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땅이 꺼져 세상 끝나길 바랐지만…더 좋은 세상 만들고 떠나다
삼풍 참사 유족 정광진 변호사 별세
< 조선일보, 박은주 부국장 겸 에디터 / 양승수 기자, 2023.05.22. >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세 딸을 잃은 정광진 변호사와 아내 이정희씨가 1996년 11월 5일 국립 서울맹학교에서 열린 삼윤장학재단 설립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했다. 정 변호사 부부는 시각장애를 딛고 서울맹학교 교사로 일하던 윤민씨와 유정·윤경씨 등 세 딸의 뜻을 기려 삼윤장학재단을 설립했다.
“그 일을 당한 뒤 우리 내외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 이 세상이 아주 끝나줬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정윤민 추모 문집에 쓴 아버지 정광진의 글)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로 시각장애인인 장녀 정윤민씨 등 세 딸을 잃은 후 장학재단을 설립, 장애인과 이웃을 도운 정광진(86∙삼윤장학재단 이사장) 변호사가 19일 오후 8시 51분 서울아산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그 여름 6월 29일, 정 변호사는 서울지법에서 재판을 끝내고 동기 모임 저녁 자리에서 붕괴 사고가 났다는 소리를 들었다. 집 근처에서 난 사고. 그는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수퍼에 가서 필요한 것도 사고 언니(윤민) 운동도 시키자”며 나간 세 자매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식이었다. 한걸음에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지만 딸들은 없었다. 밤새 서울 시내 병원을 뒤지다 다음 날 아침 10시쯤에야 둘째 딸의 주검을 마주했다. 남편, 한 살배기 아들과 유학을 떠나기로 했던 딸 유정(당시 28세)씨였다. 이어 찾은 윤민(당시 29세)씨, 윤경(당시 25세)씨도 같은 처지였다. 딸들이 다니던 영화교회 목사는 그들 장례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 현실을 믿음으로만 감내해야만 합니까.”
참척의 고통 속 그가 택한 것은 침묵이었다. 노환으로 입원한 지난 한 달 반 동안 숙부(叔父)인 정 변호사를 돌보고, 임종을 지킨 조카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은 말했다. “사고 이야기는 가족 간에도 금기였다. 아픈 이야기만 나오니까….”
말을 아꼈던 정 변호사의 속마음이 나타난 대목이 있다. 윤민씨가 유학 중 다녔던 교회의 목사 부인 노연희씨가 출간한 추모집 ‘나의 사랑, 나의 생명, 나의 예수님’에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딸 셋을 잃은 것이 아니라 인생을 송두리째 잃어버렸습니다.”
고 정경진(종로학원 창립자)씨의 7살 터울 막냇동생이었던 정 변호사는 용산고, 서울대 법대 졸업 후 1963년 제1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판사가 됐다. 전국 법조인 바둑 대회에서 여러 번 우승할 만큼 바둑을 즐겼다. 거의 유일한 도락이었다.
그의 마음은 가족, 특히 5세에 한쪽 눈 시력을, 12세에 남은 눈마저 잃은 시각장애인 딸 윤민씨에게 가 있었다. 1978년 변호사가 된 것도 수술비, 치료비 등이 이유였다고 한다. 정 변호사 표현대로 “앞을 보지 못하면서도 늘 밝은 마음으로 살았던” 큰딸은 국립서울맹학교, 단국대 졸업 후 1988년 미국 버클리대 특수교육과로 유학을 떠나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헬렌 켈러처럼 다른 시각장애인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며 모교인 서울맹학교를 첫 직장으로 택했다. 윤민씨는 정교사가 된 지 9개월 만에 사고를 당했다.
사건 이듬해인 1996년 11월 6일, 서울맹학교에서 윤민·유정·윤경씨를 기리는 ‘삼윤(三允)장학재단 설립 및 기념비 제막식’이 열렸다. 정 변호사는 자신이 수령한 미혼인 두 딸의 보상금 6억5000만원, 경기도 의왕시 토지(당시 시가 7억원)를 재단에 출연해 서울맹학교에 기증했다.
행사에서 그가 짧게 말했다. “맹인 학생들 가운데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유난히 많은 것을 봐 왔다. 삼윤장학재단은 특히 이들에게 힘이 되고자 한다.” 부인 이정희씨는 “맹인들에게 빛이 되고자 했던 윤민이의 못다 이룬 꿈을 우리 부부가 대신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독실하고 검약하게 산 ‘정광진 장로’는 교회, 병원 등 여러 곳에 드러내지 않고 여러 번 큰 기부를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비통한 마음에 땅이 꺼지길 바란다고 했지만, 결국 그가 바란 건 더 좋은 세상이었다.
시각장애인인 조성재 대구대 교수도 유학 중 연간 400만원씩 ‘삼윤 장학금’을 받았다. 박사 학위를 받은 2005년 그가 말했다. “미국 유학 7년 동안 누군가 나를 믿고 도와준다는 생각에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장학금을 받은 장애인이 수천명이다.
정 변호사는 막내딸도 병으로 먼저 보냈다. 평소 연명 치료를 거부한다고 밝혔던 그는 마지막 즈음, 부인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자식 한(恨)이 많았지만 그래도 한평생 바르게 잘 살았다.” “내가 먼저 아이들을 만나러 간다.” “여자한테 잘하는 법을 몰라서 미안했다.” 큰 슬픔으로 다른 아픔을 위로한 삶이었다.
유족은 부인 이정희씨, 외손자 윤상원씨 등이다. 빈소는 분당서울대병원 장례식장 3호실, 발인은 22일 오전 7시 30분.
2.
세 딸 잃은 아버지의 그 후 30년
< 조선일보, 김태훈 논설위원, 2023.05.22. >
1988년 남편과 아들을 연이어 잃은 소설가 박완서는 작품집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아들 잃은 아픔이 더 컸다고 했다. ‘내가 이 나이까지 겪어본 울음에는, 그 울음이 설사 일생의 반려를 잃은 울음이라 할지라도, 지내놓고 보면 약간이나마 감미로움이 섞여 있기 마련이었다. (중략) 오직 참척(慘慽·자식 사망)의 고통에만 전혀 감미로움이 섞여 있지 않았다. 구원의 가망이 없는 극형이었다.’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슬퍼하는 조각상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뜻이다. 자식 잃은 아픔은 신도 위로할 수 없기에 그저 불쌍히 여길 뿐이다.
하지만 세상엔 그런 아픔을 큰 사랑으로 승화한 부모들이 있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로 숨진 여대생 이승영씨의 부모는 승영장학회를 만들었다.
천안함 용사 정범구 병장과 차균석 중사의 어머니들은 보상금을 아들의 모교에 장학금으로 기탁했다.
서울 서대문의 이진아기념도서관은 평소 책 좋아했던 딸을 사고로 떠나보낸 부모가 세웠다. 성악 하던 아들을 학폭으로 잃은 이대봉 참빛그룹 회장도 장학회를 만들었다.
▶외국에도 비슷한 사례가 많다.
영국에선 등교한 아들을 심정지로 떠나보낸 부모가 전국 학교에 심장제세동기 6000여 개를 보내는 운동을 펼쳤다. 지난 12년간 60여 명의 목숨을 구했다.
미국에서 9·11 테러로 아들을 잃은 뒤 장학재단을 만들고 공원과 도서관, 테니스장을 조성해 아들 이름으로 시민들에게 기부한 이도 있다.
▶예술가들도 작품을 통해 비슷한 일을 한다. 가수 에릭 클랩턴은 아들을 추락사로 잃고 방황하다 ‘천국의 눈물(Tears in Heaven)’을 발표했다. 같은 아픔을 겪는 이들을 그 노래로 일으켜 세웠다. ‘나는 강해져야 해/ 그리고 살아가야 해/(중략)/ 나는 네가 있는 이곳, 하늘에 머물 수 없으니까.’
시인 김현승도 자식을 잃고 시 ‘눈물’을 썼다. 그 슬픔을 꼭 이겨내겠다는 다짐을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라는 시행에 담았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로 한꺼번에 세 딸을 잃은 정광진 변호사가 19일 별세했다. 정 변호사는 생전에 “우리 내외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 세상이 아주 끝나줬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고 했지만 세상을 오래 원망하지 않았다. 장학재단을 만들어 30년 가까이 시각장애 학생들을 지원했다. 눈물 속에 딸들을 보내지 않고 세상의 빛으로 되살려 냈다. 비극적인 사건이 끊이지 않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살아갈 희망을 얻는다. 정 변호사 같은 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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