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고 이어령 전 장관 부인 강인숙 영인문학관장 "맑은 날, 조용하고 평화롭게 가셨어요"

 

<여성조선 임언영 기자  2022.05.06>  

 


봄이 내려앉은 평창동. 겨우내 잠들었던 고목이 초록을 지나 노란 산수유, 분홍 앵두꽃, 새하얀 목련과 이팝 등이 순서도 없이 활짝 피어 있다. 남편 이어령 전 장관을 보내고 맞은 첫 봄, 강인숙 영인문학관장은 “사람이 타서 재가 되어버리는 엄청난 일에 압도당해 넋이 나가 있는 동안 밖에는 어느새 봄이 왔다”고 말했다.

 


시대의 지성, 이어령 전 장관이 세상을 떠난 지 한 달이 넘었다. 49재를 꼭 하루 앞둔 4월 15일,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 강인숙 관장을 만났다. 이날은 이 전 장관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전시인 <이어령 장예전(長藝展)>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했다. ‘크리에이터들의 크리에이터’로 불리던 고 이 전 장관을 기리기 위해 기획된 전시는 후배 예술가들이 공간을 구성하고 사진, 설치, 영상 등 작품을 완성했다. 이 전 장관 생전 각별한 사이였던 디자인하우스 이영혜 대표가 전시 총감독을 맡았다.

파워풀한 느낌의 닭이 햇살을 품은 영인문학관 곳곳에 세워져 관람객을 맞는다. 김병종 화가의 작품이다. 닭의 해에 태어난 고 이 전 장관은 ‘새벽에 외롭게 외치는 소리’라는 의미로 닭의 상징성을 자주 이야기했다. 

지하 2층에서 시작해 지하 1층으로 올라오는 동선으로 구성된 전시는 단정하고 조화롭다. 백남준, 이우환, 김병종 등 최고의 아티스트와 교류를 이어간 이 전 장관의 소장품부터 생전 사용하고 아끼던 일상용품과 사진, 대표 저서 등 수많은 자료들이 시선을 잡아끈다. 고인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수많은 마음이 느껴진다. 한 사람이 남기고 간 길고 깊은 여운만큼이나 따뜻하고 아름다운 남은 자들의 마음을 잔잔하게 공유한다. 지하 1층 전시 공간의 한복판에서 강 관장과 마주 앉았다.  
 
아름다운 전시입니다. 이 그림(윤후명의 작품)이 내 방에 있던 건데 여기 놓으니까 얼마나 아름다워요. 김덕수 선생이 쓰던 꽹과리, 안숙선 씨가 무대에서 쓰던 부채 등 하나하나 의미가 깃든 작품들인데 이렇게 밖으로 나오니 너무 멋있어요. 나는 죽었다 살아난대도 못할 일(전시)이에요. 많은 분들에게 아주 감사합니다. 

“봄이 무서워서, 방에서 숨어 지내다시피 했다”는 오프닝 말씀에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아직 마음이 힘드시지요. 벚꽃 피는 무렵이 싫더라고요. 그래서 (집에) 들어앉아 있었어요. 그러다가 이 전시 때문에 바빴어요. ‘이렇게 해서 또 힘든 시간이 지나가는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선생(강 관장은 고 이어령 장관을 ‘이 선생’이라고 불렀다)이나 나나 90이잖아요. 병이 아니라도 죽음을 생각할 나이고, 또 저희는 10년 전에 아이(이민아 목사)를 잃은 경험도 있어요. 그래서 비교적 죽음을 받아들이기 쉬웠다고나 할까요. 면역이 조금 되어 있는 거죠. ‘아이보다 10년이나 더 살았는데 뭐’라는 마음으로 이 시간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49재 맞춰 준비한 ‘장예전’ 
이어령이 남긴 ‘긴’ 예술 

 


고 이어령 전 장관을 추모하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김아타 작가가 찍은 사진과 황수로 작가의 홍매가 ‘생명과 죽음은 서로 등을 대고 있다’는 고 이 장관의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만장처럼 휘날리는 조문객의 애틋한 헌사에서는 그를 기리는 마음들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사유하다 눈을 감은 바로 그 장소에서,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추모의 현장이다.

이번 전시는 선생님 생전에 직접 기획하셨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이영혜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오셨을 때, 이 선생이 “내 장례식 디자인하는 거 해준다고 했잖아. 해볼래?”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 전시를 진행하게 됐어요. 

49재에 맞춘 전시라 더 의미가 생겼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사후 50일, 불교에서는 49일이 의미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우리끼리 “이왕이면 그 안에 하자. 혹시 아느냐 보러 오실지?” 농담을 하면서 시작했어요. 시간이 부족해서 많은 분들이 고생하셨는데, 덕분에 아주 정성들여 준비한 추모 전시가 됐습니다.   


당연히 선생님께서도 전시를 보셨을 것 같은데요. 보시고 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우리 선생님 보셨다면? (잠시 생각 후) 우리 선생님은 칭찬을 잘 안 하세요.(웃음) 그 양반은 완벽주의자라 100점이라야 되거든요. “아, 요거 요거는 고칠 걸 그랬다” 이런 말씀도 하셨을 것 같고, 이영혜 선생님이랑 호흡이 잘 맞는 파트너니까 “아, 당신 이건 참 잘했다” 하신 부분도 있을 것 같아요. 많이 좋아하시고 기뻐하셨을 것 같아요.  

스스로 아카이빙을 철저하게 해놓고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선생님의 철저함을 더 실감하셨을 것 같은데, 어떠셨나요. 맞아요, 뭐든지 꼼꼼하게 하시는 분이에요. 서재 정리가 마지막 작업이었는데, 5%만 남겨놓고 다 정리하고 가셨어요. 휠체어에 앉아서 사람을 시켜서 하는 정리지만 그 시간은 아픈 걸 잊어버리시더라고요. 이번에 준비하면서 다시 한 번 또 느꼈죠. 

 


가족이 지킨 ‘이어령의 마지막 2주’ 
맑은 날, 조용하고 평화롭게

 


고 이 전 장관은 2015년 암이 발견돼 두 차례 큰 수술을 받았지만 항암치료를 거부했다. 그 시간 동안 저서 집필에 몰두하며 치열한 시간을 보냈다. 그의 마지막 시간은 우리 사회에 죽음이라는 화두를 던짐과 동시에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돌아보게 했다. 이 전 장관의 마지막 시간을 담담하게 전하는 강 관장을 통해서도 다시 한 번 그 의미를 짚어볼 수 있었다. 

짧지 않은 투병 기간이었지만 그래도 갑작스러운 소식이었습니다. 사실 못 움직이고 완전히 누워 있었던 기간은 2주밖에 안 돼요. 그 기간에도 책 정리는 하셨고요. 좋게 가신 셈이에요. 암 환자들이 맞는 모르핀도 딱 한 번만 쓰셨으니 운이 좋은 거죠. 누군가 도왔나 보다 생각이 들어요. 식구들이 야단을 쳐서 2주 동안 영양제 주사를 맞으셨는데 “고통 속에서 10시간 주사를 맞으면 이틀을 더 산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 안 맞겠다” 하시고 사흘 만에 돌아가셨어요. 우리 선생님은 안 한다고 하면 그만이신 분이니까요. 

모든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토요일에 돌아가셔서 간병인이 한 명도 없었어요. 완전히 가족끼리  있을 때, 그 안에서 돌아가셨어요. 헐떡거리거나 고통스러워하지 않으시고, 진통제 효과가 있을 때 돌아가셔서 통증을 못 느끼셨거든요. ‘아이들이 평화로운 죽음을 봐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용하고 평화롭게 가셨어요. ‘맑은 날, 가족만 있는 데서 저렇게 돌아가시는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럼에도 임종을 지켜보는 심정은 그 어떤 언어로도 표현이 안 되는 고통입니다. 굉장히 충격이었어요. 저는 자연사를 처음 봤거든요. 딸은 심장마비로 갔기 때문에 그 과정이 생략됐어요. 그런데 우리 선생님은 6개월 정도 몸이 반으로 줄었으니까 아픈 데가 많았어요. ‘아, 저렇게 아파야 가는구나. 저렇게 고통을 당한다면 이승에서 지은 죄는 다 갚고 가는 거 아닐까?’ 여러 생각이 들더라고요. 게다가 저는 나이가 같으니까 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힘든 시간도 가족이 함께이기 때문에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큰아들(이승무 한예종 교수)은 매일 새벽에 들러 3시간 정도 머물고 출근을 했어요. 천안에 거주하는 아들(이강무 백석대 교수)은 주말마다 네 식구가 다 올라와서 2박 3일씩 시간을 보내고 갔어요. 너무 미안하더라고요. 선생님도 마지막까지 의식이 있으셔서, 아이들을 만나면 미안해하고 빨리 가라는 말을 끝까지 하셨어요.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웠습니다.    


아픈 아내 위해 사진 찍어주던 남편… 
1주기쯤에 서재 공개 할 예정 

 


강 관장과 이 전 장관은 1952년 서울대 국문학과 입학 동기다. 대학 3학년 때부터 만나 1958년 결혼해 꼬박 64년을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글을 쓴다는 직업이 같은 두 사람은 같고 힘든 일이어서 또 다른 서로를 존중하고 지켜보면서 평생을 함께했다. 강 관장은 힘든 일이어서 본인이 남아서 다행이라면서, 서재 공개 등 이 전 장관의 뒤처리 작업을 해나갈 것이라고 향후 계획을 전했다.  

마지막 두 분의 시간은 어떠셨나요. 우리는 직업이 같으니까, 저는 저대로 글을 쓰고 자기는 자기대로 글을 썼어요. 사실 동갑이면 간호가 안 돼요. 저도 간병인이 필요한 나이니까요.(웃음) 서재 정리가 마지막 작업이었어요. 한 5% 정도만 남겨놓고 다 정리하고 가셨어요. 그 시간은 아픈 것도 잊어버리시더라고요. 그걸 지켜보면서 그렇게 살았죠. 

곳곳이 흔적입니다. 남은 공간을 혼자 지켜보는 것이 힘들진 않으신가요. 한 달은 좋았던 생각밖에 안 나더라고요. 임종할 때는 너무 약해져 있으니 연민이 먼저 나와요. 그렇게 아프고 갔으니까, 아프던 생각이 나고 또 아니기도 하고 그래요. 우리 집이 좁아요. 그래서 선생님은 마지막 1년을 2층 서재에 계셨어요. 제 방에 있을 때는 그런 감정이 별로 안 느껴지는데, 아직 2층에는 못 올라가겠어요. 이제 익숙해져야죠. 조금 회복이 되면 정리도 해드려야 되고…. 잘 견딜 거예요. 제가 잘 참거든요. 

긴 시간 부부라는 이름으로 사셨습니다. 좋은 추억도 많으실 텐데, 몇 가지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60년이면 너무 많아서 고르기 힘들어 안 돼요.(웃음) 30년 전에 제가 일본에 교환교수로 가게 됐어요. 그런데 떠나는 날 뇌하수체 한복판에 혹이 났다는 걸 알아서, 100일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 11시간 동안 큰 수술을 받았어요. 그때 잠깐 일본에 머물 때, 이 선생님이 저를 데리고 다니면서 자꾸 사진을 찍어요. 저는 다 죽어가는 엉망인 얼굴인데 말이에요. 사진 찍히는 게 너무 싫어서 안 죽을게 고만 찍으라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내가 언제 죽는다고 했어?” 하면서 길길이 뛰더라고요.(웃음) 그다음에 식사를 하러 갔어요. 제가 샤브샤브가 먹고 싶다고 해서 둘이 갔는데, 그 집이 비싸더라고요. 내가 안 먹는다고 할까봐 가격표를 슬쩍 감춰놓고 메뉴를 보여주시더라고요. 그런 거죠 뭐.(웃음)    

일상은 어느 정도 회복을 하셨나요. 제가 혼자 살아보는 게 처음이에요. 대가족 속에서 항상 식구가 너무 많았는데, 도와주시는 아주머니를 내보내고 혼자 있어요. 제가 빨리 회복이 안 되면 애들이 독립을 못하게 하니까 열심히 챙겨 먹으며 혼자 사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어요. 일요일에는 큰 아들네가 와서 만나는데, 어느 토요일에 하루 종일 그 누구와 말을 안 하고 보낸 적도 있어요. ‘아, 이건 대단한 일이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남들 다 사는데… 살아야죠. 

고 이 전 장관의 아카이빙 작업은 계속 진행이 되나요? 지금 계획이, 전에 문학관을 운영하던 100평짜리 공간이 있어요. 거기 선생님 자료를 넣고 물건도 갖다놓고 내년에 공개할 예정이에요. 1주기쯤 공개할 생각입니다. 다음에는 서재를 공개하려고 해요. 우리 선생님 서재가 참 아름답거든요. 서재에 있는 책을 등록을 다 해야 하고, 서가에 장식품이 많아서 그것도 준비를 해야 하는데요. 그것도 내년 봄쯤이면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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