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걸쳐 ‘주역’ 풀어냈다, 3300쪽 해설서 낸 90세 학자
‘주역’과 ‘십익’ 해설서 펴낸 윤재근 한양대 명예교수

<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2023.11.27.  >

 


서른 살이 될 무렵 부친이 그에게 말했다. “너도 이제 ‘주역(周易)’과 가까이하거라. 어디서 살든 날마다 주역을 보면 인생의 왕래(往來)에서 순조로운 길이 넓혀짐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60년의 세월이 흘렀다. 구순(九旬) 나이에 접어든 윤재근 한양대 국문과 명예교수가 새 책 세 권을 냈다. ‘주역’ 상·하경과 공자가 지었다는 주역 해설서인 ‘십익(十翼)’(이상 동학사)이다. 모두 3300여 쪽, 원고지 2만2000장 분량이다. 주역과 십익을 해부하듯, 따로 자전을 찾아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한 글자 한 글자를 꼼꼼이 풀어내고 문장을 자세히 해석했다. 서울 광진구 윤 교수 자택에 있는 12권짜리 ‘중문대사전’엔 포스트잇 수백 장이 빼곡했다. 키보드를 치느라 손톱이 닳을 지경이라고 했다.

윤 교수는 1991년 ‘장자(莊子)’를 쉽게 풀어쓴 책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 등이 밀리언셀러가 됐던 왕년의 인기 작가다. “사람들이 5공화국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던 때였어요. 길면 길다고 자르고 짧으면 짧다고 늘리려 했던 시대적 분위기에 대한 반감 때문에 책을 많이 봤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집필에 꼬박 반세기가 걸렸다는 이번 책은 어디에도 대중서의 자취가 느껴지지 않는다.

어린 시절 윤 교수는 산골 소년이었다. 경남 함양 백운산 자락에서 약초를 캐는 채약인(採藥人)의 아들로 자랐다. 6·25전쟁이 나자 가족은 빨치산이 창궐하는 산에서 내려와야 했고, 부친은 농사를 지을 줄 몰랐다. 뭘 하며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던 청년 윤재근은 출가하려고 절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만난 고암(1899~1988) 스님이 그에게 넌지시 말했다. “너는 중이 되지 말고 대학에 가서 학자가 되거라. 네가 쓴 책 수만 권을 세상 사람들이 읽게 될 것이다.” 늦은 공부를 시작해 서울대 영문과에 들어갔을 때 서른 살이었다. 만해 한용운을 연구하는 한편 부친의 뜻을 받들어 주역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왜 주역인가? “많은 사람들이 주역을 점술서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윤 교수는 “주역이 이끌어주는 점은 복채를 들고 점쟁이를 만나는 점치기가 아니라, 내 삶의 왕래를 나 스스로 날마다 점쳐보라고 간절히 부탁하는 책입니다.” 주역의 점치기를 역수(易數)라고 하는데 이것은 역수(逆數)와 통하는 말이다. 미리 거슬러[逆] 헤아려보라[數]는 것이다.

그렇게 내다봐야 할 앞날이란 결코 먼 미래가 아니라고 윤 교수는 말했다. “예전에는 ‘인생 닷새’란 말이 있었습니다. 그제·어제와 오늘, 내일·모레의 5일에 정성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죠.” 주역은 오늘로써 그제·어제를 반추하고 곧 다가올 내일·모레의 삶을 건강하게 성취할 수 있는 길잡이라는 얘기다. 이것이 바로 일신성덕(日新盛德·훌륭한 덕을 날마다 새롭게 함)인데 허황된 미래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욕심부리지 않고 날마다 새로운 삶을 개척하라는 뜻이다. 경쟁하는 삶이 사납고 치열해질수록 길잡이가 되는 책이 주역이라는 말이다.

“주역은 6·25 전까지만 해도 식자층의 필독서였어요. 주어가 신(神)인 성경, 여래(如來)인 불경과 달리 주역은 주어가 ‘나’로 돼 있는 책입니다.” 하지만 점차 서양 문물이 들어오며 주역은 잊히고 오해받게 됐다는 것이다. ‘논어’ ‘맹자’와 ‘노자’ ‘장자’의 번역서도 낸 윤 교수는 “그 책들도 따지고 보면 결국 주역 풀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주역 64괘(卦)를 꼭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무심코 주역을 열어 드러나는 괘가 바로 그날 심독(心讀)할 인연이라는 것이다. “경문 자체가 삶의 길잡이인지라 굳이 외우려 하지 않아도 문득문득 마음에 떠오르게 됩니다.” 예를 들어 25괘를 펴들면 ‘밭 갈면서 수확을 생각하지 않고 첫째 밭을 일구면서 삼 년 뒤에 좋은 밭이 되리라 여기지 않으니, 곧 갈 바가 있어 이롭다’는 문장이 나온다. 일을 하면서 탐욕을 부리지 않고 순리대로 성과를 얻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윤 교수는 자택 연구실에서 또 다른 집필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과거 그를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게 했던 ‘장자’의 결정판이라고 한다. “중요한 부분을 정선해서 책만 보고 독학이 가능하도록 쓰고 있어요. ‘장자’ 훈장 노릇 제대로 해볼 생각입니다.”

주중엔 청소부, 주말엔 K리그 심판… 손흥민? 행복지수론 내가 ‘월클’!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K리그 축구 심판 정동식


< 조선일보, 김윤덕 기자,  2023.11.27. >

 


축구 스타 김민재를 빼닮은 남자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과자를 꺼냈다. “선물입니다.” 동그란 과자 한 면에 초콜릿이 발라진 ‘다이제스티브’. 그가 열아홉 살이던 1999년엔 500원이었다는 이 과자는 가난한 고학생의 ‘눈물’이자 ‘꿈’이었다. “밥 사 먹을 돈이 없어 천안의 대학을 오가는 통학 열차에서 다이제스티브 한 개로 하루를 버텼어요. 초콜릿을 안 바른 과자는 300원인데, 초콜릿이 묻으면 좀 더 배부를 것 같아서 200원을 더 투자했지요(웃음).”

억척 청년의 꿈은 이루어졌다. 본업은 거리 청소부, 부업은 퀵 배달부지만, 그는 대한민국에 12명밖에 없는 K리그 축구 심판이다. 밑바닥을 전전할지언정 열두 살에 품은 축구의 꿈은 포기하지 않았다는 정동식(43)씨가 형광색 청소복에 빗자루를 들고 활짝 웃었다.


◇김민재 닮은 서초구청 청소부


-별명이 ‘짭민재’라더니, 김민재 선수와 정말 닮았다.

“우리 아들들은 아빠랑 하나도 안 닮았다는데, 축구팬들은 판박이라며 좋아하더라(웃음).”

-’슛포러브’라는 유튜브 채널과 나폴리에 갔다가 현지인들에게 ‘킴킴킴킴!’ 연호를 받았다던데.

“나폴리가 33년 만에 우승을 하게 돼 나까지 덩달아 인기를 누렸다. 김민재가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다며 사인 요청, 촬영 요청을 하더라. 그 열기가 엄청났다(웃음).”

-이제 막 청소를 끝낸 건가.

“매일 새벽 6시부터 낮 3시까지 일한다. 가을엔 낙엽 때문에 일이 많다. 돌아서면 떨어지고 돌아서면 쌓이고(웃음).”

-오토바이엔 서리풀 청소기동대라고 적혀 있다.

“서초구 환경공무관인데, 난 오토바이로 이동하며 헌릉로, 매헌로 일대를 청소하는 기동대 소속이다.”

-구청 일 끝나면 퀵 서비스 일을 한다고.

“환경공무관 월급과 축구 심판만 해서는 아들 셋 못 키운다(웃음).”

-세 가지 일을 병행하는 게 가능한가?

“K리그는 주로 주말에 열린다. 퀵 서비스는 청소 끝나고 집이 있는 하남 방향으로 떨어지는 콜을 잡으면서 간다. 대리운전 할 때도 집 방향으로 콜을 잡아서 가면 교통비가 안 든다. 애들 학원비는 나온다.”

-체력이 받쳐주나?

“부모님이 신체 하나는 건강하게 물려주셔서 아직 거뜬하다(웃음).”

-본업은 왜 청소부인가.

“60세까지 할 수 있는 안정적 일자리라…. 심판은 경기를 뛴 만큼 수당을 받는 직업이라 불안정하다. 더욱이 12월부턴 경기가 없다. 석 달간 수입이 빵원! 청소 일은 사람 스트레스 없고, 뭣보다 내가 오만해지지 않도록 잡아준다.”

-오만해지지 않도록?

“국내 최고 선수들과 3만~4만 관중이 모인 그라운드를 함께 뛰다 보면 자부심에 들뜬다. 1부 리그 심판은 12명밖에 없고 휘슬로 중요한 판정을 내리니 오만해지기도 쉽다. 그런데 난 아니다. 예를 들어 일요일에 전주 월드컵경기장에서 심판을 보고 서울에 도착하면 새벽 1~2시다. 그럼 2시간 자고 일어나 출근해야 한다. 동트지 않은 거리에서 빗자루질 하다 보면 거들먹거리고 싶었던 마음이 싹 사라진다. 겸손해진다.”

-주 6일 청소에 주말엔 심판으로 뛰면 언제 쉬나?

“힐링? 그런 건 체질에 안 맞는다(웃음). 몸을 움직여 일할 때 엔도르핀이 돈다. 누가 ‘일하면서 1억 받을래, 놀면서 1억 받을래’ 하면 저는 일하면서 받을 거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돈이 되든 안 되든 심신이 건강하려면 일을 해야 한다.”

 


◇우유 배달부터 아파트 공사장까지


-원래는 축구 선수가 꿈이었다던데.

“형과 함께 학교 운동장에서 놀다가 동네 조기축구회 대타 선수로 ‘발탁’됐다(웃음). 중·고등학교에서 선수로 뛰었는데 대학 스카우트가 좌절되면서 선수 생활은 끝이 났다.”

-이번에 출간한 책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를 보니 선수의 꿈이 좌절된 열아홉 살 때부터 고생이 시작됐더라.

“워낙 가난했던 데다 부모님은 이혼하고 형은 군대를 가버려 나 혼자 벌어서 등록금을 마련해야 했다. 마침 구로구의 한 노숙인 쉼터에서 노숙자들 관리하며 살 수 있는 일이 생겨 학업과 병행했다. 월급이 50만원이라 틈날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했다. 공사장 막노동은 기본이고, 신문과 우유 배달, 마트 상품 진열, 신용카드 판매, 대리운전까지 안 해본 일 없다. 아파트 단지에 인공 폭포 만드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 돌을 날라서 쌓고 바르는 일인데 맷집 좋은 나도 딱 세 달 버티고 관뒀다.”

-그렇게 5년간 악착같이 번 돈을 사기 당했다던데.

“셋방이라도 하나 얻어 살려고 재테크 책을 열심히 읽다가 상가 투자에 꽂혔는데, 임대가 안 나가도 이자를 50만원씩 준다는 말에 속아 8000만원을 다 날렸다. 술을 진탕 마시고 한강 다리로 갔는데 강물이 너무 무서워 뛰어내리진 못했다(웃음). 죽을 용기가 없으니 살아야 했고, 다시 안 먹고 안 쓰는 생활을 시작했다. 이젠 속지 않는다.”

-’더 이상 가난해질 수도 없다’고 썼더라.

“해본 일, 할 줄 아는 일이 너무 많아서(웃음). 스리 잡(three jobs)은 기본에 7가지 일을 한번에 한 적도 있다. 닥치는 대로 일해서 번 돈을 아껴서 쓰면 가난해질래야 가난해질 수가 없다.”

-경제적 실패로 삶을 포기하는 젊은이들 보면 안타깝겠다.

그 고통 상상할 수 있지만, 그래도 죽지는 말라고 얘기하고 싶다. 다시 하면 된다. 작은 목표부터 세우고 하나하나 이뤄가면서 자존감을 되찾아야 한다. 남과 비교하지 말고 나 자신과 싸워야 한다.”

 


◇축구 심판은 신이 버린 직업?


-일하고 공부하면서 축구 심판 자격증을 딴 건가?

“선수로는 실패했지만 그라운드는 달리고 싶었다.”

-아마추어 심판이었을 때 어둠 내린 축구장 한복판에 누워 K리그 수퍼매치의 주심이 되겠다고 상상하는 장면이 인상 깊더라.

“힘들 때마다 그 장면을 상상했다. 관중의 함성 소리가 들리는 수퍼매치에서 달리는 꿈.”

-얼마 만에 꿈을 이룬 건가.

“자격증 따고 12년 만에 K리그에 입성했다. 아마추어인 K4로 시작해 실업리그인 K3를 거쳐 프로리그인 K2로 갔다가 다시 2년 만에 K1심판이 됐다.”

-2022년 수퍼매치를 뛰고, 올해의 주심상도 받았더라.

“월드컵 상암경기장에서 열린 FC서울과 수원삼성의 경기였다. 180경기를 뛰었는데도 긴장되더라. K1 심판은 12명이지만 수퍼매치는 그중 3명밖에 못 들어간다. 거기에 들어간 거다(웃음).”

-축구 심판을 ‘신이 버린 직업’이라고 한다던데.

“진 팀 관중은 무조건 심판을 욕하니까(웃음). 처음엔 악플이 너무 힘들어 파출소로 신고하러 간 적도 있는데 이제는 숙명이려니 한다.”

-스타 심판이 됐는데도 악플이 붙나.

“물론이다. ‘김민재 닮으면 다냐’는 악플도 있다, 하하!”

-오심도 하나?

“사람이니까 실수를 한다. 오심한 날엔 수갑 차고 감방 가야 할 것 같은 고통에 시달린다. 경기 전 두 팀의 축구 스타일을 연구하고 동선을 예측해 적재적소에 가서 반칙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현장은 수시로 달라지니 완벽하게 잡아낼 순 없다.”

-뛰는 양도 엄청 많더라.

“선수보다 더 많이 뛴다. 심판은 공을 따라다니고 선수는 자기 포지션 위주로 움직이니까. 더구나 선수들은 젊은 층으로 계속 교체되니 20대의 체력을 유지해야 한다.”

-월드 클래스가 된 손흥민이나 김민재가 부러울 것 같은데.

전혀! 그들에겐 그들의 삶이, 내겐 나만의 삶이 있다. 행복지수도 그들 못지않다고 생각한다. 우선 월드 클래스라는 압박감이 내겐 없지 않나, 하하!

 


◇인사만 잘해도 밥 먹고 산다


-강연 요청도 많이 들어온다고.

“학교와 기업, 보험회사에서 오는데, 10대 아이들 만날 때가 제일 좋다. 자기 부모님도 맨날 싸우는데 심판님 얘기 듣고 용기를 얻었다는 아이도 있었다. 절망하는 아이 하나라도 살릴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축구든 공부든 일단 노력하면 실력이 가파르게 늘다가 기나긴 정체기가 오는데 이때 멈추고 타협하면 안 된다는 대목에 눈길이 멎더라.

“무슨 일이든 작심 3일이 아니라 작심 100일 하라고 말해준다. 어떤 노력을 습관으로 바꾸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평균 66일이라더라. 최소 두 달 이상은 노력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 말도 꼭 해준다. 나는 고3 내내 전교 300명 중 299등, 300등을 놓쳐본 적이 없다고. 근데 지금 누구보다 잘 살고 있다고(웃음).”

-집 현관엔 ‘할 수 있다’란 문장이 적혀 있다던데.

“초등 6학년, 4학년, 1학년인 우리 세 아들은 아침에 등교할 때 ‘할 수 있다’를 세 번 외쳐야 나갈 수 있다. 귀찮은 일이지만 효과가 제법 있다. 우리 둘째가 태권도 승단 심사를 보는데 자기도 모르게 ‘나는 할 수 있다’고 외치고 있더란다. 자기 꿈을 망각하지 않게 적어놓고 입으로 반복해 내뱉으면 힘이 되어 쌓인다고 믿는다.”

-공부는 잘하나?

“셋 다 못한다(웃음). 그런데 난 공부 못해도 상관없다. 서울대 나와 대기업 다니는 사람들보다 나는 행복하다고 자신하니까. 공부 좀 못해도 세상에 할 일은 너무도 많다. 아빠처럼 청소부가 되면 또 어떤가.”

-아내는 싫어하겠다.

“당연히 싫어하지(웃음). 근데 ‘인사만 잘해도 밥 먹고 산다’가 내 신조다. 그래서 우리 애들은 인사를 최고로 잘한다.”

-종교가 있나.

“기천불교. 군대 있을 때 초코파이 얻어 먹으려고 교회, 성당, 절에 다 다녔다. 힘들면 하나님, 부처님, 알라신까지 다 찾는다(웃음).”

-소망이 있다면?

“시간이 주어지는 대로 강연에 나가 어려운 환경에 있는 청소년들에게 꿈과 용기를 주는 거다. 그리고 오디션 프로 ‘복면가왕’에 나가 인순이의 ‘거위의 꿈’을 꼭 부르고 싶다(웃음).”

-근데 참 잘 웃는다.

나는 왜 가난한 부모에게 태어나 이렇게 고생하며 살까, 분노가 치밀 때 ‘웃는 법’을 배웠다. 억지로라도 웃으면 좋은 기운이 찾아오고, 머리가 맑아진다. 진짜다. 딱 30초만 웃어봐라.

-대학에 떨어져서, 취직이 안 돼서 절망하는 청년들에게 한 말씀.

“절대 포기하지 마라. 누구나 넘어진다. 다시 일어나서 달려라. 간절히, 간절히!”

 


☞정동식

1980년 서울 출생. 중대부중·고에서 축구 선수로 뛰었고 선문대 사회체육학과를 졸업했다. 구로노인종합복지관 상담사를 시작으로 막노동, 대리운전, 퀵 배달부 등으로 일하며 축구 심판 자격증을 땄다. 실업 리그를 거쳐 현재 K리그에서 심판으로 뛰고 있으며, 2022년 올해의 심판상을 받았다.

누가 사기꾼의 먹잇감이 되는가
재벌 사생아면서 여자인 동시에 남자의 시한부 삶이라니
輕重 차이는 있지만 우리 모두 한 번쯤은 당하지 않나
욕망 좇다 ‘꾼’의 손아귀를 찾아 들어간 자신을 책망할밖에

 

< 조선일보, 한현우 문화전문기자, 2023.11.21.  >

 


기자 4년 차에 사기를 당했다. 당시 유행하던 기(氣) 관련 특집 기사를 준비하다가 어떤 기 수련 단체를 알게 됐다. 중국에서 대단한 능력의 기 수련가가 온다고 했다. 죽은 닭을 살려내고 공중 부양도 한다고 했다. 그들은 미심쩍어하는 나를 확신에 찬 목소리로 설득했다.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그 사람이 오면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얼마 뒤 그 도사가 정말 한국에 왔는데 20대 젊은 친구였다. 군살이라곤 전혀 없는 몸매에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처럼 표정과 어조가 근엄했다. 산 닭의 목을 칼로 친 뒤에 기를 불어넣어 봉합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말투가 마치 닭고기만 있으면 닭곰탕을 만들어 보겠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는 봉오리만 맺힌 꽃에 기를 불어넣어 즉석에서 만개(滿開)시킬 수 있다고 했고 가부좌 상태에서 공중에 떠오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기 수련은 서커스가 아니므로 그런 행위 자체는 별 의미가 없다고도 했다.

나는 그의 위세에 기가 눌렸고 어쩌면 내가 알지 못하는 기의 경지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신문사에 와서 시범을 보여주면 기사로 쓰겠다고 제안하니 그는 흔쾌히 수락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중국 무슨 산에 오면 840살 넘은(84살이 아니다) 자신의 스승을 전 세계 언론 최초로 인터뷰시켜 주겠다고. 나는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하는 대신 세계적 특종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사기꾼들의 스케일은 상상을 초월하는 법이다.

며칠 뒤 신문사로 온 그는 몸이 좋지 않아 닭 부활 쇼와 공중 부양은 어렵다며 꽃 피우는 건 할 수 있다고 했다. 여러 명의 제정신인 동료와 사진기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꽃봉오리에 장풍을 불어넣는 시늉을 하더니 손바닥으로 꽃을 문질러 펴기 시작했다. 그가 다 피웠다고 내민 꽃은 말 그대로 뭉개진 꽃봉오리였다. 그가 쫓겨나다시피 떠날 때 나도 회사에서 쫓겨나는 줄 알았다. 중국 가짜 도사가 신문에 보도되지는 않았으므로 여러 사람 점심시간 빼앗은 죄만 인정됐다.

경중(輕重) 차이는 있어도 누구나 한 번쯤 사기를 당한다. 전세 사기나 보이스피싱처럼 아무 잘못 없이 사기에 걸려들기도 하지만 욕망을 좇아 사기꾼 손아귀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이를테면 한때 백화점에서 물건 가격을 두 배로 매긴 뒤 50% 세일하는 것이 일종의 관행이었다. 물건을 반값에 사고픈 욕망이 사람들을 사기 세일에 빠뜨렸다. 1992년 대법원이 이런 상술을 사기죄로 인정하면서 관행은 사라졌다.

지난 2007년 수많은 사람이 “저 민정인데요. 저한테 전화번호 준 오빠 맞죠? 사진 보고 맞으면 문자 주세요”라는 문자를 받았다. 무려 40만명이 확인 버튼을 눌러 엉뚱한 사진을 봤고 휴대폰 요금에서 정보 이용료 2990원이 결제됐다. 범인들은 3000원 미만은 본인 확인 없이 자동 결제되는 점을 악용해 어떤 민정이가 나를 찾나 하고 설렌 남자 수십만 명에게 17억원을 뜯었다.

“당신은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하거나 존경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비판적인 경향이 있다. 당신은 장점으로 살리지 못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를 잘 통제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못하다….” 성격 검사 결과가 이렇게 나왔다고 치자. ‘나에게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1948년 미국 심리학자 버트램 포러가 모든 실험 대상자에게 이런 검사 결과를 주고 ‘당신과 얼마나 일치하는가’를 묻자 응답자들은 평균 4.2점(5점 만점)을 줬다. 나는 최근 유행한 MBTI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런 경향을 심리학 용어로 ‘바넘 효과’라고 한다. 바넘은 19세기 미국에서 관객 속마음 알아맞히기로 유명했던 마술사다. 바넘을 비롯한 점쟁이들은 이런 말을 확신에 찬 표정과 목소리로 말하는 기술자다. 점을 보는 것은 신통력에 의지하고픈 욕망 때문이다. 우리 동네엔 점 보는 노점이 하나 있는데 그 출입구에 딱 두 문장이 쓰여 있다. “언제 재물이 생기나? 언제 애인이 생기나?” 사람들의 가장 큰 욕망이 정확히 응축돼 있다.

유명 펜싱 선수는 어떤 욕망 때문에 사기꾼에게 걸려들었을까. 그가 사기를 공모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최악의 피해자인 것도 사실이다. 재벌의 사생아이며 승마 선수였고 자산이 51조원이나 되는데 여자이기도 남자이기도 한 시한부 환자라니, 세상의 모든 막장 드라마를 합쳐도 압도하고 남을 사기 사건을 보며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다.

 

 

 

***  포러 효과(Forer effect)  -  바넘 효과(Barnum effect)

 

포러 효과(Forer effect)는 개인들이, 그들에게 특별히 맞추어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사실상 막연하며 넓은 범위의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그들의 성격 묘사에 높은 정확도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P. T. 바넘에 의한 "우리는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것을 보았다."라는 관찰 보고 이후에 바넘 효과(Barnum effect)라고도 불린다. 이 효과는 종교와 점성술, 운세 판단, 필적학 그리고 어떤 유형의 성격 검사와 같은 어떤 신념과 실천의 광범위한 수용에 대하여 부분적인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

이것에 관련된 더 일반적인 현상은 주관적 검증에 대한 것이다.  신앙이나 기대 또는 가설은 관련성을 요하기 때문에, 주관적 검증은 두 개의 무관하거나 임의의 사건이 서로 관계 있다고 인식할 때에 나타난다. 따라서, 그것은 사람들이 그들의 성격에 대한 그들의 인식과 천궁도 사이의 일치성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천궁도(天宮圖, horoscope)는 한 사람의 출생 순간과 같은 특정 시간의 태양과 달, 행성 그리고 기준선을 표현하는 점성술의 도표 또는 도해이다. )

 

< 최근 연구 >

 

(1)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믿음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앞선 믿음이 이 효과의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증거가 있다. 예를 들어, 천궁도의 정확성을 믿는 피험자들은 막연히 일반론적인 것들이 그들에게 특별히 적용된다고 믿는 경향이 더 크다.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믿음의 다른 예들로는 마술의 힘에 대한 믿음과 영혼의 영향력에 대한 믿음이 포함된다. 정신분열성향과 포러 효과에 대한 믿음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들은 높은 상관성을 보여오고 있다. 그러나, 로저스와 술의 2009년 연구는 (위의 "효과에 영향을 주는 변수" 참조) 피험자의 점성술에 대한 믿음을 고려했는데, 중국과 서양의 회의론자들은 모두 바넘 단평에 속한 애매함을 인지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함은 점성술에 대한 믿음이 없는 개인들이 그 효과에 대해 영향을 덜 받을 가능성이 더 높음을 시사한다.

(2) 자기 고양적 편향


자기 고양적 편향이 포러효과를 상쇄한다고 보고되어 오고 있다. 자기 고양적 편향에 따르면, 피험자들은 그들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수용하는 반면, 부정적인 태도는 거부한다. 한 연구에서, 피험자들에게 세 개의 성격 보고서 가운데 하나가 주어졌다. 하나는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성격적 특징들이 기술된 바넘 단평이었고, 다른 하나는 ("보동의 결점"이라고도 불리는) 완전히 부정적인 특징들이 포함된 단평이었으며, 마지막 하나는 앞의 두 가지가 혼합되어 있었다.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것과 혼합된 것을 받은 피험자들은 전자의 두 가지와 중요한 차이점은 없다고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것을 받은 피험자들보다 그것들의 성격 평가에 동의하는 경향이 훨씬 더 높았다. 또 다른 연구에서, 피험자들은 일반적인 "가짜" 성격 평가 대신에 특징이 열거된 한 목록을 받았다. 피험자들은 그 특징들이 그들에게 얼마나 더 잘 맞다고 여기는지의 정도를 점수로 매겼다. 자기 고양적 편양과 마찬가지로, 대다수의 피험자들은 자신들 대한 긍정적인 특징들에 동의했고, 부정적인 것은 부인했다. 그 연구는 자기 고양적 편향이 일반적인 포러 효과를 상쇄할 만큼 충분히 강력하다는 결론을 얻었다.[15]

(3) 대중 문화


TV 다큐멘터리 코미디 펜 & 텔러: 불쉿!의 일곱번째 시즌의 제2화에서 유사한 실험이 행해졌다. 그 회는 점성술에 대해서 다루며 확증 편향을 논했다. 그 결과는 포러의 연구와 유사했다.

그것의 근원적 실험은 마술사 데런 브라운에 의해서 행해졌다.[모호한 표현] 그는 그의 저서 《마음의 속임수(Tricks of the Mind)》에서 그 실험을 묘사했다.

그 효과는 시트콤 빅뱅 이론의 첫 시즌의 제16화에서 인용되었다.

신비한TV 서프라이즈 제386회 인디고 아이들 편에서 포러 효과가 언급되었다. 그 회에서는 결점을 가진 자녀의 부모가 그러한 자녀를 특별한 능력자로 여기게 만드는 것이 포러 효과라고 했다. 하지만, 그러함은 보편적이지 않고 특별한 것에 대해 부정보다는 긍정을 택한다는 점에서 자기 고양적 편향에 더 가깝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은 왜 과거에 빠진 ‘선동 천국’ 됐나? 
<중세지향 퇴행사회>의 저자 홍승기 인하대 교수 인터뷰 

 

< 조선일보, 송의달 에디터,  2023.11.14. >


홍승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교수가 2023년 11월 8일 오후 조선일보 송의달 에디터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고려대 법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니아대 로스쿨에서 수학(修學)한 그는 사법시험(30회)과 미국 뉴욕주 변호사시험에 각각 합격했다. 

 

대한민국은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인구 5000만명 이상에 해당하는 ‘3050클럽’의 세계 7번째 회원국이다. 반도체 같은 IT 분야에선 손꼽히는 강국(强國)이며 경제규모와 문화·스포츠·국방 분야에서도 세계 10위권 안에 든다. 겉으론 세계가 부러워하는 글로벌 상위 선진국의 모습이다.


중견 법학자인 홍승기(洪承祺·64)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두 달 전 발간한 저서 <중세지향 퇴행사회(中世志向 退行社會)>에서 “압축 성장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는 아직도 근대화를 거부하고 식민 사회에 머무려는 중세지향 경향이 강하다”고 지적했다.

기자는 2023년 11월 8일 낮 서울 광화문에서 그를 만나 2시간 가까이 인터뷰했다.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장과 대한변호사협회 공보이사를 지낸 그는 현재 법조윤리협의회 위원장과 콘텐츠분쟁조정위원장을 맡고 있다.

 


◇근대는 망각...다시 중세 왕조 찾는 한국


- 지금 한국이 왜 ‘중세지향 사회’인가?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근거가 많다. 화폐의 초상화만 봐도 미국·유럽·일본은 물론 중국도 마오쩌둥이란 근대인을 지폐에 새겨놓고 있지만 한국엔 신사임당·세종·이율곡·이황 등 조선시대 인물 뿐이다. 고종의 아관파천 도피로를 ‘왕의 길’이라고 복원한데 이어 광화문 경복궁 앞과 덕수궁 대한문 앞 월대(月臺), 경복궁 내 전각(殿閣)의 지나친 복원까지 온통 중세 왕조(王朝) 지향이다.”

“사료(史料)를 보면 경복궁 앞 월대는 1866년 축조돼 57년 동안 존재했다. 고종이나 순종이 월대에서 백성을 만났다는 기록도 없다. 덕수궁 앞 월대는 10년 남짓 있었다. 둘 다 도시계획 과정에서 사라졌을 텐데, 누구를, 무엇을 위한 복원인지 이해할 수 없는 행태이다.”

- 눈에 보이지 않는, 더 깊은 ‘중세지향성’이 있다면?

“가장 심각한 것은 한국인의 정신 세계가 식민지 시대 탈출을 거부하고 일제시대에 머무르고자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가 해방된 지 78년, 즉 35년의 식민 기간 보다 두 배 이상 긴 시간이 흘렀지만, 정치인은 물론 상당수 지식인들조차 식민지 시대의 사고방식과 논리에 갇혀 있다.”

-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한 예로 국가보훈부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함께 지금도 매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선정·발표한다. 서울교통공사는 그 국가보훈부의 포스터를 지하철 역사(驛舍)에 게시하고 있다. 공공 부문이 ‘탈식민 거부’에 앞장서는 형국이다. 대학교수, 언론까지 친일(親日)·반일(反日) 이슈에 과민 반응하며, 반일을 외치지 않으면 누구든지 매국노(賣國奴)로 지탄받을 수 있다.”

◇反日 안 외치는 지식인에겐 손가락질


홍 교수는 이렇게 덧붙였다.

“몇 년 전 정부가 반일몰이를 하던 시기에 교가(校歌)의 작곡·작사가가 친일파라고 전국이 떠들썩했다. 호남의 명문인 광주일고도 그런 이유로 2021년 4월 교가를 바꾸었다. 아마 광주일고 옛 교가의 작곡·작사자는 당대 최고의 음악가였을 것이다. 역사가 오랜 학교의 교사(校史)전시관에서 해방 전 일본인 교장·교감의 액자를 떼 내는 모습이 자랑인 양 TV 뉴스에 보도됐다. 이런 것이야말로 역사 수정주의이고 反역사적 일탈이다.”

- 일본과 얽힌 족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 한국 사회의 식민지 시대 탈출을 가로막는 최대 주범은 친일(親日) 프레임이다. 이창위 서울시립대 교수의 분석에 의하면 1983년부터 2022년 말까지 40년간 일본 천황과 총리는 일본의 한국 병합(倂合)에 대해 총 53회 공개 사과했다. 아키히토 천황은 4회, 아베 신조 총리는 19회였다. 사실상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 경영을 사과한 사례는 일본과 이탈리아 정도 뿐이다. 이탈리아는 2008년 당시 리비아가 원유 수출을 끊겠다고 나오자 원유를 계속 공급받기 위해 사과했다. 세계 10위권 대국인 우리가 일본에게 제국주의 시대 역사를 사과하라고 계속 요구하는 것은 소아병(小兒病)적인 행태이다. 혹자는 일본의 사과에 ‘진정성’이 없다고도 트집 잡는데, 연세대 김철 명예교수의 표현을 빌면 진정성의 요구 그 자체에 진정성이 결여돼 있다. 그런데도 공공영역이 나서서 ‘토착왜구’ ‘죽창부대’ 같은 초라한 주장을 했으니 민망하기 이를 데 없다.”

1984년 9월 6일 전두환 대통령의 일본 방문에 히로히또 일본 천황은 그날 영빈관 현관 밖까지 영접을 나왔다. 이날 저녁 일본 황실 사상 최대 규모의 만찬을 연 히로히또 천황은 "양국 간 불행한 과거에 깊은 유감을 표하며, 다시는 되풀이되어선 안된다"는 사과문을 읽었다. 이는 해방 후 일본 천황이 머리 숙여 한 최초의 공식 사과였다.  


이창위 서울시립대 교수가 2023년 1월 발간한 단행본 <토착왜구와 죽창부대의 사이에서>. 이 교수는 이 책의 178쪽부터 182쪽까지 6개면에 걸쳐 1983년부터 최근까지 일본 천황과 총리의 한일 과거사에 대한 53건의 사과 일지를 적시하고 있다.  


-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 이렇게 ‘과거’·'일본’에 매몰됐나?

“이승만 대통령부터 1988년 서울올림픽까지 역대 정권은 빈곤 탈피를 목표로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근대화(近代化)에 매진했다. 역대 정권은 반일을 소품으로 일부 이용해도 밀고당길 줄을 알았다. 1982년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을 계기로 폭발한 국내 반일(反日) 에너지를 활용해 전두환 정권은 일본을 압박, 40억달러 안보·경제협력차관과 1984년 일본 천황으로부터 식민지 사죄 발언을 받았다. 그런데 1993년 2월 출범한 김영삼 대통령은 ‘임시정부 이래 최초의 정통 정부가 문민정부’라며 해방 후 한국인의 성취를 부정(否定)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의식의 근대화’ 과정에 심각한 병목 현상을 가져왔다고 본다.”

◇日 천황·총리 40년간 53회 공식 사과


- 특별한 계기가 있나?

“해방 50주년을 맞은 1995년 8월 15일 김영삼 정부가 중앙청을 해체·폭파한 사건이 분수령이다. 1926년 완공된 중앙청은, 일제가 총독부로 쓴 기간(18년) 보다 우리가 정부청사로 사용한 기간(50년)이 훨씬 길었다.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이 정치적 목적에서 반일(反日) 감정을 최대한 이용하겠다고 깨부수었다. 중앙청의 소멸은 한 개의 건물 해체를 넘어 근대화 정서의 파괴였다. 해방 후 지속된 근대화 드라이브에 브레이크를 걸었고, 노골적으로 말하면 북한식(式) 민족주의에 동조하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충남 천안시 목천읍 소재 독립기념관 본관 바깥에 있는 중앙청(조선총독부) 건축물의 석재를 뜯어서 만든 공원 모습. 한글, 영어, 일본어로 각각 작성된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조선총독부 건물 잔해를 최대한 홀대하는 방식으로 전시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상징이었던 첨탑을 지하 5m에 반(半)매장하였고 전시공원을 해가 지는 독립기념관의 서쪽에 조성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몰락과 식민잔재의 청산을 강조하였다." 


홍 교수는 이어서 말했다.

김영삼은 1993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사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 어떤 이념이나 어떤 사상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고 했다. 이는 일본 등 외세에 대한 적개심을 강조하며 민족 지상주의(至上主義)에 빠진 북한과 같은 정서를 공유하겠다는 전환적 선언이었다. 이때부터 북한식 백두사관(白頭史觀)에 대한 경계가 풀린 듯싶다.

그는 “이런 분위기는 1970년대 중후반 이후 대학가에서 불붙은 의식화 교육과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수정주의적 관점 같은 풍토 위에 불량(不良) 정권 북한에 매력 또는 연대감을 느끼고 북한의 사주(使嗾)를 받은 운동권에 의해 급물살을 탔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1990년 11월 37개 여성단체가 모여 세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약칭 정대협)와 정의기억연대(약칭 정의연)가 좋은 예이다. ‘20만 명의 소녀 강제연행’ ‘유례를 찾기 힘든 잔학함’이라는 그들의 표현은 북한의 시나리오와 흡사하다. 윤미향은 1992년 8월 ‘지금 남북 모두가 일본으로부터 정신대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을 촉구해 내고 배상을 받아내기에 충분한 주체 역량이 마련되어 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일·북간 국교 수립을 위한 회담 시기의 발언이다.

◇민족 앞세운 김영삼...북한式 민족주의에 동조


- 2000년대 들어서는 어떠했나?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세워진 ‘친일반(反)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대표적인 중세지향·퇴행사회의 예이다. 이 위원회 활동은 그 자체가 국가 폭력이다. 해방 후 60년 세월이 흐른 후, 당대의 내밀한 사정에 무지한 후배들이 조악한 기준으로 한국의 당대 엘리트들을 단죄했다. 1955년 대한민국 정부는 제2대 부통령 인촌 김성수(金性洙)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치루었고 1962년엔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다. 그런데 2005년 노무현 정부는 인촌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낙인찍고 서훈까지 박탈하는 야만을 저질렀다.”

그는 “2005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의 판단은 반(反)헌법적 행위로 ‘전적으로’ 무효화해야 한다. 위원회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낙인찍은 사람들의 재산을 박탈한 것은 헌법 위반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3조 2항은 ‘모든 국민은 소급입법에 의하여 재산권을 박탈당하지 아니한다’고 명시(明示)하고 있다”고 밝혔다.

홍 교수는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된 큰 책임은 노무현 대통령과 위원장을 맡은 강만길 교수, 편협한 시각의 국사학자들은 물론 사회의 마지막 보루인 사법부에 있다. 2011년 3월 31일 헌법재판소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에 대해 헌법전문의 ‘임시정부의 법통’ 운운하며 위헌이 아니라고 결론냈다. 조대현·이강국 재판관만이 위헌이라는 소수의견이었다. ‘임시정부의 법통’이 ‘오늘 이 순간’ 재산권의 귀속을 다투는 준거가 된다는 판단은 터무니없는 논거이다.”

◇운동권 동아리하듯 국가경영한 문재인 정권


- 역대 정권 가운데 ‘중세지향 퇴행성’이 가장 강했던 곳을 꼽는다면?

“문재인 정권이라 단언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3류 대학 운동권 학생들이 동아리를 운영하는 사고방식으로 국가를 경영했다. 자유·인권·민주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이웃 국가를 향해 대통령이 TV 앞에서 ‘다시는 지지 않겠다. 승리의 역사를 만들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재인 정권 5년은 우리 역사에서 또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 왜, 어떤 이유 때문인가?

“문재인 정권은 5년 내내 ‘엉뚱한 제도’를 ‘부적절한 방식’으로 도입해 기업인을 옥죄고, 자영업자를 괴롭히고, 국민의 건전한 근로의욕에 흠집을 냈다. 검수완박으로 검찰을 식물검찰로 만들어 특정인에 대한 형사처벌의 예외를 구축하고, 통치의 정통성을 실체가 애매한 ‘항일(抗日)투쟁’에 두었다. 조선시대 양반 특권층과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의 부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 저서에서 언급한 여러 한국인들 가운데 근대 지향성이 가장 뛰어난 이는 누구인가?

“이승만, 윤치호, 서재필, 유일한 같은 분들이 모두 훌륭하지만, 이승만(李承晩)은 당대에 나오기 힘든 ‘돌연변이’였다. 그는 탁월한 개인기(個人技)와 사명감으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존재를 공론화했다. 이승만에 압도된 한국 좌파는 어떻게든 그에게 흠집을 내고자 흑색 선전을 하고 김구를 대항마로 띄워 이승만을 깎아내리고 있다. 반공(反共)주의자인 김구는 기본적으로 좌파와 융합이 안 되는 존재이다. 좌파에게 김구는 김일성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이자, 이승만 공격을 위한 소모품일 뿐이다.”


◇‘정치 낭인’들 공공영역 진출로 국가경쟁력 쇠퇴


- 1980년대 5·6공화국과 1990년대 김영삼·김대중 양김(兩金) 정권을 비교한다면?

" 70년대 말 대학에 입학한 세대로서 88올림픽의 성공은 인정해도 정서적으로 전두환·노태우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세월이 흘러 여러 자료를 확인하고서야 ‘전두환 시대 경제성장의 과실(果實)을 양김이 뜯어먹고 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5·6공 시절에는 일류 엘리트들이 국가를 경영했다. 양김 시대에는 나름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세력을 자처하는 ‘정치 낭인(浪人)’들이 대거 공공영역으로 넘어오면서 국가경쟁력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여기서 홍 교수는 개인적인 일화를 꺼냈다.

“1997년 가을 미국 로스쿨에 등록한 지 3개월 만에 700원대이던 원·달러 환율이 1900원대로 치솟았을 때 ‘나라 잃은 국민’ 심정을 느꼈다. 당시 아시아 경제위기를 주제로 한 세미나에 갔다가 한 투자은행 발제자가 ‘한국 정부 의뢰로 한국 경제가 얼마나 위험한지 인도네시아·태국과 비교해 컨설팅을 해주었더니 한국정부가 돈은 잔뜩 주고서 컨설팅 결과를 덮어 버리더라’고 폭로했다. 1995년 11월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고 큰소리쳤던 김영삼 정부의 국가 경영능력은 엉망이었다.”

- 근대 사회는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하는 ‘깨어있는 개인(個人)’들의 결사체 아닌가?

그렇다. 하지만 2016년 하반기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동과 문재인 정부 시절 조국(曺國) 전 법무부 장관을 둘러싼 ‘조국 현상’을 겪으면서, 한국 사회에 파시즘의 망령이 깊이 깃들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1930년대 독일 국민의 투표로 정권을 장악했듯, 대한민국에는 선동되려는 기층 민중과 선동에 도(道)가 튼 정치꾼들, 선동으로 먹고사는 사이비 언론이 즐비하다. 매우 취약한 구조에서 사회가 굴러가고 있다.

- 우리나라가 ‘중세지향 퇴행’을 끊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선진국 문턱까지 갔다가 중후진국으로 추락한 아르헨티나처럼 될 것이다. 아직은 우리 기업들이 튼튼해서 다행이지만, 후진국 몰락은 순식간일 것이다. 야당과 시민단체들은 ‘노란 봉투법’처럼 틈만 나면 기업들을 옥죄고 경쟁력을 약화시키려 안달 내고 있다. 지난해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정권이 이재명으로 연결되었더라면 남미(南美)든 북조선이든 눈 앞에 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근대 사회로 가려면 사회 知力 높여야”


- 이를 막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사회의 지력(知力)을 높여야 한다. 사회 구성원 누구나 널리 텍스트를 읽고 토론하는 습관이 붙어야 한다. 다음으로 사회의 허리로서 건강한 지식인층이 구축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건강한 지식인층에서 국가 미래를 개척하고 이끄는 핵심 엘리트가 나와야 한다. 사실은 이 세 가지 모두 ‘많이 읽자’는 얘기다.”

- 좀 생뚱맞다.

“쉬운 예로 일본을 얘기하겠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하고 세계를 상대로 전쟁까지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국민 전체에 다져진 지력(知力)이 있었다. 그 지력은 독서에서 생긴 힘이었다. 일본에선 지금도 매년 100만부 이상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여럿 나온다. 요미우리신문과 아사히신문 구독자는 요즘도 각각 900만명, 600만명에 달한다. 독서를 통해 축적된 내공(內功)으로 기발한 생각과 야망, 목표를 가진 일본인들은 세계에 도전하고 있다. 디지털 분야에서 주춤하고 있으나 일본 사회의 내공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2023년 현재 일본 1만엔권 지폐에 새겨져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 적극적인 근대화론자로 게이오대학을 세운 그가 서양을 돌아보고 1866년에 낸 책 <서양사정(西洋事情)>은 단번에 20만부가 팔렸다.  그가 1872년 첫편을 출간한 <학문의 권유(学問のすゝめ)>는 1800년대에 300만부 이상, 지금까지 400만부 넘게 팔렸다. 19세기 일본 총인구가 3000만명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국민 10명 중 한 명이 구입해 읽은 셈이다. 일본 근대화를 이룬 주역은 책 읽는 일본 국민이었다.

2023년 현재 일본 1만엔권 지폐에 새겨져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 적극적인 근대화론자로 게이오대학을 세운 그가 서양을 돌아보고 1866년에 낸 책 <서양사정(西洋事情)>은 단번에 20만부가 팔렸다. 그가 1872년 첫편을 출간한 <학문의 권유(学問のすゝめ)>는 1800년대에 300만부 이상, 지금까지 400만부 넘게 팔렸다. 19세기 일본 총인구가 3000만명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국민 10명 중 한 명이 구입해 읽은 셈이다. 일본 근대화를 이룬 주역은 책 읽는 일본 국민이었다.


홍 교수는 이어서 말했다.

제 전공인 지적(知的)재산권 분야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일본과 한국 학계는 논문의 질(質)과 양(量)에서 10대 1 정도 격차가 나는 듯하다. 두 나라의 인구는 2대 1 정도지만. 우리 학계는 호흡이 짧고 유행에 따라 연구 주제가 오락가락한다. 재작년에는 NFT, 작년에는 메타버스만 외치더니 금년에는 모든 포럼·학회의 주제가 챗(Chat)GPT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AI) 일색이다. AI가 대단히 중요한 주제라도 이렇게 쏠리기만 해서야 축적이 되겠는가?

- 한국 지식인들이 공적 이슈로 논쟁하거나 사회적 담론을 주도하는 게 사라진 것 같다.

한국 지식인 사회의 절반은 논문과 강의로 먹고사는 샐러리맨이고, 나머지 절반은 폴리페서(polifessor·정치 지향 교수)라는 말이 나돌고 있다. 교수 연봉이 20년 가까이 동결된 탓인지,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나 사명감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대학진학률이 80%가 넘은 사회에서 지식인들의 담론(談論) 수준이 졸렬하다. 한국 사회에 과연 지식인 집단이 존재하는지 회의할 때가 많다.

 


◇대학진학률 80%인데 지식인들 담론 수준은 졸렬


- 우리 사회 전체가 붕 떠 있다는 느낌이 종종 든다.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의 ‘한국이 예능국가화하고 있다’는 지적에 나도 동의한다. 나라 전체가 이성 보다는 감성, 윤리보다 인기, 깊이 보다 자극을 선호하며 먹방과 트롯, 음주가무(飮酒歌舞)에 빠져있다. 지식인들조차 진득하게 공부하며 깊이 있는 글을 쓰기보다 SNS에 몰두한다. 기자들도 SNS 베끼기 바쁘고. 대학도 정부 연구기금도, 실적용 논문을 요구할 뿐 제대로 된 학술서를 기대하지 않는다. 이렇게 붕뜬 사회는 교묘한 선동과 포퓰리즘은 물론 다수결로 포장한 정치 집단의 떼쓰기를 이겨낼 수 없다.”

홍 교수는 “유튜브나 동영상, 예능의 힘조차도 텍스트(text)에서 나온다. 현재 영상산업·엔터테인먼트산업이 약진한다고는 하지만 ‘텍스트에 대한 집착’이 없다면 그 영상산업도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불안이 있다. 출판시장이 궤멸 상태라 걱정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읽는 사회’가 근대로 가는 길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교육부가 협력하여 ‘책 읽는 사회’를 장기 정책으로 꾸준히 실천하기를 희망한다. 읽는 사회, 생각하는 사회가 성숙하여야 청소년층이 건강해지고, 진중한 목소리를 내는 지식인 집단이 형성되고, 성장이 가능한 밝은 미래가 열린다.”

 


◇“尹 정부는 좌익 공세 물리치고 사회 방어해야”


- 윤석열 정부에 바라는 바가 있다면?

“윤 정부의 국방 외교정책 방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예우(禮遇)를 갖추는 점도 높게 평가한다. 그러나 청년 전문가들과 신진 엘리트의 발굴에 인색한 점은 아쉽다. 윤석열 정부의 목표는 이승만 대통령이 수립한 공화정의 진전, 즉 좌익 전체주의 공세로부터의 사회 방어여야 한다. 그에 걸맞는 인재를 적극적으로 수혈하기 바란다.”

- 대학에서 청년들을 접하면서 무엇을 느끼나?

“종북(從北)이나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청년들이 거의 없다는 게 희망적이다. 사회 현실에 비판적이라도 이들은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자에 가깝다. 선진국 한국에서 성장한 20~30대는 북한이나 공산주의와는 생래적으로 맞지 않는다. 이들은 또 맹목적 민족주의나 낭만적인 통일관에 냉담하다.”

- 앞으로 한국 사회의 주도 세력은 누가 맡아야 할까?

“1980년대부터 외교관과 주재원 자녀들에 대한 교육비 지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지 싶다. 덕분에 해외에서 교육받은 엘리트 집단이 생성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전반부에 태어나 조기(早期) 유학을 다녀온 30대와, 외고·과학고에서 국제 감각을 체화(體化)한 이들도 한국 사회의 큰 자산이다. 국내 젊은 엘리트들도 언어능력과 적응력은 기성 세대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나다. 유럽의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을 따라 최근 출범한 태재(泰齋)대학이 성공하고 확대 운영되기를 바란다. 아무 노력없이 최근 30년 동안 울궈먹은 586 운동권 세대는 분리수거통에 버리고 국제감각이 왕성한 엘리트들로 진용을 짜야 한다.”

- 이 자리를 빌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국 사회 최상위 엘리트들의 경쟁력이 높아져야 한다. 지금 공공영역을 책임져야 하는 정치권의 한쪽은 인생에서 한 번도 공부를 제대로 해 보지 못한 운동꾼이 주류(主流)이고, 다른 한쪽은 인생에서 한 번도 공동체에 대한 고민을 제대로 해 보지 않은 오렌지족이 주류이다. 대한민국의 최근 30년간은 삼성·현대차·LG·SK 같은 대기업들의 힘으로 버텨왔다.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과 당면하고 있는 복잡·첨예한 국가 이슈를 해결하려면 지금 수준의 정치인들로는 어림도 없다. 우리와 경쟁하는 G7 선진국들과 중국은 최고 엘리트들이 국정을 책임지고 있고, 그 사회는 후속세대를 효율적으로 양성하고 있다.”

事君數斯辱矣(사군삭사욕의)…

 

< 중앙일보, 김병기 서예가·전북대 명예교수, 2023.11.06 >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는 “임금을 섬기면서 자주 간언하면 욕됨을 당하고, 친구 사이에 자주 충고하면 멀어진다”고 했다. 받아들여지지 않는 간언이나 충고를 반복하면 말만 낭비하고 결국은 욕됨을 당하게 됨을 경계한 말이다.

“양약고구이어병, 충언역이이어행(良藥苦口利於病, 忠言逆耳利於行)”, 즉 “좋은 약은 입에 쓰나 병에는 이롭고, 바른말은 귀에 거슬리지만 행하면 이롭다”고 했다. 사마천 『사기』의 류후세가(留侯世家:유방의 신하인 장량의 전기)에 나오는 말이다. 진시황의 호화 궁궐인 함양궁(咸陽宮)을 접수한 유방이 당시 궁중의 여자들과 진귀한 물건들에 미혹되어 본분을 잊고 환락에 빠지려 하자, 장량이 냉혹하게 직간하면서 한 말이다. 직간을 받아들였으니 망정이지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장량은 분명 화를 당했을 것이다.

 


事:섬길 사, 數:자주 삭, 疏:성글 소. 임금에게 자주 간하면 욕을 당하고.... 35x73㎝.


목숨을 걸 만한 일이 아니면 현재를 인정해주는 것이 곧 사랑이고 존경이다. 

 

부부 혹은 친구 사이에 목숨 걸 일이 뭐가 있다고 날마다 충고를 빙자한 잔소리를 해대면 정이 붙을 공간이 없다. 

 

정이 떠나버리면 충고가 다 무슨 소용일까?

 

잔소리 후에 선심을 쓰듯 베푸는 ‘이해’보다 은근히 바라보며 끄덕여 주는 ‘인정’이 오히려 사람을 변하게 한다. 효과 없는 ‘지적질’을 삼가자!

‘기업은 나라 것’이라던 할아버지가 준 최고의 선물? 내가 나로 살게 한 자유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박사의 손녀 유일링


< 조선일보, 김윤덕 선임기자,  2023.>



독립운동가이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었던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박사의 손녀 유일링(柳恩令) 씨가 2023년 10월 24일 서울 용산 보건장학회에서 조선일보와 인터뷰 하고 있다. 할아버지처럼 아웃사이더 기질이 있다는 유일링씨는 "모두가 가는 길을 따라가지 않고 소신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유한양행 창업주인 유일한(柳一韓·1895~1971)이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된 건 그가 남긴 유언장에서 비롯됐다. 손녀의 대학 학자금 1만달러를 제외한 전 재산을 사회에 내놓는다는 내용의 유언장이 공개되자 한국 사회가 신선한 충격에 휩싸였다. 정치 비자금, 탈세, 세습 경영을 당연시하던 1970년대였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1만달러 ‘상속’의 주인공 유일링(62)씨는 “우리 가족은 오히려 ‘그렇게나 많이?’ 하고 놀라워했다”며 웃었다. “기업은 국가와 사회의 것이니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는 할아버지 말씀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고 자라 전혀 놀랍지 않았다”고 했다.

유일한 박사의 하나밖에 없는 직계 후손이지만 경영에 가족이 관여하지 않는다는 철칙에 따라 그는 유한학원 재단과 보건장학회 이사로만 이름을 올린 채 미국 애리조나에서 권총 사격 코치로 일하며 산다.


◇대학에 보냈으니 자립하라


-국내 1위 제약 회사를 일군 할아버지가 유산을 1만달러만 남겨 섭섭하지 않았나?

“전혀! 스스로 능력이 있어야지, 누가 죽기만을 기다렸다가 유산을 받는다는 건 우리 가족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웃음). 1만달러나 주셔서 오히려 놀랐다. 특히 저의 대학 등록금으로 남겨준 선물이라 더욱 의미 있고 감사했다.”

-외아들 유일선에게도 ‘대학까지 보냈으니 자립하라’고 했더라.

“임원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미국 변호사였던 아버지(유일선)가 60년대에 잠시 한국에 들어와 경영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러나 얼마 안 돼 할아버지가 해고하셨다(웃음).”

-경영이 적성에 맞지 않았던 걸까?

“아버지는 국내 기업 최초로 IBM 컴퓨터를 도입하고 킴벌리 클라크와 합작회사도 설립했다. 할아버지처럼 창의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분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성장해 한국 문화에 적응하길 어려워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서로가 더 좋은 선택을 하길 원했다. 아버지는 자유를 얻는 대신 스스로 개척하는 인생을 택했다.”

-맏딸인 유재라에겐 땅 5000평을 남겼던데.

“할아버지가 부천에 세운 유한공업고등학교에 포함된 부지다. 할아버지 묘소와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유한의 문지기로서 기업과 학교에 친인척들이 얼씬 못 하게 하고, 할아버지 경영 철학에 맞게 회사가 굴러가는지 지켜보는 사명을 맏딸인 고모에게 남긴 것이다. 고모 또한 1991년 세상을 떠나면서 전 재산을 유한재단에 기부했다.”

-유일한 박사는 아들보다 딸을 더 신뢰했을까?

“우리 집에선 성별이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할아버지와 우리 가족을 사랑하는 이유다. 할아버지는 아내와 딸에게도 총 쏘는 법을 가르쳤다. 자기 몸은 자기가 지켜야 한다며. 딸에게 문지기 사명을 맡긴 것도 그 때문이다. 친척들이 일자리를 부탁할 때 ‘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고모였다.”


◇정치자금? 정직한 납세가 애국


-유일한 박사는 왜 그토록 전문 경영인 체제를 고집했을까.

“할아버지는 모든 직원이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가족이나 친인척이 회사에 버티고 있으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저 자리까지는 못 올라가겠구나 하는 생각에 좌절하고 날개를 펼칠 수 없다고 하셨다. 물론 가족의 경영 참여가 나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유일한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 유한양행을 주식회사로 전환하고 종업원 지주제를 실시했다. 그 시대에 그런 발상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할아버지는 아홉 살에 선교사를 따라 미국으로 갔다. 네브래스카의 청교도 가정에 입양돼 일하고 공부하며 대학까지 다녔고, 졸업 후 숙주 통조림을 파는 회사 ‘라초이’를 창업해 성공시킨 사업가였다.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미국의 경영 철학과 시스템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미국 기업이 다 그렇진 않다.

“물론이다. 그런 점에서 나도 할아버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성공한 사업가가 돼 고국의 부모님을 만나러 왔을 때 할아버지는 질병과 가난에 고통 당하는 국민을 보고 충격을 받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에 남아 뭘 할 수 있는지 고민하다 의사인 아내와 종로에 제약 회사를 세웠다. 할아버지에겐 처음부터 기업을 하는 목적이 이윤 극대화에 있지 않았다.”

-정치자금을 헌납하라는 정권의 요구를 거절해 세무조사를 받았는데 아무리 털어도 먼지 한 톨 안 나와 세무당국이 당황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기업이 비자금을 내고 국가의 특혜를 받는 걸 당연히 여기던 때라 회사에도 할아버지를 이해 못 하는 임원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사업과 정치가 같이 가면 안 된다는 것이 할아버지 신념이었다. 정치자금 대신 정직한 납세가 애국이라고 믿었다.”

-교육에 대한 관심도 지대했던 유일한은 1964년 전교생에게 전액 장학금을 주고 기술을 가르치는 유한공고를 세웠다.

“할아버지는 국가와 국민을 더 강하게 하는 기반이 교육이라고 믿었다. 전쟁으로 폐허 된 나라를 다시 세우는 데 공업 기술과 엔지니어가 절실하다고 믿고 설립한 학교가 유한공고다. 지금도 할아버지 말씀이 생각난다. ‘네가 얼마나 아느냐, 지식이 많으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그 지식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내년이 개교 60주년이다.”


◇유일한과 펄 벅의 우정


-유일한은 이승만, 서재필과 함께 1919년 4월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를 이끈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지만, 태평양전쟁 때 미 전략사무국(OSS) 특수 요원이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반도에 침투해 일제를 타격하는 일명 ‘냅코 프로젝트’ 요원이었다. 가족에겐 한마디도 하지 않고 LA 산타칼리나섬에 들어가 군사훈련을 받으셨다. 그때 나이 50세였다. 작전 수행 중 죽을 수도 있으니, 아들은 네브래스카의 친구에게, 딸은 매사추세츠에 사는 친구에게 맡기고 섬으로 들어가셨다고 한다. 그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땐 무척 놀랐지만, 할아버지라면 일본을 상대로 한 싸움에 당연히 뛰어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OSS에서 유일한은 펄 벅을 만난다. 훗날 노벨 문학상을 받는 펄 벅과 우정이 각별하더라. 그의 소설 ‘살아 있는 갈대’는 유일한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었다.

“할아버지와 펄 벅을 서로 가깝게 만든 요소는, 펄 벅이 하이브리드(hybrid)라고 표현한 혼혈 아이들에 대한 감정이었다고 생각한다. 펄 벅이 부천에 ‘소사 희망원’을 세워 혼혈 고아들을 돌볼 수 있게 해준 분이 할아버지다. 두 사람은 자신들 또한 ‘혼혈’이라고 느낀 것 같다. 펄 벅은 미국인이자 중국인으로, 할아버지는 미국인이면서 애국심 강한 한국인으로 살았다. 그들은 둘 이상의 국가에 애국심을 갖는 것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줬다. 아이가 엄마 아빠를 다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듯. 놀랍도록 진보적인 아이디어와 이를 실행에 옮기는 능력도 둘의 공통점이었다.”

-중국계였던 할머니 호미리 여사는 미국에서 소아과 의사 면허를 처음으로 딴 동양 여성이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아내로서 삶의 우선순위가 국가-교육-기업-가족이었던 남편이 못마땅하지 않았을까.

“할머니는 자신의 삶을 남편에게 의지하지 않는 자립심 강한 여성이었다. 의사인 할머니가 없었다면 할아버지는 유한양행을 만들 수 없었다. 하지만 내겐 더없이 자애로운 할머니였다. 딱 하나, ‘끔찍한’ 추억은 있다. 할머니 댁 냉장고 문을 열면 주삿바늘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내가 맞아야 할 예방주사였다(웃음).”

-유한양행이 개발한 ‘국민 연고’ 안티푸라민에 대한 추억도 있을 것 같다.

“물론이다. 내가 먹는 걸 좋아해 과식으로 배가 자주 아팠는데, 그때마다 엄마가 배꼽 주변에 안티푸라민을 발라주셨다.(웃음)”


◇외할아버지도 건국훈장 받아


-유일한 박사가 돌아가신 날을 기억하는지.

“내가 열 살 때였다. 최고의 할아버지를 잃어버렸다며 울자 엄마가 ‘너에겐 할아버지 한 분이 더 계시지 않냐’며 위로해주시더라(웃음).”

-외할아버지는 중국 군인이었다던데.

“중국 국민당 쉐웨 장군으로, 할아버지(유일한 박사)처럼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으셨다.”

-중국 군인이 대한민국 훈장을 받았다는 건가?

“중일전쟁 때 잡은 포로들 중에 일본에 강제 징집된 한국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들을 분리해 조국으로 보내준 공로를 인정받으셨다고 들었다.”

-권총 사격 코치라는 직업은 두 할아버지와도 관련이 있을까.

“사격은 온 가족이 즐긴 취미였다. 어릴 때 나도 아빠한테 공기총 쏘는 법을 배웠다. 나는 예일대 사격팀의 주장이기도 했다(웃음). 예일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뒤 MBA를 하고 마케팅 디렉터로 일하다 나이 마흔에 사격 코치로 직업을 바꿨다. 엄마와 고모가 6개월 간격으로 돌아가신 뒤 커다란 상실감에 빠져 마음을 집중할 수 있는 직업이 필요했다. 내가 잘하는 게 총쏘기와 가르치기여서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애리조나의 사격 학교 코치로 취직할 수 있었다. 첫 15년은 군인, 경찰 등 학생이 다 남자였다(웃음).”

-90년대에 한국에서 잠시 일했다고 들었다.

“고모는 재단 문지기 역할을 하면서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일했는데, 나를 볼 때마다 한국에 가서 유한양행과 할아버지의 정신에 대해 더 배워야 한다고 권하셨다. 경영에 참여할 수 없으니 유한의 신입사원들에게 무급으로 영어 가르치는 일을 했다. 영업사원들과 함께 공장을 견학했던 기억도 난다. 30년 전 인연을 맺은 그들과 지금도 연락하며 친구로 지낸다. 서로 늙었다고 골린다(웃음).”

-자신이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느낄 때가 있는지.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라고 느끼는 것, 소신이 강해 홀로 외로운 길을 간다는 것. 그러나 할아버지는 너무 큰 분이라 내가 닮기는 힘들 것 같다.”

-’큰 그늘 아래선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는 속담처럼?

“그래서 우리는 큰 그늘을 벗어나 스스로 갈 길을 찾았다(웃음).”

-2026년 100주년을 맞는 유한양행은 창업주의 정신을 잘 계승해 가고 있나.

“할아버지의 열정과 철학에 동의하고 실천하는 분들이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유한은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지,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는지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 정신에 충실했던 전문 경영인들이 일군 시스템과 거버넌스가 계속해서 유지, 발전되고 있는지 지켜보고 있다.”

-대한민국에 유한양행 같은 기업만 있으면 K드라마를 못 만들 텐데.

“오, 노노(no)! 그건 안 된다. 한국 드라마는 정말 재미있다(웃음).”

-할아버지 유일한이 준 가장 큰 선물은 뭘까.

“등록금 1만달러와 내가 나로 살 수 있게 해준 자유, 그리고 책임감이다. 이 세 가지만 있으면 최고의 인생을 개척해서 살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엄청난 부자다!”


☞유일링

196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변호사 유일선과 중국인 아내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도쿄에서 유년기를 보낸 뒤 샌타바버라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왔다. 예일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뒤 마케팅 디렉터로 일하다 40세부터 애리조나의 사격 학교에서 코치로 일하고 있다. 한자 이름은 유은영(柳恩令). 유한학원과 보건장학회 이사다.

1.

8년 묶여있던 ‘학문의 자유’ 풀려났다... 대법,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무죄

 

 

<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 이슬비 기자,  2023.10.26.  >

 


대법원은 26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됐던 ‘제국의 위안부’의 저자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에게 무죄 취지의 판결을 내리면서 ‘학문적 주장은 명예훼손 형사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법리를 확인했다.

대법원은 “박 교수의 표현은 조선인 위안부 전체에 대한 종합적 해석이나 평가로서 학문적 주장이나 의견의 표명”이라며 “학문적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은 필요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고 판시했다. 박 교수의 무죄는 향후 서울고법에서 진행될 파기 환송 재판에서 최종 확정될 전망이다.


◇대법 “명예훼손 처벌 대상 아니다”

박 교수는 2017년 1월 1심에서 무죄를, 같은 해 10월 2심에서는 유죄(벌금 1000만원)를 선고받았다. 2심은 ‘강제 연행이라는 국가 폭력이 조선인 위안부에 관해서 (공적으로) 행해진 적은 없다’ ‘위안부란 근본적으로 매춘의 틀 안에 있던 여성들’ 등 11개 표현이 허위 사실이며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이날 대법원은 2심 유죄로 본 표현들에 대한 판단을 내놨다. ‘공적 강제 연행’ 부분과 관련해 대법원은 “국가나 군 차원에서 어느 정도 개입이 존재해야 이를 ‘공적 강제 연행’으로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해 다양한 해석과 주장이 가능하다”면서 “박 교수 주장이 문언의 객관적 의미나 대중의 언어 관습에 비춰 용인될 수 없는 수준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대법원은 “저서의 전체적인 내용이나 맥락에 비춰 보면 박 교수가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강제 연행을 부인하거나 조선인 위안부가 자발적으로 매춘 행위를 했다거나 일본군에 적극 협력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해당 표현들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대법원은 “오히려 박 교수는 강제로 끌려가는 이들을 양산한 구조를 만든 것이 일본 제국이며 조선인 위안부는 일본 제국 구성원으로서 피해자인 동시에 식민지인으로서 일본 제국에 협력할 수밖에 없는 모순적 상황에 있었다는 점을 여러 차례에 걸쳐 밝혔다”고 했다.

대법원은 또 “박 교수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제국의 책임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다른 사회 구조적 문제가 기여한 측면이 분명히 있으니 전자에만 주목해 한일 갈등을 키우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기 어렵다는 주제 의식을 부각하기 위해 해당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고도 했다.

박 교수는 이날 판결에 대해 “대한민국에 국민의 사상을 보장하는 자유가 있는지에 관한 판결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위안부 강제 연행을 부정하거나 위안부 할머니를 기만한 적이 없다”며 “고발당한 이후 9년 4개월 동안 제 의도를 정확히 간파하고 응원해 주신 분들께 감사한다”고도 했다.

 


◇ 2014년 시작된 법정 공방

‘제국의 위안부’가 처음 출간된 것은 2013년 8월이었다. 이 책은 ▲위안부의 불행을 낳은 것은 식민 지배, 가난, 가부장제, 국가주의라는 복잡한 구조였다 ▲20만명이 강제로 위안부가 됐다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라는 등의 주장을 담았다. ‘위안부 문제를 보는 폭넓은 시각을 제시했다’는 호평과 ‘일본의 국가적 책임을 경시하는 잘못된 논점을 담았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았지만 학문적 논의의 틀을 벗어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2014년 6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9명이 자신들을 ‘자발적 매춘부’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 등으로 매도했다며 박 교수에 대한 민형사 고소에 나서면서 책을 둘러싼 법적 공방이 시작됐다. 법원은 이들이 낸 출판 금지 가처분 신청을 일부 인용해 “ ‘위안부’들을 ‘유괴’하고 ‘강제 연행’한 것은 최소한 조선 땅에서는, 그리고 공적으로는 일본군이 아니었다” “’위안’은 기본적으로는 수입이 예상되는 노동이었고, 그런 의미에서는 ‘강간적 매춘’이었다. 혹은 ‘매춘적 강간’이었다” 등 문장 34개를 삭제해서 출판하도록 했다.


◇국내 학계, 옹호와 비판으로 나뉘어

2015년 11월 검찰이 박 교수를 기소하자 ‘학문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고노 담화’의 주인공인 고노 요헤이 전 일본 관방장관,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일본 총리, 노벨 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 등 일본의 진보적 인사들은 “제국 일본의 근원적인 책임을 지적했을 뿐”이라며 박 교수를 옹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국내 학계는 옹호론과 비판론으로 나뉘었다. 2015년 12월 2일 김병익 전 문화예술위원장, 문정인·정과리 연세대 교수 등 190여 명은 “검찰 측의 기소 사유는 책의 실제 내용에 비춰볼 때 타당하지 않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반면 같은 날 정진성·양현아 서울대 교수, 임지현 서강대 교수 등 60명은 “충분한 학문적 뒷받침 없는 서술로 피해자들에게 아픔을 주는 책”이라며 ‘제국의 위안부’를 비판했다.

 

 

 

2.

무죄 난 박유하 교수 “좌도 우도 ‘제국의 위안부’를 誤讀했다”

 

90년대 도쿄 위안부 증언 집회,  눈물 흘리며 통역한 게 첫 인연
하지만 ‘제국의 위안부’ 펴낸 후 있는 그대로 읽은 독자는 소수
9년 4개월 만의 무죄 판결, 집필 동기 이해받았다는 심정
할머니들은 늘 소외돼 그분들의 명복과 평안을 빈다

< 조선일보,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  2023.10.30. >



위안부 할머니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형사고발당한 지 9년 4개월 만에 대법원의 무죄취지 파기환송 판결을 받았다. 판결문에선 나의 집필 동기와 글의 의도가 명확히 파악되고 있었고, 학문과 역사에 대한 깊은 고찰도 담겨 있어 반갑고 고마웠다.

30년 전의 일이 떠오른다. 90년대 초, 일본 유학 마지막 무렵 즈음에 위안부 문제가 처음 제기되었다. 도쿄에서 열린 위안부 증언 집회에서 나는 무료로 통역 봉사를 맡게 되었다. 눈물을 흘리며 통역하던 경험이 바로 이 문제와의 첫 만남이다. 귀국 후 나눔의 집을 방문해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증언집을 읽기도 하면서, 나는 세간에서 위안부 문제가 소비되는 방식에 조금씩 의문을 갖게 되었다. 2005년에 펴낸 책 ‘화해를 위해서’에서 나는 그런 의구심을 처음 세상에 제기했다. 언론에서도 호의적으로 다루어지고 ‘문광부 우수교양도서’로 선정되기도 했지만, 책은 많이 팔리지 않았고 널리 읽히지 않았다.

이후에도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 대립은 격화되어가기만 했다. 국내에 소녀상이 세워진 직후부터, 나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제대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목소리 큰 양극단의 싸움에 동원되어 똑같이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만 늘어가는 소모적 현실에 제동을 가하고 싶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나고 관계 서적 대부분을 읽어 온 내가 보기에, 할머니들의 삶을 온전히 보려고 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소중히 여겨지는 듯 하면서도 실상은 할머니들은 소외되고 있었고,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원인은 거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2013년에 ‘제국의 위안부’를 펴내고 나서 다시 할머니들을 만났다. 그들은 여전히 소외되고 있었다. “적은 100만, 나는 혼자” “정대협 빼고 보상을 직접 달라”고 말하는 할머니들의 토로를 들으며, 나는 그간의 의구심과 판단이 맞는다는 확신을 얻었다.

양극단을 비판한 나의 책을 두고, 그 양극단은 자신들의 기존 주장에 맞춰 오독했다. 우파 일부는 내가 자신들과 똑같이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동의했다며 환영했고, 좌파 일부 역시 위안부를 매춘부라 비난했다면서 나를 공격했다. 급기야 내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나는 것을 노골적으로 불편해하던 ‘나눔의 집’은, 내가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면서 형사·민사·가처분 소송을 제기했다. 책을 낸 지 10개월 후였다. 나와 가장 친했던 위안부 할머니가 작고한 지 일주일 만의 일이었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문은 “강제 연행 부인, 자발적 매춘, 적극 협력을 말하기 위해 해당 표현을 사용한 게 아니다”라고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이번 사건은 위안부 할머니들과 나의 싸움이 아니라, 그렇게 주변인들과 나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그 주변인들의 진짜 불만은 자신들과 ‘다른 해결 방법’이 모색되고 받아들여진 데에 있었다.

위안부 문제는 흔히 한일 문제로만 여겨지지만, 실은 냉전 체제와도 깊이 연계되어 있다. 위안부 문제가 시작된 1990년대 초는 북한이 일본과 국교 정상화 협상을 벌이던 시기였고, 북한은 위안부 문제를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불법 배상’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겼다. 1992년에 당시 정대협 간사였던 윤미향 전 대표가 북한이 조일 수교협상에서 ‘전쟁 범죄 배상’을 받아내려 한다면서 “남과 북 모두가” “배상을 받아내기에 충분한 주체 역량”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배경이기도 하다. 위안부 문제 운동에 깊이 관여한 법률가들 역시 북한의 대일 협상력을 의식했다. 위안부 문제에서 보상 아닌 ‘배상’을 받으려면 ‘불법’이어야 하고 바로 그 때문에 어디까지나 ‘국가에 의한 강제 연행’이어야만 하는 구조가 그렇게 시작됐고 정착됐다.

하지만 정작 북한은 2002년 평양 선언에서 그 주장을 접고, 경제적 보상을 받는 방식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이후에도 윤미향 대표 등 주변 관계자들은 ‘불법 배상, 강제 연행’ 주장을 이어갔다. 이들이 박근혜 정부 시절의 한일 합의를 결사 반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동아시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나는 북일 수교를 기대하는 쪽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국가의 자존심을 살리는 수단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은 전혀 원하지 않던 ‘성 노예 프레임’에 갇히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국가에 동원되어 오랜 세월 거리에 서야 했고, 이제는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다. 내가 ‘제국의 위안부’를 쓴 건, 그분들이 전쟁의 희생자가 아니라, 식민지 지배의 희생자들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돌아가신 할머니들의 명복을 빌고, 남은 할머니들의 평안을 기원한다.

 

 

 

3.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할머니들 편에서 쓴 책…그분들 소외당했다"

 

< 중앙일보, 문현경 기자,  2023.11.01  >

 


2013년 출간 때부터 여러 의미로 주목을 받았던「제국의 위안부」는 지금은 온전하게 읽을 수 없다. 나온 지 열 달 뒤부터 송사에 휘말린 책은, 법원의 가처분 결정으로 2015년부터는 34곳이 삭제된 채 출판됐다. 34곳은 고스란히 검찰의 공소장에도 들어갔다. 그것은 2017년 1월엔 ‘일부는 사실의 적시이나, 명예훼손은 아닌 것’이었다가(1심), 그 해 10월엔 ’일부는 사실의 적시이고 명예훼손죄에 해당하는 것’이었는데(2심), 결국엔 ‘모두 학문적 주장 내지 의견의 표명’인 것으로 정리됐다(3심). 지난달 26일, 대법원은 이 책을 “한일 갈등 문제 해결을 위한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학문적 표현물”로 읽었다. 6년만에 무죄를 받은 이튿날, 박유하 세종대학교 명예교수를 유선으로 만났다.

Q 사실의 적시냐, 의견 표명이냐를 두고 세 번의 재판에서 열 명의 판사들 간 의견이 갈렸다.


A 대법원에서처럼 전부 의견으로 본 것도 납득이 된다. 판결문 초반부에 역사학에 대한 얘기가 있었는데, 역사라는 게 진실에 가까운 기술이지만 과거에 남겨진 자료의 편린을 보고 학자들이 구성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의 기술도 소설의 플롯과 다르지 않다. 새로운 자료가 나오면 이전의 자료를 틀린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학문은 기본적으로 ‘의견’으로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Q 「제국의 위안부」는 어떻게 쓰게 됐나.  


A 책이 나온 2013년은 위안부 문제 운동이 시작된 지 20여 년 되던 때다. 지금도 그렇지만 위안부 문제를 두고 지원하자는 쪽과 비판하는 쪽의 목소리가 양 극단으로 치달았는데, 양 쪽 다 할머니들의 진짜 삶이나 생각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고 양 쪽 논리 모두 문제가 있었다. 이에 양 쪽을 다 비판한 책이「제국의 위안부」다. 국가의 체면 혹은 국가가 그동안 유지해 왔던 입장을 유지하기 위해 할머니들이 이용 또는 동원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초기 할머니들을 본 입장에서, 할머니 편에 서서 쓴 책이다.


Q 왜 소송까지 이어졌다고 생각하나.


A 책 나온 직후 반응은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고발 당한 건 10개월 후인데, 할머니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으려 했기 때문이다. 책이 나온 뒤 정작 할머니들의 생각을 물어보려 한 사람이 없어 그걸 들으려 갔다가, 나눔의 집 처우에 대한 불만과 정대협 대표 등에 대한 비판 이런 이야기까지 제가 듣고 말았다. “정대협 빼고 보상을 달라” “일본을 용서하고 싶은데 말하지 못한다” 얘기하는 분도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모아 ‘위안부 문제, 제3의 목소리’란 심포지엄(2014년 5월)을 열어 한·일 언론으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한 달 후에 고발을 당했다.

Q 위안부 문제 운동의 ‘감추어진 목적’이 있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고 SNS에 썼는데.


A 위안부 문제 운동도 30년이 넘어 거의 역사화됐다. 그 운동의 역사와 배경에 비춰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얘기다. 최근 몇 년 간 강제징용·위안부 관련 판결을 살펴 봤더니,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가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더라. 1965년 협정은 공식적으로 식민지 배상을 받은 게 아니다. 앞으로 만일 북한과 일본이 수교하게 되면 한국이 공식적으로 받지 못했던 배상을 북한이 받게 받도록 하자는 생각이 존재했다. 그러려면 식민지배가 ‘불법’이어야 하고 그 안에서 이뤄진 게 ‘강제’가 돼야만 한다. 물론 그것만 목적이라는 얘기는 아니고, 이런 식의 정치적 구조도 배경에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


Q 책 하나로 10년 가까이 송사로 고생했는데, 다시 돌아가도 그 책을 쓰겠는가.


A

 

(잠시 고민하다) 쓸 것이다. 저는 한국을 떠날 생각이 없는 사람으로서 사회가 좀 더 좋아지길 바라고 그런 의미에서 쓴 책이다. 

 

제 관심은 ‘한·일 관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갈등’ 전반이다. 

 

양 극단이 대립하며 발생하는 < 분열과 갈등, 목소리 큰 사람들의 문제를 계속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가 좀 더 안정적으로, 분열에 흔들리지 말고 접점을 찾아, 사람의 생각이 다 같을 순 없겠지만 접점을 찾으면서 좀 더 합리적이면서도 윤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4.

정의연도, 박유하도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았다


‘제국의 위안부’는 無罪였지만 박유하 주장이 옳다는 건 아냐
‘동지애’ ‘매춘적 강간’ 주장, 피해자에 대한 혐오 불러
정부는 ‘정의연 독주’ 방관만, 진정한 사과 이끌 외교 절실

< 조선일보, 김윤덕 선임기자,  2023.11.07. >


 
일본 저널리스트 도이 도시쿠니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강덕경의 일생을 추적한 책 ‘기억과 살다’에는 매우 논쟁적인 대목이 등장한다. 도야마의 군수 공장을 탈출한 자신을 붙잡아 강간한 뒤 군 위안소로 끌고 간 고바야시 헌병에 대한 강덕경의 증언이다. 고바야시는 15세 소녀를 지옥 구덩이로 던져 넣은 악마지만, “가끔 주먹밥과 건빵을 갖다주고 뱃놀이도 데려가 준 사람이었다”고 강덕경은 회고한다. “고바야시에게서만 그런 일을 당했다면 위안부로 신고하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했다.

가해자를 향한 증오와 애착의 공존에 저자는 범죄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한다. 매 맞는 아내가 남편에게서 도망치지 못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듯, 물리적·심리적 감금 상태에 있던 위안부들은 생사여탈권을 쥔 일본군이 사소한 자비를 베풀 때 과도한 애착과 감사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다.

‘제국의 위안부’를 쓴 박유하 교수의 해석은 달랐다. 그는 강덕경 같은 조선인 위안부들이 일본 군인에게 느낀 감정이 ‘사랑’ 또는 ‘동지애’일 수 있다고 해서 논란을 불렀다. 황국신민으로 애국자 역할도 담당해야 했던 조선인 위안부에겐 일본군과의 동지적 관계가 긍지가 되어 살아가는 힘이 되었고, 일본군을 간호하고 사랑하고 함께 웃던 기억을 은폐하는 건 그들을 또 한번 노예로 만드는 것이라고도 했다.

나는 박유하의 문제적 저서 ‘제국의 위안부’가 사법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책이 위안부 피해자들을 분노하게 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데 동의한다. 하루 수십 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여성들에게 ‘동지애’란 말은 얼마나 잔인한가. 이는 여성 폭력에 대한 무지이자, 피해자가 아닌 ‘제국의 시각’에서 위안부를 바라본 ‘인간에 대한 몰이해’다.

일본의 국가적 책임 유무를 결정하는 두 요소 ‘강제 연행’과 ‘위안소의 매춘적 성격’에 대해서도 박 교수는, 여성을 직접 끌고 간 주체는 포주나 업자이지 일본군이었던 경우는 적어 국가적 책임을 묻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매춘적 강간’이라는 모호한 용어를 통해 매춘을 목적으로 한 조선인 위안부도 적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군 위안부 제도는 그것이 강제 연행이든 사기든, 성폭력이든 성매매든, 일본군과 사랑을 했든 안 했든, 국가 조직인 군대가 여성에게 가한 명백한 폭력이다. 군 당국과 행정기관의 비호와 묵인 없이 위안부 동원이 불가능했다는 건 일본 학자들도 동의하는 바다. 박유하가 주요 근거로 삼은 센다 가코의 책 ‘종군 위안부’조차 ‘군의 명령에 의해 전장으로 끌려가 제1선 장병들의 성욕 처리 용구로 이용됐던 여성’으로 위안부를 정의한다. ‘제국의 위안부’와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윤명숙의 일본 박사 학위 저술 ‘조선인 군 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 제도’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와 증언이 빼곡하다.

물론 ‘제국의 위안부’는 과도한 민족주의를 등에 업고 위안부 담론을 독점한 채 일본 정부에 강경 일변도로 대응해 온 정대협(정의연)의 운동 방식을 정면으로 비판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일본 정부가 왜 그토록 법적 배상 책임을 거부하는지도 소상히 밝힌다.

문제는 박 교수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해 썼다”는 이 책이 아베 정권과 일본 극우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이다. 국내에서조차 “매춘이 자랑이냐” “가짜 위안부 색출하라”는 모욕과 멸시가 쏟아졌고, 좌파와 정의연은 이를 반일 선동에 이용했다. 박 교수는 “좌우 모두 내 책을 오독했다”고 했지만, 누구를 위한 화해인지 오독하게끔 글을 쓴 건 저자의 책임이다.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 이후 30년이 흘렀지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은 요원해 보인다. 일차적 책임은 정의연의 독주를 수수방관한 정부에 있다. 박근혜 정부가 아베 정권과 우여곡절 끝에 타결한 합의마저 문재인 정부가 휴지 조각으로 만든 뒤로는 단 한 걸음의 진전도 없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챙겼다”는 이용수의 분노처럼 한일 양국 간 협상에서도, 정의연과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도 할머니들은 언제고 소외됐다.

이제라도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일본 정부의 개입이 없었다는 주장에 분노해 위안부 피해 신고를 했던 강덕경은 “일본 정부가 진상을 밝혀준다면 배상을 받지 못해도 상관없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대구에서 만난 이용수 할머니는 “돈을 바라는 게 아니라 죽기 전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싶은 것”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결국 외교로 풀어야 한다. 일본 총리가 고개 숙여 할머니들 손을 잡아드리는 일이 그 첫걸음이다. 그건 대통령과 정부만 할 수 있다.


"노인은 꽃사진 찍길 좋아한다. 이미 꽃이 아니므로"

 

 

< 매일경제, 허연 기자,  2023-10-20 >

 

 

 

 


나이 든 사람들은 꽃 사진 찍는 걸 좋아한다. 꽃은 생명력의 정점이다. 즉 꽃은 '청춘'이다. 이제 청춘을 지나쳐버린 사람들은 꽃을 찍는 것으로 생명력의 정점이 지나갔음을 아쉬워한다.

청춘은 공유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청춘은 지나가 버리기 때문에 결코 어떤 세대도 공유할 수 없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는 승계밖에 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다.

소설 '좁은 문'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는 청춘을 승계하는 매뉴얼북 같은 책을 두 권 남겼다. '지상의 양식'과 '새로운 양식'이 그것이다. '지상의 양식'과 '새로운 양식'은 소설이라고 보기에는 좀 모호한 구성을 지닌 특이한 저작물이다.

'지상의 양식'과 '새로운 양식'은 서로 38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쓰였지만 핵심 메시지는 같다. 현실이나 규범에 굴복하지 말고 꿈과 의지대로 청춘을 누리라는 게 두 책의 방향성이다.

"동지여, 사람들이 그대에게 제안하는 바대로 삶을 받아들이지 말라. 삶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항상 굳게 믿어라. 자기의 현재를 살아라. 삶에서 거의 대부분의 고통은 신의 책임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그대가 깨닫기 시작하는 날부터 그대는 더 이상 고통의 편에 들지 않을 것이다."('지상의 양식' 중)

지드가 이처럼 청춘을 마음껏 누리기를 강력하게 주장한 것은 그의 성장사를 들여다보면 단서가 보인다. 지드는 아버지가 어린 시절 사망하면서 외가에서 자라게 된다. 지드의 외가는 프랑스에서는 드문 개신교 집안, 그것도 엄격하기로 유명한 칼뱅파 청교도였다. 칼뱅파 청교도는 적극적인 금욕을 통한 탈세속화를 중요시한다. 일상생활에서도 시시각각 신앙을 증명해야 하고 늘 욕망을 자제하는 것이 칼뱅파의 도리였다. 섬세하고 호기심 많은 욕망의 화신 지드는 이에 반발했다. 육체를 포기해야 정신이 행복해진다는 식의 구분법은 지드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지드의 대표작 '좁은 문'에는 신이 규정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랑마저도 포기하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에서 지드는 "육체와 함께 행복하기를 신도 바랐을 것"이라고 외친다. 지드는 말년에 쓴 '새로운 양식'을 통해 더욱 완숙해진 청춘론을 펼친다.

"그대는 다시 채워 넣어야 할 텅 빈 하늘 아래. 처녀지에 벌거숭이로 서 있다…. 오, 내가 사랑하는 그대여. 어서 한 손으로 이 광선을 붙잡아라. 별이 있지 않느냐! 무거운 짐을 버려라. 아무리 가벼운 과거의 짐이라 해도 거기에 매이지 마라…. 나는 인간을 축소시키는 모든 것을 미워한다."

지드의 책들은 청춘의 승계 방식을 알려주는 하나의 '바통(baton)' 같다. 지드는 청춘의 승계만이 인류를 퇴보시키지 않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세대 갈등이 있는 사회는 이 승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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