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박현주의 그곳에서 만난 책 <63> 전동균 시인의 시집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

 


< 국제신문  2019-07-21 >

 


- 고교 문예반 활동하며 詩 만나
- 오랜 직장생활하다 교수로 재직

- 어린시절 뛰놀던 경주 황남동
- 천마총 발굴로 마을 강제 철거돼
- 고향 사라진 후 마음은 늘 떠돌아

- 한옥에서 자녀 안부·부고 챙기던
- 아버지의 그 살뜰한 정이 그립고
- 유교적 가풍이 더 생각나는 오늘

 


시를 읽는 행위는 평소에 잊고 있었지만 사실은 마음속으로는 줄곧 생각하던 ‘그것’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시인들은 어쩌면 이렇게 근원적인 질문을, 이렇게 아름다우면서도 적확한 단어로 쓰는 것일까 늘 감탄하게 된다. 전동균 시인의 시집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를 읽을 때 그런 기분을 특히 더 많이 느꼈다. 

 

시 ‘약속이 어긋나도’에서는 “내가 새매라고, 예티라고, 부들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저를 무엇이라고 생각할까요/ 그들의 형제인 나를”이라는 구절에, ‘이토록 적막한’에서는 “나무는 왜 땅에 서 있어야 하고 새들은 하늘을 날아야 하는지// 날마다 해와 달을 깨우고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지/ 그 힘이 왜/ 없어도 좋은 우리를 여기 있게 하고/ 아침이면 눈꺼풀을 열게 하는지”에서 오래 시선이 멈추었다. 시집을 읽는 동안 “여긴 어디지? 나는 누구지?”라는 물음이 자꾸 떠올랐다. 이 시집에서 이야기하는 주제는 존재에 대한 성찰과 질문이다. 전동균 시인을 강원도 원주에서 만났다.


■ 사라졌으나 잊히지 않는 고향

전동균 시인은 1962년 경북 경주에서 나고 자랐다. 경주고를 다닐 때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 시를 만났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86년 소설문학사 제정 신인작품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시집 ‘오래 비어 있는 집’ ‘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 ‘거룩한 허기’ ‘우리처럼 낯선’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 등을 냈다. 백석문학상과 윤동주 서시 문학상을 받았다. 한국방송광고공사에 입사해 오래 직장생활을 했고, 2008년부터 동의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방학 중 원주시의 토지문화관에 머물고 있던 시인을 만난 곳은 연세대 원주캠퍼스였다. 지난해 제3회 윤동주 서시 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캠퍼스 내의 ‘윤동주 시비동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에 들를 때마다 가끔 이 나지막한 언덕 위에서 윤동주의 시비를 보곤 한단다. 나무가 우거진 언덕에 천체를 형상화한 둥근 조형물 위에 ‘서시’를 새긴 시비가 있다. 시비라기보다 조각 예술 같았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언덕은 한여름 더위도 피해간 듯 시원했다.

시인의 고향은 경주 황남동이다. “경주 대릉원 고분 동네였어요. 지금 우리가 보는 모습이 아니라, 황남대총 외에는 그저 뒷동산 같은 모습이었죠. 능 사이에 집이 있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천마총 발굴이 시작되면서 마을은 강제철거 됐는데, 그때 상실감이 컸어요. 그 시절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능 바로 앞에 있는 집이 철거되기 전에 대낮에 큰 구렁이가 집에서 나와 담을 타고 능 쪽으로 기어갔어요. 동네사람들이 몰려나와 ‘지킴이가 간다’며 비손을 했지요. 어른들이 공경하는 걸 보니까, 어린 저도 그 구렁이가 무섭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어렸을 적 뛰어놀았던 동네는 하루아침에 갈 수 없는 곳이 되고 말았다.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이후로 늘 떠돌이가 된 것 같은 마음이었어요.”

그의 마음은 시집 말미의 ‘시인의 말’에서도 느껴진다. “대구로 서울로 부산으로 떠돌게 되었지만 이따금 내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소년은 그곳의 사람들과 흙냄새, 오래된 한옥들과 마당의 연꽃무늬 돌들, 무덤 위로 떠오르는 달빛과 짐승 울음소리, 새벽의 흰 물그릇…… 그 어둑하고 신비한 삶의 풍경을 더듬더듬 불러내곤 한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고분 동네의 풍경이 떠오른다.

시집에서 드러내놓고 고향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라진 풍경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떠돌이의 마음, 복잡하게 얽힌 세상의 길 위에서 ‘존재’라는 화두를 붙잡고 있는 시인이 보인다. 그래서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면서도, 읽는 사람 역시 그 화두의 끝머리를 붙잡고 생각에 잠기게 된다.

■ 소멸돼 가는 한 시대 담은 시 한 편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 전동균·창비·2019


시집을 덮고서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시 한 편이 있다. ‘한옥’이라는 시다. 오래된 집, 천천히 스러져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담았다.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일본 막내는 아픈 데는 없는지/ 사업하는 둘째 일은 좀 어떤지/ 아이들 공부는 나아졌는지/ 차례차례 물으셨다.” 자식들의 안부를 챙기는 아버지와, 늦가을 저녁의 풍경을 보여주던 시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술 한잔 천천히 아껴 드시고는/ 얇은 노트를 건네셨다/ 별일 아닌 듯이// 보면 원망할 데만 적었니라/ 부고 보낼 명단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또박또박/ 쓴”

시인을 만나 처음 이야기를 나눌 때부터 이 시에 대해 물었다. 시인은 이렇게 답했다. “농경문화를 이루고 유교적 가풍을 이어가며 살았던 시대가 서서히 소멸해갑니다. 젊은이들은 그 시대를 모릅니다. ‘한옥’도 ‘아버지’도 그렇게 사라졌지요. 그걸 말하고 싶었어요. 제가 아끼는 시입니다.”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시가 시인이 아끼는 시라는 말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시인의 마음과 만나는 지점을 제대로 짚은 것 같아 즐겁게 다시 시집을 펼친다. 시를 읽는 기쁨이다.  

 

 

 

2.

 

 


전동균 시인

여름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8월의 어느 날, 인사동 수도약국 앞에서 선생님을 만나 자주 가시는 찻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기억나지 않는/ 몇 번의 생을 지나' 선생님을 낯선 듯, 속수무책으로 뵈었다.
그러니까, 한 시인에게 시는 자신의 전부이고 그 전부를 다 내어주고도 또 무엇을 더 걸어야 하는 것인데 ‘뒷산 무덤에라도 다녀와야 견딜 수 있는 날이 있지’ 라는 대목을 읽으며 어떤 무서운 기운을 느낀 건 왜일까. 가난하고 높고 쓸쓸한 시인에게 매일, 매 순간 무너지는 힘은 시를 더 오래 살게 하는 '거룩한 허기'일 것이다. 무엇이 우리를 그 앞에서 오래 서성이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자존과 기품이 스며있는 시인은 흔치 않을 듯싶다. 시인의 말처럼 우리가 ‘간절히 기다린 것들은 이미 다녀갔는지 모르지만’ 그쪽으로 몇 걸음 옮겨 무언가를 한없이 기다리는 일이 시를 살 수 있는 일일 것 같다.


우리처럼 낯선

물고기는 왜 눈썹이 없죠? 돌들은 왜 지느러미가 없고 새들이 사라지는 하늘은 금세 어두워지는 거죠? 저토록 빠른 치타는 왜 제 몸의 얼룩무늬를 벗어나지 못하나요? 메머드라 불리던 왕들은, 맨 처음 씨앗을 뿌리던 손은 어디로 갔나요?
꼭 지켜야 할 약속이, 무슨 좋은 일이 있어 온 건 아니에요 우연히, 누가 부르는 듯해 찾아왔을 뿐이죠 누군지 모르지만, 그래서 잠들 때마다 거미줄이 얼굴을 뒤덮고 아침의 머리카락엔 불들이 흘러내리는 걸까요?
한 처음,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것처럼
그냥 웃게 해주세요 지금 구르고 있는 공은 계속 굴러가게 하고 지금 먹고 있는 라면을 맛있게 먹게 해주세요
꽃밭의 꽃들 앞에 앉아 있게 해주세요
꽃들이 피어 있는 동안은

 ■ 김지율: 선생님 그간 잘 지내셨어요? 정말 더운 여름이네요.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 전동균: 네, 오래간만입니다. 김지율 선생도 잘 지내셨는지요? 저는 방학이 돼서 빈둥빈둥 놀고 있습니다. 날도 무덥고. 아시다시피 학교는 부산이고 집은 서울이라 대부분 부산에서 혼자 지내는데, 모처럼 집에 와서 가족들과 밥도 같이 먹고 저녁엔 산책도 하고 그래요. 얼마 전엔 가까운 이들과 춘천에 댐 낚시를 갔다 왔어요.


■ 김지율: 네, 떨어져 있던 가족과 뜻 깊은 시간을 보내시고 계시네요. 지난해 『우리처럼 낯선』(2014, 창비)으로 제16회 백석문학상을 수상하셨는데 축하드립니다. 『오래 비어 있는 길』,『함허동에서 서성이다』,『거룩한 허기』에 이어 6년 만에 나온 네 번째 시집인데요. 이 시집을 준비하시면서 어떤 마음이셨을지 궁금해요.


□ 전동균: 글쎄, 벌써 일 년 전의 일인데… 제가 게으른 사람이라 시집도 더딘 편이지요. 어떤 시인의 시집이든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오는 거니까 시집마다 그 사람의 삶의 편린들이 묻어있기 마련인데, 말씀하신 시집『우리처럼 낯선』은 제가 중년의 나이에 부산으로 직장을 옮긴 뒤에 쓴 시들을 묶은 것입니다. 가족과 친구들을 떠나 낯선 곳에서 보낸 이 시간들이 어쩌면 뒤늦게 성인(成人)이 되어가는 과정이 아니었나 싶기도 해요. 시집에 묶은 시들이 마흔 여섯 편인데 좀 얇은 시집을 내고 싶어서 시들을 좀 뺐고, 수정도 좀 하고 그랬습니다.


■ 김지율: 『나뭇잎의 말』(에세이, 프레스21)과 시집 전반에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많이 볼 수 있었어요. 엄하셨던 아버지 뒤에서 반성문을 많이 쓰셨고, 반성문을 좀 더 썼더라면 소설가가 되었을 거라는 산문을 읽으며 한참 웃었어요. 어떻게 유년은 보내셨을까요?


 □ 전동균: 그 책을 어떻게 보셨어요? 절판돼서 구하기 힘든 건데.
어렸을 적에 경주 천마총 고분공원 안의 마을에서 자랐어요. 믿기 어렵겠지만 그 당시 고분들 근처에 인가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고,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천마총이 발굴되면서 그 안에 있던 집들이 모두 강제철거를 당했지요. 천마총이나 황남대총은 어린 시절 친구들과 뛰놀던 동산이었어요. 옛날 시청도 바로 앞에 있었지요. 자연 속에서 뛰놀며 유년시절을 보냈어요. 그 무렵엔 거지들도 많아서 동냥을 오고 그랬는데 찬밥이라도 꼭 상위에 차려주던 어른들의 모습도 기억납니다. 공동체의 정이 남아있던 곳인데,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득해지는군요.
아버님은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로 무척 남성적이고 엄하셨는데, 제가 장손이라 유달리 강하게 키우려고 하셨던 것 같아요. 별로 말이 없고 또 병치레도 잦고 내성적인 아이였던가 봐요.


■ 김지율: 좀 어렵게 구했어요. 도서관에도 가보고 인터넷 중고서점도 뒤졌구요. (웃음) 세상에 많은 일들 중에 왜 하필 시나 문학을 하시게 되었는지, 그리고 86년에 등단하시기 전, 습작기는 어떻게 보내셨는지 궁금해요.


□ 전동균: 우리 또래 대부분이 그렇듯이 고교시절에 방황하다가…(웃음) 시를 만나게 됐어요. 대학은 문창과를 다녔으니까 시 쓰고 책 읽는 게 공부였죠. 지금 생각하면 예술대학 소속이라 예쁜 영연과 여학생들, 무용과 여학생들과 강의도 같이 듣고 해서 분위기가 환했을 것 같은데 그땐 왜 그리 암울하고 답답했는지 모르겠어요. 학생들도 좀 별났어요. 오죽했으면 학교에서 ‘문제창작과’라고 했겠어요. 아무튼 그때도 시는 많이 못 썼고 술은 좀 마셨는데, 덕분에 속이 다 망가졌죠. 그래도 틈틈이 과제물 내느라 국내외 시인 작가들 작품은 꽤 많이 접했죠.
돌이켜보면 좋은 선생님들을 만났어요. 구상 선생님은 시도 그렇지만, 세속의 영리를 거부하고 치열한 현실 인식 속에 영성의 깊이를 더하신 인간 그 자체가 워낙 크신 분이었어요. 또 시와 비평을 가르친 김은자 선생님은 철없이 오만한 촌놈인 저를 많이 아껴주셨고, 계속 글을 쓰라고 격려를 해주셨어요. 지금도 해마다 스승의 날엔 꼭 인사를 드리고 있지요.

■ 김지율: 어느 지면에서 시작노트를 읽었습니다. 참 인상적이었어요. '나무나 풀들도 여느 짐승 못지않은 수성獸性을 지니고 있다. 선산의 무덤을 이장할 때 이장꾼이 말했다. “저기 저 나무 보이죠. 저놈들이 살 냄새를 기막히게 맡아요. 십여 미터 이상 떨어져 있지만 용케 알고 뿌리들이 관을 뚫고 들어와요” 나무들에게 사람의 시신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먹이여서 심지어 뼈까지 잘게잘게 부서뜨린다고 했다. 나무에게서 짐승의 욕망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이 글을 읽고 많이 놀랐어요. 저는 나무를 비롯한 모든 식물들에게 수성(獸性)이 존재할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거든요. 식물이든 동물이든 살아있는 생물에게 이런 숨길 수 없는 ‘욕망'이 어떤 식으로든 분명 존재하겠죠? 우리 시인들은 그 욕망으로 또 시를 쓰게 되는 것 같구요.


□ 전동균: 그건 이장(移葬)을 하면서 실제로 겪은 일입니다만, 우리가 잘 알듯이 지상의 모든 생명체에게 가장 중요한 게 생존과 번식이고, 그 욕망은 자연스런 거죠. 시인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 에너지 속에서 살아가는 건데,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세속의 일보다도 자기 작품 속에서 온전히 잘 타올라야 겠지요.


■ 김지율: 혹시 좋아하거나 영향 받은 시인이나 작가가 있으시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 전동균: 외국 시인들은 로버트 프로스트, 네루다, 쉼보르스카, 파울 첼란 같은 시인들 시를 좋아해요. 도스토예프스키나 카프카, 마르께스의 소설도 좋아하구요. 프로스트는 시전집이 나올 만한데 안 나오더군요. 예전엔 외국 시집 번역도 꽤 됐는데 요즘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바같 세상도 좀 봐야 넓어지는 법인데. 우리나라 시인은 서정주, 백석, 박목월의 생활시편, 김종삼…그 이후로도 좋은 시인들이 많지요. 특히 80년대 시인들.
서정주 선생께는 대학 시절 강의를 듣기도 했어요. 저희들이 미당의 강의를 들은 마지막 학생이 아닌가 싶은데, 재미있는 건 보들레르를 얘기하실 땐 꼭 ‘보들레르 군(君)’이라고 하시더라구요. 이백이나 두보 같은 시인들은 별다른 호칭 없이 그대로 부르면서. 본인이 보들레르보다는 몇 급 위라는 그런 뉘앙스 였죠.


■ 김지율: 보들레르 군(君)은 아주 재미있는 호칭이네요(웃음) 낚시를 좋아하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낚시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많으시죠? 문득, 낚시와 시쓰기의 비슷한 부분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 전동균: 제가 뭐 특별한 취미가 없어요. 만나는 사람도 별로 없고 생활도 단순하고. 낚시를 한 지는 꽤 됐는데, 낚시에도 장르가 있어요(웃음). 제 장르는 전통 붕어 낚시입니다. 40대의 몇 년은 거의 주말마다 낚시를 다녔고, 리빙TV의 낚시프로그램에도 출연한 적도 있어요. 물론 실력과는 상관없이.
낚시를 하다보면 이런 저런 일들을 겪기도 하는데, 밤낚시를 하다가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물에 떠내려갈 뻔한 적도 있었어요. 새벽에 낚시를 가면 주로 김밥을 사서 미끼통과 같이 비닐봉지에 넣어서 가는데, 나중에 김밥을 먹다보면 지렁이가 씹혀요. 김밥은 따뜻하니까 추운 지렁이가 그 속을 파고 든 거죠. 그래서 낚시꾼들은 이런 얘길 하기도 한답니다. ‘지렁이 김밥을 먹어보지 못한 자는 낚시를 이야기하지 말라!’
근데 몸도 좀 상하고 해서 오랫동안 낚시를 안 하다가 재작년부터 가끔 하고 있는데 주로 여름 밤낚시를 즐겨요. 어둠 속에 찌불을 보는 맛이 좋거든요.
낚시도 조용한 가운데 혼자 있는 거니까 시와 통하는 게 있지요. 또 ‘조선일여(釣禪一如)’라는 말이 상징하는 바도 있고요. 실제로 제 두 번째 시집 『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는 물가에서 헤맨 흔적들이 좀 있지요.



꽃이 오고 있다
한 꽃송이에 꽃잎은 여섯
그중 둘은
벼락에서 왔다
사락 사라락
사락 사라락
그릇 속의 쌀알들이 젖고 있다
밤과 해일과
절벽 같은 마음을 품고
깊어지면서 순해지는
눈동자의 빛
죽음에서 삶으로 흘러오는
삶에서 죽음으로 스며가는
모든 소리는 아프다
모든 소리는 숨소리여서
--멀리 오느라 애썼다,
거친 발바닥 씻어주는 손들이어서
아프고 낮고
캄캄하고 환하다
사락 사라락
사락 사라락
제 발자국을 지우며 걸어오는 것들
아무 데도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것들

■ 김지율: ‘경주’는 선생님 고향이잖아요. 저도 경주를 몇 번 다녀오긴 했는데, 갈 때 마다 뭔가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온다는 생각을 해요. 고분의 도시이자 첨성대와 안압지, 천마총 대릉원과 불국사 등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도시잖아요. 저에게도 경주는 다른 도시와는 느낌이 달라요. 영화 '경주'를 보고 나서도 그런 생각을 했지만요. 선생님께 '경주'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그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 거 같아요.


□ 전동균: 좀 특이하죠. 경주란 데가. 무엇보다 무덤들이 시내 곳곳에 솟아 있으니, 이런 곳은 드물 거예요. 또 지금은 많이 없어졌는데, 경주가 고도(古都)다 보니 오래된 한옥들이 많았어요. 마침 우리 집 근처에도 그런 집들이 몇 채 있었는데, 대부분 자식들은 외지로 보내고 할아버지 할머니들만 살던, 큰 기와지붕에 문이 몇 개나 되지만 정작 인기척은 없는 집들을 보면 어린 마음에도 뭔가 좀 그랬어요. 나중에 우리 뒷집이 철거될 땐 낡고 오랜 지붕이 허물어지자 박쥐들이 어디에 그렇게 많이 숨어있었는지 대낮에 하늘이 새카맣게 날아오르더라고요.
제 기억은 그 지점에서 멈춰져 있어요. 고분들이나 남산의 유적들, 삼릉이나 흥덕왕릉의 소나무들, 참 좋지요. 또 경주는 문사(文士)나 예술가를 우대하는 전통이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그런 것들을 빼면 아주 보수적인 지방 소도시지요. 대학 때 데이트를 하려면 대구나 포항으로 가서 했어요. 어딜 가든 다 아는 사람들이 있고 금방 소문이 나버리니까. 그리고 경주는 유적지로 ‘보존’이 된 게 아니라 관광지로 ‘개발’이 되어버렸잖아요. 더구나 월성 원전에 핵폐기장까지 들어오고… 아쉬움이 많지요. 저는.


■ 김지율: 저도 그 부분은 많이 아쉬웠어요. 문화재를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관광 차원으로 이용다보니 좀 억지스러워 보인다고 할까. 좌우간 경주는 신라의 가장 찬란했던 기억을 간직한 도시이면서 많은 고분과 왕릉을 가지고 있는 죽음의 도시네요. 그래서 기억과 현재가 동시에 다가오는 기이한 도시인 것은 확실한 것 같아요. 우리에게도 그 두 가지가 함께 존재한다고 봅니다. 살면서 정말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것과 (약간 모순된 말이지만) 잊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 전동균: 오래토록 기억하고 싶은 건 아무래도 가족이나 이웃들로부터 받은 온기들이죠. 제가 좀 강파른데 이런 저를 품어주는 좋은 사람들을 만났어요. 선생님도 그렇고 선후배들, 20대에 만나 지금까지 편하게 밥 먹는 친구들도 그렇고… 몇 되진 않지만.
잊고 싶은 기억들은 너무 많아서….

■ 김지율: 대학시절 읽어야 할 책들은 많고 책값이 턱없이 부족해 친구들과 벌인 책도둑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었어요. 지금은 그러면 큰일 날 일이지만 저는 그 일들이 참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책을 훔치면서 '우리의 이름이 박힌 책들이 그곳에 꽂히게 되기를 얼마나 열망했던가'라는 구절에서는 좀 먹먹했구요. 지금은 소원(?)을 이루셨지만, 다시 그때를 추억하며 책도둑 이야기 들려주실 수 있으신지(웃음). 그리고 후배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 있으시다면 무엇일까요?


□ 전동균: 뭐 별 걸 다 보셨네요. 부끄럽게. 그때 ‘책’이 아니라 ‘마음’을 훔쳤어야 하는 건데…. 대학 시절 책과 관련된 이야길 하나 더하자면, 제가 놀란 일이 하나 있어요. 남진우 선배 집에 갔더니 글쎄, 사방 벽이 책으로 가득 차 있더라고요. 그때 진우 형이 대학원생이었는데, 최소한 천 여 권은 넘는 것 같아서 무척 놀랐어요. 형이 무슨 책 무슨 책 봤냐, 묻는데 나는 잘 모르지. 대부분 외국 책들이니. 아무튼 가끔 만날 때마다 좋은 책 추천을 해준 덕분에 독서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어요.
저는 산문이나 논픽션 읽는 게 재밌더라고요. 소설도 그렇고. 소설로는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 크리스토퍼 바타유의 ‘다다를 수 없는 나라’ 같은 것들, 논픽션은 ‘1417년, 근대의 탄생’ ‘끈’ , 그리고 ‘축의 시대’같은 교양서적들, 산문은 ‘근원수필’이나 이우환의 에세이에 눈길이 가요.
좋은 책 많은데 생각이 잘 안 나네요. 담배 한 대 피고 합시다. 요샌 담배 피는 사람이 죄인이라. 어디가도 흡연석이 없고. 담배가 그리 안 좋으면 아예 판매금지를 하던지, 아니면 외국처럼 흡연자를 위한 공간도 만들어주는 게 상식인데. 쩝.


■ 김지율: 바타유의 '다다를 수 없는 나라'는 저도 좋아하는 책 중의 하나인데, 그가 글을 쓰는 이유가 세계가 추악하기 때문이라고 했던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등단한지 11년 만에 첫 시집을 내셨는데 좀 늦은 편이시죠? 혹 첫 시집이 늦은 이유가 있으신지. 그리고 네 번째 시집까지 존재의 근원과 고독, 연민과 참회의 세계를 낮은 목소리로 독자들에게 꾸준히 들려주시고 계십니다. 무엇보다 삶의 따뜻한 해학 또한 잊지 않으신데요. 시를 쓰는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 전동균: 첫 시집이 늦은 건 오로지 무능과 열정의 부족, 게으름 탓이에요. 데뷔하고 나서 김기택 권대웅, 장석남 같은 시인들과 함께 ‘시운동 2기’ 멤버로 참여하고 또 ‘신서정’이란 말을 문단에 처음 내놓은 ‘신서정 7인시집’ 같은 걸 내면서 발표도 꽤 하긴 했는데, 시가 시원찮은 탓인지 선뜻 내주겠다는 데도 없었고, 또 생활과 시가 일치되어야 한다는 젊은 날의 강박관념이 좀 있었던 터라 몇 년 간은 아예 시를 작파하기도 했었지요.
시에 대해서는 좋은 말씀들이 워낙 많으니까 제가 뭐 굳이 덧붙일 건 없을 것 같은데… 그냥 제가 쓰고 싶은 거 쓰는 거죠. 가족들이 그렇게 하지 말라던 짓 하는 건데(웃음). 다만 시도 삶을 담는 그릇이니까, 인위적으로 편벽되지 않게, 자기가 살고 느끼는 대로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속에서 들끓어오르는 절실함­ 육성 같은 게 시의 근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해요.


■ 김지율: 요즘 들어 제가 더 깊이 고민하고 있는 부분을 말씀해 주시네요. 제대로 살지 않으면 제대로 된 시를 쓸 수 없다는 강박증에 계속 자신을 학대하게 되고 어느 순간 사람들도 만나기 힘든 지점에 와 있더라구요. 선생님께 시는 무엇인가요? 다시 태어나도 시인이 되고 싶으신지?


□ 전동균: 젊었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는 얘기고, 어떻게 일치가 되겠어요. 불가능한 일이죠. 시와 삶이 전혀 딴판만 아니면 다행이죠. 내게 시는… 네루다의 표현을 빌면 ‘두 개의 불꽃’ 같은 것? 잘 모르겠네요.
다시 태어난다면 김 선생은 시인이 되고 싶으세요? 시를 쓰는 사람들은 뼈가 어디 몇 개씩은 어긋난 존재들 일텐데. 현생의 기억이 내게 남아 있다면, 내 무능과 부족을 기억하고 있다면 다시 할 염을 쉽게 낼 수 있을까요?


■ 김지율: 저도 조금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웃음) 지금 동의대 문예창작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시잖아요. 문창과에 계시면서 보람된 일도 있으시지만 힘든 일도 많으실 것 같아요. 시를 쓰는 일과 시 창작을 가르치는 것은 상당 부분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 같기도 하구요.


□ 전동균: 요즘이야 문창과 뿐 아니라 인문학이나 예술 전체가 그렇죠. 무조건 실용, 취업률이 잣대니. 사회 전반적으로 인간의 도구화가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되는 것 같아요. 이걸 헤쳐 나가야하는데 지방대학들은 원천적으로 어려운 부분들, 한계가 분명히 있죠. 우리 학과도 지난 해 국문과와 통합됐고요.


시를 쓰는 일과 가르치는 일을 얘기하면 좀 마음이 복잡해지죠. 근본적으로 시를 가르친다는 게 가능하냐, 또 문창과 식의 창작 수업이 바람직하냐는 비판도 제기될 것이고.


선생이란 안내자라고 할 수 있을텐데, 어찌 보면 제도권 문학교육의 틀에 묶이지 않는 사람들, 예컨대 김언희 선생이나 송찬호, 유홍준 같은 시인들이 학생들에겐 더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다른 건 몰라도, 강의를 위해 준비를 해야 하니까 자기와는 다른 성향, 다른 세대의 글도 읽어야 하고, 조금 폭넓은 시각을 지녀야 하는 환경은 장점인 것 같아요.

이상한 모과

시장 좌판의 모과를 하나 방에 들였다 하필이면 돌대가리 부랑아 같은 것을, 어디에 둘까 망설이다가 저녁이면 잠깐 볕이 드는 책상 성모상 옆에 나란히 두었다 남의 생각이나 훔쳐온 날들의 악취를 좀 가려보자는 거였다 이런 알량한 속셈을 알고 있는지, 보름이 지나고 한달이 지나도 모과는 좀체 익지 않았다 제 가슴 찢어 빚어내는 그 가난하되 복된 고해(告解)의 향기를 누설하지 않았다 불을 꺼도 어두워지지 않는 낯선 기척들이 어른댈 뿐……모과가 있다는 사실마저 까맣게 잊고 있던 어느날, 대관령 첫눈 소식에 뒤척이던 새벽을 한 사내가 어깨 구부린 채 빠져나갔다 소리쳐 불렀으나 끝끝내 돌아서지 않는, 꽝, 문 닫는 소리가 얼음장이었다 그때부터 모과는 빠르게 익어갔다 우리가 밥을 벌고 새끼를 낳고 키우듯 애끓는 표정으로

■ 김지율: 어느 시집 표사에서 ‘막 제본되어 나온 기도서를 읽는’ 느낌마저 든다고 정호승 시인은 언급했습니다. 실제로 많은 시편들 예컨대 ‘그레고리안 성가를 듣다가 낡은 차를 끌고’(「먹고무신을 끌고」), ‘떼제의 성가 같은 노랫소리 끊어질 듯 끊어질 듯’(「매지리 은수자(隱修者)」), ‘성 베네딕도 수도원, 늦게까지 배밭 일을 한 뒤 찬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손」), ‘ 피네스테레, 세상의 끝에 닿은 순례자들은’(「거룩한 허기」)와 「까막눈 하느님」,「몇 줌 시린 햇볕에서」등의 여러 시편들에서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꺼내기 어려운(?) 얘기일까요? 종교에 관해 하실 말씀이 있으실 거 같아요.


□ 전동균: 세 번째 시집 『거룩한 허기』말씀 하시는 것 같은데, 그 시집의 시들을 쓸 무렵 제가 아버님을 여의고 가톨릭 영세를 받게 됐어요. 제 대학 은사이신 구상 선생님 덕분에.
지금은 ‘날나리 신자’예요. 다만 가톨릭이라는 특정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 또 삶의 어떤 보편적인 근원에 대한 관심과 생각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거고, 저도 마찬가지죠. 불교나 이슬람 등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지만, 가톨릭도 교리의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는 신성하고 귀한 삶의 모습들을 현실화시켜 보여주기도 하죠. 요즘도 가끔 보면 시골성당 신부님들이 그런 분이 있어요. ‘이 세상에 신성이란 게 있다면 그것은 우리집 뒤뜰에도 있다’ 는 말에 저는 고개를 끄덕이곤 합니다.
지금도 절에 가면 부처님께 삼배를 올려요. 예전에 나희덕 선생과 연세대 대학교회 채플에 같이 간 적이 있는데, 나 선생이 가톨릭 신자가 웬 기독교 예배냐고 하기에, 제가 웃으면서 그랬어요. 하느님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다니 성당이나 교회나 절이나 이슬람 사원이나 다 같은 거 아니냐고.
종교는 헛것이라고도 하고, 또 무엇보다 믿음이 먼저 있어야한다고도 하는데, 헛것이든 아니든, 또 깊은 믿음이 있든 없든, 가톨릭이라는 창문을 통해 제 삶과 이 세상을 좀 더 넓고 깊게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김지율: ‘내 그림자 속을/ 혼자 걸어가는 시간이 많아졌다’(「우두커니 서 있는」)와 같은 짙은 서정이 선생님 시의 중요한 부분인데요. ‘어느 날은 천사가 다녀가고/ 또 어느 날은 악마가 다녀가는 나의 몸’(「상자의 生」) 은 세상의 불화들을 견디는 장소라고 봅니다. 우리의 몸도 결국 죽음과 소멸로 향하고 있구요. 선생님 시에서 일관되게 보이는 ‘서정’의 뿌리가 혹시 삶과 죽음이 늘 공존하던 고분에서 살던 유년의 기억에서 흘러나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 전동균: 그럴 수 있겠군요. 천마총, 무덤들 사이 마을에서 컸으니까요. 실제로 그땐 발굴되기 전이라 수풀이 우거진 야산 비슷했고, 밤이 되면 짐승소리도 들리고 그랬어요. 그때 여우 울음소리도 들은 것 같아서 어머니께 여쭈어봤더니 여우는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늦가을 밤바람 속에 고분의 수풀 속에서 울리던 짐승 울음소리는 제 기억 속에 깊게 남아 있습니다.

 ■ 김지율: 네 번째 시집에 실린 「우리처럼 낯선」시가 저는 참 좋았어요. '물고기는 왜 눈썹이 없죠? 돌들은 왜 지느러미가 없고'로 시작되는 시인데, 제목도 참 좋구요. 백석문학상을 심사하신 최원식 평론가는 이 시집은 세상의 부패와 타락을 속절없이 허락한 그 신에게 오히려 참회를 요구하는 반종교성을 통해 구원에 대한 갈구와 구원없는 현대의 묵시록이 극적으로 전경화되는데, 그렇다고 꼭 비장 또는 감상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해학이 따뜻하다'는 심사평을 남겼습니다. 이 시의 시작 노트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 전동균: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는 것 보다는 시 그대로 읽는 게 좋지 않을까요. 쑥쓰럽기도 하고….


■ 김지율: 선생님의 시들은 말을 꾸미거나, 과장하고 수식하지 않습니다. 힘을 주거나 요란하지도 않구요. 말로서 말을 데리고 가는 것 같아요. 행과 행 사이, 연과 연 사이 침묵이 자리를 잡고 있어요. 쉽지만 다시 한 번 더 읽게 만드는 어떤 힘이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소나기」라는 시에서는 그런 모습이 더 극렬하게 보입니다. 선생님만의 시작법이나 시론 부탁드립니다.


□ 전동균: 어려운 질문이군요. 저는 시작법이나 시론이라고 할만한 게 없어요. ‘말로서 말을 데리고 가는’ 운운은 전혀 가당치도 않고요.
다 아는 얘기지만, 시의 궁극은 노래고 주문(呪文)일 텐데, 시는 가능하면 말을 아끼는 거라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언어의 함축과 리듬(호흡)은 시를 시로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 아닌가 싶어요. 물론 요즘에는 비시적인 방법으로 시적 효과를 확대하거나 사유의 심화, 충격이나 해방을 입체화하는 시들도 있지만, 제가 만난 좋은 시들은 대부분 시의 고유한 특성을 잘 지니고 있더군요. 깔끔하고 담백한, 그러면서 그 속에 불꽃이 타오르는 시.
이런 면에서 저는 낡았고, 보수주의자입니다만, 아직은 언어를 아끼는 시들이 잘 읽히고 또 이런 시에 대한 애정이 있어요. 편견이자 취향이죠.

소나기

저,
저,
저,
저,
저,
흙탕물 사납게 차오르는 세상을
순식간에 건너가는
저,
저,
저,
저,
저,
저,
몸통 다 잘린
흰 발목들

■ 김지율: 시를 쓰는데 큰 자극이 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리고 시 쓰는 과정에서 찾아오는 슬럼프는 어떻게 극복하시는지.


□ 전동균: 요즘도 시를 못 쓰고 있는데, 그냥 놀아요. 안에 든 게 없어서 안 나오는 건데 어쩌겠어요. 또 누가 빚 독촉하듯 쓰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 김지율: 선생님에게 ‘마감’이란 무엇일까요?


 □ 전동균: 저는 시에 관해서는 ‘마감’이 없어요. 웃기는 얘기지만, 청탁 받고 시를 쓰지는 못해요. 산문은 웬만하면 딱딱 쓰는데. 그래서 더러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좀 써 놓은 게 있어야 청탁에 응할 수 있어요. 아마추어라는 얘기일 수도 있는데, 예전에 딱 한 번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계간지 청탁을 받고서는 아주 생고생을 했어요. 하지만 청탁을 받으면 반드시 시간을 지키는 편이예요. 제가 예전 직장에서 월간지 편집 일을 하면서 펑크 내거나 마감 질질 끄는 필자들 때문에 고생을 한 적이 있거든요.


■ 김지율: 만약 시를 쓰지 않았다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아직 해 보지 않은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 전동균: 몇 년 전 술자리였다면, 스님이나 사제가 되었을 거라고 (아마 중간에 파계, 환속했겠지만) 헛소리를 했을 텐데, 지금은 전혀 아니고요. ‘꼭’ 이라고 단서를 다니까 말문이 막히네요. 다만 나이 들어서는 이렇게 살았으면 하는 생각은 있어요.


■ 김지율: 마지막 질문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 전동균: 이번 2학기부터 연구 년입니다. 학교 와서 처음 맞는 건데, 이런 저런 의무들이 있지만 당분간은 몸이나 추스르면서 아무 것도 안 하려고요. 중고차를 며칠 전에 하나 샀어요. 이리저리 놀러 다니고 싶어서요. 기회가 닿으면 히말라야도 다시 가고 싶고, 중국이나 일본의 산들도 트레킹하려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찌될지 모르겠군요.


■ 김지율: 뜻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긴 시간 재미있고 귀한 답변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연구년 잘 보내세요. 혹 히말라야에 가시면 멋진 사진 보내주세요.(웃음) 멀리서 가까이서 늘 건필하시고 건강하시길 바라겠습니다.


□ 전동균: 이 더운 날, 멀리 오시고, 수고 많으셨어요. 좋으신 가을 만나길 바랍니다.




​ 초승달 아래

떠돌고 떠돌다가 여기까지 왔는데요
저문 등명 바다 어찌 이리 순한지
솔밭 앞에 들어온 물결들은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까지,
솔방울 속에 앉아 있는
민박집 밥 끓는 소리까지 다 들려주는데요
그 소리 끊어진 자리에서
새파란, 귀가 새파란 적막을 안고
초승달이 돋았는데요

막버스가 왔습니다 헐렁한 스웨터를 입은 여자가
내려, 강릉場에서 산 플라스틱 그릇을 딸그락 딸
그락거리며 내 앞을 지나갑니다
어디 갈 데 없으면, 차라리
살림이나 차리자는 듯


내 기억에 경주와 선생님은 너무 닮아 있다. 선생님의 어떤 분위기가 그렇다는 말이다. 때로는 개구쟁이 소년 같고 때로는 엄격하고 따뜻한 사제 같으시다. 선생님은 담쟁이처럼 몸을 붙이고 낮은 벽을 타고 있는 제자들과 후배들에게 단단한 그늘을 만들어 주신다. 어느 봄, 하동 문학캠프가 있었던 날, 혼자 달을 보며 담배를 피우시던 모습을 몰래 엿본 적 있다. 아마 좋아하시던 낚시를 하면서도 이 생의 어떤 그림자들을 보고 계셨을 것 같다. 그곳이 선생님의 시와 삶이 있는 중요한 부분이지 싶다. 오래 묶였다가 풀려나간 간절함 속에서 터져 나온 ‘봄볕 풀리어 맑고 환한 물 속에는/ 내가 살아보지 못한 집 한 채 숨어’ 있을 것 같다고 하셨던 것처럼. 내가 시를 조금 더 알았더라면, 선생님의 말을 더 잘 들었을 텐데…. 행간의 말과 침묵 속에 있는 말들을 놓친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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