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의 서정시대] 57년 전 이어령이 쓴 전혜린 추도사
서른둘에 죽은 전혜린 사후 나온 책에 동갑 이어령이 추모사 써
“가짜가 아닌 생이었다”는 글, 먼저 쓴 자신의 부고는 아니었을까
<김지수 조선비즈 문화전문기자 2022.04.07>
“스물아홉까지만 살고 싶어.”
젊은 시절,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혼자 중얼거리곤 했다. 어린 눈으로 훔쳐봤던 어른의 세계, 마음으로 흉봤던 뻔한 질서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불꽃처럼 살다 간 천재’ 로 명명받은 전혜린의 에세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내 낭만적 포즈에 불을 붙였다. 1960년대 서울대 법대 출신, 독일 유학 시절 슈바빙에서 보낸 이국적 나날, 죽기 전날 들렀다는 대학로 학림다방…. 서른두 해의 서사는 짧지만 매혹적이었다. ‘매 순간 온전한 자기를 갈망했던 전혜린’을 앓으면서 청춘의 봄이 지나갔고, 여름처럼 서른이 왔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들었고,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삼십세’를 읽었고, 양희은의 ‘내 나이 마흔 살에는’을 부르며 가을볕에 이르는 정상적 생장 과정이었다. 전혜린은 까맣게 잊었다. 그렇게 건강하고 무탈하게 오래 살고 싶었던 마흔아홉 살 가을에, 평창동 언덕에서 암으로 ‘죽어가는’ 이어령 선생을 만났다. 시대의 스승과 벼락같이 조우하며 한 세계가 찢겨 나가는 경험을 했다. 그는 적당히 덮어두었던 생을 들춰내 진선미의 세계로 쪼갰고, ‘너 존재했냐?’고 물었고, ‘자기만의 무늬를 살았느냐?’고 다그쳤다. 결정적으로 그는 우리가 두려워 회피하던 종말론적인 ‘죽음의 세계관’을 전복했다.
마지막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그가 찾아낸 죽음의 좌표는, 밤의 벼랑 끝이 아니라 ‘빛 한가운데 화사한 어머니의 품’이었다. 영화 ‘소울’에서 태어나기 전 세상을 보았을 때처럼 오감이 분명하게 살아났다. 몇 번의 인터뷰를 통해 그는 ‘탄생의 그 자리로 돌아간다’고 목적지를 분명히 했고 ‘죽어도 살아 있겠다’고 웃으며 작별했다. 실제로 사후에 수많은 책과 이야기를 예비해 ‘죽음은 끝이 아니라 이어짐’이라는 서사를 완성했다. 그것은 헛된 야망이 아니라 지극한 사랑이었다. ‘언제나 네 옆에서 글 쓰고 말할 거’라던.
신문에 부고조차 내지 말라던 선생의 바람과는 달리, 국가의 ‘부름’으로 널리 알려진 그의 문화부 장례식은 지극히 성대했고 그만큼 평범했다. 훌륭한 추도문이 있었으나, 최고의 추도문을 본 것은 한참 시간이 흐른 뒤였다.
어느 날 문득 인문 저술가 손관승의 SNS에서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말미에 붙은 추모 글을 보았다. 그걸 쓴 사람이 이어령이었다. 놀랍게도 전혜린과 이어령은 동년배로 둘 다 1934년 1월생이었다. 두 사람은 젊은 날 동시대를 함께 살았다.
“(중략) 그는 활화산이었다. 이 지상에 살고 간 서른두 해, 자기의 생을 완전하게 살고 간 여자였다. 가짜가 아닌 생이었다. 생을 열심히 진지하게 살았다. 정말로 유일한 여자였다. 그는 오늘의 침묵에 이르기 위하여 언제나 말을 했고 언제나 노상에 있었다. 당신은 이제 알 것이다. 그가 도달한 침묵의 값을. 그리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이 죽기 57년 전, 전혜린의 죽음을 위해 쓴 글은 ‘명백히’ 과거에 쓴 자신의 부고였다. 시대를 초월한 그들의 공명에, 아니 ‘너는 나’라는 투명한 자기 예시에 전율이 일었다. 이토록 드넓은 시공간과 독창적 타인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의 에고이스트를 본 적이 있던가. 그 뒤 ‘당대의 이념’에 제한되지 않고 ‘초월적 관념’을 말하는 자로, 오류 없이 오래 살아있겠다는 이어령의 집념은 새록새록 발견되었다. 진부한 미담이 아닌 전압이 높은 미문으로.
최근에 개정판 ‘우리 문화 박물지’를 보며 나는 뒤늦게 탄복했다. 예컨대 그는 거문고를 누워서 소리 내는 악기라고 하면서 ‘영혼의 무게를 느낄 때 인간은 눕는다. 눕는다는 것, 그것은 침묵이다’라고 쓴다. 그리고 그 자신, 지금 누워서 소리 내는 악기가 되었다.
다 지난 일이지만 ‘죽음의 스승’의 장례식에, 화환 대신 마당에 굴렁쇠 몇 개 세워 놓았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임종 감독 송길원 목사의 말은 의미 심장하다. 굴렁쇠는 그에게 정적의 소리였으니까.
완전히 다른 생이었으나, ‘완전하게 자기 생을 살다 간’ 전혜린과 이어령. 그 우연한 ‘데칼코마니’를 목격하면서 나는 요즘 신비로운 자아의 균형을 느낀다. 그리고 조금씩 즐겁게 나의 장례식 풍경을 그려볼 수 있었다. 죽음의 좌표가 삶의 한가운데 있다면, 데드라인에 이르기 전에 나의 부고는 내가 직접 쓰리라. 친구들에겐 미리 나의 연약함이 포함된 추모사를 부탁하리라. 장례식장엔 쇼스타코비치의 왈츠를 틀어놓고, 그들처럼 찬란하게 열매 맺는 우정의 만개를 지켜보리라.
'살아가는 이야기 > 이어령의 말과 죽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2) (0) | 2022.07.18 |
---|---|
고 이어령 전 장관 부인 강인숙 영인문학관장 "맑은 날, 조용하고 평화롭게 가셨어요" (0) | 2022.05.06 |
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1) (0) | 2022.04.11 |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0) | 2022.04.11 |
취재록 이어령의 마지막 나날들 (0) | 2022.0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