계속)⊙
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⑬ 지렁이 울음소리
밟히고 또 밟히면서 흙·생명 만드는 지렁이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트위터페이스북기사목록프린트스크랩글자 크게글자 작게
⊙ 왜 우리 농촌에서는 지렁이 울음소리를 들었을까?
⊙ 날 키운 흙 떠나는 건 슬픈 게 아냐… 우리 씨가 퍼져야
⊙ 흙은 국토의 개념이고 내 생명의 개념, 민족의 개념
⊙ 흙에 누워서 별을 봤을 때 듣던 소리… 지렁이가 우는 소리
⊙ 역사는 ‘밟은 자’의 역사가 아니라 ‘밟힌 자’의 역사
[ 월간조선, 김태완 기자, 2023년 1월호 ]
[편집자 註]
이어령 선생이 타계한 지 1년이 되어간다. 선생은 생전(生前) 시리즈 ‘한국인 이야기’의 문패에다 ‘끝나지 않은’이란 수식어를 직접 붙였다.
생전 선생은 당신이 남긴 굵직한 저작물과 수많은 강연에서 언급한 ‘한국인 이야기’를 비록 당신이 떠나도 계속 이어가기를 희망하였고 관련 원고와 저서의 일부를 《월간조선》에 전하였다. 또 선생이 남긴 바탕 위에 편집자의 생각을 보태도 된다고 허락하였다. 아주 조심스럽게 선생이 남긴 큰 발자국을 따라 연재를 이어가고자 한다. 선생에게 누(累)가 되지 않기를 소망할 뿐이다.
이어령 선생의 저술활동 50년을 기념하는 ‘만남 50년’ 행사가 2009년 11월 27일 오후 5시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열렸다. 펜을 쥔 자신의 손 모양을 담은 기념조각을 증정받은 이어령 선생이 활짝 웃고 있다. 사진=조선DB
# 지렁이 울음소리
여러분은 지렁이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나요? 2015년 무렵 강연을 할 때, 지렁이 울음소리를 녹음해서 거리로 나가 사람들에게 무작위로 들려주고 무슨 소리 같으냐고 물은 적이 있어요.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지요. 풀벌레 울음소리 같다는 사람, 바람소리 같다고 하는 사람, 귀뚜라미 소리라고 하는 사람, 또는 전자기기의 전파음 같다고 하는 사람 등등 다양한 답이 있었지만 지렁이 울음소리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뭐라고 딱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는, 윙윙~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잉~잉~ 하는 것 같기도 한 소리거든요. 나이가 아주 많은 시골 어르신에게 들려주었으면 “지렁이 울음소리야”라고 답을 했을지도 모르죠.
옛날 사람들은 한밤중에 들려오는 그 소리를 지렁이 울음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땅강아지가 우는 소리예요. 과학적으로 발성기관도 조음기관도 없는 지렁이는 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지렁이 생김새를 보세요. 어느 한구석이라도 소리 낼 수 있게 생겼나? 그런데도 옛날 사람들은 깊은 땅속에서 지렁이가 운다고 생각했어요. 지렁이는 울지도 않고 소리 낼 방법도 없는데 왜 우리 농촌에서는 지렁이 울음소리를 들었을까요?
“저 알 수 없는 지렁이 울음소리를 듣고 싶은 간절함… 깊은 땅속 흙의 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사진=게티이미지
저 알 수 없는 지렁이 울음소리를 듣고 싶은 간절함… 깊은 땅속 흙의 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우리 농촌의 저 땅, 혹은 흙 아래에서 울려오는 소리. 숲에서 울려오는 것도, 하늘에서 울려오는 것도 아닌, 땅속에서 나오는 저 소리, 그게 지렁이 울음소리예요.
그런데 땅속에서 소리가 울려 나오려면 사실은 지진밖에 없어요. 땅강아지도 땅 위에서 울었지 땅속에서 울지는 않았을 거거든요. 그런데도 옛날 사람들은 그 땅강아지 소리를 굳이 지렁이의 울음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흙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 말이죠. 지렁이가 있는 땅은 살아 있는 땅이죠. 그러니까 지렁이가 우는 소리는 흙을 만드는 소리예요.
우리 속담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라는 게 있어요. 그 많은 벌레 중에 왜 하필 지렁이였을까요? 우리 옛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지네도 있고, 흔히 보는 메뚜기, 여치, 방아깨비, 귀뚜라미… 농촌에 가면 벌레가 얼마나 많아요. 그런데 그 속담에 등장하는 것은 다름 아닌 지렁이예요. 이유가 뭘까요?
먹이사슬의 제일 밑바닥이 지렁이예요. 지렁이는 눈도 없어요. 그래도 몸으로, 피부로 빛을 느껴서 그 감각으로 빛을 피해 땅속으로 들어가죠. 지렁이는 암컷, 수컷도 없어요. 한 몸에 암수가 다 있어요. 그리고 지렁이는 모든 동물의 밥이에요. 하늘을 나는 새부터 물속 물고기까지. 우리가 낚시할 때 낚싯밥으로 지렁이를 쓰잖아요. 그러니까 먹이사슬의 제일 하층에 있죠.
아낌없이 주는 지렁이
“옛날에 멍석 펴놓고 말이야, 흙에 누워서 별을 볼 때 듣던 소리야. 지렁이가 우는 소리야. 저것은 땅강아지 소리 아니야. 내가 들었어. 저 지층(地層) 깊숙한 곳에서 지렁이가 울었다고.” 사진=게티이미지
두더지는 땅속에 살아요. 두더지가 왜 굳이 땅속에서 살게 되었을까요? 눈이 보이지 않아서 땅속으로 들어간 건지, 땅속에 들어갔기 때문에 눈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제 두더지는 영영 땅 위로 못 올라와요.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약하니까.
땅 위에서 살지 못하는 약한 것들이 새가 되어 하늘 위로 도망쳤어요. 하늘로 도망치지도 못하고 땅 위에서 살 만큼 강하지도 못한 것들은 땅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러니까 땅속 동물은 가장 약한 생명체예요. 그런데 실은 이게 역설적으로 생명력이 가장 센 생명체이기도 해요. 가장 약한 존재지만 가장 생명력이 강한 존재인 거죠.
땅속에 사는 두더지는 지렁이가 없으면 죽습니다. 그 깜깜한 땅속에서 지렁이밖에 먹을 게 없잖아요. 눈이 안 보여서 땅 위로 나갈 수도 없는 두더지가 땅을 파봐야 지렁이 말고 나올 게 뭐가 있어요. 그 두더지가 땅을 파서 지렁이가 나오면 그걸 먹는데 한번에 다 먹지 않아요. 두더지가 지렁이 목장을 운영하는 거죠. 반쯤 먹고 그 목장에 던져두는 거예요. 그러면 지렁이는 알아서 먹힌 부분을 재생해내며 살아나거든요. 세상에 이런 생명력 강한 동물이 또 있을까요? 놀라운 거죠.
지렁이가 동물 먹이로서만 이렇게 이로운가요? 아니에요. 식물들도 지렁이가 없이는 못 삽니다. 가랑잎이 땅으로 떨어졌는데 지렁이가 없으면 그건 그냥 마른 가랑잎으로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지렁이들은 구멍을 파서 땅 위로 나와 떨어진 가랑잎을 먹어요. 그리고 소화해서 하루에 자기 몸만큼의 배설물을 내놔요. 그게 흙을 만드는 겁니다. 가랑잎을 먹어서 흙을 만들고, 그 흙에서 식물이 자라요.
# 박완서 소설 〈지렁이 울음소리〉
등단 40주년이 되던 2010년 1월 박완서 소설가. 사진=조선DB
소설가 박완서 선생이 1973년 《신동아》에 발표한 단편 〈지렁이 울음소리〉라는 작품이 있어요. 이 작품은 그 얼마 후 잡지 《문학과 지성》에 재수록됐어요. 비로소 ‘작가’로서 대접받기 시작한 소설인 셈이지요.
소설 속 화자인 ‘나’는 ‘욕쟁이’라는 별명을 가진 스승과의 추억이 있습니다. 광복 후 미군정 시절, 국어를 가르친 이태우 선생은 ‘내’가 다니던 여학교 선생이었는데 아니꼬운 것도 부정도 못 보던 성격의 소유자였어요. 수시로 분통(憤痛)을 터트리며 욕을 했어요. 그 시절, 욕할 일이 좀 많았겠어요?
항상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세상사에 참견을 하고 비분강개를 터트리는 사람’이었죠. 그때는 일제가 끝난 직후였으니, 학생들이 학교에서 일본말을 쓰는 경우가 많았을 거 아니에요. 강점기 때는 조선어 사용을 완전히 금지했으니 일본어가 입에 배었을 테죠. 무의식 중에 일본말을 쓰면 국어선생다운 결벽성으로 절대로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었어요.
“이 자식들아, 그래 너희는 밸도 없나. 그 지긋지긋한 왜놈의 말을 또 입에 담아봐. 노예근성이 뼛속까지 박힌 놈으로 알고 회초리로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려 줄 테니까.”
이렇게 쌍욕을 했죠.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윤동주의 시를 젖은 목소리로 정성스레 낭송해 들려줄 줄도 아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여학생들이 너무너무 존경하는 선생님이었죠. ‘아, 저 사람은 분노가 있구나’ ‘불의(不義) 앞에 막 소리를 치는 용기가 있구나’ 하면서요.
남편이 하는 딱 두 가지
‘나’와 결혼한 남편은 좋은 대학 상대(商大)를 나와 은행 중역을 거쳐 지금은 지점장입니다. 제 시각에 퇴근할 뿐 아니라 술·담배도 못 해요. 대신 단팥이 잔뜩 든 생과자나 찹쌀떡, 시골에서 고아온 눅진한 조청 따위를 즐깁니다. TV 연속극과 쇼를 재미나 합니다. 삶의 모험이나 불굴의 투쟁정신이니 하는 남성성은 먼 나라 이야기죠.
게다가 유산으로 물려받은 작은 상가건물에서 적지 않은 월세까지 받으니 경제적으로 얼마나 윤택하겠어요. 알토란 같은 삼 남매와 아름답고 순종적인 부인까지 두고 있으니 남부러울 게 없죠.
남편은 안정된 생활을 누리면서 딱 두 가지, 텔레비전 보는 것과 정력제 사는 것만 해요. 이 남편은 텔레비전 볼 때 TV 채널을 돌리는 독특한 기술을 가지고 있대요. 이 소설을 쓴 시절에는 지금과 달리 리모컨이 없어서 채널을 바꿀 때는 TV 본체 옆에 붙은 다이얼을 돌려 채널을 바꿔야 했거든요. 작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7에서 9로, 9에서 11로, 이 매혹적인 홀수에서 홀수로 옮아가는 길에 아무리 바빠도 거쳐야 하는 8이나 10이란 공허한 짝수를 용케도 냉큼냉큼 건너뛰어 곧장 7에서 9로, 9에서 11로, 또 11에서 9로, 9에서 7로 전광석화처럼 채널을 돌리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게 남편의 기술에 대한 칭찬 같지는 않죠? 심지어 남편은 TV를 보면서 군것질을 즐기죠. 소설에선 이렇게 묘사합니다.
〈맛있게 맛있게 먹으며 입술 언저리를 야금야금 핥으며,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줄기차게 연속극과 쇼에 재미나 했다. 아니 연속극도 맛있어하더라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나에겐 그가 흡사 연속극도 단팥과 함께 먹고 있는 것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실상 두뇌나 심장이 전연 가담하지 않은 즐거움의 표정이란 음식을 맛있어하는 표정과 얼마나 닮은 것일까.〉
‘그럴 수는 없어. 그것만은 참을 수 없어’
‘나’는 남편과 함께 다디단 간식, TV 연속극을 즐기는 사람이면 좋을 텐데, 불행하게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TV 연속극도 단것도 안 좋아했다. 나는 단것이 위장에 해롭다고 믿고 있었고, TV는 바보상자라는 말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고, 연속극이 퇴폐적 단세포적 어쩌고 저쩌고 하며, 자못 고상하고도 혹독하게 매도되는 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즐겼다.〉
그러니, 남편을 어떻게 바라보았을지는 짐작할 수 있겠죠? ‘나’를 더욱 외롭고 슬프게 만드는 건 이 현대에 욕을 할 줄 모르는, 아니 욕할 생각이 없는 남편이었죠. 타성에 젖어 자신의 행과 불행을 굳이 따져볼 일이 없었던 화자를 깨운 사람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 맏아들이에요. 느닷없이 이 아들이 미술대학에 가고 싶다고 하자 남편은 어처구니없어합니다. 아들에게 안정된 생활의 행복을 찬양하고 또 찬양하며 아들을 타이릅니다.
〈“서울상대를 가야 해. 뭐니뭐니 해도 생활 안정이 제일이니라. 봐라 지금의 네 애비를. 뭬 그릴 게 있나. 뭬 걱정인가.”〉
이 말을 할 때 남편 입가에 떠오르는 득의와 회심의 미소가 싫고 징그러워 아들이 남편의 그 말에 반기를 들어주기를 ‘나’는 바랍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뜻밖에도 다소곳이 아버지의 말을 듣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화자의 내부에서 별안간 힘찬 반란이 일어요. ‘아니지, 당신은 그렇게 살아도 좋지만 내 아들은 당신처럼 살아서는 안 돼, 그건 안 돼!’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거죠. ‘그럴 수는 없어. 그것만은 참을 수 없어’ 하는 격렬한 외침이, 심한 딸꾹질처럼 오장육부에 경련을 일으키며 치솟아요. 부유하고 평화로운 현재의 생활에 감사하고 속물처럼 살아가지만 화자가 여학생 시절에 생각했던 생이라는 건 이런 게 아니었으니까요.
여학생 시절의 우상, ‘욕쟁이’ 이 선생
“국어를 가르친 이태우 선생은 여학교 선생이었는데 아니꼬운 것도 부정도 못 보던 성격의 소유자였어요.” 50여 년 전 교복 차림에 단정한 머리를 한 여중생들 모습이다. 사진=조선DB
겉으로만 볼 때 ‘나’는 특별한 고민도 없고, 특별히 해야 할 일도 없고 하니 취미로 조화(造花) 만들기를 익혀요. 이 조화를 만들어 남편에게 자랑하니 남편이 “와! 당신 이런 재주가 있었어? 이제 꽃 안 사 와도 되겠네. 비싼 생화를 왜 사 오냐? 시드는 거. 이거 갖다 놓으면 좋은데”라고 말해요. 남편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나’는 남대문 꽃시장에 가고 싶은 충동을 느껴요. 시드는 꽃, 살아 있는 꽃, 흙에서 생성되어 생명을 가지고 있는 꽃을 가지고 싶은 거죠.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행복이라는 것은 화자가 만든 것과 같은 조화예요. 아무런 변화도 없이 항상 행복하지만, 화자는 시들어버릴지언정 살아 있는 생명의 흙에서 나온 꽃과 같은 행복을 가지고 싶은 거죠.
이런 와중에 화자는 우연히 여학생 시절의 ‘욕쟁이’ 이 선생을 다방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는 ‘몰라보게 늙었을 뿐 아니라 몰라보게 점잖아지기까지’ 했어요. 심지어 ‘탁하고 처진 소리로 길길길길길 오래 웃기’까지 하지만 ‘나’는 그래도 그가 가슴속에 여전히 분통(憤痛)을, 욕을 간직하고 있을 터라고 기대해요.
이 조화와 같은 현대의 행복에 대해 그가 퍼부어주는 욕을 들으면 얼마나 시원할까 생각하죠. 그래서 화자는 그가 욕쟁이의 본색을 감추고 있을 뿐, 자극하면 다시 그 본색을 드러낼 거라고 생각하지만 ‘쉬 개발될 것 같지 않은 변두리의 복덕방 영감 같아’ 보이는 그는 쉬이 욕쟁이의 본색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렇게도 혐오했던 일본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에 섞어 쓰는 모습까지도 보여요. 때문에 ‘나’는 구정물을 뒤집어쓴 듯이 불쾌해집니다. 비단 ‘길길길’ 하는 웃음소리만이 아니라 ‘오야지’니 ‘요오시’니 ‘기마에’니 ‘앗싸리’니 ‘쇼부’니 하는 소리를 이 선생의 입에서 듣다니 기가 막히는 거죠.
비명이라도, 신음이라도…
그래서 ‘나’는 ‘그를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지’ 하며 진저리를 치면서도 며칠 뒤 다시 그를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찾아갑니다. ‘어떻게든 그를 다시 욕쟁이로 만들고 말 테다’ 하는 결심으로요. 만남이 거듭되면서 그와 ‘나’는 서로에 대해 알아갑니다. 욕쟁이였던 이 선생은 이제 현대사회의 평범하면서도 비열한 소시민이 되었어요. 이전에 그가 그렇게도 욕했던 그런 사람이 된 거죠. ‘나’는 차츰 그에게서 욕을 짜내기는 건포도에서 포도즙을 짜내기보다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를 못하는 거예요. 이 선생으로부터 욕은 단념했지만 비명이라도, 신음이라도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죠. 그렇게 ‘기름 안 친 기계의 운동처럼 고단하고 힘들고 쇳소리가 나게 지긋지긋한’ 사귐이 이어지던 어느 날, 이 선생이 기다리고 있어야 할 다방에는 이 선생 대신 편지 한 장이 남겨져 있습니다.
편지에는 뜻밖에도 이런 내용이 담겨 있어요. ‘제자였던 숙이를 만난 이후, 사기성을 띤 일을 해야만 하는데 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한탄한다’고요.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이 선생은 아마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제자의 도장을 이용해 사기를 쳤을 텐데, ‘옛 스승의 기개(氣槪)를 기대하는 제자의 눈빛 때문에 더는 그 일이 하기 싫어졌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예전의 그 욕쟁이로 돌아가지도 못합니다. 요새는 그와 같은 고전적 욕쟁이의 시대가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는 것이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 선생은 숙이에 대해 은근한 복수심마저 내비쳐요. ‘유부녀가 아무리 선생이라도 찾아다니는 건 아니야. 나는 너와 고궁 앞에서 찍은 사진이 있어. 그 사진을 가지고 나는 여관방에서 연탄불을 피우든지 청산가리를 먹고 죽어버릴 거야. 그러면 숙이는 난처해지겠지, 내가 난처했던 것처럼. 내 죽음이 신문에 나면 너의 남편과 함께하는 편안한 생활도 끝장이 날 거야.’ 그 편지는 이렇게 끝납니다. ‘그러니 나를 내버려 둬. 나를 숙이의 기대로부터 풀어줘. 나에게 욕을 조르지 말아줘. 날 그만 쥐어짜. 제발 날 살려줘.’
“날 놔줘” “제발 날 살려줘”
편지를 받은 ‘나’는 실제로 그가 죽었든 아니든 어차피 ‘나’에게 있어 그는 죽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허탈해지는 거예요.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도시의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그 욕쟁이는 변함없이 생존해서 시원하게 세상을 향해 욕을 내뱉는 것을 한번 보고 싶었는데 도시의 그 많은 사람과 똑같아지려다가 ‘나’를 보고 갈등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떼어놓는 편지만을 남기고 도망쳐 버린 겁니다.
일요일 아침, 화자는 남편이 신문을 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어쩌면 이 선생의 협박대로 된 것인지도 모르지요. 남편을 그렇게도 지겨워했던 ‘나’는 자유로워질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가장 먼저 두려움을 느낍니다. 자유를 감당할 자신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뜻밖에 남편은 분노에 부들부들 떨었던 것이 아니라 웃느라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어요. 메릴린 먼로가 시도 썼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그렇게도 웃긴 일이었던 거죠.
“그렇지만 먼로가 시를 썼다니 사람 웃기는군. 그렇게나 몸뚱이가 기막히게 좋은 여자가 뭬 답답해 시를 썼겠어. 책이나 팔아먹으려는 협잡이 뻔하지.”
남편은 그렇게 말하면서 아내를 봅니다. ‘마치 그 여자의 몸뚱이를 구석구석 싫도록 주물러댄 경험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 방면에 도통한 듯한 음탕하고 권태롭고 느글느글한 웃음을 흘리면서’요. 그런 남편에 대해 ‘나’는 이 선생의 비명을 생각합니다. 소설 속 한 구절입니다.
〈“날 놔줘” “제발 날 살려줘” 그건 어떤 소리 빛깔을 하고 있었을까. 지렁이 울음소리 같았을까 몰라. 그 신음을 육성으로 들어두지 못한 건 참 분하다.〉
여기에서 지렁이 울음소리라는 게 뭐였을까요. 생태계 피라미드의 제일 하위에 있지만 거기에서 생명이 나오는 거잖아요. 먹이사슬의 제일 밑바닥에 있는 지렁이. 그 지렁이의 울음소리를 ‘해석’해낼 수 있다면 그건 이 선생의 “살려줘”라는 그런 소리가 아니었을까요?
흙이 운다, 죽어가는 흙이 운다…
‘나’는 그 소리, 지렁이 울음소리를 못 들은 것이 한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보통의 사람들이,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면서 ‘내가 행복하다, 이 문명이라는 것은 참 편한 것이구나, 이것이 내가 추구하던 삶’이라며 맹목적으로 살아가다가 어느 날 밤 그 지렁이 울음소리를 듣는 겁니다. 땅속 깊은 곳에서 이놈한테 뜯기고 저놈한테 뜯기면서도 열심히 생명의 흙을 빚는 어둠의 영웅들의 소리를요.
마치 고장 난 전자제품에서 들리는 지잉~, 윙윙~ 하는 것 같은 그 소리, 실상은 땅강아지의 울음소리일 뿐인데 사람들은 지렁이 울음소리라고 인지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흙이 운다, 죽어가는 흙이 운다, 살아 있는 흙의 생명이 운다… 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요?
참 한국 사람들 대단하지요. 지렁이는 한자어 지룡(地龍)에서 파생된 말이에요. 그 하찮아 보이는 지렁이를, 햇빛 나면 그냥 말라비틀어질 뿐인 그 약한 지렁이를 저것은 지룡이다, 땅속의 용(龍)이다 생각했어요. 용이라는 게 뭐예요. 중국에서는 황제를 상징할 만큼 신령스러운 동물, 하늘을 날아다니고 자연현상을 관장하는 존재 아닙니까. 자연현상은 인간의 생존에 가장 중요한 요소예요. 그러니까 용은 인간에게 가장 두렵고도 소중한 존재지요. 결국 지렁이를 알아주는 사람은 한국인, 그중에서도 지렁이의 울음소리를 들은 사람들이에요.
# 지구의 사과껍질에 사는 우리와 지렁이
처음에 지질학적으로 지구의 단층을 보면 그 가장 표면에 흙이 있어요. 사과를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그 사과껍질 위에서 사는 거예요. 전체 지구에서 흙은 그 사과의 껍질만 한 두께와 무게밖에 차지하지 않습니다. 이 껍질, 바이오 스피어(Biosphere·생태계로서의 지구)라고 해서 모든 생물이 다 살고 있는데 그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아세요?
지구 전체 무게의 10억 분의 1도 되지 않습니다. 지구 무게 중에 생물의 무게는 흙먼지만큼도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현재 밝혀진 바로는 이 넓은 우주에, 생명체가 있는 행성은 지구밖에 없고, 그 지구 전체의 10억 분의 1도 안 되는 게 생명체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하나하나는 얼마나 놀라운 존재입니까. 각기 다 다르고 가치 있는 생명이에요. 우스운 것 같지만 우주에서 하나하나 들어가 보세요. 우주의 지구, 지구의 10억 분의 1, 그 어마어마한 확률 안에 내가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어마어마한 확률의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누가 만들어요? 바로 지렁이입니다. 지렁이가 흙을 만들어주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갈 수 있어요. 모든 생명체는 먹이사슬에 묶여 나고 또 죽어요. 흙에서 생물이 나와 살아가다 다시 죽으면 지렁이가 나서서 우리를 분해시켜 다시 흙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지요. 흙으로 분해시켜야 거기서 또 생명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한국인에게 흙이란 무엇인가. 바이오 스피어가 무엇인가. ‘신토불이(身土不二)’예요. 몸이 바로 흙입니다. 흙은 나와 같아요. 내가 농협에 만들어준 말이 하나 있어요. ‘농도불이(農都不二)’. 신토불이만 하면 도시 사람들은 전부 흙이 뭔지도 모르는데 공허한 말이잖아요. 그러니까 농도가 불이. ‘농촌과 도시가 하나’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말을 해줘야죠. 이 아스팔트와 돌멩이로 흙을 끝없이 질식시키고 죽이는 도시 사람도 구해달라는 거죠. 신토불이는 본래 불교용어고요.
세계에서 채소를 가장 많이 먹는 한국인
이유가 있어요. 전 세계에서 한국 사람들이 채소를 가장 많이 먹습니다. 참 놀라운 거예요. 김치니 뭐니 우리 밑반찬이 전부 채소거든요. 최근 신문을 보니 미국 뉴욕의 동네마트 신선식품 진열대에 ‘KIMCHI’라고 쓰인 제품들이 진열돼 있더군요. 코로나19가 몰고 온 발효식품 재평가로 ‘진짜 한국식 김치’를 맛보고 싶어 하는 현지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고 해요.
연간 대미(對美) 김치 수출액이 지난 2011년 280만 달러에서 2018년 900만 달러, 2020년 2300만 달러, 2021년 2820만 달러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어요. 김치 수출 대상 국가도 10년 전인 2012년 기준 62개국에서 2022년 89개국으로 확대됐다고 하지요.
미국 캘리포니아, 버지니아, 뉴욕, 워싱턴DC 등은 11월 22일을 ‘김치의 날(kimchi day)’로 제정했어요. 그날은 모든 주민이 김치를 의무적으로 먹는 날일까요? 그렇지 않을 테지만 신기해요. 또 미시간, 메릴랜드 등 5개 주에서도 ‘김치의 날’을 선포했다고 합니다. 김치가 한류(韓流) 덕을 보는지, 한류가 김치 덕을 보는지 모르겠지만, 김치는 더는 한국만의 전통음식이 아닙니다. 세계인의 음식이 되었어요.
# 디아스포라, 전 세계로 우리 씨를 파종하는 것
진주 남강과 촉석루. 1984년에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조선DB
여러분이 도시에 살든 어촌에 살든, 사는 곳이 어디라 해도 흙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흙의 생명을 키워야 해요. 외세의 침략에 쫓기면서도 의연하게 길을 걸어갔던 할머니의 뒷모습, 그걸 내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2)를 쓰고도 한 10년 뒤에 알게 되었어요. 그 앎이 《생명 자본주의》(2014)를 쓰게 만들었죠.
한국인, 참 지지리도 못났어요. 오죽했으면 중국 한번 쳐들어가지 못하고 원(元)나라에, 청(淸)나라에 그렇게 시달렸을까요? 허구한 날, 왜구에게 시달려 어쩜 이리 지지리도 못났나 했는데, 광복 후 70여 년 동안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서구의 자유시장·민주주의 모델을 가지고 이룩한 부(富)에 흙의 마음, 그 흙의 의미를 깨달으면 서양 사람이 못해낸 것, 우리 조상이 이룩하지 못한 것까지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내 민족만 앞세우고, “난 흙을 떠나선 살 수 없으니 우리나라에 붙박이로 남아야 해”라고 말해선 곤란해요. 흙의 마음이 글로벌해져야죠.
“내 고향 난 못 떠나!” “천리길을 내 어이 왔던고~” 하면 안 됩니다. 세상에 천리길이 뭐 그렇게 멀다고요. 고작 서울에서 진주까지의 거리예요. 그 정도 가지고 “내 어이 왔던고~”가 뭡니까.
남들은 조랑말 타고 전 세계를 누볐어요. 칭기즈칸 보세요. 몽골 초원에서 시작해 대륙을 건너 유럽까지 쳐들어가는데 우리는 겨우 진주 정도 가서 고향 떠났다고 “내 어이 왔던고~” 하고 노래하는 식이죠. 칭기즈칸처럼 정복을 하라는 게 아닙니다. 그 땅을 정복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그 땅에 뿌리내릴 수 있어요.
나를 키운 고향 흙을 떠나야 하는 디아스포라가 슬픈 게 아닙니다. 우리 씨가 퍼져야 해요. 전 세계로 파종을 하는 것이 디아스포라입니다. 생명을 뿌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 씨는 흙이 있어야 싹이 납니다. 콘크리트에선 씨가 나지 않아요. ‘붉은 산’을 간직해야 합니다.
대중가요 ‘진주라 천리길’
경남 진주를 소재로 한 대중가요 ‘진주라 천리길’은 1941년에 발표되었다. 조명암(趙鳴岩) 작사, 이면상(李冕相) 작곡, 이규남(李圭南)이 노래했다.
대중음악 평론가 이동순에 따르면, 충남 연기 출신의 이규남은 식민지 시절 일본 유학비를 벌기 위해 진주의 재래시장에서 유성기 음반과 바늘을 팔았다고 한다. 작곡가 이면상이 진주에 갔다가 이 광경을 보았고, 서울에 돌아가서 그 이야기를 작사가 조명암에게 들려주었다. 깊은 감동을 느낀 조명암은 즉시 노랫말을 지었고, 이면상이 곡을 붙였다. 이 곡을 들어보면 나라의 주권을 잃고 군국주의 체제의 시달림 속에서 허덕이는 식민지 백성의 설움과 눈물을 느낄 수 있다.
이면상은 ‘사랑도 팔자’ ‘네가 좋더라’와 같은 대중가요도 여러 곡 남겼다. 1946년 초 월북해 북한 음악가동맹위원장을 맡는 등 북한 최고의 작곡가가 되었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당 중앙위원 등을 역임했다.
조명암 역시 대중가요 ‘신라의 달밤’ ‘서귀포 칠십리’ ‘낙화유수’ 등을 작사했는데 그 역시 월북해 북한 교육문화성 부상(副相), 문예총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가수 이규남(본명 임헌익)은 성악에서 대중음악으로 진로를 바꾼 인물이다. 처음엔 그 역시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유족들의 증언과 당시 정황에 의해 납북으로 밝혀졌다. 이 곡은 분단 이후 줄곧 금지곡 목록에 들었다가 훗날 해금되었다. ‘진주라 천리길’의 노랫말은 이렇다.
‘진주라 천리길을 내 어이 왔던고/ 서장대에 찬바람만 나무기둥을/ 얼싸안고 아~ 타향살이 내 심사를/ 위로할 줄 모르느냐.
진주라 천리길을 내 어이 왔던고/ 달도 밝은 남강가에/ 모래사장을 거닐면서/ 아~ 불러보던 옛 노래는/ 지금 어데 사라졌나.’
공적이면서도 사적인 장소, 찜질방
요즘은 시들시들해졌지만 몇 해 전만 해도 다들 황토방이나 찜질방을 찾아갔어요. 중년 주부들이 우스갯소리로 “남편 없이는 사는데 찜질방 없으면 못 산다”고 했을 정도예요.
왜 우리가 전 세계에 없는 찜질방, 황토방을 만들었을까요?
왜 ‘방 문화’를 만들었어요? 공(公)도 아니고 사(私)도 아니고 참 특이한 공간이거든요. 다방, 요즘엔 커피숍, 모두 길거리와 마찬가지인 공적 장소예요. 호텔 이런 곳은 남들 눈에 띄지 않는 사적 공간이죠. 그런데 그 중간 지점이 찜질방입니다. 공적이면서도 사적인 장소예요.
찜질방에선 연인이 이마를 맞대고 잠을 자도 아무렇지 않아요. 손을 잡고 있어도 불편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이가 없지요. 엄마가 딸이 밤늦도록 집에 오지 않자 전화를 겁니다.
“너 어디야!”
소리치다가도 “나, 찜질방인데…” 하면 “응, 알았어” 하고 전화를 끊어요. 그 황토방, 찜질방이 참 묘한 문화예요. 공도 아니고 사도 아닌 중간 문화인데, 뭔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어느 정도의 선을 지킬 수 있는 곳이죠. 중간 영역이에요.
그러니까 뭔가 고민이 있고 맘속에 맺힌 게 있어 풀고 싶을 때 황토방을 갑니다. 아스팔트에 갇혀 고향을 잃어버렸을 때 흙의 생명력, 자연의 치유력을 얻는 곳이 황토방입니다. 이런 공간을 가진 나라는 우리밖에 없어요. 지금은 디아스포라로 흩어진 한국인이 해외에서 찜질방을 많이 만들었지만 말이에요.
# 에티오피아 왕 이야기
1968년 5월 18일 오전 11시 에티오피아의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 1세가 박정희 대통령의 초청으로 내한했다. 사진은 김포공항 터미널 2층 로비에 마련된 환영식장에서 에티오피아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경례를 하고 있는 셀라시에 황제. 사진=조선DB
한 발 한 발 흙을 디디며 살아가는 삶에, 우리 국토, 우리 땅만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대륙의 모든 나라가 유럽의 식민지가 될 때 유일하게 자주성을 지킨 나라입니다. 유럽의 여러 국가가 아프리카 대륙을 침략해 종단하고 횡단하며 유린할 때, 그들 중 누군가는 에티오피아에도 갔어요. 그 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땅을 재고 항구를 측량할 때 에티오피아의 국민과 왕은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둡니다. 아니, 내버려 둔 정도가 아니라 환대를 해요. 먹을 것도 주고, 측량도 도와주고. 심지어 그들이 측량을 마치고 떠날 때엔 잔치를 열어주고 국왕의 근위병을 호위로 붙여 항구까지 데려다줍니다. 그런데 그 유럽 사람들이 막 배에 타려고 하는데 뒤따라온 근위병들이 신고 있던 구두를 벗겨 구두에 묻은 흙을 조심스럽게 털고 깨끗이 닦아낸 후 다시 건네주었습니다. 영문을 몰라하는 서양의 탐험가들에게 근위병들은 황제의 말이라며 이렇게 전했습니다.
“그대들은 멀리 떨어진 강한 나라에서 왔다. 그대들은 에티오피아가 모든 나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을 그대들의 눈으로 보았을 것이다. 이 땅의 흙은 우리에게 소중하다. 우리는 그 흙에 씨앗을 심고 우리의 죽은 자들을 묻는다. 우리는 피곤할 때 그 위에 누워 쉬고 들판에서 우리의 소 떼에게 풀을 먹인다. 그대들이 계곡에서 산으로, 평야에서 숲으로 걸어 다녔던 바로 그 오솔길들은 우리 조상의 발과 우리 어린이들의 발로 만들어진 것이다. 에티오피아의 흙은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어머니, 우리의 형제다. 우리는 그대들을 환대했으며 귀한 선물을 주었다. 그러나 흙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값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흙을 단 한 알갱이도 줄 수 없다.”
이것이 에티오피아의 정신입니다. 이 정신이 있었기에 유럽 국가들의 제국주의에 의해 아프리카 대륙이 유린될 때 유일하게 나라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흙은 국토의 개념이고 내 생명의 개념이고 민족의 개념입니다. 여러분은 이 흙의 의미를, 앞으로 우주만큼 넓어지는 보편적 인류의 꿈과 접목시켜야 합니다.
# 역사는 밟힌 자의 역사
누군가 여러분에게 “너는 앞으로 어떻게 살래?”라고 묻는다면 “나는 지렁이처럼 한 번 살아볼래”라고 말해보세요. 사실, 지렁이처럼 살면 밟힙니다.
우리 역사는 ‘밟은 자’의 역사가 아니라 ‘밟힌 자’의 역사예요. 미사여구가 아닙니다. ‘밟힌 지렁이’가 없었다면 어떻게 초목이 나오고 어떻게 나뭇잎이 다시 되살아나는 봄이 옵니까? 우리의 모든 역사는 ‘밟힌 자들의 역사’이기에 영웅이 생겨나고 지도자가 있어온 것이 아니겠어요? 그게 없었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 많은 사람을 바라볼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앞에서 이야기한 암흑의 영웅, 무명의 영웅, 밟히면 꿈틀 한다는 먹이사슬 최하위에 있는 지렁이의 울음을 들어야 합니다. 저 땅속에서 들리는, 사실은 울지도 못하는 지렁이의 울음을 들었다고 고집해야 해요. 실제로는 땅강아지의 울음이라고 해도 그걸 지렁이 울음이라고 해야 합니다.
도시 사람들은 그걸 들을 기회가 없으니 녹음해서 가끔 들으세요. 저는 가끔 그런 상상을 해요. 찜질방에 지렁이 울음소리를 기증해 사람들이 거기 멍석에 누워 쉬고 있을 때 들려주는 거죠. 그러면 젊은 사람들은 “아, 이게 무슨 소리지?” 하지 않겠어요? 그럼 나이 든 분들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옛날에 멍석 펴놓고 말이야, 흙에 누워서 별을 볼 때 듣던 소리야. 지렁이가 우는 소리야. 저것은 땅강아지 소리 아니야. 내가 들었어. 저 지층(地層) 깊숙한 곳에서 지렁이가 울었다고. 과학자들은 지렁이가 무슨 소리를 내느냐고 역정을 내겠지만 지렁이는 분명히 울어. 내가 들었어.”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이 이렇게만 말할 수 있어도 이 ‘한국인 이야기’가 헛된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우리나라는 걱정을 안 해도 돼요. 지렁이는 ‘밟히더라도’ 무기물을 유기물로 만드는 생명의 통로입니다. 그런 사람이 된다면, 그러니까 흙을 기억하고 역사를 기억하면서 미래를 만드는 세대가 될 수 있어요.
恨을 푸는 지렁이 울음소리
생명, 생명력이 어디로부터 옵니까. 물론 부모로부터 오지요. 그런데 그 부모의 생명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흙에서 왔지요. 지렁이가 애쓴 결과로, 우리는 죽더라도 우리의 몸이 썩어 흙으로 돌아가 다시 꽃이 되고 작은 이파리가 되어 자자손손 순환하는 것을 생각하면 죽음도 별로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한국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고, 그래서 도망치고 싶을 때, 그것 때문에 우리가 사방에 퍼진 겁니다. 그건 쫓겨난 것이 아니에요. 파종한 겁니다. 그러니까 ‘나쁜 정치를 하는 사람도 애국하는 거야’라고 생각하면 속도 편하고 여러분도 희망이 생기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껏 추구해왔고 또 끝없이 추구해가야 할 것은 지렁이 울음 같은 삶이에요. 밟히고 또 밟히면서 흙을 만들고 생명을 만드는, 그래서 먹이사슬의 최하위가 최상의 것으로 올라가 한을 푸는 지렁이 울음 말입니다.
어떤 색깔인지 몰라도 소설 속 ‘이태우 선생’처럼, 그땐 욕하던 이유를 몰랐지만, 욕쟁이가 한을 풀어서는 안 되던 그때가 어쩌면 우리가 행복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요? 욕쟁이의 한이야말로 땅속 깊은 곳에서 솟아 나오는 지렁이 울음소리입니다.
자, 여러분에게 다시 말합니다. 한밤에 눈 뜨거든 귀를 기울여보세요. 지렁이 울음소리가 들릴 겁니다. 그건 분명 아파트 층간 소음이 아닐 겁니다.
“눈도 다리도 없고 소리 낼 목청도 없다는데 어떻게 지렁이가 울음소리를 낸다고 합니까?”라고 따지지 마세요. 그 소리는 우리 할머니가 밭에서 묻혀온 흙냄새, 혹은 어머니의 친정집 시골 뒷마당에 묻어둔 어린 시절 우리의 생명 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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