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스럽게 낸 ‘우남실록’처럼… 내가 기획한 출판도시 지금도 진화 중
[나의 현대사 보물] [20] 출판인 이기웅 열화당 대표


 

< 조선일보, 김민정 기자,  2023.08.29.  >

 

 


비가 내리던 지난 24일 파주 문발동의 파주출판도시. 나지막한 건물 사이로 책을 품에 안은 젊은 출판인들이 오고 갔다. 습기 때문에 특유의 냄새를 풍기는 고서들을 마주한 곳은 ‘열화당 책박물관’. 파주출판도시 기획·설립을 주도한 출판인 이기웅(83) 열화당 대표를 이곳에서 만났다. 그는 출판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2013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이 대표는 ‘운전수’처럼 살았다. 출판도시의 운전수였고, 평생 출판인의 길을 걸었다. 대학 졸업 후 막 편집자 일을 시작했을 때 유명 문학 평론가에게 전화 걸어 오자를 잡아낸 일은 ‘출판을 허투루 해선 안 된다’는 고집을 보여준 일화다. 1971년 출판사 열화당을 설립한 뒤엔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고흐·고갱·피카소 등의 원화를 컬러로 실은 미술 문고를 만들어 출판계를 놀라게 했다. 이후로 베스트셀러를 노리는 상업적 출판을 경계하며 양서를 내려고 노력해 왔다고 스스로 자부한다.

◇‘우남실록’ ‘백범일지 정본’… 팔기 위해 만들지 않는다

‘우남실록’(1976)과 ‘정본 백범일지(한글·한문본)’(2015)는 그가 만든 책 중 가장 의미를 두는 그의 보물이다. “팔기 위한 책”이 아닌 “기록하기 위한 책”이라고 했다. 이 대표는 “책은 팔기 위해 만드는 게 아니라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야 한다는 게 나의 신념”이라고 했다. 우남실록은 이승만 전 대통령 비서실의 제안을 받고 “용감하게” 발행한 국내 첫 이승만 자료집이다. “나중에는 많은 연구서가 나왔으나, 당시 이승만을 ‘독재자’ ‘나쁜 사람’으로 규탄하던 시절의 책쟁이 행적으로서는 놀라운 것이었죠. 저도 4·19 때 데모 많이 했지만, 자료가 흩어져 다 날아가기 전에 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걱정 때문에 했어요.” “독재자라고 하지만 시대와 함께 갔던 측면이 있고, 그 덕에 역사에서 많은 것이 이뤄지기도 했다”며 “우남을 너무 버려 놔 원형을 되찾는 데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했다.

‘정본 백범일지’는 이 대표가 5년간 교정을 봤다. 백범일지는 지금까지 국내에 100종 이상 출간됐으나 친필본과는 차이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 대표는 “이에 사죄하는 마음으로 백범의 친필본을 그대로 살려 글줄 크기, 페이지 넘어가는 속도까지 비슷하게 만들었다”며 “왜적에 대해 이를 갈았던 백범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니 백범이 제게 온 것 같았다. 이때 출판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심안(心眼)이 떠졌다”고 했다. 그는 “100권에 1권을 더하는 책이 아니라 나머지 100권을 부정하기 위해 만든 내 보물”이라며 빠른 속도로 책을 내고 마케팅에 열을 올리는 요즘 출판에 대해 따끔한 지적도 했다. “한 번 보고 버릴 책은 태생부터 잘못된 책입니다. 출판인은 인간의 속도에 맞춰, 오랫동안 읽힐 책을 고심해 만들고, 잘 만든 책을 독자가 찾아오도록 해야 합니다.”

 


◇인생을 바친, 안고 싶은 파주출판도시

이 대표는 파주출판도시에 전시돼 있는 도시 모형을 두 팔 벌려 안는 포즈를 취한 뒤 “정말 안고 싶은 과거이자 현재진행형의 과제”라고 했다. 그는 1989년부터 30년 넘게 파주출판도시 건립을 이끌었다. 저마다 다른 목소리를 내는 출판계 내부 의견 조율, 국가산업단지 지정을 위한 노력, 이후 부지 선정과 착공까지 그의 끈기가 없었다면 출판도시가 세워지지 못했을 것이라고들 말한다. 그는 “내 인생을 바쳐 갇힌 죄수처럼 일했다”며 “2005년 위암 판정을 받고 아팠을 땐 이 일을 맡은 것을 후회한 적도 있다”고 했다. 도시 안에 출판 생태계를 만들어 출판업을 효율화하고 다 같이 발전하고자 한 목표 외에도, 출판도시를 통해 ‘자생하는 출판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출판도시는 아직 진행형이다. 다음 목표는 출판업과 함께 농업이 이뤄지고 청정에너지를 생산하는 도시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명문이 있어 책이 나오고, 책이 만들어져 명문가가 나올 씨를 뿌리는 일이 출판”이라며 “책농사는 쌀농사와 다르지 않다”고 했다. 그는 “남은 일은 다음 세대의 과제”라고 했다. “요즘 ‘출판의 위기’라고 하는데, ‘책의 힘’을 지키려면 기록하지 않아도 될 말을 기록하는 상업주의를 경계하고 진실한 말을 담는 책을 만들어야 합니다.”

 


◇운명이 된 유년 시절의 책 냄새

이 대표는 출판인이 자신의 “운명”이었다고 했다. 책과의 인연은 그가 유년 시절을 보낸 고향집 강릉 선교장에서 시작됐다. 18세기 후반 7대조인 이내번(1703~1781)이 지은 기와집 선교장 내에 5대조 할아버지인 이후(1773~1832)가 1815년 건립한 사랑채 ‘열화당(悅話堂)’이 출판사 열화당의 모태다. 과거 열화당은 서화와 전적 등을 수장해 문인과 학자들이 모여든 곳이었다. 몸이 약했던 이 대표는 젊은 후손들이 선교장을 다 떠나갈 때 혼자 남아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이곳에서 지냈다. “책이 귀했던 시절 외진 땅 강릉의 ‘작은 도서관’ 같았죠. 그곳에서 군불을 때고 책 속에서 놀며 맡았던 책 냄새가 출판인이 되라는 운명 같았어요.”

2012년 출판사 옆에 조성한 ‘열화당 책박물관’은 그에게 옛 열화당을 떠올리게 하는 소중한 곳이다. 국내외 고서와 한국의 출판 역사를 보여주는 근현대 도서 등 그가 50년 넘게 모아온 서적들을 전시했다. 그를 ‘시우(詩友)’라 부르며 가깝게 지냈던 서정주, 박두진 등 문인의 친필 사인이 들어간 책들도 있다. 옛 열화당에 있던 책들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더 애틋한 장소다. 옛 열화당 책은 1·4 후퇴 때 땅 파고 독에 넣어 묻었으나 대부분 빗물에 훼손되고 도둑맞기도 했다고 한다.

열화당 내 손님을 맞는 공간에는 서기문 화백이 이 대표에게 그려준 유화 한 점이 눈길을 끌었다. 이 대표가 ‘운전수’가 돼 택시 운전대를 잡고 있고, 그의 정신적 스승인 안중근 열사가 뒷좌석에 앉아 바라보는 그림이다. 그는 힘든 고비마다 안중근 열사의 신념과 정신을 떠올리며 의지했다고 한다. 그는 그림을 볼 때마다 이렇게 묻는다고 했다. “선생님, 제가 잘 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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