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연 영정 사진으로 화제… “전쟁서 아들 잃은 어머니들 찍고 싶다”
40년 사진 인생 회고전 여는 한국현대사진 거장 구본창


40년 사진 인생을 망라한 '구본창의 항해전'을 열고 있는 구본창 사진작가는 "이번 기회를 통해 한 작가가 한국 사회와 유산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보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 조선일보, 김윤덕 기자,  2023.12.18. >




'구본창의 항해'전 개막을 앞둔 2023년 12월12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작가를 만났다. 아버지의 임종을 기록한 '숨' 연작 앞에 선 구본창은 "사멸될 수밖에 없는 모든 것, 삶과 죽음의 경계를 기록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어쩌면 ‘항해’의 시작은 그해 여름, 제주 바다였는지도 모른다. 모국의 공기는 폐쇄적이었고, 강렬한 햇빛은 숨통을 조여왔다. 돈도 없고, 친구도 없었다. 저물녘. 바다를 헤엄치다 뭍으로 올라오던 소년이 그를 구원했다. 양팔로 대지를 딛고 솟구치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셔터를 눌렀다. 구본창은 “40년 전 꼬마의 모습에서 맨몸으로 미지의 땅에 들어서는 날 보는 듯했다”고 말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내년 3월까지 한국 현대 사진의 거장 ‘구본창의 항해’전을 연다.
 

◇지지 않기 위해 걸었다

-왜 ‘항해’인가.

“1972년에 찍은 ‘자화상’이 있다. 남해에 놀러 갔다가 먼바다를 응시하는 내 뒷모습을 찍은 것이다. 새로운 세계를 향한 동경이 늘 있었다. 인생은 항해와 같다.”

-일흔에 여는 대규모 사진전이다. 시립미술관 1·2층을 다 채운 한국 작가의 전시는 처음 보는 것 같다.

“꿈같은 일이다. 1년 전 여기서 권진규 선생의 전시를 보면서 나도 그간의 작업을 한자리에서 펼쳐봤으면 좋겠다는 꿈을 가졌다. 실현될 줄은 몰랐다.”

-85년 독일에서 귀국한 구본창은 한국 사진계의 이단아였다. 스트레이트 사진이 주류였던 사진계에 연출 사진(making photo)을 시도해 사진과 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1차원적 기록 사진, 틀에 박힌 풍경 사진 말고 회화·조각·판화 등 다양한 매체의 속성을 반영한 사진을 보여주고 싶었다. 지금은 흔해졌지만 필름을 태운다든지, 장노출로 초점을 흔들기도 했다. 젊은 작가들과 의기투합해 워커힐미술관에서 ‘사진, 새 시좌(視座)’라는 그룹전을 열었다. 센세이셔널했다”

-한국 현대 사진의 서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지만, 당시엔 ‘이게 무슨 사진이냐’는 비난을 받았다.

“그때만 해도 연출 사진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젊은 작가들을 망친다고 했다. 홍순태 교수님은 ‘이게 무슨 사진이냐’며 나무라셨다(웃음). ‘사진은 사진이다’ 같은 전시가 기획됐을 정도다.”

-귀국 후 부적응으로 죽음도 생각했다던데.

“한국에서 사진을 배운 게 아니라 아는 사람도, 날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다. 시간강사로 뛰었지만 차비 정도 버는 수준이었다. 형과 누나한테 만원, 2만원 꾸러 다니는 처지가 한심하더라. 일정한 수입이 없으니 해외 전시에 초대됐는데도 여권이 안 나왔다. 독재 시대였고 도시는 무질서했다. 모든 게 제로였다.”

-난파되지 않고 어떻게 항해를 지속했나.

“지지 않기 위해 카메라 2대를 메고 걷고 또 걸었다. 익명자로 세상을 떠돌며 쉬지 않고 찍었다. 제주 바다의 그 소년도 그렇게 만났다.”
 


한국 현대사진의 거장 '구본창의 항해' 전시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2024년 3월 10일까지 열린다. 사진은 제주 바다에서 만난 소년. 저물녘 헤엄을 치다 뭍으로 올라오는 아이를 찍었다.

  


◇쓸모없던 사내아이

-연세대 경영학과를 나와 대우실업에 다니다 6개월 만에 사표를 내고 독일로 갔더라.

“매일 아침 8시 출근해 밤 8시에 퇴근했다. 주말도 거의 없다시피 일했다. 제일 싫은 건 술과 노래 왁자한 회식이었다. 그렇게 계속 살 순 없었다. 사표를 쓰고 독일 주재원을 찾는 작은 무역회사에 들어갔다.”

-개성 사람으로 섬유업을 하던 부친은 펄쩍 뛰셨다고.

“네 유학비 댈 돈은 없다고 하시더라(웃음). 형(구본영 전 과기처 장관)이 당시 미국 유학 중이기도 했다. 그 좋은 회사 들어가 한창 돈 벌어야 할 나이에 무슨 예술이냐고 혀를 차셨다.”

-원래 미술을 좋아했나.

“초등학교 때부터 미술반이었는데 중학생 때 천재적 재능을 가진 친구를 보고 화가의 꿈을 접었다. 대신 명동 뒷골목에서 구한 일본 잡지, 아버지가 출장길에 사오신 뉴요커와 명화집에 심취했다. 클림트의 ‘키스’를 그대로 따라 그린 습작이 이번 전시에도 나왔다.”

-함부르크 조형미술대에서 유학했다.

“일하면서 공부했지만 정말 행복했다. 한국에선 받지 못한 칭찬을 매일 들었다.”

-칭찬이라니?

“한국에서 난 늘 핀잔거리였다. 사내 자식이 밖에 나가서 뛰놀지 왜 잡동사니를 모으고 그림을 그리냐고. 서울중, 서울고, 서울대를 가뿐하게 들어간 형과 달리 나는 쓸모없는 아이라는 열등감에 시달렸다. 그런데 독일에선 모든 교수들이 내 과제를 칭찬했다. 날 있는 그대로 인정해줬다. 날개를 달았다(웃음).”

-내성적이고 섬세한 성격이 독일과 맞았나 보다.

“학창 시절 전혜린을 읽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 나오는 뮌헨의 풍경, 낭만, 검은 옷을 동경했다. 말수 적은 독일 사람들이 좋았고, 사생활을 캐묻지 않아서, 왜 장가 안 가냐고 묻지 않아서 좋았다(웃음). 분데스리가에서 누가 골을 넣었는지 관심이 없는 미술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난 행복했다.”

-왜 사진이었나?

“순간 포착의 즐거움, 뭣보다 결과가 빨리 나와서 좋았다. 돈은 없지만 아름다운 풍경과 물건을 카메라에 담는 순간 내 것이 된다는 희열감도 컸다.”

-토스카나 중세 마을에서 찍은 두 할머니 등 초기 유럽 연작은 시적이고 영화적이다.

“디플롬(석사 학위)을 받을 무렵 교수들은 내게 더 이상 자극을 주지 않았다.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내가 좋아하는 작가 안드레 겔프케에게 무작정 전화를 걸고 찾아갔다. 뒤셀도르프에서 만난 겔프케는 내 사진을 보고 ‘유럽인이 찍은 건지 한국인이 찍은 건지 모르겠다’고 하더라. 너의 눈으로 너의 이야기를 하라고 충고했다. 조형적으로 완벽하고 아름다운 사진만이 최고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13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구본창의 항해' 전시. 12개의 백자를 달이 뜨고 지는 형상으로 전시한 연작이 보인다. 
 

◇백자, 숨 그리고 DMZ

-구본창의 ‘백자’ 연작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80년대 어디선가 커다란 달항아리 옆에 서양 할머니가 앉아 있는 사진을 본 적이 있다. 항아리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이 할머니와 묘하게 어울려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로부터 15년 뒤 교토를 여행하다 일본 잡지에 특집으로 소개된 조선 백자를 보고 그 기억을 떠올렸다. 우리만 모르는 우리 백자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백자를 피사체로 삼은 첫 작가였다던데.

“그때만 해도 조선 자기 하면 고려청자를 의미했다. 속을 텅 비워 무욕의 아름다움을 성취한 백자의 손맛을 담아내고 싶었다. 조선 백자를 소장한 전 세계 박물관에 연락해 일일이 허락받고 촬영했다. 이번 전시엔 12개 항아리가 달처럼 뜨고 지는 형상으로 구성했다.”

-그림자 없는 백자 사진은 회화처럼 보인다. 얼룩, 흠집도 그대로 드러냈다.

“구름 위에 떠 있는 듯 아스라하게 찍고 싶었다. 수수하고 단아한 기품을 드러내기 위해 조명을 변주했다. 시간의 흔적은 내 사진의 주요 테마다. 손때 묻은, 하잘것없는 얘기들이 쌓여 역사를 만든다고 믿는다.”

-아버지의 임종 사진으로 유명한 ‘숨’ 연작도 사랑받는다.

“말라가는 식물처럼, 치매를 앓는 아버지의 육체에서 물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멸될 수밖에 없는 모든 것, 그들의 마지막 경계, 혹은 영혼의 흔적을 기록하고 싶었다. 형은 화를 냈다(웃음).”

-개인적으로는 DMZ 연작이 좋았다.

“한국전쟁 60주년 기념으로 국방부가 기획한 그룹전을 위해 찍었다. 누구는 군인을 찍고, 누구는 DMZ를 찍었는데 나는 총탄에 뚫린 철모, 주인의 생명이 빠져나간 허리띠, 일그러진 군화를 찍었다.”

-전사한 아들이 살아 돌아올 거라 믿고 평생을 산 101세 어머니 사진이 뭉클했다.

“양손에 긴 염주를 받쳐 들고 꼿꼿이 앉아 카메라를 응시하는 사진이다. 한 프랑스 평론가는 ‘피에타상을 연상시킨다’고 하더라. 이번 전시엔 나오지 않았다.”

-구본창은 오래된 사물을 피사체로 즐겨 찍는다.

“개성 상인 집안이라 그런지, 우리 집은 어떤 물건이 완전히 닳아서 없어질 때까지 아끼며 사용했다. 쉽게 버리지 못하는 습관이 어릴 때부터 배어, 원기소 통이며 작은 상자에 잔뜩 모아놨다가 이사할 때도 끌고 다녔다. 옛날 잡지, LP판, 어머니 저고리까지. 값어치 나가는 건 없지만 내겐 보물 창고이자 영감의 원천이다.”

-햇볕이 쨍한 날보다 구름이 낀 날 촬영하는 걸 더 좋아한다고 했더라.

“구름이 낀 날 찍으면 사진이 훨씬 부드러워진다. 햇볕이 강하면 모든 게 날카로워진다. 독일의 흐린 날씨에 익숙해서였는지도 모른다(웃음).”


◇영정 사진이 된 강수연의 B컷

-구본창을 상업 사진가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귀국해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는 내게 대학 동기인 배창호 감독이 일거리를 줬다. 현대상사를 관두고 영화에 뛰어든 친구라 동병상련이었다(웃음). ‘기쁜 우리 젊은 날’ 포스터를 찍을 때 스튜디오도 없이 연세대 교정, 홍대앞 카페에서 황신혜를 촬영했는데, 독일에서 소품으로 사용했던 내 마후라를 목에 두르게 해 찍었더니 태흥영화사 대표가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그 후 태흥의 일을 도맡아 했다.”

-패션 화보, 배우들 촬영도 많이 했더라.

“주어진 숙제는 뭐든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다(웃음). 내 작업에도 자극이 됐다. ‘서편제’ ‘취화선’ 등 임권택 감독 작품을 많이 찍었고, 이창동의 ‘시’에서 윤정희 선생을 찍은 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강수연의 영정 사진이 구본창이 찍은 ‘B컷’이어서 화제가 됐다.

“세상을 떠난 날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가 좋아했던 사진인데 영정 사진으로 쓰게 해달라고. 잡지 ‘바자’가 의뢰해 ‘타임리스 뷰티’라는 테마로 촬영했던 건데, 빨간 옷이라 영정으로 쓸 수 있을까 주저하다 잡지에 실리지 않은 컷을 찾아 전달했다. 강수연은 시원시원하고 강단 있어 보이지만 외로움도 깊은 배우였다.”

-구본창의 항해는 계속 이어질까.

“전쟁으로 아들 잃은 어머니들을 찍고 싶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쪽 모두의 어머니들. 매일 수십, 수백 명이 죽고 있는데 난 여기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어도 되나 하는 죄책감이 든다.”

-제2, 제3의 구본창이 되고 싶은 후배들에게.

“꿈은 꾸는 자만이 가까이 갈 수 있다는 말을 좋아한다. 처음부터 원대한 꿈을 이루려 말고 작은 것부터 하나씩 일궈가라고 말해주고 싶다. ‘모든 구름에는 왕관이 있다(Every cloud has a crown)’는 말처럼 구름 뒤에 올 햇빛을 기다려야 한다.”

 


☞구본창

1953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대우실업에 입사해 6개월 다니다 독일 함부르크 조형미술 대학으로 유학, 사진 디자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열두 번의 한숨’ ‘긴 오후의 미행’을 시작으로 ‘백자’ ‘숨’ ‘태초에’ 연작 등 다수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휴스턴 미술관·국립현대미술관·리움 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김성근 “내 인생은 파울, 파울, 파울…끈질기게 다음 기회 노렸다”
약팀을 강팀으로 바꾼 ‘野神’
야구장의 철학자 김성근 감독

 

< 조선일보, 박돈규 기자,  2023.12.16.  >


프로 통산 1384승 1202패를 거둔 김성근 감독은 “비상식으로 싸워온 벼랑 끝 인생이었다”고 회고했다. “혹사 논란에 비난도 숱하게 들었지만 악조건 속에서 문제를 돌파하려면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프로야구에서 김성근(81) 감독보다 많이 잘린 사람은 없다. 그런데 별명이 ‘야신(野神)’이다. 알쏭달쏭한 일이었다. 한국 프로야구 감독직에서 일곱 번이나 퇴출당한 사람이 어떻게 ‘야구의 신’으로 불릴 수 있을까.

지난 11일 서울숲 근처 카페에서 김성근 감독을 기다렸다. 주룩주룩 비가 내린 날이었다. 질문을 30개쯤 준비했다. 직구와 변화구를 이쪽저쪽으로 섞어 던져야지 마음먹었다. 그 질문들을 야신이 어떻게 받아칠지 궁금했다.

인생은 순간이다. 김 감독이 지난달 펴낸 책 제목이었다. 띠지에 “죽었다 깨어나도, 나이를 먹었다 해도 계속 성장하지 않으면 자리가 없다”는 문장이 쾅 박혀 있었다. 15일 현재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종합 15위.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여러 군데 밑줄을 그으며 ‘김성근은 야구장의 철학자’라고 생각했다. 진지한 표정으로 나타난 팔순의 감독에게 초구를 던졌다. 좋은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나는 ‘어차피 (안 될 거야)’ 속에서 ‘혹시 (될까)’라는 조그만 희망을 만드는 것, 그게 좋은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어떤 결실을 보는 일을 여지껏 해 왔습니다. ‘김성근에게 맡기면 반드시 새로운 야구를 한다’는 불문율을 만들어냈지요.”

김성근은 좌완 정통파 투수였지만 부상으로 선수 수명이 짧았다. 그가 좋아하는 별명은 ‘잠자리 눈깔’이다. 더그아웃에서 투수들 그립이 다 보인다고 해서 붙은 것이다. 노(老) 감독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봐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김성근을 만든 건 시행착오


‘야신’은 작년 말에 지도자 은퇴를 선언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야구 예능 프로그램의 감독직을 맡았다. 갈매기가 물가를 떠날 수 없듯이, 그라운드 바깥의 삶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 아닐까.

-은퇴했는데 왜 또 감독직을 맡으셨나요.

“프로 지도자를 안 한다는 것이었지 야구를 떠난다는 뜻은 아니었어요. 예능 프로 안 했다면 요즘도 전국을 돌아다니며 아마추어 선수들을 봐주고 있을 거요. 이제 프로야구에서는 김성근을 안 쓰잖아요?(웃음)”

-별명이 ‘야신’인데 감독과 코치를 합쳐 13번 잘렸다고 들었습니다.

“(눈이 휘둥그레지며) 13번이나? 하도 많아 셀 수가 없어요. 그런데 잘렸다는 건 바깥에서 하는 이야기지, 실제로 내가 잘렸는지 내 발로 나갔는지는 모를 거요. (반반인지 묻자) 내 선택이 더 많았어요. 미련이 남지 않을 만큼 전념했기 때문에 그렇게 끝나는 게 두렵지 않았고요. 내가 노상 하는 말이 있어요.”

-그게 무엇인가요?

“나만의 인장(印章), 무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딜 가도 산다. 세상이 다 외면해도 누군가는 그 사람을 보고 있다는 뜻이에요. 나는 프런트하고 자주 싸우는 말썽꾸러기였어요. 그런 감독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김성근을 데려가면 팀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인장을 가지고 있으면 찾아오고 결국 데려가는 거요.”

-’벌떼 야구’부터 떠오릅니다. 인생을 돌아보면 김성근의 인장은 어떤 것이었나요.

“나는 사람들한테 이해가 잘 안 되는 야구를 했어요. 특출난 투수가 없으니 여러 명이 힘을 합쳐 틀어막는 ‘벌떼 야구’도 그중 하나였지요. 돈을 10원 가진 팀이 1000원 가진 팀과 싸우는데 평범하게 하면 절대 이길 수 없어요. 어마어마한 아이디어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이길지 고민하고 비상식적 승부수를 던지는 것, 그게 김성근 야구였어요.”

-1942년 일본 교토 출생인데 고교 시절에는 어떤 선수였습니까.

“소질이 없었어요. 공이 거의 가지 않는 우익수에 9번 타자를 맡았습니다. 투수 권유를 받고는 강에 가서 하루에 200개씩 돌멩이를 던졌어요. 가난했지만 ‘가졌냐, 못 가졌냐’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되게 한다’는 방향만 생각했지요.”

-야구 잡지 속 선수들의 연속 사진을 보면서 투구를 흉내냈다면서요?

“아르바이트로 노가다를 했는데, 지붕으로 흙을 던질 때도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연구했어요. 버스를 타면 빈자리에 앉지 않고 서서 중심 잡는 연습을 했지요. 우유 배달을 할 땐 시간을 매일 단축하는 게 즐거움이었고요.”

-그야말로 악조건이었네요.

“부모를 원망한 적은 없어요. 누구한테 기대지도 않았고. 그건 악조건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까지 야구를 할 수 있게 만든 좋은 바탕이었다고 생각해요. 절박하니까 배운 거요.”

-책에 ‘김성근을 만든 건 무수한 시행착오’라고 쓰셨더군요.

“나는 프로 감독이 된 지 25년 만에 첫 우승을 했어요. 태평양 돌핀스, 쌍방울 레이더스 같은 꼴찌팀을 주로 맡아 2~3등으로 올려놓곤 했습니다. (탁자 모서리를 만지며) 나는 늘 이런 벼랑 끝에서 살았어요. 한복판에 있는 사람들, 즉 주류는 도전 의식이나 투지가 약해요. 하지만 나는 내일 어떤 위기가 닥칠지 모르니 살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시행착오가 많았다는 것은 결국 실패하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그만큼 고민하고 도전하고 결과를 냈으니 ‘시행착오가 많은 인생이야말로 베스트’지요.”

 


◇인생은 파울볼을 치며 버티는 것


선수 김성근은 1961년 한국으로 건너와 실업야구팀 ‘교통부(국토교통부의 전신)’에 입단하자마자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호투했다. 하지만 왼팔 통증으로 1966년을 끝으로 투수 생활을 접었다.

-전성기가 너무 짧았습니다.

“이적한 실업야구팀 ‘기업은행’의 마산지점으로 발령받았고 69년에 마산상고 감독으로 야구를 다시 시작했어요. 은행원일 때 도장 찍기와 서류 복사 말고는 일이 없어도 출근해 묵묵히 내 일을 했습니다. 운 탓, 남 탓을 하며 비관했다면 다시 야구할 기회를 얻지 못했을 거요.”

-그래도 참 막막했을 것 같은데.

“지금과 달리 당시는 그 순간에 모든 것을 바치던 시대였어요. 내가 살겠다는 시대가 아니라 내가 싸우겠다는 시대였습니다. 그런 각오로 덤비지 않으면 결국 선수 수명이 짧았어요. 나는 어딜 가나 이 팀을 위해 모든 걸 바치겠다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책에 ‘요즘은 교과서와 참고서가 없는 세상’이라고 썼는데.

“각자 답을 만들어가야 하니까요.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참 대단하고, 한편으로는 포기가 너무 쉬운 것 아닌가 안타까울 때가 있어요.”

-어디서 그런 걸 느끼나요.

“답은 자기한테 있는데 그걸 알면서도 실행하지 못하잖아요. 다음으로 미루거나 남의 아이디어에 기대려고 하죠. 뭐가 막혔다면 당장 이렇게 뚫을까 저렇게 뚫을까 고민하고 시도해야 해요. 야구나 인생이나 ‘져도 그만, 이겨도 그만’이 아닌, ‘왜 졌나, 왜 안 풀렸나’를 연구하면 해결책이 보입니다.”

-경험이 부족한 탓 아닐까요.

“(고개를 흔들며) 부닥치질 않아서 그래요. 일단 부닥쳐야 아이디어가 나옵니다. 인생은 파울볼을 치며 다음 기회를 보는 타자와 같아요.”

-방송을 보니 그 연세에도 하루에 수백 개씩 펑고를 치시더군요. 솔직히 힘들지 않나요.

“지금 왜 펑고를 쳐야 하고 어떻게 쳐야 하나 등을 생각하다 보면 힘들다는 의식이 들 틈이 없어요. 타격이 끝난 다음엔 몸이 힘들지만, 목표가 있잖아요. 세상 살면서 제일 중요한 건 ‘나는 뭘 해야 한다’고 의식하며 사는 겁니다. 열심히 펑고를 쳐서 어떤 선수가 실수를 깨닫고 나아지는 모습을 보는 게 낙이에요.”

-한화이글스 감독을 맡고 김태균 선수에게 ‘너는 3루에서 반쯤 죽었다’고 공개적으로 말한 적이 있지요?

“김태균이든 누구든 이 포지션(자리)이 되면 저 포지션으로도 갈 수 있어요. 여기는 누구 자리다, 이렇게 고착돼 있으면 팀이 옴짝달싹 못 합니다. 반대로 수비 범위가 커지면 그 선수는 앞으로 살아갈 길이 더 넓어지는 거요.”

-한계를 높여나가라는 뜻이군요.

“스스로 한계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관짝에서 죽기만 기다리는 것과 같아요. 앞서 가야지 왜 ‘난 이만하면 됐어’ 하면서 뒤처지나요? (스스로 한계를 여러 번 뛰어넘었다고 생각하는지 묻자) 뛰어넘고 말고 그런 문제가 아뇨. 개발하지 않으면 앞으로 못 나간다는 뜻입니다. 만족하는 순간 끝장이에요.”

-한국시리즈에서 마침내 우승했을 때는 어떤 기분이었습니까.

“사람들은 환호했지만 나는 ‘아, 끝났구나’였어요. 기쁘기보다 ‘다음에 뭘 해야 하나’라는 생각부터 했습니다. 늘 그랬어요. 8회에 우리 팀이 홈런을 쳐서 역전하면 만세 부르고 난리가 납니다. 얻어맞은 쪽에서는 ‘이제 어떻게 공략할까’ 전략을 풀가동 하지요. 그럼 나는 어떻게 막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홈런에 도취되면 역전패를 당하는 거요.”

영화 ‘파울볼’은 김성근 감독이 이끈 독립 야구단 고양원더스의 1093일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버려지거나 방출된 ‘야구 실직자들’의 패자부활전을 담았다.  

 


◇나는 비관적 낙관주의자


‘파울볼’(2015)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김성근 감독이 이끄는 한국 최초 독립구단 고양원더스에서 지옥훈련을 견뎌내며 프로 진출을 꿈꾸는 선수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타자에게 파울은 실패지만 다음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에서 완전한 실패는 아니지요.

“그게 야구가 알려주는 인생이에요. 감독부터 선수들까지 다 잘려서 모인 사람들이었어요. 나야말로 파울을 무지하게 친 사람입니다. 누구든 실패를 겪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기회가 온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어요.”

-‘야구 실직자들’의 패자부활전 같았습니다.

“그때 선수들에게 말했어요. ‘이 과정을 거쳐 성공하면 다행이고 혹시 그렇지 못한다 해도 너희들이 도전하고 시도했던 정신만큼은 평생 잊지 마라.’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그 다큐에서 ‘너희들은 벼랑 끝에 섰고 뒤가 없어. 여기서 떨어지면 죽는 거야’라고 한 말씀도 떠오릅니다.

“내 밑에 들어온 선수들은 다 키워야 해요. 자식과 똑같아요. 엄격하게 대하고 혹독하게 훈련시킵니다. 부족하다고 자식을 버릴 순 없잖습니까. 미래를 만들어줘야죠. 꼴찌를 일등으로 만드는 비법이 뭐냐고들 묻는데, ‘부모의 마음’으로 대하면 됩니다. 좋은 감독이란 사명감을 가지고 결과를 만들고, 선수에게 대가를 돌려주는 사람입니다. 한계를 넘어서면 선수 자신이 그걸 가장 먼저 알아요.”

-감독님은 비관적 낙관주의자라면서요?

“근본은 비관적이지만 해결할 방법을 찾을 땐 낙관적으로. 내 성격 중 이런 점이 가장 좋아요. 이길 것 같을 때는 비관하고 질 것 같을 때는 오히려 낙관합니다. 뭐가 닥칠지 모르는 인생에서 그게 최선의 준비라고 생각했어요.”

-나만의 위기 관리법이라면.

“한마디로 ‘늘 최악을 가정하고 최선을 준비한다’입니다. 그럼 어떤 위기가 와도 당황하거나 흔들리지 않아요. 역설적으로, 위기 자체가 거의 오질 않지요.”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1~2차전을 모두 두산에 졌을 땐 어떻게 하셨나요.

“감독실에서 새벽까지 끙끙 앓다가 ‘2패를 했어도 아직 괜찮잖아?’라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나는 그해 우승에 ‘아직’이라는 마음가짐이 큰 기여를 했다고 봐요. ‘벌써’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우승은 없었을 겁니다. 살아 보니 인생에서는 잘 버리는 게 중요해요. 선입견을, 상식을, 과거를.”

-때로는 위로도 필요하지 않습니까.

“아뇨. 위로를 받아들인다는 건 내 앞길을 막는 행위요. 2009년 SK가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졌는데 뼈아픈 패배였어요. 그날 최태원 회장이 ‘김 감독, 잘했어요’라고 위로했습니다. 나는 열이 받았고 독을 품었어요. 차라리 ‘김 감독, 똑바로 안 합니까?’ 말해주길 바랐지요. 승부의 세계에서는 위로가 아니라 패기가 필요해요.”

김성근은 김응용 감독이 이끌던 해태 타이거즈 2군 감독으로 들어간 적이 있다. “동기여서 누가 누굴 가르치고 배울 관계는 아니었다. 김응용의 해태가 왜 강팀인지, 어떻게 통솔하는지 궁금해서 밑으로 들어갔다. 무식을 창피해하면 안 된다. 공부만이 살길이다.”  

 


◇리더는 존경을 바라지 않는다


김성근은 가늘고 길게 살려고 하지 않았다. “굵고 짧게 사는 게 오히려 길게 사는 법인데 다들 그 사실을 모른다”고 책에 썼다. 무슨 뜻인지 묻자 그는 “가늘고 길게라는 건 그냥 살겠다는 사람이지 싸우겠다는 사람이 아니다”라며 “세상에는 매번 전력투구를 하는 사람이 필요하고, 그러는 사이에 자기도 모르게 성장하는 것”이라고 했다.

-선수들을 보며 느낀 게 있다면.

“50년 넘게 지도자 생활을 하며 무수히 많은 선수를 만났어요. 내가 느낀 거요?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운명도 달라집니다.”

-가장 미련한 짓은 뭡니까.

“실패에 붙잡혀 있든 성공에 도취돼 있든 과거에 매여 있는 거죠. 내가 프로 감독으로 1384승을 올렸지만 그게 오늘의 승리를 보장해주지는 않아요. 세상에서 제일 나쁜 것은 만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겼다고 만족하면 내일 어김없이 져요.”

-감독 생활 내내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말이 ‘혹사’인데.

“김성근이 연습을 너무 많이 시킨다고 손가락질했지요. 거꾸로 내가 묻고 싶습니다. 8000m급 에베레스트를 올라가고자 하는 등반가가 그 목표를 이루려고 1000m, 3000m의 산을 훈련 삼아 오른다면 그걸 혹사라고 할 수 있나요? 야구뿐만 아니라 기업도 정치도 모두 열심히 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어렵습니다.”

-요즘 ‘세대교체’가 유행입니다.

“한국 사회는 경험을 무시하고 베테랑을 괄시해요. 젊은 사람으로 다 바꾼다고 조직이 강해지지는 않아요. 나는 선수가 나이를 먹어도 능력이 있으면 적재적소에 기용했습니다. 물론 노력하지 않는 베테랑은 쓸모가 없고요.”

-야구 예능 개막전 때 이대호를 스타팅 멤버에서 빼자 박수를 받았습니다.

“그런 일로 박수를 친다는 게 우리 사회에 무엇이 부족한지 보여주는 것 아닌가 싶어요. 어느 조직이든 윗사람들이 과감한 결단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대호를 뺌으로써 팀에 충격이 오고 반대로 기회를 잡을 선수가 나와요. 조직을 해친다면 쳐내야죠. 지금 우리나라에서 제일 못하는 게 이런 결단이에요.”

-숱하게 잘리고도 성공한 리더로 통하는 비결이라면.

“나는 파벌이나 연줄이 없고 윗사람에게 아부하는 성격도 아니었어요. 살아남을 길은 하나, 내가 강해지는 것뿐이었습니다. 리더는 사실 고독한 자리요. 흔들려도 흔들림을 보여주면 안 돼요. 감독의 불안이 선수들에게 전해지면 시합을 하기 전부터 진 것이나 마찬가지요.”

-요즘도 강연 요청이 많나요?

“전보다 뜸하지만 불러주면 나갑니다. 국가기관이나 대기업, 정치권에서 강의를 요청하는 걸 보면 야구 감독에게도 배울 게 있는 모양이에요. 진정한 리더는 존경을 바라지 않아요.”

-그럼 무엇을 바랍니까.

“즐거운 야구니 깨끗한 야구니 하는 건 야구를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리더는 모든 식구들의 살림을 책임지는 사람이에요. 내 밑에 선수가 100명 있으면 식솔까지 500명, 그들의 밥줄이 내 손에 맡겨져 있는 셈입니다. 철은 뜨거울 때 때려야 해요. 리더라면 ‘아프냐?’ ‘괜찮냐?’ 묻지 말고 그저 따르도록 해야 합니다. 존경 대신 신뢰를 받아야 해요.”

펑고(fungo)라는 단어는 ‘재미있게 한다’는 데서 유래했다. 노(老)감독은 “실제로 펑고는 즐거움의 경지에 들어가는 일”이라고 했다. 젊은 사람들을 향한 당부는 뭘까. “처음부터 즐겁다는 생각을 가져야지, 고되다거나 힘들다고 생각하면 시작도 못 해요.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의식을 가지느냐에 따라 결과가 바뀝니다. 그저 편하고자 한다면 죽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요.”

후려치는 죽비 같았다. 삶이라는 타석에서 그가 지켜온 철학이었다.

"본인 작품이 보석? 내겐 똥이다"…'핵개인' 윤종신 롱런의 비결

 

 

< 중앙일보, 폴인 기자,  2023.12.11  >

 


송길영X윤종신 인터뷰

윤종신 : 엔터테인먼트 기업(미스틱스토리) 대표 프로듀서, 가수 출신 방송인(JTBC ‘싱어게인3’ 심사위원장)….

 

요즘 MZ세대에게 윤종신은 그런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본업은 엄연히 가수다. 그것도 14년째 혼자 힘으로 매달 새 곡을 발표해 온(‘월간 윤종신’ 프로젝트) 현역 싱어송라이터. 최근에는 생성형 인공지능(AI)을 이용해 앨범 커버도 직접 만들고 있다.

윤종신은 왜 업계의 문법을 깨고 ‘나만의 길’을 걷고 있을까. 그는 “스스로 ‘플랫폼’이 돼 남들의 평가에서 벗어났다”고 말했다. 최근 베스트셀러『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저자 송길영 마인드마이너와 만난 자리에서다. 송 마인드마이너는 그를 ‘자기 서사’를 만든 대표적인 ‘핵개인(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 주체적 의사결정권을 가진 사람)’으로 꼽았다.

두 사람의 대화를 ‘성장의 경험을 나누는 콘텐트 구독 서비스’ 폴인이 정리했다. 전문은 폴인 홈페이지(https://www.folin.co) ‘핵개인: 자기 서사를 만든 사람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수 윤종신에 이어 작가 이슬아, 유튜버 이연, 방송인 노홍철 인터뷰가 연재될 예정이다.

 


흥했다? 망했다?… 평가 대상에서 벗어나다


송길영(이하 송): (책에서) ‘핵개인’이란 키워드를 던지며, 윤종신 씨가 떠오르더군요.
윤종신(이하 윤): 저 노래도 있어요, ‘개인주의’라는. (웃음) 젊을 때는 단체주의자에 가까웠어요. 40대 넘어가며 바뀌었죠. 특히 ‘월간 윤종신’을 하며 ‘개인이 훨씬 유리하다’라는 쪽으로 생각이 갔어요.

송: 이유는요?
윤: 사람들이 뭉쳐서 상향 평준화된 걸 본 적이 별로 없어요. 저는 제 아이들한테도 그러거든요. ‘우리 가족이란 단체에 너무 휘둘리지 마라’ ‘스무 살이 되면 잘 떠나라, 잘 흩어지자’고요.

송: ‘월간 윤종신’은 어떻게 하게 된 건가요?
윤: (앨범을 팔기 위한) 마케팅이 부담스러웠어요. 나 좋아하는 사람은 일부인데, 너무 많은 걸 쏟아붓는 거 아닌가? 그러던 중에 트위터가 등장했어요. 제 팔로워가 20만명이 넘어갔죠. 그걸 보며 생각했어요. ‘꾸준히 음악을 내면 나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일 테고, 그들에게 한 달에 한 번 “나 음악 냈어요” 알린다면?’

송: 흥행에 대한 욕심은 내려놓은 건가요?
윤: ‘월간 윤종신’의 가장 큰 미덕이 ‘흥했다, 망했다’의 기준이 없어져 버렸다는 거예요. ‘월간 윤종신 노래 잘 안 됐다며?’가 아니고 ‘월간 윤종신 아직도 해오고 있다며?’가 된 거죠. 그게 좋은 점 중 하나예요.

송: 놀라운 발견이네요. 이제 신경 안 쓰는군요.
윤: 안 쓰죠. 신경 안 쓰려고 매달 낸 거예요. (웃음)

 


과거는 ‘똥’… 앞으로가 중요, 그건 ‘보석’

송: 좋은 걸 가지고 있는데 보여주지 못하는 분도 있어요. ‘아직 부족해’하면서요.
윤: 자기 (과거) 작품을 보석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저는 똥, 창작적 배설물이라고 생각하거든요(웃음). 저는 앞으로 할 게 훨씬 중요해요. 그건 보석이죠.

송: 어떻게 매달 가사를 쓰나요?
윤: 뭔가 떠오르면 짧게 한 문장, 한 어절 정도라도 써요. 그게 하나의 곡이 돼요. 노래도 결국 이야기더라고요. 이야기할 게 없으면 아무리 사운드가 멋져도 소용없어요. (웃음)

송: 심지어 이제 기술도 중요하지 않죠. AI로 글, 이미지, 음악까지 만드니까요.
윤: 저는 올해부터 앨범 커버 작업을 (이미지 생성 AI인) DALL·E랑 해요.

송: 역시! 제작(부담)이 훨씬 가벼워지겠네요.
윤: 네. 가끔은 가사도 챗 GPT랑 대화하며 힌트 얻기도 해요. ‘정확성이 떨어진다’고들 하는데 저는 모티브만 얻으면 되거든요. 소설 같은 얘기라도 엄청 도움 되더라고요.

송: 앞으로 ‘행위’를 파는 건 쉽지 않아요. (반면) 내 스타일이 있으면, 그만큼의 지적 재산(IP)을 요구할 수 있거든요. 캐나다 가수 그라임스가 “내 목소리 써라, 대신 수익의 절반을 달라”고 한 것처럼요.
윤: 맞아요. 사람들은 ‘생성 AI가 (가수의) 표정, 목소리까지 복제하는 데, 앞으로 어떡하지?’ 그러는데, 더 좋죠. ‘AI 윤종신’이 나오면 나랑 (수익을) 쉐어해야죠(웃음).

 

깨달음 늦지만, 깨달으면 바로 실행… 지금도 깨닫는 중


송: 결국 ‘나만의 고유성’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군요.
윤: 맞아요. 저는 오디션 심사할 때 잘 못 해도 와일드한 사람을 좋아해요. (다른 심사위원들은) 대부분 완성도를 따지는데, 그건 다른 사람도 하면 할 수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의 고유성은 못 따라가요.

송: 본인은 스스로 본인의 무대(‘월간 윤종신’)를 만들었잖아요.
윤: 누구에게나 다 자기 무대가 있어요. 작지만 다 플랫폼이 될 수 있죠. 제 생각에 핵개인화의 가장 큰 요인은 플랫폼인 것 같아요. 사람들 취향을 취합해 주잖아요. 이용할수록 내 취향이 축적되고, 비슷한 걸 추천받고. 가수 입장에서는 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 군데 모이고. 심지어 내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직업군, 남녀 성비도 보여주니까요.

송: 시대 변화를 빠르게 읽고 반영해 오신 것 같아요. 동시대성의 비결은 뭔가요?

윤: 제가 약간 늦게 깨닫는 사람이라 그런 것 같아요. 저는 깨달음은 늦을수록 좋다고 생각해요. 깨달을 만한 나이에 깨달아야 되기 때문에. 저는 스스로 (일이) 식상해질 때쯤, 그러니까 데뷔 20년 차에 제가 깨달은 걸 곧바로 실행해 버렸거든요. 그동안 해오던 걸 버리고요. 그러니까 좀 프레시해 보이는 것 아닌가. 지금도 여전히 깨달아가고 있고요.

송: 결국 실행의 힘이네요. 누가 해결해 주길 바라지 않고 그냥 하신 거예요.
윤: ‘떠오른 건 그냥 한다’ ‘지금 떠오른 건 최소한 다음 달에 내야 한다, 내년에 낼 수 없다’죠. 사실 저는 컨템포러리가 안 돼도 상관없어요. 요즘은 53세면 53세 다운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30년 넘게 음악 했으면 그에 맞는 보수성도 있어야 한다는 거죠. 무조건 프레시해야 한다는 건 강박 아닐까. 저는 가끔 익숙한 게 좋아요.

“가난한 탈북 화가라 힘들지 않냐고요? 저는 너무 행복합니다”
맨몸으로 한국살이 11년, ‘숟가락 화가’ 오성철

< 조선일보, 배준용 기자,  2023.12.09.  >

 


“북한에는 화가라는 말이 없으니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거기선 그냥 다 그림쟁이, 화공이죠.”

어릴 때부터 북한이라는 세계에서 늘 숨이 막혔다는 소년. 막연히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그는 나라에서 내준 공책에 낙서했다가, 공책 검사 날에는 혼이 날까 무서워 그림을 그린 공책들을 북북 찢어 버려야 했다. 도배지가 없어 시멘트 포장지를 풀로 붙여둔 집 벽에 무심코 그림을 그렸다 아버지한테 두들겨 맞기 일쑤였다.

10년이 넘는 군 생활 동안 북한과 김정일 체제를 찬양하는 정치 선전물과 포스터를 그리던 서른한 살 청년은, 2009년 무역을 하러 중국에 갔다 덜컥 한국 영사관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3년간 보호시설에 머물다 2012년 한국에 들어왔다. 하나원(북한 이탈주민 교육시설)을 나오자마자 그는 미대에 입학했고, 11년째 ‘가난하지만 행복한’ 화가의 길을 묵묵히 걷고 있다. 탈북자 출신 화가 오성철(45)씨다.

작업실은 서울 은평구 평범한 주택가에 있는 중국집 아래 지하실. 좁고 캄캄한 계단을 내려가 지하실 문을 열자 은은한 유화 향이 코를 찔렀다. ‘숟가락 작가’라는 별명답게, 그의 작품과 작업 중인 캔버스에는 숟가락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그는 그림으로 대체 어떤 얘기를 하고 싶은 걸까.

◇왜정 땐 수박껍질이라도 삶아먹었다


-평양 밑 남포 출신이라고요.

“할아버지가 원래 부산 지주 집안 사람인데, 소작농 딸과 사랑에 빠져 내쫓기듯 정착하신 곳이 남포예요. 6·25전쟁이 일어나자 ‘아버지 뵙고 와야겠다’며 부산에 가셨다가 돌아오지 못하셨대요. 그렇게 ‘월남’ 정치범 집안이 됐습니다. 제 아버지가 삼형제 중 막내였는데 일하느라 매일 새벽 6시에 나가서 저녁 8시에 돌아오셨어요.”

-어린 시절부터 북한 체제에 불만이 많았겠군요.

“할머니는 집에 걸린 김일성 초상화 보면서 ‘저 개XX 때문에 못살겠다’며 욕하고, 저는 ‘할머니, 누가 들으면 큰일 나요’하고 말렸죠. ‘왜정(倭政) 때는 배가 고프면 수박껍데기라도 삶아 먹었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수박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며 한탄하셨어요.”

-할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겠네요.

“저도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꼈어요. 김일성, 김정일 생일에 음식을 주면 초상화에 인사하고 먹으라는데, 그게 그렇게 우습더라고요. 한번은 등교길에 신발이 찢어져서 아버지한테 ‘다음에 월급타면 구해달라’ 했더니, 아버지가 월급날인데 월급이 없고 오히려 마이너스라고 하시는 거에요. 명세서를 보니 아동보험부터 해서 각종 보험 명목으로 월급이 쭉 다 공제된 거에요. ‘아버지, 우리나라는 학교니 의료니 다 공짜 아니에요’ 했더니 아버지가 ‘공짜 아니다’라고 하셨죠. 새벽부터 밤늦게 죽어라 일만 하는데 마이너스라는 게 말이 되나요. 심지어 명절날에 돼지고기를 1kg씩 나눠주길래 그것도 거저 주는가 했더니, 다 월급에서 제하는 거였어요.”

-원래 화가가 꿈이었나요.

“북한에는 화가나 예술가라는 개념이 없어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리니까, 생활기록부 같은 데 남았는지 17세 때 군에 징집돼 정치 선전물을 그리는 ‘직관원’이 됐어요. 물감이나 종이는 줘야 일을 할 텐데 다 알아서 구해 오래요. 참 황당했죠.”

-1994년에 징집됐으면 ‘고난의 행군’ 시기였을 텐데요.

“94년에 군대에 갔는데 김일성이 죽은 해였죠. 그때까진 군인들이 백미를 먹었고 식용 기름도 넉넉했습니다. 그런데 95년이 되니 후임병이 뚝 끊어지고 기름도, 쌀도 떨어지고 소금도 없었어요. 맹물에다 국 끓여 먹고, 너무 배가 고프니 거의 6개월은 산을 돌아다니며 칡뿌리 캐서 먹고 개구리알 삶아 먹으며 버텼습니다.”

-당시에 한국이 쌀을 지원했는데 기억 나나요.

“남포항으로 쌀이 들어왔는데, 포대에 ‘대한민국’이라고 적혀 있더라고요. 그때 대한민국을 처음 접했습니다. 남조선으로만 알았으니까요. 상부 지시로 대한민국이라 적힌 포대를 다 찢어서 소각하고 중국산 포대에 쌀을 옮겨 담는 일을 제가 직접 했어요. 지금도 북한에는 대한민국 못 들어 본 사람이 많을 겁니다.”

-선전물로 그린 것 중에 기억에 남는 게 있나요?

“북한에 ‘김일성 구호나무’라고 해서 일제 때 김일성 휘하 항일 유격대원들이 김일성을 칭송하며 글귀를 적었다는 나무들이 있습니다. 다 가짜로 만든건데, 한 번은 산에 불이 나서 그 나무가 불탈 거 같으니 애들이 나무를 지키려고 감싸 안고 타 죽은 일이 있었어요. 그걸 찬양하는 그림을 그리라고 하는데, 저는 그런 걸로 목숨을 바치라고 하는 게 너무 싫었어요. 겨우 글귀 하나 지키겠다고...”

-체제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과 뜻을 모을 순 없었나요?

“보위부에서 구역마다 연락원을 둬요. 어떤 장소에서 누가 어떤 얘기를 했는지 일주일에 한 번씩 체크하죠. 둘째 큰아버지도 외제 에어컨을 보고 ‘우리는 왜 이렇게 좋은 걸 만들지 못하냐’고 무심코 말했다 잡혀갔어요. 그러니 불만이 있어도 입을 다물어야 해요. 한국에서 예전에 독재에 반대하는 혁명을 했다는데, 그것도 자유가 있으니까 가능한 겁니다. 제 입장에선 ‘진짜 독재자한테 제대로 밟혀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죠.”

-어떻게 버텼습니까.

“꿈이란 게 없었어요. 정치범 집안이라 공부를 해도 쓸모가 없었고요. 군 시절 탈영병을 잡으러 갔는데, 탈영병 아버지가 교수였어요. 책장에 ‘1920년대 시선’이라는 시집이 있었는데 딱 봐도 불온서적 같아 훔쳐왔습니다. 몰래 읽었는데, 김소월 시를 읽으면 그렇게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왜정 때 힘든 삶을 노래한 시라는데, 왜 이렇게 지금 내 처지와 같은지. 그러다 책 읽고 질질 짠다는 소문이 퍼져서 정치부에 걸리는 바람에 한 달 반 동안 매일 자아비판문을 썼습니다. 그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었죠.”

◇그림 그리며 3년 기다려 한국행


10년 군생활을 마친 오씨는 남포의 작은 대학으로 탈출하듯 진학했다. 대학에서도 매일 돈을 내라고 요구하는 통에 갖가지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대학을 나온 뒤 보위부 산하에서 무역을 하며 중국을 오갔고, 그러다 오씨는 탈북을 결심하게 됐다. “자유라든지 예술이라든지 그런 말은 몰랐어요. 그저 노예 같은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공개 처형을 실제로 본 적이 있나요.

“주민들한테 학교에 다 모이라고 해요. 가면 말뚝이 세워져 있고. ‘반당 반혁명 종파 분자 아무개를 향하여, 쏴!’ 하면, 다다다닥…. 그걸 어린애들도 다 봐요. 말뚝에 세워놓은 사람은 이미 너무 맞아서 죽은 상태긴 했어요. 군 시절엔 탈영병이 배가 고프다고 할머니 사는 집에 들어가 할머니를 죽이고 밥을 도둑질했다 붙잡혀 공개 처형 당하는 걸 봤죠. 그런 체제를 찬양하는 사람들은 제가 보기엔 미친 사람들이에요.”

-어쩌다 탈북을 결심했나요.

“2007년부터 보위부에서 주도하는 외화벌이를 했어요. 1년에 2만달러 내면 장사할 수 있는 허가증을 줍니다. 해산물 거래를 하려고 처음 중국에 갔다가 ‘탈출해서 할아버지 고향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중국에서 대방(무역업자)하는 친구가 늘 한국 드라마를 보고 한국산 제품을 좋아하더라고요. 중국에 있는 갤러리에서 미술 작품을 보고 큰 충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콘크리트벽에 거대한 설치 미술이었는데, 북한에선 볼 수 없던 거라 ‘이게 대체 뭔 지X인가’ 했어요(웃음). 그런데 뭔가 또 먹먹함을 느꼈죠. 그렇게 예술이 뭔지 조금씩 알게 됐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두 번째 중국에 갔을 때 탈북할 방법을 물어보려고 114 같은 걸 눌러서 한국 영사관에 연결해달라고 했습니다. 마침 영사가 받길래 ‘나 북한에서 나온 사람인데 한국에 가고 싶어요’ 하니 ‘영사관에 오세요’ 이러더라고요. 짐을 싸서 영사관에 가보니, 철조망이 네 겹 쳐 있고 중국 공안이 지키고 있는 거예요. 다시 영사한테 전화해 어떻게 들어가야 되는지 물으니 ‘외교적인 문제 때문에 데리고 들어올 순 없으니 알아서 들어오라’ 하더라고요. 너무 무책임하다 생각했지만 어떡해요? 일은 벌어졌고. 가방은 다 공안들 앞에 놔두고, 비자 발급 창구 쪽을 보니까 점심 시간에 지키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후다닥 뛰어들어갔죠.”

-2009년에 탈북했는데 한국에는 2012년에야 들어왔는데.

“영사관 내 탈북자 보호시설에 3년을 머물렀어요. 처음 갔을 땐 사람이 많았는데, 1년 반 정도 되니 다 나가고 저만 남았어요. 왜 3년이나 걸렸는지도 저도 모르죠. 지하라 볕도 들지 않아서 감옥 비슷했습니다.”

-정말 한국에 갈 수 있을지 의심하거나 후회하지는 않았나요.

“그때 무심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감정을 막 그렸다가, 이상한 괴물도 그리고. 그렇게 하다 보니 ‘아, 그림을 그리니까 내가 견딜 수 있었구나. 한국에 가면 화가가 되어야겠다. 이 세계를 씹어 먹자’는 생각이 불쑥 들었어요. 그때부터 영사관 직원들한테 한국에서 화가 되는 법, 미대 가는 법 같은 걸 막 물어봤죠. 진중권이 쓴 ‘서양미술사’ 책도 주고, 수채화 물감도 구해서 주더라고요. 그림이 저를 지탱해줬어요.”

-한국 소식도 접할 수 있었나요?

“KBS 하나 딱 틀어주더라고요. 거기서 뉴스도 보고 했는데 제일 신기했던 건 시위 뉴스였어요. 어떻게 정권을 향해서 저렇게 집단 행동을 할 수 있는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시위 때도 신기해서 가봤었습니다. 시위하는 풍경 보면서 ‘이야, 이거 북한이었으면 다 죽었을텐데’ 하면서 봤죠(웃음).”

-한국 생활은 어떻게 적응했나요?

“그럴 틈이 없었어요. 35세가 넘어 입학하면 대학 장학금이 안 나오더라고요. 9월 6일에 하나원에서 나왔는데, 서울에 있는 미대 수시는 다 끝났고 지방 미대 입시만 남아서 임시 신분증 만들고 곧장 한남대에 찾아가 미대 학장을 만났죠. ‘이번에 꼭 들어가야 한다’ 했더니 조교 한 분을 붙여 도와주셨어요. 정착금으로는 학비 감당이 안 되니까 학교가 오후 6시에 끝나면 곧바로 택배 상하차 알바, 웨딩 알바, 레스토랑 알바 뛰고 새벽에 들어와 자고 그렇게 다녔습니다.”

◇”가난한 화가? 나는 너무 행복하다”


졸업 후 서울에 온 뒤로도 오씨는 알바와 공사일을 병행하며 화가 활동을 이어왔다. 1년 반 전에는 공사장에서 일하다 사다리에 추락해 뼈가 6개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3년 전에 결혼해 지난 10월 득남했다. 1억5000만원 대출로 전셋집에 살며 여전히 학자금 대출을 갚고 있다. 오씨는 “삶이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래도 이곳에서 화가로, 예술가로 살 수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서울 강서구 통일부 남북통합문화센터에서는 오씨의 특별전 ‘표현의 조건형식’이 이달 31일까지 열린다.

-그림을 팔아 생계를 잇는 건 쉽지 않을 텐데요.

“처음엔 감동을 주는 게 예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공부해 보니 아니더라고요. 갤러리 대표가 주문하는 대로 그림을 그려서 팔아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2017년에 미국에 초대를 받아 아트 페어에 참가했어요. 개념 미술이 엄청나게 상업화돼 활발하게 거래되는 걸 보니 한국 미술 시장과 세계 미술 시장의 격차가 어마어마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충격을 받았죠. 시장과 대중이 알아주지 않아도 정말 큰 미술, 개념 미술에 매달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제적인 문제가 고통을 주지 않나요.

“11년 동안 맨몸으로 살았어요. 한국에선 다들 ‘먹고사는 게 제일 힘들다’고 그래요. 북한에서 온 저로선 이상하잖아요. 사람들이 왜 힘드냐 하면 다 욕망 때문이에요. 남과 비교하고, 그 차이에 좌절하고. 그런 게 힘든 거죠. 사실 인문학적 빈곤 때문이에요. 한국은 돈이 없어도 나가서 일하면 돈 주잖아요. 북한에선 100을 벌면 90을 뜯겨요. 사람들이 재벌을 비난하는데, 사실 재벌 때문에 먹고사는 게 맞잖아요. 그냥 그대로 인정하고 내 삶을 살면 되는데 다들 왜 이렇게 불행하다고 하는지….”

-10월에 득남을 하셨는데 어떤 생각이 드나요.

“원래는 결혼하지 않으려 했어요. 미술가로 살려면 가정을 돌 볼 힘이 없으니까요. 어쩌다보니 결혼하고 아들이 생기니 책임감이 더 생겨요. 불평·불만을 조장하는 세력이 진실을 혼돈에 빠트리고, 인간에 대한 고민보다 돈이 앞서는 시대니까요. 이런 세상에서 화가로서 인문학적 정신을 관철해 나가는 삶을 아들에게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탈북자라는 이유로 차별받은 경험이 있는지.

“여기서 그림 그리며 교류한 사람 중 적지 않은 사람이 586세대예요.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김일성 관련 책을 사적으로 출판해서 돌려보더라고요. 그 사람들이 얘기하길 ‘예전 독재 정권 때 빨갱이 프레임 가지고 억울한 사람 많이 때려잡았다’ 하는데, 가만히 보면 그 말 하는 사람이 빨갱이야(웃음). 이런 사람들은 탈북자를 싫어할 수밖에 없어요. 그 사람들은 대한민국이 제일 한심한 나라고, 역사 왜곡을 하고, 이승만의 정당성을 인정 안 해주고, 조선을 계승해야 하는 것처럼 프레임을 짜놨는데, 탈북자들이 북한에서 힘든 생활을 자꾸 얘기하니 자기네 이해관계와 충돌하는 거예요. 미술 시장에서도 이런 사람들 입김이 세 저 같은 사람은 진출할 수가 없어요. 제대로 평론받고 전시도 하고 싶은데, 많이 답답하죠.”

-캔버스 속 숟가락은 어떤 의미인가요?

“요즘 한국 사회를 보면 뻔한 거짓말이 난무해요. 내로남불부터 김정은을 칭찬하는 말까지 나와요. 저는 오로지 돈만이 찬양받고 진짜 지식, 교양은 탄압받는 시대라는 생각을 그림에 녹이려고 합니다. 숟가락은 먹는 걸 담잖아요. 그런데 이 숟가락이라는 게 인간이 생각하는 모양과 똑 닮았더라고요. 다들 욕망에 따라 움직이고, 이성은 그런 욕망과 행동을 합리화하는 데 쓰고 있어요. 숟가락은 ‘당신은 스스로를 선(善)이라고 말하지만, 결국 그저 숟가락일 따름’이라고 하는 거죠.”

인터뷰를 시작할 때만 해도 수줍게 웃던 오씨의 얼굴이, 끝날 무렵엔 저항감과 사명감 가득한 예술가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30여 년을 노예로 살았다는 그는 한국에 온 지 11년 만에 그 누구보다 자유롭고 깨어있는 시민이 돼 있었다. 

“안희정 조종하던 광신도들, 새 숙주로 갈아타…두고볼 건가”
진보 진영 위선 고발한 ‘안희정 미투’의 조력자 문상철

 

< 조선일보, 정시행 기자,  2023.12.09. >

 

 


5년 전 한국에선 전무후무한 방식의 미투(Me too·'나도 당했다’는 뜻의 성폭력 고발 운동)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유력 대선 주자 안희정 충청남도 도지사가 20세 어린 비서의 성폭행 폭로로 하룻밤 새 추락한 것. 피해자 김지은씨는 이례적으로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고 나왔다. 극단적 장면의 대비에 충격받은 사람들은 그 정도면 끝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추악한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지금껏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2018년부터 김씨의 미투 폭로와 법정 투쟁을 도운 ‘첫 조력자’의 말이다. 바로 문상철(40) 전 충남도지사 수행·의전비서. 그는 오직 피해자 편에 서기 위해, 8년을 몸담은 안희정 사단에서 이탈해 내부 고발자가 됐다. 문씨는 “가해자와 가해자를 도운 이들은 서로의 뒤를 봐주며 잘 살고 있다. 그러나 피해자와 피해자를 도운 사람들의 삶은 망가졌다”고 했다.

문씨는 지난달 안희정 미투의 전말을 다룬 책 ‘몰락의 시간’을 펴냈다. 그간 검찰 코드네임 ‘김상훈’ 혹은 ‘문 선배’란 익명 뒤에 숨어 살아오다 처음 자신을 드러냈다. 왜 지금이냐고 물었다. 그는 “안희정 사건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탓에 정치권에서 비슷한 문제가 반복되고 있어서”라며 “내 경험은 우리 사회가 같이 되짚어봐야 할 공공재”라고 말했다.

◇“도와줄게”… 세상이 뒤집혔다


-안희정 전 지사와 어떤 관계입니까.

“저는 2011년 충남도청에 메시지·여론조사 담당으로 들어갔어요.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팬이었습니다. 친노(親盧) 적자이자 민주 투사로 유명한 안 전 지사 밑에서 일해보고 싶었어요. 그의 수행·의전 비서, 대선 경선 수행팀장으로 뛰었습니다. 중앙정치 경험이 없는 그를 위해 각계 전문가를 모아 집권 플랜을 짜는 ‘안희정의 대통령 공부’를 4년간 기획했어요. 도지사 시절 저서를 제가 대필하다시피 해 인세를 나눠갖기도 했고요. 그는 저의 우상이었고, 안희정의 꿈이 곧 저의 꿈이었습니다.”

-김지은씨는요.

“제 후임이었습니다. 2017년 대선이 끝나고 저는 안 전 지사의 서울 복귀를 돕기 위해 여의도의 정세균 국회의장실에 배치됐습니다. 안 전 지사는 퇴임 후 미국 유학을 다녀와 민주당 대표 경선 혹은 총선 종로 출마 등을 저울질하며 2022년 대선 가도를 구상 중이었어요. 그때 지은씨가 도지사 수행비서가 됐어요. 도청 일이 끝물이다 보니 지은씨를 도와줄 사람이 없어 제가 원격으로 업무를 조언해야 했어요. 얼굴 맞대고 일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반년 만에 김씨가 울면서 연락했죠.

“2018년 2월 25일 안 전 지사 일정을 의논하려 통화하는데 지은씨 목소리가 너무 안 좋았어요. ‘무슨 일이야? 말해봐, 도와줄게’ 했더니 ‘선배, 저 지사님께 성폭행당했어요’라며 펑펑 울더군요. 머리가 멍했지만 ‘일단 수사 기관에 신고해. 도와줄게’라고 했습니다.”

문씨가 통화한 날은 안 전 지사가 김씨를 상대로 마지막 범행을 저지른 다음 날이다. 법정 증언에 따르면, 김씨는 2월 24일 가족과 저녁식사를 하다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고 뛰쳐나갔다. 안 전 지사의 건설 업자 친구가 소유한 마포의 오피스텔이었다. 안 전 지사는 “너도 나 미투할 거냐?”라고 물었다. 미국 할리우드 등 각국에서 미투 폭로가 몰아치던 때였다. 경력과 생계를 자신에게 의존하는 하위 공무원에게서 “제가 어떻게 미투를 하겠어요”란 무기력한 대답을 얻어낸 안 전 지사는 그 자리에서 또 김씨를 성폭행했다. 이튿날 새벽 2시에 “빨리 청소하고 나가라”고 짜증을 부렸다.

훗날 김씨는 저서 ‘김지은입니다’에 “안희정에게 당할 때마다 도청 내 친한 이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다 외면당했다. 생업을 버리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때 문 선배의 ‘도와줄게’ 한마디가 얼음 속에 박제된 나를 꺼내줬다”고 썼다. 문씨가 이 문제를 가해자와 먼저 상의하고 피해자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갔다면 미투도 좌절됐을 수 있다는 얘기다. 김씨는 3월 5일 한 방송에 출연해 안 전 지사의 범행을 세상에 알렸다.

◇팩트가 무너뜨린 미래 권력


-당신은 가해자와 훨씬 가까웠는데, 왜 피해자 말만 듣고 자신의 인생을 걸었습니까.

“전 안희정의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사적 친분을 떠나 저도 나라 녹을 먹는 사람으로서 공적 책임을 가져야 했습니다. 아무리 스타 정치인이라도 그런 범죄를 저질러왔다면 신기루에 불과한 거죠. 사람을 짓밟는 행위 위에 무슨 미래가 있겠어요? 더구나 지은씨는 얼굴 내놓고 미투해서 얻을 게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 사람 말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어요.”

-김지은씨를 어떻게 도왔습니까.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저는 총 네 차례 검찰 조사를 받고, 3심에 걸친 재판마다 증인대에 섰어요. 안 전 지사 참모진과 가족은 변호인단 코치를 받아 두 사람이 불륜 관계였던 것처럼 몰아갔습니다. 그들은 지은씨가 성폭력을 당하면서도 가해자의 기분을 맞추는 언행을 하거나, 범행 장소인 호텔비 결제를 하고 식당을 알아봤다는 점 등을 들어 ‘피해자답지 못한 행실’ ‘안희정의 광팬’이라며 꽃뱀 취급했어요.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는지... 저는 그것이 잘리지 않기 위해 할 수밖에 없는 수행비서의 업무였고 안 전 지사가 강요한 충성 문화라는 점을 일관되게 진술했어요.”

-안 전 지사는 중도진보 이미지로 상한가를 달렸죠. 2017년 대선 경선에선 2위를 했고, 문재인 대통령 당선 날 밤 무대에 올라 ‘뽀뽀’를 하며 차기 주자의 지위를 각인시켰고요. 그런 때 터진 미투라 국민들 충격이 컸어요.

“미투 직전까지 안 전 지사는 ‘미래 대통령’으로 통했습니다. 정계·재계·관계·법조계에서 미리 줄대려 안달했고 해외 유력인사들도 와달라고 했어요. 본인 자신감도 극에 달했고, 그와 가까울수록 권력의 크기는 컸습니다.”

-안희정 사단에서 김지은씨 편에 선 사람은 얼마나 됐습니까.

“10명 중 1명쯤. 최측근 중에선 저 정도였고, 캠프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젊은 봉사자가 대부분이었어요. 그들이 ‘김지은과 함께하는 사람들’이란 모임을 만들어 법정 증언을 하고 탄원서를 썼습니다. 안 전 지사 가족 중에선 유일하게 차남이 피해자 말을 들어보려 했고요.”

-안 전 지사 측이 ‘배신자’ 낙인을 찍고 위협했는데.

“첫 재판 때 안 전 지사가 돌 무렵이던 제 아이를 안고 찍은 사진을 법정 스크린에 대문짝만 하게 띄우더군요. 우리가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 등 돌린 대가는 제 가족이 감당하게 될 거란 협박이었습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연민과 동정은 그때 다 사라졌습니다. 약자를 위하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자고 모인 동지들이었는데… 배신은 제가 아니라 안 전 지사가 한 거예요.”

안 전 지사는 1심에선 무죄를 받았지만 2019년 2심과 최종심에선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으로 유죄가 확정됐다. 3년 6개월 만인 지난해 만기 출소했다. 향후 10년간 피선거권이 박탈돼 정치적 재기는 불가능한 상태다. 아내 민주원씨와도 옥중 이혼했다.

◇더 무너진 내부 고발자의 삶


-범죄 혐의를 남에게 떠넘기거나, 선거에 나와 ‘비(非)법률적 명예 회복’을 하겠다는 정치인도 있어요. 안 전 지사는 죗값을 치른 것 아닌가요?

“안 전 지사는 최소한의 사법적 처분만 받았을 뿐입니다. 아직 자기 계보를 유지하고 있어요. 여전히 찾아오는 정치인과 후원자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여자애 하나 때문에 아깝게 갔다’는 세간의 오해를 이용하고 있어요. 그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주고 지은씨에게 악랄한 2차 가해를 한 사람들은 안희정계 의원들이 밀고 끌어줘 국회와 정부, 지자체 요직으로 승진했어요. 반면 안 전 지사는 피해자에겐 단 한번 진심어린 사과도, 금전적 배상도 하지 않았어요. 맹목적 충성엔 후한 보상을, 진실의 편에서 반기를 들면 벌을 준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내부 고발자의 삶은 피폐해지기 십상이다. 법치·민주주의 수준이 낮은 나라일수록 그렇다. 김씨는 미투 직후 쏟아지는 인신 공격 속에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었고, 아직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취업은커녕 고립돼 살면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것으로 전해졌다. 김씨는 안 전 지사와 충남도청을 상대로 3억원 규모 손해배상 소송을 3년째 벌이고 있지만 결과는 불투명하다.

-당신의 삶은 어땠나요.

“재판 때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왼쪽 어금니가 깨졌어요. 정세균 국무총리실, 이낙연 민주당 대표실에 들어갈 기회가 생겼지만 민주당 사람들이 똘똘 뭉쳐 ‘원래 질이 안 좋은 애’ ‘이 판에 발 못 붙이게 하라’고 했어요. 평판 조회가 생명인 정치권에서 제 경력은 끝났습니다. 시민단체 ‘의인상’ 후보에 오르긴 했어요. 간신히 일반 기업에 취직했는데, 이번에 책을 냈더니 정치적 관심이 쏠려 불편했는지 일주일 만에 권고사직당했어요. 이제 아내가 생계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원망스럽겠군요.

“솔직히 이렇게까지 오래 문제가 해결 안 될 거라곤 예상 못했습니다. 제가 아는 안희정이란 사람은 잘못은 했더라도 참회하고 배상할 줄 알았어요. 다같이 반성하고 폐허 위에 일어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판이었죠.”

안희정 미투 이후 한국의 미투는 다시 지리멸렬해졌다. 2020년 오거돈 전 부산시장이 여직원 성추행으로 사퇴하고 복역 중이지만, 피해자에겐 단돈 5000만원을 배상했다. 같은 해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비서의 미투가 예고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공소권을 없애버렸다. 민주당은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이라 조롱하며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음해했다. 오거돈과 박원순의 피해자들은 김지은씨와 달리 익명으로 남기를 택했다. 문씨는 “가해자끼리만 뭉치면 죄가 지워진다는 학습 효과가 있는 한, 피해자 한 명을 마녀로 만들어 화형대에 올리는 행태는 반복될 것”이라고 말했다.


◇운동권의 性·계급 인식


-안 전 지사 여성 편력이 유명했다면서요?

“늘 여러 여자를 은밀히 만났고, 어느 자리에든 여자를 데려오게 했습니다. 정치인에 대한 기대를 이성(異性)으로서의 호감과 헷갈리는 것 같았어요. 참모들끼린 ‘봐도 못 본 거’라고 쉬쉬했어요. 제가 ‘이 사람한테 충성하는 게 맞나?’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어요. 지은씨 말고도 도청 내 성폭력 피해자가 많다는 걸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들은 침묵을 택했을 뿐이죠.”

-‘성폭력은 권력의 모든 문제가 결합된 악랄한 최종 결과물’이라고 책에 썼더군요.

“미투는 트리거(trigger·도화선)일 뿐, 정치인 개인을 신격화하는 퇴행적 정치 문화가 근본 문제라고 봅니다. 안 전 지사는 자신이 군부 독재에 맞섰고 앞으로 ‘큰일’ 할 사람이기 때문에 절대적 권력으로 보상받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욕구가 즉시 채워지지 않으면 신경질적으로 ‘…’이라는 문자를 보냈어요. 말 안 해도 알아서 모시는 ‘물 흐르는 의전’으로 떠받들라는 거죠. 슈트발 살린다고 펜·안경닦이조차 본인 주머니에 넣지 않고 비서가 챙겨야 했고, 따뜻한 농사꾼 이미지가 필요할 땐 공관에 텃밭 만들고 농학 박사들 시켜 농사짓게 했어요. 이런 식으로 권력을 확인하는 또 다른 방법이 성폭력이었습니다.”

-그게 86세대 운동권 문화입니까.

“안 전 지사의 오랜 측근들은 학생운동 때부터 봉건적 조직 문화를 이어왔어요. ‘우린 안희정 집안’이라며 형·동생 하고, ‘조배죽(조직을 배신하면 죽는다)’ 건배사하고, 취하면 김광석 노래 부르고, 회식 끝나면 도청 돌아가 초과수당 찍고... 저도 거기서 살아남아야 했기에 안 전 지사에게 노(No) 해본 적 없어요. 그래선 안 됐어요. 제가 배타적인 광신도 조직을 만드는 데 기여한 일종의 공범일지 모른다는 죄책감 때문에 지은씨를 도운 측면도 큽니다.”

-진보 진영은 ‘박근혜의 세월호 7시간’ ‘김건희 여사 전력’ 의혹 등 유독 여성의 정조·순결을 들춰 공격하곤 합니다. 최근엔 최강욱 전 민주당 의원이 ‘설치는 암컷’이란 표현을 썼고요.

“시대가 변한 걸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자기들끼리는 그런 가부장적 여성 혐오가 여전히 재미있고 상대의 아킬레스건이 된다고 여기는지 모르지만, 젊은 세대는 남녀를 떠나 그런 데 관심 없어요.”

문상철씨는 김지은씨를 도운 이유 중 하나가 “나 또한 권위적인 안희정 조직을 만든 공범일지 모른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고 했다. 문씨는 안 전 지사의 다양한 요구를 토대로 그를 왕처럼 떠받드는 방법을 망라해 ‘수행비서 업무 매뉴얼’을 만들었다.(위 사진) ‘해외 수행’ 항목의 경우 ‘호텔은 한국인 적은 곳에 잡을 것’ ‘기내에서 코냑 사서 지사님 숙소에 비치’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이 매뉴얼대로 일한 김씨는 주로 해외 출장 중 안 전 지사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  

 

 

◇통제 불능의 팬덤 정치


-왜 지방자치단체 기관장들의 일탈이 계속 나올까요.

“충남도청도 그랬지만 지자체마다 의전 조직이 너무 세요. 공무원들이 떠받들어주니 제왕적 권력에 취할 수밖에 없어요. 중앙정부에 비해 언론과 의회의 감시는 약하죠. 지자체장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러도 안전할 거란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지자체 감사 빈도부터 높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무소불위의 안 전 지사가 두려워한 게 있습니까.

“팬덤입니다. 2017년 대선 경선에서 문재인 후보에게 밀리기 시작할 때였어요. 안 전 지사가 팬들이 보내는 맹목적 지지 메시지와 상대 비방, 유사 언론인들의 유튜브 같은 걸 틈만 나면 강박적으로 찾아보더군요. 문 후보 팬들이 우릴 미친 듯 공격할수록, 안 전 지사도 분노와 고통을 잊는 마약을 찾듯 자기 팬들에게 빠져들었어요.”

-문 전 대통령은 그걸 ‘양념’이라고 했죠.

“맹목적이고 거대한 팬덤은 다양한 사람과의 토론을 회피하게 하는 도피처가 됩니다. 개인 인권쯤은 우습게 여기는 빌미도 되구요. 그런 극렬 팬들은 특정 정치인을 존경한다기보다, 자신들의 이권이나 욕망을 대리하는 수단으로 삼는 거예요. 안희정을 떠받들던 사람들은 새로운 숙주를 찾아 자리 잡았어요. 그 숙주들이 다음 대통령 후보들로 불리고 있구요. 선출되지 않은 소수 선동가들이 국민이 뽑은 정치인을 꼭두각시처럼 부리는 세상이 올지 모릅니다.”

-책 인세는 한국성폭력상담소에 모두 기부한다고요.

“제가 성폭력 문제를 잘 아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현장 활동가들이 이름 없는 피해자들 손을 잡아주며 헌신하는 걸 지켜보니, 말만 앞세우는 정치인들보다 세상을 훨씬 낫게 바꾸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작지만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2023 평범을 산 비범한 이야기] #1. 2군 선수로만 7년째, 프로축구 선수 임민혁

 

 

< 피렌체의 식탁, 천안 시티 FC 임민혁 선수,  2023.12.09  >

 


"1등은 아니지만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수히 많습니다"
"악착같이 하루를 살아내는 우리같은 사람들이 진짜 주인공"
"결과는 열심히 노력하는 과정의 보너스, 그 자체로 행복합니다"
삶은 상대적이지 않습니다. 삶은 그 자체로 주관입니다. 그러나 우린 늘 얼굴 모를 대상, 혹은 언론에 노출된 위대한 상대에 억눌려 쪼그라듭니다. 승리는 물론 고통마저도 누구보다 더 해야만 주목받는 세상. 그럴 필요 없어요. 한해를 돌아보게 되는 이때, 올해도 참 수고했어, 잘 살아냈어! 나에게 인사하는 시간을 가져봐요. 



저는 7년 동안의 프로 선수 생활 중 30경기 남짓밖에 출전하지 못한 만년 후보 프로축구선수입니다. 주전선수들이 1년에 평균적으로 40경기 가까이 소화하니 제가 얼마나 경기에 많이 나서지 못한 선수였는지 쉽게 비교할 수 있겠죠. 그러던 저에게 지난 2022년 여름,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주전선수의 부상으로 4년 만에 경기장에 모습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경기를 마친 후 기자회견장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아무리 긴 터널도 끝은 있다고 생각했다. ‘산을 만나면 넘고 강을 만나면 건너자’라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버텼다”라고 인터뷰했습니다. 봄눈처럼 잠깐이긴 했지만 프로 데뷔 이후 처음으로 이슈의 중심에 서기도 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오래 기다렸던 기회를 잡았기 때문에 저의 2023년은 더 많은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올해는 분명 지금까지와는 다를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죠. 하지만 프로의 무대는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주전선수가 되려면 거쳐야 하는 수많은 난관을 여전히 뚫지 못한 채 2023시즌 역시 후보선수로 1년을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올해도 목표했던 경기 수를 채우지 못했고 많은 팬들의 주목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던 올해가 그저 불행하고 아프지만은 않았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후보선수로 있으면서 ‘과정의 소중함’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를 비롯한 우리 사회의 절대 다수는 각기 다른 세계에서 각기 다른 뛰어난 ‘주전선수’들을 상대로 고전하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입니다. 죽을 만큼 애쓰지 않으면 살아남을 기회조차 받지 못하는 저와 같은 보통의 사람들에게 생존을 위한 투쟁은 그 과정만으로도 위대한 여정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결코 오늘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또 한 번의 실패가 힘들지만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각박한 세상에서 특출난 것 하나 없지만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적은 횟수지만 열정적인 팬들 앞에서 부상 없이 몇 차례 내가 가진 실력을 뽐낼 수 있었던 한 해를 보낸 사실만으로 나 자신을 충분히 칭찬하고 격려하고 싶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2군 선수일 가능성이 큽니다. 운동을 그만두는 날이 오더라도 사회에서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서 ‘1등은 아니지만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수히 많습니다. 그리고 악착같이 하루를 살아내는 우리 보통 사람들이 이 세상의 진짜 주인공입니다. 그러니 목표했던 일이 잘 안된 하루여도, 또 원하던 것을 다 이루지 못했던 한해여도 괜찮습니다. 결과는 열심히 노력하는 과정에서 따라오는 보너스 같은 것이기 때문에 하루를, 한 달을, 일 년을 열심히 땀 흘려 분투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렇게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을 꾸준히 소신껏 잘 해내다 보면 보너스는 언젠가 따라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와 우리의 내일은 여전히 희망찹니다. 메마르고 모진 이 세상을 그 누구보다 잘 버티고 있는 스스로를 자주 격려합시다. 잘하고 있다고, 수고했다고!



글쓴이 임민혁은 1994년 경북 영덕에서 태어났다. 2014년 고려대학교에 입학 후 그 활약을 바탕으로 2017년 K리그 전남드래곤즈에 입단했다. 당시 등번호는 에이스 골키퍼의 상징인 1번. 현재 천안시티FC, 등번호 36번을 달고 골키퍼로 활동중이다. 패널티킥에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방 출신이라 지방 소멸 위기에 관심이 많고 평소 말은 부질없다 생각해 글쓰기를 취미로 한다.  이제 서른을 맞는 임민혁 선수는 건강하고 맑다. 몸만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마음가짐과 눈이 그렇다. "악착같이 하루를 살아내는 우리 보통 사람들이 이 세상의 진짜 주인공이다. 목표했던 일이 잘 안된 하루여도, 또 원하던 것을 다 이루지 못했던 한해여도 괜찮다. 결과는 열심히 노력하는 과정에서 따라오는 보너스 같은 것이기 때문에 하루를, 한 달을, 일 년을 열심히 땀 흘려 분투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그렇게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을 꾸준히 소신껏 잘 해내다 보면 보너스는 언젠가 따라올 것이라 생각한다. " 진짜 이기는 삶을 사는 임민혁 선수는 응원받아 마땅한 청년이다.  

 

“가져갈 순 없잖아요? 하하” 수백억원 기부한 이 남자, 남은 재산도 다 내놓는다

 


떠날 때 성경책만 가져가겠다는
영화계 전설, 배우 신영균

< 조선일보, 김아진 기자,  2023.12.02.  >

 


96세 노신사는 그동안 수백억원을 기부했다. 알려진 것도 있지만 언제, 얼마를, 왜 했는지 기억을 다 못 할 정도로 자주, 남 모르게 했다. 이유를 물었다.

“돈을 많이 벌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제가 ‘짜다’고 소문이 났더라고요. 짜장면만 산다고. 하하. 제가 짜장면을 좋아해서 산 건데 그렇게들 말하더라고요. 오해예요. 오래전부터 돈은 죽기 전에 좋은 데다 다 쓰고 가자는 생각을 했어요. 제 기부는 이제 시작입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원로 배우 신영균은 지난 7월 이승만 기념관을 지을 부지를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20년 가까이 집을 짓고 살았던 서울 고덕동의 4000평이었다. 한강이 훤히 보이는 금싸라기 땅. “이승만 대통령이 고덕동 쪽 한강에서 낚시를 즐기곤 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즉흥적으로 ‘땅이 노니까 거기에다가 기념관을 지어도 되겠다’ 한 거죠. 건국 대통령 아니겠습니까? 예우를 해야죠.”

서울 명동의 한 호텔에서 만난 신영균은 “국민의 사랑을 많이 받은 배우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배우 말고도 치과 의사, 국회의원, 사업가 등 10개 가까운 직업을 가졌다. 1960~1970년대엔 서울에 극장과 제과점, 볼링장을 열어 큰돈을 벌었다. “손대는 것마다 잘되더라고요. 인생의 유일한 실패는 국회의원 선거에 떨어진 거였어요. 그때 쓴맛을 본 뒤 나무나 키워야겠다는 심정으로 고덕동에 땅을 사서 집을 짓고 산 거예요. 시간이 지나 그 땅을 기부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고요. 그러고 보면 세상에 이유 없는 일은 없어요.”

수백억원을 기부해온 배우 신영균은 “돌려주는 기쁨이 매우 크다. 죽는 날까지 계속 기부하겠다”고 했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흐트러짐이 없는 이 노신사는 한때 소유했다가 가족에게 물려준 서울 명동의 한 호텔 사무실로 매일 출근한다. 이곳에는 영사기, 포스터, 트로피 등 빛나던 배우 시절이 전시돼 있다. 


◇사랑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


본격적인 기부는 2006년 즈음 시작했다. 당시 50년 뒷바라지해준 아내를 위해 자녀들과 함께 금혼식을 성대하게 준비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호텔에서 하고 어쩌고 하면 억대가 들겠더라고요.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사람들과 나누자고 마음을 먹었죠. 가족들도 다 좋다고 해서 금혼식을 취소하고 불우이웃 돕기에 1억원을 기부했죠.”

이전에도 어려운 동료 배우를 위해 몰래 지갑을 자주 열었다. 하지만 ‘신영균은 구두쇠’란 소문이 충무로에 쫙 퍼졌다. 아들 신원식씨는 “검소하고 낭비하지 않는 성격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 뒤로 통 큰 기부가 이어졌다. 2010년 500억원 상당의 명보극장과 사재 100억원이 들어간 제주의 영화박물관을 기증했다. 모교인 서울대, 명예박사 학위를 준 서강대에도 수십억원을 기부했다. 각종 구호 성금, 탈북 학생 장학금 등에도 수십억원을 내놨다. 이번에 기부하겠다고 밝힌 이승만 기념관 부지는 여러 사정으로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이승만 기념관 부지를 기부하겠다고요?

“기념관 설립 추진위원회 회의에 참석했는데, 첫날 모임에서 한마디하라고 해요. 그래서 그 양반을 존경한다고 말했죠. 뭐 하나 해드리고 싶다고요. 고덕동 땅 살 때 이승만 대통령이 낚시도 했다고 하고, 인연이 있는 땅이구나 생각했죠. 그래서 거기에 짓겠다면 기증하겠다고 한 거예요.”

-평소 생각이었나요.

“그날 즉흥적으로 갑자기 떠오른 것이었어요.”

-배우 이영애는 기념관 설립에 5000만원 기부 의사를 밝히고 엄청난 비난을 받았는데.

“좌다 우다 해서 대한민국이 갈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 대통령이라는 사실은 틀린 얘기가 아니잖아요. 나라를 위해 애썼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모셔야죠. 정치적으로 싸우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요. 정치인도 국민도 대한민국을 위한 싸움만 했으면 해요.”

-2010년엔 500억원대 명보극장을 기증했어요.

“1977년에 인수한 극장이죠. 그 뒤로 충무로 극장이 다 사라졌어요. 장사가 안 되니까. 주변에서 자꾸 팔라는 거예요. 그런데 아들과 (문체부 장관) 유인촌이 ‘영화의 거리를 위해선 명보극장은 남겨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러라고 했죠.”

-보통 결심은 아닌데요.

“돈이 정말 많아도 기부는 잘 못 하죠. 저는 배우로 사랑받았으니까 그만큼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밥도 싼 것만 산다고 욕도 먹고 그랬는데요. 좋은 일 하니까 너무 좋았어요.”

-기부가 돈 버는 것보다 어렵다고도 해요.

“혼자서는 못 해요. 가족도 동의해야 할 수 있는 겁니다. 제가 기부한다고 하면 자식들이 찬성해주고, 또 아들이 기부하자고 먼저 말 꺼내면 제가 호응해주고 그래서 된 거죠.”

-2016년엔 탈북 학생 장학금으로 10억원을 쾌척했어요.

“제가 이북 출신이다 보니 탈북자 교육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통일과 나눔 재단에 10억원을 갖다줬죠. 그때 수표로 가져갔는데 깜짝 놀라더라고요. 현물로 이렇게 큰돈은 처음 만져본다고. 하하.”

-기부를 더 할 건가요?

“지금까지 얼마나 했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아직 멀었어요. 이제 시작이죠. 더 할 거예요. 나이가 있으니 자식들에게 나눠줄 건 다 줬고요. 제가 갖고 있는 남은 돈은 전부 기부하고 떠날 겁니다. 지금까지는 가족 동의를 받았지만 앞으로는 오케이하거나 말거나 할 겁니다. 제 뜻은 변하지 않아요.”

-이유가 있을까요.

“몰라요. 기부하면 그냥 좋아요. 누구는 아깝지 않냐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기부할수록 제가 더 부자가 되는 느낌입니다.”

신영균은 국회의원, 사업가 등 10개 가까운 직업을 가졌다. 하지만 그는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았던 배우로 남고 싶다”며 “다른 직업은 부업일 뿐이었다”고 했다. 1960년 영화 ‘과부’로 데뷔해 300편 가까운 영화를 찍으며 당뇨 등 병을 얻기도 했지만 “지금도 나는 배우라는 직업이 좋다”고 했다. 


◇국회의원 낙선이 유일한 쪽박


일평생 한 분야에서 성공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신영균은 손만 대면 대박을 쳤다. 그래서 기부를 할 수 있었다.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연 서울 회현동 동남치과는 늘 환자로 붐볐고, 영화배우가 된 뒤엔 흥행 보증수표로 통하며 300편에 출연했다. 사업도 흥했다. 극장도 인수하고 빵집도 열었다. 1970년대 초 명동에 문을 연 우리나라 1호 볼링장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맥도널드를 들여온 것도 그다. “해외에 영화를 찍으러 다니면서 본 게 많으니까 이것저것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적중했고요. 이렇게 잘될 수가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잘됐어요.”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으로 눈을 돌렸어요.

“영화는 시대 흐름을 많이 탔어요. 정권에 따라 규제가 달라지니까 키스도 못 하게 하고. 그러니까 관객도 안 들고요. 그래서 영화 관련 협회 등에서 회장도 하면서 사회봉사를 시작했죠. 그즈음 사업도 하고요.”

-손댄 사업마다 대박이 났어요.

“장사는 극장으로 시작했죠. 1963년 금호동에 2류 극장을 열었어요. 명절 때는 줄이 끝없이 이어졌어요. 영화배우 한 것만큼 돈을 벌었죠.”

-빵집도 했어요.

“그즈음 충무로 명보극장 옆 빵집을 인수했어요. 그 집 사장이 이민을 간대서요. 극장까지 인수하려고 한 큰 그림이었는데 그게 또 잘됐죠. 그리고 1977년에 명보극장을 샀죠.”

-우리나라 1호 볼링장도 열었다고요?

“영화배우 할 때 외국에 촬영을 다니는데 볼링장이 크게 유행했어요. 들여와야겠다 했는데 허가가 안 나서 감사원에서 감사까지 받고 시작했어요. 내 성을 따서 ‘신스 볼링장’이었죠. 손님이 정말 많이 왔어요.”

-뭐 하나 망한 게 없네요.

“글쎄 그랬어요. 그런데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서 떨어졌잖아요. 제 인생의 첫 실패였죠.”

-갑자기 왜 정치에 뛰어들었나요?

“선거 20일 앞두고 서울 성동구에 나가라는 거예요. 중앙정보부에서 반협박으로. 별로 내키지 않았어요. 그런데 나밖에 나갈 사람이 없다니까. 돈만 쓰고 600표 차이로 떨어졌죠. 상대 후보가 ‘신영균에게 세컨드(첩)가 있다’고 흑색선전을 했어요. 며느리였는데 말이에요.”

-정치를 안 하겠노라 했었죠?

“환갑이 갓 지났을 때였어요. 나무나 가꾸고 살아야겠다 해서 고덕동에 땅을 샀죠. 거기서 20년을 살았어요. 그리고 이번에 기부 얘기를 꺼낸 거예요.”

-그런데 15·16대 국회의원을 지냈어요.

“마지막으로 문화예술계를 위해 봉사하는 마음으로 했어요. 지역구 출마가 아니라 전국구 비례대표를 하라고 해서 했어요.”

-정치하면서 이룬 게 있나요?

“예술가들 의료보험제도가 없었는데, 그걸 제도화했죠. 제일 잘 한 일이에요.”

-예술계도 좌, 우로 나뉘어있어요.

“그러니까요. 재단이나 협회에서 상을 주면 좌, 우 양쪽에서 난리예요. 통합이 돼야 하는데요.”

-정치도 마찬가지죠.

“윤석열 대통령을 당선 전에 만났어요. 나를 후원회장으로 모시고 싶었다고 먼저 말을 해주더라고요. 영화를 엄청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고맙게 생각해요. 꼭 성공한 대통령이 돼야 합니다.”

-후배 정치인들에게도 한마디.

“헌법 개정이 필요해요. 대통령이 5년 가지고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윤 대통령도 그렇고요. 우리나라 대통령제는 수명을 다했어요. 진지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다시 태어나도 배우로 살겠다


유년 시절에 이유도 없이 배우가 되고 싶었다. 자신을 키운 홀어머니가 “내가 너 딴따라 하라고 이북에서 여기까지 데리고 온 줄 아느냐”고 심하게 반대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얻어맞고도 고등학교 졸업 후 가출해 2년간 전국을 돌며 연극 무대에 섰다. 그런데 배가 너무 고팠다. “직업은 있어야겠더라고요.” 공부해서 서울대 치과대학에 입학했다. 배우의 꿈은 버리지 않았다. 먹고살려고 치과를 개업했지만 2년을 버티지 못했다. 1960년 서른 살이 넘은 나이에 영화 ‘과부’(감독 조긍하)로 데뷔했다. 이후 1962년 ‘연산군(감독 신상옥)’, 1964년 ‘빨간 마후라’(감독 신상옥), 1968년 ‘미워도 다시 한번’(감독 정소영) 등 영화를 300편 찍으며 당대 최고 스타가 됐다.

-배우는 왜 하고 싶었나요?

“배우가 뭔지도 몰랐지. 왜 그렇게 하고 싶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까마득해요.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때 성극을 하는데 뽑혀서 한번 무대에 오르니까 너무 좋더라고. 박수를 받는다는 게. ‘연극이 참 좋구나, 직업으로 하고 싶다’ 했지.”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네요.

“그런데 배우가 되고자 한 때부터 집 뒤 동산에 올라가 소리 지르고 연극 대사도 따라 하고 그랬어요. 배우가 되겠다고 일편단심이었지.”

-어머니 반대가 심했죠?

“고등학교 졸업한 뒤 어머니한테 연극배우가 되겠다고 하고 욕을 많이 먹었어요. ‘야, 이 XX야’ 하면서요. 고무신짝으로 두들겨맞고 집을 나왔어요. 2년 동안 극단을 따라다녔죠. 그런데 너무 고생했어요. 트럭 하나에 다 타서 다니다 한번은 떨어져서 죽을 뻔도 했죠. 그때야 어머니 말이 맞는구나 했어요.”

-그래서 공부했군요.

“1년 더 공부해서 남보다 3년 늦게 대학을 갔어요. 배우가 먹고살 수가 없는 직업이라는 걸 알고 치과 의사를 택했죠.

-졸업하고 바로 개업했나요?

“먹고살려고요. 그래도 연극을 계속하고 싶었어요. 친구들이 와서 설득해 무대에 한번 섰는데 영화 제작자들이 보고는 병원에 찾아와서 또 배우를 하라고 해요. 그렇게 찍은 게 ‘과부’입니다.”

-반응이 어땠나요?

“그때는 영화 황금기였죠. 흥행했죠. 배우를 딴따라 취급할 때였는데 서울대 졸업한 치과 의사 출신이라 좋게 봐줬어요. 그 후 1년간 치과 의사를 병행하다가 관뒀죠.”

-의사 하다가 배우 한다고 하면 반대가 심했을 거 같아요.

“와이프가 반대했죠. 자기는 치과 의사랑 결혼했지, 배우와 한 게 아니라면서요. 스캔들이 워낙 많을 때니까 바람피울까 봐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약속했죠. 나는 당신만을 사랑하겠노라고.”

-그 약속 지켰나요?

“지켰으니까 오늘날 이러고 살고 있잖아요. 하하. 유혹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고요. 신앙으로 이겨냈고 가족 생각하면서 지켰죠. 그렇게 반대하던 어머니도 영화 개봉하니까 ‘우리 아들이 배우감이었구나’ 하더라고요.”

-배우의 삶은 어땠나요?

“너무 재밌었어요. 하고 싶은 일이었으니까요. 엄청 바빠서 힘든지도 몰랐어요. 1년에 20~30편씩 찍으니까 잠도 거의 못 자고 다녔죠. 연극과는 달랐어요. 후시녹음이라 대사도 안 외우고 다 즉흥적으로 했죠. 그래서 ‘연산군’ ‘상록수’ 등 동시녹음을 한 작품이 기억에 남아요. 욕심을 내서 한 것들이죠.”

-그러다 은퇴 아닌 은퇴를 했어요.

“돈은 많이 벌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 힘들더라고요. 피곤에서 달아나려고 초콜릿을 많이 먹어 당뇨까지 왔죠. 너무 열심히 달렸어요.”
 
-치과 의사 그만둔 건 후회 안 했나요?

“전혀. 후회 안 하죠. 100%. 하하. 다시 태어나도 영화배우를 할 거예요. 국민의 사랑을 받으니 얼마나 좋아요.”

 


◇지금 내 모습은 아내 덕


신영균은 천생 배우다. 아흔을 넘겼지만 스트라이프 남색 정장에 빨간색 넥타이를 매치하고 새하얀 행커치프를 꽂은 모습은 영락없는 배우다. 헤어는 무스로 고정했다. 걸음걸이에 흐트러짐도 없다. 나이가 무색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나 보다. “오늘 나 좀 괜찮아 보이냐”고 묻는 말투에서도 배우의 연륜이 느껴졌다. 그런 그의 스타일리스트는 딱 한 사람이었다. 아내 김선희씨. “평생 그림자처럼 뒷바라지했죠. 그 사람만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합니다.”

-여성 팬이 많았죠?

“그 시절엔 집 앞에 죽치고 있으면서 혈서 쓰고, 자기 엉덩이에 내 이름 썼다고 보여준다고 하고 그런 사람이 많았어요.”

-아내가 잔소리 안 했나요?

“하지 왜 안 해요. 한번은 팬레터를 주머니에 넣은 적이 있었는데 엄청 혼났어요. 별별 유혹이 많았는데 제가 다 물리쳤죠. 그래서 오늘날 신영균이가 있는 거야(웃음).”

-소원이 있다면요?

“우리 마누라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또 나랑 같이 갔으면 좋겠어요. 진짜. 나 없다고 자살하면 어떡하나,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거든요. 지금도 사랑해요. 그 양반도 그렇고. 나도 그 사람 하나만 알고 살았으니까요.”

-주례도 많이 했죠?

“수도 없이 했죠. 이병헌 부부도 했고. 그런데 다 잘살지는 않더라고요. 하하.”

 
◇가져갈 수도, 가져가고 싶은 것도 없어


새벽 6시에 일어나 저녁 10시가 되기 전에 잠자리에 든다. 매일 점심은 누군가와 식사를 한다. “한 달 전에 약속을 다 잡아놔요. 대화를 하는 게 낙이죠.” 루틴이 철저한 게 건강의 비결이다. 또 평생 남 험담을 해본 일이 없다고 한다.

-어떤 직업인으로 남고 싶나요?

“수도 없이 받은 질문이에요. 그럴 때마다 가만히 생각해봐요. 신영균 하면 영화배우지, 정치인 신영균이나 치과 의사 신영균이 아니잖아요. 내 직업은 배우고, 나머지는 다 부업이에요.”

-건강 유지 비법이라면.

“담배는 안 피웠어요. 어머니가 안 된다고 해서 따랐죠. 술은 젊을 때는 부득이하게 먹었지만 이후엔 입에 거의 안 댔고 지금은 아예 안 먹어요. 나쁜 일 있으면 금방 잊어버리고 좋은 일만 생각해요. 오래 꽁하질 않아요. 그게 건강 비결 아닐까요?”

-루틴이 철저하다고요?

“매일 사무실에 와서 앉아 있다가 점심 때는 중식당 가서 빠짐없이 사람을 만나요. 그리고 2시간 정도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고요. 걷고 가벼운 근육 운동이요. 귀가해서 저녁 먹고 자는 거죠.”

-소식하나요? 피부 관리는요?

“과식도 안 하지만 소식도 안 해요. 당뇨가 있으니까 단것은 안 먹고요. 피부 관리 같은 건 전혀 안 해요. 열심히 좋은 거 발라요(웃음).”

-인생에 가장 행복했던 장면이라면.

“글쎄요. (잠시 침묵) 항상 좋았어요. 이북에서 어머니 손 잡고 서울에 올 때도, 아버지가 없어서 어머니가 고생할 때도 힘들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그저 그대로 열심히 살았어요. 인생은 아름답죠. 죽고 싶다,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네요. 인생이 엄청 짧아요. 사는 날까지 건강하게, 실수하지 않고 마무리하고 싶어요.”

-나중에 관에 무엇을 넣고 싶은가요?

“성경책 하나면 돼요. 가져갈 수도 없고. 가져가고 싶은 것도 없어요.”

-영화 찍자는 제안은 이제 안 오나요?

“하하하하하. 하나 찍을까요?”

그는 2012년 서울대 동문 배우 이순재와 함께 연극 ‘하얀 중립국’으로 무대에 올랐다. 젊은 시절 열흘이면 외웠을 대사를 한 달이나 붙잡고 있었지만 행복했다. 그 무대가 마지막이 아닐 거라고 했다. “너무 좋았어요. 옛날 생각이 나면서. 무대에 다시 한번 올라갈까 생각은 하고 있는데요. 지금도 그냥 배우가 좋아요. 뭘 해서 돈을 벌면 그건 다 기부하고 싶고요.”

손웅정 "'제2의 손흥민'? 재능보다 인성! 기본이 있어야 한다"

 

< 한국일보, 강은영 기자 ,  2023.11.29 >

 



"바짝바짝 붙어! 그렇지!"

강원 춘천시 손흥민체육공원 내 축구장에서 한 남성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러 퍼졌다. 낯익은 얼굴과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손흥민(31·토트넘) 아버지 손웅정(61) 손축구아카데미 대표이자 감독. 그는 이곳에서 축구를 배우는 14세 안팎의 어린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렇게 할 거야? 똑바로 안 할래?", "OO아! 좋았어! 그렇게 하는 거야!" 채찍과 당근을 쏟아내는 그의 말에 축구장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스무 명 남짓의 아이들은 손 감독의 예리한 눈빛을 느끼며 진지하게 경기에 임했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손 감독은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느라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좇느라 바빴다. 내년 대회 준비를 위해 나름의 테스트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는 경기 시작 전에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을 지은 눈치였다. 아이들의 재능을 보지 않고도 말이다.

손 감독은 이른 아침부터 아이들을 기다렸다. 넓은 주차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축구장에 서서 부모와 함께 도착한 아이들을 지켜봤다. "저는 아이들이 차에서 내리는 것만 봐도 성향을 알 수 있어요. 딱 걷는 것만 봐도 말이죠." 손 감독은 차에서 내려 축구장으로 올라오는 아이와 부모의 모습을 꼼꼼히 살펴본다고 한다. 

 

그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과잉보호받는 아이들이다. 아무리 재능이 있고 뛰어나도 부모와 아이의 그릇된 성향이 보이면 뽑질 않는다. 주차장에서 여기 운동장까지 올라오는 것만 보고도 벌써 70, 80%는 결정이 난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인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다. 손 감독은 "인성, 도덕성이 바로 서지 않으면 기량이 좋은 선수는 될 수 있어도 훌륭한 선수는 될 수 없다. 대들보가 휘면 기둥이 휜다고 부모님의 성향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시 말해 축구에 임하는 태도와 자세, 재능을 뒷받침해 줄 성실함과 겸손함이 갖춰져야 큰 선수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손 감독은 지난 2019년 이곳의 7만1,000여㎡ 부지에 손흥민체육공원을 완공했다. 크고 작은 축구장 3곳과 실내구장 1곳 등이 들어섰다. 손 감독은 9~10세 아이들을 위주로 선발해 기본기부터 가르친다. 공과 친해질 수 있도록 패스와 드리블, 킥, 슈팅 등에 엄청난 시간을 투자한다. 공과 몸이 하나가 돼야 축구의 기본기가 잡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2의 손흥민'을 만들고 싶어 이곳을 찾은 일부 부모들은 고개를 갸웃한다는 것. 기본을 다져야 할 아이들에게 꽃과 열매부터 따주려 한다는 거다. 그는 그런 부모들에게 작심 발언을 했다. "'계이불사 금석가루(鍥而不舍 金石可鏤)'라고 새기기를 그만두지 않아야 쇠나 돌도 뚫을 수 있어요. 반복만 한 스승이 없거든요. (손)흥민이는 이런 기본기를 다지는 데 저하고 13년을 했어요."

손흥민은 초등학교 2학년부터 자그마치 13년 동안 아버지 손 감독과 훈련에 훈련을 거듭했다. 손흥민이 아버지와 함께 지옥 같은 훈련을 모두 견뎌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게 고난의 길을 견딘 그는 현재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에서 월드클래스 반열에 올라 전 세계 축구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래서 이젠 '손흥민 아버지' 대신 '인간 손웅정'의 삶에 주력하고 싶은 마음이다. 뒤늦게 찾은 작가로서의 생활도 즐겁다. 내년에는 자신의 독서노트를 토대로 한 신간이 나올 예정이다. 품 안의 자식이라고 손흥민에게 잔소리하는 시기는 지났다는 손 감독, 올 연말과 신년은 영국이 아닌 한국에서 맞을 계획이다.

그는 자신의 에세이(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2021)에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선수의 경기를 편히 볼 수 없는 게 운명"이라고 쓴 바 있다. 아들 손흥민의 경기가 있는 날은 소화가 안 돼 식사를 거르는 게 일쑤인 적이 많았다. 이달 초만 해도 무패행진(8승 2무)을 이어가던 토트넘은 최근 3연패 수렁에 빠져 5위까지 떨어졌다.

 

손 감독의 심정은 어떨까. "흉년이 들 수 있고, 풍년도 들 수 있어요. 흉년 들었다고 침체해 있을 거 아니고 풍년 들었다고 교만 떨 거 아니잖아요. 호황은 좋고 불황은 더 좋다고 했어요. 그게 인생사잖아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