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 시인의 꿈을 들여다보다


조용미  -  한용국

 
『현대시』2005년 2월, 현대시가 선정한 이달의 시인/ 대담
 

 


  조용미 시인을 만나기로 한 시간은 여섯시 반이었다. 그러나 아차아차 하는 사이에 나는 무려 한 시간이나 늦게 도착하고 있었다. 추위 속을 헐떡거리며 인사동의 관훈갤러리 옆의 판화방에 도착했을 때는 이재훈 편집장이 손을 흔들어 주었고, 조용미 시인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밖에 다니러 갔다고 했다. 잠깐 자리를 옮겨 기다리는 사이에 나는 문득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을 떠올렸고, 거기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섬천남성은 독을 품고 있다」를 떠올렸다. 󰡒날아다닐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그렇게 날아다니는 나비는󰡓, 이라는 시구를 떠올렸을 때, 정말 거짓말처럼 나비 한 마리가 사뿐하게 판화방 안으로 들어와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지각을 용서하듯 살풋 웃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한용국 : 우선 근황부터 여쭤보기로 할게요. 시집 내신 이후로 무척 바쁘셨을 것 같은데..

조용미 : 시집 내고 나서 발표를 좀 많이 했나요? 단순하고 고요한 삶의 형식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올해 들어서는 감기몸살로 고생하다가 십여 일 만에 밖에 나와요. 근황이라...... 창 밖을 열심히 내다보고 있고 열심히 앓고 있고 열심히 생각하고 있어요.

한용국 : 아 어디가 아프신가 봐요?

 

조용미 : 몸이 늘 아픈 편입니다. 좀 덜 아플 때가 있고, 괜찮을 때도 있고.. 지병이지요. 의학적으로 말하자면 허리디스크 환자죠. 의학적 병명은 그런데, 병명을 모르고 아주 오래 앓았어요. 사람들을 만나면 오랜만에 만나건 근자에 만나는 사람이건 처음 묻는 말이 다 몸은 좀 어떠냐는 말입니다. 다른 걸로 안부를 물었으면 좋겠는데...... 제가 사람들한테 미안하죠. 제 대답은 늘 “괜찮다” 입니다. 아플 때나 안 아플 때나(함께 웃음)

 
한용국 : 이십대 후반에 등단을 하셨다고 되어 있으니까. 올해로 등단하신지가 십오 년 째 되시네요.

  
조용미 : 네 서른 살 되기 직전에 등단했어요. 생각보다 빨리하게 된 편이죠. 이십대 습작기에 시를 쓰다가 어느 기간 한 사년 정도 전혀 시를 못 쓴 적이 있어요. 책도 못 읽고 거의 모든 게 정지된 듯한 순간이었어요. 그때 어쩌면 시를 쓰지 않고도 살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저절로 그냥 살아지는 것이 신기했지요. 그러다 어느 순간 다시 시가 찾아왔습니다.

 
그때부터 시를 다시 쓰기 시작했어요. 이제 시를 처음 만났으니까, 한 백편 정도를 쓴 다음 시가 무엇인지 나에게 되물어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했죠. 이십대 초반부터 29살까지 쓴 것은 시 비슷하기는 하지만 시라고 할 수도 없었죠. 한 백편을 쓰고 나서 나 자신에게 스스로 시가 무엇인가 질문해 보고 그 해답이 내려지면 그 때 등단이란 걸 생각해 봐야지. 근데 어떤 계기가 주어져서 자의반 타의반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데뷔를 하게 됐죠(웃음)

 


한용국 : 네, 한길문학에 ‘청어는 가시가 많아’외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셨지요. 여기 자료가 다 준비되어 있지요. (함께 웃음)

 

조용미 : 이런, 이건 정말 어릴 때 돌 사진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네요. 애기 때 사진 보여주면서 이거 당신 맞지요 하는 것처럼 쑥스러운걸요(웃음) 등단은 덫에 걸려드는 거하고 비슷한 거 같아요. 조금 더 늦게 걸려들었으면 좋았을 텐데.......하지만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는 누구도 자신 있게 뭐라 말할 수 없는 거니까요.

 
어쨌든 시는 쓰는 게 아니라 살아내는 거라서 삶이 가장 중심에 있고 그걸 소중하게 붙들고 있으면 그 자장 안에 저절로 시가 들어오는 것 같아요. 그렇게 몸으로 체험하고 몸화된 말들이 몸을 뚫고 나올 때 울림이 큰 글이 되고 그런 울림이 큰 글만이 다른 사람의 영혼을 건드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삶이 가장 먼저죠. 삶을 꽉 부여잡고 있는 사람의 글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글을 보면 확연히 다르잖아요. 면밀하게 시를 읽어내는 독자라면 단번에 그걸 알아차릴 수 있겠지요.


  섬천남성은 남부 다도해 섬 지방의 해안 숲속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유독성 식물이라고 한다. 높이 60cm 안팎이고 5 - 6월에 흰빛이 도는 녹색 꽃이 핀다고 한다. 유독성 식물, 어쩌면 모든 시에는 독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나비 - 시인이 이야기하는 절실함이란 그 독을 가슴에 품는 힘일지도 모른다 정말 섬천남성은 사람의 몸을 통과하고픈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아, 그럴 것도 같다. 나비 - 시인은 계속해서 그러나 시를 살아낸다는 건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시를 쓴다는 일이 갈수록 무섭고 엄정해진다고 했다.

 

한용국 :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실천문학사), 『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을 날아오르다』(창비),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문학과지성사)에 이르는 세 권의 시집을 내시는 동안 당연히 시세계의 변화가 있으실 거라고 생각되요. 그 변화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다면.

조용미 : 시세계는 많이 변화했다고 할 수 있죠. 첫 시집을 내고 나서야 시가 뭔지 이제야 알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조금 느린 편입니다(웃음) 그리고 두 번째 시집은 정확한 방향을 가지고 달려갔어요. 두 번째 시집을 내고 나서는 후기에도 말했지만 이제는 좀 다른 길을 걷고 싶다고 생각해서 세 번째 시집에까지 이르렀죠. 두 번째 시집부터는 이전과는 다른 시각에서 제 자신을 들여다보게 됐다고 할까요. 세 번째 시집에서는 좀더 가열차게, 삶이 무엇인가를 간절하게 묻고 거기서 제 나름대로 찾은 해답에 대해서 보다 분명하게, 이전의 시에서보다 좀더 직접적으로 발언해보려고 했어요. 이런 건 평론가들이 해야 할 얘긴데......(웃음) 자기 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시인이 자기 시에 대해 과도하게 발언을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한용국 : 시인의 시에는 자연이 많이 변주되어 나오는 데, 시와 자연, 이라는 주제라고 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세요?

조용미 : 여행을 하면서 수없이 많은 곳을 지나며 수많은 풍경과 조우하게 됩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어떤 풍경은 저를 끝까지 따라와서 내내 괴롭힙니다. 내게 잠을 못 자게하고, 몸을 들쑤시고,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런 풍경들이 있지요. 그럴 때, 그 풍경은 그걸 체험하는 사람에게는 하나의 존재론적인 사건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시로 쓰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되요.

 
자연 속에 있을 때 가장 충만한 시간을 가지게 되는 것 같고 마음이 위태로울 때 평상심을 찾도록 자연이 도와줍니다. 내가 풍경이 되어 무심한 듯 그냥 자연 속에 하나가 되어 놓여 있는 시간을 참 좋아합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지극한 마음도 그 속에서 깨닫게 되지요.
인간은 자연에 속하면서도 자연과 대립되는, 자연과 모순되는 이중적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인간은 말하자면 자연 아닌 자연인 것이죠. 도덕경에 보면 도법자연이라고 도는 자연을 따른다고 하잖아요. 삶에서 수없이 많은 것들이 그냥 무의미하게 내 곁을 스쳐 흘러가게 되는데, 내게 특별히 존재론적인 사건으로 다가오는 자연과 대면하고 자연에 내재하는 어떤 내밀한 힘과 대화하게 될 때, 그 때가 아마 가장 행복한 순간인 것 같습니다. 내가 자연에 속해 있고, 그 속에서 시를 쓰는 행위가 내 존재를 끌어올려준다는 느낌이 들 때....

   

한용국 : 음. 너무 유창한 대답인걸요? 아마 이 질문이 나오리라고 짐작하시고 준비하신 거 아니예요? (대담자: 웃음을 유도하기 위해서 조금 어설프게 웃었음)

 
조용미 : (시인: 너무 진지하였음, 대담자: 머쓱한 채로 자세를 고쳐 진지하게 경청하였음) 그 동안 제 시들을 훑어보다 보니까 뭔가 정리를 해두어야 할 거 같아서 간단한 메모를 하고 있습니다요. 아직 체계적인 정리는 못하고 우선 단상만 적어놓고 있어요. 좀 전의 이야기는 제가 요즘 읽고 있는 책과도 관련된 거예요. 저는 육 개월이나 일 년 단위로 주제를 정해놓고 책을 읽는데 올해는 노장사상을 다시 훑어보려고 합니다. 지금은 다른 책과 함께 사유하는 도덕경을 읽고 있는데 해체철학의 시각으로 노장사상을 분석 해석한 책입니다. 노장사상의 핵심은 언어철학이고 언어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언어와 그것이 의미하는 물질적 혹은 관념적 대상과의 관계에 있는데, 이점은 시가 언어와 대상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무화시키려 노력하는 것과도 관계가 있어 보입니다. 늘 언어란 무엇인가를 염두에 두고 있는 시인들은 노장사상의 언어철학에서 그 해답을 한번 찾아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고 있어요. 이미지가 새로우면 세계가 새롭다고 하는데 언어가 새로우면 또한 세계가 새로운 것 아니겠습니까?

 
올 일 년은 노장사상에 대해서 좀 더 다른 시각으로 좀 더 깊이 있게 읽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제 몸이 그 책들을 필요로 한다고 할까요. 제가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몸이 끌려가서 책을 읽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주제가 정해졌어요. 그 책들을 지금 쓰다듬고, 들여다보고, 호흡하고 그러면서 살고 있습니다. 저는 책을 느리고 천천히 읽는 편이예요. 오히려 읽는 시간보다는 중간 중간 생각하고 창밖으로 하늘 바라보고 어느 부분에서 넘어가지 못하고 어슬렁거리고 그런 시간이 더 많다고 할까요. 저는 여행 갈 때 옛날에는 책도 노트도 안 들고 갔어요.

 
길 위에 있는 그것으로 충분해서죠. 무심하게 사물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그런 시간들을 좋아합니다. 무게 때문에 감당을 못해서이기도 하지만 아주 최소한으로 들고 다니죠. 요즘은 그래도 메모지 한 권 정도는 들고 갑니다. 아쉽게도 여기저기 많이 다니지는 못해요. 요즘은 주로 한군데 틀어박혀서 오래 있는 편이지요. 건강이 안 좋아서 꼼짝 못하고 며칠동안 숙소에서 바람소리만 듣다가 돌아 온 적도 있어요. 반은 좋아서 또 반은 어쩔 수 없이 그런 식의 여행을 합니다. 그래도 집에서 앓고 있는 것 보다 훨씬 낫죠. 바람소리 물소리도 다르고...... 여행은 자기의 몸과 영혼이 합일 되는 공간을 찾아서 나서는 것이지요. 그런 곳을 몇 군데 만난 것도 같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 장소를 찾아다녀야 할 것 같습니다.

 

  나비 - 시인의 그런 장소는 어디일까. 시의 힘을 빌어 찾아보면 섬의 어느 절벽의 벼랑 아래 아득하게 엎드린 거기일까, 섬 전체를 비추는 달의 환 속일까, 털머위의 자줏빛 긴 잎자루 위일까. 그런 걸 생각하다가 나는 문득 비 오는 날처럼 캄캄해졌다. 사실은 나도 지난 가을 산에 다녀온 후로 삶이 더욱 힘겨워져 있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 정말이지, 자꾸 체온이 떨어지는 그런 삶을 살고/죽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찻집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막 비발디의 겨울 3악장을 넘어서는 중이었다.

한용국 : 시에 죽음의식이 내장되어 있다는 예전의 인터뷰 내용을 들은 것 같은데,

지금 다시 그 이야기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다면

 

조용미 : 음, 사람에게는 누구나 원체험이란 것이 있는데 이걸 원체험이라고 할 수 있을지 는 모르겠지만 제게도 어떤 기억이 있어요. 저는 고령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랐는데, 초등학교 3학년 때 쯤 할머니가 돌아가셨거든요. 그래서 시골 고향집에 갔어요. 너무 슬퍼서 나는 눈도 안 떠지는데 그 조그만 마을에 친척들이 모두 모여들어 시끌벅적해지는 거예요. 손님들을 대접할 음식을 만들고 마당에서 따로 국을 끓이고 커다란 멍석 위에 상을 펴놓고 갑자기 음식냄새와 사람들 소리로 붐볐죠. 마치 잔치가 난 것처럼. 그리고 상여가 나가는데, 선산이 걸어가면 한나절 되는 먼 거리였어요. 하얀 꽃장식이 많이 달린 상여가 나가는데, 어른들이 다 그 뒤를 따라 상복을 입고 두건을 쓰고 지팡이를 짚고 여자들은 머리에 흰 댕기를 아래로 드리우고...... 혹시 상여 따라가 본 적 있어요? (네). 저는 어린 마음에 그걸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상여도 예쁘고 만장이 너울거리는 것도 그렇고 자주 못 보던 친척들이 모두 모여 소복을 입고 길게 상여를 따라 가는 것이 참 좋았어요. 더구나 곡을 하는 데 리듬이 실려 있고 커다란 슬픔이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때 어른들은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죠, 어른이란 제가 알 수 없는 존재들이었어요. 그때 제게는 죽음이 이상한 동화처럼 다가왔던 것 같아요.

 
요즘도 고향에 가면 그때 꽃상여와 함께 넘었던 고개를 지나며 늘 그 생각을 떠올립니다. 그때, 죽음과 삶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고, 죽은 자를 산 자들의 예로서 이렇게 잘 대접해서 보내는 거구나 그런 걸 배운 거 같아요. 죽음은 가두어두어야 하고 은폐해야 할 어떤 것이고 악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죠. 삶은 우주의 어떤 기운이 인간의 몸에 모여 있는 것이고 죽음은 그 기가 흩어지는 것일 뿐인데요. 요즘은 어린 애들을 상가에 안 데리고 가고, 사람이 죽는 모습은 안보이게 하려고 하잖아요. 그리고 옛날처럼 죽은 사람과의 정서적인 작별의 시간을 충분히 갖지도 못합니다. 지금은 병실에서 돌아가시면 바로 영안실로 보내죠. 죽음과 삶은 서로 불화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삶의 질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시에도 썼지만 할아버지 산소에 오르는 길에 아주 깊고 작은 저수지가 있었는데 저는 어려서부터 그 장소에 매혹 당했던 것 같아요. 다들 무서워했는데 그 시퍼런 물빛 때문이었는지 어쩐지는 알 수 없지만 저는 그냥 지나치지 못했어요. 고향집 앞에도 커다란 못이 있는데 그 못에 어린 아이들이 몇 년 마다 꼭 빠져 죽는 사고가 일어났어요. 제 사촌동생도 없어져 혹시나 하고 못물을 뺐더니 거기서 발견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한 말은 고백하건데 제 시에 나타나는 죽음의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다 아니, 저보다 더 죽음의 얼굴을 자주 들여다보았던 사람들도 저 같은 시를 쓰지는 않으니까요. 

 
인간이란 죽어야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이고 죽음을 불러들이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또한 죽음을 딛고 사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정말 불가해한 존재죠. 인간이 논쟁거리가 되는 이유도 인간의 몸이 천상과 지상의 모든 힘들이 서로 어울려 투쟁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무엇보다 몸이 아프니까 아무래도 죽음 쪽으로 생각이 많이 기울어지는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밝은 쪽을 바라보고 있지만은 못해요. 죽음이 나를 강렬하게 잡아끈다고 해야 할까요.

 
한용국 :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선생님에게는 시와 몸이 함께 가는 거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선생님이 겪는 존재론적 사건들이 몸으로 직접 와서 앓게 되고 시가 나오게 되고...

조용미 : 너무 직접적으로 모든 게 몸으로 와 닿아서 어떨 때는 이렇게 시를 쓰다가는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다작이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저는 아직도 원시적인 시 쓰기를 하는 사람입니다. 뭔가 나를 괴롭히고 들쑤시고 목이 메이고 몸이 아프고 잠을 못자고 밥이 넘어가지 않고, 그래서 숨을 제대로 쉬기 위해서 겨우 후하고 가늘게 내뱉는 어떤 조그만 숨결 같은 것이 제게는 시가 되거든요. 걱정입니다. 제대로 살아내려면 조금은 둔해져야 할 텐데 말이예요.

한용국 : 여성성의 문제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해주세요.

 
조용미: 여성문제에 대해서는 삼십대에 접어들면서부터 많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제가 여성임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어요. 타자로서의, 여성으로서의 자의식 때문에 내내 많이 아파하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리고 그 괴로움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게 되면서 세계를 바라보는 눈도 달라졌고,  현실을 이해하는 폭이 더 커졌다고 해야 할까요. 지구가 생기고 나서 가장 억압받은 동물이 바로 여성이 아닐까요. 여성은 아직도 소외받는 자이고 영원한 타자인 것 같아요. 이 시대에 여성이 여성으로서의 자의식 없이 글을 쓰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하지만 저는 무슨 주의자는 못되는 것 같아요. 그것은 또 다른 누군가가 담당하는 몫이고, 저는 그것을 제 몸 속에 다른 식으로 녹여서 써내고 살아내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가끔 여성시인이 쓴 시의 극단성을 꼬집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이 깊으면 괴로울 수밖에 없고 고통스러운 시를 쓸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시가 하나하나의 단말마의 비명인거지요.

  그 때 나는 ‘슬픔을 무거운 등짐처럼 다시 메고’ 나비 - 시인이 날고/걷고 있는 모습을 나는 문득 떠올리고 있었다. 문득 환영처럼 ‘안개 속에 가득한 검은 나비’들을 본 것 같기도 했다. 그때 실내에 흐르는 음악은 ‘무덤 속에서 천년 동안 토우가 뜯고 있는 가야금’ 소리처럼 가슴을 옥죄어 왔다. 나도 정말이지 ‘피로 씌어지는 生이라는 책’ 속을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정말 ‘숨을 제대로 다시 쉬기’ 위해서 화제를 돌려야만 했다.

 

한용국 : 문예중앙 겨울호에 천성산 지율스님에 관한 시를 발표하셨지요? 가서 뵙고 오신  듯한데 어떠셨어요?

 

조용미 : 지난 가을 천성산에 갔다 내려오면서 한 번 뵈었어요. 그동안 여러 차례 단식을 하셨는데 오늘로 아마 79일째일 겁니다.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을 지율스님이 혼자 하고 계신데 정말 안타깝습니다. 지난 11월 말 도롱뇽소송 항고심에서 패소한 뒤 환경단체들도 끝난 싸움이라며 하나 둘 떠나고 지금은 지율스님 혼자 남아 있는 셈인데요. 천성산 관통터널 공사문제는 정말 끝난 싸움인가, 그렇다면 그 끝은 어디인가 생각해 봐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반문명적, 반지성적 지혜가 필요한 시대인 것 같아요. 정말 환경문제에 대안은 없는 것 같아요. 몇 분 더 빨리 가기 위해서 고속철이 천성산을 지나가야 한다는데, 이런 식으로 경제논리만 쫓아가다보면 나중에 남아나는 것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제 조금 더 느리게 조금 더 불편하게 조금 더 줄이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경제논리를 꺾어놓을 수 있는 대안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지율 스님을 만났을 때, 스님께서 누구 여기 남아서 나 좀 도와줄 사람 없느냐고 말씀하시는데 모두들 살아가는 사정이 나름대로 바쁜 사람들이라 아무도 남을 수가 없었어요. 저는 차마 스님과 아무런 말도 나눌 수가 없어서 그저 입만 다물고 가만히 앉아 얼굴만 몇 번 바라보다 일어섰습니다. 차가 떠날 시간이 되어도 아무도 가자는 말을 못하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면서 무척 부끄러웠고 제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어요. 반문명적인 지혜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좀 더 치열하게 고민해 봐야할 것 같아요.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면서 대안을 찾는 게 어떻겠냐고 여쭈었더니 스님께서 대안이나 타협점을 생각해 놓지 않고 이 일을 해야 한다고, 대안을 생각해가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하셨어요.

 
지율스님이 대안을 찾지 말라고 했던 것처럼, 앞으로 무엇이 올지 모르는 시점에서 일을 해야 한다고 한 것처럼, 시도 삶과의 전면전을 벌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에 팔 다리 하나 걸치고 있는 게 아니라 전부를 걸어야 한다는 거죠. 고통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것 같아요. 진정한 서사는 언제나 타자로 향하는 길 위에 있다고 합니다. 앞으로 존재의 근원적 구조에 대한 물음과 동시에 나를 둘러싸고 있는 바깥 세계에 대한 관심을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철저한 자기인식과 명확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만이 제대로 글을 쓸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이쯤에서 대담을 끝내고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나는 문득 뿌리가 내린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서기가 어려웠다. 나비 - 시인이 그걸 알아채고, 맥주 한 잔의 제안으로 가볍게 나를 뽑아내 주었다. 나중에 다시 합류한 이재훈 편집장과 함께 자리를 옮겨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솔잎동동주를 마시면서 나비 - 시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중의 일부는 이 대담 속에 있지만 일부는 남겨진 술잔 속에 있다. 아. 막걸리 한두 잔을 마시는 동안 서서히 나비 - 시인은 서서히 아름다운 여자로 환생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기록해두어야겠다. 참, 섬천남성은 희귀 및 멸종위기 식물로 법정보호 식물이라고 한다. 천성산의 꼬리치레도룡뇽을 포함한 전 세계 양서류도 멸종위기의 비율이 조류 12%(121 1종), 포유류 23%(1130종)에 비해 32%로 현저히 높다고 한다. 이대로라면 정말 지구에서 우리 모두의 삶은 󰡒비오는 날의 나비처럼, 날아다닐 시간이 많지󰡓않을 것이다.

 

* 인용된 시들은 모두, 조용미 시인의 시집,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에 수록되어 있는 시들을 변주하여 인용한 것임을 밝힙니다.

 

 

 

 

 

 

문장의 소리 제613회 : 1부 조용미 시인 (2020-05-06)

 

    조용미 시인은 1990년 한길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시집으로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을 날아오르다』,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기억의 행성』, 『나의 다른 이름들』 등이 있습니다. 최근에 일곱 번째 시집 『당신의 아름다움』을 출간하였습니다.

Q. DJ 최진영 : 『당신의 아름다움』이라는 제목이 아름다운데 시집을 다 읽은 다음에는 슬픈 제목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제목을 택하게 되신 이유가 있나요?

A. 조용미 시인 : 제목은 '연두의 습관'과 '당신의 아름다움' 사이에서 많이 고민을 했습니다. '연두의 습관'을 염두에 두고 '당신의 아름다움'은 어떨까 고려해보는 방식이었어요. '연두의 습관'이 감각이라면 '당신의 아름다움'은 울림일 텐데 잘 결정한 것 같아요. 이 시집 전체를 끌어안는 제목이라고 생각돼요. 이전 시집에서 신형철 평론가가 "미학적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해설을 썼는데 제가 좀 탐미적인 인간인 것 같긴 해요. 아름다움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사람이죠. 아름다움엔 도저히 저항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아름다움이 제게는 시련이기도 해요. 제 시집 전부가 아름다움에 대한 공경과 찬미와 번민, 이런 것들로 이루어진 것 같기도 하고요. 초교지 보고 나서 편집부에 의견을 구했더니 이전 시집과 연관성을 고려한다면 '당신의 아름다움'이 더 좋겠다, 라고 조언을 해주었는데 초교지 볼 때는 '당신의 아름다움'이었다가 재교, 삼교 볼 때는 '연두의 습관'으로 결정했는데 삼교지 넘긴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됐는데 편집부에 다른 일로 전화를 했다가 제목에 대한 얘기를 또 나누게 됐고 그 때 최종적으로 '당신의 아름다움'으로 하겠다했어요. 제가 여간해서 남의 말을 잘 안 듣는데 이상하게 그 날은 조언이 귀에 쏙 들어왔어요. 그래서 바꾸겠다고 했죠. 사실 '연두의 습관'으로 정하게 될 것 같아서 표지색도 연두색으로 했는데. 제목이 운명이란 게 있나 봐요.

 

Q. 조용미 시인님의 이번 시집을 보면 색채를 느끼는 감각이 무척 예민하고 뛰어나다는 느낌이 듭니다. 예를 들면 '연두의 회유', '검은 연못', '흰색에 관한 말', '흰색 침묵', '분홍의 수사' 같은 표현이나 '초록을 말하다', '분홍을 기리다' 같이 이전 시집에서 쓴 표현도 그렇고 제목도 ('연두의 습관'으로) 고민하셨다는 지점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A. 제가 색채를 식별하는 감각이 좀 남다른 것 같아요. 빛을 알아차리는 감각, 빛을 기억하고 그 빛을 통해 재인식하는 이상한 자질이랄까 감각의 회로가 유난히 발달돼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알고 있는 색의 뒤편에 숨어있는 진정한 색을 찾아내는 일 같은 것에 흥미를 느끼고 있어요. 뭐든 색으로 표현하길 좋아하는데 이를테면 바흐는 푸른색, 마레는 회색, 파가니니는 보라색, 이런 색으로 말하길 즐겨 해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가장 궁금한 게 '그 사람이 무슨 색을 좋아 하는가'에요. 그리고 좀 오래된 기억이라도 그 사람이 입었던 옷의 색깔, 이런 걸 비교적 정확하게 기억해요. 저는 푸른색을 좋아하는데 가장 매혹적인 색은 검은색이 아닌가 해요. 사실 검은색은 색채라기보다 색의 없음, 과잉이고 어떤 상태에 가까운데 검은색은 실재하는 색이라기보다 빛이 없는 상태이고 알 수 없는 깊이와 우주 저 너머의 닿을 수 없는 먼 공간에 대한 상징 같은 것이기도 하잖아요. 말하자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다른 이름이라고 해야 할까. 색에 대한 제 관심은 검은색과 흰색, 붉은색에서 푸른색, 그 다음 초록으로 그리고 연두를 거쳐서 이제 분홍으로 온 것 같아요.

 

Q.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 축축한 공기 속에서 나는 오로지 나의 슬픔에만 몰두하기로 했다", 「무한의 테라스」의 한 부분입니다. 『당신의 아름다움』이라는 시집 제목만 봤을 때는 아름다운 당신의 이야기나 황홀한 사랑 같은 것들을 기대하게 되는데 이 시집을 읽을수록 사랑 뒤편에 놓인 슬픔이 더 크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A. 그러고 보니 「무한의 테라스」는 슬픔에 대한 시 인 것 같아요. 어떤 새로운 공간을 만나게 돼도 그 풍경에는 나의 슬픔이 담겨있는 거죠. 슬픔이 사라지지 않고 맞닥뜨린 아름다운 풍경으로 인해 더 깊어지는 거예요. 제목을 보고 왜 사랑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는데 사랑에 대한 진술은 대부분 과거형으로 쓰이는데 왜 그럴까요? (최진영 : 저는 시를 읽을 때 이별이 떠올랐어요.) 맞아요. 사랑의 과정에 충실해야 내가 좀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고 나의 내면을 더 깊이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돼요. 우리는 사랑 앞에서 누구나 다 약자이고 고통 받는 존재라 사랑으로 인한 슬픔은 필연인 것 같아요. 물론 사랑의 기쁨과 황홀도 있겠지만.

 

Q. 시집 맨 뒤의 시인의 말에 이렇게 쓰셨습니다. "건강한 슬픔은 사람을 괴롭히지 않고 아름답게 한다. 나는 당신에게 그런 슬픔을 안겨주고 싶다." 우리를 아름답게 하는 슬픔이란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A. 슬픔을 겪고 나면 영혼이 물로 씻어낸 듯이 새로워진 느낌이 드는데 뭔가 달라지고 인간으로 한 층 성장하는 느낌이 든다면, 그 사람이 겪었던 슬픔은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요? 고통이 아름다움이 될 수는 없겠지만 깊이 슬픔을 견뎌내다 보면 어느 순간 아름다움으로 전환되는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그건 지나고 나서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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