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의 유토피아, 北 탈출 작전에 내 전부를 걸었다

탈북 다큐 ‘비욘드 유토피아’
구출 진두지휘한 김성은 목사

< 조선일보, 정상혁 기자,  2023.10.21.  >

 


“지금 압록강 물은 어때요?”

비가 와서 강물이 불었다는 현지 브로커의 대답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다. “그럼 애가 위험한데…. 거기 군대들이랑 얘기 된 거죠?” 소년 한 명이 국경을 넘어 백두산 인근에 도착하기로 약속돼 있었다. 먼저 탈북한 소년의 어머니가 김성은(58·갈렙선교회) 목사에게 북한에 남아 있는 아들의 구출을 부탁한 것이다.

가장 가까운 나라, 그러나 가장 먼 나라. 북한을 빠져나와 공산국가인 중국~베트남~라오스, 그리고 태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오는 그 길은 사선(死線)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북송(北送)은 사실상의 죽음을 의미한다. 중국에서 잡히면 인신매매로 팔려갈 수 있다. 김 목사는 “한 명이라도 더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23년째다.

그가 진행한 실제 탈북 과정이 다큐멘터리 영화 ‘비욘드 유토피아(Beyond Utopia)’로 제작돼 올해 초 공개되자 세계는 경악했다. 1월 미국 최고의 독립영화제 ‘선댄스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했고, 지난 1일 ‘우드스톡영화제’에서는 베스트 다큐멘터리상을 받았다. ‘크리틱스 초이스 다큐멘터리 어워즈’ 4개 부문 후보에도 이름을 올렸다. 오는 23~24일 미국 전역 600여 극장에서 상영된다. 자유의 열망이 더 멀리 알려질 것이다. 영상 속에서 한 탈북자가 증언한다. “북한 정권은 우리가 낙원에 살고 있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거대한 감옥에 갇혀 있었다.” 도망치려면 죽기를 각오해야 한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

 


–영화 홍보 투어를 다녀오셨다고요.

“지난달부터 뉴욕·LA·콜로라도·샌프란시스코·워싱턴DC·보스턴 등 수십 지역을 40일간 돌았습니다. 난생처음 할리우드 사람들도 만났네요. 관객들이 많이 환호해주셨어요. 펑펑 울어주시고. 사람 목숨 구하는 영웅이라고요.”

–탈북 촬영이라니 무모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사실 안 하려고 했어요. 영화감독이 미국인(마들렌 개빈)인데 노랑 머리랑 같이 다니면 얼마나 눈에 잘 띄겠어요. 전화 요청은 계속 거절했어요. 그러자 2019년에 감독이 천안의 저희 교회로 찾아온 거예요. 결국 조건을 걸고 승낙했죠. 중국에는 감독 없이 우리 선교회 인원만 간다. CCTV도 철저하고 요새 정말 살벌하거든요. 그리고 제작비가 부족하니 탈북은 딱 한 팀만 진행한다. 촬영은 대부분 휴대폰으로 했어요.”

–영화엔 탈북자 두 팀이 등장하지요?

“그해 촬영에 돌입하자마자, 딱 맞춰 연락이 하나 왔어요. 탈북자 가족 5명이 백두산 근처에 마련해놓은 저희 교회 안가(움막)에서 구조 요청을 한 거예요. 가만 두면 잡히니 구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데다, 이미 북한을 빠져나왔으니 탈북 비용이 확 줄어든 상황이었죠. 추가 촬영이 가능해진 겁니다.”

1시간 55분 길이의 이 영상은 북한에서 아들을 빼내려는 이소연씨, 그리고 부모, 조모, 두 딸과 함께 탈북하는 노씨 가족의 두 이야기로 이뤄져 있다. 탈북은 첩보 작전과 다름없다. 현지 브로커와의 통화는 도청 우려로 1분을 넘기지 않고, 채팅 메시지로는 은어를 쓴다. ‘한국 올 때 맥주 안주로 명태 다섯 마리만 가져와(한국행 탈북자가 다섯 명 있다)’ 같은. “신고 보상금이 있으니 택시만 잘못 타도 중국 공안에 잡혀요. 돈이 더 들어도 무조건 안전이 먼저예요.” 탈북자들은 주머니에 청산가리를 넣고 다녔다. 여차하면 삼킬 심산으로.

–난관의 연속일 것 같습니다.

“동남아 밀림 지날 때가 가장 힘들어요. 벌레는 어찌나 큰지…. 밟았는데 물컹해요. 보니까 뱀이에요. 기절한 애도 있죠. 한번은 낭떠러지에서 굴러서 허리 수술도 받았어요. 담낭도 적출했죠. 긴장해서 당시엔 통증도 못 느끼고 벌떡 일어나서 걸었어요. 가시에 베어도 피가 흐르는 걸 못 느낄 정도로. 근데 아이들한테는 여행 같은가 봐요. 산도 넘고 강도 건너고 야생 코끼리도 보고…. 밀림은 백번 천번을 다녀도 길을 몰라요. 반드시 그 구간만 오가는 현지인을 섭외해야 해요.”

–탈북 루트 노출 위험은 없나요?

“욕 많이 먹었어요. 다큐멘터리로 탈북 경로 다 까발린다고. 그런데요, 중국만 놓고 봐도 육로로 수천㎞예요. 경로와 교통수단의 경우의 수도 여럿이고요. 주로 밤에 이동합니다. 손전등을 켜도 공중에서 안 보이는 우거진 숲으로요. 영상에서 장소를 특정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지금도 넷플릭스와 또 다른 탈북 다큐멘터리 촬영을 논의 중입니다.”

 


◇자유를 향해 뛰다가 목이 부러졌다


김 목사가 ‘탈북 사역’을 시작한 건 2000년부터. 평소 다니던 교회 은사(이형렬 목사) 때문이었다. “인생 살아가면서 하나님 앞에서 뭔가 하나 해보는 게 좋지 않겠냐고 하시더군요.” 1월 4일, 중국 선교에 따라나섰다. 두만강 투먼. 하루에도 수십 구씩 북한에서 시신이 떠내려왔다. 굶어 죽거나 처형당한 이들이었다. 강가에 서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누가 손을 당겼다. “동포끼리 같이 좀 삽시다.” 구걸하는 꽃제비였다.

–충격이 크셨다고요.

“처음으로 진짜 현실을 본 거죠. 당시엔 그 꽃제비가 일곱 살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일을 오래해 보니 이제는 알겠어요. 열 살은 됐을 거예요. 남한과 발육 차이가 크니까. 그 아이를 본 순간 내가 할 일이 바로 여기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무슨 일을 하셨나요.

“헌 옷 수백 벌을 모아 탈북자들에게 건네줬어요. 옷도 탈북의 중요한 수단입니다. 차림새 보면 바로 들통나거든요. 가방 하나에 보통 30㎏ 넘게 나갔어요. 그걸 하나는 목에, 두 개는 양 어깨에 메고 국경을 건넜죠.”

어김없이 그날도 두만강을 건너는 길이었다. 쾅, 빙판에 대자로 뻗었다. “우두둑, 목이 꺾이는 소리가 들렸죠. 일단은 일어나서 다시 달렸어요. 그런데 밤이 되니 목이 안 움직여요. 다음 날 한국으로 들어와 병원에 갔죠. 목뼈에 철심 6개를 박았어요. 9시간짜리 대수술이었죠.” 셔츠 너머로 14년 전의 흉터가 보였다.

–첫 탈북 구출자는 누구였나요.

“제 아내요. 인민군 출신이에요. 부친이 엘리트 과학자였는데도 ‘고난의 행군’ 당시 아사하셨죠. 국경 근처 교회에서 예배 드리다 만났는데, 처음에 대뜸 저보고 ‘김정일 장군님 닮았다’고 하대요. 키 작고 배 불룩하고. 북한에서는 김정일 닮은 게 최고의 칭찬이래요. 서로 정이 깊어졌죠.”

–사랑엔 국경이 없군요.

“신앙심도 깊고 똑똑해서 한국행을 권했어요. 탈북을 마음먹은 뒤 경로를 고민했죠. 배로 와야 하나, 비행기를 타야 하나. 마침 하얼빈에서 아내와 같은 나이의 여자가 결핵으로 죽었는데, 사망 신고하지 않은 그 여자의 신분을 뇌물 주고 샀어요. 중국 여권을 만들었어요. 거기서 혼인 신고까지 마치고, 천신만고 끝에 하늘길로 한국에 왔습니다.”

탈북은 그렇게 ‘가족’의 일이 됐다. 알음알음 다른 탈북자들과 교류하며 ‘탈북 로드’ 개척에 나섰다. 시행착오도 숱하게 겪었다. “아내 데려오는 데 23년 전에 6000만원이 들었어요. 몇백 만원이면 될 일을…. 지금은 중국에만 도착하면 태국까지 일주일이면 갈 수 있어요. 네트워크가 있으니까요. 초창기에는 동생들부터 어머니까지 총동원됐죠. 베이징에서 대학 다니던 조카는 운전수 역할까지 해주고요.”

◇사상 첫 公海上 탈북 작전

 


김 목사는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의 사업이 기울어 서울에서 군산으로 내려갔다. 돈을 벌어야 했던 소년은 중학교 때부터 어선을 탔다. 벌이가 제일 좋은 일이었다. 연근해 고깃배에서 인부들에게 밥을 차려줬다. 밥을 태워 먹을 때마다 날아오는 뱃사람들의 발길질과 구박을 견뎠다. 이후 회사원으로 개인 사업자로 목회자로 살아왔지만 “예나 지금이나 고단하긴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래도 적어도 지금은 좋은 일 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던 2009년 12월, 또 한 척의 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첫 해상 탈북이었죠?

“한국에 와 있는 탈북자의 가족 4명을 데려오는 일이었어요. 그들을 인도할 조력자 한 명이 배를 탄 적이 있었고, 저도 어릴 적 바다 경험이 있으니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죠. 무엇보다 시간이 단축되니까요. 중국서 빌린 목선을 타고 탈북자들이 서해 공해(公海)로 나오면, 마중 나간 우리 배가 그들을 태우고 돌아오는 계획이었어요.”

–계획대로 됐습니까?

“처음엔 인천에 갔어요. 배를 아무도 안 빌려줘요. 가진 돈은 2000만원뿐인데, 턱도 없다는 거죠. 그래서 예전 살던 군산으로 내려갔어요. 교회 전세금을 담보로 배를 빌렸죠. 그런데 하필 출발 당일 풍랑주의보가 내렸어요.”

–위험천만이었네요.

“선장이 안 가겠다는 거예요. 지금 우리만 믿고 바다에 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소연해도 안 통해요. 자기도 처자식이 있다고. 당장 다른 배를 구해야 했어요. 수제비 식당하는 여동생에게 전화했죠. 돈 좀 부쳐달라고.”

겨우 출항했지만, 약속된 접선 시간보다 9시간이 지체돼 있었다. 탈북자들은 집채 같은 파도 위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수시로 무전을 타전했지만 응답은 없었다.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부디 버텨주기를. 기다려주기를. 20시간 가까이 내달렸을 때, 저 멀리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목선 한 척이 보였다. “그때 같이 간 선장이 그러더군요. 기적이라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이 일화는 조선일보가 기획·제작한 다큐멘터리 ‘천국의 국경을 넘다2′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러나 그해 그는 하나뿐인 아들을 잃었다. 뇌병변을 앓던 일곱 살짜리 아들. 후원을 받기 위해 부부가 다른 교회에 다녀오던 날이었다. 집에 도착해보니 아들의 눈이 뒤집어져 있었다. 음식이 기도로 넘어가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때 다 그만두려고 했어요. 아내는 자기도 죽겠다고 40일 금식을 했습니다. 그러다 환상을 봤나 봅니다. 내가 너희 아들을 천국으로 인도했는데, 지금 지옥으로 가는 사람이 너무 많다…. 아,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아들의 유골을 바다에 뿌린 뒤, 그는 다시 지옥의 국경으로 향했다.

◇돈 없이는 목숨도 없다… 냉혹한 현실



–지금껏 1000명을 구하셨다고요?

“과장된 숫자예요. 1000여 명에게 도움을 주긴 했어요. 데려온 건 300명이 약간 안 돼요. 그 많은 돈을 어디서 구하겠어요. ‘영끌’해도 안 됩니다. 코로나 사태 직전에 북한에서 중국으로 오는 데만 2000만원 들었어요. 지금은 5000만원이 넘어요. 한국까지 오는데 한 명당 1억원 가까이 들죠.”

–구조 요청은 늘었을 텐데요.

“지난여름에도 4명 데려왔어요. 더 구하고 싶어도 돈이 없으니 괴롭습니다. 자꾸 돈 얘기 하면 ‘무슨 종교인이 저래’ 사이비 같겠지만, 그게 현실이에요. 당장 가진 게 없으니 ‘나중에 한국 도착하면 꼭 지불하겠다’고 현지 브로커한테 각서도 써요.”

–언제나 돈이 문제군요.

“100만원 들 거 200만원 쓰면 안전하게 데려올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승합차를 한 대 더 빌리면 검문소를 더 쉽게 통과할 수 있는 거예요. 투자한 만큼 돌아오는 거죠.

탈북 사역은 후원금으로 진행된다. “정기적으로 마음을 보태주시는 교인이 300명 정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충분하지 않다. 교회 건물 전세금이 올라 방을 빼야 할 상황까지 몰렸다. 그 때마다 기적이 찾아왔다. 홀연히 6000만원이 든 봉투를 건네고 사라진 익명의 부부, 은행 대출까지 받아 위기 극복에 힘 보탠 김밥집 주인, 하나님께 바친다며 1억원 넘게 건넨 의사…. 이 돈으로 사람을 구했다. 그러나 보상은 없다.

–섭섭하지는 않으세요?

“칭찬은커녕 험담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결국 당신 유명해지고 싶은 거 아니냐고. 영웅 놀음 그만 하라고. 어느 외교부 공무원은 ‘자꾸 이러면 중국과의 관계만 껄끄러워진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왜 계속 하십니까.

“열네 살 때 탈북하다가 붙잡혀 중국에 팔려온 여자가 있었습니다. 13년간 사창가에 있었다더군요. 얻어맞을 때마다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요. 저희와 연결됐을 때도 당연히 믿지 않았대요. 팔려가더라도 그저 한 번 더 팔려가는 거니까, 속는 셈 치고 따라나선 거죠. 그랬던 여자가 마지막 관문 메콩강을 건너자 울더군요. 하나님이 뭔지 교회가 뭔지 잘 모르지만 누군가에게 도움받은 경험이 생전 처음이라고. 예전엔 억울해서 울었지만 이번엔 고마워서 운다고.”

◇거저 주어지는 유토피아는 없다

지난해 김 목사는 충남 아산에 탈북민 공동체 센터를 지었다. 독지가 등의 후원으로 2100평 땅을 마련해 30~40명이 지낼 수 있는 공간을 꾸린 것이다. “4년 전 서울 봉천동에서 탈북자 모자(母子)가 집에서 굶어죽은 일도 있었고…. 누구나 와서 쉬면서 고민도 털어놓고 음식도 나눌 그런 곳이 필요할 것 같았어요.” 지난 7일 찾은 이곳 텃밭에서 탈북자 일고여덟 명이 고구마를 캐고 있었다. “북한 있을 때 다 농장원이었고 강냉이 심던 경험이 있으니까, 흙을 밟으면서 내적 치유가 되는 것 같아요.”

–탈북자 자활 운동도 하셨죠.

“탈북이 끝이 아니잖아요. 여기서 잘 살아야죠. 제 전 재산에 어머니가 보태주신 돈, 대출금을 합쳐 천안에 3층짜리 교회 건물을 8년 전에 샀어요. 1층 전체를 탈북자에게 무료로 내줬죠. 가게 차리라고요. 고기 잡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사는 잘됐습니까.

“세탁소도 하고, 카페도 있었고, 그런데 코로나가 왔죠. 쉽지 않아요.”

–기업 등의 외부 후원은 있나요?

“없습니다. 큰 기업일수록 국제적인 이해관계가 복잡할 테니 이해는 합니다.”

–정부의 도움은요?

“아뇨. 지난 정권은 특히 힘들었습니다. 귀순한 북한 주민을 추방하기까지 했잖아요. 자세히는 말 못 하지만, 똑같은 국가기관인데 정권에 따라 태도가 달라지는 게 참 웃깁니다.”

국제 정세도 녹록지 않다. 중국은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끝나자 지난 9일 탈북자 약 600명을 강제 북송했다. 이 같은 대규모 북송은 코로나 발발 이후 처음이다. 김 목사는 지난 6월 노르웨이에서 열린 국제 인권회의 ‘오슬로 자유 포럼’에 연설자로 참가해 중국 정부의 각성을 호소한 바 있다.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북한 주민들의 인권이 개선되기 위해서는 국제 사회의 한목소리가 필요합니다. 중국이 탈북민들의 주요 탈출 루트에 있는 만큼, 중국 정부가 인권 문제 해결의 중요성을 인식하기를 바랍니다… 팬데믹 기간 중국에 구금돼있던 2000명 가까운 탈북민이 북송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과 헌신을 모으면 지금 이 순간에도 북송의 두려움에 떨며 물건처럼 팔려 다니는 탈북민들의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최종 목표는 무엇인지요.

“더는 이 일을 할 필요가 없어지는 날을 보고 싶습니다.”

이래진 “국민 목숨보다 북한이 먼저였던 文, 다시 나와선 안 될 통치자”

‘서해일기’ 펴낸 이래진 씨


< 조선일보, 김윤덕 선임기자,  2023.10.16. >

 


‘바이오 라이더’라는 매연 저감 장치를 생산해내던 70평 작업실은 2020년 9월 21일 낮 1시 35분에 멈춰섰다. 여덟 살 때부터 아버지와 배를 타고, 수산고 졸업 후 원양어선을 누빈 이래진은 각종 공구로 뒤덮인 작업실에서 새로운 기계를 발명할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동생 이대준의 실종이 그의 인생을 180도 바꿔놨다.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되는 싸움, 국가 권력을 향한 싸움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3년. 감사원은 이달 5일, “문재인 정부가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대준을 근거도 없이 자진 월북자로 몰아갔다”는 내용의 감사 보고서를 채택했다.

◇슬리퍼가 월북의 증거?


-지난달 이대준 피격 사건 전말을 기록한 ‘서해일기’를 출간했다.

“해경이 사고 현장을 수색하는 모습을 보면서 단순 실종 사고가 아닐 거란 예감이 들었다. 일지로 기록해두지 않으면 중요한 단서들을 놓칠 수 있고, 나중에 재판으로 갈 경우 정황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매일매일의 상황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걸 책으로 엮었다.”

-왜 단순 실종 사고로 여기지 않았나.

“수색 과정에 헬기를 요청했더니 마지 못해 날아와 대연평도를 한 바퀴 돌고 남쪽으로 내려가더라. 지그재그나 S자 형태로 돌아야 바다를 자세히 훑어볼 수 있는데 그냥 한 바퀴 휙! 수색에 분초를 다퉈야 할 시간에 구명조끼 전수조사를 하는 것도 이상했다. 실종 3일째 되는 날 ‘동생이 북한을 동경했느냐’ ‘불온 서적 읽는 걸 본 적 없느냐’는 전화를 받고 누구도 믿어선 안 된다고 다짐했다.”

-사고 초기엔 우리 해군이 동생을 구조해낼 거라 믿었다고 썼던데.

“조류 예측 시스템이 계속 발전해 왔기 때문에 골든 타임이면 구조도 가능할 거라 믿었다. 그런데 현장에 가보니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특히 슬리퍼. 그들은 선미에 나란히 세워져 있던 슬리퍼를 자살 혹은 월북의 단서라고 주장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무슨 뜻인가.

“나는 완도 수산고를 졸업한 뒤 원양선사에서 10년간 근무하며 실종 등 선박에서 일어난 수많은 사건을 보고 수습했던 사람이다. 선박에서 자살자는 절대 슬리퍼를 그렇게 놓지 않는다.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라 난간에 한 짝이 엎어져 있거나 난간 위에 있다. 그리고 당직이었던 동생은 복장 규정상 근무복과 안전화를 신고 있었을 거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방에 있어야 할 슬리퍼를 가지고 나와 세워 놓은 것이다.”

-2억6000만원의 빚 때문에 월북을 시도했을 거란 보도도 나왔다.

“얼마나 파렴치한가. 국민의 생명보다 동생을 일단 나쁜 놈으로 몰고 가는 게 그들에겐 더 시급했다. 기사가 나오자 동생의 회생법원 담당 변호사가 연락했더라. 대준이는 짧은 기간 변제가 가능했던 특A 우량자였다고, 필요하면 증언하겠다고. 나중에 밝혀진 동생의 공식 채무는 9500만원으로, 2년 반이면 다 갚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또 동생이 월북을 결심했다면 고속단정을 내려서 타고 가지 미쳤다고 조류를 거슬러 맨몸으로 헤엄쳐 가겠는가. 조오련도 아닌데.”


◇월북 인정하면 보상한다는 회유


-민주당 황희 의원을 비롯해 해군참모총장 등 6명이 안산 작업실로 찾아와 협박을 했다던데.

“황희는 이 사건의 민주당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이었다. 사건 발생 일주일만에 ‘월북이 사실로 확인돼가고 있다’고 발표하더니, 다음 날 안산으로 와 ‘동생이 월북 운운했다는 SI(특수정보) 첩보를 듣고 왔다. 어린 조카들 생각해서 월북으로 인정해라. 그러면 보상해 주겠다’고 하더라. ‘같은 호남이니 같은 편 아니냐’고도 했다.”

-흔들렸을 것 같다.

“동생의 육성이 아니면 믿지 못 하겠다. SI 첩보를 나도 좀 들려달라고 했다. 나중에 들었지만, 그 첩보에는 동생이 ‘나는 대한민국 공무원이다. 남으로 보내달라’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흔들렸으면 우리 가족은 월북 낙인이 찍혀 이 땅에 살지 못했을 것이다.”

-이인영 당시 통일부 장관은 유족이 김정은에게 쓴 편지 전달을 거부했더라. 사고 현장을 방문해 동생 위해 소주 한 잔 붓게 해 달라고 쓴 편지였다.

“문재인 정부는 북한을 자극하는 그 어떠한 일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태도가 나를 더욱 투쟁적으로 만들었다. 국보법 철폐와 인권을 외쳤던 자들이 동생을 국보법으로 처벌하려 월북몰이 한 것에 가장 분노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고소했다.

“국군통수권자는 국방을 책임져야 한다. 더구나 NLL 인근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김정은과 9·19남북군사합의문까지 작성했고, 늘 ‘사람이 먼저’라고 얘기했던 대통령 아닌가. 그런데 동생 사건에서는 국민 목숨보다 북한이 먼저였다.”

-당시 문 대통령이 어떻게 했어야 하나.

“유엔 연설, 종전 선언을 미뤘어야 한다. 우리 국민이 적대 국가에 체포됐으니 구조가 우선이라고 했어야 한다. 오히려 그런 과정을 덮기 위해 자국민을 죽게 하고 월북자로 몰아갔다. 두 번 다시 이런 통치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

-왜 동생을 구조하지 않고 월북으로 몰고 갔을까.

“종전 선언을 부각시키기 위해, 자신들의 정치 쇼를 위해.”

-9·19 평양공동선언 5주년 기념 행사에 문 전 대통령이 참석했다.

자국민을 지키지 못한 건 반성하지 않고 무엇을 기념한다는 건가. 동생의 피살로 9·19군사합의 의미는 사라졌다. 게다가 문 대통령은 조카한테 엄정 수사를 약속해놓고, 책임자인 해경 수사정보국장을 남해청장으로 승진 발령시켰다. 유족을 얼마나 하찮게 봤으면. 북의 잘못을 덮기 위해 국민을 월북으로 몰아간 대통령은 반드시 합당한 죄를 받아야 한다.”


◇모자, 선글라스 쓴다고 공격도


-지난 3년간 악성 댓글 등 수많은 공격을 당했다.

“구토가 나올 만큼 욕설과 악플이 달렸다. 그런데 악플 덕에 서해 사건이 계속 최상위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동생 사건이 잊히지 않고 포털에서 매일 이슈가 되려면 견뎌야 했다.”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는 것도 시비 걸더라.

“모자는 머리에 상처가 있어서 쓴다. 선글라스는 바다 태양빛에 망막이 상해 바람만 살짝 불어도 눈물이 나서 쓴다. 이게 왜 공격거리가 되는지 모르겠다.”

-조카가 대통령에게 쓴 편지가 대필이란 의심도 받았다.

“내가 편지를 대신 써줄 시간이 어디 있나. 국방부와 해경, 정치인, 기자들 상대하느라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어서 살이 52kg까지 빠졌다. 나중엔 심근경색이 왔다.”

-동생의 죽음을 팔아 돈벌이한다는 악플도 있었다.

“동생 사건으로 나는 알거지가 될 판인데 돈벌이라니. 내가 특허 낸 바이오 라이더는 자동차, 선박에 장착하는 매연 저감 장치인데 잘 팔릴 땐 하루에 3천(만원), 5천씩 통장에 꽂혔다. 그런데 동생 실종 후 올스톱 됐다.”

-고향이 호남이라 문 정권에 맞서는 게 부담스러웠겠다.

“새파란 후배들이 술 먹고 전화해서 욕하더라. 가만두지 않겠다고. 그래도 동생 잃은 슬픔을 위로해주는 분들이 더 많았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엔 민주당 지지자였나.

“선거에서 늘 민주당을 찍었다. 그러나 동생 사건을 겪으며 국민을 위해 일하는 정당이 어디인지 알게 됐다.”

-호남 인맥이 사업에도 영향을 미칠까.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대부분 호남이니 영향을 받는다. 특히 내가 사는 안산은 호남향우회가 세다. 지역민 40%가 호남 출신이라 향우회가 안산시장을 당선시킨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런데 내가 문재인 정부와 싸워 서해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가자 많은 이들이 돌아왔다. 미안했다면서. 지난 대선에서도 호남 표심에 서해 사건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계란으로 바위를 깨부수다


-대선 후보였던 윤석열을 만났다.

“검찰총장 직무 정지 기간에 동생 사건 전체를 다 검토하고 왔더라. 대통령이 되면 가장 우선적으로 이 사건을 해결하겠다고, 제대로 조사해 책임자를 처벌하겠다고 약속했다. 취임 일주일 만에 그 약속을 지켰다.”

-서훈 전 국가안보실장, 박지원 전 국정원장, 서욱 전 국방부 장관 등이 첩보 삭제, 피격 은폐로 재판 중이다. 이제 마무리 단계로 가는 건가?

“아직 멀었다. 1심 판결도 나오지 않았다. 증인 신문을 7월에 끝낸다고 하더니 12월로 미뤘다. 민주당이 내년 총선 이후로 미루려는 거다. 그래서 재판 속개를 요청했다. 고인과 유족을 2차 가해한 정치인들에게도 책임을 물을 것이다.”

-‘공무원이 뻘짓하다 사고 당해 죽은 것’이라고 말한 주철현 같은 의원들인가.

“우상호, 주철현 등 민주당 의원들이 막말로 여론을 호도해 내 사업은 거의 망가졌다. 둘째 동생도 항해사인데 직장을 잃었다. 우리 가족의 정신적 고통을 포함해 손해배상 청구를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 자식들한테도 두고두고 부끄러울 것이다.”

-3년에 걸친 싸움이었다. 포기하고 싶은 적은 없는지.

“포기하려면 시작도 안 하는 성격이다. 끝장 볼 때까지 파는 스타일이라 다들 미친놈이라고 했다. 수륙양용 자전거도, 바이오 라이더도 수억씩 날려먹고 개발해낸 거다.”

-추석 직전이던 9월 22일이 이대준씨 3주기였다.

“제수씨와 조카들이 집에서 조용히 지냈다고 한다. 1주기엔 하태경 의원, 김기윤 변호사와 여기서 배, 사과, 육포 한 개씩 올려놓고 제사를 지냈다. 혼자였던 나를 위해 함께 싸워준 분들이다.”

-조카들은 잘 지내나.

“대준이 아들은 군에 입대해 부사관으로 생활한다. 4학년이 된 딸도 이제 아빠의 죽음을 알고 있다.”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더라.

“‘서해일기’는 단순히 내 동생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호소가 아니다. 힘없는 국민이 우리와 같은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싸워야 하고 어떤 이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 길잡이가 돼주려고 쓴 것이다. 국가와 싸워선 안 된다며 다들 만류했지만 가족의 명예를 위해 나는 싸울 수밖에 없었다. 계란으로 바위를 쳤는데, 바위가 진짜 깨졌다는 걸 보여준 게 뿌듯하다.

 

 


☞이래진

1966년 전남 완도에서 태어나 완도수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2020년 서해 공무원 피격사건으로 숨진 이대준의 맏형이다. 수산고 졸업 후 동원산업 항해사로 5년, 동원수산의 선원 담당으로 5년 근무한 뒤 경기도 안산에 정착, 수륙양용자전거와 자동차 매연 저감 장치 등을 개발하고 생산하는 ‘바이오 라이더’를 운영하고 있다.

"하루 '3번 이상' 양치질 소홀하면 온몸 건강에 '적신호'"

 

< 연합뉴스, 김길원 기자, 2023-10-14 >

 

 


양치질만 제대로 해도 심뇌혈관질환 위험 낮추는 효과…치실·치간칫솔도 도움
구강 질환이 당뇨병·폐렴·노쇠에 영향…고령화에 '구강 건강' 더 힘써야

 


(서울=연합뉴스) 김길원 기자 =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구강 건강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치아와 잇몸의 건강은 음식을 씹고 각종 영양소를 흡수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질병 예방과 장수의 '바로미터'가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근에는 구강 내 치아나 잇몸 등에 염증이 발생하면 전신 질환으로 확산하는 방아쇠가 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잇따르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게 심뇌혈관질환과의 연관성이다.

심뇌혈관질환은 심장과 뇌 쪽으로 이어지는 중요 혈관에 문제가 생긴 상태를 말한다. 뇌졸중과 심근경색, 협심증, 심부전, 동맥경화 등이 대표적이다.


◇ '하루 3번' 양치질만 제대로 해도 심뇌혈관질환 위험 23% '뚝'

경북대 치과대학 예방치과학교실 연구팀이 한국구강보건학회지 최근호에 발표한 논문을 보면, 부적절하게 구강 건강 관리를 하는 사람일수록 심뇌혈관질환 발생 위험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2010∼2017년 국민건강보험공단·국민건강영양조사 통합 데이터를 활용해 35세 이상 1만4천492명을 대상으로 심뇌혈관질환군(1천165명)과 심뇌혈관질환이 없는 대조군(1만3천327명)으로 나눠 평상시 구강 건강 행동이 심뇌혈관질환 발생에 미치는 연관성을 살폈다.

이 결과 지난 1년간 구강검진을 받지 않은 사람의 비율은 심뇌혈관질환군이 74.3%로, 대조군(68.6%)보다 높았다.

심뇌혈관질환군은 칫솔질 실천율도 낮았다.

하루 평균 칫솔질 횟수가 '1회 이하' 비율은 심뇌혈관질환군이 19.6%로, 대조군의 11.6%보다 8.0% 포인트 높았다. 반면 '3회 이상' 비율은 심뇌혈관질환군이 36.7%로 대조군(46.2%)보다 낮았다.

연구팀은 칫솔질을 하루에 2회, 3회 이상 실천할 경우 심뇌혈관질환 위험이 각각 19%, 23% 낮아지는 것으로 추산했다. 치실과 치간칫솔의 사용도 심뇌혈관질환 발병 위험을 16% 낮추는 연관성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연구팀은 "하루 3회 이상의 칫솔질이 심뇌혈관질환 발병 위험을 낮추는 연관성은 심혈관질환보다 뇌혈관질환에서 통계적 유의성이 확연했다"며 "이는 뇌혈관질환을 예방하는 데 있어 칫솔질 실천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분당서울대병원 연구팀이 2019년 유럽심장저널(European heart journal)에 발표한 논문에서도 칫솔질의 심혈관질환 예방효과는 뚜렷했다.

연구팀이 심혈관질환 병력이 없는 40세 이상 성인 24만7천696명을 대상으로 평균 9.5년 추적 관찰한 결과, 하루에 칫솔질을 1회 더 하면 심혈관질환 발생 위험이 9% 낮아지는 것으로 분석됐다.

또 1년에 한 번 이상 정기적으로 치과를 방문해 스케일링 등의 치료를 받는 경우 이런 효과가 14%로 더 높아졌다.

전문가들은 치주염 등의 구강질환이 C-반응성단백질(CRP)과 인터루킨-6 등을 방출함으로써 전신에 만성 염증을 일으키고, 이는 혈전이 혈관 내 혈액의 흐름을 막아 발생하는 뇌졸중, 심근경색 등의 죽상경화성 심뇌혈관질환을 유발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구강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박테리아가 트리메틸아민-N-산화물(TMAO)과 같은 독소를 생성하는 것도 심뇌혈관질환과 연관성이 큰 것으로 여겨진다.

 





◇ 당뇨병·구강질환은 서로 악영향…'폐렴·조산·노쇠'와도 연관성 커

당뇨병은 1형과 2형 모두 치주질환과의 상호 연관성이 지속해서 확인되고 있다.

잇몸에 염증이 있으면 혈당 조절이 잘 안되고, 당뇨병으로 혈당이 계속 높게 유지되면 당뇨병이 없는 사람과 비교해 치주 질환 발생이 2배 이상 높아진다는 것이다.

두 질환은 만성 염증성 질환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당뇨병의 경우 오래 앓은 환자일수록 신장, 눈, 심혈관 등 여러 조직과 기관에서 병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치주조직에도 콜라겐과 세포 합성에 손상을 끼치고, 콜라겐 분해효소를 강화해 치주 조직과 치조골의 소실로 이어지게 한다.

또한, 혈액 내 최종당화산물(AGE)의 축적으로 구강 내 염증성 반응 및 면역반응을 촉진해 치주조직 파괴를 촉진함으로써 치아를 더 빨리 잃게 될 수 있다는 보고도 있다.

입 안의 치주 병원균은 위, 폐로도 들어가 기도의 상피세포에 감염을 일으켜 폐렴을 유발하기도 한다.

특히, 노인의 경우 근육, 신경의 기능이 떨어지면서 삼킴 작용에도 장애가 쉽게 일어나는데, 이때 구강 위생 상태가 좋지 못해 병원성 박테리아가 들어가면 흡인성 폐렴이 발생할 수 있다. 치주질환자의 폐렴 발생률은 정상인의 4.2배라는 연구 보고도 있다.

치주질환은 임신 여성에게 체내 호르몬 변화를 일으키고, 임신성 치은염이 치주염으로 진행될 위험을 높이는 것으로도 보고된다.

외국의 한 연구에서는 임신부에게 치주질환이 있으면 조산아, 저체중아 출산 위험이 7배까지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한 메커니즘이나 증거가 불충분하다 하더라도, 모체의 구강 건강이 태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는 대목이다.

이 밖에도 불량한 구강 건강은 전신 노쇠의 시작을 미리 알리는 지표로 지목된다.

노쇠란 신체 기능이 급격히 허약해져 장애나 입원 가능성이 높아진 상태를 말한다. 체중 감소, 근력 감소, 극도의 피로감, 보행속도 감소, 신체 활동량 감소에 이르는 5가지 지표를 측정했을 때 각각 평균치의 하위 20%에 속하는 경우가 3개 이상일 때 노쇠로 판정한다.

일본 연구팀이 65세 이상 노인 2천11명을 3년 9개월 동안 추적 관찰한 결과, 구강 노쇠로 진단된 노인이 건강한 노인보다 전신 노쇠의 비율이 2.4배 높았으며, 이로 인한 장애율과 사망률 역시 각각 2.3배, 2.2배에 달했다.

강동경희대치과병원 치주과 강경리 교수는 "온몸 건강의 방아쇠가 구강 건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강 교수는 "칫솔질을 '한 번쯤은 안 해도 크게 상관없겠지'라고 생각해 구강 건강을 소홀히 여기기 시작하면 구강에서 비롯된 염증이 입 속뿐 아니라 몸 이곳저곳에 연쇄반응을 일으키게 된다"며 "특히 65세 이상 노인은 치아가 아프지 않아도 정기적으로 치과에 방문해 구강 건강 점검을 받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연1회 폐기능 검사하고 수영하라…찬바람 불면 쌕쌕대는 이 병 , 천식

 

 

< 중앙일보, 신영경 기자 ,  2023.10.15 >

 


천식은 찬 바람이 불 때 더욱 괴로운 질환이다. 차가운 공기가 호흡기를 자극하면서 기침과 쌕쌕거리는 증상이 악화하기 때문이다. 그리스어 ‘날카로운 호흡’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만큼 숨 쉬기가 힘겹다. 완치 개념이 없는 만성 호흡기 질환인데 감기나 독감도 걸리기 쉬워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날씨가 추워지는 시기 천식 관리에 특히 힘써야 하는 이유다. 꾸준히 실천해야 하는 천식 관리법을 알아본다.

천식은 숨길이 서서히 좁아지면서 일상을 괴롭힌다. 알레르기 원인 물질이나 찬 공기 등 자극에 노출됐을 때 기관지 염증으로 기도가 수축해 정상적인 호흡을 방해한다. 숨이 차는 것은 물론 기침과 쌕쌕거림(천명), 가슴 답답함이 대표적인 증상으로 나타난다. 모두 삶의 질을 크게 떨어뜨리는 증상들이다. 처음엔 비교적 증상이 가볍지만, 재발과 악화를 반복하면 중증으로 진행한다. 서울아산병원 알레르기내과 김태범 교수는 “천식 증상은 낮보다 늦은 밤에 주로 나타나는 게 특징”이라며 “만성질환이지만 제대로 치료를 받으면 특별한 증상 없이 일상을 보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폐 기능 검사 연 1회 이상 필요


천식은 증상 기복이 심하다. 별다른 증상이 없을 때도 있다. 그래서인지 증상이 없으면 상태가 좋아졌다고 오해해 질환을 방치하는 환자가 많다. 하지만 천식은 중증도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질환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천식 환자는 증상이 없더라도 꾸준히 진료를 받으면서 조절 상태를 파악해야 한다. 천식 조절 상태를 평가하기 위한 폐 기능 검사도 연간 1회 이상 필요하다. 증상이 개선됐다고 임의로 치료를 중단하는 건 위험하다. 김 교수는 “천식 치료에는 증상 조절제와 완화제가 쓰인다”며 “증상이 호전되더라도 전문의와 상의해 치료제를 오랜 기간 지속해서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말했다.

증상 조절제인 흡입용 스테로이드제는 천식 치료의 핵심 약제다. 항염증제 가운데 가장 효과가 좋다. 기도의 염증을 치료해 천식 증상을 조절하는 원리다. 먹는 약이나 주사보다 적은 용량으로 동일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흡입제 형태여서 사용 방법이 까다롭지만 꾸준히 써야 천식이 악화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증상이 심하지 않더라도 하루 1회 이상 규칙적으로 사용한다. 김 교수는 “흡입제는 기도와 폐에만 작용하기 때문에 부작용이 거의 없다”며 “천식을 치료하는 측면이 더 크다는 점에서 부작용을 걱정해 임의로 치료제 사용을 중단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단, 기관지를 빠르게 확장해 주는 증상 완화제는 증상이 심할 때만 일시적으로 사용한다.

 


독감 예방접종, 금연·운동 필수


천식 환자에겐 감기나 독감도 요주의 대상이다. 호흡기 바이러스 감염 대처 능력이 부족한 탓에 일반인보다 감기·독감에 더 취약하다. 천식이 심한 경우 감기만 걸려도 숨이 막혀 위협적인 상황에 부닥칠 가능성이 커진다. 호흡기 질환으로 폐 기능이 악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선 매년 독감 예방접종이 필수적이다. 감기약을 먹을 때도 천식 치료제 사용을 중단하지 말아야 한다. 손 씻기 등 개인 청결을 유지하는 것이 감기를 예방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천식은 개인마다 원인과 증상이 다르다. 김 교수는 “천식은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나타난다”며 “원인 항원에 대한 알레르기 검사 등을 통해 악화 인자를 파악하고 생활 속에서 이를 회피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담배 연기와 찬 공기, 대기 오염 물질 등은 천식 증상을 유발하는 주요 요인이다. 따라서 금연은 필수다. 간접흡연도 최대한 피해야 한다. 실내 환기도 중요하지만 미세먼지가 심한 날엔 창문을 열지 말고 따뜻한 물을 자주 섭취하는 것이 좋다. 외출이 불가피하다면 긴 소매 옷과 마스크 등을 착용해 외부 알레르기 항원과의 접촉을 줄여야 한다. 침구류 위생도 철저히 신경 써야 한다. 주기적으로 침구류를 세척하거나 교체하면서 집먼지진드기가 서식할 수 없도록 실내 환경을 깨끗이 유지해야 한다.

운동에 대한 오해도 적잖다. 천식을 앓고 있을 땐 숨 쉬기가 힘들어 신체 활동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천식 환자여도 적절한 운동은 필요하다. 무조건 운동과 거리를 두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운동 부족은 소아 성장을 저해하고 비만을 부르면서 천식을 악화시킨다. 운동을 심하게 할 땐 증상이 악화할 수 있지만 적정 강도를 유지할 경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천식 환자에게 권장되는 운동은 실내 수영이다. 온도와 습도가 적절히 유지되기 때문에 기관지를 자극하지 않는다. 공기가 차고 건조한 새벽엔 운동을 자제하는 게 좋다.

 

 

 

< 천식 관리 수칙 >

- 대기 질 나쁠 땐 가급적 외출 삼가

- 외출 시 긴소매 옷과 마스크 착용하기


- 손을 자주 씻고 독감 예방접종하기


- 규칙적인 운동으로 정상 체중 유지하기


- 전문의 지시에 따라 꾸준히 천식 치료하기


- 금연은 필수, 간접흡연도 최대한 피하기

‘멍’ ‘그녀와의 이별’ 부른 롱다리 디바 김현정

<조선일보, 길해연 배우, 2023.10.14.>

 

 


“가수 김현정이 누나 좀 만나고 싶다는데?” 후배의 전화를 받은 나는 몇 번이고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롱다리 미녀 가수 김현정? 다 돌려놔! 그 김현정?” 그 유명한 가수가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는 사람을 왜 만나고 싶다는 건지 이유를 묻기도 전에 내 입에선 “그래, 그러자”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하자마자 “앗싸!” 신이 난 내 입에선 “다 돌려놔/ 너를 만나기 전에 내 모습으로/ 추억으로 돌리기엔 내 상처가 너무 커~”가 절로 흘러나왔다. 두 팔은 허공을 휘젓고 있었다. 그 시절 목이 터져라 “다 돌려놔!”를 외쳐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 노래 제목이 ‘멍’이 아니라 ‘다 돌려놔’인 줄 알고 있던 나 같은 사람도 꽤 많았으리라.

2007년 겨울, 그렇게 우리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하던 일도, 살아온 것도 달랐던 띠동갑 두 여자는 만난 지 30분도 지나지 않아 서로의 손을 부여잡고 울고 있었다. “...어린 시절 저는 먼지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어요. 말도 없고 존재감도 없는 소심 덩어리 꺽다리. 그게 저였어요.” 깊은 곳에 열망을 감춰둔 소심한 소녀 김현정은 뜨거운 가슴을 자전거와 헤비메탈로 식히며, 힘들 때는 자신만의 동굴에 숨어 침묵하고 좌절하고 번뇌했다고 했다. “그러다 1995년 2년간의 연습생 시절을 거쳐 ‘그녀와의 이별’을 발표했는데 그 음반은 빛을 보기는커녕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어요.”

그래도 가수의 꿈을 버릴 수는 없었다. 판소리를 배우고 코러스로 일하며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어요. 90년대 길거리 테이프 노점상들 기억하시죠? 거기서 ‘그녀와의 이별’을 틀기 시작하고 나이트클럽들이 따라오면서 역주행을 시작한 거예요. 그 덕에 큰 기획사 들어가고 음악 프로 1위도 하고 정말 바쁘게 움직였어요. 차 안에서 양치를 하고 헬기를 타고 다음 공연장으로, 촬영장으로. 편하게 누워 잠든 날이 거의 없을 정도였어요.”

자신을 보살필 시간도 없는 일정들을 소화하며 ‘혼자 한 사랑’ ‘되돌아온 이별’에다 국민 떼창곡 ‘멍’까지 대단한 인기를 누렸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사람들의 갈채 속에 서서히 병들어 가고 있었다. 나를 찾아온 시기에 그녀는 성대결절 상태였다. 수술해도 계속 재수술이 필요할 거라고 해서 수술은 포기하고 좋다는 치료법을 다 찾아서 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사람 만나는 일을 줄이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인간관계가 정리되었다. 그런 모든 상황이 당찬 가수 김현정을 다시 소심한 소녀 김현정으로 되돌려 놓고 있었다.

최고의 고음 가수, 라이브의 여왕이라는 찬사를 듣던 그녀에게 성대결절이라니.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그녀 앞에서 적절한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해 한참을 주저하다가 말없이 손을 잡아 주었다. 그러자 잠금장치가 해제된 눈물 탱크처럼 그녀는 눈물을 터뜨렸다. 건강을 돌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노래를 못 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통곡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손을 잡고 함께 우는 것뿐이었다. 나중에 그녀가 이런 말을 했다.

“사실 그때 언니를 찾아간 이유가 있었는데 언니 얼굴을 보자마자 잊어버렸어요. 그냥 제 얘길 털어놓고 싶어진 거예요. 근데 갑자기 눈물이 나고…. 감정을 추스르려고 했는데 언니가 같이 울고 있지 뭐예요. 하하. 그래서 핑계 김에 엉엉 목 놓아 울어버렸어요. 지금도 궁금해요. 내가 왜 언니를 찾아갔는지.”

그렇게 만난 그날 이후 그녀는 눈이 오면 보고 싶다고, 비가 오면 울적하다고, 날이 좋으면 화창하다고 전화를 했다. 어디에 있건 단숨에 달려오곤 했다. 내가 있는 곳은 꿉꿉한 곰팡내가 진동하는 지하 연습실이거나 어두컴컴한 극장이었는데 그녀는 떠나질 않고 자리를 지켰다. 한동안은 나보다 대학로 공연을 많이 보고 뒤풀이 장소까지 따라다니며 연극하는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곤 했다. “연극은 라이브잖아요. 현재 진행형…. 이게 살아 있는 거구나, 하는 느낌. 제가 무대에 섰을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한 것 같아요.”

그녀는 그렇게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고 2014년 드디어 제2의 전성기가 펼쳐졌다. 각종 음악 프로에서 90년대와 2000년대 초 노래들이 다시 불리기 시작했고 그녀의 노래들이 역주행한 것이다.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걱정이 앞섰다.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습관 때문일까? 그녀는 지나치리만큼 부지런했고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익히는 데 온 시간을 쏟아붓고 있었다. 통화할 때도 그녀는 편안하게 널브러져 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도대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있긴 한 것인지, 너무 혹독하게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은 아닌지 마음이 아팠다.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늘 목이 말라요. 벌써 26년 차인데 아직도 무대에 오를 때 떨려요. 이게 마지막이 되진 않을까 두렵기도 하고. 그래서 이렇게 미친 듯이 노력하고 고민하는데…. 이 목마름은 언제나 끝이 날까요?”

답이 없는 질문을 던지는 그녀에게 “널 만나게 되어 참 고맙다” “네가 있어 참 든든하다”고 위로를 건네며 등을 토닥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언젠가 자신의 라이브 공연 영상을 찍어 보내곤 괜찮은지 묻는 그녀에게 이제야 나는 대학로에서 만난 후배의 말을 빌려 답을 보낸다.

선배님, 가수 김현정씨랑 친하시죠? 만나시면 제가 광팬이라고, 그리고 정말 고마워하고 있다고 전해주세요. 군대 있을 때 여자 친구에게 이별 통보를 받았어요. 가슴이 터져 죽을 것 같았는데 김현정의 ‘멍’을 따라 부르며, 다 돌려놓으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정말 큰 위로를 받았거든요. 그래, 이별도 슬픔도 당당하게 풀어 버리자. 징징거리지 말고. 그 노래가 절 구해줬어요.

이 친구의 말처럼 너는 이미 우리에게 추억이라는 큰 선물을 줬어. 또 어떤 노래로 우리를 위로해 줄지 기대하고 있을게. 초조해하지 말고 천천히…. 나이 들어가는 가수 김현정의 선물은 어떤 것일지, 그날의 기쁨을 아끼면서 기다리고 있을게!

과학 커뮤니케이터 궤도
2023년 01월호

 



< 조선일보 topclass , 유슬기 기자  >

과학 커뮤니케이터. 유튜브 과학 채널 〈안될과학〉의 진행자. 연세대학교 및 동대학원, 한국천문연구원에서 천문우주학을 공부하고, 청와대 과학기술 분야 정책자문위원과 서울예술대학교 겸임교수를 지냈다. 〈KBS 뉴스특보〉에서 대한민국 발사체 누리호 발사 생중계 해설을 맡았으며, 이후 과학 관련 프로그램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이말년 작가의 유튜브 채널 〈침착맨〉에서 진행한 2021년 침투부어워즈 대상 및 3관왕을 수상했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교훈을 남기고 2022 카타르월드컵이 막을 내렸다. 열한 명의 선수가 그라운드를 누비는 90분 동안 관중의 눈은 그들을 좇지만 귀는 중계진을 향해 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저 90분을 위해 선수들이 지난 4년 동안 어떤 준비를 했는지, 불과 몇 초 만에 골문을 흔드는 저 골을 위해 어떤 세트플레이가 있었는지. 심지어 현장에 있더라도 해설을 듣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2D로 펼쳐진 한 번의 경기는 해설위원의 사전지식과 전문성에 따라 시공을 초월하는 3D로도, 평생에 남을 명경기라는 4D로도 확장된다.

 


궤도가 바라는 바도 그렇다. 스마트폰, 반도체, 누리호… 이렇게 단어로 기억되고 단편적으로 소비되는 이야기들이 실제로 어떤 함의를 지니고 있는지, 과학이 일상을 그리고 인류를 어떻게 바꾸어가고 있는지 알리고 싶다. 현장에서 뛰고 있는 선수, 그러니까 과학자들은 숨이 가쁘게 뛰느라 자신의 연구와 업적을 이야기할 겨를도 기회도 없다. 우리는 그들이 평생에 걸쳐 일군 열매를 먹으면서도 이게 어떤 경작 과정을 거쳐 맺힌 것인지 알지 못한다. 궤도는 말한다. 그들의 수고와 헌신을 알고 나면, 세상의 궤도도 다르게 보일 거라고.

 

어떤 집단이나 분야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혁신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묵묵히 연구만 합니다.
인류의 위기마다 돌파구를 마련한 게 과학이에요.
우리가 누리고 있는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환경은 너무 열악합니다.
예산도 인력도 부족한데 개인의 건강을 갈아 넣어요.
사명감으로 하기엔 한계가 있어요.
게다가 이들은 연구하기에 너무 바쁘니까 개선이 어려워요.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들을 지지하는 조력자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선수 출신 해설위원이 할 수 있는 중계가 다른 것처럼, 과학도가 해주는 이야기는 더 생생합니다.


“어릴 때는 천체물리학으로 노벨상을 타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웃음). 중·고등학생 때는 제가 천재라고 생각할 뻔도 했는데 천체물리학을 전공하고 수많은 천재들을 만나면서 그 생각이 깨졌죠. 인류를 진보시킬 만한 공식이나 메커니즘을 찾아내서 무언가를 달성하면 꿈을 이룬 건 줄 알았는데 현실은 달랐습니다. 나로호를 발사했는데 큰 관심이 없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엄청난 기술이 집약된 로켓 발사인데 그 의미를 모르는 채 지나가는 것 같아서요. 지금은 누군가가 피땀 흘려 만든 결과물을 대중이 알게끔 하는 게 제 꿈입니다.”

그래서 과학 커뮤니케이터의 길을 걷게 됐군요.


“중요한 건 과학자예요. 선수가 없으면 경기가 없죠. 지금 과학계는 아쉬운 게, 이들의 노력과 열정과 열망, 또 이 경기를 위한 희생을 대중이 잘 모른다는 거예요. 접할 기회가 없으니까요. 축구를 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캐스터나 해설이 있다면 이 한 번의 슛을 쏘기 위해 선수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죠. 선수의 인생을 보는 거예요. 공감이 되면서 굉장한 감동을 얻게 됩니다. 몰입과 응원, 지지가 나오죠. 그러면 선수의 몸값이 오르고 산업이 커져요. 여론이 움직이고 대중이 반응하면 정책에도 힘이 실리고요.”

과학자의 목소리를 실제로 듣기는 쉽지 않죠. 이해하기 어려울 거란 선입견도 있고요.


“제가 연구소에도 있었고 학계에도 몸담아보며 과학자들을 많이 만나왔어요. 어떤 집단이나 분야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혁신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묵묵히 연구만 합니다. 인류의 위기마다 돌파구를 마련한 게 과학이에요. 우리가 누리고 있는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환경은 너무 열악합니다. 예산도 인력도 부족한데 개인의 건강을 갈아 넣어요. 사명감으로 하기엔 한계가 있어요. 게다가 이들은 연구하기에 너무 바쁘니까 개선이 어려워요.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들을 지지하는 조력자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미국에서 만난 한 할머니가 미국이 우주산업에 이렇게 많은 돈을 쓰는 걸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내 세금은 그런 데 쓰라고 주는 것”이라고 대답했다고요. 


“우주산업은 미국이 해야 한다는 자부심이 있는 거죠. 그분은 아주 어릴 때부터 그런 인식이 있었던 거예요. 인식이 태도를 바꾸는 겁니다.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지에 대한 공감대가 있어요. 우리는 그렇지 않죠. 우리가 우리 것의 가치를 충분히 알지 못한 면이 있지 않을까요.”

실제로 미국은 얼마 전 달 탐사선인 ‘아르테미스’를 발사하기도 했죠.


“아폴로 17호가 달에 착륙한 지 50년 만에 진행된 일이에요. 이들은 달에 정착할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 중입니다. 한국은 지난 6월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 발사에 성공했고 8월에는 달 탐사선 다누리를 쏘아 올렸어요. 이게 얼마나 적은 인력으로 해낸 건지 알면 깜짝 놀라요. 미국이나 러시아는 2만 명의 인력을 투입했어요. 일본도 3000명 정도 되죠. 우리는 고작 650명이에요. 아르테미스의 경우 우주복 두 벌을 만드는 데 1조 4000억 원을 썼어요. 우리는 지난 10년 동안 2조 원을 썼고요.”

쐈으니까 됐고, 성공했으니까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군요.


“항공우주산업 종사자들의 처우를 생각하면 기적이 일어난 거예요. 국민 모두가 찬사하는 성취를 만들어낸 건 현장의 연구자들인데 이들은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어요.”

그런 현장의 이야기는 들을 기회가 없네요. 성공이냐 실패냐에 대해서만 듣고요.


“누리호 1차 발사만 봐도 당시 궤도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돈만 썼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하지만 그때의 경험이 있었기에 실제 유인 탐사를 할 때 인명 피해를 막을 수 있게 된 거예요. 그 모든 걸음이 성공의 일부죠.”

과학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네요.


“과학에 대해 무지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요. 모두가 당연히 알고 있는 걸 가정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과학의 원리를 알면 세상을 보는 해상도가 높아져요. 저해상도 TV로 볼 때와 UHD로 볼 때 시원함이 다르거든요.”


 과학자들은 먼 곳을 응시하는 사람들이에요.
지금, 여기보다 먼 곳을 보고 있죠.
예전부터 과학자들은 식량난을 미리 걱정했어요.
그래서 지금 먹을 게 부족하지 않아요.
코로나가 생기기 이전부터 바이러스에 대한 경각심이 있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빨리 코로나 바이러스 백신을 만들었어요.
어떤 기술이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한 것 같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예를 들자면요.


“어렸을 때 우리가 물 묻은 손으로 콘센트를 만지만 안 된다고 배우잖아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우리 몸이 바이오 로봇이라서 그래요. 우리 몸을 움직이는 것도 전기거든요. 몸에도 전기가 흘러요. 그런데 콘센트에 흐르는 전압이 우리 뇌보다 높은데 그 전기가 몸에 흘러 들어오면 뇌가 반응을 못 하는 거예요. 그걸 손에 잡은 채로 떼지 못하는 거죠.”

아, 그냥 안전 문제인 줄 알았는데, 과학 문제였군요.


“저는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엄청 많았어요. 안 되면 왜 안 되는 건지 궁금했고요. 궁금한 게 너무 많았고 그때마다 질문을 해서 많이 혼났어요. 그래서 ‘내가 공부해서 찾아낸다, 내가 이거 밝혀낸다’가 된 것 같아요. 근데 다 못 밝혀내겠더라고요(웃음). 너무 어려운 질문이 많은데 다행인 건 똑똑한 사람도 많다는 거예요. 내가 밝혀내지 못하면 밝혀낼 사람을 도와주자고 마음먹었어요. 건축가가 되고 싶었는데 이미 훌륭한 건축가가 많아요. 그럼 그가 설계를 하면 됩니다. 그 집을 짓는 데 기여하고 싶어 저 는 모래를 나르는 사람이 된 겁니다. 내가 집을 짓는 사람이라는 게 의미가 있는 거고요.”

실제로 모래를 나르는 것처럼 고단할 때는 없어요?


“10~15분짜리 영상을 만드는 데 아홉 시간을 써요. 한 시간짜리 방송을 위해서 2주를 준비하기도 하고요. 그래도 부족할까 싶어 고민이에요. 과학을 대중에 알리고 싶어 방송을 하지만, 실제로 그 분야의 전문가가 봤을 때도 오류가 없었으면 좋겠거든요.”

유튜브 〈안될과학〉의 구독자가 67만 명입니다. 양자역학을 설명한 영상은 조회수 368만 회를 기록했고요.


“방송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어요. 거대한 과학의 바다에서 모래를 나르는 심정일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행복하죠. 특히 ‘드디어 양자역학이 이해가 된다’ ‘학창 시절에 이렇게 설명해주는 선생님이 있었더라면’이라는 반응을 들을 때 더 그렇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YWryVDQWO0 

 


그러고 보면 어릴 때 과학자가 꿈이었던 사람들도 꽤 있었던 거 같은데, 언제부터 이렇게 과학과 멀어졌을까요.


“과학이 시험의 일부가 되면서 그렇게 된 것 같아요. 피카츄도 그것에 대해 시험을 본다고 하면 띠부띠부씰도 보기 싫잖아요. 어떤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도구가 된 뒤부터 과학에 대한 흥미를 잃은 것 같아요.”

그런데도 흥미를 잃지 않았네요.


“과학자들은 먼 곳을 응시하는 사람들이에요. 지금, 여기보다 먼 곳을 보고 있죠. 예전부터 과학자들은 식량난을 미리 걱정했어요. 그래서 지금 먹을 게 부족하지 않아요. 코로나가 생기기 이전부터 바이러스에 대한 경각심이 있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빨리 코로나 바이러스 백신을 만들었어요. 어떤 기술이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한 것 같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원래 과학자들이 그렇게 태어나요.먼 곳을 응시하면서. 눈앞에 관심이 없어요. 북극에 가본 적이 없어도 북극곰을 생각하고 있죠.”

알츠하이머 그러니까 치매를 과학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란 이야기도 흥미로웠습니다.


“알츠하이머를 예방하기 위해 노년기까지 치매 없이 건강했던 수녀 일곱 명의 뇌를 연구했는데, 그들 중 가장 우수했던 수녀가 실제로는 알츠하이머 말기까지 진행된 상태였죠. 뇌를 기증했던 수녀들 대부분이 그랬어요. 그런데 어떻게 증상이 발현되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요.


“뇌에는 기억을 저장하는 시냅스라는 부분이 있는데 시냅스가 복잡할수록 기억이 단단합니다. 수녀들의 시냅스는 무척 복잡한 연결을 만들고 있었어요. 끊임없이 공부하고 생각한 게 뇌를 지킨 거죠. 기억을 하나의 시냅스에만 저장하지 않고 새로운 시냅스를 계속 연결했기 때문에 알츠하이머로 일부 연결이 끊어져도 다른 시냅스가 그 자리를 채워준 겁니다.”

그럼 일반인들이 치매를 예방하려면.


“나이가 들어도 새로운 경험, 새로운 경로 찾기를 계속하는 게 좋겠죠. 새로운 시냅스가 계속 만들어질 테니까요.”

실은 모든 게 과학과 맞닿아 있네요. 식량도, 바이러스도, 환경도, 또 노화도요.


“과학을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과학은 전문가의 영역이고 전문가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물론 그런 순간도 있어요. 그건 학회에서 그렇죠. 연구 결과를 정밀하게 말해야 할 때 그렇고요. 사회에서 대중에게는 허용의 폭이 넓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과학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요. 이때 부족하다면 전문가가 도와야죠.”

선수보다 유명한 캐스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초심을 잃을까 걱정될 때는 없나요?


“초심을 지키자는 표현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유명해지기 전과 비교한다면 초심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죠. 그전에는 지금의 상황을 몰랐으니까 더 미숙한 점도 많았을 거예요. 지금은 초심 이상의 사람이 되어야죠. 지금도 초심으로 하고 있다면 부끄러운 마음으로 더 해야 합니다. 더 노력하고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합니다.”

〈안될과학〉 콘텐츠에 사력을 다하는 이유군요.


“제가 궤도로 활동하는 이유도 그래서예요. 저에게 관심이 쏟아진다면 저만 소비되고 끝나요. 우리는 플랫폼일 뿐이고 과학기술 자체가 유명해지길 바라요.”

미래 과학도에게 전하고픈 메시지는요.


“언젠가 ‘〈안될과학〉을 보고 자란 누군가가 노벨상을 받는 걸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웃음). 과학자를 꿈꾸는 누군가가 있다면 멀리 보길 바라요. 지금은 인공지능이 이슈다 보니 컴퓨터, 전산만 뜨고 나머지는 미달이에요. 인공지능은 모든 산업과 연결됩니다. 어떻게 접목할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메타버스도 마찬가지예요. 인프라가 무궁해요.”

스스로 과학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요.


“우리 모두가 과학자가 되지 않더라도, 과학적 사고를 가진 이들이 되길 바라요. 과학적 사고란 인과관계를 명확히 하는 것이에요. 그러다 보면 상식적이 되고 화목해질 거라 생각해요. 현상을 인과관계로 보면 명확해져요. 초기 조건을 보고, 그걸 바꿔야 변하니까요.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이유를 몰라서 억울하진 않죠.”

오늘의 모래성을 쌓는 개미들에게는 먼 바다를 응시하는 개미가 별종으로 보인다. 그는 당장의 모래성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궤도는 말한다. 그들 덕분에 몇 개월 후 모래성을 쓸어버릴 거대한 쓰나미를 미리 알 수 있다고. 그들은 쓰나미의 기미를 발견할 뿐 아니라, 어떻게 막을지도 고민한다고.

지구 온도가 2도 오르면 절반이 넘는 생물체가 멸종하고, 소행성이 충돌한다면 지구의 안위도 보장할 수 없다. 내가 통장의 잔고를 고민할 동안 누군가 지구의 잔고를 생각한다는 건 어찌 보면 고마운 일이다. 그러니 인류에게 과학이 필요한 순간은 지금 그리고 언제나다.

윤여정 “오스카상 괜히 받았어… 존경이란 말 무섭다”
오스카 수상 이후 첫 공개 자리

< 조선일보, 신정선 기자,  2023.10.09.  >


“어머, 이렇게 많은 분이 돈 내고 절 보러 와주신 거예요? 유료 티켓이라고 그러던데.”


‘한국 최초의 오스카 수상자’ 배우 윤여정(76)은 지난 6일 깜짝 놀란 표정으로 부산 해운대구 KNN시어터로 들어섰다. 지난 4일 개막한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의 대담 프로그램인 ‘액터스 하우스’ 초청 배우로 나선 자리였다. 

 

그를 보자 250석을 꽉 채운 관객은 환호부터 보냈다. 2021년 영화 ‘미나리’로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받은 후 인터뷰를 사양해 오던 그가 공개 대담 자리에 나선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그는 “제가 워낙 실질적인 사람이라, 오늘 티켓이 9000원이라고 해서 (티켓 값을 못 할까) 걱정”이라며 “제가 말을 거를 줄 몰라서 그간 인터뷰를 피해 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오스카 수상은 제게 행복한 사고 같은 것”이라며 “저는 결점이 많은 사람인데, 상 받고 나선 말 한마디라도 주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니, 오스카가 오히려 족쇄가 됐다”고 말했다. 

 

존경이라는 말 무서워요. 상 괜히 받은 거 같애.”

 


윤여정은 1966년 TBC 공채 3기로 연기를 시작했다.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한양대 국문과에 입학해 방송국 아르바이트를 하다 PD 권유로 지원해 합격했다. 1971년 고(故) 김기영(1919~1998) 감독이 그를 영화 ‘화녀’의 주인공으로 발탁하며 20대의 절정이 왔다. 한 가정을 파탄 내려 드는 파출부 명자 역으로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 등 여러 상을 받았다. 윤여정은 “정작 그때는 제가 왜 그 작품에 선택받았나 싶어 저주를 퍼부었다”고 했다. 당시 촬영 현장은 맨손으로 생쥐를 잡거나 계단을 그대로 구르는 등 매우 열악했다. “그땐 어려서 몰랐어요. 김기영 감독 같은 천재한테 배웠던 건데 그걸 모르고.” 그러면서 “여러분은 친구를 사귀더라도 고급하고 노세요”라며 “나보다 나은 사람, 나보다 책 많이 읽은 사람하고 얘기해야 배움이 있다”고 했다.

꽃피던 연기 인생은 1974년 가수 조영남과 결혼하며 끊겼다. 미국으로 건너가 두 아들을 낳고 13년을 살다 서울로 돌아왔다. 이혼을 전후로 생계를 위해 연기를 다시 하려 했으나 ‘이혼한 여자'라는 손가락질이 방해했다. 단역·조역 가리지 않고 맡았다. 모욕과 멸시도 견뎠다. 한 번은 후배가 “언니, 이 역할 할 땐 그렇게 깨작거리는 거 아냐. 팍팍 먹어”라고 충고했다. 그의 목소리를 두고 “수챗구멍에 물 내려가는 소리 같다”고 쑥덕대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아무리 괴로워도 한번 한다고 했으면 한다, 중도 하차는 없다고 생각하고 끝까지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답변 중간중간에 ‘나는 현실적인 사람’ ‘나는 동물적인 사람’ ‘나는 실질적인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성으로 버텨내야 했던 세월의 결과였다.

한 관객이 “무자녀 싱글이었으면 연기 인생이 달랐을 것 같냐”고 묻자 “자식 없었으면 그렇게 목숨 걸고 안 했을 것”이라며 “걔네 먹여 살려야 해서 했다. 어떻게 보면 두 아들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주변에서 물어봐요. 돈 벌어 건물이라도 샀느냐고. 아니라고 했더니 ‘돈 벌어 젊은 남자 갖다줬냐’고 해요. 맞다고 했죠. 젊은 남자 둘 있다고.” 두 아들 얘기다. 

 

두 아들은 미국 컬럼비아대와 뉴욕대를 졸업한 엘리트다. 윤여정은 오스카 수상 소감 때도 “아들들아, 이게 엄마가 열심히 일한 결과란다”라며 애정을 드러냈다.

그는 이날 장래가 고민이라는 배우 지망생의 질문에 국민학교 양호교사를 하며 세 자매를 홀로 키운 모친의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엄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연기는 김혜자가 잘하지’라고 하셨어요. 그 말을 듣고 저는 김혜자가 되지 말아야지 결심했어요. 특출 난 배우를 따라 하려고 하면 안 돼요. 세상에 똑같은 배우가 또 필요하진 않으니까요. 나는 나다워야 해요.”

2030 관객이 많은 객석을 둘러본 그는 “어떤 젊은이가 ‘엄마가 태극기 부대라 꼴 보기 싫다’는 말을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는데, 엄마 아버지를 미워하지 마세요”라고 당부했다. “제가 1947년생인데, 격동기에 태어나 6·25를 겪은 우리한테 공산당은 너무 무서운 것이에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다시는 전쟁을 겪고 싶지 않은 공포 때문에 나서는 것이죠. 엄마 아버지가 특별 활동 하러 간다고 이해해 주세요.”

그는 대담을 마무리할 때도 ‘실질’을 잊지 않고 물었다. “제가 오늘 9000원어치 했어요?” 객석 여기저기에서 “좋아요” “멋져요”라는 큰 목소리가 들렸다.

見賢思齊(견현사제)

 

 

< 중앙일보, 김병기 서예가·전북대 명예교수 , 2023.10.12  >

 



‘가지런할 제’라고 훈독하는 ‘齊’는 들쭉날쭉한 차이가 없음을 뜻하는 글자이다. ‘제창(齊唱)’은 높낮이 음의 화음 없이 모두가 같은 음으로 노래하는 것이고, ‘합창(合唱)’은 높고 낮은음이 하모니를 이루며 함께 노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애국가는 대개 마음을 모아 같은 음높이로 부르므로 ‘애국가 제창’이라고 한다.

공자는 “어진 사람을 만나면 그와 가지런해질 것을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을 보면 안으로 자신을 살핌으로써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반성을 하라”고 했다. 『논어』 이인편 제17장 말씀이다. 물론 어진 사람보다 더 어진 사람이 되면 금상첨화이다.

 

어진 이를 보면 그와 같아질 것을 생각하 라. 賢:어질 현, 思:생각할 사, 齊:가지런할 제. 24x69㎝.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다. 잘하는 사람을 쫓아 배우기보다 시기질투부터 하는 인간의 심리를 그린 말이다. 어쩌면 시기질투는 당연한 심사인지 모른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군자는 시기심을 이내 접고 기꺼이 좇아 배우려 하는데 소인은 배우려는 노력은 안 하고 끝까지 시기하며 해코지를 하려 든다. 현자와는 애국가마저도 ‘제창’하지 않고 삐딱하게 부르려 한다. 지식인사회일수록 이런 시기질투가 많다고 한다. B급 교수가 A급 교수에 대해 ‘見賢思齊’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세평이 있다. 공자님 말씀을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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