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문재, 불가능한 것과 대치하기, 분노와 체념의 태도

<김도언의 시인의 얼굴> 여덟 번째 시인: 이문재

 

(채널예스, 김도언 글, 2015.10.21)


사실, 병들고 타락한 세계, 멸망을 향해 질주하는 이 문명을 시인이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해야 합니다. 가능하다면 누가 그걸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가능한 것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이윤이나 성취감은 있을지 몰라도. 내가 믿는 올바르고 아름다운 세계, 인간과 우주가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세계, 그 불가능의 세계에 대해 발언해야 합니다.


인디언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옵니다./그 이유는, 인디언들은 비가 올 때까지/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입니다.//하늘은 얼마나 높고/넓고 깊고 맑고 멀고 푸르른가//땅 위에서/ 삶의 안팎에서/나의 기도는 얼마나 짧은가.

- 시 「아직 멀었다」 부분.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수록


눈부신 자부심과 연민의 시인

 그와 내가 추석 연휴 마지막 날 모종의 수상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그의 모교인 경희대 도서관 앞 숲속 벤치에서 마주 앉았을 때, 나는 곧 우리에게 사소하면서도 흐뭇한 공통점 하나가 있음을 확인했다. 바로 전날 진창으로 술을 퍼마셔 눅진한 숙취를 안고 있었다는 것. 시인 이문재에게 통음의 흔적을 발견하고 사실 나는 속으로 마음이 놓였다. 아직도 술을 마시고 있다는 것은,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새파란 시인으로 살아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닌가라는 막연하면서도 비논리적인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나는 그의 시에서 이 세계에 대해 그가 갖는 연민이 자신의 몸을 통해 고통을 매개하는 방식으로 드러날 때 가장 환해지는 어떤 풍경을 보았는데, 그와 대면한 자리에서 그것의 민낯을 본 느낌이었달까. 그렇다면 내 확신이 막연하고 비논리적인 것이라고만은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내 눈에 이문재는 우리 시단에서 퍽이나 특별한 좌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그가 시의 현장과 불가근불가원한 거리를 아주 섬세하게 조율하고 지켜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는 한 번도 뜨겁고 격렬한 주목의 대상이 되었던 적이 없지만, 또한 단 한 번도 잊혀지거나 생략된 적 또한 없는 시인이다. 그러니까 그는 언제나 생생한 시적 고유명사로 독자와 동료들 앞에 놓이는 시인인 것이다. 1982년 <시운동> 4집에 시를 발표하면서 시업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는 34년째에 접어든 올해까지, 결코 다작이라고 볼 수 없는 다섯 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작년에 나온 가장 최근의 시집인 『지금 여기가 맨 앞』은 그 직전 시집 『제국 호텔』과의 공백이 무려 10년에 이른다. 그럼에도 그가 언제나 생생한 시인의 좌표를 잃어버리지 않았던 것은, 그의 작품이 갖는 생명성에 있을 것이다.(그의 옛 시집들은 출판권이 바뀌면서도 빠짐없이 재출간되고 있다.)

그는 많은 자리에서 시인은 ‘받아 적는 존재’라는 말을 했다. 들려오는 말이 있을 때 시인은 그것을 받아 적을 뿐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외부로부터 음악과 시어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릴 때 시인은 시를 토해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눈이 가리고 손이 묶인 사람처럼 한 글자도 쓸 수가 없다는 것. 이런 비슷한 얘기를 나는 돌아가신 소설가 최인호 선생으로부터도 들은 적이 있다. 선생 역시 “문학은 받아 적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내가 알기로 파블로 네루다도 비슷한 말을 기록으로 남겼다. “어느 날 시가 내게로 왔다.”

이문재와 최인호 선생, 그리고 네루다의 말은 어떤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문학이란, 자기의 의도나 의사와는 무관하게 (창졸간에) 주어지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학의 어떤 성취나 다다름은 내가 그걸 이루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오히려 내 의도에서 문학적 욕망을 배제할 때, 다시 말해 어깨에서 문학적인 포즈나 힘을 뺄 때 다가올 수 있는 것이라는 것. 부를 때는 쳐다보지도 않다가 부르지 않을 때 살금살금 다가오는 고양이처럼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일차적으로 쓰는 ‘문학적’이라는 조건절은 좀 경직되어 있고 어딘지 모르게 제도적인 억압성이 느껴진다. 내 경우만 해도 그러 한데, 나는 나 자신이 문학적인 긴장으로 팽팽해져 있을 때보다 외려 지극히 비문학적인 상황에 놓여 있을 때 문학이 내게 들어오는 것을 자주 느끼곤 한다. 가령 내가 청중의 하나로 문학 강연장에 있을 때보다 술 몇 잔 걸치고 방심한 상태로 아무 생각 없이 지하철 승강장에 내려설 때 예기치 않게 소설의 한 문장이나 시가 들어오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문학적’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일상에서 끊임없이 ‘비문학적인 상태’를 주문하는 어떤 태도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로써 ‘비문학적인 것’이 곧 ‘문학적인 것’이라는 초월적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문학이 예사롭지 않은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인데, 인과나 순리 체계를 간단하게 무시하면서 어떤 진실에 육박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나 (문학적 진실에 가닿는) 비문학적 태도를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비문학적인 태도란, 좀 어렵게 들릴지 모르지만, 문학적 모험을 수없이 거쳐서 겨우 다다른, 또 다른 차원의 고도화된 문학적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갑고 고맙게도 여기, 내 눈의 “맨 앞에” 그러한 문학적 태도를 체화한 듯한 한 시인이 (방심한 자세로) 앉아 있다. 그는 자신의 젖은 구두를 벗어 해에게 보여준 눈부신 자부심과 연민으로 똘똘 뭉친 시인이다.


시인, 자본과 문명에 화를 내다

이문재는 현재 모교인 경희대의 교양학부에 해당하는 후마니타스 칼리지에서 교수로 재직중이다.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는 대학교육에 대한 첨예한 문제의식과 성찰 아래 도정일 선생 등이 주도적으로 설립한 교육기관으로,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해야 하는 대학생들이 주체적이면서도 합리적인 사회적 태도를 가질 수 있도록 다양한 커리큘럼을 가르치는 곳이란다. 시인은 이곳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그에겐 생업의 일선인 셈이다. 인터뷰를 하기로 약속된 날, 그가 지정해준 경희대 교정의 어느 벤치에 앉아 있으니 곧 은빛과 잿빛이 섞인 머리칼과 깎지 않은 희끗희끗한 수염 투성이인 그가 다소 초췌한 인상을 풍기며 나타났다.

오랫동안 시사주간지의 기자로, 또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수많은 이들과 인터뷰 및 대담을 나눈 경험이 있는 그 앞에서 인터뷰어 노릇을 할 생각을 하니 다소 끔찍한 느낌마저 들었는데 그가 악수를 건네면서 “내게서 뭘 들을 게 있다고 여기까지 왔어요. 그냥 아는 만큼만 쓰면 되지.”라고 말을 하는 게 아닌가. 그 겸연쩍고 헐렁한 인사말을 듣는 순간 나는 오늘 이 인터뷰이에게 푹 빠져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말이다. 내가 미욱스럽게도, 처음부터 그를 화나게 하는 질문을 하고 말았다. 그의 이유 있는 역정은 인간의 삶의 조건에 대해 물은 첫 질문에 대답하는 순간부터 관측되었다.

김도언 : 요즘 온라인 환경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소통을 시도하지만, 실제로는 고독한 사회라는 느낌이 들어요. 인간의 삶의 조건으로서의 생태적 환경에 관심이 많은 선생님은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문재 : 나는 트위터도 안 하고 페이스북도 안 하고 블로그도 안 해요. 이메일이야 없으면 사회생활이 안 되니까 그 정도만 하죠. 저는 소셜미디어에 대해 별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접촉 빈도나 접촉 횟수가 높아진다고 해서 소통이 된다거나 안 좋았던 관계가 좋아진다거나 없던 관계가 생긴다거나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요. 지금 우리가 고독한 건 어쩌면 필연적인 것인데, 나쁜 자본주의가 그 이유라는 생각이 들어요.

김도언 : 나쁜 자본주의라는 게 무슨 뜻인가요.

이문재 : 좋은 자본주의라는 게 있을 리 없겠지만 나쁜 자본주의란 말하자면 인간의 자율성을 구속하는 자본주의죠. 우리들 모두가 전부 소비자가 되어버렸잖아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인간이 되지 못하고. 모든 것 사이에 자본이 개입하고 있어요. 돈이 매개가 되지 않으면 움직일 수도 없고, 먹을 수도 없고,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진 상황입니다.
 
김도언 : 나쁜 자본주의가 점점 더 소외를 시키고 인간을 고독하게 한다는 말씀인가요?

이문재 : 자본주의 안에서는 소외고 뭐고 없어요. 소외보다 더 심각합니다. 쉽게 말해서 돈 없으면 살 수 없는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사회라고 말할 수조차 없게 돼버렸습니다. 요즘은 자본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혈압이 오릅니다. 자본의 몹쓸 속성을 없애야 하는데 이걸 어떻게 없애겠어요. 대단한 포용력과 유연성, 세련성을 갖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제가 몇 년 전 에세이를 쓰면서 돈에 포섭되지 않은 것의 목록 같은 걸 정리해본 적이 있는데요, 생각해보세요.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돈에 포섭되지 않은 게 없어요. 신혼부부들이 돈이 없어서 애를 못 낳는 거잖아요. 돈이 없어서 제대로 죽지도 못하는 세상입니다. 

김도언 : 제가 여기 오기 전에 선생님의 최근 발언이나 쓰신 글들을 찾아봤는데, 상당히 현실적인 발언들을 하고 있어서 다소 놀랐어요. 지금도 자본과 돈에 대한 말씀부터 하시는데. 현실적인 감각이나 경제관념 같은 것이 희박하지 않으셨어요?

이문재 : 원래는 그랬지요. 쑥맥이었습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현실이 제 삶에 간섭을 해오니까 예민해진 거죠. 자본주의는 돈만 생각하게 만드는 사회입니다. 어떻게 하면 덜 쓰나, 어떻게 하면 안 쓰나. 어떻게 하면 더 쓰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러고 있으면 화가 나요. 모든 게 다 돈이잖아요. 정현종 선생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모든 것 사이에 돈이 있습니다.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를 들어보이며) 나하고 담배 사이에도 돈이 있습니다. 지금 나를 찍는 사진작가의 카메라하고 나 사이에도 돈이 있어요. 

그는 시인 지망생들, 그리고 후배 시인들에게 서정의 전범으로 불리는, 필독과 애독의 절대적 대상이 되는 시인이다. 그의 첫 번째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부터 뚜렷하게 그 특질이 포착된 서정은, 이 세계에 대해 기피할 수 없는 연민을 격렬하게 자신의 내적 파토스에 이입시켜 고통스러운 삼투압을 거친 후에 표현하는 방식으로, 다시 말해 자신이 영매가 되어 이 세계를 매개하는 방식으로 표현되는데, 그 와중에 걸러지는 서정이란 마치 사금처럼 반짝이는 결정이 되어 시의 행간에 가서 박히는 것이다. 예컨대 그의 초기시 「우리 살던 옛집 지붕」에서 묘사된 “알 수 없다/내가 마지막으로 그 집을 떠나면서/문에다 박은 커다란 못이 자라나/집 주위의 나무들을 못 박고/하늘의 별에다 못질을 하고/내 살던 옛집을 생각할 때마다/그 집과 나는 서로 허물어지는지도 모른다 조금씩/조금씩 나는 죽음 쪽으로 허물어지고/나는 사랑 쪽에서 무너져 나오고/알 수 없다/내가 바다나 강물을 내려다보며 죽어도/어느 밝은 별에서 밧줄 같은 손이/내려와 나를 번쩍/번쩍 들어올릴는지”는 80년대 시의 현장에서 듣기 어려운 섬세한 자기고백의 목소리를 들려주는데, 거기에 깃든 서정의 힘은 자신의 허약함과 불안까지를 모조리 껴안는 핍진성에서 연원하는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중년의 마지막 고개를 넘고 있는 그가 지금, 뚜렷한 은빛 머리칼과 희끗한 수염과 중저음의 목소리로 자신의 후경을 다 지워버린 채 어떤 격정에 휩싸여 시대에 대하여, 세태에 대하여 무서운 냉소와 채찍의 말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과연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서정성 그리고 현실에 대한 발언

김도언 : 선생님의 시를 보면 초기의 특유의 빛나는 서정성과 함께 후기로 올수록 우리 시대의 문제를 짚는 주제의식 같은 것들이 엿보여요. 주제의식이란 건 소설가들이 많이 쓰는 말이지만, 요즘은 부정적으로 많이 쓰이기도 하는데 독자들한테 뭔가를 계몽시키고 가르치려는 태도도 보이고요. 오늘도 계속 현실적인 발언들을 하고 계시는데.

이문재 : 내가 보기에 분명히 잘못되고 크게 어긋나 있으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거죠. 우리는 공멸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김도언 : 시인으로서 견지하고 있는 태도라는 게 시집에 담긴다고 보여지는데, 가장 최근의 시집을 내시면서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고 물으셨잖아요. 저는 선생님이 지금 시점에서 생각하는 시의 소용이 무엇인지 궁금해요.

이문재 : 두 말할 나위 없이 시는 세상을 바꾸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봅니다. 나는 지금 문학이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사실 요즘 문학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습니다. 아까 말씀드렸지만, 세상이 잘못되고 있는데, 요즘 아이들은 계몽이라는 말만 나와도 소름이 돋는다면서 거부감을 표현합니다. 그렇다고 젊은이들이 스스로 각성을 하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습니다. 주변에서 나보고 꼰대가 되면 큰일 난다고도 하는데, 저는 학생들 앞에서 자칭 꼰대라고 합니다. 비유컨대 우리 모두가 타고 있는 거대한 타이타닉 호가 가라앉고 있는데, 청년들이 잔소리 듣는 걸 싫어하니까 가만히 있어야 하나요? 그냥 같이 죽자고 해야 하나요?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답답합니다.

김도언 : 그런데 문학적인 언술로 뭔가를 던지고 가르치는 게 기술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문학을 일종의 수사로 받아들이잖아요. 레토릭으로.

이문재 : 누가 그러는데요? 왜 문학이 수사고 간접화법이죠? 아니, 사람이 죽어가는데, 지구 전체가 위기인데 그 상황에 대해 말하지 않고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온다고 에둘러 얘기해야 하나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김도언 : 선생님이 처음부터 문학의 소용에 대해 그런 생각을 가지셨던 건 아니지 않나요?

이문재 : 사람은 변합니다. 제가 지금 다소 격앙돼서 이렇게 이야길 하고 있지만, 내일 또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내일 아침에 문학은 깊은 메타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입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 지금 많은 이들이 작가나 시인이 되고 싶어 하는 걸 이해할 수 없어요. 그들이 작가로서 시인으로서 무얼 하려고 그토록 열심히 작가와 시인이 되려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예컨대 시인이 만 명, 이만 명 된다고 하던데 시인이 그렇게 많은데 왜 세상이 이 모양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시인이 세상을 바꾸는 사람은 아니지만 시인들이 왜 이토록 무기력한 걸까요.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사회적으로 무슨 이슈가 되는 일이 일어나면 신문에서 시인이나 소설가들한테 글을 받거나 코멘트를 받았어요. 시인과 소설가들의 직관이나 지혜가 솔루션으로 받아들여졌던 거지요. 그런데 지금은 안 그래요. 그러니까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사회가 문학의 눈을 빌리고 문학의 역할에 의미를 부여했다는 거죠. 지금은 그게 없어졌어요. 내게는 이런 변화가 문학의 사회적 역할이나 위상이 작아졌다는 증거로 보이는 거예요. 문학의 사회적 위상이 약해졌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이상한가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이상하다고 말하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요?

김도언 : 문학적 현실에 대해 회의적인 말씀을 많이 하시네요.

이문재 : 회의를 넘어 절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인류는 반드시 멸망한다고 생각해오고 있습니다. 이 지구 전체로 보면 인류가 암 덩어리입니다. 지구 생태계에서 보면 인류라는 종이 지속되어야 할 이유가 없어요. 암 덩어리일 뿐인데. 산업문명이라는 게 최악의 암 종양입니다. 지구라는 ‘살’을 파먹으면서 이런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제 살’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인류가 어떻게 하면 오래 존속하는가, 그런 게 아니에요. 앞에서 타이타닉 이야기를 했지만, 인류가 멸망할 때 어떻게 서로 예의를 갖추고 헤어지는가, 이겁니다. 배가 침몰할 때, 서로 먼저 구명정에 타려고 하지 않고 서로 양보하는 걸 상상합니다. 그리고 타이타닉이 침몰할 때 악사들이 자기 목숨을 생각하지 않고 승객들이 무사히 탈출할 때까지 연주를 하잖아요. 그 악사들이 우리 시대 예술가의 역할이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합니다.

김도언 : 선생님, 그러면 지금 오늘 날의 문학은 다시금 사회운동, 문화운동의 중심이 되어서 그런 거라도 해야 한다는 건가요? 선생님이 참여하시고 문학활동을 시작하신 동인에도 ‘운동’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잖아요.

이문재 : ‘그런 거라도’가 아니라 그걸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인간과 생명에 대한 근본적인 옹호라면 사회운동, 문화운동이 아니라 모든 운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 중심 중 하나가 정치일 겁니다. 난 문학이 왜 이렇게 왜소해지고 초라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왜소해진 걸 문학이라고 부르는 자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소위 문학의 죽음은 문학하는 사람들의 죽음, 자살이라고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내면적인 투항이겠지요.  

표현의 수위나 발언의 내용은 다소 과격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의 말에는 정연한 논리와 설득력이 있었고 무엇보다 그 자신이 자신의 말을 수도 없이 되새김질한 자의, 다시 말해 수없는 의심과 회의를 거친 말의 엄정한 단속자만이 보여주는 진정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인터뷰어를 비롯한 배석자 모두를 감화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사실 나를 포함해서 그의 시의 많은 독자들은, 그를 나이브한 리버럴리스트나 낭만주의자로 규정하는 데서 멈춰 있기 쉽다. 그것은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그의 초기시가 보여준 강렬하고 독특한 서정성의 세계와 그 선명한 이미지에 여전히 게으른 독자들이 붙들린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가 맨 앞”이라고 말하면서 자본주의와 문명을 비판하고 격렬한 언어로 문학의 왜소성을 서글퍼하는 목소리를 내는 시인은 분명 급진적으로 진화한 낭만주의자의 모습이다. 다시 생각해보건대 리버럴리스트나 낭만주의자는 기본적으로 급진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급진성이란 불가능한 것을 극복의 대상으로 상정할 때 성립되는 성질이다. 그것은 “시의 영토는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고 있지만 그 좁고 가파른 벼랑이 시의 국경”이라는 것을 알고 “한없이 죽음에 가까운 시쓰기여야만 국경에서의 삶은 지속된다는 역설” 또한 이해했던 젊은 시절의 시인 자신에서, 어떤 책임 앞에서 좀더 단호하고 분명한 태도를 가진 시인으로 진화한 모습 속에서 설명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는 지금 불가능한 것과 대치중인 것이다.

 


시를 받아 적는 무당의 태도

김도언 : 제가 선생님을 뵌 것도 오랜만이고 그동안 과문했던 탓인지 오늘 선생님의 말씀들이 무척이나 귀하게 신선하게 들려요. 이런 이야기를 어디에 가서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저 역시 초기 시의 인상에 여전히 묶여 있는 듯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이문재 : 첫 번째 시집은 제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쓴 거예요.

김도언 : 편력의 산물이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이문재 : 편력이 아니라. 그냥 받아 쓴 겁니다. 그러니까 무당, 샤먼처럼요. 들려오는 걸 받아 적은 거죠. 그런데 그게 언젠가부터 너무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받아 적는 사람이 아니고, 내가 쓴 거라는, 시에 대한 저작권을 갖고 싶었던 겁니다.

김도언 : 그런데 선생님의 첫 번째, 두 번째 시집은 시공부하는 사람들의 필독서였어요. 자부심 같은 거 없으세요?

이문재 : 그런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첫 시집이 아직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자부심이라니, 무당에게 무슨 자부심이 있어요?  무당이 저작권을 주장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20대 중반에는 하루 밤에 아홉 편을 받아 쓴 적도 있어요. 이러다 죽겠구나 싶어서 뛰쳐나와서 술을 퍼마시곤 했습니다.

김도언 : 그래도 <시운동> 동인들이 시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의미를 갖는 게 있잖아요. 어떤 세대론적 교감이나 전략을 수반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등단하실 무렵에 선생님 세대의 가장 큰 고민이나 관심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요. 그게 동인의 형태로 집단화되어서 발화된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때 동인들이 제가 보기엔 다 낭만주의자들 같았어요.

이문재 : 그 시대의 화두는 민주화였죠. 그런데 낭만주의가 가장 무서운 거예요. 혁명가들이 다 낭만주의자들이잖아요. 낭만주의는 세상에 없는 걸 동경하면서 거기에 목숨을 바칩니다.  그때는 다들 민중, 민주, 통일 이야기할 땐데 그런 이야기를 안 하는 사람들이 모인 거죠. 그렇다고 당시 시대정신을 외면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그야말로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막연한 부채감이나 두려움이 없지 않았지만, 무당 같은 존재였으니 내 개인의 상상력이 발휘된 목소리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화염병을 들거나 선언문을 쓰는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구요. 그래서 어디선가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있습니다. 1980년대에는 내 뒤에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맨 뒤를 따라다녔는데, 지금은 내 앞에 있는 사람보다 내 뒤에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런 사태를 ‘역진화’라고 부르곤 합니다. 제 시에 메시지가 분명한 것도 이 때문이겠지요.

김도언 : 그럼 그 당시 시대를 지배했던 민중시, 노동시에 대한 생각은 어떠셨어요?

이문재 : 부러웠습니다. 난 왜 저런 시를 못 쓰나. 박노해, 백무산. 다 부러웠어요. 무섭기도 했지만 쓰려고 해도 안 써졌습니다.

김도언 : 그래도 문학이 다성적인 목소리를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문재 : 선택은 각자의 몫입니다. 저는 강요하지 않습니다. 시대를 보는 눈은 다 다릅니다. 역사와 문명을 내면화하고 의미화하는 것도 다 다를 겁니다. 그런데 하나로 가자,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다만 아까 이야기했지만 뭔가 잘못되고 있으면 거기에 대해 자기 방식대로 발언해야 하지 않나, 그런 거예요.

김도언 : 오늘 선생님은 계속해서 일관되게 문학의 사회적 역할, 소용을 말씀하시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절 탓하실 수도 있는데, 선생님은 그걸 부정하실 수도 있지만 선생님께서 발을 딛고 계신 진영은 일종의 문학주의 진영이란 말이에요.

이문재 : 아니에요. 저는 <녹색평론> 편집자문위원이기도 해요. 저는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끔 <문학동네>에 쓴 글도 문학주의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저는 문학주의자가 아니에요. 현실적인 감각, 지구적 인식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제가 기자 생활 오래 하고 지금은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데, 기자나 대학선생이나 우리 삶의 조건과 미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계속 발언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기사로 썼던 걸 시로 쓰고, 시로 쓰려던 걸 기사로 쓰기도 했어요. 상호연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죠. 시와 기사. 시인과 기자. 난 그게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자생활을 하는 것이 문학에 방해가 되지 않았는가 묻지만 난 안 그랬어요. 그리고 내가 있던 매체는 상대적으로 언론 자유가 보장된 데였습니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자면 저는 제가 쓰고 싶은 것만 썼어요. 지금은 대학에 와 있는데 저는 교육이나 연구보다는 대학 혁신 쪽에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대학다운 대학이란 무엇인지, 미래의 대학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이런 화두를 붙잡고 있습니다.

김도언: 저는 선생님이 문학주의자라는 게 아니었고 선생님이 같이 있는 분들과 그 조직이...

이문재 : <문학동네> 편집위원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분들은 제가 존경하는 친구들입니다. 저는 그분들이 갖고 있는 문학관을 존중합니다. 20년 넘게 그분들로부터 많이 배웠고, 또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이번 겨울에 다 그만 둡니다.

김도언 : 그건 보도를 통해 봤습니다. 선생님 그러면 말이 나왔으니 문학동네는 변하나요? 그리고 문학동네가 반성해야 할 게 있다면 뭐가 있을까요.

이문재 : 젊은 친구들이 맡을 거니까 바뀌지 않겠어요. 그리고 문학동네가 잘못한 게 뭐냐고 물었는데, 반성할 것이 있다면 더 좋은 책을 못 만들고, 작가들을 더 후원해주지 못한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예지가 해야 할 일은 좋은 작품을 싣는 거 그거 밖에 없어요. 돌아가신 최인호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문예지가 뭐냐? 좋은 작품 싣는 거다. 그거 밖에 없다. 그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김도언 : 화제를 바꿔볼게요. 선생님은 우리 시사에서 중요한 시대를 중심에서 목격하셨는데, 우리 시사에서 가장 부흥했던 시기가 언제였다고 보세요?

이문재 : 나는 두 번의 대폭발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1930-40년대하고, 1970-80년대. 이렇게 두 번 밖에 없다고 봅니다.

김도언 : 선생님, 90년대 이후 시단에 대해 너무 박한 평가 아니신가요? 너무 인색하신 거 같은데요.

이문재 : 김도언 선생은 떠오르는 시인이 있나요? 저 두 번의 대폭발을 제외하면 우리 시의 틀이나 방향이 크게 바뀐 적이 없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시를 잘 못 쓴다는 말로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잘 쓰는 시인은 대단히 많습니다. 하지만, 잘 알고 계시는 것처럼 잘 쓴 시와 시를 바꾸는 시는 다릅니다.


시여, 정치가 되자

인터뷰 하는 내내 들려온 그의 목소리는 마치 전위성을 내장하고 있는 어떤 고전음악과도 같았다. 그의 목소리의 성조는 이를테면 냉소와 분노와 체념 사이를 불규칙하게, 불연속적으로 오갔다. 그런데 그게 내 귀에 참으로 절묘한 화음처럼 들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를테면 전위음악가 메시앙이 시도했던 불협화음까지를 의도한 실험적인 화음처럼 들리기도 하는 것이었다. 도무지 동시에 설 수 없는 낭만적 회의주의자의 모습과 엄정한 현실주의자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드러나는 분열과 모순의 어떤 대극적인 음악적 앙상블이랄까. 나는 그의 단호한 모습도, 체념한 모습도, 화를 내는 모습도, 숙취와 피로에 쪄든 모습도, 논리적인 모습도 그가 시인으로서 능히 감당해온 어떤 늠름한 태도 속에 수렴되는 것을 느꼈다.

그는 빛나는 신생의 감수성과 서정으로 80년대 시단의 경직성에 경종을 울린 청년 시인에서 이제 지천명의 후반으로 넘어가는, 삶의 또 다른 절정에 서 있다. 그는 일주일에 일곱 날을 학교 연구실에 나온다고 한다. 그는 자신에게 무척이나 가혹한, 그래서 순정한 전위적 낭만주의자의 태도를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 태도 속에서 이 세계에 대한 그의 연민은 깊고 넓어졌으리라. 그의 칼칼한, 그러니까 꼰대이기를 자처하면서 던진 어떤 목소리, 내 귓바퀴에 단단히 새겨진 목소리를 최대한 육성에 가깝게 옮기면서, 한 시인의 절실하고 핍진한 정신적 풍경을 묘사하기엔 한없이 모자란 인터뷰 글을 마친다.

“난 정치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왜 정치를 안 하려고 하지. 적지 않은 수의 우리 국민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오해하고 있어요. 선거제와 정당제, 삼권 분립이 민주주의인 줄 아는데, 그건 민주주의의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민주주의는 한마디로 인민이 자기 스스로 통치하는 거예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통치하는 거요. 루소가 말한 ‘자유’의 개념과 흡사합니다. 루소는 자유를 자기가 법을 세우고 그 법에 순종하는 거라고 말합니다. 문학 행위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작품을 쓸 때마다 스스로 법을 세우고 그 법에 복종하는 게 문학일 겁니다. 문학하는 자의 삶도 그와 마찬가지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세운 법이 불가능하더라도 그걸 추구하는 게 문학이라고 봅니다.

사실, 병들고 타락한 세계, 멸망을 향해 질주하는 이 문명을 시인이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해야 합니다. 가능하다면 누가 그걸 못하겠습니까? 그리고 가능한 것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이윤이나 성취감은 있을지 몰라도. 내가 믿는 올바르고 아름다운 세계, 인간과 우주가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세계, 그 불가능의 세계에 대해 발언해야 합니다. 불가능에 대한 추구를 말할 때마다 제가 소개하는 분이 있습니다.

지난 세기 중반 미국에서 활동한 기독교 아나키스트 애먼 헤나시입니다. 이 분은 1인 시위의 창안자이기도 한데, 무슨 일이 생기면 뉴욕 거리에서 혼자 피켓을 들고 시위를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기자나 행인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 혼자 그렇게 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겠느냐.’ 그때마다 애먼 헤나시는 씨익 웃으며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도 안다, 나 혼자 이런다고 세계가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 또한 나를 바꾸지 못할 것이다.’ 내가 세계를 바꾸겠다는 각오보다 세계에 의해 내가 바뀌지 않겠다는 의지. 이 얼마나 고귀하고 당당한 태도인가요.” 


시인 이문재는 1959년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2년 「시운동」 4집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생태적 상상력’의 시인으로 김달진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소월시문학상, 지훈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산책시편』, 『마음의 오지』, 『제국호텔』,『지금 여기가 맨 앞』이 있고, 산문집으로는 『내가 만난 시와 시인』,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등이 있다. ‘시사저널’ 취재부장과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겸임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강의하고 있다.

 
허연

 

빗나간 것들에게 바치는 헌사

 

 

<시인으로 산다는 것> (문학사상 2014)

 

 

1

 

난 인간의 신념이나 약속을 믿지 않는다. 인간을 믿지 않는다. 인간에겐 입장과 생존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난 인간을 찬양한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구름무늬 표범이나 붉은점모시나비를 찬양하라면 하겠지만 인간을 찬양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이 내세우는 명분은 아무리 고매하거나 근사해 보여도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콤플렉스나, 치부를 감추기 위한 가면이나, 이익이나 보상심리가 숨겨져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인간이다. 물론 난 인간을 찬양하지 않을 뿐 미워하거나 싫어하지는 않는다. 단지 인간과 세렝게티 평원의 하이에나가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간혹 인간을 넘어선 인간이 있다고는 한다. 아마 정신적으로 거대 공간과 거대 시간을 살았던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런 사람을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는 찾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난 인간을 찬양하는 시를 쓰지 못했다. 나에게 인간이란 늘 측은하기는 하지만 감동적이지는 않은 대상이었다.  그렇다 보니 내가 쓴 시들은 결국 내 안에서 쓰여지는 자폐적인 병증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읽어줄 사람의 기분이나 감정은 내 시 창작에 있어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난 어떤 시가 한국말로 쓰여지는 시의 정답인지 잘 모르겠다. 교과서에 나왔던, 혹은 다른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시의 상당 수를 나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떤 시가 좋은 시인지 나쁜 시인지 잘 모르겠다. 내가 쓴 시롤 몇 번 읽어 봐도 어느 날은 좋고 어느 날온 마음에 안 든다. 그래서 나는 판단을 유예한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난 그저 내가 알고, 사는 만큼만 시를 적는다. 난 서을 태생이다. 시 쓰는 다른 친구들처럼 야트막한 마율과 시냇물에 대한 기억이 없다. 소를 끌던 아버지도 없었고, 머리에 수건율 동여맨 어머니도 없었다. 여러 시인들의 시집에 꼭 등장하곤 하는 농촌이나 지방 소도시를 배경으로 한 상징적 사건이나 인물이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난 그저 만원 버스에 시달리며 청소년기를 보냈고, 일찌감치 아파트 생활을 시작했고, 도시인 대부분이 하는 것처럼 출퇴근하는 직장을 다니면서 이 나이를 먹었을 뿐이다.


절친한 문우들이 인도니 네팔이니 하는 곳을 가자고 할 때 "나는 덥고 벌레 많은 나라는 가고 싶지 않다’고 주장하다 구박을 받곤 하는 서울 놈일 뿐이다. 문제는 그런 내가 시를 쓴다는 거다. 하고 많은 일 중에 시를 쓴다는 거다. 시나 평론을 부지런히 읽지도 못하고, 시적인 냄새라고 해봐야 한 달에 한 번쯤 시단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일 때나 맛보는 내가 시를 쓴다는 거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 어울리지 않는 짓이다.

 


2


내가 왜 시인의 길을 가게 됐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럴 운명이었던 것 같기도하다.
고등학교 때 수학 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 당시로는 드물게 머리를 쇼팽처럼 기른 예술가적 분위기를 풍기시는 분이었다. 하지만 이 예술가적 풍모는 수업 시간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수업 시작종이 울리는 순간부터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릴 때까지 선생님은 잡담 한마디 하지 않았다. 선생님이 예술가의 풍모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신 건 내 기억으로는 단 한 번이었다. 한 방송사에서 고등학교를 찾아다니며 촬영하는 무슨 하이틴 프로가 있었는 데, 그 프로의 ‘우리 학교 명물'인가 하는 코너에 선생님이 출연해서 클래식 기타 연주를 하신 것이었다.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반백의 장발. 비스듬히 세운 기타. 거기서 흘러나오는 선율, 무심해 보이는 선생님의 표정은 하나의 정지 화면이자 ‘완성’이었다.
그날 이후 선생님은 내 영웅이었다. 수학에 관심도 없으면서 수학 시간만큼은 충실하려고 애썼고, 다른 모든 아이들이 선생님의 딱딱한 수업을 지겨워할 때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그러던 어느 날, 잡담이라고는 안 하시던 선생님이 ‘법어’ 한마디를 남기셨 다. 그 ‘법어’를 듣는 순간 나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둣한 충격을 받았다. 법어의 내용은 이랬다.
“너희들 중에 글을 쓰고 싶은 사람 있지. 예쁜 여학생을 보고 화가 나는 사람은 글을 써도 돼. 하지만 예쁜 여자를 보고 손이나 잡고 싶은 놈들은 그냥 살아.”
바로 내 이야기였다. 나는 예쁜 여자를 보면 늘 화가 났다. 배어나오는 자신감이나 그늘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분위기에 화가 났던 것 같다. 사춘기 소년에게 미모의 여인은 계급이자 권력으로 다가왔다. 텔레비전 드라마처럼 행복하게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운을 예감하던 소년에게 구김살 없는 미모의 여성은 느끼한 적으로 다가왔다. 햇살보다는 그늘이 나와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어쨌든 그 무렵부터 나는 내가 감히 글을 쓰는 사람으로 천명을 받았다는 착각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게 화근이었다.

 


3


내가 만약 노래를 잘했더라면 혹은 노래를 만드는 걸 배웠다면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내게 있어 시는 내가 나이기 때문에 만들 수 있는 노래다. 내 노래는 ‘어디 가느냐'고 누가 물었을 때 ‘그냥 간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내 노래는 그즈음의 나일 뿐이다. 난 내 노래가 정서를 함양하거나, 혹은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데 사용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내 노래가 나의 밥이 되거나 명예가 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내 시는 나만의 공화국에서 벌어지는 일일 뿐이다. 몇 명의 독자들이 내 공화국을 찾아주는 건 하나의 정치적 승리다. 결코 문학 정신의 승리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어쨌든 시를 쓰기 시작했다. 고흐 같은 욕심이었다.
빗나가고 싶었고, 빗나간 것들에 대해 노래하고 싶었고, 빗나간 것들을 증거하고 싶었다. 그 무렵 내 시는 그랬다. 불행히도 난 누구에게도 시를 배우지 못했다. 오로지 내게 시를 가르쳐주고, 시의 길을 일러준 사람들은 흑백사진으로 남아 있던 오래전 세상을 떠난 시인들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내가 다니던 예술학교 구내식당의 비빔밥 값이 천 원이었다. 그 천 원이라는 돈은 손바닥만 한 판형으로 출간되던 민음사 세계시인선의 가격과 같았다. 용돈이 넉넉하지 않던 나는 오전 내내 비빔밥과 말라르메를, 비빔밥과 로트레아몽을, 비빔밥과 오든을, 비빔밥과 에즈라 파운드를 놓고 고민을 해야 했다. 다행히도 말라르메와 로트레아몽과 오든과 파운드가 비빔밥을 이기는 경우가 많았다.


예술학교를 2학년까지 다니고 군대를 갔는데, 그 무렵 나는 책 읽기에 빠져 있었다. 전투적이었다. 릴케의 말처럼 이 우주를 한없이 알고 싶었다. 외출이나 휴가를 나와서 책을 사들고 들어가면 늘상 고참들에게 빼앗기기 일쑤였다. 그때 나는 묘수를 냈다. 서점에서 제목만 봐도 질려버릴 만한 어려운 책을 사들고 들어갔던 것이다. 그 방법이 성공을 거두어서 다행히 책을 빼앗기지는 않았다. 그때 할 수 없이《원예학 입문》같은 책까지 읽었던 것 같다. 재미있었다.
난 내 기억력에 대한 과신이 있었다.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는 외가 쪽 집안 어른이었던 벽초 홍명희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시곤 하였다. ‘말도 마라, 그 양반 기억력이 얼마나 좋은지, 신문을 다 읽고 나서는 그 내용을 토씨 하나 안 틀리게 줄줄 외셨다.” 무슨 신문이었는지, 그때 신문은 몇 면이나 발행됐는지 알 수는 없지만 외할아버지의 회상은 어린 시절 내 우쭐함의 한 가지 근원이었디.


내게도 이 기억력 유전자가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읽는 책들이 언젠가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는 무엇인가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근사한 이론가가 되는 상상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나는 그 숱한 문장들을 보며 오로지 내가 쓸 문장만을 생각했을 뿐이었다.《원예학 입문>을 읽으며 나는 내 악보만을 생각했던 것이다.

 


4


1991년 등단을 했다. 여름날 여자친구 손을 잡고 찾아간 을지서적 잡지 코너에서 가장 예쁜 문예지를 골라 즉흥적으로 투고를 했고, 그것이 얼떨결에 등단으로 이어졌다. 등단을 하고 가장 먼저 친해진 문우가 같은 해 《문학사상》으로 등단했던 김중식이었다. 그와 내가 절친이 된 계기에는 김수영이 있었다. 우연히 술자리에서 만나 의기투합한 우리는 어느 가을날 도봉산 자락의 김수영 무덤을 찾아갔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영국 빵집 사이로 난 길을 한참을 걸어 무덤에 도착했고, 경건하게 소주를 따라놓고 우리는 그 시절 우리가 가장 좋아했던 김수영의 시〈헬리콥터>를 비장하게 읽었다. 하늘 아래 우리만 있는 것 같았다. 산을 내려와 수유리 허름한 시장통에서 소주를 마시며 우리는 우리 앞에 펼쳐질 불안한 미래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짐승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짐승이 지배한다고 생각했던 땅에서 우리는 시만을 생각했고, 그것이 우리가 갈 길이라고 감히 믿었다. 동시에 우리는 결국 패배할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패배라는 게 두렵지 않았다. 우리에겐 시가 있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한 순혈주의 같은 게 있었던 귀여운 청년들이었다.


출퇴근하는 직장을 다니면서 시적 자아를 지키는 일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시를 쓰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다행인 건 그 고통이 내게는 달갑다는 사실이다. 일터에서 지하철에서 혹은 식당에서, 나는 매일매일 사적 자아를 지키기 위한 투쟁을 한다. 내 노래를 부르기 위한 투쟁을 한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만만치 않은 대가를 치른다. 그래도 좋다. 내 노래를 부를 수 있으니까.


밥을 위해 일을 하지만 그 일이 내 사적 자아를 위협하는 순간은 비일비재하다. 딜레마이기도 하고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다. 하지만 사적 자아만 지킬 수 있다면 그 어떤 일도 내게 위협이 되진 않는다. 단지 나는 많은 시간과 물리력과 내 건강을 일터에 쓰고 있을 뿐이다. 그 대가로 나는 나만의 노래를 부른다. 그러면 됐다. 노래를 할 수 있어서.


사실 내가 만나본 대부분의 미술가나 연극배우나 가수나 발레리나 모두 치열한 일터에서 사적 자아를 지키기 위한 눈물겨운 투쟁을 하고 있었다. 인정 받는 사람은 극소수였지만, 그들은 밥 앞에서 정직했고, 예술 앞에서 정직했다. 그들에게 밥과 예술은 수백 수천 시간외 노동과, 수백 수천 시간의 인내의 대가로 오는 사적 자아의 발현이었다.

멀리서 보는 발레리나는 아름답고 가볍지만 무대 위 가까이서 본 발레리나는 충격적일 정도로 땀범벅이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땀으로 범벅이 된 발레리나를 가까이서 본 적이 있는가. 적어도 그 정도의 땀은 흘려야 창조적 산물이 나오는 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문학 낭인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5


한동안 시를 떠나 있기도 했다. 나는 종주먹을 쥔 나쁜 소년처럼 세상에 나가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밥을 해결해주는 직장을 다녔고, 혁명이고 뭐고 다 지나가버린 거리에서 매일 술을 마셨으며, 나비 떼 같은 사랑을 했다.
내가 결코 비범하지 않은 그저 그런 시정잡배임을 뼈저리게 깨달았던 세월이었다.  시를 떠나서 살 수 있다고 믿었던 세월이었다. 아무것도 아쉽지 않았고, 어떤 문학도 그립지 않았으며, 문학판의 어떤 일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난 이상한 진실을 깨달았다. 말하는 법, 분노하는 법, 사랑하 는 법, 싫고 좋은 것을 구분하는 법을 모두 시에서 배운 것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너무 어린 나이에 시의 법을 따라 살았으므로 나는 시를 벗어나서 살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겸연쩍은 일이긴 했지만 나는 다시 시를 쓰기로 했다. 그 심정을 담아 쓴 시가 두 번째 시집의 표제작이 됐던〈나쁜 소년이 서 있다〉였다.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처연하게 늘 한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

 

 *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사, 2008

 


십 년 만에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쓰는 행위가 곧 시임을 알게 됐 다. ‘잘 쓴 시’, 좋은 시’라는 말도 큰 의미가 없음을, 심지어는 시를 발표하고, 시집을 내고 하는 일도 ‘시’의 본질 안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 일임을 알게 됐다.


살아 있는 누구도 날 동화시킬 수 없으며. 누구도 날 감동시킬 수 없다. 이것이 나의 질병이다. 오로지 죽은 자들만이 가끔 나를 흔든다. 죽었기 때문이다. 이 부족사회에서 나는 제사장 같다. 존재하지 않는 부족의 혼을 불러오는 자다.
인간은 별거 없다. 다 그저 그렇고 그렇게 산다. 목적 없는 자는 없고, 남을 위해 사는 자도 없다. 그런 인간이 유일하게 위대한 건 죽는 날이 온다는 거다. 현실계에서 사라지는 것. 그것만이 인간에게 주어진 위대함이다.


아쉽다. 내게 너무나뚜렷한 모국어가 있다는 게. 가령 희화시켜 말하자면 나는 이런 사람이 부럽다. 헝가리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 영국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카자흐스탄에서 보내고 대학 은 러시아에서 다니고 결혼은 베트남계 프랑스인이랑 해서 지금은 스위스에서 살고 있는 사람. 늘 나는 나의 상상력과 언어가 부질없고 부박하기를 원 한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오독이 되기를 원한다.


나의 언어가 뚜렷하고 명쾌한 의미와 음가를 가지고 있기에 나는 내 언어와 싸운다. 언어와 싸우는 것이 과도하고 가당치 않은 책무라는 걸 안다. 그렇지만 난그렇게 하고 싶다.
 

6


믿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시는 인간과는 별도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 같다. 누군가의 몸을 빌려서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시는 최적화된 어떤 사람의 몸을 통해 세상에 나온다. 시인은 숙주일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잘났든 못 났든 간에, 혹은 그 사람이 자신이 쓴 시가 생산되는 구조 전체를 인지하고 있든 그렇지 못하든 간에, 시는 원래 있었던 것이 단지 새로운 조합으로 만들어져 어떤 몸을 빌려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더 과감하게 이야기하면 시는 우주 어딘가에 원래 있었던 주술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내 몸과 정신을 시가 찾아들기 쉬운 최적의 상태로 만드는 것이 나의 시 쓰 기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게 잘 안 될 때가 더 많다.


물론 시는 몸과 정신을 거치는 과정에서 그 몸과 정신을 닮는다. 인간이 하는 일이 있다면 단지 그 정도일 뿐이다. 시로 하여금 몸을 닮게 하는 일. 나는 어쩌다 시를 세상에 꺼내놓는 팔자가 됐다. 난 사실 그 팔자에서 도망 치고 싶을 때가 더 많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인이라는 보직은 멋지지도 않고 자랑스럽지도 않다. 다행스러운 건 내가 시정잡배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때 뛸 듯이 기뻤다. 따라서 난 시정잡배의 시를 쓸 것이다. 

누군가 내 시에 대해 부도덕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누군가는 내 시가 너무 비관적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누군가는 내 시에 대해서 지나친 예술 취향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또 누군가는 내 시에 대해 연애시가 너무 많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또 누군가는 너무 낭만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난 잘 모르겠다. 왜 시가 부도덕하면 안 되는지, 왜 시가 비관적이면 안 되는 지, 왜 시가 예술 취향이면 안 되는지, 왜 연애시가 많으면 안 되는지, 왜 너무 낭만적이면 안 되는지 잘모르겠다.


모든 시는 불온하고 모든 시는 제멋대로 쓰여져야 한다. 모든 시는 그즈음의 외마디 비명이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은 시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세상이 그것들을 꼭 받아줘야 할 책무는 없다.


시는 눈에 보이는 세상과는 결코 친해질 수 없다. 내가 시인으로 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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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허연, 세속도시의 신표현주의자

<김도언의 시인의 얼굴> 네 번째 시인: 허연
(채널 예스, 2015.7.13)



그는 자신의 내력이나 연혁을 구조화하는 동안 양산되는 수많은 추상적 조건 속에서 다양한 구상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시인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수많은 구상적 이미지들을 떠올려보는 건 온전히 독자들의 행복일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시는 인간과는 별도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 같다. 누군가의 몸을 빌려서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시는 최적화된 어떤 사람의 몸을 통해 세상에 나온다. 시인은 숙주 일지도 모른다. … 더 과감하게 이야기하면 시는 우주 어딘가에 원래 있었던 주술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내 몸과 정신이 시가 찾아들기 쉬운 최적의 상태를 만드는 것이 나의 시 쓰기다.”
-허연, 「빗나간 것들에게 바치는 찬사」, 『시인으로 산다는 것』에서(문학사상, 2014)


시인의 인상, 이미지의 파편들

주관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그의 인상을 묘사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무래도 이 글은, 내가 그로부터 받은 인상과 축적된 이미지를 스스로 확인하고 증명하는 선에서 매듭되어질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만큼 그의 이미지가 어떤 하나의 개념으로 환원하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다자적이고 난해하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그는 이를테면 수많은 ‘소립자’로 이루어진 다면체다. 

보헤미안, 까뮈, 댄디, 카프카, 모순, 자기소외, 사무엘 베케트, 부조리, 데카당, 코스모폴리탄, 아웃사이더, 아나키즘, 니힐리스트, 보르헤스. 제임스 조이스.

시인 허연을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단어들을 기준 없이 무작위로 배열해봤다. 그는 정말 까뮈 같다. 나른하고 텅 빈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볼 때, 그는 밀납 같은 엄정함으로 현실 너머를 응시하는 실존주의자의 표정을 갖는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이방인들의 가장 고통스럽고 아름다운 표정이 그러했다고 믿는다. 그는 또한 카프카 같다. 창백한 얼굴로 넥타이를 매고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는 똑같은 직장으로 출근과 퇴근을 하고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여덟 시 이십 분쯤 출근해 저녁 일곱 시쯤 퇴근하는 걸 반복하는데,(그의 직장은 신문사여서 심지어 일요일에도 출근을 해야 한다.)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퇴근 후엔 술을 마시면서 세속의 명령을 집행한다는 측면에서, 그는 보험국의 심사원으로 ‘위장근무’하며 예술적 자의식을 궁지로 몰아넣었던 카프카의 비애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재현하는 자다. 그는 콧날이 오똑한 체코인 선배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이들이 방심한 채 육체에 쌓인 피로를 푸는 심야에, 책상 앞에 등불을 켜고 앉아 고유한 언어의 칼날을 조탁하는 것이다. 

그는 또한 저자의 소문과 사실을 다루는 부박한 세속적 조직과 성스러운 시의 제단을 끊임없이 오고간다는 측면에서 모순적 상황과 매순간 부딪쳐야 하는 부조리한 니힐리스트일 수밖에 없으며, 모국어와 순혈이라는 생래적 조건을 여일하게 부정한다는 측면에서 래디컬한 코스모폴리탄이다. 그가 부단히 전위를 탐하며 실험과 부정을 멈추지 않을 때 그는 새뮤얼 베케트의 표정을 가지며, 집요하게 고전과 이상의 활자에 몰입하며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 언어의 무의식을 해독해내고자 할 때 그는 보르헤스나 제임스 조이스의 표정을 갖는다. 그리고 그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위장한 채, 익명적 상황을 가공하고 연출하면서 자신이 나고 자란 회색의 거대도시를 활보할 때, 그러니까 쇼핑을 하고, 연애를 하고, 여행을 다니고, 욕망을 소비할 때 그는 눈에 띠는 보헤미안이고 댄디며 기꺼이 아웃사이더다. 

쉽게 설명할 수도 없고, 설령 쉽게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만만찮은 민망함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고백이지만, 나는 그의 시와 글들을 따라 읽으면서 일찌감치 그에게서 육친적인 동질감을 읽은 적이 있다. 같은 유전자형을 가진 피가 강제하는 기질과 지향의 유사성 같은 것 말이다. 그것은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놀랄 만한 것들인데, 그가 수줍지만 명료한 시적 화자의 목소리로 집단에 속하는 것을 거부한다고 말할 때, 편집증적인 에고에 자폐적으로 침잠하며 자멸을 꾀할 때, 단독자의 태도로 힘이 모이는 곳을 못 견뎌할 때, 자아를 분열시킨 망명자의 욕망으로 먼 곳을 동경할 때, 나는 여지없이 그에게서 피의 동질성을 읽어냈던 것이다. 아, 여기 같은 꿈을 꾸고 같은 상처를 안고 가는 사람이, 내가 걷고 싶은 길을 몇 걸음 앞서서 걷고 있는 사람이 있구나, 라고 자백하게 하는 사람, 그가 내게는 시인 허연이다. 

텍스트로만 접하던 그를 처음 본 것은 십여 년 전쯤이었던 것 같다. 한 출판사의 에디터로 일하고 있던 나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였던(그는 현재 같은 신문사(매일경제신문)의 문화부장으로서 재직 중이다) 그의 취재원이 되어 공적인 용무를 가지고 만났던 것이다. 이런 일은 이후 두세 차례 반복됐는데 그때마다 그와 나는 정확히 주어진 용무만을 마치고는 서둘러 돌아서기만 했다. 내가 글을 쓴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가 몇 번 ‘곁’을 내주려는 기미를 보였을 때조차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같은 내상을 가진 이들끼리의 연대가 얼마나 자욱하고 매캐한 연기를 피워낼지, 어지간히 숫기가 없던 나는 그 수상한 쾌감을 견디기 어려울 거라고 지레짐작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문단 술자리 같은 데서 마주쳤을 때도 어떤 신호를 교환하듯 눈인사만 주고받았을 뿐이다. 그런데 쭈뼛거림 같은 것이 왜 전혀 없었겠는가. 나는 몇 번이고 돌아서서 그에게서 내가 읽어냈던, 그 비밀스러운 육친적 동질감을 고백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끝내 시도되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에게는 그때나 지금이나 어떤 타자가 안전거리 이상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엄정한 방어적 태도가 있는데, 그것은 처절하게 내습을 당해본 자의 핍진한 체험에서 오는 것처럼 보였다. 삶으로부터 피습당한 자의 표정을 가진 시인이라니.  

이런 소이연을 상기해보면 인터뷰어로서 내가 그를 점지하고 만나기로 한 것은 어쩌면 매우 내밀하면서도 필연적인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터뷰 장소인 강남의 북카페에 나타난 그는 사제복처럼 칼라가 없는 블랙 라운드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와 아주 잘 어울리는 입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그의 친가 쪽이 일찍이 개화한 천주교 집안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의 집에서는 자식 중 한 명은 꼭 사제나 수녀가 되는 전통이 있었고 아버지는 그를 그 적임자로 꼽았다고 한다.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 그는 혈족이 부여한 자신의 운명에 절대적으로 순응했다고 한다. 착실하고 모범적이고 믿음직한 아들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고.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그는 극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부정하고 저항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부터 들어봐야겠다.


성스러운 것의 대체재로서의 시



김도언 : 선배님 집안에 사제나 수녀가 나오는 전통이 있다고 들었어요.

허연 : 나는 소위 말하는 서울의 엘리트 집안에서 태어났어. 할아버지가 제국대학을 나온 건축기사셨고, 할아버지가 지은 일본식 건물이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교사였고, 아버지는 미군부대 같은 곳에서 통역관 같은 걸로 일하는 모던보이였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삼남매를 앉혀놓고 누나한테는 너는 대학교수가 되고, 나한테는 사제가 되고, 동생한테는 의사가 되라고 했어. 영광스럽게도 내가 전통을 이을 대상이 되었던 거지. 중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난 신부가 될 거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어. 그래서 특별대접을 받기도 했고. 시네마천국의 토토처럼 신부님 미사 볼 때, 수발을 드는 복사라고 있는데 그걸 하는 순간이 되게 행복했고.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 그게 싫어졌던 거야.

싫어진 가장 큰 이유는 고등학교 때 세상에 여자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 그런데 성직의 길은 여자랑 유리되는 거잖아. 그리고 내가 생각보다 참을성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또 생각보다 게으르다는 걸 알게 되었어. 또 하나 치명적인 건 내가 사람을 안 좋아하더라고. 사제가 되기에는. 그런 이유로 가톨릭대학 신학부를 포기했던 거야. 그걸 집에 이야기하니까 난리가 났지. 그 전까지는 예민하고 공부 잘하고 눈물도 많고 그런 학생이었는데 고등학교 때 돌변하게 되었어. 꼴찌도 해보고 경찰서도 들락날락하고 집안에서도 버려지고. 그 무렵에 내가 왜 이럴까 생각을 해봤는데 평범하게 살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 난 사실 이런 말이 되게 싫었어. 너는 천상 기자다, 천상 은행원이다, 천상 교사야, 이렇게 규정하는 것들이 싫었던 것 같아. 그러면 어떤 식으로 나만의 고유한 존재방식을 찾을 수 있을까를 생각해봤는데 막연히 그게 창작이라고 생각했던 거 같아. 미술반이어서 미대를 생각해보기는 했는데, 미대 갈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고. 공부도 안 됐고. 그런데 그때, 사회학을 공부했던 외삼촌이랑 방을 잠깐 같이 쓴 적이 있었는데 외삼촌 책 중에 외국 시집이 많이 있었어. 그걸 사전도 찾아보면서 보고. 그러다 그때 만난 거야, 문학을.

김도언 : 문학을 우연히 만났군요. 그렇다면 특별히 이렇다 할 상처와 콤플렉스 같은 게 없었던 건가요?

허연 : 어느 사이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서 지금 한국 나이로 오십이 되었는데 사실은 진짜 후회하고 있어. 사제의 길을 가지 않은 걸.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가치 있는 삶이었던 것 같아. 그게 나를 계속 따라 다녀서 내가 과격하게 나쁜 짓을 할 때도 사실은 그 콤플렉스가 작용한 거 같고, 내가 과도하게 슈퍼에고를 부릴 때도 그게 작용하는 거 같고. 

김도언 : 숙명으로 주어졌던 길을 가지 않은 것에 대한 죄책감, 콤플렉스가 있으시다는 거죠.

허연 : 그래 운명을 부정하고 거부했던 사건, 그게 나를 만든 큰 부분이었던 것 같아.

중요한 발언이다. 운명을 부정하고 거부했던 것이 콤플렉스로 작용하면서 자신을 만들어냈다는 시인의 자기진단. 그러니까 어떤 대역을 수행하는 자가 자기근원을 응시하면서 지금의 자리를 성찰하는 것. 그의 시편에서 수없이 만났던 자기부정, 자기소외, 자기조롱의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 사제라는 성스러운 직분을 대체하기 위해 택했던 것 역시, 신성에 대한 자부 없이는 견뎌내기 어려운, 저 오르페우스가 가르쳐준 직업 시인이었다는 것. 성스러움을 피해 또 다른 성스러움 속으로 숨어든 시인의 운명. 하지만 시인은 대체재로 선택한 직업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을 영 마뜩찮아 한다.

그의 말대로, 그는 문제적 첫 시집 『불온한 검은피』(세계사, 1995)을 펴낸 이후 시의 자리로부터 훌쩍 떠난다. 그 시집의 해설을 쓴 평론가(황병하)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을 때, 그는 그것을 시와 이격된 자신의 현실을 상징하는 어떤 기표로 받아들이며 몸서리를 치기도 한다. 공백은 길게 이어지는 듯했지만 그는 화려하게 귀환한다. 첫 시집을 출간하고 13년 만에 두 번째 시집(『나쁜 소년이 서 있다』민음사, 2008)을, 그리고 다시 4년 만에 세 번째 시집(『내가 원하는 천사』문학과지성사, 2012)을 상재한 것이다. 독자와 평단은 재능 있는 유니크한 시인의 귀환을 환영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굵직굵직한 문학상도 주어졌다. 사실 그의 귀환은 2000년대 시단을 화려하게 수놓은 젊은 시인들이 호출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의 첫 시집을 읽으며 문학수업을 했던 김경주를 위시한 시인들이 자신들의 시적 멘토를 시의 제단으로 다시 불러냈던 것. 그러므로 그의 최근의 시업은 시적 서사의 연역적 역산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시간들에 대해 그 자신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세속과 성스러운 제단 사이의 왕복

김도언 : 현대시세계로 91년에 등단을 하시고 그동안 세권의 시집을 내셨는데, 첫 번째 시집이 나오고, 두 번째 시집이 나오기까지 공백이 꽤 길었잖아요. 그 공백기가 생업에 전념하는 동안에 어쩔 수 없이 생겼다는 걸 이해하는데, 공백이 길다 보면 다시 시로 귀환하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거든요. 그런데 마치 스톤헨지에서 유물이 발굴된 것처럼 다시 시를 쓰고 주목을 받기 시작하셨어요. 세 번째 시집 나올 즈음해서 문학상도 받으셨고요. 선배님 자신이 시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악조건에 처해 있었는데, 다시 시로 돌아오고 시 현장에 복귀하실 수 있었던 동력이 뭔지 듣고 싶어요.

허연 : 사실 시를 누구한테 배워본 적이 없어. 내가 다닌 예술학교도 초창기였던 때라 스승도 없었고, 등단도 어떻게 하는 줄 몰랐어. 다만, 자그마한 파장으로 엄청난 물결을 일으키는 몇 마디 말 같은 걸 보면서 평범하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시를 썼지. 그러다가 별다른 준비 없이 어린 나이에 등단을 하게 됐어. 그리고 입학원서 내듯이 출판사에 시 원고를 보내서 시집이 나왔지. 신문사에서 일하면서 바빠서도 그랬거니와 시를 많이 못 썼는데, 어느 날 문득 그런 걸 깨달았어. 나는 시에서 다 배웠다. 내가 웃는 거, 우는 거, 말하는 거, 화내는 거. 전부 다 시가 가르쳐준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야. 그래서 시 없이는 아무 것도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으로 다시 시를 썼던 것 같아. 근데 신문사 같은데 다니면서 어떻게 시를 쓰느냐고 사람들이 자주 묻는데, 답은 굉장히 간단해. 시 생각만 하는 거지. 나는 기본적으로 시인을 그렇게 위대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대단히 멋진 족속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냥 어떤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면역체계가 움직이는 것처럼 삶 이외의 공간이나 삶 이외에 어떤 진공상태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 같아.

김도언 : 신문사 기자로 일을 하는 동안 시에 몰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시를 쓰지 못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 시절에 괴롭지 않으셨어요? 내가 시인인데, 지금 생활 속에 너무 매여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잖아요. 또 직업상 문학적인 텍스트를 접해야 했잖아요. 그런 자극이 있어서 더 괴로우셨을 것 같은데 그건 어떻게 견뎌내고 참아내셨는지.

허연 : 몇 가지 나름의 방식으로 견딘 것 같은데, 우선 감수성, 감성 같은 걸 훼손하지 않게 해준 건 술과 연애였던 것 같아. 허구한 날 술 마시고, 연애하고 그랬던 것 같고. 또 한 가지 모범생들을 이기는 재미가 있었던 것 같아. 신문사에서 일하는 동료들 대부분이 모범생들이니까. 그 친구들을 이기는 재미가 있었던 것 같고. 살아 숨 쉬는 다른 작가나 시인들이 내 경쟁자라는 생각은 솔직히 안 했어. 내가 오만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런 생각이 안 들더라고. 남의 걸 봤을 때, 애틋하게 다가오는 것도 없고. 온 마음을 다해서 어, 얘 진짜 잘 쓰네, 이런 걸 느끼지도 못했어. 이상하게 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선 감동이 잘 안 와.

김도언 : 예, 그런 말씀 많이 하셨어요. 살아 있는 인간을 혐오한다는 말씀도. 그런데 어떻게 세속의 조직을 견뎌낼 수 있었는지.

허연 : 가족을 괴롭히지 않으려면 일을 해야 하잖아. 카프카는 거의 죽는 날까지 보험사에서 일을 했고, 엘리엇은 공공의 적으로 법정에 선 적도 있는 은행원이었고. 나는 사실 기자라는 내 직업이 콤플렉스였던 것 같아. 내가 기자의 모습이 아닌 채로 어느 장소에 갔을 때, 기자라고 하면 그 자리를 나와 버렸고. 반대로 기자로서 어디에 가는데 윗사람들이 시인이라고 소개하거나 하면 짜증을 내고. 그래서 어디 갈 때 나를 어떤 자격으로 대해 달라 미리 부탁을 할 때도 있었어. 의도적으로 아주 칼같이 분리를 한 거야. 훈련을 하니까 되더라고. 그런 노력을 했어. 

김도언 : 그 분리, 그 자아의 분리를 선배님처럼 극단으로 가지고 간다는 것. 그게 저는 상당히 경외스러워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신문사 문화부 기자라는 세속적인 직분과 시인이라는 성스러운 직위를 왔다 갔다 하는 동안, 그는 과부하가 걸려 격리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주변 지인이 거의 강제적으로 치료를 받게 했다고. 그 분리와 분열의 공포를 기꺼이 앓아내는 시인의 모습, 어찌 애틋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앞서, 신문사에서 일할 때 모범생들을 이기는 쾌감 같은 게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매우 인상적으로 들렸는데, 내 생각에 영민한 그는 ‘시를 쓰는 기자’로서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의 질서와 생리를 모두 조롱할 수 있는 자신만의 독특한 포지션을 명료하게 의식했던 것 같다. 다시 말해 그는 이쪽의 가면과 저쪽의 가면을 번갈아 써가는 식의 위장전술로, 현실적으로 나약하고 무기력하면서 시의 생리에 투신하는 문학주의자들의 ‘순결’도 조롱하고, 세속적인 원리와 이익 앞에서 결사적으로 담합하는 기성사회의 모범생들도 모두 다 조롱했던 것. ‘허연류’라고 말할 수 있는, 독특한 모순과 부조리의 시학이 촉발되는 이 절묘한 스탠스를 그 말고 과연 어떤 시인이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이제 직접 자신의 시에 대해 발설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허연식 태도, 허연 스타일의 탄생

김도언 : 문학적인 질문을 드려볼게요. 선배님이 91년도에 등단하셨는데, 그게 매우 상징적인 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당시 80년대적인 정서라는 것이 90년대 등단해서 시적활동을 하신 분들한테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저는 선배님 첫 번째 시집을 보면서, 개인적인 욕망, 불안, 공포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게 굉장히 신선했거든요. 선배님은 시인이 된 것이 우연의 산물이라고 말씀하셨는데, 90년대에 시인이 되면서 전 시대와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의식이 있으셨는지. 저는 첫 번째 시집에 그런 게 많이 내장되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개인적인 내력을 그렇게 필터링도 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게 신선했어요. 90년대의 시인으로서 어떤 목소리를 내야겠다는 생각이 있으셨는지요?

허연 : 솔직히 이야기하면, 시를 쓸 때는 몰랐고. 나중에 사람들이 이야기를 해주니까 내가 한 짓이 좀 유별난 짓이구나 생각을 했지. 내가 대학 다닐 때는 사회구성체 논쟁이 승할 때였는데, 나는 본능적으로 사람이나 감정을 패턴화하고 구분해서 이야기하는 게 싫었어.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의문이 들었지. 물론 나도 그 나이 때 책 읽은 사람처럼 사회에 분노해서 과격한 모임도 했었고, 노동해방문학 세미나 같은 것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손가락질을 받고 그랬어. 예를 들면, 그 당시에는 무조건 이애주 같은 사람이 최고의 춤꾼이라는 거야. 나는 미하엘 바리시니코프가 더 좋은 춤꿈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그런 말을 하면 손가락질을 받는 거야. 그렇게 패턴화 시키는 게 싫었고 그래서 돌아서서 씁쓸해했지. 그 안에서 자기들끼리 키재기하는 듯한 모습도 많이 봤고. 그런데 내 정서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그게 어떤 의미에서 90년대적인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어. 나는 시위하러 갈 때, 손수건도 다림질을 하는 사람이었거든.

김도언 : 시위할 때 얼굴을 가리는 손수건을 다리미로 다렸다구요? ‘댄디’라는 코드가 읽혀요.

허연 : 당시 어떤 문예지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내 시집을 비판했는데, 내용이 이런 거야. 서구취향이라고. 시 제목을 심야특급이라고 하면 되는데 왜 미드나잇 스페셜이라고 하느냐고. 다 그렇게 쓰는 이유가 있거든. 어떤 말이, 후렴이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거라고. 난 사람의 경험이 그 사람한테 장착이 되고 그게 그 사람을 뚫고 나와서 뭔가 이루어지는 게 시라고 생각해, 그런 측면에서 시인은 훌륭한 악기 같은 거지. 악기는 불행해도 상관없어. 문학이 나오는 데는. 나는 훌륭한 악기가 되기 위해 지식과 교양에 편집증적인 관심을 갖고 있어. 그래서 문학과 직접 관계된 어떤 일을 하기보다는 내가 일상 속에서 만나지 못하는 것, 그런 것들을 많이 훈련했던 것 같아. 훌륭한 악기가 되고 싶었던 거지. 그래서 어류도감, 지리부도 같은 것도 많이 봤지.

김도언 : 제가 선배님 시에서 아주 인상적으로 발견했던 요소가 자기조롱, 자기풍자 같은 거예요.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는 작품에서 그게 가장 잘 나타나는 것 같은데요. 선배님은 자기조롱이나 자기풍자를 상당히 전략적으로 하시고 있는 것 같아요. 선배님 문학에서 자기조롱이나 자기풍자가 가지는 의미는 뭘까요?

허연 : 어떤 태도 같은 거겠지. 나는 솔직히 내가 천재인 줄 알았어. 나를 천재라고 생각하고 살았고, 너무나 기억력이 좋았고, 읽은 건 줄줄 외우고 그런 정도였고. 우리 집이 어떤 집안인데 그런 것처럼. 그런데 서른 살이 넘어가고 어느 날 깨달았어. 내가 글을 조금 읽고, 조금 폼 잡을 줄 아는 시정잡배였구나라는 걸. 그걸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어. 그래도 마인드컨트롤을 했고, 시정잡배의 시를 쓰기로 마음먹었어. 나는 시정잡배다. 그때 막 홀가분하게 살았어. 심지어 전화 받을 때도 아, 나 잡배인데, 그러곤 했어. 자기조롱, 자기풍자는 그런 거겠지.

김도언 : 선배님 어느 인터뷰에서 첫 번째 시집에 실린 시들을 쓸 때 테러리스트가 되어 세상을 조져보자는 생각으로 쓰셨다고 했는데, 내가 세상을 조질 수 있는 테러리스트가 되려면 그 자격을 일단 자신한테 부여를 해야 하거든요. 그러려면 내가 가지고 있는 걸 버려야 되잖아요. 그걸 버려야 내가 부담 없이 조질 수 있거든요. 그런 게 아닐까. 지금 잡배라고 표현하신 게.

허연 : 세 번째 시집을 쓸 때는 늙은 파이터의 기분이 들더군. 늙은 파이터의 도전장 같은. 내가 원하는 천사는 이런 거다. 니들과는 다르다. 내 방식을 만들려고 했던 것 같고.
 

고독하고 세련된 신표현주의자

김도언 : 시인 이수명은 90년대 시인들을 언급하면서 그 전시대 시인들과 90년대 시인들의 다른 점을 공동체에서 개인을 끄집어낸 것이라고 말했는데요. 그러면서 박상순이나 강정 등을 언급하죠. 저도 선배님의 시를 읽으면서 선배님의 주된 관심은 선배님 자신이라고 생각했어요. 에고, 자기 자신. 저는 선배님이 자기 자신을 가지고 놀면서 거기서 느끼는 유희 같은 게 선배님 시 속에 표현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허연 : 등단을 했는데, 동료들도 낯설고 나도 낯설더라고. 나는 사실 장터에서 나물장사를 하는 엄마도 없었고, 동구 밖 이런 것도 뭔지를 모르고. 내가 그려낼 수 있는 것이 대다수 시인들하고 다르더라고. 생각을 해보니까 서울 한복판에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시 쓰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거든. 대부분이 향토색이 있는 지방출신 친구들이더라고. 난 시를 세상에 내놓을 때 어떤 기준이 있는데 그걸 지금도 견지하려고 애쓰고 있어. 세상에는 무언가를 주장하고, 앞서가는 사람들이 늘 있겠지. 그런데 그들이 가끔씩 뒤를 돌아봤을 때, 어, 저기 허연이 있네, 하는 섬뜩한 대상이 되고 싶었어. 잘 나가고 싶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야. 어떤 행렬을 비웃는 시를 쓰고 싶었고, 그것이 내 시의 자리라고 생각했던 거지.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나 자신이 교과서였어, 내 자신이 스승이었고, 내 자신이 경멸의 대상이었고. 가끔은 내가 너무 사랑스럽고, 가끔은 내가 너무 저주스럽고, 가끔은 내가 너무 야비하고 쪽팔리고, 가끔은 내가 좀 한심하고, 그러니 자연스럽게 내가 대상화가 되었던 것 같아.

김도언 : 인간의 삶에서는 모순과 부조리가 필연적으로 발생하는데 선배님의 경우 그게 태생적인 건지 인위적으로 발생하는 건지 궁금해요. 선배님이 무언가를 욕망하는데 물리적인 조건은 그걸 좌절시키기도 할 테니까요. 욕망과 현실의 불일치가 발생하고 거기서 모순이 발생할 때 어떤 면에서는 선배님이 그걸 개선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허연 : 그렇게 사는 게 사실은 되게 힘들어. 난 소위 ‘절친’이라 부를 만한 사람도 없고 누구에게 먼저 연락하거나 하는 일도 드물어. 어차피 말도 잘 안 통할 거 같고. 난 모순과 부조리를 철저하게 내면화하는 편이지. 그래서 이런 사회적 태도가 있어. 나는 평소에 사람들한테 착하게 대해. 예의를 굉장히 중시하고. 사실 회사라는 것도 그래. 일터잖아. 계약관계에서 일하잖아. 회사에 대한 예의를 지키면 안 건드려. 주변사람들 하고 아무 문제 안 일으키고 정말 다시 안 볼 사람 아니면 예의바르게 지내고 불편한 건 살짝 살짝 피하고. 문학적 욕망이 좌절할 때도 아픈 걸 티를 안냈어. 그러면 내가 불쾌해. 그런 것에 내가 반응하는 게 나 스스로에 대해 잘못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나는 말라르메랑 싸우고, 백석이랑 싸우고, 김종삼이랑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지. 옛날에 히틀러가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 세 가지를 무서워했대. 공산주의와 자본, 그리고 갈리마르(문학출판사). 히틀러가 두려워 한 갈리마르 속에 문학의 위대한 속성이 있는 거야. 권력 자체가 나븐 게 아니지, 교체되지 않으니까 문제가 발생하는 거야. 나는 내 문학이론을 어떤 권력의 지형이나 계보에서 펼쳐 보이고 싶지 않거든. 그냥 나는 누군가의 주머니 속에서 소비되고 싶어. 우리가 아웃사이더를, 언더그라운드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잖아. 그런 언더그라운드로 남고 싶은 마음이 있고.

시인 허연은 자신의 문학을 대표하는 키워드를 꼽아달라는 주문에 ‘나쁜 소년’을 들었다. 그것은 그가 가장 즐겨 쓰는, 이미 사람들에게 알려진 페르소나다. 글의 앞머리에서 나는 시인 허연을 ‘수많은 소립자로 이루어진 다면체’라고 표현했다. 그는 자신의 내력이나 연혁을 구조화하는 동안 양산되는 수많은 추상적 조건 속에서 다양한 구상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시인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수많은 구상적 이미지들을 떠올려보는 건 온전히 독자들의 행복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그 자신이 좋아하는 미술가 안젤름 키퍼와도 같은 신표현주의자이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세속적 조건에 새로운 입체성을 부여하고 싶어 한다. 그는 어떤 글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아쉽다. 내게 너무나 뚜렷한 모국어가 있다는 게. 가령 희화시켜 말하자면 나는 이런 사람이 부럽다. 헝가리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 영국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카자흐스탄에서 보내고 대학은 러시아에서 다니고 결혼은 베트남계 프랑스인이랑해서 지금은 스위스에서 살고 있는 사람. 늘 나는 나의 상상력과 언어가 부질없고 부박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오독이 되기를 원한다. 나의 언어가 뚜렷하고 명쾌한 의미와 음가를 가지고 있기에 나는 내 언어와 싸운다. 언어와 싸우는 것이 과도하고 가당치 않은 책무라는 걸 안다. 그렇지만 난 그렇게 하고 싶다.” 

그는 자신의 기원과 혈통과 정체성을 부정하면서 자신이 재구성되기를, 재발견되기를 꿈꾸는 것일까. 그것이 새로운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정직한 방법이라고 믿는 것일까. 그것은 얼마나 도저한 탐미적 욕망인가. 성과 속의 경계에서, 정신을 앓아내며, 육체의 피로를 즐기며 오늘도 정금의 시를 길러내고자 하는, 그는 내가 알고 있는, 가장 고독하고 세련된 세속도시의 신표현주의자다.
 

 

허연은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에서 「단행본 도서의 베스트셀러 유발 요인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추계예술대학교에서 「시 창작에서의 영화이미지 수용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게이오대학교 미디어연구소 연구원을 지냈다.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저서로는 시집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 산문집 『그 남자의 비블리오필리』『고전탐닉』등이 있다. 한국출판학술상, 시작작품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장석주

 

시는 전쟁이다

 

 

<시인으로 산다는 것> (문학사상 2014)

 

 

1955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하고. 서울에서 성장했다. 시인이자 비평가. 독서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책, 산책. 음악. 햇빛. 바다. 대숲. 제주도를 사랑하고, 서재와 도서관을 사랑한다. 1975년월간 문학 신인상에 시 〈심야>가 당선되고, 1979년《조선일보신춘문예에 시, 동아일보신춘문예에 문학 평론으로 입상하면서 시와 평론을 겸업한다. 고려원의 편집장을 거쳐 청하를 설립해 대표로 일했다. 1980년대 시 계간지현대시세계》와 비평 계간지《현대예술비평》등을 펴낸다. 2002년부터 동덕여대, 명지전문대학, 경희사이버대에서 강의하고,  EBS라디오와 국악방송 등에서 〈문화사랑 방〉〈행복한 문학〉등의 프로그램 진행자로 활동한다. 동서고금의 고전들에 대한 폭넓은 독서력을 바탕으로 <세계일보 〈인문학 산책)을. 월간신동아에 〈크로스인문학>을 연재하고. MBC라디오외 〈성경섭이 만난 사람들>에서〈인문학카페>를 일 년 동안 꾸렸다. 《풍경의 탄생〉《들뢰즈 카프카 김훈〉《장소의 탄생〉《이상과 모던뽀이들〉《일상의 인문학〉《마흔의 서재〉《동물원과 유토피아》 철학자의 사물들같은 감성적 문장과 인문학적 통찰이 돋보이는 책들을 내서 주목을 받았다. 애 애지문화상, 질마재문학상. 동북아역사재단의 독도사랑상, 영랑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지금은 서울 시교동의 집필실과 안성의 수졸재를 오가면서 다양한 책을 쓰며 살고 있다.

 

 

시인의 운명으로 호명된 것

 

시는 더도 덜도 아닌 전쟁이다. 어떤 사람들은 시라는 이 끝나지 않는 전쟁에 즐겁게 참전한다. 우리는 그들을 시인이라고 한다. 시인은 시라는 전선에서 복무하는 보병이다. 철학은 '강의실’이나 ‘카페’에서 나오고, 역사는 '감옥’이나 '광장'에서 나온다면, 시는 오로지 자신의 골방을 ‘전선’으로 삼은 자의 ‘전쟁’에서만 나온다. 철학의 이성, 역사의 피, 시의 언어는 하나다. 시인이 목숨을 걸고 쓸 때, 즉 시가 전대미문의 전투일 때, 시는 참되다. 모든 위대한 시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 온다.


시인이여, 참호를 파고, 적들을 응시하며, 적들의 심장에 총구를 겨누어라! 시인은 무엇과 전쟁을 하는가? 시인은 우중, 허상, 무지와 억측들, 야만과 억압들, 피상성, 악의 그림자, 상투적인 인습들의 우상들과 싸운다. 그리고 최후의 전쟁에서 바로자신, 바로 시 자체와 맞선다! 철학이 "소요와 전쟁의 딸"(베르나르 앙리 레비)이라면, 시는 철학과 이란성쌍둥이다. 그래시 참다운 철학자는 시인을 닮으려고 하고, 참다운 시인은 철학자를 닮으려고 한다. 시인의 소명은 이 세상에 평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쟁을, 피와 살육의 전쟁을, 세계를 파괴하고 해체하는 최후의 전쟁을, 그 전쟁의 격렬한 기쁨을 주는 데 있다.


나는 문자와 예술의 그림자 한 점 없는 척박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이 비시적 환경은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철저하게 내가 감당해야 할 운명이었다. 열 살 무렵까지 논산의 외가에서 자랐다는 사실은 자랑스러울 것도 욕될 것도 없는 사실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한반도의 토착 정주민들이 모여서 일군 농촌 취락 마을이다. 드물게 관공서의 말단 서기, 정미소, 노름꾼도 있었겠지만, 농업은 마을 주민들이 삶을 기대고 비빌 수 있는 유일한 생업이었다. 마을에서 언덕을 넘으면 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외삼촌들을 따라 그 들로 나가 논과 수로들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광경을 보았다. 그 들을 처음 봤을 때 현기증이랄까, 알 수 없는 공포감 같은 걸 느꼈다. 그 유년기의 체험은 무의식에 각인된 원체험이다. 그 뒤 서울로 올라와서 소년기와 청년기를 거치며 사십여 년을 살지만, 그 원체험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내 안에는 유년기의 긍정적인 자연 체험과 성장기의 부정적인 도시 체험이 함께 들어 있다. 그 둘은 융합하지 않고 불화하며 겉돈다. 내 의식은  '그 사이’에서 찢긴 채 있다. 아마도 내 가장 중요한 시적 상상력은 '그 사이’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첫 시를 열다섯 살 때 썼다.《학원》지에 투고한 시가 뽑혀 활자화되었다. 선자가 시인 고은이었는데, 그때 시인 고은의 이름을 처음 알았다. 어쨌든 그게 큰 자극이 되었다. 그 뒤로 십여 편의 시들을 연속으로 발표하고, 이듬해 학원문학상에서 우수작 1석으로 뽑혔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단편소설을 투고했는데, 그것도 뽑혀서 활자화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전국의 문학소년들 사이에 이름이 나고 그들과 교류를 하게 되었다. 어떤 절대적인 결핍은 그 시절 주변에 이끌어줄 만한 스승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혼자 학교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스스로 길을 찾아야만 했다. 이 모든 일들이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졌다. 어쨌든 시가 내게 왔고, 나는 시인의 운명으로 호명된 것이다. 나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 들였다. 일찍이 제도교육에서 자발적으로 이탈한 것은 나중에 더 자세하게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여러 가지 사정이 복합된 것이다. 동년배의 다른 친구들이 다들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할 때 나는 무적자가 되어 또 몇 년간을 시립도서관에 틀어박혀 책만 읽었는데,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결국 시립도서관에 처박혀 쓴 시와 평론이 1970년대의 마지막 해에 중앙 일간지의 신춘문예에 당선하면서 문단에 나오고. 그게 연줄이 되어 출판사 편집부에 입사했다. 아주 가끔 그때 내가 혼자 외롭게 시립도서관에 처박혀 문학이나 철학 책들을 읽는 대신에, 자연과학 쪽 공부를 했으면 내 삶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고 생각해볼 때가 있다. 아마 그랬다면 내 삶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여유도 없었고, 삶과 세계를 꿰뚫어보는 지적 능력이나 균형 잡힌 ‘인지적 자각'이란 게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십 대 초반에 이미 문학을 숙명으로 수락하고 고분 고분 받아들였던 게 아닌가 싶다.


내 이십 대는 고독과 가난을 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 결핍이 있었기에 문학과 음악에 대한 강렬한 열망 같은 걸 품게 된 게 아닐까? 이십 대 초반 시립도서관에서 책만 읽은 게 아니라 광화문에 있던 '르네상스’나 명동근처에 있던 ‘필하모니'、‘전원’, '티롤' 같은 고전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곳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초기 시의 미학주의적 성향은 서양 고전음악들을 접하며 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십 대 후반에 한국문학전집들을 독파하고 헤르만 헤세, 알베르 카뮈, 카프카, 헤밍웨이와 같은 널리 알려진 서구 작가들, 그리고 가와바타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오, 다자이 오사무와 같은 일본 작가들의 소설들을 남독하며 보냈다면. 이십 대 초반은 시립도서관의 참고열람실에서 서양철학자들의 책들을 많이 읽으며 보냈다. 그중에서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게 니체와 바슐라르였다. 일종의 황홀경 같은 걸 느끼면서 그 책들을 읽었다. 그리고 김현과 김우창 선생의 책들을 읽으면서 내 공부가 얼마나 하찮은가를 깨달으며 매우 큰 지적 자극과 충격을 받았다. 초기 지적 자양분은 전적으로 이분들에게서 얻은 것들이다. 출판사 고려원에 들어가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자서전인《영혼의 자서전》의 교정을 봤다. 그때도 작가의 방대한 지적 편력에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그때만 해도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국내에 소개가 그다지 되지 않은 생소한 작가였다.《영혼의 자서전》에서 깊은 감명을 받고 그의 전집을 만들어보자고 출판사사장에게 건의를 해서 그 전집이 나오게 되었다. 나중에 고려원의 편집장 자리를 박차고 나와 출판사를 차린 것은 ‘니체 전집’을 새로 번역해서 내야겠다는 결심 때문이었다. 일종의 보은이었다.

 


□ 시인으로 산다는 것

 

마흔 중반 무렵, 서울 살림을 접고 안성으로 내려왔다. 안성으로 내려을 때는 몸도, 마음도, 돈도 다 거덜나버린 상태에서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이었다. 생계를 걱정하고, 미래의 불안을 견뎌야 했다. 게다가 딱히 대상이 없는 분노 같은 게 있었다. 어느 순간 이러다 죽겠다는 자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마음을 다독여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노자와 장자를 무작정 읽었다. 그리고 안성의 들길과 산길들을 찾아 걸었다. 내 몸과 내 마음이 내 것이 아니다라는, 다만 잠정적으로 '점유'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몸과 마음이 내 것이 아니라면 이것을 억지로 쥐고 있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이어졌다. 욕심과 욕망은 내 몸과 마음이 내 소유라는 확신 속에서 번성하는 것이다. 벌써 안성 생활이 십삼 년째 이어지고 있는데, 만족하고 있다. 충분한 자기 위로의 시간들을 보내고. 덕분에 창작의 활화산 같은 시간들을 맞고 있다. 씩씩하게 책들을 써서 밥벌이를 하고 있고, 메말랐던 감성도 충만해졌다. 노자와 장자 읽기는 안성에 정착하면서 우연으로 시작한 것이지만,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보니 필연성이 있었다. 우선 내게 노자와 장자를 읽을 수 있는 자유가 조건 없이 풍성하게 주어졌다는 점이다. 안성에서의 첫 시작은 백수 노릇이었으니까, 노자와 장자를 백 번 이상씩 읽어낼 수 있었다. 물론 지금도 노자와 장자의 그 심오한 철학을 다 이해하고 체화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노자》1 장에 나오는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은 아직도 내 중요한 화두다. 안성에 내려와 살면서 정말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그 두 현자의 힘이 크겠다. 인생에 대한 긍정과 여유, 넉넉한 관조적 시선. 잃어버렸던 웃음을 되찾게 했다.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덜어내니까, 인생이 훨씬 더 살 만한 것으로 다가왔다. 삶을 가능한 한 단순화시키면서 책 읽기와 명상, 들길이나 산길 걷기에 집중했다. 그랬기 때문에 지난 십삼 년간 그 많은 책들을 읽어내고, 지치지 않고 서른 권이 넘는 책들을 써낼 수 있었다. 


최근 발표한 시 〈큰 찰나>는 “튀긴 두부 두 모를 삼키던 추분", “두드려 펼친 북어 한 쾌를 끓이던 상강”, “삶은 고등어 한 손에 찬밥을 먹던 중양절”의 시간들을 관조하는 시편인데, 이를 두고 누군가는 곤궁한 기억의 추체험을 통한 찰나의 순간을 보여준다고 하고, 평론가 조강석은 이를 ‘마음의 섭생’이라고 이해했다. 내 단순하고 순일한 일상의 한 면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인 데, 실은 튀긴 두부, 북엇국, 고등어조림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이다. 최근에 읽은 장 뤽 낭시의 책에서 "먹는 것은 먹은 것을 몸으로 합병하는 행위가 아니라 몸을 제가 삼킨 것을 향해 여는 것, ‘안’을 가령 생선이나 무화과의 맛으로 발산하는 행위”라는 구절을 읽었다. 음식을 먹고 삼키는 행위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들을 몸으로 ‘합병’하고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향해 내 몸을 여는 것, ‘안'을 그 매개물에 의지해서 그것의 맛으로 저를 ‘발산’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미각의 만족감이 삶의 행복과 연결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먹고 마셔라! 그리하면 행복해질 것이니! 몸은 마음의 외부가 아니고, 따라서 마음은 몸의 내부가 아니다. 다만 몸의 자명함에 견줘서 마음은 자명하지 않다만 몸의 섭생과 마음의 섭생이 그리 멀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에피쿠로스라는 고대 철학자의 철학을 유쾌하게 받아들인다. 추분, 상강, 중양절은 몸을 제약하는 시간의 분절들이지만, 역시 마음의 현동을 제약하기도 하겠다. 나날의 일상은 단순하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 신문과 인터넷을 보면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날마다 쓰고, 날마다 이러저러한 책들을 
읽는다. 책 읽기는 나 자신에게로 떠나는 여행이고, 꿈과 무의식을 탐사하는 일이다. 아울러 책을 읽는 일은 명석한 사유와 감정의 발달, 그리고 창의적인 시 쓰기를 위한 초석이고 영혼의 단련이다. 철학, 역사, 미학, 예술 분야 만이 아니라 건축, 요리, 축구, 뇌과학, 양자물리학, 사회생물학, 천문과학 따위의 책들을 다양하게 읽는다. 이런 독서 체험이 개별자로서의 삶 체험과 만나 섞이는 과정, 즉 융합을 통해 새로운 시적 상상력이 배양되는 것이다. 오후에는 산책을 하고, 단골 찻집에 들러 즐기는 차를 마신다. 혼자 있는 시간들이 많고, 그것을 유유자적 즐기는 편이다.

 


□ 첫 시집에서 최근 시집까지


첫 시집《햇빛사냥(1979, 고려원)이 나온 것은 스물다섯 살 무렵이다. 고려원에 다닐 때 자비출판을 준비했는데, 그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고려원 사장이 고려원에서 내자고 권유했다. 그 시집을 계기로 ‘고려원 시인선’이 나왔다. 그 뒤로《완전주의자의 꿈》(1981, 청하),《그리운 나라(1984, 평민사),《새들은 황 홀 속에 집을 짓는다(1986, 나남)로 이어지는 초기 시편들은 청년의 순수한 자아제일주의. 세계와 자아사이의 찢김, 상처와 분열증, 관념주의의 우월성 따위가 우월하다. 대신에 체험의 직접성, 영감의 번뜩임, 광기 같은 것은 희박했다. “왜 생활은 완성되지 않는가/ 왜 생활은/ 미완성으로만 완성되는가/ 왜 생활은/ 미완성일 때 아름다운가’(〈왜 생활은 완성되지 않는가>)에서 볼 수 있
듯이 내 초기 시의 세계는 소진과 과부하에 걸린 소시민적 생활인의 무력한 비애감과 거대도시에 사는 일의 메마름, 거기에 관념적 이상주의가 뒤섞인 세계다.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1991, 문학과지성사),《크고 헐렁헐링한 바지》(1996, 문학과지성사),《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2001, 세계사)에는 서울이라는 거대도시에서 끊임없이 타자와 자신에게 착취당하는 느낌이 불가피 침착되어 있다. 자아의 궁핍함과 메마른 도시에서의 무의미함과 건조함이 격렬하게 표출되었던 시기였다. 제대로 살려면 서울을 벗어나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강박적인 생각을 참 많이 했다. 숲이나 강과 같은 자연에 가까이 접하려는 열망이 있었다. 서울 삶에 대한 진절머리 같은 것들이 나던 시기였다. 끊임없이 가속화되는 속도 속에 갇히고 삶 속에서 자아는 죽어버리고 노동 기계가 되는 시간들을 견딘 것이다. 그 집단적 인식 안에 나도 속해 있었으니까 당시에는 메마르고 어둡고 비극적인 정조의 시가 나왔다. 좀 이색적인 시집이《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1998, 세계사)인데, 그 시집도 사실은 시를 통해 나락에 빠진 나를 필사적으로 일으켜 세우고자 하는 능동적 의지가 있었다. 그 시집에 사랑시가 몇 편 있기는 하지만. 제목과는 달리 사랑시집은 아니다. 그 시집의 반 정도가 노르웨이 출신의 화가 에드 바르트 뭉크 화집을 보면서 떠올린 영감으로 쓴 시들이다. 뭉크의 비극적인 삶과 내 삶이 겹쳐졌던 것이다. 그 시집에는 어떻게든 시를 붙들고 새로운 삶으로 도약하려는 몸부림,자기 치유와 성찰, 상처와 슬픔과 모욕을 끝끝내 견뎌내려는 불굴의 의지 같은 것이 오롯하다. 그 시들을 통해 생의 시련들을 견뎌 냈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2000년 여름 안성에 내려오면서 삶의 외관이나 내면의식, 감성이 커브를 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내 몸에 은닉된 도시의 자명성이 해체되고, 물, 나무, 안개, 새벽, 뱀, 너구리 따위의 자연 체험, 농약을 삼킨 개들의 죽음, 함께 놀아줄 귀신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지독한 외로움, 소름 끼치는 근본으로서의 심심함 속에서 시가 나오니까, 그 전에 쓰던 시와 는 전혀 다른 시 세계가 만들어졌다. 시골도 이미 선량한 자연친화주의나 지고지순과는 무관한 삭막한 현실이다. 밋밋한 시골의 삶도 피해망상과 배타 주의, 뻔뻔한 속물주의로 얼룩진 도시보다 더 끔찍한 지옥이다. 무분별한 농약 사용과 폐비닐 방치 따위로 땅이 죽고, 제초제로 이웃의 어미 개와 새끼들 십여 마리를 비정하게 죽여버리는 극악한 이기주의, 그리고 한없는 퇴행과 정체로 뒤덮여 있다. 그런 걸 시골에 와서 열세 해를 살면서 겪어내며《물은 천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2002, 그림같은세상),《붉디붉은 호랑이》(2005, 애지),《절벽》(2007, 세계사)을 썼는데, ‘안성 3부작'으로 꼽을 만한 시집들이다. 안성의 물. 바람, 흙이 들어 있고, 내가 먹은 밥과 젊은 벗들, 밤과 고독들이 고스란히 그 안에 들어 있다. 이전의 시집들에 있던 메마른 콘크리트 감성 대신에 식물적 감성, 그늘과 여린 것들에 대한 자애, 자연의 관능성에서 연유된 활발함이 눈에 띄는데, 이것들은 내 안의 촉기가 풍성해진 결과일 것이다. 김영랑 시인은 이 촉기를 두고 “같은 슬픔을 노래하면서도 탁한 데 떨어지지 않고, 싱그러운 음색과 기름지고 생생한 기운”이라고 했는데. 바로 그 런 뜻에서 그렇다. 안성 3부작에 어떤 풍성함이 있다면 자연과 제 오감이 비벼지면서 얻어진 이 촉기 때문이다.


《몽해항로》(2010, 민음사)는 안성에 내려온 지 만 십 년 되는 해에 나왔다. 안성 3부작을 낸 뒤 상상력의 중심이 안성에서 벗어나, 다시 죽음과 같은 사유와 상상력으로 회귀하고 있다. 장소마다 장소의 목소리가 있는데, 이제 내 시에는 안성의 목소리가 잦아들었구나, 하는 걸 느꼈다. 초기의 시들은 죽옴 이나 존재의 본질에 대한 사유로 들어가니까 관념적일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초기 시의 관념과 지금의 관념성은 다르다. 초기 시는 체험이라는 거름망을 통과하지 않은, 책 읽기를 통한 간접성에 연루된 형이상학이었다면 《몽해항로에서 드러나는 관념성은 상당 부분 직접적이고 날것인 체험과 연륜에 의해 걸러지고 육화된 것의 분출 같은 것이다. 내 안에 있는 본래적인 것들의 목소리를 낸다고나 할까. 평생 붙든 화두라는 게 인간이라는 존재가 왜 태어났느냐, 왜 인간은 죽는가 하는 형이상학적 것들인데, 그것이 깊이를 매개로 하며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몽해’는 상징적인 시공이다. ‘몽해항로’ 연작시들은 ‘몽해’라는 상상의 차가운 바다. 죽음이 무시로 출몰하는 그 가상의 시공을 통해서 존재의 유한성, 죽음에 대한 사유를 드러내는 시편들이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슬프니까, 시에도 슬픔과 애조가 깔린다. 시에는 북풍이라든지. 차가운 바다라든지, 털만 남기고 죽은 비둘기라든지 하는 죽음을 은유하는 이미지들이 많이 나타난다. 이것은 의도적이기보다는 내 안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숙성된 사유와 상상력을 도약대 삼아 튀어나온 것이다.《몽해항로》를 기점으로 다시 인간 본질에 대한 물음을 나에게 던지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내 시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 시를 아는 것은 우주를 아는 것


시를 아는 것은 우주를 아는 것이다. 나는 우주를 모른다. 다만 그 모름 속에서 먹고, 자고, 걷고, 웃는다. 나는 사십여 년을 시를 써왔지만 시를 잘 모른다. 그 모름 속에서 모름을 견디고 있을 따름이다. 거대한 모름의 한 모서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본능에 가까운 욕망으로 시를 쓴다. 때로는 고통과 분노로 쓴다. 나는 쓰기 위해 미지에 대해 상상하고, 악천후들과 싸우며, 영혼을 단련한다. “무엇보다도, 일단 써봐. 노래해. 피가 혈관을 흐르는 것처럼.”(메리 올리버. <완벽한 날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내게 시를 준다. 내 앞에 열린 세계를 바라본다. 생명의 경이로 가득 차 약동하는 세계를! 박새, 버드나무, 비비추의 푸른 싹들, 토마토, 흐린 날, 빗소리, 뱀, 날도래, 반딧불이, 별, 바람, 모란과 작약, 여자들의 미소 그리고 모든 죽어가는 것들. 시는 그것들에 반응하는 피의 자연스러운 분출이다 시는 피의 노래, 명랑한 울음, 생명의 약동이다. 피를 본다는 점에서 시는 전쟁이다! 

이승희

 

비를 맞으면 나는 젖는다 

 

<시인으로 산다는 것> (문학사상 2014)

 

 

1965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으며. 1997년에 <시와사람〉으로, 1999년에〈경향신문〉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저녁을굶은 달을 본적이 있다〉와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를 펴냈다. '서쪽'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어릴 때 나는 누구보다 비 냄새를 잘 맡았다. 비 냄새는 습기가 아니라 마른 먼지 냄새로부터 왔다. 비가 내리기 전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마른 먼지 냄새가 먼저 달려왔다. 마른 먼지 냄새가 훅 끼칠 때까지 놀고서야 우리는 비를 맞지 않기 위해 내달렸지만 번번이 집 앞에 이르기 전에 비를 맞았다. 비를 맞고 나면 우울했다. 비린내가 났고, 옷을 벗어야 했고, 엄마의 잔 소리를 한 움큼씩 들어야 했다.


어떤 세계는 내가 아무리 달아나려 해도,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제자리라는 것을 알 때가 있고, 어떤 세계는 내가 아무리 열망해도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다. 나와 상관없이 세계는 언제나 온전하고 안전했다.


비를 맞으면 나는 젖는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든다. 나를 적시고 비는 흘러갔다. 이것도 마음에 든다. 아주 갔다. 이건 더욱 마음 에 든다. 그런데도 잘 가라고 말해주지 못했다. 나는 그게 자꾸 마음에 걸렸다. 무엇도 나를 흠뻑 적셔주는 게 없던 시절이 있었고 나는 자주 비에 젖었다. 비가 오는 지역을 따라 먼 길을 걸어가기도 했다. 비는 늘 나보다 한발 빨랐고, 나는 비보다 느렸다. 그래도 비를 맞았다. 비를 맞으면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 저절로 마를 때까지, 빗물이 아주 천천히 내 몸을 떠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내가 앉는 자리마다 비는 스며들었고, 내 방에도 내 삶에도 자꾸 비가 묻었다. 그런 나를 사람들이 싫어해서 사람들 곁으로 가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비가 나를 천천히, 아주 오래 다녀가게 했다. 그게 비겁하지 않은 거라고 믿었다. 그렇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지만 그렇게 해야 비에게, 상처에게 부끄럽지 않았다. 아니, 내 마음이 후련했다. 시도 그렇다. 내 몸을 조금씩 살다 갔으면 싶었다. 내 일상의 어느 곳이든 조금씩 묻혀가며, 조금씩 말라서 증발하기를. 내 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게 투명해졌으면 싶었다. 이를테면 나에게 시도 그랬으면 좋겠다. 비처럼 내려서 나를 먼저 적시고 어느 세상의 한 부 분을 아주 조금이라도 적시고, 그다음엔 흔적 없이 말라가도 괜찮겠다.

 


□ 공원


나는 너와 저녁의 공원에서 셔틀콕을 친다. 사람들은 가로등 아래에서 트랙을 돌고, 혼자만의 음악을 듣는다. 우리는 음악도 없이 셔틀콕을 친다. 네트 너머 너는 분명한데, 너는 큰 팔을 휘둘러 내게 아무것도 보내지 않는다. 나도 내게 있는 힘껏 아무 것도 너에게 보내지 않는다. 그래도 우린 셔틀콕을 친다. 그게 우리의 셔틀콕을 치는 방법이다.  셔틀콕을 따라 밤이 흩어진다. 음악 소리도 없이 나는 셔틀콕을 따라다니느라 온 저녁을 다 보냈다. 그래도 우리의 셔틀콕은 계속된다. 무시무시한 직선의 끝은 수직낙하, 난 그게 너무 좋아서 그렇게 늙고 싶었다. 끝내 셔틀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셔틀 없는 셔틀콕은 밤새 계속된다. 내가 멀리 보낸 셔틀콕처럼 몇 개의 별이 지나갔고, 너는 자주 웃었다. 너는 나의 애인이었다가 딸이었다가 나만 사랑하는 고양이였다가 트랙을 무표정하게 돌아서 가버린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지금도 그렇다. 이 세계에서 발을 빼면 아웃이다. 네가 보낸 그 무수한 셔틀콕이 내 몸 곳곳에 박혀 난 자주 아웃되었고, 어느 날부터는 나는 아예 아웃된 채 밖으로 자라기로 했다. 그럼 네가 아웃될 거라 믿었다. 그러나 너는 아웃되지 않았다. 그게 참을 수 없이 괴로웠던 시절이 왔다 갔다 한다. 그러나 너라는 세계를 향해 나는 오늘도 셔틀콕을 날린다.
나는 오늘 밤 또다시 한밤의 공원으로 애인과 셔틀콕을 치러 갈 것이다.
나는 공원에 간다. 여긴 한낮의 공원. 그네와 미끄럼틀, 시소가 질서 있게 배치된 세계. 빈 술병이 지키는 공원의 한낮 벤치에게 말을 건다. 대답이 없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나는 산문처럼 흩어진다. 곳곳에 내가 잘못 쓴 말들의 잔해 끔찍하다 끔찍해. 오늘은 비둘기가 보이지 않는다. 다 투명해져서 날아갔다. 다 죽었다. 허공에는 비둘기들이 죽으며 사라진 투명해진 공간이 촘촘하다. 내가 들어갈 구멍이 없다. 나는 왜 투명해지지 못하는 걸까. 무엇과 싸워야 할까. 어떤 말이 나를 투명하게 할 수 있을까. 한낮의 공원은 빈 술병 같아서 휘파람 소리가 난다.


누군가 벗어둔 옷이 있고, 누군가 잊고 간 시간이 있다. 내가 공원에 가는 이유. 이를테면 또 내가 시를 쓰는 이유.

 

 

□ 종점

 

눈떠보니 종점이었다. 나는 어떻게 떠밀려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꼭 슬프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여기보다 더 먼 곳이 존재한다는 것. 나는 순환이 싫다. 북해에 뜬 별을 지나 멀고 먼 다른 행성까지 가는 동안 종점의 풍경들이 말했다. 아니다, 종점의 풍경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어쨌든 종점의 풍경들이 나를 받아주든 안 받아주든 좀 끼워주지 하면서 슬그머니 그 속을 걷는 일은 외롭고도 행복한 일. 그 풍경 속을 걸으며 가장 많이 생각했던 말은 ‘폐허’. 그 길을 걷 는다는 것은 내 마음의 폐허를 거기다가 다 내보이는 거라는 생각. 흐지부지 늙어갈수록 종점의 풍경 속을 걷는 일이 많아진다. 무엇이든 힘에 겨우면 종점으로 가서 하염없이 걸었다. 나, 아주 종점의 풍경이 되어보자고, 종점의 생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창을 열면 항상 종점. 내게 말 건네지 않는 풍경이 거기 있다. 밤이 되면 종점은 다른 행성으로 떠 있곤 했다. 수십 대의 버스들이 줄 맞춰 서 있는 차고지는 순환이 끝나면 또 다른 별로 졌다. 입을 꾹 다문 버스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무표정으로 바라보는 건 내일의 순환일까 아니면 오늘의 완성일까. 모든 시작은 저렇게 단단한 끝에서부터 다시 시작되는 그런 평범. 그 평범 아래에 잠든 그 모든 폐허를.


난 이제 안녕하지 않을 거야, 안녕하지 않을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 안녕하려고 나 얼마나 힘들었는지, 나는 가끔 구름처럼 떠다닌다. 구름처럼 흩어진다.

 

절벽에서 한 걸음,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마음이 절벽에서의 한 걸음을 받아준다. 그래서 또 서게 되는 절벽, 그렇게 끝없이 밀어가는 절벽, 나무는 그렇게 자란다. 그 많은 이파리의 끝을 밀어가며 자란다. 키 큰 나무들이 쓰러지지 않는 것은 뿌리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끝을 끝까지 밀어가는 이파리들의 안간힘 때문이다. 그 안간힘이 더 간절해지면 좋겠다 나는. 어느 날 집들이 사라지면 골목길은 어떡해야 하느냐고, 어디로 뛰어내려야 하느냐고 물었다. 아직도 난 그 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종점에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한다. 여긴 묻고 대답 하는 세계가 아니다. 질문과 대답이 서로의 빈 곳에서 자란다.


자라는 것들의 방향은 그게 어디든 끝이다. 나는 또 그게 마음에 든다. 그게 마음에 들어서 자꾸만 써보는 것이다.

 

 

□ 홀연

 

나는 나를 난간에 세워둔다.
내가 난간이 되든 난간이 내가되든
그건 아무래도 좋겠다.


난간에 서기까지도 너무 힘들었다.
이제 내려가지 않을 것.
그러면 나 참 행복할 것.
투명해질 수 있을지 몰라.

 


□  안녕


‘안녕’이라는 말은 참…… 나는 내 안녕이 어디 있는지 가만히 묻는다. 내 몸 어디에도 살고 있지 않은데. 이미 나를 떠난 지 오래인데. 내 안녕을 묻는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가. 당신은 내 안녕을 본 적이 있나? 그 저녁, 어둠을 이해하는 건 불빛이라고 썼다. 그래서 밤새 빛으로 남을 수 있는 거라고 써보았다.


서로를 버티는 저 모습이, 버티는 힘이 닿아 있는 그 경계가 밀어내면서도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삶의 모습이라는 생각. 가만히 녹슬어가는 일, 구름에게 내 몸을 떼어먹히는 일, 떼어주는 일. 부치지 못한 편지들은 부치지 못한 채로, 나 없이 환한 집들의 불빛은 그 불빛대로 늙어가게 두는 일. 어느 날, 나 이제 늙어서 더 늙을 게 없을 때까지. 시든 잎처럼 앉아 있는 날 많았다. 하나도 슬프거나 아프지 않았다.


구름이 연신내역을 지나다 말고 가만히 나를 내려다본다. 너 거 기서 뭐하니라며 가만히 내 몸을 밀어왔다. 아직도 쓰러질 곳을 찾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그 구름에 목매달고 싶었다.


죽을힘을 다해 꽃을 피우는 일은 못된 짓이다. 죽을힘은 오직 죽는 일에만 온전히 쓰여져야 한다. 당신도 모르게 하찮아 지자고, 할 수만 있다면 방바닥을 구르는 어제의 머리카락으로, 구석으로만 살금살금 다니면서 먼지처럼 쓸데없어지자고. 한없이 불량해지는 마음도 아이쿠 무거워라 내려놓고, 내 몸 어디든 바람처럼 다녀가시라고, 당신이 나를 절반만 안아주어도 그 절반의 그늘로 나 늙어가면 되는 거라고 *

 

* 〈제목을 입력하세요〉부분,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문학동네, 2012


“어떤 열렬한 마음도 이 세상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은 거짓말이다"라는 생각. 그 말을 증명하기 위해 싸우고 싶었고 그래서 "죽은 나를 두고 살아 있는 내가 입을 꾹 다물고 먼지처럼 그릇 위에 쌓여가는 일은 그러므로 아주 서러운 일은 아니”라고 믿는다. 나는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다정하지 못했다. 친절하지 못했다. 그 어떤 사소함도 지상에 닿는 무게가 되기까지는 분명 살아냈어야 할 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엽서


오직 한 방향으로, 그것이 나를 향해서 온다는 것, 세계의 절반을 돌고 돌아 오기도 한다는 것, 그것이 누군가의 안부라는 것, 더불어 내게 안부를 전하는 온기라는 것. 누군가 내 안부를 묻는다는 것이 신기하고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림이 있고, 또박또박 내 주소와 내 이름이 적혀 있다는 것은.


때로는 누군가 내게 엽서를 보냈다고 하는데, 당도하지 못한 엽서도 있다. 어느 소설가가 보냈다는 쿠바에서의 엽서는 끝내 내게 오지 않았다. 아바나의 어느 거리 혹은 어느 서류철 밑에서 잠들었을지도 모를 그 엽서를 생각하면 몹시도 아프다. 아주 오지 않는 게 아니라 어디서 더 묵은 잠을 자는 거라 믿는다.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무수하게 많은 엽서를 쓴다. 천국으로 보내고 나를 가둔 감옥으로 보내고. 우울한 불빛에게도 보내고. 이젠 내가 살지 않는 나의 집으로도 보낸다. 그래도 이 세계는 내게 답장 같은 것을 하지 않는다. 답장은커녕 비아냥대기 일쑤다. 그래도 나는 엽서를 쓴다, 시를 쓴다. 아니, 그래서 쓴다. 이제 답장 같은 거 나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냥 쓴다. 나는 어떤 방향이어야 하는가. 그건 분명하다. 너에게. 세상의 수많은 너라는 사람들이면 된다. 


나는 내가 받은 엽서들을 창문에 붙여놓았다. 포스트잇처럼 간절해 보인다. 기분이 좋아진다. 나도 창문에 엽서처럼 딱 붙어 살았으면 좋겠다.

 


□  이야기의 시작, 내 시의 자리들


사람들은 아버지를 두고 ‘한량' 이라고 불렀다. 책을 읽고 가끔 글씨를 쓰고,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은 가까운 지역을 두루 둘러 보시는 게 일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나를 제외한 식구들은 모두 싫어했다. 어머니는 아버지 대신 생계를 책임지며 힘들어했고, 누님들이나 형님들은 가난에 대한 고달픔을 전적으로 아버지 탓으로 돌렸다. 나이 들어서 들은 이야기지만. 아버지가 젊었을 때는 그나마 집에 있는 날보다 온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날이 더 많았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가 일을 하셨던 적이 있다. 장손이었던 아버지는 제법 많은 땅을 물려받아 논농사며 밭농사를 지었다. 정확히 말하 자면 아버지가 직접 농사를 지으신 것은 아닌데, 꼭 직접 하셨던 일이 있다. 담배를 말리는 일이었다. 담뱃잎을 따고 새끼줄에 꼬아서 담배건조실에 널면, 그때부터는 아버지가 불을 때고 담배를 말리셨다. 그것만큼은 절대 남의 손을 빌리지 않으셨다. 이상하게 그것은 잊히지 않고 내 기억에 남아 있다. 나는 아마 그것 때문에 시인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것은 그만큼 내게 아주 강렬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갓 따온 푸른 담뱃잎은 등을 마주하여 새끼줄 사이사이에 꼬여 발을 만든다. 길게 엮은 담배 발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건조실 달대에 맨 위부터 층층 늘여 단다. 그날 밤부터 아버지는 건조실 옆에 잠자리를 꾸리고 대엿새 꼬박 불을 조절하며 노릇노릇 담뱃잎을 익힌다. 불을 얼마큼 어떻게 조절하셨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내게 중요한 것은 그렇게 아버지가 담뱃잎을 말리기 시작하는 날부터 끝날 때까지 나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아버지 곁에서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먹을 것과 이야기가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두나무 옆 담배건조실에는 아버지가 읽으시던 책들이 늘 쌓여 있었다. 아버지는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으셨다. 그러고는 나를 옆에 앉히시고 당신이 읽으신 책을 재미난 이야기로 다시 들려주셨다. 조선의 건국에서부터 독립운동, 4 • 19까지 거의 대부분은 우리 역사에 대한 이야기였고, 이순신 장군이나 이덕형 장군 이야기는 아버지 스스로 신나서 해주셨기에 더 실감 났다. 그러다가 배가 고프다 싶으면 아버지는 옥수수며 감자 등을 구워주셨다. 그러다가 밤이 오고, 은하수가 흘렀고 밤새도록 아버지의 이야기가 별똥별처럼 떨어져내리는 것을 보다가 잠들곤 했다. 다음 날 아침이면 신기하게도 나는 방 안에 누워 있었고, 그러면 나는 다시 쏜살같이 아버지를 찾아들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담배를 말리는 며칠의 시간이 지나면 아버지는 내게 그다지 다정하지 않으셨고, 다시 예전처럼 말이 없으시고 조금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 며칠의 기억만으로도 일 년 내내 행복했고 아버지가 좋았다. 그런 마음은 우리 집이 모든 농사를 접고 청주로 이사 나와 가난한 도시 하층민으로 서서히 내몰릴 즈음까지도 계속되었다. 농사도 잘 짓지 않던 아버지가 도시로 나와 할 일이란 막노동 외에는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절대 일을 하지 않으셨다. 그저 여전히 책을 읽고 글씨를 쓰셨다. 딱 한 번을 제외하고는 그것은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버지가 두 번째 일을 하신 것은 청주에 살면서 그야말로 하층민으로 기울던 시기였다. 일을 하지 않고 시골에서 땅 판 돈으로는 마구마구 자라는 육 남매를 감당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노동이 계속되던 어느 날 아버지는 그나마 있던 거의 모든 재산을 정리해서 국수 기계를 사오셨다. 갑자기 우리 집은 국숫집이 되었고 나는 국숫집 막내아들이 되었다. 아버지는 마당 한편의 헛간을 정리하고 거기에 국수틀을 설치하셨다. 그리고 며칠 후부터 바로 국수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국수를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려운 과정은 아니었다. 반죽을 하고, 기계를 돌려 국수를 뽑고, 그것을 마당에서 말리고, 다시 그것을 알맞은 크기로 재단해서 무게를 달아 금액을 정해놓고 파는 일이었다. 그런 과정의 대부분을 아버지가 감당하셨다. 지금은 어떤지 몰라도 당시에는 모든 게 수작업이었다. 반죽을 하는 일도, 모터 없이 직접 국수 기계를 돌리는 일도 너무나 고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일은 아니었다. 나는 국수가 말라가는 동안 국수 아래를 기어다니며 국수와 함께 마르고, 졸고, 마른 국수가 떨어지면 똑 끊어 먹곤 하는 게 전부였다. 젖은 국수가 바람에 살랑이며 말라가는 동안 국수 가닥 사이로 하늘이 살살 혼들렸다. 그게 너무 좋아서 나는 국수 아래를 그렇게 기어다니거나 누워서,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시 혹은 글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아버지가 늘 떠오른다. 그것은 처음 내게 이야기의 세계를 열어주었던 기억 때문일 것이다. 또한 우리 식구들 중에서 유일하게 글을 쓰는 일에 대해 끝까지 지지하고 응원해주셨던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내 삶의 방향을 아주 일찍 문학 쪽으로 돌려놓으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이야기를 통해 상상하게 만들고, 그런 상상을 통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갑자기 드는 생각이 있다. 아버지와 셔틀콕을 치면 어떨까? 잘 받아주실까? 이제 내게 그런 세계는 다시 없겠지만 이 세계에 대해 헛손질만 하는 나를 보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유홍준

 

다시 그 공장에 가보아야겠다

 

 

<시인으로 산다는 것> (문학사상 2014)

 

 

1962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다. 1998년 《시와 반시》 신인상에 〈지평선을 밀다〉 등이 당선되어 등단했고, 시집으로 《喪家_에 모인 구두들》 〈나는, 웃는다》 《저녁의 슬하》, 시선집으로 《북천- 까마귀》가 있다. 젊은시인상, 시작문학상, 이형기문학상,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론이 있으면 일은 잘 돌아가지 않아도 그 이유는 알게 된다. 실천을 하면 일은 돌아가는데 그 이유는 모른다. 이론과 실천이 결합되면 일도 돌아 가지 않고 그 이유도 모르게 된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베르나르 베르베르, 열린책들, 2011


그 공장엘 근 이십 년을 다녔다. 그런데 떠나온 지 육 년이나 지났다. 그 공장에서 사고를 두 번 당해 내 왼손 검지와 오른손 손목엔 커다란 흉터가 남아 있다. 여름이 되면 감출 수가 없는 이 흉터를 보고 사람들은 신기해 하기도 하고 징그러워하기도 한다. 이상하다. 그 공장엘 한번 가봐야지 가봐아지 하면서도 안 가게 된다. 그렇게 오래 다닌 공장인데도 그렇다. 아니, 가보고 싶긴 한데, 왜일까 자꾸만 미루게 된다.


가끔 눈을 감고 그 공장에서 일하던 때를 떠올려보면 끔찍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그곳에서 그런 일을 했던가 싶기도 하다. 엄청난 덩치의 기계와 소음과 열기와 속도.… 그러나 삶이 나를 다시 또 그렇게 내몰면. 어쩔 수가 없다, 나는 또 그렇게 그 공장 일을 할 수밖에 없을 거다. 그게 삶이고 목숨이니까.
 
그 공장은 진주 MBC 근처 우리 집에서 남강 둑을 따라 조금 하류 쪽으로 내려가면 있다. 1공장이 있고 2공장이 있는데, 나는 2공장에서 일했다. 생산부 가공과 C반 반장이 내 직책이었다. 글쎄, 내 작업복 이름표엔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공장은 돌아가지를 않고 흉물이 되어 멈춰 서 있다. 그 공장의 기계들은 중국 쪽에 팔렸다고 한다. 기계는 그렇게 팔렸는데 그 공장 땅은 덩치가 커서 누가 사려고 하는 사람도 없다고 한다. 내가 돌리던 기계가 뜯어져 없어졌다고 하니까 괜히 마음이 이상하다. 그 기계는 내가 이십 대 후반부터 사십 대 중후반 장년이 될 때까지, 그러니까 내 청춘을 다 바 쳤던 기계다. 날이면 날마다 붙어살던 기계다. 그런 그 기계가 이제 없어졌다고 한다.


내가 다니던 그 공장은 하얀 종이를 생산하던 종이공장이었다. 눈부시게 하얀, 티 없이 맑은, 종이를 생산하던 그 공장에서 나는 단 하루 쉬는 날도 없이 삼교대 근무를 했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생산, 생산이라는 말이 참 친근하고 좋다.
하얀 종이를 오래 들여다보면 쉬이 안질이 간다는 말이 있다. 시력이 나빠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종이를 나는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이런 시를 쓰기도 했다.


펄프를 물에 풀어, 백지를 만드는 제지공들은 하느님 같다
흰 눈을 내려
세상을 문자 이전으로 되돌려놓는 조물주 같다

 

티 없는, 죄 없는
순백
無化의 길……


더욱 완전한 백지에 이르고자
없애고 없애고 또 없애는 것이 제지공의 길이다, 제지공의 삶이다, 마치 거지의 길이며 성자의 삶 같다


그러므로,

 

오늘도 백지를 만드는 제지공들은 자꾸만 문자를 잃어간다, 문맹이 되어 간다

 

문명에서- 문맹으로

 

휴일없이
삼교대 종이공장 제지공들은 출근을 한다 


아, 그래, 생각이 난다. 그 하얀 종이 위에 티끌만 한 흠집이라도 생기면 불량이었다. 그러면 나는 고향이 경북 의성인 직장 상사에게 불려가 혼쭐이 나곤 했다. 경위서며 시말서를 쓴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불량이 나고 경위서 를 쓰고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고 나면 에이씨〜 이 짓 안 하면 못 사나 정말! 열두 번도 더 나는 그 공장을 때려치우고 싶었다.
그 공장에서 나는 시를 배우고, 시를 쓰고, 시인이 되었다. 심지어 시집을 두 권씩이나 내기도 했다. 내 인생에 아주 중요한 일들이 거기에서 일어났던 거다. 맞다, 제지공장 작업복을 입고 시를 쓴다는 것은 만만치가 않았다. 밤늦게 퇴근을 하다 남강을 바라보면 까닭 없이 무언가가 밀려올라와서 서럽기도 했다.


“오래전에 살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사람은 성자이거나 폐인”이라고 한 이는 시인 박용하다. 그런 시를 쓴 박용하도 어느 한 시절 몹시 배가 고팠던 적이 있었나 보다. 누렇게 시들어 땅 위에 떨어진 목련 꽃잎을 내려다보며 ‘카스테라 빵 껍질’ 같다고 했으니까.


내가 다니던 그 공장에도 목련나무 몇 그루가 있었다. 나는 목련 중에서도 공장에 뿌리를 박고 사는 목련은 참 서글프고 처량하다는 생각을 했다. 목련은 차갑고 종이는 뜨거웠을 뿐, 둘은 색깔이 같았다. 목련 꽃잎은 차갑고 하앴지만 갓 기계를 통과해 나온 종이는 정말로 뜨겁고 하했다. 사실 종이는 물로 만드는 건데 최종 단계에선 그 물기를 모두 제거해야만 했고, 그러자니 자연 뜨거운 드라이기를 통과해야만 했다. 그래서 갓 나온 종이는 손을 대기가 힘들 만큼 뜨거웠다.
불량이 났거나 지절(紙絶)이 난 종이를 우리는 파지라고 불렀다. 그 파지는 다시 처음 단계로 돌아가 커다란 믹스기 같은 곳에 갈리고 물에 풀려 종이가 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일테면 종이도 윤회를 했다.  우리는 그 파지 쌓아두는 곳을 좋아했다. 야근 때가 되면 더러는 그 파지 속으로 기어들어가 토막잠을 자기도 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종이 속으로 파고 들어가 등을 대고 누우면, 좋았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종이를 뒤집어쓰면 아늑했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종이의 체온이 내 등짝으로 전해져올 때의 느낌, 그 느낌, 갓 구운 빵 같은 냄새는 아니었지만 특유의 암모니아 냄새가 나는 종이에 이미 나의 코는 익숙해져 있었다.


그때도 나는 시인이었다. 종이 속에 들어가 눈을 감고 누우면 이상한 감정들 이 몰려오곤 했다. 종이를 깔고 종이를 덮고 누워 기계 소리를 들으며 나는 막연히 어디에서 오는지도 모르는 시를 생각했다.


소음은 나의 노래
소음은 나의 자장가
소음 없이 난 이제 하루도 못 살아! 
도시로 나와 이십여 년, 소음굴 속에서만 살았다
소음 중독자가 되었다 
태양인에서 
소음인으로 
마침내 騷音人으로 나의 체질은 바뀌었다 
24시간 연중무휴 제지 기계가 
고속으로 돌아가는 종이공장에서
소음 없이는 못 사는 
이제 소음 없이는 못 자는 소음인 


얼마 전에 고향엘 갔다가 알았다
소음을 견디는 것보다
적막을 견디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을
소음 없는 고향은 견딜 수 없어
소음 없는 고향에선 도대체 잠을 이룰 수가 없어
하룻밤도 못 자고 나는 도망쳐왔다
매음굴보다 더 지독한
나의 정든소음굴 속으로


저 봄 언덕에 꽃이 피거나 말거나 

저 가을 들판에 벼가 익거나 말거나 

너 없이는 못 살아 정든 소음아 *

 

* 〈소음은, 나의 노래〉, 《나는 웃는다》, 창비, 2006


맞다, 내 몸은 아주 규칙적인 기계음에 길들여져갔다. 하얀 종이 속에 들어 가 몸을 웅크리고 그 규칙적인 기계음들을 들으면 저절로 곤한 잠에 빠져들 었다. 그것은 아주 매혹적이고 야릇하고 묘한 것이었다.


나는 내 생애 첫 소설을 그 파지 더미 속에서 썼다. 1990년 진주상공회의소 주최 공단문학상을 받은 단편 〈출장일기〉가 그것이다. 지금 그 소설은 내 기억 속에 첫사랑처럼 남아 있다. 그런데 그 공장의 관리자들은 파지 속에 들어가 자는 것을 한사코 말렸다. 이웃 공장에서 커다란 사고가 터졌기 때문이었다. 야근이었고, 이웃 공장 한 근무자가 파지 더미 속에 들어가 잤고, 지게차를 모는 동료 근무자가 그 사람이 들어가 자는 파지 더미를 들어서 믹스기 같은 곳에 집어넣어버렸다 고 했다. 아침에 퇴근을 하려고 하는데 사람이 하나 없어졌고, 아무리 찾아도 안 보였 고, 평소에 근태가 좀 안 좋았던 사람이었고. 몰래 담치기(?)를 했나 했고, 그러다 그냥 집에 갔겠거니 하고 퇴근들을 했다고 했다. 그런데 만 하루가 지나도 그 사람의 행방은 나타나지 않았고, 종이에서 불량이 나기 시작했다고 했다.  새하얀 종이 위에 까만 사람의 머리카락이 간혹 박혀나왔다고 한다. 그제야 사람들은 알았다고 한다. 몰려오는 잠을 참지 못해 파지 더미 속으로 기어들어간 그 사람은 파지를 치우는 동료 근무자에 의해 파지와 함께 믹서 같은 그곳에 밀어 넣어졌고 산산조각으로 갈려 종이 속으로 스며들었던 것이다.


요즘도 나는 간혹 그 생각을 한다. 파지 속으로 들어간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종이는 재생되고. 재생되고. 또 재생된다. 버려지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점점 더 질이 나쁜 종이로 전락하며 돌고 돈다. 새하얀 아트지였다가 스노우 화이트지였다가 백상지였다가 신문용지였다가 마침내 우리가 똥종이라 부르는 누런 포장지로 혹은 박스용지로 점점 더 질이 나쁜 종이로 변해갈. 뿐, 종이는 이 세상에서 온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파지 속에 들어가 자던 그 사람의 주검은 여전히 이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이 세상의 수많은 물건들에는 그런 주검들이 스며 있다. 나는 공장엘 다니면서 그것을 알았다. 우리가 쓰는 수많은 물건들, 그것들 속에는 다 그런 고통, 그런 주검, 그런 희생들이 스며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들을 잘 모르거나 아예 잊고 산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 우리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 우리가 신고 다니는 신발, 우리가 앉아 있는 의자, 우리가 사용하는 이 컴퓨터가 다 그런 과정들을 거쳐서 왔는데 말이다. 


가보나 마나 내가 다니던 옛 공장은 쓸쓸할 것이다. 정문 앞 바리케이드는 벌겋게 녹이 슬어 있고 출근카드를 꽂아놓던 그 나무함과 수백 명의 얼굴과 이름을 다 알고 있던 그 경비 아저씨의 웃음은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그 요란하던 옛 기계들과 푸른 작업복들과 희로애락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옛 동료들, 그 옛일들은 마치 이제 아주 내 인생에 없었던 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내 인생의 가장 많은 날들을 그곳에서 보냈는데도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곳에서 돈을 벌어 집을 샀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고, 그 나마 아쉬운 대로 사람 구실을 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허탈하고 허망하다. 이제 그 공장은 완전히 문을 닫았고, 몇 년째 저렇게 흉물로 방치되어 있다. 그렇다. 제가 살던 곳에 다시 돌아온 사람은 성자 아니면 폐인일 것이다. 그것이 나는 두려웠고, 그래서 그 공장에 가는 걸 자꾸만 미뤄왔던 것이다. 성자와 폐인을 하염없이 유보하며 그냥 나는 애써 외면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외면한다고 외면해지는 것이 아니다. 두고두고 잊지 말아야 할 건 내가 그 공장에 다녔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나를 낳고 길러준 고향을 잊지 말아야 하듯이, 그렇다, 나는 그 공장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공장은 내 고향이다.
 
저 산중 절간
두 눈 질끈 감은 스님은
좌정하고 염주 돌리며 무어라 무어라 중얼거리고
저 고요한 성당
미사포 쓴 수녀님은 하염없이 고개 처박고
묵주 돌리며 로사리오 기도를 올리지만
내가 다니는 종이공장
제지 기계는
베어링을 돌린다
스님보다도 오래, 수녀님보다도 더 끈질기게
기계는 기계의 염주 베어링을 돌리며 용맹정진을 한다
소음이라 부르는 기계의 염불 소음송을 외우며
오직 한 길 생산도를 닦는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내가 믿는 건 이 공장 이 기계의 크신 능력뿐.


오늘도 나는 푸른 생산 도복을 입고
닦고 조이고 기름 치나니
일용할 양식 내리시는 기계신 앞에*

 

* 〈기계는 기계의 염주 베어링을 돌린다〉, 《나는 웃는다》, 창비, 2006


한 인간이 태어나서 겪고 자란 필연적인 경험들, 그것은 곧 그 사람의 뼈대같은 것일 게다. 제지공이면서 시인으로 몸부림을 치며 살았던 세월들, 그 경험과 기억들은 나에게 더없이 소중하다.


그렇다, 규격화된 제품만을 요구하는 공장에서 내 시는 잘못 생산된 불량품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규격화된 것들은 이제 다 잊히고 없는데 어쩌자고 내가 ‘사라고 만든 이 불량품들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까? 내 왼손 검지와 오른손 손목에 남아 있는 이 커다란 흉터처럼.


시란, 어떤 사람이 보면 신기한 것이고 어떤 사람이 보면 징그러운 것일까? 오늘 저녁엔 자전거 타고 천천히 남강 둑을 따라가서 흉물이 되어버린 그 공 장 정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 와야겠다. 

 

손택수

 

시집 외상값 오천 원을 위하여

 

 

<시인으로 산다는 것> (문학사상 2014)

 


1970년 담앙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1998년 <한국일보>와〈국제신문》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 〈호랑이 발자국〉〈목련전차》〈나무의 수사학〉등의 시집을 펴냈다. 그 밖에 지은 책으로《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교실 밖으로 걸어나온 시〉가 있다. 신동엽 창작상. 오늘의 젊은예술가상. 임화문학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 모국어


나는 농경민의 후예다. 나의 모국어 속에서는 여전히 흙냄새가 난다. 가만히 들어보면, 말끔하게 다듬어진 표준어의 그늘 속에 서 고향 벌판의 해질녘 풍경과 들판을 가로질러 흘러가는 강물 소리가 섞여 들려온다. 그 너른 대지 위로 피어나는 꽃과 새들이 나의 자음과 모음이다. 빗방울을 굴리는 토란잎의 수런거림, 강물 위로 텀블링을 하는 물고기의 은비늘, 대숲 위로 솟구쳐오 르는 수만 마리 되새 떼의 날갯짓이 풍요로운 음소의 바탕이 된다. “기읔, 이렇게 크게 소리쳐보거라.”


들일을 마친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 앞에서 대지에 모국어의 첫 자음을 파넣으셨다. 마치 씨를 뿌리기 전에 굳은 땅을 갈아엎듯이 지게 작대기로 새겨넣은 말을 나는 온몸으로 소리쳐 올렸다. “기읔.” 내 혀끝에서 말이 꽃망울처럼 터졌을 때, 입술을 떠난 말이 푸른 대기 속으로 울려퍼지는 걸 돕기 위해 대지는 나를 응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좀 더 힘을 내거라, 더 크게 소리쳐보거라, 너를 둘러싼 우주가 너의 모국어에 공명할 수 있도록, 너의 몸과 대지와 우주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말은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바람과 같다.


그때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직접 깎아 만드셨다는 박달나무 지게 작대기는 펜이었고, 대지는 드넓게 펼쳐진 노트였다. 지게 작대기로 땅을 후벼파는 행위는 씨를 뿌리기 전에 땅을 갈아엎는 행위와 같았다. 몸속에 들어온 대지의 알곡들이 근육을 꿈틀거리게 하며 대지로 되돌아가는 순환과정 속에서 말들은 태어났다. 그렇게 익힌 말들을 나는 얼마나 그리워하였던가.


누가 왜 시인이 되었느냐고 물으면 농부가 되고 싶었는데 그 꿈이 좌절되어서라고 답하는 날들이 있다. 농(農)은 노래(曲)와 별(辰)이 결합된 것이다. 모국어의 대지 속에서 노래와 별은 하나였다.

 

장소적 인간


여기 오면
농장 마당에
고양이가 앉아 있을 것이다.
녀석과 잠깐 얘기를 나눠라. 이곳에서
돌아가는 사정을 아는 건 그 녀석이니 *

 

* ⟨고양이⟩ ⟪내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 H. 하우제, 실천문학사, 2008

이 시에서 고양이는 하나의 장소다. 어떤 장소에 있든 그 장소의 구석구석에 얽힌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고양이는 온몸으로 장소에 숨결을 더하고 때를 묻힘으로써 추억을 만든다. 자신이 살아가는 공간이 곧 자신의 확장된 신체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를 둘러싼 대기의 미세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 감각을 벼린다. 오늘은 어떤 꽃이 피었는지, 주인의 걸음걸이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불 꺼진 지붕 위에 앉았다 떠난 철새의 노래에 귀를 쫑긋 세울 줄 안다.


내가 한 마리의 고양이가 되어 서른 해를 보낸 곳이 부산이다. 부산이란 지명은 구체적인 실체가 아닌 추상으로 그만의 고유한 체취가 묻어나지 않는다. 국이나 도, 시처럼 체감되는 공간이 아니라 어딘가 막연하게 다가온다. 추상으로서의 장소를 가능한 한 살갗으로 직접 비비면서 살고자 하는 게 농경민의 전통이다. 시 속의 고양이처럼 실감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자는 추상을 육화시키고자 한다.


실제로 나는 틈만 나면 산동네의 슬레이트 지붕 위에 올라가 고양이처럼 등을 구부리고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지붕 위에는 불안한 도회의 일상처럼 바닷바람에 쿨럭이는 지붕을 달래기 위해 올려놓은 돌들이 있었다. 돌의 무게로 하여 지붕은 함부로 들썩이지 않았다. 지붕이 짊어진 돌처럼 아버지와 어머니는 생활을 등에 짊어진 채 날품팔이를 하셨다. 일 나가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슬레이트 지붕 위에서 도시의 골목골목을 누볐다. 내 움푹한 두 눈은 마치 탐욕스런 숟가락처럼 풍경들을 폭식했다. 내항에 뿌려진 배들과 갈매기들에 시선을 비끄러매고 있노라면 이내 저녁이 와서 일 나가신 어머니와 아버지를 기다리는 무료한 시간이 한결 견딜 만했고, 짱짱하게 당겨진 현악기의 현이 울리듯 수평선에 얹어놓은 마음에 잔잔한 떨림이 이는 것도 같았다.


'붕—’ 후미진 골목길을 따라 올라오는 뱃고동 소리 속에서 난생처음 맡아보는 갯내는 바닷물처럼 일렁이며 멀미를 일으켰다. 무의식의 밑바닥을 자극하는 그 냄새는 어딘가 사무치게 원시적이어서 탄생 이전의 기억을 마구 들쑤셨다. 짭조름하고 비릿하고 축축하면서도 물너울에 비치는 빛살 같은 눈부심을 간직하고 있는 풍경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 새로운 풍경들이 그리움을 앓게 한다. 낯선 도시의 골목을 하나의 피톨처럼 돌아다닐수록 지금 내게는 없는 무엇인가가 비로소 분명하게 각인되기 시작한다. 나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내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질문들이 새록새록 올라온다. 말하자면 이 도시는 내게 ‘나'를 발견케 한 하나의 타자다. “아버지, 저 돌아가고 싶어요.” 일곱 살 아이는 글씽이는 눈망울로 떠나온 고향을 더듬고 있었다. 얼핏 스친 아버지의 눈에도 같은 성분의 물기가 비쳤던가.


이제 향수병이 얼마나 심했는지 말해야겠다. 어느 날 나는 고향에서 멱을 감던 기억을 불러오기 위해 세숫대야에 물을 받고 고개를 처박았다. 콧속으로 물을 빨아들이고 있노라면 강물이 콧 속으로 들어올 때의 감각이 살아났다. 그 찡하고 맵고 알싸한 느낌. 그때 눈물이 흥건하도록 희미해진 감각을 찌르는 물의 환기를 통해 나는 매번 귀향 의식을 치르고 있었나 보다.


□ 은유의 발견


명색이 시를 쓰는 사람인데 내게는 특별한 시론이란 것이 없다. 그저 지금까지 살아온 내력을 나직이 들려줄 수 있을 뿐이다. 그런 답변 중의 하나가 서른 해를 산 부산에 관해서다. 당신에게 부산은 무엇인가요? 라고 묻는 독자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부산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대답한다. 그만큼 나와 이 근대도시와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는 말이다.


소년기와 청년기 내내 나는 외톨이였다. 외톨이로서 내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은 보다 더 독한 외로움 속으로 자신을 유배시키는 것이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무엇인가를 보기 위해 여기 저기를 떠돌아다니는 것이었다. 회수권을 삼분의 이쯤으로 잘라 열 장을 열서너 장으로 만드는 방식을 활용해 틈만 나면 버스를 타고 도시를 돌아다녔다. 산복도로를 따라 신문배달을 하고 다닌 적이 있지만, 방랑에 무슨 각별한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쩌면 도시의 더 많은 풍경들을 몸속에 차곡차곡 쟁이기 위해 신문배달을 했던 것은 아닐까. 지금의 여행벽도 그때 생긴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하여간 나는 낯선 것이 좋았고, 낯선 것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더 간절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방랑이 독서로 옮겨온 것은 사춘기를 지날 무렵이다. 방학 내내 일일학습지를 배달하다가 보수동 헌책방 골목으로 들어섰던 날을 기억한다. 헌책에서 나던 먼지 냄새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냄새는 뭐랄까, 오랫동안 쌓인 시간의 퇴적물에서 나는 독특한 냄새를 갖고 있었다. 그 냄새는 언젠가는 소멸해갈 내 육체의 냄새이기도 하였고, 수없이 소멸해간 존재들이 발산하는 냄새이기도 하였다. 발굴에 나선 고고학자처럼 먼지 알갱이들이 잠든 책장 속으로 나는 끝없이 빨려들어갔다. 읽는다는 점에서 방랑과 독서는 같은 것이었다. 방랑이 공간을 읽게 했다면, 독서는 자신의 내면을 읽게 했다.
책과의 만남은 송두리째 생을 바꾸는 일대 전환이 되었다. 책 속에는 유년 시절 지붕 위에 올라가 바라보던 수평선의 그리움이 있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잃어버린 것이 단순한 장소로서의 고향이 아니라 지향해야 할 어떤 가치로서의 고향임을 알게 해주는 각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나란 늘 귀향의 길 위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귀향은 이루어질 수 없고,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더 간절한 꿈으로 생을 자극한다. 이 낯선 도시를 통해 나는 그처럼 고향을 재발견했다.


그리하여 부산에 관해 누가 묻는다면 나는 감히 은유에 대해 말하고 싶어진다. 은유란 무엇인가. 은유는 ‘나는 너다'와 같은 동 일성의 세계가 아니라 나와 너 사이에 하나가 될 수 없는 균열을 품고 있다. 나와 너를 찢어놓은 균열을 직시하는 방식으로 은유는 사랑을 꿈꾼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우리 사이엔 사랑을 갈라놓는 균열의 세계가 있다. 균열은 고통스럽지만, 그 균열이 오히려 너를 더 절박하게 한다. 이것이 균열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너를 꿈꿀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사랑의 고통을 잊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을 지향하는 은유의 세계를 나는 온전히 부산으로부터 배웠다.

 

 

 

□ 오디오는 구른다

 

소리에 예민한 사람들은 대체로 외로운 사람들이다. 외로움은 뒤란의 그늘처럼 내면에 습한 이끼들을 붙게도 하지만 앞마당에선 느낄 수 없는 침묵의 경험을 선물해주기도 한다. 빈 곳이 있어야 소리가 울리듯 침묵은 음악과 시가 탄생하는 장소다. 요란한 소음들에 지쳐 감각이 흐릿해진 귀를 토끼의 귀처럼 예민하게 만들어주는 것도 침묵. 우리는 어린 날의 고적한 뒤란으로 돌아가듯 침묵으로 귀환함으로써 세계의 실감나는 반응체로 거듭난다. 더위에 지쳐 풀 죽은 나뭇잎을 물결처럼 갈아엎어주고 가는 바람 소리와 청신한 기운에 힘입어 벌어진 꽃망울 속으로 벌들이 붕붕 빨려들어가는 소리를 들어보았는가. 향기에 반한 새들이 수작을 부리듯 부러 꽃을 툭 치고 가면 그 소리에 놀란 나비가 화들짝 날아가는 소리는 어떤가. 우물가에 웃통을 벗고 등물을 하는 아버지의 ‘어푸어푸’ 소리에 쏟아지는 물보다 더 시원한 치아를 드러낸 어머니가 산 능선을 미는 구름처럼 뽀독뽀독 등을 밀어주는 소리, 우물 벽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들이 노크를 하듯 수면을 치며 똑똑 떨어지는 소리… …


그 많은 소리들을 사람들은 제도화된 언어 속에 묶는다. 야생을 포박하듯 풍요롭게 혼들리는 차이들을 동일한 기호 속에 감금 한다. 어떻게 하면 새들에게 인간의 언어로 채집되기 전의 소리들을 찾아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철썩철썩’ 하고 부서질 줄 밖에 모르는 파도에게 본디 가지고 있던 소리들을 되돌려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우수수 하고 떨어지는 낙엽에게 다른 낙하의 가능성을 찾아줄 수 있을까.


소리에 민감했던 소년 시절의 꿈 중 하나는 근사한 오디오를 장만하는 것이었다. 음악에 대해 문외한이면서도 막연하게나마 오디오를 갖게 되면 좀 더 실감나는 소리들을 갖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오디오를 향한 꿈은 어린 날 뒤란에 혼자 쭈그려 앉아 빗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어떤 생의 비의를 엿본 듯 충만감에 젖을 줄 알았던 가난한 마음을 기억하고자 하는 내 나름의 작은 소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들을 만한 오디오가 궁핍한 시인의 경제로선 엄두도 내지 못할 고가임을 알게 되면서 나는 소년 시절의 꿈을 접고 살아왔다. 결혼 무렵 아내에게 다른 혼수는 필요 없고 오디오만 있으면 된다는 말을 하였다가 그런 낭만적인 태도로 어떻게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가겠느냐는 핀잔을 듣고 난 이후론 입단속을 단단히 하고 살았다.


이런 내게 마침내 오디오가 생겼다. 나의 오디오는 특별하다. 방 안에 얌전히 틀어박혀 음악을 들려주는 내성적인 성품의 소유자가 아니라 온 들판을 굴러다니며 원 없이 음악을 틀어준다. 나는 오디오와 함께 출근도 하고 퇴근도 한다. 주말이면 가보지 못한 풍경들을 찾아 함께 멀리 여행까지 하는 형편이다. 산길도 오르고 강을 건너기도 하며 난타하는 빗속을 쾌활하게 질주하기도 한다. 


눈치챘겠지만 나의 오디오는 자전거다. 사물들에 이름을 붙여 주어야 친밀해진다고 믿는 평소의 버릇대로 나는 소년 시절의 꿈을 자전거의 이름으로 달아주었다. 오디오를 갖지 못한 서운함을 이름으로나마 달래보자는 뜻이었지만. 자전거는 그로부터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음악 소리를 들려준다. 대지를 향해 한껏 열어젖힌 감각에 돌멩이 하나마저 음표가 되어 통통거리고, 체인의 어느 마디에서는 기러기 떼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강의 모래톱 연주와 풀벌레 악단의 합주가 두 바퀴를 턴 테이블 삼아 흘러간다. 내가 침묵의 상태에 있을 때 물 위에 먼지 한 점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린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아무려나 그때 내가 듣는 음악은 나의 심장박동 소리와 같다. 그때 나의 피는 오디오로 이어진 케이블이다. 온 대지에 플러그를 꽂고 질주하는 오디오의 세포들 속으로 쩌릿쩌릿 전기가 흐른다. 어머니는 한때 단칸방에 어울리지 않는 대형 거울을 품고 살았 다. 큰 거울에 생활의 남루가 다 비치니 한숨이 더 나올 수도 있 겠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비좁은 방을 거울 속으로나마 터놓고 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누가 그것을 남루라 할 것인가. 나의 오디오는 남루마저 향긋하다.


□  시집 외상값 오천 원


시장조사를 다녀온 출판사 동료가 책을 한 권 사왔다. 우리 출판사의 신간이었다. 사재기를 했네? 요즘 사재기 감시단이 활동 하고 있는 거 몰라?  농을 건네자 동료는 배시시 웃는 낯빛으로 급하게 선물할 데가 있어서요, 라고 답한다.
사재기에 관해선 솔직히 할 말이 없다. 첫 시집을 냈을 때의 일이었나 보다.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고 나서 몇 년을 기다리다 낸 시집이었으니 감격스럽기 짝이 없었다. 내 작품집이 미지의 독자들과 만난다는 기대만으로도 충분히 흥분이 됐다. 그러나 워낙 팔리지 않는 게 시집이다 보니 시집 판매에 대해선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냥, 몇몇의 독자라도 내 시에 공감할 수 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위안이 될 것 같았다. 시란 본디 비밀 결사대 같은 소수자의 언어가 아니던가.
그런데 어느 날 친구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어느 대형 서점의 베스트셀러 순위에 내 시집이 몇 주째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친구의 말이 믿어지지 않아 살갗을 살짝 꼬집어보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친구의 전화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그 서점으로 갔다. 베스트셀러 위에 내 이름과 시집 제목이 당당히 올라 있었다.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러 참는 고통을 지그시 음미하며 여느 독자들처럼 다른 책들을 보기 시작했다. 분명 꿈이 아니었다. 글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베스트셀러 시인이 된 마당에 이 따위가 다 뭐란 말인가. 이제 머잖아 여러 출판사에서 연락이 올 것이고 내 통장엔 인세가 차곡차곡 쌓일 것이다. 그리고 출판사 와 잡지사들의 구애가 경쟁적으로 잇따를 것이다. 이제는 이 모든 구애를 정중히 거절하는 방법을 익혀야 될지도 모른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행복감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나는 시내의 다른 대형 서점을 찾았다. 글을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책을 구입하는 독자를 서점에서 만나면 대박이 난다'는 속설이 있다. 기왕 나선 김에 그 미지의 독자까지 만나 확실하게 대박의 자리를 굳히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 미지의 독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서점 베스트셀러 순위 어디에도 내 이름은 올라 있지 않았다. 그제야 뭔가 이상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혹시나 싶어 또 다른 대형 서점을 찾아보았다. 그곳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용기를 내어 서점 직원에게 물어보니 한 달 내내 두 권이 팔린 게 전부라고 했다. 끝없이 부풀어오르던 백일몽이 풀썩 주저앉는 순간이었다.


허탈을 곱씹고 나자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내 시집이 베스트셀러를 장식했던 그 서점은 화장품 방문판매를 다니시는 어머니의 직장 부근이었던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어머니가 메고 다니시는 화장품 가방을 열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가방 속에서 시집이 쏟아져나왔다. 내처 어머니의 낡은 장부를 펼치자 고객들의 이름 옆에 적어놓은 ‘시집 외상값 오천원’이 또박또박 눈에 들어 왔다. 시집 외상값이라니! 눈앞이 캄캄했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화장품 가방 속에 어머니는 못난 아들의 시집을 넣고 다니며 아무도 고용하지 않은 시집 외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바라던 내 시집이 어머니에게 짐만되고 있었다니……


어머니의 시집 사재기와 외판은 그 후로도 한동안 계속됐다. 만류도 해보고 협박도 해보았지만 막무가내였다. 언젠가부터 외판도 여의치 않고 수금하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던지 집 안에 시집이 쌓이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한숨 소리 또한 그 높이와 비례해 더 깊어졌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후로 시집을 낸다면 어머니 몰래 내리라, 고생하는 어머니의 짐이나 되는 시집 따윈 다시 내지 않으리'라고 다짐을 하고 또 했다.


몇 년 뒤 두 번째 시집을 냈다.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뜸 “시집 낸 것을 알았으면 나라도 나서서 좀 샀을 텐데 왜 말을 하 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그땐 미처 말하지 못했지만 어머니에 게 들려주고 싶다. “어머니,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던 독자가 바로 어머니라는 걸 이제 저도 알고 있어요. 제겐 어머니가 대박을 주는 그 미지의 독자예요. 그러니 사재기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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