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시는 전쟁이다
<시인으로 산다는 것> (문학사상 2014)
1955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하고. 서울에서 성장했다. 시인이자 비평가. 독서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책, 산책. 음악. 햇빛. 바다. 대숲. 제주도를 사랑하고, 서재와 도서관을 사랑한다. 1975년《월간 문학》 신인상에 시 〈심야>가 당선되고, 1979년《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 평론으로 입상하면서 시와 평론을 겸업한다. 고려원의 편집장을 거쳐 청하를 설립해 대표로 일했다. 1980년대 시 계간지《현대시세계》와 비평 계간지《현대예술비평》등을 펴낸다. 2002년부터 동덕여대, 명지전문대학, 경희사이버대에서 강의하고, EBS라디오와 국악방송 등에서 〈문화사랑 방〉〈행복한 문학〉등의 프로그램 진행자로 활동한다. 동서고금의 고전들에 대한 폭넓은 독서력을 바탕으로 <세계일보 〈인문학 산책)을. 월간《신동아》에 〈크로스인문학>을 연재하고. MBC라디오외 〈성경섭이 만난 사람들>에서〈인문학카페>를 일 년 동안 꾸렸다. 《풍경의 탄생〉《들뢰즈 카프카 김훈〉《장소의 탄생〉《이상과 모던뽀이들〉《일상의 인문학〉《마흔의 서재〉《동물원과 유토피아》 《철학자의 사물들》같은 감성적 문장과 인문학적 통찰이 돋보이는 책들을 내서 주목을 받았다. 애 애지문화상, 질마재문학상. 동북아역사재단의 독도사랑상, 영랑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지금은 서울 시교동의 집필실과 안성의 수졸재를 오가면서 다양한 책을 쓰며 살고 있다.
□ 시인의 운명으로 호명된 것
시는 더도 덜도 아닌 전쟁이다. 어떤 사람들은 시라는 이 끝나지 않는 전쟁에 즐겁게 참전한다. 우리는 그들을 시인이라고 한다. 시인은 시라는 전선에서 복무하는 보병이다. 철학은 '강의실’이나 ‘카페’에서 나오고, 역사는 '감옥’이나 '광장'에서 나온다면, 시는 오로지 자신의 골방을 ‘전선’으로 삼은 자의 ‘전쟁’에서만 나온다. 철학의 이성, 역사의 피, 시의 언어는 하나다. 시인이 목숨을 걸고 쓸 때, 즉 시가 전대미문의 전투일 때, 시는 참되다. 모든 위대한 시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 온다.
시인이여, 참호를 파고, 적들을 응시하며, 적들의 심장에 총구를 겨누어라! 시인은 무엇과 전쟁을 하는가? 시인은 우중, 허상, 무지와 억측들, 야만과 억압들, 피상성, 악의 그림자, 상투적인 인습들의 우상들과 싸운다. 그리고 최후의 전쟁에서 바로자신, 바로 시 자체와 맞선다! 철학이 "소요와 전쟁의 딸"(베르나르 앙리 레비)이라면, 시는 철학과 이란성쌍둥이다. 그래시 참다운 철학자는 시인을 닮으려고 하고, 참다운 시인은 철학자를 닮으려고 한다. 시인의 소명은 이 세상에 평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쟁을, 피와 살육의 전쟁을, 세계를 파괴하고 해체하는 최후의 전쟁을, 그 전쟁의 격렬한 기쁨을 주는 데 있다.
나는 문자와 예술의 그림자 한 점 없는 척박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이 비시적 환경은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철저하게 내가 감당해야 할 운명이었다. 열 살 무렵까지 논산의 외가에서 자랐다는 사실은 자랑스러울 것도 욕될 것도 없는 사실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한반도의 토착 정주민들이 모여서 일군 농촌 취락 마을이다. 드물게 관공서의 말단 서기, 정미소, 노름꾼도 있었겠지만, 농업은 마을 주민들이 삶을 기대고 비빌 수 있는 유일한 생업이었다. 마을에서 언덕을 넘으면 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외삼촌들을 따라 그 들로 나가 논과 수로들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광경을 보았다. 그 들을 처음 봤을 때 현기증이랄까, 알 수 없는 공포감 같은 걸 느꼈다. 그 유년기의 체험은 무의식에 각인된 원체험이다. 그 뒤 서울로 올라와서 소년기와 청년기를 거치며 사십여 년을 살지만, 그 원체험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내 안에는 유년기의 긍정적인 자연 체험과 성장기의 부정적인 도시 체험이 함께 들어 있다. 그 둘은 융합하지 않고 불화하며 겉돈다. 내 의식은 '그 사이’에서 찢긴 채 있다. 아마도 내 가장 중요한 시적 상상력은 '그 사이’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첫 시를 열다섯 살 때 썼다.《학원》지에 투고한 시가 뽑혀 활자화되었다. 선자가 시인 고은이었는데, 그때 시인 고은의 이름을 처음 알았다. 어쨌든 그게 큰 자극이 되었다. 그 뒤로 십여 편의 시들을 연속으로 발표하고, 이듬해 학원문학상에서 우수작 1석으로 뽑혔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단편소설을 투고했는데, 그것도 뽑혀서 활자화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전국의 문학소년들 사이에 이름이 나고 그들과 교류를 하게 되었다. 어떤 절대적인 결핍은 그 시절 주변에 이끌어줄 만한 스승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혼자 학교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스스로 길을 찾아야만 했다. 이 모든 일들이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졌다. 어쨌든 시가 내게 왔고, 나는 시인의 운명으로 호명된 것이다. 나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 들였다. 일찍이 제도교육에서 자발적으로 이탈한 것은 나중에 더 자세하게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여러 가지 사정이 복합된 것이다. 동년배의 다른 친구들이 다들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할 때 나는 무적자가 되어 또 몇 년간을 시립도서관에 틀어박혀 책만 읽었는데,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결국 시립도서관에 처박혀 쓴 시와 평론이 1970년대의 마지막 해에 중앙 일간지의 신춘문예에 당선하면서 문단에 나오고. 그게 연줄이 되어 출판사 편집부에 입사했다. 아주 가끔 그때 내가 혼자 외롭게 시립도서관에 처박혀 문학이나 철학 책들을 읽는 대신에, 자연과학 쪽 공부를 했으면 내 삶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고 생각해볼 때가 있다. 아마 그랬다면 내 삶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여유도 없었고, 삶과 세계를 꿰뚫어보는 지적 능력이나 균형 잡힌 ‘인지적 자각'이란 게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십 대 초반에 이미 문학을 숙명으로 수락하고 고분 고분 받아들였던 게 아닌가 싶다.
내 이십 대는 고독과 가난을 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 결핍이 있었기에 문학과 음악에 대한 강렬한 열망 같은 걸 품게 된 게 아닐까? 이십 대 초반 시립도서관에서 책만 읽은 게 아니라 광화문에 있던 '르네상스’나 명동근처에 있던 ‘필하모니'、‘전원’, '티롤' 같은 고전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곳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초기 시의 미학주의적 성향은 서양 고전음악들을 접하며 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십 대 후반에 한국문학전집들을 독파하고 헤르만 헤세, 알베르 카뮈, 카프카, 헤밍웨이와 같은 널리 알려진 서구 작가들, 그리고 가와바타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오, 다자이 오사무와 같은 일본 작가들의 소설들을 남독하며 보냈다면. 이십 대 초반은 시립도서관의 참고열람실에서 서양철학자들의 책들을 많이 읽으며 보냈다. 그중에서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게 니체와 바슐라르였다. 일종의 황홀경 같은 걸 느끼면서 그 책들을 읽었다. 그리고 김현과 김우창 선생의 책들을 읽으면서 내 공부가 얼마나 하찮은가를 깨달으며 매우 큰 지적 자극과 충격을 받았다. 초기 지적 자양분은 전적으로 이분들에게서 얻은 것들이다. 출판사 고려원에 들어가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자서전인《영혼의 자서전》의 교정을 봤다. 그때도 작가의 방대한 지적 편력에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그때만 해도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국내에 소개가 그다지 되지 않은 생소한 작가였다.《영혼의 자서전》에서 깊은 감명을 받고 그의 전집을 만들어보자고 출판사사장에게 건의를 해서 그 전집이 나오게 되었다. 나중에 고려원의 편집장 자리를 박차고 나와 출판사를 차린 것은 ‘니체 전집’을 새로 번역해서 내야겠다는 결심 때문이었다. 일종의 보은이었다.
□ 시인으로 산다는 것
마흔 중반 무렵, 서울 살림을 접고 안성으로 내려왔다. 안성으로 내려을 때는 몸도, 마음도, 돈도 다 거덜나버린 상태에서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이었다. 생계를 걱정하고, 미래의 불안을 견뎌야 했다. 게다가 딱히 대상이 없는 분노 같은 게 있었다. 어느 순간 이러다 죽겠다는 자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마음을 다독여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노자와 장자를 무작정 읽었다. 그리고 안성의 들길과 산길들을 찾아 걸었다. 내 몸과 내 마음이 내 것이 아니다라는, 다만 잠정적으로 '점유'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몸과 마음이 내 것이 아니라면 이것을 억지로 쥐고 있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이어졌다. 욕심과 욕망은 내 몸과 마음이 내 소유라는 확신 속에서 번성하는 것이다. 벌써 안성 생활이 십삼 년째 이어지고 있는데, 만족하고 있다. 충분한 자기 위로의 시간들을 보내고. 덕분에 창작의 활화산 같은 시간들을 맞고 있다. 씩씩하게 책들을 써서 밥벌이를 하고 있고, 메말랐던 감성도 충만해졌다. 노자와 장자 읽기는 안성에 정착하면서 우연으로 시작한 것이지만,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보니 필연성이 있었다. 우선 내게 노자와 장자를 읽을 수 있는 자유가 조건 없이 풍성하게 주어졌다는 점이다. 안성에서의 첫 시작은 백수 노릇이었으니까, 노자와 장자를 백 번 이상씩 읽어낼 수 있었다. 물론 지금도 노자와 장자의 그 심오한 철학을 다 이해하고 체화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노자》1 장에 나오는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은 아직도 내 중요한 화두다. 안성에 내려와 살면서 정말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그 두 현자의 힘이 크겠다. 인생에 대한 긍정과 여유, 넉넉한 관조적 시선. 잃어버렸던 웃음을 되찾게 했다.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덜어내니까, 인생이 훨씬 더 살 만한 것으로 다가왔다. 삶을 가능한 한 단순화시키면서 책 읽기와 명상, 들길이나 산길 걷기에 집중했다. 그랬기 때문에 지난 십삼 년간 그 많은 책들을 읽어내고, 지치지 않고 서른 권이 넘는 책들을 써낼 수 있었다.
최근 발표한 시 〈큰 찰나>는 “튀긴 두부 두 모를 삼키던 추분", “두드려 펼친 북어 한 쾌를 끓이던 상강”, “삶은 고등어 한 손에 찬밥을 먹던 중양절”의 시간들을 관조하는 시편인데, 이를 두고 누군가는 곤궁한 기억의 추체험을 통한 찰나의 순간을 보여준다고 하고, 평론가 조강석은 이를 ‘마음의 섭생’이라고 이해했다. 내 단순하고 순일한 일상의 한 면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인 데, 실은 튀긴 두부, 북엇국, 고등어조림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이다. 최근에 읽은 장 뤽 낭시의 책에서 "먹는 것은 먹은 것을 몸으로 합병하는 행위가 아니라 몸을 제가 삼킨 것을 향해 여는 것, ‘안’을 가령 생선이나 무화과의 맛으로 발산하는 행위”라는 구절을 읽었다. 음식을 먹고 삼키는 행위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들을 몸으로 ‘합병’하고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향해 내 몸을 여는 것, ‘안'을 그 매개물에 의지해서 그것의 맛으로 저를 ‘발산’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미각의 만족감이 삶의 행복과 연결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먹고 마셔라! 그리하면 행복해질 것이니! 몸은 마음의 외부가 아니고, 따라서 마음은 몸의 내부가 아니다. 다만 몸의 자명함에 견줘서 마음은 자명하지 않다만 몸의 섭생과 마음의 섭생이 그리 멀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에피쿠로스라는 고대 철학자의 철학을 유쾌하게 받아들인다. 추분, 상강, 중양절은 몸을 제약하는 시간의 분절들이지만, 역시 마음의 현동을 제약하기도 하겠다. 나날의 일상은 단순하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 신문과 인터넷을 보면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날마다 쓰고, 날마다 이러저러한 책들을
읽는다. 책 읽기는 나 자신에게로 떠나는 여행이고, 꿈과 무의식을 탐사하는 일이다. 아울러 책을 읽는 일은 명석한 사유와 감정의 발달, 그리고 창의적인 시 쓰기를 위한 초석이고 영혼의 단련이다. 철학, 역사, 미학, 예술 분야 만이 아니라 건축, 요리, 축구, 뇌과학, 양자물리학, 사회생물학, 천문과학 따위의 책들을 다양하게 읽는다. 이런 독서 체험이 개별자로서의 삶 체험과 만나 섞이는 과정, 즉 융합을 통해 새로운 시적 상상력이 배양되는 것이다. 오후에는 산책을 하고, 단골 찻집에 들러 즐기는 차를 마신다. 혼자 있는 시간들이 많고, 그것을 유유자적 즐기는 편이다.
□ 첫 시집에서 최근 시집까지
첫 시집《햇빛사냥》(1979, 고려원)이 나온 것은 스물다섯 살 무렵이다. 고려원에 다닐 때 자비출판을 준비했는데, 그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고려원 사장이 고려원에서 내자고 권유했다. 그 시집을 계기로 ‘고려원 시인선’이 나왔다. 그 뒤로《완전주의자의 꿈》(1981, 청하),《그리운 나라》(1984, 평민사),《새들은 황 홀 속에 집을 짓는다》(1986, 나남)로 이어지는 초기 시편들은 청년의 순수한 자아제일주의. 세계와 자아사이의 찢김, 상처와 분열증, 관념주의의 우월성 따위가 우월하다. 대신에 체험의 직접성, 영감의 번뜩임, 광기 같은 것은 희박했다. “왜 생활은 완성되지 않는가/ 왜 생활은/ 미완성으로만 완성되는가/ 왜 생활은/ 미완성일 때 아름다운가’(〈왜 생활은 완성되지 않는가>)에서 볼 수 있
듯이 내 초기 시의 세계는 소진과 과부하에 걸린 소시민적 생활인의 무력한 비애감과 거대도시에 사는 일의 메마름, 거기에 관념적 이상주의가 뒤섞인 세계다.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1991, 문학과지성사),《크고 헐렁헐링한 바지》(1996, 문학과지성사),《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2001, 세계사)에는 서울이라는 거대도시에서 끊임없이 타자와 자신에게 착취당하는 느낌이 불가피 침착되어 있다. 자아의 궁핍함과 메마른 도시에서의 무의미함과 건조함이 격렬하게 표출되었던 시기였다. 제대로 살려면 서울을 벗어나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강박적인 생각을 참 많이 했다. 숲이나 강과 같은 자연에 가까이 접하려는 열망이 있었다. 서울 삶에 대한 진절머리 같은 것들이 나던 시기였다. 끊임없이 가속화되는 속도 속에 갇히고 삶 속에서 자아는 죽어버리고 노동 기계가 되는 시간들을 견딘 것이다. 그 집단적 인식 안에 나도 속해 있었으니까 당시에는 메마르고 어둡고 비극적인 정조의 시가 나왔다. 좀 이색적인 시집이《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1998, 세계사)인데, 그 시집도 사실은 시를 통해 나락에 빠진 나를 필사적으로 일으켜 세우고자 하는 능동적 의지가 있었다. 그 시집에 사랑시가 몇 편 있기는 하지만. 제목과는 달리 사랑시집은 아니다. 그 시집의 반 정도가 노르웨이 출신의 화가 에드 바르트 뭉크 화집을 보면서 떠올린 영감으로 쓴 시들이다. 뭉크의 비극적인 삶과 내 삶이 겹쳐졌던 것이다. 그 시집에는 어떻게든 시를 붙들고 새로운 삶으로 도약하려는 몸부림,자기 치유와 성찰, 상처와 슬픔과 모욕을 끝끝내 견뎌내려는 불굴의 의지 같은 것이 오롯하다. 그 시들을 통해 생의 시련들을 견뎌 냈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2000년 여름 안성에 내려오면서 삶의 외관이나 내면의식, 감성이 커브를 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내 몸에 은닉된 도시의 자명성이 해체되고, 물, 나무, 안개, 새벽, 뱀, 너구리 따위의 자연 체험, 농약을 삼킨 개들의 죽음, 함께 놀아줄 귀신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지독한 외로움, 소름 끼치는 근본으로서의 심심함 속에서 시가 나오니까, 그 전에 쓰던 시와 는 전혀 다른 시 세계가 만들어졌다. 시골도 이미 선량한 자연친화주의나 지고지순과는 무관한 삭막한 현실이다. 밋밋한 시골의 삶도 피해망상과 배타 주의, 뻔뻔한 속물주의로 얼룩진 도시보다 더 끔찍한 지옥이다. 무분별한 농약 사용과 폐비닐 방치 따위로 땅이 죽고, 제초제로 이웃의 어미 개와 새끼들 십여 마리를 비정하게 죽여버리는 극악한 이기주의, 그리고 한없는 퇴행과 정체로 뒤덮여 있다. 그런 걸 시골에 와서 열세 해를 살면서 겪어내며《물은 천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2002, 그림같은세상),《붉디붉은 호랑이》(2005, 애지),《절벽》(2007, 세계사)을 썼는데, ‘안성 3부작'으로 꼽을 만한 시집들이다. 안성의 물. 바람, 흙이 들어 있고, 내가 먹은 밥과 젊은 벗들, 밤과 고독들이 고스란히 그 안에 들어 있다. 이전의 시집들에 있던 메마른 콘크리트 감성 대신에 식물적 감성, 그늘과 여린 것들에 대한 자애, 자연의 관능성에서 연유된 활발함이 눈에 띄는데, 이것들은 내 안의 촉기가 풍성해진 결과일 것이다. 김영랑 시인은 이 촉기를 두고 “같은 슬픔을 노래하면서도 탁한 데 떨어지지 않고, 싱그러운 음색과 기름지고 생생한 기운”이라고 했는데. 바로 그 런 뜻에서 그렇다. 안성 3부작에 어떤 풍성함이 있다면 자연과 제 오감이 비벼지면서 얻어진 이 촉기 때문이다.
《몽해항로》(2010, 민음사)는 안성에 내려온 지 만 십 년 되는 해에 나왔다. 안성 3부작을 낸 뒤 상상력의 중심이 안성에서 벗어나, 다시 죽음과 같은 사유와 상상력으로 회귀하고 있다. 장소마다 장소의 목소리가 있는데, 이제 내 시에는 안성의 목소리가 잦아들었구나, 하는 걸 느꼈다. 초기의 시들은 죽옴 이나 존재의 본질에 대한 사유로 들어가니까 관념적일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초기 시의 관념과 지금의 관념성은 다르다. 초기 시는 체험이라는 거름망을 통과하지 않은, 책 읽기를 통한 간접성에 연루된 형이상학이었다면 《몽해항로》에서 드러나는 관념성은 상당 부분 직접적이고 날것인 체험과 연륜에 의해 걸러지고 육화된 것의 분출 같은 것이다. 내 안에 있는 본래적인 것들의 목소리를 낸다고나 할까. 평생 붙든 화두라는 게 인간이라는 존재가 왜 태어났느냐, 왜 인간은 죽는가 하는 형이상학적 것들인데, 그것이 깊이를 매개로 하며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몽해’는 상징적인 시공이다. ‘몽해항로’ 연작시들은 ‘몽해’라는 상상의 차가운 바다. 죽음이 무시로 출몰하는 그 가상의 시공을 통해서 존재의 유한성, 죽음에 대한 사유를 드러내는 시편들이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슬프니까, 시에도 슬픔과 애조가 깔린다. 시에는 북풍이라든지. 차가운 바다라든지, 털만 남기고 죽은 비둘기라든지 하는 죽음을 은유하는 이미지들이 많이 나타난다. 이것은 의도적이기보다는 내 안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숙성된 사유와 상상력을 도약대 삼아 튀어나온 것이다.《몽해항로》를 기점으로 다시 인간 본질에 대한 물음을 나에게 던지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내 시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 시를 아는 것은 우주를 아는 것
시를 아는 것은 우주를 아는 것이다. 나는 우주를 모른다. 다만 그 모름 속에서 먹고, 자고, 걷고, 웃는다. 나는 사십여 년을 시를 써왔지만 시를 잘 모른다. 그 모름 속에서 모름을 견디고 있을 따름이다. 거대한 모름의 한 모서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본능에 가까운 욕망으로 시를 쓴다. 때로는 고통과 분노로 쓴다. 나는 쓰기 위해 미지에 대해 상상하고, 악천후들과 싸우며, 영혼을 단련한다. “무엇보다도, 일단 써봐. 노래해. 피가 혈관을 흐르는 것처럼.”(메리 올리버. <완벽한 날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내게 시를 준다. 내 앞에 열린 세계를 바라본다. 생명의 경이로 가득 차 약동하는 세계를! 박새, 버드나무, 비비추의 푸른 싹들, 토마토, 흐린 날, 빗소리, 뱀, 날도래, 반딧불이, 별, 바람, 모란과 작약, 여자들의 미소 그리고 모든 죽어가는 것들. 시는 그것들에 반응하는 피의 자연스러운 분출이다 시는 피의 노래, 명랑한 울음, 생명의 약동이다. 피를 본다는 점에서 시는 전쟁이다!
'한국 현대시 > 시인(詩人)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허연 _ 빗나간 것들에게 바치는 헌사 (0) | 2021.09.15 |
---|---|
정병근 _ 나는 시인인가 (0) | 2021.09.15 |
이재무 _ 시와 함께 걸어온 길 (0) | 2021.09.15 |
이승희 _ 비를 맞으면 나는 젖는다 (0) | 2021.09.15 |
유홍준 _ 다시 그 공장에 가보아야겠다 (0) | 2021.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