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죽은 친구를 부검하던 아픈 날들. 예술이 구원이었다”
[중앙일보] 입력 2021.05.26
개인적 이야기와 예술에 대한 사랑을 담아 수필집을 낸 마종기 시인.
“담당 인턴은 부검의 전 과정을 꼭 지켜봐야 하기 때문에 며칠 전까지 함께 키득거리며 머리를 쓰다듬던 그 친구의 머리뼈를 전기톱으로 잘라내고 뇌를 끄집어내어 검사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중략) 피를 물로 씻어내면서 피도 눈물도 없는 의사가 되려고 태연을 가장하던 그 수많은 날들. 그 아픔을 다스리기 위해서라도 나는 시간만 있으면 시를 찾아서 그리운 모국어의 단어 속으로 깊이 뛰어들곤 했습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언어를 쓰는 마종기(82) 시인이 최근 출간한 산문집 『아름다움, 그 숨은 숨결』(앤드)에서 고백한 기억이다. 시인으로서 영감을 받은 문학ㆍ미술ㆍ음악 뿐 아니라 개인적인 슬픔과 고통까지 털어놨다. 생명공학 전공자이자 문인ㆍ가수인 루시드 폴(조윤석, 46)과 나눈 서간집 『사이의 거리만큼, 그리운』 (2014) 이후 7년 만에 낸 산문집이다.
미국에 거주 중인 마종기는 본지와 전화 통화에서 “부끄러워 감추고,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털어버리자는 생각으로 썼다”고 말했다. “치기 만만한 것들을 감추고 빼고 살아온 게 아닌가 싶어서, 인생의 끝날에 나를 보여주자 하는 생각을 했다.“
마종기는 지난해 9월 12번째 시집을 낸 시인이다. 1959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첫 시를 발표했다. 그 때 연세대 의대 1학년 학생이었다. 가장 유명한 시는 ‘바람의 말’이다.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1980년 나온 시집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에 들어 있었고, 조용필이 영감을 얻어 노래 ‘바람이 전하는 말’(1993년)을 불렀다.
동화 작가 마해송, 무용가 박외선의 장남으로 태어난 마종기는 “고등학교까지도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학생이었는데 갑자기 동네 어른이 ‘가난한 나라에서 과학을 배워야한다’고 해 의과대학에 갔다”고 했다. “그래도 글 쓰기가 그리워 문과대학에서 도강을 하다가 시인이 됐다. 의사보다 먼저 시인이 됐다.”
마종기는 공군 군의관이던 1966년에 수감생활을 했다. 한일회담 반대 서명에 재경문인으로 참여했다는 이유였다.
이후 미국 오하이오으로 떠났고 5년만 배우고 돌아오려 생각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한국에서 신문기자로 일하던 남동생이 해직된 뒤 “배추 장사라도 하겠다”며 그를 찾아와 함께 살았기 때문이다. 마종기는 “‘바람의 말’이 이승과 저승에 있는 연인의 대화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내 나라와 내 집, 귀국을 포기하는 슬픈 심정에서 쓴 것”이라고 했다.
타국 병원의 수련 생활은 고됐다. 병원에서 환자들과 친구가 될 정도로 다정한 의사였지만, 그 친구들의 부검에 참여해 싸늘한 철판 위에서 각종 장기가 사정없이 도려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미국으로 찾아왔던 남동생은 총기 사고로 갑작스레 사망했다.
“내가 한국에서 수감됐을 때 매일 술만 마시던 아버지는 내가 미국으로 떠나오자마자 세상을 떠나셨다.” 마종기는 “외국에서 일상의 외로움에 오금을 움츠리고 공포와 슬픔과 환희의 절정을 매일 오가면서 살았던 몇 해 동안의 내 의사 수련은 엉뚱하게도 내 문학의 확실한 물꼬였다”고 했다.
고통에서 도망치듯 찾아간 대상은 언제나 예술이었다. “시간만 있으면 모국어로 된 시를 썼고, 미술관을 찾았다. 18세기부터 21세기까지의 오페라를 들었다.” 이번 책도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라는 도스토옙스키의 말로 끝난다.
아픔과 고통에서 예술로 향하곤 했던 시인의 삶이 겹친다. 그는 “문학은 내게 신은 아니다. 하지만 시가 사람들의 정신에서 불꽃이 솟아 나오도록 정성을 다해야한다는 것은 믿는다”고 했다.
마종기는 “의사였기 때문에 시를 썼다는 건 확실하다”고 했다. “의사였기 때문에 죽고 사는 결정적인 순간을 계속 보며 살아왔다. 그게 문학의 계기가 됐다. 감정의 파고가 높았기 때문에 시의 꼭지를 잡을 수 있었다.” 따스한 시어에 대해서도 의학의 영향을 언급했다. “죽고 사는 인간을 보면서 인간에 대한 연민이 안 생길 수가 없다. 의사가 아니었으면 시를 못 썼다.”
그는 지금 한국의 의사들에게도 문학과 예술을 강력하게 권했다. 2003년 연세대에서 ‘의학과 문학’ 강좌를 개설해 몇년간 의과대학 학생들을 지도했다. “과학자 생활만 한 의사들은 상당히 불행하게 산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 강좌를 만들었지만 몇년 후엔 ‘학생들 시간을 뺏는다’ ‘한국 실정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에 강좌가 비실비실해졌다. 정밀한 과학을 추구하는 의사들이 인문학과 예술에 접속하는 시간이 늘어나야 한다. 나 또한 미국 의사 생활에서 너무 외롭고 힘들어 다시 문학을 찾게 되지 않았나.” 그는 또 "세상 모든 것은 부단히 변하지만 예술의 지고한 정신은 변함이 없다"며 "고단한 삶을 가지는 모든 이가 그런 단단한 기둥을 하나 감아쥐고 살기를 바란다"고 했다.
II. 위안과 그리움… 마종기의 詩, 무겁고 차가운 외로움 떨치다
[유성호 교수가 찾은 문학의 순간, 세계일보 2020-10-18] <11>‘서정의 파수꾼’ 마종기 시인
▲ 2010년 대학로의 한 소극장에서 후배 문인들이 마종기 시인 시력 50년 기념의 밤을 마련해 주었다. 문정희, 오생근 시인, 김치수 평론가, 정현종 시인, 황동규·김혜순 시인, 김병익 평론가.
마종기 시인은 우리 시단에서 퍽 이채로운 위상을 가지고 있는 분이다. 생애의 많은 시간을 미국에서 살았지만 그는 슬럼프 없이 균질적 시 쓰기를 해 온 모어(母語)의 사제요, 순수 참여의 틀을 넘어 지성적 사유를 통한 위안의 시 쓰기를 지속해 온 서정의 파수꾼이기 때문이다.
지난 9월 그의 열두 번째 시집 ‘천사의 탄식’이 나왔다. ‘시인의 말’에 “아주 멀고 멀리 산 넘고 바다 건너에 살고 있는 고달픈 말과 글을 모아서 고국에 보낸다”라고 적었던 그 작품들이 실렸다. 30년 동안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일정한 간격으로 귀국해 국내 독자들과 만나고 지인들과 소중한 인연을 이어 왔던 그였지만, 올해는 코로나19로 그러질 못했다.시인은 시집 뒤표지 글에서 “시는 사랑의 한 표현 방법이고 체온 나눔이고 생환 훈련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한세상 시를 사랑하며 살았다”라고 했다. 그 세계에 대한 비대면 인터뷰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메일과 카카오톡을 동원해 지난날로부터 이번 성과에 이르기까지 귀한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올해는 봄에 귀국하려고 시집 출간도 그렇게 잡아 놓았는데 갑자기 터진 코로나 난리 때문에 귀국을 못했습니다. 지난달에는 영시집 ‘Forty Two Greens’(마흔두 개의 초록)가 뉴욕의 코드힐 프레스(Codhill Press)를 통해 출간됐습니다.” 거기서도 여전히 그는 현재형의 시인이다.
귀국할 때마다 자주 만나는 벗들과 2010년 함께 한 자리. 이희중 시인, 김미도 평론가, 정끝별 시인, 권혁웅·이병률·나희덕 시인.
● 체온 나눔의 시간들 그리고 사람들
이번 시집에 ‘아내의 꽃’이라는 정갈한 시가 있다. 평생 이국에서의 외로움을 함께해 온 아내에 대한 사랑이 묻어난다. 그에게 아내는 언제나 “따뜻해지고 느긋해져서/ 어깨가 다 가벼워지는” 세월을 나누어 온 반려자일 것이다. “아내는 평범한 여성입니다. 미국에 와서 결혼한 이후 너무 외로워 시를 썼고 서울 친구들에게 발표를 부탁하며 의사 생활을 이어 왔는데 시를 읽어 달라고 할 사람이 없었어요. 아내와는 시에 대해 나누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자신이 바로 그 외로움 때문에 시를 쓸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영화 ‘패터슨’에도 인용된 의사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인이 되는 첫째 조건이 외로움을 아는 사람”이라는 말을 되뇌면서, 어쩌면 아내는 좋은 시를 쓰라고 그동안 자신의 시에 관심을 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면서 말이다. “그런데 요즘 아내가 제 시를 읽겠다고 합니다.” 두 분의 사랑과 체온 나눔의 시간이 지극한 울림으로 전해져 온다.
마종기는 1939년 일본 도쿄에서 아동문학가 마해송 선생과 서양무용가 박외선 선생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학문적, 예술적 역량과 감성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게 틀림없을 것이다. 시인은 미국으로 향할 때 손에 50달러를 쥐어주며 헤어졌던 선친의 급작스런 별세 소식에 서러움과 죄책감을 토로한 적이 있다. “아버지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전형적인 문사셨어요. 청빈한 삶을 기리셨고 가난한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는 전형적인 예술가형이셨지요. 단 한 가지 무용에만 몰두하셨던 분이죠.” 청년 마종기는 연세대 의예과에 입학했고, 1959년 1월에 ‘현대문학’ 초회, 이듬해에 완료 추천을 받고 시인이 됐다. 올해는 그러니까 등단 갑년(甲年)이 되는 셈이다.
마종기는 드뷔시나 사티 같은 인상파 음악을 들으면서 자신의 시도 그 방향으로 가기를 소망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방향이 달라졌다. 우선 살아남아야 했고, 시는 자신에게 먼저 위로가 돼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마종기의 초기시에는, 이국 생활을 예감이라도 한 듯, 처연한 유랑 의식이 암시적으로 드러난다. 시인은 미국으로 거처를 옮긴 뒤에 영원한 떠돎이라는 실존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 그에게 시는 천천히 위안과 그리움의 세계로 번져갔다. 그런 세계를 함께해 준 스승은 누구였을까?
“한 분이라면 최민순 신부님을 들겠습니다. 가톨릭계에서는 존경받는 영성 신학자셨고 이탈리아어 ‘신곡’이나 스페인어 ‘돈키호테’를 직역해 세간을 놀라게 한 번역가셨지요. ‘현대문학’ 등단 소감도 신부님께 올리는 편지 형식으로 썼지요. 선친 장례 미사도 명동성당에서 친히 챙겨 주셨습니다.”
문인 중에는 박두진 선생을 들었다. 그분의 착하고 조용하신 성정도 좋아했고 그분의 단호한 강골도 좋아했다. 학생 때부터 선생을 따랐고, 그분이 ‘현대문학’에 등단시켜 주셨고, 첫 시집 ‘조용한 개선’(1960) 서문도 써 주셨다. 그렇게 부모님과 스승에 대한 체온 나눔의 기억으로 그는 이국 생활을 견뎌 왔고 지금까지 ‘마종기’일 수 있었으리라.
● ‘변경의 꽃’에서 ‘아내의 꽃’까지
1965년 공군사관학교 군의관이었던 마종기는 그해 여름 한일국교정상화 반대성명에 이름을 올렸다가 군인은 정치에 관여하면 안 된다는 조항을 위반한 혐의로 심문을 받고 감방에 수용됐다. 기소유예로 풀려난 뒤 미국으로 쫓기듯 나와 산 것이 벌서 55년째다. 그는 1968년과 1972년에 황동규, 김영태와 함께 3인 시집 ‘평균율’을 두 번 펴냈다.
“그 친구들과 함께 펴낸 ‘평균율’은 제게 큰 의미가 있지요. 고국을 떠난 게 1966년이었고 5년간 미국에서 수련의로 살아낸 그 시절은 일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고 한편으로는 저를 괜찮은 의사로 만들어 주기도 했어요. 그때 두 친구가 우정의 선물을 준 거죠.” 이번 시집 표지 캐리커처도 김영태가 그린 것이 들어갔다. 언젠가 시인은 “김영태 시인이 보낸 편지가 제일 많더라”고 추억한 적이 있었는데, 그분을 향한 시인의 사랑이 깊게 전해져 온다.
1969년에 방사선과 전문의에 합격한 뒤로 그는 의대 교수로서 평화로운 삶을 누린다. 그 과정에서 낸 세 번째 시집 ‘변경의 꽃’(1976)은 이국에서 살아온 이의 떠돌이 의식과 그리움을 담은 결실이었다. ‘변경의 꽃’이야말로 이국에 살던 시인의 초상이 아니었겠는가. 그러고 보니 ‘변경의 꽃’으로부터 그는 ‘담쟁이 꽃’, ‘박꽃’, ‘축제의 꽃’으로 ‘꽃’을 변형해 오다가 이번에 ‘아내의 꽃’에 이른 게 아닌가 싶다.
시인은 가장 아끼는 시집으로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1980)를 들었다. 나도 ‘이슬의 눈’(1997)과 함께 가장 좋아하는 시집이다. “육체적으로 힘들고 정신적으로 혼돈의 시간을 겪어 정서적으로 시의 도움이 절실하던 때의 시집이라 더 애착이 간다”고 떠올렸다. 한 편 읽어 보자.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바람의 말’) 그 ‘바람의 말’을 넓혀 온 트라이앵글이 의학과 시와 신앙이 아니었을까?
● 의사-시인-신앙인 ‘선순환의 삶’
“제 시에서 의학과 신앙이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의사였으니 의학이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것은 자연스럽지요. 신앙 역시 외국에서 살아오느라 더 깊어지거나 흩어졌을지 모르지만 가톨릭 교인으로 60년 살아왔으니까요.” 그는 의학이나 신앙이 시의 모멘텀이 되는 때는 있었지만 가급적 그 몸체가 다 보이는 것은 경계해 왔노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번 시집은 조금 달랐다. 시인은 지난봄 원고를 보내고 첫 교정지를 받았는데 팬데믹으로 모든 게 정지되자 다시 찬찬히 원고를 들여다보았다.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후회가 없겠냐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때 등단 소감에 좋은 믿음의 시인이 되겠다고 썼던 생각이 났고, 몇 편 버리고 서너 편 신앙적 시들을 넣게 됐다고 한다.
“의학은 육체의 치유, 시는 정신의 치유, 신앙은 영혼의 치유를 위한 매개체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좋다고 믿음과 시를 합치면 감동이 떨어지게 되고, 의학과 시도 한쪽으로 기울면 둘 다 역할을 못할 것입니다. 서로 우러르고 가까이에서 아끼는 상태가 돼야겠지요.”
그만큼 ‘의사’와 ‘시인’은 어느 하나가 주(主)가 되고 다른 하나가 종(從)이었던 것이 아니라 마종기에게 상호의존적인 수평적 축이었던 셈이다. 선진 의학을 5년간만 공부하고 돌아가겠다고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 틈에 시인은 그 땅에서 반세기 이상을 살았다. 오하이오에서 의사 생활을 마치고 지금은 플로리다로 옮겨 사는 시인은 아들 셋과 손주들이 멀리 살고 있어 1년에 한두 번 만나는 게 전부라고 한다.
평생 고독했지만, 자신의 시에서 위로를 받았다는 분을 만나면 갑자기 자신을 겹으로 싸고 있던 무겁고 차가운 외로움이 다 날아가버린다고 했다. 의사-시인으로 “한길로 살아온 길이 외진 길”(‘이슬의 명예’)이었다지만, 그의 ‘변경의 꽃’으로서의 시작(詩作)은 지금부터 다시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 마종기’의 생으로 시작될 것이다. 위안과 그리움을 “내 나라도 보이던 따뜻하고 편한 그 색깔”(‘노을의 주소’)에 담은 ‘천사의 탄식’이 보내준 소중한 만남이었다.
'한국 현대시 > 시인(詩人)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인 정일근 “詩와 하나돼 나와 세상만사 모든 이야기 담아” (0) | 2021.06.02 |
---|---|
이대흠 詩人 (0) | 2021.06.01 |
참사랑의 시인 이해인 수녀의 기도 (0) | 2021.04.08 |
詩人 최영미 “나는 투사가 아니다, 내 앞에 떨어진 일을 한 것뿐” (0) | 2021.03.28 |
비극적 아름다움의 시인 기형도 (0) | 2021.0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