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지·노트에 습작하다 고3 때 낸 첫 시집… 미당이 제목·서문 써줬다
[나의 현대사 보물] [22] 시인 문정희


문정희 시인은 자신의 보물로 60년 넘게 간직해온 '습작노트'를 꼽았다. 문 시인은 손에서 바스라지는 60년전 소녀 시절 원고를 보면 '애벌레가 나비가 된 것' 같은 기분이라고 했다. 

 

 

< 조선일보, 이영관 기자,  2023.09.12. >

 


낡고 빛바랜 종이 뭉치 속엔 당돌했던 한 소녀가 있었다. 지난 7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자택 인근에서 만난 문정희(76) 시인은 비닐장갑을 낀 채로, 포장지에서 학창 시절 습작 노트를 꺼내 보였다. 장롱 속에 60년 넘게 보관했다는 뭉치에는 소설과 희곡 원고지 2000여 장, 단상을 적은 대학 노트 5권 등이 섞여 있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연에게서 삶의 이치를 배운다” 같은 세계와 생명에 대한 소녀의 고민으로 가득한 글들. 그는 “어려서 인생을 몰랐을 때인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렇게 많았었는가 싶다. 너무 아는 체하기도 했다”며 웃었다.

 


산업화 시기 여성 목소리 詩에 써내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종이 더미에서 오직 한 장 남은 공책 표지가 눈길을 끌었다. 표지 모서리가 꼬깃꼬깃하게 접힌 채, 내용물은 사라진 공책. 하단에는 ‘광주 서석 국민학교/ 제육학년 십일반/ 문정희’, 그 위엔 빨갛고 큰 글씨로 ‘잘되면 출판키로 함-오빠-/ 문집/ 꿈을 찾아서’라고 적혀 있었다. 위의 글씨는 꿈을 지지해 준 친오빠가 적어준 것이다.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전교생 20여 명 규모 국민학교에 다니던 그는 5학년 때 홀로 유학을 시작했다. 국민학교 때 광주광역시로, 중학교 때 서울로 간 그는 홀로서기의 두려움을 ‘시’로 극복했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로 집안에선 그가 학교 선생이 되기를 바랐다. “처음에 시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 어른들은 매우 걱정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조선 시대까지 여성 시인은 주로 기생이었고, 개화 직후 문학을 한 여성들의 인생이 불행하고 당돌했기 때문이죠. 부모님은 여성으로서 편한 삶을 살았으면 했지만, 저는 매일 써야만 행복했습니다. 내면에서 어떤 폭발물이 끓어 나왔어요.”

문정희가 시인이자 여성으로서 살아온 삶은, 해방 이후 한국 여성들이 제 목소리를 찾는 과정과 같았다. 1

 

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한 그는 생명의 신성함을 예찬하고,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작품을 주로 발표해 왔다. 현역 시인인 그는 2010년 스웨덴이 동아시아 시인에게 수여하는 시카다상을 받고, 지금까지 시집 14권이 11개 언어로 번역 출간됐다. 작년 10월부터는 국립한국문학관장으로서 한국 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맡고 있다. “제 시 쓰기의 토양은 전통적 가부장 사회였어요. 일생 동안 부엌과 안방을 오가며 남성의 보조자로서 살아야 했던 가부장 사회에서 태어났지만, 산업 사회로 전환하는 시기에 성장했죠. 달라진 시대에 교육을 받은 덕분에, 가부장적 언어로 시를 쓰지 않은 첫 여성 시인이 됐습니다.”

그가 환멸을 느낀 여성의 삶은 특별한, 소수의 경험이 아니었다. 농경 사회에서 집안일을 맡던 여성들이 산업화 물결에서 사회로 나섰으나, 집안에서의 삶은 달라지지 않아 겪어야 했던 이야기. 시인은 “취업과 결혼을 하며 ‘천년의 얼음덩이’와 마주한 듯한 기분이었다. 잡지사에 취직할 때는 결혼하면 관둬야 한다는 약속도 했었다”며 “출산 같은 가부장적 차별이 자유롭고 싶었던 제 날개를 꺾어뜨리며, 좌절을 겪었다”고 했다.



서정주와 인연, 최초 여고생 시집으로

시집 ‘꽃숨’(1965)은 절판돼 만나보기 어려운 희귀본이다. 문 시인이 진명여고 3학년 때 한국 여고생으론 처음 낸 시집으로, 고(故) 미당 서정주(1915~2000) 시인의 서문을 실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65년 동국대에서 미당이 심사를 본 백일장에서 여고생 문정희가 장원에 입상하며 시작됐다. 미당은 ‘우리말로 가장 예쁜 첫 숨결’이라는 뜻에서 문정희의 첫 시집 ‘꽃숨’ 제목을 짓고, “여기 이 시집의 주인 문정희양은 금년에 진명여고 3학년에 재학 중인 17세의 소녀로서”로 시작되는 서문을 썼다. 미당은 문 시인이 등단 이후 첫 시집 ‘문정희 시집’(1973)을 낼 때도 서문을 써서 그를 격려했다.


문 시인은 “미당 선생은 일찍 핀 꽃이 일찍 시들듯, 어린 나이에 재능을 보이는 걸 환영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제가 지금까지 시인으로서 살아남았다는 게 새삼 놀랍다”며 과거를 회상했다. 시인은 최근 계간지 ‘문학나무’ 가을 호에 발표한 시 ‘이름’을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인간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에 ‘이름 남겨서 뭐 하게’라고 답한 작가의 이야기다. “시인으로 살아온 지난 시간이 이름으로 남아서 뭐 하겠습니까. 사는 동안 있는 힘을 다해서 파닥거렸다는 것의 증거로 작품이 몇 개 남았다는 정도이죠. 한국 여성으로서 60년 가까이 오직 썼고, 생명의 당당함에 대해 늘 노래할 수 있던 삶이 참 괜찮았습니다.”

 


“반골 기질이 창작의 혼”

미당에게 선물받은 ‘백자 향로’는 입구 한쪽이 찌그러져 있다. 소장품으로서 가치는 없지만, 문 시인이 각별히 아끼는 물건. “미당 선생이 수집하던 향로가 많았는데, 이 향로가 마음에 들었어요. 선생이 왜 좋냐고 물어봐 ‘찌그러져서 멋있다’고 답했죠.” 미당은 향로를 주며 ‘비뚤어진 것이 온전하다’는 뜻으로 ‘곡즉전(曲則全)’이라 말했다고 한다. 최근 시인이 계간지 ‘문학나무’ 가을 호에 발표한 시 ‘눈물은 어디에다 두나’에도 이런 시인의 삶이 드러났다. 새에덴교회 소강석(61) 목사가 정율성 기념 공원 추진과 관련, 이 시를 인용하며 최근 다시 화제가 됐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내 얼굴에 눈이 한 개다/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캄캄한 절벽이다/ 어디로 갔을까/ 내 한쪽 눈/ (중략) / 부패한 수족관 같은 tv뉴스 화면에서/ 한 눈 가진 사람과 두 눈 가진 사람이/ 서로를 병신이라 우기고 있다/ 나는 울었다/ 그런데 내 눈물은 어디에다 두나/ 좌파도 우파도 아닌 내 한쪽 눈/ 어디로 갔을까/ 내 눈물은 어디에다 두나’(시 ‘눈물은 어디에다 두나’ 중에서)

문정희는 호남 출신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대책이 안 서는 반골 기질”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열한 살에 홀로 고향을 떠나 평생을 떠돌았지만, 어린 날 겪은 가족의 언어에는 기존 것들에 대한 부정과 저항이 있었다. 그 부정 의식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데 바탕이 됐다”고 했다. 

 

또 그는 “1980년대 초반 군부 정권에 의해 광주에서 벌어진 민중 학살은 시를 쓰는 손이 부끄러울 만큼 시인으로서 정체성 자체를 의아하게 했다”며 “한국의 여러 변혁을 경험하며, 겁쟁이 시인으로 살았지만 진실이 은폐되고 거짓에 대한 저항을 몸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괴로워했다”고 했다. 그 괴로움이 남편을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라고 명명한 시 ‘남편’, 역사 속 유관순 열사를 한 명의 여성으로 되살려낸 장시집 ‘아우내의 새’를 비롯해 여성의 언어를 살리는 작품으로 승화됐다.

 

 “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매혹적인 힘으로 나를 혁명하고 세계를 혁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직하고 바보 같았던 대한민국 자영업자의 죽음

[기억합니다] ‘심야의 숲’ 대표 서정일을 기리며

 

< 한겨레, 김기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  2023-08-21  >




2015년 성수동에 수제맥줏집 열고
지역이 ‘핫플’로 뜨는데 일조했지만
두배로 뛴 임대료에 결국 문 닫아
“노포 되는 길은 건물주밖에 없나”

물새는 지하창고에 라이브바 개업
강남서 배달전문 업장도 함께 운영
수수료·재료비 인상 “어찌해야 하나”
6년간 하루도 못쉬더니 결국 과로사

 

 

서정일.
내 친구. 대한민국의 자영업자. 서울 성수동 라이브 재즈 바 ‘심야의 숲’ 대표.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외국계 무역상사에서 일했다. 그는 2015년 성수동에 수제맥줏집 ‘탭하우스 숲’을 열었다. 외국 손님에게 추천할 만한 수제맥줏집이 하나쯤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직장을 떠나 자영업의 정글로 뛰어드는 그를 주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맥줏집의 위치도 조용한 주택가였다. 장사를 오래 할 수 있을지 그도 확신하지 못했다.


다행이었다. 사람들이 모였다. 우연은 아니었다. 그가 엄선한 맥주는 맛있었고, 소스까지 직접 만든 안주도 사람들을 끌었다. 골목길도 사람들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성수동이 지금의 ‘핫 플레이스’가 되는 데 본인도 일조했다고, 서정일은 어느 날 친구들에게 흐뭇하게 얘기했다.


긍정적이며 양심적이고 성실했던 대한민국의 자영업자 서정일. 6년 동안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했다지만 그의 삶은 빠듯하기만 했다.

그가 올린 지역 시세에 그가 떠밀렸다. 건물주는 2021년 임대료를 두배 올리겠다고 알렸다. 서정일은 21년 5월4일 소셜미디어(SNS)에 “갑자기 머릿속이 하이얀 눈밭을 걷는 듯” 하다고 썼다. 코로나19 바람 속에서도 버티던 맥줏집은 그해 8월 문을 닫았다. 같은 달 그가 올린 글이다. “탭하우스 숲을 정리하면서 노포가 되는 길은 건물주가 되는 길밖에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성동구에서 젠트리피케이션 없는 상권을 조성하겠다고 천명했던 곳은 오래된 상점들이 거의 남지 않은 곳이 돼버렸다.”


서정일은 이참에 오랜 꿈 하나를 실현했다. 라이브 바를 열 작정이었다. 성수동의 드높은 시세는 그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 오랜 발품 끝에 성수동 한 모퉁이의 물 새는 지하 창고에 자리를 잡았다. 새로운 가게 ‘심야의 숲’을 그는 정성스럽게 가꿨다. 최고의 뮤지션을 초대했다. 섭외만 담당하는 직원도 뒀다. 자동차 정비소 건너편 지하 창고에는 밤마다 선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서 사장은 공연 때마다 마이크를 잡고 연주자를 소개했다. “공연을 하는 재즈클럽으로 본격 출발한 지 두 달 반이 되었다. 퓨전 재즈부터 아방가르드까지 폭넓게 프로그램을 소화해 보겠다고 작정했는데…, 음악 전문가가 아니다 보니 늘 아쉽다.” 2022년 7월4일 그는 이렇게 썼다.


배달 전문 바비큐 업장도 따로 운영했다. 나쁘지 않았다. 2021년 12월10일 올린 글이다. “정신없이 보내다 보니 강남 지역에서도 바비큐 업장으로 배달 1등이 되었네요. 진심으로. 마케팅 차원에서 다소 저렴하게 가격을 책정했었습니다. 직원들에게 더 돌아가게 다소나마 가격을 조정해야 할 텐데 고민이네요.” 이곳의 바비큐 음식을 라이브 바의 안주로 제공했다. 그의 말대로 “일을 하다 보니 당연히 맥주는 맛있고 음식은 최고 수준이면서 엄청난 수준의 연주를 보여줘야 하는 가게를 하게 됐다”.


자영업의 정글 속에서 심야의 숲은 아슬아슬하게 생존했다. 불리한 입지 때문에 매상은 불안정했다. 배달 어플리케이션(앱) 수수료도 걱정이었다. 2021년 12월30일 서정일은 한 배달 앱의 수수료 11.0~19.8 % 인상 결정 소식을 전했다. “양을 줄이든가, 재료를 싼 걸 쓰든가. 이건 차마 못 하겠습니다. 접고 말지. 이래저래 힘들군요.” 인건비 부담도 컸다. 직원들을 가능한 정규직으로 고용했다. 에너지와 재료 가격도 무서웠다. 2022년 7월15일 그가 썼다. “우리 바비큐 중에 가장 인기 있는 부위가 돼지고기 스페어 립. 최근 두 달 동안 슬금슬금 가격이 오르더니 50% 인상까지 찍었음. 어이쿠, 이걸 뭘 어찌해야 하나?”


수지타산은 그의 몸뚱이를 허물며 맞췄다. 그는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2015년 가게를 연 이후 6년 동안 하루도 쉬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를 버티게 한 힘은 좋은 음식과 음악을 나눈다는 자부심이었다. 2021년 4월17일 배달 음식을 포장할 때 일일이 넣었던 손글씨다. “매년 오늘은 세월호를 생각합니다. 제가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그저 정직하게 요리하고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자부심도 몸과 함께 가라앉았다. 2021년 7월4일에 그가 쓴 글이다. “그동안 10톤 이상의 고기를 손질하고 구웠다. 아직도 나는 매일 조마조마하고 고기 굽는 동안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얼마나 더 지나야 편안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불안의 터널은 2년 더 이어졌다. 손글씨로 공연 소식을 알렸던 소셜미디어의 새 글은 2023년 8월6일에 멈췄다. 그의 식은 몸은 8월8일 오후 4시께 매장에서 발견됐다. 과로사였다. 향년 50. 아내와 세 딸이 남았다. 가장 우직하고 바보 같았던 자영업자, 서정일의 죽음을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1. 김지하·이문열, 이번엔 김훈

 


< 조선일보, 원선우 기자,  2023.08.17. >

 


“저 새는 해로운 새다.” 소설가 김훈(75)씨를 향해 인신공격을 쏟아내는 야권 지지층을 바라보자니 중국 마오쩌둥의 참새 박멸 지시가 떠올랐다. 좌표가 한 번 찍히는 순간, 민주당 대통령 세 명이 극찬한 노(老)작가조차 양념 폭탄을 피할 수 없다. “노망이 들었다” “절필하라” “책을 다 갖다 버리겠다” 따위는 익명 악플 수준. 소위 ‘진보 지식인’들의 실명 비판은 차라리 저주였다. “측은지심이 없다니 사람이 아니야” “조국 가족에 대한 난데없는 칼부림” “야비하고 비열한 살쾡이”. 북한 통일전선부에서 집단 제작한다는 ‘삶은 소대가리’ ‘특등 머저리’ 같은 표현과 비슷하다.

김씨는 2015년 1월 1일 세월호 참사 추모 글을 한 일간지(중앙일보)에 기고했다. 김씨는 유족의 슬픔과 분노를 ‘특별히 재수 없어서 재난을 당한 소수자의 것, 우는 자들만의 것, 루저들만의 것’으로 밀어내는 ‘돈 많고 권세 많은 자’들을 지목했다. 2019년 5월 다른 일간지 칼럼에선 공사 현장에서 추락사하는 노동자가 일년에 270~300명이라는 통계를 언급했다. 그는 “돈 많고 권세 높은 집 도련님들이 그 고공에서 일을 하다가 지속적으로 떨어져 죽었다면, 한국 사회는 이 사태를 진작에 해결할 수 있었다”고 했다. 조국 일가의 입시 비리를 거론한 이번 기고문에서 김씨는 “‘내 새끼 지상주의’는 이 나라 수많은 권귀(權貴)들에 의해 완성됐다”고 썼다.

세월호 참사와 김용균의 죽음을 초래한 권력층의 탐욕을 김씨가 지적할 때 좌파들은 갈채를 보냈다. 당시 김씨의 펜이 대통령과 재벌을 겨눴으므로 김씨는 ‘우리 편’이었다. “김훈이 진보로 개종(改宗)했다”는 말도 나왔다. 김씨가 이 사회 기득권 목록에 강남의 50억원대 자산가이자 전직 법무부 장관, 청와대 민정수석, 서울대 교수인 조국을 추가한 것은 논리적 귀결에 불과한데도 그는 ‘해로운 작가’로 낙인찍혔다. 우리 편 아니면 적(敵). 이 이분법으로 1991년 시인 김지하씨에게 변절자라고 손가락질하고, 2001년 소설가 이문열씨에게 곡학아세한다며 책을 불태웠다.

874명. 고용노동부가 밝힌 지난해 산업재해 사고 사망자 숫자다.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한 문재인 정부 5년이 지나고도 하루에 2~3명 노동자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김씨는 지난 정부 내내 생명안전시민넷 공동대표 자격으로 청와대와 국회를 오갔다. “참사가 왜 벌어지는지 모두가 다 안다. 갈 길이 뻔하지만 그 길로 가지 않는다”고 했다.

김씨에게 손가락질하는 ‘진보 지식인’들에게 묻고 싶다. 지금도 사람들이 현장에서 끼이고 깔리고 떨어지는데, 문서 위조 잡범 한 명 수호한답시고 온 나라를 내 편 네 편으로 갈라 동강 낸 것 말고 뭘 했느냐고. 김씨는 ‘남한산성’(2007)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받는 자들의 편이다.”

 

 

 

 

 

2.

'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공교육과 그가 죽었다

 

< 중앙일보, 김훈,  2023.08.04 >

 

[특별기고] 소설가 김훈, 교사 집회현장을 가다
 

지난달 29일 오후 2시에 전국 교사 3만여 명이 서울 광화문 앞 거리에 모여서 ‘교육권 보장’을 외쳤고, ‘악성 민원’에 시달리고 짓밟히는 교육자의 고통을 호소했다.

교사들은 교육자의 ‘교권’뿐 아니라 ‘인권’과 ‘생존권’까지도 절규했다. 서울교육대학교 교수 10여 명이 이날 집회에 참가했고, 교수 102명의 이름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교사들은 교원단체나 노동조합이나 소속 학교의 깃발을 내세우지 않고 다만 ‘전국교사일동’의 이름으로 집회를 열었다. 행사를 진행하는 중견 교사는 참가자들에게 “배포된 피켓 이외의 구호를 외치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다. 이날 집회가 정치적 당파성에 오염되는 사태를 교사들 스스로가 경계하고 있음을 현장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이날 집회에서 검은 상복을 입은 3만여 명의 교사는 선생 노릇 하기의 어려움을 일기에 써놓고 자결한 젊은 여교사의 죽음을 애도했고, 고인이 아이들과 함께 이루고자 했던 뜻을 추모했다. 이날 낮기온은 34도였고, 아스팔트 위의 온도는 50도가 넘었다. 길바닥의 주저앉은 검은 상복의 대열은 길어서 끝이 아물거렸고, 아스팔트가 뿜어내는 열기 속에서 흔들렸다. 그 고통스러운 대열이 외쳤다.

 


“공교육은 죽었다” 그 배후는 학부모라는 익명 집단



이날 교사들이 절규하는 고통은 실체가 분명했다. 요약하자면, 교육을 망치는 가장 큰 해악은 ‘악성 민원’이고 교육청, 교장, 교감 등 교육의 관리자들은 이 사태의 뒷전으로 물러서 있다는 말이다. 이날 집회에서 교사들은 ‘학부모’라는 익명의 거대 집단을 직접 겨냥해서 발언하지 않았고, 다만 ‘악성 민원’이라고, 에둘러 가는 언어를 사용했다. 교사들의 조심스러운 태도에는 어쨌거나 학부모들이 교육의 과정을 함께 수행해 나가야 할 파트너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교사들이 자신들의 집회에서 정치적 당파성을 배제하고, ‘학부모’에 대해 거친 언사를 쓰지 않는 조심스러움에서 나는 교사들의 집단지성을 느낄 수 있었지만 ‘악성 민원’은 학생들이 아니라 학부모들이 제기해 온 것이므로, 무대 조명 안으로 소환되지 않은 ‘학부모’라는 익명 집단은 이 사태의 핵심이며 배후였다. 전국 교사 3만여 명이 도심의 거리에 모여서 교육에 가해지는 학부모 집단의 행태에 절규하고 저항하는 사태는, 아마도 세계 공교육의 역사상 초유의 일일 것이다. 이날, 검은 상복의 대열은 폭염 속에서 거듭 외쳤다.

젊은 여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버린 서울 서이초등학교 주변 일대는 전국의 교사와 시민들이 보내온 조화로 도시의 한 블록이 뒤덮였다. 한 새내기 여교사의 죽음에 모이는 이 거대한 조문의 대열은 공교육이 이 사회의 저변에서 일상적으로 그리고 전면적으로 붕괴되어갔던 사태를 증언하고 있다. 사람이 모이고 말이 들끓는 자리에 얼굴을 들이밀고 마이크 잡기를 좋아하는 정치세력들은 이 조문의 대열에 조화를 보내오지 않았다. 판세에 민감한 그들은 학부모 집단과 교사 집단의 갈등이라는 이 사태의 심층구조가 얼마나 두렵고 또 난감한 것인지를 알고 있고, 진영의 입장으로 여기에 섣불리 개입했다가는 득 될 것이 없다고 정세판단을 내렸을 수도 있겠지만, 인산인해를 이룬 이 고통스러운 조문 행렬이 보여주는 탈정치, 무정치의 풍경은 정치의 부재, 정치의 실종을 느끼게 했다. 그토록 끓어 넘치는 정치는 다 어디로 갔는가. 서이초등학교의 건물과 담장에는 여러 지방에서 온 교사들이 고인이 된 여교사에게 보내는 편지가 포스트잇으로 붙어 있다.

- 너도나도 당하면서 이게 우리 직업이려니 하면서 참고 살았습니다.

- 다들 당하는 걸 보면서 ‘난 운이 좋아서 안 당하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 부당함에 맞서는 사람이 되라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 선생님과 똑같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제가 먼저 소리 내지 못했습니다.

 
이 슬픈 편지들의 전언은 힘없는 자들의 힘이 무수한 파편으로 흩어져서 각자의 울음을 따로 우는 소리로 들렸다. 교사들은 이 편지에서도 ‘학부모’라는 익명 집단을 직접 호출하지 않고 있다. 나는 교사가 아니므로, 이 ‘악성 민원’의 실체를 교사들보다 덜 점잖은 언어로 말하려 한다. ‘악성 민원’의 본질은 한마디로 한국인들의 DNA 속에 유전되고 있는 ‘내 새끼 지상주의’다. ‘내 새끼 지상주의’는 ‘내 새끼’를 철통 보호하고 결사옹위해서 남의 자식을 제치고 내 자식을 이 세상의 안락한 자리, 유익한 자리, 끗발 높은 자리로 밀어 올리려는 육아의 원리이며 철학이다. ‘내 새끼 지상주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나의 자식이 겪게 되는 작은 불이익이나 훼손을 견디지 못하고 사회관계망 전체를 뒤흔들어 버린다. 교실에서 벌어지는 아이들 사이의 사소한 다툼이 ‘내 자식’을 편드는 부모의 싸움으로 확전돼 교사를 괴롭히는 사례는 흔하고, ‘내 자식’을 편들며 달려드는 학부모의 태도는 울면서 떼를 쓰는 아이와 같다고 경험 많은 교사는 말했다. 이렇게 해서 ‘내 새끼 지상주의’는 자식을 명품 시계나 고가 핸드백처럼 물신화한다. 이것은 이제 이 난세의 생존술이고 이데올로기다. ‘내 새끼 지상주의’는 계층의 차이가 없이 고루 퍼져 있지만, 부유층 밀집지역의 ‘악성 민원’이 더욱 잦고 사납고, 위압적이라는 일선 교사들의 고백은 이들을 행세하게 하는 부(富)의 천민성을 증언하고 있다. 사실, 이 ‘내 새끼 지상주의’는 이 나라 수많은 권귀(權貴)들에 의해 완성됐다. 국회 인사청문회에 나온 고위 공직자 후보들은 너도나도 그 자식을 일류대학에 보내기 위해 실정법을 위반해 가며 학원 좋고 학군 좋은 동네로 거듭 위장 전입을 해왔는데, 이 정도 범죄는 매우 경미한 사안이다. 위장 전입이 문제돼 공직 임명에서 탈락한 사람은 없다. 이런 위법행위들은 애끓는 모성애, 부성애, 또는 맹모삼천(孟母三遷)의 미담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공동체의 가치는 파괴됐고, 공적 제도와 질서는 빈껍데기가 되었다. 

 

아마도 ‘내 새끼 지상주의’를 가장 권력적으로 완성해서 영세불망(永世不忘)의 지위에 오른 인물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그의 부인일 터인데, 그는 아직도 자신의 소행이 사람들에게 안겨준 절망과 슬픔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일가가 관련된 재판의 과정을 보면서 나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인연인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미망(迷妄)일 수가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나 자신의 무명(無明)과 마주 대하고 있었다.

새내기 여교사의 죽음과 전국 교사들의 대규모 조문 사태는 한 시대의, 전체의 통렬한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 ‘내 새끼 지상주의’로 몰락해 가는 현실을 향해 ‘반성’을 말하는 것은 무력한 관념의 신음처럼 들리지만 뉘우침의 진정성이 없다면 문제를 헤쳐 나갈 추동력은 발생하지 않는다.

정부가 내놓은 ‘해법’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아동학대 처벌법을 고쳐서 ‘정당한 지도 행위는 신고하거나 처벌하지 않는다’라는 취지의 조항을 신설하자는 것이다. 여야는 이 법안에 대해 의견이 접근해 가고 있다고 여러 매체가 보도했다. 이 법안이 ‘해결책’으로 내세우는 ‘정당한’이라는 한마디의 형용사는 며칠 전 야당이 방탄 국회라는 비난을 벗어나기 위한 개혁안을 발표하면서 ‘정당한 영장청구에는 면책특권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정한 것과 똑같다. 이것은 언어의 농간(弄奸)이다. ‘정당한’이란 한마디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이 형용사는 매끄러워서 붙잡을 수 없고 아리송해서 기댈 수 없다. 이 몽롱한 형용사 한 개로 괴물을 막으려 한다면 더 큰 괴물이 달려든다. 두 번째 괴물은 더 많은 언어와 세련된 논리를 동반하고 달려들게 되는데 이 세련된 논리는 사태를 정돈하지 않고 더욱 헝클어 버려서 수렁으로 빠뜨린다.

상처받은 교사들에게 직무 연수교육을 강화하고 심리상담과 치료를 해주겠다는 ‘대책’은 고마운 것이기는 하지만 이 사태의 본질과 관련이 없는 것이라고 교사들은 말했다. 교사들의 경험 부족, 자질 부족, 열정의 부족으로 이 같은 사태가 벌어진 것이 아니며, 민원을 퇴치하는 개인기를 길러주고 상처를 힐링해 주겠다는 것은 개선책이 아니라고 현장에서 만난 교사들은 말했다. 교사들은 개별적 교사 한 명씩을 이 무겁고 또 무서운 사태 앞으로 내세우지 말고, 교육청, 교장, 교감이 교사들과 함께 사태의 전면에 나서 주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지위 높은 선생님들은 사태를 빙 돌아서 형용사 ‘정당한’ 뒤로 숨어들고 있다.

29일의 광화문 집회에 참석했던 교직 2년 차의 젊은 교사는 이날 집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이초등학교 분향소에 들러 숨진 동료 여교사에게 바치는 편지를 써서 붙였다.

- 오늘 4만 명이 거리에 모여서 외쳤습니다. 교육대학교 교수님들도 함께 외쳤습니다. 다들 함께 외쳤습니다. 다들 함께 외쳤으니까 이제 무언가 달라지겠지요. 선생님.

편지는 ‘함께 외쳤다’는 사실을 희망으로 설정하고 있었다. 이날 현장에서 이 젊은 교사의 ‘희망’은 아직은 울음으로 보였다. 광화문 앞거리의 거대한 울음은 이 시대의 지층 맨 밑바닥까지 울려야 하는 울음이다. 숨진 여교사는 지금 이름도 없고 사진도 없다. 숨진 여교사가 이름 석 자와, 웃는 표정의 사진으로 돌아오기를 교사들은 바라고 있었다.

‘전국교사일동’은 8월 5일 토요일 광화문 앞거리에서 다시 모인다.

 

 

 

 

 

3.

아, 목숨이 낙엽처럼  

 

 

< 한겨레, 김훈,  2019-05-14  >

 

 


고층건물 신축공사장에서 추락사하는 노동자가 일년에 270~300명에 달한다는 정부 통계가 티브이 뉴스에 나왔다. 금년 1월부터 4월까지는 100여 명이 떨어져서 죽었다고 한다. 부상당해서 불구가 된 사람은 더 많을 터이다.


뉴스를 보다가 나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놀랐다. 사람의 목숨을 숫자로 계산해서, 죽은 사람의 숫자가 많으면 대형참사이고, 숫자가 적으면 소형참사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꺼번에 수백 명이 떼죽음을 당하면 대형참사이고, 동일한 유형의 사고로 날마다 한두 명씩 죽으면 대수롭지 않은 사고인가.


고공에서 일하는 건설노동자들이 낙엽처럼 떨어지고 있다. 떨어져서 부서지고 으깨진다. 장례식장에서 가족들은 땅을 치며 울부짖고 노동을 관리하는 정부관리가 와서 손수건으로 눈물 찍어내는 시늉을 하고 돌아가면, 그다음 날 노동자들은 또 떨어진다. 사흘에 두 명꼴로 매일 떨어진다. 떨어지고 또 떨어진다.


왜 떨어지는가. 고층건물 외벽에 타일을 붙이거나 칠을 하려면 건물 외벽을 따라서 비계를 가설해야 하는데, 이 비계가 부실하기 때문이다. 비계 발판이 무너져내리거나 비계에 난간을 설치하지 않았거나, 비계를 외벽에 고정시키는 볼트가 허술했거나, 노동자의 몸을 외벽과 연결시키는 장치가 부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 이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사고 원인이라는 것을 들여다보니까, 그 원인을 시정하는 데는 돈도 별로 들지 않고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비계바닥을 튼튼히 하고 나사를 똑바로 박아서 비계를 외벽에 튼튼히 고정시키면 되는 일이다.

 

국민소득이 3만 달러에 육박하고, 최고급 자동차를 만들고 비행기를 만들고 갤럭시를 만들고 첨단유도무기를 만드는 나라에서 돈이 없고 기술이 없어서 이 문제를 바로잡지 못하는가.


돈과 기술이 넘쳐나도 한국 사회는 이 문제를 바로잡을 능력이 없다. 내년에도 또 270~300명이 떨어진다. 이것은 분명하다. 앞선 노동자가 떨어져 죽은 자리에 다른 노동자가 또 올라가서 떨어진다. 작년에도 그랬고, 재작년에 그랬으니, 내년인들 무슨 수가 있겠는가.


왜 바로잡지 못하는가. 나는 그 이유를 안다. 돈 많고 권세 높은 집 도련님들이 그 고공에서 일을 하다가 지속적으로 떨어져 죽었다면, 한국 사회는 이 사태를 진작에 해결할 수 있었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부는 기업을 압박하거나, 추경을 편성하거나, 행정명령을 동원하거나 간에,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이 문제를 해결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층에서 떨어지는 노동자들은 늘 돈 없고 힘없고 줄 없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나의 이러한 주장을 실증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권문세가나 부유층의 도련님들이 그 꼭대기에서 떨어져 죽은 사례가 없기 때문에 나는 방증 자료를 제시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생각이 옳다고 믿는다. 나의 생각은 계급적 편견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다. 나는 적어도 70년 이상을 이 사회에서 살아온 사람의 경험칙에 입각하고 있다. 내가 살아온 이 사회는 5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니 내년이라고 무슨 별 볼 일이 있겠는가.


한국 사회가 이 사태를 바로잡을 수 없는 또 하나의 큰 이유는 경영과 생산구조의 문제, 즉 먹이 피라미드의 문제다. 재벌이나 대기업이 사업을 발주하면 시공업체가 공사를 맡아서 힘들고 위험한 작업은 원청, 하청, 재하청으로 하도급되고, 이 먹이 피라미드의 단계마다 적대적 관계가 발생한다. 이 피라미드의 최하위에 속하는 노동자들은 고층으로 올라가고, 고층에서 떨어진다. 책임은 아래로 내려가서 소멸하고 이윤은 위로 올라가서 쌓인다. 모든 국민이 법률 앞에 평등하다는 말은 헌법의 멋진 문장이 그렇다는 얘기이고, 지금 한국 사회는 신분이 세습되는 고대국가라는 것을 나는 이번에 티브이 뉴스를 보면서 깨달았다.


나는 이 사태가 계속되는 한 4차 산업이고, 전기자동차고 수소자동차고 태양광이고 인공지능이고 뭐고 서두를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날마다 우수수우수수 낙엽처럼 떨어져서 땅바닥에 부딪쳐 으깨지는데, 이 사태를 덮어두고 한국 사회는 어디로 가자는 것인가. 앞으로 나갈수록 뒤에서는 대형 땅 꺼짐이 발생한다.


티브이 뉴스를 보면서, 방안에서 벽에 대고 혼자서 중얼거리다가, 급히 몇 자 적어서 신문사에 보낸다.

 

 

 

 

 

4.

[소설가 김훈 세월호 1년 특별기고] 1년째 ‘수취인 불명’ 남해의 부고… 선체 인양해 희망적 국면 열기를

 

< 이투데이,  온라인뉴스팀,  2015-04-10  >


 
곡절 끝에 두려움과 비겁함으로 빚어낸 특별법 시행령… 국민은 이런 ‘정부 합동 허수아비’를 원하는 게 아니다

 


다시 4월이다. 꽃보라가 흩날리고 목련이 피어서 등불로 돋아나고, 여자들도 피어서 웃음소리가 공원에 가득하다. 생명의 아름다움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어서 사람이 입을 벌려 말할 필요는 없을 터이지만, 지난해 4월 꽃보라 날리고 천지간에 생명의 함성이 퍼질 적에 갑자기 바다에 빠진 큰 배와 거기서 죽은 생명들을 기어코 기억하고 또 말하는 것은 나의 언설로 여론에 영향을 미치려는 허영심 때문이 아니라 내가 아직도 살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겨우 쓴다. 늙은이의 춘수(春瘦)는 어수선하다.

새벽의 꿈에, 배 빠진 맹골수로에도 4월이 와서 봄빛이 내리는 바다는 반짝이는 물비늘에 덮여 있었다. 그 바다에서 하얀 손목들이 새순처럼 올라와서 대통령의 한복 치맛자락을 붙잡고, 친박 비박 친노 비노 장관 차관 이사관들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우는데, 바짓가랑이들은 그 매달리는 손목들을 뿌리치고 있었다. 그 바다는 국가가 없고 정부가 없고 인기척이 없는 무인지경이었다. 손목들은 사람 사는 육지를 손짓하다가 손목들끼리 끌어안고 울었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기진하였다.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5월에 김영랑(金永郞·1903~1950)은 모란이 다시 피는 5월을 기다리듯이 나는 생명들이 바다 밑으로 뚝뚝 떨어져버린 4월에, 앞날에 다시 올 4월을 기다리면서 나의 악몽을 달래고 있다. 그러하되 그 새로운 4월은 봄이 오듯이 꽃이 피듯이 날이 흐려서 비가 오듯이 저절로 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내가 모르지 않는다.

풍랑이 없는 바다에서 정규 항로를 순항하던 배가 갑자기 뒤집히고 침몰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 원인과 배경이 불분명한 사태는 망자(亡者)의 죽음을 더욱 원통하게 만들 뿐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공허한 것으로 만든다. 망자들이 하필 불운하게도 그 배에 타서 죽음을 당한 것이라고 한다면,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은 아무런 정당성의 바탕이 없이 우연히 재수 좋아서 안 죽고 살아 있는 꼴이다. 삶은 무의미한 우연의 찌끄레기, 잉여물, 개평이거나 혹은 이 세계의 거대한 구조 밑에 깔리는 티끌처럼 하찮고 덧없다. 이 사태는 망자와 미망자(未亡者)를 합쳐서 모든 생명을 모욕하고 있고, 이 공허감은 참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 우발적이라는 공허감, 보호받을 수 없고 기댈 곳 없다는 불안감은 사람들의 마음을 허무주의로 몰아가고, 그 집단적 허무감은 다시 정치적 공략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세월호 침몰의 원인이 선박 불법증축, 과적, 고박(固縛) 불이행, 평형수 부족, 급변침 등이었다는 정부의 조사결과 발표는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결국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무시했기 때문에 배가 빠졌다는 것이다. 밥을 굶으면 배가 고프고, 심장이 멎으면 사망에 이른다는 말이다. 이 사태가 선박의 복원력을 검증하는 물리실험이라면, 정부의 발표는 나무랄 데 없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태는 물리실험이 아니다. 이 사태는 한 시대 전체의 도덕적 침몰과 국가기능의 파탄이다.

세월호가 바다에 빠진 지 1년이 되지만 특별조사위원회는 정부가 입법예고한 시행령에 가로막혀서 실무 조직을 구성하지 못하고 기능은 작동되지 않고 있다. 작년 하반기에 ‘특별법(2014.11.19 공포)’이 국회에서 입법되는 과정에서 여야 정치권의 리더십은 파탄되었다. 이 파탄은 이미 침몰한 세월호가 다시 물속으로 끌어들인 제 2의 침몰이라고 할 만하다. 정부와 여야의 정치력은 진실을 밝혀서 분노와 슬픔을 조정하는 데 무력했고, 자신들의 존망과 안위를 챙기는 사활의 생존술로 중원무림(中原武林)을 할거했다. 이 ‘특별법’의 입법과정은 사태의 진상을 규명해서 ‘안전사회 건설’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리더십이 작동된 것이 아니고, 이 비극이 몰고 올 무서운 파괴력의 폭심(爆心)으로부터 도망치고 벗어나려는 정치세력들이 국민과 유족들의 아우성에 몰려서 막다른 골목에 부딪치자 강고한 보호벽으로 자신들을 방호하면서 탈출구를 뚫어내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는 수사권, 기소권이 없이 조사권만을 갖는 한시적 기구로 발족되었다. 게다가 정부가 3월 27일 입법예고한 시행령에 따르면 위원회의 조사권의 영역은 정부가 이미 시행해서 발표한 결과를 분석하고 재조사하는 범위로 국한되었다. 그리고 조사 실무를 지휘감독하는 실무 부서장과 그 휘하 직원들은 모두 행정부가 시한부로 파견하는 공무원들로 충원하게 되어 있다.

이 시행령대로 위원회가 작동된다면 위원회는 정부의 조사결과를 추인하거나 거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뿐, 사태의 핵심부와 주변부, 심층부와 수뇌부를 향해 기획력 있는 조사를 수행할 도리가 없고, 다만 해양수산부의 하부 조직으로 전락해서 사태를 뒤치다꺼리하고 유족들의 분노와 슬픔과 요구사항을 상대해야 하는 정부의 곤욕을 대신하는 바람막이가 될 것이 뻔하다. 이것은 국민이 원하는 ‘위원회’가 아니다. 이것은 ‘조사권’이 아니다. 이것은 정부 합동의 허수아비다. 이석태 특별조사위 위원장과 유가족들은 이 시행령을 거부했고 위원회는 작동 불능이 되었다.

‘시행령’을 들여다보면 이 사태에 대한 정부의 두려움이 얼마나 크고 근원적인 것인지 알 수 있다. 사태 초기에 정부는 우선 어쩔 줄 몰라서 갈팡질팡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사태의 심층에 대한 두려움은 점차 노골화되었고, 그 두려움은 다시 그 사태로부터 달아나려는, 권력 방어적인 비겁함으로 발전했고, 그 두려움과 비겁함을 이번에 ‘시행령’으로 명문화해서 입법예고하였다. 이렇게 해서, 지난해 4월에 남해바다 맹골수로에서 온 부고는 수취인 불명으로 팽목항에 되돌아갔으니 탈상(脫喪)의 날은 아직도 멀었고 유족들은 광화문과 팽목항에 모여 농성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4월이 왔다.

거칠게 말해서, 나는 세월호 참사의 발생과 추이를 3단계로 나누어서 이해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제 1사태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이 나라에 쌓인 적폐(積弊, 나는 이 말을 대통령에게서 배웠다)가 세월호를 침몰시키기까지의 70년에 가까운 세월이고 세월호 참사의 제 2사태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한 이후 그해 11월 7일 세월호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기까지의 7개월간이고 세월호 참사의 제 3 사태는 ‘시행령’ 이후 위원회의 활동과 인양이 논의되는 미래의 시간인데, 이 3개의 국면은 서로가 서로의 배경이며 원인으로 맞물려 있다. 그리고 제 2사태는 제 1사태에 잇닿은 또 다른 침몰이고, 제 3사태도 지금 위태롭게 기울어 있다.

이 나라의 돈은 오래전부터 가치의 저장이나 측정, 교환, 유통, 지불, 결제의 수단을 넘어서서 인간과 세계를 지배하는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다. 돈의 위상은 법의 보호를 받고 돈의 작동은 시장경제의 축복을 받는다.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채찍’을 휘두르는 이 권력의 지배는 완벽하고도 철저해서 그 지배권으로부터의 이탈은 곧 죽음이다. 그래서 이 나라의 돈은 화폐라기보다는 알파벳 대문자를 써서 DON으로 표기해야만 그 유일신다운 전능의 위상에 합당할 것이다.

세월호를 침몰시킨 70년에 가까운 적폐는 이 DON과 거기에 붙좇는 정치권력과 행정권력의 연합세력이라는 사실의 흐린 윤곽은 이미 드러나 있다. 그 연합세력이 어떤 인적, 행정적 지휘-복종과 공생의 네트워크를 통해 그 배에 작동되어서 감히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깔아뭉갰던가를 시대사 전체 속에서 밝히는 것이 정부의 통상적인 업무기능 안에서는 불가능하다면 특별조사위원회를 만들어서 밝혀야 한다는 쪽으로 국민들의 뜻이 모아졌고, 국회는 파행을 거듭한 끝에 매우 허약한 권한만을 부여한 위원회법을 통과시켰는데, 정부가 다시 시행령으로 그 기능을 박탈하고 있으니 정부는 대체 무엇이 그토록 무섭고, 그 두려움의 실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한국국민들은 오랜 세월동안 정치권력에 속아왔다. 불신은 사람들의 정치정서 속에서 허무주의로 자리 잡았고, 그 허무주의는 일상화된 악(惡)이 서식하는 토양이 되었다. 세월호 참사는 난데없이 들이닥친 재앙이 아니라, 그 일상화된 악의 폭발인 것이다. 우리는 고통을 분담함으로써 시대의 난제를 극복해본 역사적 경험이 전무하거나 매우 빈곤하다. 고통은 늘 고통을 당하는 계층에게 전가되었고 기회와 정보와 우월적 지위는 늘 강하고 러키한 자들의 몫이었다. 이 불신과 고통분담에 대한 역사적 경험의 빈곤이 당면한 문제의 해결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는데, 정부가 제시한 이 무력하고 자기방어적인 ‘시행령’은 갈등과 불신에 기름을 부어서 불을 붙이는 꼴이다.

지금 정부는 공적 개방성을 상실하고 자장면협회나 상가번영회처럼 사인(私人)의 이익집단 같은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이고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몇몇 고위 관리들이 문책 경질된 것은 책임을 지는 행위가 아니다. 고위 공직의 자리가 개인의 사유재산이 아니고, 잘나가는 공무원의 물 좋은 취직자리가 아니며, 천하의 공물(公物)일진대 그 자리를 내놓는 것이 어떻게 사태를 책임지는 일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책임을 진다는 것은, 지게꾼이 지게를 진다는 말이 아니다. 자리를 내놓고, 감옥에 가고, 할복을 하고 분신을 해서 지옥에 간들 이미 그 해악이 세상에 퍼져버린 사태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는 없다. “책임을 진다”는 행위는 사실상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는 말은 쫓겨났다는 뜻이고, 그 쫓겨남으로써 아무것도 책임지지 못한다. 그것은 무의미한 빈말이다. 그 공허함은 “세월호는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무시했기 때문에 침몰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니로되, 하나마나한 말이다. “기업이 해고를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라는 말도 모두 그러한 것인데, 그 명석함에 가려진 폭력성이 세상의 강자로 행세하고 있다.

지난해 6·4 지방선거와 7·30 재·보선에서 여당의 세력이 커지자 이 비극적 사태에 오래 매달려 있는 것은 경기부양과 경제발전에 장애가 된다는 논리가 언론의 중심부로 진출했다. 이 경제논리 역시 맞는 말이로되 하나마나한 말이고, 명석성으로 폭력을 위장하고 있다.

주어와 술어를 가지런히 조립하는 논리적 정합성만으로는 세월호 사태를 이해할 수도 없고 진상을 밝힐 수도 없을 것이다. 또 이 사태를 객관화해서 3인칭 타자의 자리로 몰아가는 방식으로는 이 비극을 우리들 안으로 끌어들일 수가 없다. 나는 죽음의 숫자를 합산해서 사태의 규모와 중요성을 획정하는 계량적 합리주의에 반대한다. 나는 모든 죽음에 개별적 고통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에 값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생명과 죽음은 추상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회복이 불가능하고 대체가 불가능한 일회적 존재의 영원한 소멸이다.

그래서 한 개인의 횡사는 세계 전체의 무너짐과 맞먹는 것이고, 더구나 그 죽음이 국가의 폭력이나 국가의 의무 불이행으로 비롯된 것이라면 이 세계는 견딜 수 없는 곳이 되고 말 것인데, 이 개별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체제가 전체주의다. 

 

이 개별적 고통에 대한 공감이 없다면 어떤 아름다운 말도 힐링이 되지 못하고 경제로 겁을 주어도 탈상은 되지 않는다.

국가개조(國家改造! 나는 이 말도 대통령에게서 배웠다)는 안전관리와 구조구난의 지휘부와 조직을 재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뉘우침의 진정성에 도달함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개인이나 국가나,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들은 좀처럼 개조되지 않는다. 다만 뉘우침의 진정성 위에서 자신을 바꾸어 나갈 수 있다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서 뭉개다가 무너질 뿐이다.

중국 고대의 전국시대에 수많은 나라들이 멸망했다. 그 나라들은 대부분 반성하는 기능의 마비, 무책임, 무방비 때문에 망했고 여러 나라들이 줄줄이 망해가는 꼴을 보면서 그 뒤를 따라서 똑같이 되풀이하다가 망했다. 고통의 맨살, 죄업의 뿌리와 직면하기를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뉘우침의 진정성과 눈물의 힘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젊어서 기자 일을 할 때 함석헌(咸錫憲·1901~1989)의 이름에 붙은 타이틀은 종교인도 철학가도 사상가도 아니었다. 그의 타이틀은 반체제인사였다. 그 반체제인사가 말했다.

-눈에 눈물이 어리면 그 렌즈를 통해 하늘나라가 보인다. 사람은 고난을 당해서만 까닭의 실꾸리를 감게 되고 그 실꾸리를 감아가면 영원의 문간에 이르고 만다(‘뜻으로 본 한국역사’, 1977. 한길사 444쪽).

쓰기를 마칠 때 정부가 세월호 선체를 인양키로 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이 사태를 둘러싼 정치적 조건들을 제거하고 진실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만이 문제의 해결책이다. 정치력으로 정치를 제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어려운 길을 우리는 가야 한다. 선체 인양이 이 사태의 희망적 국면을 열어가기 바란다.

 

 

 

 

 

5.

세월호 내버리고 가면 우리는 또 같은 자리서 빠져 죽어 ..

사실의 힘에 의해 슬픔과 분노, 희망의 동력으로 바뀌기를

< 중앙일보, 김훈 소설가, 2015. 1. 1.  >


나는 본래 어둡고 오활하여, 폐구(閉口)로 겨우 일신을 지탱하고 있다. 더구나 궁벽한 갯가에 엎드린 지 오래니 세상사를 입 벌려 말할 만한 식견이 있을 리 없고, 이러한 말조차 아니함만 못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하되, 잔잔한 바다에서 큰 배가 갑자기 가라앉아 무죄한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한 사태가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알지 못하고,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몸을 차고 어두운 물 밑에 버려둔 채 새해를 맞으려니 슬프고 기막혀서 겨우 몇 줄 적는다.

 단원고 2학년 여학생 김유민양은 배가 가라앉은 지 8일 후에 사체로 인양되었다. 라디오 뉴스에서 들었다. 유민이 아버지 김영오씨는 팽목항 시신 검안소에서 딸의 죽음을 확인하고 살았을 적의 몸을 인수했다. 유민이 소지품에서 학생증과 명찰, 그리고 물에 젖은 1만원짜리 지폐 6장이 나왔다. 김영오씨는 젖어서 돌아온 6만원을 쥐고 펑펑 울었다. (유민 아빠 김영오 지음 『못난 아빠』 중에서) 이 6만원은 김영오씨가 수학여행 가는 딸에게 준 용돈이다. 유민이네 집안 사정을 보건대, 6만원은 유민이가 받은 용돈 중에서 가장 많은 돈이었을 것이다. 이 6만원은 물에 젖어서 돌아왔다.

 아 6만원, 이 세상에 이 6만원처럼 슬프고 참혹한 돈이 또 있겠는가. 이 6만원을 지갑에 넣고 수학여행 가는 유민이는 어떤 설계를 했던 것일까. 열일곱 살 난 여학생은 무엇을 사고 싶었을까. 얼마나 간절한 꿈들이 유민이의 6만원 속에 담겨 있던 것인가. 유민이가 가지고 싶었던 것들. 아버지, 엄마, 동생에게 사다 주려 했던 선물은 무엇이었을까.

 6만원은 유민이의 꿈을 위한 구매력에 쓰이지 못하고 바닷물에 젖어서 아버지에게 되돌아왔다.

 300명이 넘게 죽었고,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의 몸이 물 밑에 잠겨 있지만 나는 이 많은 죽음과 미귀(未歸)를 집단으로 한꺼번에 슬퍼할 수는 없고 각각의 죽음을 개별적으로 애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유민이의 6만원, 물에 젖은 1만원짜리 6장의 귀환을 통절히 슬퍼한다.

 아 6만원. 유민이의 마음속에서 6만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셀 수 없이 많았고, 유민이가 갖고 싶었던 것은 사소할수록 간절했을 것이다. 이것을 살까, 저것을 살까 망설일 때 그 후보 리스트에 오른 물건까지를 합산한다면 이 6만원이 갖는 구매력의 예상치, 실현되지 못한 구매력은 몇 배로 늘어난다. 유민이의 선택에서 최종적으로 탈락되었다고 해서 그 탈락된 꿈이 무효인 것은 아니다. 배는 수학 여행지에 닿지 못했다. 죽은 많은 아이들의 용돈도 다들 물에 젖어서 돌아왔을 것이므로 그 많은 꿈들은 슬픔과 분노로 바뀌어 바다를 덮는다. 유민이의 지갑에서 돌아온 6만원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국가재난 컨트롤타워에 성금으로 보내야 하는가를 생각하다가 생각을 그만두었다. 내가 젊은 날 육군에서 힘들 때 엄마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어렵고 힘들 때는 너보다 더 어려운 이 어미를 생각해라, 라고 적혀 있었다. 고지의 겨울은 맹수에게 물어뜯기는 듯이 추웠다. 엄마의 편지를 받던 날 밤에 나는 보초를 서면서 고난을 따스함으로 바꾸어놓는 엄마의 온도와 엄마의 눈물의 힘을 생각했고 자라나는 고비에서 치솟는 반항기로 엄마를 속 썩인 패악을 뉘우치면서 가슴이 아팠다. 유민이의 6만원에도 내 엄마의 편지처럼, 크고 깊은 슬픔의 힘이 저장되어 있어 세상의 불의와 세상의 더러움을 밀쳐낼 수 있으며, 말을 알아듣고 사물을 볼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시켜줄 테지만 그렇게 말해 봐도 산 자들의 말일 뿐, 젖어서 돌아온 6만원을 위로할 수는 없다. 배 안을 수색하는 잠수사들의 말에 따르면, 아이들이 담요를 둘둘 말아서 배 안의 창문 틈마다 모두 막아놓았다고 한다. 아이들은 그렇게 버둥거리다가 최후를 맞았다. 골든타임도 에어포켓도 컨트롤타워도 다가오는 인기척도, 아무것도 없었다.

 글을 쓰면서 읽은 책을 들이대는 것은 게으르고 졸렬한 수작일 테지만 나는 바다에 빠져 죽을 뻔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별수 없이 책을 들먹인다.

 조선 성종 때 관인 최부(崔溥·1454 ~1504)는 제주도에 공무 출장 갔다가 부친상을 당해 배를 타고 육지로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났다. 그는 15일 동안 바다에서 갈팡질팡하다가 중국 해안에 표착했고 북경을 거쳐 6개월 만에 귀국했다. 그는 바다와 대륙에서의 일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사나운 바다에서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은 이렇다.

 "한 채의 이불을 찢어 여러 번 둘러 동여매고 횡목(橫木)에 그것을 묶어서 죽은 후에도 시신이 배와 함께 오래도록 서로 멀어지지 않도록 하고자 했다."(『표해록』 최부 지음, 서인범·주성지 옮김, 한길사, 2004, 62쪽)

 최부는 이불을 찢어서 배 기둥에 몸을 묶었고 유민이네 학교 아이들은 담요를 말아서 창문 틈을 막았다. 그 마지막 정황에서 인간의 모습은 비슷하지만 세월호는 풍랑에 깨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침몰했다. 차오르는 물속에서 아이들은 스스로 담요를 말아서 창문 틈을 막았는데, 아직 살아 있는 몸의 동작이 생명을 향해 그렇게 작동되어지는 과정의 무서움을 최부의 글을 통해 겨우 짐작한다지만, 거듭 말하거니와 세월호는 풍랑에 깨지지 않고 스스로 침몰했다. 큰 배가 스스로 뒤집혀서 가라앉게 되는 배후에는 대체 얼만큼 악과 비리가 축적되어 있는 것인지, 그리고 담요를 말아서 창문 틈을 막다가 죽은 아이들과 정치적·행정적 시스템과의 그 참혹한 단절은 어찌 된 영문인지를 나는 알 수가 없다. 최부가 표류했던 조선 성종 시대의 동지나 바다는 물결이 사나웠고 세월호가 항해하던 박근혜 대통령 시절의 진도 연안 여객선 수로는 물결이 높지 않았는데, 그 인기척 없는 적막강산의 풍경은 흥망과 건국, 전쟁과 재건을 거쳐온 600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도 어찌 그리 똑같은지, 내가 얼마 전에 진도 팽목항에 가서 눈물도 말라버린 유가족들과 함께 바다를 바라보니 부르는 소리는 수평선 너머로 퍼져 가는데 배 빠진 자리는 흔적이 없고, 바다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國破浪花飛 (국파랑화비)
 海暮號哭散 (해모호곡산)

 

 나라는 깨지고 물보라 날리니
 바다는 저물고 곡소리 퍼진다.

 <두보(杜甫)를 흉내 내 지음>

 장한철(張漢喆·1744 ~?)은 조선 영조 연간의 제주도 선비다. 26세 때 서울 가서 과거를 보려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다가 풍랑을 만났다. 그는 오키나와까지 떠밀려갔다가 중국 상선을 얻어 타고 2개월 만에 돌아왔다. 29명 중에서 22명이 물에 빠져 죽었고, 살아서 돌아온 자들도 곧 병들어 죽었다. 부서진 배가 파도에 치솟고 잠기면서 장한철에게 죽음이 다가오는데, 임박한 죽음 앞에서도 인간은 삶을 기약한다. 그때 장한철의 각오는 다음과 같다.

 "만일 내가 살아서 돌아간다면 응당 글 읽는 일을 던져버리고 집 밖의 일도 벗어버리고 몇 고랑 안 되는 밭을 몸소 갈면서 쌍오당(둘째 아버지의 아호)의 여생을 효성스럽게 받들련다." (『표해록』 장한철 지음, 김지홍 옮김,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09, 68쪽)

 임박한 죽음 앞에서 장한철은 삶의 쇄신을 각오하는데, 쇄신의 골자는 책을 버리고 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언어와 관념의 세계를 버리고 몸과 대지가 부딪치고 엉키는 직접성의 세계에 삶을 재건할 것을 기약한다.

 세월호가 기울고 뒤집히고 가라앉을 때 배에 갇힌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러한 방식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생명의 고유한 원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 물이 차오르는구나, 이제 죽어야겠다, 라면서 죽은 사람이 있을 것인가. 세월호에서 죽은 그 많은 사람들도 장한철처럼 죽음 앞에서 삶의 쇄신을 기약했을 것인데, 그들의 마음속에서 울음으로 끓어오르던 새로운 삶에 대한 각오와 동경, 지나간 삶에 대한 회한과 뉘우침, 이루어야 할 소망과 사랑과 평화와 친절, 만남과 그리움, 손 붙잡기, 끌어안기 쓰다듬기….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팽목항에서 나는 기막혔고 분했다.

 장한철의 그 일생일대의 각오는 오래가지 못했다. 살아서 돌아온 그는 다시 글의 세계로 돌아갔다. 풍랑 치는 바다에서의 생각과 흔들리지 않는 땅 위에서의 생각은 전혀 다른 모양이다. 장한철은 살아온 지 두어 달 만에 다시 서울로 올라가서 과거에 응시했고, 떨어졌다. 낙방한 그가 다시 배를 타고 제주 바다를 건너 고향으로 돌아갈 때 책과 밭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기록에 없다.

 장한철은 살아서 돌아왔으므로 그의 마지막 각오와 소망을 번복할 수 있었겠지만, 세월호에 갇혀 죽은 사람들은 돌아와서 번복할 수 없을 것이므로 그들의 마지막 소망은 영원히 유효하다. 그 유효한 소망들이 바다와 육지 위에서 발 디딜 곳을 찾지 못하고 떠돌고 있다. 떠돌고 있지만, 소망들은 유효하다.

 세월호는 화물을 너무 많이 실었고, 선체를 불법으로 증축했고, 배의 균형을 유지시켜주는 평형수를 빼냈고, 갑판 위의 화물을 단단히 묶어놓지 않았기 때문에 배가 흔들릴 때 복원력을 상실하고 한쪽으로 쏠려서 침몰한 것이라고 검찰은 수사결과를 밝혔다. 검찰은 이 부분을 아주 자세히 설명했다.

 검찰의 말은, 한마디로, 세월호는 물리법칙을 위반했기 때문에 침몰했다는 것인데, 지구 중력의 자장 안에서 물리법칙을 위반하고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세월호는 가라앉을 만해서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나는 오래전에 졸작소설 『칼의 노래』를 쓰느라고 선박과 항해에 대한 책을 몇 권 읽었다. 내가 읽은 책들은 들이댈 만한 것도 아니고 내가 쓰려는 소설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바다의 질감과 선박의 작동원리를 전혀 모르고서는 글을 쓸 용기를 낼 수 없었다. 백면서생이 배의 작동원리를 말하는 것은 꼴 같지 않지만 무릅쓰고 가려 한다.

 20세기의 대형 선박은 모두 쇠로 만든다. 쇠가 어떻게 물에 뜨는가. 쇠건 바위건 나무토막이건 같은 용적의 물보다 가벼우면 뜨고, 무거우면 가라앉는다. 이 세상의 모든 배를 지칭하는 영어 보통명사는 베슬(vessel)인데 그릇이라는 뜻이다. 그 자체에 용적을 포함하고 있는 운송수단이라는 말이다. 수만t의 쇳덩어리는 베슬을 이룸으로써 가라앉으려는 중력과 띄우려는 부력이 길항(拮抗)하면서 물에 뜬다. 이것은 소금쟁이가 물에 빠지지 않는 이치와는 전혀 다르다. 이 길항의 원리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나오는 신석기 사내들의 고래잡이용 보트(내가 좋아하는 그림!)나 생환율이 50%에 불과했던 16세기 포르투갈·스페인·네덜란드의 범선이나 명량해전, 노량해전, 한산해전, 옥포해전에서 이긴 이순신 함대의 판옥전선이나 두 동강 난 천안함이나 방위 예산 떼어먹은 통영함이나 멀쩡히 가다가 가라앉은 세월호나 다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다. 예외는 없고 예외는 곧 죽음이다. 무게중심과 부력중심이 서로를 피하고 또 달래가면서 기우는 배를 제자리로 돌려놓는데 이 양극단의 모순이 한순간의 물리현상 속에서 통합됨으로써 배는 롤링하면서 전진한다. 그러나 배가 옆으로 기울 때 이 경사각도가 모순을 통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가면 복원력은 순간에 소멸하고 배는 뒤집혀서 침몰한다. 배는 유(柔)로서 강(剛)을 다스리며, 유와 강의 종합으로써 롤링하고 피칭하는데, 배가 롤링과 피칭 없이 뻣뻣하게 파도를 대하면 배는 바로 깨지거나 침몰한다.

 이순신 함대의 배도 그렇지만 전통적인 한선(韓船)은 연안 항해용이기 때문에 바닥이 평평해서 큰 파도를 만났을 때는 복원력이 약하다. 그래서 한선은 무거운 화물을 배 밑바닥에 싣고, 화물이 모자랄 때는 바위를 실어 무게중심을 낮춘다. 목포해양박물관에 전시된 신안 보물선도 모든 화물을 배 밑창에 싣고 있다. 이것은 아무런 비밀도 아니고 전문지식도 아니다. 고대 이집트의 갈대배에서부터 적용되던 원리다.

 세월호는 이 모든 원리와 인류의 축적된 경험을 거꾸로 했다. 그러니 어찌 살기를 바라겠는가. 갑판에 과적을 함으로써 무게중심을 위로 끌어올렸고, 배 밑창의 평형수를 빼버려서 배의 중심을 허깨비로 만들었다. 이것이 침몰의 원인인가. 이것은 원인이라기보다는 침몰 그 자체다. 이것이 침몰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배가 뒤집혀지니까 가라앉았다는 말과 같다. 이것은 동어반복이다.

 세월호 침몰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화물을 단단히 묶지 않았다는 것이다. 검찰이 그렇게 말했다. 기울어진 세월호의 사진을 보면 갑판 위에는 컨테이너고 승용차고 아무것도 없이 빗자루로 쓸어낸 것처럼 깔끔하다. 배가 기울 때, 화물들이 한쪽으로 쏠려 물속으로 휩쓸려 내려간 것이다. 화물을 단단히 묶지 않았다는 수사결과는 맞는 말이다.

 화물을 단단히 묶는 것을 고박(固縛)이라고 하고, 원양선원들의 전문 용어로는 래싱(lashing)이라고 하는데, 다 같은 말이다. 이것도 별것이 아니다. 지게꾼이 옹기를 묶을 때, 1.5t 픽업트럭 기사가 적재함의 짐을 묶을 때, 퀵서비스 오토바이 기사가 뒷자리의 박스를 묶을 때 그리고 앞에서 썼듯이 조선 성종 때 바다에서 죽음을 맞는 최부가 이불을 찢어서 몸을 선체에 묶을 때, 이 모든 동작이 래싱이다. 래싱은 흔들리면서 길을 가는 모든 자들의 기본동작이다. 별것이 아니지만, 이탈자는 살길이 없다.

 그래서 원양을 항해하는 선박의 갑판원들은 쉴 새 없이 갑판을 순찰하면서 컨테이너를 묶는 쇠줄(래싱바)을 스패너로 조인다. 이것이 갑판원의 기본 업무다. 컨테이너는 선체와 밀착되어 롤링과 피칭을 함께 해야 하며, 컨테이너가 정위치를 이탈해 한쪽으로 쏠리면 그 기세로 배 전체를 끌고 쓰러져서 살길은 없어진다. 운동은 복원되지 않는다. 세월호는 등짐 지는 지게문만큼도 래싱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세월호가 래싱을 엉터리로 해서 침몰했다는 말도 또 다른 동어반복이다. 비를 맞으니까 옷이 젖었고, 밥을 굶었더니 배가 고프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세월호는 왜 기울었고 왜 뒤집혔는가.

 2014년 4월 16일의 참사 이후로 사태를 바라보는 이 사회의 시각은 발작적인 분열을 일으키며 파탄되었다. 슬픔과 분노를 온전히 간직해서 미래를 지향하는 동력으로 가동시켜야 한다는 시각과 그 슬픔과 분노를 매우 퇴행적인 소모적인 것으로 여겨 혐오하는 시각이 교차했다. 거칠게 말하자면 4월, 5월까지는 전자의 시각이 우세했으나 6월 4일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적지 않은 재미를 보고, 이어 7월 30일 재·보선에서 여당이 압승하자, 후자의 시각이 주류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슬픔과 분노에 오랫동안 매달려 있는 것은 경제 살리기에 해롭다는 것이 그 혐오감의 주된 논리였다. 세월호에서 놓친 골든타임이 경제회복의 골든타임으로 살아났고 거기에 이념의 날라리들이 들러붙기 시작했다. 사실 4·16참사 이후에 경기는 장기 침체에 빠졌고, 정부의 부양책은 힘을 쓰지 못했다. 모두들 슬프고 분하면 경기는 침체되는 것이니까. 슬픔과 분노가 경기침체의 원인이라는 말도 결국은 동어반복이다. 어찌 헌 옷을 벗듯이, 헌신짝을 벗어버리듯이 마음의 일을 벗어 던질 수 있을 것인가. 돈 많고 권세 높은 자들이 큰 죄를 저질러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형량을 줄여서 선고하고, 형기 중에도 특별사면, 일반사면, 집행정지, 가석방, 병보석으로 풀어주는 무법천지를 나는 자유당 때부터 보아왔고 자유당은 지금도 특별사면 중이다. 죄형법정주의는 무너졌고 경제는 합리적이고 규범적인 토대를 상실했다. 재벌의 불법을 용인해야 경제가 살아나고, 정당한 슬픔과 분노를 벗어 던져야만 먹고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는 말은 시장의 논리도 아니고 분배의 정의도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속임수일 뿐이다. 법치주의가 살아 있어도 법이 밥을 먹여줄 리는 없고, 밥은 각자 알아서 벌어먹어야 하는 것인데, 법치주의를 포기해야만 밥을 벌어먹기가 수월해진다면 이 가엾은 중생들의 밥은 얼마나 굴욕적인 것인가.

 나는 수감 중인 대기업 총수에 대한 가석방 결정이 법무장관의 '고유권한'이라는 언설에 반대한다. 장관이 자의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의 고유권한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이사금(尼師今)이 아니고 마립간(麻立干)이 아닐진대, 어찌 직무에 따른 권한이 그 직위에 '고유'하게 귀속될 수가 있겠는가. 장관은 다만 그 가석방이 법치주의의 원칙과 절차에 비추어 정당한 것인가 아닌가를 공적으로 판단할 의무가 있을 뿐이다.

 저 사람을 풀어주면 이 나라가 얼마큼 더 잘 먹고 잘 살게 될 것인가는 법무장관이 판단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장관의 판단의 준거가 될 수 없다. 자유당 때부터 지금까지 전개된 무법천지의 관례도 장관이 참조할 전례가 되지 못한다. 저 사람을 지금 풀어주면 이 나라는 무엇을 잃어버리고, 무엇이 무너져 내리며, 후세의 더 큰 무너짐을 어찌 감당할 것이며, 어떠한 앞날이 닥쳐올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이 장관의 일이기를 나는 바란다.

 지금, 그날 벌어 그날 먹거나 한 달 벌어서 한 달을 먹거나, 사람들은 먹고살기의 지옥을 헤매고 있다. 이 겨울에 살기 위한 아무런 방편도 마련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을 나는 알고 있다. 이 중생고(衆生苦)가 수감 중인 대기업 총수의 석방 주장을 정당화하고 세월호의 슬픔과 분노에 대해 침묵을 요구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은 기막힌 일이지만, 기막히게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그렇게 해서 4·16의 슬픔과 분노는 전혀 정치적인 것이 아니었지만 결국은 정치의 악다구니 속으로 편입되었고, 내 편과 내 편이 아닌 편으로 갈라져서 치고받게 되었는데, 세종로에서 단식을 이어가던 유가족들 옆에서 먹성 좋아 보이는 청년들이 통닭과 짜장면을 먹어대고, 또 국회의원 명함을 내미는 웬 여성의원이 대리운전기사를 폭행하는 짓에 연루됨으로써 이 악다구니와 악다구니에 편승하는 또 다른 악다구니들이 온 나라에 넘쳤다. 슬픔과 분노의 온전한 모습은 파괴되었고 유민이의 젖은 6만원의 의미는 실종되었다. 그 슬픔과 분노는 특별히 재수가 없어서 끔찍한 재앙을 당한 소수자의 불운으로 자리 매겨졌다. 그 소수의 고통을 사회적으로 표출하는 것은 다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고 다수가 먹고사는 일이 해로운 결과가 된다고 힘센 목청을 가진 언설의 기관들이 힘을 합쳐서 소리 질렀다. 소리 질러서 낙인찍었고,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그렇게 해서 4·16의 슬픔과 분노는 특별히 재수 없어서 재난을 당한 소수자의 것, 우는 자들만의 것, 루저들만의 것으로 밀려났다.

세월호가 침몰한 사건과 그 모든 배후의 문제를 다 합쳐서 세월호 제1사태라고 한다면, 

제1사태 직후부터 이 나라의 통치구조 전체가 보여준 붕괴와 파행은 세월호 제2사태다. 

 

이것은 또 다른 난파선이다. 제1사태와 제2사태는 양태는 다르지만 뿌리가 같아서 어느 것이 원인이고 어느 것이 결과인지 구분할 수 없는데, 과거의 제2사태가 오늘의 제1사태로 터져 나오고, 오늘의 제2사태가 미래의 제1사태를 예비하고 있다. 세월호 이준석 선장과 선원들은 제1사태 때 승객과 배를 버리고 먼저 탈출했다. 이준석 선장은 36년 형을 받았다. 세월호 제2사태에서도 많은 책임 있는 자들이 난파선을 버리고 탈출했거나, 탈출을 시도했고 이준석을 욕함으로써 자신들의 탈출의 오욕을 희석시키고 있다. 이 난파선은 아직도 표류 중이다. 세월호특별법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고통과 슬픔을 향해 얼만큼 가까이 다가가야 하는지, 어느 정도에서 발을 빼야 하는지를 놓고 다투다가 여야 합의는 거듭 난파되었고 야당의 리더십은 침몰했다. 대통령은 사건 당일 인명구조에 최선을 다하라고, 일곱 시간 동안 일곱 번이나 각급 지휘관에게 명령을 내렸다고 비서실장이 밝혔다. 그런데 현장의 구조 인력은 기우는 배에 접근하지 않았고, 해경 책임자는 구조 인력 투입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대통령의 명령은 대체 무엇인가. 명령이란, 복종되고 실현되기를 강요하는 의사 표시다. 대통령의 직무는 언어의 형식으로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고, 그 명령이 요구하고 있는 내용을 현실로 바꾸어놓는 것이다. 명령은 직무의 발동이고 실현은 직무의 완수다. 이것이 대통령과 9급의 차이일 것이다. 명령을 일곱 번 내렸다고 해서 대통령의 책임을 다한 것이 아니다. 명령은 허공으로 흩어졌는지, 대통령의 명령이 구중궁궐에 갇힌 대왕대비의 신음처럼 대궐 담 밖을 넘지 못한 꼴이니, 그 나머지 일들은 기력이 없어서 더 말하지 못한다.

 연초에는 세월호특별법에 따른 위원회가 결성되어 진상조사, 재난 예방과 대처, 희생자 위로 등의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세월호 사태는 제3의 국면으로 접어드는 셈이다. 위원회는 법이 정한 바에 따라 한시적인 기구가 되었지만, 이 같은 일에는 시한이 없어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세월호를 도려내고서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세월호를 내버리고 가면 우리는 또 같은 자리에서 물에 빠져 죽는다. 우리는 새로 생기는 위원회를 앞세워서, 세월호를 끝까지 끌고 가야 한다. 위원회가 동어반복으로 사태를 설명하지 말고 그 배후의 일상화된 모든 악과 비리, 무능과 무지,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공생관계를 밝히는 거대한 사실적 벽화를 그려주기 바란다. 그리고 유민이의 젖은 6만원의 꿈에 보답해주기 바란다. 나는 사실 안에 정의가 내포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사실의 힘에 의해 슬픔과 분노가 미래를 향한 희망의 동력으로 바뀌기를 바란다. 바르고 착한 마음을 가진 많은 유능한 인사들이 이 위원회에 참여해주기를 나는 바란다. 삶을 쇄신하는 일은 여전히 가능하다고 우리는 말해야 한다.

 

1.

베이비박스 처음 운영한 이종락 목사 “아이 맡기는 엄마들, 죄인 아니다”

 

 

[주간조선, 여다정 기자, 2023.07.30.  ]


 
지난해 6월 개봉한 영화 ‘브로커’는 베이비박스를 중심으로 연결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룬 로드무비다. 베이비박스에 아기를 맡기려다 다음 날 다시 찾으러 온 미혼모 수진, 베이비박스에 남겨진 아기를 훔쳐다 입양처를 찾아 돈을 받고 넘겨주는 불법 입양브로커 상현과 동수가 아기의 새 부모를 찾아나서는 여정을 그렸다. 영아 유기와 영아 매매를 소재로 하지만 감독은 작중 인물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영화의 끝에 소영은 자신을 쫓던 형사 수진에게 아기를 맡기며 “버려진 아이가 아니라 지켜진 아이”라고 말한다. 소영의 대사는 영화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처럼 들린다. 직접 아기를 키우지 못하는 상황에 놓인 미혼모 소영은 뱃속에 있을 때 아이를 지우지 않고 낳아서 아이가 안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베이비박스를 찾았고, 이마저 여의치 않자 좋은 부모를 찾으려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최근 영아유기 사건이 공론화되면서 베이비박스를 둘러싼 찬반 논란이 재점화됐다. 수원 영아시신 사건을 계기로 출생 미신고 영아에 대한 경찰 수사가 시작됐고, 출생 미신고 영아 가운데 상당수가 베이비박스에 맡겨진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베이비박스를 반대하는 이들은 “베이비박스가 아기를 버리는 손쉬운 선택을 하도록 유도해 영아 유기를 조장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베이비박스를 찬성하는 이들은 “법과 제도가 마련되지 않아 위기에 놓인 산모와 아이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엄마의 의지로 죽음으로부터 지켜진 아이.” 2009년 12월 국내에 처음으로 베이비박스를 만들어 14년간 운영해오며 현재까지 2,100여명의 아이를 보호한 주사랑공동체교회 이종락(69) 목사는 베이비박스에 남겨지는 아이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두려움과 죄책감, 고통 속에서 열 달을 보낸 엄마가 아이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출산을 결정하고, 태어난 아이가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결국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 베이비박스에 내려놓기까지의 과정이 결코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지난 7월 24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위치한 주사랑공동체 위기영아긴급보호센터에서 이 목사를 만났다.

- 베이비박스로 2,100여명의 아이를 지켜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연이 있다면. 

 

"10년 전쯤 아이를 맡기며 '제가 졸업할 때까지 목사님이 키워주실 수 있느냐'던 고등학생 엄마가 있었다. 졸업까지 1년8개월이 남은 상태에서 아기를 맡겼는데, 당시 아이들이 많아 장기간 센터에서 돌보는 게 불가능했지만 '꼭 다시 와 아이를 찾아가겠다'고 약속해 센터에서 돌봤다. 그리고 1년 뒤 아기 엄마와 친정엄마가 울면서 아이를 데리러 왔다. 센터에서 하는 돌잔치에 참석한 친모가 아이를 보고 너무 예쁘고 견딜 수가 없어서 결국 친정엄마에게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맡겼다고) 이야기를 한 거다. 두 사람이 감사를 전하고 아이를 데려갔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미혼모 지원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 미혼모 지원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된 건가. 

 

"베이비박스를 운영하면서 찾아오는 엄마들의 사연을 듣고 자연적으로 미혼모 지원을 시작하게 됐다.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두고 가려면 외부 계단을 올라 2층으로 올라와야 한다. 계단을 오를 때, 베이비박스 문을 열 때 소리가 난다. 그러면 24시간 대기하고 있던 보육사가 10초 안에 아이를 보호하고 상담사는 밖으로 나와 엄마를 만난다. 상담사가 거의 98%의 확률로 엄마를 만나게 되는데, 엄마들 대부분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 먼저 심리상담을 진행해 다친 마음을 치유할 수 있도록 하고, 엄마와 아이의 상황에 맞게 지원을 한다."

주사랑공동체 위기영아긴급보호센터가 기록한 통계에 따르면 2015년부터 지난 6월까지 베이비키트만 7,809개가 지원됐다. 아이를 다시 데려가는 모든 엄마에게 지원되는 베이비키트에는 육아용품뿐만 아니라 생필품, 음식, 아기 장난감 등이 함께 담긴다. 출산 및 의료지원은 369건, 주거 지원과 생활비 지원은 각각 84건, 745건 이뤄졌다.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코로나19가 유행하던 시기에는 210건의 코로나19 생계비 지원도 있었다.

- 많은 아이들을 보호하고, 미혼모에 대한 지원까지 하는데 정부의 지원은 전혀 없다고 들었다. 센터가 어떻게 유지되고 있나.

 

"우리의 계산으로는 (운영이) 안 된다. 정말 하나님이 하시는 거다. 교회 헌금과 후원자들의 후원, 봉사자들의 봉사로 운영된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모든 분들이 함께했기에 정부의 도움 없이도 많은 엄마들을 도울 수 있었다.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종교시설로 지정돼 있어 정부의 지원은 전혀 없다. 성직자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센터 밖에서 아이들이 그렇게 많이 죽어가는데도 정부가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는 것은 잘못됐다고 본다. 엄마와 아이에 대한 법, 제도, 행정적 지원이 보완되어야 한다."

- 정부가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이민 정책 등을 언급하고 있는데. 

 

"안전하게 출산할 수 있도록, 엄마가 아이를 키울 수 있도록 '선 지원 후 행정'을 해야 하는데 지금 정부는 '선 행정 후 지원'을 하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지원이 우선된다. (행정이 우선되면) 행정적 절차가 진행되는 한 달 반 동안은 아이를 그냥 안고 있어야 하는데, 그러면 아이를 굶겨야 하나. 그러니까 아이들이 죽고 파묻히는 것 아닌가. 정부의 책임이다. 그래놓고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두고 온 부모를 처벌만 한다. 처벌 위주로 가면 결국 출생률에 악영향만 미친다."

-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맡기는 것이 손쉬운 선택을 하게 만든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언덕을 올라 베이비박스에 와 보면 그런 말 못한다. 엄마가 아이를 버릴 것 같으면 아무 곳에나 버리지 강원도에서, 제주도, 여수에서 여기까지 아이를 데리고 와 맡기겠나. 아이에 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여기까지 온 거다. 칭찬해야 한다. 비난받을 일도, 멸시와 천대를 받을 일도 아니다. 편견을 가지고 손가락질하는 그런 문화가 사람을 죽이는 거다. 무엇보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 우선이다. 한 생명이라도 태어나게 하고, 태어난 아이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 최근 경찰의 영아 유기 수사는 어떻게 보는가. 

 

"국가가 국민을 보호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데, 오히려 책임을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맡긴) 엄마에게 돌리고 나쁜 사람으로 매도하고 있다. 엄마들이 철저한 죄인으로 산다. 아기를 낳는 게 왜 죄가 되어야 하나. 저출생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나라에 미래가 없는데 오히려 국가에 좋은 일 하는 것 아니냐. 최근 상황을 보면 참 안타깝고 답답하다."

- 경찰이 출생 미등록 영아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당초 입건 기준을 베이비박스 설치 기관 담당자와의 상담 여부로 검토하다가 '아이의 안전 여부'로 바꿨다. 

 

"아이를 살리자고 베이비박스까지 왔는데, 상담을 안 했다고 처벌한다는 거다. 그래서 엄마들 전화가 빗발쳤다. '목사님 저 두려워서 죽으려 한다'고. 한 엄마는 경찰에서 전화가 오는 바람에 이혼을 당했다. 그래서 경찰에 급하게 알렸다. '베이비박스에 맡겨진 아이들은 처벌하지 않는다고 빨리 공표해야 한다'고. '엄마가 죽고, 아이들이 죽으면 누가 책임지느냐'고. 그런 과정이 있었다."

- 통계를 보면 2013년을 기점으로 영아유기 사례가 급증했다. 

 

"2012년 8월 입양특례법이 개정됐다. 출생신고를 의무화·강제화하면서 출생신고 사각지대가 생겼다. 출생신고를 못 하는, 출생신고를 하면 불이익을 당하는 10대 아이들이 대표적이다. 입양특례법이 시행된 이후 베이비박스에 전보다 8~9배의 아이들이 들어왔다. 어떤 때에는 한 달에 28명, 하루에 한 명씩 아이가 들어왔다. 그런데 이제 더 큰 문제가 있는, 제2의 입양특례법이나 다름없는 출생통보제가 도입됐다. 사각지대는 그대로 놔두고, 출생신고를 못 한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의료기관에서 출산하기 어렵게 만들어 놨다. 사각지대에 몰려 있는 이 엄마와 아기들은 어떻게 하나. 병원 밖 출산이 더 많아질 것으로 우려된다."

국회는 지난 6월 30일 본회의를 열고 출생통보제 도입을 위한 ‘가족관계 등록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의결했다. 출생통보제는 아이의 출생 사실을 의료기관이 의무적으로 지방자치단체에 통보하도록 하는 제도다. 부모가 고의로 출생신고를 누락해 출생 미등록 영아가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는 취지다. 법안은 내년 7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 출생통보제 도입에 따라 보건복지부가 보호출산제(익명출산제)의 조속한 입법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는데, 논의가 조금 늦은 것 같다.

 

"독일 같은 경우를 보면 출생통보제를 시작하고 10년 동안 1000명이 넘는 아이들이 밖에서 죽었다. 그래서 익명출산제(임산부의 익명 출산을 보장하는 제도)를 도입해 보완했더니 영아 사망 사건이 줄었다. 우리 정부는 실패한 법안임을 뻔히 알면서도 출생통보제를 먼저 도입했다. 출생통보제가 국회에서 통과되자 잠을 못 잤다. 보호출산제가 먼저 시행됐어야 한다. 이제라도 도입되지 않으면 안 된다."

- 보호출산제가 친부모에 대한 아동의 알 권리를 침해한다는 비판도 있는데. 

 

보호출산제는 당초 우리 센터에서 법률 전문가들과 함께 논의하고 연구용역을 의뢰해 만든 법이다. 출생이 신고된 아이들은 입양을 갈 수 있기 때문에 이름을 밝히지 않고 가명으로, 익명으로 출생신고를 하자는 것이 보호출산제다. 기록은 아동권리보장원에 보관되고 아이들이 성인이 돼 부모를 찾고 싶다고 하면 법원에 신청해 부모를 만날 수 있다. 아이가 부모를 찾고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충족돼 있다.”

 

 

 

 

 

2.

"산에서 아기 낳고 묻으려다…너무울어 교복에 싸서 데려왔어요"

 

 

< 연합뉴스,  윤근영 기자, 2023-08-08 >

 


"제주서 16시간 아기 안고 서울 베이비박스로…여중생 펑펑 눈물"
"베이비박스는 아기 살리는 곳"…이종락 주사랑공동체 교회 목사


편집자 주= 베이비박스를 운영하는 이종락 목사의 삶 인터뷰는 두 차례로 나눠 송고합니다. 이번 첫 번째 인터뷰 기사는 인생 스토리와 경험담 중심이고, 조만간 두 번째 인터뷰 기사가 정책적 분야에 초점을 맞출 예정입니다.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기자= "수업 중에 진통이 와서 학교 근처 산에 올라가 아기를 낳고는 땅에 묻으려 했던 여중생. 제주에서 배 타고 인천에 도착한 뒤 서울 베이비박스로 16시간 걸려 아기를 데려온 온 소녀. 베이비 박스가 없다면 이런 아기들은 지금 살아 있을까요?"

이종락(69) 주사랑공동체교회 담임목사는 지난 2009년 베이비박스를 만들고 지금까지 운영해온 사람이다.

지난 3일 서울 관악구 난곡로 베이비박스 사무실에서 이 목사를 만났다.

이 목사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베이비박스는 사람을 죽이는 곳이 아니라 살리는 곳"이라면서 "생명을 살리는데 불법, 합법 어쩌고 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했다.

생명을 살리는 데 집중하는 그는 젊은 시절에는 지금과 다른 삶을 살았다.

학교 다니기 싫다며 고교를 중퇴했고, 술을 안 마시는 날이 거의 없었다. 입이 거칠었으며, 노는데 집중했다. 농촌에 살면서 모를 심어본 적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버릇을 고치겠다면서 멍석말이할 정도였다.

그런 그는 1987년 아들 은만 씨가 중증 장애아로 태어나고,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서 완전히 다른 삶을 시작했다.

자신의 전신마비 아들 은만이도 보살피기 어려운데, 중증 장애 아이들을 비롯해 많게는 19명의 아이를 직접 자기 집에서 키웠다.

그는 지난해 9월 미국 최대 생명보호단체인 라이브액션이 주는 '올해의 생명상'을 받았다


-- 어디서 태어났나.

▲ 1954년 9월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가지리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 아버지는 어떤 분인가.

▲ 평화로우신 분이었다. 자녀들한테 간섭을 안 하셨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분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마을 사람들한테 존경받았다. 아버지는 일본에 보국대로 끌려갔다가 돌아와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셨다. 좀 더 어릴 때는 우리 집안이 운영하는 서당에 다니셨다. 우리 집은 땅이 많은 편이었다. 머슴이 3명이었고 정미소도 운영했다.

-- 어머니는 어떤 분인가.

▲ 정이 많으셨다. 굶는 집에 보리쌀을 몰래 주시곤 했다. 당시에는 보리쌀도 귀했다. 나의 친구들이 풀뿌리를 삶아서 먹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아이가 아픈 집이 있으면 갈아서 먹이라고 쌀을 주시곤 했다. 어머니가 정이 많은 것은 할아버지의 영향인 듯하다. 마을에 시집온 여자분의 친정아버지가 찾아오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 분이 딸 집에 묵기가 여의찮으면 할아버지가 우리 집 사랑방에 모셨고, 음식 대접까지 하셨다. 우리 집에 3년 정도 머물렀던 분도 있었다.

-- 어릴 때 독서를 많이 했나.

▲ 독서는 거의 못 했다.

-- 시골이어서 책이 없었기 때문인가.

▲ 독서에도, 공부에도 취미가 없었다.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것 외에는 공부하지 않았다.

-- 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나.

▲ 나의 취미는 노래 부르는 것이었다. 노래 부르고 노는데 다른 아이들보다 신바람이 있었다. 나의 꿈은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 부모님 농사일은 거들어줬나.

▲ 나는 일하지 않았다. 머슴이 3명이나 있었고, 농번기 때에는 마을 사람들이 도와줬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우리 논에서 모내기할 때도 나는 논에 들어가서 모를 심어본 적이 없다. 논두렁에 앉아 장구를 치면서 노래를 불렀다. 모내기하는 사람들이 힘들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못줄을 넘기면서 나의 장구와 노랫소리에 맞춰 합창했던 기억이 난다.

-- 중고교 시절을 어떻게 보냈나.

▲ 나는 집에서 4㎞ 떨어진 곳에 있는 대성중고등학교에 다녔다. 중학교를 마치고 고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만뒀다. 당시 외삼촌이 고등학교의 교감이었고. 우리 집안 아저씨가 중학교 교감이었다. 6촌 형은 중학교 체육선생으로 학생지도부장이었다. 나는 학교에 가면 불량하다고 많이 혼났는데, 더는 참지 못하고 학교에 가지 않았다.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노는 데 집중했다. 싸움질도 했고, 입도 거칠었다.

-- 집안 어른들이 보고만 있었나.

▲ 나는 마을에서 멍석말이를 당한 적이 있다. 마을 사람들이 "저놈은 구제 불능이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안 되고, 만날 술만 먹고 놀기만 한다"면서 멍석으로 말아놓고는 지게 작대기로 때렸다. 아프지는 않았다. 흉내만 내는 정도의 구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체가 상당히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고교 학력은 나중에 직장 다니면서 검정고시로 취득했다.

-- 정미소에서도 일한 적이 있다고 하던데.

▲ 아버지가 콩나물공장, 학교 서무과 등에 취직을 시켰는데 나는 적응하지 못하고 그만뒀다. 아버지는 할 수 없이 정미소에서 일하라고 하셨다. 어느 날 아버지가 순식간에 정미소 벨트에 옷이 끼어서 3∼4m 들어 올려졌다. 땅바닥에 강하게 떨어지면 아버지는 바로 돌아가실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나는 재빨리 발동기를 껐는데, 아버지의 갈비뼈와 다리뼈가 모두 부러졌다. 아버지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는지, 우리 형제들을 모아놓고 유언 같은 말씀을 하셨다. 다른 형제들한테는 공부만이 살길이라고 하셨는데, 나한테는 정미소를 잘 운영하라고 하셨다. 그 후 아버지는 기적적으로 회복하셨다.

-- 서울로 올라온 계기는.

▲ 아버지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나는 다시 이전의 자유분방한 생활로 되돌아갔다. 친구들과 3인조 밴드 또는 5인조 밴드를 만들어 이 마을 저 마을에서 열리는 음악 콩쿠르대회에 나갔다. 상도 받았고, 사회를 보기도 했다. 그러다 어떤 마을의 여성과 스캔들이 생겨 도주하다시피 서울로 왔다.

-- 상경해서 어떤 일을 했나.

▲ 서울에는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많았다. 노래로 먹고살기 힘들다고 판단해 부천 소사구 송내동의 유명 가방공장에 취직했다. 어느 날 회사 야유회 장소로 가는 버스 안에서 술을 잔뜩 마셨던 나는 버스 안을 뛰어다니며 옆 창문과 천장 형광등을 부쉈다. 버스 창문은 잘 안 깨지는데, 나는 순발력 있게 깨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 나의 난동 때문에 야유회는 취소됐다.

-- 바로 해고됐나.

▲ 그렇다. 회사에서 쫓겨난 나는 성수동 원심분리기 제조 회사로 옮겼다. 이 회사에서 봄놀이를 간 적이 있었다. 사장이 "종락씨, 노래 좀 한다고 하는데 나와서 한 곡 해봐"라고 했고, 노래를 들은 사장은 나를 칭찬하면서 술을 따라줬다. 회사 이사들도, 부장들도 연이어 술잔을 건넸다. 20곡 정도를 불렀을 때쯤 나는 인사불성 상태로 취했다. 나는 결국 사고를 쳤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당신이 뭔데 자꾸 노래시키느냐"면서 사장에게 달려들었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끌어내려 집단 구타를 했고, 그때 고막이 파손됐다. 갈비뼈 4개도 골절됐다. 나는 그 회사에서 해고됐다.

-- 주량이 얼마나 되기에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나.

▲ 친구가 군대 갈 때 가장 많이 마신 것 같은데, 2ℓ짜리 큰 병 소주와 그보다 작은 소주 3병을 마셨던 기억이 있다. 나는 술을 잘못 배웠다. 어른들한테 술을 배워야 했는데, 불량스러운 친구들과 술을 먹다 보니 나쁜 버릇이 생긴 듯하다. 직장 다닐 때는 옆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에 사라지고 나 혼자 남아있기도 했다. 나의 술주정을 우려해 집으로 가버린 것이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내가 한밤중에 술 먹고 우리 집 현관문을 찾지 못해 노래를 부르면서 집주변을 13바퀴 돌기도 했다고 한다.

-- 직장생활은 그것으로 끝났나.

▲ 나의 술주정이 소문나서 취직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구류를 만드는 회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 회사에 이력서를 낸 지 한 달 만이었다. 아직 취업하지 않았으면 같이 일을 하자고 했다. 나는 이 회사에서 열심히 일을 했기에 사장으로부터 인정받았다. 나는 어느 날 게으름을 피우는 후배 직원에게 훈계의 말을 하다 싸움이 나고 말았다. 나는 이 일로 해고될 줄 알았다. 나를 부른 사장은 예상과 달리, 교회에 다닐 것을 권했다.

-- 교회에 다니면서 건전한 삶을 살았나.

▲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서 회개를 많이 했다. 서서히 변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술과 담배도 끊었다. 오랫동안 술ㆍ담배에 파묻혀 살았는데, 그때부터 술 냄새만 맡아도 역겨웠고, 담배 연기가 있으면 머리가 아팠다.

-- 둘째인 은만씨도 본인 삶에 영향을 줬다고 하던데.

▲ 1987년에 은만이는 얼굴 크기의 혹을 얼굴에 달고 태어났다. 마치 얼굴이 두 개인 듯했다. 그 혹은 임파선염 때문에 생긴 것이었는데. 곧바로 악성으로 변했다. 태어난 지 4개월이 됐던 어느 날 아이의 열이 41.9도까지 올라갔다. 그때 시신경과 고막이 파손됐다. 구급차를 불러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으나 이미 호흡이 끊어진 상태였다. 의사들은 심폐소생술을 하다 포기하려 했으나 나는 울면서 다시 한번 시도해달라고 매달렸다. 기적적으로 아이는 다시 숨을 쉬게 됐다. 그러나 뇌세포가 죽어서 말을 할 수 없었다. 걸어 다닐 수도, 밥을 스스로 먹을 수도, 대소변을 가릴 수도 없었다. 은만이는 14년간 침대에 누운 채 병원 생활을 했다. 우리 부부와 첫째 지영이 등 가족은 아예 병원 침대 밑에서 생활했다. 은만이는 2019년 33세의 나이에 하늘나라로 갔다. 나는 은만이를 통해 아픈 사람, 힘든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 병원에서 '기도 아저씨'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고 하던데.

▲ 병원에 살다시피 하면서 아픈 아이들을 위한 기도를 많이 했다. 뇌암을 앓고 있는 초등학교 6학년생 남자아이가 있었다. 경기도 파주에서 온 아이였다. 나는 기도원에서 그 아이를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얼마 후 기적이 일어났다. 그 아이가 뇌 MRI 검사를 받았는데, 암이 사라진 것이었다. 보름 후에는 춘천에서 시각장애 아이가 병원에 왔다. 그 아이의 외할아버지는 나한테 기도를 부탁했다. 온 가족이 하나님을 믿어야 기도해줄 수 있다고 했더니 그분은 사돈의 8촌까지 모두 8명을 데리고 와서 기도에 참여했다.

-- 그 아이의 병은 나았나.

▲ 아이 가족들과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놀랍게도 그 아이의 시각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원래 그 아이는 시각장애를 고치려 한 것이 아니었다. 애당초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봤었다. 단지 눈의 통증을 해결하기 위해 병원에 왔는데, 시각이 살아난 것이다. 또 다른 기적이었다.

-- 그 이후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나.

▲ 이런 일이 일어나면서 은만이가 있던 5인실 병실에 사람들이 몰렸다. 저녁 8시 기도 시간에 50여 명이 오기도 했다. 병원 측은 기독교 병원도 아닌데 찬송가를 부르면 어떻게 하느냐고 항의했다. 나는 병원 측에 간곡히 부탁했고, 우리는 어린이병원 로비에서 예배를 볼 수 있게 됐다.

-- 중증 장애 아이들 여러 명을 데리고 살게 된 계기는.

▲ 은만이가 입원했던 병원의 옆 병실에 상희라는 아이가 있었다. 전신 마비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이였다. 어느 날 그 아이의 외할머니가 나를 보자고 했다. 83세의 그 할머니는 사흘간 나를 유심히 살펴봤다면서 자기 손녀딸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자기는 멀지 않아 세상을 뜰 것 같다고 했다. 아이의 엄마와 언니는 정신 지체자였고, 아이 아빠는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했다. 내가 머뭇거리자 아이를 맡아주면 예수님을 믿겠다고 했다. 열심히 전도하는 내가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었다.

-- 상희를 키우는데 아내도 동의했나.

▲ 나는 그 할머니에게는 수락한다고 말했지만 아내한테는 그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은만이 한 명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내는 연약한 몸으로 분식집을 운영하면서 오토바이 배달까지 하고 있었다. 고민하던 나는 상희가 우리 집에 오기 1주일 전에서야 용기를 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서 아내한테 상희 이야기를 했다. 그 순간 아내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나를 쳐다봤다. 날벼락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하나님이 하라고 그랬으면 해야죠" 아내의 말이었다.

-- 상희를 시작으로 그 후에 4명의 아이를 또 데려오지 않았나.

▲ 진료를 위해 상희를 병원에 데리고 갔다. 의사는 아이가 많이 회복된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 상희가 우리 집으로 올 때는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우리와 함께 병원에 진료받으러 갔을 때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목도 가눌 수 있었다. 그 의사는 진료 후 우리 부부를 잠깐 보자고 했다. 4명의 아기가 병원에 2년 6개월∼3년간 방치돼 있으니 맡아달라고 했다. 부모들은 돈 벌러 간다고 나간 후에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당황스러워서 답변을 못 했다.

-- 4명의 아이는 데려오지 않기로 했나.

▲ 아니다. 동행했던 아내가 의사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동의 표시를 했다. 나는 아내한테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고 물었다. 아내는 "아이가 보호자 없이 방치돼 있다고 하잖아요?"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은만이를 포함해 모두 6명의 아이를 우리 집에서 키우게 됐다. 우리 집 식구는 계속 늘어나 19명이 함께 생활한 적도 있다. 지금은 장애가 있어 누워있는 4명의 아이를 포함해 10명의 아이가 서울 금천구 시흥동 자택에서 살고 있다.

-- 베이비박스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 우리 집 주변에 아이를 놓고 가는 사람들이 생겼다. 내가 장애 아이를 정성껏 돌본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대문 앞, 주차장, 공중전화부스, 공원 입구 등 우리 집 근처 여기저기에서 아기가 발견됐다. 2007년 4월 새벽 3시쯤 우리 집 전화벨이 울렸다. 아내가 전화를 받았는데 상대방 남자는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우리는 곧바로 문밖으로 달려갔다. 계단 아래에 박스가 있었고, 고양이가 그곳에서 후다닥 달아났다. 박스에서는 굴비 냄새가 많이 났다.

-- 박스 안에 아기가 있었나.

▲ 아이가 시퍼렇게 식은 상태로 누워 있었다. 갓 세상에 나온 강아지 새끼처럼 가슴만 폴짝폴짝 뛰고 있었다. 우리가 조금만 늦었다면 고양이로부터 아기가 피해를 볼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리는 아기를 안고 들어와 산소호흡기로 산소를 공급하고, 주사기를 이용해 한 방울씩 우유를 먹였다. 그 아기에는 온유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여자 아기였다.

-- 베이비박스에 대한 아이디어는 어떻게 갖게 됐나.

▲ 나는 이런 일을 겪으면서 뭔가 조치를 하지 않으면 죽는 아기가 생길 수 있다는 걱정이 들었다. 어느 날 국민일보 외신기사를 통해 체코의 베이비박스 소식을 접하게 됐다. 그 나라 관련 기관에 메일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으나 답변이 없었다. 나는 철공 일을 하는 친구 집사한테 부탁해 베이비박스를 설치하게 됐다.

-- 아이를 맡긴 사람들의 사연 중 기억에 남는 것은.

▲ 여중학교 2학년생이 제주도에서 왔다. 그 아이는 음란물을 본 남자친구가 "우리도 한번 해보자"고 해서 결국 임신하게 됐다고 한다. 아이는 산달에 이르러 엄마와 아빠가 출근하고 없는 시간에 혼자 집에서 출산했다. 남자친구는 임신 소식을 듣고는 이미 달아난 상태였다. 아기 울음소리가 나자 옆집 아주머니가 와서는 아이 낳은 흔적을 치워줬다. 아주머니는 부모에게 알리지 않겠다고 산모에게 약속했고, 어린 산모가 서울 베이비박스로 가겠다고 하자 제주 부두까지 승용차로 태워줬다. 여객선 안에서 아기는 배고파 울었다. 이를 본 어떤 아기 엄마가 젖을 먹여줬다. 그 중학생 산모는 인천에 도착한 뒤 서울의 이곳까지 왔는데, 모두 16시간 걸렸다. 나는 "엄마가 아기를 살렸다"면서 여기까지 온 것을 칭찬해줬다. 그 여중생은 펑펑 울었다.

-- 공중화장실에서도 아기를 낳는 일이 있나.

▲ 어떤 미혼모는 아기를 공중화장실에서 몰래 낳고는 변기에 아기를 빠트린 뒤 물을 내렸다. 아기가 내려가지 않고 크게 울자 정신이 번쩍 들은 미혼모는 아기를 탯줄째 교복에 싸서 이곳에 찾아왔다.

-- 아기가 변기로 내려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인가.

▲ 그 정도로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이런 산모들은 우울증을 겪고 있는 경우가 많다. 조현병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미혼모도 있다.

-- 산에서 몰래 아이를 낳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왜 산으로 가나.

▲ 아기를 낳자마자 산에 묻을 생각으로 산에 간다. 한 여학생은 수업 중에 진통이 왔다. 화장실에 간다고 교실에서 빠져나온 그 여학생은 인근 산으로 올라갔다. 물이 흘러서 움푹 파진 곳에 아기를 묻기로 하고 그 주변을 정리해 놓은 뒤에 어렵게 아기를 낳았다. 아이를 묻으려는 순간 갑자기 아기가 울었다. 양수가 입으로 들어가 울지 못하던 아기가 캑캑하면서 울기 시작한 것이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학교까지 들리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아이의 울음소리는 컸다. 아기 엄마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몸에는 여전히 하혈이 있는 상태에서 교복으로 아기를 싸안고 이곳에 달려왔다.

-- 복대를 해도 만삭이 되면 표시가 날 텐데.

▲ 나이가 어린 사람이 갖는 아기의 몸집은 작은 편이어서 사람들이 임신 사실을 모를 수도 있다. 몸에 살을 찌워서 임신 사실을 은폐하기도 한다. 아기를 가지면 엉덩이가 뒤로 나오는 자세가 되는데, 일부러 이런 모습을 숨기려 애쓰는 소녀도 있다.

-- 병원에서도 아이 낳는 게 힘든데, 어떻게 혼자 아이를 낳나.

▲ 애 낳는 것은 죽기를 각오하는 일이다. 산모가 출산하다 호흡곤란으로 죽는 경우도 있다. 몰래 아이를 낳는 엄마는 이를 악물고, 아파도 소리도 못 지른다. 그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 아기 엄마가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도 하나.

▲ 어떤 미혼모는 고시원에서 아기를 낳았다. 3층에서 아기를 던지고, 자신은 5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할 계획까지 구체적으로 세웠다. 자기는 3층보다는 5층에서 투신해야 사망에 이를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 계획을 결행하려는 순간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마침 TV에서 베이비박스에 관한 보도가 나왔는데, 이를 본 친구가 아기를 베이비박스에 데려가면 보호해준다고 알려줬다. 그 아기와 산모는 그렇게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 아기들이 죽을 수 있는 상황이 많은가.

▲ 어떤 20대 남자는 여수에서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아기를 낳았다. 엄마는 아기를 낳은 지 사흘 만에 가출했다. 일가친척이 전혀 없는 그 아빠는 혼자 아기를 키울 수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트럭을 빌려서는 아기를 태우고 서울 베이비박스로 오다가 휴게실에서 잠깐 쉬었다. 그때 굳이 베이비박스까지 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빠는 아기를 포대기로 싸서 휴게소 뒷산에 놓고 내려왔다. 추운 겨울날이었다.

-- 아기가 숨졌나.

▲ 산에서 내려와 트럭의 시동을 끄고 주유 중이던 그에게 아기의 울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하는 듯했지만, 그 아빠에게는 아기 울음소리가 뚜렷했다. 다시 산에 올라간 아빠는 울면서 발버둥 치는 아기를 보고는 마음을 바꿨다. 그는 아기를 이곳 베이비박스에 데려왔다. 아기 엄마는 3개월 후에 집으로 되돌아왔고. 그 아빠는 아기를 다시 데려갔다. 아빠는 아기를 찾을 기회를 줘서 고맙다면서 많이 울고 갔다.

-- 아기가 상처를 입은 상태로 오는 경우도 있나.

▲ 어떤 아기는 목에 시퍼런 멍이 든 상태에서 온다. 한 미혼모는 친구 자취방에서 아기를 낳았는데, 아기가 너무 큰 소리로 울자 자기도 모르게 아기의 목을 조였다고 했다. 자칫하면 아기가 죽을 뻔했다.

-- 베이비박스가 합법적 시설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죽어가는 아이를 보호하고 살리는 일이 왜 불법인가? 생명을 살리는데 합법, 불법을 따지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최근 조사에서 드러났듯이 이곳에 오지 못한 아이들은 파묻히고, 살해당하고, 유기되고, 불법 인신매매단에 의해 팔려 간다.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하면 빨리 119로 신고하는 것이 당연하다. 불난 것을 보고 구경만 하고 있으면 안 된다. 먼저 보는 사람이 신고해야 한다.

-- 아기를 낳은 위기 산모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는.

▲ 지금도 임신 상태에서 두려움에 떠는 엄마들이 있다. 걱정하지 말고 이곳에 왔으면 한다. 베이비박스는 여러분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엄마도 살고, 아기도 살아야 한다. 여기에 와서 상담도 하고, 위로도 받고, 치료도 받았으면 좋겠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유 ‘자선 혹은 후원’…“사람들에게 내 삶이 멋있었다고 전해주오”

 

 

< 매일경제, 유경희의 ‘그림으로 보는 유혹의 기술’, 2023.07.14 >




동양학에서는 운명을 바꾸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한다. 첫 번째가 자선이고, 두 번째가 풍수고, 세 번째가 명상 혹은 독서라고. 오래전 어떤 기사에서 본 기억이 난다.

한 중년 남성에게 갑자기 유산이 상속됐다. 전혀 모르고 있던, 조상이 물려준 땅이 발견돼 큰돈이 생기게 된 것. 남자는 그 막대한 돈을 한 대학에 몽땅 기증했다. 그러면서 그가 한 말.

“별거 아닌데요. 저는 영원히 갖는 법을 선택한 겁니다.”

충격이었고, 감동이었고, 어떤 예술 작품보다 사람이 더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구겐하임과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이름만으로 무엇이 떠오르나? 금수저 출신들의 유산과 상속에 관련된 드라마틱한 에피소드다.

먼저 위대한 현대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년)의 자선 행보를 살펴보자.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아포리즘으로 유명한 영미분석철학과 일상언어학파 선구자인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카네기’로 불리는 철강 재벌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냥 부자 정도가 아니라 억만장자 가문 태생으로, 부친은 오스트리아 경제사의 주요 인물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미술품 수집가로도 유명했는데, 로댕을 비롯해 클림트와 빈 분리파를 후원했다. 어머니는 대단한 음악 애호가로 브람스, 슈만, 말러 등이 집안을 드나들며 연주했고, 넷째 형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됐다. 이처럼 외형만 보면 전혀 부러운 것 없는 삶을 살았을 것 같지만, 이 억만장자 가족에는 우울증과 자살과 광기의 기운이 맴돌았다. 첫째, 둘째, 셋째 형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피아니스트였던 막내 형은 전쟁에서 한쪽 팔을 잃었다. 아마 형들의 죽음은 진로 문제로 인한 아버지와의 갈등 그리고 동성애 문제 등이 그 원인이었던 것 같다. 비트겐슈타인도 내내 우울과 자살 욕구 그리고 동성애 갈등에 시달렸다.

비트겐슈타인 역시 아버지의 바람으로 적성에 맞지 않는 공학도의 길을 걸어왔지만, 우연히 ‘수학 원리’라는 책을 보고 감명을 받아 저자를 찾아간다. 바로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였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에게 철학을 배우다 더 이상 배울 게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홀로 철학을 연구하겠다며 노르웨이 시골의 오두막집에서 은둔했다. 그러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전쟁에 참전했고 여기에서도 철학 일기를 쓰며 연구했다. 그리고 포로 신분으로 ‘논리철학논고’ 집필을 완성한다. 포로 석방 후 철학적 문제를 해결했다며 은퇴(?)를 선언한다. 이후 비트겐슈타인은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던 중 아이들을 때렸다는 이유로 파면당했고,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정원사로도 일했으며, 2차 세계대전 때는 런던의 병원에서 약품 배달부로 일했고, 케임브리지대 교수로도 근무했다.

무엇보다 1913년 스물셋의 비트겐슈타인은 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엄청난 유산을 상속받는다. 그는 유럽에서 제일가는 부자 중 한 사람이 됐다. 그렇지만 그 재산 전부를 예술가와 형제들에게 줘버린다. 재능은 있으나 가난한 예술가에게 지원할 것을 ‘횃불’지 편집자에게 일임하고 기부했다. 수혜자로는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게오르크 트라클, 표현주의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 건축가 아돌프 로스 등이 있다. 정작 자신은 방 한 칸과 몇 개의 가구가 전부였는데, 이유인즉슨 “가파르고 높은 산을 올라가려면, 무거운 배낭은 산기슭에 놔두고 출발해야 한다”는 것. 가파른 산이란 자신이 추구하는 세계에 대한 은유였을 것이다.

평생 자살 충동에 시달렸던 비트겐슈타인은 자살하지 않은 것을 부끄러워하는 동시에 그것을 비열한 행위며 성급한 자기방어라고 생각하는 한편, 동시에 상황이 얼마나 끔찍했으면 불시에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공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런 그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참전했다. 원래는 탈장 때문에 징집에서 면제됐으나, 강렬하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 즉 죽음과 가까이 마주하려는 욕구로 인해 군복무를 지원했다. 여러 곳을 전전하다 마침내 최전방에서 가장 위험한 곳, 포격 대상이 될 첫 번째 장소인 관측소에 배치되도록 요청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암에 걸렸다는 말에 너무나 기뻐했던 비트겐슈타인은 62세인 1951년 세상을 떠나며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사람들에게 내 삶이 멋있었다고 전해주오.” 

 



또 다른 별난 후원가는 페기 구겐하임(1898~1979년)인데, 사실 그녀의 빛나는 예술가 지원은 아버지를 벤치마킹한 행위였다. 페기는 유명한 솔로몬 구겐하임의 조카이자 미국이 현대 미술의 중심지가 되도록 만든, ‘미술계의 쉰들러’라고 불릴 수 있는 존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미술가들을 망명시킨 주역이기 때문이다. 페기는 전운이 짙어지자 모두가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향하려고 했던 1940년 12월, 유대인 유럽 탈출을 위한 비상구조위원회에 50만프랑을 기부해 유대인 구조 작전을 실질적으로 지원했다. 당시 그녀를 통해 뉴욕에서 피난처를 찾은 미술가로는 샤갈을 비롯해 이브 탕기, 앙드레 마송, 쿠르드 셀리히만 그리고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이르지만 이혼하게 된 막스 에른스트 등이 있다. 페기는 가난한 예술가들이 뉴욕에서 정착할 때까지 1년 동안 매달 200달러씩을 제공했다. 당시로선 적지 않은 돈이다.

이런 페기의 예술가 후원 유전자는 아버지 벤자민에게서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이런 아버지는 페기가 사춘기였을 때 그 유명한 타이타닉호 침몰로 사망한다.

형제 중 여성 편력이 가장 심했던 페기의 아버지는 특별히 애인들에게 후한 인심을 베푸는 것으로 유명했다. 페기는 훗날 기자들에게 “나는 아직도 여기저기 내 아버지의 애인들에게서 유산을 물려받는다. 아버지가 그 여자들을 위해 신탁계정을 개설해놔 그들이 죽으면 나에게 돈이 돌아온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실종은 심각한 트라우마였지만, 몹시 사랑했고, 듬뿍 사랑받았던 페기에게 아버지에 대한 환상을 유지하는 데 최상의 기제였다. 페기의 남성 편력은 아버지의 유산이라는 의미다. 그것도 예술가 성향이 다분했던 아버지처럼 그녀가 만난 남자들은 사업가는 단 한 명도 없었고, 한결같이 문학가와 예술가였다. 그렇게 페기의 아버지와의 동일시는 예술과 사랑, 남성(예술가)과 후원으로 합치돼 미술사에 영원히 남게 됐다.

1.

암세포 성장 비밀 푼 헤이기스, 호암상 수상…

 

< 중앙일보, 고석현 기자 , 2023.06.01  >



“과학은 도전이라고 생각해요. 정답이 없는 질문에 신기술을 개발하고, 그 답을 찾아가는 게 과학자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연구 여정에서 새로운 발견은 ‘퍼즐 맞추기’ 같아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미지의 영역을 한 조각씩 맞춰나가는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1일 ‘제33회 삼성호암상’ 의학상을 받은 마샤 헤이기스(49) 미국 하버드대 의대 교수는 중앙일보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헤이기스 교수는 ‘세포 내 암모니아와 같은 노폐물이 암세포를 만들고 성장시킨다’는 암세포의 증식을 세계 최초로 규명한 공로를 인정받아 올해 삼성호암상을 받았다.

 


“가장 큰 영감 준 사람 어머니 ‘김순자’”


헤이기스 교수는 “암세포가 암모니아 같은 체내 노폐물을 활용해 더 많은 아미노산을 만들어내며 이를 바탕으로 더 성장한다”며 “T세포 같은 면역세포가 암과 맞서 싸운다. 미토콘드리아는 암세포뿐 아니라 암과 맞서 싸우는 면역세포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미토콘드리아의 유전자 변형으로 암세포를 공격하는 면역세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찾아냈다”고 설명했다.

헤이기스 교수는 어머니가 한국인인 한국계 미국인이다. 그는 “연구자로 성장하기까지 가장 큰 영감을 준 사람은 어머니 ‘김순자’”라며 “팀 워크를 소중하게 여기는 법을 배운 게 가장 많은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미 공군인 아버지가 한국에서 복무할 때 어머니를 만났고, 5살 때까지 우리 가족은 의정부 할머니 집에서 살았다”며 “대가족이 함께 살았기 때문에 팀 워크를 몸으로 자연스레 익히게 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또한 “저는 앞으로도 ‘과학자’라는 타이틀로 기억되고 싶다. 미지의 세계에서 새로운 생물학적 발견을 할 수 있다면 매우 영광일 것 ”이라며 “여성·소수자 등이 과학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누구나 과학적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다. 과학계의 평등성을 높이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1일 시상식…예술상은 피아니스트 조성진 


올해 삼성호암상 시상식은 1일 서울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에서 열렸다. 지난해에 이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직접 참석해 수상자와 가족들을 격려했다. 이 회장은 ‘회장 취임 후 첫 시상식 참여 소감’ ‘호암재단 기부 이유’ 등의 취재진 질문에 답변 없이 시상식장에 입장했다. 김기남 SAIT(옛 삼성종합기술원) 회장, 경계현 삼성전자 DS(반도체)부문장(사장), 노태문 삼성전자 MX(모바일경험)사업부장(사장), 박학규 DX(디바이스경험)부문 경영지원실장(사장) 등도 참석했다.

헤이기스 교수를 비롯해 ▶과학상 물리∙수학부문 임지순 포스텍 석학교수, 화학∙생명과학부문 최경신 위스콘신대 교수 ▶공학상 선양국 한양대 석좌교수 ▶예술상 조성진 피아니스트 ▶사회봉사상 사단법인 글로벌케어 등이 상을 받았다. 예술상은 신수정 서울대 명예교수가 대리수상했다. 부문별 수상자에게는 상장과 메달, 상금 3억원이 수여됐다.

삼성호암상은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故) 이병철 창업회장의 인재제일과 사회공익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0년 이건희 선대회장이 만들었다. 과학·공학·의학·예술·사회공헌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보여 글로벌 리더로 인정받는 국내외 한국계 인사를 발굴해 시상한다. 올해까지 33회 동안 170명의 수상자에게 총 325억원의 상금을 수여했다.


이 회장 제안에…과학 분야 상 두 개로 늘려 


이재용 회장이 2021년 “국가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지원을 확대하자”고 제안해 과학 분야 상이 한 개 부문에서 물리·수학, 화학·생명과학 등 두 개 부문으로 늘기도 했다. 이 회장은 지난해 10월 이건희 선대회장 2주기 추모식에서 “성별과 국적을 불문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며 “최고의 기술은 훌륭한 인재들이 만들어 낸다”고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재계 관계자는 “이건희 선대회장이 삼성호암상을 제정해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 제고에 기여했다면 이재용 회장은 그 뜻을 이어받아 국가 기초과학 육성을 위해 상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것”이라며 “이날 시상식에 참석해 삼성의 ‘뉴 리더’로 사회와 함께하고, 선대의 사업보국 철학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고 평가했다.

 

 

2.

삼성이 픽한 암 치료법, 암모니아 대사 주목
[바이오 인물] 마샤 헤이기스 하버드의대 교수

 

< Biowatch, 원종혁 기자, 2023.04.10 >

 


올해 삼성호암상(호암재단 주최) 의학상 수상자에 마샤 헤이기스(49) 미국 하버드의대 교수가 선정됐다.
헤이기스 박사는 세포 대사활동의 노폐물로 알려진 암모니아를 암 세포가 영양분으로 재활용함으로써 암 세포의 증식을 가속화한다는 사실을 세계 최초로 밝혀낸 공로를 인정받았다.

모친이 한국계인 헤이기스 박사는 암 대사학 분야에 세계적인 전문가로 손꼽힌다. 그가 진행한 연구는 암 발생과 증식에 관한 새로운 연구 방향을 제시하고, 세포내 암모니아 재활용 억제를 통한 새로운 암 치료법의 개발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에 따르면, 동물실험 결과 유방암 세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체내 암모니아 폐기물을 재사용할 수 있다는 결과를 발표한 것이다. 암모니아의 존재는 배양된 유방암 세포의 증식을 가속화하는 반면 암모니아 대사를 억제하면 종양 성장을 억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성장이 빠른 암세포들은 영양분을 지나치게 소비하고 많은 양의 대사 폐기물들을 생성하게 된다. 이러한 부산물 중 하나인 암모니아는 혈관을 통해 간으로 이동해 독성이 덜한 물질로 전환되고 요소 상태로 배설된다.

하지만 종양에는 혈관이 거의 없기 때문에 암모니아가 독성이 있는 농도로 축적될 수 있다는 것. 이는 암 발생에 있어 암모니아 대사를 이해하고, 종양성장을 늦추기 위한 새로운 치료법을 발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현재 헤이기스 박사는 하버드의대 교수로 미국 다나파버 하버드암센터 연구원 및 폴글렌 노화생물학연구센터 연구단장 등을 맡고 있다.

 

 

3.

[자랑스런 한인] ‘암 정복’ 가능성 연 하버드 의대, 마샤 헤이기스 교수
By KOREAN LIFE -June 18, 202319 0


가장 큰 영감을 준 사람은 어머니 김순자

 


“제 부모님은 과학자도 아니었고, 어머니는 심지어 정규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없었어요. 그래도 제가 항상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해주셨고,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심어주셨어요.”


‘2023 삼성호암상’ 의학상을 받은 마샤 헤이기스(Marcia C. Haigis) 하버드 의대 교수의 말이다. 헤이기스 교수는 어머니가 한국인인 한국계 미국인이다. 미 공군인 아버지가 한국에서 복무할 때 어머니를 만났고, 5살때까지 의정부에 살았다.

그가 연구자로 성장하기까지 자신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준 사람은 “어머니 김순자”라고 힘주어 말한다.


“어릴 적 외할머니 집에서 대가족이 함께 살았어요. 그때 팀워크의 소중함을 배웠어요. 오늘날 과학은 다양한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의 팀워크가 중요한데, 어린 시절의 경험이 큰 자산이 됐어요.”


어린 시절 헤이기스 교수는 ‘의사가 돼야겠다’는 막연한 꿈을 가진 소녀였다. 그런데 대학 졸업 후 의대가 아닌 과학자의 길을 선택했다.


헤이기스 박사는 암 대사학 분야의 세계적인 전문가로 손꼽힌다. 세포 대사활동의 노폐물인 암모니아를 암 세포가 영양분으로 재활용함으로써 암 세포의 증식을 가속화한다는 사실을 세계 최초로 밝혀냈다. 이를 바탕으로 세포 내 암모니아 재활용 억제를 통해 새로운 암 치료법 개발의 가능성을 연 공로로 호암 의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현재 헤이기스 박사는 하버드대 의대 교수로 다나파버 하버드암센터 연구원 및 폴글렌 노화생물학연구센터 연구단장을 맡고 있다. 또한 동료 과학자이자 남편인 케빈 헤이기스 하버드대 의대 교수와의 사이에 세 명의 아들이 있다.

 

 

 

 

 

4.

하버드 의대 마샤 헤이기스 교수 2023년 호암상 수상
헤이기스 교수, 과학은 협업, 내가 아닌 팀이 만들어 낸 상

 

<보스톤코리아  2023-04-20, 16:13:55 >



(보스톤 = 보스톤코리아) 한새벽 기자 =  하버드 의대 교수로 재직중인 마샤 헤이기스 박사가 올해 '2023 삼성호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5일(한국시간) 호암재단은 헤이기스 교수와 피아니스트 조성진 등 개인 5명과 단체 1곳을 '2023 삼성호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올해 수상자는 △의학상 마샤 헤이기스(49) 미국 하버드의대 교수 △과학상 물리∙수학부문 임지순(72) 포스텍 석학교수 △과학상 화학∙생명과학부문 최경신(54) 미국 위스콘신대 교수 △공학상 선양국(62) 한양대 석좌교수 △예술상 조성진(29) 피아니스트 △사회봉사상 사단법인 글로벌케어 등이다.

각 부문별 수상자에게는 상장과 메달, 상금 3억원이 수여된다. 시상식은 오는 6월 1일 개최된다.
올해 수상자는 국내외 저명 학자 및 전문가 46명이 참여한 심사위원회와 이와는 별도로 45명의 외국인 석학으로 구성된 자문위원회의 4개월에 걸친 심사 과정을 통해 선정됐다고 호암재단은 설명했다.

의학상에 선정된 마샤 헤이기스 박사는 세포 대사활동의 노폐물로 알려진 암모니아를 암 세포가 영양분으로 재활용해 증식을 가속화한다는 사실을 세계 최초로 밝혀낸 전문가다.

헤이기스 박사의 발견은 암 발생과 증식에 관한 새로운 연구 방향을 제시하고 세포 내 암모니아 재활용 억제를 통한 새로운 암 치료법 개발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헤이기스 박사는 다문화 선교회(담임 김동섭 목사)에 집사로 재직 중인 에롤, 순자 헤이기스 부부의 딸이기도 한다. 

헤이기스 박사는 수상 소감에 대해 묻자 “처음 호함의학상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너무도 감사했다. 과학은 팀의 공동 노력이다. 나는 재능있고 열심히 일하고 창조성 있는 학생들 그리고 펠로우들과 실험실이세 함께 일할 수 있는 행운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언제나 지원을 아끼지 않은 엄마, 아빠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과 같은 2세들에게 대해 조언을 구하자 “어린 코리안어메리칸들은 자신들의 호기심을 따르고 다른 사람들과 다른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을 두려워 말아야 한다. 아주 어렵지만 어려움에 닥쳤을 때 지속적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꿈을 쫓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과학상 물리•수학부문에 선정된 임지순 박사는 고체물질 형성에 필요한 총에너지를 정확히 계산할 수 있는 혁신적인 방법을 고안했다. 임 박사의 계산법은 슈퍼컴퓨터에 접목돼 새로운 물질의 설계와 합성 과정에 필수적인 요소가 됐다.

과학상 화학•생명과학부문 최경신 박사는 광전극 물질과 촉매의 효율을 높이는 연구를 통해 친환경 수소 생산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온 공로를 인정받았다.

최 박사가 개발한 다양한 전극물질들은 나무껍질, 식물줄기와 같은 유기성 폐자원을 친환경 에너지로 바꾸고, 해수와 폐수의 정화 등에 활용돼 환경 문제 해결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공학상에 선정된 선양국 박사는 리튬이온 전지의 양극재로 주로 쓰이는 니켈∙코발트∙망간 화합물에 농도구배형 구조를 세계 최초로 적용했다.

선 박사는 개발한 양극재 제조 기술을 국내외 이차전지 관련 기업에 이전해 성공적으로 상업화시킴으로써 전기차, ESS(에너지저장장치), 로봇, 드론 등 첨단 산업 전분야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예술상에 선정된 조성진 피아니스트는 2015년 한국인 최초로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한 이후 베를린필, 런던 심포니오케스트라 등 세계 정상급 연주단체와의 지속적인 협연과 최고의 독주 무대를 펼쳐온 클래식 음악계의 젊은 거장이다.

사회봉사상에 선정된 사단법인 글로벌케어는 1997년 설립된 국내 최초의 국제보건의료 비정부기구(NGO)로 지난 26년간 우크라이나 전쟁 피해 현장을 비롯한 18개국의 각종 재난 현장에 긴급 의료팀을 파견했다.

또 15개국에서 전염병 퇴치, 빈민 진료 등의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2020년에는 대구지역에 코로나19 확산 위기가 닥쳤을 당시 의료진을 모집해 파견하고 중환자실을 구축했다.

호암재단은 올해 학술부문에서 에너지, 환경, 질병 등 인류가 당면한 위기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혁신 연구업적들이 다수 선정되고 특히 한국계 젊은 여성과학자 2명이 선정된 점을 높이 평가했다.

정학이 바꾼 그녀의 운명...암 발생·진화 밝혀 유전학 새 장 열다  
(에블린 위트킨 1921~2023) DNA 복구 과정 규명…현대 유전 연구 여명 열어

 

< 조선일보, 박건형 기자,  2023.07.24. >



“얘들은 왜 살아남았을까?”

1944년 미국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 출근 첫날 실험을 진행하던 박사과정 학생 에블린 위트킨(Evelyn Witkin)은 당혹스러운 결과를 앞에 두고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장균 세포에 자외선을 조사한 뒤 돌연변이가 생기는지 관찰하는 실험이었는데, 자외선을 너무 강하게 쫴 대부분의 세포가 모두 사멸했습니다. 문제는 그 와중에 4개의 세포만 살아남았다는 겁니다. 위트킨은 “아마 자외선에 저항성을 가진 돌연변이가 생겼을 것으로 추정했다”고 당시를 회고했습니다.

초보 여성 과학자에게는 의문이 드는 신기한 현상일 뿐이었던 이 실험이 후일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자외선에서 살아남은 대장균들은 박테리아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살아있는 유기체를 구성하는 유전자(DAN) 손상과 복구의 원리를 파헤치고, 나아가 암과 노화라는 인류의 가장 큰 적과 대항할 무기를 만드는 결정적인 힌트가 됐습니다. 

 

지난 8일(현지 시각) 뉴저지주 플레인스보로 타운십에서 세상을 떠난 위트킨 박사에 대해 워싱턴포스트는 “위트킨은 DNA의 구조가 수수께끼로 남아 있던 1940년대부터 1991년 70세로 은퇴할 때까지 유전학의 획기적인 발전을 선도했다”고 했습니다.

 


◇진로 바꾼 정학 사건

 

위트킨은 1921년 3월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조셉은 약사였고, 위트킨이 3살 때 사망했습니다.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위트킨과 가족은 퀸즈로 이사를 갔습니다. 어린 시절 위트킨은 의학 연구에 열정을 바친 젊은 의사를 다룬 싱클레어 루이스의 퓰리처상 수상 소설 ‘애로스미스(Arrowsmith)’를 읽은 뒤 생물학에 흥미를 느낍니다. 훗날 위트킨은 “과학을 너무나 낭만적이고 보람되고, 훌륭하게 보이게 만든 책”이라고 했습니다.

뉴욕대에 16살에 입학해 생물학을 전공한 위트킨은 흑인 인권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뉴욕대 팀은 미주리대 미식축구 원정 경기 당시 흑인 선수인 레너드 베이츠를 남겨두고 떠났는데, 위트킨을 비롯한 학생 2000명이 이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습니다. 시위를 주도했던 위트킨을 비롯한 7명의 학생은 3개월간의 정학 처분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위트킨의 미래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초 뉴욕대에서 대학원에 진학하려던 위트킨은 정학 처분의 영향으로 대학원 진학과 조교를 할 수 없게 됐고, 대신 1941년 컬럼비아대 박사 학위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2016년 ‘국립 과학기술 메달 재단’ 수상 기념 인터뷰에서 “1941년 뉴욕대가 나를 나쁜 여성이라고 규정하지 않았다면 난 이 메달의 수상자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훌륭한 스승과 조력자들


컬럼비아대에서 위트킨은 진화유전학의 창시자이자 러시아 출신 연구원인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 밑에서 공부했습니다. 도브잔스키는 초파리를 이용한 유전학을 만들어내, 생물의 진화에 염색체 이상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밝혀낸 인물입니다. 도브잔스키를 두고 생물학자들은 ‘20세기 최고의 유전학자’라고 평가합니다. 도브잔스키는 위트킨의 뉴욕대 정학 처분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를 받아들였고, 거침없는 토론을 벌였습니다. 도브잔스키는 당시 논란이 있었던 주제인 ‘박테리아에 과연 DNA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다양한 논문을 근거로 위트킨에게 명백한 사실이라는 점을 가르칩니다.

박사과정 재학 시절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도 위트킨에게 큰 행운이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옥수수 유전 연구로 1983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바버라 매클린톡과 친구가 됐습니다. 콜드 스프링 하버는 제임스 왓슨이 DNA의 이중나선 구조에 대한 첫 번째 공개 발표를 할 정도로 당대 최고의 연구소로 주목받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위트킨은 “나는 과학 분야에서 여성을 괴롭혀온 성차별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운이 좋았다”면서 “남편(심리학자 허번 위트킨)은 내 경력이 자신의 경력만큼 중요하다고 믿었던 진정한 페미니스트였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연구소는 위트킨이 처음 임신했을 당시 급여 삭감 없이 출산 휴가와 6년 동안의 유연한 시간제 근무를 허용했습니다. 여성의 경력 단절이 당연시되던 때라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복구 메커니즘 ‘SOS 반응’ 규명

 


1955년 위트킨은 뉴욕주립대 다운스테이트 메디컬 센터로 자리를 옮겼고, 1971년에는 럿거스대 교수가 됐습니다. 하지만 그의 경력을 관통하는 연구는 모두 유전학에 집중돼 있었습니다.

대장균 돌연변이에서 시작된 위트킨의 연구는 1970년대 초 브뤼셀 자유대 박사 연구원이었던 미로슬라프 라드먼과의 공동연구를 통해 마침내 빛을 발합니다. 이들은 세포가 파괴될 위기에서 DNA 손상을 막고 번식하려는 작용, 이른바 복구 메커니즘인 ‘SOS 반응(SOS response)’을 규명했습니다. SOS 반응은 정상적인 조건에서는 비활성화돼 있지만, DNA에 손상이 생기는 특수한 조건에서만 유도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두 사람의 연구팀은 DNA가 손상됐을 때 어떤 물질이 활성화되는지, 세포가 어떻게 버티도록 돕는지를 알려주는 40개 이상의 효소 등의 요인을 찾아냅니다. 뉴욕타임스는 “이들의 연구는 태양 복사와 환경 화학물질이 인간의 유전적 구성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고 했습니다. 이 성과는 진화를 이해하고, 종양에 대한 돌연변이 유발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손상된 DNA를 복구하지 못하면 암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를 세포 스스로 막는 방법을 규명한 겁니다. DNA 손상은 암뿐만 아니라 노화, 신경질환, 면역 체계 등 다양한 질환의 원인이 됩니다. 이후 수많은 과학자가 도전하고 또 결실을 맺은 분야의 개척자인 셈입니다.

위트킨은 이 공로로 2015년 ‘예비 노벨상’, ‘미국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레스커상을 수상했습니다. 그의 나이 94세였습니다. 위트킨은 1991년 럿거스대의 규정 때문에 정년퇴직해야 했지만 본인이 연구 현장을 떠난다는 것을 아쉬워했습니다. 2012년 국제학술지 플로스 제네틱스 인터뷰에서 “연구실을 마련할 수 있는 200만 달러가 있었으면 나는 연구를 중단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100번째 생일이 있었던 2021년, 럿거스대는 최고의 연구 실험실에 위트킨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럿거스대는 “그는 대학 역사상 가장 뛰어난 학자이자 국보와 같은 존재였다”면서 “시대를 앞서간 수많은 과학자의 롤모델이었다”라고 했습니다.

고기 즐겨먹는 100세 헨리 키신저, 장수 비결은?


< 조선일보, 박상철 전남대 연구석좌교수,  2023.07.19. >

 


미소(美蘇) 데탕트, 미중 수교 등 20세기 중반부터 세계사 흐름을 이끌었던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올해 100세 되었다. 1923년생이다.

그의 아들은 최근 미국 신문 워싱턴포스트지에 ‘나의 아버지 헨리 키신저의 백세 장수 비결’이라는 기고를 했다. 격동과 긴장의 삶을 살아 왔고, 백 살이 된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바탕을 가까이 지켜본 아들이 설명했으니, 장수학자로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키신저는 독일식 소시지와 돈가스처럼 쇠고기를 튀겨 먹는 비너 슈니첼을 즐기고 있다. 소식이나 채식과는 거리가 멀다. 스포츠도 보기를 좋아했지, 결코 몸소 하지 않았다. 종래 장수 비법과는 동떨어진 생활 습관이었다.

반면 의지적 행동은 예사 사람들과 달리 특별했다. 생각이나 신앙이 다른 이들을 결코 적대시하지 않았다. 노회한 소련 대사 도브리닌과 초긴장 협상을 할 때도 체스를 두면서 여유를 가졌다고 한다.

그칠 줄 모르는 그의 활동 동력은 무엇보다도 호기심이었다. AI(인공지능)가 등장하자 95세 때부터 대학원생과 같은 열정으로 그 문제점을 파고들기 시작하여 이미 책 두 권을 발간했다. 그중 한 권이 ‘AI의 시대: 그리고 우리 인간의 미래’이다. 백 살이 된 지금도 미래를 이야기하며 새로운 책 집필도 시작했다.

호기심과 사명감의 근저에는 강한 의지를 바탕으로 한 근면과 열정이 있다. 이는 <하자> <주자> <배우자> 등 장수 3원칙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다. 백 살 나이에도 주저하지 않고 앞으로 계속 나가는 진행형 삶을 살아가는 키신저, 신체적 노력에 못지않게 부단한 정신적 의지가 장수 결정 요인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My father, Henry Kissinger, is turning 100. This is his guide to longevity.
By David Kissinger

 


Washington Post

May 25, 2023 at 6:38 p.m. EDT

David Kissinger is president of the television production company Conaco.

 


On Saturday, my father, Henry Kissinger, celebrates his 100th birthday. This might have an air of inevitability for anyone familiar with his force of character and love of historical symbolism. Not only has he outlived most of his peers, eminent detractors and students, but he has also remained indefatigably active throughout his 90s.

Even the pandemic did not slow him down: Since 2020, he has completed two books and begun work on a third. He  returned from the Bilderberg Conference in Lisbon earlier this week just in time to embark on a series of centennial celebrations that will take him from New York to London and finally to his hometown of Fürth, Germany.

My father’s longevity is especially miraculous when one considers the health regimen he has followed throughout his  adult life, which includes a diet heavy on bratwurst and Wiener schnitzel, a career of relentlessly stressful decision-making, and a love of sports purely as a spectator, never a participant.

David Von Drehle: My neighbor lived to be 109. This is what I learned from him.

How then to account for his enduring mental and physical vitality? He has an unquenchable curiosity that keeps him dynamically engaged with the world.  His mind is a heat-seeking weapon that identifies and grapples with the existential challenges of the day. In the 1950s, the issue was the rise of nuclear weapons and their threat to humanity. About five years ago, as a promising young man of 95, my father became obsessed with the philosophical and practical implications of artificial intelligence.

As the Thanksgiving turkey was passed around in recent years, he would ruminate about the repercussions of this new  technology, in ways that occasionally reminded his grandchildren of storylines in the Terminator films. While immersing himself in the technical aspects of AI with the intensity of an MIT grad student, he infused the debate over its uses with his singular philosophical and historical insight.

The other secret to my father’s endurance is his sense of mission.  Although he has been caricatured as a cold realist, he is anything but dispassionate. He believes deeply in such arcane concepts as patriotism, loyalty and bipartisanship. It pains him to see the nastiness in today’s public discourse and the seeming collapse of the art of diplomacy.

As a child, I remember the warmth of his friendships with people whose politics might have been different from his, such as Kay Graham, Ted Kennedy and Hubert Humphrey. Kennedy loved to play practical jokes that my father thoroughly  enjoyed (including inviting Dad to his home office and claiming to have a mongoose hidden in a closet).

David Ignatius: Why artificial intelligence is now a primary concern for Henry Kissinger

Even as Cold War tensions persisted, Soviet Ambassador to the United States Anatoly Dobrynin was a frequent guest at our house.  The two of them would occasionally play games of chess between negotiating issues affecting the entire planet. My father had no illusions about the repressive nature of the Soviet regime, but these regular conversations helped de-escalate tensions at a time when the nuclear superpowers appeared to be on a collision course. If only such regular dialogue occurred between the top players in today’s global tensions.

Chess aside, diplomacy was never a game for my father. He practiced it with a commitment and tenacity born of personal experience. As a refugee from Nazi Germany, he had lost 13 family members and countless friends to the Holocaust. He returned to his native Germany as an American soldier, participating in the liberation of the Ahlem concentration camp near Hannover.  There, he witnessed the depths to which mankind can sink unconstrained by international structures of peace and justice. Next month, we will return to Fürth, where he will lay a wreath at the grave of his grandfather, who did not escape.

I know that no son can be truly objective about his father’s legacy,  but I am proud of my father’s efforts to anchor statecraft with consistent principles and an awareness of historical reality.

 

This is the mission he has pursued for the better part of a century, using his rare brain and unflagging energy to serve the country that saved his family and launched him on a journey beyond his wildest dreams.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