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실존의 심연에서 건져낸 언어…견고하게 빚어낸 문학의 주름
[유성호 교수가 찾은 문학의 순간 / 서울신문 2021-06-20 ] <19>나희덕 예술의 시간들
최근 에세이집 ‘예술의 주름들’을 출간한 나희덕 시인은 원래 제목을 ‘시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시인의 눈으로 예술을 읽어 낸 작은 오솔길 같은 책이랄까.
더위가 일찍 찾아온 초하(初夏)에 서울 종로의 한 식당에서 시인 정현종 선생을 나희덕 시인과 함께 뵀다. 건강하신 스승의 말씀을 들으며 식사를 하는데 나 시인이 연필을 선물했다. 언제나 무언가를 들고 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좋아하는 그는 미국에 사는 한국인 목사가 목수가 되어 만든 연필을 바다 건너 구입해 스승과 친구에게 나누어 줬다. 순간 ‘연필’이라는 상징이 세 사람의 글쓰기를 환하게 이어 주었는데, 그것은 언제나 나희덕만이 만들어 내는 순간이다. 그의 첫 시집 ‘뿌리에게’(1991) 발문에 정현종 선생이 쓴 한 구절이 떠올랐다. “대학 시절의 나희덕은 시를 열심히 쓰는 학생이었고 산문을 봐도 우선 문장력이 마음 놓이는 학생이었다. 말이 그렇지 대학 시절에 눈에 거슬리지 않는 글을 쓴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생각하면, 벌써 상당히 견고한 문장은 눈에 띄게 마련이었다.”
인터뷰는 그의 ‘견고한 문장’이 빛을 발하는 신작 산문집 ‘예술의 주름들’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지만 자연스럽게 그의 삶과 시 전체로 번져 갔다. 그는 이제 막 종강을 해서 한숨 돌리고 있다면서 벌써 세 학기째 학생들을 직접 만나지 못하고 온라인 수업을 하다 보니 좀 지치기도 했다고 한다. “책을 내고 나서 한동안 행사나 강연 등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냈어요. 방학에는 조용히 시인의 자리로 돌아가 살아 봐야죠.”
● 시인의 눈으로 읽어 낸 오솔길 같은 책
이번 산문집에서는 ‘아름다움’과 ‘주름’의 의미가 각별하다. “예술의 여러 장르들을 넘나드는 책을 낸 것은 사실 무모한 일일 수도 있을 것 같다”면서도 “시나 문학이 아닌 다른 예술장르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 의미를 헤아려 보는 일이 많은 공부와 즐거운 경험이 됐다”고 했다.
그는 예술적 성취를 논하는 비평가의 역할보다는 예술적 순간이 시작되어 창조되는 과정에 함께 참여하는 시인으로서의 느낌을 책에 가득 채워 넣었다. ‘주름’은 무슨 뜻일까? “희로애락과 온갖 기억이 깃들어 있는 우리 몸과 마음의 주름처럼 예술작품에 새겨진 주름을 찬찬히 펼쳐 보면 결국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예술이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돼요.” 그 주름 속에 감춰진 심연이나 온기를 제 방식으로 길어 올린 기록들인 셈이다.
책에서 호명한 여러 예술가들은 시대도 장르도 성별도 국적도 개성도 모두 다르다. 한때 피아노를 치고, 유화를 그리고, 사진에도 남달리 심취했던 나 시인의 예술적 경험이 다른 예술언어에 대한 이러한 차근한 기록을 가능케 했을 성싶다. 그리고 그 결실은 그가 지상에 남기는 또 한 권의 시집인 것 같기도 하다.
● 전위적 언어가 가닿을 수 없는 세계의 비밀
그는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종교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실현하려 했던 분이었고 그러한 인생관으로 경북 산골에서 신앙공동체를 일궜다. 아버지는 거기서 어머니를 만나 결혼했고 산을 내려와서 정착한 곳이 논산이었다. 그의 시에 줄곧 나타나는 현실과 종교의 갈등적 공존이라거나 타자를 향한 한없는 연민과 사랑의 마음은 부모님으로부터 온 유전자와도 같은 것이었을 터이다.
그에게 종교는 선택의 영역이 아니었다. 성장기에 갈등도 심했다. 문학을 하게 된 것도 “종교적 수행과 사회적 혁명 사이 어디에도 귀속되지 못한 자의 경계인 의식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한동안 그에게 종교와 문학은 서로 건널 수 없는 간극을 지닌 것처럼 보였지만 어느 순간 양자의 갈등이 더이상 자신을 억압하지 않게 됐다. 그는 “흔히 제 시에 대해 붙어 다니는 ‘생태적, 여성적, 공동체적’ 특성이 넓은 의미의 ‘영성’과 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더이상 종교성에 갇히지 않으면서 다양한 영성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예술의 주름들’ 서문 첫 행에는 “피아니스트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라고 적혀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어린 시절 예배당에서 피아노 반주를 했던 가녀린 손이 써 내려간 시가 진정한 찬미(讚美)의 노래가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최초의 예술적 꿈이었던 음악적 선율이 그만의 시로 펼쳐져 간 것이니까 말이다.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뿌리에게’가 당선돼 30년 넘는 시력을 일구어 왔다. 그의 초기 시는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1994), ‘그곳이 멀지 않다’(1997)에 담겨 있다. ‘형식적 단정함과 따뜻한 모성’이 평단의 주목을 받았지만 사실 그 안에는 고단함과 기다림과 상처와 통증으로 버텨 온, 나희덕만의 시간이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는 사라져 감으로써 존재의 빛을 남기는 것들에 대한 사랑과 애착, ‘시’를 향한 자기 엄격성의 산물로 진화해 갔다.
오랫동안 이러한 지속과 변이를 거듭해 온 그의 시에서 우리는 한동안 시단을 잠식했던 분열과 환각, 우울과 공포, 광기와 모멸, 전위적 포즈 같은 것들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그는 그러한 언어들이 가닿을 수 없는 세계의 비밀스러움을 탐색했고, 그만큼 그의 시는 다양한 폭과 깊이를 담고 있으면서도 언어 선택에서만은 고전적인 청교도적 자세를 유지해 왔다.
“저의 문학 수업은 어쩌면 등단과 함께 시작됐고 늘 학생의 마음으로 지내 온 것 같아요. 그러는 동안 빛에서 어둠으로, 삶에서 죽음으로, 식물성에서 동물성으로, 낙관주의자에서 비관주의자로 조금씩 변화했죠.” 그 점에서 그는 네 번째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2001)이 중요한 변곡점이었다고 말한다. 가장 힘들고 불안할 때 비명처럼 한숨처럼 토해 낸 시들이어서인지 그 시집은 자신에게도 애틋하고 독자들에게도 가장 공감을 준 게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다.
이후 시인은 ‘사라진 손바닥’(2004)과 ‘야생사과’(2009)에서 자신의 시를 변화시키려는 모험과 도전을 새롭게 보여 준다. 그 안에는 나희덕 시의 속살이 지속하고 변이하는 충일하고도 격렬한 교차 과정이 펼쳐져 있다. 그는 이 시집들을 통해 ‘가이아’에서 ‘사이렌’으로, 상처를 ‘다스리는 것’에서 ‘받아들이는 것’으로, ‘뿌리’로부터 ‘가지’로 ‘잎’으로 끝없이 시적 원심을 확장해 갔다. 그러면서 가장 실존적이고 종교적인 심층으로서의 ‘죽음’과 ‘사라져 감’의 형이상학에 대해 노래하는 성숙한 시인이 되어 갔다.
그 뚜렷한 귀납적 결실이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2014)이었을 것이다. 그는 시집 뒤표지 글에 “떼어낸 만큼 온전해지는, 덜어낸 만큼 무거워지는/ 이상한 저울, 삶” 그리고 “이미 돌이킬 수 없거나 사라진 존재를 불러오려는/ 불가능한 호명, 시”라고 썼다. 그렇게 이 시집은 한 시대의 죽음을 넘어 애도와 치유라는 이중 기능을 충실하게 담아낸 결과로 남았다.
● 진퇴의 왕복을 벗어날 수 없는 시의 힘
여덟 번째 시집 ‘파일명 서정시’(2018)는 ‘눈과 얼음’으로 시작해 ‘서른세 개의 동사들 사이에서’라는 시로 끝난다. “온통 눈과 얼음으로 가득한 세상을 간신히 살아내면서, 현실의 그 한기와 단단함을 조금씩 녹여내면서, 마침내 허공과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시집”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눈과 얼음이라는 고체적 상태에서 어떤 기화와 액화를 위한 몸부림을 쳤다고 말한다. 이 작품들을 쓰는 동안 개인적으로든 시대적으로든 다양한 죽음과 폭력을 통과해야 했는데 막상 시집으로 내고 나니 그런 시간에서 조금은 놓여나게 되었다고 한다. 나희덕 시의 찬연한 결실이다.
그는 이야기를 하다가도 가끔 배시시 웃기를 잘한다. 물론 그것은 발랄한 성정에서 오는 게 아니라 고통을 지나고 나서 얻어 낸 어떤 넓음 같은 것에서 온다. 그의 이름처럼 웃음은 ‘희’(喜)고 넓음은 ‘덕’(德)이다. ‘파일명 서정시’의 ‘시인의 말’에 “시는 나의 닻이고 돛이고 덫이다”라고 썼다. 아름다움을 향한 간절한 그의 언어를 가장 적정하게 담은 말이 아닐까 한다. “저를 머물게 하기도 하고, 나아가게 하기도 하고, 결국 그 진퇴의 왕복 작용에서 끝까지 벗어날 수 없게 한다는 점에서 시는 참 힘이 세다는 생각이 들어요. 언제까지 쓸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시보다 앞장서지 않고 겸허하게 시의 뒤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러기를 바란다. 그럴 것이다.
그나 나나 정현종 선생을 만난 것은 문학적으로든 인간적으로든 감사한 인연이다. 선생은 시인이 지녀야 할 자존과 주름까지 낱낱이 보여 준 스승이시다. 불가피하게 이 글은, 스승과 제자들이 모처럼 만난 초여름 저녁에 시인 친구와 나눈 우정의 기록도 되는 셈이다.
II. [조용호의 길 위에서 읽는 시] <8> 나희덕의 ‘와온에서’ (2009-06-17)
그네의 시는 대체로 아늑하고 따뜻해서, 혹은 슬퍼서, 어두워지는 골목길을 돌아 십오 촉 전구가 깜박거리는 누옥으로 들어서는 느낌이다.
거기, 헐겁고 지붕이 낮은 그 집에 ‘일몰’이 산다.
그네에게 일몰이란,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어스름’이란, ‘소멸을 향해 걸어가는 시간의 발소리’를 듣는 그 저녁이란, ‘시간의 연대기적 순서에서 해방된’ 영원한 찰나이기도 하다.
나희덕의 시에서 이 일몰의 풍경은 여러 번 변주되거니와 최근에 내놓은 다섯 번째 시집 ‘야생사과’에 수록된 ‘와온에서’는 그중에서도 가장 진화된 늠름한 일몰이다.
◇ 밀물이 들어차 석양에 물든 갯벌 대신 바닷물이 넘실대는 와온 앞바다. 향일암까지 다녀오는 바람에 와온의 석양을 놓친 나희덕 시인은 “부패가 두려워 미라처럼 말리던 내 안의 생명을 이제는 물기로 적셔 살려내고 싶다”고 말했다.“산이 가랑이 사이로 해를 밀어넣을 때,/ 어두워진 바다가 잦아들면서/ 지는 해를 품을 때,/ 종일 달구어진 검은 뻘흙이/ 해를 깊이 안아 허방처럼 빛나는 순간을 가질 때,// 해는 하나이면서 셋, 셋이면서 하나// 도솔가를 부르던 월명노인아,/ 여기에 해가 셋이나 떴으니 노래를 불러다오/ 뻘 속에 든 해를 조금만 더 머물게 해다오”(‘와온에서’ 부분)
신라 경덕왕 시절 어느 날, 해가 둘이나 나타나 열흘 동안 없어지지 않는 변괴가 일어나자 월명노인이 도솔가를 불러 다시 해를 하나로 만들었다는 설화가, 와온에서도 되풀이된다. 일몰의 와온에, 하늘과 바다와 뻘에 해가 셋이나 떴으니 월명노인을 불러 도솔가를, 그것도 한참 길게 정성을 들여 부르게 할 일이다.
일몰의 낙조 풍경으로 소문난 전남 순천시 해룡면 와온마을. 뒷산이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이라 하여 와온(臥溫)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데, 이름만으로도 시적이다. 이곳 와온의 일몰을 보기 위해 오후 4시 무렵, 나희덕(43) 시인과 순천역에서 만났다. 그 시간에 곧바로 와온에 가면 해가 지기까지 한참 기다려야 하는 애매한 시간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시인은 여수 방향 이정표를 보더니 향일암에 들렀다가 와온으로 돌아오는 건 어떤지, 물었다. “다친 발목을 끌고 향일암 가는 길/ 그는 여기 없고/ 그의 부재가 나를 절뚝거리게 하고/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는 동안/ 절,뚝,절,뚝,”으로 이어지는 시편도 이번 시집에 나온다. 순천과 여수가 그 정도로 가까운지는 미처 몰랐다. 그러니까 그네와의 대화는 생각보다 멀었던 향일암까지 갔다가 어둑한 와온 해변까지 돌아오는 그 긴 시간의 차 안에서, 그것도 내내 운전석의 시인에게 조수석에서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듣는 방식이었다.“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먼 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눈부셔 잘 부스러지는 살이니/ 내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 뻗어가려무나// 척추를 휘어접고 더 넓게 뻗으면/ 그때마다 나는 착한 그릇이 되어 너를 감싸고/ 불꽃 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 네 뻗어가는 끝을 하냥 축복하는 나는/ 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을 가졌어라”(‘뿌리에게’ 부분)
불과 스물셋의 청춘에 웅숭깊은 뿌리의 정서로 시단에 나선 나희덕은 이후 모성과 단정함과 절제된 이미지로 평가받는 시를 써왔다. 젊고 싱싱한 그이에게서 쏟아지는 시는 아늑하지만 성찰의 기운이 지배적이고, 따뜻하지만 쓸쓸해서 깊은 것들이었다. 시를 제쳐두고라도, 심지어 어떤 시인은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돌아다니다가 “박완서 할머니와 지낸 것 같다”며 그를 보냈다고 했다. 무엇이 그를 일찍 깊게 만들었을까.
그는 지금 조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살고 있는데, 전화 한 통만 받고 광주역에서 이력서를 작성해 면접장에 간 뒤 교수로 ‘취직’했다고 한다. 국내 대학에서는 보기 힘든 투명하고 공정한 교수 선발 방식이 나희덕에게 적용된 경우였는데, 그 당시 그네는 인생 최대의 시련을 이겨나가는 중이어서 더욱 빛을 발하는 미덕이었다. 아무리 그러하더라도, 조직생활에 적응하느라 힘들지는 않았는지 물었다. 그네는 낯선 사람들이나 조직에 적응하는 건 일도 아니라고 했다. 보육원에서 태어나 대학에 갈 때까지 20년을 그곳에서 살았다는 말을 듣고서야 내 질문이 부적절했음을 알았다. 나희덕의 엄마는 그네가 태어날 때부터 보육원을 관리하는 총무로 일했다. 어머니는 보육원의 수많은 고아들과 자신의 딸을 동등하게 대했다. 그래서 “자식이 너무 많으신 우리 어머니/ 나의 어머니라고 고집부리고 나면/ 웬지 미안해지는 우리 어머니”였다.
“뿌리뽑힌 줄도 모르고 나는/ 몇줌 흙을 아직 움켜쥐고 있었구나/ 자꾸만 목이 말라와/ 화사한 꽃까지 한무더기 피웠구나/ 그것이 스스로를 위한 弔花인 줄도 모르고// 오늘밤 무슨 몰약처럼 밤비가 내려/ 시들어가는 몸을 씻어내리니/ 달게 와닿는 빗방울마다/ 너무 많은 소리들이 숨쉬고 있다// 내 눈에서 흘러내린 붉은 진물이/ 낮은 흙 속에 스며들었으니/ 한 삼일은 눈을 뜨고 있을 수 있겠다// 저기 웅크린 채 비를 맞는 까치는/ 무거워지는 날개만큼 말이 없는데/ 그가 다시 가벼워진 깃을 털고 날아갈 무렵이면/ 나도 꾸벅거리며 밤길을 걸어갈 수 있겠다// 고맙다, 비야. …고맙다. …고맙다.…”(‘몰약처럼 비는 내리고’ 전문)
터지는 비명이 그대로 시가 되었다는, 세 번째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에 수록된 시편이다. 그네가 아무리 힘들어도 낮은 자세로 포복하며 자학적으로 비를 맞으며 고맙다고 되뇌일 수 있는 태도의 근인은, 낮고 외로운 자들과의 동류의식에다 어머니의 기독정신이 합류한 결과 같다. 시인의 엄마는 일찍이 부산사범학교를 다니던 수재였는데 기독교에 심취해 산속의 공동체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아버지와 만났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방 앞에 널려 있는 빨래가 어찌나 눈부시게 희던지 거기에 마음이 끌렸다”고 했다. 어쨌든 그런 부모 밑에서, 그것도 낮은 보육원에서 성장한 시인이었기에, 그네의 시에서 헌신과 모성과 따뜻함을 감추기는 힘들었을 테다. 물론, 나희덕의 시를 그의 성장배경으로 이리 간단히 해명하는 건 폭력일 수 있지만 그네의 시를 형성한 큰 밑그림으로는 유효하다.
여수가 지척인 줄 알았는데 정작 향일암은 한참 멀다. 이미 들어선 길, 돌아가자니 아쉽고 향일암까지 갔다가 와온으로 가자니 해는 이미 져버릴 것 같아 난감하다. 시인은 “내가 하는 일이 늘 이렇다”고 자조했고, 조수는 짐짓 “괜찮다”는 말을 연발했다. 우리는 숨 가쁘게 향일암에서 사진 몇 장 찍고 내려와 와온을 향해 다시 달려나갔다. 지는 해를 따라가는 형국인데, 빨리 가서 떨어지는 해를 받아내기에는 도로가 너무 막힌다.
5년 만에 새 시집을 내면서 그는 인터뷰할 때마다 “이제는 달라지겠다”고 선언했는데, 어느 매체는 이를 받아 “범생이 스타일에서 벗어나겠다”고 썼다. 하지만 그네는 “나는 절대로 범생이는 아니다”며 “남들이 그렇게 보았을 뿐”이라고 강변했다. 사실, 어떤 선배는 20대 때 자신의 별명을 ‘전도부인’이라고 지어주었다고 했다. 까만 가방을 들고 까만 구두만 신으면 영락없는 전도사처럼 보일 거라고 놀린 거였다. 그네의 시가 윤리적이고 희생적인 내용인 데다, 구조나 정서적으로 일탈과 파괴가 아니라 수용하고 반듯하게 정리하는 세계여서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했다. 시는 그러할지 모르지만, 그네 자신은 절대 범생이가 아니라고 고개를 흔든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본드를 흡입해본 적이 있다고 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 하교길에 우연히 동참한 이벤트였다. 그런가 하면 여학생 남학생 분리된 방에 들어갔다가 남녀의 다리가 합쳐진 침대도 일찍이 보아버렸다. 수돗가에서 달밤에 병을 깨뜨리며 싸우는 보육원 아이들도 자다가 일어나 보았다. 나희덕에게 이러한 체험은 어둠을 껴안게 만드는 동력이기는 할망정, 스스로 어둠 속으로 스며들게 만드는 계기는 아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기독정신, 그들의 사랑이 품어낸 온기의 힘이었을까. 그네는 “사유의 질서가 너무 완강해 우연이 끼어들 틈이 없는 거는 명징해지는 장점도 있지만 다른 데로 튀어나갈 틈이 없다”며 “내 시가 읽힐 수 있고 소통하는 힘이 거기에 있었던 건 사실인데 이제 실패할 수 있겠지만 그 구조에서 일탈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윤리적 자아가 완강하고, 서정시 전통에 너무 익숙하게 길들여져 쓰기만 하면 시가 그럭저럭 되는 상태를 깨뜨려야 하는 게 과제”라며 “남들은 20대에 좌충우돌하면서 모험도 하다가 나이가 들면서 안정된 세계로 나아가는데 나는 오히려 반대”라고 씁쓸하게 웃었다. 어렵게 와온에 당도했지만 해는 이미 사라졌고, 뻘에는 밀물이 가득해 석양의 정조는 애당초 찾아볼 수 없는 지경이다. 시인은 미안해하면서 예전에 와서 찍은 와온의 석양 사진을 보내준다고 했다. 미안할 것 없다. 그네가 가져간 해만 내놓으면 될 일이다.
“저녁마다 일몰을 보고 살아온/ 와온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떨기꽃을 꺾어 바치지 않아도/ 세 개의 해가 곧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에/ 찬란한 해도 하루에 한번은/ 짠물과 뻘흙에 몸을 담근다는 것을 알기에/ 쪼개져도 둥근 수레바퀴,/ 짜디짠 내 눈동자에도 들어와 있다/ 마침내 수레가 삐걱거리며 굴러가기 시작한다// 와온 사람들아,/ 저 해를 오늘은 내가 훔쳐간다”(‘와온에서’ 부분)
조용호 선임기자
■나희덕 연보
●1966년 : 충남 논산 출생, 연세대학교 국문과와 동대학원 졸업.
●1989년 :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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