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어쩌다 ‘매운맛 종주국’이 됐나?
6·25와 근대화 등 거치면서 쌓인 스트레스를 매운맛으로 풀어

 

 

< 월간조선,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 2024년 2월호 >



⊙ K-컬처 열풍 속에 불닭볶음면 등 매운 음식, 해외에서 인기
⊙ 배추 1포기당 평균 고추 사용량, 5.75g(1930년대) → 13.8g(1950년대) → 53.37g(1980년대) → 71.26g(2010년대)
⊙ 한국전쟁 후 신당동 떡볶이, 1980년대 청양고추, 1990년대 후반 불닭 등장… 저성장-청년실업 고착된 2010년대 이후엔 마라탕 수입
⊙ 외국의 매운맛 열풍… K-컬처, SNS 외에 스트레스 탓 커

이문원
《뉴시스이코노미》 편집장, 《미디어워치》 편집장, 국회 한류연구회 자문위원, KBS 시청자위원, KBS2 TV 〈연예가중계〉 자문위원, 제35회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역임 / 저서 《언론의 저주를 깨다》(공저), 《기업가정신》(공저), 《억지와 위선》(공저) 등

 


  연말연시면 언론미디어에서는 다양한 분야에 걸친 새해 전망을 쏟아낸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이전까진 잘 언급되지 않던 부문이 새롭게 새해 전망 단골처럼 등장하고 있다. 한국의 농식품 업계 현황과 전망이다. 한국 음식의 글로벌화를 통해 이른바 ‘K-푸드 열풍’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다 보니 이 분야 사정 역시 K-팝이나 K-드라마 등 여러 대중문화 분야들과 함께 한류(韓流)라는 틀 안에서 K-컬처 전망으로서 다뤄지기 시작한 것이다.
 
  확실히 ‘K-푸드 열풍’은 대단한 현상이 맞다. 지난해 12월 30일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12월 23일 기준 농식품 수출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0% 증가한 90억1000만 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경신(更新)했다. 10년 전인 2013년만 하더라도 57억2500만 달러에 머물렀던 수치다. 특히 라면과 음료 등 가공식품 분야에서 75억 달러 수출을 기록하며 4.6% 증가 추세를 보였다. 라면은 9억3830만 달러를 기록하며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4.7% 폭증(暴增)했고, 쌀 가공식품 19.3%, 음료 11.6%, 과자류 6.0% 순으로 성장세를 기록했다. 신선식품 중에선 김치가 가장 수출 비중이 높다. 1억5070만 달러를 기록해 10.3% 늘었다.
 
  국가 단위로 보면 1위 수출국은 역시 일본이다. 모든 한류의 텃밭이자, 사실상 한국 음식이 가장 먼저 주류(主流) 문화로 정착한 국가다. 14억2570만 달러를 기록했다. 다음은 중국으로 13억8100만 달러를 기록하며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8.9% 증가했다. 그런데 이다음이 미국이다. 12억9590만 달러를 기록했다. 8.7%가 늘어난 수치다. K-팝 등 각종 대중문화 상품들도 지난 수년간 미국과 유럽에서의 수요가 폭증하며 전반적 상승세를 이어가는 상황인데, 농식품 수출도 이와 같은 궤를 그리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결국 이 부문 또한 대중문화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K-컬처 영역인 것이다.
 
 
  라면 수출, 1조원 넘어
 
  이 중 가장 눈길이 가는 건 역시 지난해 처음 수출 1조원을 넘어선 라면 품목이다. 라면 업체들이 해외 현지 공장에서 생산해 판매하는 물량까지 고려하면 2조원을 웃돌 것으로 추정된다. 일단 성장세가 가장 높은데다 미국이나 유럽 등 신(新)시장으로의 진출도 가장 긍정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지난해 1~10월 기준 중국, 미국, 일본, 네덜란드 순으로 수출액이 높아 특정 지역에 편중되지 않는 확장성을 보여줬다. 전 세계 200여 개국 중 3분의 2 가까운 128개국으로 수출되고 있다.
 
  그리고 대중문화 분야 글로벌화와 가장 밀접하게 연동되고 있다. 《아주경제》 2023년 12월 30일 자 기사 〈[K-애그리 열풍] 농산물·식품·기술 전방위 각광… 새 수출 첨병 부상〉은 “2020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 〈기생충〉에서는 농심의 짜파게티와 너구리를 섞은 ‘짜파구리’가 등장하기도 했다”며 “BTS와 블랙핑크 등 K-팝 스타들이 SNS나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 라면을 먹는 모습을 보이며 팬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고 분석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이 같은 라면의 수출 1위 업체는 의외로 삼양식품이라는 점이다. 해외에 생산 공장이 없다 보니 물량 전체가 수출로 잡히는 이유도 있지만, 그 성장세를 보면 이럴 만도 하다. 수출액 측면에서 지난해 3분기 기준으로 전년 대비 30% 성장이라는 폭증을 기록했다. 삼양식품의 전체 매출 중 67.8%가 해외 매출일 정도다. 그런데 이 중 가장 효자상품이 한때 ‘한국에서 가장 매운 라면’으로 꼽혔고 지금도 ‘매운 라면’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불닭볶음면이다. 불닭볶음면을 포함한 불닭 브랜드는 해외 100여 개국으로 수출되며 80%가 넘는 매출을 해외에서 올리는 것으로 집계됐다.
 
 
  ‘매운맛 열풍’에 빠진 세계
 
  ‘매운맛 열풍’은 불닭 브랜드 등 ‘매운 라면’에만 그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신선식품 중 가장 수출 비중이 높은 품목도 해외 입장에선 ‘맵다’는 인상의 김치이고, 전년 대비 10% 넘는 성장세를 보이며 시장 확대를 실감하게 해준다. 또한 지난해 3월 미국 NBC 뉴스에서는 ‘떡볶이의 점령: 미국이 탐닉하는 다음 메뉴는 한국의 추억의 음식’이라는 꼭지를 내보냈고, 일본에서도 치즈닭갈비를 이을 1020세대 인기 한식 메뉴로 매운 주꾸미볶음을 꼽으며 연일 늘어서는 식당 앞 장사진(長蛇陣)을 보도했다. 세계가 한국의 매운맛에 열광하는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왜일까. 상황을 설명한 《조선일보》 2023년 11월 3일 자 기사 〈스무디·사탕까지 매운맛 열풍… ‘맵부심’에 빠진 세계〉를 보자.
 
  〈전 세계가 ‘매운맛앓이’ 중이다. 지난달 말 미국 최대 프리미엄 식품 체인점이자 아마존의 자회사인 홀푸드마켓은 ‘2024년 미국이 주목할 식품 트렌드 10’을 발표하며 내년 세계를 휩쓸 트렌드 중 하나로 ‘별별 매운맛 열풍(Complex Heat)’을 꼽았다. 홀푸드마켓 리서치팀은 “매운맛은 더 확산하고 진화할 것”이라면서 “매운 스무디와 매운 콤부차, 매운 칵테일과 고추 맛 사탕이 앞으로 더 많이 팔려나갈 것”이라고 했다. 글로벌 식품 기업 네슬레도 2024년 전망 리포트에서 “매운맛이 키워드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중략) 매운맛 열풍은 소셜미디어가 키웠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몇 년 사이 틱톡·유튜브 등에서 매운 음식 먹기에 도전하는 소위 ‘매운맛 챌린지(Spicy challenges)’가 유행처럼 번져 나가면서 매운맛 인기도 커졌다.〉
 
  결국 그동안은 매운맛이 자신들 식문화에 없기에 선입견을 갖고 꺼려왔지만, 틱톡이나 유튜브 쇼츠 등 숏폼 플랫폼에서의 인기 영향으로 호기심이 생겨 맛보고 난 뒤 매운맛 특유의 통각(痛覺)에 길들어 관심과 인기가 부풀어 올랐다는 얘기다. 여기에 미국 한정으로 덧붙여보자면, 애초 자신들 식문화에 강렬한 매운맛이 자리 잡고 있던 남미 히스패닉 인구가 미국 내 19%(6250만 명, 2021년 기준)까지 치솟아 흑인 인구(12%)를 압도하면서 매운맛에 대한 미국 내 수요도 그만큼 올라갔다고 볼 수 있다.
 
 
  ‘매운맛 종주국’ 한국
 
  그중에서도 특히 ‘한국의 매운맛’이 유난히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는, K-팝 등 K-컬처 전반의 영향도 크겠지만, 한국의 ‘매운맛 종주국(宗主國)’ 입지 이유도 있겠다. 실제로 남미나 아프리카 대륙, 동남아 등 한국보다 매운 고추 품종을 사용하는 이유로 더 매운 음식들이 존재하는 지역은 많지만, 한국만큼 여러 다양한 음식을 죄다 ‘빨갛게’ 만드는 나라도 또 없다는 것이다. 찌개 등 탕 요리부터 각종 나물 반찬, 돼지나 닭 등 육(肉)고기와 해산물들, 심지어 떡이나 국수 같은 밀가루 음식들에 이르기까지 온통 고춧가루, 고추장을 ‘기본’인 양 버무려놓으니 과연 ‘매운맛 종주국’이라는 말이 안 나올 수가 없다는 것. 그리고 그 다양한 ‘빨간 음식’의 가짓수만큼이나 매운맛이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르는 세계 요식업계에서의 존재감도 나날이 커져가고 있다.
 
  또한 그 영향은 다른 분야로도 번져간다. 언급했듯, 특히 해외 시장 진출에 있어 서로 영향을 크게 주고받는 대중문화계부터 이 같은 흐름을 재빨리 반영하고 있다. 《시사저널》 2023년 6월 30일 자 기사 〈에이티즈, 그리고 K-팝의 이유 있는 청양고추맛〉을 보자.
 
  〈최근 발매된 보이그룹 에이티즈(Ateez)의 신곡 ‘Bouncy’에는 흥미롭게도 ‘K-HOT CHILLI PEPPERS’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중략) 맥락을 모른다면 뜬금없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룹이 앨범의 타이틀곡을 통해 내세우고자 하는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태도를 한국의 매운맛, 그러니까 ‘청양고추’의 맛에 빗대 표현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수긍이 될 법도 하다. 물론 K-팝에서 강렬한 사운드와 태도를 맛에 비유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투애니원 출신 CL의 ‘Spicy’라는 곡이 있었고, NCT Dream의 히트곡 ‘맛’의 부제 역시 ‘Hot Sauce’였다. 불과 한 달 차이로 걸그룹 에스파(aespa)는 신곡 ‘Spicy’를 발표하기도 했다.〉
 
  K-팝계뿐만이 아니다. 유튜브 등 동영상 플랫폼 콘텐츠도 ‘매운맛 천지’인 건 마찬가지다. 흔히 광고계에는 ‘3B 법칙’이 있다고들 한다. 아기(Baby), 미녀(Beauty), 동물(Beast)이 나오는 광고는 보편적으로 많은 이가 호감을 가져 광고 효과도 그만큼 높아진다는 법칙이다. 그런데 근래 유튜브에도 ‘3B 법칙’이 있다는 우스개가 돈다. 알파벳 B에 해당하는 한글 자음 ‘ㅂ’으로 시작되는 셋, 방탄소년단, 반일(反日), 그리고 불닭볶음면이 소재로 등장하는 영상은 조회 수가 폭등(暴騰)한다는 것이다. 앞선 《조선일보》 기사에서 전 세계적 매운맛 열풍이 각종 동영상 플랫폼의 매운 음식 챌린지로부터 시작됐다고 분석한 내용과 같다. 그렇게 한국은 전 방위적 문화 흐름에서 ‘매운맛’ 코드로 점철(點綴)되는 시점을 맞이하고 있다.
 
 
  한국인이 매운맛 즐기기 시작한 건 얼마 안 돼
 
  여기서 좀 더 생각해볼 부분이 있다. 한국은 어쩌다 ‘매운맛 종주국’이 된 걸까. 한국인들은 대체 언제부터 매운맛에 이토록 경도(傾倒)돼 음식들을 죄다 빨간색으로 만들어놓는 걸까 말이다. 물론 역사로 들어가 보면 그 원재료인 고추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부터 전해져 18세기 중엽부터 조선 사회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고추=매운맛’은 한국 대중 사이에서 그렇게 오래, 쉽게 퍼진 것이 아니다. 엄밀히 매운맛을 대중적으로 즐기기 시작한 건 불과 몇십 년 전부터라는 자료들이 많다.
 
  예컨대 2015년 한국식생활문화학회지에 실린 서모란, 정희선의 논문 〈조리서와 신문 잡지 기사에 나타난 1930~2010년대 배추김치 연대별 고추 사용량 변화에 대한 고찰〉을 들 수 있다. 제목 그대로 1937년부터 2014년까지 총 78종의 조리서 및 신문, 잡지 기사 등에 실린 배추김치 조리법에서 연대별 배추 1포기당 평균 고추 사용량을 살펴본 자료다.
 
  ▲ 1930년대 5.75g
  ▲ 1940년대 8.83g
  ▲ 1950년대 13.8g
  ▲ 1960년대 20.25g
  ▲ 1970년대 28.42g
  ▲ 1980년대 53.37g
  ▲ 1990년대 54.45g
  ▲ 2000년대 60.03g
  ▲ 2010년대 71.26g
 
  보다시피 2010년대의 고추 사용량은 1930년대의 12배 이상이다. 지금과 비교해 보면 1930~40년대 김치는 매운맛을 악센트 정도로만 살짝 얹었을 뿐 배추를 숙성시켜 절인다는 본질에만 충실했다는 얘기다. 그러다 1950년대 즈음부터 그 본질이 서서히 ‘매운 음식’으로 바뀌어간다.
 
  당연히 김치 맛만 달라진 것도 아니다. 1970년대부터 측정한 농림축산식품부의 한국인 1인당 고추 연간 소비량에서도 상황은 같은 맥락으로 흘러간다. 1970년에는 1.2kg이던 것이 1975년에 2.7kg으로 배 이상 뛰고, 2011년에 이르러선 5.8kg까지 간다. 불과 40년 만에 한국 사람 한 명당 먹는 고추 양이 5배 가까이 증가한 것이다.
 
  반면 김치 자체는 소비량이 계속 줄어드는 추세다. 1970년대에 1인당 하루 소비량이 300~400g이었다가 2000년대 들어 103.7g까지 내려간다. 그런데도 고추 소비량이 폭증하고 있다는 건 그사이 고추를 대량으로 사용하는 매운 음식들이 새로 개발돼 시장에 정착했고 김치 역시 이에 발맞춰 계속 더 매워졌기 때문에 김치 소비 자체가 줄어들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이에 대한 지배적인 해석은 1970년대 고추 품종 개량으로 고추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국내 고추 품종은 이전까지 지방재래종에서 1970년대 후반 일대잡종 품종이 개발되면서 수량성이 대폭 개량된 바 있다. 중요한 건, 김치에 쓰이는 고추 사용량 폭증은 1970년대 후반 이전, 1950~70년대 중반에도 이미 이뤄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수량성 개량은 이런 흐름에 날개를 달아준 정도라고 볼 수 있다. 더 주목할 만한 부분은, 베트남 고추 등 국산 고추보다 매운 수입산 고추의 시장점유율이 2000년 13%에서 2011년에는 51%로 껑충 뛴다는 점이다. 고추도 더 많이 사용하지만, 애초에 사용하는 고추 자체 또한 더 매워졌다는 뜻이다.
 
 
  음식이 매워지기 시작한 건 ‘스트레스’ 때문
 
  그럼 대략 1950년대 즈음부터 한국 음식이 점점 매워지기 시작한 이유는 왜일까. 많은 연구가 제시하는 원인은 한국인의 ‘스트레스’ 차원이다. 그것도 가히 생존 차원의 스트레스가 매운맛에 대한 집착을 불렀다는 것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안정윤 학예연구원의 2009년 논문 〈고추, 그 매운맛에 대한 역사민속학적 시론-한국 사회는 왜 고추의 매운맛에 열광하는가〉도 이런 결론을 제시하는 연구다. 안 연구원의 당시 발표를 담은 《동아일보》 2009년 10월 28일 자 기사 〈“6·25전쟁-경제난 스트레스가 한국을 매운맛에 길들였다”〉를 보자.
 
  〈안 연구원은 고추의 매운맛이 더욱 확산된 시기를 1950년대로 보았다. 그는 “6·25전쟁, 빈곤과 기아의 스트레스가 매운맛을 찾게 했다”고 추론한다. 1953년 고추장을 사용한 신당동 떡볶이가 나온 것도 이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안 연구원은 “고추의 매운맛은 중독 증세와 엔도르핀 효과에 힘입어 상업성을 띠었다”며 “이에 따라 1960년대 무교동 낙지볶음, 경기 연천의 망향비빔국수, 대구의 매운 갈비찜 등이 등장했다”고 설명했다. 안 연구원은 “최근 고추의 매운맛을 즐기는 계층은 20, 30대 젊은층”이라며 “취업난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실제 업계의 반응도 이 같은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MBC 뉴스〉 2016년 6월 20일 자 보도 〈[앵커의 눈] 한국인은 매운맛? 입맛 살리려다 몸에 ‘독’ 될 수도〉에서 MBC와 인터뷰한 김종옥 BHC 본부장은 “경기가 안 좋을 때 매운맛을 많이 찾는다는 속설이 있지만 실제로 매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게 사실”이라고 밝힌 바 있다. 원리도 단순하다. 매운 음식을 먹으면 이에 따른 통각을 줄여주는 엔도르핀이 자동적으로 나오고, 이 엔도르핀은 통증을 억제하는 효과가 마약으로 분류되는 모르핀보다 약 100배나 강하다는 것이다. 즉 매운 음식을 통해 통각을 고의로 유발하면 엔도르핀이 분비되면서 일시적으로 좋은 기분을 만끽하게 해준다는 것. 수많은 스트레스 거리로부터 일시적으로나마 도피(逃避)하려 한국인들은 사실상 대부분의 음식을 빨갛게 만들어버렸다는 얘기다.
 
 
  고도성장기의 흔적들
 
  이것도 엄밀히 말하자면, 애초 6·25전쟁이라는 민족상잔(民族相殘)의 비극으로부터 시작된 일이긴 하지만, 이후 1960~80년대 고도성장, 압축성장이 낳은 아픔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갑자기 농경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진화, 고향의 따스하고 비(非)타산적인 공동 사회에서 이촌향도(離村向都) 열풍을 따라 혈혈단신(孑孑單身) 대도시로 입성하면서 낯선 이익 사회에 빠르게 적응하려다 보니 다들 극심한 고립감과 불안감에 시달리게 됐다는 것이다. 그만큼 삶의 스트레스도 가중되고 이를 매운 음식들을 통해 잠시나마 잊고자 고추 소비량도 늘고 김치도 급격히 더 매워지기 시작했다는 전개다.
 
  생각해보면 1960~80년대 고도성장기 동안 형성된 한국인의 사회·문화적 습성 또는 특성들은 단순히 매운맛 선호에만 그치지 않는다. 예컨대, ‘이모’ ‘삼촌’ 등 호칭이 친인척을 넘어 다양한 이들, 심지어 식당 점원 등 낯선 이들에까지 확장돼 쓰인다는 점도 짚어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고향을 떠나 기댈 사람 하나 없는 대도시에서 불안과 고립에 직면하다 보니 이익관계에 불과한 직장 동료, 심지어 아예 기능적 관계인 식당 직원들에게까지도 친인척에 부여하던 호칭들을 써가며 공동 사회 특유의 안온함과 안정감을 잠시나마 맛보려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서로 일종의 유사(類似) 공동 사회 분위기를 연출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많다. 현재 해외에서 ‘한국인의 특성’으로 바라보는 대부분의 현대 한국인 멘털리티(mentality)들도 따지고 보면 1960~80년대에 고도성장, 압축성장의 단맛과 쓴맛을 함께 맛보며 형성됐다고 볼 수 있다. 정확히는 번영(繁榮)이라는 단맛을 맛보기 위해 정신적 공황(恐慌)과 부적응의 쓴맛을 감내하면서 형성된 것들이다. 앞선 매운맛 선호나 친인척 호칭의 확대된 용례부터 시작해 한국인 자체를 상징하는 ‘빨리빨리’ 문화, 심지어 폭음(暴飮) 문화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다. 현대 한국인은 ‘이때’ 완성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 영향과 스테레오 타입은 지금도 계속되는 중이다.
 
 
  극단적 매운맛 열풍은 IMF 사태의 산물
 
  한때 ‘매운 라면’의 대명사였던 신라면은 이제 더 이상 매운 라면이 아니다.


  다시 ‘매운맛’으로 돌아가 보자. 고도성장기 이후의 매운맛에 대해서다. 앞선 자료들에서 알 수 있듯, 한국 음식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매워지고 있다. 세상살이 자체가 고도성장기보다 더 힘들어져서라고 보긴 어렵다. 일단 삶의 스트레스를 일시적으로나마 매운맛으로 해소한다는 문화적 방법론은 계속 이어져 내려오는 상황에서, 한 번 어느 정도 매운맛이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나면 이후 또 다른 근심거리가 닥쳤을 땐 그보다 더 매운맛을 요구하게 되기에 점점 더 매워진다. 일종의 마약(痲藥) 중독과도 같은 경로다.
 
  예컨대, 지금처럼 외래종 고추를 사용하는 극단적으로 매운 음식 열풍은 엄밀히 1997년 IMF 외환(外換)위기의 산물이라고 봐야 한다. 1990년대 말엽 등장해 엄청난 인기를 모은 신종(新種) 음식이 바로 불닭볶음면이 모티브를 가져온 불닭이다. 매운 소스로 버무린 불닭이 열풍을 일으키며 서울 등 대도시 번화가를 휩쓸자 곧바로 매운 짬뽕, 엽기떡볶이 등이 뒤따랐고, 역시 매운 소스로 버무린 닭발 열풍도 일어났다. 그러다 2010년대 저성장(低成長)과 함께 청년 취업 불황이 찾아오자 ‘헬조선’이라는 유행어와 함께 찾아온 것이 한국 음식도 아닌 중국발(發) 마라탕 열풍이다. 점점 매워지다 못해 이제는 해외 음식까지 찾는다.
 
  시판되는 라면으로 보면 상황이 더 잘 와닿는다. 1986년 신라면이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다른 라면들보다 맵다고 매울 신(辛)자를 붙였었다. 매운맛을 측정하는 데 사용하는 스코빌지수로 당시 신라면은 지수 1300이었으니 안성탕면(570)이나 삼양라면(950)보다는 더 매운 게 맞다. 그런데 이제 신라면은 ‘안 매운 라면’의 대명사다. 라면업계 매운맛 열풍을 가져온 불닭볶음면은 스코빌지수 3210이고, 여기서도 만족 못 해 지수 6504짜리 핵불닭볶음면을 추가로 출시했다. 지금은 이 정도도 우습다. 이후 출시된 불마왕라면은 스코빌지수 1만4444, 염라대왕라면은 2만1000이다. 흐름이 이러니 신라면조차 계속 맵기를 더해 지금 출시되는 것은 스코빌지수 3400에 맞춰져 있다. 그러다 추가로 ‘더 매운’ 신라면 더 레드를 내놓았다. 스코빌지수 7500이다. 중·노년층에서 “요즘 한국 음식은 한국 것이 아닌 것 같다”는 푸념이 여기저기서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매운맛’ 정체성은 1980년대 중반 이후 형성
 
  사실 1980년대만 해도 한국 음식은 딱히 맵다는 인상은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한국의 매운맛’ 자체를 상징하는 청양고추조차 사실 1983년 유일웅 박사팀이 제주산 고추와 태국산 고추를 잡종 교배해 탄생시킨 품종이다. 이후 상용화(常用化)까지는 또 한참이 걸렸다.
 
  한편 ‘매운맛’이 중요한 정체성(正體性) 요소로서 한국인들 스스로에 각인(刻印)되기 시작한 것도 1980년대 중후반부터라는 견해가 많다. 대략 신라면이 처음 등장하던 때 즈음,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국민들 의욕을 북돋기 위해 “작은 고추가 맵다” “한국인의 매운맛을 세계에 보여주자” 등의 구호가 각종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면서 비로소 ‘매운맛을 즐기는 한국인’ 정체성이 자부심 요소로서 대중적으로 퍼져나갔다는 것이다.
 
  한국 유튜브 시장의 중요 요소로 자리 잡았다는 ‘매운맛 챌린지’도 엄밀히 이 같은 정체성이 자부심 요소로서 대물림되고 있는 현장이다.
 
  그런데 이런 자부심도 자극성을 추구하는 소셜미디어 속성에 따라 상당 부분 변태(變態) 왜곡(歪曲)됐다. 상당수가 매운맛에 익숙지 않은 외국인들에게 불닭볶음면 등 매운 한국 음식을 먹이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다분히 가학적(加虐的)인 자부심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앞선 유튜브 성공의 ‘3B 법칙’ 중 긍정적인 것은 방탄소년단밖에 없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해외에서 매운맛에 열광하는 이유는?
 
  흥미로운 건, 이처럼 한국인의 정체성 요소로 자리 잡았으면서도 동시에 이제는 한국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로 매워진 한국 음식에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열광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점이다. 단순히 K-컬처에 대한 흥미, 틱톡 등 숏폼 플랫폼 인기를 이유로 매운맛을 좋아하게 됐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어쩌면 그들도 한국인과 같은 경로, 즉 극심한 스트레스를 일시적으로나마 잊는 방도로써 매운맛의 효용을 K-컬처든 숏폼 플랫폼이든 신종 계기를 만나 알아버린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2010년대 소셜미디어 열풍 이후 세계 곳곳에서 비교심리와 열등감으로 이전보다 훨씬 심한 우울감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이들이 급증했다는 외신 보도들을 보면 이런 추측이 아예 엉뚱한 얘기는 아닐 듯싶다.
 
  당연한 얘기지만, 과도한 매운맛 집착은 건강에 좋지 않다. 소화기관이나 심장 등의 육체적 문제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그렇다. 매운맛은 일시적으로만 엔도르핀의 영향으로 기분을 좋게 해줄 뿐 궁극적으로는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를 촉진해 오히려 스트레스 지수를 높인다. 피로도도 배로 올라간다. 잠시 잊게 해주고 그 대가는 배로 돌아오는 식이다.
 
  그래도 매운맛 유행은 K-팝과 K-드라마, K-무비, 그리고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쉽게 끝날 기세가 아니다. 오히려 한층 심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결과적으로 한층 더 심각해질 대중의 스트레스와 정신적 공황이 과연 어떤 미래를 가져오게 될지 사뭇 불안해진다. 2024년 새해의 한국 농식품 호황(好況) 전망과 함께 대중의 정신적 불황(不況)도 함께 점쳐지는 아이러니한 시점이다.⊙

"노인은 꽃사진 찍길 좋아한다. 이미 꽃이 아니므로"

 

 

< 매일경제, 허연 기자,  2023-10-20 >

 

 

 

 


나이 든 사람들은 꽃 사진 찍는 걸 좋아한다. 꽃은 생명력의 정점이다. 즉 꽃은 '청춘'이다. 이제 청춘을 지나쳐버린 사람들은 꽃을 찍는 것으로 생명력의 정점이 지나갔음을 아쉬워한다.

청춘은 공유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청춘은 지나가 버리기 때문에 결코 어떤 세대도 공유할 수 없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는 승계밖에 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다.

소설 '좁은 문'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는 청춘을 승계하는 매뉴얼북 같은 책을 두 권 남겼다. '지상의 양식'과 '새로운 양식'이 그것이다. '지상의 양식'과 '새로운 양식'은 소설이라고 보기에는 좀 모호한 구성을 지닌 특이한 저작물이다.

'지상의 양식'과 '새로운 양식'은 서로 38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쓰였지만 핵심 메시지는 같다. 현실이나 규범에 굴복하지 말고 꿈과 의지대로 청춘을 누리라는 게 두 책의 방향성이다.

"동지여, 사람들이 그대에게 제안하는 바대로 삶을 받아들이지 말라. 삶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항상 굳게 믿어라. 자기의 현재를 살아라. 삶에서 거의 대부분의 고통은 신의 책임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그대가 깨닫기 시작하는 날부터 그대는 더 이상 고통의 편에 들지 않을 것이다."('지상의 양식' 중)

지드가 이처럼 청춘을 마음껏 누리기를 강력하게 주장한 것은 그의 성장사를 들여다보면 단서가 보인다. 지드는 아버지가 어린 시절 사망하면서 외가에서 자라게 된다. 지드의 외가는 프랑스에서는 드문 개신교 집안, 그것도 엄격하기로 유명한 칼뱅파 청교도였다. 칼뱅파 청교도는 적극적인 금욕을 통한 탈세속화를 중요시한다. 일상생활에서도 시시각각 신앙을 증명해야 하고 늘 욕망을 자제하는 것이 칼뱅파의 도리였다. 섬세하고 호기심 많은 욕망의 화신 지드는 이에 반발했다. 육체를 포기해야 정신이 행복해진다는 식의 구분법은 지드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지드의 대표작 '좁은 문'에는 신이 규정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랑마저도 포기하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에서 지드는 "육체와 함께 행복하기를 신도 바랐을 것"이라고 외친다. 지드는 말년에 쓴 '새로운 양식'을 통해 더욱 완숙해진 청춘론을 펼친다.

"그대는 다시 채워 넣어야 할 텅 빈 하늘 아래. 처녀지에 벌거숭이로 서 있다…. 오, 내가 사랑하는 그대여. 어서 한 손으로 이 광선을 붙잡아라. 별이 있지 않느냐! 무거운 짐을 버려라. 아무리 가벼운 과거의 짐이라 해도 거기에 매이지 마라…. 나는 인간을 축소시키는 모든 것을 미워한다."

지드의 책들은 청춘의 승계 방식을 알려주는 하나의 '바통(baton)' 같다. 지드는 청춘의 승계만이 인류를 퇴보시키지 않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세대 갈등이 있는 사회는 이 승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지적(指摘)문화, 두뇌의 퇴화 늦출 수 있다

 

< 경향신문, 송용진 인하대 수학과 교수, 2023.07.18  >

 

 


남들이 잘못하고 있는 행동이나 말에 대해 지적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지적받는 사람들이 아주 기분 나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꽤 오래전에 방영됐던 TV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TV 프로그램의 영상에서 사회자가 두 어린이에게 “잔소리와 충고의 차이는 뭘까요?”라고 하니까 그중 한 어린이가 “잔소리는 왠지 모르게 기분 나쁜데, 충고는 더 기분 나빠요”라는 장면이 나온다. 남들의 잘못이나 부족한 점을 지적하는 문화를 간단히 ‘지적(指摘)문화’라고 불러보자. 용어가 개념을 확대재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미국·영국·일본 등에 비해 지적문화가 좀 위축되어 있다. 나는 그 나라들이 일찍이 선진국이 되는 데에 지적문화가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랫동안 축구·테니스·농구 등 여러 운동을 해 왔는데 운동을 할 때 초보자에게 운동의 기본 동작이나 패턴을 가르쳐 주는 것이 쉽지 않다. 나는 가르쳐 준다고 말을 해도 당사자는 내가 자기의 잘못을 지적했다거나 잘난 척을 한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미국 유학 시절의 경험담을 하나 이야기해 보자. 하루는 농구 코트에 나가서 모르는 학생들과 농구를 하다 나와 우리 편 학생 둘이서 2 대 1 속공을 하게 됐는데 내가 마지막 패스를 우리 편 학생에게 잘 주어 그가 가볍게 레이업으로 골을 넣었다. 아주 전형적인 쉬운 속공이었다. 그런데 그 학생이 돌아 나오며 나에게 “왜 바운스 패스를 하지 않았지?”하고 지적하는 것이 아닌가. 그 후에도 이와 비슷하게 학생들이 운동할 때 서로에게 지적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선진국엔 과하지 않은 지적문화

예전에 한국인들은 미국인들이 어디서나 줄 서는 모습을 보고 문화 수준의 차이를 실감했다. 줄서기 문화가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을 대변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거기에도 배경적인 문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지적문화이다. 미국의 맥도널드에서 누군가 줄을 서지 않고 그냥 주문대로 다가가면 주문을 받고 있던 종업원이 바로 눈을 부라리며 줄을 서라고 소리를 지른다. 즉, 누군가 바로 지적하기 때문에 줄을 서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영국에 머물 때 이야기다. 하루는 자전거 가게에서 새 자전거를 샀다. 그 가게에서 방금 산 자전거를 타고 찻길까지 넓은 인도를 대각선으로 20m 정도 가로질러 가는데 갑자기 어떤 신사가 소리를 지르며 내게 뛰어오는 것이 아닌가? 불과 몇초 사이지만 자전거는 찻길로 다녀야 하는데 왜 인도로 다니냐고 지적하는 것이었다.

일본에 머물던 때 이야기도 하나 해 보자. 어느 주말에 한국 유학생들끼리 학교 운동장을 빌려 야구를 하는데, 대여 마감 20분 전쯤에 학생들이 하던 운동을 멈추고 모두 밀대를 들고 나와 운동장 바닥을 미는 것이 아닌가.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학교 직원이 끝까지 쫓아다니며 야단을 치거나 불이익을 주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이런저런 자잘한 규정이나 매뉴얼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는 것을 좋아한다. 예컨대 한 회사의 신입 사원이 복사기 사용에 대한 관행을 잘 몰라 복사물 정리를 이상하게 해 놓으면 바로 다른 직원들이 회사의 관행이나 규정을 가르쳐 준다. 만일 한국인이라면 지적질당했다고 기분 나빠할지 모른다.

내가 경험한 이런 나라들에는 공통적으로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의 지적문화가 존재하고 그 사회에서는 누구든 허튼짓을 하면 안 된다는 긴장감 같은 것이 있다. 서로가 과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자기 자신은 느끼지 못하는 잘못이나 부족한 점을 남들이 지적해 준다면 각자의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남들의 올바른 지적에 대해 무조건 부정적인 감정을 가질 필요는 없다.

남들이 나의 잘못이나 부족함을 지적해 준다면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닌 한 나 자신이 못 느끼던 잘못을 고칠 수 있고 자신이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될 텐데 왜 기분이 나쁜가? 물론 엉터리 지적이나 과한 지적까지 너그럽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부족한 점이나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만이 발전을 지속하고 현명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나는 어렸을 때 배운 ‘일일삼성(一日三省)’의 정신을 평생 간직하며 살아왔다. 가능하면 자주 나 자신의 행동과 말에 대해 반성하려고 노력하지만 그게 쉽지는 않다.

 

평소에 자신을 돌이켜 보고 남들의 지적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는 청소년 시기에는 자기 발전을 촉진하고 인생의 후반기에는 두뇌의 퇴화를 늦추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쇠를 달구고 망치질 하며 노래하라

 

 

< 대전일보, 장석주 시인,  2023.07.07  >

 

 


사람들은 원고료와 인세만으로 생계를 꾸리는 나를 가리켜 '전업작가'라고 한다. 어찌어찌 하다 보니 책상 앞에 어깨를 구부리고 앉아 글을 쓰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 인생의 3분의2를 책상 앞에 앉아서 글을 쓰며 보내고 나니 알겠다. 제 고독과 마주하며 무언가를 쓰는 일은 보람도 없지 않지만 꽤나 건조한 작업이라는 것을! 작가의 일이란 '꿈, 낳기, 창작'이다. 그 일은 '우리를 통해 존재하고자 하는 것들'에게 몸을 주어 존재하게 한다. 현실에서 당장의 쓸모는 없을지라도 작가라는 직업을 갖고 사는 동안 가끔 몸을 쓰는 직업을 가졌다면 지금보다 더 행복했을까, 하고 묻곤 했다. 국가재해보험국이란 직장에서 근무하며 퇴근한 뒤에는 자기 방에서 타자기로 소설을 썼던 카프카가 그랬듯이 나는 언젠가 '가구를 만드는 장인'이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종일 나무에서 나오는 향내를 맡으로 일하고 싶다는 꿈은 이룰 수가 없었다.

내 아버지의 직업은 목수였다. 그는 솜씨가 좋은 목수였지만 몸을 쓰는 자기 직업에 대한 자부심은 크지 않았다. 현장에서 몸을 쓰며 땀 흘리는 일보다는 '책상에서 펜대를 굴리며' 살기를 갈망하던 아버지는 한 직장에서 진득하니 견디기보다는 여러 번 전직을 하며 옮겨 다녔다. 그렇게 옮겨 다녔건만 아버지는 만족감을 찾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실직으로 빈둥거리며 보낸 세월이 더 길었다. 일하지 않고 무위도식 하는 자는 무기력하고 비루해 보였다. 내가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나는 여러 사업을 구상하고 '허황한 일확천금'을 꿈꾸는 아버지의 속내를 이해하거나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이 세상이 온전하도록 떠받치는 것은 '평범한 사물들의 인내심', 꽃을 피우는 구근식물, 벌과 나비들, 땅에 뿌리를 박고 광합성 작용을 하는 나무들, 그리고 제 자리를 지키며 일하는 자들의 성실함이다.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대장간을 짓고, 쇠를 달구고 망치질 하며 노래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은 평화롭게 굴러간다. 씨를 뿌리고 파종하는 농부들, 새벽 거리를 청소하는 환경미화 노동자들, 빵을 굽는 제빵사들,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 간호사와 의사들, 우편물을 분류하고 배달하는 우체국 직원들이 없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제 일터에서 헌신하는 노동자가 없다면 우리 생활은 지금보다 훨씬 더 조악하고 누추해질 게 분명하다.

'저기 언덕 꼭대기에 서서/소리치지 말라./물론 당신이 하는 말은/옳다, 너무 옳아서/그것을 말하는 자체가/소음이다./언덕 속으로 들어가라./그곳에 당신의 대장간을 지어라./그곳에 풀무를 세우고/그곳에서 쇠를 달구고/망치질 하며 노래하라./우리가 그 노래를 들을 것이다./그 노래를 듣고/당신이 어디 있는지 알 것이다'.(올라브 H. 하우게, '언덕 꼭대기에 서서 소리치지 말라')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이 공연히 언덕 꼭대기에 서서 소리치는 일이 되지 않기 위하여 애써야 한다. 그 외침이 의미의 생산이 아니라 소음을 만드는 공허한 짓인 탓이다. 나는 자주 묻는다. 내가 하는 일이 고슴도치나 양치식물이 세상에 기여하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가? 한 줄의 시, 한 줄의 산문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데 힘을 보태지 못한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무용한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인들이란 얼마나 하염없는 존재들인가!

시인 윤동주는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에 제 얼굴을 비춰 보고 그 욕됨에 부끄러워하며,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라고 다짐한다. 그런 싯구를 적는 청년은 외래의 피침으로 국권을 잃고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에서 야만의 시대를 견뎌야 했던 그 누구보다도 정직한 사람이었다. 

 

생명을 가진 것들은 모두 빛의 격려 속에서 먹고 살기 위하여 일한다. 박새와 곤줄박이, 닭과 오리, 벌과 개미, 저 혼자 돋는 열무 싹과 민들레도 먹이를 구하며 생명의 동력을 얻는다. 

 

우리가 하는 정직한 일들은 생계의 방편이고 꿈을 향해 나아가는 도정이며, 삶의 기쁨과 의미를 만드는 근간이다. 한 사람의 가치는 그가 하는 일에 대한 평판에서 나온다. 일하지 않는 자는 어떤 평판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시인은 쇠를 달구고 망치질 하며 노래하는 사람이 되라고 썼을 테다.

오줌을 누면서도 쓴다

 

 

< 국민일보, 편성준 작가,  2023-06-24 >


가즈오 이시구로는 한때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직장인처럼 착실하게 앉아 글을 썼다고 한다. 오후 4시 이전에는 전화나 이메일도 받지 않고 독하게 글만 썼기 때문에 그런 놀라운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일까. J D 샐린저 같은 전설적 소설가도 매일 아침 6시면 일어나 글을 쓰는 부지런쟁이였고, ‘시녀 이야기’라는 소설을 북미에서만 1000만부나 팔아치운 마거릿 애투드도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는 꼬박 앉아서 글만 썼다고 한다. 글을 쓰고 싶은데 직장도 다녀야 하고 살림도 해야 하는 당신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하루 종일 글만 써도 되는 작가들의 처지가 무한정 부러울 것이다.

하지만 작가들이라고 다 그런 건 아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인세 수입만으로는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어 다른 직업을 가지는 경우가 흔하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야만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작가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물론 누구나 책상 앞에 앉아야 비로소 원고 작성이 가능하긴 하지만 그건 그동안의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일 뿐이다. 아무것도 쓸 게 없는 상태에서 책상 앞에 앉으면 머릿속이 하얘질 뿐이다.

아이디어를 내기에 가장 좋은 것은 단순노동을 하는 것이다. 열 권도 넘는 초단편소설집으로 일가를 이루고 있는 김동식 작가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10년 동안 주물공장에서 단순노동을 하며 지냈다. 하루 종일 국자로 아연을 떠서 도금 작업을 하던 그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걸 매일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다가 촉이 좋은 편집자의 눈에 띄는 바람에 작가가 됐다. 하지만 작가가 되기 위해 너도나도 주물공장으로 달려갈 필요는 없다.

내가 아는 작가들은 대개 걷거나 돌아다니면서 쓴다. 그중에도 베스트셀러 소설 ‘불편한 편의점’을 쓴 김호연 작가는 ‘팔을 다치면 글을 쓸 수 있지만 다리를 다치면 쓸 수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산책 옹호자다. 걸으면서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이 글이 되고 스토리텔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따져 봐도 걸으면 전두엽이 자극되고 그 자극으로 도파민이 생성되는데 그 물질이 생각을 하게 만든다. 결국 작가에게 걷는 건 쓰는 것과 같은 행위와 같다.

“나는 하루 종일 걸었는데 왜 글이 안 써지냐”라고 항의하는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왜 그럴까. 걷기만 하고 메모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도 머릿속에만 저장됐다가 사라지면 말짱 도루묵이다. 그래서 나는 산책을 나갈 때면 반드시 A4지를 두 번 접어 가방에 넣고 볼펜도 챙긴다. 언제 어디서 이상한 생각이 떠오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필기구가 있어도 길에서 메모하는 건 어렵다고? 그럼 스마트폰에 녹음을 하면 된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중 녹음 기능을 누르고 아무렇게나 목소리를 남긴다. 어차피 나중에 당신 혼자 들을 테니 횡설수설해도 되고 심지어 속어를 쓰거나 욕을 해도 된다. 다만 그날이나 그다음 날 저녁엔 꼭 다시 듣고 글로 옮겨놓기 바란다. 목소리를 글로 옮기는 과정이 있어야 아이디어가 쓸 만한 건지 아닌지 판가름 난다. 그리고 너무 오래 묵혀두면 나중에 그걸 왜 녹음했는지는 잊어버리고 녹음을 한 당시의 상황만 기억나기도 한다.

‘작가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라기보다는 건축설계사다’(어니스트 헤밍웨이), ‘영감이란 매일 일하는 것이다’(샤를 보들레르), ‘라파엘처럼 그리는 데 4년이 걸렸지만 아이처럼 그리는 데는 평생이 걸렸다’(파블로 피카소), ‘4시에 글을 쓰기로 결심했으면 4시에 글을 써야 한다! 어떤 핑계도 통하지 않는다’(도로시아 브랜디).

지금 메모장을 뒤져 찾아낸 ‘글쓰기 명언’들이다. 사실 이런 걸 메모해 놓았다고 당장 다 써먹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런 걸 메모해 놓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중 누가 더 좋은 글을 쓸 확률이 높을까 생각해 보면 단연 전자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최근에 나는 아내와 아내 친구 이렇게 셋이 술을 마시다 처녀 시절 너무 지분거리는 남자가 많아 가짜 청첩장을 만들었던 여자분 이야기를 듣고 화장실에 가서 ‘가짜 청첩장 만든 그녀. 대한민국에서 예쁜 직장 여성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라는 메모를 했다. 이게 어떤 글로 발전할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오줌을 누면서도 쓴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쓰는 놈에겐 못 당하는 법이다. 

다큐로 보는 우크라 전쟁의 비극, 6·25의 고통 비추는 거울

 

 

< 중앙일보, 문소영 중앙SUNDAY 문화전문기자, 2023.06.23  >

 



“첫 폭격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온통 창문 얘기였어요. ‘우리 집 창유리가 다 깨졌어. 창유리 없이 어떻게 살지?’ 하지만 3~5일이 지나가 다들 창문 얘기는 잊었어요. ‘우리 아파트가 폭격을 맞았어, 우리 집은 비껴갔지만. 끔찍해.’ 1주일이 지나자 사람들은 더는 폭격 맞은 집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죽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죠.”

“산부인과 병원과 주택가는 폭격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전 3월 2일에 출산했어요. 이틀 뒤 17구역에 있는 병원이 폭격을 당했어요. 의사들이 수술 중에 숨졌어요.”

“지하실에서 지냈어요. 잠시 발전기가 돌아갈 때만 빼고 온종일 암흑이었죠. 발전기가 돌아갈 때는 모두 휴대폰을 충전하러 달려왔어요. 콘센트가 몇 개 없어서 멀티탭을 연결하고 그 멀티탭에 다른 멀티탭을 주렁주렁 연결했어요. 이미 2~3주 넘게 인터넷도 이동통신망도 안 되는 상태였는데도 말이죠. 일종의 본능이었던 것 같아요. 일단 폰이 충전되면 조만간 가족과 통화할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느낌으로 그랬던 거예요.”

 


생존자 인터뷰 묶은 ‘마리우폴…’
포성과 죽음이 끊이지 않는 곳

멀티탭 뒤엉킨 휴대폰 충전줄
어린이들 피신한 극장도 폭격

“전쟁 끝내는 건 평화보다 승리”
정전 70년 맞은 한국에 큰 울림

내달 폐막 광주비엔날레서 공개


우크라이나 동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 시민들이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 이후 처음 한 달 동안 겪은 일이다. 광주비엔날레(7월 9일까지) 우크라이나 파빌리온에서 토요일마다 상영 중인 다큐멘터리 ‘마리우폴, 잃지 않은 희망(Mariupol, Unlost Hope)’(2022)에서 이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앞에서 인용한 부분은 이들이 겪은 참혹한 일들의 서두일 뿐이다.

동시대에 벌어진 비극이기에 70여 년 전 우리 땅의 아픔보다 더 피부에 와 닿는 면도 있다. 폭탄이 쏟아지고 통신망이 끊기면서 휴대폰으로 늘 연결돼 있던 가족·친구와 갑자기 단절되고 생사도 알 수 없게 된 상황, 가족과의 연락을 바라며 통신망이 없는데도 필사적으로 폰을 충전하는 모습이 고통스럽기만 하다.

지난달 31일 아침 6시 반, 폰이 찢어지는 비명 같은 경고음을 내며 “서울 지역에 경계경보 발령”이라는 위급재난문자를 띄웠을 때, 그리고 깜짝 놀라 클릭한 네이버가 먹통이었을 때 (접속 폭주 때문으로 밝혀졌다), 즉각 머리에 떠오른 것도 마리우폴의 휴대폰 이야기였다.

그때의 경계경보는 우리 역시 언제라도 마리우폴 시민처럼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었다. 서울시와 중앙부처 사이의 엇박자와 위급재난문자의 모호한 정보 등 많은 혼란이 노출됐음에도, 이 경계경보를 무심하게 흘려보낸 일부 시민들의 반응이 더 심각한 문제로 보인다.

북한이 인공위성 운반용 로켓이라 밝혔고 발사 날짜 범위도 미리 통보했는데 왜 호들갑을 떨었냐는 말도 들린다. 그러나 그 로켓은 위성 대신 탄두를 실으면 곧바로 장거리 미사일로 전용될 수 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는 북한이 이런 로켓을 발사하는 것 자체를 금지한다. 국제법을 위반한 것인데, 위성 대신 탄두가 실렸을 일은 없다는 북한의 말을 믿으며 발사 당시에 ‘호들갑’을 떨지 말아야 했을까. 곧 6월 25일이 다가오는데 73년 전 그날, 기습 남침을 일으켰고 지금도 무력도발을 계속하는 북한이 그렇게 신뢰할 상대였던가.

6·25가 먼 옛날 일처럼 들린다면 눈앞의 우크라이나 전쟁을 ‘마리우폴, 잃지 않은 희망’을 통해서 다시 보자. 인구 54만 명의 마리우폴은 산업과 문화가 발달한 현대 도시였다. 전쟁이 이런 도시를, 그리고 인간의 존엄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길거리에 폭격 맞은 시신이 즐비하고 그곳을 걷는 생존자들은 아는 얼굴을 발견할까 봐 두려움에 떤다. 10대 아들을 눈앞에서 잃은 여성은 며칠 후 어떤 남성이 어린 딸의 시신 앞에서 “왜 내가 아니고 너였니?”라고 울부짖는 것을 보며 같은 질문을 되새긴다. 하지만 오래 슬퍼할 겨를도 없다. 남은 가족을 살리기 위해 그들은 여기저기 지하실을 전전한다. 대형 문화시설이 피신처가 되었다.

그러나 그곳도 안전하지 않았다. 일례로 드라마 극장이 러시아 공군의 폭격을 맞았다. 아이들이 있는 곳이니 폭격하지 말아 달라며 커다랗게 ‘어린이’라고 써놓았는데도 말이다. 최소 600여 명이 사망한 민간인 학살이었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점점 지쳐가고, 물과 식량을 놓고 다투고, 절망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들도 속출한다.

 


담담한 영상에 담긴 강렬한 충격

이번 다큐는 마리우폴 탈출 생존자들의 인터뷰를 주로 엮었다. 관련 영상도 나오지만 가장 참혹한 장면은 편집됐다. 대신 인터뷰 중간중간에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장면을 배치했다. 화가는 러시아 침공 이전 마리우폴의 활기찬 풍경을 그린 후에 생존자들의 증언에 맞추어 도시가 파괴된 모습을 덧입힌다. 무너진 벽과 검은 재와 연기와 시신들을…. 그렇게 변모한 그림과 담담한 인터뷰는 자극적인 영상보다 더 길고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이 또한 우크라이나인의 항전 방식이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세계에 자국 상황을 알리기 위해 펴낸 연설집 『우크라이나에서 온 메시지』(2023) 서문에 이렇게 썼다. “우크라이나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크라이나에 지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크라이나인의 용기가 ‘유행이 지난 것’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 이 전쟁을 시작한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전쟁은 우리가 끝내야 합니다. (…)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과거에 우리는 그것이 ‘평화’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승리’라고 말합니다.”

피를 토하는 듯한 그의 말이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언제나 전쟁을 피하기 위해, 평화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그 평화가 침략전쟁으로 깨졌을 때, 침략한 쪽의 책임을 뭉뚱그린 채 평화를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우크라이나 국민의 결사 항전은 전 세계 잠재적 침략 국가들에 전쟁이 절대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어떤 면으로는 세계 평화에 일조했다. 그렇기에 더욱 우크라이나는 승리해야 한다. 정전 70주년을 맞는 대한민국도 기억해야 할 일이다.

물불 가리지 않기

 

 

< 경향신문, 오은 시인,  2023.06.15  >

 

 


물을 마실 때마다 불을 생각한다. 불을 피울 때마다 물을 떠올린다. 물과 불, 이름은 비슷하나 성질은 전혀 다른 두 물질 말이다. 불 위에 물을 올려두고 끓이다 보면 불의 힘이 불끈 솟는 게 느껴진다. 타오르는 불에 물을 끼얹는 장면을 보면, 끓어오르는 것을 잠재우는 물의 위력에 새삼 놀란다. 4월이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세월호 참사와 최근 캐나다 동부에서 서부로 확산한 산불 소식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물과 불의 위험성을 깨닫곤 한다. 사람이 사는 데 필수 불가결하지만, 잘 다루지 않으면 언제든 인류를 위협할 수 있다.

얼마 전, 각기 다른 자리에서 불같은 사람과 물 같은 사람을 만났다. 불같은 사람은 들고일어나는 사람이다. 정열, 용맹, 투지처럼 뜨겁고 강렬할 때 지지받는 불같음도 있으나 질투심, 욕망, 성미처럼 뜨거워질수록 자신과 주변인을 위협에 빠뜨리는 불같음도 있다.

불같은 사람은 자신이 있는 자리를 흥분과 열정으로 달아오르게 한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에 영향받지 않을 도리가 없다. 다만 그 불이 예기치 않게 꺼지고 말았을 때, 우리는 잿더미 위에 웅크린 사람을 마주해야 한다. 부싯돌 같은 손길을 기다리는 간절한 눈빛 앞에서, 여전히 그를 불같은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물 같은 사람은 마냥 유순할 것 같지만, 때때로 넘쳐흐르거나 말라버리기도 한다. 범람과 고갈 사이의 상태를 항상 유지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불이 물을 끓이기도 하지만 증발시키기도 하듯, 사람들 틈 속으로 파고들고 스며들며 물 같은 사람은 본래의 성질을 잃을지도 모른다. 물 흐르듯 할 적에는 거침없어도 물 건너가면 손쓸 수 없어진다. 물이 오를 때는 신나지만 물이 빠질 때는 한없이 처연해지기도 한다. 사회 물을 먹고 불순해지기도 하고, 외국 물에 길든 나머지 본류(本流)를 잊기도 한다. 액체 상태이기는 해도 처음의 물과는 전혀 다른 상태가 되었을 때, 변함없이 그를 물 같은 사람이라고 불러도 될까.

‘물과 불’은 서로 용납하지 못하거나 맞서는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물불’은 비유적으로 어려움이나 위험을 이르기도 한다. 물불 가리지 않는다는 말은 “위험이나 곤란을 고려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행동하다”라는 뜻이다. 불같은 사람 둘이 만나면 협심하여 어떤 일을 거침없이 밀어붙일지도 모르지만,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을 놓치거나 빠뜨릴 수도 있다. 물 같은 사람 둘이 만나면 서로 배려하며 한 발 한 발 나아갈 수도 있지만, 상대에 의지하는 데 익숙한 나머지 촌각을 다투는 결정 앞에서 머뭇거릴지도 모른다. 어느 경우든 ‘물불’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한때 나는 물은 물끼리 어울리고 불은 불과 만나는 게 좋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는 어쩌면 우물이나 불길에 자신을 가두는 일일지도 모른다. 편한 상태에 길드는 일은 관성에 젖는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우물이 깊다고, 불길이 뜨겁다고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다. 다른 우물에는 무엇이 있는지, 불길 밖의 온도는 어떤지 헤아리지 않으면 자신이 몸담은 세계가 전부인 줄 알게 된다. 

 

잠자고 있던 열정을 달구기 위해, 북받쳐 오르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물은 불을, 불은 물을 부단히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만남은 세상에 나와 다른 성질을 지닌 사람이 존재함을 깨닫는 과정이자 그와 어떻게 하면 어울릴 수 있을지 고민하는 길이기도 하다.

물불 가리지 않는다는 말을 이렇게 풀이해본다. 당장은 맞지 않아도 다양한 사람을 경험해보기, 내 입맛에 맞는 것이 아닌 그 상황에 걸맞은 것을 찾아보기, 회피의 자리에 직면을, ‘어쩔 수 없이’의 자리에 ‘기꺼이’를 두기. 가열과 증발과 소화(消火)를 오가는 동안 물이 수증기가 되기도 하고 불이 재가 되기도 할 것이다.

 

이 또한 물불 가리지 않았기에 마주할 수 있는 새로운 풍경이다.

‘시간의 감옥’에 갇혀 산다는 것 

 

 

< 동아일보, 배윤슬 도배사,  2023-05-30 >

 

 

 

 


시간이 곧 돈이다! 도배사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도배사의 일당은 한정된 시간 안에 해내는 작업 실적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실적을 내면 수입이 늘어나지만 그렇지 못하면 당연히 수입이 준다. 초보 시절부터 지겹도록 이 말을 들어왔고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막상 그 의미를 뼈저리게 느끼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올해 처음으로 아파트 한 동을 맡아 책임지고 작업하게 되면서 나는 시간 관리에 매우 예민해졌다. 작업 물량과 기한이 정해진 후, 곧바로 나는 정해진 시간 안에 최대한 빠르게 작업을 완수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도배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물론이고 쓰레기를 줍고 물건을 정리하는 시간, 짐을 옮기는 시간까지도 분 단위로 생각해 하루에 해낼 수 있는 작업량을 계산했다. 몸으로는 도배를 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작업량과 시간을 생각하느라 여유가 없었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겨 작업 시간이 길어지면 불안해하기 일쑤였다. 맡은 작업량을 책임지고 완성해내기 위해 조기 출근과 야근을 마다하지 않았고 일의 진행이 늦어진다고 생각될 때에는 일요일에도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시간에 쫓기다 보니 심지어 파트너와 의견 차를 조율하는 순간조차도 속으로는 흘러가는 시간을 계산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 덕분에 이전보다 수입은 많이 늘었지만 마치 시간에 갇혀버린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시간에 대해 새롭게 깨닫는 경험을 했다. 얼마 전 휴가를 내고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날의 일이다. 결혼식장을 나온 나는 모처럼 다른 일정이 없어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걷다 보니 날씨도 좋고 마음도 느긋해지면서 결국 두 시간 정도 걸어 집에 도착했다. 평소에는 자유시간이 주어지면 그 소중한 시간을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가치 있게 사용할까 전날부터 고민하기 바쁘다. 휴식을 취하더라도 ‘오늘은 꼭 푹 쉬어야지’ 다짐하며 시간을 ‘잘’ 사용하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이날은 내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가치 있게 쓸지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아주 펑펑 낭비해버린 셈이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아무 목표도, 목적도, 가치도 없는 일에 마음껏 사용해버리다니! 그 순간 마치 나는 시간 부자가 된 느낌이었다.

도배를 시작하면서 나는 다른 기술자들에 비해 뒤처지거나 못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써왔다. 작업을 해도 더 효율적으로 하려 했고 기술이나 경험이 부족한 부분은 더 많은 시간 일하며 보충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시간에 갇혀 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시간에 쫓기는 삶에서 조금씩 기쁨도 잃어가고 있었다.

언젠가 ‘청년의 시기에는 공간에 집을 짓는 것보다 시간에 자기 집을 짓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눈에 보이는 당장의 소유나 물질적인 가치보다는 자기가 사는 현재의 삶에 더 충실하라는 의미인 것 같다. 나의 직업은 공간에 집을 완성해가는 일이지만 일을 하는 매 순간의 과정은 시간에 집을 짓는 일이다. 

 

올해로 나는 도배 경력 5년 차에 접어들었다. 자연스럽게 시간과 삶에 대해 다시 살펴보아야 할 때다. 청년의 때에 시간의 감옥에 갇혀 사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조금 더 천천히 살면서 시간에 집을 짓는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시간의 감옥에서 문을 조금 열고 나오면 그만큼 시간 부자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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