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진 “다시 쇼팽 콩쿠르 나가는 악몽 꿔… 100번 연주하면 3번 만족”
[김윤덕이 만난 사람] 삼성 호암상 최연소 수상 조성진

 

 

< 조선일보, 김윤덕 선임기자,  2023.07.24.  >

 

 


차고 까다롭다는 세평은 거짓이었다. 스물아홉 살 조성진은 허당에 가까울 만큼 잘 웃고, 털털하며, 겸손한 청년이었다. ‘젊은 거장’ 소릴 듣지만 주기적으로 세 가지 악몽을 꾼다고 했다. 그중 하나가 “쇼팽 콩쿠르에 다시 나가는 꿈”이라고 해서 폭소가 터졌다. “나는 운이 좋았을 뿐 뛰어난 연주자는 아니다”라고도 했다. 왜 그리 겸손하냐 묻자 “저는 그냥 팩트를 말한 것”이라고 했다. 장대비 퍼붓는 내내 우문현답이 쏟아졌다.

 


◇세 가지 악몽


-얼굴이 도로 앳되졌다.

“한국 와 살이 올라가지고. 머리를 깎아서 더 그런 것 같다.” 조성진은 지난 12일까지 국내 4개 도시에서 헨델, 브람스의 곡들로 독주회를 연 뒤 베를린으로 돌아갔다.

-올해 삼성 호암상 예술상을 최연소로 수상했더라.

“정명훈, 백건우 선생님이 받으신 상을 저도 받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홍라희 여사가 열성 팬이라던데.

“제가 유명하지 않을 때부터 연주회에 와주셨다. 2012년 파리로 유학 가기 한 달 전, 스승인 신수정 선생님 댁에서 처음 뵀는데 음악을 정말 사랑하는 분이었다.”

-수상 소감에서 1년에 100회 연주를 하는데도 매번 긴장된다고 했더라.

“실수할까 봐, 내가 원하는 표현이 안 될까 봐.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엄청 긴장된다(웃음).”

-막상 무대 위 조성진은 무아지경에 빠진 사람처럼 보인다.

“일단 연주를 시작하면 무의식으로 들어가려 한다. 연주는 생각이 많으면 잘 안 된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연습하나.

“하루 5시간 이상 안 한다. 경험상 오래 연습하면 손이 아파서 짧은 시간 집중해서 한다.”

-나무보다는 숲이 보이는 연주를 하는 게 중요하다고도 했다.

“디테일이 물론 중요하지만 거기에 너무 치중하면 음악 전체를 표현할 수 없다. 음악이 30분짜리면 어디에 클라이맥스를 두고 연주해야 할까 늘 생각한다. 구조, 혹은 기승전결이 명확한 음악을 좋아하는 편인데, 어느 부분이 아름답게 느껴져도 너무 아름답게 표현하지 않는다. 다음에 더 아름다운 대목이 나올 수 있으니까 참는 거다.”

-조성진도 피아노가 뜻대로 안 쳐지는 악몽을 꾸는지.

늘 세 가지 악몽을 꾼다. 어떤 협주곡을 열심히 준비했는데 연주회날 프로그램북에 다른 협주곡이 적혀 있는 꿈, 무대가 미끄러워 연주하다 의자에서 떨어지는 꿈, 쇼팽 콩쿠르에 다시 나가는 꿈(웃음).

조성진은 2015년 10월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했을 때 “다시는 콩쿠르에 나가지 않아도 돼 기쁘다”고 말했다.

-징크스 같은 것도 있나?

“손에 땀이 많은 편이라 연주하기 전 손을 비누로 박박 씻는다(웃음).”

 


◇바로크 음악에 빠지다


-6번째 정규 앨범 ‘헨델 프로젝트’가 발매 직후 빌보드 클래식 주간차트 1위에 올랐다. 태어나 가장 많이 연습한 곡이라고 했더라.

“좀 어렵기도 했고, 코로나로 연주가 줄줄이 캔슬돼 집(베를린)에서 연습할 시간이 많기도 했다. 제가 레퍼토리 욕심이 꽤 많아서 베토벤 모차르트부터, 라벨 드뷔시 같은 프랑스 음악, 프로코피예프, 라흐마니노프 같은 러시아 음악은 많이 연주했는데 바흐나 헨델, 라모 같은 바로크 작곡가들은 안 해봐서 언젠가 꼭 해보고 싶었다.”

-바로크 중에서도 왜 헨델인가.

“바흐보다 멜로딕하고 가슴을 울려서. 그런데 생각보다 어렵더라. 음악이 언어와 같아서, 바로크 음악을 여섯·일곱 살 때부터 했으면 모국어처럼 자연스럽게 습득했을 텐데 저는 고전, 낭만파 위주로 해서 그런지 잘 안 되더라. 그래서 최대한 바로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제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해봤다.”

-코로나의 불안감을 헨델 음악이 위로해줬을까?

“코로나 때 불안했던 건, 제가 1년에 100번을 연주하다가 갑자기 0번이 되니까 왠지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헨델을 의도적으로 택한 건 아니다. 음악 들을 시간이 많아져 집에 있는 몇천 장의 음반을 심심할 때마다 하나씩 들어보다가 리히테르가 연주한 헨델 음반을 발견했다. 들어보니 너무 좋았다.”

-하프시코드를 피아노로 대체해 조성진 식으로 해석한 이번 앨범을 헨델이 들으면 칭찬해줄까?

“일단 피아노 소리에 놀라실 것 같다. 지금의 피아노와 그때의 피아노(하프시코드)가 너무 다르니까(웃음). 칭찬보다는 ‘내 곡을 이렇게도 연주할 수 있구나’ 긍정적으로 평가해주시면 제일 좋을 것 같다.”

-빌헬름 켐프가 편곡한 헨델의 미뉴엣 G단조를 들은 애호가들이 ‘비밀의 정원에 들어온 느낌’, ‘숨이 멎을 듯 아름답다’는 댓글을 올렸더라.

“댓글은 안 봐서…. 그런데 음악은 연주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청중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누구도 터치할 수 없는 영역이다.”

-지난 3월 프라하에서 현대음악 작곡가인 티에리 에스케슈의 피아노 협주곡 ‘에튀드 교향곡’을 세계 초연했다.

“굉장히 좋은 경험이었다. 베토벤이나 모차르트를 연주할 땐 질문이 생겨도 물어볼 수가 없는데, 현대음악은 작곡가한테 바로 물어볼 수 있으니까(웃음).”

-현대음악은 너무 난해하지 않나.

“그 음악이 고전이 될지 여부는 50년, 100년 뒤에 결정된다. 라흐마니노프나 프로코피예프 음악도 100년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연주해 왔기 때문에 고전이 됐다고 생각한다. 싫어하는 청중도 이해하지만 저는 거부감이 전혀 없다. 기회 있을 때마다 도전해보려고 한다.”

-자신의 연주에 얼마나 만족하나?

연말이면 마음에 들었던 연주를 혼자 꼽아보는데, 100번 중 3번 정도 나온다.”

-작년 기준으로 3번의 연주라면?

5월 독일 뷔어츠부르크에서 밤베르크 심포니와 연주한 모차르트 협주곡 23번, 8월 에든버러에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연주한 베토벤 협주곡 5번, 10월 런던 심포니와 연주한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대구 공연.”

-작년 2월 뉴욕 카네기홀에서의 빈 필 협연은 드라마틱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연주자가 갑자기 바뀌어 공연 24시간 전에 의뢰받고 베를린에서 뉴욕으로 날아갔더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이라 수락했다. 3번이었으면 못 했을 거다(웃음).”

-3년 만에 친 곡이고 리허설도 제대로 못 한 채 무대에 섰는데 뉴욕타임스가 ‘기적 같은 솜씨’라고 호평했다.

“솔직히 만족스러운 연주는 아니었다. 뉴욕행 비행기에서 잠깐 졸았을 때 꿈속에서도 연습했을 만큼 압박감이 엄청났는데 지휘자 야니크 덕분에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포옹할 때 울컥하더라.”

-호텔로 돌아왔을 때 코피가 터졌다고.

“쌍코피였다(웃음).”

 
◇베토벤과 브람스에 약하다?


-한국 클래식 역사는 조성진 전과 후로 나뉜다에 동의하는지?

“전혀 아니다.”

-’건반의 시인’ ‘건반 위의 구도자’로도 불린다.

“베를린 필과 협연 때 사이먼 래틀 경이 그렇게 표현하셔서…. 근데 ‘아, 시인처럼 쳐야지’ 이러면서 치진 않는다(웃음).”

-’조성진은 늘 가슴 한편에 자기만의 시를 품고 연주한다’는 평도 있다.

“음…. 제가 칭찬에 알레르기가 있어서. 차라리 지적을 해주시면 좋겠다.”

-조성진은 쇼팽·드뷔시·라흐마니노프엔 강하지만, 베토벤·브람스처럼 웅장한 힘이 필요한 독일 작곡가엔 약하다더라.

“라흐마니노프도 그렇게 잘 치는 것 같진 않다(웃음). 베토벤 콘체르토는 자신 있는데 소나타는 아직 자신이 없다. 브람스는 협주곡 두 개랑 클라비어슈트케, 변주곡을 해봤는데 개인적으로 화려한 테크닉을 요하는 곡보다는 형식과 구조의 미학을 가진 곡을 선호한다. 뭔가 볼륨이 큰 음악에 강점이 있는 피아니스트가 아닌 건 맞다.”

-임윤찬, 박재홍 등 최근 약진하고 있는 후배 연주자들에게 조언한다면.

“저도 시행착오 겪으며 배우는 중이라 조언할 입장이 못 된다. 그리고 조언이 필요없는 후배들이다.”

-스승들은 ‘조급해하지 마라, 기다려라’고 조언했다던데.

“그것도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고(웃음). 자기가 뭘 원하는지 아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다.”

-요즘 가장 핫한 임윤찬은 어떻게 평가하나.

경이롭더라. 만나본 적은 없지만, 반 클라이번 콩쿠르 때 친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은 진짜 대단했다.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 못 친다.”

-조성진과 임윤찬 연주를 비교해 올려놓은 영상들이 많던데 기분 나쁘지 않나?

“상관없다. 카라얀과 번스타인도 비교하는데 제가 뭐라고(웃음).”

-그러나 조성진·임윤찬 같은 연주자들은 극소수다. 졸업 후 ‘예술 낭인’으로 살아가는 전공자들이 많다.

“제가 동료들에 비해 좀 더 잘나가는 건 맞지만 성공했다곤 할 수 없다. 운이 필요한 일인데 그게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전 항상 준비를 했던 것 같다. 기회가 있을 때 잡을 준비. 그런데 전 유명해지려고 음악을 한 건 아니다. 제가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지 못하고 다르게 풀렸어도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독한 음치


-얼마 전 TV 예능 프로에 나와 시청자를 웃겼다.

“클라리넷 하는 제 친구 김한은 재미없었다고 하던데(웃음).”

-정말 곱창류를 좋아하나?

“다 잘 먹는다. 맛있는 거 먹을 때 제일 행복하다.”


-엄마가 요리를 잘하시나?

“아빠가 잘하신다. 된장찌개부터 파스타까지.”

-첼리스트 장한나는 연주를 5초만 들어도 그 사람 실력을 알아본더라. 성진씨도 그런가.

“5초는 아니고… 2분?”

-장한나처럼 지휘 공부도 했다던데.

“2019년 통영음악제에서 지휘할 기회가 있었는데, 저는 목소리도 작고, 카리스마 있게 남한테 뭘 시키는 걸 잘 못하더라. 연주자들 눈치도 보게 되고. 데뷔하자마자 은퇴했다(웃음).”

-카네기홀이든, 200석 공연장이든 똑같은 자세로 연주한다는 말이 인상 깊었다.

“그날 제 연주를 처음 듣는 분도 있고, 마지막으로 듣는 분도 있을 테니까. 그리고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지만 이젠 유명 홀, 유명 오케스트라보다 어떤 사람들과 공연하느냐가 더 중요해졌다. 지난달 경주에서 우리 현악기 연주자들이 결성한 ‘발트 앙상블’과 협연하면서 정말 재미있고 행복했다. 마음에 맞는 연주자들과 음악을 만들어가는 기쁨을 만끽했다.”

-사람 만나는 것보다 집에서 연습하고 악보 공부하는 걸 좋아하는 범생이더라. 실연도 해보고 실패도 해봐야 연주가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슈베르트가 서른한 살에 죽었는데 연애를 거의 한 번도 못 했다. 그렇게 아름다운 곡을 쓴 분이. 고등학교 때 엄마에게 내 인생엔 스토리가 없는 것 같다고 했더니, 안 좋은 경험은 안 해도 된다고 하시더라(웃음). 60쯤 되면 내 음악도 드라마틱해지지 않을까.”

-한 달 휴가가 주어지면 남극 여행을 하겠다는 꿈은 여전한지?

“요즘 빙하가 녹고 있어 가지고(웃음). 또 한 달간 피아노를 안 치면 손이 굳어서 연주가 불가능해지는 문제도 있다.”

-김광석을 좋아하던데, ‘서른 즈음에’도 부를 줄 아시나?

“노래를 끔찍하게 못 한다. 거의 음치 수준이다.”

-명연주자도 음치일 수 있나?

“몇 분 뵀다(웃음).”

-조성진의 ‘이과적 답변’이 사람들을 웃게 한다.

“아버지가 공대 나오셨고 작은아버지도 공대다. 아버지는 피아노 연습 그만하고 나가 놀자고 하던 분이다.”

-파리에서 베를린으로 옮겨 6년째 살고 있다.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베를린 필하모니홀. 관객으로, 애호가로 연주 들으러 갈 때 가장 행복하다.”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자신의 장례식에 슈베르트의 현악 5중주를 연주해달라고 했다더라. 조성진이라면?

“음…. 지금은 좀 이르지 않을까?(웃음)”

-그럼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조성진은 오늘 어떤 곡을 연주할까?

“지구가 멸망한다는데 피아노를 치는 건 좀…. 그냥 가족과 맛있는 밥을 먹겠다(웃음).”

 

 


☞조성진

1994년 서울에서 태어나 예원학교, 서울예고, 파리국립고등음악원에서 공부했다.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3위를 거쳐, 2015년 쇼팽 콩쿠르에서 한국인으로 처음 우승했다. 베를린 필, 빈 필 등 세계 유수 오케스트라와 협연했으며, 쇼팽에서 모차르트, 드뷔시, 슈베르트, 헨델에 이르기까지 다수 앨범을 발표했다.

스스로 생 마감한 아빠…"나는 자살 생존자" 웹툰작가 외침

 

 

< 중앙일보, 전수진 기자 , 2023.0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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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살 생존자입니다』를 쓰고 그린 황웃는돌 작가는 2016년을 잊을 수 없다. 그해 봄, 아버지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도로에서 맞은 편 차량이 "깜빡이 없이 중앙선을 침범해 나를 향해 달려오는데 피할 길 없는" 사고 같은 사건이었다. 그래도 시간은 흐르고, 삶은 계속된다. 2020년, 그는 웹툰을 그리기로 했다. 그 나름의 애도의 방식이기도 했고, 어둠의 늪 속에 빠진 이들에게 "튜브가 되어 주자"는 마음도 있었다.

한국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압도적 1위다. OECD 회원국 평균 자살률은 10만명 당 11.1명(2020년 기준)인데 한국은 24.1명. 그 유가족인 자살 생존자들의 숫자는 그의 몇 배다. 이 책은 그들을 위해 황 작가가 던지는 구명튜브다. 책은 담담하게 절망을 마주하고 차분하게 희망을 바라본다. 다음은 지난 14일 그와의 만남 요지.

 


재미있는 필명, 아버지가 지어줬다고.  


"웃긴 이름으로 불러주면 사람들이 좋아할 거라며 붙여주신 이름이다. 이름 후보에 '당무계'도 있었는데, 성씨를 붙이면 '황당무계'가 된다(웃음). 가족 반대로 포기했다지만, 그만큼 재미있는 분이었다. 영화 제작사를 했는데 배우 이병헌 씨의 미국 진출 계기가 된 영화에도 참여했다."  

그가 이날 가져온 아버지의 추억이 담긴 유품 중엔 칸 영화제 공식 초청자들이 받는 ID카드도 있었다. 그의 영어 이름 '빅터(Victor, '승리자'를 의미)'가 선명했다. 그의 오른 손목에도 아버지 이름이 타투로 새겨져있다. 그러나 공익광고에 나올법한 따스한 부녀 관계를 으레 짐작하면 오산. 여느 인간 관계가 그러하듯 두 부녀의 관계는 복잡미묘했다. 아버지의 사업이 안 되며 알코올에 중독되고, 황 작가는 아버지와 불화를 겪으며 탈선했다. 아버지가 죽음 뒤엔 그가 남긴 빚을 갚으려 몸을 혹사하다 기절도 수차례했다.


어려운 이야기를 담담히 풀었는데.  


"지금의 '안정'이라는 텃밭을 가꾸기 위해 뼈를 깎았다. 아직도 완전히 극복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외상후 성장'이라는 단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만들며 가장 주의했던 포인트는 힘든 과정을 건강하게 전달하는 거였다. '제가 해냈으니 여러분도 힘내세요'라는 느낌은 피하고 싶었다. 극복 아닌 회복, 저항 아닌 수용의 과정이었다."  

 


아버지가 지금 여기 있다면. 


"(눈시울을 붉히며) 이제는 좀 편안했으면 좋겠다. 아빠가 좋아했던 햄버거와 단팥빵, 콜라 맘껏 드시면 좋겠다."  

 


'극단적 선택'이라는 말은 어찌 보나.  


"그 표현은 그 사람의 평생의 삶과 그 사람이 처했을 상황과 가졌을 마음을 납작하게 본다. 자살은 그냥 자살이다. 자살을 막기 위해 가장 먼저 물어봐야 하는 질문 방식은 '너, 자살하려는 건 아니지?'라는 빙빙 돌리는 접근법이 아니다. '너 지금 자살을 생각하는 거니?'라는 단도직입이다."  

 


자살률 높은 까닭은 뭘까.  


"사람마다 이유는 다르겠지만, '세상이 나에게 다정했던 순간이 있었더라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반대로 아버지는 평생 세상이 다정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세상이 그 다정함을 거둬간 경우다. 있었던 다정함이 없어진 절망감도 굉장히 컸을 터다. 이유는 다들 다르겠지만 '자살'을 죽음의 한 선택지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한국이라는 사회가 비교적 덜 다정한 환경이라서 아닐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손을 건네기엔 다들 여유가 너무 없으니까."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최근에 우연히 만난 할아버지 얘기를 대신 하고 싶다. 캔을 주워 생계를 잇는 분이셨는데, 갑자기 다가오더니 이렇게 말씀하더라. '세상은 개인의 사정을 이해해주지 않지만, 인생은 결국 강물처럼 빨리 지나간다. 작은 행복을 찾고 감사할 줄 안다면, 우리의 삶도 조금은 행복해질 수 있다'라고. 맞는 말 아닌가. 삶은 결국 강물이다. 흘러야 하고, 흘러간다."  

‘보통 사람들 시대’ 되살리기 나선 노태우 아들… “정치적 행보? 전혀 아니다”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원장

 
< 조선일보, 김윤덕 선임기자,  2023.07.17.  >

 

 


노재헌은 감기에 잔뜩 걸려 있었다. 우리는 에어컨을 끄고 마주 앉았다. 올 초 ‘보통 사람들의 시대 노태우센터’를 출범시킨 뒤 바빠진 모양이었다. 중국 출장을 다녀오자마자 ‘6·29 민주화 선언 36주년 기념 학술 대회’를 지난 6일 프레스센터에서 치렀다. “인터뷰를 무를 순 없겠지요?”라며 웃는 얼굴에 열감이 어렸다. 그를 만난 날은 ‘7·7 선언’ 35주년이기도 했다.

◇'베사메무초’가 음악외교 원조


-창밖으로 거대한 은행나무가 보인다.

“모교인 경복고 교정이다. 단풍 들면 정말 멋있다. 저 담장 밑에서 담배들 많이 피웠다(웃음).”

-청와대에서 열리고 있는 ‘우리 대통령들의 이야기’ 전시에 해설자로 깜짝 등장했더라. 노태우 대통령의 ‘퉁소’를 소개했다.

“정확히는 옆으로 부는 대금인데, 그 시절엔 다 퉁소로 통칭한 것 같다. 할아버지 유품인지, 집에 세 자루 있었는데, 기분 좋으시거나 술 한잔 걸치시면 연주하셨다. 꽤 잘 부셨다.”

-독학으로 배우신 건가?

“아버지가 일곱 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소 몰고 산에 올라 퉁소를 불며 그리운 마음을 달래셨다고 한다. 음악성이 있으셔서 작곡도 하고 노래도 잘 부르셨다.”

-’베사메무초’는 노태우 대통령의 애창곡으로 유명하다.

“진짜 애창곡은 88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잡고’였다. 시도 때도 없이 부르셔서 우리도 다 따라 불러야 했다(웃음). ‘베사메무초’는 아버지가 멕시코를 방문했을 때 시청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그 나라 가수와 함께 불러 난리가 났다.”

-윤석열 대통령의 ‘아메리칸 파이’처럼?

“그렇다. 음악 외교의 원조다(웃음). 물론 윤 대통령이 훨씬 업그레이드됐다. 잘 부르시더라.”

-청와대 생활은 어땠나.

“결혼하고 들어가 잠깐 살았다. 아버지 서재엔 늘 보고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그걸 밤늦게까지 읽으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직원들 모두 퇴근하고 나면 적막강산이었다. 물 하나 사러 나가기도 어렵고. 사람 살 곳은 아니었다(웃음).”

-대통령 아들들의 회동이 뉴스가 됐다.

“아버지 1주기 때 초청장을 보냈는데 고맙게도 그 먼 데(파주)까지 김홍업, 김현철 이사장님이 와 주셨더라. 박지만 회장님은 그해 11월 김영삼 대통령 7주기에서 처음 뵀는데, 정기적으로 만나자는 뜻이 모였고, 나이가 어린 제가 총무를 맡았다. 형님들이 밥만 축내지 말고 사회에 기여할 일을 해보자 해서 고민 중이다. 저 사람들 무슨 꿍꿍이야, 하며 우려하는 눈으로 보실 것도 같고(웃음).”

-최근 이승만 기념관 설립 추진위원회에도 합류했더라.

“제가 이승만 대통령님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초대 대통령 기념관이 없다는 건 건국을 부정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대통령이란 개인을 떠나서 그 시대를 상징하고 대표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와서 좀 도우라고 해서 감사한 마음으로 참여했다.”

 


◇ 국민에 대한 예의


-2019년부터 매년 5·18 민주 묘역을 참배하고 있다. 왜 그 시점이었나.

“5·18이 1980년의 일이니 거의 40년을 주저했던 일이다. 두렵기도 했다. 이게 맞는 건가도 싶고. 제일 큰 계기는 언제 돌아가실지 모를 만큼 아버지 병세가 위중해졌기 때문이다. 저는 5·18에 대한 아버지의 진의가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저라도 대신 사과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광주의 반응이 두렵지 않았나.

“5·18민주묘역에 들어설 때의 느낌이 지금도 기억난다. 이른 아침이었고 참배객이 거의 없었다. 만감이 교차하더라. 감사하게도 묘역에 계신 분들이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분향하고 참배한 뒤 기념관도 둘러보게 해주셨는데 마음은 무거웠지만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노 대통령은 아들이 참배하는 모습을 보셨나.

“TV도 못 보고, 말씀도 못 하는 상황이었다. 다녀왔다고 하니 눈만 깜박이시더라. 잘했다는 뜻으로 저는 받아들였다.”

-5·18 관련 연극을 관람하다 ‘반성 쇼 중단하라’는 항의를 받기도 했다.

“사전에 인지되지 않은 상황에 저란 존재가 훅 나타나서 언짢으셨던 것 같다. 당연한 반응이었고, 소란을 일으켜 죄송했다.”

-’노태우 회고록’에 적힌 ‘광주 사태의 진범은 유언비어였다’는 문장을 수정하라고 요구하던데.

“아버지는 취임 전부터 5·18에 대한 생각을 여러 번 피력하셨다.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한 글이 있는데 거기에 ‘광주 시민의 민주화 의지가 6·29 선언의 어머니였다’고 말씀하신 게 나온다. 실제로 취임하자마자 민화위(민주화합추진위원회)를 만들어 ‘광주 사태’를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정정했고, 명예 회복과 보상도 시작하셨다. 그래서 문제의 대목을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아버지가 쓴 회고록을 자식이 고치는 게 맞느냐는 고민도 있다.”

-6·29 민주화선언이 있던 날을 기억하나.

“뭔가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건 감지했다. 아버지도 평소와 달리 비장하셨다. 마치 전장에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필사즉생(必死則生)’이라고 쓰실 땐 정말 숙연했다.”

-5·18에 대한 노재헌의 기억은 어떤 것인가.

“대학교에 붙은 5·18 관련 사진들을 보면서 혼란스러웠다. 너무나 비극적인 일인데 아버지가 관련돼 있다 해서 번민이 많았다.”

-’임을 위한 행진곡’도 따라 부르시나.

“물론이다. 아버지가 늘 말씀하신 것이 ‘무한 책임’이다. 본인이 관련 있든 없든 역사적·도의적 책임을 한 번도 회피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6·29 선언이나 민주화에 더 전력을 기울이신 게 아닌가 생각한다.”

-노 대통령의 국립묘지 안장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돌아가시기 전부터 논란이 있었지만, 국론이 분열되는 걸 당신도 원치 않으셨고 국민에 대한 예의도 아니어서 저희가 먼저 파주 통일동산을 제안했다. 교하 노씨이고, 아버지가 파주에서 사단장을 지낸 데다, 통일동산도 재임 시절 조성한 곳이라 인연이 깊었다. 국가장으로 치러주셔서 감사할 뿐이다.”

-장례식에 박남선 5·18 시민군 상황실장이 왔더라.

“두 번째 참배하러 갔을 때 뵈었다. 정중히 사과드리자 흔쾌히 받아주시면서 아버지 돌아가시면 조문을 가겠다 약속했는데 그걸 지키시더라. 1주기에도 오셨다.”

-장례식 후 누나인 노소영 관장의 페이스북 글이 화제였다. ‘연희동 집은 동생에게 양보하고 나는 아버지가 덮으시던 곰돌이 담요를 가져왔다’는.

“누나가 욕심이 없다. 욕심이 없으니까 뭐 저러고 있겠지만(웃음). 저희가 딱 둘인데, 부모님이 가장 강조하신 게 우애였다. 우리가 죽더라도 너희 둘은 끝까지 사이 좋게 지내라고. 제가 누구보다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고, 앞으로 사회에서 많은 역할 할 수 있길 바란다.”


◇잊힌 ‘보통 사람들의 시대’


-’노태우센터’가 지난 2월 출범했다. 재평가 작업을 본격화하는 건가.

“떠들썩하게 기념사업을 하는 건 아니다. 어느 젊은 유튜버가 노태우 정부가 꽤 많은 일을 했던데 왜 다 묻혀 있느냐고 해서 충격을 받았다. 시간이 더 흘러 기억이 흩어지고 자료와 증언이 사라지기 전에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북방 정책, 88올림픽, 주택 200만호 공급, 범죄와 전쟁까지 업적이 많지만 ‘5.5 공화국’ ‘군정의 잔재’라는 평가도 받는다.

“엄청난 변혁과 혼란이 있던 과도기였다. 잘했다 못했다를 떠나 과도기에 어떤 정책이 펼쳐졌고, 어떤 리더십이 발휘됐으며, 무엇이 성공했고 실패했는지 분석해 남기는 일은 중요하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처럼 그때 던져진 경제민주화란 화두를 비롯해 남북문제까지 지금도 연결되고 반복되는 이슈들에 교훈을 얻고 대안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7·7 선언’을 한 노 대통령이라면 현재의 꽉 막힌 남북 관계를 어떻게 풀어갔을까.

“제가 아버지 묘소에 갈 때마다 빠짐없이 드리는 질문 중 하나다. 그때는 핵이 없었고 지금은 있으니 아버지의 답이 정말 궁금하다. 하지만 저는 핵의 유무보다 우리에게 통일에 대한 열망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할 것 같다. 실향민이 다 돌아가신 뒤에도 통일 의지가 남아 있을까가 핵보다 더 큰 문제라고 본다.”

-경제 민주화, 재벌 개혁을 보수 정권인 노태우 정부에서 시도했다는 것도 놀라웠다.

“분배와 성장을 함께 고려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됐다는 걸 아버지는 아셨다. 민주화 요구를 수용해가는 차원에서 진보적 성격을 아우르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본다. 재벌개혁도 재벌이 미워서가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시대’라는 캐치프레이즈처럼 노동자와 중산층 모두를 만족하는 사회로 가려면 재벌을 일정 부분 견제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약간의 혼란과 불협화음은 있었지만 분배와 성장을 균형 있게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노태우 정부 때 가장 많은 노사분규가 일어났지만 공권력을 투입하지 않았다더라.

“아버지는 공권력이 동원되면 다시 권위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는 우려를 갖고 계셨다. 또, 민주주의는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겪으면서 학습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노 대통령은 자신이 한 일 중 뭘 가장 자랑스러워했나.

“북방 외교 아닐까. 단순히 동구권 45국과 수교를 했다가 아니라 민족 자존, 자주 외교를 이뤘다는 점에서. 88올림픽 조직위원장을 맡아 세계를 다녀보니 대한민국이 경제성장은 했지만 민주화는 안 된 독재국가라는 인식이 많았다더라. 그래서 민주화에 매진하셨고 그걸 자주 외교를 통해 보여줬다며 뿌듯해하셨다.”

-회고록에 자신의 최대 과오는 비자금 사건이라고 썼더라.

“그 시절 관행이었다고는 하나 모두가 아버지 자신의 과오라고 여기셨고, 국민께 가장 미안해하셨다.”


◇ ‘물태우’에 동의하지 않아


-노태우 대통령과 마주 앉은 듯한 착각이 든다. 성격도 닮았나?

“둘 다 신중한 편이다. 아버지는 저보다 말씀을 훨씬 설득력 있게 하셨다.”

-김종인은 ‘노태우는 돌다리를 두드려보고도 건너지 않고 걱정하는 사람이었다’고 썼더라.

“신중하셨지만 한번 결정하면 단호히 밀고 나가셨다. ‘물태우’였다면 북방 정책을 비롯해 남북기본합의서, 주택 200만호 공급, 범죄와의 전쟁을 밀어붙일 수 있었을까.”

-노태우 대통령은 투병으로 20년 가까이 외부 활동을 거의 못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한 번도 쉬신 적이 없다. 그래서 퇴임 후 좀 편히 사시길 바랐는데 한국적인 상황이 그렇지 못했다. 출소 후 병까지 얻고도 견뎌내시는 걸 보면서 참 잘 참는 분이구나 생각했다.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 덕분이다. 두 분의 애틋한 이야기는 어머니가 써오신 일기를 토대로 언젠가 꼭 알리고 싶다.”

-노 대통령 기일이 10월 26일로 박정희 대통령과 같더라.

“인연이 이래저래 많으시다. 가까이서 직접 모신 적도 있고. 따님이신 박근혜 대통령도 늘 애틋하게 여기셔서, 박 대통령이 정치 일선에 나오기 전 음으로 양으로 도와드린 걸로 알고 있다.”

-김대중 정치학교 4기 수강생이다.

“생전에 아버지께서 김대중 대통령 얘기를 자주 하셨다. 정책적 협력도 많이 해주셨고, 꼼꼼한 데다, 본인 의사를 참 기분 좋게 전달하는 분이라고. 김 대통령도 남북기본합의서 등 아버지 때 정책을 계승해주셨다. 결석이 많았는데도 수료시켜줘서 감사할 뿐이다(웃음).”

-동아시아문화센터 원장으로 한중일 우호를 위해 노력하고 있더라.

“지난 봄에 한중일협력사무국(TCS)과 공동으로 세 나라 청년들을 5명씩 선발해 경주, 나라, 양주 세 도시를 다니며 문화 체험을 하고 교류했다. 서로 유사한 것, 다른 것을 보면서 삼국의 뿌리랄까, 아시아적 문화와 가치가 있다는 걸 깨닫는 시간이었다. 첨예한 정치 이슈들로 서로 싸울 땐 싸우더라도, 경제나 문화처럼 힘을 합쳐 융성한 시너지를 얻을 수 있는 분야는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도 그런 뜻이 아니었을까.”

-최근 행보가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좌절된 정치 활동 재개로 보는 시각이 있다.

“전혀 아니다. 그저 저같이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이 어떻게 사회에 기여해야 할까를 고민하고 있다.”

-그게 정치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능력이 부족하다. 뭣보다 얼굴이 두껍지 않고, 집요하지도 않고, 거짓말은 가끔 하는데 얼굴에 다 드러난다(웃음).”

-5·18 참배도 정치적 행보로 보는 이들이 있다. 억울한가.

“억울하지 않다. 제 진심이 더 중요하니까. 하하!”

 

 


☞노재헌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복고,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스탠퍼드대에서 정치학 석사를, 조지타운대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7년부터 장애인에게 음악의 길을 열어주는 ‘뷰티플 마인드’ 상임이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동아시아문화센터 원장으로 한·중·일 관계 개선에 노력하고 있다. 현재 통일미래기획위원회 위원이다.

‘광우병 연예인 40명’ 전모 최초 공개...‘가짜’와 싸우는 언론인 

 

서옥식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인터뷰

 

①1842개 ‘광우병동맹군’ 앞장 선 연예인들

②천안함 폭침, 원전 오염처리수 등 ‘가짜’ 행진

③조작·왜곡·강변 ‘원조’인 북한 닮아가는 한국

④국가정체성 배반한 ‘문재인 망언록’ 낼 것 

 

 

 

 

< 조선일보, 송의달 에디터,  2023.07.16. >

 

 

 

서옥식(徐玉植) 대한언론인회(大韓言論人會) 부회장은 거짓·왜곡·조작·날조·선동과 싸우는 전사(戰士)이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졸업 후 1973년 동양통신에 입사한 그는 외신부·사회부·기획취재부에서 통일혁명단 재건 음모사건, YH사건, 12.12 사태, 사북탄광 항쟁 같은 사건·사고 현장을 직접 취재했다. 이후 동양통신과 합동통신이 통폐합해 생긴 연합뉴스에서 정치부 차장, 방콕특파원, 외신1부장, 북한부장을 거쳐 김대중 정부 시절 편집국장으로 2년 넘게 일했다.

 

서옥식 대한언론인회 부회장이 2023년 7월 12일 서울 종로구 관훈클럽정신영기금회관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전남 광양에서 태어나 순천 매산고를 졸업한 그는 연합뉴스 편집국장을 지냈으나 임원 승진을 못했다. 서 부회장은 "김대중 정부가 능력 이하 인사들을 연합뉴스 사장으로 연이어 선임한데 대해 반발한 것이 당시 정권의 미움을 산 때문"이라고 했다. 2016년부터 연합뉴스 사우회(社友會) 회장을 맡았던 그는 노무현-문재인 정부 시절에도 일관된 입장을 견지했다. 

 

 

◇ 최근 10년 600쪽씩 넘는 단행본 3권

 

그는 재직 시절 후배들이 부담스러워할 정도로 ‘사실(事實·fact) 확인’을 강조하고 스스로 솔선수범(率先垂範)한 ‘확인 제일주의자’였다. 5.18 광주민주항쟁 당시엔 미국 UPI통신 서울지국의 제안으로 UPI특파원증을 발급받아 광주에 들어가 현지 상황을 생생하게 국내외에 알렸었다. 그러던 그는 퇴임 후 거짓·왜곡·조작·날조(捏造·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거짓으로 꾸밈)와의 전쟁에 본격 뛰어들었다.

 

2013년 낸 <오역(誤譯)의 제국>을 시작으로 2년 후 낸 <북한 교과서 대해부>, 2019년 발간한 <가짜뉴스의 세계>라는 단행본이 그 증거이다. 각각 600쪽 넘는 분량의 세 권의 책은 모두 사실’에 근거해 한국과 북한에서 벌어지는 왜곡·날조 사례를 분석하고 해부했다.

 

서 부회장은 ‘광우병(狂牛病) 촛불 집회’ 시작 15주년일인 2023년 4월 29일 개인 블로그에서 2008년 당시 “미국산 쇠고기는 광우병 쇠고기”라며 반(反)정부 시위 선동에 앞장선 40명의 연예인(演藝人) 명단과 발언을 집대성해 공개했다. 국내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그는 이 블로그에서 이렇게 밝혔다.

 

“검찰이 ‘광우병동맹군’ 1842개를 이끌고 2008년 여름 106일간 대한민국 수도(首都) 서울을 사실상 무정부상태로 만든 ‘촛불난동폭력집회’ 주동세력인 ‘한국진보연대’ 사무실을 압수수색해 나온 문건은 ‘미국산 쇠고기수입 재개 반대 촛불집회’ 목적이 대통령 선거에 불복해 출범 2개월된 이명박 정권을 타도하는 데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중략) 당시 세계 110개국이 수입해 먹고있던 미국산 쇠고기를 광우병물질이라며 거짓·왜곡·오역·조작 등 가짜뉴스를 만들어 공권력에 대적하고 국민을 선동하는 데 기름을 부운 사람들은 연예인들이었다.”

 

기자는 이달 12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소재 관훈클럽정신영기금회관에서 그를 만나 3시간 가까이 인터뷰했다.

 

 

 

- 어떻게 ‘광우병 선동 연예인 명단’을 작성했나?

 

“당시 많은 탤런트와 배우·가수·코메디언·아나운서 등이 1842개 ‘광우병동맹군’의 전위(前衛)선전선동대가 돼 시위대에 기름을 부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 공개조차 되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사람 이름과 발언을 내가 일일이 확인하는 작업을 거쳐 실명(實名) 명단과 발언 내용을 밝혀냈다. 부분적으로 나온 적은 있어도 광우병 연예인 명단의 전모(全貌)를 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반성없는 ‘광우병 연예인’들...단죄해야”

 

 

- 대표적으로 어떤 연예인이 무슨 말을 했나?

 

“광우병 사태 이후 김규리로 개명한 배우 김민선은 2008년 5월 1일 자신의 싸이월드 미니홈페이지에 ‘광우병이 득실거리는 소를 뼈째로 수입하다니...차라리 청산가리를 입안에 털어 넣는 편이 오히려 낫겠다’고 했다. 방송인 김구라는 같은 해 5월 3일 방송된 MBC 프로에서 ‘미국산 쇠고기를 먹느니 생삼겹살을 먹겠다. 우리나라 국교를 (소를 먹지 않는) 힌두교로 바꾸자고 했다. 그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으로 재직할 시절 ‘딴지일보’ 인터넷 방송에서 ‘ㅈ같은 새끼, 이명박 때문에 늦었어’ ‘교통체계를 x같이 해놔서 말야’라고 했다. 희극배우 겸 방송인인 김미화는 당시 MBC라디오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을 진행하면서 ‘일단 위기를 넘기자는 미봉책이라는 논란이 다시 커지고 있다...5공, 6공 시절의 경찰청장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요’라는 편파 발언을 했다.”

 

서 부회장은 이어서 말했다.

 

“방송인이자 MC인 박미선은 그해 5월 3일 MBC 프로그램 ‘명랑 히어로’에서 ‘미국 사람들조차도 미국산 쇠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호주산 쇠고기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곳이 바로 미국이라고 한다’는 가짜 뉴스를 퍼뜨렸다. 방송인 겸 뮤지컬 배우인 윤도현은 ‘10대가 촛불 들고 나서는 것 보고 우리가 너무 창피했다. 욕먹을 각오를 하고 나왔다’고 그해 5월 17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문화제에서 말했다.”

 

- 명단 공개후 두 달 넘게 지났는데 문제나 이의(異議)를 제기한 연예인이 있나?

 

“현재까지 단 1명도 없다. 이들 40명의 연예인들은 이후 지금까지 15년여 동안 그때 외친 대로 한 번도 미국 쇠고기를 먹지 않고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거짓·왜곡·조작으로 직접 선동하거나 선동에 동참해 큰 사회적 혼란을 불러일으키고도 반성은 커녕 멀쩡하게 활동하는 행태를 단죄(斷罪)해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다.

 

 

◇ “MBC 두 차례 사과방송...‘低質 프로’ 自認”

 

 

- 광우병 시위에 얼마나 ‘가짜’와 ‘왜곡’이 많았나?

 

“광우병 시위를 촉발시킨 결정적 계기는 2008년 4월 29일 저녁 방송된 MBC TV PD수첩의 ‘긴급 취재!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 편이었다. 4개월후인 8월 12일 밤 MBC는 뉴스데스크에서 ‘6개 부분 오역(誤譯)’을 했으며 ‘한국인의 인간광우병 발병 확률이 94%’라고 오도(誤導)한 점, 주저앉은 소를 ‘광우병 걸린 소’로 단정한 점 등을 공개사과했다. 대법원 2부가 2011년 9월 2일 상고심에서 확정판결을 내린 후, 엄기영 MBC 사장은 3일후인 9월 5일 밤 뉴스데스크 방송 첫머리에서 사과방송을 하고 거의 모든 일간신문에 사과광고를 실었다. 가짜와 왜곡, 날조 가득한 저질(低質) 프로를 내보냈음을 만천하에 인정한 것이다. 이런 가짜 방송에 온 국민이 속아 나라 전체가 엄청난 혼란을 겪고 에너지를 허비했다.”

 

- 30여년 기자로 일하다가 거짓과 왜곡 등과 치열하게 싸우는 이유가 궁금하다.

 

연합뉴스 퇴임 1년 전 경기대 대학원에 입학해 북한 정치·이데올로기를 파고 들었다. 그런데 공부를 할수록, 북한은 거짓과 왜곡·조작·날조로 세워져 버티는 나라라는 생각이 분명해졌다. 그래서 해방 70년을 맞은 2015년에 <북한 교과서 대해부>라는 두꺼운 책을 냈다. 100% 북한 교과서와 당의 공식 문건을 갖고 근거해 썼다. 북한 교과서는 세계 최고(最高)의 거짓말과 날조의 총집합체이다.

 

-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그렇나?

 

김일성의 항일 운동을 왜곡 날조한 것은 기본이고, 김정일이 태어난 날(1942년 2월 16일) ‘하늘에서 16명의 신선(神仙)이 내려와 절하고 큰 별이 떴다’는 표현부터 그렇다. 북한 교과서와 노동신문 등은 1948년 9월 조선 인민공화국 창건에 남한 유권자들이 참가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해 8월 북한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에 북한 유권자 99.97%가 뽑은 북측 대의원 212명과 남한 유권자 77.5%가 뽑은 남측 대의원 360명이 참가했다고 적고 있는데,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자 날조(捏造)이다.

 

 

◇“거짓·날조로 세워져 버티는 북한”

 

 

그의 이어지는 말이다.

 

뿐 만 아니다. 고구려 귀족의 무덤을 발굴해 놓고 거기서 ‘단군(檀君)의 뼈가 나왔다’면서 단군릉(陵)으로 조작했다. 평양 대동강을 인더스강, 황하강, 메스포타미아(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일대), 나일강과 함께 세계 5대 문명의 발상지라고 교과서는 기술하고 있다. 김일성의 항일 독립운동은 날조과장하면서 우리 민족 최대의 항일무장 투쟁인 청산리 대첩과 봉오동 전투는 교과서에 기록조차 않고 있다.

 

- 거짓말과 왜곡, 조작, 오보 등이 대한민국에서도 갈수록 늘어나는 것 같다.

 

“그렇다. 광우병 촛불 난동사태와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반대 시위를 시작으로 천안함 폭침,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전자파 성주 참외’, 최근엔 후쿠시마 원전 오염처리수 등을 둘러싼 가짜뉴스와 괴담이 끊이지 않고 난무하고 있다. 김대업이라는 사기꾼에 의해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가 좌지우지되는 일도 벌어졌다. 이런 가짜 뉴스와 괴담들은 인터넷을 통해 빠르게 널리 전파되고 있다.”

 

- 2013년에는 <오역의 제국 : 그 거짓과 왜곡의 세계>을 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가?

 

“통신사 외신부 기자로 13년 근무하면서 1만건이 넘는 외신 기사를 번역했다. 번역은 인류의 지적(知的) 성과물을 공유하는 수단이다. 한 사회의 지적 번영(繁榮)은 번역에 의해 촉발된다고 볼 수 있다. 외국어 뉴스를 우리말로 옮겨 전달하는 외신기자는 ‘번역가’이다. 그런데 너무 많은 오역이 한국 사회에 혼란과 낭비, 질적(質的) 하락을 낳고 있다.”

 

 

◇ “MBC 광우병 PD수첩 오역과 조작만 30여곳”

 

 

- 그런 주장을 입증하는 통계나 자료가 있나?

 

“조금 오래 됐지만 2004년 우리나라 영미(英美)문학연구회가 국내에 번역된 영문학 작품 573종의 번역본을 검토한 결과, 이 가운데 독자들에게 추천할만한 작품은 61종(11%)에 그쳤다. 소설의 경우 추천본이 전체 번역본의 6%였다. 대학교수 같은 지식인이 번역한 소설 100권 가운데 94권은 믿고 읽을 수 없는 책으로 판명된 것이다.”

 

서 부회장의 이어지는 말이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2008년 MBC TV의 PD수첩 광우병 프로그램만 해도 30여곳에 오역(誤譯)과 조작(操作)을 했다는 사실이 검찰 수사에서 드러났다. 미리 내린 결론에 꿰맞추기 위해 전혀 다른 ‘광우병’과 ‘인간 광우병’을 섞어 조작한 것이다. PD수첩의 오역·오보로 촉발된 광우병 촛불시위로 약 100일간 서울 시내 도심이 무법(無法)천지가 됐고, 이로인한 손실·손해 등 사회적 비용은 4조원에 육박했다.”

 

- 한국은 왜 이렇게 ‘사실(事實)’은 팽개치고 거짓말·왜곡이 넘쳐나는 사회가 됐나?

 

“공자(孔子) 얘기로 대답하고 싶다. 2500년 전 공자는 세상을 바로잡는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정명(正名), 즉 이름을 바로잡는 것을 꼽았다. 달리 말하면 이름이 바르지 않는 용어 사용이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말이다. 공자 사상이 지금도 동양사회에서 견고하게 군림하는 것은, 그가 정명을 통한 ‘개념’에 철저해서다. 공자는 ‘술이부작(述而不作)’, 즉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하되 지어내서 쓰지 않는다’는 정신에도 투철했다. 공자도 가짜와 거짓에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

 

- ‘정명’은 곧 ‘사실(fact) 존중’인 듯 하다.

 

“그렇다. 공자 자신이 ‘사실’과 ‘개념’에 철저하고 완벽을 기했기에 그의 사상이 지금도 빛을 발하며 인정받고 있다. 이는 오역, 왜곡, 거짓말, 날조를 당연시하는 우리 사회에 큰 경종(警鐘)을 던진다. 우리나라도 ‘사실이 이끄는 사회(fact-driven society)’가 돼야 한다. 소통 부재와 사회적 양극화, 엄청난 비용 낭비는 상당부분 ‘사실’ 확인에 게으르고 느슨한 악습(惡習)에서 기인한다.”

 

 

◇“韓 사기 범죄율 세계 1위...무고죄, 日 보다 38배 많아”

 

 

- 그래선지 한국인들은 거짓말에 관대하고 거짓말에 익숙한 것 같다.

 

“대한민국처럼 거짓말이 넘쳐나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법무부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의 사기(詐欺) 범죄 건수는 2011년 22만건에서 2020년 35만건으로 10년 새 60% 늘었다. OECD 회원국 가운데 한국의 사기 범죄율이 1위이며, 14세 이상 국민 100명당 1명꼴로 매년 사기를 당한다는 통계도 있다.(강도, 도둑보다 더 많다) 17세기 조선에 왔던 네덜란드 선원 하멜(Hamel)은 ‘표류기’에서 ‘조선인들은 남을 속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잘한 일로 여긴다’고 했다. 지금 한국 정치인들은 대놓고 국민을 속이고 있다. 승부 조작에 가담한 스포츠 선수와 사실 확인도 없이 툭하면 선동 시위에 나서는 연예인들도 마찬가지다.”

 

- 일본과 비교하면 어떤가?

 

“2016년 6월 14일 일본의 경제전문지인 ‘비즈니스 저널’은 한국 경찰청 통계를 인용해 이렇게 보도했다. ‘2013년 한국에서 위증죄로 기소된 사람은 3420명, 무고(誣告·사실이 아닌 일을 거짓으로 꾸미어 해당 기관에 고소하거나 고발하는 일)죄와 사기죄는 각각 6244명, 29만1128명이다. 한국과 일본의 인구 규모를 감안하면, 이는 일본 보다 165배 많다.’ 무고죄와 위증(僞證·거짓으로 증명함)죄 건수는 2007년 통계 기준 한국이 일본보다 24배, 38배 정도 각각 더 많다. ‘죽더라도 거짓말하지 말고 정직하자’고 외친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의 유지(遺旨)를 우리는 실행하기는커녕 거꾸로 가고 있다.”

 

서 부회장은 이어서 말했다.

 

“내 개인 블로그에도 올렸는데, 2017년 현대경제연구원은 가짜 뉴스로 인한 우리나라의 연간 피해액을 30조원으로 추정했다. 2009년 삼성경제연구소는 가짜 뉴스와 거짓말 등으로 인한 불신·혼란 같은 사회적 비용이 최소 82조원에서 최대 246조원이라고 밝혔다. 246조원은 그해 우리나라 예산하고 맞먹는 숫자이다. 거꾸로 말하면 정직하고 사실·진실 확인에 힘쓴다면 사회적 신뢰와 효율 상승 같은 긍정적 효과가 엄청나다는 얘기이다.”

 

 

◇“記者는 거짓과 사실 구별하는 전문가”

 

 

서옥식 부회장은 2014년까지 약 10년 동안 6개 국내 대학에서 초빙교수 등으로 정치학을 강의했다. 당시 그는 ‘서사실(徐事實)’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념의 좌우를 떠나 사실(fact·팩트)에 집요할 정도로 철저하다는 이유에서였다.

 

- 30여년 기자 생활을 했는데 ‘기자(記者)’라는 직업의 본질은 무엇인가?

 

기자는 전문가, 스페셜리스트(specialist)이다. 거짓과 사실을 구별해 주는 스페셜리스트여야 한다. 초등학생부터 90대 노인까지 모두 뉴스와 정보를 발신하는 시대에 기자가 차별화하는 유일한 방법은 얼마나 ‘사실 확인’에 철저하고 충실하느냐이다. 한때 우리 언론에 ‘~알려졌다. ~전해졌다’ 같은 표현의 기사가 많았다. 그러나 한국이 세계 10대 경제대국 된 이젠 재미없더라도 사실(팩트) 확인을 거친 것만 기사로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론이 더 큰 불신을 받아 사회에서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이다.”

 

그는 “1류 언론과 3~4류 언론의 결정적 차이는 사실 확인에 충실하느냐, 맥락을 깊이있게 제대로 분석하느냐에 있다”며 “디지털 시대에 기자는 무엇보다 ‘진실 확인자(Authenticator)’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 최근엔 후쿠시마 원전 오염 처리수와 서울~양평 고속도로를 둘러싼 괴담(怪談)이 분분하다.

 

“한국원자력연구원 연구팀이 문재인 정부 시절이던 2020년 8월 작성한 보고서는 ‘한국인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처리수의 영향을 받은 물고기를 섭취해 받게될 연간 방사능 피폭량은 0.0000000035mSv으로 흉부(胸部) X레이를 한 차례 찍을 때의 피폭량인 0.05mSv과 비교하면 1000만분의 1 정도’라고 밝혔다. 최근 어떤 연구소는 그 비율이 10만분의 1이라고 했고, 또 다른 곳은 1조(兆)분의 1이라고도 했다. 어느 쪽이든 국민 건강에 거의 무해(無害)하다는 게 과학자들의 일치된 연구 결론이다.”

 

- 그런데도 적지 않은 국민들이 괴담과 가짜 주장에 흔들리고 있다.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과 진실을 부정하고 정치 공세를 퍼붓는 정치인 탓이 크다. 하지만 주견(主見) 없이 거짓 주장에 동조하는 국민도 큰 문제이다. ‘분별력없는 국민이 정치와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 “북한 닮아가는 한국...가짜·조작·생떼 급증”

 

 

- 2000년대 들어 한국 사회도 북한을 닮아 가짜·조작·선동·왜곡, 생떼 쓰기가 급증하는 것 같다.

 

“동감이다. 원래 조작과 왜곡, 날조, 선동의 원조(元祖)는 북한인데, 이게 대한민국으로 전염 확산되고 있다. 이는 북한의 대남(對南) 공작에다 그를 수용하고 따르는 한국내 친북·종북(親北·從北) 세력이 호응하며 세(勢)를 불린 결과로 보인다. 문제는 이런 가짜와 조작, 왜곡, 선동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망치는 원흉(元兇)이라는 점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는 높은 사회적 신뢰와 건강한 개인의 자율에 기초하고 있는데 가짜와 왜곡, 선동은 이것들을 갉아먹고 해체시키는 암적(癌的) 존재이다.”

 

- 이런 현상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사회의 정신과 방향을 이끄는 언론인과 학자, 법률가, 지식인 등이 ‘사실’을 중시하고 철저해 ‘사실이 이끄는 사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대중적 인기로 먹고 사는 정치인과 연예인들도 따라하며 달라진다. 더 시급한 것은 자유·민주·인권을 중시하는 우파가 좌파의 본질과 속성을 꿰뚫고 새롭게 각성(覺醒)하는 일이다.”

 

 

◇ “좌파는 ‘거짓을 진실로 만드는 기술자들’”

 

 

- 무슨 말인가?

 

러시아 혁명의 주역인 레닌은 <제국주의론>에서 ‘공산주의자란 모름지기 법 위반과 거짓말(lies), 속임수(deceptions), 은폐(cover-ups)를 예사로 해야 한다’고 했다.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은 ‘좌파는 거짓을 진실로 만드는 기술자들’이라고 했다. 한국 사회에서 급증하는 가짜와 거짓말, 조작과 날조는 대부분 좌파의 작품이다. 우파가 이를 일과적 현상이라며 순진하게 대응하는 순간 몰락하게 된다. 지금은 ‘문화 전쟁’ ‘용어 전쟁’ ‘역사 전쟁’이 전방위로 펼쳐지는 숨가쁜 전쟁 상황이다.”

 

-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있나?

 

2010년 모 언론사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우리나라 20대 초반 세대는 ‘지난 100년간 한국의 훌륭한 인물’ 1위로 노무현 대통령을 꼽았다. 이에 대해 나는 그해 5월 노무현의 연설문집과 유고집 등에 근거해 그가 대한민국을 얼마나 폄훼하고 저주한 사람인지 분석한 책을 냈다. 지난 5년간 대한민국 국가 정체성을 파괴한 문재인 대통령의 실체를 해부한 ‘문재인 망언록(妄言錄)’을 준비하고 있다.”

 

서옥식 대한언론인회 부회장이 2014년에 낸 책. 2010년 출간한 <故 노무현 대통령의 말 말 말>을 개정증보했다. 사실(fact)의 기록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든 발언에 일자와 장소가 적혀 있다.

 

 

◇‘광우병 연예인 40명’ 전체 명단

 

배우 김규리(김민선), 방송인 김구라, 희극배우 겸 방송인 김미화, 배우 이동욱, 래퍼 겸 음악 PD 송백경, 탤런트 김가연, 탤런트 서민우, 방송인 하리수, 힙합가수 김디지(김종원), 가수 세븐, 가수 이하늘, 가수 김희철, 배우 김부선, MC 박미선, 가수 프라임, 배우 이준기, 배우 문소리, 배우 권해효, 가수 김상혁, 가수 메이비, 가수 이승환, 가수 김지우, 탤런트 박용하, 배우 최진실, 배우 함소원, 탤런트 지진희, MC 정재환, 탤런트 이주현, 가수 윤도현, 탤런트 유아인, 모델겸 탤런트 송미라, 탤런트 박철민, 방송인 배칠수, 가수 윤종신, 가수 이소라, 희극배우 박준형, 배우 김래원, 탤런트 맹봉학, 아나운서 허일후, 아나운서 오상진     [출처] 서옥

 

1.

"아들아, 된장물 한 사발만 있으면 나 이렇게 죽지 않을 듯한데"

 

< 연합뉴스, 윤근영 선임기자, 2023-06-26 06:00 >

 


"중국에서 장기매매 인신매매 조직에 잡혀 죽을뻔한 탈북 자매"
"동생들 살려달라면서 우는 북한 소년에게 돈줘서 다시 北으로"
"北주민 굶어죽지 않도록 우리가 도와야"…조명숙 여명학교 교장
 

 

"중국에서 만난 16세 북한 소년은 한없이 울었다. 팔다리는 뼈만 남았고, 송아지 같은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부모님은 식량난으로 죽고, 두 명의 동생이 굶고 있기에 북한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달러를 접어 비닐로 싼 뒤 소년의 항문에 넣어줬다. 죽지 말고 반드시 북한으로 되돌아가서 동생들을 먹이라고 했다. 중간에 돈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그 아이는 우리가 숨죽여 지켜보는 가운데 두만강을 건넜다. 우리는 혹시 그 아이가 총에 맞을까봐 노심초사했다"

조명숙 여명학교 교장(53)은 1993년부터 4년간은 이주노동자, 나머지 26년은 탈북민을 도왔다. 빈민가에서 자란 그는 사회 약자들과 고통을 같이하고자 했고, 그들을 구조하려 했으며, 희망을 주려고 노력했다. 특히 탈북민을 돕는 과정에서 전쟁도 아닌 시기에 우리 민족이 겪는 참상에 충격을 받았다.

지난 12일 서울 남산 기슭에 있는 탈북청소년 중고등학교 과정 대안학교인 여명학교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에서는 식량난으로 된장 한 사발, 달걀 하나가 없어 굶어 죽은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아버지, 어머니들이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모두 주고는 자신들은 결국 굶어 죽는 일이 적지 않았는데, 탈북한 아이들은 이 때문에 더욱 괴로워한다고 했다.

조 교장은 북한의 식량난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도 안 되고, 방치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죽어가는 우리 동포들을 보고도 모르는 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1970년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생 시절인 1993년부터 외국인노동자를 돕기 시작했고, 1997년에는 탈북민 지원에 나섰다. 2003년에는 탈북청소년들의 야학인 '자유터학교'를 열었고, 2004년에는 탈북청소년을 위한 대안학교인 여명학교를 제안해 교감으로 일하다 지금은 여명학교 교장으로 있다.


-- 고향은 어디인가.

▲ 서울 노원구 상계동 노원마을에서 4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때 노원마을은 빈민촌이었다. 하루 3끼 먹기가 힘들었다. 나는 어린 시절에 철이 없었기에 왜 밥을 안 주느냐면서 엄마한테 대들었던 기억이 난다. 충분히 밥을 먹지 못했던 나는 먹을 것을 지나치게 밝혔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내 별명이 돼지였다. 지금은 여명학교에서 '미스코리아 교장선생님'이란 별명을 갖고 있다. 당시 상계동 빈민촌 집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옆집에서 이야기하는 소리까지 다 들렸다. 우리 여섯 식구는 방 하나에 부엌이 달린 작은 집에서 살았다. 몸을 구부리고 자야 했으니 아침에 일어나면 허리가 아팠다.

-- 부모님은 어떤 분인가.

▲ 아버지는 월남전 상이용사였다. 금은세공, 개인택시, 트럭 운전, 옷걸이 장사 등 여러 사업을 하셨으나 실패하셨다. 평소에 내성적이고 말이 없는 아버지는 월남전 트라우마로 술을 마시면 난폭해져서 가족들을 괴롭혔다. 어머니는 막걸리 장사, 공장일, 구멍가게, 아파트 청소 등을 하시면서 자식들을 먹여 살렸다. 어머니의 막걸릿집 단골손님 중 한 분이 돌아가신 천상병 시인이었다. 어머니가 막걸리를 넉넉하게 드려서 그분이 단골이 됐다. 아주 어릴 때는 몰랐는데, 그분이 TV에 나오는 것을 보고 유명한 시인인 것을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천상병 시인은 사랑이 가득한 눈빛을 갖고 계셨다.

-- 어머니가 정이 많은 분이었나.

▲ 어머니는 인정이 많았다. 걸인한테 밥을 줘도 찬밥이 아닌 새로 지은 뜨거운 밥을 주셨다. 그래서 걸인들이 우리 집 앞에 줄을 서기도 했다. 나는 어머니한테 "다른 집처럼 우리도 찬밥을 주면 되지, 왜 뜨거운 밥을 주느냐"고 항의한 적이 있다. 어머니는 "그분들이 우리 집에서라도 대우받아야 하지 않느냐"라고 했다. 어머니가 구멍가게를 할 때는 빵을 공급하는 아주머니, 우편물을 배달하는 우체국 아저씨 등에게 공짜로 밥을 주기도 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를 치르느라 가게 문을 닫아야 했는데, 이런 분들이 오셔서 가게를 봐줬다. 매일 벌어 먹고살아야 했던 우리 집은 그분들의 도움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나는 이 일로 어머니로부터 정이 있고 따뜻하면서 재미있게 사는 법을 배웠다.

-- 본인의 중고교 학창 시절은 어떠했나.

▲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았고, 장난이 많은 아이였다. 그런데도 선생님들한테 이쁨을 받았다. 선생님들이 숙직할 때는 자장면을 시켜서 드시는데,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을 알고는 자장면을 사주시는 분도 있었다.

-- 어머니 대신에 술을 판 적도 있다고 하던데.

▲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머니가 1주일간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당시 아버지는 중동 건설 현장에 나가 계셨다. 우리 집은 어머니가 장사하지 않으면 굶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게 두려웠던 나는 어머니 허락 없이 막걸리를 팔았다. 그건 어렵지 않았다. 평소에 어머니와 함께 시장을 다녀봤기에 어디에 가서 무엇을 구입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빈대떡은 살짝 데워서 내놓으면 됐다. 나는 퇴원한 어머니에게 돈을 벌었다고 자랑했다. 칭찬을 할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그 가게를 곧바로 그만두고 공장에 취업하셨다. 막걸리 장사가 자식들의 교육에 안 좋은 영향을 줄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 중학생 시절 공장에서 일한 적도 있다고 하던데.

▲ 어머니는 막걸리 장사를 그만두고 반짝이는 종이를 만드는 작은 공장에 다녔다. 나도 중학교 방학 때에는 그 공장에서 일했다. 어머니와 한 조가 됐는데, 어머니가 좀 더 쉴 수 있도록 내가 열심히 일했다. 지금 나의 양쪽 엄지손가락에는 지문이 거의 없을 정도다. 그 공장 사장님은 어른보다 월급을 더 줄 테니 고등학교에 가지 말고 이 공장에서 일하라고 했다. 엄마는 그날로 공장을 그만두고, 아파트 청소 쪽으로 일을 바꿨다.

-- 사범대에 진학한 이유는.

▲ 나는 고3 시절에 뒤늦게 철이 들었다. 당시 우리 마을에는 대학에 가는 사람이 없었는데, 나는 사범대학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교사가 돼서 빈민촌 아이들한테 도움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 대학생 시절부터 외국인 이주노동자 돕기를 시작했는데, 그 계기는 무엇인가.

▲ 한번은 우리 집에 전화가 왔다. 파키스탄 노동자가 전화를 잘못 건 것이었다. 그는 전화를 끊은 뒤 다시 우리 집에 전화를 걸어서는 자기 친구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친구는 산재를 당해 병원에 누워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그때부터 나는 외국인노동자를 돕기 시작했다.

-- 탈북자를 돕게 된 계기는.

▲ 외국인노동자 상담센터에서 일을 하면서 탈북민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남편과 나는 상담센터 선후배였는데, 우리는 신혼여행도 중국으로 가서 탈북자들을 도왔고, 신혼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뒤에 곧바로 짐을 싸서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다. 나와 남편이 중국에서 활동했던 시기는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던 1997년과 1998년이었다.

-- 남편은 어떤 분인가.

▲ 현재 난민을 돕는 시민단체 '피난처'의 대표를 맡고 있다. 서울대 법대 79학번인 남편 이호택(64)은 대학교 때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했다. 3학년 때에는 사법고시 1차 시험에도 합격했다. 그런데 갑자기 오른손에 수전증이 오는 바람에 2차 논술시험을 제대로 치를 수 없었다. 나는 남편에게 굳이 사법시험을 계속 볼 필요가 없다고 조언했다. 그 이후 남편과 나는 탈북민 지원, 난민지원 활동을 같이했다.

-- 남편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어 결혼했나.

▲ 그는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시절에 얼굴도 모르는 선교사한테 신장을 하나 떼어줄 정도로 양심과 신념대로 사는 사람이다. 내가 왜 신장을 떼어줬느냐고 물었더니 "그 선교사한테는 생사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남편은 최근에 '2023년 창의적인 서울법대인상'을 받았다. 서울대 법대 동문회가 주는 상이다.

-- 중국에서 무슨 일을 했나.

▲ 두만강 등 국경지대에서 탈북민을 돕는 일을 했다. 두만강에는 중국으로 건너오다 숨진 북한 사람의 시체가 적지 않았다. 까마귀가 탈북민 시체를 뜯어먹는 것도 봤다. 까마귀가 잡식인 것을 그때 알았다. 더욱 황당한 것은 까마귀탕이 정력에 좋다는 이유로 중국에서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고객은 한국 관광객들이었다.

-- 백두산 기슭에서도 지원활동을 했나.

▲ 백두산에는 탈북민들이 숨어있곤 했다. 어떤 움막으로 그 지방의 조선족 동포 사학자가 나를 안내한 일이 있다. 움막 주변에 컵라면 빈 용기들이 널려 있었다. 그 사학자는 탈북 여성이 이곳에 머무르면, 중국 노총각들이 컵라면 용기에 국수를 담아 온다고 했다. 탈북 여성이 국수를 먹고 기운을 차리면, 돈을 조금 주고 성관계를 한다고 했다. 그 동포 사학자는 조선 민족이 전쟁이 아닌 시기에 이런 수치를 당한 적이 없었다면서 이런 참상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나는 힘닿는 데까지 그들을 돕겠다고 답변했다.

-- 민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탈북민의 한국행을 이끌었다고 하는데.

▲ 1997년에 13명의 탈북민을 이끌고 중국-베트남 국경선을 넘어 하노이의 한국 대사관에 인계했다. 그 과정에서 베트남군에 잡히는 등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다. 그런데 우리 대사관에서 조사받은 후 베트남 외무성에서 조사받던 탈북민들이 어떻게 된 것인지 베트남-중국 국경으로 보내지는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중국과 베트남이 4차례에 걸쳐 탈북민들을 상대방 국경 안으로 넘기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른바 '핑퐁난민사건'이다. 외환위기 등으로 혼란한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 국경지대로 갔다. 1년간의 노력 끝에 13명을 찾았고 11명을 한국으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나머지 2명은 중국에 남겠다고 했다.

-- 북한 '고난의 행군' 시절에 몇 명이 죽었나.

▲ 300만명가량 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장티푸스, 파라티푸스, 콜레라 등 수인성 전염병으로 숨진 사람까지 포함한 것이다. 당시에 굶어 죽은 사람보다 전염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한다. 물론, 전염병으로 죽은 것도 영양상태가 나빴기 때문이다.

-- '꽃제비'를 만난 일이 있나.

▲ 중국에 있을 때 16세가량의 북한 남자아이가 울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달려가 보니 팔다리가 삐쩍 말랐고, 끔벅끔벅하는 송아지 같은 눈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얼굴은 못 먹어서 부었고, 세포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푸석푸석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옥수수를 싣고 중국에서 북한으로 넘어온 열차가 있었다. 그 안에 몰래 들어간 그 아이는 바닥에 떨어진 옥수수 알갱이를 주워 먹다 자기도 모르게 잠들었는데, 그 열차가 중국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이었다. 그 아이의 부모는 식량난으로 이미 죽었고, 동생 두 명이 북한에 있었다. 극심한 기아 상태였던 그 아이는 굶고 있는 동생들을 살리러 북한으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한참을 울었다.

-- 그 아이를 어떻게 했나.

▲ 일단 음식을 먹인 뒤 호주머니에 약간의 돈과 사탕, 엿 등을 넣었다. 이런 것들은 아이가 먹을 게 아니다. 북한으로 가는 과정에서 빼앗길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빼앗길 것이 있으면 잡혔을 때 덜 맞는다. 우리는 비교적 규모가 큰 달러를 작게 접어서 비닐에 싼 뒤 그 아이의 항문에 넣어줬다. 실로 연결해 잡아당겨 뺄 수 있도록 했다. 우리는 이 돈을 빼앗기지 말고 북한에 들어가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우리는 그 아이가 두만강을 건너는 것을 숨죽여 지켜봤다. 다행히 그 아이는 총을 맞지 않고 무사히 건너갔다.

-- 된장 물 한 사발이 없어 죽었다는 사람도 있다고 하던데.

▲ 여명학교 학생 중 한 명이 전한 자신의 이야기다. 북한에 있을 때 아버지는 먹을 것이 생기면 먹지 않고 자식에게 줬다고 한다. 자식은 살려야겠다는 생각에서다. 오랫동안 굶은 아버지는 결국 쓰러지셨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물에 탄 된장 한 사발이면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 아들은 그 된장을 구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그 아들은 된장을 구해드리지 못한 데 대해 가슴을 치고 있다. 한 아이의 어머니는 수인성 전염병으로 돌아가셨다. 양양 상태가 안 좋다 보니 전염병에 쉽게 걸린 것이다. 그 어머니는 달걀 하나만 먹으면 나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어디에서도 달걀 하나를 구할 수 없었다.

-- 식량을 구하러 중국에 왔다가 인신매매 당하는 사람이 많았나.

▲ 지금은 중국-북한 국경을 넘어가기가 어렵다. 남-북한 휴전선처럼 철책이 이중삼중으로 처져 있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배고픈 사람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는 일이 많았다. 압록강과는 달리 두만강 폭은 좁은 곳이 20미터에 불과하고, 수심도 1미터 정도인 곳이 있다. 겨울에 얼음이 얼면 후다닥 뛰어가기도 했다. 두만강을 건너 중국 쪽으로 오면 인신매매단의 사주로 노인에게 성폭행당하는 경우가 있다. 여성이 노인에게 성폭행당하면 중국 농촌의 노총각에게 팔려나갈 때 그나마 낫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는 계산으로 이런 짓을 한다고 한다.

-- 인신매매를 당하면 주로 농촌으로 팔려 가나.

▲ 중국 농촌에 결혼하지 못한 노총각들이 많다. 인신매매단이 농촌 총각들에게 넘겨 강제 결혼이 이뤄진다. 이 경우에 중국인 남편은 아내가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집 밖으로 못 나가게 감시하기도 한다. 아내가 도주하거나 공안에 발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유흥업 쪽으로 팔려 가는 경우도 있다고 하던데.

▲ 어떤 탈북소녀는 벗은 몸의 모습을 인터넷으로 보여주고, 성매매도 하는 조직에 팔려 갔다가 도주해서 한국에 들어왔다. 같이 일하던 탈북인 언니가 건물 5층에서 탈출하려다 떨어져 죽는 것을 보고는 목숨을 걸고 결행했다고 한다.

-- 엄마와 아이가 동시에 팔려 가는 경우가 있나.

▲ 엄마와 아이가 두만강을 건너 탈북했다가 인신매매단에 붙잡히면 엄마는 농촌에, 아이는 자녀 없는 집에 각각 팔려 가기도 한다.

-- 남자 청소년은 노동 노예가 되는 경우가 있나.

▲ 남자아이가 노동 노예처럼 팔려 가기도 한다. 어떤 아이는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중국인이 자신을 짚 더미에 집어 던져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고 했다.

-- 이외의 다른 분야로 팔려 가는 경우가 있나.

▲ 인신매매단에 의해 장기 매매 조직에 팔려 간 청소년기 자매가 있었다. 신장 등 장기를 떼어 파는 조직이었는데, 간신히 탈출해서 한국에 올 수 있었다. 장기를 부분적으로 떼어가는지, 다른 장기도 떼어서 죽게 되는지를 몰라 엄청난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이 자매의 어머니는 중국에서 공안에 붙잡혀 북송됐고, 아버지는 식량난으로 돌아가셨다.

-- 지금도 탈북자들이 많은가,

▲ 많이 줄었다.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북-중 국경선 철책이 남북한 휴전선만큼이나 이중 삼중으로 돼 있기 때문이다. 국경을 넘다 발각되면 사살될 수 있다.

-- 북한에 식량난이 다시 시작됐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 한동안 북한에서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다시 식량 사정이 나빠진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에도 영국 BBC방송이 보도했는데, 그 내용은 어느 정도 사실인 것으로 나는 판단한다. 북한에서 굶어 죽은 사람이 자주 발견되는 곳은 기차역이다. 먹을 게 없어서 이동하려다 죽는 것이다, 배고픈 나머지 물을 많이 마셔서 배가 볼록 나온 상태로 죽기도 한다.

-- 북한의 식량 사정이 다시 나빠진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북한이 핵 개발을 강행하면서 경제적으로 봉쇄됐다. 이어 코로나 사태로 국경이 완전히 닫혔다. 그전에는 중국에서 북한으로 들어가는 것은 가능했는데, 이마저도 불가능해졌다. 북한은 '고난의 행군' 시절에 식량 배급체계가 무너졌다. 장마당에서 식량을 구입해야 하는데, 그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장마당 사정이 어려워진 것은 중국에서 물품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 북한의 식량난을 어떻게 해야 하나.

▲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북한 주민이 굶어 죽는 일이 없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가 식량을 제공하면 북한이 핵무기 개발 등에 사용할 수 있다고 해서 주저하게 된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의지를 갖고 대안을 찾아야 한다. 북한 주민이 죽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같은 민족으로서 그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이런 지원은 남북통일의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

 

 

 

 

2.

"北의 엄마가 간암이래요, 제발 남한의 좋은 약 좀 구해주세요"

 

 

< 연합뉴스, 윤근영 선임기자, 2023-06-30 >

 


"엄마처럼 죽지 않을 겁니다", "아버지 공개처형 직접 봤어요"
조명숙 여명학교 교장 "탈북 청소년, 엄마 간식 먹은 적 없어"

 


이는 남한에 온 북한 청소년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남한의 청소년들처럼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조명숙(54) 여명학교 교장은 지난 14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북한 출신 아이들은 부모가 굶어 죽고, 장마당에서 공개 처형되는 것을 목격했다고 전했다. 이들 아이는 어머니처럼, 아버지처럼 죽을 수는 없다고 판단해 목숨을 걸고 남한으로 왔다고 했다.

조 교장은 남한에 있는 청소년들이 북한에 있는 가족들과 통화하는 일이 있는데 어머니가 간암, 폐암, 유방암 등에 걸렸다면서 남한의 좋은 약을 보내달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이 약들은 의사의 처방 없이는 구할 수 없기에 슬프고 안타깝다고 했다.

여명학교는 서울 남산 기슭에 있는 탈북청소년 중고등학교 과정 대안학교다.

1970년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서 태어난 조 교장은 대학생 시절인 1993년부터 외국인노동자를 도왔다. 1997년에는 탈북민 지원으로 전환했다. 탈북민 문제가 외국인 노동자 문제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남편 등과 함께 1997년부터 2년간 두만강 변, 백두산 자락 등에서 탈북민을 구호했다. 민간인으로는 처음으로 탈북민 13명을 이끌고 베트남 주재 한국 대사관에 도착, 이들이 한국에 입국하도록 도왔다.

2003년에는 탈북청소년 야학인 '자유터학교'를 열었고, 2004년에는 탈북청소년을 위한 대안학교인 여명학교를 제안해 이 학교가 문을 여는 데 기여했다. 그는 이 학교 교감을 거쳐 지금은 교장으로 일하고 있다. 남편은 난민을 위한 시민단체 '피난처'의 이호택(64) 대표다.

조 교장은 2012년 제9회 촛불상과 제24회 아산상 사회봉사상, 2014년 제8회 통일문화대상을 받았고, 2015년에 아쇼카 펠로우로 선정됐다. 저서로는 '사랑으로 행군하다', '여기가 당신의 피난처입니다', '꿈꾸는 땅끝' 등이 있다.

--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 내가 결혼할 때 어머니는 가난했다. 그런데도 매달 5만 원씩 모아서 나와 남편에게 결혼반지를 해주셨다. 금가락지였다. 우리 부부는 그 금가락지를 끼지 않았다. 어느 날 어머니는 반지를 왜 안 끼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그냥 장롱에 뒀다고 했지만, 사실은 결혼식 직후에 팔았다. 중국에서 탈북민 지원활동을 하려면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넘어왔다가 되돌아가는 탈북민들에게 우리는 한국 돈으로 5만 원, 10만 원에 해당하는 달러를 손에 쥐여주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금반지를 팔지 않아도 활동에 큰 지장이 없었다. 반지에 담긴 어머니의 사랑을 간과한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든다.

-- 가족들한테 이기적이라는 말도 들었다고 하던데.

▲ 빈민가에 살았던 우리 가족은 내가 대학에 갔으니 집안을 일으켜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나는 대학 졸업하기 전부터 외국인노동자와 탈북민을 위한 삶을 살았고, 8년간 급여가 없었다. 여동생이 "우리 가족보다 외국인노동자와 탈북민이 더 중요하냐. 그런 일은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부자들에게 맡기고, 언니는 우리 가족을 도와주면 안 되느냐"고 했다. 가족으로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가족들에게 항상 미안하다.

-- 중학교 때부터 난민을 도왔다고 하던데.

▲ 여중학교 시절에 내 짝꿍이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일부러 웃기는 이야기를 했더니, 그 아이는 웃었지만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사정을 알아보니 그는 베트남 패망으로 떠돌던 보트피플 난민이었다. 부산을 거쳐 서울로 왔다가 빈민촌인 상계동으로 밀려난 것이다. 나는 그 친구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내가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아니었기에 가르쳐 주려면 나 먼저 공부를 해야 했다. 그랬더니 그 친구의 성적이 많이 좋아지지 않았지만 내 성적은 점프했다. 선생님들은 내가 커닝을 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해서 나를 교무실에 앉혀놓고는 시험문제를 별도로 풀도록 했다.

-- 외국인노동자 지원활동을 하면서 고용주들한테 미움을 받았을 듯한데.

▲ 나는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외국인노동자 상담센터에서 일했다. 외국인노동자들이 겪는 임금체불, 산재 피해 보상 문제 등을 도왔다. 한번은 한 외국인노동자가 빨리 본국을 방문해야 한다고 했다. 부모님 중 한 분이 돌아가실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장이 그 외국인노동자의 여권을 갖고 있으면서 내주지 않았다. 나는 그 사장을 찾아가 여권을 내주라고 요청했다. 그 사장은 "너는 예쁘장하게 생겨서 왜 외국인노동자와 붙어먹느냐. 저기 여관에 가 있으면 여권을 주겠다"고 했다. 대학생이었던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성희롱이었다.

-- 외국인노동자 산재보상 제도개선에 기여했다고 하던데.

▲ 지난 1995년에 23일간의 시위를 벌인 결과, 불법체류자라고 하더라도 산재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법이 바뀌었다. 그전에는 산재를 당해도 아무런 보상 없이 본국으로 쫓겨난 외국인노동자들이 많았다. 나는 필리핀, 남편은 중국으로 각각 가서 "법이 바뀌었고 3년 소급 적용이니 빨리 보상받으라"고 했다. 나는 필리핀에서 노동절 날 피켓을 들고 다녔는데, 이 나라의 한 방송국 프로그램 PD가 나를 두 차례 출연시켜줬다. 이 방송의 효과가 컸다. 나는 이 방송국으로부터 공로상까지 받았다.

-- 굳이 필리핀까지 가서 그런 활동을 한 이유는.

▲ 우리가 노력해서 이뤄낸 법 개정으로 많은 외국인노동자가 혜택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소급 적용 기간인 3년이 지나면 영영 보상을 못 받으니, 한 명이라도 피해자를 찾아내서 보상받도록 하는 것이 국격을 높이는 것으로 생각했다. 외국에 사는 우리 교민들을 위해서도 이런 일은 필요했다. 한국에서 일하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본국에 돌아가 한국 교민의 식당에 불을 지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들이 평생 한국을 원망하며 사는 것은 우리한테 이롭지 않다.

-- 일부 탈북민을 한국에 데려오는 것은, 중국 공안당국의 검거 강화를 초래해 오히려 중국에 있는 전체 탈북민을 힘들게 하고, 이념적 선전 목적으로 탈북을 기획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 현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중국 현장에서 탈북민을 직접 만나면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위험에 빠져 살려달라고 하는데, 모르는 체할 수 있나? 인신매매단에 붙잡혀 장기가 적출될 위험에 빠진 소녀가 남한에 보내달라고 하소연하는데, 외면할 수 있는가? 중국 농촌에 팔려 남편한테 두들겨 맞고, 공안에 언제라도 체포될 수 있는 탈북 여성에게 참고 살아보라고 할 수 있나? 중국 인신매매단에 의해 성매매 조직에 넘겨졌다가 목숨을 걸고 도망쳤는데,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 그냥 숨어 살라고 할 수 있나?

-- 중국의 농촌 총각과 결혼하는 탈북 여성의 나이는.

▲ 다양하지만 15∼16세 아이들도 있다. 너무 못 먹어서 성장이 안 돼 초등학교 4학년 정도로 보인다. 굶주려서 생리도 안 하는 아이들과 잠자리하려는 것을 보고 나는 화가 치밀곤 했다. 어떤 아이는 인신매매단에 붙잡혀 농촌 총각에 팔려 갔는데, 인신매매단이 아이의 가슴에 양말을 집어넣어 성숙해 보이도록 했다고 한다.

-- 탈북민이 중국 공안에 붙잡히는 것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나.

▲ 한 할아버지가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탈북민은 굶주렸기에 행색이나 얼굴에 금방 티가 난다. 그런 쇠약한 할아버지를 건장한 공안들 여러 명이 둘러싸고 잡아갔다. 한번은 중국 공안들이 우리가 거주 중인 아파트를 빙 둘러싼 적이 있다. 탈북민이 있다는 제보를 받고 체포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 아파트 3층에 탈북민들과 함께 머물고 있었다. 우리가 타깃이 아니었지만, 위험한 상황이어서 도주해야 했다. 탈북 아이와 엄마도 데리고 있었는데, 내가 아이를 등에 업고 뛰었다. 탈북 엄마가 굶주린 탓에 아이를 업고 뛸 수 없기 때문이었다.

-- 탈북민을 체포하는데, 중국 공안들은 왜 인력을 대규모로 동원하나.

▲ 공포심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다. 일종의 시위라고 볼 수 있다. 탈북하면 이렇게 붙잡혀 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농촌에서는 인신매매에 의해 중국 남성과 사는 탈북 여성을 공안이 파악해 놓고도 잡아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알고만 있다가 정부에서 포상금 공고를 내면 그때 잡아간다. 중국 공안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 중국이 탈북민을 잡아서 북한에 보내는데 열성적인 이유는.

▲ 북한 체제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탈북 사태가 커져 북한 체제가 붕괴하면 자국이 감당해야 할 비용이 클 것으로 계산하는 것이다.

-- 탈북자들 출신 지역을 보면 함경북도가 많은데, 왜 그런가.

▲ 함북 출신이 80% 이상이다. 이 지역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닿아있다. 압록강은 강폭이 넓어 넘어올 만한 곳이 적다. 두만강은 좁은 곳의 폭이 20m에 불과하고, 수심이 1m도 안 되는 곳이 있다. 강이 얼어붙으면 후다닥 뛰어가기도 했다. 함북 외의 다른 지역 출신이 탈북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강원도 출신이 탈북한 사례가 있다. 북한의 학교는 정기적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김일성 혁명유적지인 백두산을 방문하는데, 이때 숲으로 내달려 도주한 아이가 있다. 인솔 교사는 60∼70명의 학생을 관리해야 하니, 이를 막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 탈북자들 대부분이 여성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 탈북자들 가운데 여성의 비율은 80% 이상이다. 북한에서는 유교적인 가부장적 문화가 강하다. 가족을 대표해서 식량을 배급받는 사람은 가장인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사라지면 금방 티가 날 수밖에 없다. 아버지가 중국에 와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다. 어머니는 가정부, 식당 등의 일을 할 수 있기에 취업이 훨씬 쉽다. 한국에 와서도 남성보다는 여성이 빨리 적응한다.

-- 북한에서는 왜 가부장적 문화가 강한가.

▲ 수령체제 자체가 가부장적 문화이기 때문이다. 가정에서는 작은 수령인 아버지가 권위를 갖는다. 학교에서도 남학생들이 지도자가 되고, 여학생들이 따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남한에서 탈북 남성이 성희롱했다고 오해받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문화의 영향도 있다고 본다.

-- 탈북한 사람은 여러 번 탈북하는데, 그 이유는.

▲ 5∼6차례 탈북하는 사람도 있다. 중국에서 살아본 사람은 북한에서 지내기 힘들어한다. 중국에서는 굶주리는 일이 없고, 생활이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여성은 포승줄에 묶인 채 공안들에 둘러싸여 잡혀갔다. 그녀가 북한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그녀의 사촌 언니한테 들은 바에 따르면 놀랍게도 그 후 7년 만에 그녀가 중국에 다시 나타났다고 한다. 그녀는 다리를 절면서 중국에 왔는데, 북한당국이 그녀의 다리를 꺾어놨다고 한다. 북한당국은 그녀의 의지를 꺾지는 못한 셈이다.

-- 북송된 탈북민은 어떤 처벌을 받나.

▲ 북한으로 넘겨지면 집결소를 거쳐 노동단련대 또는 교화소(정치범수용소)로 가게 된다. 처벌 강도에서는 중국 공안이 작성하는 문건이 중요하다. 그 문건에 남한행을 시도했거나 종교를 믿는다는 내용이 적혀 있으면 북한당국이 안 봐준다. 장마당에서 공개적으로 총살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지금은 공개총살이 줄었는데, 이는 외국의 여론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생계형 단순 탈북자는 노동단련대에서 몇 개월 교육을 받고 나오기도 한다. 뇌물을 쓰면 처벌을 덜 받는 경우가 있다.

-- 공개총살을 직접 목격한 아이도 있나.

▲ 자신의 아버지가 총살당한 것을 본 아이가 있다. 아버지는 머리에 3발, 복부에 3발, 다리에 3발을 각각 맞아 몸이 산산조각이 났다고 한다. 이런 것을 목격하면 심각한 트라우마로 인해 오랫동안 정신적 고통을 겪는다.

-- 여명학교에서 힘들 때는 언제인가.

▲ 갑자기 아이가 울면서 학교 밖으로 뛰쳐나가는 경우가 있다. 엄마가 북한 또는 중국에서 붙잡혀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다. 엄마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이는 바들바들 떨면서 울지만 나는 껴안아 주는 것 외에는 해줄 것이 없다. 이럴 때는 가슴이 아프고, 안타깝고, 미안하다.

-- 아이들이 엄마처럼 죽지 않겠다고 이야기한다고 하는데.

▲ 나는 어릴 때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딸로 태어난 청소년들이 이런 말을 많이 한다. 탈북청소년들은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엄마처럼 죽지 않겠다"고 한다.

-- 북한에 있는 가족들이 약을 보내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던데.

▲ 한국에 온 아이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북한에 있는 부모와 통화하기도 하고, 돈을 보내기도 한다. 북한에 있는 어머니가 아픈데 돈이 없어 병원에도 못 간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엄마가 유방암, 간암, 폐암 등에 걸려 남한의 좋은 약을 보내달라고 한다면서 나한테 부탁하는 아이도 있다. 이럴 때는 난감하다. 암에 좋은 약은 항암제인데, 의사처방 없이는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북한 병원은 도움이 안 되는가.

▲ 북한 병원에는 의사는 있으나 약이 없다고 한다. 치료받으려면 환자가 밖에서 약, 수술 도구, 주사기 등을 구해서 병원에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의사들이 공식적 의료활동으로 먹고살기 어려워 집에서 몰래 불법 의료행위를 하기도 한다.

-- 한국에서 아이들이 피 뽑는 것을 싫어한다고 하던데.

▲ 건강검진을 위해 피를 뽑는 경우가 있다. 북한에서 온 아이들은 채혈을 무서워해서 도망치기도 한다. 북한에서 아이들은 수혈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부모로부터 많이 들었다고 한다. 영양제가 없는 북한에서는 환자가 아프고 기력이 부족하면 공동체 단위로 헌혈하도록 해서 환자에게 수혈한다. 수혈이 누구한테 도움을 준다면 피를 제공하는 사람한테는 손해가 된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것 같은데 어떻게 푸나.

▲ 내가 다른 사람에 비해 스트레스를 덜 받는 성격인 것 같다. 학교 아이들과 정신연령이 비슷해서 아이들과 함께 떠들고 논다. 일반적으로 교장 선생님이라고 하면 근엄하고 진지한 인상을 주는데, 나는 아이들과 장난치고 먹을 것을 만들어주곤 한다. 이렇게 생활하니 스트레스가 덜 쌓이는 것 같다.

-- 교장 선생님이 먹을 것을 만들어주나.

▲ 교장실이 아주 작은데, 아이들의 사랑방과 같은 곳이다. 나는 여기에서 달고나도 만들어주고, 호빵도 만들어 먹인다. 간식 시간에 아이스크림도 나눠주곤 한다. 아이들은 엄마가 만들어 준 간식을 먹어 본 경험이 거의 없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자식에게 해 주듯 이것저것을 만들어준다. 아이들은 사랑을 받으면 밝아지고 예뻐진다.

-- 본인의 삶의 원칙은 무엇인가.

▲ 잘살자는 것, 열심히 살자는 것이다. 나는 죽을 때 나의 삶이 부끄럽지 않고, 민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아이들 교육의 목표는.

▲ 나는 여명학교 아이들이 일류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잘 나누고, 사랑받고, 사랑할 줄 아는 아이들로 키워나가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북한 아이들의 성향은 어떤가.

▲ 마음이 따뜻하다. 힘든 삶을 살아와서 그런지 고난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도우려 한다. 튀르키예 지진이 발생했을 때 여명학교 학생들과 졸업생이 며칠 만에 500만 원의 성금을 모아서 주한 튀르키예 대사관에 전달하기도 했다. 어떤 아이는 자신이 받은 장학금을 모두 후원했다. 북한 아이들은 똑똑하다. 교육을 잘 받으면 한국의 좋은 일꾼이 될 수 있다. 남과 북을 모두 경험했기에 통일에도 좋은 인적자원이 될 것이다,

 

 

 

 

3.

"왜 북조선 좋아하시나요…한 달 살아보면 실상 아실텐데"

 

 

< 연합뉴스, 윤근영 선임기자, 2023-07-06  >

 


"직접 북한 주소 찍어주겠다…1주일 버티기도 쉽지 않을 듯"
"이 식물은 된장 풀어 먹고 저 풀은 소금 뿌려 먹으면 된다"
"탈북 청소년들에게 품 좀 내줬으면"…조명숙 여명학교 교장

 

 "남한 사람들이 북한 체제에 대해 좋게 이야기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네다.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모르고, 비현실적인 생각을 가진 것 같습네다"

조명숙(53) 여명학교 교장은 지난 26년간 탈북민, 탈북 청소년을 돌보고 교육하면서 그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적지 않게 들었다고 했다.

조 교장은 지난 3일 연합뉴스와의 추가 인터뷰에서 북한 아이들은 자신이 살았던 곳의 주소를 찍어주고 싶다면서 그곳에서 한 달간만 살아보면 실상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고 했다.

조 교장은 상류층이 살고 있는 평양 특별시와 북한당국이 외국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시용 아파트 등만 보고는 북한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고 했다.

 



-- 여명학교가 개교한 지 20년 됐는데, 그동안 학생들은 어떻게 한국에 오게 됐나.

▲ 경로가 다양하다. 주요 경로는 북-중 국경을 넘어 중국과 동남아 몇개국을 거쳐 태국에 도착한 뒤 한국으로 오는 것이다. 북한에서 직접 배를 타고 오기도 하고, 북-중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갔다가 배를 타고 한국에 도착하기도 한다. 휴전선을 넘어온 아이도 있었다.

-- 아기 때 탈북하는 경우도 있을 듯한데.

▲ 아기였을 때 엄마 품에 안겨 중국으로 넘어온 뒤 인신매매단에 붙잡히는 일이 있다. 엄마는 농촌이나 유흥업소에 팔려 가고, 아기는 자녀가 없는 중국인 가정에 넘겨지기도 한다. 이런 아기가 청소년으로 성장해서 한국에 오기도 한다.

-- 학생 중에 중국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꽤 있나.

 탈북 여성이 인신매매로 중국의 농촌 총각과 결혼하면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 집 밖으로 나오기 힘들다. 도주할까 봐 남편이 못 나가게 한다. 아이를 낳으면 '설마 아이가 있는데 도망갈까' 하는 생각에서 바깥출입을 허용한다. 그 틈을 타 한국으로 오는 탈북 여성이 있다. 아이까지 낳았지만, 아직 어린 나이여서 한국에 오면 공부하고 싶어 한다. 그런 앳된 여성들이 여명학교를 다닌다. 시간이 지나면 이들 여성이 중국에서 낳은 아기가 어느 정도 성장해 한국에 들어온 뒤 여명학교에 입학하기도 한다.

-- 한국에 온 아이들이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이유는.

▲ 북한에서 살다 한국에 온 아이들은 20세기에서 살다가 타임머신을 타고 21세기로 날아온 것 같다고 한다. 그만큼 환경이 급격히 바뀌는 것이어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는다.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할 때조차 당황한다. 커피를 달라고 하면 종업원이 어떤 종류의 커피를 원하냐고 묻는다. 탈북 아이들은 아메리카노, 카페라테 등을 모르기에 좀 더 큰 소리로 "그냥 커피 주세요"라고 한다. 여러 가지 신용카드 멤버십을 접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아이들도 있다. 북한에서 신용카드를 써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 북한 학교에서는 주로 무엇을 배우나.

▲ 남한에 온 아이들은 북한 교육에 분노한다. 여러 가지 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배워야 할 나이에 김일성 가족 우상화 교육만 받았다는 것을 깨달아서다. 북한에서 받는 교육은 북한을 제외한 세계 어느 곳에서도 써먹을 데가 없다고 한다. 자신이 경쟁력 없는 바보가 됐다고 개탄한다.

-- 아이들은 한국에서 영어 공부에 열성적인가.

▲ '자유터 학교'는 집중적으로 영어교육을 했다. 이곳은 북한 출신을 위한 야학이어서 직장에 다니는 청년, 대학생 등이 와서 영어 공부를 했다. 미국인 자원봉사자들이 영어 교사였다. 미국 사람은 나쁜 놈들이라고 배웠기에 학생들은 이들 교사에 적응하는데 힘들어했다. 어떤 학생은 미국인 교사를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5분간 노려봤다. 외국인 교사도 무슨 영문인지 몰라 같이 노려봤다. 나는 그 두 사람을 불러 화해시켜야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탈북 학생들은 "좋은 양키도 있네요"라고 하며 서서히 편견을 지웠다. 자유터 학교는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문을 닫았는데, 아직도 열지 못하고 있다.

-- 북한에서 누가 영어를 가르치나.

▲ 예전에는 영어가 선택과목이어서 안 배우는 학생들도 많았다. 요즘은 모든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영어 교사들이 외국 유학 경험이 없고, 영미 문화에 대해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 탈북 아이들은 바나나를 갈색으로 알고 있다고 하던데.

▲ 어떤 학생은 북한에서 파인애플이라는 영어 단어를 알았지만,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이 과일을 봤다고 한다. 어떤 학생은 바나나가 갈색인 줄 알았는데, 노란색인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고 했다. 북한 상점에는 바나나를 걸어놓는 경우가 있는데, 오래돼서 갈색이라고 한다.

-- 탈북 아이들이 한국에서 특히 힘들어하는 것은.

▲ 뭔가 결정하기 어려워한다. 북한에서 스스로 결정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당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다. 자아비판과 상호비판을 하는 '생활총화'를 많이 해봐서 비판은 잘한다. 대안을 이야기해 보라고 하면 답변을 제대로 못 한다. "그건 위에서 결정하는 것인데, 왜 저에게 물으세요"라고 한다.

-- 탈북 아이들의 장점은.

▲ 손재주가 좋다. 북한에서는 뭐든 직접 만들어 사용해야 하기 때문인 듯하다. 자신의 고통스러운 경험 때문에 고난받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도 뛰어나다. 간호사로 취업하는 아이들이 꽤 있는데, 보호자가 없는 중환자실에서, 의식 없는 환자를 정성껏 간호한다고 한다. 나는 이런 아이들이 한국을 살맛 나는 세상으로 만들 것이라고 본다.

-- 아이들이 한국에서 눈물을 흘리는 일이 많은가.

▲ 힘들 때보다 좋은 일이 있을 때 많이 운다. 여명학교 졸업생이 결혼식을 할 때 내가 신부 어머니 자리에 앉는 경우가 있다. 북한에 있는 엄마가 그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하는데, 가장 행복한 날에 엄마는 북한에서 고생하며 지내고 있으니 신부는 서러워한다. 그녀는 나를 보며 엄마 생각이 나서 울고, 나는 그런 상황이 안타까워 운다.

-- 주로 북한에 있는 가족 때문에 많이 우나.

▲ 북한에 있는 엄마가 간암, 폐암, 유방암에 걸려서 남한의 좋은 약을 구해 보내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의사 처방 없이는 구할 수 없으니 아이들은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어머니가 중국에서 공안에 잡혀 북송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들바들 떨면서 우는 아이도 있다. 중국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한테 전화를 걸었더니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엄마라는 욕설만 듣고 쪼그려 앉아 우는 학생도 있다.

-- 북한 문제에 대해 정치권에 도움을 호소한 적이 있나.

▲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석방 운동 지지 선언을 부탁하러 정치인들을 찾아간 적이 있다. 이때 그들은 "미얀마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권이 무서워서 외칠 수 없으니, 밖에서 도와줘야 한다"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한 달 후 미국에서 북한인권법을 발표했다. 나는 같은 인사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더니 그들은 예상과 달리 다른 반응을 나타냈다. 북한 안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결해야지, 왜 밖에서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정 간섭이라고 했다.

-- 남한에는 사상의 자유가 있는데, 사람에 따라서는 북한의 정치ㆍ경제ㆍ사회 시스템에 대해 정서적 호감을 가질 수 있는 것 아닌가.

▲ 그럴 수 있다. 그런데 탈북 청소년들은 그런 사람들이 남한에 꽤 있다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란다. 아이들은 "북한이 그렇게 좋으면 그곳에 가서 살아보면 좋겠다. 북한이 보내주는 곳 말고, 내가 살았던 곳의 주소를 찍어줄 테니 그곳에서 한 달만 살아보고 그래도 좋다고 느끼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아이들은 1주일도 버티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 북한 당국이 안내하는 곳은 위장된 것인가.

▲ 어떤 아이는 청진시 아파트에서 살았다. 외국인한테 보여주는 전시형 주택이었다고 한다. 외국인이 방문하면 아파트에 전깃불이 들어오지만, 그들이 떠나면 전력이 금방 끊긴다고 했다.

-- 탈북 아이들이 한국 정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박근혜 대통령 탄핵, 노무현 대통령 서거 등을 보면서 상당히 놀란 것 같다. 숙청이 일어나는 것은 아닌지, 빨리 안전한 곳으로 피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물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치 문제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탈북 아이들은 국민이 대통령과 정치인에 대해 욕하는 것을 보고도 충격을 받는다. 북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 북한 주민들의 당국에 대한 충성도가 많이 떨어졌다고 하던데.

▲ '고난의 행군'으로 북한당국은 식량 배급을 포기했다. 주민한테 알아서 식량을 구해서 살라고 했다. 당시 300만명이 굶어 죽거나 병들어 사망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당국에 대한 주민들의 충성도가 떨어진 것 같다.

-- 평양시민은 충성도가 강하지 않나.

▲ 평양 특별시에 산다는 것은 북한에서 큰 자부심을 가질만한 일이다. 북한의 상류층들이 주로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어떤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은 평양시에서 쫓겨난다. 한국에 온 북한 아이 중에서 한 명이 "내가 평양시 출신이다"라고 했다. 그때부터 그 아이는 분위기를 압도했다.

-- 북한 주민들은 북한 체제에 대해 왜 저항하지 않나.

▲ 보통 사람은 쉽지 않은 일이다. 반역하면 친가, 외가, 처가 등 삼족이 죽는데, 어떻게 저항하나. 자기 자신만 처벌받는 것이 아니다. 아무 죄도 없는 친척들이 자기 때문에 영문도 모른 채 야밤에, 트럭에 태워져 사라진다.

-- 북한 주민이 열렬히 북한 수령에 대해 환호하는 것은 가식적인가.

▲ 그렇지 않다. 어떤 아이는 2시간 동안 걸어서 김일성 생가에 도착해서 마당에 있는 나무의 잎을 자신이 가장 아끼는 손수건으로 닦아줬다고 했다. 남들한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라고 한다. 어릴 때부터 시작한 세뇌 교육의 영향이 이렇게 크다. 그렇지만 지난 90년대 중후반 '고난의 행군'을 거치고 공산당이 주민의 식량을 책임지지 못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뀐 듯하다.

-- 북한은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유지되고 있나.

▲ 북한이 '고난의 행군' 이후 주민들은 개인 밭을 일구어 농사도 짓고, 장마당에서 필요한 것을 구해 생활하니 초기 시장경제 체제라고 할 수 있다. 20년 전 여명학교 초기에는 학생들이 이자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은행에 돈을 맡기면 이자를 준다고 했더니, 아이들은 "은행이 도둑으로부터 우리 돈을 보호해주니, 돈을 맡기는 사람이 보관료를 내야지 왜 이자라는 돈을 받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돈을 장사꾼한테 빌려줘서 더 많은 돈을 벌게 해주니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했더니 아이들은 "왜 내 돈을 장사꾼한테 빌려주느냐"고 반문했다.

-- 자본주의 경험이 없으면 이해하기 힘들 듯하다.

▲ 아이들이 도저히 이해를 못 해서 나는 그냥 외우는 게 낫겠다고 한 적이 있다. 지금 여명학교 아이들은 이자의 개념을 너무 잘 안다. 북한에서 초기 시장경제가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북한에서는 힘 있는 당국자의 부인과 중국 화교들이 결합해서 물주(전주.자본가) 역할을 한다. 이자율이 10∼40%나 된다. 이러다 보니 자본주의처럼 빈부 격차가 커지고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한당국은 화폐개혁을 했는데, 이후 주민들은 북한 화폐를 신뢰하지 않고 위안화나 달러로 거래한다고 한다.

-- 북한에서는 뇌물을 주고받는 일이 많다고 하던데.

▲ 사람에게는 생존이 가장 중요하다. 청렴과 정직을 지키느라 자식을 굶겨 죽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 뇌물을 주고받는 일이 흔해졌다. 어떤 아이는 두만강을 건너왔는데, 업혀서 왔다고 했다. 누가 업어줬냐고 물었더니 북한군 경비병이라고 했다. 북한에서는 두만강 국경에서 일정 기간 군 근무를 하면 집을 산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 북한 학교에도 촌지가 있다고 하던데.

▲ 북한에서는 뇌물을 주는 것을 '고인다'고 표현한다. 여명학교에 있으면 가끔 북한 출신 학부모가 봉투를 주는데, 처음에는 편지가 들어있는 줄 알았다. 열어보면 5만원의 돈이 있어 되돌려주면 "그럼 선생님은 어떻게 먹고삽네까?"라고 묻는다.

-- 북한 주민들은 남한에 대해 많이 아는가.

▲ 중국에 넘어왔다가 다시 북한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있다. 남한에서 북한에 있는 가족들과 통화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그러다 보니 남한 소식이 전파될 수밖에 없다. 한번은 한 어머니가 어떤 일로 보위부원에 의해 끌려가면서 울었다고 한다. 그때 보위부원이 "그래도 당신은 희망이 있지 않으냐"라고 했다고 한다. 남한에 있는 자식이 돈을 보내오니, 살만하지 않으냐는 뜻이었다.

-- 남한 제품이 장마당에서 많이 팔리나.

▲ 한국산 내의가 인기가 많다고 한다. 어떤 학생은 한국 상표를 떼어내는 작업을 하다 탈북했다고 했다. 장마당에서는 장사꾼이 드러내놓고 팔지는 않지만 가까이 가면 귓속말로 "남조선 내의가 있다"고 말해준다고 한다. 한국산 내의는 북한산보다 색깔이 하얗고, 두께가 있어서 인기라고 한다. 가격은 북한산의 두 배 정도라고 한다.

-- 여명학교 학생들을 볼 때 가슴 아픈 일이 있다면.

▲ 학생들을 데리고 수목원에 간 적이 있다. 여러 가지 들꽃을 보며 꽃말에 관해 이야기를 해줬다. 아이들은 "이 풀은 소금을 뿌려 먹으면 되고, 저 풀은 된장과 함께 먹으면 맛이 있고, 이 풀은 독이 있어서 절대 먹으면 안 된다"고 했다. 한번은 한 아이를 데리고 한의원에 갔다. 잘 먹지 않고, 키가 아주 작은 아이였다. 한의사는 이런 아이는 처음 봤다고 했다.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어 있어 참혹하기가 이를 데 없다는 것이다.

-- 어렵게 탈북해서 남한에 와서는 숨지는 아이도 있다고 하던데.

▲ 야학 '자유터학교'를 운영할 때 26세의 탈북 청년이 레프팅하러 가자고 했다. 자기 생의 마지막으로 그걸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는 위암 말기였다. 나는 학생들을 모두 데리고 계곡에 갔다. 그런데 배가 뒤집혔고, 그 청년과 나는 뒤집힌 배의 에어포켓에서 목을 내놓고 간신히 숨을 쉬고 있었다. 그때 그 청년은 "제가 죽을 뻔했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한 달 후에 숨졌다. 목숨을 걸고 북한에서 탈출해 중국을 거쳐 한국에 왔는데, 암에 걸려 죽은 그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북한에서는 음식이 없어서 못 먹었는데, 남한에서는 음식이 많은데도 위암에 걸려 못 먹는 현실을 그는 죽기 전에 한탄했다.

-- 여명학교 아이들은 통일을 원하나.

▲ 간절히 원한다. 북한 고향에서 못 먹고 고생하고 있는 부모와 형제, 친구들과 함께 남한의 풍요로움을 나누고 싶어 한다. 이는 통일이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 탈북 청소년들한테 조금만 품을 좀 내줬으면 한다. 이 아이들을 우리의 부담 또는 소외계층으로 바라보지 마시고 우리 학교를 혐오시설로 보지 마셨으면 한다. '먼저 온 미래'로서 충분히 성장할 아이들이며, 역사에게 이들이 필요할 때 우리가 하지 못하는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아이들이다. 탈북 청소년들과 여명학교를 따뜻하게 품어 주셨으면 좋겠다


 “후쿠시마 怪談은 과학 아닌 사회문제, 객관적 증거 제시하되 국민 정서 고려해야”
과학커뮤니케이션 大家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

 


”정치 논리 따라 믿는 과학자 달라지면 안 돼
후쿠시마 오염수 방사능은 한국에 오지 않는 농도
진보 과학, 보수 과학 없고 객관적 팩트만 고려해야
일본 수산물 수입은 주권 문제, 방류수 안전과 별개”

 

 

< 조선일보,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2023.07.04  >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는 서울 광화문 조선비즈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객관적 증거로 괴담 수준의 주장에 대응하되, 국민의 감정을 고려한 설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오종찬 기자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는 서울 광화문 조선비즈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객관적 증거로 괴담 수준의 주장에 대응하되, 국민의 감정을 고려한 설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오종찬 기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632년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란 책에서 당시 주류 이론이던 천동설을 배격하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했습니다. 갈릴레이의 ‘디알로고(Dialogo·대화)’처럼 심층 인터뷰를 통해 세상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를 두고 한국이 두 갈래로 나뉘어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야당은 정부가 위험한 핵 폐수 방류를 방조하고 있다며 장외 투쟁에 나섰고, 정부 여당은 근거 없는 괴담(怪談)이 국민의 불안감을 증폭시켜 어민만 피해를 본다고 비판하고 있다. 야당이 “오염수가 안전하면 너나 마셔라”고 하자, 여당 의원은 우리 바닷물은 안전하다고 수산시장 수족관의 바닷물을 마시기도 했다.

문제는 객관적 정보를 제공하는 전문가인 과학자조차 입장이 다르다고 공격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야당 대표는 오염수 방류의 안전성을 강조한 영국 옥스퍼드대 명예교수에게 ‘돌팔이 과학자’라고까지 했다. 평생 물리학과 방사선의학을 연구한 학자도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고 매도당한 것이다. 한국 과학커뮤니케이션 학계의 대표적 학자인 이덕환(69)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는 “오염수 방류를 둘러싼 최근 논란은 과학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라며 “정치 논리에 따라 달라지는 과학은 없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 자문기관인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과 산업기술연구회 이사 등을 지냈으며, 과학 저술로 과학기술 대중화에 앞장선 과학자이다. 불화수소(불소) 누출, 요소수 대란 같은 사회 이슈에서 언론에 정확한 과학 정보를 전달하는 데 노력했다. 전국 61개 대학의 교수 225명이 참여한 ‘에너지 정책 합리화를 추구하는 교수협의회’(에교협)의 공동 대표로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맞서기도 했다.


◇“독은 양이 결정한다, 삼중수소 양은 문제없다”

–후쿠시마 오염수와 관련해 괴담이 판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번 괴담은 출처가 분명하다. 서균렬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명예교수가 발원지다. 오염수가 위험하니 바다에 방류하지 말고 석촌호수 같은 인공호수를 파서 넣으라고 하지 않나, 일본에서 농업, 공업 용수로 쓰라고 하지 않나 정말 말이 안 되는 말을 쏟아냈다.”

–한 야당 국회의원은 ‘서 교수가 원자력 전공자인데도 오염수 안전에 크게 우려하고 있으니, 이런 분을 정부의 일본 후쿠시마 원전 시찰단에 포함해야 한다’고도 했다.

“야당 대표가 매도한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는 평생 물리학과 방사선의학을 연구한 석학이다. 오염수를 처리하면 안전하다며 ‘1L라도 마실 수 있다’고 말해 돌팔이 소리까지 들었다. 우리 국민에게 마시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만큼 안전하다고 강조했을 뿐이다. 그런데 서균렬 교수는 과학이나 상식으로 볼 때 분명 잘못된 말을 했는데도 서울대 교수를 지냈다고 믿는다고 한다. 누가 더 뛰어난 학자인가.”

–서균렬 교수가 잘못 말한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에는 한반도에서 잡은 물고기는 안전하다고 하더니, 지금은 완전히 입장을 바꿨다. 후쿠시마 사고 직후 더 많은 방사성 물질이 바다로 왔는데 그때는 안전하고, 지금은 그보다 훨씬 적은 양이 오지만 위험하다고 하면 말이 되나. 그때나 지금이나 기준치보다 훨씬 낮은 농도가 나와 문제가 없다.”

–일본이 방류하는 오염수는 처리해도 방사성 물질인 삼중수소는 그대로 남지 않나.

“로마 시대 의학자인 파라켈수스는 ‘용량이 독을 만든다’고 했다. 독이라도 양이 적으면 문제가 없다. 해류는 오염물질을 분산하지 모으는 게 아니다. 일본 정부가 오염수를 처리하고 바닷물로 희석해서 방류하면 수개월 뒤 해류가 우리나라에 온다 해도 삼중수소가 처음 버린 양의 수억분의 1에 불과하다. 10분의 1, 100분의 1이라면 삼중수소가 돌아온다고 할 수 있지만 1억분의 1, 1조분의 1은 온다고 표현하면 안 된다. 국민에게는 후쿠시마에서 방류한 삼중수소가 태평양에 흩어져서 우리나라에는 오지 않는다고 설명해야 한다.”

–서균렬 교수는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지 말고 인공호수에 모아두거나 농업, 공업 용수로 쓰라고 했다.

“물은 바다로 흘러간다. 농업, 공업 용수로 써도 다 바다로 간다. 인공호수에서 물이 새지 않거나, 증발하지 않게 할 방법은 없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통제를 벗어난 방류가 돼 문제가 된다. 액체 오염물질은 희석해서 강이나 바다로 방류하는 것이 정석이다. 하수 처리도 그렇게 한다. 일본 정부의 통제된 방류 계획을 거부할 근거가 없다.”

–런던 협약이 방사성 물질의 해양 투기를 금지하고 있지 않나.

“런던 협약은 1972년 해양 쓰레기 투기를 막는 협약으로 영국 런던에서 채택되고 1996년에는 의정서로 승격됐다. 우리가 지금 하수를 처리해서 바다로 방류할 때도 런던 협약을 참고한다. 그전에는 그냥 바다에 버렸다. 런던 의정서가 방사성 폐기물을 바다에 버리지 못하도록 했는데, 폐기물 여부를 정하는 잣대가 방류 기준이다. 지금 후쿠시마 저장 탱크에 있는 오염수는 방류 기준을 넘어 바다에 버리지 못한다. 하지만 이를 정화해서 희석한 다음에 방류하면 제재할 근거가 없다.”

–삼중수소 농도가 낮아도 생물에 축적되면 위험할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생물축적은 먹이사슬을 통해 독성물질의 농도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참치 지방과 뼈에 중금속이 축적되는 것을 말한다. 삼중수소는 단독으로 자연에 없고 물 분자 향태로만 존재한다. 물은 우리 몸에 축적되지 않는다. 삼중수소는 생물축적의 대상물질이 아니다.”

◇ “진보의 과학, 보수의 과학 따로 없다”

–야당에서는 후쿠시마 오염수의 위험성을 말하는 과학자들도 있다고 주장한다.

“야당 의원이 서균렬 교수가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명예교수인데 안 믿을 방법이 있느냐고 했다. 그러면 평생 물리학과 방사선 의학을 연구한 옥스퍼드대 명예교수는 왜 안 믿나.”

–정치적 입장에 따라 과학자들도 갈리지 않나.

“직설적으로 말하면 비과학 분야에서는 국민 건강을 챙기는 진보의 과학이 있고, 경제적 이득을 앞세우는 보수의 과학이 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과학 전공자들은 팩트는 하나라고 본다. 아직 모르는 것이 있지만 밝혀진 과학은 신뢰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다. 정치 따라 과학이 다른 것은 아니다.”

–과학계 밖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는 것 같다.

“신문에 후쿠시마 방류수가 안전하다고 하는 과학이 있고 그렇지 않다는 과학이 있다는 취지의 글이 실렸다. 내가 과학커뮤니케이션 관련 논문에 ‘교과서적 과학이다’고 했더니 ‘교과서에 실렸다고 다 맞느냐’는 사회과학자의 심사평이 있었다. 그런데 역사적 평가와 달리 과학은 현재 기준으로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 있다.”

–오염수를 희석하면 마시겠다고 한 과학자들이 나오고 실제 여당 의원이 수족관의 바닷물을 마셨다.

“음용수 수질 기준에 맞는다는 취지로 한 말로 안다. 오염수를 희석해서 방류하면 그 기준에는 맞는다. 수도법은 다르다. 상수원은 공장이나 농장 근처에 개발할 수 없다. 국제우주정거장에서는 우주인의 소변을 정화해서 식수로 쓴다. 기술적으로는 어떤 물도 음용수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수질 기준이 맞는다 해도 후쿠시마 오염수는 수도법의 상수원 기준에 부합하지 않아 마시면 안 된다. 그리고 바닷물은 사람이 마실 수 있는 물이 아니다.”

–정부 여당에서는 일본보다 중국 원전에서 나오는 삼중수소가 더 많다고 반박한다.

“올바른 접근이 아니다. 중국도 일본과 같은 기준으로 봐야 한다. 문제는 중국 원전에서 발생하는 삼중수소의 절대량이 아니라 방류하는 수질이다. 양이 많이도 충분히 희석해서 내보내면 문제가 없다. 규정을 지키지 않을 때 남에게 시비를 걸 수 있지, 내가 싫어한다고 시비를 걸 수는 없다. 중국의 위험을 강조하면 해류가 우리 쪽으로 오는데 우리 어민은 어떻게 하나.”


◇“과학 아닌 사회문제, 다른 방식 접근해야”

–정부 여당은 괴담에 국내 어민과 횟집만 죽는다고 수산물 소비 운동을 벌이고 있다. 맞는 방법인가.

“과거에도 먹거리 논란이 벌어질 때마다 공무원들이 직접 먹으면서 안전하다고 홍보했다. 하지만 이른바 ‘먹방’이 논란을 잠재우는 효과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오염수 논란이 과학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인가.

“작년 12월 일본 후쿠시마 중앙TV에서 나를 인터뷰하러 왔다. 일본 기자가 ‘오염수 방류는 과학의 문제이니 과학자들이 나서서 잘 정리하면 끝날 문제’라고 하더라. 그때 사회문제이지 과학자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했다. 과학자가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식으로 도와줄 수는 있지만, 과학자가 주역이 돼서 문제를 해결할 게 아니라는 말이다.”

–사회문제라면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하나.

“이 문제는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가 문제가 되는 사안이지 과학적 팩트가 이해력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 정부가 처리 방법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자료를 공정하게 공개하며, 앞으로 30년 동안 계획대로 성실히 수행하겠다는 의지와 방안을 분명하게 밝힐 때 해결이 되는 것이다.”

–정부도 그렇게 하겠다고 수차례 밝혔지만, 국민은 여전히 불안해한다.

“내 생각엔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후쿠시마 근해가 일본의 황금 어장이다. 일본 수산물 절반이 거기서 나온다고 한다. 일본이 방류하는 오염수가 안전하다고 하니 후쿠시마 수산물이 다시 수입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오염수를 기준 이하로 처리해서 방류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금지는 우리 주권이다. 안전해도 국민이 원치 않으면 수입하지 않아야 한다. 정부가 그 원칙을 처음부터 강조했어야 한다.”

–후쿠시마 항만에서 잡힌 우럭에서 기준치 180배나 되는 방사성물질인 세슘이 나왔다고 한다.

“사고 직후 나온 방사성 오염물질이 앞바다 개펄에 쌓여 있기 때문이다. 우럭은 방사능 오염을 측정하기 위한 표지 생물로 둔 것이다. 정기적으로 잡아서 오염 상황을 본다. 그물로 막아 놓아 밖으로 나가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도 원전 바로 앞의 내항에서는 상당 기간 오염된 물고기가 나올 것이다. 이런 정보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해야지 괴담만 말하면 안 된다.”

 
◇“전문가가 사회문제 볼 능력 갖춰야”

–설득의 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말인가.

“과학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증거의 설득력이 있고, 대중을 설득시키는 설득력의 크기도 있다. 두 가지가 항상 같이 가지는 않는다. 과학적으로 명백한 증거가 반드시 대중에게 설득력이 큰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하면 사회적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합의에 이르도록 할 수 있나.

“전문가가 먼저 사회문제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물론 오염수 처리 과정을 알고 얘기를 해야 한다. 그러나 국민이 무엇 때문에 불안해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일본이 하루에 방류하려는 120톤은 400명이 쓰는 수돗물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태평양 앞에 100가구가 사는 아파트를 세워두고 거기서 나오는 하수를 처리해 버리는 정도이다, 그걸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문제가 된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명박 정부 때 광우병 파동을 기억하나. 그때 한미 정상이 골프를 치면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결정했다. 당시 한우 농가 보호가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였다. 국민은 축산농가의 생존권이 달린 문제를 너무 가벼이 처리한 데 분노한 것이다. 단순히 괴담이라 하지 말고 그런 문제를 챙겨야 한다.”

–오염수 방류 논란이 후쿠시마 원전 사고 처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데.

“오염수를 방출해야 그 공간에서 원전 폐로 작업을 할 수 있다. 오염수만 내보내면 문제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원자로를 해체하고 방사성 폐기물을 꺼내야 한다. 더 위험한 일들이 많이 남아있다. 처음에 차분하게 이런 내용을 설명해야 했는데, 지금은 오염수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됐다. 분명히 말하지만, 오염수를 다 방류한다고 해서 사고 지역이 다시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는 곳이 되는 게 아니다.”

 

 


☞이덕환

서울대 화학과를 나와 미국 코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34년간 서강대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교수를 지내고 정년 퇴임했다. 대한화학회 회장(2012)을 역임했고, 지난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반대하는 ‘에너지 정책 합리화를 추구하는 교수 협의회(에교협)’ 공동 대표를 맡았다. 국내 대표적인 과학 저술가로 과학기술・교육・에너지・환경・안전・보건의료 등 사회 전반에 대해 3000여편의 칼럼・학술 논문을 발표했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와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를 비롯해 교양 과학 서적 30여권을 번역했고, 과학기술훈장(웅비장)・대한민국과학문화상・과학과사회소통상(한국과학기자협회) 등을 받았다.

김정운 교수 “창조적 사고 막는 취업용 대학, 이제 없어져도 된다”
[김윤덕이 만난 사람] ‘창조적 시선’ 펴낸 김정운 교수


< 조선일보, 김윤덕 선임기자,  2023.07.03.  >

 

 


문화심리학자에 나름 화가이며, 현직은 어부(漁夫)라고 주장하는 김정운이 돌아왔다. “말도 되고 글도 되는데 마스크까지 되니 이를 어쩌냐”며 ‘자뻑’을 일삼던 그의 뽀글파마엔 흰머리가 부쩍 늘었다.

야한 농담이 줄고 사뭇 진지해진 건 10년에 걸쳐 ‘대작’ 집필에 몰두한 탓이다. 그는 ‘창조적 시선-인류 최초의 창조학교 바우하우스 이야기’란 제목의 책을 들고 서울에 나타났다. 무려 1000쪽이 넘는 이 벽돌책의 테마는 ‘창조성(creativity)’. 김정운은 “이 책을 읽으면 당신 삶이 매우 창의로워질 것”이라며 어깨에 힘을 빡 줬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다 대학에 사표를 던지고, 일본으로 가 그림을 배우더니, 여수에서 배로 1시간 20분 들어가는 섬에 정착한 그가 100년 전 독일 학교 ‘바우하우스(Bauhaus)’에 꽂힌 전후 사정을 들었다.

 


◇ 소니에서 바우하우스로


-요즘 시대에 1000페이지 책이라니.

“바우하우스를 건축·디자인 학교로만 아는데, 내가 공부해보니 그 바운더리가 훨씬 넓었다. 지식 혁명의 근원이 거기 있었다.”

-10년이나 걸릴 일인가.

“14년밖에 존속하지 않은 학교라 그런가 자료가 많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 직후 바우하우스(1919~1933)가 처음 세워진 독일 바이마르를 시작으로 데사우, 베를린을 훑으며 흔적 찾기에 나섰다. 헌책방에서 찾은 보석 같은 책들을 섬으로 보내는 기쁨이 어마어마했다.”

-집(haus)을 짓다(bau)란 뜻의 ‘바우하우스’는 현대 건축과 산업디자인의 뿌리로 여겨진다. 어쩌다 바우하우스에 꽂혔나.

“내가 ‘애플빠’다. 삼성은 왜 애플처럼 못 만드는지 항상 의문이었다. 아이폰은 그저 스마트한 기기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월터 아이작슨이 쓴 평전 ‘스티브 잡스’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프롬 소니 투 바우하우스(from Sony to Bauhaus)’. 좋은 건 죄다 베끼는 잡스가 소니를 버리고 바우하우스를 따라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애플 디자인이 바우하우스에 기반했다는 건가.

“애플 디자인 책임자였던 조너선 아이브가 독일 가전 회사 브라운 제품의 디자인을 대놓고 흉내 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브라운의 미니멀하고도 세련된 디자인은 대부분 디터 람스의 작품인데, 디터 람스의 계보를 찾아 올라가면 그 끝에 바우하우스가 있다.”

-그 전엔 바우하우스에 관심이 없었나?

“베를린에서 유학할 때 집에서 시내로 가려면 ‘바우하우스 아카이브’란 건물을 반드시 지나쳐야 했다. 13년 유학했으니 매일 왕복으로 1만 번 지나친 거다. 그런데 한번도 들어가볼 생각을 안 했다. 그저 독일 기능주의 건축의 시조(발터 그로피우스)라는 사람이 설계한 건물인데, 현재 슬럼화돼 사회 문제가 돼가는 아파트 단지를 고안해낸 주범들이라며 독일 사람들도 욕만 해댔다(웃음).”

-그럼 오로지 애플과 잡스 때문에 바우하우스에 빠졌다는 건가.

“전작 ‘에디톨로지’에서 나는 스티브 잡스가 지닌 천재성의 핵심이 ‘편집’이라고 주장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고, 그냥 뚝 떨어지는 것도 없다. 이미 존재하던 것들을 재구성해 남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편집해 내는 능력이 창조다. 잡스는 그 분야 달인이었다.”

-스티브 잡스의 창의력이 바우하우스와 무슨 상관인가.

바우하우스야말로 전혀 다른 영역의 지식이었던 ‘예술’과 ‘기술’을 디자인과 건축이라는 실용 지식으로 편집해 낸 창조의 아이콘이기 때문이다. 흔히 4차 산업혁명으로 부르는 지식 혁명은 20세기 초 바우하우스의 예술과 기술의 통합에서 시작됐고, 이는 애플의 마우스, 아이폰의 터치를 거쳐 챗GPT로 이어지고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챗GPT의 기원이 바우하우스라고?

“마우스가 그 시작이다. 인공지능 연구가 급발전한 계기는 GPU, 즉 그래픽 처리 장치 덕분인데, GPU의 개발은 GUI라는 컴퓨터 화면의 직관적 운영체제가 있어 가능했다. 화면에 그래픽으로 표현된 상징을 마우스로 클릭하면 해당 명령이 즉각 수행되는 GUI가 처음 탑재된 컴퓨터가 1983년 애플 리사다. 애플은 마우스에서 한 발짝 더 나간다. 마우스의 클릭을 손가락의 터치로 바꾼다. 아이폰으로 시작된 스마트폰이다. 엄마가 아기를 어루만지듯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원초적인 수단으로 기계를 만질 수 있게 한 거다. 촉각으로 일으키는 시각과 청각의 변화! 이 같은 ‘감각의 교차 편집’을 처음 실험하고 가르친 곳이 바로 바우하우스였다.”


◇ 당신도 창조적 인간이 될 수 있다


-책의 타이틀은 ‘창조적 시선’이다.

“챗GPT로 완전히 다른 세상이 온다고 난리다. 창조적 인간이 돼야 살아남는다고 겁준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창조적이 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희는 죽었다 깨도 다비친처럼, 스티브 잡스처럼 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바우하우스는 누구나 창조적 인간이 될 수 있고, 심지어 창조성을 가르칠 수 있다고 믿었다.”

-어떻게 가르쳤길래.

“칸딘스키, 클레 같은 최초의 추상화가들이 바우하우스 선생들이었다. 사진기의 출현으로 대상을 실물 그대로 재현하는 그림(구상화)에 의미가 없어지자 이들은 음악처럼 점, 선, 면, 색채를 음표 삼아 그림(추상화)을 그리기 시작했다. 학생들에게도 ‘색을 듣고 소리를 그릴 수 있는’ 감각의 교차 편집을 가르쳤다. 예를 들면 엉겅퀴를 손으로 만지고 그 따가운 느낌을 색과 형태로 표현하게 하는 식이다.”

-의식의 흐름대로 따라가는 ‘네트워크적 사고’도 창조력의 중요한 요소라고 썼더라.

“추상화와 함께 윌리엄 제임스의 ‘의식의 흐름’, 프로이트의 ‘자유연상’이란 개념이 등장한 시기가 1920년대 바우하우스 시기와 겹친다. 이때만 해도 창조적 사유는 천재들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우스가 등장하면서 보통 사람도 창조적 사유를 할 수 있게 됐다. 클릭만 하면 전혀 다른 영역으로 휙휙 건너뛰게 하는 마우스는 다양한 정보와 지식들을 연결해 편집하는 ‘네트워크적 사고’를 하게 했고, 거기서 창의적 콘텐츠가 속출했다. 연역법, 귀납법처럼 ‘트리(tree) 구조적 사고’를 하는 산업화·민주화 세대와 달리 MZ세대는 해시태그(#)로 끝없이 이어지는 정보를 빨아들여 새롭게 편집하는 네트워크적 사고를 한다. 그래서 세대 간 소통이 어려운 거다. 심리학자 입장에서 볼 때 오늘날의 갈등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세대 갈등이 핵심이다.”


◇ 대학, 없어져도 된다


-그 창의성이 대한민국에선 문화 영역에서만 발현된다.

“최근 독일에 가보니 베를린자유대학 한국어과 경쟁률이 어마어마했다. 내가 공부할 땐 한국어과 자체가 없었다. 지금은 한국어과 떨어지면 일본어과에 간단다. 여기에 엄청나게 창조적인 과정이 숨겨져 있다. 창조는 편집인데, 편집할 단위들이 많을수록 그 레벨이 높아진다. 서양 문화를 흉내 내고 따라잡기 위해 마구 흡입해온 콘텐츠와 우리 전통 문화적 콘텐츠가 결합되고 편집되면서 K팝, K드라마가 폭발한 것이다. 세계에서 유학생 수가 가장 많은 나라는 중국, 인도 순이지만 인구 대비로 따지면 한국이 압도적 1위다. 그만큼 전 세계를 다니며 다양한 콘텐츠를 축적했다는 뜻이다. 이걸 우리 식으로 해석할 문화적 자신감이 생기면서 이날치 밴드의 ‘범 내려온다’ 같은 걸작이 쏟아졌다.

-그런데 왜 유독 대중문화에서만 창의가 꽃피었을까.

정치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기 때문 아닐까분단된 한국 사회의 창의를 방해하는 건 적(敵)을 상정한 이분법이다. 그런 점에서 난 소위 386으로 불리는 민주화 세력이 빨리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교육의 창의성도 바닥이다.

“트리 구조의 계층화된 지식을 주입하고 외우게 하기 때문이다. K컬처로 성공한 스타들이 대부분 학교 공부엔 흥미가 없던 아이들이다. 그런 점에서 난 이제 대학이 없어져도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 대학은 철저하게 트리 구조다. 대학 안에 인문대 사범대 공대가 있고, 인문대는 다시 사회학과 심리학과 국문학과 등으로 세분화된다. 창의를 저해하는 지극히 근대적이고 낡은 형태다. 지식 생산의 권력이 더 이상 대학에 있는 것도 아니다. 논문 말고도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발표할 수 있는 매체가 널렸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창의적 영역을 개척해 나가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저 성실하기만 한 기업 임원들이 젊은 직원들의 창의를 잘라버린다고도 했더라.

“한국 디자인이 망하는 이유는 디자이너들이 창조적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줘야 할 사람들이 직접 디자인을 하려고 달려들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이 코너에서 충주시 홍보맨 인터뷰한 걸 봤는데, 그가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자유를 준 충주시장이야말로 메타적 창조자라고 생각한다. ‘비너스의 탄생’ 등 보티첼리의 그림이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꼽히게 된 건 존 러스킨이라는 비평가가 그 속에 숨은 창의성을 알아봐줬기 때문이다. 나라를 이끄는 정치 지도자들에게 꼭 필요한 능력이다.”


◇ 인생 절정기에 섬으로 간 까닭


-작업실 이름이 미역창고(美力創考)더라. 왜 그렇게 창조에 목을 매나.

“재미있으니까. 내가 섬에서 혼자 사는 이유도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조해 내기 위해서다. 인류가 이렇게 오래 살았던 적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늙어가야 행복한지 제대로 보여준 사람이 없다. 그래서 내가 실험하고 있다.”

-대학교수를 관두고 일본으로 미술 유학 다녀와 섬으로 들어간 때가 인기 절정기였다.

“최고 몸값의 강연자로 TV도 나가고, 광고도 찍고, 정치권 콜도 받았지만 이게 내가 원하는 삶이었나 회의가 들더라. 언제부턴가 내가 대중이 원하는 말만 하고 있다는 자괴감도 들었다.”

-외롭지 않은가?

“섬에 들어가 살겠다고 하니 너 같은 관종이 혼자 어떻게 사냐고들 걱정하더라. 그런데 난 이미 교토 촌동네에서 유학할 때 죽도록 외로워봤다. 오히려 고립은 쓸데없는 관계들을 끊어낼 기회다. 섬에서 살지 않았으면 이번 책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하루 일과는 어떤가.

“눈 뜨면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을 한다. 나체로(웃음). 그런 다음 어젯밤 잡은 물고기로 아침을 지어 먹고 낮 1시까지 글을 쓴다. 오후엔 주로 그림을 그리고, 고기는 밤에 잡는다. 낚시는 물때가 중요한데, 만조 되기 두 시간 전부터 만조 이후 두 시간까지가 제일 잘 잡힌다. 가끔 여행객들이 들어와서 낚시를 하는데 한심하다. 고기 잡힐 시간도 아닌데 종일 낚싯대를 걸고 있다가 허탕만 치고 쓰레기만 버리고 간다.”

-섬에서는 시간이 한없이 느리게 갈 것 같다.

“천만에다. 일주일만 살면 혓바닥에 바늘이 돋는다. 밥해야지, 설거지해야지, 청소해야지, 고기 잡아야지, 책 읽어야지, 문짝 고쳐야지. 그래서 주말엔 여수 시내에 나가 하루 쉬어줘야 한다. 사우나도 하고 짜장면도 먹고.”

-다음 책은 슈베르트라던데.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노래도 아름답지만 사랑을 한 번도 이뤄본 적 없는 슈베르트에게, 학창 시절 선생들한테 미움만 받은 내 처지가 이입되더라. 그 책은 정주에게 헌정할 거다.”

-고인이 된 김정주 넥슨 회장 말인가?

쉰에 자유인이 된 나처럼 정주도 딱 50세가 되면 회사 팔고 다른 삶 살아볼 거라고 큰소리쳤었다. 바이올린 연주자이기도 했던 정주와 콰르텟을 만들어서 전국 순회 공연을 하는 게 꿈이었는데 먼저 갔다.”

-이번 책은 아버지에게 바쳤다.

집필 막바지에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세 사람이 잇달아 사라졌다. 이어령, 김정주, 그리고 아버지. 고집세고 재수없는 날 사랑하고 인정해준 몇 안 되는 분들이다. 아버지는 모두가 섬 살이를 반대할 때 헤밍웨이도 바닷가에 집을 짓고 살았다며 응원해준 유일한 분이다. 근데 책이 좀 어려운가?

-머리에 쥐날 정도는 아니다. 바우하우스 로드를 따라 여행하고 싶게 하는 책이다.

“장담하건대, 바우하우스를 이렇게 통찰한 책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내가 쓰고도 감동했다.”

-’자뻑’은 불치병인가.

“하하하! 그래서 사람들이 날 싫어한다. 특히 아저씨들.”

 


☞김정운

1962년생으로 고려대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2년 명지대 교수를 그만두고, 일본 교토 사가예술대에서 그림 공부를 한 뒤, 여수의 한 섬에서 살고 있다. ‘에디톨로지’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남자의 물건’ 등을 집필했다.

원조 ‘집밥의 여왕’ 장선용 “情 중에 밥정만 한 게 어딨어요”
[아무튼, 주말]
‘며느리에게 주는 요리책’
83세에 미국에 한식 전파

< 조선일보, 박은주 부국장 겸 에디터,  2023.06.17.  >

 


김옥길(1921~1990) 이화여대 총장과 동생 김동길(1928~2022) 박사 남매는 서울 대신동 자택으로 지인을 초청하면 꼭 냉면을 대접했다. 꾸미가 없는 ‘누드 냉면’에 편육 한 접시나 녹두부침이 전부였지만, 권력가부터 이화여대 경비원까지 이른바 ‘옥길 면옥’에서 밥 먹은 걸 자랑하는 사람이 많았다. 김 총장이 별세하자 지인들은 국수틀을 뽑아 이화여대 국문과 59학번 장선용 집으로 가져갔다. 생전 김 총장도 “이거 받을 사람은 장선용밖에 없다” 했다. 예상대로 장선용은 손목이 나가도록 메밀가루을 반죽해 냉면을 뽑아댔다.

아들이 결혼하자 미국 사는 며느리를 위해 장씨는 편지마다 조리법을 적어 넣었다. 이걸 지인들이 좋다며 복사해 나눠 보면서 ‘매일 해 먹는 요리책’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후 이화여대 출판부가 1993년 정식 출간했다. 제목이 ‘며느리에게 주는 요리책’. 파란이자 선풍이었다. ‘시어머니=무서운 사람’이라는 도식을 깨고 다정한 말투로 며느리에게 음식 비법을 전수했다. 요리책이지만 사진이 없었고, 그럼에도 레시피가 정확해 30만부가 팔렸다. 이후로 ‘에게 주는 요리책’ 식의 제목 짓기가 유행했다. 53세 주부 장선용은 당시 거의 최초의 ‘집밥의 여왕’이었다.

그 후 30년, 이 책을 본 요즘 사람 반응은 이렇다. “결국 자기 아들 밥 해주라는 소리잖아.” “아들에게 주는 요리책은 왜 없어요?”

◇ ‘반가 음식’을 집으로 들여온 원조 ‘집밥의 여왕’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에서 30분 거리 소도시 프리몬트(Fremont)로 장선용(83)씨를 만나러 갔다. 페이스북 메신저로 약속을 청하자 즉각 답이 왔다. ‘점심 밥때 맞춰 오라’는 주문이었다. “얼굴만 보면 뭐 해. 밥을 같이 먹어야지.” 식탁에 앉자 구절판과 돼지갈비 강정, 소고기 구이, 오이소박이와 배추김치가 나왔다. 후식은 “새벽에 쌀가루 갈아 후딱 쪘다”는 동부 계피를 얹은 메떡. 반가(班家) 음식을 내놓는 한정식 식당보다 만듦새가 더 야무졌다.

 


-모든 재료를 이렇게 곱게 채 쳐서 볶은 구절판은 정말 오랜만에 봅니다.

“구절판 음식은 재료는 임의대로 하더라도, 오이 당근까지 곱게 채 썰어 볶아서 내야 해요. 요샌 구절판에도 생야채를 턱 내놓는 식당이 많더라고.”

-음식을 어머니께 배우셨나요?

“부모님(부친이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와 사촌지간)이 신의주 분인데, 원래 이북 사람들이 먹는 데 열심이잖우. 어머니는 교육열이 남달랐는데도, 메주 뜨고 장 담그는 날, 김장 날은 학교에 보내질 않았어. 무엇보다 강인희 선생께 10년 배운 게 결정적이었어요.”

강인희(1919~2001) 선생은 흥인군 이최응(흥선대원군의 형)의 종부 김정규 여사, 순정효황후의 올케 조면순 여사에게 반가 음식을 배웠다. 1978년 명지대 가정학과 교수에서 퇴임한 후 ‘한국의 맛 연구소’를 세워 반가 음식을 기록하고 보존한 인물이다.


◇“저는요, 정말로 남편 밥을 잘 먹이고 싶었어요”


-대가에게 배우셨네요.

“다른 음식은 책 보고 하겠는데, 떡이 안되더라고. 강 선생님 명성을 듣고 찾아갔지. 그분은 요리 학원 강사 같은 프로만 받고, 일반인은 받지 않는 분인데 나를 받아줬어. ‘저는 정말로 우리 남편 밥을 잘 먹이고 싶어요’ 했더니 기뻐하시더라고.”

-남편 밥을 뭘 그렇게까지....

“남편이 왕이면 내가 왕비 되잖아(웃음). 사람이 말이에요, 좋은 음식 먹어야 순한 사람이 돼요. 애들도 제대로 먹여야 제대로 크고.”

장선용씨는 남편 이영일(90)씨를 1964년에 만났다. 평양 근방 순천 출생인 이영일은 귀하게 컸다. 부친이 딸 일곱 끝에 얻은 아들을 위해 유치원을 세우고 서울서 교사까지 초빙했다. 중학 재학 시절 공산당 비난 유인물을 붙였다가 소년 수용소에 1년 갇힌 ‘반공 소년’이었다. 6·25가 발발하자 징집을 피해 숨어 있다가 1950년 겨울, 혈혈단신 월남해 해병대에 입대했다.

서울대 공대 졸업 후 석유공사에 다니던 청년 이영일을 장선용의 어머니가 먼저 점찍어 선을 보게 했다.

-젊어서 인기가 많으셨겠어요.

“아유, 말도 마. 내가 키는 작은 게 말대꾸를 꼬박꼬박 한다고 맨날 퇴짜 맞았어. 그 사람 처음 만나는 날, 명동 미도파백화점 지하 다방에 가서 앉으면서 내가 그랬어. ‘선 보러 오셨어요? 그럼 실컷 보세요’.” 이영일은 키 작고 눈이 반짝반짝한 여자를 보고 바로 좋아했다. 작은 키를 두고는 “트랜지스터는 작아도 소리만 잘 난다”고 한다.

1964년 결혼 후 남편은 호주로 유학을 다녀와 반도체 기업 페어차일드, 장비업체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의 인도네시아, 필리핀, 한국 지사장을 거쳐 미국 본사에서 퇴직했다. 2003년 은퇴 후 두 아들 직장이 있는 샌프란시스코로 아예 이주했다. 장선용 요리책이 한식을 넘어, 동남아식, 중식, 양식까지 메뉴가 너른 이유다.

장선용은 남편이 유학 간 사이 이화여대 학무처에 근무하면서 돈 모아 집을 사고, 틈틈이 최고 스승들에게 배웠다. 음식 배우고, 조각보와 한복은 정정완(정인보 선생 장녀) 선생에게 사사했다. 이렇게 최고들에게 배워 90년대 두 아들(65년, 66년생) 결혼 폐백은 집에서 해줬다. 미국서 손자 돌상을 차릴 때는 앵두나무 가지로 활도 만들었다.

“시댁만 절 받던 시대였는데, 그런 게 어디 있어. 딸 키운 부모, 조부모까지 당연히 절 받아야지. 우리 집은 약혼식 대신 폐백에 양가 130분을 모셔서 서로 인사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며느리에게 주는 요리책’을 받았던 며느리가 지금도 근처에 살며 ‘요리 선생 장선용’의 조교로 활동하는 데는 이런 배경이 있을 것이다. ‘한국 전통’을 말하던 그는 ‘돌잔치’ 이야기를 꼭 써달라고 했다. “원래 돌잔치 상은 과일 몇 개, 떡 한 접시 이렇게 소박하게 차리는 거에요. 너무 화려하면 귀신이 시샘한다고. 요즘은 돌상에 굽 달린 접시를 많이 쓰던데, 돌상에는 절대, 절대로 그런 거 쓰는 게 아니에요.”

 


◇ 요즘 세대는 펄쩍 뛸 제목 ‘며느리에게 주는 요리책’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사람들 불러 음식 퍼먹이시기로 유명합니다.

“말로만 하는 건 별로야. 밥 같이 먹는 게 제일이지. 음식 끝에 정이 나잖아요. 있잖아, 사람들이 다 김옥길 총장님이 자기를 제일로 예뻐하시는 줄 알았어. 밥을 잘 먹여 주니까. 하하.”

-선생님 책 제목을 듣고 요즘 젊은 세대 반응이 싸늘한 건 아시죠?

“아유, 못됐어(웃음). 직장 다니다가 결혼하면 아무것도 모르잖아. 기왕 먹을 거 제대로 해 먹으면 좋겠다 싶어서 책을 쓴 거야.”

-아들에게도 요리 가르치셨어요?

“안 가르쳤는데, 저희가 잘하더라고. 와이프 음식이 제일 맛있다고 하면서.”

아들에게 음식은 안 가르쳤지만, 설거지는 정확히 가르쳤다. “여자들이 왜 명절마다 뿔따구가 나는지 알아요? 여자들만 일 시키고, 저희은 놀아서 그러는 거잖아. 분담해야 해.”

-요즘엔 ‘분담도 싫다. 명절에는 누워 있고 싶다’고 합니다.

“아이구, 죽으면 평생 누워 있는데 뭘 누워 있어.”

-그래도 좀 적당히 하는 게 편하잖아요.

“적당히 해서 되는 게 세상에 어딨어요. 나는 아직도 배울 게 너무 많아.”

‘적당히’란 표현이 거의 나오지 않는 것도 장선용 요리책의 특징이었다. 정확한 계량, 현지화한 계량이 특징. 미국에서 살던 자식 부부를 위해 ‘코스트코 오이 두 봉지에 무채 한 컵 반’ 식으로 썼다. 그가 미국서 ‘한식 쿠킹 클래스’를 하면서 인원을 적게 받는 이유는 수강생이 ‘정확한 계량’을 하는지 체크하기 위해서다.

-쿠킹 클래스에 온 수강생이 배우고, 먹고, 음식을 엄청 싸가는 식이라면서요. 남는 게 있으세요?

“한 회에 80달러 받았는데, 나는 나대로 많이 배워. 며느리 친구들 얘기 들으면서 ‘우리 며느리 마음이 저렇구나’ 미리 알고 조심해요. 코로나 기간에 쉬었는데, 너댓 명 정도로 다시 시작할까 해요.”

장선용은 ‘며느리에게 주는 요리책’ 제목이 배척받는 시대를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고집은 전업주부의 자존심이 팔할 이상일 것이다. ‘가정 최고경영자(CEO)’라는 자존심.

저녁 식사를 마치면 부부는 매일 늘 같은 대화를 한다.

“아, 잘 먹었다. 오늘 하루도 행복하게 잘 살았다. 고마워요.”

“잘 잡숴줘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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