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쓴 이어령의 추모시 ‘질경이 꽃’ 잔잔한 감동
‘독재와 독선, 역사의 두 수레바퀴에서 피어난 질경이 꽃’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2021.10.30>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가 쓴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조시(弔詩)가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이 교수는 노태우 정부 당시 신설된 문화부의 초대 장관(재임 1989년 12월~1991년 12월)을 지냈다.

자신도 병상에 있으나 직접 빈소를 찾은 이 교수는 유족들을 위로한 뒤 추모시 ‘영전에 바치는 질경이 꽃 하나의 의미’를 전했다고 한다.

이 교수는 “몸이 성치 않아서 옛날같이 글을 쓰지 못하고 컴퓨터 입력도 어려워 음성입력으로 쓰다 보니 부끄러운 글을 되풀이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 추모시는 대통령 유족들이 언론에 공개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영전에 바치는 질경이 꽃 하나의 의미

                               이어령


남들이 고인의 영전에
국화 한송이 바칠 때에
용서하세요. 질경이 꽃 하나
캐다 올리겠나이다.
하필 마찻길 바퀴자국난
굳은 땅 골라서 뿌리내리고
꽃 피운다하여 차화(車花)라고도
부르는 잡초입니다.
독재와 독선, 역사의
두 수레바퀴가 지나간 자국 밑에서
어렵게 피어난 질긴
질경이 꽃 모습을 그려봅니다.
남들이 서쪽으로 난
편하고 따듯한 길 찾아 다닐 때
북녘 차거운 바람 미끄러운
얼음 위에 오솔길 내시고
남들이 색깔이 다른 차일을
치고 잔칫상을 벌일 때
보통 사람과 함께
손 잡고 가자고 사립문 여시고
남들이 부국강병에 골몰하여
버려 둔 황야에
세든 문화의 집 따로
한 채 만들어 세우시고
이제 정상의 영욕을
역사의 길목에 묻고 가셨습니다.
어느 맑게 개인날 망각에서
깨어난 질경이 꽃 하나
남들이 모르는 참용기의 뜻,
참아라 용서하라 기다려라
낮은 음자리표 바람소리로
전하고 갈 것입니다.
  
이 교수는 고인을 ‘질경이 꽃’에 비유하며 ‘독재와 독선, 역사의/ 두 수레바퀴가 지나간 자국 밑에서/ 어렵게 피어난 질긴/ 질경이 꽃 모습’이라고 했다.

조시 끝자락에 ‘참용기’, 풀이하자면 ‘참아라 용서하라 기다려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말은 생전 노태우 대통령이 장관시절 이 교수에게 한 말이자, 평소 대통령의 좌우명이었다. 시중에서 노태우를 ‘물태우’라고 비난했지만 노 대통령은 자신의 신조가 ‘참용기’라면서 “참고, 용서하고,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이런 일이 있었다. 문화부 초대 장관 시절, 이어령 장관이 대통령 집무실을 찾아간 일이 있다. 1991년,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9월 17일, 한국시각 18일)을 앞둔 무렵의 일이다. 당시 우리 정부는 유엔의 관례에 따라 가입 축하 기념물을 선정해야 했다. 유엔에 전시·기증할 목적인데, 기념물을 준비하던 주무 부서는 외무부였다. 외무부는 기념물을 화려한 신라 금관의 레플리카로 정한 뒤 이미 대통령 재가까지 받았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이 장관이 문화부 차원에서 공식의견을 냈다. 조선 세종(1449) 때 지어진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의 원본을 확대한 복사본과 이를 인쇄한 당시의 활자를 재주조한 특수 전시물 제작을 제안한 것이다.

자칫 부서간 힘 겨루기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 장관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금속활자를 처음 만들어 쓴 나라요, 막강한 한자문화권에서도 독창적인 한글을 창제한 우리나라를 전 세계에 알려 대한민국 문화의 위상을 보여줄 수가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대통령 재가를 받은 사항을 번복할 수 없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답변이었기에 이 장관은 직접 대통령께 말씀드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독대 끝에 승낙을 받아냈다.

그때 노 대통령이 이 장관에게 말했다.
“참용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대답을 찾으려고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대통령은 “‘참아라’의 참, ‘용서하라’의 용, 그리고 ‘기다려라’의 기, 이것이 참용기이지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장관은 “죄짓다 들킨 사람처럼 가슴이 뜨끔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문화에 관한 대통령의 확고한 의지와 그에 대한 신뢰를 알고 있었기에 이미 재가까지 났던 결정을 뒤집을 수 있었다.

“나는 노태우 대통령과 지연이나 학연은 물론이요, 어떤 인맥도 닿는 데가 없다. 대선 때에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던 생면부지의 사람, 현실정치와는 담을 쌓고 지내온 사람, 대학 학과장조차 맡기 싫어하는 사람, 어쩌자고 그런 사람을 신설 문화부의 초대 장관 자리를 맡기실 생각을 하셨는가. 국무회의의 석상에서도 ‘이제 모든 장관은 물리적 힘이 아니라 문화적 접근을 통해 국민을 감동시키는 행정을 펴도록 하세요’라는 말로써 힘없고 가난한 신설 문화부에 추임새를 보낸 대통령이셨다.”

이 교수는 “이미 대통령께서는 먼저 내 수를 빤히 읽고 계셨고 나는 그 포석을 통해서 그분이 왜 문화부를 신설하려고 하셨는지 왜 1차 개각 때 장관 자리를 고사한 사람에게 다시 장관직을 맡기는 도량을 베푸셨는지 모든 의문이 풀렸다”고 했다.

이어령 교수는 1991년 12월 초대 문화부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대통령께서는 함께 임기를 마치자고 했지만, 당시의 정원식 총리에게 사의를 전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의 법령 통과를 끝으로 떠났다”고 한다.


다음은 1991년 9월 25일자 《조선일보》 1면에 실린 기사의 일부다.

<노태우 대통령은 24일 오전 11시 7분(한국시각 25일 0시 7분) 유엔 총회에 참석, 역사적인 기조연설을 통해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고 남북한 간에 신뢰구축 노력이 진전될 경우 재래식 무력의 감축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핵 문제에 대해서도 남북한 간의 협의를 추진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중략)
노 대통령은 기조 연설이 끝난 뒤 유엔본부 사무총장실로 케야르 사무총장을 면담하고 우리의 유엔가입 기념으로 <월인천강지곡>이 담긴 한국 초기 금속활자 모사품 등을 기증품으로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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