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 은폐된 반국가성향...반미 안 먹히자 반일로 우회한다

 

 

 

< 중앙일보, 민경우 대안연대 상임대표, 2023.09.13  >

 



윤석열 대통령은 8ㆍ15 경축사에서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세력들이 여전히 활개 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다”고 목소리 높였다. 사실상 반국가세력으로 진보민주세력을 겨냥한 것이다.

 전례 없이 강경한 기조 때문에 많은 논란과 파란이 일었다. 무엇보다 반국가세력을 소수의 간첩ㆍ친북세력을 넘어 진보민주세력 상당수로 확장하고, 마치 그들과의 전면전을 선포하는 것과 같은 어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다수의 사람들이 대통령의 발언에 공감하지 않을 것 같다. 나도 어느 정도 그렇다. 아마도 진보민주세력 다수도 본인을 반국가세력으로 지칭하는 데 강한 저항감을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대통령의 주장에 어느 정도, 아니 상당한 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와 같은 괴리가 생겨난 배경은 진보민주세력의 반국가적 성향이 주로 무의식에 은폐되어 본인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신영복 글씨체로 된 원훈석이 얼마 전까지 국가정보원 한복판에 있었다. 한국 지하당의 상징인 통일혁명당(통혁당)에 가담한 사람의 글씨체로 만들어진 원훈석이 그를 검거하는 것이 주 임무인 국정원에 한동안 아무렇지 않게 서 있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문재인 전 대통령이 신영복의 실체를 형식적으로 인지하면서도 내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0~90년대 학생운동은 양면적인 측면을 갖고 있었다. 주체사상이나 마르크스ㆍ레닌주의를 신봉하는 하나의 측면과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또 하나의 측면인데, 불행히도 양자는 상호 연관되어 있었다. 북한은 집요하게 대남 방송을 통해 대중운동의 온건화를 설득하고 있었고, 당시 학생운동이 이를 받아들였다. 이를 배경으로 학생운동이 6월 민주화운동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주사파가 학생운동을 석권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주사파라는 급진적 성향과 민주주의에 기여했던 역사적 공적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동전의 양면이었다. 정상적이라면 80년대 학생운동에서 주사파적 기원과 영향을 지우고 새로운 민주주의로 재정립했어야 한다. 그러나 운동권 다수는 학생운동에서 주사파적 기원을 제거하지 않고 80년대 민주화 운동에 내재해 있던 급진적인 유산을 그대로 남겼다. 이를 위해 은폐와 무의식을 동원했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이다. 북한 해주에서 송출했던 한민전 방송은 녹취 후 소책자로 배포되어 80년대 후반~90년대 학생운동을 휩쓸었다. 한민전 방송이 중요한 것은 학생운동의 북한 기원과 영향을 숨길 수 없는 명료한 증거였기 때문이다. 학생운동권, 나아가 학생사회 전체는 수십 년에 걸쳐 한민전을 역사 속에서 지웠다. 거대한 역사 왜곡의 전형이라 할 만했다.

 사람의 인식은 유기체와 같이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한민전을 지워내면 나머지를 통해 온전한 민주주의가 정립될 것처럼 착각했지만 한민전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와 연결되어 있던 찌꺼기들도 제거해야 했다. 그 찌꺼기들은 독소처럼 살아남아 오늘에 이른다. 직접민주주의, 반외세친북, 민중과 평등의 과도한 강조, 공안 기관에 대한 지나친 적대감 등이 그러하다.

 80년대 학생들은 혁명을 지향했다. 그들은 정치인ㆍ교수ㆍ종교인으로 성장했지만 그들의 무의식 속에는 80년대 나라를 통째로 뒤엎고자 하는 위험한 사조가 흐르고 있다. 그중 하나가 올해 핵심 쟁점 중 하나인 반일이다. 운동권 급진주의의 핵심은 반미였다. 그러나 반미는 대중적으로 잘 통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반미로 가는 다양한 우회로를 개척했는데 그중 하나가 역사이고 다른 하나가 일본이다.

 김일성의 교시에 갓끈 전술이라는 것이 있다. 갓의 두 갈래 끈 중 하나를 끊으면 갓이 벗겨진다는 내용이다. 즉 반미가 어려운 조건에서 반일을 통해 갓의 일본 경로를 끊으면 결국 한·미·일 삼각동맹이 와해되면서 반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반일 운동의 뿌리가 그러하다. 야권은 한미일 협력의 약한 고리인 일본 문제를 공략했다. 물론 반일 운동의 시원은 다양하고 그 규모도 훨씬 크다. 그럼에도 반일 운동의 경로 중 하나가 80~90년대 반미 운동의 우회로를 열고자 했던 운동권 급진주의·주사파에 있음은 명백하다.

 반국가적 성향과 문화의 잔재는 그저 머릿속에 유제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질기게 살아남아 현실 정치에 영향을 준다. 더 위험한 것은 80~90년대 급진주의의 전성기에 태동한 반국가적 유산들이 여전히 중년 세대를 중심으로 강고하게 형성되어 있다. 반국가세력을 정치·조직적 수준에서 암약하는 간첩세력으로 한정하는 것은 상황을 너무 안이하게 보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과거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민주화운동 동지회를 만들었다. 민주화 운동의 상징 자산을 주사파가 사취해 독점 이용하는 어이없는 사태에 책임을 지고, 우리가 만든 쓰레기는 우리가 치우기 위해서다. 그래야 다음 세대가 새로운 잔치판을 열 수 있다.

민경우 대안연대 상임대표, 전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

<월간조선, 여다정 기자, 2023.09.08 >

 

2023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 파행 이후 공개된 내년도 정부 예산안에서 새만금 SOC(사회간접자본) 예산이 대거 삭감되면서 새만금 개발사업이 또다시 표류할 조짐이다. 정부는 새만금 기본계획 전면 재검토를 통해 오는 2025년까지 ‘새만금 빅피처’를 다시 그리겠다는 계획이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새로운 기본계획이 나올 때까지 일시적으로 예산 투입이 줄어들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야권을 비롯한 지역 정치권은 “잼버리 파행의 책임을 지자체에 넘기는 보복성 예산 삭감”이라고 반발하고 나섰다. 앞서 국민의힘은 잼버리 파행과 관련해 “SOC사업 예산 강탈에 혈안이 돼 1171억원에 달하는 혈세가 투입된 행사가 파행했다”며 더불어민주당과 전라북도에 책임을 묻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새만금 사업은 전북 군산시와 부안군을 연결하는 세계 최장의 방조제(33.9㎞)를 쌓고, 간척토지(291㎢)와 호소(118㎢)를 조성해 여의도 면적의 140배에 이르는 409㎢ 규모의 땅을 새롭게 개발하는 사업이다. 

 

2050년 완공을 목표로 사업비 총 22조 7900억원이 투입될 예정이다. 1989년 노태우 정부 시절 사업이 시작된 만큼 34년의 세월 동안 새만금이 이미 완공됐거나, 매립이 완료된 것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매립이 완료된 면적의 비율은 33.1%(진행 중 14.9%)에 불과하다. 

 

다만 방조제는 1991년 착공을 시작해 2010년 4월 완공됐다. 

 

내부 개발을 위한 SOC사업으로는 간선 도로망인 동서도로가 2020년 11월, 남북도로가 잼버리 개막을 앞둔 지난 7월 완공됐다. 이 밖에 항만과 철도, 국제공항 사업 등이 진행 중이거나 착공을 앞두고 있던 상황이다.

 

 


예산 78% 삭감, ‘잼버리 보복’ 논란

2017년 세계잼버리대회 유치는 정치권과 전북도 간 공조로 새만금 사업에 속도를 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새만금개발청은 관광레저용지 내 호텔 건설, 국립새만금간척박물관 건설, 배수지 건설 공사 등 다수 사업을 추진하면서 ‘잼버리’를 언급했다. “세계잼버리대회를 차질 없이 지원하기 위해 옥구·계화 배수지 건설 공사에 착수했다” “국내외 청소년들에게 새만금 가치를 홍보하고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명소로 박물관을 활용하기 위해 잼버리 이전에 개관할 수 있도록 했다”는 식이다. 정부도 장단을 맞췄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지난 3월 6일 제29차 새만금위원회에서 “새만금 개발을 가속화하는 데 범정부적으로 노력하겠다. 물류·교통의 핵심 기반인 공항·철도·항만 개발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밝혔다. 윤석열 대통령 역시 여름휴가 중 새만금 2차전지 투자협약식에 참석해 “가장 중요한 것은 개발 속도”라며 힘을 실었다.

그러나 준비 부족으로 잼버리대회가 파행을 빚고, 정부와 전북도가 책임 공방을 벌이며 분위기가 급변했다. 지난 8월 29일 국무회의를 통과한 내년도 정부 예산안에 반영된 새만금 SOC 예산이 당초 부처 반영액(6626억원)보다 78% 삭감됐다. 기획재정부 심사 단계에서 5147억원이 잘려나갔다. 새만금항 인입철도 건설(100억원)과 새만금 환경생태용지 2-1단계(62억원), 새만금 간선도로 건설(10억원), 새만금 환경생태용지 2-2단계 조성(9억5000만원) 등 사업 예산이 전액 삭감됐다. 내년 착공 예정이던 새만금 국제공항 예산은 부처 반영액 580억원 대비 11%인 66억원만 배정됐다. 새만금~전주 간 고속도로와 새만금 신항만 예산 역시 각각 28%, 26%만 남았다.

국토교통부의 설명자료는 ‘예산보복’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지난 8월 29일 국토부는 설명자료를 내고 “새만금 잼버리 행사 이후 새만금 SOC사업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는 바, 8월 29일부터 공항, 철도, 도로 등 새만금 SOC사업의 필요성, 타당성, 균형발전정책 효과성 등의 적정성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자체 점검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한덕수 총리가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 등에게 새만금 개발 계획의 전면 재검토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진 날이다. ‘잼버리 이후 문제가 제기돼 적정성 여부를 검토하겠다’는 설명은 잼버리 파행과 새만금 예산 삭감의 연관성을 의심하게 했다.

이에 야권과 전북 정치권은 ‘예산보복’을 주장했다. 전북도의원 14명은 지난 9월 5일 “전북도를 향한 잼버리 파행 책임 공세가 도를 넘더니 급기야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예산폭력이 자행됐다”며 집단 삭발을 하고 릴레이 단식에 돌입했다. 9월 7일에는 국회 본청 앞에서 ‘윤석열 정부 새만금 예산 삭감 규탄대회’도 열었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 김원기 전 국회의장 등 전북 정치 원로들도 “부당하게 삭감된 예산을 회복하는 데 전 도민의 뜻을 모을 것”이라며 공동성명을 냈다. 국민의힘은 예산보복 논란에 ‘가짜뉴스’라며 맞섰다.

하지만 전북도 역시 잼버리대회를 SOC사업의 명분으로 삼았다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전북도가 2018년 8월 발행한 ‘2023 새만금 제25회 세계스카우트 잼버리 유치활동 결과보고서’에는 “전라북도가 세계스카우트잼버리를 새만금에 유치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새만금 개발의 조속한 추진이 필요했기 때문” “전라북도는 국제공항 건설 및 SOC 구축 등 새만금 내부 개발에 박차를 가할 명분이 필요했다”는 내용이 명시됐다. 2017년 12월 새만금위원회가 ‘잼버리대회의 시급성’을 강조하며 당초 관광레저용지였던 갯벌을 농업용지로 바꾼 뒤, 농지관리기금 1800억원을 들여 갯벌을 매립해 새만금 잼버리 야영지를 조성한 점도 문제가 됐다. 용도가 농지로 변경되면서 관광레저용지일 경우 받았어야 할 환경영향평가와 사업타당성 조사 등이 생략됐기 때문이다.

새만금 SOC사업 예산 삭감을 두고 중앙 정치권에서는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지만, 정작 지역에서는 각양각색의 목소리가 나온다. 전북환경운동연합과 전북녹색연합 등 시민·환경단체와 정의당 전북도당은 생태계 보전과 도민을 위한 새로운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일단 기본계획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입장에서는 정부·여당과 의견이 같다. 다만 전북환경운동연합은 “기존 사업의 한계에 대한 진단과 분석, 평가 없이 내린 결정이라는 점에서 보복성 예산 삭감이자 책임 떠넘기기 꼼수로 보인다”며 정부를 비판했다. 


예산 삭감에도 ‘지역민 분노’ 없어

반면 정의당 전북도당은 지난 8월 24일 기자회견에서 “노출지(매립되기 전부터 수면 위로 노출돼 있던 곳)를 거부하고 새롭게 갯벌을 매립하느라 잼버리가 파행으로 치달았다. 잼버리를 명분 삼아 SOC사업을 추진했다”며 여당과 유사한 논리로 지역 정치권을 비판했다.

민주당 전북도당 의원들이 “도민의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라며 삭발 투쟁에 나섰지만, 정작 예산 삭감에 대한 지역민들의 불만이 크지 않다는 주장도 나온다. 당초 새만금 사업이 중앙정부 주도로 계획되며 지역 어민들은 피해를 본 반면, 그간 새만금 SOC 개발에 투입된 예산은 매립공사 등을 수주한 대기업으로 흘러들어갔다는 것. 새만금살리기공동행동 대표를 지낸 한승우 전주시의원은 “새만금 기본계획은 중앙정부, 국토부를 중심으로 한 관련 부처가 일방적으로 세운 것이지 지역민의 의견이 반영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새만금 사업에 투입된 예산의 85%는 서울에 있는 대기업 건설회사들이 가져가고, 전북도의 어업은 연간 1조원 이상의 피해를 보고 있어 예산에서 소외된 도민들이 이중 피해를 당하는 것이 새만금 사업의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새만금 사업에서 지역민들은 소외”

 실제로 수산경제연구원은 2019년 9월 발간한 연구보고서 ‘새만금사업에 따른 수산업 영향 및 대응 방안’을 통해 “어업활동의 중단에 따라 어촌 주민들의 안정적인 소득 확보에 어려움이 나타나고 있으며, 어촌이 기능을 상실해 생계유지를 위해 마을을 떠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방조제 착공 전인 1990년 전라북도 수산물 생산량은 15만234t이었으나, 방조제 완공 직후인 2011년에는 7만1309t으로 52.5% 감소했다. 반면 유사한 어업환경을 보유한 충남지역 수산물 생산량은 같은 시기 85.1% 증가했다. 면접조사 결과 새만금지역 어업인들의 소득 수준은 어업을 통한 소득이 있던 이전과 비교할 때 30~40% 수준으로 낮아졌다. 새만금간척사업 초기 정부는 간척농지 일부를 어업인에게 분양할 것을 약속했으나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오히려 기본계획 변경으로 일부 사업이 중단된 데 안도하는 분위기도 읽힌다. 지역 시민단체들은 새만금 신공항 건설과 생태용지 조성, 수상 태양광 사업 등에 대한 재검토 필요성을 꾸준히 제기해왔다. 특히 쟁점이 되는 사업은 내년 7월 착공이 예정됐던 새만금 신공항이다.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은 신공항 예정지인 수라갯벌에서 전투기와 민물가마우지 무리가 충돌하는 버드 스트라이크(조류충돌) 사진을 공개하며 위험성을 알렸고, 새만금신공항백지화공동행동은 지난해 9월 국토교통부 장관을 상대로 ‘새만금국제공항 개발사업 기본계획 취소소송’을 제기했다. 원고만 1308명에 달한다. 새만금 신공항의 경우 환경영향평가가 진행되고 있어 추후 환경부의 동의를 받아야 사업을 진행할 수 있지만, 국토부는 지난 8월 14일 공항 건설업체 선정을 위한 입찰을 진행했다.

새만금 신공항을 반대하는 시민단체들은 “지역 정치권에서 ‘동북아 허브공항’이라고 홍보했지만 미군기지(군산공항)로부터 1.3㎞ 거리에 있어 사실상 미공군 제2활주로 증설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편다. 미군기지 인근이라 중국 노선 취항이 어려운 데다, 주기장이 5개에 불과하고 활주로 역시 군산공항 활주로(2.7㎞)보다 200m 짧아 C급 소형 항공기만 취항할 수 있다는 것. 인근의 전남 무안국제공항은 50개의 주기장을 확보했지만 ‘고추 말리는 공항’이라는 오명을 썼고, 결국 지난해 12월에는 공항의 활성화를 위해 활주로를 기존 2.8㎞에서 3.16㎞로 연장하기로 했다. 

 

 

 

<  새만금 약사  >

정권마다 ‘갈지자’… 밑그림만 세 차례 바뀌어 

새만금 사업은 1987년 대통령 선거 당시 노태우 후보의 선거공약으로 등장했다. 가장 낙후된 전북의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정치권의 선물이자, 표심을 자극하기 위한 카드였다. 

 

1991년 7월 여야 영수회담(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김대중 평민당 총재)에서 개발 착수에 합의해 추경예산을 배정하고, 같은 해 11월 노 전 대통령이 ‘새만금 간척 종합 개발사업’의 착공식에 직접 참석하면서 본격적인 사업에 들어갔다. 노태우 정부는 새만금을 ‘농업 식량 생산기지’로 만들 계획이었다. 

 

이후 김영삼 정부는 ‘대중국 교두보’, 김대중 정부는 ‘환황해경제권 생산교역 물류 전진기지’를 약속하고 방조제 공사를 이어갔다

 

1996년에는 시화호 오염 사태가 발생하며 새만금에도 여파가 미쳤다. 시민단체 등을 중심으로 새만금 사업 재검토가 논의되고, 1999년부터 2001년까지 민관 공동조사단의 조사가 진행되며 방조제 공사가 중단됐다. 2003년 7월 환경단체 소송으로 새만금사업의 잠정 중단이 결정되며 공사가 멈췄다가 2006년 3월 대법원 판결로 공사가 재개되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는 2007년 4월 새만금 내부 토지개발 기본구상을 발표하면서 기존 농지 100%에서 농지 72%, 산업·관광 등 비농지(복합산업농지) 28%로 토지이용계획을 전환했다. 

 

 

2010년 4월 착공 19년 만에 방조제가 준공된 이후에도 새만금 개발계획은 정권마다 변경됐다. 

 

이명박 정부는 2011년 3월 2030년까지 21조원을 투자해 새만금을 동북아 경제 중심지로 개발한다는 ‘새만금 종합개발계획’을 발표하고 산업관광 용지 비율을 70%로 전환했다. 

 

‘국제 경제협력특구’를 내건 박근혜 정부는 2013년 9월 새만금개발청을 개청한 후 2014년 9월 새만금기본계획을 변경했다. 이명박 정부가 개발계획을 발표한 지 3년6개월 만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9월 새만금개발공사를 설립했고, 2021년 2월 글로벌 신산업중심지 조성을 목적으로 새만금 기본계획을 다시 변경했다. 

원고지·노트에 습작하다 고3 때 낸 첫 시집… 미당이 제목·서문 써줬다
[나의 현대사 보물] [22] 시인 문정희


문정희 시인은 자신의 보물로 60년 넘게 간직해온 '습작노트'를 꼽았다. 문 시인은 손에서 바스라지는 60년전 소녀 시절 원고를 보면 '애벌레가 나비가 된 것' 같은 기분이라고 했다. 

 

 

< 조선일보, 이영관 기자,  2023.09.12. >

 


낡고 빛바랜 종이 뭉치 속엔 당돌했던 한 소녀가 있었다. 지난 7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자택 인근에서 만난 문정희(76) 시인은 비닐장갑을 낀 채로, 포장지에서 학창 시절 습작 노트를 꺼내 보였다. 장롱 속에 60년 넘게 보관했다는 뭉치에는 소설과 희곡 원고지 2000여 장, 단상을 적은 대학 노트 5권 등이 섞여 있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연에게서 삶의 이치를 배운다” 같은 세계와 생명에 대한 소녀의 고민으로 가득한 글들. 그는 “어려서 인생을 몰랐을 때인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렇게 많았었는가 싶다. 너무 아는 체하기도 했다”며 웃었다.

 


산업화 시기 여성 목소리 詩에 써내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종이 더미에서 오직 한 장 남은 공책 표지가 눈길을 끌었다. 표지 모서리가 꼬깃꼬깃하게 접힌 채, 내용물은 사라진 공책. 하단에는 ‘광주 서석 국민학교/ 제육학년 십일반/ 문정희’, 그 위엔 빨갛고 큰 글씨로 ‘잘되면 출판키로 함-오빠-/ 문집/ 꿈을 찾아서’라고 적혀 있었다. 위의 글씨는 꿈을 지지해 준 친오빠가 적어준 것이다.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전교생 20여 명 규모 국민학교에 다니던 그는 5학년 때 홀로 유학을 시작했다. 국민학교 때 광주광역시로, 중학교 때 서울로 간 그는 홀로서기의 두려움을 ‘시’로 극복했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로 집안에선 그가 학교 선생이 되기를 바랐다. “처음에 시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 어른들은 매우 걱정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조선 시대까지 여성 시인은 주로 기생이었고, 개화 직후 문학을 한 여성들의 인생이 불행하고 당돌했기 때문이죠. 부모님은 여성으로서 편한 삶을 살았으면 했지만, 저는 매일 써야만 행복했습니다. 내면에서 어떤 폭발물이 끓어 나왔어요.”

문정희가 시인이자 여성으로서 살아온 삶은, 해방 이후 한국 여성들이 제 목소리를 찾는 과정과 같았다. 1

 

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한 그는 생명의 신성함을 예찬하고,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작품을 주로 발표해 왔다. 현역 시인인 그는 2010년 스웨덴이 동아시아 시인에게 수여하는 시카다상을 받고, 지금까지 시집 14권이 11개 언어로 번역 출간됐다. 작년 10월부터는 국립한국문학관장으로서 한국 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맡고 있다. “제 시 쓰기의 토양은 전통적 가부장 사회였어요. 일생 동안 부엌과 안방을 오가며 남성의 보조자로서 살아야 했던 가부장 사회에서 태어났지만, 산업 사회로 전환하는 시기에 성장했죠. 달라진 시대에 교육을 받은 덕분에, 가부장적 언어로 시를 쓰지 않은 첫 여성 시인이 됐습니다.”

그가 환멸을 느낀 여성의 삶은 특별한, 소수의 경험이 아니었다. 농경 사회에서 집안일을 맡던 여성들이 산업화 물결에서 사회로 나섰으나, 집안에서의 삶은 달라지지 않아 겪어야 했던 이야기. 시인은 “취업과 결혼을 하며 ‘천년의 얼음덩이’와 마주한 듯한 기분이었다. 잡지사에 취직할 때는 결혼하면 관둬야 한다는 약속도 했었다”며 “출산 같은 가부장적 차별이 자유롭고 싶었던 제 날개를 꺾어뜨리며, 좌절을 겪었다”고 했다.



서정주와 인연, 최초 여고생 시집으로

시집 ‘꽃숨’(1965)은 절판돼 만나보기 어려운 희귀본이다. 문 시인이 진명여고 3학년 때 한국 여고생으론 처음 낸 시집으로, 고(故) 미당 서정주(1915~2000) 시인의 서문을 실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65년 동국대에서 미당이 심사를 본 백일장에서 여고생 문정희가 장원에 입상하며 시작됐다. 미당은 ‘우리말로 가장 예쁜 첫 숨결’이라는 뜻에서 문정희의 첫 시집 ‘꽃숨’ 제목을 짓고, “여기 이 시집의 주인 문정희양은 금년에 진명여고 3학년에 재학 중인 17세의 소녀로서”로 시작되는 서문을 썼다. 미당은 문 시인이 등단 이후 첫 시집 ‘문정희 시집’(1973)을 낼 때도 서문을 써서 그를 격려했다.


문 시인은 “미당 선생은 일찍 핀 꽃이 일찍 시들듯, 어린 나이에 재능을 보이는 걸 환영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제가 지금까지 시인으로서 살아남았다는 게 새삼 놀랍다”며 과거를 회상했다. 시인은 최근 계간지 ‘문학나무’ 가을 호에 발표한 시 ‘이름’을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인간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에 ‘이름 남겨서 뭐 하게’라고 답한 작가의 이야기다. “시인으로 살아온 지난 시간이 이름으로 남아서 뭐 하겠습니까. 사는 동안 있는 힘을 다해서 파닥거렸다는 것의 증거로 작품이 몇 개 남았다는 정도이죠. 한국 여성으로서 60년 가까이 오직 썼고, 생명의 당당함에 대해 늘 노래할 수 있던 삶이 참 괜찮았습니다.”

 


“반골 기질이 창작의 혼”

미당에게 선물받은 ‘백자 향로’는 입구 한쪽이 찌그러져 있다. 소장품으로서 가치는 없지만, 문 시인이 각별히 아끼는 물건. “미당 선생이 수집하던 향로가 많았는데, 이 향로가 마음에 들었어요. 선생이 왜 좋냐고 물어봐 ‘찌그러져서 멋있다’고 답했죠.” 미당은 향로를 주며 ‘비뚤어진 것이 온전하다’는 뜻으로 ‘곡즉전(曲則全)’이라 말했다고 한다. 최근 시인이 계간지 ‘문학나무’ 가을 호에 발표한 시 ‘눈물은 어디에다 두나’에도 이런 시인의 삶이 드러났다. 새에덴교회 소강석(61) 목사가 정율성 기념 공원 추진과 관련, 이 시를 인용하며 최근 다시 화제가 됐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내 얼굴에 눈이 한 개다/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캄캄한 절벽이다/ 어디로 갔을까/ 내 한쪽 눈/ (중략) / 부패한 수족관 같은 tv뉴스 화면에서/ 한 눈 가진 사람과 두 눈 가진 사람이/ 서로를 병신이라 우기고 있다/ 나는 울었다/ 그런데 내 눈물은 어디에다 두나/ 좌파도 우파도 아닌 내 한쪽 눈/ 어디로 갔을까/ 내 눈물은 어디에다 두나’(시 ‘눈물은 어디에다 두나’ 중에서)

문정희는 호남 출신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대책이 안 서는 반골 기질”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열한 살에 홀로 고향을 떠나 평생을 떠돌았지만, 어린 날 겪은 가족의 언어에는 기존 것들에 대한 부정과 저항이 있었다. 그 부정 의식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데 바탕이 됐다”고 했다. 

 

또 그는 “1980년대 초반 군부 정권에 의해 광주에서 벌어진 민중 학살은 시를 쓰는 손이 부끄러울 만큼 시인으로서 정체성 자체를 의아하게 했다”며 “한국의 여러 변혁을 경험하며, 겁쟁이 시인으로 살았지만 진실이 은폐되고 거짓에 대한 저항을 몸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괴로워했다”고 했다. 그 괴로움이 남편을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라고 명명한 시 ‘남편’, 역사 속 유관순 열사를 한 명의 여성으로 되살려낸 장시집 ‘아우내의 새’를 비롯해 여성의 언어를 살리는 작품으로 승화됐다.

 

 “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매혹적인 힘으로 나를 혁명하고 세계를 혁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교육을 지킨다"

 

 

< 중앙일보, 양성희 기자, 2023.09.11  >

 

 



언제야 이 비극이 멈출까. 2학기 들어 언론에 알려진 것만 9명의 교사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20대 서울 서이초 새내기 여교사로 시작해 정년을 1년 앞둔 60대 체육 교사, 대전의 24년 차 40대 여교사까지 나이, 성별, 지역을 가리지 않는다. 유치원 교사나 특수교사에 대한 학부모 갑질 사례도 속속 알려졌다.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 5년간 매년 20여 명의 공립학교 교사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정당한 훈육이 아동학대로 내몰리는 살얼음판 같은 현실 속에 그간 우리가 몰랐던 너무도 많은 죽음이 있었다. 그저 교사라면 안정적인 직업 정도로만 여겼던 우리 모두의 선입견이 부끄럽고 죄스럽다.

24년 차 대전 여교사는 무려 4년간 악성 민원에 시달렸다. 팔로 친구 목을 조르는 아이를 제지했다는 등의 이유로 아동학대로 고소당했고, 검찰 조사에서 무혐의가 나왔지만 악성 민원은 계속됐다. 학부모가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민사소송에도 시달려야 했다. 서이초 교사 추모 집회에 나가 ‘뭔가 달라질 것’이라 희망을 걸었던 교사는 결국 극단적 선택을 했다. ‘2023 교사 직무 관련 마음 건강’ 실태조사에 따르면 심한 우울증을 겪는 교사가 일반 성인의 4배였다. 자살을 생각하는 비율도 최대 5.3배 높았다.

 


잇따른 교사들의 극단적 선택
교권 회복 대책 마련과 함께
교육 자체의 위기도 성찰해야

 

 


정부는 각종 대책을 내놓고 있다. 교육부는 악성 민원에서 교사를 보호하는 고시안(가이드라인)을 마련해 지난 1일부터 시행 중인데 실효성 문제가 있다. 여야 없이 법적 정비를 약속했던 정치권은 지난 7일 ‘교권 회복 4법’에 대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 교권 침해 행위로 제재받은 기록을 학생생활기록부에 남기는 문제 등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교사들의 목숨 건 사투가 이어지는 만큼 실효성 있으면서도 빠른 대책이 필요하다.


 지금 논의는 ‘교권 회복’에 맞춰져 있지만, 사실 사안의 핵심은 그를 넘어선다. 교사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날 “공교육이 멈췄다”는 게 단순한 수사(修辭)가 아니다. 요즘 학부모들은 내가 낸 세금으로 월급을 받으니 교사에게 거리낌 없이 ‘소비자 주권’을 행사한다지만, 똑같이 돈을 내면서도 학원 교사들에 대한 태도는 다르다. 어차피 입시전쟁이니 공부는 사교육으로 해결하고 학교는 친구나 사귀는 곳이라 말하는 학부모들도 있다. 학원에서 면학 분위기를 흐리거나 딴짓하면 아이를 잡아달라고 당부하기도 한다. 결국 입시경쟁, 성적 만능주의로 인한 공교육의 총체적 붕괴가 낳은 참사다. 그것도 사교육 의존도가 높아져서 공교육이 무력해졌다는 차원을 넘어, 입시와 성적이 모든 게 돼버린 교육 자체의 위기다. 그저 시험을 잘 보는 게 아니라 타인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인생에 불가피한 좌절과 어려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헤쳐 나가는지 삶의 기술과 태도, 시민성을 가르치는 교육의 핵심은 뒤로한 채 오직 ‘내 아이 기죽이지 말라’는 부모들의 이기적인 아우성만 가득한 현실이다.


지난 4일 거리로 쏟아져 나온 교사들의 외침 중에 “우리들은 교육을 지킨다” “우리들은 포기하지 않는다”는 구호가 가슴에 오래 남았다. 지금 교사들이 지키려는 건 단순히 교권만이 아니다. 교육이다. 우리 사회가 함께 바로 세워야 하는 것도 교육이다.


지금은 자기 자녀가 아동학대를 당했다며 교사를 신고하지만 그렇게 제대로 훈육받지 않는 아이들은 조금만 자라면 부모도 공격한다. 최근 한 중등교사는 온라인에 “교육이나 훈육이 불가한 초등학교에서 6년을 보내고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면 진짜 헬파티가 열린다. 이제는 부모가 아이를 이길 수 없고, 학교에서는 당연히 재량으로 지도할 수 없다. 이들은 사회인으로서 조직 생활을 하기가 매우 어려운 세대로 자란다”며 “공교육 정상화에 학부모 역할이 정말 크다”는 글을 올렸다.

 

 

툭하면 아동학대로 교사를 신고하지만 지난해 아동학대 가해자의 80%가 부모였다. 

 

학대 장소도 81%가 집이었다(복지부). 

 

반면에 지난해 교사를 대상으로 한 아동학대 신고 중에서 유죄가 확정된 사례는 1.5%였다(전교조).

 “어느날 툭툭 기적이 내게로 왔다”  양희은


누구나 살려면 ‘그럴 수 있어’
사는 건 힘 빼는 연습… 억울할 땐 걸어라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는 도무지의 노래
버려진 노래 대중이 발견해서 돌려준 ‘한계령’
가수 운명… 자전거 타다 화단 들이받은 격
라디오는 거대한 어깨동무… 이름 불러주고 편들어줘

 

< 조선일보, 김지수 작가,  2023.08.19  >

 


70년대 통기타 줄 위로 솟구치던 양희은의 노래는 그 음색의 청아함으로 씩씩함과 쓸쓸함의 급커브를 돌았다. 한때 저항의 노래로 거리를 휩쓸었으나, 기실 그의 목소리는 목련이 지는 봄밤이나, 계곡물의 온도가 변하는 가을 아침, 혼자서 듣기에 가장 좋았다.

깨어짐과 헤어짐을 감당하며 흐르듯 노래하던 내 젊은 날의 가수가 저렇게 묵직하게, 투명하게 거침없이 나이드는 모습을 보니 그 기백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라 그래’에 이어 출간한 양희은의 신작 에세이 ‘그럴 수 있어’는 출간 몇 주만에 베스트셀러 상위에 안착되었다. ‘그럴 수 있어’! 10cm 볼펜으로 단번에 써내려간 양희은의 개운한 구어체가 겨울 동치미 국물처럼 시원하게 가슴을 적신다.

햇빛이 정수리에 내려꽂히던 무더운 어느날, 시간의 단차를 두고 양희은을 두 번 만났다. 코엑스 스타필드 별마당 무대에서 관객을 앞에 둔 공개 인터뷰로 한번, 일주일 후 상암 MBC 근처 카페에서 다정하게 마주 보고 또 한번. 두 번 다 캔디 컬러 셔츠와 안경이 맞춘 듯 화사했고 청바지가 잘 어울렸다.

서울 사람이라 또박또박 타자치듯 정확히 말할 뿐, 실상 남 앞에 못나서는 수동적인 사람이라고, 그는 인터뷰 무대에서 하염없이 떨리는 마음을 드러냈다. 글 쓰는 건 너무 어렵고 나이 들면 머리도 물기 없는 사막같아 미완성의 노랫말들만 잔뜩 쌓여있다고.

나는 이 관록의 어른이 뿜어내는 정처없는 정직에 깊이 매료되었다. 에스키모를 좋아하고 파브르 곤충기를 읽는 70대 여성, 스스로를 성인 ADHD라고 진단하는 이 형 같은 국민 언니를 만나보자.

-’그러라 그래’에 이어 ‘그럴 수 있어’ 연작시 같은 책이 나왔어요. 참으로 양희은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 후배들에게 툭툭 던진 말들이 모아졌어요. 사람들 말에 가타부타 속 끓이는 후배를 만나면 신경쓰지 마. 그 사람들 그냥 ‘그러라 그래’하고 툭 쳐줘요. 자기가 한 행동에 노심초사하는 후배들한테는 네 입장에서 ‘그럴 수 있어’ 두둔도 했고요. 한쪽이 한쪽을 밟아버리면 그건 좀 가슴 아픈 일이니까, 상대 입장에서 보면 그쪽도 살려고 그러는 거니 ‘그럴 수 있어’... 그랬죠.

▲양희은 베스트 3곡을 꼽아보라고 했더니 단번에 ’백구’ ‘저 바람은 어디서’ ‘나 떠난 후에라도’를 꼽았다. 


양희은의 책을 읽다 보면 명사 동사 형용사 접속사처럼 목적이 분명한 똑똑한 말들보다 ‘도무지’ ‘문득’ 같은 변두리 부사들이 사소하고 헛헛한 이야기를 끌어올리는 것 같았다.

-언젠가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의 가사는 ‘도무지’가 길어올린 이야기라고 읽은 적이 있어요. 뉴욕에서 기타리스트 이병우와 노래를 만들 때, ‘사랑’이라고 쓰고 나니 도무지 무슨 말을 써야할 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랬어요. 도무지 모르겠다, 도무지 모르겠다… 그랬더니 도무지가 뒷말을 끌고 왔어요. ‘도무지 알 수 없는 한가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그때는 참 산다는 게 쓸쓸했어요. ‘문득’이라는 말도 참 놀라운 말이에요.”

뭘 써야할 지 모를 땐 ‘도무지, 문득’이 도우려 달려올 거라고 했다.

-문득 궁금합니다. 가수가 된 건 운명인가요?

저는 가수가 되고 싶지 않았어요. 그냥 인생이 이 길로 끌고 왔어요. 나무 그루터기로 가려다 화단 경계석을 들이받은 자전거처럼. 언젠가 강화도에서 자전거 타다 몇 미터 아래 밭두렁으로 굴어떨어질 때도 그 생각을 했어요. 인생이 참 이상한 곳으로 날 끌고 가는구나. 저는 오십 줄에 자전거를 처음 배웠어요. 자전거 교실에서 수료증까지 받았는데, 그때 제일 먼저 넘어지는 걸 배워요. 가만 보면 인생은 넘어진 자전거를 일으켜서 끌고가는 일 같아요.”

-일찌감치 꿈을 이룬 분으로 알았습니다.

“(미소지으며)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통지표에 적혀있던 문구를 정확히 기억해요. ‘주의산만. 인내력 부족.’ 인내력은 살면서 나아졌지만 주의산만은 여전해요. 어른 ADHD죠. 그냥 무계획적으로 살아요. 가수도 그랬어요. 저한텐 노래가 생계였어요. 노래를 사랑은 했지만, 직업이 되면서 사랑을 느끼기는 힘들었어요.

-그래도 성취감은 있으시죠?

“이거 아닌데, 이거 아닌데…하다 ‘이거다!’하는 짧은 순간을 보고 가는 거죠.”

주의 산만하던 어린이가 삼청공원으로 가회동 언덕으로 동네 남자애들 끌고 다니며 대장 노릇하다 십 대가 됐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사방팔방 노래로 빚 갚으며 가장 노릇하다 보니 이십 대가 됐다.

그렇게 세끼 밥 차리고 강아지 돌보며 방송국과 목욕탕, 수영장과 정발산을 오가다 보니 칠십 줄에 들어섰다. 암도 걸려봤고, 우울증도 앓아봤다. 그동안 사람 보는 촉은 좀 생겼으나 노래 보는 촉은 여전히 모르겠다고 했다.

-노래의 운명은 부르는 가수도 예측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것 같아요. 내 노래 중에 ‘한계령’은 음반 회사 사장이 아주 싫어했어요. “너는 대학 다닐 때는 (’아침이슬’ ‘상록수’ 같은 노래로) 나를 남산에 끌려가게 만들더니 대학 졸업하고는 왜 또 장사 안될 노래만 골라서 부르니?” 면박을 줬죠. 그런데 그 노래를 사람들이 찾아내서 퍼뜨려 줬어요.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도 드라마에 배경 음악으로 나오면서 알려졌어요. 유명 연속극, 단막극, 심지어 ‘전원일기’에서 복길이도 그 노래를 울면서 따라 불렀어요. 제가 이병우와 뉴욕에서 만들어서 왔을 땐 모든 음반사에서 ‘노래는 좋은데 되겠어?’ 거절했던 앨범이거든요. 그렇게 쓸쓸하게 흘러가다 결국 대중에게 발견되는 순간이 있어요. 그걸 예측할 수는 없어요.”

대중이 좋아할 만한 스타일을 편곡해 틱톡으로 단숨에 띄우는 세상에서, 여전히 ‘노래의 운명은 예측할 수 없다’는 양희은의 말은 신비롭게 들렸다.

-저는 ‘한계령’을 들으며 그 바람길을 나침반 삼아 젊은날 지리산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 시절 양희은의 노래가 없었다면 어떻게 그 스산한 시간을 견뎠을까 싶어요. 노래를 부를 때마다 가사를 얼마나 생각하시는지요?

“노래를 부를 때도 사연을 읽을 때도 깊이 잠수해 들어가요. 이야기 안으로 쑥 들어가지요. 특히 말하듯 노래하고 노래하듯 말하기 위해서는 치아 구조까지 연구하게 돼요. 발음이 깔끔하게 딱 떨어져야 정확히 전달이 되니까요.

저는 노래와 방송을 거의 동시에 시작했어요. 70년대에 한 섬마을 소년이 겨울 방학이 오면 트랜지스터로 제 목소리를 들으며 외로움을 견뎠다는 사연을 보내왔어요. 제 방송을 들으면 공동묘지 곁을 지나도 무섭지 않다고요. 저는 그 말이 너무나 무서웠어요.”

-무엇이 그렇게 무서우셨어요?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나는요, 당시에 아무도 없었어요. 내 편이 아무도 없었어요. YMCA 청소년 공간인 청개구리에 드나들다 발탁돼서 19살에 방송국 왔는데 아무도 날 보고 웃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해야 오래 할 수 있을까, 골똘히 생각해 보니 많은 사람이 듣고 아껴주면 살아남겠더라고.

그렇게 쥐뿔도 모르는 애가 지금까지 온 거예요. 라디오는… 사기를 못쳐요. 눈 가리고 아웅을 못해요. 금방 들통이 나요.”

양희은의 군더더기 없는 입말은 그의 창법처럼 천진하게 휘몰아치며 정곡을 찔렀다.

-무대공포증도 여전하십니까?

“여전해요. 그런데 달리 생각해보면 익숙한 게 좋은 건 아니에요. 남편은 옆에서 보고 40~50년이 지나도 처음인 것처럼 그렇게 긴장되고 떨리면 ‘때려치워라.’ 그래요. 때려치워야 하나, 고민했는데 두려움이 있다는 건 좋은 거예요. 저는 감기 기운 있을 때 더 노래를 잘해요. 목소리가 아주 맑을 때보다 컨디션이 좀 으슬으슬할 때 더 잘 나와요.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난 놀듯이 하는 것 보다, 떨리는 게 더 나은 것 같아요.”

생각해 보니 윤여정 선생도 카메라 앞에서 매번 긴장한다고 했다. 긴장한다는 것은 항상 ‘신인의 자리’에 선다는 것. 다 아는 꼰대의 자리가 아니라 겸손한 신인의 자리로 돌아가 젊은이들과 함께 떨며 섞이는 것. 필사적으로 권위의 자리를 마다하는 것, 그것이 내가 만난 만년 현역들의 공통점이었다.

-함께 작업한 후배 아티스트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습니까?

“다 좋았어요. 김반장이라는 친구와는 ‘요즘 어때’라는 곡을 함께 했는데, 요즘 어떻게 지내나 마음이 쓰여요. ‘엄마가 딸에게’는 악뮤와 부른 버전이 TV에 나오면서 더 널리 알려졌어요. 젊은 아티스트와 섞일 수 있다는 건 영광이고 기쁨이에요.

사람의 귀는 묵은 소리를 좋아하고 사람의 눈은 새 것을 좋아한다지만, 저는 후배들한테 “날 좀 가르쳐줘라”고 해요. 그들 덕에 제가 가진 옛날 ‘쪼’를 떨칠 수 있었어요. 그들의 나누는 마음이 정말 귀해요.”

-선배 가수들 중엔 누구를 좋아했나요?

“스탠더드 팝을 기가 막히게 부른 윤복희 씨. ‘청실홍실’ ‘바닷가에서’ 불렀던 안다성 씨.”

-습윤한 채 찰랑찰랑 뻗어가는 목소리는 마음에 드세요?

“더 허스키하면 좋겠어요. 젊은 날보다는 중저음이 늘어난 게 마음에 들긴 합니다.”

-코로나로 한창이던 시절에 한계령에 올라 ‘한계령’을 부를 땐 어땠습니까?

“과거에 한계령을 부를 땐 한계령이 뭔지도 모르고 불렀어요. 대관령, 진부령은 알아도 한계령은 몰랐어요. 노래를 내놨는데 ‘이건 PR할 필요도 없는 망한 노래’라고 레코드 사장이 단언해서 노래 없는 세상으로 도망가고 싶어서 결혼해서 미국으로 갔어요. 그래서 나는 한계령이 나를 시집보냈다고 해요(웃음).

지인들이 ‘한계령 좋더라’ 할 때마다, 나는 그게 여행지 얘긴 줄 알았어요. 그게 내 노래라는 건 나중에 알았어요. 나를 떠난 노래를 대중이 발견해서 나에게로 되돌려주는구나. 그 노래를, 엄혹한 코로나 시절에, 바람을 맞으며 골룸 머리가 돼서 불렀어요. 당시엔 아무런 생각도 안 났어요. 그저 무관객으로 한계령 앞에서 노래를 부르니 그 기운에 가슴이 뻥 뚫렸지요.”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양희은의 ‘한계령’

-스스로가 자랑스럽다는 벅찬 느낌을 받을 때는 언제인가요?

나는요, 자아도취 하지 않아요. 노래도 눈감고 부르지 않아요. 나 자신에게 후한 점수를 주지도 않습니다. 내 인생이 그렇게 자랑스럽지도 않아요. 재미있어서 살지도 않았어요. 휘리릭 시간이 흘러서 때가 되면 떠나겠지요. 거창한 계획도 없고 어떤 큰일이 닥쳐도 별로 놀라지 않아요. 누가 나를 놀래키면, 그냥 씩 웃어요.”

강심장은 아닌데, 사람 어려워할 줄은 모른다고 했다. 낮다고 얕잡아 본 적도 높은 사람 앞이라고 주눅 들어 본 적도 없노라고.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을 때, 누군가가 나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위축된다.

타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어, 덤덤한 일흔 살 양희은을 앞에 두고 있자니, 왜 그가 부르는 노래 ‘상록수’가 늘 푸르고 서늘한지 알 것만 같았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불고 눈보라 쳐도…’

-독립군 인생이로군요!

“독립군이지요. 소속사도 없고 선 계약금 받아 갚아야 할 돈도 없고. 난 고등학교 때도 그런 마음이었어요. 1평짜리 담배 가게를 해도 내 맘대로 하고 싶다고. 그런 인생은 비교할 수 없잖아요. 흘러가고 싶은 대로 흘러가고 싶어요.”

-노래도 글도 배꼽 밑에서 시작된다는 건 무슨 말일까요?

우뚝한 그런 마음이라고 할까요. 사람은 ‘배알, 배짱’이라는 게 있어야 해요. 둥둥 떠 있는 욕심 말고, 뭔가 빡 진심으로 끌어당기는 힘 같은 거, 그런 건 배꼽 밑에 나와요.”

-각별히 사랑했던 이는 누구였지요?

“각별히 사랑한 건 동생들이었어요. 그 애들이 내 에너지원이었어요. 내가 희생해서 가세를 굴려 동생들이 공부하고 학교만 다니면 좋겠다… 그렇게 가슴이 저리고 졸였어요. 70년대 초에 아르바이트로 노래한다는 건 편안한 직장이 아니었어요. 술꾼들이 무대로 오니까… 동생들이 ‘내 편’이고, 같은 울타리에 사는 식구라는 힘으로 견뎌냈어요.”

-인생의 은인은 만나셨나요?

“제 젊은 날은 끔찍한 빚더미의 시간들이었어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엄마가 빚보증을 잘못 선 데다 운영하던 양장점이 불에 타버리는 바람에, 20대 내내 단벌 청바지에 차비도 없이 걸어 다녔어요.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었는데 쥐어짜도 돈 나올 구멍이 없었어요. 파산선고라는 것도 할 줄을 몰랐으니까. 그때는 하늘에 삿대질을 했어요. 아버지 몫을 내가 하고 있는데, 아이들을 이렇게 개고생시키면 어떡하느냐고.

신이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그렇게 빚의 구렁텅이에서 헤매고 있으니, 내 얼굴이 얼마나 우울했겠어요. 그런데 그때 클럽에 노래 들으러 오던 분 중에 1950년대 한국에 오신 외국 선교사분들이 사연을 묻고 선뜻 도와주셨어요. 그 뒤로 킹레코드사와 계약해서 빚을 다 갚았습니다.”

인생 고비마다 생각지도 못한 도움이 툭툭 나타나더라고 배짱 두둑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기적은 그렇게 툭툭 오는 건가요?

네. 툭툭 오죠, 기적은. 막다른 곳에서 툭툭 쳐주듯이.”

-보고 싶은 사람은 누굽니까?

“아버지. 엄마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에요. 뭐든지 당연하고 당당하고 좋은 건 당신이 먼저 하세요(웃음).”

-누가 선생 인생에서 엄마가 되어 주었나요?

“선배 언니들이죠. 언니들이 나를 붙여주고, 이래라저래라 잔소리하지 않고, 그냥 툭툭 쳐줬어요. 시스터후드라고 하지요? 나이 들면서 그런 게 더 좋아요.”

-30대 난소암 투병 전후 인생관이 달라졌나요?

“저는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말을, 정말 싫어해요. 그럴 땐 ‘언제? 어디서? 우리가 돈이 없지, 시간이 없니?’ 이러면서 막 추궁해요(웃음). 어려울 게 뭐 있어요. 마음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툭툭 하면 돼죠.

암에 걸려 기운 없이 누워 지내면 다 보여요. 겉으로는 “어떠니?” 해도 속으로는 ‘지금 내가 네가 아닌 게 정말 다행이다’하는 눈빛이 다 읽혔어요. 진심으로 위해주는 사이는 쉽지 않아요. 슬플 때 같이 슬퍼하는 것만큼 기쁠 때 같이 기뻐하는 것도 쉽지 않아요.

그래서 오지랖 넓었던 관계가 많이 정리가 됐어요. 인생 사는 데 사람 많이 필요 없어요.”

-언제 행복하세요?

“일상을 충실히 살아내면… 행복은 멀리 있지 않더라고요. 요즘엔 집근처 단골 목욕탕에서 목욕할 때, 불투명 창으로 빛이 스며들면 그게 얼마나 행복하고 개운한지 몰라요. 변함없이 살아내는 하루하루가 다 노래가 되더라고요. 예쁜 종지 하나가 깨졌다,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맛있게 끓었다… 그런 게 다 하루하루의 노래였어요.”

배꼽 밑에 꾹꾹 쟁여둔 일상 밑천이 결국 노래로 돌아온다고 했다. 노래를 안 할 때 노래를 잘 살고 있는 거라고.

-저는 젊은 날 아껴 듣던 양희은의 촉촉한 목소리가 ‘여성시대’ 라디오에서 집밥처럼 슴슴하게 흘러나올 때 살짝 낭패감이 들기도 했어요(웃음). 노래를 부르는 것과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 양희은에겐 어떤 쪽이 더 끌립니까?

“저는 1971년 가을부터 라디오를 했어요. ‘아침이슬’ 노래도 1971년 9월 1일에 나왔어요. 거의 동시에 나온 거예요. 이름을 부르는 거, 그거 제가 살던 어린 시절엔 아주 자연스러운 거였어요. 기독교 문화가 들어간 이북 사람들이 특히 더 그랬어요. 제 아버지도 평안도 분인데 친척분들 이웃분들 모이면 꼭 이름 석 자를 따박따박 불러줬어요.

‘너 이름이 뭐니?’는 유행어는 이성미에서 시작이 됐어요. 방송국 소파에서 먹고 자며 아침 방송 리포터 한다는 애가 있다는데, 왠지 짠했어요. 어느 날 야구모자 쓰고 지나가는 그 쪼끄만 애를 불렀어요.

‘너 이름이 뭐니? 우리 집에 와. 밥 차려 줄게.’ 이성미가 나중에 그래요. 자기한테 처음 밥상 차려준 사람이 나라고.”

이름을 부르면 함부로 할 수 없다. 호명은 관계의 시작이다. 양희은은 만 24년 4개월 진행한 ‘여성시대’를 그렇게 이름 불린 자들의 거대한 어깨동무라고 했다.

“처음엔 돈 때문에 병 때문에 폭력 때문에 무너져 내리는 아픈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이야기를 전하는 게 그들의 삶에 무슨 효용이 있을까, 그 무용함에 우울했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누군가는 컴퓨터를 배워 글을 쓰고 누군가는 읽고 누군가 듣는 동안 ‘아,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었구나!’ 그 마음으로 힘을 얻어 하나둘 어두운 동굴을 박차고 나왔어요.”

-아름다운 웨이브네요.

맞아요. 세상 크기만 한 어깨동무가 생기는 거예요. 그런다고 돈벼락이 떨어지거나 병이 낫는다거나, 남편이 착해진다거나, 경천동지할 일이 일어나진 않아요. 그냥 어깨동무의 동심원이 계속 커지는 거예요.”

-사람을 살리는 건 대체 뭘까요?

걱정도 나누고 좋은 것도 나누고 먹을 것도 나누고. 내 속사정을 털어놓으면 듣는 사람도 자기 객관화가 돼요. 그래서 하지 못하던 결단도 내리죠. 자기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매우 용감한 사람입니다.”

-그래도 억울하고 슬플 땐 어떻게 합니까?

인디언, 에스키모인들은 화가 나면 화가 풀릴 때까지 산허리를, 얼음 평원을 걷고 또 걷는데요. 

한참을 걷고 나서 분이 가라앉으면 그때 멈춰서서 걸어온 길을 되돌아온다고 해요. 

그렇게 돌아오는 길은 떠날 때의 길하고는 달라요. 

억울할 때 슬플 때 복잡할 때 햇빛 받고 걸으세요. 

걷다 보면 정리되고 걷다보면 나아집니다.”

그 자신, 가장 큰 걱정은 백 살 가까운 노모와 열일곱 살 넘은 노견이라고 했다. 잘 못 걷고 잘 못 듣고 잘 못 보는 그들을 돌보며 ‘저것이 나의 길이다’ ‘저것이 나의 앞날이다’를 되새기는 삶. 그럼에도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도시락 싸고, 방송국에 나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시장 보고 된장찌개를 끓여내는 양희은의 쳇바퀴 삶이 그의 배꼽 아래 쌓여 세상을 보살피는 은은한 노래로 나오는 걸 우리는 목격한다.

▲온갖 사람 드나드는 방송국에서 반평생을 보내면서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보는 촉이 발달했다. 말만 앞세우는 게 싫어, 책을 읽어도 ‘파브르 곤충기’나 ‘식물도감’을 읽는다는 양희은. 


-50년 넘게 노래해 보니 힘주기와 힘 빼기 중에 무엇이 더 어렵던가요?

시작을 잘하면 끝까지 잘 풀려요. 노래는 첫 소절, 시작이 반이에요. 처음에 힘 조절 못 하면 끝까지 헤매지요. ‘상록수’라는 노래는 높은음으로 지르는 노래라 힘 빼고 시작하기가 정말 힘들어요. 힘을 내듯 또 살짝 빼면서… 결국 노래도 삶도 평생 힘 빼는 연습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제일 좋은 노래는 콧노래예요. 아무도 듣지 않고 나 혼자 부르는 노래… 그게 제일 살아있는 노래 같습니다.”

다시 태어나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쉬다 가는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다. 바람에 힘 빼고 나부끼는 잎새처럼, 바람에도 뱃심으로 지탱하는 나무처럼, 그렇게 주의산만한 채로 명랑하게 뚱딴지같이 늙어가겠다는 양희은. 나무가 되어가는 그를 보며, 그의 노래로, 가을을 맞는다.

“후쿠시마 선동한 이재명과 86그룹, 한국 정치사상 지적 능력 가장 떨어져”
‘민주화운동 동지회’ 민경우


 


< 조선일보, 김윤덕 선임기자,  2023.09.11.  >

 

 


“여기가 보수의 심장이군요”라고 민경우는 말했다. 골수 주사파였던 그는 조선일보가 신기한 듯 연신 두리번거렸다. “젊을 때 형성된 생각의 원형은 쉽게 바뀌지 않아요. 새로운 지식, 경험을 통해 사람이 변한다고요? 개뿔입니다.” 한미 FTA 반대와 광우병 시위 주동자로 후쿠시마 괴담의 허구를 설파해 온 그이지만, 여전히 자기 검열에 시달린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나쁘다, 검찰은 악이다처럼 무의식 중에 학습된 판타지를 깨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죠. 아직도 ‘전대협 진군가’를 들으면 울컥하니까요.” 

 

그는 지난 8월 15일 주대환, 함운경과 함께 ‘586 설거지론’을 주창하며 ‘민주화 운동 동지회’를 출범시켰다.

 


◇후쿠시마 괴담… 反윤석열 위한 미끼


-2008년 광우병 시위 때 사실 검증은 없었다고 폭로한 것이 후쿠시마 괴담의 확산을 막는 데 기여했다.

“후쿠시마 오염수는 캠프 데이비드 합의 등 한·미·일 군사 협력이 강화되는 가운데 민주당과 시민 단체가 이를 저지하기 위한 약한 고리로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많은 국민이 한·미·일 군사 협력 기조가 옳다고 판단하면서 선동에 휩쓸리지 않았다. 여기에 광우병 학습 효과로 국민이 민주당이 아닌 과학자들의 말을 신뢰한 결과다.”

-광우병 시위대의 관심은 오로지 이명박 퇴진이었다고 했다.

“후쿠시마도 마찬가지다. 오염 처리수의 과학적 진실 여부는 그들의 관심이 아니다. 오로지 윤석열을 반대하고 이재명의 사법 처리를 막는 게 목적이었다.”

-당시 광우병의 진실에 조금도 의구심을 갖지 않았나?

“여러 명의 전문가에게 광우병의 존재를 물어봤다. 아무도 관심이 없더라. 당연히 토론도 없었다. 술자리에서 방송사 PD와 교수가 통화하는 내용을 들었을 뿐이다. 소들이 픽픽 쓰러지는 영상을 보여주면 국민들이 충격을 받을 거라고. 광우병은 그저 미끼에 불과했다.”

-그때는 국민들이 왜 휩쓸렸을까?

“광우병을 아는 과학자가 별로 없었고, 안다고 해도 시민사회가 거세게 압박하니 발언하지 않았다. 후쿠시마 괴담은 원자력 싸움의 경험이 있는 과학자들이 적극 나서줘 막을 수 있었다.”

  


◇주사파 최대 프로젝트 ‘이승만 죽이기’


-FTA와 광우병 사태를 겪으며 운동권에 회의를 느꼈다고 했다.

FTA가 체결되면 미국 식민지로 전락하는 줄 알았다. 오로지 반미(反美)가 목적인 주사파는 상대가 미국이라서 투쟁한 것뿐이었다. 그즈음 삼성전자 영업이익이 일본 반도체 기업의 영업이익 전부를 합친 것보다 크다는 보고서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삼성은 매판자본이 아니었다.”

-21세기에 한국이 식민지라는 생각을 했다는 건가?

“의심하기 시작한 건 90년대 서태지와 룰라가 나왔을 때부터다(웃음). 그러나 인정하지 않았다. 식민지를 부정하는 순간 주사파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니까.”

-’진보의 재구성’이란 책이 그 무렵 나왔다.

“내가 20년 활동해 온 주사파가 틀렸다는 첫 선언이었다.

-주사파가 틀렸다는 걸 인정하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나?

“나를 비롯한 80년대 학생운동가들은 독립운동처럼 혁명을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제일 좋아하던 노래가 독립군가다. 조국이 ‘죽창가’ 운운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연설은 또 얼마나 장엄하고 비장한가. ‘영원한~’ ‘인간 해방’ ‘끝장내자’ 같은 감성적이고도 격렬한 단어들. 그땐 혁명 이외의 삶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주사파를 우습게 보는 건 기독교를 우습게 보는 것과 같다고도 했다.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 같은 사상이 아니라 종교에 가깝다. 책이 아니고 노래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키고 일체감을 조성한다. 지식인의 합리주의는 무력하다. 몇 글자 책으로 세상이 바뀔 거라고 보는 건 운동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다. 트럼프의 포퓰리즘이 얼마나 위력적인가. 주사파는 대중의 가슴을 자극하는 판타지를 심는다.”

-주사파는 ‘대한민국은 친일파가 세운 나라’라는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궤를 같이한다고 썼더라.

“한국 사회 모든 악의 근원은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않은 것이라는 게 ‘해전사’의 핵심이다. 이를 토대로 주사파는 80년대 중반 이승만을 깎아내리기 위한 대항마로 김구를 띄우기 시작했다.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는 거부감을 줄 수 있으니, 김구를 대안으로 등장시킨 것이다. 북한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김구의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단독정부는 안 된다’고 한 말을 이용했다. 주사파 역사상 가장 성공한 프로젝트였다.”

 


◇86세대의 신화 만들기


-’86세대의 민주주의’란 책에서 87년 6월 항쟁이 많은 부분 과장되었다고 했다.

“영화 ‘1987′은 학생운동을 신화로 만들기 위해 선악을 극단적으로 묘사한 대표적인 경우다. 당시 순수한 학생운동이란 없었다.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비롯해 인문대·사회대·자연대 학생회장이 다 주사파였다. 87년 배경의 드라마 ‘설강화’가 북에서 지령을 받는 대학생이란 설정으로 역사 왜곡 논란이 있었는데, 내가 웃었다. 당시 주사파 운동권은 ‘한민전’이라는 북한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시위의 방향을 정하고 조직했다.”

-6월 항쟁의 진짜 주역은 김영삼의 민추협이지 학생운동이 아니라고도 썼다.

“학생운동이 직선제와 호헌 철폐를 외친 건 87년 4월~6월 두 달 정도다. 그 전엔 줄곧 반미(反美)를 외쳤는데 이게 안 먹히자 구호를 바꾼 거다. 오히려 김영삼이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가 판세를 좌우했다. 6월 24일 김영삼이 전두환과 마지막 담판을 하면서 직선제가 아니면 끝까지 싸우겠다고 선언한 것이 6·29의 기폭제였다.”

-김영삼이 저평가됐다는 뜻인가.

“86세대가 스스로를 신화로 만들기 위해 김영삼을 희화화했다.”

-신영복도 터무니없이 우상화된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통혁당 사건의 주모자들은 60년대 초반 서울대 상대에 있었던 몽상가들이다. 그런데 80년대 주사파들이 마치 그가 운동의 적자인 것처럼 신화를 썼고, 대통령이 된 문재인이 신영복을 가장 존경한다고 말하면서 또 한번 판타지를 만든다. 그러나 신영복에겐 이렇다 할 사상이 없었다. 문익환, 백기완처럼 운동의 한복판에 있지도 않았다. 고상한 인문학적 글쓰기로 포장된 사람일 뿐이다.

-학생운동이 아니어도 민주화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도 했다.

“베이비붐 세대라는 인구 집단과 경제 성장이 맞물리면서 민주화로 갈 수밖에 없었던 사회구조가 작동했다는 뜻이다. 80년대 학생운동을 폄하하려는 게 아니다. 이를 부풀리고 정치적으로 이용한 세력이 역사를 퇴행시켰다.”

-문재인 정치 그룹이 가장 위험하다고 했더라.

“김대중, 노무현 정부엔 그래도 엘리트 집단이 포진해 있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80년대 몽상에 사로잡힌 운동권이 장악했다. 문 대통령의 ‘능라도 연설’을 들으며 깜짝 놀랐다. ‘민족 자주’ ‘남쪽 대통령’ 같은 80년대 운동권 용어들이 그대로 들어 있다. 세계는 AI 혁명으로 가는데 문 정권은 검찰 독재, 역사 청산으로 퇴행했다. ‘짱깨주의의 탄생’ 등 70~80년대 사고의 원형에 갇혀 있는 그가 추천하는 황당무계한 책들을 보라.”

 


-86세대는 시위만 했지 공부는 안 했다는 지적에 동감하나.

“나는 문재인에 이어 현재 이재명 주위에 있는 그룹이 한국 정치사상 지적 능력이 가장 떨어지는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김대중과 노무현의 이미지를 팔아먹으며, 과격한 발언들로 존재감을 과시할 뿐이다. 

 

민주당은 처럼회, 개딸들과 결별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

 


◇조국보다 위험한 사람들


-그런데 지지자들은 왜 여전히 많을까.

“정책 경쟁보다는 무의식의 싸움이라고 본다. 민주화 세대가 만들어낸 80년대 판타지가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

-윤석열 대통령도 86세대 아닌가?

“윤석열의 문화적 원형은 80년대 중반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있다. 대선 후보 시절 학생운동의 상징인 함운경을 찾아가지 않았나. 그러나 윤석열이 이념에 편향되지 않고 균형을 잡게 된 건 아버지 윤기중 교수의 영향이었다고 생각한다. 윤 대통령이 자유주의 시장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을 ‘인생의 책’으로 꼽는 이유다. 부모의 영향은 그래서 중요하다.”

-이북 출신으로 동대문에서 장사를 하신 부모님은 민경우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줬나?

“강한 생존력. 아들이 학생운동 하다 감옥에 가는 걸 걱정하면서도 쿨하게 받아들이셨다. 이북에선 흔히 보던 풍경이라(웃음).”

-서울대 의예과로 입학했다가 중퇴하고 국사학과로 다시 들어가 실망이 크셨겠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왜 의대를 그만둔 거냐’ 원망하시더라.”

-왜 국사학과였나.

“초등학교 때 라디오로 들은 월남 패망 뉴스, 선생님이 들려주던 4·19혁명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다. 의대가 싫었다기보다 역사, 철학 공부를 하고 싶었다.”

-운동권과 결별 후 수학 강사가 됐다.

“학창 시절 수학을 제일 잘했다. 국보법으로 감옥에 두 차례 구속돼 있을 때도 수학 문제를 풀었다(웃음). 교육 혁신 기업을 하고 싶었는데 사업 수완이 없어서 망했다. 공부 머리와 사업 머리는 전혀 다른 것 같다.”

-’민주화운동동지회’를 결성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초래한 반(反)대한민국적 역사 인식부터 설거지하자는 뜻에 공감하는 분들이 모였고, 500여 명이 동참했다. 내가 우파로 돌아선 건 조국보다도 조국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조국은 한 치의 잘못도 없고 검찰이 엮은 것이란 말에 충격을 받았다. 한명숙 정치자금 수수, 김경수 드루킹 사건도 반성하지 않더라. 그들은 더 이상 민주 세력이 아니었다.”

-조국은 ‘차라리 날 남산에 끌고 가 고문하라’고 했던데.

“내 가까운 친구는 거리 싸움을 나간 적도, 화염병을 던져본 적도 없는데 자기가 민주 투사였다는 망상에 빠져 그 시절을 묘사하며 분노한다. 86세대엔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 많다.”

 


☞ 민경우

1965년 서울 출생. 서울대 의예과를 다니다 중퇴, 국사학과에 재입학했다. 인문대 학생회장,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을 지내며 국보법 위반으로 두 차례 구속됐다. 한미 FTA 반대 운동본부 정책팀장으로 광우병 시위를 주도했다. ‘진보의 재구성’ ‘86세대 민주주의’ 등을 펴냈고, 현재는 수학 강사로 일하며 ‘미래대안행동’을 이끌고 있다.

“저는 영웅도 義人도 아녜요, 위급한 사람에게 손 뻗었을 뿐”

 


[박돈규 기자의 2사 만루]
오송 지하차도에서 3명 구한
화물차 운전기사 유병조씨

 


< 조선일보, 박돈규 주말뉴스부장,  2023.09.09.  >

 


영화 ‘트랜스포머’에 나올 법한 대형 트럭이 천천히 후진하며 공장을 빠져나왔다. 궁둥이에 ‘충북80아XXXX’ 번호판부터 보였다. 적재함은 덮개를 날개처럼 여닫을 수 있었다. 그 14t 화물차 운전석 문이 열리고 마침내 ‘오송 지하차도 의인(義人)’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달 30일 인천 북항 근처 화물차 전문 시공 업체에서 만난 유병조(44)씨는 수척해 보였다. 힘을 다 써버린 영웅처럼, 악수할 때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저 허약한 손으로, 저 깡마른 몸으로 유리창을 깨고 트럭 위로 올라가 3명의 목숨을 구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웃는 게 아니었다.

“그 사건을 겪고 나서 잠을 잘 못 자요. 수면제를 처방받았습니다. 침수된 14t 트럭은 폐차했어요. 한 달 보름 동안 일을 못 했고 식욕도 잃었습니다. 체중요? 6~7㎏ 빠져 54㎏이에요. 그래도 저는 괜찮습니다.”

유병조씨에게 이날은 특별했다. 현대차가 지급한 새 화물차의 특장(特裝)과 인테리어 등이 모두 끝나고 처음으로 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새 트럭은 430마력이었다. 부릉부릉–. 말 430마리가 일할 준비를 끝냈다는 우렁찬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유씨는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누구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제가 주목받아 부담스럽다”며 “이제 일터로 돌아가 평소처럼 묵묵히 물건을 실어 나를 것”이라고 했다.

유병조씨는 “그 상황에서 우선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트럭 창문을 깨고 지붕으로 피했고, 그다음부터 사람이 보이면 본능적으로 끌어올렸다”며 “누구라도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라고 했다.  

 


◇ 2023년 7월 15일 오송 지하차도


지난 7월 13~15일 충북 청주에 비가 500㎜ 넘게 쏟아졌다. 15일 오전 8시 30분쯤 오송읍 궁평2지하차도 근처에서 제방이 터졌고 미호강이 범람했다. 어마어마한 물이 2~3분 만에 지하차도로 들이닥쳤다. 약 10분 뒤 터널은 완전히 침수됐다.

-고통스럽겠지만 그날을 복기해주십시오.

“여느 때처럼 집에서 오전 7시에 나섰어요. 봉명동 공장에서 트럭을 점검하고 대기를 좀 하다 세종 물류창고로 출발했습니다. 세종에서 청주로 오는 형님이 ‘미호강이 범람할 것 같다. 50㎝밖에 안 남았다’고 전화로 알려줬어요. 8시 15~20분쯤일 거예요.”

-우회할 생각은 안 했습니까.

“5분 전에도 저희 화물차가 그 지하차도를 지나갔어요. 진입로를 차단하지 않았고 통제하는 사람도 없어 괜찮겠거니 했습니다. 저는 8시 30분쯤 들어갔어요.”

-그때 상황은 어땠나요.

“차들이 1차로에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3주 전 터널 안 화재로 2차로는 통제 중이었거든요. 고개를 빼고 앞을 보는데 출구 쪽에서 물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앞 승용차는 차를 돌려 역주행으로 나갔고 저는 트럭을 2차로로 빼 출발했습니다. 앞에 빨간 버스가 들어왔고요. 그때까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이 정도 물이야 충분히 밀고 나갈 수 있다고.”

-그런데요?

“짧은 시간에 수위가 높아졌어요. 바퀴가 절반 넘게 물에 잠기자 속도가 나질 않았습니다. 출구 가까이 갔을 때는 승용차들이 떠서 밀려오는 거예요. 버스도 저도 그걸 피해서 지그재그로 운전하기 시작했어요.”
 
-출구 쪽 오르막에서 버스가 멈췄지요.

“네. 시동이 꺼진 것 같아 밀어 올리려고 뒤에서 박았는데 꼼짝도 안 했습니다. 후진했다가 버스를 서너 번 추돌하는 과정에서 제 계기판에도 배터리 등의 이상 신호가 계속 떴어요. 뒤로 뺐다가 다시 가려고 했는데 그만 시동이 꺼졌습니다. 트럭도 멈춰버린 거예요. 버스 기사가 (승객들 대피하라고) 유리창을 깨는 게 보였어요.”

-두렵지 않았나요.

“트럭은 운전석이 높아 더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안으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앞에 있던 버스가 물에 뜨더니 제 트럭 뒤로 휩쓸려 들어가는 게 보였습니다. 그제야 ‘현타(현실 자각)’가 왔어요. 겁이 났습니다. 이대로 있다간 죽을 수도 있겠구나. 물을 피해 의자 위로 올라갔고 창문을 내리려고 했는데 움직이질 않았어요. 바닥에서 허겁지겁 공구를 찾아 조수석 유리창을 깨뜨렸습니다.”

-일단 지붕 위로 피신했군요.

“올라가 보니 20대 여성이 제 트럭 운전석 사이드 미러를 붙잡고 매달려 있었습니다. 버스에서 떠내려온 그분을 지붕 위로 끌어올렸습니다. 그때 트럭 뒤쪽이 물에 뜨면서 점점 벽 쪽으로, 난간 쪽으로 붙더라고요.”

-그건 하늘이 도왔네요.

“뒤로 가서 보니 사람들이 물 위에 뜬 채 ‘살려 달라’ 외치고 있었습니다. 남자 두 분을 구했어요. 우리는 트럭 지붕을 이용해 난간으로 건너갔습니다. 소방차와 경찰관이 도착했지만 물살이 너무 셌어요. 30분쯤 기다려 로프와 배를 통해 구조됐습니다.”

-유병조씨 미담을 전한 기사에 달린 댓글이 인상적이었어요. ‘세 명을 구한 게 아니라 세 가족을 살린 것이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일단 피하자는 생각으로 지붕에 올라갔다가 본능적으로 행동한 거예요. 사람이 보이면 아무 생각 없이 끌어올렸습니다. 누구라도 저처럼 했을 거예요.”

“침수 사고 사망자가 많은데 제가 부각되는 게 죄송하고 부담스러웠어요. 말주변도 없고요. 동료 기사들은 ‘살아 돌아와 고맙다’고 합니다. 저는 괜찮은데 우는 사람이 많았어요.” 

 


◇ 아무나 할 수 없는 일


그날 이 지하차도에 차량 17대가 고립됐다. 14명이 사망했고 16명은 구조되거나 자력으로 탈출했다. 유병조씨가 구출한 정영석(45)씨가 다시 ‘릴레이 구조’에 나섰다는 뉴스는 비극 속에 한 줄기 빛 같았다. LG복지재단은 얼굴도 모르는 이웃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몸을 던진 유씨에게 ‘LG의인상’을 수여했다.

-군 복무를 특전사나 해병대에서 했나요.

“병역특례를 받았습니다(웃음). 충북 제천에서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산업체에서 5년간 근무했어요. 평소에 근력 운동도 안 합니다.”

-화물차 일은 얼마나 했습니까.

“대형 면허를 따고 처음부터 14t 화물 트럭을 몰았어요. 20대 중반에 시작했는데 벌이가 시원찮았죠. 그만두고 4년 동안 시외버스도 하고 통근버스도 몰았지요. 그러다 10년 전쯤 좋은 자리가 생겨 14t 트럭으로 돌아왔습니다. 운송 위탁 계약을 맺고 청주~세종을 왕복하며 짐을 실어 나른 지 5년쯤 되고요.”

-보통 어떤 물건을 옮기나요.

“LG생활건강이 생산하는 세제·치약·샴푸 등을 운송합니다. 사고 당일에는 물건을 실으러 가는 길이라 적재함이 텅 비어 있었어요. 만약 꽉 차 있었다면 그 무게로 버스를 밀어 올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합니다.”

-릴레이 구조의 출발점이 된 ‘오송 지하차도 의인’으로 불리는데.

“어휴, 그런 호칭은 듣기 거북합니다. 서로 도와가면서 구조했어요. 저는 의인도 아니고 영웅도 아닙니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세상에 위험을 무릅쓰고 이타적인 행동을 했는데 왜 의인이 아닌가요?

“처음에는 저도 ‘사람을 구해야지’보다는 ‘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트럭 위로 피한 다음에는 사람이 보이니까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은 겁니다. 대단한 일을 해낸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도 ‘저 상황이 닥치면 나도 할 수 있을까’ 의심하곤 했어요. 겸손이 아니라, 막상 겪어 보니 하게 되더라고요.”


-가족도 놀랐을 것 같습니다.

“저는 미혼이에요. 결혼한 누나가 둘 있고 어머니가 계십니다. 사고 당일에는 아무 얘기도 안 했어요. 이틀 후 알게 된 어머니는 ‘그 사람이 너였니? 큰일 안 당해 다행이다’ 하셨습니다.”

-그 일을 경험하기 전에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냥 보통 사람이에요. 그날 거기 있던 사람들이 다 그렇지 않나요? 이 사건 전이나 후나 저는 똑같습니다.”

-인터뷰를 기피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동료 기사들은 뭐라고 하던가요.

“침수 사고 사망자가 많은데 제가 부각되는 게 죄송하고 부담스러웠어요. 말주변도 없고요. 동료 기사들은 ‘살아 돌아와 고맙다’고 합니다. 저는 괜찮은데 우는 사람이 많았어요.”

"트럭은 제 생계 수단이죠. 삶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2m 높이 운전석에서 본 세상


‘오송 지하차도 의인’은 침수된 트럭을 폐차해 일을 할 수 없었다. 그 소식이 알려지자 현대차가 신형 14t 엑시언트(1억8000만원 상당)를 지급했고 물류대행사 LX판토스, 전국화물자동차운송사업연합회 등 각계에서 후원의 손길이 이어졌다. 유씨는 성금 일부를 “수해 피해 복구에 써달라”며 기부했다.

-당신에게 트럭이란 무엇입니까.

생계 수단이죠. (좀 더 의미를 부여해달라고 하자) 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트럭이 삶이라고요?

“이게 있어야 일을 할 수 있고 밥도 먹을 수 있고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트럭이 없으면 저는 실업자나 마찬가지예요.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매일 살피고 때로는 고쳐 주면서 오래 지내다 보면 트럭과도 애착이 생겨요. 고마운 존재죠. 장거리 뛰는 분들은 이 안에서 잠도 자요. 100만㎞ 넘게 동행한 녀석을 떠나보내야 해 마음이 안 좋았어요.”

-이렇게 멋진 새 트럭이 생겼잖아요.

“오늘 처음 몰아봤는데 백미러 보는 것부터 낯설더라고요. 새 차 냄새는 반갑고요(웃음). 정을 붙이며 ‘애마(愛馬)’로 만들어야죠.”

-14t짜리 애마도 있군요. 화물차 기사를 천직으로 생각하나요.

“처음에는 운전이 좋았어요. 화물차는 버스나 택시와 달리 남 신경 안 쓰고 내 할 일만 잘하면 되잖아요. 종종 끼니도 거르고 이동해야 하는 게 단점이지만 정년도 없고 마음이 편해요. 그게 좋아서 하는 거죠.”

-도로에서 화물차는 덩치도 크고 밀어붙이는 것 같아 겁이 납니다.

저희는 승용차가 더 무서워요. 하하. 화물차는 정지 거리가 긴데 승용차가 끼어들어 갑자기 멈추면 당황할 수밖에 없어요. (승용차 운전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청하자) 화물차 앞에는 들어오지 마세요. 화물차와 나란히 주행하는 것도 피하세요. 사각지대가 있어 차로를 변경할 때 위험합니다.”

-오송 지하차도 의인도 운전대 잡으면 욕을 하나요.

“(겸연쩍게 웃으며) 하루에도 열두 번 욕이 나와요. 제가 담배를 석 달 끊었다가 다시 피웠어요. 운전하면서 담배까지 안 피우니 속이 터질 것 같더라고요.”

-본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기사들을 읽은 기분이라면.

“처음에는 신문도 인터넷도 안 봤어요. 방송에 나왔다고 하길래 봤지만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제가 일을 중단하고 집에 혼자 멍하니 있었잖아요. 그날 이렇게 했으면 어땠을까, 저렇게 했으면 어땠을까, 그런 상상을 자꾸 했어요.”

-반복해서 떠오르는 장면이 있나요.

“처음 2주 정도는 눈을 뜨든 감든 그 사고 현장이 보였어요. 붙잡혀 있기 싫어서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써도 빨간 버스가 자꾸 떠올라요. 죄책감까지는 아니고 후회가 밀려오는 겁니다.”

-무엇을 후회합니까.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제가 더 빨리 침착하게 행동했더라면 버스 승객들을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요. 트럭 앞유리나 버스 뒷유리나 같거든요. 제가 그것들을 다 깨고 승객들을 제 트럭 운전석 쪽으로 건너오게 한 뒤 지붕으로 피신시켰다면 어땠을까….”

 


◇  더 잘 살아야겠다


오송 지하차도 참사는 공무원들의 부주의가 겹쳐진 인재(人災)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홍수특보 등 경고가 있었고 주민이 ‘위험하다’고 신고까지 했는데 막지 못했다. 유씨는 “제방을 제대로 관리했다면, 교통을 제때 통제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고”라고 했다.

-이런 참사가 재발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관련자들에게 무겁게 책임을 물어야죠. 국가 재난 방지 시스템도 기본부터 바로 세워야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분들은 얼마나 애통하겠습니까. 그날 현장에 있던 사람으로서 저도 죄송할 따름입니다.

-20대 여성이 ‘이 손 놓으시라’ 했는데 끝까지 잡고 구출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축 늘어진 채로 포기하고 있더라고요. 이쪽이 끌어당기면 저쪽도 웬만하면 힘을 쓰기 마련인데, 물에 들어갔다가 간신히 매달려 있으니 정신도 없었고 기운도 없었겠지요. 팔을 잡고 당기다가 다시 허리춤을 잡고 있는 힘껏 끌어 올렸어요.”

-그분의 부모가 감사 인사를 하러 찾아왔다면서요?

“네. 아버님이랑 저랑 멀리서 얼굴을 보자마자 서로 눈물부터 나더라고요. 어떤 말도 필요 없었어요. 따님이 큰 충격을 받았을 텐데 잘 회복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번 일로 유병조씨 인생도 달라졌나요.

“어머니가 ‘너는 7월 15일에 다시 태어났다’고 하셨어요. 죽을 뻔한 아들이 살아 돌아온 날이라는 거예요. 해마다 그날이 오면 기분이 복잡할 것 같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저를 그냥 똑같이 봐주시면 좋겠어요. 기대가 높아져 실망시킬까 봐 걱정이에요.”

-궁평2지하차도는 평소에 자주 지나던 곳이죠?

“지난 5년간 하루에도 서너 번까지 다니던 길이라 눈 감고도 훤해요. 내부 수리 등의 이유로 연말까지는 통제한다고 들었어요.”

-저 트럭을 몰고 그 지하차도를 통과해야 하는 날도 올 텐데.

“사고를 겪고 나서 비가 온 어느 날 승용차를 몰고 나온 적이 있어요. 작은 물웅덩이를 지나다 물이 좀 튀었을 뿐인데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다시 그 지하차도를 지날 땐 심호흡부터 크게 한 번 하고 들어갈 것 같아요. 계속 피하고만 살 수는 없잖아요. 정면 돌파하고 트라우마를 떨쳐내야죠.”

-소망이 있다면.

생존자 모임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죽다 살아난 목숨이니 값있게 살자’는 말을 많이 해요. 하나 더 보태자면 이 일을 겪기 전 ‘작년의 유병조’처럼 묵묵히 짐을 실어 나르며 조용히 살아가고 싶습니다.”

주목받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유병조씨는 지난 7~8월을 빨리 잊고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가 새 화물차 운전석에 앉았다. 부릉부릉–. 삶이 내는 엔진 소리처럼 들렸다. 유씨는 “부드럽고 힘이 좋다. 진짜 신세계다, 신세계”라며 웃었다. 한국 사회에 신세계(新世界)를 보여준 사람은 자신이라는 사실을 이 남자만 모른다.

악수를 거절하는 용기

 

 

< 중앙일보, 권석천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2023.09.08  >

 

 



오늘은 영화 ‘오펜하이머’의 한 장면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원자폭탄의 아버지’ J 로버트 오펜하이머에게 부인 키티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녀는 최고의 순간부터 최악의 순간까지 오펜하이머의 곁을 흔들림 없이 지킨다. 그에게 원폭 프로젝트의 리더가 되라고 한 것도, 그가 사랑하던 연인의 죽음에 괴로워하자 “정신 차리고 당신 자리로 돌아가라”고 일갈한 것도 그녀다.

그녀는 오펜하이머가 매카시즘의 타깃이 된 후 모호한 태도를 취하자 “분연히 맞서 싸우라”고 독려한다. 둘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 것도 그즈음이다. 동료였던 에드워드 텔러가 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뒤 악수를 청한다. 오펜하이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내민다. 이 얘기를 전해 들은 키티는 넌더리를 낸다. “순교자인 척하지 말라고!” 세월이 흐른 뒤 오펜하이머가 공로 메달을 받는 행사장에서 그녀는 텔러가 내민 손을 무시한다.

오펜하이머는 왜 악수에 응한 것일까. 조건반사로 나온 행동이라고? 예의는 지켜야 하는 거 아니냐고? 좋은 사람, 성숙한 사람이란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청문회 관계자들의 눈을 의식한 거라고? 어떤 이유에서든 악수는 정답이 될 수 없다.

악수는 상대를 선의로 대하겠다는 신호다. 이미 상대가 적의의 이빨을 드러낸 상황에서 악수는 그 상황을 인정한다는 의미밖에 안 된다. 믿음을 저버린 자에게 손을 내밂으로써 그의 배신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키티는 말한다. “사람들이 부당하게 취급하도록 놔둔다고 해서 당신이 용서받을 거 같아? 아니. 그렇지 않아.”

어색한 미소로 모든 일이 끝나지 않는다. 

 

감정도, 상황도 철저한 정산 과정을 거쳐야 한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대한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악수를 거절할 용기가 없는 자의 인격은 그 누구도 존중해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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