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 언어로 세태를 풍자하다

- 박제영 시집 『안녕, 오타 벵가』





이승하(시인, 중앙대 교수)





문학나무사에서 2009년에 인물시집 『사랑했을 뿐이다』와 『노래했을 뿐이다』를 펴냈었다. 시인과 소설가 28명이 인물을 소재로 쓴 시 52편을 나누어 실은 두 권 시집은 그 인물의 특징을 한 편의 시로 요약ㆍ정리한, ‘언어로 그린 초상화’ 시집이었다. 각 시마다 이인 화백이 그린 인물의 초상 및 시인과 인물이 맺은 각별한 인연이나 인상을 적은 시작노트가 곁들여져 있어 보고 읽는 즐거움이 아주 쏠쏠했었다. 박제영 시인의 제6시집 『안녕, 오타 벵가』를 읽으면서 서평자의 뇌리를 스친 생각이 바로 그 두 권 시집이었다. 박제영의 이번 시집은 ‘인물시집’이라 일컬을 만하다. 제일 먼저 다룬 인물이 화자의 장돌뱅이 (외)할머니다.


전국 방방곡곡 안 댕긴 장이 없니라
바다 건너 제주장 빼곤 다 가봤니라
이 할미 광주리에 안 담아본 게 없니라
글카다 정선장에서 그마 그니를 만난기라

아라리가 뭔 줄 아나
창자가 열두 번 끊어졌다 속에 암 것도 없을 때
그런 담에야 나오는 소리니라
삼십 년 이슬 맞으며 하늘을 이불 삼아봐야 나오는 기라

 

ㅡ「아라리」 앞 2연


제 1부의 시 10편은 할머니가 자신의 과거지사와 삶의 철학을 외손자에게 이야기해주는 식으로 전개된다. 장이 서는 고장을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하는 이는 대체로 남자인데(김주영의 대하소설 『객주』에 잘 나타나 있다) 화자의 할머니는 아녀자의 몸으로 “바다 건너 제주장 빼곤 다 가본” 장돌뱅이였다.


만주 땅이 얼매나 먼지 아나
만주서 배따시게 해주겠다던 말
다 거짓부렁이었니라
얼어죽을 나랏일! 무슨 혁명을 하겠다고
어린 색시와 세 살배기 딸만 남겨놓고
북망산으로 즈그 혼자 훌쩍 가버렸니라

만주 땅이 얼매나 먼지 아나
세 살배기 업고 넘는 거먹뫼는 얼매나 높던지
세 살배기 업고 건너는 압록강은 얼매나 깊던지
세 살배기 느그 어매 아니었으면
첩첩 뫼를 우예 넘었을깐
굽이굽이 시커먼 강을 우예 건넜을깐

 

ㅡ「만주」 제 2, 3연


이 시에 따르면 외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갔지만 일찍 돌아가셨다. 넓디넓은 만주에 화자의 외할머니와 세 살배기 어머니가 남게 된 것이다. 악착같이, 억척스럽게 살아야 했던 (외)할머니는 광주리장사를 하면서 딸을 키웠나 보다.


장똘뱅이들은 본디 집도 고향도 없니라
이 장에서 사흘 살고 저 장에서 닷새 살고
평생을 번지 없이 살았니라
그리 한 생이 갔니라
아라리 고갯길이 뭔 줄 아나
애시당초 길이 아니었네라
장똘뱅이들이 수수백 년 밟아 맹근 길이네라
그니들이 아라리 부르며 넘다 눕다 생긴 고갯길
그기 아라리 고개니라
신식길이 나기 전엔 말이다

 

ㅡ「가는 날이 장날」 부분


『객주』의 세계가 이 한 편의 시에 압축되어 있다. 수십 년 동안 장에서 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살아간 할머니의 생애는 간난고초나 인생유전 같은 네 글자 한자성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회한에 젖어 푸념을 늘어놓고 때로는 한이 맺혀 세상 원망도 한다. 당연히, “우리 강생이 그저 할배랑 반대로만 살면 되니라/ 하모 그라믄 되니라!”(「혼자만 착하믄 뭐하노」) 하면서 먼저 간 남편 욕도 한다. 할머니의 넋두리로만 10편의 시를 꾸려간 입담은 실존인물일 법한 할머니의 입담 덕분인지, 시인의 능청스런 재담 실력 덕분이지 헷갈린다. 분명한 것은 이 나라 민중에 대한 신뢰감을 시인이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시에서 ‘할배’는 만주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우듬치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시 10편의 할머니가 몽땅 동일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 땅의 할머니, 그 시대의 할머니(들)였다.


그때는 다 동학이었네라
누구라 할 것도 없네라
왕과 양반들 친일 모리배들 빼곤 죄다
남자고 여자고 애고 어른이고
조선 사람이믄 죄다 동학이었네라
저 무너미 고개 넘어 곰나루 돌아
우금치에서 다 죽었네라
몽둥이 들고 죽창 들고
왜놈들 신식총과 맞섰으니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네라
우금치 마루는 시체로 하얗게 뎊였고
시엿골 개천은 아흐레 동안 핏물이 콸콸 흘렀네라
준자 봉자 최준봉
녹두장군 뫼셨던 할배도 게서 죽었네라
니는 우금치가 낳은 씨알이네라
우금치를 잊으면 사람이 아니네라

ㅡ「우금치」 전문


동학농민혁명을 다룬 소설도 여러 종 나와 있고 장시도 있지만 길지 않은 이 시 안에 동학농민혁명의 의미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왕과 양반들 친일 모리배들 빼곤 죄다/ 남자고 여자고 애고 어른이고/조선 사람이믄 죄다 동학이었네라”라는 할머니의 말 속에는 민중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담겨 있다. 민중은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수 있었지만 힘이 없었다. 힘은 일본과 일본의 지시를 받는 이 땅의 관군들이 갖고 있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모셨던 외할아버지의 함자가 나온다. 최준봉. 그 당시 희생된 이가 몇 만 명이었는지 숫자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데, 희생자는 바로 그때부터 시작되어 줄기차게 이어진다. 을미사변의 의병, 징병과 징용, 가미카제 특공대원, 일본군 위안부…….

제2부의 10편은 기리봉동에 사는 부부 58년 개띠 가만덕 씨와 61년 소띠 마귀순 씨의 집안 이야기다. 부부는 늘 티격태격 싸우지만 이혼하지 않은 채 해로하고 있다. 이 땅 서민들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할까, 시를 끌고 가는 구수한 입담이 된장 맛이고 고추장 냄새 같다. 가만덕 씨는 당진 출생으로 중견 기업에 취직해 부장까지 올라갔지만 정년 전에 정리해고 되어 집에서 놀고 있다. 그의 아내 마귀순 씨는 가리봉동의 소갈빗집에서 서빙을 하고 불판을 닦고 있다. 텔레비전을 끼고 사는 남편이 못마땅해 “수건으로 남편의 대굴빡을 후려갈기기”(「그 궁뎅이 좀 치워줄래」)도 하지만 두 사람, 속정은 깊다.

김치전 냄새가 노릇하니 허기를 부르는 참이었나
귀순 씨가 그러는규

 

와유, 어서 와유
그만 뒹굴고 김치전이나 먹어유
어여 먹고 제발 정신 좀 차려봐유

그래서 만덕 씨가 정신을 차렸을까유 못 차렸을까유?
못 차렸다구유?

틀렸슈 정신 차린 만덕 씨 택시 기사로 취직했슈
참말로 다행이쥬 암만유

ㅡ「와유」 후반부


다행히도 만덕 씨가 택시 기사로 취직한다. 그런데 이 집의 아들 영찬이는 법대를 나와서 고시 준비를 5년 하다 포기하고 부동산중개업자로 나선다. 딸 영심이는 이화여대 대학원을 나왔는데 9급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


영찬이 그눔아 고시 포기하고 취직한단 게 기껏 복덕방이 뭐래?
그게 은젯적 일인데 왜 또 그놈의 복덕방 타령이래유 글구 복덕방이 아니라 부동산 컨설팅 회사라잖아유
그게 복덕방인겨 법대 나와서 복덕방이 뭐여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는 법인디 고작 5년 만에 포기하는 그기 사내새끼가 할 일이냐 이 말이여 누굴 닮아 그러나 몰러
이 양반이 애먼 사람을 왜 또 긁는대유
영심이 그년도 똑같여 넘들 다 부러워하는 이대 대학원까지 나왔으면서 맨날 빈둥거리는 꼴 좀 봐 애들이 다 누굴 닮았나 몰러
시방 그게 말이유 가마니유 영찬이 영심이가 가씨유 마씨유 누구 씨유 글구 영심이가 뭘 빈둥거려유 공무원 준비한다고 그러는 거잖유
그니까 하는 말이여 이대 나온 애가 7급도 아니고 9급이 뭐여 그럴 거면 대학원은 왜 댕겼대
그런 당신은 택시 몰 거면 대학은 왜 댕겼대유 그리 잘났으면서 회사는 왜 짤렸대유

 

ㅡ「영찬이와 영심이는 누구를 닮았나」 앞 연


부부의 말다툼 속에 네 식구의 면면이 다 드러난다. 이 네 식구는 우리 사회의 압축파일이자 민중적 삶의 척도이다. 오래 실업자로 있다가 택시를 몰게 된 아버지,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어머니, 부동산중개업을 시작하는 아들, 9급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딸은 그야말로 이 땅 서민의 초상이다. 네 식구가 티격태격 싸우면서도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고 아옹다옹 살아가는 모습이 정겹다. 특히 충청도 사투리가 이 시의 매력을 배가시킨다. 다른 시에서도 박제영 시인은 민중의 쌩얼, 즉 서민의 민낯을 그리고 있다.


평생을 졌다
평생을 진 사람들이다
식솔들의 짐을 대신 지고
식솔들을 대신해서 치러야 했던
아비규환의 밥그릇 전쟁
끝내는 질 때까지
세상의 모든 전쟁터를 누볐다
지고 또 지고, 기꺼이 지면서
마침내 졌다

 

ㅡ「지는 세계」 제 1연


시인은 “평생을 진 사람들”이 이제는 이기기를 바라고 있다. 얼굴을 들고 걷기를, 어깨를 펴고 걷기를 바라고 있다. 지고 또 지고, 기꺼이 지더니 마침내 졌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이 세상이 제 것인 양 으스대는 정치배들, 고급공무원들, 재벌 2세들, 종교귀족들……. 왕조시대에는 “왕과 양반들 친일 모리배”들이 높은 곳에서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이제는 이런 자들이 밑을 내려다보고 있다. “마침내 졌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 지는 세계가 아닌 이기는 세계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목을 이렇게 붙인 것이려니.

이제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 한 폭을 본다.



코로나 씨에게 세상을 초토화시킨 심정이 어떠냐고 물었다

질문이 잘못되었다
세상이 아니라 당신들이 망한 거다 오히려 세상은 안정되고 있고 지구는 안전해졌다

코로나 씨에게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냐고 물었다

질문이 잘못되었다
처음부터 당신들과 함께 있었다 본래 우리는 한 몸이었다 균형을 깬 건 당신들이다

코로나 씨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냐고 물었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다
마침내 사람의 씨가 마르면 암흑천지와 혼돈천지가 걷히고 세상은 새로운 빛과 질서를 찾을 것이다

 

ㅡ「코로나 씨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 부분



시인은 코로나19 바이러스 내습의 책임이 인간에게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대유행, 창궐, 팬데믹 운운하지만 생태환경론자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세상은 안정되었고 지구는 안전해졌다. 비행기나 배, 승용차 등 운반수단이 덜 다니면 지구는 그만큼 정화될 것이다. 지구온난화도 늦춰질 것이다. 인구가 과밀해지면 과밀해질수록 지구 오염은 심해질 테니 인류가 적당히 줄어주는 것도 전 지구적 입장에서는 좋을 수도 있다. “마침내 사람의 씨가 마르면” 즉, 인류의 멸종이 오면 “암흑천지와 혼돈처지가 걷히고 세상은 새로운 빛과 질서를 찾을 것이다”는 말은 얼핏 보면 역설인데 가만히 바다의 오염과 열대우림 지역의 개발을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다. 시인은 흡사 예언자처럼 이렇게 말한다. “천 년 후, 코로나 씨는 코와 입이 사라진 신생 인류의 신이 되었다”고. 즉, 자손 대대로 마스크를 쓰면 코와 입이 가려진 신생 인류가 나타나 돌아다닐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지금 이 세상에는 유모차를 타고 가는 신생아도 마스크를 하고 있다. 공공장소에서 마스크를 써야 함은 물론 동네 한 바퀴 산보를 하더라도 마스크를 써야 한다. 우리는 그간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퇴치의 대상으로만 생각하였다. 하지만 독감바이러스가 그렇듯 이 지구에서 내쫓을 수는 없다. 바이러스라는 것이 없었는데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에볼라 바이러스, 조류인플루엔자, 신종플루, 구제역, 메르스, 라사열, 마르부르크, 리프트계곡열, 로키산홍반열, 주닌출혈열, 뎅기열, 크리미아-콩고출혈열……. 이런 것들이 총궐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브라질 밀림 개발, 아프리카 코끼리 사냥, 덴마크령 페로제도와 일본 타이지 마을의 고래 대량 학살 같은 것은 중단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인간의 추악함이 이야기되고 있는 표제시를 보자.


1906년 뉴욕의 브롱크스 동물원 사장은 모처럼 붐비는 사람들로 희희낙락 콧노래를 불렀어. 특별히 거금을 들여 데려온 동물이 시쳇말로 대박을 터뜨린 것이지.


원숭이 우리 앞 팻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어.
<나이 24세, 키 150㎝, 몸무게 45㎏, 인간과 매우 흡사함>

난생 처음 본 동물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던 아이들은 이내 빵 부스러기 과자 부스러기를 던져주며 좋아했어. 물론 몇몇 어른들은 기대했던 눈요깃거리에 못 미친다며 야유와 욕설을 내뱉기도 했지만 말이야.

ㅡ「안녕, 오타 벵가」 앞부분


콩고의 한 전통부족인 ‘오타 벵가’라는 남성이 미국인들에 의해 인간임에도 동물로 취급되었다. 20대 초반으로 결혼하여 아내와 아이도 있었다. 뾰족한 치아와 작은 키(151cm)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을 주목한 미국인 몇이서 구경거리 요소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미개인이다, 진화가 덜 되었다, 구경거리로 삼으면 돈이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오타 벵가는 미국의 브롱크스 동물원에서 오랑우탄 우리에 지내게 되었다. 추운 날에도 따뜻한 옷을 입을 수 없었다. 인간을 닮은 동물이 있다는 소문은 막대한 수입을 올리게 했다. 세월이 꽤 흘러 그는 미국 내 흑인 관료들에 의해 동물원에서의 생활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브롱크스 동물원 측에서는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사과를 하지도 않았다.

1904년 벨기에군이 콩고를 침략했을 때, 콩고 원주민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을 때, 스물네 살의 피그미족 청년 오타 벵가도 비극을 피할 수는 없었어. 일가족이 학살당하는 생지옥에서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결국 붙잡혔고 노예 상인에게 팔렸지. 이후 미국 세인트루이스의 만국박람회와 뉴욕의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었다가 뉴욕 브롱크스 동물원으로 팔려와 원숭이 우리에 전시된 것이었어.

1910년 인권운동가들의 항의로 풀려나기는 했지만, 1916년 벵가는 권총 자살로 서른네 해라는 짧은 생을 마감했지.

ㅡ「안녕, 오타 벵가」 중간부분


오타 벵가는 뉴욕에 정착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렸다고 한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함으로써 고향으로 가는 하늘길이 막혀버렸다. 그는 거기서 취직을 하여 돈을 번다. 구경거리가 아닌 일을 해서 돈을. 그는 그렇게 모은 돈으로 권총을 한 자루 샀고, 그 권총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브롱크스 동물원과 야생동물 보존협회(WCS)는 114년 만에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였다.

오타 벵가 이야기를 시인이 왜 시집의 표제시로 삼은 것일까. 먼 미국에서의 일이고 100년도 더 전의 일인데 구태여 시로 쓴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시인의 꿈이 만민평등사상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할머니 이야기도, 우금치 농민봉기 이야기도, 가리봉동의 네 식구 이야기도, 사실은 우리 사회의 평등하지 못함을 들려주려고 한 것은 아닐까. 이런 시가 있다.


오십 평생 한눈팔지 않았는데, 잘못 살았다네
배운 대로 시키는 대로 살았는데, 잘못 살았다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겠네
귀신도 곡할 노릇이라
어느 날 문득 깨어보니
아내도 없고 아내와 살던 집도 없어졌네
메이데이 메이데이 메이데이
대답하는 이 하나 없네
막다른 섬 여기는 어디, 오륙도*라네
고립무원 무인도 여기는 어디, 오륙도라네
오늘은 내가 오르지만
내일은 당신이 올라야 하는
여기는 어디, 오륙도라네

ㅡ「오륙도」 전문



시인이 붙인 각주를 보니 오륙도를 “오십세 육십세까지 직장에 다니면 ‘도둑놈’이 되는 세상이라네”라고 설명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얼마나 각박한지 단적으로 말해주는 시편이 아닌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세상이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땅값, 집값이 빈부의 격차를 더욱더 벌려놓고 있다. 권력과 금력을 갖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반상의 구분이 뚜렷했던 왕조시대를 방불케 한다. 시인은 역설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믿기 어렵겠지만,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공자도 맹자도 예수도 석가도 불평등함이 세상의 순리이니 불평하지 말라 했다”(「불평등이 순리다」)고. 과연 그렇게 말했을까? 물론 “당신이 생떼를 쓴다고, 억지를 쓴다고 바뀔 일이 아니다”라는 말도 서평자에게는 역설로 들린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제1조 제1항이 무색한 오늘 대한민국을 향해 던지는 정문일침 같은 시집, 바로 『안녕, 오타 벵가』이다.





■ 이승하



시집 『뼈아픈 별을 찾아서』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외. 평전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최초의 신부 김대건』 『마지막 선비 최익현』 외.

 

1.  박현주의 그곳에서 만난 책 <63> 전동균 시인의 시집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

 


< 국제신문  2019-07-21 >

 


- 고교 문예반 활동하며 詩 만나
- 오랜 직장생활하다 교수로 재직

- 어린시절 뛰놀던 경주 황남동
- 천마총 발굴로 마을 강제 철거돼
- 고향 사라진 후 마음은 늘 떠돌아

- 한옥에서 자녀 안부·부고 챙기던
- 아버지의 그 살뜰한 정이 그립고
- 유교적 가풍이 더 생각나는 오늘

 


시를 읽는 행위는 평소에 잊고 있었지만 사실은 마음속으로는 줄곧 생각하던 ‘그것’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시인들은 어쩌면 이렇게 근원적인 질문을, 이렇게 아름다우면서도 적확한 단어로 쓰는 것일까 늘 감탄하게 된다. 전동균 시인의 시집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를 읽을 때 그런 기분을 특히 더 많이 느꼈다. 

 

시 ‘약속이 어긋나도’에서는 “내가 새매라고, 예티라고, 부들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저를 무엇이라고 생각할까요/ 그들의 형제인 나를”이라는 구절에, ‘이토록 적막한’에서는 “나무는 왜 땅에 서 있어야 하고 새들은 하늘을 날아야 하는지// 날마다 해와 달을 깨우고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지/ 그 힘이 왜/ 없어도 좋은 우리를 여기 있게 하고/ 아침이면 눈꺼풀을 열게 하는지”에서 오래 시선이 멈추었다. 시집을 읽는 동안 “여긴 어디지? 나는 누구지?”라는 물음이 자꾸 떠올랐다. 이 시집에서 이야기하는 주제는 존재에 대한 성찰과 질문이다. 전동균 시인을 강원도 원주에서 만났다.


■ 사라졌으나 잊히지 않는 고향

전동균 시인은 1962년 경북 경주에서 나고 자랐다. 경주고를 다닐 때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 시를 만났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86년 소설문학사 제정 신인작품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시집 ‘오래 비어 있는 집’ ‘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 ‘거룩한 허기’ ‘우리처럼 낯선’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 등을 냈다. 백석문학상과 윤동주 서시 문학상을 받았다. 한국방송광고공사에 입사해 오래 직장생활을 했고, 2008년부터 동의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방학 중 원주시의 토지문화관에 머물고 있던 시인을 만난 곳은 연세대 원주캠퍼스였다. 지난해 제3회 윤동주 서시 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캠퍼스 내의 ‘윤동주 시비동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에 들를 때마다 가끔 이 나지막한 언덕 위에서 윤동주의 시비를 보곤 한단다. 나무가 우거진 언덕에 천체를 형상화한 둥근 조형물 위에 ‘서시’를 새긴 시비가 있다. 시비라기보다 조각 예술 같았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언덕은 한여름 더위도 피해간 듯 시원했다.

시인의 고향은 경주 황남동이다. “경주 대릉원 고분 동네였어요. 지금 우리가 보는 모습이 아니라, 황남대총 외에는 그저 뒷동산 같은 모습이었죠. 능 사이에 집이 있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천마총 발굴이 시작되면서 마을은 강제철거 됐는데, 그때 상실감이 컸어요. 그 시절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능 바로 앞에 있는 집이 철거되기 전에 대낮에 큰 구렁이가 집에서 나와 담을 타고 능 쪽으로 기어갔어요. 동네사람들이 몰려나와 ‘지킴이가 간다’며 비손을 했지요. 어른들이 공경하는 걸 보니까, 어린 저도 그 구렁이가 무섭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어렸을 적 뛰어놀았던 동네는 하루아침에 갈 수 없는 곳이 되고 말았다.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이후로 늘 떠돌이가 된 것 같은 마음이었어요.”

그의 마음은 시집 말미의 ‘시인의 말’에서도 느껴진다. “대구로 서울로 부산으로 떠돌게 되었지만 이따금 내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소년은 그곳의 사람들과 흙냄새, 오래된 한옥들과 마당의 연꽃무늬 돌들, 무덤 위로 떠오르는 달빛과 짐승 울음소리, 새벽의 흰 물그릇…… 그 어둑하고 신비한 삶의 풍경을 더듬더듬 불러내곤 한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고분 동네의 풍경이 떠오른다.

시집에서 드러내놓고 고향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라진 풍경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떠돌이의 마음, 복잡하게 얽힌 세상의 길 위에서 ‘존재’라는 화두를 붙잡고 있는 시인이 보인다. 그래서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면서도, 읽는 사람 역시 그 화두의 끝머리를 붙잡고 생각에 잠기게 된다.

■ 소멸돼 가는 한 시대 담은 시 한 편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 전동균·창비·2019


시집을 덮고서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시 한 편이 있다. ‘한옥’이라는 시다. 오래된 집, 천천히 스러져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담았다.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일본 막내는 아픈 데는 없는지/ 사업하는 둘째 일은 좀 어떤지/ 아이들 공부는 나아졌는지/ 차례차례 물으셨다.” 자식들의 안부를 챙기는 아버지와, 늦가을 저녁의 풍경을 보여주던 시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술 한잔 천천히 아껴 드시고는/ 얇은 노트를 건네셨다/ 별일 아닌 듯이// 보면 원망할 데만 적었니라/ 부고 보낼 명단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또박또박/ 쓴”

시인을 만나 처음 이야기를 나눌 때부터 이 시에 대해 물었다. 시인은 이렇게 답했다. “농경문화를 이루고 유교적 가풍을 이어가며 살았던 시대가 서서히 소멸해갑니다. 젊은이들은 그 시대를 모릅니다. ‘한옥’도 ‘아버지’도 그렇게 사라졌지요. 그걸 말하고 싶었어요. 제가 아끼는 시입니다.”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시가 시인이 아끼는 시라는 말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시인의 마음과 만나는 지점을 제대로 짚은 것 같아 즐겁게 다시 시집을 펼친다. 시를 읽는 기쁨이다.  

 

 

 

2.

 

 


전동균 시인

여름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8월의 어느 날, 인사동 수도약국 앞에서 선생님을 만나 자주 가시는 찻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기억나지 않는/ 몇 번의 생을 지나' 선생님을 낯선 듯, 속수무책으로 뵈었다.
그러니까, 한 시인에게 시는 자신의 전부이고 그 전부를 다 내어주고도 또 무엇을 더 걸어야 하는 것인데 ‘뒷산 무덤에라도 다녀와야 견딜 수 있는 날이 있지’ 라는 대목을 읽으며 어떤 무서운 기운을 느낀 건 왜일까. 가난하고 높고 쓸쓸한 시인에게 매일, 매 순간 무너지는 힘은 시를 더 오래 살게 하는 '거룩한 허기'일 것이다. 무엇이 우리를 그 앞에서 오래 서성이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자존과 기품이 스며있는 시인은 흔치 않을 듯싶다. 시인의 말처럼 우리가 ‘간절히 기다린 것들은 이미 다녀갔는지 모르지만’ 그쪽으로 몇 걸음 옮겨 무언가를 한없이 기다리는 일이 시를 살 수 있는 일일 것 같다.


우리처럼 낯선

물고기는 왜 눈썹이 없죠? 돌들은 왜 지느러미가 없고 새들이 사라지는 하늘은 금세 어두워지는 거죠? 저토록 빠른 치타는 왜 제 몸의 얼룩무늬를 벗어나지 못하나요? 메머드라 불리던 왕들은, 맨 처음 씨앗을 뿌리던 손은 어디로 갔나요?
꼭 지켜야 할 약속이, 무슨 좋은 일이 있어 온 건 아니에요 우연히, 누가 부르는 듯해 찾아왔을 뿐이죠 누군지 모르지만, 그래서 잠들 때마다 거미줄이 얼굴을 뒤덮고 아침의 머리카락엔 불들이 흘러내리는 걸까요?
한 처음,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것처럼
그냥 웃게 해주세요 지금 구르고 있는 공은 계속 굴러가게 하고 지금 먹고 있는 라면을 맛있게 먹게 해주세요
꽃밭의 꽃들 앞에 앉아 있게 해주세요
꽃들이 피어 있는 동안은

 ■ 김지율: 선생님 그간 잘 지내셨어요? 정말 더운 여름이네요.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 전동균: 네, 오래간만입니다. 김지율 선생도 잘 지내셨는지요? 저는 방학이 돼서 빈둥빈둥 놀고 있습니다. 날도 무덥고. 아시다시피 학교는 부산이고 집은 서울이라 대부분 부산에서 혼자 지내는데, 모처럼 집에 와서 가족들과 밥도 같이 먹고 저녁엔 산책도 하고 그래요. 얼마 전엔 가까운 이들과 춘천에 댐 낚시를 갔다 왔어요.


■ 김지율: 네, 떨어져 있던 가족과 뜻 깊은 시간을 보내시고 계시네요. 지난해 『우리처럼 낯선』(2014, 창비)으로 제16회 백석문학상을 수상하셨는데 축하드립니다. 『오래 비어 있는 길』,『함허동에서 서성이다』,『거룩한 허기』에 이어 6년 만에 나온 네 번째 시집인데요. 이 시집을 준비하시면서 어떤 마음이셨을지 궁금해요.


□ 전동균: 글쎄, 벌써 일 년 전의 일인데… 제가 게으른 사람이라 시집도 더딘 편이지요. 어떤 시인의 시집이든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오는 거니까 시집마다 그 사람의 삶의 편린들이 묻어있기 마련인데, 말씀하신 시집『우리처럼 낯선』은 제가 중년의 나이에 부산으로 직장을 옮긴 뒤에 쓴 시들을 묶은 것입니다. 가족과 친구들을 떠나 낯선 곳에서 보낸 이 시간들이 어쩌면 뒤늦게 성인(成人)이 되어가는 과정이 아니었나 싶기도 해요. 시집에 묶은 시들이 마흔 여섯 편인데 좀 얇은 시집을 내고 싶어서 시들을 좀 뺐고, 수정도 좀 하고 그랬습니다.


■ 김지율: 『나뭇잎의 말』(에세이, 프레스21)과 시집 전반에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많이 볼 수 있었어요. 엄하셨던 아버지 뒤에서 반성문을 많이 쓰셨고, 반성문을 좀 더 썼더라면 소설가가 되었을 거라는 산문을 읽으며 한참 웃었어요. 어떻게 유년은 보내셨을까요?


 □ 전동균: 그 책을 어떻게 보셨어요? 절판돼서 구하기 힘든 건데.
어렸을 적에 경주 천마총 고분공원 안의 마을에서 자랐어요. 믿기 어렵겠지만 그 당시 고분들 근처에 인가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고,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천마총이 발굴되면서 그 안에 있던 집들이 모두 강제철거를 당했지요. 천마총이나 황남대총은 어린 시절 친구들과 뛰놀던 동산이었어요. 옛날 시청도 바로 앞에 있었지요. 자연 속에서 뛰놀며 유년시절을 보냈어요. 그 무렵엔 거지들도 많아서 동냥을 오고 그랬는데 찬밥이라도 꼭 상위에 차려주던 어른들의 모습도 기억납니다. 공동체의 정이 남아있던 곳인데,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득해지는군요.
아버님은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로 무척 남성적이고 엄하셨는데, 제가 장손이라 유달리 강하게 키우려고 하셨던 것 같아요. 별로 말이 없고 또 병치레도 잦고 내성적인 아이였던가 봐요.


■ 김지율: 좀 어렵게 구했어요. 도서관에도 가보고 인터넷 중고서점도 뒤졌구요. (웃음) 세상에 많은 일들 중에 왜 하필 시나 문학을 하시게 되었는지, 그리고 86년에 등단하시기 전, 습작기는 어떻게 보내셨는지 궁금해요.


□ 전동균: 우리 또래 대부분이 그렇듯이 고교시절에 방황하다가…(웃음) 시를 만나게 됐어요. 대학은 문창과를 다녔으니까 시 쓰고 책 읽는 게 공부였죠. 지금 생각하면 예술대학 소속이라 예쁜 영연과 여학생들, 무용과 여학생들과 강의도 같이 듣고 해서 분위기가 환했을 것 같은데 그땐 왜 그리 암울하고 답답했는지 모르겠어요. 학생들도 좀 별났어요. 오죽했으면 학교에서 ‘문제창작과’라고 했겠어요. 아무튼 그때도 시는 많이 못 썼고 술은 좀 마셨는데, 덕분에 속이 다 망가졌죠. 그래도 틈틈이 과제물 내느라 국내외 시인 작가들 작품은 꽤 많이 접했죠.
돌이켜보면 좋은 선생님들을 만났어요. 구상 선생님은 시도 그렇지만, 세속의 영리를 거부하고 치열한 현실 인식 속에 영성의 깊이를 더하신 인간 그 자체가 워낙 크신 분이었어요. 또 시와 비평을 가르친 김은자 선생님은 철없이 오만한 촌놈인 저를 많이 아껴주셨고, 계속 글을 쓰라고 격려를 해주셨어요. 지금도 해마다 스승의 날엔 꼭 인사를 드리고 있지요.

■ 김지율: 어느 지면에서 시작노트를 읽었습니다. 참 인상적이었어요. '나무나 풀들도 여느 짐승 못지않은 수성獸性을 지니고 있다. 선산의 무덤을 이장할 때 이장꾼이 말했다. “저기 저 나무 보이죠. 저놈들이 살 냄새를 기막히게 맡아요. 십여 미터 이상 떨어져 있지만 용케 알고 뿌리들이 관을 뚫고 들어와요” 나무들에게 사람의 시신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먹이여서 심지어 뼈까지 잘게잘게 부서뜨린다고 했다. 나무에게서 짐승의 욕망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이 글을 읽고 많이 놀랐어요. 저는 나무를 비롯한 모든 식물들에게 수성(獸性)이 존재할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거든요. 식물이든 동물이든 살아있는 생물에게 이런 숨길 수 없는 ‘욕망'이 어떤 식으로든 분명 존재하겠죠? 우리 시인들은 그 욕망으로 또 시를 쓰게 되는 것 같구요.


□ 전동균: 그건 이장(移葬)을 하면서 실제로 겪은 일입니다만, 우리가 잘 알듯이 지상의 모든 생명체에게 가장 중요한 게 생존과 번식이고, 그 욕망은 자연스런 거죠. 시인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 에너지 속에서 살아가는 건데,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세속의 일보다도 자기 작품 속에서 온전히 잘 타올라야 겠지요.


■ 김지율: 혹시 좋아하거나 영향 받은 시인이나 작가가 있으시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 전동균: 외국 시인들은 로버트 프로스트, 네루다, 쉼보르스카, 파울 첼란 같은 시인들 시를 좋아해요. 도스토예프스키나 카프카, 마르께스의 소설도 좋아하구요. 프로스트는 시전집이 나올 만한데 안 나오더군요. 예전엔 외국 시집 번역도 꽤 됐는데 요즘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바같 세상도 좀 봐야 넓어지는 법인데. 우리나라 시인은 서정주, 백석, 박목월의 생활시편, 김종삼…그 이후로도 좋은 시인들이 많지요. 특히 80년대 시인들.
서정주 선생께는 대학 시절 강의를 듣기도 했어요. 저희들이 미당의 강의를 들은 마지막 학생이 아닌가 싶은데, 재미있는 건 보들레르를 얘기하실 땐 꼭 ‘보들레르 군(君)’이라고 하시더라구요. 이백이나 두보 같은 시인들은 별다른 호칭 없이 그대로 부르면서. 본인이 보들레르보다는 몇 급 위라는 그런 뉘앙스 였죠.


■ 김지율: 보들레르 군(君)은 아주 재미있는 호칭이네요(웃음) 낚시를 좋아하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낚시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많으시죠? 문득, 낚시와 시쓰기의 비슷한 부분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 전동균: 제가 뭐 특별한 취미가 없어요. 만나는 사람도 별로 없고 생활도 단순하고. 낚시를 한 지는 꽤 됐는데, 낚시에도 장르가 있어요(웃음). 제 장르는 전통 붕어 낚시입니다. 40대의 몇 년은 거의 주말마다 낚시를 다녔고, 리빙TV의 낚시프로그램에도 출연한 적도 있어요. 물론 실력과는 상관없이.
낚시를 하다보면 이런 저런 일들을 겪기도 하는데, 밤낚시를 하다가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물에 떠내려갈 뻔한 적도 있었어요. 새벽에 낚시를 가면 주로 김밥을 사서 미끼통과 같이 비닐봉지에 넣어서 가는데, 나중에 김밥을 먹다보면 지렁이가 씹혀요. 김밥은 따뜻하니까 추운 지렁이가 그 속을 파고 든 거죠. 그래서 낚시꾼들은 이런 얘길 하기도 한답니다. ‘지렁이 김밥을 먹어보지 못한 자는 낚시를 이야기하지 말라!’
근데 몸도 좀 상하고 해서 오랫동안 낚시를 안 하다가 재작년부터 가끔 하고 있는데 주로 여름 밤낚시를 즐겨요. 어둠 속에 찌불을 보는 맛이 좋거든요.
낚시도 조용한 가운데 혼자 있는 거니까 시와 통하는 게 있지요. 또 ‘조선일여(釣禪一如)’라는 말이 상징하는 바도 있고요. 실제로 제 두 번째 시집 『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는 물가에서 헤맨 흔적들이 좀 있지요.



꽃이 오고 있다
한 꽃송이에 꽃잎은 여섯
그중 둘은
벼락에서 왔다
사락 사라락
사락 사라락
그릇 속의 쌀알들이 젖고 있다
밤과 해일과
절벽 같은 마음을 품고
깊어지면서 순해지는
눈동자의 빛
죽음에서 삶으로 흘러오는
삶에서 죽음으로 스며가는
모든 소리는 아프다
모든 소리는 숨소리여서
--멀리 오느라 애썼다,
거친 발바닥 씻어주는 손들이어서
아프고 낮고
캄캄하고 환하다
사락 사라락
사락 사라락
제 발자국을 지우며 걸어오는 것들
아무 데도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것들

■ 김지율: ‘경주’는 선생님 고향이잖아요. 저도 경주를 몇 번 다녀오긴 했는데, 갈 때 마다 뭔가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온다는 생각을 해요. 고분의 도시이자 첨성대와 안압지, 천마총 대릉원과 불국사 등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도시잖아요. 저에게도 경주는 다른 도시와는 느낌이 달라요. 영화 '경주'를 보고 나서도 그런 생각을 했지만요. 선생님께 '경주'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그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 거 같아요.


□ 전동균: 좀 특이하죠. 경주란 데가. 무엇보다 무덤들이 시내 곳곳에 솟아 있으니, 이런 곳은 드물 거예요. 또 지금은 많이 없어졌는데, 경주가 고도(古都)다 보니 오래된 한옥들이 많았어요. 마침 우리 집 근처에도 그런 집들이 몇 채 있었는데, 대부분 자식들은 외지로 보내고 할아버지 할머니들만 살던, 큰 기와지붕에 문이 몇 개나 되지만 정작 인기척은 없는 집들을 보면 어린 마음에도 뭔가 좀 그랬어요. 나중에 우리 뒷집이 철거될 땐 낡고 오랜 지붕이 허물어지자 박쥐들이 어디에 그렇게 많이 숨어있었는지 대낮에 하늘이 새카맣게 날아오르더라고요.
제 기억은 그 지점에서 멈춰져 있어요. 고분들이나 남산의 유적들, 삼릉이나 흥덕왕릉의 소나무들, 참 좋지요. 또 경주는 문사(文士)나 예술가를 우대하는 전통이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그런 것들을 빼면 아주 보수적인 지방 소도시지요. 대학 때 데이트를 하려면 대구나 포항으로 가서 했어요. 어딜 가든 다 아는 사람들이 있고 금방 소문이 나버리니까. 그리고 경주는 유적지로 ‘보존’이 된 게 아니라 관광지로 ‘개발’이 되어버렸잖아요. 더구나 월성 원전에 핵폐기장까지 들어오고… 아쉬움이 많지요. 저는.


■ 김지율: 저도 그 부분은 많이 아쉬웠어요. 문화재를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관광 차원으로 이용다보니 좀 억지스러워 보인다고 할까. 좌우간 경주는 신라의 가장 찬란했던 기억을 간직한 도시이면서 많은 고분과 왕릉을 가지고 있는 죽음의 도시네요. 그래서 기억과 현재가 동시에 다가오는 기이한 도시인 것은 확실한 것 같아요. 우리에게도 그 두 가지가 함께 존재한다고 봅니다. 살면서 정말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것과 (약간 모순된 말이지만) 잊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 전동균: 오래토록 기억하고 싶은 건 아무래도 가족이나 이웃들로부터 받은 온기들이죠. 제가 좀 강파른데 이런 저를 품어주는 좋은 사람들을 만났어요. 선생님도 그렇고 선후배들, 20대에 만나 지금까지 편하게 밥 먹는 친구들도 그렇고… 몇 되진 않지만.
잊고 싶은 기억들은 너무 많아서….

■ 김지율: 대학시절 읽어야 할 책들은 많고 책값이 턱없이 부족해 친구들과 벌인 책도둑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었어요. 지금은 그러면 큰일 날 일이지만 저는 그 일들이 참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책을 훔치면서 '우리의 이름이 박힌 책들이 그곳에 꽂히게 되기를 얼마나 열망했던가'라는 구절에서는 좀 먹먹했구요. 지금은 소원(?)을 이루셨지만, 다시 그때를 추억하며 책도둑 이야기 들려주실 수 있으신지(웃음). 그리고 후배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 있으시다면 무엇일까요?


□ 전동균: 뭐 별 걸 다 보셨네요. 부끄럽게. 그때 ‘책’이 아니라 ‘마음’을 훔쳤어야 하는 건데…. 대학 시절 책과 관련된 이야길 하나 더하자면, 제가 놀란 일이 하나 있어요. 남진우 선배 집에 갔더니 글쎄, 사방 벽이 책으로 가득 차 있더라고요. 그때 진우 형이 대학원생이었는데, 최소한 천 여 권은 넘는 것 같아서 무척 놀랐어요. 형이 무슨 책 무슨 책 봤냐, 묻는데 나는 잘 모르지. 대부분 외국 책들이니. 아무튼 가끔 만날 때마다 좋은 책 추천을 해준 덕분에 독서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어요.
저는 산문이나 논픽션 읽는 게 재밌더라고요. 소설도 그렇고. 소설로는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 크리스토퍼 바타유의 ‘다다를 수 없는 나라’ 같은 것들, 논픽션은 ‘1417년, 근대의 탄생’ ‘끈’ , 그리고 ‘축의 시대’같은 교양서적들, 산문은 ‘근원수필’이나 이우환의 에세이에 눈길이 가요.
좋은 책 많은데 생각이 잘 안 나네요. 담배 한 대 피고 합시다. 요샌 담배 피는 사람이 죄인이라. 어디가도 흡연석이 없고. 담배가 그리 안 좋으면 아예 판매금지를 하던지, 아니면 외국처럼 흡연자를 위한 공간도 만들어주는 게 상식인데. 쩝.


■ 김지율: 바타유의 '다다를 수 없는 나라'는 저도 좋아하는 책 중의 하나인데, 그가 글을 쓰는 이유가 세계가 추악하기 때문이라고 했던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등단한지 11년 만에 첫 시집을 내셨는데 좀 늦은 편이시죠? 혹 첫 시집이 늦은 이유가 있으신지. 그리고 네 번째 시집까지 존재의 근원과 고독, 연민과 참회의 세계를 낮은 목소리로 독자들에게 꾸준히 들려주시고 계십니다. 무엇보다 삶의 따뜻한 해학 또한 잊지 않으신데요. 시를 쓰는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 전동균: 첫 시집이 늦은 건 오로지 무능과 열정의 부족, 게으름 탓이에요. 데뷔하고 나서 김기택 권대웅, 장석남 같은 시인들과 함께 ‘시운동 2기’ 멤버로 참여하고 또 ‘신서정’이란 말을 문단에 처음 내놓은 ‘신서정 7인시집’ 같은 걸 내면서 발표도 꽤 하긴 했는데, 시가 시원찮은 탓인지 선뜻 내주겠다는 데도 없었고, 또 생활과 시가 일치되어야 한다는 젊은 날의 강박관념이 좀 있었던 터라 몇 년 간은 아예 시를 작파하기도 했었지요.
시에 대해서는 좋은 말씀들이 워낙 많으니까 제가 뭐 굳이 덧붙일 건 없을 것 같은데… 그냥 제가 쓰고 싶은 거 쓰는 거죠. 가족들이 그렇게 하지 말라던 짓 하는 건데(웃음). 다만 시도 삶을 담는 그릇이니까, 인위적으로 편벽되지 않게, 자기가 살고 느끼는 대로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속에서 들끓어오르는 절실함­ 육성 같은 게 시의 근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해요.


■ 김지율: 요즘 들어 제가 더 깊이 고민하고 있는 부분을 말씀해 주시네요. 제대로 살지 않으면 제대로 된 시를 쓸 수 없다는 강박증에 계속 자신을 학대하게 되고 어느 순간 사람들도 만나기 힘든 지점에 와 있더라구요. 선생님께 시는 무엇인가요? 다시 태어나도 시인이 되고 싶으신지?


□ 전동균: 젊었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는 얘기고, 어떻게 일치가 되겠어요. 불가능한 일이죠. 시와 삶이 전혀 딴판만 아니면 다행이죠. 내게 시는… 네루다의 표현을 빌면 ‘두 개의 불꽃’ 같은 것? 잘 모르겠네요.
다시 태어난다면 김 선생은 시인이 되고 싶으세요? 시를 쓰는 사람들은 뼈가 어디 몇 개씩은 어긋난 존재들 일텐데. 현생의 기억이 내게 남아 있다면, 내 무능과 부족을 기억하고 있다면 다시 할 염을 쉽게 낼 수 있을까요?


■ 김지율: 저도 조금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웃음) 지금 동의대 문예창작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시잖아요. 문창과에 계시면서 보람된 일도 있으시지만 힘든 일도 많으실 것 같아요. 시를 쓰는 일과 시 창작을 가르치는 것은 상당 부분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 같기도 하구요.


□ 전동균: 요즘이야 문창과 뿐 아니라 인문학이나 예술 전체가 그렇죠. 무조건 실용, 취업률이 잣대니. 사회 전반적으로 인간의 도구화가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되는 것 같아요. 이걸 헤쳐 나가야하는데 지방대학들은 원천적으로 어려운 부분들, 한계가 분명히 있죠. 우리 학과도 지난 해 국문과와 통합됐고요.


시를 쓰는 일과 가르치는 일을 얘기하면 좀 마음이 복잡해지죠. 근본적으로 시를 가르친다는 게 가능하냐, 또 문창과 식의 창작 수업이 바람직하냐는 비판도 제기될 것이고.


선생이란 안내자라고 할 수 있을텐데, 어찌 보면 제도권 문학교육의 틀에 묶이지 않는 사람들, 예컨대 김언희 선생이나 송찬호, 유홍준 같은 시인들이 학생들에겐 더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다른 건 몰라도, 강의를 위해 준비를 해야 하니까 자기와는 다른 성향, 다른 세대의 글도 읽어야 하고, 조금 폭넓은 시각을 지녀야 하는 환경은 장점인 것 같아요.

이상한 모과

시장 좌판의 모과를 하나 방에 들였다 하필이면 돌대가리 부랑아 같은 것을, 어디에 둘까 망설이다가 저녁이면 잠깐 볕이 드는 책상 성모상 옆에 나란히 두었다 남의 생각이나 훔쳐온 날들의 악취를 좀 가려보자는 거였다 이런 알량한 속셈을 알고 있는지, 보름이 지나고 한달이 지나도 모과는 좀체 익지 않았다 제 가슴 찢어 빚어내는 그 가난하되 복된 고해(告解)의 향기를 누설하지 않았다 불을 꺼도 어두워지지 않는 낯선 기척들이 어른댈 뿐……모과가 있다는 사실마저 까맣게 잊고 있던 어느날, 대관령 첫눈 소식에 뒤척이던 새벽을 한 사내가 어깨 구부린 채 빠져나갔다 소리쳐 불렀으나 끝끝내 돌아서지 않는, 꽝, 문 닫는 소리가 얼음장이었다 그때부터 모과는 빠르게 익어갔다 우리가 밥을 벌고 새끼를 낳고 키우듯 애끓는 표정으로

■ 김지율: 어느 시집 표사에서 ‘막 제본되어 나온 기도서를 읽는’ 느낌마저 든다고 정호승 시인은 언급했습니다. 실제로 많은 시편들 예컨대 ‘그레고리안 성가를 듣다가 낡은 차를 끌고’(「먹고무신을 끌고」), ‘떼제의 성가 같은 노랫소리 끊어질 듯 끊어질 듯’(「매지리 은수자(隱修者)」), ‘성 베네딕도 수도원, 늦게까지 배밭 일을 한 뒤 찬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손」), ‘ 피네스테레, 세상의 끝에 닿은 순례자들은’(「거룩한 허기」)와 「까막눈 하느님」,「몇 줌 시린 햇볕에서」등의 여러 시편들에서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꺼내기 어려운(?) 얘기일까요? 종교에 관해 하실 말씀이 있으실 거 같아요.


□ 전동균: 세 번째 시집 『거룩한 허기』말씀 하시는 것 같은데, 그 시집의 시들을 쓸 무렵 제가 아버님을 여의고 가톨릭 영세를 받게 됐어요. 제 대학 은사이신 구상 선생님 덕분에.
지금은 ‘날나리 신자’예요. 다만 가톨릭이라는 특정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 또 삶의 어떤 보편적인 근원에 대한 관심과 생각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거고, 저도 마찬가지죠. 불교나 이슬람 등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지만, 가톨릭도 교리의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는 신성하고 귀한 삶의 모습들을 현실화시켜 보여주기도 하죠. 요즘도 가끔 보면 시골성당 신부님들이 그런 분이 있어요. ‘이 세상에 신성이란 게 있다면 그것은 우리집 뒤뜰에도 있다’ 는 말에 저는 고개를 끄덕이곤 합니다.
지금도 절에 가면 부처님께 삼배를 올려요. 예전에 나희덕 선생과 연세대 대학교회 채플에 같이 간 적이 있는데, 나 선생이 가톨릭 신자가 웬 기독교 예배냐고 하기에, 제가 웃으면서 그랬어요. 하느님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다니 성당이나 교회나 절이나 이슬람 사원이나 다 같은 거 아니냐고.
종교는 헛것이라고도 하고, 또 무엇보다 믿음이 먼저 있어야한다고도 하는데, 헛것이든 아니든, 또 깊은 믿음이 있든 없든, 가톨릭이라는 창문을 통해 제 삶과 이 세상을 좀 더 넓고 깊게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김지율: ‘내 그림자 속을/ 혼자 걸어가는 시간이 많아졌다’(「우두커니 서 있는」)와 같은 짙은 서정이 선생님 시의 중요한 부분인데요. ‘어느 날은 천사가 다녀가고/ 또 어느 날은 악마가 다녀가는 나의 몸’(「상자의 生」) 은 세상의 불화들을 견디는 장소라고 봅니다. 우리의 몸도 결국 죽음과 소멸로 향하고 있구요. 선생님 시에서 일관되게 보이는 ‘서정’의 뿌리가 혹시 삶과 죽음이 늘 공존하던 고분에서 살던 유년의 기억에서 흘러나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 전동균: 그럴 수 있겠군요. 천마총, 무덤들 사이 마을에서 컸으니까요. 실제로 그땐 발굴되기 전이라 수풀이 우거진 야산 비슷했고, 밤이 되면 짐승소리도 들리고 그랬어요. 그때 여우 울음소리도 들은 것 같아서 어머니께 여쭈어봤더니 여우는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늦가을 밤바람 속에 고분의 수풀 속에서 울리던 짐승 울음소리는 제 기억 속에 깊게 남아 있습니다.

 ■ 김지율: 네 번째 시집에 실린 「우리처럼 낯선」시가 저는 참 좋았어요. '물고기는 왜 눈썹이 없죠? 돌들은 왜 지느러미가 없고'로 시작되는 시인데, 제목도 참 좋구요. 백석문학상을 심사하신 최원식 평론가는 이 시집은 세상의 부패와 타락을 속절없이 허락한 그 신에게 오히려 참회를 요구하는 반종교성을 통해 구원에 대한 갈구와 구원없는 현대의 묵시록이 극적으로 전경화되는데, 그렇다고 꼭 비장 또는 감상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해학이 따뜻하다'는 심사평을 남겼습니다. 이 시의 시작 노트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 전동균: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는 것 보다는 시 그대로 읽는 게 좋지 않을까요. 쑥쓰럽기도 하고….


■ 김지율: 선생님의 시들은 말을 꾸미거나, 과장하고 수식하지 않습니다. 힘을 주거나 요란하지도 않구요. 말로서 말을 데리고 가는 것 같아요. 행과 행 사이, 연과 연 사이 침묵이 자리를 잡고 있어요. 쉽지만 다시 한 번 더 읽게 만드는 어떤 힘이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소나기」라는 시에서는 그런 모습이 더 극렬하게 보입니다. 선생님만의 시작법이나 시론 부탁드립니다.


□ 전동균: 어려운 질문이군요. 저는 시작법이나 시론이라고 할만한 게 없어요. ‘말로서 말을 데리고 가는’ 운운은 전혀 가당치도 않고요.
다 아는 얘기지만, 시의 궁극은 노래고 주문(呪文)일 텐데, 시는 가능하면 말을 아끼는 거라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언어의 함축과 리듬(호흡)은 시를 시로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 아닌가 싶어요. 물론 요즘에는 비시적인 방법으로 시적 효과를 확대하거나 사유의 심화, 충격이나 해방을 입체화하는 시들도 있지만, 제가 만난 좋은 시들은 대부분 시의 고유한 특성을 잘 지니고 있더군요. 깔끔하고 담백한, 그러면서 그 속에 불꽃이 타오르는 시.
이런 면에서 저는 낡았고, 보수주의자입니다만, 아직은 언어를 아끼는 시들이 잘 읽히고 또 이런 시에 대한 애정이 있어요. 편견이자 취향이죠.

소나기

저,
저,
저,
저,
저,
흙탕물 사납게 차오르는 세상을
순식간에 건너가는
저,
저,
저,
저,
저,
저,
몸통 다 잘린
흰 발목들

■ 김지율: 시를 쓰는데 큰 자극이 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리고 시 쓰는 과정에서 찾아오는 슬럼프는 어떻게 극복하시는지.


□ 전동균: 요즘도 시를 못 쓰고 있는데, 그냥 놀아요. 안에 든 게 없어서 안 나오는 건데 어쩌겠어요. 또 누가 빚 독촉하듯 쓰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 김지율: 선생님에게 ‘마감’이란 무엇일까요?


 □ 전동균: 저는 시에 관해서는 ‘마감’이 없어요. 웃기는 얘기지만, 청탁 받고 시를 쓰지는 못해요. 산문은 웬만하면 딱딱 쓰는데. 그래서 더러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좀 써 놓은 게 있어야 청탁에 응할 수 있어요. 아마추어라는 얘기일 수도 있는데, 예전에 딱 한 번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계간지 청탁을 받고서는 아주 생고생을 했어요. 하지만 청탁을 받으면 반드시 시간을 지키는 편이예요. 제가 예전 직장에서 월간지 편집 일을 하면서 펑크 내거나 마감 질질 끄는 필자들 때문에 고생을 한 적이 있거든요.


■ 김지율: 만약 시를 쓰지 않았다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아직 해 보지 않은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 전동균: 몇 년 전 술자리였다면, 스님이나 사제가 되었을 거라고 (아마 중간에 파계, 환속했겠지만) 헛소리를 했을 텐데, 지금은 전혀 아니고요. ‘꼭’ 이라고 단서를 다니까 말문이 막히네요. 다만 나이 들어서는 이렇게 살았으면 하는 생각은 있어요.


■ 김지율: 마지막 질문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 전동균: 이번 2학기부터 연구 년입니다. 학교 와서 처음 맞는 건데, 이런 저런 의무들이 있지만 당분간은 몸이나 추스르면서 아무 것도 안 하려고요. 중고차를 며칠 전에 하나 샀어요. 이리저리 놀러 다니고 싶어서요. 기회가 닿으면 히말라야도 다시 가고 싶고, 중국이나 일본의 산들도 트레킹하려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찌될지 모르겠군요.


■ 김지율: 뜻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긴 시간 재미있고 귀한 답변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연구년 잘 보내세요. 혹 히말라야에 가시면 멋진 사진 보내주세요.(웃음) 멀리서 가까이서 늘 건필하시고 건강하시길 바라겠습니다.


□ 전동균: 이 더운 날, 멀리 오시고, 수고 많으셨어요. 좋으신 가을 만나길 바랍니다.




​ 초승달 아래

떠돌고 떠돌다가 여기까지 왔는데요
저문 등명 바다 어찌 이리 순한지
솔밭 앞에 들어온 물결들은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까지,
솔방울 속에 앉아 있는
민박집 밥 끓는 소리까지 다 들려주는데요
그 소리 끊어진 자리에서
새파란, 귀가 새파란 적막을 안고
초승달이 돋았는데요

막버스가 왔습니다 헐렁한 스웨터를 입은 여자가
내려, 강릉場에서 산 플라스틱 그릇을 딸그락 딸
그락거리며 내 앞을 지나갑니다
어디 갈 데 없으면, 차라리
살림이나 차리자는 듯


내 기억에 경주와 선생님은 너무 닮아 있다. 선생님의 어떤 분위기가 그렇다는 말이다. 때로는 개구쟁이 소년 같고 때로는 엄격하고 따뜻한 사제 같으시다. 선생님은 담쟁이처럼 몸을 붙이고 낮은 벽을 타고 있는 제자들과 후배들에게 단단한 그늘을 만들어 주신다. 어느 봄, 하동 문학캠프가 있었던 날, 혼자 달을 보며 담배를 피우시던 모습을 몰래 엿본 적 있다. 아마 좋아하시던 낚시를 하면서도 이 생의 어떤 그림자들을 보고 계셨을 것 같다. 그곳이 선생님의 시와 삶이 있는 중요한 부분이지 싶다. 오래 묶였다가 풀려나간 간절함 속에서 터져 나온 ‘봄볕 풀리어 맑고 환한 물 속에는/ 내가 살아보지 못한 집 한 채 숨어’ 있을 것 같다고 하셨던 것처럼. 내가 시를 조금 더 알았더라면, 선생님의 말을 더 잘 들었을 텐데…. 행간의 말과 침묵 속에 있는 말들을 놓친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다. 

“4, 5년 전 쓴 뒤 처박아 놨던 글, 마지막 업 지우는 맘으로 펴내” [나의 삶 나의 길]

 

 

(김용출 세계일보 2021-06-26)

 


8년 만에 명상소설 ‘숨’ 출간 송기원 작가

바이러스 백혈병으로 딸 떠나보낸 화자
불교 수행법으로 고통 극복 과정 그려
과거 회상·화해 모색하는 자전적 작품

1974년 신춘문예 소설·시 동시 당선 화제
모더니즘 추구 내면 안에서 리얼리즘 발견
70·80년대 민주화운동하다 네 차례 투옥

딸 떠나보낸 뒤 미얀마 명상센터 등 전전
코로나 터지지 않았다면 스리랑카 갔을 것
다시 태어난다면 고양이로 태어나고 싶어



최근 본격 명상소설인 ‘숨’을 펴낸 송기원 작가는 “10년 전, 둘째 딸이 세상을 떠난 뒤 미얀마에서 1년간 학교 공부식으로 초기 불교의 수행법인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공부했다”고 말했다.  


신춘문예에 소설과 시가 동시에 당선되며 비범함을 알린 작가, 예리한 현실인식과 탐미적 감수성의 작품 세계, 동인문학상과 김동리문학상 등 많은 문학상을 수상, 네 차례나 투옥되며 민주화의 한복판에 섰던 인생, 명상 등에 탐닉하며 바람처럼 살아온 후반의 삶….


송기원 작가가 8년 만에 장편소설 ‘숨’(마음서재)을 펴냈다고 했을 때, 그를 만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파란만장한 50년 문학 인생을 온몸으로 헤쳐온 그 아니었던가.

더구나 ‘명상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내건 작품 역시 심상치 않았다. 바이러스 백혈병으로 딸을 먼저 떠나보낸 화자가 초기 불교의 수행법인 사마타(선정을 위한 명상)와 위빠사나(지혜를 위한 명상)를 통해 죄의식과 상실의 고통을 뛰어넘어 평온에 이르는 구도 소설이자, 아버지의 시선과 이승을 떠나 중음신(사후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의 상태)으로 떠도는 딸의 시선을 교차시키며 과거를 회상하고 화해를 모색하는 자전적 작품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무 때나 내려오라는 말을 듣고 그가 사는 곳을 지도에서 찾아보니, 남도의 끝자락 해남에 위치한 ‘백련재 문학의집’. 시인 김남주, 고정희, 황지우의 고향인 해남군이 2019년부터 운영하는 작가 레지던스 공간이었다. 까마득한 것도 잠시.

하늘이 마치 청포 같던 지난 18일 아침, 서울에서 해남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놓치고 광주를 거쳐 해남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휴게소에서 전화를 한 뒤 해남에 도착해 택시를 잡아타고 푸른 논밭을 가로질러 백련재로 들어섰다.

그는 왜 지금 멀고도 먼 이곳에서 우주를 바라보거나 마음속 광명으로만 내달리고 있는 것일까. 사진 몇 장을 찍고, 입주 작가들이 함께 쓰는 거실에 마주 앉았다. 곧이어 파란만장한 삶과 문학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데. 그는 말이 어눌했고, 숫자와 이름을 자주 기억해내지 못했다.


―8년 만에 장편소설을 펴냈는데, 왜 이 소설을 써야 했는가.

“(책을) 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중에 꼭 필요한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그놈의 욕심 때문에 내게 됐다. 4, 5년 전쯤 쓴 뒤 처박아 놓고 있었는데, 어떤 식으로든 정리해야 할 것 같았다. 이를테면, 죽을 때가 다되면 마음이 약해져 이것 하나는 쓰고 죽고 싶다는 심정이었달까. 근본으로 가서 자기 자신에게 자유로워질 것인가, 하는 게 소설의 질문이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도 “이승에서 마지막 업을 지우는 일”이었다며 “인연이 되어 책을 펼치는 이들이 있다면, 한두 번이 아니라 열 번, 백 번을 펼쳐서 그이들 깊은 곳에 못박힌 고통까지 녹아나게 되기를”이라고 적었다.

―구체적인 집필 동기나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옛날 인도나 미얀마, 스리랑카 등 동남아시아를 간 적이 있는데, 미얀마가 불교국가여서 그런지 명상 시스템이 잘돼 있었다. 산속에 명상센터 등이 있었고, 숲 속에는 꾸띠라는 오두막집이 있어 혼자 살기 좋게 해놨더라. 10년 전 죽은 둘째 딸이 마지막으로 앓았던 병의 단계가 ‘섬망’이었는데, 섬망 비슷한 상태를 선정으로 재현하기 위해 미얀마 명상센터를 찾아갔다.”

햇살이 병실을 밝게 비추던 어느 겨울날 오후 2시, 간호사가 들어와 딸의 이름을 불렀다. 옆에서 책을 읽던 그는 좀 깊이 잠들었나 봐요, 라고 딸 대신 대답했다.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불현듯 딸 코끝에 손을 가져다댄 뒤 후닥닥, 병실을 뛰쳐나갔다. 손만 뻗으면 닿는 거리에서 딸의 마지막을 놓치다니, 이건 아니야. 이른 봄, 그는 남해안 일대에 딸의 유골을 뿌렸고, 이후 세상을 부유했다.

작품은, 그러니까, 더 이상 단순한 소설이 아닌 셈. 박규리 시인이 추천사에서 “이 책은 살아서 두 눈 부릅뜬 채 중음의 딸과 함께 그 아득한 바르도를 찬연하게 건넌 한 아비의 지극한 천도재”라고 쓴 이유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조금 설명해달라.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초기 불교와 소승불교의 수행법인데, 서로 약간 다르다. 사마타는 빛을 보는 선정을 통해 감각이나 사고를 컨트롤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 버리는 것으로, 감각에 구애받지 않으니까 탐진치라든가 짜증 등 자체가 없어진다. 빛만 있고 내가 없어지면서 선정으로 들어간다. 반면 위빠사나는 알아차려서 지혜가 열리는 것으로, 알아차림을 해야 하니 선정으로 들어갈 수 없다.”

명상의 타래가 풀리자, 이야기는 종횡으로 내달렸다. 불교의 화두선과 묵조선 및 염불선, 선불교의 돈오후수와 정혜쌍수, 한국의 화두선과 일본의 화두선, 인도와 티베트의 호흡법, 도교의 피부호흡법…. 그리하여 회광반조의 질문으로 달렸다가 멈춘다. “몸이 있는가?/ 또는 몸이 없는가?/ 이것이 나냐?/ 또는 내가 아니냐?”(321쪽)

1947년 전남 보성 장터에서 태어난 송기원은 중학교 2학년 때 유서를 쓴 뒤 공동묘지 옆의 늙은 소나무에서 극단적 선택을 시도할 정도로 남다른 감수성의 소유자였다. 책에는 “얼굴조차 모르는 노름쟁이에다 아편쟁이인 건달의 사생아라거나, 오일장을 떠돌며 미역이나 멸치를 파는 가난한 장돌뱅이 어머니의 자식이라는 출신성분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는지 모른다”(11쪽)며 운명의 굴레를 묘파했다.

그는 1974년 신춘문예에서 소설과 시가 동시에 당선돼 화제가 됐다. 등단 이후 소설집으로 ‘월행(月行)’(1979), ‘다시 월문리에서’(1984), ‘별밭 공원’(2013) 등을, 장편소설 ‘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1994),‘안으로의 여행’(1999), ‘또 하나의 나’(2000) 등을, 시집으로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1983), ‘저녁’(2010) 등을 각각 펴냈다. 그 사이 동인문학상과 오수영문학상, 대산문학상과 김동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문학 세계를 조금 설명해 달라.

“우리 현대 문학은 내면을 추구하는 모더니즘과 시대나 세상에 천착해 발언하는 리얼리즘으로 대별할 수 있을 텐데, 저는 양쪽 모두 불만이었다. 리얼리즘은 시대만 있지 깊이가 없어 보였고, 인간 속으로 깊이 들어간다는 모더니즘의 경우 넓이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넓이가 없는 듯했다. 저는 처음 리얼리즘 쪽이었지만, 징역을 다녀오고 나이가 들면서 내면을 추구하는 쪽으로 갔다. 내면 안에서 리얼리즘을 발견하려 했다.”

송기원은 1970, 80년대 네 차례나 투옥되며 민주화의 한복판에 섰다, “어쩌다보니”.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서라벌예대에서 소설을 가르쳤던 소설가 이호철의 구속에 문인들과 함께 데모에 나섰다가 붙잡혀 첫 구속,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연루, 1985년 민중교육지 사건 관여, 1990년 ‘붉은 산 검은 피’를 펴낸 오봉옥 시인의 필화사건 연루. 특히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는 과정은 헛헛하다. 결혼해 아이까지 낳고 뒤늦게 복학해 교생 실습 중이던 1980년 5월, 그는 나중에 농민운동가가 되는 백남기씨로부터 연락을 받고 전두환 화형식에 참여했다가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1개월 뒤 붙잡힌 그는 남산 안기부에서 가혹한 조사를 받았다.

“안기부에서 직살나게 얻어터졌는데, 처음에는 김대중에게서 돈을 받아 상여를 사서 화형식을 한 것으로 말하라고 하더라. 김대중을 알지도 못하고 백남기가 주도했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했다. 그러니까 이번엔 김대중이 고은 시인에게 돈을 줬고, 다시 고은에게서 돈이 온 것으로 하자고 했다. 고은은 짠돌이여서 돈을 받은 적이 없고 둘째 딸이 5000원을 받은 게 전부라고 했다. 그랬더니 고은에게서 100만원을 받은 것으로 둔갑시키더라. 그 돈으로 상여를 만들어 시위를 벌였다는 거였다(웃음).”

더구나 두 번째 징역을 살고 있을 때, 화성에 살던 어머니는 “빨갱이” 손가락질 속에서 목을 맸다. 그는 한동안 실천문학 발행인을 지낸 뒤 중앙대 문창과 초빙교수로 강단에 섰다. 하지만 둘째 딸이 백혈병에 걸리자 교수직을 그만두고 병간호에 전념했고, 딸을 세상을 떠나자 그는 명상 등에 빠져 처사처럼 곳곳을 헤맸다.


―딸이 떠난 뒤 10년 가까이 부유했다고 했는데, 어디에서 어떻게 부유한 것인가.

“미얀마의 명상센터에 가서 명상을 했고, 국내에 들어와선 계룡산이나 지리산 등을 전전했으며, 해인사나 만기사 등 여러 절에서 절밥을 먹었다. 만기사 원경 스님으로부터 덕문이라는 법명도 받았다. 해인사의 소리원 고시원에 가기도 했다. 토지문학관을 비롯해 여러 문학관에도 돌아다녔다. 이곳은 지난해 왔다.”

―이곳의 일상은 어떤가.

“오전 6시쯤 일어나서 밤 10시쯤 잔다. (술은 마시는지) 집에서 먹지 않고, 기분 나빠도 먹지 않으며, 기분 나쁜 놈들과도 먹지 않는다. 다만 좋은 벗을 만났을 때만 마신다. (요즘 낙은) 저녁에 자다가 일어나서 휴대폰 등으로 묘한 것을 본다. 우주 표준모형이나 우주 미스터리, 연대표 등 빅 히스토리를 보거나 공부한다. 재미있더라.”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고, 어떤 작품을 쓰고 싶은가.

“그런 것은 완전히 없어졌다. 앞으로 뭘 할지도 모르겠다. 코로나19가 터지기 전에는 스리랑카로 가려고 했다. 스리랑카에는 집들이 띄엄띄엄 있어서 혼자 살기 좋다더라.” 그는 이때 불쑥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기 싫다, 다시 태어난다면 고양이로 나고 싶다”고 말했다. 이유를 묻자, 그의 대답이 무심했다. “(인생이) 재미가 없어요.”

인터뷰가 끝나고 해남 읍내로 나가 함께 이른 저녁을 먹었다. 식사가 끝나자, 그는 고양이에게 준다며 생선 한 조각을 비닐봉지에 담아갔다. 만약 그가 내세에 고양이로 태어난다면, 고양이의 삶이 진짜이고 인간의 삶이란 한갓 꿈일까, 아니면 고양이로 태어난 게 한갓 꿈일까. 절급하게 궁금해 그의 시를 찾아 읽는다, 상경하는 기차 안에서.

“참 오래 머물렀다./ 주인이듯 내가 머무는 동안에, 몸은/ 벼라별 모욕을 다 겪고, 몇 군데는/ 부러지고 꺾이고 곪아서, 끝내/ 만신창이가 되었을 거다.//… 이제 나는 몸이 없는 곳으로 떠난다.// 그렇게 몸이 없이 사방을 돌아보면, 아아,/ 몸 이외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몸이 없는 곳에는 그 어떤 것도 없구나.”(‘몸’ 부문)

 

해남=글·사진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송기원 작가는… ●1947년 보성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197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경외성서’, ‘동아일보’에 시 ‘회복기의 노래’가 동시에 당선돼 등단 ●소설집에 ‘월행’(1979), ‘다시 월문리에서’(1984), ‘인도로 간 예수’(1995), ‘사람의 향기’(2003), ‘별밭 공원’(2013) 등, 장편소설로 ‘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1994), ‘여자에 관한 명상’(1996), ‘청산’(1997), ‘안으로의 여행’(1999), ‘또 하나의 나’(2000) 등, 시집에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1983), ‘마음속 붉은 꽃잎’(1990), ‘단 한번 보지 못한 내 꽃들’(2006), ‘저녁’(2010) 등이 있음 ●동인문학상 오수영문학상 대산문학상 김동리문학상 등 수상 ●1970, 8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네 차례 투옥 ●실천문학 발행인, 중앙대 문창과 초빙교수 등 역임 ●현재 해남군의 백련재 문학의집 거주

 

 

 

< 소설로 구도의 길 모색한 작가 송기원 별세…향년 77세 >


(서울=연합뉴스, 2024-08-01 ) 김용래 기자 = 소설을 통해 구도(求道)의 길을 모색해온 작가 송기원이 별세했다. 향년 77세.

1일 문학계에 따르면 전남 해남에 거주하며 작품활동을 하던 송기원은 숙환으로 치료를 받아오다 지난달 31일 오후 숨을 거뒀다.

1947년 전남 보성 출생인 고인은 1967년 고교 재학 당시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는 등 일찌감치 글재주를 인정받았다.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한 뒤 베트남전에 자원해 참전했고, 1974년 동아일보와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각각 시와 소설이 당선돼 중앙 문단에 이름을 알리면서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고인은 세상의 상처와 치부, 자기혐오의 감정을 탐미적인 문장과 구도적인 서사로 승화한 문인으로 평가된다.

"자신이 순간마다 변하는 과정이 바로 무상이고, 그런 순간의 변화에 어지러움과 현기증을 느끼는 과정이 고통이며, 그런 순간의 고통 속에서 어디를 둘러보아도 나라는 존재는 보이지 않는 과정이 무아가 아니고 무엇이랴."(송기원 소설 '숨'에서)

마지막 장편인 명상소설 '숨'(2021년)에서는 백혈병으로 딸을 먼저 떠나보낸 작중 화자가 초기 불교 수행법과 명상을 통해 자기혐오와 죄의식, 상실의 고통을 극복하고 완전한 평온함에 이르는 과정을 그렸다. 이 작품에는 둘째 딸을 먼저 보내고 또 명상과 수행에 정진해온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 짙게 녹아있다.

군부 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에도 깊이 관여했다.

작가회의의 전신이자 박정희·전두환 정권에 저항한 문인 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에 적극 참여했던 그는 고은·윤흥길·이문구·황석영·이시영 등 자실 회원 30여명과 함께 1974년 자실 결성식에서 김지하 시인의 석방 등을 촉구하는 '문학인 101인 선언'을 발표했다. 1980년에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휘말려 옥고를 치렀고, 1985년에는 '민중교육 필화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한때 실천문학사 주간으로 일하며 출판 실무에도 몸담았다.

저서로는 소설집 '월행'(月行·1979) '다시 월문리에서'(1984), '인도로 간 예수'(1995)와 장편소설 '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1994), '여자에 관한 명상'(1996), '청산'(1997), '안으로의 여행'(1999), '또 하나의 나'(2000), '숨'(2021), 시집 '그대 언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1983), '마음속 붉은 꽃잎'(1990), '단 한번 보지 못한 내 꽃들'(2006) 등을 남겼다.

자전 소설 '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는 1996년 김영빈 감독의 연출로 박상민, 최민수 등이 출연한 '나에게 오라'라는 작품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생전에 고인은 제2회 신동엽창작기금과 제24회 동인문학상, 제9회 오영수문학상, 제6회 김동리문학상, 제11회 대산문학상 소설부문을 수상했다.

고인은 문학 외에도 명상과 수묵화에도 조예가 깊었다.

일찍이 구도와 깨우침에 뜻을 두고 인도, 네팔, 지리산, 계룡산 등을 오가며 요가와 명상 등을 오랜 시간 수련했고, 2022년에는 해남 땅끝순례문학관에서 '선정, 그 깊고 아득한 순정의 세계'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도 열었다.

빈소는 대전 유성구 선병원 장례식장 VIP 3호실에 차려졌다. 발인은 3일 오전 8시. ☎ 042-825-9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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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양주 8년, 마음 닦아 詩心 열다

 

채한기 (법보신문  2004.03.22)

 


첫 시집 『이 환장할 봄날에』 펴낸 박규리 시인

 

후미진 뒷담

손바닥만한 물웅덩이에


서럽도록 환한 달빛!


저물도록 법성포 바닷가를 기웃거리다 돌아오는 길

자칫 헛디뎌 밟을 뻔한


지상에 뜬 달 한줌!


바다도 아니요 호수도 아닌 발 밑, 시궁창이

치자꽃 같은 하얀 달빛으로 가득하다


바로 이 자리에서, 제 속의 출렁거림을

얼마나 깊이 들여다보았던 것이냐

흔들리는 제 맘을 얼마나 간절히 내린 것이냐

급한 물살에는 그림자도 쉬어가지 못하건만넓고 큰 바다만 그리던 나


어리석음의 파도를 걷어내고

이 자리에, 바로 이 웅덩이에 내 설움 내려놓을 수 없을까


‘지상에 뜬 달 한줌’ 전문


박규리 시인의 첫 시집『이 환장할 봄날에』(창작과비평사)는 범상치 않은 시적 내공이 한껏 응축된 시집이다. 처절하리만치 강인한 시어들은 오히려 너무도 애절해 차라리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차마 떨치지 못한 삶의 티끌마저 암자에 서서 허공으로 날려버리려 애써보지만 이내 자신의 가슴속에 다시 묻어두고야 마는 애처로움이 시 전편에 배어있다. 왜일까.

고창 미소사 공양주 보살이 낸 시집이라는 포커스보다는 시인 박규리가 공양주가 된 사연에 초점을 맞춰야 풀릴 듯 하다.


시인에서 공양주로

여고시절 때까지도 몸이 아파 택시를 타고 등교해야만 했던 소녀.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읽고 엄마 품에서 ‘세상에 이렇게 불쌍한 것이 여자라니까’라며 펑펑 울던 소녀는 문학잡지를 탐독해 가며 시인의 꿈을 키워갔다. 한 대학의 약대생이 된 숙녀였건만, 문학 열병을 앓고 있던 그녀는 결국 중도에 대학을 그만둔다.

대학 중퇴 후 신경림, 정희선 시인을 만나 본격적인 문학지도를 받던 그녀는 1995년 ‘민족예술’을 통해 문단에 첫 이름을 올렸다. 병명조차 알 수 없는 지병으로 이미 쇠약해져 있건만 시집 한 권 세상에 내 보겠다는 당찬 야심(?)은 꺾을 줄 몰랐다. 결국 피폐할대로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잠시 뉘일 곳을 찾던 그녀는 평소 집안과 친분이 있던 고창 미소사로 발길을 돌린다.

공양주 없는 작은 암자에서 박규리 시인은 절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공양을 올리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산사에 머물면서도 그녀는 시집 출간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매달리고 또 매달렸다. 하루빨리 한 권의 시집만 갈무리하고 하산하려 했던 박규리의 공양주 일은 그로부터 8년여 동안 지속된다. 왜 그랬을까.


“금강경은 나의 스승”

“금강경은 나를 바꿔놓은 큰 스승입니다. 아상을 버리고, 버리는 마음마저 버리면 이 세상 전부가 다 시일 것이라는 확신이 섰습니다. 그토록 깊은 편견과 아집으로 가득 차 오로지 분별 속에서 깜깜한 방안을 헤매이던 제가, 드디어 하늘을 바라보고 새소리를 들으며 하염없이 작고 작은 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어요.”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면서 그녀는 당장 시를 쓰지 않고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 본 후 써 내려간 시는 점차 문단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각종 문예지에 작품이 하나 둘씩 실리고 1999년 ‘좋은 시 99’에 작품 ‘치자꽃 설화’가 선정되는가 하면  시평에 작품 ‘그 변소간의 비밀’이 ‘올해의 좋은 시’로 선정됐다. ‘그 변소간의 비밀’은 2003년 ‘작가가 선정한 올해의 좋은 시’로도 선정됐다.

『이 환장할 봄날에』는 지난 8년여 동안 ‘참나’를 찾아가며 조금씩 변모해 가는 시인의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신경림 시인은 “새파란 칼날의 매서움과 봄 햇살의 부드러움을 함께 지니고 있다”고 평한다.

수행승의 경계를 함부로 넘지 않으면서도 그 경계선에서 자신의 심상을 하나 둘씩 풀어가는 박규리의 선적 내공도 일품이다. ‘지상에 뜬 달 한줌’을 비롯해 ‘상추’, ‘가시방죽’, ‘잃어버린 안경’, ‘모래 한 알로 사는 법’, ‘가을비’, ‘사무친 길’ 등을 통해 그녀의 선기를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박규리 시인

1960년 서울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정을 수료
1995년 ≪민족예술≫에 <가구를 옮기다가> 외 4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
첫시집 <이 환장할 봄날에> 창작과비평사 2004

시인 김이듬, 건강한 백치의 관능과 용서

<김도언의 시인의 얼굴> 다섯 번째 시인: 김이듬
(채널 예스, 2015.8.13)

 



어떤 의도나 악의가 없을 때에만이, 그리고 그것이 상대방에게 오해 없이 다가간다는 확신이 있을 때만이 할 수 있는 농담인 것. 아니다, 그 어떤 반응조차 무관심한 백치의 상태에서야 비로소 가능한 농담인 것. 그 말에 파안대소를 터뜨린 걸 보면 송승언 시인 역시, 김이듬 시인의 농담을 그냥 백치적인 천진함에서 비롯된 치사로 받아들였음이 틀림없다.
 

숨고 싶다. 기약 없는 땅으로. 독창(獨創) 혹은 숙명(宿命)이라는 착란 속에서 단지 쓰다가 사라지고 싶다. 최선을 다해 빛나지 않으려고 애쓰는 빛나는 것들의 심정이 이러할까?
- 시집 <명랑하라 팜 파탈> 후기 중


시인의 백치적 태도

2001년, 지금은 없어진 <포에지>라는 시전문지의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김이듬 시인은 우리 시단의 선명한 이색異色이다. 시적 화자로서 그녀를 통해 발화된 여성의 목소리가 아직까지 관측된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제사장으로 만신을 대리하는 듯한 허수경이나 김선우와도 다르고, 지적 균열을 내며 여성의 실존적 의미를 궁구하는 김혜순이나 진은영과도 다르다. 외관상 김이듬이 내는 목소리의 가장 명료한 개성은 특유의 천진함으로 보인다. 이 말은 단순히 그의 목소리에 꾸미거나 가공한 흔적 같은 것이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가 발성될 때, 대기의 입자를 흔들고 공명을 일으키는 사후적 반응에 김이듬이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 백치적 태도를 갖고 있다는 의미를 가리킨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그녀가 갖고 있는 시인의 존재론적 좌표에까지 연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고전적이다 못해 낭만주의에 깊이 침윤된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시인은 만들어지거나 발명되는 존재가 아니라 발견되는 존재, 다시 말해 원래 있는 존재다. 시인은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이 세계의 작동 방식, 다시 말해 자연이나 사물이 존재하거나 관계 맺는 방식에 제각기 반응하며 특유의 이미지를 자신의 몸을 투과시켜 음악적 언어(목소리)로 표현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몸이 일종의 악기라고 말한 시인 허연의 표현은 매우 적확하다.) 이때 시인이 어떤 인공적인 태도나 의도를 가미한다면, 자신의 몸에 들어오는 세계의 빛은 굴절되거나 왜곡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시인은 가장 원시적인 상태에서 그 세계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것은 일종의 백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의도나 긴장을 지워버린 욕망의 공백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김이듬은 그것을 아마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시인 중 하나일 것이다.  

여기서 그녀의 백치적인 천진함을 확인할 수 있는, 최근에 직접 목격한 에피소드 한 가지를 소개하겠다. 폭염으로 도심의 아스팔트가 이글이글 타오르던 7월 31일 어느 식당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날은, 새로 창간된 시 전문 계간지 <22세기 시인>이 제정한 22세기 시인상 시상식이 있는 날이었고, 그 상의 초대 수상자가 바로 김이듬 시인이었다. 나는 그 잡지의 편집위원인 김요일 시인의 초대를 받아 그 시상식에 참석했다가 뒤풀이가 열리는 자리에까지 끼게 되었다. 김이듬 시인이 받은 상이 본상 격이라면, ‘22세기 젊은 시인상’은 본상과 함께 주어지는 특별상이었는데, 그 상의 수상자는 송승언 시인이었다. 당연히 그 역시 뒤풀이 장소에 와 있었다. 그런데 음식을 기다리던 중 송승언 시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김이듬 시인이 한참 후배인 송승언 시인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승언 씨, 시 열심히 써, 그러면 언젠가는 나처럼 좋은 시를 쓰게 될 거야.”

그 말이 끝나는 것과 좌중에 웃음이 터졌다. 김이듬 시인의 말은 당연히 악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농담이었고 장석주 시인을 포함해 그 자리에 하객으로 참석하고 있던 시인들 사이에 고여 있던 다소 어색한 분위기를 일시에 무화시켜버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시인이 시인에게 그와 같은 농담은 하는 것은 사실 매우 어려운 것이다. 어떤 의도나 악의가 없을 때에만이, 그리고 그것이 상대방에게 오해 없이 다가간다는 확신이 있을 때만이 할 수 있는 농담인 것. 아니다, 그 어떤 반응조차 무관심한 백치의 상태에서야 비로소 가능한 농담인 것. 그 말에 파안대소를 터뜨린 걸 보면 송승언 시인 역시, 김이듬 시인의 농담을 그냥 백치적인 천진함에서 비롯된 치사로 받아들였음이 틀림없다.

인터뷰를 위해 김이듬 시인을 만난 건 8월 초, 그녀가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치는 문지문화원 사이 강의실에서다. 검은색 투피스 블라우스를 입고 온 이 백치 같은 시인에게 시가 처음 들어온 것은 언제였을까. 그것부터 들어보고 싶었다.  
 

시를 만난 여름날 오후
 
김도언: 먼저 시인님이 최초로 시를 만나게 된 상황을 설명해주시면 좋겠어요. 처음 내가 시를 쓰고 있다는 걸 자각한 순간이라거나. 어떤 결정적인 명료한 순간이 있었는지.

김이듬: 저는 집에 책이 많았거든요. 아버지 친구 분이 금성출판사였나, 외판원을 하셔가지고 집에 전집류 같은 게 많았어요. 그래서 제가 어렸을 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런 걸 읽었어요. 초등학교 때, 뭔지도 모르면서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랐죠. 아마 3, 4학년 때쯤인 거 같은데 여름이었어요. 새어머니랑 싸우시고 집을 나가버린 아버지를 찾으러 나갔는데, 동네 여기저기를 기웃기웃하면서 보니까 이발소에 아버지가 계시더라고요. 거기 할아버지하고 같이 소주를 마시고 계셔서 들어가서 아버지한테 집에 가자고, 가서 저녁 드시라고 그랬는데, 아버지는 좀 기다려봐라 하면서 시간이 계속 지나갔어요. 아마 장기나 바둑 같은 걸 두셨던 거 같아요. 그런데 그 이발관에 시 같은 게 걸려 있었는데, 그날따라 그 시가 눈에 선명히 들어왔어요. 푸시킨의 시였거든요.

김도언: 푸시킨이라면.

김이듬: 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마라. 그 시였죠. 그 날은 제가 너무 우울했고, 새어머니하고 우리 아버지가 싸우는데 저 분들이 싸우다가 잘못되면, 나는 또 어떡하나 이런 생각을 했고, 해질녘이었고 그런 여러 가지 상황들이, 좀 지저분한 의자에 앉아서 아버지를 기다리면서 올려다본 액자에, 그 시가 있었던 거죠. 그 액자가 지금도 눈에 선명해요. 그때 삶이 슬픈 거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시가 뭔가 위로해주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김도언: 그러면 그 이후에도 시가 그러한 것이라는 자각이 계속 이어졌어요? 아니면 그날이 있고, 한참 후에 또 시를 만난 건가요. 혹시 중고등학교 때 문학소녀였나요?

김이듬: 네 그랬어요. 중학교 때 시를 곧잘 썼어요. 도왕자 선생님이라고 국어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 분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도왕자 선생님은 거의 어머니 같은 분이셨어요. 선생님이 저한테 책을 주셨는데, 심지어 『채털리 부인의 사랑』 같은 것도 중학교 3학년 때 주시고 그랬어요. 그리고 선생님 쉬실 때 놀러 오라고 해서 같이 토론도 하고. 넌 어떻게 읽었어, 물으면 제 감상을 말씀드리고 그랬죠. 전혜린도 그 때 알았어요. 선생님은 저를 거의 문학적 동반자, 친구처럼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김도언: 그 선생님한테 문학 영재 교육을 받으신 거네요. 

김이듬: 지금 생각하면 그런 셈이죠. 선생님이 말을 잘하고 그러면 뉴욕제과 데려가서 빵도 사주시고, 짜장면도 사주고, 그런 재미가 있었어요. 선생님한테 잘 보이고 싶고, 기대에 어긋나면 버림받을 까봐,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흘러가는 좌표

아버지를 찾으러 나갔던 그 불안한 여름날 오후, 이발소 벽에 걸려 있던 외국 시인의 시를 통해 삶에 넌지시 말을 건네오는, 시의 특별한 쓰임을 (자발적으로) 어렴풋이 깨닫고, 이후 특별한 선생님과의 만남과 그로부터의 자극 속에서 문학의 아우라에 성큼 자신의 몸을 적실 수 있었다는 시인의 증언. ‘줄탁동기’라는 말처럼 우연과 필연의 정교한 짜임 속에 김이듬 시인의 문학이 출발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저물거나 지치지 않는 시인의 건강한 자존감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삽화가 아닐 수 없다.

21세기의 벽두인 2001년 등단한 김이듬 시인은 그동안 비교적 안정적인 주기로 다섯 권의 시집을 펴냈다. 내 관점에선 최근의 시단에서 그보다 더 활력 있고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는 시인을 찾기 힘들 정도로 시업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자연스레 그녀가 성취한 문학적 성과에 대한 평단과 동료시인, 그리고 독자들로부터의 평가와 인정이 뒤따르면서 문학상 같은 보상과 격려도 주어지는 중이다. 지난 6월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시인 페스티벌에 황지우, 심보선, 강정 등과 함께 한국 시인을 대표해 참석하기도 했다. 이 지속가능한 열정의 근원이 무엇인지 물었다.

김도언: 2001년 등단 이후 15년이 되었는데 그 시간 동안 중단 없이 시를 쓸 수 있는 동력이 무엇인지 좀 말씀해주세요. 혹은, 슬럼프가 있었다면 그 슬럼프를 어떻게 극복했는지도 좋고요.

김이듬: 아무래도 잘 쓰니까.(웃음)

김도언: 주변에서 적절한 피드백이 있었고, 격려가 있었고. 그런 외부적인 요인이 영향을 미쳤다는 건가요.

김이듬: 등단한 직후에는 피드백 그런 거 없었어요. 그땐 친구도 아무도 없었고. 스승도 없고. 근데 열심히 썼거든요. 저는, 그냥 노래가 기분 좋으면 나오고, 슬플 때 울음이 나오는 것처럼 시가 그런 거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제가 시를 썼다기보다도 시가 저를 좀 데리고 왔고 또 살게 하고 그런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전망을 가지거나 계획성 있거나 그렇지가 않거든요. 언제 몇 편을 쓰고 언제 시집을 내고, 그런 계획 자체가 없어요. 시집 낼 때도 발표한 원고를 다 못 찾을 때가 많아요. 면밀하지가 못한 편이죠. 그 시 좋던데, 왜 시집엔 수록되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저는 그 시가 도대체 왜 사라졌는지 모르겠는 거예요.

김도언: 그러니까 슬플 때도 노래가 나오고, 기쁠 때도 노래가 나오는 것처럼 시도 그렇다는 거죠? 그런데다가 어느 시점부터 자주 언급되고, 평가와 인정을 받으면서 더 동기부여도 되고 그런 측면도 있었겠죠.

김이듬: 사실은 비평 잘 안 찾아봐요. 누가 뭐라고 하거나 안하거나 그런 거에 별로 자극이 안돼요. 어떤 사람은 자기 비평 모아 놓는다는데 저는 하나도 안 모아놨어요. 그냥 그건 지나가는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런 것에 좌고우면할 이유가 없죠.

이 글의 서두에서 나는, 김이듬 시인에게서 받은 인상을 묘사하면서 좀 과감하게 어쩌면 과격하게 ‘백치’라는 단어를 썼다. 그것은, 원시적인 상태에 다다르기 위해 자신의 의도나 긴장을 지워버린, 그래서 세계의 가장 자연스러운 원형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최적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에 고스란히 기록되는 인터뷰를 통해 김이듬 시인은, (물론 의식을 하고 말한 것은 아니겠지만) 자신의 입으로 자신이 가진 백치성에 대해, 이미 깃들어 있는 그 천진함에 대해 충분히 증언을 하고 있는 셈이다. 당연히 그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백치적인 천진함이란 게 과연 의도한다고 만들어지거나 보여질 수 있을까. 나는 그 특유의 나이브한 태도를 좀 더 확인해보고 싶었다.
 
김도언: 자신의 좌표를 특별하게 의식하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둔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게 좋은 시인들의 공통점 같아요. 2001년도에 등단하셨는데 저는 그 시기가 상징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90년대 시인들이 80년대적인 무거운, 이념적 지향이 있는 것들을 걷어내면서 90년대적인 감수성을 시 안에 들여놓았는데 그것이 만개한 게 2000년대 시단이잖아요. 그때 미래파니 해서 온갖 개성 있는 시인들이 나오고, 시가 정말 활발하게 거의 르네상스처럼 논의가 됐었어요. 김이듬 시인도 그런 상황에서 함께 언급됐고요. 시인님의 시 역시 개인적인 욕망, 불안 이런 것들을 다루면서 2000년대의 시의 전형적인 특질을 보여주었다고 저는 보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본인이 참여하고 있는 2000년대 시사의 의미를 어떻게 보고 계세요?

김이듬: 저는 거기에 대해서 특별한 통찰을 해보지는 않았고 다만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걸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저는 1990년대 후반쯤에 등단할 뻔했다가 최종심에서 떨어지는 일들이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등단이라는 걸 빨리 하지 않고 애타고 좌절했던 시간을 가진 후에 했던 것이 저에게 좋았던 것 같아요. 2000년대 초반에 좋은 시인들이 등단하는 기류 속에서 그들과 함께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었다는 생각도 들고요. 솔직히 저는 제게 문운이 따라준다고 생각해요. 제가 사실 지방 출신에 아무 것도 없고 그리고 2000년대 미래파나 전위성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있었지만, 글쎄요, 그것으로 제 시에 대한 특질이 전부 다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김도언: 명료하게 정언적으로 개념을 확정할 수는 없다는 거죠. 2000년대적인 분위기를 명료하게 정의내리는 것 자체가 반 2000년대적이라는 거죠.

김이듬: 비평가나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 시대는 어떤 시대였다라고 말하면 오히려 그 시대의 특질과 멀어지는 것 같아요. 저는 다만 제가 시인으로 작업을 시작했던 시기가 좋은 시를 쓰는 다수의 시인들이 함께 활동하는 시기였고 거기에 동참했던 것이 즐거웠던 거죠. 그때의 시인들이, 전위적으로 시대성을 담보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모험을 감행했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다기보다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억압이나 다툼 없이 터져나왔다는 것 자체가 매력이었던 것 같아요. 그 시대에 나도 시를 쓸 수 있었던 것, 그게 좋았다는 거죠. 사실 어떤 뿌리가 있고 조금 먼저 도착한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에 시는 계속 진보하는 거잖아요. 황병승 시인이 쓴 ‘여장남자 시코쿠’ 같은 것도 채호기 시인의 ‘슬픈 게이’와 연관 지어 생각해볼 수도 있고요. 모던하고 감각적인 언어를 블록화 시키는 시인들도 사실은 그 근거를 따라가보면 많은 원형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라고 생각해요. 그것들이 처음에는 물밑에 잠재되어 있다가 퍼져나가면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죠. 우리는 선배들이 만들어놓은 기류를 받아들여서 즐겁게 작업했던 거라고 생각해요. 특별히 거기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고요. 그리고 우리 시대에 들어서 외국어 독해능력이 보편화되었고 외국문학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도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해요. 시장에서 주어지는 것만이 아닌, 다양한 외국의 시인과 시들, 대중문화를 직접적으로 접할 기회를 갖게 되었던 것이죠. 그게 감각적인 상승작용을 일으킨 것 같아요.

김도언: 저는 김이듬 시인님의 등단지면이, 황현산 선생님이 만든 <포에지>라는 매우 실험적인 문예지였다는 것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굉장히 전통있는, 문지나 창비 같은 곳에서 등단했다면 어떤 면에서 상당한 부담이나 간섭을 받았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그 안에 축적되어 있는 선배 시인들의 무게에 짓눌리거나. 그건 또 상상하기 나름일 수는 있겠지만.

김이듬: 실험적인 신생 문예지로 등단해서 상당히 외로웠던 것 같아요.


캐릭터를 변주하는 시인

외로웠다고 말하는 김이듬 시인의 어투는 매우 담담하면서도 권태롭게 느껴진다. 당연히 엄살이나 투정처럼 들리지도 않는다. 그럴 때 그녀는 영락없는, 회고 취향을 가진 노인처럼 보인다. 사실 사석이나 공석에서 그녀의 실물을 볼 기회가 있었을 때, 그리고 시를 통해 그녀의 무의식의 행간을 살필 때 나는 종종 그가 팔색조처럼 변신에 능한 배우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내 식대로의 표현을 하자면,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데 있어 그는 사실상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솜씨를 가진 시인인 것 같다. 그가 만들어낸 캐릭터에는 공장의 선반에 올려져 있는 ‘소녀’(그녀의 아버지는 한동안 신발공장을 운영했다)로부터 명랑하라는 명령을 받는 ‘팜 파탈’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애인을 간직한 비밀스러운 여자, “부르면 혼자 오시겠어요”라고 묻는 ‘세이렌’ 그리고 반듯한 가계의 기품을 지루해하는 ‘시골창녀’ 자신의 ‘히스테리아(자궁)’를 드러내며 여자의 기원과 미래를 궁구하는 ‘대모’까지 다양다기하다. 이 캐릭터를 만들어낸 주체는 당연히 시인 자신이다. 변주된 캐릭터를 통해 시인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 욕망에 스며든 분열과 모순과 부조리는 과연 어떤 것일까.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김도언: 시인님이 창조한 시적 화자나 캐릭터의 목소리를 보면 어떤 때는 상당히 직설적이고 약동하는 화법을 보여주는데, 또 어떤 화자는 수줍은 독백처럼 모호하게 중얼거리는 그런 화법을 보여주기도 해요. 상당히 다중적이고 모순적이죠. 김이듬 시인님에게 모순이나 부조리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들인가요?

김이듬: 저는 모범적으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어요. 왜냐하면 제가 삐뚤어지면 우리 새어머니가 너무 좋아할까봐. 아무튼 학교나 우리 사회에 만연한 유교적 질서 속에서 통일된 인격을 권장 받았죠. 그런데 사실 사람은 굉장히 불안하고 모순적이잖아요. 고요함과 소용돌이치는 자아가 공존하니까. 그런 것이 교육이나 훈육을 통해 통제되고 반응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고유한 아이텐티티를 가지게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에겐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듬어지기 전의 본연에 가까운 그런 원형에 대한 감지력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저희 할머니는 많이 못 배우신 분인데, 나중에 눈이 멀고, 귀도 안 들리고 그랬는데도 누군가 옆에 오면 피부가 반응하고, 밤에 큰 새가 날아가고 도둑이 들어오는 걸 다 아셨거든요. 그런데 지금의 여성이나 사람들은, 그런 동물적인 감각이 많이 희박해진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가능하면 그걸 가지고 싶고 또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야 세계에 즉자적으로 다양하게 반응할 수 있으니까요. 저는 일관성 있게 시를 쓰는 사람은 잘 이해가 안 돼요. 밤도 있고 낮도 있고, 굉장히 추운 계절도 있고 굉장히 더운 계절도 있고, 오후 3시가 있고 아침 10시가 있는데, 다양한 주기와 궤도가 있는데, 어떻게 동일한 반응을 하면서 살 수가 있을까요.

김도언: 시인으로서 김이듬 시인에겐 자의로든 타의로든 구축되어 있는 이미지가 있어요. 팜 파탈, 소녀, 세이렌, 창녀, 성녀 같은 남성들의 상상계에서 자의적으로 변주된 함의가 풍부한 여성의 이미지들. 그런 개념들이 김이듬 시인님의 시인으로서 구축되어진 이미지인데, 이런 이미지들이 시인님의 시적 개성이나 문학적 진실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다고 보시는지 아니면 그런 구축되어진 이미지들에 균열을 내고 싶은 불만은 없는지 궁금해요. 아니면 그런 이미지들이 시적 전략에 의해서 일부러 만들어내신 트릭인지. 이런 걸 좀 말씀해주실래요?

김이듬: 뭐, 세 가지가 다 맞을 수 있는데 그런 이미지가 공식적이라거나 확정적으로 정착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실 새소리도 다르고, 바람소리도 다르고, 악기는 악기마다 소리가 다르잖아요. 저는 여자인데 어릴 때 학대도 많이 받았거든요. 이유 없이 미움도 많이 받고, 알고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말이죠. 니가 너무 키가 커서 짜증이 났어, 이런 식으로. 아무튼 여자가 한국 사회에서는 비주류적인, 마이너리티를 가지고 있으니까 관심이 더 있었고. 그냥 바이올린은 바이올린 소리를 내고, 플루트은 플루트 소리를 내는 것처럼 저는 여성이니까 여성 이야기를 한 거고. 여성 문제에 관심이 많은 것도 사실이고요.

김도언: 저는 이와 관련해서 매우 미묘한 스탠스 같은 걸 느꼈거든요. 제가 잘못 느꼈을 수도 있지만, 제가 독특한 스탠스라고 한 게 뭐냐면, 문학을 통한 여성의 목소리는 순종적이거나 저항적이거나 둘 중 하나예요. 그런데 김이듬 시인이 내는 목소리는 그 어떤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거죠. 남자에게 저항도 하지만 동시에 남자들과 친화적인 걸 도모하는 목소리도 있단 말이에요. 영리한 여자가 단순한 남자들을 잘 얼러서 이용해먹고, 그런 게 있어요.

김이듬 : 남자들을 어떻게 한 가지로 규정을 해요. 어떤 남자들은 귀엽고 친하고 싶고, 동지 같고 동생 같고, 오빠 같은 반면에 어떤 남자는 정말 싫고 무섭고 그러니까.

김도언: 저는 그런 시적 화자의 개성이 우리 시단에서는 굉장히 귀하다고 봤어요. 독특한 스탠스잖아요. 여자시인이 남자들과 친화적인, 남자들을 데리고 노는, 그런 모습이 여자들이 쓴 시에서 잘 안 보여요. 그렇게 유연한 목소리를 갖는 게 이상하게 우리 시단에는 없었다는 거죠.

김이듬: 아, 처음 듣는 얘기예요. 고마워요. 저는 특별히 남자들에게 적대감이 있거나 그들의 세계관을 바꾸거나 그런 의도는 없고 그때그때 쓰고 싶은 걸 써요. 획일적으로 생각하지는 않고요.

김도언: 남자들의 가부장성이나 이런 걸 보면 비판하고 계몽하고 그럴 생각은 없는 거죠.

김이듬: 그럴 힘도 없어요. 시가 뭐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고, 안 그런 남자도 많고. 다 그렇게 싸잡아서 이야기할 필요는 없죠. 아시다시피 가장 최근 시집 제목으로 쓴 ‘히스테리아’가 여성의 자궁을 뜻하거든요. 그런데 저는 영혼이 복부에 있다고 믿어요. 배고플 때 먹고 나면 영혼이 조용해지잖아요. 뇌에 있으면 그렇지 않을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육체적인 영혼성이라고 해야 하나. 저는 자궁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자궁이 가지고 있는 우주성이라고 해야 하나, 저는 조금 더 근원적이고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근원성이라고 생각하고요. 굉장히 아름다운, 물렁물렁하고 그런, 저도 제가 신비주의로 빠질까봐 걱정이긴 한데요. 제가 원형성에 대해 계속 공부를 하는데 관심이 많아요. 히스테리아라는 시를 오래 전에 썼고, 저는 그런 걸 굉장히 알고 싶어요. 자궁이 가지고 있는 건강함과 그것의 역할에 대해서 말이죠. 근원적인 통찰에 이르면 남자에 대한 여자의 태도는 훨씬 유연해질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제 시가 굉장히 건강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퇴폐적이라고 하고.(웃음)

 


건강한 관능의 탄생

21세기, 자본의 권한과 권위를 마음껏 보장하는 신자유주의가 거의 절대적으로 우리의 일상을 구속하고 지배하는 시대다. 불행하게도 시인은 자본에 가장 취약한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세상은 시인들에게 자본에 대해 매우 고약한 태도를 요구하는 듯하다. 자본에 대해 민감하고 셈이 빠르면 시인으로서의 순정한 자질을 의심하고, 자본에 대해 아둔하고 무관심하면 아나크로니즘에 빠진 낙오자로 손가락질 한다. 내가 아는 김이듬 시인은 자본이 지배하는 현실적 질서에 매우 취약한 사람이다. 대학에서 박사 과정까지 마쳤지만, 그리고 한눈 팔지 않고 성실하게 시를 썼지만 안정적인 신분을 얻는 데 자발적으로 실패한 것이다. 그의 실패는 어느 정도 예정된 것이었으리라. 때문에 그에게 자본에 저항하는 시인의 태도를 묻는 것은 어쩌면 좀 짓궂은 행동이었는지도 모른다.   

김도언: 시인은 자본에 어떻게 저항해야 할까요?

김이듬: 분명히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시인은 좀 자본으로부터 초월해 있어야 하고, 부나 돈이나 이런 것과 거리를 둬야 한다는 생각은 굉장히 낭만주의적인,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거예요. 시인은 폐병에 걸리고, 술에 찌들고, 약에 취하고 이런 건 정말 보들레르 시절의 이야기잖아요. 근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고, 또 독자들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대리만족을 하는 게 문제예요. 자기들은 잘 먹고 잘살면서 시인들은 좀 가난해야하고. 저는 그건 정말 옳지 않은 생각이라고 봐요. 그리고 또 시인들 중에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나는 시만 쓰면서 살아야 하고 그래야 정말 좋은 시인이라고요, 그건 어떻게 보면 자존감이 아니라 병적인 우월의식이에요. 오히려 자존감이 없는 사람인 거죠. 나는 시인이고 작가니까 우대받아야 하고 누군가 조력자가 있어서 살아야 하고 저는 이런 생각에 반대해요. 시인은 똑같은 보통 사람의 삶을 사는 건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누굴 밟아서 교수가 되거나 세속적인 지위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과는 다르고요. 시인도 그냥 밥을 위해선 성실해야 한다는 거죠.

사적인 이야기지만 그녀는 유치원에 다닐 때 부모가 이혼한 이후, 아버지와 새어머니 사이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때 어린 그녀가 느낀 불안감이나 공포가 시인으로서의 징후를 형성할 그녀의 감수성이나 정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추정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상처를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 이것은 시인들에겐 피할 수 없는 과제일 테니까. 그런데 김이듬 시인은 그 상처를 문학으로 훌륭히 극복했던 것 같다. 그녀가 아버지를 찾으러 나갔던 여름 날 오후, 이발소 벽에 걸려 있던 푸시킨의 시가 어떤 화학적 공명을 일으키며 그녀에게 다가갔던 것처럼, 그때 그녀가 영민하게도 시가 삶에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걸 즉자적으로 알아버렸던 것처럼 그녀는 시를 쓰고, 시인의 눈으로 삶과 세상을 읽어내면서 자기 안에 덧씌워진 의뭉스러운 암호를 하나하나 해제해나갔던 것 같다. 말라르메는 시인을 부족의 방언을 순결하게 닦는 자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김이듬 시인을 자신이 창간한 잡지를 통해 등단시킨 장본인인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시인은 자신의 언어를 순결하게 닦는다는 측면에서 아무리 혼자서 자아 속에 유리된 채 작업을 해도 그들의 언어는 공공성과 보편성을 띄는 것이라고 말했다. 말라르메와 황현산이 말한 부족의 언어의 공공성과 보편성. 김이듬 시인에게 있어 그것은 바로 사랑의 회복과 용서를 통한 상처의 극복이다. 그녀는 인터뷰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

“사실 시를 왜 쓰는지 생각해보면, 궁금한 게 많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왜 엄마는 나를 버렸으며, 아버지는 왜 그랬나. 그러면서 인간이 대체 뭔지를 알고 싶었던 거죠. 그리고 그것은 결국 인간과 사랑이라는 주제와 연결되는 것이었어요. 거기에서 파생되는 문제들을 이해하고 싶고 용서하고 싶은 거죠. 용서의 문제와 창조의 문제거든요. 제가 감히 다다르고 싶은 보편성은 말하자면 질문을 하고, 이해를 하고, 용서를 하는 거예요.”

이와 같은, 비범한 각성을 통해 그녀가 얻은 건 ‘건강한 관능’으로 보인다.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읽어왔던 여자 시인이나 소설가의 작품에서 나는 상처를 관능이라고 이야기하는 화자들을 자주 만났다. 그녀들은 상처를 관능으로 드러내온 것이다. 그런데 여기, 내가 만난 김이듬 시인은 반대로 관능이 상처의 전거일 뿐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상처가 관능이 아니라. 관능이 상처의 예비적 징후로서 눈부시게 피어 있는 것이라고.
 


시인 김이듬은 진주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하여 부산대학교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경상대학교 국문학과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1년 『포에지』로 등단하여 네 권의 시집 『별 모양의 얼룩』, 『명랑하라 팜 파탈』, 『말할 수 없는 애인』, 『히스테리아』과 장편소설 『블러드 시스터즈』를 발간했다. 제1회 시와세계작품상(2010)과 제7회 김달진창원문학상(2011)을 수상했다. 경상대, 경남과학기술대 등에 출강하며 진주 KBS라디오 ‘김이듬의 월요시선(月曜詩選)’을 진행 중이다. 2012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파견 작가로 선정되어 독일베를린자유대학에서 한 학기 간 생활했다. 2013년 여름부터 석 달 간 아이오와 대학 국제창작프로그램(IWP)에 한국작가로 참가한다.

시인 김정환, 공적인 죽음을 말하다

공적인 죽음, 인문주의적 파르티잔의 욕망
 


죽음이 있으니 인생에 불가능은 당연히 있고 문제는 언제 어디서부터 불가능인가, 불가능한가다. 죽음이 끊임없는 (불)가능의 변증법을 모두 치르거나 겪고 난 후에도 있는 마지막 불가능이고 가능이다. 그 이전 불가능은 대개 지쳤거나 게으른 것에 다름 아니다. 잔당(殘黨)의 울화를 닮은. - 김정환 산문 「현실의 물증, 접속사로서의 죽음>(《21세기문학》 2015년 봄호 수록)에서.

 


글 | 김도언  (채널 예스, 2015.6.11)

시인, 공적인 죽음을 말하다
  

합정동에서 양화대교로 한강을 건너면 곧 당산동이다. 거기 오래된 아파트에, 거실 한 가운데 놓인 책상 앞에 ‘그’는 정물처럼 그대로 있다. 그는 그냥 있을 뿐인데 사람들이 그를 마음대로 사용했다. 신기한 것은 수많은 이들의 손을 탄 이후에도 그는 그대로, 처음처럼 닳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이다. 닳지 않고 그냥 거기에 있는 사람, 시인 김정환 얘기다.

가장 최근의 것으로 보이는 시인 서효인과 가진 인터뷰(《21세기문학》 2015년 봄호)에서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사실 모든 시는 정치적이야. 김수영이 모든 좋은 시에는 죽음의 리듬이 있다고 말한 것, 그게 바로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이야. 정치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나누는 일인데, 공적이라는 것은 세상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게 하기 위한 자기 죽음 같은 거거든. 일단 죽음을 통과해야 당대의 미학을 끌고 나갈 수 있다는 것이지. (그렇다면 그건) 공적인 희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공적인 죽음과 공적인 희생. 그가 죽음과 희생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이 내게는 어딘지 심상하지 않게 다가왔는데, 자신이 선택하고 자신의 입으로 발음한 그 단어들이 자기가 끌고 나갔던 문학적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그가 연역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관심이 있는 건 아닐까, 그러니까 그가 해온 모든 방대한 작업이 공적인 죽음을 이해한 자의 의식과 연관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추정을 가능케 한 것이다. 

그는 앞서 얘기한 강변동네의 오래된 아파트에서 수십 년째 살고 있다. 이 한결같음은, 시인으로서, 저술가로서, 그리고 번역가로서 그의 삶의 전모를 이해하는 데 제법 중요한 실마리 구실을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사실 매우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행위다. 그 행위의 구체성이 시인과 작가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일 테다. 시인은 군인이나 경찰처럼 신분적 존재가 아니라 행위적 존재라는 말은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데, 행위란 운동성을 지니는 것이어서 지속가능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더군다나 그게 사유에서 의미를 뽑아내는 일임에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내 생각에 글쓰기라는 ‘행위’ 속에서 가장 적확하게 정의되고 있는 시인이 바로 김정환인 듯하다. 그 말고 누가 중단 없는 ‘행위’의 운동성을 통해 자신이 시인인 것을, 당대의 지식인인 것을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해보였는가. 그가 그동안 펴낸 책은 물경 200권. 1년에 한 권씩 펴내도 200년, 1년에 두 권을 펴내도 100년이 걸리는 놀라운 양이다. 글만 쓰는 게 아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셰익스피어 전집과 세계현대시인들의 전집을 번역하고 있다. 이 멈추지 않는 운동성의 행위는 행위 자체에 대한 객관적 타자성을 탈색해야 가능하다. 객관적 타자성이란, 수요를 계산하는 공급자의 시각이다. 그런데, 시인 김정환에게 있어 글을 쓴다는 행위는 내면의 각성에 의한 공적인 죽음을 수행하는 행위여서 수요와 공급의 ‘관제성’을 일치감치 뛰어넘는다. 그에게 글쓰기는 차라리 회의와 성찰과 자기긍정이 극적으로 통합된 아니 애초부터 무화된 주술성과 즉물성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도 보인다. 참으로 신비하고 경이로운 삶.  

내가 인터뷰어가 되어 그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바로 관제성을 뛰어넘는 순수한 정치 행위자로서의 시인의 삶과, 죽음까지 엮어내고자 하는 그의 ‘총체적’ 노력이 오늘 우리 문학의 조건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딘지 부족한 것 같고, 인문주의적 파르티잔이라 칭할 만한 그의 비정상적인 에너지에 대한 원색적인 호기심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아무려나, 이 인터뷰는 백퍼센트 실패가 예정된 것이다.

 

콤플렉스와 분열

문청 시절부터 그의 글을 따라 읽으면서 궁금했던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 압도적인 괴물 같은 능력의 소유자에게도 혹여 콤플렉스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래, 인간이라면 열등감이 어찌 없을 수 있을까. 더군다나 상처에서 꽃을 피운다는 문학을 하는 사람인데. 나는 그래서 인터뷰어로서 그 앞에 섰을 때 작심을 하고 첫 번째 질문을 통해 그의 콤플렉스를 유인해보고자 했다. 그에게 콤플렉스가 있다면 나는 그것이 그의 출생지 ‘서울’이라는 향토성이 거세된 공간의 어떤 한계로부터 촉발되는 건 아닐까라는 짐작을 했다. 그래서 예의를 가장해 도발적으로 물었다. 그가 담배를 빼어물 때, 그러니까 방심할 때를 기다려.

김도언 : 선생님은 서울에서 태어나셨잖아요. 비교적 서울의 전통적인 정서가 남아 있는 마포라는 곳에서 태어나셨는데, 보통의 지방출신 시인 예술가들이 각각 자신의 고향을 독자적인 감수성의 전진기지로 삼아 문학을 시작하고 심화시키는데, 대한민국의 중앙이자 수도인 서울에서 태어나신 선생님은 다른 작가나 시인들의 문학적 고향을 부러워하신 적은 없으신가요?

김정환 : (다소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지금은 풍토가 달라졌는데 옛날에는 문단 어른들이 내가 술 잘 먹고 잘 노니까 좋아하다가도 서울 출신인 걸 언급하면서 너 글 쓰기 힘들겠다. 그러다 또 몇 달 지나면 내가 서울대 나온 것까지 곁들여 너 정말 글쓰기 힘들겠다, 이런 말씀들을 했어요. 거기에다가 난 또 영문과잖아. 그러니까 문단 어른들 말씀은 자기가 제일 똑똑한 줄 알고 잘난 척하다가 글을 제대로 못 썼던 서울대 출신 문인들의 현실적인 한계를 지적한 거였지. 사실 뭐, 서울대 출신들이 문학에 약하긴 하지. 그런데 지금은 달라진 게 요즘 젊은 작가들은 오십퍼센트 이상이 서울 출신이에요. 그만큼 서울이 넓어졌지. 내가 마포 살 때는, 사실 사대문 안이 아니면 서울로 쳐주지도 않고, 마포 촌놈이라고 했거든. 그래서 시골 출신 그리고 서울 사대문 출신 양쪽에서 모두 날 안 쳐줬지.(웃음) 근데 내가 성격이 뻔뻔스러운 데가 있어서 그런지 후회한 적도 없고, 서울 출신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뭐, 별로 신경을 안 쓰고 살았어. 그리고 내가 서울을 좋아해요. 서울이 내 고향이니까 말야. 물론 내 세대에는 서울과 지방에 대한 구분이 좀 있었고, 근대화된 도시에서 산다는 것과 시골에서 산다는 것은 다른데, 나는 오히려 서울 출신인 내가 그 이야기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 경상도, 전라도가 정치적으로만 경쟁심이 있는 게 아니라 워낙 역량이 엄청나. 서울이나 충청도도 별로 내색을 못했을 때부터요. 나보다 한 열 살 정도 위로 가면 경상도랑 전라도 문학이 정말 쎄지.

여기까지 들었을 때, 그로부터 콤플렉스를 유인해보겠다는 내 졸박한 의도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우리 문학은 근대화 과정에서 향토로서의 농촌이 와해되고, 그곳을 탈주하는 자들의 상상력과 감수성을 수용하고 배려하면서 성장해온 측면이 있다. 김정환이 지적한 것처럼, 그의 바로 윗세대에서 내로라하는 전라도 경상도 출신 문인들이 배출됐는데, 그들이 상경해 각기 문학의 정부 역할을 자임하면서 한국문학 특유의 에꼴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서울 출신의 희귀한 시인이 위축됨 없이 자기 문학을 밀고 여기까지 온 것은, 그리고 자신의 이름으로 파르티잔의 정부를 세운 것은, 사실 문학사적으로도 매우 의미 있는 이색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김정환이 덤덤하게 말한 것처럼, “뻔뻔스러운 데가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 역시, 그가 말했던 공적인 죽음과 연결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콤플렉스란, 사적인 죽음이나 삶의 세계를 배회하는 개인의 욕망이 더 힘센 욕망과 충돌할 때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적인 죽음의 유혹을 거부한 시인이라면, 도대체 어느 결에 콤플렉스를 느낄 수 있을까.
 


근대성,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여기에서 잠깐 그의 전기적 사실을 부기하고 가는 편이 좋겠다. 시인 김정환의 외가는 마포에서 오랫동안 정착해온 집안이고 그의 친가는 황해도 신천의 목사 집안이란다. 그의 아버지는 열일곱에 월남해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 군문에 투신해 특무상사까지 복무를 했고 청와대 경호실에서도 일한 적이 있다. 마포 토박이인 외할아버지가 전쟁통에는 집안에 군인이 하나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사윗감으로 그의 아버지를 점찍은 것이라고. 아버지가 직업군인이라면, 그렇다면 권위적이지는 않았을까. 압도적인 부권으로부터 어떤 상처를 받은 경험은 없을까. 또다시 콤플렉스를 유인해내고 싶은 이상한 습관.

김도언 : 아버님이 권위적이거나 그러시진 않았어요?

김정환 : 그런 거 없었어. 청와대 경호실 출신인데도, 내가 데모하고 그래도 한 번도 뭐라고 한 적이 없어. 다 승낙해줬지.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도 자기가 황해도에서 술 깨나 드시던 목사 집안인데, 여기저기 외상값 깔리고 하니까 라디오 같은 비싼 걸 싹 훔쳐가지고 월남을 한 거거든. 그때는 남과 북이 영영 갈릴 줄도 모르고. 흔히 생각하는 글쟁이들이 다 집안 사연 많고, 어렸을 때 불우하고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우리나라만 그런 거예요. 그래서 농담으로 소설가가 소설을 잘 쓰려면 많은 걸 먹어봐야지 어렸을 때. 어렸을 때 먹은 게 별로 없는데, 무슨 소설을 쓰냐. 심지어 가난해야 글 잘 쓴다고 하냐. 뭘 먹은 게 있어야 소설을 쓸 거 아니냐고 하죠. 외국 같은 경우에는 셰익스피어가 기점이야. 자본주의화나 근대화되면서 돈벌이도 좀 있고, 먹고 살 걱정을 좀 덜하고 이래야 글 좀 쓴다고 하지. 나처럼 아내 같은 든든한 원군이 있고. 맨날 부부싸움 싸우면서 그게 되나. 우리나라는 그런데 그게 아직도 강해요. 나는 그런 친구들한테 그건 니들이 근대화가 덜 되서 그렇다고 하지.

김도언 : 방금 영문학에서 셰익스피어가 하나의 기점이라고 하셨는데, 저한테 그게 상당히 인상적으로 들리네요. 셰익스피어를 기점으로 문학을 다루는 관점이라거나 태도가 전근대적인 것과 어떻게 구분될까요.

김정환 : 셰익스피어 이후로 평론가들이 문학이 고통의 산물이라는 이야기를 안 하기 시작했어. 반 고흐 이야기를 우리나라만 유별나게 해. 아, 반 고흐가 물론 고생하고 정신병 걸리고 그랬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문학은 별난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없어. 내가 하게 된 것도 우연히 하게 된 거라서. 그러니까 내가 황지우나 이성복 같은 친구들이랑 잘 놀았지. 아까 말한 콤플렉스라는 게 어떻게 보면 좋은 것일 수도 있는데, 피차 콤플렉스가 없으니까.

김도언 : 문학도 다른 분야처럼 제도화가 되고 생태계가 만들어지고, 직업도 생기고 종사자도 생기고, 당연히 시스템도 생기고 권력도 생기잖아요. 그러면 선생님 같은 경우는 흔히 이야기하는 주류니, 비주류니, 권력이니 하는 게 상당히 사소하고 시시하게 들렸을 것이고, 선생님은 애초부터 그런 걸 의식하지 않고 작업을 하신 것 같은데 그렇게 선생님이 균형감각을 잡을 수 있었던, 자기중심을 잡고 견고한 태도를 가질 수 있었던 비결이 궁금하고요. 사실은 이게 먹고사는 문제고 돈 문제이기 때문에 아무리 초연한 소설가나 시인들도 자유롭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래서 주류로부터 밀려나면 괴롭고 고통스럽고 갈등과 다툼이 생기고, 그게 현재 우리 현대문학의 왜소화된 현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선생님이 진단을 좀 해주세요. 선생님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게 쉽지 않으니까요.

김정환 : 뭐, 난 어쩌다보니까 이렇게 된 거지. 먹고 사는 문제가 사실 문학의 문제인데, 김수영 같은 경우는 계속 먹고 사는 문제가 나오잖아. 그게 근대화라니까. 그래서 내가 서정주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건 근대 이전의 시라는 거지. 거기에는 먹고 사는 문제가 없어요. 그래서 서정주를 좋아하는 건 좋은데, 괜히 흉내내려고 하다가 지금이 어느 시대 이야기인지도 모르는 거, 서정주만 못한 시를 쓰게 된다는 거지. 김소월도 마찬가지지. 그 사람도 자살해버린 사람이잖아. 끝까지 살려고 노력한 사람 이야기가 아니라는 거지. 김소월 시에 사는 이야기가 어디 있어.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이거 사는 이야기가 아니잖아. 이건 근대 이전에 시인이 음풍농월을 할 때, 그때 잘 쓴 시지. 그러니까 그 당시에 그 시를 쓴 건 대단한 거지. 그렇다고 그걸 계승한다면서 먹고 사는 이야기는 하나도 안 쓰고. 그러니까 요즘 보면, 미래파 그거 딴 거 없어. 근대화야. 근대화. 음풍농월이 없잖아. 사는 이야기고. 여자를 찢어 죽이고 싶다고 했다가 그 다음날 다시 사랑한다고 하고. 거기 음풍농월이 없는 거야. 김수영 때문에 근대화 될 뻔했는데. 요새는 김수영 존경하는 사람은 많고 극복하려는 사람이 없어서 그게 문제지.
 


사람들은 그를 사용한다.

김도언 : 아까 황지우, 이성복 이런 분들 말씀을 하셨는데, 예를 들어서 선생님이 막 등단하셔서 활동하셨던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에 상대적으로 걸출한 문사들이 많이 나왔잖아요. 이성복 선생님도 계시고, 이인성 선생님도 계시고, 황지우 선생님도 계시고, 박남철 선생님도 계시고. 저는 그런 시대가 60년대 김현, 최하림, 김승옥 선생님 나오셨던 산문시대를 연상시키더라고요. 그때가. 그런데 그런 분들은, 황지우, 이성복 선생님 같은 분들은, 물론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 말하면 문학주의의 포즈를 취하면서 빠르게 문학 중심부로 육박해 들어갔잖아요. 그런데 선생님은 그와는 달리 상당히 복합적인 태도를 취하셨더라고요. ‘자실’ 이런 곳에서 운동도 하시고, 민중적인 관점에서 문학운동도 하시고. 그때 선생님이 상대적으로 문학인으로서, 문단의 한 멤버로서 불리할 수도 있는 선택을 하신 거잖아요. 그때 상황과 선생님 생각을 설명해주실 수 있으세요. 또래들이 중심부로 육박해들어가는데 선생님은 다른 쪽으로 좀 돌아가신 것 같아서요. 창비와의 관계도 좀 말씀해주시고.

김정환 : 그게 말하자면 ‘팔자’라는 거겠지. 알겠지만 내가 등단하고 한 5년간을 떨어져 있다가 나온 셈이지. 나는 이걸 다행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내겐 문청기간이 없어요. 보통 다른 친구들이 문청 때 읽는 책들이 좀 많아? 그런데 늦게 읽으면 또 늦게 읽는 맛이 있어. 늦게 읽으면 더 많이 보이거든. 그래서 공부를 또 열심히 하면 그것도 손해 볼 것도 없고. 오히려 문청을 평생 동안 못 벗어나는 사람도 있고. 내가 운동할 때 할복자살한 사람(김상진 열사)의 추도식을 하는데, 그때는 거기 가면 다 잡혀가는 거지. 추도식에서 시 한 번 읽었다고 징역 2년 산 건 좋은데, 나오자마자 또 나이가 어려가지고 강제징집까지 됐거든. 그래서 도합 5년의 공백이 생긴 거야. 그런데 그 5년 동안 심심하니까 편지 주고받고. 사실 내 첫 시집(「지울 수 없는 노래」) 이 마누라랑 주고받은 편지야. 한 편 빼놓고는. 그런데 창비가 센 곳이잖아. 그쪽으로 데뷔하고 보니까 운동권에 징역살고 게다가 창비로 데뷔한 사람이 나밖에 없는 거야. 그래서 갑자기 내가 운동문학 안에서 서열이 높아진 거야. 하여튼 운동권이라는 게, 사회주의라는 게 반쯤은 전근대적인 게 있어서 창립선언문을 딱 썼더니 대변인 되고 서열이 또 올라가고.

김도언 : 선생님은 그런 걸 예측하지 못했는데 쓰고 나서 보니까 그렇게 되어 있더라는 거죠?

김정환 : 아니, 김근태 형이 나보고 대변인을 해달라는 거야. 그때는 내가 이미 글쟁이라 대변인하면 망할 것 같아서 그건 못하겠다고 했더니 삼고초려하면서 꼭 좀 해주라는 거야. 세 번 오면 큰일인데 거절도 못하고. 원래 분위기가 좀 그렇잖아. 그러고 있다가 백낙청 선생님이 ‘자실’을 만들자고 해서 그럽시다 했지. 그런데 자실이라는 게 요즘 작가회의처럼 회원 2천 명이 아니고 백 명이 안 됐지. 고은을 비롯해서 제일 젊은 나까지. 그런데 그때가 제일 영향력이 컸어. 지금은 2천 몇 명이라고 하는데 이건 댈 게 아니야. 한 달에 한 번씩 내가 문지 가서 회비 걷고 그랬지. 그때는 자실 사무국장 하면서 출세를 했다는 생각도 들었어.(웃음) 내가 자실 사무국장하면서 ‘문명’을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기관지를 낼 때마다 구류를 살았거든. 내가 아마도 우리 나라에서 최고 구류 기록을 가지고 있을 거야.

김도언 : 선생님이 스스로 말씀하신 문학적 내력을 들어보면 선생님에겐, 자의로든 타의로든 문학적 현실로 바로 직행할 수 없게 하는 어떤 시대적인 카오스가 있었던 것 같아요.

김정환 : 내가 추모시를 열두 편이나 썼어. 신경림 선생 같은 분들이 펑크를 낼 때도 있었고. 죽은 사람도 있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거절하느냐. 그런 생각이 들어서 추모시를 많이 썼지. 그러면서 느낀 게 공적인 죽음이라는 게 무엇일까 하는 거야. 문학이라는 게 어차피 허구인데 죽어봤느냐, 이렇게 물어볼 수는 없는 거잖아. 죽는 사람의 그때 그 심정이 뭘까. 이것하고 문학의 정체성하고, 김수영이 좋은 문학에서는 죽음의 리듬이 들린다고 한 것 하고. 이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한 10년쯤 지나가지고 내가 여태 거기 매달려 있었구나. 공적인 죽음이란 무엇인가. 당시에는 바빠서 모르다가 약간 시간을 가지니까. 문학이라는 것이 사실 공적인 죽음하고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이야기가 바로 죽음이다, 이런 이야기를 내가 한 적이 있었는데 그건 모르고 한 말이고. 쉽게 이야기하면 죽음이 있으니까 이야기가 생겨난다는 것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이야기 자체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제의다. 더 나아가서 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살아있을 때 할 수 있는,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이다. 그래서 문학이 공적인 죽음하고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돈도 안 되는데 죽으라고 문학을 한다는 게 뭘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지.

이 원고의 앞머리에서 나는 “그는 그냥 있을 뿐인데 사람들이 그를 마음대로 사용했다. 신기한 것은 수많은 이들의 손을 탄 이후에도 그는 그대로, 처음처럼 닳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팔자’라는 참으로 세속적인 말 속에서도 운명과 긴장감 있는 조응을 추구하는 단독자의 빛나는 태도를 갖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자기전망을 통해 화석화되는 정신을 갱신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그의 회고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카오스 상태로 자신을 끊임없이 회귀시키는 능력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기념비적인 저작물인 『음악의 세계사』 서문에서 그는 “까마득한 날에 세상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시간은 언제 태어났을까. 그리고 만물은 어떻게 생겨났을까.”라고 묻고 있다. 그것은 문학평론가 황광수가 그의 장시들을 분석하면서 섬세하게 지적한 대로 “그 시대의 생의 범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혼돈처럼 밀어닥칠 때 그것을 언어로 수습할 수밖에 없는 시적 주체의 내적 필연성”에 의한 자연스러운 물음이었을 것이다. 인문주의적 파르티잔으로서는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자본주의, 그리고 다시 공적인 죽음, 파르티잔의 욕망.

김도언 : 시인들이 자본이라는 것에 굉장히 취약하잖아요. 이게 되게 고약하잖아요. 어쩐지 시인이면 계산도 느려야 할 것 같고, 자본 앞에서도 서툴러야 할 것 같은 게 있잖아요. 현실적인 계산이 빠르다는 것이 문학적 감수성이나 상상력을 지체시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시인들이 자본 앞에서 복잡한 태도를 가지게 되더라고요. 드러내놓고 탐욕도 못하고 그렇다고 포기도 못하고. 이런 이중적인 태도가 있는데, 이렇게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또 진짜 자본 앞에 속수무책인 시인들은 삶이 황폐해지잖아요. 이혼도 하고 폐인처럼 살죠. 지금 21세기 첨단의 자본이 지배하는 시대에서 시인의 가장 이상적인 방어 전략은 무엇일까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이런 상황에서요.

김정환 : 글을 열심히 쓰는 거지. 자본주의라는 게 그렇잖아. 자본주의를 우리가 극복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도망칠 수는 없잖아. 들뢰즈가 탈주 어쩌고 하더니 결국 자살하잖아. 탈주를 못해서. 결국 죽음까지 삶의 영역에 끌어들인 거 아니야. 그러니까 자살을 했지. 철학의 결론인거지. 탈주가 불가능하니까. 누구나 자본주의 속에서 살고. 그건 일제 강점기도 마찬가지야. 친일파들 너무 야단치는 것도 내가 싫어하거든. 내가 보기에는 박정희 때 열심히 민주화 운동했던 사람이 전두환으로 바뀌니까 그 중에 2/3가 포섭이 되고, 전두환 때 열심히 민주화 운동했던 사람이 노태우로 바뀌니까 2/3가 또 포섭이 되고. 정치권까지 포섭된 걸로 치면 99%가 포섭이 된 거지. 그래서 내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일제는 36년인데 내가 민주화 운동 10년 딱 보니까 저거 포섭이 안 되는 사람이 없는 거야. 그렇게 10년 살아보니까 욕할 것도 아니더라고. 그래서 아주 나쁜 놈 말고는. 그렇게 사는 거지. 그렇게 사는 게 모멸인 거지. 모멸이잖아. 그런데도 왜 사나, 그런 질문을 쓸데없이 던지는 게 문학이다. 그것도 남이 아니라 자기한테.

김도언 : 열심히 쓰면서 그런 질문을 계속 던져라.

김정환 : 그렇지. 그런 게 문학인 것 같다. 내가 옛날에 『ㄱ자 수놓는 이야기』이라는 소설을 쓴 게 있는데. 거기에 그렇게 썼어. 왜 살아남은 이야기만 할까. 왜 죽은 사람 이야기는 안 할까?

김도언 : 네, 처음에 말씀하신 죽음이 또 나오네요.

김정환 : 다시 그 이야기로 돌아온 거야. 공적인 죽음이라는 게 사실 그거거든. 자진에서 죽은 게 공적인 죽음 아니야. 왜 공적인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왜 안할까. 그게 이제 왜 사나, 하는 것과 공적인 죽음이 뭘까. 그래서 삶이랑 죽음에 대한 연결이 어떻게 되는 걸까. 그것처럼 흥미진진한 주제가 없잖아. 죽은 사람한테는 미안하지만.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렵게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만 하는 거야. 헤르타 뮐러인가 노벨상 받았다고 책을 보냈길래 읽었는데, 그것도 살아남은 이야기야. 사형당하는 사람들의 심정이 어땠을까. 더군다나 우리나라는 정말 놀라운 일이지. 분신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그게 보통 일이야. 종교도 아닌데. 그 쇼크랄까. 깊은 골이랄까. 우리가 친구나 친척이 죽어도 문상 가서 어느 정도 죽음을 생각하잖아. 그러다가 까먹지. 그런데 이건 공적인 죽음이야. 문학은 공적인 죽음의 의미를 계속 물어야 해.

시인 김정환은 공적인 죽음의 의미를 묻는 ‘인문주의적 파르티잔’이다. 인문과 예술과 문학의 모험을 감행하며 통합된 세계의 회복과 그 가능성을 인민에게 보급하는 유격대원이다. 인민은 파르티잔을 사용하지만, 이 파르티잔은 놀라운 회복능력으로 언제나 인민 앞에 다시 나타난다. 그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소속되어 있으며 자신의 명령과 요구에만 복종한다. 어쩌면 가장 완벽한 파르티잔이란, 가장 완벽하게 자신에게 소속되어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일 테다. 완벽하게 자신에게 소속되어 있어야만, 다른 곳에 편입되거나 편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편입되거나 편제될 가능성을 지워내는 것이야말로 파르티잔이 치러야 할 가장 격렬한 전투일 것이다. 정규적으로 편제되는 순간, 파르티잔의 전투력은, 위대한 존재의 가능성은 상실된다. 아울러 공적인 죽음의 가능성도 소멸된다.

나는 지금 시인 김정환을 파르티잔에 빗대 말하고 있지만, 파르티잔을 묘사하는 것은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삶의 전선에서 목격된 그의 정신력과 외모를 파르티잔의 실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시인 김정환은 언제나 목격된 곳에서 목격되지만, 또한 우리가 목격할 수 없는 곳에서 끊임없이 재현된다. 자가증식한다. 그 자폐가 허용하는 우주의 크기를 누가 짐작할 수 있겠는가. 김정환은 자기자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그 이야기들이 축적되면 축적될수록, 오히려 더욱 모호해지는 이상한 존재다. 파르티잔은, 서류에, 데이터에, 파일 속에 자신의 행적을 남기지 않는다. 우주적 직관으로 카오스의 한복판을 가로지를 뿐. 공적인 죽음을 삶 속에서 미리 경험하는 것, 그것만이 파르티잔의 유일한 욕망이겠지. 그 삶과 죽음의 우주가 내 앞에, 그리고 당신 앞에 있다.     

   

시인 김정환은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0년 계간 ‘창작과비평’에 시 ‘마포, 강변에서’ 외 5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07년 제9회 백석문학상, 2009년 제8회 아름다운 작가상을 수상했다. 노동자문화운동연합회 의장, 한국작가회의 상임이사,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사무국 국장, 한국문학학교 교장을 지냈다.

 

『지울 수 없는 노래』 『하나의 2인무와 세 개의 1인무』 『황색예수전』 『회복기』 『좋은 꽃』 『해방 서시』 『우리 노동자』 『사랑, 피티』 등 19권의 시집을 냈다. 산문집으로는 『발언집』 『고유명사들의 공동체』 『김정환의 할 말 안 할 말』 『김정환의 만남, 변화, 아름다움』 『이 세상의 모든 시인과 화가』 등이 있다. 평론집 『삶의 시, 해방의 문학』, 음악교양서 『클래식은 내 친구』 『음악이 있는 풍경』 『내 영혼의 음악』 『음악의 세계사』, 역사교양서 『20세기를 만든 사람들』 『한국사오디세이』, 희곡 『위대한 유산』 등을 썼다. 『셰이머스 히니 시전집』과 『필립 라킨 시전집』을 번역했다.

시인 안현미, 고아孤兒의 균형과 고독한 여제사장

김도언의 시인의 얼굴 열세 번째
(채널 예스, 2015.12.16)

 

 


결핍으로만 충만했던 성장기를 보내고, 외롭고 고독하게 세상에 나온 한 영민한 정신이, 의지할 곳을 찾은 것이 시라는 것인데, 거기에 무슨 과장이 있고 무슨 셈속이 있을 것인가. 시가 자신에겐 종교 같은 것이라고 너무나 일상적인 표정으로 말하는 이 앞에서 나는 시의 어떤 권능을 목도한 느낌이다.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치의 방과 한 달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말을 더듬었다 우우, 우, 우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댓국밥을 먹었다 순댓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냐고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지만 고아 같았다

-〈거짓말을 타전하다〉 부분, 시집 《곰곰》 수록


한국 현대시사에는, ‘여제사장’ 또는 ‘샤먼’이라고 부를 만한 카리스마와 ‘포스’를 뽐내는 시인들의 계보가 있다. 문정희, 김승희, 허수경, 김선우 등등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그것이다. 우리가, 모든 시인은 생물학적인 성과 관계없이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과 접신하는 영매靈媒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통설을 긍정으로 받아들일 때, 여제사장은 시가 가지고 있는 주술적인 치유력과 복원력을 가장 극적으로 부각시켜주는 이미지다. 어떤 시인이 여제사장의 이미지를 품고 있다는 것은 하나의 축복일 것이다. (아니 저주인가?) 

틈틈이 그리고 꾸준히 안현미 시인의 시편들을 쫓아 읽던 나는, 어느 날 불현듯 안현미 시인에게서도 예의 여제사장, 샤먼의 이미지를 발견한 적이 있다. 이와 같은 단정은 그의 시가 인공적으로 가공되거나 조직된 것이라기보다는 천연적으로 흘러나온 것으로 보인다는 인상에 빚을 지는데, 주문이나 축문을 연상시키는 그의 번다한 시편들이 이런 나의 단정을 조심스럽게 뒷받침해주었다. 주문이나 축문은, 절실한 발원의 내용을 필요로 한다. 시가 치유나 회복 같은 절실한 내면의 요구에 응해서 쓰일 때, 주문이나 축문의 리듬을 갖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떤 현대 시인은 내면의 요구를 거절하기 위해 일부러 인공적인 시어를 무질서하게 배치하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 절실함의 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안현미 시인의 실제적인 삶의 연혁을 살피면, 그에게 ‘발원’이란, 피할 수 없는 삶의 한 양식이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간단치 않은 삶을 살았고,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안현미 시인과 견주어 내가 우선적으로 여제사장의 이미지를 상기한 선배 시인은 허수경과 김선우다. 그런데, 허수경과 김선우를 지배하는 몸신은 어딘지 유사한 데가 있다. 그들의 몸신은 정치적으로 억압받고 경제적으로 곤핍했던 시절의 가혹한 억눌림의 고통을 상쇄하거나 해원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그들의 노래는 그래서 주술적인 동시에 신파적이다. 이때 말하는 신파는 좋은 시만이 도달하는 한 경지를 뜻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현미를 지배하는 몸신은 허수경과 김선우의 그것과 달리, 자꾸 영매에서 달아나려고 몸부림친다. 다시 말하면 몸신이 영매에 깃들지 않으려고 자꾸 어깃장을 놓는 것이다. 그 흔적들은 고스란히 안현미의 시편에 기록된다. 그리고 이것이 그대로 안현미만의 여제사장 캐릭터를 구축하면서 고유한 개성을 확보한다. 그렇다면, 시인이라면 모두가 간절히 원할 시적 대상과의 온전한 일치를, 그것을 받아내는 찰나를 안현미가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안현미가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특유의 균형감각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안현미 시인은 요즘 매일 남산예술센터로 출근한다. 그곳이 그의 직장이다. 인터뷰도 그곳에서 이루어졌다. 그가 내민 명함에는 ‘예술교육팀 차장’이라는 직급이 박혀 있다. 안현미 시인은 서울시 직할 서울문화재단 소속 정규직 5급 공무원 신분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물론 아니다. 지난 2009년, 일반회사에서 퇴직하고 쉬고 있던 시인은 서울문화재단의 계약직 공모에 응해 정식 전형 절차를 거쳐 서울문화재단에 입사한다. 이후 첫 발령을 받은 근무지가 ‘연희문학창작촌’. 작가와 시인들에게 창작공간을 제공하는 시설인 이곳에서 시인은 매니저로 일하면서 입주 작가를 지원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하는 일을 했다. 그 자신이 창작자이면서 시인과 작가들의 창작을 고무하고 독려하는 일을 맡았던 것. 

그가 얼마나 세심하고 섬세하게 입주 작가들을 도왔는지를 나는 복수의 문인들로부터 직접 들은 바가 있다. 2014년, 신분이 ‘무기계약직’으로 바뀌면서 지금의 남산예술센터로 발령을 받았다. 그리고 올해 6월 그는 정규직으로의 전환을 위한 시험을 치러 당당히 정년이 보장되는 정규직 지위를 획득했다. 안현미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의 피고용 형태의 변천사를 특기한 이유는 그것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인이 자신의 삶을 책임지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고 부단하게 삶의 모욕과 맞서왔는지 저 일련의 과정과 시간들은 고스란히 증언해준다. 노동자와 피고용자의 생존 조건이 살인적으로 열악해지는 상황에서 시인이 정당하게 자신의 실력과 노력으로 그 자신과 가족의 삶의 존엄을 지켜낼 자격을 얻었다는 것은, 지금 한국사회의 풍경에서는 그 자체로 경이로운 일이다. 계약직에서 무기계약직으로, 그리고 정규직으로 신분이 바뀌는 동안 시인은 도대체 얼마나 자주 혹독하게 모독의 순간과 마주쳐야 했을까. 그것을 가만 상상하거나 헤아리고 있으면 저절로 목이 매어온다. 시인의 삶의 형식은 우주적인 실존이어야 한다는 폭력적인 전제 앞에서, 이 누추한 생존의 조건에 맞서 싸운 시인의 태도는 마땅히 격려받아야 한다. 누가 감히 그것을 세속적인 투쟁이며 욕망이라고 윽박지르며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영민했던 그는 가정형편 때문에 실업계 고교(서울여상)로 진학하고 졸업 후엔 취업의 길에 나선다. 그런 그가 1997년 뒤늦게 대학의 문창과에 입학한다. 이미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은 상태였다. 그는 대학에 들어와 정식으로 문학을 공부하고 4년 만인 2001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하는데 이 해가 다소 공교롭다. 그가 막 서른 살이 된 해인 데다가 새로운 세기가 실질적으로 시작된 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또한 자신의 등단한 타이밍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적이 있는데, 어떤 산문에서 시를 호명하며 “설명하고 싶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데리고 네가 나를 찾아왔다.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게. 그리고 나는 21세기 시인이 되었다?”고 쓴 적이 있다. 그가 시에 닿은 곡절 또한 일반적이지 않아 보인다. 그는 문학을, 시를 왜 찾았던 것일까. 

(문단 동료로서 오랜 우정을 나눈 인터뷰이와의 대화는 편안한 말투로 진행됐으며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그것을 그대로 표기함을 알려둡니다.)

김도언 : 네 삶의 이력, 시인으로서의 이력을 보면, 무언가 정반합 같은 이치가 보이거든. 서로 길항 하고 서로를 작용시키는 것 같단 말야. 너의 시적인 욕망은 왜 생겼는지 궁금해. 남다른 성장기부터 현실이 고통스러워서 혹시 눈앞의 현실을 지워버리기 위해 시가 필요했던 것일까.

안현미 : 내가 다른 친구들보다 좀 특수한 경험을 하긴 했지만 그 성장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들이 전적으로 다 맞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 정도의 현실적인 고통이나 아픔을 겪는 사람은 너무 많고, 특별할 건 없는 거지. 그런데 예민하고 과민했기 때문에 특별하게 받아들인 시절이 있었던 것 같아. 그 시절들을 견디기 위해서 나한테는 특별한 양식이 필요했는데, 그게 바로 시였던 것 같아. 시가 없었다면 난 지금 금치산자나 양아치 같은 극단적인 삶이나 다른 형태의 마이너리티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겠어. 지금이 그렇지 않은 삶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시라는 걸 꿈꿀 수 있었던 게 큰 위안이었어. 일종의 도피처였다는 생각을 지금은 하지만 그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었어. 전혀 다른 내가 말하는 어떤 특별한 차원의, 굉장히 매력적인 차원의 내 삶을 시가 보여줬거든.

김도언 : 그러니까 시를 쓰고 시인의 삶을 살게 되면 삶에 새로운 차원이 생긴다고 믿었던 거야?

안현미 : 그렇지. 내가 생각할 땐 분명히 그런 걸 느꼈어. 예컨대 ‘장자의 나비’ 같은 얘기는 내가 시를 공부하고 문학을 접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모르는 차원의 이야기였을 것 같은 거야. 오늘 아침에 그냥 회사에 가서 아니면 식당에 가서 쟁반을 나르고 접시를 닦고 일을 마치면 집에 돌아가서 피곤해서 자고, 그런 일상적인 삶을 살다가 죽는 개인이었을지도 모르는 거지. 근데 시라는 것이 나한테 오면서 내 삶의 지평이 확 넓어진 것 같은 게 있다는 거야. 그러니까 비루한 내 현실을 〈비굴레시피〉라는 시를 적으면서 나는 좀 다르게 보았던 거지. 내가 발 딛고 있는 세상이지만, 그걸 다른 방식으로 낯설게 뒤집어 볼 수 있는 게 예술의 힘이고, 시의 힘인 거 같은 느낌이었고 그 과정에서 찰나적인 쾌감 같은 것이 있었어. 그게 큰 위로였지. 누가 뭐라고 해도 주목을 받건 받지 못하건 상관없이 시는 내게 매우 중요했던 거 같아. 그러니까 현실을 지우려고 했다는 게 맞을 수도 있는데, 결과적으로는 삶을 견디기 위한 것들이 되게 필요했고 그게 내 경우에는 종교가 아니고 시였던 거지. 그래서 나한테 시는 종교 같은 것인 거고, 정말로 사랑하는 애인 같은 걸 수도 있고. 

대뜸 시인은 시를 종교의 자리와 등치시킨다. 사실 그것은 새로울 것이 없는 수사다. 어떤 이에겐 사랑이 종교이고 어떤 이에겐 돈이 종교인데, 이때 그들은 모두 사랑과 돈을 자신이 최고로 지키고 섬겨야 할 가치라는 뜻으로 종교를 끌어오는 것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문학이나 시를 종교에 비유하는 사례도 부지기수다. 그런데 놀랍게도 안현미 시인이 시가 종교 같은 것이라고 말할 때, 그 수사가 내겐 조금도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 핍진성이 눈곱만큼도 의심스럽지 않은 것이다. 결핍으로만 충만했던 성장기를 보내고, 외롭고 고독하게 세상에 나온 한 영민한 정신이, 의지할 곳을 찾은 것이 시라는 것인데, 거기에 무슨 과장이 있고 무슨 셈속이 있을 것인가. 시가 자신에겐 종교 같은 것이라고 너무나 일상적인 표정으로 말하는 이 앞에서 나는 시의 어떤 권능을 목도한 느낌이다. 

김도언 : 2001년이라는 등단 연도가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거 같아. 너 개인적으로도 막 서른이 된 시기였고, 시대적으로도 21세기가 실질적으로 시작하는 때잖아. 시기적으로 어떤 분기가 되는 상징적 의미가 있는 거 같아. 그 시점에 시인이 된 것에 대해 어떤 자의식이 있는지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



안현미 : 세기말과 세기초를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모두 경험해본다는 것은 한 인간에게 특별한 행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 세기말에는 어떤 전환에 대한 동기 같은 게 생기잖아. 실제로 밀레니엄이니 종말이니 해서 매우 요란스러웠고. 나 개인적으로는 서른이 되면 나는 시인이 될 거야, 이런 생각을 했었거든. 그런데 딱 맞아 떨어진 거야. 그래서 의미 부여를 안 할 수가 없었어. 아, 난 역시 시인이 될 운명이었어, 하는 자기암시 같은 거. 그리고 문학적으로 우리 세대가 좀 낀 세대잖아. 황지우, 이성복, 최승자. 뭐 이런 분들이 90년대까지 굉장한 영향을 미쳤고, 그리고 우리 뒤에는 성준이나 승일이 같은 시인들이 맹렬하게 질주를 하고 있는데, 우리 세대는 뭔가 주목받지 못하는 세대였던 거 같기도 해. 실제로 등단하고 1년에 한 번 청탁이 올까 말까 했어. 등단했는데 시인이 맞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던 것 같아. 그 즈음 신인들을 주목하는 시선도 없었던 거 같고, 그래서 우리끼리라도 서로의 시를 읽어주자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었던 것 같아. 게다가 나는 고등학교도 상고를 다녔고, 졸업하자마자 취직했고 그렇게 사무원으로서 살았던 10년 동안 시인이 돼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시인이 된 거여서 무언가 뚝 떨어진 느낌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 

김도언 : 10년 동안? 그러니까 고등학교 졸업하면서부터 시인의 꿈을 꾼 거구나.

안현미 : 고등학교 때 문학서클을 했으니까 그 이전부터라고도 할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시를 마음속에 뚜렷하게 품은 건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야. 아까 말했듯이 나를 지킬 나만의 그 무엇이 필요했으니까. 

김도언 : 좋아, 그런데 등단을 막 했을 때는 1년에 청탁이 한 편 정도 올까 그랬는데 2006년에 첫 시집 《곰곰》을 내고 이후부터는 상당한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되었잖아. 그 시집을 보고 나도 상당히 놀랐거든. 그리고 권혁웅 시인도 얘기를 했지만, 이렇게 좋은 시집을 내는 신인들이 다들 저평가를 받고 시집 출간 의뢰도 거절당하는 걸 지켜만 볼 수 없어 자신이 직접 나서서 적극적으로 이들의 가치를 알리기 시작했다는 거지. 그게 미래파라고 묶인 건데. 아무튼 시집이 나온 이후부터는 꽤 주목을 받았고 그 시기에 황병승 김경주와 더불어 어떤 폭발이 있었던 것 같은데, 당사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 시기를 어떻게 생각해? 

안현미 : 우리 바로 앞 세대는 아까 말했던 80년대가 끝나고 신서정을 받아들였던 장석남, 박형준 같은 선배들이잖아. 그런데 그런 신서정으로는 양이 차지 않았던 우리는 매우 다양하면서도 사소한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 그로테스크한 것에 매달리기도 하고 음악 같은 형태로 시를 변주해보기도 하고. 신동옥이나 정재학 같은 친구들이 그렇지. 그런 서브컬처에 대한 취향과 감식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등단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시가 우리 앞 세대 시인들과 정서적으로 구분되면서 관심이 증폭됐던 것 같아. 그러니까 앞 세대들은 어쨌거나 20세기 정치와 문화의 흐름 속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주류였고 우리는 세기말의 혼돈 속에서 정체성을 다양하게 변주한 애들이 각자의 취향을 반영하면서 시가 다양해졌던 것 같아. 그때 중요했던 사람이 나는 시인이자 에디터인 김민정이라고 생각하는데. 편집자 김민정이 있었기 때문에, 랜덤 시선을 시작할 수 있었지. 그게 참 신선했지.

김도언 : 내적 요인과 외부의 연출과 기획이 함께 가면서 시너지 효과를 낸 거구나. 인풋과 아웃풋의 정확한 반응이 있었던 거네. 너의 시에 대해서 사람들이 많이 하는 이야기가 현실의 고통이나 애환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거기에 특유의 발랄한 상상력을 결합시켜서 특유의 어법으로 그것들을 입체적으로 환기시킨다는 것인데 나도 동의하는 평가거든. 개인적으로 나는 너에게 매우 본능적인 현실감각이 있다고 생각해. 그런데 시인에게 현실감각이 뛰어나다는 게 칭찬만은 아니잖아. 사실. 나는 너에게 있는 이 현실감각이 참 비상하게 느껴져. 그것이 시적으로 과열된 카오스 상태를 되돌려 놓거든. 균형을 잡게 하는 거지.

안현미 : 현실감각이 뛰어나다는 건 욕처럼 들리는데.(웃음) 균형감각을 얘기했는데 그건 사실 성장 환경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  

사실 안현미 시인의 가족사와 성장기의 이야기를 나는 수년 전 사적인 술자리에서 상세하게 들을 기회가 있었다. 기억이 또렷한데, 신동옥 시인이 주선한 술자리에서였을 것이다. 이미 결혼해 아이들이 있던 그의 부친은 한때 강원도 태백 장성광업소에서 일을 했는데, 한 여자를 만나 살림을 차린다. 안현미는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다. 역마살이 있던 아버지는 여자와 식솔을 돌보지 않고 경향각지를 떠돌다가 본처에게, 태백 어디에 가면 자기 핏줄인 영민한 계집아이가 하나 자라고 있으니 집에 데려오라는 연락을 취한다. 그래서 안현미는 다섯 살 무렵 생모를 떠나 아버지의 본처 슬하로 들어가게 된다. 

그 장면을 가만 상상해보자.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낳아준 엄마를 떠나 생면부지의 두 번째 엄마, ‘뒤바뀐 엄마’의 집으로 들어가는, 어린 여자아이의 초상을. 눈앞의 세계가 하루아침에 뒤바뀌는, 그 막막한 암전의 체험의 무게를. 그 아이는 얼마나 두렵고 어려웠으며 어리둥절했을 것인가. 그 아이는 자신의 삶의 좌표가 천공의 눈금에서 어느 지점에서 어느 지점으로 몇 센티미터 정도 이동했는지를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던 것일까. 그가 자신의 타고난 균형감각에 대해 성장 환경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을 때 나는 무릎을 탁 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모두 살펴야 하는 양안적인 시각을, 그리고 감성과 감각을 교직하는 어떤 화학적 융합을 그 아이는 그때부터 체득했던 것은 아닐까.    

김도언 : 너의 성장 환경이나 유년 시절의 체험은 뭐 특별한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건 아니지만, 각별하다고는 할 수 있을 거야. 넌 시인이니까 말야. 그 체험이 너의 감수성이나 영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조금 자세하게 이야기해줄 수 있니?

안현미 : 내 부모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다 말할 수는 없어. 다 말하지도 않을 거고. 그때는 그런 것들이 너무 많이 있었지. 드라마에서 보면, 엄마가 다른 엄마한테 핍박받고 사는 그런 거. 그래서 분노에 차고 내가 성공해서 복수를 하고 그런 스토리. 그런데 바뀐 엄마, 그러니까 낳은 엄마가 아니라 길러준 엄마는 너무 착한 사람이었어. 내가 두 번째 시집에서 무덤에 있는 엄마와 태백에 있는 엄마에게 시집을 바친다고 했는데, 거기서 무덤에 있는 엄마가 날 길러준 엄마야. 그러니까 아버지의 본처.

김도언 : 그러니까 너를 낳지 않았는데도 성심껏 돌보신 거야?

안현미 : 성심껏 돌본다기보다는 그냥 목숨 대 목숨으로 대해주신 거야. 엄마의 소생들은 나이 차가 많이 나서 이미 대처로 나갔고 아빠도 옆에 없었고. 그러니까. 남들이 생각하는 혼란이 있긴 했는데, 양가감정이었던 거 같아. 태백에 있는 엄마가 그립기도 했고, 여기 있는 엄마가 날 미워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생각했던 거지. 내가 공부를 굉장히 잘했는데도 아들을 대학을 못 보냈으니까 나 역시 대학에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하실 정도로 보수적인 분이었는데, 자기가 할 수 있는 한계 조건 안에서는 구박하거나 그러지 않았어. 특별하게 정을 베풀어주신 것도 아니었고. 본인의 삶이 아마 신산했기 때문일 거야. 아무튼 그런 상황을 겪으면서 세상에는 절대선도 절대악도 없다고 생각했던 거 같아. 그래서 자꾸 연민도 생겼던 것 같고. 이 사람은 이래서 안됐고, 이 사람은 이런 점이 너무 아프겠고, 그러는 거지. 그런 연민이 생기는 계기였을 거 같아. 그게 아마도 균형감각이 아닐까. 한쪽으로 치우치면 불안한 거지. 

김도언 : 그럼 너의 가치관, 인성 이런 거에 아버지의 영향은 없어?

안현미 : 좀 지랄 같은 성격?(웃음) 약간 영민한 아이큐. 아버지가 똑똑했다고 하더라고. 아버지는 늘 부재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나 이십대 초반에 돌아가셨지. 그 시절에 내가 정말 고민을 많이 했어. 그리고 세 가지 중에 꼭 한 가지를 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웠어. 그 세 가지는 결혼, 대학입학, 출가였지. 그런데 결혼을 했지. 그게 가장 쉬웠거든. 그리고 몇 년 후에 대학을 갔고. 

김도언 : 그래, 성실하게 대답해줘 고마워.(웃음) 네 시를 읽어보면 확실히 너에겐 균형에 대한 강박이 있는 것 같아. 네 시에서는 병적인 퇴폐성, 악마성, 낭만적인 자폐성 같은 것들에 유혹을 당한 흔적들이 다 눈에 띠는데 시가 끝날 즈음엔 언제 그랬냐는 듯 현실로 돌아와 있거든. 다시 말해 너는 사회적 자아와 시적 자아 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잡고 있는 건데, 나는 그것이 안현미만의 시적 긴장을 만들어내는 동인이라는 생각이 들어. 실제 시를 쓸 때 어떻게 과도한 낭만성을 통제하고 현실감각을 되찾는지 궁금하거든. 어쨌든 그쪽으로 안 가잖아.

안현미 : 통장? 급여명세서? 이런 걸까?(웃음) 내겐 항상 고아의식이 있는 거 같아. 내가 날 지켜야 한다는 생각 같은 거지. 아까 서두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엄마가 두 명이고, 아빠는 식구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나 자신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이 있고 바닥까지는 내려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있는 거지. 나는 든든한 배경도 없고,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고, 능력이 출중해서 프리랜서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나를 바닥까지 끌고 내려갈 자신이 없다는 거지. 그래서 매일 현실로 출근하는 거야. 힘들어도 늘 정신을 차리지. 회사가자, 이렇게. 

김도언 :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비굴해지지 않기 위해 계속 수입이 있는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는 건데 시인이란 가장 자본에 취약한 직업이잖아. 시인들 중에는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가능성이나 열정을 너무 빨리 포기해버리는 경우도 있잖아. 내가 무슨 돈을 벌겠어, 하고. 가난한 걸 자랑이나 훈장으로 여기는 시인들. 그런 시인들한테 할 말 없어?

안현미 : 일반적인 의미에서 말하자면, 가난한 걸 자랑으로 여기는 건 죄 같아. 그런데 가난한 걸 견딜 수 있는 내공이 있다면 나는 그런 삶도 가능하다고 생각해. 왜냐하면 견디는 것은 그 사람 몫이니까. 다만 그가 시인으로서 치열할 때 그 의미가 더욱 빛나겠지. 그런 종족이 바로 시인인 것 같아. 

이즈음에 이르러 안현미는 자신이 종족에 대한 타고난 연민과, 불합리한 삶을 지탱하는 균형감각으로 중무장한, 내공이 어지간히 깊은 시인임을 확인시켜준다. 그는 건강하고 견고하다. 그렇지만 바람에 기꺼이 흔들린다. 유혹에도 취한다. 그러나 꺾이지는 않는다. 그가 건강하고 견고하다는 건 꺾이지 않는 순간 증명되는 것. 개인적인 이야길 좀 하자면, 나는 문학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통에 대한 과도한 엄살이나 문학적 엄숙주의를 불편해하는 편이다. 안현미가 시를 종교에 비유했듯, 다른 많은 시인들이 자신에게는 시밖에 없고, 시가 자기 삶의 전부이고, 그 제단에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거라고 얘길 한다. 

그런데 그것이 말처럼 가능한가? 그들의 과장된 말을 통해 문학의 신성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팽창한다. 물론 나는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진실을 확보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지나치게 과잉된 수사에 의해 유포될 때 문학이 가지고 있는 보다 높은 차원의 기능들, 예컨대 이 삶과 세계를 인식하는 지적인 통찰이나 모순과 부조리의 심도를 세심하게 촉지하는 더 높은 차원의 문학 작용 같은 게 지워질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쉽게 소비되는 문학의 ‘세속적’ 지위와 지켜져야 할 ‘고전적’ 위의威儀 사이에서 시인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김도언 : 좀 불편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 너는 시가 삶의 고단함을 덜어주는 치유제라고 말한 적이 있어. 나는 그것이 의심의 여지없는 너의 진실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이런 말들이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수용되면 오해의 소지도 발생하는 것 같아. 예를 들면, 시가 단순히 개인의 고통이나 고난을 치유하는 그런 소비재로 소비될 여지도 있고. 시에 비판적인 거리를 가지지 못하게 될 수도 있지. 어떻게 생각하니? 

안현미 : 그런 세속적인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오히려 불멸의 시를 쓰기 위해서 삶 속으로 자기를 던져 버리는 사람들이 더 많지 않아? 그런 사람들 중에 훌륭한 시인들이 많고?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데. 시에도 여러 가지가 있잖아. 흔히 달달하다고 얘기하는 대중적인 시도 있고 난해한 부호 같은 시도 있잖아. 그처럼 고통에도 다양한 컬러가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해. 그런데 다른 시인은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에만 그 고통을 받아들이거든. 취사선택의 문제인 거 같아. 우리의 취향이 그렇듯이. 

시인의 태도나 수용의 문제는 정답이 없는 것 같아. 나는 이미 정말로 힘든 고통은 나를 다 지나갔다고 생각하거든. 그런데 만약 사랑하는 가족이 죽는다거나 내 자신의 죽음 같은 걸 겪어보면 이런 생각이 오만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 고통에도 내성이 생기는 거 같고. 고통을 표현하는 방식도 그렇기 때문에 다양할 수밖에 없지. 치유하는 방식도 다양하고, 엄살도 있을 수 있고, 자신이 발견한 치유제를 강력하게 어필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 난 지나치게 문학적인 엄살을 떠는 사람보다는 문학적인 삶을 사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비만에 대해 슬픔의 두께, 라고 표현하는 며칠 전 내가 만난 어떤 시인처럼.

김도언 : 시로 돌아가보자. 세 권의 시집을 냈는데 삶의 눅진한 체험적 진실을 발랄한 상상력과 언어유희와 결합시키는 것이 이제 안현미의 시 세계를 설명하는 어떤 합의된 말인 거 같은데, 이런 스타일을 선보인 이후의 세계가 궁금해. 네 번째 시집, 다섯 번째 시집을 낼 때는 이런 스타일을 바꿔볼 생각이 있는지, 아니면 심화시킬 생각인지.

안현미 : 바꿀 수 있다면 바꾸고 싶은데, 그렇다면 정말 변신 성공일 텐데, 내가 볼 때 나는 너무 게을러서 완전한 변신을 할 수는 없을 거 같아. 내가 다른 사람에게 늘 솔직하게 말하는 건, 나는 아는 만큼만 쓰는데, 그 아는 만큼을 어떻게 쓸지를 고민하는 거야. 언어유희라든가 테크니컬한 면도 많이 고민해서 좀 낯설게 보이고 싶고 참신한 서정이나 세계를 만들고 싶은 생각도 있지. 내게 그런 재주가 조금 있기는 한데, (웃음) 뭔가 확 바꾸거나 변화를 주는 것에는 좀 무신경한 것 같기도 해. 말하자면 그런 재주는 없는 거지. 그걸 하기엔 내가 너무 바쁘기도 하고 피곤하고 늙었고. 깊이 있게 내려가지 못할 바엔 그만 써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어. 

그런데 요즘엔 또 이런 생각을 해. 지금처럼 이렇게 시를 안 쓸 바에야 내가 시인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아까 또 이야기했던 것처럼 동어반복이나 그렇고 그런 시를 쓸 거라면 시 쓰기를 그만둬야 한다. 그만둘 수 있는 용기가 나한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그런데 그럴 수 있을까? 이런 걸 못하는 게 노욕이라는 걸까? 항상 나의 문제는 내 연령과 다른 정신세계와의 불일치 속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잡아가려고 애쓰는 노력인 거 같아. 십대 때 막 해맑게 웃고 그랬어야 하는데, 그렇게 못했으니. 

김도언 : 네가 시 공부를 한 이후에 스스로 사숙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계보를 내가 잇고 있다고 생각하는 선배 시인이나 스승이 있나? 

안현미 :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만한 선배도, 스승도 없는 거 같은데. 그게 늘 고아 같다는 의식에 붙들려 있었기 때문일까. 아무튼 나는 백석의 어떤 면도 좋아하고 닮아 있다고 생각하고 또 이상의 어떤 면도 되게 좋아하고 닮아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어떤 계보로도 쉽게 묶을 수 없는 혼종적인 면이 내 시에 들어 있다고 생각해. 그게 네가 말한 다양하고 분열적인 것들에게 유혹당한 결과일 수도 있고. 어떤 평론가가 내 시를 분석하기 위해 내 시집 세 권을 한데 펼쳐놓았을 때, 아무런 분석이 되지 않는 그래서 치워버리는 그렇게 묶을 수 없는 것들을 하나하나 만드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 사실 내가 좋아하고 늘 읽는 작가는 보르헤스인데 난 보르헤스의 뇌가 섹시한 거 같아서 마음에 들어. 할 수만 있다면 그의 뇌 속에 사숙하고 싶지. 뇌를 누군가와 바꿀 수 있으면 보르헤스의 뇌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있지.

김도언 : 시 공부를 일반적으로 하지 않은 케이스여서 묻는 건데, 습작 때는 어떻게 했어? 다른 친구들이 하지 않는 너만의 특별한 방법은 없었어?

안현미 : 습작 때는 일주일에 한 번씩 써서 학교 애들이랑 합평하고, 그때 했던 친구들이 최치언, 유형진 같은 친구들이지. 그리고 특별한 습작 비결은 없고 도서관에 있는 책들은 여기부터 저기까지 모조리 읽었어. 그래도 시인이 못 된다면 재능이 없는 것이다, 라고 간주하려고 했는데, 시인이 되더라고. 읽는다는 행위 자체도 중요하지만 뭔가를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마음을 유지하고 지속해가는 것들이 필요한 시기가 있는데, 그때의 책읽기가 도움이 됐던 거지. 그런데 그걸 기계적으로 하면 문제가 있어. 나의 콤플렉스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인문학적 베이스가 취약하다고 생각했던 거야. 《자본론》도 안 읽고 뭐도 안 읽고. 대신 주산, 부기 이런 자격증만 있었으니까. 나는 내가 아는 것만을 쓸 수 있는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한 거지. 시를 보면 내가 읽은 독서의 영향이 드러나.

모든 시인에게는 저마다의 고유한 태도가 있다. 크게는 삶에 대한 태도이기도 하고 작게는 타인과 사물에 대한 태도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태도는 모두 시에 대한 태도로 환원되며 그것이 시인의 독자적인 캐릭터를 만든다. 시인 안현미의 시적 태도는 무엇이고, 그 태도는 어떤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동원될까. 그는, 자신의 자부심인 동시에 콤플렉스이기도 할 고아의식 속에서 남루한 현실을 탈주하겠다는 대담한 계획을 세우고 시로 육박해 시인이 된 ‘성인동화’의 주인공이다. 그 동화의 행간에서 다소 독특한 태도가 발견되는데 그것은 그가 가족이나 삶의 공간에서 만난 타자들과의 인연을 단호하게 끊어버리지 못하는, 그러니까 차단이나 절연을 계속 유보하는 태도다. 그 태도에서는 어떤 소속이나 공동체를 지향하는 욕망도 엿보인다. 일찍이 와해된, 가장 원초적인 혈연 공동체의 복원에 대한 본능적인 관심일까. 아니면 그것은 단순한 연민일까. 아니면 고아가 갖는 균형감각일까. 그는 과장도 엄살도 없이 이렇게 말한다.

“누구처럼 세계를 여행하고 사람을 경험해야겠다는 욕망 자체가 별로 없어. 그렇다고 삶이 만족스러워지는 건 아닐 테니까. 그냥 살다가 가는 거라는 생각을 하는 거 같아. 아무도 특별하게 미워하지 않으려고 생각하는 거지. 누가 좀 미워질 때도 그냥 천천히 미워하기로 하는 거야. 미워하게 될 때까지 이십 년이 필요한 경우도 있었고. 그 과정에서 내가 좀 느슨하게 보이는 것뿐일 거야. 매 순간 나는 이걸 그만둬야 할까, 이런 것을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이십 년 만에 아, 이건 아닌 것 같아, 라고 생각하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 거지. 나는 오히려 나 좋다는 사람에게 거리를 두는 편이야. 타인이 나에 대해서 뭐가 좋다고 그러면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해주고 있어. 그러지 마. 인간 거기서 거기야. 네가 본 건 네가 보고 싶은 거지 나는 아니야. 내가 못된 거지, 한마디로.”

공교롭게도 안현미는 자신의 시 세계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를 말해달라는 주문에 ‘고독’을 들었다. 그는 지나치게 견고해서 외로운 시인이다.  


시인 안현미는 1972년 강원도 태백에서 태어나 서울과기대를 졸업했다. 2001년 문학동네신인상에 「곰곰」 외 4편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불편’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시집으로 『곰곰』 『이별의 재구성』『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가 있다. 제28회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 문태준, 따뜻한 비관주의와 사랑의 수행자

김도언의 시인의 얼굴 14

(채널예스, 2015.12.31)

 


문태준의 비관주의에 대해 내가 따뜻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스러지고 소멸하는 것들을 쓰다듬는 데 이 비관의 힘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의 비관주의는 사랑의 수사학이다.

 


오늘은 이별의 말이 공중에 꽉 차 있다/나는 이별의 말을 한움큼, 한움큼, 호흡한다/먼 곳이 생겨난다/나를 조금조금 밀어내며 먼 곳이 생겨난다/새로 돋은 첫 잎과 그 입술과 부끄러워하는 붉은 뺨과 눈웃음을 가져가겠다고 했다/대기는 살얼음판 같은 가슴을 세워들고 내 앞을 지나간다/나목은 다 벗고 다 벗고 바위는 돌 그림자의 먹빛을 거느리고/갈 데 없는 벤치는 종일 누구도 앉힌 적이 없는 몸으로 한곳에 앉아 있다/손은 떨리고 눈언저리는 젖고 말문은 막혔다/모두가 이별을 말할 때/먼 곳은 생겨난다/헤아려 내다볼 수 없는 곳
- 「먼곳」 『먼곳』(창비, 2012) 수록.

 


서장을 여는 내용으로서는 좀 호들갑스러울지도 모르지만, 문태준 시인을 만나고 돌아와 이런 상상을 가만 해보았다. 지금 우리 한국 시단에 문태준이라는 시인을 지운다면, 그러니까 문태준이 펴낸 여섯 권의 시집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과연 시단의 풍경과 풍속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 소란과 풍문, 이미지가 난무하는 과열된 시적 열기와 원색의 소용돌이를 진정시킬 줄 아는 그 묵향과도 같은 성찰이 없다면... 어떤 존재가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가장 쉽게 해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가상의 풍경을 그려보는 것이다. 그때 그 풍경이 삭막하기 이를 데 없이 느껴진다면 우리는 그 존재의 자리를 새삼 각성하고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 문태준의 시는 차마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정을 하는 것조차 저어하게 하는 어떤 성스러운 기품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시는 적막하고 깊지만, 그것이 없는 세계는 실상 눈부신 광휘와 어두운 흑암으로 요란스러울 것만 같다는 암울한 상상. 그러니까 그의 시가 가진 적막함과 깊이는 눈을 찌르지 않는 호롱불에 깃든 은은한 빛과 같은 것이다.  


문태준 시인은 경북 김천의, 40호 정도가 올망졸망 모여 있는 작은 시골마을(정확한 행정구역명은 경상북도 금릉군 봉산면 태화 2리다) 출신이다. 그의 집은 읍내에 있는 중,고등학교에서 8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버스로 통학을 했다고 한다. 자전거라는 게 생긴 뒤에는 버스정류장이 있는 곳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 받쳐놓고 버스를 탔다고 한다. 그의 고향집은 방 두 칸짜리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것이었고 부모님은 일년 내내 농사만 짓는 분들이었다. 위로 누나 둘과 아래도 여동생 둘 사이에 낀 외아들이었던 그도 수업이 없는 날은 부모님의 일손을 거들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학교에서는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는 수재였다.

유복하지 않은 가정형편 속에서 고생만 하는 부모님을 보고 자란 수재 형의 두뇌를 가진 이라면, 의당 인생을 역전시킬 만한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실행하는 게 보통이다. 예컨대 판검사가 되어 입신을 하거나 경영학 등을 공부해 대기업에 입사하거나 하는 식이다. 아버지도 그가 법학을 공부하길 바랐다고 한다. 그도 처음엔 육군사관학교나 경찰대학교 같은 곳에 들어갈까 고민을 했었다고. 그런데 문태준은 국문학과을 선택한다.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고. 그것은 그러니까 나름대로 어떤 현실적인 판단에 의한 선택이었던 것. 그런데 그의 시를 꾸준히 읽은 데다 대화까지 나눈 지금의 나는 그 선택에 신비하면서도 절묘한 인연이 내습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인연’이라는 말은 문태준에게 범상치 않는 의미를 갖는 말이다. 그가 한 어떤 메모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요즘 밥집에서 흰 쌀밥을 받을 때 하물며 물 한 방울에 8만 4천 마리의 벌레가 들어 있는데 밥이 만들어지기까지의 모든 노고와 인연을 잊을 수 없어 스님네들처럼 '오관게'를 염송합니다.”

한 그릇의 밥에 깃들어 있는 노고와 인연을 깊이 헤아리는 시인이 문학과 시에게 홀연 끌렸던 자신의 마음자리를 섬세하게 읽고 그것을 지켜나가고 있는 것은 그러므로 매우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그는 소위 말하는 문학 소년의 시기를 거치지 않았다고 한다. 중학교 때 김천 관내에서 주관하는 백일장에 나가 상을 받기도 했지만, 김천을 벗어난 도 단위의 백일장에서는 입상한 적이 없고, 집안 형편상 교과서 외에는 읽어본 책이 없었던 그가 시에 눈을 뜨게 된 것은 대학 진학 후 과내의 문학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부터였다고. 거기에서 좋은 스승과 선후배 동료들을 만난 것이 큰 자극과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본격적으로 시 공부에 재미를 붙이게 된 데에는 크게 두 차례의 계기가 있는데, 하나는 군입대 전 대학 2학년 여름방학 때 한보따리의 시집을 사가지고 고향에 내려가 집중적으로 시를 읽을 때였고, 또 하나는 군복무를 할 때였다. 당시 그가 근무한 부대에서는 사병들에게 시집 자체를 못 읽게 했는데, 그 금기가 욕망을 추동한 것인지 그는 이성복 등의 시집을 낱장으로 뜯어 호주머니에 넣어서 초소 근무 등을 설 때 몰래 꺼내 읽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런 순연한 사랑의 태도가 지금 문태준이 길러낸 서정의 자양일 것이리라.

문태준의 시를 사랑하는 독자라면, 그의 시편들이 가진 서정적 촉기가 환기시키는 단아하면서도 낯선 감각의 세계에 깊이 매료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문태준의 시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감응력의 결과다. 선한 인상에 거동이 점잖고 느린 문태준 시인은 그가 쓴 시를 꼭 닮았다. 그의 시가 희미하게 존재하고 흔들리고 낮아지고 마침내 사라져가는 생명들의 그늘을 노래하듯, 그의 삶 역시 어딘지 역동적이라기보다는 식물이나 초식동물의 수굿함을 생각하게 한다. 마흔이 되기도 전, 소월시문학상과 미당 문학상 등 굵직굵직한 문학상을 받아 한국 시단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자릴 잡았으면서도 그는 처음 시를 받아들이던 초심을 견결하게 붙잡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그가 수많은 미혹들과 벌인 고투를 통해 다져진 어떤 태도 같은 것일 테다. 그 태도를 확인하기 위해 그를 만난 건 세밑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12월 하순, 그가 근무하는 마포 도화동 불교방송국 인근 찻집에서였다.

 
어렸을 적 경험한 ‘마을 공동체’

김도언 : 근황부터 여쭙고 싶어요. 불교방송국이 직장이시죠? 지금 몇 년 되셨어요?
 
문태준 : 1996년도에 입사했으니까 20년 되었네요. 대학 졸업하고 첫 직장에 계속 다니고 있는 셈이에요. 정확히 하는 일은 라디오 방송을 제작하는 피디예요. 매일 오전 9시 5분부터 10시까지 하는, 비구니 스님(원영 스님)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맡고 있어요. 그리고 토요일과 일요일에 나가는 <세계는 한가족>이라는 프로그램도 맡고 있고, 요즘에는 제가 쓴 원고지 5매 정도 되는 에세이를 읽어드리는 방송도 해요. <문태준의 생각>이라는 건데, 그건 시작한 지 한 3주 정도 됐어요.

김도언 : 지금 일하시는 곳도 불교방송국이시고, 선배님이 써오신 시편 속에도 선배님이 자인하시기를 어떤 불교적인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교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생기신 거예요?

문태준 : 불교는 어머니를 따라서 절에 다닐 때부터 관심이 있었어요. 관심이라기보다는 그냥 따라다닌 거죠. 김천에 직지사라는 큰 절이 있어요. 그 절의 말사가 용화사라는 절인데, 우리 동네 근처, 태화초등학교 근처에 있던 절이에요. 그 용화사에 어머니를 따라서 다녔는데,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어머니가 저를 데리고 다니셨던 것 같아요.

김도언 : 방금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면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셨는데, 선배님의 시에 대한 특질을 이야기할 때, 고향, 가족, 향토적인 공동체적 질서 같은 키워드들을 편의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선배님도 그런 의견에 대해 적극적으로 부인은 안 하시는 것 같고요. 창작자들은 고향이나 가족으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잖아요. 그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말이에요. 선배님은 긍정적인 영향을 받으신 것 같은데, 그게 제가 보기에는 매우 독특해요. 서사적인 요소도 보이거든요. 공동체, 고향, 가족에 대한 긍정적인 수용이 어떻게 서사적인 구체적 이미지를 가질 수 있는가. 저는 이게 참 궁금해요. 그 시대 부모님들 중에는 술도 많이 드시고, 가족에 대한 애착을 왜곡된 형태로 표현하신 분들도 많았는데, 선배님의 부모님은 선배님에게 어떤 초상을 갖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선배님이 자라신 고향에 어떤 특별한 분위기가 있었는지 궁금하거든요.

문태준 : 개별적인 것에 자극을 받았다기보다는 저는 마을 공동체를 본 거예요. 40호 정도 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저희 동네는 마을 공동체로 다 이어져서 살았어요. 소문도 금방 퍼지고, 싸우면 서로 엉겨 붙어서 싸우기도 하고, 말리기도 하고. 또 같이 사이좋게 술 먹다가 싸우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뭐, 굉장히 가난했으니까요. 그런데 거기서 도망치려고 하거나 그런 걸 보고 실망감이나 분노 같은 걸 느끼지는 않았어요. 그보다는 왜 우리는 이렇게밖에 살 수 없나. 왜 동네 분들은 저럴 수밖에 없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사는 모습에 대해서, 생태에 대해서 자연스러운 관심이 생긴 거죠. 제 아버지, 어머니는 낮밤 없이 노동하시는 분들이셨어요. 논과 밭에서요. 겨울에 농한기가 있다고 하지만, 아버지는 전라도나 이런 곳에 품 팔러 다니시고, 막노동하러 다니셨어요. 나이가 드셔서까지도 고속도로 공사 현장 같은 델 계속 다니셨으니까. 그렇게 끊임없이 노동하는 걸 본 거죠. 선하고 악하고 이런 문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계속 노동하는 걸 보았던 거예요. 그런 데서 삶의 질박함을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노동을 견뎌내신다는 것에 대한 경외감이 있었죠. 어떻게 저런 걸 다 견뎌낼 수 있을까. 강철로 만든 몸도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하면 안쓰러운 거죠. 커가면서 느꼈던 건 안쓰러움 같은 것이었어요. 농사 짓는 사람은 왜 구조적으로 가난할 수밖에 없는가, 이런 것도 많이 생각했었어요. 그래서 농민시 경향의 시도 많이 쓰고 했어요.

농민시 경향의 시를 썼다는 문태준의 발언은 구체적인 부연을 달고 있다. 그가 학과 안에 있던, 최동호 교수가 만들고 지도한 문학 동아리 ‘안암 문예창작 강좌’에 가입했을 때, 스승의 권유로 신경림, 고재종, 김용택의 시를 사숙했던 것.(안암 문예창작 강좌 출신으로는 강연호, 심재휘, 박정대, 이영광, 권혁웅, 이장욱, 김행숙 등이 있다.) 그는 자신이 쓰는 시가 농민시라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문태준은 농민의 계급의식이라거나 농촌 공동체가 직면한 현실보다는 사람 자체를 보고 싶어 했고 거기에 불교 공부를 통해 얻어진 세계관이 겹쳐지면서 앞서 언급한 선배 시인들의 농민시와는 다른 자신만의 문법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한다.

확실히 그가 보여준 문법은 새로운 서정이라 부를 만한 독자적인 시정(詩情)을 확보하고 있다. 슬프고 감상적인 듯하지만, 견결한 사유와 가볍지 않게 반짝이는 감각이 정교하게 교직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어떤 인터뷰에서 불교에서 얘기하는 관계적 사유, 생태철학 같은 것으로부터 뚜렷한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한 적도 있다. 예컨대, 그의 서정의 자장 안에는 모든 존재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나는 너다’, 혹은 ‘내 속에 당신이 있다’ 같은 ‘연기(緣起)’에 대한 풍요로운 상상력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나는 하나의 온전한 존재이면서도 세계를 통틀어 볼 땐 또 하나의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런 전체와 부분에 대한 사유가 특유의 시적 긴장과 함께 문태준만의 서정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문태준만의 서정

김도언 : 선배님 시를 가리켜 한국 정통 서정시를 계승하는 시인이다, 한국 서정시 가문의 적자다, 이런 말을 많이 하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것만으로는 선배님 시가 가지고 있는 특질이 다 드러난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전통을 계승한다고 했을 때, 그건 특질이라기보다는 한 유형이 될 수는 있을 것 같고요. 저는 선배님 시편에서 범속한 서정성의 세계를 뛰어넘는 어떤 직관 같은 걸 보았거든요. 김종삼의 시에서 주로 보이는 그러니까 서정성이 만들어놓은 환상성을 보기 좋게 무너뜨리면서 뛰어넘는, 저는 불교를 잘 모르지만 어떤 돈오 같은 찰나적인 깨달음 같은 게 스며 있는 게 느껴지거든요. 그런데 이런 건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요?

문태준 : 제 시가 돈오라기보다는 시적인 순간들이 다 돈오라고 봐야지요.

김도언 : 그런데 그 돈오가 있고 없고가 범속한 서정시와 특별한 서정시를 가르는 것 같아요.

문태준 : 직관이 있다는 게 서정시를 다 설명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해요. 비교적 제 시가 전통 서정에 가깝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해요. 서정시의 적자라거나 그런 이야기도 그래서 나오는 것 같고요. 사실 전통 서정에 가깝긴 하죠. 서정적 자아가 굉장히 부드럽고, 슬픔도 잘 느끼고, 굉장히 섬세한 부분이 있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여성 화자적인 면도 있고요. 이별이라거나 슬픔의 정서를 잘 아는 서정적 자아라는 거죠. 그래서 그렇게 느낄 수 있는데, 전통적 서정과는 다르게 균열되는 지점을 찾으려고 애를 쓰고 있어요. 갈등하는 자아들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거죠.

그리고 전통적 서정적 자아가 상당히 평온한 서정적 자아라면 그런 것을 넘어서려는 것과 새로운 감각을 조금 더 벼려내는 서정적 자아라거나 이런 쪽으로 가는 것에 관심이 많아요. 혹은 세계와의 관계 맺기를 하는 서정적 자아라든지. 보통 나와 당신의 평면적인 관계가 아니라 큰 세계, 혹은 더 넓은 바깥 세계와 생각을 주고받는, 교신하는 자아. 이런 것은 전통서정과는 조금 다른 위치에 있는 문제들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것들에 대해 계속 질문을 던지는 거죠. 자연과의 관계를 말할 때에도 자연과 나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 큰 자연으로서의 내가 있고, 작은 자연으로서의 내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내가 다른 자연물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할 수 있거든요. 나는 공기도 될 수 있고, 새도 될 수 있고, 책상도 될 수 있고, 나는 당신도 될 수 있다. 이런 생각은 분명 다른 자아죠. 자연물로 이야기하면, 나는 샘도 될 수 있고, 나는 여울도 될 수 있고, 나는 새도 될 수 있고, 나는 바다도 될 수 있고, 바다는 나고, 이렇게 이야기하면 전통적인 서정과는 조금 더 다른 지점으로 가는 것 같아요.

미묘하지만 조금 다른 지점에 있으려고 하는 욕망이 있어요. 어떻게 보면 그게 서정이 조금 더 분화되거나 혹은 진화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런데 대체로 보면 전통 서정의 둘레로서 제 시를 보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사실은 굉장히 개별적이고 독특한 서정적 자아들이, 그런 주체들이 있는 것인데요.

김도언 : 조금 불편한 질문일 수 있는데요. 선배님 시집 여섯 권을 쭉 읽으면서 말씀하신 것처럼 균열을 도모하는, 자기 갱신을 꾀하려는 흔적들이 보이더라고요. 최근으로 오면서요. 그런데 거기에 비관주의가 조금 깃들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왜 이게 불편한 질문일 수도 있다고 말씀드렸느냐면 선배님에 대해서 흔히 독자들이나 평자들이 이야기하는 게 원숙하고 웅숭깊은, 세계를 바라보는 믿음직한 태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요. 그러니까 조숙한 자아라는 거죠. 그런데 조숙한 사람은, 세계를 일찍 알아버리니까 다른 사람들이 60이나 70되어야 알 수 있는 걸, 40살에도 알 수 있다는 거죠.

그러면 그 이후에는 뭐가 남느냐의 문제가 주어질 텐데 그런데 제가 볼 때 선배님은 조숙한 서정적 자아가 이미 알 걸 다 알고 나서 그 이후의 세계가 매우 공허하고 무기력하게 느껴져서 거기에 비관주의를 끌어들인 것처럼 보여요.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것, 내가 이미 알아버린 걸 회의하는 거죠. 그게 지금 다섯 번째 시집, 여섯 번째 시집에서 보이는 것 같은데.

문태준 : 그건 한 시인의 시세계가 진전되는 과정을 너무 과속처럼 본 결과인 것 같아요. 한 시인의 시세계의 진전이 그렇게 신속하게 이루어지는 건 아니에요. 시가 그렇게 가면, 진짜, 그 시인은 한 생에 여러 생을 다 살아버리겠죠. 그건 성급한 기대인 것 같아요. 다른 시인들이 그런 걸 보여줬다면, 글쎄요. 의도적이고 전략적으로 어떤 시세계의 변화를 꾀한 경우일 수는 있겠지만 그게 일반적인 건 아니죠. 시세계는 자연스럽게 나이가 들면서 확장되고 깊어지고, 원숙해지는 게 더 좋은 거죠. 독자나 평자들은 시적 테마나 주제를 자꾸 바꾸기를 원하는데 그게 그렇게 썩 좋은 방법, 아니, 좋은 기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 기대를 느끼면 느낄수록 시인들이 써내는 시편들의 깊이는 얕아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조바심도 생기고, 심적인 부담도 많이 생기기 때문이죠. 그냥 시인도 자기 세계 안에서 분발하는 거예요. 계속 분발하는 거고. 삶의 속도에 맞춰서 시 세계도 깊어지거나 확장되거나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비관주의가 깊어졌다는 건 글쎄 뭘까요? 예전과는 다르게, 삶에 대해서, 예를 들면, 몸의 끝남, 육체의 늙음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죠. 경험의 질량도 많아지고요. 주변의 것들도 바뀌니까요. 제가 나이가 많이 든 것도 아닌데, 그런 게 많이 보이는 거죠. 어머니께서 암 투병하는 걸 본다거나 아니면 응급실에서 며칠 지내면서 절명의 순간에 있는 환자들을 본다거나 임종을 지켜본다거나 그런 것을 보면서 몸의 쇠락, 몸의 종말, 인연의 끊김, 관계의 종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다 보니까 다소 비관이 들어갈 수 있겠죠. 비관을 본다기보다 아, 끝남이 본질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어요.

김도언 : 희미해지고, 얇아지고, 낮아지고. 이런 말씀을 예전보다는 더 하시는 것 같아요.

문태준 : 그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게 들어와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예를 들면 산기슭이 무너져 내리듯이 몸이 무너져 내린다거나 이런 것들이 마음에 들어오는 거죠. 항상 같은 상태로 있지 않고, 계속해서 생멸하지만, 결국 멸로 간다는 거죠.

시를 읽는 독자와 시를 쓰는 시인을 포함해서 하는 말이지만, 시인에 대해 우리 모두는 (일반적이라 할 만한) 어떤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시인은 자유로운 존재이며 전능한 존재일 수 있다는 어떤 가정으로부터 촉발되는 자의적 환상이다. 시인이 과연 자유로운 존재이고 전능한 존재일 수 있을까. 시인들이 물리적인 조건으로부터의 구속을 적극적으로 해제하면서 자신의 실존을 심화하고 확대시키기 위해 사물이나 세계를 응시한다는 걸 전제할 때, 시인의 자유와 전능을 인정하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런데 오히려 시인은 명백한 의미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을 할 수 있는,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매우 명백한 ‘한계적(marginal) 존재’에 가깝다. 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읽어낸다. 다시 말해 자신이 무엇을 할 때 아름다운 것을 자각하고, 무엇을 할 때 미적 쾌감을 느끼는지를, 무엇을 할 때 그것이 가장 ‘나다운 것’인지를 민감하게 파악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그 ‘한계’가 시인에게는 절대적인 세계, 무한의 우주로 펼쳐진다. 그 안에서 시인은 자유롭고 전능하다. 사정이 그렇다면 시인에게 당신은 왜 이런 것을 하지 않느냐고 묻는 것은 금기인 동시에 결례일 수 있다. 시인은 할 수 있는 것 안에서 자유롭고 전능한 존재니까. 문태준 시인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내가 바투 느낀 것은 그가 한계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매우 정치하면서도 섬세하게 이해하고 있는 시인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자유와 전능을 잘 아는 것이 시인에게는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시 쓰는 사람은 언제나 앞으로 쓸 시가 더 걱정이 되는 법”

김도언 : 1994년도에 등단하셨으니까 등단하신 지도 20년이 훌쩍 넘었고, 시집도 여섯 권을 내셨잖아요. 시집들도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시인선을 가지고 있는 창비, 문지에서 내셨어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보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안정적인 입지를 가지고 시작활동을 하신 거란 말이죠. 적절한 격려를 받으시면서요. 그런데 이런 안정적인 입지를 가지고 시작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어떤 관성이나 타성 같은 게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 건 어떻게 극복하셨어요?

문태준 : 시 쓰는 사람은 언제나 앞으로 쓸 시가 더 걱정이 되는 법이에요. 그래서 더 조심스럽고 고민이 많아진다는 생각이 들어요. 타성이 생기면 시인으로서는 치명적이죠. 시가 좋지 않았을 때 받게 되는 실망감과 충격이 정말 클 테니까요. 태작을 발표하면 더 빨리 들켜요. 더 빨리 알아버리죠. 직접적으로는 이야기하지 않아도 우회적으로는 다 그런 이야길 해요. 시를 쓰고 있는데도, 시 좀 써라, 이렇게 말을 하죠. 제가 그런 적이 있었는데, 한 계절에 시를 제법 많이 발표했는데 태준이 저 친구는 시도 안 쓰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시 많이 썼는데, 했더니 무슨 시가? 그러더라고요. 그런 말은 사실 무서운 말이죠. 고마운 말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그런 긴장을 유지하다 보면 타성이란 게 생길 여지가 없어요.

김도언 : 선배님은 기본적으로 선배님의 고향, 가족, 공동체 같은 재래적인 요소를 시의 주된 질료로 하고 있는데, 그건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멀어지는 거잖아요. 나로부터요. 박제화될 수도 있고요. 시간적, 물리적 환경이 급박하게 바뀌게 되면, 당연히 삶의 조건이나 이런 게 분화되잖아요. 그러면 거기에 따라 다양하고 유연한 반응들이 문학적 표현 속에 들어오게 되고, 그래서 2000년대 들어 한국 현대시가 그런 부분들을 일정하게 반영을 하면서 일군의 젊은 시인들이 주목을 받았고, 또 그런 젊은 시에 대해 전위를 확보했다, 이런 말을 하는데, 전위라는 건 모든 시인들이 다 관심을 갖는 가치라고 생각해요. 선배님은 어떻게 전위를 확보하세요?

문태준 : 도언 씨가 오해를 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일단 시공간에 대한 생각이 그러한데, 제 시를 고향과 시골의 공간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그거예요. 왜 서정적 자아가 반드시 세계와 맞서야 하고, 그것에서 전위라는 것이 발생한다고 보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시적 자아라는 게 꼭 전위적인 자아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없고요. 제 시에 있어서 세계와 맞서는 전위적인 어떤 첨단의 그런 자아를 원하는 것 자체도 적절한지 모르겠어요. 그건 읽는 분들의 욕심인 것 같아요.

김도언 : 오해를 하는 건 아니고요, 독자들이 궁금해할 만한 걸 대리해서 여쭤본 거예요. 전위를 원하지 않는 게 선배님의 전위다,라고 이해를 해도 될까요?

문태준 : 시마다 고유한 역할이 있는 것 아닐까요. 시인마다 자기 시에 있어서 각자의 전위를 찾아가는 거겠죠. 정태에서 웅덩이에 고인 물처럼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시가 도달하고 싶어 하는 저 언덕 너머의 세계가 있다는 거죠. 그걸 계속해서 찾아가는 거고, 그런데 시인마다 성향이 있을 거 아니에요? 시적 성향이. 저의 시적성향은 A라는 것인데, 이 시적 성향을 버리고, 왜 당신은 B와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으로 가지 못하느냐고 하면 그건 적절하지 않은 접근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생태적인 시, 생명시 같은 것이 시의 어떤 전위에 있다면 제 시의 일부분은 전위에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제 시의 관심은 생명세계에 대한 관심이고, 생명세계에 있어서 생명 존재들은 협력적 관계에 있거든요. 존재들이 관계되어 있다는 게 제가 생명세계를 보는 기본생각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차원에서 보면 제 시는 어떤 면에서 자연서정이면서 생태시에 가까운 거예요. 그런 측면에서 전위가 들어가 있을 수도 있겠죠. 그런 게 도언 씨가 이야기하는 그런 요소가 될는지는 모르겠네요.

문태준 시인이 단호하게 지적한 것처럼, 문학적 레토릭에서 ‘전통’이나 ‘서정’이 ‘전위’와 일치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것은 양립이 불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그런데 전위를 첨단이라는 단어와 결부지어 생각하면서 전통을 퇴행적인 어떤 것이라고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이들에게 전통과 전위는 함께 놓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놀라운 건 그런 생각을, 시를 쓰는 사람들조차 아무렇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전위나 첨단은, 사실 특정한 누군가가 선취하거나 전유하는 게 아닐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전위 혹은 첨단의 정신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시사하는 것이다. 전위와 첨단은 당연히 어떤 차원에서든 내재적인 당위를 가지면서 존재할 수 있다. 예컨대 전위와 첨단은 민요나 시조가락에서도 능히 식별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왜냐하면 참다운 전위란, 어떤 고전적인 명제가 재래적으로 보지해온 차원을 비틀 때, 그것에 균열을 내려는 노력이 어떤 발열을 일으킬 때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통을 계승하는 것은 고전적인 차원의 일이라고 단정하고 묶어버릴 때, 우리는 오래도록 갱신되어 온 전위와 첨단의 연혁을 놓쳐버릴 수도 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문태준 시인이 우리 문단에서 전통 서정시의 계승자, 서정시 가문의 적자로 불리는 것의 의미를 보다 온전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다. 그는 서정에 ‘관조’ 대신 깊디깊은 응시와 함께 자기 몸을 들여다 놓았다. 그것은 생명의 연대에 몸소 참여하기 위해서다. 모든 것이 내통해 있다는 의식의 첨단, 그 삼엄한 떨림을 서정적인 언어로 벼려내는 것, 이것은 문태준이 긍정하든 부정하든 전위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김도언 : 제가 느낀 따뜻한 비관주의에 대해서 다시 질문을 드려볼게요. 이건 제 주관적인 느낌인데, 제가 선배님 최근 시집을 읽으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 그리고 약간 슬픈 자족감 같은 걸 느꼈어요. 백석의 시에서 엿보이는, 그 <남신의주 유동 박씨봉방> 있잖아요. 그런 정조랄까요. 그런 회한 같은 게 현대적으로 되살아나 있다는 느낌요.

문태준 : 저는 백석의 시 중에서 그 시보다 좋아하는 시가 있는데 <산숙>이라는 시예요. 거기 보면 시적 자아를 가진 이가 여러 사람들이 와서 자고 가는 허름한 집에 드는데, 국수도 만들고 그런 집인 것 같아요. 그런데 방에 들어가서 보니까 목침이 있어요. 그런데 목침을 보니까 때가 까맣게 올라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목침을 베고 잤던 그 집을 들고 난 수많은 사람들의 자취를 떠올리는 거예요. 저는 시적자아가 가지는 어떤 연민보다 백석 시에서 닮고 싶은 게 그런 서정이에요. 목침에서 타인의 삶을 내다볼 수 있는 서정, 이런 것들이 더 닮고 싶은 거예요.

김도언 : 선배님은 시를 쓰면서 어떨 때 카타르시스를 느끼시나요? 목침에 묻은 때에서 목침을 베고 누웠던 수많은 사람들의 자취들을 발견했을 때 백석이 느꼈을, 그런 순간인가요?

문태준: 그 순간에 쾌감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오히려 안쓰러움 같은 걸 느꼈겠죠. 내가 아, 이런 걸 알아냈구나! 이런 것보다 아, 내가 들었던 생각이 제대로 나왔을 때 만족감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내가 보고, 내가 있는 그대로라고 생각하는 것, 물상, 물물, 존재, 이런 것들이 내 시 속에, 있는 그대로 옮겨왔느냐. 그것이 만족스러우면 기쁜 거죠. 시를 쓸 때의 쾌감은 거기에 있는 거겠죠. 내가 제대로, 다시 쓸 수 없을 만큼 썼느냐. 그것이 더 중요하다는 거죠.

김도언 : 『먼 곳』이라는 시집 해설에서 김인환 선생님이 나날의 메마름을 견뎌내게 하는 영혼의 강장제가 되기에 충분한 시편이다, 이런 표현을 하신 걸 봤어요. 저도 동의하고요. 훌륭한, 어떤 좋은 시들이 가지고 있는 덕목이니까. 그런데 시라는 것이, 시인 자신이나 독자에게 위로나 치유가 되는 건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이지만, 너무나 그런 방식으로만 독자들에게 주어지고, 소비되는 것은 시가 가지고 있는 훨씬 다채롭고 풍요로운 의미의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문태준 : 저는 시인이라면 독자들이 받아들이는 방식 자체를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모든 시에는 저마다의 의미가 있고 그 의미대로 독자들을 찾아가는 걸 테니까요.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생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요. 생명시라는 게 뭘까요. 화단을 구성할 때, 화단에 있는 여러 종의 꽃과 풀이 있을 텐데 이것들이 동시에 확 피는 게 아니라 어떤 건 개화하고 어떤 건 낙화하잖아요. 그러면서 화단의 꽃핌이라는 걸 지속시키잖아요. 마찬가지예요. 문단의 생태, 시단의 생태도, 어떤 시적형태, 모양과 빛깔과 개화시기가 다 다르고, 어떤 것은 잎이 넓고, 어떤 것은 의지가 강해서 줄기를 높게 세우고, 이런 게 다 다르지만 이런 것이 다 산림을 만드는 거죠. 시적 생태계를 만드는 거죠. 그리고 독자들은 이 생태계를 마음껏 거니는 것이고요.

김도언 : 어느 새 마지막 질문이 될 것 같은데요. 선배님의 서정시가 갖는 보편성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문태준 : 세계 독자들이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보편성이라는 게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거 아닐까요? 아픔과 슬픔. 그리고 그것에 대한 환기. 그건 너무 엄숙한가요? 예를 들면, 몽골 시인이나 중국의 스촨성에서 태어난 시인이나 피레네 산맥 산골짜기에 살고 있는 시인들의 시가 세계적인 독자들을 거느릴 수 있는 힘이 뭘까? 그들은 모두 자기 신화를 이야기하거든요. 자기 부족의 소수민족의 신화에 대해서요. 근데 그게 바로 절박한 생명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인류적 우주적 자아에게까지도 전해지는 것이겠죠. 생명애가 하나의 큰 축이라고 볼 수 있겠죠.

문태준의 비관주의에 대해 내가 따뜻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스러지고 소멸하는 것들을 쓰다듬는 데 이 비관의 힘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의 비관주의는 사랑의 수사학이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걷는 것이라고 한다. 산길 같은 데를 걷는 게 아니라, 사람들도 보이고 마을도 보이는 평지를 오래 걷는 걸 좋아한다고 한다. 걷는 동안 그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고 한다. 그것은 시로 육박하기 직전의, 격렬한 몰입 직전의 정적을 연상시킨다. 그 정적을 통해 사랑의 에너지를 비축하는 것이겠지. 유년의 원체험을 새기면서 어머니의 신앙을 받아들인 그는 불교적 사유를 통해 사바세계의 고통과 고난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것을 문학적으로 발화시키는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수행’과 닮아 있다. 그리고 이 수행의 가장 큰 동기 역시 사랑으로 보인다. 사랑 없이 어떻게 삶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사랑이 없다면 고통도 슬픔도 없다. 발톱에 할퀴고 이빨에 물린 짐승의 통각만이 있을 것이다. 통각만으로는, 생명들은 연대하거나 결속할 수 없다. 생명이 이어져 있다는 그의 자각은 사랑으로 감지하는 고통과 슬픔을 그가 정확하게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그의 유일한 산문집 『느림보 마음』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사랑을 고백할 시간과 장소는 모두 당신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곳과 당신의 말이 가장 멋진 옷을 입을 시간을 고를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오래 전부터 숨겨놓았던 말은 불쑥 당신의 입술바깥으로 나올지도 모릅니다. 마치 우리의 오른손이 호주머니에서 불쑥 동전을 꺼내 들듯이.”

문태준에게 시는, 그렇게 스며 있다가 사랑의 이름으로 호명되는 어떤 것일 테다.
 


시인 문태준은 197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과와 동국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시〈처서處暑〉 외 9편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곳』,『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이 있다. 시 해설집으로 『포옹』,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2』, 『우리 가슴에 꽃핀 세계의 명시 1』이 있다. 산문집으로 『느림보 마음』이 있다. 미당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동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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