擧直錯諸枉(거직조저왕)

 

 

< 중앙일보, 김병기 서예가·전북대 명예교수, 2023.07.03  >



노나라 애공(哀公)이 공자에게 “어떻게 해야 백성이 잘 복종합니까” 하고 묻자, 공자는 “곧음을 굽음의 위에 두면 백성이 복종하고, 굽음을 곧음의 위에 두면 백성이 불복합니다”라고 답하였다. 정직함이 사악함을 이기는 정치라야 백성이 복종함을 천명한 말이다.

우리는 불행하게도 한때 반국가·반민족행위자가 오히려 애국·애족지사를 억압했고, 독재세력이 민주세력을 박해한 적도 있다. 곧음과 굽음이 뒤바뀐 상황에 불복하는 마음이 쌓이고 쌓여 국민이 투쟁에 나섬으로써 마침내 민주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아직도 불행했던 시절의 후유증으로 정부 특히 검찰과 경찰에 대한 불신이 적지 않다. 검찰 출신 대통령이 나라를 이끄는 지금을 기회 삼아 불행했던 과거를 깔끔하게 치유했으면 좋겠다.


擧:들 거,

 

直:곧을 직,

 

錯:둘 조(措),

 

諸: 어조사 ‘저’,

 

枉:굽을 왕.

 

곧음을 굽음 위에 두면 백성이 복종.

 

35x75㎝. 

 

 

 

 

 

 

 

 

 

 

 

 

 

 

 

 

 

 

 

 

 

 

 

 

 

 

 

 

 

 

 


‘錯’은 ‘어긋날 착’으로 훈독하는데 ‘措(둘 조)’와 모양이 비슷하여 통용하게 된 것 같다. ‘諸’는 ‘제’가 아닌 ‘저’로 읽으며 ‘지어(之於)’의 줄임말로서 ‘…에(於) 그것(之)을’이라는 뜻이다. 

 

 

‘擧直錯諸枉’은 곧 ‘擧直措之於枉’이므로 ‘곧음을 들어 굽음의 위에 두다’라고 해석한다. 

 

정직이 사악을 이기는 나라여야 국민이 희망을 갖고 바르게 산다. 더 이상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는 일은 없어야 한다.

고단하고 고단한 삶 속에서

 

 

 

< 중앙일보,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2023.06.14 >

 


“아내가 제 손 잡고 잠든 날이었습니다/ 고단했던가 봅니다/ 곧바로 아내의 손에서 힘이 풀렸습니다” 윤병무 시인의 ‘고단(孤單)’이라는 시의 첫 연이다. 다음 연에서 시인은 삶의 고단함으로 힘이 풀리는 손을 보며 문득 별세(別世)의 순간을 떠올린다. 제목에 한자를 병기한 데에서 ‘지쳐서 피곤하다’는 뜻과 ‘단출하고 외롭다’는 뜻을 겸하여 담고 싶은 시인의 마음을 읽는다.

조선 최고의 천재 가운데 한 명으로 불리는 율곡 이이 역시, 자신의 고단(孤單)함이 너무나 심해서 스스로 민망할 지경이라고 토로했다. 우계 성혼과 편지로 치열한 성리 논변을 주고받다가 그마저도 자신과 소견이 같지 않음을 탄식하면서 한 말이다. 이이의 문집에는 성혼과 주고받은 편지가 22편이나 실려 있다. 한 살 터울의 두 사람은 오랜 시간 가깝게 지내며 삶과 학문을 나누었다. 이이가 세상에 자신과 부합하는 이가 거의 없다고 하면서 “저에게는 오직 형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이 편지를 받은 성혼은 굳이 서로 부합하고 의견이 같아야 할 필요가 있는지 되묻는다. 스스로 깨달은 실제가 있다면 온 천하 사람과 뜻이 다르더라도 마음이 평화롭고 즐거울 뿐이니 굳이 자신의 고단함을 민망히 여길 것 없지 않은가. 배움이 견문에 따라 진전되고 견문이 실행을 통해 깊어지기를 기다려야지 당장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다고 괴로워할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군자로서 지녀야 할 본연의 자세를 상기시키는, 매우 지당한 말이다. 하지만 학설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이가 진솔하게 토로한 고단함의 무게가 더 마음을 울린다.

이이처럼 진리를 추구하는 열정을 가지지 못한 우리에게도, 삶은 고단하고 고단하며, 고단해서 더욱 고단하다. 학문적 소견을, 혹은 삶의 행보를 같이할 사람을 찾는다고 해서 이 고단함이 그칠까? ‘고단’의 시구와 같이, 가장 가까운 사람과 손을 잡고 함께 잠드는 순간에도 고단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의 삶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곁에 있는 소중한 이들을 돌아보며 이 시의 마지막 연을 나지막이 되뇌어 볼 뿐이다. “아내 따라 잠든/ 제 코 고는 소리 서로 못 듣듯/ 세상에 남은 식구들이/ 조금만 고단하면 좋겠습니다”

留侯論(유후론) - 蘇軾(소식)  

 

 

留侯論(유후론) - 蘇軾(소식)

 


<유후(留侯) 장량(張良)에 대하여 논하다>

 
유후론(留侯論)은 북송(北宋)의 문학가인 소식(蘇軾)이 <사기(史記) 유후세가(留侯世家)>에 근거하여 유후 장량에 대하여 평론한 산문으로 〈진론(進論)〉 50편 중의 하나이다.
  
장량(張良)의 자(字)는 자방(子房)이며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이다. 박랑사(博浪沙)에서 진시황(秦始皇)을 습격했으나 실패하고 하비(下邳)에 은신하고 있을 때 황석공(黃石公)으로부터 <태공병법서(太公兵法書)>를 물려받았다. 진승(陳勝)·오광(吳廣)의 난이 일어났을 때 유방의 진영에 속하였으며, 후일 항우(項羽)와 유방이 만난 '홍문의 회(會)'에서는 유방의 위기를 구하였다. 선견지명이 있는 책사(策士)로서 한나라의 서울을 진(秦)나라의 고지(故地)인 관중(關中)으로 정하고자 한 유경(劉敬)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소하(蕭何)와 함께 책략에 뛰어나 한나라 창업에 힘썼다. 그 공으로 유후(留侯)에 책봉되었다. 한신(韓信), 소하(蕭何)와 더불어 한초삼걸(漢初三傑)로 일컬어진다.

 
 
留侯論(유후론)

蘇軾(소식)

 
 
古之所謂豪傑之士者(고지소위호걸지사자),必有過人之節(필유과인지절)。

人情有所不能忍者(인정유소불능인자),匹夫見辱(필부견욕),

拔劍而起(발검이기),挺身而鬥(정신이투),此不足為勇也(차부족위용야)。

天下有大勇者(천하유대용자),卒然臨之而不驚(졸연림지이불경),

無故加之而不怒(무고가지이불노),此其所挾持者甚大(차기소협지자심대),

而其志甚遠也(이기지심원야)。

   
옛날에 이른바 호걸스러운 선비는 반드시 남보다 뛰어난 절조가 있었다.
사람의 감정으로는 참지 못하는 일이 있을 때 평범한 사람은 모욕을 당하면
검을 뽑아 들고 일어나 몸을 솟구쳐 싸우는데 이는 용기라 할 수 없다.
천하에 크게 용맹한 자는 갑자기 어떤 일이 닥쳐도 놀라지 않고
까닭 없이 해를 당하여도 노여워하지 않는데 이는 그의 포부가 심히 크고
그의 뜻이 매우 원대한 것이다.

◯ 節(절) : 절조(節操). 절개와 지조.
◯ 匹夫(필부) : 평범한 사람.
◯ 見辱(견욕) : 모욕을 당하다.
◯ 卒然(졸연) : 돌연. 갑자기.
◯ 挾持(협지) : 포부(抱負)

 
 
夫子房受書於圯上之老人也(부자방수서어이상지노인야),其事甚怪(기사심괴)。

然亦安知其非秦之世(연역안지기비진지세),有隱君子者出而試之(유은군자자출이시지)。

觀其所以微見其意者(관기소이미현기의자),皆聖賢相與警戒之義(개성현상여경계지의);

而世不察(이세불찰),以為鬼物(이위귀물),亦已過矣(역이과의)。

且其意不在書(차기의부재서)。

   
자방(子房)이 다리 위의 노인에게서 책을 받았는데 그 일은 매우 괴이하다.
그러나 또한 진(秦)나라 시대 때의 은자(隱者)가 나타나서 자방을 시험한 것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노인이 자신의 뜻을 조금 나타낸 것을 살펴보면 모두 성현이 서로 함께 경계시키려는 뜻인데, 세상 사람들은 이를 살피지 못하고 노인을 귀신이라고 하니 또한 터무니없는 일이다.
또 노인의 뜻은 책을 전달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었다.

◯ 子房(자방) : 장량. 자(字)는 자방(子房)이다.
◯ 受書(수서) : 병서를 받다. <태공병법서(太公兵法書)>를 말한다.
◯ 圯上(이상) : 다리 위. 圯(이)는 흙다리.
◯ 老人(노인) : 황석공(黄石公). 노인과 장량이 다리 위에서 만난 이야기는 사기 유후세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史記(사기) 세가(世家) 권55.留侯世家(유후세가)>
◯ 微(미) : 약간. 어렴풋하다.
◯ 見(현) : 現과 같다. 나타내다.

   
當韓之亡(당한지망),秦之方盛也(진지방성야),以刀鋸鼎鑊待天下之士(이도거정확대천하지사)。

其平居無事夷滅者(기평거무사이멸자),不可勝數(불가승수)。

雖有賁(수유분)、育(육),無所獲施(무소획시)。

夫持法太急者(부지법태급자),其鋒不可犯(기봉불가범),而其未可乘(이기미가승)。

子房不忍忿忿之心(자방불인분분지심),以匹夫之力(이필부지력),

而逞於一擊之間(이령어일격지간);

當此之時(당차지시),子房之不死者(자방지불사자),其間不能容髮(기간불능용발),葢亦危矣(개역위의)。

 
한(韓)나라가 망하고 진(秦)나라가 막 흥성할 때 칼과 톱, 솥과 가마솥으로 천하의 선비를 대했다.
평소에도 죄 없이 멸족을 당한 자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비록 맹분(孟賁)과 하육(夏育)과 같은 용사가 있더라도 능력을 발휘할 도리가 없었다.
법을 너무 급하게 집행하는 군주는 그 예봉(銳鋒)을 거스를 수 없고 그 기세를 탈 수 없는 법이다.
자방(子房)은 분하고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해 보통사람의 힘으로 일격을 가하는 사이에서 분풀이를 하고자 하였다.
이때 자방이 죽임을 당하지 않았으나 그 사이가 털끝 하나도 용납할 틈이 없었으므로 진실로 위험한 일이었다.

◯ 刀鋸鼎鑊(도거정확) : 모두 사람을 처형하는데 쓰인 형구. 刀鋸(도거)는 칼과 톱으로 사람을 찔러 죽였으며, 鼎鑊(정확)은 솥과 가마솥으로 사람을 삶아 죽였음을 뜻한다.
◯ 夷滅(이멸) : 멸족하다.
◯ 賁(분) : 맹분(孟賁). 역사(力士). 맨손으로 살아 있는 소의 뿔을 뽑았다고 하는데 오획(烏獲)과 함께 무왕(武王)을 따라 낙양(洛陽)에 갔다.
◯ 育(육) : 하육(夏育). 위(衛)나라 사람으로 1천 균(鈞)을 들 수 있고 소꼬리를 뽑을 수 있었다고 한다.
◯ 無所獲施(무소획시) : 능력을 발휘할 도리가 없다.
◯ 子房不忍忿忿之心(자압불인분분지심) : 장량(張良)은 한(韓)나라가 진 시황제(秦 始皇帝)에게 멸망되자 젊은 혈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복수하고자 하였다.
◯ 而其未可乘(이기미가승) : 형세가 진(秦)나라에 유리하지만 그 기회를 틈타지 못하다.
◯ 而逞於一擊之間(이령어일격지간) : 장량은 남은 가산을 다 써서 역사(力士)들을 구하고 120근의 철추를 만들어 동쪽으로 유람 중인 시황제(始皇帝)를 박량사(博浪沙)에서 저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史記(사기) 세가(世家) 권55.留侯世家(유후세가)>

 
千金之子(천금지자),不死於盜賊(불사어도적),何者(하자)?

其身可愛(기신가애),而盜賊之不足以死也(이도적지부족이사야)。

子房以葢世之才(자방이개세지재),不為伊尹(불이이윤)、太公之謀(태공지모),

而特出於荊軻(이특출어형가)、聶政之計(섭정지계),以僥倖於不死(이요행어불사),此圯上老人所為深惜者也(차이상노인소위심석자야)。

是故倨傲鮮腆而深折之(시고거오선전이심절지)。

彼其能有所忍也(피기능유소인야),然後可以就大事(연후가이취대사)。

故曰(고왈):「孺子可教也(유자가교야)。」
  
천금을 가진 부잣집 자식은 도적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그들의 생명은 귀중하여 도적들은 그들을 죽일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자방은 세상을 덮을 만한 훌륭한 재주로 이윤(伊尹)과 태공(太公)의 계책을 쓰지 않고,
단지 협객인 형가(荊軻)와 섭정(聶政)의 계책을 내면서 요행으로 죽지 않기를 바랐으니, 이것을 다리 위의 노인이 아주 애석하게 여긴 것이다.
이 때문에 노인은 거만하고 무례하게 대해 자방의 용기를 심하게 꺾었다.
노인은 자방이 능히 참을 줄 안 뒤에야 대사를 성취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말하기를 “젊은이 가르칠 만 하다.”라고 한 것이다.

◯ 伊尹太公之謀(이윤태공지모) : 이윤(伊尹)은 상(商)나라를 개국한 탕(湯)임금의 재상이고, 태공(太公)은 주(周)나라를 개국한 무왕(武王)의 군사(軍師)이다. 두 사람은 모두 은인자중하며 때를 기다리다가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를 만난 뒤에 비로소 천하를 도모하였다.
◯ 特(특) : 단지.
◯ 荊軻聶政之計(형가섭정지계) : 형가(荊軻)와 섭정(聶政)은 모두 전국시대의 자객들로, 이들의 계책이란 목숨을 도외시하고 위험한 행동으로 일을 이루려는 계책을 이른다. <史記列傳(사기열전) 권86 刺客列傳(자객열전)>
◯ 鮮腆(선전) : 무례하다.

 
楚莊王伐鄭(초장왕벌정),鄭伯肉袒牽羊以迎(정백육단견양이영);

莊王曰(장왕왈):

「其主能下人(기주능하인),必能信用其民矣(필능신용기민의)。」

遂舍之(수사지)。

勾踐之困於會稽而歸(구천지곤어회계이귀),臣妾於吳者(신첩어오자),

三年而不倦(삼년이불권)。

且夫有報人之志(차부유보인지지),而不能下人者(이불능하인자),

是匹夫之剛也(시필부지강야)。
 
초 장왕(楚 莊王)이 정(鄭)나라를 정벌하자, 정백(鄭伯)이 윗통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양을 끌고 맞이하였다.
장왕(莊王)이 말하기를,
“그 군주가 자신을 낮출 수 있으니 반드시 그 백성들에게 신임을 얻었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정백을 놓아주었다.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회계산(會稽山)에서 곤경에 처했다가 돌아가 오(吳)나라에 신첩(臣妾) 노릇하기를 3년 동안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 남에게 보복할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남에게 자신을 낮추지 못하는 것은 바로 평범한 사람의 강함일 뿐이다.

◯ 楚莊王伐鄭(초장왕벌정) : 장왕 17년(기원전 597년) 봄에 초 장왕이 정나라를 포위하여 석 달 만에 함락시켰다. 황문(皇門)으로 들어가니 정백(鄭伯)이 웃통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양을 끌고나와 초 장왕을 맞이했다. <史記(사기) 세가(世家) 권40.楚世家(초세가)>
◯ 鄭伯(정백) : 정 양공(鄭襄公). 춘추시대 정나라의 군주로 이름은 견(堅)이다.
◯ 肉袒牽羊以迎(육단견양이영) : 윗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양을 끌고 간 것은 항복하고서 신하가 되겠다는 뜻을 보인 것이다.
◯ 臣妾(신첩) : 자신은 신하가 되고, 아내는 첩(妾)이 된다는 뜻이나, 상대방에게 복종함을 이른다.
◯ 報人(보인) : 남에게 원수를 갚다.


夫老人者(부노인자),以為子房才有餘(이위자방재유여),

而憂其度量之不足(이우기도량지부족),故深折其少年剛銳之氣(고심절기소년강예지기),

使之忍小忿而就大謀(사지인소분이취대모)。何則(하즉)?

非有平生之素(비유평생지색),卒然相遇於草野之間(졸연상우어초야지간),

而命以僕妾之役(이명이복첩지역),油然而不怪者(유연이불괴자),

此固秦皇之所不能驚(차고진황지소불능경),而項籍之所不能怒也(이항적지소불능노야)。

노인은 자방이 재주는 충분하다고 여겼으나 도량이 부족함을 걱정한 까닭에 장량의 젊은이로서의 강하고 날카로운 기운을 심하게 꺾어서
그로 하여금 작은 분노를 참아 큰 계책을 성취하게 한 것이다. 어째서인가?
평소 서로 만난 일이 없었는데 갑자기 들판의 사이에서 서로 만나
종처럼 일을 시키는데도 유연하여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으니,
이는 진실로 진 시황(秦 始皇)이라도 그를 놀라게 할 수 없고, 항적(項籍)도 성내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 非有生平之素(비유생평지소) : 평소 서로 만난 일이 없다. 일면식도 없다.
◯ 仆妾之役(복첩지역) : 종이나 하는 일을 시키다. 노인이 신발을 주워오게 한 일을 말한다. 仆妾(복첩)은 남자 종과 여자 종.
◯ 油然(유연) : 생각이나 감정이 저절로 일어나는 모양.
◯ 所不能(소불능) : 할 수 없는 일.

  
觀夫高祖之所以勝(관부고조지소이승),項籍之所以敗者(항적지소이패자),

在能忍與不能忍之間而已矣(재능인여불능인지간이이의)。

項籍唯不能忍(항적유불능인),是以百戰百勝(시이백전백승),而輕用其鋒(이경용기봉);

高祖忍之(고조인지),養其全鋒(양기전봉),以待其弊(이대기폐),此子房教之也(차자방교지야)。

當淮陰破齊而欲自王(당회음파제이욕자왕),高祖發怒(고조발노),見於辭色(현어사색)。

由此觀之(유차관지),猶有剛強不忍之氣(유유강강불인지기),非子房其誰全之(비자방기수전지)?
 
고조(高祖)가 승리한 이유와 항적(項籍)이 패망한 이유를 살펴보면,
참을 수 있느냐 참을 수 없느냐의 차이일 뿐이었다.
항적은 단지 참지 못하여 백전백승하였으나 경솔히 자신의 병력을 소모하였고
고조는 참을 수 있어 온전한 전력을 키워 상대방이 피폐해지기를 기다렸으니, 이는 자방이 가르쳐준 것이다.
회음후(淮陰侯)가 제(齊)나라를 격파하고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을 때 고조가 성을 내어 말이나 안색에 나타났었다.
이것으로 살펴보면 고조는 아직도 강하고 참을 수 없는 기운이 있었던 것이니, 자방이 아니면 누가 고조를 온전히 보존하게 해주었겠는가?

◯ 輕用其鋒(경용기봉) : 경솔하게 자신의 군대를 소모시키다.
◯ 當淮陰破齊而欲自王(당회음파제이욕자왕) : 한왕 4년(기원전 203년)에 한신(韓信)이 제나라를 격파하고 스스로 제나라 왕이 되려고 하자 한왕이 대노했다. 장량이 한신을 대우하지 않으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한왕을 설득하여 한신을 제왕(齊王)으로 세웠다. [史記列傳(사기열전)] 권92 淮陰侯列傳(회음후열전)
  
 
太史公疑子房以為魁梧奇偉(태사공의자방이위괴오기위),

而其狀貌乃如婦人女子(이기상모내여부인녀자),不稱其志氣(불칭기지기)。

嗚呼(명호)!此其所以為子房歟(차기소이위자방여)!
 
태사공(太史公) 사마천은 자방이 기골이 장대하고 인품이 기이하고 위대할 것이라고 여겼었는데, 그 형상과 모양이 도리어 부인과 여자 같아, 그의 지기(志氣)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의심하였다.
아! 이것이 바로 자방(子房)이 자방답게 된 이유일 것이다!

◯ 太史公疑子房(태사공의자방) : 태사공은 유후세가에서 “나는 유후가 기골이 장대하고 인품이 기이하고 위대할 것이라고 여겼었는데 그의 초상화를 보니 용모가 부인이나 예쁜 여인 같았다.”라고 하였다.   [史記(사기) 세가(世家)] 권55.留侯世家(유후세가)
◯ 소식(蘇軾, 1037년~1101년) : 북송 시대의 시인이자 문장가, 학자, 정치가이다. 자(字)는 자첨(子瞻)이고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 흔히 소동파(蘇東坡)라고 부른다. 현 쓰촨 성 미산(眉山)현에서 태어났다. 시(詩),사(詞),부(賦),산문(散文) 등 모두에 능해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원문출처>

留侯論/作者:蘇軾

古文觀止/古文辭類纂

 
 
  古之所謂豪傑之士者,必有過人之節。人情有所不能忍者,匹夫見辱,拔劍而起,挺身而鬥,此不足為勇也。天下有大勇者,卒然臨之而不驚,無故加之而不怒,此其所挾持者甚大,而其志甚遠也。夫子房受書於圯上之老人也,其事甚怪。然亦安知其非秦之世,有隱君子者出而試之。觀其所以微見其意者,皆聖賢相與警戒之義;而世不察,以為鬼物,亦已過矣。且其意不在書。
 
옛날에 이른바 호걸스러운 선비는 반드시 남보다 뛰어난 절조가 있었다. 사람의 감정으로는 참지 못하는 일이 있을 때 평범한 사람은 모욕을 당하면 검을 뽑아 들고 일어나 몸을 솟구쳐 싸우는데 이는 용기라 할 수 없다. 천하에 크게 용맹한 자는 갑자기 어떤 일이 닥쳐도 놀라지 않고 까닭 없이 해를 당하여도 노여워하지 않는데 이는 그의 포부가 심히 크고 그의 뜻이 매우 원대한 것이다. 자방(子房)이 다리 위의 노인에게서 책을 받았는데 그 일은 매우 괴이하다. 그러나 또한 진(秦)나라 시대 때의 은자(隱者)가 나타나서 자방을 시험한 것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노인이 자신의 뜻을 조금 나타낸 것을 살펴보면 모두 성현이 서로 함께 경계시키려는 뜻인데, 세상 사람들은 이를 살피지 못하고 노인을 귀신이라고 하니 또한 터무니없는 일이다. 또 노인의 뜻은 책을 전달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었다.
 
  當韓之亡,秦之方盛也,以刀鋸鼎鑊待天下之士。其平居無事夷滅者,不可勝數。雖有賁、育,無所獲施。夫持法太急者,其鋒不可犯,而其末可乘。子房不忍忿忿之心,以匹夫之力,而逞於一擊之間;當此之時,子房之不死者,其間不能容髮,葢亦危矣。千金之子,不死於盜賊,何者?其身可愛,而盜賊之不足以死也。子房以葢世之才,不為伊尹、太公之謀,而特出於荊軻、聶政之計,以僥倖於不死,此圯上老人所為深惜者也。是故倨傲鮮腆而深折之。彼其能有所忍也,然後可以就大事。故曰:「孺子可教也。」
 
한(韓)나라가 망하고 진(秦)나라가 막 흥성할 때 칼과 톱, 솥과 가마솥으로 천하의 선비를 대했다. 평소에도 죄 없이 멸족을 당한 자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비록 맹분(孟賁)과 하육(夏育)과 같은 용사가 있더라도 능력을 발휘할 도리가 없었다. 법을 너무 급하게 집행하는 군주는 그 예봉(銳鋒)을 거스를 수 없고 그 기세를 탈 수 없는 법이다. 자방(子房)은 분하고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해 보통사람의 힘으로 일격을 가하는 사이에서 분풀이를 하고자 하였다. 이때 자방이 죽임을 당하지 않았으나 그 사이가 털끝 하나도 용납할 틈이 없었으므로 진실로 위험한 일이었다. 천금을 가진 부잣집 자식은 도적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그들의 생명은 귀중하여 도적들은 그들을 죽일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자방은 세상을 덮을 만한 훌륭한 재주로 이윤(伊尹)과 태공(太公)의 계책을 쓰지 않고, 단지 협객인 형가(荊軻)와 섭정(聶政)의 계책을 내면서 요행으로 죽지 않기를 바랐으니, 이것을 다리 위의 노인이 아주 애석하게 여긴 것이다. 이 때문에 노인은 거만하고 무례하게 대해 자방의 용기를 심하게 꺾었다. 노인은 자방이 능히 참을 줄 안 뒤에야 대사를 성취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말하기를 “젊은이 가르칠 만 하다.”라고 한 것이다.
 
  楚莊王伐鄭,鄭伯肉袒牽羊以迎;莊王曰:「其主能下人,必能信用其民矣。」遂舍之。勾踐之困於會稽而歸,臣妾於吳者,三年而不倦。且夫有報人之志,而不能下人者,是匹夫之剛也。夫老人者,以為子房才有餘,而憂其度量之不足,故深折其少年剛銳之氣,使之忍小忿而就大謀。何則?非有平生之素,卒然相遇於草野之間,而命以僕妾之役,油然而不怪者,此固秦皇之所不能驚,而項籍之所不能怒也。

초 장왕(楚 莊王)이 정(鄭)나라를 정벌하자, 정백(鄭伯)이 윗통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양을 끌고 맞이하였다. 장왕(莊王)이 말하기를, “그 군주가 자신을 낮출 수 있으니 반드시 그 백성들에게 신임을 얻었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정백을 놓아주었다.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회계산(會稽山)에서 곤경에 처했다가 돌아가 오(吳)나라에 신첩(臣妾) 노릇하기를 3년 동안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 남에게 보복할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남에게 자신을 낮추지 못하는 것은 바로 평범한 사람의 강함일 뿐이다. 노인은 자방이 재주는 충분하다고 여겼으나 도량이 부족함을 걱정한 까닭에 장량의 젊은이로서의 강하고 날카로운 기운을 심하게 꺾어서 그로 하여금 작은 분노를 참아 큰 계책을 성취하게 한 것이다. 어째서인가? 평소 서로 만난 일이 없었는데 갑자기 들판의 사이에서 서로 만나 종처럼 일을 시키는데도 유연하여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으니, 이는 진실로 진 시황(秦 始皇)이라도 그를 놀라게 할 수 없고, 항적(項籍)도 성내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觀夫高祖之所以勝,項籍之所以敗者,在能忍與不能忍之間而已矣。項籍唯不能忍,是以百戰百勝,而輕用其鋒;高祖忍之,養其全鋒,以待其弊,此子房教之也。當淮陰破齊而欲自王,高祖發怒,見於辭色。由此觀之,猶有剛強不忍之氣,非子房其誰全之?
 
고조(高祖)가 승리한 이유와 항적(項籍)이 패망한 이유를 살펴보면, 참을 수 있느냐 참을 수 없느냐의 차이일 뿐이었다. 항적은 단지 참지 못하여 백전백승하였으나 경솔히 자신의 병력을 소모하였고 고조는 참을 수 있어 온전한 전력을 키워 상대방이 피폐해지기를 기다렸으니, 이는 자방이 가르쳐준 것이다. 회음후(淮陰侯)가 제(齊)나라를 격파하고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을 때 고조가 성을 내어 말이나 안색에 나타났었다. 이것으로 살펴보면 고조는 아직도 강하고 참을 수 없는 기운이 있었던 것이니, 자방이 아니면 누가 고조를 온전히 보존하게 해주었겠는가?

  太史公疑子房以為魁梧奇偉,而其狀貌乃如婦人女子,不稱其志氣。嗚呼!此其所以為子房歟!

태사공(太史公) 사마천은 자방이 기골이 장대하고 인품이 기이하고 위대할 것이라고 여겼었는데, 그 형상과 모양이 도리어 부인과 여자 같아, 그의 지기(志氣)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의심하였다. 아! 이것이 바로 자방(子房)이 자방답게 된 이유일 것이다! 

당신의 슬픔은 당신만의 것
   

 

< 한국고전번역연구원, 송호빈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조교수 >

 

 


이런 말들은 구경하는 사람들의 억측일 뿐 취한 사람의 진정(眞情)은 아니니 어찌 그리도 슬퍼하는지는 모름지기 취한 사람에게 물어야 한다. 취한 사람은 무슨 일로 그렇게 슬퍼하는 것일까?
 
是乃觀者臆量耳, 非醉人眞情, 須問醉人所慟. 醉人所慟何事?
시내관자억량이, 비취인진정, 수문취인소통. 취인소통하사?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燕巖集)』 제10권 별집, 「도화동시축발(桃花洞詩軸跋)」

   
해설


   슬픔은 어디에나 있다. 길을 걷노라면 그것이 뒤를 쫓아와 오른쪽 어깨를 건드리며 앞질러 가고 혹은 앞에서 다가와 왼쪽 옷깃을 스치며 엇갈려 간다. 책을 읽다 문득 고개를 든 여름 한낮, 햇볕이 하얗게 쏟아지는 창틀에 다소곳이 앉아 나를 내려다보는 슬픔을 나 또한 올려다보았다. 뜻하지 않게 잠에서 깨어난 겨울 밤중에는 시나브로 이불 밖으로 내어놓은 차가워진 발가락 끄트머리를 설핏 맴돌다 가는 그것의 등허리를 본 적이 있다.

   그리하여 어디서도 누군가는 운다. 복사나무 아닌 나무는 한 그루도 없고 복사꽃 아니 핀 가지는 한 가지도 없어, 살구꽃 만발하였던 필운대(弼雲臺)에서 놀던 사람들이 채 열흘도 되지 않아 모두 이곳으로 옮아온 시절. 이날의 도화동(桃花洞)은 잠깐의 멈춤이나 한 치의 틈도 없이 중(中)과 화(和)가 가득하였기에 평소 울근불근하던 연암(燕巖)마저도 마음이 누그러지고 잔잔해졌던 것이다. 이토록 더할 나위 없이 화평한 봄낮의 꽃그늘 아래서도 한 사람만큼은 흐느껴 운다.

   우리는 그의 슬픔을 알 수 있을까? 초여름 맹랑한 모기에 물려 서둘러 부풀어 오른 어린아이의 살갗, 돌이켜 보면 어떤 병의 징후였을지도 모를 아내의 사소한 빈혈, 세상에 이로운 재화를 생산하다 기계 속에서 부수어져 버린 노동자의 몸 ― 이들과 마주하거나 그런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적지 않게 슬펐지만 조금도 가렵거나 어지럽거나 아프지 않았다. 아플 수 없었다. 나와 남의 몸이 나뉘어 있는 이상 동정(同情)과 공감(共感)은 정녕 수사(修辭)에 그칠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울음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는다. 복사꽃 아래서 목놓아 울던 사람도 머지않아 울음을 그칠 것이요 모조리 울고 나서 제 슬픔을 스스로 추스를 것이다. 슬픔의 까닭을 묻고자 하여도 울음을 그친 뒤에야 비로소 가할 터인데 아마도 연암은 끝내 묻지 않았으리라. 가섭(迦葉)이 석가(釋迦)의 염화(拈花)에 미소 지었듯 섣부른 헤아림이나 물음을 짓지 않아야 슬픔의 진정에 육박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의 슬픔에 우리가 할 일은 쉬이 남의 슬픔에 함께 아파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슬픔의 존재를 가만히 인식하는 것이다. 

 

나의 어떤 슬픔으로 미루어 보건대, 슬픔이란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어떤 까닭으로든 존재한다는 것을. 

 

그러므로 당신의 슬픔은 당신만의 것이다.



“여자라고 성인 못 되나” 친정·시집 둘 다 일으킨 수퍼맘 장계향

‘수양과 실천’의 여장부 장계향

 

 

< 중앙일보,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2023.05.26  >

 



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인 영해부(寧海府·현재 경북 영덕군 영해면) 인량리의 너른 들녘을 여섯 살 난 동자를 업은 한 여성이 걸어간다. 들판 저 너머 5리 길의 마을 훈장에게 아이를 데려갔다 데려오는 데 여성은 늘 그 시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운 바닷바람에도 개의치 않았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등굣길의 모자는 갓 시집온 스무 살의 장계향(1598~1680)과 2년 전에 엄마를 잃은 이상일이다. 새엄마 장씨는 어미 잃은 아이의 기를 살리고 착한 선비로 길러내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를 본 시아버지 이함(1554~1632)은 아이의 죽은 어미가 살아온 것 같다고 한다.

 


모든 생명 공경, 몰락한 시가 재건
전처 소생 등 10남매 반듯이 키워

“직접 일궈야 내 재물” 처절한 시간
자녀들과 산골 들어가 새 삶 닦아

친정아버지와 이복동생들도 돌봐
첫 한글요리서 『음식디미방』 남겨

 


‘내가 곧 우주’ 자존감의 경(敬)사상

누구의 소생이든 연약한 생명에 정성으로 응대한 장계향의 행위에는 ‘내가 곧 우주’라는 자기 존중감을 바탕으로 사람과 만물을 응대한다는 철학이 깔려 있다. 열 살 무렵의 그녀는 이미 내 몸, 내 존재에 대한 긍정과 공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인식에 이르는데, “이 몸은 바로 어버이의 몸이니, 어찌 감히 이 몸을 공경하지 않으리”(경신음·敬身吟)라고 한다. 공경과 삼감으로 자아를 가꾸고 그 정신과 실천을 외부로 확장한다는 경(敬)의 사상, 아버지 경당 장흥호(1564~1633)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장계향은 시집 가문의 중흥을 주도하였다. 재령이씨 영해파는 입향조 이후 3대에 걸쳐 재지사족(在地士族·지방 지배세력)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특히 이함은 의령현감을 끝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다량의 서적을 갖추어 놓고 후세 교육에 주력한다. 재령이씨 영해파의 번영은 탁월한 재산 경영과 인(仁)의 철학으로 사회적 영향력을 넓혀간 이함이 배경이 되었다.

그런데 이함의 네 아들 시청·시형·시명·시성이 출사할 즈음에 갑자기 몰아친 불운으로 가문은 위기를 맞는다. 차남과 장남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차례로 급서하고 남편을 잃은 두 며느리가 연달아 자결하는 변고가 발생한 것이다. 셋째 며느리의 사망까지 불과 5년 사이에 20~30대의 젊은 사람 5명이 사라져버렸다. 이 암울한 집안에 재건의 열쇠를 쥔 장계향이 등판하게 된다.

 


교육과 살림, 30명 대가족 이끌어

사실 운이 다한 듯한 집안에 무남독녀를 시집보낸다는 것은 사상적 지지나 자신감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게다가 어린 남매가 기다리는 재취 자리다. 경당은 한때 자신의 문하에서 빛을 발하던 스무 살의 이시명(1590~1674)이 혹독한 변고를 겪고서 초췌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을 때 애잔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술잔을 기울이며 위로의 긴 시간을 보내면서 제자의 맑은 기운과 학문적 역량에 경도되며 스승은 딴마음을 품게 된다. 경당은 아침저녁으로 학술과 도덕을 함께 논하던 딸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자신의 딸이라면 몰락의 조짐을 보이는 한 집안을 재건할 것이라는 자신감도 들었다.

겨우 스무 살의 장계향은 실의에 빠진 시부모를 위로하고 전처소생의 어린 남매를 양육하는 등 30여 명의 식구를 건사하는 대가족의 주부로 삶의 새 장을 연다.

 

그녀의 가문 의식은 “남이 넉넉할 때 내 많은 재물은 자랑일 수 있지만 남이 모두 없는데 홀로 많이 가진 것은 재앙”이라고 한 말에서 드러나듯 사회를 향해 열려 있다. 이후 25년 동안 장씨는 7남 3녀의 출산과 양육, 그리고 교육과 혼인을 주관하며 활발한 청장년기를 보낸다.

역병과 자연재해가 일상이 된 17세기의 외진 고을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10남매의 부모로 산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생존과 다투는 날들이었다. 이러한 절박한 환경에서도 장계향은 직접 일구지 않은 재물은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자식 교육에 도전과 노력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고 여겼다.

 


“강학 열어 자식들 미래 준비하자”

당시 이시명은 임금이 청나라에 굴복한 사건에다 지역인의 모함으로 죄인 취급을 받으며 서울로 압송되는 모욕을 당한 사건이 겹치면서 세상과 인간에 대한 불신에 차 있었다.

 

실의에 빠진 남편에게 힘을 실을 겸 장씨는 “강학을 열어 자식들의 미래를 준비하자”고 제안한다. 이에 부부는 분재(分財·가족이나 친척에 나눠준 재산)로 받은 영해의 넉넉한 들녘에 안주하지 않고 자녀들을 데리고 산골 마을 석보(石保)로 들어가 최소한의 토지를 기반으로 새로운 형태의 삶을 모색한다.

석보 생활 12년 동안 삶과 죽음이 교체되고 나가고 들어오는 등의 구성원들 변화를 지켜보면서 더 산간 오지 수비(首比)로의 이거를 단행한다. 근거지를 버리고 더 나은 환경으로 옮기는 경우는 많지만 장계향 부부처럼 더 열악한 곳을 선택하는 경우는 예나 지금이나 특별한 모습이다. 부모의 뜻이 무엇인지를 안 자식들은 직접 일해야 먹을 수 있는 생활을 선택하며 혼인한 자들까지 따라나서 식구는 20명에 이르렀다.

훗날 이 가문의 위상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갈암 이현일(1627~1704)은 수비에서의 생활을 기록으로 남겼다. “나는 은둔할 목적으로 부모님을 따라 이곳 수비에 와서 띠풀을 엮어서 집을 짓고 물을 퍼 올려 채마밭을 일구었다. 여기서도 가족 강학은 계속되었다.”(‘갈암기·葛庵記’)

쉽고 편한 것에 안주하지 않고 쉼 없이 자신을 갈고닦는 이 삶의 자세는 어디서 온 것인가. 친정아버지에게서 가르침을 받던 소싯적의 장계향은 성인(聖人)을 꿈꾸었다. 그녀는 “성인도 사람이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면, 나도 노력한다면 성인이 되는 데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라고 한다. (‘정부인장씨행실기’) 산간오지에서 보낸 30여년의 세월은 부모에게는 수양과 성찰의 시간이었고, 자식들에게는 근본에 충실한 학문 연마의 시간이었다.

 


한국 음식문화사의 새 장 열어

특히 장계향은 이 기간에 지역의 약초나 토산물을 활용하여 기근과 궁핍, 질병을 해결하였다. 또 건강의 바탕을 음식으로 보고 수십 년에 걸쳐 연구하고 실험한 결과를 모아 최초의 한글 조리서 『음식디미방』을 저술한다. 이 책은 350년이 지난 지금도 전통 음식문화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무남독녀 장계향은 어머니의 타계로 홀로 남겨진 아버지에게 달려가는데, 영해에서 안동 친정까지는 200리 길이다. 20대 중반 나이에 수십 명을 건사하는 주부였지만 시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의 배려로 친정살이하며 아버지 경당을 봉양한다.

그런데 학봉 김성일과 서애 유성룡을 통해 퇴계학을 전수하여 심학(心學)으로 발전시킨 대학자 경당은 수백 명의 문인에 학인들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섰지만, 대(代)가 끊긴다는 사실에서 딸이 가졌을 법한 비애는 짐작이 된다. 장계향은 아버지의 재혼을 성사시킨 후 시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10여년 후 어린 자녀들을 남기고 아버지가 타계하자 어린 이복동생들을 자기 곁으로 데려와 돌보며 삶의 터전을 마련해준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뒤를 이을 학자로 성장하도록 정성을 다했다. 경당 가문의 후손들에게 장계향은 특별한 존재로 기억되고 있었다.

 


훌륭한 아들들 키운 숭고한 삶

장계향의 아들 현일은 학문이 완숙해진 52세에 학행으로 출사하여 영남 사림의 종장이자 산림정치가로 크게 이름을 떨친다. 아들 휘일은 아우 현일과 합작으로 『홍범연의』를 저술하는데, 여기에는 국가 재건을 염두에 둔 경세철학이 담겼다. 다른 아들들도 학문으로 각자의 세계를 만들었는데, 이는 가문의 명운을 걸고 절차탁마한 긴 시간의 결과물이다. 재령이씨 영해파는 이함과 이시명, 그리고 휘일·현일 형제, 3대가 나라에 큰 공훈을 남긴 사람에게 주는 불천위(不遷位)의 영예를 받기에 이르렀다.

85세 나이로 이시명이 운명하자 아들들이 모두 모여 여묘살이를 한다. 이때 이현일은 『논어』를 강론하고, 어머니 장계향은 『논어』의 실천과 일상화의 중요성을 말한다.(‘석계연보’) 장계향은 자신을 모시려는 소생 아들들의 청을 거절하고, 장남 상일에게 남은 생을 의탁한다. 추위를 막느라 업어서 등교시킨 60년 전의 그 아들이다. 전 생애를 오롯이 경(敬·수양과 실천)의 정신으로 일관한 장계향의 삶은 숭고했다.

마음으로 즐길 일

 

< 다산연구소 풀어쓰는 실학 이야기 47호, 심경호(고려대학교 특훈명예교수) >

 


  이즈음 사람들은 기쁜 마음을 갖기 어렵고 즐거운 일도 없다고들 한다. 고향도 잃어버리고 안식처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더 그럴 것이다. 

 

샘 페킨파David Samuel Peckinpah 감독의 1971년영화 <지푸라기 개>Straw Dogs가 생각난다. 주인공 부부 데이빗과 에이미는 에이미의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마을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고 그들의 폭력성 때문에 위협을 느끼다가, 데이빗이 폭도 가운데 다섯 사람을 살해하게 된다. 가까스로 자신들을 지켜내지만 그들 자신이 불한당이 된 것이다.

  1786년 2월, 정약용은 별시 초시에 응시하여 차하(次下)를 받았으나 전시(殿試)에 나아가지 못했다. 여름에 소내에서 지내며 남송 장자(張鎡)의 산문 「장약재상심낙사(張約齋賞心樂事)」를 읽고, 한 해 열두 달의 즐거운 일을 6언시로 노래하여 「초천사시사, 장 남호의 상심낙사를 본떠서[苕川四時詞, 效張南湖賞心樂事]」 13수를 연작했다.

  상심낙사는 본래 사미(四美) 가운데 둘을 말하지만, 결국 그 넷을 아우르는 말이다. 남조(南朝) 사영운(謝靈運)의 「의위태자업중집시서(擬魏太子鄴中集詩序)」에 “천하에 좋은 날, 아름다운 경치, 기쁜 마음, 즐거운 일, 이 넷은 아울러 갖기 어렵다.[天下良辰美景賞心樂事, 四者難并.]”라고 한 말에서 기원한다. 북송의 소식(蘇軾)은 마음으로 즐길 경치들을 선정하여 「상심십육사(賞心十六事)」라고 했다.

  정약용의 13수 연작에서 첫 번째 시는 경기도 광주(廣州) 두미협 어구의 검단산(黔丹山)에서 꽃 구경하는 즐거움을 노래했다.

  작은 마을에 배꽃 새하얗고
  깊은 산골 진달래는 타는 듯 붉어라.
  천천히 돌비탈 오솔길 따라갔다가
  안개 낀 물가 바위를 고깃배로 다시 찾는다.

  村小梨花白立, 山深杜宇紅然. (촌소이화백립, 산심두우홍연.)
  徐從石磴樵路, 還訪烟磯釣船. (서종석등초로, 환방연기조선.)

  장자는 임안(臨安, 지금의 절강 항주시)에 거처하며, 남호(南湖)와 원정(園亭)을 두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다. 1207년 사농 소경(司農少卿) 시절, 일이 있어 광덕군(廣德郡)으로 좌천되고 1211년에 상주(象州)애 편관(編管)되어 있다가 죽었다. 장자의 상심낙사가 호사스러운 유흥인 데 비하여 정약용의 상심낙사는 고향 소내의 자연 속에 어우러져 생활하는 즐거움을 꼽았다. 봄은 검단산의 꽃구경[黔丹山賞花], 수구정의 버들 구경[隨鷗亭問柳], 남자주의 답청[藍子洲踏靑]. 여름은 흥복사에서 꾀꼬리 소리를 들음[興福寺聽鶯], 월계의 고기잡이[粵溪打魚], 석호정의 피서[石湖亭納凉]. 가을은 석림의 연꽃 구경[石林賞荷], 유곡에서 매미소리 들음[酉谷聽蟬], 사라담에서 달밤 아래 배를 띄움[䤬鑼潭汎月], 천진암의 단풍 구경[天眞菴賞楓]. 겨울은 수종산의 눈 구경[水鐘山賞雪], 두미협의 물고기 구경[斗尾峽觀魚], 송정에서의 활쏘기[松亭射帿].

  정약용은 1796년 11월 하순 규장각에서 『사기』를 교정할 때 수종산 설경이 그리워져 검서관 박제가에게 섬계(剡溪)의 흥취를 이야기하다가 이 「초천사시사」 13수 가운데 12수를 외워 들려주었다. 또 강진에 유배되어 있던 1811년, 도강(道康) 병마우후(兵馬虞候) 이중협(李重協)에게 12수를 베껴 주었다. 「성화에게 준 초천사시사첩[與聖華苕川四時詞帖]」이 2009년 한 화랑에 전시된 적이 있는데, 13수 가운데 ‘유곡에서 매미 소리 들음[酉谷聽蟬]’의 시가 빠져 있다. 이중협은 자(字)가 성화(聖華)로, 양근(현 양평)의 서쪽 끝인 서종(西終)에 집을 두었다. 정약용은 그와 함께 『비어고(備禦考)』를 엮었다. 1813년 6월 12일 이중협이 서종으로 떠나게 되자 정약용은 그를 위해 시도 지어 주고 글도 써주었다.

  1796년 11월 하순의 규장각 숙직 때 정약용이 자신의 「초천사시사」를 외운 것은 답답한 마음을 털어버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정약용은 또, 명말 청초 김성탄(金聖嘆)의 「불역쾌재(不亦快哉)」33칙을 계승하되 칠언절구 연작 형태로 「그 얼마나 좋을까 노래 20수[不亦快哉行二十首]」를 지었다. 그 제11수는 이러하다.

  옹색하게 서울에서 움츠려 지내길
  병든 새가 조롱에 갇혀 있듯 하다가,
  채찍 울리며 교외로 훌쩍 나가서
  눈앞에 펼쳐진 들판을 볼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좋을까.

  局促王城百雉中, 常如病羽鎖雕籠. (국촉왕성백치중, 상여병우쇄조롱.)
  鳴鞭忽過郊門外, 極目川原野色通. (명편홀과교문외, 극목천원야색통.)
  不亦快哉! (불역쾌재!)

  우리는 누구나 그 나름의‘광경’을 보고 싶어한다. 지금 여기를 벗어나서 드넓은 들판을 볼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좋을까.


‘구독’과 ‘좋아요’ 대신 필요한 것
   

< 한국고전번역연구원, 송수진 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연구원,  2023.04.26 >

 

 


무릇 눈을 가진 자들은 만약 볼만한 것이 있으면 고개를 숙인 채 그냥 지나는 자가 없으니, 

그 욕망이란 것이 이와 같다.
 

凡有目者苟有可以見 則未有低頭而過者也 其爲欲有如是矣
범유목자구유가이견 칙미유저두이과자야 기위욕유여시의

- 윤기(尹愭, 1741∼1826) 『무명자집(無名子集)』 문고 제10책 「간완욕(看玩欲)」

   
해설


   조선 후기 학자 윤기(尹愭, 1741∼1826)는 대중의 생활상과 풍속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글을 남겼다. 이 글 또한 윤기가 살던 시대에 대한 비평이 담겨 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 당시 어가 행렬은 대단한 구경거리였나 보다. 사대부들은 하인들의 손가락질을 받아도 부끄러움을 모른 채 뛰어갔다. 하나라도 놓칠세라 농사일도 내팽개쳐 버리거나, 같이 갔던 가족도 잃어버리고 돌아오는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구경하다가 길에서 해산을 하거나 누각에서 헛디뎌 추락하는 일도 발생했다. 그렇게 애를 쓰고 달려가도 그들이 실제로 보는 것은 정작 군마가 떼로 달리는 정도였는데 말이다.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는 구경거리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길가에서 싸움이 나면 아무리 급해도 발을 멈추고 구경하고, 특이한 물건이나 좋은 경치가 생기면 굳이 가서 보고 온다. 윤기는 구경거리가 생기면 남녀노소 앞다투어 달려가는 모습이 마치 미치광이와 다를 바 없다고 보았다.


   식욕, 색욕, 재물욕, 명예욕 등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지만, 윤기는 구경하려는 욕망이 천하의 모든 욕망 중에서 가장 큰 욕망이라고 지적했다. 윤기는 성현들이 인욕을 경계하라고 가르쳐 주었음에도, 눈이 구경하고자 하는 욕망이 과거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고 한탄하였다. 그런데 이 욕망에 대한 추구는 안타깝게도 오늘날이라고 다르지 않아 보인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구독’과 ‘좋아요’에 열광하며 오늘도 새롭고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찾으러 다닌다. 이러한 욕망을 부추기는 관찰 예능은 대중이 자신의 욕망을 경계하고 성찰하기를 어렵게 만든다.

 
   시선이 밖으로 달릴수록 남과 의식주를 끊임없이 비교하며 자신의 삶에 만족하기가 어려워질 수 있다. 

 

윤기의 지적대로 구경하려는 욕망은 더 큰 욕망을 재촉하게 되니, 그야말로 욕망 중의 가장 큰 욕망임에 틀림없다. 옛사람의 충고를 새겨 밖으로만 내달리는 눈을 잠시 감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비어가는 마음을 채울 결단이 필요하다.

1.

항룡유회(亢龍有悔)
-너무 높이 올라간 용은 후회함이 있다



< 경남신문, 허권수 동방한학연구소장, 2020-12-29 >



‘주역(周易)’은 육십사 괘(卦)를 가지고 세상의 모든 일의 이치를 풀이한다. 육십사 괘 가운데서 건괘(乾卦)는 대표적인 괘이고 하늘을 상징하는데 모두 양(陽)으로만 되어 있다.

이 건괘는 세상의 원리와 사람의 처세 방법 등을 용을 등장시켜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하나의 괘는 여섯 개의 효(爻)로 되어 있는데, 가로 그은 막대는 양(陽)을 나타내고, 가운데 끊어져 있는 막대는 음(陰)을 나타낸다. 여섯 개의 효는 아래서부터 기운이 작동한다.

건괘의 첫 번째 효에서는 ‘잠겨 있는 용이니, 쓰지 말아라(潛龍勿用)’라고 했다. 다 자라지 않은 청소년으로 학덕이나 능력 등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두 번째 효에서는 ‘나타난 용이니, 밭에 있다(見龍在田)’라고 했다. 학덕과 능력을 갖추고 세상에 나와서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려는 단계이다.

다섯 번째 효에서는 ‘나는 용이 하늘에 있다(飛龍在天)’라고 했다. 용이 하늘에 날아오르듯이 사람이 때를 얻어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단계이다. 임금이 되어서 세상을 다스리는 것도 이렇게 비유했다.

두 번째와 다섯 번째 효 뒤에는 ‘위대한 사람을 만나보는 것이 이롭다(利見大人)’라는 말이 붙어 있다. 능력을 발휘하려고 할 때나 전성기에도 자기만의 생각이나 능력으로는 안 되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 앞선 사람의 말을 듣고 의논하는 것이 좋다는 뜻이다.

다섯 번째 효가 가장 높은 것이 아니고, 그 위에 여섯 번째 효가 더 있다. 여섯 번째 효는 ‘너무 높이 올라간 용은 후회가 있다.(亢龍有悔)’라고 했다.

다섯 번째보다는 여섯 번째가 더 좋을 것 같지만, 여섯 번째 효까지 올라가면 돌아설 수 없는 데까지 가서 어떻게 할 수가 없게 된다.

‘주역’은 점치는 책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사람에게 올바른 이치를 가르쳐 미리 대비하고 신중히 하고 경계하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주변에서 ‘너무 높이 올라가 돌아설 수 없는 경우’에까지 간 사례를 많이 본다.

처음 음식점을 개업했을 때는 주인이 아주 친절하고, 손님의 말을 듣고 개선을 한다. 장사가 좀 잘 되면 종업원들에게 맡겨 놓고 주인은 향락을 누리며 돌아다닌다. 연예인들도 조금 이름이 나면 문제를 일으킨다. 학자들도 조금 이름이 나면 재충전보다는 강연하러 다니기에 바쁘다. 국회의원들도 초선, 재선일 때는 유권자를 존중하고 선거운동을 열심히 한다. 3선 이상 되면 교만이 붙어서 유권자들은 안중에도 없다. 다 도가 지나친 것이다. 지금 대통령, 법무부장관, 여당 국회의원들은 도를 넘친 것 같다. 일 처리를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하지 않고 힘으로 밀어붙이려고 한다. 말도 함부로 한다.

서로 견제하도록 하기 위해서 삼권이 분리되어 있는 것인데, 재판의 결과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당장 탄핵 운운하는 것은 너무 오만하게 구는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도 ‘항룡유회’의 지경까지는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

* 亢 : 높을 항. 뻣뻣할 항
* 龍 : 용 룡
* 有 : 있을 유
* 悔 : 뉘우칠 회



2.

** < 한국역사연구회 > **

[역사이야기] 항룡은 후회한다(亢龍有悔)
By 하원호 -2007년 12월 18일


항룡은 후회한다(亢龍有悔)

하원호(근대사 1분과)

새해가 되면 길가에서 돗자리를 깔고 앉은 토정비결 영감님들은 바빠진다. 물론 그 내용이야 “물가에 가지 마라”, “귀인이 찾아온다” 같은 뻔한 것들이지만 요즘같이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대형사고에 불안한 서민들이야 한치 앞을 못보는 세상살이에 덕담이라도 듣고 싶어 영감님들의 좌판 앞에 쭈구리고 앉게 된다. 점괘를 좀더 고급스럽게 보려는 식자층은 <<토정비결>>보다는 <<주역>>을 들친다. 일반인들은 <<주역>>을 점술책 정도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주역>>을 밑천으로 ‘동양철학의 대가’, ‘역학자’, ‘역술가’라고 자칭하면서 간판을 내걸고 손님을 받는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이나 역술이라고 풀어내는 것도 일반인들에게는 <<토정비결>>이나 다름없는 점괘로만 여겨질 뿐이다. 원래 신비주의는 복잡하고 애매할수록 더 그럴 듯한 법이고, 이 방면의 ‘대가’가 되는 방법 현란한 애매성의 확보가 전제이다. 그런 점에서 <<주역>>의 현란한 괘상은 좋은 밑천이 된다. 물론 동양철학의 애매함을 현대어로 조금 쉽게 풀어쓴 덕에 별다른 심각한 내용이 없으면서도 쓰는 책마다 잘 팔리고, 얼마 전에는 성행위를 원색적으로 표현하는 토크쇼도 철학의 이름으로 포장해 비난받는 전직이 철학교수인 현직 한의사도 있으니 반드시 애매한 것만이 상품이 되는 것도 아니긴 하다.

그런데 <<주역>>은 단순히 신비적이고 몽상적인 동양사상을 담고있는 점술책만은 아니다. <<주역>>은 그냥 신수풀이 정도로 여기는 <<토정비결>>류와는 달리 그 자체가 수천년 동양사회의 역사적 경험을 정리한 하나의 사유체계이다. <<주역>>에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얻을 수 있는 생활철학이나 행동양식이 그대로 녹아 있다. 유교의 경전 중에서도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연전에 최규하씨 덕분에 유명해진 ‘항룡’이란 말도 이 <<주역>>의 첫 장에 나오는 ‘항룡유회(亢龍有悔)’란 효사에서 잘라내서 써먹은 것이다.


<<주역>>의 64개 괘에는 각각 6개의 효가 있고 각 괘에 괘사가, 각 효에도 효사가 있다. 첫번째 괘인 건괘(乾卦)의 여섯 개 효 중 맨 위의 것이 ‘항룡유회’이다. 건괘는 태극기의 왼쪽 위에 있는 직선 셋의 도형을 두 개 포개놓은, 즉 한 일(一)자 여섯을 위에서 아래로 나열한 모양이다. <<주역>>에서의 건은 하늘을 말하고 순양(純陽)을 의미한다. 양(陽)은 맑고 따뜻하고 뻗어오르는 기운이다. 그래서 이 괘의 상징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용이다.

건괘의 여섯 개 효 중 맨 아래 있는 효를 초구(初九), 곧 초효(初爻)라고 하는데, 양기 중에서도 맨 아래 있는 것은 아직 땅 속에 묻혀 있어 얼음이 풀릴 시기를 기다려야 움직이게 된다. 그래서 초효는 용이 웅크리고 있는 형상이고 그 뜻인 효사(爻辭)는 잠룡물용(潛龍勿用)이다. 잠복해 있는 용은 용의 덕을 구비하고 있으면서도 아직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숨어 살도록 강요 당해도 불평을 하지않는다. 태평한 세상에서는 나라에 벼슬을 하여 도를 행하고 난이 일어난 세상에서는 물러나 도를 지켜 확고부동하니 이것이 잠복한 용이다.

다음 효는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 대인을 보는 것이 유리하다(見龍在田 利見大人)”라고 되어 있다. 나타난 용은 때와 장소를 얻은 용이다. 항상 언행을 삼가고 악을 멀리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선행을 해도 자랑하지 않고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해석된다. 셋째 효는 “군자는 종일 쉬지 않고 노력하고 저녁에 삼가면 위태로우나 허물은 없다(君子終日乾乾 夕 苦 无咎)”로 되어 있다. 덕을 기르고 사업을 보전하기 위해 군자는 바른 말과 참된 마음을 기른다는 뜻이다.

네째 효는 “연못에서 혹 뛰어놀기도 한다. 허물이 없을 것이다(或躍在淵 无咎)” 이다. 용이 마침내 날기 시작하려 할 때다. 나아가거나 물러가거나 해서 그 행동은 일정함이 없으나 악을 행하는 것은 아니고 제멋대로 방자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항상 때와 장소에 맞는 행동을 하기 때문에 허물을 면할 수 있다고 한다.

다섯 째 효는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는 것이 이롭다 (飛龍在天 利見大人)”로 되어 있다. 날아 오르는 용이 하늘에 도달하니 건괘의 극치이다. 성인이 나타나 만인의 찬양을 받는다고 해석된다. 점복에서 이 괘가 나오면 마음대로 활동해도 좋다고 한다.

맨 위에 있는 마지막 상구(上九)의 효사가 “높이 오른 용이니 후회가 있을 것이다(亢龍有悔)”이다. 끝까지 날아 오른 용은 내려올 일밖에 남아 있지 않다. 높은 자리에 있을지라도 민심을 잃고, 현인을 낮은 지위에 두기 때문에 그 보좌를 받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무엇을 해도 뉘우칠 일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최규하씨가 스스로 자신을 ‘항룡’으로 생각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비서관은 최씨를 ‘항룡’에 비유했고 그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졌다. ‘잠룡’도 못되는 우리같은 서민이야 ‘항룡’이란 말이 도통 낮설기만 하고 한때 유행했던 ‘토사구팽’같은 유식하고 지위 높으신 분들이 주고 받는 선문선답의 한 구절처럼만 들려 ‘항룡’ 근처도 못가보고 ‘팽’도 당할 일 없는 처지로서는 한편으로는 남의 일같고, 한편으로는 왠지 몰라도 속이 메스꺼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최씨 쪽이 <<주역>>을 공부해서 ‘항룡’을 쓸만큼 유식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비서관의 말처럼 ‘항룡’이라는 말을 앞 뒤를 잘라먹고 쓰여진 예는 역사 속에서도 찾기 어렵다. ‘항룡’의 뒤에는 반드시 ‘후회한다(有悔)’라는 말이 따라 붙는다. 그 말이 빠졌다고 하더라도 ‘항룡’에는 이미 그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역사서에서 ‘항룡’이란 말이 사용된 용례는 중국 사서 <<한서(漢書)>> 왕망전(王莽傳)의 찬(贊)에 보이는 정도이다. 여기에는 “찬(贊)하기를… 항룡은 기운이 끊겨 비명에 죽을 운명이다(亢龍絶氣 非命之運)”라고 되어 있다. 왕망은 항우와 싸워 이긴 유방이 세운 전한(前漢)을 무너뜨리고 왕이 된 인물이다. 외척으로서 권세를 잡고 당시 한나라 왕이던 평제(平帝)를 죽이고 그 아들을 가황제(假皇帝)로 삼아 섭정을 하다가 마침내 왕위를 뺏아 왕이 되어 국호를 신(新)으로 했다. 그러다가 그의 정권에 반대해 일어난 후한의 광무제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참혹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따라서 왕망에게 ‘항룡’이란 말을 붙인 것은 너무나 적절하다. 황제라는 높은 자리에 올랐지만 후회할 비명의 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불길한 운명을 담고 있는 ‘항룡’이란 말을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쓴다면 악담 중에 악담일 수밖에 없었고, 더구나 봉건왕조가 아닌 요즘같은 세상에서야 흔히 들을 수 없는 생소한 용어인 것은 당연하다.

최규하씨의 비서관이 이같은 역사적 배경을 알고 썼을 정도로 고전에 밝다고 생각되지않고 왕조시대의 왕의 자리에 민주사회의 대통령을 갖다 붙이는 전근대적 발상이지만, 그 결과는 역사 속의 최씨의 운명을 <<주역>>의 점괘로 짚은 것이나 다름없다. 바로 잡힌 역사를 보려는 국민의 갈증을 풀어주지 않고 돌아서 버린 그에게 내려질 역사적 심판은 바로 왕망과 같은 ‘비명지운(非命之運)’이다.

최씨만이 아니라 전직이 소위 ‘항룡’이었던 전씨나 노씨는 이미 ‘유회’하는 중이고, 똑같은 ‘항룡’짓을 하다가 추락하기 시작한 와이 에스도 내년 신수를 뽑으면 틀림없이 같은 괘사가 기다릴 것이다. 잠룡이 아니라 이무기도 안될 것 같은 요즘의 잔챙이 자칭 용들도 이 주역의 괘사에서 교훈을 받아야 할 것이다.



3.

전직 대통령과 亢龍有悔(항룡유회)


< 법률신문, 이기창 변호사(서울), 2009-06-15 >



노무현 전직 대통령의 자살사건이 몰고 오는 파장이 심상치 않다. 대통령책임제 하에서의 대통령의 직위는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원수의 직무를 수행하는 귀한 자리인 동시에 내각책임제 하에서와는 달리 국가가 처한 상황에 대처하여 어떠한 국난도 슬기롭게 헤쳐나아가게 국민을 이끌어 가야하는 등 국정의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국가통수권자의 자리로서 그 직책을 맡은 분들은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로 결단력 있는 분들일 것이다.

재임 중에 있었던 수뢰 사건의 피의자로서 조사받는 심리적 고통이 아무리 컸다 하더라도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가 쉽게 자살에 까지 이를 수 있을까?

도대체 전직 대통령이라는 위치가 어떻기에 국민의 생존권을 보호해야 할 위치에 있던 분이 그렇게 柔弱(유약)한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전직 대통령의 지위 내지 위치에 대해서는 최규하 전 대통령이 1995년 ‘전직 대통령의 지위 내지 위치는 亢龍(항룡)의 지위 내지 위치와 같아 검찰의 요청에 응할 수 없는 것이라는 隱喩的인 표현’을 사용한 이외에는 달리 이야기 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최 전 대통령의 말씀은 전두환 전직 대통령 등에 대한 내란죄 등 사건에 검찰이 요청한 출석증언요구와 관련된 對 國民談話 발표 시, 이를 대독한 후에 대독자가 발언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위와 같은 발언내용이 보도되자 날카로운 필명을 날리던 故 李圭泰씨는 대통령이라는 최고의 직위에 올랐었기 때문에 검찰요구에 불응하는 것으로 오해하여 土龍(지렁이)으로 떨어지라는 辛辣(신랄)한 비판의 글을 조선일보에 올린 바 있어 전직 대통령을 국가원수라는 귀한 자리에 올랐었던 사람이라고만 해석한 것 같다.

항룡이라는 말이 국민에게 출석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는 대 국민담화 후에 나온 것으로 보아 그 말은 국민이 아닌 당국자 내지 집권자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周易 乾卦에 보면 ‘上九曰 亢龍有悔 何爲也 子曰 貴而 无(무)位 高而 无民 賢人 在下位而 无輔 是以動而 有悔也’라는 글이 있다.

이 중에 貴而 无(무)位 高而 无民 賢人 在下位而 无輔라는 글을 항룡 즉, 전직인 상왕(전직 대통령)은 별 볼일 없는 늙은이라고 비유할 수 있고 是以動而 有悔也라는 글에서는 飛龍(帝王)이 하는 정치에 간여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비유적으로 추론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를 합쳐 보면 ‘나는 일선에서 물러난 힘없는 사람으로 전직 대통령을 전직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전의 일을 가지고 재판에 회부하려고 하는 것은 정치행위의 일종이고 증언한다는 것 자체도 정치에 간여하는 것으로 되니 나는 그러한 정치 행위에 가담할 수 없소’라는 표현을 직접 하지 않고 은유적으로 한 것이다.

최 전 대통령이 항룡이라는 말을 위와 같은 뜻의 의사표시만을 위해 한 것이 아니고 亢之爲言也 知進而 不知退 知得而 不知喪 知存而 不知亡 其唯聖人乎 知進退存亡而不失其正者 其唯聖人乎라는 문구 즉, 聖君(훌륭한 대통령)만이 進退 등의 때를 놓치지 않는다는 의미의 亢이라는 말의 뜻에 비추어 정치를 함에 있어 밀고 나갈 때와 그만 둘 때 등을 잘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忠言의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역사는 迂餘曲折(우여곡절)이 있을 수 있고 우여곡절 있는 역사를 참고하여 좋은 정치를 함은 모르되, 힘으로 그 우여곡절의 과거사를 되돌려 바르게 펼 수는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은유적인 방법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유언에서 ‘사람은 자연의 일부일 뿐’이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보아 인간의 矮小(왜소)함과 生死一如(삶과 죽음은 같다)라는 불가의 말을 體得(체득)한 것 같은 감이 들어 亢龍有悔에서의 항룡 다시 말해 힘없는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虛無感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

다른 전직 대통령의 한분이 자기라도 그러한 처지에 몰렸다면 그러한 처신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도 위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이해될 것 같다.

항룡 즉, 전직 대통령의 지위가 할 일 없는 원로의 지위임을 알고 어떠한 정치적 행위에도 가담하지 않은 전형이 최 전 대통령이었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이 직위에서 물러나 전직이 되면 항룡의 지위 내지 위치로 된다는 自覺으로 자신의 처신은 물론 주변단속을 하였다면 이번 사태와 같은 불행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亢龍有悔의 뜻을 되씹어 보기만 했어도 자신의 말이 먹히지 않는다는 無力感과 孤獨感에서 온 자살이라는 극단의 행동은 없었을 것 아니냐는 안타까운 심정이다.

항룡유회의 심정으로 남긴 남을 ‘원망 말라’는 유언을 고인의 지지자들도 받아드리는 것 즉, 전직 대통령은 힘없는 원로로서 남아 있는 것이 正道로서 故人의 죽음을 어떠한 정치적 수단으로도 이용하지 않는 것이 우리 모두의 화합을 위해 국민장으로 보내드린 국민의 뜻에 부합하는 길이 될 것이라 믿으면서 노 전 대통령의 冥福을 빈다.

※ 易經의 乾卦 五爻(오효)의 飛龍이 帝王을, 六爻의 亢龍은 현역에서 은퇴한 上王을 각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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