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외로움으로부터의 해방

 

 

 

< 서울경제, 정여울 작가, 2023-05-13  >

 

결핍·욕망의 사슬서 벗어나려면
타인 의존 않는 나의 삶 시작하고
사랑 받는 대상 아닌 주체가 되자



인간은 끝없는 욕망, 결핍, 외로움과 평생 싸워야 하는 존재일까. ‘명랑한 은둔자’로 유명한 작가 캐럴라인 냅은 거식증과 알코올중독에 얽힌 뼈아픈 체험을 고백하는 글쓰기를 통해 수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촉망받는 기자이자 작가였던 그녀는 거의 뼈밖에 보이지 않는 앙상한 몸으로 거식증과 알코올중독을 함께 앓으며 지독한 외로움과 싸웠다. 그녀는 자기 인생의 진짜 주인공이 ‘나 자신’이 아니라 바로 ‘타인의 시선’이었음을 깨닫는다. 또 끔찍한 거식증의 뿌리에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있음을 깨닫는다. 부모님, 연인, 친구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 세상으로부터 받지 못한 인정, 그 모든 사랑받지 못한 고통과 결핍의 기억이 그녀로 하여금 술을 갈망하게 했고, 거식증에 빠지게 했다.

캐롤라인 냅은 세 가지 방법으로 끝없는 결핍과 멈출 수 없는 욕망의 사슬로부터 벗어났다. 첫째, 자학과 자기혐오를 멈추고 자기를 돌보는 삶을 시작하기. 먹고 싶은 욕망을 통제함으로써 다른 욕망까지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고, 자신의 욕구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고, 아름다워지고 싶은 그 모든 욕구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그녀는 ‘조정’을 배움으로써 몸에 관해 더 잘 알게 되었다. 물살을 가르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기쁨, 자연의 힘과 인간의 힘이 조화를 이루어 배를 움직이는 기쁨을 통해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회복한 것이다.

둘째, 욕망의 대상이기를 멈추고 욕망의 주체이기를 선택하기. 타인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깡마른 신체를 보여주고 싶었던 마음에는 단지 외모에 대한 강박이 아니라 ‘나는 고통받고 있어요’라는 구조신호가 숨어 있었다. 그녀는 타인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 투쟁하는 삶보다는 욕망의 주체로서 능동적으로 살아가고 싶은 자신을 발견한다. 고통받고 있다는 구조신호를 보낼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강력한 해방의 의지로 ‘과거의 나’라는 감옥을 탈출하는 길. 그것은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내 삶의 기쁨을 발견할 수 있는 스스로의 강인한 모습을 발견하는 길이었다.

셋째,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사랑을 주는 실천으로 바꾸기. 그녀는 가족, 연인, 친구로부터 더 많은 사랑, 더 제대로 된 사랑을 받고 싶은 열망을, 스스로 먼저 사랑을 적극적으로 주는 실천으로 바꾸었다. 내 마음에 꼭 들게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 가족과 연인을 탓하는 일을 그만두고, 반려견을 입양해 그 사랑스러운 생명체를 온 힘을 다해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반려견에 대한 사랑은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되었고, 사랑을 받기만을 열망하던 캐럴라인은 오히려 반대로 사랑을 끊임없이 적극적으로 줌으로써 자기 안에 짐작보다 훨씬 크고 깊은 사랑이 아직 무궁무진하게 남아있음을 발견한다.

끝없는 결핍, 상대적인 박탈감에 시달리는 우리들에게, 나는 캐럴라인의 용기와 열정과 사랑을 선물하고 싶다. 

 

욕망에 끝은 없지만, ‘끝없이 무언가를 갈망하는 마음’과 단호하게 결별할 수 있는 용기는 있다. 사랑의 대상이 되기 위해 전전긍긍하기보다는 내가 먼저 사랑의 주체가 되자.

자신에게 말걸기, 가장 따뜻한 말투로

 

 

< 한국일보, 이정미,  2023.05.05  >

 

 


얼마 전 '근로자의 날'에 쉬지 못하는 근로자가 10명 중 3명이나 된다는 조사결과를 뉴스로 접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5월에 줄줄이 있는 특별한 날에 가족과 함께하기 어려운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생업으로 인해 어린이날에 자녀와 함께하지 못하거나, 어버이날에 부모님을 찾아뵐 수 없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저마다의 사정으로 가족이 떨어져 살며, 주말부부로 지내는 가정이 상당히 많다. 부부의 날(5월 21일)이 법정기념일이라지만, 현실은 아이들 챙기랴 부모님 챙기랴 먹고살기 바빠 정작 부부가 둘만의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다. 둘만의 대화를 나눈 지가 언제인지도 모르겠고, 아이들 없이 덩그러니 집에 둘만 남으면 어색하다는 농담 같은 진담을 들은 지도 꽤 여러 번이다.

가정의 달을 맞아 그동안 아이들 키우느라 몸 상하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살아온 서로에게 당신 덕분에 해낼 수 있었다고 한 번쯤 말해 보는 것은 어떤가. 말하기 쑥스럽다면 짧은 한 줄 문자메시지도 좋겠다. 점차 나이가 들수록 젊은 시절에 비해 사회적 관계망이 줄어들고, 배우자, 자녀, 손자, 그리고 친한 친구로 압축된다. 이들과의 관계가 긍정적이고 지지적인 것이 돈과 명예보다 더 우리 행복에 중요하다는 것은 굳이 심리학자들의 연구결과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자명하다. 그러니 이제 막 시작된 5월에는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와 자기 자신을 점검하는 데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어 보는 것이 어떨까.

분석심리학자인 카를 융은 인생의 전반부는 직업이나 사회적 성취를 목표로 외적인 삶을 추구해야 하므로, 사회 속에서 자기 기반을 닦는 데 열중해야 옳다고 보았다. 

 

반면, 중년에 이르러 시작되는 인생의 후반부에는 개인적이고 내적인 삶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하였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인간 조건에서 중년기 이후의 삶은 노화와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이고,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중년 이후에는 부부관계 못지않게 자기 자신과 관계를 잘 맺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 이는 배우자가 있든 없든 누구에게나 적용되며, 한 인간의 성숙과 행복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과 관계를 잘 맺는다는 건 어떤 것인가? 이를 알아보는 방법이 있다. 지금 눈을 감고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모든 자극을 차단하고, 조용히 내면의 감각에 집중해 보자. 편안하고 부드러운 감각이 느껴지는가? 불안하고 초조하며 딱딱하게 굳은 감각이 느껴지는가?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호흡에 집중해서 침묵 속에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마주해 보자. 이제 준비가 되었다면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건네어 보자. "잘 지내니?"라는 인사도 좋다. "그동안 힘들었지?"라는 위로도 좋다. "힘내. 난 언제나 네 편이니까"라는 응원도 좋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말투로 최대한 부드럽게 내면의 자기에게 한마디 건네 보자.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 다정한 사람은 건강하다. 그러나 지금 그렇지 못해도 괜찮다. 흉내 내도 좋으니 자기 자신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어 보는 것이 중요하다. 낯설고 어색할수록 연습이 필요하다. 바로 그 부드러운 말투로 배우자에게, 부모님에게, 자녀들에게 전해 보자. 곁에 있어 주어서 고맙다고. 문자 메시지마저 쑥스럽다면, 일기장에 한 줄 쓰는 것만 해도 효과가 있다.

운을 줍는 사람들

 

< 세계일보, 정시우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작가, 2023-05-12 >

 


‘준비된 자’ 만이 기회 올 때 잡아
조성진 대타로 나서 월드 스타로
日 오타니도 ‘만다라트 계획’ 실천
꾸준한 성실함이 ‘운의 씨앗’ 심어

 


운동을 곧잘 했었다. 덕분에 체육선생님의 신임을 두둑이 받곤 했는데, 국민학교 5학년 때였던가. 수업 중 느닷없이 불려 나간 곳은 도내 육상선수대회였다. 선수 한 명이 이탈하면서 대타로 100m 달리기에 차출된 건데, 갑작스러운 상황에 여러모로 어리둥절. 여차여차해서 결승까지 진출했으니 의기양양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결말은 사뭇 교훈적이었으니, 예선까지는 어느 정도의 요행이 통했지만 결승전에서는 어림없었다. “준비, 탕!” 나는 출발에서부터 한참을 밀렸고, 경쟁자들의 뒤통수만 구경하다가 꼴찌로 결승선에 도착했다. 스타트가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단거리에서 오랜 시간 출발 연습을 한 친구들과 수업 도중 불려 나온 나 사이엔 어마어마한 간극이 존재했던 것이다.

꾸준히 ‘준비한 자’와 ‘준비 안 된 자’의 실력은 중요한 순간 결국 갈린다는 걸 일찍이 알려준 귀한 경험이었는데, 그래서일까. 살면서 종종 그 순간을 떠올렸다. 

 

어떤 기회를 만날 때마다. 넋 놓고 있다가 그 기회를 놓칠 때마다. 마침 인터뷰어로 활동하며 대중에게 인정받는 사람, 각자의 일에서 일정량의 성과를 거둔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다. 그러면서 공통점 하나를 발견했다. 그들은 일보 전진을 위해 쉬지 않고 걸어온 사람들이란 점이었다.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언더스터디(주인공이 사고 날 때를 대비한 대역)로 시작했다가, 부상당한 주인공 대신 무대에 올랐던 배우 주원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그 시절을 회상하며 담담히 말했었다.

“언더스터디는 실질적으로 무대에 오르기 힘들어요. 그럼에도 매일 연습했어요. 공연이 없는 날에도 일찍 가서 걸레질하고 대본을 봤죠. 형들이 농담으로 ‘그만 좀 와. 너 공연도 안 하는데 왜 자꾸 와~’ 할 정도로요. 주인공 형의 100회 공연 중 92번을 봤어요. 2층 맨 꼭대기에 앉아서 매일매일 배우일지를 쓰면서 말이죠. 그러다 리허설을 대신할 기회가 생겼는데,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무리 없이 해냈어요. 그걸 본 제작자가 나를 무대에 세워도 좋겠다고 판단하셨는지, 이후 150회 공연 무대에 설 수 있었죠.”

알다시피 주원은 이후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를 통해 범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다양한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도 대타로 나선 무대에서 세계적 스타가 된 케이스다. 2017년, 부상 입은 랑랑 대신 (오케스트라의 양대 산맥인) 베를린 필하모닉 무대에 선 조성진은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 G장조를 연주하며 세계의 찬사를 받았다. 준비된 사람이 아니었다면 대신 무대에 오를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고, 얻었다 해도 기회를 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 3월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조성진을 보다가 인상적으로 박힌 부분이 있다. 2015년 쇼팽 국제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했을 때를 언급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콩쿠르 우승한 다음부터가 진짜 시작이거든요. 생각했죠. 나는 이제 막 태어난 사람이구나. 이 음악계에서 완전히 신생아구나.” 최고의 순간, 가장 낮은 자세에서 생각하고 성장하기 위해 매일매일 피아노 앞에 앉았을 그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머리에 그려졌다.

최근 나는 ‘꾸준함’이라는 것이, 운을 줍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일본팀 우승을 이끈 오타니 쇼헤이를 통해서다. 실력은 물론 인성까지 훈훈해서 ‘순정만화의 실사화’라는 이야길 듣는 오타니를 논할 때 자주 언급되는 건, 그가 자기 계발법으로 작성했다는 ‘만다라트 계획표’다. 가로·세로 3칸씩 구성된 정사각형 한가운데 최종목표를 적고 그 주위로 세부 목표를 채운 후 이를 위한 실행 계획을 64개 세부안으로 나눠 실천하는 것인데, 여러 항목 중 눈길을 끄는 건 ‘운(運)’이다. 배려, 예의, 심판을 대하는 태도 등이 채워진 이곳엔 하물며 ‘쓰레기 줍기’도 있다.

실제로 쓰레기 줍는 모습이 여러 차례 중계방송에 잡히기도 한 오타니. 이에 대해 그가 한 말이 또 만화적이다. “다른 사람이 무심코 버린 ‘운’을 줍는 겁니다.” 

 

아마 그가 생각하는 운이란, ‘갑작스럽게 찾아드는’ 게 아니라 ‘성실하게 획득하는’ 것일 것이다. 이때의 관건은, 꾸준함. 꾸준함으로 기회가 될지도 모를 씨앗을 줍는 것이다. 그 씨앗이 꽃을 피우지 못할 수는 있지만, 줍지 않으면 피지도 못할 테니까.



삶이 우릴 때려눕힌다고 느낄 때

 

 

< 세계일보, 조경란의 얇은소설 , 2023-04-14  >

 


어느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
있는 힘 모아 땅 밀고 일어서야 희망

 

 


새 단편소설을 쓰기 전에는 매번 머릿속이 하얘지곤 한다. 새로운 이야기 앞에서는 앞의 방식과 경험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구성은 어떻게 할지, 어떤 목소리로 독자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효과적일지에 대해 고민해야 하니까. 조금 과장을 하자면 그야말로 소설 쓰기의 처음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그럴 때 ‘작가의 작가’라는 칭호를 듣는 제임스 설터가 미국 문예지 <파리리뷰>와의 인터뷰에서 단편소설에 관해 한 말을 읽고 또 읽는다. ‘우리가 지금 문학의 모닥불 주위에 앉아 있다고 가정해 보자, 어둠 속에서 여러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어떤 목소리를 들으면 졸리고 어떤 목소리들에는 귀를 쫑긋 세우고 귀 기울이게 된다. 그처럼 단편은 흡인력이 있어야 하며 첫 줄, 첫 문단 모두 독자를 끌어들여야 하고 소설이 끝날 때는 의미도 있고 기억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는 조언을.


그가 자신의 단편 중에서 좋아한다고 꼽은 「아메리칸 급행열차」와 「탕헤르 해변에서」의 첫 문장은 각각 이렇다. “이제는 그 모든 장소와 모든 밤을 생각하는 것이 쉽지 않다.” “바르셀로나, 새벽. 호텔은 어둡다. 큰길은 죄다 바다를 향하고 있다.” 그리고 「20분」의 첫 문장은 “이 일은 카본데일 근처에서 제인 베어라는 여자에게 일어났다”이다. 우리가 지금 문학의 모닥불 주위에 앉아 있다고 가정해 보면 제인 베어라는 여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 모든 장소에서 인물들이 무엇을 보고 경험했을까? 궁금해하며 다음 문장을 기다리지 않을까. 제임스 설터는 상상이나 전적으로 꾸며내서 쓰는 소설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듣고 알고 있는 이야기를 “완벽하게 알고 자세히 관찰”했다고 느낄 때까지 기다렸다 소설을 쓰는 타입에 가깝다. 독자에게 그것이 ‘본질적으로 진실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길 바라며.

 


“나는 언젠가 한 파티에서 그녀를 만났다”로 이어지는 단편 「20분」은 그 파티에서 만난 그녀가 나에게 자신의 인생에서 벌어진 20분, 죽음을 기다리고 있어야 했던 그 운명의 시간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다.

 


일과가 끝난 늦은 오후, 이미 어두워지는 무렵에 제인 베어는 말을 타고 혼자 산등성이에 올랐다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리 영리하지도 않고 걸을 때 가끔 비틀거리는 말에게도 그 길은 익숙했다. 그녀와 말은 배수로를 따라 문을 향해 나갔고 그들은 언제나 그 문을 뛰어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말이 뭔가를 포기하고 멈췄다. 순식간에 그녀는 말의 머리 위로 튕겨 나갔다. 땅바닥에 떨어진 그녀의 무릎으로 슬로모션처럼 말이 곤두박질쳤다. 그녀의 몸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지만 정신은 알고 있었다. 20분. 사람들이 늘 그렇게 말한 시간. 20분 안에 구조되지 못하면 살아날 가능성이 없을 거였다. 이웃들의 집은 멀었고 도로를 오가는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 곁에서 풀을 뜯고 있는 말은 안장을 차고 있으므로 누군가 말을 본다면 그녀를 구조하러 올 텐데.

 


도와주세요! 소리를 지르고 기도를 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손쉽게 할 수 있었던 일들과 하고자 했던 수없이 많은 일이 떠올랐다. 지금 이렇게 자신이 땅바닥에 팽개쳐질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순간들. 이제 그녀는 아버지를 떠올린다. 인생을 한 문장으로 설명할 줄 알았던 아버지. “삶은 우릴 때려눕히고 우린 다시 일어나는 거야. 그게 전부야.” 그녀는 손바닥으로 땅을 밀기 시작했다. 『아메리칸 급행열차』의 서문을 쓴 편집자는 이 단편에 대해 20분 안에 한 사람의 전 인생을 드러내기 때문에 좋아한다는, 매번 이 단편으로 돌아가곤 한다는 찬사를 덧붙였다.

 


어느 한순간,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렇게 삶이 나를 때려눕히려고 할 때. 천천히, 있는 힘을 끌어모아 손바닥으로 땅을 밀어본다. 안전한 방향 쪽으로. 신이 있고 세상엔 어떤 미덕이 아직 남아 있다고 믿는 게 그때는 진짜 도움이 될지 모른다.

내 마음을 털어놓을 곳은 없을까


펜데믹이 부른 테크노 스트레스…신체적·정신과적 질환 유발
편의점 문 열듯이 정신과 쉽게 찾을 수 있었으면

 


< 매일신문, 김성미 정신과전문의 ,  2022-07-07  >

 



얼마전 넷플릭스에서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를 보았다.요즘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구씨와 염미정을 모르면 대화가 안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사람들은 왜 이 드라마에 빠져드는 건지 호기심이 생겼다.

일에 치이고 상사 뒤치다꺼리하며 살아가는 직장인들, 군중 속에 있으면서도 혼자라는 외로움에 시달리는 주인공을 보면서 동일시를 통한 위로를 받았는지도 모른다.영화나 드라마는 대리 만족감을 주거나 교육적 효과도 있어서 치유적 도구가 되기도 한다.

지난 2년간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의 생활을 많이 바꿔놓았다.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간관계가 소원해졌고,저마다 혼자 지내는 방법에 익숙해졌다. 대화는 SNS를 통해 이루어지고 화상회의로 조직은 흘러갔다. 생필품 구매나 예방접종 예약 등 거의 모든 일상은 컴퓨터를 통해야 했다. 이런 변화는 우리에게 새로운 스트레스를 안겼다. 바로 테크노 스트레스다.

1980년대 미국의 심리학자 크레이크 브로드가 이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현대인들은 테크노 과부하 상태로 더 많이 더 빠르게 처리해야했고, 항상 누군가와 연결되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되었다. 나날이 발전하는 신기술을 배우지 않으면 도태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안게 되었다.

이런 염려와 불안은 스트레스 호르몬인 혈중 코티솔 농도를 높이고,이것은 신체 면역을 저하시켜서 관절염이나 비만 등 각종 신체 질환을 유발하고, 집중력저하, 기억력저하, 예민함, 과각성, 우울감 등의 정신과적 질환의 가능성도 높인다.

인간관계가 줄어들면 스트레스도 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정반대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혼자 있다는 게 불안해지고, 다시 사람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자유와 타인과의 교감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누군가와 분리되어 동떨어져 지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지치는 일인지 지난 2년간 뼈저리게 느꼈다.

이런 심리상태의 시청자에게 나의 해방일지는 편안한 고향집 같은 정서를 선사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온가족이 밥상에 둘러앉아 함께 식사하는 장면이다. 어머니는 푸짐하게 음식을 장만하고 듬뿍 덜어준다. 지나가는 친구도 숟가락 하나만 보태서 밥을 먹여서 보낸다. 요즘 1인 가족시대에 1인분량의 식품이 잘 팔리고 1인 좌석에 익숙해진 우리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식구(食口)란 입으로 함께 먹는 사람들을 뜻한다. 늦은 저녁 일터에서 돌아온 식구들이 밥상에 둘러앉아 식사하면서 서로의 안색을 살피기도 하고 불만을 터트리며 다투기도 하지만 그들의 식탁은 다음 날 아침에도 또 이들을 기다린다.

두 번째로 눈여겨 본 것은 편의점이다. 주인공은 편의점 본사 직원이고 자기에게 할당된 가게를 관리하는 일을 한다. 사람들은 편의점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 쉬고, 담배도 피우고 처음 보는 이와도 두런두런 대화를 나눈다. 편의점 문은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로 하루종일 닫혔다열렸다 반복한다.코로나로 거리는 한산해도 편의점은 불이 꺼지는 날이 없었고 항상 열려있었다.

캄캄한 밤거리를 걷다가 편의점 불빛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든든한 동네 오빠를 만난 듯 밤길이 안심이 되곤 했다. 망망대해의 등대 같은 느낌이랄까. 목마를 때 생수 한 병의 고마움을 알게 해준 것도 편의점이다. 유통기한이 지난 도시락을 허기진 사람과 나눠먹기도 하는 정겨운 장면도 있다.

편의점이 마치 정신과 병원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정신과는 정신이 이상하거나 집에 우환이 있거나 성격이 나빠서 찾는 곳이 아니다. 편의점의 물건처럼, 일상의 불편한 감정을 다루는 곳이 정신과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겹겹이 쌓아두지 않고 시원하게 털어내면 병이 되지 않고 뇌가 건강해진다.편의점 문을 열듯이 정신과 병원을 쉽게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해서 병이 되기도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등이 우리를 지치게 하고 에너지를 과소비 시키고 결국 번아웃 증후군으로 이어진다.

무기력감을 해결하기 위해 몸에 좋은 음식을 먹어야 된다는 생각에 고착되어 채소와 과일을 얼마나 먹었는지, 비타민 함유량이 얼마인지, 하루에 몇 칼로리를 소모했는지, 잠은 얼마나 잤는지, 렘수면은 몇 분간 지속되었는지 등 매일 체크하며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건강이 나빠져서 곧 중병에라도 걸릴 듯이 걱정을 한다.

하지만 과학적 연구 결과는 덜 걱정하고, 가족이나 좋아하는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이웃에게 친절하고, 더 많이 웃는 일처럼, 저울이나 수치로 측정할 수 없는 것들의 효과에 더 주목하라고 말한다. 식단과 신체 단련에 쏟는 노력만큼 더 나은 인간관계를 위해, 사랑하는 사람과 좋은 추억을 만들기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가족이나 친구와 잘 지내기위해서는 마음의 거리가 필요하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충고를 참아내고 대신에 그가 좋아질 때까지 곁에서 기다려주는 여백이 필요하다.이런 마음의 거리두기가 현대인의 스트레스를 풀어내는 좋은 방법이 된다.

많은 생각을 버리기 위해 자주 명상을 하는 것도 아주 좋은 방법이다.

 

내 마음의 해방일지는 어디까지 써내려갔는지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공황발작

 


<  매일신문,  김성미 마음과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2022-09-01  >

 


아침 일찍 경보음처럼 전화벨이 울렸다. 친구였다. 이 시간에 전화한 걸보니 급한 일임에 틀림없다. 출근 준비를 멈추고 전화를 받았다. 그의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간밤에 자다가 깨서 숨이 쉬어지지 않아서 한숨도 못잤다는 것이다. 산소 결핍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으로 끔찍한 새벽을 보냈다고 했다. 한 달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어서 응급실도 가고 여러 가지 검사를 해보았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다.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있을 시간에 홀로 깨어 숨을 못 쉬는 상황이라니. 이보다 더 잔인한 악몽이 또 있을까.

어젯밤의 그의 질식감은 공황 발작이었다. 공황 발작(panic attack)은 불안 장애 중에서 가장 수위가 높은 불안이다. 그런 일이 또 생기지 않을까 하는 예기불안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기 시작한다. 고속도로 터널 안에서 숨이 막히거나

답답함을 경험했다면, 터널을 피하게 되고, 시내에 차가 밀리면 갇힌 느낌 때문에 차를 버리고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든다. 지하주차장이나 엘리베이터 안에서 심장이 두근거리고 밀폐 불안이 엄습한다.

심장마비나 뇌출혈이 생겨서 갑자기 쓰러지거나 죽지 않을까 걱정해서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검사를 반복해서 받기도 한다. 검사결과는 정상이라고 하는데 본인은 신체 증상이 지속되니 의사들이 오진한 것은 아닌지 의심을 하고 또다른 의사를 찾아가게 된다. 이 모든 문제들이 자신의 마음이 강하지 못해서 또는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증상을 숨기거나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 공황장애는 평생 유병률은 3~5% 라고 알려져 있다. 요즘은 코로나로 마스크를 항상 착용하면서 공황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공황불안은 왜 생기는 걸까. 유명 연예인들도 이 장애를 앓고 있다고 자주 소식을 접하게 된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종일수록 발병 위험성이 높다.장기간 지속되는 스트레스는 견디는 힘을 약화시켜서 살얼음이 꺼지듯이 갑자기 무너지게 한다. 가족들과 켜켜이 쌓인 불편한 감정들, 복잡한 사회관계에서 어려운 처신들, 몸이 아파도 일은 해야 하고, 통장 잔고와 당장 결재해야할 내역들이 눈앞에 버티고 있는 경제적 상황들 모두 스트레스 요인이다.

두 번째는 스트레스를 다루는 방식이 비효율적이라면 또한 위험하다. 무조건 참기만 하는 사람일수록 심한 불안이 올 가능성이 높다. 많이 눌린 스프링이 더 높이 튀는 원리다. 공황 발작은 열심히 일하고 막 성공가도에 오른 사람들이 위험하다.

스트레스를 술로 푸는 사람들이 많다. 일과를 마치고 폭탄주를 몇잔 들이키고 나면 걱정이 사라지고 잠도 잘 잘 수 있다고 술을 약삼아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공황발작은 전날 과음 후에 오는 경우가 가장 많다. 술은 잠시 불안을 속일뿐 진행되고 있는 내적 붕괴과정을 더 촉진시키는 가장 좋지 않은 방법이다.

나의 친구 역시 항상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달력에는 일정이 빈틈없이 빽빽하게 메모되어 있었고, 매일 모닝 커피로 몸을 깨우고 깊은 담배 한 모금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무리한 부탁을 절대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늘 부지런했고 친구도 많고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누구도 그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눈치 채지 못했다. 죽음의 공포까지 느낀 후에야 SOS를 보냈다.

중년에 찾아오는 무기력감을 카페인과 니코틴으로 근근이 버텨왔지만 그의 내면의 배터리는 충전의 기회가 없었다. 어느 날 문득 내리막을 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심리적 불안감인 상승정지증후군(rising stop syndrome)은 가족을 책임지고 있는 가장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다. 가장 안전한 마약배달원은 가족이 있는 가장, 거기에 아픈 자식이 있다면 가장 안전한 배달원이다. 드라마 <모범가족>에서 마약조직의 상선이 한 대사다.

스트레스는 심약하거나 우환이 있거나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 겪는 것이 아니다. 스트레스는 나쁜 자극에 맞서 이겨내려는 적응과정 증후군(adaptation syndrome)이다. 이 과정에는 우리 신체와 뇌, 그리고 마음까지 총동원 된다. 이 3가지는 한 팀이 되어서 침입한 적군을 물리치기 위해 동시에 움직인다. 몸 뇌 마음은 분리된 각자가 아니라 하나다. '밤송이'라는 신체 안에 '알밤'처럼 뇌와 마음이 나란히 들어있다고 하면 적당한 비유가 될것 같다.

몸이 병들면 마음이 힘들어지고 마음이 힘들어지면 신체에 병이 온다. 나는 스트레스는 없는데, 머리가 아프다, 소화가 안된다고 여러 병원을 전전하지 말고 심리적 상태를 점검받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약을 먹어도 낫지 않는 두통, 역류성 식도염, 방광염 증상이 있다면 정신과 상담을 권한다. 외롭다, 지친다, 힘들다고 감정과 느낌을 털어놓을 수 있어야 뇌가 맑아지고 위산 역류도 줄어든다.

평소에 쉰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고, 코로나에 걸려야 쉬고, 교통사고가 나야 입원하고, 암에 걸려야 건강을 돌보는 어리석음은 없어야한다. 마음이 가벼워지면 뇌가 회복되고, 뇌가 건강해야 비슷한 스트레스나 사건이 닥쳐도 미리 예상하고 잘 지나갈 힘이 생긴다.

머릿속이 걱정으로 가득 차 있으면 새로운 생각이 들어올 공간이 없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들을 미리 걱정하느라고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한다. 산사에서 목탁을 두드리다가 꾸벅꾸벅 조는 스님의 뇌가 가장 건강한 상태가 아닐까. 텅 비어있는 백지의 달력, 오후의 멍때리기, 해질녘 가로수의 긴 그림자와 동행하는 느린 산책. 커피나 담배 대신 이런 취향으로 갈아타는 것은 어떨까.


 

수전증을 가진 어느 신랑에게

 


<  매일신문, 김성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2022-10-27 >

 


"선생님, 제가 정신적으로 정상이라는 진단서 좀 써주세요. 장모님이 진단서를 가져와야 결혼 허락해준대요." 결혼을 앞둔 신랑이 신부 부모님의 갑작스런 정신건강진단서 요청에 정말 내가 비정상이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으로 정신과를 찾았다.

그는 좋은 학교를 나와서 직장에서 인정받는 능력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은 손을 떠는 증상에서 비롯되었다. 장인어른의 술을 받다가 손이 떨려서 술을 쏟고 말았다. 그는 예기치 않은 당혹스런 상황으로 인해 단단했던 마음이 무너지고, 부모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했다.

그 후부터 그는 손 떠는 것을 숨기려고, 부모님 집에 갈 때는 술을 미리 마시고 가거나, 약속을 피하거나 미루었다. 이런 행동이 반복되자 정신과 진단서까지 요구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남 앞에 서면 머리가 하예지고 목소리가 떨려서 사람 앞에 나서는 걸 두려워했다. 이런 수행 불안을 없애기 위해 남모르게 수년을 노력해왔다. 떨림증, 대인불안과 관련된 책을 수도 없이 읽고, 인터넷에서 끊임없이 정보를 찾아보았다. 웅변학원도 다녀보고 긍정심리학에 매달려 보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순간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자기는 쓸모없는 사람이고 남들이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이렇지 않았던 상태로 되돌리려고 온갖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본인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일어나지 않을 일조차 걱정하느라고 에너지만 방전되고 해결되는 것은 없다.

지금까지 아무도 모르게 힘겨운 노력을 해온 지친 심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도움이 필요한 친구를 대하듯이 세상에서 거절당하고 지친 자기를 안아주어야 한다. 고갈된 에너지가 충전이 되면 스스로 떨치고 일어나 툭툭 털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생각하는 것도 내적 행동이다. 당장 닥친 불안에서 벗어나는 게 목표가 된다면, 삶의 에너지만 소모될 뿐이다. 항상 도끼를 날카롭게 가는데 시간을 다 보내지만, 정작 나무를 베어 집은 짓지 못하는 것과 같다.

스티븐 헤이즈는 수용전념치료(ACT)에서 어쩔 수 없는 불행이나 인생의 고난이 닥쳤을 때 회피하거나 없애려고 발버둥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고통을 처리하는 방식이라고 조언한다. 행복의 화두는 정상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실효성있게 행동을 하는 것에 있다고 한다.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 과거를 파헤치는 힘든 과정을 겪지 않아도 되고,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를 미리 걱정하느라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 난감한 상황에 처한 새신랑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사막 모래 구덩이에 빠졌다고 상상해보자. 빠져나오려고 모래를 밀어내고 발버둥을 칠수록 더 깊이 빠져든다. 이럴 땐 힘을 빼고 부드럽게 몸을 쭉 펴서 가능한 한 몸의 표면이 모래와 많이 닿도록 하면, 구덩이로 더 빠지지 않을 것이다.

고통스런 기억을 지우려고 하면 더 생각이 나는 것처럼, 저항도 회피도 망각도 하지 말고, 현재 닥친 문제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불안과의 싸움을 멈추고 자기감정과 기꺼이 만나는 것이다.

스프링도 많이 누르면 많이 튀어오르는 것처럼 통제할수록 사로잡히기 때문에 이런 경험 통제에서 벗어나서 기꺼이 행동하기를 연습해야한다. 자전거를 배울 때 부모가 균형을 잘 잡으라고 말해준들 잘 탈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직접 안장에 올라앉아 보아야 한다. 골프 스윙을 배운다고 동영상 강의를 하루 종일 본들 골프공을 맞출 수 있겠는가. 몸의 움직임을 본인이 직접 해보고 결과에 따라 수정해나가야 골프실력이 는다.

현실을 기꺼이 수용하면서 현재의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하는 문제가 남았다. 적극적이고 의도적으로 가치 있는 방향으로 기꺼이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인내는 더 나은 것이 나올 때까지 부정적인 경험을 참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망망대해의 나침반처럼 인생이 나아갈 방향을 잡아주는 것이 가치관이다.

야구장에 가면 운동장에서 뛰는 사람과 관중석에 있는 사람이 있다. 관중석의 사람들은 선수를 응원하기도 하고 팝콘도 먹고 경기를 분석하고 선수를 욕하기도 한다. 이들이 경기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수 있을까. 아마 거의 영향이 없을 것이다. 마운드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가. 그들은 경기 진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이기기 위해 전념할 것이다.

이들의 대화는 경기에 아주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경기가 어떻게 끝날지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고, 위험을 감수하는 것도 그들의 몫이다.

우리는 삶에서 어디에 위치하고 있을까. 그저 보고 평가하는 관중으로 있는지, 아니면 경기장에서 직접 뛰고 진행에 대해 치열한 대화를 하고 있는지. 인생의 경기에서 관중석과 마운드 중 어디에 있고 싶을까. 당연히 경기장일 것이다.

가치는 목표를 설정하게 하고 원하는 삶을 향해 전념하고 그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을 기꺼이 감수하고 그런 삶속에서 배움과 활력을 느끼는 것, 불편함을 회피하는 삶에서 가치에 다가가는 삶으로 전향하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이기도 하다. 우선 좋은 감정만 추구하며 사는 삶은 우리가 가장 깊숙이 믿고 있는 가치대로 살지 못하도록 한다.

신학자 라인홀트 니버의 평온을 비는 기도를 인용해본다.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수용)와 바꿔야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전념),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냄새는 사건에 향수처럼 뿌려져서 감정과 버무려져 저장된다
냄새, 감정·기억와 밀접한 관계…코는 뇌에 가장 가까운 통로

 



 


< 매일신문, 김상미 정신과전문의,  2022-11-24 >

 



어제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11월의 비는 낙엽을 적시고 길바닥을 적셔서 특유의 냄새를 만들어낸다. 이 냄새가 나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정신과 수련의 시절 만난 나의 소중한 환자에 얽힌 일이다.

평소에 생각지도 않던 일이 냄새를 맡는 순간 기억이 되살아날 때가 있다. 제주 공항에 내리면 밀려오는 바다 냄새와 길가에 즐비한 가로수의 냄새는 신혼여행을 떠오르게 하듯이, 마음에 담아둔 풍경들, 아득히 먼 추억들, 사람, 장소, 그때 느꼈던 감정, 몸의 감촉까지 생생하게 살아난다.

이처럼 냄새가 기억을 되살리는 것을 '프루스트 현상(The Proust Effect)'라고 한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의 이름에서 나온 용어다. 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이 홍차에 마들렌을 적셔서 맛보는 순간, 그 맛과 관련 있었던 과거 기억들이 떠올라 생기와 열정에 차오르는 장면이 있다.

냄새는 사건에 향수처럼 뿌려져서 감정과 버무려져서 저장된다. 기억은 감정으로 채색되어 무의식에 저장된다. 어느 날 불현듯 마음의 심연에 가라앉아있던 기억이 수면위로 떠오르게 된다. 정신치료에서 과거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작업이어서 아로마를 이용한 후각 자극이나 사소한 단서들은 기억의 동굴을 흔든다.

정신과 전공의 일 년차 때의 일이다. 당직을 서는 날이면 한숨도 자지 못할 정도로 응급실을 찾는 환자가 많았다. 응급처치하고 병실로 입원시키고 입원차트를 작성하고 나면 날이 밝았다.

그날은 자정까지 응급실에서 걸려오는 콜이 하나도 없었다. 이런 날도 있구나. 책을 읽다가 당직실 침대에 누웠다. 그때 응급실에서 전화가 왔다. 응급실 전화번호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긴장이 바짝 되었다. 응급실 울렁증이 생겨났다. 남자가 칼을 들고 있다, 정신과 선생님을 찾는다는 것이다. 경험이 없던 시절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했다. 환자의 차트를 보관하는 외래 접수실은 건물의 가장 높은 층에 동떨어져 있었다.

우선 어떤 환자인지 알아보기 위해 차트실로 향했다. 어두운 복도에 내 발자국 소리만 크게 울렸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20년 이상 우리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왔고 최근에 내원한 기록이 없었다. 아마 약을 먹지 않고 지내다가 조울병이 재발했나보다. 조울병은 기분이 고양되는 조증과 우울증이 번갈아가며 나타나는 정동 장애다.

환자는 단단한 체구에 건장한 남자였다. 눈이 충혈되었고 목소리가 다 쉬었다. 정신과 병력이 수년씩되는 베테랑 정신과 환자에게 전공의 일 년차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새로 온 의사네. 나는 교수만 상대하니까 내 담당 교수 불러라." 한밤중에 교수님께 전화하는게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칼을 들고 위협하는 상황에서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교수님이 나의 전화를 받고 병원에 도착하기까지 20여분 걸렸을까. 평생에 그 시간만큼 긴 시간이 또 있었을까.

경찰관이 출동하고 긴박한 시간이었다. 환자의 칼을 뺏으려던 경찰관이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때 교수님이 도착했다. 교수님을 본 환자는 갑자기 온순해지고 울기도 하고 권총도 스스로 내려놓았다. 마치 투정이라도 부리는 듯 했다. 환자는 서서히 안정되어갔다.

진료실 분위기와 상관없이 무장 경찰 수십 명이 출동해서 권총을 뺏은 죄로 환자를 잡아갔다. 교수님께서는 내 환자가 잡혀갔는데 잠을 잘 수 있겠느냐면서 경찰서로 환자를 보러 나섰다. 환자를 면회하고 반드시 치료받으라고 설득했다. 경찰 담당자에게는 조증 상태에서 벌어진 행동이니 처벌보다는 치료가 필요하다고 간곡히 설명했다.

경찰서를 나서니 날이 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춥고 스산한 11월의 비가 내려 낙엽이 젖어 있었다. 큼큼한 흙냄새와 비릿한 공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김선생, 고생 많았다."는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만약 교수님이 전화를 받지 않고 나오지 않으셨다면 어땠을까. 평생에 감사한 분이다. 그 환자는 다음날 병실로 입원했고 나는 그의 주치의가 되었다. 잊을 수 없는 나의 환자였다.

이 사건을 떠올리게 한 건 어제 내린 비 때문이었다. 비 냄새는 어떤 경로로 옛 기억을 불러내는 것일까. 후각기관은 뇌에 0.3초 만에 자극을 전달한다. 화학물질로 되어 있는 냄새를 코의 후각세포가 감지를 하면 전기신호로 바꿔서 뇌로 전달한다. 냄새의 저장 장소는 뇌의 측두엽에 존재한 변연계이다. 냄새는 감정, 기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코는 뇌로 이르는 가장 가까운 통로여서 우울증 치료에 이용하기도 한다. 에스케타민이라는 물질을 코 안에 뿌리면 자살 위험성이 높거나 치료저항성 우울증 환자에게 상당한 효과를 보인다. 코로 흡입된 에스케타민은 글루타메이트라는 신경 흥분 물질을 방출시켜서 바로 뇌 신경계에 영향을 주게 된다. 투약 24시간 내에 호전되는 경우들이 많다.

에스케타민은 비강 스프레이 형태로 사용된다. 복용하는 항우울제는 길고 긴 단백질 생성과정을 통해 효과를 내기 때문에 급성기나 자살 생각이 높은 환자들에게 효과가 늦게 나타나는 단점이 있다. 특히 여성이나 젊은 성인, 급성으로 발병한 경우, 불안감이 동반된 우울증의 경우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우리에게 냄새는 추억을 되살려주기도 하고, 삶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잡아주는 천사의 날개 같기도 하다. 들숨 날숨을 따라 오가는 향기는 나의 폐와 뇌를 끊임없이 일깨운다. 나도 누군가에게 향기로운 의사로 기억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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