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에로티즘을 노래하다
- 박이화의 시
<오홍진 문학평론가, 박이화 시인의 두 번째 시집 [흐드러지다] 추천사>
1. 에로티즘의 향연을 열다
박이화 시는 에로티즘의 향연장을 방불케 한다. 에로티즘은 생명의 진원지이다. 생명의 탄생이 에로티즘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거라면, 에로티즘에 대한 갈망은 실상 생명을 향한 무한한 욕망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문제는 에로티즘의 시적 현현이 아니라, 그러한 에로티즘으로 발산되는 시적 분위기, 곧 에로티즘의 정치학일 것이다. 정치학이라고 했지만, 시에서 그것은 미학의 범주 속에서 의미를 얻는다. 박이화의 시가 에로티즘을 지향하고 있다면, 거기에는 분명 에로티즘을 통해 시인이 구현하려는 세계의 실재(the real)가 있다. 실재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쉽게 융합될 수 없는 세계이지만, 그럼에도 이 세계-현실의 너머를 사유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에로티즘이란 실재는 이런 점에서, 지금 이곳의 우리가 놓치고 있는 어떤 실재를 계속해서 사유하도록 만든다. 사회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에로티즘이 넘쳐나는 사회에서, 박이화 시의 에로티즘은 어떤 실재의 세계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을까?
「봄과 여자와 고양이」라는 시를 먼저 보자. 이 시에서 시인은 봄과 여자와 고양이의 공통점을 시화한다. “이제 막 겨울에서 젖 뗀/ 호기심 가득한 봄”이라는 시구에 나타나듯, 시인은 봄-여자-고양이의 속성을 사춘기의 예민한 감수성에서 찾는다. 예민한 존재는 한편으로는 반항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없이 다정다감하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하는 존재의 삶은 시시때때로 변하는 봄의 날씨와 상당히 닮아 있다. 시인은 이러한 봄의 특성을 여자와 고양이에게 부여함으로써 사춘기의 호기심에 짙게 물든 존재를 시의 세계로 불러들인다.
요컨대 에로티즘을 향한 시인의 관심은 무엇보다 사춘기 소녀의 성(性)에 대한 호기심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중년 여성과 사춘기 소녀의 시간적 경계를 넘나들며 시인은 나이가 들수록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그 시절의 감수성을 거듭 확인한다. 이를테면 「청보리밭」의 시적 화자는 “몇 날 며칠 깎지 않은 수염처럼/ 거칠고 꺼끌꺼끌한 보리밭을 지날 때면/ 옛 남자를 본 듯 반갑고 가슴 뛴다”고 고백한다. “억센 야성의 그리움”이라는 시구에 드러나는바, 시인은 잘 정돈된 잔디밭이 아니라, 정돈되지 않은 청보리밭에서 생의 희열을 느낀다. 바람이 불수록 청보리밭은 “고랑마다 더 비리고 축축한 청보리 냄새를 풍”긴다.
이처럼 이 시에는 중년 여인의 완숙한 에로티즘이 펼쳐져 있지만, 동시에 자신의 모습과 다른 대상을 향한 사춘기 소녀의 반항적 심성 또한 그 이면에 깔려 있다. 사춘기 소녀의 ‘봄’은 중년 여성의 ‘가을’과 어울려 사춘기 소녀도, 중년의 여성도 아닌 에로티즘의 새로운 형상을 빚어낸다. 박이화는 한창 피어 흐드러진 사랑의 기억을 가슴에 품은 채 “이 상습적인 봄날”(「중독」)의 환각에 중독된 여성 화자를 시의 전면에 내세운다. 해마다 봄-계절은 오지만, 시간의 흐름을 견디지 못한 몸-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올 봄과 돌아오지 않는 몸 사이에서 박이화의 에로티즘이 탄생한다면, 그리하여 “백주 대낮/ 푸른 잎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출렁이는 왕벚꽃의 싱숭생숭한 체위”를 그녀의 시에 그대로 대입할 수 있다면, 박이화의 시가 에로티즘에 중독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우리는 분명히 알게 된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봄’에 중독되어 있는 것이다. 봄도 봄 나름일 터, 사춘기 소녀의 봄은 여전히 봄이지만, 중년의 나이를 넘긴 여인에게 그 봄은 다시 와도 즐길 수 없는 봄일 뿐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중독된 봄은 도대체 어떤 ‘봄’일까? 표제작 「흐드러지다」를 보도록 하자.
그러나 으스러질 듯 나를 껴안고 있던 그대 팔이
잠들면서 맥없이 풀어지듯
때가 되면
저 난만한 꽃잎도 시나브로 가지를 떠난단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눈꺼풀 스르르 내려앉는 그 천만근의 힘으로
때가 되어 떠나는 일 그러하듯
때가 되어 꽃피는 힘 그 또한
누가 말릴 수 있을까?
때가 되어
그대 앞에 만판 흐드러진
내 마흔 봄날도 분명 그러했을 터
- 「흐드러지다」 4~6연
간밤의 거친 비바람을 견뎌낸 “꽃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도리어 화사하다”(같은 시 1연). 아무리 거세게 비바람이 몰아쳐도 꽃은 떨어지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아직 때가 안 되”(2연)었기 때문이다. 수분(受粉)을 위해 꽃은 온 힘을 다해 악착같이 가지에 매달려 있다. 그것은 강요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꽃의 자연(自然)이다. 시인은 이러한 꽃의 자연을 인간의 삶에 대입한다. 수분을 끝낸 꽃은 시나브로 가지를 떠난다. 이 또한 꽃의 자연이다. 때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떠나지 않았다면, 때가 됐으므로 이제는 주저 없이 떠나야 한다.
그러므로 흐드러지는 순간은 한창의 시절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지를 떠나야 하는 ‘낙화’의 순간을 예기하기도 한다. 때가 되면 악착같이-으스러지게 나를 껴안고 있던 그대의 팔도 맥없이 풀어진다. 영원히 가지에 붙어 살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당신을 껴안고 있는 그 순간의 감각만은 시간이 흘러도 남아 있다. 한때 흐드러졌던 존재의 감각은 몸의 감각으로 살아남아 “거대한 비밀의 제국”(「나의 몽유도원」)처럼 상황이 무르익으면 언제가 표면화될 준비가 되어 있는 셈이다.
“내가 아는 모든 거품은 포근했다”(「거품」)고 시인은 이야기한다. “한순간 꺼지는 것이 거품이라지만/ 그 거품 속에서 애벌레는 네 번의 허물을 벗고/ 우화등선 곤충이 된다”. 허물을 벗는 건 더 이상 애벌레가 아니라는 표시이다. 허물을 벗고 흐드러지게 피어 한 생을 누린 존재는 이제 그 거품의 포근함을 기억 속에서나마 감각으로 느낀다. 박이화의 이번 시집에는 자연 속 생명의 적나라한 에로티즘이 묘사되고 있는바, 시인은 그러한 생명들의 에로티즘을 눈으로 ‘느끼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희미해진 몸의 욕망을 한없이 그리워한다. 생명들의 에로티즘은 항상 기습적으로 시인의 시선에 포착된다. ‘기습적’이란 말의 의미는 생각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는 순간 몸이 반응하는 감각의 향연이 박이화 시에 나타나는 에로티즘의 본질에 해당되는 것이다.
대낮도 벌건 대낮에 발정 난 도둑고양이 두 마리 난데없이 내 집 담장을 타 넘어와 다짜고짜 짝짓기한다. 몸이 있는 것들은 짝이 있고 짝이 있는 것들은 저렇듯 발칙하게 후배위를 아는구나. 아침저녁 공공연하게 내 입속을 들락이는 숟가락도 수저통 안에선 버젓이 후배위로 누워 있고 퍼런 군용 담요 위에서 삼팔광땡 철썩 들러붙던 화투패도 그 아니 기막힌 후배위냐? 아랫도리 미끈한 배롱나무 아래서 저놈들 마침내 제 볼일 다 보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부리나케 담장 너머 내뺀다. 끝내 서로 일별조차 없이! 하기사 한때 사랑의 불길도 활활 달아오른 연탄처럼 타오르면 오를수록 이별의 밑장 쩌-억 달라붙던 후배위 아니더냐? 아무리 누가 걷어차거나 찬물 끼얹어도 벌겋게 한몸으로 나뒹굴던 저 환장할 후배위 아니더냐
- 「후배위」 전문
발정난 도둑고양이 두 마리가 후배위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시적 화자는 목격한다. “난데없이”라는 시어에 드러나듯, 화자는 고양이들의 후배위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라본다. 하긴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색정에 들뜬 고양이들의 소리가 싫어 훠이훠이 손을 들어 내쫓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실제의 현실에서나 벌어질 법한 일이다. 시의 공간에서는 시인이 꿈꾸었던 모든 일들이 실현된다(실현되어야 한다). 상상의 힘으로 구축되는 시의 세계는 지금 이곳에서는 불가능한 일을 꿈꾼다는 점에서, 정확히 실재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실재는 상징계의 바깥에서 상징계에 갇힌 존재들의 삶을 끊임없이 교란한다. 벌건 대낮에 펼쳐지는 도둑고양이들의 질퍽한 정사-후배위가 시적 소재로 문제시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도둑고양이의 후배위를 목격한 시적 화자의 눈에는 일상의 온갖 일들이 후배위의 장면과 교차된다. 이를테면 숟가락은 수저통 안에서 후배위로 누워있고, 군용 담요 위의 화투패 또한 후배위로 누워 있다. 화자의 눈에 비친 세상은 온통 후배위로 불타오른다. 뜨거운 사랑을 끝내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부리나케 담장 너머”로 내빼는 도둑고양이들을 보며 시인은 시간이 흘러도 사라질 수 없는 열정을 확인한다.
「붉은 화병」을 참조한다면, 그 열정을 품은 존재는 “아무도 갈아 주지 않는 사이/ 꽃도 물도 마른 지 오래”일 때조차 “그 한철/ 그때가 내 몸을 열어/ 수련처럼 깊숙이 긴 대궁 적시던” 감각을 여전히 품고 있다. “한때 내 안의 7할을 채웠던 물기”가 마른 지 오래이지만, 그 물기를 향한 욕망은 지금도 살아남아 몸속에서 꿈틀대고 있다. 물기 어린 몸을 향한 욕망은 사랑의 욕망과 다르지 않다. 나이가 들어도 놓을 수 없는 게 사랑이라면, 봄과 여자와 고양이의 에로티즘은 바로 이러한 사랑의 본질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시인은 몸에 새겨진 사랑의 감각을 끊임없이 바깥으로 불러내고 있다. “내 안의 이 속일 수 없는 짐승의 냄새”(「덫」)가 사랑의 감각을 암시한다면, 그녀의 에로티즘은 무엇보다 이 냄새-감각과 연동됨으로써 시의 언어로 표현된다고 하겠다.
2. 범람하는 향기에 젖다
박이화는 이번 시집에서 냄새=향기에 대한 감각을 다양한 맥락으로 시화하고 있다. ‘비 냄새’에서 당신의 몸 냄새를 떠올리는 「범람」에서 시인은 감각으로 각인된 그리움의 양상을 시로 표현한다. 그리움의 감각은 몸에 새겨진 감각으로부터 뻗어 나온다. 그리움은 정신적인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 정확하게는 몸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당신의 몸 냄새를 지울 수 없어 시적 화자는 당신을 그리워한다. “시시때때 온몸을 휩쓸고 지나간/ 격렬한 당신 땀방울 때문”에 내 몸의 제방 또한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당신의 땀방울이 내 몸의 제방을 무너뜨린다는 상황 설정이 암시하는 대로, 감각은 아주 세밀하게 몸속으로 스며든다. 사람은 잊을 수 있어도, 그 사람의 몸에 대한 감각은 쉽게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시인은 냄새라는 감각을 통해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범람’이라는 시의 제목에 나타나는바, 몸속의 물기는 상황만 설정되면 쉽게 몸 밖으로 흘러넘친다. 그것은 이성(理性)의 문제도 아니고, 감정의 문제도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감각의 문제에 해당되거니와, 감각이 문명 세계의 외부로 쫓겨난 이유는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겠다. 이를테면 「밤꽃」에서 시인은 “첩첩산중 깊은 밤 깊은 곳에서 하필 내 남자의 체취를 풍기며 나를 휘영청 흔들어 놓는” 밤꽃을 이야기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밤꽃 냄새 자체가 아니라, 그 냄새가 “깊은 밤 깊은 곳”에서 스며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대낮의 밤꽃 냄새와 깊은 밤 깊은 곳에서 맡는 밤꽃 냄새는 얼마나 다른가. 이성의 그늘로부터 생성되는 밤꽃의 향기는 냄새를 맡아도, 맡지 않은 척 해야 하는 실재-금기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시인은 밤꽃 냄새에서 “내 남자의 체취”를 맡았다고 고백한다. 냄새를 맡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밤꽃 냄새를 맡는 순간, 다시 말해 내 남자의 체취를 맡는 순간 몸의 물기는 말 그대로 범람한다. 몸속에 새겨져 있던 온갖 감각의 기억체들이 밤꽃 향기를 계기로 하여 몸 밖으로 한없이 밀려나온다. “월경마저 찔끔거리는 이즈음 나”(「꽃들에겐 미안하지만」)의 상황과는 상관없이 펼쳐지는 몸의 감각-혁명은 에로티즘이 결국은 감각의 문제임을 에둘러 드러낸다. 감각은 인위적인 게 아니다. 「시절, 시절들」에 표현된 것처럼 감각은 “풀밭만 보면/ 무작정 달려가 얼굴을 묻던 시절”의 경험이 아니면 몸속에 새겨질 수 없다. 감각은 만든 것이 아니라 ‘저도 모르게’ 새겨진 것이다. “토끼풀꽃보다 더 비릿한 날비린내”의 이 감각을 문명-이성이 지배하는 이 세계로 어떻게 하면 이끌어올 수 있을까?
「피차 짐승 아닌 꽃 없고」에서 시인은 “갑자기, 느닷없는,/ 이 기습적인 향기에 화들짝” 놀란 존재를 묘사한다. “여러 날 동안/ 있는 듯 없는 듯/ 꽃대 속에 가만히 웅크리고 있던 국화”가 “발정난 짐승처럼 컹컹 맹렬한 향기 풍기고 있다”. 식물의 향기를 발정난 짐승의 향기로 표현한 것도 재미있지만, 그보다 더 주목할 것은 국화의 “이 기습적인 향기”에 저도 모르게 몸이 단 시적 화자의 모습이다. 국화는 향기로 자신의 살아 있음을 표현한다. 그러니 그것을 발정으로 표현한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렇다면 시적 화자의 발정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살아있는 것들은 그리움 또한 필사적”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상처끼리는 한 핏줄이었구나”라며 애달픈 마음을 슬쩍 내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본다면 무언가를 향한 그리움은 항상 상처를 전제로 한다. 무언가를 그리워한다는 건 그 무언가가 지금 여기에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피차 짐승 아닌 꽃이 없다면, 사람들이 벌 나비가 찾아드는 꽃들의 화려한 시절을 그리워하는 건 당연하다. 시간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는 사람들이 페로몬에 집착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페로몬」에서 시인은 “가임과 불임이 오락가락하는 경계에” 처한 시적 화자를 호명한다. 몸을 속여야 마음 또한 속일 수 있다. 죽은 자들이 남긴 체액으로 사람들은 회춘(回春)을 기약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입은 상처를 사람들은 죽은 자들의 “무언의 체액”을 통해 치유하려고 하는 것이다.
시간의 폭력 앞에서도 멈출 수 없는 이 생식에 대한 욕망을, 시인은 살아 있는 존재라면 벗어날 수 없는 자연으로 간주한다. 숨을 내려놓지 않는 한 몸은 살아 있고, 몸이 살아 있는 한 생식을 향한 욕망 또한 여전히 살아 있다. 「감물」을 따른다면 그것은 “한번 들면 절대 빠지지 않는 감물처럼 한평생 치대고 비벼도 어쩔 수 없는 이 시퍼렇고 떨떠름한 그리움”의 욕망과 전혀 다르지 않다. 박이화는 지금 시간의 폭력을 견디며 오롯이 제 길을 걸어가는 존재를 바라보고 있다. 에로티즘에 상기된 얼굴로 그녀는 세상을 직시한다. 페로몬으로 잃어버린 야성을 찾고 싶어 할 정도로 그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시나브로 변화해가는 몸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거기서 그녀는 무엇을 찾았을까?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죽은 듯한
새끼 고양이가 아파트 화단 구석에
무심히 방치되어 있다
어미가 그 곁을 수시로 맴돌므로
치워 주지도 묻어 주지도 못하는 사이
벌써 한 패거리 파리 떼들
풍악 소리 울리며 몰려와 붕붕거리고 있다
저 비릿한 주검의 자리가
어떤 놈들에겐 흥청망청 꽃자리였다니
누렇게 달라붙은 눈곱마저 달디단 꿀이었다니
그러고 보니 이따금
커다란 화병 속에 한 아름 꽃을 꽂아 놓고
시시때때 코를 박고 킁킁대던 나도 어쩌면
저 몹쓸 파리 떼와 다를 바 없었구나
시름시름 비명 같은 향기 지르며 시들어 갔던
꽃들에게 나는,
한없이 치사하고 야속한 그 어떤 놈이었구나
- 「어떤 놈」 전문
살아 있는 생명에게 에로티즘은 아름다운 행위이다. 동물의 생식 본능을 넘어서는 쾌락이 인간의 에로티즘에 내재되어 있든, 아니든 에로티즘 자체는 생명의 연속성을 잇게 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살아 있는 존재들의 삶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분명히 형성하고 있다. 위 시에서 시인은 꽃의 향기가 죽음의 향기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예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새끼 고양이의 시취(尸臭)를 맡고 몰려온 파리 떼를 보며 시인은 “저 비릿한 주검의 자리가/ 어떤 놈들에겐 흥청망청 꽃자리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파리 떼들이 서 있는 자리는 꽃향기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이 서 있는 자리와 동일하다. 고양이의 시취가 꽃향기와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은, 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현재 상황을 되돌아보게 하는 시적 기제로 작용한다.
잃어버린 야성을 찾기 위해 페로몬을 사용하는 인간의 방식은 “한없이 치사하고 야속한 그 어떤 놈”의 방식에 불과하다. 다른 생명의 죽음(페로몬은 시취가 아닐까)을 자신의 새로운 탄생으로 연결시키는 사고방식은 고양이의 시체 위를 붕붕 날아다니며 시취에 탐닉하는 저 파리 떼들의 욕망과 정확히 닮아 있다.
시인은 「색계」라는 시에서 “성과 속 해탈과 일탈이 따로 없는/ 저 징-한 꽃들의 세계”를 ‘색계’로 표현했다. 색계는 말 그대로 색(色)의 세계이다. 색은 욕망을 욕망한다. 색에 탐닉하는 자는 색의 이면에 또 다른 무엇이 있는가를 사유하지 않는다. 파리 떼에게 시취-향기 너머의 세계를 탐색하라고 요청할 수는 없다. 파리 떼는 시취에 홀려 정신을 못 차리는 게 자연이다.
요컨대 파리 떼들은 몸에 각인된 자연에 따라 죽은 고양이의 주변으로 모인다. 그렇다면 사유하는 인간이 죽은 고양이의 시취에 홀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편으로 인간의 색-욕망이 파리 떼의 욕정과 다르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박이화 시의 에로티즘이 육욕의 세계를 넘어 해탈의 경지로 나아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성과 속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면, 육욕의 세계-色과 해탈의 세계-空 또한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적과의 동침」을 예로 든다면, “극이 극을 극하여 상생”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녀에게 적은 무엇일까? 에로티즘-육욕일까, 아니면 에로티즘-해탈일까?
3. 에로티즘의 그늘을 보다
박이화의 시에 표현되는 에로티즘은 육욕과 해탈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그 통속적인 봄날의 선데이서울”(「선데이서울」)로부터 도둑 고양이들의 후배위에 이르는 여정이 육욕적 에로티즘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면, 「구르메 달 가드키」 「잠들면 다 꿈이고」 「다시, 미혹」 등에 이르는 작품들은 에로티즘을 통해 해탈의 경지로 나아가려는 존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구르메 달 가드키」에서 시인은 황진이와의 스캐들로 파계승이 되었다는 지족 선사를 시의 세계로 불러낸다. 당대의 가장 존경받는 선승이었던 지족 선사가 “그만 술 중의 술 방중술에/ 십 년 염불 도로아미타불 공염불”에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
시인은 ‘봄’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무리 지족 선사라고 해도 “더욱이 때는 봄밤이고 보면/ 소쩍새 만공산 좆죠 좆죠 울어 쌓는/ 달빛 질펀한 봄밤이고 보면” “상기병통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일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시의 제목을 빗대어 표현한다면, 욕망은 구름에 달 가듯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욕망 자체를 내려놓지 않는 한 시시때때로 스며드는 욕망의 그늘을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시인은 “알고 보면 그는 이미/ 만중운산 구름처럼/ 몸과 마음의 경계가 없었던 거라/ 무주강산 달밤에 빈 배의 노를 젓듯/ 유유히 여인의 뱃전에서 노를 저었던 거라”고 이야기한다. 몸과 마음의 경계가 없다면 ‘배’의 구분 또한 없다는 것일까? 하긴 여인의 뱃전에서 무심하게 노를 저을 줄 아는 이라면, 육욕의 세계는 허무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허무는 허(虛)와 무(無)의 복합어이다. 육욕의 대상을 향한 마음-욕망이 없는 상태라면, 지족 선사의 파계는 세속에 젖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소문에 불과할 수도 있다. 시인의 말마따나 “그에게는 해탈도 열반도/ 이화에 월백하는 것이어서/ 구르메 달 가드키 가는 것이어서” 황진이와의 스캔들을 주저 없이 만들어냈는지도 모른다. 요컨대 지족 선사의 스캔들을 육욕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사람들 자체가 일장춘몽의 미혹 상태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시인은 강조한다.
「다시, 미혹」에서 시인은 “고색창연한 햇살 아래/ 하해 같은 봄날을 기다리는 저 나무”의 꿈을 일장춘몽으로 표현한다. 봄이 되면 나무는 “저 처처의 가지마다/ 삼천 송이 꽃”을 피울 거라고 다짐한다. 하지만 봄만 되면 피어나는 나무의 꿈은 가을이 되면 하루아침에 무너진다. 가지마다 꽃을 피우는 현상은 가지마다 꽃이 지는 현상과 더불어 진행된다. 나무의 꿈은 그러므로 미혹일 뿐이다. 봄이 되면 꽃을 피우는 나무가 자연인 것처럼, 가을이 되면 꽃을 떨구는 나무 또한 자연이다.
봄 나무가 가을을 꿈꾸지 않아도 가을은 오고, 가을 나무가 봄을 꿈꾸지 않아도 봄은 온다. 무언가를 꿈꾼다는 건 시간적으로 보면 이미 와 있는 것을 꿈꾸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꿈에서 깨어나면 아무것도 아닌데, 꿈속에서는 그 일이 현실이 되어 꿈꾸는 이를 미혹에 빠뜨린다. 황진이와 만난 지족 선사는 어떤 꿈을 꾸었을까? 그리고 지족 선사의 스캔들을 들은 사람들은 어떤 꿈을 꾸었을까? 그들이 벌인 일이 다만 일장춘몽에 불과한 것이었다면, 그 일을 마치 사실처럼 뇌까린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한 것일까?
이건 농담이지만 춤 중에는 우선멈춤도 있고 엉거주춤도 있다는데 각설하고, 어떤 춤꾼도 춤만으론 살 수 없어 주춤주춤 고픈 배 채우러 들리는 간이식당. 그 한쪽 벽면엔 낡은 선풍기 한 대 온종일 허공을 껴안고 슬로우 슬로우로 돌아가고 그 맞은편엔 특선 점심 메뉴표가 바람 앞에 치맛자락 펄럭이듯 펄럭이고 있다. 거기 가라사대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돼지는 죽어 위대한 순댓국을 남긴다나? 나 오늘 저 불멸의 말씀 한술에 더 이상 배고프지 않나니. 먹지 않아도 배부르나니. 그런데 한술 더 떠 저 늙은 식당 여자, 허름한 불빛 아래 산전수전 다 겪은 뻐드렁한 얼굴로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듯 제 팔자 뒤집듯 누런 호박전 히떡 잘도 뒤집는 여자, 산은 산이나 물은 셀프란다. 나무관셈! 선승은 첩첩골골 기암절벽 천년 암자에 있지 않고 이 속세 지하 무도장 한켠 간이식당에 계셨고녀!
- 「산은 산이나 물은 셀프다」 전문
간이식당에는 여자는 없고 선승만 있다. 아니 여자만 있고 선승은 없는지도 모른다. 산은 산이나 물은 셀프라는 말장난을 말장난이 아닌 것처럼 만드는 이치는 사실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의 행동에서 나온다. 누가 제일 먼저 말했던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산이 산이고 물이 물이려면,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어야 한다. 그러니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 된다는 선승들의 게송을 저 멀리에 두고, 시인은 “산은 산이나 물은 셀프다”라고 외친다. “이 속세 지하 무도장 한켠 간이식당” 여주인은 누런 호박전을 잘도 뒤집으며 ‘산은 산이고, 물은 셀프다’라고 소리친다. 선승이 첩첩산골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들끓는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냥저냥 살아가는 속세의 장삼이사(張三李四) 중에서도 선승에 못지않은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 그렇다면 세속이 곧 깨달음의 장소로 화하는 변곡의 지점은 무엇일까?
시인은 “저 늙은 식당 여자”의 거침없는 말 속에서 그 길로 나아가는 계기를 본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돼지는 죽어 위대한 순댓국을 남긴다면, 저 늙은 식당 여자는 죽어 무엇을 남길까? 사소한 말 한 마디에 우주의 진리가 실려 있다는, 어떻게 보면 가장 일상적이고, 어떻게 보면 가장 비일상적인 화법을 통해 시인은 에로티즘으로 물들어 있는 자신의 시 세계를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에 배치한다. “구르메 달 가드키” 제 몸의 허물을 벗은 지족선사처럼, 식당 여자 또한 “구르메 달 가드키” 제 몸에 달라붙은 업장들을 말로써 풀어냈다.
이렇게 본다면 박이화의 시는 정확히 식당 여자의 화법과 닮아 있다. 산은 산이고 물은 셀프라고 식당 여자는 말한다. 산은 산이고, 시는 에로티즘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시와 물의 거리가 셀프와 에로티즘의 거리를 만든다. 하지만 그 거리를 ‘거리’라는 말로만 표현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물은 셀프라는 식당 여인의 말을 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시는 에로티즘이라는 시인의 말을 일상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요컨대 시인은 에로티즘을 통해 일상의 내부로 다시 들어오는 역설적 도정을 시화한다. 그것이 설사 미혹이더라도, 그래서 잠에서 깨어나면 꿈속의 세계를 향한 그리움이 더욱 더 커질지라도, 시인은 이 에로티즘의 시업(詩業)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황혼이
내 집을 향해 기우는 건 우연한 일이 아니다
빈집에 적막처럼 숨어도
복사꽃보다 불콰히 나를 덮쳐 오는 건
그래, 놀빛에 흐드러져
너를 마중 가는 건
저무는 바람 탓이 아니다
도중에 술집과 여관이 추문처럼 꼬리 물고
약국이 많고
멀리 주유소 불빛이 추억처럼 점멸하는
너의 집 신호등 앞에서
날마다 이렇게 자청하여 섰는,
매연보다 탁한 그리움에 정체되어 보는
이 일이 결코 일몰 때문만은 아니다
- 「서향」 전문
이번 시집의 4부에는 “비릿한 날비린내”(「시절, 시절들」)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는 시들이 많이 실려 있다. 「하수」를 참조한다면, 이러한 그리움은 무엇보다 “구석구석 음악이 배암처럼 스며들 때 비로소 능글능글 춤을 갖고 놀게” 되는 상태를 지향한다. 몸을 갖고 놀 때가 되어야만 제대로 춤을 출 수 있다. 돌려 말하면 그 상황은 “지난 내 검도 사부님은 시선을 칼끝에 집중시키지 말라셨지 두 눈이 매이면 생각이 매이고 생각이 어딘가에 붙들리면 검의 길을 알 수 없다고 그때 일촉즉발, 상대의 칼날이 바람처럼 내 몸을 지나”(같은 시 2연)가는 상황과는 전혀 다르다. 몸을 갖고 놀려면 몸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칼을 갖고 놀려면 칼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천하제일 춤꾼은 몸과 음악이 하나 된 사람 천하무적 검객은 몸과 검이 하나 된 사람”(같은 시 3연)이라는 시적 진술은 정확히 이 지점을 가리킨다. 거리가 있되, 그 거리를 거리로 생각하지 않는, 달리 말해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의 시선이 제거된 상태를 시인은 “하나 된 사람”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리움은 따라서 이러한 경지를 향해 시나브로 나아가는 존재의 그리움이 아니면 안 된다. 요컨대 그리움에는 그리워하는 대상이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위에 인용한 「서향」에 나타나듯 이 세상의 모든 현상에는 우연한 일이 없다.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일이 인과관계에 묶여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위 시에서 시인은 긍정어법이 아니라 부정어법을 사용하고 있다. ‘아니다’라는 시어를 반복함으로써 시인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아니다’라는 말을 단순한 부정어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다. ‘아니다’의 이면에는 수없이 많은, 그리하여 딱 하나로 집어 말할 수 없는 긍정어들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박이화는 시를 통해 에로티즘을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의 이면에는 그러나 여전히 말하지 않은, 혹은 말할 수 없는 ‘아니다’의 기억들이 숨어 있다. “어제 건드렸던 누군가 내일도 모레도 다시 손길 주면 죽지 않는”(「유츄프라카치아」)다는 유츄프라카치아(꽃)를 “또 다른/ 내 음지의 이름이여!”라고 시인은 외치듯이 고백한다. 음지가 있다면 양지가 있을 것이다. 그녀 시의 양지에 에로티즘이 있다면, 그녀 시의 음지에는 유츄프라카치아가 있다. 「서향」이라는 시는 어떻게 보면 박이화의 시가 이 음지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음을 에둘러 보여준다. ‘서향’이라는 말이 의미하는바 그대로 그녀는 서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 그곳이 음지인 까닭이다. ‘아니다’라는 말을 계속해서 읊조리며 비릿한 것을 향한 그리움에 몸을 떠는 시인의 뒷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그 뒷모습이 에로티즘의 그늘 속에 감추어진 그녀의 시라는 것을 굳이 말할 필요는 없으리라.
'한국 현대시 > 시인(詩人)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양희 _ 시에 대한 생각 (0) | 2022.05.30 |
---|---|
이정록 시인 (0) | 2022.05.08 |
길과 말의 어려움을 찾아서 _ 권경인 (0) | 2022.04.27 |
박제영 시인 (0) | 2021.12.08 |
전동균 (0) | 2021.1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