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귀환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헨리 나우웬 (2009, 포이에마)

 

 

 

<루가복음 제15장>

 

잃었던 양 한 마리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 하며 못마땅해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한 마리를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아흔아홉 마리는 들판에 그대로 둔  잃은 양을 찾아 헤매지 않겠느냐?

 그러다가 찾게 되면 기뻐서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양을 찾았습니다.' 하며 좋아할 것이다.

 잘 들어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잃었던 은전

 

"또 어떤 여자에게 은전 열 닢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닢을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 여자는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온통 쓸며 그 돈을 찾기까지 샅샅이 다 뒤져볼 것이다.

그러다가 돈을 찾게 되면 자기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잘 들어두어라.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잃었던 아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제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재산을 갈라 두 아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자기 재산을 다 거두어가지고 먼 고장으로 떠나갔다. 거기서 재산을 마구 뿌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돈이 떨어졌는데 마침 그 고장에 심한 흉년까지 들어서 그는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그는 그 고장에 사는 어떤 사람의 집에 가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주인은 그를 농장으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하도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워보려고 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아서 그 많은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

 어서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으로라도 써주십시오 하고 사정해 보리라.'

 마침내 그는 거기를 떠나 자기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하인들을 불러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 하고 말했다. 그래서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밭에 나가 있던 큰아들이 돌아오다가 집 가까이에서 음악 소리와 춤추며 떠드는 소리를 듣고

하인 하나를 불러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하인이 '아우님이 돌아왔습니다. 그분이 무사히 돌아오셨다고 주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게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서 달랬으나

 그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는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종이나 다름없이 일을 하며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지 않으시더니

 창녀들한테 빠져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린 동생이 돌아오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주시다니요!' 하고 투덜거렸다.

 이 말을 듣고 아버지는 '애,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 하고 말하였다."

 

 

 

작은 아들

 

 

1. 그림

 

작은아들의 황갈색 홑옷은 아버지의 붉은 외투와 어우러져 제법 근사해보이지만 사실 젊은이는 비참했던 지난 삶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누더기를 걸치고 있습니다아버지는 물론이고 지켜보는 키 큰 남성도 신분과 위엄을 드러내는 붉은 외투를 입고 있습니다오로지 지치고 피곤해서 탈진 상태에 이른 육신을 너덜너덜한 황갈색 속옷으로 가렸을 따름입니다.

 

박박 밀어버린 머리를 보면 지난날 흥청거리고 오만하고 반항적인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졌습니다.

 

샌들 바닥만 봐도 탕자의 여정이 얼마나 길고 수치스러웠는지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닳아빠진 신발마저도 벗겨진 왼발에는 상처가 있습니다구멍 뚫린 샌들을 반만 꿰고 있는 오른발 역시 고통스럽고 비참한 현실을 웅변합니다.

 

칼 한 자루 말고는 모든 걸 탕진한 젊은이의 초상입니다남아 있는 품위의 상징이라고는 달랑 엉덩이에 매달린 단검이 전부입니다신분을 나타내는 일종의 배치인 셈입니다작은아들의 단검은 비록 거지꼴을 하고 부랑자 신세가 되어 돌아왔을망정 여전히 아버지 아들이라는걸 잊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2. 묵상

 

(1) 작은아들집을 나서다

 

- ‘돌아옴은 떠남을 전제로 합니다잃었던 되찾은 벅찬 기쁨의 이면에는 그 아이를 잃어버렸던 지난날의 슬픔이 깊게 배어 있습니다.

 

아들의 가출은 생각보다 훨씬 무례한 짓이었습니다태어나고 성장한 가정을 냉정하게 내동댕이치는 처사인 동시에 자신이 속한 광범위한 공동체에서 정성껏 지키는 전통을 무시하고 뿌리친 행동입니다.

 

작은아들이 떠나온 세상에서의 사랑은 항상 조건적이며 앞으로도 절대 달라지지 않는 곳입니다세상에서 추구하는 것은 중독인데 이것으로는 마음속 깊이 간직한 소망을 채울 수 없습니다.

 

세상의 속임수를 간파하지 못하면 먼 지방에서 머물며 허망한 일을 쫓는 중독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자존감은 충족되지 않고 끝없이 이어지는 환멸에 부닥칩니다.

 

탕자의 거부는 아담이 저지른 반역의 복사판입니다그러나 아담과 그 후손이 저지른 반역은 용서를 받았습니다하느님은 아버지처럼 두 손을 내밀고 언제나 반갑게 맞아 주십니다.

 

 

(2) 작은아들다시 집으로

 

먼 지방에서 작은아들은 결국 주위사람들에게 더 이상 사람 취급을 받지못하고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외로움을 느꼈습니다더 잃을 것 없을 만큼 빈털털이가 되었습니다이 총체적인 탈선 때문에 탕자는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정신 차린 순간 탕자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우너래의 자신을 되찾는 것만이 유일합니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내가 일어나서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으로 삼아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먼 지방을 떠나 집으로 향했습니다.

 

탕자는 전 재산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의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가장 밑바닥에 떨어져서 비로소 말리서 자신을 부르는 아버지의 음성을 희미하게나마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탕자의 길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용서를 받으려면 하느님이 명실상부하게 나의 주님이 되셔서 치유하고 회복시키며 새롭게 하시는 역사를 일으켜주시도록 기꺼이 전폭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야 합니다마음을 돌이키는 순간부터 집에 도착할 때까지 지혜롭게 스스로를 훈련시키면서 여행해야 합니다.

 

 

큰아들

 

 

1. 그림

 

작은아들을 끌어안은 노인을 바라보는 핵심 입회인인 큰 아들은 한 발 뒤로 물러서 있습니다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지만 기뻐하는 기색이 없습니다손을 내밀지도 웃음 짓지도 반갑다는 표현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무대 한 구석에 그냥 서 있을 뿐 전면에 나설 의사가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귀향이 중심 화제인 것은 분명합니다그러나 물리적으로 캔버스 중앙에서는 그 장면을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사건은 왼쪽으로 치우친 자리에서 벌어집니다오른쪽 구석은 기골이 장대하고 완고해 보이는 큰아들이 지배하고 있습니다남은 여백은 아버지와 맏아들을 갈라놓고 있습니다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내며 해결을 재촉하는 공간입니다.

 

그림에 큰아들이 버티고 있는 한탕자가 돌아온 사건을 감상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비중이 가장 높은 입회인은 아버지가 보여주는 따뜻한 환영에 동참할 생각이 없다는 듯한사코 거리를 두려 합니다큰아들 마음 속에는 무슨 생각이 오가고 있을까요?

 

렘브란트는 아버지와 큰아들을 대단히 흡사하게 그렸습니다둘 다 수염을 그리고 있으며 붉은 망토를 어깨에 넉넉하게 두르고 있습니다이런 외적 요소들은 큰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공통점이 많다는 사실을 넌지시 암시합니다화가는 큰아들의 얼굴에 빛을 떨어 뜨려서 역시 밝은 조명을 받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과 직접 연결시키는 방식으로 방점을 찍습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가슴 아픈 차이가 있습니다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온 아들을 향해 몸을 굽히고 있습니다큰 아들은 뻣뻣하게 서있을 뿐입니다손에서 바닥까지 곧게 이어진 지팡이는 그의 완고한 마음가짐을 보여줍니다.

 

아버지의 망토는 자식을 환영하는 듯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큰아들의 옷은 몸에 착 달라붙었습니다아버지는 손을 펴서 탕자를 어루만지고 있습니다축복의 몸짓입니다큰아들은 양손을 단단히 모아 쥔 채 가슴에 대고 있습니다두 인물의 낯에는 모두 빛이 드리웠습니다그러나 아버지의 얼굴에서 나오는 광선은 오몸특히 두 손으로 흘러나가 따뜻하고 풍성한 빛으로 온전히 감싸는 반면큰아들 얼굴 위에 떨어진 빛은 차갑고 제한적입니다몸뚱이는 여전히 어둠에 묻혔고 그러쥔 손은 그늘졌습니다.

 

 

2. 묵상

 

 

(1) 큰아들집을 나가다

 

어쩌면 렘브란트가 그림으로 옮긴 이야기는 탕자의 비유가 아니라 탕자들의 비유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할 지 모릅니다자유와 행복을 찾아 집을 떠났다가 먼 지방에서 길을 잃은 작은 아들뿐만 아니라 고향에 머물던 큰아들 역시 방황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겉으로는 어른이 시키는 일들을 성실하게 잘해낸 착한 아들처럼 보이지만속내를 들여다보면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 엉뚱한 곳을 헤메고 있었습니다부친을 잘 섬기고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며 주어진 책임을 다했지만 큰아들은 날이 갈수록 불행하고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보통 맏아들은 부모의 기대에 맞추어 살며 그 뜻을 잘 따르고 효도하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특유의 욕구가 있는지도 모릅니다때로는 그러한 욕구는 무거운 짐이 되어 계속 짓누를 수도 있습니다.

 

큰아들이 화를 냈다는 것은 탈선이고집을 떠나 방황하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버지의 집에서 자유롭게 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분노하고 시기하는 모습 자체가 여전히 무언가에 속박된 종의 신세라는 증거입니다.

 

큰아들의 탈선은 분별하기 어렵지만집에 돌아온 작은아들을 보고 뛸 듯이 기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자 암흑의 기운이 마음속에서 표면으로 솟구쳐 떠올랐습니다분노오만몰인정이기적 자아가 점점 강해져 마침내 사나운 본색을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 ‘나는 열심히 노력했어오랫동안 최선을 다했고 일도 많이 했어하지만 아무 대가도 받지 못했어남들은 다 쉽게 얻는데도 말이야어째서 아무도 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지초대하거나 함께 어울리려고 하지 않고 왜 제대로 대우를 해주지 않느냐고대충대충 가볍게 사는 이들한테는 그렇게 신경을 쓰면서 말이야.’

 

큰아들이 최종적으로 어떤 결정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그러나 여기서 분명한 것은 한없이 큰 사랑을 베푸는 아버지의 넓은 마음입니다.

 

 

(2) 큰아들집으로 돌아오다

 

아버지는 작은아들뿐만 아니라 맏아들도 애타게 기다렸습니다그 역시 잘못을 깨닫고 기쁨에 집으로 되돌아 올 필요가 있었습니다큰아들은 간곡히 타이르는 아버지에 가르침에 반응을 보일까요아니면 자기 뜻을 굽히지 않을까요렘브란트 또한 그 질문에 확실한 답을 하지 않습니다큰아들의 반응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관람자의 몫이 되었습니다.

 

큰아들 이야기는 모든 고민스러운 이야기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합니다하느님이 탕자를 맏아들보다 더 사랑하셨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명쾌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애야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았더냐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 아니냐?’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여실한 한 마디는 모든 의구심을 단숨에 날려 버립니다아버지는 무제한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두 아들에게 온전히그리고 공평하게 쏟아 부었습니다.

 

작은아들이 극적으로 돌아온 것을 아버지가 한없이 기뻐했지만 그것이 어떤 면으로든 큰아들을 덜 사랑한다는 말은 아닙니다아버지는 두 아들을 비교하지 않습니다각각 걸어온 삶의 여정에 맞게 온전한 사랑을 쏟습니다.

 

에수님은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거룩한 자녀들은 하느님 나라에 저마다 고유한 자리를 가지고 있고 그곳이 바로 주님의 거처인 것입니다그러므로 마음에서 비교와 경쟁의식다툼을 모두 비워낸 자리에 하느님의 사랑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탕자의 비유는 나를 만날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찾아다니는 하느님의 이야기입니다하는님은 권면하고 간청하십니다죽음의 권세에 의존하지 않고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는 거룩한 팔에 몸을 맡기라고 사정하십니다비록 내 힘으로는 차가운 분노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할지라도날마다 구체적으로 신뢰하고 감사하는 훈련을 통하여 주님 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거룩한 사랑에 힘입어 건강을 찾을 수 있도록 스스로 분발해야 합니다.

 

 

 

아버지

 

 

1, 그림

 

렘브란트가 그린 아버지의 초상에서 그처럼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느껴지는 것은 견줄 수 없을 만큼 거룩한 요소를 가장 인간적인 틀 안에 포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거의 시력을 잃은 노인을 보십시오구레나룻을 길렀고 턱수염은 두 갈래로 나뉘었습니다금실로 수놓은 웃옷에 심홍색 외투를 두르고 있습니다큼지막하고 뻣뻣한 두 손은 돌아온 둘째아들의 어깨에 올려져 있습니다묘사가 대단히 구체적이고 분명해서 직접 현장에 같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아버지에 두 손은 정말 다릅니다아들의 어께에 닿은 아버지의 왼손은 강하고 억세 보입니다손가락을 펼쳐 탕자의 어깨와 등의 상당부분을 가리고 있습니다마디 마디에 적잖이 힘이 들어가 있는 게 눈에 뜨입니다특히 엄지손가락이 그렇습니다그저 만지는데 그치지 않고 힘을 주어 단단히 부여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물론 왼손으로 아들을 다독이는 모습에서는 부드러움이 넘치지만 그러쥔 느낌은 여전합니다하지만 오른손은 전혀 딴판입니다부여잡거나 움켜쥐지 않습니다세련되고 부드럽고 대단히 다정합니다손가락들이 가지런히 모으고 있어 우아한 분위기가 납니다아들의 어께에 사뿐히 올려놨다고 해야 할까요어루만지고 토닥이며 위로와 위안을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그건 어머니의 손입니다아버지의 손은 부여잡고 어머니의 손은 쓰다듬습니다아버지는 확신을어머니는 위안을 줍니다.

 

 

2. 묵상

 

- <탕자의 귀환>은 인류를 불쌍히 여기는 하느님의 따뜻한 마음을 인간에 대입해 표현한 그림입니다어쩌면 <탕자의 귀환대신 인정 많은 아버지의 환영이라는 제목이 더 적합할 수도 있겠다 하는 것은 아들보다는 아버지를 더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렘브란트는 아버지라는 인물의 묘사 하나하나가 인류를 향해 하느님이 쏟아부으시는 사랑태초에 존재했으며 앞으로도 변치않을 하느님의 사랑을 웅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집으로 돌아온 아들의 등을 어루만지는 두 손은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아버지에 도구처럼 보입니다. 육신의 눈이 거의 감기 다시 피한 아버지는 오히려 더 멀리 그리고 널리 봅니다그것은 인류 전체를 아우르는 영원한 시선입니다시간과 장소 성별을 초월해서 모든 이들의 상실과 방향을 살핍니다집을 떠나는 쪽을 선택한 자녀들이 겪는 아픔을 알고 말할 수 없는 만큼 가슴아파하는 눈길입니다정신적인 고통과 고뇌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을 보고 바다를 이루도록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아버지에 마음은 길은 자신의 집으로 데려 오려는 열망으로 뜨겁게 타오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한없이 사랑하므로 강요할 수도 속박할 수도 밀어부칠 수도 끌어당길 수도 없었습니다도리어 그 사랑을 거부하든지 아니면 집으로 돌아오든지 선택할 자유를 주셨습니다하느님을 그토록 고통스럽게 하는 근원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는 우선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되기로 작정하셨습니다아버지 하느님은 자녀들이 자유로워지기를 자유로이 사랑하기를 바랍니다거기에는 자식이 집을 떠나 먼 지방으로 가서 모든 재산을 탕진할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아버지는 내심 그런 선택이 불러올 심한 고통을 알고 있지만 사랑의 가로막혀 하릴없이 바라만 봅니다.

 

하나님은 목소리보다 어루만짐을 통해 자녀들에게 좋은 말씀을 들려주고 싶어 하십니다벌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안팎으로 방황하면서 이미 넘치도록 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아버지는 다만 자녀들이 그토록 비뚤어진 방식으로 찾아 헤매 왔던 사랑이 늘 가까이에서 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며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알려주길 바랄 뿐입니다.

 

렘브란트의 작품 <탕자의 귀환>의 참된 중심은 아버지 손에 있습니다가장 밝은 빛이 그 위를 비추고 있습니다구경꾼들의 시선도 거기 손에 있습니다그 손 안에 자비로운 사랑이 구현되었습니다. 거기서 용서와 화해치유가 일어납니다아버지는 결국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고내 여정의 종착점이며 마지막 안식처입니다.

 

우리는 비록 지금 작은아들인 동시에 큰아들의 처지이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궁극적으로는 아버지처럼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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