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죽은 친구를 부검하던 아픈 날들. 예술이 구원이었다”

[중앙일보] 입력 2021.05.26

 

개인적 이야기와 예술에 대한 사랑을 담아 수필집을 낸 마종기 시인.  

 
“담당 인턴은 부검의 전 과정을 꼭 지켜봐야 하기 때문에 며칠 전까지 함께 키득거리며 머리를 쓰다듬던 그 친구의 머리뼈를 전기톱으로 잘라내고 뇌를 끄집어내어 검사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중략) 피를 물로 씻어내면서 피도 눈물도 없는 의사가 되려고 태연을 가장하던 그 수많은 날들. 그 아픔을 다스리기 위해서라도 나는 시간만 있으면 시를 찾아서 그리운 모국어의 단어 속으로 깊이 뛰어들곤 했습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언어를 쓰는 마종기(82) 시인이 최근 출간한 산문집 『아름다움, 그 숨은 숨결』(앤드)에서 고백한 기억이다. 시인으로서 영감을 받은 문학ㆍ미술ㆍ음악 뿐 아니라 개인적인 슬픔과 고통까지 털어놨다. 생명공학 전공자이자 문인ㆍ가수인 루시드 폴(조윤석, 46)과 나눈 서간집 『사이의 거리만큼, 그리운』 (2014) 이후 7년 만에 낸 산문집이다. 
 
미국에 거주 중인 마종기는 본지와 전화 통화에서 “부끄러워 감추고,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털어버리자는 생각으로 썼다”고 말했다. “치기 만만한 것들을 감추고 빼고 살아온 게 아닌가 싶어서, 인생의 끝날에 나를 보여주자 하는 생각을 했다.“ 
 
마종기는 지난해 9월 12번째 시집을 낸 시인이다. 1959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첫 시를 발표했다. 그 때 연세대 의대 1학년 학생이었다. 가장 유명한 시는 ‘바람의 말’이다.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1980년 나온 시집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에 들어 있었고, 조용필이 영감을 얻어 노래 ‘바람이 전하는 말’(1993년)을 불렀다. 
  
동화 작가 마해송, 무용가 박외선의 장남으로 태어난 마종기는 “고등학교까지도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학생이었는데 갑자기 동네 어른이 ‘가난한 나라에서 과학을 배워야한다’고 해 의과대학에 갔다”고 했다. “그래도 글 쓰기가 그리워 문과대학에서 도강을 하다가 시인이 됐다. 의사보다 먼저 시인이 됐다.” 
 
마종기는 공군 군의관이던 1966년에 수감생활을 했다. 한일회담 반대 서명에 재경문인으로 참여했다는 이유였다.
 
이후 미국 오하이오으로 떠났고 5년만 배우고 돌아오려 생각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한국에서 신문기자로 일하던 남동생이 해직된 뒤 “배추 장사라도 하겠다”며 그를 찾아와 함께 살았기 때문이다. 마종기는 “‘바람의 말’이 이승과 저승에 있는 연인의 대화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내 나라와 내 집, 귀국을 포기하는 슬픈 심정에서 쓴 것”이라고 했다.
 
타국 병원의 수련 생활은 고됐다. 병원에서 환자들과 친구가 될 정도로 다정한 의사였지만, 그 친구들의 부검에 참여해 싸늘한 철판 위에서 각종 장기가 사정없이 도려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미국으로 찾아왔던 남동생은 총기 사고로 갑작스레 사망했다. 
 
“내가 한국에서 수감됐을 때 매일 술만 마시던 아버지는 내가 미국으로 떠나오자마자 세상을 떠나셨다.” 마종기는 “외국에서 일상의 외로움에 오금을 움츠리고 공포와 슬픔과 환희의 절정을 매일 오가면서 살았던 몇 해 동안의 내 의사 수련은 엉뚱하게도 내 문학의 확실한 물꼬였다”고 했다.
 
고통에서 도망치듯 찾아간 대상은 언제나 예술이었다. “시간만 있으면 모국어로 된 시를 썼고, 미술관을 찾았다. 18세기부터 21세기까지의 오페라를 들었다.” 이번 책도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라는 도스토옙스키의 말로 끝난다. 
 
아픔과 고통에서 예술로 향하곤 했던 시인의 삶이 겹친다. 그는 “문학은 내게 신은 아니다. 하지만 시가 사람들의 정신에서 불꽃이 솟아 나오도록 정성을 다해야한다는 것은 믿는다”고 했다.
 
마종기는 “의사였기 때문에 시를 썼다는 건 확실하다”고 했다. “의사였기 때문에 죽고 사는 결정적인 순간을 계속 보며 살아왔다. 그게 문학의 계기가 됐다. 감정의 파고가 높았기 때문에 시의 꼭지를 잡을 수 있었다.” 따스한 시어에 대해서도 의학의 영향을 언급했다. “죽고 사는 인간을 보면서 인간에 대한 연민이 안 생길 수가 없다. 의사가 아니었으면 시를 못 썼다.”
 
그는 지금 한국의 의사들에게도 문학과 예술을 강력하게 권했다. 2003년 연세대에서 ‘의학과 문학’ 강좌를 개설해 몇년간 의과대학 학생들을 지도했다. “과학자 생활만 한 의사들은 상당히 불행하게 산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 강좌를 만들었지만 몇년 후엔 ‘학생들 시간을 뺏는다’ ‘한국 실정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에 강좌가 비실비실해졌다. 정밀한 과학을 추구하는 의사들이 인문학과 예술에 접속하는 시간이 늘어나야 한다. 나 또한 미국 의사 생활에서 너무 외롭고 힘들어 다시 문학을 찾게 되지 않았나.” 그는 또 "세상 모든 것은 부단히 변하지만 예술의 지고한 정신은 변함이 없다"며 "고단한 삶을 가지는 모든 이가 그런 단단한 기둥을 하나 감아쥐고 살기를 바란다"고 했다.

 

 

 

II.  위안과 그리움… 마종기의 詩, 무겁고 차가운 외로움 떨치다
 
    [유성호 교수가 찾은 문학의 순간, 세계일보 2020-10-18] <11>‘서정의 파수꾼’ 마종기 시인

 



▲ 2010년 대학로의 한 소극장에서 후배 문인들이 마종기 시인 시력 50년 기념의 밤을 마련해 주었다. 문정희, 오생근 시인, 김치수 평론가, 정현종 시인, 황동규·김혜순 시인, 김병익 평론가.

마종기 시인은 우리 시단에서 퍽 이채로운 위상을 가지고 있는 분이다. 생애의 많은 시간을 미국에서 살았지만 그는 슬럼프 없이 균질적 시 쓰기를 해 온 모어(母語)의 사제요, 순수 참여의 틀을 넘어 지성적 사유를 통한 위안의 시 쓰기를 지속해 온 서정의 파수꾼이기 때문이다. 

 

지난 9월 그의 열두 번째 시집 ‘천사의 탄식’이 나왔다. ‘시인의 말’에 “아주 멀고 멀리 산 넘고 바다 건너에 살고 있는 고달픈 말과 글을 모아서 고국에 보낸다”라고 적었던 그 작품들이 실렸다. 30년 동안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일정한 간격으로 귀국해 국내 독자들과 만나고 지인들과 소중한 인연을 이어 왔던 그였지만, 올해는 코로나19로 그러질 못했다.시인은 시집 뒤표지 글에서 “시는 사랑의 한 표현 방법이고 체온 나눔이고 생환 훈련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한세상 시를 사랑하며 살았다”라고 했다. 그 세계에 대한 비대면 인터뷰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메일과 카카오톡을 동원해 지난날로부터 이번 성과에 이르기까지 귀한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올해는 봄에 귀국하려고 시집 출간도 그렇게 잡아 놓았는데 갑자기 터진 코로나 난리 때문에 귀국을 못했습니다. 지난달에는 영시집 ‘Forty Two Greens’(마흔두 개의 초록)가 뉴욕의 코드힐 프레스(Codhill Press)를 통해 출간됐습니다.” 거기서도 여전히 그는 현재형의 시인이다.


귀국할 때마다 자주 만나는 벗들과 2010년 함께 한 자리.  이희중 시인, 김미도 평론가, 정끝별 시인, 권혁웅·이병률·나희덕 시인. 

 


● 체온 나눔의 시간들 그리고 사람들

이번 시집에 ‘아내의 꽃’이라는 정갈한 시가 있다. 평생 이국에서의 외로움을 함께해 온 아내에 대한 사랑이 묻어난다. 그에게 아내는 언제나 “따뜻해지고 느긋해져서/ 어깨가 다 가벼워지는” 세월을 나누어 온 반려자일 것이다. “아내는 평범한 여성입니다. 미국에 와서 결혼한 이후 너무 외로워 시를 썼고 서울 친구들에게 발표를 부탁하며 의사 생활을 이어 왔는데 시를 읽어 달라고 할 사람이 없었어요. 아내와는 시에 대해 나누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자신이 바로 그 외로움 때문에 시를 쓸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영화 ‘패터슨’에도 인용된 의사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인이 되는 첫째 조건이 외로움을 아는 사람”이라는 말을 되뇌면서, 어쩌면 아내는 좋은 시를 쓰라고 그동안 자신의 시에 관심을 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면서 말이다. “그런데 요즘 아내가 제 시를 읽겠다고 합니다.” 두 분의 사랑과 체온 나눔의 시간이 지극한 울림으로 전해져 온다. 

마종기는 1939년 일본 도쿄에서 아동문학가 마해송 선생과 서양무용가 박외선 선생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학문적, 예술적 역량과 감성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게 틀림없을 것이다. 시인은 미국으로 향할 때 손에 50달러를 쥐어주며 헤어졌던 선친의 급작스런 별세 소식에 서러움과 죄책감을 토로한 적이 있다. “아버지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전형적인 문사셨어요. 청빈한 삶을 기리셨고 가난한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는 전형적인 예술가형이셨지요. 단 한 가지 무용에만 몰두하셨던 분이죠.” 청년 마종기는 연세대 의예과에 입학했고, 1959년 1월에 ‘현대문학’ 초회, 이듬해에 완료 추천을 받고 시인이 됐다. 올해는 그러니까 등단 갑년(甲年)이 되는 셈이다.

마종기는 드뷔시나 사티 같은 인상파 음악을 들으면서 자신의 시도 그 방향으로 가기를 소망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방향이 달라졌다. 우선 살아남아야 했고, 시는 자신에게 먼저 위로가 돼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마종기의 초기시에는, 이국 생활을 예감이라도 한 듯, 처연한 유랑 의식이 암시적으로 드러난다. 시인은 미국으로 거처를 옮긴 뒤에 영원한 떠돎이라는 실존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 그에게 시는 천천히 위안과 그리움의 세계로 번져갔다. 그런 세계를 함께해 준 스승은 누구였을까?

“한 분이라면 최민순 신부님을 들겠습니다. 가톨릭계에서는 존경받는 영성 신학자셨고 이탈리아어 ‘신곡’이나 스페인어 ‘돈키호테’를 직역해 세간을 놀라게 한 번역가셨지요. ‘현대문학’ 등단 소감도 신부님께 올리는 편지 형식으로 썼지요. 선친 장례 미사도 명동성당에서 친히 챙겨 주셨습니다.”

문인 중에는 박두진 선생을 들었다. 그분의 착하고 조용하신 성정도 좋아했고 그분의 단호한 강골도 좋아했다. 학생 때부터 선생을 따랐고, 그분이 ‘현대문학’에 등단시켜 주셨고, 첫 시집 ‘조용한 개선’(1960) 서문도 써 주셨다. 그렇게 부모님과 스승에 대한 체온 나눔의 기억으로 그는 이국 생활을 견뎌 왔고 지금까지 ‘마종기’일 수 있었으리라.

● ‘변경의 꽃’에서 ‘아내의 꽃’까지

1965년 공군사관학교 군의관이었던 마종기는 그해 여름 한일국교정상화 반대성명에 이름을 올렸다가 군인은 정치에 관여하면 안 된다는 조항을 위반한 혐의로 심문을 받고 감방에 수용됐다. 기소유예로 풀려난 뒤 미국으로 쫓기듯 나와 산 것이 벌서 55년째다. 그는 1968년과 1972년에 황동규, 김영태와 함께 3인 시집 ‘평균율’을 두 번 펴냈다.

“그 친구들과 함께 펴낸 ‘평균율’은 제게 큰 의미가 있지요. 고국을 떠난 게 1966년이었고 5년간 미국에서 수련의로 살아낸 그 시절은 일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고 한편으로는 저를 괜찮은 의사로 만들어 주기도 했어요. 그때 두 친구가 우정의 선물을 준 거죠.” 이번 시집 표지 캐리커처도 김영태가 그린 것이 들어갔다. 언젠가 시인은 “김영태 시인이 보낸 편지가 제일 많더라”고 추억한 적이 있었는데, 그분을 향한 시인의 사랑이 깊게 전해져 온다.


1969년에 방사선과 전문의에 합격한 뒤로 그는 의대 교수로서 평화로운 삶을 누린다. 그 과정에서 낸 세 번째 시집 ‘변경의 꽃’(1976)은 이국에서 살아온 이의 떠돌이 의식과 그리움을 담은 결실이었다. ‘변경의 꽃’이야말로 이국에 살던 시인의 초상이 아니었겠는가. 그러고 보니 ‘변경의 꽃’으로부터 그는 ‘담쟁이 꽃’, ‘박꽃’, ‘축제의 꽃’으로 ‘꽃’을 변형해 오다가 이번에 ‘아내의 꽃’에 이른 게 아닌가 싶다.

시인은 가장 아끼는 시집으로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1980)를 들었다. 나도 ‘이슬의 눈’(1997)과 함께 가장 좋아하는 시집이다. “육체적으로 힘들고 정신적으로 혼돈의 시간을 겪어 정서적으로 시의 도움이 절실하던 때의 시집이라 더 애착이 간다”고 떠올렸다. 한 편 읽어 보자.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바람의 말’) 그 ‘바람의 말’을 넓혀 온 트라이앵글이 의학과 시와 신앙이 아니었을까?

● 의사-시인-신앙인 ‘선순환의 삶’

“제 시에서 의학과 신앙이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의사였으니 의학이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것은 자연스럽지요. 신앙 역시 외국에서 살아오느라 더 깊어지거나 흩어졌을지 모르지만 가톨릭 교인으로 60년 살아왔으니까요.” 그는 의학이나 신앙이 시의 모멘텀이 되는 때는 있었지만 가급적 그 몸체가 다 보이는 것은 경계해 왔노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번 시집은 조금 달랐다. 시인은 지난봄 원고를 보내고 첫 교정지를 받았는데 팬데믹으로 모든 게 정지되자 다시 찬찬히 원고를 들여다보았다.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후회가 없겠냐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때 등단 소감에 좋은 믿음의 시인이 되겠다고 썼던 생각이 났고, 몇 편 버리고 서너 편 신앙적 시들을 넣게 됐다고 한다.

“의학은 육체의 치유, 시는 정신의 치유, 신앙은 영혼의 치유를 위한 매개체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좋다고 믿음과 시를 합치면 감동이 떨어지게 되고, 의학과 시도 한쪽으로 기울면 둘 다 역할을 못할 것입니다. 서로 우러르고 가까이에서 아끼는 상태가 돼야겠지요.”

그만큼 ‘의사’와 ‘시인’은 어느 하나가 주(主)가 되고 다른 하나가 종(從)이었던 것이 아니라 마종기에게 상호의존적인 수평적 축이었던 셈이다. 선진 의학을 5년간만 공부하고 돌아가겠다고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 틈에 시인은 그 땅에서 반세기 이상을 살았다. 오하이오에서 의사 생활을 마치고 지금은 플로리다로 옮겨 사는 시인은 아들 셋과 손주들이 멀리 살고 있어 1년에 한두 번 만나는 게 전부라고 한다.

평생 고독했지만, 자신의 시에서 위로를 받았다는 분을 만나면 갑자기 자신을 겹으로 싸고 있던 무겁고 차가운 외로움이 다 날아가버린다고 했다. 의사-시인으로 “한길로 살아온 길이 외진 길”(‘이슬의 명예’)이었다지만, 그의 ‘변경의 꽃’으로서의 시작(詩作)은 지금부터 다시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 마종기’의 생으로 시작될 것이다. 위안과 그리움을 “내 나라도 보이던 따뜻하고 편한 그 색깔”(‘노을의 주소’)에 담은 ‘천사의 탄식’이 보내준 소중한 만남이었다.



I.  (이기철 시인의 ‘영원 아래서 잠시’ – <문학사상> 2020년 6월호 ‘이달의 시인’ 코너)

    [문학뉴스=강현 기자, 2020.06.06] 

 

 

이번에 전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코로나19 사태가 시인에게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지난 2,3월 가장 심각한 코로나 사태를 혹독하게 겪어야 했던 대구의 이기철 시인은 “시간에는 물리적 시간과 인간적 시간이 있는데 이 두 달이 인간적 시간으로는 십 년에 해당하는 시간이었다.”고 토로했다.

이 시인은 이어서 “그러면서 생각했다. 코로나19 이후 인간의 삶의 양식에 예기치 않은 변화가 도래하리란 것을. 이는 생태학이나 문화인류학의 거대이론에 기댄 것이 아니라 눈앞에 벌어지는 현상을 직접 보고 느낀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지구 전체로 보면 쌀알에 불과한 ‘대구’라는 도시가 불과 두 달 만에 삶의 양태를 바꿔놓고 있는 것을 목도한 후에 얻은 생각”이라는 것이다.

이 시인은 최근 발간된 <문학사상> 6월호의 ‘이달의 시인’ 코너의 ‘영원 아래 잠시’ 에세이를 통해 이같은 소회를 밝혔다.

그는 이 글에서  이 기간 동안 “사회, 경제, 문화의 양태들은 모두 단절되거나 변화를 예고했다. 시민경제는 거의 바닥을 드러냈고 거리는 텅 비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인간’이라면  ‘인간의 관계’가 거의 차단됐다. 사람들은 누구도 만나려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특히 “문화는 단말마 상태였고 작은 삶의 향연들마저 축소되고 보류됐다. 이 치유가 언제, 얼마나 가능할지 아무도 예단할 수 없게 됐다. 이런 상태가 장시간 지속된다면 우리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문화’는 퇴락하고 우리가 애써 가꾸고 다듬었던 문명마저 월하의 적요로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비관했다.

이기철 시인은 그러나 “사람들은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스스로를 달래며 말한다. 이번 사태는 ‘이념의 초월’, ‘강대국과 약소국의 제휴’, ‘계급과 계층 없는 인간의 평등’, ‘제도교육의 수정’ 등을 가져올 것” 이라며 “지금으로서는 실낱 같이 가늘고 연약한 그 말에 기댈 수밖에 없음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 시인은 “이 기간 동안 수도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고 시를 썼다”며 “여기에 발표하는 시 세편도 이런 과정에서 쓴 것”이라고 부연했다.

 ‘양지꽃 휴양지’, ‘신생대의 아침’, ‘각북에서 쓰다’라는 제목의 시 세 편은 이 코너 말미에 각각 실렸다.

 

 

 

 

II. [피플앤피플] “시는 자의식을 담는 그릇” 이기철 시인
2017년 06월 14일

"숨은 차지만 시인이 걷는 이 길이 가장 아름다운 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기철(74) 시인이 신작 시집 ‘흰 꽃 만지는 시간(민음사)’을 펴냈다. 자연과 사물의 생명력, 삶의 의미를 시에서 찾는다.

이기철 시인은 197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해 시집 ‘청산행’,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유리의 나날’ 등을 발표했다. 또한 김수영문학상, 시와시학상, 최계락문학상, 후광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시·문학계의 인정을 받아왔다.

흰 꽃은 뜰에 온 나무의 첫마디 인사다 / 그런 날은 사람과의 약속은 꽃 진 뒤로 미루자 / 누굴 만나고 싶은 나무가 더 많은 꽃을 피운다 / (...) / 아름다운 사람이 앉았다 간 자리마다 / 다녀간 꽃들의 우편번호가 남아 있다 / 풀잎으로 서른 번째 얼굴을 닦는다 / 내일모레 언젠가는 그들이 남긴 주소로 손등이 발갛도록 흰 잉크의 편지를 쓰자 (p.48 흰 꽃 만지는 시간)

유성호 문학평론가는 이기철 시인에 대해 "우리 시단에 서정시의 기품과 깊이를 지속적으로 부여해 온 대표적인 중진이며, 근원성을 지향하는 맑고 푸른 위의(威儀)를 이어온 서정의 사제"라고 평한다.


다음은 이기철 시인과의 일문일답이다.

Q. 18번째 시집 '흰 꽃 만지는 시간'이 나왔는데, 어떤 주제의 시들이 담겼나?

이번 시집에는 총 73편의 시가 들어있다. 늘 그렇듯이 전 크고 무겁고 어려운 주제보다, 작고 낮고 겸허한 주제를 찾는다. 일상, 사물, 목숨의 소중함,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서 소재를 찾는 경우가 많다.


Q. 이번에 발표하신 시 가운데 가장 애착이 가는 시를 꼽는다면?

시는 제게 자식이나 마찬가지다. 다시 말하면 아들과 딸인데, 그중 어느 자식에 가장 애착이 가는지 물으면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것과 비슷하다. 우선 ‘흰 꽃 만지는 시간’, ‘속옷처럼 희망이’, ‘시인이 걷는 길이 가장 아름다운 길이 되었으면 좋겠다’, ‘기슭에서의 사색’, ‘시 쓰는 일’ 등이 마음에 남는다.


Q. 태초로 돌아가고자 하는 염원을 주로 표현하시는데, 생명의 근원을 노래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데도 제 목숨을 가꾸고 갈무리하며 사는 여리고 작은 생명들이 흩어져 있다. 그것을 시인이 아니면 누가 발견하고 기릴 수 있는가? 우리 시사(詩史)에서는 1930년대 후반에 ‘생명파’로 분류되던 시인들이 있었다. 그분들이 ‘전기 생명파’라면 저는 ‘후기 생명파’로 불리고 싶다.


Q. 시 쓰는 일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이다. 평소 시상의 원천은 무엇인가?

틈날 때마다 산책을 하며 시를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아침, 저녁 산책길을 비롯해 혼자 있는 밤, 다른 사람이 쓴 좋은 글을 보면서 시상을 얻는 편이다. 더 근원적으로 본다면 주위의 잊혀가는 생명들, 설령 그것들이 지상에서 사라져도 아무도 아쉬워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작은 숨소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시상의 원천이다.

197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를 쓰는 일이 시작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섬광(閃光)처럼 오는 그 순간을 스스로 포착하는 일이 가장 어렵고 또 필요한 일이다.


Q. 한 평생 시인의 길을 걸어오면서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

‘시집’을 세상에 내는 일이 가장 조심스러운 일이다. 시는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담는 그릇이고, 시집은 산고 끝에 낳은 자식과 같다. 그러나 어렵게 시집을 내도 독자와 언론의 반응, 나아가 시집이 얼마나 잘 팔리는지 등 현실적인 부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여러 고난과 예상 못한 과정 속에서도 시집을 꾸준히 내면서 세상과 독자와 소통하는 일은 중요하면서도 어렵다.


Q. 앞으로 작품 계획이 궁금하다.

꾸준히, 힘이 닿는 한 시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시대와 사회가 변해도 시는 불변의 진리를 품고 있다. 저 역시 지금까지의 모습을 간직한 채 나아갈 것이다. 그동안 쓴 시가 1,450 편쯤 되는데, 가능하다면 새로운 시를 쓰겠다는 일념으로 하루를 산다. 이번 시집에 담긴 시 ‘시 쓰는 일’에서 저는 이렇게 썼다.

"시 쓰는 일은 나를 조금씩 베어 내는 일 / 면도날로 맨살을 쬐끔씩 깎아 내는 일 / 입천장, 겨드랑이, 사타구니, 항문까지 / 쬐끔씩 발라내는 일 / (…) / 주검까지 가다가 죽지는 않고 / 절뚝이며 휘청이며 돌아오는 일 / 시 쓰는 일"

 

 

 

 

 

III. [조용호의 길 위에서 읽는 시] (7) 이기철의 ‘청산행’

     (세계일보 2009-06-03)  

시인의 고향 마을에 들어설 때부터 뻐꾸기 소리는 내내 따라다녔다. 뻐꾸기가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에는 산비둘기가 울었다. 뒤란 언덕에서 대나무 잎이 바스락거리고 오래된 지붕에 와송(瓦松)이 솟아나는 그 기와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인이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처로 떠나기 전까지, ‘눈에 익은 수많은 돌멩이들의 정분을 거역’하고 ‘뛰는 버스에 올라 도시 속의 먼지가’ 되기 전까지 살았던, 거창군 가조면 석강리 옛집이다.

“용서할 줄 모르는 시간은 물처럼 흘러갔고/ 눈 속에 묻히는 봄보리들의 침묵이 나를 무섭게 위협했을 때/ 관습의 신발 속에 맨발을 꽂으며 나는/ 눈에 익은 수많은 돌멩이들의 정분을 거역하기 시작했다./ 염소를 불러모으는 비음의 말들과/ 부피가 작은 몇 권의 국정교과서를 거역했다./ 뒷산에 홀로 누운 조부의 산소를 한 번만 바라보았고/ 그리고는 뛰는 버스에 올라 도시 속의 먼지가 되었다./ 봄이 오면 아직도 그 골의 물소리와 아이들의 자치기 소리가/ 도시의 옆구리에 잠든 나의 꿈 속에/ 배달되지 않는 엽신(葉信)으로 녹아 문지방을 울리며 흐르고 있다.”(‘이향 離鄕’ 부분)

대구에서 현풍을 거쳐 시간 반 달려와 놓고도 시인은 옛집 가는 길을 쉬 찾지 못했다. 두어 번 헤매다가 논 사이로 난 좁은 길로 들어서자 이번에는 앞에서 털털털 경운기가 간다. 하릴없다.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에 그나마 논물이 고인 평지가 있어 아늑했는데 산 쪽으로 길이 다시 숨어 들어간다. 모퉁이를 돌아든 경운기가 다행히 옆길로 빠져나가 숨통이 트이는가 싶었더니, 이번에는 막다른 산맥이다.

“손 흔들고 떠나갈 미련은 없다/ 며칠째 청산에 와 발을 푸니/ 흐리던 산길이 잘 보인다./ 상수리 열매를 주우며 人家를 내려다보고/ 쓰다 둔 편지 구절과 버린 칫솔을 생각한다./ 南方으로 가다 길을 놓치고/ 두어 번 허우적거리는 여울물/ 산 아래는 때까치들이 몰려와/ 모든 野性을 버리고 들 가운데 순결해진다”(‘청산행’ 부분)

‘청산행’은 이기철(66) 시인을 시단과 독자들에게 제대로 각인시킨 두 번째 시집 표제작이기도 하다. 살다보면, 그것도 도시에서 각박하게 설움에 시달리다보면, 고향 생각이 절로 나는 건 자율신경이 의지와 상관없이 치러내는 반사작용일 게다. 그 고향이 산 첩첩 물 골골 청산이었을 때, 그를 키워준 자연을 향한 그리움은 더욱 절절할 것이다. 이기철은 더구나 그 청산을 어린 시절에 떠난 게 아니라, 고스란히 19세 청년기 초입까지 그곳에서 살다가 떠나온 것이니 그의 시구 그대로 “그 골의 물소리와 아이들의 자치기 소리가/ 도시의 옆구리에 잠든 나의 꿈 속에/ 배달되지 않는 엽신(葉信)으로 녹아 문지방을 울리며”(‘이향’) 흐를 수밖에 없을 테다.

기와집 옆으로 공터 텃밭과 밭 너머 언덕 아래 시커먼 굴이 보인다. 시인은 그곳을 가리키며 이 자리에 있던 초가집이 조카의 실수로 불타는 바람에 부친이 어렵사리 지었던 재실(齋室)로 옮겨와 고등학교 때까지 살았다고 했다. 그 재실이 지금 돌아보는 이 기와집이다. 그는 6·25전쟁 때 교전이 심했던 이 지역에서 피란을 위해 가족이 힘을 모아 팠다는 밭 곁의 검은 입구를 가리켰다. 반세기 훌쩍 전에 파놓은 굴의 초입이 어제의 피란처처럼 생생하게 검다. 그 검은 굴에 눈길을 주는데 까칠한 높은 목소리가 청각을 자극한다. 돌아보니, 등에 분무기를 짊어진 키가 작은 노파 하나가 마당에 들어서는 중이다. 그네는 “여가 어데라고 남의 집이서 함부로 사진을 찍느냐”고 나무라다가 시인이 공손하게 예전에 자신이 살던 집이라고 고하자, 목소리를 낮춘다. 올 여든셋이라는 그 노파는 그 집에 홀로 살고 있었다. 인근에 환갑 맞은 딸이 살고 있고, 아들은 서울의 큰 회사에서 다니는데 어머니를 모시려했지만 이곳에 홀로 사는 게 좋아 남았노라고 노파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말했다. 시인의 모친은 진즉에 대밭 넘어 언덕으로 가, 말없이 누워 있다.

◇경남 거창군 가조면 석강리, 이기철 시인의 옛집 마당. 주인 노파가 텃밭에서 약을 치다 말고 분무기를 짊어진 채 돌아와 객들을 맞는다. 시인이 다가가 공손히 사연을 고하자, 노파는 음료수라도 들고 가라며 잡아 끌었다. 시인은 늙은 어미 같은 그 노파의 손에 담배값이라며 한사코 지폐를 쥐어주었다.거창 가조면 석강리, 시인이 나고 자란 그 마을은 전주이씨 열댓 가구가 모여 살던 곳이었다.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치고 앞으로는 그리 넓지 않은 논밭이 조금 있어, 겨우 가난을 이겨내는 마을이었다. 시인은 성장기의 이곳 고향을 떠올리면 춥고 고생스러웠던 기억만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고향까지 오지 못하는 대신, 대구 인근 비슬산 기슭에 ‘늘 고향 같아라’는 바람의 ‘여향(如鄕)예원’을 지어놓고 그곳에서 시도 쓰고 제자들과 만난다.

읽을 책이라곤 교과서가 고작이었던 산골 소년에게 국어 책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그에게 교과서에 실린 소월이나 김광섭 등의 시는 지금도 달달 외우는 정서적 감응의 대상이었다. 특별히 공부를 잘했던 학생, 늘 읽을거리에 굶주렸던 시골 소년, 그가 대구로 나아가 대학을 다니면서부터 잠재돼 있던 문기(文氣)는 폭발하기 시작했다. 2학년 때 대학생 문예대회에서 장원을 해 처음 김춘수 시인과 만났다. 그는 성실한 문청이었다. 특별히 일탈하지는 않았으나 내연하는 서정시인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와서는 교사를 하면서 대학원 다니랴, 꾸준히 그리운 시를 쓰랴, 늘 바쁘고 각박한 생활이었지만 옆길로 새지는 않았다. 그의 출세작은 고향을 그리는 ‘청산행’인데, 시의 정조는 한국적인 내용이지만 정작 그는 대학 시절 엘리엇과 발레리에 흠뻑 빠져 살았다. 그는 지금도 세계 시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시인은 폴 발레리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발레리는 철저하게 얼치기 감성을 자제하고 지성에 헌신한 주지적인 시인이었다. 자신의 의식을 투명하게 관찰하는 하나의 도구로 시를 상정했다. 그에게 시란 자기 정신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도구였고, 그 과정을 엄격하게 계산하면서 쓰는 것이 시였다. 그는 수학, 그중에서도 기하학을 좋아하는 시인이었다. 발레리가 극렬한 짝사랑의 고통 뒤에 그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이처럼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설픈 감정일랑 집어치우고 고도의 정신적 단련 상태로 나아가고 싶은 욕구였다는 거다.

‘청산행’의 서정시인 이기철에게도 그런 계기가 있었던 것일까. 그는 ‘유리의 나날’이라는, 발레리에게 헌정하는 듯한 시집을 냈다. 그는 이 시집 뒤의 산문에 “나는 ‘유리’ 연작을 쓰면서 줄곧 폴 발레리를 생각하고 발레리가 시를 버리고 기하학에 몰두했던 때의 심경을 생각했다”며 “나의 정신이 고도로 단련된다면 얼마만한 높이에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을 이 연작을 통해 시험하려 했던 것”이라고 적었다.

“내 이제 조그맣게 고백하노니/ 나는 꽃보다는 누추하게 살아왔고/ 먼지보다는 깨끗하게 살아왔다/ 별빛보다는 어둡게 살아왔고/ 뻘물보다는 정결하게 살아왔다// 순수를 향해 경배하던 오랜 시간들/ 명징을 위해 손 모으던 무수한 기도들// 그러나 무지개를 보면 나는 너무 누추하게 살아왔고/ 폭포를 보면 나는 너무 안개처럼 살아왔다/ 이슬을 보면 나는 너무 뻘물로 살아왔고/ 유리를 보면 나는 너무 진흙으로 살아왔다”(‘유리(琉璃)에게 묻노니’ 부분)

그는 지금 생각해보니 그 시절은 ‘지적인 허영심’이 승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후회는 하지 않지만 그리 좌충우돌하느니, 차라리 한국 시인들의 정조에 파묻혀 ‘청산행’을 이어왔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써온 시들을 죽 늘어놓고 보면 그리 멀리 돌아온 길은 아닌 듯싶다. 결국 그가 가고 싶고 돌아가고 싶은 곳은 청산 같은, 정신의 열대 같은, 따뜻한 평화와 생명과 위로가 깃든 그 영원한 공간이 아니겠는가.

“내 정신의 열대, 멱라를 건너가면/ 거기 슬플 것 다 슬퍼해본 사람들이/ 고통을 씻어 햇볕에 널어두고/ 쌀 씻어 밥 짓는, 마을 있으리/ (…) 저녁의 고전적인 옷을 벗기고/ 처녀의 발등 같은 흰 물결 위에/ 살아서 깊어지는 노래 한 구절 보탤 수 있으리/ 오래 고통을 잠재우던 이불 소리와/ 아플 것 다 아파 본 사람들의 마음 불러모아/ 고로쇠숲에서 우는 청호반새의 노래를/ 인간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말로 번역할 수 있으리/ 내 정신의 열대, 멱라를 건너가면”(‘정신의 열대’ 부분)

처음에는 뜨악한 표정으로 경계하던 노파가 일행을 불러 음료수라도 마시고 가라고 강권한다. 하릴없이 설탕물 같은 노란 시골 음료를 마시고 마당을 나서는데 시인은 뒤에 처져 노인에게 옛사람의 안부를 물었다. 윗마을에 살던 여학생 하나가 시인의 집 들창에 돌멩이를 던져 자신이 내려왔다고 기별을 하곤 했단다. “물레방앗간 뒤쪽에 비비새가 와서 울면/ 간호원을 하러 독일로 떠난 여자 친구의 항공엽서나 기다리며/ 느린 하학종을 울리는 낙엽송 교정에서/ 잠처럼 조용한 풍금 소리를 듣는 2급정교사가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던 ‘이향’의 그 여인이다. 시인은 세월이 흘러 미국에 교환교수로 갔을 때 그 여인을 만났다는데, 그는 추억 속, 특히 소년소녀 시절에 만났던 연인은 다시 만나서는 안 될 일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짐짓 그네의 뚱뚱해진 늙은 외모 탓을 했지만, 영원히 늙지 않는 세월의 속살을 그가 모른다고 잡아떼지는 못할 테다.

그는 “시라는 게 참 매몰차서 찾아가면 도망가고 포기하면 곁에 와서 잠을 깨우는, 사람의 연애보다 더 뜨거운 것”이라며 “아직 최후의 명작은 못 내놓았는데 안될지도 모르지만 단 한 편이라도 지금까지 쓴 것보다 나은 작품을 남기고 싶다”고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열 줄만 쓰고 그만두려 했던 시를/ 평생 쓰는 이유를 묻지 말아라// 내가 편지에,/ 잘못 살았다고 쓰는 시간에도/ 나무는 건강하고 소낙비는 곧고/ 냇물은 즐겁게 흘러간다.// 꽃들의 냄새가/ 땅 가까운 곳으로 내려오고/ 별들이 빨리 뜨지 못해서 발을 구른다./ 모든 산 것들은 살아 있으므로 생이 된다”(‘느리게 인생이 지나갔다’ 부분)

I. 실존의 심연에서 건져낸 언어…견고하게 빚어낸 문학의 주름
   [유성호 교수가 찾은 문학의 순간 / 서울신문 2021-06-20  ] <19>나희덕 예술의 시간들

최근 에세이집 ‘예술의 주름들’을 출간한 나희덕 시인은 원래 제목을 ‘시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시인의 눈으로 예술을 읽어 낸 작은 오솔길 같은 책이랄까. 

더위가 일찍 찾아온 초하(初夏)에 서울 종로의 한 식당에서 시인 정현종 선생을 나희덕 시인과 함께 뵀다. 건강하신 스승의 말씀을 들으며 식사를 하는데 나 시인이 연필을 선물했다. 언제나 무언가를 들고 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좋아하는 그는 미국에 사는 한국인 목사가 목수가 되어 만든 연필을 바다 건너 구입해 스승과 친구에게 나누어 줬다. 순간 ‘연필’이라는 상징이 세 사람의 글쓰기를 환하게 이어 주었는데, 그것은 언제나 나희덕만이 만들어 내는 순간이다. 그의 첫 시집 ‘뿌리에게’(1991) 발문에 정현종 선생이 쓴 한 구절이 떠올랐다. “대학 시절의 나희덕은 시를 열심히 쓰는 학생이었고 산문을 봐도 우선 문장력이 마음 놓이는 학생이었다. 말이 그렇지 대학 시절에 눈에 거슬리지 않는 글을 쓴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생각하면, 벌써 상당히 견고한 문장은 눈에 띄게 마련이었다.”


인터뷰는 그의 ‘견고한 문장’이 빛을 발하는 신작 산문집 ‘예술의 주름들’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지만 자연스럽게 그의 삶과 시 전체로 번져 갔다. 그는 이제 막 종강을 해서 한숨 돌리고 있다면서 벌써 세 학기째 학생들을 직접 만나지 못하고 온라인 수업을 하다 보니 좀 지치기도 했다고 한다. “책을 내고 나서 한동안 행사나 강연 등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냈어요. 방학에는 조용히 시인의 자리로 돌아가 살아 봐야죠.”

● 시인의 눈으로 읽어 낸 오솔길 같은 책

이번 산문집에서는 ‘아름다움’과 ‘주름’의 의미가 각별하다. “예술의 여러 장르들을 넘나드는 책을 낸 것은 사실 무모한 일일 수도 있을 것 같다”면서도 “시나 문학이 아닌 다른 예술장르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 의미를 헤아려 보는 일이 많은 공부와 즐거운 경험이 됐다”고 했다.

그는 예술적 성취를 논하는 비평가의 역할보다는 예술적 순간이 시작되어 창조되는 과정에 함께 참여하는 시인으로서의 느낌을 책에 가득 채워 넣었다. ‘주름’은 무슨 뜻일까? “희로애락과 온갖 기억이 깃들어 있는 우리 몸과 마음의 주름처럼 예술작품에 새겨진 주름을 찬찬히 펼쳐 보면 결국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예술이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돼요.” 그 주름 속에 감춰진 심연이나 온기를 제 방식으로 길어 올린 기록들인 셈이다.

책에서 호명한 여러 예술가들은 시대도 장르도 성별도 국적도 개성도 모두 다르다. 한때 피아노를 치고, 유화를 그리고, 사진에도 남달리 심취했던 나 시인의 예술적 경험이 다른 예술언어에 대한 이러한 차근한 기록을 가능케 했을 성싶다. 그리고 그 결실은 그가 지상에 남기는 또 한 권의 시집인 것 같기도 하다.



● 전위적 언어가 가닿을 수 없는 세계의 비밀

그는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종교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실현하려 했던 분이었고 그러한 인생관으로 경북 산골에서 신앙공동체를 일궜다. 아버지는 거기서 어머니를 만나 결혼했고 산을 내려와서 정착한 곳이 논산이었다. 그의 시에 줄곧 나타나는 현실과 종교의 갈등적 공존이라거나 타자를 향한 한없는 연민과 사랑의 마음은 부모님으로부터 온 유전자와도 같은 것이었을 터이다.

그에게 종교는 선택의 영역이 아니었다. 성장기에 갈등도 심했다. 문학을 하게 된 것도 “종교적 수행과 사회적 혁명 사이 어디에도 귀속되지 못한 자의 경계인 의식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한동안 그에게 종교와 문학은 서로 건널 수 없는 간극을 지닌 것처럼 보였지만 어느 순간 양자의 갈등이 더이상 자신을 억압하지 않게 됐다. 그는 “흔히 제 시에 대해 붙어 다니는 ‘생태적, 여성적, 공동체적’ 특성이 넓은 의미의 ‘영성’과 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더이상 종교성에 갇히지 않으면서 다양한 영성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예술의 주름들’ 서문 첫 행에는 “피아니스트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라고 적혀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어린 시절 예배당에서 피아노 반주를 했던 가녀린 손이 써 내려간 시가 진정한 찬미(讚美)의 노래가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최초의 예술적 꿈이었던 음악적 선율이 그만의 시로 펼쳐져 간 것이니까 말이다.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뿌리에게’가 당선돼 30년 넘는 시력을 일구어 왔다. 그의 초기 시는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1994), ‘그곳이 멀지 않다’(1997)에 담겨 있다. ‘형식적 단정함과 따뜻한 모성’이 평단의 주목을 받았지만 사실 그 안에는 고단함과 기다림과 상처와 통증으로 버텨 온, 나희덕만의 시간이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는 사라져 감으로써 존재의 빛을 남기는 것들에 대한 사랑과 애착, ‘시’를 향한 자기 엄격성의 산물로 진화해 갔다.

오랫동안 이러한 지속과 변이를 거듭해 온 그의 시에서 우리는 한동안 시단을 잠식했던 분열과 환각, 우울과 공포, 광기와 모멸, 전위적 포즈 같은 것들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그는 그러한 언어들이 가닿을 수 없는 세계의 비밀스러움을 탐색했고, 그만큼 그의 시는 다양한 폭과 깊이를 담고 있으면서도 언어 선택에서만은 고전적인 청교도적 자세를 유지해 왔다.

“저의 문학 수업은 어쩌면 등단과 함께 시작됐고 늘 학생의 마음으로 지내 온 것 같아요. 그러는 동안 빛에서 어둠으로, 삶에서 죽음으로, 식물성에서 동물성으로, 낙관주의자에서 비관주의자로 조금씩 변화했죠.” 그 점에서 그는 네 번째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2001)이 중요한 변곡점이었다고 말한다. 가장 힘들고 불안할 때 비명처럼 한숨처럼 토해 낸 시들이어서인지 그 시집은 자신에게도 애틋하고 독자들에게도 가장 공감을 준 게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다.

이후 시인은 ‘사라진 손바닥’(2004)과 ‘야생사과’(2009)에서 자신의 시를 변화시키려는 모험과 도전을 새롭게 보여 준다. 그 안에는 나희덕 시의 속살이 지속하고 변이하는 충일하고도 격렬한 교차 과정이 펼쳐져 있다. 그는 이 시집들을 통해 ‘가이아’에서 ‘사이렌’으로, 상처를 ‘다스리는 것’에서 ‘받아들이는 것’으로, ‘뿌리’로부터 ‘가지’로 ‘잎’으로 끝없이 시적 원심을 확장해 갔다. 그러면서 가장 실존적이고 종교적인 심층으로서의 ‘죽음’과 ‘사라져 감’의 형이상학에 대해 노래하는 성숙한 시인이 되어 갔다.

그 뚜렷한 귀납적 결실이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2014)이었을 것이다. 그는 시집 뒤표지 글에 “떼어낸 만큼 온전해지는, 덜어낸 만큼 무거워지는/ 이상한 저울, 삶” 그리고 “이미 돌이킬 수 없거나 사라진 존재를 불러오려는/ 불가능한 호명, 시”라고 썼다. 그렇게 이 시집은 한 시대의 죽음을 넘어 애도와 치유라는 이중 기능을 충실하게 담아낸 결과로 남았다.



● 진퇴의 왕복을 벗어날 수 없는 시의 힘

여덟 번째 시집 ‘파일명 서정시’(2018)는 ‘눈과 얼음’으로 시작해 ‘서른세 개의 동사들 사이에서’라는 시로 끝난다. “온통 눈과 얼음으로 가득한 세상을 간신히 살아내면서, 현실의 그 한기와 단단함을 조금씩 녹여내면서, 마침내 허공과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시집”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눈과 얼음이라는 고체적 상태에서 어떤 기화와 액화를 위한 몸부림을 쳤다고 말한다. 이 작품들을 쓰는 동안 개인적으로든 시대적으로든 다양한 죽음과 폭력을 통과해야 했는데 막상 시집으로 내고 나니 그런 시간에서 조금은 놓여나게 되었다고 한다. 나희덕 시의 찬연한 결실이다.

그는 이야기를 하다가도 가끔 배시시 웃기를 잘한다. 물론 그것은 발랄한 성정에서 오는 게 아니라 고통을 지나고 나서 얻어 낸 어떤 넓음 같은 것에서 온다. 그의 이름처럼 웃음은 ‘희’(喜)고 넓음은 ‘덕’(德)이다. ‘파일명 서정시’의 ‘시인의 말’에 “시는 나의 닻이고 돛이고 덫이다”라고 썼다. 아름다움을 향한 간절한 그의 언어를 가장 적정하게 담은 말이 아닐까 한다. “저를 머물게 하기도 하고, 나아가게 하기도 하고, 결국 그 진퇴의 왕복 작용에서 끝까지 벗어날 수 없게 한다는 점에서 시는 참 힘이 세다는 생각이 들어요. 언제까지 쓸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시보다 앞장서지 않고 겸허하게 시의 뒤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러기를 바란다. 그럴 것이다.

그나 나나 정현종 선생을 만난 것은 문학적으로든 인간적으로든 감사한 인연이다. 선생은 시인이 지녀야 할 자존과 주름까지 낱낱이 보여 준 스승이시다. 불가피하게 이 글은, 스승과 제자들이 모처럼 만난 초여름 저녁에 시인 친구와 나눈 우정의 기록도 되는 셈이다.

 

 

II.  [조용호의 길 위에서 읽는 시] <8> 나희덕의 ‘와온에서’   (2009-06-17)

 

 

그네의 시는 대체로 아늑하고 따뜻해서, 혹은 슬퍼서, 어두워지는 골목길을 돌아 십오 촉 전구가 깜박거리는 누옥으로 들어서는 느낌이다.

 

거기, 헐겁고 지붕이 낮은 그 집에 일몰이 산다.

 

그네에게 일몰이란,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어스름이란, ‘소멸을 향해 걸어가는 시간의 발소리를 듣는 그 저녁이란, ‘시간의 연대기적 순서에서 해방된영원한 찰나이기도 하다.

 

나희덕의 시에서 이 일몰의 풍경은 여러 번 변주되거니와 최근에 내놓은 다섯 번째 시집 야생사과에 수록된 와온에서는 그중에서도 가장 진화된 늠름한 일몰이다.

 

 

밀물이 들어차 석양에 물든 갯벌 대신 바닷물이 넘실대는 와온 앞바다. 향일암까지 다녀오는 바람에 와온의 석양을 놓친 나희덕 시인은 부패가 두려워 미라처럼 말리던 내 안의 생명을 이제는 물기로 적셔 살려내고 싶다고 말했다.“산이 가랑이 사이로 해를 밀어넣을 때,/ 어두워진 바다가 잦아들면서/ 지는 해를 품을 때,/ 종일 달구어진 검은 뻘흙이/ 해를 깊이 안아 허방처럼 빛나는 순간을 가질 때,// 해는 하나이면서 셋, 셋이면서 하나// 도솔가를 부르던 월명노인아,/ 여기에 해가 셋이나 떴으니 노래를 불러다오/ 뻘 속에 든 해를 조금만 더 머물게 해다오”(‘와온에서부분)

 

신라 경덕왕 시절 어느 날, 해가 둘이나 나타나 열흘 동안 없어지지 않는 변괴가 일어나자 월명노인이 도솔가를 불러 다시 해를 하나로 만들었다는 설화가, 와온에서도 되풀이된다. 일몰의 와온에, 하늘과 바다와 뻘에 해가 셋이나 떴으니 월명노인을 불러 도솔가를, 그것도 한참 길게 정성을 들여 부르게 할 일이다.

 

일몰의 낙조 풍경으로 소문난 전남 순천시 해룡면 와온마을. 뒷산이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이라 하여 와온(臥溫)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데, 이름만으로도 시적이다. 이곳 와온의 일몰을 보기 위해 오후 4시 무렵, 나희덕(43) 시인과 순천역에서 만났다. 그 시간에 곧바로 와온에 가면 해가 지기까지 한참 기다려야 하는 애매한 시간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시인은 여수 방향 이정표를 보더니 향일암에 들렀다가 와온으로 돌아오는 건 어떤지, 물었다. “다친 발목을 끌고 향일암 가는 길/ 그는 여기 없고/ 그의 부재가 나를 절뚝거리게 하고/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는 동안/ ,,,,”으로 이어지는 시편도 이번 시집에 나온다. 순천과 여수가 그 정도로 가까운지는 미처 몰랐다. 그러니까 그네와의 대화는 생각보다 멀었던 향일암까지 갔다가 어둑한 와온 해변까지 돌아오는 그 긴 시간의 차 안에서, 그것도 내내 운전석의 시인에게 조수석에서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듣는 방식이었다.“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 나의 사랑을// 먼 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눈부셔 잘 부스러지는 살이니/ 내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 뻗어가려무나// 척추를 휘어접고 더 넓게 뻗으면/ 그때마다 나는 착한 그릇이 되어 너를 감싸고/ 불꽃 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 네 뻗어가는 끝을 하냥 축복하는 나는/ 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을 가졌어라”(‘뿌리에게부분)

 

불과 스물셋의 청춘에 웅숭깊은 뿌리의 정서로 시단에 나선 나희덕은 이후 모성과 단정함과 절제된 이미지로 평가받는 시를 써왔다. 젊고 싱싱한 그이에게서 쏟아지는 시는 아늑하지만 성찰의 기운이 지배적이고, 따뜻하지만 쓸쓸해서 깊은 것들이었다. 시를 제쳐두고라도, 심지어 어떤 시인은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돌아다니다가 박완서 할머니와 지낸 것 같다며 그를 보냈다고 했다. 무엇이 그를 일찍 깊게 만들었을까.

 

그는 지금 조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살고 있는데, 전화 한 통만 받고 광주역에서 이력서를 작성해 면접장에 간 뒤 교수로 취직했다고 한다. 국내 대학에서는 보기 힘든 투명하고 공정한 교수 선발 방식이 나희덕에게 적용된 경우였는데, 그 당시 그네는 인생 최대의 시련을 이겨나가는 중이어서 더욱 빛을 발하는 미덕이었다. 아무리 그러하더라도, 조직생활에 적응하느라 힘들지는 않았는지 물었다. 그네는 낯선 사람들이나 조직에 적응하는 건 일도 아니라고 했다. 보육원에서 태어나 대학에 갈 때까지 20년을 그곳에서 살았다는 말을 듣고서야 내 질문이 부적절했음을 알았다. 나희덕의 엄마는 그네가 태어날 때부터 보육원을 관리하는 총무로 일했다. 어머니는 보육원의 수많은 고아들과 자신의 딸을 동등하게 대했다. 그래서 자식이 너무 많으신 우리 어머니/ 나의 어머니라고 고집부리고 나면/ 웬지 미안해지는 우리 어머니였다.

 

 

뿌리뽑힌 줄도 모르고 나는/ 몇줌 흙을 아직 움켜쥐고 있었구나/ 자꾸만 목이 말라와/ 화사한 꽃까지 한무더기 피웠구나/ 그것이 스스로를 위한 弔花인 줄도 모르고// 오늘밤 무슨 몰약처럼 밤비가 내려/ 시들어가는 몸을 씻어내리니/ 달게 와닿는 빗방울마다/ 너무 많은 소리들이 숨쉬고 있다// 내 눈에서 흘러내린 붉은 진물이/ 낮은 흙 속에 스며들었으니/ 한 삼일은 눈을 뜨고 있을 수 있겠다// 저기 웅크린 채 비를 맞는 까치는/ 무거워지는 날개만큼 말이 없는데/ 그가 다시 가벼워진 깃을 털고 날아갈 무렵이면/ 나도 꾸벅거리며 밤길을 걸어갈 수 있겠다// 고맙다, 비야. 고맙다. 고맙다.”(‘몰약처럼 비는 내리고전문)

 

터지는 비명이 그대로 시가 되었다는, 세 번째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에 수록된 시편이다. 그네가 아무리 힘들어도 낮은 자세로 포복하며 자학적으로 비를 맞으며 고맙다고 되뇌일 수 있는 태도의 근인은, 낮고 외로운 자들과의 동류의식에다 어머니의 기독정신이 합류한 결과 같다. 시인의 엄마는 일찍이 부산사범학교를 다니던 수재였는데 기독교에 심취해 산속의 공동체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아버지와 만났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방 앞에 널려 있는 빨래가 어찌나 눈부시게 희던지 거기에 마음이 끌렸다고 했다. 어쨌든 그런 부모 밑에서, 그것도 낮은 보육원에서 성장한 시인이었기에, 그네의 시에서 헌신과 모성과 따뜻함을 감추기는 힘들었을 테다. 물론, 나희덕의 시를 그의 성장배경으로 이리 간단히 해명하는 건 폭력일 수 있지만 그네의 시를 형성한 큰 밑그림으로는 유효하다.

 

여수가 지척인 줄 알았는데 정작 향일암은 한참 멀다. 이미 들어선 길, 돌아가자니 아쉽고 향일암까지 갔다가 와온으로 가자니 해는 이미 져버릴 것 같아 난감하다. 시인은 내가 하는 일이 늘 이렇다고 자조했고, 조수는 짐짓 괜찮다는 말을 연발했다. 우리는 숨 가쁘게 향일암에서 사진 몇 장 찍고 내려와 와온을 향해 다시 달려나갔다. 지는 해를 따라가는 형국인데, 빨리 가서 떨어지는 해를 받아내기에는 도로가 너무 막힌다.

 

5년 만에 새 시집을 내면서 그는 인터뷰할 때마다 이제는 달라지겠다고 선언했는데, 어느 매체는 이를 받아 범생이 스타일에서 벗어나겠다고 썼다. 하지만 그네는 나는 절대로 범생이는 아니다남들이 그렇게 보았을 뿐이라고 강변했다. 사실, 어떤 선배는 20대 때 자신의 별명을 전도부인이라고 지어주었다고 했다. 까만 가방을 들고 까만 구두만 신으면 영락없는 전도사처럼 보일 거라고 놀린 거였다. 그네의 시가 윤리적이고 희생적인 내용인 데다, 구조나 정서적으로 일탈과 파괴가 아니라 수용하고 반듯하게 정리하는 세계여서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했다. 시는 그러할지 모르지만, 그네 자신은 절대 범생이가 아니라고 고개를 흔든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본드를 흡입해본 적이 있다고 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 하교길에 우연히 동참한 이벤트였다. 그런가 하면 여학생 남학생 분리된 방에 들어갔다가 남녀의 다리가 합쳐진 침대도 일찍이 보아버렸다. 수돗가에서 달밤에 병을 깨뜨리며 싸우는 보육원 아이들도 자다가 일어나 보았다. 나희덕에게 이러한 체험은 어둠을 껴안게 만드는 동력이기는 할망정, 스스로 어둠 속으로 스며들게 만드는 계기는 아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기독정신, 그들의 사랑이 품어낸 온기의 힘이었을까. 그네는 사유의 질서가 너무 완강해 우연이 끼어들 틈이 없는 거는 명징해지는 장점도 있지만 다른 데로 튀어나갈 틈이 없다내 시가 읽힐 수 있고 소통하는 힘이 거기에 있었던 건 사실인데 이제 실패할 수 있겠지만 그 구조에서 일탈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윤리적 자아가 완강하고, 서정시 전통에 너무 익숙하게 길들여져 쓰기만 하면 시가 그럭저럭 되는 상태를 깨뜨려야 하는 게 과제라며 남들은 20대에 좌충우돌하면서 모험도 하다가 나이가 들면서 안정된 세계로 나아가는데 나는 오히려 반대라고 씁쓸하게 웃었다. 어렵게 와온에 당도했지만 해는 이미 사라졌고, 뻘에는 밀물이 가득해 석양의 정조는 애당초 찾아볼 수 없는 지경이다. 시인은 미안해하면서 예전에 와서 찍은 와온의 석양 사진을 보내준다고 했다. 미안할 것 없다. 그네가 가져간 해만 내놓으면 될 일이다.

 

저녁마다 일몰을 보고 살아온/ 와온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떨기꽃을 꺾어 바치지 않아도/ 세 개의 해가 곧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에/ 찬란한 해도 하루에 한번은/ 짠물과 뻘흙에 몸을 담근다는 것을 알기에/ 쪼개져도 둥근 수레바퀴,/ 짜디짠 내 눈동자에도 들어와 있다/ 마침내 수레가 삐걱거리며 굴러가기 시작한다// 와온 사람들아,/ 저 해를 오늘은 내가 훔쳐간다”(‘와온에서부분)

 

조용호 선임기자

 

 

나희덕 연보

1966: 충남 논산 출생, 연세대학교 국문과와 동대학원 졸업.

1989: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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