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과 말의 어려움을 찾아서 *
이성부
아스팔트길을 오래 걷는 일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산행을 마친 뒤 걸어 내려와야 하는 어떤 길이 그러한데, 잘 닦여져서 발걸음은 편안하지만 왠지 마음은 불편하기 이를 데 없다. 그렇게 여러차례 마음에 안 드는 하산을 되풀이하다가, 어느날 나는 다른 길을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계곡을 가로질러 숲속 길에 들고, 다시 능선에 올라 여러차례 내리락오르락을 해야 하는데, 힘은 들더라도 여간 깔끔한 맛이 있는 길이 아니다. 다 내려왔는데 다시 산길로 들어가 체력 소모를 차초하다니! 비록 어떤 때 몸이 고단하여 그냥 아스팔트길로 내려가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 능선길을 알고부터는 계속 그 길로만 하산하는 게 버릇이 되었다.
어떤 바윗길에는 위태로운 꼭지점을 올랐다가 6,7미터 직벽을 내려와야 하는 곳이 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 꼭지점에 오르지 않고서도, 옆구리를 돌아 좀더 안전하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보인다. 어떤 날 혼자 가다가, 전에 없던 무서움이 몰려와 이 길로 들어선 적이 있다. 산행을 다 끝낸 뒤의 마음이 개운하지 못했다. 부끄러움과 함께 내 생의 전체가 슬퍼졌던 까닭이다. 그날 이후부터 나는 다시는 그 안전한 길로 접어들지 않았다.
힘들고 위태로운 길에서, 나는 시쓰기의 편안함과 어려움을 생각할 때가 많다. 사는 일과 시쓰는 일의 어려움은 이런 길에 든 것과 같고, 아스팔트길의 마음에 안 드는 편리함은 어쩐지 나와는 다른 사람들의 일로만 여겨지기 십상이다. 시쓰기를 선택한 이들은 처음부터 다른 사람들과 다름을 고집한 사람들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은, 세속의 안일함이나 행복 따위의 추구보다는, 그것들을 오히려 슬픔이나 아픔으로 해석하려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스런 삶까지도 자기 것으로 껴안으려는 세계 인식을 바탕으로 삼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들이 아프게 만들어 낸 시는 읽는이들에게 편안한 위안으로, 혹은 가슴 벅찬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 말을 어렵고 고통스럽게 만든 그만큼, 읽는이들에게는 반대로 행복감을 안겨주기 마련이다.
말과 시의 길이란 언제나 힘들게 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말의 길을 편안하게만 가버린다면 정신은 황폐해진다. 힘들게 가야 하는 말의 길은 어떤 길인가. 그 길은 무엇보다도 가는 사람 스스로를 무겁게 지고 가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어렵다고 피해 가는 길을 애써 찾아가는 길이다. 그 길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마지막에 오는 성취감은 훨씬 더 큰 것이다. 이같은 마음가짐은 시인의 본질적 덕목이자 당위라고 할 수 있다. 말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무거움과 깊이를 우리 모두 다시 한번 생각해볼 때이다.
최근 우리나라 시인들 가운데는 말을 가볍게,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쏟아 버리거나 조작하는 경우가 적지 않음을 본다. 이것이 무슨 새로운 실험이라도 되는 것처럼, 또 자기 특유의 빛나는 상상력의 발로인 것처럼, 성실하지 못하게 말을 함부로 다루는 시인들이 눈에 띈다. 경박하고 폭력적인 언어들도 시의 한 속성이나 개성이라면 이해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경박한 언어가 시의 한 속성이라 할지라도, 시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아름다움의 세계라는 생각이다. 경박한 언어들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아름다움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어야 한다. 경박함 자체가 주제가 되고 목적이 되는 경우는 특정한 시대, 또는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부분적이고도 병적인 증후일 뿐이다. 언어는 잘 닦여진 아스팔트길로, 자동차가 달리듯 가볍고 시끄럽게 가는 길이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거창한 주제를 내세우거나, 엄숙하게 폼을 잡고 시를 써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가벼운 것, 하찮은 것, 평범한 소시민의 일상 따위들이 시가 되는 경우에도, 그 말들은 무겁고 깊은 사유를 통해, 진지한 성찰의 체를 통해 걸러져나와야 한다는 생각이다.
최근에 나온 황지우. 백무산. 정규화. 권경인의 시집들은 고달픈 시대에도 시의 길을 어렵게 찾아가는 성실함이 돋보인다. 이들 가운데 앞의 세 시인은 80년대 들어 시쓰기를 시작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뒤틀리고 뒤엉킨 그 시대의 아비규환을 겪어낸 이들이 어느덧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말의 길을 가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권경인은 90년대 초에 등단했는데, 신인답지 않은 탄탄한 시의 틀과 개성으로 나를 놀라게 한 시인이다.
권경인이라는 낯선 시인을 만난 것은 나로서는 하나의 큰 기쁨이다. 시를 만들어내는 솜씨도 만만치 않으려니와, 그가 말하고자 하는 세계가 무겁고 깊게, 긴장된 떨림으로 전달되어 오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세계는, 우리가 항상 오가는 '길'의 세계이며 그 길에서 내다보고 돌아보고 생각하는 성찰의 세계이다. 그는 삶을 기쁨이나 즐거움, 빛남이나 화려함 따위의 수식으로는 결코 해석할 수 없다는 입장인 것 같다. 낮은 곳과 어두움이 항상 그를 따라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삶의 길에서 체험하고 터득하는 것들이, 그대로 어떤 영혼에 닿아 감전을 일으키는 모습인가. 그의 고통이나 슬픔, 쓸쓸함, 너무 오래된 상처 등은 아직 파닥거리는 원형질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권경인은 아마도 산꾼의 한 사람일 터이다. 산꾼은 산꾼의 냄새를 금방 맡는다. 외로움의 냄새다. 시집 『변명은 슬프다』는, 애써 산을 가리려고 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산을 마음놓고 드러내지도 않는다. 그의 '길'은 틀림없이 산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들은 산에 오르는 일을 대체로 현실사회에서의 일탈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다. 건강을 위해서라든가, 자기충전을 위해서라든가, 현실 도피 또는 탈속의 경지를 갖기 위해서라든가, 알피니즘의 구현이라든가...... 여러 가지 차별화된 목적이 많을 터이지만, 산행은 일단 집(조직)을 벗어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이 벗어남은 곧 그때마다 새롭고도 다양한 세계의 열림을 약속해준다. 산에서 겪는 자연, 힘겨움, 외로움, 두려움, 자기와의 싸움 등을 통해 진정한 자아와 만나는 시간들이 주어진다. 이때 내가 만나는 자아는 집과 사회에서 느꼈던, 결코 나 같지 않은 나의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 산길에서 나는 또 하나의 나를 여유있게 내려다볼 수 있다. 그리하여 산행이 끝나면 반드시 집으로 돌아온다. 일탈에서 소속으로 기어드는 것이다.
어느 길을 걸어 나를 만날까
돌아가지 않는 여행이란 없으니 - 「회귀」부분
단 한번의 비상을 꿈꾸어 전생애를 탕진하고도
가장 힘든 길은 언제나 내 안에 있으니 - 「변명은 슬프다」부분
멀어서 아름답고 곁에 있어 다정한
별 욕심없이 그저 그런 것들에 취해 있으면
숨이 턱에 닿을 때쯤
산은 절로 내 안에 들어와 자리하리라 - 「삶의 형식」부분
'길 - 산'은 내가 나를 만나러 가는 이행의 과정에 있다. 그 길은 아무래도 평탄하지 않다. 그 길은 힘이 들면 들수록 걸어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내 안의 길"이기도 하다. "숨이 턱에 닿을 때쯤" 내 안에 산이 자리잡는다. 마침내 내가 나를 만나는 경지이다. 산의 아름다움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들은 이같은 '자기와의 만남'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 안에 길과 산이 자리잡고, 또하나의 나를 내가 들여다보는 일에는 분명 어떤 초자연의 신명이 깃들여 있기 마련이다. 산 체험이 삶과 연계된 명상으로 이어지는 권경인의 시편들을,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해석하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권경인은 지리산을 가리켜 "너는 언제나 내 안의 길이었다"고 말한다. 앞서 인용한 "가장 힘든 길은 내 안에 있으니"의 그 '안'과 같다. 그러나 이번에는 '언제나'라는 시간 개념이 먼저 불거져 있다. '언제나'는 산에 들었을 때나 산밖에 있을 때를 모두 포괄하는 때매김이다. 집에 있을 때에도 도시의 빌딩숲을 지나칠 때에도 지리산은 '내 안에' 있는 길이다. 그런데 그 길은 집을 벗어나와 달려가 "마주 보아도 이렇듯 그리워서/ 살아 있었구나"(「지리산, 지리산」)의 길이다. 내 안에 있으면서 내가 마주 보아도 그립다? 그렇다. 내 안에 항상 있는 것은 사실 내 밖에, 또는 너무 멀리 있는 것이어서 언제나 그리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움의 대상은 그러므로 그 실체를 마주 보아도 그립다. 그리움은 내 의식의 깊은 골짜기에 잡아두고 싶은 욕망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렇게 내 안과 밖을 넘나드는 길 또는 산은 끊임없이 내가 나를 만나는 순환이면서 자유이다. 산은 이제 내가 그리워하는 먼 데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내가 밤마다 잠드는 집에까지 내려와 있다.
사람의 길이란 지상에서 가장 낮은 길이 아닐까
낮아서 오르는 길밖에 갖지 못한 - 「낮아서 오르는 길」부분
길은 언제나 제 자리를 향하고 있음을
떠나보면 안다
그리하여 이승의 가지 못할 길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 「솟대를 찾아서」부분
온갖 길 다 섞으며 스스로 길에서 놓여나는 바람같이
얼마나 더 헤매어야
헛된 것들에게서 비로소 자유로울까 - 「먼 길」부분
사람이 살면서 걷는 길이란 땅위의 가장 낮은 곳에서 점차 고도를 높여가는 길일 따름이다. 아무리 올라가보아도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러기에 길들은 헛된 길일수밖에 없다. 내가 만나는 또하나의 내가 그러한 것처럼.
시집 『변명은 슬프다』의 거의 전편에 흐르는 세계는 길과 삶의 '헛됨'에 대한 진지한 물음으로 넘치고 있다. 그러나 이 헛됨은 불교적.철학적 허무주의와는 빛깔을 달리하는, 인간의 본질적 고독에 닿아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떠도는 영혼은 언제나 포구에서 길을 잃는다
여기까지 끌고 온 길은
또 어디까지 끌고가야 할 길이냐 -「감포」부분
사람 사는 일의 어려움이 이 세 줄 행간에 모두 스며들어 있다. 너무나 아름답다.
길과 말의 어려움을 찾아서 (황지우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지성사 1998, 백무산 시집 『길은 광야의 것이다』, 창작과비평사 1999, 정규화 시집 『다시 부르는 그리운 노래』, 경남 1998, 권경인 시집 『변명은 슬프다』, 창작과비평사 1998)
* 권경인
1957 경남 마산에서 출생하고, 서울에서 성장함.
1988 부산 MBC 신인상 당선
1991 <한국문학> 신인상에 「인동초」외 4편의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시집 <변명은 슬프다>(창작과비평 1998)
1999, 한국문학 특별 창작지원금 수혜 권경인-정작 외로운 사람은 말이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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