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단색화 거장 박서보 화백 별세

 

 

< 조선일보, 허윤희 기자,  2023.10.14.  >

 


단색화 거장 박서보(92) 화백이 14일 오전 별세했다. 지난 2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화가는 당시 페이스북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캔버스에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고 쓰고 최근까지 왕성하게 활동을 해왔다. 지난 6월 본지 인터뷰에서 그는 “매일매일 내 몸이 약해지고 있는 걸 체감한다. 무릎이 꺾이고 손이 떨려 연필 선이 달달거리는 심장 초음파 선 같을 때가 있다”고 했다.

한국 현대미술의 상징과도 같은 화가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태어나 1950년대 전위적인 앵포르멜 운동을 이끌었고, 1970년대 초부터 ‘묘법’이라 불리는 무채색 단색화 작업을 해왔다. “스님이 온종일 목탁을 두드려서 참선의 경지에 들어가듯” 연필로 끊임없이 선을 긋는 반복을 통해 정신을 수양하고 탐구하는 작업이다. 10여 년 전부터 재평가되기 시작해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장르이자 세계 현대미술의 주류가 된 단색화에서 박서보 화백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청년 박서보는 1950년대 중반, 정부 주도 국전을 거부하고 반기를 들었다. “홍대 다닐 때, 김환기 선생 권유로 국전에 출품한 적이 있었는데, 극소수 작품 빼고는 전부 한 사람이 그린 것같이 보이더라. 분기탱천한 20대라 한탄을 했다. 일제강점기 지나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세대로서 어떻게 그림이 저렇게 저항 정신이 없을 수 있냐고.” 1956년 서울 명동 동방문화회관에서 4인전을 열고, 반(反)국전 선언문을 전시장 문 앞에 붙였다. 화가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선언 후에야 앞으로 나아가야 할 작업의 방향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됐다”며 “큰소리치고 나면 책임을 지려고 더 세차게 노력하는 법”이라고 했다.

그의 대표작이자 단색화 초기를 상징하는 ‘연필 묘법’ 연작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나왔다. “노자, 장자를 읽고 또 읽었어요. 나는 서양 이론에 의한 화가였지, 기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요. 옛 선비들이 할 일 없어서 사군자를 친 게 아니에요. 정쟁으로 피폐해진 자아를 다스리기 위해 글씨를 쓰고 난을 친 겁니다. 반복적인 일을 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맑게 걸러져요. 그런 세계관으로 나를 비워내야 한다는 것까지는 다가갔는데, 어떻게 표현할지 방법이 없어 고민이 깊었어요.”

다섯 살 난 둘째 아들이 형의 국어 공책을 펼쳐 놓고 글씨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종이가 구겨지고 제 맘대로 쓸 수 없으니 짜증 내면서 연필로 죽죽 그어버리는 걸 보고, 아, 저거구나, 저 체념의 몸짓을 흉내 내 보고 싶어 만든 작품”이 최초의 연필 묘법인 ‘Ecriture No. 6-67′이다. 그는 “친구인 화가 이우환이 우리 집에 와서 우연히 이 작품을 보고 너무 좋다고 해서, 그의 주선으로 1973년 도쿄 무라마쓰 화랑에서 첫선을 보이게 됐다”며 “내 인생의 이정표가 된 작품”이라고 꼽았다. 그의 그림 중 최고가 작품도 연필 묘법이다. 1976년 작 ‘묘법 No. 37-75-76′이 2018년 홍콩 소더비 경매에서 200만달러(약 25억원)에 팔렸다.

생전 일기장 50여 권을 남겼다. 1972년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쓴 일기다. 그는 “평생 치열하게 살아온 나의 흔적이 담긴 보물”이라고 꼽았다. 본지 인터뷰에서 그는 “사람의 기억이란 왜곡되기 쉽고, 나이 들어 가면서 기억력에만 의존할 수 없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며 “그날 겪은 사실의 기록일 뿐이어서 건조하지만, 한국 현대미술사의 한복판을 지나온 사람의 기록이니 의미가 깊을 것”이라고 했다.

미술계는 “최근 프리즈 아트페어 현장에도 휠체어를 타고 나타났을 정도로 의욕적으로 활동을 해왔는데 안타깝다” “미술계 거목이었던 화백의 명복을 빈다”고 애도를 표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

"새 작업에 눈빛 반짝이던 스승"…故 박서보 빈소에 추모 행렬

 

< 연합뉴스, 김경윤 기자, 2023-10-14 >

 


제자부터 해외 큐레이터까지 잇단 조문…윤 대통령 조화 보내
"한국 미술사 순수한 욕심쟁이"…"추상미술 정착시키고자 노력"

 


(서울=연합뉴스) '단색화' 거장 박서보 화백이 14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박 화백은 올해 2월 SNS를 통해 폐암 3기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린 바 있다. 

이들이 기억하는 박 화백은 우리나라 미술계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 선배였다.

빈소에서 만난 고인의 제자 최명연 전 홍익대 교수는 "1962년 대학교 2학년 때 파리에서 막 돌아온 박 선생님을 만났다"며 "콧수염을 기르고 '당꼬바지'(밑단이 홀쭉한 형태의 바지)를 입은 채 나타나 '10년 안에 여기서 작가가 나오면 장을 지지겠다'고 하시며 학생들을 고무시킨 것이 기억난다"고 회고했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이미지가 강할지 몰라도 기억력도 탁월하고 상당히 섬세하셨던 분"이라고 덧붙였다.

이열 홍익대 교수는 "6·25 이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가 힘든 상황에서도 추상미술을 정착시키기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며 "혼자만의 작업 세계를 이룩하는 것이 아니라 그룹 차원의 움직임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김용대 전 이화여대 교수는 "(박 화백은) 예술에 있어서는 한국 미술사에 100년 만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순수한 욕심쟁이"라며 "우리 미학의 근원적인 것을 현대적으로 해석했다"고 설명했다.

이강소 작가도 "미니멀한 국제적인 조류를 나름대로 해석해서 형식을 도출해낸 작가"라며 "후배들에게 영향을 많이 끼치셨다"고 기억했다.

누구보다 따뜻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도 있었다.

박 화백의 제자였던 김영순 전 부산시립미술관장은 "누구보다 이타적이었던 작가였다"며 "무슨 일이 있으면 자신뿐만 아니라 후배, 제자들을 동참시키려고 하셨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아직 우리 미술계에 제대로 된 갤러리가 없을 때 화가이자 기획자, 해외 미술 교류의 교량 역할까지 적극적으로 하셨다"고 강조했다.

김 전 관장은 지난해 12월 마지막으로 고인을 만났을 때 새 작업을 시작한다며 눈빛을 반짝이던 모습을 잊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해외 큐레이터들도 이날 빈소를 찾았다.

프랭크 보엠 독일 스튜디오 보엠의 큐레이터는 "4∼5년 전 독일에서 큰 전시가 열렸을 때 박 화백을 처음 만났다"며 "그는 떠났지만 그의 놀라운 작품들은 계속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근조화환도 빈소 곳곳에 배치됐다.

윤석열 대통령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정병국 한국문화예술위원장이 조화를 보내 조의를 표했다. 유재석, 김희선, 오은영 등 문화계 인사들의 조화도 눈에 띄었다.

박 화백의 추모식은 16일 진행된다. 발인은 17일 오전 7시, 장지는 경기 성남시 분당 메모리얼 파크다.

정상화, 바보스러움으로 도달한 경지

 

 

< 중앙일보, 이은주 기자,  2023.07.11 >

 

요즘 아무리 사진 기술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미술 작품을 책으로 접하는 것과 전시장에서 실물을 직접 보는 것 사이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심지어 사진 작품도 그렇고, 그림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국내 단색화가 정상화(91) 화백의 그림은 여기서 한술 더 뜹니다. 직접 보는 경우라 하더라도, 작품과의 거리에 따라 ‘반전(反轉)’의 묘미가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전시장에 들어서며 처음 보았을 땐 단 하나의 색으로 그린 것으로 보였다가,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의 그림은 전혀 예기치 못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캔버스 표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격자무늬, 작은 네모꼴 하나하나를 가르는 밭고랑 같은 선들이 꿈틀거립니다. 보는 이를 감탄하게 하고, 또 ‘아이고, 이 지독한 사람(화가)!’이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게 하는 그림입니다.

정상화, 무제, 1987, 한지에 콜라주, 94x65㎝. [사진 갤러리현대]

 

정 화백은 이우환·박서보 등과 더불어 한국 단색조 추상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인데요, 그는 ‘들어내고 메우기’라는 특유의 기법으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먼저 캔버스에 붓으로 고령토를 바르고, 표면이 마른 뒤에 캔버스를 상하좌우로 접고, 고령토를 일부 들어내고 그 자리에 다시 아크릴 물감으로 메우는 방법으로 작품을 완성합니다. 그런데 이 작업을 한 번만 하는 게 아닙니다. 바르고, 말리고, 접고, 뜯어내고, 메우고, 다시 뜯어내고, 또 메우고···. 얼핏 단색 그림으로 보이지만, 색상과 질감의 미묘한 차이를 품은 디테일의 세계. 이게 그 지독한 반복 노동의 흔적이었던 것입니다.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열었을 때 그는 이를 가리켜 “평면에 나만의 방법으로 공간을 만드는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화면에 요철이 생기며 평면이 입체적 공간으로 확장해간다. 이 공간성이 내겐 매우 중요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남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차이에 매달려 작업을 지속해온 화가는 어느새 아흔 살이 넘었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끝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 자기만 가지고 있는 게 나온다. 

근데 그것은 스스로 느끼는 것이지 남이 아는 게 아니다.” “끝없이 행위를 반복하는 그 바보스러움이 결국에 말을 해준다.” 

 

한 달 전 서울 삼청동 갤러리현대 개인전 ‘무한한 숨결’ 개막을 앞두고 만났을 때 그가 들려준 말이 계속 머리에 맴돌고 있습니다.

남들은 몰라도 내가 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우직한 그에겐 남들 눈에 평평한 캔버스도 평생 실험하고 도전하며 파고들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오는 16일 막 내리는 ‘무한의 숨결’과 더불어 그 옆 현대화랑 기획전 ‘조선백자 제기의 미와 현대미술의 만남’에서 백자와 어우러진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 작가의 지독한 바보스러움이 도달한 경지를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https://youtu.be/zDWjluCJ5G4

 

 

 

광주는 왜 박서보를 버렸나
군부독재에 침묵했다고
기습 시위한 집단에 떠밀려
‘박서보賞’ 폐지한 비엔날레
광주는 저항서 화해로 가는데
80년대 매몰돼 예술을 정치화
그들은 예술가도 뭣도 아니다

 

 

< 조선일보, 김윤덕 선임기자,  2023.07.04.  >

 


‘코 없는 코끼리’는 올해 광주비엔날레에서 가장 사랑 받는 작품이다. 초등생은 물론 중장년 관객까지 흰색 분홍색 연두색으로 칠해진 대형 코끼리 조형물을 만져보고 신기해하며 사진을 찍는다.

코끼리에게 코가 없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란 화두를 들고 작가 엄정순은 시각장애 어린이들과 함께 살아 있는 코끼리를 만져보고 냄새를 맡고 소리를 들어본 뒤 그 형상을 점토로 만들게 했다. 한 아이는 코끼리에게 먹이를 주다 손이 코끼리 코로 빨려 들어간 바람에 코끼리가 재채기를 하고 콧물이 튀는 소동을 겪었다. 그 아이는 코끼리를 진공청소기의 호스 모양으로 빚었다.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편견에 사로잡히는 건 아닌지 반문한 이 작품은 광주비엔날레가 올해 처음 제정한 ‘박서보 예술상’을 수상했다. 폐암 3기로 투병 중인 91세 단색화 거장 박서보는 무명이나 다름없던 작가에게 상금 10만달러를 전달하며 “첫 수상자가 한국인 여성이라 기쁘다”고 했다.


올해 광주비엔날레가 제정한 제1회 박서보 예술상 수상작인 엄정순의 '코 없는 코끼리'의 일부. 시각장애인 아이가 진공청소기의 호스 모양으로 빚은 코끼리를 대형화한 것이다. /광주=김윤덕 기자 

 


그러나 이 흐뭇한 광경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제정 첫 회 만에 박서보 예술상이 폐지됐기 때문이다. 미술계 일부 그룹과 시민 단체들은 개막식에 기습적으로 나타나 “광주 정신 먹칠하는 박서보 상을 폐지하라”고 외쳤다. 군부독재 시절 침묵했다는 이유다. 일부 비평가도 가세했다. 실험적이고 전위적이며 도발적인 작업을 통해 예술 담론의 틀을 제시해야 할 광주비엔날레가 박서보의 작품 한 점 가격에 비엔날레의 권위를 팔았다고 비판했다. 비엔날레 측은 “원로 작가를 어디까지 망신 줄지 걱정돼 폐지를 결정했다”고 해명했다.

아이러니한 건, 이런 소동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올해 광주비엔날레는 관람객들로부터 역대 최고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쉽고 재미있고 따뜻해서다. 붉은 머리띠 두르고 종주먹 내두르는 걸개그림 아니면 도통 무슨 의미인지 알아듣기 힘든 영상물, 난해한 설치물들이 즐비해 관람 자체가 고문이었던 과거 비엔날레와는 달랐다.

살벌한 정치 구호가 빠진 자리엔 위트와 촌철, 성찰이 들어찼다. 흙 향기 물씬한 숲속에 물의 정령들이 나와 상처투성이 된 심신을 치유해줄 것 같은 아프리카 작가의 ‘영혼 강림’을 비롯해, 식민 지배와 강제 이주의 아픈 역사를 어린아이가 그린 듯 맑고 담백한 색채로 승화한 캐나다 이누이트 원주민들의 그림까지,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여러 민족들의 삶과 철학, 고난을 이겨내는 지혜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들을 보며 관객은 모처럼 예술이 주는 치유를 경험했다.

예술 감독을 맡은 이숙경 테이트모던 수석 큐레이터의 공이 컸다. 그는 “관객이 작품을 감상하면서 뉴스를 보는 듯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상에서 정치적 요구도 중요하지만, 예술가만 할 수 있는, 예술의 힘으로 풀 수 있는 것도 많다”고 했다. 올해 광주비엔날레의 타이틀도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다. 노자 도덕경 ‘유약어수(柔弱於水)’에서 차용한 이 문구는 5·18민주항쟁 43주년을 맞아 ‘저항’에서 ‘화해’ ‘용서’로 진화해가는 광주 정신을 보여주는 듯했다. 말레이시아 작가 팡록 술랍이 5·18 시민군에게 건네는 주먹밥을 장미꽃으로 바꿔 그린 ‘광주, 꽃피우다’ 앞에서 많은 이들이 뭉클해하며 멈춰 선 이유다.

그 틀에서 보면 박서보 예술상 폐지는 치졸했다. 80년대에 매몰돼 미래를 열지 못하는 자폐적 집단의 선동이자 아집이었다. 박서보도 한때 전위예술, 아방가르드의 선두주자였다. ‘국전’에 반대했고, 반정부적 작품이라고 전시장에서 철거 당한 이력도 있다. 그러나 민중미술이 지배하던 80년대 한국 화단의 폐쇄성에서 벗어나 현대미술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맹주이기도 했다. 이우환 윤형근과 함께 단색화를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게 한 일등공신이다. 거장이 되기까지 영욕의 세월이 없는 작가 있을까. 작품 값이 수십억대면 예술이 자본의 시녀로 전락한 건가. 그들의 낡은 논리대로라면 김환기 백남준 등 그 어떤 작가도 미술상을 만들 수 없다.

시위 소식을 접한 박서보는 페이스북에 썼다. ‘어떤 이견도 없는 것보다 훨씬 좋은 현상이다. 역사는 반동하며 발전한다. 하지만 이 주장에는 치열함이 없다. 사실관계도 맞지 않고 사유의 흔적도 읽을 수 없다. 공부를 더 해야 한다.’

엄정순 작가가 10년 넘게 천착해온 ‘코 없는 코끼리’ 프로젝트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 우화를 비튼 것이다. 작가는 “시각은 여러 감각 중 하나일 뿐, 예술은 촉각 후각 청각 등 오감과 생각이 다 함께 만들어내는 거란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자기가 눈으로 본 것만 진실이라 우기고, 그와 다른 의견을 내면적으로 상정해 단죄하려는 이들이 새겨야 할 말이다. 그들은 예술가도 뭣도 아니다.

[다시 보다:한국근현대미술전]   이성자 ‘어제와 내일’

< 조선일보, 신용석 인천시립박물관 운영위원장·이성자 화가의 장남, 2023.06.14.  >

 

 

 

이성자, '어제와 내일'(1962). 캔버스에 유채, 145×114cm,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 소장.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초반 어머니는 파리로 떠났다. “프랑스에 가서 성공해 자랑스러운 어머니가 되어 돌아오겠다”며 우리 곁을 떠난 어머니가 어린 나이에 섭섭하게만 느껴졌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어린 두 동생과 함께 어머니 없이 지내던 나날은 허황하기만 했다. 

 

1957년 중학교 3학년이 됐을 때, 어머님 편지를 처음 받았다. “파리에서 화가의 길을 걷고 있다”는 편지를 아우들과 함께 밤새워 읽었다. 

 

어머니 이성자(1918~2009) 화가가 파리의 유명한 전시회에 ‘눈 덮인 거리’를 출품하여 호평을 받았고 라라뱅시 화랑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게 됐다는 희소식을 듣게 된 건 고등학교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1965년 우리 삼형제가 모두 대학생이 됐을 때 어머님이 일시 귀국했다. 파리의 유명한 샤르팡티에 화랑에서 성황리에 개인전이 끝난 후 금의환향이었다. 세 아들을 14년 만에 다시 만나는 감동의 순간이었다. 공항에서 아우 용학(파리 건축대 교수)과 용극(유로통상 회장), 그리고 외삼촌 이상국(서울대 의대 교수)과 이한필(가수 위키리)이 어머니와 감격적인 재회를 했다. 프랑스에서 화가가 되어 귀국한 어머님은 유화 45점과 목판화 40여 점을 가지고 오셨다. 당신은 전시회를 소망했으나, 당시 서울에는 100호짜리 대형 유화들을 포함해 80여 점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화랑이 없었다. 서울대 졸업반으로 대학신문 편집장을 맡고 있던 나는 대학본부에 간청해 의과대학 캠퍼스에 있던 교수회관을 대관, 어머님의 귀국 전시회를 마련할 수 있었다.

전시회 준비에 음양으로 도움을 주셨던 김병기, 김세중, 이경성, 이대원, 최순우, 천승복 선생님들은 어머니 작품을 보면서 “고구려 벽화가 연상된다” “승화된 한국의 색동무늬 같다”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아우들과 삼촌들이 함께 모여서 작명 경쟁도 벌였다. 눈부신 색채와 아름다운 비단무늬가 연상되는 작품들을 보면서 ‘내가 아는 어머니’ ‘연꽃 핀 궁전’ ‘어제와 내일’ ‘새벽 무지개’ ‘오작교’ 같은 시적인 제목을 붙였다. 어머니도 “멋진 제목”이라며 좋아하셨다. 서울고등학교 시절 가깝게 모시던 조병화 선생님께 ‘오작교’ 작품에 헌시를 부탁드려 대학신문에 게재한 일도 있었다.

어머니가 파리로 떠나신 지 72년 만에 소마미술관에 ‘어제와 내일’이 전시됐다. 섬세한 붓질로 캔버스의 모든 면을 채운 작품이다. 어머니는 작가 노트에 “붓질 하나하나가 자식들의 안위에 대한 염원, 자신을 다잡는 주문”이라고 썼다고 한다. 

 

우리 삼형제가 그리울 때마다 밭을 갈아 씨앗을 뿌리고 땅을 일구듯 캔버스를 채워나갔을 거다. 이제는 하늘로 떠난 어머니 작품 앞에 서서 보니, “자랑스러운 어머니가 되겠다”며 프랑스로 떠났던 어머니 말씀이 새삼 진심으로 다가온다.  

1.

폐암 3기에 붓든 92세 박서보 "아직 그려야 할 게 남았습니다"

 

 

< 중앙일보, 권혁재 기자, 2023.05.18  >

 


최근 문화계에서 박서보 화가가 ‘뜨거운 감자’였다.
‘광주비엔날레 박서보 예술상’의 폐지 논란이 이유였다.
논란 끝에 광주비엔날레 재단이 상을 폐지하기까지 이르렀다.


박서보 화가의 심경이 어떨까 하여 그의 SNS를 살폈다.
"광주비엔날레가 ‘박서보 예술상’ 문제로 어수선하다.
지난해 2월 공표됐기 때문에 의견수렴의 기간이 충분히 있었다.
반대 의견이 많았다면 다른 해결책을 찾았을 것이다. (중략)
광주비엔날레 재단 측과 박서보 예술상을 폐지하기로 합의하였다."

아쉬움이 밴 그의 심경과 아울러 지난 2월의 건강 고백에 눈이 머물렀다.
"폐암 3기 판정을 받았다.
내 나이 아흔둘,
당장 죽어도 장수했다는 소리를 들을 텐데
선물처럼 주어진 시간이라 생각한다.
작업에 전념하며 더 의미 있게 시간을 보낼 것이다. (중략)
사는 것은 충분했는데, 아직 그리고 싶은 것들이 남았다.
그 시간만큼 알뜰하게 살아보련다."

박서보 화가는 ″지금 나는 어느 때보다 평온하고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며 심경을 그의 SNS에 밝혔다. 

그는 당신의 건강상태를 알리며 더는 안부를 묻지 말라며 당부했다.
당신에게는 그 시간도 아깝다는 게 이유였다.

올 3월, 제주 JW메리어트 호텔에서 ‘박서보 미술관 기공식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당신의 건강에 대한 심경을 한 번 더 밝혔다.


“처음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암을 친구로 모시자, 함께 살자고 생각했다.
새로운 작업을 위해 방사선 치료를 받지 않기로 했다.”

이 말끝에 2021년 그가 아흔이던 해 기자에게 들려줬던 말이 떠올랐다.
“죽음을 준비하는 게 즐겁다. 떠날 것은 뻔한데 아등바등할 이유가 있겠나.
죽음도 삶이다. 죽음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삶이다.”

묘비명의 의미를 박서보 화가는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변화는 한순간에 오지 않는다. 나 자신을 차갑게 바라보는 사고의 확장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잘못 변화해도 추락한다. 자기 것으로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 변화는 오히려 작가의 생명을 단축한다. 그걸 경계하라는 뜻이다”고 했다.

죽음도 삶’이라는 노 화백은 묘비에 쓸 당신의 좌우명을 써놓았다고 했다.
바로 ‘변화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변화해도 추락한다’였다.
평생 그리고 또 그리며, 바꾸고 또 바꾸어 온 당신 삶의 이야기였다.

 

 

 

2.

광주비엔날레재단, 독재정권 부역 논란 ‘박서보 예술상’ 폐지

 

< 한겨레,  노형석 기자, 2023-05-10  >


광주비엔날레재단 공식 발표
한겨레 단독 보도로 폐지 방침 알려져
 


광주비엔날레 ‘박서보 예술상’이 공식 폐지된다. 박서보 예술상은 국내 최대 규모 격년제 국제미술제인 광주비엔날레가 국내 제도권 추상화단의 대가 박서보(91) 화가의 후원을 받아 올해 14회 행사부터 신설했다가 미술인들의 반발 속에 폐지 압박을 받아왔다.


재단법인 광주비엔날레는 10일 보도자료를 내어 이날 열린 186차 이사회에서 상을 폐지하기로 공식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재단 쪽이 지난달 초 첫회 시상을 끝으로 박서보 예술상 간판을 내리기로 방침을 정했다고 <한겨레>가 단독보도(5월3일치 22면)한지 일주일만이다. 재단 쪽은 또 박 작가가 후진 양성을 위해 설립한 비영리 법인으로, 상의 운영재원 100만달러를 댔던 기지재단 쪽과 협의해 1회 시상금 10만달러를 뺀 나머지 후원금 90만달러를 돌려주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비엔날레 쪽은 작가 쪽과의 후원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는 수순을 밟게 됐다.


박서보 예술상은 지난해 2월 비엔날레 재단이 기지재단과 100만 달러 후원 협약을 맺고 제정했다. 지난 3월 이사회에서 예술상 규칙을 만든데 이어 지난달 6일 열린 14회 광주비엔날레 개막식에서 첫회 수상자로 엄정순 작가를 발표하고 상과 상금 10만달러(1억3천만원)를 수여하는 시상식도 진행했다.


그러나 광주 등 지역미술인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이들은 1970~1980년대 독재정권에 부역하고 광주항쟁 등에 침묵하면서 출세와 영달을 이루어 제도권 미술 권력으로 군림했던 박 작가 후원금을 받고 그의 이름을 쓰는 상은 광주정신에 걸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예술인 모임을 꾸려 폐지 운동을 벌여왔다. 지난달 6일 시상식장에서 지역 미술인들이 기습적인 항의 펼침막 시위를 벌인 것을 시작으로, 이후 광주비엔날레 전시관 앞에서 날마다 1인 시위가 지속되면서 상에 대한 지역 여론이 악화한 것이 폐지 결정을 촉발한 것으로 보인다.


재단 쪽은 보도자료에서 “최근 제기된 박서보 예술상 폐지 의견과 관련하여 그동안 상의 운영 방향에 대해 미술계로부터 다양한 의견을 들었고, 기지재단 쪽과도 협의를 지속해왔다”면서 “상이 폐지됨에 따라 향후 각계의 의견을 들어 시상 제도를 발전적으로 강구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재단 쪽은 조만간 자문위원회를 열어 다른 시상제 신설 여부를 논의할 것으로 전해졌다. 

서양화가 노은님

    

 

1. “나는 구제된 사람입니다”

 

 

< 행복이 가득한 집 2015년 4월호 >

‘물고기의 꽃밭’, 종이에 아크릴 채색, 785×585mm

오리 하나 나무 하나 돌멩이 하나가 점이 되어 알알이 박힌 옷을 입고 환하게 미소 지으며 악수하는 서양화가 노은님. 제18회 KBS 해외동포상 문화예술 부문 수상을 위해 한국을 찾은 그는 시차에 적응할 여유도 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다른 수상자들과 함께 제주 여행을 마치고 막 올라와 조금은 피로한 모습이었지만, 몸에 배어 있는 듯한 평온함과 여유로움은 여전했다. 그의 그림 속에서 만난 동식물은 그가 입는 옷, 휴대폰, 지갑 등에 유랑하고 있었다. 평소 “작가 자신이 작품이 되어야 한다”고 말해왔듯이 붓이 닿는 모든 대상이 캔버스가 되어 그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그림과 참 많이도 닮았다. 그 옆에는 반려자 게르하르트 바치가 그를 소중한 보물 다루듯 에스코트했다. 편안한 의자가 눈에 보이지 않자 자신의 허벅지에 잠시 앉으라는 농을 할 만큼 여전히 애정을 드러내는 인생의 짝꿍. 노은님의 작품이 언제나 평온하고 말간 위로를 주는 것은 나무처럼, 바위처럼 언제나 든든하게 인생의 바람을 막아주는 그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내 몸이,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화가 노은님은 18년째 독일 남부 깊은 산골 미헬슈타트의 고성에서 산다. 1200년대에 지은 고성은 녹음이 짙은 숲과 개울로 둘러싸여 있다. 작가는 “집 보여드릴까요?” 하며 태블릿 PC를 꺼내 사진을 보여준다. 그 안에는 가을에 직접 딴 버섯 사진도 있다. “아는 것만 먹어요. 발 닿는 데에 넘치니까. 아침에는 사슴이 제 새끼 데리고 이파리를 뜯어 먹고, 저녁에는 여우가 숨어 달려요. 개울이 집의 담을 따라 흐르는데, 창문 너머로 음식을 휙 던지면 팔뚝만 한 숭어가 달려들어 탁탁 받아먹어요. 여름엔 이렇게 큰 가재가 냄새를 맡고 와요. 해가 물에 비치면 다 보이거든. 항상 돌 옆에 있어요. 빨리 숨으려고. 먹이를 탁 던져주는데, 저쪽에서 숭어가 보고 뱅 돌아와서 홱 낚아채요. 가재가 얼마나 화를 내는지…. 그런 걸 관찰하면서 사는 것 같아. 얼마나 재미있는지 몰라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던 노은님 화가는 집 주변에서 마주하는 자연을 이야기할 때 목소리 톤이 한층 높아졌다.

한 해의 3분의 1은 떠도는 삶을 사는 여행자이기도 한 그는 생애 잊을 수 없는 자연을 마주한 순간에 대해서도 덧붙였다. “몰디브는 여섯 번 갔는데, 신이 만든 창조물 중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그 신비로움에 취해 바닷속을 더 들여다보려고 하면 파도가 못 들어오게 막 밀어내요. 이리 밀고 저리 밀고… 창조주가 쉽게 볼 수 없도록 숨기는 것 같아요.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바다 수평선 너머 해가 지는 모습을 보는데, 마치 바다와 해가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함께 잠자리에 들러 들어가는 것 같더라고요.” 그는 그렇게 대자연과 마주할 때 자신이 가장 살아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한없이 넓은 우주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지 깨닫고 겸손해진다. 그런 경험 때문일까? 

 

사람들이 그에게 향수병(하임베heimweh)에 대해 물으면, 그는 그 대신 페른베fernweh, 즉 먼 곳을 향한 동경과 그리움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자연을 유랑하며 오감으로 경험한 것이 그의 붓끝으로 이어지는 것이리라. 표지 작품 ‘나비와 함께’(종이에 아크릴 채색, 2009)도 마찬가지다. “정원에 노랑나비가 많이 오거든요. 붓 가는 대로 그리다 보면 정원에서 본 노랑나비도 나오고, 오리도 나오고, 물고기도 나오고…. 김치만 먹으면 몸 밖으로 김치밖에 나올 게 없잖아, 그쵸? 내가 보고 느낀 것만 그림으로 소화되어 나와요.”


1946년 전주에서 태어난 화가 노은님은 1970년대 파독 간호사로 한국을 떠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홀로 그림을 그렸다. 간호장의 주선으로 전시회를 연 것을 인연으로 함부르크 미술대학에 입학, 주경야독하며 그림 공부와 일을 병행했다. 이후 1990년부터 2010년까지 독일 함부르크 조형미술대학의 교수로 일했다. 세계를 무대로 수많은 전시를 열었고, 백남준ㆍ요셉 보이스 등의 예술가와 함께 평화를 위한 전시회에 참가했다. 지난 3월 ‘제18회 KBS 해외동포상 문화예술 부문’을 수상했으며, 5월 갤러리 현대에서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

 


오로지 감사하며 살 뿐


스스로 “그림을 만나기 전에는 꼭 벌받는 사람처럼 살았다”고 말하지만, 강물이 흐르듯 해가 뜨고 지듯 마치 그 길이 정해져 있던 것처럼 그의 인생은 흘러갔다. “제가 스스로 무엇이 되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저 좋아하는 것을 했을 뿐인데, 평생 그림을 그리게 됐고, 좋은 상까지 받게 되었네요. 죽음의 경계에까지 갔다가 기적같이 살아난 사건이 두번 있었는데, 그때 깨달은 것이 있어요. 저는 항상 구제되었다는 것이죠. 뭔가 든든한 백이 있는 것 같아요. 부처님 말씀처럼 ‘두려워하지 마라, 넌 항상 구제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모든 근심을 내려놓고 감사하는 마음만 생겼어요. 여태까지 온 삶이 그래요.” 

 

그는 KBS 해외동포상 문화예술 부문 수상 소감에서도 같은 마음을 전해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항상 구제되었다고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더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제 두 발이 길다면 세상 끝까지 걸어가고 싶고, 제 두 팔이 길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안아주고 싶습니다.” 이는 삶을 대하는 그의 방식이자 작품의 근원적 에너지이며, 만물을 향한 진솔한 고백이다.

 

 

 

2. 노은님 , “독일에서는 저를 그냥 화가라고…한국서만 파독 간호사 꼬리표”

 

< 국민일보 2019-07-28 >  

 


“독일에서는 저를 그냥 화가라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꼭 파독 간호사 출신이라고 붙여요.”

 


노은님, <달과 함께>, 2019년 작, 캔버스에 복합재료, 143x158cm. 가나아트센터 제공

 


재독 화가 노은님(73)씨의 개인전 ‘힘과 시’(8월 18일까지)가 서울 종로구 평창로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다. 최근 개막식 참석차 방한해 기자들과 만난 노 작가는 눙치듯 이런 불만을 털어놨다.

한국 여성 작가 최초로 독일 국립함부르크 조형예술대학 정교수로 임용되는 등 이미 독일에서 미술 교육자로, 작가로 입지를 굳힌 그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중학교 문학 교과서에 작품이 수록되기도 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관성처럼 그에게 ‘파독 간호사 출신’ 꼬리표를 붙인다.

 

 


노은님, <생명의 시초>, 1984년 작, 종이에 복합재료, 258x203cm. 가나아트센터 제공

 


돌이켜보면 1972년(26세) 때 파독 간호사로 근무하던 함부르크 항구 근처 시립병원에서 가진 개인전이 화가 인생의 출발이었다. 독일 땅을 밟은 지 2년째 되던 해였다. 한국에 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초상화가 갖고 싶어 그림을 배웠던 그는 정밀한 사실화에 질려 포기했었다. 그때 사둔 물감을 가지고 병원 일이 끝난 뒤 짬짬이 그렸는데, 독일인 동료 간호사들이 반색하며 전시를 주선했다. 내친김에 2년 뒤 함부르크 국립미술대학에 정식 입학했고, 그 길로 화가의 길을 걸었다.

노 작가의 작품 세계는 사실주의와 거리가 멀다. 단순한 선과 원초적인 색으로 화면을 구성해 생명의 화가다. 작가 인생 초창기인 1984년(38세)의 작품 ‘생명의 시초’는 200호 대형 화면을 가득히 채운 화살표들이 마치 무정형의 생물처럼 꿈틀거리는 듯한 힘의 양상을 보여준다. ‘뛰는 동물’은 한 번의 붓질로 쓱 상상 속의 동물을 그렸다. 캔버스가 아닌 한지의 그림들은 여백의 미까지 있다. 독일의 대표적인 미술평론가인 아넬리 폴렌은 “동양의 명상과 유럽의 표현주의를 잇는 다리”라고 극찬했다.


젊은 시절, 노 작가는 ‘우울증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었고, “운명이 어디서 시작하는지, 내가 누군지에 대한 물음”에 빠져 살았다. 그녀가 만들어 내는 화면은 그 근원을 탐구한 결과다. “15년을 그렇게 헤맸는데, 어느 날 아침 막한 하늘이 뚫린 듯 편해졌다”는 그녀의 화폭은 예전처럼 거침이 없으면서도 원색을 구사해 밝다. 11월에 작업실이 있는 미헬슈타트 시립미술관에는 그녀의 작품을 전시하는 영구 전시관이 개관한다. 

 

3. 맑고 힘찬 생명의 기운, 노은님의 그림에 위로를 받네

 

 

< 중앙일보 이은주 기자, 2021.08.16  >


노은님, 어항 1992 Acrylic on canvas, 70 x 100 cm,.[사진 가나아트]


노은님, 암초상어, 1990, 종이에 아크릴, 45x55cm. [사진 가나아트]
 


물고기 가족, Fisch Familie 2003, Acrylic on paper, 50 x 70 cm.[사진 가나아트]

 


"저는 원래 화가로 태어난 것처럼 느껴져요. (그림을 그린 지) 50년 다 됐는데도 그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이상한 사람이 돼가고 있어요(웃음)."

재독화가 노은님(75) 화백이 2019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 강연에서 한 말이다. "젊은 시절 고독과 방황 속에서 마치 큰 벌을 받는 사람처럼 지냈다"는 그는 "외로워서 괴로웠고, 괴로워서 외로웠다. 나는 그 덕에 많은 그림을 그려냈다"고 했다.

그런 시간이 그에게 선물을 준 것일까. 그의 그림은 '외로움' 혹은 '괴로움'과는 거리가 멀다. 맑고 푸른 물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힘찬 생명의 기운으로 충만한 작품은 대담한 선과 색으로 전하는 위로와 즐거움에 가깝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들의 위로  

 


노은님, 무제, 1998 종이에 혼합매체, 100x70cm. [사진 가나아트]


물고기와 새, 꽃 등의 자연물로 생명이라는 주제를 다뤄온 노은님의 개인전 '생명의 시작: am Anfang'이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다. 1980년대 작품부터 지난해 완성한 신작까지 총 31점을 선보이는 자리. 국내에선 2년 만에 열리는 전시인데도 반응이 심상찮다. 개막 전 작품의 절반이 '예약' 됐고, 개막 3일 만에 초대형 작품 등 두 점을 제외하곤 29점이 모두 팔렸다. 꾸밈없고 원시적인 생명력을 갖춘 그의 그림에 팬들이 응답했다.

노은님은 독일에 정착한 지 50년이 넘는 파독 간호사 출신이다. 1946년 전주에서 태어난 그는 1970년 독일로 이주했다. 함부르크 시립외과병원에서 간호보조원으로 일하던 당시 간호장이 우연히 그의 그림들을 보고 병원에서 전시를 열도록 주선하면서 본격적으로 미술의 길로 들어섰다. 그 전시를 계기로 73년 국립 함부르크 미술대학 회화과에 한국인 최초로 입학했고, 독일 표현주의와 바우하우스를 대표하는 거장 한스 티만 교수의 가르침을 받았다. 졸업 후 전업 작가로 활동하던 그는 한국 작가로서는 최초로 국립 함부르크 조형예술대학 정교수로 임용돼 20여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원초적인 표현방식 탐구

 


노은님, 무제, 1996, 종이에 아크릴, 28x64cm. [사진 가나아트] 

 


노은님, 찾아온 손님, 2017, 캔버스엔 아크릴, 160x224cm. [사진 가나아트]


노은님, 생명의 시작, 2020, 캔버스에 아크릴, 160x400cm. [사진 가나아트]


노은님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생명'이다. 생명의 시작을 의미하는 점(點)은 그의 화면에 자주 등장하는 요소다. 과감한 붓질로 파랑·빨강·초록 등 원색으로 그려낸 고양이와 물고기, 새와 꽃, 개미 등엔 반드시 점이 찍혀 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점은 곧 눈(目)이란다. 살아있는 존재, 즉 생명의 표식인 셈이다.

그는 자신의 시화집 『눈으로, 마음으로』에서 "나는 모든 물체에 눈을 그려 넣는다. 나무에 눈을 달아주면 잎이 살아나고, 곤충들은 눈을 뜨고 날아다니고, 물고기들은 눈을 뜨고 우주를 여행한다"고 썼다.


"그림 속에서 많은 것을 깨달았고, 내가 큰 대자연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작은 모래알 같은 존재임을 알았다"는 그는 가장 단순한 형태로 자연의 형상을 표현해왔다. "참다운 예술은 진정한 순수함을 원한다. 모든 복잡함이나 기술을 떠나 단순함이 남아 있을 때 예술은 살아난다"는 신념에서다.

이번 전시엔 각각 1984년, 1996년, 2003년에 그린 '무제' 연작도 선보인다. 오랜 시차를 두고 그린 것이지만 나란히 놓인 화면엔 물고기와 새의 탄생을 담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지난해 그린 대작 '생명의 시작'도 눈에 띈다. 단순하고 대담한 선에 색도 절제돼 있지만 맑고 힘찬 기운이 화면에 가득하다.

세상 만물은 물, 불, 흙, 공기 등 4원소로 구성됐다는 고대 그리스의 4원소론을 바탕으로 파란색, 빨간색, 밤색, 검정 또는 흰색을 쓰는 등 색에도 자연에 대한 통찰을 담는다.

 


"암이어도 괜찮다···삶에 감사"  


2019년 노 화백에겐 중요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첫째는 독일 미헬슈타트 시립미술관에 노은님 작가를 소개하는 영구 전시실이 마련된 것. 1450년에 지은 미술관 건물을 새로 보수하면서 새로 마련된 작은 공간엔 그의 그림과 더불어 그의 고향 전주와 서울, 함부르크 등 세 도시를 소개하는 사진이 걸렸다.

바로 이어 그는 암 진단을 받았다. 노 화백은 본지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처음엔 깜짝 놀랐다.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붓을 놓은 시간도 있었다"면서도 "하지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건강이 나아져 요즘엔 독일 남부에 있는 미헬슈타트에서 매일 산책하며 지내고 있다"고 전했다. 틈틈이 그림도 다시 그리느냐는 질문에 그는 "틈틈이가 아니다. 그림은 매일, 밥 먹듯이 그리고 있다"고 답했다.

2007년 개인전을 열며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인생의 숙제를 푸는 데 그림은 나에게 도구였으며 길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나를 태우고, 녹이고, 잊고, 들여다보았다. 살아남는다고 전쟁터 병사처럼 싸울 필요는 없다. 오히려 풀밭에서 뛰노는 어린아이 같아야 한다.” 노은님의 놀이는 오늘도 '현재 진행형'이다. 전시는 29일까지.

 

 

 

 

4. 삶이라는 두 갈래 길
파독 간호사 출신 ‘생명의 화가’
노은님, 지난 18일 독일서 별세

< 조선일보 정상혁 기자,  2022.10.20  >

 

 


노은님 2020년작 '무제'(228×160㎝). /가나아트센터
 

 


태어나, 죽는다. 사람(人)이 두 획으로 이뤄진 이유일 것이다.

생명의 본질을 화가 노은님(1946~2022)은 평생 궁리해왔다. 단순한 선, 원초적인 색, 꽃이나 새와 같은 자연의 요소로 화면을 채웠다. 붓과 빗자루, 때로 걸레까지 손에 잡히는 대로 긋고 칠했다. 어린아이 낙서 같은 형상, 태고의 명상적 화풍으로 ‘생명의 화가’라는 별칭이 붙었다. “참다운 예술은 순수를 원한다”는 게 노은님의 생각이었다. “모든 복잡함과 기술을 떠나 단순함이 남을 때 예술은 살아난다.”

암 투병 와중이던 2020년 완성한 ‘무제’는 단순함의 극치다. 제목도 없고, 색조차 쓰지 않았다. 그저 큰 붓으로 캔버스 위를 쓱 왔다 갔을 뿐이다. 그 양 갈래의 흔적이 자연스레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세계 여러 미술관을 다니며 고대 벽화와 토기를 보면 깜짝 놀란다. 살아남은 흔적이 어찌 그리 똑같은지… 그래서 내 그림도 점점 단순해지고 원시적으로 돼간다.” 이 그림은 지난해 8월 서울 개인전 당시 선보인 마지막 신작이다. 전시명이 ‘생명의 시작’이었다.

파독(派獨) 간호보조원 출신으로 모교(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 교수까지 지낸 입지전적 인물이나 악착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림도 인생도 억지로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모두가 전쟁터 군인처럼 죽기 살기로 싸울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자연스러움, 욕심과 번민의 끝에 자리하는 위안. 화가는 지난 18일 그곳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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