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낮설게 하기의 아름다움
저는 평소에 시는 언어로 짓는 사원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시(詩)라는 말의 한자어는 말씀 '언(言)'과 절 '사(寺)'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왜 절 사자를 거기에다 붙였을까요. 다 아시는 대로 절은 용맹정진하는 구도자들의 수행장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시를 쓰는 사람들도 구도자의 정신과 자세로 시를 쓰라는 뜻에서 '시(詩)'자가 만들어졌다고 생각됩니다.
내가 언어로 사원을 짓기 시작한 것은 1965년 이화여대 3학년 때로, 박두진 선생님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서 등단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등단 통로가 두 군데밖에 없었습니다. 신춘문예 당선과 {현대문학}지 추천 통과밖에 없었는데, 현대문학이 유일한 문예지였습니다. 올해로 내가 시인의 길을 걸어온 지가 35년이 됩니다. 시의 나이가 35세가 되는 셈이지요. 그런데 그 동안 걸어온 삶의 길이나 시의 길이 너무 꾸불텅해서 내 자신을 바꾸는 데도 20여 년이 걸렸습니다.
이 나이쯤에는 앞서간 여러 사람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예수도 석가도 이 나이쯤에 삶의 절정에 다다랐지요. 예수는 33세에 인류를 구원했고, 소월(素月)도 영랑(永郞)도 파울 첼란도 실비아 플라스도 요절했지만 불멸의 시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도 컴퓨터를 하지 못해서 원고지로 글을 쓰는데, 원고지 앞에 앉으면 사각의 모서리가 절벽같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내가 그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여러분이 제게 왜 시를 쓰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잘 살기 위해서 시를 쓴다"고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또 누군가 시가 밥 먹여주냐고 물으면, 나는 "시가 내 정신의 밥이다"라고 분명히 얘기할 수 있습니다.
쌀로 된 이밥은 우리 배를 부르게 하지만, 시는 우리의 정신을 살찌우는 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한 편의 시를 가슴에 넣고 하루를 너끈히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한 편의 좋은 시가 가슴 속을 따뜻하게 해서 평생을 거기에 기대면서 풍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한 끼의 밥은 굶을 수 있어도, 정신의 허기는 사람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시가 밥의 길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시로써 배부른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시인이 되려고 마음먹은 사람들이 돈도 밥도 안 된다고 주저하고 두려워한다면, 이런 사람들은 아예 다른 길로 가야지 시인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피나는 노력 없이, 오랜 습작 기간 없이 시인이 되려 하고 좋은 시를 쓰겠다는 생각은 좋지 않은 생각입니다.
니체는 일찍이 '좋은 글은 피의 여로를 거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피로 쓴 글만이 진실하다고 얘기했고, 불멸의 명작을 남긴 플로베르는 글쓰기의 어려움을 가리켜, '내 심장과 두뇌를 짜서 그걸 고갈시키는 과정이다'라고 갈파했습니다.
그만큼 작품 쓰기가 어렵다는 걸 나타내는 말입니다. 또 그는 '한 마디의 말을 찾기 위해서 나는 하루 종일 내 머리를 쥐어짰다'라고도 토로했습니다. 오늘날 활동 중인 시인들이나 시인 지망생들조차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이 두 사람이 얘기한 것은 그만큼 시인 정신이 치열해야 한다는 것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자신에게 반문해 봅니다. 너는 과연 피의 여로를 거쳤느냐? 너의 심장과 두뇌를 짜서 토로하는 과정을 거쳤느냐? 그렇게 반문하면 어떤 때는 말문이 콱 막혀 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 수많은 밤을 정말 피 흘리는 것처럼 지샌 적도 많고 수많은 파지를 버렸습니다. 수많은 파지를 버린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한 편의 시를 만나기 위해서 몇 달이 걸리기도 하고, 몇 년이 걸리기도 합니다. 몇 년 걸린 나의 시 중에 [직소포에 들다]가 있습니다. [직소포에 들다]는 13년 만에 완성된 시입니다.
[마음의 수수밭]은 8년 만에 얻어졌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면서 얻어지는 시가 있는가 하면,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그믐달]이라는 시는 30분 만에 썼습니다. 왜 그랬는가 하면 포도가 익어서 향기가 나듯이 어머니가 늘 내 가슴속에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온 겁니다. 그런 게 흔하지는 않고 단 한 편밖에 없습니다.
나는 낯선 곳에 여행을 갔다가 오면 금방 시를 쓰지를 못합니다. 그때그때 메모해 두었다가 다시 한번 그곳에 찾아가서 그때 내가 왔던 심정과 지금 내가 여기 서있을 때의 심정이 어떤가 내 자신을 닦달해 봅니다. 너는 이걸로 올라가서 시를 쓸 수 있겠는가. 그래서 거기서 느낌을 메모해 두었다가 와서 겨우 시를 완성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과작(寡作)인지 모르지만, 과작이라고 해서 나쁜 것도 아니고 다작(多作)이라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무슨 시를 몇 편이나 쓰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 지하철 계단에서 번개 같은 시상을 매만지며
나는 메모지를 꼭 넣고 다닙니다. 그때그때 생각이 떠오르면 장소를 생각하지 않고 멈춰 서서 그 생각이 떠날까봐 메모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총을 받은 적도 많습니다. 지하철 계단을 올라갈 때 사람들이 올라가는데 무슨 생각이 팍 떠오르는 겁니다. 생각이 떠날까봐 딱 멈춰 서 있는데, 뒤에 올라오는 사람들이 가지를 못하고 짜증을 내는 겁니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찰나에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한번은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내 차례가 되었습니다.
뒤에 사람들이 서 있고 내가 타야 하는데 문득 시상이 떠올랐습니다. 눈총을 받는 게 차라리 낫지 싶어서, 옛날같이 연기처럼 날려보내지 않는다는 생각에 버티고 서 있다가 겨우 한 줄을 건졌습니다. 그럴 때의 희열이라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누가 미친 여자라고 해도 좋습니다. 자기가 정말 붙잡아야 된다는 것을 메모해 두지 않으면 다 사라집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메모한 노트가 지금 수십 권에 이릅니다. 그래서 그걸 보면서 나는 돈이 많은 부자가 아니라도 메모 부자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볼 때는 참 웃기는 여자라고 할지 몰라도 나는 참 행복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시에 대해서 이렇게 순정을 바치거든요. 그 순정을 시가 알아주었던지 시가 나를 받아줬어요.
옛날에는 내가 시를 받아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시가 나를 받아줘야지 한 편의 시를 만들 수 있습니다. 아, 이 시가 나를 받아주고 있으니까 시와 함께 살면서 어떤 걸 겪더라도 나는 그걸 고통이던 괴로움이던 행복한 괴로움과 행복한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시를 내 생업으로 삼는 게 팔자라면, 시를 팔자로 삼아 세상을 남들이 아무리 빨리 가도 나는 터벅터벅 낙타처럼 걸어가려고 합니다.
등단 18년 만인 1983년에 첫 시집을 냈습니다. 굉장히 늦게 낸 셈입니다. 그 동안 우여곡절을 거치는 동안 시 한편 한편이 너무 구원이고 나의 구명줄이었습니다. 남들이 볼 때는 감동이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시 외에는 아무 것도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시를 구원으로 삼고 계속 시를 썼는데, 두 번째 시집 낼 때까지 내가 그렇게 맹목적으로 사랑을 바쳤지만 짝사랑으로 그치고 마는구나 하는 괴로움 때문에 굉장히 힘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에 딱 차지 않는 시들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상재한 시집이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입니다. 영국의 시인 셀리는 "신이 나에게 묻는다면 때때로 울었노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했는데, 나도 그런 말밖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꾸 눈물만 나는 겁니다. 두 번째 시집은 {사람 그리운 도시}인데, 도시에 그렇게 사람이 많아도 사람이 그립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시집 {하루치 희망}을 낼 때는 언어의 모순을 통해서 세상의 모순을 드러내는 전략을 써 보기로 했습니다.
세 번째 시집을 보면 언어유희, 동의어, 반복어 들이 참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나는 세상에 대해서 발길질을 한번 한 거지요. 왜 말놀이를 많이 했느냐고 사람들이 할지 몰라도 내게는 타당성이 있습니다. 내가 사람들을 많이 만나지 않고 혼자서 갇혀 있을 때 무엇과 놀며 지냈습니까. 만화를 보겠습니까. 무슨 게임을 할 줄 알겠습니까. 나는 말로써 놀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말놀이를 그 책으로 끝내려고 했는데 다섯 번째 {오래 된 골목}에도 조금 들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외로움이 말놀이로도 다 메워지지를 않으니까 그칠 수가 없었습니다. 말놀이를 하고 동의어, 반복어를 씀으로써 내 의식의 전환기를 보냈던 것 같습니다.
네 번째 시집 {마음의 수수밭}을 내기 전까지는 전국 방방곡곡을 여행하며 다녔습니다. 관광여행이 아니라 서울에서 살기가 너무 힘이 들면 살아서 돌아오려고 한 여행도 있었고, 여행을 가서 정말로 살아서 못 돌아오면 안 돌아와도 좋다는 두 가지 생각을 가지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 때의 여행이 나한테는 고행이었고 내 삶의 수행으로 삼았습니다.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닐 때의 경험이 {마음의 수수밭} 속에 많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수수밭}에 가장 애착이 갑니다.
어떤 일이 내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내가 죽고 나면 이 시는 남아 있을 것 아닙니까. 이렇게 해서 다섯 번째 시집까지 나왔는데 생각해 보면 시의 길에는 에누리도 덤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라는 것이 예수의 고난을 상기시키잖아요. 왜냐하면 부활의 환희도 십자가의 수난 뒤에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그 정도로 글쓰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 글쓰기의 궁극은 불교에서 말하는 소신공양(燒身供養)이고 그 결과는 등신불(等身佛)이지 않겠습니까. 그만큼 시에 대해서 어떤 오체투지(五體投肢)를 해야 합니다. 자기 몸을 완전히 바닥에 엎드려서 낮춰야 됩니다. 치열하더라도 겸허하게 치열해야 합니다.
자기 시가 조금 잘 써진다고 해서 턱을 쳐들고 못 쓰는 사람을 무시하면 발전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겸허한 마음으로 치열하게 시를 써 나가야 됩니다. 말하자면 이렇게 힘든 시하고도 나는 한몸이 되어서 정말 평생을 살고 싶습니다. 아무리 괴롭더라도 말입니다. 그건 왜 그런가 하면 시와 같이 있으면 내가 진실 곁에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진실하고 배가 맞는다는 확실한 느낌이 옵니다. 그래서 나는 평생을 시와 같이 살기로 했습니다.
어느 시인은 시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맨몸으로 철조망을 통과한 사람들의 등판과 같다.' 이성복 시인의 이 말을 들으니까 내게 전율이 오더군요. 이제 시를 쓰는 자체도 우리들 삶의 문제잖아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노력의 하나라면 희망이 너무 넘쳐도 시가 안 되고 절망에 너무 질식해도 시가 되지 않습니다. 부정과 긍정이 이중적으로 교차하는 그 자리에 꽃이 핍니다.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됩니다. 자기 폐쇄성에 빠지고 맙니다.
어느날 내가 한강을 지나가는데 아이들이 연날리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연을 보는 순간 '아, 시를 저기에 비교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도 가오리연과 방패연이었습니다. 가오리연은 가볍기 때문에 공중으로 올라가는 시간은 굉장히 빠릅니다.
하지만 굉장히 까붑니다. 요리조리 공중을 까불다가 결국은 균형을 잃고 땅바닥에 꽂히고 맙니다. 반면 방패연은 아주 의젓합니다. 그래서 올라갈 때는 굉장히 힘이 듭니다. 상승 속도가 무척 느리지만 한번 공중으로 올라갔다고 하면 자기 스스로 균형을 잡습니다. 그래서 꽂히는 일 없이 아주 의젓하게 하늘을 가릅니다. 가오리연과 방패연은 외형부터 다르고 몸집은 비교도 안 됩니다.
나는 가오리연을 조금 나쁜 시에, 방패연을 좋은 시에 비교해 봤습니다. 그리고 연도 날리기 전에 절대로 빨리 날려서는 안 됩니다. 잘 만들어서 띄울 때는 아주 높이 올라가고 오래 하늘을 납니다. 마음이 급해서 빨리 날리려고 하면 실패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연을 날릴 때는 얼레를 잡은 손의 역할이 참 중요합니다. 얼레를 잡고 당길 때 줄을 너무 많이 당기면 끊어지고, 느슨하게 당기면 풀어집니다. 그래서 손으로 당길 때는 당기고 놓아줄 때는 놓아줘야지, 균형을 잘 잡아서 높이 올라가고 하늘을 오래 날 수가 있는 겁니다. 연이 빨리 올라간다고 해서 반드시 높이 올라가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래 견디는 것도 아닙니다.
- 내가 아닌 것은 연줄을 끊듯 버려라
어느 스승이 거문고를 앞에 두고 제자한테 물었습니다. 줄을 너무 당기니까 어떻느냐고 했더니 줄이 끊어집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너무 느슨하게 하면 어떻더냐고 했더니 음이 잘 나지 않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문학 지망생들이나 등단한 신인들은 가오리연처럼 너무 빨리, 높이 올라가려고 하고 오래 견딜 줄을 모릅니다.
시대가 너무 급변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시를 써서 등단하려 하고 빨리 시집을 내서 유명해졌으면 하는 욕구가 강합니다. 하지만 시라는 것은 잡초 전략도 아니고 흥부전략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이디어를 쫓아가서 되는 것도 아니고 유행을 따라간다고 해서 시가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기 삶에서 체득을 해야 됩니다.
누구도 시를 써주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자기의 경험도 중요하고 평소의 마음 씀씀이도 중요하다는 게 누구나 시를 쓸 수는 있지만 아무나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의 시에 임하는 태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좀 느리고 좀 미흡하더라도 나는 나여야 합니다. 내가 남이 아니잖습니까. 나는 하나밖에 없는데 그런 나의 개성을 버리고 괜찮다 싶은 것을 닮으려고 하면 그건 벌써 이미 자기가 아닙니다. 자기가 아닌 사람이 시를 써놓으면 좋은 시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아닌 것은 따라가지 말고 버릴 것은 버리는 게 좋습니다. 연도 잘 날다가도 어느 순간 줄이 끊어져서 얼레를 떠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미련 없이 떠나 보내야 합니다. 그걸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시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던 언어들도 어느 땐가는 나와 맞지를 않습니다. 그럴 때는 자꾸 거리에 매달리지 말고 미련 없이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버린다는 것은 자기 안으로 단단해진다는 겁니다. 단단해진다는 것은 어떤 외부의 조건이 닥쳐도 견뎌낼 힘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견뎌낼 힘이 있다면 방패연과 같은 좋은 시를 쓸 수 있게 됩니다. 이런 것은 아주 평범한 것 같아도 중요한 일입니다.
독자의 관심은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고 시 자체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인을 만나보고 싶지만 그 시인의 시가 별로 아니면 시인도 만나보고 싶지 않거든요. 그런데도 요즘의 시들은 너무 바깥에 민감합니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이나 세계에 대해서 새로운 인식도 없이 아주 포즈에 능한 시들이 많습니다. 다변과 요술을 문학적 열정과 혼동하는 시들이 있습니다. 문맥이 잘 안 통하는 시들이 있는가 하면, 전혀 해독이 불가능한 시들이 있습니다. 이름만 덮으면 누구의 시인지도 모르게 비슷비슷한 시들이 있습니다. '
아, 이런 시들은 안 되겠다'는 생각과 함께 나 자신 그런 시들을 보면서 거울처럼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어느 평자가 이런 말에 크게 공감을 했습니다. 이렇게 감동은커녕 공감조차 할 수 없는 시들이 양산되면 너무 위험합니다. 시 독자들이 그렇게 많지도 않은데 자꾸 수가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시도 매력이 있어야 합니다. 시 독자 수도 줄어들고 그 동안 시인한테 갖고 있던 기대나 관심조차도 줄어들게 되면 참 안되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독자들을 걱정하기 전에 시인들 자신이 그 치열성을 놓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여러분도 앞으로 시를 쓰실 분들이 많은 것 같은데, 그걸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요즘 시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80년대를 시의 시대라 하고 90년대를 시의 소멸 시대라고 하잖아요. 나는 그런 표현이 좀 지나치다고 생각됩니다. 소멸이나 쇠퇴라는 말을 쓰기에는 90년대 시가 80년대 시에 결코 뒤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독자들이 시를 외면하고 있고 고립시킨다고 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종이책이 줄어들고 전자책이 나온다고 해도 종이책은 종이책 나름대로 소중함을 갖고 있을 테니 그렇게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의 문명이 디지털화되면 될수록 시의 세계는 자꾸 서정성을 회복합니다.
시라는 게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따라간다고 해서 좋은 시가 아닙니다. 우리의 전통 없이 어떤 실험시가 있겠습니까. 전통이 바탕이 되는 그런 실험시가 제대로 실험시가 되지 전통을 완전히 무시해버리면, 농부들이 그렇게 잘 가꾸어 온 밭에 형편없는 씨를 뿌려서 완전히 농사를 망치는 그런 실험시들은 실험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시의 위기라고 말하는 것 중에 신춘문예에 응모자 수가 날로 늘어가고 문예지의 응모자 수도 늘어갑니다. 각종 문예 창작 학교의 프로그램들이 굉장히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시집이 줄어든다고 해도 많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위기가 아닌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뭐가 더 위기냐 하면 많이 양산되고 프로그램들이 많이 나오는 것은 좋습니다만 시인을 양산하게 되면 치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 치열성을 잃어버릴 경우에 매너리즘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정신적 공황이 생기게 됩니다. 그럴 경우에 오히려 위기가 아닐까, 청소년들의 왜곡된 시 교육이 대학생이 되어도 마찬가지고 어른이 되어도 시에 대해서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날 TV를 보고있는데 수능시험에 대비한 국어시간이었습니다. 어떤 시인의 시를 강의하고 있었는데 전문은 살짝 한번 보여준 다음, 시 한 구절 한 구절을 해체시키고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분석하더니 상징이 어떻고 비유가 어떻고 도치가 어떻고 난도질을 하는 겁니다.
그러더니 시 한 편은 어디로 가고 없고 아주 쓸모없는 수사만 남발되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런 왜곡된 시 교육을 하니 어떻게 우리 청소년들이 시를 제대로 느끼고 이해하고 시를 가까이 하고 사랑할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우리 나라의 입시제도에 정말 분통이 터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걸 없앨까, 위기라고 하지만 경제위기만 위기겠습니까. 문화위기가 나는 더 큰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프랑스와 같은 나라에서는 유치원에서부터 시를 들려준답니다. 학년이 높아갈수록 시를 자꾸 이해시켜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거의 100편을 외운다고 합니다. 그냥 외우는 게 아니고 자기의 가슴 속에 들어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나라같이 시를 획일화시키고 분석하는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미국의 엠허스터라는 대학이 있는데 문학창작이 유일한 필수 과목이라고 합니다. 그 교육 이념이 뭐냐고 하면 종합 사고력을 갖춘 지성인을 양성한다는 것입니다. 국가 경쟁력이 그 학교에서는 문학, 철학, 자연과학에서 나온다고 굳게 믿고 있는 학교랍니다. 그래서 1,600명밖에 안 되는 초미니 학교인데도 미국 전체 인문과학대학에서 1등 자리를 몇 년간 고수하고 있답니다.
이 창작강의를 패스하려고 과외공부까지 한답니다. 일본에도 자매학교가 있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는 언제 이런 학교가 생기겠습니까. 맨 일류학교만 생각하다가 언제 제대로 된 훌륭한 시인 작가가 배출되겠습니까. 정말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인데 개인의 힘이 미약하니까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참 분통이 터집니다.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고 있을 때 왕에게 영국하고 셰익스피어 중에 뭘 택하겠느냐고 누가 물었는데 인도는 버려도 셰익스피어는 포기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답니다. 우리 나라 같으면 뭘 택하겠습니까. 뻔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우리의 옛날 조상들은 시를 짓고 노래하는 걸 자기네 생활 속에서 아주 오랜 전통으로 여겨왔습니다. 왕에서부터 촌부까지 다 시를 사랑하고, 뿐만 아니라 시를 통해서 삶의 도리를 배우고 자기의 꿈을 드러냈습니다.
과거시험 제도에도 관리등용 시험을 보는데 시가 제일 중요한 과제로 제시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잘 산다고 해서 과연 잘 사는 겁니까. 퇴행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것들이 시를 죽이고 시인을 죽인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톰 슐만의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소설을 보셨지요. 영화도 상영이 되었고 비디오도 나와 있으니까 안보신 분은 빌려보시고 아이들도 한번 보게 하세요. 공부만 하라고 해서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걸 보면 왜 인간한테 시가 소중한가를 알게 해줍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굉장히 마음을 트이게 해줍니다. 대강의 줄거리를 얘기하면 이렇습니다.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명문학교인 웰튼 아카데미에 키팅이라는 국어선생이 새로 부임을 합니다. 첫날 첫 시간에 키팅 선생이 휘파람을 불면서 교실로 들어옵니다. 애들은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오 선장이여, 우리 선장이여. 그러면서 이 시는 휘트먼의 시 한 구절인데 링컨 대통령을 찬양한 시인이 앞으로 자기를 그렇게 불러도 좋다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이 엄격한 교육에 찌들려 있는 학생들이 너무 충격을 받고 어리둥절해 있으니까 또 이렇게 말합니다.
"제군은 알겠나, 너희들은 지금 전쟁중이란 말이야 전쟁. 그리고 너희들의 혼은 위기에 빠져있다. 나 너희들로 하여금 언어를 사랑하며 자비를 베푸는 일을 가르치겠다."
그러면서 느닷없이 에반스 프리차드 박사가 쓴 감상문 21쪽을 찢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너무 놀라서 어쩔 수 없이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찢습니다. 그걸 왜 찢게 했겠습니까. 이 키팅 선생은 너무 보수적이고 엄숙자의자의 교육장인 웰튼 아카데미에서 아이들이 가식과 강제의 허울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 허울 속에서 아이들을 빼내어서 창조적인 인간들을 만들어 보려고 시도를 했던 겁니다. 이런 시도가 사실은 에반스 프리차드 박사의 감상문을 찢게 한 데 대한 의미심장한 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사실 시 쓰는 데 이론이 필요합니까. 물론 기초는 되어야지요. 하지만 이론에 대입시킨다고 해서 시가 안되거든요. 오히려 손해볼 일이 더 많습니다. 이론에 밝으면 시를 못씁니다. 사람들이 시를 읽는 것은 우리가 인류의 한 일원이면서 정열에 넘치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의학이나 법률, 은행업들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아주 필요한 분야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시나 로맨스, 사랑이나 아름다움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존재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면서 시는 우리 인간 삶의 양식이다고 선언을 합니다.
그렇게 화두를 던져놓고 학생들로 하여금 스스로 해답을 찾도록 끊임없이 시를 읽히고 쓰게 하고 토론하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토론문화가 없습니다. 내가 대학 모교인 이대에 가서 창작강의를 두 학기를 했었는데 죽 앉아 있는 게 싫어서 둥글게 앉혀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뭘 주면서 토론을 해보라고 했더니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겁니다. 우리 나라는 토론문화가 이렇게 안 되어 있으니 서로 주고받는 대화도 잘 안되고 소통이 불가능합니다.
요즘 학생들한테는 두 가지 결핍이 있다고 합니다. 감동할 줄 모르는 것과 자연하고 친화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데이트 할 때도 컴컴한 곳이 아니면 백화점입니다. 북한산과 청계산도 좋은데 거기는 갈려고 생각을 안합니다. 연애하는 애들이 한번도 산에 오는 것 보지 못했습니다.
돈도 들지 않고 얼마나 볼 게 많습니까. 그래가지고 나중에 아이들에게 뭘 가르치겠습니까. 그러니까 감동없는 인간으로 크게 마련이지요. 그래서 이 키팅 선생은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들을 구태의연한 틀 속에 가둬놓고 교육을 시킨다는 것은 강제교육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들과 호흡을 맞추면서 학생들로 하여금 정말 창조적인 인간으로 만들려 했는데, 보수적인 교장과 일류병에 병든 학부모들로부터 쫓겨나고 맙니다. 그래서 키팅 선생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쫓겨나지만 학생들은 자기들의 의식을 전환시켜 주고 창조적인 인간으로 만들려고 했던 키팅 선생을 영원히 잊지 못합니다.
- 고정 관념을 깨고 자유로운 사유의 날개를
만일 이 키팅 같은 선생이 우리 나라에 있다면 아마 지금쯤 쫓겨났고 왕따당하고 있을 겁니다. 이 왜곡된 시 교육이 얼마나 나쁜 영향을 미치는가 하면 21세기 문학 행보를 늦추게 할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좋은 시인, 훌륭한 시인이 어떻게 왜곡된 시 교육을 받고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겠습니까. 이런 게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법이 많은 사회는 범죄가 많다고 합니다. 반면 시를 권하는 사회는 삶의 질을 높이는 사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술을 권하는 사회였고, 요즘은 인터넷을 권하는 사회, 골프를 권하는 사회지요. 언제 시를 권하는 사회가 올까요.
'삶의 질'이란 어떻게 해서 생긴 단어일까요. 이 단어를 제일 먼저 쓴 사람은 영국 작가 프리스틸인데, 그는 1943년에 어느 글에서 '모든 시민에게 한층 더한 안정과 보다 나은 가치와 보다 고귀한 삶'이라고 쓴 데서 따온 거라고 합니다. 삶의 질이라는 건 무엇을 뜻할까요. 삶의 질이라는 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고, 아름다운 생활을 설계할 수 있고 사람을 참으로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근사한 말입니까.
그게 될 때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지 무조건 삶의 질이 높여집니까. 사람에 따라서는 물질이 풍부하면 삶의 질을 높였다고 생각하겠지만 물질은 삶을 편리하게는 하지만 사람답고 아름답게 행복하게 살게 하지는 않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물질이 아무리 풍부해도 정신이 결핍되면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1947년에 사르트르가 미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뭐라고 했느냐 하면 미국은 물질은 풍부하지만 풍요로운 삶은 없다고 한마디로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미국이 달라졌지요. 그래서 밥을 많이 먹으면 배가 부르듯이 시를 가슴 속에 넣고 있으면 정신이 부릅니다. 시는 우리 정신의 밥입니다. 우리가 배가 부르다고 해서 살 수 있습니까. 밥이 아무리 배를 채워도 정신은 채워줄 수 없거든요. 그래서 밥이 행복의 기본 조건은 되어도 충분 조건은 못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물질로 배가 부른 시대일수록 정신은 점점 더 고파갑니다.
예수와 석가를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이 분들은 우리 인류가 출현한 이래 최고 최상의 정신을 보여준 분들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분들이 말씀하신 거는 전부가 시입니다. 경전이나 성경을 보면 그토록 오래 되어도 뭐든지 사랑하고 읽고 또 읽어도 감동을 줍니다.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러나 우리는 지금 경전도 성경도 소중하게, 크리스천이나 불교 신자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일반 무신론자나 종교가 없는 사람들은 그까짓 것 골치 아프게 읽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시는 우리의 삶의 중심과 정신의 정수를 한데 묶어놓는 그 어떤 거라고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함께 보여주는 황홀한 세계라는 것입니다. 그런 황홀한 세계를 여는 문이 바로 시입니다. 여러분들이 시를 많이 읽고 많이 사랑하면 그 황홀한 세계를 자기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희열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옛말에 '시를 알아야 사람다운 말을 할 수 있고 또 모든 이는 자기가 읽은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사십이 넘으면 책을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은 관상이 다릅니다. 사람이 영혼의 기쁨이 고갈되면 피폐해진다고 합니다. 그 굶주림을 채우는 길은 시가 가장 좋은 치유 방법이고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좋은 시를 만나면 감동하게 되고 그게 바로 기쁨입니다. 그럴 때 마음이 환해지지 않습니까.
우리가 머리를 하고 마음에 들면 하루종일 기분이 좋듯이 하물며 좋은 시를 읽을 때의 감동이 금방 사라지겠습니까. 인류의 역사가 지속하는 한 우리의 시는 결코 멸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아무리 위기라고 하고 다른 좋은 놀이기구들이 나와도 그건 금방 사라집니다. 그래서 시인이 시를 통해서 진실을 말하지 못한다거나 시를 정신의 밥으로 만들지 못할 때에는 진정한 시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언어로 밥을 쌓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시집이 많아도 시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시집이 많아도 시가 없고, 진정한 독자가 없다면 우리가 정신 공황에 빠져서 정신의 거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정신의 거지라는 단어가 얼마나 슬픈 단어입니까. 그래서 시인을 판단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시입니다. 그리고 시를 판단하는 것은 진정한 독자의 몫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독자가 되면 우리는 꼼짝못합니다.
어떻게 함부로 시를 써서 여러분한테 보여주겠습니까. 정신이 팍 차려지지요. 시인은 시를 끝낸 순간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시를 쓰는 순간에만 존재합니다. 마찬가지로 독자들도 시 읽기를 끝낸 순간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시를 읽고 있는 그 순간에 존재하는 겁니다. 독자가 없는 시는 있을 수도 없고 독자들도 시를 모르면 독자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독자의 위치라는 것은 상당히 소중한 존재입니다.
여러분 중에 시 창작을 하고 있거나 앞으로 시인이 되고 싶다는 염원을 가진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시 창작의 방법을 얘기해 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가 제일 강조하는 것은 많이 생각하고 많이 읽고 많이 써라. 이게 시 창작의 기본 방법입니다. 이것 없이는 절대로 좋은 시를 쓰지 못합니다. 왜 많이 생각하라고 하느냐면 상상력이 아주 폭이 넓어집니다. 책을 많이 읽는다던가 세상을 읽는다던가 사람을 읽는다고 하면 생각의 폭이 굉장히 깊어집니다. 많이 쓰라는 것은 저절로 문장수업이 됩니다.
만일 오랜 습작 기간도 없고 피나는 노력 없이 그냥 좋은 시를 쓸려고 과욕을 부리면 그나마 갖고 있던 사고도 흐려지고 재능도 박탈당합니다. 우선 창작하는 즐거움을 가지시고 그 다음에 욕심을 부려야지 창작하는 즐거움은 저쪽으로 보내놓고 과욕만 부리면 절대로 좋은 시가 나오지 않습니다. 시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금방 붓을 떼고 말면 시는 가차없이 시 쓰는 사람을 처단합니다. 말하자면 어떤 즐거움을 우선하지 않고 결과를 탐하면 언어 나열이 되고 남을 모방하기 쉽습니다. 그건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상식적이고 상투적인 낡은 고정관념의 벽을 뛰어넘어야 됩니다. 그리고 앵무새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남이 지저귀고 남이 한 말을 따라하는 사람이 많은데 절대로 안됩니다. 내가 좀 서투른 목소리라도 내 지저귐이 있어야 됩니다. 마음 속에 가위 하나를 넣어놨다가 내가 너무 잡다한 말을 많이 쓸 때에는 그 가위를 꺼내서 잘라 버리세요.
헤밍웨이가 지방신문의 기자로 있을 때 젊은 시절 문학에 대한 열망도 많고 해서 기사를 쓸 때마다 어렵게 쓰고 길게 써가지고 가면 부장한테 굉장히 야단을 맞았다고 합니다. 글은 간결하고 쉽게 써라. 그때의 문장 훈련이 자기가 명작을 쓰는데 굉장한 도움을 줬다고 합니다. 그 당시는 부장이 야속하고 미웠지만 정말 감사하다고 그는 회고록에 쓰고 있습니다.
어휘가 쉬워야 되고 외워서 읽기가 쉬워야 되고, 문장이 쉬워야 됩니다. 너무 어렵고 잡다하게 쓸려고 하면 오히려 맥을 못 찾습니다. 자기 글을 자기가 못 찾아서 폐쇄성에 빠져버리면 시를 쓸 수가 없게 되어 버립니다. 발상의 전환이 아니라 역발상을 해야 됩니다. 미와 추, 추와 미 해도 되지 않습니까. 하늘과 땅, 남자 여자, 나와 너, 체험이나 지식까지도 확 뒤집어야 합니다. 한번 깨보고 뒤집어 보는 겁니다.
내가 똑바로만 걸어가는 게 아니라 물구나무서서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나 똑바로만 걸어가려고 하는 겁니다. 시범을 보여줄 때 물구나무서서 걸어가는 사람도 있잖아요.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고 독창적인 시를 쓰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의 독특한 경험세계를 가진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것도 독특한 시를 쓰게 되는데 기여를 하게 되는데, 하지만 주의해야 할 것은 구체화시켜서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야지 그게 없으면 주관적인 자기 폐쇄성에 빠져버립니다. 남들은 아무런 감흥도 없는데 저 혼자만 북 치고 장구 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시어를 잘 다뤄야 됩니다. 논개의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 물결 위에' 하는 시구를 읽고서 사전을 찾아봤더니, 강낭콩이 놀랍게도 흰색이거나 약간 자줏빛, 아니면 연분홍색이었습니다. 그런데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이라고 했으니까 그건 시어로서는 맞지 않습니다.
- 어린애가 첫 세상을 보듯 시 앞에 앉을 때
어떤 신인이 나한테 시를 보여주는데 소쩍새가 겨울에 울고 있더라구요. 소쩍새는 초여름부터 웁니다. 그래서 내가 없는 것을 상상력으로 만드는 것은 정말 좋지만 실제로 있는 것을 왜곡시키는 것은 안 됩니다. 여름에 우는 소쩍새를 겨울에 운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마음속에 생물을 넣고 다녀야 합니다. 살아있는 식물, 새소리 등 생물을 넣고 다녀야지 역동적인 시를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변화에 민감해야 합니다. 계절의 변화나 날씨의 변화에 민감해야 합니다.
비가 와도 그만, 달이 떠도 그만, 눈이 와도 그만 종소리를 들어도 아무 감흥이 없으면 생각이 죽어버립니다. 죽은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있는 시를 쓸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연애를 하지 않아도 연애 감정을 좀 가져 보세요. 그리고 자기를 살려보세요. 그러면 시를 쓰는데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낯설게 하기를 해야 합니다. 낯설게 하기라는 단어는 러시아의 형식주의자들이라고 일컫는 문학 이론가들이 있었는데 '시의 기능은 사물의 낯설게 하기'라고 쓴 데서부터 기인했다고 합니다. 낯설게 하기의 본보기의 시로는 김광균의 [추일서정]의 첫 구절에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라는 대목이 있는데 얼마나 새로운 인식입니까.
또 영국 작가 체스터튼은 가로수를 가리켜 '노상 누워 있던 땅의 일부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벌떡 일어선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새로운 인식입니까. 관습적인 인식에서 완전히 벗어났지요. 이런 것을 여러분이 앞으로 좀 써야 합니다. 남의 시를 읽되 자기가 쓸 때에는 보지 마세요. 그러면 비슷비슷한 시를 쓰게 됩니다. 그때는 떠나 보내버리세요. 완전히 자물통을 채워놓고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쓰는 게 좋습니다.
다음은 동심적 발상을 해라. 왜냐하면 어린애가 처음 세상을 보았을 때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신선합니까. 시인은 그런 발상을 해야 합니다. 맨날 나이만 먹다가 나는 늙었는데 하면서 왜 자기를 빨리 늙게 합니까. 주름살이 늘어서 늙는 게 아니고 영혼이 깜깜해질 때 늙는다고 했습니다. 나이가 많이 든 사람이라도 마음이 늘 살아있고 마음에 언제나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겠다는 사람은 얼굴이 훨씬 젊어 보입니다. 화장을 해서 젊게 보이는 게 아니고 마음을 색칠하라는 얘기입니다. 마지막으로 현실을 직시해라. 아무리 시를 잘 써도 자기 인생이 들어가 있지 않거나 존재의 그런 게 없거나 현실과 너무 분리된 시나 음풍영월조의 시는 가치가 없습니다.
이런 방법을 써도 시가 안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우울하고 죽어야 되나 살아야 되나 하면서 새벽시장도 가보고 미친 듯이 다닙니다. 낯선 곳도 가보고 어디 가다가 노을을 보고 앉아서 펑펑 울어보기도 하고 나를 자꾸 닦달을 해야 됩니다. 고목도 바람이 흔들어주지 않으면 죽습니다. 저는 거실에 풍경을 달아 놓았습니다. 풍경 밑에 물고기가 달려 있는데 왜 물고기를 달았을까요. 물고기는 잘 때도 눈을 뜨고 잔답니다. 그래서 용맹정진하는 수도자처럼 물고기가 눈을 뜨고 자듯이 정신이 깨어 있으란 뜻으로 물고기를 달아 놓았다고 합니다.
우리 시인도 눈을 뜨고 자는 물고기처럼 정신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남이 잘 때 잘 것 다 자고 남이 먹는 것은 다 먹고 배가 불러서 정신은 어디로 가고 배부를 때 시가 됩니까. 하루에 두 끼만 먹어도 죽지 않습니다. 꼭 세 끼를 먹어야 합니까. 그 한 끼를 아껴서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시가 안될 때는 하루에 몇 번씩 풍경을 칩니다. 아마 옆집 사람은 스님이 와 계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겁니다. 나는 그럴 때 정신이 바싹 듭니다. 물고기한테 부끄럽습니다.
그 미물도 잘 때 눈을 뜨고 자고 스물 다섯 번을 허물벗기를 하고 공중으로 아주 멋있게 나르고 짝짓기를 한 다음 하루를 살다가 죽는답니다. 하루를 살다 죽는 그 미물도 성충이 되려고 천 일을 물 속에서 보내고 스물 다섯 번의 허물을 벗는데, 오관을 가진 인간이 허물도 하나 벗지 않고 고통도 받지 않고 고뇌도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어려운 시를 쓸 수 있을까요.
그래서 나는 미물한테서 시인의 치열성을 배웁니다. 그 미물의 치열함이 나의 새로운 가치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치열한 깨우침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만들면서 그 시가 정신의 밥이 되거든요. 그리고 나를 잘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잘 산다는 거는 시로 된 정신의 밥을 먹으면서 살아야 잘 사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함민복 씨의 시 [긍정적인 밥]으로 강의의 결론을 대신하겠습니다.
시 한 편에 삼만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2. 시의 길을 묻다-⑦ /천양희 시인
꺼지지 않는 시 정신, 세계와 화해에 이르는 길
『경남작가』가 마지막으로 천양희 시인에게 시의 길을 물었다.
대담은 오인태 회장이 단신으로 상경하여 서울 대학로에 있는 학림다방에서 이루어졌다.
사진은 서울에 사는 서양숙 시인이 찍었다.
11월 마지막 토요일인 28일, 달력이 막 초겨울로 넘어가는 무렵이었다.
'길의 시인, 물의 시인'으로 불리며 여전히 시간에 굴하지 않는 시혼을 불태우는 천양희 시인과의
대담은 학림다방에서 인근 한정식 집으로 두 시간여 동안 숨가쁘게 이어졌다.
이날 <작은 詩앗-채송화> 동인 모임이 열리는 김해행 다섯 시 비행기가 예약되어 있었다.
이번 호로 일곱 차례에 걸친 '시의 길을 묻다'를 맺는다.
그동안의 대담을 한 데 묶어 단행본으로 내려고 한다.
-편집자 주
오인태(이하 오) / 사진으로야 많이 뵈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직접 뵙기는 처음입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젊어 보이십니다. 들어오면서 다른 분인 줄 알고 한참 두리번거렸습니다.
천양희(이하 천) / 무슨 말씀을……, 이제 많이 늙었어요.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기도 쑥스러워요. 오 선생이야말로 사진보다 젊고 인상이 참 좋아 보이네요. 『아버지의 집』 잘 읽었어요. 뭔가 짠하게 다가오는 느낌이 있더군요.
오 / 고맙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2006년도에 냈으니 제 모습도 서너 해 전 것일 텐데요. 젊어 보인다는 말이 이렇게 좋은 걸 보면 저도 이제 나이가 꽤 들었나봅니다.
천 / 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 교대에 강의를 나간다지요? 요즘 같은 시절에 애들 속에 묻혀 지내니 얼마나 행복한 일이에요. 나도 초등학교 교사가 되고 싶은 때가 있었는데……,
오 / 아, 그러셨어요? 그렇잖아도 요즘은 초등학교 교사로 지내는 게 얼마나 행운인가, 하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인터뷰를 당하는 것 같은데요(웃음).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천 / 지난 4월 25일 울산시가 주최하는 제1회 고래의 날에 선상에서 여러 시인들과 함께 시낭송을 하고 왔어요.
오 / 고래가 보이던가요? (웃음)
천 / 파도가 너무 심해서 고래는 못보고 왔지만 흔들리는 배 위에서 시를 낭송한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7월에는 이육사 탄생 100주년 문학관 기념행사에서 강연을 했고, 9월에는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주관하는 한국과 스웨덴 수교 50주년 문학행사에 다녀오기도 했어요. 20년만의 외국여행이라 낯설긴 했지만 새로운 세계를 접한 경험이 시 쓰는 데 힘이 될 것 같아요. 또 몇 군데 대학에서 특강과 문학행사 심사를 하기도 했고요.
오 / 여전히 바쁘게 사시는군요. 건강도 꽤 좋아 보이시고요. 다행입니다. 오랫동안 건강 잘 지키셔서 좋은 글 많이 쓰시길 빕니다. 그런데 2005년에 내신 『너무 많은 입』 이후엔 시집이 안 보입니다. 새 시집을 내실 때가 된 것 같은데, 준비하고 계십니까?
천 / 시인이란 시를 끝낸 순간이 아니라 시를 쓰는 순간에만 존재한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지만, 서둘러 시집을 내야 한다는 생각은 좀 덜 하는 편이에요. 2005년에 여섯 번째 시집을 내고 벌써 4년이 지났으니 이미 발표한 시만 해도 시집 한 권 분량은 충분히 되겠지요. 하지만 그 동안 건강이 좋지 않아 발표한 시들 중에 몸과 마음이 엇갈려 마치 병든 것처럼 시들한 시들이 더러 있어서 버릴 것은 버리고 살릴 것은 살려야 할 것 같아요. 내년이나 내후년쯤에나 내놓을 수 있지 싶어요.
오 / 기대됩니다. 그런데 65년 『현대문학』에 「정원」 등의 시가 추천되면서 문단에 데뷔하여 시력 40여년 만에 시집 여섯 권이면 과작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특별한 이유나 소신이 있는 겁니까.
천 / 대학 3학년이던 65년에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지만 이런 저런 일로 시도 제대로 못 쓰고 쓴 시도 제대로 발표하지 못하다가 등단한 지 18년만인 83년에 첫 시집을 냈어요. 그 이후 4, 5년 만에 한권씩 낸 셈이니 과작이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시에 모든 순정을 바치고 살아왔는데 좀 과작이면 어때요.
오 /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는 말씀인가요?
천 /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너무 다작인 것도 바람직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에요. "이 세상에서 죽는다는 건 어렵지 않네 / 그보다 더 힘든 건 사는 일이라네"라고 한 마야코프스키의 시처럼 시인으로 산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인 것 같아요. 시가 더 좋아지기 위해 스스로 궁하게 하는 것일까요. 나는 매일 나 자신을 만들어 간다는 생각으로 시를 쓰고 있어요.
오 / 그래서일까요. 선생님의 시를 읽다보면 시인의 자의식이 아프게 다가오기 일쑤입니다. 그리고 그 자의식도 시집이 거듭될수록 조금씩 변한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천 / 그렇겠지요. 시와 시인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니까요. 내 시에서 시인의 자의식이 유별나게 드러난다고 느꼈다면 잘 읽으신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자의식이 나이가 들수록 변해 온 것도 사실이고요.
오 / 제가 이미 읽었거나, 또 현재 가지고 있는 시집을 가지고 선생님의 시력을 정리해보니 83년에 첫 시집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를 내신 이후 88년에 『사람 그리운 都市』 92년에 『하루치의 희망』 94년에 『마음의 수수밭』 98년에 『오래된 골목』, 같은 해에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 그리고 2005년에 『너무 많은 입』을 내셨더군요. 빠진 것이 있으면 보충해주십시오.
천 / 빠진 것 없이 다 맞습니다만, 98년에 낸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는 시로 쓴 것이 아니라 사실은 25년 동안 하루에 한두 줄씩 써놓았던 단상들을 묶은 것인데 서점에서 시집으로 분류했더군요. 그런데 그 책이 독자들에겐 쉽게 소통이 되어서인지 많은 공감을 얻었어요.
오 / '시로 쓴 영혼의 자서전'이란 부제가 붙은 그 시집 말이지요? 아, 시집이 아닌가요?(웃음) 아무튼 그 책 서문에 이렇게 적혀 있더군요. '세상에서 가장 먼 것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오늘도 서성거립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하다가 나는 말을 던져버렸습니다. 그래야만 세상을 잘 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 말씀이 바로 이 시집 이후의 시들의 변화를 예고하는 것 같습니다.
천 / 새삼스레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군요. 질문에서 벗어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시란 결국 우리 인생의 한 변용이며 결핍을 메우는 표현이며 마음을 헤집는 갈등이며 동시에 에너지란 생각이 들곤 해요.
오 / 사실, 많은 평자와 독자들이 『마음의 수수밭』에서부터 선생님의 시세계에 일대전환이 이뤄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변화의 핵심은 무엇이며, 어떤 계기로 그런 시세계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는지요?
천 / 맞아요. 첫 번째 시집과 두 번째 시집의 시들은 철저한 자기응시에 근거하고 있고 무겁고 암울한 심상으로 자신의 존재를 탐구하는 데 치중하고 있어요. 말하자면 자아와 세계의 완결성이 거부되고 자아와 세계가 균열되던 시기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겠죠. 내 시의 여정에서 현실과 이상의 부조화가 두드러진 단계였던 것 같아요. 이런 경향이 세 번째 시집에서 세상의 모순에 대한 하나의 전략으로 언어유희에 빠져든 세계를 구축하게 된 거겠죠.
오 / 세 번째 시집이라면 『하루치의 희망』을 말씀하는 거지요? 그렇잖아도 이 시집에 실린 시 가운데 「세상에서 말처럼」, 「비, 비애」, 「선전하는 선전」, 「해가 된 해」, 「세운상가에서」, 「脫 춤놀이」, 「세상에서 말처럼」, 「복수」, 「외가리」, 「佛 행하리」, 「분당화」등 많은 시들이 동음이의어에 의한 언어유희적인 시들인데, 방금 세상의 모순에 대한 하나의 전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혹자는 단순한 언어유희라고 지적하기도 하던데요?
천 / 글쎄, 단순한 언어유희로 파악하는 것에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군요. 이것은 저 자신의 독특한 세계관이며 앞으로의 시세계에 이르고자 하는 준비단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오 / 제 생각에도 말의 해체를 통한 말과의 극한적인 대립과 갈등은 말과의 화해를 위한 전조로 보아지는데요. 말은 곧 세상이기도 할 테죠?
천 / 그렇지요. 동음이의어에 의한 언어탐구와 유희는 『마음의 수수밭』으로 가는, 즉 세상과의 불화에서 친화의 길로 가는 전환기적인 과정이라 할 수 있어요. 『마음의 수수밭』에서 보인 변화의 핵심은 그동안 자아와 세계의 균열을 기반으로 했던 자신의 생에 대한 성찰과 불화의 대상이었던 세계에 대한 진지한 응시와 모색 끝에 이른 불이의 세계, 곧 현실과 이상, 욕망과 허무, 너와 내가 양립되지 않는 시세계를 구축한 것이라 볼 수 있겠지요.
오 / 주로 동음이의어에 의한 언어탐구와 언어유희적인 시풍은 『마음의 수수밭』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는데요. 예컨대, 「진로를 찾아서」, 「미아리 엘레지」, 「원근리길」, 「새록이」, 「상상」등이 이런 부류의 시라 할 수 있겠지요.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 낸 『너무 많은 입』의 「수락시편」, 「상일동 아침」, 「다문이」, 「간절곶」같은 시도 이 연장선에 놓여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선생님의 유별난 언어에 대한 관심과 집착은 한 때의 전환기적인 현상이 아니라 시어에 대한 시인의 특별한 인식을 반영한 하나의 일관된 시풍이라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시의 언어에 대해서 말씀해주시지요.
천 / 시는 언어를 통해 언어로 표현되는 것이고, 그래서 시를 쓰는 시인은 언어 가장 가까이에서 늘 언어에 촉수를 세운 채 언어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결국 시란 언어탐구가 아니겠어요? 시인이 자신의 시의 도구인 모국어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끊임없이 탐구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겠지요.
오 / 선생님의 초기 시들을 보면 세계와의 불화의 흔적들, 예컨대 어둠과 절망, 아픔, 슬픔, 자조의 정조들이 곳곳에 묻어있습니다. 그 무렵의 시대적인 배경도 작용했겠습니다만, 시인의 시세계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무래도 시인의 개인적 체험이나 환경일 텐데요. 그 무렵의 개인적 삶이나 인식, 시적 세계관이 어떠했는지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여『마음의 수수밭』에 도달하셨는지도 말씀해주십시오.
천 / 맞아요. 초기 시들에 나타나는 세계와의 불화의 흔적들은 80년대의 시대적 배경이 작용했다기보다 개인적인 시련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어요. 그 무렵이 내 생애에서 가장 불행했던 때였으니까요. 사람은 물론이고 시와도 소통이 잘 되지 않아 무척 고통스럽고 외로워서 내 안에 내가 갇혀버렸지요. 자기응시가 강한 사람들이 시적 충동이 강렬하듯이 나의 시적 충동도 집요한 자의식 혹은 자기응시를 배양토로 삼을 수밖에 없었어요.
오 / 아, 그래서 자의식이 그렇게 두드러지게 드러났던 거군요.
천 / 그렇게 보이지요? 이 무렵의 시적 세계관은 자연이나 사회 또는 타인보다는 내 삶의 상황과 일상적인 감정에 더 치우쳐 있었던 게 사실이에요. 그래선지 초기 시들은 거의 공통적으로 어둡고도 무기력한 자아의 세계를 고백하는 것을 기조로 삼고 있어요.
오 / 그렇지만 『마음의 수수밭』에 이르러서는 그런 자조적인 자의식들이 많이 누그러지고 한층 투명해진 내면세계가 외부세계와 융화하려는 시도와 조짐이 뚜렷해지고 있는데요. 이렇게 내면의 자정력을 발휘하여 세계와 화합하고 일체화한 동기와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겁니까?
천 / 바로 나를 죽고 싶게 한 상처였지요. 역설적으로 그 상처로 인한 극한적 고통이 나를 살고 싶게 했어요. 어디에선가 밝힌 대로 절망과 고통이 극에 달했을 무렵 신문에서 '직소폭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고통으로 썩어가는 내 몸을 거기에 던져버릴 작정으로 찾아가서 망연히 앉아있는데, 어디선가 "너 죽을 만큼 살았느냐"고 우레 같은 소리가 들려오는 거예요. 갑자기 주위가 환해지면서 살고 싶은 욕망과 의지가 폭포처럼 솟구치더라고요. 결국 몸 대신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는 극한적인 절망을 던져버리고 왔지요. 그 무렵에 알았어요. 어설픈 상처는 악취를 풍기지만 온전히 썩은 상처에서는 향기가 나는 법이라고 깨달은 거지요. 그렇게 해서 도달한 곳이 『마음의 수수밭』이었어요.
오 / 온전히 썩은 상처에서는 향기가 난다는 말씀에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그래서 김선태 시인이 선생님의 시를 일러 '상처 위에 핀 눈부신 생명의 꽃'이라 한 거로군요.
천 / 그렇게 표현한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오 / 『너무 많은 입』의 「물에게 길을 묻다」연작들이 보여주는 대로 지금까지 전개된 선생님의 시적 작업이 길 찾기의 과정으로 상징화되고, 그것이 시 속에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길'이라는 시어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선생님 시에서 '길'은 어떤 의미소인지요?
천 / 지적한 대로 내 시들은 일관되게 내 삶의 길을 가는 과정으로 묘사되고 있어요. 나는 시에 대한 열정이나 삶에 대한 모색을 길에다 두고 시를 쓰는 시인이므로 그 지혜로서 길의 영채를 갖는다고 어느 평자는 말했지만 내 시에 담긴 길의 이미지는 자기 성찰과 삶에 대한 완성으로서의 길을 그려내고 있는 거지요. 내 시 속의 길 속에는 고통스럽고 외로운 내 생이 숨쉬고 있고, 그 길 끝에는 내 생을 바쳐서 얻은 깨달음이 있어요. 또 직접적인 길을 얘기하지 않는 시들이라 할지라도 본질적으로는 모두 길 위의 시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런 점에서 나를 길의 시인, 길 위에 선 시인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오 / '길'과 함께 '물'도 선생님의 시를 읽는 핵심키워드의 하나가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시에서 '물'은 고여 있는 물이라기보다 흐르는 물의 이미지가 더 강한데요.
천 / 물은 어떤 특정한 형태를 고집하지도 않고 거슬러 오르는 법도 없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지요. 내 시에 있어서의 물은 겸손의 미덕과 부드럽게 포용하는 모성(母性)의 다른 모습이기도 해요. 나는 물에 대한 성찰을 통해 나 자신의 삶을 물에게서 배워요. 내가 물에게 길을 묻는 것은 물처럼 살고 싶은 내 욕망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한 거지요. 이것은 사라지는 삶을 살아지는 삶으로 바꾸는 것이며, 답답한 자신의 존재나 막혀 있는 삶의 통로를 흘러가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뚫고 나아가려는 스스로의 의지이기도 하겠지요.
오 / 『마음의 수수밭』 이후 줄곧 보여주셨듯이 선생님의 시적자아는 이미 세계와 화해하신 듯합니다. 선생님의 시가 활기차면서도 편안하게 읽히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렇듯 자아와 세계의 일체화는 바로 시적 세계관이자 불교적 세계관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불교와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까?
천 / 자아와 세계의 일체화는 바로 시적 세계관이자 불교적 세계관과 일치한다고 보는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해요. 나는 어릴 때부터 불교의 향기를 공기처럼 마시며 자랐어요. 불심(佛心)이 깊었던 할아버지와 절(寺)에 대해 지극했던 어머니의 영향 때문인지 내 정서는 늘 불교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지요. 경전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불교가 종교지만 깊은 학문 같고, 명상은 자의식과 진정성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종교란 그 시대의 살아있는 영혼이라는 말이 있는 거겠지요.
오 / 제 전공이 어린이문학이고, 그래서 특히 선생님의 시 가운데 『마음의 수수밭』에 있는 「여름 한때」를 관심 깊게 읽었는데요. 이 시에서 선생님은 두 살배기 아이에게서 생기가 넘치는 뭉클한 우주를 발견하고 이것을 시인의 자아로 전이하여 '나는 다시/ 숨을 쉬며 부푼다. 살아 붐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천 / 아기가 넘어질 듯 뒤뚱뒤뚱 걷는 것은 불안하지만,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눈부시고 경이로운 모습이 아닐까요. 이 세상의 모든 부도덕과 불온과 사악함을 무화시키는 것을 보는 경이로움이지요. 그 경이로움을 느끼면서 '우주가 저렇게 뭉클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자가 시인이 아닐까요. 나는 그때 내가 다시 살아난 듯, 숨이 막힐 정도로 살아 붐비는 생의 기미를 느꼈어요. 두살배기 아기에게서 여성으로서의 속박과 인생의 굴레를 단숨에 벗어버리는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고나 할까요.
오 / 대상과의 일체감에서 오는, 말하자면 물아일체의 상태에서 느끼는 감정이겠지요. 사실 아동성의 중심속성이 바로 세계와 자아를 일체화하는 동일성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아동성, 불성, 시성이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고 보는 입장에 서 있는데, 이것은 바로 인간의 본성에 귀결되는 문제가 아니겠는지요.
천 / 맞아요. 동심이 천심이며 시심과 일치한다고 보는 견해에도 동의해요. 그것이 시인의 본성, 인간의 본성에 귀결되는 것이라는 생각에 대해서도요. 아동성의 중심 속성이 바로 세계와 자아를 일체화 하는 동일성이라는 말이 특히 가슴에 다가오는군요.
오 / 정리하는 차원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시가 무엇이며 시는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선생님만의 고유한 시 쓰기방식이나 발상법이 있으면 함께 밝혀주시지요.
천 / 많은 사람들이 시에 대해 나름의 정의를 내리지만, 나에게 시란 절망이 부양한 목숨에 대한 반성문이며 절로 나를 새롭게 하고 절로 나를 밝게 하며 절로 나를 철들게 하는 삶의 고전(古典)이라고 생각해요. '시는 감정의 해방이 아니라 감정으로부터 탈출'이라고 말했듯이 시를 쓸 때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는가보다 사물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봐요. 시는 긴장과 절제와 구체성을 생명으로 삼아야 해요. 시는 오래 숙성하고 되새김질하되 반복하지 말아야 해요. 동어반복은 시를 변화, 변모시키지 못하는 시의 가장 큰 적이기 때문이죠. 나만의 시 쓰기 방식이 될지 모르겠지만, 시 쓸 때를 위해서 메모를 많이 해 두는 편이에요. 시상이 문득 떠오를 때 마음속에 넣어두었다가 꺼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데, 아무래도 옛날보다 기억력이 떨어져서 메모를 하게 되는 것이겠죠. 메모를 해 두었다가 나중에 보면 그 순간의 어떤 생각이나 상상력과 어우러지게 되어 한 편의 시가 탄생하곤 하죠. 그리고 또 말을 거꾸로 읽거나 역발상을 하는 습관이 있어서 그것이 시 쓰는 데 일조를 하기도 해요.
오 / 그렇군요. 마지막으로 후배 시인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해주십시오.
천 / 후배 시인들, 특히 신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시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라는 거예요. 시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요. 무통분만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덧붙이자면, 아니 이거야말로 꼭 하고 싶은 말인데, 자발적 소외를 자청하는 지독한 고독을 가지라는 거예요. 고독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시는 고독을 자양분으로 하는 것이니까요.
오 / 긴 시간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오래오래 건강하셔서 좋은 시 많이 써주시길 바랍니다.
-『경남작가』2009년 하반기호. 제17호
3.
아침마다 거울을
천양희
아침마다 거울을 본다
거울 속의 나를 본다
거울이 물 속 같다
물 속에 내가 빠져 있다. 물 먹고 있다
잡을 것이 없는 물 속에서
나는 허우적거린다
아무도 물 속에 있는
내 속을 모른다. 몰라준다
내 심장의 고랑
내 늑골 밑의 습지
내 머릿속 웅덩이 그리고 나의 무덤
나에게는 다시 써야 할 생이 있다
세상이 잘못 읽은 나의 生
수몰된 生
암매장된 生
누가 읽기도 전에 나를 써버렸다
그들에게 도난당한 장편의 문장들
그 때문에 틀린 생의 제목들
내 생, 너무 오래 생매장되었다
아침마다 거울을 본다
거울 속의 나를 본다
나는 곧 재조명될 것이다. 밝혀질 것이다
거울같이 환하게.
천양희 『마음의 수수밭』(창비시선 122)
【천양희 시인】
출생 1942년 1월 21일 (부산광역시)
학력 이화여자대학교 국문학 학사
데뷔 1965년 현대문학 '정원 한때'외 발표 수상 2007년 제2회 박두진문학상
2005년 제13회 공초문학상
1998년 현대문학상
1996년 소월시문학상
천양희 시인을 몇번인가 뵌 적 있다. 전주 한옥마을 골목에서였고 어느 시상식장에서였다. 그러다가 2007년도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하는 천양희 시인과의 대담을 하게 되면서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저 스치듯 잠깐씩만 이런저런 자리에서 뵙다가,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얘기를 나누게 된 것이다. 솔직히 말주변이 없는 나로서는 여간 부담스럽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으나, 한편으로는 평소 따르고 싶은 시인을 풋내기인 내가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렜다.
예상했던 대로 시인은 무척 다정다감했다. 또한, 익히 알고는 있었으나 삶과 시에 대한 시인의 열정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감동적이었고, 정말이지 어떤 귀한 성품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때 시인은 공식적인 대담 말고도 참 좋은 얘기들을 내게 조곤조곤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그날 나는 시인과 만나 대담을 했다기보다는 시인이 발라주는 빨간약으로 시와 마음의 상처를 치료받고 온 셈이었다. 시인에게 있어서 시는 “목숨에 대한 반성문”이라고 했다. “시에 마음 전부를 걸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할 것” 같다고도 했다. “시를 쓰는 것은 레일 위를 급히 달리는 기차가 아니라 사막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낙타” 같은 것이라고 나직이 말하던 시인은 릴케의 말을 빌려 “시를 쓰지 않으면 살아 있는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시를 쓰라는 엄혹한 말”도 들려주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그는 정말이지 시의 길을 가는 시의 구도자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나 자신이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이 세상에 내가 살아남아도 될까. 나는 누구인가. 도대체 뭘 하고 이 세상을 살아왔나 나 자신에게 물어보니까 아무것도 마음속에 넣을 만한 게 없더라고요. 너무 울부짖었다고 할까요. 그 상처에서 밖으로 나오지를 못했어요······ 그러다 돌아보니까 내가 뚜렷이 보이더라고요. 세상을 버릴까 하는 것도 접고, 내가 죽을 만큼 제대로 살았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다시 시에 매달렸죠. 그때부터 다시 시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이쯤해서 「아침마다 거울을」을 떠올려보지 않을 수 없다. ‘물 속’에 빠져 있었을 시인을, 세상에 실컷 ‘물 먹’었을 시인을, 어지간히도 ‘허우적거’렸을 시인을, 그야말로 ‘무덤’ 같았을 시인의 마음을. ‘수몰’되고 ‘암매장’되는 것처럼 느껴졌을 시인의 비참한 고통을 떠올려보면서, 그가 걸어온 길 또한 쓰라리게 깊은 서정시처럼 여겨졌다. 「직소포에 들다」나 표제작인 「마음의 수수밭」 같은 시편을 함께 읽어도 좋겠다. 시인은 거의 십년 넘게 고뇌하고 울부짖고 한 뒤에야 『마음의 수수밭』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고 했다. 여전히 아침마다 세번 절하고 반야심경 읽고 기도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는 말도 예사롭지 않게 들려왔다. 습관 같은 건 없냐고 여쭈니, 시를 쓰기 전에는 아무리 급해도 꼭 손을 먼저 씻는다는 말이 돌아왔다.
“원고지에 글을 쓰다보면 원고지 사각형 모서리가 진짜 벼랑 같아요. 거기서 안 떨어지려고 매달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에요. 시를 쓴 지 사십년이 훌쩍 넘어도 그래요. 그런 마음이 나를 시 속으로 몰아넣어요.”
그는 여전히 교자상에 낮게 앉아 원고지에 한행 한행 시를 써내려간다고 했다. 산문 또한 마찬가지란다. 여전히 컴퓨터도 없고 집에 있는 기계라고는 원고를 보내기 위한 팩스가 전부란다.
<추천시> 아침마다 거울을/ 천양희 시인
시인이 되려면
새벽하늘의 견명성(見明星)같이
밤에도 자지 않는 새같이
잘 때에도 눈뜨고 자는 물고기같이
몸 안에 얼음세포를 가진 나무같이
첫 꽃을 피우려고 25년 기다리는 사막만년청풀같이
1㎏의 꿀을 위해 560만 송이의 꽃을 찾아가는 벌같이
성충이 되려고 25번 허물 벗는 하루살이같이
얼음구멍을 찾는 돌고래같이
하루에도 70만번씩 철썩이는 파도같이
제 스스로를 부르며 울어야 한다.
자신이 가장 쓸쓸하고 가난하고 높고 외로울 때 *
시인이 되는 것이다
(* 백석의 시「흰 바람벽이 있어」중에서.)
천양희 「시인이 되려면」전문
시인의 『너무 많은 입』(창비시선 245)에 들어 있는 이 시는, 내가 엄살 피우고 싶을 때마다 꺼내 읽는 시편이다. 한동안 이 시를 책상에 붙여놓고 마음을 다잡기도 했다. 필경, 시인이 되기 위해서만 “제 스스로를 부르며 울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시의 행간에 나오는 ‘···같이’와 같은 노고 없이 얻어지는 것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을 터. 우리가 무엇인가가 되려고 얼마나 끙끙거리고 있는지 되짚어보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거울같이 환하게” 밝혀질 내일의 나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저마다 이루고 싶은 꿈을 “시인” 자리에 넣고 읽어봐도 좋겠다. 유심소작(唯心所作),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짓는다고 했던가. 이 세상 모든 것은 오직 마음가짐 여하에 달려 있다는 말이 새삼 다가오는 봄이다.
접어둔 마음을
책장처럼 펼친다
머리 끝에는 못다 읽은
책 한권이 매달리고
마음은 또
짧은 문장밖에 쓰지 못하네
이렇게 몸이 끌고 가는 시간 뒤로
느슨한 산문인 채
밤이 가고 있네
다음날은
아직 일러 오지 않는 때
내 속 어딘가에
소리없이 활짝 핀 열꽃 같은
말들, 言路들
오! 육체는 슬퍼라. 나는 지상의 모든 책들을 다 읽었노라던 말라르메의 그 말이, 비가 오고 있
다. 움직이는 悲哀를 알고 있느냐던 김수영의 그 말이, 흠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던 랭보의 그
말이, 누가 나를 인간에 포함시켰소라던 브로드스키의 그 말이, 낮의 빛이 밤의 어둠의 깊이를
어떻게 알겠느냐던 니체의 그 말이,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던 발레리의 그 말이······
나는 본다
나에게로 세상에게로
내려앉는 말의 꽃이파리들
내 귀는 듣는다
나에게로 세상에게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말의 발자욱 소리들
나를 끌고 가는
밑줄친 문장들.
천양희 「그 말이 나를 살게 하고」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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