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이기철 시인의 ‘영원 아래서 잠시’ – <문학사상> 2020년 6월호 ‘이달의 시인’ 코너)

    [문학뉴스=강현 기자, 2020.06.06] 

 

 

이번에 전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코로나19 사태가 시인에게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지난 2,3월 가장 심각한 코로나 사태를 혹독하게 겪어야 했던 대구의 이기철 시인은 “시간에는 물리적 시간과 인간적 시간이 있는데 이 두 달이 인간적 시간으로는 십 년에 해당하는 시간이었다.”고 토로했다.

이 시인은 이어서 “그러면서 생각했다. 코로나19 이후 인간의 삶의 양식에 예기치 않은 변화가 도래하리란 것을. 이는 생태학이나 문화인류학의 거대이론에 기댄 것이 아니라 눈앞에 벌어지는 현상을 직접 보고 느낀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지구 전체로 보면 쌀알에 불과한 ‘대구’라는 도시가 불과 두 달 만에 삶의 양태를 바꿔놓고 있는 것을 목도한 후에 얻은 생각”이라는 것이다.

이 시인은 최근 발간된 <문학사상> 6월호의 ‘이달의 시인’ 코너의 ‘영원 아래 잠시’ 에세이를 통해 이같은 소회를 밝혔다.

그는 이 글에서  이 기간 동안 “사회, 경제, 문화의 양태들은 모두 단절되거나 변화를 예고했다. 시민경제는 거의 바닥을 드러냈고 거리는 텅 비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인간’이라면  ‘인간의 관계’가 거의 차단됐다. 사람들은 누구도 만나려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특히 “문화는 단말마 상태였고 작은 삶의 향연들마저 축소되고 보류됐다. 이 치유가 언제, 얼마나 가능할지 아무도 예단할 수 없게 됐다. 이런 상태가 장시간 지속된다면 우리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문화’는 퇴락하고 우리가 애써 가꾸고 다듬었던 문명마저 월하의 적요로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비관했다.

이기철 시인은 그러나 “사람들은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스스로를 달래며 말한다. 이번 사태는 ‘이념의 초월’, ‘강대국과 약소국의 제휴’, ‘계급과 계층 없는 인간의 평등’, ‘제도교육의 수정’ 등을 가져올 것” 이라며 “지금으로서는 실낱 같이 가늘고 연약한 그 말에 기댈 수밖에 없음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 시인은 “이 기간 동안 수도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고 시를 썼다”며 “여기에 발표하는 시 세편도 이런 과정에서 쓴 것”이라고 부연했다.

 ‘양지꽃 휴양지’, ‘신생대의 아침’, ‘각북에서 쓰다’라는 제목의 시 세 편은 이 코너 말미에 각각 실렸다.

 

 

 

 

II. [피플앤피플] “시는 자의식을 담는 그릇” 이기철 시인
2017년 06월 14일

"숨은 차지만 시인이 걷는 이 길이 가장 아름다운 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기철(74) 시인이 신작 시집 ‘흰 꽃 만지는 시간(민음사)’을 펴냈다. 자연과 사물의 생명력, 삶의 의미를 시에서 찾는다.

이기철 시인은 197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해 시집 ‘청산행’,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 ‘유리의 나날’ 등을 발표했다. 또한 김수영문학상, 시와시학상, 최계락문학상, 후광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시·문학계의 인정을 받아왔다.

흰 꽃은 뜰에 온 나무의 첫마디 인사다 / 그런 날은 사람과의 약속은 꽃 진 뒤로 미루자 / 누굴 만나고 싶은 나무가 더 많은 꽃을 피운다 / (...) / 아름다운 사람이 앉았다 간 자리마다 / 다녀간 꽃들의 우편번호가 남아 있다 / 풀잎으로 서른 번째 얼굴을 닦는다 / 내일모레 언젠가는 그들이 남긴 주소로 손등이 발갛도록 흰 잉크의 편지를 쓰자 (p.48 흰 꽃 만지는 시간)

유성호 문학평론가는 이기철 시인에 대해 "우리 시단에 서정시의 기품과 깊이를 지속적으로 부여해 온 대표적인 중진이며, 근원성을 지향하는 맑고 푸른 위의(威儀)를 이어온 서정의 사제"라고 평한다.


다음은 이기철 시인과의 일문일답이다.

Q. 18번째 시집 '흰 꽃 만지는 시간'이 나왔는데, 어떤 주제의 시들이 담겼나?

이번 시집에는 총 73편의 시가 들어있다. 늘 그렇듯이 전 크고 무겁고 어려운 주제보다, 작고 낮고 겸허한 주제를 찾는다. 일상, 사물, 목숨의 소중함,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서 소재를 찾는 경우가 많다.


Q. 이번에 발표하신 시 가운데 가장 애착이 가는 시를 꼽는다면?

시는 제게 자식이나 마찬가지다. 다시 말하면 아들과 딸인데, 그중 어느 자식에 가장 애착이 가는지 물으면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것과 비슷하다. 우선 ‘흰 꽃 만지는 시간’, ‘속옷처럼 희망이’, ‘시인이 걷는 길이 가장 아름다운 길이 되었으면 좋겠다’, ‘기슭에서의 사색’, ‘시 쓰는 일’ 등이 마음에 남는다.


Q. 태초로 돌아가고자 하는 염원을 주로 표현하시는데, 생명의 근원을 노래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데도 제 목숨을 가꾸고 갈무리하며 사는 여리고 작은 생명들이 흩어져 있다. 그것을 시인이 아니면 누가 발견하고 기릴 수 있는가? 우리 시사(詩史)에서는 1930년대 후반에 ‘생명파’로 분류되던 시인들이 있었다. 그분들이 ‘전기 생명파’라면 저는 ‘후기 생명파’로 불리고 싶다.


Q. 시 쓰는 일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이다. 평소 시상의 원천은 무엇인가?

틈날 때마다 산책을 하며 시를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아침, 저녁 산책길을 비롯해 혼자 있는 밤, 다른 사람이 쓴 좋은 글을 보면서 시상을 얻는 편이다. 더 근원적으로 본다면 주위의 잊혀가는 생명들, 설령 그것들이 지상에서 사라져도 아무도 아쉬워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작은 숨소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시상의 원천이다.

197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를 쓰는 일이 시작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섬광(閃光)처럼 오는 그 순간을 스스로 포착하는 일이 가장 어렵고 또 필요한 일이다.


Q. 한 평생 시인의 길을 걸어오면서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

‘시집’을 세상에 내는 일이 가장 조심스러운 일이다. 시는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담는 그릇이고, 시집은 산고 끝에 낳은 자식과 같다. 그러나 어렵게 시집을 내도 독자와 언론의 반응, 나아가 시집이 얼마나 잘 팔리는지 등 현실적인 부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여러 고난과 예상 못한 과정 속에서도 시집을 꾸준히 내면서 세상과 독자와 소통하는 일은 중요하면서도 어렵다.


Q. 앞으로 작품 계획이 궁금하다.

꾸준히, 힘이 닿는 한 시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시대와 사회가 변해도 시는 불변의 진리를 품고 있다. 저 역시 지금까지의 모습을 간직한 채 나아갈 것이다. 그동안 쓴 시가 1,450 편쯤 되는데, 가능하다면 새로운 시를 쓰겠다는 일념으로 하루를 산다. 이번 시집에 담긴 시 ‘시 쓰는 일’에서 저는 이렇게 썼다.

"시 쓰는 일은 나를 조금씩 베어 내는 일 / 면도날로 맨살을 쬐끔씩 깎아 내는 일 / 입천장, 겨드랑이, 사타구니, 항문까지 / 쬐끔씩 발라내는 일 / (…) / 주검까지 가다가 죽지는 않고 / 절뚝이며 휘청이며 돌아오는 일 / 시 쓰는 일"

 

 

 

 

 

III. [조용호의 길 위에서 읽는 시] (7) 이기철의 ‘청산행’

     (세계일보 2009-06-03)  

시인의 고향 마을에 들어설 때부터 뻐꾸기 소리는 내내 따라다녔다. 뻐꾸기가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에는 산비둘기가 울었다. 뒤란 언덕에서 대나무 잎이 바스락거리고 오래된 지붕에 와송(瓦松)이 솟아나는 그 기와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인이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처로 떠나기 전까지, ‘눈에 익은 수많은 돌멩이들의 정분을 거역’하고 ‘뛰는 버스에 올라 도시 속의 먼지가’ 되기 전까지 살았던, 거창군 가조면 석강리 옛집이다.

“용서할 줄 모르는 시간은 물처럼 흘러갔고/ 눈 속에 묻히는 봄보리들의 침묵이 나를 무섭게 위협했을 때/ 관습의 신발 속에 맨발을 꽂으며 나는/ 눈에 익은 수많은 돌멩이들의 정분을 거역하기 시작했다./ 염소를 불러모으는 비음의 말들과/ 부피가 작은 몇 권의 국정교과서를 거역했다./ 뒷산에 홀로 누운 조부의 산소를 한 번만 바라보았고/ 그리고는 뛰는 버스에 올라 도시 속의 먼지가 되었다./ 봄이 오면 아직도 그 골의 물소리와 아이들의 자치기 소리가/ 도시의 옆구리에 잠든 나의 꿈 속에/ 배달되지 않는 엽신(葉信)으로 녹아 문지방을 울리며 흐르고 있다.”(‘이향 離鄕’ 부분)

대구에서 현풍을 거쳐 시간 반 달려와 놓고도 시인은 옛집 가는 길을 쉬 찾지 못했다. 두어 번 헤매다가 논 사이로 난 좁은 길로 들어서자 이번에는 앞에서 털털털 경운기가 간다. 하릴없다.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에 그나마 논물이 고인 평지가 있어 아늑했는데 산 쪽으로 길이 다시 숨어 들어간다. 모퉁이를 돌아든 경운기가 다행히 옆길로 빠져나가 숨통이 트이는가 싶었더니, 이번에는 막다른 산맥이다.

“손 흔들고 떠나갈 미련은 없다/ 며칠째 청산에 와 발을 푸니/ 흐리던 산길이 잘 보인다./ 상수리 열매를 주우며 人家를 내려다보고/ 쓰다 둔 편지 구절과 버린 칫솔을 생각한다./ 南方으로 가다 길을 놓치고/ 두어 번 허우적거리는 여울물/ 산 아래는 때까치들이 몰려와/ 모든 野性을 버리고 들 가운데 순결해진다”(‘청산행’ 부분)

‘청산행’은 이기철(66) 시인을 시단과 독자들에게 제대로 각인시킨 두 번째 시집 표제작이기도 하다. 살다보면, 그것도 도시에서 각박하게 설움에 시달리다보면, 고향 생각이 절로 나는 건 자율신경이 의지와 상관없이 치러내는 반사작용일 게다. 그 고향이 산 첩첩 물 골골 청산이었을 때, 그를 키워준 자연을 향한 그리움은 더욱 절절할 것이다. 이기철은 더구나 그 청산을 어린 시절에 떠난 게 아니라, 고스란히 19세 청년기 초입까지 그곳에서 살다가 떠나온 것이니 그의 시구 그대로 “그 골의 물소리와 아이들의 자치기 소리가/ 도시의 옆구리에 잠든 나의 꿈 속에/ 배달되지 않는 엽신(葉信)으로 녹아 문지방을 울리며”(‘이향’) 흐를 수밖에 없을 테다.

기와집 옆으로 공터 텃밭과 밭 너머 언덕 아래 시커먼 굴이 보인다. 시인은 그곳을 가리키며 이 자리에 있던 초가집이 조카의 실수로 불타는 바람에 부친이 어렵사리 지었던 재실(齋室)로 옮겨와 고등학교 때까지 살았다고 했다. 그 재실이 지금 돌아보는 이 기와집이다. 그는 6·25전쟁 때 교전이 심했던 이 지역에서 피란을 위해 가족이 힘을 모아 팠다는 밭 곁의 검은 입구를 가리켰다. 반세기 훌쩍 전에 파놓은 굴의 초입이 어제의 피란처처럼 생생하게 검다. 그 검은 굴에 눈길을 주는데 까칠한 높은 목소리가 청각을 자극한다. 돌아보니, 등에 분무기를 짊어진 키가 작은 노파 하나가 마당에 들어서는 중이다. 그네는 “여가 어데라고 남의 집이서 함부로 사진을 찍느냐”고 나무라다가 시인이 공손하게 예전에 자신이 살던 집이라고 고하자, 목소리를 낮춘다. 올 여든셋이라는 그 노파는 그 집에 홀로 살고 있었다. 인근에 환갑 맞은 딸이 살고 있고, 아들은 서울의 큰 회사에서 다니는데 어머니를 모시려했지만 이곳에 홀로 사는 게 좋아 남았노라고 노파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말했다. 시인의 모친은 진즉에 대밭 넘어 언덕으로 가, 말없이 누워 있다.

◇경남 거창군 가조면 석강리, 이기철 시인의 옛집 마당. 주인 노파가 텃밭에서 약을 치다 말고 분무기를 짊어진 채 돌아와 객들을 맞는다. 시인이 다가가 공손히 사연을 고하자, 노파는 음료수라도 들고 가라며 잡아 끌었다. 시인은 늙은 어미 같은 그 노파의 손에 담배값이라며 한사코 지폐를 쥐어주었다.거창 가조면 석강리, 시인이 나고 자란 그 마을은 전주이씨 열댓 가구가 모여 살던 곳이었다.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치고 앞으로는 그리 넓지 않은 논밭이 조금 있어, 겨우 가난을 이겨내는 마을이었다. 시인은 성장기의 이곳 고향을 떠올리면 춥고 고생스러웠던 기억만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고향까지 오지 못하는 대신, 대구 인근 비슬산 기슭에 ‘늘 고향 같아라’는 바람의 ‘여향(如鄕)예원’을 지어놓고 그곳에서 시도 쓰고 제자들과 만난다.

읽을 책이라곤 교과서가 고작이었던 산골 소년에게 국어 책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그에게 교과서에 실린 소월이나 김광섭 등의 시는 지금도 달달 외우는 정서적 감응의 대상이었다. 특별히 공부를 잘했던 학생, 늘 읽을거리에 굶주렸던 시골 소년, 그가 대구로 나아가 대학을 다니면서부터 잠재돼 있던 문기(文氣)는 폭발하기 시작했다. 2학년 때 대학생 문예대회에서 장원을 해 처음 김춘수 시인과 만났다. 그는 성실한 문청이었다. 특별히 일탈하지는 않았으나 내연하는 서정시인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와서는 교사를 하면서 대학원 다니랴, 꾸준히 그리운 시를 쓰랴, 늘 바쁘고 각박한 생활이었지만 옆길로 새지는 않았다. 그의 출세작은 고향을 그리는 ‘청산행’인데, 시의 정조는 한국적인 내용이지만 정작 그는 대학 시절 엘리엇과 발레리에 흠뻑 빠져 살았다. 그는 지금도 세계 시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시인은 폴 발레리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발레리는 철저하게 얼치기 감성을 자제하고 지성에 헌신한 주지적인 시인이었다. 자신의 의식을 투명하게 관찰하는 하나의 도구로 시를 상정했다. 그에게 시란 자기 정신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도구였고, 그 과정을 엄격하게 계산하면서 쓰는 것이 시였다. 그는 수학, 그중에서도 기하학을 좋아하는 시인이었다. 발레리가 극렬한 짝사랑의 고통 뒤에 그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이처럼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설픈 감정일랑 집어치우고 고도의 정신적 단련 상태로 나아가고 싶은 욕구였다는 거다.

‘청산행’의 서정시인 이기철에게도 그런 계기가 있었던 것일까. 그는 ‘유리의 나날’이라는, 발레리에게 헌정하는 듯한 시집을 냈다. 그는 이 시집 뒤의 산문에 “나는 ‘유리’ 연작을 쓰면서 줄곧 폴 발레리를 생각하고 발레리가 시를 버리고 기하학에 몰두했던 때의 심경을 생각했다”며 “나의 정신이 고도로 단련된다면 얼마만한 높이에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을 이 연작을 통해 시험하려 했던 것”이라고 적었다.

“내 이제 조그맣게 고백하노니/ 나는 꽃보다는 누추하게 살아왔고/ 먼지보다는 깨끗하게 살아왔다/ 별빛보다는 어둡게 살아왔고/ 뻘물보다는 정결하게 살아왔다// 순수를 향해 경배하던 오랜 시간들/ 명징을 위해 손 모으던 무수한 기도들// 그러나 무지개를 보면 나는 너무 누추하게 살아왔고/ 폭포를 보면 나는 너무 안개처럼 살아왔다/ 이슬을 보면 나는 너무 뻘물로 살아왔고/ 유리를 보면 나는 너무 진흙으로 살아왔다”(‘유리(琉璃)에게 묻노니’ 부분)

그는 지금 생각해보니 그 시절은 ‘지적인 허영심’이 승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후회는 하지 않지만 그리 좌충우돌하느니, 차라리 한국 시인들의 정조에 파묻혀 ‘청산행’을 이어왔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써온 시들을 죽 늘어놓고 보면 그리 멀리 돌아온 길은 아닌 듯싶다. 결국 그가 가고 싶고 돌아가고 싶은 곳은 청산 같은, 정신의 열대 같은, 따뜻한 평화와 생명과 위로가 깃든 그 영원한 공간이 아니겠는가.

“내 정신의 열대, 멱라를 건너가면/ 거기 슬플 것 다 슬퍼해본 사람들이/ 고통을 씻어 햇볕에 널어두고/ 쌀 씻어 밥 짓는, 마을 있으리/ (…) 저녁의 고전적인 옷을 벗기고/ 처녀의 발등 같은 흰 물결 위에/ 살아서 깊어지는 노래 한 구절 보탤 수 있으리/ 오래 고통을 잠재우던 이불 소리와/ 아플 것 다 아파 본 사람들의 마음 불러모아/ 고로쇠숲에서 우는 청호반새의 노래를/ 인간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말로 번역할 수 있으리/ 내 정신의 열대, 멱라를 건너가면”(‘정신의 열대’ 부분)

처음에는 뜨악한 표정으로 경계하던 노파가 일행을 불러 음료수라도 마시고 가라고 강권한다. 하릴없이 설탕물 같은 노란 시골 음료를 마시고 마당을 나서는데 시인은 뒤에 처져 노인에게 옛사람의 안부를 물었다. 윗마을에 살던 여학생 하나가 시인의 집 들창에 돌멩이를 던져 자신이 내려왔다고 기별을 하곤 했단다. “물레방앗간 뒤쪽에 비비새가 와서 울면/ 간호원을 하러 독일로 떠난 여자 친구의 항공엽서나 기다리며/ 느린 하학종을 울리는 낙엽송 교정에서/ 잠처럼 조용한 풍금 소리를 듣는 2급정교사가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던 ‘이향’의 그 여인이다. 시인은 세월이 흘러 미국에 교환교수로 갔을 때 그 여인을 만났다는데, 그는 추억 속, 특히 소년소녀 시절에 만났던 연인은 다시 만나서는 안 될 일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짐짓 그네의 뚱뚱해진 늙은 외모 탓을 했지만, 영원히 늙지 않는 세월의 속살을 그가 모른다고 잡아떼지는 못할 테다.

그는 “시라는 게 참 매몰차서 찾아가면 도망가고 포기하면 곁에 와서 잠을 깨우는, 사람의 연애보다 더 뜨거운 것”이라며 “아직 최후의 명작은 못 내놓았는데 안될지도 모르지만 단 한 편이라도 지금까지 쓴 것보다 나은 작품을 남기고 싶다”고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열 줄만 쓰고 그만두려 했던 시를/ 평생 쓰는 이유를 묻지 말아라// 내가 편지에,/ 잘못 살았다고 쓰는 시간에도/ 나무는 건강하고 소낙비는 곧고/ 냇물은 즐겁게 흘러간다.// 꽃들의 냄새가/ 땅 가까운 곳으로 내려오고/ 별들이 빨리 뜨지 못해서 발을 구른다./ 모든 산 것들은 살아 있으므로 생이 된다”(‘느리게 인생이 지나갔다’ 부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