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떠메고 봄 햇살 둘러메고 천생 시인, 천상에 들다

[유성호 교수 (문학평론가 / 한양대 교수)가 찾은 문학의 순간] <15>김형영 '시와 신앙의 삶

 

(서울신문 2021.02.22)

 

 


지난 15일 시인 김형영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났다. 선생은 1944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1966년 문학춘추로 등단한 이래 55년 동안의 시력(詩歷)을 쌓아 온 우리 시단의 대표 중진이다. 오랜 세월 ‘시’와 ‘신앙’이라는 두 바퀴로 조용조용 달려온 그의 정결한 생애를 두고 빈소에 모인 지인들은 깊은 추념과 안타까움을 나누었다. 시선집 ‘겨울이 지나간 자리에 햇살이’(문학과지성사)는 선생이 지상을 떠나던 그날 지상에 내려앉았다. 투병하던 당시 시인 스스로 그동안의 시집 10권에서 213편을 선정해 최종적으로 정본 작업을 완료한 시적 에센스가 영정 앞에 놓인 것이다. 비록 고인은 만져 보지 못했지만 그 책은 그 순간 선생의 몸이 되어 그가 천생 시인이었음을 증언하고 있었다.

 


● 저항의 세계에서 통회의 심연으로

선집 체재는 네 개의 시기별 분류를 택했다. 시인 스스로 ‘저항’→‘신앙’→‘자유’→‘교감’을 키워드로 해 자신의 삶의 궤적을 조감하도록 배려한 결과로 읽힌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초기시는 폭력이 미만한 세계에 대한 항의와 저항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물론 그의 시는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 아니라 깊은 곳에서 조용하게 솟구쳐 오르는 나지막한 것이었다.

그 은유적 상관물로 시인은 ‘모기’를 택했는데 가령 시인이 간절하게 속으로 외친 소리는 “모기들은 죽으면서도 소리를 친다/죽음은 곧 사는 길인 듯이”(‘모기’)처럼 작고 소소한 이들의 마음으로 현상했다. 2015년 박두진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저는 지금도 왜 시를 쓰느냐고 자신에게 가끔 묻는다. 쓰면 쓸수록 어렵기만 하고, 때로는 숨이 막히게도 하는 시”라고 말씀한 그 ‘시’를 평생 떠메고 모기 소리처럼 작은 저항의 세계를 온축했던 선생은, 원치 않은 병고로 말미암아 스스로 깊은 신앙의 세계로 들어간다.

지금도 나는 김형영의 ‘통회(痛悔)시편’ 연작을 선연하게 기억하고 있다. 당시 나도 신앙의 문전에서 어정거리고 있을 때였기 때문일 것이다. “주님, 저를 죽이지 마소서./화가 나시더라도/ 흐느끼는 이 소리 들으소서.// 뼈 마디마디 경련이 일고/ 내 마음 이토록 떨리는데/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이 목숨 살리소서.”(‘통회시편 1’) 1980년대에 쓴 이 기도는 하늘에 상달되어 그로 하여금 ‘영성의 시인’으로 우리 곁에 머무르게끔 해 주었다.

무릇 모든 존재자는 현상계에서 물질적 존재 방식을 한시적으로 취하다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사라져 가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소멸이란 온통 비극적인 것이 아닌가. 하지만 선생은 그것을 평생 통회의 심정으로 탐구하고 형상화하면서 스스로의 존재 증명을 해 갔다. 선생의 말처럼, 모든 것이 은총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김형영은 이때부터 평범한 일상에서 근원적 사유와 형이상학적 전율의 세계를 길어올린다. 가장 신성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희원하는 시인의 품과 격을 보여 준 것이다. 깊은 영성을 시로 담아 냄으로써 남루한 존재자들이 신성한 존재와 연루되고 있음을 고백하고 증언하고 탐구하는 지향을 일관되게 개척해 간 것이다. 그만큼 시인에게 가톨릭에 기반을 둔 사유와 감각은 신성한 존재를 희구하고 물어가는 실존적 사건이었으며 그러한 시선이 마침내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회귀성을 가지게 해 주었다.

세례명이 ‘스테파노’인 그는 수많은 이들의 대부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대자 가운데 한 사람인 전동균 시인은 “가톨릭 영성을 심층적으로 서정성과 결합해 탐색해 낸 정말 보기 드문 시인”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김형영(왼쪽부터)·정희성·임정남·석지현·강은교·윤후명 시인 등 ‘70년대’ 동인 시대를 보냈으며, 조광호 신부와 시화전을 함께 했을 당시. 소리꾼 장사익은 김형영의 시를 음악으로 만들었다.

 


● 신성의 자유로운 현장으로서의 자연

후기로 갈수록 김형영 시의 주된 요소는 자연과 시인이 상응하는 장면에서 일어나게 된다. 말하자면 자연 사물의 구체성과 시인이 지향하는 삶의 지표가 서정적 순간성 속에서 견고하게 결속한 것이다. 그 빛나는 순간을 통해 우리는 김형영 브랜드인 형이상학적 빛을 한껏 쬐게 되고 이때 우리도 스스럼없이 환한 서정과 영성의 순간에 놓이게 된다.

후기 대표작 가운데 한 편을 읽어 보자. “봄비 오시자/ 땅을 여는/ 저 꽃들 좀 봐요.// 노란 꽃/ 붉은 꽃/ 희고 파란 꽃,/ 향기 머금은 작은 입들/ 옹알거리는 소리,/ 하늘과/ 바람과/ 햇볕의 숨소리를/ 들려주시네.// 눈도 귀도 입도 닫고/ 온전히/ 그 꽃들 만나고 싶거든/ 마음도 닫아걸어야겠지.// 봄비 오시자/ 봄비 오시자/ 땅을 여는 꽃들아/ 어디 너 한번 안아보자.”(‘땅을 여는 꽃들’)

물론 자연은 신성의 거소(居所)이자 고유의 향기와 소리로 스스로를 증명하는 신성 자체이기도 하다. 작은 입으로 하늘과 바람과 햇볕의 숨소리를 들려주는 봄날의 꽃을 온전하게 만나기 위해 시인은 눈도 귀도 입도 마음까지 닫은 채 크나큰 품으로 온전하게 봄날의 꽃들을 안아 들인다. 그러한 신성과의 소통 과정을 일러 시인은 ‘교감’이라고 규정했을 것이다.

“영혼이 오가는 순간을/ 어찌 귀와 입으로 붙잡겠는가./ 눈도 아니다./ 생각도 아니다./ 나 없는 내가 되어/ 가슴으로 듣는 말,/ 사랑의 숨결이다.”(‘교감’) 이처럼 시인이 들려주는 사랑과 영혼의 소리에 우리도 가장 행복한 마음의 상태를 경험한다. 김병익 선생도 시선집 해설에서 “육신의 회복과 정신의 부활을 치르면서 김형영의 시는 이 세계와의 교감과 공감을 싱싱하게 드러낸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처럼 그에게 ‘시’는 생명의 리듬이 만져지고 보이는 음악이요, 숨결의 형식이 선연하게 들려오는 보이지 않는 그림이었을 것이다.

시선집 ‘시인의 말’에서도 선생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 태어나고 사라지는 생명들과의 교감 그리고 가끔 거기서 얻은 감동을 시로 꽃피우는 즐거움, 그 은총이야 말해 무엇하리”라고 적었다. 이러한 김형영 시의 지향은 결국 실존적 형이상학의 세계로 귀납될 것이고, 그때 그의 언어는 우리의 마음을 깊이 울리는 음악으로 남을 것이다.

김형영 시인은 ‘샘터’ 편집자로 오래 활동하며 한말숙 소설가, 피천득 선생, 김남조 시인, 최인호 소설가 등 문단 내 여러 인사와 두루 소통했다. 

2012년 석지현, 김형영, 정희성, 강은교, 윤후명 시인 등 ‘70년대’ 동인들이 칠순을 앞두고 공동시집 ‘고래’를 냈다.  

 


● 샘터, 아버지, 그리고 봄 햇살을 따라

선생은 ‘샘터’에서 30여년간 편집자로 일했다. 이 오랜 전통의 월간지가 정점을 구가할 때였을 것이다. 법정, 이해인, 최인호, 정채봉 등 이 책을 그득하게 채웠던 언어들은 지금도 한국문학의 보석이 되어 빛을 뿌린다. 개인적 경험으로는 소설가 한강이 대학을 졸업하고 샘터에 들어갔는데, 입사 직후의 그를 만나러 대학로의 붉은 벽돌 건물 앞에서 얼떨결에 선생을 뵈온 일이 있었다. 나중에 선생의 시집 해설도 쓰고 같은 잡지의 자문편집위원도 하면서 선생의 말년과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 마지막 투병 중 전화로 들었던 선생의 떨리는 목소리의 힘으로 선생의 시에 대한 기록을 더 깊이 수행해 갈 다짐을 해본다.

빈소에서 인사를 나눈 둘째아들 김상조씨와 장례를 마치고 전화 통화를 했다. “저나 형한테는 늘 친구 같은 아버지셨어요. 같이 식사하고 탁구나 배드민턴도 같이 치고, 힘들 때 서로 전화해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던 분이셨습니다.” 상을 치르면서는 지인과 후배들이 휴대폰에 남긴 내용이나 빈소에서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새삼 ‘큰 분’이었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유품을 정리하다가 지난해 12월 20일에 온 크리스마스 카드 한 장을 발견했어요. 자신이 한없이 방황할 때 신앙으로 인도해 주신 마음에 고마움을 표하는 감사 카드였습니다.”

선생의 묘역은 따로 없다. 가톨릭대학에 시신을 기증했기 때문이다. 상조씨는 아버지가 ‘유언시’라고 하시면서 1월 중에 보내 주신 작품 한 편을 문자메시지로 보내주었다. 처음 공개되는 선생의 마지막 작품 전문이다.

“사랑하는 아들들아, 내가 죽거든/ 무덤일랑 만들지 마라/ 납골당에도 가두지 마라// 나를 먼지로 만들어/ 관악산 중턱 후미진 곳에서 뿌려다오/ 바람이 불면 바람 따라/ 구름이 흘러가면 구름 따라/ 새들 지저귀면 새소리로/ 꽃들 향기 뿜으면 그 향기에 취해/ 천지사방 허공을 떠돌며/보이지 않는 자연이 되어 날아다니고 싶다”(‘화살시편115-내가 죽거든’) 지금쯤 선생은, 바람 따라 구름 따라 훨훨 흘러가고 계실 것이다.

이제 선생은 스스로 언어의 화살이 되어 하늘나라로 들어갔다. 나는 새삼 그의 세례명을 생각했다. 신약성서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스테파노는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햇살보다 더 밝은 얼굴로 신에게 영혼을 의탁하는 모습이 기록된 분이다. ‘김형영 스테파노’의 얼굴에도 그 햇살이 환하게 비추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늘로 돌아간 그날 출간된 시선집 제목처럼 ‘겨울이 지나간 자리에’ 따뜻한 봄 햇살로 우리에게 남을 것이다. 스스로를 염두에 두고 쓴 것 같은 작품 한 편을 선집에서 꺼내어 봄 햇살에 비추며 읽어 본다.

“별이 하나 떨어졌다./ 눈에 없던 별이다.// 캄캄한 하늘에 비질을 하듯/ 한 여운이 잠시/ 하늘에 머물다 사라진다./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보다 작게/ 보다 낮게/ 한 점 남김없이 살다 간 사람.// 그를 기억하소서./ 그의 여운이 아직 사라지기 전에/ 한때 우리들의 이웃이었던 그를.”(‘무명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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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허무집》(1971)
《빈자일기》(1977)
《소리집》(창작과비평사, 1982)
《바람노래》(1987)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실천문학사, 1989)
《벽속의 편지》(창작과비평사, 1992)
《어느 별에서의 하루》(창비, 1996)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문학동네, 1999)
《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 넣고 다녔다》(문학사상사, 2002)
《초록 거미의 사랑》(창비, 2006)
《벽 속의 편지》(창비, 2019)


시선집
《풀잎》(민음사, 1974)
《붉은 강》(풀빛, 1984)
《우리가 물이 되어》(1986)
《그대는 깊디 깊은 강》(미래사, 1991)


산문집

《그물 사이로》(1975)
《추억제》(1975)
《도시의 아이들》(1977)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1980)
《누가 풀잎으로 다시 눈뜨랴》(1984)
《잠들면서 참으로 잠들지 못하면서》(한양출판, 1993) ISBN 89-85247-63-8
《허무 수첩》(예전사, 1996)

 

 

 

 

I. 20년째 부산 바닷바람을 안고 사는 ‘허무의 시인’ 강은교 요즘 생활

(WDonga 정지연 기자 2002.10.08)

얼마 전 새로운 시집을 펴낸 강은교 시인을 만났다. 사물의 사소한 몸짓까지 읽어내는 단아한 시들에는 지나온 그의 세월이 응축되어 있다. 뇌 질환으로 쓰러졌던 이십대와 ‘완벽주의자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삼사십대를 담담히 추억하며 20년째 부산에서 혼자 사는 여유를 즐기고 있다고 고백한 강은교 시인과의 만남.


20년째 부산 바닷바람을 안고 사는 ‘허무의 시인’  강은교 요즘 생활. 강은교 시인(57·동아대 국문과 교수)이 이번에 내놓은 시집의 제목이다. 모두 73편이 실려 있는 이번 시집에서 우리는 맑고 담담한 서정의 세계를 만난다. 그의 시집에서는 억지로 빚어낸 듯 현란하기 짝이 없는 시적 표현이나 무겁디 무거운 철학적 언어들을 찾아볼 수 없다. 도리어 그의 시집에는 하루살이, 풍뎅이, 장수하늘소, 게… 이처럼 작은 생명들이 뛰어노는 몸짓들로 가득하다.


두권의 선집을 포함, 열세번째 시집을 세상에 내놓은 강은교씨. 68년 신인 문학상에 ‘순례자의 잠’으로 등단한 이후 35년을 꾸준히 시만 써왔다. 참 오랜 세월이라는 말에, 그는 얼굴을 붉히며 “재주가 이것밖에 없어서…”라며 겸손해 한다.


“35년…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재주라곤 이거밖에 없어서요. 사실은 이거라도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하지만요. 살아오면서 고비가 많았는데, 시가 있어서 그나마 제대로 살아온 게 아닌가 해요. 제게 시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은 해보는 것조차 싫어요.”


“어릴 때부터 친구 없이 혼자 있는 게 더 익숙해요”


강은교씨는 외로운 사람이다. “전 워낙 혼자 있는 게 버릇이 되어서 외로운 게 불편한 건지도 모르겠어요”라고 말할 정도다. 경기여고,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했지만 친한 친구 하나 없었던 이십대. 지금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대학교 교수식당에서도 그는 혼자 식사해야만 마음이 편하다. 다른 이들의 식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혼자 수저를 드는 일이 그는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고 한다. 도리어 동료 교수가 인사하면서 옆자리에라도 앉으면, 이내 사레가 들릴 정도로 사람의 부대낌을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 그가 강은교 시인이다.


“사람들은 저더러 혼자서도 너무 잘 논다며 신기해 하더군요(웃음).”


그래서일까. 그의 시집에는 꽃과 새와 등불은 있어도 사람은 없다. 그 지적에 그 역시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다.
“제가 쓴 시집들을 죽 보니까 그런 경향이 있더군요. 사람이 시에 드러나지 않더라고요. 아마, 제가 사람 만나는 반경이 좁고, 또 늘 외로운 사람이라 그런 거겠죠. 집에서 하루 종일 음악 틀어놓고 혼자 있으니까 도리어 집안의 사물들, 낡은 주전자, 수도꼭지, 천장… 이런 것들에 신경이 쓰이는 거예요. 하지만 요즘에는 조금씩 사람이 보이는 시도 쓰고 있어요.”


그런 조짐은 그가 80년대 발표한 에서 이미 나타난 바 있다. ‘허무의 존재증명’이라고 뭉뚱그려진 평을 받아온 그의 시세계. 그렇기에 사람들이 의외로 놓친 점이 있다. 그가 80년대를 거치며 저항시를 썼다는 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고(故) 이한열군에 대한 슬픔과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을 담아 조시를 쓰기도 했던 그였다. 비록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그 나름의 방법으로 사회를 껴안으려는 시도였던 셈이다. 그 과 유사한 맥락에 놓인 시들을 이번 시집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사물의 속삭임에서 조금씩 사람들의 소리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열세번째의 시집을 내는 동안 그의 시세계가 크게 변화를 겪은 건 아니다. ‘허무와 존재와 고독의 시인’이라는 평가 역시 그는 묵묵히 받아들인다.


“지금도 전 삶이 허무하다고 생각해요. 글을 쓰다가 어디서 본 듯한 표현이라 생각돼 확인해보니 이미 70년대 에서 그런 유사한 구절을 썼더군요.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허무를 좀더 따뜻하게 바라보게 된 점일 거예요. 허무는 장자가 말한 ‘비어있음’과도 일맥상통해요. 비어있음의 궁극은 생명이거든요. 허무가 가진 힘은 극도의 저항으로도 이어지죠. 전 허무의 창조적, 생명적 가치를 믿어요.”


그러면서 그는 말을 잇는다. “사는 게 그래선지 전 다른 시인들처럼 시의 변화가 확 나타나지 않더라고요. 제가 좀 바보라서 한 가지만 파고들어서 그래요.”

강씨는 부산 송도 부근의 아파트에 살고 있다. 83년 동아대학교 교수로 임용되면서 부산으로 내려갔으니 벌써 20년이 되어간다. “처음에는 귀에 설은 부산 사투리가 무서웠다”는 서울 토박이는 지금은 “부산만큼 정들고 좋은 곳이 없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바다가 있어서 너무 좋아요. 낙동강과 다대포항이 만나는 지점에 우리 집이 있는데, 아침마다 바다에 나가는 게 일이에요. 바다만 보고 있어도 행복하잖아요.”


그의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넌 남쪽으로 가야 잘 산대”라는 말을 했었다고 한다. 예감이었을까. 운명이었을까. 그걸 어떤 말로 부르든 그 자신 수긍한다. 부산은 내게 맞는 곳이라고. 이곳에 와서는 크게 아픈 적이 한번도 없었으니까.


강씨는 72년 스물일곱의 나이에 삶의 커다란 고비에 선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빨래를 하던 중이었다. 마지막 빨래를 헹구기 위해 세면대의 물을 트는 순간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 ‘뚝’하는 소리가 났고 그는 쓰러졌다. 의사는 뇌동맥이 끊어진 것이라 했다. 정확한 병명은 선천성 뇌동맥 정맥 기형.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핏줄들이 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환갑이 가까워가는 나이에 이르도록 그는 머릿 속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살고 있다.


“신경안정제를 지금껏 복용해왔어요. 그게 몸에 좋을 수 없잖아요. 그래서 약을 안 먹어보려고 노력했는데, 지난 7월 부천에서 강의하는 중에 머릿속에서 다시 스파크가 팍! 하고 일어났어요. 부산 내려와서는 10년 동안이나 그런 적이 없었는데… 늘 조심해야 해요, 저는.”


이런 자신의 상태를 비관하거나 괴로워할 법도 한데, 그는 담담하게 고약한 병을 껴안고 산다. 자신의 경련을 두고 ‘살과 피의 스파크’라고 이름 붙인 그. 뇌 사진을 찍은 후 그가 쓴 글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형광 램프에 비쳐진 나의 뇌사진은 마치 나비들이 엎드려 있는 것 같았다. 내 머릿속에 있는, 날지 못하는 수많은 나비들….’


비록 몸은 불편하다고 해도 그는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면서 산다. 혼자 힘으로 물에서 헤엄치는 법을 터득했고, 다리가 불편하지만 등산도 다닌다. 그리고 재작년엔 미국 버클리 대학에 교환교수로도 다녀왔다. 1년여간의 미국 체험은 그에겐 많은 것을 깨우치게 했다.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왔나 하는 자각을 했어요. 격식이라는 것에 너무나 매여 살았구나,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았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됐고요. 게다가 전 모범생 콤플렉스가 있어서, 모든 걸 잘해야만 직성이 풀렸어요. 논문도 잘 써야 하고, 시도 잘 써야 하고 집안일도 남 못지 않게 잘해야 하고…. 미국 가기 바로 직전 진공 청소기를 구입할 정도였어요. 그러다가 미국에 가서야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됐죠. 그 모든 걸 다 잘 하려고 안달복달할 필요가 없는 거로구나….”


이제 그는 적당히 어질러놓고, 그걸 게으르게 치우는 재미를 알겠노라고 했다. 그렇게 하다보니, 시 쓰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리고 남는 시간을 쪼개 한달에 한번 부산에서 시 낭송회를 하고 있다. ‘시 치료’라는 이름으로 해오고 있는 이 작업을 그는 뿌듯해 한다.


“시 낭송회를 좀더 다르게 해볼 수는 없을까 생각해요. 시는 언어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시에는 소리, 리듬이 있으니 노래로 표현할 수는 없을까 생각해봤어요. 그래서 이번 9월말 미국에서 열리는 낭송회에는 낭송이 아닌 한국의 소리, 노래로 시를 전달하려고 해요.”


집에 있을 때는 늘 음악을 켜두고 있을 만큼 음악광인 그다운 말이다. 클래식 음악과 러시아 민요를 좋아하는 그는 얼마 전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바이엘부터 시작 한 의욕적인 피아노 레슨이 비록 바쁜 일정에 밀려 정년 퇴임 후로 늦춰지긴 했지만 그만큼 그는 ‘소리’ ‘음악’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개강했죠, 미국 나갈 준비해야죠…. 요즘 참 바쁘네요. 게다가 사물들이 일제히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럴 수도 있나 싶어요. 전 마이크 없이는 강의를 못하는데 마이크가 나가질 않나. 인터넷이 다운돼버리질 않나. 밥솥이 고장나질 않나. 오죽하면 등산화 밑바닥까지 망가져 버렸어요. 전부 새로운 걸로 바꾸라고 하는 계시인가 싶기도 해요. 그래도 전부 바꿀 순 없으니까 급한 대로 인터넷만 전용선 회선을 바꿔버렸어요.”


‘사물들’의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인답게 사물들 얘기를 통해 근황을 대신하고 강씨는 홍익대 시각디자인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는 외동딸과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다며 총총히 일어섰다. 딸과 떨어져 사는 게 외롭지 않은가 하고 기자가 마지막 질문을 던지자 그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어떡하겠어요. 사실 전 너무 풍족한 상태는 겁이 나요. 가르치는 아이들한테도 그러는 걸요. 문학을 하려면 고독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그렇지 않겠어요? 뭔가 결핍이 있어야 그걸 찾기 위해서 글을 쓰지 않겠어요. 전 너무 풍족한 상태는 그래서 겁이 나요. 시가 안 나올까봐요.”


그의 대답을 듣고 있으려니 그가 왜 시인이며, 또 시 밖에 할 줄 아는 재주가 없다고 했는지 새삼 알 것 같았다. 그는 천상 시인이었다.

 

 

II.  <내 마음속의 이곳> (11) 시인 강은교.. 은포, 나의 여자
사춘기를 휘감았던 은둔과 탈주의 공간

 

< 부산일보 2007-09-13 >

 


다섯 살 무렵 부산 피란시절 서대신동 집뜰에서 무용을 하는 강은교 시인(오른쪽 사진). 시인은 사춘기 시절에도 그만의 '예술의 긴 터널'을 지나며 성장했다.

 

1 늘 저쪽이다. 저쪽에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강철로 된 무지개'(이육사)가 있으며 알 수 없는 암벽화가 새겨진 고적한 동굴이 있다. 시는 언제나 그 저쪽의 동굴이다. 저쪽으로의 탈주다.

2 나에게 그 저쪽은 '은포'다. 은교의 포구 또는 은둔과 포기의 항(港), '나의 그 여자'가 사는 곳.

3. '나의 그 여자'는 그때, 식구들이 다 나간 빈 방에서 홀로 그 방 벽장 유리창에 비치는 자기를 살피며 우스운 발레 같은 몸짓을 하곤 했다. 아마도 '그 여자의 발레'는 나의 시를 최초로 유리창에 써 주었던 것 같다. 아무튼 유리창에 비친 나를 보며 참 열심히도 몸짓을 하였다. 하긴 지금 생각하면 일종의 스트레칭을 매일 한 셈이니 건강생각을 하면 지금 그렇게 하면 얼마나 좋으랴. '유리창 무용'을 하고 나면 온몸이 정말 시원했다. 그리고 그 빈 방, 빈 집의 '고적'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벽장 속에는 우리 집의 굉장한 문화시설인 '별표 천일 전축'이 있었는데, 아무도 시끄럽다고 할 사람이 없으니, 그것을 있는대로 크게 틀어놓았다. 아마도 그때 처음 음악을 들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튼 음악은 정말 멋있었다. 나의 팔과 함께 소리치던 음악의 육체여. 그 육체는 나에게 당시 유일하게 음악방송을 FM으로 하던 유엔방송의 클래식 음악시간을 찾아듣게 했다. 어느 때는 내 마음대로 지휘도 하면서, 나의 차지이던 어두운 건넌방에서 제니스라디오를 틀곤 했다. 그때 아마도 바하의 '토카다 앤 푸가'를 처음 들었던 것 같은데 너무 멋있어서 신청곡 엽서를 보냈었다. 아마도 신청자가 그리 없었던지, 나는 곧 당첨되었고 어느 날 유엔 방송 시간엔 내 이름이 불려졌다. 그리고 바하가 울렸다. 나는 내 이름이 '강은교 씨'라는 씨자를 달고 공중을 헤치고 흐르는 것을 놀라서 들었다. 내 이름이 방송에 나오다니……. 나는 놀랍고 놀라웠다.

4 유엔 방송의 FM시간은 자연히 나를 '르네쌍스'라는 음악실로 안내했다. 나는 거기서 싫을 정도로 바하며, 베토벤 같은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차이코프스키도 만났고, 커피도 만났다. 하긴 당시에는 고등학교 학생이 음악실을 가면 안 되었으므로 살짝 살짝 학교시간을 빼먹기도 했고…. 그러면 커피잔을 앞자리에 놓은 대학생 연인 같은 사람들이 고등학생인 나에게 특별히 잘해주곤 했다. 잘해주었다는 것은 커피를 한 잔 더 부탁해 준다든가, 내 눈이 예쁘다고 말해주는 것들이다. '쌍스'(당시 대학생 언니한테선가 그렇게 부르는 법을 배웠었다) 복도에서 밑을 내려다보면 마치 카뮈의 소설에 나오는 '에로스트라트'라든가, 뭐 그 비슷한 주인공으로 내가 생각되기도 했다.

아버지는 내게 점점 실망해가셨다. 평생을 항일 독립운동과 같은 이념에 바치신 아버지로서는 당연한 일이셨을 것이다. 꽤 똑똑하다고 생각한 딸의 방에서 매일 음악이 흘러나왔으니 말이다. 아버지의 가치관으로는 이해하실 수 없는, 아니 참을 수 없는 일이셨을 것이다. 어느 날 아버지는 '쌍스'에서 돌아와 건넌방으로 들어가려는 나를 대청마루에 불러세우셨다. 그리고 회초리를 드셨다. 그리고는 힘껏 때리셨다. 그때 아버지의 얼굴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어쩔 수 없는, 실망의 극에 달하신 그런 모양, 회초리는 그전에도 그후에도 구경해본 일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집 어느 구석에 그런 회초리가 있었을까, 정말 의문이다.

5 결국 나는 그 다음 순서로 책을 아주 열심히 읽게 되었고, 아버지는 내게 알바트로스의 커다란, 흰 날개만 남기시고 돌아가셨다. 그 당시엔 학교 근처에도 동네에도 헌 책방이 아주 많았다. '쌍스'에 다닐 무렵엔 나는 카뮈와 같은 그러한 멋진 '쓰기'를 갈망하게 되었다. 하긴 사실을 말하자면 당시 우리 학교에는 성악콩쿠르가 있어 거기서 한번 멋진 노래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여 아리아를 몇 곡 외우고 식구들이 나간 빈 방에서 유리창을 보며 '폼'을 잡은 일도 있었고, 사랑채에 있던 빈 목욕탕에서 수챗구멍에 대고 노래연습을 한 일도 있었으나, 곧 그만 두었다. 수챗구멍에 대고 노래를 자꾸 했던 이유는 그것에 대고 노래를 부르면 내 목소리도 괜찮아서, 꽤 노래소리가 들을 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그만두었던 이유는 '레슨비'가 너무 많이 든다는 것을 학교 음악 선생님으로부터 들었기 때문이었다.

6 그 다음에는 책과 함께, 미술에 반해 화실을 쫓아다니기도 했다. 마침 친구 중에 뭉크 화집이니, 하는 것을 갖고다니는 아이가 있어 생긴 욕망이었다. 그래서 동네 화실에 데생을 하러 다녔다. 화실은 둥근 언덕길 위 골목길 속에 거의 숨듯이 있었는데 얼마 전에 그 동네에 다시 가 보니 거기엔 화실 같은 것은 자취도 없고 돌솥밥집과 언덕으로 올라가는 네거리엔 주유소가 간판을 번쩍이고 있었다. 화실도 곧 그만두었다. 왜냐하면 매달 돈을 낸다는 것이 고등학생인 나로서는 어려운 일이었고,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되겠다'는 화실 선생님의 말에 '예술은 그런 게 아니잖아. 열심히 하는 게… 말야'라고, 참 철없이도 아니 건방지게도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7 화실을 그만 둔 다음 나는 멋진 소설을 하나 쓰기로 계획을 세웠다. 마음을 쇄신한다는 의미에서 방도 옮겨 버렸다. 건넌방에서 꽃밭 뒤에 약간 숨듯이 있어서 잘 눈에 띄지 않았던 바깥사랑채로 옮겼다. 바깥사랑채는 오랫동안 비어있었으므로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았지만 거기서 나는 로망 로랑의 '쟝 크리스토프'같은 소설을 쓰리라 작정하고 문구점을 열심히 돌아다녀 아주 괜찮은 노트부터 마련하였다. 그러나 독립된, 작은 뜰까지 있던 그 곳이 어린 나에게는 너무 고적했는지(고적함이 지나쳐도 글이 안 되는 법이니까.) 나는 몇 페이지 가지 못해서 막히고 말았다. (그 소설은 아직도 미완이다. 죽기 전엔 꼭 쓰리라.) 말하자면 나의 그 여자가 잘 나오질 않았다고 할까.

8 나는 다시 방을 옮겼다. 그리고 대학엘 갔다. 이젠 대학에서 나의 그 여자와 은포를 찾아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리집은 점점 더 고적해져 갔다. 우리는 더 작은 집으로 집을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새 집에서의 내 방은 지금 생각해도 참 어두웠다. 분홍색 바탕에 은빛 물방울 무늬의 비닐이 깔려 있었다. 거기 배를 깔고 엎드려 학교도 가지 않고, '물끼'라는 소설을 썼던 것이 생각난다. 물론 그 전의 '쟝크리스토프'처럼 몇 장 쓰지 않아 노트를 덮고 말았지만. 그대신 나는 그 물방울 무늬에 엎드려 시를 쓰기 시작했고, 그것이 대학신문에 발표되곤했으며 졸업할 때는 대학신문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그 대학시절에 T S 엘리엇을 만나기도 했으며 연애도 했다…. 그러면서 나의 첫 번 째 시집 '허무집'의 여러 편의 시가 그곳의 어두운 은빛 엎드림 위에서 태어났다. 나도 모르게. 정말로 나도 모르게.



 날이 저문다.
 먼 곳에서 빈 뜰이 넘어진다.
 無限天空(무한천공) 바람 겹겹이
 사람은 혼자 펄럭이고
 조금씩 파도치는 거리의 집들
 끝까지 남아있는 햇빛 하나가
 어딜까 어딜까 都市(도시)를 끌고 간다.
 
 날이 저문다.
 날마다 우리나라에
 아름다운 女子(여자)들은 떨어져 쌓인다.
 잠 속에서도 빨리빨리 걸으며
 寢牀(침상) 밖으로 흩어지는
 모래는 끝없고
 한 겹 씩 벗겨지는 生死(생사)의
 저 캄캄한 數世紀(수세기)를 향하여
 아무도
 자기의 살을 감출 수는 없다.
 
 집이 흐느낀다.
 날이 저문다.
 바람에 갇혀
 一平生(일평생)이 落果(낙과)처럼 흔들린다.
 높은 지붕마다 남몰래
 하늘의 넓은 시계소리를 걸어놓으며
 曠野(광야)에 쌓이는
 아, 아름다운 모래의 女子(여자)들
 
 부서지면서 우리는
 가장 긴 그림자를 뒤에 남겼다. ('自轉(자전) Ⅰ' 전문)


10 그러나 진짜 애인은 아직 오지 않았다. ('허무집'의 자서(自序)대로.) 나의 허무는 그때나 지금이나 은빛 물방울 무늬이다. 하긴 늙어보니 알 것 같다. 참 얼마 안된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은포, 나의 그 여자는.


필자 약력

1945년 함남 홍원 출생.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허무집''풀잎''빈자일기''등불 하나가 걸어오네''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 넣고 다녔다''초록거미의 사랑' 등 10여권. 산문집 '추억제''그물사이로''사랑법''어느 불면의 백작부인을 위하여' 등. 한국문학작가상(1975년)·현대문학상(1992년)·정지용문학상(2006년) 등 수상. 현 동아대학교 문창과 교수.



III.  기독교사상 표지 이야기 (2007년 4월호) 
 

피,아이,엘,지,알,아이,엠. 수화기 너머로 또박또박 스펠링이 건너온다. 필그림(pilgrim), 순례자이지요. 왼손이 치는 흰색 건반 같은 목소리가 뒤따라 들려왔다.


강은교 선생의 아이디를 받아 적는 중이었다. ‘순례자…’ 그녀에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어쩌면 등단작인 “순례자의 잠”과도 연관이 있을 터이다. 그렇지만, 40년이 다 되어가는 그녀의 시력(詩歷)을 살펴보면 문학이라는 성지를 순례하는 길 위에서의 모습이 보인다.


강은교 선생은 그 순례자의 길을 여행하면서 1971년 『허무집』을 시작으로 2006년 출간한 『초록거미의 사랑』까지 모두 11권의 신작시집을 냈다. 또한 시선집과 산문집, 동화와 역서 등 선생의 이름을 걸고 나온 책만 해도 40여 권에 가깝다. 그 책들의 제목을 듣게 된다면 행여 선생의 이름은 흐릿할망정 누구나 한 두 권쯤은 읽어 보았을 책들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책의 제목들을 이 지면에 굳이 나열하지 않은 이유는 그 수가 많은 탓도 있지만, 선생이 나중에 들려 준 책에 관한 이야기 때문일 수 있다. 선생이 인터뷰 말미에 한 그 이야기는 이 글의 마지막에 들려드릴 생각이다. 지금은 그 순례자의 행보를 막 따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강은교 시인을 만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다. 마침 봄은 비를 뿌리며 남도로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차창 밖에 들판이 펼쳐지자, 봄나물을 캐러나가던 그 어떤 날이 떠오른다.


길 위에는 봄이 넘나들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연초록 움이 트고, 풀빛은 흩날리는 봄비를 맞아 싱그러운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강은교 시인의 집은 선생이 20여 년 간 재직한 동아대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한 한적한 빌라이다. 마치 뒤편의 구덕산이 품을 내어 준 듯 선생의 집은 산과 가깝다. 구덕산 산마루에는 희뿌연 안개와 매지구름이 걸려 있다.


시인은 환한 웃음으로 기자 일행을 맞았다. 큰 가구가 별로 없는 거실에는 자색의 꽃을 피운 난(蘭)이 놓여 있었다. 친구처럼 지내던 딸이 결혼을 해 분가한 뒤 고즈넉했던 집안에서 말동무가 되어 주던 대상이다.


그런데 한동안 집안은 색다르게 북적될 것이다. 그 딸이 아기를 낳았기 때문이다. 시인은 병원에 있던 딸에게 미역국을 끓여 가져다주면서 했던 읊조림이 생각난 모양이다.


“사회 속의 개인, 계층 속의 개인, 성 속에 개인… 이러면서 제가 중얼거렸어요. 미역국 냄비를 들고 말이죠. 개인이 중요하긴 중요한데 말이죠. 사회 속의 개인이고, 계층 속의 개인인거죠. 어울리죠? 미역국 냄비하고 제가 중얼거린 것이. 시도 오래 쓰다 보니…, 개인이냐, 사회냐 이거든요. 내가 개인으로는 시를 모더니즘으로 시작했지만, 80년대를 지나면서 여러 가지 운동들도 많았잖아요. 대학교 다닐 때는 4년 중 3년을 데모로 인해 조기 방학을 했어요. 유신이었고, 전태일이 있었죠. 제 학위 논문도 모더니즘과 사회성 하고의 결합 혹은 종합을 얘기했던 거였어요.”


강은교 시인을 일러 ‘허무의 시인’이라고 부른다. 시인이 낸 첫 시집의 제목 때문일 수도 있지만, 많은 평자와 독자들은 시인의 시에 스며있는 ‘허무’를 읽어내 왔다. 그 허무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도약하려는 과정과 결과로 버무려져 왔다. 그것은 ‘한 여자’의 존재이유이기도 하고, 우리의 삶 속에 드리워져 있는 어두움에 대한 저항의 무기이기도 했다.


하여 ‘70년대’동인으로 함께 활동해 온 정희성 시인은 <은교의 시>라는 시편에서 다음과 같이 시인의 허무를 말하고 있다.


“그녀가 다스리는 허무의 영역/다시 들어가 보면/그러나 아주 허무는 아니고/자궁같이 든든한 알맹이가 보인다”
모더니스트로 출발한 시인이 허무의 양가적 의미에 관심을 두고 또한 70년대와 80년대를 살아내면서 사회와 역사의 모순과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여자’의 자궁은 죽음과 신생(新生)을 동시에 내포한 근원의 고향이다. 시인은 스물일곱 살에 낸 첫 시집에서부터 지금까지 그 자궁을 가진 ‘한 여자’의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들려주고 있다. 그것은 우리 신화 속에서 살아있는 ‘비리데기’이다.
“내 삶의 파일 제목을 ‘비리데기 치유사’라고 정했어요. 나는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비리데기의 여행노래>를 썼는데, 그게 지금까지 계속 쓰고 있거든요. 80년대도 쓰고 90년대도 쓰고, 지금도 씁니다. 내 평생 주제인 것 같아요. 비리데기는 생명의 여신이에요. 비리데기가 저승에까지 가서 약수를 구해다가 죽은 아버지에게 뿌리니까 아버지가 살잖아요. 어머니도 살아나고. 이게 바로 굉장한 생명의 여신인거예요. 트리스탄과 이졸데 같은 서양의 신화보다 더 근사할 수 있는데, 그걸 살려준 문학이 우리에게 없는 거예요. 나는 비리데기를 살리면서 뭔가를 해 보고 싶어요. 그래서 우리 아버지를 살리고 싶어.”


비리데기는 우리나라 곳곳에서 조금씩 변형된 이야기로 전승되어 오는 서사로 바리데기, 바리공주 등으로도 알려져 있다. 일곱 번째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왕인 아버지로부터 내침을 당하여 살다가 그 아버지가 병이 들어 죽자, 저승으로 가 생명의 약수와 꽃을 가지고 와 아버지를 살려냈다는 것이 그 신화의 큰 뼈대를 이루고 있다.


시인은 이 비리데기를 문학적으로 살려내고 싶어 하면서 ‘그 여자’의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부활시켜내고 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자신이 비리데기가 되어 그녀의 아버지, 춘산(春山)강인택 선생을 살려내고 싶어 한다.


일반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선생의 시, <사랑법>에는 시인의 아버지가 주는 존재의 이미지로 채워져 있다.

떠나고 싶은 자/떠나게 하고/잠들고 싶은 자/잠들게 하고/그리고도 남는 시간은/침묵할 것//또는 꽃에 대하여/또는 하늘에 대하여/또는 무덤에 대하여//서둘지 말 것/침묵할 것/(…)/실눈으로 볼 것/떠나고 싶은 자/홀로 떠나는 모습을/잠들고 싶은 자/홀로 잠드는 모습을//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그대 등 뒤에 있다

시인은 자신의 시에 유독 많은 ‘뒷배경이 보이는 하늘’에 관한 이미지가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는 딸을 기다리던 아버지의 모습 때문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했다.


늘 집을 떠나계셨던, 가족보다는 나랏일에 더 열중하셨던 아버지. 시인의 아버지는 일제시대에는 항일운동을 했던 독립운동가이며 고향인 홍원에서 육영학원을 설립하여 교육 운동을 펼친 분이다. 1919년 삼일 운동 때는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 2년 간의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또한 경성제국대학에 대항할 수 있는 학교를 만들고자 김성수, 한용운 등과 함께 조선 민립대학 건설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강은교 시인이 1945년 함경남도 홍원에서 태어날 무렵에도, 선생의 아버지는 가족을 떠나 홀로 서울에 있었다. 당연히 태어난 딸의 존재조차도 몰랐다. 선생의 어머니는 백일 된 딸을 들쳐 업고 집을 나섰다. 남편에게 딸을 보여주겠다는 일념 하나로 총탄이 빗발치는 사선을 넘었던 것이다. 주소도 모른 채 서울의 천도교 건물이라는 것만 알고 무작정 나선 길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만난 남편에게 딸을 보이며 당신 자식임을 알리자, 그 아버지는 깜짝 놀랄 뿐이었다고 한다.


그 뒤로도 늘 부재 중인 아버지를 찾아 나서는 유랑의 가족사는 시인의 마음 속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다. 집안의 장녀인 시인은 책임감 때문에라도 일찍 철이 들어 조숙해져만 갔다.


조숙한 초등학교 시절 시인의 눈에 비친 아버지의 모습은 절망이었다고 한다. 체신부 장관까지 지낸 분이었는데, 왜 늘 어둡고 슬픈 표정이었을까. 선생이 어렸던 터라 그 속내를 알 수는 없었다. 다만 현실 정치를 접하면서 당신이 생각하시던 이상과 대의에 맞지 않아 절망하셨으리란 선생의 추측만이 남아 있다. 장관직을 물러나서도 감찰위원장 등 권력과는 먼 자리를 맡아 하시던 아버지는 선생이 경기여중 시절 은퇴를 하셨다.


선생이 여고를 다닐 무렵 학교를 파하고 귀가할 즈음, 선생의 아버지는 늘 한복을 입은 채 대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고 했다. 그때 아버지의 등 뒤로 보이던 하늘을 선생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그대 등 뒤에 있다” 는 싯구절 뒤로 우리는 선생이 가진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아버지는 제가 고등학교 2학년일 때 돌아가셨어요. 너무 일찍 가셨지요. 그래서 내가 아버지에 대해 너무도 몰랐어요. 사학과 교수하는 분이 우리 아버지에 대한 자료를 많이 모아놓았어요. 판결문도 찾았고, 글들도 모았지요. 그 시대 지성인 명단에는 다 들어 있는데, 유독 아버지에 대한 자료는 거의 빠져 있어요. 아버지가 뭘 하셨는지 나에게 보여주시기만 했으면 내가 찾았을 텐데, 그때 우리 집에 책 한권이 없었습니다. 우연히 흘려듣기로는 다 태워버리셨다고 그래요. 제 기억에는 아버지는 만날 라디오연속 방송극 듣고, 박종화 소설 같은 거, 그런 거 열심히 보시고 했던 것만 기억나요.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내가 몰랐죠. 그랬는데 내가 우연히 <개벽>을 뒤지다보니 아버지 호와 이름으로 된 글들을 찾게 되었어요. 그래서 자료를 지금 모으고 있는 중이에요.”


자료를 찾으면 자서전이라도 낼 생각이 있으시냐고 묻자, 선생은 도리질을 하신다.


“이게 바로 비리데기 치유사 아닙니까? 우리 아버지 살려드려야지요. 책 하나 내면 뭐합니까. 그런 건 하지 말자 그래요. 우리 아버지가 원했으면 그렇게 다 태워버리진 않으셨겠죠. 그런 거 말고, 정말 이제 제 손녀도 낳았으니까. 그 애한테도 그런 정신이 이어질 수 있는 거고, 뭐 그런 거 아니겠어요?”

선생은 고등학교 때부터 학교와 집 근처에 있던 헌책방을 제집 드나들듯이 다녔다. 처음엔 장르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읽어 나갔다. 그러다 카뮈와 릴케, 니체 등을 만나게 되었다. 닥치는 대로 읽어나갔다. 선생은 뭘 알고 읽었다기보다는 다독의 습관이 들어서 그랬다고 했다. 그런데 그 다독은 정독이 되었고, 결국 문학으로 이끌어갔다. 문학을 해 보겠다는 생각 앞에 선생은 소설을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로맹 롤랑의 소설 『장 크리스토프』는 그의 창작의지에 불을 당겼다. 선생에게 시는 아는 언니의 결혼식을 위해 쓴 축시가 첫 시작이었다. 그 뒤 박두진의 <해>라는 시를 만나 시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독특한 리듬의 산문시에 전율이 인 것이다. 대학에 들어가 대학신문인 <연세춘추>의 기자로 들어간 선생은 동기들과 함께 시 모임을 만들었다. 나중에 남편이 된 임정남 선생도 그 시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시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T.S. 엘리엇의 시는 선생에게 시에 대한 폭발적인 에너지를 안겨 주었고, 연애를 하는 동안 시 작업은 더욱 열렬해져갔다. 1968년 <사상계>를 통해 문단에 데뷔한 그는 임정남 선생과 오랜 연애를 끝내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곧 아기도 생겨 행복에 취해 있을 무렵, 뜻밖에도 선생에겐 죽음의 사신이 드리워졌다.


임신 7개월이던 해, 선생은 아침에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다. 거기서 선천성 뇌동맥 정맥 기형이라는 병명을 선고받았다. 언젠가는 터질 핏줄이었으므로 지금껏 별 탈 없이 살아온 것도 기적이었다. 뇌를 절단해 끊어진 핏줄을 잇는 대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다. 그러는 중 조산을 하게 되었는데, 낳고 보니 쌍둥이였다. 그 중 한 아이는 인큐베이터에서 3개월을 살다 그대로 떠나버렸다. 수술과 출산과 딸의 죽음을 한꺼번에 맞은 그녀의 생은 지옥이었다. 병원 측에서 오랫동안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던 선생을 좀 편안한 곳으로 옮겨준다고 배려한 곳이 알고 보니 시체실이었다. 조그만 방이었는데, 시체실로 쓰였던 방인 것이다. 거기서 선생은 십자가 예수 상을 보았다.


“거기서 상당한 경험을… 아마 그게 영적인 경험인가 봐요. 퇴원한 다음에는 명동성당에서 교리를 배웠어요. 그때 신부가 젊은 신부라서 끝나고 나면 맥주를 같이 마시곤 했죠. 그 뒤로는 그냥 그랬어요. 그러다 우리 애가 첫 돌을 넘겼을 때 김남조 시인이 영세해야한다고 집에 찾아왔더군요. 어느 신부님을 불러다가 억지로 영세를 했어요. 그래서 신자가 됐죠. 그땐 아주 웃겼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다행이에요. 항상 내가 돌아갈 때가 있으니까 그것 참 고맙네요. 안 그러면 항상 방황하고 그럴 텐데, 그죠?”


그렇게 선생은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돌아와 늘 새롭게 시를 쓰고 있다. ‘생명’이라는 이름으로 포용하는 시적 자세를 넓혀나간 것이다.


2000년 선생은 버클리대 방문교수 시절 시 낭독회를 처음 경험했다. 그곳에서 ‘강은교 시 낭독회’를 개최했는데, 거기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느끼게 된 것이다. 시 낭독을 통해 시가 가진 효과를 경험했는데, 그것은 경이로움이었다. 버클리에서의 경험과 ‘시치료’의 새로운 기법을 창안하여 선생은 “시바다”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시바다는 지난 2001년부터 시작하여 추리문학관, 영광도서, 밀양연극촌 등과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져 60여회가 다 되어간다. 하지만 올해 1월 시바다는 다시 새롭게 발을 내딛었다. 해서 1회 ‘시바다, 시치료’ 공연이 이루어졌고, 곧 4월 마지막 주 목요일에는 2회가 펼쳐질 예정이다.


시바다는 시 낭독모임이지만 낭독이 유일한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북이나 징을 동원하여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했고, 음악이나 무용 같은 공연도 함께 있어왔다.
지금 ‘시바다’ 모임은 그동안의 여러 우여곡절의 시간 속에서 훨씬 단단해졌다고 한다. 그 전에는 장소를 제공하거나 주최하는 곳에서 시 낭독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해주어 공연을 하기에는 매우 수월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바다 스스로 새롭게 재정비를 했다.
시바다는 시 팀과 퍼포먼스 팀, 후원회원 팀, 이렇게 세 바퀴로 굴러간다. 시 팀은 기획을 하고 시인을 섭외하는 일을 하는데 제일 기본이 되는 일이다. 퍼포먼스 팀은 노래와 연극 무용, 음악 등 여러 가지 그날의 시에 맞는 주제를 가지고 행위를 펼쳐낸다.


시바다 공연에는 여러 시인이 출연하고, 공연 팀이 출연하는데, 거기엔 언제나 강은교 시인의 시치료가 있다.
“제가 미사를 참 좋아하는데 특히 청년성가대의 노래는 참 감동적이에요. 노래를 못한다해도 말입니다. 제가 질질 울면서 열심히 성당을 다닌 적이 있는데, 청년성가대의 노래를 들으면 카타르시스가 싹 되는 거예요. 음악치료를 받은 거지요. 시도 좀 그렇게 하고 싶다는 겁니다.”
글쓰기 그 자체에 치유적 기능이 있다는 것은 이미 정설이 되어 버렸다. 시인은 글이란 쓰는 것에 치유가 있고, 그것에 몰두할 때 쾌감을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시치료는 그런 치유적인 기능을 살리고 소통하자는 의미로 시작되었다. “그럼 시도 살고 사람들의 정신도 살고, 그렇지 않겠어요?”시인은 반문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렇기 때문에 시 낭독회 같은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이제 제가 할 일은 나이도 좀 들었고 하니, 시바다에서 비리데기 치유사가 되는 거예요. 그게 내 마지막 남은 시절에 꿈같은 거라 할 수 있죠.”

디스크가 있어 거실에 오래 앉아 있기가 불편했던 시인은 의자가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서재로 쓰는 방이다. 작년에 시인을 방문한 적이 있었던 사진기자는 그 방에 들어서자 깜짝 놀란다. 책장에 쌓이고 넘쳐 방바닥까지 점령했던 책들이 없어지고, 책장 몇 개에만 책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이유는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기 때문. 일몰이 아름답던 다대포에서 이곳 구덕산 아래로, 이제 시인이 가려는 집은 금정산 밑이다.


“이렇게 큰 집을 짊어지고 사는 것도 너무 웃기는 것 같아요. 거긴 방이 두 개니까 책을 둘 곳도 없어요.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리고 산 것 같애. 여기 있는 것도 점점 더 줄여 아주 아주 줄어들겠지. 내가 놀라운 말씀을 해 드릴까요?”
시인이 전한 놀라운 이야기는 두 방을 가득채운 책을 처분할 때 근(斤)으로 넘긴 일이었다. 요즘은 정년퇴직한 교수들이 책을 도서관에 다 기증해서 도서관에서도 받지 않는다고 하자 할 수 없이 책을 팔게 되었는데 그 책이 모두 근으로 팔려나간 것이다.


“앞으로 시집을 내지 않고 시바다를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고, 잘 모르겠어요. 진짜로 모르겠어요. 내가 근으로 팔 책을 이렇게 쓰고 있다니, 쓰고 있었다니, 그런데 예전에 정약용 선생이 유배지에서 당신 아이들에게 나중에 벽지로 바를 글, 노끈으로 만들 글 쓰지 마라 그랬었거든요. 내가 그 글을 인용해서 노끈이 될 글은 쓰지 않겠다 큰소리쳤는데, 심지어 책 좋아하는 우리 경비 아저씨도 원하지 않는 것이 시집이더라고요. 제일 먼저 나가는 게 문예지고, 그 다음이 시집이더라고요. 그걸 어떻게 생각합니까? 논문집도 다 소용이 없더라고요. 근으로 달 책을 만들었고, 근으로 달 공부를 한 거예요.”


시인이 마지막까지 남겨 놓은 책은 니체 전집과, 릴케, 삼국유사와 향가에 관한 이론서, 그리고 선생이 낸 책 몇 권뿐이다.


시인은 자운영꽃 이야기를 했다. 풋거름이 되는 운명이지만 아름답게 피는 꽃 자운영. 시인은 이제 갓 태어난 손녀의 태명을 ‘녹비’라 지었다. 녹비(綠肥)인 자운영꽃.


“녹비가 풋거름이거든요. 내가 풋거름이 되고 싶다. 장미가 되고 싶지도 않고, 되지도 않겠지만, 되어서도 뭐하냐 했거든요. 이렇게 찾은 녹비를 어디에 쓸까 했는데, 손녀에게 먼저 뺏겨 버렸어. 제가 <우리의 녹비>란 시를 쓴 게 있는데, 거기에 ‘세상은 아름다운 똥밭’이란 표현이 나오거든요. 그런 생각이 드는 날이 있잖아요? 세상은 참 아름다운 똥밭이다 하는 그런 날…”


시인은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지었다. 풋거름이 될 운명에도 아름답게 꽃을 피우는 쓸쓸한 자운영처럼.
아름답게 피어 풋거름이 되는 자운영꽃처럼 시인은 그렇게 살고 싶은 모양이다. 세상 속에 풋거름이 되어 가고 싶은 모양이다.


이제 나의 허무는 짙은 회색이 아니라 분홍빛 허무라고 시인은 말한 적이 있다. 그 ‘분홍빛 허무’를 안고 시인은 순례자처럼 세상의 길을 걸어간다. 시인이 불러 세운 ‘그 여자’들도 세상 속으로 나와 풋거름이 되어 익어 갈 것이다. 그러면 언젠가 혹은 또한 흐르는 물이 되어 만날 수도 있으리. 

 

 

IV.  제18회 가톨릭문학상 수상작/ 시 부문 강은교 시인의 「바리연가집」

“바리공주는 생명의 상징… 오랜 투병 후 알게 된 하느님을 향한 노래”

 

< 카톨릭신문 2015-04-05 [제2938호, 16면] >
        
■ 시 부문 강은교 시인의 「바리연가집」

쌍둥이 임신 중 뇌동맥 수술
퇴원 후 세례받고 새로운 삶
13권 시집, 생명과 평화 주제로
토착화된 신앙시 계속 쓰고 싶어


▲ 강은교 시인은  1945년 함경남도 홍원에서 태어났다.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고 시집으로 「허무집」, 「풀입」, 「빈자 일기」, 「소리집」, 「붉은 강」, 「벽 속의 편지」, 「어느 별에서의 하루」,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 「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 넣고 다녔다」, 「초록 거미의 사랑」, 「제가 떠난 후에 너를 얻었다」, 「바리연가집」 등이 있다. 산문집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무명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 현대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유심작품상, 박두진문학상을 수상했다.

 

“한국가톨릭문학상을 수상하게 돼 감사드립니다. 제게 깊은 의미로 다가오는 이 상은 앞으로의 작품 활동에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한국가톨릭문학상에 선정된 강은교(클라라·71·부산 송도본당) 시인의 「바리연가집」에 등장하는 ‘바리’는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전승되어 온 ‘바리공주’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오구대왕이 아들을 바라며 일곱 번째 자식을 낳지만 이마저 딸이라 내다버리고 만다. 하지만 바리는 자신을 버린 부모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모진 고통을 감내하며 병든 아버지를 구해낸다는 스토리다.

강 시인의 첫 시집에서부터 등장해 온 ‘바리’는 그녀에게 있어서 생명과 희생의 상징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무속적인 껍데기 이면에 숨겨진 생명에 대한 부르짖음이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기나긴 여정의 단초였다.

“30대 첫 시집을 출간할 무렵 뇌동맥에 이상이 생겨 큰 수술을 했습니다. 이때 쌍둥이를 임신 중이었는데 생과 사를 오가는 긴박한 상황에서 저희 모녀를 살려준 분은 하느님이셨습니다.”

강 시인은 출산 후에도 성모병원 중환자실에서 오랜 투병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아이를 돌볼 수 없었지만 병원에서 한 수녀가 아이를 지켜주었다. 이후 그녀에게 있어서 신앙은 삶의 주춧돌이 됐다.

“어렸을 때부터 가족들은 모두 가톨릭 신앙을 갖고 있었어요. 하지만 제가 사춘기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하느님께 대한 철없는 원망을 했었죠. 늘 제 주변에서 저를 이끄시던 하느님을 애써 외면하던 시절이었어요.”

강은교 시인은 퇴원 후 남편과 함께 명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김남조 시인이 대모를 섰다. 살면서 가장 힘들었다던 남편과 사별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살면서 버텨냈다.

강 시인은 “젊은 시절에는 대상이 분명하고 열정적인 사랑을 표현하기도 했고 유신시대에는 남편과 함께 역사시를 쓰기도 했다”면서 “하지만 열세 권의 시집 모두를 관통하는 사상은 생명과 평화에 대한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청년기의 열정과 순수함이 세월과 함께 조금씩 수그러들었다면, 지금 다시 그녀에게 펼쳐진 바람과 과제는 하느님께로 향한 사랑의 노래다.

강 시인은 “신앙이 토착화되기 위해서는 문학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면서 “우리 고유의 문화가 신앙에 접목되는 방법에 있어서 물리적인 결합으로는 불가능하고, 오히려 내면에서 응답해 본질적으로 변화하는 화학적 융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상징적 인물 ‘바리’가 가진 생명과 평화의 이미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이 드러나는 아름다운 노래를 쓰고 싶습니다.”

앞으로 그녀가 노래하는 생명과 평화의 노래가 토착화된 신앙시로 모두와 함께 부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도경 기자>



■ 수상작 바리연가집(강은교 지음/ 112쪽/ 8000원/ 실천문학사)

부모에게 버림받은 바리데기가 부르는 그리움의 노래

강은교(클라라) 시인의 열세 번째 시집. 시인은 이 시집에서 부모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도처를 헤매는 바리데기 이야기를 통해 개인의 아픔과 시대의 고통을 노래하고 있다. 아울러 애도(哀悼)의 가장 지극한 방식은 연가(戀歌), 곧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라는 사실을 깨우쳐준다.

시집 전반부는 ‘70년대’라는 동인을 함께 한 남편이자 시인인 임정남에 관한 시들로 엮였다. 아울러 시인은 언젠가 닥칠 본인의 죽음을 예감하며 스스로에게 바치는 시들도 담아냈다. 20대부터 줄곧 복용해온 알약들을 “내 평생의 연인들”이라고 부르는 시인은 고통 가운데 살아있음을 체험하는 인간의 모순적 비의를 드러낸다.

시집 후반부로 가면서 ‘바리’는 세상 모든 것을 향해 나아간다. 시인이 바리데기를 처음 호명한 것은 첫 시집 「허무집」(1971)에서 선보인 연작시 ‘비리데기(바리데기) 여행의 노래’를 통해서다. 시력 47년에 이르러 시인은 다시 바리데기를 호명하며 생사의 한계를 초극하는 연가를 부른다. 총 55편의 시들은 노래의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가장 깊이 버림받은 ‘바리’의 사랑노래를 새로운 선율로 선보이고 있다. <김근영 기자>


■ 심사평 / 신경림 시인

“슬픈 삶까지 아름답게 그려낸 詩語

무가적 가락, 매력적 작품 만들어”

예심에서 올라온 후보작 가운데 처음부터 주목을 받은 것은 강은교 시인의 「바리연가집」이다.

제목이 가리키는 대로 이 시집에도 초기부터 그의 시의 바탕이 되어온 무가(바리연가) 가락의 시가 많다.

그 가락이 언어가 가진 원초적 주술성을 극대화하면서 그의 시를 한층 매력적으로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집은 지금까지의 시집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이 시집에서는 그것이 한층 진화하고 있다. 살면서 생긴 상처와 흉터가 곳곳에서 드러나면서 무가적 가락이 삶의 구체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지나간 한 시대의 그의 삶, 아니 우리 모두의 삶이 바리연가를 통해 되살아오는 대목을 간과할 수 없다.

이 시집 속의 시들은 슬프고 아름답다. 예컨대 ‘시, 그리고 황금빛 키스’, ‘봉투’ 그리고 ‘중병’ 같은 시들은 같은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개인사와 시대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드는 슬픈 시요, ‘단어’, ‘그리운 동네’, ‘지금 내가 가진 것’, ‘둥근 지붕’ 등의 시는 그의 아프고 슬픈 삶까지도 아름답게 보이게 만드는 아름다운 시들이다.

무엇보다도 이번 시집을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무가적 가락이라는 성격 때문에 시에 자욱하게 낀 것처럼 보이던 안개 같은 것이 말끔히 가셨다는 점이다.

이번 「바리연가집」은 비록 같은 바리연가집이기는 하나 분명 옛날과는 다른 진화한 「바리연가집」 임이 분명하다.

「바리연가집」이라는 좋은 시집을 수상작으로 얻게 되어 기쁘다.



■ 심사평 / 신달자 시인

“가톨릭정신으로 형상화한 인간 본성”

강은교 시인의 「바리연가집」이 최종적으로 심사위원들의 관심을 받으며 제18회 가톨릭 문학상으로 결정되었다.

「바리연가집」은 신경림 선생님의 심사평처럼 무가적 분위기에서 인간의 본성과 상처와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노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강은교 시인의 매력은 이 무가적 샤머니즘을 넘어서서 인간의 전통적 정신요소를 가톨릭 정신으로 형상화하는 보편적 인간구원으로 끌어가는 힘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외롭고 구슬픈 무가는 인간의 원초적 노래이므로 그것을 모두 품어 안는 가톨릭 정신으로 가다듬는 수용의 자세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시집이다.

강은교 시인에게 축하를 드린다.

 

이규리 시인 "살아 있는 한 인생은 언제나 미완성이다"


BRAVO  2019-07-11  
 
[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 ‘시의 인기척’,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시인은 시를 품은 인식으로 산다”고 말하는 이규리(李珪里·64) 시인. 그런 그에게 가장 구체적이고 확실한 인식을 심어준 문장은 바로 ‘종이는 종이 아닌 것으로 이루어졌다’(틱낫한)이다. 

 

종이는 종이 그 자체가 아닌 물, 나무, 바람, 햇빛 등 수많은 요소로 이뤄졌다는 것. ‘종이’와 ‘종이 아닌 것’이 같다는 걸 알고 난 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이렇듯 시로써 다 말하지 못했던 깨달음을 모아 그는 ‘시의 인기척’과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에 담았다.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이후 5년 만에 펴낸 이규리 시인의 새 책은 시가 아닌 아포리즘(격언, 경구 등의 글귀)으로 채워졌다. 책에는 오랜 세월 시인이 삶과 자신에게 던져온 숱한 질문과 대답의 흔적들이 녹아 있다. 아포리즘의 형태를 가져왔지만, 책을 읽다 보면 시인다운 표현들이 눈에 띈다. 어쩌면 시를 통해서도 같은 의미를 전할 수 있었으리라. 특별히 아포리즘으로 일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시라는 건 굉장히 압축되고 비유되고 또 감춰져 있어서 정작 저자의 의도를 알아차리기 어려울 때가 많아요. 그에 비해 아포리즘은 말하려는 바를 더 논리적으로 드러낼 수 있죠. 그동안 살면서 제가 품었던 궁금증이나 질문들은 책과 사람을 통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어요. 나와 같은 고민을 가진 독자가 있다면 내가 정리한 답이 도움 되지 않을까 생각했죠. 그런 이야기를 보다 명징하게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에 아포리즘이 적합하다고 봤어요.”


뒤를 바라보며 지나는 삶

독자에게도 도움을 주는 글들이겠지만, 그는 집필기간 무엇보다 자신을 돌아보고 정리하는 의미있는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책을 위해 단기간에 글감을 찾아 모은 것은 아니다. 지난 10년여 동안 메모노트에 적어둔 글들을 바탕으로 3년 정도 엮는 과정을 거쳤다. 아주 오래전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할 메모노트는 그에게 ‘재산’과 같단다.

“메모노트는 늘 가지고 다녀요. 노트 중간에 간지를 끼우고 절반은 제 생각이나 글을 쓰고, 나머지 절반은 독서나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통해 얻은 것들을 적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좋은 글인데 이게 내 생각인지, 다른 데서 들은 이야기인지 구분이 안 될 때가 있거든요. 그렇게 쓴 메모노트 내용 중 시로 탄생한 것도 있고, 아포리즘으로 풀어낸 것도 있죠.”

이규리는 서두 ‘작가의 말’에 “오래전부터 메모되었던 글들이 모였을 때 그 흔적이 아픔이고 견딤이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썼다. 많은 것을 견디며 살았다는 그는 책에서 ‘견디고 있다’와 ‘지나고 있다’는 두 말을 ‘결혼시키고 싶다’고 표현했다. 그 독특한 문장이 지닌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누가 ‘어떻게 지내?’라고 물었는데 ‘견디고 있다’고 대답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곱씹어보니 견딘다고 하면 내가 뭔가 수고했다는 게 포함된 말 같은 거예요. 그보다 더 적확한 표현이 없을까 생각하니 ‘지나고 있다’가 떠오르더라고요. 물론 둘 다 좋고 아름다운 말이에요. 이런 말들을 새기고 산다면 경멸을 느끼는 순간이 찾아와도 잘 견디고 지날 수 있죠. 그때가 지나면 언젠가 말할 기회가 찾아오는데도 우리는 늘 성급해서 먼저 얘기해버리고 후회를 하잖아요. 견디고 지나며 살아갈 때 인간은 성숙해지고, 세상은 평화로우리라 생각하니 두 말이 참 아름답게 느껴져 짝지어주고 싶었어요.”

그렇게 누군가가 견디고 지나는 모습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처럼 그는 보이지 않는 ‘뒤’라는 존재에 대해 오래전부터 고찰했고, 그 생각들은 이번 아포리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의 3부에는 “뒷모습은 정확함보다 정직함에 가깝다”는 문장이 나온다. 그는 특히 시인이라면 겉이나 앞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 그 내면과 뒤의 모습까지 이해하고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우리는 즐거움을 느끼죠. 그 음식을 내놓기 위해 어떤 사람들이 얼마나 수고했는지까지는 생각하지는 않아요. 어쩌면 그날 해고된 직원이 식당 뒤에서 울고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단순히 잘 차려진 식탁만 봐서는 헤아릴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글을 쓰는 사람, 특히 시인은 보이지 않는 삶과 세계까지 살피고 이해해야 해요. 그런 점에서 앞보다는 뒤, 밝음보다는 어둠, 만복보다는 공복 쪽에 서서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완성은 과정이 머물다 멈추는 지점

이규리 시인은 불안(不安), 불리(不利), 부족(不足) 등 ‘아니 부(不)’를 지닌 단어들도 가까이하고 좋아한다. 그렇다고 ‘부’가 들어간 단어 모두를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부정(不正), 불법(不法), 불신(不信) 등은 멀리한다. 어떤 기준으로 단어들의 호불호가 나뉘는지 고민하던 그는 결국 해답을 찾았다.

“칼날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어요. 불안, 불리, 부족 등은 내가 불편하고 손해를 보기 때문에 칼날이 나를 향하지만 부정, 불법, 불신 등은 칼날이 상대를 가리키고 다치게 하죠. 그걸 발견한 뒤부터는 어떤 결정을 내릴 때면 칼날의 방향을 따져보고 판단해요.”

그렇게 인생을 알아가고 자신만의 기준을 세워나가는 동안에도 고민과 물음은 끊이지 않았다. 젊은 시절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해답을 고요히 스스로 찾을 수 있게 해주는 연륜이 생겼다는 것. 자신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삶을 살아낸 중장년이라면 대부분의 문제는 자기 인생 안에서 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내린 답은 모두 정답일까? 그는 몇 번이고 다시 묻고, 부정해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내가 어떤 답을 내렸을 때, ‘그래 이게 맞아’라고 끝내기보다는 ‘과연 내 답이 맞을까?’라고 의문했을 때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어요. 마찬가지로 어떤 일을 할 때도 ‘완성했다’고 여기지 않으려 합니다. 화가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마지막 초상화를 그릴 때 완성에 가까운 작품인데도 18일 동안 지우고 또 지우며 다시 그렸다고 해요. 그렇게 완성이란 무언가를 계속하는 과정 속에서 멈추는 지점일 뿐이지, 완벽한 완성은 없다고 봐요. 같은 맥락에서 우리 인생 역시 죽음에 이르렀을 때야 비로소 완성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살아 있는 한 삶은 미완성일 수밖에 없고,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의문하고 부정해야 합니다.”

선생과 아이들은 한 몸이 되어야 한다
교사시인 윤재철, 다섯 번째 시집 <능소화> 펴내


오마이뉴스 이종찬 기자 07.11.17 

 

 

 


"어둠 속에서 담배를 핀다 칠흑 같은 바다의 어둠과 침묵 그리고 소멸하는 시간 속에서 살아오는 허무의 꽃 꿈인지도 모른다 꿈의 꿈인지도 모른다 몽환의 화려한 꽃불 꽃가지 언제부터인가 눈에서 귀에서 검은 입 속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한 꽃 웃음의 끝 울음의 끝에서 환히 피어오르는 허무의 꽃 가슴 저 끝에 뿌리박은 듯 뻗어 올라 가슴 가득 뒤덮은 능소화 푸른 잎 속에 피어오르는 주황빛 저 꽃"(25쪽, '능소화' 모두)

윤재철 시집 <능소화> 시인 윤재철이 다섯 번째 시집을 냈다



교사시인 윤재철의 시의 계절은 가을이다. 가을로 '마악' 접어드는 9월초가 아니라 단풍빛이 곱게 물드는 시월 초쯤이다. 시인의 나이 또한 오십대 중반이니 시인의 인생도 가을에 물들고 있다. 그래서일까. 시인의 삶과 시인이 쓴 시의 빛깔은 핏빛으로 진하게 물든 단풍나무 잎새나 황금빛으로 물든 은행나무 잎새처럼 선명하지가 않다.

그저 은은한 빛이다. 장미처럼 붉지도 않고, 평지나물꽃(유채꽃)처럼 노랗지도 않은 능소화 꽃빛처럼 어정쩡한 주황빛이다. 까닭에 시인의 삶과 시인이 쓰는 시는 화려하거나 반짝반짝 빛나지 않는다. 여름에 쏟아지는 땡볕처럼 뜨겁거나 '땡겨울'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처럼 차갑지도 않다. 미지근하다는 그 말이다.   

시인 윤재철은 젊은 시절부터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였고, 오십대 중반의 나이가 된 지금도 교사이다. 시인은 한때 소설가 송기원, 시인 김진경 등과 함께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교직을 잃어버린 시인은 그때부터 전교조 창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출판사 대표를 맡고 있던 중 복직되어 다시 교단에 섰다.    

시인의 시가 능소화 빛을 띠고 있는 것도 독특한 삶의 이력 때문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마음이 포근한 노랑색이라면 해직과 투옥, 전교조 창립 등은 강렬한 붉은색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시인의 삶과 시인이 쓴 씨는 노랑색과 붉은색이 잘 섞인 주황빛을 띨 수밖에 없다.      

가을빛 물고 겨울빛 내다보는 시인

"장맛비 잠깐 그치고/  저녁 어스름 / 보랏빛 꽃잎은 어둠 속에 잠겨 간다 // 사랑한다 / 사랑한다 / 나지막히 되뇌어 보지만 / 사랑할 때 떠나고 싶다 // 수국이여, 수국".('자서' 모두)

윤재철 시인이 이번에 펴낸 시집 <능소화>(솔)에는 유난히 가을빛을 띠고 있는 시가 많다. 겨울빛을 띤 시들도 더러 있다. 가을빛과 겨울빛은 시인의 삶을 그려내는 시편들 곳곳에  엎드려 있다. 노랑빛을 띠는 시들도 수두룩하다. 노랑빛은 시인이 교단에서 아이들과 부대끼는 모습을 그려낸 시편들이다. 

50여 편 남짓한 시 중에서 가을빛과 겨울빛을 띠고 있는 시들은 제1부에 실린 '식당 가는 길' '2교무실 앞 단풍나무' '가을 칸나'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야구 중계방송' '잠' '자존심' '죽은 시인 윤중호 생각' '젖은 꽃' '고대 구로병원' '성남동 아저씨' '댓병 소주' '저무는 바다는 왜 허무할까' 등이다.

노랑빛을 띠고 있는 시들은 제2부에 실린 '비둘기와 중간고사' '겁먹은 송아지' '세때' '작취미성' '이상' '지성이' '각축' '조경사업' '방학' '졸업식' '수능감독' '번호들의 세상' '그래도 다시 한번' '참 좋은 봄날' '숙제' 등이다.        

능소화 시인의 시의 빛깔은 능소화빛이다



죽음, 혼자 가야 하는 그 쓸쓸한 길

"장마 얼마 앞두고
소담스럽게 핀 수국꽃에도 눈길 한번 주며
터덜터덜 구내식당 가는 길
뒤좇아 온 같은 부서 여선생님 둘이
같이 가자는 말도 없이 혼자 가느냐
치사하다 농담을 한다
그러자 대뜸 내 입에서 나온 말
그러면 죽을 때도 같이 죽을 거야 하니
깔깔 웃으며 그 말이 맞다 한다"(12쪽, '식당 가는 길' 몇 토막)

시인 윤재철은 교사다. 어느 날 교사시인은 "오전 수업 끝내고 / 오른손 중지 볼록 솟은 군살에 / 허옇게 묻은 백묵 가루 힘주어 닦고"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서둘러 구내식당으로 간다. 근데,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여교사가 같이 밥 먹으러 가자는 말도 하지 않고 혼자 가느냐며 농을 건넨다.

그때 교사시인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죽을 때도 같이 죽을 거야"라는 말이 툭 튀어나온다. 시인은 구내식당에 들어가 여교사 둘과 마주보고 앉아 밥을 먹으며 문득 겨울빛(죽음)을 본다. 비록 지금은 "함께 웃으며 밥을 먹지만" 죽음으로 가는 그 길은 "끝내는 같이 갈 수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지금 교사시인의 나이 또한 가을빛이다. 아직은 '마악' 단풍이 곱게 물들기 시작하는, 지천명(하늘의 명을 아는 나이)에 접어든 삶이다. 하지만 죽음으로 가는 그 길은 부모 형제라도 함께 갈 수 없다. 게다가 그 길은 "아무도 몰래 예비된 것처럼 / 어느 날 문득 우수수 낙엽"이 지기 시작하면 반드시 가야만 하는 길이다. 혼자서 쓸쓸히.

가을빛을 물고 있는 시인은 지금 저만치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겨울빛을 내다보고 있다. 그 외롭고도 쓸쓸한 길 위에 미련 없이 올라서기 위해 홀로서기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줄 아는 모습은 곱게 물드는 저녁놀처럼 아름답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죽지 않으려 아둥바둥하는 모습은 얼마나 추한가.  

겨울빛 너머 새로운 세상이 있다면

"십수 년 전
이것저것 의문 나는 것을 캐묻는 내게
팔 안거를 했다는 어느 스님은
문지방에 턱 괴고 앉아 낙숫물 바라보며
죽는 건 죽는 겨
죽으면 모든 게 끝나는 겨
내세가 어딨남
현세도 모르는디 중얼거렸다."(33쪽, '죽은 시인 윤중호 생각' 몇 토막)

가을빛을 물고 겨울빛을 바라보고 있는 교사시인 윤재철은 젊은 때 이것저것 물어보던 노스님의 "죽는 건 죽는 겨"라는 말을 떠올린다. 그때에도 시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시인은 "죽으면 모든 게 끝나는 겨"라는 노스님의 말이 자꾸 목에 걸렸다. 겨울빛 너머 새로운 세상이 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시인은 삶이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때문에 시인은 노스님에게 "그래두 워치게 그렇게 끝난대유"라며 안간힘을 쓰기도 했다. 성철 스님께서는 "산은 산이구 물은 물이구"라고 했다며 "내세라는 말이 있으면 그게 / 그래두 있는 거 아뉴"라며 떼를 써보기도 했다. 하지만 노스님은 입을 닫아버렸다.

교사 시인은 문득 마흔아홉이란 나이에 이 세상을 등져버린 시인 윤중호를 떠올린다. 그렇게 저 세상으로 가버린 윤중호는 지금 무엇이 되어 있을까. "영동 어느 포도 과수원 집이든가 / 공항동 이주단지 아니면 일산 아파트 / 툭닥거리면서도 서로 좋아 죽겠는 / 어느 젊은 맞벌이 부부 집" 갓난아기로 태어났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 노스님의 말이 맞다. 하지만 저만치 머무는 겨울빛이 교사시인에게 너무 빨리 다가오고 있다. 이대로 삶을 끝내기엔 너무 허망하다. 게다가 교사시인은 아직도 아이들을 위해 할 일이 너무 많다. 저 세상이라도 있다면 그곳에서 아이들에게 못다 한 꿈을 꼭 이뤄보련만.

선생과 아이들은 어머니와 갓난애처럼 한몸이다

"하루 종일 몸살에 온몸이 들쑤시는데
지금은 몇 교시 지금은 무슨 시간
학교 시간 대로 틈을 놓지 않고 지나가다
7교시 일과가 끝나고서야 마음이 놓이는데".(78쪽, '선생' 몇 토막)

윤재철 시인은 하늘이 내린 선생이다. "어쩌다 지독한 몸살을 만나 결근하던 날 / 미음도 제대로 넘기지 못하면서"도 학교에 있는 아이들 생각에 편히 쉬지 못한다. 선생과 아이들은 젖먹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처럼 잠시라도 떼놓을 수 없는 한 몸이라는 것이다. 까닭에 "깜빡 잠들었다" 눈을 떠도 "지금은 몇 교시 쉬는 시간"이 눈에 밟힌다. 

교사시인은 몸살을 심하게 앓고 있어도 아이들의 수업이 끝날 때까지 깊은 잠에 들지 못한다. 그렇게 아이들의 7교시 수업이 끝난 뒤 마음을 놓고 깊은 잠에 빠지면 이번에는 꿈속에서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1번부터 38번 아무개까지 / 하나 하나 번호 번호 / 얼굴이 지나가고" 그 아이들의 가정환경과 특기가 불쑥불쑥 떠오른다.


시인은 꿈속에서도 하늘이 내린 선생이다. 교사시인은 꿈속에서도 "누구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 누구는 컴퓨터 게임에 도사고 / 누구는 9시면 락카페 쟁반 들고 알바 나가겠구나", 온통 아이들 걱정뿐이다. 교사시인의 삶이 곧 아이들과 아이들 가정의 삶이고, 아이들의 삶과 아이들 가정의 삶이 곧 교사시인의 삶인 것이다.

교사시인의 아이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드러낸 시편들은 수두룩하다. "교복을 벗은 몸이 참으로 아름다워"(청춘)라거나 "학교가 너를 병들게 만들었구나"(겁먹은 송아지), "아이들아, 너희가 다 동백이다"(동백꽃 피는 학교), "쉬는 시간이면 왁자지껄 / 공부보다 즐거운 장이 선다"(매점) 등이 그러하다.

특히 아이들이 중간고사를 보느라 진땀을 빼고 있을 때 운동장에서 자연스럽게 사랑을 나누고 있는 비둘기를 바라보며 "아무 표찰도 시험도 없는 저 사랑을 / 나는 아이들에게 /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비둘기와 중간고사)라며 고민하는 교사시인의 마음은 너무나 아름답다. 발문을 쓴 문학평론가 김영호의 지적처럼 시인 윤재철은 "천생 선생"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시인 윤재철은 1953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1982년 <오월시> 동인에 참여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아메리카 들소>(청사, 1987) <그래 우리가 만난다면>(창비, 1992) <생은 아름다울지라도>(실천문학사, 1995) <세상에 새로 온 꽃>(창비,2004)이 있다. 산문집으로는 <오래된 집>이 있으며, 1996년 신동엽 창작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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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대한민국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82년 ‘오월시’ 동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85년 성동고 재직 시절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소설가 송기원, 시인 김진경 등과 함께 투옥, 해직되었다. 교직을 잃어버린 시인은 그때부터 전교조 창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출판사 대표를 맡고 있던 중 복직되어 다시 교단에 섰다.

1987년 첫 시집 《아메리카들소》를 펴냈다.
1996년 제14회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았다.
2015년 2월 정년으로 교직에서 물러났다.

 


시집


1987년 《아메리카들소》(청사)
1992년 《그래 우리가 만난다면》 (창비)
1995년 《생은 아름다울지라도》 (실천문학사)
2000년 《오래된집》 (내일을여는책)
2004년 《세상에 새로 온 꽃》 (창비)
2007년 《능소화》 (솔)

시인 황인숙, 고통으로부터의 자유

<김도언의 시인의 얼굴> 
(2015.09.09)

기본적으로 황인숙 선생님에게, 다른 것을 차별 없이 받아내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테다. 받아낸다는 것, 그것은 자신을 열어 보인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얼마나 괴로운지/나한테 토로하지 말라/심장의 벌레에 대해/옷장의 나방에 대해/찬장의 거미줄에 대해/터지는 복장에 대해/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인생의 어깃장에 대해/저미는 애간장에 대해/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치사함에 대해/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차라리 강(江)에 가서 말하라/당신이 직접/강(江)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강가에서는 우리/눈도 마주치지 말자
-〈강〉 전문, 시집 『자명한 산책』 수록

 

시인들의 시인

 

독자들이 좋아하는 시인이 있고, 평론가들이 인정하는 시인이 있고, 동료 시인들이 지지하는 시인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 세 부류의 시인은 모두 좋은 시인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다른 두 부류와는 달리 동료 시인들이 지지하는 시인은 언제나 예외 없이 좋은 시인이다. 그가 나쁜 시인일 가능성은 없다. 다시 말해 좋은 시인의 가장 보편적 특질은, 하나같이 동료 시인들의 지지와 존경을 받는다는 것이다. 백석과 김수영, 김종삼과 최승자 등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지금 내가 말하려고 하는 황인숙 시인 역시 동료 시인들로부터 지지와 사랑을 흠뻑 받고 있는 시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가 좋은 시인이 아닐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가장 자명한 증거일 것이다. 사실 언젠가부터 시인 하면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황인숙이다. 말하자면 시인의 아이콘과도 같달까. 그 이유는 과연 뭘까. 이 글은, 내가 짐작하고 있는 그 이유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시도일 공산이 크다.

 
나는 황인숙 시인을 개인적으로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2000년대 초반 샘터사에서 단행본 기획을 할 때 시인 조은 선생님을 만나는 자리에서 선생님을 처음 보았다. (평소 동경하던 시인의 실물을 보고 비현실적인 이물감에 사로잡혔던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정말 내 앞에 있는 사람이 황인숙 시인인가 몇 번이고 상기할 정도였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선생님의 산문집 두 권을 만들게 되었는데, 또한 그 인연으로 이제하 선생님, 고종석 선생님, 조용미 선생님 등과도 교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화가 이현 선생님과 염성순 선생님도,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점선 선생님도 황인숙 선생님 때문에 알게 되었다. 선생님과의 인연으로 알게 된 분들의 이름을 열거해 본 이유는, 성향이나 기질, 신분 같은 것들이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황인숙 선생님이 이들로부터 놀라운 정서적 유사성과 동질감을 이끌어내고, 그것을 전염시키기 때문이다. 이 말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기본적으로 황인숙 선생님에게, 다른 것을 차별 없이 받아내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테다. 받아낸다는 것, 그것은 자신을 열어 보인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아마도 황인숙 선생님의 마음속엔 타자에 대한 연민과 사랑, 그리고 이해가 잘 혼융된, 어떤 좋은 영적 태도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황인숙 선생님과 오누이처럼 지내는 고종석 선생님은 그것을 ‘기품’이라는 말로 간명하게 표현한 적이 있다.
 

“황인숙은 기품 있는 여자다. 기품이라는 말을 생각할 때. 내가 제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황인숙이다. 그는 누구 앞에서도 움츠러드는 법이 없고, 누구 앞에서도 젠체하는 법이 없다. 움츠러들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젠체하지 않는 것도 내면의 견결한 자기 긍정 없이는 힘들다. 그런 견결한 자기 긍정을 내면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황인숙은 귀족이고 아씨다.”

 
시인에게 기품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내 생각에 그것은 우선 자신의 고통과 비참, 비애를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자존심의 의지 같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의지는 이 세상에 대해 뒤틀려 있거나 닫혀 있지 않고 순정하게 열려 있을 때만 가능할 것이다. 분명 그 맑고 단아한 열정 같은 것이 바로 시인의 기품을 만드는 것일 테다.


나는, 시인으로서 선생님이 가지고 있는 이 맑고 귀한 열정을 증거할 만한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려고 한다. 나만 알고 있는 예쁜 동화 같은 이야기를. 2007년 2월 어느 날 있었던 일이다. 그 즈음, 한국은행은 천 원권 지폐의 신권을 발행하는데, 구권보다 사이즈도 작아지고 컬러의 톤도 밝아져서 보기에 매우 산뜻하고 예뻤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구권을 신권으로 바꾸는 바람에 품귀 현상까지 벌어졌다. 그즈음 어느 날 무슨 일인가로 선생님을 뵙고 헤어지려는 찰나, 선생님이 가만 있어보라면서 당신의 지갑을 여는 것이었다. 그러곤 빳빳한 천 원짜리 신권 대여섯 장을 꺼내더니 내게 건네주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도언, 이것 좀 봐. 어찌나 예쁜지 도언에게도 몇 장 주고 싶어.”

 
아, 그때의 선생님의 눈동자를 나는 지금도 어제 본 것처럼 기억하고 있다. 그 뿌듯하면서도 설렘 가득한 눈동자를 말이다. 선생님의 눈동자는 마치 예쁜 그림엽서나 카드 같은 것을 친한 이에게 나눠줄 때의 보람을 담은 듯, 한없이 투명하고 맑고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아름다움을 나누는 사람의 눈동자였다.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돈을, 예쁜 단풍잎처럼, 그림처럼 바라볼 수도 있다니.

이 에피소드가 말해주듯이 내가 아는 선생님은, 아름다움 앞에서 결코 머뭇거리는 법이 없다. 그것은 맑고 높은 곳을 향해 열려 있는 순정한 의지 때문에 가능한 것인데, 그게 바로 선생님만이 간직하고 있는 기품의 정체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기품으로 31년째 시를 쓰고 있다.

 
‘키가 큰 남자가 쓴 시 같다’라는 말

인터뷰 약속을 정하고 선생님을 뵙기로 한 곳은, 선생님이 사시는 동네에 있는 1980년대식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소박한 카페였다. 소나기가 쏟아지는 날씨였다. 선생님은 약속 시간보다 정확히 5분 일찍 도착하셨는데,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셨다. 뒤에 따로 쓰겠지만 나는 그 수상한 짐의 정체를 사실은 금방 알아차렸다. 
 

선생님이 숨을 좀 돌리자, 처음 시가 찾아왔던 순간이 언제였는지부터 물었다. 30년 넘게 시인 부락의 어떤 상징으로 살고 있는 이에게 시가 어떻게 다가왔던 것인지를. 선생님은 그게 마치 어제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스무 살 즈음이었던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때가 당신이 쓰고 있는 것이 시일지도 모르겠다는 자각이 들었던 최초의 순간이었다고. 그즈음 우연히 시 열 편 가량을 쓰게 되었고 그것을 친한 친구에게 보여줬는데, 그 친구의 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김도언 : 친구분한테 시를 보여주셨다고요. 친구분이 뭐라고 하셨어요? 문학적인 소양이 있는 분이었나요?


황인숙 : 내가 봐도 뭔가 근사한 것 같아서 내가 썼다는 말은 하지 않고, 이 시 어떠냐고 보여줬거든. 그런데 친구의 말이 굉장히 키가 큰 어떤 남자가 쓴 것 같다는 거야. 그런데 이상하게, 내가 굉장히 기분이 좋았어. 문학적 소양이 있는지는 모르겠고 그냥 친한 친구였는데 그런 말을 했어.


김도언 : 그러면 그때 친구분의 말씀을 듣고 기분이 좋으셨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그 이후부터는 틈나실 때마다 쓰신 거예요.
 

황인숙 : 아니, 한동안은 안 쓰고 그냥 책을 읽기만 했어. 책 읽는 건 정말 좋아했으니까. 그러다가 서울예대를 스물 네 살쯤인가 들어갔는데, 실기시험에 썼던 시를 선생님들이 좋게 보셨어. 그때 정현종 선생님이 2학년을 가르치고 계셨는데, 스무 살 무렵에 썼던 시들을 모아서 가져다 드렸더니 선생님이 굉장히 칭찬을 해주셨어. 그래서 완전히 고무됐지. 그때부터 등단하기 전부터 내가 진짜 천재 시인인 것 같은 느낌으로 살았지.(웃음)
 

김도언 : 그리고 몇 년 뒤에 등단하신 거네요. 습작 과정을 좀 설명해주실 수 있으세요? 저는 그게 정말 궁금하거든요. ‘천생 시인’인 것 같은 선생님과 ‘습작’이라는 말이 어딘지 좀 어울리지 않는데.


황인숙 : 등단 전후로 시를 열심히 쓰려고 노력했어. 왜냐하면 정현종 선생님이 그렇게 넘치게 칭찬해주셔서 다른 선생님들도 쟤가 정현종 선생이 잘 쓴다고 한 친구야? 그러면서 관심을 갖고 지켜보셨으니까. 그런 분위기에서 열심히 하려고 했어. 그런데 쓰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고 배운 바도 없고 그래서 좀 애매했지. 어떤 창작의 열정이나 욕망이 막 우러나서 쓴 적은 없었어. 그런데 내가 몇 편 쓰지도 않았는데 칭찬을 들었던 걸 보면, 한 가지 짚이는 게 있어. 내가 중학교 때부터 일기를 썼거든. 내가 문학 수업 같은 건 안 했다고 했지만 일기를 썼던 게 아마 글쓰기 연습이나 이런 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그러니까 아무것도 안 쓰다가 어느 날 갑자기 쓴 거라고 말할 순 없지.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책을 참 좋아했어. 시보다는 소설을 많이 읽었던 게 기억나네.
 

자신을 지워나가는 시인

 
무언가 단순하고 졸박한 대답이다. 선생님에게서 당신 자신을 말하게 할 때, 그게 무엇에 대해서건 화려하고 극적인 서사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걸, 이즈음에서 나는 터득한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인다. 선생님은, 자기가 좋아하는 외부의 것에 대해서는, 그러니까 좋아하는 사람이라든지, 동물이라든지, 어떤 책이나 날씨라든지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참으로 풍미 있고 다채롭게 말씀을 잘 하시지만, 당신 자신에 대해서 말할 때는 극도의 미니멀리스트가 돼버린다. 수사도 없고 과장은 더더욱 없다. 자신을 지우라는 신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제 같기도 하다. 자신을 지우는 것과 시를 쓰는 것은 과연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일까.

 

김도언 : 1984년도에 등단하셔서 올해 등단 31년이 되셨어요. 그동안 시집 여섯 권과 시선집 한 권을 내셨고요. 그런데 처음에 주목을 받은 시인도 개인적인 환멸이나 시인으로서의 회의와 절망, 이런 것 때문에 스스로 시인의 이름을 반납하기도 하는데, 선생님은 서른 해가 넘는 시간 동안 일관되게 시인의 삶을 살아오셨어요. 그런 것이 가능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황인숙 : 특별히 그런 건 없는 것 같은데. 시 쓰는 게 독립운동하거나 노동운동하는 것도 아니고, 각오가 필요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냥 살면서 별 의식이 없이 썼던 것 같아. 내가 그냥 되어가는 대로 살고, 되어가는 대로 쓰고 그러다 보니까 시집도 한 권 두 권 내게 되었어. 사실 글이라는 게 안 쓰고 사는 게 제일 편하잖아. 내가 세상에서 자그마한 이름이나마 얻은 게 시인인데, 요즘은 그조차도 허명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내가 너무 시 의식 이런 게 없구나 싶다는 생각도 들어. 시인으로서 부지런하지 못했던 셈이지.


김도언 : 선생님, 내가 시인이어서 참 다행이구나, 하고 느끼신 적은 없으세요? 시인에 대해 특별한 자부심이나 명예를 의식하신 적은 없으셨지만 그래도 시인이어서 다행이다, 하는 생각 말이에요.


황인숙 : 글쎄,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내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내게 어떤 미적인 태도를 갖게 해준 측면이 있달까. 내가 더 이상 젊다고 볼 수 없는데, 사회적으로 대우를 받는 전문직을 가진 적은 없지만, 시인이라는 것이 내겐 젊지 않은 시간도 견디게 해주는 직업 같기도 해. 다른 나라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우리나라에는 순수한 기쁨 같은 걸 느끼면서 사는 사람들이 적은 것 같아. 그러니까 정원을 가꾸는 기쁨이라거나 이런 거 말야. 아마도 내게 시는 그런 것 같아.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는 거.
 

김도언: 선생님의 하루 일상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궁금해요. 선생님은 매일매일 돌보시는 것들이 있잖아요.


황인숙 : 시인으로서의 일상이란 건 없는 것 같고, 내가 매일 길고양이 밥을 주잖아. 8~9년 된 것 같아. 그런데 2~3년 전부터 내가 결코 원치 않았는데 일이 두 배 이상 늘어났어. 적어도 마흔 군데 이상 밥을 주는데, 그건 정말 피할 수 없고 꼭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에 지켜나가고 있어. 내가 몇 달 전부터는 밤에는 끌고 다니는 카트를 써. 그 전에는 가뜩이나 행색이 노숙인 같은데 카트까지 끌면 정말 더 꼴불견이다 싶어서 안 했는데, 힘들어서 써봤더니 편리한 점이 많아. 특히 손이 자유로워지니까, 걷는 시간에 뭘 생각할 수 있고 메모를 할 수 있겠더라고. 앞으로도 기대가 돼. 최근 3년 동안에는 동아일보에 〈행복한 시읽기〉 연재를 했어. 그게 남들 보기에는 별 거 아닌 거 같아도 나는 모기 잡는데 도끼 휘두르는 격으로 머리를 꽁꽁 싸매고 며칠을 써야 하거든. 지금은 연재도 끝났지만.

 
김도언 : 선생님, 그럼 혹시 그런 생각이 있으세요? 직업이 없는 시인들의 무위. 아무 할 일이 없는 상태, 시간이 떠도는 상태, 그런 상태에 대한 시민으로서의 자책감이라거나 그런 거 있으세요? 내가 지금 아무런 할 일이 없는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 같은 거?
 

황인숙 : 아무런 할 일이 없는 적이 있을까. 내가 정말 쉰 살까지는 별 다른 일을 안 하면서 살았네. 그런데 그걸 지금에서야 다 갚는 거 같아. 나는 정신적으로 일하는 사람들한테는 아무 부채감 없어. 그런데 청소 미화원이라거나 행상이라거나 아무튼 그런 분들한테는 굉장한 채무감이 있지. 죄책감이 있어.
 

황인숙 선생님이 인터뷰를 하기로 한 장소에 들어올 때 싸매고 온 것. 그것은 바로 길고양이들에게 줄 사료다. 커다란 배낭으로 한가득이다. 저 무거운 걸 9년째, 겨울이건 여름이건 짊어지고 동네의 학대받는 배고픈 생명들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그것을, 청소를 하거나 행상으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분들에 대한 부채감을 만회하기 위해 자의식이 충만한 사람이 고안해낸 어떤 의식적인 고행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마도 지나친 상상일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선생님이 자발적으로 수행하는 이 고행이, 시인으로서 자신이 믿고 있는 어떤 숭고미를 지상에서 실행하기 위한, 양보할 수도 없고 양보해서도 안 되는 도저한 신념 같은 것으로 다가온다. 희생과 헌신이라는 의미까지 여기에 겹치게 되면, 이 신념은 그대로 한 시인의 숙명적 이콘(icon)이 되기도 하고.  
 

의식의 백지상태

 
김도언 : 이수명 시인이 요즘 ‘시집’을 통해서 90년대 시사를 둘러보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90년대 시인들의 특징을 공동체적 윤리에서 개인을 끄집어낸 거라고 이야기하더라고요. 그러면서 그 선구적인 작업을 한 시인으로 황인숙, 장정일 등을 꼽았어요. 그러니까 선생님이랑 장정일 시인은 90년대가 아니라 그 전에 등단을 했지만 90년대 시의 예비적 징후를 보여줬다는 거죠. 선생님이 등단하신 80년대가 전두환 정권 치하였고 개인주의가 많이 억압받던 시절이었잖아요. 그래서 많은 시인들이 문학을 저항의 수단으로 삼기도 했고 큰 목소리들이 문학을 통해서 많이 나왔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저는 선생님이 보여준 시가 참 이채롭고 경이롭게 보였어요.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가 궁금해요. 시대적 상황이나 사회현실과 괴리되어 있다는 비판은 받지 않았나요?
 

황인숙 : 비판,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거 같기도 한데(웃음) 나중에 생각해보면 내가 세상을 몰랐기 때문에 그런 시를 쓸 수 있었던 것 같아. 세상을 모르고 나 혼자 책이나 읽고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혼자 갇혀 살았으니까. 학교에 다닌 것도 아니고 직장에 다닌 것도 아니고 그냥 격리되어 있었다고 할까. 그런 영향이 있는 것 같아. 그렇다고 내가 내성적이거나 비사교적이거나 그런 성격은 아니야. 오다가다 사람들도 잘 사귀어. 그런데도 그 시절의 나는 아주 작은 차원의 사회라는 게 없이 살았던 거 같아. 잘 모르겠어. 아무튼 서울예술대학에 들어가면서 사회에 나온 셈이 되었고 그때부터 어렴풋이 사회가 보이고 그랬으니까. 나는 그게 내 시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고 보는데, 내가 등단했을 때는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시가 득세하는 시대였거든. 그런데 내가 쓰는 시라는 게 초상집 같은 데 가서 노래를 흥얼거리는, 그러니까 음풍농월 같은 의식이 든 거야. 나는 그런 시밖에 쓸 도리가 없었어. 어떤 의식의 백지상태에 있었다고 할까.

 
김도언 : 그래도 선생님은 등단과 함께 계속해서 주목을 받았고, 꾸준한 평가의 대상이 되었고, 문지라는 매우 문학주의적인 출판사에서 계속 시집을 내셨어요. 나름대로 시인으로서 순탄한 길을 걸으신 거죠. 그런데 제 질문의 요지는 그런 안정적인 입지를 가지고 시를 쓸 때 시적 긴장이 해이해질 우려는 없나 하는 거예요.


황인숙 : 시적 긴장은 이런다고 해이해지고, 저런다고 괜찮고 그런 게 아니라 각각 자기 정신적인 태도의 문제인 것 같아. 어떤 시인이 좋은 평을 안 받았다고 해서 긴장해서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반대도 아니지. 나는 그 점에 대해서는 시인으로서 굉장히 행운이라고 생각하는데, 열광적인 주목이나 각광을 받은 적도 없지만 그래도 시를 쓰면 발표는 할 수 있을 정도의 평가는 받았거든. 일종의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 같아. 

 
김도언 : 선생님은 독신이시잖아요. 시인에게 혼자 산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나요? 결혼해서 가족을 이루고 사는 삶, 그러니까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체험에서 오는 시인의 시선이나 깊이 같은 것도 있을 수 있잖아요.
 

황인숙 : 결혼생활이나 가정생활을 통해 체감되는 보편적인 감정은 주위에 숱하게 널려 있는 것 같은데. 약간의 상상력이랑 정서, 감응 능력만 있으면 보편성을 얼마든지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해. 가족이라, 음, 거기서 오는 고통이나 비애가 너무 절절히 스며들 것 같아.

 
김도언 :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엄마의 입장이 되어 본 시인이 엄마의 관점에서 삶과 사회를 바라보고 거기서 뭔가를 추출해서 시를 쓰는 것이 엄마 입장이 되어보지 않아도 가능하다는 말씀이시죠?
 

황인숙 : 그건 안 가능하겠지. 그런데 그건 그거 하나잖아. 그런데 그거 하나를 위해서, 그런 결정적이고 운명적인 경험을 해야 할까. 지금 도언이가 말한 그런 종류의 시는 세상에 그냥 단 한 편이면 돼. 내가 놓치는 게 아닌가 싶지만, 사실 알고 보면 세상에 놓치는 게 얼마나 많은데.



‘전략 없음’이라는 시인의 전략
 

앞서 얘기했지만 황인숙 선생님은 동료 시인들이나 지인들에게 인기가 많다. 물론 그것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고 선생님에게 베풀고 어루만지는 특별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하러 오면서도 선생님은 사과 세 알을 싸가지고 와서 선물로 주셨다.) 아닌 게 아니라 선생님은 모든 것을 다 나눈다. 소유하고 독점하는 것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믿는 듯하다. 아, 소유하고 독점하는 게 하나는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나는 시로 쓰지 않은 좋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말할 때의 시다. 그러니까 그 절대적 숭고만을 선생님은 독점한다. 어쨌거나 선생님은 자타가 인정하는 좋은 사람인 동시에 좋은 시인이다. 시인의 사회적 인격과 문학성. 문학이 사회적으로 소비된 이후 이 문제는 매우 잦은 논쟁의 주제였다. 선생님의 말을 듣고 싶었다. 
 

김도언 : 선생님을 뵈면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거지만, 상당히 정도 많고 사람들에게도 관대하신데, 저는 그런 것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엄격하지 않거나 자기 고통을 통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선생님이 쓰신 시 중에서 ‘강’이라는 시를 보면 그런 게 분명히 느껴져요. 선생님은 다른 사람 모르게, 자기 자신과 치열하게 사투를 벌이고 있다는 걸요. 그런데 보통 문학적 인격과 사회적 인격이 다를 수 있잖아요. 좋은 사람이 좋은 시를 쓰는 것도 아니고, 시는 좋은데 사람은 나쁜 사람일 수도 있고. 이런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황인숙 : 시인에게는 사람이 되는 거보다 시인이 되는 게 더 행복하겠지. 시인이 되기 전에 사람이 되라는 이런 말은 바보 같은 말인 것 같아. 아무튼 좋은 사람이 되는 건 각자 개인적으로 선택할 일이고 시인은 기본적으로 시를 잘 써야지. 그런데 좋은 시, 나쁜 시를 떠나서 시에서 기운 같은 게 느껴지지 않나? 내가 아는 어떤 시인이 있는데, 이 사람은 좀 이기적이고 다른 사람한테 폐도 끼치고 그런 사람이야. 그런데, 언젠가 보니까 시가 예전보다 좋아졌던 거야. 그때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어. 어쩌면 악이거나 악에 유사한 그런 성향도 시에 도움이 될 수 있고. 그런 걸로 인한 사회의 반응이 있을 거 아니야. 자기의 잘못에 대한 사회의 반응으로 따돌림을 당한다거나 그런 게 있거든. 물질적으로는 이익이 있을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상처가 있을 거 아니야. 그런데 이런 게 이 사람한테는 좋은 시를 쓰는 자양이 됐을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 그 사람이 그런 경우고. 선한 기운도 힘이 될 수 있지만, 그런 것도 이런 저런 화학작용을 일으켜서 좋은 시를 쓰는 데는 좋은 조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시 자체가 무슨 선악, 도덕 이런 건 아니잖아. 그냥 미적으로 훌륭하면 되는 거니까.

 
김도언 : 제가 선생님을 뵐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자유로운 게 느껴지거든요. 그리고 선생님은 언제나 사람들을 편견 없이 대하시는 거 같아요. 그 사람의 직업, 사회적 계급 그런 거 신경 안 쓰시고. 그런데 편견 없이 공평하게 사람을 대한다는 게 쉽지 않잖아요. 그러려면 콤플렉스 같은 게 없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혹시 선생님은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지 않은 콤플렉스가 있으세요?



황인숙 : 콤플렉스인데 진짜 말하지 않은 게 있다면 끝내 말하지 않을 것이고. 글쎄. 별 다른 건 없는 거 같네.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않은 건 콤플렉스가 아니라 그건 그냥 불편함과 창피함 같은 거야. 콤플렉스라기보다 닥친 일이야. 닥친 일. 잠깐 잊고 있었는데, 출판사에 넘겨주기로 한 그 많은 원고는 어떻게 줄 것인가. 억장이 무너지네.(웃음)
 

김도언 : 이번엔 좀 다른 질문을 드려볼게요. 문학의 위상이라는 게 계속 변하잖아요. 사회적인 변화에 영향을 받으면서 말이죠. 문학이 70~80년대만 해도 시대적인 어젠다를 끌고 가고, 제시했었잖아요. 시인들도 시대적인 교사 역할을 했었고요. 그런데 90년대와 2000년대의 문학적 분위기가 다르다는 거죠. 그런 것과 관련해서 선생님이 시를 쓰면서 의도한 어떤 전략 같은 게 있는지.


황인숙 : 내 시에서는 전략 같은 건 없어. 특히 시를 쓰는 건 좀 고리타분한 걸로 느껴지잖아. 나 어렸을 때는 발레를 한다거나 피아노를 한다거나 그런 건 세련된 건데, 요즘은 시를 쓴다고 하면, 어린이가 창을 배우는 그런 느낌을 가지는 거 같아. 내가 별다른 시인의 의식 같은 걸 가지지 않고 살았다고 했잖아. 그건 능력이 없는 것이기도 해. 여유가 없는 것이기도 하고, 정신이 없는 것이기도 해. 시의 위상은 굉장히 낮아지고, 시집도 진짜 안 팔리는 시대지. 내 조금 앞 세대인 김정환 시인만 해도 십만 부가 나갔다고 해서 내가 그 말 듣고 엄청 놀랐거든. 요새는 시집이 그렇게 팔릴 수가 없지. 그런데 너무 이상한 게 있는데. 그렇게 독자도 없고, 안 팔리는데 시는 굉장히 좋아졌거든. 젊은 시인들. 뭐, 진은영이니 김소연이나 이현승이나 김언이나. 나는 그것이 참 중요한 걸 말하고 있다고 생각해. 불리한 시대적 상황에서 시가 홀로 고군분투하는 것. 그게 시 자체의 힘 같은 게 아닐까 생각이 드는 거야.

 
자유로운 자의 꿈

 
황인숙 선생님의 상징적인 페르소나는 잘 알려진 대로 고양이다. 등단작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에서부터 고양이가 등장하니까. 선생님과 동고동락하는 란아, 복고, 명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세 마리의 고양이는 황인숙 선생님의 행복한 반려다. 고양이는 “숨탄 연약한 것”에 대한 선생님의 타고난 연민을 가장 극적으로 강력하게 자극하는 존재다. 그리하여, 시인으로 하여금 매일매일 동네 사람들의 눈총을 받아내며 길고양이 밥을 주러 다니게 한다. 선생님은 당신이 돈을 많이 벌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사람들을 시켜서 길고양이 밥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 선생님이 정말 돈을 많이 벌어서 길고양이 밥을 주는 사람들의 ‘고용주’가 되는 일은 과연 가능할까. 가능했으면 좋겠다. 이 세계는 그런 좋은 고용주도 가져보아야 하니까.
 
김도언 : 고양이를 언제부터 좋아하셨어요?


황인숙 : 고양이를 싫어한 적은 없어. 그런데 옛날에는 강아지랑 더 친했었는데, 지금은 고양이랑 친하게 된 거지.

 
김도언 : 선생님은 길고양이들에게 매일 밥을 주는데, 고양이가 선생님한테 뭔가를 주기도 하나요?

 

황인숙 : 고양이는 그냥 바라보고 있으면 무언갈 항상 줘. 그래서 난 집에서 고양이 키우는 거 추천해. 그런데 길고양이 돌보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야. 밥을 들고 다니는 게 너무 무겁고 많은 시간을 써야 하고. 길고양이를 돌보는 ‘캣맘’들은 정신 치료를 주기적으로 받아야 할 것 같아. 캣맘들을 연민에 중독된 존재로 보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은데, 중독이 안 돼. 볼 때마다 새로운 고통인 거지. 내성이 생기지도 않고. 그리고 고양이는 어떤 상징 같은 것도 아니야. 상징이라고 하기엔 엄청 예쁘거든!


개인적으로 내게 시인 황인숙은 ‘자유로운 자’, 좀 더 부연하면 ‘고통에서 자유로워진 사람’으로 다가온다. 이때의 자유는, 분별력과 용서, 초월과 탈속 같은 이미지의 호위를 받으면서 시인의 이미지를 고유하고 매력적인 어떤 것으로 만든다. 황인숙 선생님은 걸어서 올라가기 힘든, 해방촌 고지대의 옥탑방에서 고양이 세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매일매일 어떤 사역처럼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길고양이의 소외와 고통을 마주하러 다닌다. 이것이 시인이 짜둔 생활의 전선이다. 결코 풍요로울 수 없는 삶의 조건이다. 하지만, 아무도 황인숙 시인으로부터 남루나 곤핍을 발견해내지 못한다. 그것은 시인이 그렇게 보이지 않도록 위장을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사뿐히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새로 나온 천 원짜리 지폐를 예쁜 꽃잎처럼 나눠주던 것처럼, 천진하고 맑은 영혼의 명령대로 그가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그는 나쁜 시인일 가능성이 절대로 없다.

 
황인숙은 1958년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다.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가 당선되면서 시단에 데뷔했고, 동서문학상(1999)과 김수영문학상(2004)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1988), 『슬픔이 나를 깨운다』(1990),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1994),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1998), 『자명한 산책』(2003),『꽃사과 꽃이 피었다』(2013)이 있다. 산문집으로는 『우다다 삼냥이』(2013), 『해방촌 고양이』(2010), 『인숙만필』(2003) 등이 있고, 소설 『도둑괭이 공주』(2011)이 있다.

 

길 위의 식사”, 이재무 시인과의 인터뷰

 

 

홍수연기자 2021-01-20

시인뉴스 포엠

 

 

 

 

제27회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하신 작품「길 위의 식사」로 인터뷰의 문을 열기로 한다.

 

 

 

길 위의 식사

 

 

사발에 담긴 둥글고 따뜻한 밥 아니라

 

비닐 속에 든 각진 찬밥이다

 

둘러앉아 도란도란 함께 먹는 밥 아니라

 

가축이 사료를 삼키듯

 

선 채로 혼자서 허겁지겁 먹는 밥이다

 

고수레도 아닌데 길 위에 밥알 흘리기도 하며 먹는 밥이다

 

반찬 없이 국물 없이 목메게 먹는 밥이다

 

울컥, 몸 안쪽에서 비릿한 설움 치밀어 올라오는 밥이다

 

피가 도는 밥이 아니라 으스스, 몸에 한기가 드는 밥이다

 

(2012 제7회 소월시문학상 수상작품)

 

 

선생님의 수상소감 중 일부를 발췌, 소개한다.

 

 

 

“나는 우리 근현대 시사의 가장 중요한 문학적 자산인 서정의 전통성을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자세로 내화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진화하는 건강한 서정’입니다. 재래 문법에 안주한 고답적 서정이 아니라 변화하는 시대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는 창조적 서정을 계속하여 선보이고 싶은 것입니다. 형식과 내용의 기계적 조화가 아니라 긴장하고 갈등하는, 기우뚱한 조화와 균형을 꿈꾸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월을 승계하는 일이며 살리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소월의 부활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2012 제27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시인 시선집『길 위의 식사』, p.196)

 

 

우리들의 식사는 “길 위의 식사”다. 우리들의 식사는 어제도 오늘도 길 위에 있다. 내일도 여전히 길 위에서 이루어 질 것이다. 이육사문학상, 윤동주문학대상, 소월시문학상, 난고문학상, 편운문학상, 풀꽃문학상, 송수권시문학상, 유심작품상 등을 수상하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정 시인이신 선생님께서 “선 채로 혼자서 허겁지겁” 드신 밥, “길 위에 밥알 흘리기도 하며”, “반찬 없이 국물 없이 목메게” 드신 밥, “으스스, 몸에 한기가 드는” 쓸쓸하고 서럽고 눈물겨운 밥은, ‘진화하는 건강한 서정’은, 선생님의 시를 통해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지 시작(詩作) 40여년의 발자취를 감히 따라가 보고자 한다.

 

 

 

 

《대표시》

 

 

감나무

 

 

감나무 저도 소식이 궁금한 것이다

그러기에 사립 쪽으로는 가지도 더 뻗고

가을이면 그렁그렁 매달아 놓은

붉은 눈물

바람결에 슬쩍 흔들려도 보는 것이다

 

저를 이곳에 뿌리박게 해놓고

주인은 삼십 년을 살다가

도망 기차를 탄 것이

그새 십오 년인데....

감나무 저도 안부가 그리운 것이다

그러기에 봄이면 새순도

담장 너머 쪽부터 내밀어 틔워보는 것이다

 

(시집『몸에 피는 꽃』)

 

 

 

걸어 다니는 호수

 

 

소의 커다란 눈은 호수 같다

그렁그렁 눈물이 고여 있는 호수

소가 눈 들어 앞산을 바라보니 앞산이 호수에 잠긴다

눈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구름이 잠긴다

소가 꿈벅, 하고 눈을 감았다 뜨니 산이 눈을 빠져 나오고

소가 또 꿈벅, 하고 눈을 감았다 뜨니 구름이 빠져 나온다

소는 느리게 걸어 다니는 호수를 가지고 있다

 

(시집『슬픔은 어깨로 운다』)

 

 

 

 

밥알

 

 

갓 지어낼 적엔

서로가 서로에게 끈적이던

사랑이더니 평등이더니

찬밥 되어 물에 말리니

서로 흩어져

끈기도 잃고

제 몸만 불리는구나

 

(시집『몸에 피는 꽃』)

 

 

 

•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정말 반갑습니다. 미소와 눈웃음이 넘 매력적이세요.(웃음) 제27회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하셨을 때, 문태준 시인님의 심사평을 옮기겠습니다.

 

(이재무 시인의 시는 아무런 특권을 갖지 못한 서민들이 발 딛고 사는 격랑의 현실에서 태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의 시는 줄곧 글썽이는 가난 곁에 있어왔다. 이른바 그가 스스로 지칭한 우악스런 ‘생활의 손아귀’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의지가 그의 시의 육성이다.)

 

 

선생님의 시집에서 아프게 드러내 보이시는 ‘우악스런 생활의 손아귀’, 즉 가난에 허적이던 선생님의 유년시절과 학창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어머님께서도 가난으로 인하여 48살의 젊은 나이에 간경화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연년생 동생분의 이야기도

 

들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엄니

 

 

마흔여덟 옭매듭을 끊어버리고

다 떨어진 짚신 끌며

첩첩산중 증각골 떠나시는규

살아생전 친구 삼던 예수 따라

돌아오리란 말 한마디 없이

물 따라 바람 따라 떠나시는규 엄니

가기 전에 서운한 말

한마디만 들려달라고 아부지는 피 울음 쏟고

높은 성적 받아왔으니

보아달라고 철없는 막내는 몸부림을 쳐유

보시는규, 모두들 엄니에게 못 갚은 덕

한꺼번에 풀고 있는 이웃들의 몸 둘 바 모르는 몸짓들인데

친정집 빚 떼먹은 죄루다

이십 년 넘게 코빼기도 안 보이던

막내 고모도 갚지 못한 가난

지 몸 물어뜯으며 저주하구유

시집오면서 청상과부 올케에게

피눈물로 맡겨놨다던 열 살짜리 막내 삼촌도

어른 되어 돌아오셨슈

보시는규, 엄니만 일어나시면

사는 죄루다 못 만난 친척들의

그리움 꽃 활짝 필 흙빛 얼굴들을

보시구서도 내숭 떠느라 안 일어나시는규

 

지척거리며 바람이 불고 캄캄한 진눈깨비 몰려와

마루 끙끙 울리는 동지 초이틀

성성하던 엄니의 기침 소리는

아직 살아 문풍지를 흔드는데

다섯 마지기 자갈논 가쟁이 모래밭 다 거둬들이던

그 뜨겁던 맨발 맨손 왜 자꾸 식어가는규

가뭄 탄 잡초 같은 엄니의 입술 보며

크고 작은 동생들 올망졸망 함께 모여서

지청구 한마디가 듣고 싶은디

왜 시종 말이 없는규

궂은 날 지나 갠 날이 오면

아들딸네 집 두루 돌아댕기며

손자 손녀들 재롱 시중드는 게 소원이라시더니

그 갠 날 지척에 놔두시고선

끝끝내 아까워 못 꺼내시던

한복 곱게 차려입고서

진주댁이 쥐어준 노잣돈 쥐고

기어이 물 따라 바람 따라 떠나시는규 엄니

 

 

(시집『섣달그믐』)

 

 

간경화꽃

 

 

 

농약에 과로에 찌든 가슴은

간경화꽃의 비료입니다

설움에 원한에 멍든 가슴은

간경화꽃의 거름입니다

증각골 가득 간경화꽃이 피었습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지치고 힘 부친 가슴은

무엇이든 투정 없이 먹어댑니다

지금, 증각골 가득

섬뜩한 간경화꽃이 피었습니다

 

(시집『섣달그믐』)

 

 

재식이

 

 

아비의 평생과 죽은 엄니의 생애가 고스란히 거름으로 뿌려져 있는

다섯 마지기 가쟁이 논이 팔린 지

닷새째 되는 날

품앗이에서 돌아온 둘째 동생 재식이는

한동안 잊었던 울음 쏟고 말았다

맷돌 같은 손으로 흘러넘치는 눈물 찍으며

대대손손 가난뿐인 빛 좋은 개살구의

가문의 기둥 찍고 찍었다

동생의 아이고땜으로

“정직하게 성실하게 살자”

가훈이 덜컹 마루 끝으로 떨어지고

동네 허리 감싸 안은 야산도

함께 울었다 여간한 슬픔

끝 모를 절망의 늪에

온몸 빠졌을 때도, 눈물에 인색하면서

선웃음 잃지 않던 뚝심의 동생이

썩은새로 무너지며 터뜨린 눈물로

텃밭 푸성귀들을 자지러지게 흔들던 날

예순의 머슴 아비도

죽은 엄니 초상화 꺼내 들고

아끼던 눈물 한 방울

방바닥으로 굴리셨다

팔려버려 지금은 남의 논이 된

그 논에 모를 꽂고 온 동생의 하루가

내 살아온 부끄러운 나날에

비수 되어 꽂히던 달도 없던 그날 밤

건넛집 흑백 TV 브라운관 뛰쳐나온

프로야구의 들끓는 함성이

허름한 담벼락

마구 흔들어대고 있었다

 

(시집『섣달그믐』)

 

 

• 시인은 시로써 말하는 게 좋은데 인터뷰 형식을 따를 수밖에 없으니 췌언을 보태면, 저희 세대(베이비붐)의 유년은 누구나 엇비슷한 토대와 환경에서 나고 자랐지요. 절대적 가난과 궁핍 속에서도 천진과 무구를 잃지 않았던 시절 말입니다. 저에게 고향은 상반된 이중적 의미가 있습니다. 도피하고 싶은 욕망과 근원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장소와 시간이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도 과거의 파편들은 계통 없이 수시로 출몰합니다. 오늘 현재는 오지 않은 미래의 전사이고 지나간 과거의 후사입니다. 그러니까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교차로인 셈입니다. 현재에 무의도적으로 개입하는 과거의 조각들로 인해 내 삶은 매순간 다르게 구성됩니다. 요컨대 출몰하는 과거로 인해 나는 새롭게 구성되어 다시 태어납니다. 이럴 때 과거는 소멸이나 망각이 아니라 생성이나 창조의 원인 혹은 근원이 됩니다.

 

 

‘재식이’는 연년생 동생인데 결혼을 앞두고 교통사고를 당해 이른 나이에 ‘火, 水, 地, 風’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동생은 지금도 제 가슴에 아픈 가시로 남아 있습니다. 동생은 가정 형편 때문에 스스로 고교진학을 포기했고,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에서 몇 년 동가숙서가식하다가 고향에 돌아와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왔는데 한참 형편이 나아지려 할 즈음에 결혼을 앞두고 불의의 사고를 만났습니다. 그러니까 동생은 제게 갚을 길 없는 부채만을 안겨주고 떠난 셈입니다.

 

 

 

• 선생님의 시집을 읽으면 참 많이도 울먹이는 선생님을 뵐 수 있습니다. 모든 시인들이 그러하겠지만 유난히 한이 많으신 분이라는 생각입니다. 시를 쓰시게 된 계기, 배경을 들려주실까요?

 

 

• 헝가리 문예 비평가 게오르크 루카치의 말을 빌리면 시대적 상황이나 개인의 전기적 생애가 미학적 형식을 불러들일 때 시인과 작가가 탄생한다 하였는데 저의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저는 누구들처럼 문학 청년기의 체험이 없습니다. 살다보니 우연히, 거짓말처럼 시를 쓰고 있었습니다. 제가 최초로 쓴 시는 위에서 소개되고 있는 <엄니>인데 이 시는 군 제대 후 복학(계절학기)을 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늦가을, 엄니를 장지에 묻고 돌아와 부의록에 쓴 것입니다. 이후 틈틈이 시가 찾아왔습니다. 이렇듯 저는 파란만장, 우여곡절, 요철의 굴곡진 생애가 어느 날 문득 미학의 형식을 불러와 운명처럼 시의 인생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몰래 온 사랑

 

 

 

밤사이 비가 다녀가셨다

우리가 잠든 사이 도둑처럼 오셔서 산과 들을 깨끗이 쓰고 닦고 가셨구나

 

나는 이렇게 몰래 다녀간 것들이 좋다

 

몰래 온 비

몰래 온 눈

몰래 온 사랑

 

몰래 와서는 존재의 흔적을 남기고 가는 것들

 

몰래 들어와 내 안에서 기숙하는 사랑아!

 

 

올 때처럼 갈 때에도 몰래 가거라

 

(시집『데스밸리에서 죽다』)

 

 

 

제부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거리 말인가?

대부도와 제부도 사이

그 거리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손 뻗으면 닿을 듯, 그러나

닿지는 않고, 눈에 삼삼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깊이 말인가?

제부도와 대부도 사이

 

가득 채운 바다의 깊이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그리움 만조로 가득 출렁거리는,

간조 뒤에 오는 상봉의 길 개화처럼 열리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 말인가? 이별 말인가?

하루에 두 번이면 되지 않겠나

아주 섭섭지는 않게 아주 물리지는 않게

자주 서럽고 자주 기쁜 것

그것은 사랑하는 이의 자랑스러운 변덕이라네

 

(시집『위대한 식사』)

 

 

 

백련사 동백꽃

 

 

동백나무들은 장애수障碍樹였다

암 병동 환자들처럼 하나같이 괴롭고 불편한 육신들

성긴 가지끼리 깍지를 껴,

 

서늘한 그늘 드리우고

임종 직전 꾸역꾸역 환자가 토해내던 피

뭉클뭉클 붉게 피우는 꽃숭어리들,

지병 안고 사는 자들의 소리 죽인 통곡으로

체한 듯 속이 먹먹하다

추추가 만든 미미, 추사 김정희 서체를 닮은,

백련사에 가지 말았어야 햇다

봉해놓은 과거의 매듭 풀리고 방 안 가득

질펀하게 울음 쏟아붓는,

귀양에서 풀려나 다시 몸과 마음 꽁꽁 묶어오는 것들

지독히 불운한 인연들,

아름다운 사랑은 모두 속 붉은 병이었다

 

(시집『저녁 6시』)

 

 

 

•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시편들을 참 많이 가지고 계시고, 선생님의 시편들은 독자들에게 널리 읽혀지고 있습니다. 저는 특히「백련사 동백꽃」의 마지막 구절, “아름다운 사랑은 모두 속 붉은 병이었다”에 깊이 공감하였습니다. 교사로 재직하고 계신 사모님과는 어떻게 만나셨는지요?

 

 

• 아내는 전교조 1세대 교사였습니다. 1980년 후반 명동성당에서 전교조 교사들이 단식 농성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대학 졸업 후 교사를 하고 싶었으나 대학 재학 시 교육 무크지 <<민중교육>>誌에 르뽀 <교사 임용 이대로 좋은가?>를 상재하는 바람에 블랙리스트에 올라 교사 임용이 어렵게 되어, 지방에서 상경하여 서울시 마포구에 위치한 문인단체 <<민족문학 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의 상임간사 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후, 진보적 성향의 출판사 <<청사>>에서 편집장 일을 하는 한편 ‘작가회의’ 시분과 부위원장 직을 맡고 있었는데 몇몇 시인들과 함께 교사들을 위로하고자 성당을 찾아가 지지 시낭송을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아내를 만났고 결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고무친에 적수공권이었던 처지라 처가 쪽에서 반대가 심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묵 이야기

 

 

 

1

 

멱을 감다가 가재를 찾아 골짜기를 두 팔 두 다리 아프게 훔치다 배가 출출해지면 간 큰 놈들이 해오는 참외 수박 서리로 배를 채우고 우리들은 맨입 맨손으로 집에 가기가 허전하고 죄스러워서 이제 일과의 하나가 되어버린 상수리나무 숲으로 가을 양식을 벌러 가야 했다 주인인 재정이 할아버지의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조무래기 몇을 보초로 세워놓고 머리통보다 두 배나 세 배 더 큰 돌을 머리 위로 세워 들어 나무의 허리께를 향해 던졌다 자지러지게 팔다리를 흔들며 나무가 울고, 싹 꿈꾸며 땅 그리워하던 다 익은 열매들은 떨어지면서 깔깔깔 웃어댔다 빵병 앓는 머리통에 버짐 핀 얼굴 위에 그때마다 밥벌이에 바쁜 왕텡이 식구들이 소낙비로 쏟아지는 총알 같은 열매 사이를 뚫고 필사적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우리들은 적을 만난 병정들처럼 잽싸게 엎드려 자세로 숨을 죽이고 동정을 살펴야 했다 수색마친 벌들이 윙윙거리며 그들의 진지로 돌아가는 시간이 천 년처럼 길고 아득했다 언뜻, 밀린 숙제가 떠오르고, 선생님의 회초리가 아프게 다가오고, 술 취한 당숙의 뒤켠이, 장에 간 엄니가 그새 보고 싶고......

 

 

2

 

여기저기 우리 동네의 앞날처럼 시체로 널브러진 열매들이 들뜬 손을 부르면, 날아간 벌들의 꽁무니에 가을 공판장 술 취한 어른들의 손짓 발짓으로 네에미시팔 욕설을 실컷 퍼붓고, 질세라 졸라맨 허리띠 다시 추슬러 런닝구가 불룩하도록 열매를 주워 담았다 그해 여름 내내 손등 발등에 훈장처럼 빛나는 상처가 늘어갈수록 장독대의 항아리 가득 열매가 부어졌고, 그것으로 엄니들은 묵 빚어 가을 양식을 삼고 더러는 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시집『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

 

 

 

서울 오는 길

 

 

막차가 떠났다 뽀얀 먼지가 일고

나이 든 누이와 막내

품앗이 마치고 집으로 가던

아낙들 서넛

저녁 바람에 고즈넉이 흔들리는

미루나무와 나란히 서서

오래도록 손 흔들어주었다

멀리, 사립에 쪼그려 앉아

어머니 누워 계신 먼 산 보며

아버지 청자담배 피워 무셨고

남녘서 날아온 새 한 마리,

가난에 매 맞고 죽은

둘째 동생 재식이와의 추억이

솔잎으로 돋아나는

서편 숲으로 가뭇없이 사라졌다

아리랑 부르며 울며 넘던 고갯길을

숨 가쁘게 차가 달렸고

인가의 불빛은 꽃잎처럼 피어나는데

철들어 품은 기다림 그리움은

 

멀고 아득하기만 해서

마음의 심지 타오르는 희망의 등잔불

바람 앞에 언제나 서럽고 위태로웠다

마을 사람들 마음의 손이

꽁꽁 동여맨 간절한 기구의 보따리

허리에 차고

평생을 가도 가닿지 못할

그러나 기어이 가야만 하는

멀고 험한 길 가며

바닥을 잊은 가슴샘에서

솟는 눈물은 또 얼마나 퍼올려야 하는 것인가

멀미가 일어

달게 먹은 점심의 국수 가락 토해내면서

서울 오는 길

고향은 끝내 깍지 낀 내 몸

풀지 않았다

 

(시집『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

 

 

• 선생님의 시집을 읽으면서 아련한 그리움으로 섧기도 하였고 애잔하여 저도 모르게 눈물을 닦기도 하였습니다. 제1시집(『섣달그믐』)과 제2시집(『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은 시로 엮은 자전적 소설처럼 읽힙니다.

 

 

• 제 시적 이력은 크게 세 번의 변화를 겪게 되는데 첫 시집 <<섣달그믐>>, 두 번째 시집 <<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 세 번째 시집 <<벌초>> 등은 전반기에 속한 것들로서 주로 고향에서의 유년, 가난, 가족서사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네 번째 시집 <<몸에 피는 꽃>>에 와서야 서울 생활에서의 체험이 우러나기 시작합니다. 이후 생태학적 세계에 몰두하다가 최근 들어서는 실존적 범주로 시의 관심이 이동하게 됩니다. 저는 의도와 계획을 가지고 시를 쓰지 못하는 체질입니다. 그때, 그때 대상과 세계에 대한 순간적 감응에 시의 몸을 맡기는 쪽입니다.

 

저는 제 나날의 구체적 일상에서 시의 소재를 주로 구하는 편입니다. 일종의 ‘생활의 발견’이랄까? 리얼리즘의 기율에 충실한 편이지요.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부지불식간 모더니즘의 경향을 띄기도 합니다. 아마도 몸으로서의 체험이 줄어든 대신 독서 편력이 가져다 준 결과 때문일 텐데 이것으로 시의 우열을 결정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내가 생활에 지고 온 날 늦도록 전전반측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면 머리맡으로 어머니가 찾아오셔서 달아오른 이마를 짚고 축 처진 어깨를 두드리신다. “얘야, 괜찮다, 아직은 괜찮다.” (2012 제27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시인 시선집 『길 위의 식사』, P. 219)

 

 

 

깊은 눈

 

 

마을회관 한 구석 고물상 기다리며

한 마리 늙고 지친 짐승처럼 쭈그려 앉은,

흙에서 멀어진 적막과 폐허를 본다

젊어 한때 쟁기가 되어 수만 평 논 갈아엎을 때마다

무논 젖은 흙들은 찰랑찰랑 얼마나

진저리치며 환희에 들떠 바르르 떨어댔던가

흙에 생 담궈야 더욱 빛나던 몸 아니었던가

논일 끝나면 밭일, 밭일 끝나면

읍내 장터에, 잔치 집에, 떡 방앗간에, 예식장에, 초상집에

공판장에, 면사무소에, 군청에, 시위 현장에

부르는 곳이면 가서 제 할 도리 다해온 그였다

눈 많이 내렸던 그해 겨울밤 만취한 주인 실고 오다가

멀쩡한 다리 치받고 개울에 빠져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고

저 또한 팔 다리 빠지고 어깨와 허리 크게 상하기도 했던

돌아보면 파란만장한 노동의, 그 오랜 시간을

에누리 없이 오체투지로 살아온 그가 오늘은

바람이 저를 다녀갈 때마다

저렇듯 무력하게 검붉은 살비듬이나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몸의 기관들 거듭 갈아 끼우며

겨우 오늘에까지 연명해온 목숨 아닌가

올 봄 마지막으로 그가 갈아 만든 논에

실하게 뿌리내린 벼이삭들 달디 단 가을 볕

쪽쪽 빨아 마시며 불어오는 바람 출렁, 그네 타는데

때 늦게 찾아온 불안한 안식에 좌불안석인 그를

하늘의 깊은 눈이 내려다보고 있다

 

(<제1회 윤동주 문학대상> 수상작품)

 

 

• 저는 시인은 신들린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선생님처럼 선생님의 시야에 들어오는 무엇이든 낚아채어서 시를 쓰실 수가 있으실까요? 신들렸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만약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선생님의 신은 어떤 존재일까요?

 

 

• 하하하, ‘신들린 사람? 이라’ 글쎄요, 제가 詩魔에 들었다고는 차마 낯간지러워 말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시에 미쳐 사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40여년을 한결같이 시를 떠나 살지 못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일상의 종교처럼 걷는 일에 열중합니다. 걷다보면 수시로 잡념이 찾아옵니다. 그 잡념 속에는 더러 운 좋게 씨의 시앗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제 시는 길이 준 선물입니다. 길이 제 시의 자궁인 셈이지요. 제게 신은 길입니다. 즉 걷는 일입니다. 걸으면서 저를 정화하고 기원하고 용서하고 사유를 빚기도 하니 이만하면 종교 자격이 있지 않을까요?

 

 

팽이

 

 

오늘 나는 한 방향만을 고집하는

저 낯익은 사내에 대해 다시 노래하련다

회초리가 와서 자신의 몸을

때리면 때릴수록 더욱

돌고 돌면서 미쳐 날뛰면서 그는

회초리가 빨리 더 빨리

다녀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맹렬한 속도로 돌고 도는 관성은

바라보고 있으면 바닥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직립의 회전을 보이기도 하나

주기적인 매질이 없으면

언제라도 바닥에 내팽개쳐질 가련한 신세

그러기에 팽이는 돌면서 매를 부르고

회초리는 팽이의 몸에 척척 감기며

가학의 쾌감에 전율한다

저 현기 속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

오, 저것은 얼마나 지독한

자본의 마조히즘과 사디즘이란 말인가

 

(시집 『저녁 6시』)

 

 

 

유빙들

 

 

어긋난 사랑 엇도는 관계를 저렇게도

 

아프고 무력하게 말하는 것들이 있다

 

한파가 맺어준 단단한 결속을 저렇게도

 

 

한순간에 허무는 것들이 있다

 

둥둥 물살에 휩쓸려 떠다니면서

 

한 몸으로 살았던 어제를 잊고

 

서로를 불신하며 밀어내고 있는 것들이 있다

 

쩌렁쩌렁 겨울 천하를 호령하던 이력 지우고

 

흐르는 세월에 재빠르게 순응하는 것들이 있다

 

(시집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옻나무

 

 

어릴 적 나는, 토담집 한 귀퉁이

십수 년 우리 집 가난과 함께 자라온

옻나무가 무서웠다 살갗만 살짝 스쳐도

온몸에 두드러기가 일던 그 괴괴한 나무의 서늘한 눈빛과

무심코 눈이라도 부딪는 날이면

어김없이 밤마다 진저리치는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어느 해인가

할머니의 가슴앓이로 다리 한 짝 잃고도

아버지의 진기 빠진 근력을 위해

팔 한 짝 선뜻 내주던 은혜였던 나무

그리고 그다음 해의 늦봄

해수병의 당숙 기어이 속옷으로 쓰러뜨리던

성성한 이파리로

그늘을 넓혀 이십여 평 양지의 마당

삼키어가던 식욕 좋던 그 나무가

어릴 적 나는, 왜 그리 무서운 금기의 나무였는지

지금도 추억 떠올리면 종아리에 소름꽃 핀다

옻 타지 않는 이에게 더없이 약 되면서

옻 타는 사람에겐 더없이 병 되던

은혜와 배반의 이파리로 엮어진 나무

그 시퍼런 이중성의 표정이

근엄한 판검사의 얼굴로 닥지닥지 열리는 것을

 

어느 날 나는, 법정의 방청석에서

오돌오돌 떨며 그러나 똑똑히 보았다

 

(시집『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

 

 

 

• 서정시에서 다소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점이 저에게는 날카로운 현실비판과 새로운 비전 제시였습니다. 하지만 서정시에 그런 첨예한 의식이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은 아니거든요. 이것이 저의 편협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선생님의 시집을 읽으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현실비판이 잘 들어나지 않게 보이는 것은 서정시가 가진 온건함, 온화함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어쩜 자연친화적인 세계를 노래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모든 악과 맞서는 비전을 제시해 주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연은 그 자체로서 우리들이 돌아가야 할 곳을 말해주거든요. 제 나이쯤에 이르러서는 무언가를 잘 모르면서도 다 알듯 하기도 하고요.(웃음) 그것이 허무인지 모르겠지만 절로 자연을 닮은 시를 찾아서 읽게 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드라마는 재벌의 얘기라든가 평범하지 않은 일상의 얘기들로 우리들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시에 우리들 범상한 일상과 콘크리트 벽만 등장한다면 시가 재미가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시에는 별이 등장하고 달이 등장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자연은 우리들을 꿈꾸게 해주고 원형인 고향으로,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회귀하게 해줌으로써 출렁이는 양수 속에서 잠시나마 쉴 수 있는 안락함과 평화로움을 제공해주는 것 같아요. 선생님의 시를 읽는 내내 자연 속에서 함께 숨 쉬는 것 같아서 평화롭기도 하였고 아프기도 하였고 번득이는 사유에 이르러서는 감탄을 금치 못 하기도 하였습니다.

 

 

 

• 과람, 과찬이십니다. 자연은 우리 생활의 부모이자 스승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우주 안의 편재하는 사물들은 다 같이 관계망, 그물망으로 얽혀 있습니다. 인간을 모든 사물은 인드라망 즉, 우주(자연)을 구성하는 한 인자일 뿐이지요.

 

칼 세이건의 <<코스머스>>를 보면 우주에는 수천억 별로 이루어진 은하계가 수천억 개가 있습니다. 지구가 소속된 은하계는 수천억 은하계 중 변방에 속합니다. 지구는 은하계에서 가장 변두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푸른 먼지에 지나지 않는 지구에 70억 인구가 각축하며 살고 있으며 사람의 평생은 우주 시간으로 찰나보다도 짧습니다.

 

지금 이곳에서의 삶은 반목과 대립과 분열로 인한 증오가 용광로의 마그마처럼 들끓고 있습니다. 확증 편향으로서의 소음이 위험 수위를 넘고 있는 것입니다. 나날의 삶이 허무하거나 지독한 절망에 빠지게 될 때 혹은 이유 없는 편집증에 시달리게 될 때 저는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버릇이 있습니다.

 

 

 

생각의 편차가 심한 사람들도 소월의 시를 읽으며 함께 감동과 울림을 공유했던 시절은 충분히 아름답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그런 날을 살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에 근접하도록 노력하는 것마저 냉대하거나 냉소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또 소월이 보여준 첨예한 현실 인식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보편적 감동과 울림이라는 문학의 당위가 이론에만 갇혀 있지 않고 현장에서 살아 돌아다니게 해야 할 것입니다.(2012 제27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시인 시선집 『길 위의 식사』, P. 198)

 

 

다이아몬드

 

 

서양인이 들어오기 전 아프리카 소년들은 다이아몬드 원석으로 공기놀이를 하고 있었다.

 

서양인들이 다이아몬드를 발견한 뒤로 아프리카는 다이아몬드 사냥꾼들의 차지가 되었다.

 

다이아몬드 최대 산지인, 최빈국 시에라리온은 내전이 끝나지 않고 있다.

 

다이아몬드를 캐지 못하게 하고 또 투표를 할 수 없도록 반군들은 소년병들에게 마약을 먹여 주민들의 손을 자르게 했다.

 

다이아몬드는 축복이 아닌 저주가 되었다.

 

신은 아프리카를 버렸다.

 

(시집『데스밸리에서 죽다』)

 

 

• 선생님의 시「다이아몬드」를 읽으며 절망하였고, 인간의 악마성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다이아몬드 최대 산지인, 최빈국 시에라리온”은 정말 아이러니한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고발하고 인간성 회복을 일깨워주는 시가 좋은 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보았습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가장 나쁜 시는 어떤 시일까요?

 

 

• 이 세상에 완전하게 나쁜 시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쁜 시도 반면교사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질문을 하셨으니 굳이 대답한다면 나쁜 시는 자기를 속이는 시입니다. 진정성 없이 꾸미는 시, 보여주기 위한 시, 자기 것이 아닌 시, 유행에 편승하는 시들을 저는 멀리하고 있습니다. 시는 자기만의 고유한 성질과 빛깔을 갖추어야 합니다.

 

 

 

 

일생

 

 

태어나 말 배운 뒤

 

엄마를 반대하다가

 

코 밑 수염이 생겨난 뒤로

 

아버지를 반대하다가

 

신발의 문수

 

바꾸지 않게 된 뒤로부터

 

독재를 반대하다가

 

배 불룩 나온 뒤로부터

 

아내를 반대하다가

 

나 어느새 머리칼

 

하얀 중노인이 되어버렸다

 

 

(시집『데스밸리에서 죽다』)

 

 

 

 

쓰러진 나무

 

 

나무도 쉬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평생을 서서 사는 일이

어찌 고달프지 않겠는가

 

푸른 수의와 잿빛 옷 번갈아 입으며

 

벌받는 자세로 서서 그늘 짜는

 

일생의 노역에서 놓여나고 싶은

 

심정이 천둥과 번개를 불러들였을 것이다

 

나무도 눕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생을 벗는 일인 줄 알면서

 

그렇게 수직의 감옥을 벗어났을 것이다

 

(시집『데스밸리에서 죽다』)

 

 

 

• 선생님의 시「일생」은 누구든지 공감할 수밖에 없는 시라는 생각이에요. 성인이 된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자면 “반대하다”인지도 모르겠어요. 우리 모두 이렇게 반대하다가 “어느새 머리칼 / 하얀 중노인이 되어버렸”어요. 이제는 반대의 결과물인 세어버린 머리칼을 반대해야할까요? 한편 선생님의 시「쓰러진 나무」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나무도 눕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 그것이 생을 벗는 일인 줄 알면서 / 그렇게 수직의 감옥을 벗어났을 것이다” 우리들의 일생은 나무처럼 불편한 자세로 초록을 드리우고 백발성성한 눈의 계절을 지나 “수직의 감옥”을 벗어나는 일일까요? 때론 죽음이 그렇게 마냥 슬퍼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 서양의 이분법적 세계관은 삶과 죽음을 분리합니다. 하지만 동양적 사유에서의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살면서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은 동시적으로 진행합니다. 삶 따로 죽음 따로 가 아닌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일리치의 죽음>>의 마지막 서술처럼 삶이 끝났을 때 죽음도 끝나게 됩니다. 이렇게 삶과 죽음을 하나로 인식할 때 우리는 삶 이후의 세계에 대하여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삶이 끝나면 죽음도 끝나니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현재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미래 때문에 현재를 유보하거나 현재를 죽이는 일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선풍기

 

 

한여름 내내 수도 없이 발가락으로 선풍기를 켜고 끄면서 사랑도 이렇게 켜고 끌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을 노예나 기계처럼 부리는 일이라는 생각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다가 선풍기는 수요만큼 공급하는 이상적인 바람 공장이라는 생각에 고개를 위아래로 몇 번 끄덕이다가 세상의 모든 도는 것들이 오른쪽을 고집하는 것은 지구의 자전과 상관이 있을거라 생각하다가 선풍기를 처음 만든 이는 휴머니스트일 거라는 추측에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도대체 선풍기처럼 단순하게 사는 인간도 있을까 혀를 끌끌 차다가 혹여 내 인생을 하나님께서 선풍기처럼 켜고 끄며 관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갑자기 속이 더워져 바람의 세기를 한 단계 높이게 되었다.

 

(시집『데스밸리에서 죽다』)

 

 

 

소리들

 

 

나는 소리의 형태를 관찰한 적이 있다

 

미장질 마친 벽처럼 고르고 평평한 소리

건축처럼 돌올하게 솟아있는 소리

유리처럼 투명한 소리 두꺼비 등처럼

우툴두툴한 소리 밀가루 반죽처럼 만질수록

부드럽고 찰진 소리 항아리 뚜껑처럼 둥근

소리 신발 밑창처럼 닳고 닳은 소리

떡가래처럼 길쭉한 소리

나무토막처럼 살갗이 까칠까칠한 소리

벗어놓은 아내의 브레지어같이 속 텅 빈

채 봉긋한, 공갈빵 같은 소리

버드나무 가지처럼 치렁치렁

늘어진 소리 윤슬처럼 은은하게 반짝이는

소리 봄날 아지랑이 아른아른

몽롱한 소리 팔부 능선 기어오르는

달빛처럼 환한, 은륜에 햇살 튕기는 소리

 

(시집『데스밸리에서 죽다』)

 

 

 

 

슬리퍼

 

 

슬리퍼를 신을 때마다 슬리퍼처럼

편하고 만만했던 얼굴이 떠오른다

슬리퍼는 슬픈 신발이다

막 신고 다니다 아무렇게나 이곳저곳에

벗어놓는 신발이다 언감생심 어디

먼 곳은커녕 크고 빛나는 자리에는

갈 수 없는 신발이다

기껏해야 집 안팎이나 돌아다니다

너덜너덜해지면 함부로 버려지는 신발이다

슬리퍼를 신을 때마다 안개꽃같이

누군가의 배경으로 살았던

오래된 우물 속처럼 눈 속 가득

수심이 고여있던 얼굴이 떠오른다

 

(시집『데스밸리에서 죽다』)

 

 

• 사르트르는 “한 줄이라도 쓰지 않은 날은 없었다. 이것이 내 습성이고, 또 내 본업이다. 오랫동안 나는 펜을 검으로 여겨왔다.”고 하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일상의 소소한 것들(「선풍기」,「세탁소」,「빨간 신호등」,「손」,「소리들」,「소음들」,「슬리퍼」 등)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시를 쓰십니다. 쓸거리가 없어서 시를 쓰지 못한다는 소재고갈주의자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 하하하! 그렇습니다. 저 역시도 길든 짧든 글을 쓰지 않는 날은 드문 일에 속합니다. 랭보는 시인을 견자라 말했지요. 시인은 ‘보는 자’입니다. 다만 이 때 보는 행위란 현상 이면의 진실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지는 실체를 담보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박지원 선생이 쓰신 <<열하일기>>에도 나오는 말이지요. 현상 너머의 실체나 진실을 보는 자, 그가 시인입니다. 視力이 밝으면 詩歷이 생겨납니다.

 

 

우리 시대의 사용법

 

 

편지 봉투에 돈 들어있고 유모차에

벽돌 한 장 들어있고 가위는

김치나 무 김을 자르고 방망이나

홍두깨는 밀가루 반죽이나 밀고 빈집

대추나무 가지에 걸린 호미는

허공을 매고 키 작은 지붕

위에 놓인 왜낫은

달빛, 바람이나 자르고

식은 굴뚝 새벽이슬 매단 거미줄엔

파란 별빛이나 걸려들어 파닥거리고

금 간 항아리엔 빗물, 산그늘,

새소리나 고이고 회칼은

생선 대신 사람을 찌르고 있다

 

(시집『데스밸리에서 죽다』)

 

 

 

사람들은 도회에 와서 죽는다

 

 

 

시골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도회로 와서 살다가 죽는다

 

도회에서 태어난 사람들도 도회에서 살다가 죽는다

 

도회에서 살던 사람들은 죽어서야 도회를 빠져나간다

 

도회는 죽음이 성시를 이루는 곳

 

도처에 죽음이 즐비하게 도사리고 있다

 

죽기도 전에 유령이 된 사람들이 도시 곳곳을 누비고 있다

 

도시에 낀 안개가 날마다 두꺼워져 간다

 

안개 낀 도시에 사람들이 부표처럼 둥둥 흘러 다닌다

 

(시집『데스밸리에서 죽다』)

 

 

 

• 저는 대학 졸업 논문으로「최승호 시인의 시에 나타난 죽음에 관한 연구」를 썼던 적이 있습니다. 30대의 한때 최승호 시인에게 완전히 빠져있었습니다. 이 논문에서의 죽음은 정신적인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최승호 시인께선 깨어있지 못하고 시대의 흐름에 떼밀려 다니는 현대인들을 비판하는 시를 많이 쓰셨거든요. 모든 시인들의 영원한 주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만 선생님의 시「사람들은 도회에 와서 죽는다」는 시를 읽으면서 최승호 시인이 오버랩 되었어요. 선생님께서 소월시문학상 수상 시에 말씀하신 ‘건강한 서정’에 관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 최승호 시인은 저도 좋아하는 시인입니다. 세속도시의 비루한 일상을 최승호 시인만큼 날카롭게 풍자한 시인도 없을 것입니다. 제게 건강한 서정이란 변화하는 현실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는 감성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서정도 진화하여야 합니다.

 

 

 

이재무 시인은 한국 서정시의 중심에 서서 일상의 삶과 그 경험의 진실성을 서정의 세계로 끌어올리며 아름다운 시 정신을 가꾸어온 중견의 시인이다. 특히, 최근작에서 깊이와 무게를 지닌 서정시의 본연의 모습을 지켜보고자 노력하는 진지한 시인의 자세가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은 한국 현대시의 앞날을 위해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권영민. 문학평론가, 단국대 석좌교수)

 

 

 

• 저는 젊은 날의 한때 시집을 조금 많이 읽은 편인데요. 20대의 어느 날 「산정호수」라는 시집을 읽으면서 그 웅혼함에 감탄하였고요. 최승호, 최승자, 김혜순, 김정란 시인님께 깊이 경도되어 있었어요. 당시의 저는 국어사전을 펼쳐놓고 시를 읽었는데요. 제 공부의 짧음은 생각하지 않고 왜 시가 이렇게 어려워야만 할까? 나는 나중에 아주 쉽고 재미난 시를 쓸 거야, 라고 다짐하곤 했던 적이 있습니다. 지나친 은유와 황홀한 비유 등등을 제 스스로 배척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시집은 쉽게 써져 있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고 시의 깊이 또한 융성한 시편들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윤동주문학대상, 소월시문학상, 편운문학상 등 많은 문학상을 수상하셨어요.

 

• 비교적 상복이 많은 편입니다. 그래서인지 질시도 많이 받고 있어요. 하하. 시에는 쉬운 시와 어려운 시가 있습니다. 쉬운 시와 어려운 시가 시의 우열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쉬운 시에도 좋은 시와 그렇지 않은 시가 있고, 난해 시에도 좋은 시와 그렇지 않은 시가 있습니다. 또, 쉬운 시와 쉽게 써진 시는 구별해야 합니다. 쉬운 시를 쓰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서양근대에 대한 이중적 감정이 있습니다. 일본을 통해 서양 근대를 강제적으로 이식해온 사정 때문에 생긴 현상일 텐데 하나는 콤플렉스이고 또 하나는 거부감입니다. 난해에 대한 숭상은 전자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 봅니다. 이제는 이러한 난해와 새것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달빛 속에는

-오민석에게

 

 

달빛 속에는 이스트가 들어있나 봐

달빛 받은 것들은 부풀어 오른다

강물이 부풀어 올라 출렁거리고

바다는 부풀어 올랐다 깊어지고

산길이 부풀어 올라 꿈틀거리고

지붕과 언덕과 산이 부풀어 올라

솟아오르고

꽃이 부풀어 올라 활짝 피고

항아리가 부풀어 올라 불룩하고

태어나 처음 사랑을 만난

소녀의 가슴이 부풀어 올라 봉긋하고

늦도록 잠 못 드는 사내의

회한과 슬픔이 부풀어 올라 범람한다

달빛 속에는 이스트가 들어있나 봐

 

세상은 달빛 받아

높아지고 넓어지고 깊어진다

 

(시집『데스밸리에서 죽다』)

 

 

• 시「달빛 속에는」“오민석에게” 란 부제가 달려있습니다. 흔히들 말씀하시는 절친이신 것 같아요.(웃음) 두 분의 우정에 대해서 들려주실까요?

 

 

• 우리는 이십대에 만났습니다. 친구 오민석은 영문학자이자 시인이고 평론가이기도 합니다. 이 친구는 삼십년 전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영문학에 전념하느라 홀연 연기처럼 사라져 이십 년이 넘도록 문단을 떠났다가 몇 년 전 불쑥 도둑처럼 다시 나타나 문단에서 가장 핫한 인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중입니다. 내공이 만만치 않아서인지 文體/文採가 튼튼하고 매혹적입니다. 저는 그 친구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특히 서양이론에 밝은 그에게서 얻는 게 적지 않습니다. 위 시는 이 년 전 상처를 당한 후 상심에 젖어 사는 친구가 안쓰러워 술김에 쓴 시입니다.

 

 

장작을 패며

 

 

장작을 패며 나는 배운다.

싸움꾼의 원칙과 자세에 대하여.

 

두 눈 부릅떠 곁을 겨눌 것.

웅이는 절대 피할 것.

순서는 마른 것에서 젖은 순으로.

 

한두 시간이 아니라

하루 이틀이 아니라

평생을 도끼질할 때

원칙과 자세가 바로 생명이라는 것을.

 

(시집『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

 

 

• 선생님의 삶의 원칙과 자세를 알고 싶습니다.

 

• 너무 어려운 질문입니다. 제가 다른 것은 몰라도 의리는 있다는 소리는 가끔 듣고 삽니다. 하하! 또 비교적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합니다. 사회의 부조리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정을 지녔습니다. 밥을 소중하게 여기는 삶이 제 삶의 모토입니다. 밥처럼 위대한 종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누구도 밥을 먹을 때 고개를 숙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밥보다 높은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홍옥 혹은 시에 대하여

 

홍옥이 사라지고 있다. 신맛을 꺼려하는 사람들 입맛 때문에 점차 홍옥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과의 대명사였던 홍옥의 처지가 딱하게 되었다. 기호와 취향의 변덕 때문에 사라지는 것 어디 홍옥뿐이랴.

 

(시집『데스밸리에서 죽다』)

 

 

 

• 시에도 유행이 있고 사람들의 입맛은 자주 변하고 사람들의 시적취향도 변합니다. 온갖 “기호와 취향의 변덕”에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시의 본령은 무엇일까요?

 

 

• 시의 본령은 서정입니다. 실험 시는 한 시대 유행하다가 운명을 마칠 때가 많습니다. 물론 실험은 매우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실험이 문학사에 기여한 면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실험은 시의 외연을 확장시켜왔습니다. 그러나 한 개인이 평생을 실험에 몰두하기란 난망한 일입니다. 실험 시를 쓰시는 분들 중 중도에서 그만 두는 경우 혹은 본래의 서정으로 돌아오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고답적으로 옛것을 고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온고지신, 법고창신의 정신과 태도가 중요합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옛 것을 익혀 새롭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시에서의 본령은 서정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 2018년 시선집『얼굴』을 출간하시고 시인의 말에서 “삶의 보폭과 시의 보폭이 나란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시인들의 영원한 숙제이자 소망일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한편으론 너무 정직한 삶에서는 시가 발현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 저는 제가 산만큼 쓰자는 주의입니다. 자신을 과장하지 말자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을 속이면서 타자를 움직일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시에서의 정직과 삶에서의 정직은 다른 것입니다. 시에서의 윤리는 감동입니다. 시에서의 비 윤리는 울림과 감동이 없는 것입니다. 삶은 정직하게 살되 시에서는 상상력의 영토에 제한이 없어야 합니다. 즉 시인의 내면에는 거지 성자 창녀 도둑 교사 등 인간의 모든 선과 악이 허용되어야 합니다만 삶에서는 가급적 그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서울 참새

 

 

이제 우리의 식량은 벼가 아니다

이제 우리의 일터는 들이 아니다

한때 더불어 살던 날의 아름다움

빛났던 날짐승의 비상도

잊어야 한다 수은비 내리는 여기는

빌딩의 밀림 모든 것은 혼자서 견뎌야 한다

우리가 겁나는 것은 돌팔매가 아니다

우리가 두려운 것은 허수아비가 아니다

먹이는 도처에 산재하지만

새로서 살 수 없는 것

예고도 없이 죽음은 찾아오고

정성情性을 버려야만 연명되는 곳

우리는 더 이상 새가 아니다

 

(시집 『몸에 피는 꽃』)

 

 

신도림역

 

 

검고 칙칙한 지하선로

살찐 쥐 한 마리 걸어간다

누군가 검붉은 침을

아직 불이 살아 있는 담배꽁초를

그의 목덜미께로 뱉고 던진다

쥐는 동요하지 않는다

전방 50m 화물열차가

씩씩거리며 달려오고 있다

그는 동요하지 않는다

선로를 가로질러 태평하게 저 갈 곳을 가는

그는 나보다도 서울을

잘 살고 있다

 

한 무리의 쥐들이 열차에 오른다

 

(시집 『몸에 피는 꽃』)

 

 

• 「서울 참새」, 「신도림역」은 현대인들의 모습을 잘 묘사하신 시라는 생각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새였습니다. 누구나 한철 새였습니다. 누가 우리들의 날개를 꺾었을까요? 아무도 꺾지 않았습니다. 아프기 싫어서 스스로 꺾어버렸죠. 일선에서 물러나 어느 정도 삶을 관조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야 말로 분질러버린 날개를 다시 일으켜 세울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20대의 어느 날, 신도림동에 무슨 인연인가로 잠시 머물렀던 기억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시에 「신도림역」, 「신도림동」 등 신도림동이 많이 등장합니다. 선생님께는 어떤 추억이 있는 곳일까요?

 

• 결혼 직후 수원시 율전동에서 살다가 서울에 진입하여 2년 동안 신도림 아파트에서 전세를 산 적이 있습니다. 삼년 전 신도림동은 지금과 다르게 크고 작은 가내 공장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특유의 불쾌한 유황냄새가 코를 찔러대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 당시 내게 신도림은 그저 생존의 공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내 일상의 종교

 

 

나이가 들면서 무서운 적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핸드폰에 기록된 여자들

전화번호를 지워버린 일이다

술이 과하면 전화하는 못된 버릇 때문에 얼마나 나는 나를

함부로 드러냈던가 하루에 두 시간 한강변 걷는 것을 생활의 지표로

삼은 것도 건강 때문만은 아니다 한 시대 내 인생의 나침반이었던

위대한 스승께서 사소하고 하찮은 외로움 때문에

자신이 아프게 걸어온 생을 스스로 부정한 것을 목도한 이후

나는 걷는 일에 더욱 열중하였다 외로움은 만인의 병 한가로우면

타락을 꿈꾸는 정신 발광하는 짐승을 몸 안에 가둬

순치시키기 위해 나는 오늘도 한강에 나가 걷는 일에 몰두한다

내 일상의 종교는 걷는 일이다

 

 

(시집『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 “나이가 들면서 무서운 적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걷는 일에 열중하였다. 외로움은 때로 독약과도 같아서 사람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외로움을 잘못 다스리면 사람은 얼마든지 추해지거나 망가질 수 있는 것이다. 내 한때의 위대한 스승이었던 분이, 아프게 일관된 평생을 하찮고 사소한 외로움 때문에 스스로 부정한 일을 목도한 이후 나는 걷는 일에 더욱 의미와 가치를 두게 되었다.”고 우리시대 시인 20인이 말하는 나의 삶 나의 시『시인으로 산다는 것』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외로움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불치의 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의 스승은 마광수 선생님을 말씀하시는지요?

 

• 아닙니다. 생존해 계시기 때문에 차마 이름을 밝힐 수가 없습니다.

 

 

 

 

 

한때 나의 밤길에

동무였던, 위안이었던

별 하나, 오늘은 왠일인지

누군가 일부러

압핀으로 눌러놓은 듯

어둔 하늘 회색 도화지에

아프게 꽃혀

하얀 피를 흘리고 있다

 

(시집『벌초』)

 

 

 

온다던 사람 오지 않았다

 

 

온다던 사람 오지 않았다

빈 가슴에 흙바람을 불어넣고

종착역 목포를 향해 말을 달렸다

서산西山 삭정개비 끝에서

그믐달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주먹의 불빛조차 잠이 들었다

주머니 속에서

때 묻은 동전이 울고 있었고

발끝에 돌팍이 울고 있었다

온다던 사람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오지 않았고

내 마음의 산비탈에 핀

머루는 퉁퉁 젖이 불고 있었다

 

 

(시집 『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

 

 

• 선생님께서 기다리시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 하하하, 기다림의 대상은 시절마다 다르겠지요. 저에게 이제 기다리는 사람은 저 자신입니다. 나름 순수했고 천진했고 무구했던 옛날의 내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립니다만 불가능한 꿈일 뿐입니다.

 

 

 

부드러운 복수

 

 

시는 삶에 대한 부드러운 복수라는데

혹, 나의 시는 내 가난한 삶에 대하여

너무 지독한 복수를 꿈꾸어온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나는 내 생을 지나치게 분식해왔는지 모른다

어쩌면 나는 내 삶을 지나치게 연민해왔는지 모른다

어쩌면 나는 떠난 사랑에게 지나치게 집착해왔는지 모른다

어쩌면 나는 한 시대 불같이 뜨거운 이념에,

높고 푸른 이상에, 창백한 미래에, 어쩌다

바람에 불려 가로수에 매달리게 된 검은 봉지처럼

위태위태 휘둘려왔는지 모른다

생의 바다에 낡은 그물 고집스럽게 던져오면서

우연히 행운의 대어가 걸려들기를 바라왔는지 모른다

시는 삶에 대한 부드러운 복수라는데

나는 목청 높여 과장되게 고함치고 울어왔는지 모른다

시는 삶에 대한 부드러운 복수라는데

나는 목청 높여 과장되게 고함치고 울어왔는지 모른다

언젠가 나는 죽을 것이고 내가 낳은

부실한 시편들 중 몇몇은 남아 죽은 나를

비웃을지 모른다 생각하면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시집 『저녁 6시』)

 

 

• 위의 시에서 “시는 삶에 대한 부드러운 복수라는데 / 나는 목청 높여 과장되게 고함치고 울어왔는지 모른다”고 반성하고 계십니다. 이런 덕목은 시를 쓰는 모든 시인들이 지녀야할 겸양의 덕목이고 철저한 자기반성의 결과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신의 시에 온전히 부끄럽지 않을 분들이 몇 분이나 계실까요? 그리하여 종국엔 “나는 표절 시인”이었음을 고백하고 계십니다.

 

 

 

나는 표절 시인이었네

 

 

나는 표절 시인이었네 고향을 표절하고 엄니의 슬픔과 아부지의 한숨과 동생의 좌절을 표절했네 바다와 강과 저수지와 갯벌을 표절하고 구름과 눈과 비와 나무와 새와 바람과 별과 달을 표절했네 한 사내의 탕진과 애인의 눈물을 표절하고 기차와 자전거와 여관과 굴뚝과 뒤꼍과 전봇대와 가로등과 골목길과 철길과 햇빛과 그늘과 텃밭과 장터와 중서부 지방의 사투리를 표절했네 이웃과 친구의 생활을 표절했네 그리고 그해 겨울 저녁의 7번 국도와 한여름 강진의 해안선을 표절했네 나는 표절 시인이었네

 

 

(시집 『슬픔은 어깨로 운다』)

 

 

 

• 시에서 밝힌 그대로입니다. 자연 사물들과 이웃과 한 시절 함께 했던 이들이 제게는 모두 위대한 스승인 셈이지요.

 

 

 

가을 계곡

 

 

처서 백로 거쳐 추분에 들자

 

계곡은 더욱 맑고 투명해졌다

 

바닥 환히 드러내 보이는 물빛

 

밝아진 시력으로

 

제 몸보다 훨씬 더 큰 것들을 담고는

 

평상심으로 제 갈 길 가고 있었다

 

손을 담그면 서늘한 기운 솟구쳐 올라

 

쭈뼛, 머리끝이 곤두서기도 했다

 

 

가끔, 나는 그곳에 들러

 

문장 연습을 하다가 오고는 하였다

 

(<풀빛문학상> 수상작품)

 

목련

 

 

 

사회복지사가 다녀가고 겨우내 닫혀 있던 방문이 열리자 방안 가득 고여 있던 냄새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무연고 노인에게는 상주도 문상객도 없었다 울타리 밖 소복한 여인 같은 목력이 조등을 내걸고 한 나흘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유심문학상> 수상작품)

 

 

 

• 시선집까지 포함하여 총 13권의 시집을 상재하셨습니다. 김인희 시인께선 자신의 시세계 스토리를 “엄마를 위로하고 엄마에게 힘이 되는 방법을 찾아 온 우주를 방황하고, 기어이 그 힘을 가진 언어를 찾아서 엄마를 구해낸다.”는 것으로 요약하셨습니다.(웹진시인광장 2018년 1월호 시인광장 시인탐방, 손현숙 시인의 시인탐방 발췌) 또 시리아 시인 아도니스(91)는 “나는 나 자신을 찾아다닌다. 아도니스가 누구인지 누가 아도니스에게 말할 수 있는가?”라는 문장으로 시를 쓰시는 이유를 정의하였습니다. 선생님의 시세계에 스토리를 입혀보면 어떤 스토리일까요?

 

 

• 시를 읽어보면 제가 보인다고 하더군요. 저는 생활에서 주로 시를 구해왔기 때문에 그런 평가를 듣는 것 같습니다. 제 시를 읽다보면 한국사회의 가장 평균적인 사내의 이력과 초상이 보일 것입니다. 전형적인 시골 농가에서 태어나 가난하게 살다가 운 좋게 도시로 유학을 오고 졸업 후 도시 처녀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얻고 이 직업 저 직업을 전전하다가 눈 깜짝할 새 중노인이 되어버린, 회한과 후회뿐인 한 사내의 일생이 시의 언어와 산문의 언어로 표현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상수리 나무

 

 

생활이 나를 속일 때마다 나는 그대가 그립다

그대의 구릿빛 근육을 떠올리고 그대의 한결같은

성정을 떠올리고 또 나는 그대의 벌거벗은 아랫도리

곳곳에 숭숭 뚫린 구멍들을 떠올린다 그 구멍 속을

쉴 새 없이 들고나는, 일개미들과 풍뎅이들과

장수하늘소, 왕텡이들의 여름날 신성한 노동을 떠올린다

그들은 모두 내 유년의 정다운 벗들이다 그 구멍은

내 벗들의 서식처이고 일터이고

숨구멍인 셈인데 아, 이제 와서는

내 마음의 거처가 되어버린 것이다

살아서는 상처의 진액으로 그 많은 식구들을 먹여

살리고 죽어서도 불이 되어 시린 등을 덥혀 주던,

마을에 들어서면 어깨 위에 척하니 가지를 걸치고

환하게 웃어주던 죽마고우, 생활이 나를 속일 때마다

그대가 내게로 온다

 

(시집『데스밸리에서 죽다』)

 

 

 

• 선생님의 시「상수리나무」를 읽으면서 선생님이야말로 이 시대의 “숨구멍” 역할을 하실 수 있는 한그루 “상수리나무”가 아니실까? 생각하였습니다. 세상에는 좋은 시인들이 많이 있는데 문예지에 소개되는 시인은 한정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좀 더 많은 시인들에게 골고루 지면이 허락되었으면 좋겠고요. 지면을 얻지 못해 시작을 포기하는 시인들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 시인이 많습니다. 문예지도 많습니다. 최근 들어 문예지들이 동인지화 되어 가는 현상이 안타깝습니다. 끼리끼리 챙기는 문화가 일반화된 지 오래입니다. 그러다보니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머니 속 송곳은 언젠가는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소외가 막막하고 두렵겠으나 포기하지 않고 정진하여 옥고를 낳다보면 반드시 세상으로부터 발견되는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문학도 예술의 한 유형이라는 관점에서 작품의 감각적 형상화가 어떤가, 문학은 물질이 아니라 언어를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그 안에 담겨진 세계관이나 이념이 어떤가, 창조적 작업이라는 점에서 상상력의 새로움은 어떤가, 이 세 가지 관점에서 이재무 시인의 시가 앞섰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오세영 시인)

 

• 선생님께서 교수로 재직하고 계신 서울디지털대학교 시사랑 동아리 “Seein 씨인” 게시판을 보면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들과 이재무 교수님의 똑같은 잔소리란 제목으로 시를 쓸 때의 유의할 점, 심지어 이재무 교수님 활용법까지 올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요.(웃음) 저도 잠시만, 선생님을 활용하도록 할게요.(웃음) 비대면 시대에 독자들에게 위로의 한 말씀과 선생님의 시작법이나 시론을 들을 수 있을까요?

 

 

• 자신을 사랑하는 삶을 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착하게 살지 말고 주체적으로 삶을 운영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거절하는 용기를 가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풍문에 의존하지 말고 주체적으로 판단하며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살아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시작법은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지적 투자가 곧 생산입니다. 읽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모든 글쓰기는 책읽기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마이산>>의 저자 토마스 만의 말처럼 작가는 소매치기와 같습니다. 훔치되 들키지 말아야 합니다. 들키는 순간 소매치기는 법의 저촉을 받습니다. 이 말은 모든 지적 생산물은 이전의 선 텍스트에서 자양분을 얻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얻되 자기화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들키지 않습니다.

 

 

 

• 선생님의 앞으로의 계획과 확장하고 싶은 시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요?

 

 

• 저는 계획하면서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어진 현재에 충실해 왔을 뿐입니다. 현재가 쌓여 내일이 됩니다. 늘 그래왔듯 오늘만 생각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登頂이 아니라 오르는 과정을 중시하는 ‘登路’의 삶을 살 것입니다.

 

미래의 시 세계는? 글쎄요? 시간과 존재와 우주에 관한 사색, 성찰 등이 되지 않을까요?

 

 

•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나 선생님의 문학에 대해서 덧붙이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들려주실까요?

 

 

• 독자들이여, 글쓰기는 근육운동입니다. 근육은 날마다 운동을 할 때 생겨납니다. 또 글쓰기는 관성의 법칙이 적용되는 작업입니다. 열정은 재능입니다. 재지 말고 계산하지 말고 한 번뿐인 인생 뜨겁게 살아봅시다. 타다가 만 땔감처럼 보기 싫은 게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의 삶과 생을 활활 태우다 갑시다. 완전하게 태운 땔감이 남긴 재는 얼마나 곱고 부드럽습니까?

 

 

 

 

시인으로서 내가 꿈꾸는 세상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들 삶에 최소한의 안전망이 구축된 세상, 사회적 약자가 자신들의 불우한 처지를 자유롭게 발언하고 호소할 수 있는 세상, 서로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극단의 대결의식에서 벗어나 평화 속에서 민족이 공존하고 공생할 수 있는 길을 도모하는 국가적 분위기, 계층과 지역과 세대와 남녀 간의 불통이 해소된 세상, 이념의 차이로 편 가르기를 하지 않는 세상, 차별이 없는 세상, 실패한 가장과 청소년을 자살로 내몰지 않는 세상,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없는 세상, 일등만 기억하지 않는 세상, 사교육비 부담으로 결혼을 기피하지 않는 세상, 어느 정치인이 내세운 슬로건처럼 ‘저녁이 있는 삶’, 취직과 퇴직 걱정이 없는 세상...... 희망사항을 열거하자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시가 무엇이건대 이상 열거한, 이 엄청난 일들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감당하자는 게 아니다. 하지만 시가, 시인이 이러한 일들에 작으나마 관심을 표명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시인으로 산다는 것』, p.244)

 

 

 

주름진 거울

 

 

거울 속 붉게 팬 주름들 곁,

갓 태어난 잔주름들

어느새 일가를 이루었구나

 

저 굴곡과 요철은

시간의 밀물과 썰물이 만든 것

 

주름 문장을 읽는다

주름 속에는 눈 내리는 마을이 있고

눈에 거듭 밟히는

윤곽 흐릿한 얼굴이 있고

만지면 촉촉이

손에 습기가 배는 풍금 소리가 있다

 

이마에서 발원한 주름 물결

번져서 온몸을 덮으리라

 

(시집 『경쾌한 유랑』)

 

 

 

 

 

“주름 속에는 눈 내리는 마을이 있고 / 눈에 거듭 밟히는 / 윤곽 흐릿한 얼굴이 있고 / 만지면 촉촉이 / 손에 습기가 배는 풍금 소리가 있다” 한층 더 깊어진 풍금으로 시의 악보를 호령하고 탄주하실 선생님의 노래는 산하에 더 높이 더 깊게 스며들어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고 이 세상을 위로할 것이다. 선생님에겐 수많은 제자들이 있고 무수한 독자들이 있고 선생님을 흠모하고 존경하는 많은 시인들이 있다. 노장은 결코 죽지 않는다. 몸 자체가 백만편, 천만편의 시이신 선생님은 오롯이 또 시를 살아내실 것이다. 여전히 성하盛夏의 뜨겁고 짙푸른 녹음인 선생님의 시는 소월과 함께 영원히 살아있는 교과서가 될 것이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선생님께 다시 한 번 더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선생님의 시 「기도」로 인터뷰를 맺고자 한다.

 

 

 

기도

 

기도란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하늘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바람 부는 벌판에 서서 내 안에서 들려오는 내 음성을 듣는 것이다.

 

 

《이재무 시인》

 

충남 부여 출생. 동국대 국어국문과 석사 수료. 1983년 <<삶의 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섣달그믐>> <<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 <<벌초>> <<몸에 피는 꽃>> <<시간의 그물>> <<위대한 식사>> <<푸른 고집>> <<저녁 6시>> <<경쾌한 유랑>>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슬픔은 어깨로 운다>> <<데스밸리에서 죽다>> 시선집 <<얼굴>> <<길 위의 식사>> <<오래된 농담>> 산문집 <<생의 변방에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 <<집착으로부터의 도피>> <<쉼표처럼 살고 싶다>> 시평집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가 있음. 수상경력 윤동주문학대상, 소월시문학상, 난고문학상(시집 <<위대한 식사>>), 편운문학상(시집 <<위대한 식사>>), 풀꽃문학상(<<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송수권문학상(시집 <<슬픔은 어깨로 운다>>), 유심문학상, 이육사 문학상(시집 <<데스밸리에서 죽다>>) 등 수상. 현재 (주) <<천년의 시작>> 대표이사.

나비 - 시인의 꿈을 들여다보다


조용미  -  한용국

 
『현대시』2005년 2월, 현대시가 선정한 이달의 시인/ 대담
 

 


  조용미 시인을 만나기로 한 시간은 여섯시 반이었다. 그러나 아차아차 하는 사이에 나는 무려 한 시간이나 늦게 도착하고 있었다. 추위 속을 헐떡거리며 인사동의 관훈갤러리 옆의 판화방에 도착했을 때는 이재훈 편집장이 손을 흔들어 주었고, 조용미 시인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밖에 다니러 갔다고 했다. 잠깐 자리를 옮겨 기다리는 사이에 나는 문득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을 떠올렸고, 거기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섬천남성은 독을 품고 있다」를 떠올렸다. 󰡒날아다닐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그렇게 날아다니는 나비는󰡓, 이라는 시구를 떠올렸을 때, 정말 거짓말처럼 나비 한 마리가 사뿐하게 판화방 안으로 들어와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지각을 용서하듯 살풋 웃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한용국 : 우선 근황부터 여쭤보기로 할게요. 시집 내신 이후로 무척 바쁘셨을 것 같은데..

조용미 : 시집 내고 나서 발표를 좀 많이 했나요? 단순하고 고요한 삶의 형식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올해 들어서는 감기몸살로 고생하다가 십여 일 만에 밖에 나와요. 근황이라...... 창 밖을 열심히 내다보고 있고 열심히 앓고 있고 열심히 생각하고 있어요.

한용국 : 아 어디가 아프신가 봐요?

 

조용미 : 몸이 늘 아픈 편입니다. 좀 덜 아플 때가 있고, 괜찮을 때도 있고.. 지병이지요. 의학적으로 말하자면 허리디스크 환자죠. 의학적 병명은 그런데, 병명을 모르고 아주 오래 앓았어요. 사람들을 만나면 오랜만에 만나건 근자에 만나는 사람이건 처음 묻는 말이 다 몸은 좀 어떠냐는 말입니다. 다른 걸로 안부를 물었으면 좋겠는데...... 제가 사람들한테 미안하죠. 제 대답은 늘 “괜찮다” 입니다. 아플 때나 안 아플 때나(함께 웃음)

 
한용국 : 이십대 후반에 등단을 하셨다고 되어 있으니까. 올해로 등단하신지가 십오 년 째 되시네요.

  
조용미 : 네 서른 살 되기 직전에 등단했어요. 생각보다 빨리하게 된 편이죠. 이십대 습작기에 시를 쓰다가 어느 기간 한 사년 정도 전혀 시를 못 쓴 적이 있어요. 책도 못 읽고 거의 모든 게 정지된 듯한 순간이었어요. 그때 어쩌면 시를 쓰지 않고도 살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저절로 그냥 살아지는 것이 신기했지요. 그러다 어느 순간 다시 시가 찾아왔습니다.

 
그때부터 시를 다시 쓰기 시작했어요. 이제 시를 처음 만났으니까, 한 백편 정도를 쓴 다음 시가 무엇인지 나에게 되물어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했죠. 이십대 초반부터 29살까지 쓴 것은 시 비슷하기는 하지만 시라고 할 수도 없었죠. 한 백편을 쓰고 나서 나 자신에게 스스로 시가 무엇인가 질문해 보고 그 해답이 내려지면 그 때 등단이란 걸 생각해 봐야지. 근데 어떤 계기가 주어져서 자의반 타의반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데뷔를 하게 됐죠(웃음)

 


한용국 : 네, 한길문학에 ‘청어는 가시가 많아’외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셨지요. 여기 자료가 다 준비되어 있지요. (함께 웃음)

 

조용미 : 이런, 이건 정말 어릴 때 돌 사진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네요. 애기 때 사진 보여주면서 이거 당신 맞지요 하는 것처럼 쑥스러운걸요(웃음) 등단은 덫에 걸려드는 거하고 비슷한 거 같아요. 조금 더 늦게 걸려들었으면 좋았을 텐데.......하지만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는 누구도 자신 있게 뭐라 말할 수 없는 거니까요.

 
어쨌든 시는 쓰는 게 아니라 살아내는 거라서 삶이 가장 중심에 있고 그걸 소중하게 붙들고 있으면 그 자장 안에 저절로 시가 들어오는 것 같아요. 그렇게 몸으로 체험하고 몸화된 말들이 몸을 뚫고 나올 때 울림이 큰 글이 되고 그런 울림이 큰 글만이 다른 사람의 영혼을 건드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삶이 가장 먼저죠. 삶을 꽉 부여잡고 있는 사람의 글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글을 보면 확연히 다르잖아요. 면밀하게 시를 읽어내는 독자라면 단번에 그걸 알아차릴 수 있겠지요.


  섬천남성은 남부 다도해 섬 지방의 해안 숲속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유독성 식물이라고 한다. 높이 60cm 안팎이고 5 - 6월에 흰빛이 도는 녹색 꽃이 핀다고 한다. 유독성 식물, 어쩌면 모든 시에는 독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나비 - 시인이 이야기하는 절실함이란 그 독을 가슴에 품는 힘일지도 모른다 정말 섬천남성은 사람의 몸을 통과하고픈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아, 그럴 것도 같다. 나비 - 시인은 계속해서 그러나 시를 살아낸다는 건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시를 쓴다는 일이 갈수록 무섭고 엄정해진다고 했다.

 

한용국 :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실천문학사), 『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을 날아오르다』(창비),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문학과지성사)에 이르는 세 권의 시집을 내시는 동안 당연히 시세계의 변화가 있으실 거라고 생각되요. 그 변화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다면.

조용미 : 시세계는 많이 변화했다고 할 수 있죠. 첫 시집을 내고 나서야 시가 뭔지 이제야 알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조금 느린 편입니다(웃음) 그리고 두 번째 시집은 정확한 방향을 가지고 달려갔어요. 두 번째 시집을 내고 나서는 후기에도 말했지만 이제는 좀 다른 길을 걷고 싶다고 생각해서 세 번째 시집에까지 이르렀죠. 두 번째 시집부터는 이전과는 다른 시각에서 제 자신을 들여다보게 됐다고 할까요. 세 번째 시집에서는 좀더 가열차게, 삶이 무엇인가를 간절하게 묻고 거기서 제 나름대로 찾은 해답에 대해서 보다 분명하게, 이전의 시에서보다 좀더 직접적으로 발언해보려고 했어요. 이런 건 평론가들이 해야 할 얘긴데......(웃음) 자기 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시인이 자기 시에 대해 과도하게 발언을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한용국 : 시인의 시에는 자연이 많이 변주되어 나오는 데, 시와 자연, 이라는 주제라고 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세요?

조용미 : 여행을 하면서 수없이 많은 곳을 지나며 수많은 풍경과 조우하게 됩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어떤 풍경은 저를 끝까지 따라와서 내내 괴롭힙니다. 내게 잠을 못 자게하고, 몸을 들쑤시고,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런 풍경들이 있지요. 그럴 때, 그 풍경은 그걸 체험하는 사람에게는 하나의 존재론적인 사건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시로 쓰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되요.

 
자연 속에 있을 때 가장 충만한 시간을 가지게 되는 것 같고 마음이 위태로울 때 평상심을 찾도록 자연이 도와줍니다. 내가 풍경이 되어 무심한 듯 그냥 자연 속에 하나가 되어 놓여 있는 시간을 참 좋아합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지극한 마음도 그 속에서 깨닫게 되지요.
인간은 자연에 속하면서도 자연과 대립되는, 자연과 모순되는 이중적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인간은 말하자면 자연 아닌 자연인 것이죠. 도덕경에 보면 도법자연이라고 도는 자연을 따른다고 하잖아요. 삶에서 수없이 많은 것들이 그냥 무의미하게 내 곁을 스쳐 흘러가게 되는데, 내게 특별히 존재론적인 사건으로 다가오는 자연과 대면하고 자연에 내재하는 어떤 내밀한 힘과 대화하게 될 때, 그 때가 아마 가장 행복한 순간인 것 같습니다. 내가 자연에 속해 있고, 그 속에서 시를 쓰는 행위가 내 존재를 끌어올려준다는 느낌이 들 때....

   

한용국 : 음. 너무 유창한 대답인걸요? 아마 이 질문이 나오리라고 짐작하시고 준비하신 거 아니예요? (대담자: 웃음을 유도하기 위해서 조금 어설프게 웃었음)

 
조용미 : (시인: 너무 진지하였음, 대담자: 머쓱한 채로 자세를 고쳐 진지하게 경청하였음) 그 동안 제 시들을 훑어보다 보니까 뭔가 정리를 해두어야 할 거 같아서 간단한 메모를 하고 있습니다요. 아직 체계적인 정리는 못하고 우선 단상만 적어놓고 있어요. 좀 전의 이야기는 제가 요즘 읽고 있는 책과도 관련된 거예요. 저는 육 개월이나 일 년 단위로 주제를 정해놓고 책을 읽는데 올해는 노장사상을 다시 훑어보려고 합니다. 지금은 다른 책과 함께 사유하는 도덕경을 읽고 있는데 해체철학의 시각으로 노장사상을 분석 해석한 책입니다. 노장사상의 핵심은 언어철학이고 언어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언어와 그것이 의미하는 물질적 혹은 관념적 대상과의 관계에 있는데, 이점은 시가 언어와 대상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무화시키려 노력하는 것과도 관계가 있어 보입니다. 늘 언어란 무엇인가를 염두에 두고 있는 시인들은 노장사상의 언어철학에서 그 해답을 한번 찾아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고 있어요. 이미지가 새로우면 세계가 새롭다고 하는데 언어가 새로우면 또한 세계가 새로운 것 아니겠습니까?

 
올 일 년은 노장사상에 대해서 좀 더 다른 시각으로 좀 더 깊이 있게 읽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제 몸이 그 책들을 필요로 한다고 할까요. 제가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몸이 끌려가서 책을 읽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주제가 정해졌어요. 그 책들을 지금 쓰다듬고, 들여다보고, 호흡하고 그러면서 살고 있습니다. 저는 책을 느리고 천천히 읽는 편이예요. 오히려 읽는 시간보다는 중간 중간 생각하고 창밖으로 하늘 바라보고 어느 부분에서 넘어가지 못하고 어슬렁거리고 그런 시간이 더 많다고 할까요. 저는 여행 갈 때 옛날에는 책도 노트도 안 들고 갔어요.

 
길 위에 있는 그것으로 충분해서죠. 무심하게 사물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그런 시간들을 좋아합니다. 무게 때문에 감당을 못해서이기도 하지만 아주 최소한으로 들고 다니죠. 요즘은 그래도 메모지 한 권 정도는 들고 갑니다. 아쉽게도 여기저기 많이 다니지는 못해요. 요즘은 주로 한군데 틀어박혀서 오래 있는 편이지요. 건강이 안 좋아서 꼼짝 못하고 며칠동안 숙소에서 바람소리만 듣다가 돌아 온 적도 있어요. 반은 좋아서 또 반은 어쩔 수 없이 그런 식의 여행을 합니다. 그래도 집에서 앓고 있는 것 보다 훨씬 낫죠. 바람소리 물소리도 다르고...... 여행은 자기의 몸과 영혼이 합일 되는 공간을 찾아서 나서는 것이지요. 그런 곳을 몇 군데 만난 것도 같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 장소를 찾아다녀야 할 것 같습니다.

 

  나비 - 시인의 그런 장소는 어디일까. 시의 힘을 빌어 찾아보면 섬의 어느 절벽의 벼랑 아래 아득하게 엎드린 거기일까, 섬 전체를 비추는 달의 환 속일까, 털머위의 자줏빛 긴 잎자루 위일까. 그런 걸 생각하다가 나는 문득 비 오는 날처럼 캄캄해졌다. 사실은 나도 지난 가을 산에 다녀온 후로 삶이 더욱 힘겨워져 있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 정말이지, 자꾸 체온이 떨어지는 그런 삶을 살고/죽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찻집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막 비발디의 겨울 3악장을 넘어서는 중이었다.

한용국 : 시에 죽음의식이 내장되어 있다는 예전의 인터뷰 내용을 들은 것 같은데,

지금 다시 그 이야기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다면

 

조용미 : 음, 사람에게는 누구나 원체험이란 것이 있는데 이걸 원체험이라고 할 수 있을지 는 모르겠지만 제게도 어떤 기억이 있어요. 저는 고령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랐는데, 초등학교 3학년 때 쯤 할머니가 돌아가셨거든요. 그래서 시골 고향집에 갔어요. 너무 슬퍼서 나는 눈도 안 떠지는데 그 조그만 마을에 친척들이 모두 모여들어 시끌벅적해지는 거예요. 손님들을 대접할 음식을 만들고 마당에서 따로 국을 끓이고 커다란 멍석 위에 상을 펴놓고 갑자기 음식냄새와 사람들 소리로 붐볐죠. 마치 잔치가 난 것처럼. 그리고 상여가 나가는데, 선산이 걸어가면 한나절 되는 먼 거리였어요. 하얀 꽃장식이 많이 달린 상여가 나가는데, 어른들이 다 그 뒤를 따라 상복을 입고 두건을 쓰고 지팡이를 짚고 여자들은 머리에 흰 댕기를 아래로 드리우고...... 혹시 상여 따라가 본 적 있어요? (네). 저는 어린 마음에 그걸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상여도 예쁘고 만장이 너울거리는 것도 그렇고 자주 못 보던 친척들이 모두 모여 소복을 입고 길게 상여를 따라 가는 것이 참 좋았어요. 더구나 곡을 하는 데 리듬이 실려 있고 커다란 슬픔이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때 어른들은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죠, 어른이란 제가 알 수 없는 존재들이었어요. 그때 제게는 죽음이 이상한 동화처럼 다가왔던 것 같아요.

 
요즘도 고향에 가면 그때 꽃상여와 함께 넘었던 고개를 지나며 늘 그 생각을 떠올립니다. 그때, 죽음과 삶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고, 죽은 자를 산 자들의 예로서 이렇게 잘 대접해서 보내는 거구나 그런 걸 배운 거 같아요. 죽음은 가두어두어야 하고 은폐해야 할 어떤 것이고 악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죠. 삶은 우주의 어떤 기운이 인간의 몸에 모여 있는 것이고 죽음은 그 기가 흩어지는 것일 뿐인데요. 요즘은 어린 애들을 상가에 안 데리고 가고, 사람이 죽는 모습은 안보이게 하려고 하잖아요. 그리고 옛날처럼 죽은 사람과의 정서적인 작별의 시간을 충분히 갖지도 못합니다. 지금은 병실에서 돌아가시면 바로 영안실로 보내죠. 죽음과 삶은 서로 불화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삶의 질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시에도 썼지만 할아버지 산소에 오르는 길에 아주 깊고 작은 저수지가 있었는데 저는 어려서부터 그 장소에 매혹 당했던 것 같아요. 다들 무서워했는데 그 시퍼런 물빛 때문이었는지 어쩐지는 알 수 없지만 저는 그냥 지나치지 못했어요. 고향집 앞에도 커다란 못이 있는데 그 못에 어린 아이들이 몇 년 마다 꼭 빠져 죽는 사고가 일어났어요. 제 사촌동생도 없어져 혹시나 하고 못물을 뺐더니 거기서 발견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한 말은 고백하건데 제 시에 나타나는 죽음의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다 아니, 저보다 더 죽음의 얼굴을 자주 들여다보았던 사람들도 저 같은 시를 쓰지는 않으니까요. 

 
인간이란 죽어야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이고 죽음을 불러들이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또한 죽음을 딛고 사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정말 불가해한 존재죠. 인간이 논쟁거리가 되는 이유도 인간의 몸이 천상과 지상의 모든 힘들이 서로 어울려 투쟁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무엇보다 몸이 아프니까 아무래도 죽음 쪽으로 생각이 많이 기울어지는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밝은 쪽을 바라보고 있지만은 못해요. 죽음이 나를 강렬하게 잡아끈다고 해야 할까요.

 
한용국 :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선생님에게는 시와 몸이 함께 가는 거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선생님이 겪는 존재론적 사건들이 몸으로 직접 와서 앓게 되고 시가 나오게 되고...

조용미 : 너무 직접적으로 모든 게 몸으로 와 닿아서 어떨 때는 이렇게 시를 쓰다가는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다작이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저는 아직도 원시적인 시 쓰기를 하는 사람입니다. 뭔가 나를 괴롭히고 들쑤시고 목이 메이고 몸이 아프고 잠을 못자고 밥이 넘어가지 않고, 그래서 숨을 제대로 쉬기 위해서 겨우 후하고 가늘게 내뱉는 어떤 조그만 숨결 같은 것이 제게는 시가 되거든요. 걱정입니다. 제대로 살아내려면 조금은 둔해져야 할 텐데 말이예요.

한용국 : 여성성의 문제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해주세요.

 
조용미: 여성문제에 대해서는 삼십대에 접어들면서부터 많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제가 여성임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어요. 타자로서의, 여성으로서의 자의식 때문에 내내 많이 아파하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리고 그 괴로움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게 되면서 세계를 바라보는 눈도 달라졌고,  현실을 이해하는 폭이 더 커졌다고 해야 할까요. 지구가 생기고 나서 가장 억압받은 동물이 바로 여성이 아닐까요. 여성은 아직도 소외받는 자이고 영원한 타자인 것 같아요. 이 시대에 여성이 여성으로서의 자의식 없이 글을 쓰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하지만 저는 무슨 주의자는 못되는 것 같아요. 그것은 또 다른 누군가가 담당하는 몫이고, 저는 그것을 제 몸 속에 다른 식으로 녹여서 써내고 살아내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가끔 여성시인이 쓴 시의 극단성을 꼬집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이 깊으면 괴로울 수밖에 없고 고통스러운 시를 쓸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시가 하나하나의 단말마의 비명인거지요.

  그 때 나는 ‘슬픔을 무거운 등짐처럼 다시 메고’ 나비 - 시인이 날고/걷고 있는 모습을 나는 문득 떠올리고 있었다. 문득 환영처럼 ‘안개 속에 가득한 검은 나비’들을 본 것 같기도 했다. 그때 실내에 흐르는 음악은 ‘무덤 속에서 천년 동안 토우가 뜯고 있는 가야금’ 소리처럼 가슴을 옥죄어 왔다. 나도 정말이지 ‘피로 씌어지는 生이라는 책’ 속을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정말 ‘숨을 제대로 다시 쉬기’ 위해서 화제를 돌려야만 했다.

 

한용국 : 문예중앙 겨울호에 천성산 지율스님에 관한 시를 발표하셨지요? 가서 뵙고 오신  듯한데 어떠셨어요?

 

조용미 : 지난 가을 천성산에 갔다 내려오면서 한 번 뵈었어요. 그동안 여러 차례 단식을 하셨는데 오늘로 아마 79일째일 겁니다.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을 지율스님이 혼자 하고 계신데 정말 안타깝습니다. 지난 11월 말 도롱뇽소송 항고심에서 패소한 뒤 환경단체들도 끝난 싸움이라며 하나 둘 떠나고 지금은 지율스님 혼자 남아 있는 셈인데요. 천성산 관통터널 공사문제는 정말 끝난 싸움인가, 그렇다면 그 끝은 어디인가 생각해 봐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반문명적, 반지성적 지혜가 필요한 시대인 것 같아요. 정말 환경문제에 대안은 없는 것 같아요. 몇 분 더 빨리 가기 위해서 고속철이 천성산을 지나가야 한다는데, 이런 식으로 경제논리만 쫓아가다보면 나중에 남아나는 것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제 조금 더 느리게 조금 더 불편하게 조금 더 줄이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경제논리를 꺾어놓을 수 있는 대안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지율 스님을 만났을 때, 스님께서 누구 여기 남아서 나 좀 도와줄 사람 없느냐고 말씀하시는데 모두들 살아가는 사정이 나름대로 바쁜 사람들이라 아무도 남을 수가 없었어요. 저는 차마 스님과 아무런 말도 나눌 수가 없어서 그저 입만 다물고 가만히 앉아 얼굴만 몇 번 바라보다 일어섰습니다. 차가 떠날 시간이 되어도 아무도 가자는 말을 못하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면서 무척 부끄러웠고 제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어요. 반문명적인 지혜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좀 더 치열하게 고민해 봐야할 것 같아요.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면서 대안을 찾는 게 어떻겠냐고 여쭈었더니 스님께서 대안이나 타협점을 생각해 놓지 않고 이 일을 해야 한다고, 대안을 생각해가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하셨어요.

 
지율스님이 대안을 찾지 말라고 했던 것처럼, 앞으로 무엇이 올지 모르는 시점에서 일을 해야 한다고 한 것처럼, 시도 삶과의 전면전을 벌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에 팔 다리 하나 걸치고 있는 게 아니라 전부를 걸어야 한다는 거죠. 고통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것 같아요. 진정한 서사는 언제나 타자로 향하는 길 위에 있다고 합니다. 앞으로 존재의 근원적 구조에 대한 물음과 동시에 나를 둘러싸고 있는 바깥 세계에 대한 관심을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철저한 자기인식과 명확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만이 제대로 글을 쓸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이쯤에서 대담을 끝내고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나는 문득 뿌리가 내린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서기가 어려웠다. 나비 - 시인이 그걸 알아채고, 맥주 한 잔의 제안으로 가볍게 나를 뽑아내 주었다. 나중에 다시 합류한 이재훈 편집장과 함께 자리를 옮겨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솔잎동동주를 마시면서 나비 - 시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중의 일부는 이 대담 속에 있지만 일부는 남겨진 술잔 속에 있다. 아. 막걸리 한두 잔을 마시는 동안 서서히 나비 - 시인은 서서히 아름다운 여자로 환생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기록해두어야겠다. 참, 섬천남성은 희귀 및 멸종위기 식물로 법정보호 식물이라고 한다. 천성산의 꼬리치레도룡뇽을 포함한 전 세계 양서류도 멸종위기의 비율이 조류 12%(121 1종), 포유류 23%(1130종)에 비해 32%로 현저히 높다고 한다. 이대로라면 정말 지구에서 우리 모두의 삶은 󰡒비오는 날의 나비처럼, 날아다닐 시간이 많지󰡓않을 것이다.

 

* 인용된 시들은 모두, 조용미 시인의 시집,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에 수록되어 있는 시들을 변주하여 인용한 것임을 밝힙니다.

 

 

 

 

 

 

문장의 소리 제613회 : 1부 조용미 시인 (2020-05-06)

 

    조용미 시인은 1990년 한길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시집으로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을 날아오르다』,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기억의 행성』, 『나의 다른 이름들』 등이 있습니다. 최근에 일곱 번째 시집 『당신의 아름다움』을 출간하였습니다.

Q. DJ 최진영 : 『당신의 아름다움』이라는 제목이 아름다운데 시집을 다 읽은 다음에는 슬픈 제목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제목을 택하게 되신 이유가 있나요?

A. 조용미 시인 : 제목은 '연두의 습관'과 '당신의 아름다움' 사이에서 많이 고민을 했습니다. '연두의 습관'을 염두에 두고 '당신의 아름다움'은 어떨까 고려해보는 방식이었어요. '연두의 습관'이 감각이라면 '당신의 아름다움'은 울림일 텐데 잘 결정한 것 같아요. 이 시집 전체를 끌어안는 제목이라고 생각돼요. 이전 시집에서 신형철 평론가가 "미학적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해설을 썼는데 제가 좀 탐미적인 인간인 것 같긴 해요. 아름다움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사람이죠. 아름다움엔 도저히 저항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아름다움이 제게는 시련이기도 해요. 제 시집 전부가 아름다움에 대한 공경과 찬미와 번민, 이런 것들로 이루어진 것 같기도 하고요. 초교지 보고 나서 편집부에 의견을 구했더니 이전 시집과 연관성을 고려한다면 '당신의 아름다움'이 더 좋겠다, 라고 조언을 해주었는데 초교지 볼 때는 '당신의 아름다움'이었다가 재교, 삼교 볼 때는 '연두의 습관'으로 결정했는데 삼교지 넘긴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됐는데 편집부에 다른 일로 전화를 했다가 제목에 대한 얘기를 또 나누게 됐고 그 때 최종적으로 '당신의 아름다움'으로 하겠다했어요. 제가 여간해서 남의 말을 잘 안 듣는데 이상하게 그 날은 조언이 귀에 쏙 들어왔어요. 그래서 바꾸겠다고 했죠. 사실 '연두의 습관'으로 정하게 될 것 같아서 표지색도 연두색으로 했는데. 제목이 운명이란 게 있나 봐요.

 

Q. 조용미 시인님의 이번 시집을 보면 색채를 느끼는 감각이 무척 예민하고 뛰어나다는 느낌이 듭니다. 예를 들면 '연두의 회유', '검은 연못', '흰색에 관한 말', '흰색 침묵', '분홍의 수사' 같은 표현이나 '초록을 말하다', '분홍을 기리다' 같이 이전 시집에서 쓴 표현도 그렇고 제목도 ('연두의 습관'으로) 고민하셨다는 지점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A. 제가 색채를 식별하는 감각이 좀 남다른 것 같아요. 빛을 알아차리는 감각, 빛을 기억하고 그 빛을 통해 재인식하는 이상한 자질이랄까 감각의 회로가 유난히 발달돼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알고 있는 색의 뒤편에 숨어있는 진정한 색을 찾아내는 일 같은 것에 흥미를 느끼고 있어요. 뭐든 색으로 표현하길 좋아하는데 이를테면 바흐는 푸른색, 마레는 회색, 파가니니는 보라색, 이런 색으로 말하길 즐겨 해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가장 궁금한 게 '그 사람이 무슨 색을 좋아 하는가'에요. 그리고 좀 오래된 기억이라도 그 사람이 입었던 옷의 색깔, 이런 걸 비교적 정확하게 기억해요. 저는 푸른색을 좋아하는데 가장 매혹적인 색은 검은색이 아닌가 해요. 사실 검은색은 색채라기보다 색의 없음, 과잉이고 어떤 상태에 가까운데 검은색은 실재하는 색이라기보다 빛이 없는 상태이고 알 수 없는 깊이와 우주 저 너머의 닿을 수 없는 먼 공간에 대한 상징 같은 것이기도 하잖아요. 말하자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다른 이름이라고 해야 할까. 색에 대한 제 관심은 검은색과 흰색, 붉은색에서 푸른색, 그 다음 초록으로 그리고 연두를 거쳐서 이제 분홍으로 온 것 같아요.

 

Q.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 축축한 공기 속에서 나는 오로지 나의 슬픔에만 몰두하기로 했다", 「무한의 테라스」의 한 부분입니다. 『당신의 아름다움』이라는 시집 제목만 봤을 때는 아름다운 당신의 이야기나 황홀한 사랑 같은 것들을 기대하게 되는데 이 시집을 읽을수록 사랑 뒤편에 놓인 슬픔이 더 크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A. 그러고 보니 「무한의 테라스」는 슬픔에 대한 시 인 것 같아요. 어떤 새로운 공간을 만나게 돼도 그 풍경에는 나의 슬픔이 담겨있는 거죠. 슬픔이 사라지지 않고 맞닥뜨린 아름다운 풍경으로 인해 더 깊어지는 거예요. 제목을 보고 왜 사랑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는데 사랑에 대한 진술은 대부분 과거형으로 쓰이는데 왜 그럴까요? (최진영 : 저는 시를 읽을 때 이별이 떠올랐어요.) 맞아요. 사랑의 과정에 충실해야 내가 좀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고 나의 내면을 더 깊이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돼요. 우리는 사랑 앞에서 누구나 다 약자이고 고통 받는 존재라 사랑으로 인한 슬픔은 필연인 것 같아요. 물론 사랑의 기쁨과 황홀도 있겠지만.

 

Q. 시집 맨 뒤의 시인의 말에 이렇게 쓰셨습니다. "건강한 슬픔은 사람을 괴롭히지 않고 아름답게 한다. 나는 당신에게 그런 슬픔을 안겨주고 싶다." 우리를 아름답게 하는 슬픔이란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A. 슬픔을 겪고 나면 영혼이 물로 씻어낸 듯이 새로워진 느낌이 드는데 뭔가 달라지고 인간으로 한 층 성장하는 느낌이 든다면, 그 사람이 겪었던 슬픔은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요? 고통이 아름다움이 될 수는 없겠지만 깊이 슬픔을 견뎌내다 보면 어느 순간 아름다움으로 전환되는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그건 지나고 나서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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