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나상호 교정원장 "신앙 생활의 본질은 감사하는 마음"

 

 

< 중앙일보, 백성호 기자,  2024.04.18 >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물음을 가진 한 청년이 있었다. 20년 넘게 수도한 끝에 마침내 답을 찾았다. 1916년 4월 28일, 그는 진리의 자리를 뚫고서 이렇게 외쳤다.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道)와 인과 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

청년의 이름은 박중빈(1891~1943). 원불교를 창교한 소태산(少太山) 대종사다. 소태산은 전남 영광에서 출발해 변산을 거쳐 전북 익산에 원불교의 터전을 잡았다. 올해가 익산에 원불교 총부가 들어선 지 꼬박 100주년이다. 대각개교절(大覺開敎節,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고 원불교를 연 날)을 앞두고 15일 익산 원불교 중앙총부에서 행정수반인 나상호(63) 교정원장을 만났다.

대각개교절은 원불교 최대 절기다. 무엇을 크게 깨친(大覺) 건가.  


“진리를 깨달았다. 그런데 그 진리가 당신만의 소유라고 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다 깨달아서 소유할 수 있다고 했다. 다시 말해 깨달음의 중심에 당신만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 중심에 설 수 있다고 했다.”
나 교정원장은 그걸 “깨달음의 개벽(開闢)”이라고 표현했다.

그게 왜 ‘깨달음의 개벽’인가.


“나는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에 대한 개벽적 시각을 열어주었다고 본다. 당시 누군가 물었다. ‘당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도 됩니까?’ 소태산의 답은 단호했다. ‘나를 절대로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마라.’ 그 말에는 진정한 신앙의 대상이 무엇인가에 대한 가르침이 담겨 있다.”


진정한 신앙의 대상, 그게 무엇인가.


“진리 그 자체다. 원불교는 그걸 ‘법신불(法身佛)’이라 부른다. 이 우주의 근원이다. 또한 우리 각자 안에도 내재해 있다. 소태산 대종사를 찾아온 한 사람이 물었다. 왜 불상(佛像)이 보이지 않느냐고 했다. 소태산은 기다려보라고 했다. 점심때가 되자 논밭에서 일하던 제자들이 돌아왔다. 소태산은 그들을 가리키며 ‘저들이 우리 집 부처님이다’고 대답했다.”

나 교정원장은 여기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마음이 있다. 또 하나는 이 세상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부처의 모습을 찾아라. 그래서 대종사께서는 내 주변의 사람들, 즉 살아 있는 부처에게 불공(佛供)을 드리라고 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깨달음을 얻고서 세상을 향해 표어를 하나 내놓았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갈수록 물질만능의 세상이다. AI(인공지능) 혁명까지 가세해 물질개벽이 더욱 실감난다. 우리에게 왜 정신개벽이 필요한가.


“사람이 물욕에 빠지면 물질의 지배를 받게 된다. 명예욕이나 권력욕도 물질의 연장선이다. 우리의 삶이 물질의 노예가 되어선 곤란하다. 그래서 소태산 대종사는 그걸 넘어서는 힘을 기르라고 했다. 그게 정신개벽이다. 그러니 개벽은 하늘이 중심이 아니고 사람이 중심이다.”


정신개벽,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되나.


“하나는 수행이다. 요즘 말로 하면 마음공부다. 또 하나는 신앙이다. 쉽게 말하면 감사하는 생활이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서 은혜를 발견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일. 그게 원불교가 말하는 신앙생활이다. 창밖을 보라. 4월의 신록이 푸르지 않나. 저런 나무가 없으면 지구가 살 수 있나. 인간이 살 수 있나. 그런 식으로 주위를 돌아보면 감사함 투성이다.”


그렇게 감사하면 무엇이 달라지나.


“고마움을 알면 상대를 존중하게 된다. 그럼 상대도 나를 존중한다. 내 주위에 상생(相生)의 관계가 이루어진다. 그럼 사람 관계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결국 우리의 삶이 달라지지 않겠나.”

출가 후 지금까지 가슴에 꽂고 사는 한 마디가 있나.


“있다. ‘마음을 알아서 마음의 자유를 얻고, 생사의 원리를 알아서 생사를 초월하고, 죄복(罪福)의 이치를 알아서 나의 죄복을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을 얻도록 적공(積功)하자.’ 소태산 대종사의 법문에 있는 말이다. 매일 아침 5시, 기도와 명상을 할 때 이 구절을 새긴다.”


죄와 복은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이걸 어떻게 내 힘으로 다루나.


“내가 앙갚음할 차례다. 갚으면 어찌 되나. 상대방이 또 앙갚음하게 된다. 윤회의 수레바퀴가 쉬지 않는다. 만약 내가 갚을 차례에 참으면 어찌 되나. 그 업이 쉬게 된다. 윤회의 바퀴가 멈춘다. 그럼 죄가 쉬고 복이 온다. 그러니 내 힘으로 할 수 있다.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릴 수 있다.”

‘삼체’ 작가 “미중관계 은유? SF일뿐… 文革 장면, 책보다 수위 낮더라”
 
넷플릭스 드라마 세계 1위 ‘삼체’ 작가 中류츠신

 

< 조선일보, 베이징=이벌찬 특파원,  2024.04.18.  >

 


“인공지능의 눈부신 발전과 일론 머스크(‘스페이스X’ 창업자)의 우주선이 열어젖힌 새로운 우주 시대를 보라. 인간은 역사 속 재난을 반복해서 만들지만 그 가운데 강대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것이 인류다.”

중국 SF(공상과학) 소설가 류츠신(劉慈欣·61)을 16일 두 시간에 걸쳐 전화 인터뷰했다. 그는 현시점에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중국인 소설가 중 하나다. 그의 대표작 ‘삼체(三體·2006~2010년)’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미국 드라마는 지난달 21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이후 세계 시청 순위 1위(TV 부문)에 올랐다. 앞서 중국 CCTV는 지난해 1월 중국판 ‘삼체(중국어 발음 ‘싼티’)’ 드라마를 방영했는데 이 역시 크게 흥행했다. 류츠신의 소설엔 중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이 언급되는데 삼체에는 문화혁명(문혁·1966~1976년 중국 극좌사회운동)이 나온다. 문혁을 겪으며 인간의 자정(自淨) 능력에 실망한 중국 과학자가 외계로 메시지를 보낸 이후 벌어지는 지구와 외계 문명의 대결을 그렸다. 책은 2014년 미국에서 번역 출간돼 ‘버락 오바마(전 대통령)가 휴가 때 읽는 소설’로 유명해졌고, 전 세계 판매량은 영어권 300만권을 포함해 3000만 권이 넘는다. 지금까지 번역 출간된 중국의 문학 작품 총 판매량을 뛰어넘는(가디언) 기록이다.


◇ “히트 칠 줄 몰랐고 지금도 이유 모른다”

-‘삼체’가 이 정도로 성공할 줄 알았나.

“의외다. 출판사가 나보다 더 놀랐다. 이 책은 순수 SF 소설로 출간됐고, 겨냥한 독자층도 중국의 SF 애호가들 정도였다. 지금도 성공 원인은 못 찾았다.”

-당신의 소설이 현실을 빗댄 우화, 혹은 예언이라 하는 이들도 있다. (예를 들어 ‘삼체’ 2부 ‘흑암의 숲’에 대해선 미·중 갈등을 그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아니다. ‘흑암의 숲’의 경우 인간과 외계인의 대결을 그렸을 뿐이다. 대항만 있고 협력은 없다. 그러나 실제 인간 사회와 미·중 사이엔 경쟁과 대항 외에도 협력이 있다. 독자 해석은 자유지만, 나는 SF 소설을 통해 은유하지 않는다. 내 작품은 (정치 메시지를 담은 SF 소설) ‘1984′(조지 오웰)가 아니다.”

-‘삼체’의 애독자 오바마가 2017년 베이징에 왔을 때 만났던데.

“오바마와 얼굴을 한 번 봤을 뿐이고,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 새 책이 나오면 보내달라 했지만, 연락처를 주지 않았으니 보낼 수도 없지 않나.”

 

◇ “중국 역사보다 서방 역사를 더 잘 안다”

-‘삼체’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었나.

“물리학이 말하는 삼체 문제를 설명한 글을 읽고 이에 관한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 삼체 문제는 질량을 가진 세 개의 점만으로 이뤄진 우주가 있다고 가정한다. 단순한 우주인데 이 점들이 각자의 인력(引力)으로 당기며 움직일 경우 현재의 물리학이나 수학으론 그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이 세 점이 항성이고 문명이라면’이란 질문을 스스로 던지며 소설을 썼다.”

-작품엔 물리학적 요소가 많은데, 물리학은 어떻게 통달했나.

“솔직히 물리학을 진정으로 이해하진 못한다. 좋아할 뿐이다. 전문가들이 봤을 때 높은 수준이 아니다.” (류츠신은 1985년에 화베이 수리수전대학을 졸업하고 컴퓨터 엔지니어로 일했다. 그는 중국이 첫 인공위성을 쏘아 올린 1970년부터 천문학에 매료됐고, 대학에선 수력 발전을 전공하며 물리학 지식을 쌓아갔다고 알려졌다.)

-문학적 재능은 타고났다고 생각하나.

“보통이다. 문학을 사랑해서 소설을 쓴 것이 아니고, 과학·기술을 사랑하기에 SF 소설을 쓴다. 체계적인 문학 훈련을 받거나 문학 작품을 다독하지도 않았다.”

-영향받은 책이 있다면.

“SF 소설로는 아서 C 클라크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꼽을 수 있다. 문학 전체 중엔 레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다. 광활한 시각으로 역사의 장관을 묘사했다. 대지(大地)의 무게감이 내 창작에 영향을 크게 미쳤다. 하나의 시대를 묘사하는 넓은 시야가 있는 소설이다. 오늘날 많은 작가는 자신이 속한 작은 집단에 몰두하고, 심지어 개인의 희로애락(喜怒哀樂)만 다룬다. 거대 서사를 펼칠 능력이 없는, 시야가 좁은데 근시다.”

-시야를 넓히기 위해 무엇을 하나.

“깊이 있는 역사·과학서를 읽는다. 그리고 과학과 관계가 밀접한 서방 역사를 중국 역사에 비해 많이 읽고, 그래서 더 잘 안다.”



◇ “지난 30년 간 지구의 평화는 비정상”

-인류가 ‘삼체’와 같은, 생존의 위협과 맞닥뜨리는 날이 올까.

“나는 과거에 비해 생존 위기가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돌아보면 흑사병이 유럽 인구 3분의 1을 앗아갔고, 세계 대전이 두 번이나 일어났고, 핵위협이 (지금보다) 실질적인 때도 있었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인류는 더 강대해지고 있고 위험은 작아지는 추세다. 코로나 사태나 (러시아·우크라이나 등의) 전쟁 등을 고려해도 지금은 인류 역사 전체로 봤을 때는 ‘새로운 혼란 발생기’가 아니라 ‘정상[常態] 회복기’에 가깝다.”

-지구와 우주를 변화시키는 궁극적인 힘은 무엇일까.

“오직 한 가지 힘이다. 과학기술. 나는 인공지능(AI)이 세계를 바꿀 핵심 기술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다만 현재의 AI는 데이터에 기반해 확률에 의존할 뿐이고, 논리적 추론에 기대 판단하는 수준엔 이르지 못했다. 지금의 수준으론 SF 소설에 나오는 인간 통치 능력을 갖출 수 없다. 나는 AI가 영원히 그런 능력을 갖추지 못할 수 있다고도 본다.”

-AI가 미래에 미칠 영향을 상상한다면.

“당장 직면한 영향은 사람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에 대비해) 전통적인 분배 방식에 중대한 변화가 필요하다. 과거 증기기관과 자동화 기계가 나타났을 때는 인간을 다른 일자리로 밀어내는 정도라면, 지금은 일할 기회 자체를 박탈한다. 분배 개혁을 하지 않으면 ‘러다이트 운동’(기계 반대 운동)의 1만배 수준의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

-‘공동부유(다 함께 잘 살자)’ 등 중국의 최근 정책이 이런 변화에 대한 대비책이라고 보나.

“그건 아니다. 중국 정부는 빈곤한 지역과 발전된 지역의 균형을 맞추려는 것뿐이다.”

 


◇ “문화혁명은 참회가 없었다”

‘삼체’에선 문혁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첫 장면이 문혁 당시 제자와 아내에게 버림받고 살해당하는 천체물리학자의 모습을 조명한 것이다. 이를 두고 일부 중국인들이 “중국에 망신을 주고 있다”고 분노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문혁을 중요하게 다룬 이유는.

“이야기 전개에 필요했기 때문이다. 줄거리의 진행상 현대의 중국인이 인간성에 대해 철저하게 실망하는 내용이 필요한데, 중국 현대사에서 그럴 만한 사건이 문혁 외에 떠오르지 않았다. 문혁은 참여한 이들이 대부분 참회하지 않았다.(그 부분이 특히 실망스럽다는 뜻.)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른다.”

-넷플릭스 ‘삼체’에 만족·불만족한 부분은.

“등장인물을 대거 추가하고 관계를 풍부하게 만든 것은 좋다. 그런데 그 등장인물들이 왜 서로 다 아는 사이인가. 그건 이상하더라. 외계인에 대한 저항은 전 인류의 공동 대업인데, 마치 한 학급의 친구들이 차출돼 외계인과 싸우는 것처럼 연출됐다.”

-넷플릭스 드라마 제작에 얼마나 참여했나.

“고문 수준으로 참여했고 의견도 냈다. 다만 미국 드라마 특징과 상업성을 살려야 하니 내 의견이 다 수용될 수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문혁 박해 장면이 중국 소셜미디어 등에서 비판받았는데.

“원작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정상적이다. 오히려 소설보다 적게 묘사되지 않았는가?(영어 등 번역판 소설에선 문혁 장면이 앞쪽에 상세히 묘사되는 반면, 중국어판에선 다소 뒤쪽으로 이동해 있고 분량도 적은 편이다.) 중국사회에서 문혁은 여전히 어느 정도의 민감성이 있다. 그러나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두 편이 문혁을 배경으로 삼았을 정도로 소재로 삼은 사례가 전혀 없지는 않다.”

-현재의 중국을 후일 당신의 책에선 어떻게 묘사할까.

“비행을 시작하는, 굴기의 시기. 지난 세기 초 미국의 모습과 비슷하다. 중국은 강력한 ‘미래감(未來感·미래 지향적인 감각)’이 있는 나라다.”

-중국과 세계는 지금 어떤 변화를 겪고 있나.

“AI 발전을 통해 인류는 고유의 것이라고 믿은 지능, 지식에 대한 이해가 더는 인간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중국의 변화라면, 중국이 자신을 전(全) 인류의 일원으로 보기 시작했다. 시야가 인류 전체를 향하기 시작하며 넓어졌다. 앞으로 중국은 더 개방되고 연결되어 결국 세계와 융합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 “우주 속에서 아주 작은 인간, 그걸 보여주고 싶다”

류츠신은 1980년대부터 산시성 화력발전소에서 30년간 일하며 소설을 썼다. 1994년 같은 발전소의 여직원과 결혼하기 전까지 기숙사 2인실에서 생활했다. 그는 “발전소 4층에서 컴퓨터 공학자로서 홀로 일했다. 퇴근하면 오전 1시까지 글을 썼는데, 컴퓨터가 있는 사무실에서 작업하니 동료들이 내가 게임 중독인 줄 알더라”고 했다.

-유명해진 후에도 발전소에서 일한 이유는.

“중국 SF 출판 시장은 작다. (삼체 3부가 출판된) 2010년까지는 큰돈을 만져보지 못했다. 잡지사에 소설을 투고하면 고료가 1000자 기준 150위안(약 2만8500원)밖에 안 됐다. 장편 소설은 한 권 팔릴 때마다 떨어지는 돈이 2위안(약 380원) 정도였다.”

-공장 다니며 부업으로 글 쓰는 것이 맘은 편하지 않았나.

“얼마나 힘들었는데… 공장 다니면서 장편 쓸 시간이 없었다. 나이가 들수록 체력도 고갈된다. 아무도 내가 소설을 쓴다는 사실을 모르게 하려고 노력했다. 편의를 봐준다는 뒷말이 나오고 ‘투잡’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어서다.”

-왜 베이징이나 상하이 같은 대도시에 살지 않나. SF 소설가는 기술의 발전상을 눈으로 봐야 하지 않나.(그는 현재 산시성의 외진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SF 소설 거장으로 꼽히는 아서 클라크도 평생을 스리랑카 어촌에 살았다. 작은 도시에 살면 사회관계가 단순해져 장점이 많다. 한 달에 한 번도 친구를 안 만나곤 한다. 아내도 대도시 삶을 동경하지 않는다.”

-딸이 아빠를 자랑하지 않느냐.

“딸은 대학원 1학년생으로, 환경 공학을 배운다. 이공계 학생이긴 하지만 SF 소설에 관심이 없다. 학교에서는 내가 아빠인 걸 숨긴다. 다른 아이나 학교 측에서 알면 내가 학교에 불려가 특강해야 할까봐 그런다고 한다.”

-소설 쓰는 데 얼마나 걸리나.

“나는 오래 걸린다고 생각하는데, 장편 소설은 한 권에 1년 정도 걸렸다. 삼체 3부가 각 1년씩이었다. 2006년 잡지에 삼체 소설을 연재할 때 1권은 완고한 상태였다. 단편 소설은 2주 정도면 완성하는데, 생각하는 시간이 쓰는 시간보다 길다.”

-지금은 뭘 쓰고 있나.

“‘삼체’ 이후 더 나은 글을 쓰기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정점을 찍은 작가들이 다들 겪는 일이다. 지금까지 쓴 글 중에 폐기한 적은 없고, 썼다면 다 출판했다. 스스로 합격점을 줄 수 있는 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공산당원인가.

“당원 아니다. 다른 당·정 직책도 없다.”

-SF의 힘은 무엇이고, 문학을 통해 무엇을 하고 싶은가.

“SF는 독자의 상상력을 일으켜 미지의 세상에 대한 열망을 갖게 하는 힘이 있다. 중국은 창신(創新·창조와 혁신)형 국가를 만들려고 하기에 앞으로 SF 소설 시장이 커질 것이다. 작가이자 SF 마니아로서 나는 미래 우주에 대한 상상을 통해 독자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고 싶다. 우주 속에서 인간은 아주 작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러나 과학과 지식의 힘은 1억~2억년 후 인류를 우주만큼 거대하게 만들 것이다.”

-한국 SF 작품도 평가해달라. 무엇을 보았고 어떤 영향을 받았나.

“최근 한국 SF 영화 ‘괴물’ ‘설국열차’ ‘승리호’ 등을 인상 깊게 봤다. 한국은 할리우드를 제외하면 가장 높은 수준의 SF 영화를 만드는 나라가 된 것 같다. 특히 작품이 축소 지향적이지 않고 중국과 일본 작품처럼 대규모 서사를 풀어낸다. 김초엽 소설가 작품을 비롯해 한국 SF 소설도 종종 읽는다.”

-한국 방문 계획은.

“아직은 없다. 올해 6월 한국에서 열리는 도서전을 참가하려고 했는데, 중국에서 비슷한 일정이 겹쳐서 못 가게 됐다.”

 

 


☞류츠신은 누구

영미권에서만 300만 권이 팔린 소설 ‘삼체(三體)’를 쓴 중국 최고의 SF(공상과학) 소설가. 2015년 SF 소설계의 노벨문학상으로 불리는 휴고상을 아시아 작가 최초로 받았다. 1963년 베이징에서 태어났고, 아버지가 중국 문화혁명 기간에 직장을 잃고 보내진 산시성의 작은 도시 양취안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때 화약 만드는 법을 독학했고, 십대에 천문학에 매료됐고, 1981년에 화베이수리수전대학에 들어가 수력발전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 화력발전소에서 컴퓨터 엔지니어로 일하며 SF 소설을 썼다. 1999년 등단해 승승장구했지만, 삼체 3부작 출간 직후인 2010년에서야 발전소 도산에 따라 전업 작가가 됐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는 ‘류 전기공’이란 별명으로 더 많이 불린다. 반체제 인사는 아니지만, 문화혁명·천안문사태 등 민감한 현대사를 소설에서 다루거나 모티브로 삼아 주목받았다. “훌륭한 SF 소설이란 정신 나간 상상을 뉴스 보도처럼 진실 되게 쓰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2019년 그의 중편 소설 ‘유랑지구’를 원작으로 한 영화가 그해 중국 관람객 수 2위에 올랐고, 지난해와 올해 삼체가 중국과 미국에서 잇따라 드라마로 제작돼 흥행했다.

인간극장' 제작진이 24년 동안 지켜온 방송 철칙 '한 가지'
[장수프로] KBS 1TV <인간극장>

< 오마이뉴스, 오수미(breathee),  2024.04.14 >

 


2000년 5월 1일 첫 방송된 KBS <인간극장>은 그 이후 24년째 꾸준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KBS의 대표 휴먼 다큐멘터리다. 무기수로 복역하다가 6박 7일간 휴가를 나온 모범수들의 이야기를 담은 '어느 특별한 휴가, 귀휴' 편을 시작으로, 제주 바다와 65년 동안 함께한 '해녀 김옥자' 편, 영화 <맨발의 기봉이>의 원전이 된 '맨발의 기봉씨' 편, 어려운 환경에도 따뜻한 가족애를 보여준 '흥부네 11남매' 편 등 <인간극장>은 수많은 우리 이웃들의 거칠고 치열한 삶을 밀착 취재하며 안방극장에 감동과 공감을 전했다.

특히 방송 시작을 알리는 오프닝 음악과 정감 넘치는 내레이션은 누구나 <인간극장>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익숙한 것이기도 하다. 24년 동안 매일 아침 7시 50분에 한결같이 시청자들과 함께한 <인간극장>만의 힘이다. 지난 5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 본관에서 KBS 김영선 프로듀서와 타임프로덕션 한성순 팀장, 제3비전의 조창근 팀장을 만났다.

<인간극장>은 격주로 타임프로덕션과 제3비전이 외주 제작을 맡고 있고, 김영선 프로듀서가 이를 조율하는 전체 프로듀싱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한성순, 조창근 팀장은 <인간극장> 제작 초창기부터 함께한 사이로, <인간극장>의 역사에 대해서는 물론 시시콜콜하고 정감 넘치는 에피소드들까지 꿰고 있는 인물들이다. 

2000년 프로그램에 합류했다는 한성순 팀장은 <인간극장>에 대해 "내 삶과 분리해서 말할 수 없는 프로그램"이라고 말했다. 그는 "프로그램이 흘러가듯 저 역시 성장해 왔다. 서른 살에 연출을 시작해서 서른둘에 결혼하고, 서른셋에 아이 낳고, 서른다섯에 아이 낳고 아직도 이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며 웃었다. 2002년부터 조연출을 맡았다는 조창근 팀장 역시 "저도 총각일 때 시작했는데 결혼하고 아이를 갖고 나니 그때와 출연자들, 프로그램을 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졌다고 느낀다. 인간에 대해 더 많이 공감하게 되고 출연자들에게 많이 배우고 있다"고 전했다.

24년 동안 변함없이 우리 곁을 지켜온 <인간극장>이지만, 길었던 세월 만큼이나 제작 현장의 풍경은 많이도 달라졌다. 최근까지도 현장에서 연출을 담당한 조 팀장은 당시를 추억하며 "6mm 카메라로 촬영했던 옛날 시스템이 더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언젠가 촬영을 했는데 파일이 통째로 날아간 적이 있다. 6mm 시절엔 테이프가 손상되면, 앞뒤를 조금 잘라내고 붙여서 새로 만들 수 있었거든. 그렇지만 HD 카메라로 바뀐 지금은 그게 안 되지. 며칠 동안 찍은 게 날아가버리기도 한다. 그러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한성순 팀장 역시 "그때는 테이프를 데크에 넣고 재생하면서 작가들이 수기로 프리뷰어(영상을 텍스트로 옮기는 일)를 했다. 지금은 프리뷰어의 영역이 따로 있지만, 그땐 막내 작가에 메인 작가까지 다같이 손으로 적었다. 원고도 이메일로 주고받는 게 아니라 손으로 써서 타이핑을 하고 그걸 직접 들고 더빙실까지 뛰어 올라가야 했다"고 말했다. 이어 한 팀장은 당시엔 출연자 섭외를 위해 어디로든 무작정 떠났다고 회상했다.

"꼭 해보고 싶은 아이템이 노부부였다. 2004년이었는데 노부부를 찾기 위해 저, 조연출, 막내작가, 카메라 감독까지 넷이서 강원도를 2박3일 동안 훑었다. 여기 가면 이런 분이 있다더라, 어느 동네 맨 끝집에 가면 어떤 분이 산다더라. 도서관에서 찾은 이 정도 정보만 가지고 가서 온 동네를 다 돌아다녀 보는 것이다. 그러다 120년 된 귀틀집에 사는 80대 노부부를 만났다. 그게 참 기억에 많이 남는다. 그땐 무작정 떠나는 게 당연했다. 신안에 1000여 개 섬이 있으면 우리가 이번에 일정상 갈 수 있는 섬이 어디까지인지 계산해서 무작정 갔다. 그때는 이런 휴먼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뭐든 아이템이 됐다. 요즘은 이미 다른 방송에서 다룬 게 너무 많지 않나. 그런 부분에선 옛날이 좋았지."(한성순 팀장)

<인간극장>은 PD 10명, 메인 작가 7명, 조연출 7명, 취재 작가 7명, 카메라 감독 등을 모두 포함해 약 50여 명의 제작진이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이들이 모두 매주 방송되는 분량을 제작하는 것은 아니다. 조창근 팀장은 "주 5일 방송되는데, PD, 작가 1명씩, 조연출, 취재작가, 카메라 1명, 제작팀장까지 모두 포함해서 6명이 한 주간의 방송을 제작한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짜인 팀이 하나의 에피소드를 완성하기까지 총 10주 정도의 시간이 걸린단다. 한성순 팀장은 "출연자를 물색하고 섭외를 결정하기까지 3주, 촬영 3주, 후반 작업 2.5주, 그리고 마지막 1.5주는 출연자 A/S 기간이라고 부른다. 출연자와 제작진이 그동안 밀착해 있었으니, 방송 끝나고 회포를 푸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면 10주가 된다. 그리고 또다시 (다음 편을) 시작한다"고 덧붙였다.

제작진은 21일 정도 출연자와 함께 먹고, 자고, 동고동락하며 촬영하는데 하루이틀 차에 찍은 영상은 거의 방송에 쓰지 않는다고. 조 팀장은 "첫날에는 촬영조차 하지 않을 때도 많다. 계속 촬영만 하는 게 아니라 출연자와 대화를 많이 나누는 편이다. 첫째 주는 (아직 서로 낯설어서) 서먹서먹 하다. 2주 차쯤 점점 가까워지는데 이때 출연자와 제작진간 힘 겨루기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다 3주 차에는 엄청 가까운 사이가 된다. 그때쯤이면 한 배를 탄 것이나 다름없다"고 귀띔했다. 촬영 기간 동안에도 오늘 무엇을 찍을지 거의 정해놓지 않고 그저 출연자의 일상을 함께하면서 지낼 때가 더 많단다.

"아침에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오늘 뭐할 거예요?' 슥 물어본다. '오늘 애 데리고 어디 가봐야 하는데 그런 것도 따라갈 거예요?'라고 하시면, '일단 가보죠 뭐. 같이 가요' 하고 슬렁슬렁 따라가는 것이다. 그렇게 찍다 보면 뭐가 나오고. 식사도 같이 하고 잠도 같이 자니까. 카메라 내려놓고 같이 밥 먹다가도 아까 촬영할 때랑 다른 새로운 얘기가 나오면 숟가락 놓고 또 카메라를 든다. 그게 <인간극장>의 문법이 됐다." (한성순 팀장)

매일 붙어있었다 보니, 촬영이 끝나고 나면 허전함을 느끼는 출연자들도 적지 않다. 조창근 팀장은 어느 출연자로부터 갑자기 걸려왔던 전화가 기억에 남는다고 고백했다. 

"촬영이 모두 끝나고 방송은 나가기 전이었다. 갑자기 전화가 와서, 아내분이 '우리 신랑 울고 난리였다'고 하시더라. 염전을 운영하는 출연자였는데, 염전은 주변이 뻥 트여있지 않나. 염전을 밀려고 길목을 걸어가다가, '이 사람들이 나한테 인터뷰를 할 때가 됐는데 왜 아무 말도 안 시키지?' 생각을 한 거다. '조 PD 뭐하고 있지?' 하고 뒤를 돌아봤는데 아무도 없었지. 촬영에 너무 익숙해져서 순간적으로 착각한 것이다. 텅 빈 염전을 보니 너무 외로워서 눈물이 주룩주룩 났다고 하더라. 아내분은 점심을 챙겨서 함께 밥을 먹으러 갔는데, 갑자기 신랑이 우니까 깜짝 놀라셔서 전화를 하셨다. 그 얘기를 전화로 듣는 데 뭉클하더라. 단순히 출연자와 제작진 관계가 아니라 촬영이 끝나도 형님, 누님이라고 부르며 지낼 정도로 가까워진다." (조창근 팀장)

유일무이한 연작 다큐멘터리
  
<인간극장>이 돌풍을 일으킨 이후, SBS <휴먼스토리 여자> 등 비슷한 다큐멘터리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20년 전과 달리 '휴머니즘'이라는 말이 어색해진 시대지만 <인간극장>은 유일무이한 연작 다큐멘터리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시청률 역시 7%를 웃도는 수준으로(닐슨코리아 전국 기준) OTT, 유튜브가 대세인 시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훌륭한 성적이다.

<인간극장>이 아직까지 시청자들의 사랑받을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김영선 프로듀서는 공식 홈페이지에 쓰인 기획 의도 '평범한 사람들의 특별한 이야기, 특별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를 언급하며, 이 말 만큼 <인간극장>을 잘 표현해주는 말은 없다고 강조했다.

"모든 사람의 삶에는 드라마가 있다.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 삶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각자의 사연, 아픔, 희로애락이 있다. 최근 '별난 여자 김선씨' 편을 보면서 그걸 느꼈는데 SNS에서는 독특한 모습만 보여주는 분이었다. 그런데 우리 카메라가 한꺼풀 벗기고 들어가니, 그 사람의 깊은 이야기를 끌어냈다. 아주 가끔 연예인이 나오기도 하지만, 화려하게 사는 사람들도 우리처럼 희로애락을 겪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나. 그래서 사람들이 <인간극장>을 좋아하는 것 같다. 저 사람들도 우리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구나. 공감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게 우리 프로그램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김영선 프로듀서)

그럼에도 TV를 보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인간극장> 제작진 역시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다. 주 시청자층이 장년층, 노년층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서도 김영선 프로듀서는 "휴먼 다큐멘터리는 세대를 떠나서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코드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요즘 젊은 친구들도 유튜브 등을 통해 <인간극장>에 대해 알고 있더라. 최근 화제가 됐던 '나는 선생님과 결혼했다' 편은 젊은 층도 많이 봤다. 저희도 소재도 다양하게 하려고 하고 젊은 세대 출연자들을 찾는 등 노력하고 있다. 길이도 30분 정도라, 젊은층이 보기도 편한 콘텐츠이지 않나. 꼭 실시간으로 보지 않더라도, 두고두고 볼 수 있는 콘텐츠이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동안 <인간극장>에 출연한 사람들만 해도 1000명이 훌쩍 넘는다. 더이상 새로울 게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극장>이 앞으로도 계속 방송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김영선 프로듀서는 "저도 처음에는 놀랐다. 어떻게 24년 동안 끊임없이 새로운 사람을 찾을 수 있었을까. 누가 '사람은 계속 태어나고 또 늙는다'고 하더라. 평범한 사람들의 특별한 이야기를 담는다는, 다큐멘터리의 본령을 지킨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국민소득 3만 불을 넘어서면 더이상 <인간극장>은 방송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한 적도 있다. 우리가 영미, 서구권처럼 잘 살게 되면 남의 문지방을 아무렇지 않게 넘어서 촬영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3만 불을 넘어섰지만 여전히 방송하고 있지 않나. 한국만의 특수성이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인간극장>에 출연해주시는 모든 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저는 제 삶을 누가 와서 보겠다고 하면, 감추고 싶은 부분도 많다. 하지만 그 분들은 '나는 떳떳하게 살았는데 왜. 내가 도둑질을 했어, 뭘 했어'라며 자신을 탁 펼쳐 보이는데, 그 순간이 굉장히 멋있다. 그런 분들이 계속 있는 한 <인간극장>은 계속될 수 있지 않을까." (한성순 팀장)

“북한산 정상엔 태극기가 꼭 있어야죠” 24년간 태극기 값만 430만 원

 

< 조선일보 산, 서현우,  2024.03.29 >

 


북한산 백운대 태극기 24년간 교체한 정왕원씨

극한 산행은 단순히 체력만 좋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 산을 대하는 올곧은 태도와 이념, 탄탄한 지식과 경험을 두루 갖춰야만 안전히 산행을 마칠 수 있다. 넷플릭스 인기 예능 <피지컬100>에서 피지컬이 뛰어난 이를 탐구했듯, 월간<山>은 ‘산지컬’이 뛰어난 이들을 만나본다. _ 편집자 주

 


“백운대에는 태극기가 있어야 합니다.”


문득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이 생각났다. 저주에 걸린 선원들이 “플라잉 더치맨에는 선장이 필요하다”는 말을 홀린 듯 되풀이하는 장면이다. 정왕원(74)씨도 영화 속 캐릭터처럼 홀린 듯이 반복적으로 얘기했다. 북한산 백운대에는 그 어떤 다른 것도 아닌 태극기가 있어야 한다고.

왜 북한산 백운대에 태극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일까. 사실 태극기가 게양된 봉우리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국립공원의 경우에는 조금 얘기가 다르다. 과거 20세기에는 설악산 대청봉 같은 곳에 태극기가 걸려 있곤 했지만 지금은 싹 밀어냈다. 지난 2015년에는 정상부 관리 가이드라인도 만들었다. 정상석은 자연석을 활용할 것, 주변부 경관이 난잡하면 자연경관에 어울리게 정비할 것 등이다.

그런 의미에서 백운대에 들어선 태극기는 이질적이다. 국립공원의 경우, 그것도 가장 상징적인 공간인 정상에 정상석을 제외한 인공시설물이 존재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리고 이 태극기가 들어선 사연을 알고 나면 더 놀랍다. 이 태극기는 국립공원공단이 설치, 관리하는 것이 아니다. 단 한 명의 일반인이 한다.

그게 바로 정왕원씨다.

정씨는 지난 2000년부터 백운대 태극기를 교체하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현재는 개인택시 일을 하고 있는데 이틀 일하고, 하루 쉬는 날이면 늘 백운대에 올라서 태극기 상태를 점검한다. 색이 바래거나 해진 부분이 있으면 즉각 새 걸로 교체한다. 교체주기는 날씨에 따라서 상이한데 보통 한 달에 3번 정도 바꾼다.

“작년 말 기준으로 백운대를 2,200번 올랐어요. 태극기 교체 횟수는 딱히 세지 않아서 잘 모르겠네요. 한 달 평균 3장이니 1년이면 36장이군요. 24년 했으니 계산하면 한 850장 정도 구매했던 거네요. 태극기 한 장 소매가격이 1만2,000원이지만 저는 도매가격으로 5,000원 정도에 사고 있거든요? 태극기에만 430만 원이나 썼네요. 허 참 그렇게 많은 돈을 들였을 줄이야.”

인터뷰 당일 북한산 진달래 능선에서 만난 정왕원씨는 스스로 계산을 해보곤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새벽 일찍부터 도선사에서 출발해 백운대에 오른 뒤 진달래 능선 쪽으로 걸어온 상태였다. 분명 본인이 늦을 테니 천천히 오라고 했지만 부리나케 백련사 기점에서 올라가 만난 그는 한참을 기다린 눈치였다.

“혹시 먼저 태극기를 좀 같이 들고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요?”

사진기자의 말에 그는 배낭에서 태극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인상적이게도 그는 고이 접은 태극기를 고급 손수건으로 폭 싸서 갖고 다녔다. 배낭 안에도 독립된 주머니에 홀로 넣어놔서 다른 물건에 짓눌리지 않게 해놓았다.

“태극기를 늘 이렇게 싸서 갖고 다니시는 거예요?”

“당연하죠. 어떻게 태극기를 함부로 대할 수 있겠어요.”


고단한 삶을 비춘 빛, 백운대

정왕원씨가 백운대 태극기를 관리하게 된 건 그의 인생 궤적과 맞닿아 있다. 그의 인생사는 지난 2016년 본지 기사에 자세하게 소개된 바 있다. 그에게 “해당 기사에 나온 내용 중에서 정정할 부분이나 추가할 부분이 있냐”고 묻자 그는 “창피하고 부끄러운 이야기라 다시 얘기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

“제 인생은 바닥을 기었고 비참했습니다. 돈이 없어서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고, 벌였던 사업들도 제대로 굴리지 못했어요. 여러 직업과 지역을 전전했지만 정착하지 못했죠. 2000년에 개인택시 일을 시작하면서 현상유지가 되는 삶을 살게 됐고요.

물론 사람들이 옛날 그 기사를 보곤 ‘그렇게 힘들게 살았으면서도 백운대 태극기 교체라는 좋은 일을 해서 존경스럽다’고 박수 쳐주곤 합니다.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고맙지만 저는 그냥 바닥에서부터 치열하게 기어올라 살아났을 뿐이거든요. 그런 얘길 들을 때면 쥐구멍을 찾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네요.”

등산을 시작하게 된 것도 우연한 계기였다. 1994년, 일정한 직업이 없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대동문을 통해 백운대에 올라갔다. 애초에 백운대를 오르겠단 생각도 딱히 없었다. 그냥 산의 흐름을 따르다보니 가게 됐다. 헐렁한 작업복 차림으로 정상에 서니 그는 “경치가 완전히 딴 세상이라 충격이었다”고 했다. 그리곤 이내 시선은 정상에 있는 사람들에 머물렀다.

“정상에서 놀고, 쉬고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어요. 나는 잘 놀지도 못하고 힘들게 사는데 이렇게 좋은 경치를 보면서 재미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구나 싶었죠.”

그 기억을 잊지 못해 고단한 삶 속에서도 짬을 내 백운대를 찾았다. 일요일 아침 8시쯤 백운대에 도착하면 늘 보던 얼굴들이 있었다. 서로 가져온 음식과 다양한 술을 나눠 먹으며 즐기다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딱히 정확히 몇 시에 모이자고 말을 한 것도 아닌데 그게 2년이나 지속됐다. 그러면서 백운대 아래에서 기념품을 팔고 사진을 찍어 주던 박현우씨와도 자연스럽게 연을 맺게 됐다.

“그분 얘기론 자신이 1985년부터 직접 정상에 대나무로 깃대를 세우고 태극기를 게양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장사도 점점 안 되고 무릎도 아프니 백운대에 매일 올라오기 어렵게 됐죠. 그게 2000년입니다. 그때 제가 마침 개인택시를 시작하면서 이틀 일하고 하루 쉬는 스케줄이 됐어요. 그래서 제가 태극기 일을 자연스럽게 인계받았죠. 박씨와는 지금도 연락해요. 늘 ‘태극기 잘 있냐’고 물어봐요.”

 


24년간 3일에 한 번 등산…

그래서 3일에 한 번꼴로, 1년에 약 100회씩 그렇게 백운대를 집요하게 올랐다. ‘사람이 어떻게 밥만 먹고 사냐’는 말이 있듯 “어떻게 같은 산만 오르고 사냐?”는 말이 절로 나오지만 그의 백운대 사랑은 끔찍하다. 설악산 대청봉도 가봤고, 지리산 천왕봉도 올랐지만 그저 땀이 좀더 날 뿐이었단다. 그 어느 곳도 백운대만큼 좋지 않았다. 그는 “백운대 정상 암릉 구간이 엄청 짜릿하고 스릴 넘치는데 다른 산에서는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고 돌아봤다. 

“물론 설악산도 지리산도 좋죠. 하지만 저는 돈과 시간을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그걸 감안하면 서울 바로 옆에 딱 붙어 있는 백운대가 얼마나 좋아요. 게다가 정상에 오를 수 있도록 계단과 난간도 잘 만들어놨죠. 사실 북한산 백운대 정상부만 놓고 보면 무척 어렵고 무서운 산입니다. 얼씬도 못 하겠죠. 돈과 시간을 적게 들여, 안전하게, 스릴을 즐기며, 오를 수 있는 어려운 산이라니. 이런 산이 옆에 있다는 것이 정말 행운이죠.”

정씨가 백운대를 올랐던 나날을 말로 되짚어 오른다. 왜인지 모르게 그 모습에서 그의 인생사가 겹쳐 보였다. 그는 순조롭게 자리를 잡을 만하면, 일이 풀릴 만하면 우여곡절 끝에 다시 바닥으로 내팽개쳐지곤 했다. 마치 9부 능선인 백운봉 암문까지는 순조롭게 오르지만 생각보다 무서운 백운대 정상부를 극복하지 못하는 산행 초보처럼. 

하지만 정씨는 백운대 정상을 올랐고, 악착같이 버티는 데 급급했던 인생에도 안정이 찾아왔다. 그러니 그에게 백운대는 더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2000년대 초 기존에 있던 깃대가 삭아서 부러진 적이 있었다. 4m 높이에서 위풍당당하게 휘날리던 태극기가 반절쯤 내려오니 영 볼품이 없었다. 4~5m 쇠파이프를 지고 백운대를 오를 엄두가 나지 않아 기회를 엿보는 사이 국립공원공단에서 깃대를 새 걸로 바꿔줬다. 정씨는 “아 이제 공단이 관리하려나보다 했는데 깃대만 바꾸고 태극기는 건들지도 않았다”며 “그래서 그때부터 쭉 내가 태극기 교체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최근에는 그래도 10번 중 1번꼴로 공단 직원이 가서 태극기를 교체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용케 공단이 깃대를 바꿔줬네요? 보통 자연물만 남기려고 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지금도 태극기 교체하는 일에 뿌듯함을 느껴요. 예를 하나 들게요. 백운대 정상에는 한국산악회가 1975년에 세운 통일서원비가 있어요. 옛날엔 그게 정상석 노릇을 했죠. 그런데 한 산꾼이 보니 거기에 백운대 이름도, 높이 표시도 안 돼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이 안타까우니까 자기가 그 비석 사이즈에 딱 맞는 종이에 백운대 이름과 높이 836m를 인쇄해서 뒷면에 붙여놨어요. 공단 직원이 바로 ‘이거 왜 네 맘대로 붙여’ 하면서 뗐죠. 이 사람이 화가 나서 1년 넘게 계속 붙였고, 공단은 계속 떼는 싸움을 했어요. 아무리 그분이 ‘정상석엔 산의 이름과 높이가 적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도 씨도 안 먹혔죠. 그렇게 한참 지나고 나서야 공단이 사람을 시켜서 지금 정상석에 석각을 새기더라고요. 2000년대 후반이었어요.”

“근데 그 사건과 태극기가 무슨 상관이죠?”

“그러니까 박현우씨와 제가 계속 태극기를 게양하는 작업을 이어오지 않았다면, 나중에 태극기를 매달았다면, 지금처럼 태극기가 백운대의 상징이 되지 못했을 거란 말입니다. 박현우씨가 일찌감치 잘한 셈이죠.”


어려운 살림에도 태극기 교체 도맡아

처음에는 태극기 값이 좀 부담됐다. 당시 기준으로 1만2,000원. 택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라 여윳돈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지자체를 찾아서 협찬을 좀 해달라고 했다. 그는 “첫 해에 10장 주고, 그 다음해에 한 장을 주겠다기에 그럴 바엔 그냥 안 받겠다고 하고 나왔었다”며 “사실 나도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게 백운대 정상은 행정주소가 고양시인데 강북구청을 찾아가서 달라고 했다”며 웃었다. 어쨌든 처음에는 그 정도로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지금은 어때요? 국립공원공단이나 지자체에서 지원해 주겠다는 얘기가 없나요?”

“그런 얘기도 없고, 제가 받을 생각도 절대, 전혀 없어요. 제가 이 일을 더 못 하는 날까지는 무조건 제 돈으로 할 겁니다. 백운대를 위해서 돈을 쓰는 건데 전혀 아깝지 않고 오히려 더 선뜻 쓰고 싶어요.”

돈은 돈대로, 시간은 시간대로 쓰는 힘들고 까다로운 일. 그래도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에 대해 묻자 그는 단순히 “좋아서”라고 했다. 누가 등을 떠밀지도 않았고, 노고를 칭찬받고자 하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고 했다. 그래도 단순히 좋아서란 말로는 부족해 보여 조금 더 캐물어봤다. 미간에 주름을 잡고 고민하던 그가 입을 연다.

“백운대 정상에는 온갖 사람들이 다 옵니다. 열이면 열, 태극기를 옆에 두고 사진을 찍어요. 그런걸 보면 우리는 다 똑같다, 모든 한국 사람들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참 똑같다고 느껴요. 그러니 그렇게 태극기를 좋아해 주는 것 아니겠어요? 저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일원들이 수도 서울 최고봉에 모였을 때 서로 같은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상징물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 어찌 안 ‘좋을’ 수 있겠어요?”

백운대 태극기 앞에서는 좌파도 우파도, 여자와 남자도, 젊은 세대와 나이든 세대도 다 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고, 같은 눈으로 올려다본다. 정씨는 그런 모습을 ‘좋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아내도 그랬다. 24년 동안 백운대를 올라 태극기를 교체하는 일에 대해 좋다 싫다 일언반구도 없다가 딱 한 마디만 남겼단다. “여보, 의미 있는 일 한다”고.

 


백운대 오르려고 새벽 2시에 일어나

백운대를 위해서 삶의 패턴도 바꿨다. 오후 6시 30분에 잠들어서 새벽 2~3시 사이에 깬다. 산에 가는 날만 그러는 게 아니다. 매일이다. 과거에는 친구들을 만나 술도 많이 마셨고 밤늦게 놀기도 했다. 하지만 오로지 백운대에 올라 태극기를 교체하는 일을 원활히 진행하기 위해 그런 즐거움을 포기했다.

“일을 하는 날에는 새벽 3시쯤 일어나서 한 시간 정도 운동을 하고 출근합니다. 집 안에 철봉도 들여놨고 35kg 쇳덩어리도 있어요. 헬스를 하죠. 그리고 저녁 6시에 퇴근하면 곧장 잠들어요. 산에 가는 날이면 조금 더 일찍 일어나서 새벽 3시 내외에 도선사 들머리에 도착하고요.”

“왜 그렇게 일찍 오르시는 겁니까?”

“거창한 이유는 아니에요. 예전엔 괜찮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도선사 주차장에 주차난이 생겼어요. 주말이면 새벽에도 자리가 한두 개밖에 없을 때가 많아졌죠. 그래서 그냥 삶을 산에 맞췄어요. 주차도 편리하고, 올랐을 때 정상부에 사람이 없어서 교체 작업하기도 편하고, 또 아침 일찍 오신 분들도 헌 태극기가 아니라 새 태극기를 볼 수 있고 여러모로 좋더라고요.”

“하지만 친구 만날 시간이 없는데요?”

“나이 70이 넘어가니까 누굴 만나서 술 마시고 그래봤자 맨날 쓸데없는 얘기만 하지 영양가가 없더라고요. 차라리 산에 가서 땀이라도 흘리면 다리 힘이라도 생기죠.” 

그러니 밤이 없는 삶을 선택한 건 그에게 대승적인 결정이나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었다. 그냥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사건사고도 많았다. 죽을 뻔한 적도 있다. 어느 겨울 가파른 나무계단 초입에서 살얼음을 못 보고 밟았다가 머리부터 떨어졌다. 불행 중 다행인지 다행 중 불행인지 쇠기둥에 머리를 박으면서 추락이 멈췄다. 모자를 벗으니 피가 쏟아졌다. 묘하게 피를 한 번 흘리고 나니 정신은 말짱하고 그리 아프지도 않았다. 눈으로 피를 덮고 오기가 생겨 정상에 무사히 갔다가 내려 왔다. 피가 더 안 나기에 멀쩡한 느낌이었는데 병원에 가니 상처를 봉합해야 한다고 해서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뇌진탕 증세까지는 없어서 더 위독해지진 않았다.


태극기 교체, 앞으로 3년 남았다

진달래 능선을 오르내리는 그의 숨이 사뭇 거칠다. 사실 이제 그의 백운대 사랑도, 태극기 작업도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정씨는 “앞으로 3년, 길어야 5년 정도 더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체력적으로 버겁다. 사실 가려면 갈 순 있는데 컨디션이 안 좋으면 선뜻 올라갈 결심이 잘 서지 않는단다. 그래서 도선사 주차장까지 왔다가 되돌아가기도 한다.

“이어 받을 사람은 있나요?”

“없습니다. 백운대를 정말 사랑하고, 저처럼 백운대를 3일에 한 번꼴로 올 수 있는 여건을 갖춘 사람이어야 할 텐데, 그런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국립공원공단에 말해 보려고 합니다.”

“국립공원공단이 할까요?”

“싫어도 할 수밖에 없죠. 깃대가 세워져 있는 걸요. 지금도 태극기가 해져 있으면 바로 공단 사무소에 민원이 접수됩니다. 그 등쌀에 할 수밖에 없겠죠. 그렇게 믿고 있어요.”

“태극기 교체 일을 그만둔 뒤에는 어떤 일을 하실 생각인가요?”

“사실 꿈이 있어요. 블라디보스토크부터 대서양까지 유라시아 횡단을 해보려고 합니다. 캠핑카로요. 그간 못 둘러본 세상을 실컷 보고 싶습니다.”

그는 백운대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꿈은 일절 가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백운대를 오르기 전 그의 세상이 주먹 안에 쥘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면 지금은 팔을 활짝 벌려도 모자랄 정도로 세상이 넓어졌다고 했다.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도, 세상이 이토록 넓고 아름답다는 것도 모두 백운대에서 배웠다. 그래서 그는 “백운대는 내 인생의 스승”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든지 그런 게 있을까요?”

그는 망설였다. 그리곤 “뭘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런 말을 하겠냐”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질문을 살짝 바꿔봤다.

“백운대에 처음 올라온 아이가 ‘여기 이 태극기는 뭔가요?’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해 주실 것 같으세요?”

그는 이번엔 망설이지 않았다.

“여기에 꼭 있어야 되는 것이라고 답할 겁니다. 백운대에는 태극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는 백운대 위에 다른 그 무엇도 아닌 태극기가 있어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그것이 곧 대한민국과 서울, 그리고 한국인을 드러내는 상징이자 의미라면서. 

‘노벨상 산실’ 뚫은 토종 과학자… “망한다는 연구도 밀어붙인 맷집 통했죠” [김윤덕이 만난 사람]
막스플랑크 연구소 첫 한국 단장


차미영 카이스트 전산학부 교수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 첫 한국인 단장으로 선임된 차미영 카이스트 전산학부 교수는 가짜 뉴스를 비롯해 빈곤, 기후변화, 식량 문제 등 인류 공통의 사회 안전망에 관한 연구를 할 것이며, "연구가 너무 재미있어서 월요일 되기만을 기다렸다”라고 밝혔다. 

 


< 조선일보, 김윤덕 기자,  2024.02.26.>

 


대통령의 독일·덴마크 순방이 취소된 덕에 차미영 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대통령이 참석할 예정이던 독일 레오폴디나 한림원 행사에 동행하기로 돼 있었다. 빅데이터와 AI를 기반으로 가짜 뉴스, 기후변화, 식량 문제 등 지구촌 공동의 이슈를 분석해온 차 교수는, 최근 세계적 권위의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 첫 한국인 단장에 선임돼 화제가 됐다. 빽빽한 일정에 3월 이후에나 볼 수 있겠다던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아인슈타인 배출한 노벨 사관학교


-막스플랑크 연구소는 어떤 곳인가?

“한마디로 ‘공룡’이다. 독일 전역에 86개 연구소, 2만4000명의 연구원과 직원을 둔 세계 최고의 기초과학 연구 빅텐트다. 총재 밑에 300명의 연구단장이 있고 그중 한 명이 됐다.”

-노벨상 사관학교라던데.

“아인슈타인, 막스 플랑크를 비롯해 노벨상 수상자가 30명이 넘는다. 노벨상 말고도 각 분야 최고 연구자들이 모인 곳이라 단장 회의에 참석하면 굉장할 것 같다(웃음).”

-’보안 및 정보보호연구소’의 단장이라고 들었다.

“그중에서도 ‘인류를 위한 데이터과학 연구그룹’을 이끈다. 가짜 뉴스를 비롯해 빈곤, 기후변화, 식량 문제 등 인류 공통의 사회 안전망에 관한 연구를 할 것이다.”

-단장직에 ‘지원’한 게 아니고 ‘초대’받았다고 하더라.

“작년 겨울 막스플랑크 연구소에서 심포지엄이 있었다. 내가 카이스트와 기초과학연구원(IBS)에서 진행해온 연구에 대해 주제 발표를 했는데, 타 분야 연구단장들까지 다 와서 듣더라. 나중에 알고 보니 일종의 면접이었다.”

-후보군에 하버드대, 옥스퍼드대 학자들도 있었다던데.

“다양성(diversity)을 위해 아시아 학자인 내가 우선순위가 된 게 아닐까(웃음). 나의 도전적이고 초긍정적인 리더십이 좋은 인상을 줬다고 하더라. 우리 팀은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연구도 과감히 추진해왔다.”

-오는 6월 임기가 시작되면 카이스트 교수직은 그만두나.

“카이스트에서 겸직할 수 있는 파격 대우를 해주셨다. 학생으로 입학해 교수 생활까지 24년을 몸담은 카이스트를 떠나야 했다면 몹시 슬펐을 것이다.”

-연봉도 파격적인가?

“돈 때문이라면 한국에 남거나 실리콘밸리로 가야지(웃음). 100년 전통의 막스플랑크엔 연구의 독립성을 지켜주는 ‘하르나크 원칙’이 있다. 단장에게 연구 예산과 인사권을 일임한다. 당장 성과가 나오지 않아도 믿고 기다려준다. 전통, 관습의 폐해가 있을 거라는 상식을 깨뜨리는 곳이다.”

 


◇백만 팔로어의 오류


-차미영 연구팀은 ‘액셔너블한 기초과학’을 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우리 연구의 주제는 사회 현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논문이나 이론으로만 남아 있지 않고 사회에 직접 파급력을 갖는 연구를 하려고 한다. 사회과학자들, 그리고 유엔 등 세계 기구들과 협업하는 이유다.”

-2008년 소셜미디어에 관한 연구를 일찌감치 시작했더라.

“그때만 해도 얼리 어답터들만 이용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용자가 가파르게 증가했다. 스스로 수집한 정보를 자발적으로 공유하고 전파하는 혁신적인 미디어였다. 대세가 될 거란 확신이 왔다.”

-17억개 트위터를 분석한 논문 ‘백만 팔로어의 오류’는 4000회 가까이 인용될 만큼 반향이 컸다.

“2008년 막스플랑크 연구소 박사후 연구원(포닥)으로 있을 때 서버 50대로 수집한 네트워크를 분석한 연구다. 단순히 팔로어(follower)가 많다고 해서 메시지 전파력이나 사회적 영향력이 큰 건 아니라는 결과를 데이터로 증명했다.”

-소셜미디어를 연구하다 가짜 뉴스로 관심이 옮겨간 건가.

“트위터가 나온 첫 3년 동안의 데이터를 들여다보니 가짜 뉴스가 굉장히 많이 보였다. 양질의 정보가 많은데 왜 사람들은 가짜 뉴스를 퍼뜨리지?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사람을 왜 계속 팔로(follow)하지? 그런 궁금증에 연구를 시작했다.”

-가짜 뉴스의 특징을 밝히기도 했다.

“일반 정보는 초반에 확 읽히고 사라지는데 가짜 뉴스는 파도처럼 정점을 오르내리길 반복한다. ‘어디서 들은 건데’처럼 확실하지 않은 표현이 많고, 낚시성 제목과 본문이 불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건 초창기 가짜 뉴스에 해당하는 특징이다. 요즘은 딥페이크 등 개인이 판별하기 어려운 가짜 뉴스가 쏟아져온다. 사용자가 챗GPT와 직접 대화하면서 정보를 얻는 등 유통 경로도 바뀌고 있다. 오픈AI가 최근 발표한 영상 생성 AI 소라(Sora)는 내게도 충격적이었다. 텍스트를 주면 짧은 영상을 뚝딱 만들어낸다. 가짜 뉴스는 이제 새로운 게임이 됐다.”

-대책이 별로 없다는 뜻인가?

“AI 기술이 너무 빨리 발전하고 정보가 산발적으로 퍼지기 때문에 중앙의 컨트롤은 거의 불가능하다. 뒤따라가면서 규제하고 안전장치를 만드는 수밖에 없다. 진짜 문제는 우리나라의 가짜 뉴스 처벌이 너무 약하다는 것이다. 가짜 뉴스 자체에 대한 처벌은 없고 명예훼손죄로 몇백만원 벌금 내는 정도다.”

-올해 선거를 치르는 나라가 많다.

“어떤 형태로든 대형 사고가 날 텐데 우리나라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실패, 두렵지 않다


-가짜 뉴스 범람에 네이버, 유튜브, 페이스북 같은 플랫폼의 책임이 적지 않다.

“미 대선 기간이던 2016년, 페이스북으로 연구년을 다녀왔다. 플랫폼이 왜 가짜 뉴스를 안 막는지 비난받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플랫폼이 어떤 정보가 가짜 같아서 가리거나 삭제하면 사용자로부터 고소가 들어온다. 일일이 검증하기도 힘들다. 플랫폼이 할 수 있는 일은, 양질의 콘텐츠를 위로 올려 가짜 뉴스를 후순위로 밀리게 하는 것뿐이다.”

-소셜 네트워크의 폐해가 많지만 행복을 도모하는 데 도움이 될 가능성도 있다고 했더라.

“지금의 알고리즘들은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고 사용자를 더 오래 잡아두느냐에 사용되고 있다. 이와 반대로 나를 더 많이 웃게 해주고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쪽으로 알고리즘을 개발할 수도 있다. 가까운 친구보다도 플랫폼이 노출하는 콘텐츠의 영향이 더 큰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플랫폼들은 사용자의 삶을 보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유엔 등 세계기구와의 협업도 많았다던데.

“세계관세기구에 탈세범 잡는 알고리즘을 제공해 개발도상국들이 탈세를 막고 제대로 세수를 거둘 수 있게 도와줬다. 유엔개발계획(UNDP)과 함께 인도네시아의 물가지수를 샘플링해 가짜 물가를 잡는 작업도 했다.”

-데이터 과학이 개도국이나 후진국들에 더 필요하다고 했더라.

“빈곤, 환경오염, 식량 문제의 해법을 모색하는 데 데이터 과학이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위성 영상을 보면 어느 지역이 빈곤한지, 어느 지역에 쓰레기가 쌓이고, 인구가 밀집해 있는지 다 보인다. 문제는 디지털화가 안 된 개도국에는 이런 기술과 알고리즘을 제공해도 사용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괴리를 줄여나가는 것이 과제다.”

 


◇몰입과 공상 좋아하던 아이


-과학자가 된 건 물리학자였던 아버지 영향일까.

“난 좀 별스러웠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음악을 들으면 눈앞에 꽃잎이 막 떨어지고, 눈을 감으면 별이 가득한 우주가 펼쳐졌다(웃음). 몰입과 공상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춘천에서의 성장기는 어땠나.

“호수와 안개 속에서 자랐다. 소설가 오정희 선생님과 같은 아파트인 데다 딸이 나와 동갑이라 맨날 놀러 갔다. 그 집에는 언제나 클래식 음악이 흘렀다.”

-천문학을 하려다 카이스트엔 없어 전산학을 공부했다던데.

“전산도 재미있었다. 요즘엔 데이터가 전산에만 있는 게 아니어서 어느 분야에 갔어도 재미있는 걸 찾아 연구했을 거다.”

-’로봇의 인권’도 연구 주제더라.

“나와 함께 막스플랑크 연구소로 가는 우리 팀은 다국적 연구원들로 구성돼 있다. 지난 5년간 20국에서 130명의 인턴을 채용했다. 다양한 경험을 가진 인재들에게서 다양한 아이디어와 창의가 나온다. 미래의 이슈로 떠오를 ‘로봇의 인권’을 연구해보자는 아이디어도 그렇게 나왔다. 트럼프가 집권해서 좋을 딱 한 가지는 미국으로 흡수될 우수한 과학 인재들이 카이스트로 올 수 있다는 점이다(웃음).”

-여성이라 차별받은 적은 없나.

“당시엔 남고, 남자 대학이나 다름없는 과학고와 카이스트에서 ‘빡세게’ 공부만 하고 살아선지 차별 같은 건 인지할 틈이 없었다(웃음). 지금은 여학생 수가 많아져서 정말 좋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남편, 양가 부모님, 베이비 시터 등 모든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았다. 연구가 너무 재미있어서 월요일 되기만을 기다렸다(웃음).”

-후배들에게 회의할 때 뒷자리에 앉지 말라고 했더라.

“초대받은 회의라면 나만의 목소리를 내고 와야 한다. 어디서든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돼야 한다. 하다못해 행사가 있으면 총장님 옆에 서는 게 좋다(웃음).”

-직업병은 없나?

“병이 아니라 혜택! 소셜미디어에 중독되지 않는 나만의 방법을 터득했다. 페이스북이든 유튜브든 네이버든 필요할 때 사용하고 바로 앱을 지워버린다. 다시 깔기 귀찮아서라도 안 본다(웃음).”

-외모며 말투가 과학자 같지 않다는 말도 들을 것 같다.

“결핍 때문일 거다. 공부만 하는 바람에 10대, 20대에 누려야 할 낭만이 없었다. 그래서 석·박사 과정 때 꽃무늬 원피스만 입고 다니고, 여성 잡지를 한 달에 다섯 권씩 구독했다(웃음).”

-여성은 수학, 과학에 약하다는 편견에 대해.

“남녀는 선천적으로 다른 생물이 아니다. 다만 지금은 여러 가지 융합 능력이 필요한 시대고 100세까지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인문적 소양과 예술적 감성도 함께 키워야 한다. 아, 경제도 좀 일찍 가르쳐달라. 내가 펀드와 재테크는 완전 무지하다, 하하!”

 


☞차미영

1979년 대전에서 태어나 춘천에서 자랐다. 강원과학고를 졸업한 뒤 카이스트 전산학부에 입학, 카이스트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부터 2년간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근무했고, 2010년 카이스트 교수로 임용됐다. 5년간 기초과학연구원(IBS) 데이터 사이언스그룹을 이끌었다.

차인표 “당신도 광야를 헤매는 누군가의 ‘천사’가 될 수 있다”

다큐 ‘바울로부터’ 찍은 차인표


< 조선일보, 김윤덕 기자,  2024.02.19. >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광야가 있다고 차인표는 말했다. 사나운 벌판에서 수도 없이 넘어졌지만 굽이굽이 자신을 일으켜 세운 손길이 있었다고 했다. 입양으로 시작해 극빈국 아이들과 탈북자 돕기, 마약 퇴치 운동에 발 벗고 나선 것도 그 사랑을 되갚기 위해서였다.

영화 ‘바울로부터’ 시사회에서 차인표를 만났다. 그는 최근 사도 바울의 일대기와 행적을 다룬 CGN 10부작 다큐에 출연했다.

 


◇위기의 한국 교회에 경종을


-왜 바울인가?

“바울은 예수 믿는 이들을 핍박하는 바리새인이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던 중 예수의 음성을 듣고 삶이 180도 달라진다. 돌과 채찍을 맞으면서도 예수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고 끝내 순교한다. 최초의 선교사였던 바울이 없었다면 오늘의 기독교도 없었다.”

-대중의 사랑을 먹고 사는 배우가 종교 다큐를 찍기가 쉽지 않을 텐데.

“지난해 1월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때 내 손에 들려 있던 책이 톰 라이트의 ‘바울 평전’이었다(웃음). 꽤 오래전 사둔 책인데 마침 새해 첫날부터 읽고 있었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일까?

“그런 것 같다(웃음). 한 달 이상 집을 비우는 일인 데다, 암 투병 중이셨던 아버지 때문에 망설였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키프로스, 이스라엘, 튀르키예, 몰타, 이탈리아 등 여섯 나라에서 2~3일에 한 번씩 비행기를 갈아타야 하는 강행군이었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가 이륙했을 때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비행기를 수백 번 넘게 탔지만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증세였다. 순간 내가 믿고 의지하고 목표로 삼아왔던 모든 것, 그것이 돈이든 얄팍한 명예든,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이든 그 어떤 것도 나를 도와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저 하나님만 찾았다. 제발 숨쉬게 해 달라고. 그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힘없고 하찮은 존재였다. 바울처럼.”

-왜 바울처럼인가?

“유대교 최고 엘리트였던 바울은 예수를 만난 뒤 그의 생애에서 가장 낮아지고 겸허해진다. 스스로 재판관처럼 살아온 나의 교만이 바울 다큐를 찍으면서 무너져내렸다.”

-위기의 한국 교회에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라고 하더라.

“바울은 명예나 부귀영화를 위해 예수의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살해 위협을 받으면서도 예수가 십자가를 통해 완성한 궁극의 사랑과 용서, 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데 온몸을 던졌다. 지금 한국 교회에 그런 절박함이 있는지 바울은 묻는다. 전도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는 것임을 일깨운다.”


◇고비사막에서 만난 은하수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 안에’로 벼락 스타가 된 차인표의 이미지를 바꾼 건 탈북자를 소재로 한 영화 ‘크로싱’이었다.

“하기 싫어서 계속 고사했던 작품이다. 몽골로 중국으로 몇 달씩 촬영 다니며 고생할 테고, 흥행은 절대 안 될 거고(웃음). 누가 탈북자 영화를 보겠나.”

-그때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건가?

“몽골 고비사막으로 답사를 갔을 때 급체가 와서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오한에 떨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들이 이쪽 끝부터 저쪽 끝까지 양탄자처럼 덮여 있더라. 수많은 탈북자가 이 사막을 건너다 저 은하수를 보며 죽어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이 영화는 내게 일이 아니라 사명이라는 확신이 왔다.”

-중국 대사관 앞에서 탈북자 강제 북송 반대 시위도 했던데.

“‘크로싱’ 개봉 4년 뒤 일이다. 중국 공안에 붙잡힌 탈북자 30여 명이 강제 송환 위기에 처했는데 영화 찍을 때 알게 된 여명학교 아이들의 형제와 부모도 포함돼 있었다. 그래서 중국 대사관 앞에 가서 호소문을 발표했다. 탈북자의 인권과 생존에 우리가 먼저 관심을 가져야 세계인도 주목할 거라고 믿었다. 탈북자들도 세계시민으로서 살아갈 권리가 있다.”

 


◇입양, 후회한 적 없다


-남경필 전 경기지사와 마약 퇴치 운동을 시작했다.

“제 나이가 연예계에서는 이제 많은 축에 든다. 작품도 중요하지만 후배들을 위해 뭐라도 조금 돕고 은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연예인들이 몹시 어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힘든 일을 당했을 때 상의할 곳이 없다는 것이다. 소문이 날까 봐. 자살 충동을 느끼고, 마약을 하게 되더라도 상담과 치료의 길로 들어서기 힘들다. 그래서 남경필 형님께 연락을 드렸다.”

-단체 이름을 정했다고 하더라.

“‘Never Give Up(절대 포기하지 마라)’을 줄인 NGU,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은구(恩求)가 된다. 마약 치료 전문가인 조성남 국립법무병원 원장님과 셋이서 2주에 한 번 줌 회의를 하며 준비하고 있다. 남 지사님 말씀대로 마약은 남의 일이 아니다. 내 자식이나 손자들 모두 위험에 처할 수 있는 문제다.”

-그 사이 배우 이선균씨 사건이 있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했다. 사건 전말을 제가 다 모르니 뭐라 말씀드릴 순 없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올해가 ‘사랑을 그대 품 안에’가 방영된 지 30주년이더라. 이 드라마에서 만난 신애라씨와 결혼했다.

“아내한테 많이 배운다. 내가 갈피를 못 잡을 때 조언해주고 응원해주는 사람이다.”

-성격은 매우 다르다던데.

“지금도 안 맞는다(웃음). 아내는 외향적이고 여행 다니기를 좋아하는데 나는 내성적이고 집에 있기를 좋아한다. 살림에 대한 아내의 깨알 원칙을 내가 잘 못 따라가 매일 잔소리를 듣는다.”

-부부가 함께 선한 영향력을 미치며 살아가기가 쉽지 않을 텐데.

“성격은 다르지만 인생의 한 방향을 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다.”

-입양한 예은이, 예진이는 많이 컸겠다.

“예은이는 고3, 예진이는 고1이다. 공부하기 좋아하는 예진이는 언어 치료사가 꿈이고, 공부엔 별 관심없는 둘째 예은이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꿈이라 메이크업을 가르쳐주는 학원에 다니고 있다.”

-잔소리도 하나?

“우리 부부는 아이들이 꼭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할 일은 아이들한테 충분히 기회를 주는 것, 그리고 실패했을 때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버팀목이 돼 주는 것이다.”

-입양을 후회한 적은 없나?

“한 번도. 너무 오래된 일이라 우리가 입양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웃음). 내가 젊다면 또 입양할 텐데. 이젠 우리 세 아이가 결혼해 입양을 하지 않을까.”


◇ 내 인생의 광야


-차인표의 인생에 광야는 언제였나.

“1987년 한국 대학을 중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산 6년이다. 한 푼 두 푼이 절실할 만큼 치열하게 살아야 했던 시간이다.”

-아버지가 해운업을 하지 않았나.

“내가 중학생 때 부모님이 헤어지셔서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도 차인표의 이미지는 언제나 금수저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웃음). 생활비를 벌기 위해 밤 11시부터 다음 날 아침 7시까지 뉴저지의 한 정신병원에서 간호 보조사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덕분에 생애 가장 기억에 남는 크리스마스를 맞기도 했다.”

-어떤 크리스마스였길래?

“40년 전인데도 정확히 기억난다. 그날 중환자 병동에서 내가 맡은 임무는 마약중독 환자를 밤새 지켜보는 일이었다. 자살할 위험이 있어 화장실 갈 때도 따라다니고 잠들었을 때도 병실 문 앞에 앉아 그를 지켜봐야 했다. 그러다 문득 예수님이 다시 세상에 온다면 어디로 오실까 생각했다. 에드워드라는 저 남자처럼 누가 쳐다봐 주지 않으면 자기 목숨 하나 지킬 수 없는 사람들에게 오지 않을까. 순간 누군가 뒤에서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느낌을 받았다.”

-청년들에게 ‘오늘 하루로 인생이 결정나지 않는다. 포기하지 말고 버티라’고 했더라.

“한국에 돌아와 200군데 이력서를 냈는데 딱 한 군데서 연락이 왔다(웃음). 그런 내가 배우가 될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 했다. 조상님들 묘를 정리하러 선산에 갔다가 증조할아버지부터 손자 손녀까지 30~40명 이름이 적힌 비석을 본 적이 있다. 우리 증조부는 빈농으로 태어나 빈농으로 살다 돌아가셨는데, 그분이 만일 힘들다고 중간에 삶을 포기했다면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없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 우리는 수백 수천 대의 어머니들이 품어온 사랑의 결정체이자 누구도 폄훼할 수 없는 존재다. 이 기적 같은 삶을 포기해선 안 된다.”

-소설도 쓰더라. 벌써 3권을 발표했다.

“글을 쓸 때 내가 가장 자유롭다고 느낀다.”

-위안부 피해자인 훈 할머니를 모티프로 삼은 첫 소설 ‘잘 가요 언덕’은 이어령 선생이 극찬했던데.

“큰아이가 4학년일 때 ‘나눔의집’ 봉사를 함께 다녔는데, 할머니들이 한 분 한 분 돌아가시는 게 안타까웠다. 이분들이 다 떠나시면 누가 이 슬픈 역사를 알려줄까, 하는 생각에 동화처럼 써본 작품이다.”

-본업은 배우다. 아카데미상에 대한 포부는 없는지.

“저까지는 기회가 안 올 것 같다(웃음). 그리고 한 번도 그런 영예가 내 삶에 중요하지 않았다.”

-컴패션을 통해 20년간 후원해온 아이들은 잘 자라고 있나?

“우리 부부가 가장 처음 후원한 아이가 리카다. 개중엔 변호사, 국회의원이 된 아이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리카는 자기 엄마처럼 싱글맘이 됐다. 얼마 전 만났는데 아내와 부둥켜안고 울더라. 그래도 우리는 변함없이 리카를 위해 기도하고 응원할 것이다. 끝까지 자기만의 행복을 찾아갈 수 있도록.”

-당신은 돈이 많아서 나눌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부자라도 나누지 않으면 거지이고, 거지라도 나누면 부자라는 말은, 구두를 닦아 모은 돈으로 가난한 아이들을 돕는 김정하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다. 당신도 광야를 헤매는 누군가의 천사가 될 수 있다.”

 

 

 


☞차인표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나 충암고, 미국 럿거스대학을 졸업했다. 1993년 MBC 탤런트로 입사, ‘사랑을 그대 품 안에’에서 강풍호 역으로 신드롬을 일으켰다. 배우 신애라와 결혼해 1남 2녀를 두었다. 두 딸은 공개 입양했다. 컴패션을 통해 빈곤국 어린이를 후원하고 있으며, 탈북의 아픔을 그린 영화 ‘크로싱’에서 열연했다. ‘잘 가요 언덕’ 등 세 편의 소설을 펴냈다.

라면 年매출 1조...“절박해서 바닥부터 뛰면서 일했다”
김정수 삼양라운드스퀘어 부회장, 국내 언론 첫 인터뷰

 

 


< 조선일보, 송혜진 기자,  2024.02.19. >

 


“오이시(맛있어)!” 지난 15일 일본 지바시에서 열린 ‘수퍼마켓 박람회(Supermarket Trade Show) 2024′. 매년 6만여 명이 몰리는 일본 최대 식품·유통 박람회다. 삼양식품 부스는 3500여 곳 중에서도 유독 북적거렸다. 불닭볶음면과 일본에 새로 내놓은 인스턴트 파스타 ‘탱글’을 시식하려는 사람들이 몰린 것이다. 현장에서 만난 김정수 삼양라운드스퀘어(삼양식품그룹 새 이름) 부회장은 상기된 표정이었다. 그는 “세계 최초 라면 업체이자 일본 최대 라면 업체 닛신도 이달 불닭볶음면을 따라 한 신제품을 내놓는다고 들었다. 포장에 한글을 새긴 것까지 같더라”면서 “라면의 종주국 일본서도 K푸드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고 했다.

김정수 삼양라운드스퀘어 부회장이 지난 16일 국내 언론 중에선 처음으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볶음라면을 넘어 즉석 파스타면 시장, 소스 시장까지 공략해 매출 규모를 몇 배 더 키워 나가겠다"고 말했다.  


삼양라면은 국내 최초 라면 회사로 한때 시장점유율 70%까지 기록했다. 그러나 1989년 발생한 ‘공업용 우지 사건’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5년 8개월 동안 법정 싸움 끝에 1995년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삼양라면이 10%대까지 떨어진 시장점유율을 다시 끌어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김 부회장을 경영으로 부른 사람은 시아버지이자 창업주인 고(故) 전중윤 명예회장이었다. 서울예고와 이화여대 사회사업학과를 나온 그는 본래 결혼 후 가정주부였다. 1998년 입사한 그는 “절박해서, 아무것도 몰라서, 그저 바닥부터 뛰면서 일했다”고 했다. 그는 이후 연 매출 1조원 규모의 수출 기업으로 올려놓았다. 김 부회장이 만든 불닭볶음면은 현재 미국·중국·일본·영국·독일·캐나다·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전 세계 95국으로 팔려 나간다. 김 부회장을 일본 도쿄에서 만났다. 경영에 뛰어든 지 25년 만에 국내 언론과 처음 하는 인터뷰다.


◇반전 드라마 ‘불닭’

-일본 박람회까지 왔다. 늘 이렇게 직접 현장을 다니나.

“내가 와야 일이 빨리 풀리니까. ‘이런 거 왜 빨리빨리 진행 안 돼? 지금 바로 하자’고 독려할수록 모든 일이 쉬워진다. 직원들이 괴롭고 답답한 점도 직접 물어봐야 확실히 알 수 있다. 중간에 본부장, 부장 거쳐 가며 알아보면 절대 제대로 알 수 없다.”

-1998년 영업본부장으로 일을 시작했다.

“솔직히 나도 본격적으로 회사 경영을 하게 될 줄 몰랐다(웃음). 1994년 1월 초에 시집왔고, 시아버지께서 처음엔 ‘원주 골프장 인테리어 좀 봐달라’고 하셨다. 회사가 흔들리자 나를 영업에 투입했다. 전국 마트, 수퍼마켓을 다 돌아다녔고 “삼양라면 좀 눈에 잘 띄게 배치해 달라”고 허리 숙이며 읍소했다. 한번은 대전에 갔더니 타사 라면이 다들 ‘원 플러스 원(1+1)’으로 묶음 세일을 하더라. 우린 그럴 마케팅 비용도 없고 여력이 안 됐다.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직원들에게 말했다. ‘한국 시장선 답이 안 나오니, 내가 외국 가서 물건 팔아 오겠다. 그때까지만 버티자’고. 수출을 해보겠다고 다짐한 이유다.”

지난달 6일 미국 경제 전문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66조원 라면 시장을 뒤흔든 여성’이라는 제목으로 김 부회장 인터뷰 기사를 내보냈다. WSJ은 “김 부회장의 삶이 한국 드라마의 한 페이지를 찢고 나온 것 같다”고 했다.

-서울의 명동 불닭집 앞에 사람이 많은 것을 딸과 함께 보고 나서 2012년 불닭볶음면을 만들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당시 딸이 고등학생이었다. ‘앞으로 공부하느라 엄마랑 데이트할 시간이 별로 없을 테니 놀러 가자’고 했다. 내가 예고 출신이라서 명동 지리를 좀 잘 안다. 손수 운전해 뒷골목에 차를 대고 나오는데 불닭집 앞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더라. 사람들이 땀을 뻘뻘 흘려가며 불닭을 먹는 걸 보고 ‘매운 걸 이렇게 다들 좋아하는구나’ 생각했다. 바로 나와 수퍼마켓에서 각종 양념을 사서 회사 직원들에게 나눠 주고 ‘이걸로 제품 좀 만들어 보자’고 했다.”

-직원들도 처음에 ‘사람이 못 먹을 매운 맛’이라고 반대했다던데.

“다들 반대했지만, 굽힐 생각이 없었다. 난 알고 있었다. 매운맛이 이미 무섭게 인기를 끈다는 걸. ‘나가사끼 짬뽕’이라는 제품을 만들면서 청양고추를 슬쩍 넣어봤는데, 난리가 날 정도로 잘 팔렸다. 아이들 학교 끝나고 학원 데려다 주면서 보면, 아이들 열 명 가운데 네댓 명은 이걸 먹고 있었다. 불닭은 더 잘될 거라고 생각했다.”

-시아버지인 전중윤 명예회장도 처음엔 불닭볶음면이 ‘너무 맵다’고 반대했다던데.

“‘사람들 배고파서 먹는 식사는 너무 맵게 만들면 안 된다’고 생각하셨다. 삼양라면도 처음엔 안 매웠다.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나라 최초 ‘모디슈머(자기 입맛대로 제품을 소비하는 사람)’다. 우리 라면을 드셔 본 박 대통령은 아침 일찍 명예회장님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임자, 칼칼하게 고춧가루 좀만 더 넣지’ 하셨다더라(웃음). ‘나가사끼 짬뽕’은 아버님께 살살 빌어가며 만들었다. 불닭볶음면을 드신 시아버님이 ‘이렇게까지 매운 걸 꼭 해야 하느냐’고 하셨을 땐, ‘예, 이건 무조건 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시아버님이 2014년 돌아가셨다. 불닭볶음면이 세계적으로 히트한 걸 못 보고 가신 게 못내 아쉽다.”

 


◇유튜버 등을 통해 세계 시장으로

-2014년 구독자 580만명이 넘는 유튜버 ‘영국남자’가 불닭볶음면을 먹는 런던 사람들 반응을 편집해 유튜브에 올리면서 세계적으로도 인기가 폭발했다.

“계속 준비하지 않으면 잠깐의 운에 그칠 수도 있다. 유튜브, 틱톡 등에서 ‘불닭볶음면 챌린지’를 올리는 놀이가 전 세계에 번지는 것을 보며 우리도 소비자 반응에 발 빠르게 대응했다. 치즈 가루 올려 먹는 유튜브가 터지면 ‘치즈불닭볶음면’을 만들었고, 고추 올려 먹는 사람들을 보면서 3배·5배 매운맛 불닭도 내놨다. 그게 또다시 히트했고 매출도 지속적으로 늘었다.”

 


◇”포스트 불닭? 걱정 없다”

-‘불닭면 이후’를 궁금해한다.

“다들 ‘너희 불닭이 매출의 90%인데 이거 무너지면 어떻게 될지 불안하지 않으냐’고 한다. 그때마다 ‘불닭은 안 무너진다’고 답한다(웃음). 코카콜라는 120년 동안 잘 팔린다. 중국에서 잘 팔리는 굴 소스인 이금기 소스는 지금도 전 세계에서 3조~4조원어치씩 팔리고, 시장점유율의 90%를 차지한다. 불닭도 그럴 거라 믿는다. 매운맛은 생물학 반응에 가깝다. 먹고 나면 땀이 나면서 개운하고 스트레스가 풀린다. 마치 운동을 하면 개운해지는 것과도 비슷하다. 일종의 기쁨을 주는 맛이고, 한번 먹으면 헤어날 수 없는 중독에 가깝다. 게다가 매운맛은 얼마든지 변주가 가능하다. 까르보불닭, 야끼소바불닭처럼.”

-소스 시장을 겨냥한다는 얘기도 있다.

“불닭 소스를 더 묽게 만들고 비율을 잘 맞춰 개발하면 어느 음식에나 뿌려 먹을 수 있는 기막힌 소스가 된다. 외국 출장 나가 보면 테이블마다 케첩, 마요네즈, 타바스코 소스까지 있는데 고추장만 없다. 고추장은 뻑뻑하고 텁텁해 외국 음식에 폭넓게 써먹기 쉽지 않다. 불닭 소스가 거기 올라가면 되겠다 싶더라. 올해 안에 리뉴얼해서 내놓을 거다. 소스 시장은 라면 시장보다 몇 배는 더 크다. 두고 보시라. 이건 된다(웃음).”

-시장 흐름은 어떻게 따라잡나.

“신문 열심히 읽고 소셜미디어 열심히 하고, 젊은 사람들이 관심 가지는 데엔 나도 열심을 쏟는다. 여기 오는 길 차 안에서도 ‘포켓몬고’ 게임을 했다(웃음). ‘포켓몬고’를 해보면 캐릭터 이름이 기막히다. 일본 이름, 한국식·미국식 번역 이름이 다 다른데, 뜻이 쉽고 직관적이다. 이런 걸 볼 때면 나도 제품 네이밍, 마케팅 하는 법을 다시 배운다.”

-삼양라운드스퀘어로 최근엔 지주회사 사명도 바꿨다. 궁극적으로 어떤 회사가 되길 바라나.

“시아버지가 꿀꿀이죽 먹는 우리나라 사람들 위해 일용할 양식을 만들겠다고 시작한 회사가 삼양라면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분이다. 그 정신을 잊지 않고 이어나가고 싶다.”

500만원으로 창업, 매출 10兆 회사로 키워... “내 생애 은퇴는 없다” 김웅기 글로벌세아 회장
출장길 기내에서 쓴 메모 모아 <세상은 나의 보물섬이다> 출간
갈 수 있는 곳까지 멀리 가야 기회 얻을 수 있어
M&A 앞두곤 잠 못 자… 태림페이퍼, 쌍용건설 인수 “이종업계 진출은 숙명”
목숨처럼 지킨 납기… 전세기까지 띄웠다
다음 목적지는 아프리카 진출… 숀 펜과 영화도 찍을 것

 

< 조선일보, 유윤정 생활경제부장 / 김은영 기자,  2024.02.>



은퇴를 하면 고인 물이 될 것입니다. 저는 생이 다할 때까지 쉬지 않고 흐르는 물이 되고 싶습니다. 아직은 물의 유속이 빠른 편이지만 지금보다 세월이 더 흐르면 유속은 느려지겠지요. 그렇다고 고인 물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곁에서 회사를 지켜보는 어드바이저로 남고 싶습니다.


김웅기(73) 글로벌세아 그룹 회장은 은퇴 계획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철저히 기업가로 기억되고 싶다”는 그에게 ‘은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김 회장은 글로벌 섬유 패션 업계에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직장생활을 하다 서른다섯에 퇴사하고 1986년 자본금 500만원으로 글로벌세아의 모태인 세아상역(당시 세아교역)을 창업해 세계 최대 규모의 의류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제조업자개별생산(ODM) 기업으로 일궜다. 이 회사의 하루 평균 생산량은 250만 벌로, 미국 대형 유통사인 월마트, 타겟, 콜스, 갭 등에 수출한다.

또 나산(현 인디에프(785원 ▼ 1 -0.13%)), 쌍용건설, 태림페이퍼, 발맥스기술, 세아STX엔테크, 전주페이퍼 등을 인수·합병(M&A)해 지난해 대기업집단에 포함됐다. 글로벌세아는 2025년까지 매출 10조원, 영업이익 1조원 달성을 목표로 한다.

‘플라잉 맨(Flying Man)’이라는 별명처럼 김 회장은 바쁠 때면 1년에 24일을 비행기에서 보냈다. 일흔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해외 출장이 잦다. 그는 출장길 불 꺼진 기내에서 틈틈이 휴대전화 메모장에 기록한 글을 모아 지난달 경영 에세이 <세상은 나의 보물섬이다>를 펴냈다.

‘남들이 걷고 뛸 때 나는 늘 지구 위 어딘가를 날고 있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미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과테말라, 니카라과, 아이티, 코스타리카 등 전 세계를 누비며 사업을 일궈 온 그의 도전의 순간들이 담겼다.


지난 6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세아빌딩 본사에서 만난 김 회장은 책 속 문장처럼 담담하고 담백한 말투로 출간 소회(所懷)를 밝혔다.

“과거를 모르면서 미래를 설계할 수 없습니다. 현대를 사는 청소년과 미래의 젊은 창업자들에게 38년 전의 창업과 경영에 대해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들이 이 책을 읽고 더 값진 미래를 설계하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그가 세상을 탐험하며 깨달은 사실은 단 하나, 자신이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가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느껴본 사람만이 기회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만난 세상은 온통 보물로 가득했다.

조선비즈는 김 회장의 경영철학을 관통하는 도전 정신과 신뢰, 꿈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 도전 : 본 만큼, 아는 만큼, 거둔다

세아상역은 창업 후 38년간 단 한 번의 적자 없이 지속 성장해 왔다. 외환 위기와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도 비껴갔다. 김 회장이 변함없이 지켜온 원칙은 ‘도전정신’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다 창업했을 때도, 낯선 대륙에 진출할 때도, 모두가 망한 사업에 후발주자로 나설 때도 도전정신으로 뜻을 밀고 나갔다.

1995년 해외 생산기지 구축의 발판이 된 사이판에 진출할 땐 모두가 안 된다며 말렸다. 이미 현지엔 34개의 공장이 있었고, 그들은 ‘더 이상 경쟁력이 없다’며 사업을 접던 중이었다. 그러나 김 회장은 자동화 설비를 갖춘 새 공장을 짓고, 숙련된 인력으로 생산성을 높여 ‘제2의 창업’을 일궜다.

이후 진출한 과테말라도 상황은 비슷했다. 한국계 공장들은 경쟁력 떨어졌다며 철수하는 분위기였지만, 후발주자인 세아가 들어오고 나서 분위기가 반전됐고 과테말라는 의류 수출 전성기를 맞았다.

김 회장은 바람이 불지 않으면 바람개비를 들고 뛰어서라도 바람개비를 돌렸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로 농사를 짓는 천수답(天水畓) 경영이 아닌, 주변의 모든 용수를 이용하는 수리답(水利畓) 경영이라야 기업을 지속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김 회장은 “후발기업들은 선발기업들이 실패한 이유를 분석해 답습하지 않으면 단기간 내 성공할 확률이 높다”면서 “모든 기업은 끊임없이 정진해야 하므로 경영자는 좁은 길은 넓히고 막힌 길은 뚫어야 할 책임이 있다. 경영자가 그런 각오로 경영에 임해야만 회사가 정진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세아상역으로 의류 OEM·ODM 1위 기업이 된 후엔 M&A를 통해 이종 업종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했다. 전 세계를 누빈 그도 M&A를 앞두고는 막연한 불안감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다. 수면 중에도 의식의 절반은 깨어 M&A에 골몰했다. 하지만 김 회장에게 현상 유지는 곧 퇴보를 의미했다.

그는 “시간이 멈추면 어떻게 될까? 지구상의 모든 것들이 죽거나 우주로 사라질 것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라며 “현상 유지는 안정이 아니라 쇠락의 시작이다. 매출과 영업이익, 창조적인 사고와 혁신이 성장을 멈추는 순간 추락은 시작된다. 향후 성장을 다시 하더라도 도태기의 상흔은 어떤 형태로든 회사에 남아 있게 된다”라고 했다.

실제 2020년 인수한 태림페이퍼는 코로나 여파로 온라인 쇼핑이 크게 늘면서 매출과 영업이익이 지속 성장했다. 지난해에는 전주페이퍼 인수 계약을 체결해 국내 제지 시장에서 선두 체제를 굳혔다. 쌍용건설은 인수 4개월 만에 흑자로 돌아섰다. 세아에게 이종 업종 진출은 완전한 성공이었다.

 


영업이익이 전년도와 같을 때 “그래도 떨어지지 않고 유지는 했으니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는가? 그 순간 추락은 시작된다. 나는 창조적 변화를 원한다. 동종 업계에서 1, 2등으로 성장한 기업은 사업 다각화를 위해 이종 업종으로의 진출이 숙명이다. 두렵고 어려운 길이지만 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한두 업종에만 매달려 있을 때 해당 업황이 나빠지면 방법이 없다. 그러나 사업 다각화에 성공하면 위험성은 현격히 감소한다.


<세상은 나의 보물섬이다> 中

 


◇ 신뢰 : 전세기 띄워 맞춘 납기… 신뢰는 생명

도전정신과 함께 김 회장이 강조한 리더십은 신뢰다. 그는 납기를 목숨처럼 지켰다. 창업 초엔 파란 포니 엑셀을 끌고 전국의 원단 공장과 염색 공장을 누볐고, LA 항만 노조 파업 때는 전세기를 띄워 납기를 지켰다. 덕분에 세계 시장에서 세아에 대한 신뢰는 더 커졌다.

코로나19 위기를 넘긴 것도 오랜 기간 쌓은 인연과의 신뢰가 바탕이 됐다. 당시 미 연방정부는 국민들에게 의료용 방호복과 마스크를 지급하기 위해 자국 회사들을 상대로 입찰을 진행했다.

세아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미국 방적 회사 파크데일을 통해 마스크와 방호복 수주에 참여했다. 코로나로 거래처들의 주문이 급감했지만, 세아상역은 방호복 3000만 장, 마스크 2억 장의 주문을 수주했고, 그 결과 2020년 매출과 영업이익이 팬데믹 이전보다 증가했다.

김 회장은 당시 세아상역이 마스크와 방호복을 대량으로 수주할 수 있었던 건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이 창안한 아이티 재건 사업에 참여한 이력 덕분이라 회고했다. 세아상역은 2011년부터 미국 국무부, 미주개발은행, 아이티 정부와 함께 추진 중인 카라콜 산업단지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김 회장을 ‘체어맨’이라 부르는 힐러리 전 국무장관은 2005년 부산 에이펙 총회 기조연설에서 세아상역의 아이티 투자를 ‘무역을 통한 원조’라고 소개했다.

카라콜 프로젝트는 공단과 발전소, 항구, 도로, 주택 5000채를 건설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세아는 2만 명을 고용할 수 있는 공장을 가동하는 것을 목표로 기계 설비를 투자하고 있다. 지난해 아이티 세아학교는 첫 고교졸업생을 배출했다.

김 회장은 “기업의 존재 이유는 이윤 추구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라며 “어려운 국가와 국민을 돕는 인류애를 목적으로 형성된 관계는 그 어떤 관계보다 강한 연대감을 갖게 된다”라고 강조했다.

임직원들과의 신뢰도 중요하다. 그는 임직원에게 비전을 심어주고, 업계 최고의 보상으로 자긍심을 높였다. 세아상역은 가장 많을 때는 부서별로 1000%가 넘는 성과급을 지급했다.

세아가 추구하는 인재는 전문성과 인성을 겸비한 사람이다.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혁신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항상 내일의 변화를 준비하고 창조적인 사고로 최고를 지향하는 사람이다.

김 회장은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며 “내가 생각하는 인재경영은 로열티와 경청, 혁신전략과 도전정신을 가진 인재를 경영자의 주변에 두고, 경영자는 회사와 임직원들을 위한 희생정신의 모범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 꿈 : 희망을 현실로 이끄는 이정표

김 회장은 미술에도 조예가 깊다. 한국 미술품 중 역대 최고가인 김환기 작가의 작품 ‘우주’를 132억원(2019년 낙찰 당시 환율)에 낙찰받아 세계 200대 컬렉터에 이름을 올렸다. 사옥 내 자체 갤러리를 운영하고 무료로 전시회도 연다. 미술은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그의 취미이자, 사회 환원을 위한 수단이다.

아이티 재건 사업으로 인연을 맺은 할리우드 배우 숀 펜과는 영화 제작을 꿈꾸고 있다. 숀 펜은 과거 김 회장이 아이티 사업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영화를 제작하면, 개런티를 1달러만 받고 출연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김 회장은 “나는 몽상가다. 혼자 있는 시간에 많은 생각을 하고, 생각의 열매들은 언젠가 실현됐다”면서 “아이티 관련 시나리오를 썼고, 지금은 우크라이나 관련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언젠가는 숀 펜이 출연하는 영화 제작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젊었을 적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과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경영 에세이를 감명 깊게 읽었다. 이를 통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이 기업가의 본분이고, 도전과 창조의 길이 바로 기업가의 길이라고 깨달았다.

최근 안중근 의사의 유묵(遺墨) 한 점을 얻었습니다. ‘용호지웅세 기작인묘지태(龍虎之雄勢 豈作蚓猫之態)’ 즉, ‘용과 호랑이의 웅장한 기세를 어찌 지렁이와 고양이의 자태에 비하겠는가’라는 뜻이지요. 유묵이 주는 교훈을 글로벌세아 그룹의 표상으로 삼아 대한민국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기업으로 영원히 정진하고 싶습니다.


김 회장은 청년들에게도 도전과 꿈을 강조했다. 그는 “직장생활이든 사업이든 혁신전략에 항상 목말라하고 끊임없이 용기 있게 도전해야 한다”라며 “도전은 꿈과 희망을 성취하는 사다리”라고 조언했다.

그의 사전에 은퇴라는 단어는 없다. 경영자라면 머릿속에 현재에 대한 생각이 50%, 미래에 대한 생각이 50%여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미래 먹거리 발굴을 위한 그의 시선은 아프리카로 향한다.

김 회장은 “앞서 가나와 탄자니아, 케냐를 여러 차례 방문했다. 현재 쌍용건설은 아프리카 적도기니에서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면서 “나에게 있어 아프리카는 꿈과 희망의 대륙이다. 사업의 아이템과 기회가 무궁무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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