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스럽게 낸 ‘우남실록’처럼… 내가 기획한 출판도시 지금도 진화 중
[나의 현대사 보물] [20] 출판인 이기웅 열화당 대표


 

< 조선일보, 김민정 기자,  2023.08.29.  >

 

 


비가 내리던 지난 24일 파주 문발동의 파주출판도시. 나지막한 건물 사이로 책을 품에 안은 젊은 출판인들이 오고 갔다. 습기 때문에 특유의 냄새를 풍기는 고서들을 마주한 곳은 ‘열화당 책박물관’. 파주출판도시 기획·설립을 주도한 출판인 이기웅(83) 열화당 대표를 이곳에서 만났다. 그는 출판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2013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이 대표는 ‘운전수’처럼 살았다. 출판도시의 운전수였고, 평생 출판인의 길을 걸었다. 대학 졸업 후 막 편집자 일을 시작했을 때 유명 문학 평론가에게 전화 걸어 오자를 잡아낸 일은 ‘출판을 허투루 해선 안 된다’는 고집을 보여준 일화다. 1971년 출판사 열화당을 설립한 뒤엔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고흐·고갱·피카소 등의 원화를 컬러로 실은 미술 문고를 만들어 출판계를 놀라게 했다. 이후로 베스트셀러를 노리는 상업적 출판을 경계하며 양서를 내려고 노력해 왔다고 스스로 자부한다.

◇‘우남실록’ ‘백범일지 정본’… 팔기 위해 만들지 않는다

‘우남실록’(1976)과 ‘정본 백범일지(한글·한문본)’(2015)는 그가 만든 책 중 가장 의미를 두는 그의 보물이다. “팔기 위한 책”이 아닌 “기록하기 위한 책”이라고 했다. 이 대표는 “책은 팔기 위해 만드는 게 아니라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야 한다는 게 나의 신념”이라고 했다. 우남실록은 이승만 전 대통령 비서실의 제안을 받고 “용감하게” 발행한 국내 첫 이승만 자료집이다. “나중에는 많은 연구서가 나왔으나, 당시 이승만을 ‘독재자’ ‘나쁜 사람’으로 규탄하던 시절의 책쟁이 행적으로서는 놀라운 것이었죠. 저도 4·19 때 데모 많이 했지만, 자료가 흩어져 다 날아가기 전에 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걱정 때문에 했어요.” “독재자라고 하지만 시대와 함께 갔던 측면이 있고, 그 덕에 역사에서 많은 것이 이뤄지기도 했다”며 “우남을 너무 버려 놔 원형을 되찾는 데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했다.

‘정본 백범일지’는 이 대표가 5년간 교정을 봤다. 백범일지는 지금까지 국내에 100종 이상 출간됐으나 친필본과는 차이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 대표는 “이에 사죄하는 마음으로 백범의 친필본을 그대로 살려 글줄 크기, 페이지 넘어가는 속도까지 비슷하게 만들었다”며 “왜적에 대해 이를 갈았던 백범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니 백범이 제게 온 것 같았다. 이때 출판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심안(心眼)이 떠졌다”고 했다. 그는 “100권에 1권을 더하는 책이 아니라 나머지 100권을 부정하기 위해 만든 내 보물”이라며 빠른 속도로 책을 내고 마케팅에 열을 올리는 요즘 출판에 대해 따끔한 지적도 했다. “한 번 보고 버릴 책은 태생부터 잘못된 책입니다. 출판인은 인간의 속도에 맞춰, 오랫동안 읽힐 책을 고심해 만들고, 잘 만든 책을 독자가 찾아오도록 해야 합니다.”

 


◇인생을 바친, 안고 싶은 파주출판도시

이 대표는 파주출판도시에 전시돼 있는 도시 모형을 두 팔 벌려 안는 포즈를 취한 뒤 “정말 안고 싶은 과거이자 현재진행형의 과제”라고 했다. 그는 1989년부터 30년 넘게 파주출판도시 건립을 이끌었다. 저마다 다른 목소리를 내는 출판계 내부 의견 조율, 국가산업단지 지정을 위한 노력, 이후 부지 선정과 착공까지 그의 끈기가 없었다면 출판도시가 세워지지 못했을 것이라고들 말한다. 그는 “내 인생을 바쳐 갇힌 죄수처럼 일했다”며 “2005년 위암 판정을 받고 아팠을 땐 이 일을 맡은 것을 후회한 적도 있다”고 했다. 도시 안에 출판 생태계를 만들어 출판업을 효율화하고 다 같이 발전하고자 한 목표 외에도, 출판도시를 통해 ‘자생하는 출판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출판도시는 아직 진행형이다. 다음 목표는 출판업과 함께 농업이 이뤄지고 청정에너지를 생산하는 도시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명문이 있어 책이 나오고, 책이 만들어져 명문가가 나올 씨를 뿌리는 일이 출판”이라며 “책농사는 쌀농사와 다르지 않다”고 했다. 그는 “남은 일은 다음 세대의 과제”라고 했다. “요즘 ‘출판의 위기’라고 하는데, ‘책의 힘’을 지키려면 기록하지 않아도 될 말을 기록하는 상업주의를 경계하고 진실한 말을 담는 책을 만들어야 합니다.”

 


◇운명이 된 유년 시절의 책 냄새

이 대표는 출판인이 자신의 “운명”이었다고 했다. 책과의 인연은 그가 유년 시절을 보낸 고향집 강릉 선교장에서 시작됐다. 18세기 후반 7대조인 이내번(1703~1781)이 지은 기와집 선교장 내에 5대조 할아버지인 이후(1773~1832)가 1815년 건립한 사랑채 ‘열화당(悅話堂)’이 출판사 열화당의 모태다. 과거 열화당은 서화와 전적 등을 수장해 문인과 학자들이 모여든 곳이었다. 몸이 약했던 이 대표는 젊은 후손들이 선교장을 다 떠나갈 때 혼자 남아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이곳에서 지냈다. “책이 귀했던 시절 외진 땅 강릉의 ‘작은 도서관’ 같았죠. 그곳에서 군불을 때고 책 속에서 놀며 맡았던 책 냄새가 출판인이 되라는 운명 같았어요.”

2012년 출판사 옆에 조성한 ‘열화당 책박물관’은 그에게 옛 열화당을 떠올리게 하는 소중한 곳이다. 국내외 고서와 한국의 출판 역사를 보여주는 근현대 도서 등 그가 50년 넘게 모아온 서적들을 전시했다. 그를 ‘시우(詩友)’라 부르며 가깝게 지냈던 서정주, 박두진 등 문인의 친필 사인이 들어간 책들도 있다. 옛 열화당에 있던 책들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더 애틋한 장소다. 옛 열화당 책은 1·4 후퇴 때 땅 파고 독에 넣어 묻었으나 대부분 빗물에 훼손되고 도둑맞기도 했다고 한다.

열화당 내 손님을 맞는 공간에는 서기문 화백이 이 대표에게 그려준 유화 한 점이 눈길을 끌었다. 이 대표가 ‘운전수’가 돼 택시 운전대를 잡고 있고, 그의 정신적 스승인 안중근 열사가 뒷좌석에 앉아 바라보는 그림이다. 그는 힘든 고비마다 안중근 열사의 신념과 정신을 떠올리며 의지했다고 한다. 그는 그림을 볼 때마다 이렇게 묻는다고 했다. “선생님, 제가 잘 가고 있습니까?”

한국 선수단장 된 재일교포 “차별·실패에 굴하지 않은 건 럭비로 배운 투쟁심 덕분”

항저우 아시안게임 선수단 이끄는 재외동포 출신 최윤 OK금융그룹 회장

 

 

 

< 조선일보, 배준용 기자,  2023.08.26. >

 

 


“우리나라는 학연·지연을 비롯해 이른바 ‘끼리끼리 문화’가 있잖아요. 그런데 재외동포를 선수단장으로 뽑다니,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뜻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특히 체육계는 보수적인 분위기가 강한 분야예요. 저를 선임한 배경에는 ‘이제 새롭게 시작하자’는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다음 달 23일부터 중국 항저우에서 열리는 제19회 아시안게임은 개막하기도 전에 특별한 기록을 남겼다. 역대 최초로 재외동포가 대한민국 선수단장을 맡은 것이다. OK금융그룹 최윤(60) 회장은 재일교포 3세 사업가다. 코로나 여파로 5년 만에 열리는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그는 역대 최대인 선수단 1180명을 이끌고 종합 2위 탈환에 도전한다.

지난 18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최 회장은 비행기 날개처럼 위아래로 문이 열리는 테슬라 중형 세단에서 나타났다.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대뜸 “제가 새로운 건 꼭 해봐야 하는 성격”이라며 씩 웃어 보였다. 그는 회장님보다 부장님 같은 푸근한 인상을 풍겼지만, 인터뷰가 시작되자 달라졌다. 산전수전과 공중전을 다 겪어낸 도전적인 사업가의 모습 그 자체였다.

“자이니치(일본 거주 한국인)로 차별받고 자랐지만 국적을 버릴 순 없었습니다. 내 뿌리니까요.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산 게 헝그리 정신처럼 저를 무장시킨 것 같아요. 지금은 대한민국에 감사한 마음으로 삽니다. 한 때 우리나라 1인당 GDP(국내총생산)는 500달러였는데, 지금은 3만달러가 넘는 선진국이 됐어요. 누구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나라인 겁니다.”

최윤 대한민국 아시안게임 선수단장이 럭비공을 들어 보이고 있다. 재일교포 3세 출신인 최 단장은 고교 시절 럭비 선수로 활약했고, 현재 대한럭비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럭비로 인생을 배웠다


1920년대 할아버지가 일본으로 건너가 1963년 나고야에서 태어난 최윤 회장은 어린 시절부터 온갖 차별과 불이익을 견뎌내며 살아왔다. 한국어 발음은 조금 서툴렀다. 최 회장은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으로부터 ‘일본 사람들한테 지지 마라’ ‘일본 사람이 괴롭혀도 맞고만 있지 마라’ 이런 얘기들을 귀에 못이 박이게 듣고 자랐다”며 웃어 보였다.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앞둔 소감이라면.

“공교롭게도 제가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 갈 때마다 개최국과 우리 관계가 미묘하네요. 선수단 부단장을 맡은 지난 도쿄올림픽 때는 한일 관계가 좋지 않았는데, 이번엔 한중 관계가 그렇잖아요. 다시 긴장이 됩니다. 하하.”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아시다시피 개최국 중국은 만반의 준비를 해왔고 우리의 라이벌인 일본은 10년 전부터 많은 투자를 했어요. 목표는 2위 탈환입니다. 선수들이 5년간 고생하고 준비하며 쌓은 실력을 발휘하도록, 특히 억울한 판정이 없도록 최선을 다할 거예요. 국민은 이번 기회에 스포츠를 좀 다른 시각으로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시각이라니요?

“스포츠는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이나 월드컵만 있는 게 아닙니다. 평상시에도 즐기는 것이어야 해요. 일본이나 선진국은 그게 잘되고 있습니다.”

-생활 스포츠라는 저변이 중요하지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체제 경쟁의 역사 때문에 엘리트 선수 육성에만 집중했어요. 여전히 ‘스포츠 하는 놈은 스포츠만 하고 공부는 열외’라는 문화가 있습니다. 그게 아니에요. 학교 수업 시간이나 방과 후에 스포츠 클럽에서 꾸준히 운동을 하고, 그중에서 엘리트 선수가 나와야 합니다. 사회에 진출한 뒤에 스포츠를 배우는 우리 관행은 선진국 기준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거예요.”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도 일회성으로 즐기는 경향이 있지요.

스포츠에 대한 경험이 부족해서 그래요. 이번 아시안게임부터 메달 순위보다 선수 개개인의 노력, 어떤 도전을 하는지 주목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학교 교육부터 스포츠를 즐길 수 있어야 진정한 스포츠 대국이 돼요. 교육부가 좀 나서야 됩니다. 죽기 살기로 운동을 한 선수들이 이렇게 큰 국제대회가 열릴 때만 반짝 인정받는 그런 문화를 바꾸고 싶습니다.

최 회장은 스포츠에 누구보다 진심인 열정남이다. 2015년부터 럭비협회 부회장을 거쳐 현재는 협회장을 맡고 있고, 지난 3월에는 아예 럭비단을 창단했다. 10년 전에는 남자 배구단을 창단해 2년 만에 우승을 일궜다. 도쿄올림픽 때 부단장을 맡고 이번에 아시안게임 선수단장으로 임명된 것도 최 회장이 폭넓은 경험으로 선수단을 이끌 적임자라는 평을 받았기 때문이다.

“제가 사업을 하면서 실패해도 굴하지 않고 칠전팔기(七顚八起)로 도전할 수 있었던 배경이 럭비 같아요. 럭비를 하면서 도전 정신, 리더십, 협동심 등을 체득했으니까요.”

-한국에서는 아직 생소한데, 럭비의 매력은 뭡니까.

“럭비는 사회의 축소판과 같습니다. 사회라는 게 체격도, 생각도, 재능도 다양한 사람이 모여 사는 공동체잖아요. 럭비도 1번부터 15번까지 역할이 제각각이고 그에 맞는 체격도 다 달라요. 그런데 한 팀으로 뭉쳐 각자 제 역할을 해야만 이기는 게임이에요. 럭비는 또 몸을 부딪치잖아요. 가끔은 그게 무서워요. 그런데 막상 경기가 시작되면 공포를 이겨냅니다. 혼자 싸우라면 무서워서 피할 수도 있는데, 럭비는 팀원들이 다 지켜보고 있잖아요. 그래서 마주하고 부딪쳐 나가는 매력이 있습니다.”

-광고 효과가 높지 않은 비인기 종목들을 지원하는 까닭이라면.

“일본은 한국과 달리 럭비가 리스펙트(존경)를 받아요. 우리나라 럭비는 여건이 너무 열악해 마음이 아팠습니다. 럭비가 가진 정신과 장점이 더 확산했으면 하는 마음이었어요. 제가 직접 럭비협회에 찾아가 ‘돕겠다’고 했습니다.”

-10년 전에 남자 배구단도 창단했는데.

“주인을 잃고 표류하던 드림식스 배구단을 인수해달라는 제안을 받고 ‘일단 1년을 네이밍 스폰서로 도와주겠다’고 했는데, 하다 보니 배구의 매력에 빠졌습니다. 인수하겠다고 했더니 우리가 배제되고 우리금융그룹과의 경쟁에서 졌지요. 거기서 오기가 생겼습니다(웃음). 그래서 신생팀을 만든 거예요.”

-김세진 감독을 임명한 것도 화제였습니다.

“제 경영 철학이 ‘이단에서 출발하여 정통으로 올라선다’예요. 프로에서 이단이 뭘까요? 신생 구단으로서 대학교 3학년 이하를 필두로 한 팀이라 새롭고 젊은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김세진 감독을 만나 보니 정말 치밀하고, 통찰력도 대단하더라고요. 당시 감독들 평균 연령이 60세 가까이 됐습니다. 저희가 39세 초보 감독을 발탁한 게 이단이었는데, 창단 2년째 우승하면서 정통으로 올라섰죠.”

-배구팀에 일본인 지도자를 데려온 이유라면.

“10년간 이어지니 다시 매너리즘이 생겼어요. 외국인 감독 중에 일본 감독은 체격의 열세를 극복하고 경기력을 높은 수준으로 올렸다는 점에서 탐이 났습니다. 한일 관계도 좋아지면서 언론이나 팬들도 너그럽게 봐주신 것 같습니다.”


◇차별과 오해에 끊임없이 맞서다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곱창집을 하는 어머니를 보며 자랐다. 운동선수와 사업가, 인생의 두 항로 사이에서 고민하 대학 시절 건설하청업을 시작했다. 1988년에는 한국식 불고기를 파는 ‘신라관’으로 대박이 났다. 15년 만에 신라관의 야키니쿠(燒肉·구운 고기)는 일본이 사랑하는 음식으로 자리 잡았고, 체인점이 60여 개로 늘면서 최 회장은 재일교포를 대표하는 청년 사업가가 됐다.

-성공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재일교포는 국적을 일본으로 바꾸지 않으면 공무원이나 대기업에 취직할 방법이 없었어요. 홀로 설 수 있는 직업은 사업가나 연예인, 스포츠 선수나 의사 정도인데, 저는 사업이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업으로 성공하는 게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어요.”


-차별이 힘들지 않았나요.

“한국계 초등학교에 다녀서 제가 한국인이라는 걸 감추지 않았어요. 중학교 1학년 때는 반에서 저 혼자 한국인이라는 자부심도 있었지요. 그런데 추석을 쇠고 나니 저 말고도 차례 음식으로 도시락을 싸온 친구가 2명 더 있었습니다. 한국인인 걸 숨기고 일본인인 척할 정도로 차별과 압박을 받았죠.”

-초등학교 때 신문배달, 중학교 때는 대학생인 척하고 공사장 인부로 일했다고요?

“용돈이 필요했어요. 공사장에서 일할 땐 힘이 있으니 남보다 일을 두 배로 했어요. 그때 관리자와 협상을 했습니다. ‘일당을 두 배로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공부는 어머니한테 얻어맞지 않으려고 열심히 했습니다(웃음). 그런 경험 덕분에 대학에 진학해서 선후배들을 모아 건설하청 회사도 창업할 수 있었죠.”

-신라관으로 크게 성공했습니다.

“경영회사로서 처음으로 어떤 체제를 갖췄다고 할까요. 그런데 신라관을 경영하면서 뒤늦게 대학 때 공부하지 않은 걸 후회했습니다. 경영학을 전공했는데 사기도 당했어요. 공부를 제대로 했다면 구태여 겪지 않을 실패들을 하게 되더군요. ‘공부는 다 때가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한국에서 벤처캐피털을 시작한 이유가 궁금하네요.

“경영을 해보니 회사를 크게 하는데 시간을 단축하려면 금융 시스템을 잘 알아야 하더군요. 사업을 하나씩 키우는 것보다 투자를 해야 된다는 걸 배운 거예요. 그리고 고국에서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1999년에 벤처캐피털 회사를 열었는데, 닷컴 버블이 터지면서 크게 실패했죠.”

-왜 실패한 건가요.

“제가 배우지 않은 상태로 남을 믿고, 남을 시키면서 투자를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어요. 제가 누구보다도 잘 알아야 하고, 직접 모든 것을 확인하고, 자신 있는 분야라야 하는구나. 경영진한테 그냥 다 맡기고 돈만 주고 ‘해봐’ 한 게 정말 바보 같은 결정이었죠.”

벤처캐피털로 쓴맛을 본 최윤 회장은 2002년 소비자 금융회사인 ‘원캐싱’을 설립한 뒤 재일교포 상공인들을 설득해 2004년 에이앤오(A&O)그룹을 인수했다. 이른바 ‘러시앤캐시’로 알려진 소비자금융이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한 출발점이었다.

-벤처캐피털에 실패했을 때 가족들이 ‘일본으로 돌아오라’고 했다면서요.

“실패자로 돌아가는 건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어요. 오기가 발동했습니다. 그러다 에이앤오 그룹이 매물로 나온 걸 봤어요. 대한민국이 발전하고 있는데 이제 개인의 신용을 계산해서 소액을 대출해주는 소비자금융 시장이 곧 열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부업을 향한 곱지 않은 시선이 있는데.

“대부업, 사채부터 시작했다고 하는데 저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웃음). 대부업은 신용대출이 아니라 채권, 부동산 등 담보를 다 받아요. 선진국에서는 이미 개인의 직장, 경제 상황, 환경 등으로 신용을 계산해 연체 확률을 파악한다는 사실을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일시적으로 유동성이 어려운 사람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지, 이번 달에 못 갚을 사람한테 빌려주는 건 못 해요. 제가 고깃집을 하지 않았습니까. 어디를 봐도 거지이고 돈이 없는데 손님으로 받을 수 있나요? 그럴 땐 ‘죄송합니다’ 하고 문을 닫죠(웃음). 마찬가지예요.”

-소비자금융은 성선설(性善說)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무슨 뜻인가요?

“대부업은 성악설로 봐요. (돈을 빌리는 사람은) 나쁜 놈이다. 그래서 담보를 받아야 되고 협박해야 되고 보증을 받아야 되고…. 우리는 기본적으로 고객은 빌린 돈을 갚으려 한다고 봅니다. 나쁜 사람은 정말 일부고 우리가 신용을 잘 계산하고 관리하는 거예요. 저는 소비자금융에 대한 부정적 시선 때문에 더 투명하게, 합법적으로 경영을 했습니다. 오로지 고객, 시장, 라이벌만 보면서 살았습니다.”

 


◇재일교포 사업가가 보는 한일관계


OK금융그룹은 저축은행을 인수하며 창업 20년 만에 자산 규모 약 20조원, 19개 계열사를 거느린 대기업이 됐다. OK금융그룹의 ‘OK’는 ‘Original Korea’, 즉 ‘토종 한국’이라는 뜻. 최 회장이 ’진짜 한국, 진짜 한국인’이라는 긍지와 함께 ‘저를 한국 사람으로서 지켜봐주세요’라는 뜻으로 직접 지었단다. 토종 만화 캐릭터인 태권브이를 모델로 사용한다.

-두 자녀 이름이 최선, 최다해라고 ‘최선을 다해’라고 들었습니다. 사내 공모로 이름을 지었다고요.

“최선은 제가 지었고 다해는 사내 공모로 지었어요. 한자가 아닌 순 한글 이름입니다. 우리끼리 ‘정말 최선을 다하자’고 이야기 많이 하는데, 아이들도 자기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합니다. 사실 제 욕심 같아선 셋 더 낳아서 ‘최선을 다해, 최고를 향해 OK’까지 가고 싶어요. 최고, 최향해, 최읏 이렇게요. 하하.”

-돈을 많이 번 사람으로서 돈의 의미도 달라졌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똑같아요. 야구 선수가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서 연습도 안 하고 그러나요. 오히려 보는 눈이 더 많아지고 그만큼 책임감이 생깁니다.”

-한국과 일본을 다 진하게 겪으셨네요.

“1980년대부터 1991년까지 일본이 GDP 1만달러에서 4만달러까지 갔던 기적을 봤고, 우리나라에선 또 2002년부터 1만달러에서 3만달러까지 성장하는 걸 목격했어요. 저는 정말 행운아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한국이 일본처럼 ‘잃어버린 30년’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데, 우리 정부가 어떻게 이끌고 풀어갈지 주목하고 있어요. 한국과 일본은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차이가 있나요?

“두 가지예요. 하나는 우리나라처럼 역동적으로 정치에 관심을 가진 국민은 전 세계에 없다고 봅니다. 일본은 30년간 정체됐는데도 정치에 불만이 거의 없어요. 그런데 우리 국민은 그렇게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또 하나는 우리는 대기업 의사결정권자가 대부분 한 사람이에요. ‘오너 경영’이 부작용도 많지만 세습이나 리더십을 없애고 합의체로 만든 일본 기업들과는 확실히 다른 장점이 있습니다. 리스크에 맞서 도전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두 가지 때문에 한국은 일본처럼 30년이 아니라 5년, 10년으로 위기를 짧게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합니다.”

-2019년 반일 열풍이 불면서 억울하게 친일 기업으로 지목되기도 했는데.

“대한민국은 이제 선진국이에요. 일본과 대등한 관계로 가야한다고 봅니다. 사과를 요구하고 공격만 할 게 아니라 양보할 건 양보하면서 가는 게 대등한 관계예요. 우리가 이렇게 하고 있으니 너희도 이렇게 해봐, 하는 겁니다. 그게 한일 관계의 발전적 파트너십이 되지 않을까요.”

-아시안게임처럼 한일은 결국 라이벌 아닌가요?

“라이벌은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선의의 라이벌이 돼야죠. 우리 국민들만 보는 게 아니라 전 세계가 보고 있어요.”

-아시안게임 선수단장으로서 각오라면.

“2위가 목표인데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각자 위치에서 고생한 선수들, 가족들, 코치들 이런 분들에겐 지금이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중요한 시기예요. 그들이 얼마나 힘들게 연습하고 지켜봤는지 생각해주시면서 힘껏 응원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유인촌 “예술을 정치 도구 삼는 건 공산국가나 하는 일… 새 틀 짤 것”
[김윤덕이 만난 사람] 대통령 문화체육특보 유인촌


 


< 조선일보, 김윤덕 선임기자,  2023.08.28. >

 

 


대통령 문화특보 임명에 ‘올드맨의 귀환’이란 조롱이 나오자 유인촌은 코웃음을 쳤다. “올드맨? 아직 꿈도 많고 에너지도 넘치는데?” 장관 퇴임 후 굴착기 면허부터 땄다. 소년원 아이들에게 연극을 가르쳤다. 작년 가을엔 자전거로 유럽 2000km를 종주했다. 돌아오자마자 대작 ‘파우스트’에 돌입했다. 가슴에 돈키호테를 품고 산다는 일흔두 살의 유인촌은 “낡은 이념에 치우친 문화 산업 전반에 쇄신이 필요하다”고 했다.

◇내가 블랙리스트 원조?


-진보 진영은 이동관 방통위원장과 묶어 ‘언론·문화계 탄압 기술자’라고 한다.

“그분들은 변한 게 없다. 문체부 장관에 취임한 직후 동아마라톤 행사에 갔더니 한 진보 언론이 내가 점령군처럼 서 있다고 썼더라. 난 장관이기 전에 모든 마라톤 대회를 뛰었던 애호가로 개막식에 나간 것뿐인데도. 또, 장관 마치고 이해랑 탄신 100주년 연극 ‘햄릿’으로 무대에 복귀했더니 ‘이 뒤틀리고 뒤틀어진 세상’이란 대사를 트집 잡아 자기가 뒤틀린 세상 만들어 놓고 저런 대사를 한다고 비아냥대더라(웃음). 어떻게 해야 이분들과 대화가 될 수 있을지 참 암담하다.”

-장관 시절 진보 예술인들을 탄압하셨나?

“내가 그들을 탄압했다면 지금까지 우리 문화·예술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난 척박한 예술 환경을 개선하고 지역 문화를 살리려고 장관이 된 사람이다.”

-취임 후 기관장들을 쫓아냈다고 해서 지탄을 받았다.

“서울시장이 이명박에서 오세훈으로 바뀌었을 때 내가 서울문화재단 대표였다. 같은 보수당이라도 새로운 시장은 새로운 사람들과 일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의를 표했다. 장관이 됐을 때도 그런 맥락에서 가볍게 말한 거다. 새 정부와 생각이 다른 기관장들은 더 있으라고 해도 안 있을 거라고. 근데 다음 날 신문에 ‘지난 정부 기관장 물러가라’는 제목으로 나오더라.”

-블랙리스트의 시작이 유인촌 장관이라고 한다.

“증거는 없다면서 그냥 우긴다(웃음). 그렇게 믿고 싶겠지. 누가 조사 좀 해주면 좋겠다. 내가 장관할 때 지원 배제 명단이나 특혜 문건은 없었다. 나 역시 어떤 특혜도 받지 않았다. 청문회 때 민주당에서 1973년 문화예술진흥원이 생긴 이래 2008년까지 유인촌을 지원한 기록을 제출하라고 요구했는데 단 한 건도 없었다. 오히려 퇴임 후 연극계로 돌아왔을 때 나와 일했던 스태프들이 지원을 한 차례도 받지 못했다. 그게 블랙리스트 아닌가.”

-작가 임옥상은 화이트리스트인가.

“200여 점이면 전국 공공 미술 분야를 싹쓸이한 수준이다. 과연 실력만으로 수주를 따냈을까. 그런데도 자기들은 늘 정의롭단다. 나는 ‘상식적인 진보 우파’라 자처했는데 근래는 진보란 말을 떼버렸다. 진보라는 말 자체가 아주 더러워졌다.”

-진보 우파?

“예술가란 과거를 되새기고 현실의 밑바닥까지 성찰하며 미래를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나는 왕 역할을 많이 했지만 ‘임금도 땀 흘리지 않으면 밥 먹지 마라’고 했던 조광조 같은 개혁적 인물에게도 끌렸다. 그런데 요새는 진보란 말을 꺼내기도 싫다. ‘파우스트’에 악마 메피스토의 대사가 있다. ‘인간 세상에 내려가 보니 나보다 더 나쁜 놈들이 많아서 졸지에 실업자가 될 판’이라고. 요즘이 딱 그런 세상 아닌가? 죄 지은 사람이 더 당당하고, 억울하다며 악다구니한다.”


◇문화·예술도 경쟁해 살아남아야


-대통령은 왜 유인촌을 문화특보로 임명했을까.

“새 틀을 짜라는 것 아닐까? 특보를 맡은 이상 난 끊임없이 묻고 두드리고 저지를 것이다.”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있나.

“내가 장관 했을 때가 12년 전이다. 그 사이 문화, 미디어 환경이 급변했는데 우리는 어떤가. 할리우드 작가와 배우들은 챗GPT와의 저작권 투쟁을 시작했는데, 우리는 넷플릭스 하나 컨트롤 못 한다. 지상파 3사를 봐라. 언젠가부터 정권의 나팔수가 되더니 요즘은 노영(勞營) 방송이라고 한다. 머리띠 두르고 정치 싸움만 하니 새로운 콘텐츠가 나오겠나. 지상파 3사가 투자해 만들었다는 플랫폼 웨이브도 망했다. 그 사이 넷플릭스는 막대한 자본 갖고 들어와 불공정 계약은 물론 인건비만 엄청 올려놨다. 문화 정책도 그저 살려달라는 이들에게 지원금 나눠주는 수준이다. 영화, 게임, 애니메이션 등 장르의 칸막이를 없애고 융·복합 지원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지원 정책을 바꾸겠다는 건가.

“문화·예술도 경쟁을 통해 살아남아야 한다. 쥐꼬리만한 예산을 모두에게 똑같이 나눠주면 경쟁이 될까? 생계 보조형 지원은 그만해야 한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을 확실하게 밀어줘야 한다. 자본과 권력에서 독립하겠다는 영화들까지 왜 정부가 돈을 줘야 하나. 좁은 문을 만들어 철저히 선별해야 한다.”

-공정성 논란은 없을까.

“대신 도전할 기회를 많이 주면 된다. 간접 지원, 사후 지원, 인큐베이팅 지원으로 다양하게. 심사도 당사자들이 책임을 지는 책임심의관제로 가야 한다.”

-좌파 예술인들 몰아내려고 유인촌을 특보로 앉혔다는 말도 있다.

“하하! 호사가들 얘기다. 가장 자유로워야 할 문화계에서 이념 논쟁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속칭 좌파 예술인들도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술을 정치적 도구로 삼는 건 공산국가에서나 하는 일이다. 굳이 정치적 표현을 하고 싶다면 말릴 수 없다. 부모 말도 안 듣고 이 바닥에 나온 사람들이 누구 말을 듣겠나. 다만 정부 예산을 지원하라고 요구해선 안 된다. 나랏돈으로 국가 이익에 반하는 작품을 만드는 게 말이 되나.”


◇장관 퇴임 후 굴착기 면허 따


-저작권법 정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한글박물관 건립 등 장관 재임 시 한 일이 적지 않더라.

“장관 시절 날 무지하게 괴롭혔던 야당 의원이 ‘기관장 문제로 이미지가 나빠져서 그렇지 일은 정말 잘했다’고 하더라(웃음). 나는 늘 현장에 있었다. 지구 7바퀴 반을 돌았다고 할 정도로 주말이면 국도를 타고 전국을 누볐다.’

-’회피 연아’, ‘찍지 마’ 동영상은 아직도 유튜브에 돈다.

“밴쿠버 올림픽에서 우승하고 돌아온 김연아 선수를 내가 안으려는 것처럼 악의적으로 편집한 영상이다. 유포자들을 다 고소했다. 이를 생중계한 KBS 영상이 나와 거짓으로 드러났는데도 날 공격했던 민주당 의원들은 사과 한마디 안 하더라. 웃자고 한 일에 죽자고 덤빈다며. 어떻게든 망신과 모멸감을 주려는 게 이 나라 정치다. 후쿠시마 오염수 선동처럼 가짜뉴스가 여전히 판치는 현실에 화가 난다. ”

-장관 끝난 뒤 굴착기, 지게차 면허를 땄다는 게 사실인가.

“내 꿈이 숲속에 작은 문화 공간을 직접 짓는 거다. 땅 파는 것부터 배우려고 파주 중장비 학원 가서 굴착기와 지게차 운전법을 배웠다.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실습을 해보고 싶었는데 초짜들은 안 써준다더라(웃음).”

-비행 청소년들과 7년째 자전거로 국토 종단을 하신다고.

“장관을 3년이나 했으면 여생은 봉사를 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의왕소년원에 가서 연극을 가르치다가 7년 전부터는 부산에서 서울까지 자전거 종단을 한다. 첫해는 자전거 집어 던지며 성질을 부리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더라. 재범률도 뚝 떨어졌다.”

-71세에 자전거로 유럽을 종주했다.

“유로벨로라고 유럽 전역을 연결하는 자전거 루트 17개가 있다. 방송사 PD였던 친구와 카메라를 장착하고 스위스에서 독일, 네덜란드로 이어지는 15번 길을 달렸다. 막판엔 체력이 달려 욕이 다 나오더라(웃음). 앞으로 뭔들 못 하겠나 싶었다.”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나 보다.

“우리 자전거 인구가 1300만이다. 그런데 제대로 된 자전거 길은 이명박 대통령 때 만든 4대강 외엔 없다. 유럽의 자전거 길을 조사해 보고 싶었다. 이정표는 물론 신호등도 따로 돼 있고, 자전거텔(숙박), 도시로 연결되는 길도 잘돼 있더라. TV나 유튜브를 통해 이 다큐를 곧 공개할 생각이다.”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고


-지난 봄 LG아트센터에서 전석 매진을 기록한 연극 ‘파우스트’에서 악마 역 박해수와 열연을 펼쳤다.

“스타가 된 배우가 다시 무대로 돌아오는 건 힘든 일이다. 그런데 이 친구는 모든 일정을 접고 연극에만 올인하더라. 연습 1시간 전에 와 있고 맨 마지막에 연습장을 떠났다. 보석을 발견했다.”

-이번엔 파우스트지만 과거엔 메피스토(악마)를 주로 연기했다.

“메피스토 연기는 즐겁다. 악에는 확실히 쾌락이 있다(웃음). 인간 파우스트가 힘들었다. 신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 끝없이 욕망하는 인간. 겉으로 드러나는 희로애락의 표현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인물이라 괴로웠다. 내가 메피스토를 연기할 때 윤주상이 파우스트를 연기했는데, 그때 왜 윤주상이 그렇게 고통스러웠했는지 알 것 같더라(웃음). 다이아몬드를 캐는 심정으로 연기했다.”

-인생작은 6번 연기한 햄릿일까?

“홀스또메르. 폐기 처분된 경주마의 눈으로 인간 세상을 풍자하는 작품이다. 이 연극을 본 한 남자가 내게 편지를 보냈다. IMF 때 사업이 망해 자살하려고 했는데 당신 연극을 보고 나서 다시 살기로 했다고. 꼭 성공해서 당신의 후원자가 되겠다고.”

-연기와 정치, 뭐가 더 어려운가?

“내겐 연기가 훨씬 어렵다. 100점을 맞는 게 불가능하니까. 물론 정치도 어렵지만 거긴 성과물이 있지 않나. 그런데 연기는 다르다. 95점까진 할 수 있는데 나머지 5점을 채우려고 발버둥 치다 끝내 못 하고 떠나는 게 연기다.”

-고생은 안 하고 살았을 것 같다.

“내가 피란 중에 태어났다. 한겨울 어머니가 연탄난로에 물을 팔팔 끓여서 찬밥을 끓이던 장면이 기억난다. 한 공기만 넣어도 양이 불어나서 온 식구가 먹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김치 한 가지도 볶음김치, 조림김치로 바꿔가며 도시락을 싸주셨다. 내 창의력의 원천은 어머니 도시락이다(웃음).”

-나이 듦이 좋은가?

“그럴 리가. 한 20년만 뒤로 갔으면 좋겠다. 아직 별도 따고 달도 따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모자라다.”

-가장 좋아하는 대사는?

돈키호테! 이룩할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며,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

 


☞유인촌

1951년 전북 완주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나와 1974년 MBC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다. ‘전원일기’ ‘야망의 세월’ ‘조선왕조오백년’ 등 다수 드라마에 출연했고, KBS 역사스페셜도 진행했다. ‘햄릿’ ‘파우스트’ ‘맥베스’ ‘리어왕’ ‘문제적 인간 연산’ 등 연극에 가장 열정을 쏟았다. 이명박 정부 때 문체부 장관을 지냈다.

'미친 여자'처럼 살았더니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의지의 똘녀'
60세부터 노르웨이어 독학해 입센 전집 완역한 연극학자 김미혜 교수

 

 

< 스브스프리미엄, 김수현, 작성 2023.08.13  >

 

 


헨리크 입센은 노르웨이의 극작가이자 시인입니다. 근대 시민극과 현대의 현실주의 연극을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하면서 ‘현대극의 아버지’라고도 불립니다. 1879년에 입센이 발표한 ‘인형의 집’은 페미니즘 희곡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꼽힙니다. 입센은 ‘인형의 집’ 외에도 ‘민중의 적’ ‘유령’ 등 지금도 끊임없이 공연되는 걸작들을 남겼습니다.

지난 3일, 서울 평창동에 있는 노르웨이 대사관저에서 노르웨이 왕실 공로훈장 수여식이 열렸습니다. 훈장을 받은 사람은 김미혜 한양대 연극영화과 명예교수. 한국 문화계 인사로는 처음으로 이 훈장을 받았습니다. 노르웨이가 자랑하는 작가 헨리크 입센 작품이 모두 실린 전집을 번역한 공로를 인정받은 건데요, 노르웨이 국왕 하랄 5세를 대신해 안네 카리 한센 오빈 주한 노르웨이 대사가 김 교수에게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올해 75세의 김 교수는 연극학자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이론서를 쓰고, 수많은 작품을 번역하고, 연출까지 했던 ‘연극인’입니다.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연극학 박사 과정을 마쳤고, 한국 작품을 독일어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김 교수가 입센 전집을 번역했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독일어로 된 걸 번역한 건가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입센 작품을 번역하기 위해 60세에 노르웨이어를 독학했다는 겁니다. 정년퇴임 이후 쉬기는커녕 본격적으로 번역 작업에 매달렸고, 74세 되던 지난해, 총 23편, 10권 분량으로 입센 전집 한국어 번역본을 발간했습니다.

김 교수는 ‘시장성이 없어서’ 출판 비용 일부를 부담하고 책을 냈습니다. 책상 앞에서 입센의 희곡과 씨름한 세월이 길어지며 척추 협착증을 얻어 한동안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김미혜 교수는 훈장을 받는 자리에서 울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요, 악전고투를 자처하며 왜 그렇게 입센에 매달렸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골라듣는 뉴스룸 커튼콜에 김 교수를 초대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헨리크 입센은 현대 연극의 아버지로 불리는 노르웨이의 극작가입니다. 헨리크 입센, 하면 몰라도 ‘인형의 집’은 들어보신 분들 많을 겁니다. 1879년에 입센이 발표한 ‘인형의 집’은 페미니즘 희곡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꼽힙니다. 여주인공 노라가 결혼과 남녀의 역할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자아를 찾아 집을 나가는 결말로 유명하죠. 입센은 ‘인형의 집’ 외에도 ‘민중의 적’, ‘유령’ 등 지금도 끊임없이 공연되는 걸작들을 남겼습니다.
 
김 교수가 본격적으로 입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6년, 입센의 서거 100주년을 맞아 독일에서 열린 한 학술대회에 참가한 것이 계기였습니다.

“베를린 대학에서 입센 콘퍼런스가 열렸는데 제가 당시 연극학회 회장 자격으로 초청받아 갔거든요. 27개국에서 와서 자기 나라에서 하는 입센(연구와 작품)에 대해 발표하는데, 저는 얘기할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왜? 우리는 안 하니까. 그때 엄청나게 우울했어요. 다른 사람들 얘기를 듣고만 있었어요. 독일 주재 노르웨이 대사관 리셉션에 갔는데, 거기서도 할 말이 없어서 대화에 끼기도 어려운 거예요.”

왜 그렇게 됐을까 의아했던 김 교수는 그래서 베를린에서 돌아온 후, 바로 노르웨이 오슬로로 갔습니다. 거기서 전 세계에서 발간된 입센 관련 출판물을 모두 수집해 놓았다는 입센 연구 센터를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자괴감을 느꼈습니다.

“한글로 되어 있는 자료는 하나도 없더라고요. 그때 뭐라 그럴까, 자괴감, 절망감을 느꼈어요. 그래도 우리도 문명국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일본 책도 있고 중국 책도 있는데 한국 것만 없어요.”

막연하게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김 교수는 그다음 해인 2007년, 뉴욕 방문길에 서점을 찾았다가 우연히 ‘Complete Norwegian’이라고 적힌 책을 발견하고 운명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 내가 직접 입센을 연구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하죠. 김 교수는 홀린 듯이 이 책을 사서 귀국했는데, 알고 보니 이 책은 노르웨이어 독학 교재였어요.

김 교수는 곧 입센 연구에 뛰어들었는데요. 한국어로는 입센을 연구할 수 없었습니다. 자료가 사실상 전무했으니까요. 김 교수는 한국 대학에선 영문학을 전공했고 오스트리아에서 유학해 독일어에 능통했기에, 영어와 독일어로 출판된 입센의 희곡과 관련 도서, 논문들을 백방으로 구해 ‘미친 듯이’ 읽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노르웨이어를 직접 배워야겠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습니다. 김 교수의 입센 연구는 2010년 헨리크 입센 평전을 출간하면서 첫 결실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입센의 작품을 영어와 독일어 번역으로 다 봤는데, 이게 차이가 있더라고요. 영어는 거의 단어 대 단어로 직역해 놓은 느낌이라서 문장을 읽고 나서도 작가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독일어는 또 너무 자세하게 번역해서 이게 희곡이 아니고 소설로 풀어놓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도대체 오리지널이 어떻길래 이럴까 궁금해하다가, 노르웨이어 교재를 사 왔던 게 생각났어요. 그래서 노르웨이어를 공부하게 된 거죠.”

나이 60세에 노르웨이어를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는데, 당시만 해도 한국에선 노르웨이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이 없었습니다. ‘노르웨이 남자 친구를 사귀면 된다’는 농담을 들었다고 하죠. 결국 뉴욕에서 사 온 노르웨이어 교재, 노르웨이에서 사 온 사전과 책들을 쌓아두고 독학을 시작했습니다. 노르웨이어가 독일어, 영어와 유사점이 있는 건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새로운 언어를 익히는 일은 처음 생각한 것보다 훨씬 험난한 과정이었습니다.

“매일 공부해야 하는데, 밖에서 바쁘고 밤늦게 오면 못하죠. 그럼 분명히 엊그제 했는데 그다음을 펴면 앞이 하나도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내가 정말 늙었구나. 전에는 기억력이 좋았는데 왜 이렇게 기억이 안 나지? 정말 많이 괴로웠지만, 그래도 계속 반복하니까 외워지더라고요. 그렇게 대강 노르웨이어를 떼고 나서, 바로 입센 전집에 도전했어요.

제임스 조이스나 토마스 만 같은 작가들도 입센을 오리지널로 읽고 싶어서 노르웨이어를 배웠대요. 그 사람들은 세계문학의 거장들이고 나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나라고 못할 것 뭐 있어? 나도 한 번 해보자! 그랬죠. 그런데 막상 도전해 보니까 다행이었던 게, 입센이 즐겨 쓰는 어투나 구절이 자꾸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할 수 있었죠.”

김 교수가 보여준 노르웨이어 입센 전집은 한 페이지도 반으로 나눠 깨알 같은 글씨로 꽉꽉 채워 1,0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벽돌 같은 책이었습니다. 입센이 평생 쓴 희곡 23편이 실려 있습니다. 이 책은 너무 글씨가 작아서 작품 별로 나온 단행본들도 따로 사 왔습니다. 번역 작업은 지루하고 더디게 진행됐습니다. 하루 종일 번역에 매달려도 두 줄 밖에 진도를 못 나가는 날도 있었습니다. 정년 퇴임 후에는 시간이 더 많아져서 본격적으로 입센 전집 번역에 매달렸습니다.

입센의 희곡 23편을 모두 한국어로 번역하고 나니 4,300페이지, 책 10권 분량이 나왔습니다. 영어나 독일어로 했다면 1년에 한두 권씩 낼 수도 있었겠지만, 노르웨이어는 자신이 없는 외국어라서, 계속 공부하면서 먼저 번역했던 것도 보고 또 보고 수정하는 과정을 반복하느라 막판에 한꺼번에 낼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김 교수는 그동안 노르웨이에도 여러 차례 다녀왔는데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바다에서 온 여인’을 번역하는데, 해안가 마을에 사는 주인공이 ‘넓은 바다’를 가고 싶어 하는 거예요. 바닷가에 사는데 왜 그럴까 의아했는데, 노르웨이 가보고 알았어요. 협곡이 너무 심해서 이 안에 콕 들어가 있는 해안가에 살면 넓은 바다가 안 보여요. 그리고 협곡 안쪽의 바다 하고 넓은 바다의 색깔도 달라요. 작품에 색깔에 대한 얘기도 나오거든요. 노르웨이에 직접 가서 보고 왜 그런 작품이 나왔는지 이해하게 된 부분이 많아요. 그래서 제 재산도 좀 들어간 거죠.

그런데, 중간에 그만두고 싶었던 때는 없었을까요?

“당연히 있었죠. 너무 힘들고, 노르웨이어는 자꾸 잊어버리고, 속상하니까. 그래도 그동안 했던 게 또 아까운 거예요. 그래서 그냥 했죠. 셰익스피어만 전집이 몇 개 있을 게 아니라 입센도 전집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나. 그것도 (독일어나 영어에서 옮긴) 중역 말고 오리지널로. 셰익스피어는 영국인이니까 영어로 다 했잖아요. 노르웨이 사람인 입센은 노르웨이어로 해야죠. 그래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잖아요.”

“She was Crazy!” 입센 연구를 시작하고 나서 김 교수는 스스로 생각해도 ‘미친 여자’처럼 살았다고 했습니다. 한국에 입센 연구가 너무 없어서 직접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나선 거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미친 듯이 이 일에 매달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일단 시작하면 그게 뭐가 됐든 끝장을 보는 성격이거든요. 처음에는 쉬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다 보면 생각보다 어려운 일도 있잖아요. 그래도, ‘자신과의 투쟁’ 이런 진부한 표현은 쓰기 싫고, 어찌 됐든 ‘내가 시작했는데 자존심이 있지, 끝을 내야지, 그런 편이긴 해요.

사실 이 일 하는 동안에 스스로한테 질문을 안 했어요. ‘너 왜 지금 이거하고 있니?’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은 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거고, 그럼 보람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혹시나 스스로 하게 될 것 같아서였죠. 그랬는데도 조금 시간이 지나니까 너무 힘들더라고요.”

이래선 안 되겠다고 생각한 김 교수는 노르웨이 대사관을 찾아갑니다. 이 일을 계속할 ‘명분’ 혹은 ‘구속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내가 노르웨이어 입센 전집을 번역하고 있는데, 매년 연말에 번역한 원고를 출력해서 제출할 테니 약간의 번역료를 달라, 그러면 내가 그 돈에 대한 의무감 때문에 번역 작업을 지속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노르웨이 대사관에서 소액이긴 하지만 지원금을 주셨어요. 6년 동안 지원해 주셔서 저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연말마다 그 해 작업한 원고를 출력해서 직접 제출하거나 소포로 발송했어요.

제가 노르웨이 왕실 훈장받던 날 울음이 나오려고 했는데, 그때 노르웨이 대사관 문정관 하시던 분이 오셔서 나도 120% 이해한다, 나도 눈물이 났다, 얼마나 고생했는지 직접 봤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하시더라고요.”

김 교수는 입센을 연구하면 할수록, 입센이라는 작가를 인간적으로도 굉장히 가깝게 느끼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저랑 너무 쿵짝이 맞는 거예요. 입센이 갖고 있었던 ‘소명 의식’, 그리고 자유를 추구하되 그 자유에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는 생각, 당파에 치우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한 것을 끝까지 해내는 정신이 굉장히 좋았어요.

입센은 19세기 중반에 극작가가 되었는데, 당시엔 노르웨이가 스웨덴의 속국이었거든요. 노르웨이적인 연극도 문화도 별로 없었어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작품을 사주는 사람도 없고, 치즈와 빵을 살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지만, 초지일관 자신이 하고자 한 일을 끝까지 했다는 점 때문에, 입센을 보면서 ‘사람은 정말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김미혜 교수는 입센의 작품은 자유로운 영혼, 인간의 권리, 젠더 문제, 예술가의 문제, 등등 다양한 테마를 다루고 있다고 했습니다. 입센이 그랬듯 입센의 희곡 속에도 소명 의식에 투철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런 대목에서 특히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민중의 적’에 나오는 스토크만 박사가 마지막에 ‘이 세상에 홀로 서 있는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사실은 독일 작가 쉴러가 한 말이기도 한데, 저는 이 대목에서 눈물이 좀 나더라고요. ‘브란’이라는 작품에도 자신을 희생하면서 소명에 헌신하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 작품을 보면서도 눈물을 흘렸어요.”

김 교수는 그 유명한 ‘인형의 집’은 페미니즘이 처음으로 북구에서 일어나기 시작할 때 나온 작품이라 페미니즘 해석을 많이 해왔지만, 이 작품을 페미니즘적으로만 해석하는 건 협소하게 이해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노라가 꼭 남편 때문에 집을 나갔다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교육하기 위해, 이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집을 나간 걸로 본다며, ‘인형의 집’은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얘기를 듣다 보니 좀 궁금해졌어요. 입센은 19세기에 활동한 남성 작가였지만 ‘인형의 집’의 노라도 그렇고, 헤다 가블레르도 그렇고, 당시로선 파격적인 여성상을 많이 창조해 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입센은 아내 수잔나 입센, 그리고 장모(수잔나의 의붓어머니) 막달레나 토르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해요. 이 두 사람은 당시 노르웨이에서 매우 진보적인 여성들이었습니다. 입센은 20대 초반 첫 희곡을 내고,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토르슨의 살롱에 초대됐다가 수잔나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습니다.

“수잔나는 엄청난 여자였어요. 아버지 영향으로 학구적인 분위기에서 자랐고, 똑똑한 데다가 성격은 완전히 여장부였죠. 그게 입센을 매료시킨 거예요. 입센의 작품들에서는 남자 캐릭터보다 여자 캐릭터들이 강해요. 여자들이 자의식이 강하고 활동적이고 생각도 깊죠. 입센은 자기 일을 하고, 예술적이고, 의지가 강한 여성들을 좋아했어요. 수잔나의 영향이 큽니다.

입센이 죽음을 앞두고 자기 며느리한테 이렇게 얘기했대요. ‘나는 너희 시어머니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다. 그녀는 내 일생의 독수리였다’라고요. 이 대목에서도 또 눈물이 났어요. 입센은 평생 수잔나한테 미안해했다고 합니다. 나랑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뭔가 큰일을 했을 텐데, 이렇게 생각했다는 거죠.”

이전에 한국에서 입센의 작품 번역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소수 작품에 한정됐고 그마저도 영어 번역본을 한국어로 옮긴 중역으로 오역이 많았습니다. 입센의 많은 작품들이 김 교수 덕분에 한국에서 초연됐는데요, 전집 완간 전에도 김 교수의 추천으로 명동예술극장이 ‘헤다 가블레르(2012)’, LG아트센터가 ‘사회의 기둥들(2014)’, 서울시극단이 ‘왕위 주장자들(2017)’을 한국 초연 무대에 올렸습니다. 입센의 작품이 21세기 한국 관객들에게도 생생하고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는 걸 새삼 확인했다고 합니다.

“‘사회의 기둥들’을 공연하는데, 세월호 사건을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 많았어요. 예를 들면 배에 많은 물건을 싣기 위해서 평형수를 조금만 넣고, 배가 낡았는데도 돈 벌려고 그냥 출항시켜서 사람들이 죽고 하는 이야기가 나와요. 어떻게 현실하고 이렇게 똑같을 수 있을까, 공연이 끝나고도 자리에서 못 일어나고 한참 있는 관객들이 많았다고 하더라고요.

‘왕위 주장자들’에는 왕위를 주장하는 인물이 세 명 등장합니다. 권력을 갖기 위한 인물들의 고뇌가 나오는 작품인데, 물론 상황이 똑같지는 않지만 대선을 앞둔 시기에 어울리는 작품이었죠.”

김미혜 교수는 입센 전집을 출판할 때 1천만 원 정도를 자비로 지출했습니다. 아무리 의미 있는 책이라도 시장성이 없어서 선뜻 출판해 줄 곳이 없는 게 한국의 현실입니다. 노르웨이 문학 번역 기금을 신청해 3백만 원 정도 받았고, 노르웨이 대사관에서도 일부 비용을 지원해 줬지만, 그래도 모자란 액수는 김 교수가 부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책을 안 내면 용돈이 굳고, 책을 낼수록 가난해진다! 책을 낼 때마다 제작비를 내요. 내가 몸을 버려가면서까지 고생했는데 10원이라도 받지는 못할망정, 출판하기 위해 내가 돈을 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죠. 그렇지만 어떡해요. 여기 살려면 그 현실을 인정해야죠.

그래도 책 나오고 보람을 느꼈어요. 한국 연극 전공하는 선생님들이 저한테 많이 연락해 오셨어요. ‘입센은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작가인데 선생님이 드디어 그 일을 하셨군요! 감사합니다’ 이런 내용이었어요.

사실 나는 한국에서 연극학을 공부한 적이 없고, 그냥 연극을 좋아하다 간 사람이라서, 꼭 한국 연극과 관계를 가져야 했어요. 서양 연극을 공부했지만, 학생들에게는 한국의 현실도 알려줘야 되니까, 열심히 대학로 연극 보고(그는 많이 볼 때는 1년에 100편 이상의 연극을 봤다고 합니다), 한국 연극 연구하고, 그렇게 난리를 쳤죠.”

김 교수는 학생들에게 가르칠 교재가 없어서 여러 권의 책을 직접 쓰고, 번역하고, 그렇게 책을 낼 때마다 사비를 들였습니다. 입센 연구에 매달렸던 15년 동안에도 다른 번역서와 저서를 네 권이나 냈습니다.  

“누군가는 해야 되지 않나? ‘콜링(calling)’이라는 말, 소명 의식을 많이 얘기했는데, 사실 학생들 가르칠 교재가 없어서 번역도 하고 책도 쓰고, 많이 하게 된 거죠.

내 돈 내고 책 낼 때마다 생각했어요. 연극 연출이나 극단을 하면 본전 찾기도 힘들잖아요. 그냥 내가 연극 연출 하나 해서 돈 썼다고 생각하자, 이러니까 좀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외국에서도 그런 책을 낼 때 사비를 들이나요?) 그렇지 않죠. 거긴 독자가 많아요. 책을 한 권 냈을 때 출판사가 운영이 될 수 있을 만큼 팔리는데 한국은 안 팔리니까.

하지만 책이 안 팔려도 책은 있어야 되는 거고, 이다음에 내가 죽더라도, 이제 입센 전집이 있으니까 누군가 입센을 공부할 수 있고, 그런 걸 생각해서 하는 거죠. 당장 내일만 생각하면 사실 할 수 없어요. 좀 더 길게 보고 내가 중요한 일을 한다, 그래도 한국 연극의 발전을 위해서 우리 선배들이 닦아놓은 한국 연극의 길에 내가 조금의 보탬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해야 되지 않나’라고 생각하는 것과, 내가 바로 그 ‘누군가’가 되는 것 사이에는 간극이 있습니다. 그 간극을 뛰어넘어 실천으로 나아가게 하는 게 바로 소명의식 아닐까요. 연극과 연극학에 대한 애정이, 그 소명 의식의 바탕에 있었을 겁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서부터 사회생활을 배우는 곳이 극장이었거든요. 연극을 보는 건 국민의 ‘민도’하고도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연극의 매력은 직접적이라는 데 있어요. 배우들이 생생하게 바로 앞에서 얘기하잖아요. 소설을 읽는 것과는 다르게, 굉장히 직접적으로 감정의 선을 많이 건드리죠. 힘들어도 연극은 계속 만들어야 하고 관객을 끌기 위해서 계속 노력해야 해요. 요즘 우리 연극이 너무 표피적인 게 많은데 그런 거 말고 진짜 진지한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작품들이 더 많아지면 좋겠어요.”

입센 얘기로 시작했지만, 김 교수의 인생 이야기도 흥미진진했습니다. 어릴 때엔 배우가 되고 싶었다고 합니다. 또 처음부터 박사를 하려고 오스트리아에 갔던 게 아니라, 유학하는 남편 뒷바라지하다가 독일어를 처음 배우고 빈 대학 학부 1학년 과정부터 다시 시작해서 연극학으로 박사 코스를 마쳤습니다. 그렇게 공부하는 게 당연히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유학 시절 그의 별명은 ‘의지의 똘녀’였습니다. 

이제 입센 전집 완간이라는 큰 숙제를 끝냈으니, 이제 좀 쉬고 싶을 만도 한데, 김 교수는 아직 쉬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책 한 권을 더 번역하려고 판권 계약을 했다고 하죠. 그리고 80까지 꼭 해야 할 일이 남았다고 했습니다.  

“김미혜 작품집 하나 내고 죽고 싶어요. 원래 내가 작가 지망생이었기 때문에. 내가 비엔나에서 둘째 딸을 낳았거든요, 9살 차이로. 근데 사흘 낮밤을 울었어요. 이제 논문을 시작해야 되는데 아이가 태어났으니 내가 공부를 과연 할 수 있을까, 공부를 그만둬야 하나, 지금까지 딴 성적이 너무 아깝고, 그런 산후 우울증이 와서 제가 단편소설을 하나 써서 한국의 일간지 신춘문예에 응모했어요.

신춘문예 최종 심사까지 올라갔는데 떨어졌어요. 심사 평을 보니 제 작품도 좋았는데 더 젊은 사람을 선택했다고 돼 있더라고요. 그때 당선됐으면 아마 작가가 됐을 거야. 그래서 지금 다시 소설 쓰고 있어요. 김미혜 작품집은 그냥 자비 출판할 거예요. 어차피 내가 유명한 사람도 아니고, 지금까지도 책 낼 때마다 내 돈 들어갔으니, 그냥 용돈 아꼈다가 작품집 출판하고 죽으려고요.”

김미혜 교수가 입센과 ‘쿵짝이 맞았다’는 말이 딱 맞더라고요. ‘초지일관 자신이 하고자 한 일을 끝까지 해낸’ 입센처럼, 김미혜 교수도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 시작한 입센 연구와 번역 작업을 난관을 돌파하며 끝까지 해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래 간직했던 꿈을 향해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60세에 독학한 노르웨이어로 입센 전집을 번역하고, 80세에는 자신의 소설집을 내겠다는 김미혜 교수를 보니, ‘도전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라는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명의식, 독수리, 의지의 똘녀, 그리고 자유로운 영혼. 김 교수를 만나고 나서 제 머릿속을 맴돈 말들입니다. 그가 번역한 입센의 희곡들을 읽어봐야겠습니다. 앞으로 5년 후 나올 김미혜 작품집도요.

김미혜 교수 이야기는 골라듣는 뉴스룸 커튼콜에서 직접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노르웨이 이야기도 있고,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https://youtu.be/SF35a4FTUVE

 

“김건희 무차별 공격… 한 여성 발가벗겨 광화문 세워놓고 짱돌 던지는 것”
 
癌투병에도 발언, 전여옥 前의원


2023년 7월 31일 전여옥 전 국회의원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암을 앓게 됨으로 인해서 인생이 깊어질 수 있었다"라고 말하며 자신은 '얼마나 오래 사는지'가 문제가 아닌 '어떻게 나머지를 사느냐'가 더 중요한 사람이라 말했다 

 

 

< 조선일보, 김윤덕 선임기자,  2023.08.14. >

 

 


암투병 중에도 유튜브와 블로그를 통해 맹렬히 사회발언을 하는 전여옥 전 의원이 지난달 31일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정치인은 사랑이 아니라 감시하고 채찍질하며 부려먹어야 할 대상"이라며 "오늘의 '국개'를 만든 데는 유권자들 책임도 크다"고 했다.  


전여옥 사전에 힐링, 고요, 평화는 없다. “10차 세계대전을 치르다시피 살아온” 인생이었다. “앞만 보고 달린다”, “눈물을 무기로 쓰는 여자는 되지 않겠다”가 생의 철칙이었다. 

 

뜻밖의 불청객이 찾아온 건 2년 전 겨울. 대장암 4기로, 이미 간으로 전이돼 수술이 불가하다고 의사는 말했다. 울음을 터뜨린 아들 앞에서 남은 생 더 뜨거운 전사(戰士)로 살겠다고 다짐했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전여옥이 깔깔 웃었다.

 


◇癌, 눈가의 잔주름처럼 여긴다


-충격이 크셨겠다.

“아들이 ‘엄마, 암이래’ 하며 울더라. 그래도 아이가 아니라 내가 아파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엄마는 자식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데, 난 아들을 위해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항암치료가 힘들지 않은가.

“즐거운 과정은 아니다. 그럼에도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살아 있다는 것에 희열과 경이를 느낀다. 어제보다 몸 상태가 나아졌다고 느끼면 설거지도 하고 청소기도 막 돌린다. 내가 평생 과체중인데, 항암엔 나처럼 뚱뚱한 사람이 유리하단다(웃음).”

-암을 눈가의 잔주름처럼 여기며 산다고 했더라.

인생이 2미터의 물이라면 난 1미터밖에 몰랐는데 암을 통해 1.5미터는 더 내려가 그동안 내가 알지 못했던 세계를 보고 있다. 누군가를 용서하기까지의 시간도 짧아졌다.”

-아픈데 유튜브와 블로그는 왜 그리 맹렬히 하시나?

암을 선고받으니 얼마나 오래 사느냐보다, 어떻게 나머지를 사느냐가 중요해졌다. 내겐 사회를 향한 발언이 또 하나의 치유 방법이다.

-투병 사실은 지난 5월에 알려졌다.

“대통령도 아닌데 국민에게 내 건강 상태를 공표할 필요가 있나. 또 내가 암이라고 하면 좌파들이 얼마나 저주를 퍼부을 건가.”

-실제로 ‘벌받았다’ ‘모자 벗어보라’는 악플이 쏟아졌다.

“진짜 촌스럽고 유치하게 군다 싶더라. 머리 보여주는 게 뭐 대단한가 싶어 기꺼이 벗었다.”

-모욕과 조롱에 상처받지 않나?

나도 인간이니까 안 받는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옳지 않고, 나는 그들보다 모든 점에서 나은 사람이라 괜찮다. 그리고 내겐 날 위해 함께 울어주고 애태워주는 좋은 친구들이 있다.

 


◇김건희 여사 두둔하는 이유? 


-진혜원 검사와의 소송으로 투병 사실을 공개했다던데.

“진혜원이 김건희 여사를 조롱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려 내가 인격 살인이라고 논평했더니 모욕이라며 고소했더라. 내가 정계에 복귀하려고 김건희를 두둔한다면서. 그래서 김소연 변호사가 투병 사실을 밝히면 정계 복귀를 위해 진혜원과 싸우는 게 아님을 대중이 알지 않겠느냐고 해서 동의했다.”

-김 여사를 왜 그리 열심히 방어하시나.

사람이 잘못을 하면 거기에 적당한 형량을 받아야 하는데 김 여사는 자신이 한 것에 비해 너무 가혹하게 받는다고 느꼈다. 좌파들이 대통령이 무식하다고 공격하지만 서울법대 나오고, ‘아메리칸 파이’를 그 자리에서 열창하는 사람이니 먹히질 않는다. 술고래라고 욕하는데 윤 대통령이 주사 부렸다는 얘기는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반면 김건희씨는 여성이라 가짜 뉴스로 부풀리기 좋다. 콜걸이니 동거니 얼마나 무자비한가. 암 걸린 내게도 온갖 악플이 쏟아지는데, 김 여사는 나의 열 배, 백 배는 달릴 거라 본다. 한 여성을 발가벗겨 광화문 네거리에 놓고 짱돌을 던지는 셈이다.”

-무속, 풍수 등 김 여사의 처신엔 문제가 없을까.

내가 아는 벤처기업인도 전속으로 상담하는 무속인이 있다. 정치인들도 부지기수다. 풍수가 무슨 문제인가. 신문마다 ‘오늘의 운세’ 코너도 있는데. 성형도 그렇다. 나도 보톡스 많이 맞았다. 성형은 개선의 열망이 강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이 한다. 의료의 중심이 안티에이징으로 가는 세상에 왜 성형 갖고 난리인가. 다만 김 여사에게 조언하고 싶은 건 있다. 그녀가 가장 예뻐 보인 건 맨얼굴에 헐렁한 치마 입고 강아지와 함께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 나갔을 때다. 화장 안 해도, 애교머리 안 해도 충분히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래도 리투아니아 명품숍 논란을 ‘마녀사냥’이라 감싼 건 오버다.

“빡빡한 공식일정 중 머리 식히려고 산책한 걸 갖고 너무 심하게 비난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블로그에 들어오시는 한 남자분이 화가 나서 댓글을 올렸더라. 우리는 보수정권을 지키기 위해 후쿠시마 오염수에 양평고속도로까지 야당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안간힘을 쓰는데 어떻게 영부인이 명품가게에 들어갈 수 있냐고. 그 글을 읽고 반성했다. 내가 같은 여성으로 너무 김건희를 동정했다는 생각에. 그래서 김 여사에게 ‘정(丁)의 각오로 대통령을 보필해 달라’는 글을 뒤이어 올렸다.”

-전여옥의 입은 여전히 거칠더라. ‘전여옥 TV’에서 민주당을 무뢰배, 당대표를 잡사범이라고 했다.

“정확하지 않은가? 내가 정치할 때 만난 민주당 의원 중엔 괜찮은 이가 참 많았다. 독재와 싸운 역사가 있고, 민주주의 위해 자신을 던진 사람들이었다. 그런 민주당이 타락한 모습에 가슴이 아프다. 청춘의 빛을 다 잃어버린 노회한 정당 같달까. 국회의장을 지낸 임채정 같은 분은 지금도 존경한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려면 고쳐야 할 것에 대해 진심 어린 조언도 해주셨다. 그런 인간적 면모가 사라진 권력 괴물이 지금의 민주당이다.”

-박지원 의원도 저격했다.

“내가 정치는 오래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게, 나이 많은 정치인들의 권력욕을 보면서다. 솔직히 내리 3선 이상은 국회의원 못 하게 해야 한다. 다선 의원에 장관까지 했으면 후배들 디딤돌이 돼줘야 하는데 정치를 또 하겠다고 나서니 얼마나 추한가. 제발 여의도에서 나와 서민의 땅을 밟아보라. 김밥천국에도 가보시라.”

-젊은 이준석은 왜 미워하나?

“이준석은 젊지 않다. 박지원과 똑같이 노회한, 충심은 없고 꼼수와 못된 정치공학만 배운 늙은 정치인이다.”

 


◇박근혜 저격? 돌아가도 같은 선택


-정치를 안 했다면 더 건강하지 않았을까?

“누가 떠밀어서가 아니라 내 발로 들어간 정치다. 오히려 내 인생에 전기를 맞았다. 나의 성취는 순전히 내가 잘났기 때문이라 여겼는데 정치를 하고 수많은 유권자를 만나보니 난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더라. 다만 정치는 남의 인생을 사는 거라 행복하진 않았다. 매일매일 지뢰밭을 밞으며 검투사처럼 살았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맞서지 않았다면 지금도 정치를 하고 있지 않을까.

“100% 지는 싸움이었지만 보수를 지지하는 국민을 위해 나라도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박 대통령의 문제를 모두가 알았지만 아무도 얘기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국민 앞에 큰 죄를 짓는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탄핵된 박 대통령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겠다.

난 박 대통령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에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애국심이 있고, 대중을 움직이는 데 누구보다 뛰어난 정치인이었으며, 권력 의지는 DJ(김대중)보다도 강했다.”

-윤석열 후보를 일찌감치 지지했다.

검사에 대한 편견이 있었지만, 권력에 맞서 목숨 걸고 싸우는 걸 보면서 이런 사람이 나라에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에 충성하지 않고, 요리를 좋아한다는 점에서 나와 매우 비슷했고(웃음).”

-윤 대통령도 잘못하면 비판할 건가.

물론이다. 내가 윤석열을 남자로 좋아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하하!”

-우려하는 점은 없나.

“인사는 좀 실망스럽다. 하지만 그분이 27년을 검사만 해서 이재명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는 알아도, 누가 진짜 능력 있는 사람인지는 모를 거다. 그래서 대통령이 물망에 오른 후보들과 최소 1시간 대화를 나눠보면 좋겠다. 적어도 3배수를 두고 결정했으면 한다.”

-내년 총선은 어떻게 될까

윤통이 지금 팔수 중이다 생각하며 겸손하게 나아가면 승산 있다. 김 여사는 ‘부산 이즈 레디’ 같은 열쇠고리 달고 엑스포 유치에 힘쓸 게 아니라 보육원 아이들, 반지하에 사는 아이들 문제를 살피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내리 5선 한 안민석이 엉터리 같지만 소셜 스킬이 엄청 좋다. 사근사근하고. 서민들에게 좌파들은 속삭인다. 힘들어서 어떡하냐며. 커피 한 잔도 안 사주는데 그런 말들이 위로가 된다. 우파가 그걸 알아야 한다.”


◇내게 있어 창세기는 내 생일


-’전여옥TV’를 보니 매일 모자가 바뀌더라.

워낙 드세 보여 날 동정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암에 걸렸다고 하니 사람들이 잘해준다. 모자도 사주고. 물론 가슴을 후벼파는 악플도 달린다. 그럴 땐 거울 보고 ‘난 전여옥이다!’를 외친다(웃음).”

-’내게 있어 창세기는 내 생일’이라고 했다.

“내가 태어나야 세상이 존재하고, 내가 죽으면 끝나니까. 아프기 전에도 생일을 1주일에 걸쳐 뻑적지근하게 지냈는데, 요즘은 마지막 생일이 될까 봐 한 달 내내 축하받는다.”

-10차 대전을 치르며 산 것 같다고 했다.

“성격이 운명을 만든다고, 나는 태생이 전사였다. 정신 놓고 멍 때리는 걸 제일 싫어한다. 하나라도 더 보고 읽어야 하지 않나. 아들에게도 너보다 경험 많고 나이 많고 능력도 있어서 배울 게 많은 여자와 결혼하라고 했다.”

-아들을 위해 ‘흙수저 연금술’이란 재테크 책도 펴냈더라.

“돈 쓰는 걸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아들한테도 네가 지금 10원짜리 동전을 굴러다니게 하면 그 10원 때문에 울게 될 날이 온다고 귀에 못이 박이게 얘기했다. 돈은 자유와 독립과 권력을 준다. 타인이 날 모욕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돈이다. 아들이 자동차 튜닝 가게를 열었는데, 아침 7시에 내 방문을 열고 외치더라. 외상값 13만원이 입금됐다며! 그게 안 들어올까 봐 잠 못 자는 아이를 보며 내가 떠나도 한몫의 인간으로서 잘 살겠구나 했다.”

-’총체적으로 계산하면 내 인생은 축복받은 인생’이라고 했다.

나는 늘 나를 축복했다. 아이 블레스 유! 실제로 운이 좋았고, 예기치 않은 곳에서 수많은 이가 도와주는 인생을 살았다. 노력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가. 다만 결혼을 늦게 해 아직 어린 아들이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엄마가 이 세상에 없더라도 늘 네 옆에 있어줄 거라고 말한다. 넌 절대 혼자가 아니라고.”

 


☞전여옥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KBS 도쿄특파원을 거쳐 2004년 한나라당 대변인으로 정치에 입문한 뒤 17대, 1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일본은 없다’를 비롯해 ‘여성이여 테러리스트가 돼라’ ‘오만과 무능’ ‘산다는 것은 1%의 기적’ 등 여러 저서를 출간했다. ‘전여옥 TV’를 운영한다.

“엄마는 양공주였지만 부끄럽지 않아… 나한테는 영웅이니까”

 


‘전쟁 같은 맛’으로 전미도서상 후보
한국계 미국인 사회학자 그레이스 조

 


< 조선일보, 박돈규 주말뉴스부장,  2023.08.12. >

 


엄마는 양공주였다. 부산 어느 기지촌에서 청춘을 보냈다. 이름은 군자(1941~2008). 사회학자인 딸 그레이스 조(Grace M Cho)는 엄마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6·25전쟁, 가족 상실, 굶주림, 미군 기지촌, 혼혈아 출산, 미국 이민, 사회적 죽음 등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몸과 정신에 진열해 놓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레이스 조는 미국 브라운대를 졸업한 뒤 하버드대에서 교육학 석사를 받았고 현재는 뉴욕시립대 사회학·인류학 교수다. 엄마의 생애를 복기한 회고록 ‘전쟁 같은 맛(Tastes Like War)’은 2021년 전미도서상 논픽션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고 시사주간지 ‘타임’은 올해의 책으로 선정했다. 2022년에는 아시아·태평양 미국인 도서상을 받았다.

최근 국내에 번역된 ‘전쟁 같은 맛’은 들추기 겁나는 세계로 독자를 잡아끈다. 책장이 바삐 넘어간다. 군자는 전쟁으로 오빠와 아버지 등 가족의 절반을 잃고 기지촌 클럽에서 일하다 상선 선원이던 백인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1971년 혼혈아 그레이스를 낳고 추방되다시피 미국 워싱턴주의 시골로 이민을 갔지만 인종차별이 심한 그곳도 피난처가 되진 못했다. 군자는 조현병을 앓으며 망상과 환청에 시달리다 2008년 생을 마감했다.

지난달 11일 서울 광화문에서 그레이스 조를 만났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사회학자는 첫인상이 견고해 보였다. 두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간 그녀는 “아이구! 답답으라” 등 몇몇 단어 말고는 한국어를 하지 못했다. “이 책은 상실의 슬픔을 글쓰기로 달래고 엄마라는 존재를 되살리려 시작한 프로젝트였어요. 한국어판이 나오고 한국 사람들이 엄마와 나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니, 기적적인 귀향(miraculous homecoming) 같아요.”

그레이스 조는 “엄마의 인생을 담은 ‘전쟁 같은 맛’은 쓰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던 이야기”라며 “돌아갈 곳이 없었던 엄마라는 존재를 글쓰기로 되살리고 싶었다”고 했다. "독자들이 열린 가슴과 열린 생각으로 읽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엄마의 삶은 추방의 연속이었다


비가 내려 축축한 날이었다. 인터뷰에는 그레이스의 아들 펠릭스(10)가 함께했다. 13년 만에 한국에 왔다는 그레이스는 “이번 방한은 내 자식과 같이 왔다는 점이 특별하다”며 “고향 부산을 비롯해 엄마와 외할머니의 나라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독자에게 이 책을 소개한다면.

“크게 두 갈래예요. 하나는 어머니에게 발병한 조현병의 사회적 근원에 대한 연구입니다. 상당 부분은 전쟁과 가족 상실, 미군을 위한 매춘 등 한국에서 비롯된 것이니까요. 다른 하나는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10여 년 동안 제가 엄마를 위해 해드린 한국 음식에 대한 회고록입니다.”

-제목은 왜 ‘전쟁 같은 맛’인가요.

“말년에 엄마는 식욕을 잃고 음식을 거부하곤 했어요. 라면과 과일 통조림만 드실 뿐 단백질 섭취가 부족했습니다. 올케가 분유를 드렸더니 ‘그 맛은 진절머리가 나. 전쟁 같은 맛이야’라고 하셨지요. 미국이 식량 원조로 준 분유를 먹고 (유당 불내증 때문에) 복통과 설사로 고생한 사람이 많았다는 자료를 본 기억이 났습니다.”

-그것은 어떤 맛이었을까요.

“냄새를 맡거나 맛을 볼 때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장면이 있잖아요. ‘전쟁 같은 맛’은 잊고 싶은 시절의 고통을 불러내는 맛이겠지요. 듣는 순간 ‘책 제목이 되겠구나’ 직감했어요. 음식 회고록은 따뜻하고 아름다운 추억만 소환하는 게 아니라 훨씬 더 복잡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과거에 끝난 전쟁이 아니라 현재에도 무엇과 연결돼서 사람들에게 어떤 기억을 불러일으키기를 바라면서.”

-성명이 Grace M Cho인데 외할머니의 성(姓)이라고 들었습니다.

“모계를 기억하기 위해서예요. 다른 이유도 있는데, 오빠와 올케 등은 과거를 덮어두고 싶어합니다. 저는 엄마의 진실을 말하되 다른 가족은 보호해야 했어요. 그래서 엄마의 엄마, 외할머니의 성을 사용합니다.”

-가족사를 세상에 공개하는 게 두렵지 않았나요?

“공포보다 해야 한다는 욕구가 더 강했어요. 엄마가 말하지 않은 비밀이자 트라우마,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침묵은 우리 가족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크게 보면 가족을 넘어서는 거대한 역사의 일부라서, 숨기지 말고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선택에 어머니도 동의하실까요.

“2008년 펴낸 학술서 ‘한인 디아스포라의 출몰: 수치심, 비밀 그리고 잊힌 전쟁’에서 양공주 문제를 다룰 때 엄마가 지지해줬어요.”

그 책에 따르면 6·25전쟁 이후 미군을 상대로 술이나 성(性)을 파는 서비스업에 종사한 한국 여성은 약 100만명에 이른다. 10만여 명은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정부가 사실상 기지촌을 운영했고, 혼혈아가 태어나면 해외 입양을 권장한 시절이었다.

-책에 ‘군자의 삶은 추방의 연속이었다’고 썼는데.

“정말 그랬습니다. 군자는 일본으로 강제징용된 가정에서 태어나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전쟁을 겪으며 가족을 잃었고 ‘외국인과 살을 섞었다’는 경멸과 낙인 때문에 사실상 쫓겨났어요. 아이들에게 더 나은 삶의 조건을 마련해주기 위해 이주한 미국에서도 차별을 당하고 환청에 시달리며 방에 틀어박혔습니다. 생물학적 죽음 이전에 사회적 죽음을 맞은 거예요.”

-어머니를 사회학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습니까.

“엄마에게 제 학업은 당신의 과거와 얼룩을 지워내는 방편이었어요. 그런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사회정의에 대한 제 의식은 가족사와 더 밀접하게 얽혀 갔습니다. 오랫동안 연구 주제가 ‘트라우마로 점철된 역사’였기 때문에, 엄마의 질병 밑에 숨어 있는 뿌리가 무엇인지 궁금했어요.”

-어머니가 함구한 비밀을 알게 되고 글로 옮기는 과정은 고통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엄마의 이상한 증상은 제가 열다섯 살 때 시작됐는데 조현병이라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어요. 올케가 ‘어머님이 매춘부였대요’라고 한 스물세 살부터는 엄마 인생의 맥락을 이해해보려고 애쓰며 성인기를 보냈으니 긴 여정이었습니다. 엄마의 비밀은 내 정체성의 일부가 된 셈이에요. 고통요? 과거에는 괴로웠지만 진실을 파헤치고(excavate the truth) 글쓰는 일로 옮겨간 다음부터는 고통스럽지 않았어요. 정면으로 마주할 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마침내 고향에 돌아온 기분


이렇게 말할 때 그레이스는 엄마의 진실을 발굴하는 고고학자처럼 보였다. 과거를 한 꺼풀씩 들추다가 깜짝 놀라 다 덮어버리고 싶은 적은 없었을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그녀는 답했다.

-왜 불가능합니까.

“가족 중에 ‘그만 멈추라’고 한 분들이 있었고 학계에서도 ‘그것은 진짜 사회학이 아니다’라고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반대가 심할수록 중요한 뭔가가 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했어요. 엄마는 거대한 억압의 역사로 가는 입구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사회학이 아니라는 비판은 핵심이 뭐였나요.

“미국 사회학계에는 백인 중심으로 어떤 관행과 역사가 있어요. ‘전쟁 같은 맛’은 동양적 의미의 영혼이나 귀신, 목소리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기 때문에 사회학에서 벗어나 있다는 지적을 받은 겁니다. 이 일은 2008년 엄마의 이른 죽음을 애도하며 심리치료 겸 추도사처럼 시작한 거예요. 글로 애도하는 장례식과 같았습니다. 쓰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어요.”

-2021년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에 올랐고 호평이 쏟아졌습니다.

“올해의 책은 금방 잊히지만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로 뽑힌 책은 기록이 남고 꾸준히 읽힙니다. 강연과 인터뷰 등으로 바빠졌지만 정말 뿌듯했어요.”

-이렇게 한국어판이 나온 감회라면.

“초조하고 불안해요. 혼혈인인 저는 한국과의 관계에서 아웃사이더(국외자)였습니다. ‘전쟁 같은 맛’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몰라 감상을 정리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분명한 건 딱 하나, 기적 같은 일이라는 점입니다.”

-왜 기적이라고 생각하나요.

“제 복잡한 내면을 설명하고 싶었는데 그동안 언어 장벽 때문에 답답하고 슬펐거든요. 이 땅에 남겨둔 모든 사람, 모든 것을 이어주던 엄마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책으로 내가 누구인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지 한국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됐어요. 엄마와 저 같은 혼혈 가족은 한국이 오랫동안 잊고 싶어한 존재라서 더 감격적이에요.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온 기분입니다.”

-목소리를 내도 들어줄 사람이 없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책이라고 썼는데.

어떤 여성이 기지촌에서 일했다는 비밀을 말할 수 없을 때, 그 트라우마는 무의식에 선명한 자국을 남깁니다. 다음 세대로도 전달되고 유령(ghost)처럼 출몰하게 돼요. 제 정신과 무의식에 그런 유령이 존재한다고 저는 생각했어요. 긴 침묵을 깨야만 했습니다. 소외돼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이 목소리를 들었으면 좋겠어요. 사회에서 거부당한 사람들의 초상을 완전한 인간으로 그려내는 것이 제 목표 중 하나예요.”

-사회가 그들에게 진 빚도 있다고 생각하나요.

“미국 사회는 음식을 만들고, 화장실을 청소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이민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국가 안보의 최전선에서 제 몸과 성노동을 바쳤지만 사회악 취급을 받은 기지촌 여성들에게 한국 사회가 진 빚도 있어요. 그렇게 만든 구조가 문제이지 그들이 수치심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숨죽인 채 유령처럼 살지 않아도 돼요.”

-아들 펠릭스에게 당신은 어떤 엄마인가요.

“엄마가 그랬듯이 저도 아이에게 굉장히 열정적이고 때로는 불같이 화를 냅니다(웃음). 내 안에 엄마가 있구나 느낄 정도로. 그런데 저는 어떤 비밀도 없어요. 아이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합니다.”

지난해 9월 대법원은 기지촌에서 미군에게 성매매를 제공한 여성들이 “정부의 기지촌 조성·운영·관리 등 불법행위로 피해를 입었다”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6억7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그레이스는 “한국 사회가 이 여성들을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보상할 준비가 됐다는 신호이기를 바란다”고 했다.

 


◇엄마가 물려준 가장 귀한 선물


딸의 성공은 엄마가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었다. 그레이스는 “내 교육은 엄마에게 다시 주어진 기회라는 것을 깨닫는 데 평생이 걸렸다”고 썼다. “엄마는 제가 클 때 부엌엔 얼씬도 못 하게 했어요. 한번은 나중에 요리사가 되고 싶다 했더니 ‘안 돼! 열심히 공부해서 멀리멀리 제일 좋은 대학 가야지. 넌 의사, 변호사, 교수도 될 수 있어!’라고 소리를 질렀어요.”

-어릴 적엔 어머니가 당신을 ‘순희’라 부르곤 했다면서요.

“순희는 ‘가장 순진한 소녀’라는 뜻이었어요. 엄마가 내 순진함을 그토록 바란 이유는 당신에게는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지촌에 발을 들이기 전 엄마의 삶에서 엄마가 깨끗하게 간직하고 싶었던 건 아무것도 없었는지도 몰라요.”

-어머니의 소망을 이뤄드렸다고 생각하나요.

“하하. 매우 그렇습니다. 엄마는 제가 박사가 됐을 때, 교수가 됐을 때 굉장히 좋아했어요. 미국에서 책으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을 누린 데 대해서도 엄마가 영혼으로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한다는 걸 느낍니다.”

-책에 ‘내게는 세 엄마가 있었다’고 썼는데.

“유년기의 엄마는 요리를 좋아했고 활기찼고 이상적인 엄마에 가까웠어요. 낯선 미국 사회에 적응하려고 애썼지요. 두 번째 엄마는 조현병으로 아프고 아무것도 못한 채 사그라들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때 저는 엄마를 잃어버렸어요. 세 번째 엄마는 나를 당신의 요리사로 받아들이고, 외할머니가 해주셨던 한국 음식을 내게 가르쳐주며 되살아난 엄마예요. 마지막 10여 년간 같이 밥을 먹으며 옛날 이야기를 빵 부스러기처럼 흘려주시곤 했지요. 연구를 시작하도록 추동한 사람은 두 번째 엄마였지만, 그것을 끝마치도록 자양분을 준 사람은 세 번째 엄마예요.”

-콩국수, 생태찌개, 쇠고기국, 생선조림 같은 음식을 나누며 관계를 회복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었어요. 가장 좋아하는 한식이라면.

“(주저 없이) 미역국요! 어린 시절과 연결돼 있는 음식입니다. 아침에 미역국 냄새가 나면 제가 금세 일어나서 밥을 먹고 제 시간에 등교한다는 걸 엄마는 아셨어요. 하나 더 꼽자면 비빔밥을 좋아합니다. 엄마가 해주시던 비빔밥은 간단했는데 한식당에서 주문한 비빔밥에는 온갖 재료가 들어가더군요. 그때 깨달았어요. 비빔밥은 무슨 재료로든 만들 수 있구나.”

-이번 여행에서 특별히 경험한 게 있나요.

“제가 미국으로 가기 전에 부산에서 살던 집을 찾아냈어요. 형태는 달라졌지만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주인 허락을 받고 마당에 들어가 사진도 찍었어요.”

-지금 어머니가 생존해 계시고 이 책을 읽는다면 뭐라고 하실까요.

“글쎄요, 상상이 잘 안 되지만 ‘아이구! 답답으라’는 아닐 것 같아요. 엄마는 늘 내 편을 들어주셨으니까 아마도 ‘우리 딸, 잘했다’ 하지 않을까요?(웃음)”

-당신에게 어머니는 어떤 분인가요. 물려받은 가장 귀한 것이 있다면.

“엄마는 타락한 여자라는 꼬리표에도 불구하고 명예로운 삶을 살았고, 정신병자라는 꼬리표에도 불구하고 이성적인 존재였어요. 저는 엄마가 처한 삶의 조건은 단순한 망명 상태가 아니라 도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자녀들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기, 미국에서 삶을 꾸려나가 보겠다는 의지, 음식을 만들며 생존하려 한 방식까지. 엄마는 그런 도전 정신을 물려줬어요. 저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아요.”

‘전쟁 같은 맛’의 끄트머리에 모녀가 나눴다는 대화가 나온다. “준비 중인 책에 양공주(yanggongju)라는 단어가 등장한다”고 하자, 그레이스의 눈을 피하며 군자가 지적한다. “오, 그건 나쁜 말이야.” 딸은 이렇게 대꾸한다. “내가 글쓰기로 그 의미를 바꾸려고 해요. 그 단어가 더 이상 수치스러운 말이 아니었으면 해요. 그 여자, 내게는 영웅이니까. 나는 엄마가 조금도 부끄럽지 않아요.”


죽고 싶었을 때 혁명군처럼 진격… 끝까지 살아봐야 알아요, 인생은!

‘인생은 아름다워’展 여는 팔순의 닥종이 작가 김영희


2023년 7월 26일 닥종이 작가 김영희 씨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인생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며 인생은 "끝까지 살아봐야 안다"고 했다./ 이태경 기자

 

 

< 조선일보, 김윤덕 선임기자 / 이태경 기자,  2023.07.31. >

 


김영희가 연인 배용이 만들어준 푸른 원피스를 입고 인형들과 활짝 웃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손, 와인, 편지 등 일상을 소재로 삼은 추상 신작도 볼 수 있다.  

 


어머니가 도둑놈 손이라고 했던 열 손가락 지문(指紋)은 평생의 노동으로 다 닳아 없어졌지만, 김영희는 “인생은 오페라보다 아름답다”며 웃었다. 첫 남편과 사별 후 아이 셋 업고 날아간 독일 땅에서 갖은 설움받고 살았지만, “그래서 인생은 최고의 예술품”이라고 했다. 팔순의 그녀가 다시 모국에 왔다.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말벗이 돼준 닥종이 인형들과 함께. 서울 광화문 아트조선스페이스에서 8월 26일까지 열리는 전시 제목이 ‘인생은 아름다워’다.

 

 


◇떨어져 연애하니 좋더라


-내년 80인데도 군살이 하나 없습니다.

“채소고 고기고 가리지 않고 잘 먹어요. 우리 큰딸이 엄마는 대체 맛없는 게 뭐냐고 물어요. 그리고 걷지요. 독일에서도 매일 6~7㎞는 걸었어요. 인형 만들고 정원 돌보느라 한시도 퍼질 새가 없어요.”

-서울에서도 광화문 숙소에서 청와대까지 매일 아침 걷는다고요.

“꽃과 나무들이 예뻐서 말을 걸다 오지요. 나이가 드니 아름다운 것에만 눈을 돌리는 이기주의자가 됐나 봐요.”

-한국에 오면 좋은가요?

“저에겐 휴가죠. 사람들 만나 수다 떠니까. 뮌헨 집에선 종일 혼자 일만 하거든요. 그리고 맛있는 게 많잖아요. 팥빵, 오징어, 만두, 옥수수. 미국 사는 오빠도 팔십이 넘으니 한국 가서 탕수육 먹고 살고 싶대요. 근데 내가 쓰는 말을 호텔 직원들이 못 알아들어요. 변소가 어디냐고 했더니 그게 뭐냬요, 하하!”

-사랑도 건강의 비결이겠지요? (김영희는 67세에 동갑내기 패션 디자이너 배용과 연애를 시작했다.)

“그이는 참 부지런한 사람이에요. 제가 부산에 가면 아침을 지어서 갖다 바쳐요. 부산 남자라 말은 이쁘게 안 하는데 어찌나 깨끗한지 집을 쓸고 닦지요. 첫사랑이던 아내와 사별했으니 큰 충격이었죠. 암 치료한다고 서울 의상실도 접고 간병만 했대요. 아내가 죽고 나서 매일 울었는데, 김영희 만나고는 울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그러더군요(웃음).”

-벌써 13년째네요.

“눈에서 멀어지면 사랑도 멀어진다고 독일 친구들은 반대했어요. 곧 헤어진다는 데 300유로씩 걸고(웃음). 근데 난 떨어져 연애하니 참 좋아요. 쓸데없는 간섭이 없잖아요. 대신 매일 아침 전화를 하죠. 잘 있냐, 잘 먹었냐. 우리 올케가 웃어요. 노인네들이 참 부지런하다고. 그럼 내가 그래요. 죽었나 살았나 체크는 해야 할 거 아니냐!”

-팔순을 앞두고 여는 전시입니다.

“한지를 내가 다섯 살 때부터 만졌잖아요. 뭐든지 흔하면 좋은 줄 모르는데, 운명이라 그랬나 봐요. 나는 화가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고 자란 고향이 뒷받침되지요. 네덜란드에 전시하러 갔는데 그 나라 풍경이 딱 몬드리안 그림이야. 산은 없고 모두가 네모, 네모. 미켈란젤로의 조각상도 이탈리아에 대리석이 많으니 가능하지 않았겠어요? 나는 한지의 나라에서 태어나 한지 조각가가 됐고요. 그런 내가 장해요(웃음).”


◇뜻대로 안 되니 인생


-닥종이의 첫 느낌을 기억하나요?

“그럼요. 아버지가 제천서 직조공장 할 때 한옥에서 살았는데 매년 물 뿌려 창호지를 교체할 때마다 마당에 버려진 파지를 조물락거리던 느낌이 생생하죠. 보송보송한 솜털 같은 종이로 생쥐도 만들고 강아지도 만들고. 고3 때도 그러고 있으니 우리 엄마, 아버지는 막내딸이 저능아인가 했대요.”

-홍대 다닐 땐 굉장한 멋쟁이였다고요.

“그때는 홍대 앞이 진흙밭이라 장화 신고 학교 가서 하이힐로 갈아 신은 다음 수업이 끝나면 무조건 명동으로 갔어요. 명동 가서 노는 게 3분의 1!  인형 만드는 것만 재미있지 학교 수업은 재미가 없어서 학점을 겨우 따고 졸업했지요.”

-제천에서 중학교 미술 교사로 근무했더군요.

“대학을 졸업하니 엄마가 용돈을 딱 끊어서 하숙비 안 드는 제천으로 교직을 신청했죠. 거기서 유진이(큰딸) 아빠를 만났고요. 그러니 사람 일이 뜻대로, 플랜대로 되는 게 없어요. 운명대로 살지요.”

-사별 후 왜 서울로 왔나요?

“남편이 죽으니 배짱이 생겨요. 여기서 선생 할 게 아니라 서울 가서 작가로 나가겠다! 엄마도 가라고 하셨어요. 과부 돼서 선생질 하나 그게 그거라고. 서울 개봉동에 집을 사서 시부모님 모시고 살면서 인형을 만들었죠. 무조건 성공해야 했어요.”

-첫 전시를 조선호텔 복도에서 했지요?

“처음엔 신세계백화점에 갔는데 거절당했죠. 이름도 못 들어본 작가라고. 다행히 조선호텔에서 허락받고 70점을 걸었는데 호텔 커피숍이 바글바글해질 만큼 전시가 잘됐어요. 마침 내셔널지오그래픽 기자가 리뷰까지 해줘서 건축가 김수근씨 ‘공간’에서 두번째 전시를 한 뒤 독일 뮌헨시립미술관에서 전시하는 첫 한국인 작가가 됐지요.”

-뮌헨 전시에서 운명의 청년 토마스를 만납니다.

“난 서른일곱, 토마스는 스물세 살이라 말도 안 되는 건데, 자기는 영원히 날 사랑할 거고 아이들도 먹여 살릴 거라고 장담하더군요. 서양 남자나 한국 남자나 뻥을 잘 쳐요, 하하!”

-어머니는 반대하지 않았나요?

“내가 말로 해서 듣는 딸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많이 맞았어요(웃음). ‘젊은 양놈한테 미쳐서 애들 밥도 안 해주고 해싸면 내 죽은 귀신이라도 독일로 날아가 널 잡아묵을끼다’ 하셨죠. 난 우악스러운 우리 엄마가 좋았어요. 모르는 게 없는 여장부였죠. 아버지가 그랬어요. 무식한 게 틀린 말은 안 한다고. 다들 파마할 때 쪽찐머리로 평생 산 분이죠.”

-그런데 토마스는 경제적 능력이 없고, 독일 화단의 벽은 높았지요?

“누가 날 쳐주겠어요. 평론가 파워 막강한 독일에선 처녀에, 젊고, 독일대학 나와야 성공한다는 말이 있는데, 저는 하나도 해당 안 됐지요. 그러다 뮌헨 전시 때 내 작품을 눈여겨봤던 사람이 호숫가의 작은 갤러리를 소개해줘 첫 전시를 했어요. 넷째 낳고 3일 만에 퉁퉁 부은 얼굴로 한복 입고 개막식에 갔는데 지금 생각해도 촌스러웠어요(웃음).”

-이젠 독일에서도 유명해졌지요?

“내 컬렉터들은 평론가를 무시하는 사람들이에요. 나는 작품에 포엠(poem·시)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데 그걸 좋아하는 분들이죠. 컬렉터 중 한 변호사가 그러더군요. 자기는 한 시간 만에 변론 쓰고 버는 돈을 당신은 한 달간 노동해서 번다고. 내가 그랬죠. 바보는 바보대로 사는 거라고, 그래도 행복하다고.”

김영희의 닥종이 인형은 언제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어머니, 아버지, 자식을 새삼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가족 관람객이 많이 찾는다. 1994년 9월 3일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열린 김영희 닥종이 전시회에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선 관람객들.

 


◇언제나 기다리는 엄마


-토마스와의 이혼을 후회하나요?

“제일 잘한 일 중 하나예요. 사랑해서 독일로 갔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점점 보수적인 독일 남자가 돼가고, 나는 억센 한국 여자가 돼갔지요. 성당 안 간다고 어린 딸을 때리고, 배변 못 가린다고 아이 엉덩이에 뜨거운 물, 찬물 퍼붓는 걸 참을 수 없었어요.”

-다섯 아이는 성인이 됐겠군요.

“맏딸 유진이는 파산 전문 변호사가 됐고, 윤수는 음악학원 차려 성공했어요. 스님 되겠다던 장수는 자연의학에 관련된 일을 하고, 봄누리는 작곡가로 살고 있지요. 그 애들이 이제 날 감시해요. 말대꾸하면 큰일나죠, 하하!”

-자폐 증세 있던 막내 프란츠도 잘 있나요?

“프란츠 때문에 늘 마음 아파하니 장수가 그래요. 엄마는 프란츠가 잘 크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건 엄마가 다른 애들과 비교를 하기 때문이라고. 정작 프란츠는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게 지낸다고.”

-봄누리 때문에도 맘고생 하셨지요?

“처녀가 애를 뱄으니, 기가 찼지요. 촉망받는 피아니스트였는데 프랑스에서 온 거지 청년과 사랑에 빠져서 대학도 그만뒀으니. 그래도 입으로는 축하한다고 했어요. 결국 혼자 돼 레슨과 작곡으로 돈을 벌면서 다시 학위도 땄어요. 이번 전시에 ‘김영희의 사계절’이란 영상이 나오는데 거기 흐르는 음악을 봄누리가 작곡했어요.”

-오남매는 서로 잘 지내나요?

“걔네들은 한달에 한번 만나는 걸 원칙으로 알아요. 큰아들 집에 모여 바비큐 파티를 하지요. 유진이는 너무 바쁘니 부르지 말라고 해도 꼭 달려와요. 한국말 독일말 섞어서 저희들끼리 별 얘기를 다하고. 크리스마스는 오스트리아 접경 지역에 사는 봄누리까지 다 모여요.”

-아이들에게 미안한가요?

“저 어린 것들이 무슨 죄로 낯선 나라에 와서 멸시받고 사나 미안했지요. ‘왜 우릴 여기로 데려왔어?’ 따지기도 했고요. 그런데 요샌 고마워하는 것 같아요. 코로나로 학원이 어려워져 힘들어하는 아들한테 며느리가 그랬대요.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는 문맹자로 왔지만 다섯 아이 공부시키고 그랜드피아노 사서 음악 가르치고 인형으로 돈도 벌었잖아. 그러니까 당신도 이겨내야지.’”

-자식들로부터 존경을 받는군요.

“이웃집 프리들 아줌마가 그래요. ‘프라우 킴(김영희)은 언제나 기다리는 엄마’라고. 그 말에 내가 울었어요.”

 


◇갱년기는 혁명의 시간


-여자에게 갱년기는 함정이거나 혁명, 둘 중 하나라고 했더군요.

“나의 갱년기는 엄청난 함정이었어요. 토마스와 헤어져 더 죽을 지경이었죠. 눈물만 나고 죽고 싶은 생각도 들고. 의사한테 갔더니 무조건 걸어야 된대요. 근데 내가 걸을 시간이 어딨어요. 작품하고 애들 키우느라 바쁜데. 그래서 스스로에게 물었죠. 죽기 아니면 살기인데 어떡할래? 살기로 결정한 뒤엔 매일 걷고, 물 마시고, 일했어요. 그리고 거울 보면서 날 칭찬했지요. 야, 얼마나 근사하게 생긴 여자냐, 두 번이나 결혼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냐?”

-혁명군이 되었군요.

혁명은 나폴레옹처럼 힘이 굉장히 세야 돼요. 실패는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진격을 해야 돼요. 그래서 매일 진격했죠. 오늘 얼마큼 걸었나, 얼마큼 인형을 만들었나 체크하고, 이쁜 옷도 사서 입고. 어떤 날은 소피아 로렌처럼 눈화장을 하고 강가의 멋진 레스토랑 가서 혼자 커피를 마셨어요. 당당해지려고.”

-예술은 무엇일까요.

“아침에 바흐나 모차르트를 들으면 눈물이 나요. 모차르트는 몇백 년 후에 한국의 못생긴 여자가 작업실 한구석에서 자기 음악 들으며 울고 있을 줄 알았을까요? 그 상상을 하면 내가 반성을 해요. 내 작품이 먼 훗날 사람들에게 어떤 감동을 줄까 하고요.”

-시간을 되돌린다면 언제로 가고 싶으세요?

안 가고 싶어요. 과거는 과거로 끝. 저는 내일이 제일 좋아요.

-늙으면 좋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죠.

“늙으니 좋아요. 내 의무가 없어지고 세상 보는 눈이 좀 올라가고요. 하늘에서 부르면 가야 하는 것도 아니까 욕심도 없어져요.”

-죽고 싶다며 절망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오죽하면요. 근데 죽는 거 쉽지 않아요. 살아야겠다 이 악물면 무수한 인연들이 알게 모르게 손을 내밀어 도와주죠. 추운 겨울날 토마스 집 문이 잠겨 밖에서 떨고 있는 나와 아이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따뜻한 차와 케이크를 내어주던 프리들 아줌마처럼. 그래서 인생은 최고의 예술품이에요. 어떤 오페라보다 아름답죠. 이걸 모르고 죽으면 억울하잖아요? 끝까지 살아봐야 알아요, 인생은!

 

 


☞김영희

1944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홍익대 미대와 대학원에서 회화와 조각을 전공했다. 1978년 서울 조선호텔에서 첫 전시를 한 뒤 1981년 독일 뮌헨으로 이주해 닥종이 조형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200만부가 팔린 첫 책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를 비롯해 ‘뮌헨의 노란 민들레’ ‘눈이 작은 아이들’ ‘눈화장만 하는 여자’ 등을 펴냈다.

우파 작가엔 등 돌리고 反기업 세력 지원하는 한국 기업·부자들 
1970년생 이응준 작가가 보는 대한민국 문화계·정치경제·남북한 통일  

 

< 조선일보, 송의달 에디터,  2023.07.30. >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자유주의 우파(右派)의 실력자와 자산가들은 사람을 키우지 않는다. 오히려 알고 그러는지 모르고 그러는지 방해까지 한다. 그러면서 나라 걱정, 세상 한탄은 혼자서 다 한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자유주의(自由主義) 작가들은 신념을 지키면 지킬수록 더욱 더 소외되고 괴로워진다. 이들은 그런 걸 잘 알면서도 자신의 일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응준(53) 작가가 2023년 7월 28일 낮 서울 광화문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386세대'의 막내 격인 그는 다양한 작품 활동과 함께 2013년부터 여러 일간지의 고정 칼럼니스트로서 정치·사회·문화 칼럼을 쓰고 있다. 2015년에 제16회 '무영문학상'을 받았고 이화여대 국문과 강사, 열린사이버대 문예창작과 전임교수와 학과장 등을 지냈다. 


1970년생인 이응준(李應準·53) 작가의 말이다. 한양대 독문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386′ 세대의 막내 격이다. 그것도 시·소설 등 순수 문학활동 외에 각종 일간지 칼럼 등을 통해 분명한 관점을 설파(說破)하는, 보기드문 ‘사회파(社會派) 작가’이다. 1990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에 10편의 시(詩)로 등단(登壇)한 그는 4년 후엔 소설가로도 입문했다.

 


◇20세에 등단...창작 저서 20여권


지금까지 20여권의 창작 저서를 냈고 영화 감독·드라마 작가·대중 가요 작사가로도 활동했다. 그가 직접 감독한 단편영화 ‘Lemon Tree’는 뉴욕과 파리 국제단편영화제에 각각 초청받았다. 2009년에 낸 장편 소설 <국가의 사생활(私生活)>은 영국 일간지 가디언(Guardian)이 두 차례 집중 조명할 정도로 주목받았다. 남한이 북한을 흡수통일한 대한민국에서 탈주한 북한 군인들이 조직 폭력배로 변신해 활개치는 가상(假想) 상황을 그린 소설이다. 기자는 2023년 7월 28일 낮 서울 광화문 조선일보사에서 이응준 작가를 만났다.

- 우리나라 문화예술계는 진짜 좌파(左派) 일색인가?

“부정(否定)할 수 없는 사실이다.”

- 문화예술계에서 우파가 버티고 있거나 선전(善戰)하는 분야가 있는가? 있다면 어디인가?

“없다.”

- 왜 이렇게 됐나?

원래 한 청년이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그 순수한 눈에 비춰진 세상이란 모순과 불의로 가득 차 있다. 또 예술가(藝術家)는 인간의 나약함 속에서 희망을 찾아 해매는 행위로부터 자신의 예술을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청년과 예술가는 좌파적 견해와 감상에 매혹되기 쉽다. 또한 현대 한국인들의 내면에는 ‘불안’과 ‘분노’ ‘슬픔’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가득 차 있다. 한국인 자체가 좌파적 감성에 휩쓸리기 쉬운 심성을 갖고 있다. 여기서 문화예술인들은 큰 오류를 저지르게 된다. 자유로운 예술은 ‘당(黨)을 위한 예술’이 아니며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는 것이다. ‘오직 나만 정의(正義)를 갖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좋은 예술가가 될 수 없다.”

 
◇‘좌파 일색’ 기울어진 한국 문화예술계


- 문화예술 분야가 이렇게 기울어진 운동장이 된 원인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우파 정치인, 권력자와 자산가(資産家)들에게는 ‘문화적 진지(陣地)’에 대한 개념과 비전 자체가 없다. 이들은 자신들의 입장과 세계관을 대변(代辯)하는 글과 책, 공연과 영화 등의 콘텐츠들을 생산하는 작가들에게 아무런 지원을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한심한 것은, 한국 기업들이 반(反)기업적인 인사들과 단체·세력에게는 열심히 지원을 한다는 점이다. 뻐꾸기는 남의 둥지에 있는 알들 사이에 자신의 알을 낳는다. 한국 기업들은 자기 둥지에서 뻐꾸기를 정성껏 키운다. 나무 밑에는 뻐꾸기가 밀어내 떨어뜨려 깨진 알들의 잔해(殘骸)가 수북하다. 다 자란 그 뻐꾸기들이 기업인들을 협박하고 돈을 뜯어내고 감옥에 집어넣는다.”

- 이념의 균형이 잡힌 사회를 흔히 “새는 좌와 우 양쪽 날개로 난다”고 하지 않나?

“나는 다르게 본다. 무조건 좌우 양쪽 날개로 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새의 몸통이 자유민주주의여야 하고, (동일한 몸통을 가진) 그 새가 진보와 보수라는 양(兩) 날개로 날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진보와 보수는 좌파와 우파의 동의어(同義語)가 아니다. 수구(守舊) 좌파도 있고 진보(進步) 보수도 있다. 진보와 보수라는 태도는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거다.”

- 일각에선 “한국의 우파는 우파(愚派·공부하지 않는 무리)다”라는 지적이 나온다.

“책 팔리는 걸 봐라. 한국인들은 우파건 좌파건 다 공부 안 한다. 이미지가 그렇게 설정된 거지 무슨 우파만 어리석겠나. 분명한 것은 ‘386′보다 무지(無知)한 세대는 없다는 점이다. 주사파(主思派·북한의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사람들)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들도 없다. 사회 전체가 공부해서 계몽(啓蒙)돼야 한다.”

- 한국 사회에 극우(極右) 또는 극좌(極左)라는 호칭이 가능한가? 흔히들 ‘태극기 부대’를 극우로, ‘민노총을 좌파로 부르지 않나?

“용어(用語)부터 정리하고 싶다. 태극기 ‘부대’, ‘아스팔트’ 우파 같은 용어들은 거칠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내포한다. 그들을 싫어하는 쪽에서 지은 영리한 언어전략이다. 언어가 존재를 규정한다. 따라서 우파는 ‘보수 우파’ 대신 ‘자유(自由)우파’라고 스스로를 부르는 게 정치적으로 이득일 것이다.”

그는 이어 말했다.

“질문으로 돌아가서 ‘광장(廣場) 우파’가 나타난 것은 ‘광장 좌파’가 대통령을 탄핵으로 끌어내리고 감옥에 집어넣는 것에 충격을 먹은 게 중요 분기점이라고 본다. 게다가 지난 문재인 정권은 대의(代議)민주주의가 아니라 직접 민주주의, 광장민주주의 같은 인민(人民)민주주의의 수법들을 구사했다. 앞으로도 어느 한쪽만 광장을 포기하지는 않을 게 분명하다. 좌파와 우파에 ‘극(極)’자를 붙이는 기준은 정치세력이 ‘폭력’을 사용할 때이다. 그런데 ‘광장 자유우파’가 폭력을 사용하거나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하고 있나? 인종주의적으로 외국인들을 공격하거나 나치 깃발을 흔들고 있나? 이들은 오히려 북한 인권(人權)을 얘기하고 있다. 작은 태극기 하나씩 손에 들고 나와서 팔랑팔랑 흔들어대는 걸 두고 극우라고 하는 것은 너무 나쁜 쪽으로 과대평가하는 짓이다.”

 


◇“한국에 극우는 없다...폭력 쓰는 민노총은 극좌”


- 우리나라에 극우 세력은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 대한민국 장성(將星)이 청와대 행정관 앞에 벌벌 기고, 공무원보다 더 눈치를 보는 마당에 무슨 얼어 죽을 극우가 있나? 태극기 시위대는 경찰이 쳐놓은 폴리스 라인(police line)을 얌전하게 잘 지키고, 술판을 벌이거나 노상 방뇨도 않고, 주변 상인들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는다.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극우인가? 반대로 극좌(極左)세력은 남한에 분명히 있다. 폭력을 사용하고 거기 간부가 간첩으로 체포되고 있는 민노총이 그렇다. 북한은 인류 역사상 최악(最惡)의 극좌 파시즘 집단이다. 그걸 따르거나 용인하면 극좌가 맞다. 이것은 팩트(fact)이다.”

- 2019년에 낸 산문집 <작가는 어떻게 생각을 시작하는가>에서 “한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불구덩이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인들이 제각기 불구덩이어서다”라고 썼는데.

한국 사회는 자신에 대한 불안(不安)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타인(他人)에 대한 적개심에 몰두하는 사회다. 유럽의 르네상스 이후 탄생한 ‘근대인(近代人)’은 자신의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 타인에 대한 증오가 필요없는 홀가분한 ‘개인(個人)’을 의미한다. 근대인은 그 공허(空虛)함을 자신의 직업노동과 직업정신에서 해소하고 승화(昇華)시킨다. 도덕은 공자·맹자가 아니라 직업도덕이다. 한국사회는 타인에 대한 증오(憎惡)로 유지되고 있다. 그런 곳에 사는 한국인들은 직업정신(職業精神)이 부족하다.

- 한국인들은 왜 사실(事實) 보다 괴담(怪談)·조작에 쉽게 속을까? 한국 사회에 샤머니즘(shamanism·무속신앙)과 파시즘적 성향이 동거(同居)하고 있다고 칼럼에서 주장했는데.

“파시즘은 이념이 아니라 질병이다. 그래서 좌·우파를 가리지 않는다. 부주의한 민주주의는 삽시간에 전체주의(全體主義)로 변질된다. 그리고 유교, 불교, 기독교 등 어떤 종교든 한반도 안으로 들어오면 무속(巫俗·샤마니즘)적 경향을 띤다. 공산주의도 마찬가지다. 공산주의는 원래 기독교적 세계관의 이단(異端) 버전으로 신학이론이자 종교논리이다. 이게 북한에서는 민족공산당과 결합해 김일성교(주체사상)가 되었다. 한국인의 무속성(巫俗性)은 21세기에도 극성을 부리고 있다. 이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이건 굿판 아닌가, 누군가 나타나면 ‘저 자는 무당이 아닌가’하고 본색을 의심해봐야 한다.”

 


◇職業精神 약하고 무속신앙 득세하는 한국


- 이런 모습은 한국과 북한에 모두 벌어지는가?

“현상만 다르게 나타날 뿐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김정은의 핵 포기를 나는 평화쇼가 진짜처럼 난무할 적에도 믿지 않았다. ‘김일성교’는 정식으로 백과사전에 등록된 종교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김일성의 어머니는 강반석이고, ‘반석’은 ‘베드로’를 뜻한다. 김일성은 스스로 성부, 김정일은 성자, 주체사상은 성령(聖靈)으로서 성삼위일체를 구성한다. 문학이론으로 분석하자면, ‘북핵’은 ‘김일성’을 상징한다. 북핵을 포기하는 순간, 야훼(북핵)의 모조품인 김정은은 파괴된다. 따라서 그 어떤 좋은 여건을 제공해준들, 북핵이 사라지는 경우는 오직 ‘북한의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정권교체)’뿐이다. 한반도와 한국인을 조종하는 건 정치가 아니라 종교적 상징과 에너지, ‘샤머니즘’이다.”

이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남북한 모두 피(被)지배자가 지배자에게 자발적으로 협력하거나 쏠려가는 대중적 파시즘 성향이 짙다. ‘개딸’을 비롯한 정치인 팬카페처럼 논쟁적인 이슈를 놓고 급격하게 무조건 쏠리는 모습이 그러하다. 이런 파시즘에 샤머니즘이 끼어 있으면서 광기(狂氣) 비슷한 열정들이 분출해 이성(理性)적인 사회 작동을 가로막을 뿐 더러 찬찬하고 냉정하게 분석하는 능력까지 무너뜨리고 있다. 굉장히 위험한 사회이다.”

 


◇지배자에게 쉽게 쏠리는 ‘파시즘 성향’도


- 한국인들은 왜 이런 특성을 갖게 됐나?

기마민족(騎馬民族)인들이 좁은 한반도에 갇혀 있어서 생기는 모순일 수 있고, 발칸반도처럼 반도인(半島人)적인 성향 탓일 수도 있다. 한국인들이 근대인으로서의 체계적 경험치와 능력을 함양(涵養)하지 못한 것도 한 원인이다. 한국의 근대화는 건국과 6.25 전쟁으로 리셋(reset)을 거친 뒤 1960년대 초에야 제대로 출발했다. 남한 언론이 ‘한국인(韓國人)’이라는 단어(單語)를 처음 사용한 것도 1961년 들어서다.”

- 어느 기고문에서 “한국의 지식인이 바라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날 좀 알아 달라’는 것이고, 대중이 바라는 것은 그 시대의 ‘자극제(stimulant)’다”라고 썼다.

“관념을 다루는 지식인의 맹점이기도 하고, 원래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렇다. 북한의 김정은을 ‘계몽군주’라고 추켜세우는 ‘소위’ 이 시대의 대표지식인을 미친 사람이 아니라고 변호하려면 이렇게 생각하는 방법 밖에 없다. 한국의 대중은 ‘심심한 진실’을 좋아하지 않고 ‘극적인 거짓’을 따라간다. 과학의 힘이 워낙 강력해 그런 줄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이지, 사람에게는 지동설(地動說)이 아니라 천동설(天動說)이 편안하게 감각된다. 대중은 ‘천동설적 유혹’에 넘어가기 쉽다. 문재인 정부때 나온 소득주도성장, 국방을 배제한 무조건적인 평화론, 사회주의적 경제정책들이 다 일종의 천동설들이다.”

 


◇後조선인들에게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


- 한국 일부 지식인들, 좌파 정치인, 운동권들은 여전히 ‘친중·종북(親中·從北) 세계관’에 갇혀 있다.

386주사파 운동권들의 세계관을 ‘조선 양반 탈레반’과 ‘위정척사파’로 분석하고 규정한 책들이 이미 많이 나와 있다. 그들은 후기 조선(後期 朝鮮)사람들이라고 보면 된다. 조선사람들이니까 중국이 종주국이고, 북’조선’이 좋은 것이다.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고. 그런데 이들은 북한에서 살라고 하면 안 산다. 자기 자식들을 그 사회로 보낸다면 진정성을 믿어주겠다. 우리는 우리 모두를 동시대인(同時代人)이라고 착각하기에 우리의 분란(紛亂)을 이해 못하고 있다.”

- 이런 후진적인 모습은 언제,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무엇보다 ‘정확(正確)한 학문(學問)’이 대중화되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요컨대, 1980년대를 지배했던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리영희의 책들 대신에 정치학자 함재봉의 <한국 사람 만들기>와 송재윤 캐나다 맥마스터대학 교수의 <슬픈 중국>이 널리 읽힌다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독서(讀書)를 너무 안 한다. 한국사회의 ‘실질적 문맹률(文盲率)’이 너무 높다.”

송재윤 캐나다 맥마스터대 교수가 쓴 <슬픈 중국 1,2>. 두 권의 책은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 등에 담긴 맹목적 친중주의의 허구를 역사적 사실과 사례로 명징(明澄)하게 비판하고 있다 


- ‘386 세대’의 막내 격으로서 386세대의 공과(功過)와 사명(使命)은 어떻게 생각하나?

“공이 있다면 각자 조용히 간직하면 될 일이다. 60~70대나 30~40대라도 ‘386′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들도 ‘386적 인간’들이다. 386의 대부분은 자신이 주사파 386 운동권과는 다르다고 착각하고 있다. 시대가 세대를 가스라이팅한다. 불온한 매력이 ‘문화’가 되어 ‘스미고’ 추억으로 변환, 유전자화된 것이다. 갱신(更新)하지 않는 인간은 타인의 노예가 되고, 자신의 과거의 노예가 된다. 생각이 바뀐다는 것은 변절이 아니라 ‘공부’이다. 정직과 용기이며 ‘치유’다. 나를 포함한 386들이 정확한 지식을 통해 리뉴얼 되어 새로운 시대에 장애가 되거나 악영향을 끼치지 않기를 바란다.”

 


◇“과학적 지식과 인류 보편 人權 의식으로 연대해야”


- 386 세대와 지금의 2030세대와의 연결 가능성은?

“과학적 지식과 인류 보편의 인권(人權)의식으로 연대(連帶)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올바른 사회통합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386들은 반성하고 사회적 혼란과 퇴보에 책임(責任)을 느껴야 한다. 아버지는 내게 산업을 물려줬는데, 우리는 후배들에게 거짓말만 물려주고 있다. 이대로라면 386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무지(無知)하고, 이기적(利己的)이고, 위선적(僞善的)이고, 허황(虛荒)된 세대로 남을 것이다.”

이응준 작가의 외할아버지인 고(故) 이찬우(李燦雨·1918~1983년) 선생은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돼 2년 6개월 수감생활을 했고 해방후 제5대 국회의원과 제2대 노동청장을 지냈다.

- 독립운동을 한 외할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았나?

“나는 그 분의 장손자(長孫子)로서 그분께 누(累)가 될까 걱정했을 뿐 그 사실을 자랑하거나 팔아먹은 적은 없다. 내가 독립운동을 한 건 아니잖은가? 마음속의 자랑으로 조용히 간직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하며 지냈다. 내 30년 넘은 친구들도 내가 독립투사의 후손이라는 걸 지난 정권 시절에야 알게 됐다. ‘토착왜구’라는 나치용어로 하도 국민들을 갈라치기 하기에 내가 스스로 밝힌 것이다. 어느날 정신을 차려보니, 일제의 중추원(中樞院) 참의(參議)를 지낸 최고위직 친일파의 손자가 국회의원인 정당에서 독립투사의 장손자인 내게 일본제 와이셔츠 한 장을 산 것 같은 일을 죄목(罪目)으로 들어 ‘토착왜구’라고 부르는 나라에 살고 있었다. 기가 막혔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지금 민주당 친일파 후손 국회의원들은 정치를 하면 안 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한 자유인으로서 그 어떤 연좌제(緣坐制)도 반대하기 때문이다. 역사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1917~2012년)의 지적대로 ‘역사를 정치화(政治化)하는 행태’를 경계해야 한다.”

- 한국은 지금이 정점(頂點·peak)이며 앞으로 추락할 일만 남았다는 ‘코리아 피크론(論)’이 나온다.

“남유럽의 그리스는 1950~60년대에 세계 최상위의 제조업(자동차 등)을 갖고 있던 선진국이었다. 그리스의 처참하고 되돌이킬 수 없는 몰락은 1980년대 파판드레우 정권부터이다.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Andreas Papandreou·1919~1996년)는 하버드대에서 공부한 대학교수 출신의 경제학자였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파판드레우가 너무 많다. 아까 얘기한 천동설(天動說)은 ‘편안하게 감각되는 거짓’을 말한다. 그걸 따르면 우리는 중세 속으로 떨어진다. 사회주의적 사고방식은 그 순도(純度)가 높아질수록 더 강력한 마약 같은 천동설이 된다.”

이 작가의 이어지는 말이다.

“대중들의 귀에 달콤하게 들리는 악법안(惡法案)들이 바로 천동설의 유충(幼蟲·애벌레)들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좌우를 떠나 한국 정치인들은 경제, 외교, 국방, 교육, 연금, 의료, 복지, 부동산 등에서 천동설로 대중을 유혹해 지옥으로 끌고 가 팔아먹은 다음 제 이득을 챙긴다. 불편한 지동설(地動說)을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확실한 결과가 그리스, 베네수엘라처럼 눈앞에 있는데도, 대중은 당장의 촉감(觸感)만으로 미래를 선택한다. 이걸 고쳐야 한다.”

 


◇“북한 강제수용소가 북한 인권 문제의 핵심”


- 남북한 통일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낮아지고 있다. 통일은 꼭 필요한가?

“하나만 말하겠다. 2차 세계대전 끝 무렵 독일 부헨발트(Buchenwald) 유대인수용소를 연합군이 해방했을 때, 현장을 지휘하던 중 패튼 장군은 구토(嘔吐)를 했고 아이젠하워 장군은 기자들을 불러 그곳의 모든 것들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찍게 했다.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부인하거나 의심할 수밖에는 없는 생지옥이 펼쳐져 있어서다. 나치는 이런 유대 종족 전체의 몰살을 ‘최종적 해결’이라는 학술적 용어로 대체했는데, 나는 ‘북한 인권문제’라는 용어가 ‘최종적 해결’이라는 말처럼 타락했다고 생각한다.”

- 무슨 말인가?

“북한 인권(人權)문제라는 두루뭉술해져버린 말과 표현으로 북한 강제수용소 문제를 담요로 덮어버리고 있는 꼴이다. 북한 인권문제의 핵심은 북한 강제수용소이다. 북한 인권문제를 입에 올리는 사람들이 북한 강제수용소를 ‘정확하게’ 문제 삼지 않을 때, 북한 인권문제라는 용어는 어이가 없게도 남한 사람들의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킨다. 나는 궁금하다. 5.18 광주학살과 남영동 고문실에 분노하던 그 사람들은 대체 다 어디로 갔는가? ‘북한 인권문제’를 ‘북한 강제수용소문제’로 바꿔 부르기를 제안한다. 지금 내가 만약 북한 강제수용소에 대해 발언하지 않는다면, 훗날 북한이 해방 돼 통일이 되고 북한의 강제수용소가 바로 우리 눈과 코 앞에서 전모(全貌)를 드러냈을 때 한 북한 청년은 이렇게 따질 것이다. ‘나만 살아남고, 내 가족들은 강제수용소에서 다 죽었습니다. 모르지 않았잖아요. 당신은 작가라면서요. 그런데 왜 그때 우리들을 위해 단 한 줄도 쓰지 않았던 겁니까?’”

이 작가는 ‘통일 이후 사회 전문가’로 꼽힌다. 2009년에 낸 장편소설 <국가의 사생활>을 쓰기 위해 3년에 걸쳐 단행본 300여권 분량의 북한 관련 자료를 읽고 탈북자들을 만났다. 그는 “집필은 부산의 한 숙박업소에서 6개월 만에 마쳤으나 정말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고 회상했다.

 

◇“통일 ‘예상 분석팀’ 필요...군사적 위기 동반할 한반도 통일”


- 북한과의 통일 이후에 관심을 쏟는 이유라면?

“통일에 대한 희망 만큼이나 통일에 대한 ‘비극적 상상력(想像力)’이 긴요해서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통일 이후에 벌어질 끔찍한 사태들에 대한 시뮬레이션이 없다. 통일 이후에 대한 면역력(免疫力)을 키우는 ‘과학적 비관의 실용’을 정부가 전혀 제공하고 있지 않다. 과거 정부들도 ‘통일 한반도’를 두고서 ‘판타지 월드(fantasy world) 도면 그리기 놀이’ 같은 ‘헛된 사업들’만 공상했다. 독일의 인구에, 프랑스의 군사력에, 영국만큼의 영토와 경제력을 가진 통일 대한민국이 공짜로 얻어질 리 만무(萬無)하다.”

그는 “정부의 통일부나 국가정보원 안에 팀(team)을 만들어 통일 이후의 사회에 대한 예상과 분석을 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대기업들이 이런 팀을 운영하다면 통일 후에 엄청난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협상력을 갖게 될 것이다. 미국 CIA나 FBI라면 이런 분석·전략팀을 가동할 것이다. 다만, 평범한 사회과학자들로선 안 된다. 상상력(想像力)을 가진 사람들이 맡아야 한다”고 말했다.

- 통일이 된다면 어떤 혼란이 예상되나?

“한 예로 북한의 2500만 인민들이 갑자기 대한민국 투표권을 가지게 된다면, 엄청난 ‘민주적 대환란’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1948년 이후 남한 사람들이 이렇게 부단히 노력했건만 아직도 남한 사회와 남한 사람들은 근대적 개인이라든가 자유민주주의자로서의 정체성(正體性)이 미진하다. 북한 인민들은 근대인은커녕 김씨 사교왕조(邪敎王朝)의 노예적 백성들이다. 이들과 공멸없이 통합되는 과정에는 상당한 고통과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 작가는 이어 말했다.

“2014년에 논픽션 <미리 쓰는 통일 대한민국에 대한 어두운 회고>를 낸 이후로 나는 매년 1월 1일 아침 마다 새로 모인 자료와 변화를 반영해 한반도 통일을 다시 전망하는 일을 한다. 한 번은 소설가로서, 한 번은 비평가로서, 한 번은 한 인간으로서 한다. 세 가지 정체성은 각각 꼭지점이 되고 그 분석들을 이 이어 삼각형을 만든다. ‘넓은 의미의’ 주사파(主思派) 국회의원들조차 요즘은 통일하자는 얘길 안 한다. 대신 그들은 북한의 보전과 ‘남한의 중국화(中國化)’를 원한다. 그러나 한반도 통일은 분단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찾아올 공산이 크다. 모르긴 해도 한반도 통일은 굉장한 군사적(軍事的) 위기(危機)를 동반할 것이다. 그 하중(荷重)을 이겨내는 실력과 배짱이 대한민국에게 없다면, 북한 지역을 중국에게 뺏길 것이다.”

- 남북한 통일이 되면 통일 한국은 ‘세계 일류 국가’가 될 수 있을까?

통일 앞에서 우리 각자가 ‘실증적인’ 용기(勇氣)를 발휘하지 못한다면 ‘세계 일류 국가’는커녕 망해갈 것이다. 한반도 통일은 독일통일과는 차원이 다르다. 서구 자유진영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서독이었고, 사회주의 진영에서 가장 괜찮다는 나라가 동독이었다. 그 둘이 결합했는데도 통일 뒤 20년 가까이 이러다 망한다는 소리가 나왔고 아직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견해가 심심찮다. 한반도 통일 후 큰 난관은 남과 북 출신 간의 ‘증오(憎惡·hatred)’인데, 진정한 통합은 북한을 기억 못하는 세대끼리에나 가능할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개혁들은 통일준비의 부분집합이 되어야 한다. 번영보다는 공존(共存)을, 공존보다는 공멸(共滅)을 걱정하는 문제의식 위에서 번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희망의 영역이 넓어질 것이다.”

 


◇“단 한 명의 읽어줄 사람 위해 글을 쓴다”


- 20세에 등단한 뒤 시인·소설가·영화감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글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장르에서 일하고 있다. 순수문학과 대중예술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드라마와 영화 작업은 성공한 경우도 있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중단된 경우도 있다. 이전 계획들을 보완해 다시 추진 중이다. 장르와 분야를 가리지 않을 뿐더러 그럴 수 있다는 게 작가로서의 나의 강점이다. 특히 정치, 사회 비평가로서는 이런 스타일이 내용적으로 많은 도움이 된다. 이론에 대해 무지한 채 문학에만 갇혀 있지 않아서다. 나 같은 칼럼리스트가 몇 명쯤은 필요하다는 믿음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

- 본인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면?

“나의 본질(本質)은 문학, 정확히 말해서 ‘20세기 작가’이다. <광장>을 쓴 소설가 최인훈(崔仁勳·1936~2018년) 선생처럼 사회에 관한 질문에 대답하는 지식인이기도 한 그런 작가 말이다. 이 본질을 포기하지 않고 하이브리드화해서 여러 방향으로 멀티유스(multi-use)하고 싶다. 영화, 드라마도 하고 통일 대한민국 사회를 예상하는 분석팀을 꾸려 팀장도 해보고 싶다.”

- 조선일보 등에 쓰는 칼럼의 글쓰기가 독창적(獨創的·unique)이다. 본인 만의 기준(基準)이나 루틴이 있나?

“여러 명이 읽어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 한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을 위해서 쓰고 있다는 상상을 하며 쓴다.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1903~1950년)은 정말 많은 칼럼들을 쓰기도 했는데, ‘정치에 대한 글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보고 싶다’고 말했다. 나도 오웰처럼 그런 글을 쓰면서 새로운 시대에 맞게 나 자신을 확장(擴張)시키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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