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임종

 

최후 30분 황홀한듯 허공 응시했다...아들이 전한 이어령 임종

(중앙일보 2022.02.27 김호정 기자)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 이화여자대학교 명예석좌교수가 암 투병 끝에 89세를 일기로 26일 별세했다.  

 

“숨쉬기 힘들어하셔서 제가 편하게 안아드렸어요. 그랬더니 아주 가벼운 숨이 느껴져, 가족들이 ‘다시 숨을 쉬신다’고 기뻐하며 ‘아버지, 아버지’하고 불렀어요. 그 가벼운 숨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고(故) 이어령 선생의 큰아들인 이승무(59,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가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전했다. 26일 아버지의 임종을 지킨 그는 27일 서울대학교 병원 장례식장에서 기자와 만나 “늘 바라셨던 대로 평화롭고 편안하게 가셨다”고 했다.


이어령 선생은 정신이 흐린 상태에서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말해왔다 한다. 이승무는 “그래서 진통제도 거의 맞지 않으셨는데, 놀랍게도 마지막까지 의식이 또렷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고인이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을 관찰하는 모습을 그는 봤다. “죽음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봐야겠다는 표정이었다. 허공을 아주 또렷하게 30분 정도 응시하시더라. 마치 아주 재미있는 걸 지켜보시는듯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보면 황홀한 얼굴이었다.” 그는 “임종을 일부러 멋있게 표현하는 건 아버지도 좋아하지 않으시겠지만, 마치 죽음과 흥미로운 대결을 한번 해보시는 듯하다가 편안히 숨을 거두셨다”고 했다.


26일 낮 12시 30분쯤 숨을 거두기 한 시간 전에는 손주들과 영상 통화도 했다. “할아버지가 위독하시니, 미국에 있는 두 손주가 만나거든 통화를 한번 하자고 해뒀다. 그런데 마침 그날 영상 통화가 걸려왔다.” 말을 뱉을 기운이 없었던 고인은 손을 낮게 들어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웃는 얼굴로 정말 기뻐하시는 모습을 봤다.” 

영상 통화 후 가족 예배를 열었고, 그 이후 숨이 점점 옅어졌다. 이승무는 “임종 전에 하루 이틀은 의식 없이 보내신다 들어서 더 계실 줄 알았는데 의식이 분명하신 상태에서 가볍게 가셨다”고 전했다. 말을 할 기운은 없었지만, 의사 표현 정도는 할 수 있는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얼굴 닦아 드릴까요’ 하면 손짓과 약한 음성으로 ‘괜찮다’고 하실 수 있을 정도였다”고 했다.
 
이어령 선생의 장례는 본래 가족장이었으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위원장이 되는 문체부장으로 변경됐다. 황희 문체부 장관은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서 우리나라 문화정책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도록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셨다. 장례 절차 마무리 뒤에도 국민들과 함께 이 전 장관님을 어떻게 기억해나갈지 고민하겠다"고 27일 밝혔다. 다음 달 2일 오전 9시 발인 후 10시에 영결식을 치른다. 화장한 후 충남 아산의 선산에 묻힌다. 이승무는 “몸이 답답하신 걸 싫어하시던 아버지가 화장을 원하셨다”고 전했다.



2.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로 아름다운 일
(조선일보 유슬기 기자 2022.02.27)


시대의 별이 졌다. 동시대인들은 길을 잃었을 때 바라볼 현인이자 북극성을 잃었다. 봄을 재촉하는 바람이 불던 2월 26일 오후 12시 30분경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암을 몸에 품고 산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항암치료는 받지 않았다고 한다. 몸은 쇠약해졌으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지성은 잃지 않았다. 이별이 가까운 줄은 알았으나 정말 이별이 올 줄은 몰랐다. 그는 자신의 이름 ‘영’과 아내의 이름 ‘인’을 따서 지은 영인문학관 강인숙 관장과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토록 사랑하던 그의 딸(이민아, 1959~2012)을 따라 '지성에서 영성으로' 떠났다. 1934년생, 89년의 삶이었다.

“나는 이제 너의 죽음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하지 않아. 그만큼 죽음이 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이야. 추상명사가 아니라 물건 이름처럼 손으로 잡을 수 있고, 냄새를 맡을 수 있고, 던지면 깨질 수 있는 유리그릇 같은 아주 구상적인 명사로 죽음은 그렇게 내 앞으로 온 거야.”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 중

그는 별다른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의 삶 자체가 메시지였다. 투병 중에도 제자인 톱클래스 김민희 편집장과 함께 《이어령, 80년 생각》, 김지수 문화전문기자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를 냈다. 덕분에 살면서 그가 그리운 이들은 때때로 펴 볼 지도를 얻었다. 그는 생전에 자신을 ‘해녀’에 비유했다. 호흡을 고르며 깊은 바다 속을 물질하는 해녀다. 그가 심해를 유영하는 이유는 하나다. 숨겨놓은 전복을 찾기 위해서.

“이 책은 나에 대한 용비어천가 같은 책이 되면 절대로 안 돼. 자기 잘난 얘기를 하는 책을 왜 독자가 굳이 읽겠어. 내가 한 말, 내가 한 일을 있는 그대로 말해주는 게 중요한 거야. 나는 이 책이 그들의 삶에 도움이 되었으면 해요. 사물을 보는 눈, 현상을 보는 눈, 나처럼 생각할 수 있는 있는 힘을 길러주고 싶다는 거지.”

-《이어령, 80년 생각》 중

그는 초대 문화부 장관, 서울올림픽 준비위원장, 작가와 교수, 논설위원과 편집인을 거치며 세상을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지구인의 축제였던 서울올림픽에서 한 소년이 세계인의 눈 앞에서 지구처럼 둥그런 굴렁쇠를 굴린 것도,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란 이론으로 일본에 대한 열등감이나 혐오를 넘어 이들을 해석할 힘을 얻은 것도, 일본식 표현인 노견이 '갓길'로 바뀐 것도, 예술하는 천재들이 비바람을 피할 ‘한국예술종합학교’를 만든 것도 그가 창조한 세계다.

“나는 천재가 아니야. 창조란 건 거창한 게 아니거든. 제 머리로 생각할 줄 안다는 게 중요한 것이지. 누구나 나처럼 생각하면 나처럼 될 수 있어요. 진짜라니까.”

-《이어령, 80년 생각》 중

이어령 전 장관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인터뷰어였고, 스승이었으며 새로운 시대의 감각을 빠르게 습득하는 얼리어답터였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면 누구보다 세심하게 자신의 말들을 읽었고, 사실과 다르거나 의도와 다른 부분은 수정했다. 그의 서재에는 7대의 컴퓨터와 2대의 스캐너, 무선 공유기, 프린터 등 각종 디지털 장비가 있고 그는 7대의 컴퓨터를 직접 네트워킹했다. 그에게 컴퓨터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뇌의 확장된 영역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그의 말대로 ‘디지로그’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물질만능으로 흘러가는 4차산업혁명시대에도 다시 '생명이 자본'이라고 말한 인문학자이기도 했다.

"생명이란 것이 무언지. 저리도 모질고 아름다운 지에 대해 가슴이 뜨거워질 것이다. 소란스럽고 척박한 길바닥 그 많은 바퀴의 위협 속에서도 용케 비집고 나온 작은 생명, 그 아슬아슬한 모험 앞에서 당신의 질주는 잠시 멈출지 모른다. 마음속에서라도 말이다. 인간보다 식물을 더 사랑해서가 아니다. 하잘 것 없는 야생화가 그동안 내 굳은 살 속의 생명을 만질 수 있게 한 것이다." -《생명이 자본이다》 중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죽음을 탐구했고, 그 탐구의 실과도 아낌없이 나누었다. 죽음이 저 먼 곳이 아닌 '생의 한가운데' 있고, 제 각각 얇디 얇은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고. 죽음을 기억할 때, 삶이 삶다워질 수 있다고. 죽음에 대해서도 그는 앞선 선각자이자, 얼리어답터였다.

“나는 이제부터 자네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하네. 이 모든 것은 내가 죽음과 죽기 살기로 팔씨름을 하며 깨달은 것들이야. 이해하겠나? 어둠의 팔뚝을 넘어뜨리고 받은 전리품 같은 것이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

그는 마지막 인터뷰에서 “내 육체가 사라져도 내 말과 생각이 남아 있으니, 그 만큼 더 오래 사는 셈”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라면 이어령은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그가 고속으로 달리는 도로 곁에 남긴 휴식같은 갓길을 지날 때마다, 그가 지은 한예종의 푸른 예술가들이 남긴 성취를 볼 때 마다, 그가 그린 생각의 지도를 따라가는 이들과 함께 우리는 이어령을 만난다. 그게 바로 그가 그토록 숨을 참으며 쥐어주고자 한 전복이자 보물이었는지 모른다.

“내가 평생 창조, 창조 해왔잖아. 내 손에서 탄생한 우물물 한 방울이 생명의 순환을 고스란히 따랐으면 해요. 한 인간이 남겨놓은 열정 한 방울, 창조성 한 숟가락, 업적 한 그릇이 이어져서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고, 다시 수증기가 되어 비로 내리고, 골짜기에 쏟아지고, 또 그 물 한 방울이 다시 누군가의 가슴에 작은 울림을 주면 좋겠다는 거지.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로 아름다운 일 아니겠어요?”

-《이어령 80년 생각》 중




3. “나는 곧 죽지만 내 꿈 좇을 정열이 있어… 당신은 어떤가요”
[이어령 선생을 보내며] 1년전 선생 청탁 받고 ‘이어령 평전’ 완성… 보름전 마지막 인사

( 조선일보 이인화 소설가 2022.02.28 )


26일 이어령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날씨는 우중충했고 비가 내렸으며 바람이 심했다.

선생이 이어령 평전을 써달라고 부탁했기에 나는 돌아가시기 직전 가끔 찾아뵈었다. 병환이 위중했는데도 선생은 늘 웃으며 당신이 쓰고 계신 책 이야기를 하셨다. 체중이 절반으로 줄어든, 불행과 지혜가 아로새겨진 야윈 얼굴에 아름다움이 있었다. 미소 짓는 우수였고 기도하는 달관이었다.

메타버스, 생명 자본주의, 인간은 150만년 동안 먹거리를 찾는 채집꾼, 호모 컬렉티쿠스였다, 그런 이야기만 하셨다. 새로 나온 플라톤 전집이 좋더라, 빨리 사 보라는 말씀도 했다. 나약한 감상의 말은 일절 없었다. 이런 무언의 충고를 하시는 듯했다.

"난 곧 죽습니다. 하지만 아직 내 꿈을 쫓아갈 정열이 있지요. 그대는 어떤가요?"

이어령은 한국 현대 문예 비평사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비평가이다. 그는 한 줌 지식인의 전유물이었던 비평을 모든 사람의 지식으로 만드는 커다란 변혁을 이룩했다. 인습적이고 권위적이었던 한국 비평에 참신한 수사학과 통찰을 도입했고 독자들은 그 비평에 열광했다.

이어령은 <저항의 문학> 같은 문학 비평에서 출발하여,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 지향의 일본인> 같은 문화 비평을 거쳐, <그래도 바람개비는 돈다> <디지로그 선언> 같은 문명 비평으로 나아갔다. 그는 인구의 절대다수가 농사를 지을 때 현대 문명을 이야기했고 사람들이 겨우 도시에서 살게 되었을 때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 가자고 외쳤다. 국문학자, 에세이스트, 언론인, 문화부 장관, 올림픽 기획자 등 얼핏 산만해보이는 그의 이력은, 사실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비평이라는 꿈을 쫓아온 일관된 정열의 궤적이다.

부고와 함께 우리는 이어령의 생애를 정면으로 마주 보게 된다. 그리고 이어령의 지성과 에너지가 우리 사회의 얼마나 큰 부분을 채우고 있었던가를 깨닫고 놀라게 된다. 오늘날 한류 커뮤니티 1억명에 빛나는 한국 문화가 이 위대한 해석자에게 얼마나 많이 의지해왔는가를 실감하게 된다.

나에게 이어령은 추억의 불빛으로 빛나는 신전이다. 7살 때 영남대 강당에서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문학사상’을 홍보하러 온, 검은 뿔테 안경 때문에 얼굴에 하얀 철 가면을 쓴 것 같은 신사의 강연을 처음 들었다. 29살에 장관을 지내고 대학에 복귀한 선생을 같은 과의 신임 교수가 되어 다시 보았다. 그리고 인생의 많은 것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 57살에 아직도 문학적 영감을 주는 큰 스승을 빈소에서 본다.

교정의 목련꽃이 아름답던 어느 봄날. 선생은 꺼벙한 얼굴의 신임 교수와 학생들 앞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디지로그는 리얼과 페이크의 경계가 무너지는 겁니다. 아날로그 세계가 진짜고 디지털 세계는 가짜가 아닙니다. 다 진짜입니다. 우리는 필멸의 존재입니다. 시간만이 우리를 구성하는 실체이기에 우리는 모든 세계에서 살 수 있습니다. 언젠가 ‘완전한 디지털 전환’이라는 말이 나올 겁니다.

우리는 결국 디지로그로 살아갑니다. 인생에서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우리는 역경에 익숙해집니다. 나락으로 밀려 떨어졌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강인한 정신력으로 다시 기어 올라갑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나는 그때 선생의 말을 반도 이해할 수 없었다. 햇살만이 이파리 사이로 쏟아져 아스팔트 위에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고 이어령 교수는 지난 2020년 10월 소설가이자 대학 후배인 전 이화여대 교수 이인화씨에게 자신의 평전을 써달라고 청탁했다. 그는 이후 여러 차례 면담과 취재를 거쳐 200자 원고지 700장 분량의 평전을 최근 완성했으며, 이 교수와의 마지막 만남은 지난 2월 10일이었다.



4. “한글에 왜 띄어쓰기가 있습니까?”… 이우환 질문에 이어령의 대답은
[이어령 선생을 보내며, 이우환 회고]


(조선일보 정상혁 기자 2022.02.27)


“이어령 선생은 우리 문화의 본질과 성격이 무엇인가를 누구보다 예리하게 파헤치고, 그것이 국제적인 언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한 분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화가 이우환(86)씨는 대한민국 지성계를 풍미했던 이어령(1933~2022) 선생을 이렇게 회고했다. 일본에 머물고 있는 이씨는 27일 본지 통화에서 “오늘 아침 일본 뉴스를 통해 별세 소식을 전해들었다”며 “너무나 많이 배우고 도움 받고 존경했던 분”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선생과의 첫 만남을 회고했다. 1968년쯤이었고, 이어령 선생이 먼저 만남을 제안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우러러 봤지만 만날 기회는 없었다. 일본에서 민화(民畵) 관련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걸 어떻게 찾아보셨는지 ‘번역해서 잡지에 싣고 싶다’는 선생의 연락을 받았다. 서울 내자호텔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하셨다.” 훗날 이어령 선생이 ‘이우환 충격’이라고 표현한 이날 만남에서 이씨는 “한글에 띄어쓰기가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대뜸 물었다.

“우리 고전(古典)에는 띄어쓰기가 없다. 일본도 구두점만 찍을 뿐이지, 서구적 의미에서의 띄어쓰기는 없다. 옛 한글학자들이 한글을 한문에서 독립시킨다면서 문법은 서양 것을 갖다 붙이는 모순이 생긴 것이다. 우리는 서양 문법처럼 그렇게 단어가 독립돼있는 것이 아니고, 결국 술어적으로 붙어있는 것이 기본 발상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띄어쓰기에 대해 조금 의문이 있는 입장이라고 질문했다.” 이어령 선생은 “그거 너무 엄청난 문제”라면서 “우리 발상의 언저리는 역시 술어적인 것이고, 그것이 지금의 한글로 얼마나 정리가돼있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고 답변했다. 이날 이후 두 사람은 서로의 지지자가 된다.

이우환은 “1970년대 군정에 잡혀가 고문 당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 앞장 서 변호하고 빼낸 게 이어령 선생”이라며 “선생은 문학·음악·미술 등 각계를 꿰뚫어 우리 문화가 나아갈 길을 정리하고 미지(未知)와의 연결고리를 평생 찾아오셨다”고 말했다. “일본이 축소지향이라면 우리의 반도 문화는 좀 더 열리고 중성적인 여러 가변성을 지녔다는 점을 파헤치고 다듬었다. 애국심이 워낙 강하신 분이었다. 글 마다 마지막에서는 ‘한국 사람’ ‘우리 역사’로 귀결됐다. 언젠가 프랑스로 보내주신 책을 읽고 이에 대해 투정했더니, 그 말을 책 광고에 넣으셨더라.”

이씨는 “선생은 전인적(全人的)인 학자였고, 프랑스의 앙드레 말로처럼 생각된다”면서 “마음 아프고 정말 애석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 가는 것이니…”라며 명복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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