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천지인(天地人)과 윤동주의 ‘서시’
“높은 곳에 ‘별’, 가장 아래에 ‘잎새’, 그사이에 ‘내’가 있다”
⊙ 라파엘로 그림에 플라톤의 손끝이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손바닥이 땅을 가리키고 있는 까닭은…
⊙ 김소월 ‘진달래꽃’ 속 두 사람은 서로를 역겨워도 않고, 가지도 않았으며,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중
⊙ 윤동주 ‘서시’는 부끄럽지 않게 살았고, 살고 있고, 살 것이라는 맹세
⊙ 인간은 비록 불완전하고 땅에서 죄를 짓고 살지만 하늘을 볼 수 있기에 부끄러움을 알아
내가 서양 사람들 앞에서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 사상을 이야기하면 서양인들이 다들 와 놀랍다고 이야기하는 까닭이 있어요.
서양의 최고 철학자는 플라톤입니다.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1861~1947년)는 “오늘날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본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했어요. 여기에 하나 더 붙이자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지요.
이탈리아 르네상스 전성기의 화가 중에 라파엘로(Raffaello Sanzio·1483~ 1520년)가 있습니다. 이탈리아 로마는 기본적으로 기독교 내지 그리스도교 국가이지만 르네상스 시기에 그리스·로마 문화가 들어와요. 중세 때는 그리스도교와 이방의 종교 문화는 대립하고 싸웠지만 르네상스에 들어서 기독교가 그리스·로마의 문화까지도 다 품어버립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티칸 교황청의 프레스코화입니다.
대표적인 그림은 라파엘로가 1510~1512년 사이에 그린 〈아테네 학당(Scuola di Atene)〉이라는 작품입니다. 그리스는 희랍의 신(神)을 믿는 다신교니까 로마 가톨릭의 입장에서 보면 이교도지요. 그런데 왜 바티칸에 이 그림을 그리게 했을까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까지도 예수님 밑에 오면 다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아테네 학당〉을 보면 알겠지만, 가로세로의 비율이 똑같아요. 이처럼 비율이 똑같은 게 기독교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니까 희랍의 철학자들을 데리고 기독교를 만든 거죠.
서양 철학의 기본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 그림의 중앙을 보세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세워놓았지요? 그리고 나머지 희랍 철학자들을 다 집어넣었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여기 벌거벗고 드러누워 있는 사람이 디오게네스라는 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죠. 통나무집에서 산 디오게네스 말고 또 누가 이렇게 바닥에 드러누워 있겠어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크게 확대해 보면, 플라톤의 손끝이 하늘을 가리키고 있어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손바닥을 아래로 해서 땅을 가리키고 있죠.
이러니 서양 사람들이 내가 ‘천지인 삼재’를 이야기하면 놀라지 않을 수 있겠어요?
플라톤은 “모든 인간의 본질은 하늘에 있다”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러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선생님, 하늘이 아니라 땅이지요, 땅”이라고 말합니다.
이게 이원론(二元論)입니다. 서양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 이원론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1770~1831년)이 정(正·테제·Thesis), 반(反·안티테제·Antithesis), 합(合·신테제·Synthesis)이라고 해도, 프로이트(Sigmund Freud·1856~1939년)가 무의식을 파헤치고 별의별 것을 다 했지만 결과적으로 서양에서 ‘하늘’과 ‘땅’은 멀어요. 하늘은 이데아, 관념의 세계이고 땅은 육체의 세계입니다. 하늘은 무한·영원의 세계이고 땅은 순간·공간의 세계입니다. 무한·유한, 선·악, 두 세계로 나뉩니다.
서양에서는 하늘나라에서 잘못한 사람들이 모두 땅으로 떨어져요. 떨어지는 것은 무게를 지니고 있어요. 중력에 의해 떨어지는 것은 다 나쁜 것이 되고, 죄는 항상 무거운 것이에요. 무거운 죄를 지은 죄인들의 발목에 큰 족쇄를 채우죠.
반대로 중력을 이기고 날아가는 것들은 선(善)한 것들, 좋은 것들이죠. 그래서 단테의 《신곡》에 보면 죄의 무게만큼 높은 산을 올라가는 형벌을 내립니다. 올라간 만큼 죄가 가벼워져요.
# 잘못된 지식의 위험성 - ‘진달래꽃’의 새로운 해석
1988년 12월 촬영한 이어령 선생과 ‘호돌이 어린이’ 윤태웅 군. 한국을 세계에 알린 88서울올림픽의 이미지 메이커 이어령 선생이 개회식 〈정적〉에서 굴렁쇠를 굴린 ‘호돌이 어린이’ 윤태웅 군을 안아 올려 원의 의미를 말해주는 모습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국민시 두 편이 있어요. 그중 하나가 김소월(金素月·1902~1934년)의 ‘진달래꽃’입니다. 교과서에 실린 이 시를 대개 학창 시절 외웠거나 지금도 외우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시는 윤동주(尹東柱·1917~1945년)의 ‘서시’입니다.
두 시 모두 각종 시험에 단골 출제되는 시지요. 심지어 외울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렇게 외우는 사람 중 거의 단 한 사람도 ‘진달래꽃’과 ‘서시’를 제대로 모른다고 말한다면 믿으시겠어요?
자, ‘진달래꽃’을 우리는 이별의 시로 배웠어요. 과연 진짜 그럴까요? 이 시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이라고 시작해요. ‘가실 때’니까 아직 내가 사랑하는 님은 안 갔어요. 이런데 어떻게 이별의 시가 됩니까?
‘만약 당신이 가신다면 이러이러하겠다’는 이야기니까 현재 이 두 사람은 서로를 역겨워도 않고, 가지도 않았으며,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중이에요. 가령 내가 ‘만약에 백만원이 생긴다면…’이라고 썼는데 시제를 잘못 봐서 ‘아, 이(李)아무개 백만원 생겼대’라고 오해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영어로 하면 if 가정법이잖아요. 그런데 학교에서 다들 그렇게 가르쳐요. 사랑가가 아닌 이별가로 말이죠.
‘진달래꽃’은 이별가가 아닌 사랑가
2016년 6월 서울 종로구 화봉문고에서 전시된 《진달래꽃》 초판본의 모습. 시인 김소월이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 초판본은 2015년 경매에서 1억 3500만원에 낙찰되었다.
“사랑한다면 당신하고 어디 가서 서로 진달래꽃 꺾어서 뿌리지 않고 화전이라도 부쳐 먹으면서 오순도순 했어야지. 이건 분명히 이별하는 이야기야”라고 단정하는 식이에요.
그러나 동사의 시제를 잘 보세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에서 보듯 ‘드렸다’가 아니라 ‘드리오리다’잖아요. 그런데 다들 ‘드렸다’로 읽어요. 그러니까 이별의 시가 된 거죠. ‘뿌리오리다’지, 뿌리지 않았어요. 이 시의 동사는 전부가 미래 추정형입니다. 마지막 구절도 보세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지금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이 시가 정말로 이별가가 되려면 이렇게 되어야죠.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 말없이 보내 드렸었지.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지르밟고 가셨지. 죽어도 눈물 안 흘리려고 했는데 눈물 펑펑 흘렸습니다.’
이게 원래의 시와 닮기나 했어요?
이 시의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건 이 말이에요.
“내가 당신을 지금 열렬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버려도 꽃을 뿌려줄 겁니다. 나는 눈물도 안 흘릴 겁니다, 이렇게 사랑하는데….”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시는 이별을 가장하여 사랑을 노래한 시예요. 이별을 상상하면서 이별을 통해 오늘의 반대되는 상황으로 오늘의 내가 누리고 있는 사랑의 기쁨을 노래한 시예요. 이별의 슬픔을 통해 사랑의 기쁨을 노래한 것이죠. 이것을 전문적인 용어로는 패러독스 아이러니(Paradox Irony) 수법이라고 합니다.
# 선입견으로 읽는 윤동주의 ‘서시’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책에 줄 긋고 칠하면서 배운 시가 윤동주의 ‘서시’입니다.
윤동주…저항시인…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하며 줄줄줄 외웠죠. 이게 상표(商標)입니다. 영화사의 로고예요. 알맹이가 아닌 껍데기죠. 외우면 윤동주의 시를 알게 됩니까?
윤동주 저항시? 윤동주가 저항하는 거 봤어요? 다 선생님에게 들은 얘기지요. 이 시를 읽기도 전에 선생님이 알려줘요.
“윤동주는 저항시인이다. 이 시는 일제에 저항한 시다”라고 말한 뒤 시 읽기를 시작하지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아! 죽는 날까지 일제에 저항하겠다는 다짐이구나’ 하고 해석해가면서 읽는 거죠. 그렇게 하고 읽으면 이 시의 여러 군데가 걸려요.
윤동주 선생이 저항시인이 아니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저항시인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이 시를 보면 이 시의 진짜 값어치를 모르게 돼요. 다 일제에 저항하는 시로만 읽으니까, 이 시의 장치나 비유도 딱 그렇게 한정 짓게 되니까요.
만약 여러분이 이 시를 쓴 시인이 누구인지 모르고 선생에게 가르침도 받지 않고 그냥 날것인 채로 읽었을 때도 저항시라고 느껴질까요? 한번 해보세요.
‘서시’를 날것 그대로 다시 읽기
저항시라는 말도 모르고 윤동주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길을 걷는데 그냥 ‘서시’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기에 주워 읽었다 칩시다. 그런 마음으로 솔직하게 그냥 읽어보세요.
이 시만 읽어서 ‘아, 이분이 후쿠오카 감옥에서 생체실험 희생자로 돌아가시고, 그 집안도 다 기독교인인 데다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이지’ 하고 느껴질까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의 ‘서시’ 전문
아무런 선입견 없이 이 시만 읽었을 때, 조선 독립을 위해서 싸우겠다는 마음이 느껴져요? 이 시를 저항시로 읽으려면 해석을 이렇게 해야 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부끄럽지 않게 나는 친일파가 되지 않겠다. 일본놈 앞잡이를 절대 안 하겠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잎새라는 게 민초들이지. 바로 한국인이야. 이 시를 쓰고 있는 윤동주가 살고 있는 북간도로 쫓겨온 가난한 사람들이지. 이 사람들을 보니 일본 식민치하에서 사는 사람들이 너무너무 안되어 보여서 윤동주가 괴로워하고 있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조국 해방의 별, 우리의 별 그걸 위하여 나는 끝까지 일본 사람들에 의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사랑해야지. 우리 동포를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일제에 저항하고 조선[한국]을 독립시켜서 이 가난하고 학대받고 어렵고 고난에 찬 민족을 구해야 되겠다. 그 길이 나에게 주어진 길이니 나는 오늘도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끝!
자, 여러분은 저항시인 윤동주 시인의 저항시 한 편을 감상했어요.
# 새롭게 읽는 윤동주의 ‘서시’ - 삭제된 서술부의 시제
그런데 저항시인이라는 프레임을 제거하고, 시대상황도 배제하고 이 시를 읽으면 ‘모든 죽어가는 것들’에 예외가 있습니까? 일본 사람, 한국 사람의 구별이 있어요? 공자님이 말씀하신 대로 ‘나라’를 빼고, 이 시에서는 ‘노자’까지 나갔어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이니까 ‘사람’까지 뺐잖아요.
‘바람에’+‘도’가 붙으니, ‘바람’은 물론이고 ‘사람’은 말할 것도 없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그러니 그게 일본인이든 중국인이든 한국인이든, 내 이웃을, 죽음의 운명을 타고난 인간을 윤동주는 사랑했어요. 태어나면서 사형선고를 받는 것이 사람이죠. 언제가 되었든 필연적으로 죽는 것이 인간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죽을 줄 알면서도 버티고 싸우지요. 윤동주는 그 안에서 버티는 것이 아니라 하늘까지 올라갔어요.
하늘에 올라가면 별이 있습니다. 땅을 노래하는 마음이 아니라 별을 노래하는 거니까 벌써 그 안에 역사를 내재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역사를 포함하고 점점 위로 올라가면 땅이 보이고 지구가 보이고, 거기서 쭈욱 올라가서 별을 노래하는 겁니다. 하늘을 우러러보는 거죠.
그러니까 하늘까지 못 올라간 사람, 별을 모르는 사람은 풀잎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리가 없어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이라는 말은 현재 자신은 부끄러울 것이 전혀 없다, 나는 결백하다, 나는 그런 뜻을 가지고 있다며 스스로에게 맹세하는 말이에요. 그렇게 살고 싶다고 소원하는 거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이렇게 맹세하고, 다짐하고, 소원한다는 건 돌이켜 말하면 죽는 날까지 부끄럼 없이 살고 싶은데 그게 자신이 없다는 말이기도 해요. 자신이 없으니 또 한 번 맹세하고 다짐하는 거죠.
앞에서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이야기하면서 시제를 잘못 읽으면 시의 본래 뜻을 모르고 착각하게 된다고 했지요? 그런데 ‘서시’의 이 부분은 한국어의 특성상 서술어를 생략하면서 시제가 동시에 생략되어 있어요. 보세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하고 서술어 대신 말줄임표(…)를 썼어요. 이건 읽는 사람이 서술부의 시제를 무엇으로 넣어 읽느냐에 따라 이 문장을 과거로도 현재로도 미래로도 읽을 수 있다는 거지요. 한 번 해볼까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맹세했다’라고 읽으면 과거에 맹세한 것이지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맹세한다’라고 읽으면 지금 현재에 내가 맹세하고 있는 것이에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맹세할 것이다’라고 읽으면 미래에 그리 맹세할 것이라는 다짐이 됩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다는 이야기예요. 부끄럽지 않게 살았고, 살고 있고, 살 것이라는 말이지요.
# ‘부끄러움’도 문화의 산물. 3가지 부끄러움
1967년 가수 윤복희씨가 우리나라 최초로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타났을 때 신문과 방송에서는 망신스럽다고 야단이 났어요. 결국 윤복희씨는 미니스커트 때문에 울고 갔잖아요. 요즘은 그가 입었던 미니스커트는 오히려 얌전해 보일 정도인데 옛날엔 그 정도의 길이도 창피해했어요.
그러니까 부끄러움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문화입니다. 어느 문화에서는 부끄럽지 않은 것이 어느 문화에서는 부끄러운 것이 되지요. 또 남에 대해서는 부끄러운 것이 자기에 대해서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경우도 있어요. 자기가 혼자 있을 때는 아무렇게나 해도 부끄럽지 않잖아요. 주말 오전에 늦잠 자고 일어나 한껏 흐트러진 모습도 혼자 있을 때는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지요. 그 모습을 누가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그때부터는 부끄러워지지만. 또 남들은 모르는 나 혼자만의 부끄러움이 있어요. 자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이건 하늘에 대한 부끄러움이죠. 남들은 다 몰라도 하늘과 나만은 아는 그런 일들이 있으니까요. 이 부끄러움이 땅으로 내려오면 다시 남에 대한 부끄러움, 흔히 말하는 ‘쪽팔리는’ 부끄러움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세 가지 부끄러움을 배웠어요.
하늘이 나를 봤을 때의 부끄러움, 땅의 사람(법, 제도 등)이 나를 보았을 때의 부끄러움, 그리고 꽃과 같은 자연이 나를 보았을 때의 부끄러움이 있어요. 남이 보는 앞에서는 부끄러워서 옷을 못 벗는데, 집에서 키우는 반려동물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벗어요. 개에게, 탁자에 놓인 꽃한테 “저리 가, 고개 돌려”라는 말을 하지는 않잖아요.
부끄러움조차 ‘천지인’과 연관해 설명할 수 있는 거예요. 이러니 ‘천지인’이 기가 막힌 거죠.
‘나와 하늘’이 직접 연결된 ‘부끄러움’
좀 더 ‘부끄러움’에 대해 이야기해볼게요.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선악과(善惡果)’와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어요.
하느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을 때 창세기 2장 25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뒤 어떻게 됐을까요? 창세기 3장 7절입니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
‘무화과나무 잎을 엮었다’는 것은 알몸을 부끄러워했다는 말과 같아요. 이처럼 부끄러움은 인간의 원죄(原罪)에서 나왔다는 시각입니다. 이 부끄러움은 하늘(신) 앞에 감히 고개를 들 수 없는 인간의 타고난 죄인 것이죠. 부끄러움의 세 층위(層位) 중 첫 번째 ‘하늘이 나를 봤을 때의 부끄러움’입니다.
신기독(愼其獨), 혹은 신독(愼獨)이란 말이 있습니다.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에 나오는 말인데, ‘홀로 있을 때 삼가라’는 뜻입니다. 백범(白凡) 김구(金九·1876~1949년) 선생이 남긴 여러 유묵 가운데 ‘신기독’이란 글씨가 등록문화재(제442-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김구가 집무실 벽에 ‘신기독’을 걸어놓았다고 합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년) 선생 역시 ‘신독’이란 말을 따랐다고 합니다. 어느 더운 여름날, 퇴계가 의관을 정제하고 서책을 읽자 가족들이 편하게 옷을 갈아입으라고 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퇴계는 “혼자 있어도 천 명 사이에 있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며 ‘신독’이라는 글귀를 남겼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퇴계와 김구의 경구, 愼獨
《송사·채원정전(宋史·蔡元定傳)》에서는 ‘신독’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밤길 홀로 걸을 때에도 그림자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고, 홀로 잠잘 때에도 이불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獨行不愧影 獨寢不愧衾).’ 남이 보든 안 보든 스스로 삼간다는 이 신독·신기독은, ‘나와 하늘’이 서로 연결돼 있음을 뜻합니다.
‘나(개인)와 사회’, 다시 말해 ‘사회 법률·제도’가 나와 연결된 것이 아니라 ‘나와 하늘’이 직접 연결돼 있습니다. ‘나와 하늘’이 주고받는 것이지 중간에 ‘사회와 법률’이 개입할 순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아도, 법을 어겨 혹독한 처벌을 받아도 ‘나와 하늘’ 앞에 떳떳한 겁니다.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해 시성식(諡聖式)을 직접 주재하며 김대건(金大建·1822~1846년) 신부를 비롯해 가톨릭 복자 103위를 성인(聖人)으로 품위를 올렸습니다. 또 지난 2014년 2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에게 시복(諡福) 결정을 내렸습니다.
한국의 신앙 선조들은 선교사나 사제, 수도자의 가르침을 통해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나와 하늘’이 바로 연결된 경우가 아닐까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죽음까지 불사해가며 믿음을 지키게 했을까요?
조선 왕조가 자행한 전 근대적 사상 통제와 신분제적 사회 질서에 대한 저항이었을지 몰라도 보다 높은 차원의 선택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망해가는 조선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을 근거가 부족합니다. 어쩌면 그들의 죽음은 인간의 양심과 인격에 대한 깨달음의 표현이 아니었을까요? ‘순교자의 죽음은 역사 발전 과정에서 출현한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대한 갈망의 결과’(한국천주교주교회의·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이때 양심은 ‘나와 하늘’이 바로 만나는 지점입니다.
양심과 ‘부끄러움’
독자 여러분이 종교를 믿지 않는다면, 부끄러움은 개인의 양심(良心) 문제일 수도 있어요. 두 번째 ‘땅의 사람(법, 제도 등)이 나를 보았을 때의 부끄러움’ 말입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양심’을 찾아보면 이렇게 정의되어 있어요.
‘도덕적인 가치를 판단하여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깨달아 바르게 행하려는 의식.’
《철학사전》(중원문화 刊)에서 ‘양심’을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인간이 사회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도덕적인 책임을 생각하는 감정상의 느낌을 말한다.’
어떤 선택을 하고 결정에 책임을 지는 과정에서 ‘양심에 어긋나면’ 혹은 ‘도덕적인 책임감을 느끼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이는 아무리 인적이 드문 거리라도 함부로 무단횡단하지 않습니다. 지나는 차도 없고 횡단보도가 멀어도 그는 도로교통법을 철저히 지킵니다.
그런데 이 양심이 형성된 과정을 추적하면 조금 복잡해집니다. 저 유명한 에리히 프롬(Erich Pinchas Fromm·1900~1980년)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떠올려보세요. 어떤 이는 자신의 양심에 따른 결정에 불안감과 공포를 느낍니다. 스스로 선택한 삶의 원칙(양심)을 따르지 못하고 외부의 ‘신화’와 ‘우상’을 섬깁니다.(신화와 우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독립적인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심리 상태를 ‘자유로부터의 도피’라고 하지요.)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양심의 실체는, 내면의 성찰과 비판을 거쳐 스스로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어야 합니다. 남이 만든 도덕률 혹은 윤리적 외부 준거(準據)나 틀에 맞추고, 맞춰가는 행위를 ‘양심에 따른다’고 착각합니다. 사회적인 법과 제도, 도덕률이 절대적인 양심이 될 순 없습니다.
양심과 ‘자유로부터의 도피’
아무리 사회 제도가 허용한다고 해도, 내 양심에 비춰 아니라고 느끼면 그것은 아닌 것입니다. 미국 사상가 헨리 소로(Henry D. Thoreau·1817~1862년)가 말하는 시민 불복종 운동(Civil Disobedience Movement) 같은 것이죠.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들이 조선총독부의 혹독한 법과 제도를 알면서도 목숨을 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양심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모진 고문을 겪고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그토록 믿어왔던 도덕률이 악법으로 바뀔 경우 양심은 큰 혼란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그렇기에 양심은 세상에서 평가하는, 옳고 그른 것을 초월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바람이 불어도, 권력이 바뀌어도 자신을 지켜나갈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사람마다 양심, 풀이하자면 자긍심, 수치심, 그리고 죄책감 같은 정서들은 천차만별입니다. 부모의 양육태도가 ‘부끄러움’과 ‘뻔뻔함’을 결정한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브로디와 셰퍼의 연구(1982)에 따르면 위협적이고 처벌적인 부모들이 도덕적으로 성숙한 자녀들을 양육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와 정반대로 가혹한 형태의 훈육에 의존하는 부모들은 종종 부적절한 행동을 하고 죄책감, 양심의 가책, 수치심, 혹은 자기비판을 거의 나타내지 않는 자녀들을 갖게 되는 경향이 있다고 해요. 아이들을 부모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교육만능론’은 전혀 신뢰할 것이 못 됩니다.
어쨌든, 각 개인이 태어나고 자라난 환경, 양육태도가 다르듯 저마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정서상의 반응, 즉 양심도 다릅니다.
복수와 관련한 두 이야기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는 사냥꾼 휴 글래스(리어나도 디캐프리오 扮)의 복수극입니다. 휴 글래스는 거대한 야생 곰에게 일격을 당해 큰 부상을 입게 되는데 비정한 동료 피츠 제럴드(톰 하디)는 인디언의 추격과 돈에 눈이 멀어 휴의 아들을 죽이고 그 또한 땅속에 묻고 떠납니다. 휴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처절한 복수를 완성하는데 이 경우 어떤 사람은 ‘복수하라’고 양심에 명령을 내리지만, 어떤 이는 ‘어떤 일이 있어도 살인만은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도 양심의 문제를 다루고 있어요. 덴마크의 왕이 갑자기 서거하자, 동생 ‘클로디어스’가 왕위에 오릅니다. 심지어 선왕(先王)의 아내와 재혼까지 합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괴로운 시간을 보내던 ‘햄릿’ 왕자. 그는 어느 날 아버지의 망령(亡靈)에게서 자신이 동생 클로디어스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햄릿은 숙부 클로디어스를 죽이지 못해 양심상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극(劇)과 똑같은 상황에 직면한 다른 사람은 숙부를 죽여서 살인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할지 모릅니다. 참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에서 ‘부끄러움’은, 본능적인 욕구들의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원초아(Id), 이러한 욕구들에 대해 현실적인 계획들을 세워 대응하는 합리적인 자아(Ego)보다는 도덕적인 초자아(Superego)와 가깝습니다.
초자아는 양심과 비슷합니다. 초자아가 생겨나면 아동은 자신의 행위에 자긍심을 느끼고, 반면 도덕적으로 위반한 행동에 대해서는 죄책감 혹은 수치심을 느끼도록 만드는 ‘내부의 감시자(internal sensor)’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초자아 이론은 현대 심리학에서 많은 공격을 받습니다. 초자아가 아동들이 이성의 부모에 대한 근친상간의 욕망 같은 정서적인 갈등을 경험하는 남근기(3~6세)에 주로 발달한다는 주장도 요즘 거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어요.
# ‘서시’를 읽는 세 가지 방법 - 종교시·저항시·휴머니즘시
다시 윤동주의 ‘서시’로 돌아가 세 가지 층위의 부끄러움에 관해 분석해보겠습니다. 앞서 ‘하늘이 나를 봤을 때’ ‘땅의 사람이 나를 보았을 때’ ‘자연이 나를 보았을 때’의 부끄러움을 말했어요.
‘서시’를 일제에 대한 저항시라고 했을 때는 이 시를 정치적 레벨에서 읽은 것입니다. 국가 간의 정치 속에서 이 시를 읽을 수 있어요.
국가의 개념을 털어내고 인간 레벨의 문제로만 읽었을 때는 휴머니즘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다음으로는 종교적, 초월적 하늘의 레벨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해서 ‘서시’는 저항시(정치), 인간주의시(휴머니즘), 종교시 이렇게 3개 층위로 읽을 수 있지만 전체적인 뜻은 천지인입니다.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애(民族愛), 인간애(人間愛), 우주애(宇宙愛) 말이죠. 이처럼 하늘, 땅, 사람으로 나눠놓으면 놀랍게도 이 시가 금세 보입니다.
하늘에는 별이 있어요. 땅에는 잎새가 있지요. 먼저 하늘의 별은 바람이 불어도 끄떡없어요. 그러나 땅의 풀잎과 같은 잎새는 바람이 불면 흔들려요. 잎은 떨어지면 쉽게 죽습니다. 그러니 잎새는 모든 죽어가는 것의 상징이지요. 별은 죽음을 초월한 것이에요. 죽지 않습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나오는 말이에요. “오, 폭풍이 불어도 끄떡없는 별아.” 태풍 속에서 배를 타고 노 젓는 사람들은 별을 보고 항해를 합니다. 그 별이 우리나라로 오면 북극성, 북두칠성이 됩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이 북두칠성에서 온 것이에요. 저 삼라에서 온 것입니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그러니 우리가 누워서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하는 것은, ‘죽는 나와 영원히 죽지 않는 저 하늘나라에서 온 내가 있다’는 말입니다. 나는 땅에서는 죽어야 하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슬프지만 별과 나를 동일시(Identify)해서 별의 생명이 되었을 때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이지요. 사실은 슬픈 얘기예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는 마음의 기저에는 ‘나-하늘’이 직접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연결된 지상의 인간들은 사랑을 해도 뭘 해도 다 죽지만 별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했을 때, 내 마음속 심리적인 부끄러움이나 괴로움을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극복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시인의 마음이죠. 정치인이나 종교인의 마음이 아니라 시인이니까 윤동주는 하늘의 별을 노래하지 스스로 하늘의 별이 되지는 않았어요. 그러니까 다시 천지인으로 돌아옵니다.
제일 높은 곳에 ‘별’이 있고, 가장 아래에 ‘잎새’가 있고 그사이에 ‘내(사람)’가 있습니다. 위를 보고, 아래를 보고, 다시 시인으로 돌아오는 것이지요.
# 인간의 아름다운 눈, ‘나와 하늘’이 연결되다
사형수들은 형장에서 죽기 전에 예외 없이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땅 한 번 쳐다보고 죽는다고 합니다. 마지막까지도 하늘과 땅을 보고 죽어요. 그러니까 하늘과 땅 사이에 인간의 눈이 그렇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형수의 눈이라도 아름다워요. 하늘을 보고 땅을 보니까 말이죠. 짐승들은 땅밖에 보지 못합니다. 짐승들은 부끄러움을 몰라요.
하지만 인간은 비록 불완전하고 땅에서 죄를 짓고 살지만 하늘을 볼 수 있기에 부끄러움을 압니다. 죄를 짓고 경찰서에 끌려온 사람들,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에 하나같이 모자를 눌러쓰거나 옷을 뒤집어쓰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립니다. 그 모습을 보면 마음이 놓입니다. 죄를 짓고 끌려왔지만 너도 인간이구나, 하는 안도감이지요.
함께 죄를 지은 무리가 저희끼리는 막 부끄럽게 다녀도 끄떡없었어요. 그런데 잡혀온 순간 하늘을 보는 겁니다. 하늘을 보니 스스로 부끄러운 거예요. 사형수들이 죽기 전에 하늘을 한 번 쳐다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땅의 마음만이 아니라 하늘의 마음이 있고 인간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 말을 하죠.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냐. 너도 사람이냐?”고 할 때는 ‘그 말을 듣는 너라는 상대가 짐승보다 못하다’는 비난입니다. 그런데 “나도 사람이야” 할 때는 실수할 수 있고 완벽할 수 없는, 신이 아닌 인간이라는 뜻이에요. 신처럼 완벽할 수는 없지만 짐승은 아니지요. 지금 ‘사람’은 신과 짐승의 사이에 있습니다.
윤동주 눈이 아름다운 이유는…
인간은 천(天)과 지(地)의 사이에 있기 때문에 하늘을 볼 때는 신을 향하고 땅을 볼 때는 짐승을 향합니다. 그래서 그사이에 있는 인간의 눈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윤동주의 눈이 그래서 아름다워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기를 맹세하는 사람이니까 사랑해야지, 영원히 미래를 향해서 사랑해야지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가 이렇게 아름다운 겁니다.
제일 마지막 줄을 볼까요?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시에서 바람이 두 번 나옵니다. 처음에는 ‘잎새에 이는 바람’인데, 그 바람이 지금은 ‘하늘의 별에 스치고’ 있어요. 모든 것을 시들게 하고 죽게 하는 바람은 시간이죠. 그 시간이 별에 스치면 영원까지 갑니다. 그러니 윤동주가 ‘나는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라고 말할 때의 그 길은 풀잎에서부터 별까지 가는 것이지요. 바람을 따라서, 잎새에 이는 땅의 바람에, 저 허공에 부는 바람까지 뻗쳐서 별까지 가는 그 과정의 길입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길이지요. (계속)⊙
8. 천지인(天地人)과 별[星]의 노래
우리는 고난을 통해 별로 간다(ad astra per aspera)
⊙ 윤동주의 두 가지 마음, ‘별을 노래하는 마음’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
⊙ 시인의 마음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흔들리고 설레는 마음… 윤동주는 역사 속 ‘영웅’이 아니라 ‘햄릿’과 같아
⊙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아래로는 사람을 대함에 있어 부끄럽지 않을 때(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
⊙ 추운 겨울날, 언 손을 비비며 연을 날려본 기억이 있는 이가 윤동주의 마음을 아는 사람
⊙ Veni, vidi, vici(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의 ‘V’, 윤동주의 ‘밤, 별, 바람’의 ‘ㅂ’
하늘과 땅 사이에 길이 있습니다. 무슨 그런 길이 다 있냐고요?
당연히 있지요. 눈에 안 보일 뿐 마음의 눈으로 보면 누구나 길을 그릴 수 있지요. 과학적으로도 설명할 수 있어요.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은 포물선을 그리며 낙하한다고 해요. 밤하늘에 별똥별이 휙 나타났다가 떨어지는 찰나에 진심을 다해 소원을 빌었던 기억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겁니다. 그러고 보면 혜성도 태양을 중심으로 포물선의 궤도로 움직이고 있어요.
하늘과 땅 사이에 다양한 형태의 길을 꿈꿀 수 있겠지만 하늘의 길은 어쩌면 포물선 형태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땅에서 하늘로 향하든, 하늘에서 땅으로 향하든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 연과 포물선
땅에서 얼레를 들고 있는 아이와 하늘에 떠 있는 연 사이에 있는 실이 그려내는 선이 포물선입니다. 이 포물선을 이야기하기 전에, 아이들은 그 추운 날 왜 그렇게 덜덜 떨면서도 밖에 나가 연을 날렸을까요? 지금 어른들이 로켓과 비행기 같은 것을 만들어서 하늘로 가고 싶어 하는 그 마음과 하늘로 연과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아이들의 마음은 같습니다. 이 연은 비행기의 모델이에요.
연을 날려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연이라는 게 떨어지기 쉬워요. 전선줄에 걸리고 나뭇가지에 걸려 추락할 때의 좌절감은 참 크죠. 내 연이 높이 높이 날았으면 좋겠는데 반드시 떨어져요.
연을 바람에 실어 날려 보낼 때, 연은 하늘로 날아오르려고 하지만 동시에 끝없이 떨어지려고도 하지요. 하늘로 날아가고 싶은 마음과 땅으로 끌어당기는 중력, 그 두 개의 마음이 윤동주(1917~1945년) 시인에게도 있잖아요. ‘별을 노래하는 마음’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처럼요.
‘모든 죽어가는 것’은 현실에서의 괴로움이고, ‘별을 노래하는 것’은 이상과 꿈입니다. 그러니 끝없이 가벼워져서 별까지 올라가는 마음과 땅의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 미움, 현실에서의 어려움이 하늘로 날아가는 연과 얼레를 잡고 있는 아이 사이의 긴장감 있는 포물선으로 자리 잡는 것입니다.
포물선과 逆說, 그 아름다움
아이가 연을 날린다고 했을 때, 하늘을 나는 연과 얼레를 잡고 있는 아이 사이에는 반드시 올라가려는 것과 내려오려는 것 사이의 포물선이 그려집니다. 이것이 포물선의 아름다움이에요. 우리나라의 기본은 이러한 포물선으로 이루어집니다. 말하자면 역설(逆說)이지요. 하늘로 올라가려 하는 가벼움과 끝없이 지구가 끌어당기는 중력이 팽팽하게 긴장을 이루는 가운데 포물선은 직선이 아닌 곡선이에요. 그러니 이 포물선은 아름답지요.
운명으로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데 그 운명의 끝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이 길은 나에게 주어진 것이니까 자기가 선택할 수는 없어요. 그렇지만 그냥 끌려가는 것만도 아닙니다.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속에서 끝없이 별을 노래하고 하늘을 우러러볼 줄 알기 때문에, 짐승처럼 그냥 죽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그 추위 속에서도 연을 날리는 것은 중력과 그 중력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것의 대립이지요. 이것이 시몬 베유(1909~1943년)가 말하는 ‘중력과 은총’입니다.
중력이라고 하는 것은 뉴턴(1643~ 1727년)의 사과처럼 밑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땅에 있는 식물들은 그 중력을 거스르고 하늘로 올라가요. 힘없는 넝쿨이라도 하늘을 향해 끝없이 손을 뻗어요. 죽음은 정해진 운명이지만 죽는 그 순간까지 지향점은 영원의 하늘이지요.
윤동주 시인이 그랬습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과 같이 죽음, 중력에 지배되는 땅을 향한 마음과 별을 우러르는 하늘을 향한 마음, 그 중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포물선과 같은 곡선이 생깁니다.
# 맹자의 〈진심편〉과 서시
그런데 윤동주가 시인이 아니라 군자(君子)라면 어떻게 될까요.
군자는 이미 초월한 사람입니다. 땅에 사는 보통의 사람이 아니에요. 맹자(BC 372~289년)는 〈진심편(盡心篇)〉에서 군자에게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부모님과 형제가 모두 무사하면 첫 번째 즐거움(父母具存 兄弟無故 一樂也)이고, 둘째 위로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아래로는 사람을 대함에 있어 부끄럽지 않을 때가 두 번째 즐거움(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이며, 셋째는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을 함이 세 번째 즐거움(得天下英才 而敎育之 三樂也)이라 하였습니다. 윤동주의 시는 이 두 번째 즐거움에서 나옵니다.
‘앙불괴(仰不愧)’—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부부작어인(俯不怍於人)’—땅을 내려다봐서 사람을 향해서도 당당하게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가 군자의 즐거움이지요.
괴(愧)도 부끄러움을 뜻하는 한자어고 작(怍)도 부끄러움을 뜻하는 자입니다. 요즘은 여간해서는 잘 쓰지 않는 글자지요.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낄 때는 ‘자괴(自愧)’라고 합니다. ‘자작(自怍)’이라고 하면 남 앞에 부끄러운 것입니다. 자괴는 하늘 앞에 부끄러운 것이고 자작은 남 앞에 부끄러운 것이니까 요즘 말로 바꾸면 “쪽팔리는 것”이지요. 그러니 군자삼락의 두 번째 구절을 거칠게 해석하면 ‘사람을 봐서 쪽팔리는 일이 없고, 하늘을 봐서 부끄러움이 없으면 문제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이 문구의 시제는 과거, 현재, 미래 중 어디에 해당할까요?
현재에도 과거에도 부끄러움이 없는…
미래에 그럴 것이라고 하면 그것은 군자가 아닙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렇다 해야 그것이 군자이지요. 그러니 전부 과거형이어야 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현재에도 과거에도 ‘없었고’ 사람을 봐서도 부끄러움이 ‘없다’, 이것이 군자입니다.
윤동주의 ‘서시’를 전부 과거형으로 고치면 윤동주는 시인이 아니라 군자가 됩니다.
‘하늘을 우러러서 나는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습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사랑했습니다. 주어진 길을 내가 오늘 갑니다.’ 이건 시가 아니라 자랑이죠. 남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 자랑을 들은 사람은 “와~ 저 사람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했네. 예수님이네” 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과거형으로 바꾸어버린 시에는 망설임과 노력하려는 마음과 현실에서의 부딪침이 전혀 나타나지 않아요. 그런 것들이 시인의 마음인데요, 남에게 말하는 것은 시가 아니라 자랑이에요. 과거형으로 바꾼 ‘서시’에서 윤동주는 시인이 아니라 군자가 되었습니다.
다시 윤동주가 쓴 ‘서시’의 본래 문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원문을 보면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어요. 이루어진 것은 보통 과거형, 완료된 문장으로 서술되는데 이 시에서 과거형으로 쓴 것은 ‘괴로워했다’ 단 하나예요. 그러니까 괴로워한 것만은 사실이고 현실이지요. 나머지 서술부의 시제를 보면 ‘사랑해야지’ ‘걸어가야겠다’ 하는 미래의 다짐, 미래의 원망(遠望)과 의지만이 나타납니다. 일종의 자기 자신에 대한 맹세지요.
그리고 현재시제 역시 단 하나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 시에 나타난 동사에는 ‘보다, 노래하다, 부끄럽다, 괴롭다, 사랑하다, 걷다’가 있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시제가 붙어 있습니다.
시제를 보면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 볼 수 있지요.
첫 구절은 시제를 붙일 서술어를 생략해버리는 것으로 시제를 넘어섰어요. 과거, 현재, 미래를 통튼 자신의 결심이니까 과거에 했든, 현재에 하든, 미래에 할 것이든 상관이 없어요. 어쨌든 된 것이고 될 것이니까요.
# 상승직선, 수평선, 포물선
현재형과 미래형으로 쓴 윤동주의 시들이 모두 이루어졌을 때, 그것을 ‘길’로 그려보는 상황을 가정해봅시다. 가장 낮은 잎새에서 바람은 별까지 올라갔습니다. 이 위로 올라가는 길을 똑바로 직선으로 그으면 그것은 군자의 경지예요.
위로 올라가지 않고 아래에서 쭉 뻗어나가면 그것은 현실 정치인, 현실인의 경지지요.
그런데 인간은 신과 짐승의 중간에 있고 하늘과 땅을 모두 볼 수 있는 인간의 눈은 아름다운 것, 그것이 바로 시인의 마음이지요. 하늘과 땅 사이에서 흔들리고 설레지요. 군자는 이런 설렘이 없어요. 모든 것을 완전히 졸업하고 초월한 존재입니다. 또 악인이면 괴로워하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아요. 현실에 그저 적응하고 살면 되지요.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것이 시인의 마음입니다. 저항시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윤동주는 독립운동하는 사람의 결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서 끝없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인간적인 것에서 우주적인 것으로 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윤동주는 역사 속 ‘영웅’이 아니라 ‘햄릿’과 같아요. 시 속에서 끝없이 흔들리면서 죽음 앞에서 영원으로 가고, 현실 앞에서 이상으로 가고, 괴로움 앞에서 노래하고 사랑을 하는 존재이지요.
땅에 얽매여 있으면서도 그것으로부터 초월하고자 하고 가장 낮은, 모든 죽어가는 것의 현실에서 영원히 불멸하는 별을 향해서 가는 마음을 노래하고 그 길을 걷는 것을 실천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시인의 마음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어린 아이가 그 추운 날 날린 연에 묶여 있는 실처럼 포물선이 그려져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드리운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에서 날아가려는 연과 중력으로 떨어지려는 연 사이에 팽팽한 연실의 그 중력! 그 추운 겨울날에 언 손을 비비며 연을 날려본 기억이 있는 사람은 윤동주의 시를 알고, 윤동주의 마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 연에는 날개가 없어요. 그리고 그 연과 사람 사이에는 묶인 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실이고, 그것이 길입니다.
#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에서 나왔다
시를 볼 때 어떤 것이든 여러 가지 의미 층위가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명사 하면 ‘하늘, 별, 땅’ 그다음이 풀잎이에요. 이 풀잎을 정치적으로는 민초(民草)라고 합니다. 글래스 루츠(Grass Roots). 민주주의(Democracy)와 비유할 때는 민초라는 뜻을 가지지요. 월트 휘트먼(1819~1892년)의 시 ‘풀잎’처럼 우리가 땅에서 하는 것이에요. 또 김수영(1921~1968년)의 유명한 시 ‘풀’에서 바람이 불면 풀들은 다 눕습니다. 울다가 눕고,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더 빨리 울었다가, 바람보다 먼저 일어납니다.
김수영 시인은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고 ‘풀’을 노래했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의 ‘풀’ 일부
이렇게 하찮은 것, 바람이 불면 운명에 거스르지 못하고 복종하는 것! 이런 존재에서 시작해 전혀 다른 차원의 하늘까지 가는 하늘의 별이니까 하늘, 땅, 사람을 그리면 공간이 생겨납니다. 이번엔 시간을 볼까요? ‘잎새에 일던 바람’은 춘하추동, 밤낮과 같은 시간의 변화 속에서 점점 하늘로 올라갑니다. 계속 가다 보면 변하지 않는, 바람이 꽉 차 있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사실 바람이라고 하는 것은 끝없이 변하는 시간을 뜻하니까 시간의 축이 돼요. 시간은 곧 탄생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처럼 말이죠.
그러니까 이 시 전체에서 ‘별’과 가장 가까운 동사를 찾아낸다면 ‘사랑해야지’입니다.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에서 나왔습니다. 현실이 아니라 모든 것이 멸망하는 밤이 되어도 빛이 사라지지 않고, 바람이 불어도 끄떡하지 않는, 그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힘이 됩니다.
# 서양과 동양의 서로 다른 별 모양
라틴어 ‘ad astra per aspera’는 ‘고난을 통해 별로 간다’는 뜻이다.
미국 국기에는 별[星]이 많습니다. 미국 주(州)의 수만큼 왼쪽 상단 네모난 칸에 별을 그려 넣었는데, 지금은 별이 50개입니다. 이 성조기의 별의 모양을 보세요. 익숙하지요. 우리에게 지금 별을 그려보라 하면 다들 이런 모양으로 그립니다. 미국 국기에 그려진 별의 모양과 동일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백 년 전만 해도, 한국 사람에게 별을 그리라고 하면 단추처럼 동그란 모양으로 그렸습니다.
여러분이 별을 그릴 때 단추처럼 동그란 모양이 아니라 다섯 모서리가 있는 별을 그리는 것은 유럽 서양문명이 자기의 ‘밈(Meme)’, 문화적 유전자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처음 한국 사람, 중국 사람이 미국에 가서 우리에게 익숙한 저 별이 그려져 있는 미국의 국기를 보고는, “아, 웬 놈의 깃발에 저렇게 꽃이 많냐” 해서 화기(花旗)라고 했어요. 꽃이 있는 깃발이라는 뜻이지요. 우리도 처음에는 미국을 ‘화기국’이라고 했어요. 이런 것들을 볼 때 서양 사람들이 생각하는 별은 한국 사람이 생각하는 별과 다릅니다.
오각형의 별 모양은 사람을 나타냅니다. 머리, 양손, 양발. 그래서 별을 거꾸로 놓으면 큰일 나는 거예요.
육각형 별, 우리가 흔히 다윗의 별(Star of David)이라고 하는 삼각형 두 개를 엇갈려 겹쳐놓은 별은 유대교의 상징이지요. 두 개의 삼각형 중 하나는 올라가는 것 불, 하나는 내려가는 것 물을 나타내요. 이런 것을 상징코드라고 하는데, 이런 상징코드를 알고 보면 별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별에게 가는 길
별이란 무엇입니까. 바람이란, 길이란 무엇입니까. 길은 선(線)이고 시간이잖아요. 공간이면서도 시간입니다. 그래서 길 위에 서 있으면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특히 밤에 그런 짓 하면 큰일 나요. 밤에 길거리에 서 있으면 이건 법률적으로 안 되는 겁니다.
그와 관련된 법률이 있는 네덜란드 같은 나라에서는 개를 산책시킬 때도 사람이 한곳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맴돌아야 해요. 주변을 맴도는 것은 괜찮지만 가만히 서 있으면 강도나 도둑, 아니면 이상한 여자로 오해를 받습니다. 길은 걸어가도록 만들어져 있기에 길에 멈춰 서면 멋쩍고 이상한 것이지요.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말은 프로세스(Process)를 의미합니다. 과정이지요. 죽는 날까지의 과정을 길로 나타냈어요. 길의 끝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직선으로, 평지를 향하여 쭉 뻗은 길을 그냥 가면 길 끝에서 죽음과 만나게 됩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 죽어가는 것’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시인이니까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가면 이 길은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성인군자는 아니니까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듯’ 땅에게 끌어당겨지지요. 하늘로 올라가는 연과 중력의 사이에서 그려지는 연실과 같은 아름다운 포물선이 그려지지요.
# 시와 현실의 이야기 - 시인으로 살아가기 힘든 현실
별을 노래했던 윤동주는 별에 닿았을까요? 시인은 영원히 별에 닿지 못합니다. 영원히 세속을 초월한 군자가 못 되는 존재예요. 그렇다고 세속적 인간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시인에게는 상상력의 날개가 있어요.
시인들이 현실에서는 성인군자로 존경받기보다는 뭔가 우리와는 다른 이상한 사람, 변태적인 사람, 생활력이 없는 사람으로 느껴지지요. 보들레르(1821~1867년)의 말처럼 귀양 온 신선이거나, 귀양 온 천사가 아니면 앨버트로스가 시인입니다. 앨버트로스(Albatross·한자문화권에서는 신천옹[信天翁]으로 불렸다-편집자)는 단숨에 바다를 건널 수 있다는 새인데 이 새가 사람들에게 붙잡혀 배의 갑판에 앉으면 우스꽝스러운 새가 됩니다. 단번에 바다를 건널 수 있는 거대한 날개가 오히려 걷는 데 방해가 되어 뒤뚱거리게 만드니까요. 그래서 선원들은 그 새의 큰 부리에다 담뱃재를 터는 학대도 했다고 해요.
그것이 오늘날의 시요, 시인의 상상력입니다. 하늘 위 시의 세계를 날아다닐 때는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하는 기가 막힌 날개가 땅 위의 현실세계에서는 보행을 방해하지요. 시인들이 참 살아가기 힘든 세상입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시인(詩人)은 실제로 시집을 출간하고 등록되어 있는 시를 쓰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을 뜻하는 것입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을 가지고, 풀잎의 괴로움을 가지고, 죽는 날까지 부끄러움이 없이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그래서 서로 눈과 눈을 마주치면서 별을 보고 하늘을 보는 여러분이 시인입니다.
시(Poem)와 시인(Poet)의 어원인 고대 그리스어 명사 Poietes는 ‘만들다(Make)’는 뜻입니다. 만든다는 것은 없던 것을 새로 있게 하는 것이지요. 물건을 만드는 사람은 기술자고 마음이나 꿈을 만드는 사람은 시인이에요.
언어와 상상력을 가지고 시를 만들었는데 그 시가 현실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 ad astra per aspera 고난을 통해 별들로
“아이 라이크 아이크(I Like Ike)”는 미국 34대 대통령 아이젠하워의 선거 구호였다.
라틴어 ‘ad astra per aspera’는 ‘아드, 아스트라, 페르, 아스페라’로 읽습니다. 나는 프랑스어는 했지만 라틴어는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이 문장의 정확한 발음은 몰라도 의미는 알죠.
‘고난을 통해서 별로 간다.’
세네카(B.C. ?~65년·고대 로마 제국 시대의 정치인, 사상가, 문학자. 로마 제국의 황제인 네로의 스승으로도 유명하다-편집자)의 구절인데, 뜻이 중요한 것만이 아니라, ‘A.A.A’의 두음을 보세요. ‘아드, 아스트라, 아스페라.’ 이것이 바로 시입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B.C.100~B.C.44년)가 로마 시민과 원로원에 보낸 승전보에 쓴 유명한 문구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도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라틴어 경구 “Veni, vidi, vici”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어로 번역된 문구가 다시 한국어로 번역되어 왔기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문구도 보세요. ‘비니, 비디, 비치’, ‘V.V.V’의 두음이에요. 이런 것이 시입니다. 영어로 번역해서는 시가 안 돼요.
미국의 34대 대통령 아이젠하워(1890~1969년·재직 1953~1961년)가 대통령 선거 당시 내건 구호는 “I Like Ike”였어요. Ike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이젠하워의 별명이었습니다. ‘아이, 아이, 크크.’ 두음·흉음·말음의 운율이 정확히 일치하죠. 이 말은 그대로 시가 됩니다. ‘나는 아이젠하워를 좋아합니다(I Like Eisenhower)’라고 하면 ‘I Like Ike’와 같은 뜻이지만 시가 아니지요.
그러니까 시는 의미 이상의 것입니다. 의미에 날개를 단 것이에요.
‘아드, 아스트라, 아스페라’ ‘비니, 비디, 비치’
다시 고난을 통해서 별들로, 즉 ‘ad astra per aspera’를 봅시다. 우연히도 ‘별’이라는 아스트라(astra)와 ‘고통’이라는 아스페라(aspera)가 발음이 비슷해요. 우연이겠지만 기적 같지 않아요? 밤이라는 고난이 있을 때 별은 빛납니다. 낮에는 별을 보지 못해요. 깜깜한 밤, 폭풍이 부는 때에 별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렇게 별과 고난은 연결이 되는 것인데 언어까지도 유사한 거예요.
그런 말들은 많아요. 어머니의 자궁은 움(womb)인데 무덤은 툼(tomb)입니다. ‘W’와 ‘T’ 글자 하나 차이지요. 무덤은 우리가 죽어서 가는 곳이고 자궁은 우리가 태어나는 곳인데 어쩌면 태어나는 곳과 죽어서 가는 무덤이 하나는 ‘움’이고 하나는 ‘툼’일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극과 극인데 차이는 고작 ‘W’와 ‘T’의 차이로 나타내는 그것이 시입니다. 언어에 대한 아름다움, 언어의 운율을 알기 시작할 때 시를 아는 것이지, 단순한 의미만을 알아서는 시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한국 프로야구 레전드 이만수 전 SK와이번스 감독이 좋아하는 문장이 ‘Scars Into Stars’입니다. 번역하면 ‘상처는 별이 된다’입니다. 생략된 영어 문장을 살리면 ‘Turn your scars into stars(당신의 상처를 별로 바꾼다)’입니다. ‘상처’와 ‘별’의 단어가 한 자(c, t)만 다르고 같습니다.
‘h’가 반복되는, ‘상처’를 뜻하는 hurt와 ‘별’과 비슷한 뜻의 halo(성상의 머리나 몸 주위에 둥글게 그려지는 광륜 혹은 후광이라는 뜻-편집자)를 써서 ‘Turning hurts into halos(상처를 빛으로 바꾼다)’라는 문장도 자주 사람들에게 회자됩니다.
# ‘서시’의 별, 바람, 밤 - 반복되는 ‘ㅂ’
윤동주는 ‘서시’에서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고 했어요. ‘도’라는 것은 반복의 의미지요. 어젯밤에도 내일밤에도 무한히 계속될 거예요. 잎새에서 별까지 바람이 이는 그 길을 향해서 나는 걸어갑니다.
그런데, ‘밤, 별, 바람’ 이상하지 않아요? ‘ㅂ’이 공통적으로 겹쳐요. 세 개의 ‘B, ㅂ’ 두운입니다.
시를 가르칠 때 저항시인이다 하는 정치적인 의미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으로 한국말의 두운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찾을 수 있게 가르쳐줘야 합니다. 이런 ‘ㅂ’ 두운을 가진 시가 또 있어요. 정지용의 ‘향수’라는 시에 보면 ‘빈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다시 이야기를 처음으로 되돌려 생각해봐요. 하늘과 땅 사이에 다양한 길 말입니다. 지금부터 한국이 할 일은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일, 하늘에서 한국을 내려다보는 별이 되는 일입니다. 그걸 꿈꾸어봐요. 그것은 어쩌면 우리 역사 속에서 ‘천지인’의 천(天)을 가지는 일과 같을지 모릅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그 길이 아름다운 포물선임을 가르쳐준 이가 윤동주입니다.
우리는 윤동주를 역사 속에서 그 시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시를 쓴 저항시인으로 알고 있지만, 만약 윤동주가 역사적 차원에서 저항시로만 ‘서시’를 썼다면 독립한 후에도 우리의 가슴을 울리지는 않았겠지요. 윤동주의 시는 우리 생각의 틀을 한 번 더 깨주고 더 큰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만들어주었던 것입니다.⊙
9. 땅 이야기 -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선생님 이름이 이어영입니까, 이어녕입니까, 이어령입니까?”
⊙ 집안에선 “의영아, 의영아!”로 불러… 해방되고는 ‘이어녕’
⊙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2년)가 처음 나왔을 때 ‘이어영’
⊙ 이화여대에 가면 ‘이어녕’ 선생, 교육부에선 ‘이어령’
⊙ 최초의 신소설 《血의 淚》, 최초의 신체시 ‘海에게서 少年에게’의 비극, 한자 세대의 비극
⊙ 한국인에게 묻고, 세계인에게 묻는 말 “너, 어디까지 왔니?”
故 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2001년 9월 7일 정년퇴임을 앞두고 고별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건강이 썩 좋지 않아 외부 강연을 하지 못하는 날이 많아 서울 평창동 서재에서 강연을 하고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나를 배려하여 집으로 와준 것이었지요.
그러나 본래 서재는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곳입니다.
생각해보세요. 한 왕궁의 주인인 임금님이라 할지라도 그 왕궁의 주방에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임금이 주방에 들어가면 몇 사람이 죽어나가게 돼요. 일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깨끗하게 유지하려 노력해도 임금님이 보면 “야! 니들이 이걸 나한테 먹였구나, 어! 저기 바퀴벌레도 있구나” 하거든요. 그러니까 주방은 그 성의 주인인 임금은 물론 외부인에게도 절대로 보여주면 안 됩니다. 그 성에서 열리는 파티가 아무리 화려하고 성대해도 그 파티가 열리는 동안 주방에 한번 들어가 보세요. 음식을 막 엎지르고, 쓰레기가 지천으로 널려 있지 않겠어요?
글 쓰는 사람에게는 그런 주방이 바로 서재인 셈입니다. 읽다가 엎어둔 책들, 글 쓰면서 마신 차 찌꺼기가 엉겨 붙은 찻잔, 구겨진 원고지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피곤할 때 잠시 눈을 붙였던 자리의 흔적들. 게다가 남들은 ‘야, 이 양반 참, 뭐 이런 걸 갖다 놨어. 초등학교 애들 방도 아니고’라고 생각할 만한 나에게만 소중하고 영감을 주는 물건들도 여기저기 있어요.
남한테 보이려고 꾸민 공간이 아니니까 그냥 별의별 게 다 정돈되지 않은 채로 있어요. 그래서 여간해서는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장소이지요. 그럼에도 서재까지 여러분에게 열어놓은 것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 60년 넘게 글쓰기를 멈추지 않은 이야기
이어령 선생의 서울 평창동 서재에 자리한 《플라톤 전집》. 선생은 생전에 “《플라톤 전집》을 읽고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나는 일제 시대에 초등학교를 다녔고, 초등학교 6학년 때 해방을 맞았습니다. 일제 시대를 제법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지요. 또 23~24세, 대학 4학년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평생을 글을 썼어요. 이렇게 오랫동안 글을 써온 사람이 없을지 몰라요, 주변에. 실력이 나보다 나은 사람이 있지만 이렇게 재수 좋은 사람이 많지가 않거든요. 이렇게 꾸준히 오랫동안 글을 써온 사람을 어디서 구해 오겠어요. 전 세계에 없어요. 서양에서는 괴테 하나가 23세에 글을 쓰기 시작해서 83세까지도 현역으로 글을 썼죠.
그러니까 내가 잘나거나 지식이 특별히 많아 강연하고 글 쓴 게 아니라, 단지 해방 이후 70여 년간 다양한 시대상을 직접 경험하면서 그 경험을 글로 꾸준히 옮긴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거지요.
제가 어렸을 때 누님과 나물 캐러 다닌 게 ‘채집 시대’를 경험한 것 아니겠어요? 오래전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면서 산업 사회에서 ‘정보화와 디지로그’에 관한 글을 쓰고, 후기 정보 사회인 요즘에는 ‘빅데이터’에 관한 글을 썼지요.
그러니까 인간의 한 생애 속에서 누님 쫓아 나물 캐던 채집 시대를 거친 소년이 후기 정보 사회의 빅데이터 강연을 하는 사람은 전 지구상에 나 하나뿐인 거예요.
# 채집 시대 때 사랑받는 이는 누구?
우리가 어렸을 때는 정말로 나물 캐러 다녔어요. 쑥과 같은 나물은 하느님이 거저 주신 것이지 인간이 재배한 것이 아니죠. 그러니까 나물 캐기는 채집이에요.
사실 한국 사람들이 내 곁에 있는데, 그게 뭔지를 몰라서 못 찾아 먹는 것일 뿐, 우리는 나물 문화를 가지고 있어요. 콩나물 같은 것은 인간이 재배하기도 하지만 나물의 기본은 산채(山菜), 즉 인간이 가꾼 것이 아니라 산에서 그저 자라는 거예요. 한국 사람들이 이걸 아직도 몰라요.
서양 사람들이 김 먹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서양 사람들은 김을 먹지 않아요. 요즘은 김도 양식 재배를 하지만 본래 김은 인간이 씨를 뿌려 재배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 자연에서 그저 발생한 것을 우리가 뜯어 먹는 것이었거든요. 동양인만 김을 먹어요. 채집 문화, 나물 문화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거죠. 샐러드로 대표되는 서양의 야채 요리는 모두 재배된 식물로 만들어져요. 허브와 같은 향신료조차 그들은 정원의 한쪽에서 따로 재배하죠. 그러나 한국을 보세요. 쑥도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해서 판다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봄날의 시골 장터에 나가 보면 밭둑이나 산에서 직접 채취해온 나물을 파는 할머니들이 시장에 좌판을 펴고 앉아 있고, 우리는 그 나물을 사다가 집에서 반찬을 만들어 먹어요. 서양의 샐러드와는 전혀 다르죠. 우리의 생활 속에 채집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는 거예요.
그런데 채집 시대에, 부지런한 사람과 게으른 사람 중 어느 쪽이 칭찬을 받았을 것 같아요? 지금의 상식으로는 부지런한 사람이 칭찬을 받았을 것 같지만 아니에요. 농경 시대에 부지런한 사람이 자기 논과 밭을 열심히 경작해서 많은 수확을 얻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었지만 채집 시대를 생각해보세요. 농경은 작물을 기르는 일이 주가 되지만, 채집 시대에 인간은 작물을 수확만 할 뿐 기르는 행위는 전혀 하지 않았어요. 기르는 것은 오직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죠. 그러니까 뒷동산에 주어진 사슴은 몇 마리밖에 없어요. 인간의 노력과 관계없이 이미 주어진 것이죠. 그런데 부지런한 사람이 있어 남들이 놀 때 그 사슴을 전부 잡아먹었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다른 사람은 굶을 수밖에요.
채집 시대의 勝者 꼬부랑 할머니
부지런한 것은 우리가 직접 생산에 참여할 때나 그러라는 이야기예요. 고사리든 뭐든, 하느님이 주신 것은 똑같으니 그것을 다 함께 나누어 따 먹어야 하는데 부지런한 사람이 있어서 새벽까지 막 따서 자기가 먹고 남은 것을 저축하면, 저축하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죠. 그러니까 옛날 채집 시절에는 게으르고 저축하지 않는 사람이 그 공동체에게 굉장히 사랑받는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예요. “너 착한 애야”라는 칭찬도 받고요. 그래서 요즘은 노름해서 지면 그 사람에게 돈을 빼앗지만, 옛날에는 일을 아예 못 하도록 도구를 빼앗았어요. 그 사람이 일을 못 해야 그만큼의 배분이 나에게 돌아오니까요. 우리 생각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집는 이것은 마셜 살린스(Mashall Sahlins·1930~2021년)의 《석기시대 경제학》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옛날 사람이 혼자 벌어서 몇 사람이나 먹여 살렸을 것 같아요? 대개 두 사람, 세 사람 정도고 나머지 사람들은 자기가 먹을 것을 직접 다 채집해 왔어요.
그러면 제가 질문 하나 할까요? 채집 시대 때 가장 경쟁력 있는 자가 누구였을까요?
아프리카의 수렵 채집민 하드자족 예를 든다면 가장 많은 식량을 구한 이는 놀랍게도 노파들이었다고 하죠. 그것도 뼈와 가죽만 남은 노파들…. 미국의 저명한 인류학자이자 영장류학자인 세라 블래퍼 허디(Sarah Blaffer Hrdy·1946~)의 《어머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따르면, 어디서 음식을 구해서 먹이는 할머니와 이모할머니가 있으면 아이들은 풍족한 영양을 공급받아 잘 자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할머니가 바로 내가 비유로 늘상 이야기하던 ‘꼬부랑 할머니’입니다. 이 이야기는 뒤에 다시 할게요.
할머니의 무조건적 사랑 내지 희생, 무엇보다 손주에 대한 아낌없는 사랑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채집 시대 때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따져보면 남성은 식량을 구하러 장거리 여행을 떠나거나 사냥 혹은 싸움으로 다치거나 죽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어요. 여성 입장에선 먹고사는 문제를 남성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 없는 이유였죠.
그러니 때로 스스로 살아갈 궁리를 해야 했고 예고 없이 찾아온 기근이나 추위, 풍수해 같은 자연재해는 물론 보릿고개 같은 불가피한 식량난까지 대비해야 했어요. 이럴 때 가족 내지 집단 내에 모계 친척 여성, 즉 어머니, 외할머니, 이모할머니의 존재는 아이들의 성장과 생존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음을 예상할 수 있어요.
한편, 채집민들은 사냥감을 집단 전체와 나눠 가졌다고 해요. 그러나 남성의 채집(사냥)만으론 집단이 필요로 하는 칼로리의 절반도 채울 수 없었다고 하지요. 그럼 나머지는 어떻게 메웠을까요? 여성, 무엇보다 할머니의 비중이 커질 수밖에요. 또 일부 남성은 일부일처(一夫一妻)에 만족하지 않았을 겁니다. 뒤집어 말하면 여성 역시 부성(父性)의 지원이 불확실한 남성과도 짝을 맺었던 거지요. 결국 여성 스스로 남성의 빈 자리를 어떤 식으로든 메워야 했는데 ‘대행 부모’ 내지 ‘돌봄 공유’의 형태에 가장 적합한 존재가 할머니이고 장수하는 할머니는 ‘인류의 에이스 카드’였지요.
세라 허디의 이런 시각은 내가 이야기하는 ‘꼬부랑 할머니’와 일맥상통합니다. 남자들이 채집이나 사냥을 해오면 누가 요리해요? 여자는 애 낳고 키우면서 자연히 집에 있게 되잖아요. 불을 다루는, 부지깽이를 든 여자가 바로 인류 최초의 요리사, 즉 꼬부랑 할머니죠.
헤겔은 ‘최초의 전사(戰士)’, 즉 남성이 역사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내가 볼 때 아닙니다. 최초의 역사를 만든 이는 전사 혹은 싸움꾼이 아니고 부지깽이를 든 여성, 꼬부랑 할머니입니다.
다른 영장류와는 구별되는 이런 인간의 ‘협동 육아’가 진화사에 큰 변곡점을 만들었고, 세라 허디의 표현을 빌리자면 타인의 마음을 읽는 행위, 공감하고 협력하는 태도, 나눔과 같은 ‘상호 이해(Mutual Understanding)’를 하게 되었지요.
이런 관계 속에서 점점 현실의 어려움이나 닥쳐올 고난을 ‘준비’하고 ‘대비’할 수 있었어요. 그러면서 인류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되고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으며, 나는 그리고 우리는 누구일까’를 질문할 수 있게 되었지요.
# ‘어디까지 왔어?’라는 말의 뜻
자, 우리가 그 수렵채집의 시대로부터 지금 어디까지 왔나를 생각해보세요.
전화가 와도 옛날 같으면 “누구십니까” 했을 것을 요즘은 전화에 발신인이 누구인지 다 뜨니 그런 것을 묻지 않죠. 그 대신 기다리는 남자친구 또는 여자친구가 약속시각이 지났는데도 사람은 오지 않고 전화만 올 때, 첫마디가 이래요.
“너, 어디야 거기?”
그다음으로 하는 말은 “어디까지 왔어?”죠. 요즘은 모바일 시대라 다들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잖아요.
초등학생쯤 되는 아이가 길바닥에서 막 울먹울먹하면서 휴대전화를 걸 때 옆에서 가만히 들어보면 아마 이렇게 말을 할 거예요.
“엄마 어디야? 어디까지 왔어?”
다른 애들은 하교 시간에 다들 엄마가 와서 데리고 가는데 내 보호자만이 오지 않을 때 하는 말이죠. 또 있어요. 어머니들이 늦도록 들어오지 않는 딸에게 전화를 걸어서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너 지금이 몇 시야? 어디까지 왔어?”
어머니는 딸이 오는 시각에 맞추어 골목길로 마중을 나가줘야 하니까요. 아버지들이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도 그래요. 요즘 아들들이 아버지 말을 그렇게 잘 듣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전화를 걸어서 “야, 너 어디까지 왔어?” 한 뒤에 바로, “뭐? 떠나지도 않았어?”라고 말을 합니다. 아들은 아예 떠나지도 않은 것이죠.
이런 건 또 할아버지들이 하는 것도 있어요. 명절이나 제삿날인데 서울에 있는 자식만 안 왔어요. 세상 풍파를 다 겪어본 할아버지는 딱 점잖게 어린애처럼 보채는 일도 없이 신경질도 안 내고 느긋하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씀하시죠.
“누구야, 다들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어디야? 어디까지 왔어?”
할아버지들의 맥없는 그 말은 참 가슴 아픈 이야기이기도 해요. 다른 자식들은 다 왔는데 서울 애만 안 오는 거예요. 지금 제사도 다 지내고 명절이면 차례도 다 지냈는데 그 애만 늦는 거죠.
서울 사람들은 대부분 늦어요. 우리가 약속시각보다 늦게 왔을 때 제일 많이 하는 거짓말이 “길이 막혔다”는 말이에요. 도로가 막히지 않아도 “거의 다 왔는데 길이 막혀요”라고 말하잖아요.
그러니까 전화할 때 거짓말을 제일 많이 해요. 거북한 전화가 왔을 때는 잘 들리면서도 이렇게 말하잖아요.
“전화 상태가 나빠서 잘 안 들려. 내가 나중에 걸게.”
#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한국과 세계는 어디에 있는지
내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어디까지 왔고 어디에 있는지, 이것을 내가 때로는 유치원, 초등학교 아이 입장에서, 때로는 딸을 기다리는 어머니 입장에서, 또 아버지와 할아버지 입장에서 한국인에게 묻는 거예요.
“어디까지 왔니? 거기 어디야?”
또 아시아인에게 같은 질문을 해요.
사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어요. 과거엔 우리가 유럽을 위시한 서양 사람을 죽어라 쫓아갔지만, 이제는 거꾸로 서양 사람이 동양을 보고 있어요. 그런데 이 아시아 사람들은 지금 갈등만 하고 있어요. 그래서 ‘아시아 사람은 어디까지 왔냐?’를 묻는 거죠. 유럽은 EU(유럽연합)를 만들고, 미국은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가 있는데 아시아인은 뭘 하고 있어요? 어디까지 왔어요?
앞으로 세계 경제에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의 역할과 비중이 더 커지리라 기대해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는 11월 18~19일 태국 방콕에서 APEC 정상회의가 열리고, 이보다 앞선 15~16일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G20 정상회의가 개최된다고 하네요.
마지막으로 하나 더 물을 것이 있어요. 코로나19 이전의 메르스 사태 때 뭘 느꼈어요? 우리와 아무 관계도 없을 줄 알았던 그 중동의 낙타, 내가 한 번 보지도 못했던 그 낙타 때문에 우리가 온통 난리를 겪었잖아요.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지금도 그 난리를 치고 있어요. 원인은 박쥐의 코로나 바이러스와 기원이 알려지지 않은 코로나 바이러스 사이의 재조합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요. 세상에 박쥐가 다 뭐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무관한 사람은 없어요. 글로벌이니 로컬이니 이런 이념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이에요. 우리 밥상을 보세요. 우리 시골에서 키운 게 별로 없어요. 표고버섯과 밤은 일본산, 손질한 고등어는 네덜란드산, 소고기는 호주산, 돼지고기는 멕시코산, 닭고기는 캐나다산, 전지분유는 뉴질랜드산을 자주 먹으니 우리 밥상만 하더라도 이미 글로벌한 것이죠.
그러니 마지막에는 세계인들에게 물어야 해요. 우리만 행복해도 안 돼요. 아프리카에서 병이 나고, 또 지구 어딘가에서 지진이 나는 속에 우리 혼자 행복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또 전 세계 사람에게 묻습니다. “너, 어디까지 왔니?”라고.
한국인에게 묻고, 아시아인에게 묻고, 세계 사람에게 묻는데 그중 제일 급한 것은 한국인에게 묻는 것이고, 그보다 더 급한 것은 나에게 묻는 것입니다.
내가 늘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어디서 불났다”고 할 때 놀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자기 동네에서 불났다”고 그러면 다들 문을 열어보고, “이웃집에서 불이 났다”고 하면 바로 집으로 달려가거나 도망을 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민족, 애국 이런 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어디 왔느냐를 알면 한국이 어디에 왔는지를 알고 아시아가, 세계가 어디에 있는지를 압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지금 나의 책을 읽는 목적이고, 또 내가 여러분에게 말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디까지 왔나’를 생각하는 목적입니다.
이야기의 전체 주제를 알아야 해요. 초상집에 갈 때 누구 초상인지는 알고 가야지, 실컷 울고 나서 “그런데 누가 돌아가셨대? 이럴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이야기의 시작이 어딘지를 알아야 합니다.
# 환경·시대에 따라 ‘이어영’ ‘이어녕’ ‘이어령’으로 불린 이야기
이어령 선생이 1962년 펴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현암사). 오른쪽은 문학사상사가 발행한 같은 책이다. 이 책은 단행본으로 국내에서만 수백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고 미국, 일본, 중국 등지에 번역 출판되었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가 1962년에 처음 나왔어요. 그때는 저자의 사진을 책에 넣어주는 경우가 있었거든요. 그 책의 저자 보관본 사진 속지에 내가 내 이름을 써넣었는데 ‘이어영’이라고 썼어요. 그런데 시간이 흘러 언젠가부터 ‘이어령’이라고 사인을 했어요. 세월이 흐르면서 얼굴색이 변한 것처럼 이름도 바뀐 겁니다.
어렸을 때 집에서 나는 ‘의영’이라고 불렸어요. 서울 경기도에서는 ‘어’자의 발음을 ‘의’라고 했거든요. ‘암행어사’라고 하지 않고 ‘암행의사’라고 하는 식이죠. 그러니까 원래 ‘령(寧)’자는 단어의 제일 앞에 나오면 ‘영’으로 발음하고 중간에 나오면 ‘령’으로 읽어야 하는데, ‘어(御)’자를 ‘의’라고 발음해버리니까 히아투스(Hiatus·모음충돌) 현상이 일어나지 않아서 ‘령’자가 처음에 나온 것과 마찬가지가 되어 ‘영’으로 발음하게 된 거죠. 그래서 집안에서는 다들 “의영아, 의영아!” 그렇게 불렀어요.
학교에 들어가서는 다들 표준말을 쓰니까 지금이라면 의당 내 이름을 찾을 수 있었겠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때는 일제 시대라 창씨개명 때문에 아무도 내 진짜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어요. 6학년 때 해방이 되면서 비로소 이름을 찾았는데 그때는 ‘어녕’이라고 했어요. 그러다 또 중학교에 갔더니 그때는 한글맞춤법도 없었을 땐데, 국어 선생님이 “‘어녕’이가 뭐냐, ‘어영’이다, 너는” 하셨어요. 그래서 내 이름의 영문 표기는 ‘O Young’이에요. 인터넷에서 나를 영어로 검색할 때도 그렇고, 내 책 영문 번역본의 저자 이름도 모두 ‘by Lee O Young’로 되어 있어요.
오래전 영국문화원(British Council)에서 우리 외교 문화인사를 초청하는 행사가 있었어요. 내가 거의 최초의 한국문화론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의 저자이고 대학교수니까 나를 초청했었죠. 대학 졸업 직후에 교수를 했으니 교수치고는 무척 젊었던 나를 보고 영국 문정관이 자기도 모르게 “Oh, Young!”, 그러니까 ‘너 참 젊다!’며 감탄을 해요. 그러더니 자기가 나를 초청하려면 내 이름의 로머나이즈(romanize)를 써야 한다며 묻기에, “너 지금 나에게 ‘Oh, Young’ 그랬잖아, 그렇게 쓰면 돼. ‘Young’이라고”라고 대답한 일이 있어요. 그러니까 내 영문명은 ‘오영, 어영’이죠.
그 뒤 내 글이 국정교과서에 실리게 되어 편수관들이 모였어요. 그때는 남의 이름이라도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국가에서 지정한 표기법으로 통일하게 되어 있었어요. 당시 국가 지정 표기법으로는 지명은 속음으로 읽게 되어 있었어요. 그러니까 충남 보령(保寧)이라고 하지 ‘보영’ 또는 ‘보녕’이라고 읽거나 표기하지 않잖아요. ‘보령, 회령, 비령’ 하는 식으로 지리책에서 ‘寧’자가 들어간 지명은 모두 ‘령’으로 표기하니까 사람 이름에도 ‘寧’자가 있으면 ‘령’으로 표기하는 것이 원칙이 되는 거죠. 그래서 교과서에는 내 이름이 ‘이어령’으로 표기되었어요.
“아무렇게나 불러도 됩니다”
현암사가 펴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에 실린 이어령의 사진과 사인. 사인이 ‘이어영’으로 적혀 있다.
당시 내가 교수로 있던 이화여대에 가면 ‘이어녕’ 선생이고, 월급봉투나 기타 문서에도 ‘이어녕’인데 교육부에 가면 ‘이어령’이 되어 교과서에는 전부 ‘이어령’으로 실렸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술 먹다 말고 한밤중에 나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묻는 겁니다.
“선생님! 지금 싸움이 붙었는데, 선생님 이름이 이어영입니까, 이어녕입니까, 이어령입니까?”
그때마다 나는 “아무렇게나 불러도 됩니다”라고 대답했어요. 사람들은 “아니, 내기가 걸렸는데 아무렇게나 하면 돼요?”라고 불평했지만, 나로서는 그렇게 대답해서 서로 다 이긴 걸로 해주는 수밖에 없었어요. 내가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면 누군가는 잃을 수가 있는데 그건 내 책임이잖아요. 한때는 책에 저자 사인을 ‘이어영’이라고 했는데, 왜 그때 ‘이어영’이라고 사인해놓고는 지금은 ‘이어령’이라고 하느냐고 따지면 나는 할 말이 없거든요.
교육부가 나에게 붙여준 이름 ‘이어령’, 집안에서 불러준 ‘이의영’, 중학교 때 ‘이어영’, 그리고 대학에서는 ‘이어녕’! 이렇게 내가 내 이름을 어려서부터 쓰고, 20대부터 글을 쓰고 책을 내기 시작해서 거의 60~70년을 이 성(姓)과 이름을 가지고 책을 내고 저자 사인을 해주었는데도 내가 내 이름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거예요.
게다가 남들은 나한테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니,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자기의 이름을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어디까지 왔니’처럼 광복 후 70여 년이라는 긴 세월 속에 일제 시대 강제로 창씨개명한 것을 제외하고라도 ‘李御寧’이라는 이름이 이처럼 다양하게 변한 거예요. 남들이 그렇게 불러준 것만이 아니라 나 스스로도 그렇게 다양하게 변환하며 써왔어요. 1962년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초판 저자 보관본에는 이렇게도 선명하게 나의 글씨로 써놓은 나의 이름 ‘이어영’이 있으니까요.
#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에 담긴 뜻은…
내 이름에도 이러한 비화가 있지만, 나의 첫 번째 책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역시 이름에 얽힌 이야기가 있어요. 사람들은 이 책의 제목을 두고 시적(詩的)이라는 말을 많이 해요. 사실 이 책이 첫 출간될 당시에는 한자어로 된 제목이 일반적이었거든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당시 일반적으로 쓰이던 한자어 제목으로 바꾸면 ‘풍토(風土)’가 돼요. 정신풍토, 지리풍토 이런 말로도 많이 쓰이고, 영어로 하면 Climate. 기후, 풍토. 희랍어로는 ‘기울다’는 뜻이죠. ‘경사져 있다’는 말이에요. 흔하게 쓰고 듣던 말이지만 ‘풍토’라는 말을 하면 가슴에 찡하게 오는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한자를 말했기 때문이지요. 풍토의 풍(風)은 바람 풍자예요. 토(土)는 흙이라는 뜻이죠. 저는 이 풍토라는 말을 세 살 때 어머니에게 배운 말로 바꾸면서 바람이 뒤에 오고 흙이 먼저 오도록 순서만 뒤집었어요. 그리고 흙, 바람이라는 말에 ‘속에’라는 말을 붙였어요. 또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건데 ‘저’라는 말을 슬쩍 끼워 넣어 ‘저 바람 속에’라고 손가락질하듯이 하니까 바람이 보여요.
그러니까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라는 건 ‘풍토’라는 말인데, 한자로 風土라고 할 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추상어였다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라는 세 살 때 배운 순수한 우리말로 바꾸는 순간 ‘아! 풍토라는 말이 바람과 흙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거죠. 흙과 바람. 우리 몸, 육체는 흙이에요. 마음, 또는 정신(Spirit)이라는 것은 바람이에요. 흙은 변하지 않지만 바람은 수시로 변해요. 그러니 우리에게는 변하는 ‘나(마음)’와 변하지 않는 ‘나(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죠. 나만이 아니라 한국에도 그런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기에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인 거예요. 《풍토》가 아니라. 사실 이 제목 덕분에 그 당시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 한국 근대에 담긴 비극적 현실
1906년에 간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인 이인직의 《혈(血)의 누(淚)》. 사진은 2016년 한 출판사가 펴낸 《혈의 누》.
한국 근대문학이 막 부화하던 시절 책 제목을 어떻게 붙였는지 볼까요?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로 알려진 이인직(李人稙·1862~1916년)의 《혈(血)의 누(淚)》를 들어보셨지요? ‘피의 눈물’이라고 하면 간단할 것을 신소설이라고 내세우면서도 제목은 굳이 한자를 써서 ‘혈의 누’라고 붙였어요. 소설가들이 모두 한자에 절어 ‘피의 눈물’이라는 말을 못 하는 거예요. 소설가는 제 나라말, 그것도 세 살 때 배운 말로 소설을 써야 하는데, 엄청난 한자문화 때문에 한자 세대는 한자가 우리나라 말보다도 더 익숙했어요. 그러니까 《혈의 누》 같은 제목을 쓰게 되는 거죠. 한글 세대인 요즘 사람들은 《혈의 누》라는 제목을 보면 ‘남원 광한루’ 같은 것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지요.
“내 눈에서 피눈물이 나” 그러지 “내 눈에서 혈의 누가 난다”라고 하면 무슨 실감이 나나요? 아버지가 막 화를 내면서 “너 그 짓하면서 내 눈에서 피눈물 나는 걸 봐야 되겠냐!” 이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 찡한데, “내 ‘혈의 누’ 나는 걸 봐야 되겠냐!” 하면 아무 감동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풍토》, 그러면 독자들이 감동하지 않는데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하면 감동하는 거예요. 게다가 그냥 바람도 아니고 ‘저 바람’이라 하고 거기다 ‘속’이라는 글자가 두 개 나오니 운율이 붙는 거예요. 또 이게 완결된 문장이 아니에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그러니까 종이 울리다 만 것처럼 여운이 있잖아요. 흙 속에 뭐가 있는지, 바람 속에 뭐가 있는지 아무 이야기도 안 했는데 사람들은 제목 하나만으로 상상하는 거예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있는 무언가에 대해.
대한민국 제1호 잡지 《소년》 창간호. 독자 6명으로 시작한 14전짜리 《소년》은 1908년 11월 최남선이 발행했다. 최초의 신체시 ‘海에게서 소년에게’는 《소년》 창간호의 권두시로 발표되었다.
특히 이상한 것은 ‘신체시(新體詩)의 효시’라고 하는 최남선(崔南善·1890~1957년) 선생이에요.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시를 최남선 선생이 썼는데 그 작품의 제목이 ‘海에게서 少年에게’예요. 바다 해(海)자를 썼어요.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국제펜클럽대회를 한국에서 열었을 때 내가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시 ‘海에게서 少年에게’를 소개한 일이 있어요.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왔지요. 스크린 전면에 이 시의 영문 제목이 떴는데 눈이 아득해지더라고요. ‘From the sun, To the boys’라고요. 화들짝 놀랄 수밖에요. 번역자가 한글로 ‘해에게서 소년에게’라고 적어놓은 걸 보고 바다 해(海)를 하늘에 떠 있는 해(日)로 생각을 하고 영문으로 옮긴 거죠. 이것이 우리나라 신체시의 비극이에요. 신체시라고 했으니 ‘바다에서 소년에게’라고 하는 것이 마땅한데 왜 ‘海에게서 소년에게’라고 했을까요? 당시에는 바다를 해(海)라고 하고, 사람을 인(人)이라고 하는 게 더 알기 쉬웠던 거죠. 한자 세대니까.
병원 중에 이비인후과라는 게 있잖아요. 이비인후과의 ‘이(耳)’는 귀를 뜻하는 한자예요. 그러나 우리말의 ‘이’는 치아를 의미하죠. 그래서 누가 “너 이가 이상하다”라고 말하면 되묻게 되는 거죠. 두 손으로 각각 귀와 치아를 가리키며 “귀요? 치아요?”라고.
그러니까 신소설, 신체시를 쓰던 이인직·최남선 선생이 굉장히 위대한 분이지만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은 한자 세대가 아닌 한글 세대라서 그분들의 위대성을 실감하기 어려운 것이죠.
# 나는 무슨 세대에 속할까
국립국어원은 이어령 문화부 장관 시절인 1991년 1월 23일 개청했다. 이어령 장관, 안병희 초대 국어연구원장 등이 서울 종로구 운니동 덕성여대 별관에 마련한 새 청사에서 현판식을 갖었다.
한글 세대, 즉 우리말 세대는 광복 이후 고작 70여 년밖에 되지 않아요. 한글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여러분은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겠지만, 한국 사람이 세 살 때 배운 어머니 말로 통하는 세상이 왔으니 우리는 옛날 사람보다 행복한 시대에 사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나라 말 쓴다고, 이비인후과의 이(耳)라고 하지 않고 귀라고 한다고 행복해하는 사람이 있어요? 행복이 먼 데 있는 게 아니에요. 비교해보면 이인직·최남선 선생이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바다’를 ‘바다’라고 부르지 못하고 ‘해(海)’라고 쓰면 ‘해(日)’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데도 그렇게 썼다고 하니, 또 그걸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시인 신체시라고 부르니, 우리 근대라는 것이 오죽했겠어요.
한글 세대 이전에 한자 세대가 있었어요. 나는 서당 가서 천자문을 배웠으니 한자 세대에 약간은 걸쳐 있는 사람이에요. 일제 시대에 태어나 자랐고 그때 초등학교에 다녔으니 일어 세대는 말할 것도 없죠. 이름까지도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했었으니까요. 그러면서도 나는 ‘혈의 누’와 같은 형식의 제목인 ‘풍토’라고 하지 않고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라고 했어요. 풍토라는 한자어를 순수한 어머니의 말로 한 거죠. 이 책이 외국에서도 《Climate》가 아니라 《In This Earth, In That Wind》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어요. 풍토라는 말이 한자에서 온 것이 아니라 우리의 흙과 바람이라는 의식이죠. 이것을 영어로 번역했을 때 내 사상은 중국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한국의 사상이 배어 있는 것이 세계로 알려졌어요.
이렇게 되니 결국 나는 무슨 세대에 속할까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천자문을 읽었고 그다음에 일본어를 썼어요. 학교에 가서 한글을 체계적으로 배우기 이전에 일본어를 철저히 배워야 했죠. 그곳은 한국어를 쓰면 벌을 서던 세계였어요. 6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국어를 자유롭게 읽고 쓰게 된 사람이 지금은 언어를 다루는 문필가가 되었어요. 한글 세대가 된 거죠.
한때는 사람들이 내가 우리말로 감동을 준다고 해서 ‘언어의 마술사’라고 불렀는데 내가 붙인 말이 아니에요. 실은 별명이 몇 개 있는데 ‘창조의 아이콘’ ‘창조적 지성’, 그리고 뭐… ‘한국대표 지성’.
내가 제일 바라는 말은…
솔직히 하나도 안 맞는 이야기지만 남들이 붙여준 겁니다. 그러니 별명이지요. 난 그런 별명이 싫어요. 대신 “부르려면 크리에이터(Creator)로 불러다오” 하지요. 창조인, 생각하는 사람(Thinking Man)이라고 부르는 게 내가 제일 바라는 것입니다.
광복 이후 다른 나라들이 200년 걸려도 하지 못한 산업문명의 모든 것을 우리는, 한국은 불과 몇십 년 안에 다 치러야 했습니다. 범람하는 산업화의 물결, 급변하는 문명의 충돌 그 사이사이, 고비고비마다 굵직한 모토를 던져왔지요. 20대에는 ‘우상의 파괴와 저항의 문학’, 30대에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로 대표되는 한국문화론, 40대에는 일본문화론인 ‘축소 지향의 일본인’, 50대에는 88서울올림픽 슬로건 ‘벽을 넘어서’, 60대에는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 70대에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접목을 말하는 ‘디지로그’, 80대에는 ‘생명이 자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물 한 방울’이라는 키워드를 던졌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세계의 어떤 문필가와 교수가 만년 동안 살아야 체험할 수 있는 인류 문명의 전 과정을 80여 년 한평생 동안 모두 체험하고 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의 서문
[편집자 註]
1962년 현암사에서 이 책이 처음 출간되었다. 이후 동화출판공사, 범서출판사, 갑인출판사, 삼성출판사, 문학사상사에서 이 책을 찍었다. 단행본으로 국내에서만 수백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고 미국, 일본, 중국 등지에 번역 출판되었다. 컬럼비아대에서 동양학 연구자료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어령 하면 수많은 저작물 중에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기억하는 이가 많다. 이 책의 서문은 너무나 아름답고 슬프다. 아무리 읽어도 감동이 식지 않는다.
그것은 지도에도 없는 시골길이었다. 국도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한국의 어느 시골길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길이었다. 황토 흙과 자갈과 그리고 이따금 하얀 질경이 꽃들이 피어 있었다. 붉은 산모롱이를 끼고 굽어 돌아가는 그 길목은 인적도 없이 그렇게 슬픈 곡선을 그리며 뻗어 있었다. 시골 사람들은 보통 그러한 길을 ‘마차길’이라고 부른다.
그때 나는 그 길을 지프차로 달리고 있었다. 두 뼘 남짓한 운전대의 유리창 너머로 내다본 나의 조국은, 그리고 그 고향은 한결같이 평범하고 좁고 쓸쓸하고 가난한 것이었다.
많은 해를 망각의 여백 속에서 그냥 묻어두었던 풍경들이다.
이지러진 초가집의 지붕, 돌담과 깨어진 비석, 미루나무가 서 있는 냇가, 서낭당, 버려진 무덤들 그리고 잔디, 아카시아, 말풀, 보리밭… 정적하고 단조한 풍경이다.
거기에는 백로의 날갯짓과도 같고, 웅덩이의 잔물결과도 같고, 시든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 같고, 그늘진 골짜기와도 같은 그런 고요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폐허의 고요에 가까운 것이다. 향수만으로는 깊이 이해할 수도 또 설명될 수도 없는 정적함이다.
아름답기보다는 어떤 고통이, 나태한 슬픔이, 졸린 정체(停滯)가 크나큰 상처처럼 열려져 있다. 그 상처와 공도를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거기 그렇게 펼쳐져 있는 여린 색채의 풍경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위확장(胃擴張)에 걸린 아이들의 불룩한 그 배를 보지 않고서는, 광대뼈가 나온 시골 여인네들의 땀내를 맡아보지 않고서는, 그리고 그들이 부르는 노래와 무심히 지껄이는 말솜씨를 듣지 않고서는 그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지프차가 사태진 언덕길을 꺾어 내리막길로 접어들었을 때, 나는 모든 것을 보았던 것이다. 사건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사소한 일, 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가장 강렬한 인상을 가지고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앞에서 걸어가고 있던 사람들은 늙은 부부였다. 클랙슨 소리에 놀란 그들은 곧 몸을 피하려고는 했지만 너무나도 놀라 경황이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은 갑자기 서로 손을 부둥켜 쥐고 뒤뚱거리며 곧장 앞으로만 뛰어 달아나는 것이다.
고무신이 벗겨지자 그것을 다시 집으려고 뒷걸음친다. 하마터면 그때 차는 그들을 칠 뻔했던 것이다. 이것이 그때 일어났던 이야기의 전부다.
불과 수십 초 동안의 광경이었고 차는 다시 아무 일도 없이 그들을 뒤에 두고 달리고 있었다. 운전사는 그들의 거동에 처음엔 웃었고 다음에는 화를 냈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이었다. 이제는 아무 표정도 없이 차를 몰고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을 역력히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잔영이 좀처럼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누렇게 들뜬 검버섯의 그 얼굴, 공포와 당혹스런 표정, 마치 가축처럼 둔한 몸짓으로
뒤뚱거리며 쫓겨 갔던 그 뒷모습, 그리고… 그리고 그 위급한 경황 속에서도 서로 놓지 않으려고 꼭 부여잡은 앙상한 두 손… 북어 대가리가 꿰져 나온 남루한 봇짐을 틀어잡은 또 하나의 손… 벗겨진 고무신짝을 집으려던 그 또 하나의 손… 떨리던 손….
나는 한국인을 보았다. 천 년을 그렇게 살아온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뒷모습을 본 것이다. 쫓기는 자의 뒷모습을.
그렇다. 그들은 분명 여유 있게 차를 비키는 아스팔트 위의 이방인 같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운전사가 어이없이 웃었던 것처럼 그들의 도망치는 모습은 꼭 길가에서 놀던 닭이나 오리 떼들이 차가 달려왔을 때 날개를 퍼덕거리며 앞으로 달려가는 그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
악운과 가난과 횡포와 그 많은 불의의 재난들이 소리 없이 엄습해왔을 때에 그들은 언제나 가축과 같은 몸짓으로 쫓겨 가야만 했던 것일까!
그러한 표정으로, 그러한 손길로 몸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우리의 피부빛과 똑같은 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우리의 비밀, 우리의 마음이 있다.
10. 땅 이야기 - 부지깽이, 두레박, 이끼
‘부뚜막 위 부지깽이가 되자’
⊙ 남을 불태워주는 추임새를 넣는 사람이 되어라
⊙ ‘우물가 옆 두레박이 되자’… 자기 두레박 없어도 함께 두레박 쓸 수 있는
⊙ ‘바위 위 이끼가 되자’… 딱딱한 바위를 초록으로 덮어 생명이 싹트게
⊙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일이 인간의 영원성을 찾는 일과 같아
한국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절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아요. 닭살 돋고 낯간지러워 절대 하지 못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진짜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그런 말을 안 쓰는 거예요.
서양 사람은 내(I)가 너(you)를 사랑(love)한다고 말하는데, 그 말을 하는 순간 사실은 벌써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랑하면 너와 내가 하나, 한 몸이 되는 건데 나와 너를 따지는 순간 사랑하는 것이 아니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사랑해” 이러지 “내가 너를 사랑해” 이렇게 말하지 않아요.
사랑 고백할 때 남편은 아내에게 “사랑해”라고 해요. ‘나, 너’를 빼고 그냥 “사랑해”. 사실 그것도 상당히 발전한 거예요. 원래 한국 사람들은 진짜 사랑해서 구혼할 때 “사랑해”라는 말 대신 “니캉 내캉 함께 살자”라고 말했어요. 참 좋은 말이죠. 너와 내가 함께 살자! 살자는 건 생명을 말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평생 동안 글을 쓴다는 건 말을 찾는 거였어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
그러고 보면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팔도마다 다 틀려요. 그러니 찾는 과정이 어렵지요. 어렵지만 즐겁기도 하고요.
경상도 사투리로 ‘너를 사랑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디져도 그런 말 몬 한다.”
전라도 사투리로 ‘너를 사랑해’는 “거시기 혀!”, ‘널 죽도록 사랑해’는 “오메 거시기 혀!”. 또 다른 버전으로 “니가 오살나게 좋아브러”.
충청도 사투리로 ‘너를 사랑해’는 “임자밖에 서” 혹은 “꼭 말루 허야 하남”이죠. 충청도 사람이 기분이 좋을 때 “뭐여…”라고 말하고, 기분 나쁠 때는 “뭐여!”, 짜증 날 때도 “뭐여!!”라고 하지요. 이처럼 같은 의미라도 쓰이는 방식, 표현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사람마다 지역마다 사회마다 다 다릅니다. 그러니 일일이 ‘찾아가는’ 것이지요.
# 문화부 장관 시절, ‘갓길’ 이야기
1990년 10월 12일 자 《조선일보》에 어느 독자가 〈노견 어원이 뭐냐. 갓길이면 어떨까〉라는 글을 투고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갓길 표시’ 또는 ‘갓길 없음’ 표시가 나오는 걸 보게 될 거예요. 그것이 내가 만든 말이에요. ‘갓길’. 그래서 내 별명이 ‘갓길 장관’이 되었어요. 문화부 장관 하면서 뭘 했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별로 한 일이 없는 것 같은데 고속도로 타고 가다 보면 ‘아, 내가 그래도 이름 하나는 바꿨구나’ 싶어요.
갓길은 무엇보다 어색하지 않다는 장점이 있었어요. 한자어를 순우리말로 순화한다면서 공처가를 ‘아내 무섬쟁이’니, 이화여대를 ‘배꽃 계집 큰 배움터’ 막 이런 어색한 말로 바꾸니까 사람들이 저항감을 느껴 결국 바꾸지 못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갓길은 입에 착 붙어요. 내가 그 이름을 짓기 전에는 노견(路肩), 혹은 길어깨라고 했어요. 노견이라고 하니까 무슨 길거리 개(路犬)을 말하는 거냐고 사람들이 막 욕하니까 그다음으로 제안된 이름이 길어깨였어요. 노(路)가 길이고 견(肩)이 어깨니까 길어깨. 노견과 함께 길어깨라는 이상한 이름이 불리기도 했어요. 그래서 내가 국무회의에서 “그 길을 ‘노견’이나 ‘길어깨’라고 하면 절대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어요.
당시 행정용어 표기 문제는 내무부 소관이었는데 내무부에서 갓길 통행 과태료 법을 통과시키려고 할 때였어요. 사실 갓길은 길이 아니라, 고속도로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차가 그 길을 달리면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길도 아닌 거죠. 그러니까 다른 장관들이 “그건 당신 소관도 아닌데, 문화부 장관이 왜 나서냐, 그리고 길도 아닌데 갓길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사람들이 그걸 오히려 더 길로 착각하고 달릴 것 아니냐”며 반대했어요. 그때 내가 이렇게 말했죠.
갓길의 기적, 《행정용어순화편람》(1992)
1992년 12월 《행정용어순화편람》이라는 책이 이문석 총무처 장관 명의로 나왔다. 1991년 말에 〈행정용어바르게쓰기에 관한 규정〉이 제정되면서 총무처와 법제처, 문화부 등이 중심이 되어 대대적인 행정용어 순화 작업을 벌였다고 한다.
“‘길갓집’을 생각해봐라. 길갓집은 길의 가에 붙어 있는 집이지, 길 위에 있는 집이 아니다. 그러니까 갓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그게 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국무회의는 장관회의가 아니라 나라 살림에 관한 회의다. 그 길의 이름은 대한민국 온 사방에 다 붙을 건데, 그 글자는 문화에 관한 것 아니냐.”
이렇게 막 밀어붙여서 결국 내무부에서도 ‘갓길’로 이름 붙이게 된 거예요. 갓길. 가에 있는 길, 갓길. 어린아이도 이해하기 쉬운 말이잖아요.
게다가 누가 만든 말이 아니라 옛날부터 써온 말 같지 않아요? 일제 시대 때 발행된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를 찾아봐도 갓길이란 표현은 나오지 않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쓰였지만 순우리말이어서 쓰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사실 노견은 일본식 표현입니다. 과거엔 고속도로 표지판에 〈노견주행 엄금〉이라는 표현이 많았습니다. 미국 등 서양에서 ‘Road Shoulder’라는 표현을 쓰는데 일본 사람들이 그걸 보고 한자로 옮겨 만든 용어죠. 1960년대 정부 행정용어로 노견이란 한자어 대신 같은 의미의 길어깨라고 쓰기도 했어요. 1982년 《이희승 국어대사전》에도 길어깨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공식적으론 길어깨로 쓰면서 표기는 노견이라 적고, 뒤죽박죽 써온 것이지요.
그러나 갓길은 세 살 때 어머니에게 배워서 써온 말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정착되었어요. 노견이 갓길로 바뀐 후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전부터 일제식 행정용어를 우리말로 바꾸자는 움직임이 있어왔는데 갓길이 마중물이 된 셈이지요.
1992년 12월 《행정용어순화편람》이라는 책이 이문석 총무처 장관 명의로 나왔습니다. 앞서 1991년 말에 〈행정용어바르게쓰기에관한 규정〉이 제정되면서 총무처와 법제처, 문화부 등이 중심이 되어 대대적인 행정용어 순화 작업을 벌였죠.
어문 관련 단체 등 71개 기관에서 순화 대상 용어를 수집하였어요. 이렇게 모은 8673개 용어를 국어심의회 등 전문기관의 심의를 거쳐 1차로 최종 확정해 《행정용어순화편람》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당시 편람에 들어간 사례는 이렇습니다. 그땐 왜 이리 어려운 말을 썼을까 싶어요.
고오바이 → 오르막·물매·비탈길
가께소바 → 메밀국수
가꾸목(角木) → 각목·각재
가도(假道) → 임시도로·임시통로
가리방 → 줄판
도선장(渡船場) → 나룻터
브로슈어(brochure) → 안내서
쇄정(鎖錠)하다 → 잠그다
시건(施鍵)장치 → 잠금장치
오시핀 → 납작못
영세민 → 저소득층
잠업(蠶業) → 누에치기
재식(裁植)하다 → 심다
절석(切石) → 마름돌
품신(稟申)하다 → 건의하다
핫 라인 → 직통전화
마을 입구 정자목, 쌈지공원, Vest Pocket Park
내가 만든 말은 그것만이 아니에요.
주택가 곳곳에 조그마한 공원을 만들어 ‘쌈지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그걸 문화부 장관 재임 시절 3개를 만들었는데 지금은 전국에 쌈지공원이 수천 개 있어요. 과거 농촌 등 집단 거주지의 중심지나 마을 입구의 정자목을 중심으로 형성된 자생적인 소공원 형태의 ‘농촌 공동쉼터’를 도시에 정책적으로 적용시킨 것이죠.
‘쌈지’라는 건 작은 주머니를 말하는 우리말이에요. 작은 공원을 그냥 흔하고 평범하게 ‘작은공원’이라고 하지 않고 쌈지공원이라는 예쁜 이름을 붙여준 거죠.
서구에서도 비슷한 개념의 공원이 많아요. 뉴욕 허드슨 강이 내려다보이는 허드슨 하이트(Hudson Height)라는 곳이 있어요. 맨해튼 끝자락에 위치한 언덕이죠. 이 지역에 3개의 도로가 만나는 교차로가 있는데 차가 빨리 지나가 보행자들이 늘 사고 위험에 노출됐었죠. 거기에 소규모 공원을 만들었는데 그걸 포켓공원이라 부릅니다. 이 포켓공원이 생기면서 자동차들은 알아서 속도를 줄이게 됐죠. 또 포켓공원과 연계해 횡단보도도 훨씬 넓어져 보행자들의 안전도 보장받게 됐어요.
도시 소공원(Vest Pocket Park)은 조끼주머니(Vest Pocket)가 의미하는 것처럼 작지만 요긴하고 편리함을 추구하는 공간인데 우리로 치면 바로 쌈지공원을 말합니다. 쌈지공원은 ‘the Vest-Pocket Park’의 순수한 한국적 표현으로 도심지의 자투리땅을 활용해 저소득층 고밀주거지역 거주자들을 위한 문화·복지적 차원에서 조성되었습니다.(이은기의 〈도심지 쌈지공원의 이용 후 평가 및 개선방안〉 참조)
또 서울시에 ‘자락공원’이 있어요. 서울에는 크고 이름난 산이 많잖아요. 그 산과 평지의 접경지역에 공원을 만들고 자락공원이라고 이름 붙였어요. 치맛자락을 생각해보세요. 치맛자락은 땅에 끌리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남산이 치마를 입었다고 상상을 해보세요.
또 ‘자락’은 치맛자락의 자락이기도 하지만 끝자락의 자락이기도 해요. 산의 끝자락, 주거지의 끝자락. 그 양쪽의 끝자락이 겹친 곳에 자락공원을 만드는 거죠. 산과 사람들의 주거지가 이어지지 않으면 산은 섬처럼 고립돼요. 도시인의 생활반경에 산을 끌어들이는 거죠.
이어령, 쌈지공원에서 울다
다음은 2016년 8월 26일 자 《주간조선》에 보도된 쌈지마당 이야기다.
1991년 6월 첫 번째 쌈지마당인 ‘중계쌈지마당’이 완공됐다. 연탄 실어 나르는 리어카 한 대도 다닐 수 없는 작고 꼬불꼬불한 골목길 마을에 들어선 쌈지마당은 의외의 곳에 ‘짠’ 하고 나타나는 ‘마법의 예술공원’ 같았다. 중계쌈지마당 준공식 행사 당일, 이어령은 울었다.
“고건 시장한테 준공식에 나와달라고 했더니 이분이 농을 해. ‘선배님, 서울시장을 너무 우습게 보시네요. 10억 건설 현장에도 테이프 끊으러 안 가는데 8000만원짜리 공사에 나가겠습니까. 껄껄껄. 가야지요. 100억짜리는 안 나가도 거기엔 나가겠습니다.’ 이런 말을 하더니 기쁘게 행사장에 왔지. 행사가 끝나도 갈 생각을 안 해. ‘장관님 먼저 가세요. 저는 민원이 많아서 빠져나가기 힘들 겁니다’ 하며 손사래를 치더라고. 거기가 무허가 건물이 많잖아. 시민들이 서울시장한테 하고 싶은 건의가 좀 많겄어. 시민들 틈에 뺑 둘러싸여 나더러 손사래를 치는데, 고건씨가 키가 크잖아. 혼자 삐죽이 서 있는 걸 보니 울컥하더라고. 그런 마음으로 공원 입구를 나오는데 아이들이 만든 플래카드가 보여. ‘이.어.령.문.하.부.장.과.님.감.사.합.니.다.’ 노트를 한 장씩 찢어서 크레파스로 삐뚤빼뚤하게 써서 매달아 놓은 거야. 서툰 글씨로 철자법도 다 틀리고. 그 근처에 수녀님들이 돌봐주시는 보육원 시설이 있는데, 그 아이들이 만든 거였지. 아이들 마음이 어떻겠어요? 그걸 본 순간 눈물이 확 나더라고.”
안상수체로 바뀌면서 일어난 변화
기하학적인 안상수체는 받침이 세로획의 정중앙에 오면서 정사각형 틀을 벗어난 글꼴이다.
내가 장관이 되었을 때는 군사정권이 막 민간으로 넘어올 때니까 중앙정부는 아직도 권위주의에 가득 차 있었어요. 서류나 문서는 모두 교과서의 글씨체처럼 딱딱한 명조체로 쓰고 그럴 때 나는 문화부의 모든 글씨체를 안상수체로 바꾸어버렸어요.
글자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디자인 아닌가요? 이후 서체 디자인이 뭔지 사람들이 그제야 깨닫게 됩니다. 기존의 틀에 익숙한 사람들은 거부감이 있었겠지만 컴퓨터가 보급되고 워드 프로세서 소프트웨어가 널리 쓰이면서 날개를 달았죠. 통치계급, 즉 정치인이나 관료들이 쓰는 서체의 권위가 무너졌어요.
서체의 변화가 문장의 변화, 사고의 변화, 사회의 변화를 동시에 이루지 않았을까요? 또 다양한 서체가 등장하면서 높다란 정부의 문턱도 낮아지지 않았을까요?
나는 권위주의를 깨고 좀 부드럽게 하고 싶어서 문화부 앞에 바람개비를 붙여놓기도 했지요. 우리가 바람개비 가지고 놀 때, 바람이 불기를 기다리기만 하며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들고 뛰면 바람이 없어도 바람개비가 돌아가잖아요. 바람이 없다고 탓하지 말고 스스로 뛰면 바람개비는 돌아간다는 뜻으로. 그러자 어떤 장관이 나에게 오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중앙청이 권위가 있어야지. 문화부가 바(bar) 같아요. 뭐 거기다가 바람개비를 달아놓고 그럽니까?”
지금은 뭐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 말을 들을 당시에는 참 기분이 나빴어요. 중앙청의 청(廳)은 관청을 뜻하는 말이고, 거기에 출근하는 사람들을 등청(登廳)한다고 했어요. 보통 사람들은 출근을 하는데 중앙청으로 오는 사람들은 등청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어마어마한 말을 쓰는 곳에 막 바람개비를 붙여서 돌리니까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았죠. 그래서 관리들이 그렇게 불평을 하는데 나는 이런 농담을 했어요.
“성공했네! 사람들이 bar로 알았으면 성공했네. 그러면 사람들이 막 들어올 거야. 우리한테는 그 문턱이 높았지만, 이젠 그냥 별 사람 다 들어올 거 아니야. 밤에도 들어올 거 아니야.”
# 문화부 슬로건1 부뚜막 위 부지깽이
1991년 6월 29일 《조선일보》 19면에 실린 〈휴식공간 중계 쌈지마당 준공〉 기사. 이어령 장관과 백상승 서울 부시장, 주민 등 150명이 참석해 준공식을 가졌다. 기사에는 중계 쌈지마당에 이어 금호 쌈지마당(성동구 금호2가), 창신 쌈지마당(종로구 창신동)도 다음 달 준공한다고 적혀 있다.
그때는 관청에서 내거는 슬로건이 보통 ‘협조와 평화와 뭐…’ 이런 식이었어요. 관념적이고 한자 투의 말이었죠. 사실 슬로건은 지금도 그렇긴 하죠. ‘진보와 평화’ 하는 식으로. 내가 문화부 장관이었을 때 문화부의 슬로건이 뭐였는지 알아요?
첫 번째, 부뚜막 위 부지깽이가 돼라.
부뚜막 위 부지깽이. ‘부’자 두음이 반복되니까 음운율이 생기죠.
부엌에 가면 놋그릇, 은그릇 같은 귀중품도 있고 식칼, 도마 같은 필수품도 있고 그중 제일 천한 것이 부지깽이예요. 부지깽이는 밤낮 불에 타요. 끄트머리를 불태워가며 아궁이의 불을 지피고 나면 다시 끄고, 다시 또 타고. 여러분이 특수한 사람은 못 되어도 부지깽이 같은 사람은 될 수 있어요. 남을 위해서 몸을 태우고 불은 못 되더라도 불을 붙여주는 것이 부지깽이잖아요.
그러니까 부엌에서 가장 천한 것이지만 또 가장 요긴한 것이 부지깽이예요. 불을 붙여주는 부지깽이가 없으면 안 돼요. 그리고 이 부지깽이는 누구나 될 수 있어요. 아무 나뭇가지나 하나 꺾으면 다 부지깽이로 쓸 수 있어요.
여러분이 기가 막힌 발명이나 연구로 노벨상을 타는 사람이 못 될지는 몰라도, 다들 부지깽이는 될 수 있어요. 사람들은 부지깽이를 우습게 알지만, 부지깽이가 있기 때문에 장작불을 지필 수 있고 밥을 지을 수 있어요. 부엌에 식칼부터 은그릇까지 온갖 것이 다 있지만 제일 하찮아 보이는 부지깽이, 심지어 무엇이나 될 수 있고 가장 긴요하게 쓰이는 것이 부지깽이예요.
그러니까 긴요하게 쓰이는 사람이 되라는 거죠. 자기가 불타는 것이 아니라 남을 불태워주는 추임새를 넣는 사람이 돼라, 공무원이 뭐냐, 너희 스스로 불이 되려 하지 마라, 너희가 밥이 되려 하지 마라, 밥 짓고 요리할 때 밑에서 자기를 그슬려가며 부지깽이처럼 봉사해라.
전 국민을 향해 “불이야!”라고 소리 지르는 사람
인류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불의 발견이라고 하지만 불을 이용하게 된 것도 부지깽이 덕분입니다. 사냥한 음식을 익혀 먹을 때 불을 어떻게 다뤘을까요? 손으로 했겠냐고요. 부지깽이로 했겠지요.
불쏘시개 작대기야말로 가장 소중한, 꼭 필요한 물건이죠. 부지깽이로 이글거리는 불을 만지며 생각에 빠졌을 겁니다. 따스함을 느꼈을 겁니다. 불 앞에 모여 음식을 익혀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밤하늘에 수놓은 별들을 올려다보았겠지요.
그 별을 보며 처음으로 신화(神話)라는 꿈을, 가공의 이야기를 만들었을 테지요. 종교가 생겨났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가 시인이나 소설가로 부르는 사람 역시 과거로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면 별을 올려다본 최초의 사람이 나오고, 그리고 불쏘시개, 부지깽이를 든 사람이 나오지 않겠어요?
태초에 부지깽이를 든 사람들은 하늘에 흩어져 있는 별들을 그냥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북두칠성처럼 별과 별 사이를 이어서 하나의 별자리를 만들어냈어요. 그리고 그 모습 속에 견우직녀 설화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적어 넣었던 겁니다.
그러니 ‘부뚜막 위 부지깽이가 돼라’라는 말이 얼마나 소중한 말이냐고요. 그런 농담 있잖아요. ‘홍도야 울지 마라’를 한마디로 줄이면 ‘뚝!’이 된다는. 그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런 다양한 분야의 봉사를 표현하는 게 ‘부뚜막 위 부지깽이가 돼라’예요. 봉사자 중에서도 문화 봉사자니까 그냥 봉사를 하는 게 아니라 문화계에 불을 붙이는 봉사자가 되어, 시인에게 불을 붙이고, 연극계에 불을 붙이는 거죠. 그래서 문화부가 잘 되면 환하게 불이 탈 거 아니겠어요? 나는 문화부 장관이 전 국민을 향해 “불이야!”라고 소리 지르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문화부라 하면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불이야’라고 하면 돌아볼 거 아니겠어요. 불이 났으니까.
# 문화부 슬로건2 우물가 옆 두레박
두 번째 슬로건은 우물가 옆 두레박이에요.
두레박을 모르는 사람은 없죠? 두레박은 우물가에 하나를 공용으로 놔주기만 하면 그다음에 오는 사람이 손쉽게 물을 떠먹을 수 있어요.
아무리 목이 말라도 두레박이 있어야 해요. 두레박 없이는 우물물을 길을 수 없어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전승돼온 것이 두레박일지 몰라요. 두레박이 없었다면 우물을 파지도 못했을 것이고 강가나 개울 곁에서만 살았을 겁니다. 두레박이 있었기에 깊은 산속에서도 살 수 있었고 공동으로 우물을 쓰며 집단을 이루고 마을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을 거예요.
한국인에게 돗자리가 ‘하늘을 나는 융단’이라면, 두레박은 ‘하늘이 내린 그릇’ 아니겠어요? 우물이 ‘집안의 작은 바다’라면 두레박은 ‘바다와 땅을 잇는 엘리베이터’인 셈이지요.
그런데 만약 그 두레박을 자기 것 들고 가서 쓰고는 내 것이라고 싹 챙겨 와 버리면 모든 사람이 다 우물터에 갈 때마다 자기 것을 가지고 다녀야 해요. 이렇게 못난 짓 하는 사람은 되지 말자는 거죠.
내 가진 것을 나눠주고 어쩌고 하는 이런 위선적인 말 대신, 모두가 쓰는 우물터에 내가 물 떠먹은 두레박을 안 가져가고 놔두는 그런 작은 선행보다 더 크고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아요. 그거면 모든 동네 사람이 자기 두레박이 없어도 하나의 공동 두레박으로 편하게 쓸 수 있잖아요.
그 두레박과 같은 것이 문화시설이에요. 극장 하나 지어 놓으면 거기 와서 누구나 연극을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 문화시설, 소위 문화 인프라를 우리가 만들자는 거죠. 부지깽이가 되어 문화에 불을 붙이고, 그 불 붙은 문화가 활활 타오를 수 있는 터전을 만드는 것, 그것이 문화부가 할 일이에요. 문화를 융성시키고 불 붙이는 일!
그런데 아무래도 후퇴한 것 같아요. ‘문화융성위원회’(박근혜 정부 시기인 2013년 7월 공식 출범한 문화 융성을 담당하는 대통령 직속 정책 자문기구.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라졌다)와 같은 어려운 말을 쓰잖아요. 내가 이미 몇십 년 전에 ‘부지깽이가 되자’라고 했는데 그게 융성(隆盛)이에요. 불 붙이라는 이야기잖아요? 그걸 그냥 ‘문화에 불 붙이자’ 하면 진짜 불이 붙을 텐데, ‘융성’이라고 하니까 이게 어디 남의 나라 이야기 같아요. 그래도 한편으로는 이름 잘 붙인 거예요. 그래야 뭐가 있는 것 같잖아요. 뭐 부지깽이, 두레박 이러면 또 너무 가벼운 것 같아서 사람들이 미심쩍어해요. 사람들은 묵직해야 쫓아오지 가벼우면 안 쫓아와요. 이해하긴 참 쉬운데도.
# 문화부 슬로건3 바위 위 이끼가 되자
세 번째, 바위 위 이끼가 되자.
우리가 바위를 깰 수 있어요? 우리 속담에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있죠. 문화는 도저히 정치·경제를 못 깨요. 계란으로 바위를 깨지 못하듯. 비유를 하나 해볼까요? 지금 맹장염에 걸린 사람이 있어요. 당장 수술 안 하면 큰일 나죠. 그런데 또 이 사람이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해요. 그런데 노래를 못 부르게 한다고 해서 어디가 터져서 죽어요?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문화는 밤낮 우선순위가 뒤로 밀리는 거예요.
그리고 부모님들이 뭐라고 해요? 늘 “그거 다음에 하자”라고 말씀하시죠. 먹고사는 것, 그러니까 정치·경제·사회가 우선이지 문화는 밤낮 뒷전인데, 그 뒷전인 문화부의 장관이 뭘 할 게 있었겠어요.
우스운 이야기인데, 지금처럼 한강유역 정비가 잘 되기 전의 이야기예요. 여름만 되면 한강 부근에서 홍수가 나서 마포 일대에서 이재민이 발생하는 거예요. 내가 장관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또 한강 다리가 물에 잠길 정도로 큰 홍수가 나서 이재민이 발생했죠. 그러자 대통령 주재하에 장관들이 모인 국무회의를 열었어요. 내무부는 치안을 담당하고 보사부는 의약품을 지원하는 식으로 각 부처마다 그런 재난 상황에 해야 될 역할이 있는 거예요. 심지어 국방부는 국군장병들을 동원해 긴급 재난 구호 봉사를 하고요. 그런데 문화부는 뭘 하라고 시키는지 들으려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나오는 거예요. 그 국무회의 끝까지 계속.
홍수 같은 재난 상황이 나서 이재민이 나왔을 때 문화부가 뭘 하겠어요. 잘 해봐야 합창단 데리고 가서 힘내라고 공연하는 건데 잘못하면 뺨 맞아요. 남은 지금 다 죽게 생겼는데, 너희는 지금 신난다고 노래하고 춤추냐? 안 그러겠어요?
“이끼만 있다면 사막에서도 살 수 있어. 그게 문화”
그러니까 문화라고 하는 건 정치·경제·사회 같은 바위와 싸워서 이길 수는 없어요. 그러나 그 딱딱한 바위를 덮는 이끼는 될 수 있죠. 이 메마른 정치·경제·사회를 깰 수는 없지만 아름다운 노래, 시로 감동시켜 생명의 이끼로 덮어버리는 거죠. 그 딱딱한 바위에 초록색 이끼가 돋아나는 거 보세요. 기가 막히잖아요?
이런 게 기적이죠. 흙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그 딱딱한 바위를 초록색 부드러운 이끼로 다 덮어서 생명이 거기서 싹트게 하니 기적이지요.
이끼는 원래 ‘물기가 많은 곳에 나는 푸른 때’를 가리키는 말이에요. 이끼는 3억5000만 년 전 최초로 육상 생활에 적응한 식물군이죠. 종류도 다양해서 우리나라에서만 700여 종이나 된다고 해요. 집 주변의 돌담이나 그늘지고 축축한 마당, 습기가 많은 숲 속 등에는 다양한 종류의 이끼가 살고 있습니다. 비록 습한 곳에서 자라지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요.
흙이 무너지거나 공사 등으로 맨땅이 드러나 식물이 전혀 없는 곳에 맨 먼저 나타나 정착하면서 다른 생물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주죠. 과거 유럽에서는 침대의 속재료와 건축 재료로 사용했고, 인디언과 에스키모인들은 아기 기저귀를 만드는 데 이용하는 등 세상에 이롭게 사용됐어요. 지금도 이롭게 쓰입니다.
1995년에 서울에서 이끼가 사라지자 산림청에서 환경오염 실태조사를 벌인 적이 있어요. 산성비 때문이지요. 이끼는 대기 및 토양 오염물질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합니다.
서울주택도시공사(SH)는 도시 내 미세먼지 저감 솔루션인 ‘SH 스마트 이끼타워’를 개발해 특허 출원했다고 합니다. 이끼와 바람을 이용해 주변 약 50m 내의 미세먼지 흡착률을 높여 공기정화 효율을 증진시키도록 고안됐다지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이처럼 이끼만큼 이로운 게 없어요. 저 거대하고, 숨도 쉬지 못하는 바위를 덮을 만한 이끼만 있다면 우리가 어떤 사막에 가서도 살 수가 있어요. 그게 문화예요. 그래서 바위 위 이끼가 되자, 이게 내가 장관 재직 시절 내건 문화부의 세 번째 슬로건이었어요.
# 우리말을 낡고 옛날 것 취급해선 안 되는 이유
내가 그렇게 세 가지를 문화부 슬로건으로 내걸었더니 신문에서 문화부를 공격하기를, ‘요즘 이 아무개가 문화부 장관이 되더니 중앙청과 문화부 내에 고어(古語)가 난무한다’라는 거예요. 옛날 말이지만 이게 우리말인데, 사람들은 고어, 그러니까 고려 시대 때 말인 줄 알아요.
그 당시로 치면 21세기가 이제 곧인데 이 사람이 어디서 와서 지금 부지깽이니 두레박이냐는 거죠. 그 사람들은 부지깽이가 뭔지 몰랐나 봐요. 그러니까 고어라고, 나더러 옛날 고리타분한 조선 시대 놀음을 한다고 공격했겠지요.
그러나 우리 것은 맨날 낡고 옛날 거예요? 우리 것이 미래가 되면 안 됩니까?
밥 먹을 때 쓰는 젓가락, 옷 입을 때 매는 옷고름 자락, 그리고 누워서 바라보는 대청마루의 서까래, 손가락의 투구인 골무, 악기가 된 평화로운 곤봉인 다듬이, 머리의 언어인 갓, 누워 있는 악기인 거문고, 현재 세계인의 고랑을 파는 호미, 한국인 손으로 빚어진 진주이자 다이아몬드인 나전칠기… 한국인이 사용해온 물건들 하나하나에는 한국인의 마음이 그려낸 별자리가 있어요. 그건 낮엔 안 보일지 몰라도 밤이 되면 밝게 빛납니다. 낮에는 태양 때문에 안 보일 뿐 없어서 안 보이는 게 아닙니다. 한국인의 마음이란 게 그렇습니다.
부지깽이와 두레박은 버리거나 잊힌 것들이 아니라 한국인의 마음을 그려낸 별자리입니다. 하늘의 별들은 다 똑같지만 별자리와 그 전설의 이야기들은 민족과 나라에 따라 다 달라지는 법입니다. 그러니 함부로 천시하거나 잊어선 안 되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가 어디까지 왔니?
요즘 사람들이 쓰는 말을 보면, 이것저것 붙여놓고 다시 말을 줄여놔서 뭘 이야기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술을 마실 때 건배사로 “나가자!” 그러기에, 나는 어디로 나가자는 말인 줄 알았더니 ‘나라와 가정을 사랑하자!’라는 말을 줄인 거라더군요.
지금 한글 세대들이 쓰는 한글에는 새로운 조어가 얼마나 많이 생겼는지 몰라요. 이게 《혈(血)의 누(淚)》(‘피눈물이 난다’는 의미)라던 사람들이 한글 전용을 시작한 지 70년 만에 일어난 변화예요.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문화부 장관 하던 시절만 하더라도 ‘부뚜막 위 부지깽이가 되자’ ‘우물가 옆 두레박이 되자’ ‘바위 위 이끼가 되자’ 이것들을 고려 때 이야기인 줄 알고 고어를 쓰는 사람이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러니 내가 묻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어디까지 왔니? 문자로 봤을 때 한자 세대로 시작해 일어 세대를 거쳐 한글 세대로 왔는데, 이 한글을 제대로 찾지도 못하고 다시 영어 세대로, 또 한자 세대로 가고 있어요.
외국어를 쓰지 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일이 바로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고 한자를 배우는 것이죠.
서정주의 시집 《화사집》 속에는 서구적인 사상이 있지만 그 속에 동양적인 전통이 담겨 있고,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 속에는 거꾸로 동양적인 특성이 있지만 그 속에 또한 서구적인 사상까지 내포되어 있죠. 그래서 이들은 다 같이 전통적이며 인류적 보편성을 획득한 한국 문학이라 말합니다.
우리가 어느 특정한 시대나 고정된 지역적 편견의 색안경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때 그 시대 문화의 생명은 극히 짧은 것이 되고 맙니다. 한 시대(시간), 한 지역(공간)이 되는 배경을 이해해야만 안목이 생기고 비전이 생깁니다. 문학에서 고전적 작품이라는 것은 무수한 공간을 꿰뚫고 확충하면서 오늘날까지 그 가치를 존속시켜온 작품을 뜻합니다. 호메로스나 셰익스피어의 위대성은 타임리스(timeless)에 있습니다. 《햄릿》이 덴마크인이라서, 왕자라서, 고대인이라서 유명한 게 아니라 인물 속에 인간 총체의 한 비극성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덴마크 왕실의 인간들만 흥미를 갖는 인물로만 그려졌을 거예요.
당대에만 유행하는 사조, 뿌리가 없는 전통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곧 잊히고 맙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일은 인간의 영원성을 찾는 일과 같아요. 가치에 공감하는 많은 이의 지적(知的) 연맹을 실현시킬 수 있으니까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2)에서 요즘 사람들은 거꾸로 풍토(風土)라는 한자를 쉽게 배워요. 우리말을 찾는 것이 곧 한자를 배우는 일이 된 거죠.
#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한국인의 뒷모습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의 서문(《월간조선》 2022년 9월호 참조)에 나오는 노부부 이야기는 저의 실화입니다.
당시 군대에서는 더 이상 군용으로 쓸 수 없는 차를 민간에 불하해줬어요. 그럼 언론사들이 그 차를 불하받아 차체의 카키색을 다른 색으로 칠하는 정도의 개조만을 거쳐 썼거든요. 책에서 내가 타고 있던 차도 그런 차였어요. 그 차를 타고 고향을 갔다가 오는 길에 본 장면인 거죠. 그 장면을 한 번 상상해보세요.
그런데 고개라는 게 뭘까요? 우리 민요 아리랑을 보세요. 그게 고개 노래잖아요. 각지의 아리랑마다 가사는 다 달라도 후렴은 똑같거든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고개를 넘게 해주시오, 고개를 넘어가세요, 넘지 마세요.’ 이러잖아요. 판소리에서 나온 우리 고전소설 《춘향전》에 춘향이 ‘(이도령이) 달만큼 별만큼, 나비만큼 불티만큼 망종고개 넘어 아주 깜박 넘어가니’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한국인에게 있어 고개라는 건 이별의 마지막 경계선이에요.
어려서 외갓집에 놀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는 항상 외할머니가 쫓아 나오세요. 분명히 안방에서 하직 인사 하고 나왔는데도 마루 끝까지 따라 나와 “잘 가라” 하세요. 그래서 마당 아래에서 인사를 꾸벅 하는 거예요. “할머니 추워요, 얼른 방에 들어가세요.” 그렇게 이미 두 번이나 인사를 주고받았는데도 할머니는 또 대문간까지 나오시죠.
그럼 “이만 가볼게요, 얼른 들어가세요” 하고 인사를 하고 대문을 나서는데도 여전히 따라 나오세요. 돌담을 따라 돌아가는 골목길까지. 그럼 “아유, 얼른 들어가세요”라고 만류해보지만 할머니는 그러세요. “응응, 들어갈게, 들어갈게” 하시면서 막상 들어가지는 않으시고.
한국 사람들이 이별하는 게 이렇게 힘이 들어요. “들어가셔요” 그러면 또 쫓아 나오시고. 이 애틋한 동행은 보통 마을 입구까지지만 눈으로 하는 배웅은 계속 이어져요. 당신의 딸, 손자가 마을 고갯길을 넘어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그 자리에 서서, 딸이나 손자가 돌아보면 손을 흔들어주기도 하면서 서 있는 거죠. 참 눈물겹죠. 그 마지막 고개를 넘어가면 자기 딸이나 손자를 영원히 못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도 한국의 어느 고개를 가든지 거기에는 이별하는 사람들이 마지막 봤던 얼굴이 있는 거죠.
자동차에 놀란 村老의 뒷모습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서문은 바로 그런 고개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지프를 타고 속력을 내며 고갯길을 돌아 내려오는데, 마침 그 앞에 나이가 든 시골 할아버지·할머니가 있는 거예요. 농부 특유의 옷차림에 장을 보고 오는지 할아버지는 작은 짐을 들고 느긋하게 길을 걷고 있다가 자동차 경적 소리에 뒤를 돌아본 거지요.
마차 정도나 다니지 지프가 다니지도 않는 시골이에요. 시골에 있어도 비행기는 하늘을 날아다니니까 봤어도 자동차는 여간해서는 볼 일이 없어요. 그런데 갑자기 등 뒤에서 차가 나타나니까 평생 차를 피해보지 못한 이분들이 깜짝 놀라서 뛰어요. 그냥 뛰었으면 내가 그렇게 가슴이 아팠을까.
그 경황없는 가운데 두 노인이 손을 부여잡고, 또 그 보따리에 뭐 그리 귀중한 게 들었겠어요? 시골 장터에서 구입한 거라고 해봐야 양잿물, 북어대가리 그런 것일 텐데 그걸 다른 손에 또 꽉 부여 쥐고 놓질 않아요.
닭, 오리, 칠면조 이런 가금(家禽)으로 키우는 새들은 개나 여우 같은 육식 동물이 덤벼들 때 날 수가 없으니까 뛰어서 피해요. 그것도 길옆으로 숨어버리면 될 텐데 그냥 무작정 앞만 보고 푸덕푸덕 달려가는 거죠. 바로 이 두 노인분이 그랬어요. 뒤에서 빵빵하고 경적을 울렸으니 길옆으로 피하면 간단한 걸, 기를 쓰고 앞으로만 계속 뛰는 거예요. 놓치지 않으려고 손을 꼭 붙잡고 서로 다칠까 봐 걱정하면서.
도시 사람들은 뒤에서 경적을 울려도 쓰윽 보고는 느긋하게 길옆으로 슬쩍 피해주는데 자동차에 놀라 뛰어가는 촌로의 뒷모습에서 내가 뭘 봤겠어요.
그 장면을 보던 때 나는 25세나 26세쯤 되었어요. 확실하진 않지만 어쨌든 서른이 되기 전에 쓴 글이거든요. 그때 그분들은 내게 역사 속에서 끝없이 쫓겨 다니던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할아버지를 생각하게 했어요.
‘우리 조상들이 저런 모습으로 도망갔구나, 가축의 모습으로 쫓겨 다녔구나’ ‘천년을 그렇게 살아온 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뒷모습을 만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쫓겨 가던 뒷모습, 우리 역사 속에서 허둥지둥 가축처럼 쫓겨간 한민족.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하자고 생각했어요. 그것이 그때 내가 쓴 책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였던 거죠.
# 후에 찾아간 성황당 길 - 모든 것이 변하다
이어령 선생이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서문에 나오는 ‘무척 깊은 산골의 높은 고개’인 청다니 고개를 다시 찾았다. 차가 다니기 좋게 다 깎아 완만한 언덕이 되어 있었다.
그때가 《경향신문》 논설위원을 할 때고, 그 차도 신문사의 차라는 말은 앞에서 했고요. 그리고 한참 뒤에, 그 쫓기던 노부부가 있던 길에 다시 한 번 가봤어요. 그 불하받은 미제 군용 지프가 아니라 제대로 된 우리 국산차 에쿠스를 타고 갔죠. 에쿠스는 희랍어로 말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네 바퀴 달린 말을 타고 그곳에 다시 간 거예요.
내가 어렸을 때는 그곳이 무척 깊은 산골의 높은 고개였어요. 물론 어린아이의 왜곡된 기억일 수 있지만. 그때는 청다니 고개라는 이름이었는데, 밤에 고개를 넘으면 호랑이가 모래를 끼얹는다는 전설이 있었지요. 동네의 어떤 사람이 장 보고 오다가 호랑이 때문에 놀라 허리를 다쳤다는 말도 있고. 그런데 지금 가보니 거기는 호랑이가 나올 만한 깊은 산골도, 높은 고개도 아니었어요. 내가 지프를 타고 갔을 때만 해도 조그마한 길이었는데 지금은 차가 다니기 좋게 다 깎아 완만한 언덕에 버스가 다니는 4차선 도로예요. 심지어 그 길의 아래에 광케이블이 깔려 있으니 조심하라는 팻말도 달려 있었어요. 다만 성황당 나무는 그대로더군요. 어지간히는 늙은 그 나무가 그 자리에 옛날처럼 서 있었어요.
20대 후반의 나는 거기서 할아버지·할머니의 뒷모습을 보고 가축처럼 쫓겨 간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 우리 조상들은 참 못났다, 왜 쫓겨 다니느냐고 가슴을 치고 화를 냈는데 후에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어렸을 때는 한국 사람의 진짜 뒷모습을 몰랐어요. 아, 그게 아니다 내가 잘못 알았다는 사실을 내가 이대 교수가 된 뒤니까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쓴 후예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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